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3 (완전판) -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황금가지 |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앵커텔 경 부부가 교외의 저택으로 지인들을 초대한다. 의사 존 크리스토와 그의 아내 게르다, 조각가 헨리에타, 헨리에타를 사랑하는 에드워드, 친척인 미지와 데이비드 등으로 존과 헨리에타는 불륜 관계이다.
그들이 다 모인 첫날 밤, 15년전 존과 사랑했던 사이라는 여배우 베로니카가 나타나 존을 다시 유혹한다. 존은 유혹을 이겨내지만, 다음날 누군가가 쏜 총을 맞고 사망하는데...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에서 걸작이라고 추천해서 마음 속에 담아두었다고 읽어보게 된 작품.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저에게는 걸작이 아니었습니다. <<완전 공략>>의 기준과 제 기준이 다르다는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작품은 그 차이가 너무 심해서 놀랄 정도로 말이죠. <<완전 공략>>에서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한 이유는, '살인'에 다다르기까지의 드라마의 정점이며, 등장하는 여성들이 매력적이면서도 무척 슬픈 이야기이기 때문이라는데, 뭐 하나 동의할만한게 없었습니다.
특히 시작부터 약 80여 페이지에 이르는 초반 분량은 짜증 그 자체입니다. 루시 앵커텔을 비롯하여 존과 헨리에타, 게르다 등이 등장하여 각자의 푸념을 늘어놓는게 전부이기 때문이에요. 등장인물 거의 모두가 극에 달한 이기주의자들로 각자 자기 이야기만 합니다. 존 크리스토는 그 중에서도 최고봉이고요. 지구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에요. 제 옆에 있다면 한 대 때려 주었을겁니다.
베로니카 역시 존 못지 않은 이기주의자에 자기 중심적 사고방식을 갖춘 인물이며, 루시 앵커텔 역시 존 크리스토가 죽고나서 바로 헨리에타와 에드워드를 이어줄 생각을 하는 등, 자기 가문만 생각하는 자기 중심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별로 다르지 않고요. 솔직히 존이 살해당하는 순간,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죽어도 싼 놈이 죽은 기분이라서요. 이게 슬픈 이야기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존 크리스토와 베로니카, 루시 앵커텔이 이 작품에서 가장 생동감넘치고 살아있는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이 외 다른 인물들은 그들의 숭배자거나 곁가지에 불과하거든요. 이외에는 딱 한명, 여주인공 헨리에타만 비교적 공평한 시각에 자신의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인물로 묘사될 뿐이에요. 자기 중심적 사고 방식의 이기주의자들과 그의 추종자들로 이루어진 집단의 이야기가 재미있을리 없지요.
추리적으로도 별볼일 없습니다.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고, 사건이 미궁에 빠진건 단지 운이 좋았으며 우연찮게 주요 등장인물들이 범인 게르다를 감싸주었기 때문이니까요. 특히나 앵커텔 가문의 정점에 있는 루시 앵커텔이 작정하고 도와준 덕분에, 게르다가 당장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게 사건의 전부입니다.
게르다가 남편의 불륜을 목격하고 그동안의 숭배의 감정이 배신으로 일그러졌다는건 동기는 말은 됩니다. 그러나 존은 이전에도 바람을 피운걸로 묘사됩니다. 이전의 불륜, 바람은 참고 넘어갔더라도 눈 앞의 불륜을 참지 못하고 살의에 휩싸여 계획적인 범행을 저지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작 중에서도 이전에 불륜을 저지른 적이 있지만, 별 일 없었기에 게르다는 범인이 아닐거라는 식으로 묘사할 정도인데 말이죠. 이 이유가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으니, 제대로 된 동기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살의 역시 게르다 시점으로는 한 번도 묘사되지 않아서, <<공략>>에서 이야기한대로 '살인'에 다다르기까지의 드라마가 펼쳐진다고 보기도 힘들고요.
이러한 주변 시점의 묘사는 동기를 감추고, 게르다 말고 다른 범인역을 내세우기 위해서일 겁니다. 그러나 그 정도가 너무 심했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합리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요. 용의자도 뻔해서 이렇게 다른 범인역을 내세울 필요도 없었습니다. 피해자 존을 비롯, 헨리, 에드워드, 데이비드라는 지나가는 행인스러운 이름의 남성들은 모두 주변인이고 곁가지이며, 미지는 존이 죽어버리면 헨리에타가 에드워드와 결혼할 수도 있으니 범행을 저지를 리 없으니까요. 결국 루시 앵커텔, 헨리에타, 베로니카, 게르다가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 루시와 베로니카는 자기 중심적이고 자신의 운명과 인생을 스스로 리드해가는 여성들입니다. 헨리에타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들이 타인 때문에 자신의 위험을 감수한다는건 잘 와 닿지 않아요.
조금 더 상세하게 살펴보자면, 우선 루시의 동기라면 앵커텔 가문의 대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걱정입니다. 에드워드가 헨리에타를 좋아하니, 둘이 결혼하면 만사형통인데 헨리에타가 존과의 관계 때문에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어서지요. 그러나 에드워드의 헨리에타를 향한 마음이 영원할거라 믿는 건 억지스럽습니다. 실제로 사건 이후 에드워드는 미지와 결혼하죠. 설령 당장 결혼은 하지 않더라도, 에드워드의 다음 세대인 데이비드가 건재하니 가문 걱정은 너무 이릅니다.
그렇다면 여배우 베로니카가 범인일까요? 그러나 세계적인 여배우인 그녀가 15년만에 만난 존에 대한 질투심을 폭발시켜 살인까지 저지른다는건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베로니카와 존의 다툼은 널리 알려졌으니 그녀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들 이유도 없고요.
그나마 헨리에타가 용의자로는 유력한 편입니다. 그녀는 존이 베로니카와 하룻밤을 보낸걸 알았으니까요. 하지만 불륜녀가 불륜남의 또다른 연인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다? 이 역시 현실적이지 않은건 마찬가지에요. 여사님의 묘사도 중반까지는 루시 앵커텔을 독자에게 범인역 먹잇감으로 던져주는걸 보면 현실적으로 헨라에타를 범인으로 몰고가는건 어렵다는걸 알았던게 분명합니다.
아울러 주요 인물들이 모두 게르다를 도와준 이유는 아예 설명되지도 않는 점, 게르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당장은 빠져나갔다손 치더라도, 영원히 은폐가 가능했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포함하면 추리적으로는 도저히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없습니다. 할로 저택의 총을 쓴 이상, 외부에서의 침입자 가능성은 없으니 누군가는 죄를 뒤집어 썼을게 뻔하거든요. 과연 다른 누군가가 혐의를 받는데도 루시가 잠자코 있었을까요? 언제가 되었든 진범, 혹은 범인역을 내세웠어야 했을겁니다. 그럴거라면 가문의 사람이나 지인보다는 베로니카를 내세우는게 손쉬웠을텐데,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는건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여기에 푸아로가 정말로 하는게 아무것도 없다는걸 더하면 이 작품이 정말로 추리 소설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푸아로가 진상을 알아챈건, 루시와 헨리에타 들보다도 훨씬 뒤이며,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제대로 묘사되지 않거든요. 푸아로의 유일한 활약이라면 마지막에 게르다와 헨리에타가 만나는 자리를 찾아와 헨리에타가 독살당하는걸 막고 게르다가 죽게 만드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등장인물이 다 모인 자리에서의 추리쇼는 이거에 비하면 극사실 다큐멘터리에 가깝다고 여겨질 정도로 말이지요.
게르다가 실제로 멍청하지는 않고 '멍청한 척' 했다는걸 초반부에 드러낸다던가, 헨리에타가 사건에 사용된 총을 조각상 안에 감춘다던가 하는 디테일은 나쁘지 않지만, 작품의 수준을 끌어올리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 이기주의자들의 장광설을 참고 볼 만큼 추리적으로나 다른 면에서 가치가 있지 않습니다. 제가 보는 시각이 <<완전 공략>>과 다르다는걸 뼈저리게 깨달았으니, 이제 더 이상은 <<완전 공략>>에 의지하지 않고, 다른 기준으로 책을 골라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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