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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1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 이종각 : 별점 3점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 6점
이종각 지음/동아일보사

'명성황후 시해사건'에서의 조선인 주요 가담자 우범선과 그를 암살한 고영근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격동의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의 조선 정세와 주요 인물들의 이야기를 엮어놓은 미시사 서적입니다.
총 9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1~6장은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우범선, 고영근의 이야기이며 7장은 또다른 대역죄인이었던 김옥균과 그를 암살한 홍종우의 이야기, 8장은 우범선의 아들인 우장춘과 후손들의 이야기, 9장은 고영근의 후일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가치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해 굉장히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책이 주요 가담자 우범선과 암살자 고영근을 다루고 있는 책이기에 당연한 일이겠지만요.
단순히 시해사건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왜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당시 열강들의 세력구도는 어떠하였는지, 어떤 인물들이 주로 관여하였으며 사건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등을 모두 포괄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를 다양한 자료로 뒷받침 하는건 물론입니다. 머리 속에서 사건들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이해하기 쉽게 쓰여졌다는 것도 장점이고요. 이 책 한 권을 읽는다면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해서는 졸업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정도에요.

그리고 그간 다른 책에서는 접하기 힘든 정보도 많습니다. 제일 먼저 '우범선'과 '고영근' 이라는 인물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들 수 있겠네요. 우범선이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외의 것들은 잘 모르던 차에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되어 무척 기뻤습니다. 무과에 급제하여 별기군 간부로 근무했던 나름 당시의 엘리트 군인이 어떻게 국모 시해사건에 가담하였는지?에서 시작해서, 일본에서 어떻게 가정을 꾸리고 살았는지, 암살 당시 일본의 분위기는 어떠하였는지, 그 후손(우장춘을 비롯한)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등 일대기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의 내용이 가득합니다.
고영근 역시 조선에서의 행적과 왜 망명을 갔는지, 왜 암살을 시행하였는지, 그리고 재판 이후 귀국하여 고종의 능인 홍릉 능참봉직을 수행하며 능비건립 사건을 일으키기까지의 거의 모든 행적에 대해 설명해줍니다.

그 외에도 김옥균 암살 작전과 관련자들, 그리고 후일담도 과거 TV '역사스페셜'에서 보았던 내용보다도 자세하며, 당시 망명자들이 일본에서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이야기 - 장, 차관급 인사에게는 일본 정부가 생활비를 지급하기는 했지만 보통 휘호로 먹고 사는 인물이 많았고, 몇몇 인물들은 정말로 곤궁했다더라... 일본내에서 다 첩을 데리고 살았다더라... - 등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습니다.

단 제목을 제외하고는 책 전체에 걸쳐 '명성황후'를 '민비'라고 표현하고 있는 점은 불만스러웠어요. 평가야 어찌 되었건간에 황후로 추존되어 불리우는 사람을 왜 '민비'라는 호칭으로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더군요.
그리고 고영근 후일담에 대해서는 중간과정이 많이 생략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고영근은 명성황후와 민씨 일가에 아첨하여 출세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다가 망명했지요. 그래서 결국 다시 자신의 몫을 찾기 위해 우범선을 암살했다고 설명됩니다. 즉,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암살을 진행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말년에는 고종의 능비를 자비로 건립하고 죽을때까지 능을 지켰다는 충정이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려주지 않아서 좀 의아했습니다.

이렇게 약간의 불만은 있지만 조선 말기 ~ 대한제국 초기까지의 당대 국제정세 및 조선의 상황, 정변이 속출하고 망명자도 많았던 격동의 시기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는 높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 정보 추가합니다. 초록불님의 글을 통하여 '명성황후'가 맞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전공자로서 역사책을 쓰는 사람이라면 이런 정보는 반영해서 책을 써 주는게 좋았을 것 같네요.

2019/12/28

도쿄전력 OL 살인사건 - 사노 신이치 / 류순미 : 별점 2.5점

도쿄전력 OL 살인사건 - 6점
사노 신이치 지음, 류순미 옮김/글항아리

1997년 3월 19일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 도쿄 전력 여직원 야스코 살인 사건의 배경과 재판 과정, 후일담까지를 거의 500여 페이지 분량으로 꼼꼼하게 기록한 논픽션입니다.
이 사건은 발생 당시 일본 사회에 굉장한 충격을 안겨 주었고, 이런저런 콘텐츠에서 인용되었던 유명 사건입니다. 대표적인 예는 "여자 친구"입니다. 작품 속 피해자인 마키코는 명문 대학 법대생으로 재학 중 이미 사법고시에 합격한 엘리트지만 전락하여 매춘을 반복했다는 설정인데, 이 사건과 거의 같습니다.
평소 관심 있던 차에 국내 출간이 되었길래 기쁜 마음으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크리스마스 직전에 완독했지만, 크리스마스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아 리뷰를 조금 늦췄습니다.

특징이라면 살인 사건 재판을 다루고 있지만, 진범이 누구냐를 탐구하는 법정 미스터리 속성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네팔인 불법 체류자 고빈다를 범인으로 모는 경찰과 검찰의 비상식적이고 비정한 태도와 주장, 그리고 그 주장을 뒤집으려는 화자인 취재 기자의 취재와 추리를 3년여에 걸친 1심 공판 과정과 후일담 속에 담아낸 것이 내용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검경 합동의 환장할 누명 씌우기는 볼 만합니다. 일단 검찰은 고빈다가 피해자 야스코와 만난 시간부터 제대로 증명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고빈다가 근무지인 식당에서 퇴근 후 10시 7분 열차를 타고 시부야역에 11시 20분에 도착했을 거라고 주장하지만, 취재 결과로는 10시 22분 열차를 탔다는 쪽이 타당하다고 증명되거든요. 설령 검찰의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객관적인 증거가 없는 건 마찬가지고요.

검찰이 유력한 증거라고 내민 범행 장소에서 발견된 피해자의 정액이 들어 있는 콘돔 역시 살인의 증거로 볼 수는 없습니다. 고빈다가 매춘을 하던 피해자의 손님으로 범행 장소에서 이전에 관계를 가졌던 건 사실이니까요. 게다가 현장에서는 피해자와 고빈다의 것이 아닌 음모 등 다른 증거도 발견되었고, 범인이 돈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잡아당기다 피해자의 숄더백에 묻힌 피부 조각 역시 고빈다의 것이 아니기도 했고요.
그 외 세세한 억지 주장에 대한 반론은 셀 수도 없으며, 고빈다의 무죄를 강하게 짐작하게 하는 증언과 증거가 마지막까지 드러나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이렇게 검찰과 경찰이 네팔인을 범인으로 몰려는 의도도 여러 가지 증거와 온갖 비인간적 행각의 폭로를 통해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체가 발견된 3월 19일 이후, 고빈다를 출입국 위반으로 취조할 때 이미 타액을 채취했으며, 고빈다는 물론 그의 룸메이트들에게도 고문과 강압 수사로 억지 자백을 받아낸 것입니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조작했는데도 결정적 증거를 제대로 선보이지 못하고 억지 주장만 되풀이한 검찰의 무능함도 돋보입니다.

또 고빈다가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는 장면에서 끝나지만, 에필로그에서 검찰 항소로 열린 2심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십수 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는 후일담은 기가 막힙니다. 1심 판사가 좌천되기까지 했다니, 어디까지 썩어 문드러진 건지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다행히 재심으로 누명을 벗고 무죄 선고를 받았다지만, 십수 년의 세월은 보상받기 어렵죠. 게다가 이 사건을 진두지휘했던 전 경시청 간부 히라다가 ‘무죄 판결은 사법부가 여론을 의식한 결과이며 고빈다가 진범’이라고 우기며 극우 단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는 내용에 이르러서는 정말이지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 않았습니다.

화자인 취재 기자 사노 신이치의 꼼꼼한 취재도 인상적입니다. 고빈다의 고향을 방문하여 가족과 추방된 당시 룸메이트들의 결정적 증언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이고, 재판에 출두한 거의 모든 증인을 후속 취재하여 피해자 야스코가 살해되기까지의 동선을 자세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각종 증거들도 상세한 보충 설명을 통해 독자의 이해를 돕습니다.

사노 신이치의 추리력이 빛나는 장면도 여러 군데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야스코의 지갑에서 발견된 이오카드의 존재에 대한 추리입니다. 검찰은 이 카드의 잔액으로 야스코가 특정 장소, 그러니까 정기권을 버리기 위한 장소로 이동했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엄청난 구두쇠였던 그녀가 돈을 써 가며 정기권을 버릴 이유는 없죠. 사노 신이치는 그래서 야스코가 이 이오카드를 주웠을 것으로 추리합니다. 비용이 남아 있다고 쓰여 있었지만 사실은 현금을 보태 표를 구입했기에 잔액이 0원이었고, 잔액을 몰랐던 야스코는 뒤의 잔액 기록만 보고 나중에 쓸 요량으로 챙겼다는 것입니다. 아주 합리적이에요.
야스코의 정기권을 아무런 접점이 없는 스가모 주택가에 버린 범인의 심리에 대한 변호인단의 추리도 볼 만합니다. 시체가 며칠 동안 발견되지 않자 범인의 의심이 커져 범행을 드러낼 요량으로 대낮 주택가에 정기권을 버렸다는 것인데, 이 역시 그럴듯했어요.

무엇보다도 가장 궁금했던, “왜 게이오 대학교를 나와 대기업 도쿄 전력의 간부로 근무하며 연봉이 천만 엔이 넘었던 야스코가 수년간 밑바닥에서 매춘을 했는지?”에 대한 나름의 답이 등장하는 것도 반가웠습니다. 속이 다 후련하더군요.
도화선은 그녀가 성스러운 존재로까지 여겼던 아버지가 사망한 것입니다. 그 뒤 공무원 시험에 떨어지고 도쿄 전력 내 라이벌과의 승부에서도 패배하며, 스스로 좌천당했다고 여긴 인사 발령을 받고 아버지가 ‘징벌적 초자아’에 빙의하여 그녀에게 벌을 내립니다. 아버지보다 못한 나를 못나게, 더럽게 만들어야 된다는 이유로요.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를 사회의 밑바닥, 구렁텅이로 떨어뜨리고 만 것입니다.
그 수준은 가히 참혹해서 2천 엔에도 여러 명의 외국인에게 길거리에서 몸을 팔고, 노상 방뇨 등을 서슴없이 저지를 정도였죠. 아, 무섭습니다. 확실히 현실이 픽션보다도 더 끔찍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렇게 자극적인 사건과 극적인 재판 과정을 다루고 있기에 아주 흥미로운 독서였습니다. 여러모로 별점 4점을 주었었던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와 비교됩니다. 핵심 용의자가 유죄를 선고받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무죄로 풀려난다는 재판 과정도 동일할 뿐 아니라, 잘못된 경찰과 검찰의 주장을 밝혀내기 위한 상세하면서도 방대한 취재가 이야기의 핵심이라는 점도 같으니까요.
그러나 이 책은 별점 4점을 주기는 어렵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저자인 사노 신이치가 이 사건을 사카구치 안고의 "타락론"이라든가 일본 사회의 어둠 등과 엮어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문학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네팔에서의 여정을 장황하게 소개하는 부분이라든가 야스코의 무덤을 찾은 감상 등이 그러한데, 전부 쓸데없을 뿐더러 그 양도 너무 많았어요. 그냥 사카구치 안고의 "타락론"과 연계하여 작금의 일본 사회를 드러내는 정도에 그쳤다면 좋았을 겁니다.

게다가 이러한 개인적 감상을 무리하게 사건 취재와 엮은 부분은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예요. 대표적인 게 사건 당일 야스코를 목격한 증인 중 한 명인 샌드위치맨 하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험난했던 인생사와 야스코 사건을 엮고, 이를 내면의 어둠 운운하면서 비극적으로 포장하는데 솔직히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하토는 16년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지만 아내의 사망 이후 스스로 술독에 빠져 인생이 망가진 것이라, 이를 딱히 내면의 어둠이나 운명의 장난으로 포장할 이유는 없죠.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는 저자 스스로 진범이 누구인지에 대해 여러 가지 취재를 통해 범인상을 그려내지만, 이 책에서는 그냥 뜨내기 손님이었을 거라는 일반적인 예상 외에 그 어떤 정보도 추가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현실만 취재해서 문제만 드러냈을 뿐, 그 이상의 진실은 담아내지 못했다는 이야기니까요. 같은 이유로 법정 미스터리를 방불케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기대했었는데, 그러한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는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배분도 적절하지 못합니다. 지금은 고빈다의 억울한 재판이 9, 야스코의 삶과 죽음이 1 정도의 비중인데, 이 책을 구입한 독자라면 야스코의 삶에 대한 관심도 높은 건 당연합니다. 왜 그녀가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의사 한 명과의 인터뷰가 전부라 취재의 양과 깊이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의사의 견해도 증명된 것은 아니고요.
또 고빈다 재판에서 사건 당일 야스코와 고빈다의 행적도 너무 많이 반복됩니다. 이런 부분만 정리했더라도 분량은 대폭 줄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많고 내용도 흥미롭지만, 말씀드린 단점들 때문에 감점합니다. 지금보다 군살을 덜어내고 더 논픽션답게 썼더라면 별점 3점 이상은 충분했을 겁니다. "오컴의 면도날"이 떠오르는 그런 책이네요.

2014/02/20

11인이 있다! - 하기오 모토 / 서현아 : 별점 2.5점

11인이 있다! - 6점
하기오 모토 지음, 서현아 옮김/세미콜론

애니메이션으로 미리 접했었던 작품. 생각해보니 하기오 모토 작품을 책으로 읽는 것도 처음이네요. 유명세에 비하면 읽는 것이 너무 늦은 것 같기도 한데, 뭐 국내 소개가 늦은 탓이 크겠죠? 여튼 표제작 "11인이 있다!"와 "동쪽의 지평선 서쪽의 영원"이라는 두 편의 중편과 함께 권말 보너스 만화 수준의 "스페이스 스트리트"라는 짤막한 개그 꽁트가 실려있더군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어요. 오래된 걸작을 읽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만, 시간이 흐른 탓에 명성만큼의 재미나 가치를 느끼기는 어려운건 모든 고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일이겠지요. 가끔, 정말이지 아주 가끔 "시대를 초월한 명작"이 있기는 한데, 이 작품은 그럴 정도의 명작은 아닙니다.

아울러 이 작품을 좋은 번역과 디자인으로 국내에 소개하여 주신 출판사 세미콜론에게는 진심으로 감사드리나 가격이 너무 쎄요. 정가가 거의 만 원이라니! 할인된 금액으로 구입하긴 했지만 이른바 "가성비" 측면에서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래도 한 번쯤 볼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한 만큼 아직 읽지 못하신 장르문학(만화) 팬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뿐이지 나름 시대를 앞서간 반짝이는 부분은 확실히 있으니까요. 가격 부담만 없으시다면...

간단한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1인이 있다!"

동명 애니메이션의 원작으로, 우주대학 입학 시험을 그린 작품입니다.

10명의 수험생이 시험을 치루는 우주선에 11명의 수험생이 타고 있다는 기발한 설정 하나만큼은 최고입니다. 고립된 단체 속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설정은 흔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한 명이 수상하다!"라고 알려주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작품은 보기 드무니까요. "우주해적 코브라"의 한 에피소드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소위인지 중위인지가 두 명이라 둘 중의 한 명이 가짜다! 라는 이야기였는데...
어쨌거나 이 설정 하나 덕분에 우주선에 닥치는 갖가지 위기에서 서로 단합하기 어렵고 누가 11번째인지를 찾기 위한 노력이 수반되기에 단순할 수 있는 입학시험이 흥미롭게 흘러가게 됩니다.

또 천편일률적이기는 해도 몇몇 캐릭터는 아주 괜찮았어요. 특히 여성이 될지 남성이 될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설정의 히로인 프롤의 독특함이 기억에 남네요. 여러 가지 면에서 시대를 앞서간 히로인입니다. "남자"가 될 것을 주장하는 히로인이라니!

허나 시대를 거스르기는 힘들었던 것일까요? 솔직히 이야기의 완성도는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제일 큰 문제점은 초반 테스트에서 꽤나 강력해 보였던 타다의 초능력이 왜 먹히지 않았는지에 대해 설명되지 않는 점입니다. 여기서 11번째는 충분히 밝혀졌어야 하지 않나요?
또 흥미로운 전개에 비해 11번째가 결국 자백(?)에 의해 밝혀진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었어요. 설득력은 있지만 시시했거든요. 뭔가 단서라도 던져줘서 독자에게 함께 추리하게 만들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말이죠.

결론적으로 흥미로운 설정에 비하면 전개는 부족하고 결말은 시시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애니메이션은 굉장히 재미있게 감상했던 기억이 나는데 다시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이러한 단점이 과연 시대가 흐른 탓인지, 아니면 애니메이션은 각색을 잘 했었던 것인지 궁금하네요.

"동쪽의 지평선 서쪽의 영원"

"11인이 있다!"의 후일담으로, 우주대학에 합격하여 훈련받는 타다 - 프롤 커플이 마야왕 바세스카의 초대에 응해 마야에 방문하나 급진파 - 전통파의 충돌로 전쟁 목전의 상황에 처한다는 이야기로 전형적인 SF 판타지 군웅물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일 캐릭터를 등장시켜 약간 하드한 SF에서 판타지로 이어지는 구조는 초인 로크의 "신세계전대" - "빛의 검" 구성과 유사하네요.

그러나 이 작품은 "11인이 있다!"보다도 더 문제가 많습니다. 행성 마야의 위기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악당들의 음모도 유치하기 그지없으며,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과 그 와중에 낀 타다와 프롤의 행동 역시 별다른 긴장감을 느끼기 어려웠던 탓입니다.
또 타다와 프롤이 대체 이 사건에서 무슨 역할을 담당하는지도 애매하고, 입학 동기인 4세의 죽음이 그려지기는 하지만 다른 동기들의 활약은 거의 전무하다는 점에서 후일담치고는 부족한 점도 많아요. 전혀 별개의 이야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니까요.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스페이스 스트리트"는 정말이지 권말 보너스 만화 수준이라 별점을 주기는 애매합니다만, 후일담 성격으로는 "동쪽의 지평선 서쪽의 영원"보다는 훨씬 좋았습니다. 재미도 있고요.

2019/01/26

위작의 기술 - 노아 차니 / 오숙은 : 별점 4점

위작의 기술 - 8점
노아 차니 지음, 오숙은 옮김/학고재

역사적인 위조와 사기에 대한 논픽션입니다. 유명한 사건 위주로 나열했던 다른 책들과의 차이점은 위작을 만들고 위조하는 이유를 몇 가지 - 자신이 천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위조를 다룬 "천재성", 작품을 감정하는 사람들의 자존심 때문에 사건이 벌어진 에피소드들이 수록된 "자존심", 미술계와 전문가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위조가 시작된 이야기들을 다룬 "복수", 위조 경력이 밝혀진 후 오히려 부와 명성을 누린 사람들을 다룬 "명성", 순수하게 범죄 목적이었던 사건들인 "범죄", 여러 기회주의자들에게 이용된 딱한 위조꾼이 등장하는 "기회주의", 가장 강력한 동기인 돈에 얽힌 사건들인 "돈", 단순히 미술계가 아닌 정말로 큰 권력에 대한 이야기인 "권력" 순 - 로 분류하여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고요.

당연히 위작을 만드는 방법, 출처를 위조하는 방법 등 위작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도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갤러리 페이크"를 읽었다면 친숙한 여러가지 방법, 기술이 등장하는데 실제로 그림을 그린다면 상당히 유용할 정보도 많아요. 과거 사용된 카본블랙 잉크는 숯검정에 기름이나 풀, 고무질같은 고착제를 섞어 간단히 만들 수 있다던가, 유명한 위조꾼 헵번이 추천하는 거장의 작품을 베끼기 위한 이상적인 '위조꾼의 팔레트(연백, 옐로 오커, 크롬 옐로, 로 시에나, 레드 오커, 번트 시에나, 버밀리언, 로 엄버, 번트 엄버, 테르 베르데, 순수 울트라 마린, 아이보리 블랙의 12가지)' 같은게 그러합니다.

재미있는 실제 사건도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바스키아가 죽기 전 친하게 지내던 마약상 집 철문에 그림을 그리고 얼마 후 죽었는데, 마약상이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고 인증받으려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스키아 유산 관리 위원회에서는 진품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약물 과다 복용으로 숨진 바스키아의 죽음에 한 몫 했을 마약상에게 큰 돈을 쥐어주고 싶지 않은 마음 탓이 컸을거라고 하네요. 그러나 저 개인적으로는 죽은 바스키아를 위해서는 공식 작품으로 인정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한 작품이라도 더 알려지는게 작가에게는 좋은 일일테니까요.
미술계 이외의 유명한 위조, 위작에 대한 소개도 충실해서 하워드 휴즈 자서전 위조나 가짜 히틀러 일기나 토리노의 성 수의 등 다양한 위작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중 콜럼버스 전 바이킹이 북아메리카에 도달했다는 증거인 "빈란트 지도"가 위조임이 판명되었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다만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위조하여 괴링에게 팔아넘긴 반 메헤렌 이야기 같이 다른 유사한 책들에 등장했던 유명 범죄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하지만 반 메헤렌이 재판에 회부된 후 오히려 괴링을 속였다는걸 실제로 새로운 그림을 그려 증명했으며, 덕분에 '나치 협력자'에서 '괴링에게 사기 친 남자'라는 평판을 얻어 대중의 영웅이 되었다던가, 괴링이 처형 직전에 이 사실을 알게되었다는 등의 후일담이 실려있는 식으로 디테일이 압도적이라는 차이는 분명합니다. 특히나 사건들에 관련된 도판은 정말이지 다른 유사 도서와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강력한 장점이고요.

이렇게 재미와 현학적인 지적 욕구 모두를 만족시키는 좋은 책입니다. 동서고금의 유명 위작, 위조 사건에 대해 통사적으로 훝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유명 위작가들과 위조품에 대한 일람이 가능할 뿐 아니라 사실로 밝혀진 이야기는 후일담까지 충실하다는 점에서 위작, 위조에 대해 관심있으신 사람이라면 놓칠 수 없는 책이기도 하고요. 번역과 도판, 만들어진 책의 완성도도 최고 수준이기에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약간 감점한 이유는 앞서 말씀드렸던대로 타 도서에서 이미 소개되었던 이야기가 제법 있고, 분류도 아주 조금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어서인데(자존심이고 뭐고 솔직히 돈이 가장 중요한 목적일 테니까요) 책의 가치를 훼손할 정도는 아닙니다.

2010/08/21

정말이야? 1,2 - 안드레아스 슈뢰더 / 이영민 : 별점 3점

정말이야? - 6점
안드레아스 슈뢰더 지음, 이영민 옮김/재승출판

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역사속 사기꾼들과 사기에 대해 다루고 있는 논픽션입니다. 총 2권으로 1권에는 17개, 2권에는 11개의 목차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기 중 인상적이었던건 아래와 같습니다.

"모나리자를 훔쳐낸 뒤 다수의 위작을 거액으로 수집가들에게 팔아넘긴 '모나리자 절도사건"
진품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작을 여러개 만들어 비싼 값에 팔기 위해 진품을 훔쳐낸다는 발상이 기발했어요.

"역사상 최대의 은행 절도 사건인 프랑스의 스파갸리 사건"
1억달러 이상의 금과 지폐, 귀중품 등을 지하 금고실에서 대대적인 작전을 통해 훔쳐낸다는 스케일도 크죠. 그러나 더욱더 인상적인 것인 의외로 금방 체포된 주범 스파갸리가 판사 집무실에서 전직 낙하산병다운 몸놀림으로 순식간에 탈출한 뒤 사라져 버렸다라는 후일담이었습니다.

"100만달러의 현금을 탈취한 D.B 쿠퍼 사건"
"프리즌 브레이크"로도 친숙한 D.B 쿠퍼 사건입니다. 미국에서 거의 최초로 비행기 폭파 협박으로 100만달러의 현금을 갈취한 뒤 낙하산으로 도망간 사건이죠. "프리즌 브레이크"에서는 다시 감옥에 수감된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행복하게 살다가 80년대 후반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하는군요. 어쨌건 담대한 싸나이의 '인생은 한방' 철학에 충실한 모험담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돈을 마음껏 농락한 여상 마르트 하나우 사건"
1920년대에 이미 매체를 통한 주가조작이라는 첨단 사기방법을 보여준 여성 마르트 하나우가 등장합니다. 아예 공식적으로 언론사를 운영하면서 전국 규모의 매체조작으로 주가를 상승시키는 대담함이 돋보이네요.

"미국의 황제 노턴 1세"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며 자신을 황제라 칭했던 정신병자 노턴 1세의 이야기입니다. 자칭 황제인 정신병자가 정말로 황제로 대접받으며 근사한 말년을 보냈다는 내용인데 이러한 사기 정도는 유머와 여유로 받아주던 19세기 후반의 샌프란시스코가 부럽네요. 혹 여행갈 일이 있다면 책에서 언급한 노턴 1세의 자취를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셰라톤 팔레스 호텔의 식당이름이 황제 노턴실임 / 엠페러 항에는 노턴 1세의 얼굴이 세겨짐 / 피어39 쇼핑센터 앞의 황제 마네킹 등)

"최고의 위작가 엘미르 드 호리"
1920년대 유명 후기 인상파 화가 페르낭 레제의 미술학도로 공부하며 후기 인상파에 대해 모든 것을 꿰뚫게 된 엘미르 드 호리가 막대한 위작을 팔아넘긴 사기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잘 나가다가 결국 체포되어 자살했지만, 사기당했다는 사람들도 그의 작품을 좋아하고 외려 그의 위작임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후일담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니 위작가로서의 능력이 정말 뛰어났던 것 같네요.

"군대를 손아귀에 넣다"
1차대전 당시 프러시아와 2차대전때의 오스트리아에서 각각 군복을 입고 지위를 사칭하여 주변을 농락한 이야기입니다. 군국주의 파시스트가 판치던 분위기에서 아주 효과적인 사기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아무래도 의도적이라기 보다는 풍자의 의미가 컸던 탓인지 두 사건 모두 주인공들이 나름 행복한 결말을 맞았다는게 이채롭기도 하군요.

"인류에게 에너지를!"
에테르 엔진을 개발한 미국 발명가 존 킬리, 물에다가 자신이 개발한 약간의 약품을 첨가하면 휘발유를 대체할 수 있다는 엔리히 이야기 2편이 등장합니다. 존 킬리 사건은 너무나 전형적인 장치 설비 사기라서 좀 허탈하기도 하네요. 엔리히 이야기는 결국 그 물질이 뭐였을까?에 대한 답은 없이 끝나는데 뒷날 조사 결과로는 '에탄올'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독일의 원격조종 강도 다고베르트 사건"
90년대 독일을 휩쓸었던 지능범 다고베르트 사건입니다. 직접 개발한 원격 조종 장치 박스안에 현금을 넣고 기차에 부착하라고 지시한 뒤 원격으로 기차에서 떨어지게 조작한다던가, 하수구 뚜껑 위에 직접 만든 모래상자를 놓고 밑에서 현금을 빼낸다던가 하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속출하는 재미있는 이야기였어요. 하수구 뚜껑 위의 장치는 영화 "스피드"가 연상되기도 하더군요. 어쨌건 오랜 기간동안 경찰을 농락하다가 결국 체포되기는 했지만 독일에서 굉장한 화제를 모으고 영화 이야기도 여럿 나왔다고 하니 다고베르트 역시 앞날은 걱정없겠네요. 영화를 찾아보고 싶어집니다.

이외의 사건들도 재미있고 무엇보다도 다른 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자료들이라 읽으면서 아주 만족스러웠어요. 딱 하나 아쉬운 점은 왜 2권으로 분책했냐는 거죠. 조금 두꺼워지더라도 활자 크기를 조정해서 1권으로 나왔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어쨌건 별점은 3점입니다. "쿠로사기"와 같은 사기 관련 컨텐츠를 좋아하시는 분들께 적극 추천합니다. 사기의 원점을 둘러보는 의미에서 볼 만 하니까요.

2013/01/15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 - 이충렬 : 별점 3.5점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 - 8점
이충렬 지음/김영사

구한말(1800년대 후반)부터 6.25 직후(1950년대)까지 시기에 그려진 한국 근현대 관련 그림을 소개하면서, 그림에 얽힌 역사적 사실과 에피소드를 풀어놓는 식으로 구성된 근현대 미시사 서적.

개인적으로는 풍경화로 설명해 주는 당시 시대상이나 문물 이야기보다는, 인물화 이야기 쪽이 더 흥미로웠습니다. 예를 들자면,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민씨가의 규수" 그림을 통해 그림의 주인공 민용아가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떠날 때까지 함께 공부한 옹주의 소꿉친구라는 사실을 소개하면서, 덕혜옹주의 학창 시절과 기구한 말년을 살짝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식입니다.

모두 27개의 주제 중 특기할 만한 것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누가 마지막 황후의 눈물을 닦아줄 것인가?"

그림 : 엘리자베스 키스의 "궁중 예복을 입은 공주"

이 그림의 주인공은 유억겸(유길준의 아들)의 부인인 윤희섭일 것이라는 추정. 황후의 동생이기에 영문 제목에 Princess라고 명기하였을 것이라고 하는데, 일리가 있어 보이네요. 그리고 윤희섭의 언니인 순정효황후와 그녀의 아버지인 조선 제일의 빚쟁이 '채무왕' 윤택영의 파란만장한 일생사, 순정효황후의 마지막 가는 길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데, 에피소드들 하나하나가 무척 재미있고 새로웠습니다. 순정효황후가 한국전쟁 때 피난을 가지 못해 인민군에게 둘러싸였지만 "내가 조선의 국모"라고 호통을 쳤다는 것 등은 처음 알게 된 내용이었어요. (인민군 입장에서는 처단 대상 1순위이기에 신뢰성은 떨어지지만...)

"조선의 도공이여, 고려청자의 비색을 재현하라"

그림 : 폴 자쿨레의 "도공"

내용은 식민지 시기 일본에서 청자가 유행한 뒤, 조선시대 명맥이 끊겼던 고려청자를 재현하기 위해 홀로 노력한 해강 유근형의 이야기입니다. 장인의 집념이 느껴지는 이야기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모던걸 변동림과 천재 시인 이상의 뜨거운 사랑"

그림 :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

구본웅이 그린 아주 유명한 이상의 초상화와 함께, 구본웅의 배다른 이모 변동림과 이상의 뜨거운 사랑과 결혼, 그리고 이상 사후 변동림이 김환기와 다시 사랑에 빠져 개명까지 불사하며(김향안으로 바꿨다고 하네요) 결혼에 골인했다는 후일담을 그리고 있습니다. 변동림에게 이런 사연이 있는지 처음 알았네요. 지금 드라마로 만들어도 그럴듯한 이야기가 될 것 같은, 정말로 뜨거운 사랑 이야기 아닐까요?

"근대의 불치병 결핵과 크리스마스 실 운동"

그림 : 운보 김기창과 엘리자베스 키스의 크리스마스 실 도안들

크리스마스 실의 도안과 함께 우리나라 결핵 박멸을 위한 셔우드 홀의 노력이 펼쳐집니다. 무엇보다도 1940년 도안이 일본의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검열에 걸려 수정했다는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6.25 동란의 참상과 시대상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인도교가 끊긴 뒤 피난을 가지 못한 시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역을 하였는데, 수복 이후 부역 정도에 따라 처단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일화(피난 가지 말라는 정부의 말을 듣지 않은 시민은 살아남고, 정부의 말을 들은 시민은 처단당한다?)라던가, 벽초 홍명희, 무희 최승희의 일생과 월북 이후 후일담을 관련된 그림과 함께 알려주는 부분 등이 좋았습니다. 그림을 그린 화가들에 대한 깨알 같은 소개도 마음에 들었고요.

각종 사료들(신문기사 등)도 디테일하게 실려 있어서 자료적 가치도 아주 높고, 도판의 질도 우수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3.5점입니다.

참고로, 4점에서 0.5점 감점한 이유는 16,000원이라는 가격 탓입니다. 그림 때문에라도 풀컬러 인쇄가 필요했을 테고, 덕분에 가격이 비싸진 건 당연하지만, 너무 비싸긴 비싸네요. 요즈음은 정말 책 한 권 선뜻 사기도 겁나는 세상입니다. 아, 춥다...

2014/04/16

라이징 임팩트 1~17 - 스즈키 나카바 : 별점 1.5점

라이징 임팩트 17 - 4점
스즈키 나카바 지음, 정선희 옮김/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완결된지 10년도 더 넘게 지났지만, 최근에 골프에 관심을 둔 친구가 많아져서 이런 저런 작품을 읽다가 만나게 된 작품입니다.

그런데 골프 만화는 아닙니다. 전형적인 왕도형 배틀 판타지 만화입니다. 초등학생이 400야드가 넘는 드라이버샷을 날리고, 수십미터짜리 버디 퍼팅과 칩인 어프로치를 당연하게 성공시키고, "기프트"라고도 불리우는 각자의 필살기("라이징 임팩트", "샤이닝 로드"…)를 가지고 있고, 주인공이 아무리봐도 초등학생 같지 않은 라이벌들과 싸워 나가고, 그 라이벌들과 한팀이 된 이후 다른 라이벌 팀과 싸워 나가고, 그 라이벌 팀과의 싸움이 끝난 뒤 진정한 라이벌 팀이 나타나고… 하는 식의 전형적인 배틀 판타지 액션 소년 만화의 공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만화에서 골프는 단지 소재일 뿐입니다. 골프 시합은 성투사들과의 전투, 라이징 임팩트는 페가수스 유성권으로 바꿔도 이야기는 가능하겠지요.

그래도 배틀 판타지로는 왕도형이라 기본적인 재미는 갖추고 있습니다. "점프"에서 단행본 17권 분량까지 연재되었다는게 증거이고요. 다양한 홀의 구성과 환경에 맞춰 서로의 필살기를 펼쳐나가는 것이 꽤 그럴듯한 덕분입니다. 몇몇 장면에서는 두뇌 싸움을 보는 맛도 약간 느껴지고요. 또 천연계 주인공 가웨인 캐릭터는 이런 류의 만화에서는 보기 드문 캐릭터라는 점에서 차별화됩니다. 다른 캐릭터들은 별다른 새로움을 보여주지 못했지만요.

그러나 갈수록 너무 뻔해지는게 심상치 않았는데, 카멜롯과 그렐 킹덤과의 최종 결전에서 "자 이제 승부를 시작해볼까!"라는 말과 함께 바로 10년 후로 넘어가 후일담이 이어지는 어처구니없는 결말은 좀 황당했습니다. 편집부의 압력 ("당장 집어쳐!")이 느껴지더군요. 그나마 후일담으로 거의 모든 등장 인물들에 대해서 정리해준게 다행이에요.

여튼 기대와는 전혀 달랐던 전형적인 소년 만화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중년에 접어든 제가 읽기에는 너무 유치했어요. 킬링타임용으로 오래 기억될 작품은 아니네요.

덧붙이자면 주인공은 가웨인에 라이벌은 란슬롯, 끝판왕은 트리스탄, 다니는 학교는 카멜롯인 등 아더왕 전설에서 모티브를 따 오기는 했으나 그냥 그뿐입니다. 제대로 하려면 최소한 끝판왕은 모드레드에 모르가나 정도는 나와줬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고요. 일본이 무대인 만화에 왜 억지로 이런 이름을 가져다 붙였는지 작가에게 물어보고 싶어집니다.

2026/01/16

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대하여 - 세스지 / 전선영 : 별점 2점

영화까지 발표되었던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의 작가 세스지의 신작입니다.

전작은 여러 형식의 기록들을 이어붙인 모큐멘터리 형식으로 괴이 현상의 실감을 높였는데, 이번에는 전형적인 소설의 형식을 따릅니다. 때문에 형식은 유사하지만 별로 실감나지는 않았어요. 여러 기록들도 작중에서는 모두 심령 현상이 일어난 해당 장소와 관련된 괴담을 '날조'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기도 하고요.

괴이한 심령 현상들도 복수라고 볼 수 있는, 일종의 '윤회'라는 식으로 풀어가는데 깔끔한 느낌을 주지는 못합니다. 등장인물들의 개별 서사도 이야기에 충분히 녹아들지 않고, 주어진 떡밥들 역시 모두 깔끔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여러모로 작가의 욕심이 지나쳐 보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섬찟한 부분도 있지만, 여러모로 전작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상세한 괴담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태 오두막

유튜버 이케다와 팬북을 출간을 진행 중이던 고바야시는 재생 횟수가 많았던 동영상에 그럴싸한 괴담을 날조해서 꾸며 넣기로 했다. 출판사가 혹하게 만들이 위해서였다. 첫 번째 대상은 '변태 오두막' 촬영 영상으로, 산 속의 이른바 '변태 오두막'은 누군가 도촬한 듯한 사진이 널려있는 기묘한 곳이었다.
날조에도 리얼리티가 필요하다는 고바야시의 주장으로, 이케다는 '변태 오두막'처럼 '인형'을 버린 폐가를 취재했던 유튜버와의 인터뷰를, 고바야시는 '변태 오두막' 속에서 발견된 사진에 대한 추가 취재를 진행하는데..

괴담 내용은 상당히 흥미진진합니다. 변태 오두막은 누군가를 저주하려는 사람들이 저주의 대상 사진을 집어 넣는 곳이었습니다. 유키에는 불륜 상대의 아내 료코가 이혼해 주지 않아서 그녀를 저주하려고 오두막에 사진을 집어 넣었고, 이후 료코는 자살했습니다. 자살 후 유키에의 딸 유카에게 료코가 윤회하여 빙의해 버렸기 때문이지요. 료코 사진이 '정화' 의식 때에는 부풀어 올라 있었다는 묘사는 확실히 섬찟했고요.

그러나 등장인물들이 찾아낸 정보라고 설명되기 때문에, 현실감이 부족해서 아쉽습니다. 인터뷰, 신문 기사 등을 통해 드러내는건 전작과 비슷했지만 전작보다는 더 소설 느낌이 강했던 탓입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진상을 유키에의 독백으로 마무리한건 문제입니다. 유카가 마지막에 말한건 맥락 상 "용서 못해"일텐데, 이를 표현하지 않은 이유도 모르겠네요. 이 진상은 맥락적으로도 이상해요. 변태 오두막의 저주가 통해 료코가 죽었다면, 료코의 영혼 역시 저주로 죽는게 맞지 않을까요?

유키에의 독백말고 그냥 그녀가 딸을 방치하여 죽였고, 이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후일담 기사 정도로 마무리하는게 좋았을 겁니다.

천국 병원

유령을 볼 수 있다는 괴담 작가 호조가 '천국 병원'에 대한 괴담을 찾아냈다. 폐암으로 연명 치료 중이던 할머니가 그만 편해지기를 바랬다는 한 소설가의 고교 시절 추억담으로, 이후 소설가는 자살했다...

앞부분 소설가의 회고는 괴담이라고 보기 어려운 담담한 이야기로 실망스럽지만, 뒤이은 청년들이 병원에서 벌인 담력 시험 체험기는 오싹합니다. 천국 병원의 막혀있던 병동에서 '괴이'를 마주쳤다가 쫓기는 과정의 서스펜스, 그리고 일행을 쫓던 머리가 커지던 괴이가 들고 있던 친구 휴대전화 번호로 아직도 전화가 걸려 온다는 후일담까지 완벽했던 덕분입니다.
마지막에 소설가의 회고를 틀어서 진상, 즉 소설가는 할머니가 미워했던 양녀였고, 소설가는 사신과 거래하여 할머니를 죽게 만들었다는 진상도 재미있었습니다.

아울러 병원이 '제로 자기장'에 위치해서 괴현상이 많이 발생한다는 설명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합리적이거나 설득력이 높지는 않지만, 단순 괴담에 그치지 않으려는 노력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니까요.

그러나 소설가가 할머니를 저주로 죽게 만든게 그리 나쁜 짓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건 문제입니다. 할머니는 나쁜 사람으로 그려진 탓에, 그냥 보면 정의구현으로 보이거든요. 그래서 소설가가 저주의 역풍을 맞은 듯한 현실은 별로 와 닿지 않네요.

어리석은 세 사람

등장인물들의 과거 - 이케다는 과거에 호감을 품었던 유코를 저주로 죽게 만들어서 유령을 쫓는 유튜버를 하게 되었다, 호조가 유령을 볼 수 있어서 중학교 때 왕따를 당하다가 교생을 자살하게 만들었다 등 -가 펼쳐집니다. 책 전체로 보면 징검다리 역할이라고 할 수 있어요. 뒤에 이 과거가 중요하게 작용하게 되거든요.

하지만 그냥 이 부분만 놓고 보면 딱히 점수를 줄 부분이 없는, 지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윤회 러브 호텔

러브 호텔에 그려진 괴상한 벽화와 여러 소문에 대해 논의하는게 대부분인데, 대체로 굉장히 합리적으로 설명하며 마무리하는게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뒤에 이어지는, 스토커 피해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죽은 여성 이야기는 어떻게 이어지는건지 잘 모르겠네요. 이 여성은 순수한 피해자에 불과한데, 스스로 스토커 게이이치에게 뭔가 잘못했다고 여기는 묘사는 불쾌하기까지 했습니다. 뒤로 가면 갈 수록 이야기가 이상해지는 느낌이에요.

불확실한 괴이

앞서 날조를 위해 만들었던 이야기들 모두 고바야시의 음모였다는게 드러납니다. 유령을 믿지 않는 이케다가 유령에 홀리게 만드는게 목적이었지요. 이케다에게 뭔가 괴이 현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책을 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세사람"처럼 각자의 사정과 과거가 펼쳐지는 징검다리 이야기입니다.

한낱 패밀리 레스토랑

이케다에게 달력 일정에 유코의 기일이 기입되었고, 기분 나쁜 장난 전화가 걸려왔고, 움직일리 없는 유튜브 동영상 속에 괴이한 여성의 움직임이 나타났고, 자주 보던 버튜버의 화면이 기이하게 바뀌는 등의 괴이 현상이 일어났다...

이케다의 괴이 체험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앞서 선택되었던 괴담들 모두가 일종의 '윤회'를 다룬, 괴이가 다시 태어난다는 괴담이었다는게 설명되기 때문에, 책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부분이지요.

한낱 옛날 이야기

세 명 모두 누군가를 죽였었다, 그리고 죽였던 여자들이 유령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얻었는가?

유령에 홀렸던 이케다가 신관인 호조 아버지의 도움으로 벗어나고, 책은 출간이 결정된다는 결말입니다. 앞서 그들이 각자 보았던 괴이들은 각자가 죽였던 피해자들이었다는게 밝혀지고요.

윤회에 관련된 로쿠부 살해 괴담을 이방인의 피가 필요했다로 연결하는 아이디어만큼은 참신했는데 회수가 안 된 떡밥이 너무 많고 - 이케다는 유코를 죽이지 않았는데 무엇에 홀린건가? 호조의 교생 선생은 어떻게 죽었는가? 윤회는 모든 저주의 대상에 해당하는가? 등 -, 등장인물들의 일이 모두 잘 풀린다는 결말은 허무합니다. 최소한 고바야시는 이케다를 괴이에 홀리게 만들려는 악의가 있었던게 분명하니, 이 작자만큼은 벌을 받으면 했는데 말이지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2023/07/19

마션 (2015) - 리들리 스콧 : 별점 4점


소설을 읽고 탄력받아 영화까지 감상했습니다. 마침 디즈니 플러스에 있더라고요. 

일부 디테일에 있어서 차이가 있으며, 와트니에게 닥친 위기 중 몇가지 - 와트니 실수로 패스파인더가 망가져서 NASA와의 통신이 불가능하게 된 것, 마지막 여행 중 로버가 뒤집혀 버렸던 것 등 - 가 생략되어 있기는 하지만 내용은 원작을 거의 그대로 따라갑니다. 아무래도 영화는 상영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탓이겠지요. 
 
반대로 영화에서 추가된 부분도 있는데,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와트니가 우주 공간에서 슈트에 구멍을 뚫어서 대장에게로 이동하는 클라이막스, 두 번째는 구조 이후의 에필로그 형식 후일담입니다.
이 두 가지는 영화 쪽이 훨씬 좋았어요. 클라이막스는 와트니가 불확실하지만 대담한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유머러스하게 주장하며 - 아이언맨처럼 날 수 있잖아요! - 실행에 옮기는건 그의 캐릭터에 딱 들어맞을 뿐더러, 영화라는 매체에도 잘 어울리는 좋은 장면이었습니다. 단순히 '우주선이 이동하고, 와트니를 잡아서 구조한다' 정도였다면 심심했을테니까요.
그리고 후일담은 없어서 불만이라고 소설 리뷰에 적었었는데, 영화에서라도 볼 수 있어서 아주 좋았습니다. 전 지구적(?) 유명인사가 된 와트니가 NASA 교관이 되어 특유의 언변으로 학생들을 사로잡는 마지막 장면은 짤막하지만 만족스러웠어요. 그 외의 다른 등장인물들도 빠짐없이 챙겨주고 있고요.

마크 와트니의 화성에서의 생존을 위한 분투가 너무 유머러스하고 재미있게 그려진 나머지, 위기감을 느끼기 힘들었다는 단점은 있지만 - 수백일을 감자만 먹고 지냈으며, 그마저도 부족했던 와트니 묘사를 위해 맷 데이먼이 감량이라도 좀 했어야 하지 않을까... - 사소합니다.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재미있게 감상했어요. 별점은 4점입니다.

2012/03/12

워 사이언티스트 - 토머스.J.크로웰 / 이경아 : 별점 3점

워 사이언티스트 - 6점
토머스 J. 크로웰 지음, 이경아 옮김/플래닛미디어

역사 속에 길이 남은 전쟁 무기를 개발한 과학자들을 다룬 미시사 서적. 기원전부터 현대에 걸친 기간 동안 전쟁의 양상에 큰 변화를 가져온 25개의 무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 하늘이 내린 무기 - 칼리니쿠스의 액화
  • 투석기, 갈고랑쇠, 살인 광선 - 아르키메데스의 기이한 전쟁 무기
  • 최초의 생물학 무기 - 한니발의 독사 항아리
  • 하늘을 날며 춤추는 화약 - 위백양의 진천뢰
  • 신에 맞선 행위 - 제갈량이 개량한 연발 석궁
  • 르네상스 시대의 만물 수선공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기관총
  • 결집된 화력 - 마랭 르 부르주아의 부싯돌식 방아쇠
  • 천재의 노력 - 데이비드 부시넬의 잠수함
  • 매우 부도덕한 행위 - 윌리엄 콩그리브의 로켓
  • 안전하고 영양 많은 - 니콜라 아페르의 통조림 식품
  • 권총 - 새뮤얼 콜트와 서부를 이긴 리볼버
  • 죽음의 상인 - 알프레드 노벨과 다이너마이트
  • 군을 무용지물로 만들다 - 리처드 개틀링의 기관총
  • 느리지만 효과적인 - 로버트 화이트헤드의 어뢰
  • 석류를 닮은 - 수류탄을 완성한 윌리엄 밀스
  • 화학을 악용하다 - 프리츠 하버의 독가스
  • 불타는 관 - 라이트 형제가 만든 최초의 군용기
  • 캐터필러 이동 요새 - 랜슬롯 드 몰의 탱크
  • 전염병 지역 - 이시이 시로와 세균전 과학자들
  • 세계의 파괴자 -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
  • 구조 임무 - 최초의 헬리콥터를 만든 이고르 시코르스키
  • 반향을 기다리며 - 레이더를 발명한 로버트 왓슨와트
  • 달을 향하여 - 베르너 폰 브라운의 V-2 로켓
  • 가장 도덕적인 무기 - 새뮤얼 코언의 중성자탄
  • 총알 잡기 - 스테파니 크월렉의 방탄 섬유

이런 류의 책이라면 피해 갈 수 없는, 워낙 잘 알려진 무기들 - 예컨대 다빈치의 무기들이나 다이너마이트, 독가스, 원자폭탄 등 - 도 포함되어 있어서 신선함이 떨어진다는 약점은 존재하나, 무기보다는 발명자를 중심으로 소개해 주면서 다른 유사 도서와 차별화에 성공하고 있습니다. 발명자의 신상과 개인사, 말년과 후일담까지 소개해주는 꼼꼼함도 좋았어요.

25개의 병기 중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것은 "칼리니쿠스의 액화", 즉 그리스의 불에 대한 이야기와 새뮤얼 콜트의 리볼버, 로버트 화이트헤드의 어뢰, 윌리엄 밀스의 수류탄이었습니다.

그리스의 불은 다른 문서 등을 통해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기 때문인데, 비밀무기와 그 제조법이라는 게 정말로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이런 비밀은 보통 한 세기를 넘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그래도 딱 한 가지, 공기와 접하면 자연발화하는 물건은 아니었을 테니(그렇다면 과학을 넘어 마법의 영역이겠죠?) 따로 불을 붙였을 텐데, 그렇다면 공격하는 쪽도 리스크가 있는 만큼 방법이 어떤 것이었을지 궁금합니다. "호기심 해결사"에서 해결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네요.

그리고 새뮤얼 콜트는 이른바 "육혈포" 발명 뿐 아니라 사업가적인 수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뢰의 발명자 로버트 화이트헤드가 특허권을 팔지 않고 발명의 비밀을 독점하였으며, 그의 발명을 모방한 경쟁자들은 여지없이 실패하였다는 부분도 재미있었고요. 셜록 홈즈 시리즈의 비밀 설계도 이야기가 허언이 아니었구나 싶더라고요. 그의 손녀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잠수함 함장 폰 트라프와 결혼하여 일곱 아이를 남겨두고 사망한 뒤, 폰 트라프가 견습 수녀 마리아와 결혼한다는 후일담(?)도 기억에 남습니다.

수류탄 이야기에서는 수류탄 자체보다는 "척탄병"의 어원을 알게 된 것이 더 큰 수확이었습니다. 손으로 폭탄을 던진다는 한자어 그 자체에 충실한 명칭이라니... 그나저나 프리미어 리그 스토크시티의 가공할 드로잉 능력을 갖춘 인간 기중기 로리 델랩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전쟁 때 태어났더라면 훌륭한 척탄병이 되었을 거예요. 아니, 야구선수들이 더 적당할려나요?

이렇듯 재미있는 기획이고, 세세한 정리와 소개는 정말이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그러나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도 사이언티스트로 포장하여 소개한 경우가 제법 있다는 것은 취지와는 맞지 않아 보였습니다. 고대의 예가 특히 많은데, 제갈량이나 한니발 같은 경우겠죠. 물론 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었고, 등장한 발명품들이 전쟁의 양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확실하기에 크게 거슬리는 부분은 아니었습니다만... 오히려 가장 큰 단점은 도판입니다. 많기는 한데 정작 중요한 무기 도판은 거의 없는 탓입니다. 석궁(쇠뇌), 화승총, 로켓, 수류탄 등 기본적인 도판 몇 장이 구조나 원리를 더욱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무기들이 많은데 말이지요. 이 책에서 설명하는 무기 중 제대로 된 도판이 등장하는 무기는 부시넬의 잠수함, 개틀링의 기관총, 화이트헤드의 어뢰, 시코르스키의 헬리콥터 정도뿐입니다.

때문에 별점은 3점입니다. 도판만 조금 더 충실했더라도 별점은 1점 정도 더 높이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재미만큼은 확실하니, 전쟁이나 병기 관련 미시사 서적을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립니다.

2014/03/10

발칙하고 기발한 사기와 위조의 행진 - 브라이언 이니스 / 이경식 : 별점 3.5점

발칙하고 기발한 사기와 위조의 행진 - 8점
브라이언 이니스 지음, 이경식 옮김/휴먼앤북스(Human&Books)

저명한 범죄관련 저술가 브라이언 이니스의 저서. 출간된지도 몰랐던 책인데, 알고나니 절판되었더군요. 작가의 명성 덕에 항상 읽고 싶다가, 운 좋게 중고 도서를 구하게 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역시나 내용은 명불허전! 총 8개 챕터로 고금동서의 다양한 위조와 사기에 대해 집대성하여 알려주는데 정말 기상천외하고 놀라운 사건들이 많아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위조에 대한 여러 가지 기술을 상세하게 소개해주는 것도 아주 마음에 들었고요.

모든 이야기가 재미있지만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를 꼽아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첫번째는 영국 1파운드 금화가 시장에서 20달러 정도의 가치가 있지만, 원가는 9달러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위조하여 유통했던 베라하 사건입니다. 영국 당국이 그가 거주하는 스위스에 범인 인도 요청을 하였지만, 1파운드 금화는 영국에서 더 이상 법률적인 화폐가 아니라는걸 변호사가 증명하여 무죄로 풀려났다고 하네요. 심지어 영국 재무부에서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성격은 다르지만 "비트코인"과 같은 가상화폐와 왠지 유사하기도 한데, 지켜볼 일입니다.

그리고 하워드 휴즈의 자서전을 둘러싼 사기극도 흥미로왔습니다. 멀쩡히 살아있는 나름 영향력 있는 거부의 자서전을 날조해 출판할 생각을 하다니! 읽으면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돈을 토해냈다는 이야기는 없고, 작가였던 어빙은 이후 이 사건을 다룬 "거짓말"이라는 책을 출간했다는 후일담을 보고 그럴 법도 하구나 싶었네요. 조금 고생해도 역시 돈이 더 중요한 것이겠죠.

사해 문서의 진위 여부를 둘러싼 이야기들도 재미있었어요. 일찍이 사기꾼과 연결되었던 샤피라라는 인물이 사해 지역 동굴에서 나온 양피지 조각을 대영박물관에 팔았지만, 샤피라의 전력과 조각들의 몇 가지 특징으로 위조범으로 몰린 뒤 자살하였는데, 과연 위조를 한 것 때문에 자살을 한 것인지, 본인의 세계 최대 업적 중 하나가 폄하된 것에 대한 분개인지는 알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진짜로 사해 쿰란에서 샤피라가 가지고 있던 양피지 조각 같은게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최초 공개되었던 15장의 양피지 조각은 모두 사라졌다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전설적 사기꾼 폰 루스티그가 알 카포네에게 친 일종의 "정직한 사기?"는 5만 달러를 주면 두 배를 만들어주겠다고 하고, 기간이 되자 작전이 실패했다며 1,000달러 지폐 50장, 5만 달러를 그대로 가져다 준 사기입니다. 알 카포네가 이유를 묻자 이 돈만 빼고는 알거지가 되었다고 고백했고, 이에 알 카포네는 다섯 장의 지폐를 뽑아서 건네주었다고 하네요. 이거야말로 범죄가 아닌 범죄, 그야말로 궁극의 사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기꾼 '옐로우 키드' 웨일의 사기 행각도 기억에 남습니다. 또 하나는 영화 "스팅"의 실제 모티브가 되었다는 사기입니다. 웨일은 얼뜨기 부자를 꼬드겼습니다. 전화 통보 담당자를 매수하여 경마 결과를 2~3분 늦게 알려주게 한 뒤, 그 사이에 마권을 사게 해 주겠다면서요. 그 뒤 마권 영업장을 가짜로 꾸며낸 뒤, 마권을 부자가 살 시점에 소동을 일으켜 사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권을 못 산 건 부자 잘못이고, 전화 통보 담당자라던가 다른 동료들에게 줄 돈과 여러 손해 배상 명목으로 원금의 세 배 정도를 뜯어내었다고 합니다. 웃긴 건, 얼뜨기 부자가 돈을 뜯기고 나서도 웨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한번 더 합시다."

그 외에 굉장히 유명한 이야기들의 최신 정보를 접하게 된 것도 수확인데, 예를 들면 아나스타샤를 자칭한 안나 앤더슨의 정체는 역시나 아나스타샤가 아니라 폴란드 처녀였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는 등입니다. 이른바 "오파츠"라고 불리는 아즈텍의 수정 두개골에 현대의 연마기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더욱 자세한 설명 및 충실한 도판, 비교적 근래 출간된 책답게 후일담도 충실히 기술하고 있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 에펠탑을 팔아넘긴 사기꾼의 말로, 히틀러의 일기를 위조한 사기꾼의 말로 등은 처음 본 것 같긴 합니다 -, 어렸을 때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무슨 백과사전류에서 읽었던 것들부터 시작해서 다른 여러 책, 최근에는 "정말이야?"와 같은 책들에서 접했던 내용이 많다는건 아쉽습니다.  

이렇게 다른 책에서 접한 이야기가 많기에 약간 감점하여 별점은 3.5점입니다만, 결론적으로는 추천작입니다. 추리, 호러 계열 장르문학과 전문가 속성의 만화와 자료들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딱 맞는 책이었어요. "위조"와 "사기"라는 범죄의 전문가들 이야기일 뿐 아니라, 여러 이야기가 책 한 권에 담뿍 담겨 있는 단편집 속성도 갖추고 있으니까요. "갤러리 페이크"를 재미있게 읽으신 분들께서는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쿠로사기"의 팬분들도 마찬가지에요.

2021/07/04

태평양 전쟁 - 유진 B. 슬레지 / 이경식 : 별점 3점

태평양 전쟁 - 6점
유진 B. 슬레지 지음, 이경식 옮김/열린책들

저자 유진 B. 슬레지가 직접 참전해서 싸웠던 2차 대전 태평양 전쟁에서의 경험을 서술한 회고록이자 전쟁사 서적입니다. 책은 저자가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슬레지(별명은 이름에서 따온 "슬레지해머")는 샌디에이고 훈련소에서 여러 주에 걸친 가혹한 훈련을 받고 한 명의 해병대원으로 성장한 뒤, 제 1 해병사단 제 5연대 3대대 소속 박격포병으로 1944년 펠렐리우 섬에서의 격전, 1945년에 오키나와 전선에 투입됩니다. 그리고 운 좋게 부상없이 생환하였지요.

저자가 겪은 2차 대전은 고작 1년도 안되는 기간입니다. 실제 전선에서 싸운건 그 절반에도 훨씬 못 미치고요. 하지만 일본군이 반자이 돌격없이, 섬에 방어망을 철저하게 구축하여 저항했던 마지막 전선이기에, 그리고 한 곳은 땅을 팔 수도 없는 열사의 산호섬이고, 또 한 곳은 항상 비가 오는 진흙탕이었고. 일본군 병사들의 목적도 오로지 죽기 전 미군을 한 명이라도 죽이려는 생각이었다니 그 끔찍함과 고생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덕분에 560여 페이지에 달하는 꽤 긴 분량이지만 술술 읽힙니다. 

다른 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생생함도 쉽게 읽을 수 있게 도와주는 요소였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건 시체가 널려있던 전선 상황에 대한 묘사였습니다. 일본군의 시신은 산호섬이라 묻을 수도 없어서 사방에 방치되어 있었고, 더운 날씨 탓에 바로 썩어들어가서 그 악취가 어마어마했다고 하네요. 당연하게도 파리도 굉장히 많았는데, 시체에 붙어있던 거대한 파리떼가 식사로 먹던 레이션에 달려들었다는 이야기는 정말 섬뜩했고요. 이렇게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상상하기도 힘들, 그런 생생한 묘사들이 곳곳에 가득합니다.

전쟁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분량이 할애되어 있습니다. 일본군과 미군이 서로에 대해 갖는 증오심이야 뭐 서로 겪은게 있으니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각자 서로에게 집행하는 상상 이상의 폭력이 정말 충격적입니다. 아직 살아있는 일본군의 금니를 뽑으려고 입을 대검으로 찢었다던가, 기념품으로 일본군 포로의 손을 잘라 챙겼다던가, 일부러 일본군 시체에 대고 오줌을 쌌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숱하게 등장합니다. 저자가 미 해병대원이다보니 미군 시점의 이야기가 많은데, 일본군도 별반 차이가 없었겠지요. 

이와는 정 반대로, 전투를 겪으며 미치거나 피폐해지는 병사들에 대한 서술도 적지 않아요. 죽은 일본군의 반쯤 날아간 머리를 계속 개머리판으로 쳐 댔다는 미군 병사 이야기처럼요. 그동안 일본군은 거의 전멸했던 반면, 미군은 실종 포함한 사망자는 7,631명, 부상자는 3만 1,807명이라 큰 피해는 받지 않았다고 생각해 왔었습니다. 부상자들이 복귀만 한다면 전선 유지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부상자 중 2만 6,221명이 정신적인 부상자라는 이 책의 설명을 읽고나서는 생각을 바꿨습니다. 정신적인 부상자들은 군 복귀는 물론, 일상 생활로의 복귀도 힘들 사람들이 많았을테니까요. 저자는 전투는 참가한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사람들은 그 끔찍한 흔적을 안고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정말 살아도 산게 아닌 사람들이 너무 많을 것 같아요. 저자 역시 운 좋게 무사히 살아남기는 했지만 마음에 많은 상처를 입은건 분명하다는게 이런저런 회고와 묘사에서 여실히 드러나고요. 고작 20살에 불과한 저자와 비슷한 또래의 전우들이 겪기에는 지나치다는 말로도 부족할 지옥이었겠지요. 정말이지 전쟁은 무섭네요.

그래도 다행히, 멋진 전우들도 많고 그들의 활약으로 목숨을 건지거나, 죽음을 넘나드는 와중에 웃을 수 있는 여유도 보여지곤 하더군요. 담배를 피지 않던 슬레지가 펠렐리우 상륙 작전 직후에 바로 담배를 찾았다던가, 두 박격포병들이 거의 목숨을 걸고 싸운건, 탄약 상자 속 포탄 용기 안에서 발견한, 은색 립스틱을 바른 여자의 입술로 키스를 한 자국이 있는 사거리표 카드를 서로 갖겠다는 이유였다는 이야기처럼요. 이런 일도 없다면 진작에 다 미쳤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역시 20년도 더 지난 옛 군 생활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 때 그 친구들은 다 어디서 무엇을 하려나....

이렇게 가치있는 회고가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기승전결의 구조가 없다는건 좀 아쉬웠습니다. 회고록인 탓입니다. 각 시기별 경험들을 모두 이어 붙여 놓았을 뿐이니까요. 때문에 뭔가 정리된 이야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등장 인물들도 두서없이 등장해서 죽거나, 사라지곤 하는 편이고요. 또 잔혹한 쓰레기였던 분대장 맥의 후일담이 궁금했는데, 등장 인물들 중 살아 남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후일담을 적어주면 좋았을 것 같네요.

그래도 일반 병사 시점에서 본 전쟁이라는 특이함에 더해, 생생함이 놀라운 수준이라 별점은 3점입니다. 태평양 전쟁, 아니 일반 병사의 전쟁이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25/04/04

미친 항해 - 마이크 대쉬 / 김성준, 김주식 : 별점 4점

미친 항해 - 8점
마이크 대쉬 지음, 김성준.김주식 옮김/혜안

마이크 대쉬가 집필한 역사 논픽션입니다. 1628년, 암스테르담을 출항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선 바타비아 호가 이듬해 6월, 현재의 소호주 해안 인근 암초에 충돌하여 난파한 뒤 생존자 사이에서 벌어졌던 벌어진 대규모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2002년 영국에서 처음 출간된 이 책은 BBC History Magazine과 History Today 등의 권위 있는 역사 전문 매체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습니다.

당시 항해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선장이었지만, 직급상 최고 책임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관리인 '대상인' 프란시스 펠사아르트였습니다. 선장 야콥스와 펠사아르트 사이의 갈등은 여자 문제 등으로 항해 중부터 깊어졌고, 이러한 틈을 비집고 들어온 이가 바로 '부상인'이자 전직 약제사였던 예로니무스 코르넬리스였습니다. 그는 선장을 꼬드겨 선상 반란을 모의했는데, 바타비아 호가 암초에 부딪혀 좌초하면서 계획이 꼬이게 됩니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펠사아르트가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자바섬으로 떠난 틈을 타서 코르넬리스는 생존자들의 리더가 된 후, 체계적인 학살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남은 식량과 식수를 가지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티면서, 반항할만한 불순분자들을 없애기 위해서였지요. 펠사아르트가 구조대를 이끌고 보물을 회수하러 돌아오면, 그 배를 점령해 해적 생활을 하려는 계획으로요. 그래서 병자와 노약자, 반대 세력을 중심으로 약 115명에 달하는 이들을 죽였습니다. 

계획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회수할 보물이 많기에 구조대 인원이 많지 않을거라는 코르넬리스 생각대로 구조대가 움직였거든요. 그러나 말라 죽으라는 의도로 다른 섬으로 보내졌던 위이버 헤이스와 건장한 남성들이 우물을 발견하는 등 예상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생존에 성공하고, 코르넬리스의 학살을 알게된 후 방어 거점을 구축하자 상황은 급변합니다. 코르넬리스는 친위대를 이끌고 위이버 헤이스를 속이려다가 사로잡혔고, 코르넬리스의 후임이 일당들과 함께 위이버 헤이스 섬을 공격하여 전면전이 벌어졌을 때 대상인 펠사아르트의 구조선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영화나 소설이라고 해도 억지스럽다고 할 것 같은데, 정말 이런 일이 벌어졌다니 놀라웠어요. 여튼, 위이버 헤이스와 코르넬리스 세력은 각각 펠사아르트의 구조선으로 사람을 보냈고, 빨리 도착하는 쪽이 승리하는 싸움에서 위이버 헤이스가 이겨서 폭도들을 모두 사로잡으며 코르넬리스의 음모는 막을 내립니다.

이러한 난파 후 서사만으로도 영화나 소설로 각색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흥미진진합니다. 코르넬리스가 생존자들의 리더가 된 후 학살을 지시하며 독재자로 거듭나는 과정은 '이세계 전생물'로 바꾸어 보아도 재미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종교와 조직(동인도 회사)가 절대적인 사회에서 독자적이면서도 설득력있는 종교론과 조직에서의 직위를 무기로 자신만의 왕국을 만든다는게 아주 현실적으로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저자 마이크 대쉬는 방대한 사료 조사와 기록 분석을 통해, 사고 외에도 각 인물의 생애와 심리, 사회 구조적 배경까지 책에 촘촘히 담아냅니다. 예로니무스 코르넬리스가 왜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이게 되었는지, 그가 처한 시대와 개인적 몰락, 종교적 배경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기업 구조와 식민 경영 방식에 대한 설명 역시 뛰어납니다. 실제로 코르넬리스의 생애만 따로 정리한 분량이 35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깊이 있는 탐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관련 인물들의 후일담이 꼼꼼하게 조사되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역시 놀라운 수준입니다. 코르넬리스의 아내에 대해서까지 최대한 조사해서 수록했을 정도니까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무역, 당시 항해에 대한 전반적인 모든 설명 역시 상세합니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았던 항해 중 먹거리 설명을 예로 들자면, 우선 바다 고기를 낚으면, 누가 고기를 낚든 매일 맨 처음 낚은 고기는 선장의 몫이었고 그 다음 12마리 정도는 상인과 사관들의 몫으로 돌아갔으며, 전례에 의거하여 인정된 순서에 따라 고기가 돌아갔다고 합니다. 선원들은 신선한 음식을 먹는게 거의 불가능했겠지요. 그래서 선원들은 거의 전적으로 통조림에 든 고기와 콩, 건빵으로 알려진 딱딱한 빵인 비스킷으로 끼니를 때웠는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경우는 음식의 질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갓 도축한 돼지와 소를 사들여 고깃덩어리를 통째로 피도 빼내지 않은 채 바닷물이 펄펄 끓고 있는 가마솥에 넣어 보존 처리를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처리된 고기는 쌌지만, 아주 짜서 조리를 하려면 청수에 담가 짠 맛을 빼내야 했는데, 항해 중에는 한정된 식수를 절약하기 위해 바닷물에 넣어 끓였다는군요. 얼마나 짰을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말린 생선도 싣고 다녔는데, 대구가 대부분이었다네요. 말린 대구는 스튜로 끓여서 역 시 말린 완두콩이나 강낭콩과 함께 먹었고요. 그 외 먹거리들 모두 형편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타비아 호 선원들은 당시의 기준에서 본다면 잘 먹고 잘 마신 편이라는게 충격적입니다. 부과된 노동을 충분히 감내할 정도의 칼로리를 섭취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 외에도 가혹했던 항해에 대한 설명 등 재미있는 정보가 그야말로 넘쳐납니다.

이렇게 재미와 역사적, 자료적인 가치 모두 빼어난데, 코르넬리스가 이단 사상에 빠지게 된 과정에 대한 추측이라던가, 후일담 이후 코르넬리스가 정신병자로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설명 비중이 지나치다는건 다소 아쉬웠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백인들 후예가 살고 있을거라는 추측도 마찬가지고요. 섬에서의 학살도 논픽션이라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극적인 이야기를 그렇게 잘 묘사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또 책의 디자인과 구성도 옛스러워서 읽기 불편했고, 도판도 좋은 편은 아니에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충격적인 실화를 방대한 자료로 치밀하게 재구성한 뛰어난 논픽션입니다. 난파에 대한 논픽션을 세 권째 읽게 되었는데 - "바다 한가운데서", "메두사 호의 조난" - 대체로 기본 이상은 해주는 장르인 것 같네요. 이런 분야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7/03/10

북로우의 도둑들 - 트래비스 맥데이드 / 노상미 : 별점 4점

북로우의 도둑들 - 8점 트래비스 맥데이드 지음, 노상미 옮김/책세상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대공황 직후 약 1930년대까지)까지 기승을 부렸던 책 전문 절도범들, 그리고 그들을 잡아 넣기 위한 도서관 특별 수사관들의 활약을 그린 논픽션입니다. 제목의 북로우는 맨해튼 애스터 플레이스에서 유니언 스퀘어까지 죽 이어진 4번가의 여섯 블록을 의미합니다. 책들이 늘어선 거리, Book Row라는 말에 걸맞게 책방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고 하네요. 도둑들은 북로우 일부 서적상들 및 그들이 지휘하는 도둑들(북 스카우트)을 의미하고요.

북로우에 터전을 잡고 활동하던 악덕 서적상 골드가 뉴욕 공공도서관 소장품인 에드거 앨런 포의 초판본 "알 아라프, 티무르" 초판본을 손에 넣은 뒤(정확하게는 골드 밑에서 북 스카우트로 일한 듀프리가 뉴욕 공공도서관에서 알 아라프, 티무르와 주홍 글씨 초판본, 백경 초판본을 훔친 뒤), 그를 잡기 위해 활약했던 공공도서관 특별 수사관 버그퀴스트의 노력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외 다른 서적 절도 사건도 다수 언급되며, 희귀본 시장이 어떻게 커져갔는지와 그에 따라 도서관들이 어떻게 책 절도범들에게 노략질 대상이 되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배경 설명도 함께 합니다.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논픽션다운 디테일입니다. 특히 당대 책 절도에 대한 설명은 타의추종을 불허합니다. 책 절도는 대단한 기술이나 전략이 필요치 않다, 도서관과 사서들의 부주의 탓에 절도가 쉬웠다, 필요한 것이라곤 훔친 책을 집어 넣을 수 있는 커다란 코트와 가끔 가다 쫓길 경우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다리 정도였다는, 시대를 연상케하는 언급부터 시작하여 책을 훔친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 눈에 띄는 마크나 도장 제거 등 - 와 북 스카우트라고 불리운 도서관 책 절도범들과 책서점 주인이 손을 잡고 사업을 키워가는 과정이 상세하게 설명됩니다.
참고로, 이렇게 도서관 책 절도범이 기승을 부린 이유는 책 절도범을 잡더라도 치안판사들이 고소를 취하하는 등 심각하게 처벌하지 않은 탓이 크다고 하네요. 리스크는 적고 수익은 높아지니 많은 사람들이 뛰어든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네 사고 방식인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말과 서울대 출신 책도둑, 공시생 책도둑 등이 선처를 받고 훈방되었다는 뉴스가 떠오르네요.

도둑들을 잡기 위해 뉴욕 공공도서관 설립 된 후 특별 조사관으로 활동한 길야드, 버그퀴스트의 활약의 디테일도 못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것을 꼽아보면, 도서를 대출한 후 반납하지 않고 대출자가 사라진 사건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길야드는 대출자가 살았던 우체국장에게 우편물을 전송하는 새 주소를 알려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개인정보 유출 방지 목적?), 옛 주소로 먹지 한 장을 숨긴 등기 서류를 보냈습니다. 등기 서류가 우체국에 도착하면 주소록이 고쳐질 것이라 생각하고, 봉투에 이사 간 곳의 새 주소가 쓰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발송 되기 전 회수한다는 전략이었지요.
버그퀴스트는 뭐니뭐니해도 핵심 이야기인 골드 체포 작전의 활약이 가장 눈부십니다. 수사 권한이 없었기에 함정 수사를 펼치는 등 노력도 눈물겹지만, 끝까지 노력해서 결국 골드에게 실형을 선고받게 만드는 결말이 아주 통쾌한 덕분입니다. 그것도 싱싱 교도소에 수감시켰던만큼, 기쁨이 더 컸을 것 같네요. 이 과정에서(인간의 갱생 가능성에 대해 낙관적 태도를 갖추고 있는) 버그퀴스트의 진심어린 설득에 넘어가 책 절도 박멸에 동참하는 구 절도범 마호니, 윔스와의 인연은 시대를 느끼게 해 주고요. "자네도 볼장 다 봤잖아. 우리 쪽으로 오지그래?" 같은 말이 자연스럽게 오가는, 의리물이 떠오르는 낭만적인 이야기였거든요. 그런 시대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참고로, 후일담은 조금 씁쓸했습니다. 뻔뻔한 절도범 헤럴드, 절도 조직의 우두머리였던 골드와 스미스 등 악덕 서적상들 모두 범죄가 밝혀진 이후 짤막한 재판과 수형 생활을 거치고나서 다시 떵떵거리면서 살았다니까요. 그나마 골드 사건이 마무리되고 희귀본과 값진 책들은 도난 당하지 않도록 따로 분리해 이용을 엄격히 제한하게 되었으며, 책을 수집하던 사람들도 죽으면서 소장품과 희귀본을 도서관과 대학에 기증하는 사람이 많아져 시장 자체가 사라진 덕에 현재는 이런 류의 절도가 거의 없어졌다고 하니 다행일 뿐입니다. 최근은 도서관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도서관에서 책을 훔치는 것도 많이 어려워졌지요.

그 외에도 다양한 희귀본 관련 재미있는 이야기도 가득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포의 작품 관련 이야기들이 재미있었습니다. 뭉텅이로 팔린 책 더미에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이 처음으로 발표된, 표지가 떨어져 나가고 없는 그레이엄스 매거진이 포함되어 있었다던가, 가난하게 살던 노파가 근방 서적상 존 루미스 씨에게 옛날 책을 팔려다가 포의 첫 시집 "알 아라프"를 팔게 되었다는 등입니다.

이렇게 햇수로는 40 ~ 50년에 걸친, 방대하고 자세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등장 인물과 사건도 많지만 시대 순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내용도 재미있어서 쉽게 읽히는 멋진 책입니다. 잘 알지 못했던 20세기 초반 책 절도에 대한 지식도 상세하게 알 수 있고요. 
개인적으로는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희귀본을 탐색하던 추억이 떠올라 더 공감이 갔습니다. 그때 구했던 책들 중 다수 - "점성술 살인사건", "불야성""석양에 빛나는 감""얼굴에 흩날리는 비""내가 죽인 소녀" 등등등 - 거진 다 복간되어 이제는 의미가 없습니다만ㅡ 괜히 그 시절이 떠오르네요. 아 그립습니다.

다만 수사관들이 도둑들에 비하면 열세라 밀고 땡기는 맛이 부족하다는 점은 조금 아쉽습니다. 도둑들이 잘 먹고 잘 살았다는 후일담 역시 씁쓸한데 이 모두 실화에 기초한 만큼 어쩔 수 없는 부분겠지요. 논픽션을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2017/05/13

손자병법의 탄생 - 웨난 / 심규호, 유소영 : 별점 2.5점

손자병법의 탄생 - 6점
웨난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일빛

1972년 산동선 임기현 은작산 1호, 2호묘에서 발굴된 죽간과 출토물들에 대해 여러가지를 풀어놓는, 580여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고고학, 미시사, 역사 서적입니다. 웨난 작가의 고고학 관련 책을 워낙 좋아하기에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부활하는 군단"은 진시황릉에 대한 바이블같은 책이죠. "마왕퇴의 귀부인"은 그만 못했지만 역시 괜찮았고요. "삼성퇴의 고대문명"을 절판 전에 구하지 못한 게 한스럽기만 합니다.

이 책의 구성은 "부활하는 군단"과 같습니다. 먼저 발굴 과정에 얽힌 이야기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이후 유물에 대한 실제 역사적 이야기를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지금 현재의 상황을 알려주며 마무리됩니다.

첫 시작인 발굴 과정부터 드라마틱합니다. 문화대혁명 직후의 어수선한 분위기와 전문가가 아닌 지역 담당자의 무식한 발굴이 겹쳐져 일어난 엄청난 피해, 고고학자들의 유물을 복원하기 위한 분투가 생생하게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흙탕물 속에서 죽간을 그러잡아 뜯어 올리는 식의 엄청난 발굴이 보여집니다! 이 와중에 정치적인 논리가 개입되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었고요.
그리고 제목 그대로 발굴된 죽간이 "손자병법"이었다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묘는 한나라 무제 때로 추정되지만 이 죽간의 필사 연대는 한나라 문경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늦어도 서한 전기), 한나라 시대 죽서 "손자병법"은 손무가 직접 쓴 원본일 가능성이 많기에 그야말로 초기 "손자병법"에 대해 생생하게 알게 된 것이라고 하네요. 송나라 판각본과의 대조 결과, 명확한 차이를 보인 부분이 있다고 하고요.
또 "손자병법", "육도", "관자" 등의 고적이 실존하며, "손빈병법"이 발굴되어 손무와 손빈이 각기 병법서를 세상에 전했다는게 밝혀진 것도 큰 성과입니다.
참고로 죽간을 수장품으로 묻은 이유는, 인쇄술이 시작된 당나라 이전에는 모두 손으로 필사했기 때문에 서적이 굉장히 귀해서 수장품에서 서적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은작산 한묘의 죽간은 크게 열 묶음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수량인데 유가의 경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재미있습니다. 이는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법가 사상이 퍼져나가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해석되네요. 후대의 '비림비공(임표와 공자를 비판함)'과 크게 다름없는 상황인 것이죠!

여기까지가 약 120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이고, 이어서 360페이지에 걸쳐 발굴된 죽간을 연대별로 구분한 후 실제 해당 시기의 역사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항목별 간단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육도" 

강태공이 주문공을 만나고, 주나라가 천하를 재패한 후 봉지로 제나라를 하사받는 과정까지의 이야기.
주문공과 첫 만남에서 강태공이 말한 '삼상주의'는 은작산 한묘 발굴로 알려지게 되었다는데, 최순실에 농락당한 대한민국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네요. '그 능력에 관계없이 사돈에 팔촌을 엮어 관직에 앉힐 경우 그 화가 나라와 백성에게 미쳐 결국 나라를 망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는 내용이니까요. 

"육도"에 대한 설명이 뒤에 이어지는데 주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화복과 길흉에 대해서, 인사가 하늘에 달린게 아니라 사람에게 달렸고, 백성 사랑이 치국과 치군에 가장 중요한 전제라는게 분명히 지적됩니다. 천하가 평화로와야 모든 것이 이롭다는 것, 인심에 순응해 천하의 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 등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3천년도 더 전에 쓰여진 죽간 속 내용이 지금도 통용될만 하다는게 신기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왕병"

'절개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고집스럽고 답답한 서생에 불과합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지금 세상은 사람 노릇을 하는 데 그리 진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 포숙이 관중을 데려오려 할 때 한 말. 

주 왕조가 쇠학하여 춘추 시대로 돌입하게 되고, 제나라가 관중과 포숙을 얻어 제후국의 맹주를 차지할 때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관중이 죽은 후 그의 언설을 정리한 책이 "관자"입니다. 대체로 군사 사상으로 다섯가지 원칙으로 정의되는데 부국강병, 우병어농, 군정일체, 선계후전, 이인위본, 선전준비가 그것이죠. 은작산에서 출토된 "왕병"은 관중의 정치, 군사 사상에 대한 완전한 작품이며 후대에 전해진 "관자"는 불완전한 작품이라네요.

"안자춘추"

'귤은 회수 남쪽에 심으면 귤이 되지만 북쪽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명언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안자는 처음 들은 이름이네요. 사마천 왈 "관중이 죽고 백여년이 지나 안자가 나왔다."고 할 정도의 인물인데 말이죠. 

안자 안영과 전양저가 힘을 합쳐 제나라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이야기는 재미있습니다. 이후 제나라 위왕이 양저의 군사 사상을 책으로 정리한 것이 "사마병법"이라지요. 전양저의 친척이자 전씨 가문의 유력인인 전서가 공을 세워 "손"씨 성을 하사 받았으며 이후 손무, 손빈 등의 후손들로 이어집니다.

"손자병법" 

손무가 오나라 국경 궁륭산에 터를 잡고 혁명을 위한 군사조직을 이끌다가 오자서를 만나는 데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 뒤는 "열국지" 등에서 본 이야기 그대로, 초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오자서가 오나라왕 합려와 함께 전쟁을 일으키고, 이후 오나라가 패망할 때 까지의 흥망성쇠가 그려집니다.

잘 알고 있는 이야기라 신선함은 덜했지만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손무가 일종의 도적단 두목같은 포지션으로 등장해서 오자서와 밀약을 나눈다는 설정이 그것입니다. 손무가 오나라의 왕이 되고, 오자서는 초나라의 왕이 된다는 밀약인데, 작가의 창작인지 아니면 뭔가 유래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울러 초나라가 정벌된게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라는 연구자들의 의견도 신선했습니다.

"손빈병법" 

오나라를 떠난 손무가 제나라에 정착한 후 증손자 손빈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역시나 "열국지"를 통해 알고 있는 내용이에요. 방연과의 인연, 귀곡자 문하에서의 생활, 위나라에서 방연에게 뒤통수를 맞은 뒤의 처참한 생존 과정과 탈출, 그리고 복수가 차례대로 펼쳐집니다. 

그런데 읽다보니 이상한 점이 있더군요. 미친 척을 해서 방연의 눈을 피하는 것은 그럴듯한데 제나라 묵적의 제자 금활리라고 자신을 밝힌 인물에게 너무 쉽게 속 마음을 드러내는 전개는 전혀 납득이 되지 않았어요. 실제로는 수차례 연극을 더 했을 수 있겠지만요.


그리고 나머지 200여페이지에서는 현재 도출된 각종 의문과 문제에 대해 다루어 집니다. 대표적인 건 방연이 죽은 마릉의 정확한 위치, 후대에 수차례 대두되었던 손무 허구인물설에 대한 상세한 내용과 은작산 손자병법에 의해 밝혀진 진실, 손자병법과 손빈병법의 차이점 - 춘추 말기 낙후된 생산력과 경제력 탓에 손자병법은 속전속결을 주장하며 공성전을 피해야 한다고 했지만 손빈병법이 쓰여진 전국 시대에는 쇠뇌, 투석기와 같은 선진 무기의 도입과 기병전의 증가, 전쟁 규모의 확대 및 도시의 발전으로 공성전을 적극 주장하는 등 전략, 전술, 진법이 크게 변하였음 - 등 입니다. 손무의 고향이 어디인지에 대한 지역과 학계 간 암투 - 저자의 말에 따르면 '고향 소유권 쟁탈' - 도 소개되고 있고요.

그런데 손무 허구설, 손자병법과 손빈병법의 차이는 재미있었지만, 마릉의 위치나 손무의 고향이 어디인지는 중국 내에서야 관심사일 뿐 저에게는 하등의 가치가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지역 경제 부흥을 중요시 여기는 듯한 저자의 글도 와닿지 않았고요.

그나마 이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사료가 소개, 인용되는데 그 중 기억에 남을 만큼 재미있는 항목이 몇가지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학자 곽말약, 여공아의 주장 중 '춘추'와 '전국'을 나누지 않고 한데 묶어 '춘추 전국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대목입니다. 저는 여태까지 당연히 '춘추 전국 시대'로 알고 있었는데 중국 내에서 '두 시기는 사실상 연결되어 있고 그 간격은 약 28년에 불과하여 분명하게 차이가 나기 어렵기 때문에 묶어야 한다!'는 주장이 의외로 소수파라는 것이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지금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손무 무덤 발굴에 관련된 이야기 중 합려의 무덤인 검지 발굴을 위해 물을 뽑았었지만 검지 붕괴 위험과 비밀로 남겨두는 편이 지역 관광산업 발전, 경제 효과를 높이는데 유리하여 발굴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알았네요. 어장검 등 각종 보검이 궁금했는데 아직은 때가 아닌 듯 싶군요.
손빈의 후예라는 손노가 손씨 가족을 연구할 때 '일부 당성이 탁월하고 정치적 견해가 뚜렷하고 영리한' 사람들을 모아 좌담회를 가졌다는 중국 공산당식 마인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여기서 '문화대혁명' 때 손씨 가문 족보를 태우겠다고 소란을 피웠으며, 손씨 가문의 어른인 손지일이 홍위병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었지만 족보는 잘 숨겨놓아 결국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고요.
손씨 가문 내력을 조사하여 손빈의 무덤 위치와 말년을 알아내는 과정은 조상과 제사를 중시하는 우리나라 현실과도 잘 맞아떨어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중국 내 사학계에서 손씨 족보의 발견이 굉장한 성과로 인정받고 있을 정도라니 족보라는게 참으로 중요하구나 싶더라고요.

이어서 1996년에 벌어진 손자병법 82편의 영인본을 발견했다는 사기극이 등장합니다. 역시나 홍위병이 등장하여 고대 죽간을 태워버리는 바람에 일부만 건졌고, 필사한 사본만 남았다는 주장에서 시작되는데 고대 죽간을 손에 넣었다는 조부 장서기의 일대기를 분석하여 사기꾼의 주장을 반박하고, 장서기의 진짜 직계 후손이 등장하여 이름 돌림자를 가지고 사기꾼들을 박살내는 전개는 우리나라 상황과 유사하여 재미있었습니다. 가짜임을 증명하는 고고학적인 분석 결과와 사기에 가담했던 국방대학교 강사 방립중이 벌인 민사 소송으로 벌어진 재판 과정도 법정 추리물 느낌이라 아주 흥미로왔고요. 솔직히 너무 유치하고 어설픈 사기극이라 이렇게까지 크게 이슈가 된 것도 잘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요.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죽간과 다른 출토물들의 후일담을 그립니다. 죽간은 그나마 신경써서 보존되었지만, 성 박물관도 문화대혁명에 휩쓸려 직원들이 밭을 경작하느라 관리가 소홀해진 탓에 훼손이 심해졌다니 문화대혁명이 정말 문화와 역사에 몹쓸 짓을 한게 맞는 것 같네요. 그리고 최초 발견자들과 관계자들 후일담도 소개되는데 첫 발견자인 '당나귀'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아내의 외도를 보고 자살했으며, 한묘도 지금은 고층빌딩이 들어섰고 이후 죽간 소유권을 놓고  벌인 추잡한 암투가 벌어졌다니 이것도 무슨 저주 비스무레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하기사 발굴이라고 해 봤자 멀쩡한 묘를 대놓고 터는 것이니 좋은 결과일리 없겠지요.

이렇게 방대한 분량에 이런저런 이야기로 꽉 채워져 있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만 "부활하는 군단"이나 "마왕퇴의 귀부인"에 비하면 유물과 역사적 사실에 대한 도판이 극도로 부족, 부실하고 잘 알고 있는 열국지 내용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현대에 이르러 별 관심 없는 중국 지방 행정부의 관광 수익을 노린 이권다툼이 많이 소개되는건 좀 아쉬웠습입니다. 다른 곳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역사편과 쓸데없는 지방 행정부 이야기를 덜어내는게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핵심인 은작산 출토 "손자병법"의 발굴 과정과 이로 인해 밝혀진 새로운 사실들 중심으로만 소개하는 식으로요.  물론 저자의 허락없는 제멋대로의 편집은 안될 말이겠지만요.

하여튼, 별점은 2.5점입니다. "손자병법"과 춘추 전국 시대(중에서도 춘추 시대?)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한 번 쯤 볼만합니다. 허나 그렇지 않다면 딱히 권해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불필요한 내용도 많은 편이고요. 가격도 상당한 만큼 구입하실 것이라면 신중을 기하시기 바랍니다.

2022/04/03

플레인 센스 - 김동현 : 별점 3점

플레인 센스 - 6점
김동현 지음/웨일북

비행기 개발의 역사가 아니라 '비행'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알려주는 인문학 서적입니다.

개인적으로 범죄, 사건, 사고에 관심이 많은 탓에 사고 사례 소개에 관심이 많이 갔는데, 책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비행기 납치 사례들 소개부터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하이잭' 단어의 의미에서부터 시작해서, 보안승무원이 기내에서 테러범을 사살했던 1971년의 김상태 대한항공 월북 기도 사건, 베트남전에서 퍼플 하트 훈장을 수여받을 정도로 능력있는 해병대원이었던 라파엘 미니첼로가 월급 횡령에서 비롯된 실망감에 미국에서 비행기를 납치해 모국 이탈리아로 향했던 1969년 TWA 85편 납치 사건, 무려 넉 대의 여객기를 같은 시기 피랍했던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 (PFLP) 비행기 납치 사건, 일본 적군파가 평양으로 향하기 위해 납치했던 1979년의 요도호 사건, 평범한 오타쿠가 비행기 납치를 시도해서 대형 참사가 일어날 뻔 했던 1999년의 니시자와 사건 등 모두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꼼꼼하게 수록되어 있는 후일담들도 마음에 듭니다. 예를 들어 라파엘 미니첼로는 미국에서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이탈리아에서 국민적 영웅이 되어 곧바로 석방되었고 본인 이야기를 다룬 영화 주인공으로 캐스팅되기까지 했다는군요.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 납치 사건이 일어난 후 미국은 정예 요원에게 사복을 입혀 비행기에 탑승시키는 스카이마샬 제도를 도입했고, 그 외에도 테러를 막기 위해 좌석에서 승객에게 독극물을 주사하는 인젝션 키트나 납치범을 쉽게 격리할 수 있는 부비트랩 플로어 등의 발명이 이어졌다고 하고요. 니시자와 사건도 결국 니시자와가 지적했던 하이재킹 방지 정책이 실행되었다네요. 911 이후에는 국가의 안전이 더 우선시되어 테러범에게 납치된 비행기의 영공 진입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모두 인터넷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이를 일종의 통사처럼 시대순으로 모아놓은 구성도 좋았습니다. 덕분에 어떻게 비행기 납치가 시작되어서, 어떻게 발전되어 나갔는지를 상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

끔찍했던 비행기 사고에 대한 사례 소개도 충실합니다. 저 역시 몇 년 전 까지는 출장 등으로 비행기를 자주 탔었기 때문에 더 몰입해서 읽었던 것 같네요. 언제든 저에게도 닥칠 수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니 집중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더라고요. 과냉각된 적란운 속으로 비행기가 진입했을 때, 비행기가 거대한 응결핵이 되어 순식간에 얼어붙은 탓에 추락하고 만 에어프랑스 447편 사고는 정말 무섭더군요. 기내에 화재가 일어났을 때 15분 내로 긴급 착륙하지 못하면 다 죽는다는 이야기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많은 승객들이 타고있을 비행기 내에서의 화재 진압이 왜 어려운지가 궁금했었는데, 외부 공기를 유입하기 위한 여압 시스템 때문이라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연기가 빠져나갈 곳이 없어서 순식간에 일산화탄소 중독에 빠진다니 무섭습니다. 화재 현장을 빠져나가기도 불가능하니, 정말 죽을 수 밖에 없겠어요. 그동안 있었던 기내 화재로 인한 사고들은 많은 경우 기내 흡연 탓에 벌어졌다는 이야기는 황당했고요. 저도 아주 오래전, 90년대 비행기를 처음 탔을 때 기내에서 담배를 피웠던 기억이 나는데 얼마나 무식한 짓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리튬 배터리 폭발로 인한 화재 사고가 많다고도 하는데, 앞으로 편한 마음으로 비행기 타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아울러 비행기를 탈 때의 주의 사항도 몇 가지 알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건 산소 마스크가 내려왔을 때 바로 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압에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산소 공급이 순식간에 끊어지므로 산소 마스크를 바로 쓰지 않으면 곧바로 의식을 잃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경험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만약 산소 마스크가 떨어지면 재빨리 뒤집어 쓰고 볼 일입니다. 사고는 아니지만, 랜딩 기어에 숨어서 밀항하려다가 떨어져 죽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끔찍하더군요. 14세 소년 키이스가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장면이 우연히 찍혔다는 아래 사진 이야기가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네요.


그 외에도 스튜어디스의 탄생이라던가 콜사인, 웨이포인트 등 여러가지 비행 관련 이야기를 풀어 놓는데, 여기서는 기장 출신 실무 전문가다운 노하우가 빛납니다. 항공 통신에 대한 소소한 디테일들처럼요. 한국과 미국의 사고 방식의 차이를 들며 원할한 무선 교신을 위한 팁을 알려주고 있거든요. 이런건 실제로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겠지요. 여객기의 양대 산맥인 보잉사와 에어버스사의 간략한 역사와 콩코드 취항 등으로 알아보는 여객기의 발전 과정과 항공사별 대표 기종 소개도 흥미로운 정보였습니다. 도판도 충실하며, 보잉과 에어버스사 기종의 차이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눈길을 끕니다. 두 회사의 차이도 인상적이에요. 보잉은 인간의 판단이 더욱 중요하다는 쪽이고, 에어버스는 반대로 인간의 조작을 컴퓨터가 모두 모니터링하고 제한한다는데, 앞으로는 에어버스 쪽이 대세가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은 들었습니다. 링크 트레이너 등 다양한 비행기 시뮬레이터 개발의 역사를 이 책처럼 상세하게 알려주는 책도 또 없으리라 생각되고요. 한마디로 비행에 관련된 모든 것을 모아 놓은 종합 선물 세트같은 책이에요. 간만에 좋은 독서를 했습니다.

그러나 욕심이 좀 과하기는 했습니다. 위도, 경도에 대한 이야기는 제대로 요약해서 풀어놓지는 못했고, 대서양 횡단 비행을 한 린드버그의 모험담도 억지로 수록한 느낌이었거든요. 이야기 목차도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느낌이 강했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2016/10/10

기억나지 않음, 형사 - 찬호께이 / 강초아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찰에게 가장 중요한 건 말야, 당연히 자기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지!
어떻게 하면 나를 드러내 보일까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 분수를 알고 나 자신을 지킬까 하는 거라고. - 쉬유이의 선배 화 선배가 하는 조언.

수사의 목적은 대답을 듣는 게 아니라 대부분 문제를 찾아내는 겁니다. - 쉬유이가 수사에 대해 아친에게 하는 말.

급작스러운 두통으로 차에서 잠이 깬 웨스턴 경찰서의 쉬유이 경장. 그는 고질적인 단기 기억상실증 탓에 지난 6년간의 기억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6년 전 당시 맡았던 둥청아파트 살인 사건의 후속 이야기를 취재하는 미모의 신문기자 아친의 취재에 동참한 후, 6년 전 사건을 풀어내기 위한 새로운 실마리를 접했고, 옌즈청이라는 스턴트맨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13.67"로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준 찬호께이의 장편 소설로 제2회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상 수상작입니다.

'기억을 상실한 인물이 자신에게 닥친 수수께끼를 해결해 나간다.'는 설정은 "공포의 검은 커튼" 이후 서스펜스 스릴러 장르의 전가의 보도와도 같습니다. 누가, 어떤 작품을 써도 기본 이상은 해 주니까요. "사라진 시간", "살인자의 기억법" 등 처럼요.

이 작품 역시 재미면에서는 합격점을 줄 만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재미를 위한 만능 조미료 같은 설정 - 6년간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 우연히 6년 전 사건의 재수사에 돌입한다 - 에 더해서, 초중반부까지의 흡입력이 정말 장난이 아닌 덕분입니다.
생생했던 6년 전 기억과 6년 후 새롭게 밝혀진 단서를 조합해나가는 과정의 설득력도 넘치며, 단기 기억상실증으로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본인이 얽혀있을지도 모른다는 긴장감 역시 독자의 흥미를 크게 높여줍니다.

또 작가에게 기대했던 추리적 요소 역시 기대에 값합니다. 6년 전 벌어진 잔혹한 둥청아파트 살인사건의 재조사가 시작된 후, 쉬유이가 새롭게 접한 몇 가지 단서들 - 사건 당일 피해자 이웃 후 어르신이 공격받지 않은 이유, 린젠셩의 아내 리징루가 건네준 린젠셩의 수첩 등 - 을 가지고 새로운 진상에 이르게 하는 추리가 놀랄 만큼 잘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경찰 수사물임에도 불구하고 고전 본격물의 향취가 느껴질 정도로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보였던 단서들 - 영춘권 도장의 위치,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 영국 TV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 쉬유이와 옌즈청이 같이 찍은 사진, 영화 촬영소에서의 대화 등등 - 이 큰 의미를 갖는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단서들 모두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된다는 점도 고전 본격물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중반부 이후부터는 힘이 서서히 빠집니다. 특히 쉬유이 경장이 병원에서 정신이 든 후 자신이 사실은 옌즈청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후 이야기는 모두 억지스럽습니다. 작가가 반전을 너무 의식한 탓인지 비현실적인 설정이 너무 많은 탓이 큽니다. 일단 옌즈청이 경막하출혈을 일으킨 등의 이유로 스스로를 쉬유이로 착각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 와중에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요. 최초 경찰서에서도 그렇고, 뤼후이메이가 사건 당시 담당 경찰이었던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역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또 착각의 이유가 된 옌즈청의 개인적 수사의 이유 역시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린젠셩의 무고를 확신한 이유가 고작 린젠셩이 걸어온 전화 한 통에 불과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고요. 이 약점을 보완하고자 인간 쓰레기로 묘사되었던 린젠셩이 급작스러운 사고로 고아가 된 옌즈청을 가끔 돌봐주었다는 식의 과거사를 추가한 것도 공정치 못합니다. 린젠셩의 자동차 사고는 고장에 의한 것이었다는 후일담은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작위적 설정의 극치였어요.

게다가 진범이 피해자 뤼슈란의 언니 뤼후이메이였다는 반전은 더 억지스럽습니다. 작가가 CCTV와 같은 제약 조건을 너무 많이 달아 놓은 탓에, 린젠셩이나 옌즈청이 범인이 아니라면 결국 범인은 최초 발견자이자 열쇠를 가지고 있던 뤼후이메이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를 설명하기 위한 내용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뤼후이메이가 본인 스스로를 뤼슈란으로 착각할 이유는 전혀 설명되지 않거든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착각과 그에 따른 동기보다는, 차라리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인간을 응징한다는 린젠셩의 동기가 더 설득력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뤼후이메이가 아친을 살해하려 한다는 결말 역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옌즈청이 진범이라는 옌즈청 본인 스스로의 수사는 당시의 알리바이로 이미 부정된 상황입니다. 때문에 린젠셩이 범인이 아님을 증명할 길은 없어요. 그런데 구태여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 아친은 그냥 조력자에 운전수 역할 정도일 뿐, 탐정 역할은 옌즈청 혼자라 아친을 죽일 이유는 없습니다. 살인으로 아친의 입을 막아 봤자 새로운 수사가 시작될 뿐이고요. 어차피 둥청아파트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가 개봉된다면 세간의 관심을 피할 길도 없을 겁니다.

아울러 단점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핵심 추리 중 하나인 린젠셩이 엄지손가락을 다쳤을 것이다라는 추리는 주어진 단서에 비해 비약이 심합니다. 서툰 글씨에 이은 당구 약속 취소 등으로 추론하고 있긴 하지만, 엄지손가락으로 힘을 주지 않으면 10센티미터가 넘는 상처를 낼 수 없다는 건 다소 약합니다. 두 손을 쓰면 되잖아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영화를 보는 듯한 감각적인 전개는 돋보이고 중반부까지의 몰입도는 역대급이지만 이후 억지스러운 반전의 반복으로 힘을 잃은 작품입니다. 재미 면에서는 나쁘지 않은 만큼 킬링 타임용으로 추천드립니다.

2013/03/19

EBS 천년의 밥상 - 오한샘, 최유진 : 별점 1.5점

EBS 천년의 밥상 - 4점
오한샘.최유진 지음, 양벙글 사진/도서출판 Mid(엠아이디)

EBS 프로그램 "천년의 밥상"의 몇몇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

그러나 돈 주고 살 가치는 없습니다. 이야기가 전체 실려있는 것이 아니라 개요와 간단 레시피, 기타 토막상식 정도만 실려있으며, 실제 "천년의 밥상" 내용보다도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라든가 제작 시 있었던 에피소드, 후일담 등이 비중 있게 실려있기 때문입니다. 책의 출판 의도 자체가 프로그램 애청자를 위한 서비스 측면이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심야식당 X 단츄"와 유사하나, 책 자체만으로도 매력이 있는 독립적 콘텐츠였던 "심야식당 X 단츄"에 비하면 너무나 알맹이가 없었습니다.

인절미 이름의 유래, 밴댕이젓이 별미라는 등은 재미있었고, 각 음식들의 효능을 설명하는 꼭지와 같이 자료적 가치가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허나 프로그램 동영상을 유료로 다운로드받아 보는 게 나은 선택이에요. 별점은 1.5점입니다. 프로그램의 굉장한 애청자가 아니셨다면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1/03/01

해황기 1~45 : 카와하라 마사토시 - 별점 3점

해황기 45 - 6점
카와하라 마사토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몇 년 전부터 보아오던 작품이 드디어 완결되었습니다.

초반에는 중세 분위기의 이(異)세계에서 과학문명을 이용한 '숲지기'라는 존재와 그 이면의 흑막에 대해 그려가는 것 같더니, 어느새 장대한 대하 서사 군웅극으로 탈바꿈합니다. 이 중 흔해빠진 이세계 판타지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한 초반부의 전개는 별로였습니다. 그러나 '월한'의 카자르 세이 론과 손을 잡고 그를 도와 세계를 정복하는 중후반부부터는 엄청난 재미를 선사합니다. 재미의 가장 큰 요인은 '범선'을 이용한 전략을 설득력 있게 그려가는 데 기인하고요. 이만큼 '범선'이라는 소재를 잘 활용한 만화가 또 있을까요? 상선학교 출신이라는 작가의 배경 덕분으로 생각되는데, 정말로 납득할 만한 멋진 전략들이 가득 펼쳐집니다. 그야말로 해양 액션 - 전투물로는 최고 수준입니다.

또한, 약간 안티-히어로적인 면모를 지닌 주인공 판 감마 비젠의 매력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못하는 게 하나도 없는 엄친아 먼치킨이기는 하지만, 말투와 행동을 장난스럽게 그려 밉지 않은 캐릭터로 완성한 것 같습니다. 그 외의 다양한 인물들 역시 전형적이기는 하지만, 작가가 의도적으로 하나씩 어설픈 요소들을 집어넣은 것 같아서 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결말이 약간 시시하기는 하지만, 모든 등장인물의 후일담을 꼼꼼히 알려주고 반전이라면 반전인 의외의 설정을 집어넣었다는 점에서 마지막까지 팬들을 사로잡는 요소는 충분했다 생각되네요.

물론 묘사가 그다지 정교하지 않고 시원한 배경이 대부분이라 작화 면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는 약점과 함께, 범선 전략 이외의 지상에서의 전략과 전투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는 점, 그리고 뒤로 갈수록 너무 전형적인 이야기로 흘러간다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순수 창작 서사물로는 보기 드문 흡입력을 갖춘 작품임에는 분명하기에, 대하 서사 군웅극을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립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아울러, 길이도 적당하고 끝내야 할 때 끝내는 미덕을 갖춘 만화가 최근에는 드문데, 이 작품이 신호탄이 되어 적절하게 매듭짓는 작품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2017/08/18

물건의 탄생 - 앤디 워너 / 김부민 : 별점 3점

여러가지 일상 속 물건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려주는 미시사 만화책입니다. 욕실, 옷장, 거실, 주방, 카페, 사무실, 마트, 술집, 야외라는 8개 항목의 대분류로 구분된 44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정말로 우리 생활 속에 맞닿아 있는 사소한 물건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게 특징입니다. 불과 수 십년 전만 해도 대세였던 고리가 달린 캔 뚜껑 따개를 누가 만들었는지, 지금과 같이 뚜껑이 떨어지지 않게끔 누가 개선했는지 알려주는 식으로요. 덕분에 익히 잘 알려진 이야기들의 비중이 높고요. 문제는 그 중에서도 면도기, 고양이 모래, 비단, 찍찍이(벨크로), 옷핀, 슬링키, 전자레인지, 볼펜, 종이, 포스트잇, 종이봉투, 인스턴트 라면, 아이스크림 콘, 감자칩, 철조망의 15종은 이미 다른 책에서 상세하게 접한 내용이라는 것이지요.
또 220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으로 머릿말, 참고 문헌, 감사의 말 등을 제외하면 이야기 하나 당 4페이지를 갓 넘는 정도라 그다지 밀도가 높다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만화로서 꽤나 재미있는 덕분입니다. 별 것 아닌 이야기에서 나름 드라마를 뽑아내어 전개하고 있어서, 이야기 하나하나가 만화 한 편으로 볼 만 하거든요. 유머러스하게 전개도 즐거웠고요. 흑백 톤으로만 그려져있지만 정확한 뎃셍으로 그려진 작화도 이야기에 딱 맞아 떨어집니다. 이런 부분은 "만화로 보는 맥주의 역사"와는 다른 명확한 장점이죠. 

아울러 1/3이 다른 책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2/3는 새로운, 신선한 정보들이라 이러한 것들을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 비롯된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괜찮았어요. 1904년 흑인 여성 마담 C.J 워커가 샴푸로 대박을 쳐서 미국 최초로 자수성가한 여성 백만장자로 기록되었다는 이야기, 흑인 혼혈 청년 마첼리허르가 네덜란드령 기아나에서 필라델피아로 이주한 후 구두 골 위에 가죽을 씌우는 라스팅 공정을 자동화하는 기계를 발명한 이야기, '요요'는 필리핀에서 유래되었는데 1915년 미국으로 이주한 요요의 달인 페드로 플로레스가 대량 생산을 처음 시작한 후 던컨이라는 미국인에 의해 전국적 인기를 얻지만, 이후 '요요'라는 말은 필리핀어로 장난감을 뜻하는 일상 용어라 제품명 저작권을 상실하고 결국 도산했다는 이야기, 감자칩을 과자의 왕으로 만든 사람은 서부의 감자 칩 여왕 로라 스커더로 그녀가 처음으로 바삭한 감자칩을 유통했다는 이야기, 1922년 흑인 발명가 개릿 모건이 신호등 특허를 출원했다는 이야기 등이 그러합니다.

수박 겉핥기 수준이라도 관련된 Trivia를 소개하고 있는 점도 괜찮았어요. 주로 후일담이나 관련된 이야기들인데, 몇 컷 되지는 않지만 본 편 만큼이나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발명품으로 돈을 벌지 못한 실패자들이 등장하는 장면처럼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예전에 많았던 "학습 대백과" 류의 만화가 떠오르는, 만화의 장점을 잘 살린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