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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0

홍학의 자리 - 정해연 : 별점 3점

홍학의 자리 - 6점
정해연 지음/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혼 직전 상황에서 지방 고교에 발령받아서 혼자 내려가 살던 김준후는 제자 채다현과 불륜 관계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준후와 다현이 교실에서 관계를 맺은 직후 다현이 무참하게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를 발견한 준후는, 자신의 인생이 파멸할거라 여겨 시신을 둘이 밀회를 위해 자주 찾던 인적없는 호수에 유기했다. 며칠 뒤, 시신은 발견되었고 사건 수사를 받은 강치수 형사는 준후의 불합리했던 진술을 하나씩 파헤치기 시작하는데...

모처럼 읽어본 한국산 범죄 스릴러입니다. 적절한 분량, 빠른 호흡과 적절한 긴장감,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추리적인 장치들 덕분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준후가 다현의 시체를 삼은 호수에 유기했던 트릭이 괜찮습니다. 검시 결과 밝혀진 다현의 사망 시각에 준후의 차는 호수 방향 모든 길 CCTV에 찍히지 않았습니다. 호수로 향하는 길은 험했고, 다현의 시체에도 긁힌 상처 하나 없어서 사람이 끌고갈 수는 없었고요. 어떻게 유기했던 걸까요? 준후는 다현의 시체를 일단 자택 욕조로 옮겨 놓은 뒤, 장기 결석 핑계로 다현의 집을 방문하는 척 할 때 삼은 호수를 지나며 시체를 유기했던 겁니다. 이는 부검 결과, 다현의 폐에서는 플랑크톤이 검출되었지만 신장, 심장, 간에서는 나오지 않았다는걸로 증명되고요. 사인은 익사인데 플랑크톤이 나오지 않았다면, 수돗물로 죽었다는 뜻이니까요. 굉장히 현실적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지만, 이를 밝혀내는 과정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김준후가 집 목욕탕을 이용하지 않는 묘사로 드러내는 식으로요.

다현이 사실은 남자였다는걸 마지막에 드러내는, 서술 트릭의 효과적인 사용도 눈여겨 볼 만 합니다. 여자인줄 알았지만 사실은 남자였다는건 흔한 설정이기는 합니다. 그래도 이 작품에서는 꽤 잘 숨기고 있는 편이에요. 읽으면서는 상상도 못했을 정도니까요. 또 다현과 준후의 관계를 '홍학'을 이용하여 은근슬쩍 독자에게 알리는 솜씨도 제법입니다. 홍학에 집착하면서, 홍학이 산다는 아루바 섬에 가고 싶다는 다현의 소원은 유치한 캐릭터 만들기라고 생각했었는데, 다현이 남자라는게 밝혀진 뒤 그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홍학은 동성끼리 새끼를 키우고, 아루바는 네덜란드 령으로 네덜란드는 동성 결혼이 가능했다는 설정이거든요. 그래서 다현은 준후와 아루바로의 여행을 꿈꿨던 것이지요. 즉, 다현의 정체에 대해서는 꽤나 결정적인 단서를 초반부터 제공해 준 셈입니다. 준후가 아내 영주와 자연스럽게 관계를 가지고, 심지어 아이까지 있다는 설정은 좀 반칙같기는 했지만, 실제 양성애자도 있고, 이런 사례가 없는건 아니니 허용범위 이내라 생각됩니다.

수사물로도 꽤 수준이 높습니다. 앞서 사체 유기 트릭을 밝혀내는 과정은 물론, 준후가 CCTV 사각을 피해 시신을 교실에서 외부로 옮긴 방법에 대한 추리와 수사가 돋보이는 덕분입니다. 준후는 경비원이 3층 순찰을 돌 때 마주친 뒤, 경비원이 4층 순찰을 다 마치고 경비실로 돌아올 때 까지 차에서 기다렸다고 진술했습니다. 사실은 3층의 완강기를 이용해서 시신을 1층에 내려놓고,CCTV가 있는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나와 본관 옆에 차를 대고 시신을 실은 뒤, 완강기는 잠기지 않은 창문을 통해 계단으로 올라가 원위치 시켜 놓았었지요. 강치수 형사는 이 때 15분이라는 공백이 발생한걸 수상하게 여깁니다. 경비원 순찰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건 그럴싸한 핑계였지만, 그렇다면 누구나 교문 앞에서 기다릴텐데 교문에서도 멀고 경비실이 보이지도 않는 본관 옆에서 기다린건 이상하다고 생각했고요. 이를 통해 창문과 완강기에 대한 분석을 벌이게 됩니다. 

다현과 준후가 밀회를 위해 이용했던 다현의 핸드폰은, 준후가 발급받았었기 때문에 초반 수사 과정에서 걸리지 않았다는 착안도 좋았습니다. 학교에서는 수업 전에 핸드폰을 수거했다가 하교 시 다시 나누어주는데, 이 때 폰이 바뀔 수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별도의 폰을 마련해 주었다는건 분명 타당한 이유가 되니까요. 수사 과정에서 드러낸 준후의 수상한 행적을 준후가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장면들도 인상적입니다. 억지 변명이기는 한데, 말이 안되는게 아니라서 경찰도 당장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잘 그려내고 있거든요.

빠른 호흡으로 전개되면서, 적절하게 충격과 긴장을 안겨다주는 덕분에 몰입도도 높습니다. 다현의 죽음과 사체 유기, 다현의 사인이 익사라는게 드러나는 장면, 준후가 협박장을 받는 장면, 경비원 황권중의 시체를 발견하는 장면, 교무부장 조미란이 체포되는 장면 등 단락마다 극적 긴장감을 한껏 높이며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주인공 김준후입니다. 그는 초반에는 다현의 상황에 가슴 아파하는 유일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래서 진범이 밝혀지기를 원했고요. 다소 어설픈 사체 유기도 그 일환인 것으로 설명됩니다. 사체가 발견되어야 수사가 진행되어 진범이 밝혀질 수 있다는 이유였지요.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악당으로 돌변해버립니다. 알고보니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만 신경쓰는 극도의 이기주의자로, 다현의 죽음 따위는 진작에 잊어버렸다는데 그 변모가 거의 다른 사람 수준이에요. 이를 위한 별다른 설명도 없고요. 처음에는 교사로서의 지위를 잃고 파멸할게 두려워 다현의 시체를 유기했다고 설명되는데, 뒤에서는 교사라는 직업 따위는 중요하지도 않다고 하니 뭐가 맞는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이럴 바에야 애초에 시신을 좀 더 철저히 유기했더라면 만사 형통이었을겁니다. 

이렇게 정체를 드러낸 이후, 불화가 있던 아내 영주의 돈까지 끌어모아 해외 도주를 시도한다는건 그야말로 최악입니다. 이 와중에 김준후의 아내 영주는 왜 이혼을 하려고 하지 않는지, 왜 재결합을 원해서 지방까지 따라 내려왔는지 등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서 답답했고요. 경비원 황권중 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반에는 별 생각없이 태만하게 근무하는 사람좋은 아저씨로만 보였는데, 현장의 증거를 확보한 뒤 준후를 협박한다는건 별로 와 닿지 않더라고요. 초반부터 철저하고 깐깐한 아저씨로 묘사했다면 훨씬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황권중의 협박으로 비롯된 사건들도 다소 억지스러웠습니다. 김준후가 협박에 응하지 않는건 당연했어요. 자기는 범인이 아닌게 확실하고, 범인이 누구인지 드러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자신이 범인이라는 협박에 직접 움직인다는건 바보짓이니까요. 어설프게 김준후가 행동에 나설 이유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김준후에게 보낸 협박장을 본 조미란이 직접 나서 황권중을 죽였다는 건 더 이상합니다. 다현을 죽인 진범이 자기 아들 은성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그를 죽였다는데, 협박장이 보내진 상황을 보면 황권중은 김준후가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조미란이 황권중을 서둘러 죽일 필요는 없지요. 죽이기 전에, 김준후와 만나서 무얼 어떻게 하는지를 먼저 살펴보는게 당연했습니다. 

물론 이 범행은 어머니의 절박한 심정 때문이었다면 아예 말이 안 되는건 아니겠지요. 그러나 조미란이 지극히 간단한 수사에 의해 체포되는건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아들의 범행이 드러나지 않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는데, 이렇게 쉽게 체포되는거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셈이잖아요? 조미란을 체포한 후, 경찰이 심문할 때 은성이를 불러다 함께 심문을 한 것도 법적으로 가능해 보이지 않았고요. 애초에 황권중이 확보했던 증거라는 다현을 매달았던 끈을 현장에 두고왔다는 것도 좀 납득이 되지 않은 등, 여러모로 황권중 사건은 극적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벌였던 무리수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다현의 죽음이 자살이었다는 진상도 놀랍기는 했지만, 설득력이 약한건 마찬가지입니다. 다현이 자살한 동기까지는 납득이 갑니다. 준후와도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는걸 깨닫고, 친구한테도 용서받지 못해서 죽음을 택했다는건 꽤나 타당한 이유니까요. 그러나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 처럼 위징해서 자살할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자살로 밝혀지면 준후가 빠져나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던걸까요? 다현이 목을 매는 끈을 손으로 쥐고 몸을 끌어올린 뒤 목을 집어 넣어 죽었기 때문에 아래에 발판이 없었다는 진상을 다현이 사실 남자였다는걸 드러내는 장치로 사용한건 효과적이었지만, 이를 위해 다소간 억지를 부린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준후에게 복수하는게 궁극적인 목적이었다면, 준후의 체액을 몸에 담은 채 유서를 쓰고, 학교 운동장에서 목을 메는게 더 나았을거에요. 이래서야 개죽음일 뿐이지요.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재미있게 읽은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아직 읽어보시지 않으셨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서술 트릭이 사용되어 영상화나 시각화는 어려운만큼, 반드시 책으로 읽어야 하는 작품이기도 하니까요.

2014/04/21

파계 재판 - 다카기 아키미쓰 / 김선영 : 별점 3점

파계 재판 - 6점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검은숲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과거 신극배우였던 무라타는 내연녀와 그의 남편을 살해한 뒤 사체를 유기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그는 남편을 살해한 내연녀 야스코를 위해 시체 유기를 도왔다는 혐의는 인정했지만, 나머지 혐의는 모두 부인했다. 검사는 무라타의 유죄를 확신했으나 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의 활약으로 서서히 흐름이 바뀌고, 결국 무라타의 비밀까지 밝혀지는데...

누명을 뒤집어 쓴 피고인 무라타 가즈히코의 결백을 밝히고 진범을 밝혀내는 햐쿠타니 센이치로 변호사의 활약이 그려지는 법정 미스터리입니다. 일본 추리작가 다카기 아키미쓰의 대표작 중 한 편이지요. 작가가 후기에서 언급하기로는, 이전 가미즈 교스케 단편을 확장했다고 합니다. 도서출판 검은숲에서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 두 번째로 출간되었는데,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에 이어 국내 정식 출간된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하네요.

장점이라면, 재미 하나는 확실하다는 겁니다. 두 건의 살인사건 자체가 흥미롭고,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 한순간에 드러나는 진범과 그 진상이 매우 인상적인 덕분입니다. 작가가 사법고시 준비 수준으로 조사했다는 법정 묘사는 허언이 아닐 정도로 상세하고요. 증인이 한 명씩 등장해 검사와 변호사가 벌이는 치열한 공방도 매우 긴박감 넘치게 그려집니다.

또한 이 작품은 단순한 법정극을 넘어서는 사회파적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부락민 출신이라 평생 차별에 시달렸다는 설정을 통해, 일본 사회에 내재한 차별 구조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목인 "파계"는 시마자키 도손의 차별을 그린 동명 작품에서 따왔으며, 부제 역시 "사람이 아닌 자의 이야기"입니다. 검사가 제시하는 무라타의 과거 범죄들이 실은 차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정은 매우 설득력 있습니다. 극단에서의 횡령은 출신을 이용한 협박 때문이었고, 동거녀와의 결별 역시 출신 성분을 알게 된 그녀의 선택 때문이었다는 식으거든요. 특히 그 동거녀가 법정에서 결혼하겠다고 증언하는 장면과, 무라타가 이를 일축하며 "내 돈 때문이지!"라고 외치는 순간은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전개 방식도 독특합니다. 전부 법정 안에서만 이야기가 진행되며, 화자인 요네다가 법정출입기자로서 재판 과정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방식으로 서술됩니다. 보통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별도 취재나 외부 조사가 동반되는데, 그런 장치가 전혀 없습니다. 그 덕분에 엽기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전작들에서 보이던 과장된 묘사 없이 매우 절제되고 날카로운 문체가 돋보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아쉬움은 추리적인 요소의 한계입니다. 요네다의 시점만으로 모든 정보가 전달되기 때문에 독자에게 제공되는 정보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주는 탓이에요. 법정 미스터리 특성상 상대가 어떤 증언을 준비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은 이해되지만, 이는 이야기 구조를 제한적으로 만듭니다. 또한 정보의 일부가 작위적으로 보인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혈액형에 대한 증언이 위증으로 밝혀지는 부분이 그러합니다. 증인이 정직하게 말했더라면 오히려 사건이 더 애매해졌을거에요. 또한 사라진 천만 엔의 행방에 대해 검사나 경찰이 거의 신경 쓰지 않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60년대 초반 기준으로도 막대한 액수이며, 자금의 출처를 밝히는 것만으로도 진범 규명의 단서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쓰가와 히로모토와 야스코의 관계 역시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특히 쓰가와가 야스코의 시신을 어떻게 유기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점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첫 번째 유기에는 무라타의 자가용이 개입되었기에 개연성이 있었지만, 두 번째 범행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또한 진범의 정체가 드러나더라도 이 작품은 무라타의 재판에서만 끝을 맺습니다. 화자인 요네다를 내세운 만큼 쓰가와 재판 결과까지 다루는 에필로그가 있었더라면 완성도가 더 높아졌을텐데 아쉽습니다. 

배우 이토 교지나 여배우 호시 아키코 같은 인물들도 단순한 미스디렉션으로 사용하기엔 등장 비중이 너무 크다는 느낌을 주고요. 무라타의 무죄를 확신하고 자비까지 들여 조사에 나선 햐쿠타니 변호사의 동기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는 점도 의문입니다. 상황상 무라타가 범인처럼 보이니까요. 이후 시리즈화 가능성을 염두에 둔 캐릭터 설정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다카기 아키미쓰의 법정 미스터리는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 시리즈"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작가 역시 변호사보다는 검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극적 긴장감과 사회파적 메시지를 고루 갖춘 완성도 높은 작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작가가 이 작품을 위해 사법고시 수준의 공부를 했다는 열정이 느껴졌고, 몇몇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의미와 재미를 함께 갖춘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덧 : 책의 디자인은 나쁘지 않지만, 표지 일러스트 때문에 책 하단에 오물이 묻은 것처럼 보입니다. 구입 당시에는 띠지로 가려져 있었지만, 이런 디테일은 조금 더 신경 써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2010/09/23

용의 손은 붉게 물들고 - 미치오 슈스케 / 이영미 : 별점 3점

용의 손은 붉게 물들고 - 6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이영미 옮김/은행나무

소에키다 렌 - 가에데 남매는 계부인 무쓰오를 증오한다. 이웃에 사는 다쓰야 - 게이스케 형제 역시 새어머니 사토에에게 반항하던 상황. 그러던 중 우연히 무쓰오가 살해당했고, 렌은 어쩔 수 없이 사체를 유기했다. 하지만 유기하는 장면을 다쓰야 형제에게 목격당한 뒤, 다쓰야와 동창생인 가에데에게 협박장이 날아왔다. 렌은 동생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들 것을 결심하는데...

"섀도우",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으로 접했던 미치오 슈스케의 장편 소설입니다. 제목이 굉장히 멋진데, 원제는 단순하게 "龍神の雨"더군요. 원제보다 번역된 제목이 내용을 더 잘 드러내면서도 세련된 경우는 드문데, 이번 작품이 그렇습니다.

이 작품은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기보다는 범죄 스릴러에 가깝습니다. 정교한 트릭보다는 첫 사건인 무쓰오 살해 사건이 벌어진 후 사체 유기, 그리고 범행 현장이 목격되어 협박장이 날아오는 전개가 긴박하게 진행되어, 계속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는 점에서요.

추리적으로도 무쓰오 살해 사건에 대한 여러 트릭과 사체 유기 과정에서의 디테일은 상당한 수준입니다. 끊임없이 던져지는 다양한 단서들이 나중에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방식으로 연결되는 구조도 잘 짜여져 있어서 추리 애호가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다쓰야 형제의 어머니가 사고사한 것에 대한 나름의 추론 역시 하나의 독립적인 소품으로서도 흥미로웠습니다.

"결손 가정"이라는 가족 내 문제를 작품 속에 심도 있게 도입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점도 인상적이며, 태풍이 몰아치고, 비가 끊임없이 내리는 축축하고 음울한 분위기 역시 작품 전반에 잘 녹아들어 있었습니다. "경관혐오"를 읽을 때와 비슷한, 뜨겁고 끈적한 긴장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특히 "섀도우"와 비슷한 단점이 반복된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특히 '진범'의 정체가 너무 뜬금없습니다. 물론 작품 속에서 단서와 복선이 충분히 배치되어 있었지만, 독자가 이를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수준으로는 묘사되지 않습니다. 이래서야 반전을 위한 장치일 뿐, 공정한 전개로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굳이 남매와 형제를 얽어놓기보다는, 진범의 정체를 좀 더 정교하게 풀어나갔다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또한, 렌 남매와 다쓰야 형제를 연결하기 위한 설정이 다소 무리하게 느껴졌고, 마지막에야 소에키다 무쓰오라는 남자의 진심을 렌이 이해하게 되는 전개, 그리고 우연히 만난 친구에게서 전철 치한의 정체를 듣게 되는 과정 등은 다소 작위적이었습니다. 이런 문제들 모두 "섀도우"에서도 느꼈던 단점들과 유사합니다.

전체적으로 태풍과 비라는 요소를 강조하며 상황을 연출하는 방식도 다소 과했으며, 특히 후지공주와 야마타노오로치 전설까지 엮은 것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보였습니다.

이렇게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이야기의 스릴과 서스펜스는 대단하며 끝까지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확실한 작품입니다.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은 것도 분명하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소설보다는 영화로 제작되었을 때 더욱 빛을 발할 것 같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영화화된 적이 있는지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2021/10/15

미스테리아 34호 - 미스테리아 편집부 : 별점 2점

미스테리아 34호 - 4점
미스테리아 편집부 지음/엘릭시르

미스테리아는 주제가 흥미로울때만 가끔 읽곤 합니다. 34호는 일본 본격 추리 소설이 특집이라서 읽게 되었습니다. 나름 고전 본격물의 팬을 자부하고 있으니까요. 표지부터 마음에 들어요. "니가 범인이야!" 라는 느낌이니까요. 강렬합니다.

특집은 일본 본격물의 역사에서 시작합니다. 본격과 변격이라는 말의 유래, 그리고 본격이라는 말의 정의, 최초의 본격물에서 신본격, 그리고 근래 라이트 노벨류까지 이어지는 역사와 대표작, 대표 작가들이 소개되지요. 큰 흐름으로는 본격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고가 사부로에서 시작하여 에도가와 란포"D언덕의 살인사건", 하마오 시로의 "그 남자가 죽였을까", 요코미조 세이시"혼진 살인사건", 그리고 마쓰모토 세이초사회파 미스터리의 대 유행에 이은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 아야쓰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월광 게임 - Y의 비극 '88", 니시자와 야스히코"일곱 번 죽은 남자", 모리 히로시"모든 것이 F가 된다"신본격 전국 시대를 넘어 우타노 쇼고"벛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시인장의 살인"으로 이어진다는 식입니다. 

뒤로는 본격물이 일본에 받아들여진 당시 일본 추리 문단에 대한 상세 설명, 여러가지 유명 작품 속 트릭에 대한 소개, 점점 캐쥬얼화 되어가는 신본격 장르물에 대한 기사가 이어집니다. 자료 조사도 탄탄하고, 담고 있는 내용도 풍성한 편이었어요.

두 번째 특집 기사 '체인질링'은 인간의 아이와 바꿔치기된 요정 아이에 관련된 민담을 분석하는데, 중세 유럽에서 왜 아이가 바뀐 것에 대한 전설이 만들어졌는지를 당시 역사적 배경으로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아이가 기형일 수도 있고, 아이가 죽는 일이 다반사였던 탓이라는데 아주 그럴듯했어요. 관련된 다른 전설, 우리 나라의 예도 들어서 설명해 주는 것도 좋았습니다. 

홍한별 번역가와 곽재식 작가의 옛 사건 탐구도 흥미로왔어요. 특히 명동 한복판에 일제 강점기 시절 빼돌리지 못했던 보물이 묻혀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나 소설로 만들어도 손색없어 보였습니다. 레이철 쿠시너의 "마스 룸" 속 등장하는 요리들을 소개한 컬럼은 '추리 소설과 요리'에 대한 글을 써 온 저로서는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는 내용이었고요. 요리들도 아주 신기하더군요.

그런데 불만족스러운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우선 본격물 관련 특집은, 이미 대충 알고 있던 내용들로 새로운 건 없었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저도 쓸 수 있었을 기사였달까요? 물론 캐쥬얼화 되어가는 최근의 흐름은 잘 몰랐던 내용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쪽 작품들 찾아 읽을 정도로 좋아하지 않아서 몰랐던거에요. 구태여 구해 읽을 필요가 있었던 기사는 아니었습니다. 

유성호 법의학자의 아동 학대 흔적에 대한 컬럼, 이은의 변호사의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 속 법적 대응 방법 등 다른 기사, 컬럼들은 볼륨이 대체로 빈약합니다. 인터넷 검색 결과와 별다를게 없는 수준이에요. 반대로 정성일 평론가의 영화 "포제서" 평론은 볼륭은 풍성했지만 글의 가독성이 너무 낮아서 지루했고요.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평론만 봐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어요. 이렇게 가독성이 낮은 글은 이외에도 많아서, 쉽게 읽히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짤막한 리뷰들 하나하나까지 모두요.

마지막에 수록된 3편의 단편들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관심있는 특집이더라도 더 이상은 구매할 생각이 없습니다. 정은지, 홍한별, 곽재식의 컬럼과 논픽션 기사나 추후 단행본이 출간되면 구입해 볼 생각입니다.

수록 단편에 대한 짤막한 소개로 리뷰를 마칩니다.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콩알이를 지켜라!" 

자신이 창조해 낸 인기 동화책 콩알이가 인생의 전부인 일러스트레이터 지혜정의 남편 김진석 교수가 살해되었다. 범인은 제자 최은비였다. 진석이 그녀를 강간하려 해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혜정은 은비를 꼬드겨 시체를 강원도 의천에 있는 별장에 유기하러 출발했다. 콩알이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별장에는 진석의 변태 친구 한동철이 머무르고 있었고, 혜정은 동철마저 살해한 뒤 시체 두 구를 함께 유기해 버렸다.

듀나범죄 스릴러 단편인데 이야기할 가치가 없는 졸작입니다. 

우선 범죄에 대한 설득력이 너무 낮습니다. 아무리 남편이 쓰레기였다 한들, 피해자 아내가 남편을 죽인 살인자와 함께 시체 유기를 한다는걸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못한 탓입니다. '콩알이'의 존재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에 대한 설명과 묘사가 부족해서, 그다지 절박한 이유로 보이지 않았거든요. 혜정이 처음부터 한동철을 죽이려 했고, 이를 위해 앞서 시체 유기를 일부러 훤히 드러나게 시도했다는 식으로 범죄 계획을 정교하게 세우기라도 했다면, 범죄물로 볼 만한 여지가 있었을텐데 그렇지도 않고요.

전개도 혼란스럽습니다. 진석이 제자의 고백을 녹화하여 한동철과 공유하고, 성적인 대상으로 삼았다는 진상이 드러나는건 뜬금없었고, 이 때문에 한동철을 죽였다는 것도 급작스러워서 이해가 힘들었습니다. 애초에 진석은 여태 은비의 고백을 녹화해서 잘 쓰다가, 왜 갑자기 강간을 저지르려고 한걸까요? 문학하는 남자들을 모두 성범죄자로 단정짓는 설정도 황당하기 그지 없더군요.

듀나의 특기이자 장점인 기발한 설정이 빠져버리니, 뭐 하나 건질게 없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웃는 탐정" 

초월탐정 김재건과 미소년 조수 마곤이 등장하는 단편으로 집주인 여사와 김재건 사이에 택배로 인해 발생한 트러블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엉망진창이에요. 마곤이 초능력자로 일종의 투명 인간이 되어 집주인 여사가 가지고 있던 김재건의 택배를 훔쳐내는게 이야기의 거의 전부인데, 마곤이 이 택배를 왜 훔쳐내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초월탐정 어쩌구하는 김재건의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경박하고 유치찬란한 김재건 묘사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초월 탐정' 이 뭘 뜻하는 별명인지 감도 오지 않지만, 별로 궁금하지도 않는군요. 서두의 시점을 가지고 독자와 장난치는 부분은, '메타 미스터리' 운운했던 앤솔로지 "Y의 비극"에서 니카이도 레이토가 썼던 단편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 작품도 엄청난 졸작이었지요.

마곤이 할머니와 김재건 사이에 있었던 일을 추리하는 일상계 추리스러운 부분은 괜찮았지만, 다른 부분은 그저 그랬어요. 앞으로도 이 시리즈를 읽을 일은 없을 듯 합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죽음의 세트장" 

배우 잭 하터가 영화 촬영용 세트장에서 살해당했다. 사건 당시 21번 방음 세트장 안에는 현장 제작자 조 캐츠키와 감독 샘 매스터퍼드 등 모두 열 세 명의 사람이 있었다.

1930년대를 무대로 하고 있는 단편인데 옛스러운 영화 촬영장 분위기를 상세하게 그려낸 묘사는 아주 좋았습니다. 잭 하터와 마리 플레밍, 두 주연 배우 간에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게 되는 마지막 촬영 장면 묘사가 특히 그럴싸 했어요. 이 부분은 여배우를 연모하고 있었던 감독 샘의 살인 동기가 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기도 했는데, 잘 그려냈습니다.

'스크립터'가 탐정역을 소화한다는 설정도, 과연 영화를 잘 아는 사람이 썼구나! 싶더군요. 스크립터는 씬마다 있는 오류를 잡아내기 위한 사람으로, 당연히 관찰력이 남다를 수 밖에 없으니까요. 

관찰력을 바탕으로, 일종의 닫힌 공간인 촬영 스튜디오에서 소거법으로 범인을 찾아내는 추리 과정도 설득력이 높습니다. 거의 대부분 목격 증언으로 소거되는 덕분이에요. 결국 조 캐츠키와 샘 매스터퍼드만 남는데, 발소리를 듣지 못해서 샘이 범인이라는게 드러납니다. 조 캐츠키의 발소리는 독특했고, 샘은 고무 장화를 신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서가 별다르게 제공되는건 없어서 본격물로 보기 힘들며, 추리도 일사천리라 의외성은 없습니다. 사실 샘이 범인이라는 스크립터의 추리는 증거가 명확하다고 볼 수 없어서, 경찰 수사가 추가로 필요한 부분이었다 생각되네요. 그래도 다른 단편들에 비하면, 최소한 읽을만한 수준의 추리물이기는 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6/04/10

기억 속의 유괴 - 오야마 세이이치로 / 한수진 : 별점 2.5점

저자의 "붉은 박물관" 시리즈 두 번째 작품집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해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전작을 그다지 재미있게 읽지 않아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는 괜찮았습니다. 단편다운 기발하고 신선한 부분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수록작 전부가 빼어나지는 않고, '설녀' 히이로 사에코 관장의 만화적인 설정은 여전히 별로지만 이 정도면 한 번 읽어볼 만은 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고생 추락사 사건"

1991년 2월, 기타구 도립 니시가하라 고등학교에서 2학년 여학생 후지카와 유리코가 옥상에서 떨어져 사망했습니다. 후두부를 화단 모서리에 강하게 부딪친 것이 사인이었고, 사건 당시 아래층에서 일하던 작업자는 옥상에서 한 소녀가 "이제 곧 작별이네요. 저는 선배를 좋아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말 때문에 유리코가 선배에게 고백했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여겨졌고, 같은 미술부 3학년 남학생 세 명이 유력한 용의선상에 올랐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어 사건은 끝내 미제로 남고 공소시효까지 만료되었습니다.

'붉은 박물관장' 히이로 사에코는 고정관념으로 굳어져 있던 사건의 전제를 뒤집어 버립니다. 당시 고백한 사람은 유리코가 아니라 그녀의 후배인 1학년 여학생이었고, "이제 곧 작별"이라는 말 역시 죽음을 암시한 것이 아니라 전학을 뜻하는 말이었다고요. 그래서 당시 1학년생 가운데 전학을 간 학생을 추적해, 그 학생이 진범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대단한 트릭이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고정관념'을 깨는 맛이 잘 살아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연쇄 방화 사건"

1990년, 후추, 고쿠분지, 구니타치, 다치카와 일대에서 연쇄 방화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피해자들 사이에 별다른 공통점이 없었기 때문에 보험금을 노린 자작극이나 교환 방화설은 설득력을 잃었고, 여러 건 가운데 한 건만 진짜 목적이고 나머지는 위장이라는 해석도 방화 횟수가 너무 많아 힘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범인은 누군가를 찾기 위해 방화를 저질렀다는 사건의 실마리가, 범인을 신고하려다 살해당한 가타노 사치에의 전화로 알려졌습니다. 이 때문에 사건은 '야채 장수 오시치 사건'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확인된 유일한 공통점은 방화 대상이 된 집들이 모두 24~25년 전에 지어졌다는 점뿐이었습니다.

사에코는 우선 소거법을 이용해 범인이 찾고 싶어 했던 대상들을 추려냅니다. 소방관은 다른 사람이 출동할 수 있어서 제외하는 식으로요. 그리고 동시에 특정한 조건을 가진 집들을 계속 태웠다는 점을 연결해 사건의 목적을 밝혀냅니다.

그렇게 해서 추리해 낸 진상은 현장검증 책임자 벳쇼가 진범이며, 그는 연쇄 방화가 일어나면 동일한 수사 인력이 반복적으로 현장에 투입된다는 점을 이용해서 특정 시기에 지어진 집들 가운데 한 곳의 바닥 밑에 묻혀 있을 어머니의 시신을 찾아내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 안의 사람들은 미리 대피시켰습니다. 시신이 훼손되거나 혼동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오시치 사건이라는 아이디어도 좋고, 연쇄 방화 피해자들의 공통점을 통해 범인의 목적과 정체를 밝혀 나가는 추리도 빼어납니다. 어머니의 사체를 찾기 위해서라는 목적으로 저지른 범죄치고는 지나치게 극단적이라는 단점이 조금 거슬리지만, 큰 흠은 아닙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토막 사체 사건"

1999년 3월 23일, 아라카와 하천 부지에서 토막 난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머리와 몸통, 양팔의 위아래 부분, 양다리의 위아래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부위가 관절을 중심으로 절단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었습니다.

보통 토막 사체는 운반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관절 부위를 추가로 정교하게 잘라낸 목적이 무엇인가를 두고 흥미로운 추리를 펼쳐 보입니다.

사에코는 범인이 "가동 범위가 큰 관절"을 의도적으로 제거했다고 보고, 이것이 시신의 마지막 자세를 숨기기 위한 행위였다고 추리합니다. 피해자는 죽은 뒤 사후 경직이 일어나 특정 자세로 굳었을 것이고, 그 자세만 보면 범행 현장이나 범인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논리이지요.
또 범인은 경직이 풀릴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굳은 자세를 알아볼 수 없도록 시신을 관절 위주로 절단해 유기했다는 점을 통해 사에코가 지목한 범인은 피해자의 지인 쓰카모토 가즈오였습니다.

피해자는 가즈오의 중고차 가게에서 차를 타며 자주 놀았는데, 차에 앉아 있던 피해자를 살해한 뒤 급하게 자리를 떠나는 바람에 피해자가 운전하는 자세로 굳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즈오는 피해자의 아내 오리에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그녀가 남편 호소다의 성으로 장례를 치르는 상황을 막고 싶어서 시신이 빨리 발견되도록 유기할 수밖에 없었고요.

이처럼 사후 경직으로 범행이 밝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관절'을 제거했다는 아이디어가 아주 좋네요. 정말 획기적입니다. 단편 특성상 용의자가 몇 명 등장하지 않아서 범인이 빠르게 짐작된다는 단점은 있지만,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회사원 살해 사건"

1990년 3월 14일, 미나미시나가와에서 회사원 후지시로가 살해당했습니다. 후지시로는 주변 동료들에게 거액의 채무를 지게 만들고, 그런 상황을 즐기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성격 때문에 그를 원망하는 사람은 많았고, 사건 역시 원한 관계를 중심으로 수사가 전개되었지만 유력한 용의자에게 알리바이가 있어서 결국 미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앞선 작품들에 비하면 평균 이하였던 졸작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추리의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에코는 후지시로가 속한 재료과 멤버들을 중심으로 용의자를 좁혀 가는데, 그 전제부터 억지스럽게 느껴집니다. 협박이나 금전적 압박이 특정 부서 사람들에게만 향했을 리 없으니까요.
또 후지시로의 집에 있던 의자의 위치를 보고 그가 어깨를 다쳤다고 추리하는 부분까지는 흥미롭지만, 그것이 사건 해결의 핵심 근거가 되는 과정은 억지스럽습니다. 실제로 의자를 무엇에 썼는지는 피해자가 죽었으니 밝힐 수 없기도 하고요. 청소하느라 빼 놓았을 수도 있잖아요?

여기에 더해 진범 사와모토가 구보데라를 살해하고 그의 신분을 빼앗았다는 반전은 최악입니다. 앞서 구보데라에게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다고 제시해 놓고, 나중에 사실은 그 인물이 이미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어 있었다고 뒤집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서술 트릭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이를 납득하게 할 만한 사전 단서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기억 속의 유괴"

26년 전, 다섯 살이던 토다 나오토가 유괴당했습니다. 당시 범인은 몸값을 요구했지만, 결국 별다른 이유 없이 나오토를 풀어주었다.

친모가 나오토와 동반 자살을 할 목적으로 납치했지만 양부모에 의해 살해당한 뒤, 양부모는 친모의 사체를 유기하고 나오토가 납치당한 기억을 왜곡시키기 위해 유괴 사건을 자작했다는 것이 진상입니다.

양부모가 매년 어디론가 참배를 갔던 점, 범인의 이상했던 당시 몸값 요구 같은 단서는 있지만 친모의 정체 등 독자에게 공유되지 않는 정보가 많아서 좋은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네요. 납치와 유괴, 살인과 같은 강력 범죄가 등장하지만 이상하게 소품 느낌을 준다는 점도 별로였고요. 납치와 살인은 우발적이고, 유괴가 작위적인 연극인 탓이겠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0/10/02

살인 현장은 구름 위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점

살인 현장은 구름 위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단편집입니다. 신일본 항공 승무원인 하야세 에이코를 탐정으로 내세운 시리즈이지요. 에이코는 통칭 A코로 불리우는, 도쿄 대학을 중퇴하고 입사하여 훈련생 수석까지 차지한 재원으로, 마른 몸매의 고전적 외모의 미녀이기까지 하지요. 그녀가 겨우 합격하고 훈련생에서도 꼴찌인 동기 후지 마미코(통칭 B코)와 콤비로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읽어보면 구태여 승무원이 주인공일 필요는 딱히 없어요. 승무원 설정을 살린 이야기가 한 편 정도? 때문에 버블 시대에 승무원 관련 컨텐츠 유행에 편승한 설정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B코 역시 등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추리에 도움을 주지도 않고, 민폐만 끼칠 뿐이니까요. 사실 등장할 때 마다 짜증만 날 정도였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 만한 이야기는 많이 없어요. 무리한 설정이 너무 많은 탓입니다.

이런 단점들 때문에 시리즈가 이어지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K호텔 살인의 밤" 

가고시마로의 비행 후 언제나처럼 바 '와이키키'에 모여 한 잔 하던 승무원들 모임에 그날 승객이었던 혼마가 동석했는데, 마침 그 때 혼마 아내의 전화가 걸려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웨이터가 그녀의 호텔 방으로 샌드위치를 배달하는건 호텔에 있던 B코가 목격했다. 4시간 정도 술을 마시고 새벽 1시 경 호텔로 돌아간 그들은, 혼마 아내의 시체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 때 A코의 눈에 들어온건, 혼마 씨 부인 시체가 하이힐을 신고 있었던 것이었다....

강도가 구태여 트윈룸에 침입할리 없으며(두 명이 있을 수 있으니), 오토록으로 잠긴 문을 돌파할 방법도 없습니다. 여기에 누구나 알리바이 공작임을 알아챌 수 있는 술자리 설정을 더하면 범인이 혼마 씨라는건 쉽게 짐작 가능합니다. 이렇게 범인이 뻔하기에, 트릭이 중요합니다.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끌기 위해서는요.

그러나 트릭은 단순한 변장 트릭이라 시시합니다. 배달된 샌드위치를 받았던 건 변장한 조카였거든요. 둘은 자신들의 유산을 혼마 씨 부인이 멋대로 주식에 투자해서 큰 손해를 보자, 의기투합하여 살인을 공모했던 겁니다. 간단하고 현실적이기는 한데, 재미있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그나마 사체 부검 결과 위장 속에 있었던, 먹은지 30분 정도 지난 샌드위치는 배달 전에 따로 구입한걸 혼마 씨가 부인에게 먼저 먹였다는 조금 고심한 트릭이 곁들여져 있기는 합니다만, 이 역시 새롭거나 기발한 발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추리를 경찰이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조카가 피해자로 변장했다는걸 밝혀내기는 불가능하니까요. 혼마 씨가 따로 샌드위치를 샀다는걸 결정적 증거처럼 취급하고 있는데, 이건 단순한 정황증거일 뿐입니다. 혼마 씨 조카의 지문이 피해자 방에서 나왔다면 모를까, 증거가 샌드위치가 전부라면 무죄 판결을 받는게 그리 어려워보이지는 않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분실물에 유의하세요" 

베이비 투어에 참가했던 25쌍의 가족이 탑승했던 비행이 끝난 뒤, B코는 실내를 정리하다가 남겨진 아기를 발견했다. 서둘러 베이비 투어 일행을 찾았지만 아이는 25명이 모두 있었다. 아이는 누구이며, 왜 혼자 남겨져 있었을까? 결국 사건은 방송을 타게 되는데, 다행히 교토에 사는 아기 엄마가 나타난다. 아기는 엄마와 함께 산책 중 실종되었었다...

A코는 베이비 투어 일행이 교토에서 그 공원에 들렸던 걸 알아낸 뒤, 참석했던 부부 중 누군가가 자기들 아기와 똑같은 옷을 입은 남의 아기를 착각해서 데려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추리라고 할 것도 없는, 상식 수준의 이야기에요.

그래도 비행기에서 내린 베이비 투어 참석자의 아기가 25명이었던 이유에 대한 추리는 꽤 괜찮습니다. 남편이 먼저 자기 아기를 데리고 도쿄로 먼저 출발한 겁니다. 부인은 남의 아기를 데리고 원래의 투어용 비행기에 탑승했고요. 착륙 후 남의 아기는 자리에 남겨두고, 공기 인형 따위에 아이 옷을 입혀 위장한 뒤 비행기에서 내렸고, 곧바로 남편을 만나 자신들의 진짜 아기를 안고 있던 겁니다.

그러나 사건 자체가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실수로 데려온 남의 아이와 함께 비행기까지 탄 뒤 비행기에서 유기한다는건 너무 억지스럽지요. 투어였다면 가이드와 상의해서 처리하는게 상식적이잖아요? 비행기에서 유기하는 순간 애가 울기라도 했으면 빠져나갈 방법도 없고요. 마찬가지로 남의 아기를 태연히 버린 부모를 용서할 수 없던 A코와 B코가 그 부부의 아기를 인형과 바꿔치기 한 뒤 옥상에서 떨어트리는 쇼를 펼쳐 응징한다는 결말도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이 역시 중범죄인 탓입니다. 경찰에 신고하는게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상황은 흥미롭지만, 억지로 만들어 낸 이야기라는 티가 너무 많이 났습니다.

"중매석의 신데렐라"

B코는 비행 중 친해진 나카야마라는 승객으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운전사 딸린 벤츠로 B코를 에스코트한 뒤, B코에게 청혼했다. B코는 재산을 노리는 나카야마 친척들의 욕심을 좌절시켜야 한다며 A코에게 완벽한 신부 연기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친척들을 만나러 가는 길, 나카야마의 벤츠로 이동하던 A코는 운전사 다무라를 어디선가 보았다고 느끼는데...

간단한 일상계 소품. 나카야마와 B코의 결혼은 나카야마의 부탁으로 진행했던 연극이었습니다. 나카야마가 진짜 연인과 함께 하기 위해 연극을 꾸민거지요. 나카야마의 연인이 남자인 운전수 다무라였기에 친척들이 반대할게 뻔했기 때문이라는게 그 이유인데, 2020년 관점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특이한 설정이나 반전은 아니었어요. 게다가 마지막에, 다무라를 성전환 시키겠다는 이야기는 이게 뭔가 싶더군요. 그럴거라면 성전환 후에 당당하게 결혼하면 되잖아요? 이렇게 억지 연극을 벌일 이유는 없죠.

전체적으로 억지스럽고 작위적일 뿐 아니라, 결말이 황당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나카야마가 연극 상대로 B코를 점찍은 이유가 다무라와 B코가 닮았다는 것 정도만 재미있었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길동무 미스터리" 

후쿠오카 전통 과자 가게 도미야의 주인 도미타 게이조가 호리이 사키코라는 여성과 함께 도쿄의 호텔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남자는 욕조에서 손을 그어 출혈사하였고, 여자는 칼에 가슴이 찔린 채였다. 처음에는 치정에 의한 자살로 생각되었지만, 그들이 마셨던 커피 잔 두 잔 중 한 잔은 지문이 지워져 있던 상태였고, A코와 B코를 통해 둘은 아무 관계도 아니었으며 같은 호텔에 투숙한 것 역시 우연이라는게 드러났다.
도미야가 경영 위기였고, 도미타가 거액의 생명보험에 가입되어 있어서 아내의 범행도 의심했지만 알리바이는 철벽이었다. 또 자살 시 보험금을 받을 수 없는데 자살로 보이는 애매한 상황을 만들리도 없어서 그녀는 용의선상에서 빠져나가는데...

진상은 도미타가 보험금을 목적으로 자살하려 했다는 겁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한걸로 위장하려고 열쇠를 쓰레기통에 버린 뒤 손을 그었지요. 그러나 투숙객 사키코가 열쇠를 주운 뒤, 친절하게도 방에 가져다 주었습니다. 도미타는 자살 시도가 밝혀지면 보험금을 받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죽이고 자살했고요. 찻잔을 위장할 수는 있었지만, 열쇠를 다시 버리러 갈 여유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지나친 우연이 겹친 작위적인 사건이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도미타의 유서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경찰이 진상을 밝혀내는건 불가능하겠지만, 그렇다고 살인사건으로 처리될지는 확실치 않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문제고요. 자살로도 처리될 수 있는 애매한 상황이니까요.

무엇보다도 도미타의 아내가 진상을 알고 나서도 보험금을 꼭 받겠다고 단언하는 마무리는, 개죽음당한 사키코에 대한 배려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아주 중요한 분실물" 

A코는 비행 중 화장실 앞에서 유서를 주웠다. 27명의 승객 중 화장실을 간 승객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 직장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 일흔살 쯤 되어 보이는 은발의 노부인, 여자 중학생, 머리가 벗어진 중년 남자, 인텔리 남자 회사원, 염치없는 중년 여성, 그 중 누구의 유서인가?

유서에 서명이 없는게 결정적 단서가 되는게 독특했던 작품. 소녀는 어머니의 재혼으로 성이 바뀌게 되어서, 어떤 성을 써야 할 지 몰랐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는 소품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허깨비 승객" 

신일본 항공 객실과 승무원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남자는 A코에게 자신이 어제 신일본 항공 승객을 죽인 뒤 도쿄만에 유기했다고 털어놓으며, 돈을 내 놓지 않으면 비행기 승객을 계속 죽일거라고 협박했다. 경찰은 수사에 나서지만, 찾은 건 피가 묻은 핸드백 뿐으로 시체는 발견되지 았다. 핸드백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핸드백 속 탑승권으로 수소문한 끝에 그녀를 목격했다는 승객이 나타났다. 그러나 조사 결과 그런 여자 승객은 없었다는게 드러나는데...

앞서 협박 전화가 있기는 했지만, 핸드백 주인이 왜 나타나지 않는지가 핵심 수수께끼인 일종의 일상계 작품입니다.

이 모든건 그녀를 목격했다는 승객 나리타의 계획이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만난 여성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꾸민 범행이지요. 피 묻은 핸드백을 버려두고 협박 전화를 건 뒤, 핸드백 주인을 보았다고 하면 얼굴을 확인시키기 위해 다른 승객들을 만나게 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겁니다.

이를 핸드백 속 립스틱으로 알아챈 A코의 추리력은 빛납니다. 립스틱은 신상으로 출시된지 일주일도 안됐는데 많이 닳아있던걸 보고 조작을 간파했던 것이지요. 일부러 쓰던 것 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의미니까요. 장난이 아니라 협박이 사실이라면, 피해자의 신원이 드러나야 범인에게 유리한데 그렇지 않다는건 아주 공들인 장난일 거라는 추리 역시 합리적이고요.

무엇보다도 여성 승객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가 가장 마음에 들어요. 승무원 중 한명인 A코들의 선배 기타지마 가오리가 그날따라 승객으로 탑승했던겁니다! 그녀가 핸드백 주인이 아니라는건 전 승무원들이 아는 만큼 수사 초기에 밝혀졌으니, 범인 나리타에게 그녀의 사진을 보여줄 이유가 없었지요.

그러나 일반인이 선뜻 실행하기에는 너무 큰 범죄라는 점에서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장난이라도 형사 처벌을 피할 수 있어 보이지 않아요. 또 B코가 번호를 잘못 눌러 발신번호 추적이 실패했다는 설정은 황당했습니다. 이건 경고 정도로 넘어가기는 불가능한 실수잖아요?

그래도 승무원이라는 직업과 예상치 못했던 동기가 잘 결합되어 있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이 단편집 최고의 작품이었습니다. 

"누가 A코를 노리는가" 

결혼과 함께 승무원을 그만 둔 전 선배 기타지마 가오리가 승객으로 탑승한 비행을 마친 A코는 가오리로부터 그녀 옆에 앉았던 이상한 승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뒤 휴일에 쇼핑을 나선 A코는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걸 깨닫고 불안해서 귀가하던 중, 차량의 습격을 받았다. 다음날, 출근한 A코에게 형사가 찾아왔다. 어떤 남자가 그녀가 기타지마 가오리와 함께 했던 비행편에 탑승했는지 확인해 달라는 부탁 때문이었다. A코는 경찰이 보여준 사진을 보고, 그가 대학 동창이자 전 연인 쓰카하라라는걸 알고 놀랐다. 그는 모리오카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주요 참고인이었다. A코는 쓰카하라의 연락을 받고 그를 만나게 되는데...

진상은, 쓰카하라는 범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직장 동료 다구치가 범인이었지요. 다구치가 알리바이 조작을 위해 비행기로 이동 중, 우연히 기타지마 가오리 옆 자리에 앉았던게 발단입니다. A코가 기타지마 가오리에게 "오랫만이에요"라며 아는 척 했는데, 승무원끼리는 개인적인 대화를 삼가하는 관습 때문에 대 놓고 아는척 하지 못한 기타지마 가오리가 눈인사만 전한게 화근이었어요. 다구치가 인사말을 자기에게 한 걸로 오해했거든요. 그래서 A코가 자신을 알아보았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녀를 죽이려고 한게 자동차 습격 사건의 진상입니다. 3개월 전, A코의 옛 연인이기도 했던 쓰카하라가 A코와 우연히 재회했을 때, 다구치는 쓰카하라와 함께 있었던 탓도 큽니다. 그래서 더 쉽게 오해했던 것이지요.

우연에 의지하고 있고, 조금은 작위적이라는 단점은 있습니다. 그래도 승무원의 업무에 대해 잘 이해하고 쓰여졌다는 생각이 드네요. 별점은 2.5점 입니다.

2010/10/02

헌책방 어제일리어의 사체 - 와카타케 나나미 / 서혜영 : 별점 3.5점

헌책방 어제일리어의 사체 - 8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서혜영 옮김/작가정신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편집자로 일하던 아이자와 마코토는 실직 후 바다를 찾아왔다가 익사체를 발견했다. 어쩔 수 없이 하츠키시에 머물게 된 마코토는 헌책방 ‘어제일리어’의 주인 베니코의 간단한 테스트를 통과한 뒤, 그녀의 취업 제의를 받아들였다.

한편 그녀가 발견한 익사체는 하츠키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마에다 가문의 히데하루로 밝혀져 장례 준비가 진행되는데, 그 와중에 마에다 가문의 현 주인 마치코마저도 어제일리어에서 살해되고 마는데...

소도시 하자키를 무대로 한 와카타케 나나미의 코지 미스터리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작가라 주저 없이 선택했는데, 읽고 나서야 두 번째 작품이라는걸 알았네요. 

그런데 이 작품, 정말 재미있습니다! 작가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가 가득한 것에 더해 추리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가 수사와 추리의 과정에 공정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했으며, 범인과 동기가 이치에 맞는 등 본격 추리적인 요소에 아주 충실합니다.

거기에 더해, 아이자와 마코토가 초반에 겪는 호텔 화재 사건이나 마코토와 치아키의 전화 통화, 베니코 여사의 옛날 이야기 같은 사소한 단서들이 모두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덕분에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거나 복잡한 느낌 없이 추리 소설의 재미를 가득 느낄 수 있었어요.

작가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 역시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시끌벅적하면서도 황당한 상황이 계속 이어지지만, 적절히 수위와 템포를 조절하며 작품과 어울리도록 녹이는 부분에서 작가의 내공이 더욱 깊어지고 원숙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코토가 처음 어제일리어를 방문한 뒤, 베니코 여사와 펼치는 '고딕 로맨스 퀴즈' 등 고딕 로맨스 소설에 얽힌 다양한 떡밥들은 매니아를 자극하는 요소로 작용해 더욱 흥미로웠고요.

하지만 주요 사건의 깔끔한 해결에 비해 다른 사건들은 정리가 다소 부족하다는건 아쉬웠습니다. 특히 마치코-구도가 얽힌 하쓰호 살해 및 유기 사건이 그렇습니다. 구도가 하쓰호를 죽인 이유도 명쾌하지 않았고, 시체 유기에 대한 진상은 다소 억지스러웠거든요. 이 때문에 마치코 역시 유언장을 폐기하려면 차라리 불을 지르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하거든요. 유언장도 없애고, 생사가 불분명한 하쓰호의 행방을 파악할 수 있어 재산 상속에 문제가 없어지니 1석 2조가 되니까요. 어차피 자신이 직접 죽인 것이 아니니, 마치코의 영향력을 고려하면 큰 문제 없이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구도가 마코토를 습격하면서까지 사체를 처리하려 했던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차피 사건은 종결된 상태였으니까요. 이런 행동은 무리수였습니다. 차라리 고마지 반장의 추리로 밝혀내는 식으로 처리하는게 더 나았을 거에요.

덧붙이자면, 히데하루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와 그가 복수를 결심한 이후의 행동들 역시 다소 뜬금없었습니다. 복수 방법도 어설펐지만, 마이와 시노부가 얽히는 과정이 순전한 우연에 불과하다는 점은 앞선 정교한 장치들과 비교한다면 너무 쉽게 처리된 듯 합니다.

하지만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5점! 이상하게 단점을 리뷰에 상세하게 적기는 했는데, 장점이 훨씬 더 월등한,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빨리 1권을 구해 읽어야겠네요.

PS: '코지 미스터리'를 표방한 작품치고는 너무 강력한 사건이 등장하며, 전형적인 일본의 콩가루 집안 재산 싸움이 펼쳐지는 점이 의외였습니다. 이런 작품도 코지 미스터리로 분류할 수 있을까요?

2010/05/28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 - 미치오 슈스케 / 김윤수 : 별점 3점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 - 6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윤수 옮김/들녘(코기토)

주의 : 스포일러 있습니다

개와 고양이를 살육해서 다리를 부러뜨려 유기하는 범죄가 연속적으로 발생하던 무더운 여름날, 초등학교 4학년 미치오는 방학식에 등교하지 않은 S에게 준비물 등을 전해주러 S의 집을 찾아갔다가 S가 목매 죽은 시체를 발견했다. 그러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 앞에서 시체는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거미로 환생한 S의 부탁으로 미치오는 동생 미카와 함께 S의 시체를 찾아내고, 사건의 진상을 풀기 위해 나서는데...
 

 친구 S의 자살사건과 더불어 여러가지 사건들이 독특한 상상력을 토대로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작가의 전작 "섀도우"리뷰에서 tuppence님이 추천도 해 주셨고 네이버 일본 미스터리 즐기기 카페가 뽑은 2009년 미스터리에서 10위를 차지하는 등, 다른 곳에서 본 리뷰들도 평이 괜찮았기에 바로 읽게 되었습니다.

작품은 소문대로 무지하게 특이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생인 미치오의 혼란스러운 자아와 시각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아이의 상상력이 전면에 배치되는 독특한 환상 소설 같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러한 상상을 디테일한 묘사를 통해 결국 현실이 드러날 수 있도록 복선처럼 단서들을 곳곳에 삽입해 놓은 것도 좋습니다. 사건 없이 이러한 단서만으로도 추리 소설적인 흥미를 자아내니까요.

추리적으로도 크게 2개의 사건 - S 자살 사건과 개, 고양이 연쇄 살육유기사건 - 이 펼쳐지며, 이 사건들이 다양한 추리를 통하여 다양한 가설이 계속해서 등장하기 때문에 굉장히 풍성한 느낌을 줍니다.
또한 가설들마다 단서는 물론 증거와 트릭들도 정교하게 배치해 놓고 있는데, 이게 제법이에요. "비누"가 주요한 단서로 등장하는 이유, 다이조 할아버지와 미치오의 관계를 드러내는 여러가지 장치들 등 사건에 관계된 단서들이 잘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중간에 등장하는 다이조 할아버지의 과거 어머니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는 짤막한 하나의 추리 호러물로 보아도 손색없는 완성도의 작품이고요.

그러나 "미치오"라는 주인공 소년 및 주변 인물 설정에 대한 설득력이 떨어져서 아쉽습니다. 먼저 미치오부터 이야기하자면, 꼬마아이가 뇌내보정을 통하여 여러가지 곤충이나 동물, 사물과 대화하는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환생"에 대해 믿는다는 기이한 상상력도 그렇다 치고요. 그러나 초등학교 4학년으로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머리가 좋다라는 것, 그리고 이렇게 머리가 좋은 아이가 자신만의 환상 세계에 갖혀 산다는건 모순으로 보입니다.
주변인물들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의 광증과 아버지의 체념은 너무나 극단적인 설정이고 담임선생, 다이조 할아버지 등 주요 인물들의 과거와 사연 이야기도 쉽게 납득하기는 어려운 내용들이니까요.
저자 이름과 주인공 이름이 같고, 1인칭이라는 점에서 저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풀어낸 것으로 보기이고 하는데,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설정은 자전적 소설이 아니라면 소설에 맞춰 정리하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무엇보다도 마지막 결말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왜 미치오가 다이조 할아버지를 직접 살해하면서까지 사건의 진상을 왜곡하려 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탓입니다. 자신이 자살로 내 몬 S에 대한 죄책감? 과연 그것이 할아버지를 살해할 정도로, 그리고 다이키치까지 죽어가면서 실행했어야 할 큰 짐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울러 경찰이 백엽상에서의 격투 흔적과 살해된 시체의 상태를 보고도 자살로 판단했을 것이라는 결말은 무책임한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마지막 미치오의 각성과 방화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도 뜬금없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미치오 가족에 대한 극단적 설정이 없었다면 그냥 잘 마무리할 수 있었을텐데 이래서야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구나 싶기도 합니다.

주위 분들이 추천하실만한 재미있는 작품이기는 합니다. 추리적으로도 세련되고 잘 짜여진 구성이 마음에 들고요. 그러나 환상소설처럼 짜맞추려는 의도가 지나쳐서 오히려 작위적으로 보이는 부분과 극단적인 몇몇 설정들, 그리고 작품 전체적으로 풍기는 음울한 분위기는 취향이 아니었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2006/03/03

음란서생 - 김대우 : 별점 2.5점


명망 높은 사대부 집안 자제이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알려진 윤서(한석규)에게 권력은 쫓기에 허망한 것이요, 당파 싸움은 논하기에 그저 덧없는 것. 권태로운 양반 라이프를 살아가던 윤서는 반대파의 모략으로 골치 아픈 사건을 맡게 되고, 이 와중에 저잣거리 유기전에서 일생 처음 보는 난잡한 책을 접하게 되면서 알 수 없는 흥분을 느낀다. 윤서는 급기야 몸소 추월색이라는 필명으로 음란소설을 발표하게 된다.
장안의 화제를 얻으며 인기를 얻게되고 음란 소설에 대한 아이디어가 발전하던 윤서는 고신 전문가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가문의 숙적 광헌(이범수)에게 소설 속 삽화를 그려줄 것을 부탁한다. 광헌 역시 자신의 맥박수치를 끌어 올리는 제안을 차마 거절치 못하고 윤서와 나란히 음란 소설 창작에 빠져 든다. ..

장장 2시간 30여분에 가까운 대작(?) 입니다. 제목과 포스터에서 보여주는 느낌 그대로의 코믹사극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한국 코미디 영화의 나쁜 습관인 뭔가 있어보이는 (?) 이야기를 너무 스토리에 포함시켜서 후반부에는 진지한 이야기로 흘러가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이런 뭔가 있어보이는 무거운 전개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최소한 저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더군요. 그래서인지 초중반부의 한석규가 음란 소설 창작에 서서히 몰입해 가며 보여주는 여러가지 에피소드들로 구성된 코믹한 부분이 훨씬 좋았습니다. 오히려 이쪽 이야기를 극대화해서 아예 코믹하게 가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재기발랄한 전개와 구성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한마디로 저 위의 줄거리 요약 부분만 더 발전시키는 것이 훨씬 좋았을 것 같아요.
인물들도 톡톡튀어서 이름난 명 문장가에 전형적인 사대부인 윤서(한석규)와 의금부 관원이자 그림의 명인 광헌(이범수)의 캐릭터 설정과 연기는 역시(!) 하는 수준이었고 뭐니뭐니해도 유기전 주인이자 음란소설 유통의 핵인 황가의 연기와 캐릭터는 정말 일품이더군요. 그 외의 인물들도 여러가지 부분에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솔직히 정빈 (김민정)의 연기는 좀 아니었지만 비쥬얼이 그간 사극 중에서도 최고 수준인 만큼 용서해 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대로 중반이후 갑작스럽게 정빈 (김민정)과의 트러블로 사람이 죽어나가며 피가 튀기는 마지막 장면은 영 와닿지 않았습니다. 윤서와 정빈의 마음의 교감에 대한 설득력이 영화 내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기도 했지만 윤서의 음란소설에 대한 집념 자체도 이 이야기 때문에 앞부분의 힘을 상실해 버린채 흐지부지되어버립니다. 정빈의 미모가 그나마 이러한 사랑 싸움의 유일한 증거로서 기능할 뿐이니 말 다했죠. 게다가 배신감을 느낀 정빈의 분노에 따른 극적 갈등과 막판 결말도 수긍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무엇보다도 왕의 비현실성이 너무 극대화되는 모양새가 좋지 않더군요. 마지막 장면인 목욕탕에서의 드라마는 거의 환타지라 생각되었습니다...

여러 부분에서 그간 사극의 전형성을 깨는 퓨전사극의 하나로 충분한 재미와 비쥬얼은 가져다 주지만 전체적인 이야기의 완성도가 조금 미흡했다고 생각되네요. 디테일은 좋았지만 전체적 흐름이 좋지 않았던 우리나라 영화에서 항상 있어왔던 문제점을 다시 되새겨 보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나름 해피엔딩이고 결국 불쌍한건 덧없이 죽어간 조내관일뿐... 뭐 죽은 사람만 불쌍한 것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만 빛나는군요.

2022/09/25

살인자의 사랑법 - 마이크 오머 / 김지선 : 별점 2점

살인자의 사랑법 - 4점
마이크 오머 지음, 김지선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이는 20년 전, 자기 동네에서 벌어졌던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 이웃 글로버라는걸 알았다. 그러나 그가 도망가는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았던 탓에 그녀는 프로파일러가 되었다. 하지만 글로버는 그녀 주위를 끊임없이 맴돌며 회색 타이를 보내는 방식으로 자기의 존재를 계속 어필해 왔다. 

현재, 시카고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을 돕기 위해 조이는 FBI요원 테이텀과 함께 수사팀에 합류했다. 언론에서 '목조르는 장의사'라 부르는 살인범은 살해한 여자들을 방부처리하여 시내에 유기하고 있었다. 조이는 프로파일링과 수사를 진행하면서, 사건의 범인이 20년 전 사건의 범인 글로버일 것이라 생각하는데....

시체를 가지고 장난치는 연쇄 살인마프로파일러, FBI 요원 컴비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살인자의 기억법"과 비슷한 제목 때문에 영 손이 가지 않았는데, 읽어보니 생각보다는 훨씬 재미있었습니다. 추리적으로 꽤 괜찮았던 덕분입니다. 

우선 연쇄 살인마인 '목조르는 장의사'의 정체를 밝혀내는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초반에 방부처리된 사체를 보고 가짜 프로파일러가 범인은 전문 장의사일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체의 발목 부분이 부패했다는걸 조이가 간파하고 범인은 이러한 사체 처리에 익숙하지 않은 초짜라는걸 밝혀내는 첫 장면부터 그럴싸 합니다. 

연쇄 살인의 패턴을 파악하여 범인의 정체를 추리하는 과정도 여타 연쇄 살인물과 비슷하지만 추리의 여지가 많은 편입니다. 예를 들어 피해자들의 키가 전부 달랐는데, 딱 맞는 옷을 입고 있었던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범인은 살해 전에 피해자들에게 옷을 사 입혔던 겁니다! 첫 희생자 집 배관이 자주 역류했다던가, 납치되었던 피해자가 범인에 대해 재갈이 물린채 했던 말 등을 통해 범인이 배관공이라는걸 드러내는 등 단서 제공도 비교적 공정하고요.

범인이 여성들을 방부처리한 이유와 유기한 시체들이 전부 우는 듯한 표정이었던 이유를 범인이 오랫동안 함께 한 '연인'을 꿈꿨고, 그녀와 헤어지게 되자 사체들이 슬퍼하는 것 처럼 연출했다는 황당무계한 추리도 나름대로 설득력있게 그려집니다.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그냥 범인의 광기 묘사에 집증하는 경우가 많은데, 비교적 객관적인 서술이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광기어리고 비참했던 유년 시절의 끔찍했던 학대가 원인이었다는건 다소 뻔했습니다만, 도화선이 된 사건은 동기로서는 충분하다 생각될 정도로 잘 그려져 있습니다. 

아직 살아있는 피해자 목에 칼을 대고 협박하던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조이가 범인의 판타지를 활용하여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범인 앞에서 옷을 벗으며, 팬티에 감춘 권총을 테이텀이 잡게 만드는 마지막 클라이막스도 영화화하면 괜찮았겠다 싶더라고요. 

현재의 사건과 병행 진행되는 20년 전 과거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글로버가 진범이란걸 확신한 뒤, 그의 집에 몰래 잠입해서 증거를 뒤지다가 글로버와 마주치는 장면, 글로버가 조이의 집에 쳐들어와서 자매를 협박하는 장면은 굉장한 서스펜스를 안겨줍니다. 21세기 작품다운 속도감있는 전개 역시 좋았어요.

그러나 워낙 뻔한 설정이라 비슷한 작품과의 큰 차이를 느끼기는 어려웠고, 캐릭터가 진부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프로파일러 조이 캐릭터가 대표적입니다. 어린 시절 겪었던 공포스러운 기억, 그에 따른 불면증, 감정적이면서 도전적인 말투와 행동 등 어디서 많이 보아왔던 여성 수사관 캐릭터와 별다를게 없는 탓입니다. "양들의 침묵"의 클라리스가 바로 떠오를 정도었어요. 그나마 조이에게는 여동생 안드레아, 그레이에게는 여든 살 넘은 할아버지 마빈이라는 가족이 굳건한 유대를 보여준다는건 좋았지만 , 이야기와 크게 관련이 있는 부분은 아니었습니다.

편의에 따라 작위적으로 쓰여진 부분도 눈에 뜨입니다. 20년 전 사건 관련 내용에 특히 그러합니다. 우선 12살 중학생의 고발이라 하더라도 이를 무시해버린 처사는 쉬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고발 직후 소녀들 집에 침입해서 협박하다가 도주까지 했는데 말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범인으로 몰려 자살했던 용의자 매니 앤더슨의 부모가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또 1996년이라는 시기는 그리 옛날도 아닙니다. 어느정도 법의학이 정립되어 있었을터라 분명 단서도 남아있었을텐데, 경찰이 매니 앤더슨에게만 촛점을 맞춘건 말이 안됩니다. 

글로버의 철벽같았던 알리바이가 알고보니 매니 앤더슨을 옭아매기 위해 검시 보고서가 조작된 탓에 불과했다는건 솔직히 어이가 없더군요. 글로버는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이야기니까요. 이를 테이텀이 짧은 시간 동안 밝혀냈다는 것도 당황스러웠어요. 

또 현재의 시카고 사건에 갑작스럽게 글로버가 끼어드는건 비현실적이었고, 마찬가지로 글로버가 등장하는 속편을 강하게 암시하는 결말은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설득력도 없어요. 조이가 동생 안드레아의 심층 트라우마를 일깨울까봐 글로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안드레아가 글로버를 알아보지 못하고 납치될 수도 있다는건데, 조이가 스토킹을 당했다면 안드레아도 글로버의 먹잇감이 될 수 있는건 당연합니다. 진작에 최대한 상세히 정보를 제공해 주었어야 했어요. 

덜 떨어진 것 처럼 보였던 글로버가 20여년 동안 FBI의 자문역도 맡고 있는 전문가를 거리낌없이 스토킹하며, 나중에는 덮치는데 성공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과거의 알리바이도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인 충동적 범죄자에 불과하니까요. 게다가 조이가 습격당한건 대낮이었습니다. 미국의 치안이 이 정도로 엉망일까요? 

납치되었던 피해자 전화를 통해 위치를 파악하려는 시도 외에는 범인을 잡아낼 방법이 없어 보인다는 것도 별로 와 닿지 않더군요. 범인이 범행을 저질렀던 거리까지 알아냈는데도 불구하고 범행 장소도 결국 특정하지 못하는 등, 시카고 경찰의 무능만 작품 전체에 걸쳐 도드라지고, 범인을 잡은건 오로지 조이의 프로파일링 덕분인데 이는 현실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장점이 없지는 않지만 아주 매력적이라고 보기는 힘드네요. 킬링타임용으로 적합하며,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09/10/29

아웃 1,2 - 기리노 나쓰오 : 별점 4점

아웃 1 - 8점
기리노 나쓰오 지음/황금가지

도시락공장에서 야간근무를 하는 4명의 여인 마사코와 요시에, 야요이, 쿠니코는 서로 팀을 짜서 일하는 관계. 그러던 어느날 우발적으로 남편을 살해한 야요이가 마사코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 스포일러가 약간 있습니다. 정통 추리물도 아니고 특별한 반전도 없는 만큼 대단하진 않지만 염두해 주세요.

정말 끔찍한 작품입니다! 그야말로 더 이상 갈 곳 없는 막다른 막장의 심리를 이보다 잘 표현한 소설이 있을까요? 읽는 내내 소름이 돋을 정도였어요. 다른 작품들에 비해 뒷맛이 개운치 못한 탓에 더더욱 끔찍한게 아니었나 싶네요. 기리노 나쓰오 작품은 세편 ("얼굴에 흩날리는 비""내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부드러운 볼)""암보스 문도스") 만 접해보았지만 사람 마음을 후벼판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은 이 작품이 처음이었습니다.

끔찍하고 인상적이었던 이유를 들자면 첫번째로는 등장 인물들의 도를 넘는 이기주의와 자기 합리화를 들고 싶네요.
자신이 자초한 회사내 왕따(?)로 인해 회사도 잘리고 가정에서도 남편과 아이 모두에게 소외된 주인공 마사코는 회사에서나 가정에서나 절대로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꾸려 노력하지 않습니다. 바람나고 도박에 빠진 남편을 우발적으로 살해한 야요이 역시 남편과 어떻게 잘해보려는 의지는 작품내에서 전혀 보이지 않고요. 시어머니와 딸에 치여 사는 요시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터무니없는 과소비로 빚더미에 눌려사는 쿠니코는 뭐 말할 필요도 없죠.
즉 본인 스스로들이 세상의 모든 고민과 불행을 지고 사는 것 처럼 묘사는 되지만 원인 자체부터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은 대부분 망각되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벗어나거나 개선하려는 의지는 눈꼽만큼도, 1mg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그야말로 극단적 이기주의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야요이와 마사코는 이혼과 같은 현실적 방안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요시에는 무너진 가정을 홀로 지탱할 뿐 딸에 대해서는 전혀라고 할 정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거의 "짐"으로 여겨질 만큼요. 엄청난 민폐 캐릭터지만 상황을 현실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며 본능에 의해서 움직이는 쿠니코가 차라리 인간적으로 보일 정도였어요.

두번째 이유는 지옥행 급행열차에 대한 묘사를 들고 싶습니다. 어려운 상황만 당장 벗어나려 발버둥치려는 현실이 결국 지옥으로 향하는 전개는 다른 작품에서도 많이 보아왔지만 이 작품의 처절함은 수준이 다르더군요. 처음에는 어쨌건 "선의"였을 수 있는 친구 남편 시체를 토막내어 유기하는 행위가 우정의 파탄과 더불어 협박, 또다른 시체 유기와 같은 단계를 거쳐 결국 살인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과정이 디테일하면서도 너무나 적나라하거든요. 때문에 중반에 등장하는 "시체처리 부업" 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는 깜찍하고 재미있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는 절대 절망 엔딩입니다. 알거지가 된 야요이는 그래도 나름 미모가 있으니 조금 나은 편이고 마지막에 사다케에 의해 만신창이가 될 뿐 아니라 결국 모든것을 잃고 그야말로 "홀로" 남겨지는 마사코의 결말도 비참한 수준이나 그래도 그녀에게는 현실에서의 탈출과 거금이라는 보상이 있는 반면 친구들에 의해 토막나 버려지는 쿠니코와 가족에게 버림받고 마지막에는 극단적인 결론을 내리는, 결국 뭘 위해서 시체 토막까지 했는지 알 수 없게 된 요시에의 엔딩은 정말이지 죽을때까지 맞고 한대 더 맞는 기분이 들 정도로 씁쓸했습니다.

어쨌건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너무나 인상적이고 재미있었으며 읽는 내내 손에서 떼기 힘들정도의 박력과 흡입력, 거기에 무엇보다도 대단한 심리묘사가 어우러진 대단한 작품입니다. 추리소설로 부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어차피 고전적인 정통 추리물을 기대한 것은 아닌 만큼 만족스러운 독서였어요. 때문에 별점은 4점. 하지만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에 다시 읽게될 것 같지는 않네요.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여성을 중심으로 한 디테일한 심리묘사와 일상속의 지옥도, 남자 캐릭터들은 준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사다케를 빼면 하나같이 머저리같은 인물로 그려진 등의 점이 미네트 월터스 (그 중에서도 "냉동창고") 작품과 비슷하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미네트 월터스 작품은 나름 해피엔딩들이라는 차이점은 있습니다만....

2022/01/08

악마의 문장 - 에도가와 란포 / 주자덕 : 별점 1점

악마의 문장 - 2점
에도가와 란포 지음, 주자덕 옮김/아프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H제당 주식회사 대표 가와테 쇼타로 씨는 일족 모두를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고, 명탐정 법의학자 무나가타 류이치로 박사에게 조사를 의뢰했다. 그러나 두 딸이 차례로 살해당한 뒤 가와테 쇼타로 씨 마저도 은신처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곳곳에 '3중 소용돌이 지문'의 흔적을 남긴 범인에 의해서였다. 특히 첫째 딸 다에코는 저택 주변에는 형사가, 잠긴 방 창문과 출입문은 박사와 조수가 직접 보초를 섰는데도 불구하고, 깜쪽같이 방에서 사라진 후 유령의 집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유령의 집에서 박사에게 쫓기던 범인은 박사의 조수 코이케도 살해했고, 출동한 경찰에게 완전 포위되었지만 끝내 거울의 방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스미다강에서 보트 놀이하던 남녀가 우연히 잘린 손가락을 발견한걸 계기로, 박사는 기타조노 류코가 사건에 관계가 있다는걸 추리해 냈다. 도주한 그녀의 은신처를 밝혀낸 박사는 추격 끝에 그녀를 사로잡지만 결국 그녀는 물론, 진범으로 생각되는 안대를 한 남자 역시 자살해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수사과장, 나타무라 경감, 형사부장과 무나카타 박사, 아케치 코고로가 함께 한 사건 마무리 축하 연회에서, 아케치는 자신이 추리한 진짜 사건의 진상을 펼쳐 보이는데...

대담하면서도 스케일 크고, 기묘하면서도 변태스럽기까지한 범행이 연이어 등장하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에도가와 란포 스타일의 장편입니다. '3중 소용돌이 지문'은 이 작품을 읽기 전에도 워낙에 유명해서 익히 알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읽게 되었네요.

불가능 범죄가 많이 등장하는 덕분에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부분이 제법 됩니다. 다에코 소실 사건을 빈 침대와 연결하여 풀어내는 과정이라던가, 거울의 방 소실 트릭을 통해, 무나카타 박사가 진범이라는걸 드러내는 것처럼 말이죠. 

무나카타 박사가 기타조노 류코를 포박하고 경찰에 연락한 뒤 돌아와보니 그녀가 끈을 끊고 자결했던 상황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던 아케치 코고로의 추리도 설득력이 높습니다. 끈을 먼저 끊었다면 도망치는게 타당했고, 누군가 살해했다면 끈을 끊을 이유는 없었다는건 당연하니까요. 박사가 손가락을 싸고 있는 신문지와 손수건으로 류코의 거처를 알아냈다던가, 류코가 도주 전 대량의 식재료를 배달받았다는걸 근거로 자택 다락에 은신하고 있다는걸 추리해내는 등의 소소한 추리들도 괜찮습니다. 

3중 소용돌이 지문을 일종의 아이콘처럼 활용하고 있는 전개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지문이 찍힐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지문이 발견되도록 만들어서 범인이 전능하다는걸 드러내는 연출도 좋았고, 무고했던 류코가 3중 소용돌이 지문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그녀가 극심한 공포를 느끼게 만들었다는 범인의 계획도 그럴듯했거든요. 명탐정 아케치 코고로의 활약도 팬으로서는 반가운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필요한 연극적인 상황을 지나치게 많이 연출하고 있는건 문제입니다. 이야기에 별 상관도 없고, 설득력을 떨어트리는 요소들일 뿐인 탓입니다. 가와테의 두 딸 시체를 '인체 전시회'와 '유령의 집'에 각각 전시하듯 유기한 상황부터가 그러합니다. 범인이 얻을 수 있었던 이득은 하나도 없는 불필요하며 불합리한 행동에 불과하니까요. 오히려 유령의 집에 시체를 유기하려다가 경찰에 포위되었고, 그래서 정체가 드러날 빌미를 아케치 코고로에게 제공했을 뿐이니 이는 완전한 패착이었습니다. 완전 포위당한 거울의 방에 갖혀있던 범인이 사라지고, 박사 튀어나왔다는건 박사가 범인이라는거니까요. 이 소실 트릭이 보다 현실적인 상황에서 등장했더라면 그나마 괜찮았을텐데, 범인의 억지 연출로 자기 무덤을 판 것에 지나지 않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애초에 복수 대상이었던 가와테 쇼타로가 사건 수사를 범인인 박사에게 의뢰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냥 완전범죄로 죽이면 되는데, 왜 자기 정체가 드러날 위험을 무릅쓰고 충직한 조수마저 죽게 만들면서까지 억지 상황을 연출하면서 복수를 질질 끌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전무합니다. 이런 연출로 박사가 얻은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표면적으로 아케치 코고로에 버금간다는 명탐정이었던 박사의 명성에 흠집만 났을 뿐이에요.

또 이 상황에서 묘사되는 유령의 집 가짜 시체와 여러 장치들은 당시 기술력으로는 재현이 불가했을 장치들이라 완전 억지에 불과했습니다. 거울의 방 묘사는 작가의 작품에서 반복되던 그대로라 지겨웠고요. 이야기와는 아예 상관없는 쓸데없는 내용이 이렇게까지 길게 묘사될 이유도 없었어요. 쇼타로의 은신처에서 그를 죽이기 전 복수의 이유인 쇼타로의 아버지 가와테 쇼베가 저질렀던 악행을 연극으로 만들어 보여주는 묘사도 억지스럽고 불필요한건 마찬가지고요. 이런 묘사들은 아마 당시 잡지 연재를 하면서, 매 편마다 독자들의 흥미와 재미를 불러 일으키기위해 자극적인 묘사로 채우기 위한 의도였다고 생각은 됩니다. 연재 시 분량을 늘여 원고료를 더 받기 위한 얄팍한 술책도 한 몫했을테고요. 문제는 이걸 하나의 책으로 묶어 보니, 과하고 불필요한 묘사만 가득차 버리고 말았다는거지요.

그래서 제 별점은 1점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낡기만 했을 뿐, 특별한 가치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이 정도면 그냥 잊혀져도 무방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2026/09/11

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바치는 일곱 가지 수수께끼 - 아오사키 유고 외 : 별점 2.5점

아리스가와 아리스 데뷰 35주년을 기념하여, 젊은 작가 일곱 명이 '아리스가와 세계관'으로 발표한 단편을 모아 놓은 단편집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세계관이지만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가 가장 많습니다. 또 다른 대표 시리즈인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명탐정 에가미 지로 등장 작품은 한 편 밖에 없고요. 행각승 지장 스님 시리즈도 한 편 있을 정도인데 말이지요.

하여튼, 꽤 신선한 기획인데 작품들 수준도 괜찮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워낙 유명한 젊은 작가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 덕분입니다. 대부분 아리스가와 월드를 충실히 구현한, 전통적인 신본격 추리물이라는 점도 마음에 든 점이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가볍게 즐기기에 적당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끈, 밧줄, 로프" 아오사키 유고

야스미 노도카가 모아이 도자기 상으로 머리를 얻어맞아 살해당한채 발견되었다. 동기는 희귀 게임 카드이며 범인은 새시를 통해 시체를 밖으로 운반한 뒤, 바다로 시체를 내던진 것으로 보였다. 여러 현장 상황을 통해 범인은 자동 잠금장치가 설치된 아파트 주민 29명 중 한 명이며, 그 중에서도 당일 오전, 로프같은걸 버린 세 명 중 한명일 가능성이 높았다. 피해자가 죽기 전 로프 같은 것으로 묶여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각자 버린 건 다용도 마끈, 안전용 수평 구명줄, 반사 소재 텐트 로프였다. 

히무라 히데오가 '필드 워크'를 통해 범인을 밝혀내는 전형적인 신본격 단편입니다. '헤이세이의 엘러리 퀸' 아오사키 유고답게 추리적인 부분은 완벽에 가깝습니다. 

히무라는 피해자가 둔기에 맞았을 때 안경을 끼고 있다는 것을 통해, 범인이 피해자가 깨어있을 때 침입했고 흉기로 위협했다고 추리합니다. 그리고 뭔가에 묶인 피해자를 나르는 범인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통해, 범인이 피해자 사체를 유기하기 직전에 묶은 끈을 회수했다고 추리하고요. 사체 유기가 실패했다는걸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기 때문에, 끈을 푸는 데에는 위협에 사용했던 칼을 사용했습니다. 다음날 범인은 토막난 끈을 버려야 했으며, 이는 쓰레기 버릴 때 종이 팩을 사용했다고 지적받았던 시나다의 행동과 이어집니다. 즉, 시나다가 범인입니다. 시나다는 매일 종이 팩 쥬스를 마시는 습관이 있어서 그게 재활용이라는걸 모르지 않았다는 것도 증거이고요.

사건과 범인이 로프를 그날 버린 이유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핵심 단서인 '로프'를 가지고 기둥서방 시나다의 유력한 동기였던 '동아줄'로 이어지는 일종의 언어유희적인 전개도 괜찮습니다.

다만 설정 자체가 조금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현대 법의학, 법과학으로 범인을 충분히 밝혀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도 수수께끼 풀이용 단편으로는 충분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정통파 추리 소설에 대한 작가의 고민도 흥미롭습니다. 아래의 말을 빌어서, 추리 소설가의 필사적인 창작은 결국 AI도 만들 수 있는, 독창적인 요소가 없는 결과물일거라는게 요지인데 저 역시 동의하는 바입니다. 

  • '정보를 수집하고 검토해 논리적으로 수수께끼를 풀어낸다.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가 하는 일은 따지고 보면 그 해법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 "수수께끼 풀이 자체는 누가 설명해도 마찬가지인, 개성없는 장면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애초에 누구나 풀 수 있는 수수께끼가 아니면 본격 미스터리로 성립할 수 없다는 딜레마도 있어. 결국 탐정 캐릭터들도 '모범 답안'을 독자에게 전하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는 걸지도 몰라."

물론 이 논리는 미스터리는 과학이 아니라 유사 과학이라는 히무라의 입을 빌어 작가 본인 스스로 타개하고 있기는 합니다. 탐정들은 미스터리의 신의 말을 전하는 선교사인데,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의견을 내 놓는 과학자와 다른 집단이라면서요. 그래도 AI도 만들 수 있다는 결과물이라는게 변하지는 않지만요...

"클로즈드 클로즈" 이치오 미치

아리스와 히무라는 여고에서 일어났던 교복 도난 사건 해결을 부탁받았다. 교복을 도난당한 다즈하라 시게오는 같은 3학년 부원인 고미야 리오와 반목이 있었다. 그러나 고미야는 이미 수개월 전 전학을 간 상황이었다. 

다즈하라가 고미야에게 교복을 빌려줬는데, 다른 친구에게 빌린 거울이 들어 있어서 도난 소동으로 발전했다는게 진상입니다. 그런데 추리적으로 딱히 눈여겨 볼 부분은 없습니다. 히무라가 이렇게 추리해 낸 과정이 제대로 선보이지 않는 탓입니다.

또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팬에게서 만족감을 주지 못합니다. 아리스와 히무라가 여고에서 가짜 신분(?)으로 활동하는 일상계 추리물이라는 설정은 독특하지만, 둘의 대화와 전체적인 분위기가 모두 여성 작가가 쓴 듯한 느낌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더 건조하게 묘사했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흉내내기에 불과해 보였어요. 수록작 중 최악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히무라 히데오에게 바치는 괴담" 오리가미 교야

도쿄에서 열린 이벤트에 참석했던 아리스와 히무라는 그날 밤 찾은 바에서 서점 직원 쓰지와 합석하게 되었다. 쓰지는 둘에게 자신이 겪었던 괴담을 들려주었고, 히무라는 자신만의 추리로 괴담의 진상을 풀어냈다.

쓰지가 네 편의 괴담을, 그리고 마지막에 합류한 바 손님이 한 편의 괴담을 들려주어 총 다섯 편의 괴담이 선보입니다. 쓰지가 겪거나 들었던 괴담은 모두 추리를 통해 진상이 밝혀지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 후배 하숙집에서 심야에 전자기기가 오작동하는 사건이 자꾸 일어났다. 심지어 어느 날은 한밤중에 탄내까지 났다.
    진상: 개조한 불법 무선기로 통신하는 장거리 트럭이 원인이었다. 심야에 발생한건 장거리 트럭은 고속도로 통행 요금이 할인되는 심야에 운행하기 때문이며, 탄내는 오작동한 전열기구 때문이었다.
  • 쓰지는 대학 시절에 동창과 숲에서 고개를 돌리며 짐승 울음 소리를 내었던 인형 탈을 보았다.
    진상: 몸은 땅 속에 묻힌 사람에게 인형 탈을 씌워 숲속에 방치해 둔 것이었다. 짐승 울음 소리는 재갈이 물려있던 탓이며, 비성수기 휴양지 산속이라는 현장이 근거이다.
  • 등산을 좋아하는 쓰지의 친구는 안개로 뒤덮인 산길에서 똑같이 생긴 오두막을 등산로에서 연이어 발견했다.
    진상: 그냥 오두막이 두 채 있었다.
  • 쓰지는 방학 때 고향 친구 가가와, 가가와의 선배 유모토와 함께 폐업한 유원지에서 담력 시험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유모토가 미러 하우스 안으로 들어간 뒤 사라져버렸고, 그를 찾으러 들어간 쓰지는 미러 하우스 속 거울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형체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도주했다. 그 뒤 가가와와 유모토와는 연락이 끊겼다.
    진상: 고객을 놀라게 만드는데 사용했던 매직 미러를 이용하여 유모토가 쓰지를 놀라게 만든 장난이었다. 

첫 번째 괴담은 재미있고, 네 번째 괴담도 추리만큼은 그런대로 합리적이지만 다른건 별로입니다. 그리고 모두 진상을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도 크고요. 

이보다는 바 손님인 이토가 이야기한 진짜 괴담이 더 괜찮았습니다. 이토는 교통사고 현장에 놓여있던 시들어진 조화를 버리고 새로 꽃을 사서 갖다 둔 뒤, 원망하는 표정의 여자 귀신에게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분명 선의로 행한 일인데 왜 귀신은 원망을 가졌을까요? 아리스의 추리는 '꽃이 문제였다'는 겁니다. 즉, 원래 놓여있던 시든 꽃이 귀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놓아둔 꽃이었다는 것이지요. 이 역시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는 있지만 의표를 찌르는 맛도 좋고, 아리스가 추리를 펼친다는 의외성도 좋았습니다.

그 외에 저는 잘 모르는 '심령 탐정'이라는 아리스가와 월드 속 다른 주인공이 언급되는 등, 헌정물로는 여러모로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블랙 미러" 시라이 도모유키

'나'는 대학 미스터리 동호회 때 친구였던 가가미 에이지로부터 오랫만에 연락을 받고 만났다. 그 뒤, 경찰을 만나 에이지와 그의 형 고이치가 연루된 살인사건에 대해 들었다. 상황은 에이지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나'와의 만남을 진행한 것으로 보였지만, 알리바이 트릭은 완벽해서 깨기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추리소설가를 꿈꾸던 '나'와, 경찰을 돕던 건방진 교수 히무라가 힘을 합쳐 알리바이를 깨는데 성공한다.

복잡한 시간표로 구성된, 전형적인 시간표 알리바이 트릭물입니다. 쌍둥이인 에이지와 고이치가 어느 시점에 교체하여 서로의 알리바이를 만든게 진상입니다. 핵심은 고이치가 엄지손가락을 절단한 뒤, 그걸 가지고 에이지가 고이치의 비밀금고를 열었던 것이고요. 이는 고이치가 범행을 저지른 뒤, 생수병 뚜껑을 따지 못해 머그컵으로 물을 마셨던 상황 등으로 추리됩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기에는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70년대라면 모를까, 지금은 CCTV가 여러 곳에 가득한데 자신의 노출을 이렇게까지 숨기면서 짜여진 시간표 동선대로 이동한다는건 말오 안되니까요. 히무라가 사건에 뛰어든 이유가 역에서 뛰어나가던 에이지와 부딪혔기 때문이었다는 우연도 작위적이고요.

본인을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메타적인 설정은 나쁘지 않지만, 현재 가장 뜨거운 작가 중 하나인 시라이 도모유키의 작품치고는 영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안티의 수수께끼" 유키 하루오

추리 소설가인 '나'는 신작 구상을 위해 담당 편집자 미토베 씨와 함께 취재차 온천 휴양지를 찾았다. 그런데 그곳 식당에서 만난 점원 후쿠나가 아이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극도로 싫어하는 사촌 이야기를 해 주었다. 둘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후쿠나가의 사촌 아버지인 외삼촌 거처를 찾았고, 그곳에서 미토베 씨는 사촌의 행동을 추리해 내는데...

작품을 다 읽었지만 극도로 싫어한다는 사촌의 기묘한 언행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는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유명 작품들이 다수 등장하지만, 무대와 설정은 아리스가와 월드가 아니라는게 특징입니다. 

추리는 사촌이 후쿠나가에게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을 빌려주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했다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서재에 있던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은 커버와 띠지만이며, 내용물은 다른 책으로 바뀌어져 있었기 때문이고요. 사촌은 별채에 침입하여 아버지의 만년필을 훔쳤습니다. 그러나 눈이 오는 바람에 별채에서 탈출하지 못했고, 별채는 난방이 안되어서 너무 추웠던 탓에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을 난로에 태웠던 겁니다. 후쿠나가의 외삼촌은 모든 장서를 서재와 별채, 두 곳에 비치하였기 때문에 다음날 외삼촌이 돌아오기 전 사촌은 서재의 책을 별채로 옮기고, 때우지 않았던 띠지와 표지를 서재에 있던 다른 책에 씌워 위장했고요. 책은 새로 주문했지만 도착까지는 시간이 걸려서 당장 후쿠나가에게 책을 빌려주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안티인 척을 했던 거지요.

위의 추리를 위한 모든 정보는 공정하게 제공되는 좋은 추리물입니다.  유명 작품은 물론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의 TV 방영까지를 작품 설정에 녹였다는 점에서 '헌정'이라는 취지에도 딱 들어 맞고요. '아리스가와 아리스 안티'를 표방한 사촌의 주장은 헌정이라는 취지와 정 반대이기는 하지만, 이런게 또 기획의 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제가 읽었던 유키 하루오의 작품은 비현실적인 설정이 문제였는데, 소규모 일상계로 설정을 좁혀 놓으니 훨씬 낫네요.  

"행각승 지장 스님의 낭패" 아쓰카와 다쓰미

20년 전, 행각승 지장 스님의 이야기를 '에이프릴'에서 들은 멤버였던 '나'와 도코가와는 오랫 만에 한 잔 하기 위해 '풀스 메이트'라는 가게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20년 전과 똑같이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는 행각승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20년 전과는 다르게, 손님들의 공격과 의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풋내기였다.

"행각승 지장 스님의 방랑"은 그렇게 인기가 많은 작품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이 작품을 헌정물로 새롭게 써 낸게 좀 신기하네요. 일종의 '도라에몽 세계관'인 히무리 히데오 시리즈와는 다르게, 지장 스님이 활약한 20년 후인 현재를 무대로 협박범 구로사와가 살해당했는데, 사체는 피해자가 수집했던 나비 표본 수십 개로 둘러 쌓여 있었던 사건에 대한 추리가 펼쳐집니다.

나비의 이름이 범인을 특정하는데, 나비 표본 하나만 꺼내어져 있으면 범인이라는게 바로 드러나서 어쩔 수 없이 표본을 전부 꺼냈다는게 진상입니다. 범인은 나비 표본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모르는 아사기 유즈루였고요.

이 뒤에 등장인물의 이름, 수를 가지고 딴지를 거는 손님에게 진짜 지장 스님이 나타나 보강하는 추리를 펼치며 이야기가 마무리 됩니다. 

여러모로 추리 퀴즈에 가까우며, 작위적이고 설득력이 낮다는 점에서 원전과 비슷한 점이 많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시체의 실루엣은 말한다" 이마무라 마사히로

에이토 대학 추리 소설 연구회 멤버 5명은 고향 나고야로 취업 활동을 갔다 온 오다가 가져온 수수께끼 풀이에 나섰다. 오다가 만난 동향인 고바야시가 친구가 남긴 암호를 해독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나왔습니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 이 시리즈 단편은 읽은 적이 없는데, 젊은 작가가 일종의 일상계로 풀어낸게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형식만 신선한게 아니라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고바야시의 친구 바토 씨가 남긴 낙서와 다이잉 메시지를 풀어내는 과정이 추리 소설 연구회 5명의 대화를 통해 펼쳐지는데, 정말로 모든 있을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하고 추리와 의견들을 내 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토대로 드러나는 진상은 꽤 합리적으로 느껴져요. 대화로 일종의 추리 대결을 펼쳐나간다는 점에서는 작가의 전작 "시인장의 살인" 속 학생 식당 메뉴 맞추기 게임도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고바야시와 바토가 헤어졌고, 이 사건은 바토가 고바야시가 계속 어울려 줄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벌인 일종의 게임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은 있습니다. 결국 진상은 절대로 드러나지 않는 탓이에요. 다이잉 메시지도 AOK로 읽히는데 이건 All-OK라는 추리 역시 근거없는 공허한 주장일 뿐이지요.

논리적으로 즐길거리는 많은데 다소 맥이 빠진다는건 어쩔 수 없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에가미 선배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 등 팬이라면 소소히 즐길거리가 있지만, 그리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19/08/18

라스트 차일드 - 존 하트 / 박산호 : 별점 3점

라스트 차일드 - 6점
존 하트 지음, 박산호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년 전 이란성 쌍둥이 여동생인 앨리사가 실종된 이후 조니의 가족은 풍비박산났다. 앨리사 실종을 남편 탓이라 여긴 엄마 캐서린 때문에 아빠는 집을 나가버렸고, 마을의 실력자인 켄은 그 틈을 노려 엄마를 마약 중독자로 만든 뒤 엄마와 조니에게 폭행을 행사했다. 조니는 이런 고난을 피하기 위해 책에서 읽은 인디언 주술에 의지하며 홀로 군 전체를 돌며 앨리사 찾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날, 조니 앞에서 한 남자가 추락사하는데 그는 죽기 전 "내가 그녀를 찾았어."라고 말했다. '그녀'가 앨리사라고 생각한 조니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자비스의 집으로 숨어드는데...

최근 읽었던 추리 소설들은 대부분 완성도가 그닥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부러 최근 평이 가장 좋은 듯한 작품을 골라보았습니다. 사실 미국산 장편 범죄 스릴러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요.

그런데 다행히 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꽤나 긴 분량이지만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끌만한 요소가 많은 덕분입니다. 조니와 엄마 캐서린에게 닥친 불행과 사건 수사 현황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만 지나면 곧바로 온갖 사건이 이어지기도 하고요. 데이비드 윌슨이 누군가에게 습격당해 죽는데 죽기 전 조니에게 실종된 아이를 보았다고 말한 사건에서 시작해서 거대한 흑인 레위 프리맨틀의 등장, 또다른 소녀의 실종, 조니가 몰래 유력한 용의자 자비스의 집에 잠입하다가 죽을 뻔 하는 등 강력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거든요.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죽는 사람만 해도 무고한 목격자였던 데이비드 윌슨과 연쇄 어린이 납치 살해범인 자비스와 미첨, 조니 가족을 괴롭히던 켄 홀웨이, 순수한 신의 사자 레위 프리맨틀까지 무려 다섯 명에 이를 정도이며 전개도 그만큼 긴박하고 박진감 넘칩니다. 등장인물들의 선악 구분도 명확하며, 모든 사건이 해결되는 결말도 깔끔하며 권선징악을 담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미국 남부 노스캐롤라이나를 무대로 현대적이고 성인 대상의 "허클베리 핀"이나 "톰 소여의 모험"을 그려낸 듯한 묘사들도 인상적입니다. 인디언 신앙을 추종하여 독수리 깃털 등의 부적을 손수 만드는 조니는 곧바로 톰 소여를 떠오르게 합니다. 동생을 찾기 위해 미지의 장소인 허쉬 아버로 떠나는 모험에 유일한 친구 잭과 함께 한다는 설정도 마찬가지고요. 조니가 사건을 겪으며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 대한 디테일도 좋습니다. 엄청난 역경에 처해 있지만 그걸 이겨내는 소년의 심리 묘사는 정말로 발군이에요.

그러나 범죄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사건들이 우연에 의해 작위적으로 전개되는 경향이 강한 탓입니다. 데이비드 윌슨이 조니 앞에서 유력한 증언을 남기고 죽은 것 부터가 그러합니다. 실종된 소녀의 시체를 발견했다가 살해당하는 피해자가 실종된 소녀의 오빠를 죽기 직전에 만난다? 지나친 우연입니다. 조니가 어린이 납치범 자비스에게 죽을 뻔 했을 때 납치되었던 소녀 티파니가 마침 탈출해서 자비스를 쏴 죽인다는 상황도 완벽한 우연과 행운이며, 조니가 잭과 함께 허쉬 아버로 향했다가 레위 프리맨틀을 만난 것도 우연입니다. 이렇게 만나지 못했더라면 레위가 켄을 죽이고, 잭이 레위의 말을 듣고 앨리사 실종 사건의 전말을 조니에게 털어놓는 결말도 이루어지지 않았을테지요.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아쉬운건, 잭이 레위의 "No crows"라는 말을 듣고 앨리사 시체가 숨겨진 '노스 크로제 광산'을 떠올리는게 와 닿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노스 크로제'를 약자로 '노. 크로즈'라고 표기했기 때문이라는데 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원어민이라면 이해가 되었을까요? 저에게는 차라리 "No crows"에서 '크로스'라는 이름을 떠올리는게 더 와 닿았을 것 같네요.

또 경찰이 한심할 정도로 하는게 없습니다. 어린이 납치범 자비스가 죽은 것, 탈옥수 레위 프리맨틀을 발견한 것, 앨리사 실종 사건의 진상을 알아낸 것 모두 조니의 활약 덕분입니다. 경찰이 유일하게 추리력을 발휘하는 건 조니가 어린이 납치범 자비스의 공범이 '경찰' 이라고 착각한걸 토대로 '경비원'인 미첨이 범인이라는걸 알아채는 정도입니다.
오히려 경찰인 크로스가 음주 운전을 하다가 앨리사를 차로 치어 죽인 아들을 위해 시체를 유기한 앨리사 실종 사건의 협력자이자 데이비드 윌슨 살인범이기까지 합니다! 그가 시체만 유기하지 않았어도 조니의 아버지도 죽지는 않았을테고 가족도 풍지박산은 나지 않았을테니 조니 시점에서는 모든 사건의 원흉입니다. 심지어 조니의 유일한 친구인 아들 잭을 협박해서 조니에게 진상을 말 못하게 하고, 궁지에 몰린 잭이 아버지 살인 미수까지 범하게 만드니 작품 최고의 악질입니다. 이래서야 경찰은 없는게 더 나아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레위 프리맨틀이 켄을 죽인게 일종의 기적처럼 묘사되며, 이 모든게 조니의 기도에 대한 신의 응답이라는 기독교적 사고 방식이 근저에 깔려있는게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구태여 넣을 필요없는 완벽한 사족이었습니다.

그래도 별점은 3점입니다. 작풍은 다르지만 토머스 H 쿡의 작품들이 떠오를 만큼 재미와 문장력을 모두 갖춘 좋은 작품이기는 합니다. 추리적으로 별 볼일 없기 때문에 약간 감점하지만, 이 정도라면 작가의 다른 작품도 기대가 되네요.

2019/07/26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 시가 아키라 / 김성미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 6점
시가 아키라 지음, 김성미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미타는 택시 안에 스마트폰을 두고 내렸는데, 그것을 주운 남자가 폰 속 도미타의 여자친구 아사미에게 반하고 말았다. 남자는 전문 해커이자 연쇄 살인범으로, 자신의 능력을 총동원하여 아사미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한 편, 인적이 뜸한 야산에서 신원 불명의 여성 변사체가 잇달아 발견되어 경찰은 수사에 나서는데...

제15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 최종 수상작입니다. 최근 상당히 화제가 된 듯 하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스마트폰과 SNS는 누구나 쓰는 반면, 해킹에 취약점이 많아서 이를 소재로 한 작품은 많습니다. 휴대폰 위치 추적을 활용한 작품이 개중 많은 편이고요. 해킹에 촛점을 맞춘다면 찬호께이"망내인"이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망내인"과는 다르게 이 작품은 살인이라는 실제 범죄까지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때문에 대단한 해킹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반대로 현실적입니다. 특히 살인 직전까지 페이스 북 등을 잘 활용하여 피해자를 옭아매는 과정은 설득력이 높아요. 비슷하게 페이스 북을 주로 활용했던 "리얼 라이즈"는 영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었는데 말이지요. 아마 이런 부분이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을 수상하게 된 요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방법을 간략하게 설명드리자면, 우선 범인은 습득한 도미타의 핸드폰의 비번을 풉니다. 도미타의 생일이 비밀번호였지요. 그런데 이를 알아낸 방식이 기발합니다. 마침 전화를 걸어 온 애인의 이름이 화면에 표시되었기 때문에, 이 이름의 페이스북 가입자를 조사한 뒤 바탕 화면 사진과 일치하는 가입자를 찾아냅니다. 이를 통해 도미타의 페이스북 계정을 알아내어 생일을 확인했던 겁니다.
다음으로는 도미타의 핸드폰에 해킹 프로그램을 심어 놓은 후 폰을 돌려줍니다. 페이스 북을 통해 알아낸 정보로 도미타, 아사미와 관련된 가짜 페이스북 친구들을 다수 만들어 연결하고요. 그리고 페이스북을 통해 아사미에 관련된 정보를 하나둘씩 입수하면서 도미타 폰에 고의로 랜섬웨어 감염을 일으킨 뒤, 친구 소개를 가장하여 보안 전문가로 직접 나타나 도미타와 아사미의 신임을 얻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사미에게도 개인 정보 유출과 해킹 등의 사건을 일으키고 해결해 준 뒤, 틈을 타 납치하는데 성공합니다.
페이스 북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건 약점이며, 도미타의 직장 동료로 가장한 고야나기의 질척거림 등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꽤 그럴싸한 현실 속 해킹 수법이라 생각됩니다. 도미타 핸드폰 속 사진의 GPS 정보를 분석하여 아사미의 집이 어디 근처인지를 알아낸다던가 하는 디테일들도 괜찮았으니까요.

여기에 더해 범인이 이미 살해하여 유기한 피해자들이 아직도 살아있다고 믿게 만드는 상황도 아주 인상적이에요. 피해자들의 스마트폰만 살려 놓은 뒤 가끔 문자 메시지 연락을 하는 정도인데 이게 아주 잘 먹히거든요. 가족, 친지와 멀어지고 모든 걸 온라인으로만 소통하는 현대 사회이기에 가능했던 속임수이지만, 실제로 아주 그럴듯해 보여서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아사미를 납치하여 살해하려는 실제 범행 쪽 이야기는 아쉽게도 설득력이 낮습니다. 우선 아사미에게 누드 사진을 보내는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범인이 보안 전문가 우라노로 가장하여 신뢰를 쌓았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 수준의 범죄면 경찰에 바로 신고할 수도 있잖아요? 다케이와의 불륜을 암시하는 사진을 페이스북을 해킹하여 게시한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케이의 행동을 컨트롤하는건 불가능한데 다케이가 경찰에 신고했다면 어떻게 하려고 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이 범행을 통해 다케이를 아사미로부터 떼어 놓는다고 해도 범인이 얻을 수 있는 것도 없고요.
이보다는 작품 자체는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리얼 라이즈" 수준 정도의 페이스 북 조작이 더 현실적입니다. 조작한 나의 정보를 불특정 다수에게 퍼트려 내 개인의 평판을 망가트리는 정도요. 평판을 망치는 것 외에 페이스 북을 통해 상황을 제어하거나 조작하는건 아무래도 어려우니까요. 

그리고 납치는 방심한채 술을 마시는 아사미를 만나 그녀의 술에 약을 타는 고전적인 방식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이럴 생각이었다면 도미타, 다케이를 떼어버리고 차분히 보안 전문가 우라노를 신뢰하고 의지하게 만든 뒤 당당히 집에서 납치하는게 정답이었어요. 이미 연쇄 살인사체 유기가 발각되어 수사가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서 범행을 서두를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바텐더가 분명 아사미와 함께 나가는 범인을 목격하기도 했으니 더더욱 그러합니다. 

무엇보다도 아사미를 납치한 뒤 그녀가 Siri로 도미타에게 전화를 걸어 구조된다는 결말이 가장 문제입니다. 해킹 전문가인 범인이 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어처구니 없는 실수였어요. 폰이 아이폰이라는걸 명확히 알았는데도 이 기능을 간과한건 납득하기 어려우니까요. 전화를 받은 도미타가 이전 해킹 덕분에 아사미 폰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는 설정도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해킹과 폰 위치 추적은 별 상관이 없잖아요? 백신을 설치했다면 모를까.

그리고 데뷰작이기 때문이겠지만 소설적인 완성도도 부족합니다. 캐릭터 설정부터 견고하지 못해요. 도미타가 가장 좋은 예입니다. 그는 거의 전편에 걸쳐 아사미에게 의지하는 무능력한 찐따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아사미를 구해주고 그녀의 과거마저 모두 이해한다는 대인배로 급작스럽게 거듭납니다. 반면 왠지 모르게 계속 좋은 사람, 훈남으로만 묘사되는 다케이는 반대로 단 몇 줄의 묘사를 통해 불륜을 즐기는 인간 쓰레기로 돌변하여 리타이어해 버리고 말고요.
여기에 더해 아사미가 과거 AV 배우 야마모토 미나요였다는 설정은 왜 등장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야기와 별 상관도 없을 뿐 아니라 아사미로 가장한 미나요가 아사미의 대학 시절 잠깐의 연애 상대였던 다케이와 다시 만나는 행동은 비현실적입니다. 자신의 정체를 알아낼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 화를 불러올 이유는 없잖아요? 이 과정에서 그녀가 진짜 아사미인 것처럼 심리묘사를 해 가며 독자를 속일 이유 역시 없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톡톡 튀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닥 기대에 값하지는 않았습니다. 해킹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망내인"을 읽는게 훨씬 낫습니다.

2018/03/18

범죄 과학, 그날의 진실을 밝혀라 - 브리짓 허스 / 조윤경 : 별점 4.5점

범죄 과학, 그날의 진실을 밝혀라 - 8점
브리짓 허스 지음, 조윤경 옮김/동아엠앤비

법의학의 역사를 쉽게 설명해주는 일종의 미시사, 과학사 서적입니다. 통사처럼 '법의학'의 흐름을 일람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책의 시작은 별다른 과학적인 수사가 존재하지 않던 시대로, 비소가 특별한 검사법이 없어서 널리 쓰이던 1751년에 영국 여성이 아버지 독살 혐의로 기소되면서 과학 수사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사건 소개입니다. 비소는 가열하면 마늘 향을 내뿜는데 용의자 메리의 약갑 속 물질을 가열하니 마늘 냄새가 났다는, 지금 보면 어처구니 없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인, 그야말로 과학 수사의 한 걸음을 내딛은 방법이 등장합니다. 이 증거로 메리는 교수형을 당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1806년 로제 교수가 '로제 검사법' 이라는 비소 검출법을 고안해 냅니다.

그리고 의사가 검시관이 되는 과정, 그 중에서도 프랑스의 알렉상드르 라까사뉴가 1881년 리옹에 '법의학 연구소'에 합류하여 부검에 참여하고 여러 제자를 양성하여 많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이 자세히 그려집니다. 특히 유명한 '크리펜 사건' 은 대중에게 라까사뉴와 같은 법의 병리학자의 존재 및 그 유용함을 널리 알리게 됩니다. 병리학자 스필스베리가 크리펜 자택 지하실에서 발견한 사체가 크리펜의 실종된 아내라고 판단한게 사형 선고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참고로, 최근 조사 결과로는 이 사체는 '남자의 사체' 였다고 합니다. 스필스베리의 추리대로 독살이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총으로 쏘고 사체를 절단하여 유기하는 건 일반적인 독살범 행태와는 다르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이었고요. 하지만 코라 크리펜은 결국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크리펜의 범행은 성공했지만 우연에 의해 정의의 철퇴를 맞았다고 생각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네요.
여튼 이러한 최근 조사로 스필스베리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긴 했지만, 또 다른 유명 연쇄 살인 사건인 '욕조 속의 신부들' 사건 당시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는지 조사하여 증언한 내용도 인상적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만삭 의사 부인 사망사건' 이라는 유사 사건이 있어서인지 더 기억에 남네요. 의사인 주제에 100년전 사기꾼보다도 유치하게 현장을 조작하다니, 사형 선고를 받지 않을걸 다행이라 여겨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결국 1925년 노먼 쏜 재판에서의 논란으로 스필스베리의 완벽함에 균열이 가고, 대중도 병리학자의 결점과 오류 가능성에 대해 알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유럽보다 늦은 1918년 법의관 제도가 시작되는데 법의관들의 활약으로 여러 건의 사건이 해결됩니다. 부검이 아니라 정말 탐정 뺨치는 추리로 범인을 밝혀낸 사건도 있습니다. 하숙집에서 노부인이 시체로 발견되어 자연사인줄 알았는데, 현장에 도착한 법의관이 '가정부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면 문은 안에서 잠겨있었다는 뜻인데, 그럼 열쇠는 어디 있는걸까?'라는 의문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수사를 이어간 끝에 열쇠를 소지한 범인을 잡는다는 결말인데, 당장 추리 소설에 응용해도 좋은 멋진 추리였어요.

이러한 법의관 제도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온 과학적인 수사 방법도 상세합니다. 지금은 일반 상식이 된 범죄 현장의 증거를 토대로 한 수사는 1세대 법과학자 에드몽 로카르가 셜록 홈즈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을 정도로 홈즈의 영향이 컸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에드몽 로카르를 비롯, 오스트리아의 한스 그로스, 프랑스의 빅토르 발타자르, 미국의 벤자민 모건 밴스 등 여러 선구자들의 활약으로 해결된 사건이 연대별로 흥미롭게 소개됩니다. 여기에 더해서 과거에는 분석하지 못했고, 알지 못했던 정보로 현대에는 어떻게 사건이 해결되었는지를 병렬로 설명하고 있어서 이해를 돕고요.

뒤이어 각종 분석 방법들을 한 챕터씩 할애하여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챕터별 구성은 대동소이합니다. 해당 분석법의 역사와 주요 인물, 그리고 해당 분석법이 활용된 주요 사건이 소개되는 식이죠. '지문'의 경우, 뎁퍼드가 살인 사건을 비롯한 거의 모든 내용은 이전에 읽었던 "지문"에서 더욱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어서 딱히 언급할 부분은 없습니다. 그래도 샤를리즈 테론의 "몬스터"로 잘 알려진 에일린 워노스 사건 소개는 기억에 남네요. 그리고 '다른 사람의 지문'을 숨겨야 했던 사건도 재미있습니다. 시체를 자신이 죽은걸로 위장하려고 기도한 사건인데 황당한건 시신의 신원만 위장했지 정작 범인 자신의 신원은 위장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후 다른 사건 사례를 통해 지문의 결함이 있다는 점도 알려주며 마무리됩니다.
이와 함께 베르틸롱(베르티용) 측정법도 함께 실려 있는데, "지문"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베르틸롱 측정법의 심각한 문제인 "쌍둥이는 구분할 수 없다"의 실제 사례는 흥미로왔습니다.

총기 분석에서는 유명한 '사코와 반체티 사건' 에서 최근 분석 결과 사코는 진범이었을 수 있다는 결론. 그리고 알 카포네의 '발렌타인 데이의 학살' 관련 수사가 재미있었어요.

혈흔 분석 챕터에서는 "도망자"의 모델 샘 셰퍼드 의사 부인 살인 사건이 가장 흥미로왔습니다. 혈흔 분석을 통해 재판 결과가 뒤바뀌는 과정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도 최근의 조사 결과와 결론을 내리기 위한 다양한 시도, 그리고 결론이 아주 새롭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는 '피해자학(희생자가 살해될 요소가 무엇인지? 를 분석하여 동기, 용의자를 알아내는 기법)'을 토대로 메릴린이 희생자가 될 확률은 오로지 불안정한 결혼 생활 뿐이었다고 단언합니다. 현장이 조작된 증거도 상세하게 실려 있고요.

시신 분석 사건에서는 '아이스맨'이라는 별명의 살인 청부업자가 피해자의 시신을 수 년간 냉동한 후 유기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실제 범행은 수년 전이지만 3~4 주 전에 살해된 것으로 오인하게 만들기 위해서였지요. 하지만 여러가지 증거를 토대로 진상을 밝혀내고 범인을 체포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하는 내용은 흡사 미드 "CSI"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유골 분석은 다른 챕터에 비하면 사례의 재미가 조금 덜한 편입니다. '아나스타샤 사건'으로 법의인류학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는 정도만 괜찮았어요.

마지막은 프로파일링과 DNA 분석이라는 최신 수사 기법으로 마무리됩니다. 프로파일링은 익히 수많은 책을 통해 접했던 내용의 요약이지만, FBI 행동 과학부의 수사관들이 활약한 사건들은 흥미진진합니다. 사건에서 프로파일링 기법의 활용도 잘 설명되고 있고요.
DNA 분석은 이를 통해 해결한 사건보다도 증거가 왜곡된 사건들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DNA가 악수 등으로 쉽게 옮겨질 수 있기 때문으로 이를 통해 잘못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례는 물론, '바이트 마크' 와 같이 오류가 있는 증거가 채택되어 발생한 문제 등이 함께 소개되는데 참 무섭더군요. 요새도 증거 조작이나 오인식, 각종 오류로 피해를 보는 사례가 가끔 보도되는데, 항상 조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법의학, 법과학에 대한 통사적인 이해는 물론, 실제 사건과 연계하여 한 편의 추리 소설을 보는 듯한 재미도 전해주는 좋은 책입니다. 내용도 이해하기 쉽게 쓰여져 있으며, 도판들도 적절한 수준으로 삽입되어 있는 등 전체적인 책의 완성도도 빼어납니다. 한마디로 재미와 가치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보기드문 좋은 책이에요.
분량 상 개략적으로 설명한 부분이 많으며, 이미 각 분야별로 상세하게 설명한 다른 책들을 통해 제가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 제법 된다는 점은 아쉽지만 큰 문제는 아닙니다. 별점은 4.5점입니다. 이쪽 분야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2019/08/02

죽여 마땅한 사람들 - 피터 스완슨 / 노진선 : 별점 2점

죽여 마땅한 사람들 - 6점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푸른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투자회사를 운영하는 테드 스버슨은 아내 미란다가 건축업자 브래드와 불륜을 저지른다는 걸 알고 실의에 빠졌다. 그 때 우연히 만난 여성 릴리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 둘은 죽어 마땅하다며 테드가 직접 행동에 나설걸 촉구했다. 릴리에게 빠져든 테드는 살인 계획을 세웠지만, 브래드가 선수를 쳐서 테드를 살해해 버리고 말았다. 이 사실을 뉴스로 접한 릴리는 그 둘을 직접 응징하려 하는데... 

이런 저런 곳에서 평이 상당히 좋았던 미국 스릴러입니다. 오쟁이를 진 남편이 살의를 품게 된 계기가 우연히 만난 여성 릴리의 설득 때문이라는 시작은 독특합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낯선 승객"이 살짝 떠오르더군요. 책 뒤 해설을 보니 영향을 받은 듯, 안 받은 듯 모호하게 쓰여져 있기는 한데 최소한 작가도 존재를 알고 있었던건 분명하네요. 첫 만남 당시 릴리가 읽고 있던 작품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1" 이니까요.

평이 좋은 이유는 일단 잘 알 수 있습니다. 재미만큼은 확실하거든요. 흡입력있는 신선한 전개도 아주 좋고요. 중반부까지 테드와 릴리의 시점을 각각 오가는데 테드의 시점은 릴리를 만난 다음부터의 현재이며, 릴리의 시점은 그녀가 첫 살인을 저지른 어린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옵니다. 그리고 두 시점이 합쳐지는 순간, 테드는 살해당하고 이는 독자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줍니다. 그 뒤에도 릴리와 미란다 시점, 미란다가 살해된 뒤에는 경찰 킴볼 시점과의 교차 전개가 계속되는 것도 괜찮았어요. 독자에게 다양한 시각, 알지 못했던 정보를 제공하는 덕분입니다.
이 과정에서 테드에게 살의를 불러 일으키는 릴리에 대한 설정과 묘사도 인상적입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죽이는데 주저함이 없는 싸이코패스"나를 찾아줘"의 에이미 스타일인데, 개인의 욕심이나 이기심보다는 제목 그대로 '죽여 마땅한' 사람들만 죽인다는 차이점이 명확합니다. 범행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의 추진력, 결단력 역시 매력적이고요. 그녀를 실존하듯 그려낸 묘사도 일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린 시절부터 추리 소설을 - '낸시 드류' 시리즈를 포함해서 - 좋아했던 소녀로 그려져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녀와 대척점에 있는 '죽여 마땅한' 사람들인 미란다와 브래드 설정도 괜찮습니다. 단순히 불륜 관계가 아니라 테드를 살해한다는 전개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 킴볼 역시 잘 그려져 있습니다. 시를 쓰는게 취미일 정도로 문학에 조예가 깊고, 상당한 관찰력과 추리력을 갖추고 있으며 우연히 쓴 음란한 시가 발목을 잡게 된다는 복선도 치밀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릴리가 대학 시절 사귀었던 에릭을 살해한 범행만큼은 돋보입니다. 에릭이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고 견과류가 들어간 인도 요리를 먹인 뒤, 치료제를 숨겨 질식해 사망하게 만드는데 사고사로 보이게끔 다양한 조작을 하기 때문입니다. 견과류는 미리 갈아서 요리에 섞어두었고, 범행 전 에릭의 승부욕을 자극하여 펍에서 열리는 술 먹기 대회에 참여하게 만드는 등의 작전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술에 취한 에릭이 실수로 요리를 먹고, 치료제도 찾지 못해 죽었다고 경찰은 생각하게 되지요.
경찰 킴볼이 의외로 유능해서 릴리와 테드의 관계, 릴리의 거짓말과 여러가지 이상한 행동을 파헤치는 과정도 볼거리입니다. 정말 몇 안되는 단서를 통해 릴리를 추적해나가는 과정은 경찰력에 상당한 신뢰를 갖게 만들 정도에요.

그러나 다른 범행은 그닥입니다. 릴리가 미란다와 브래드를 살해하는 핵심 범행부터가 그러합니다. 특히 브래드를 설득해서 미란다를 죽이게 만든다는 계획이 최악이죠. 브래드가 미란다에게 역으로 설득당해 릴리를 죽일 수도 있었으니까요.
미란다, 브래드를 살해한 뒤 먼 거리를 이동하여 사체를 유기하는 장면의 묘사도 나쁘지는 않지만 도로의 CCTV에 촬영되거나 도로 요금소에서 목격당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완벽하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미국 도로 CCTV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과연 추적이 불가능했을지?에는 의구심이 남습니다.

릴리가 저질렀던 다른 사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 만났던 유아 성애자 챗을 숨겨진 우물에 떨어트려 죽인 뒤 챗의 모든 짐도 같은 장소에 버린 첫 범행부터 문제가 많습니다. 범행 자체의 설득력부터 부족한 탓입니다.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기는 했지만 챗이 우물에서 떨어져 즉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을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으니까요. 지나치게 잘 풀린 느낌이에요. 차라리 뚜껑을 덮고 굶어죽도록 놔 두는게 낫지 않았을까요? 또 당장은 살해하는데 성공했더라도 누군가 찾아 나섰다면 충분히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도 문제에요. 정처없이 떠도는 나그네라 아무도 찾지 않았다는 설정으로 대충 넘어갈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릴리가 충동적으로 킴볼을 칼로 찔러 체포되는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백주대낮에 현역 경찰에게 직접 흉기를 휘두르는건 빠져나가기 힘든 범죄니까요. 킴볼을 없애려면 더 철저하게 준비해서 범행을 저질러야 했습니다. 치밀해 보였던 릴리 캐릭터가 막판에 급작스럽게 붕괴되어 버리는데 그래서 얻은 건 아무 것도 없어요. 범죄 천재로 보였지만 그냥 어설픈 정신병자에 불과했다는 결말에 불과합니다.

그 외의 범행들도 어설픕니다. 남편을 죽이고 재산을 가로채려던 미란다의 계획? 당연히 실패했을겁니다. 범행 당시 브래드의 인상착의가 목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릴리에 의해 살해되지 않았다면 킴볼 등 경찰의 수사에 의해 진상이 드러나는건 순식간이었을 거에요. 작 중에 등장하는 것 처럼 가짜 증언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과연 그렇게 쉽게 넘어갔을지는 의문입니다.
테드가 충동적으로 릴리가 근무하는 대학 도시 윈슬로를 방문한 것, 릴리가 테드 사망 후 케네윅을 방문해서 숙박한 것 등의 자잘한 실수도 눈에 뜨입니다. 테드의 실수는 릴리를 곧바로 수사 선상에 올리게 만드니까요. 테드가 미란다보다 선수쳐서 범행을 저질렀다 해도 이래서야 완전 범죄가 성공했을 것 같지는 않네요. 테드와 릴리가 서로 끌렸다는 설정은 바람난 아내와 정부를 응징하겠다는 테드의 계획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아니 등장하니만 못했고요.

작위적인 설정도 많습니다. 테드의 아내 미란다가 에릭과 바람이 났던 대학 시절 친구 페이스이며, 우연히 만난 줄 알았던 릴리와 테드의 만남도 어느정도 계획된 것이라는게 밝혀지는 것 등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냥 우연히 만나서 정말로 범행에 대해 조언을 해 주게 되었다는 식으로 풀어나가도 충분했을텐데 말이지요. 마지막에, 릴리가 시체를 유기했던 초원 지대가 재개발된다는 마무리도 작위적입니다. 이런 류의 개발 계획을 근처에 사는 사람이 몰랐다는게 말이 될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인물 설정 및 묘사, 그리고 전개는 뛰어나지만 범죄물로는 함량 미달이라 감점합니다. 공들여 쌓아올린 천재 여성 범죄자가 별볼일 없는 정신병자라는 결말도 실망스럽고요.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0/12/26

Q.E.D Iff 증명종료 12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3점

Q.E.D Iff 증명종료 12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이번 권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유괴 교섭을 다룬 "좋은 사람"과 복잡한 트릭이 사용된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재생의 시간" 입니다. "좋은 사람"은 평균 이하였지만, "재생의 시간"은 Q.E.D가 다른 추리 만화와 다른 점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편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이야기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사람" 

이탈리아 저널리스트 아르젠트 (알) 로셀리니가 시리아 무장 단체에게 유괴되었다. 교섭인 시나 샌드는 토마의 옛 동창이어서 토마와 가나는 그녀를 돕기 시작했다. 그녀와 이탈리아 정부, 그리고 알의 백부 마이클까지 모두 3개의 창구가 존재하는 상황으로 교섭은 난항을 겪는데....

유괴 교섭에 대한 이야기. 그런데 단순 교섭보다는 복잡합니다. 세 개의 창구가 교섭에 나선 탓입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탈리아 정부와 마이클에게 범인 X의 요구액이 너무 높으니 일부분을 부담해달라는 부탁을 해 보라는 토마의 계획은 기발합니다. 만약 다른 두 창구가 범인과 교섭하고 있는게 아니었다면 동의할테고(인질 석방이 우선이니), 그들도 교섭 중이었다면 거절할거라는 이유입니다.
이탈리아 정부와 마이클의 거절로 범인이 세 개 창구 모두와 교섭하여 몸값을 받아낼 속셈이라는걸 알아낸 뒤, 모두의 몸값 전달 날짜가 다르다는걸 통해 각각 다른 사람들과 교섭하고 있다고 추리하게 됩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개 창구가 교섭하는건 가짜인거지요. 

이러한 교섭 단체간 의견 조율과 교섭 이야기는 꽤 그럴싸 합니다. 또 중동 유괴범들이 어떻게 사업(?)을 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투자자도 있고, 이자도 지급하는 등 여러모로 명백한 사업이더군요. 그래서 빠른 교섭이 필요하고요. 투자금 회수가 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면, 손해가 커지기 때문에 몸값이 점점 올라갈 수 밖에 없거든요.
콘테이너를 이용하여 유럽으로 건너가려는 시리아 난민의 비참한 삶에 대한 묘사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난민 소년이 유괴범 일원이 되는 과정도 설득력이 있고요. 즉 유괴 교섭, 유괴 사업, 유괴범에 대한 드라마는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그런데 알을 돌려받는 클라이막스는 영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에까지 토마와 가나가 나서서 위험에 휘말릴 이유는 전혀 없으니까요. 또 알과 가나가 절벽 아래에서 탈출하기 위해 숨겨둔 장치를 이용한 일종의 패러글라이딩을 이용한다는건 과정 자체는 그럴듯하지만 이 역시 현실성이 없습니다.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어서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중요한 조사를 가나 한 명으로 돌려막기 하는 내용도 비현실적입니다. 가나 혼자 이탈리아에서 마이클을 만나 협상하고, 마이클 비서를 자칭하여 은행으로부터 몸값 전달 날짜를 알아낸다는 식인데, 일본이었다면 모를까 외국에서 외국인 대상으로 진행한건 지나쳤습니다. 이게 가능하다면 가나도 토마 못지 않은, 어학과 연기의 천재인거지요. 이 정도면 "엘프 사냥꾼"의 코미야마 아이리급이 아닐런지?

이야기도 짜임새가 부족합니다. 유괴 교섭인에 대한 이야기, 유괴된 인질의 탈출극 (?), 시리아 난민의 비참한 삶, 좋은 사람 알에 대한 이야기가 마구 뒤섞여 있거든요. 예전 "마스터 키튼" 속 에피소드처럼 '교섭' 하나에 집중하는게 훨씬 좋았을겁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재생의 시간" 

잡지 기자 크리스는 시의회의원 모카이에게 찾아가 17년전 스미야 코우사쿠 사망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며 협박하여 300만엔을 뜯어 내었다. 스미야 코우사쿠 사망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사방이 벽으로 둘러쌓여 출입금지된 장소에서 목을 메고 죽은걸로 보이는 백골 사체가 발견된 사건이었다. 유류품으로 사체는 스미야 코우사쿠로 판명되었는데, 그는 이미 14년 전 실종된 상태였었다(현 시점에서는 17년 전).
경찰은 14년 전 스미야가 이 장소에서 목을 메고 자살했다고 결론내렸었다. 하지만 스미야는 함께 일하던 쇼우스케와 자주 다퉜으며, 쇼우스케가 큰 상처를 입고 기숙사로 돌아온 17년 전 어느날 돌아오지 않았었고, 쇼우스케도 곧바로 입원했던 병원에서 사라졌다.

이후 쇼우스케가 있는 마을로 찾아온 크리스는 시체로 발견되었고, 유력한 용의자는 쇼우스케의 아들 세이지였다. 아르바이트 중 피해자와 다퉜고, 아르바이트하던 술집 근처에서 피해자가 살해되었으며, 시체를 옮긴 보트는 그의 아버지 가게에서 분실된 것이라는 등의 불리한 정황 증거 때문이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범인이 술집에서 술을 먹는다는걸 알 수는 없었다'는 이유로 풀려났다. 피해자가 술집에 오는걸 알지 못했다면, 보트를 미리 준비해서 유기 장소로 옮기는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살해 현장 근처에는 보트를 숨길 곳도 없었다...

17년 전 과거와 현재, 두 개의 사건이 하나로 만나는 작품으로 두 개의 사건은 모두 수수께끼를 품고 있습니다. 17년 전 사건에서 쇼우스케는 범인일 수 없었습니다. 쇼우스케와 스미야가 다투는게 목격된 장소에서 사체 발견 현장까지는 왕복 1시간 이상 걸리는데, 쇼우스케가 다친채로 기숙사로 돌아온건 고작 30분 뒤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누가 봐도 쇼우스케가 범인이니, 무언가 트릭이 사용된게 분명합니다. 현재의 사건에서는 술을 어디서 먹을지 모르는데 보트를 어떻게 미리 준비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고요.

토마는 두 사건은 모두 밤에 술 마시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습격당했다는 공통점에 착안하여, 술 마시러 가는 장소 모두에 미리 시체를 숨길 수 있도록 준비했다고 추리합니다. 스미야는 역 앞 라면집, 산기슭 정식집, 이자카야의 세 개 가게만 다녔기 때문에 준비가 그리 어렵지 않았던거지요.
산 기슭 정식집 근처에서 도난당했던 포크레인이 발견된게 증거입니다. 범인은 포크레인을 휘둘러 사체를 멀리 던져 버리고 알리바이를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이는 17년전 사건에 사용된 트릭과 같아요. 사체가 밀실에서 발견된건, 담벼락 넘어 공중에서 던져졌기 때문이었죠. 꽤 기발하고, 나름 현실적인 멋진 트릭이었어요.

범인이 사건을 저지른 동기도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사체로 발견된 스미야가 원래 쇼우스케였던 겁니다. 스미야가 쇼우스케를 죽이고 신분을 바꾼거지요. 모카이가 이를 도왔고요. 쇼우스케와 모카이는 고교시절 야구부 배터리로 절친이었고, 모카이는 쇼우스케가 야구부 매니저였던 교우카와 맺어지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야구를 그만두고 방탕한 삶을 보내던 쇼유스케가 음주운전으로 교우카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도망간 탓에 원한을 품었다가, 스미야가 저지른 사건을 알고 그를 도와준 겁니다.

이후 바꿔치기한 스미야가 교우카와 만나 사랑에 빠지는 사랑 이야기도 나무랄데 없어요. 처음 봤을 때 부터 사랑했다는 부부의 말은 참 슬프네요. "마틴 기어의 귀향"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바꿔치기와 트릭을 눈치채고 크리스는 모카이를 협박했고, 스미야(현 쇼우스케)가 그를 죽인겁니다.
크리스가 17년전 사건은 살인 사건이 분명하다며 남긴, '기름게와 무당게의 다른 점'이 핵심이라는 말도 바꿔치기를 의미합니다. 같아 보이지만 다른건 이름 뿐이라는 뜻이지요. 이를 여러가지 단서복선으로 드러내는 전개도 일품입니다.

그런데 추리에는 조금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현재의 크리스 살인 사건의 경우, 피해자와 이자카야에 동행했던 아오야마가 공범에 전화를 걸어 보트를 준비하도록 만들었다는 생각은 왜 하지 못할까요? 단독 범행이라고만 생각하는 이유를 통 모르겠어요.
17년 전 사건도 마찬가지에요. 30분 안에 사체를 어딘가 숨기고 돌아온 뒤, 퇴원 후 숨기러 가도 되니까요. 17년, 아니 14년 만에 백골로 발견되었다면 그 정도 차이를 눈치채는건 불가능했을텐데 말이지요. 아니면 어느정도 생활이 안정된 후, 현장을 뒤져 시체를 암매장하는 것도 방법이었고요. 살인사체 유기가 동시에 벌어졌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쇼우스케가 스미야라는 증거가 있다면 모를까, 별다른 증거가 없는 말 뿐만인 추리라는 약점도 큽니다. 같은 이유로 크리스를 살해할 필요가 있었는지도 의문이고요. 설령 쇼우스케가 스미야라는게 밝혀진다 한 들, 살인을 저지르고 시체를 숨겼다는 증거는 없으니까요. 한 명 더 살해해서 위험을 늘리기보다는, 정면으로 반박하는게 더욱 타당했습니다. 

아울러 토마와 가나가 무리하게 사건에 뛰어들어 추리를 도와주는 이유도 석연치 않습니다. 용의자 세이지와 교제하는 마리나와 가나가 친구라는게 이유인데, 그렇다면 세이지가 혐의를 벗은 시점에서 더 도와줄 이유는 없어요. 오히려 토마가 입만 다물었어도 미제 사건으로 끝났을지도 모르는데, 토마가 웃는 얼굴로 추리쇼를 펼치며 사건을 해결해서 세이지 가족을 파괴해버리고 맙니다. 이래서야 정의의 집행자가 아니라 사랑을 방해하는 무자비한 악마, 냉정한 추리하는 기계일 뿐이지요. 한 마디로 토마의 비인간성이 부각된 에피소드입니다. 하긴, 이게 Q.E.D와 토마의 매력이긴 하지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5점입니다. 추리에서의 설득력이 조금만 갖추어졌더라면 걸작이 될 수 있던 좋은 이야기였습니다. 좀 긴 호흡의 소설로 발표하는게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2014/12/11

게물랭의 댄서 - 조르주 심농 / 성귀수 : 별점 2.5점

게물랭의 댄서 - 6점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열린책들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 샤보와 르네 델포스는 단골 캬바레 게물랭을 털 계획을 세우고 심야에 몰래 잠입했다. 그러나 그들은 캬바레 안에서 시체를 발견했고, 혼비백산하여 도주했다. 시체가 동물원 앞에서 유기된 채 발견된 후, 수수께끼의 사내에게 미행당해 불안감에 사로잡힌 두 젊은이는 달리 마련한 돈을 처분하기 위해 다시 게물랭에 방문했다. 그러나 장 샤보가 경찰에 체포되고 마는데...

조르주 심농메그레 경감 시리즈 중 한 권으로, 1931년도 작품입니다. 연표를 보니 상당히 초기작이네요.

제가 읽었던 메그레 경감 시리즈 중 단언컨데 가장 이색적입니다. 다른 시리즈 작품과 차별화되는 점을 하나씩 열거해 보자면,

  1. 거의 책의 절반 분량까지 메그레 경감은 등장하지 않고 방탕한 청년 장 샤보의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점.
  2. 사건 발생 및 해결 모두가 벨기에의 리에주라는 도시에서 이루어진다는 점.
  3. 일상 속 범죄, 현실 속에 감추어진 어두운 드라마가 중심이었던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국제적인 첩보조직이 등장하는 등 약간은 모험 소설 같은 파격적인 설정을 갖추고 있다는 점.
  4. 메그레가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유행했던 본격물 탐정들과 같은 대담한 추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

입니다.

이 중 추리소설 애호가로서 네번째 항목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피해자가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했지만, 그 뒤 경찰을 어떻게든 따돌리려 시도한 이유에 대한 추리가 핵심인데 셜록 홈즈의 추리법이 연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추리의 결과가 황당하지만, 그게 사실에 거의 부합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합니다. 또 독자에게 비교적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도 역시나 고전 본격물스럽습니다. 앞서 언급한 피해자의 기이한 행동, 담배갑을 델포스가 가지고 있다고 입을 맞춘 게물랭 직원과 댄서의 증언으로 장 샤보가 늪에 빠지지만 이후 진상이 밝혀진다는 디테일, 르네 델포스가 훔쳤다고 증언한 2천 프랑의 출처 등이 대표적입니다. 피해자가 최초에 죽은 척 한 것이라는 일종의 트릭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여러모로 심농이 다른 경쟁자들을 의식해서 “나도 이런 거 쓸 수 있다구!” 라는 마음가짐으로 써내려간 느낌이 듭니다.

심농 작품다운 심리묘사와 배경 묘사도 여전합니다. 특히 시체를 발견하고 경찰(로 생각되는)에게 쫓긴다고 생각하는 철부지의 심리묘사가 상당히 볼거리였어요. 적절한 분량이라는 미덕 역시 동일하고요.

하지만 약간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메그레 스스로 시체를 은닉했다는 중요한 정보를 나중에 알려주는 것은 공정치 못합니다. 마지막에 아델의 집으로 빅토르와 델포스가 잠입하여 물건을 회수하려 한 까닭도 잘 모르겠고요. 마지막 장면은 주요 등장인물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놓고 메그레가 진상을 설명하는 추리쇼 형태라서 무리수를 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것까지 다른 고전 본격물을 따라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아울러 피해자가 사실은 비밀첩보원이었고, 암호로 된 편지까지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고전 명작 중 잠수함 설계도를 다룬 작품들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만, 게물랭이 국제적인 첩보 조직에 속한 곳!이라는 설정도 많이 엉뚱합니다. 차별화되는 요소였을지는 모르나 설득력 측면에서는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래도 결론내리자면 추천작입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메그레 시리즈의 일반적인 스타일을 사랑하는 독자에게는 호오가 갈릴 수 있고, 제 기대와도 약간 달라서 감점하지만, 추리 애호가라면 즐길거리가 많고 심농만의 장점도 여전히 유효한 독특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