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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4

사일런트 페이션트 -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 남명성 : 별점 3점

사일런트 페이션트 - 6점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해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심리 상담사 테오 파버는 그로브 병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남편을 잔혹하게 살해한 화가 앨리샤 치료를 맡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의자에 묶인 남편을 총으로 사살했고, 그 뒤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직 자화상인 "알케스티스"만 남겼을 뿐이었다. 

앨리샤와의 첫 면담에서 그녀는 테오를 폭행했지만, 이윽고 그녀도 테오에게 마음을 열며 자신의 일기장을 건네주었다. 테오는 그녀의 형부인 맥스, 사촌인 폴, 친구인 장 펠릭스 등과 만나서 얻은 정보와 일기장 내용을 조합하여, 그녀의 정신병의 원인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냈던 교통사고에 있다는걸 알아냈다. 이런 치료를 통해 앨리샤는 다시 말문이 트였다. 그리고 테오에게 남편을 죽인 사람은 집을 감시하던 정체불명의 인물이라고 말해주었지만, 테오는 물론 병원장 디오메디스 교수 등 모두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앨리샤가 약물 과다 복용으로 혼수상태에 빠지는 사고가 일어나는데...

영국을 무대로 한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이자 서술 트릭이 사용된 추리물입니다. 

앨리샤 시점에서 사건 전부터 사건이 일어났을 때 까지를 보여주는 부분과, 테오 시점에서 테오가 앨리샤의 치료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아내 캐시의 불륜을 알고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과정이 뒤섞여 전개되는데, 앨리샤의 일기는 사건 전부터이므로 과거 시점입니다. 당연히 독자들은 테오 시점의 묘사는 모두 현재라고 생각하게 되고요. 하지만 테오 시점의 묘사는 현재와 과거가 뒤섞여 있었다는게 사용된 서술 트릭의 핵심입니다. 테오가 앨리샤 치료를 위해 노력하는 부분만 현재에요. 아내 캐시의 불륜을 의심하다가 뒤를 밟고, 결국 불륜남의 집을 덮치는 이야기는 모두 앨리샤 일기와 동일한 과거 시점이지요. 그리고 앨리샤와 테오의 과거는 서로 만나게 된다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즉, 엘리샤 일기 속 정체불명의 남자이자 진범은 테오였던 겁니다. 

사실 화자별로 병행 전개되는 이야기의 시간이 서로 다르다는걸 숨기다가, 마지막에 드러내면서 반전으로 이어지는건 "이니시에이션 러브"로, 한 명의 화자 시점의 이야기지만 시간이 다른 이야기 두 개가 진행되는 이야기라는건 "통곡"으로 이미 접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를 섞어서 진행하는 작품은 처음인데, 독자가 쉽게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솜씨도 일품이라 감탄했습니다. 트릭을 알고 나서 돌이켜보면, 두 이야기가 전혀 섞이지 않게끔 확실히 구분되어 있을 뿐더러, 캐시 이야기에서의 테오는 명백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는 식으로 나름 서술 트릭에 대한 단서도 제공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속을 수 밖에 없었어요.

또 남편에게 배신당한 뒤 말을 잃은 알케스티스 공주 이야기는 단순히 상징인줄 알았는데, 그게 앨리샤에게 실제로 닥쳤던 일이었다는 진상도 꽤 그럴싸했습니다. 테오는 앨리샤의 남편 가브리엘이 아내 캐시의 불륜남이라고 확신하고, 집을 덥쳐서 앨리샤와 가브리엘을 포박한 뒤 가브리엘에게 누굴 살릴 것인지 선택하라고 했지요. 이 때 가브리엘이 자기를 살려달라고 이야기한게 앨리샤의 과거 - 어머니와 함께 타고 가던 차가 사고가 나서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가 앨리샤가 죽었어야 했다고 절규했던 - 상처를 헤집어 폭발시켰던 겁니다. 그래서 테오가 사랑을 비웃으며 떠난 뒤, 앨리샤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죽이고 가브리엘도 죽인거지요. 

맥스, 폴, 장 펠릭스 등 앨리샤 주변 인물들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게 하나씩 밝혀지는 앨리샤의 일기 내용도 흥미를 더해주는 요소였습니다. 앨리샤가 테오를 처음 만났을 때 공격했던 이유는, 테오가 침입자였다는걸 알았기 때문이라는 내용은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고요.

하지만 조금 과장된 심리 묘사와 비정상적인 등장인물들이 많다는건 아쉽네요. 두 화자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주변 인물들 (특히 앨리샤) 모두 수상하고, 비정상적입니다. 앨리샤의 일기도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며 흥미를 더해주는건 맞지만, 그냥 읽으면 혼란스러워요. 명백한 사실은 테오가 앨리샤 집을 감시하다가 침입해서 사건을 일으킨 것 뿐입니다. 그 외의 내용들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를 잘 모르겠어요. 증거도 일기 외에는 전무하고요. 피해망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또 일기를 읽고 당사자들을 찾아가서 추궁하는 테오에게 거의 모두가 사실을 털어놓는다는건 작위적입니다. 예를 들어 과거 앨리샤를 치료했던 적이 있다고 일기장에 쓰여있다며 테오가 크리스티안을 추궁할 때 처럼요. 크리스티안은 그로브에서 앨리샤 치료를 맡은 정신과 의사입니다. 앨리샤가 자신이 아는 정신과 의사 이름을 대고 거짓말을 할 가능성은 왜 생각해보지 않은걸까요? 테오야 지은 죄가 있으니 앨리샤의 모든 증언을 믿는다 쳐도, 병원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걸 믿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침입한 이후 가브리엘을 죽인게 테오인지 앨리샤인지, 캐시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건 맞는지, 그 불륜 상대남이 가브리엘이 확실한지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테오의 심리 상태도 극히 불안하고, 마리화나도 피우는 탓에 1인칭 시점 묘사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무리이니까요.

테오가 앨리샤의 입을 막기 위해 약물 과다 복용을 위장하여 피하 주사를 놓아 죽이려 했다는 결말도 석연치 않습니다. 앞서 테오가 이끌어 내었던 앨리샤의 증언 - "앨리샤는 범인이 아니고, 그 집을 감시하던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범인" - 은 디오메디스 교수 등을 통해 부정됩니다. 그냥 봐도 제 정신으로 한 증언으로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정신병이 있는 환자의 이 정도 증언 따위가 테오에게 위협이 될 수 있었을까요? 게다가 이 증언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테오라고 주장한다는건 인정될리 없습니다. 뭐 앨리샤의 말문이 트인게 위협이라고 생각되어 살의를 품었을 수는 있습니다만... 구태여 피하 주사 자국을 찾았다는걸 밝힐 필요는 없었습니다. 약물 과다 복용으로 자살했다고 누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타살이라는걸 부각시켜 얻을게 별로 없으니까요. 

혐의를 크리스티안에게 뒤집어 씌운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어요. 크리스티안이 과거 앨리샤를 진료했다는걸 숨겼다는게 살인 동기라는데, 이를 증명하는건 모두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앨리샤의 증언과 일기장은 실체는 남아 있지 않았고, 오로지 테오의 증언만 있는 상황에서 크리스티안을 옭아매는건 무리입니다. 앨런 형사가 일기장을 찾았다며 테오를 찾아와 그가 범인이라는 페이지를 읽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앨리샤의 몇 안되는 짐에서 일기장을 찾지 못하고 경찰에게 빌미를 준 테오의 행동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이 일기가 증거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거든요. 그녀의 증언은 이미 정신과 의사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말했는데, 일기가 진실일 이유는 없잖아요. 일기는 굉장히 설득력있게, 잘 정리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일기 전체가 거대한 거짓말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최소한 테오가 범인이라는걸 밝히기에는 많이 부족했어요. "열심히 치료해 주었는데, 뒷통수를 맞았다!"고 주장한다면, 그런 테오의 주장을 뒤집긴 힘들었을겁니다.
캐시가 연극도 포기하고, 정크 푸드만 먹는 돼지가 되었다는 결말도 불륜남 가브리엘이 죽은 탓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설명되지 않아 답답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아이디어도 좋고 전개도 일품입니다. 비정상적인 심리 묘사가 많고, 결말이 석연치 않아 감점하지만 추천합니다. 색다른 추리 스릴러를 찾으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24/08/17

계간 미스터리 2024.여름호 - 별점 2점

계간 미스터리 2024.여름호 - 4점
최희주 외 지음/나비클럽

구독 중인 서비스 '밀리의 서재'에 올라와 있기에 봄 호에 이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수록 단편들이 대체로 호러 성향을 띄는게 특징입니다. 더운 여름에 잘 어울리는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뻔한 설정과 전개를 답습하고 있다는 단점이 있기는 합니다. 좀 더 신선한 발상과 반전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면 훨씬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딥페이크 업체 추적기
실제 있던 사건을 재구성한 논픽션입니다. 텔레그램을 통해 사진, 동영상 딥페이크 제작을 요청하면 건당 돈을 받고 결과물을 보내주며, 심지어는 업체의 API를 연결하여 직접 생성할 수도 있는 현실을 취재를 바탕으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취재를 통해 딥 페이크 범죄가 널리 확산 중인데도 불구하고, 법 규제가 이를 따르지 못하는 상황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범죄는 여성들 피해가 많은데, 저도 딸 아이의 아빠로서 좀 더 강한 처벌이 시행되면 좋겠네요.
이렇게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취재라는 점에 더해, 이전 호보다 더 논픽션에 가깝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탁묘
작가 효진은 고등학교 동창 애희와 동네에서 오랫만에 재회한 뒤, 가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어느날, 손을 다친 애희가 찾아와 자기와 남편 지욱에게 닥친 이야기를 해 주는데...

이번 호 계간 미스터리 신인상 수상작. 두 여자의 대화로만 이루어진 공포물인데, 수상이 당연하다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의 빼어난 흡입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되살아난 지욱이 효진에 대한 집착만 남아 그녀를 덮치는 결말도 강렬했고요.
 
그러나 애희가 살해한 지욱을 윗층 할머니가 되살려냈다는건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고양이를 되살린 것, 고양이를 죽게 만든 택시 운전 기사가 비참하게 죽었다는 등의 다른 설정들도 마찬가지에요. 기묘한 집안 물건들 정도로 이런 능력이 가능하다고 하는건 무리입니다. 주술이건, 부적이건, 조금이라도 설명을 덧붙여 주는게 좋았을겁니다.
또 효진이 지욱과 불륜관계라는 뻔한 설정도 별로입니다. 게다가 효진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이를 제대로 밝히지 않은건 반칙이에요. 특히 애희가 남편 불륜 상대와의 문자를 봤다고 했을 때, 놀라기는 커녕 제 3자처럼 "화양연화" 운운한건 말도 안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수상자 인터뷰에서 밝혔던 창작 동기 - 층간소음 으로 괴로워하던 사람이 복수심으로 윗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를 훔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를 잘 살린 것 같지는 않네요.

메리
의대 진학을 앞둔 '나'는 아르바이트로 삼촌의 스마트 축산 건축업을 돕기 위해 한 시골 마을로 향했다가, 마을 사람들의 성적 노리개인 정신지체자 '메리'의 아기가 죽었다는걸 알게 되었다. 그제서야 아기의 죽음을 알게 된 메리는 처절한 복수에 나서는데...

외딴 마을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의 결과로 빚어지는 복수극.
그러나 핵심인 '메리'의 복수심에 대한 빌드업보다는 '나'의 개인 심리 묘사에 치중한 탓에 복수극으로서의 맛은 다소 부족합니다. 도축 현장과 가축 축사 등이 어우러진 배경 묘사는 그럴듯하지만 지나치고요. 복수극이라면 그에 걸맞게 화끈하게 달려주는게 낫습니다. 괜한 문학적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어요.
메리의 복수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과 유사성이 짙다는 문제도 큽니다. 복수 장면도 독극물을 먹은 잔치 참석자들이 복통으로 몸부림치는걸 난도질로 끝장낸 상황인데, '나'가 창고에서 걸어나와 문을 나서는 중에 이 모든게 이루어진다는건 이상합니다. 최소한 사전에 독극물을 먹였다는 설명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환상통
두 손이 잘려나간 환자가 자신의 손이 자기 목을 조르는 환상에 시달렸다. 그 상황에서 20여년 전 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딸아이 이름을 불렀다. 딸은 백화점 붕괴사고로 환자 눈 앞에서 죽고 말았었다. 

환상통과 거울 치료 등 의학적인 부분에서의 디테일은 볼만했던 작품.
하지만 죽어가는 딸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건 많이 뻔했고 이야기 전개에서 의외성도 별로 없습니다. 무섭지도 않고요. 이게 무슨 장르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일단 호러는 아닌데, 그렇다고 심리 스릴러도 아니고... 여튼 장르물로의 기대에는 전혀 값하지 못합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저수지
제주도의 물 빠진 저수지에서 시체 두 구가 발견되었다. 한 구는 박서현의 남편 시신이었다. 남편은 같은 마을 동우 엄마와 불륜 관계였고, 박서현도 요가 수강생 은우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추리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 사건이 등장하고, 의외의 진상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하지만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고 하기는 힘든게, '추리'의 여지는 거의 없습니다. 경찰 수사에 의해 모든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모든건 조현병 환자인 박서현의 망상이었다는게 진상입니다. 남편은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고, 박서현도 은우와 불륜을 이어가지 않았습니다. 망상 때문에 은우와 남편을 살해했던 것이지요.
반전은 괜찮았지만 어딘가에서 본 듯한 내용이라는 문제는 있습니다. "장화 홍련(영화)"와도 별로 다르지 않지요. 상황을 오해하고 있다가 블랙박스와 사진 등을 통해 현실이 드러나는건 영상물에 어울리지, 소설에는 잘 어울리는 작법이라 할 수도 없고요. 소설이라면 독자도 속일만한 디테일한 묘사가 많았어야 했습니다. 
또 이야기와는 별 관계없는 제주 무당(심방) 관련 설정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는 이야기의 본질만 흐립니다. 흥미롭기는 한데 작품에 잘 녹아들지는 못해요. 박서현이 귀신에 홀려 범행을 저질렀다는 식으로 흘러가는 결말도 억지스러웠고요. 제주 무당 관련하여 작가가 '내가 이렇게까지 자료조사를 했다!'는걸 과시하고 싶었던게 아닌가 하는 의심만 드는 탓에, 차라리 이 설정을 뺐더라면 더 좋았을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고스트 하이커
휴직 중인 경찰 수연은 동료 태현을 쫓아 찾아온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길을 잃었다. 태현은 아내 살해 용의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사라진 상태였다.

수연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영원히 떠도는 - 제목 그대로 '고스트 하이커'가 되어 '부랑'을 하는 - 내용의 작품. 
솔직히 장르가 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건이 등장하기는 하는데, 진상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수연이 결혼한 태현에게 집착한 나머지, 태현의 아내는 자살했고 태현은 부랑자가 되었다던가, 수연이 베로나 실종 사건에서 알랭이 수상하다는걸 리즈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던가 하는건 모두 수연의 생각일 뿐입니다.
 
이런 애매한 사건들 이야기를 나열하는 것 보다는 중간에 수연이 죽었다는걸 명확하게 알려줄 수 있는 복선을 삽입한 뒤, 수연이 유령이라는걸 드러내는 전개가 더 좋았을거에요. 정교한 맛도 살리면서 말이지요. 여러모로 부족하고 애매한 작품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한국 미스터리를 읽는 네 가지 키워드 2 : 욕망과 갈등의 논리
한국 미스터리의 특징에 대해 해석하여 설명해주는 연재물. 이번에는 '사연'과 '한'이라는 한국 미스터리만의 특별한 주제에 대해 "아홉 꼬리의 전설"과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라는 두 편의 작품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미스터리의 특징이라기 보다는, 저 두 작품에 대한 해설과 비평에 가까와서 별로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저 두 작품이 한국 미스터리를 대표하는 작품도 아니니까요. 보다 보편 타당한 고전을 예로 들었어야 했어요. 그리고 이런 류의 비평과 해석이라면, 연대순으로 한국 미스터리의 특징을 당시 주요 사회 현상과 연결하여 통사적으로 설명하는게 더 와 닿았을것 같네요.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이외 비평, 인터뷰, 추리 퀴즈 등은 점수를 주기 애매해서 생략합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내용들도 아닙니다.

2013/02/13

미녀 - 렌조 미키히코 / 모세종, 송수진 : 별점 1.5점

미녀 - 4점
렌조 미키히코 지음, 모세종.송수진 옮김/어문학사

80년대에 일세를 풍미했던 렌조 미끼히꼬가 90년대에 발표했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한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대부분 불륜이 소재라는 점 외의 유사점은 없습니다. 장르로는 추리물인 "밤의 오른편", "밤의 제곱"과 '기묘한 맛' 류인 "야광의 입술", "희극 여배우", "밤의 살갗", 일반적인 드라마에 가까운 "타인들", "모래 유희", "미녀"로 나뉘고요.

추리물부터 소개하자면, 내 남편이 당신 아내와 불륜 중이라고 찾아온 여자와 복수를 위해 불륜을 저지르다가 결국 살인으로 치닫는다는 "밤의 오른편"은 극적인 반전과 더불어 놀라운 진상, 즉 불륜 상대방 커플의 치밀한 계획이 놀라움을 자아냅니다.

"밤의 제곱"은 두 여인이 죽은 사건에서, 각각의 사건을 자신이 저질렀다며 번갈아 증언하는 범인의 순간이동 알리바이 트릭을 깨는 전통적인 방식의 추리물입니다. 꽤 괜찮았습니다.

"밤의 살갗"은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아내가 과거의 불륜을 고백하는 순간의 심리 묘사가 기가 막혔고요.

그러나 나머지 작품들은 그냥저냥이었어요. 자연스러운 인공미를 지니는 아내에게 끝까지 지배당하는 성형외과 의사를 그린 "야광의 입술"은 결말이 예상 가능했고, 8명의 독백을 통해 복잡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희극 여배우"는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반 드라마 작품들도 현실적이면서도 나름 뼈가 있는 표제작 "미녀"를 제외하고는 역시나 이해하기 어려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또 작가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현란하면서도 깊이 있는 심리 묘사가 지나친 것도 부담스러웠고, 비교적 최근 출간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번역과 표기가 낡은 느낌을 주는 것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심지어 저자명도 렌조 미"끼"히"꼬"라고 되어 있을 정도에요)

한마디로 추리물 및 기타 아주 일부만 저자의 이름값에 값하고 그 외의 작품들은 별로 건질 게 없었다 생각되네요. 전성기는 80년대였던 걸까요? "회귀천 정사"로 대표되는 "화장" 시리즈처럼 이 단편집도 좋았던 작품들, 즉 제목에 "밤"이 들어가는 추리물들만 따로 모아서 선보이는게 나았을겁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04/12/16

한낮의 유괴 - 모리무라 세이이치 : 별점 2점

인기 탤런트 야기하시 노리코와 불륜관계인 도오토 대학 조교수 미야모토는 어느날 정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뒤, 아내 구미코의 시체와 함께 아들 미사오가 유괴된 것을 알게되었다. 그는 노리코와 의논하여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시체를 숨기고, 유괴범과 접촉하여 아들을 돌려받기 위해 나섰다.
유괴범이 요구한 500만엔을 들고 접선을 시도했지만 유괴범의 재치로 돈만 잃은 후, 호텔에 정통한 유괴범의 정체에 의문을 품고 해당 호텔의 직원 명부를 뒤지고 여러 단서를 조합하여 용의자를 발견했지만 용의자는 도주 끝에 눈 앞에서 사고로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 뒤 미야모토는 오히려 노리코와 함께 경찰에 아내 살해 혐의로 체포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 이면에는 미야모토의 아내와 불륜관계였던 인기작가 마키노 케이스케의 뺑소니 사건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작품. 흔치 않게 "유괴"가 메인 테마입니다. 조사해보니 1973년 작품이네요(공식사이트 참조). 비교적 초기 작품이라서 상당히 기대가 컸습니다. 이 작가의 작품은 초기 작품이 훨씬 좋거든요.
우선, 대학 조교수 미야모토 부부의 2중 불륜사건(미야모토-노리코 / 마키노- 구미코 )과 뺑소니 사건과 유괴 살인사건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 결국 하나로 귀결되는 작가 특유의 전개는 좋았습니다. 작가의 작품인 "죽음의 연립방정식"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중반부의 "유괴범"을 찾기위한 미야모토와 아키코의 활약까지만 재미있고 이후는 지루합니다. 무엇보다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는 살인범과 유괴범이 다르다라는 결정적 트릭이 너무 쉽게 드러난다는게 가장 큰 약점이에요. 불필요한 장면도 많습니다. 초반부의 코인로커의 열쇠에 대한 의문과 열쇠를 삼킨 아이라는 설정, 이것들과 연결되는 마지막의 어이없는 에필로그는 대체 왜 들어갔는지 모르겠어요. 그렇잖아도 지루해진 작품을 쓰레기로 만들어 버라서 황당할 뿐입니다. 이 정도 막장 전개에 비하면 "지유가오카"라는 지명을 "자유 언덕"이라고 번역하는 등의 오역은 오히려 애교로 보입니다.
또한 불륜과 불륜이 겹친다는 지나친 통속소설류의 설정은 읽을수록 더 불쾌해지더군요. 왠놈의 정사장면은 이다지도 많은지... 이런 설정 없이도 충분히 재미있게 스토리를 끌고 나갈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나마 유괴범과의 두뇌싸움은 꽤 흥미진진하고 특히 호텔맨 출신의 모리무라 세이이치 본인의 경험을 살린듯한 리얼한 호텔 묘사, 이른바 "3차원" 전달 방식이라는 기발한 몸값 전달 방법, 그리고 유괴범의 주소를 찾기 위한 일련의 단서들을 조합한 추리는 괜찮은 편입니다. 하지만 기대에 비하면 좀 많이 별로였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절판된 작품을 헌책방에서 어렵게 구해보 읽긴 했지만 두번 읽게될 것 같지는 않군요.

2020/09/05

가족의 탄생 - 도진기 : 별점 2.5점

가족의 탄생 - 6점 도진기 지음/시공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해결사로 활동하며 먹고 사는 김진구에게 여자친구 혜미를 통해 의뢰가 들어왔다. 얼마 전 사고로 아내를 잃은 일식 요리사 이교준의 의뢰였다. 그는 아내의 사고에 두 처형이 관련되어 있다며, 갓난 자신의 딸 아름이 100억대인 장인의 유산을 독식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진구는 젊은 새어머니의 유산까지 아름의 것으로 해 줄것을 약조하며, 이교준 명의의 3억짜리 집을 담보로 잡았다.

그러나 두 처형도 동생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며 이교준을 의심한 나머지, 이런 류의 범죄에 해박하다는 '어둠의 변호사' 고진을 고용하고, 김진구와 고진의 두뇌 게임이 시작되는데...

눈에 뜨일 때 마다 집어들고 읽게 되는 도진기 작가의 장편입니다.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 해결사 김진구와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 함께 등장한다는게 특징이고요. 그러나 공동 주연 작품은 아닙니다. 각자의 의뢰인이 적대하는 관계라서,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 맞붙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명탐정 코난괴도 키드' 라기 보다는 '소년 탐정 김전일지옥의 광대 타카토 요이치'에 좀 더 가까운 셈이지요.
이 중 주인공은 김진구입니다. 고진은 남고운, 남문영 자매로 부터 받은 '제부의 유산 상속을 막아달라' 라는 의뢰만 해결하고 빠지는 반면, 나머지 사건과 유산 상속 정리는 김진구가 해결해버리고, 작 중 비중도 두 배 가량 될 정도로 높으니까요.

그래도 남유정 사망 사건 해결은 나름 둘이 함께 힘을 합치기는 합니다. 이 사건에서 유산 상속 문제가 비롯된건 물론, 추리적으로 작품의 핵심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처음에는 단순 교통 사고로 생각되었습니다. 이교준이 동승하여 남유정이 운전하던 미니가 김순옥의 모하비와 추돌했고, 조수석에 탔던 이교준은 생명을 건졌지만 남유정은 안전벨트를 하지 않았던 탓에 사망했으니까요. 그러나 이 사건은 이교준이 일으킨 살인 사건으로, 진구의 말에 따르면 '3중 방어막'이 쳐진 교묘한 계획이었습니다. 

첫 번째 방어막은 원래 알려진 바와 같이 살인 혐의를 찾아보기 힘든, 단순 교통사고로 보이도록 꾸민 겁니다. 그러나 이교준이 김순옥과 불륜 관계라는게 밝혀져 첫 번째 방어막은 뚫리게 됩니다. 누가 봐도 의심스러우니까요.
여기서 등장하는 두 번째 방어막은 '고의적인 충돌 사고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불륜을 목격한 남유정이 과속하여 추격하다가 모하비에 추돌하여 일어난 불행한 사고라는 주장이에요. 불륜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남유정이 고의적으로 추돌하게 만들었다는건 증명할 수 없어서 단순 사고로 처리될 수 밖에 없게 되지요.
그러나 남유정의 목에 교살 흔적이 남아 있어서 살인이라는게 밝혀진 뒤 마지막 방어막인 '정황의 방어막'이 등장합니다. 이교준은 사고가 발생했을 때 김순옥의 모하비에 타고 있어서 범행을 저지르는게 불가능했다는게 정황입니다. 하지만 진구는 남유정 목의 교살 흔적은 왼손잡이의 흔적인데, 가족 중 왼손잡이는 이교준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CCTV에 찍힌 모하비는 추돌 부위가 이미 부숴져 있었다는 사실을 토대로 진상을 추리해냅니다. 모하비와의 추돌은 조작된 것이고, 이교준이 아내 남유정을 목 졸라 죽인 뒤, 자기 무릎에 시체를 앉히고 전봇대에 추돌하여 사고를 위장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3중 방어막이라는 말만 그럴듯하지, 그다지 완성도 높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애초에 실제 자동차 추돌 여부를 조사하지 않은 점, 사인을 정확하게 규명하지 않은 점, 꽤 장기간 불륜 관계였던 김순옥과 이교준의 관계를 밝혀내지 못한 점 등 사고 발생 시 수사에 나섰던 경찰의 무능이 확실한 탓입니다. 진구의 말 대로 조금만 파고들면 지나치게 많은 우연이 결합된 수상한 사건이라는걸 금방 알 수 있었을 테니까요. 최소한 명확한 사인은 검증했어야 합니다.

추리도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고진과 진구가 사고 전 CCTV를 입수하여 이를 단서로 이교준의 공작을 증명하는게 거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미니가 한 쪽으로 쏠린걸 과학 수사까지 이용하여 검증한 디테일은 좋지만, 이게 이교준의 범행을 증명하지는 못한다는 문제는 큽니다. 진구가 이교준이 범인이라며 쏘아붙이는 것들 - 범인은 남유정을 목졸라 죽이고는 미니에 싣고 달리다가 사고를 냈다, 이 살인자는 왼손잡이인데 가족 중 이교준만 왼손잡이다. 미니는 남유정 남편인 이교준의 불륜녀가 운전하는 모하비와 부딪혀 사고가 난다, 그 모하비는 CCTV를 통해 보니 사고 전에 이미 충돌 부위가 부서져 있었다 등등등 - 은 모두 정황 증거 뿐이에요. 왼손잡이라는게 그렇게 대단한 증거도 아니고요. 제 생각에 이교준이 유죄 판결을 받기는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이렇게 사건에 대한 추리 부분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유산 상속 이야기는 아주 흥미로왔습니다. 법조인 출신 작가라 그런지, 현행법에 기초하여 설득력있는 이야기를 잘 풀어낸 덕입니다. 고진과 진구의 활약도 대단하고요.

우선 고진이 의뢰에 따라 이교준의 친권을 박탈하여 아름이 몫의 상속분을 빼앗습니다. 이교준의 딸 아름이가 사실은 남유정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아니라, 불륜녀 김순옥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라는걸 밝혀냈기 때문입니다. 아름이의 친부임을 주장한 남유정의 불륜남 원경호 소동에서 유전자 감식이 진행되었는데, 이 때 증거를 확보한 거지요.
또 진구와의 조사 결과 공유를 통해, 이교준이 아내 남유정 사망 후 남유정 - 원경호의 딸인 진짜 아름이를 자신과 김순옥 사이의 딸로 바꿔치고, 아름이를 입양 기관에 보냈다는 걸 알아냅니다. 아내가 죽은 뒤, 가사 도우미를 해고해서 아름이가 바뀐걸 아무도 알 수 없었지요. 할아버지는 장님이고, 다른 친척들은 아름이에게 관심도 없었으니까요. 이는 진구가 이교준의 집을 방문하는 제일 첫 장면에서, 부부의 사진은 있지만 아이 사진이 없는 복선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고진의 말에 따르면 친부가 아니더라도, 아름이는 부부 사이의 딸이므로 이교준이 친권자인건 맞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자기 친딸과 바꿔치기하고 입양 기관에 보낸 사람에게는 친권 자격이 있을리가 없으니 친권 상실 청구를 하면 이교준은 아름이 몫을 못 받게 됩니다. 그래도 여전히 남유정 몫의 대습 상속은 유지되는데, 이 역시도 진구가 남유정을 살해한건 이교준이라는걸 밝혀내어 상속 자격을 상실하고 맙니다. 앞선 순위나 동순위 상속인을 살해하면 상속권을 잃는 법 때문입니다. 결국 이교준은 빈털터리 신세가 됩니다!

여기까지는 생각대로의 전개인데, 그 뒤 다른 상속인들 모두의 상속권이 날아가버리는 전개는 예상치 못했네요. 새어머니 유재연이 낙태를 한게 발단입니다. 그녀는 불륜을 저질러 아이를 갖지만 이런저런 부담감으로 낙태를 선택합니다. 이 낙태에 그녀를 미워하던 두 의붓딸 남고운, 남문영 자매가 진구의 권유로 모처럼 동행했고요. 그러나 유재연이 가진 아이가 남현호 할아버지의 아이가 아니더라도, 법률상으로는 엄연히 부부간의 아이이고 적법한 상속인입니다. 즉, 상속인을 살해한건 마찬가지라 그녀도 상속권을 잃고, 낙태에 동행했던 두 딸도 낙태를 도운 공범으로 상속 자격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즉, 남유정의 딸 아름이가 유일한 상속인이 되는 거지요.
이렇게 낙태가 상속을 막는다는건 정말이지 처음 접해보았는데, 완전 대박이네요. 법률에 대해 잘 아는 작가라 쓸 수 있던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의뢰대로 상속을 막은 진구가 의뢰인 이교준에게 당신이 살인범이라는걸 밝혀낸건 의뢰와 관계 없었으니 보수를 챙기겠다며 쿨하게 마무리하는 장면도 마음에 들어요. 가족이 모두 파멸하는 결말인데, 워낙 많은 분량에 걸쳐 비호감을 끌어온터라 속 시원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또 자신만의 가족을 꿈꾸었던 이교준, 그리고 가족이지만 각자 자기 생각만 했던 남씨 일가족이 무너진다는건 "가족의 탄생"이라는 제목과 묘하게 잘 어울리더라고요.

그러나 이 유산 상속 과정가 전부 잘 짜여져 있는건 아닙니다. 콩가루 집안이 모두 몰락한다는건 지나치게 전형적인데다가, 남고운, 남문영 자매는 악인도 아니기에 결말이 썩 개운하지 않거든요. 막내 동생을 제부가 죽였다고 의심하여 제부에게 유산이 가는걸 막으려고 노력하는데, 의심이 사실로 밝혀졌으니 그녀들은 잘못한게 없습니다. 오히려 새어머니 유재연의 낙태를 도와준건 순전한 선의였기에, 유산 상속을 막으려는 악당 김진구에게 농락당한 것에 불과합니다.

아울러 김진구가 작중에서 벌인 활약과 행동은 모두 이교준의 범행을 밝혀내기 위함입니다. 이교준의 의뢰를 위한 행동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건 예상치 못했던 급작스러운 유재연의 임신과 낙태, 그리고 진구의 권유를 받은 남씨 자매가 낙태 수술에 동행했기 때문으로, 진구의 활약 여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우연에 불과합니다. 이런걸 보면 그다지 정교하게 잘 짜인 이야기라고 보기는 힘들어요. 부부가 모두 불륜을 저질러 같은 시기에 혼외자를 낳는다는 설정 역시 작위적이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으로 대단하지는 않고, 우연과 작위적인 설정이 많이 결합된 전개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낙태를 통해 기존 알고 있던 유산 상속의 상식을 깨 버린 아이디어 만큼은 높게 평가할 만 한데, 이 설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더라면 진짜 걸작이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덧붙이자면, 서두와 에필로그에 "정신자살"의 '이탁오 박사'를 등장시켜 다음 작품과 연결시키는 구성을 갖추고 있는데 꽤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2020/05/08

할로 저택의 비극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3) - 애거서 크리스티 / 원은주 : 별점 1.5점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3 (완전판) - 4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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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에서 걸작이라고 추천하길래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저에게는 걸작이 아니었습니다. "완전 공략"의 기준과 제 기준이 다르다는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작품은 그 차이가 너무 심해서 놀랄 정도에요. "완전 공략"에서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한 이유는, '살인'에 다다르기까지의 드라마의 정점이며, 등장하는 여성들이 매력적이면서도 무척 슬픈 이야기이기 때문이라는데, 뭐 하나 동의할게 없습니다.

특히 시작부터 약 80여 페이지에 이르는 초반 분량은 짜증 그 자체입니다. 루시 앵커텔을 비롯하여 존과 헨리에타, 게르다 등이 등장하여 각자의 푸념을 늘어놓는게 전부인 탓입니다. 등장인물 거의 모두가 극에 달한 이기주의자들로 각자 자기 이야기만 합니다. 존 크리스토는 그 중에서도 최고봉이고요. 지구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에요. 제 옆에 있다면 한 대 때려 주었을겁니다.
베로니카 역시 존 못지 않은 이기주의자에 자기 중심적 사고방식을 갖춘 인물이며, 루시 앵커텔 역시 존 크리스토가 죽고나서 바로 헨리에타와 에드워드를 이어줄 생각을 하는 등, 자기 가문만 생각하는 자기 중심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별로 다르지 않고요. 솔직히 존이 살해당하는 순간,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죽어도 싼 놈이 죽은 기분이라서요. 이게 슬픈 이야기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존 크리스토와 베로니카, 루시 앵커텔이 그나마 이 작품에서 가장 생동감넘치고 살아있는 인물이라는 겁니다. 다른 인물들은 그들의 숭배자거나 곁가지에 불과합니다. 이외에는 딱 한명, 여주인공 헨리에타만 비교적 공평한 시각에 자신의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인물로 묘사될 뿐입니다. 자기 중심적 사고 방식의 이기주의자들과 그의 추종자들로 이루어진 집단의 이야기가 재미있을리 없지요.

추리적으로도 별볼일 없습니다.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고, 사건이 미궁에 빠진건 단지 운이 좋았으며 우연찮게 주요 등장인물들이 범인 게르다를 감싸주었기 때문이니까요. 특히나 앵커텔 가문의 정점에 있는 루시 앵커텔이 작정하고 도와준 덕분에, 게르다가 당장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게 사건의 전부입니다.

또한 동기도 문제가 많아요. 게르다가 남편의 불륜을 목격하고 그동안의 숭배의 감정이 배신으로 일그러졌다는 것 자체는 말은 됩니다. 그러나 존은 이전에도 바람을 피운걸로 묘사됩니다. 이전의 불륜, 바람은 참고 넘어갔는데 눈 앞의 불륜을 참지 못하고 살의에 휩싸여 계획적인 범행을 저지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작 중에서도 이전에 불륜을 저지른 적이 있지만, 별 일 없었기에 게르다는 범인이 아닐거라는 식으로 묘사할 정도인데 말이죠. 이 이유가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으니, 제대로 된 동기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살의 역시 게르다 시점으로는 한 번도 묘사되지 않아서, "공략"에서 이야기한대로 '살인'에 다다르기까지의 드라마가 펼쳐진다고 보기도 힘듭니다.

이러한 주변 시점의 묘사는 동기를 감추고, 게르다 말고 다른 범인역을 내세우기 위해서일 겁니다. 그러나 그 정도가 너무 심했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합리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요. 용의자도 뻔해서 이렇게 다른 범인역을 내세울 필요도 없었습니다. 피해자 존을 비롯, 헨리, 에드워드, 데이비드라는 지나가는 행인스러운 이름의 남성들은 모두 주변인이고 곁가지이며, 미지는 존이 죽어버리면 헨리에타가 에드워드와 결혼할 수도 있으니 범행을 저지를 리 없어요.
즉 루시 앵커텔, 헨리에타, 베로니카, 게르다가 유력한 용의자인데 앞서 이야기했듯, 루시와 베로니카는 자기 중심적이고 자신의 운명과 인생을 스스로 리드해가는 여성들입니다. 헨리에타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들이 타인 때문에 자신의 위험을 감수한다는게 와 닿을리 없지요.

조금 더 상세하게 살펴보자면, 우선 루시의 동기라면 앵커텔 가문의 대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걱정입니다. 에드워드가 헨리에타를 좋아하니, 둘이 결혼하면 만사형통인데 헨리에타가 존과의 관계 때문에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어서지요. 그러나 에드워드의 헨리에타를 향한 마음이 영원할거라 믿는 건 억지스럽습니다. 실제로 사건 이후 에드워드는 미지와 결혼하죠. 설령 당장 결혼은 하지 않더라도, 에드워드의 다음 세대인 데이비드가 건재하니 가문 걱정은 너무 이릅니다.
그렇다면 여배우 베로니카가 범인일까요? 그러나 세계적인 여배우인 그녀가 15년만에 만난 존에 대한 질투심을 폭발시켜 살인까지 저지른다는건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베로니카와 존의 다툼은 널리 알려졌으니 그녀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들 이유도 없고요.
그나마 헨리에타가 용의자로는 유력한 편입니다. 그녀는 존이 베로니카와 하룻밤을 보낸걸 알았으니까요. 하지만 불륜녀가 불륜남의 또다른 연인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다? 이 역시 현실적이지 않은건 마찬가지입니다. 여사님의 묘사도 중반까지는 루시 앵커텔을 독자에게 범인역 먹잇감으로 던져주는걸 보면 현실적으로 헨라에타를 범인으로 몰고가는건 어렵다는걸 알았던게 분명합니다.

아울러 주요 인물들이 모두 게르다를 도와준 이유는 아예 설명되지도 않는 점, 게르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당장은 빠져나갔다손 치더라도 영원히 은폐가 가능했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포함하면 추리적으로는 점수를 줄 부분이 없습니다. 할로 저택의 총을 쓴 이상, 외부에서의 침입자 가능성은 없으니 누군가는 죄를 뒤집어 썼을게 뻔하거든요. 과연 다른 누군가가 혐의를 받는데도 루시가 잠자코 있었을까요? 언제가 되었든 진범, 혹은 범인역을 내세웠어야 했을겁니다. 그럴거라면 가문의 사람이나 지인보다는 베로니카를 내세우는게 손쉬웠을텐데,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는건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여기에 푸아로가 정말로 하는게 아무것도 없다는걸 더하면 이 작품이 정말로 추리 소설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푸아로가 진상을 알아챈건, 루시와 헨리에타 들보다도 훨씬 뒤이며,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제대로 묘사되지 않아요. 푸아로의 유일한 활약이라면 마지막에 게르다와 헨리에타가 만나는 자리를 찾아와 헨리에타가 독살당하는걸 막고 게르다가 죽게 만드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등장인물이 다 모인 자리에서의 추리쇼는 이거에 비하면 극사실 다큐멘터리에 가깝다고 여겨질 정도입니다.

게르다가 실제로 멍청하지는 않고 '멍청한 척' 했다는걸 초반부에 드러낸다던가, 헨리에타가 사건에 사용된 총을 조각상 안에 감춘다던가 하는 디테일은 나쁘지 않지만, 작품의 수준을 끌어올리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기주의자들의 장광설을 참고 볼 만큼 추리적으로나 다른 면에서 가치가 있지 않습니다. 

제가 보는 시각이 "완전 공략"과 다르다는걸 뼈저리게 깨달았으니, 이제 더 이상은 "완전 공략"에 의지하지 않고, 다른 기준으로 책을 골라봐야겠습니다.

2025/07/19

이상한 집 2 - 우케쓰 / 김은모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상한 집 2"는 기묘한 평면도를 가지고 기상천외한 추리를 펼쳤던 전작에 이은 우케쓰의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전작과는 다르게 연작 단편집으로, 11편의 개별 단편들은 제각기 다른 사건과 인물을 다루지만 이야기 말미에 하나의 결말로 수렴되는 구조를 가집니다. 대부분의 수록작 모두에 기묘한 평면도를 가진 집이 등장하며, 이들 사이에 공통된 무언가가 있다는게 조금씩 드러나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인상적이었던 것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우선, “갈 곳 없는 복도”는 어머니로부터 과보호와 냉대를 동시에 받으며 자란 네기시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녀가 살던 집에는 막힌 복도가 있었는데, 네기시 씨는 태어날 당시 자신의 쌍둥이 자매가 죽은 탓에 자매 방이 철거되었다는 추리를 제시합니다. 하지만 진상은, 건설 당시 사고로 아이가 사망한 장소가 원래 현관이었던 탓에 현관 위치를 바꿨고 그로 인해 복도가 막혔다는 것으로 드러나지요.

“어둠을 키우는 집”은 가족 살인 사건을 다룹니다. 쓰하라라는 소년이 가족을 살해한 사건인데, 그 원인이 엉터리로 설계된 집 구조 때문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평면도를 통해 그 집이 생활에 적합하지 않고, 쓰하라 소년의 고립을 유발하는 구조였는걸 조목조목 드러내며 공간이 범죄를 유발했을 수도 있다고 추리하는데 아주 그럴듯했어요.

“재생의 성역”은 컬트 종교단체 ‘재생회’의 수행 공간인 '성역'에 잠입한 기자의 리포트입니다. 성역은 나가노 현에 있는데, 수행은 신도들에게 숙면을 취하게 하는 기묘한 것이었습니다. 기자는 신자들이 신성시하는 성모가 왼팔과 오른다리가 없는 신체를 가졌다고 했는데, 나는 그 장소의 평면도를 조합해 ‘재생의 성역’ 건물 자체가 그 성모의 육체를 본뜬 구조임을 밝혀냅니다. 이렇게 평면도를 조합하는건 작가의 전작 "이상한 그림"도 연상되는데, 상당히 충격적이었어요. 이 리포트는 전편만 발표되었고, 세뇌 방식이나 수행의 실체가 담긴 후편은 결국 발표되지 못했다며 수수께끼를 남기는 결말도 좋았고요.

“방을 잇는 실 전화기”는 어린 시절 실 전화기로 아버지와 대화하던 기억을 가진 가사하라 지에의 이야기입니다. 이웃 마쓰에 집 화재 사건 이후 아버지가 떠난 뒤, 지에는 실 전화기의 줄 길이가 이상하게 길고, 실 끝은 아버지 침실이 아니라 예전에 옆집 마쓰에 부인이 분신 자살했던 방으로 이어진다는걸 알게 됩니다. 지에는 그날 밤 아버지가 횡설수설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아버지가 마쓰에 부인을 살해했을지도 모른다고 추리합니다. 실 전화기 길이로 이어지는 추리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달아날 수 없는 연립주택”은 과거 사채 때문에 어린 아들과 함께 조직의 감시 아래 연립주택 ‘오키토’에서 매춘을 강요당했던 아케미 씨의 기억을 담고 있습니다. 그녀는 같은 처지였던 옆 방의 왼팔이 없는 야에코 씨와 친해졌는데, 야에코는 아케미의 아들 미쓰루를 구하려다 교통사고로 오른다리마저 잃고 말았지요.
여기서는 평면도나 주택 구조는 그리 특이할건 없습니다. 그러나 아케미는 당시 한 번의 매춘에 십만 엔을 받았다고 회상했는데, 그 금액은 터무니없는 고액입니다. 2층에 고작 네 명만 거주했고, 1층은 감시조였다는 구조도 부유층을 대상으로 하기에는 지나치게 비효율적인 시스템이었고요. 여기에는 놀라운 반전이 숨어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11편의 이야기 모두 컬트 종교단체 ‘재생회’와 그 본거지인 ‘재생의 성역’을 중심으로 벌어졌다는게 밝혀집니다. 우선 재생회의 기묘한 수행은 성역 구조와 관계가 있습니다. 성모의 몸을 딴 성역에서 신자들은 자궁 위치에서 숙면을 취합니다. 이는 성모의 몸속에 있는 태아와, 출산을 은유한 과정으로 신자들은 모두 성모의 자식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각 이야기에 등장하는 기이한 집 구조들도 모두 재생회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성역'과 똑같이 개축되었기 때문입니다. 재생회의 주 수익원도 성역처럼 집을 개축하는 공사였습니다. 이를 가능하게 한 인물은 히쿠라 하우스의 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재생회의 간부이기도 했으니까요. 대표적인건 “딱 한 번 나타난 방”에서 드러난 이루마의 집 구조입니다. 이루마의 부모는 이루마의 죄를 씻기 위해 집을 성역처럼 만든 것입니다. 

이런 흐름은 다른 사건들도 마찬가지에요. 지에의 아버지는 마쓰에 부인과 불륜 관계였습니다. 실 전화기 길이와 방해물이 없어야 하는 특징을 생각하면, 그는 발화 현장이 아니라 부인 침실에서 전화를 했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진상은, 지에 아버지는 그날 부인을 살해한게 아니라 사체를 발견했던 겁니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는 유서를 읽는 소리였고요. 부인이 자살했던 이유는 불륜으로 인한 임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미쓰에 씨 남편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불륜을 감추기 위해 아내 시신을 벽장 안에 넣고 태웠는데, 이 때 불이 번져 죽고 말았던 것이지요. 지에의 아버지는 이후 죄책감으로 재생회에 들어간 뒤, 또 다른 불륜으로 태어난 미쓰루를 위해 집을 개축까지 했지만, 결국 미쓰루가 학대로 죽자 재생회의 사상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심장 위치 방문을 잠그고 자살했습니다. '성모'의 죽음을 실제로 행동을 보여주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재생회 신자들은 대부분 ‘죄를 물려받은 아이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즉, 불륜으로 아이를 낳은 부모들이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네기시 씨 어머니의 냉대와 집 개축 이유도 이해가 됩니다. 네기시 씨는 어머니의 불륜으로 태어났고, 미숙아였기 때문에 출산 당시 혈액형 검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혹시 수혈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해 혈액형이 드러날까 봐, 딸이 사고를 당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과보호하면서도 동시에 냉정했던 것이고, 집을 성역에 가깝게 개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방의 배치를 보면, 어머니가 딸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는걸로 보이는데 이 역시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아울러, ‘물레방앗간’은 기요치카가 딸 오키누를 낳기 위한 장소로 만든 공간이었습니다. 그 안의 움푹 팬 부분은 아이를 숨겨두기 위한 임시 대피소였고, 그 딸이 바로 야에코였습니다. 오랜 시간 그 안에 숨어 있다가 팔이 끼어 괴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미쓰코가 음모로 죽게 만든 인물 역시 야에코였습니다. 야에코가 숨기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의족이었지요.

또한 ‘오키토’의 이야기에서 남겨진 수수께끼를 통해, 실제로 매춘을 했던 사람들은 어머니들이 아니라 그들의 아이들이었다는게 밝혀집니다. 히쿠라 하우스 사장은 야에코의 딸을 매춘 상대로 삼았다가 결국 결혼까지 했던 겁니다. 

결국 이 모든건 야에코의 딸이 어린 시절 자신을 매춘에 내몬 어머니를 증오했으며, 그 복수로 어머니의 신체 결함을 본떠 전국에 같은 구조의 집들을 퍼뜨리기 위해서 벌어진 일이었다는 진상으로 마무리됩니다. 히쿠라 하우스 사장은 죄책감 탓에 아내의 요구에 따라 야에코를 ‘성모’로 삼고 재생회를 만들었고, 이후 신도들의 집을 성역처럼 개축하는 등의 행위에도 군말없이 따랐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딸을 조종해 야에코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고요

이렇게 각각의 에피소드가 이어지며 결말로 이어지는 과정이 무척 흥미롭고 쉽게 읽힙니다. 무엇보다 집의 평면도를 소재로 이런 서사를 만들어 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특징적인 여성의 몸을 가진 집의 평면도'를 구상한 뒤, 이 설정과 진상에서부터 역순으로 이야기를 쓰지 않았을까 싶은데 창작 과정이 궁금해 집니다.

단편 하나하나도 추리물로서 수준이 높은 이야기가 제법 되고요. 각 단편마다 추리적으로도 인상적인 요소들이 많습니다.
“어둠을 키우는 집”에서는 쓰하라 소년이 범죄를 저지른 이유가 엉망으로 설계된 집 구조 때문이라는 설정이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평면도만 보고 그런 추리를 이끌어낸 전개도 흥미로웠고, 진상에 대한 제 나름의 해석—소년이 범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할머니를 해치려는 걸 막으려다 우발적인 사고가 벌어졌다는 점—도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소년 혼자 칼에 상처를 입었던 점, 할머니가 어머니의 비명 소리에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 등 다양한 단서를 조합하며 추리의 실마리를 만들어낸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숲 속의 물레방앗간”에서는 물레방아가 돌아가면 내벽이 움직이는 구조에 대한 미즈나시 우키의 추리가 기억에 남습니다. 오른쪽 방의 벽에 있던 움푹 팬 공간 쪽으로 벽을 조이게 하여, 안에 있는 사람이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는 자세가 되도록 만든 구조였는데, 이는 마치 죄인이 참회하는 자세와 닮아 있었습니다. 실제 그 방향에 사당이 있었다는 점도 설득력을 높였습니다.
“딱 한 번 나타난 방”에서는 비밀방을 찾아가는 과정이 흥미로웠습니다. 네 가지 단서—① 갑작스러운 현기증 이후 문이 보였다는 점, ② 문을 열자 작은 방이 나왔다는 점, ③ 그 방의 바닥이 다다미 반 장 크기의 정사각형이었다는 점, ④ 상자 안에 무언가 무서운 것이 있었다는 점—와 함께 이루마 씨 아버지의 직업, 2004년의 지진, 미닫이문의 구조 같은 현실적인 단서들이 함께 제시되면서, 평면도를 기반으로 직접 추리하는 재미가 잘 살아 있었습니다.

다만 11편의 단편들은 전체적인 완성도에서 편차가 있습니다. 일부 이야기는 독립된 단편으로서 완결되지 않고, 결말에서 쓰일 단서 제공에 그치기 때문에 연작 ‘단편집’이라 보기엔 다소 애매한 구성이 됩니다. 물론 결말에서 이 단점이 일정 부분 해소되기는 하지만, 전편이 모두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쥐덫의 집”에서는 히쿠라 하우스 사장의 딸 미쓰코가 하야사카와 억지로 친구가 되어, 할머니 야에코를 죽음으로 이끈 음모가 전개됩니다. 하지만 미쓰코와 만화 취향이 전혀 맞지 않았고, 책장이 잠겨 있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한 추리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하야사카를 굳이 끌어들일 이유도 명확하지 않으며, 건설회사 사장의 어머니가 자사 설계로 인해 사고사했다면 그 자체로 큰 스캔들일 텐데도 이런 위험성 큰 일을 벌인다는게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거기 있었던 사고 물건”에서는 물레방앗간에서 발견된 ‘백로’가 사실은 오키누의 시신이었다는 추리가 제시되지만, 이를 뒷받침할 근거가 없습니다. 아무리 오래전 일이라고 해도 시체 발견이라는 큰 사건이 지역 신문 기사나 사람들의 기억에도 남지 않았다는 설정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아저씨의 집”은 학대받다 굶어 죽은 소년의 일기라는 설정인데, 그 일기가 죽기 직전까지 어떻게 쓰였고 어떻게 세상에 나와 발표까지 되었는지 설명이 없습니다. “살인 현장으로 향하는 발소리”에서 아내 사체를 불태운 마쓰이 씨가 왜 미처 도망치지 못했는지도 납득이 어렵고요.

또한 몇몇 단편은 전체 흐름상 불필요하게 느껴집니다. “아저씨의 집”은 “딱 한 번 나타난 방”에서 신도들이 집을 개축하고 감축했다는 정보가 이미 충분히 제시되기 때문에 굳이 추가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거기 있었던 사고 물건” 역시 “숲 속의 물레방앗간”에 정보를 보완하는 정도로 대체할 수 있었고, “살인 현장으로 향하는 발소리”도 전편인 “방을 잇는 실 전화기”의 내용을 시점만 바꿔 반복한 것에 가까워 정보의 추가는 거의 없었습니다. 단지 마쓰이 씨에게 30분의 여유가 있었다는 점 외에는 새로운 내용이 없거든요.

몇몇 이야기는 설정이 지나치게 과합니다. "숲 속의 물레방앗간"이 대표적입니다. 지역 유지였던 아즈마 키요치카가 불륜으로 낳은 아이를 숨기기 위해 만들었다는데,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이런 거대하고 수상한 건물을 만든다는건 말도 안되니까요. 야에코가 팔을 잃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도 너무 억지스러웠어요. 재생회 신도들이 불륜을 저지른 사람들이라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친 억지였습니다.

무엇보다, 이야기 전체를 이끄는 핵심 인물인 야에코의 딸이 끝까지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그녀의 증오가 이야기의 중심 동기인데도, 구체적인 내면 묘사나 행동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독자가 감정적으로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야에코가 자신의 장애를 숨기려 했던 인물인데, 그런 야에코의 몸을 본떠 건물을 전국에 짓게 만들었다는 것도 그리 와 닿지는 않습니다. 복수가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건물 외형만 보고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탓입니다. 치부를 아무도 모르게 전국에 설치했다!는게 과연 복수가 될까요? 잘 모르겠네요.

이렇게 단점이 없는 작품은 아니지만, 이야기 하나하나가 흥미롭게 이어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평면도를 바탕으로 한 개별 단편의 아이디어와 추리는 충분히 인상적이니까요. 몇몇 이야기는 제법 서늘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소설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추천드립니다.

2015/09/16

데인 가의 저주 - 대실 해밋 / 구세희 : 별점 1.5점

데인 가의 저주 - 4점 대실 해밋 지음, 구세희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콘티넨털 탐정 사무소에 소속된 '나'는 도난당한 다이아몬드를 찾아 달라는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 레게트 가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에드거 레게트의 딸 가브리엘을 만났고, 그녀가 아버지를 증오하고 있다는걸 들었다. 뒤이어 다이아몬드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던 남자들이 살해당했고 레게트 본인마저 자살하면서 레게트 가에 감춰져 있던 충격적인 내막이 드러나는데… 과연 악몽같은 사건들의 연속은 '데인 가의 저주'에서 비롯된 것인가? (출판사 책 소개 인용)

대실 해밋 전집 두 번째로 출간된 작품. 콘티넨털 탐정사의 이름 없는 탐정이 주인공인 시리즈입니다. 첫 번째 작품은 유명한 "붉은 수확"입니다만, 아주 오래전 (대학교 3학년쯤 되었을 때인 20여 년 전, 당시 거주하던 인천 동네 문방구 서점에서 구입!) 일신 추리문고 시리즈로 읽어보았기에 이 작품부터 읽게 되었네요. "붉은 수확"의 두께를 보니 제가 예전에 읽었던 버전은 일어 중역일뿐만이 아니라 내용 자체가 좀 축약되고 줄어들었으리라는 확신이 들지만, 뭐 읽긴 읽은 거니까요. 하여튼, "붉은 수확"도 좋은 작품이지만 "몰타의 매"가 워낙에 걸작인 덕에 꽤 큰 기대를 하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단편 "쿠비날 섬의 약탈" 역시 재미있게 읽었었고요.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솔직히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습니다. 일단 제목만 보면 막장 가문이 등장하는 일본 고전 추리물 느낌인데, 정작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데인 가"의 딸 가브리엘의 주변에서 수많은 살인사건들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애초에 근거도 없고 애매한, 게다가 가브리엘의 의도는 하나도 없는 상황이거든요. 이걸 "데인 가의 저주"라고 묶는 것 자체가 억지죠. 가브리엘도 뭔가 있어 보이게끔 외모까지 제대로 묘사하지만 정체는 불쌍한 어린양에 불과한 탓에 이야기의 중심을 잡아주지 못합니다.

전개도 김성모 화백의 만화를 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막나가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그래도 1부라 할 수 있는 레게트(메이엔) 부부의 죽음까지는 읽을 만합니다. 앨리스가 가브리엘이 어렸을 때부터 벌인, 광기 어린 복수극이 꽤 그럴싸하게 펼쳐지니까요. 물론 미쳐도 너무 미쳤다 싶은 광기는 과했으며, 레게트가 아내 살해의 누명을 쓰고 투옥된 후 겪은 - 프랑스에서 베네수엘라와 멕시코, 미국에 이르는 -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이 너무 황당해서 그닥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는 않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이 정도면 그냥저냥 무난하고 읽을 만한 하드보일드 장편으로는 충분한 수준입니다.
허나 가브리엘이 치료를 위해 사이비 종교단체라 할 수 있는 성배의 사원에 머무르게 되는 2부부터는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황당한 이야기의 연속입니다. 사이비 종교단체의 비밀이 가스와 최면 효과를 이용한 과학적인 사기였다는 진상만큼은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데인 가의 저주"와 엮어서 이야기를 전개한 게 문제랄까요. 또한 아무리 최면술이 강하다 하더라도 미니가 리스를 죽이게 만든 것처럼 누군가를 조종한다던가, 조셉이 스스로 신이 된 착각에 빠진다는 류의 설정은 영 와닿지 않았습니다. 조셉이 아내 에레니아를 죽이려는 이유도 미쳤다는 것으로 끝내기에는 설명이 부족했고요. 사실 1부도 그랬지만, 그냥 "미쳤다"로 이야기를 만드려는 작가의 고민 없는 전개는 볼썽사나웠어요. 범행들도 하나같이 허술해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뭘 이렇게 거하고 어렵게 사건을 일으키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제가 조셉 할던이었으면 차라리 정면으로 쳐들어가서 죽이고 신도들을 자신의 최면술과 카리스마로 입막음을 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부, 가브리엘의 남편 에릭이 죽은 후의 이야기는 막 나가는 전개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에릭의 시체가 발견된 후 가브리엘이 사라지고, 그녀가 용의자로 의심을 받는 와중에 갑자기 경찰서장 코튼의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으며, 불륜 상대인 하비가 용의자로 급부상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다다르는 과정도 급작스러운데, 불륜 상대 하비의 알리바이를 코튼 부인이 증명하는 황당한 상황에 더해 코튼이 그를 범인으로 만드려고 현장을 조작하는 등의 개막장 스토리가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한민국의 일일연속극을 보고 있는 건지, 하드보일드 3대 거장 중 한 명의 하드보일드 장편을 읽고 있는 건지 아주 혼란스러웠어요. 마지막에 시체가 따뜻했다는 이유로 코튼을 진범으로 체포하는 결말 정도만이 이 작품이 그래도 하드보일드 추리물이구나 싶은 요소였습니다만... 추리물로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즉흥적인 전개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마지막 4부는 결말이 밝혀지는 대단원인데 앞의 개막장 이야기를 어떻게든 하나로 엮으려는 시도가 펼쳐집니다. 이를 위해 그동안 상상도 못했던 인물인 작가 오웬 피츠스테판이 진정한 흑막으로 등장하죠. 허나 설득력을 갖추었다 보기에는 어려운 뜬금없는 결말일 뿐더러 작가가 피츠스테판을 흑막으로 만들기 위해 1부, 2부, 3부의 사건을 하나로 엮는 억지스러움에는 눈물이 날 정도였어요. 방법은 아래와 같습니다.

  • 1부 - 피츠스테판도 데인 가의 후손이다! 이렇게 해서 앨리스와 엮죠 (불륜 관계였다는 설정도 살짝 포함)
  • 2부 - 에레니아 할던과 불륜 관계였다!
  • 3부 - 범인 하비는 사실 조셉 할던 밑에서 일하던 핑크의 양아들이었다! 그래서 에레니아를 통해 조종이 가능했다!

... 이게 당췌 뭔지 싶습니다.
아울러 피츠스테판을 괴물처럼 묘사하려는 시도 역시도 실패작이에요. 무엇보다도 피츠스테판의 모든 범행은 운에 의지한 즉흥적인 범죄들이 대부분이라 한번 걸리니 증인들이 속출해서 모든 사건에서 범인으로 밝혀지게 되니까요. 애초에 피츠스테판이 사건에 개입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으로 '나'가 과거의 인연으로 본격적인 사건 조사 전에 방문한 것이 시작이니 피츠스테판이 뭔가 작전을 짜는 등의 시도를 할 이유나 여유가 없기도 하고요.

그리고 주인공 탐정이 가브리엘을 보살피는 과정은 왜 들어갔는지 그 이유도 좀 궁금합니다. 여주인공의 마약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는 주인공이라... 뭔가 차도남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주려 한 것 같은데 여러모로 어색하고 안 어울렸어요. 하드보일드 주인공이라면 따뜻한 보살핌이 아니라 구타와 감금으로 마약을 끊게 만들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콘티넨털 탐정 사무소에 소속된 주인공 탐정이 나름 묵직하게 묘사된 점과, 그나마 가브리엘이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결말 정도는 괜찮지만 그 외에는 딱히 읽을 가치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하드보일드 장편들이 고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단점인 복잡한 인간관계를 극단적으로 활용해서 작위적인 이야기를 만든 아이디어는 그럴듯합니다만 전개가 너무 막장이었어요. 이야기 하나하나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괜찮은 것도 있는 만큼, 차라리 하나하나를 단편으로 발표하는 게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이번 독서의 유일한 가치는 작가의 대표작으로 "몰타의 매"와 "붉은 수확"만 거론되는 이유를 알려준다는 점뿐이군요. 전집은 3, 4권으로 이어지기는 하지만 더 읽어볼 필요가 전혀 느껴지지 않네요. 차라리 "붉은 수확"이나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2022/06/11

기만의 살의 - 미키 아키코 / 이연승 : 별점 1.5점

기만의 살의 - 4점
미키 아키코 지음, 이연승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니레 가문의 당주 하루시게가 아내 사와코, 양자 요시오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의 자켓에서 독이 들어있던 초콜릿 포장지 조각이, 그리고 사와코의 서재에서 그가 불륜을 저지르는 사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범행을 인정한 하루시게가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40년 후, 가석방된 그는 사랑했던 니레 가문의 둘째 딸 도코에게 자신이 함정에 빠졌으며 사형 선고만을 피하려 거짓 자백을 했다며 40여년 간 고민해왔던 범인의 정체와 트릭을 알리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도코로부터 온 답장에는 그의 추리를 반박하는 도코의 추리가 담겨 있었다....

1947년 생이라는 노인 작가의 고전적인 정통파 본격 추리물입니다. 

콩가루 지역 유지 가문에서 발생한 의문의 독살 사건이라는 기본 설정부터 전체적인 분위기와 내용 모두 본격물 황금기 시대를 연상케 합니다. 심지어 맨 앞 부분에 주요 등장인물에 대한 소개가 수록되어 있는 구성까지도요. 대부분의 전개가 하루시게와 도코 사이에 오간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건 독특한 요소지만, 손으로 써서 편지 봉투에 넣고 보냈다는 점에서도 고전적인 스타일이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지금은 이메일이나 페이스북 메신저 대화로 이루어지는 작품이 나오는 시대이니까요.

설정과 구성, 내용 외에 추리적인 부분도 고전 본격물 스타일을 충실히 따릅니다. '트릭' 이라는게 존재한다는 점에서요. 하루시게와 도코의 편지를 통해 같은 사건에 대해서 무려 4개의 추리가 펼쳐지는 풍성함도 좋고요. 특히 사와코의 자작극이었다는 추리와 사쿠라, 요헤이, 스미에가 공범이었다는 추리는 무릎을 칠 정도로 그럴듯했습니다. 사쿠라와 스미에의 관계에 대한 조사 결과를 근거로 써 먹는 부분, 그리고 마지막에 양복에 초콜릿 포장지 조각을 넣은 트릭도 괜찮습니다. 처음에 요헤이와 하루시게 자켓을 바꾸어 걸어 놓은 뒤, 라이터를 꺼내는 척 양복 주머니에 조각을 집어 넣었다는 건데 굉장히 현실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맨 처음에 효도가 범인임을 주장했을 때, 흰 커피잔에 다량의 아비산을 넣고 그 위에 물엿 코팅을 했다는 장치 트릭 이야기는 조금 별로였어요. 하루시게는 이 장치를 만든건 요시오였을 거라고 추리했습니다. 효도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초등학교 4학년 아이에게 목숨을 맡기는 장치를 시킨다는건 그다지 현실성이 있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독특한 장치 트릭인건 사실이고, 이외에도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은 많아서 즐거웠습니다. 하루시게가 죄를 인정했던 이유가 어쩔 수 없는 사형 선고를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설정도, 변호사 출신 작가답게 잘 풀어내고 있고요.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지나치게 낡았을 뿐더러, 작위적이이라는 본격물 특유의 단점을 극복하지는 못했습니다. 우선 전개의 핵심인 둘 사이에 오간 편지와 결말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첫 번째 편지에서 하루시게는 양복 속 초콜릿 포장지 조각을 넣은 방법은 결국 알아낼 수 없었지만, 니레 가문을 이용해 먹으려고 했던 효도 유타카가 범인이라고 추리했습니다. 그러나 도코는 하루시게의 아내 사와코가 벌인 자작극이라는 자신의 추리를 보내옵니다. 불륜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 그리고 남편 상복을 준비했기에 포장지 조각을 쉽게 넣을 수 있었다는게 증거라면서요.
다음 편지에서 하루시게는 도코의 남편 요헤이와 사쿠라, 그리고 가정부 스미에가 공범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와코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와 함께요. 그리고 도코가 사실은 요헤이를 사랑했던거 아니냐고 비난합니다. 그러자 도코는 요헤이는 사고사한게 아니며, 자신이 살해한 것과 다름없다는 편지를 보내옵니다.
하루시게의 마지막 편지는 도코가 요헤이와 공모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하루시게가 감옥 생활을 하게 한 진범이라는걸 밝히는 내용이었고요.
둘의 자살 이후 이 편지들이 발견되었고, 하루시게의 변호사이지 친우 기시가미의 도움으로 경찰은 도코가 하루시게를 살해하고 자살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42년 간의 수감 생활 중 도코가 진범임을 확신했던 하루시게의 복수였다는게 드러나며 마무리 되는데, 이 편지의 왕래 자체가 억지스럽고 작위적입니다. 첫 번째 편지를 보낸 뒤, 도코가 "맞아요, 효도가 범인일거에요" 라는 답장을 보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녀가 사와코가 범인이며, 사실 하루시게는 사와코를 사랑했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낼 이유는 없었습니다. 

설령 그런 답장을 보냈다 한들, 하루시게의 두 번째 편지 - 사쿠라, 요헤이, 스미에 공범설 - 에 응해 사실 자기가 요헤이를 살해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편지를 보낸다는건 더 말이 안됩니다. 솔직히 도코가 이런 장문의 답장을 쓴 것 부터가 억지에요. 42년은 긴 세월입니다. 아무리 불같은 사랑을 했더라도 수십년간 연락도 뜸했던 남자가 저런 편지를 보내왔을 때, 도코가 기꺼이 반기며 열정적으로 답장을 보내면서 결국 다시 사랑에 불타오른다는건 별로, 아니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도코가 범인이라는걸 증명할 수 없다는, 본격 추리물로 보기 어려운 결함도 큽니다. 도코가 범인이라는 증거도, 자백도 없기에 이는 하루시게의 확신에 불과합니다. 즉, 하루시게의 사쿠라, 요헤이, 스미에 공범설이 진짜였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하루시게가 니레 가문의 당주가 된 시점에서, 도코가 사와코를 살해할 동기가 없는 탓이고요. 딸들도 아버지가 며느리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걸 묵인했을 정도로 니레 가문 당주의 위치는 확고했습니다. 불륜 따위로는 흔들리지 않았을거에요. 

물론 불륜 상대방이 자기 동생이라걸 사와코가 받아들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만, 실제로 그런 상황이 확인되지도 않았는데, 심지어 하루시게가 당주가 된 직후에 도코가 사와코를 살해할 이유는 없습니다. 설령 도코가 요헤이와 공모했다 하더라도, 하루시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는 것 역시 이해하기 힘듭니다. 누가 봐도 가문의 사람이 아니고, 곧바로 야심을 드러낸 사쿠라나 효도의 양복 속에 초콜릿 포장지 조각을 넣는게 당연했을 테니까요. 사건을 무마하고, 이후 니레 가문의 터전을 다지는데도 훨씬 쉬웠을테고요. 

하루시게가 경찰에서 '사와코가 진범이다' 라고 주장했을 거라는게 도코의 바람이었다는데,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내가 당신 아내를 죽이고 당신에게 누명을 씌웠지만, 당신은 똑똑하니까 당신 아내 자작극이라고 경찰에 말하면 될꺼야!" 라는 건데, 뭐라 말하기도 힘든 억지 주장일 뿐이지요.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 시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마지막 반전(?)도 딱히 인상적이라고 하기는 힘들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고전 본격 추리물 애호가로서 이런 스타일의 작품이 새롭게 출간된건 반가왔지만, 본격 추리물로는 함량 미달입니다. 사실 도코의 두 번째 답장부터는 읽으면서도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었어요. 딱히 고전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는 애호가가 아니시라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0/12/25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 루스 렌들 / 홍성영 : 별점 3점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 6점
루스 렌들 지음, 홍성영 옮김/봄아필

루스 렌델이 쓴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중심의 단편집입니다. 수록된 대부분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무언가에 몰입, 집착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대상은 열쇠, 시계, 저택과 같은 사물도 있고, 여장이나 동물로 변장하는 등의 독특한 취미도 있지요. 주인공들은 결국 그 때문에 파국을 맞게 되는데, 파국을 맞는 장면이 마지막 몇 줄로 정리되는 반전 묘미가 빼어난 작품이 많습니다. 등골 서늘한 반전을 짤막한 문장으로 펼쳐보인다는 점에서 '기묘한 맛' 장르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정교하게 계획된 범죄가 등장하는 "휘파람 부는 남자"와 "늪지 저택, 펜 홀"은 등장 인물들 심리와 주변 배경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중심이기는 하지만, 잘 짜여진 추리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었고요.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시대에 조금 뒤처진 느낌도 들고, 반전도 뻔한 작품들이 많다는건 아쉽습니다. 대표적인게 표제작인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겠지요. "헤어가 살던 집", "아버지의 날" 등도 예상하기 쉬운 내용이었고요. 

하지만 뻔하더라도 독자를 몰입시키는 구성과 전개, 묘사가 빼어나서 한 번 읽어볼 가치는 충분합니다. 거장이 달리 거장이 아닌 거지요. 별점은 3점입니다.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남성 공포증이 있는 여자와 장난삼아 여장을 즐긴 남자가 겪는 파국을 그린 작품.

원제는 The New Girlfriend인데, 영화 때문에 제목이 바뀐걸가요? 여튼 여장한 데이빗을 진짜 여자로 생각하는 크리스틴의 심리 묘사가 볼거리였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데이빗이 크리스틴과 함께 하기(?) 위해 남자로 돌아오자, 그를 살해한다는 결말은 너무 뻔했습니다. 크리스틴이 남편 외 남성에 대해 갖는 혐오가 앞서서 상세하게 설명된 탓이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조금 찾아보니 영화는 기본 설정만 따왔을 뿐, 전혀 다른 이야기로 각색했더군요. 저는 영화 결말보다는 원작 결말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푸른 히아신스 향기" 

아내 캐서린이 불륜 뒤 임신하자 이혼하고 40년간 해외를 떠돌던 남자가 돌아왔다. 그는 다시 한 번 캐서린을 찾아 나섰고, 결국 그녀를 만났지만 그녀는 도망가버리고 말았다. 남자는 다시 그녀를 찾아가 총으로 쏴 죽였다. 그러나 그가 죽인건 알고보니 그녀의 딸이었다.

남자가 캐서린에게 집착하는 디테일한 심리 묘사가 일품입니다. 이를 통해 그녀에 대한 살의와 살인이라는 직접적 행위가 설명되고요. 죽인 여자가 캐서린이 아니라 그녀의 딸이었다는 반전 역시 대단했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과수원 울타리"

나는 공습을 피해 엘라 이모가 사는 인치필드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엘라 이모가 남편이 징집된 틈에 병가를 받고 돌아온 조종사 데니스 클리프턴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걸 알아챘다.
밤에 총 소리를 들은 어느 날 아침, 나는 나무에 매달린 허수아비를 데니스 클리프턴의 시체로 오인해 소동을 일으킨 뒤 런던으로 쫓겨났다. 엘라 이모도 아이를 낳다가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나는 그곳에서 머리에 산탄총을 맞은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이 작품도 '나'의 심리 묘사가 빼어난 작품입니다. 또 어린 시절 추억을 회고하면서 그려내는 영국 시골 풍경에 대한 묘사도 좋고요. 서정적인 분위기에서 불륜으로 긴장감을 싹 틔우고, 이를 목 매달린 시체 (허수아비)로 터트리는 전개도 거장답습니다.

그런데 에필로그처럼 그려진 마지막 반전은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발견된 유골은 데니스 클리프턴일겁니다. 그렇지만 데니스 클리프턴은 전시에 병가 중인 군인이었습니다. 그가 실종된게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었을까요? 마을 사람들 모두가 불륜을 알고 입을 맞췄다고 하더라도 전시라는 상황이면 문제가 되었을텐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헤어가 살던 집" 

살인 사건이 일어난 탓에 싸게 나온 집을 구입한 노먼은 아내 리타와 함께 이사왔다. 10여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계속 신경을 쓰던 노먼과 리타는 욕실 창문이 자꾸 열리는걸 가지고 다툼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리타를 거의 죽일 뻔 한 노먼은 다시 이사를 마음먹은 뒤, 헤어 사건이 알고보니 자기와 같이 욕실 창문이 열린 탓이라는걸 알게 되는데...

스트레스와 긴장이 쌓이면 사소한 일로 살의가 폭발하는 심리를 극단적으로 묘사한 작품입니다. 전형적인 일상 속 이야기처럼 그려내었다는게 특징입니다. 살의가 우리 삶에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를 잘 알려준다고 할 수 있네요. 일상 속 사소한 문제로 폭발한 살의라는 점에서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활자 잔혹극 (유니스의 비밀)"과도 비슷하고요.

하지만 전개와 결말은 다소 뻔했습니다. 별다른 반전도 없고요. 창문 문제가 살의를 촉발할 수 있다는걸 이웃은 알고 있던걸로 보이는데, 이웃에 대해서 반전 형식으로 풀어내었다면 어땠을까 싶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뇌물과 부패" 

니컬러스는 여자에게 홀려 자기 수준에 맞지 않는 레스토랑을 방문하여 엄청난 덤터기를 쓸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아버지를 해고했던 아버지 회사의 보스 소렌슨이 식사비를 대신 지불했다는걸 알게 되었다. 소렌슨이 아내가 아닌 젊은 여자와 함께 있는걸 목격했던 탓으로 여긴 니컬러스는 식사비를 돌려주기 위해 다음날 소렌슨을 찾아갔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니컬러스를 협박범, 그리고 바보 취급을 할 뿐이었다.

며칠 뒤, 소렌슨의 아내가 살해된 채 발견되고 소렌슨은 식당에서 그를 목격했던 니컬러스만이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수 있는 상황에 처하는데....

소심한 소시민이지만 자존심만큼은 갖춘 니컬러스가 펼치는, 자신을 무시했던 소렌슨에 대한 복수극입니다. 독자가 니컬러스에게 공감을 느낄 수 있도록, 니컬러스가 울분을 쌓아가는 과정을 차분히 그려낸 전개가 돋보입니다.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빌드업'이 완벽해요. 이러한 빌드업을 완성하는 마지막 니컬러스의 한 마디, "보지 못했습니다. 절대로요."가 작품의 백미고요. 소시민의 잔혹 복수극이자 일상계라는 독특한 작품의 정체성도 인상적입니다.

식당에서 소렌슨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조금은 작위적인 설정은 아쉽지만, 그 외에는 단점을 찾아보기 힘든 수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휘파람 부는 남자"

매뉴얼 밑에서 페인트 공으로 일하는 제레미는 영국인 불법 체류자이자 좀도둑으로, 일하던 중 모르는 집 열쇠를 줍게 되었다. 이 집을 털어서 인생 역전을 꿈꾼 제레미는 집 열쇠에 적힌 주소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집은 매뉴얼의 본가였고, 잽싸게 도망치던 제레미는 이 모든게 매뉴얼의 복수라는걸 깨닫게 되었다. 매뉴얼이 결혼할 여자인 루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게 들켰기 때문이었다...

허술해 보이는 쿠바 이민자가 영국인 좀도둑을 가지고 놀면서 제대로 복수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몇 줄로 드라마틱한 반전이 완성되는, 오 헨리 스타일의 반전물이기도 하고요. 반전을 통해 매뉴얼이 이상하게 돈이 많았다는 복선도 회수되지요. 

개인적으로는 호감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느낄 수 없는 영국인 제레미가 죗값을 치룬다는 권선징악적인 결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만큼 밉상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묘사력은 정말이지 부럽네요.

그런데 제레미가 집을 터는 동안, 제레미 짐 속에 마약을 숨긴 뒤 세관에서 걸리게 만든것 자체는 엄청난 복수이기는 합니다만 너무 복잡하고 거창한 복수가 아니었나 싶어요. 제레미가 집을 털 생각을 하지 않았거나, 집 주소를 알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고요. 물론 매뉴얼은 다른 복수를 준비했겠지만, 여러모로 손이 너무 많이 가는게 아닌가 싶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나팔꽃 시계" 

트릭시는 데본셔에 사는 친구 시빌에게 놀러갔다가 그곳 갤러리인 아티팩트에서 충동적으로 나팔꽃 시계를 훔쳤다. 시계는 그녀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안겨 주었고, 시계를 알아본 친구 미비마저 사고를 위장해 살해했다. 시계를 몰래 돌려 놓으려는 시도마저 실패하자 트릭시는 순간적 광기로 시계를 부숴버리는데....

특정 물건에 대한 충동적인 집착이 파국을 불러온다는 심리 드라마입니다. 주인공이 노인이며, 시계 때문에 그녀가 살인까지 저지르는 파국이 일상 속에서 전개되는 일상계 속성이라는 점을 주목할 만 합니다. 마지막에 쓰러진 트릭시가 "똑딱똑딱, 나팔꽃 시계 소리"라고 말하는 장면도 대단했어요. 그녀 정신이 붕괴했다는걸 이렇게 한 마디로 표현하는 솜씨는 그야말로 일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전개와 결말은 다소 뻔하다는 단점은 어쩔 수 없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늑대탈" 

'나'는 임박한 결혼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연극에 쓰는 늑대탈을 쓰면 자신을 잊을 수 있다는걸 알아챘다. 같은 취미를 숨기고 살던 어머니와 함께 하게 되자, 늑대탈을 쓰는 행위와 늑대가 될 때 야생으로 깊이 들어가던 행위는 점점 폭주하게 되었다. 마침내 약혼녀 모이라가 양가죽 외투를 입고 찾아온 날, 야생동물 두 마리가 양을 덮치고 만다....

두 마리의 야생 동물이 바닥에 쓰러진 양을 덮쳤다는 것이다. 는 마지막 문구는 섬뜩했습니다. 전형적인 '기묘한 맛' 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모이라를 먹은 건지도 살짝 궁금해지고요.

그러나 정신병자가 쓰는 글이라는걸 계속 알려주고, 늑대탈을 쓰면 늑대가 된다는 행동 묘사가 상세해서 반전의 묘미는 약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분명 어딘가에서 읽었던 작품이라 신선함도 부족했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늪지 저택, 펜 홀" 

프링글과 친구들은 아버지 친구 리던 씨가 사는 늪지 저택 펜 홀 근처로 캠핑 여행을 떠났다. 리던 씨는 저택 관리를 위해 모든걸 걸었지만 돈과 인력,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고, 리던 씨 아내 플로라는 저택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물건에만 집착했다. 때문에 저택 내부는 쓰레기장같아 보였다.
태풍이 불어 포퓰러 나무가 쓰러진 다음날, 나무 구덩이에서 오래된 유물이 발견되고 이를 좋아하는 플로라는 발굴에 나섰다. 그러나 리던 씨가 해체하던 쓰러진 나무가 구덩이로 떨어져 그녀는 깔려 죽고 마는데...

서로 다른걸 원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사고로 죽어버립니다. 당연히 남편이 사고처럼 위장해서 저지른 범행이고요. 이렇게 내용은 굉장히 뻔합니다. 하지만 이를 어린 아이인 프링글 시점에서 은근히 드러내는 묘사만큼은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해 줍니다. 직접적으로 죽이는걸 본건 아니지만, 여러가지 정황 증거들을 묘사하는 식이거든요. 

그리고 본 편 이야기보다도 오히려 늪지 저택 펜 홀과 숲에 대한 묘사가 훨씬 굉장하다고 느꼈습니다. 자작나무 줄기는 은색, 너도밤나무는 백랍색, 플라타너스는 회색과 노란색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도입부부터 독자를 사로잡는, 굉장히 상세하면서도 맛깔나는 묘사였어요. 작가의 필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아버지의 날" 

테디는 처제 가족과 그리스 섬으로 여행왔다. 처제의 남편 마이클은 아내 린다가 아이들과 함께 자신을 떠나는걸 두려워하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이클이 아내를 처치하고 아이들을 독차지한다는 이야기인데, 절벽에 떨어질뻔했던 테디와 아내 앤의 사고를 묘사하여 이어지는 사고와 연결시키는 전개는 너무 뻔했습니다. 수록작 중에서 가장 뻔한 이야기였달까요. 아이들과 헤어지기 싫지만 이혼이 만연한 세상에 두려워하는 마이클의 강박증 설정은 괜찮았지만, 테디 시점에서 묘사해서 그렇게 극적으로 묘사되지는 못한 것도 아쉽고요. 더 광적인 에너지가 느껴졌으면 했는데, 지금의 작품은 제 3자 입장에서 바라본 탓에 조금 무미건조한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케판다로 가는 초록길" 

나는 인기없는 판타지 소설을 쓰는 작가 아서 케스트렐과 친구였다. 그러나 그가 발표했던 15권에 달하는 '칼리나스 연대기'는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다. 아내 엘리자베스만 읽었을 뿐이었다. 아서는 어느날 '나'에게 런던 외곽선이 폐쇄되고 생긴 아름다운 산책로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엘리자베스와 함께 산책을 나섰지만, 그가 이야기한 풍경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서는 혹독한 비평이 신문에 실린 뒤 자살을 택했다. 바로 그 날, '나'는 알 수 없는 사명감에 아서를 찾아왔다가 귀가하던 중 아서가 이야기했던 산책로를 발견하는데...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가 다른 사람에게도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작가들이 꿈 꿔볼만한 일종의 판타지 작품. 장르 문학을 쓰는 작가에 대한 세간의 푸대접에 불만을 품고 쓴 글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아서가 만들어낸 산책로의 아름다운 묘사가 빼어납니다.

하지만 다른 수록작들과 비교할 때 극적 재미를 느끼기는 힘들었습니다. 특별한 반전도 없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23/11/26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 고미네 하지메 / 민경욱 : 별점 2점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 4점
고미네 하지메 지음, 민경욱 옮김/하빌리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건설회사 대표 시바모토 겐지로의 딸 미유키가 임신 중절 수술 후유증으로 죽은 뒤, 아이 아빠 후보로 의심받던 야규는 친구 나이토의 도시락을 먹고 입원했다. 도시락에 비소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야규의 누나 미사코의 불륜 상대 가메이가 실종된 뒤, 야규의 집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야규의 어머니는 자기가 저지른 범죄라고 주장했지만, 노무라 형사는 야규의 알리바이를 깨버리고 진상을 밝혀내었다. 모든 사건은 엔메이, 야규, 나이토, 아라키 네 명이 결성한 아르키메데스 모임의 의도였다....

1973년 제 9회 란포상 수상작. 올해 일본 작품을 너무 많이 읽어서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지만, 란포상 수상작 완독 달성을 위해 읽게 되었네요.

야규가 가메이를 살해한 날, 수학 여행을 갔다는 알리바이 트릭은 괜찮았습니다. 배에서는 정확하게 학생들을 확인하지 않고 사람수만 센다는 맹점을 이용한 겁니다. 일행은 야규대신 다른 학교 학생을 대신 세도록 만들었고, 배 안에서는 "야규와 함께 있었다"라고 엔메이가 거짓으로 증언해서 함께 탄 것으로 위장했지요. 간단하지만 실현 가능한 현실적인 트릭이었습니다.
야규가 살인범인지, 어머니가 살인범인지를 놓고 벌이는 마지막의 취조 과정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단지 손으로 목을 졸랐다는 야규의 증언과 실제 사체의 교살 흔적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를 잘 풀어냈습니다. 가메이가 죽은 줄 알고 시체를 파묻다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걸 알고 어머니가 확실하게 목을 졸랐던 거지요.

그런데 그 외에는 점수를 줄 부분이 없습니다. 일단 사건을 저지르는 주체인 "아르키메데스 모임" 부터가 전혀 와 닿지가 않아요. 이들이 주변의 부정을 벌한다고 계획한 것들 모두 정의로움을 느낄 여지가 없는 탓입니다. 임신중절 수술로 미유키가 죽은 사건만 놓고 보아도 그러합니다. 친구이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심지어 멤버 중 한 명인 나이토의 아이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를 어른에 대해 복수에 성공했다며 희희낙락하고, 이를 꾸짖는 어른에게 한 마디도 지지않고 맞선다? 어이가 없어요. 자괴감과 미안함에 몸부림치며 사죄해도 부족합니다. 나이토가 미유키가 죽은 뒤에도 아르키메데스 모임 멤버들과 우정을 이어나간건 타인의 고통이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이 아예 없는 사이코패스가 아닌가 의심될 정도입니다.
또 미유키를 임신시킨건 겐지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위해서이며, 이는 겐지로가 지은 건물이 일조권을 빼앗아 나이토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에 대한 복수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이토의 할머니의 사망이 일조권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겐지로 역시 그냥 건물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분명 정당한 보상을 했다고 언급하고 있어요. 그런데 도대체 뭘 잘못해서 딸을 잃기까지 했어야 했는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은 미유키를 질투한 엔메이의 치정이 결합된 치졸한 행동이 원인이었습니다. 정의와는 별 관계도 없는 셈이지요.
 
야규가 저지른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연히 불륜을 저지르는 가메이같은 인간은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불륜은 야규의 누나가 함께 저지른 겁니다. 왜 남자만 단죄하겠다는 걸까요? 그리고 단죄가 목적이었다면 구태여 수학여행을 갔다는 알리바이를 만들 필요는 없었습니다. 수학여행을 갔다고 누나만 속여도 충분했으니까요. 즉, 이렇게까지 치밀한 알리바이를 만든건, 단지 혼을 내주려던게 아니라 살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이며, 이는 파렴치한 범죄는 저지르지 않겠다는 아르키메데스 모임의 취지를 거스르기에 문제의 소지가 많습니다. 1급 살인 미수라는 점에서 처벌도 보다 강력해야 할 테고요.

"청춘 미스터리"의 효시라는 소개 역시 제가 보았을 때는 지나친 과찬입니다. 작품 속 청춘은 자기 확신에 가득찬 몰염치하고 비겁한 놈들입니다. 아르키메데스 모임은 극 중 노무라 형사의 말대로 그냥 야쿠자 조직과 다를게 없어요. 게다가 고등학생들이 기성 세대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묘사는 진부했고, 특히 전공투와 연합 적군파를 긍정하는 듯한 발언 등은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합니다. 한마디로 주인공으로 청춘(고등학교 2학년생)이 등장할 뿐 청춘과는 거리가 멉니다. 차라리 평범한 학생이 누나의 불륜남을 응징하려고 하다가 사건이 벌어지는 식으로 진행되었더라면 모를까, 고등학교 범죄 조직의 범죄극에 불과합니다.

추리적으로도 알리바이 트릭은 일견 괜찮아 보였지만, 부두에서 기차 등을 타고 거의 3시간에 걸쳐 집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실제로 목격자가 나타나서 트릭은 실패하고 말지요. 
그 외 사건에서 작위적인 부분들이 많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야규의 누나 미사코가 자살한걸 의문스럽게 묘사한게 대표적입니다. 미유키가 죽기 전 아르키메데스라는 말을 남긴다던가, 야규 목격자는 신문 투서를 통해 알아낸다는 등도 마찬가지고요. 엔메이 등 다른 아르키메데스 멤버들이 왜 위증으로 처벌받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알리바이 공작을 위해 형사에게 거짓 증언을 했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작품이 발표된 40년 전에는 나름 신선하고 가치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읽기에는 여러모로 함량 미달입니다.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09/09/11

절벽 - 현재훈 : 별점 3.5점

거의 백만년만의 추리소설 포스팅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새 너무 독서가 뜸했네요. 개인적으로도 바쁘고 여유가 없다보니 책을 지긋이 읽는 것 자체가 좀 무리더군요.

그래서 기분전환도 할 겸 이번에는 단편집에 손을 대 보았습니다. 이 책은 저도 잘 몰랐던 한국 작가 현재훈님의 단편집입니다. 우연찮게 검색을 통해 알게된 작가인데, 이렇게 새로운 작가분들을 알게될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합니다. 척박한 국내 추리 문단에서 작품을 발표해 왔다는게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어쨌건 책 소개를 하자면, 이 책에는 "절벽", "곰팡이", "낙화", "검은 반점", "기만자", "부녀", "모래성", "흑무", "복제인간", "잠꼬대", "목소리", "족적" 이라는 총 12편의 작품이 실려있습니다. 몇몇 작품은 20여페이지 내외의 꽁트 분량이지만 양적으로는 풍성합니다. 수록작 대부분은 일본 사회파적인 느낌이 물씬 납니다. 그러나 암울했던 독재시대인 80년대 당시의 분위기를 작품과 캐릭터, 설정에 드러내면서 이야기와 연관시키는 본격적인 사회파 작품은 아닙니다("검은 반점"에서 노동운동이 약간 표현되는 정도입니다). 분위기만 따라갈 뿐이지요. 그래도 황금만능주의를 주요 테마로 하여, 범행의 동기와 수사의 과정을 치밀하게 보여주는 부분은 정통 사회파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또한 "낙화"나 "검은 반점"의 트릭은 작품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기대 이상의 재미를 선사해 주며, "부녀"나 "모래성"에서의 경찰 수사에 대한 디테일한 설명은 한국 추리문학에 이런 작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잘 짜여져 있어서 만족스럽습니다. 대부분의 내용을 심리묘사 중심으로 끌고나가는 문장력도 빼어납니다. 순수문학가 출신다운 내공을 유감없이 보여주네요. 한국적인 특색을 살린 몇몇 묘사들도 굉장히 반가웠고요. 그야말로 숨겨졌던 한국 추리문학의 재발견에 가까운 작품이랄까요.

그러나 단점 역시 분명합니다. 무엇보다도 "추리소설"로 보기에는 부족하다는 단점이 큽니다. 수록작 대부분은 '"A"가 저지른 사건에는 "B"과 관련되어 있고 "A"와 "B"가 티격태격하다가 전혀 엉뚱한 "C"에 의해 사건이 밝혀진다.'는, 반전도 아닌 깜짝쇼에 의존한다던가, 결국 범인이 자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작품이 너무 많습니다. 사실상 독자가 추리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어요. 

마츠모토 세이초 작품들과 설정 등에서 지나칠 정도로 유사성을 보이는 점도 거슬렸던 점입니다. 대표적으로 표제작인 "절벽"의 예를 들 수 있겠죠. 이 작품은 마츠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상권에 수록된 "수사권외의 조건"의 설정을 많이 따라했거든요. 사실 백영호라는 인물이 복수를 위해 "8년"의 세월을 기다리며 자신을 감추는 과정과 범행에 대한 디테일(상상이지만)은 거의 똑같습니다. 작품 내에서도 "소설"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할 정도니까요.
"잠꼬대"라는 작품에서 마츠모토 세이초의 작품과 주요 트릭을 언급하고 있으며, "곰팡이"는 "제로의 촛점"과 캐릭터 면에서 유사한 등 많은 부분이 겹칩니다.

그리고 작품마다 여러 고전과 명대사, 명언등이 언급되고 철학적 주제를 논하기까지 하는데 영 별로였습니다. 순문학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탓입니다. 이런 쓸데없는 묘사를 들어내면 작품이 더 깔끔해졌을텐데 아쉽네요. "추리소설"이 그다지 문단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70~80년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니 씁쓸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아주 색다른 작품들이었고 좋은 독서였습니다. 비록 많이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한국 추리문학을 논할때 빼놓으면 안되는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모든 작품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인 의미도 크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85년도에 출간된 책인데 이미 절판되어 정보조차 찾을 수 없는 현실이 야속합니다. 구하실 수 있다면 한번 찾아서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절벽

이승준은 과거 가난했지만 사장의 딸 홍정아와 결혼하여 출세했다. 그러나 과거의 첫사랑과 우연히 조우하여 불륜을 저지르고, 과거 부하 백영호의 아내와도 불륜관계였다가 그 아내를 사망케하고 도주한 과거가 있었다. 이 사건으로 복수심에 불타던 백영호는 때를 기다린다... 

살인을 저지르면서까지 출세하고 싶었던 가난뱅이 청년과 황금만능주의는 "아메리카의 비극" 등 많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테마죠. 하지만 이 작품이 특이한 것은 출세를 위해 과거 교제했거나 임신한 여인을 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출세하고 난 뒤에 불륜이 시작된다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한국적인 전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부분들은 지나치게 통속적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래도 공범자가 있다는 트릭과 주인공들의 심리묘사가 잘 어우러져서 상당한 수준의 사회파 추리물로 만들어 졌습니다.

딱 한가지 아쉬운 점은 "백영호"라는 인물의 설정을 앞서 말했듯 마츠모토 세이초 작품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따왔다는 점입니다. 좀 무리한 설정이 아니었나 싶어요.

"곰팡이"

부유한 저명인사 허진영은 그녀의 과거가 양공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김학수라는 인물에게 협박을 당하는데.... 

6.25 동란때의 숨겨야 하는 과거와 현재가 밀결합되고 있는 점, 그리고 과거에서 파생된 범죄가 범죄를 낳는 점 등 전형적 사회파 추리소설의 틀을 따르고 있는 작품입니다. 나름의 트릭과 사건 전개, 그리고 범인을 밝혀내는 과정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고요.

그러나 마츠모토 세이초의 "제로의 촛점"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 그리고 협박자와 내연의 관계에 있어 같이 살해당한 여인을 쫓아다녔다(?)는 이유만으로 사건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탐정역의 박상호라는 인물이 별로 와닿지 않는다는 단점이 아쉽습니다.

"낙화"

화가인 내가 작품 활동을 위해 머무는 산장에 친구 박희주 부부가 찾아와 머물게 되었다. 박군은 아내 문영과의 사이가 멀어진 뒤 처제 난영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문영이 산장 베란다 밑 절벽으로 떨어져 죽었다. 방은 밀실상태였고 문영의 손에는 박희주의 양복단추가 쥐어져 있던 상태였다. 

밀실 + 심리 트릭이 돋보이는 잘 짜여진 정통 추리물입니다. 지나칠정도로 치정극으로 치우쳐져서 통속적으로 흐를 수 밖에 없는 인물 설정과 상황 묘사들로 추리적인 매력이 많이 희석된게 아쉽지만 나름대로의 동기와 트릭, 범행방법 모두 납득할만한,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습니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결말부분에서 너무 "끝"을 내려는 작가의 의도가 너무 튀었다는 것인데 그래도 작품에 흠집을 낼 정도는 아닙니다.

"검은 반점" 

신혼여행 중 신부 한미숙이 바닷가에서 실종된 후, 위도라는 섬에서 청산가리를 음독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가 입고있던 실내의가 바닷물에 오염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바닷물로 흘러간 상태는 아니었지만, 구역내의 어떠한 배도 위도로 여자를 실어다 준 배는 단 한척도 없었다. 

시체가 어떻게 그 섬에 있을 수 있었을까? 라는 순간 이동 트릭을 테마로 한 작품입니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바꿔치기 트릭도 등장하는 등 추리적으로는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해당 지역에 대한 상세한 조사가 바탕이 된 듯한 디테일도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범인이 시체를 은닉하거나 자연스럽게 유기하지 않고 부자연스러운 상태로 만든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과 좀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맥없이 범인의 자백으로 작품을 마무리 지은 것 때문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좀 힘드네요.

"기만자" 

주인공의 독백만으로 이루어지는 기묘한 작품입니다. 과연 아내 희숙을 죽인것은 또는 죽게 만든 것은 누구인지, 경선을 죽게 만든 것은 누구인지, C군은 어떻게 된 것인지가 뒤엉켜서 흘러가는 복잡한 작품이기는 한데 썩 재미는 없더군요. 참신한 시도는 눈여겨 볼 만 하지만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부녀" 

진아물산 사장 김인호의 큰딸이 밀실에서 청산가리에 의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녀가 자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형사 김익수는 치밀한 수사 끝에 여러 정황증거를 토대로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게 되는데... 

과거의 사건에 의한 범죄라는 테마는 사회파 추리소설에 흔히 나오는 것이죠. 이 작품은 과거의 죄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현재에 다시 범행을 저지른다는 줄거리와 더불어 현재 벌어진 사건에 대한 경찰의 치밀한 수사가 디테일하게 그려진 전형적 사회파 추리소설입니다.

작중에 경찰 스스로의 입으로 밝히듯 결정적 증거가 없다!라는 추리소설로서는 사실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고, 결말도 범인의 자백으로 끝나는 등 "추리" 적인 요소로만 본다면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와 전개는 지금 읽어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수작입니다. 디테일한 수사와 여러 단서를 통해 유추해내는 추리가 무척이나 설득력 넘치는 덕분입니다.

"모래성"

H부동산의 회장 신병호가 자신의 저택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수사관 한정수는 제한된 단서와 증언을 토대로 서서히 범인을 추적해 나가는데... 

여러 용의자, 복잡하게 꼬인 단서들과 서로 다른 증언들이 교차되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수사 추리물입니다. 수록된 작품들 중 가장 긴 작품 중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범행을 하기 전 똥을 누면 운이 좋다"와 같은 속설까지 작품에 끌어들일 정도로 세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소설 속 불가능 범죄가 아닌 현실의 실제 있는 강도사건을 보는 듯한 자세한 상황 및 배경 묘사가 일품이기 때문입니다.
발자국이나 침투경로, 새벽에 들은 소리, 왜 비상벨을 누르지 않았는지 등의 다양한 단서들을 필요할 때 마다 하나씩 던져주는 등 전개도 흥미진진하고요.

하지만 신병호의 과거와 현재, 강남 복부인들과의 관계라던가 실제 사건에서의 몇몇 미심쩍은 단서 등 벌려놓은 소재를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서둘러 끝맺은 마무리 부분이 너무나 아쉽네요. 보다 긴 중편 이상 길이의 본격 사회파 추리소설로 전개하였더라면 우리나라 추리문학의 고전으로 길이 남지 않았을까 싶은데 결말이 매끄럽지 못해서 평작에 머무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시 읽어봄직한 수작임에는 분명합니다.

"흑무"

문학교수 김용석은 학문에서 좌절하고 부인 이지영과의 관계도 원만치 못하여 술로 고독을 삼키던 중, 단골 술집에서 접근한 한 여인에게 끌려 그녀의 집으로 가게 된다. 

복수극이긴 한데 치밀한 맛이 떨어지는 소품입니다. 주인공의 단골 술집에서 접근한 여인, 그에게 원한이 있는 범인 등 한번 수사를 한다고 치면 걸려들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 완전범죄로 가장하기에는 너무 미흡하지 않나 싶더군요. 작가의 순문학에 대한 강박관념이 느껴질정도로 토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문학적인 이론과 평가가 난무하는 것은 내용에 혼란만 더하고요. 그냥저냥한 평작이었습니다.

복제인간 

2015년 서울 교외의 아파트촌에서 주미리여사가 살해당했다. 사건과 더불어 복제인간 유아 성추행 살인사건이 벌어지는데... 

근미래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흉기가 총이라는 것과 복제인간 아이라는 설정을 제외하고는 SF적인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는게 특이합니다. 사실상 복제인간 아이라는 것도 "쌍둥이"라는 설정을 위해 가져온 것이니 만큼 별다른 것이 없어서 왜 근미래를 무대로 묘사했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어요. 이야기 자체는 평이하고 예상대로 전개되기에 딱히 두드러지는 부분은 없습니다. 소품 수준의 평작입니다.

"잠꼬대" 

최건호는 아내 은영의 불륜을 의심하여 여러가지로 그녀를 시험해본다. 그러던 중 은영이 독극물에 중독되어 숨지고, 사건은 자살로 판명되는 듯 하지만.... 

한마디로 "의처증"을 극단적으로 묘사한 작품입니다. 집요하고 수법이 잔인한 편이라 좀 놀랍더군요. 시대를 앞서간 듯한 강박증에 대한 심리묘사도 대단하고요.

하지만 이러한 의처증 이외의 사건 전개는 너무 막 나가기에 좋은 평가를 하기 어려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건이 주요 전개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부분에서 끝나버리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의처증 증세의 진상이 폭로되는, 즉 최건호는 의처증으로 의심받아 정신병원에 수용되지만 앞부분에서는 결백한 듯 했던 은영이 실제로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식의 전개가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목소리" 

박찬식은 사업과 연애의 라이벌이었던 정진호를 제거하고 그의 아내 미경과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미경이 살해되고 모든 정황이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되는 상황에 빠지자 박찬식은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자가 누구인지 밝혀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도청과 가명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피력되는 복수극입니다. 하지만 "도청" 방법 이외의 추리적인 요소를 찾아보기 힘들기에 정통 추리물로 보기엔 무리가 있네요. 경찰의 수사로 인해 끝나는 결말 역시 많이 허무한 편입니다.

"족적" 

조숙경이 살해된다. 제1용의자는 불륜관계였던 화가 김기오. 그러나 김기오는 스스로 누명에 빠졌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이 연상되는 이색단편입니다. 화자이기도 한 주인공이 스스로의 진술을 사기친다는 설정이 동일하거든요. 하지만 이야기가 정교하지 않으며 별로 공평하게 전개되고 있지 않아서 굉장히 무리가 많습니다. 그 외에도 경찰이 확실한 정황증거가 있음에도 기소하지 않는 황당한 모습을 보이는 등 여러모로 평균 이하인 졸작입니다.

2025/02/22

모즈가 울부짖는 밤 - 오사카 고 / 김은모 : 별점 2.5점

모즈가 울부짖는 밤 - 6점
오사카 고 지음, 김은모 옮김/문학동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킬러 '모즈'는 타겟 가케히를 죽이려다 가케히가 들고 있던 폭탄이 폭발하는 사고에 휘말렸다. 사고에 휘말려 죽은 피해 여성은 경시청 공안부 형사 구라키의 아내 다마에였다. 담당자였지만 가족이라 사건에서 배제된 구라키는 얻어낸 열흘간의 휴가를 이용해 사건 수사에 나섰다.

한편, 신가이 가즈히코는 호메이 흥업 조직원들에게 살해당했지만, 기억을 잃은 채 발견되었다. 호메이 흥업이 계속 그의 목숨을 노리는 와중에, 신가이는 자신의 과거를 찾기 위해 분투하여 결국 기억을 되찾았다. 그는 가즈히코가 아니라 동생 히로미이자 킬러 '모즈'였다. 

구라키, 모즈, 그리고 형사 오스기 등의 수사와 추적으로 폭탄 테러는 공안부장 무로이 때문이었다는게 드러났다. 무로이와 구라키의 아내 다마에는 불륜 관계였고, 방일하는 사르도니아 대통령을 테러하기 위해 가케히는 무로이를 협박해서 정보와 폭탄을 손에 넣으려 했었다. 무로이는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이 협박에 흥했지만, 다마에가 폭탄을 이용해 가케히를 죽이려다 폭발에 말려든게 진상이었다...

오사카 고의 '모즈' 시리즈 첫 번째 작품입니다. 1986년에 출간된 작품이지요. 니시지마 히데토시와 가가와 데루유키 주연으로 드라마도 제작된 인기작입니다. 우리나라에도 10여년 전에 출간되었습니다. '일본 본격 미스터리 100선'에 선정되어 있어서 이전부터 관심이 가던 차에, 늦었지만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기억을 잃은 킬러 신가이 가즈히코와 아내를 잃은 공안 형사 구라키 나오타케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절벽에서 추락해 기억을 상실한 채 발견된 신가이는 아주 사소한 단서들을 토대로 과거를 찾아 나섭니다. 폭탄 테러로 아내를 잃은 구라키 형사는 독단적으로 수사를 진행하며 사건의 실체를 쫓고요.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굉장히 빠른 전개로 강한 흡입력을 보여줍니다. 지루함 없이 여러 사건이 속도감 있게 전개되고, 와중에 폭력과 액션도 넘쳐나서 오락적인 요소도 풍부하거든요. 사람도 여럿 죽어나가고요.

복잡한 이야기들이 얽히지만, 모두 '복수'가 중심이라는 점도 특이합니다. 구라키 형사는 폭탄 테러로 죽은 아내 다마에의 복수를 위해, 신가이(히로미)는 형 가즈히코의 복수를 위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칩니다. 흑막이자 원흉인 공안부장 무로이조차 사르도니아 대통령을 죽이려 했던 이유는 딸과 사위의 복수를 위해서였고요. 이렇게 작품 속 주요 인물들이 각자의 복수를 위해 움직이며 이야기가 전개되는건 신선했습니다. 

반전들도 인상적입니다. 첫 번째 반전은 기억을 잃은 신가이 가즈히코가 사실은 쌍둥이 동생 히로미였다는 것입니다. 히로미는 남성이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 트라우마로 인해 여장을 하고 킬러로 살아왔다는데, 그의 정체가 밝혀지는 과정은 꽤 설득력 있습니다. 그가 신가이로 오인되는 과정도 합리적인 편이고요.

두 번째 반전은 구라키 형사의 아내 다마에가 사실 폭탄 테러의 범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마에는 공안부장 무로이와 오랜 기간 불륜 관계였고, 이를 가케히에게 들켜 협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로이가 폭탄을 가케히에게 주기로 했었습니다. 무로이는 사르도니아 대통령 에체베리아에게 개인적인 원한도 있어서 가능했지요. 그러나 다마에가 폭탄을 이용하여 협박자였던 가케히를 죽이려다 결국 자신까지 말려들게 되었던 겁니다.

그 외에도 구로키와 다마에 사이에 태어났던 딸이 사실은 무로이의 자식이었고, 무로이의 부하 와카마쓰가 호메이 흥업과 손을 잡은 악당이었다는게 밝혀지는 장면도 꽤 놀라운, 반전이라면 반전입니다. 이렇게 많은 반전들 모두가 명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든 점입니다.

하지만 단점도 존재합니다. 우선, 이야기 구조가 지나치게 복잡합니다. 구라키 형사의 수사와 신가이(히로미)의 추적, 그리고 흑막인 무로이 부장의 존재까지는 납득할 만하지만, 여기에 더해 무로이의 부하 와카마쓰 경시가 독단적으로 극우 폭력단 호메이 흥업을 조종했다던가, 감찰부의 쓰키 경시정이 부하 미키를 이용해 내부 감찰을 벌였다는 등의 이야기는 과한 느낌을 줍니다. 이들의 비중있는 등장은 오히려 서사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였습니다. 특히 미키는 정말 불필요해서, 왜 등장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구로키에게 갖게되는 연심도 불필요한 요소였던건 마찬가지고요. 

또한, 이야기 전개도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호메이 흥업이 애초에 신가이를 살해하려 한 이유부터 명확하지 않습니다. 무로이 부장 측이 불륜과 테러의 증거 사진이 신가이에게 있을 것이라고 단정한 것도 불합리하고요. 피해자인 가케히가 설령 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신가이에게 넘겼을리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신가이(히로미)를 두 번이나 생포하여 사진의 위치를 추궁한다?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애초에 불륜 사진 확보 없이 가케히에게 사진과 폭탄을 전해준 것도 말이 안되지요. 외국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폭탄 테러라는 거대한 범죄가 벌어졌을 때, 그에 대한 증거가 되는 사진을 회수하지 못하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건 당연하니까요. 

구로키와 신가이 이야기가 교차될 때, 신가이 시점은 신가이가 살아난 다음부터 시작되지만 구로키 시점은 폭탄 테러 직후라서 시계열이 일치하지 않는데, 왜 이런 방식을 취했는지도 의문입니다.

결말도 아쉬운 점 중 하나입니다. 대단한 증거없이 무로이 부장의 자백으로 마무리되는건 허무하며, 길고 늘어지는 감도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주요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하여 대단원에 이르는건 비현실적이었어요. 하긴, 형이 살해당한 그 장소에서 쌍둥이 동생이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고 발견된다는 기본 설정부터 비현실적이긴 합니다만...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도 많지만 긴장감 넘치는 전개와 강렬한 반전, 그리고 복수를 주제로 한 독창적인 이야기는 나쁘지 않습니다. 여러모로 인기를 끌만한 요소는 많아요. 무엇보다도 재미만큼은 확실하니, 킬링 타임용 작품을 찾는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본격 미스터리 100에 선정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만...

2021/02/26

녹나무의 파수꾼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3점

녹나무의 파수꾼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소미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이토는 절도 사건으로 체포되었지만, 집안의 어르신이라는 치후네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치후네는 그 대신 레이토에게 '녹나무 파수꾼' 직을 제의했고, 별다른 방법이 없던 레이토는 녹나무 파수꾼을 맡게 되었다. 레이토는 파수꾼을 하면서 이런 저런 제약과 수수께끼 가득한 녹나무 기원 행사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지만, 치후네는 기원 행사는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며 정보를 주지 않았다. 마침, 기원을 하러 온 아버지 사지 도시아키가 불륜을 저지른다고 의심하여 미행해 온 사지 유미와 만난걸 계기로, 레이토는 녹나무에 얽힌 수수께끼 풀이에 나서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작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장르물인지 아리송하네요. 사람의 염원을 담았다가, 그 사람의 혈육에게 전해 준다는 녹나무 설정은 분명 판타지입니다. 그런데 녹나무에 소원을 비는 '기념'이 무엇일까? 사지 도시아키가 만났던 불륜녀는 누구이며 그가 열심히 기념하는건 무엇 때문일까? 치후네 할머니가 녹나무 파수꾼 역할을 레이토에게 맡긴 이유와 그녀가 행해왔던 알 수 없던 행동들의 이유는 무엇일까? 와 같은 다양한 수수께끼가 던져지고, 이를 추리하는 전개는 추리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거든요. 

제 견해로는, 이 작품은 판타지 설정이 가미된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추리물로 완성도가 그만큼 높기 때문입니다. 우선, 수수께끼 풀이를 위한 단서 제공이 상당히 공정합니다. 녹나무 기념 행사가 무엇인지는 레이토가 과거 '기념' 기록 데이터를 전산화하는 작업을 시작한 뒤 접한 정보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레이토는 기념 행사가 가족간 행사이며, 그믐과 보름에 한해 이루어진다는걸 알게 되거든요. 그래서 기념은 가족 중 누군가가 그믐에 염원을 한 걸, 보름에 다른 가족 누군가가 전달받는 행사이며 녹나무는 일종의 '염원 기억 매체'라는걸 레이토가 추리할 수 있었고요. 주어진 정보만으로는 좀 과했던 추리이기는 했습니다만, 충분히 말은 됩니다. 

또 치후네 할머니가 치매를 앓고 있었다는건 이런저런 단서 제공과 복선이 많고 확실해서 그야말로 완벽한 일상계 추리물이었어요. 이를 약간 반전처럼 드러내는 마지막 장면도 좋아요. 이런 부분은 확실히 추리 소설의 거장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필력을 여실히 느끼게 해 줍니다. 그만큼 설득력과 흥미를 동시에 갖춘, 좋은 이야기였습니다. 

그 외 가족을 증명하기 위해 호적 등본은 부실하다는 말과 유념을 받지 못할걸로 생각하는 모습을 보고 오바 소치가 친아들이 아니라는걸 추리하는 등 세세한 추리들도 풍성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물론 사지 도시아키가 기념했던게 무엇인지는 도시아키가 직접 알려주는 탓에 추리의 여지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가 몰래 만났던 여자는 불륜녀가 아니라 이미 죽은 형이 염원하여 남긴 곡을 피아노 연주곡으로 구체화해 주던 피아니스트였다는 전개는 재미있었어요. 귀가 먼 작곡가가 머리 속에 작곡되어 있는 '음악'을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녹나무의 특별한 힘이 필요했다는 것도 나름 설득력 있었고요. 사지 도시아키가 처음으로 녹나무에서 형 기쿠오가 남긴 유념 속 음악을 받는 장면은 영상화된다면 꽤나 멋질 것 같더군요.

노인 치매에 대해, 그리고 자식을 키우는 것에 대해, 가족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에피소드들의 결말도 감동적이었습니다. 가족과 추억은 소중하다는걸 다시금 떠올리게 해 주거든요. 또 작가가 이전에 "붉은 손가락"으로 치매에 대해 다룬 방식과는 다르게 이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고, 치매에 걸린 어머니 다카코에게 이미 죽은 기쿠오가 작곡한 음악을 들려주는 공연을 펼치는 클라이막스로 극대화하는 전개도 괜찮았어요. 확실히 완숙해진 티가 났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녹나무의 능력을 잘 보여주는 사지 가족 이야기와 치후네 할머니에 대한 일상계 추리 영역은 하나로 잘 엮여 읽히지 않았던 구성부터가 그러합니다. 별개 에피소드로 보일 정도였어요. 

캐릭터 설정과 배분도 문제입니다. 우선 주인공 레이토의 기본 설정, 그리고 성장기로서의 전개는 너무 뻔합니다. 치후네와 본의아니게 오래 떨어져 있다가, 급작스럽게 녹나무 파수꾼 역할을 맡는다는 배경 설정이 필요했다는건 이해됩니다. 그러나 불륜으로 태어난 자식으로, 도둑질까지 저지르던 말종이라는 스테레오 타입 설정을 가져가야 했을지는 의문이에요. 첫 등장에서는 반쯤 양아치였는데, 작중 시점으로도 얼마 지나지도 않은 마지막 장면에서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파수꾼으로 나오는 것도 영 와닿지 않았고요. 제대로 된 성장기로 기능하려면, 좀 더 긴 호흡의 이야기가 필요했습니다.

여주인공 포지션인 사지 도시아키의 딸 사지 유미의 존재도 애매합니다. 녹나무 기념이 무엇인지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녀 없이 레이토 혼자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거든요. 오히려 아버지를 엿보는걸 넘어서 도청을 하려하고, 이를 위해 기념에 절대 개입하면 안되는 녹나무 파수꾼 레이토를 설득하여 한 편으로 만드는 과정은 여러모로 거북하기만 했습니다. 딸이 불륜으로 오해한건 가족 문제일 뿐, 파수꾼 레이토가 도시아키 기념을 엿들은건 명백한 사실이라 도시아키가 항의하면 레이토는 해고되어도 할 말 없는 상황이잖아요? 레이토와의 러브 라인도 딱히 드러나지 않아서 그닥 전개에 필요해 보이지 않더군요. 차라리 유미없이 레이토 혼자 과거 기록 정리를 통해 녹나무에 대해 어느정도 알아낸 뒤, 사지 도시아키와 대화를 통해 진상을 풀어내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신파성 드라마도 과한 편입니다. 일본 특유의 한 방(?) 전개도 지나쳐서 기쿠오 작곡 결과물을 들려주는 연주회는 괜찮았지만, 치후네 할머니 고문 은퇴 등이 결정되는 임원 회의와 여기서 레이토가 열변을 토하는건 억지스러웠어요. 야나기사와 호텔이 살아남는다는 결과는 작위적이었고요.

이렇게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읽는 재미만큼은 괜찮았던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은 작품이에요. 개인적으로는 노련하고 경력있는 파수꾼 레이토가 기념하러 온 손님들 고민을 들어주면서 사건을 해결해 주는 일상계 추리물로 그려내는게 더 좋았을 것 같지만요.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영상화 횟수를 보면 영상화될게 거의 확실해 보이는데, 사기 기쿠오가 남긴 멜로디가 과연 어떻게 구현될지 궁금해집니다.

2025/06/08

미로장의 참극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긴다이치 고스케는 사업가 시노자키 신고의 초대로 후지산 앞에 위치한 저택 ‘명랑장(미로장)’을 방문했다. 이 저택은 본래 구 백작 후루다테 다쓴도의 소유였으나, 시노자키가 이를 구입해 수리한 후 호텔로 개장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과거 20년 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도주했던 외팔이 남자 오가타 시즈마가 이 명랑장 주변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자, 시노자키는 긴다이치에게 조사를 의뢰하고자 그를 초대한 것이었다. 마침 호텔 개업을 앞두고 후루다테 가문과 관련된 인물들—후루다테 다쓴도, 그의 외삼촌 덴보, 아내 가나코의 여동생 야나기마치 요시에—도 모두 명랑장에 모였다. 시노자키 자신도 후루다테 가문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다쓴도의 아내였던 시즈코와 불륜 관계를 맺다가 결국 결혼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날 오후, 후루다테 다쓴도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경찰이 출동해 수사를 개시했지만, 뚜렷한 실마리를 잡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다가 다음 날에는 덴보마저 살해당했고, 하녀 다마코는 실종되었음이 밝혀졌다. 덴보가 죽은 방은 비밀 통로가 전혀 없는 완벽한 밀실로 확인되며, 사건은 더욱 미궁에 빠졌다.

긴다이치와 경찰은 명랑장의 구조를 조사하던 중, 비밀 통로와 연결된 지하 동굴에서 다마코의 참혹한 시신을 발견했고, 바로 그 직후에 시노자키의 전처 소생 딸 유코가 중상을 입은 채 비밀 통로 출구 근처에서 구조되었다. 그녀는 기절하기 직전 “아빠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날 밤, 긴다이치는 다하라 경부보와 이가와 형사 앞에서 덴보의 방을 밀실로 만든 방법을 직접 시연했고, 지하 동굴 속 오가타 시즈마의 묘소로 경찰을 안내했다. 그리고 명랑장에 나타난 외팔이의 정체는 마부 조지였다는걸 밝혔다. 조지는 명랑장의 관리인 이토메와 함께, 다쓴도를 괴롭히기 위해 외팔이 행세를 했던 것이었다. 긴다이치는 이후 연이어 사건의 진상을 추리해냈다. 진상은 다음과 같았다.

시즈코는 관계를 이어가던 다쓴도와 함께 남편 시노자키를 살해하려고 했다. 목적은 유산이었다. 다쓴도는 외팔이로 변장해서 시노차키를 살해할 계획이었는데, 범행 예행 연습을 요시에에게 우연히 목격당했다. 둘은 격투를 벌였는데, 외팔이로 변장한 탓에 다쓴도는 요시에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요시에는 현장을 급히 떠나 알리바이를 만든 뒤, 나중에 도르레를 이용하여 마차 위로 사체를 옮겼다. 그래서 복잡한 형태의 현장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덴보는 다쓴도와 시즈코의 불륜을 입증할 수 있는 사진을 가지고 시즈코를 협박했는데, 시즈코는 이를 빼앗기 위해 덴보를 살해했다. 그 현장을 마침 목격한 다마코 역시 시즈코에 의해 희생당했다는게 진상이었다.

마지막에, 외팔이로 위장해 남편 시노자키를 제거하려던 시즈코의 계획은 요시에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리고 둘은 함께 무너지는 비밀 통로에 휘말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요코미조 세이시가 1975년에 발표한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의 중후반부 작품입니다.‘명랑장(미로장)’이라는 기묘한 저택을 무대로 복잡한 가족사와 잇따른 살인 사건을 그려낸 본격 추리소설이지요.

장점이라면 사건들이 흥미롭고 풍성하다는 점입니다. 명랑장이라는 독특한 공간에 연쇄 살인이 어우러지는 구성은 독자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고, 특히 덴보가 살해된 밀실 트릭의 완성도가 높습니다. 작품 속에 흩어진 단서들이 수수께끼 해결에 필요한 정보로 작용하는 점 역시 공정한 추리의 전형이라 할 수 있고요. 예를 들어, 작품 속 핵심 수수께끼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죽은 다쓴도는 왜 외팔이인척 했는가?
  2. 범인은 다쓴도를 왜 번거롭게(둔기로 타격한 뒤 교살하여 마차 위에 올려놓는 식으로) 살해했는가?
  3. 덴보를 살해하고 밀실을 어떻게 만들었나?

여기서 1번 수수께끼의 답은, 다쓴도가 외팔이인척 다른 범행을 저지르기 위해서였습니다. 누군가 다쓴도가 외팔이로 보이게끔 조작하지 않았다는건, 그의 복장과 가져온 짐으로 증명되었고요. 2번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역시 도르래와 모래 주머니, 그리고 범인 요시에의 조금 어긋나있는 알리바이 증언으로 증명됩니다.
3번 트릭을 풀어내기 위한 단서로는 이전에는 다른 곳에 놓여 있던 칠기 접시의 존재, 그리고 시즈코의 프랑스 자수가 지속적으로 언급됩니다. 범인은 접시에 바늘을 꽂은 뒤, 실을 회전창 너머로 넘기고 이 실에 열쇠를 매달아 접시 위로 내려보냈던 겁니다. 바늘은 밖에서 잡아당겨서 회수했고요.

그 외의 수수께끼들에 대한 추리 모두가 논리적으로 제시됩니다. 명랑장에 나타났던 외팔이의 정체가 조지였다는 추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토메가 조지를 외팔이로 변장시켰던건데, 선대 주인 가즌도가 죽은 이유가 다쓴도의 비열한 소문 때문이었으니 이토메가 원한을 품은건 당연합니다. 

긴다이치와 경찰이 탐험해 나가는 명랑장의 미로에 대한 묘사는 모험물을 보는 듯한 느낌도 전해 주어서 좋았습니다. 약간 "팔묘촌" 느낌도 나더군요.

그러나 좋은 본격 추리 소설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주요 범행이 일어난 이유가 우연이라서 범행에서 정교함을 느끼기 어려운 탓입니다. 다쓴도가 살해된 것은 요시에에게 살인 모의 장면이 들켰기 때문이었고, 다마코 역시 시즈코가 덴보를 살해한 직후 우연히 방을 찾은 바람에 희생당했으니까요. 이런 전개는 극적이긴 하나, 치밀한 계획 범죄의 인상은 줄 수 없었습니다. 

범행 동기의 설득력도 낮습니다. 시즈코가 신고와 결혼한 뒤에도 다쓴도와 관계를 이어갔다는 핵심 동기에 대한 단서가 전혀 제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쓴도는 돈도, 외모도 특별히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지도 않고요. 재산, 외모 모두 시노자키가 압도적인데 시즈코는 왜 다쓴도와 관계를 이어나가며 남편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걸까요?
이런 동기 부분의 설득력이 약한건 비슷한 설정인 - 위장 결혼 후 재산을 노리고 배우자를 살해하는 - 걸작 "나일 강의 죽음"도 그렇다 치죠. 하지만 다쓴도가 살해당한 뒤, 범행을 이어나간 시즈코의 동기는 아예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우선, 협박자인 덴보를 구태여 살해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불륜의 대상자인 다쓴도가 이미 죽은 상황에서는, 시노자키에게 고백하고 불륜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게 빠른 방법이었으니까요. 어차피 시노자키도 원죄 - 시즈코와 강제로 결혼한 - 가 있으니 괜찮았을거에요. 설령 협박에 대한 앙심을 품고 살인을 저질렀다 치더라도, 덴보의 방을 밀실로 만들 필요는 없었습니다. 알리바이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 시간만 걸리는 무의미한 행동이었으니까요. 이건 독자를 위해 억지로 끼워넣은 단순한 장치 이상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시즈코가 신고를 살해하려 했던 계획은, 외팔이 범인의 존재를 조작해 빠져나가려는 원래의 설정과 연결되지만 이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명랑장에는 명탐정 긴다이치와 경찰들이 상주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이 범행이 성공할 가능성은 애초에 희박했습니다. 게다가 원래의 외팔이가 누구인지 시즈코는 모르는 상황입니다. 누군지 모르는 진짜가 있는데, 그 진짜를 위장해서 경찰이 우글거리는 상황에서 범행을 저지른다? 시즈코의 범행 시도는 설득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쓴도와 시즈코의 관계를 알아챈 시노자키가 1,000만엔을 주고 관계를 끊고자 했다는 핵심 동기가 맨 마지막 에필로그에나 등장한건 반칙같이 느껴지네요.

후더닛 물로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명랑장에 모인 사람 중 비중이 있는건 주인인 시노자키와 시즈코 부부, 다쓴도, 덴보, 요시에와 시노자키의 딸 요코, 비서 오쿠무라, 종업원 이토메, 조지 정도가 전부입니다. 살해당한 사람을 빼고,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는 요코와 오쿠무라, 동기가 없을 조지를 빼면 시노자키와 시즈코, 이토메만 남습니다. 시노자키가 시즈코와 다쓴도의 불륜을 알고 살해하려고 했다는건 있을 수 없고 - 본인도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까 - , 설령 그랬다쳐도 덴보를 살해할 이유는 없으니 시노자키는 범인일리 없습니다. 이토메가 범인이라면, 그녀 역시 덴보는 죽일 이유도 없지만 지난 수십년간 아무 것도 하지 않다가 구태여 지금 범행을 벌일리 없고요. 그러니 유력한 범인은 시즈코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침 알리바이도 없으니까요. 

아울러 요코미조 세이시 특유의 기괴하고 뒤틀린 가족 관계도 뻔하고 식상했습니다. 명랑장이라는 무대 설정 역시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어서 현실감이 떨어졌고요. 그리고 이토메와 조지가 현재 주인인 시노자키에게 품고 있는 과다한 충정의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본격 추리 소설의 구조는 갖추고 있지만 주요 동기와 설정의 설득력 부족, 과도한 우연의 연속, 뻔한 인물 구성 등이 완성도를 낮춥니다. 구태여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4/07/12

교도관의 눈 - 요코야마 히데오 / 허하나 : 별점 2.5점

교도관의 눈 - 6점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허하나 옮김/폭스코너

요코야마 히데오의 단편집. 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목만 봤을 때는 교도관이 주인공인 범죄 추리물이라 생각했습니다. "종신검시관"처럼요.
그러나 교도관이 등장하는 작품은 한 편 뿐이며, 추리물보다는 일상계 범죄물이나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살인이라는 강력 범죄가 많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등장인물의 심리가 사건보다 더 중요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요코야마 히데오 작품답게 기본적인 완성도와 재미는 갖추고 있습니다. 전체 평균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교도관의 눈"
야마테초에서 주부 구타니 에미코를 살해하고 시신을 없앤 혐의로 불륜남 야마노이 가즈마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정황 증거 뿐 물증을 찾지 못해 석방되었다. 그 순간 에미코의 남편 구타니 이치로가 가즈마를 살해하려고 덮쳤지만, 반대로 그가 죽고 말았다. 검찰청은 가즈마를 정당방위로 불기소 처분할 수 밖에 없었다.
교도관 곤도는 가즈마가 수상하다는걸 느끼고 조사에 나섰고, 현경 기관지 편집자 에쓰코는 곤도를 만나러왔다가 우연찮게 사건에 휘말리는데...

사람을 죽인 범인은 이글대다가도 씻겨 사라지지만, 곤도가 본 야마노이 가즈마는 날이 갈수록 이글거렸습니다. 이를 통해 곤도는 가즈마가 아무도 안 죽였지만, 유치장을 나가서 사람을 죽일 생각이었던걸로 추리했습니다. 에미코는 공범으로, 에미코는 살해된게 아니라 스스로 몸을 감췄고요. 그리고 가즈마는 에미코를 폭행하던 남편 이치로를 정당방위로 위장하여 살해했던 겁니다. 가즈마가 날이면 날마다 체력 단련에 열중했던 것도 이 추리를 뒷받침해 줍니다.
비록 이치로가 '식칼'을 들고 덤빌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던건 - 그리고 그랬다해도 죽일 수 있었으리라 보장할 수 없었던건 - 단점이지만, 추리는 꽤 기발했습니다. 이를 은퇴를 앞둔 교도관이 꿰뚫어 보았다는 설정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앞서의 단점으로 이치로를 죽이는데 실패했더라도, 최소한 에미코는 사라질 수 있었으므로 나름 성공한 계획인건 분명하고요.
결국 진상은 드러나지 않고 여운을 남기는, 그리고 이를 젊은 여성인 에미코 시선으로 해석하여 설명해주는 결말도 좋았습니다.

다만 캐릭터 묘사는 다소 아쉽습니다. 젊은 편집자 에미코와 붙임성없는 나이든 꼰대 곤도 묘사는 전형적이라 식상했기 때문입니다. 에미코에 대한 이런저런 설정도 불필요하다 싶었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만족스럽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자서전"
팔리지 않는 방송작가 다다노는 운 좋게 '효도전기'의 회장 효도 고자부로의 자서전 대필을 맡게 되었다. 무려 300만엔짜리 일이었다. 그런데 효도는 자신이 젊었을 때 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다다노는 효도가 불륜 관계였던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했다 여기고 효도를 협박하는데...

알고보니 어머니를 살해한건 아버지였다는 결말입니다.
그런데 효도가 다다노를 챙겨줄까?라고 생각하고 과거의 단편을 살짝 알려준 이유가 불분명합니다. 자신 탓에 연인이 죽고 자식이 불행에 빠졌다면, 자식에게는 나중에 금전적 보상을 해 주면 됩니다. 이렇게 사람을 가지고 놀 이유는 없어요.
'원망의 말은 합격, 협박은 불합격'이라는 기준도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다다노가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진실이라 여기고 협박(?)하려 했던건 상식적입니다. 공소시효는 지났지만, 효도는 어머니를 살해한 범인이니까요. 복수를 하지 않으면 뭐라도 얻어내는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협박했다고 아웃이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말버릇"
가정법원 가사조정위원으로 일하는 세키네 유키에는 이번 이혼 조정 신청 당사자인 기쿠타 요시미가 과거 고등학교 시절, 딸 나쓰코의 등교 거부 원인이었던 동급생이었다는걸 알아챘다. 유키에는 과거 우연히 마주쳤을 때의 요시미의 경멸하던 눈빛, 그리고 나쓰코가 소중히 모았던 저금통이 사라졌던 기억을 떠올리며 요시미를 까칠하게 대했다. 그러나 유키에의 말버릇으로 그녀가 누군지 알아챈 요시미에게서 충격적인 진상을 듣게 되었다...

'악의'가 내포된 드라마적 요소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특히 여성 내면 심리와 일상 속에서의 복잡한 관계를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가쿠다 미쓰요고이케 마리코의 작품이 떠오르지만, 요코야마 히데오 특유의 명확한 반전이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됩니다.
요시미와 이혼 조정 중인 남편 기쿠타는 고등학교 때부터 커플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쓰코가 기쿠타를 유혹해서 잠자리를 가졌었고, 그 탓에 임신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임신한 나쓰코는 모든 돈을 긁어모아 중절 수술을 했고, 그 뒤 등교를 거부했었던 것이지요.
예상치 못한 반전이지만, 앞서 단서를 모두 제공해주고 있어서 잘 짜여진 느낌을 전해줍니다. 이혼 조정 과정에 대한 묘사도 흥미로왔고요. 질투와 분노가 뒤섞여 있는 심리 묘사도 돋보입니다.

그러나 요시미가 이미 다른 남자와 불륜 관계인 듯 보이는데 이렇게 당당한건 이해하기 어렵고, 내용 상 나쓰코의 시점에서의 묘사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래도 좋은 작품으로 수록작 중에서 최고로 꼽을 수 있습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오전 다섯 시의 침입자"
정보관리과 경부 다치하라가 관리하던 S현 경찰 홈페이지가 해킹당했다. 다치하라는 서둘러 페이지를 내리고 복구한 뒤, 방문했던 사람들을 직접 만나 입막음을 하러 나섰다. 해고당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자리 보존을 위해 사건을 없던 것으로 덮으려했지만, 경찰관의 본분과 자신이 지켜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깨닫는다는 작품. 해킹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상세히 다루지 않아 범죄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해커가 올려놓았던 프랑스어 문장을 통해 범인을 알아내는 부분은 추리물 요소를 갖추고 있지만, 한국인 독자가 알아채기에는 어려운 단서여서 애매합니다.
결국 이 작품은 범죄 수사 과정보다는 주인공의 내면 변화와 성찰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라 할 수 있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조용한 집"
현민신보의 기자 출신 편집자 다카나시는 오보를 사과하기 위해 사진작가 스가이를 찾아갔다. 그러나 만나지 못해 연락처만 남겼는데, 그날 저녁에 스가이는 전화를 걸어와 정정 기사를 내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열흘 뒤, 스가이의 사체가 발견되었고 다카나시도 주요 참고인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다카나시는 그날 자신에게 전화를 건게 스가이가 맞는지 생각해 보는데...

편집부에서 벌어지는 다카나시의 좌충우돌을 중심으로 그려지는 신문사 내의 긴장감 넘치는 상황은 흥미롭습니다. 여러모로 잔혹한 신문의 세계가 인상적이었어요.
추리물로도 트릭이 사용되었다는 점은 좋았습니다. 문제는 트릭이 많이 허술해 보인다는 겁니다. 스가이의 불륜 상대 남편이 그를 살해한 뒤, 집을 찾아온 다카나시가 남겼던 명함으로 스가이인척 전화를 걸어 알리바이를 만들었다는 것인데, 열흘 전 사건이라면 사망시간을 정확하게 추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확실한 알리바이라고 하기는 무리입니다. 경찰이 범인을 특정하기도 별로 어렵지 않았을 것이고요.

그래도 복선과 단서의 배치는 나쁘지 않고, 완성도도 준수한 편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비서과의 남자"
지사의 신임을 받는 비서과장 구라우치는 지사의 신뢰가 갑자기 떨어진걸 느꼈다. 새롭게 발탁된 젊은 피 가쓰라기의 수작이라 생각했다. 구라우치는 자신에게 돈을 빌리러 온 뒤 자살했던 무카이의 아내를 만나, 무카이의 동생이 무카이와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부풀려 투서를 했다는걸 알아냈다.

질투로 인해 비롯된 일상 속 악의와 인간의 내면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의 "말버릇"과 비슷합니다. 차이라면 중년 남성이 주인공이며, 현재를 인정하며 긍정적인 결말로 마무리된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런 결말이 훨씬 좋네요.
구라우치에 대한 투서를 올린게 하스네였다는 진상도 괜찮았습니다. 질투와 악의를 그려내는데 이만한 진상도 또 없을 듯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건의 핵심인 무카이와 구라우치의 관계입니다. 구라우치 입장으로는 무카이는 잠깐의 대화밖에는 없는 사이입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20만엔'을 빌려주겠다고 한 것은 분명 선행입니다. 무카이 죽음의 원인이 될 수 없고, 이를 다른 사람이 비하할 수도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때문에 지사가 '사람을 잘못봤다'며 구라우치를 내치려 한다는 설정은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투서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탓이 큽니다.
이런 점에서 약간 부족함이 느껴져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0/08/28

사고 -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 유혜자 : 별점 3점

사고 - 6점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유혜자 옮김/아래아

섬유회사에 다니는 나이 마흔다섯 살의 신체 건강하고 외무 준수한 알프레도 트랍스는 그의 애차 스투데베커의 급작스러운 고장으로 한 시골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트랍스를 저녁 식사와 함께 하는 그들의 게임에 초대하고, 트랍스는 초대를 받아들였다. 게임은 전직 판사, 검사, 변호사에 사형 집행인이었던 집주인과 손님들이 벌이는 모의 법정 놀이로, 그 날은 트랍스가 피고가 되어 그의 유죄를 증명하게 되는데....

독일 작가 프레드리히 뒤렌마트의 짤막한 단편입니다. 평범한 영업맨으로 보였던 트랍스가 상사였던 기각스를 해치우기 위한 범행을 계획하고 실천한 살인범이라는게 드러난다는 내용으로 일종의 완전 범죄물이지요. 

트랍스는 직장 상사 기각스의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면서 기각스가 심장이 약하다는 걸 알게되고요. 그 뒤 회사 내에서 기각스와 잘 소통하는 직원에게 불륜을 털어놓아 기각스가 그 사실을 알게끔 만들었고, 그 탓에 기각스는 심장 이상으로 죽고 맙니다. 

문제는 어느정도 고의였다 하더라도 트랍스의 행위만으로는 범행을 증명하기는 애매하다는 점입니다. 진지한 법정에서라면 트랍스가 유죄 판결을 받는건 불가능했을거에요. 그런데 이를 '모의 법정 놀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돌파하고 있습니다. 모의 법정 놀이는 트랍스가 방문한 시골 마을에서, 은퇴한 옛 법조인들이 함께 하는 저녁 만찬에서 벌어지는 놀이인데, 판사와 검사, 변호사와 사형 집행인까지 조합은 완벽하지만 놀이인 탓에 분위기는 시종 일관 난장판입니다. 참석자들이 나오는 음식과 술을 과다 섭취한 탓도 있고요. 이렇게 반쯤은 미쳐 날뛰는 광란의 도가니탕이라 트랍스마저도 스스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할 정도로 휩쓸려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스스로 범행을 저지른 살인자임을 자각하게 되지요. 

이렇게 왁자지껄 떠들썩한 모의 법정 놀이는 그야말로 현대적이면서도 참신한 아이디어였습니다. 1956년 출간된 작품이니 무려 반세기도 더 지난 고전인데도 말이지요. 작중에 나오는대로 소크라테스, 예수, 잔다르크, 드레퓌스의 모의 법정 놀의 결과도 한 번 보고 싶어지네요. 이러한 현대적인 설정과는 반대로 혼외 정사, 불륜을 전혀 범죄라 인지하지 못하는 트랍스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시대를 느끼게 해 주고요.

하지만 마지막 결말은 좀 뜬금없었습니다. 트랍스는 자신이 완벽한 범죄를 저지른 전능한 범죄자로 인식되어 유죄, 그리고 사형 판결을 받아 굉장히 기뻤던 나머지, 법정 놀이를 완벽하게 완성하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하지만 오히려 남은 전직 법조인들에게는 짜증나는 결과였다는 결말인데, 납득이 가지는 않았어요. 사람은 모두 죄를 짓기 마련이고, 인생사는 결국 희극이라는걸 표현하려는 작가의 의도였을까요? 짐작하기가 쉽지 않네요.

그래도 추리적으로 충분히 좋은 작품입니다. 모의 법정 놀이라는 아이디어도 기발하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굉장히 짤막하고 읽기도 편한 만큼,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작가의 이름값(?)도 있는만큼, 읽고 난 뒤의 만족감은 두 배 이상이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2010/03/30

종신검시관 - 요코야마 히데오 / 민경욱 : 별점 2.5점

 

종신검시관 - 6점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민경욱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사라진 이틀"과 "제3의 시효"로 접해보았던 요코야마 히데오의 단편집. 종신 검시관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는 카리스마 넘치는 검시관 구라이시가 주축이 되는 연작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총 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특이한 점이라면 각 단편별로 주인공은 모두 따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구라이시는 사건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에서는 제 3자로 머물죠.

그런데 작품은 그간 들어왔던 호평에 비하면 단점이 많더군요. 일단 뛰어난 감식관이자 한마리 외로운 늑대, 인망도 있지만 적도 많아서 야쿠자스럽다는 구라이시의 캐릭터는 매력적이지만 설정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들이 노골적이라 거슬렸습니다.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추리적으로도 무리수를 너무 많이 두었고요. 단편들 대부분이 "누가 보아도 XX한 상황을 구라이시가 아주 사소한 단서로 진상을 꿰뚫어본다"는 내용인데 사실 억지가 심하더라고요.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 못하고 제각각인 것도 옥의 티였습니다. 좋은 작품들도 있지만, 처지는 몇몇 작품이 발목을 잡는 탓입니다. 그래서 전체 총 별점은 평작 수준인 2.5점입니다. 개인적인 베스트로는 "전별"을 꼽습니다.

덧붙이자면, 캐릭터가 강하고 등장인물도 많으며 이야기는 풍성한 만큼 차라리 "강력1반"처럼 만화화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각 단편별로 짤막하게 소개하고 평가해 본다면,

<붉은 명함>
검시담당 조사관 대리 이치노세가 자신과 불륜관계였던 유카리의 사체를 검시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이치노세가 불륜관계가 들통날까봐 전전긍긍하는 심리 서스펜스가 일품인 작품입니다. 정보도 공정한 편이라 추리적으로도 탄탄하고요. 
하지만 트릭 자체는 구라이시의 탁월한 검시능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무리수가 약간 보입니다. 그래도 재미와 스릴 모두 합격점이기에 별점은 3점.

<눈앞의 밀실>
현민 신문 기자 아이자키가 기사를 위해 오오시다 반장 자택 앞에서 잠복하다가 살인 사건과 만나게 된다는 내용.
기자들의 취재경쟁이 디테일하게 펼쳐지는 것과 동시에, 노파 살인 사건과 반장 부인 살인 사건이라는 두 개의 사건이 펼쳐져서 내용이 무척 풍성합니다. 하지만 노파 살인 사건은 현실성없는 추리퀴즈에나 쓰일법한 구닥다리 트릭(발레 슈즈?)이 거슬리고 반장 부인 살인 사건 역시 동기와 범행에 있어 납득하기 어렵기에 추리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화분의 여자>
"눈앞의 밀실"처럼 불륜관계인 남녀의 음독 사체를 검시하는 이야기와 더불어 향토 역사가를 자처하는 우에다 마사쓰구가 시체로 발견되는 두 가지 사건이 함께 진행됩니다. 
그런데 두 이야기 모두 추리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첫 번째 음독 사체 사건은 우연과 작위성이 지나치고, 두 번째 향토 역사가 사건의 경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 자체는 괜찮았지만 가장 중요한 다이잉 메시지가 너무 억지스러웠으니까요 
그래도 트릭은 풍성하고 생각하지 못한 의외성이 돋보여 평작 수준은 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전별>
형사부장 고마쓰자키가 은퇴를 앞두고 자신에게 엽서를 보내온 수수께끼의 인물에 대해 구라이시와 상담한다는 이야기. 중간에 짤막한 살인 사건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크게 비중은 없어서 한 개의 사건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잔잔한 드라마가 마음에 드는 작품으로 사건도 합리적으로 설명되고 있어서 추리적으로도 괜찮더군요. 별점은 3.5점.

<목소리>
실무수습생으로 지검에 온 사이다 리오의 자살사건을 둘러싸고 여러 사람들의 감정이 교차하는 작품. 발단과 전개는 독특한 맛이 있지만 결국 자살이기에 사건성이 높지 않고, 이야기의 설득력도 떨어져서 이 단편집의 워스트로 꼽습니다. 심리 드라마도 아니고 범죄물도 아니고 반전물도 아닌 애매한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한밤중의 조서>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이야기의 무대가 형사들의 단골 Bar입니다. 이곳에서 자신이 막 해결한 사건에 대한 무용담을 늘어놓던 형사 사쿠라가 구라이시가 사건에 대한 반론을 재기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 이유를 캐내려는 것이 주요 내용이죠. 혈액형과 DNA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 핵심인데, 내용은 상식을 벗어나지 않기에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고 무엇보다도 구라이시가 사건에 주목하게 된 계기가 억지스럽다는 것은 확실한 단점입니다. 구라이시의 뛰어남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지나쳤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실책>
전직 여경이었던 하루에의 자살 사체를 검시하게 된 구라이시가 다른 모든 이의 판단을 뒤엎고 살인이라 결론내린다는 내용으로 여성의 섬세한 심리 묘사가 일품인 작품입니다. 하지만 구라이시의 실책이라는 설정만 놓고 보면 아주 중요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별다른게 없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구라이시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려 한 의도가 너무 뻔해보이기도 했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17년 매미>
구라이시가 발탁한 조사관대리 나가시마를 축으로 17년마다 벌어지는 불량배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모든 면에서 억지가 심한 작품입니다. 사건의 동기와 범인 모두가 말이죠... 나가시마와 구라이시의 인연이 잘 녹아들어 있다는 것과 구라이시의 최후를 암시하는 결말은 인상적이지만 역시나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들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