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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5

도시전설의 모든 것 - 얀 해럴드 브룬반드 / 박숭서 : 별점 3점

도시전설의 모든 것 - 6점
얀 해럴드 브룬반드 지음, 박중서 옮김/위즈덤하우스

현대의 도시전설, 즉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미스터리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생성되고, 퍼지며, 사람들의 믿음 체계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해당 이야기들과 함께 소개하는 책입니다. '사랑니를 빼면 기억력이 감퇴한다', '자동차 트렁크에 숨어있는 괴한 이야기', '맥도날드 햄버거에 벌레가 섞여 있다' 같은 익숙한 이야기들이 언제, 어디서 처음 시작되어 널리 퍼졌는지,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담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지를 분석하여 알려줍니다. 관련된 서브컬처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예를 들자면, '한 남자가 여자와 교외로 드라이브를 나가 차를 세우고 시간을 보내려던 중, 라디오에서 갈고리 손을 가진 탈주범에 대한 뉴스가 나온다. 겁에 질린 여자가 집에 가자고 강하게 요구해 남자는 화가 난 채로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준다. 하지만 여자가 차에서 내린 순간, 차량 문고리에 갈고리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한다.'는 갈고리 괴담을 소개한 뒤,

'이 이야기는 1967년, 인디애나 대학의 한 여학생이 룸메이트에게 들려준 "갈고리남"을 문자 그대로 채록하여 1968년 학술지 인디애나 민간전승 창간호에 실은 것이며, 민속학자 린다 데그 교수는 이 전설이 최소 1959년부터 전해졌고 지역에서 44종의 변형된 버전이 수집되었음을 보고했습니다. 1960년 디어 애비 칼럼에도 소개되었고, 이후 가장 유명한 미국 도시전설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영화 미트볼스(1979)와 캔디맨(1992), 만화 파 사이드 등 다양한 매체에서 다뤄졌으며, 많은 소설가들도 이를 차용했습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이야기가 단순한 공포담인지, 늦은 밤 외진 곳에서 위험을 경고하는 이야기인지, 혹은 성적인 의미를 내포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자동차 안에서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려는 상황과 자동차 밖에서 갈고리남이 위협하는 구조가 상징적 거세를 암시한다는 해석도 존재합니다.'라는 해설이 이어지는 방식입니다.

자기 것인 줄 알고 쿠키를 빼앗아 먹었는데, 알고 보니 남의 쿠키였다는 이야기는 "포기하기 힘든 유혹" 수록작인 "깨진 습관"이 원전인 줄 알았는데, 영국에서는 1970년대 초부터 "비스킷 봉지(The Packet of Biscuits)"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이야기의 수많은 변형이 존재한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과거 수십 년 전 리더스 다이제스트 등에 독자 투고로 실린 유머들이 사실은 도시전설의 일환이며,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였다는 것도 흥미로왔고요.

이처럼 단순한 유머, 재미난 도시전설 소개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정보를 함께 전해주는 것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인터넷과 미디어가 도시전설의 확산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도시전설이 만들어지고 퍼지는 과정에 대한 분석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믿고 있는 이야기들이 실제로는 허구이거나 잘못 전해진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예를 들어 "거룩한 장소(The Holy Place)"라는 도시전설이 있습니다. 어느 성당의 신도들이 측랑의 특정 지점에 가면 항상 무릎을 꿇고 성호를 그었는데,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오래된 신도에게 이유를 물어본 결과, 원래 그 지점에는 벽에서 돌출된 부분이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그 장애물이 사라졌지만, 습관이 남아 무릎을 꿇는 행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볼 만한 내용이 많은데, 분량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1,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은 과했습니다. 도시전설이 만들어지고, 퍼지고, 변형되는 과정에 집중하려 했다면, 이렇게 많은 사례를 수록하기보다는 보다 핵심적인 이야기들에 집중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너무 학술적으로 접근한다면 "한국의 학교 괴담"처럼 논문에 가까운 결과물이 될 테니, 어느 정도 균형은 잘 맞춰야 하겠지만요.

그래도 수록된 도시전설들이 흥미롭고, 관련된 서브컬처 정보도 풍부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수록 도시전설 한 가지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정신병자와 타이어 너트(The Nut and the Tire Nuts)"

어느 시골길을 달리던 운전자가 갑자기 타이어가 펑크 나 차를 세웠다. 그는 당황했지만 곧 잭을 꺼내 타이어를 교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실수로 휠 너트 다섯 개를 모두 흘려버리고 말았다. 어두워지는 길가에서 너트를 찾으려 애썼지만, 결국 하나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낙담한 그때, 근처 정신병원의 울타리에 기대어 있던 환자가 이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각 바퀴에서 너트 하나씩만 풀어 끼우면 되잖아요. 그러면 적어도 정비소까지는 갈 수 있을 텐데요.”

운전자는 깜짝 놀라면서도 감탄하며 물었다.

“이렇게 똑똑한 분이 왜 정신병원에 계신 거죠?”

그러자 정신병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미쳤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멍청한 건 아니니까요.”

2020/05/01

머드맨 1, 2 - 모로호시 다이지로 / 김동욱 : 별점 3점

머드맨 1 - 6점
모로호시 다이지로 지음, 김동욱 옮김/미우(대원씨아이)
머드맨 2 - 6점
모로호시 다이지로 지음, 김동욱 옮김/미우(대원씨아이)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판타지 만화입니다. 일본 전통 설화를 현대로 끌고온 "요괴 헌터"와 비슷하게 전설을 현대 무대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인류학자의 딸 나미코는 아버지가 뉴기니에서 데리고 온 원주민 소년 코도와와 함께 살게 되는데, 코도와는 사실 학자가 원주민 여자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학문적 야심을 달성하기 위해 일부러 오지 마을 촌장에게 양자로 보낸 뒤, 코도와 몸에 새겨진 문신의 비밀을 밝혀내려 한 거죠. 그러나 억지로 문신의 비밀을 알아내려 한 교수의 행동은 정령 머드맨에 의해 들통납니다. 이후 코도와가 응 바기를 불러 그를 응징하며 자신이 뉴기니의 성스러운 숲을 지키는 후계자라는걸 드러내는게 1화입니다.
이어지는 2~3화는 문명을 거부하고 뉴기니의 전통 신앙을 지키려는 코도와가 슈퍼 히어로처럼 활약하는 독립적인 이야기입니다. 2화는 뉴기니는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이후, 시간의 흐름이 멈춘 상태의 세계라는 신화적인 내용이며 3화는 뉴기니를 전염병으로 초토화시킨 문명 탐사대에 대한 복수극이거든요. 복수극은 별다른 내용이 없는, 일종의 중간 다리 역할에 지나지 않지만 파푸아 뉴기니가 '노아의 방주'가 도달한 장소로 덕분에 독특한 생태계가 이루어졌다는 설정은 재미있었어요.

그러나 4화부터는 완결까지 이어지는, 긴 호흡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파푸아 뉴기니 전설인 카우나기, 나미테 이야기가 핵심이지요. 전설 속에서 둘은 위대한 가면의 비호를 잃고 숲에서 달아나고, 옹고로의 바위 안에 숨겨져 있던 악령인 아엔의 가면이 그 둘을 쫓습니다. 겨우 탈출한 둘은 위대한 자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유한한 삶을 살게 되지만, 카우나기의 몸에 새긴 문신 덕분에 자손은 숲과 정령의 가호를 받으며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신을 새기다 피가 판다누스 나뭇잎에 튀고, 이 나뭇잎은 자라서 무엇이든 먹는 나라모로 성장해서 카우나기와 나미테를 위협합니다. 전설에서는 나미테가 죽은 뒤, 그 몸에서 먹을게 자라났다게 결말입니다. 덕분에 나라모도 먹을게 생긴 것이죠.
카우나기와 나미테가 다시 부활한게 코도와와 나미코라는 설정으로, 둘은 전설 속 둘의 모험과 똑같은 경험을 하면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그러나 코도와와 나미코는 전설대로의 결말을 거부하고, 그들의 삶을 살기 위해 떠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이야기 속에 비행기가 신의 선물을 가지고 와서 모두를 풍요롭게 해 준다는 '카고 컬트'를 이야기에 잘 녹여낸 부분도 흥미롭지만, 다시 부활하여 사람들을 위협하던 나라모가 "반드시 다시 돌아와 숲도, 산도 모두 먹어치울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는데, 일본의 야마비시 상사가 전설 속 숲에서 천연가스와 석유를 발견하여 자연을 황폐하게 만들고, 야마비시 상사의 로고가 나라모 문양과 같았다는 후일담도 많은걸 생각하게 해 주네요. 지금 보기에는 좀 낡은 환경 보호 메시지이기는 해도, 전설과 합쳐서 좋은 시너지를 내거든요.
코도와와 나미코가 죽지 않은 만큼, 코도와가 나미코와 결합하여 후손들을 낳아 문명에 대항하여 위대한 숲의 의지를 이어갈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 것도 좋았어요.

파푸아 뉴기니의 전통 설화가 일본 전통 설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과감한 아이디어도 눈길을 끕니다. 코도와 몸의 문신이 일본 죠몬 토기와 이어지는 초반부 설정도 흥미로우며, 신들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옹고로'는 일본 전설의 섬 '오고로노지마'이며 카우나기와 나미테는 이자나기, 이자나미와 같다, 즉 세계의 근원은 하나라는 결말도 굉장히 인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모로호시 다이지로 작품과는 다른 큰 특징도 있습니다. 바로 '코도와'가 상당한 수준의 능력을 지닌 일종의 히어로라는 점입니다. 전설 속 수호령 머드맨을 부리며 숲길을 열어 빠르게 이동하고, 뛰어난 활 솜씨로 악당들을 처단하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덕분에 아엔의 가면과의 사투 등에서는 다른 모로호시 다이지로 작품에서 보기 힘든 액션씬이 가득 펼쳐지는게 좀 신기했습니다.

솔직히 일본 전통 설화와의 연결은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았고, 아무리 좋았다하더라도 카고 컬트, 일본의 종합 상사 등의 소재가 녹아들기에는 분량이 좀 부족했습니다. 더욱 긴 장편으로, 아니면 차라리 코도와가 뉴기니 주술로 문명과 싸우는 옴니버스 단편으로 구성된 액션 시리즈로 그려내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기는 합니다.
그래도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매력은 잘 느낄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각 권말에 각 3 ~ 4편씩 수록된 단편들도 다른 곳에서 접한게 많지만 1권의 "유니콘 사냥꾼"과 2권의 "인간 대 통조림", "왕의 죽음"은 모로호시 다이지로 월드를 상징한다고 해도 부족함 없는 멋진 단편들이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이미 절판되었고, 중고 가격도 어마어마한데 e-book으로 나와주기를 바랍니다.

2014/07/28

포토로그 신화와 전설 - 필립 윌킨스 / 김병화 : 별점 3점

신화와 전설 - 6점
필립 윌킨스 지음, 김병화 옮김/21세기북스(북이십일)

신화-전설 백과사전으로 전 세계 각지의 신화와 전설을 집대성하여 다양한 풀컬러 도판과 함께 소개해주는데 그야말로 양과 질 모두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사전식 구성으로 모든 주제가 도판 포함해서 한 장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쉽게 쉽게 읽을 수 있어서 좋더군요.

개인적으로는 베다 - 라마야나 - 마하바라타를 중심으로 신들과 신화, 전설을 소개해주는 힌두교 부분이 여러모로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읽으면서 "3×3 아이즈"라던가 "신들의 사회"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이렇게 여러 가지 장르물들을 접할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라던가 오딘, 아서왕 전설과 같이 익히 알고 있었던 이야기들이 대량 포함된 서구권 신화, 전설이 거의 1/3을 차지하며, 일본의 신화 비중이 불교 비중보다 많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전체적인 비중 조절에 실패한 느낌이 들어요. 한 장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요약이 지나친 탓에, 깊이 있는 내용을 얻기 조금 어렵다는 단점도 있고요. 번역과 교정도 조금 미흡해 보였습니다.

그래도 이 책 한 권만 제대로 읽어도 전 세계 신화와 전설에 대해 기본적인 수준의 지식은 갖출 수 있을 정도로 잘 정리되어 있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심지어 저는 알라딘 15주년 기념행사로 10,000원이라는 가격에 구입하기도 했으니까요. 만화책도 비싼건 만 원 가까이 하는 현실에서 300페이지가 넘는 풀컬러 양장본이 만 원이라니... 가성비만 놓고 보았을 때는 별점 5점도 충분합니다!

2025/07/06

그리고 유리코는 혼자가 되었다 - 기도 소타 / 부윤아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문 유리가하라 고등학교에는 '유리코 님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다. ‘유리코’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 중 마지막으로 남는 유리코는 ‘유리코 님’이라 불리며 학교에서 모든걸 뜻대로 할 수 있게 된다는 전설이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마쓰자와 유리코’가 옥상에서 추락해 사망했고, 그 뒤 다른 유리코들도 차례로 살해당했다. '나' 야사카 유리코는 자신도 이 전설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 속에서, 친구 미즈키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시작하는데...

일본 작가 기도 소타의 데뷰작인 학원 미스터리입니다. 유서 깊은 명문 여학교 ‘유리가하라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괴담, 본격 추리, 인물 간 심리전이 어우러지는 작품입니다.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유리코 님 전설’이라는 설정입니다. 단순한 학교 괴담처럼 보이지만 '이름'이 주요 매개체로 결국 학교에 유리코는 딱 한 명만 남게 된다는 독특한 아이디어가 작품 속 사건들의 설득력을 높여주는 주요한 장치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전설에 따른 일종의 초자연적 현상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트릭이 사용되었으며,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도 돋보입니다. ‘마쓰자와 유리코 추락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마쓰자와 유리코가 떨어진 옥상은 밀실이었습니다. 최소한 범인은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지요. 미즈키는 불탄 교복과 '흰 백합 모임' 방 창문이 항상 열려있다는걸 근거로 범인이 교복을 이어 로프를 만든 뒤 아래층 '흰 백합 모임' 방을 통해 탈출했다는 추리를 내 놓습니다. 탈출 후 방법을 숨기기 위해 교복을 불태웠던 겁니다.

이외에도 ‘초대 유리코 님’의 일기에 담긴 위화감을 단서로 삼아, 실제로는 그 일기가 1970년대에 쓰인 것이 아니라 1998년 이후에 작성되었으며 초대 유리코 님이 사실은 여자아이가 아니라 남자아이였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부분은 서술 트릭물의 묘미를 잘 살리고 있습니다. 일기 속 세세한 부분에서 드러나는 모순을 독자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잘 배치해 둔 덕분입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는 과정도 논리적입니다. 흰 백합 모임 방 창문이 열려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던 인물이어야 하고, 해당 방의 열쇠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유리코 님으로 변장할 수 있을 만큼 체구가 작아야 했다는 조건들을 하나씩 밝혀내며 결국 ‘유리 선배’라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범인이 교복을 불태운 뒤 어떻게 옷을 챙겨입고 도주했는지도 이 추리를 통해 설명됩니다. 여자 교복 밑에 원래의 남자 교복을 입고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지요. 성정체성이 여성인 유리가 '유리코'들을 모두 죽이고 유리코 님이 되려고 했다는 동기도 유리코 님 전설 및 일기를 통한 서술 트릭과 잘 맞물려 있고요. 이를 학원제 연극 후 일종의 추리쇼처럼 밝히는 과정도 볼만 했으며, 다카미자와 선생이 과거 ‘초대 유리코 님’의 일기를 남긴 인물이며, 유리코 님 전설에 오랫동안 개입해 왔다는 반전 역시 꽤 그럴듯했습니다.

그러나 아쉬움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핵심 트릭인 교복을 로프로 만들어 탈출했다는건 그리 좋은 트릭은 아닙니다. 유치할 뿐더러, 아래에서 로프 교복을 불태웠다고 깔끔하게 흔적이 사라졌다는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발상입니다. 옷이 옥상에 아무 흔적도 남지 않고 타버린다는건 현실적으로 보기 어려우니까요.

그리고 마쓰자와 유리코 사건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은 전반적으로 단순하며, 추리의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는다는 문제도 큽니다. 범인이 범행에 성공한건 단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사건이 점점 확대되는데 학교나 경찰 차원의 진지한 대응이 없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최소한 '유리코' 들에 대한 보호는 진행했어야 해요.
다카미자와의 정체에 대한 반전까지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가 흑막으로 사건을 조종했다는 추리는 다소 억지스러웠고요.  

하지만 이런 단점은 사소합니다. 에필로그에 비교하면요. 에필로그에서 밝혀지는, 미즈키가 친구 야사카를 ‘유리코 님’으로 만들고 진짜 학교의 지배자가 되려 했다는 진상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입니다. 반전을 위한 반전으로만 보이고, 빼어난 활약을 보였던 명탐정 미즈키 캐릭터와도 잘 어울리지 않는 탓입니다. 학교의 지배자가 된다고 해도 특별한 뭔가가 있는건 전혀 아닙니다. 게다가 미즈키는 유리가 유리코들을 살해하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어쩔 생각이었던걸까요? 직접 다른 유리코들을 죽였을까요? 왜 이런 비상식적인 에필로그를 집어넣어 이야기를 망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미즈키의 계획이 흰 백합 모임의 유리코 선배에게 간파당해 미즈키가 살해당한다는 결말도 엉망입니다. 차라리 미츠다 신조 스타일로 야사코 유리코가 인지를 벗어난 '유리코 님'으로 거듭나며 괴담이 진짜가 된다는 식의 결말이 더 나았을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기발한 설정, 본격 추리 요소는 매력적이었는데 에필로그가 다 말아먹었습니다. 에필로그만 없었어도 별점 2.5점은 줄 수 있었는데 조금은 아쉽습니다.

2017/07/02

식물 이야기 사전 - 찰스 스키너 / 윤태준 : 별점 2점

식물 이야기 사전 - 4점
찰스 스키너 지음, 윤태준 옮김/목수책방

120가지 식물들에 대한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전해지는 전설이나 재미난 일화를 모아서 소개해 주는 책입니다. 하나하나의 호흡이 굉장히 짧습니다. 길어야 2~3페이지 정도의 짤막한 이야기들입니다. 짧은 건 반 페이지 짜리도 있고요.

이런저런 정보들이 많으리라 기대했는데 솔직히 실망했습니다. 내용이 재미가 없는 탓이 큽니다. 식물, 꽃이 많아서겠지만 사랑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은데, 대체로 비슷해서 지루하거든요. 슬픈 사랑의 결과로 연인이 꽃이나 식물이 되었다, 신의 저주 등으로 꽃이나 나무가 되었다는 식인데 이름만 다르지 내용은 대동소이합니다.
내용도 중구난방입니다. 항목들의 정리부터가 모호해요. '곡식' 이라는 큰 주제로 벼, 귀리, 수수 등을 모아 소개하는 항목이 있을 정도니까요.
수록된 이야기도 전설이면 전설, 실제 역사면 역사라는 식으로 보다 명확하게 카테고리를 구분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심지어 도판도 하나 없습니다! 사전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항목별로 똑같거나 유사한 구성에 적절한 도판이 필수라 생각합니다. 이런 건 일본 친구들이 잘 하는데 말이죠. 솔직히 사전이라는 표현은 가당치도 않아 보입니다.

우리나라 실정과 정서와 맞지 않는 식물들이 많은 것도 아쉽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봄직한 것들은 별로 등장하지 않아요. 서구권 신화, 전설, 일화 비중이 높습니다. 동양권 이야기는 그나마 일본 이야기가 많은 편인데 좀 과한 점이 없지 않고요. 국화 이야기에서 국화와 아무런 관계없는, 단지 이름이 '오키쿠'인 인물의 전설을 가져다 인용하는 것이 대표적이에요. 재미있기는 하지만 이래서야 '사전'이라는 취지에 많이 어긋나지요.

그래도 워낙에 많은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기에 재미있는 것들도 제법 있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 몇개 소개해 드립니다. 우선 처음 알게 된 것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개암이 헤이즐넛입니다. 개암은 북유럽에서는 굉장히 '신령스러운' 나무로 요술지팡이의 재료이자 일찌기 '다우징' 용으로 많이 쓰였다고 하네요. 그래서 식물학자 린네가 이것이 그냥 전설일 뿐이라는 것을 밝히는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숲 속에 돈을 숨겨두고 친구에게 개암나무 가지로 찾아보도록요. 뭘 이런걸 실험 씩이나 했는지.... 여튼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서 아담을 불쌍하게 여겨 신이 전해준 것이 개암나무 지팡이라는 등, 잉글랜드 최초의 그리스도 교회 건물은 개암나무 가지를 엮어 지었다는 등 기독교 쪽에서도 알아주는 나무더군요.
이와 정 반대되는 식물은 '금작화'입니다. 유다에게 팔려가기 직전 예수의 기도를 방해한 것은 금작화가 내는 소리였고, 헤롯왕에게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은신처를 알려준 것도 금작화와 이집트 콩이라고 하니까요. 마녀가 타는 빗자루도 금작화 가지로 만든다니 중세 시대에 멸종되지 않은게 신기하기만 합니다.
보리수 열매가 신들의 음식인 암브로시아라는데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딘의 우주수 위그드라실이 물푸레나무라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그동안 선악과가 사과라고 알고 있었는데 성경에는 명확하게 종류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니 의외였습니다.
동방 박사가 바친 '유향'은 발삼나무 수액을 말려 만든 약재라는군요. 수천년 된 전설의 약재인데, 무슨 효능이 있는지는 좀 궁금합니다.
그리고 요리 관련 이야기도 몇가지 기억에 남습니다.
타비스톡 애비의 수도사들은 맛있는 사과주를 만들어 수도사를 모집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톡 쏘는 맛이 너무 강했어요. 와인과 섞어서 부드럽게 만들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고요. 그래서 수도원장이 사과주를 부드럽게 만드는 공정을 개발하는 사람에게 상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키작은 절름발이 노인 한 사람이 나섰죠. 그런데 한 수도사가 노인이 뭐하나 궁금해서 몰래 훔쳐보니 악마였다지 뭡니까. 그래서 놀란 수도사가 술통에서 잠자던 악마에게 사과주를 쏟아 붓자 노인은 저주를 퍼부으며 하늘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화난 노인이 발한 열기 때문에 사과주가 펄펄 끓었고, 식어버린 사과주를 먹어보니 그 맛이 천하일미! 그때부터 모든 사과주를 불타는 유황에 부어 만든다고 합니다.
단풍당 (maple sugar)를 발견하게 된 것은 한 인디언 여성의 귀차니즘 때문이랍니다. 어느날 그녀가 사슴고기를 요리하다가 물을 떠오기 귀찮아서 단풍나무 수액을 채워 넣고 불에 올린 것이죠. 그 다음 잡담을 즐기다고 돌아와보니 수액이 모두 날아가버리고 사슴고기는 끈적끈적해 버렸습니다! 남편에게 혼날게 두려워 도망갔는데 밤에 돌아와보니 남편이 딱딱하게 굳은 고기를 열심히 먹고 그녀를 칭찬했다고 하네요. 아마 일종의 '사슴고기 강정' 이 되어버린 것이겠죠? 쉽게 구할 수 있는 단풍나무 꿀을 고기에 발라먹으면 비슷한 맛이 날 것 같습니다.
그 외 악마를 소환하는 방법도 인상적입니다. 1월 6일 밤 딱총나무 가지를 꺾고 나무에게 허락을 구한 후, 대답이 없으면 침을 세 번 뱉는다. 꺾은 가지를 가지고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마법진을 그리고, 주위에 특정 꽃과 산딸기 등을 늘어놓은 다음 한가운데에 선다. 악마가 나타나면 힐다의 지팡이(딱총나무 가지)로 가리키면 복종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한번 시도해 봐야 겠네요.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질 항목에서 소개되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이사벨라, 로렌조 커플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굉장히 끔찍했기 때문입니다. 둘의 사랑을 방해한 오빠들에게 로렌조가 죽자 이사벨라는 로렌조의 시신에서 머리만 잘라내어 화분에 숨기고 바질을 심어 소중하게 가꾸었다는 내용이거든요. 머리가 들은 화분이라니! 괴담에서나 봄직한 이야기인데 이를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포장한 것도 놀랍기만 하네요.

이렇게 읽을만한 부분도 많지만 전체적으로는 단점이 더 많습니다. 14,000원에 가까운 가격도 과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냥 인터넷을 통해 접해도 충분한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2026/03/13

봉래동의 연구 - 다나카 히로후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봉래동의 연구"

사립 덴키 학원 뒤 상세의 숲에는 ‘봉래동’이라는 동굴이 있는데, 이 동굴을 지나면 늙지도 병들지도 않고 배고픔도 없는 낙원 ‘봉래향’으로 이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져 왔다. 그러나 봉래를 찾으러 들어간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고, 동굴에는 용이 산다는 무시무시한 소문도 있었다. 
신입생 모로보시 히카루는 왕따 학생 미쓰메 토오루가 누군가로부터 봉래향의 존재를 들은 뒤 실종되자,  그를 구하기 위해 이런 정보에 정통한 민속학 연구회에 가입하여 회원들과 함께 상세의 숲으로 향했다. 수색은 실패로 끝났지만, 동급생 호시노가 봉래동의 정체를 알아내어 실종된 학생들 구출에 성공한다.

"대남무아미동의 연구"

모로보시 히카루는 학교 축제인 '히루메야마'제에서 연구회 대표로 뽑혀 오코노미야키 조리에 나섰지만 절망적인 요리 실력으로 처참히 실패했다. 팔지 못하고 남은 600장의 오코노미야키를 버리려던 히카루는 상세의 숲에 살고 있던 괴수를 만나게 되었다...

"검은 동굴의 연구"

민속학 연구회는 합숙을 위해 동북 지방의 작은 마을 기가시라 마을로 향했다. 숙소에서 모신다는 일종의 신인 '오시라사마'를 볼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낙뢰가 포함된 폭풍우로 발이 묶인 상황에서 숙소 여관의 여종업원과 주인 아들, 여주인이 연쇄적으로 살해당했다. 연구회원들은 살아남기 위해 옛날 어떤 고귀한 인물이 숨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검은 동굴’로 도망쳤다. 그리고 사건의 원흉인, 하자쿠라 기미코가 불러낸 악의 근원 스토쿠 상황과 마주쳤다...

일본 작가 다나카 히로후미(田中啓文)의 ‘학원 전기(伝奇) 미스터리 소설’인 “사립 덴키 학원 민속학 연구회(私立伝奇学園高等学校民俗学研究会)”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최근에 읽은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원서로 읽었습니다.

작품의 무대가 되는 덴키 학원의 정식 명칭은 사립 덴나카 기하치 학원 고등학교입니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개성이 강한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이며, 학교 행사와 규칙 역시 상당히 기묘합니다. 게다가 학교 옆에는 ‘상세의 숲’이라 불리는 거대한 밀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교장의 개인 소유지로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는 덴키 학원 민속학 연구회에 신입생 모로보시 히카루가 가입하면서 시작됩니다. 히카루는 개성 넘치는 연구회 멤버들과 함께 다양한 사건에 휘말리고요.
이 사건들이 ‘전기(伝奇) 미스터리’라는 명칭에 걸맞게 전설과 신화, 민속과 초자연적 존재들과 관련되어 있다는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첫 번째 이야기이자 표제작인 “봉래동의 연구”입니다.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다는 낙원 ‘봉래향’과 이어진 동굴이라는 전설이 등장하고, 민속학 연구회 멤버들은 이 전설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는데 그 중 하나가 봉래동에 산다는 ‘용’은 ‘출세소라’라는 겁니다. 조개인 법라패(호라카이)가 수천 년을 살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데, 용이 빠져나간 구멍이 동굴이 되었는 해석이지요.
이후 히카루가 발견한 동굴은 도자기처럼 매끈한 재질이었고, 근처에서는 괴물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립니다. 처음에는 실제 괴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히카루의 동급생 호시노가 밝혀낸 진상은 의외의 것이었습니다. 그 동굴은 사실 거대한 조개 껍데기였으며, 실제로 출세소라의 껍데기였습니다! 괴물의 울음소리 역시 소라 껍데기를 불 때 나는 소리와 같은 원리였습니다. 거대한 껍데기 내부를 통과하는 바람이 울림을 만들어냈고, 그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괴물의 포효처럼 들렸던 거지요.
진상은 작품 속에 제시된 여러 단서와도 연결됩니다. 예를 들어 히카루가 발견한 작살은 고둥류인 이모가이가 쏘아내는 치설과 같은 것이고, 사무라이가 뱀의 몸이 되었다는 전설도 치설에 의한 피부 손상이었다는 식으로요.

이처럼 전설과 신화를 해석하는 과정이 실제 괴물의 존재와 이어지는 구조는 꽤 흥미롭습니다. 앞서 제시된 단서들이 결말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점에서 추리적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 하고요. 이 작품만큼은 이런 '전기 미스터리'의 마스터라 할 수 있는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최고작과도 견줄만합니다. 별점 3점 이상도 충분해요. 

그러나 이후 이어지는 작품들은 영 별로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인 “대남무아미동의 연구”는 상세의 숲에 오래전에 멸종된 거대 나무늘보가 살아 있었다는게 진상입니다.
문제는 괴물이 극 초반부터 등장해 버리는 탓에 미스터리로서의 긴장감이나 추리의 재미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대왕 나무늘보를 뜻하는 일본어 ‘오오나마케모노’를 일본 신화의 신 ‘오오나무치’와 연결하고, 나아가 아마테라스가 대왕 나무늘보를 길렀을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해석도 근거가 발음의 유사성뿐이라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지고요. 그나마도 일본 독자라면 어느 정도 흥미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한국 독자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는 설정이었습니다.

마지막 작품인 “검은 동굴의 연구”는 더욱 실망스럽습니다. 이야기 전반이 비슷한 발음에서 비롯된 말장난 위주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하자쿠라 기미코가 불러낸 ‘스토쿠 상황’은 ‘스토쿠인’이라는 원호로 추존되었는데, ‘스토쿠인’과 ‘스타킹’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스타킹이 흉기로 사용되었다는 식입니다. 이후 호시노가 설명하는 여러 진상 역시 비슷한 방식이라 설득력이 부족해요. 스토쿠 상황에 대한 역사적 설명도 그 자체는 흥미롭지만,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요.

만화적인 설정과 분위기도 감점 요소입니다. 배경이 되는 덴키 학원부터 시작해서 고무술 ‘코마’의 후계자이자 엄청난 대식가인 모로보시 히카루, 천재이지만 흥분하면 반말을 하는 호시노, 미신 때문에 머리를 절대 자르지 않는 연구회 부장 이즈미야, 역사광이자 스모 도장의 후계자로 촌마게 머리를 하고 다니는 부부장 시라카베, 미모의 여장남자 이누즈카 등 주요 인물들의 설정 모두 만화적입니다. 등장인물들의 언행 역시 현실적인 느낌보다는 과하게 코믹해서 만화적이기는 마찬가지고요.
여러모로 전반적인 분위기도 가볍기 그지 없는 탓에, 전설과 고전, 역사 이야기를 풍부하게 끌어다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인상은 본격 미스터리보다는 라이트 노벨에 가까운 장르물이라는 느낌을 전해 줍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봉래동의 연구”만큼은 괜찮지만, 뒤의 두 편이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데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만화적인 정서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될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만약 번역되어도 “봉래동의 연구” 한 편만 읽어 보아도 충분합니다.

2009/05/29

명탐정 키요시로 사건노트 1~7 - 하야미네 카오루 / 에누에 케이

제목 그대로 "명탐정" 인 교수 유메미즈 키요시로가 옆집 이와사키 가(家)의 세쌍둥이 자매 아이, 마이, 미이와 함께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짤막하고 일상에 가까운 이야기로 시작해서, 본편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전개로 한권이 이루어진 옴니버스 시리즈 만화입니다. 예전에 봤었지만 취향이 아니라서 보다가 접었었는데 형이 7권까지 구입했길래 빌려서 읽게 되었네요.

일단 장점부터 소개하자면 :
1. 추리만화이지만 대상 연령대가 낮은 덕분에 눈높이를 맞춘 티가 역력할 정도로 굉장히 사건들과 이야기들이 유쾌하고 밝은 편입니다. 살인과 같은 강력사건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발랄한 이야기들이라 추리소설 초보자들에게 적합한 작품이 아닐까 싶네요. 특히 아동들....

하지만 단점도 확실해서 :
  1. 장점이기도 하지만 대상 연령대가 지나치게 낮습니다! 한마디로 유치하달까요? 전개와 대사 모두 어이상실입니다.....
  2. 만화 자체가 한마디로 후집니다. 순정만화 스타일의 그림인데 전혀 제 취향도 아니었을 뿐더러 이야기 전개도 낙제점에 가깝습니다. 또한 주인공 캐릭터도 너무나 과장되어 있고 웃기지도 않는 개그컷의 남발은 짜증만 불러 일으키더군요. 좀 깔끔하게 정리라도 해서 그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3. 추리적으로도 재미에 치중한 탓에 설득력이 떨어지는 작품이 많더군요.
팬들분에게는 죄송하지만 제게는 단점이 너무 명확한 수준 이하의 작품이라는 것이 제 감상평입니다. 아동용으로는 정평이 나 있는 시리즈이니 만큼 제 나이가 너무 많은 탓도 있겠지만, 일단은 만화 자체의 수준이 함량미달이라 생각되네요. 어쨌건 별점은2점. 이번처럼 형이나 주위 누군가가 구입하지 않는다면 개인적으로 다시 찾아볼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덧붙이자면, 같은 원작으로 잡지 "파우스트"에 연재된 작품 쪽이 "만화" 측면에서 그림과 전개 모두 7만배는 낫더군요. 파우스트 연재작이 단행본으로 나와준다면 구입 의향 있습니다!

* 현재의 만화판(위)과 파우스트 만화판(아래) 비교

명탐정 키요시로 사건노트 1 - 4점
하야미네 카오루 지음, 에누에 케이 그림/대원씨아이(만화)

Vol 0 : 명탐정 유메미즈 키요시로 등장 - 이와사키 가(家) 옆집에 새로 이사온 사람은 뭔가 수상쩍은 키큰 아저씨! 그 아저씨는 스스로 교수이자 명탐정이라고 칭하지만 뭔가 어벙하고 덜 떨어져 보인다. 하지만 곧바로 명탐정의 솜씨를 발휘해서 세자매의 수수께끼를 곧바로 풀어낸다.
- 주인공의 등장과 주요 등장인물을 소개하면서 일상계 수수께끼를 잘 풀어낸 소품. 하지만... 지나치게 소품이기에 평가할게 별로 없네요.
Vol 1 : 그리고 5명이 사라지다 - 오무라 판타지 파크에 세자매를 데리고 놀러온 교수. 그러나 마술쇼 도중에 한 소녀가 사라지고 곧바로 "백작"이라 자칭하는 범인이 곧바로 다른 소년, 소녀를 유괴할 것이라고 예고한다. 키요시로는 경시총감과의 연줄을 이용해서 사건 해결에 뛰어드는데!
- 범행 트릭이 너무나 유치하고 동기와 전개 모두 설득력 빵점인 아동용 추리물. 유치찬란 그 자체.

명탐정 키요시로 사건노트 2 - 4점
하야미네 카오루 지음, 에누에 케이 그림/대원씨아이(만화)

프롤로그 : 설혼전설 - 판타지 파크 사건으로 유명세를 탄 키요시로에게 잡지 "세.시마"의 편집부원 이토 마리가 찾아온다. 명탐정이 여행하면서 그 지방 전설에 대한 수수께끼를 푸는 이른바 "명탐정 유메미즈 키요시로의 수수께끼 풀이 기행!!" 기획을 위해서. 첫번째 여행 코스는 N현 A고원으로, 이 지방에서는 눈보라 치는 밤이 지난 아침에는 "설혼의 숲"이라 불리우는 대나무 숲에 눈의 영혼인 "설혼"이 어린 아이를 데리러 나온다는 전설이 있다. 실제로 3살짜리 아이가 행방불명된 20년 전의 사건은, 아이의 발자국이 집에서 설혼의 숲까지 일직선으로 나 있다가 숲 직전 20미터 정도에서 뚝 끊겨 있던 것.
- 이 "설혼전설"에 관한 트릭이 상당히 그럴듯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작품 자체는 쓰잘데 없는 곁가지 이야기가 대부분에다가 스키 자국에 관련된 말도 안돼는 트릭이 들어가는 등 괜찮은 트릭을 다 망쳐버리는 전개를 보여줘서 높은 점수를 주기가 힘듭니다.

Vol 2 : 마녀가 숨어있는 마을 - "세.시마"의 기획 두번째 코스는 "쇼우노사토"라는 벚꽃의 명소. "쇼우노사토"의 숲에는 마녀가 있다라는 전설이 있는데, 이토 마리와 교수, 그리고 세 자매 일행이 도착한 뒤부터 숙소인 여관 "로우란 장"을 무대로 한 정체불명 게임의 막이 오른다.
- 이 시리즈 치고는 이질적인 무겁고 심각한 이야기. 15년전 한 일가족이 사라진 사건에 비롯된 현재의 비극이라는 점은 "김전일"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대형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무겁고 진중한 전개라서 이 시리즈와는 따로 노는 느낌에다가 트릭도 거의 실현불가능해 보이는 (어떻게 리프트를 혼자서 조작하는지라던가 하는 세세한 부분의 설명은 전무!) 낙제점에 가까운 작품

명탐정 키요시로 사건노트 3 - 4점
하야미네 카오루 지음, 에누에 케이 그림/대원씨아이(만화)

Vol 3 : 망령은 밤을 떠돈다 - 세 자매가 다니는 학원의 학원제 기간에 학교에 전해져 내려오는 4가지 전설을 소재로 한 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과거 4가지 전설을 창작한 것으로 알려진 여학생은 죽은 것으로 밝혀지는데....
- "김전일"의 "방과후의 마술사" 같은 설정이죠? 그러나 무거운 설정과는 반대로 학원제를 배경으로 한 밝은 분위기의 작품이라 설정과 미묘한 부조화를 이루는 것이 이색적인 작품입니다. 트릭은 여러개가 등장하는 풍성함을 보여주는데 모든 트릭이 만화에 가까운 것들이라 추리적인 가치는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봐도 실현이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아요.

명탐정 키요시로 사건노트 4 - 4점
하야미네 카오루 지음, 에누에 케이 그림/대원씨아이(만화)

그랜드오프닝 : 탐정영화 - 교수와 세자매는 추리 영화를 보러간다. 완벽한 밀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계단식 논 사이에 있는 오두막에서 태풍이 분 다음날 시체가 발견된다. 오두막은 전기도, 수도도 없고 구멍하나 없는 완벽한 밀실. 흐트러진 방 안에서 발견된 칼에 찔려 죽은 시체! 그러나 영화가 끝나기 전 사고로 인해 일행은 결말을 보지 못하고, 교수는 자신의 추리를 자매들에게 들려준다.
- 가상의 영화를 소재로 추리하는 독특한 작품. 솔직히 트릭은 현실성이 너무 없어보이긴 하지만 아이디어는 괜찮은 편.

Vol 4 : 사라지는 소세이섬 - 세 자매는 영화 캐스팅 제의를 받고 거대재벌 반노재단이 제작하는 영화 로케 현장으로 교수와 함께 떠난다. 그러나 촬영현장인 소세이섬에 도착하자마자 유일한 교통수단인 크루즈가 폭발하고, 기이한 사건이 발생하다가 마지막에는 섬의 하나뿐인 가장 높은 "산"이 아예 없어져 버리는 기상천외한 사건에 맞부닥치게 되는데!
- 거대한 스케일의 농담같은 트릭이 등장하는데 너무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 이러한 특정 "장소"의 소실에 대한 고전인 엘러리 퀸의 "신의 등불" 정도는 아니더라도 흉내는 내 줬어야지!

명탐정 키요시로 사건노트 5 - 4점
하야미네 카오루 지음, 에누에 케이 그림/대원씨아이(만화)

Vol 5 : 춤추는 야광괴인 - 일본 최초의 연금술사인 사이토 소우후가 남긴 금불상의 위치를 알려주는 암호가 마을 절에서 발견되고, 한편으로 마을 공원에서 춤추고 머리가 분리되는 "야광괴인"이 나타나는 사건이 일어난다. 보물의 위치를 알려주는 키워드인 "코우다요이사루"는 무엇? 야광괴인의 정체는 무엇? 절에서 발견된 암호문의 해독 방법은 무엇?
- 암호문은 국내 독자는 풀기가 불가능한 일본어 암호 트릭이라 패스. 하지만 암호문의 "종이" 의 사이즈를 토대로 한 "키"의 도출이라는 방식은 참신했습니다. 문제는.... 정말 명탐정이라면 몇글자 치환해 보면 이러한 "키" 없이도 암호를 충분히 풀 수 있는 간단한 암호라는 점이겠죠.

명탐정 키요시로 사건노트 6 - 4점
하야미네 카오루 지음, 에누에 케이 그림/대원씨아이(만화)

Vol 6 : 유리항아리의 비밀 - 에도말기를 무대로 한 번외편! 나가사키의 데시마의 창고에서 유리 항아리 "피카이치"가 도난당한다. 자물쇠로 잠긴 창고는 완벽한 밀실상태에다가 남아 있는 발자국은 도저히 생물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수수께끼의 사건. 마을에 흘러들어온 정체불명의 인물인 유메미즈 키요시로자에몬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다.
- 번외편 형식으로 막말의 일본을 무대로 한 이야기들. 첫번째 "피카이치" 도난 사건은 전개와 복선, 동기와 결말 모두 납득할 만 하며 재치있게 꾸며진 이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작품. 두번째 보살 이야기는 돌 보살상을 일종의 "추"로 썼다는 일상계 소품인데, 작중 묘사된 보살상의 크기를 볼 때 완전 억지였습니다. 나무를 몇톤씩 하는 것도 아닐테고 말이죠. 마지막 에도에 등장하는 요괴의 정체에 대한 이야기는 완전 어이상실의 이야기였고.... 초반 분위기를 끌어주었더라면 별 세개는 줬을텐데 아쉽네요.

명탐정 키요시로 사건노트 7 - 4점
하야미네 카오루 지음, 에누에 케이 그림/대원씨아이(만화)

프롤로그 : 한여름밤의 괴담 - 교수와 세자매 및 기타 등장인물들이 모여 "괴담회"를 벌인다.
- 아하하하. 아주아주 유쾌한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소품인데 "괴담"을 추리해서 그 진상을 밝힌다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네요. "피에 젖은 책상" 같은 조금은 유치한 괴담인데 추리를 끼워맞추는 것이 놀랍습니다!

Vol 7 : 트랩하우스의 숫자노래 - 유명 만화가의 저택인 "트랩하우스"에 초대받은 교수와 세자매는 파티 도중 만화가가 밀실 안에서 비명과 함께 실종되는 사건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연쇄살인!
- 굉장히 심각하고 진지한 전개라 낯설었던 작품입니다. 만화안의 만화안의 만화라는 액자 구성은 독특했고 중요 범인을 드러내는 트릭 - 왜 범인은 옥상으로 도주할때 엘리베이터 3층 버튼을 누르고 3층에서 내려 옥상까지 뛰어올라갔을까? - 도 괜찮은 편이지만 이야기가 따로 노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또한 무대 설정같은 것도 지극히 만화적이라 현실성이 떨어지는데 너무 복잡하고 작위적인 구성을 취함으로서 더더욱 전개가 산으로 간 것이 아닌가 싶네요. 그냥저냥한 수준이었습니다....

2019/11/24

C.M.B. 박물관 사건목록(씨엠비) 33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점

[고화질] C.M.B. 박물관 사건목록(씨엠비) 33 - 4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한동안 출간 자체를 모르고 살다가 전자책으로 출간된 덕분에 읽게 되었습니다. 한 때는 국내 출간된 모든 추리 만화를 다 소장하겠다!는 꿈을 가졌던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보던 시리즈도 놓치는 상황이 되어 버렸네요.

어쨌건, 이전에 읽었던 두 권은 모두 평균 수준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권인 33권은 개인적으로는 기대 이하였습니다. 그럭저럭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기는 한데, 추리적으로는 너무나 별로인 탓입니다. 억지스러운걸 넘어서 솔직히 말도 안되는 수준의 트릭이 남발되어 실망스러웠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번 권은 딱히 권해드리지 않습니다.

이야기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세요.

"움직이는 바위"

게임을 좋아하는 하나오카는 문부과학성 관료의 딸과 결혼하여 출셋길이 열렸지만, 처가의 엄격함 때문에 게임이 금지되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1년에 두 번, 온천에서 2박 3일 게임을 즐기기로 타협하고 시골 온천으로 향했다.
친구들과 게임, 맥주를 즐기던 그곳에서 전설의 '움직이는 바위'가 나타나고, 움직이는 바위를 보면 죽는다는 전설과 비슷하게 온천 여관 주인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하나오카의 친구인 회사원 겐부 유리가 용의자로 몰렸지만, 마침 다른 조사차 현장에 있던 신라가 전설의 정체와 진상을 파헤친다.

'움직이는 바위'에 대한 이야기는 꽤 재미있습니다. 절벽에서 떨어진 낙석에 형광 성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돌이 떨어진 후 남겨진 자국이 빛나서 사람들이 바위가 움직인거라 착각했다는게 진상이지요. 이를 확인하기 위해 조사하던 사람 몇 명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사고가 있었으리라는 추론도 합리적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전설이 고착화되었고요. 전설과 토속 신앙은 무언가 이유, 근거가 있다는 이론에 기반한 이야기인데 그런대로 설득력이 높습니다.

그러나 사건 이야기는 영 아닙니다. 불륜을 온천 여관 주인에게 들킨 하나오카가 그녀를 살해하고, 죄를 겐부에게 뒤집어 씌운게 진상인데 설득력이 너무 낮아요. 하나오카가 겐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건 겐부도 불륜을 알고 협박했다고 착각했기 때문인데, 실제로 그랬다면 범인 누명을 쓴 순간 하나오카도 수상하다고 이야기했을게 뻔하잖아요. 자기에게 누명을 씌울 만한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사람이 누군지 경찰에게 말하는게 당연하니까요. 또 실제로 누명을 쓰고 체포되었다 한 들, 협박이 멈출리도 없고요.

친구 네 명이 같이 이동하는 중에, '움직이는 바위'를 보면 죽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앞만 보고' 가는 상황을 이용하여 혼자 살짝 빠져나와 여관 주인을 죽였다는 트릭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달랑 네 명이 움직이는데 아무리 살짝 빠져나갔다 해도 아예 그 상황을 모른다는 것 부터가 말도 안됩니다. 앞만 본다고 해서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시골 마을의 전설을 풀어낸 전개는 괜찮았지만, 추리적으로는 도저히 점수를 줄 수 없는 망작입니다.

"읽지 못한 문학전집"

남편과 사별한 후 하와이로 장기 여행을 떠난 요네쿠라 리츠코의 여행 목적은 읽지 못한 문학 전집을 모두 읽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행 첫 날, 발코니에서 책을 읽던 그녀는 아래 방갈로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목격해서 경찰에 신고했지만, 시체를 발견하지 못한 경찰은 수사를 더 이상 진행하지 않는데...

요네쿠라 리츠코가 문학 전집을 읽지 않은 이유, 그건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걸 깨닫고 남편과의 사랑을 돌이켜보는 마지막 장면이 괜찮았던 작품입니다. 타츠키가 정말로 오랫만에 나름 활약을 펼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어요. 여러모로 이야기의 완성도는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찰이 아무리 무능했더라도, 나무 그림자 바로 앞 시체를 놓쳤을 것 같지는 않네요. 설령 놓쳤다 치더라도, 이건 순전히 '운'에 불과한 거라 트릭이라 부르기도 어렵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뿔매미"

우라메 컨설턴트에서 일하는 이가사는 별 것 아닌 내용을 기묘한 전문용어로 포장할 뿐인 사기꾼으로 회사에서 유일하게 진실된 컨설팅을 하는 요시즈를 그만두게 하기 위해 사장의 임명장을 위조했다. 그러나 오히려 사장실에서 거액의 돈이 사라진 뒤 범인으로 몰려 체포되는데...

뿔매미라는 매미는 처음 들어보았네요. 이 책에 따르면 개미 등으로 의태하여 개미 속에 숨어지내며 남는 당분을 제공해주고, 대신 개미는 뿔매미를 지켜준다고 합니다.
이가사가 스스로 뛰어나다는 생각을 지나치게 한 나머지 이상하게 의태해버린 결과 - 본인이 범인이 아닌데도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 를 이 뿔매미를 빗대어 설명하는게 꽤 그럴듯합니다. C.M.B 특유의 학습 만화스러운 재미는 충분해요.

트릭도 간단해서 설득력이 높은 편입니다.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소품을 문에 끼어 놓아서 문이 자동으로 잠기지 않게 만드는 정도라면 누구나 가능하니까요. 물론 이가사가 문이 정말로 닫혔는지도 확인하지 않을 정도로 허술하고 멍청한 인간이었다는 설정이 앞 부분에 조금이라도 등장했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그게 조금 아쉽네요. 

그래도 이야기의 완성도, 특유의 박물학적 지식을 전해주는 학습만화스러운 재미, 추리 만화로서의 설득력도 갖춘 이번 권 최고의 이야기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보이지 않는 사수"

연극에서 리어왕 역할을 맡은 나가타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등 가운데에 화살을 맞았지만, 무대 뒷 쪽은 꽉 막혀있던 상태였다. 경찰은 시종역으로 옆에 서 있었고, 소도구인 석궁을 가지고 있던 요츠야를 체포했다. 요츠야의 무죄를 믿는 타니바타 경위는 쿠지라자키 경감의 소개로 신라를 찾아와 사건 해결을 부탁하는데...

흔해빠진 이야기의 반복에 불과한 수준 이하의 졸작입니다. 트릭과 이야기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탓입니다. 범인을 밝혀내는 것도 수사 정보를 흘려 함정을 판다는 유치한 작전이며, 트릭도 독특한 장치로 화살을 쐈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등에 화살이 꽂힌 것도 나가타가 화살을 피하려고 몸을 비트는 순간을 노렸다는건데 너무 작위적이에요.
원래 둘이 교제하고 있었는데, 나가타가 다른 여자를 사귀려고 했다는 범인인 이다의 살해 동기도 경찰 수사의 부실함을 증명할 뿐입니다. 아무리봐도 요츠야보다는 더 확실한 동기잖아요?

게다가 C.M.B에서 유일하게 기대해볼만한 박물학적인 재미 역시 전무합니다. 타니바타 경위가 신라에게 사건을 의뢰할 때 케이크를 가져올 정도로 신라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이에요. 마지막에 감사 인사로 귀중한 식물을 보낸다며 준 것도 네잎 클로버고요! 물론 웃기기는 했습니다만.... 

하여튼, 별점은 1.5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점수를 줄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2010/03/17

도시전설 세피아 - 슈카와 미나토 / 이규원 : 별점 2.5점

도시전설 세피아 - 6점 슈카와 미나토 지음, 이규원 옮김/노블마인

제가 일본 추리 - 호러 단편집을 워낙 좋아라하기 때문에 진작부터 관심이 있던 단편집입니다. 일본에서는 TV용으로 영상화되기도 했었고요. 하지만 별다른 입소문도 없고, 커뮤니티나 추리, 호러 애호가들 사이에서 언급조차 되지않은 탓에 구입해 읽을 생각까지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온 뒤 찾아간 집근처 산본 중앙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기에 바로 대여하여 읽어보게 되었네요.

총 5편의 호러 취향 단편이 실려있는데, 기이한 변태들의 이야기가 많은 전형적인 일본식 호러, 스릴러 단편들입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상을 받았다는 것이 허명은 아닐 정도로 설정이 참신한 작품도 있고, 재미와 반전도 잘 갖추고 있는 편입니다. 독자를 몰입시키는 맛도 괜찮고요. 

그러나 이러한 재미와 설정을 뒷받침하기 위한 이야기 전개에서 작위적인 요소가 너무 많아서 설득력이 떨어진다는건 크게 거슬립니다. 앞부분 수록작들은 상대적으로 괜찮은데, 뒤로 갈수록 이러한 단점이 두드러지는데, 적절한 수위를 조절이 필요했습니다. 

전체적으로 평균한 별점은 2.5점입니다. 앞부분 수록작들만 놓고 본다면 3점은 충분한데, 뒤로 갈수록 힘이 딸리기에 감점했습니다. 개인적인 베스트는 "올빼미 사내"를 꼽습니다.

"올빼미 사내"

도시전설에 매료되어 스스로 전설이 되고싶어한 주인공이 자칭 올빼미사내로 변장하고 나타나 살인을 저지른다는 이야기를 1인칭 서간문 형태로 다루고 있는 작품입니다. 

변태적인 상상력이 실제 범죄로 발전한다는 이야기는 작중에서 주인공이 언급하는 그의 멘토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과 유사해서 참신한 맛은 없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전형적인 설정이니까요. 그러나 괴담을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인터넷을 활용하는 등의 요소가 곁들여져 설득력을 확보하는 점,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전설의 구체화를 위해 변장을 하고 벌이는 마지막 범죄가 예상하지 못한 반전으로 이어지는 결말이 아주 괜찮았습니다. 작위적인 내용은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이 정도면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어제의 공원"

절친 마치의 사고사를 알게된 초등학생 엔도가 우연히 자신이 사건 직전의 시간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뒤 마치를 구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는 타임슬립SF입니다만... SF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일상적이고 타임슬립의 원인이나 이유가 해명되지 않기에 판타지로 보이기도 합니다. 

소소한 이야기인데 사건을 막으려 노력할 때마다 더 큰 사건이 벌어진다는 설정이 그간의 타임슬립과 타임 패러독스물을 재치있게 피해가는 참신함이 돋보여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지막에 작위적인 반전이 등장한다는 것이 옥의 티이긴 한데 역시나 별점 3점은 충분한 작품입니다. 영상화한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덧붙이자면 이러한 작위적 반전보다는 차라리 성인이 된 엔도가 다시 타임슬립하게 되어 마치의 사고의 원인이 된다는 결말이 어떨까 싶긴 한데, 이것도 작위적이었을까요?

"아이스맨"

25년전 요양차 내려간 외할아버지 댁에서 냉동된 갓파 흥행사와 함께 알 수 없는 사건에 흽쓸렸던 가츠키의 이야기인데, 25년전 이야기는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흥행사가 선보이는 얼음속의 정체불명 갓파 시신, 갓파 흥행사의 어리지만 영악하고 속을 알 수없는 딸 논코, 어마어마한 체구의 갓파 흥행사 등 등장인물도 개성이 넘칠 뿐 아니라 사건의 전개과정이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덕분입니다. 

하지만 25년 뒤의 현재 시점에서의 결말이 너무 시시합니다. 뻔할뿐더러 밝혀지는 것도 없고 주인공의 기묘한 심리상태 역시 설득력이 전무한 탓입니다. 계속 언급하는 이 단편집 전체의 문제이지만 작위적인 결말이 특히나 별로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과거 시점의 분위기로 계속 달려주었더라면 걸작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쉽습니다.

"사자연" 

제목 그대로 죽은 사람과의 인연을 다루는 심리 스릴러물입니다. 여류화가 가나에 린코가 인터뷰하는 형식의 일인칭 소설로 그녀가 푹 빠졌던 기미히코라는 자살한 청년과 그녀와 똑같이 기미히코에게 매료된 시노부라는 두명의 여성의 이야기로 광기어린 집착과 그에 따르는 파멸을 차분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미있고 분위기 있었던 기미히코 이야기로 끝냈으면 좋았을 것을... 막판에 길을 잘못들어도 유분수지 난데없는 지박령 이야기로 끝맺어서 도저히 높은 점수를 주기가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작품 역시 기미히코 이야기로만 잘 마무리했더라면 4점은 충분했습니다.

"월석"

자신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마네킹을 다룬 소품으로 호러라기보다는 심리 썰렁 드라마입니다.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이야기의 전개가 그다지 매끄럽지 못하고 좀 두서가 없어 보이며 속시원히 해결되는 것이 없다는 차이점이 있는데, 작위적이지 않아서 이야기가 담백하고 깔끔합니다. 일종의 정신적 성장과 강함을 보여주는 마무리도 괜찮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15/10/15

군화와 전선 2- 하야미 라센진 / 성동현 : 별점 2.5점

군화와 전선 2 - 6점
하야미 라센진 지음, 성동현 옮김/이미지프레임(길찾기)

하야미 라센진의 판타지 밀리터리 만화 2권, 완결권입니다.

나쟈와 바센카 콤비가 동부전선에서 독일군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가 옴니버스 단편물로 수록되어 있다는 건 1권과 같습니다. 특징이라면 러시아 고유 신화와 전설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고요. 신성한 곰, 물가에 사는 정령 루살카, 파르티잔 리더 "승리의 유리"(성 게오르기), 악령 쵸르트, 여름의 정령 폴루드니차, 전설의 영웅 일리야 무로메츠와 불사신 코시체이, 괴물 솔루베이 라즈보이닉, 집에 사는 노파 요정 키키모라, 성녀 파트니차, 머리 셋 달린 악룡 즈메이 고리니치(킹기도라?) 등 마지막 편을 제외하면 모든 이야기에 러시아산 정령과 영웅들이 등장합니다. 이는 1권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2권에 등장하는 신화와 전설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이야기, 특히 "전쟁"에 개입해 드라마를 만들어간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설의 영웅들이 러시아의 승리를 위해 싸우기 때문입니다.
또 2차대전과는 관계없이 마지막 결말에서 나쟈가 "죽음"과 한 판 승부를 벌여 바센카를 구해내는데, 여기서 약간 백합물스러운 느낌을 전해주는 것도 나름 괜찮았습니다. 작가가 노린 듯싶기도 합니다.

다만 1권보다는 아무래도 신선함이 떨어진다는 점, 마녀 바센카의 활약보다는 이런저런 정령과 요정들의 활약이 주가 된다는 점은 단점입니다. 2권 만에 완결된 것도 작가가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무엇보다 작품의 매력이라 할 수 있는 일러스트 칼럼의 재미가 많이 반감된 것은 정말 아쉬웠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 군복이나 혁명 전 프랑스 드레스, 여걸들, 중세와 근대 유럽의 식사와 일본의 식사 등 다양한 소재를 망라해 소개하고 있는데, 작가의 넓은 지식은 충분히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그다지 관심이 가는 소재들이 아니었습니다. 1권에서는 러시아산 무기나 각종 장비 등 관심거리가 많아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게다가 글이 너무 빽빽해서 읽기조차 힘든 점도 문제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무난한 수준이지만 1권보다는 재미와 신선함 모두 부족했기에 감점합니다. 그래도 깔끔하게 완결된 점 하나만큼은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2011/12/24

물만두의 추리 책방 - 홍윤 (물만두)

물만두의 추리 책방 - 6점
홍윤(물만두) 지음/바다출판사

전설의 추리소설 리뷰어 물만두 홍윤님의 1838편의 리뷰 중 200편을 선정해 실어 놓은 리뷰집입니다. 추모의 의미를 담아 구입하여 읽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도 인터넷에서 고인의 리뷰를 자주 접했었지만, 책으로 읽으니 새로운 느낌이네요. 수록 리뷰 중 제가 읽은 작품은 절반에도 못 미치는 89편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리뷰를 올렸던 작품들은 비교해가며 읽어보았습니다. 확실히 리뷰의 수준이 차이가 나더군요. 많은 부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작품의 좋은 부분을 찾아내어 주목하는 리뷰가 많았다는 점과, 작품의 역사적인 의미, 전작 출판에 대한 강한 소망도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 진정한 추리 애호가였다 생각되고요.

리뷰들 중에서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내용이 많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다가왔습니다. 한창 블로그를 방문하며 리뷰를 접했을 때에는 무심히 넘겼던 부분이었지만, 고인의 지병을 알고 나니 이러한 고민이 더욱 묵직하게 느껴졌습니다.

"아픈 사람, 호전될 가능성이 제로라고 선고받은 사람도 희망을 가질 때가 있다. 이것은 그 상황에 처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살아있는 한 희망이 있음을 믿고 싶다." - 제프리 디버 "곤충소년"

"산다는 건 어쩌면 죽는 것보다 더 힘든 고행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누군가는 남아서 죽은 이를 추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 미치오 슈스케 "섀도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곁에 있다고 잘 보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곁에 없다고 못 보내는 것도 아니다. 죽은 이를 애도하는 마음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는 한 그는 영원히 존재하는 사람이 된다. 죽음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건 아름답게 살라는 뜻이다." - 텐도 아라타 "애도하는 사람"

"살아만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는 말은 사실이다. 죽으면 그저 묻히는 것뿐이다. 산다는 건 고행과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럼에도 살아가고 있는 건 불행은 작아 보이게 만들려 애쓰며 극복해 나아가고, 행복은 더 크게 만끽하며 오래도록 간직하고 추억하기 때문이다." - 텐도 아라타 "영원의 아이"

이와 같은 글들이 다시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누군가 그토록 살고 싶어 한 내일이다."라는 경구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추리소설과 장르문학 리뷰어를 자처하는 저에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실감하게 했고, 보다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해 준 책이었습니다. 일단, 고인이 강력 추천한 작품 중 아직 읽지 못한 것부터 읽어봐야겠습니다.

"전설은 아니더라도, 어떤 것에서든 최고는 아니더라도 내 시대가 끝날 때 나 혼자만이라도 만족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 사쿠라바 가즈키 "아카쿠치바 전설"

하지만 이미 전설이었고, 최고였습니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제가 알라딘 블로그를 거의 이용하지 않아 고인과의 접점이 많지 않았다는 점이 너무나 아쉽습니다. 제 알라딘 블로그 방명록에 남겨진 한 줄 글이 유일한 인연이라니... 생전에 댓글로라도 의견을 나누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경성탐정록"에 대한 좋은 리뷰에 제대로 감사 인사를 전하지 못한 것도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고인이 강력 추천한 작품 목록

  • 코넬 울리치 (윌리엄 아이리쉬)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 넘버원 여탐정 에이전시
  • 수키 김 통역사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동물 애호가를 위한 잔혹한 책
  • 할런 코벤 단 한 번의 시선
  • 조너선 캐럴 웃음의 나라
  • 토머스 해리스 이니그마
  • 존 카첸바크 어느 미친 사내의 고백
  • 프레더릭 포사이스 어벤져
  • 츠지무라 미즈키 차가운 학교의 시간은 멈춘다
  • 모리 히로시 조금 특이한 아이 있습니다
  • 심포 유이치 화이트아웃
  • 히가시노 게이고 둘 중 누군가가 그녀를 죽였다
  • 텐도 아라타 영원의 아이
  • 히가시노 게이고 다잉아이
  • J.M. 에르 개를 돌봐줘
  • 막심 샤탕 악의 심연
  • 프레드 바르가스 4의 비밀
  • 박미경 괴상한 해초
  • 류성희 나는 사랑을 죽였다
  • 이은 수상한 미술관

2018/05/27

거인들의 전설 - 호시노 유키노부 : 별점 2.5점

거인들의 전설 - 4점
호시노 유키노부 지음, 김완 옮김/애니북스

호시노 유키노부의 SF 중, 단편집입니다. 오래전 북오프에서 구입한 뒤 묵혀두다가, 좀 무게감 있는 작품을 읽고 싶어 집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핵심 중편인 "거인들의 전설" 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탓이 큽니다. 단편 "이카루스 계획"은 호시노 유키노부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작품이지만, 지나치게 초기작이라 작화가 영 마음에 들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작품별 리뷰는 아래와 같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거인들의 전설"

6만년전, 빙하기 당시 정신력을 기반으로 한 고도 문명을 이루어 살던 거인족 타이탄이 목성을 태양으로 만들어 빙하기를 막으려다 실패하여 다른 곳으로 떠났다. 그리고 현재, 태양 에너지 감소로 인해 현대에 다시 닥친 빙하기 해결을 위해 거인족이 만든 피라미드를 이용하여 목성을 불태워 '제 2의 태양'을 만드려는 계획이 시작되는데...

호시노 유키노부의 SF 중편. 고대 타이탄 족의 이야기와 현대의 위기를 1, 2부로 나누어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합니다. 특히 작가의 특기 중 하나인 과학적인 설정과 이야기의 결합 측면에서 많이 아쉬웠어요. 빙하기와 목성 태양화 계획 자체는 그럴듯하지만 지구의 극점 이론이라던가, 타이탄 족이 만든 피라미드를 활용해야 한다는 점 등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은 설정이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특유의 반전을 통한 재미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위기는 목성 태양화 멤버의 내분에서 찾아오며, 반란파를 진압하고 우주선을 떨구는 게 이야기의 전부거든요. 여기서 반란파와 주인공 일행의 싸움은 단순한 액션물에 불과할 뿐이고요.

딱 한 가지, 마지막 주인공이 우주 공간에서 총을 쏴서 악당을 해치우고 구조선까지의 이동도 성공하는 장면은 호시노 유키노부스러웠지만 그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이카루스 계획"

지구의 에너지 고갈을 해결하기 위해, 태양 에너지를 끌어 당기려는 이카루스 계획이 시작되었다. 주인공 일행은 이를 막으려는 테러 집단인 지구 해방 전선의 우주선과 우주전을 벌이는데...

작가의 초기작으로 내용은 간단하지만 과학 지식이 곳곳에 녹아들어 있어 전작보다는 보는 재미가 큽니다. 지구 해방전선이 쏜 미사일이 태양의 인력 탓에 정상 궤도를 상실하고, 추락하던 이카루스호가 소혹성의 인력으로 기사회생한다는 내용들 처럼요. 이 장면에서 그리스 신화 속 이카루스 이야기와 결합한 전개를 보이는 점도 아주 좋았습니다.
또 이카루스 계획 설정은 물론 에너지를 독점하려고 하는 악역 설정도 상당히 신선했습니다. 지금 읽기에도 그리 낡아 보이지 않았거든요.

주인공 약혼자의 죽음, 목숨을 건 수리와 죽음과 같은 신파조의 연출에 더해 정교하지 못한 초기 극화 스타일의 작화는 아쉬웠지만 이 정도면 호시노 유키노부답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19/11/30

드라큘라 그의 이야기 - 레이몬드 맥널리, 라두 플로레스쿠 / 하연희 : 별점 3점

드라큘라 그의 이야기 - 6점
레이몬드 맥널리.라두 플로레스쿠 지음, 하연희 옮김/루비박스

드라큘라라는 컨텐츠의 실체에 대해 다루는 책입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흡혈귀 드라큘라의 실제 모델인 루마니아 왈라키아 공국의 군주 드라큘라의 자취를 추적해 나가는 전반부, 그리고 브람스토커를 중심으로 흡혈귀와 드라큘라 컨텐츠에 대해 다루는 후반부로 나뉩니다.

전반부에서는 실제 왈라키아 공국을 방문하여 현지 답사도 진행하고, 거의 남아있지는 않지만 유적의 자취도 탐색하는 노력에 더해 방대한 당시 사료들을 조사하여 드라큘라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깊이와 디테일은 가히 최고 수준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지요. 잔인무도했다는 몇 가지 에피소드들만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는데, 일대기 자체가 아주 흥미로운 인물이더라고요. 그래서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간략하게 그의 일대기를 소개하자면, 드라큘라는 어린 시절 발칸 반도를 집어심킨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볼모로 잡혀가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그 와중에 형은 산채로 생매장 당하는 등의 아픔도 겪고요. 몇 년 뒤 탈출하여 트란실바니아의 후냐디의 도움으로 왈라키아 군주 자리에 오른 뒤, 동맹인 트란실바니아의 색슨족들을 가혹하게 제압합니다. 왈라키아 인들을 위해서였지만 이 때 벌인 잔혹한 학살 때문에 생긴 악명이 그를 지금과 같은 불멸의 존재로 만들게 되었죠. 이후에는 투르크와 큰 전쟁을 벌입니다. 다뉴브에서 대승을 거두지만 병력 규모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났던 탓에 험준한 산림을 이용한 유격전, 전염병을 이용한 세균전과 보급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청야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고, 후퇴에 후퇴를 거듭한 끝에 이웃나라 헝가리로 동맹을 요청하러 탈출하지만 무려 12년간 헝가리 왕국의 포로로 세월을 보냅니다. 헝가리 왕국은 꼭두각시 군주를 통해 왈라키아를 지배하에 두고, 투르크와 휴전을 통해 평화를 강구하려는 속셈이었을거에요.헝가리에서 러시아 정교에서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은 드라큘라는 투르크의 지원을 받는 왈라키아 군주 바사라브 3세를 쓰러트리기 위해 출진하여 전투를 벌이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며 삶을 마칩니다.

보시다시피 일생 자체가 포로, 배신, 전쟁으로 이루어진 인물입니다. 후대에 드라큘라로 알려지게 된 이유인 잔혹한 통치 방법도 이런 삶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공포로 충성심을 잡아두지 않으면 자리가 위태롭다고 여긴 듯 합니다. 그래서인지 왈라키아 주민들에게는 비교적 괜찮은 군주였다는군요 그 유명한 말뚝형의 대상은 주로 언제든 반기를 들 수 있는 지역 유지인 보야르와 그 일당들, 왈라키아에서 새력을 펼치는 게르만계, 그리고 당연히 오스만 제국과 이웃 나라의 병사들과 포로들 등이었다고 하니까요. 자신에게 충성하는 주민들만 평양에 모아놓은 북한 정권을 보는 듯 합니다. 덕분에 악명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군주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겠지요.

말뚝형으로 대표되는 잔혹함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가득합니다. 터번을 벗지 않으려는 오스만 제국 사신의 머리에 터번째 못을 박았다던가, 말뚝형에 꽂힌 시체 냄새가 지독하다고 불평한 귀족을 가장 높은 말뚝에 꽂아 세워 놓았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전설인줄로만 알았던 황당한 이야기가 많은데 출처도 명확히 소개해주고 있어서 놀랐습니다. 아무리 전설이라도 당대 문헌에 이 정도로 많이 소개되었다면 꽤나 신빙성이 높은 이야기들일테니까요. 과연 후대에 잔혹한 흡혈귀의 모델이 될 법한 인물이구나 싶더라고요. 그런데 조금 의외였던건 영화와는 다르게 드라큘라는 엄청나게 독실한 신자였다는 겁니다. 수도원을 세워 헌금을 하고, 죽는 순간에 진실로 참회하면 모든 죄가 사하여진다고 믿었다는데 솔직히 가당치도 않지요. 그렇다면 수도사까지 말뚝형에 처한건 또 왜였는지 궁금하네요.

이러한 드라큘라의 일대기와 발자취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한 뒤, 흡혈귀에 대한 유럽의 전설과 민담, 엘리자베스 바토리 백작부인의 무서운 이야기 등을 거쳐 본격적인 흡혈귀 문학에 대해 소개해주는 후반부가 이어집니다. 내용의 핵심은 브람스토커와 그의 대표작 "드라큘라"이기는 한데, 그 외에도 조세프 셰리단 르 파누의 "카르밀라"라는 흡혈귀 이야기의 고전 걸작, "프랑켄슈타인" 이야기의 탄생과 폴리도리, 뒤마, 플랑쉬 등이 발표한 다양한 흡혈귀 이야기도 연대별로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카르밀라"는 얼마전 읽었던 "요녀전설"과도 이어진다는 점에서 흥미로왔으며, 브람스토커의 작품도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건 아니고 다양한 작품들에 영향을 받았다는게 인상적이었어요.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드라큘라'라는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재창작해 낸 아이디어 덕분에 불멸의 명성을 얻은 듯 한데, 남들과 다른 아이디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해 줍니다. 브람스토커 이후의 다양한 흡혈귀 관련 컨텐츠 소개는 현대 컨텐츠까지 쭈욱 계속되고요. 재미는 물론 어떻게 '흡혈귀'가 호러 소설의 소재로 등장하여 널리 퍼졌는지를 쉽게 알 수 있는 보기드문 자료라 아주 좋았습니다. 특히 잘 알려져있지 않은 관련 컨텐츠 소개가 소설 뿐 아니라 영화에 이르기까지 폭 넓고 풍성해서 마음에 쏙 들었어요.

책의 마지막은 부록입니다. 지도를 비롯한 드라큘라의 일대기 및 관련된 당대 자료들의 번역본, 그리고 흡혈귀 관련 영화 소개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참고 문헌 목록까지 합치면 부록의 분량이 100페이지 정도나 될 정도로 풍성하며, 그 수준도 깊고 방대하여 빼 놓기 힘들 정도의 귀한 자료임에는 분명합니다. 왜 부록으로 뺐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흡혈귀 컨텐츠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꼭 읽어봐야 할, 자료적 가치가 높은 서적입니다. 도판도 아주 충실하니까요. 장르 문학 매니아로서 추천하지 않을 수 없네요. 장르 문학, 그 중에서도 호러, 또 그 중에서도 흡혈귀 관련 장르 애호가시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08/04/27

세 개의 관 - 존 딕슨 카 / 김민영 : 별점 3점

세 개의 관 - 6점
존 딕슨 카 지음, 김민영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수수께끼의 남자가 나타난 뒤 방 안에서 연기와 같이 사라진 그리모 교수 살인 사건과 거리 한복판에서 유령과 같은 목소리와 함께 살해된 카리오스트로 거리의 마술사 살인 사건, 불가능해 보이는 두 사건의 해결을 위해 기디온 펠 박사가 나섰고, 의외의 진상을 밝혀낸다.

존 딕슨 카 최고 작품 중 하나라는 작품입니다. 번역된지는 꽤 되었지만, 기디온 펠 박사 시리즈는 취향이 아닌 탓에 통 손이 가지 않아서, 이제서야 완독하게 되었습니다. 추리 소설 역사에 길이 남을 명탐정이긴 하지만 기디온 펠 박사를 싫어하는 이유는 잘난척하는 캐릭터와 장황한 언변으로 엘러리 퀸이나 파일로 밴스 같은 짜증 계열 탐정으로 저한테는 분류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방코랑 탐정이 개인적으로는 더 취향이에요.

하여튼, 이 작품은 고딕 호러물과 추리물의 결합이 특기인 딕슨 카의 작품답게 "트란실배니아의 흡혈귀 전설"이라는 호러적인 소재를 도입하고 있으며. 흡혈귀 전설에서 유래한 관, 그리고 관에서 살아나온 시체라는 설정을 "불가능 살인"의 기묘함과 잘 결합시키고 있습니다. 눈 위에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진 범인이라는 설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흡혈귀나 마술사와 딱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니까요.

또한 이러한 불가능 살인 사건이 무려! 두 건이나 벌어지며 - 모두 밀실 살인 사건으로 한 건은 자신의 방에서 살해된 그리모 교수 사건이고, 또 하나는 눈이 쌓인 거리 한 복판에서 총에 맞아 살해된 마술사 프레이 사건입니다 -   두 건 모두 의외의 진상을 보여주는 덕분에 추리적인 재미는 상당합니다. 아무래도 하나보다는 두개가 낫지요.

하지만 그리모 교수 사건은 완벽한 트릭과 장치에 의한 정교한 밀실 살인 사건인 반면, 프레이 사건은 우연과 특수한 상황이 결합된 돌발 상황일 뿐이라는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범인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우연과 우연이 여러 개 겹친 상황이라는 점에서 아무래도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그리고 첫번째 사건도 아주 정교하고 공들인 장치와 트릭이 어우러진 밀실 사건이라는 점에서는 명성에 값하나,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범인의 "체력"에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고 있다는건 설득력이 다소 부족합니다. 때문에 트릭 면에서는 알려진 것 만큼 완성도가 높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기대가 너무 큰 탓도 있겠지만요.

그래도 흡혈귀 전설에서 시작해서 마술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지식과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작품과 트릭에 녹여내는 솜씨 하나만은 과연 대단합니다. 트란실배니아의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었거든요. 또 기디온 펠 박사의 밀실 살인 사건에 대한 장황한 강의 역시 인상적이었고요. 아울러 해드리 경감과 랜폴 등 시리즈 캐릭터의 등장도 반가왔습니다.
추리적으로는 아쉬운 부분이 있고 기디온 펠 박사는 여전히 짜증 계열 타입이기는 하지만 재미, 작품의 역사적인 의의를 되새겨 볼 때 별 세개는 충분히 줄 수 있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PS : 그리고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국내에 출간된 딕슨 카 작품 은 거의 다 읽은 것 같네요.

작품목록 : 연속살인사건 (고성의 괴사건) / 해골성 / 황재의 코담배갑 (황제의 코담배케이스) / 세개의 관 / 화형법정 / 모자수집광사건 / 감미로운 초대 (밤에 걷다)

이 중 딱 세 작품만 꼽아 본다면 저의 영원한 베스트 "황제의 코담배케이스", 정통 추리와 고딕 호러의 완벽한 결합체인 "해골성", "화형법정" 을 꼽겠습니다.

2020/02/23

그때, 맥주가 있었다 - 미카 리싸넨.유하 타흐바나이넨 / 이상원.장혜경 : 별점 2.5점

그때, 맥주가 있었다 - 6점
미카 리싸넨.유하 타흐바나이넨 지음, 이상원.장혜경 옮김/니케북스

유럽의 기나긴 역사에서 맥주가 중요한 대목을 장식했던 이야기들을 선별하여 소개해 주는 독특한 미시사, 음식사, 문화사 서적입니다. 역사 속 맥주가 관련된 특정한 사건을 수 페이지 정도 소개한 뒤, 해당 사건과 관련된 현대의 맥주를 마지막에 소개하는 식으로 구성된 스물 네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취지에 걸맞는 내용이 많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당연히 맥주 때문에 역사의 흐름이 바뀐 이야기는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어떤 한 장면에서 맥주가 멋지게 등장하거나 활용된 정도를 기대한 정도이지요. 그러나 절반 이상의 이야기가 그렇지 못합니다. 단순히 유럽의 특정 역사를 소개하면서 '그 때는 아마 맥주를 마셨을거다' 정도에 그치는 탓입니다. 

물론 추정 자체는 꽤 그럴싸 합니다. 문제는 사료로 증명되지 않는다는 점이죠. 조금 맥주와 관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이야기들은 단지 등장인물들이 맥주에 관련된 직업에 종사했거나, 맥주 회사가 관련되어 있는 정도에 그치고요. 예를 들자면 난센의 북극 탐험은 단지 링그네스 양조장에서 탐험 비용을 후원했을 뿐입니다. 히틀러가 맥주집에서 바이에른 정부를 실각시키고 제국 정부를 수립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던 역사를 맥주와 관계가 있다고 하는건 억지고요. 옥스퍼드 대학 문인들이 펍에서 열리는 문학 클럽에 참석하다가 "반지의 제왕"과 "나니아 연대기" 등을 발표하게 되었다는 것 역시 장소가 펍일 뿐입니다. 딱히 맥주와 관련이 있지는 않아요.
바이마르 공화국의 외무 장관 역할을 멋지게 수행했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이야기나 체코 대통령 하벨의 이야기는, 그 둘이 술집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다는게 전부입니다.

그래도 맥주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야기들도 많고 시기적으로는 수도원에서 맥주를 양조하기 시작했을 때 부터 현대까지, 장소로는 유럽 전역을 무대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그 폭은 상당히 넓고 방대합니다. 덕분에 재미있는 이야기, 새로운 이야기들이 적지는 않은 편이에요. 

맥주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야기부터 살펴보자면, 30년 전쟁 당시, 목마른 스웨덴 왕 구스타브 아돌프가 농부로부터 맥주를 대접받은 후 커다란 루비가 박힌 금반지를 답례로 선사하고,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일화는 명백히 맥주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료로 증명되지는 않은 전설급의 이야기라고는 하지만요. 그래도 이 전설 후에도 해당 지역에서는 계속 맥주를 만들어 왔으며, 지금의 크로스티츠 양조장은 유럽에서 가장 현대적인 양조 시설 중 한 곳으로 대표작인 '파인헤르베스 필스너'는 라벨에 구스타브 아돌프의 초상화를 담아 판매되고 있다고 합니다. 400년 이상 된 전설 속 맥주라니 마케팅으로는 더할 나위 없네요.
1836년, 유럽 대륙 첫 철도 운송 화물이 뉘른베르크 레데러 양조장에서 퓌르트로 보낸 맥주 두 통이었다는건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레데러는 현재도 독일 리데베르거 그룹의 계열사로 '레데러 프리미엄 필스'를 계속 출시하고 있답니다.
파스퇴르가 맥주 양조 분야에서 독일을 물리치기 위해 열정을 불태웠다는 이야기도 맥주가 중심입니다. 영국 위트브레드 양조장과 협력하여 최적의 열처리 온도가 섭씨 50~55도라는걸 알아내는 등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맥주에 관한 연구"라는 유럽 맥주 양조인의 경전과도 같은 책을 출간했다는 내용이니까요. 그런데 그의 맥주 실험의 가장 큰 수혜자는 프랑스가 아니라 코펜하겐의 칼스버그 양조장이라는게 재미있네요. 결국 칼스버그에서 파스퇴르의 꿈이었던 미생물없는 라거 맥주 효모 배양에 성공했다니 진짜 후계자인 셈입니다.

처음 알게 된 이야기도 제법 됩니다. 오줌싸게 소년 동상의 모델은 브라반트 공국의 수장인 어린 고드프리 3세로, 당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어린 나이로 출정했을 때 반란군을 향해 오줌을 싼 게 유래라는 설이 대표적입니다. 이 때, 유모가 맥주를 마시고 수유를 했거나 아니면 실제로 맥주를 마셔서 요의를 느꼈을 거라고 설명하는건 좀 억지스러웠지만, 나름 재미있었어요. 함께 알려주는 브라반트 공국의 중심지 브뤼셀의 전통있는 맥주 '램빅'도 아주 입맛을, 아니 흥미를 돋구고요.
스웨덴의 미식가 전쟁 영웅 요한 아우구스트 산델스 역시 이전에는 알지 못했었던 인물입니다. 1808년, 스웨덴과 러시아가 핀란드에서 벌였던 전쟁에서 활약한 영웅입니다. 다만 소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맥주 관련된 일화는 없습니다. 러시아 군 보급품을 털었을 때, 맥주도 함께 털었을거라고 추정하는게 전부죠. 그래도 지금 '산델스'라는 이름의 맥주가 산델스가 활약했던 핀란드 양조장 올비에서 양조되어 판매된다니 한 번 마셔보고 싶네요.

근현대사로 넘어오면서는 재미가 덜하지만, 1935년 투르 드 프랑스 경주에서 맥주 탓에 벌어진 순위 변경이라던가, 이탈리아 경제 성장기에 함께 발전한 페로니 맥주의 마케팅 전략, 아일랜드가 무섭게 성장하다가 리먼 사태 등으로 휘청일 당시, 카우언 총리의 기네스 맥주 사랑 등은 기억에 남네요. 특히 폴란드의 맥주 애호가 정당 이야기는 온갖 정당이 창궐하는 지금의 우리나라를 연상케 해서 제일 인상적이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기획 의도대로 완벽하게 쓰여진 책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알게된 이야기들이 많기도 하고, 저자들의 글 솜씨도 유쾌하기 때문이죠. 맥주 한 잔 하면서 읽으면 더욱 좋지 않을까 싶네요. 마지막으로, 책에서 소개하는 맥주 리스트를 인용하며 리뷰를 마칩니다. 이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파는 맥주는 한 개 씩 구입해서 마셔볼 예정입니다.

  1. 생 푀이엥 트리플 St-Feuillien Triple 벨기에 
  2. 칸티용 괴즈 100% 램빅 바이오 Cantillon Gueuze 100% Lambic Bio 브뤼셀 (벨기에)
  3. 아인베커 우어 보크 둔켈 Einbecker Ur-Bock Dunkel 아인베크 (독일) 
  4. 린데만스 파로 Lindemans Faro 블렌제비트 (벨기에)
  5. 우어 크로스티처 파인헤르베스 필스너 Ur-Krostitzer Feinherbes Pilsner 크로스티츠 (독일)
  6. 발티카 No.6 포터 Baltika No.6 Porter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7. A. 르꼬끄 포터 A. Le Coq Porter 타르투 (에스토니아)
  8. 올비 산델스 Olvi Sandels 이살미 (핀란드)
  9. 레데러 프리미엄 필스 Lederer Premium Pils 뉘른베르크 (독일)
  10. 위트브레드 베스트 비터 Whitbread Best Bitter 웨일스의 마고 (영국)
  11. 칼스버그 Carlsberg 코펜하겐 (덴마크)
  12. 링그네스 임페리얼 폴라리스 Ringnes Imperial Polaris 오슬로 (노르웨이)
  13. 그랭 도르주 뀌베 1898 Grain d'Orge Cubee 1898 릴 (프랑스)
  14. 레벤브로이 오리지널 Lowenbrau Original 뮌헨 (독일)
  15. 베를리너 킨들 바이세 Berliner Kindl Weisse 베를린 (독일)
  16. 크로넨버그 1664 Kronenbourg 1664 오베르네 (프랑스)
  17. 그래비타스 Gravitas 브릴 (영국)
  18. 스핏파이어 프리미엄 켄티시 에일 Spitfire Premium Kentish Ale 파버샴 (영국)
  19. 페로니 나스트라즈로 Peroni Nastro Azzurro 로마 (이탈리아)
  20. 크라코노시 스베틀리 레작 Krakonos Svetly Lezak 트루트노프 (체코)
  21. 지비에츠 Zywiec 지비에츠 (폴란드)
  22. 사라예브스코 피보 Sarajevsko Pivo 사라예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23. 기네스 드래프트 Guineness Draught 더블린 (아일랜드)
  24. 하이네켄 Heineken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2012/10/17

타지카라오 1~4 - 모리 진파치 / 요시카이 칸지 : 별점 1점

타지카라오 4 - 2점
모리 진파치 글, 요시카이 칸지 그림/학산문화사(만화)

한 시골 촌락의 숭배 대상인 고대신 타지카라오가 그 마을을 둘러싼 이권 다툼으로 베일이 벗겨진다는 판타지 만화.

외딴 산골마을에서 촉발된 살인 사건이라는 발단은 흥미로웠지만, 이후 전개는 전형적인 초인 전설 이야기에 불과해 실망을 안깁니다. 촌 마을의 숨겨진 전설의 진상에 접근한다는 이야기는 "칠석의 나라"와 일견 비슷한데, 재미와 설득력에서 발뒤꿈치에도 미치지 못한 졸작입니다.
재미가 없는 것은 그렇다 쳐도 환경 문제, 고령화, 불법 대출 등 너무 많은 주제를 녹이려 한 것은 명백히 작가의 실수입니다. 달랑 4권이라는 분량에 비해 악역이 너무 많다는 것 역시 산만할 뿐이었고요. 별 활약도 없고, 실제로 불필요한 초인 변신이 대체 왜 들어간 것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딱 한 가지, 타지카라오의 가면을 선택받은 사람이 쓰면 초인이 된다는게 전설이 아니라, 정말로 고대로부터 전승된 신빙성 있는 이야기였다고 마무리되는 결말은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마무리를 서두른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지리적 위치 및 대카구라 관련된 복선 등이 꽤 충실하게 설명되는 등 나름 설득력을 보이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장점은 그 뿐입니다. 단점이 더 많고 명확하기에 별점은 1점입니다. 욕심을 줄이고 좀 더 간단하게 전개되었더라면, 그리고 실존하는 전승 설화였다는 이야기 구조를 더 디테일하게 파고들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그러고 보니 원작과 작화가 나누어져 있는데, 두 개 다 건질 부분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특이하군요.

2013/02/01

아라비아 밤의 종족 1 - 후루카와 히데오 / 한성례 : 별점 1.5점

아라비아 밤의 종족 1 - 4점
후루카와 히데오 지음, 한성례 옮김/뿔(웅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침공을 앞두고 이를 막기 위해 지방의 베이(지방 장관) 중 하나인 이스마일의 수하 노예인 아이유브는 읽는 이를 파멸로 몰아넣는 전설의 책 "재앙의 서"를 활용할 계획을 짠다. 그리고 "재앙의 서"를 부활시키기 위해 이야기꾼 줌드르를 찾아가 그녀에게서 전설과 같은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는데....

일본 플레이보이지 선정 "미스테리 - 철야본을 찾아라!"에 소개되었던 작품. 인터넷 서점에 장르가 "판타지 / 환상문학"으로 등록되어 있어서 국내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네요.

그런데 1권을 읽어본 결과는... 한마디로 별로였습니다.  아이유브가 보나파르트를 막기 위해 전설의 책 '재앙의 서'를 새롭게 창조하려는 본편 이야기는 흥미진진했지만, 정작 '재앙의 서'의 내용이라는 이야기꾼 줌드르의 이야기는 장황하기만 할 뿐 알맹이는 별로 없고 말이 안 되는 내용 투성이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사악한 아담이 왜 조하르에 들어가 승리하겠다는 공약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법으로 위의 형들을 하나씩 죽여나갔다면, 가만히 앉아서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뱀신"의 능력에 대해 모르고 있었는데 신자가 되어 신전에 들어가려 노력한다는 설정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 외에도 강대한 마법을 얻었다면 왜 조하르에 틀어박혀 가만히 있었는지? 등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많아요. 덕분에 "재앙의 서"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이미지를 전혀 전달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본편 이야기는 고증을 바탕으로 한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복을 무대로 하고 있으면서, 정작 중요한 핵심 이야기는 "마법이 군대로 대표되는 물리력보다 우위에 있다"라는 철저한 환상소설인 탓에 느껴지는 이질감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높은 평가를 받았던 작품답게 '재앙을 불러오는 책으로 나폴레옹의 침공을 막겠다', '막강한 먼치킨 마법사가 주인공이며 사악한 잔꾀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 등의 흥미로운 소재와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장대한 묘사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진부하고 지루한 점이 더 많네요. 3권 완결로 3권까지 읽고 리뷰를 남겨야 하나 지금 감상으로는 도저히 다음 권을 읽을 것 같지 않습니다. 이걸로 마무리하려 합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다시 "미스테리 - 철야본을 찾아라!" 순위를 확인해보니 이 작품 바로 윗 순번의 작품이 용납하기 어려웠던 졸작 "마리오네트의 덫"이더군요. 이런 리스트는 역시나 믿을 만한 게 못 되는 것 같네요.

2020/08/29

흑사의 섬 - 오노 후유미 / 추지나 : 별점 3점

흑사의 섬 - 6점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북홀릭(bookholic)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흥신소를 운영하는 시키부는 오랜 고객인 논픽션 작가 카츠라기의 행방을 쫓아 그녀의 고향인 '야차도'라는 섬을 찾았다. 그녀가 섬으로 향하는 배를 탄 것은 확인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섬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보지 못했으며, 마을에는 카츠라기의 원래 성인 하세가와라는 집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모두 마을 사람들의 방해라는걸 알아낸 시키부는 혼자만의 조사와 조력자인 마을 의사 야스다를 통해 시호가 참혹한 시체가 되어 발견되었다는걸 알아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시호가 '마두야차'의 심판을 받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유는 그녀가 마을 영주인 진료 가문의 후계자 히데아키를 살해한 범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섬 특유의 종교와 풍습에 시호가 죽었다면 그녀와 동행한 나가사키 마리라는 여인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나가사키 마리가 진료 가문의 마지막 남은 후계자라면 시호를 죽인 이유는 무엇인지? 마두야차와 진료 가문의 '슈고'라는 존재는 무엇인지? 등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계속 더해지고, 결국 마지막 순간에 현재의 '슈고'인 진료 아사히에 의해 모든 진상이 빍혀지는데...

"시귀"와 이런저런 괴담 단편집으로 호러, 공포 소설 작가로 알고 있었던 오노 후유미의 본격 추리물입니다. 

외떨어지고 고립된 마을을 지배하는 가문과 그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을 토대로 풀어낸 본격 추리물은 일찌기 많이 접해 보았습니다. 일본 작품이라면 요코미조 세이시가 떠오르네요. "이누가미 일족" 등이 그러하니까요. 가문의 저주와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 가문의 상속자들을 죽게 만드는 "바스커빌 가의 개"도 마찬가지고요. 그만큼 고전적인 설정인데, 지금도 도조 겐야 시리즈, 민속 탐정 야쿠모 등으로 계속 이어지는 인기 설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장기간에 걸친 전통 관습의 과정이 핵심 트릭(의도한 건 아니지만)의 하나라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됩니다. 전설을 직접적인 트릭으로 이용한게 아니라 일종의 심리 트릭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띄는 점이고요.

마을만의 신앙과 전설, 관습, 그리고 트릭을 조금 자세히 설명드리자면 우선 마을에서는 '마두야차'님을 신으로 모십니다. 마두야차는 죄 지은 자를 심판하며, 마을을 지배하는 진료 가문은 오래전 야차산에 사는 사람 잡아먹는 귀신을 응징한 행자의 후예입니다. 그런데 귀신인 '마두님'은 아직도 진료 가에 붙잡혀 있어서, 진료 가문에서는 대대로 후계자가 아닌 셋째 아들이나 딸에게 마두님이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도록 지키는 역할인 '슈고'를 맡게 해 왔습니다. 슈고는 어렸을 때 정해지고, 한 번 슈고가 되면 그만둘 때 까지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게 관례입니다. 심지어 슈고로 있는 동안은 호적이 없어서 학교도 가지 않았습니다. 없는 사람인거에요. 그렇게 이십여년 정도 슈고를 맡다가 성인이 되면, 다음 대 슈고에게 자리를 넘긴 뒤 신관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 관습을 이용하여 전 대 슈고이자 현재 진료 신사의 신관인 모리에가 슈고였을 때인 19년 전 나가사키 마리의 어머니 히로코를 깜쪽같이 살해했습니다. 섬 사람들이 '낯선 사람'을 목격했는데, 모리에는 슈고였던 탓에 집에 갇혀 있어서 사람들이 그 존재를 잘 몰랐던 덕분이었지요. 모리에는 사건의 진상을 감추기 위해 히로코와 결혼할 예정이었던 시호의 아버지 노부오도 잔인하게 토막 살해했습니다.
이는 섬의 마두 신앙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섬 마을 사람들은 노부오의 잔혹한 시체를 보고 이를 마두야차의 심판으로 받아들이고 사건을 끝난 일로 치부하여 그냥 덮어버리고 말거든요. 단지 신사에 심판을 의미하는 화살촉 한 대만 놓아두면 끝이었던 거지요. 

그 뒤 현재에 이르러, 모리에는 진료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히데아키를 살해했습니다. 히데아키가 없으면 분가인 자신의 집이 종가를 잇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딸인 나가사키 마리가 종가를 잇게 될 수 있다는걸 알고난 뒤, 그녀마저 죽이고 완전범죄를 위해 19년 전 사건처럼 참혹하게 시체를 훼손했습니다. 섬 마을 사람들은 역시나 관례대로, 나가사키 마리가 히데아키를 죽여서 심판받았다 생각하고 대충 사건을 수습해 버렸고요.
이렇게 '슈고' 라는 관습을 활용해서 섬 사람이지만 낯선 사람이었다는 상황을 만든 트릭(우연이었지만), 그리고 마두 신앙을 활용하여 살인이라는 큰 범죄를 대충 수습하게 만든 일종의 심리 트릭을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동기가 확실해서 범인을 특정하기 쉬운데, 비교적 초반에 발견된 시체가 카츠라기 시호라는게 증명되어서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드는 전개도 좋습니다. 시호와 동행했지만 사라진 나가사키 마리가 진료 가문의 후예라는걸 알게된 후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진료 가문의 부를 노리는 종가의 범행이라면 카츠라기 시호를 죽일 이유는 없으니까요. 이와 함께 이런저런 용의자들도 부상하면서 흥미롭게 진행됩니다.

일종의 '바꿔치기' 트릭도 잘 사용되어서 추리적으로 큰 만족감을 전해줍니다. 진상은 카츠라기 시호와 나가사키 마리가 고등학생이 되어 섬을 나갈 때 서로의 신분을 바꾸었던 겁니다. 여관에서 '나가사키 마리'를 찾는 전화를 받고 나가 살해된 건 섬에서는 시호였던 여자 마리였고, 섬에서 마리였던 시키부의 지인 '카츠라기 시호'는 당연히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도주했고요. 그리고 이 때문에 폐가가 된 시호의 옛 집에서 채취한 지문은 시체와 일치했습니다.
바꿔치기는 현재의 슈고이자 해결자 역할을 맡고 있는 아사히의 추리와도 연결됩니다. 섬 사람들은 모두 시호와 마리를 알아봤다고 합니다. 둘 다 어린 시절을 섬에서 보냈으니까요. 그러나 범인은 시호와 마리를 구분할 수 없었고 그래서 시호를 죽였다고 생각했지요. 이에 아사히는 범인은 두 사람이 고등학생이 되어 섬을 떠난 뒤 태어났거나, 아니면 두 사람과 엇갈려 섬을 나갔다 돌아온 이로 한정된다고 추리합니다. 이런 섬 사람은 없으니, 범인은 당시 슈고였던 모리에일 수 밖에 없고요. 진료 가문의 정보를 이용하여 마리의 현재 신상을 캐 내어 후쿠오카에서 얼굴을 확인까지 했으니, 충분히 착각할 만 했습니다.

주인공인 시키부도 꽤 인상적입니다. 보통 폐쇄된 마을 공동체가 꺼리는 조사를 하는 주인공은 마을 사람들에게 휘둘리고, 공격당하는 탓에 어떻게든 도망다니면서 기회를 엿 봐 역전의 기회를 노리는 식의 이야기가 많았었죠. 그러나 시키부는 마을 사람들과 당당하게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돋보입니다. 여관 주인 오에가 자신의 짐을 손댄걸 알고, 일부러 수첩을 비닐 봉투에 넣은 뒤 현금이 사라졌을 수도 있다며 협박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분명 범인의 지문이 남아있을거라고 장담하면서요.
옛 하세가와 집에서 담배를 피다가, 가츠라기 시호가 버린 듯한 캐빈 꽁초를 줍는 장면처럼 탐정 역할도 충실하며, 범인은 이 섬 신앙을 잘 알고 있지만 섬 사람은 아닐 거라는 등 추리력도 쓸만합니요. 자신이 범행을 저지르면 마두님에게 심판받을 걸 두려워하는 섬 사람이 범행을 저지를리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인데 그럴싸합니다.
한 마디로 자기 한 몸은 충분히 지킬법한 능력과 기본 이상의 추리력은 갖춘 능력자입니다. 2000년대 이후 작품인 만큼 고전들처럼 마을 사람들도 섣불리 그를 건드릴 수는 없었겠지만,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라는 시키부의 캐릭터가 명확한 탓도 있을겁니다.

황량한 섬도 실제하는 듯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히 핵심 트릭으로 사용되는 마두야차 신앙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놀라운 수준입니다. 시키부가 이런 쪽에 관심이 많고 주술과 음양 오행에 박식한 나머지 섬에서 모시는 신인 '마두야차 (마두관음상에 뿔이 난 형태)'가 '해치'라는걸 깨닫는다는건 무리수로 보이기는 했지만, 덕분에 시키부 시점에서 이런저런 상세한 정보를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잘 전해줍니다. 한 마디로 기대보다 훨씬 좋았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핵심 트릭인 섬과 마두야차 신앙, 그리소 슈고 등 진료 가문과 관련된 풍습 모두 이야기를 위해 만들어진, 작위적인 설정이라는 문제는 있습니다. 물론 오노 후유미가 공들여 설정을 잘 쌓아올려 놓은 덕분에 읽다보면 실제로 있음직하다는 설득력은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는 중반까지고, 아쉽게도 어린 소녀인 슈고 아사히가 후리소데 차림으로 나타나 모리에를 직접 잔인하게 살해한다는 마지막 장면 탓에 심혈을 기울였던 설득력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이건 정말이지 만화에서나 쓰임직한 장면이었어요.
물론 마두, 해치의 심판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한 노력은 가상합니다. 진료 가문의 행자가 사람 잡아먹는 귀신을 응징하고 가둔게 아니라, 귀신이 진료 가문의 핏줄이라서 슈고는 그러한 핏줄을 타고난 후예를 가두어 놓는 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막 나갈 필요는 없었습니다. 아사히가 슈고 입장에서 추리를 들려주는 정도로 충분했으니까요. 아니면 감히 해치를 사칭한 모리에에게 천벌을 내린건 슈고로서의 임무였다고 하던가요. 또 이렇게 마두를 사칭한 자에게 천벌을 내린 거라면, 대체 19년전 사건은 왜 가만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 전 일이라서?
슈고 전통의 진상 역시 그다지 의외성없고 만화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진료 가문에서 아사하기 살인귀의 핏줄을 타고 났다는걸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묘사도 없어서 그나마의 설득력도 존재하지 않고요. 이럴 바에야 차라리 "부러진 용골"이라던가, "인어 공주", "앨리스 죽이기" 등 처럼 판타지 속 이야기로 풀어내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군요. "철가면" 이야기를 응용했더라면 괜찮지 않았을까요?
그 외 야스다가 나가사키 가문의 아들이었다는 등의 자잘한 설정은 나오지 않는게 좋았습니다. 너무 관련된 인물이 많이 엮여 작위적으로 느껴졌거든요. 용의자를 늘리려는 의도였다는건 알겠는데, 지나쳤어요.

그래도 오노 후유미가 본격 추리물 작가로도 충분한 실력을 갖췄다는건 여실히 보여준다는건 분명합니다. 남편 아야츠지 유키토도 긴장할만한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손에 땀을 쥐고 읽을만한 서스펜스와 치밀한 두뇌 게임 모두를 갖춘 만큼, 더운 여름밤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