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황실 비사 - 곤도 시로스케 지음, 이언숙 옮김, 신명호 감수/이마고 |
1907년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궁내부 사무관으로 특채되어 이왕궁에 입궁한 뒤 각종 궁내 대소사의 실무자로 일했던 곤도 시로스케의 회고록입니다. 일본인 시각에서 한일 병합과 이왕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지요. 대한제국의 황제가 이왕가로 격하되며 겪게 된 온갖 수모가 일본인 시각에서 담담하게, 하지만 굉장히 상세하게 그려지고 있거든요. 망국의 왕가로서 당연히 짊어질 수 밖에 없는 수모겠지만 이를 '대일본제국' 신민의 시각으로 바라본 글을 읽자니 굉장히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심지어 저자 곤도는 일본인이지만 이왕가에 대한 충심도 갖춘 인물이라는 점에서 내용이 무척 기묘한데, 곤도의 이러한 성격 덕분에 진짜 매국노가 누구인지를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을사5적 중에서도 최고의 악질이자 매국노의 대명사로 이완용을 기억하고 있는데 곤도의 시각에 따르면 한일병합의 1등 공신은 윤덕영입니다. 병합 외에도 매국노 역할로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지요. 특히 순종의 도쿄 방문에 대한 이야기는 곤도 마저도 '자작의 잔혹하고 악랄한 수단'이며 '극도의 모욕을 준 것'이라고 표현할 정도에요. 나라를 침략한 일본인이 나쁜 놈이라고 욕하는 조선 매국노라니! 정말이지 할 말이 없습니다.
또 이완용 후작보다는 송병준 백작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여론을 환기시키고 움직이는 능력이 출중하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더러운 친일파들이기는 마찬가지만 이래서야 이완용 혼자 너무 독박을 쓰고 있지 않나 싶더군요. 앞으로 친일파를 욕하는 자리가 있다면 윤덕영과 송병준의 이름도 꼭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이러한 한일 병합에 따라 겪는 치욕적인 역사 한 가운데에서 당시 곤도가 직접 진두지휘하고 겪었던 일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압권입니다. 대표적인게 윤덕영의 활약(?)으로 성사된 순종이 일본 천황을 만나는 과정입니다. 경성에서 부산까지 특별 열차로 이동하고, 부산에서 군함을 타고 시모노세키에 도착하고, 시모노세키에서 나고야를 거쳐 도쿄에 도착하여 천황을 만난 뒤 교토, 미야지마, 시모노세키를 거쳐 돌아오는 여정의 일정별, 장소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상세하게 기록하여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영친왕의 일본 유학과 생활에 관련된 이야기, 대조전 화재와 그에 따른 대조전 중건, 고종 사망과 뒤따라 벌어진 만세 운동, 고종의 능묘를 선정하는 문제 등 소개되는 이야기들 모두 실무 책임자가 아니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디테일이 가득합니다. 여기서 만세 운동은 고종 황제의 국장을 일본 예법 형식을 강조해서 촉발된 것이며, 무저항주의 민중운동이라고 정확히 서술하는 등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것도 눈에 뜨이는 점입니다. 가장 큰 이유가 한일 병합이라는 점을 간과하고는 있다는 문제는 있지만요.
또 잘 몰랐던 새로운 사실도 제법 많습니다. 조선에서 '목마 사업'을 운영했었다는 이야기가 좋은 예입니다. 수원역 근처에 목장을 조성하여 운영하였으며, 데라우치 총독이 특히나 관심을 가지고 원조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무척 새로왔어요. 궁내부 운영의 여러가지 디테일도 재미있었는데 특히 매달 왕에게 5,000원, 왕비에게 2,500원을 친용금으로 전달했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이 밖에도 정기적인 용돈이 6만원 이상, 임시 용돈이 2만원 이상이었다니 상당한 금액이지요. 1927년 1원의 가치는 2010년대 기준으로 3만원 ~ 6만원 사이라고 하니, 중간값인 4만 5천원이라고 해도 매월 2억이 넘는 금액을 수령한 셈입니다. 왕비까지 합치면 3억이 넘고요. 나라는 망했어도 호의호식은 했겠구나 싶네요.
시간 순서에 가깝기는 하나 이야기 전개에 두서가 없고, 과연 이런 책을 읽을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해 볼 문제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꽤 인상적인 독서였습니다. 한일 병합, 일제 강점기 초창기에 대해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 외의 다른 사실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생각되거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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