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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4

1942 대기근 - 멍레이 외 / 고상희 : 별점 3.5점

1942 대기근 - 8점
멍레이 외 엮음, 고상희 옮김/글항아리

1942년 후난성에서 발생했던, 무려 300만 명의 사망자를 낳은 대기근을 설명하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수집 가능한 거의 모든 자료와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전쟁이나 재해에서 고통받는 것은 평범한 민중들일 뿐이라는 진리를 새삼 느끼게 해 줍니다. 아울러 이러한 재앙이 왜 일어났는지와 대기근의 와중에 위대함을 보여준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책 홍보문구 및 내용에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참혹했던 실상의 설명이 압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땅이 갖고 싶어 곡식을 팔아 땅을 샀지만, 먹을 게 없어 농사 한 번 지어보지 못하고 땅도 팔고 아들도 굶어죽고 아내마저 미쳐버렸다는 리다차이의 이야기,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물건들을 들고 나와 100위안을 외치며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는 골동품 시장의 노부부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이 정도는 그나마 인간성이 유지되는 수준인데, 이후 기근이 격심해진 뒤에는 상식의 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충격적인 이야기가 많아서 잘 와닿지 않더군요. 아내를, 자식을 팔고 심지어 삶아먹기까지 했다니까요. 목숨을 건 탈출에 대한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처절함은 정말이지 "바다 한가운데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존 본능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들고요.

또 당시 대기근을 취재했던 타임즈 기자의 사진도 좋았습니다. 아주 잔인한 사진은 뺀 듯하지만, 당시의 분위기를 전해주기에 충분한 수준이었습니다. 저자가 자료를 찾아 다니고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따는 과정을 삽입한 르포르타주 형식의 구성도 효과적입니다. 중국적인 디테일도 인상적인데, 대기근의 참상을 말할 때 인터뷰어들이 "대가 끊긴 집안이 많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대기근은 인재였다는 설명도 놓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대기근의 이유를 크게 세 가지 — 극심한 가뭄, 메뚜기떼의 창궐, 군대의 수탈 — 로 들고 있거든요. 가뭄이야 어쩔 수 없었다 치더라도, 메뚜기떼의 창궐은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화위안커우 제방을 터뜨려 생태계가 교란되었기 때문이며, 군대의 수탈은 지금까지도 허난 지역에서는 4대 재해로 꼽는 게 '수해, 가뭄, 메뚜기 재해, 탕언보'라고 할 정도로 극심했다니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당시 허난성을 수탈한 탕언보의 부대).

참사를 막기 위한 구호 활동이라도 서둘렀다면 피해자를 줄일 수 있었겠지만, 후난성 전체가 일본군 손에 들어갈 수 있었기에 장제스가 의도적으로 수탈에 전념하고 구호 활동을 소홀히 한 것이라는 설명도 책에서는 여러 자료를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남에게 빼앗길 거라면 나라도 싹 털어버려야겠다는 그런 생각인데 정말 너무한 일이죠. 청나라 후기의 혼란기에서도, 기근 때 정부의 노력으로 피해가 최소화된 적이 있었다는 설명이 등장하니, 이래서야 뭘 위해 정권을 잡고 전쟁을 한 건지 알 수가 없어집니다.
당시 유력 신문 "대공보"의 기자 장가오펑의 기사와 사장 왕윈성의 사설, "타임즈" 기자 시어도어 화이트의 기사 등으로 참상이 널리 알려져 구호가 시작되었고, 그 외에도 몇몇 인물들의 영웅적인 행동이 뒷받침되었다는 점 정도만이 위안거리입니다. 이후 탕언보 부대는 일본군이 허난 성에 대한 전면공격을 감행한 1944년에 민중의 공격으로 패주하였으나, 탕언보는 건재했고 기근의 원흉인 군벌과 정치가들에게 제대로 된 철퇴가 내려지지 않았다는 결말은 씁쓸한 뒷 맛을 남기네요.

그러고 보니 세월호 사건과 참으로 많은 것이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관계기관의 무능함이 겹쳐져 발생한 인재라는 점과 빠른 구호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아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졌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관계자에 대한 처벌은 현재진행형이니 지켜봐야 할 테지만요.

여튼 생각할 거리도 많고 놀라움을 안겨주는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딱 한 가지, 지도가 몇 개 실려 있기는 하나 전체를 개괄할 수 있는 형태로 삽입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아쉽지만, 큰 단점은 아닙니다. 출판사 글항아리에서 발간하는 '걸작 논픽션' 시리즈에 포함된 것이 납득되는 수준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역시나 같은 시리즈인 "자백의 대가"도 마찬가지지만) 미시사를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18/01/27

오로지 일본의 맛 - 마이클 부스 / 강혜정 : 별점 2점

오로지 일본의 맛 - 4점
마이클 부스 지음, 강혜정 옮김/글항아리

영국인 요리사 출신 작가가 쓰지 시즈오의 "일본 요리 : 단순함의 예술"에 깊이 매료된 탓에, 현재 일본 요리를 탐구하고자 3개월 동안 아내, 두 아들과 함께 도쿄를 비롯한 일본 이곳저곳을 다니며 여러가지 다양한 문화를 맛보고 즐긴 경험을 기록한 여행 에세이집입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실망스럽습니다. 여행 목적은 그럴듯했지만 내용이 목적에 딱히 부합하지 않는 탓입니다. 그냥 일본 이곳저곳 여행기와 식도락이 결합된 뻔한 여행기에 불과합니다.
또 색다른 곳에서 느끼고 경험한 이색적인 체험을 쓰기는 했는데, 서양인 시각에서만 신기하고 재미있을 만한 체험이라는 문제도 큽니다. 일본에 이웃한 한국인 시각에서 봤을 때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게다가 와패니즈라 불려도 무방할 정도로 저자가 지나치게 일본을 맹신하는 묘사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일본 요리 장인이 만든 튀김을 맛본 후, 엄청난 기술과 맛에 감탄하는 정도는 괜찮아요. 일본 튀김은 저도 좋아하니까요. 그러나 아지노모토사를 방문기를 통해 MSG의 무해함을 강조하며 합성 조미료를 전도하고, 쓰키지 시장 방문 경험의 마지막을 '장기를 팔아서라도 꼭 가봐야 하는 곳' 이라고 마무리 하며, 생 와사비야 말로 슈퍼 푸드로 그 맛에 중독되었다고 묘사하는 식으로 직접 찾아서 경험하고 맛본 모든 요리와 재료에 대해 끝없는 칭찬과 홍보가 지겹게 반복됩니다. 이러한 맛에 대해 부정하는건 아니지만, 일본 내 식문화를 소개하는 다른 작품들과 비교할 때 특별한 내용도 없어요. 예를 들어 튀김이나 와사비, 가쓰오부시 등은 모두 "맛의 달인" 등에서 자세히 소개했던 것입니다. 튀김의 핵심 비결인 밀가루 대충 풀기, 와사비 농원의 생육 환경과 강판에 가는 법, 가쓰오부시 제조법 및 전용 대패 모두 말이죠. 쓰키지 어시장은 "어시장 3대째"라는 더 길고 방대한 작품이 이미 존재하고요. 이는 일본 요리가 건강식이며 장수에 도움이 된다며 오키나와 요리와 장수의 비결을 탐구하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시나 "맛의 달인"에서 이미 등장했던 소재입니다. 그나마 오키나와의 새로운 소금 제조법 정도만 기억에 남을 뿐입니다.

직접 '비스트로 스맙'을 찾아 가서 기무라 타쿠야 등을 만나고, 스모 연습장을 찾아가 챵코 나베를 직접 먹어 보는 식의 현장감 넘치는 경험담은 좋아요. 그러나 이 역시 방송이나 다른 여러가지 컨텐츠에서 보았던 내용에 반복에 불과하고, 저자가 신기하게 생각한 대부분은 앞서 말했듯 우리나라에서는 새롭지 않습니다. 장인 정신을 발휘하는 요리사들, 연예인들이 직접 스튜디오에서 요리를 해서 게스트에게 먹이는 등은 우리나라 방송에서도 흔히 볼 수 있으니까요.

물론 고래 고기처럼 일본의 정책을 비판하고, 맛없다고 이야기하는 부분도 있기는 합니다. 도쿄를 벗어나서의 이야기들에서 조금 많이 드러나는 편이에요. 허나 고래 고기는 이런저런 컨텐츠에서 특유의 풍미가 있다고 언급되어 왔으니 색다를 것도 없고, 도쿄 이외의 장소에서의 에피소드는 음식, 요리 관련 이야기라기 보다는 외국인의 좌충우돌 여행기에 더 가깝다는 점에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무엇보다도 비판적 시각은 일부일 뿐, 결국 글은 가이세키 요리나 오사카 패스트푸드를 극찬하는 기승전'일본맛있쪄'로 마무리되니 온전한 비판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죠. 일본 최고의 회원제 레스토랑 미부에서의 놀라운 경험이 소개되는 마지막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일본 요리란 무엇인지, 그 진가를 제대로 체험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거든요. 맛을 떠나 일본 요리의 찬양이 반복되는 느낌이라 지루했습니다. 게다가 저자의 일본 여행 목적이기도 했던 일본 요리의 비결은 '재료 본래의 맛을 끌어내는 것' 이라는 것도 로산진 이래로 너무 많이 접한 내용이라 식상합니다.

개인적으로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요리사다운 시각이 돋보이는 몇몇 디테일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숯불구이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비결이 재료를 작게 만드는 혁신 덕분이라는 착안이 대표적이에요. 서구에서 초밥이 진짜 이유를 끌게 된 이유에 대한 주장도 신선합니다. 설탕, 소금, 식초로 이루어진 초밥 양념이 빅맥의 기본 양념과 동일하다는 것이죠.
또 저자의 재기발랄한 글솜씨 덕분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은 큽니다. 예를 들어 성게 맛에 대한 묘사도 제가 본 작품 중 최고로 꼽을 만 해요. 인어들이 바닐라 맛만 있는 수제 아이스크림 가게를 연다면 이런 맛이 아닐까 싶다는데, 정말로 멋드러진 발상입니다!

하지만 거의 5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이 정도의 단편적인 장점만으로 덮을 수는 없습니다. 실망이 컸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책을 읽느니 "맛의 달인" 을 다시 정독하는게 정보와 재미 측면에서 더 나을 겁니다.

2021/01/10

일본요리 뒷담화 - 우오쓰카 진노스케 / 장누리 : 별점 2.5점

일본요리 뒷담화 - 6점
우오쓰카 진노스케 지음, 장누리 옮김/글항아리

제목이 꽤 강렬해서 관심이 갔던 책. 저자는 일본 최초 요리점 중 하나 우오쓰카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고물상을 운영하는 등 자신만의 삶을 산 괴짜 우오쓰카 진노스케입니다. <<격식 파괴 요리책 한 그릇 더!>>의 원작가로 더욱 친숙한 인물이지요. <<한 그릇 더!>>에서는 싸게, 쉽게,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레시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면, 이 책은 일본 식문화 전반에 대한 여러가지 의견을 담고 있습니다. 뒷담화라기보다는 일본의 식문화에 관련된 여러가지 주제를 '교육'이라는 큰 틀로 묶어 풀어내었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건강하게 먹는 방법에 대한 교육, 제대로 된 일본 요리와 식문화에 대한 교육, 음식에 대해 정확하게 정보를 파악하는 교육 등이 수록되어 있거든요.

하지만 딱딱하지 않고 재미있게 쓰여져 있습니다. 에세이 형식으로 읽기 쉬웠으며, 흥미로운 내용도 제법 많았던 덕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참치회에 대한 이야기처럼 일본 요리에 대해 알려진 상식들을 깨는 이야기들이 제일 좋았습니다. 원래 참치회는 굉장히 쌌고, 특히 대뱃살은 거의 버리는 재료였는데, 전후 사람들이 진한 맛을 추구하면서 대뱃살 인기가 폭발해서 현재의 위치에 올랐다고 알고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이미 1915년에도 대뱃살은 최고급 재료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에도 시대나 다이쇼 시대에는 보존, 유통 기술이 부족해서 지방이 많아 상하기 쉬운 대뱃살을 유통하기 어려웠을 뿐으로, 보존과 유통 기술이 발달하면서 원래도 맛있었던 대뱃살이 각광받게 된 것이라네요. 입맛이 변한게 아니라요.
고래 고기 이야기는 충격적이기 까지 합니다. <<맛의 달인>>에서도 일본 전통 식문화라고 강하게 주장했었는데, 고래 고기도 원래 잘 먹지 않았다고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1939년 잡지에 실린 기사를 통해 1935년 남극 빙해 지역 포경 시작 전까지 대다수 일본인에게 고래고기 요리법이나 맛은 익숙하지 않았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래 된 일본 고유 풍습이 아니라는 거지요. 잡지 기사 하나만으로 근거를 삼는건 좀 애매한데, 과연 뭐가 맞는건지 자료를 더 찾아보고 싶어지는군요. 이전에 썼던 글을 아예 고쳐야 할 지도 모르겠어요.
옛 일본에서는 회를 찍어먹을 때 술을 졸여서 조미료로 썼다는 이야기도 재미있었습니다. '이리자케'라는 조미료로 우메보시, 술, 가쓰오부시를 졸여서 만듭니다. 짭쪼름하면서도 시큼 달큼할 것 같습니다. 한 번 시도해보고 싶군요. 맛술에 액젓, 식초를 조금 섞으면 비슷할까요?
마지막으로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 우리에게도 익숙한 '신토불이'는 원래 '인과응보'와 같은 뜻의 불교 용어라고 하네요! 이를 1907년 일본 육군의 이시즈카 사겐이 일본인은 일본 식자재를 일본 전통적인 방식으로 먹자며 제안한 사상의 슬로건으로 유명해진게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말인줄 알았는데, 정말 의외였어요.

제목의 '뒷담화'에 가까운 쓴소리들도 일부 실려 있습니다. 지금은 옛날과 같은 '단란한 식탁'은 없는 시대이다, 지금의 현미는 다이쇼 이전 현미와 다르며 에도 시대 사람들은 백미에 치우친 극단적 편식을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현미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등이 그러합니다. 이 중 '장수한 사람들이 먹은 식품을 예로 들어 이런걸 먹어야 장수한다!'는 억지라는 주장은 굉장히 와 닿더군요. 100세가 넘으신 어르신들이라면, 아무래도 태어난 곳에서 줄곧 먹어온 음식은 한정적이었을게 뻔하다는 논리인데 그럴듯해요.
많지는 않지만 <<한 그릇 더!>>와 같은, 간단한 비법 레시피들도 마음에 들었어요. 특히 초반부에 등장하는, '다이소'에서 1000원으로 구입 가능한 재료'로 만든 요리들은 <<한 그릇 더!>> 그 자체더라고요.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에 모두 공감할 수 있었던건 아닙니다. 보존식을 만들어서 두고두고 먹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낭비되는 재료 소모를 줄이자는 주장이 그러합니다. 전통을 지키고, 더 맛있고 영양가 있게 음식을 먹자는 취지는 알겠지만 시대에 역행하는 주장이라 생각되었거든요. 이미 조리는 극도로 단순한 형태로 제한하는 상품들이 소비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고, 빠르고 편한 조리가 더욱 각광받는건 어쩔 수 없는 흐름이니까요. 이런 주장을 펼치느니, 차라리 유기농으로 재배한 재료를 전통 방식으로 조리하여 밀키트나 통조림, 레토르르 형태로 제공하는 기업체를 스스로 차리는게 나을겁니다. 햇볕에 쬔 고기가 맛있다면, 직접 만들어서 팔면 되잖아요?
또 지금은 제철인 음식이 없는데, 제철 음식을 먹자는 주장은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어요. 우리가 사시사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건 농작물 재배 방식이 발전되고, 해산물은 양식이 가능해진 덕분입니다. 반대로 이를 제철에만 먹는다면 오히려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요. 해당 계절에 작황이 불량하면 그 해에는 특정 작물을 못 먹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현대 사회에서 양식없이 조업으로만 해산물을 채취한다는건 더 말이 안되지요. 해산물 자원 씨가 마르고, 가격도 폭등할게 뻔합니다. 제철이 없어짐으로 음식과 재료에 고마와하는 마음이 희박해진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현대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에요. 오히려 최대한 기술을 활용하여 먹거리를 제공하는게 먹는 것 만큼은 빈부격차를 최소화하는게 제대로 된 발전 방향이라 생각되네요.
마지막으로, 일본 관점에서만 쓰여졌다는 것도 우리 입장에서는 단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간단 레시피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파는건 별로 없어 보여서 재현은 어려워 보이더군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지만, 저자 주장에 모두 동의할 수 없고, 근거가 더 보강되어야 하며 일본 시각으로만 쓰여진 글들도 제법 많아서 감점합니다. 일본 요리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면, 딱히 권해드릴 책은 아닙니다.

2010/04/21

화염조선 - 박재광 : 별점 2.5점

화염 조선 - 6점
박재광 지음/글항아리

요새 자주 찾아보는 미시사 서적 중 한권으로, 고구려부터 조선까지 각 시대를 대표하는 첨단무기들을 열전 형식으로 다루고 있다고 소개되는 책입니다. 그런데 조선 이외 시대는 최무선 이야기와 화포가 잠깐 언급될 뿐이라 조선 중심의 책으로 보는게 타당하겠죠.

반 이상을 차지하는 화약과 다양한 화포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좋습니다. 화약 개발을 둘러싼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여러가지 총통들, 로켓 무기인 신기전과 화차, 일종의 시한 작열탄인 비격진천뢰, 연발식 권총의 원조라는 삼안총, 그리고 대원군이 제작을 지시하였던 일종의 수중기뢰인 수뢰포 등에 대한 이야기들은 재미도 있지만 관련된 다양한 도판 등의 자료가 굉장히 방대하고 자세해서 만족스럽거든요.
예를 들자면 비격진천뢰라는 무기를 단순히 그 쓰임새와 위력만 사료를 통해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 크기와 무게가 얼마나 되었는지, 신관과 도화선의 구조는 어떠하였으며 그 장치들의 당시 용어는 무엇이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식이라 자료적인 가치도 무척 높죠.

하지만 중반부 이후부터는 자료적 가치와 재미가 많이 퇴색됩니다. 특히 거북선 관련한 이야기들은 내용은 방대하나 솔직히 새로운 내용도 별로 없고 있는 자료를 별다른 고민없이 쭈~욱 늘여놓은 느낌입니다.
비거 - 비차로 알려진 일종의 글라이더 관련 글은, 형태나 이론을 구체화시켜 소개하는 것 자체는 좋았지만 방송국에서 재현했던 내용을 그대로 옮겨온 것에 불과합니다. 관련된 영상 다큐를 찾아보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될 정도였어요.
마지막 궁시에 관련된 내용은 다른 책에서 더욱 자세한 정보를 얻은 적이 있기에 새로움도 없고, 자료적인 가치도 크지 않아서 마지막 쇠뇌 관련 이야기를 빼고는 실망이 더 컸습니다.

제목 그대로 "화염"에 관련된 이야기, 즉 책의 절반 정도는 괜찮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나머지 절반은 뭔가 좀 억지로 가져다 붙힌 느낌이라 아쉬웠는데 차라리 없애고 앞부분만 절반 가격에 팔았더라면 훨씬 좋을 뻔 했습니다. 그래야 책 제목에도 잘 어울리고 가격대비한 만족도도 훨씬 높았을 것 같네요.

그런데 요새 이쪽 책을 읽다가 느낀건데 책 값이 점점 더 오르는 듯 싶어요. 좀 괜찮다 싶으면 다 만원은 훌쩍 넘어가니 취미생활도 하기 힘드네요. 멀티미디어 이북 시대가 오면 좀 나아지려나...

2015/05/27

알고나 먹자 - 전호용 : 별점 2.5점

알고나 먹자 - 6점
전호용 지음/글항아리

딴지일보에 연재되었다는 음식 관련 컬럼 모음집. 존경하는 이웃 블로거 밥과술님이 추천해 주셔서 관심이 가던 차에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호평이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재미도 있고 장점도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재료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는게 가장 마음에 듭니다. 부제인 "본격 식재료 추적 음식문화 박물지"에 어울리는 디테일로 된장, 고추장에서 시작해서 고기와 각종 야채, 곡물까지 대부분의 한국 음식에 사용되는 재료를 일람하고 있거든요. 온갖 농산물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주고, 김장이라는 큰 주제로 중간 부분을 마무리하는 목차 구성도 좋고요.

그리고 저자가 실제 농사일을 해왔던 경험을 토대로 썼다는 점도 특별한 장점 중 하나입니다. 글 줄 하나하나마다 저자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는 게 흡사 동네 할아버지가 해 주는 재미난 농산물 관련 옛 이야기 같기 때문입니다. 순수하게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한 내용들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고요.
이렇게 경험 바탕으로 다른 책들과 상당한 시각 차를 보인다는 점도 재미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황교익은 염전은 허구이며 갯벌을 썩게 만든다고 주장했지만, 이 책에서는 경험에 기인한 나름의 긍정적인 부분, 즉 젓갈이 좋았다... 라는 이야기를 해 주는 식이거든요. 장점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경험자의 의견으로는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것 같아요.

저자의 농사 경험 및 실제 요식업에 몸을 담았던 경력에 토대를 둔 노하우를 소개하는 점도 좋습니다. 젓갈을 사러 가면 양념 젓갈은 사지 말라는 것, 이유는 양념 젓갈은 그 상태로만 먹어야 하고 다른 요리에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500그램 한 통 사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젓갈집 들어가서 이거저거 하나씩 먹어보고 "이거 양념 안 한 것도 있어요?"라고 물어보라는 팁은 그야말로 꿀팁이지요. 양념 안한 젓갈이 있다면, 그건 그 집에서 담근 젓갈일 거라는 뜻인데, 이거야말로 다른 책에서는 알기 어려운 좋은 정보였습니다. 이 챕터는 저자가 곰소에서 산 바지락젓을 이용한 계란찜과 황새기젓의 살을 발라 다진 뒤 청양고추, 마늘을 다져 넣고 발사믹 식초를 넣은 양배추 쌈장의 레시피로 마무리되는데, 한마디로 개인 경험담에서 시작해서 음식 관련 정보 소개, 그리고 레시피로 이어지는 완벽한 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흔한 음식 관련 서적에서 많이 소개되지 않는 소소한 것들에 대해 자세하게 파고든 것도 큰 장점이입니다. 마늘이나 생강, 각종 향신료, 콩과 잡곡 등에 대해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알려준 책은 여태까지 본 적이 없거든요. 처음 접하는 내용들이라 이래저래 생각할 거리도 많습니다. 다른 곡식을 심었더라면 배는 주리지 않았을 텐데 구태여 쌀을 심은 이유에 대해 논하는 부분이 그러하죠. 쌀은 마약이었다! 라는 결론인데 참신했어요.

겉보리가 꽁보리라던가, 고량주는 수수로 담근다라던가, 전래동화 "해님 달님"의 호랑이가 떨어진 곳이 수수밭의 수수대를 날카롭게 잘라낸 밑동이 있던 자리라는 것, 그래서 호랑이 피가 수수대에 묻은 것이 아직 남아 수수대 밑동이 붉다는 전설 같은 것들도 재미있었습니다.

시시콜콜한 여러 가지 정보들을 제공해 주는 것도 기대에 값하는데, 고기를 맛있게 먹기 위한 방법의 소개, 늙은 고기는 싸지만 보쌈, 수육에는 좋다던가 집에서 쓰는 칼에 대한 정도 등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지요.

그 외에도 지나치게 우리 농산물을 강조하지 않는 것도 독특했던 점이에요. 중국산 마늘은 씨알이 굵고 매운맛, 향이 강하니 고기 요리나 볶음 요리를 할 때 넣으면 좋다는 것은 아주 유용한 것이죠. 타박만 할 게 아니라 용도에 맞게 쓰라는 것, 암요. 맞는 말이고 말고요.

아울러 전형적인 딴지일보 마인드가 엿보이는 것도 다른 유사 에세이와의 차이점으로, 자신의 삶과 경험을 토대로 자본주의, 계급사회를 비판하는데 설득력 충분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각 자체가 불편한 독자도 분명 있겠죠. 그리고 농산물에 대한 불안을 토로하며 GMO 농산물을 비롯하여 고기 소비, 물고기 양식 등 총체적인 것에 대한 비난은 그 해결책이 없다는 점에서 조금 아쉽긴 했습니다. 생협, 또는 직거래 장터와 같은 단기적인 방안이 크게 실효를 거두리라 생각되지는 않으며, 설령 성공한다 하더라도 유전자 조작 농산물에 대한 해결책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음식 관련 서적으로 보기에는 학술적 근거 대신 개인 생각과 경험이 많이 들어가 있어 적절치 않으며, 요리 서적으로 보기에는 레시피가 거의 없기에 실망하실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부분도 레시피가 부족하다는 것으로, 간단한 레시피도 몇 가지 소개되고 있긴 하나 실제 집에서 해 볼 수 있을 만큼의 디테일은 보여주지 못합니다. 관심 있으면 따로 찾아보라는 뜻일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재미있는 글들이라는 것을 부인하긴 어렵습니다만 단점도 있고 일부 기대와 다른 부분 때문에 감점합니다. 재료보다는 조금 더 "요리", "음식" 쪽으로 포커스를 옮긴 후속작이 나와주었으면 하네요.

2025/01/17

도쿄의 가장 밑바닥 - 겐콘 이치호이 / 김소운 : 별점 2.5점

도쿄의 가장 밑바닥 - 6점
겐콘 이치호이 지음, 김소운 옮김/글항아리

1893년, 저자 겐콘 이치호이(본명: 마쓰바라 이와고로)가 빈민가로 알려진 시타야 만넨정, 요쓰야 사메가하시, 시바 신아미정 등 3대 빈민굴을 직접 찾아 하층민들의 생활을 관찰하고, 이를 생생하게 글로 옮긴 논픽션입니다. 일본 근대 르포문학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하네요.

특징이라면 단순히 빈곤의 현상을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빈민들의 식생활, 일상적인 노동, 그리고 지역 경제의 구조적 문제까지 구체적이며 상세하게 설명해 준다는 점입니다. '차부'(인력거꾼)에 대한 상세한 설명처럼요. 그들의 영업과 업무 행태, 하루 벌이, 주요 먹거리, 생활상과 나이 들었을 때의 비참한 모습까지, 뭐 하나 빠짐없이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독자는 그들의 생존 방식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에 드리운 가난의 무게를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근대 초기를 이해하는 데에도 참고가 되리라 생각되고요. "경성탐정록"의 "운수 좋은 날"을 쓰기 전에 읽었더라면 좋았을 뻔 했네요.

차부 외에도 고물상, 경매 시장, 일용직과 도급 인부들, 아침장과 야시장 등 다양한 하층민 직업에 대한 설명 및 하층민들의 생계 방식이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잔반을 모아 팔며 생계를 이어가는 '잔반야'의 존재와 그들이 판매하는 잔반들에 대한 묘사는 당시의 생존 환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음식들 설명도 많은데, '후카가와 메시'가 차부들을 대표하는 식사 중 하나로 바다 비린내가 심해서 먹기 힘들다는게 새롭더군요. 지금은 지역 먹거리로 유명한 음식이니까요. 조리법의 문제였을까요? 원래는 꿀꿀이죽과 다를게 없었던 우리나라의 '부대찌개'의 유래와 현재 위치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또한, 지금 시점에 읽어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을 제공한다는 점도 돋보입니다. 예를 들어, 부자가 망하면 3년을 못 간다는 '좌식산공'에 대한 언급, 전당포와 고리대금업자들의 무자비한 행태, 가증스러운 도급업자들에 대한 서술은 지금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막걸리는 1홉(0.18리터)에 2센이며 잘 마시는 사람은 한 번에 5동이에서 7동이를 해치운다. 그중에는 옷가지를 잡히고 홧술로 10동이 이상 기울이는 사람도 있다."는 설명은 더 말할 것도 없을테고요.

시대적 배경과 문화적 특성 모두 우리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으며, 당시 일본 사회에 대해 잘 모른다면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지만, 당시 사회의 모순과 빈민들의 고단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책입니다. 인간의 생존 본능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어 주고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4/04/22

자백의 대가 - 티에리 크루벨리에 / 전혜영 : 별점 2.5점

자백의 대가 - 6점
티에리 크루벨리에 지음, 전혜영 옮김/글항아리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 폴 포트 정권에서 S-21 교도소의 소장으로 일하며, 이른바 킬링 필드에서 1만 2천 명이 넘는 사람을 죽이는 데 관여했던 남자 ‘두크'의 국제 재판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이 책이 알리고자 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두크가 저지른 범죄가 과연 피할 수 없는 필연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크를 비롯한 전범들은 혁명을 위해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열심히 일했을 뿐이며 이는 불가항력이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합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한데, 이는 일제 강점기 친일이나 독재 정권 시기 순응과도 맞닿아 있는 주제이지요. 때문에 우리에게도 시사점이 큽니다.

책은 두크의 주장뿐만 아니라 그와 대척점에 서 있는 생존자들과 희생자 가족들의 생생한 증언과 인터뷰를 500쪽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제공하며, 독자로 하여금 마치 재판에 참여하고 함께 판단하게 만드는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두크가 자신의 범죄를 불가항력으로 주장하고, 고문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부인하는게 초반부입니다. 중반부는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열고 도움을 준 프랑스인 프랑수아 비조의 이야기 및 크메르 루즈 지도자들의 말로, 그리고 프놈펜 함락 이후 두크의 삶에 대한 내용이고요. 후반부는 재판 과정 중 가장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장면, 즉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여야 했던 풍 떤 교수 가족의 인상적인 등장과 함께 재판의 결말로 이어집니다.

이런 과정에서 드러나는 두크의 천재적인 기억력, 수십 년 전 심문 대상자의 자백을 기억하는 능력, 재판장에서 보여준 능수능란한 대응 등은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책을 통해 그는 "밀그램의 복종 실험"처럼 단순히 권위에 복종한 인물이 아니라는걸 잘 알 수 있었어요. 처음에는 스스로의 이상을 위해, 나중에는 기계적으로 범행에 가담한 독특한 사례로 이해됩니다. 더불어 교도소장이던 시기를 제외하면 그는 선생, 목회자 등으로 성실하고 신뢰받는 인물이었다는 이중적인 모습도 특이했고요.

그러나 제 기대와는 조금 다른 부분도 있었습니다. ‘자백의 대가’라는 개인에 집중하기보다는, 크메르 루즈라는 거대한 조직 내에서 그가 왜 범죄에 가담하게 되었는지를 구조적으로 조망하는 데 주력하는 탓이 큽니다. ‘자백의 대가’로서의 조종 능력, 심리적 설계도 제대로 묘사되지 않고요. 제가 기대했던 방향은 아니었어요.

재판 논픽션으로서도 법정극적인 재미는 다소 부족한 편입니다. 두크의 범죄가 워낙 명확해서 빠져나갈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고문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부인하지만, 그가 직접 작성한 방대한 기록들이 남아 있으니까요. 그래서 마지막에 프랑수아 루 변호사가 펼치는 변론 역시 공허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재미’의 측면에서는 부족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재미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책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나라의 격동의 근현대사와 맞닿아 있는 주제를 담고 있고, 두크라는 인물이 고문 기술자 이근안과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말년에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점도 똑같고요.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회심은 과연 가능하며 진실한가?” 하는 점인데, 등장하는 목사는 이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습니다. 다만 책이 내리는 결론은, 두크는 믿음 없이는 살 수 없는 인물이며, 과거에는 공산당이 그 믿음의 대상이었다가 이제는 종교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본질은 바뀌지 않은 이기적인 믿음일 뿐이라는 분석이죠.

또 하나 인상적인 점은, 크메르 루즈의 집단학살 현장이 현재는 관광산업의 일환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참혹한 현실이 상업화되는 모습은 씁쓸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남깁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는 부족하지만, 크메르 루즈와 캄보디아의 현대사, 집단학살과 전범 재판, 인간 심리라는 주제에 관심 있는 분들께는 의미 있는 독서가 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 "어차피 죽일 거면 대체 왜 고문을 한 겁니까?"

2019/12/28

도쿄전력 OL 살인사건 - 사노 신이치 / 류순미 : 별점 2.5점

도쿄전력 OL 살인사건 - 6점
사노 신이치 지음, 류순미 옮김/글항아리

1997년 3월 19일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 도쿄 전력 여직원 야스코 살인 사건의 배경과 재판 과정, 후일담까지를 거의 500여 페이지 분량으로 꼼꼼하게 기록한 논픽션입니다.
이 사건은 발생 당시 일본 사회에 굉장한 충격을 안겨 주었고, 이런저런 콘텐츠에서 인용되었던 유명 사건입니다. 대표적인 예는 "여자 친구"입니다. 작품 속 피해자인 마키코는 명문 대학 법대생으로 재학 중 이미 사법고시에 합격한 엘리트지만 전락하여 매춘을 반복했다는 설정인데, 이 사건과 거의 같습니다.
평소 관심 있던 차에 국내 출간이 되었길래 기쁜 마음으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크리스마스 직전에 완독했지만, 크리스마스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아 리뷰를 조금 늦췄습니다.

특징이라면 살인 사건 재판을 다루고 있지만, 진범이 누구냐를 탐구하는 법정 미스터리 속성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네팔인 불법 체류자 고빈다를 범인으로 모는 경찰과 검찰의 비상식적이고 비정한 태도와 주장, 그리고 그 주장을 뒤집으려는 화자인 취재 기자의 취재와 추리를 3년여에 걸친 1심 공판 과정과 후일담 속에 담아낸 것이 내용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검경 합동의 환장할 누명 씌우기는 볼 만합니다. 일단 검찰은 고빈다가 피해자 야스코와 만난 시간부터 제대로 증명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고빈다가 근무지인 식당에서 퇴근 후 10시 7분 열차를 타고 시부야역에 11시 20분에 도착했을 거라고 주장하지만, 취재 결과로는 10시 22분 열차를 탔다는 쪽이 타당하다고 증명되거든요. 설령 검찰의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객관적인 증거가 없는 건 마찬가지고요.

검찰이 유력한 증거라고 내민 범행 장소에서 발견된 피해자의 정액이 들어 있는 콘돔 역시 살인의 증거로 볼 수는 없습니다. 고빈다가 매춘을 하던 피해자의 손님으로 범행 장소에서 이전에 관계를 가졌던 건 사실이니까요. 게다가 현장에서는 피해자와 고빈다의 것이 아닌 음모 등 다른 증거도 발견되었고, 범인이 돈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잡아당기다 피해자의 숄더백에 묻힌 피부 조각 역시 고빈다의 것이 아니기도 했고요.
그 외 세세한 억지 주장에 대한 반론은 셀 수도 없으며, 고빈다의 무죄를 강하게 짐작하게 하는 증언과 증거가 마지막까지 드러나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이렇게 검찰과 경찰이 네팔인을 범인으로 몰려는 의도도 여러 가지 증거와 온갖 비인간적 행각의 폭로를 통해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체가 발견된 3월 19일 이후, 고빈다를 출입국 위반으로 취조할 때 이미 타액을 채취했으며, 고빈다는 물론 그의 룸메이트들에게도 고문과 강압 수사로 억지 자백을 받아낸 것입니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조작했는데도 결정적 증거를 제대로 선보이지 못하고 억지 주장만 되풀이한 검찰의 무능함도 돋보입니다.

또 고빈다가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는 장면에서 끝나지만, 에필로그에서 검찰 항소로 열린 2심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십수 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는 후일담은 기가 막힙니다. 1심 판사가 좌천되기까지 했다니, 어디까지 썩어 문드러진 건지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다행히 재심으로 누명을 벗고 무죄 선고를 받았다지만, 십수 년의 세월은 보상받기 어렵죠. 게다가 이 사건을 진두지휘했던 전 경시청 간부 히라다가 ‘무죄 판결은 사법부가 여론을 의식한 결과이며 고빈다가 진범’이라고 우기며 극우 단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는 내용에 이르러서는 정말이지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 않았습니다.

화자인 취재 기자 사노 신이치의 꼼꼼한 취재도 인상적입니다. 고빈다의 고향을 방문하여 가족과 추방된 당시 룸메이트들의 결정적 증언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이고, 재판에 출두한 거의 모든 증인을 후속 취재하여 피해자 야스코가 살해되기까지의 동선을 자세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각종 증거들도 상세한 보충 설명을 통해 독자의 이해를 돕습니다.

사노 신이치의 추리력이 빛나는 장면도 여러 군데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야스코의 지갑에서 발견된 이오카드의 존재에 대한 추리입니다. 검찰은 이 카드의 잔액으로 야스코가 특정 장소, 그러니까 정기권을 버리기 위한 장소로 이동했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엄청난 구두쇠였던 그녀가 돈을 써 가며 정기권을 버릴 이유는 없죠. 사노 신이치는 그래서 야스코가 이 이오카드를 주웠을 것으로 추리합니다. 비용이 남아 있다고 쓰여 있었지만 사실은 현금을 보태 표를 구입했기에 잔액이 0원이었고, 잔액을 몰랐던 야스코는 뒤의 잔액 기록만 보고 나중에 쓸 요량으로 챙겼다는 것입니다. 아주 합리적이에요.
야스코의 정기권을 아무런 접점이 없는 스가모 주택가에 버린 범인의 심리에 대한 변호인단의 추리도 볼 만합니다. 시체가 며칠 동안 발견되지 않자 범인의 의심이 커져 범행을 드러낼 요량으로 대낮 주택가에 정기권을 버렸다는 것인데, 이 역시 그럴듯했어요.

무엇보다도 가장 궁금했던, “왜 게이오 대학교를 나와 대기업 도쿄 전력의 간부로 근무하며 연봉이 천만 엔이 넘었던 야스코가 수년간 밑바닥에서 매춘을 했는지?”에 대한 나름의 답이 등장하는 것도 반가웠습니다. 속이 다 후련하더군요.
도화선은 그녀가 성스러운 존재로까지 여겼던 아버지가 사망한 것입니다. 그 뒤 공무원 시험에 떨어지고 도쿄 전력 내 라이벌과의 승부에서도 패배하며, 스스로 좌천당했다고 여긴 인사 발령을 받고 아버지가 ‘징벌적 초자아’에 빙의하여 그녀에게 벌을 내립니다. 아버지보다 못한 나를 못나게, 더럽게 만들어야 된다는 이유로요.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를 사회의 밑바닥, 구렁텅이로 떨어뜨리고 만 것입니다.
그 수준은 가히 참혹해서 2천 엔에도 여러 명의 외국인에게 길거리에서 몸을 팔고, 노상 방뇨 등을 서슴없이 저지를 정도였죠. 아, 무섭습니다. 확실히 현실이 픽션보다도 더 끔찍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렇게 자극적인 사건과 극적인 재판 과정을 다루고 있기에 아주 흥미로운 독서였습니다. 여러모로 별점 4점을 주었었던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와 비교됩니다. 핵심 용의자가 유죄를 선고받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무죄로 풀려난다는 재판 과정도 동일할 뿐 아니라, 잘못된 경찰과 검찰의 주장을 밝혀내기 위한 상세하면서도 방대한 취재가 이야기의 핵심이라는 점도 같으니까요.
그러나 이 책은 별점 4점을 주기는 어렵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저자인 사노 신이치가 이 사건을 사카구치 안고의 "타락론"이라든가 일본 사회의 어둠 등과 엮어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문학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네팔에서의 여정을 장황하게 소개하는 부분이라든가 야스코의 무덤을 찾은 감상 등이 그러한데, 전부 쓸데없을 뿐더러 그 양도 너무 많았어요. 그냥 사카구치 안고의 "타락론"과 연계하여 작금의 일본 사회를 드러내는 정도에 그쳤다면 좋았을 겁니다.

게다가 이러한 개인적 감상을 무리하게 사건 취재와 엮은 부분은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예요. 대표적인 게 사건 당일 야스코를 목격한 증인 중 한 명인 샌드위치맨 하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험난했던 인생사와 야스코 사건을 엮고, 이를 내면의 어둠 운운하면서 비극적으로 포장하는데 솔직히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하토는 16년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지만 아내의 사망 이후 스스로 술독에 빠져 인생이 망가진 것이라, 이를 딱히 내면의 어둠이나 운명의 장난으로 포장할 이유는 없죠.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는 저자 스스로 진범이 누구인지에 대해 여러 가지 취재를 통해 범인상을 그려내지만, 이 책에서는 그냥 뜨내기 손님이었을 거라는 일반적인 예상 외에 그 어떤 정보도 추가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현실만 취재해서 문제만 드러냈을 뿐, 그 이상의 진실은 담아내지 못했다는 이야기니까요. 같은 이유로 법정 미스터리를 방불케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기대했었는데, 그러한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는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배분도 적절하지 못합니다. 지금은 고빈다의 억울한 재판이 9, 야스코의 삶과 죽음이 1 정도의 비중인데, 이 책을 구입한 독자라면 야스코의 삶에 대한 관심도 높은 건 당연합니다. 왜 그녀가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의사 한 명과의 인터뷰가 전부라 취재의 양과 깊이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의사의 견해도 증명된 것은 아니고요.
또 고빈다 재판에서 사건 당일 야스코와 고빈다의 행적도 너무 많이 반복됩니다. 이런 부분만 정리했더라도 분량은 대폭 줄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많고 내용도 흥미롭지만, 말씀드린 단점들 때문에 감점합니다. 지금보다 군살을 덜어내고 더 논픽션답게 썼더라면 별점 3점 이상은 충분했을 겁니다. "오컴의 면도날"이 떠오르는 그런 책이네요.

2018/04/06

히틀러의 비밀 서재 - 티머시 W.라이백 / 박우정 : 별점 3.5점

히틀러의 비밀 서재 - 8점
티머시 W. 라이백 지음, 박우정 옮김/글항아리

히틀러가 남긴 장서들이 보관되어 있는 의회 도서관, 공공 기록 보관소, 민간 보관소 등을 저자가 직접 찾아다니며 뒤져본 후, 히틀러가 관심을 가졌거나 혹은 영향을 끼쳤을 책들을 골라 소개하는 책입니다. 

'책이 수집가를 보존하며 수집가가 소멸된 뒤에는 그 삶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 히틀러의 장서를 통해 히틀러라는 인물의 실체를 알려주려는 시도만큼은 무척 독특합니다. 틀린 말은 아닌게 이 리뷰를 쓰면서 제 책장을 쭉 훝어 보니, 정말 저라는 인물에 대해서 쉽게 알 수 있는 책장이구나 싶더라고요. 요리 관련 서적 20%, 역사서 20%, 과학 관련 서적 10%, 장르문학 30%, 만화책 20% 정도의 구성인데 이 블로그 리뷰 비율과도 비슷하고 실제 제 관심사와도 같으니까요. 장서가 수집한 사람의 취향과 관심사를 개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목차는 열개 항으로 나뉘며, 중요한 책도 열 권이지만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책들은 그 외에도 많은데 이 중 히틀러에게 영향을 끼쳤거나 관심을 가졌던 책들을 분류하자면 크게 네 가지입니다.
우선 히틀러의 사상과 철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거나, 최소한 그러한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책들이 첫 번째입니다. 오스보른의 "베를린", 직접 쓴 "나의 투쟁", 그랜트의 "위대한 인종의 쇠망", 권터의 "독일 민족의 인종적 유형론", 그리고 그 스스로 자기 최면에 걸릴 수 있도록 한 스벤 헤딘의 "대륙 전쟁 속 미국" 등입니다.
두 번째는 히틀러라는 인물이 형성되는데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 혹은 히틀러에 대해 증언한 인물들이 관련된 책입니다. 히틀러의 정치 인생 초반에 그를 후원하고 이끌었던 유명 작가 에카르트의 "페르 귄트", 유명 영화인 레니 리펜슈탈이 선물한 "피히테 전집" 이 대표적입니다. "피히테 전집" 은 리펜슈탈과 히틀러 사이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목적 외에도, 피히테라는 철학자가 히틀러에게 끼친 영향도 약간이나마 설명된다는 점에서 첫 번째 분류와도 조금 겹치는 부분이 있고요.
세 번째는 책 자체가 목적이나 수단이 되어 히틀러 주변에서 움직인 경우입니다. 히틀러가 싫어했다는 로젠베르크의 "20"과 이에 맞서 나치와 카톨릭을 결합시키려 했던 후달의 "민족사회주의의 기초"는 각각 책 소개와 함께 실제 히틀러 주변에서 벌어졌던 역사적 일화가 함께 소개됩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총통이 실무, 그리고 공부를 위해 읽은 책입니다. "슐리펜", "프리드리히 대왕"과 같은 전기와 각종 전쟁사나 전술 및 각종 무기 관련 서적들 처럼요.
이러한 책들을 히틀러의 성장 과정 순으로 소개하고 있어서 그가 점차 어떤 사상, 철학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시대상도 대략 설명해 준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역사서라고 보아도 무방하고요.

항상 주변 인물들의 증언과 후대 역사가의 사료를 통해서만 접했던 히틀러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은 반가왔습니다. 접근 방식이 신선한 덕분입니다. 용감하고 전우애 넘치는, 독일 제국에 충심을 다 한 군인, 생사의 기로에서 짧은 쾌락에 탐닉하지 않고 독서를 통해 자기 계발을 멈추지 않은 노력가, 제대로 된 공부는 하지 못했지만 방대한 독서로 자신만의 이론과 세계를 완성하고 이를 토대로 누구와도 토론이 가능했던 천재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무기 관련 연감을 통독하여 후일 할더에게까지 한 방 먹였다는 에피소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독재자이고 살인자라고 해도 16,000권이 넘는 장서를 읽고, 중요한 내용은 기억하고 담아두었다가 써먹었다니 흉내도 내기 힘든 일이긴 하지요. 세계와 맞 상대할 수 있었던 제국을 십 년 이상 철권통치한 인물이 보통 인물일리야 없겠지만, 제 생각보다도 훨씬 뛰어날 뿐 아니라 엄청난 노력가라는 점에서 탄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성기 때의 모습은 그야말로 반신반인이더라고요. 물론 말도 안되는 민족주의에 우생학을 결합시켜 유대인을 학살한 잔혹한 독재자의 모습, 스스로를 유럽 대륙의 구원자로 생각한 과대망상 독재자의 모습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히틀러의 독서법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책을 제대로 독파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특정 관념을 형성한 뒤, 책의 목차와 색인을 살펴 쓸만한 정보를 조금씩 모으는 방식입니다. 때로는 결론부터 읽기도 할 정도로 책의 내용을 깊숙히 이해하기보다는 필요한 정보만 집중적으로 습득하는 방식인데, 논문을 쓸 때의 방식과 비슷하네요. 스스로의 목표나 관념이 명확하다면 나름 효율적일 수는 있겠다 싶었어요.

그러나 실제로 책의 목적, 그리고 광고 문구 - 1만 6000권 장서 중 단 열 권이 역사를 바꿨다 - 에 부합하는 내용인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소개되는 절반 가까이의 책들이 최상의 혈통인 아리아인의 혈통을 보존하고자 하는 우생학적 관점, 이 때문에 유대인을 말살해야 한다는 반유대인주의 형성에 관련되어 있는 탓이 큽니다.
게다가 몇몇 책들은 히틀러가 소장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읽었는지조차 불분명하다는 점도 심각한 문제에요. 이래서야 저자의 주장을 설득력있게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책을 선정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특정 인물을 구체화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단편적인 정보일 뿐이고요.
물론 반유대주의가 히틀러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허나 이렇게까지 억지스럽게 깊게 파고들 필요는 없었어요. 더 다양한 책들로 다양한 분석을 해 주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제임스 쿠퍼의 "가죽 장화",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카를 마이의 "사막 횡단", 스벤 헤딘의 모험담 등 평소 즐겼다는 모험 소설들도 여러 권 언급되는데, 이런 책들을 좀 더 분석하는 게 더 취지에 맞는 방향이 아니었을까요? 아울러 서재에 각종 추리 소설도 꽂혀 있었다는 증언이 있는데 과연 어떤 책이었을지 너무 궁금합니다. 최소한 제목 정도는 알려주었어야 했어요. 이것도 추리 소설 홀대의 하나인지 궁금하네요.

그래도 한 인물을 다른 각도로 들여다 보게 만드는 좋은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는 추천작입니다. 취지에 딱 들어맞는다고 보기는 좀 어렵고, 신뢰성 측면에서도 다소 부족하지만 읽는 재미도 쏠쏠하니 히틀러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제 별점은 3.5점 입니다.

덧붙이자면, 책장이 소유자에 대해 대략 알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요새는 사람들이 정말 책을 안 사고, 안 읽는 시대죠. 모든 컨텐츠 소비가 스마트 폰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으니까요. 앞으로 수십년 뒤에는 "스마트 폰 로그로 분석한 누구누구" 와 같은 책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2021/03/06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 - 제임스 노우드 프랫 / 문기영 : 별점 3점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 - 6점
제임스 노우드 프랫 지음, 문기영 옮김/글항아리

서양의 많은 애호가에게 바이블처럼 읽힌다는 차에 대한 전문서이자 문화사 서적입니다.

1부에서는 차의 기원에서 시작하여 차가 세계로 퍼져나가게 된 역사, 그리고 홍차 인기가 주춤했던 뒤 다시 인기를 끌게 된 현재 시점까지를 상세하게 서술하여 알려줍니다. 특징이라면 '기원' 부터 상세하게 통사적으로 서술해서 알려준다는 점이고요. 특히 미국인 저자에게는 불리했을 중국차 역사가 비교적 정확하다는 데에서 공부의 깊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중국 신농 황제가 차에 관심을 보였고, 기원전 1066년 윈난 성에서 생산된 차가 황제에게 공물로 바쳐졌다는 등 중국 고대사에서 시작하여 당나라 육우의 "다경"이후 송나라 채양의 "다록", 명나라에서 이전과 다른 녹차 가공법이 등장했다는 역사 소개가 상세하며, 심지어 "고문진보" 속 차에 대한 명시 '칠완다가'까지 번역하여 소개할 정도입니다. 

또 이 과정에서 차 전래가 불교 전파와 관련이 있다는 여러가지 설들과 그에 대한 해석도 재미있었습니다. 첫번째 설은 승려 감로가 1세기 경 인도 순례를 마치고 돌아올 때 차를 들여왔다는 설로, 그가 심었다는 전설의 차나무 일곱 그루는 아직도 쓰촨성 멍딘 산에 남아 있다네요. 두번째 설은 달마 선사 눈꺼풀에서 차나무가 자라났다는 설인데, 달마 선사가 인도 출신이니 이 역시 차나무 인도 기원설을 의미하지요. 야생 차나무의 고향은 윈난성과, 인간이 차나무를 처음 재배한 곳으로 알려진 쓰촨 성 모두 인도에서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점, 불교에서 명상과 술을 대신하기 위한 이유로 차를 이용했고, 그래서 승려들이 차나무 재배와 차 가공법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꽤나 타당한 해석으로 보입니다. 불교가 융성했던 당나라에서 육우 선사가 "다경"을 쓴 배경 역시 마찬가지 이유일테고요. 

'차 茶'라는 문자가 등장한 시기와 그 발음 및 일본 다도 문화의 역사, 그리고 일본 다도를 대표하는 센노 리큐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주로 오카쿠라 가쿠조의 "차에 관한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 많은데, 놀랍게도 국내에 e-book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어 있네요. 이 책에 일본이 가루차를 거품내는 송나라 방식을 쓰는건, 자기들이 몽골 침략을 물리쳐서 차 전통을 계승할 수 있었던 거라는 해석이 나오는 모양인데,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센노 리큐 이후 센차 방식을 발전시킨 바이사오에 대한 설명도 빼 놓지 않고 있고요.

다음은 중국차가 유럽에 전해지는 과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1610년 네덜란드가 최초로 차를 들여오면서 유럽에서 차가 확산되게 됩니다. 이후 17세기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이 전쟁을 벌일 때 프랑스와 네덜란드 교역 단절로 프랑스는 차 공급이 끊어졌고, 반대로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커피 수입이 단절된게 국가적 선호가 갈리게 된 이유라고 하네요. 그리고 영국에서 찰스 2세와 왕비에서부터 시작된 엄청난 차 유행과 이 때문에 벌어진 영국 동인도 회사, 존 컴퍼니와 중국 무역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원래 중국차를 성공적으로 수입해서 유럽에 유통시킨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였는데, 네덜란드는 중국 차의 미래를 과소평가해서 인도네시아 자와섬을 통한 중계 무역만 하다가 수요 폭증 때 중국과 직거래하던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고요. 그리고 보스턴 티 파티, 제국주의의 선봉장이었던 동인도 회사의 추악한 행위들과 아편 전쟁, 영국이 패권을 쥔 뒤 민싱 레인에서의 차 거래와 차 운반선들이 레이스를 펼치던 영광의 시대, 인도 아삼 지방에서의 차 재배 성공, 토머스 립턴과 실론 티의 성공 등이 이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기존 제국주의 사고방식과 다른 전통들이 모두 파괴된 뒤 그 자리를 값싼 '티백'이 차지하였고, 회사마다 가격 경쟁이 시작되어 고급 차들이 모두 시장에서 사라져버린 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이 시대는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고요. 다행히 지금 고급 차 시장이 기지개를 펴고 있다고 언급하며 차 역사 설명은 마무리됩니다. 그 외에는 차와 관련된 여러 유명인들, 그리고 '본차이나'로 대표되는 다기 제조에 대한 역사 등을 함께 소개해주고 있는데, 모두 재미있었어요.

반면 2부의 나라별 주요 차 소개는 특별히 와 닿는 내용은 없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많았고, 인터넷 등에서 확인 가능한 정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강희제가 '벽라춘'이라고 이름붙인 차 이름의 유래는 찻잎이 우러나는 동안 나선 모양으로 회전하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저자 개인적인 견해는 괜찮았지만요. 그 밖에는 프랑스가 1825년 베트남에 최초의 차나무를 심었다고 자랑하지만, 옛날부터 차나무는 베트남에 야생으로 자라고 있었으며, 차는 이미 1,000년 전 부터 인도차이나 문화 일부였다며 일침을 가하는 것처럼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시각 정도만이 눈에 뜨였습니다. 프랑스가 뭘 새롭게 한 건 없고, 오히려 창피해 해야 마땅하다는 이야기로, 비교적 공정한 견해라 할 수 있겠죠. 

그래도 2부 마지막에 실린 블렌딩과 차 브랜드 설명은 그런대로 유용했습니다 . 브랜드별 대표 차 명칭, 어떻게 블렌드되어 있고 어떤 맛인지를 대략적이나마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 그레이의 기원과 레시피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인상적이었고요. 

하지만 3부는 50페이지도 안되는 짤막한 분량인데다가 차를 어떻게 마시는게 좋은지 차 마시는 방법이 전부입니다. 도판과 함께 상세하게 소개해주는 다른 책들에 비해 더 나은 점을 찾기는 어렵더군요. 도판이 없다면 최소한 유튜브 동영상 링크라도 포함해 주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2부와 3부는 그닥이었지만, 1부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차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최소한 1부만이라도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7/07/09

식물도시 에도의 탄생 - 이나가키 히데히로 / 조홍민 : 별점 2점

식물도시 에도의 탄생 - 4점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조홍민 옮김/글항아리

에도와 관련된 식물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 생각하고 읽은 책입니다. 소갯글도 그럴듯하고, 만든 모양새도 예뻐서 집어들게 되었네요.

그런데 생각과는 무척 달랐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에도 시대, 즉 도쿠가와 막부 시대 뿐만이 아니라 일본 각지, 다양한 시대를 망라하여 여러가지 식물 관련 정보를 전해주거든요. 에도 시대로 한정하면 내용이 많지 않은건 당연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이래서야 제목과의 괴리감이 너무 큽니다. 게다가 우리나라 이야기도 아니라서 큰 재미를 느끼기도 힘들었어요. 딱히 식물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닌 탓에 더욱 그러했죠.

또 등장하는 해석도 과장되거나 오버스러운 것이 많습니다. 에도가 인분을 기반으로 벼농사를 지어서 오물 통제가 가능한, 완벽한 '에코 - 리싸이클링 도시' 였다고 이야기하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조금 남은 오물 잔류물도 바다에 영양을 공급하여 전설의 황금어장 '에도마에'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설득력이 낮습니다. 인분을 비료로 쓴 곳이 일본, 에도에 한정된 것은 아니잖아요? 닌자들이 직업 특성 상 각종 식물, 약재에 능통한 전문가들이었다고 설명하는 부분도 오버스럽기는 마찬가지고요.

물론 분량도 길고 주제가 독특한만큼 볼만한 정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이야기한 닌자 이야기 중, 닌자가 '호로쿠다마'라 불리는 화약 장착 수류탄을 무기로 이용했는데 그 재료가 식물 쑥이었다는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네요. 초석은 질산칼륨의 결정으로, 닌자는 쑥에 오줌을 뿌려 흙 속에 묻은 후 미생물을 발효시켜 오줌 속 암모니아와 쑥에 함유되어 있는 칼륨을 반응시켜 질산칼륨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것을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대단해요.
가토 기요마사가 구마모토 성을 축성할 때, 과거 조선 출병 시 농성전을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다다미의 심으로 짚 대신 토란 줄기를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입니다. 일종의 보존식으로 벽에는 박으로 만든 박고지까지 발라 넣었다고 하네요. 지금 구마모토의 명물인 가라시렌콘(삶은 연근 구멍에 물에 갠 겨자와 된장 섞은 것을 넣고 밀가루와 콩고물을 묻혀 튀긴 향토요리)의 재료인 연근 역시 구마모토 성 해자에 비상 식량으로 재배되고 있었다니, 조선에서 어지간히 고생했나 봅니다.

하지만 이런 재미난 이야기들 역시 과학적인 사실에 기반한 것도 아니고, 출처나 자료가 제대로 제시되지 않아서 대체 무슨 사료를 기반으로 이야기하는지 불분명하다는 단점은 큽니다. 대표적인게 전국 시대 무장들이 어떻게 초식만 먹고 싸울 수 있었는지에 대한 고찰입니다. 무장들은 하루에 현미 5홉 정도를 먹었는데, 단백질도 없이 이 정도 식사로 갑옷을 입고 어떻게 전투를 할 수 있었나?를 전투민족 파푸아뉴기니인들과 연결시켜 설명하거든요. 파푸아뉴기니인들도 바나나와 타로, 토란 등 식물만 먹는데, 이를 통해 전국 무장들이 파푸아뉴기니 사람들 처럼 장내에서 질소를 흡수해 채내에서 단백질을 합성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당연히 과학적으로 증명 되지 않은 추론에 불과한 내용이지요. 발상은 재미있지만 여러모로 무리였어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랑했던, "맛의 달인"에서도 간혹 언급되던 '핫초 된장'의 유래와 같이 내용 자체가 부실한 이야기도 제법 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건질 것은 이름의 유래밖에는 없어요. 이에야스가 태어난 오카자키 성으로부터 8정 떨어진 핫초 마을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데 이건 사실이겠지요. 그러나 그 외 된장의 특성에 대해서는 딱히 대단한게 없습니다. 핫초 마을은 야하기 강 자연 제방 위에 위치해 된장 만들기에 필요한 용천수가 충분했고, 야하기 강을 통해 수로 운송도 용이해서 된장이 발달할 수 있었다. 아울러 핫초 된장 제작에는 성을 쌓는 기술도 응용되어 있는데, 찐 콩을 동그랗게 뭉쳐 누룩균을 묻힌 된장 덩어리를 직경 2미터 정도의 거대한 삼나무 통에 채워 넣고, 된장 덩어리와 같은 무게가 될 정도의 돌을 눌러 쌓아 숙성시키는 것으로 이것은 성의 석벽을 쌓는 것과 같은 이치다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 정도 환경을 갖춘 지역이야 널리고 널렸을테고, 제작 방식도 축성 기술을 응용했다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무리인데 너무 억지로 대입시킨 느낌입니다. 예컨데 순창 고추장에 대한 설명 - 기후상 습지가 많은 분지 지역이라는 특성 덕분에 고추장 발효가 활발해져서 다른 고추장에 비해서 장맛이 깊고 빛깔 또한 곱다 - 정도의 설득력이 있지는 않아요. 이런 이야기가 '식물'을 이야기하는 책의 주제와 맞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기획의도와 주제, 만든 모양새는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만 내용은 별로 기대에 미치지 못햇습니다. 단점도 많으며 내용에서 딱히 신뢰가 가지도 않았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2019/10/04

칼과 책 - 둥핑 / 이준식 : 별점 3점

칼과 책 - 6점
둥핑 지음, 이준식 옮김/글항아리

부제는 '전쟁의 신 왕양명의 기이한 생애'로, 중국 명나라의 철학가이자 정치가, 무관이었던 왕양명에 대한 전기입니다. 양명학에 대해서 이름은 들어보긴 했지만 왕양명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가진 지식이 전무하였는데 형이 강력하게 추천하여 읽게 되었습니다.

책에 소개된 왕양명의 간략한 생애는 다음과 같습니다. 왕양명은 유력한 집안의 자제로 태어나 어렸을 때 부터 '성인'이 되기를 꿈꾸었습니다. 주희의 '격물치지'를 실현하기 위해 대나무를 관찰하다가 지병을 얻었을 정도로요. 그러다 벼슬길로 나서 말단 관리로 일하던 중, 정의를 위해 나서다가 곤장을 맞고 죽기 직전에 살아난 뒤 오지로 발령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암살자의 추격을 겨우 뿌리치고 도착한 임지 용장에서 '도'를 깨우칩니다. 이를 통해 사물 속에 하늘의 이치가 담겨있다는 격물치지가 아니라 모든 사물의 이치는 애초부터 내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있다는 가지고 있다는 '심학'이 수립되게 된 것이지요. 뒤이어 주희가 이야기한 '지선행후', 즉 '먼저 안 다음 실천해야 한다'가 아니라 '알기보다는 실천하는게 훨씬 중요하다'는 '지행합일설'이 태어나게 되고요. 

왕양명은 사상적 기반을 수립한 귀양 생활 뒤 조정의 명을 받아 이런저런 곳에서 반란군을 토벌합니다. 그것도 어려운 상황에서 한 번도 지지 않고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요. 이는 모두 '지행합일'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으로 익혔던 군사적 이론과 지식을 곧바로 실전에 적용한 셈이니까요. 또 실전에서 익힌 지식을 얻어 더 발전하게 된건 '행'이 '지'로 전이된 것으로 '지'와 '행'이 상호 보완적으로 부단히 통일되어 간 것입니다. 과연 '지행합일설'의 창시자다운 모습이에요.

그리고 말년에 이렇게 얻은 경험과 지식을 통틀어 제시한 결과가 바로 '양지설'입니다. 양지는 개개인 마음 속에 원래부터 존재해서 후천적 학습이 필요없는, 우리 본심이며 영혼의 본래 모습이자 본래 상태입니다. 그러나 살면서 종종 은폐되곤 하니 이를 발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게 골자입니다. 양지는 거울과 같아서 오래 사용하거나 닦지 않으면 더러워지기 마련이니까요. 이 양지가 '지행합일'의 '지'를 대체함으로서 영혼과 마음, 사물과 이치에 대한 관계가 완성됩니다.

하지만 양지설 제시 이후 얼마 못가 대규모의 반란과 도적떼 소탕 이후 사망하고 맙니다. 살아 생전에 큰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건 조금 아쉽지만 사후에라도 큰 명성을 얻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겠네요. 중국에서는 무장, 관료, 철학 세가지 분야에서 불후의 업적을 이루었다는 의미로 '삼불후'라고 불리운다니 대단합니다.

이러한 왕양명의 삶과 철학을 소설처럼 구성하여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아요. 일단 찬양이 너무 지나칩니다. 그리고 책의 절반 가까운 분량이 왕양명의 화려한 군사적 업적을 다루고 있는데 관련된 도판이 전무하다는 점도 문제고요. 최소한 간단하게나마 지도 정도는 수록하는게 좋았을텐데 말이죠. 아무리 못해도 가장 큰 전과인 영왕의 반란을 진압했던 이야기 정도는 좀 더 잘 알려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잘 몰랐던 인물, 역사에 대해 알게된 건 분명한 수확입니다. 양지설은 지금 시점에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은, 좋은 이야기라는 것도 분명하고요. 제가 비록 성인을 꿈꾸지는 않지만 그래도 남 부끄럽게 살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드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14/10/29

홍차의 세계사, 그림으로 읽다 - 이소부치 다케시 / 강승희 : 별점 3점 -> 미정

홍차의 세계사, 그림으로 읽다 - 6점
이소부치 다케시 지음, 강승희 옮김/글항아리

"차"보다는 "홍차" 중심으로 기원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소개해 주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입니다. 도판과 자료가 화려해서 즐겁습니다. 차를 마실 때 사용했던 눈이 휘둥그레지는 각종 도구, 다기들, 차와 관련된 그림과 사진, 지도 등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거든요.

책은 유럽에 최초로 소개된 차는 녹차였는데 이것이 왜 홍차로 바뀌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영국물은 미네랄이 많이 함유되어 경도가 높은 탓에 녹차를 우리면 차의 떫은맛 성분인 탄닌이 제대로 우러나지 않는데, 녹차 대비 탄닌 함유량이 높은 발효차는 중국에서는 떫지만 런던의 경수에서는 순하게 우려져 좋은 맛이 되었기 때문이라네요.

원래 홍차가 실패한 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도 흥미롭습니다. 어쩔 수 없는 환경적 요인으로 반발효차를 만들지 못해 완전 발효차가 되었고, 차를 만드는 공장에서 찻잎을 건조시키는 땔감으로 쓴 소나무의 연기가 찻잎에 착향된 것이 미묘한 향이 난다는 보히차, 정산소종이 되었다고 하니까요. 그러나 원산지인 우이산의 보히차가 영국의 소비량을 따라가지 못하고, 격동기의 중국에서 차를 확보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가짜 보히차가 범람하고, 더욱 강한 맛과 향을 착향시키기 위해 강제로 훈연한 랍상소종이 지금은 영국의 전통적인 차로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니 세상 일은 정말 모를 일입니다.

또 차의 기원을 찾아 이런저런 곳을 돌아다니며 찾은 여러 가지 차에 대해 소개해 주는데, 홍차 관련된 장소에 대한 기행문이라는 점에서는 "커피견문록"이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는 지노족이라는 소수민족의 량반차가 인상적이었어요. 왜냐하면 반찬처럼 먹는 차이기 때문이에요. 차의 생엽을 유념하여 생강, 마늘, 고추, 소금과 함께 섞어 뜨거운 물을 부은 뒤 먹는다고 합니다. 꽤 맛있을 것 같죠? 비슷하게 반찬처럼 먹는 차가 미얀마에도 있는데, 이곳에서는 약간 발효한 절인 음식처럼 먹는다고 하네요.

이외에 여러 가지 차에 관련된 중요한 역사의 흐름도 짤막하게 알려줍니다. 물론 "보스턴 티 파티"가 빠질 수 없죠. 아편전쟁도 어떻게 보면 차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해석하는 관점도 새로웠고요.
홍차 관련 주요 인물들 어떤 활약(?)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얼 그레이 홍차를 만든 그레이 백작을 비롯해 중국에서 차 수입이 어려워지자 인도의 아삼이나 스리랑카의 실론 등의 식민지를 차 생산지로 활용하기 위해 노력했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지금도 그 이름을 강하게 남기고 있는 홍차의 왕 "립턴"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네요. 다른 사람들은 정말 홍차를 재배하고 널리 퍼트리는 데 노력한 사람들이라면, 립턴은 순수한 사업가로 생산과 판매에 남다른 재주를 발휘하여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거대 기업을 세운 것이니까요. 참고로 얼 그레이는 유명한 홍차 상회 트와이닝에서 정산소종의 훈연향이 랍상소종만큼 강하지 않자, 다른 향기에 주목하여 베르가못의 향을 첨가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차가 전래되면서 미국인의 실용적인 관점으로 새롭게 등장한 티백, 아이스티, 레몬티 등이 소개되고, 마지막은 맛있는 홍차를 만드는 방법으로 끝맺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통해 읽었던 조지 오웰의 수필을 중심으로 설명되고 있어서 더 반갑더군요. 내용의 핵심은 "우유를 먼저 붓느냐, 차를 먼저 붓느냐"였는데 조지 오웰의 주장은 우유의 양을 조절할 수 있으므로 우유를 나중에 부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MIF, MIA 논란은 계속 이어졌는데, 왕립화학학회까지 나서서 내린 결론은 "우유가 먼저(MIF)"입니다. 우유를 나중에 넣으면 우유 속의 단백질이 고온의 차에 의해 변성되어 차의 맛과 향이 나빠지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과학이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아주 좋은 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재미는 물론 자료적 가치도 충분한 만큼, 차를 좋아하신다면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책의 장정, 디자인도 아주 예쁘고 실려 있는 도판들도 컬러로 제대로 수록되어 있는 등 책의 완성도도 높은 편입니다.

2014.10.30 수정) 댓글을 읽어보니 책 내용에 오류가 제법 있는 것 같습니다. 참고하세요.

2014.11.06 수정) 댓글을 읽어보니 오류 정도가 아닌 것 같기에 별점은 미정으로 최종 수정합니다. 잘 아는 분야에 대해서만 리뷰를 남길 수는 당연히 없습니다. "독서"가 자신의 교양을 쌓고 부족한 것을 채우는 데 목적이 있기도 하니까요. 잘못된 정보를 주는 책을 잘 모르는 독자가 읽었을 때의 폐해의 대표적인 경우라 생각하겠습니다.

2016/05/31

박물관 보는 법 - 황윤 : 별점 3점

박물관 보는 법 - 6점
황윤 지음, 손광산 그림/유유

부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감상자의 안목"입니다. 간략한 책 소개와 부제를 보고, 다양한 박물관에 대해 어떤걸 관람하면 좋을지를 알려주는 실용서라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내용은 제 생각과는 많이 다르더군요. 우리나라 박물관과 유물 수집가의 역사를 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미시사 서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을 정도로요.

책은 을사늑약 이후 일본의 도굴꾼이 창궐했다는 1909년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에서 시작합니다. 다행히 1908년 왕립 이왕가 박물관이 세워진 이후, 시장에 나도는 유물들을 웃돈을 얹어 구매함으로써 유물의 유출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하네요. 1908~1917년까지 왕실이 수집한 유물의 규모는 무려 1만 122점, 구입비만 21만원이었다고 하니 대단합니다. 1원이 5만원 정도라고 한다면 100억원 정도 쓴 거니까요. 특히나 국립 중앙 박물관의 핵심 유물인 "금동반가사유상"을 1912년 2,600원이라는 거금에 구입한 것이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판매자 일본인 고미술상은 경주 남산 기슭에 있는 어느 절에서 찾아낸 이 유물을 40원이라는 금액에 사들였다고 하니 정말 남는 장사 했네요. 천벌이나 받아라! 여튼 이왕가 박물관 덕에 해외로 유출되지 않았으며 지금 보험 평가액만 500억원 수준이라는게 다행일 뿐입니다.

다음에 설립된 것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입니다. 식민 통치의 일환인데 총독부의 권력을 앞세워 1930년대 말에는 1만 4천점이 넘는 막대한 전시품을 유치했다고 합니다. 이때 일본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본국 총리로 임명되어 귀국할 때 자신이 수집한 유물을 기증했는데 여기 포함된 것이 또 다른 금동반가사유상이었습니다! 본인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우리나라를 위해 그나마 좋은 일을 해 준 것은 고맙네요.

그 뒤에는 유물 수집가와 그들이 수집한 유물들 이야기입니다. 간송 전형필 이야기는 너무 많이 접해보아서 조금은 식상했습니다만, 이외의 인물들도 소상하게 소개해 줍니다. 악명 높은 유물 반출범 오구라에서 시작하여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 중 조선 최상류층의 친일파 의사 박창훈과 서민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산 성모 병원을 세운 박병래 이야기가 인상적입니다. 박창훈은 치부의 대상으로 유물을 수집했고, 1940~41년 사이 소장품 전부를 경성미술구락부에 모두 팔았습니다. 거의 600점 가까운 소장품을 4000~7000원 사이의 고액에 매각했다니 어마어마한 돈이죠.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했다는 후일담은 입맛을 씁쓸하게 만드네요. 반면 박병래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백자 중심의 수집을 이어간 뒤 후일 소장품 전부를 국립 중앙 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 가서 유물 카드에 '수정 (박병래의 호)'가 적힌 유물은 관심 있게 봐 두어야겠어요.

또한 출신 대학이 아니라면 쉽게 가보지 못할 대학 박물관에 대한 상세한 정리도 눈길을 끕니다. 친일파로 유명한 김활란이 이화여대 박물관을 위해서는 대단한 활약을 보였다는 일화가 특히 재미납니다. 박물관의 상징인 국보 백화철화포도문 항아리를 1960년대 1,500만원 (현재 시세로 30억 이상)에 구입한 것이 그것인데, 이 항아리는 장택상의 소유로 그가 야당 지도자로 활동할 때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내놓았다는건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

이어서 사립 박물관과 사립 미술관이 소개됩니다. 미국의 게티 미술관을 소개하며 진정한 문화재단의 역할을 알려주는데, 한국 기업 휘하의 박물관과 미술관에서는 아무래도 요원한 일이겠죠. 그나마 우리나라에서는 호림 박물관이 공공재로서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제 공부가 부족한 탓에 호림 박물관은 가본 적이 없는데 근시일 내에 꼭 한번 가 봐야겠습니다.

마지막은 근대 미술 및 천안의 씨킴과 아라리오 프로젝트, 아라리오 뮤지엄 소개로 마무리됩니다. 이 부분은 익히 알고 있는 내용도 있었는데 한눈에, 책 한 권을 통해 읽게 되니 뭔가 통사적인 흐름이 느껴져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네요.

이러한 미시사적 이야기는 물론, 박물관별로 주요 소장품도 함께 소개됩니다. 주요 소장품이야말로 관람할 때 가장 먼저 체크해야 할 테니 소개되는건 당연합니다. 이 부분은 책에 대해 가졌던 원래의 제 생각과 비슷하네요. 부록으로 국립 중앙박물관의 경우, 간략한 약도와 최적의 동선도 수록되어 있고요.

책의 저자인 역사학자 황윤에 대해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 박물관과 유물에 대한 애정만큼은 깊이 느껴지는 글들도 좋았습니다. 230여 페이지라는 적절한 분량, 책날개도 없는 오래전 문고본 형태의 심플한 디자인에 적절히 삽입된 정밀한 일러스트도 마음에 들고요.

단 불필요한 장식, 군더더기를 덜어내어(심지어 표지조차 2도 인쇄에 불과합니다) 보급형 책을 만들겠다는 의지와는 다르게, 9,000원이라는 정가가 적합한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더 저렴하던가, 아니면 조금만 가격을 올려서 표지 정도라도 딴딴하게 (?) 만드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도 박물관을 좋아하시고 우리 유물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꼭 한번 보실 만한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저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책에 실린 박물관별 꼭 보아야 할 유물 목록을 요약하며 글을 마칩니다.

  • 국립 중앙 박물관 - 금동반가사유상, 2층 기증 전시실의 수정 박병래가 기증한 백자들
  •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 백자철화포도문항아리
  • 호암미술관 - 15~16세기 초기 청화백자, "수월관음도" 등
  • 플라토 미술관 - 로댕의 "지옥의 문", "깔레의 시민"
  • 부암동 서울 미술관 - 이중섭의 "황소" 외 근현대 작품

2026/03/14

추리 소설 속 자동차 : 알파 로메오 스파이더

그동안 추리소설 속에 등장하는 요리에 대해 몇 차례 글을 써 왔습니다. 음식은 인물의 취향과 성격, 그리고 시대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모아서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지요.

이번에는 조금 방향을 바꿔,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자동차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자동차는 추리적으로 알리바이를 만들기도 하고, 완벽해 보이던 알리바이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도 하니까요. 때로는 밀실을 대신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하고요. 차종과 색상, 구입 시기 같은 정보만으로도 인물의 성향과 처지를 드러노기도 합니다. 굴러가기만 한다는 이유로 오래된 고물 블루버드를 타고 다니는 탐정 사와자키처럼요. 낡고 오래되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BMW’라는 별명답게 튼튼하고 신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물과 차가 절묘하게 겹쳐 보입니다. 최근의 예로는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의 미키 할러를 떠올릴 수 있겠네요.

이처럼 현대 추리소설에서 자동차는 사건과 등장인물과 밀접하게 연결된 존재입니다. 수많은 작품 속에 다양한 차가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이야기의 핵심 장치로 기능하는 자동차들을 중심으로 하나씩 소개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소개할 자동차는 알파로메오 스파이더 3세대입니다.

알파로메오는 1910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출발한 브랜드로, 레이싱을 통해 다져진 기술력과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명성을 쌓아 왔습니다. ‘운전의 즐거움’을 상징하는 브랜드로 자주 언급되며, 스포츠성을 중시하는 제조사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스파이더는 1966년 처음 등장한 2인승 오픈 스포츠카입니다. 디자인은 피닌파리나가 맡았고, 유려한 곡선의 차체로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영화 "졸업"에 등장하며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고, 1993년까지 약 27년간 생산되며 12만 대 이상 판매된 장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중 3세대는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생산된 후기형으로, 기존의 클래식한 이미지를 유지하면서도 범퍼와 외관을 현대적으로 다듬어 1980년대 감각에 맞춘 변화를 보여 주었습니다. 전통을 이어 가면서도 시대의 흐름에 발맞춘 세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모델이지요.

이 차가 등장하는 작품은 일본의 콤비 추리소설가 오카지마 후타리의 1987년 작품 "그리고 문이 닫혔다"입니다.
오카지마 후타리는 두 명(이노우에 유메히토, 도쿠야마 준이치)의 합동 필명으로, 이름의 유래는 ‘재미있는 두 사람’(오카시나 후타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독특한 아이디어와 소재를 도입한 본격 추리물로 유명하며, 대표작으로는 "클라인의 항아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는 피해자의 모친이 사건 용의자 네 명을 핵 셸터에 가둔 뒤 진상을 밝혀내려 한다는 독특한 설정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 속 피해자 사키코의 애차가 바로 알파로메오스파이더고요. 세대가 명확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발표 시점이 1987년이고 사키코가 부유한 집안의 딸로 최신 유행과 명품을 선호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판매 중이던 3세대 모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화려한 빨간색 오픈 스포츠카는 제멋대로이면서도 타인의 시선을 즐기는 사키코의 성격과 잘 어울립니다. 유이치와 드라이브를 하다가 일부러 차를 세우고, 루프를 연 채 키스를 나눈다는 묘사를 통해 관심받기를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그녀의 모습을 한층 선명하게 드러내지요. 이는 2인승 오픈카라서 가능했을 행위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 자동차는 단순히 이러한 사키코의 성격을 상징하는 소품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녀가 절벽 아래로 추락해 사망했을 당시 타고 있던 차가 바로 이 알파로메오였고, 사건의 실마리 역시 차량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신문에 실린 흑백 사진 속 인양된 알파로메오와, 사키코가 생전에 찍힌 컬러 사진 속 차량을 번갈아 보던 유이치 일행은 운전석 시트 위치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두 사진 모두 차량의 왼쪽에서 촬영되었고, 좌핸들 차량이므로 운전석은 카메라 쪽에 자리합니다. 그런데 바다에서 끌어올린 차량의 시트는 컬러 사진보다 훨씬 뒤로 밀려 있습니다. 사키코가 직접 운전했다면 시트 위치가 같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사건 당시 마지막으로 운전대를 잡은 인물이 사키코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자동차는 단순한 배경, 소품이 아니라 소설의 추리적 핵심 장치로 사용됩니다. 시트 위치라는 사소한 차이가 사고사라는 견해를 뒤집고, 등장인물들의 알리바이를 다시 검토하게 만드니까요.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 시각 현장에 있던 네 명 중 타다시는 사키코를 살해한 뒤 차량에 태워 절벽까지 이동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다시와 치즈루, 아유미는 이후 함께 절벽에서 차량을 발견했지만, 차 안에는 시체가 없었습니다. 그 뒤로 세 사람은 계속 함께 있었기 때문에 타다시가 차량을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는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반면 그 시간대에 유일하게 자리를 비운 인물은 유이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이치가 범인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는 사건 초반에 별장을 떠났기 때문에 살해를 실행하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으니까요.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요. 누가 언제 운전대를 잡았고, 사키코의 죽음은 어떻게 연출된 것일까요. 그 진상과 트릭은 "그리고 문이 닫혔다"를 통해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추리소설을 읽으실 때 인물들의 대사뿐 아니라 그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에도 한 번쯤 눈길을 주시면,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