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큘라 그의 이야기 - 레이몬드 맥널리.라두 플로레스쿠 지음, 하연희 옮김/루비박스 |
드라큘라라는 컨텐츠의 실체에 대해 다루는 책입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흡혈귀 드라큘라의 실제 모델인 루마니아 왈라키아 공국의 군주 드라큘라의 자취를 추적해 나가는 전반부, 그리고 브람스토커를 중심으로 흡혈귀와 드라큘라 컨텐츠에 대해 다루는 후반부로 나뉩니다.
전반부에서는 실제 왈라키아 공국을 방문하여 현지 답사도 진행하고, 거의 남아있지는 않지만 유적의 자취도 탐색하는 노력에 더해 방대한 당시 사료들을 조사하여 드라큘라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깊이와 디테일은 가히 최고 수준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지요. 잔인무도했다는 몇 가지 에피소드들만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는데, 일대기 자체가 아주 흥미로운 인물이더라고요. 그래서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간략하게 그의 일대기를 소개하자면, 드라큘라는 어린 시절 발칸 반도를 집어심킨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볼모로 잡혀가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그 와중에 형은 산채로 생매장 당하는 등의 아픔도 겪고요. 몇 년 뒤 탈출하여 트란실바니아의 후냐디의 도움으로 왈라키아 군주 자리에 오른 뒤, 동맹인 트란실바니아의 색슨족들을 가혹하게 제압합니다. 왈라키아 인들을 위해서였지만 이 때 벌인 잔혹한 학살 때문에 생긴 악명이 그를 지금과 같은 불멸의 존재로 만들게 되었죠. 이후에는 투르크와 큰 전쟁을 벌입니다. 다뉴브에서 대승을 거두지만 병력 규모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났던 탓에 험준한 산림을 이용한 유격전, 전염병을 이용한 세균전과 보급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청야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고, 후퇴에 후퇴를 거듭한 끝에 이웃나라 헝가리로 동맹을 요청하러 탈출하지만 무려 12년간 헝가리 왕국의 포로로 세월을 보냅니다. 헝가리 왕국은 꼭두각시 군주를 통해 왈라키아를 지배하에 두고, 투르크와 휴전을 통해 평화를 강구하려는 속셈이었을거에요.헝가리에서 러시아 정교에서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은 드라큘라는 투르크의 지원을 받는 왈라키아 군주 바사라브 3세를 쓰러트리기 위해 출진하여 전투를 벌이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며 삶을 마칩니다.
보시다시피 일생 자체가 포로, 배신, 전쟁으로 이루어진 인물입니다. 후대에 드라큘라로 알려지게 된 이유인 잔혹한 통치 방법도 이런 삶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공포로 충성심을 잡아두지 않으면 자리가 위태롭다고 여긴 듯 합니다. 그래서인지 왈라키아 주민들에게는 비교적 괜찮은 군주였다는군요 그 유명한 말뚝형의 대상은 주로 언제든 반기를 들 수 있는 지역 유지인 보야르와 그 일당들, 왈라키아에서 새력을 펼치는 게르만계, 그리고 당연히 오스만 제국과 이웃 나라의 병사들과 포로들 등이었다고 하니까요. 자신에게 충성하는 주민들만 평양에 모아놓은 북한 정권을 보는 듯 합니다. 덕분에 악명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군주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겠지요.
말뚝형으로 대표되는 잔혹함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가득합니다. 터번을 벗지 않으려는 오스만 제국 사신의 머리에 터번째 못을 박았다던가, 말뚝형에 꽂힌 시체 냄새가 지독하다고 불평한 귀족을 가장 높은 말뚝에 꽂아 세워 놓았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전설인줄로만 알았던 황당한 이야기가 많은데 출처도 명확히 소개해주고 있어서 놀랐습니다. 아무리 전설이라도 당대 문헌에 이 정도로 많이 소개되었다면 꽤나 신빙성이 높은 이야기들일테니까요. 과연 후대에 잔혹한 흡혈귀의 모델이 될 법한 인물이구나 싶더라고요.
그런데 조금 의외였던건 영화와는 다르게 드라큘라는 엄청나게 독실한 신자였다는 겁니다. 수도원을 세워 헌금을 하고, 죽는 순간에 진실로 참회하면 모든 죄가 사하여진다고 믿었다는데 솔직히 가당치도 않지요. 그렇다면 수도사까지 말뚝형에 처한건 또 왜였는지 궁금하네요.
이러한 드라큘라의 일대기와 발자취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한 뒤, 흡혈귀에 대한 유럽의 전설과 민담, 엘리자베스 바토리 백작부인의 무서운 이야기 등을 거쳐 본격적인 흡혈귀 문학에 대해 소개해주는 후반부가 이어집니다. 내용의 핵심은 브람스토커와 그의 대표작 <<드라큘라>>이기는 한데, 그 외에도 조세프 셰리단 르 파누의 <<카르밀라>>라는 흡혈귀 이야기의 고전 걸작, <<프랑켄슈타인>> 이야기의 탄생과 폴리도리, 뒤마, 플랑쉬 등이 발표한 다양한 흡혈귀 이야기도 연대별로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카르밀라>>는 얼마전 읽었던 <<요녀전설>>과도 이어진다는 점에서 흥미로왔으며, 브람스토커의 작품도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건 아니고 다양한 작품들에 영향을 받았다는게 인상적이었어요.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드라큘라'라는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재창작해 낸 아이디어 덕분에 불멸의 명성을 얻은 듯 한데, 남들과 다른 아이디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해 줍니다. 브람스토커 이후의 다양한 흡혈귀 관련 컨텐츠 소개는 현대 컨텐츠까지 쭈욱 계속되고요.
재미는 물론 어떻게 '흡혈귀'가 호러 소설의 소재로 등장하여 널리 퍼졌는지를 쉽게 알 수 있는 보기드문 자료라 아주 좋았습니다. 특히 잘 알려져있지 않은 관련 컨텐츠 소개가 소설 뿐 아니라 영화에 이르기까지 폭 넓고 풍성해서 마음에 쏙 들었어요.
책의 마지막은 부록입니다. 지도를 비롯한 드라큘라의 일대기 및 관련된 당대 자료들의 번역본, 그리고 흡혈귀 관련 영화 소개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참고 문헌 목록까지 합치면 부록의 분량이 100페이지 정도나 될 정도로 풍성하며, 그 수준도 깊고 방대하여 빼 놓기 힘들 정도의 귀한 자료임에는 분명합니다. 왜 부록으로 뺐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 흡혈귀 컨텐츠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꼭 읽어봐야 할, 자료적 가치가 높은 서적입니다. 도판도 아주 충실하니까요. 장르 문학 매니아로서 추천하지 않을 수 없네요. 장르 문학, 그 중에서도 호러, 또 그 중에서도 흡혈귀 관련 장르 애호가시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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