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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1

교통경찰의 밤 - 히가시노 게이고 / 이선희 : 별점 2.5점

교통경찰의 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바움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연작단편집. 총 6편의 단편이 "교통사고"라는 일관된 주제로 실려있습니다.

먼저 단점부터 이야기하죠. 일단 이야기의 얼개가 대부분 허술했습니다. 사건에 우연이 많이 작용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그다지 정교하지 못하고, 여러모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탓입니다. 교통사고라는 주제에 있어 사회고발적인 메시지를 너무 직접적으로 강하게 드러내는 것도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세련되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초기작이기 때문이겠죠?

보다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먼저 우연에 의해 사건이 마무리되는 단편은 "천사의 귀"와 "버리지 마세요"를 들 수 있습니다.
첫번째 단편 "천사의 귀"는 장님소녀가 특이한 재능을 이용하여 교통사고의 진짜 가해자를 밝힌다는 발상은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작중에 이야기되듯 신호등 표시 시간이 변경되었는데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했으며 이러한 소녀의 노력과 관계없이 너무나 우연한 제 3자의 비디오 촬영이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는 것에서 정교한 느낌을 받기 어려웠어요.
다섯번째 단편 "버리지 마세요" 역시 우연에 의해 사건이 마무리되는 단편이죠. 나름 치밀한 살인극이 등장하기는 하는데, 이 살인극이 도로에 버린 캔 깡통과 연결되는 과정에서 결국 우연이 개입한다는 것은 너무 안일한 결말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피해자인 카메라맨이 범인의 범행을 눈치채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줄 알았는데 아예 다르게 풀어버리고 결말은 우연에 의해 진상이 드러난다는 것이라 솔직히 실망했습니다. 살인극 자체는 괜찮았던 만큼 아쉬움이 크네요.

그리고 설득력 부족은 "분리대"와 "불법주차"라는 단편에서 크게 느껴졌습니다. 두 작품모두 사회고발적 메시지는 두드러지나 동기와 결말에 있어 설득력이 약했거든요.
예컨데 두번째 단편 "분리대"는 독자의 공분을 불러 일으키는 아줌마 캐릭터 덕에 무단횡단에 대한 사회고발적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에는 성공하고는 있지만, 결말이 개운치 못합니다. 경찰의 약간의 조사만으로도 복수를 위한 자해라는건 쉽게 밝혀질테니까요.
네번째 단편 "불법주차"는 불법주차 차량으로 제시간에 병원에 가지 못해 죽은 아이의 복수라는 이야기로 역시나 사회고발적 메시지는 확실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작위적이라 별로 와닿지 않았습니다. 이래서야 "네비게이션이 부정확한 길을 알려줘서 그것때문에 손해본 사람이 복수한다" 라는 이야기와 다를것도 없잖아요. 뭐 나름 재미있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단점만 있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장점도 명확하죠. 위에 예를 든 단편들도 그렇지만 기본적인 재미를 갖추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한번 손에 잡으면 끝까지 한번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은 대단하니까요. 또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름에 값하는 추리적인 디테일도 잘 살아 있고 말이죠.
특히 세번째 단편 "위험한 초보운전"같은 경우 사건을 조작하는 과정이 치밀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외려 이 단편은 동기부분에서 다른 단편들에 비해 설득력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사건의 결말까지 범인이 의도한대로 정확하게 흘러가는 과정이 잘 짜여져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단편 "거울 속에서"는 우발적 사고를 토대로 한 공정한 추리 수사물로 우연과 작위성이 두드러지지 않는 정통 수사물이라 할 수 있죠. 독자가 예상할 수 있는 트릭이었고 결말이 미적지근하다는 것은 아쉽습니다만 알콩달콩한 러브라인의 등장이라던가 전체적으로 감도는 따뜻한 느낌 등 히가시노 게이고의 특징도 잘 살아있기에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별점을 매기자면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장단점이 명확한 만큼 2.5점 주겠습니다. 초기작인것을 감안한다면 너무 박한 평가일까요?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한번쯤 봐도 실망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 스토리텔러로서의 능력은 충분히 보여주니까요.

2020/05/24

폐허에 바라다 - 사사키 조 / 이기웅 : 별점 2.5점

폐허에 바라다 - 6점
사사키 조 지음, 이기웅 옮김/북홀릭(bookholic)

"에토로후 발 긴급전"의 작가 사사키 조단편집입니다. 홋카이도 도경 경부보 센도 타카시가 이런저런 부탁으로 개인적인 수사를 벌인다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탐정사전"에서 멋지게 소개된 덕에 기억하고 있다가, 우연찮게 읽게 되었네요. 

센도는 이전 사건 때문에 PTSD 장애를 입어 현장에 복귀하지 못하고 장기 요양 중으로, 의사 말에 따르면 "경찰에 관련된 일은 모두 잊어라, 가능하면 신문도 읽지 마라, 책은 읽어도 상관없지만 범죄 소설은 금물이다"라는 상황이지만 주위의 요구에 응해 이런저런 방법으로 수사를 돕습니다.

니세코 스키장, 홋카이도 동부 토카치 온천 여관, 유바리 시, 삿포로 시내, 히다카 등 북쪽 지방 이곳저곳을 자동차로 돌아다니며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데, 관련 묘사들이 인상적입니다. 예를 들어, "폐허에 바라다" 속 소도시는 가공의 마을 같지만 그렇게 생각되지 않아요. 유바리 시 인근 쿠라야마 초 등 현존하는 곳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덧붙여진 덕분입니다. 마을로 향하는 길에 대한 묘사는, 지금이라도 차를 타고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거든요. 연어 정치망 어업과 가리비 양식이 주인 오오츠크해 연안 항구 마을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러한 묘사 덕분에 여정 미스터리 느낌도 강하게 전해 줍니다. 또 매 이야기마다 실제 사건을 담당한 형사가 등장하는데, 제각각 독특한 개성을 뽐내는 것도 재미요소에요. 사건 해결을 위해 센도를 이용하는 형사가 있는가하면 센도를 방해꾼 취급하면서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형사도 있고, 애주가도 있고 패션 감각이 빼어난 패셔니스타도 있거든요. 무엇보다도 나오키 상을 수상했을 만큼 문학적인 묘사가 돋보입니다. 사회파스럽게 현실에 대한 고발, 비판 의식을 이야기에 잘 담아낸 솜씨도 빼어나고요.

그러나 현실 고발없이 단순 범죄에 대한 이야기로만 끌고간 몇 몇 작품들은 기대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그냥 멋드러지게 쓴 범죄가 등장하는 드라마일 뿐, 추리 소설이나 범죄, 수사물로 보기에는 영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합한 별점은 2.5점. 문학적으로는 근사하고, 뭔가 품격이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추리적으로 빼어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저와 같이 추리물에는 어느 정도 수수께끼 풀이나 트릭같은 요소가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추리 애호가 분들께는 별로 권해드리고 싶지 않네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지가 좋아하는 마을"

60여 페이지에 불과한 짤막한 단편입니다. 이야기도 대단한건 없어요. 센도 타카시가 휴직 중인 탓에 치밀한 수사를 벌일 수도 없고요. 하지만 고작 하룻밤 조사로 아서에게 쏠린 혐의를 돌릴만한 정황 증거를 담당 형사에게 들이민다는건 너무하다 싶었어요. 그것도 잠깐 관계자 옆자리에 동석했던 정도라면, 현재 담당 경찰들이 수사를 등한시 했다는 이야기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현지 경찰들이 '오지'에게 한 번 맛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치더라도, 이건 너무 심하죠. 용의자 아서의 아내는 일본인이고, 그의 자식 역시 일본인일테니 이렇게 푸대접을 받을 이유도 없고요. 특별한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으며, 인간 관계 및 경제적인 이득 등 동기까지 명확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사토미와 아서가 관계를 맺었다는 등의 설정도 불필요했습니다.

스키장 마을의 묘사라던가, 이야기를 쉽고 명쾌하게 전달하는 전개는 나쁘지 않은데 특별히 점수를 줄 만 한 부분도 없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폐허에 바라다"

지독한 가난으로 어린 시절, 여동생을 죽이고 자살하려는 어머니를 목격한 뒤 범죄에 빠져버린 후루카와의 범행을 건조하게 그려냅니다. 후루카와를 한 때는 융성했지만 지금은 쇠락해버려 폐허가 되어버린 탄광촌 마을에 빗대는게 인상적이에요. 후루카와가 바란건 죽음이었고, 결국 자살로 센도 앞에서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장면은, 제목과 겹쳐지고요. 폐허에 바라는건 결국 흉물스러운 모습을 창피하게 드러내어 명줄을 유지하는게 아니라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는 뜻으로 읽히거든요. 이런 내용으로 본다면, 사회 고발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회파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 볼 만한 부분은 전혀 없습니다. 사건이 워낙 명확한 탓이에요. 후루카와와 만나기로 한 센도의 의도를 야마기시가 어떻게 알고 추적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가 있기는 하나,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아닙니다.

이렇게 형사가 등장하고, 비참한 현실과 그 때문에 생겨난 비극을 범죄 드라마로 그려내었다는 점에서는 김성종"어느 창녀의 죽음"과 비슷합니다. 드라마로서 볼 만하고, 묘사도 특출난 부분이 있지만 추리적 요소는 거의 없다는 점도 비슷하고요. 일본 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도 충분히 수긍이 갑니다. 그러나 일본의 버블 붕괴 및 지방 경기의 몰락을 그렸기 때문에, "어느 창녀의 죽음"만큼이나 우리에게 와 닿기는 힘들지요. 이런 점을 감안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

"오빠 마음"

'토'라는 어부들의 조합 때문에 사건이 벌어지는데 흉기가 어부들이 쓰는 마키리라는 등 어업과 관련된 디테일한 묘사가 돋보입니다. 지저분한 마을 유력자의 음모, 그와 손을 잡은 폭력단의 만행이 동기라는 점에서 사회파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사회 고발에만 그치지는 않습니다. 사건 속 수수께끼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용의자 이시마루가 피해자 다케우치를 폭행한건 인정했지만, 칼은 가져가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단지 칼을 가져가지 않았을 뿐, 칼로 찌른건 명백한 사실이며 이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끝에 그냥 손에 잡힌 칼로 범행을 저지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를 밝히기 위한 수사를 진행하면서, 이시마루의 가족들이 이시마루가 범인이라고 못 박은 이유가 드러나는 과정은 볼 만 했어요. 앞서 이야기한 사회파적인 고발이 함께 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단순한 센도의 추측 - 추리라고 하기는 어려운 - 만으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전개는 너무 뜬금없었습니다. 지나치게 쉽고 짧게 소비되어 버린 느낌도 들고요. "붉은 수확" 처럼 마을의 실력자, 여러 세력들 사이에서 분투하는, 장편 사회파 하드보일드물로 그려낼만한 이야기였는데 말이지요.

센도의 추리에 좀 더 설득력을 부여하고, 좀 더 드라마틱한 세력간 갈등을 그려낼 수 있는 장편이었다면 별점 3점 이상도 충분했을텐데, 지금의 결과물은 별점 2.5점입니다.

"사라진 딸"

범행은 강력하게 의심되지만, 시체가 없어서 본격적으로 수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을 그리고 있는 작품. 경찰이 직접 일을 벌일 수 없어서 경찰 타나베가 미야우치에게 센도를 소개시켜 준 것입니다. 센도가 사건을 해결한 건 타카다 방에서 발견한 평범한 스냅 사진 속 인물에게 주목했던 덕분이고요. 그 인물의 정체를 알아낸 뒤, 전화 한 통으로 시체 은닉 장소를 알아내게 되거든요. 경찰이 수사 중 간과했던 단서에 주목한게 주효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경찰 수사의 디테일 부족으로 사건이 미궁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꽤 그럴듯했습니다. 추리적으로 대단하지는 않지만 나름 현실적이기도 하고요. 시체가 발견되지 않아서 타카다의 과거를 상세하게 조사할 정도로 경찰이 수사를 확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도 설득력을 더합니다.

아주 빼어나지는 않지만, 실감나는 이야기라는건 분명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바쿠로자와의 살인"

저자 후기를 보니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영감을 받아서 썼다고 합니다. 아버지에게 아들들이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고 있고,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원수로 여기는 젊은이가 살인을 저지르도록 유도했다는 진상이 좀 비슷하기는 합니다.
여기에 더해 유언장이 주요 동기 중 하나로 등장하며, 지방 영주의 성 같다는 오하타 목장의 저택 묘사, 말을 키우는 목장 묘사 등이 더해져 굉장히 이국적인 느낌을 전해 줍니다. 일본이 아니라 영국 어딘가를 무대로 한 작품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작가의 의도는 러시아였겠지만요.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 외에, 추리적으로 건질건 없습니다. 내용을 보면, 17년 전 피해자였던 나가누마의 어린 아들이 장성해서 복수를 한게 뻔해 보이고, 새로 온 잡역부 청년 하라다가 마침 18살이라 수수께끼고 뭐고 이야기할게 별로 없네요. 오히려 하라다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지 않은 경찰의 무능함만 돋보일 뿐이에요.

추리 소설이 아니라 범죄에 대한 순문학, 드라마를 그리고 싶었다면 좀 더 길고 풍성한 묘사가 필요해 보였던 작품입니다. 지금의 결과물은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수준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복귀 전날"

센도의 PTSD의 원인이 된 사건이 회자되며 센도의 완쾌를 알리는, 단편집의 대단원을 이루는 작품. 그러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추리적으로 대단한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유미코의 전화는 도움 요청인줄 알았지만, 알고보니 하루카가 진범이라는걸 드러내기 위한 목적의 밀고 전화였다는 반전이 있기는 하지만요. 

하지만 이 역시 그렇게 의외의 반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전화 내용이 사실과 달랐다면, 전화를 건 사람이 거짓말을 한게 당연하니까요. 오히려 왜 이렇게 밀고를 하려 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라던가, 범행에 무언가 트릭이라도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내용도 없어서 이게 추리 소설인지도 의심스러울 정도에요. 유미코의 동기는, 센도가 처음 만났을 때 손에 반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라는 디테일과 하루카가 피해자인 나오와 남자 문제로 다투었다는 증언이 순차적으로 드러나니 그리 대단한 수수께끼는 아니거든요. 하루카의 범죄 역시,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나오를 죽이고 불에 태웠는지에 대한 진상은 드러나지 않고 그냥 그녀가 범인일 수 있다는 정황 증거 정도만 추가될 뿐이라 속 시원하게 해결되지도 않고요.

물론 이렇게 추리적으로 허술하다는게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어차피 이 단편집 수록작 모두가 마찬가지이기도 하고요. 또 아는 사람, 잘 해주는 듯한 사람이 더 무섭다라는 명제를 잘 전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이를 위해 억지로 센도를 엮었다는 점입니다. 수록된 다른 작품들은 모두 센도가 사건에 개입되는게 나름 이유가 명확한데,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미코 본인이 와인바 사장인 유키에가 겪은 일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그게 중요한 단서가 될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걸 그냥 경찰에 제보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구태여 센도를 중간에 연락책으로 사용할 이유가 없어요. 오히려 가족을 밀고한다는 자신의 치부를 아는 사람을 만들 필요도 없고요.

이렇게 시리즈를 위한 억지 투성이인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19/11/01

진범의 얼굴 - 마에카와 유타카 / 김성미 : 별점 1.5점

진범의 얼굴 - 4점
마에카와 유타카 지음, 김성미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0여년 전, 2008년 하치오지 시 가와구치 초의 주택가에서 토다 하야토와 미도리 부부가 실종되었다. 여러가지 증언, 정황 증거로 떠오른 유력한 용의자는 토다 하야토의 형 타츠야였다. 그러나 타츠야는 기소 후 무죄 판결을 받았다. 토다 하야토의 사망을 명백히 증명할 수 없어서, 살인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스기야마 기자는 이 사건의 심층 탐사 보도를 나선 뒤, 타츠야가 진범이며 공범이 있을 거라는 확신을 품기 시작했다. 이는 불량 청소년 기무라와 도가시의 증언으로 진짜라는게 판명되었다. 하지만 기무라와 도가시 모두 시체로 발견되고 마는데...

"크리피" , "시체가 켜켜이 쌓인 밤" 이라는 두 편의 범죄 스릴러로 접해 보았던 작가 마에카와 유타카의 장편입니다. 전에 읽었던 두 편은 모두 주위 사람들을 일종의 세뇌 상태로 만들어 범죄로 끌어 들이고 조종하는 범죄자가 등장했는데, 이 작품은 탐사 보도 전문 기자가 화자로 등장하며 10여년 전인 2009년 벌어졌던 '가와구치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 나간다는 내용으로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르포르타쥬 느낌의 전개와 비교적 현실적인 설정 덕분에 전작들보다 설득력은 높습니다. 그러나 재미는 오히려 부족합니다. 애초부터 스기야마는 타츠야가 진범일 것으로 생각하고, 실종된 동생 부부의 사체를 은닉할 시간이 없었던 이유를 공범이 존재했다고 추리하거든요. 이후 이야기는 이 추리를 뒷받침하는 과정에 불과하며, 결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타츠야가 진범이라는건 곧바로 불량 청소년인 기무라와 도가시의 증언에 의해 밝혀지게 되니까요.
그 뒤 범죄를 일으킨 4인조의 우두머리 하야마에게 위협을 느낀 기무라는 범행 현장을 촬영한 동영상이 담긴 USB를 보험삼아 준비했다가 살해당하고, 도가시 역시 미심쩍은 사고로 죽습니다. 다행히 공개된 USB를 통해 범행 장소를 특정한 경찰은 하야마의 절 고엔지를 수색하지만, 시체를 발견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타츠야가 곧바로 진상을 스기야마에게 고백한 뒤 자살하기 때문에 여기서 가와구치 사건은 끝난거나 다름 없습니다. 즉, 드라마에서 별다른 긴장감을 느끼기 힘들어요.
무려 일곱명의 관계자가 병사와 사고사를 비롯하여 자살 등으로 사망한 대형 사건이지만, 타츠야 범인설이 거의 진짜였다는 진상이라는 점도 허무합니다. 진짜 흑막으로 하야마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 동기와 수법을 짐작하기 어려운 모호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나오지 않는게 나았고요. 

추리적으로도 특기할 만한 내용은 없습니다. 스기야마가 공범의 존재를 추리하는 것, 그리고 범죄 집단의 우두머리인 '베레모 남자'의 베레모는 짧은 헤어스타일도 가릴 수 있는 모자다, 그래서 베레모 남자의 머리는 짧을 것이며 이는 하야마를 가리킨다는 추리가 전부인데 사건 해결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이 추리가 없었어도 어차피 제 발로 찾아온 범인의 증언으로 진상은 밝혀졌을 테니까요.

이외에 건질만한 부분도 없다시피 합니다. 사회파스러운, 사회 고발과 같은 동기도 등장하지 않아요. 범인 일당이 미도리에게 품은 비정상적인 성욕에 의한 잔인한 범죄에 불과한 탓입니다. 살인을 저지르고 시체를 유기한건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도 아니었고요. 또 이 과정에서 학교의 부교장이며 절의 주지인 인텔리 인격자 하야마가 비정상적인 성도착자로 살인집단의 리더였다는게 밝혀지는 부분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그가 딸 리하에게 품은 성욕과 소유욕은 솔직히 불쾌하기까지 했고요.

이후의 에필로그가 그나마 약간 사회 고발스럽기는 합니다. 스기야마가 10여년이 지난 지금, 스스로 취재한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책을 쓸 계획을 하야마에게 밝히자 하야마는 딸과 딸의 약혼자를 죽이고 자살합니다. 그리고 사건의 주요 관계자였던 타츠야의 변호사 하마나카가 스기야마에게 '너야말로 범인이다. 너의 집요한 추궁으로 하야마를 신경 쇠약으로 몰고갔기 때문이다. 가와구치 사건의 진범은 너다!"라고 비난하며 마무리되는데 여기서 '취재의 자유가 어디까지 보장되어야 하는지' 를 생각하게 만드니까요.

그러나 그럴 의도였다면 책의 내용 모두가 타츠야가 진범이라고 생각해서 모든 취재 결과를 거기에 끼워맞춘 스기야마의 음모라는 식으로 풀어나갔어야 했습니다. 실제로 유력한 몇몇 증언, 타츠야가 본인이 진범 중 한 명이라며 범행의 진상을 고백한 증언과 하야마의 딸 리하와의 인터뷰 등은 모두 스기야마 혼자 입수한 정보로 얼마든지 가공이 가능했으니 충분히 그렇게 쓸 수 있었을거에요.
그러나 가장 유력한 증언이었던 초반부 기무라와 도가시의 증언은 편집자 스가이와 함께 들었고, 동영상이라는 증거가 있어서 이렇게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결국 진범 일당 모두 죽어 마땅한, 잔인 무도한 범죄를 일으킨 놈들이고 취재로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솔직히 전혀 문제는 없습니다. 인권은 사람에게나 있지 이런 짐승들한테 있는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추리적으로도 별볼일없고 범죄물, 그 외 사회 고발 등 다른 가치도 거의 없는 망작입니다. 찾아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4/03/05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 - 시마다 소지 / 한희선 : 별점 2.5점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 - 6점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엮음/시공사

아사쿠사의 건어물 가게에서 소비세 12엔을 내려 하지 않던 노인이 가게 주인을 칼로 찔러 살해하고 말았다. 범인이 명확해서 사건은 쉽게 종결될 수 있었지만, 노인의 범행 동기에 석연치 않은 점을 느낀 요시키 형사는 수사 끝에 사건이 30여 년 전 있었던 기이한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내는데...

시마다 소지의 요시키 형사 시리즈.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사회파 추리소설과 같은 사회 고발 의식이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범인인 나메카와 — 여태영이 일제 강점기 때 강제징용된 조선인으로 본인과 가족 모두가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걸 드러내는게 작품의 핵심이라는 점이에서요. 여태영의 인생은 일본 때문에 그야말로 기구하다는 말로 표현이 안 될 정도로 꼬일 대로 꼬여서 불행의 극을 달리기에 굉장히 처절한 느낌을 전해줄 뿐 아니라, 작중에서 "전쟁 탓이라고 해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 이런 도리에 어긋난 일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일본은 진정한 일등 국가가 못 될 것이다"라고 일갈하기까지 합니다. 최근 일본의 우경화가 심각한 상황인데, 일본인이 사죄해야 한다는 글을 보니 작품 완성도와는 별개로 무척 반갑더군요. 덕분에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감정이입이 용이하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또 "누명"이란 무리한 질서 유지 혹은 치안 유지의 결과로 경찰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지 않기 위한, 이른바 '일본인의 행복을 위해 행해지는 정의라는 명목의 불합리한 폭력'이며, 데이코쿠 은행 사건, 시마다 사건, 마루쇼 사건, 무레 사건의 범인들은 모두 누명을 썼다고 확신한다고 작중 인물인 하타노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는 점, 일종의 파시즘적인 광기를 비판하는 점 역시 마찬가지로 사회파적 사회 고발로 볼 수 있습니다. 단체로 광기를 벌이지 않으면 일본인은 타인을 죽이는 전쟁을 거국적으로 행할 기력을 일으킬 수 없는 인종이라고 단정짓는데 상당히 그럴듯했어요.

그리고 요시키 형사 시리즈가 다 이런지는 모르겠지만 여정 미스터리 느낌을 준다는 게 특이했는데, 홋카이도나 센다이는 물론이고 도쿄를 상세히 설명해주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감성으로 접할 수 있으니까요. 첫 사건이 벌어지는 아사쿠사라던가 요시와라, 구레시타 노인의 산책길인 세이로카 병원 – 쓰쿠타오하시 다리 근처에 대한 묘사 등이 대표적입니다. 아사쿠사만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한 번 가 보고 싶어집니다. 그러고 보니 일본 여행도 갔다 온 지 참 오래되었군요.

아울러 거의 50여 페이지에 걸쳐 에도시대 요시와라 유흥 문화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도 현학적인 측면에서 나쁘지 않았습니다. 요시키 형사가 피해자의 과거 근무처였던 요시와라를 탐문하며 요시와라와 에도시대 유곽 문화에 대해 설명을 듣는 식인데, 디테일이 상당한 수준이었거든요. "에도 일본"에서 읽었던 것과 비슷하지만 훨씬 상세했어요.

그러나 이러한 사회파, 여정 미스터리, 현학적 요소 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작가의 명성에서 기대했던 신본격 추리소설로의 가치는 기대 이하라 아쉽습니다. 무려 500페이지나 되는 대장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사건만 놓고 보면 스케일 크고 전개도 꽤 흥미롭긴 합니다. 열차 안에서 피에로가 화장실에 틀어박혀 권총 자살을 하였는데 그 직후 시체가 사라졌다, 투신 자살로 머리가 잘린 시체가 벌떡 일어나 걸어 나왔다, 달리던 열차가 갑자기 하늘로 들려 올라가 기차가 탈선했다는 등의 상상하기 어려운 불가능 범죄가 연이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불가능 상황에 여름벌레의 날갯소리와 같은 소리가 들려왔고, 빨간 색으로 눈이 빛나는 거인이 보였다는 등의 기이함도 더해져 있고요.

하지만 밝혀진 진상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피에로 사건만 해도 여태영이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라는게 동기라는고 설명되데, 여태영은 그냥 도망쳤어도 아무 상관없었습니다. 여태명과 아라마사의 시체가 함께 발견되면 서로 싸우다 죽은 것으로 사건이 종결되었을 테니까요. 아니면 여태명의 시체만 중간에 숨기고 그냥 삿쇼선을 타고 도주하면 되잖아요? 어릿광대가 여태영이라는 게 밝혀지는 것도 아니고... 여튼 들인 노력에 비하면 얻은 게 별로 없습니다. 실제로 아라마사 사건의 경우 여태영은 용의선상에조차 오르지 않았으니 완벽한 뻘짓이었어요.

게다가 열차의 탈선은 순전히 우연이었고 거인의 정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작중에서 "기발한 발상이 하늘을 움직인 결과"라고 설명될 정도로 우연에 기인한 현상으로, 불필요한 장치였습니다. 이야기의 복잡성을 더하기 위해 억지로 집어넣은 느낌이에요. 어차피 독자가 여태영 – 여태명 형제의 존재를 알게 되면 투신 자살한 시체와 트릭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고요.

그 외에도 기차 시간표가 등장하지만 핵심 요소는 아니고, 오히려 공정한 추리를 방해한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지도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탓에 핵심 트릭이 뒤늦게 밝혀지는데, 그 동네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 법한 트릭이라서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은 게 외려 더 이상했습니다. 참고로, 조금 이채로웠던 것은 우시코시 형사가 요시키와 만나기 위한 편지에서 기차 시간표를 보고 어떤 기차 몇 호를 타라고 지정하는 문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뼛속까지 기차 시간표 형사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좀 웃겼어요.

마지막에 진상이 밝혀지니 나메카와(여태영)가 처음에 살인 사건을 저지르는 상황에 대한 설득력이 없어진다는 것도 그닥입니다. 소비세 때문에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하거나, 과거 사건의 복수 때문으로 밝혀지거나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아라마사를 죽인 것 때문이라면 어차피 공소시효가 지난 것일 뿐 아니라 당시 상황은 충분히 정상 참작을 받을 만한 것인데... 왜 치매에 걸린 것처럼 위장해서 입을 다물었는지가 설명되지 않아 답답했습니다. 초절정 미소녀였던 사쿠라이가 30년이 지난 뒤 폭삭 삭아버린 것에 대해서 설명이 없는 것도 조금 의아한 점이었고요.

그리고 일본 연호로 연도를 표시한 것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국내 독자를 위해 모두 현대의 서력을 병기하여 주는 배려가 필요했습니다. 조금은 어색한 문체, 예를 들자면 "신호에 멈추어 섰다. 횡단보도의 신호가 빨강이었다. 바람에 봄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벚꽃 냄새와 비슷했다. 따뜻하지만 희미한 광기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노인은 학생처럼 보이는 옆에 선 젊은이의 어깨 밑에 가려질 정도로 키가 작았다"와 같은 묘사는 신호에 멈춘 것과 벚꽃 냄새, 노인의 체구를 두서없이 나열한 느낌이고요. 보다 깔끔하게 "신호가 빨강이라 멈추어 섰다. 따뜻하지만 희미한 광기가 느껴지는 봄 냄새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라는 식으로 정리하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아요. 뭐 제가 문체를 지적할 수준의 전문성이 있는건 아닙니다만.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사회고발적인 성격은 높이 평가할 만하고 특히 강제 징용 조선인에 대한 부분은 만점을 주고 싶습니다. 시마다 소지의 또 다른 면을 접한 것도 반가왔고요. 그러나 추리적인 요소가 500페이지나 되는 대장편치고는 알맹이가 없어서 감점합니다.

그래도 일본인 작가가 반성의 의미로 쓴 "강제 징용된 조선인"에 대한 텍스트로는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시마다 소지라는 작가에 대해 다시 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9/06/21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 - 나카야마 시치리 / 김성미 : 별점 2점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 - 4점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김성미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건 복지 사무소 과장 미쿠모가 납치당했다. 그리고 보름 후, 결박당해 아사(餓死)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참혹한 범행 방식을 볼 때 원한 관계가 의심되었지만 피해자는 직장 내, 외적으로 인격자로 모든 이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수사에 난항을 겪던 경찰 앞에 두 번째 아사 시체가 나타났다. 피해자 조노우치 타케루는 지방 의회 의원으로, 살해 방식을 비롯하여 모든 점에서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였다. 피해자들의 접점을 찾던 경찰 도마시노와 하스다는 그들이 8년 전, 한 지방 보건 복지 사무소에서 함께 근무했었다는 걸 알아냈다. 8년 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으며, 범인은 누구인가?

"호의라든가 배려라는 건, 일대일로 주고받는 게 아니야. 해준 일에 감사했다면 너도 똑같이 낯선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면 돼. 그런 일들이 점점 퍼지고 퍼져 세상은 점점 좋아지는거야." - 케이

비교적 재미있게 읽었던 범죄 스릴러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의 저자 나카야마 시치리의 장편입니다. 전작과 같은 화끈한 범죄 스릴러를 기대했는데, 의외로 고전적인 정통 사회파 범죄 소설이네요.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 때문에 사건이 일어나고, 트릭보다는 "동기" 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요.
그러나 따지고 보면 "개구리 남자"도 형법 39조의 모순을 다룬 사회파 추리, 범죄 소설이기는 했었지요. 사회적인 이슈를 전면으로 다루면서도 진범이 아닌 사람을 1인칭에 가깝게 묘사하여 진범처럼 내세우는 전개, 그리고 진범이 따로 있다는 반전도 "개구리 남자"와 완전히 똑같다고 할 수 있고요.

하지만 "개구리 남자"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추리, 범죄보다 사회 고발 쪽에 훨씬 큰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작품에서 고발하는건 기초 생활 수급자와 생활 보조금 관련 문제인데 정말 철저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다루어 집니다. 특히나 아사(餓死)라는 살해 방식을 선택한 이유인 8년전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압권입니다. 생활 보조금이 너무나도 필요했던, 그야말로 죽기 일보 직전의 케이 할머니의 서류 접수를 피해자들이 거절해서 할머니가 굶어 죽는 사건이 주요 관계자인 도네 카스하시 시점으로 처절하게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마지막에 먹은 건 역전 앞에서 무료로 나누어주는 휴지였다니 말 다했지요. 원인이자 사건의 동기인 피해자들의 말도 안되는 탁상 행정에 대한 묘사는 실제 생활 보조금 지급이 얼마나 부실하게 관리되는지를 재고하게 만들며, 또한 독자도 함께 분노하게 만듭니다.

이와 함께 예산 부족과 노령층 인구 등 기초 생활 수급자의 급격한 증가로 철저한 심사가 필요하다는 현실을 수사 과정에 결합해서 전개하는 장면도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생활 보조금 지급 대상자들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설득력을 더 해 주고요. 희미하게 시큼하고, 희미하게 달달하다는 '가난의 냄새' 묘사에서 시작하여 생활 보조금 지급에 대한 불법 행위라던가 기초 생활 수급자들의 절규가 눈 앞에서 보는 듯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는 덕분입니다. 정말 자료 조사를 철저하게 했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너무 사회 고발 쪽 비중이 큰 탓에 추리, 범죄물로는 점수를 줄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애초에 추리라는건 존재하지 않는 탓입니다. 그냥 경찰의 수사만 있을 뿐이니까요. 게다가 도네 카스하시가 범인이 아니고 마루야마 스가오가 범인이었다는 반전은 급작스러울 뿐 아니라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케이 할머니 사망 당시 중학생이었던 마루야마 스가오가 8년간 증오를 품고 있다가 범행을 벌인 이유가 대체 뭘까요? 게다가 본인 스스로 생활 보조금 지급 업무를 진행하게 되었다면, 더더욱 피해자들의 불가피한 사정과 법률적으로 하자는 없는 행동이라는건 알았을텐데 말이지요.
이렇게 억지스럽게 반전을 집어넣느니 도네가 범인인 도서 추리물 형태로 구성하는게 더 깔끔하고 명확했을겁니다. 정 간짱이 필요했다면 케이 할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불쌍한 사람을 돕는 착한 어른이 됐다 정도면 괜찮았을거에요. 캐릭터에게 급격한 변화를 주는게 작가의 특기 같은데,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추리적으로 건질게 없다면 범죄물로의 가치라도 있어야 할텐데 역시나 함량 미달입니다. 초반, 자신의 족적을 숨기기 위해 사이즈 범위가 넓고 바닥 무늬가 없는 슬리퍼를 신었다는 디테일 정도만 볼만하며 그 외에는 전부 대충 넘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납치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미쿠모 과장의 경우는 마루야마 스가오가 부하 직원이라 방심했을테니 납치가 용이했다 치더라도, 두번째 피해자 조노우치, 세번째 피해자(가 될 뻔한) 가미사키를 쉽게 납치한 방법은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인 도네의 행동도 이해되지 않는건 마찬가지입니다. 대표적인게 작품의 절정부라 할 수 있는, 공항에서 변장한 도네를 경찰이 체포하는 장면입니다. 도네의 목적은 마루야마의 범행을 막기 위해 가미사키를 공항에서 납치하려 했다는건데 이게 말이나 됩니까? 공항에서 경찰과 대치하느니 마루야마의 뒤를 쫓아 범행을 막는게 훨씬 현실적이잖아요. 이야기 속에서 도네가 진범이 아니라는걸 너무 작위적으로 숨기고 있는 것도 문제고요.

마지막으로, 휴지를 먹다 죽어간 케이 할머니의 죽음이라는 동기는 처절하지만 나름 수입이 있었던 도네가 단지 '찾아뵙지 못해서' 할머니가 아사한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송금을 하거나, 배달을 시키거나 하는 등 직접 찾아가지 않아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었을텐데요. 작 중에서도 설명되지만 '누군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생활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되는데, 도네는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누가 보아도 할머니는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이를 두고 출장을 갔다는건 도네 역시 할머니 죽음을 방조했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할머니 사망 후 무려 10년 형을 받을 정도로 폭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역시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에요. 복수보다는 속죄를 해야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얼마전 아베 총리가 말했듯,' 노후 자금으로 2억이 필요하다'는게 충분히 이해가 될 정도로 사회파 소설로의 가치는 높지만 추리, 범죄물로는 점수를 줄 여지가 없어서 감점합니다. 생활 보조금 관련된 이슈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읽어보셔도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시다면 딱히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13/07/22

일본의 검은 안개 (상) - 마쓰모토 세이초 / 김경남 : 별점 2.5점

일본의 검은 안개 - 상 - 6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모비딕

마쓰모토 세이초가 발표하여 일세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논픽션이 드디어 정식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이런 책까지 읽을 수 있게 되다니, 정말 세상이 좋아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 작품은 총 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권에는 모두 6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 『일본의 검은 안개』를 헤쳐가는 방법 - 모비딕 편집부 서문
  • 1장: 출근길에 사라진 총재 - 시모야마 국철총재 모살론
  • 2장: 10분간 2,000피트, 고도 유지 - 목성호 추락 사건
  • 3장: 누가 자전거를 쐈는가 - 시라토리 사건
  • 4장: 쓸모 있는 자와 쓸모 없는 자 - 라스트보로프 사건
  • 5장: 혁명을 파는 남자 - 이토 리쓰 사건
  • 6장: 검은 돈의 뿌리, 빙산의 일각 - 2대 부정부패 사건

사회파 추리소설은 사회 고발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논픽션과 유사한 면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회파 추리소설의 거장이자 실제 언론인이기도 했던 마쓰모토 세이초가 쓴 논픽션이, 단순한 사건 추적을 넘어 흥미로운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를 선사해 주는건 그렇기 때문이겠지요.

다만, 이 책에 실린 사건들은 발표 당시 일본에서는 큰 반향을 일으켰겠지만,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한국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점은 아쉬웠습니다. 저 역시 이름이라도 들어본 사건은 ‘시모야마 국철총재 사건’ 하나뿐이었거든요. 그런 이유로 별점은 2.5점입니다.

물론 거장의 대표 논픽션이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작품임에는 틀림없지만, 같은 논픽션이라면 국내 추리 애호가 분들께는 다루는 사건 자체가 좀 더 흥미로운 "미스터리의 계보"를 먼저 추천드립니다.

"출근길에 사라진 총재"
‘빌리 배트’에도 등장했던, 시모야마 국철총재가 실종 후 열차에 치인 시신으로 발견된 사건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수사는 자살로 종결되었지만, 마쓰모토 세이초는 이를 미군정 G2와 GS 간의 권력 다툼에서 비롯된 모략으로 해석하며 다양한 정황과 증거를 통해 설득력 있게 제시합니다.

특히 시모야마 총재의 속옷에만 묻어 있던 기름, 절단된 시신과 멀쩡한 겉옷, 사체에서 나온 색색의 가루 등은 모두 치밀하게 분석되며, 그가 어디에 감금되었는지를 추리하는 장면이나 기차 시간표를 통해 사건을 재구성하는 장면은 마치 본격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를 줍니다. 논픽션으로도, 재미로도 뛰어난 이야기로,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0분간 2,000피트, 고도 유지"
1952년, 33명의 승객을 태운 채 추락한 ‘목성호’ 항공기의 사고를 다룬 이야기입니다. 유일한 여성 승객이었던 오하라인 요코가 다이아몬드 밀수 공작의 희생양이라는 가설도 등장하지만, 점령기 미군의 실수였을 가능성으로 마무리되어 결말은 다소 싱거웠습니다. 분량도 25페이지 남짓으로 짧은 탓에, 여러모로 큰 인상을 주지는 못하네요.

"누가 자전거를 쐈는가"
삿포로에서 발생한 경찰관 시라토리 사살 사건의 전말을 다루고 있습니다. 공산당 조직을 해체하려는 모략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하지만, 사건 자체가 한국 독자 입장에서는 그리 흥미롭지 않아 몰입이 어려웠습니다. 유사한 일이 한국에서는 자주 벌어졌던 탓도 있을 것 같습니다.

"쓸모 있는 자와 쓸모 없는 자"
주일 소련 대표부의 라스트보로프가 실종 후 미국으로 망명한 사건을 추적합니다. 처음에는 대단한 인물인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이렇다 할 정보도 없는 인물로 밝혀져 다소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냉전기의 일본이 미·소 간의 첩보 충돌 지대였다는 역사적 의미는 느껴졌지만, 지금의 독자들에게는 큰 흥미를 주기 어렵습니다.

"혁명을 파는 남자"
일본 공산당 내 실력자였던 이토 리쓰의 제명 사건을 통해 그의 이중 스파이 행위를 조명한 이야기입니다. 개인적 욕심과 비겁함으로 인해 좌우를 오가며 배신을 일삼는 인물의 행보는 읽는 재미가 있었으나, 스파이 행위 자체는 단순한 이간질에 불과해 큰 임팩트는 없었습니다. 중국에서 27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는 후일담은 충격적이지만, 그만큼의 무게감 있는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검은 돈의 뿌리, 빙산의 일각"
쇼덴 사건과 조선 사건이라는 두 건의 부정부패 사건을 다룹니다. 쇼덴 사건은 GHQ와 관련된 정치적 공작이 얽혀 있어 흥미보다는 복잡한 뒷사정 중심으로 흐르고, 오히려 평범한 고발에서 시작된 조선 사건 쪽이 훨씬 인상 깊었습니다. 결국 수사는 정치적 이유로 흐지부지 마무리되며, 지금의 대한민국 현실과도 유사하다는 점에서 씁쓸함이 남는 이야기였습니다.

2015/11/09

붉은 손가락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붉은 손가락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년 가장 아키오는 어느날, 아내 야에코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고 서둘러 귀가했다. 그리고 정원에서 어린 소녀의 시체를 발견했다. 범인은 중학생인 아들 나오미였다. 다급히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아키오는 시체를 버렸지만 곧바로 들통났다. 거듭되는 수사에 큰 압박을 느낀 아키오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범인으로 내세우는 폐륜을 저지르는데...

가가 형사 시리즈. 최근 가가 형사 시리즈를 주로 읽는 이유는 도서관 탓입니다. 회사 근처에 생겨 자주 이용하게 된 도서관이 소설류는 책장 하나에 불과할 정도로 자료는 빈약한데, 가가 형사 시리즈만 이상하게도 전권이 있더라고요. 사서분 취향이겠죠. 덕분에 몰아서 읽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시리즈 중에서 비교적 최신작으로 2007년도 고노미스 9위를 차지 했었습니다. 300페이지가 안 되는 분량으로 장편보다는 중편에 가깝습니다. 원래 단편으로 발표된 작품을 개작했다고 하는군요.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일본 현대 사회 문제점을 대변하는 마츠우라 집안에 대한 묘사입니다. 고부간의 갈등과 가사, 가정 교육 모두를 아내에게 맡기고 바람까지 피우는 무신경한 아버지, 시가에 애정을 전혀 보이지 않는 어머니, 왕따를 당한 뒤 극도의 이기적 성향을 보이는 아들, 거기에 치매에 걸린 할머니까지! 겉보기에만 정상일 뿐 썩을 대로 썩은, 더 이상 가정이라고 부를 수 없는 가정 묘사가 정말이지 아주 빼어나요.
아울러 콩가루 집안 묘사는 극도의 개인화를, 치매 노인을 모시고 사는 문제는 노령화를, 그리고 어머니의 치매를 이용하여 아들의 범행을 덮으려 하나 정작 어머니는 치매가 아니었다는 충격적인 반전을 통해 세대 간 단절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이 반전은 정말 대단합니다. 몇 년간 함께 산 가족이 어머니의 치매 여부도 모르다니!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 덕분에 막장 패륜 범죄 드라마가 더 그럴싸한 얼개와 완성도를 갖추게 되었네요.

이렇듯 현대 일본 사회 문제에 대한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발하고 있는 병폐가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선이라는 점에서 더 무섭더군요.

그리고 아들 나오미 캐릭터가 상상 초월의 비호감이라 읽는 내내 짜증남과 동시에 소년범에 대해서는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확신이 또다시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놈이 커서 제대로 된 인간이 될 것 같지도 않거든요. 끽해야 여든살 아버지를 살해한 쉰살 (실제로는 49) 히키코모리처럼 살게 될 테니 차라리 감방 속에서 사회생활이라도 익히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요?

그래도 이놈이 마지막에 가가에게 멱살을 잡혀 끌려나와 체포되는 장면은 아주 좋았습니다. 멱살이 아니라 쌍욕을 하면서 작살을 내 버렸어야 하는 건데 말이지요.

여튼, 이렇게 장점이 많은데 단점도 명확합니다. 추리적으로 별로라는 겁니다. 그간의 가가 형사 시리즈는 트릭 측면에서, 아니면 와이더닛 계열로 추리적인 완성도는 비교적 높은 편이었는데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최초 범행을 근처 주택 거주자로 특정하고 용의자를 짚어낸 가가의 추리는 볼 만하고, 범인이 먼저 밝혀진 뒤 여러 가지 범인의 계획을 독자에게 먼저 알려주는 식으로 도서 추리물 형식을 띤 건 나쁘지는 않습니다. 앞서 말했던 반전도 대단하고요.

그러나 피해자가 확인한 e-mail을 추적했다면 진범이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니 마츠우라의 계획은 그냥 약간의 시간 벌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래서야 전혀 드라마가 될 수 없죠. 또 어머니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결정적 증거인 "붉은 손가락" 역시 별 의미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본인 스스로 아들이 계속 자신을 범인으로 몰면 진상을 고백할 심산이었으니까요.

어머니가 치매가 아니었다는 것을 가가가 알게 된 것이 "눈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등, 극적 반전과 관련해서는 독자에게 제공하는 정보가 거의 없다는 것도 공정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너무 무거워서 읽기 편한 작품도 아니고 추리적으로 별로라 감점합니다만 사회파 미스터리로 기본은 해 주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이렇게 살아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긴 하니까요. 제 경우에는 외할머니가 치매에 걸리셨다가 얼마 전 돌아가셨기에 더더욱 남 이야기 같지 않았습니다. 요양원에 모시긴 했지만 그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지요. 고령화가 가속화되고 있는데 이러한 부분에서 뭔가 해결책이 나와야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딸은 정말 잘 키워야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해 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를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가가 형사에 대한 묘사도 꽤나 상세하게 등장합니다. 가가의 아버지를 지극히 생각하는 사촌동생 마츠미야가 등장해서 가가와 컴비를 이루어 수사를 펼치고, 가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등 꽤나 굵직한 개인사가 펼쳐지죠.

그런데 가가의 아버지가 가가에게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는 말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어머니는 찾아올 사람이 찾지 못해 홀로 죽어갔지만, 찾아올 사람이 있는데도 오지 말라고 하는 건 그것 때문에 자식이 먹을 욕을 생각하지 않은 자기 욕심에 불과합니다. 아버지의 유언 대신이라면 저도 따르기야 하겠지만 이런 억지 외로움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습니다. 게다가 아들은 안 되는데 마츠미야는 된다? 무슨 기준인건지 모르겠네요.

2026/02/13

존재의 모든 것을 - 시오타 다케시 / 이현주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친했던 형사 나카자와의 유지를 받아, 다이니치 신문 지국장 몬덴 지로는 30년 전 유괴 사건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했다. 나이토 료라는 아이가 유괴되고 2년 후 조부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직 범인은 체포하지 못했던 사건이었다.

조사를 통해 피해자 료가 사실화로 유명한 화가 기사라기 슈와 동일인물이며, 수사선상에 떠올랐던 용의자 노모토 마사히코의 남동생인 화가 노모토 다카유키와 같은 같은 화랑에 속해있다는게 드러났고, 몬덴은 노모토 다카유키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2023년 경, 여러 리스트에서 꽤 높은 순위를 기록했던 유괴 소재의 범죄 스럴러 드라마입니다.

초반의 아이가 유괴된 상황에서 경찰과 피해자 가족이 중심이 되는 몸값 전달 과정에 대한 묘사는 상세하면서도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특히 범인과의 전화 통화, 그리고 여러 장소를 거쳐 이동하며 피해 아동 료의 조부 기지마가 탈진하는 장면이 아주 박진감 넘칩니다. 또한 유괴범들이 경찰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본래 목적이었던 유괴에 앞서 다른 유괴를 벌인다는 설정, 그리고 유괴범들이 몸값을 받는 데 실패한 뒤 사라졌던 피해 소년 료가 2년 후 조부모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전개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소재였습니다.
30년 뒤, 기자 몬덴이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 구성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저자가 신문기자 출신으로, 그래서인지 몬덴 지로의 취재 과정에 대한 묘사가 아주 상세한 덕분입니다.

몬덴이 료를 보호했던 화가 노모토 다카히코 가족의 이동 경로를 따라 도쿄, 시가현 비와호, 홋카이도 등을 순례하듯 따라가는 장면에서는 여정 미스터리의 분위기도 엿볼 수 있었고, 지역의 풍광이나 명소들을 노모토의 ‘사실화’ 화풍과 연결 지어 서술하는 방식도 잘 어울렸습니다. 

사진과 다르게 모든 곳에 촛점이 맞고 추격해 오는 듯한 박력이 느껴진다는 사실화에 대한 설명도 발군입니다.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말이지요. '하이퍼 리얼리즘' 장르와 같다고 생각되는데, 몇 작품 찾아보니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어 보입니다. 다만, 사진과는 다르게 생성형 AI로 추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닌가 싶기는 하네요. 이건 화가들이 고민하고 극복해야 할 문제이겠지만요.

이렇게 묘사는 남다른 데가 있는데, 문제는 초반 유괴극의 묘사를 제외하면 범죄 스릴러라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화가로 성공한 현재의 료를 과거에 돌봤던 인물이 유력 용의자 노모토 마사히코의 동생인 사실화가 노모토 다카유키라는 사실이 너무 일찍 밝혀지는 탓이 큽니다. 이후 전개는 노모토 다카유키의 과거를 추적하는 흐름일 뿐이며, 그가 아내 유미와 함께 료를 정성껏 보살폈다는 점도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이후 이야기는 스릴러보다는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범죄라는 행위가 없으니 당연하지요. 유괴극도 몸값을 받아내는데 별다른 아이디어가 없어서 맥이 빠지고요.

몬덴의 추적극도 그리 드라마틱하지 않습니다. 현장을 발로 뛰는 정성은 높이 평가할 수 있으나, 결정적인 단서를 얻는 과정들이 대부분 우연에 의존하기 때문에 몰입감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노모토의 그림을 본 뒤 부터는 더 논할 가치가 없습니다. 노모토는 자신이 도주하며 머물렀던 곳을 사실화 그림으로 남겼기 때문입니다. 즉, 사진 속 장소만 찾아다니면 됩니다. 

그리고 료가 스스로 과거를 밝히면 충분한 이야기인데, 왜 이처럼 기자의 조사가 필요했는냐는 문제도 큽니다.  공소시효도 이미 지났고, 료는 명백한 피해자이기 때문에 몬덴에게 추적을 맡기고 사건을 숨길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를 정성껏 길러준 노모토 부부를 위해서라도 진상을 밝히고 동정을 이끌어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화가로서의 노모토를 위해서라도요.
몬덴 역시 왜 이 사건을 추적하는지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문하지만, 기사화해서 화제를 일으키고 돈을 벌겠다는게 핵심일터라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노모토 이야기를 통해 일본 화단계의 부조리를 드러내려는 시도도 별로입니다. 약간 사회파적인 느낌을 주기는 하는데, 노모토가 화단을 떠난 결정적 이유는 형의 유괴 사건에 우연히 연루되어 도주한 것이라서 이러한 고발과는 연결하기가 애매합니다. 작중 언급도 되듯이 작가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팬인 듯 한데, 그냥 어설픈 흉내내기에 불과해 보였어요. 이렇게까지 큰 비중을 가질 내용도 아니었고요.
비중으로 친다면 료의 고등학교 동창인 리호의 등장은 더 큰 문제입니다. 그녀는 이야기 전개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리호는 그저 료의 천재성을 드러내기 위한, 그리고 약간의 화단과 백화점 관련 사회 고발 메시지를 언급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녀없이 몬덴의 추적극으로만 진행되었어도 충분했을 이야기에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유괴극을 다룬 범죄물로서는 초반을 제외하면 다른 유괴물 대비 장점을 찾기 어렵고, 이후의 전개도 추리나 스릴러의 측면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진상이 너무 일찍 밝혀지고, 이야기도 잘 짜여졌다는 인상을 주지 못하는 탓입니다. 별로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5/08/01

동트기 힘든 긴 밤 - 쓰진천 / 최정숙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하철 역에서 살해당한 남자가 들어있는 캐리어를 옮기던 남자가 체포되었다. 그는 유명한 변호사 장차오로, 피해자 장양과 금전 관계로 다투다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법정에서 그는 경찰의 권위에 눌려 허위 증언을 했다며 범행을 부인함과 더불어 결정적 알리바이를 제출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 때문에 사건은 전국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경찰은 장차오가 도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이는지 알아내기 위해 수학 천재인 옌량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20여년 전 있었던 허우구이핑 변사 사건 및 초등학생 아이 성상납이라는 추악한 범죄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게 서서히 드러난다...

중국 사회의 구조적 부패와 폭력, 권력형 범죄를 정면으로 다룬 사회파 추리 소설입니다. 초등학생을 성상납하는 추악한 범죄가 이루어졌음에도, 대기업 회장과 고위 정치인이 결탁하여 수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증거를 인멸하며, 주요 수사 관계자에게 누명을 씌워 파멸시키는 과정을 거침없이 보여줍니다. 이 모든 일이 20여 년 전인 2001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으며, 이런 내용을 담은 작품이 중국에서 정상적으로 발매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작품은 단순한 사회 고발에 그치지 않습니다. 쑨훙원의 비서 후이랑과 공안 리젠궈가 결탁하여 허우구이핑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유력한 증인이었던 딩춘메이도 살해하며, 딩춘메이를 살해한 왕하이쥔마저 죽이면서 사건을 철저히 은폐하는 과정은 범죄, 수사물로 충분한 재미와 완성도를 갖추고 있으며, 전개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입니다. 이처럼 극심한 후이랑과 리젠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우직하게 수사를 이어가는 장양과 주웨이의 모습은 감동을 불러일으키고요.

결국 사건이 영원히 은폐되나 싶었지만, 장양, 주웨이, 천민장, 장차오가 힘을 합쳐 거짓 살인 사건을 만들어 이를 공론화하는 전개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특히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장양이 자살한 뒤, 그 시간에 알리바이를 만든 장차오가 지하철에서 소동을 일으켜 사람들의 주목을 끈 다음, 시체를 드러내는 도입부는 아주 인상적입니다. 단순히 여론을 환기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동 성매매를 했던 고위 정치인 샤리핑의 친자 검사를 비밀리에 진행해, 그가 피해자에게 출산까지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이야기 절정 부분의 쾌감도 강렬하고요.
샤리핑이 최종 악역이 아니라, 그 위에 더 큰 흑막이 존재해서 사건에 관여했던 인물들은 모두 자살하거나 사고사로 죽고, 장양의 조력자들도 감옥에 가게 되는 결말은 현실적이면서도 씁쓸한 여운을 남깁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핵심 축인 허우구이핑 사건을 다시 수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장양과 주웨이, 천민장의 우정과 의리, 정의감은 사나이의 가슴을 뜨겁게 만듭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거대한 악에 맞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는 이들의 모습에서는 사파가 지배하는 무림을 정의롭게 되돌리기 위해 나서는 영웅호걸들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작가의 전작에서도 느껴졌지만, 다른 작품에서 본 듯한 설정이 곳곳에 보입니다. 시한부 인생인 주인공이 자살했지만, 이를 살인 사건으로 꾸며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설정은 영화 "데이비드 게일"과 똑같아요. 심지어 자살 방법과 동영상으로 자살했다는 진상을 고백하는 장면까지 유사하다는건 아쉽습니다. 게다가 "데이비드 게일"은 사형 집행이 과연 옳은가?라는 주제에 맞는 설정이라서 와 닿는데, 장양이 이런 기묘한 방식으로 여론을 환기할 이유는 솔직히 설득력있게 설명되지는 못합니다. 왜 샤리핑 사진과 사건 진상을 그냥 인터넷에 뿌리지 않았을까요?

아울러 과거 허우구이핑 사건 조사 과정에서 벌어지는 후이랑과 리젠궈의 방해는 너무 뻔해서 뒤로 갈수록 식상합니다. 장양과 주웨이 등이 그들의 덫에 쉽게 걸리는 등의 전개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리젠궈가 어떤 식으로든 훼방놓을게 뻔한데, 계속 리젠궈의 방해에 걸려 좌절하는건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어요.  

인물 설정과 묘사도 허술합니다. 장차오가 갑자기 등장해서 정의감을 불태우는 이유부터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허우구이핑의 연인이었던 리징과 결혼한 게 그렇게 큰 죄책감을 느낄 일인지 의문이에요. 장차오 때문에 허우구이핑이 죽은게 아니니 연인의 자리를 차지한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허우구이핑의 사인이 잘못되었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한들, 그 당시에 장차오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고요. 오히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장양을 돕기 위해 갑자기 나타나는 전개가 더 어색했습니다.
반대로, 처음에 장양에게 사건에 뛰어들기를 강요했던 연인 우아이커와의 이별은 너무 급작스럽게 전개됩니다. 그렇게 헤어질 거였다면 우아이커의 비중을 초반에 크게 설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리즈의 주인공격인 수학 천재 옌량이 사실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문제는 큽니다. 옌량이 등장하지 않아도 이야기 전개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도 중국의 민낯을 드러낸 강렬함만큼은 놀랍고, 한번 잡으면 손 떼기 힘든 재미를 갖추고 있는건 분명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사회파 추리 소설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2024/08/21

자완: 확장판 (2023) - 애틀리 : 별점 2점


의적 비크람 라토레가 나타나 홀로 온갖 사회 병폐를 해결한다. 하지만 그의 행동에 위기 의식을 느낀 사악한 무기상 칼리는 비크람 라토레의 정체가 여자교도소 소장 아자드라는걸 알아냈다. 그러나 진짜 비크람 라토레가 나타났다. 비크람 라토레는 과거 칼리와의 악연으로 죽다 살아난 인물로 아자드는 그의 아들이었다. 부자는 손을 잡고 칼리를 끝장내 버린다.

인도에서 대흥행했다는 액션 영화. 넷플릭스로 감상했습니다.
빈민을 위해 싸우는 의적 이야기는 흔한지만 몇가지 차별화되는 점이 있습니다. 의적이 정체가 여자 교도소장으로 수감자 중 에이스(?) 들을 뽑아서 함께 작전을 펼친다는 설정처럼요. 대단하지는 않지만 아자드의 범죄 계획이 나름 펼쳐진다는 점에서는 피카레스크물 느낌도 살짝 납니다. 의적이 자신을 쫓는 여수사관(나르마다)과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한다는 설정도 재미나고요. 의외였던건 사회적인 요소가 들어갔다는 점입니다. 특히 마지막 아자드가 정체를 드러내며 '무지성적인 투표를 하지말고, 왜 이 사람에게 투표를 해야 하는지 물어봐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은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지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범죄물이나 사회 고발물로 가치가 높지는 않습니다. 이 작품의 핵심은 슈퍼스타 사룩 칸이 1인 2역을 맡은, 비크람 라토레와 아자드의 액션씬입니다. 격투씬의 합도 잘 맞아서 무척 찰지며, 무엇보다도 시가 연기를 내뿜는 비크람 라토레의 '후까시' 하나 만큼은 정말 대단합니다.
아무리 심각한 상황이건 상관없이, 슬로우 모션으로 점철되어 있고 장면장면이 화려해도 비상식적인게 많으나 이건 인도 영화의 특징이니 즐기면서 볼 만 합니다. 오히려 이런 비정상적인 화면들은 "죠죠" 시리즈를 인도에서 만들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그야말로 만화적이니까요.
아자드가 비크람 라토레를 자처하는 이유인 칼리에 대한 복수심도 설득력있게 그려졌고, 마지막 복수도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주제가도 흥겹고 신나고요.

중간중간 이야기가 엄청 건너뛴다던가, 누군가 죽는 심각한 상황에서 즐거운 대동단결 분위기로 급작스럽게 전환하는 등 연출과 전개가 다소 와 닿지 않는 부분은 있습니다. 방금 전에 의적단 멤버였던 락슈미가 죽어서 슬퍼하는데, 나르마다가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고 하니 다시 신나서 으쌰으쌰한다는건 정말 무슨 연출인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도 더운 여름, 킬링타임용으로 적절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내용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으시는 분들은 액션씬만 골라서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2014/08/11

사망 추정 시각 - 사쿠 다쓰키 / 이수미 : 별점 3점

사망 추정 시각 - 6점
사쿠 다쓰키 지음, 이수미 옮김/소담출판사

지역 유지 와타나베 쓰네조의 외동딸 미카가 유괴당한 뒤, 1억원의 몸값을 요구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은 치밀한 범인의 계획 때문에 몸값을 잃을까 우려하여 몸값 전달을 포기했다.
그러나 곧바로 미카의 시체가 발견되어 경찰은 수사상의 문제가 없었는지에 대한 비난 위기에 직면했고, 특히 현경의 모리타 본부장은 쓰네조로부터 검은 돈을 받아왔기 때문에 더욱 심한 압박을 받았다. 그래서 경찰은 사망 추정 시각에 대한 검시 조서를 조작했다. 동네 건달 쇼지를 범인으로 날조하기 위해서였다....

잘 몰랐던 작가의 신선한 법정물. 작품은 크게 세 부분 - 미카 사건의 상세한 수사과정이 펼쳐지는 초반부, 시체 근처의 지갑에서 돈을 훔친 뒤 시체를 발견하고 도망간 동네건달 고바야시 쇼지를 범인으로 날조하는 과정이 그려지는 중반부, 가와이 도모아키 변호사가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쇼지의 국선 변호인으로 임명된 뒤 조사해본 기록들을 통해 쇼지가 진범이 아님을 확신하고 항소심에 임하는 후반부 - 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법조인 출신이라는 작가의 이력다운 디테일이 제일 큰 장점입니다. 이는 작품을 읽는 내내 강하게 독자를 몰입하게 만듭니다. 특히 쇼지에게 누명을 씌우는 수사기관의 조작 과정은 정말 숨이 막힐 정도였습니다. 본부장 이하 모든 담당자가 어떻게든 쇼지를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날조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펼쳐지기 때문인데, 이후 가와이 변호사가 그 헛점을 여러개 눈치챌 정도로 허술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정말 이 정도까지 적극적으로 나서면 그 누구도 쉽게 빠져나갈 수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그야말로 천라지망이랄까요. 우리 나라에서도 검찰, 경찰때문에 실형을 선고받은 뒤 무죄가 된 실제 사례가 몇 건 있었기에 남의 일 같지 않기도 했고요. 바로 얼마 전에도 "친딸 살해 누명을 20년만에 벗어났다"는 뉴스가 떴었지요.

이외에도 유괴범이 몸값을 받아내려는 작전도 추리적으로 꽤 괜찮았고, 이후 가와이 변호사가 항소를 준비하고 법정에서 승부를 벌이는 후반부는 법정물의 모범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긴박감이 잘 살아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첫번째는 촌동네이고 동네 건달을 상대로 했다 하더라도, 조작 수사 과정은 지나쳤습니다. 인권을 무시한 강요된 수사로 미란다 원칙에 대한 설명도 없고, 변호사도 없는 상태에서 밤을 세워가면서 폭력으로 진술을 얻어낸다는건 작품의 무대인 2001년에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돼잖아요? 이게 20세기 초중반, 아니 한 80년대만 되도 그러려니 했을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초반부터 와타나베 쓰네조는 범인을 이미 짐작한 것으로 보이지만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유력한 용의자의 이름을 초반에 대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만, 딸은 금지옥엽처럼 귀하게 키웠을 뿐더러 자신의 적은 가차없이 부숴버리는 냉혈한으로 묘사되니까요. 딸이 죽은 다음에 모든 활력을 잃었다고는 해도, 최소한 복수는 했을 것 같은 인물이라 이상했어요. 범인이 유카를 죽인 이유도 솔직히 잘 와닿지 않았고요.

마지막으로 가와이 변호사의 노력은 항소재판은 속심이 아니라 사후심이라는 것, 즉 1심 판결이 타당하다는 재판장의 논리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끝나는데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경찰 수사의 왜곡이야 본부장이 검은 돈을 받은 것이 원인이라는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법부가, 그것도 현장과 떨어진 도쿄에서의 재판이 이렇게까지 대충 이루어진다는게 말이 될까요?

무엇보다도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는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고 쇼지의 누명 역시 벗겨지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작품이 약간 모호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작품의 가장 특이한 점이기도 한 부분인데, 제게는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범인도 멀쩡히 있고, 쇼지는 누명을 쓴 채 무기징역인데 가와이 변호사 혼자 사법제도의 모순을 깨닫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라는 식으로 끝맺으니 맥이 빠질 수 밖에요. 뭐 논픽션, 르포르타쥬 수준의 사회 고발성 강한 작품으로 본다면 큰 단점은 아니긴 합니다. 현실적이기도 할테고요. 그러나 하나의 완성된 소설로 보기에는 미완성인 결말로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신사회파라는 홍보문구에는 걸맞게 이 사회의(특히 사법제도) 모순, 부조리와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재미 또한 별로 빠지지 않는 만큼 법정물에 관심있으신 분들께 추천 드립니다.

2020/12/06

동급생 - 히가시노 게이고 / 민경욱 : 별점 2점

동급생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소미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문 슈분칸 고등학교 야구부 주장 니시하라 소이치는 야구부 매니저 미야마에 유키코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학기 초에 충동적으로 니시하라와 관계를 가졌었다. 니시하라는 유키코가 차도로 뛰어들은 이유는, 임신해서 산부인과에 가다가 고전 선생이자 학생 지도부 선생인 미사키 후지에에게 쫓긴 탓이었다는걸 알고 미사키 선생을 학생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미사키 선생이 교실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고, 천문부 부장 미즈무라 히로코가 자살 미수 상태에 빠졌다. 니시하라는 야구부 친구들과 탐문 조사를 벌인 끝에, 학생 지도부장인 하이토 선생이 처음부터 사건에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극 초기작으로 고등학교를 무대로 한 청춘 미스터리 장편입니다. 

추리적으로는 괜찮습니다. 범행 동기를 마지막 순간까지 교묘하게 감춘 덕입니다. 읽는 내내 미사키 후지에를 살해할만한 사람과 동기를 떠올리기 힘들거든요. 중반 이후 하이토 선생이 진범일거라는 의혹이 불거지기는 합니다. 유키코가 죽었을 때, 미사키 후지에 말고 하이토 선생도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요. 그러나 하이토의 알리바이는 트릭을 사용할 여지없이 완벽하게 입증됩니다. 사고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게 살인을 저지를만한 동기도 아니고요.
유키코의 부모님 쪽이 동기는 더 확실합니다. 미사키 후지에가 뒤쫓아 간 탓에 딸이 죽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들도 범인일 수는 없습니다. 학교에 몰래 숨어들어 미사키 후지에 선생을 불러내기도 어렵고, 압박 붕대를 이용하여 니시하라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용의자들은 모두 범행을 저지를 수 없어서 독자들을 고민하게 만드는데, 진상은 미사키 후지에가 자살했다는 겁니다. 생각도 못했지만 설득력은 높아요. 

그녀가 자살할 때 사용된 트릭도 볼거리입니다. 그녀는 목에 붕대를 감고 한쪽 끝은 가스 밸브에, 다른 한쪽 끝에 덤벨을 매단 뒤, 학생들 사물함 속 내용물을 이용하여 만든 경사를 이용하여 덤벨을 창 밖으로 굴려 내렸습니다. 무거운 덤벨은 분해하여 현장에서 조립했고요.
단서 제공도 본격물 수준으로 공정합니다. 미사키 후지에가 관리 담당자였던 육상부실에 압박 붕대와 덤벨이 있었다는 증언, 미사키 후지에 자살 현장에서 어떤 학생이 자기 사물함 속 내용물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 교실 내 가스 밸브와 창 틀에 생긴 자국에 대한 설명, 교실 밖 벽에 생긴 이상한 흔적 묘사 등 관련된 정보 모두가 독자에게도 남김없이 제공됩니다.

목을 멘 붕대에 자살한 이유와 하이토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절절하게 써 놓았기 때문에 - 사고 현장에 같이 있었는데 학생들은 나만 비난한다, 하이토 선생이 자기를 지켜줄걸로 믿었는데 여고생 제자와 불륜 관계를 가져서 나를 배신하더라 등 - 뒤늦게 연락을 받고 나타난 하이토 선생이 현장을 수습하고 살인으로 위장했다는 것도 그럴듯했어요.

아울러 사건에 대해 주인공 니시하라가 나름대로 추리력을 선보이는 장면들도 꽤 괜찮았습니다. 신문 기사를 토대로 미사키 후지에를 죽인 흉기는 리본이 아니라 압박 붕대라고 추리하는 장면, 미사키 선생 자택에 남겨져 있던 워드프로세서 속 시험 문제인 '만장기'는 이미 지난 학기 문제였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녀가 자살했다고 추리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물론 리본이 흉기라는게 언급되지 않은 이유가 신문 기사는 사실만 써야 하기 때문이라는건 근거가 빈약합니다. 흉기를 숨기는 건 범인 심문 때 써먹기 위해 경찰이 곧잘 벌이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한 마디로 소가 뒷걸음질치다가 쥐를 잡은 격이지요.

미조구치 형사의 추리력도 돋보입니다. 니시하라의 반응만으로 그가 유키코를 진짜 사랑하지 않았다는걸 알아냈다는건 억지스럽지만, 이를 철저한 수사로 뒷받침하고 있다는건 마음에 듭니다. 유키코에게 연하장도 보내지 않았고, 전화 한 통 없었고, 같이 찍은 사진 한 장 없었다는 등 증거는 차고 넘치니까요. 그 뒤 히로코와 니시하라가 연인이었다는걸 밝혀낸 과정도 설득력 넘치고, 니시하라가 미사키 후지에 사건 범인이 아님을 확신한 이유도 타당합니다. 미사키 선생이 니시하라를 만나는데 꽃단장을 하고 올 이유도 없고, 니시하라가 범행에 구태여 붕대를 쓸 이유는 없으니까요. 손으로 조르는게 당연하죠. 이렇게 전반적인 추리 관련 내용들은 모두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하지만 그 외의 나머지 부분들은 문제가 많더군요. 먼저, 니시하라를 비롯한 학생들이 선생님, 경찰 등 어른들 모두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치기어린 묘사는 불편했습니다. 선생님들에 대한 적대감이 특히 지나칠 정도에요. 선생님들 거의 모두를 학교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발악하는 악인으로 그려졌는데 공감하기도 힘들 뿐더러, 시대착오적인 묘사였다 생각됩니다.
니시하라의 여동생 하루미가 선천적으로 병을 가지고 태어난건, 미즈무라 히로코의 아버지가 임원으로 있는 반도체 공장에서 폐수를 방류한 탓이라는 곁가지 이야기도 사족으로 느껴집니다. 사회파 흉내를 낸 걸까요? 그러나 사회 고발성 메시지는 강하지 않고, 오히려 이 때문에 주인공 니시하라가 사건의 원흉이라는게 불거질 뿐입니다.
원래 니시하라는 미즈무라 히로코와 교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로코의 아버지를 만나 하루미가 병을 가지게 된 폐수 방류 사건에 대해 비난한 뒤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방황하다가 딱히 사랑한다는 감정도 없이 충동적으로 유키코와 관계를 가졌는데 그녀가 덜컥 임신하게 된 거지요. 한마디로 모든 사건의 원흉입니다. 유키코 부모님에게 살해당해도 할 말이 없을거에요. 이런 녀석이 주인공으로 나와서 교사들을 폄하하며 정당함을 어필한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와 닿을리가 없어요. 이런 점들 때문에 고등학생이 주인공이기는 하지만 청춘 미스터리 느낌도 거의 나지 않습니다. 교사, 어른들과 싸울 생각만 가득한,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들이라 풋풋함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탓입니다. 그나마 고등학교에서의 마지막 야구 시합에서 패한 뒤, 모든 힘든 과거는 떨쳐버리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마무리는 청춘물답습니다만... 앞서 이야기한대로 니시하라가 과거를 떨쳐버린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죗값을 치루는게 맞아요. 청춘이라는 말로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동기, 진상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았지만, 미사키 선생이 이렇게 복잡스럽게 자살 현장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는 점에서 작위적입니다. 그냥 교실 아무데서나 붕대로 목을 메면 끝날 일인데, 덤벨을 조립하고 굴려내리는 등의 방법을 사용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니시하라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해서? 어차피 하이토 선생이 뒷처리를 할 거라 현장의 상태는 상관이 없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적으로 볼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 외의 부분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감점합니다. 무엇보다도 주인공 니시하라는 최악이에요. 구태여 찾아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2024/03/09

웨스트포인트 2005 - 리 차일드 / 정경호 : 별점 2점

웨스트포인트 2005 - 6점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트릭, 진상 그리고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해진 목적지 없이 가장 먼저 출발하는 버스에 올라탄 잭 리처. 잠시 들른 휴게소에서 산책길에 나선 리처는 전당포 앞을 지나가다 진열창에 놓여 있는 반지를 보고 걸음을 멈춘다. 리처가 졸업한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의 2005년도 졸업 반지. 4년에 걸친 혹독한 훈련을 이겨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스러운 반지를 전당포에 맡길 졸업생은 아무도 없기에 리처는 반지의 주인인 여자 생도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하고 추적에 나섰다.
반지가 흘러들어온 경로를 더듬어가던 리처는 FBI 출신 사립탐정 테리 브라몰과 의뢰인 매켄지와 함께하게 되었다. 매켄지는 실종된 여자 생도 세레나의 쌍동이 언니였다.
우여곡절끝에 세레나는 군대에서 입었던 치명적인 얼굴 부상으로 각성제에 중독되었다는게 밝혀졌다. 리처는 세레나의 치료가 안정될 때까지 필요한 각성제를 확보하고 밀매 조직을 괴멸시킨 뒤, 우두머리 스콜피오마저도 처리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잭 리처 시리즈 22번째 작품. 원제는 "Midnight Line"입니다. "메이크 미"에서 이어지는 작품으로 미셸 장과 헤어진 직후부터 시작됩니다.

'웨스트포인트 졸업 반지를 전당포에 맏길 졸업생은 없다'는 취지로 반지 주인을 찾아나서는 초반부는 흥미진진합니다. 졸업 성적도 우수했고, 여러 전장에 참전해서 훈장까지 탔던 졸업생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전개가 일품입니다. 큰 부상을 입은 군인에게 주어지는 '퍼플 하트' 훈장, 그리고 '항상 얼굴을 감추고 숨어있었던 여자'라는 단서가 세레나는 얼굴에 큰 부상을 입었다는 추리로 이어지는 과정도 깔끔했고요. 이 추리는 독자들도 쉽게 할 수 있는 수준인데, 세레나와 함께 있다가 자살한 사이러스가 사타구니 총상으로 괴로워했다는건 신선한 아이디어였어요. 집안도 좋고 외모, 사지 멀쩡한 청년이 약물에 중독되어 결국 자살을 택한 이유가 없을테니 살해된게 아닐까?라는 의문을 품게 되는데, 알고보니 너무나도 타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니까요. 아,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
매켄지가 세레나의 언니라는걸 그녀의 빗으로 확인하는 장면, 그리고 세레나의 현재 소재를 사이러스의 집 근처에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결국 찾아내는 장면, 리처가 카우보이들에게 죽을 뻔 했을 때, 그들이 사실은 사이러스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는게 아니라는걸 깨닫는 장면 등 리처의 추리력이 발휘되는 장면은 그 외에도 많습니다. 
 
진통제의 위험성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도 인상적입니다. 주삿바늘같은게 아니라 TV에서 광고하는 제품을 소비하는 행위가 결국 마약 중독이라는 이야기로, 단순한 마약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제조, 판매되는 진통제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제대로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 문제를 고발한다는 측면에서는 일종의 '사회파'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세레나가 은신한 곳이 '라라미' 근처의 깡촌 뮬크로싱이라는건 재미있었어요. 예~전에 "라라미에서 온 사나이"라는 서부극 영화를 보고 잠깐 찾아봤을 때도 깡촌이라고 느꼈었는데, 지금 도 잊혀지길 원하는 사람이 은거하기 위해 선택하는 깡촌이라는게 신기했거든요. 한번 깡촌은 영원한 깡촌인거 같네요.

그렇지만 중반 이후는 다소 시시했습니다. 잭 리처가 세레나에게 이르는 과정도 끄나풀들을 찾아가 주먹질을 하고, 이미 죽거나 도망친 사람들의 집을 뒤지는게 전부입니다. 초반의 스콜피오의 부하들과의 대면, 그리고 스콜피오의 사주를 받은 카우보이들이 리처를 습격해서 죽이려하는 장면 외에는 위기도 전무하다시피 하고요. 
정교한 맛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스콜피오가 정식 의약품을 빼돌릴 수 있었던 방법 역시 석연치 않습니다. 군대용 의약품을 빼돌렸고, 이를 눈치챈 사이러스의 고발이 무위로 돌아갔다는 등의 설명이 있지만 이보다는 더 정교한 계획이 필요했습니다. 
스콜피오를 뒤쫓는 래피드시티의 형사 글로리아 나카무라 시점에서도 전개도 가끔 보여주는데, 그리 필요했던 내용은 아니었고요. 오히려 나카무라 형사의 컴퓨터 범죄가 친구가 스콜피오가 산 휴대폰 번호를 추리해내는 장면이 더 볼만했어요.

전개가 시시한만큼 리처의 활약이 그걸 보상해 주었어야 했는데 그렇지도 못합니다. 이 작품에서 리처는 스스로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습니다(스콜피오는 아마 죽었겠지만요)! 리처를 죽이려 했던 카우보이 중 한 명이 죽은건 오발 탓입니다. 마약상 스태클리를 죽인건 세레나고요. 리처는 놀랍게도 별다른 액션을 보이지 않습니다. 리처가 뭔가를 보여줘야 할 만큼 스콜피오 조직의 무력이 신통치 않은 탓도 큽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리처 시리즈의 매력을 느끼기는 힘들었습니다. 

2022/07/17

공주의 죽음 - 리전더 / 최해별 : 별점 2.5점

공주의 죽음 - 6점
리전더 지음, 최해별 옮김/프라하

오랫만에 읽어보는 미시사, 문화사 서적입니다. 이야기는 서기 6세기, 유목민족인 선비족 탁발씨가 건립했던 북위 왕조에서 일어났던 한 건의 형사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북위 난릉장공주와 그의 부마 유휘와 관련된 사건이지요.

유휘는 남방에서 도망 온 장군 유창의 손자입니다. 유창은 남조의 황족이었는데 궁정 내부의 권력 다툼에 연루되어 어쩔 수 없이 북쪽으로 도망친 겁니다. 이 때 휘하의 군대, 많은 인력과 재물을 가져왔던 덕에 북위 조정의 봉작을 받았고요. 손자 유휘가 공주와 혼인할 수 있었던 배경입니다. 

난릉장공주와 유휘는 대략 서기 500년 전후, 즉 선무제 즉위 초기에 혼인을 하였는데 유씨의 투기로 둘의 관계가 멀어지자, 당시 섭정을 하고 있었던 영태후 유휘의 작위를 빼앗기로 결정하고 이혼을 명령했습니다. 두 사람이 더 이상 부부로 살 이유가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이때는 그들이 결혼한 지 대략 10여 년이 흐른 뒤였고요. 그러나 일 년 후 아마도 공주의 청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데,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한 환관과 당시 두 사람의 상황을 조사하고 보고했던 황족의 대신이 함께 영태후에게 공주와 유휘의 재결합을 건의하였습니다. 영태후는 공주의 본성이 바뀌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두 사람의 관계가 개선의 여지가 없음을 걱정하여 동의하지 않았지만, 환관과 대신이 여러 차례 건의하자 이를 거절할 수 없어 태후는 결국 그들의 재결합을 허락하였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친히 공주가 출궁하는 것을 배웅하며 앞으로 조심해서 행동하라고 그녀를 타일렀지요. 그리고 대략 519년을 전후하여 공주는 임신을 했습니다. 문제는 유휘는 평민인 장지수의 여동생 장비와 진경화의 여동생 진혜맹 등과 간통을 했다는 거지요. 공주는 끝내 참지 못하고 유휘와 다시 충돌했습니다. "위서" 기록에 따르면 이 때 분노에 찬 유휘가 공주를 밀어 침대 밑으로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주는 다시 유휘에게 배를 차인 탓에 유산했고, 결국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곧바로 장씨, 진씨 남매 네 명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지만, 유휘는 도망쳤습니다. 조정은 모반대역죄에 상당하는 현상 액수를 내걸고 유휘를 잡으려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조정은 유휘와 용비, 혜맹 및 그들의 오빠들을 심판하고 처리해야 하는 문제로 한 차례 심각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황권을 옹호하고 공주를 보호하는 황족 세력(영태후)에 대항하여 한인 및 한화된 관료 집단이 가부장적 가족 윤리를 내세워 맞섰던 것이죠. 

이 책은 이 사건을 통해 중국의 가부장적 가족 윤리의 역사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황족 세력의 주장은 공주 뱃 속 아이도 황족이니, 황족을 죽인 유휘는 모반대역죄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관료 집단의 리더인 상서삼공랑중 최찬은 이는 아직 태어나지 않는 자기 자식을 죽인 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어요. 당시 북위의 법률도 "조부모, 부모가 분노하여 병기나 칼로 자손을 죽이면 5년 형, 구타하여 죽이면 4년 형에 처한다" 고 되어있었고요. 

설령 공주의 신분이 아무리 존귀하여 일반 여성과 비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녀가 유휘에게 시집 온 이상, 그녀가 임신한 태아는 유휘의 혈육이라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 예법에 따르면 여성은 일단 결혼을 하면 '가족정체성'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법률 역시 기혼 여성은 친정보다는 시댁을 '가족'으로 여겨야 한다고 강조하고요. 유휘가 공주를 구타하여 유산에 이르게 한 이 사건에서도 공주는 이미 친정에서 시댁으로 가족정체성이 전환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친정사람의 죄로 연좌될 필요도 없고 친정 사람들도 그녀의 죄로 처벌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됩니다. 즉, 공주 뱃속의 태아는 황실의 구성원이 아니며 유휘의 혈육이며 유휘가 범한 죄 역시 대역죄가 아니라는 논리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하늘이요, 남편은 처의 하늘"로 한 사람의 머리 위에 두 개의 하늘을 둘 수 없다면, 여성이 결혼하는 것은 곧 "하늘을 바꾸는 것", 즉 그녀가 지존으로 여겨야 하는 대상이 아버지에게서 남편으로 바뀌는 건 고대 예서의 뜻이라고 하네요.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전에 있었던, '출가외인' 사상하고도 일치하지요.

이 책은 이렇게 난릉 공주 사건에서 시작하여, 한과 당 사이 법률의 유가화(또는 유가 윤리의 법제화라 부를 수도 있겠다) 과정이 어떻게 되는지를 상세하게 안내해 줍니다. 단지 난릉 공주의 죽음과 같이 부부간 폭행 치사 뿐 아니라 간통죄에 대한 처벌, 사건 범인을 숨겨주는 문제, 죄인의 가족을 모두 처벌하는 '연좌'에 있어 법률 적용이 남, 녀 어떻게 달랐는지와 그 달라짐의 역사를 이러저런 사료를 바탕으로 하나씩 소개해 주고 있는 덕분입니다. 심지어 구타와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 확인에 대해서 당시 어떤 식으로 조사가 이루어졌는지까지 알려줄 정도입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 난릉 공주 사건 외에도 이 당시가 얼마나 심한 부계화 사회였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동위의 대신 두원의 글이 있습니다. 두원은 "남편은 처의 하늘이고 아버지는 자녀의 하늘이다. 일단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이면 모자 두 사람의 하늘이 동시에 무너지는 것이다. 어머니가 이미 나의 하늘을 무너뜨렸다면 나는 더 이상 그녀를 어머니로 여길 수 없으며, 반드시 그녀를 고발해야 한다. 반대로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했을 경우 '부존처비'와 '부존모비'에 근거해 자식된 이는 자기의 하늘을 고발할 수 없고, 이로써 자식이 아버지의 죄를 숨기는 것은 정상을 참작할 만하다."고 했다네요. 근거로는 의례, 상복의 원칙을 들고 있고요. 

하지만 아무리 '부계화'되었다 하더라도 단지 시집만 간다고 해서 시댁 사람이 되는건 아니라는 점도 특이했습니다. 예를 들어 동한 말기, 한 여성이 혼인 후 남편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남편이 병역을 회피하여 도주했다고 연좌되어 잡혀왔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법상 동뢰와 묘견 등의 예를 아직 행하지 않았기에, 아직 남편 집안 사람이 아니라 하여 죄를 묻지 아니했다고 하네요. 부계 사회였음에도 간통 여성에 대해서 딱히 심하게 처벌하지 않았다는 것도 조금 의외였고요.

이러한 한인과 한화된 관료 집단의 유교적인 논리에 영태후가 맞설 수 있었던 이유도 잘 설명해 줍니다. 선비족은 "계책을 세울 때는 부인을 따르며 오직 전장에서만 스스로 결정한다”는 유품을 지니고 있을 정도로 여성의 정치적 영향력이 컸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남쪽과 비교하면 여러모로 그 활동력은 엄청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무측천같은 다른 여성 통치자의 독특한 개혁과 영향력에 대해서도 비교적 소상하게 소개되고요.

난릉 공주 사건 외 다른 이야기들이 조금 두서없이 소개되는 감은 없잖아 있고,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설명되지 않는 글들의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발단이 된 사건도 재미있었을 뿐더러, 역사적으로 잘 알지 못했던 남북조 시기의 사회와 문화, 법률에 대해서 알 수 있었던 좋은 독서였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유휘는 붙잡혀 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집행 전에 사면령이 내려져 목숨을 건졌습니다. 심지어 영태후가 권력을 잃고 효명제가 정권을 잡자, 다시 봉작을 받기까지 했다네요.

2013/01/20

미스터리의 계보 - 마쓰모토 세이초 / 김욱 : 별점 4점

미스터리의 계보 - 8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욱 옮김/북스피어

사회파 추리소설의 거장 마츠모토 세이쵸의 논픽션. "전골을 먹는 여자", "두 명의 진범", "어둠 속을 내달리는 엽총"이라는 세 편의 이야기와 상당한 분량의 해설이 실려 있습니다.

"전골을 먹는 여자"는 군마현 호시오 마을에서 종전 직후 벌어진 식인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상호 간 도와주는 사회적 합의가 무너진 상황에서, 산골 마을의 무지와 야만이 결합해 벌어진 끔찍한 범죄입니다. 작가가 이 일대를 여행했을 때의 과정을 설명하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정말이지 엄청난 오지더군요.

내용은 사실 뻔합니다. "벽장 속의 치요"의 한 이야기와도 유사하지요. 그러나 논픽션이기에 훨씬 충격적일 뿐 아니라, 진상이 밝혀지는 부분에서 "도라는 왜 죽였어!"라고 윽박질렀을 때 범인이 답하는 "먹었어"라는 장면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찟했습니다. 이어서 설명해주는 노구치 오사부로, 스기무라 가즈요의 범행 역시 굉장히 흥미로웠고요.

근친 결혼으로 인한 저능한 가족 공동체라는 점에서는 영국의 소니 빈 일족 일화, 기아로 인한 범죄라는 점에서는 "얼라이브"나 난파선 구명보트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두 명의 진범"은 스즈가모리 석탑 부근에서 살해된 다나카 하루 사건을 다룹니다.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한 두 명 중 누구인지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일본의 사형 및 재판 제도 문제와 연결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억울한 용의자 다카무라의 자백 및 심문 조서에서 모순을 밝혀나가는 세이쵸의 전개가 인상적입니다. 특히 "흰색 고시마키가 두꺼운 플란넬 소재였다"라는 중요한 사항을 짚어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또한, 경찰의 갖가지 증거 조작과 고문으로 날조된 자백 탓에 두 번째 범인이 생겼으며, 진범이 유죄 판결을 받은 후에도 재판이 계속되어 6개월이 지난 다음에야 무죄로 풀려났다는 점에서, 제도적인 야만을 규탄하는 사회파적 의미도 강하게 느껴졌고요.

"어둠 속을 내달리는 엽총"은 미스터리, 범죄 매니아에게는 친숙한 쓰야마 사건을 파헤치는 내용입니다. 무려 31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경상을 입은 대량 살인 사건이죠. 워낙에 유명한 사건이라 대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범인 도이 무쓰오의 출생에서부터 범행에 이르는 과정을 현미경처럼 세밀하게 그리고 있어서 단숨에 읽어버릴 정도로 흡입력 넘쳤습니다.

외딴 산골의 문란한 성 풍속, 소문으로 비롯된 따돌림, 한 개인의 컴플렉스가 결합하여 벌어진 사건이라고 하는데, 피해 의식이라는 것은 주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그러나 위의 두 사건과는 다르게, 이 사건은 시대적 야만으로 빚어진 사건이 아니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세이쵸의 글만 보면 사회적인 따돌림과 본인 스스로의 컴플렉스가 만들어낸 괴물이라고 설명되지만, 한 마을 자체를 거의 날려버린 잔인무도한 범행에는 그 어떤 핑계도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보이네요. 우리나라의 우범곤 순경 사건이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다루었던 농약 음료수 사건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회적 격리가 필요한 인간 말종일 뿐이라 생각됩니다.

결론 내리자면, 세 편의 이야기 모두 흥미롭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읽으면서 전율이 느껴지는 충격적인 내용도 가득하고, 생각할 거리도 많이 던져줍니다. 또한, 작가의 명성에 걸맞는 미려하고 흡입력 있는 문장이 눈길을 사로잡으며, 무지와 야만이 범죄의 원인이라는 점을 폭로하는 사회파 작가다운 고발 정신도 살아 있는 명편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왜 거장이 거장인지를 알려주는 좋은 책이라 생각되네요. 아직 읽지 않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덧: 세이쵸의 원고지라는 부록이 들어있는데, 전혀 쓸데없는 물건이었습니다. 차라리 책값을 천 원이라도 낮추는 방안을 출판사에 건의드리는 바입니다.

2008/12/15

마크스의 산 - 다카무라 카오루 : 별점 4점

마크스의 산 I - 8점
다카무라 카오루 지음/고려원(고려원미디어)

1976년, 미나미 알프스에서 알콜중독자 노무자가 등산객을 살해한 사건이 벌어진 날, 같은 장소에서 일가족이 자살을 시도했고 어린 아들만 겨우 구조되었다. 1988년, 미나미 알프스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백골 사체가 발견되어 76년 사건의 범인 이와다가 재구속되었다. 
1992년, 전직 폭력단원이던 한 사나이가 알 수 없는 흉기로 두개골이 함몰된 사체로 발견되었고, 이후 연쇄 살인사건으로 발전했다. 수사 7계의 고다 형사는 사건 수사 중, 이 연쇄살인 사건이 76년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걸 알아내는데...

"석양에 빛나는 감" 이후 두 번째 다카무라 카오루 작품 리뷰입니다. "석양에 빛나는 감"의 주인공 고다 형사가 등장하는 "추리소설"로서, "석양에 빛나는 감"이 순문학에 가깝다면, 이 작품은 추리물로 보기에 손색없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추리적인 요소만 놓고 본다면, 약간은 도서추리적인 성향을 띄는 일종의 사회파 추리물입니다. 범인이 범행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의 행동과 사고를 독자가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도서추리적인 성격이 엿보이며, 사회의 모순과 비리에 대한 고발성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은 물론 경찰, 형사들이 사건을 수사해서 진범을 밝혀 나가는 부분은 전형적인 사회파 추리-수사물의 유전자를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습니다.

치밀하거나 잘 짜여진, 범인과 두뇌싸움을 펼치는 정통 추리 범죄물은 아니지만, 언뜻 보기에 관련없는 사건들에서 불거진 사소한 단서들을 통해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이 잘 짜여져 있어서 수사물로의 완성도가 높습니다. 무려 16년에 걸친 범죄의 복잡한 사슬이 상당히 치밀한 덕분이고요. 작가의 능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우연에 의지한 요소도 별로 없고 드러난 사실이 공정하다는 점도 추리적으로 좋은 점수를 줄 수 있습니다.

다카무라 카오루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묘사 역시 굉장히 좋습니다. 그 중에서도 심리, 성격묘사가 극한으로 잘 뽑혀 나온 작품이기도 합니다. 전작에서의 "석양에 빛나는 감"이라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시적인 묘사는 없지만, 그 대신 범인인 "마크스"의 심리 - 특히 광기 -에 대한 디테일이라던가 7계 반원들에 대한 캐릭터들의 묘사가 흡사 현미경을 보듯 잘 살아있습니다.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산"에 대한 묘사 역시 엄청난 자료 조사와 내공을 보여주었고요.

물론 과거의 사건에서 비롯되는 "마크스"라는 이름은 실존하는 유명 소설 "마크스의 산"을 지나치게 의식한 작위적인 설정으로 보였으며, 범인인 마크스의 사고방식이나 범행의 동기가 그다지 현실적이지는 못하다는 점, 범행이 나름 "운" 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 등은 약간 아쉽습니다. 그래도 작품의 가치를 저해할 정도는 아닌, 납득할만한 수준이었습니다. 범인의 병력이 사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이유라던가 간호사 피격사건 이후 폭주의 과정 등이 설득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죠. 사실 가장 큰 단점은 이 모든 사건이 탄탄했던 5명의 원조 "마크스" 중 한명의 유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조금은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라는 것이었습니다만...

어쨌건 나오키상을 수상하는 등 작가의 명성과 화려한 수상경력에 일조한 걸작답게 십수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고 메시지를 전해주는 좋은 작품입니다. 저 역시 10여년 전에 한번 읽었던 책이지만, 다시 꺼내어 읽어 보아도 새로움이 느껴지는 것이 과연 좋은 작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추리적 요소도 충분해서 추리 매니아도 공감할 수 있고, 화려한 문체와 심리묘사가 펼쳐지는 순문학적인 특성도 가지고 있어서 일반 독자분들께도 권해드릴만 합니다. 현재 절판 상태이긴 한데 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니까요...

2021/09/10

공기의 바닥 - 데즈카 오사무 : 별점 2점


데즈카 오사무가 1960년대 후반 ~ 1970년대 초반에 발표했던 성인풍 단편 극화 모음집입니다. "동경 표류 일기"를 읽고, 동시대 감성을 데즈카 오사무는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해서 찾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무려 열 네 편이나 되는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인간 드라마, 범죄극, 멜로물, 기묘한 맛, SF, 심지어 서부극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장르 스펙트럼을 보여줍니다. 성인물답게 정사 장면도 많고, 근친 상간에 수간!까지 등장한다는게 이채로왔고요. "블랙잭"으로 재기에 성공하기까지, 침체기에 놓였던 데즈카의 다양한 시도들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딱히 재미있지는 않더군요. 지금 읽기에는 진부한 설정과 내용이 많았고, 결말도 대체로 예상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예상 못했던 결말의 경우는, 그 결말이 딱히 좋다고 느껴지지도 않았고요. 완성도도 문제가 많습니다. 일부 작품의 경우는 기본적인 전개 구상도 없이 생각나는대로 그린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대표적인 예가 "카멜레온"입니다. 능력있는 직장인 카자마가 주인공인 기업 드라마로 시작해서, 카자마가 산업 스파이라는게 밝혀지면서부터 범죄물이 됩니다. 그러다가 카자마가 자신을 유혹했던 여자에게 배신당하고, 자신이 훔쳐낸 정보로 만들어낸 약의 실험 대상이 된 뒤에는 일종의 SF로 돌변합니다. 뇌 사용이 극대화되고 대신 끊임없는 식탐에 시달린다는 설정으로요. 그리고 카자마를 유혹한 여자는 카자마가 학생 운동을 할 때 밀고로 죽고만 친구의 동생으로 모든건 복수를 위해서였다는 복수극으로 바뀝니다. 결말은 카자마가 말도 없이 화염병을 던져서 여자와 그 아버지가 타고 온 헬기를 파괴한다는, 다소 허무한 마무리였고요. 식탐으로 기형이 되어버렸지만, 분명 머리가 좋아졌을 카자마인데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게 이상했고, 솔직히 뭘 이야기하려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수의 끝은 공멸이라는 걸까요? 설령 그렇다손 쳐도, 이 모든걸 설득력있게 풀어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분량이었습니다. 분량을 늘렸더라면 그래도 볼 만 했을텐데 말이지요.

엄청난 인종 차별 주의자 오하라가 베트남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고, 부하였던 흑인 죠의 심장을 이식받은 딜레마를 그린 "죠를 방문한 남자", 홈리스 거지로 분장하는 취미가 있는 사장이 한 눈에 반한 거리의 여자와 사장 신분으로 결혼하지만, 그녀는 홈리스 거지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밤의 소리", 계곡에 갖혀 사는 가족의 비밀이 드러나는 "우리 계곡은 사람들이 모른다" 정도는 볼만했지만, 이들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오히려 "밤의 소리"는 결말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청년 사장 가보리가 취미인 거지로 변장했을 때 만나 사랑에 빠진 여인을 자기 회사에 입사시켜 결혼까지 하지만, 그녀가 사랑했던건 홈리스 거지였다는 것까지는 나쁘지 않아요. 그러나 여자가 가보리를 총으로 쏜 시점에서, 그녀가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는 약점은 치명적입니다.

한마디로 극화 전환기에 표류하던 데즈카 오사무의 상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들이라 생각됩니다. 좋아하던 모험물, SF에 인간 드라마, 사회 고발 등을 자극적인 성관계와 폭력으로 녹여내고 있지만, 잘하고 좋아하던 것에 비하면 확실히 완성도는 떨어진다는 점에서 말이죠.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12/01/19

다잉 아이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1.5점

다잉 아이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이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 '양하'의 바텐더 신스케는 손님에게 습격당해 머리에 중상을 입고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겼다. 회복한 뒤, 사건의 원인이 자신이 일으킨 1년 반 전의 교통사고에 대한 복수라는 경찰의 수사 결과를 들었다. 그러나 신스케는 그 사고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상태였다. 신스케는 어렴풋한 기억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데...

물만두님의 리뷰 때문에 읽게 된 책. 

그런데 물만두님의 극찬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네요. 물만두님의 극찬 요지는 양심 없는 가해자들에 대한 사회고발적인 성격이 짙다는 것인데, 딱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범인인 우에하라 미도리는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렸고, 동승자이자 사후종범인 기우치는 미쳐버린 약혼녀의 뒷치닥거리나 하는 존재로 전락해버렸으니 사는 게 지옥일 텐데, 양심 없이 사는 가해자라는 건 어울리지 않잖아요.

물론 사고를 잊고 나름 행복하게 살아가던 또 다른 가해자인 신스케와 에지마에게 복수의 철퇴를 내려 경종을 울린다는 해석도 가능하긴 합니다. 그러나 진범이라 할 수 있는 에지마가 걸려든 것은 순전한 우연 - 신스케 살인미수가 루리코의 잠복과 겹친다는 - 에 불과하다는 것은 본질을 벗어난 게 아닌가 싶어요. 이래서야 경종을 울린다기보다는 그냥 재수가 없었을 뿐이니까요.

또 우연이 많이 개입되어 있고, 무리하고 작위적인 설정이 많은 것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일단 죽어가는 피해자의 눈이 신비한 힘을 발휘한다는 기본 설정부터 작위적입니다. 게다가 우연찮게 머리를 맞고, 우연찮게 사고 및 사고와 관련된 일들만 잊어버렸다... 참 편한 설정이기는 합니다만 말도 안 되죠.

그 외에도 유니버설 맨션이라는 루리코의 거처를 알게 된 순간 경찰에 신고만 해도 범행의 전모를 밝히는 것은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을 텐데, 출동한 형사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출동한 뒤 우연찮게 실종된다는 것과, 왜 경찰은 형사가 실종되었는데 핸드폰 통화 내역과 발신자 조회도 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외에도 중간에 신스케가 발견한 레이지의 SF 소설 같은 일기, 신스케의 애인 나루미가 남자가 없었다는 증언과 그녀의 실종을 대비시키는 전개 등 작위적인 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요.

무엇보다도 루리코가 신스케를 유혹하고 정사를 나눈다는 설정은 정말이지... 뭔지 모르겠습니다. 미모의 여자가 몸까지 바쳐가며 초호화 맨션에서 같이 살 것을 요구한다니! 이런 복수라면 오히려 환영하는 피해자가 더 많을 것 같아요.

그냥 순수한 원한과 복수를 서스펜스 스릴러 형태로 그리고 싶었던 것이 작가의 의도였을까요? 그렇다면 범인보다도 범행을 지켜보기만 했던 목격자들을 복수의 대상으로 삼았던 "살인 더하기 다섯"처럼, 미나에 사건의 원인인 고용인을 막 다루는 후카미 집안 사람들도 같이 응징했어야 하는 게 더 합리적이었을 것 같은데, 이건 뭐 신스케에 대한 복수극도 아니고 대체 뭔지도 잘 모르겠어요.

서두의 죽어가는 미나에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와 더불어 '원한의 눈길'이라는 지극히 동양적이면서도 신비한 동기를 서스펜스 스릴러로 포장한 작가의 능력은 인정합니다. 신스케의 사고 - 루리코의 등장 - 나루미의 실종 - 기우치와의 만남 - 감금과 탈출 등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느껴지는 재미도 탁월하고요. 그러나 작가의 장점인 트릭과 플롯의 조화는 사라지고, 작위적인 설정과 우연으로 점철된 전개, 불필요한 자극적인 묘사로 싸구려 펄프 픽션 느낌이 너무 강해서 도저히 좋은 평가를 할 수 없네요. 좋게 봐줘도 흔해빠진 서스펜스 스릴러물 정도니까요.

물만두님의 리뷰는 경애하는 바이지만, 이 작품만큼은 분명하게 다른 견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제가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중에서는 최악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24/11/09

여섯 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 - 아사쿠라 아키나리 / 남소현 : 별점 3.5점

여섯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 - 8점
아사쿠라 아키나리 지음, 남소현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서는 트릭과 진범이 누구인지가 모두 설명되고 있습니다.'

하타노, 시마, 쿠가, 하카마다, 야시로, 모리쿠보의 명문대 졸업을 앞둔 취준생 6명은 가장 잘 나가는 신생기업 스피라링크스 최종 전형까지 살아남았다. 한 달 동안 6명은 마지막 관문인 그룹 토론을 준비하여 모두 함께 합격하자며 친해졌는데, 그룹 토론은 그들 중 딱 한 명만 투표로 선발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말았다. 토론장에서 여섯 명은 각각이 수신인인 수상한 봉투를 발견했고, 그 안에 각자의 과거 치부가 증거와 함께 들어있다는게 밝혀졌다. 이를 통해 투표는 순식간에 요동쳐서 원래 앞서가던 쿠가 등이 봉투 속 내용물로 뒤쳐지고, 하타노가 1위로 부상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봉투를 가져다 놓은게 하타노라는게 드러나 결국 시마가 1위로 스피라링크스에 취업하게 되었다.

그리고 8년 후, 하타노는 지병으로 사망했고 시마는 유품을 건네받았다. 유품은 시마가 진범이라는 일종의 고발이었다. 범인이 아니었던 시마는 충격을 받고, 과거 그룹 토론 멤버들과 다시 연락하여 사건에 대해 재조사에 나섰다. 이는 하타노가 끝까지 숨겼던 자신의 치부가 담겨있던 봉투 속 내용물이 무엇인지 두려워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취업 준비생들의 극심한 경쟁을 사회파 범죄 스릴러로 풀어낸 작품. 신입사원 공채에 대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으니 사회파 소설로 보아도 무리가 없겠지요. 얼마전 올렸던 추리 소설 추천 리스트에 있었는데 번역되어 있는지 몰랐습니다.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기쁜 마음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장점이라면 일단 독자를 흡입시키는 전개가 아주 탁월하다는 점입니다.

1부는 화자 하타노의 시점에서 전개되는데, 그가 범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범인으로 몰려 추락하는 상황이 긴장감있게 그려집니다. 또 그룹 토론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매우 흥미로우며, 특히 입사가 어려워지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긴장감은 눈부십니다. 단순한 그룹 토론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솜씨가 정말 놀랍습니다. 이와 함께, 치열한 입사 경쟁이라는 현실도 강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2부에서의 입사에 성공한 시마의 시점으로 그녀의 조사를 통해 하타노의 결백이 하나씩 드러나는 과정도 무척 흥미롭고요. 이러한 시점의 변화는 캐릭터의 진실을 탐구하는 재미를 더합니다. 

작품 속 여섯 명의 취준생 캐릭터들도 처음에는 능력있고 선한 사람들로만 보였지만 이후 그룹 토론과 시마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약점(?)이 하나, 둘 씩 독자에게 제공되면서 마지막에 복합적인 인물들로 거듭난다는 점에서 좋았어요. 그동안 보아왔던 평면적인 인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생생함을 보여주었으니까요. 작 중 언급된대로 '달은 지구에서는 표면밖에 보이지 않지만, '뒷면'이 엄연히 존재한다.'는걸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누가 비밀을 폭로하는 봉투를 준비했나?'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이 공정하면서도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본격 추리물처럼 단서를 제공하고 범인을 빵 터트리는건 아니지만, 결정적인 단서로 '하타노가 음주를 하던 사진에서 '스미노프 보드카'가 술이라는걸 알아채지 못한 사람이 범인이다'는걸 독자에게도 알려주고, 이를 통해 술을 못하는 쿠가가 범인이라는걸 드러내는건 본격 추리물 못지 않았습니다. 하타노가 유언처럼 남긴 파일의 '범인, 시마 이오리에게'라는 수신인이 '범인 시마 이오리에게'가 아니라 '범인과 시마 이오리에게'라는 뜻이었다는 착안도 괜찮았고요. 하타노가 파일에 걸어놓은 암호도 범인이 쿠가이므로 '페어'였었죠.

또 괜찮은 서술 트릭물이기도 합니다. 시마의 인터뷰와 하타노, 시마 1인칭 시점으로만 다른 인물들을 묘사하여 야시로가 선뜻 장애인 석에 앉았고, 쿠가가 장애인 주차장에 차를 세웠고, 하카마다가 야구를 하던 어린 아이들에게 폭언을 하며 혼을 냈다는걸 드러내며 그들을 선한 사람들이 아니라 악하고 얄팍한 인물로 보이게 만듭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야시로와 쿠가는 장애가 있는 시마를 배려했던거고 하카마다도 할머니가 공에 맞을 뻔 해서 아이들을 혼냈고 나중에는 잘 타일렀다는게 드러납니다. 이렇게 독자를 착각하게 만들었다가 마지막에 반전으로 진상을 드러내는건 전형적인 서술 트릭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저도 깜빡 속았네요.

취준생들이 겪는 압박과 고통, 힘든 취업 과정에 대한 묘사도 빼어납니다. 읽다가 얼마전 제가 근무하는 부서에 입사한 신입사원이 합격 소식을 듣고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 기뻐서 펑펑 울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만큼 절박한 취준생 들의 심정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불합리한 신입 공채에 대해서도 사회파 추리 소설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로 잘 밝히고 있습니다. 단지 사측 입장이 아니라 취준생들도 거짓말쟁이라는걸 밝히고 있어서 균형을 맞추는 것도 좋고요. 물론 사측 문제가 더 커 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하타노가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그의 유품으로 시마의 진상 추적이 시작되는 2부는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 쿠가가 신입 공채 시험의 정당성에 의심을 품고 일부러 사건을 일으켰다는 동기가 불공정한 탓이 큽니다. 쿠가의 뛰어난 친구가 스피라링크스 2차에서 떨어졌는데 쿠가 본인은 최종 전형까지 합격한게 불만이라는 동기는 처음에는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뛰어난 친구 이야기가 잠깐 나오기는 하지만, 동기를 뒷받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동기 자체의 설득력도 없어요. 쿠가의 말 그대로 치기어린 행동에 불과합니다. 한마디로, 철없는 아이의 장난과 다를바 없는 사건이라 와이더닛 측면에서는 낙제점을 줄 수 밖에 없네요.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쿠가가 하타노를 범인으로 몰아붙인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는겁니다. 쿠가가 신입 공채를 망치고 싶었다면, 범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가 최후의 1인이 되든 상관없이 그룹 토론이 엉망이었다는것만 스피라링크스 인사팀이 확인하면 되었으니까요. 각자의 치부를 담은 봉투 안에 작은 협박문을 넣어서 알리바이를 조작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어차피 모리쿠보가 범인으로 몰리게 된 상황에서, 사진이 이상하다는걸 들먹이면서 각자의 알리바이를 확인하여 하타노가 범인일 수 있다는 식으로 끌고간 까닭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이전 술자리에서 술을 못하는 시마에게 술을 강권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쿠가가 시마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지 않는 한, 그렇게까지 큰 잘못으로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 자리에 하타노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또 시마가 확인한 그룹 토론 당시 동영상을 통해 모리쿠보와 야시로가 협박당했다는게 밝혀졌습니다. 이 당시에는 모두 취직이 급했으니 비밀을 공개하겠다는 협박은 통했을겁니다. 그러나 8년이 지나 모두 사회인이 된 현재 시점에서 이 시절 협박당했다는걸 드러내지 않은건 말이 안됩니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하타노의 알리바이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협박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여 하타노가 범인으로 몰리는걸 방조한 잘못이 있기도 하고요. 모리쿠보는 시마를 의심했고, 쿠가는 진범이었으니 그렇다쳐도 최소한 야시로는 시마를 만났을 때 그 사실을 충분히 밝혔어야 했습니다. 이 점은 이들 모두 알고보면 착한 사람들이었다는 반전을 약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아울러 '공개되지 않은 시마의 비밀은 무엇인가?'라는 수수께끼는 좀 작위적이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시마의 장애가 1부에서 아예 설명되지 않은 것도 탐탁치 않고요. 약간은 노리고 속인 느낌이 드니까요.

신입 공채에 대한 비판도 다소 과장되어 있습니다. 스피라링크스의 인사부장이 말한건 현실적이지도 않고요. 서류 전형과 면접, 여러가지 시험 등을 통해 나름 공정하게 사원을 선발하는게 당연합니다. 6명의 최종 입사 대상자들을 대상으로 그룹 토론해서 1명을 뽑아라? 이건 말도 안되요. 갑자기 성장한 회사라 제대로 체계를 갖추지 않았다는 변명이 실제로 통할리 만무합니다. 작가가 직장 생활은 해 보지 않은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은건 분명합니다.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신입 사원 공채를 소재로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다는데 감탄할 수 밖에 없네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쿠가가 하타노를 범인으로 몰지만 않았어도 별점 4점 이상은 충분했습니다.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보통 추리소설 추천 리스트는 믿지 않는 편인데, オモコロ(Omocoro)bros 편집부 추천은 믿음이 생기네요. 다른 작품도 번역이 되었는지 찾아봐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당연하게도 영화화가 되었더군요. 곧 개봉이라는데, 서술 트릭 쪽을 어떻게 영상화했을지 궁금합니다. 



2023/10/27

백조와 박쥐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점

백조와 박쥐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망높은 변호사 시라이시 겐스케가 살해당했다. 형사 고다이와 나카미치는 시라이시에게 연락했던 구라키 다쓰로가 수상하다는걸 알아내었고, 수사를 통해 구라키 다쓰로의 자백 - 구라키가 30여년 전 하이타니를 살해했다는걸 알게된 시라이시가 당시 유력한 용의자로 자살했던 후쿠마 준지 유가족에게 사죄하라고 강요했기 때문 - 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자백과 동기에 의문을 품은 구라키의 아들 가즈마와 시라이시의 딸 미레이는 각자 조사를 통해 구라키의 자백의 헛점을 각자 찾아내었고, 이는 경찰의 재수사로 이어지는데...


히가시노 게이고 추천 작품 30선에 있길래 읽어보게된 작품.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 인생 30년 기념작이라고도 하네요.

상당한 분량, 그리고 여러가지 사회 문제를 작품을 통해 고발하는 사회파 추리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읽기 쉽다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최대 장점은 여전합니다. 경찰이 무고한 시민을 억압하여 자살하게 만든 33년전 사건과 구라키 다쓰로의 자백으로만 이루어진 현재의 시라이시 겐스케 살인 사건을 통해 검찰, 경찰과 가해자 변호인 모두 재판에서 이기는게 목적이지 진상에는 관심이 없다는걸 드러내며 비판하는 것을 비롯하여 살인죄 공소 시효 폐지가 정당한지, 피고인의 진심어린 사죄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부모, 가족이 저지른 범죄로 다른 가족과 자녀가 피해를 입는다는게 말이 되는지, 황색 언론의 어거지 취재와 발표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 등의 여러가지 이슈를 녹여내고 있는데 무겁지 않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구라키가 공들여 만들어서 헛점이 거의 없었던 자백이 사소한 단서들에 의해 거짓이라는게 하나씩 밝혀지는 과정은 볼만합니다. 경찰과 유족, 관계자들이 모두 힘을 합쳐 각자의 영역에서 조사를 진행하는 덕분에 설득력도 높았고요. 예를 들어 구라키는 시라이시 변호사에게 TV에서 유산 증여에 대한 방송을 보고 궁금한 점이 생겨 전화를 한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이것만 놓고 보면 아무런 문제없는 자백이지요. 하지만 그 날 TV에서 관련된 내용은 방송되지 않았고, 구라키가 가지고 있던 명함첩을 통해 이미 다른 변호사에게 똑같은 내용을 물어보았다는게 추가 조사 결과 밝혀집니다. 이런 점에서는 잘 만들어진 수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라키가 거짓 자백을 해서 죄를 뒤집어 쓴 이유, 시라이시가 살해당한 이유에 대한 설명도 명쾌하게 이루어집니다. 33년전 사건이 도화선인건 맞아요. 다만 구라키가 아니라 시라이시가 진범이었던 겁니다! 이를 우연히 알게 된 당시 누명을 쓰고 자살했던 후쿠마의 손자 안자이 도모키가 복수를 위해 범행을 저질렀던게 진상이고요. 반전이라면 반전인데, 이를 위한 구성이 탄탄해서 별로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의 딸과 가해자의 아들이 진상을 밝힌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힘을 합쳐 사건을 조사한다는 설정도 괜찮았습니다. 제목 그대로 완벽한 정 반대의 커플의 조합이니까요. 둘이 힘을 합침으로서 혼자라면 불가능했을 단서 - 시라이시 겐스케의 어린 시절과 가족 관계, 그리고 진짜 동기 - 를 알아낸다는건 그야말로 무릎을 칠만 했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둘 사이에서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싹트게 된다는 것도 독자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게 해 줍니다.

하지만 다른 작품들에서 많이 보아왔던 소재와 설정을 뒤섞어 보여주는 자기복제에 가까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오래전 사건이 동기가 된다는건 작가의 수많은 다른 작품에서 보아왔던 설정이며, 살인자의 가족이라고 고통받는 이야기는 작가의 "편지" 등에서 선보였고, 살인자의 죗값에 대한 이야기는 "공허한 십자가"에서, 촉법소년과 사적 제재에 대한 이야기는 "방황하는 칼날"에서, 피해자의 이동 경로가 핵심 단서 중 하나가 된다는건 "기린의 날개"나 "신참자"를 연상케합니다. 정 반대측에 놓인 청춘 남녀가 함께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은 "몽환화"와 거의 똑같고요.

또 하나씩 제시되는 단서들을 통해 구라키의 자백이 거짓이라는게 하나씩 밝혀지데, 이 단서들이 단계별로 소개되지도 않아서 '추리'적으로 좋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예를 들어 앞서 구라키가 시라이시를 만났던 계기가 거짓말이라는 것 등은 모두 제각각 독립적인 단서들이며, 친할머니에게 하이타니가 사기를 쳤기 때문에 살해했다는 시라이시의 동기도 시라이시 겐스케의 어린 시절 사진과 호적 등본이라는 독립적인 단서로 밝혀지거든요. 즉, 이 단서를 먼저 접했다면 중간의 다른 조사는 불필요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의 단서가 다른 단서로 이어지는 식의 정교하게 잘 짜여진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 가즈마와 미레이가 힘을 합치게 되는 과정에 따른 빌드업만 있을 뿐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시라이시를 살해한 안자이 도모키의 동기를 설명하는 일종의 에필로그는 최악이었습니다. 소년은 자기 가족을 불행에 빠트린 진범을 응징했다고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이는 거짓말이었고 단지 살인에 흥미를 느껴 저지른 범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라이시가 고백하지 않아서 어머니가 이혼을 한건 명백한 사실이니 소년은 시라이시에 대해 원한을 가질 이유는 충분해요. 구태여 중학생 싸이코패스 설정을 집어넣어 이야기를 흐릴 이유는 없었습니다. '촉법소년' 제도를 고발하기에는 안자이 도모키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부족해서 별로 와 닿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이미 충분히 고통을 겪은 후쿠마 준지의 딸 아사바 오리에가 불쌍하기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누명을 쓰고 자살하고, 어머니와 자기는 살인자의 딸이라며 손가락질 받다가 이혼까지 당했고, 연심을 품었던 남자(구라키) 는 사랑을 받아주지도 않고 죽었는데 아들까지 살인범이 되었다니.... 이렇게까지 기구하고 잔혹하게 쓸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있게 읽었고, 생각할 거리도 많지만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부르기에는 한없이 미흡했습니다. 다른 작품들을 읽으셨다면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