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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5

사라진 남자 (Charlie Muffin)- B 프리맨틀 / 박종원 (일신추리문고31) : 별점 3.5점

찰리 머핀은 영국 정보부의 베테랑 요원이지만 정보부장의 교체 등 인물들이 물갈이 되면서부터 서서히 소외되기 시작했다. 한편 그의 활약으로 붙잡은 소련 KGB의 1급 스파이 베렌코프의 석방을 놓고 궁지에 몰린 KGB 장군 카레닌은 망명의사를 은밀히 피력했고, 그러한 신호를 감지한 CIA와 영국 정보부는 공동 작전을 개시하여 그를 서방세계로 망명시키려 했다. 그러나 담당 정보부원들이 모두 실패하자 어쩔 수 없이 영국 정보부는 찰리 머핀을 작전의 중심 인물로 기용하며, 찰리 머핀은 일생일대의 대 작전에 나서는데...

B 프리맨틀은 일본에서 선정한 "동서 미스터리 100"에 "이별을 알리러 온 남자"라는 작품이 선정되어 있기도 한 유명작가인데 작품을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국내에 소개된 작품이 적은 탓도 크지만요.

줄거리 소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스파이 첩보물입니다. 그러나 이 바닥의 고전인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라던가 "르윈터의 망명"과는 분명히 차별화되는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조국에 대한 충섬심은 배재한체 두뇌게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는 점이죠. 또한 일반적인 스파이들과는 다른 찰리 머핀이라는 캐릭터도 무척 인상적이에요. 잔머리에 강하면서도 프로로서의 자부심도 높고 약간 비열한 면모도 보이는, 그간 다른 첩보물에서 보기 힘들었던 복잡하면서도 독특한 캐릭터였거든요. 이러한 그의 모습이 작품의 재미에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고요.

내용은 베테랑 요원 찰리 머핀의 1인극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의 활약과 두뇌싸움이 중심인데 007같은 단순한 히어로물은 아니며 정보부의 비정함, 서로가 속고 속이는 잔인한 게임을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때문에 현실적이면서도 긴박한 전개가 무척 일품이었어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스파이 첩보물을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립니다. 이미 절판된 책이라 지금 구하기에는 조금 어렵지만 구해볼 가치는 있습니다.

그나저나... 조사해 보니 이 작품을 시작으로 한 시리즈물이던데 이후 작품들도 꼭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특히 "이별을 알리러 온 남자"가 땡기네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시리즈물이 계속될 만한 결말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이어지는지도 좀 궁금하거든요. 덧붙이자면,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부하한테 잘 해줘라" 정도가 되겠습니다....^^;;

2018/03/31

고양이 발 살인사건 - 코니 윌리스 / 신해경 : 별점 3점

고양이 발 살인사건 - 6점
코니 윌리스 지음, 신해경 옮김/아작

SF 쪽에서는 명성이 높은 코니 윌리스가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쓴 작품들을 모아놓은 중단편집입니다.
코니 윌리스 작품은 처음 읽어보는데 아주 재미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다른 작품을 찾아봐야겠다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을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한 작품들 중에서도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수록작 대부분이 평균 이상의 완성도를 갖춘 데다가, 밝고 따뜻하면서 유머러스해서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통 SF라기 보다는 약간의 SF 설정이 가미된 작품들로 일상 - 홈 드라마이자 사회 비판물인 "말하라, 유령", 본격 추리물 "고양이 발 살인사건"과 로맨틱 코미디 첩보물 "절찬 상영중", 그리고 로맨틱 코미디 SF "소식지", 로드무비 "동방박사들의 여정", 일상 드라마인 "우리가 알던 이들처럼"로 장르를 구분할 수 있는데 대부분 기본 이상은 해 줍니다. 친숙한 작품들이 바로 떠오를 정도로 익숙한 클리셰, 설정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장르문학, 컨텐츠 애호가로서 반가왔던 점이에요. 그만큼 볼거리가 아주 풍성합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3점입니다. 하지만 아래 상세 리뷰에서 처럼 별점 5점짜리! 작품도 수록되어 있는 만큼, 장르문학 애호가시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세요.

그나저나, 저도 크리스마스 관련된 이야기를 몇 번 써 보려고 한 적이 있는데 수준 차이가 엄청나네요. 반성하게 됩니다.

"말하라, 유령" 

이혼남으로 책이 유일한 취미인 서점 직원 그레이의 유일한 낙은 크리스마스에 딸 젬마와 보낼 시간이었다. 그러나 서점의 사인회와 전처 때문에 딸을 만나지 못하게 된 그레이는 서점 직원으로 임시 채용된 크리스마스의 유령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는데...

딸 아이를 위해 열심히 해 보려고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꾸만 엇나가는 그레이와 사람을 개과천선 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하는 유령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약간의 판타지 설정으로 흥미를 자아내며 묘사도 일품입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때 바쁜 백화점 서점에 대한 무시무시한 묘사가 압권이에요. 이래서야 정말 빠져나가기 힘들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으니까요. 크리스마스 캐럴을 비롯해 딸 젬마가 좋아하는 소공녀, 그 외에도 디킨스와 월터 스콧의 작품이 많이 인용되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그러나 완벽한 크리스마스 해피 엔딩이 아니라는건 의외였습니다. 마지막에 유령들이 뭔가의 슈퍼 파워로 딸 젬마를 그레이에게 데려다 줄 줄 알았는데 그냥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끝나버리거든요. 돈이 최고고(작 중 표현대로라면 유일한 것), 유령들은 힘도 없고, 크리스마스에 기적 따위는 없다는 결말은 서늘하고 냉소적인 사회 비판 소설에 가깝습니다. 이게 현실적이긴 합니다만 씁쓸하네요. 디즈니 작품과 비슷한 가족 판타지로 위장된 탓에 이런 갭이 더 크게 느껴지는데, 호불호가 많이 갈리지 않을까 싶군요. 저는 다소 불호입니다. 딸아이 아빠로서 젬마는 최소한 행복해졌어야 했기 때문이에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고양이 발 살인사건" 

세계 최고의 탐정 투페는 크리스마스에 친구 브리들링스 대령과 함께 마웨이트 장원으로 향했다. 그곳은 사건을 의뢰한 샬롯 발라디 부인이 영장류를 연구하는 인공지능 연구소로 사람의 말이 가능한 고릴라 달타냥, 추리소설도 좋아하는 똑똑한 침팬치 하이디가 하인으로 일하는 등 연구 실적이 빼어난 곳이었다. 그러나 함께 사는 그녀의 동생 제임스는 영장류를 증오하여 자신이 유산 상속을 받으면 모두 쫓아낸다고 공언한 상태. 다행히 그들의 아버지인 억만장자 알리스테어 경은 치매로 난폭한 바보가 되었지만, 앞으로 수년은 더 살 수 있을 정도로 건강했다.
투페 컴비는 다른 손님들, 기자인 루트거스와 폭스양, 지역 경찰 유스티스 경사, 알리스테어 경의 간호사 파치트리 양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고, 이 와중에 의뢰하는 수수께끼가 단지 영장류의 존재에 대한 질문임을 알게 된 투페는 당장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알리스테어 경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모든 정황이 고릴라 달타냥의 범행임을 암시했는데....

포와로와 헤이스팅스 컴비를 빼닮은 탐정 컴비가 등장하고, 전형적인 영국 장원을 무대로 하는 클로즈드 써클 미스테리입니다.

일단, 고전 본격물에 대한 높은 이해가 돋보여요. 탐정 컴비의 묘사는 물론 장원에 머무는 사람들 모두가 모두가 동기가 있고 수상쩍은 등 여사님 작품에서 보았었던 그런 느낌으로 묘사되거든요. 패러디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고전 캐릭터를 쏙 빼 닮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전형적입니다. 사건과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 역시 고전 본격물 그대로에요. 무엇보다도 추리에 있어서 영장류의 지능이 높다는 설정으로 독특함과 재미를 안겨다 주는 부분이 탁월했습니다. 이 설정이 단지 재미 요소가 아니라 진짜 반전의 핵심 요소인 덕분입니다. 영장류가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과학적 연구 결과를 토대로, 그들이 알리스테어 경을 살해하고 제임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드러나기 때문이에요.

약간의 SF가 가미된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한 정통 본격물로 추리와 재미 모두 기본 이상은 해 주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저와 같은 고전 본격물 팬이시라면 충분히 즐기실 수 있으실 거에요. 별점은 5점!입니다.

"절찬 상영중"

"크리스마스 소동" 이라는 고전 영화를 보기 위해 애쓰는 사라와 그녀가 그 영화룰 왜 못 보는지를 설명해주는 전 애인 잭의 이야기입니다.

일단 사라가 방문한 영화관 시네드롬은 온갖 영화 관련 오락거리가 가득차 있는 일종의 테마 파크인데 크리스마스 즈음하여 손님들이 밀어닥친 탓에 난리도 아닌 상황이 펼쳐지는데, 이러한 복잡한 상황 묘사가 대단합니다. 

그리고 사라가 영화를 보지 못한 이유도 아주 그럴듯해요. 영화를 만든다고 사기를 친 뒤 시네드롬에 돈을 좀 쥐어줘서 아무도 못보는 환상의 상영관을 확보한 후 제작비를 쓴 것처럼 꾸미는 제작사의 음모이고, 이는 백 개도 넘는 상영관을 모두 채우는 건 무리였던 시네드롬에게도 필요했던 사기라는 진상인데 생각도 못했네요.

이러한 내용을 소비자 사기국에서 근무하는 잭의 화려한, 영화를 방불케하는 첩보 작전처럼 풀어나가는 것도 아주 매력적입니다. 사라에게 사 준 티셔츠가 카메라 부착형이라는 아이디어 등 디테일도 볼거리이며, "백만 달러의 사랑", "아이 러브 트러블", "위기의 암호명" 등 비슷한 영화들의 장면 장면과 엮이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거든요. 실제로 로맨틱 코미디 첩보극이라는 장르 공식에 굉장히 충실하기까지 하니 더할 나위 없지요. 그 외 다수 영화들의 인용, 묘사도 흥미로운데, "디워"가 원작에도 언급되는건지는 좀 궁금합니다.

그런데 망한 영화도 매니아가 따라붙고, 온갖 매체에서 흥행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현대 사회에 어울리는 설정같지는 않습니다. 지난 8개월 동안 잭이 연락을 하지 않은 이유도 설명이 부족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즐겁고 유쾌한 작품임에는 분명한데, 소설보다는 영상물에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네요.

"소식지" 

크리스마스를 앞 둔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착해졌다. 이를 처음 눈치챈 건 주인공 "나"의 직장 동료이자 그녀가 흠모하는 이혼남 게리였다. 둘은 곧 착해진 사람들이 모두 모자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다른 악영향없이 착해지기만 한 탓에 이를 밝히고 처리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착해진 사람들의 몸 관절이 이상해지는 부작용을 알아낸 주인공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생수를 박멸하고자 직장과 집의 온도를 올렸다(모자를 벗게). 다행히 기온이 올라 이 소동은 자연스럽게 마무리된다...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따뜻한 로맨틱 코미디로 변주된 "신체 강탈자의 습격 (바디 스내쳐)" 입니다. 기생수의 부작용이 착해지는 거라니 정말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네요. 이변을 눈치채지만 착해지는 게 과연 무슨 문제인지?를 고민하는 주인공들의 딜레마도 웃음을 자아내고요.

하지만 디테일이 좀 지나쳤습니다. 보다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을텐데, 과유불급이랄까요? 제목이기도 한 가족들 간의 '소식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람들의 이변을 강하게 드러내는 소품이기는 하지만 구태여 등장시킬 필요는 없었어요. 지역별 편차가 있고 이유는 기온이다!를 드러내려면 TV나 신문 등의 뉴스로 충분했을 테니까요.
등장인물들도 너무 많은데, 이 역시 주인공과 게리가 잘 되게 만드는 식으로 깔끔하고 단순하게 마무리하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아이디어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별점은 3.5점입니다. 크리스마스에 걸맞는 멋진 이야기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여정" 

눈보라가 휘몰아쳐 도로가 통제되는 와중에서 자기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계시에 따라 예수를 찾아나선 목사 멜과 친구 BT, 그리고 여행 중 만난 여성 캐시 3인의 여정이 그려진 작품입니다.

한마디로 동방박사 이야기를 현대로 가져온 일종의 로드 무비(?)입니다. 백인 목사, 흑인 과학자, 전직 영어 교사인 여성 3인이라는 파티 구성도 나름 완벽해서 눈길을 끌고요.

그러나 여정에 대해 상세하게 그린다기 보다는, 실제로 동방박사가 겪었음직한 고뇌(이게 계시가 맞는지? 내가 미친건 아닌지? 와 같은)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드라마적 재미는 별로 없어요. 독백과 종교적 고뇌로 가득찬 작품이 애초에 재미있을 리가 없지요.
게다가 중간, 중간 계시와 유사한 카니발 조명과 예수일지도 모르는 카니발 운전사 등의 존재가 조금씩 드러나는데, 그 정체가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차라리 알 수 없는 계시의 파편을 모아 그것을 토대로 여행의 목적지를 정하는, 일종의 추리 과정이라도 동반되었더라면 나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데 이런 이야기는 비중이 너무 작아서 아쉬웠어요.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결말이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결국 이 세 명이 카니발을 찾아가 예수(?)를 만나는지, 그들을 방해하는 헤롯왕의 수하들은 누구인지 등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마무리 되는 탓입니다. 이래서야 모험이 시작되자마자 이야기가 끝나는, "반지의 제왕" 1부와 같은 수준의 도입부에 불과합니다.

크리스마스에 적합한 이야기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완성된 이야기냐는 측면에서는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네요. 수록작 중 개인적으로는 최악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우리가 알던 이들처럼" 

책 뒤에 작가가 꼽은 크리스마스를 다룬 최고의 영화, 책, TV 시리즈가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영화 중 최고는 "러브 액츄얼리"를 꼽고 있더군요. 이 작품은 작가가 나름대로 변주한 "러브 액츄얼리" 입니다. 족 모임을 위해 오리를 구우려는 루크, 이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미구엘의 양육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파일러, 남편과 사별하고 멕시코로 여행온 베브, 아내 마진를 두고 불륜을 저지르는 워런, 크리스마스 이브 결혼식을 주장하는 친구 스테이시의 들러리로 여행 온 폴라,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대폭설을 연구하는 네이선 박사와 조수 진성 등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다양한 등장인물이 한 꼭지 씩 이야기를 선보이다가 마지막에 연결되는 결말인데 전개 방식이 똑같거든요. 대부분 해피엔딩이며 감동적인 이야기와 적절한 코미디가 섞여 있다는 점도 비슷하고요. 차이점이라면 이야기들 속 대 소동이 일어나는 원인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대 폭설" 이라는 SF적인 설정이라는 것 뿐입니다.

모두 재미있고 따뜻하며, 크리스마스에 잘 어울리는 가정적인 이야기들입니다. 도저히 싫어할래야 싫어할 수가 없어요! 거짓말을 하다가 파멸한 불륜남 워런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과는 결이 조금 다르지만, 아주 속 시원해서 마음에 들었고요. 무엇보다도 대폭설의 원인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 이 모여서 일어난 것이라는 어처구니없으면서도 크리스마스다운 발상이 아주 좋았습니다.

한마디로 대미를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던, 반짝반짝한 작은 소품들이 모인 선물 상자같은 작품으로 별점은 4점입니다. 이 작품도 영화로 꼭 만나보고 싶어지네요

2024/03/03

나이트 스쿨 - 리 차일드 / 정경호 : 별점 2점

나이트 스쿨 - 4점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96년 어느날, 잭 리처는 미 육군 수훈장을 받은 날 '학교'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학교'에서 리처는 FBI의 케이시 워터맨, CIA의 존 화이트와 만났고, 그들 모두 조직 최고의 요원으로 특별한 작전을 위해 소집되었다는걸 알게 되었다. 불법무장단체가 '1억달러'라는 거금을 주고 어떤 미국인으로부터 무언가를 사려고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기 때문이었다. 세 명은 그 미국인이 누구이며, 팔려는 물건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작전에 돌입했다.
거래가 있던 독일 함부르크로 향한 리처는 목격자 설명에 따른 몽타쥬를 통해 미군 탈영병 윌레이가 범인이라는걸 밝혀냈다. 윌레이의 은신처는 그가 사용했던 가명을 통해서, 그리고 윌레이의 주변 사람들 증언을 통해 그가 팔아넘긴게 '소형 핵폭탄'이라는 것까지 알아냈지만 윌레이는 시체로 발견되고 마는데.....

잭 리처 시리즈 21번째 작품. 원제는 동일합니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의 정체와 그가 팔려는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전개는 일종의 첩보물을 연상케합니다. 첩보물에서 "숨어있는 적 정보원, 그리고 그가 확보한 중요 단서"를 찾으려는 설정, 과정과 거의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수사물의 기본 얼개와도 비슷하기에 잭 리처의 추리도 많이 선보이고요.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이미 드러난 윌레이의 가명들을 통해 그가 현재 쓰고 있는 가명을 추리해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윌레이가 먼저 사용했던 가명은 '에른스트'와 '겝하르트'였습니다. 리처는 마지막 남은 이름은 '아이작 H. 켐프너'라고 추리합니다. 윌레이는 텍사스 슈거 랜드에서 나고 자라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텍사스 최초의 독일 정착촌을 설립한 에른스트, 텍사스 출신의 유명한 핫소스 창업자 겝하르트의 뒤를 이을 이름은 슈거 랜드를 이룩한 슈거 랜드의 아버지 아이작 H. 켐프너 뿐인 것이지요. 실제로 윌레이가 쓴 가명도 아이작 헤르베르트 켐프너였습니다. 우리나라로 번안하자면 LG 트윈스 팬인 범인이 첫 가명을 "김용수", 두 번째 가명을 "이병규"라고 했다면 마지막 가명은 "박용택"이다!라고 하는 느낌이겠지요? 텍사스와 독일계 미국인에 대해 엄청나게 자세하게 알아야 풀 수 있는 추리이기는 하지만, 재미있었어요.
현장을 분석하여, 윌레이는 물건을 배로 실어 나를 생각이었다, 그래서 트럭을 항구 근처 창고에 숨겼을 것이다, 그 창고는 트럭 2대가 들어갈 양문형에 추가 잠금 장치가 되어 있을 것이다는 추리도 좋았고요.

윌레이가 팔려고 했던 물건이 그가 입대 동기로 이야기했던 "데비 크로켓 때문에 군인이 되고 싶었다."는 말이라던가, 유년 시절 함께 살았던 엄마의 정부 "삼촌"의 경력 등이 토대가 되어 천천히 정체가 드러나는 과정도 합리적이며, 무척 흥미로운 부분이었어요. 미군이 냉전시절 개발했던 소형 핵폭탄이 착오로 버려진걸 윌레이가 확보했다는 정체도 괜찮았고요. 유럽과 미국이 '1'을 쓰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에 착안하여 현재 위치를 찾아내었다는 아이디어도 그럴싸 했습니다.

"1030"의 니글리, 오로스코의 등장도 반가왔습니다. 만나는 모든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리처가 가장 신뢰하며 오래되었을 부하 니글리와는 관계를 맺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그 이유가 밝혀지기도 하고요. (접촉 기피증)

하지만 이야기를 지나치게 길게 늘린 느낌이 듭니다. 앞서 대단한 듯 했던 '학교'에서의 멤버들 중 FBI와 CIA는 별 쓸모가 없습니다. 실제 독일에서의 활약은 니글리와 오로스크라는 리쳐의 인맥과 독일 경찰 그리즈만이 활용되었으니까요.
윌레이가 거래가 마무리 되기 전까지 몸을 사리지 않고 매춘부와 즐기다가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범행은 전개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고, 윌레이의 정체가 드러나는데 별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독일 경찰 그리즈만은 리처를 돕지만, 뮬러는 배신해서 극우 조직의 리더인 드레믈러에게 정보를 팔아넘긴다는 설정도 똑같아요. 극우 조직이 이 사건에 개입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범죄 조직과 극우 조직이 비록 종이 한 장 차이일 수는 있어도, 비교적 성공한 사업가인 드레믈러가 돈 때문에 물건을 빼았앗을리는 없어서 개연성도 부족합니다.
이런 불필요한 요소는 최대한 배제하고, 윌레이를 보다 신중한 인물로 그린 뒤 그와의 대결에 집중했어야 했습니다. 지금의 여러가지 설정들은 이야기만 길게 만들었을 뿐으로 지루하기까지 했습니다. 윌레이와 드레믈러의 최후는 시시하기까지 하고요.

타국에서 일종의 비밀 작전을 벌이는 것이라 액션이 별볼일 없다는 단점도 큽니다. 리처가 드레믈러를 제외한 악당을 아무도 죽이지 않아서, 다른 작품들만큼의 파괴에 대한 쾌감은 부족하거든요. 당연히 펼치는 액션과 무기에 대한 설명도 부실한 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리처의 군 시절 활약이 펼쳐진다는 특이함은 팬으로서 기뻤지만, 전체적으로는 평작에 가깝습니다.

2017/04/08

콘돌의 6일 - 제임스 그레이디 / 윤철희 : 별점 2점

콘돌의 6일 - 4점
제임스 그레이디 지음, 윤철희 옮김/오픈하우스

코드네임 '콘돌'인 정보원 말콤은 CIA 조직에서도 한직인 미국문학사협회에서 일하며 하루하루를 한가하고 무료하게 보내던 중,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다른 동료들이 모두 몰살당하고 말았다. 말콤은 '패닉 넘버'로 사건을 보고했지만, 오히려 조직 내 끄나풀에 의해 살해당할 위기에 처했다. 운 좋게 살아남아 도주에 성공한 말콤은 스스로 사건의 진상을 더듬어 나가기 시작하는데...

"콘돌"은 오래전 극장에서 감상했던 영화였습니다. 찾아보니 국내 개봉이 1989년이었더군요. 1975년 영화이니 국내 개봉은 무척 늦은 편이지요. 14년이나 뒤에 개봉할 정도로 큰 화제를 몰고 온 작품은 아닌데 좀 희한하군요. 여튼, 한창 전성기였던 로버트 레드포드와 페이 더너웨이가 주연을, 거장은 아니더라도 몇몇 작품("투씨", "아웃 오브 아프리카")으로 영화사에 큰 자취를 남긴 시드니 폴락 감독을 맡은 작품으로 당시 저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정말 너무나도 재미있게 감상했었습니다. 그때까지 보아왔던 영화 중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요. 어린 마음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흥미로왔던 첩보 스릴러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쪽 장르 영상물로는 역시 비슷한 시기 TV에서 감상했던 리처드 체임벌린 주연의 "잃어버린 얼굴 (본아이덴티티)"와 제 추억 속에서는 쌍벽을 이룹니다. "아이거빙벽"까지 해서 저만의 3대장인 셈이지요.

서론이 길었군요. 이 책은 바로 그 영화의 원작 소설입니다. 오픈하우스에서 선보인 장르문학 시리즈인 '버티고'시리즈 중 한 권으로, 원작이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이렇게 번역, 출간되니 너무 반갑네요. 

그런데 제 기억 속 영화에 비하면 소설의 완성도와 재미는 기대 이하였습니다. 물론 영화는 경험치도 높지 않고, 접해본 컨텐츠도 많지 않았던 어린 시절 감상했던 탓에 과하게 좋은 평가를 내렸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소설의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영화화된 인기작답게 아예 형편없지만은 않아요.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이런 것 까지? 라는 생각이 드는, CIA 같지도 않은 독립적이고 한가한 정보 분석 부서 '미국문학사협회'에 대한 설정은 분명 독특하니까요. 여기서 일하는, 현장 요원이 아닌 말콤(콘돌) 설정도 타 첩보물과 차별화되는 부분이고요. 군인이나 경찰 출신도 아니고, 석사 학위 필기 시험 때 "돈키호테"를 '네로 울프'에 비교하여 쓴 답안지 덕분에 취직에 성공한 문학 전공자라니 정말 독특하잖아요.

미국문학사협회 직원들이 급작스러운 습격으로 몰살당한 후, 숨겨진 뒷문으로 점심을 사러 갔던 말콤만 운 좋게 살아남아 목숨을 걸고 도망다니면서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노력한다는 중반부까지의 전개도 흥미롭습니다. 별다른 훈련도 받지 않은, 무늬만 정보 요원인 말콤이 여러가지로 머리를 짜내어 도주하는 과정이 아주 그럴듯해서 설득력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CIA의 핵심 인물인 '노인'과 케빈 파웰이 말콤을 찾아내기 위해 벌이는 수사의 디테일도 빼어나고요.
참고로, 여기서 주는 교훈이라면 도주할 때에는 절대 이발소를 찾아가지 말라는 것. 결국 이발소를 통해 모든 행적이 드러나게 되거든요. "아저씨"의 원빈처럼 직접 자르는게 답인 듯 싶네요.
아울러 이만한 이야기를 200페이지를 갓 넘는 분량으로 소화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말콤이 웬디를 만나 은신하기 시작한 후 부터는 별로입니다. 우연에 의한, 작위적 설정으로 점철되어 있는 탓입니다. 애초에 웬디가 말콤의 말만 믿고 몸과 마음을 바쳐가며 도주를 돕는다는 설정부터 작위적입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헐리우드 스타일 도주극이 그러하니 여기까지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워싱턴에 변장하고 다시 잠입한 말콤과 웬디가 '우연히' 마로닉을 만나게 되어 총격전이 벌어지고, 이 와중에 말콤이 마로닉과 함께 있던 동행의 차 번호판을 기억하여 주소를 알아내는 과정은 개연성이 너무 떨어집니다. CIA 내부의 흑막이 벌이는 행동치고는 지나치게 허술하다는 것도 문제고요.
이후 저택에 숨어든 말콤이 사로잡혀 죽을 위기에 빠지지만 마로닉에 의해 살아남는 과정도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마로닉이 구태여 말콤을 살려줄 하등의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건 사건이 왜 일어났으며, 진상이 무엇인지를 악당 시점에서 상세하게 설명해주려는 목적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악당 마로닉이 자기 입으로 진상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그 다음에 말콤이 공항까지 찾아가 마로닉을 사살한다는 결말도 뜬금없습니다. 진상이라도 대단하면 모를까, 마약 밀수 때문이라니 좀 허무했어요. 웬디가 죽지 않아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마지막 장면은 사족에 불과하고요. 

영화의 디테일이 모두 기억나지는 않지만, 마지막 장면만은 확실히 기억납니다. 신문사를 찾아가 모든걸 폭로한 '콘돌'과 정부 요원이 대화를 끝낸 후 인쇄된 신문이 쌓이는 장면이었습니다. 신문에 말콤이 이야기한 사건이 실렸을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 여운도 남기고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게 만드는 멋진 결말이었습니다. 다른건 몰라도 결말만큼은 영화가 백만배는 더 뛰어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독특한 캐릭터만큼은 높이 평가하나, 그 외에는 딱히 특기할 점이 없는 스파이 소설입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영화를 구할 수 있다면 영화로 감상하는게 훨씬 낫습니다.

2023/04/22

침저어 - 소네 게이스케 / 권일영 : 별점 2.5점

침저어 - 6점
소네 게이스케 지음, 권일영 옮김/예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사 2과 소속 후와 경부보는 일본의 국회의원인 중국 공작원 - '침저어' - 멕베스가 누구인지 밝혀내는 수사에 가담했다. 곧 거물 정치인 아쿠타가와 의원이 유력한 멕베스 후보로 떠올랐다. 아쿠타가와의 비서 이토 마리가 중국 공작원으로 의심받는 우춘시엔과 만났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이토 마리가 실종되었고, 그녀의 노트북에서는 비밀 문서인 요코다 페이퍼까지 발견되어 혐의는 더 짙어졌다.
망명 요청을 한 중국 외교관 류잉캉의 증언으로 후와는 멕베스는 조작이라 여기게 되었지만, 수사본부를 장악한 고미 일당은 아쿠타가와가 멕베스이며, 후와는 중국 밀정인 두더쥐로 생각했다. 후와는 어쩔 수 없이 멕베스 사건 지휘자 도쓰이 관리관에게 직접 보고했고, 류잉캉의 증언으로 또다른 거물급 정보원 '시벨리우스'를 체포해서 멕베스 조작설의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에 고미는 직접 류잉캉을 심문하러 나섰지만, 중국 공작원들에게 습격당해 류잉캉은 빼앗기고, 고미마저 치명상을 입었다. 후와의 직속 후배이자 부하 와카바야시는 이 사건이 자기 탓이라 자책했고, 그가 두더쥐였다는게 밝혀졌다.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포섭되었었다. 그리고 사라져버린 와카바야시의 행방을 찾는 무리에 후와마저 납치당했다.
풀려난 후와는 도쓰이 관리관에게 베이징의 책략을 폭로했다. 알고보니 멕베스는 아쿠타가와 겐타로가 맞았고, 류잉캉의 증언을 포함한 모든 건 이를 들통나지 않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첩보 미스터리. 일본에서 국제적인 정보전이 펼쳐진다는 설정이 특이했는데, 흡입력은 상당합니다. 거물 공작원 멕베스가 누구인지, 멕베스의 존재 자체가 가짜가 아닌지, 경찰 내부의 두더쥐는 누구인지 등 다양한 수수께끼가 등장하는 덕분입니다. 국회의원으로 대표되는 입법부와 경찰 조직간의 역학 관계, 고미 일당과 후와 경부보간의 알력 다툼 등 여러 갈등도 재미를 더해주고요.

하지만 기본적인 이야기 전개에서 헛점이 느껴지는건 아쉽습니다. 우선, '멕베스'의 존재가 드러난건 수사본부 발족 2개월 전 미국에 망명했던 중국 고위층 인물 후샤오밍의 증언 때문입니다. 중국은 이 증언 자체가 가짜라고 여기게끔 공작을 벌이고요. 그래서 류잉캉에게 거짓 증언을 시켰죠. 목적은 당연히 멕베스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첫 번째는 왜 아쿠타카와의 비서 이토 마리가 우춘시엔과 만나는걸 방치했냐는 것입니다. 수사가 2개월 뒤에 시작되었으니, 이 만남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습니다. '멕베스가 아쿠타카와가 아닌가 생각되었지만 그건 조작이었다!'보다는 '멕베스는 조작으로 누구인지 실체가 없다!' 쪽이 훨씬 안전한 선택입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두 번째는, 왜 이토 마리를 납치해서 살해하고 노트북에 비밀 서류가 있다고 조작했냐는 것입니다. 마리는 중국이 죽인걸로 보이는데, 앞서 말했듯 중국은 멕베스라는 존재 자체가 가짜라고 여기게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그렇다면 아쿠타카와가 의심을 살 단서를 조작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래서야 아쿠타카와에게 수사가 집중될 뿐입니다. 게다가 이토 마리의 만남은 후와의 수사로 문제가 없다는게 밝혀졌습니다. 자료는 '두더쥐' 와카바야시에게 넘겨주었으니 중국도 그 사실을 입수할 수 있었고요. 도대체 중국은 무슨 생각이었던걸까요?
일본측 목적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은 아쿠타카와가 멕베스라는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아쿠타가와는 이중 스파이였으니까요. 수사에 나서지 않으면 중국이 이상하게 여길테니 외사과를 투입하기는 했지만, 아쿠타가와의 정체가 드러날 수사를 진행할 필요는 없었어요. 드러난 증거로 소모적인 수사만 시키다가, 멕베스가 조작된 정보라는 것만 고미 일당에게 충분히 설명해 주고 수사본부를 해산하면 됐습니다. 물론 이토 마리가 실종되고 노트북에서 기밀 정보가 발견된 이상, 누가 보아도 아쿠타카와를 수사해야 하는 상황이라 수사를 중지시키는건 어려워졌긴 했습니다만. 더더욱 중국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지는군요.
차라리 멕베스는 다른 누군가라고 후샤오밍이 명확하게 말했고, 중국은 그 사실을 숨기려고 "멕베스는 아쿠타카와다!"라고 속이기 위한 작전을 펼쳤으며, 일본은 "아니, 우리는 차라리 후샤오밍의 증언 자체가 조작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래"라고 받아치다가 후와에 의해 "알고보니 멕베스는 OOO이었다!"라고 드러나는 전개가 단순하지만 더 설득력있었을 겁니다.

이런 알 수 없는 양국 행태에 비하면 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와카바야시의 두더쥐 활동은 차라리 깔끔한 편이기는 합니다. 일본측 - 도쓰이 관리관 - 이 와카바야시도 이중 스파이로 이용했다는 설정도 나쁘지 않았고요. 문제는 와카바야시를 커뮤니케이션이 지극히 떨어지는 기묘한 인물로 설정했다는 점입니다. 도무지 감정이입하기 힘들었습니다. 다른 인물들도 그리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후와 경부보는 일본 하드보일드물에 흔하디 흔한 한 마리 고독한 늑대, 고미 일당은 전형적인 깡패 형사들이고 그 외 인물들도 스테레오 타입에 가까운 탓입니다. 모든걸 알아챈 후와가 지인이자 어둠의 실력자 왕 영감의 도움으로 탈출하고 사라지면서, 뭔가 후속작에 대한 여운을 남기는 결말도 진부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단점을 잔뜩 언급하기는 했지만, 재미는 있습니다. 첩보물로의 미덕은 잘 살아있고요. 란포상 수상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재미삼아 한 번 읽어볼 만은 합니다. 

덧붙이자면, 뒤에 함께 수록된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 소감이 놀랍습니다. 작가는 명문대 와세다 대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했는데, 그 이유가 "빤한 인생을 살기 싫다" 였다니까요. 그래서 일부러 망해가는 사우나, 어두컴컴한 만화 카페 등에서 일했고 만화 카페에서조차 급여와 직책이 오르기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껴 사표를 냈다니 놀랍습니다. 1967년 생이니 이런 결심을 했을 때에는 이미 일본에서도 버블 경제는 끝나서 그렇게 만만한 삶을 살기는 힘들었을텐데 말이지요. 또 정작 발표한 작품은 비교적 뻔하다는걸 보면 인생관, 가치관과 결과물이 비례하는건 아니라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2014/12/11

게물랭의 댄서 - 조르주 심농 / 성귀수 : 별점 2.5점

게물랭의 댄서 - 6점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열린책들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 샤보와 르네 델포스는 단골 캬바레 게물랭을 털 계획을 세우고 심야에 몰래 잠입했다. 그러나 그들은 캬바레 안에서 시체를 발견했고, 혼비백산하여 도주했다. 시체가 동물원 앞에서 유기된 채 발견된 후, 수수께끼의 사내에게 미행당해 불안감에 사로잡힌 두 젊은이는 달리 마련한 돈을 처분하기 위해 다시 게물랭에 방문했다. 그러나 장 샤보가 경찰에 체포되고 마는데...

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경감 시리즈 중 한 권으로, 1931년도 작품입니다. 연표를 보니 상당히 초기작이네요.

제가 읽었던 메그레 경감 시리즈 중 단언컨데 가장 이색적입니다. 다른 시리즈 작품과 차별화되는 점을 하나씩 열거해 보자면,

  1. 거의 책의 절반 분량까지 메그레 경감은 등장하지 않고 방탕한 청년 장 샤보의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점.
  2. 사건 발생 및 해결 모두가 벨기에의 리에주라는 도시에서 이루어진다는 점.
  3. 일상 속 범죄, 현실 속에 감추어진 어두운 드라마가 중심이었던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국제적인 첩보조직이 등장하는 등 약간은 모험 소설 같은 파격적인 설정을 갖추고 있다는 점.
  4. 메그레가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유행했던 본격물 탐정들과 같은 대담한 추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

입니다.

이 중 추리소설 애호가로서 네번째 항목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피해자가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했지만, 그 뒤 경찰을 어떻게든 따돌리려 시도한 이유에 대한 추리가 핵심인데 셜록 홈즈의 추리법이 연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추리의 결과가 황당하지만, 그게 사실에 거의 부합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합니다. 또 독자에게 비교적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도 역시나 고전 본격물스럽습니다. 앞서 언급한 피해자의 기이한 행동, 담배갑을 델포스가 가지고 있다고 입을 맞춘 게물랭 직원과 댄서의 증언으로 장 샤보가 늪에 빠지지만 이후 진상이 밝혀진다는 디테일, 르네 델포스가 훔쳤다고 증언한 2천 프랑의 출처 등이 대표적입니다. 피해자가 최초에 죽은 척 한 것이라는 일종의 트릭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여러모로 심농이 다른 경쟁자들을 의식해서 “나도 이런 거 쓸 수 있다구!” 라는 마음가짐으로 써내려간 느낌이 듭니다.

심농 작품다운 심리묘사와 배경 묘사도 여전합니다. 특히 시체를 발견하고 경찰(로 생각되는)에게 쫓긴다고 생각하는 철부지의 심리묘사가 상당히 볼거리였어요. 적절한 분량이라는 미덕 역시 동일하고요.

하지만 약간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메그레 스스로 시체를 은닉했다는 중요한 정보를 나중에 알려주는 것은 공정치 못합니다. 마지막에 아델의 집으로 빅토르와 델포스가 잠입하여 물건을 회수하려 한 까닭도 잘 모르겠고요. 마지막 장면은 주요 등장인물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놓고 메그레가 진상을 설명하는 추리쇼 형태라서 무리수를 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것까지 다른 고전 본격물을 따라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아울러 피해자가 사실은 비밀첩보원이었고, 암호로 된 편지까지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고전 명작 중 잠수함 설계도를 다룬 작품들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만, 게물랭이 국제적인 첩보 조직에 속한 곳!이라는 설정도 많이 엉뚱합니다. 차별화되는 요소였을지는 모르나 설득력 측면에서는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래도 결론내리자면 추천작입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메그레 시리즈의 일반적인 스타일을 사랑하는 독자에게는 호오가 갈릴 수 있고, 제 기대와도 약간 달라서 감점하지만, 추리 애호가라면 즐길거리가 많고 심농만의 장점도 여전히 유효한 독특한 작품입니다.

2022/03/13

모돌이 탐정 1~4 세트 - 전4권 - 이우정 : 별점 2점

모돌이 탐정 1~4 세트 - 전4권 - 4점
이우정 지음/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우정 화백의 고전 추리 만화입니다. 드디어 복간되었네요. 그야말로 전설의 작품으로 저는 어린 시절 "소년 중앙" 독자로 이 작품이 연재될 때 실시간으로 일부 에피소드를 감상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 감개 무량합니다.

전 4권 세트로 모돌이 탐정의 시작을 알리는 탄생편, "쥐덫"을 각색한 "잊혀진 산장", 추리물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스케일의 첩보물이자 범죄물인 "홍콩 대탈출", 바닷 속 보물을 찾는 "보물 찾기", 그리고 등장인물 중 한 명이었던 장미가 주인공 탐정으로 등장하는 스핀오프인 "여탐정 장미"까지 모두 다섯 편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중 크리스티 여사님의 "쥐덫"을 70년대 후반 한국을 무대로 각색한 "잊혀진 산장"은 제법 읽을만한 추리물입니다. 6.25 때 있었던 비참한 과거가 동기가 되었다는 각색과 진범이 사라졌던 오빠가 아니라 '북괴'의 일원이었다는 반전이 괜찮습니다. 시대 상황을 볼 때 충분히 있음직한 이야기였으니까요. 모돌이의 활약도 인상적이었고요. 세세한 부분을 들면 문제가 없지는 않겠지만, 당시 아동 눈높이에는 잘 맞춰진 좋은 이야기였습니다.

"보물 찾기"에서 보물이 진주를 품고 있는 조개였다는 발상도 꽤 그럴듯했고, 마지막 에피소드인 "장미 탐정"은 괜찮은 암호 트릭도 눈여겨 볼 만 하지만 무엇보다도 '스핀 오프' 작품이라는게 인상적입니다. 시대를 앞서간 발상이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일부만 아슬아슬하게 합격권일 뿐이고,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추리 만화로서의 완성도는 지극히 낮습니다. 추리의 여지도 거의 없고, 그나마 있는 추리와 계획 모두 유치한 탓입니다. 특수 도료를 사진으로 찍으면, 현상한 사진이 특수 도료와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발상, 뱀을 피리로 조종하여 사람을 죽인다는 등의 트릭이 난무하니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몇 개의 암호 트릭 정도는 괜찮았지만 남발하는 느낌이 강하고요.

설정도 문제에요. 모돌이 탐정은 작품 전체에 걸쳐 슬랩스틱에 가까운 개그만 하고, 추리는 모두 조수인 표표와 박돌이에게 시키는 악덕 고용주로 그려집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장면에서는 모든게 자신의 계획이었다는 식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이게 뭔가 싶더군요. "우뢰매"로 따지면, 앞 부분의 모돌이는 바보 형래이고 뒷 부분은 에스퍼맨으로 등장하는 셈인데 "우뢰매" 만큼의 설득력도 없습니다. 에스퍼맨은 변신이라도 했다지만 모돌이는 그런것도 없으니까요. 개그와 추리, 둘 중 하나만 선택하는게 바람직했습니다.

정교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운과 우연에 많이 의지하는 전개도 감점 요소였고, 시대를 여실히 느끼게 하는 작화도 가독성을 크게 저해했습니다. 일관성도 없어요. "장미 탐정" 에피소드는 다른 사람이 그린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이런 단점은 작품이 발표된 시기와 연재된 매체를 고려해보면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무려 50년이 지났으니 어쩌겠습니까. 모르고 구입한 것도 아니고요. 값을 지불할 수 없는 추억을 다시금 소장할 수 있게 되었다는걸 기뻐해야 하는게 맞겠지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하지만 다른 분들께 권하기는 어렵습니다. 추억 외에 다른 가치는 거의 없다시피 한 탓입니다. 4만원이라는 정가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2021/03/28

사라진 남자 (Charlie Muffin) - B. 프리맨틀 / 박종원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찰리 머핀은 영국 정보부의 베테랑 요원이지만 정보부장이 엘리트 군인 카스버트슨 경으로 교체된 뒤, 그를 싫어하는 부장과 다른 애송이 엘리트들에 의해 홀대와 좌천은 물론 죽을 위험까지 겪게 되었다. 한편, 찰리 머핀의 활약으로 체포된 소련의 1급 스파이 베렌코프의 석방 지연으로 궁지에 몰린 KGB의 수장 카레닌은 망명 의사를 은밀하게 피력했고, 영국 정보부는 카레닌을 받아들이기 위한 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카레닌과 접촉했던 애송이 해리슨은 사살당했고, 스네어도 체포되자 카스버트슨은 어쩔 수 없이 찰리 머핀을 작전 전면에 내세웠고, 찰리 머핀은 단독으로 진행한 카레닌과의 대화에서 입수한 정보로 CIA 수장 거슨 라트거즈를 협박하여 협조를 이끌어 내었다. 그리고 카레닌 망명의 D-Day가 다가오고, 그가 국경을 넘기로 계획한 오스트리아에는 수백명의 영국 정보부와 CIA 요원은 물론 두 수장까지 자리잡아서 카레닌 망명을 기다리는데....

원제는 "Charlie Muffin"으로 브라이언 프리맨틀의 스파이 소설입니다. 작가의 대표작으로 오래전 '동서 미스터리 100'에서 4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지요. 무려 "빅 슬립"보다 순위가 높습니다! 이미 14년 전에 읽고 리뷰를 남겼었지만, 책 정리 중 우연찮게 다시 집어들어 읽어보게 되었네요. 워낙 오래전에 읽어서 그런지, 처음 읽는 느낌이었어요. 심지어 마지막 반전마저도 기억나지 않았으니 처음 읽는 것과 다를바 없지요.

이 작품의 재미를 책임지는건 주인공 찰리 머핀입니다. 궁지에 몰려도 항상 퇴로를 마련하는 능력있는 스파이로서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된 덕분입니다. 액션 없이 주로 대화만으로 긴장감을 자아내게 만드는 전개도 빼어나고요. 찰리 머핀이 카레닌 장군과 손을 잡고, 영국 정보부와 CIA 주요 요원과 부장들까지 소련에 체포되는 배신을 저지르는 반전도 좋았어요. 배신한 동기에 대한 설명도 확실해서 설득력도 높습니다. 진짜 프로임에도 불구하고 새로 부장으로 부임한 헨리 카스버트슨 경과 그가 총애하는 젊은 애송이들에게 무시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기 때문이거든요. 퍼블릭 스쿨 출신 엘리트가 아닌 낮은 신분 출신으로, 외모도 보잘 것 없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 탓이니 복수를 당해도 싸죠. 애송이 해리슨은 사살당하고, 스네어는 체포된 뒤 세뇌 공작으로 광인이 되며 카스버트슨은 소련에 체포된 뒤 실각하게 되는 결말인데, 안타깝다기보다는 속 시원했습니다.

이렇게 찰리 머핀이 배신하는 반전에 대한 단서, 복선도 충실하게 짜여져 있어서 이야기 완성도도 높은 편입니다. 비교적 초반에 묘사되는, 체포된 러시아 스파이 베렌코프와의 회견 장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베렌코프는 찰리 머핀에게 러시아는 결코 스파이를 잊지 않는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거들떠 보지도 않지 않는다며 "찰리, 나는 결단코 당신네 나라의 조직에서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말합니다. 찰리는 그게 체포되지 않기 위한 큰 동기라고 답하지만 베렌코프는 "그래 가지고 어떻게 자기 부하가 일을 잘 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소. 물론 러시아에도 여러 가지 결함은 있소. 하지만 적어도 충성심이라는 것은 존재합니다"라고 응수하지요. 베렌코프가 한 말 그대로 찰리 머핀은 충성심 따위는 잊고, 복수와 개인 영달을 위해 마지막 작전을 벌이게 됩니다. 그 외에도 초반부 찰리 머핀이 유럽으로 향했던 2주간의 휴가, 베렌코프와의 여러 번 회견에서의 대화도 모두 복선 및 단서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또 14년 전에 읽었을 때 보다 '조직 관리'와 '역량 평가' 부분이 더 눈에 들어왔던게 신기했어요. 저도 직장에서 어느 정도 리더, 매니저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제가 보기에 찰리 머핀은 그 전문성을 인정하여, 위에서의 관리를 최소화하고 최대한 업무 진행, 의사 결정의 권리를 주어야 하는 인재입니다. 그러나 영국 정보부는 찰리 머핀의 역량을 잘못 판단하여, 조직원이 조직에 대한 충성과 애정 모두를 잃고 떠나게 만드는 최악의 조직 관리를 보여줍니다. 상사가 전문성이 부족했던 탓이죠. 저도 이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보다 부단히 노력해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여튼, 별점은 3점입니다. 시대를 뛰어넘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스파이, 첩보물로는 평균 이상의 완성도와 재미를 갖춘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냉전 시대 스파이물을 좋아하신다면 적극 추천드립니다. 이미 절판된지는 오래 되었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지요.

2023/02/11

닌자의 세계 - 야마키타 아쓰시 / 송명규 : 별점 2.5점

닌자의 세계 - 6점
야마키타 아쓰시 지음, 송명규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제목 그대로 닌자에 대한 모든걸 정리하여 알려주는 책입니다. 구성은 몇 권 읽어보았던 다른 AK 트리비아 북 시리즈와 동일합니다. 한 개의 주제에 한페이지 설명과 한 페이지 도표, 도판으로 이루어져 있는 구성이지요.

닌자의 역사에 대해 통사적으로 접근하는게 눈에 띕니다. 닌자가 정말로 존재했을까? 라는 의문에서 시작되거든요. 전국시대 당시 첩보를 하는 인간들은 분명 존재했다고 설명해 줍니다. 이들을 모두 '시노비'라고 부르게 되었던건 도쿠가와 막부가 고용했던 이가 사람들이 시노비였기 때문이고요.
닌자라는 말은 2차대전 이후 야마다 후타로가 쓴 인법장 시리즈 등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답니다. 당연히 만화 등에 나오는 화려한 인법보다는 첩보, 정찰 업무가 주였고, 인술비전서 최고의 인술로도 '모략'이 소개되고 있다는군요. 원래도 대단치 않은 기술을 보유했었고, 전국 통일 후에는 대부분 평범한 하급 무사가 되었버려서 그나마의 인술도 잊혀졌지만, 이가에서만 이가를 맡았던 다카토라에 의해 기술을 발전시킬 '무족인' 제도가 도입되어 기술이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막부 말기 이른바 최후의 닌자로 이가의 무족인이었던 '사와무라 진자부로' 가 페리 함대에 잠입해서 조사했던 기록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뭐, 이것도 인술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첩보 활동이었지만요. 반면 이가만큼이나 유명했던 코가 닌자는 무족인과 같은 특권을 받지 못해 결국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에도시대에 예능이 성행하면서 시노비의 기술이 기예로 인기를 끌어 널리 퍼졌습니다. 즉, 현재의 닌자 캐릭터는 일종의 광대극 캐릭터인 셈입니다. 

이 뒤에는 닌자의 기원에 대한 이론, 유명한 이가와 코가 닌자의 유래와 그 관계, 핫토리 한조와 그 후계자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막부 시대 밀정은 닌자는 아닙니다만, 후계자라면 후계자라면 할 수 있겠지요. 에도 시대 호조 가문의 시노비였던 후마 코타로가 도적이 되었고, 그를 잡는데 도움을 주었던 카이의 시노비 코사카 진나이도 결국 잡혀 죽었다는건 역사적 사실로 보여 흥미로왔습니다.

닌자의 도구, 기술 설명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닌자의 옷이 검은색으로 알려진건 에도 시대 무대 공연 때문일 뿐, 실제로는 저렴하게 물들일 수 있는 감즙색 옷이 많았다는 사실에 기반한 정보들도 좋았고, 시노비 두건 쓰는 법, 닌자의 속옷, 수리검이라고 불린 차검의 다양한 형태와 봉수리검과의 차이, 항아리 뗏목, 소형톱 시코로 등의 도구와 자사구리, 츠리가타나, 사게오칠술 등의 인술처럼 도판이 효과를 발휘하는 항목도 많아서 마음에 들았습니다.
닌자는 가난하다는 기본 상식을 바탕으로 설명해주기 때문에 얼마나 창작물이 허구인지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한번 쓰고 버릴 수리검에 돈을 투자할 이유가 없지요. 줄에 가로대를 달고 끝에 갈고리를 붙여 올라가는 사다리 카기시바고는 잘 알려져 있기는 한데, 걸 때 소리가 나서 실제로는 잘 쓰이지 않았을 거라는 설명도 좋았습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입니다. 이렇게 실제로는 무의미했을 창작품은 그 외에도 물 위를 걷는 신발 미즈구모(실제로는 두께가30cm이상 되었어야 함) 등이 있다네요. 

인술비전서도 당연히 후대의 창작품이지만 그 중 "만천집해"는 그래도 상당한 연구가 겻들여진 수작이라는걸 알려줍니다. 도판도 곁들여져 있다니까요.

인술이 나름 효과있는 술법이라는 주장도 그럴듯했습니다. 급박한 전투에서는 간단하고 실용적이며 빠르게 쓸 수 있는 술법이 사용된게 당연하지요. 한 번 성공하면 상대를 죽일 수 있으니 비밀도 지켜지고요. 이런건 후대 닌자 만화 설정과 비슷하네요. 당연한 일을 좀처럼 할 수 없는게 인간이라 일부러 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해석은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격으로 보이지만요.
물론 설명되는 인술은 무슨무슨술....처럼 이름은 거창하지만 뻔하고 어이없는 것들도 많기는 했습니다. 그나마 고양이 눈으로 시간을 확인한다는 찰천술은 기억에 남네요. 죽은 시체의 동공으로 시간을 확인했다는 클락성 살인사건의 추리가 떠올랐거든요. 정원 한복판에서 등을 둥글게하고 머리를 숨기며 가만히 있는 메추라기 은신술도 나름대로 그럴듯했고요.
참고로 여우 은신술은 물 속에 숨는 술법인데 만화에서처럼 대나무로 호흡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굵은 나무가 튀어나와 있으면 이상하니까요. 원래는 얼굴에 나뭇잎 등을 붙이고 얼굴째 내밀어 호흡했다는군요. 삼베 뛰어넘기 훈련법은 삼베가 아니라 모시풀이었을거라는 추정도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은 창작물 속 닌자들 소개로 마무리됩니다. 타츠카와 문고의 사루토비 사스케, 야마다 후타로의 인법첩 시리즈 특징과 주요 대결구도, 시라토 산페이의 닌자 만화 시리즈 소개, 지라이야 소개 등입니다. 이 중 시라토 산페이의 만화에서 인술을 합리적으로 설명했다는건 신선했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닌자의 체술이 바탕이 되었다고는 해도, 아예 마법같은 것 보아야 현실적인 느낌을 가져다 주었겠지요.
그러나 이 부분은 설명 도판이 아쉬웠습니다. 인술을 합리적으로 설명했다는 부분을 실제 만화 이미지로 보여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지라이야의 유래가 중국 소설에 등장하는 도적으로, 도둑질 한 곳에 '아래야'라는 메모를 담겨둔 것에서 시작되었다는건 처음 알았고요.

마지막 100번째 항목은 실존하는 무술 Ninjutsu입니다. 해외에서는 유명하지요. UFC 초창기(시즌 2)에 닌쥬츠 고수가 나왔던 시합이 기억납니다.

하지만 닌자 역사에 대한 설명 중 야규 일족, 마미야 린조 등 암살, 밀정 활동을 한 실존 인물을 닌자처럼 설명하는건 와 닿지 않았고, 사이고 다카모리까지 언급하는건 도가 지나쳤습니다. 이시카와 고에몬도 닌자였을 수 있다는건 좀 억지스러웠습니다. 비슷한 기술을 지니고 있있으니 전국시대가 끝나고 도둑이 된 닌자가 많았을거라는건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니까요. 마츠오 바쇼 닌자설도 마찬가지, 많이 걸었다는 것과 여비를 누구도 주었는지로 닌자일 수 있다는건 억지입니다. 다른 트리비아북 시리즈에는 파워포인트스러운 도표가 대부분인 책도 있었는데, 이 책은 그래도 일러스트를 통한 설명이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성에 차는 수준은 아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리 깊이있는 내용이 담겨있다고 할 수 없고 가성비도 좋나고 보기 어려우나 실제 역사와 근거에 기반한 설명과 시리즈 취지에 걸맞는 잡다한 정보가 많은건 분명한 장점입니다. 닌자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나쁘지 않을 듯 합니다.

2009/06/09

나폴리 특급 살인 - 랜달 개릿 / 김상훈 : 별점 4점

나폴리 특급 살인 - 8점
랜달 개릿 지음, 김상훈 옮김/행복한책읽기

가상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한 대체역사 SF 소설이면서도, 탐정 다아시경이 활약하는 추리물이기도 한 독특한 작품집입니다. 전에 "세르부르의 저주"를 읽고 딱히 취향이 아닌듯 해 관심을 끊었던 시리즈지만 이번의 50% 할인 행사를 놓칠 수 없어 구매하여 읽게 되었네요.

그런데... 정말 안 읽었더라면 엄청 후회할뻔 했습니다. 일단 이 시리즈의 특징이라면 세계관이 아주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이라는 것을 들 수 있는데, 과학적 마법 문명의 지배를 받는 영-불 제국을 무대로 하여 마법이 증기기관과 공존하는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유사한 분위기의 일본 만화들의 원조격 작품이기도 하죠. 그러나 다른 파생 작품들과 가장 큰 차이점이자 가장 마음에 든 점은 이 세계관에서 "마법"은 일종의 보조적인 역할로 쓰인다는 점입니다. 마법은 "전문가" 가 행하는 "전문적인 행위" 이기는 한데, 현대 과학기술에서 관련된 전문가가 행하는 역할과 유사한 점이 있는 일종의 "기술" 처럼 그려질 뿐이거든요. 예를 들면 "방부처리" 라던가 "자물쇠 전문가" 같은 식이죠. 즉 수사가 등장하는 추리 소설에서의 검시관이나 감식관이 수행할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거 정말 획기적 발상이 아닌가 싶어요.

또한(어떻게 보면 당연하게도!) 마법이 사건에 별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 것도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이 작품에서 마법은 단지 설정과 재미를 위해서 존재할 뿐이며, 각 사건들 마다 "마법이 개입된 사건이 아니다" 라는 것을 마법사들이 조사해서 먼저 알려주는 점 등으로 철저하게 추리의 영역과 마술의 영역을 구분함으로서 뻔하디 뻔한 SF-판타지가 될뻔한 작품을 추리물로서도 가치를 지닐 수 있게끔 중심을 잘 잡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약간 바람끼(?)도 보이는 카사노바 다아시경과 강의를 좋아하는 현학적이고도 호기심 많은 마술사 마스터 숀, 현명하고 비범한 결단력의 플랜태저넷 왕가 군주인 노르망디공 리처드 등 고정 캐릭터들을 보는 재미도 뛰어나고, 작가가 상상해 낸 영불제국의 묘사 역시 비범한 편이라 여러모로 즐길거리가 많은 작품이기에 할인행사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만족감이 컸을 것 같습니다. 전작에 비해 "추리" 요소가 더욱 풍성해 진 것에 가산점 하나 얹어서 별점은 4점입니다. 첫 단편 "중력의 문제" 는 정말이지 정통 추리팬도 탄복할만한 멋진 밀실 트릭물이에요! 그 외에도 추리 애호가들이 즐길만한 장치도 풍부하니 쟝르 문학을 좋아하신다면 놓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첫 번째 작품이자 밀실 트릭 걸작 중 하나라는 "중력의 문제" 는 앞서도 말했듯 정말 빼어난, 추리적으로 아주 파헤치는 다아시경의 활약을 그린 단편인데, 그야말로 교과서적인 멋진 작품입니다!

일단은 탑 꼭대기에 위치한 방 안에서 누군가에게 떠밀려 추락했지만 방은 그야말로 완벽한 밀실이었다는 무대 설정을 비롯, 유력한 동기를 지닌 것 처럼 보이는 아들에다가 광신도인 딸이라는 기묘한 가족구성, 가스등과 거대한 샹들리에로 대표되는 - 고딕호러스타일도 느껴지는- 배경 묘사가 굉장히 과학적, 합리적으로 잘 짜여진 트릭과 어우러지고 있으며, 동기 및 단서의 제공도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아서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SF로 유명한 "다아시 경" 시리즈이기 때문에 추리적으로 손해를 보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두 번째 작품인 "비터 엔드"도 상당한 수준의 추리적 퀄리티를 보여줍니다. 다아시경의 부하인 마술사 마스터 숀이 우연찮게 말려드는 살인사건에 관한 이야기로 마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특징도 있지만,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불특정 다수의 인물이 모이는 카페에서 범인은 가까이 가지도 않은 상태로 피해자만 콕 집어 독살시킨다는 원격조정 트릭이 설득력있게 등장하는 덕분입니다. 경찰이 약간만 디테일하게 수사한다면 범인은 곧바로 밝혀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헛점은 존재하지만 이 정도면 평균 이상은 된다고 생각되네요.

세 번째 작품인 "입스위치의 비밀"은 좀 애매합니다. 한 남자의 시체가 해변에서 발견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되는데, 총에 맞아 죽은 남자 옆에 발자국은 첫 발견자의 발자국밖에 없었다! 라는 추리적으로 흥미진진한 화두를 던져놓지만, 죽은 남자의 신원이 정보부 소속의 노엘 스탠디쉬라는 것, 그리고 스탠디쉬는 뭔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중요한 "입스위치 파이얼"이라는 물건을 폴란드 제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폴란드 제국의 비밀경찰 세르카 요원을 추적하던 중에 결국 시체로 발견된 거라는 내용으로 이어지면서 이야기가 폴란드 제국과의 스파이 전쟁 첩보물로 확 바뀌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름 첩보전의 스릴과 더불어 흥미로운 요소 - 스탠디쉬의 다이잉 메시지라던가, 갑자기 별이 사라진 것과 같은 이유를 알수없는 특이한 현상 등 - 이 많이 등장해서 지루하지는 않지만, 폴란드 제국과의 첩보전을 지나치게 길고 장황하게 묘사해서 결과적으로는 추리적으로 흥미로울 수 있던 소재와 트릭이 첩보전에 파묻혀버려 아깝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폴란드의 미녀 스파이가 등장해서 꿍짝을 맞추는 결말도 썩 마음에 들지 않고요. 

그래도 재미는 있고 추리적으로도 버려진 낡은 외투를 가지고 벌이는 추리와 해변가에서 시체가 발견된 트릭의 발상 자체는 좋았기에 평작 수준은 됩니다. 무엇보다도 카사노바 다아시경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대폭소! 왠지 피터 웜지 경 같은 느낌을 전해주던 다아시경의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서 마음에 듭니다.

네 번째 작품 "열여섯개의 열쇠"는 영불제국과 루멜리아제국과의 이른바 "해군조약"에 관련된 이야기로, 주 콘스탄티노플 대사였던 복스홀 경이 맺은 조약의 문서가 사라지고 복스홀 경은 엄청나게 나이를 많이 먹은 모습으로 완전 밀실에서 시체로 발견된다는 내용입니다. 다아시경이 곧바로 출격(?) 하여 복스홀 경과 그만이 통과할 수 있는 그의 여름 별장 열쇠 16개를 단서로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고요.

조금 소품스러운 느낌이기도 한데, 하룻밤의 소동(?)을 재미나게 그려내고 있으며 이야기도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건너기"를 연상시키는 수학적 트릭과 더불어 합리적으로 잘 짜여져 있어서 유쾌한 느낌이 가득해서 좋았습니다. 사람이 기괴하게 죽어나가고 중요 문서가 없어졌는데도 이렇게 유쾌하다니 정말이지 모를 일이네요. 하지만 아쉽게도 트릭 자체는 설득력이 떨어지긴 합니다.

덧붙이자면 "해군조약"은 홈즈, 포와로 등 많은 탐정들이 활약한 전력이 있는 추리계의 완소 아이템 중 하나로, 이 작품에서도 역시나 국가의 명운을 건 중요 조약 문서로 설명되고 있다는 것이 추리 애호가로서 반가운 점이었습니다. 이런게 바로 추리 애호가들이 즐길 수 있는 요소중 하나겠지요.

마지막 작품 "나폴리 특급 살인"은 네번째 작품에 등장하는 "해군조약"을 극비리에 운송하는 특명을 띈 다아시경과 마스터 숀이 탑승한 나폴리행 특급 열차안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입니다. 비밀 임무이기에 정체가 발각되면 안되는 이 두 컴비는 열차가 로마에 도착하기전에 사건을 대신 해결해 주기로 마음먹고 서둘러 사건해결에 나서게 됩니다. 

제목 그대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패러디이자 오마주 성격의 작품입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트릭을 재구성하여 보여주는 정통 트릭물로서의 가치도 높지만, 추리 애호가가 즐길만한 장치가 가득해서 정말이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작품집의 표제작에 어울리는 좋은 작품이에요. 단서의 제공도 공정하고 복선도 잘 짜여져 있어서 완성도도 아주 높으니까요. "중력의 문제"와 더불어 이 단편집의 투탑, 쌍두마차라 할만한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이 작품 덕분에 작가의 또다른 패러디 - 오마주 작품인 "마술사가 너무 많다"(당연히 오리저널은 "요리장이 너무 많다" 죠)에 대한 관심이 증폭하여, 절판도서임에도 인터넷 헌책방을 뒤져서 겨우 한권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배송되면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우리 형제의 안팔리는 판타지-추리 소설 "장미빛 인생" 도 유사 쟝르죠. 차이점이라면 우리 작품에서는 마법이 추리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정통 추리물처럼 써내려갔으니... 그래서 안팔리는건가?

2004/02/03

스파이의 역사 1 : 작전편 - 20세기를 배후 조종한 세기의 첩보전들 : 별점 4점

스파이의 역사 1 : 작전편 - 8점 어니스트 볼크먼 지음, 이창신 옮김/이마고
이 책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스파이들과 그 정보전을 다루고 있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워낙 소재가 독특하고 제 취향에 맞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간략하게 목차와 내용을 잠깐 소개해드리자면,
“제1부 기만작전: 사상 최대의 속임수”는 가공의 저항 자유 조직을 만들어 서방세계를 속인 소련과, 쿠바인을 스파이로 고용했던 CIA를 역이용하고 농락하는 쿠바와 같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속여 먹는 이야기입니다. 무적으로 느껴지는 CIA의 멍청하고 한심한 일면을 다루고 있어 상당히 통쾌하게(?) 읽었습니다.
“제2부 암호와 감청 전쟁: 보이지 않는 스파이들”은 주로 2차대전을 다루고 있는 편으로 에니그마와 일본 암호 해독 등 서로의 암호를 해독하여 전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명한 에니그마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상당히 디테일하게 이야기를 다루고 있네요. (물론 “암호의 세계”라는 이 분야의 바이블 같은 책이 있습니다만…)
“제3부 반역작전: 내부의 적을 색출하라”는 제목 그대로 조직 내부의 스파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원자폭탄 관련 정보를 입수하게 되는 소련과 소련의 최 고위층 비밀 요원 “톱해트”의 이야기가 흥미롭네요. 흡사 영화 같습니다.
“제4부 두더지작전: 미로 속의 첩보 게임”은 역사속에 묻혀진, 그리고 역사의 희생양이 된 몇몇 스파이들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스웨덴의 “발렌베리” 사건이 인상적입니다. 스웨덴의 명문 출신이자 인도주의자였던 외교관 발렌베리가 어떻게 누명을 쓰고 죽어갔는지에 대한 이야기인데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가슴 아프기도 하고요.
“제5부 실패한 작전: 첩보역사상의 대실수들”은 실패로 끝난 작전들이 나옵니다. 일본과 미국의 진주만을 둘러싼 암투라던가, 동유럽의 공산화 방지를 위해 노력했다가 실패하는 CIA이야기도 있고 태평양의 한 섬을 둘러싼 미-일 간의 첩보 공방전 이야기 등이 실려 있습니다.
“제6부 성공한 작전: 대규모 작전의 눈부신 성과들”은 성공한 유명한 스파이들의 이야기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던 미국의 “배신자” 워커일가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잡혔을 때 리더스 다이제스트같은 곳에서 특집으로 낼 만큼 유명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네요. 그 외에도 영국의 엘리트 5인방 스파이 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7부 무의미한 작전: 첩보역사상 최대의 코미디”는 제목 그대로 무의미 했던 정보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 뿌리기 위해 만든 반체제 우편물과 우표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지금은 그 우표 (반은 해골, 반은 히틀러)가 수집가들 사이에서 굉장히 고가에 거래된다는 이야기까지, 역사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재밌네요.
이렇게 역사적 정보전과 유명 스파이들을 다루고 있는데 무척이나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어떤 부분은 역사책, 그 중에서도 2차대전 물인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부분은 미스터리물 같다는 점도 흥미로왔고요. 읽고나니 스파이와 정보전의 중요성이 굉장히 크게 느껴지네요. 역사를 움직이는 “흑막”이라는 것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하고 말이죠.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4점. 역사서적으로의 가치와 재미를 모두 갖춘 보기드문 책입니다. 우리나라 정보기관이나 유명한 (영화로도 나왔죠) “뻐꾸기 알” 이야기가 없는게 조금 의아하지만, 2편을 계속 읽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었습니다.

2004/10/23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온 사나이 - 켄 폴레트 : 별점 2.5점

1914년, 영국 귀족원 의원 월든 백작에게 윈스턴 처칠이 갑자기 찾아왔다. 처칠은 군비를 확충 중인 독일의 위협에 대비해 러시아와의 동맹을 수립해야 한다는 밀명을 내렸고, 이에 백작은 처조카이자 러시아 짜르의 조카이자 해군 제독인 알렉스와의 회담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편 회담 정보를 입수한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펠릭스는 알렉스를 암살하기 위해 영국으로 출발했다. 무고한 러시아 민중의 전쟁 참여를 막기 위함이었다...

영화로도 유명한 첩보물 "바늘구멍"의 원작자 켄 폴레트의 역사 첩보 스릴러입니다. 1차대전 직전의 영국을 배경으로 하여 무정부주의자의 암살 계획을 그리고 있습니다. 

같은 작가의 작품답게 바늘구멍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적대국의 스파이이자 악당인 주인공이 주변 여성(?)의 도움으로 수차례의 도주 끝에 임무에 성공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세에 지장을 주지는 못한다는 - 바늘구멍은 최후의 순간에 실패하고 죽어버리긴 했지만 - 설정이 거의 판박이라고 해도 무방하거든요. 

그래도 실존인물과 실제 역사적 사건들이 등장하는 전개(특히나 처칠의 악역스러운 묘사!)로 팩션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차이점은 있습니다. 이는 영국 귀족에 대한 상세한 세부 묘사(파티나 체면을 위한 여러 의식 등)로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암살, 모험물로도 빼어납니다. 무정부주의자들의 활동, 직접 제작하는 니트로글리세린을 이용한 암살 계획 및 발각된 펠릭스의 수차례에 걸친 탈주극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덕분입니다. 무엇보다도 타락하고 아무 생각 없는, 자신밖에 모르는 영국과 러시아 귀족들보다는 무정부주의자의 편을 들고 싶어지는 전개가 인상적이에요. 펠릭스는 악역처럼 묘사되고는 있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일종의 안티 히어로에 가까운 인물이기도 하니까요. 때문에 집념의 암살 계획은 성공하지만 아무 소득없이 끝나버린다는 결말은 굉장히 슬펐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대중적인 인기에 집착한 듯한 불필요한 성적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또한, 월든 백작의 딸 샬롯의 지나친 정치 참여 의식도 전혀 설득력이 느껴지지 못했고요. 마지막으로 펠릭스와 리디아, 그리고 샬롯과의 관계는 굉장히 중요한 극적 장치이긴 하지만 너무 비현실적이고 작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재미있기는 하지만 예전에 읽었던, 비슷한 소재였던 쥘 베르느의 "황제의 밀사" 쪽이 저는 훨씬 마음에 드네요. "황제의 밀사"나 다시 구해서 읽어 봐야 겠습니다.

2007/12/15

009-1 : 별점 3점

전 세계가 이스트블록과 웨스트블록으로 나뉘어져 대립하는 시대. 중립 지역은 달. 각 블록의 핵과 군비 경쟁의 뒷면에서 서로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평화를 유지시키려는 에이전트들의 활약이 존재한다. 웨스트블록의 핵심 에이젼트는 009-1!

이 작품의 제목을 뭐라고 읽어야 하는지는 아직도 헛갈립니다만(제로제로 원인지, 더블오 원인지, 제로제로 쿠노이치인지...), 간만에 전 편을 몰아본 TV 애니메이션이네요. 정말 간만입니다. 보게 된 동기는 인터넷 서핑 중 발견한 이 작품의 히로인 밀레느 호프만의 피규어 사진 때문입니다. 정말 땡기게 만들었거든요.

작품은 009로 유명한 이시노모리 쇼타로 선생의 원작으로 30여년전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하여 제작한, "자이언트 로보"나 "009" 애니메이션과 같은 컨셉입니다. "쾌걸 증기탐정단"을 보는 느낌도 좀 들고요. 작품에 레트로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복고적인 의상과 메카닉을 좋아하는 탓에, 모두가 제 취향에 딱 맞아서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주 내용은 "에이전트"라 불리우는 사이보그 여성의 활약상을 담고 있는데 SF적인 느낌보다는 첩보물 성향이 강합니다. 첩보물적인 설정의 에피소드들은 그 수준도 모두 상당한 편이었고요. 정보를 얻기 위한 여러가지 스파이 활동의 디테일은 물론이고, 에이젼트들의 인간적인 고뇌까지 충실하게 그려져 있는 덕분입니다. SF적인 설정의 근간인, 온 몸이 기계화된 미녀들의 액션도 괜찮습니다. 각 에이젼트들의 캐릭터나 특징이 사이보그 009의 멤버들과 무척 유사하다는건 저같은 고전 매니아에게는 반가운 요소였어요.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히로인인 009-1 밀레느 호프만입니다. 강하고 냉정한 것은 물론, 임무를 위해서라면 몸을 팔거나 살인까지 서슴치 않는 팜므파탈적인 매력이 아주 독특하고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고뇌를 보여주는 복잡한 성격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비쥬얼도 돋보였고요. 피규어를 사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독특하고 재미난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매니아적인 취향의 작품이었기 때문인지 12화로 짧게 끝납니다. 단지 짤막한 시즌이면 괜찮은데 9화부터 심각하게 작화 붕괴 현상이 일어나 안타깝네요. 조금 더 길게, 완성도 있게 제작되었더라면 더욱 좋았텐데 말이지요. 

워낙 짧은 분량이라 딱히 특정 에피소드를 추천하기는 좀 어렵지만, 다양한 미녀들의 멋진 액션과 작품의 특징이 잘 살아있는 1화 "잠입자들", 강력한 라이벌과의 사투가 벌어지는 3화 "하드보일드"는 내용과 전개 모두 일급인 걸작 에피소드라 생각되며, 미래세계의 굉장히 기발한 황금 운송 작전이 등장하는 5화 "황금의 여자" 역시 재미있었습니다. 6화 "팝"은 여운을 남기는 전개가 인상적이었고 작화가 붕괴되던 초입인 7화 "항구"는 순진한 소년과 추악한 음모가 대비되는 전개가 좋았고요. 

다만 앞서 설명드린대로, 결말부인 10,11,12화는 솔직히 너무 급하게 마무리한 느낌이 강해서 아쉽습니다. 끝이 좋아야 다 좋은 법인데 말이죠.

그래도 정말 간만에 애니메이션 한 시즌을 전부 몰아 보았는데 나름 만족스러웠던 작품이었습니다. 고전 매니아라면 즐겁게 감상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되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04/08/23

어쩌다 찾은 필독 추리소설 리스트...

추리소설 초심자를 위한 필독 작품 리스트 by 화요추리클럽 in 싸이월드

개인적으로는 이런 리스트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습니다. 워낙 사람들마다 취향들이 다르니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은 쉽지 않겠지요.
하지만 이 리스트는 초심자를 위해서 리스트를 선정하셨다고 하는 원 저자분의 노고가 엿보이는 리스트라 돋보입니다.
추리사적으로 인상적인 작품들과 정통파-하드보일드-첩보물 등 쟝르를 골고루 섞은 노력과 꽤 최근까지 올라오는 연대 등 여러모로 알찬 리스트인것 같네요.
개인적으로는 일본 작품이 좀 적다는 것이 불만이긴 하지만...

그래서 저만의 리스트를 몇개 적어 보았습니다.

  • 크리스티 - 포와로 수사집 / 화요일 클럽의 살인 (걸작 단편집 2권 추려보았습니다. 단편이고 유명 탐정이 등장하니 초심자에게 좋을 것 같습니다)
  • 케멜먼 - 9마일은 너무 멀다 (역시 단편집을....^^)
  • 엘러리 퀸 - 엘러리 퀸의 모험 / 새로운 모험 / Y의 비극 (역시 엘러리 퀸의 걸작 중단편집과 그 유명한 Y의 비극, 빼놓을 수 없겠죠)
  • 도일 - 홈즈 시리즈 전집 (단편집을 더욱 추천합니다)
  • 르블랑 - 뤼뺑 시리즈 (역시 단편집을 더욱 추천합니다)
  • 엘린 - 특별요리
  • 해미트 - 말타의 매
  • 챈들러 - 기나긴 이별
  • 에도가와 란포 - 고도의 마인 (외딴섬 악마)
  • 마츠모토 세이쵸 - 점과 선
  • 피터 러브시 - 가짜 경감 듀
  • 마지막으로... 딕슨 카의 황제의 코담배케이스!
써 놓고 보니 단편집 투성이네요. 그래도 크게 살인사건이나 엽기 사건이 벌어지지 않고 집중력 있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을 골랐다고 생각하는데 어떤가요? 에도가와 란포는 가부가 좀 갈릴 것 같긴 하네요.

이것도 투표하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2016/10/10

밀정 (2016) - 김지운 : 별점 2.5점

오랫만에 아내와 함께 데이트 느낌으로 감상한 작품입니다. 추석 연휴 때 감상했는데 리뷰는 좀 많이 늦었네요. 현재 흥행 중이라 이런저런 리뷰와 정보가 이미 인터넷상에 많이 퍼졌을 터이니 짤막하게 정리하겠습니다.

감상 전에는 독립군들이 조국을 위해 활약하는 영화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다르더군요. 좀 오래된 표현이지만 "첩보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밀정인지?"를 밝히는 것이 영화의 핵심이거든요.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긴장감이 제법인데, 특히 기차에서 벌어지는 이정출과 김우진, 하시모토가 벌이는 신경전과 추격전은 백미입니다. 마지막 하시모토의 급습, 이윽고 벌어지는 총격전까지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계속 이어집니다. 와중에 배신자를 밝혀내기 위해 시간과 장소를 모두에게 다르게 알려주는 장면도 전형적이지만 재미나고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무간도" 생각이 계속 났습니다. 특정 조직에서 다른 특정 조직을 없애기 위해 누군가를 밀정으로 파견한다... 그런데 그는 그 다른 조직에서도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는 식의 전개가 똑같은 탓입니다. 조직에서 자신이 배신자라는 것을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몸부림도 그 처절함이 비슷한 수준이에요.

이를 뒷받침하는 송강호 씨의 연기가 아주 출중하다는 것, 그에 반해 공유 씨 연기는 조금 처져 보인다는 것도 무간도스러웠습니다. '양조위 - 송강호, 유덕화 - 공유'인 것이죠. 송강호 씨는 정말 이정출 그 사람이다! 싶을 정도로 엄청난 연기를 보여주는데, 법정씬은 그 중에서도 최고로 꼽고 싶습니다. 덧붙이자면, 의열단 단장으로 특별 출연한 이병헌 씨의 등장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무게를 잘 잡아 주었어요.

하지만 단점도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화가 너무 길다는 겁ㄴ비다. 2시간을 훌쩍 넘기는 긴 러닝타임 내내 재미와 흥분을 가져다 주지는 못합니다. 초중반까지는 조금 지루한 면이 없잖아 있어요.

설정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왜 의열단원들 모두가 꼭 폭탄과 함께 경성에 잠입해야 했을까요? 그리고 의열단원들은 이정출처럼 중간에 기차에서 뛰어내리면 안 되었던 걸까요?

마지막의 테러도 수많은 의열단원들의 희생을 감안하면 큰 성과는 아닌 듯싶어 보였습니다. 이러느니 군경에게 포위되었을 때 자살 폭탄 테러를 하는 게 나았을 겁니다.

그래도 아팠던 시대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계기도 되었고, 그럭저럭 재미도 있었던 작품입니다. 경성과 상해에 대한 묘사는 해당 시대를 다룬 작품을 창작하는 입장에서 참고도 되었고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2/09/18

조커게임 - 야나기 코지 / 한성례 : 별점 2점

조커게임 - 4점
야나기 코지 지음, 한성례 옮김/씨엘북스

어딘가의 랭킹에서 트릭이 뛰어난 작품이라며 추천하고 있어서 구해 읽었습니다. 사전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과 전혀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랭킹 탓에 특별한 게임과 관련된 본격 미스터리 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구 일본 제국 시대를 무대로 한 스파이물인데다가 심지어 단편 시리즈였기 때문입니다.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등장하는 몇가지 트릭은 분명 나쁘지 않았습니다. 시대 상황을 잘 살리고 있는 덕분입니다. <<조커 게임>>에서 헌병대가 외국 스파이의 집을 철저하게 뒤졌지만 마이크로 필름을 찾지 못한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스파이는 마이크로 필름을 천황의 사진 뒤에 숨겨 놓았던 것이지요. 일본 헌병대는 불경죄를 저지를까 두려워 사진을 만져보지도 못했던 겁니다.
<<로빈슨>>에서 완벽하게 암호를 전달했지만 본국이 가짜라는걸 알아채게 만든 트릭은 일정 간격으로 오타를 입력해야 되는 것이었고요. 간단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보여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 점수를 줄 부분이 많지는 않습니다. 저 정도의 트릭으로 '빼어나다' 고 말하기는 힘들고요. 무엇보다도 작품 속 특수 정보 기관인 D기관에 대한 설정과 묘사가 유치하고 진부한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마왕' 유키 중령은 물론이고, 등장하는 모든 D기관원들 모두가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는 슈퍼 스파이 - 스파이 패밀리 같은 - 로 그려지고 있으니까요. 아무리 봐도 만화 속 등장인물에 가까와서 현실감을 느끼기는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애니메이션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던데, 여러모로 애니메이션으로 보는게 더 나은 선택이 될 것 같네요. 그만큼 만화적이고 허구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저 역시 후속작을 따로 책으로 읽어볼 계획은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조커 게임>>
육군에 유키 대령 지휘 하에 스파이 양성 학교가 세워졌다. 훈련생들이 군인이 아닌 일반 대학 졸업생이었고, 전통적으로 스파이 활동을 무사도에 반하는 행위라 생각하여 이 학교와 조직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육군은 사쿠마 중위를 파견했다. 사쿠마 중위의 임무는 유키 대령 조직의 실수와 헛점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사쿠마는 학교 훈련생들의 기상천외한 입학 시험과 훈련 과정, 그리고 천황제를 부정하는 듯한 사고 방식에 경악하던 차에, 미국인 기술자 고든의 스파이 행위 증거를 찾기 위한 작전에 투입되는데...

표제작이자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 사쿠마 중위의 시점으로 첩보 기관 D기관에 대한 설정과 '마왕' 유키 대령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활동을 가장 잘 드러내는게 제목이기도 한 '조커 게임' 입니다. D 기관 훈련생들이 식당에서 여흥으로 즐기는 포커 게임으로 보이지만, 사실 식당에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는 스파이 게임이지요. 누구나 누군가의 카드를 보고 정보를 줄 수 있는데, 그 정보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규칙입니다. 누구나 스파이가 될 수 있고, 누구도 믿으면 안된다는 D 기관의 룰을 잘 드러내는 게임이에요.

이러한 D 기관 설명이 중심이고, 고든이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증거물을 찾는 과정은 곁가지에 불과하지만, 이 과정에 약간의 트릭이 사용되고 있으며, D 기관원들이 천황제 부정 발언을 했던게 트릭과 연결되고 있어서 전개 구조 자체는 잘 짜여져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사쿠마가 주도한 수색 자체가 육군의 음모였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최초 수색을 지시했던 무토 중령은 필름을 발견하지 못했고, 고든의 부당한 수사에 대한 항의로 궁지에 몰렸던 상태였지요. 그래서 D 기관을 시켜 두 번째 수사에 나선 것입니다. D 기관도 수색에 실패하면 모든걸 뒤집어씌워 조.직을 와해시키고, 자기 실수를 덮으려는 목적으로요. 사쿠마는 무토 중령의 음모를 위한 버림돌에 불과했던 겁니다.

그러나 반전이 드러나는 과정은 억지스러웠습니다. 이야기의 헛점도 많습니다. 무토 중령이 술집 게이샤에게 용의자 집 수색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고든 본인이 사쿠마 중위에게 지금이 두 번째 수사라고 말했더라면? 어쩔 셈이었을지 모르겠거든요. 유키 중령이 변장하고 무토 중령과 자리를 함께 했다는 등 작위적인 요소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그럭저럭 평작 수준은 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유령>>
영국 총영사 그레이엄은 일본인 양복점 점원 가모와 체스로 친해졌다. 그러나 가모는 D 기관 조직원이었다. 그의 임무는 폭탄 테러 계획의 유력한 용의자 그레이엄 총영사에 대한 혐의를 확정하기 위한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가모는 체스를 통해 총영사는 심증으로는 죄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총영사 관저에서 사용하는 특수한 종이가 테러범 접선 장소에서 발견되었기에, 결정적 증거를 잡고자 철저히 미행했지만 별다른걸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새벽에 영사관에 잡입하게 되는데....


영사는 지령문을 옮기는 수단에 불과했다는게 진상입니다. 테러 조직은 영사의 우산 속 빈 공간을 활용해서 접선 장소에서 몰래 지령문을 전달받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영사가 테러 조직의 접선 장소와 동선이 겹쳤고요.

발상의 전환이기는 한데, 구태여 영사를 이용해야 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D 기관원 가모가 영어에 능통하고, 체스는 물론 미행과 잠입, 그리고 금고 털기에도 숙달된 슈퍼 스파이라는 묘사도 과장이 심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가모가 영사가 소싯적 저질렀던 악행을 고백한 일기를 읽은 뒤, 이걸로 영사를 협박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마지막 장면은 최악이었습니다. 촬영도 않고 다른 증거도 없는데, 단지 악행을 기억하고 있다는걸로 영사를 협박하는게 가능했을까요? 심지어 상대는 적국의 스파이인데 말이지요. 이게 통하려면 뭔가 결정적 증거를 확보해야 했습니다.

가모가 신분을 세탁하여 영사와 친분을 맺는 과정, 그리고 가모가 미행할 때 영사가 팁을 주는 행동이 자연스러운 정보 교환 방법이 아닐까 의심하는 장면 정도는 볼 만 했는데, 그 외에는 건질게 별로 없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로빈슨>>
D 기관원 이자와는 영국 런던에 잠입했지만 영국 첩보기관에 체포되었고, 자백 유도제를 맞아 비밀 암호 등을 털어놓고 말았다. 영국은 유키 대령에게 배반당했다는 이자와를 이용하여, 일본에 가짜 정보를 전달하여 혼란을 주려 했지만 이자와는 의식의심층 구조에 숨겨진 진짜 중요한 비밀은 털어놓지 않았었다. 그래서 D 기관은 이자와의 정보가 가짜라는걸 알아채는데...

앞서 소개해드렸던 , 암호가 가짜라는걸 알게된 이유는 꽤 괜찮았습니다. 스파이는 일본 남아의 사고 방식과는 다르다, 무조건 살아남아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유키 대령의 사고 방식도 스파이다워서 좋았고요.

하지만 그 외에는 과장이 심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특히 자백제에도 넘어가지 않았던 방법이 말이 안됩니다. 의식의 표층과 심층을 구분하여 표층 정보만 입에 올리도록 훈련했다는데, 전혀 설득력있게 묘사되고 있지 못했습니다. 훈련 과정이 설명되는 것도 아니고요. 하긴, 자백제라는 비과학적인 약도 마찬가지긴 하네요.
이자와 탈출에 결정적 역할을 한 '프라이데이'의 존재도 이전에 설명 한 번 없어서 뜬금없었습니다. 이자와가 임무를 떠날 때 유키 대령이 <<로빈슨 크루소>> 책 한권을 선물로 주었을 뿐이니까요. 게다가 위기에 처했던 이자와가 동그라미에 십자가 기호가 그려진 암호를 보고 프라이데이의 존재를 깨닫는다는건 솔직히 가관이었습니다. 이 암호는 연금술에서 '미의 여신'을 뜻하고, 미의 여신 비너스는 천문학에서는 금성이며, 이는 일주일 중 제 6일, 즉 '프라이데이'를 가리킨다는데 어이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국가 정보 기관들의 두뇌 싸움은 볼 만 했지만, 그 외의 부분은 설득력이 낮았습니다.

<<마의 도시>>
상하이에 파견된 헌병 중사 혼마 에이지는 상사 오이카와 대위로부터 헌병대 내부 내통자 색출을 지시 받는다. 헌병대의 미야타 중사가 살해당했기 때문이어다.
그 직후, 오이카와 대위의 자택이 폭탄 테러를 당했고 혼마는 본국 '특고' 시절 안면을 텄던 신문기자 시오즈카로부터 제보를 전달받았다. 옛 동급생이자 D 기관원인 대학 동창 구사나기를 상하이에서 목격했다는 제보였다....


D 기관원이나 기관의 작전이 중요하게 등장하지 않는 이색작. 헌병대 중사 혼마의 수사와 추리가 이야기의 핵심인 탓입니다.
특별한 트릭은 없지만, 잘 짜여진 이야기가 돋보였습니다. 오이카와 대위는 아편을 빼돌리다가 미야타 중사에게 들켰고, 그래서 중사를 살해한 뒤 증거 은폐 목적으로 자택을 테러로 위장해 폭발시켰던 겁니다. D 기관은 시오즈카로 변장시킨 조직원을 시켜 혼마가 이 수사를 하게끔 유도했고요.

하지만 혼마의 추리는 증거가 없다는 문제가 큽니다. 오이카와가 도박장을 드나들었고, 빚이 있었다는 정도로 미야타 중사 살인사건 및 폭탄 테러 사건의 범인으로 몰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오이카와가 혼마의 질책 정도로 패배를 쉽게 수긍하는건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그 뒤 요시노 상병에게 총을 맞고 죽는 장면도 뜬금없었습니다. 요시노 상병은 오이카와에게 지시를 받고 움직이다가 폭발 때 죽고 만 게이 소년의 연인이었다는 설정인데, 설명이 부족했어요.

혼란스러웠던 상하이 분위기와 이런저런 묘사는 그럴싸했고 재미도 있었지만, 결말이 별로였기에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더블 크로스>>
독일인 카를 슈나이더가 소련과 독일 양쪽에 정보를 제공하는 이중 스파이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D 기관은 졸업 시험을 겸해 도비사키에게 임무를 맡겼다. 도비사키는 슈나이더가 어떻게 암호를 발송했는지 등을 밝혀냈고, 신병을 확보하기 직전 단계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슈나이더는 애인의 집에서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고 음독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범인은 사건 현장을 발견했던 슈나이더의 애인 노가미 유리코였습니다.
사건 당일 그녀의 알리바이는 완벽했습니다. 수 km 떨어진 극단 연습장에서 한창 연극 리허설 중이었고 그녀는 주역이라 연습장을 5분 이상 비우는건 불가능했는데, 차로 집을 왕복하는데는 최소 10분은 걸리는데다가, 슈나이더에게 유서를 쓰게하고 독이 든 와인을 마시게 하는데는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 짜여진 알리바이 트릭물 처럼 보였던 설정과 전개에 비해 진상은 보잘것 없습니다. 슈나이더는 미리 독을 넣어둔 와인을 마시고 죽었던 겁니다. 바로 직전에 읽고 소개해드렸던 <<흑마술의 여자>> 트릭과 똑같네요. 유서는 전화를 통해 연극 대사로 위장해 쓰게 했다는, 추리 퀴즈 수준의 트릭이었고요. 노가미 유리코가 자택에 설치해두었던 전화 대신, 사람을 시켜 경찰을 부른 이유 - 유서를 옮겨 놓으려고 - 정도에 대해서만 약간의 추리가 등장할 뿐입니다.
유서(?)에 작게 쓰여져 있던 '더블 크로스'도 슈나이더의 즉흥적인 낙서에 불과하다는게 진상이라 허무했습니다. 그가 양다리를 걸쳤다는 의미였다는데, 그냥 맥거핀에 불과했어요.

오히려 본편 사건보다는 도비사키의 과거,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등을 버리며 홀로 살아가는 스파이가 될 수 없다는 도비사키의 결심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이 결심은 급작스럽게 등장합니다. 이 작품이 장편이었다면, 그래서 그가 노가미 유리코를 심문하면서 애정이 싹텄다던가 하는 식으로 풀어나갔다면 괜찮았을텐데 중간 과정 없이 결심만 등장하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수록작 중 워스트로 추리물, 스파이물 양쪽 모두 별 가치가 없는 작품입니다.

2019/10/25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 구라치 준 / 김윤수 : 별점 2점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 4점
구라치 준 지음, 김윤수 옮김/작가정신

잘 모르는 작가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한 모두 여섯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목이 흥미로와서 별 생각없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제목에서 연상되는 기발함, 기묘함이 부족한 탓이 가장 큽니다. 개개의 이야기들 모두 아이디어에 비하면 긴 편이라는 것도 단점이고요. 호시 신이치였다면 10페이지 안 쪽으로 끝냈을, 그런 내용들에 불과하거든요. "사내 연애"와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은 특히 쇼트쇼트 스타일로 쓰여지는게 어울렸을겁니다. 기발한 농담에 가까운 이야기였다는 점에서요.

물론 쓰고 싶은 글을 느긋하게 썼구나 싶은 작품도 있습니다. "밤을 보는 고양이"는 고양이를 정말 사랑하는 애묘인이구나! 싶은 묘사가 가득하여 읽는 내내 아주 흐뭇했어요.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은 기발함이 추리적으로 잘 포장된 괜찮은 이야기였고요.

하지만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고 아이디어도 괜찮았지만 약간은 어정쩡한 느낌이 컸기 때문입니다. 호시 신이치 쪽인지, 아토다 다카시 쪽인지를 좀 더 명확히 하면 좋겠네요. 호시 신이치 쪽이라면 더 짧게, 아토다 다카시 쪽이라면 아이디어의 보강과 약간의 엽기성(?)이 추가되어야 할 겁니다.

각 단편별 상세 소개로 리뷰를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ABC

불특정한 희생자를 살해하는 무차별 살인이 벌어지는데, 주인공은 우연히 2 건의 살인 사건이 ABC의 규칙을 따른다는걸 알아내고 C에 해당하는 희생자를 찾아내어 살해하려 했다. 이유는 유산을 노리고 동생을 죽일 계획인데 동생이 'D'에 해당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호그 연속 살인과 ABC 살인 사건의 결합은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의 귀환"에서도 써 먹은 아이디어입니다. 아마 다른 작품에도 쓰여진 경우가 있을 거에요. 그만큼 유명한 트릭이자 설정이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의 진짜 핵심 아이디어는 범인이 C 사건을 일으킨 뒤, 곧바로 다수의 D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는 반전입니다. 여러 사람이 연쇄 살인에 편승하여 저마다 모방 범죄를 일으킨 것이죠. 그리고 주인공이 급작스럽게 자신도 D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는걸 깨달으며 마무리됩니다.

반전과 결말 모두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어요. 흔해 빠진 서두를 조금 더 줄여서 쇼트쇼트로 발표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사내 편애"

인사 관리를 컴퓨터가 전담하게 된 이후, AI 시스템 '마더컴'로부터 편애를 받게 된 주인공이 회사 내에서 이런 저런 황당한 일을 겪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공 지능이 인사 관리를 한다는 아이디어는 새롭지 않지만 '모더레이트 플리커 메소드식 (MFM)' 이라고 불리우는 설정이 아주 기발합니다. 인사 관리를 지나치게 합리적이지 않도록 하는, 인간적인 모호함을 넣은 서브 프로그램으로 덕분에 좀 느슨하고 인간적으로 관리하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이런 시스템을 도입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인 '공정성'이 훼손되는거라 일부러 이런 오류를 집어넣을 이유는 없지만, 상황 자체는 꽤 그럴듯 했습니다.

이 모호함이 주인공 데라시마에게는 '편애'로 작동하여 일으키는 소동들도 재미있습니다. 전무가 직접 커피를 타다 주고, 상사가 허물을 덮어주는 정도에서 마음에 둔 여사원과 억지로 이어주는 민폐 수준의 도움까지 진화하게 되거든요. 심지어 마음을 고백한 것도 아닌데 주인공의 눈빛 등을 분석하여 이런 억지를 이끌어내니 어떻게 보면 무섭지요.

그러나 결국 지긋지긋해진 주인공이 회사를 그만 두고 다른 회사 면접을 보는데 그 회사 마더컴은 주인공을 그냥 싫어하더라는 결말은 조금 시시했습니다. 조금 더 재미있는 상황을 끌어낼 부분이 많았는데 너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야기를 끝낸 느낌이에요. 별점은 2점입니다.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

살해된 피해자 입에 파가 물려있고, 머리 맡에는 케이크가 놓여있는 기묘한 상황을 그린 단편입니다.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데 추리물로 보기는 어려워요. 나카모토 경부의 합리적인 수사를 통해 범인은 아주 쉽게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기묘한 범행 현장에 대한 아마치 형사의 추리가 전부인데, 진상이 밝혀지지 않기도 하고요. 어떻게 보면 혼잣말과 비슷한 수준의 이야기라 공허합니다. 아마치 형사 본인 스스로도 마음껏 공상한, 상식 밖의 엉뚱한 생각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니까요.

물론 실제 진상이 드러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피해자를 스토킹하면서 피해자가 파를 싫어하고 케이크를 좋아했다는 걸 알게 된 범인이 살인을 저지른 후, 좋아하는 케이크를 먹고 싶어도 싫어하는 파가 입을 막고 있어서 먹지 못해 원통해서 마음 편히 성불하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성불을 막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는 추리는 솔직히 억지스러워요. 피해자에게 집착해서 그녀가 죽어서 영원히 손에 닿지 않는 곳에 가면 안되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건데, 누가봐도 정신병자의 행동입니다. 정신병자의 정신나간 행동을 합리적으로 추리한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에요.

때문에 추리 소설로의 가치는 별로 없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밤을 보는 고양이"

할머니 혼자 사는 시골집에 내려간 주인공 유리에는 할머니의 고양이 미코가 며칠동안 밤에 어딘가를 바라보는걸 알아챈다. 미코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앞서 말씀드렸듯이 고양이 미코에 대한 묘사가 꽉 채워져 있는데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시종일관 느껴져 좋았습니다. 고양이를 쓰다듬고, 만지고, 같이 노는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사랑스러워요.

하지만 고양이가 어딘가를 바라보는 이유가 '냄새' 때문이며, 이는 이웃집 할머니를 아들이 암매장하기 위해 땅을 판 탓이라는 결말은 좀 억지스럽습니다. 고양이의 후각이 예민한건 맞지만, 이웃집에서 땅을 판다고 밤에 자지 않고 그쪽을 쳐다본다는건 좀 이상하잖아요? 땅을 판다고 해서 그렇게 특별한 냄새가 날지도 잘 모르겠고요. 실제로 공사 현장 옆에 산다고 해서 고양이가 그곳을 바라보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닐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고양이 묘사는 좋지만 그 외에는 그냥저냥한 소품이었습니다.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패전 직전인 1944년 겨울, 나가노 현에 위치한 제국 육군 특수 과학 연구소 2-13호 실험실에서 벌어진 기묘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날카로운 흉기는 하나도 없는 밀실인 실험실에서 피해자가 후두부를 날카로운 흉기로 얻어 맞아 죽은 사건이었다. 언뜻 두부 모서리에 부딪혀 사망한 걸로 보이는데 과연 진상은 무엇일까?

밀실 살인물이자 불가능 범죄물입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 마사키 박사가 실험실에서 연구하고 있는 인력 '공간 전위', 즉 일종의 텔레포트 현상을 인력으로 발생시켜 미국에 폭탄을 투하한다는 연구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특무 첩보 기관에서 파견 나온 도네 소좌의 추리는 꽤 기발했습니다. 공간 전위의 첫번째는 공간 역전 현상으로 공간이 뒤집혀 피해자는 거꾸로 떨어졌고, 우연찮게 지금은 움푹 들어간 천장 모서리에 후두부가 찍히게 되었다는 추리입니다. 공간 역전이 일어나면 움푹 들어간 곳은 반대로 튀어나올 테니까요.

하지만 당연히 이런 괴기한 추리는 진상도 뭐도 아니며, 뒤이어 주인공인 이즈카 가쓰오 이등병의 합리적인 추리가 등장합니다. 범인은 도네 소좌이며, 이유는 피해자가 스파이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흉기는 벽돌 같은 걸로 범행 후 멀리 던져버렸고, 아침에 문을 열 때 문 앞의 눈이 치워져 있었다는게 증거고요. 밀실은 특무대 소속이면 자물쇠 여는 것 쯤은 식은죽먹기였을거라는 식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이 역시 이즈카 이등병의 상상일 뿐입니다. 근거도 없고, 진상도 결국 밝혀지지 않아요. 그리고 이즈카 이등병의 상상이 진상이었다 하더라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고를 위장하여 연구에 종사하는 병사들을 죽이는건 별로 어렵지 않다고 이즈카 본인 스스로 이야기하는데, 도네 소좌가 이런 불가능한 상황을 연출해 가면서까지 가게우라 이등병을 죽일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가 스파이라고 생각했다면 사람들 앞에서 총으로 쏴 죽여도 괜찮았을겁니다. 그만큼 미친 시대였지요.

그래도 일본의 전황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 무식한 특수 과학 실험,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걸 풍자하는 묘사와 내용은 인정할 만 합니다. 공간 전위라는 기묘한 실험에 대한 아이디어와 이를 추리에 응용한 발상도 좋았고요. 차라리 이 추리가 마지막에 진상처럼 드러나고, 결국 진상은 아무도 모르지만 미친 시대에 누가 그런걸 신경이나 쓸까? 라는 형태로 마무리했더라면 훨씬 마음에 들었을텐데 여러모로 아쉽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

하마오카는 회사 연구소에 극비 신소재 관련 자료를 가져오기 위해 방문했다. 그런데 마침 그 곳에서 인형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학교 선배 네코마루를 만났고, 우연히 연구소 내 산책을 함께 하다가 연구 소장 살인 미수 사건을 접하게 되는데...

일종의 불가능 범죄를 다룬 정통 본격 추리물입니다. 그런데 도가 지나친 삼엄한 연구소 경비, 기묘한 연구원과 도저히 알 수 없는 센스의 연구소 마스코트 네코멜론군, 이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기이한 네코마루 선배 등 설정이 만화적이라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건 단점입니다. 네코마루 선배 정도만이었다면 괜찮았을텐데 말이죠. 이래서야 지극히 현실적인 동기 - 극비 신소재에 대한 정보를 빼돌리는 것 - 와 거리감이 커서 영 와 닿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시종일관 장난으로 일관하는 행동과는 다르게 추리 자체는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네코마루 선배의 추리만큼은 괜찮았습니다. 아무도 범행을 저지를 수 없었으니 이 범행은 소장의 자작극이다! 그리고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던질 수 없으니 빈 양동이를 던져 부딪혔고 물은 그 전에 쏟아 놓았다!는 추리로 아주 현실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극비 신소재 자료를 빼돌리고 이를 하마오카에게 뒤집어 씌우려 했다는 동기도 좋았고요. 농담같은 철저한 보안은 구급차를 타고 빠져나감으로써 뚫을 수 있다는 발상 역시 보안이 나름 강한 회사에 다니는 제 입장에서 보아도 설득력이 높아 보입니다. 과연 시리즈 작품에 탐정으로 등장할 만 합니다.

만화적이고 과장된 묘사를 줄이고 좀 더 일상계스러운 작품으로 쓰는게 여러모로 더 나아 보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다음 작품이 기대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06/12/03

셜록 홈즈 전집 8 : 홈즈의 마지막 인사 - 아서 코난 도일 / 백영미 : 별점 2점

셜록 홈즈 전집 8
아서 코난 도일 지음, 백영미 옮김/황금가지

추리소설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아니 아예 관심조차 없어도 누구나 아는 명탐정 셜록 홈즈는 알지요. 탐정의 대명사라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고, 꾸준히 읽어 왔습니다. 전집은 이미 중학생때 다 읽었고, 이런저런 문고본으로 많이 소장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간만에 찾아간 헌책방에서 황금가지에서 출간된 전집을 발견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구입하여 다시 읽어보게 되었네요. 나름 최근 구상중인 창작 추리소설 작업에도 도움이 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요. 그리고 이 황금가지 버젼은 삽화가 굉장히 충실해서 이래저래 소장가치는 충분하다 생각되거든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단편집은 실망 그 자체였습니다. 실려있는 8편의 작품 대부분이 다른 시리즈 단편들과 너무 비슷한데 수준은 낮은 탓입니다. 개인적인 홈즈 단편의 최고 걸작이자 베스트는 "붉은 머리 클럽"인데, 엇비슷하기는 커녕, 처지는 작품이 많습니다. 특히 가장 마지막 단편인 "마지막 인사"는 단지 홈즈와 왓슨 캐릭터를 이용한 모험물에 지나지 않아서 대미를 장식하는 단편으로는 너무나 별로였어요. 그다지 색다르거나 신선한 작품도 실려 있지 않고요. 때문에 홈즈의 매력을 느끼기에는 부족했습니다.

물론 이 작품이 쓰여진 시대를 놓고 본다면 이러한 평가는 온당한 것은 아니겠죠. 무려 1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 본다면 너무 순진하거나 유치한 플롯일 수 있고, 작위적이고 뻔한 내용에 별다른 트릭도 없지만 작품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재미는 아직도 변하지가 않았거든요. 이러한 재미는 뭐니뭐니해도 홈즈라는 캐릭터의 힘이겠죠. 아직도 계속 재생산되고 패러디되는 굴지의 명탐정 홈즈와 조수 왓슨이라는 캐릭터 설정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거든요.
그래도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1. 등나무 집 :
홈즈에게 스콧 에클스라는 신사가 급하게 찾아와 자신에게 일어난 황당한 사건 조사를 의뢰한다. 사건은 그가 최근에 사귄 친구인 스페인계 미남자 가르시아의 이른바 "등나무 집"이라고 불리우는 저택에 초대받은 것에서 시작된 것으로 그가 저녁을 먹은 뒤 잠들었다가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저택이 텅텅 비어 있었다는 것. 그러나 가르시아는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고 홈즈는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나선다.
홈즈 시리즈의 특징인 "평범한 사람에게 닥친 황당한 상황"이라는 소재를 그런대로 잘 살렸다고는 생각되지만 이후의 전개가 굉장히 부실한 작품입니다. 알리바이를 조작하기 위한 간단한 트릭이 나오지만 그다지 효과적인 트릭은 아니고 부두교 등을 집어 넣은 것은 너무 과했다고 보여지거든요. 홈즈물의 전형이긴 하지만 작품 자체는 범작 수준이었습니다.

2. 소포상자 :
수잔 쿠싱이라는 독신 여성 앞으로 소포 상자가 도착하는데 그 상자안에는 인간의 귀 2개가 들어있다는 엽기적 사건이 일어나고 홈즈는 레스트레이드의 부탁으로 사건 조사에 착수한다.
역시 홈즈 시리즈의 전형적인 작품입니다. 그러나 시작은 좋았지만 결국 알맹이 없게 끝나는 내용보다 외려 서두의 왓슨의 생각을 추리해 내는 홈즈의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레스트레이드의 "뻔뻔한" 활약 역시 재미있었고요.

3. 붉은 원 :
하숙집을 운영하는 워런 부인이 최근 찾아온 기묘한 하숙인에 대해 사건 조사를 의뢰하기 위해 찾아온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설정이지만 수수께끼의 하숙인의 정체를 밝혀내는 홈즈의 추리 과정은 정공법이면서도 무척이나 확실해서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단순한 이야기를 정통 추리물로 바꾸어 놓는 기본 아이디어가 상당히 좋네요. 그러나 코난 도일 경은 아이디어가 막히면 "비밀 조직"을 가져다 붙이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부한 내용 전개로 마지막에 완성도가 떨어진 것이 안타깝습니다.

4. 브루스파팅턴호 설계도 :
영국이 국운을 걸고 개발하는 신형 잠수한 브루스파팅텅 호의 설계도 보관과 관련이 있는 병기창 사무원 캐도건 웨스트가 시체로 발견되고 그의 주머니에서 잠수함 설계도 7장이 있다는 것이 확인된다. 가장 중요한 3장은 사라진 상태. 캐도건 웨스트가 설계도를 빼돌려 팔아 넘기려 하다가 살해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잃어버린 설계도를 찾기 위해 국가를 위해 일하는 홈즈의 형 마이크로포트가 홈즈에게 직접 사건을 의뢰한다.
마이크로포트 홈즈가 등장해서 사건을 의뢰한다는 설정 이외에는 이전에 발표되었던 단편인 "해군 조약"과 유사한 설정과 소개로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그러나 시체가 발견된 장소를 추리해서 살해된 곳, 그리고 범인을 추리하는 내용은 확실히 홈즈다운 부분이라 생각되고 마지막까지 내용 전개가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어서 진부함을 상쇄시키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5. 빈사의 탐정 :
허드슨 부인에게서 홈즈가 죽어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 찾아간 왓슨. 홈즈는 왓슨에게 자신의 병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인 컬버튼 스미스를 불러 줄 것을 부탁한다.
너무너무 뻔해서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작품이었습니다. 홈즈의 위기상황 자체는 굉장히 이색적이며 특이한 설정이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전개가 너무 진부하며 추리적인 요소가 거의 없거든요. 추리물보다는 홈즈라는 캐릭터에 기댄 성격이 더 짙은 소품이라 생각되네요.

6. 프랜시스 카팍스 여사의 실종 :
명문 귀족의 후예인 미모의 독신여성 프랜시스 카팍스 여사가 실종된 사건이 벌어지고 홈즈는 왓슨에서 그녀의 행적을 쫓아 자신에게 보고해 줄 것을 부탁한다. 왓슨은 온 유럽을 돌면서 그녀의 뒤를 쫓다가 그녀의 실종에는 그녀 앞에 나타난 야만인과 같은 남자의 존재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온 유럽을 헤집고 다니는 듯한 스케일은 굉장히 크지만 범죄 자체는 그다지 특출난 것은 없습니다. 중반 이후까지 왓슨이 좌충우돌 하는 모습만 등장할 뿐 실제로 본격적인 추리 이야기는 이야기 후반에만 등장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추리적 요소 역시 지금 보기에는 너무 낡고 진부해서 공감이 좀 덜 가긴 했습니다. 홈즈가 한번 패배할 뻔 했다는 것 하나는 굉장히 특기할만하나 그 이외의 알맹이는 별로 없는 작품입니다.

7. 악마의 발
홈즈는 건강 때문에 콘월 지방으로 요양을 떠난다. 그러나 그 지방의 트리대닉 와사 저택에서 불가사의한 사건이 벌어진다. 하룻밤 사이에 카드놀이를 즐기던 세 남매 중, 오빠 2명은 미쳐버리고 여동생은 사망한 사건. 홈즈는 사건 수사에 뛰어들지만 곧바로 가족 중에서 마지막으로 남았던 모티머까지 하룻밤사이 똑같은 죽음을 맞게 된다.
역시 홈즈물의 전형적 작품으로 상당히 괜찮은 트릭이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가장 중요한 흉기와 살해 방법에 대해서는 그다지 과학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신뢰가 가지는 않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8. 마지막 인사
1차 대전이 벌어지기 직전, 독일 황제의 비밀 첩보원인 폰 보르크는 자신의 비밀 요원인 앨터몬에게서 마지막으로 확보할 암호체계에 대한 문서를 받고 영국을 떠나 독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일종의 첩보물이긴 한데 단편집 말미를 장식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평균 이하의 작품이었습니다. 추리적 요소는 전무하고 홈즈 말년의 모습이 약간 묘사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실망만 안겨준 작품이거든요. 제대로 된 추리물로 대단원을 장식했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2003/12/15

마지막 에이스 - 프레드릭 포사이스 : 별점 4점

"자칼의 날"등으로 유명한 첩보/스릴러 작가 F.포사이스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한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증거", "목격자", "광고번호H331","마지막 에이스", "면책특권","아일랜드에는 뱀이 없다(이하 아일랜드)", "황홀한 죽음", "제왕","재수없는 날" 순입니다.
"목격자"와 "아일랜드.."는 이전에 다른 단편 앤솔로지에서 읽었었던 단편이니, 새롭게 접한것은 7편이네요.
첫 번째 작품인 "증거"는 걸작입니다. 독특한 설정, 계단을 올라가는 듯한 스릴, 반전까지 짧은 분량에서 더 이상의 이야기를 발견하기 힘들정도로 완성도 높은 단편입니다.

"목격자"는 예전에 다른 미스테리 앤솔로지에서 접했었던 이야기로("세계 미스테리 명작여행") 설정과 내용은 조금 뻔하지만 평작 이상은 됩니다. 킬러가 총을 반입하는 과정이 내용보다 오히려 흥미진진했습니다.

"광고번호 H331"은 한 중년남자의 일탈과 그것때문에 협박당하는 과정에서의 심리적 공포, 스릴 등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내용이 역시 좀 뻔했다는 것이고요. 그래도 마지막 장면에서의 살짝 반전은 괜찮았습니다.

"마지막 에이스"는 수록 단편들 중 추리 및 스릴러물 성향 작품들 중에서는 가장 처지는데 왜 표제작인지 모르겠네요. 포커에 빠져들게 되는 과정의 묘사는 흥미진진하고 디테일하지만 결말은 다소 실망스럽습니다. 너무 익숙한 반전이었어요.

"면책특권"은 신문기사에 의해 명예를 훼손당한 주인공이 법률서적을 뒤진 끝에, 면책특권이라는 법률을 이용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는 이야기인데........., 일종의 콩트로 추리물이나 스릴러물의 요소는 별로 없습니다. 존 그리샴이 쓴 가벼운 단편물 같은 느낌입니다.

"아일랜드.."는 아마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포사이스의 단편이겠죠? 세계 미스테리 걸작선에 수록되어 있는 바로 그 작품입니다. 좋은 작품이지요.

"황홀한 죽음"은 자신이 죽은 뒤 유산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인 한 자산가의 이야기인데, 이색적이긴 하지만 그다지 흥미롭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부자들 이야기를 싫어하나봐요. 
그래도 보기싫은 여동생 가족을 골탕먹이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결국 이루어 낸다는 구성과 마지막 묘사까지 완성도는 대체로 높습니다.

"제왕"은 헤밍웨이를 다분히 의식하고 쓴것이 분명한 "낚시"단편입니다. 순문학에 가까운 단편이지만 감정의 변화와 막판 뒤집기 (반전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모자란)가 통쾌한 나름대로 멋있는 작품입니다. 물론 "노인과 바다"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지요..

마지막 "재수없는 날"은 그야말로 모든것이 꼬여버린 한 도둑의 이야기인데 코믹한 분위기가 넘치는 소품입니다. 아일랜드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포사이스의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가벼운 것 같아서 조금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범작과 수작이 골고루 섞여있고, 범작에서도 포사이스의 재능은 느낄 수 있는 꽤 괜찮은 단편집입니다. 모든 작품에서 포사이스 특유의 단계적으로 늘어가는 스릴과 반전의 묘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코믹한 요소가 많기도 하고요. 대부분의 이야기가 나름대로 "해피앤딩"인것도 특이합니다.

이 책은 저같이 단편소설 매니아에겐 딱 알맞는 책인것 같아요. 단편 하나하나의 길이도 적당하고 쉽게 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주변에서 구할 수 있다면 강추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PS: 9편이 실려있는데 책 뒷커버에는 "F.포사이스의 전율적인 스릴러 10편이 들어있다"라고 되어있군요. 흠...

2004/11/23

반 헬싱 - 스티브 소머즈 (2004) : 별점 3점



로마 교황청 소속의 특수 요원 "반 헬싱"은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 스스로 선택하여 싸움에 뛰어든 전사로 그의 새로운 임무는 트랜실배니아의 드라큘라 백작을 해치우고 정통 왕위 계승자들을 보호하는 것.
하지만 이미 왕자는 늑대인간에게 습격당해 늑대인간이 되어 버린 상태이며 안나 공주의 목숨도 계속 위협받고 있었다. 늑대인간이 된 오빠를 구하기 위해 뛰어든 공주가 위험에 처하게 되고 반 헬싱의 활약으로 겨우겨우 탈출에 겨우 성공하지만 지하에서 우연히 프랑켄슈타인의 몬스터와 만나게 되고 드라큘라가 자신의 새끼들을 부화시키기 위해 몬스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결국 납치된 프랑켄슈타인의 몬스터를 구하고 드라큘라의 야망을 저지하기 위해 드라큘라 성의 비밀입구를 찾아내어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되는데.... 

올 여름을 강타했던 블록버스터 화제작. 드라큘라 소설의 설정만 살짝 가져와서 헐리우드 식으로 각색하여 액션영화를 만들어 내었다는 것에 보고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의외로 보고나니 흥행에 성공할 만 하더군요. 

일단 느낌은 그야말로 "블레이드+007"이라는 생각입니다. 주인공이 뱀파이어에서 늑대인간으로 설정이 바뀌었고, 007의 영국 첩보부가 로마 교황청으로 바뀌었을 뿐 두 영화에서 이미 친숙한 모든 요소들을 동원하여 영화를 끌어나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흥행에서 이미 검증된 요소들만 모아 놨달까요? 더군다나 원래 특수효과가 짬뽕된 과장된 액션을 잘 뽑아내는 감독의 영화답게 액션 장면은 과장되었지만 유쾌하고 흥미진진하게 연출되어 보는 재미를 더합니다. 
각종 고딕 호러의 몬스터들이 등장하는 것도 인상적입니다. 초반에 잠깐 등장한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하이드를 비롯하여 프랑켄슈타인의 몬스터, 드라큘라와 그의 3미녀등의 캐릭터들은 설정도 확실하고 원작을 잘 구현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듭니다. 특히 프랑켄슈타인의 몬스터가 잘 표현되어 있더군요. 반 헬싱역의 휴 잭맨이나 수도사 칼 역의 데이빗 웬험, 공주역의 케이트 베킨세일, 그리고 드라큘라 역의 리처드 록스버그 모두 캐릭터에 딱 맞는 호연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의 최강 보스격인 드라큘라 백작과의 사투가 생각보다 무척 시시하다는 점과 몇몇 사소한 점의 의문을 제외한다면 킬링타임용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액션물로는 합격점을 충분히 줄 만 합니다. 그야말로 단순화끈 액션물로는 더말할나위 없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PS : 의문점이 몇개 생겼습니다. 중요하진 않지만..... 
  1. 늑대인간만이 드라큘라를 처치할 수 있다고 하는데 다른 늑대인간들은 맘대로 조종할 수 있는 드라큘라가 왜 반 헬싱만 조종할 수 없었을까요? 
  2. 마지막 사투에서 드라큘라는 그냥 밖으로 날아서 도망가 버리면 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새끼들을 전부 부르던지... 
  3. 그럼 반 헬싱이 원래 대천사 가브리엘이었다는 이야기인가요?
  4. 마지막에 그 드라큘라의 소굴에서 어떻게 빠져나왔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