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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1

범인 없는 살인의 밤 - 히가시노 게이고 / 윤성원 : 별점 2점

범인 없는 살인의 밤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윤성원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신참자"를 읽고 난 뒤 충동적으로 연이어 읽게 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집. 전부 7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정통 추리물이라기보다는 인간 심리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다는 것이겠죠. 

그러나 "신참자"보다는 확실히 별로였습니다.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제에 걸맞는 이야기들로 섬찟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반전들은 괜찮은 편입니다. 허나 반전을 위해 작위적인 설정들이 개입된 이야기가 많다는 점, 그리고 추리적으로 그다지 뛰어나지 않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물론 여섯 번째 작품인 "굿바이 코치", 그리고 마지막 작품인 표제작 "범인 없는 살인의 밤"만큼은 괜찮은 트릭에 결말까지 설득력 있는, 일정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역시나 작가의 이름값을 느끼게 해 주지요. 하지만 그 외의 작품들은 사소한 감정이나 오해 등에서 촉발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인지 정교하거나 디테일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동기도 과장된 것들이 많고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 읽는 재미는 있지만 작가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평범한 수준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보다 정교한 추리물이었거나 아니면 심리 묘사를 중심으로 한 "기묘한 맛" 류의 단편이었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결과물 이었습니다.

수록작별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작은 고의에 관한 이야기"

친구 다쓰야의 자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이야기. 고등학생에 어울리는 수사 과정의 현실성이 돋보이고 진상도 깔끔하나, 우연이 많이 개입된 상황 + 설득력 떨어지는 동기라는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어둠 속의 두 사람"

제자 하기와라 신지의 동생 살해 사건에 대해 알아가다가 놀라운 진상을 깨닫게 되는 중학교 교사 히로미의 이야기.

전개도 그럴듯하고 반전도 충격적이면서 설득력 있는데 문제는 과연 범인이 범행을 그렇게 저지를 수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죽일 이유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말이죠. 때문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춤추는 아이"

매주 수요일 밤 리듬체조를 연습하는 소녀에게 푹 빠진 제자를 위해, 소녀에 대해 조사에 나선 가정교사 구로다의 이야기.

시작은 순수했지만 결말이 비극적이라는 점에서 단편집 주제에 가장 잘 맞는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드라마에 가까운 평범한 내용으로, 추리적으로는 언급할 만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약간의 일상계 분위기만 내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어쨌건 추리소설은 아니었습니다.

"끝없는 밤"

오사카로 혼자 부임한 남편이 살해된 것을 알게 된 주부 아쓰코의 이야기.

인간적이면서도 관찰력 좋은 형사 반바의 캐릭터는 마음에 들지만, 처음에 남편 시체가 놓여진 상태를 공정하게 알려주지 않는 등 추리적으로는 역시나 언급할 만한 점이 별로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아쓰코의 심리 묘사 정도만 볼 만했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하얀 흉기"

A 식품회사 자재과 직원들을 대상으로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의 진상에 대한 이야기.

범인을 초반부터 드러낸다는 점이 독특했으며, 첫 번째 사건의 트릭도 괜찮았으며 무엇보다도 동기가 확 와닿아서 마음에 듭니다. 저도 담배를 끊어야 할 텐데 말이죠... 

하지만 딱 한 가지, 범인이 정신이상이었다는 결말은 섬찟하기는 하나 너무 쉽게 풀어낸 느낌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굿바이 코치"

양궁부 제자 모치즈키의 자살과 그녀의 유서인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밝혀지는 진상을 그린 이야기.

범인인 코치의 트릭은 우연이 동반된 결과물이기는 하나 꽤 기발합니다. 문제는 모치즈키 나오미가 코치를 함정에 빠트릴 계획이었다면 아예 테이프 자체를 바꿔치기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구태여 처음 테이프의 상황과 동일하게 꾸며가면서 약간의 단서만 남기는 식으로 갈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아예 통째로 바꿔치기하거나 파기해서 궁지에 빠트리는 것이 더 효과적인 복수였을테니까요. 

트릭 말고는 별로 건질 게 없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범인 없는 살인의 밤"

유명 건축가 키시다 저택에서 벌어진 우발적인 살인 사건을 시점을 바꿔 가면서 전개하는 작품입니다. 시점을 바꾸는 점에서 트릭이 살짝 엿보였는데(서술 트릭이겠거니... 싶었죠) 진상은 제 예상보다도 더 복잡하게 꼬아놓았더군요. 경찰의 수사 과정도 상당히 돋보였고요.

그러나 트릭의 설득력은 그다지 높지 않고 작위적 설정이 지나쳐서 트릭을 위해 만든 것 같은 느낌입니다. 누가 봐도 같은 이름의 여자 가정교사가 있다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텐데, 사소한 부분에서 신경을 좀 덜 쓴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12/10/19

신참자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3점

신참자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가가 형사가 주인공인 단편집. 모든 단편들이 중년 이혼녀 살인사건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각각 작게나마 연관되어 있는 - 가가 형사가 수사 도중 선물하고 다니는 선물이 두 번째 단편에 등장하는 닌교야키나 다섯 번째 가게의 케이크라던가, 일곱 번째 단편에서 피해자 전남편과 술을 먹는 가게가 두 번째 단편의 주 무대라던가 하는 식이죠 - 연작 단편집입니다.

추리적으로는 모순된 증언을 밝힐 수 있다면 아무리 기묘해도 그것이 진실이라는 점에서(예를 들자면 케이크 가게와 피해자 아들을 연결시키는 진상 같은 부분) 홈즈의 귀납 추리법이 떠오르는데, 고전 추리물 애호가로서 정말이지 무척 반가왔습니다. 이러한 추리법이 다양한 지역 주민들의 모순된 증언 이면의 진실을 파헤친다던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단순한 진실을 밝혀낸다는 일상계 작품에 사용되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실제로 있음직한 소소한 사건을 셜록 홈즈가 풀어가는 느낌이랄까요? 한마디로, 추리적으로는 충분한 재미를 가져다 줍니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꼬여있던 인간관계가 해결된다던가, 감정의 응어리가 풀린다는 치유계스러움, 피해자 아들 고우키의 성장물 스러움도 지니고 있다는 점도 독특합니다. 고우키가 어머니의 진심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에서는 잔잔한 감동도 전해주고요.

덧붙이자면, 실존하는 지역인 니혼바시 고덴마쵸의 여러 가게들을 무대로 펼쳐진다는 점도 꽤 인상적이었어요. 약간 여정 미스터리 느낌도 듭니다. 저도 지역 특산물이라는 닌교야키나 아몬드 푸딩 위에 패션프루트 젤리를 얹은 젤리는 한번 사 먹어보고 싶어지더군요.

그러나 몇몇 이야기는 비약이 심하고 정보를 공정하게 전달해주지 않으며, 중반부까지의 이야기, 즉 지역 주민들의 거짓 증언을 밝혀내는 이야기들은 많이 작위적이라는 단점은 있습니다(아무리 고집이 세고 입이 무거워도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앞에서 태연하게 거짓 증언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또 피해자의 자금 관계를 조금만 철저하게 조사했더라면 보다 쉽게 진상을 밝혀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수사가 발품, 탐문으로만 진행된 것도 납득하기는 어려웠고요.

그래도 결론은 수작입니다. 재미와 함께 추리적인 요소도 잘 갖추고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이전에 읽었던 가가 형사 시리즈는 묵직한 정통 추리물 + 복수극 느낌인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뿐이었는데, 아주 상반된 분위기라 의외였지만 저는 이쪽 분위기가 훨씬 마음에 드네요.

수록작 별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센베이집 딸"

용의자의 옷차림에 대한 증언과 가가 형사의 관찰(거리를 지나다니는 직장인들의 옷차림)을 바탕으로 비약이 심하지만 논리적인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이 고전 추리 스타일이라 마음에 든 작품입니다. 그러나 살인사건이라는 강력 사건 수사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었을까? 라는 점에서는 설득력이 별로 없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요릿집 수련생"

피해자의 집에 있던 닌교야키에 얽힌 진상을 밝혀내는 이야기. 사건과는 하나도 관계가 없다는 점과 추리적인 요소가 부족하다는 점에서는 아쉽지만, 실제 있음직한 일상계스러운 분위기는 좋았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사기그릇 가게 며느리"

피해자의 집에서 발견된 주방 가위를 사기그릇 가게 고부갈등과 연결시킨 작품. 식사용 가위라는 말을 주방 가위로 오해했을 것이라는 진상을 시어머니의 여행과 연결시킨 전개가 깔끔합니다. 이 정도면 완벽한 일상계가 아닐까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케이크 가게 점원"

피해자가 자주 들린 케이크 가게 - 피해자가 갑자기 연고도 없는 고덴마쵸로 이사 온 이유 - 피해자의 아들이 동거하는 연인의 집이라는 연결고리를 풀어내는 이야기. 철모르는 피해자 아들 고우키의 인간적인 성장이 돋보입니다. 피해자가 이사 오게 된 계기가 순전히 우연이었다는 점에서 정교함이 떨어지나, 은행이 많다는 묘사를 통해 공정하게 독자에게 정보를 전해준 것이 아주 괜찮았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번역가 친구"

시체를 발견한 피해자 친구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이야기가 중심으로, 추리물이라기보다는 치유계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의 사기그릇 가게에서의 증언이 주요 소재로 쓰인다는 점에서 연작물 특성을 많이 보이는 것도 특징이고요. 드라마는 잔잔하니 좋은데, 추리적으로 별로 눈여겨볼 만한 부분은 없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청소회사 사장"

피해자의 전남편이 등장하여 가족 간의 응어리를 풀어낸다는 작품으로, 역시나 치유계입니다. 반지에 대한 묘사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추리물로 보기는 좀 어렵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민예품점 손님"

유일하게 한 편으로 완결되지 않는 작품으로, 마지막 이야기를 위한 복선 및 정보 제공 성격이 강한 작품입니다. 별점을 단독으로 주기는 좀 애매하네요.

"니혼바시의 형사"

범인을 밝혀내는 대단원 격인 작품으로 전편인 "민예품점 손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깔끔한 마무리는 좋은데, 진상과 동기가 너무 평범해서 앞부분의 수사가 왜 필요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서 조금 맥이 빠집니다. 그래도 흉기를 찾아내는 부분이 현실적이면서도 정교해서 괜찮았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18/04/15

기린의 날개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5점

기린의 날개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니혼바시 다리에서 건축 부품 제조 회사 간부인 아오야기가 칼에 찔린 시체로 발견되었다. 유력 용의자 야시마 후유키는 도주 중 교통 사고로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고, 경찰은 아오야기가 근무하던 공장의 산재 은폐가 동기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가가는 사건의 진짜 동기가 따로 있다고 확신하고 수사를 계속하는데...

"살인 사건이란 게 암세포와 같아서 일단 생겼다 하면 그 고통이 주위로 번진단 말이지. 범인이 잡히든 수사가 종결되든, 그 고통에 의한 침식을 막기가 어려워" - 가가

히가시노 게이고가가 형사 시리즈 장편입니다. 니혼바시 다리 중간에서 살해당한채 발견된 중년 남성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가장 큰 장점은 읽기 편하다는 겁니다. 500여 페이지에 가까운 장편임에도 쉽게 읽힙니다. 스토리텔러, 이야기꾼 히가시노 게이고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할 수 있지요. 독자의 흥미를 계속 잡아 끄는 전개가 흡입력의 비결이고요.

  • 피해자 아오야기가 왜 사건 현장을 방문했는지?
  • 아오야기가 칠복신 신사 순례를 한 이유는?
  • 아오야기가 신사 순례 때 종이학을 접어 바친 이유는?
  • 종이학은 왜 노란색부터 접어서 바쳤는지?
와 같이 수수께끼 하나를 풀면 뒤이어 다른 수수께끼가 등장하기 때문에 계속 읽어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전개는 오래 전 일간지 연재물을 연상케도 하는데, 그보다는 훨씬 잘 짜여진 이야기로 작가의 치밀한 구상과 계산이 돋보입니다. 

아울러 이런 아오야기 관련 수수께끼에 더해 유력 용의자 야시마에 얽힌 수수께끼도 마찬가지입니다.

  • 야시마와 아오야기의 관계는? 
  • 야시마는 어떻게 아오야기를 만났는지? 
  • 흉기인 버터플라이 나이프의 입수 경로는? 

같이 단계별 구성을 취하고 있어 흥미를 더합니다. 

산재 은폐, 오래전 발생한 안전 사고의 은폐, 의도하지는 않은 아오야기 살인 사건 은폐라는 세 종류의 은폐가 핵심이 되는 구성도 흥미롭습니다. 비밀은 없고, 진실은 밝혀진다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해주는 히가시노 게이고스러운 결말도 마음에 들고요. 역시나 흥행을 아는 작가다왔습니다.
사건과 함께 나름대로 성장해 나가는 가가의 모습도 볼 만 합니다. 아버지의 평소 이야기와는 다르게 죽을 때 마지막 메시지를 마음에 받아들여야 하는게 살아있는 사람의 의무라는 말은 아주 묵직하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다른 가가 형사 시리즈와는 다른, 전통적인 일본 미스터리 스타일이 엿보인다는 점도 독특합니다. 우선은 여정 미스터리 느낌이 물씬 난다는 점을 들고 싶네요. 도쿄를 무대로 한 작품임에도 "신참자" 의 무대와 같은 니혼바시 주변, 이른바 칠복신 신사 순례길을 바탕으로 한 탐문 수사가 길게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도쿄 사는 사람들에게야 별 거 아니겠지만 다른 지방, 타국의 독자에게는 이국적인 느낌이 충만한 묘사들이라 절로 눈이 가더군요. 가가의 추천 요리집과 요리도 몇 개 등장하는데 그 중 메밀 국수는 저도 꼭 한 번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70년대를 주름잡았던 사회파 미스터리 느낌도 강합니다. 산재 은폐와 이를 피해자 아오야기에게 뒤집어 씌우는 회사의 행태, 그리고 이 때문에 살해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가족에게 억울한 비난이 쏟아지게 만드는 잘못된 매스컴의 행태 묘사 때문입니다. 산재 은폐건은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라 겉핥기 식으로 짚고 넘어가는 점은 좀 아쉬웠습니다만, 이를 깊숙히 파고들면 가볍고 경쾌하게 읽을 수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 스타일의 작품이 나오기는 힘들었을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요.

이렇게 읽는 재미도 있고, 잘 짜여져 있을 뿐 아니라 볼거리도 풍성한 작품이기는 한데 추리적으로 다른 가가 형사 시리즈보다 약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수사만으로 거의 모든게 해결되어서 추리의 여지가 별로 없는 탓입니다. 추리 소설이라기 보다는 경찰 소설, 수사 소설이라고 부르는게 어울릴 정도에요. 용의자 야시마가 도주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이유부터 경찰 포위망에 걸렸기 때문이고, 이후의 이야기도 추리보다는 수사 결과에 따라 진행될 뿐이거든요. 피해자와 하야마의 접점이 공장이라는걸 알아낸 경찰이 탐문 수사를 갔을 때 동료가 몰래 고발해서 산재 은폐건이 부각되고, 아오야기와 하야마의 범행 당일 행적을 뒤쫓다가 결국 그 날 아오야기가 만난건 하야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는걸 알게 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가가와 마츠야마가 칠복신 신사 순례라는 피해자 행적 파악에 성공하지만 이 역시 추리라기 보다는 우직하게 발로 걸어서 얻어낸 결과물입니다.
물론 이러한 수사 과정도 재미가 없는건 아닙니다. 가가와 동행하는 마쓰미야의 "헛걸음을 얼마냐 하느냐에 따라 수사 결과가 달라진다"는 대사가 와 닿을 정도로 발로 뛰는 꼼꼼한 수사의 디테일도 대단하고요. 하야마의 동거인 가오리와의 대화에서 힌트를 얻어 하아먀가 서점에서 시간을 보냈으리라 추리하여, 결국 하야마가 피해자와 함께 있지 않았다는 걸 밝혀내는 과정은 독자에게도 카타르시스를 불러 일으킬 정도로 짜릿하고 멋졌습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작위적이고 설득력이 낮은 진상입니다. 일단 범행 당일 피해자와 함께 있던 범인이 들통나지 않은건 순전히 운이 좋았던 것에 불과합니다. 카페에서 무려 2시간 정도나 함께 대화하며 시간을 보내는 등 노출되어 있었는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상황이니까요. 여기에 지나가던 하야마가 '우연히' 피해자가 죽어가는걸 보고 가방과 지갑을 들고 도주했다? 그러다가 교통 사고가 나서 의식 불명이 되어 죽었다? 이건 우주의 운이 다 모이기 전에는 불가능할 거에요.
피해자의 유품인 디카에 종이학 사진이 남아있지 않았단 것도 의문이며, 핸드폰 기록만 확인하고 접속했던 블로그 URL을 확인하지 않은 이유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종이학 사진과 '기린의 날개' 블로그를 피해자의 행적과 함께 이으면 알 수 없던 피해자 행동의 의미가 드러나 사건 수사의 또다른 핵심 축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이를 짚어내지 못한 건 단지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한 작가의 편의적 전개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어요. 이는 칠복신 순례의 핵심이 '순산 기원' 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하야마의 동거인 가오리의 임신과 연계하여 풀어나가는 전개도 한 몫 단단히 하고 있고요.
피해자가 니혼바시 다리 기린 상까지 구태여 찾아가 죽은 것도 굉장히 작위적입니다. 이럴 힘이 남아 있었다면 도움을 요청하는게 상식적이잖아요? "기린상" 을 사건과 연결시키려는 억지가 너무 지나쳤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한 단계 성장하는 가가 형사의 모습은 마음에 들고 이런저런 볼거리는 많지만 추리 소설로서는 평범한 수준입니다. 그래도 재미는 확실한 만큼 시리즈 팬이시라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23/10/27

백조와 박쥐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점

백조와 박쥐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망높은 변호사 시라이시 겐스케가 살해당했다. 형사 고다이와 나카미치는 시라이시에게 연락했던 구라키 다쓰로가 수상하다는걸 알아내었고, 수사를 통해 구라키 다쓰로의 자백 - 구라키가 30여년 전 하이타니를 살해했다는걸 알게된 시라이시가 당시 유력한 용의자로 자살했던 후쿠마 준지 유가족에게 사죄하라고 강요했기 때문 - 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자백과 동기에 의문을 품은 구라키의 아들 가즈마와 시라이시의 딸 미레이는 각자 조사를 통해 구라키의 자백의 헛점을 각자 찾아내었고, 이는 경찰의 재수사로 이어지는데...


히가시노 게이고 추천 작품 30선에 있길래 읽어보게된 작품.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 인생 30년 기념작이라고도 하네요.

상당한 분량, 그리고 여러가지 사회 문제를 작품을 통해 고발하는 사회파 추리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읽기 쉽다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최대 장점은 여전합니다. 경찰이 무고한 시민을 억압하여 자살하게 만든 33년전 사건과 구라키 다쓰로의 자백으로만 이루어진 현재의 시라이시 겐스케 살인 사건을 통해 검찰, 경찰과 가해자 변호인 모두 재판에서 이기는게 목적이지 진상에는 관심이 없다는걸 드러내며 비판하는 것을 비롯하여 살인죄 공소 시효 폐지가 정당한지, 피고인의 진심어린 사죄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부모, 가족이 저지른 범죄로 다른 가족과 자녀가 피해를 입는다는게 말이 되는지, 황색 언론의 어거지 취재와 발표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 등의 여러가지 이슈를 녹여내고 있는데 무겁지 않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구라키가 공들여 만들어서 헛점이 거의 없었던 자백이 사소한 단서들에 의해 거짓이라는게 하나씩 밝혀지는 과정은 볼만합니다. 경찰과 유족, 관계자들이 모두 힘을 합쳐 각자의 영역에서 조사를 진행하는 덕분에 설득력도 높았고요. 예를 들어 구라키는 시라이시 변호사에게 TV에서 유산 증여에 대한 방송을 보고 궁금한 점이 생겨 전화를 한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이것만 놓고 보면 아무런 문제없는 자백이지요. 하지만 그 날 TV에서 관련된 내용은 방송되지 않았고, 구라키가 가지고 있던 명함첩을 통해 이미 다른 변호사에게 똑같은 내용을 물어보았다는게 추가 조사 결과 밝혀집니다. 이런 점에서는 잘 만들어진 수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라키가 거짓 자백을 해서 죄를 뒤집어 쓴 이유, 시라이시가 살해당한 이유에 대한 설명도 명쾌하게 이루어집니다. 33년전 사건이 도화선인건 맞아요. 다만 구라키가 아니라 시라이시가 진범이었던 겁니다! 이를 우연히 알게 된 당시 누명을 쓰고 자살했던 후쿠마의 손자 안자이 도모키가 복수를 위해 범행을 저질렀던게 진상이고요. 반전이라면 반전인데, 이를 위한 구성이 탄탄해서 별로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의 딸과 가해자의 아들이 진상을 밝힌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힘을 합쳐 사건을 조사한다는 설정도 괜찮았습니다. 제목 그대로 완벽한 정 반대의 커플의 조합이니까요. 둘이 힘을 합침으로서 혼자라면 불가능했을 단서 - 시라이시 겐스케의 어린 시절과 가족 관계, 그리고 진짜 동기 - 를 알아낸다는건 그야말로 무릎을 칠만 했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둘 사이에서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싹트게 된다는 것도 독자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게 해 줍니다.

하지만 다른 작품들에서 많이 보아왔던 소재와 설정을 뒤섞어 보여주는 자기복제에 가까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오래전 사건이 동기가 된다는건 작가의 수많은 다른 작품에서 보아왔던 설정이며, 살인자의 가족이라고 고통받는 이야기는 작가의 "편지" 등에서 선보였고, 살인자의 죗값에 대한 이야기는 "공허한 십자가"에서, 촉법소년과 사적 제재에 대한 이야기는 "방황하는 칼날"에서, 피해자의 이동 경로가 핵심 단서 중 하나가 된다는건 "기린의 날개"나 "신참자"를 연상케합니다. 정 반대측에 놓인 청춘 남녀가 함께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은 "몽환화"와 거의 똑같고요.

또 하나씩 제시되는 단서들을 통해 구라키의 자백이 거짓이라는게 하나씩 밝혀지데, 이 단서들이 단계별로 소개되지도 않아서 '추리'적으로 좋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예를 들어 앞서 구라키가 시라이시를 만났던 계기가 거짓말이라는 것 등은 모두 제각각 독립적인 단서들이며, 친할머니에게 하이타니가 사기를 쳤기 때문에 살해했다는 시라이시의 동기도 시라이시 겐스케의 어린 시절 사진과 호적 등본이라는 독립적인 단서로 밝혀지거든요. 즉, 이 단서를 먼저 접했다면 중간의 다른 조사는 불필요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의 단서가 다른 단서로 이어지는 식의 정교하게 잘 짜여진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 가즈마와 미레이가 힘을 합치게 되는 과정에 따른 빌드업만 있을 뿐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시라이시를 살해한 안자이 도모키의 동기를 설명하는 일종의 에필로그는 최악이었습니다. 소년은 자기 가족을 불행에 빠트린 진범을 응징했다고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이는 거짓말이었고 단지 살인에 흥미를 느껴 저지른 범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라이시가 고백하지 않아서 어머니가 이혼을 한건 명백한 사실이니 소년은 시라이시에 대해 원한을 가질 이유는 충분해요. 구태여 중학생 싸이코패스 설정을 집어넣어 이야기를 흐릴 이유는 없었습니다. '촉법소년' 제도를 고발하기에는 안자이 도모키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부족해서 별로 와 닿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이미 충분히 고통을 겪은 후쿠마 준지의 딸 아사바 오리에가 불쌍하기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누명을 쓰고 자살하고, 어머니와 자기는 살인자의 딸이라며 손가락질 받다가 이혼까지 당했고, 연심을 품었던 남자(구라키) 는 사랑을 받아주지도 않고 죽었는데 아들까지 살인범이 되었다니.... 이렇게까지 기구하고 잔혹하게 쓸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있게 읽었고, 생각할 거리도 많지만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부르기에는 한없이 미흡했습니다. 다른 작품들을 읽으셨다면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 없습니다.

2013/03/17

매스커레이드 호텔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매스커레이드 호텔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도쿄에서 의문의 살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피해자는 30세 전후의 회사원, 43세의 주부, 53세의 고등학교 교사였고, 사건 현장에는 수수께끼의 숫자가 남겨져 있었다.

45.761871, 143.803944
45.648055, 149.850829
45.678738, 157.788585

경찰은 이 숫자를 해독해내는 데 성공했다. 숫자는 다음 범행장소를 예고하는 메시지였다. 메시지에 의해 다음 범행장소로 예고된 곳은 최고급 호텔 코르테시아도쿄 호텔이었다.

경찰은 네 번째 살인을 막기 위해 호텔에 수사관들을 대거 급파하고 벨보이, 하우스키퍼, 투숙객 등으로 위장한 형사들이 잠복근무에 돌입했다. 닛타 형사도 호텔의 간판 부서인 프런트 직원으로 위장해 잠입 수사를 시작했다. 진짜 호텔리어처럼 보이기 위해 베테랑 호텔리어인 야마기시 나오미의 지도를 받으며, 둘은 사건 해결을 위해 함께 협력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비교적 최신 장편. 기둥 줄거리는 연쇄살인사건이라는 강력 사건이지만, 가운 절도, 장님인 척하는 할머니, 스토커에게 쫓기고 있다는 미인, 끊임없이 어이없는 클레임을 거는 손님이라는 일상계 사건이 연달아 벌어진다는 구성이 독특합니다.

또한 이 일상계 사건들이 모두 나름대로의 트릭이 존재하고, 이 트릭들에서 힌트를 얻어 범행의 진상에 접근해 나가는 전개는 가가 형사 시리즈 "신참자"를 연상케 합니다. 단편 연작물 느낌을 주면서도 기둥 줄거리와 잘 엮어나가는건 판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상계물에 비하면, 본편 이야기인 연쇄살인사건 이야기는 많이 별로입니다. 일단 상관없는 살인들을 연쇄살인사건으로 위장하여 진상을 흐리게 만든다는 설정부터가 "ABC 살인사건" 등 다양한 작품에서 이미 사용되었기에 뭔가 다른 아이디어가 필요했을 텐데, 그런 게 전혀 없다는 문제가 너무 큽니다. "호그 연속살인" 정도의 임팩트는 줬어야 했을 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암호도 억지스럽습니다. 연쇄살인처럼 보이게 하려면 "살인범 X" 같은 이니셜로도 충분했을 테고, 모방 범죄가 우려된다면 특별한 폰트와 사이즈 정도만 써도 충분했을 텐데 괜히 어렵게 꼬아놓기만 했으니까요. 호텔을 콕 집어 범행 장소로 지정할 이유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경찰의 주목을 끌어서 유리한 점이 뭐가 있을까요?

그 외에도 각 사건별로도 어설픈 점이 많아요. 예를 들면 오카베의 알리바이는 억지스럽습니다. 그때 옛 애인이 전화를 했으리라는 보장도 없을 뿐 아니라, 경찰에서 통화 내역을 조사했더라면 금방 진상을 알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혼자만 PC를 사용하게 만들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요.

진상도 어딘가에서 본 듯한 내용이며 - "낯선 승객"이 생각나네요 -, 범인의 동기 역시 설득력이 떨어져서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물론 닛타와 야마기시 나오미의 밀당도 재미나고 소소한 일상계 트릭들은 충분히 즐길 만했습니다. 호텔이라는 장소에서 일하는 여러 전문가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점도 좋았고요.  제 별점은 2.5 점입니다. 차라리 호텔을 무대로 한 일상계 추리물이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무리하게 장편을 만든 느낌이에요.

2022/07/14

나의 히가시노 게이고 베스트 (2022년 7월)

지난 주말에 리뷰를 올렸던 "사명과 영혼의 경계"는 제가 올렸던 53번째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리뷰였습니다. 53편이나 읽었으면 베스트 10편도 충분히 뽑을 수 있을 것 같아 한 번 정리해보았습니다.

의외로 별점 4점 이상의 작품은 없고 별점 3점을 준 작품만 15편이 있습니다. 평균 수준이라 할 수 있는 별점 2.5점으로 범위를 넓히면 모두 30편이고요. 타율은 준수하지만 장타력은 별로 없는 타자같은 느낌이네요. "머니볼" 이론으로는 그닥 영양가없는 타자인 셈입니다. 좋아하는 작가고, 많은 작품을 읽었지만 이제 다른 작가를 타선에 좀 끼워 넣어야 할 때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여튼, 별점 3점을 주었던 15편의 작품을 개인적인 순서대로 배열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악의"
  2. "용의자 X의 헌신"
  3. "수상한 사람들"
  4. "기도의 막이 내릴 때"
  5. "예지몽"
  6. "백야행"
  7. "신참자"
  8. "방과 후"
  9. "오사카 소년 탐정단"
  10.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11. "공허한 십자가"
  12. "녹나무의 파수꾼"
  13. "사명과 영혼의 경계"
  14. "명탐정의 규칙"
  15. "명탐정의 저주"
앞으로 어떻게 순위가 바뀔 지는 모르겠지만, 2022년 7월 기준입니다~

2020/04/28

여태까지 나만의 가가 쿄이치로 형사 시리즈 순위

몰랐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시리즈 주인공인 가가 쿄이치로 형사 시리즈를 얼마전 읽었던 "기도의 막이 내릴 때"로 전부 완독했더군요.

기념삼아, 저만의 가가 쿄이치로 형사 시리즈 순위를 공개합니다.

공동 1위 : 별점 3점

공동 5위 : 별점 2.5점

8위 : 별점 2점 

9위 : 별점 1.5점

시리즈 9편 중 무려 7편이 평균 이상의 완성도를 보이는, 좋은 시리즈라는걸 잘 알 수 있습니다. 고전 스타일의 본격 퍼즐 미스터리는 물론 사회파서술 트릭, 심지어는 진범이 누구인지 독자에게 알려주지 않는 실험적인 작품까지 작품의 폭이 넓다는 것도 큰 장점이에요. 당연히 경찰 수사 소설로도 우수하고요. 이 시리즈만 읽어도 추리 소설의 큰 흐름을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완결되었다니 아쉽기도 한데, 언젠가 후속작이 나오기를 기원해 봅니다.

2023/12/08

hansang의 히가시노 게이고 추천 작품 15선

전에 올렸던 일본 헌책방의 히가시노 게이고 추천 작품 30선을 보고 저도 꼽아봤습니다. 이른바 hansang의 히가시노 게이고 추천 작품 15선! 제가 읽고 리뷰를 올린 58권 중 별점이 높은 작품들입니다. 순위는 무순이고요.

1년 전에 비슷한 글을 올렸었는데, 결과는 동일합니다. 고작 6권 더 읽었을 뿐이니 당연합니다. 평이 좋았던 "백조와 박쥐"가 새롭게 순위권에 올라갈까 기대했는데 역부족이었네요.
선정된 작품을 보니, 예나 지금이나 저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본격 추리물'을 훨씬 더 좋아한다는걸 바로 알 수 있군요. 단편집이 많은 것도 눈에 뜨입니다. 단편들은 보통 본격 추리 성향을 많이 보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빼어난 수록작 한 두편이 전체 별균 평점을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 중 딱 한 권을 고른다면, "악의"를 꼽겠습니다.

2015/12/02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 김홍민 : 별점 2.5점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 4점
김홍민 지음/어크로스

필명인 마포 김사장으로 유명한 출판사 북스피어 사장 김홍민 씨가 이런저런 매체에 기고한 글과 본인 블로그에 올린 글을 모아 출간한 책입니다. 

저는 마포 김사장 뉴스레터는 물론, 블로그도 RSS로 구독하고 있는 독자입니다. 때문에 그간의 재기발랄한 글들을 책으로 만나볼 수 있게 되어서 아주 기뻤습니다. 다 재미있지만 그 중에서도 제약적인 예산 하에서 지혜를 짜내 자신이 출간한 책을 홍보하려는 노력과 제목이기도 한 그의 철학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가 더해진 좌충우돌 에피소드들이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1부가 그러한 이야기 중심인데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와 손톱"의 봉인 페이지에 대한 이야기
  2. 뒷날개를 활용한 등장인물 소개 (이건 정말 필요한 책에는 아주 최고일 듯 싶어요)
  3. 과학 소설 전문 출판사 '불새' 관련 기가 막히는 이야기: 공무원이었던 어느 남자가 로버트 하인라인의 "은하를 넘어서"를 읽고 출판사를 차린 뒤 과학소설을 내놓는다. 일곱 권의 책을 내고 문을 닫는다. 많은 이의 성원으로 재고를 처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얻은 수익으로 불새 대표가 뭘 했느냐. 이런 빌어먹을, 다시 책을 펴내기 시작했다. (이 부분만큼은 원 글의 감동을 살리고자 거의 그대로 인용합니다)

또 작가, 출판인을 꿈꾸고 있는지라 여러모로 참고가 되는, 실전에 기반한 에피소드들인 2장의 이야기들도 좋았습니다. 다짜고짜 투고는 옳지 않다(출판사 절차를 따를 것), 공모전에 대한 팁 — 장면 전환에 전화를 이용하지 말라, 진부한 비유는 피하라, 평범한 보통 명사는 제목에 쓰지 말라, 불필요한 묘사로 시작하지 마라, 뻔한 기관 국정원 등을 주요 소재로 삼지 마라, 영화처럼 서술하지 마라(주인공의 시선과 행동만을 쫓아 전개했을 때의 문제), 짧은 장을 반복해서 만들지 마라 등 -, 그리고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왜 4의 배수인지와 판권 페이지 관련 이야기 등은 재미도 있고 유익했으니까요.

허나 몇 가지 의견에는 동의하기 힘들긴 했어요. 미야베 미유키"에도물" 출간 논란이 대표적이죠. 일단, 북스피어가 키워놓은 시장을 날로 먹으려고 한 비채는 엄연히 상도의를 어긴 것이며, 도덕적인 면에서 비난받아야 함은 마땅하다는데 동의합니다.
하지만 선인세는 엄연히 작가에게 돌아가는 돈입니다. 작가 입장에서 보면 경쟁으로 내 작품값, 내 몸값이 올라가고, 출판사에서 그만큼 많이 팔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건 지극히 타당하면서도 고마운 일이에요. 즉, 좋은 작품을 썼고, 그것이 좋은 가격을 인정받고, 높은 판매를 보장받았다. 이게 전부입니다. 선인세 경쟁으로 한국 출판사가 글로벌 호구가 되었다! 라고 주장하는 건 말이 안됩니다. 마포 김사장 말대로 적정 금액이 암묵적으로 있다면 그건 담합이죠. 왜 유통사가 콘텐츠 창작자의 창작물 가격을 마음대로 정한답니까? 선인세가 높아서 독자가 피해를 본다는 게 명백하게 증명되지 않는다면(멀쩡한 책의 분책이나 동일 판형, 페이지 단행본 대비 가격 상승, 사재기를 통한 판매 부수 조작 등) 유통사들 간의 분쟁일 뿐, 독자와 작가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뒤가 켕기는 건 출판사지 독자가 아니에요.
통일된 디자인과 판형으로 시리즈를 모으지 못한다는 문제는 있지만 에드 멕베인의 87분서 시리즈도 "아이스" 한 권만 피니스 아프리카에 말고 검은숲에서 출간되었고, 가가 형사 시리즈"신참자"만 출판사가 다른 등 이 바닥에 워낙 비일비재한 일이라 문제도 아닙니다. "경성 탐정록"은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음에도 1, 2부 판형부터가 다르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리고 한국 추리소설에 대해 언급하며, 한국의 히가시노 게이고가 왜 필요한가? 이미 히가시노 게이고가 있는데? 라는 생각을 드러낸 것도 섭섭했습니다. 한국 작가의 추리소설은 투자 대비 성공하기 어렵다는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라면 최소한의 애정은 보여줘야 하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꾸준히 각종 공모전을 개최하는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 황금가지와 너무 비교되는 마인드에요. 이래서야 그냥 장사꾼이지요. 미야베 미유키 작품만 영원히 팔 건가요?

이렇듯 마음에 안 들거나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앞부분, 1, 2부의 이야기는 괜찮았어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본인, 그리고 출판사를 지지하는 팬층이 두텁다는 것은 알겠고, 그렇게 두터운 팬층을 만든 마포 김사장의 노력에는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도 북스피어의 건승을 기원하겠습니다.

덧붙이자면, 비록 이전에 제안했다가 거절당하기는 했지만(거절의 이유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네요) "경성 탐정록" 장편을 여기서 내 주면 참 좋겠다 싶긴 하네요. 마포 김사장의 재기발랄한 마케팅이라면 뭔가 될지도?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뭐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2015/12/04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3점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제목과 동일한 표제작을 포함하여 모두 5편의 단편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제목처럼 범인이 자신의 범행을 숨기기 위한 거짓말을 파악하여 범행을 증명하는 전개를 보이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단편집이라 그런지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에서처럼(주로 초기작) 억지스러운 동기나 인간관계가 등장하지 않고, 트릭과 추리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아울러 가가 "형사"에 어울리는, 그야말로 끈질긴 수사가 추리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참고삼아 해당 수사 내역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 봅니다.

  • 첫번째 사건: 화분을 구입한 날짜에 대한 수사
  • 두번째 사건: 피해자가 입고 있던 옷에 대한 목격 증언으로 옷을 갈아입은 것을 알아냄, 담배를 피우지 않는 피해자 옷에 진하게 밴 담배 냄새에 대한 탐문 조사
  • 세번째 사건: 친칠라 고양이에 대한 증언, 피해자가 먹은 청어메밀 판매 장소 탐문을 통한 취식 시간 확인, 용의자의 단골 미용실에 대한 조사
  • 네번째 사건: 나오코 집 근처 가게들을 대상으로 한 탐문 조사
  • * 다섯번째 사건은 친구의 가정사에 대한 내밀한 추리 중심이라 경찰 수사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또 핵심 사건, 트릭 하나에 그치지 않고 나름 반전 요소들도 들어가 작품들의 복잡도와 재미를 더해줍니다. 두번째 사건에서 유타의 사체를 제한된 시간과 장소 안에서 들키지 않고 은닉하는 트릭, 네번째 사건에서 숨겨놓은 사체의 정체가 무엇인지?같은 요소가 대표적입니다.

가가 형사의 비중보다는 주인공, 화자 역할의 범인 비중이 더 크다는 점은 팬에게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은 됩니다만(가가라는 캐릭터에 매료된 팬이라면 당연히 불호겠죠) 이 정도면 아주 괜찮은 단편집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제가 읽은 가가 형사 시리즈 중에서는 최고로 꼽습니다.

수록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유게 발레단의 발레리나 하야카와 히로코의 자살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는 내용입니다. 발레단 사무국장 데라니시 미치요가 살해했다는게 진상이고요. 미치요의 거짓말은 히로코가 이사할 때 화분을 만졌다는 것입니다. 화분은 사고 당일에 구입한 것으로 이사할 때에는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미치요의 범행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화분은 히로코를 자살로 위장하여 살해할 수 있었던 트릭의 도구이기도 하고요.

발레단과 발레 공연, 연습에 대한 상세한 조사가 뒷받침된 묘사나, 단순 협박 (안무가가 미치요의 남편 데라니시 도모야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난이도 높은 무대를 삭제하고 마지막 공연을 한 히로코의 자존심, 즉 히로코의 요구에 응해 15년 전 무대가 가짜였다는 것을 인정한 것을 감추기 위한 동기는 "잠자는 숲"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발레" 그 자체를 트릭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는 더 뛰어나고요.

아울러 표제작이면서도 이 단편집의 주제이기도 한 "범인의 거짓말"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거짓말을 감추려면 좀 더 큰 거짓말을 하게 되지요(가가)"라는 말이 대표적이에요.

그런데 가가가 거짓말을 유도한 방법은 유치하고, 단지 말실수 한 것뿐인데 뭐 그리 큰 꼬투리가 될까 싶기는 했습니다. 증거는 결국 아무것도 없고, 버티면 빠져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이렇게 하면 단편으로 성립하기는 어려웠을 테니 문제라고 지적하기는 어렵지요. 별점은 3점입니다. 발레에 대한 세밀한 조사가 바탕이 된 적절한 트릭과 합리적인 동기가 어우러진 수작입니다.

"차가운 작열"

주부 다누마 미에코가 교살되고, 돌이 갓 지난 아들 유타가 실종된 사건의 진상은?

진상은 남편 요우지의 범행으로, 동기는 아내 미에코가 빠찡코를 하다가 차에 둔 아이를 찜쪄 죽였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 동기는 "너버스 브레이크다운"에서도 등장했던 것인데 실제 있었던 사건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짓말은 피해자가 죽기 전에 입었던 빨간 티셔츠가 세탁기 안에 있던 겁니다. 요우지는 땀을 많이 흘려서였다고 말하지만, 빨간 티셔츠를 다른 빨래와 섞어서 빨아도 되는지? 와 같은 사소한 점에서 가가가 수상함을 느끼게 되는 아이디어가 좋았습니다. 집안일에 관심이 없는데 유타의 옷차림을 기억하는 것 역시 괜찮은 착안점이었고요.

무엇보다도 다누마 요우지의 증언 중 차의 에어컨이 고장났다는 것을 앞의 거짓말과 엮고 — 차의 에어컨이 고장났는데 그것 때문에 땀을 많이 흘려 옷을 갈아입었다는 해명 — 그것이 진상에 이르는 전개 -  즉 에어컨이 고장나 아기가 차 안에서 열사했다 -에는 정말 탄복했습니다. 아이 사체의 부취를 막기 위해 수지로 밀봉했다는 곁다리 트릭도 돋보였고요.

하지만 티셔츠에 담배 냄새가 배었는데, 집에 재떨이도 없고 부부는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는 점에서 수상함을 느꼈다고 하는데, 이 정보가 독자에게는 제대로 제공되지 않아서 공정함을 느끼기 힘들었던건 조금 아쉽습니다. 이 점 때문에 약간 감점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만, 읽을 가치는 충분한 좋은 작품입니다.

"제2지망"

이혼녀 미치코가 교제하던 남자 모리 슈스케가 집에서 교살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의 진상은?

한마디로, 이 단편집 수록작 중에서는 최악입니다.

거짓말은 미치코가 댄스 교습을 마치고 샤워를 하지 않았다는 말로, 머리칼의 샴푸향을 가가가 눈치채서 그녀의 알리바이가 밝혀지게 되죠. 그런데 두 번째 사건과 마찬가지로 샴푸향에 대한 정보는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지 않고, 동기 설명도 부족하다는 단점이 너무 큽니다.

남자 목을 여자가 조르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포장지 20미터 정도를 이용하여 창밖으로 체중을 걸고 뛰어내렸다는 트릭이 등장하는데, 이 역시 별로였습니다. 어차피 밝혀져도 상관없는 것이었다면(범행 은닉은 미치코의 의도였고 리사는 아무 생각도 없었으니) 굳이 이런 수고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칼로 찌르거나 불을 지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모호한 동기, 불합리한 범행, 별볼일 없는 트릭 모두가 갖추어진 망작입니다.

"어그러진 계산"

사카가미 나오코의 남편은 얼마 전 역 앞에서 트럭에 치여 즉사했다. 그 와중에 불륜남 나카세 유키노부 실종 사건을 수사하는 가가와 만나는데...

나카세와 나오코의 과거, 그리고 범행 모의가 현재 시점에서의 수사와 서서히 교차되어 전개되며 결과적으로 두 개의 이야기가 만나 진상이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솔직히 추리적으로는 별로에요. 거짓말은 천장에서 흐르는 물에 대한 것이지만, 이건 가가가 사기친 것에 불과하니까요.

그래도 집에 숨겨놓은 사체가 유키노부의 것이었다는 반전은 괜찮았습니다. 가가의 수사를 바탕으로 한 추리 — 냉동고에 대한 증언 → 약국 탐문을 통한 보냉제 구입 확인 → 편의점 탐문을 통해 매일 얼음을 구입한 것을 확인하고, 시체가 냉동되어 있다! 는 구성 — 은 합리적이고 설득력도 높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 외적인 매력이 더 괜찮았던 작품이에요.

"친구의 조언"

가가의 친구 하기와라가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냈다. 가가는 그의 아내 미네코가 드링크제에 약을 탔다는 것을 추리해내는데...

단편집 다른 수록작들과는 다르게 가가의 일방적인 추리와 주장이 펼쳐지는 작품으로 일종의 가가 추리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추리하는 내용 대부분이 타당하고 설득력이 높아서 만족스러웠습니다. 하기와라가 출발 전 집에서 마신 음료를 따로 꺼낸 컵이라는 사소한 단서로 밝혀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아들 다이치가 그린 파란 물고기 그림을 바탕으로 동기와 범행을 추리해내는 장면도 인상적이었고, 밀봉된 비타민제 안에 수면제를 넣는 트릭도 현실적이면서도 신선했습니다.

다만 미네코가 아트플라워 교실 강사 구즈하라 루미코와 레즈비언 관계였다는 설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습니다. 차라리 남자였다면 마지막 장면의 감정이 더 강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단점은 사소한 수준이고, 추리적으로 워낙 뛰어나서 별점은 3.5점. 이 단편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국내 출간된 가가 형사 시리즈는 현 시점에서 다 읽은 만큼 개인적으로 순위표를 작성해 봅니다.

  1.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2. "악의"
  3. "신참자"
  4. "붉은 손가락"
  5. "내가 그를 죽였다"
  6.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7. "졸업 : 설월화 살인 게임"
  8. "잠자는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