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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31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5) 사람먹는 장르 문학

추리 소설을 비롯한 장르 문학에는 식인이 등장하는 작품이 많습니다. 소재 자체가 워낙 강렬하다 보니, 한 번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독자에게 충격과 혐오감, 공포감을 동시에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작품 속 식인은 모두 같은 의미로 쓰이지는 않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대략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가장 흔한 형태입니다. 사람을 말 그대로 ‘먹이’나 ‘식량’으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가장 단순하게는 사람이 평범한 먹잇감으로 취급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좀비물처럼 사람을 잡아먹는 크리처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하겠지요. 클라이브 바커의 "한밤의 식육 열차", 그러니까 "미드나이트 미트 트레인"은 조금 다릅니다. 작품 속 빌런인 푸주한 마호가니가 깊은 밤 지하철 승객들을 도살해 인육으로 만드는 이유는 직접 먹기 위해서가 아니거든요. 미지의 절대자에게 대접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먹이’가 아니라 ‘미식’의 영역으로 발전한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전에 소개드렸던 스탠리 엘린의 "특별요리"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계보를 잇는 타쿠미 츠카사의 "금단의 팬더"는 한술 더 떠서, 아예 인육으로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방법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작품입니다. 소재만 놓고 보면 끔찍하지만, 장르 문학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지요.

사람을 먹이로 삼는 경우 중에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육을 먹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다시 재료의 정체를 숨기고 먹느냐, 대놓고 먹느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정체를 숨기는 대표작은 고전 SF "소일렌트 그린"입니다. 작품 속 “소일렌트 그린”은 인구 폭발과 환경 오염으로 식량이 사라져가는 미래 세계에 등장한 먹거리입니다. 공식적으로는 플랑크톤으로 만들었다고 소개되지만 그 정체는! 영화사에 길이 남은 명대사 “Soylent Green is people!”로 밝혀집니다.

반대로 살기 위해 대놓고 사람을 먹는 작품 중에서는 스티븐 킹의 "서바이버 타입"을 끝판왕으로 꼽고 싶습니다. 무인도에 표류한 생존자가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을 조금씩 먹어버린다는 엽기적인 이야기인데, 스티븐 킹답게 이 말도 안 되는 설정을 묘하게 설득력 있게 풀어냅니다.

두 번째는 범죄 목적으로 식인을 행하는 경우입니다.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것은 증거 인멸을 위한 식인일 것입니다. 로드 던세이니의 "두 개의 양념병"은 한 남자가 거처를 떠나지 않은 채, 함께 살던 동거녀를 감쪽같이 사라지게 만든 사건을 다룹니다. 남자에게 필요했던 것은 장작 패기라는 적절한 운동, 그리고 입맛을 돋우기 위한 ‘두 개의 양념병’뿐이었다는 내용이지요.

히라야마 유메아키의 호러 "오메가의 성찬"은 여기서 한 술 더 뜹니다. 아예 전문적으로 시체를 ‘먹어서’ 폐기하는 괴인이 등장하니까요. 증거 인멸이라는 범죄 목적과 식인이라는 혐오 소재가 결합했을 때 얼마나 기괴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또 다른 범죄 목적은 복수입니다. “원수의 간을 씹어 먹는다”는 옛말처럼, 식인은 복수심의 극단적인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 노리즈키 린타로의 "카니발리즘 소론"에 등장하는 식인이 바로 이런 목적에 가깝습니다. 다만 시각은 조금 독특합니다. 범인이 동거녀를 죽이고 먹은 이유가, 그녀를 ‘변’으로 내보내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라니까요. 혐오스럽지만, 그래서 더 잊히지 않는 발상입니다.

세 번째는 의학적 목적의 식인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관련된 속설이 구전되어 왔고, 실제 사건도 존재합니다. 일제강점기에 발생한 ‘경성 죽첨정 단두여아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간질병의 특효약이 아이의 뇌수라는 속설을 믿은 범인이,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어린아이의 사체에서 뇌수를 긁어낸 사건이었지요.

비슷한 맥락에서 이우혁의 단편 "손가락"은 ‘문둥이가 아이의 간을 먹으면 낫는다’는 속설을 현대적으로, 그리고 비극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마리 유키코의 "여자친구"도 넓게 보면 이 범주에 넣을 수 있겠습니다. 낙태한 태아의 사체를 섭취함으로써 극한에 이른 스트레스를 달래려는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치료라기보다는 병적인 해소에 가깝지만, 몸과 질병, 치유에 대한 왜곡된 믿음이 식인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는 의학적 목적의 식인과 맞닿아 있습니다.

네 번째는 식인을 특별한 의미 없이, 캐릭터 형성을 위한 장치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식인만큼 ‘광기’를 즉각적으로 드러내기 좋은 소재도 드물기 때문이겠지요. 토머스 해리스가 창조해낸 한니발 렉터 박사가 가장 유명한 예입니다. 사실 한니발의 식인 행위는 이야기의 구조 자체를 크게 바꾸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한니발이 평범한 인간의 윤리와 감각을 초월한 존재라는 사실을 강렬하게 각인시킵니다. 저는 아직도 “내 오랜 친구를 먹으러 가야 하거든”이라는 한니발의 대사만큼 유머러스하면서도 잔혹하게, 동시에 절대자 같은 면모를 드러내는 문장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식인이 캐릭터의 기괴함과 매력을 동시에 만들어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장르 문학 속 식인은 여러 목적과 형태로 변주되어 왔습니다. 먹이, 미식, 생존, 증거 인멸, 복수, 의학적 속설, 캐릭터의 광기까지. 충격과 혐오감,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이만큼 효과적인 소재도 드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만큼 많이 사용되어 이제는 더 새로운 설정이나 이야기가 나오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와카타케 나나미의 "광취"처럼, 제 분류로는 쉽게 정의하기 어려운 아이디어가 도입된 작품이 발표되는 걸 보면 여전히 놀랍습니다. 저도 언젠가 새로운 아이디어로 도전해 보고 싶은 주제이지만, 러시아의 ‘인육을 먹었다는 살인마 부부 사건’ 같은 뉴스를 접할 때마다 자신이 없어지네요. 과연 실화를 뛰어넘는 창작물을 만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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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1

놀라운 반전이 있는 미스터리들 - 북오프 칼럼

가끔 소개해드리는 이러저런 미스터리, 추리소설 추천 정보. 이번에는 북오프 온라인 칼럼 하나를 찾아 소개해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의역이 많은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촘촘히 짜여진 수많은 복선, 상상할 수 없는 전개, 충격적인 결말 ...... 소름이 돋는 오싹함을 찾아 추리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많을겁니다.
그 중 '반전'이 뛰어난 미스터리 작품들을 아는 사람만 아는 작가들과 유명 작가들로 나눠 소개해 드립니다.
꼭 한번, 그 '반전'에 감탄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만 '반전'의 작품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아는 사람만 아는 작가
"가면병동" 치넨 미키토
"If의 비극" 우라가 가즈히로 (국내 미출간)
"신의 숨겨진 얼굴" 후지사키 쇼
"출판금지" 나가에 토시카즈 (국내 미출간)

유명 작가
"연쇄살인마 개구리 남자" 나카야마 시치리
"미로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
"어둠 속의 기다림" 오츠 이치
"살인귀" 아야츠지 유키토

"가면 병동"
강도로 인해 밀실로 변한 병원, 숨 막히는 심리전의 막이 오른다!
요양병원에 강도가 침입해 자신이 쏜 여자의 치료를 요구한다. 사건에 휘말린 외과의사 하야미즈 슈고는 여자를 치료하고 탈출을 시도하던 중 병원에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된다. 폐쇄된 병원에서 펼쳐지는 궁극의 심리전. 그리고 충격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현직 의사가 그리는 단숨에 읽을 수밖에 없는 '본격 미스터리×메디컬 서스펜스'. 저자 첫 문고판 장편소설!

인기 시리즈 제1탄.
의료 소설이라고 하면 난해하고 접근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겁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알기 쉽고, 읽기 쉽습니다. 라이트 노벨 같은 경쾌한 터치로 독자를 쏙쏙 끌어당깁니다.
게다가 치넨 씨는 현직 내과 의사로 의사의 시선으로 바라본 전문적 견해를 바탕으로 집필되어 있어 단순한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점도 매력적인 점입니다.
마음에 드셨다면 속편인 '시한부 병동'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If의 비극"
소설가 가노는 사랑하는 여동생의 자살을 의심한다. 결국 여동생의 약혼자였던 오쿠츠의 불륜이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오쿠츠를 불러내어 살해한다. 하지만 위장공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노가 운전하는 차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나는데....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두 가지로 나뉜다. A는 남자를 치어 죽인 경우, B는 아슬아슬하게 남자를 치지 않은 경우. 두 개의 평행세계가 하나로 연결될 때, 예측할 수 없는 충격적인 진실이 밝혀진다!
식인 작가(사람을 잡아먹는 소설을 많이 써서)로 알려져 '미스터리계의 기인'으로 불리는 우라가 카즈히로 씨의 작품. 경력이 거의 공개되지 않아 그 수수께끼 같은 부분을 좋아하는 독자도 많다고 합니다.
"절대 속지 않는다!"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운 이 작품이지만, 절대 속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 반전에 역시나 격침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신의 숨겨진 얼굴"
신과 같은 청렴결백한 교사, 츠보이 세이조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통곡의 밤은 슬픔에 휩싸여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참석자들이 '신'을 추모하는 가운데, 엄청난 의혹이 제기되었다. 사실 츠보이가 흉악한 범죄자가 아니었을까...? 츠보이의 아름다운 딸, 후배 교사, 제자인 중년 남성과 요즘 여자, 이웃집 주부와 개그맨. 두 번, 세 번 뒤집어지는 그들의 추리는? 반전이 있는 결말이 화제!!!
제34회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 '대상' 수상작. 아리스카와 아리스, 온다 리쿠, 구로카와 히로유키, 미치오 슈스케라는 쟁쟁한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를 받았다는 놀라운 작품입니다.
'웃음을 자아내는 절묘한 유머 감각이 있고, 서비스 정신이 넘친다 (온다 씨)', '개그맨으로 활동한 경험 때문인지, 말투가 매우 유쾌하고 유머 감각은 본받고 싶을 정도였다 (미치오 씨)'라는 심사평에서 알 수 있듯이, 어쨌든 유머가 넘치는 작품입니다. 반전도 훌륭하고요. 꼭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출판금지"
작가인 나가에 씨가 손에 쥔 것은 "카뮈의 자객"이라는 소문난 원고였다. 저자는 작가 와카바시 고세이. 내용은 유명 다큐멘터리 작가와 동반 자살을 시도했지만 살아남은 신도우 나나오와의 단독 인터뷰였다.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산장, 동반 자살의 모든 것을 기록한 영상. 불륜의 끝에서 벌어진 비극인가? 왜 여자만 살아남은 것일까? 숨막히는 전개, 무서운 반전. 기형적인 걸작 미스터리.
작가인 나가에 씨는 원래 호러와 서스펜스를 전문으로 하는 TV 감독이었습니다. 컬트적인 인기를 자랑했던 프로그램 '방송금지'(후지TV)의 기획, 각본, 감독도 담당했다고 하네요. 이 책은 그런 경력을 가진 나가에 씨가 가상의 사건을 취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읽다 보면 마치 논픽션처럼 느껴져서, 도중에 공포에 질려서 더 이상 읽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
수수께끼가 수수께끼를 불러일으키는, 스릴 있고 무서운 작품이라 추리소설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연쇄살인마 개구리 남자"
어느 도시에서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시신은 아파트 13층에서 갈고리에 매달린 알몸의 여성이었다. 그런 시체 근처에는 어린아이가 쓴 것 같은 히라가나로만 쓰여진 조악한 범행 진술서가 있었다. 이후 제2, 제3의 엽기 살인이 일어난다. 한 기자는 세상을 공포에 떨게 하는 범인에게 '개구리 남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
이 작품은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에서 최종 후보까지 올랐던 작품입니다. 기괴한 살인을 다룬 서스펜스 넘치는 미스터리지요.
마지막 반전에 이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반전은 볼만한 가치가 충분해 마지막까지 눈을 뗄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범인의 책임능력을 묻는 형법 제39조가 강하게 개입된 사회파 미스터리의 면모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미스터리로서도 재미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작품입니다.

"미로관의 살인"
추리소설계의 거장 미야가키 요타로에 의해 신예 작가 4명이 '미로관'이라는 기괴한 관에 모였다. 미야가키의 비서는 미야가키가 자살했다며 카세트 테이프를 대신 건네 주었다. 테이프에는 '미로관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써달라', '가장 좋은 작품을 쓴 사람에게 유산의 절반을 주겠다'는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도리없이 네 사람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관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관 시리즈'는 "십각관의 살인", "시계관의 살인" 등 반전과 의외의 결말이 있는 작품이 많은데, 이 작품 역시 큰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다.
곳곳에 깔려있던 복선이 회수되고 여러 가지 장치가 차례로 밝혀지는 후반부 전개가 특히 압권입니다. 이 작품은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까지 눈을 뗄 수 없는 걸작이에요.
참고로 이 작품은 시리즈 작품이지만, 이 작품만으로 독립된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어 이 권부터 읽어도 무방합니다.

"어둠 속의 기다림"
살인 혐의로 경찰에 쫓기던 아키히로는 눈이 보이지 않는 미치루라는 여자가 혼자 사는 집에 숨어들었다. 미치루는 '자신의 집에 누군가가 있다'며 아키히로의 기척을 느꼈지만 계속 모른척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맹인 여자와 살인 용의자인 남자의 기묘한 동거 생활이 시작되는데...
여자가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살인 용의자인 남자가 무단으로 여자의 집에 숨어든다 - 이런 줄거리를 보면 앞으로 도대체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작품이 아닙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점차 유대감 같은 것이 싹트기 시작하거든요.
마지막에는 깜짝 놀랄 만한 반전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살인귀"
'TC멤버스'는 중학생부터 성인까지가 소속된 친목 단체다. 그런 TC멤버스 일행이 후타바산으로 캠핑을 떠난다. 하지만 즐거워야 할 캠프는 후타바산 살인마에 의해 피비린내 나는 참극으로 변해가고, 한 명, 또 한 명씩 살해당하는데............
이 작품은 스플래터 호러 소설입니다. 그 모습을 극명하게 묘사하기 때문에 상당히 그로테스크해서 이런 작품을 싫어하는 분들께는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로테스크한 묘사가 전부는 아닙니다. 후반부에는 아야쓰지 유키토다운 깜짝 놀랄만한 장치가 준비되어 있으며, 거기서 그려지는 반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로테스크한 작품에 면역이 있는 분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2023/12/23

기기괴괴공모전 수상작품집 - 백해인 외 : 별점 2점

기기괴괴공모전 수상작품집 - 4점
백해인 외 지음/팩토리나인

"오싹함"이라는 주제의 단편 공모전인 '기기괴괴' 공모전의 입상작 5편을 모은 단편집.
별 기대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다행히 "전래 미스터리"처럼 인터넷 게시판 수준은 아니더군요. 공모전 수상작다운 기본적인 완성도는 갖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장점은 없습니다. 오히려 주제와 걸맞지 않게 별로 무섭지 않다는 문제가 도드라지며, 대부분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전개와 결말이라 의외성이나 반전의 묘미를 찾아보기도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흔한 설정과 전개의 양산형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수록작별 간략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탈피, 키스" 백해인
원인모를 피부 트러블 탓에 제대로 외출도 할 수 없던 수희는 고운 피부를 되찾았다. 목욕탕에서 만난 여성이 바토리 백작 부인의 축복이라며 욕탕에 뿌린 핏물 덕분이었다. 그러나 핏물이 떨어지고 다시 피부 트러블이 찾아오자, 수희는 자기를 농락한 애인 이진을 죽인 뒤 그 피를 뒤집어 쓴다....
'미'를 쫓다가 금단의 영역에 손을 댄 뒤 파멸한다는 이야기는 너무 흔하지요. 이 공모전과 이름이 같았던 웹툰 "기기괴괴"의 "성형수" 에피소드가 대표적입니다.
흔한 설정이라면 나름대로 변주라도 있어야 했을텐데, '아름다운 사람의 피'가 도구로 활용된다는건 안일한 발상이지요. 여기에 "바토리 백작 부인의 축복"이라는 설정을 덧 씌운 것, 이진이 수희를 등쳐먹는 악질 사기꾼이었다는 설정도 뻔하기 그지 없고요. 별로 기괴하지도, 무섭지도 않았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수레바퀴 소리가 들리면" 백승빈
궁핍했던 평안도의 어느 마을 노름꾼 아비 밑에서 자란 쌍둥이같이 꼭 닮았던 자매는 천재적인 이야기꾼으로 장날의 인기인이 되었다. 그러자 검은 도포의 남자가 나타나 거액을 주고 언니를 사갔다. 동생은 언니가 해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겨우겨우 그녀를 찾아갔지만, 언니는 검은 도포의 남자가 피를 빨아먹는 사내들을 집으로 끌고가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사내들의 피를 먹고 사는 불사의 존재였다. 자매는 검은 도포의 남자의 아내의 도움을 얻어 그의 가슴에 말뚝을 박아 쓰러트리는데 성공했지만, 마지막에 언니가 그에게 물리고 말았다....
전형적인 흡혈귀 이야기지만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자매가 '이야기 꾼'이라는 특기를 살려 흡혈귀와 맞선다는 설정은 신선했습니다. 뻔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차별화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넷플릭스의 "킹덤"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가지치기" 신도윤
뭔가에 물린 뒤 물린 자리에서 사람 머리카락이 나더니 결국 '머리'까지 자라났다. 확인해보니 내 얼굴이었다. 얼굴을 식칼로 잘라내가며 대응했지만 온 몸에 나기 시작했고, 결국 진짜 머리마저 두 갈래가 되어버렸다...
"토미에" 류의 인간 복제(?) 상상력을 일상 이야기와 결합한 작품. 혐오스러운 묘사를 '잘라낸 머리를 음식물 쓰레기 봉투에 넣어 버렸다'는 식으로 현실적이고 담담하게 묘사한건 독특했지만, 자라난 머리가 결국 온 몸을 뒤덮는다는 결말이 예상 그대로라 실망스러웠습니다. 본인의 진짜 머리조차 자라난 머리에 침식당한다는건 "블랙잭"에서의 "인면창" 에피소드와 흡사하니까요. 전개와 결말에서 조금 더 의외성을 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비어 있는 상자" 이승훈
코인 등 투자 실패로 돈이 필요했던 정훈은 이상한 상자를 옮기는 일을 하게 되었다. 상자에 들어있던건 살아있는 껍질같은 사람들로, 부자들이 껍질을 사서 입는 시장으로 옮겨지는 것이었다....
허세에 치중한 인간들은 겉 껍질밖에 없다는 세간의 비유를 그대로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비유를 직유처럼 소화하니 색다르네요.
그러나 색다름보다는 진부한 요소가 더 많았습니다. 껍질 상태가 되어서도 허영은 남아서 어떻게든 부자들 눈에 들겠다고 발버둥친다는 반전도 그닥이었고요. 왜 사람들이 껍질만 남는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알고 수집하는지? 이들이 사라져도 세간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지? 등 설정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다소 기발해보이는 아이디어가 전부일 뿐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무미의 끝" 정현수
강어진은 오래전 친구 준혁의 회고록(?)을 배달받았다. 스트레스와 가정 문제로 미각을 잃은 준혁이 결국 식인까지 저지른 뒤 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 어진은 준혁이 자살했다는 장소로 달려갔는데, 그곳에서 완전히 식인 괴물이 된 준혁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미각을 잃은 준혁이 이런저런 재료를 거쳐 식인에 이르는 과정은 꽤 엽기적으로, 실감나게 묘사되지만, 역시나 신선함, 새로움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설정부터가 너무 뻔한 탓입니다. '맛' 때문에 식인을 감행한다는 작품은 워낙에 많으니까요. "특별 요리"도 그렇고, "금단의 팬더"도 별로 다르지 않지요. '최고의 맛'을 위해 식인을 저지르는게 아니라 '잃어버린 미각'을 찾기 위해 식인을 저지른다는 동기 측면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결국은 같은 내용입니다.
게다가 식인을 저지르다가 아예 괴물이 되어버린다는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비교적 현실적인 분위기로 그럴듯하게 끌고가던 초중반부와 동떨어져 있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처음에는 어진의 회상처럼 시작하는데, 결말이 어진의 죽음이라면 이걸 뭐라고 해석해야 할지 잘 모르겠고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23/12/16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 - 시라이 도모유키 / 구수영 : 별점 1.5점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 - 4점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리뷰에는 트릭 및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물 모두가 감염될 수 있는, 치사율이 50%가 넘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여 인류의 상당수가 사망했다. 치료제를 만들었지만 인간에게만 유효해서 사람들은 채식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영양 섭취 문제가 불거졌다. 일본 유전자 공학의 1인자 후지야마 히로미는 식용 클론 인간을 대량 생산하여 고기를 보급한다는 계획을 내 놓고 '플라나리아 센터'라는 식육 가공 시설을 만들었다. 클론의 개인 제작은 엄격하게 금지하며, 클론 고기는 먹는 본인의 클론이어야 하고, 클론은 성장 촉진제로 빠르게 성장시키기에 개와 비슷한 지성밖에 갖추지 못한다는 등의 조건을 내세워 비난을 최소화했다. 사업은 성공했고, 일본 경제도 성장했지만 후생 노동부 장관에 취임했던 후지야마는 매춘 스캔들이 터져 사임했다. 이는 클론 인간 제작을 반대했던 정적 노다 조타로 살인 사건 조사 때 드러났다.
그리고 몇 년 후, 후지야마에게 배달하기 위해 가공했던 클론 배달물에 '머리'가 함께 배달되는 사고가 터졌다. 유력한 용의자는 배달물을 포장했던 시바타 가즈시였다. 동료 유시마 미키오가 범인은 후지야마 본인이라는 그럴듯한 추리를 내 놓았지만 증거를 잡지는 못해서 둘 다 근신 처분을 받았다. 그날 밤, 잃어버린 시계를 찾으려고 다시 플라나리아 센터로 항했던 시바타는 괴한에게 습격당했고, 다음날 센터가 테러 때문에 전소되는 대형 사고가 벌어지는데....

"명탐정의 제물"로 화제를 불러 일으킨 시바타 도모유키의 데뷰작. 제 34회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 최종 후보작이었습니다.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미치오 슈스케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추천으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고 하네요.

식인이라는 금기에 도전했던 작품은 수도 없이 많지만, 이 작품에서는 식인은 단순히 미식이나 생존 목적은 아닙니다. 일종의 수단으로 식용 '클론'을 만들 수 밖에 없게 되었던 이유, 식용 클론을 만드는 플라나리아 센터에 대한 상세한 설정 등은 상세하게 설명됩니다.

추리적으로도 풍성합니다. 후지야마가 잘린 머리를 배달받은 사건에서 시작해서 시바타가 밤에 센터에서 만났던 괴한 사건, 플라나리아 센터 폭파 테러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이 연달아 벌어지며, "명탐정의 제물"처럼 여러 등장인물들이 서로 자신의 추리를 선보이다가 의외의 진상으로 이어지는 덕분입니다. 이 과정에서 식인, 그리고 클론이 트릭의 핵심 요소로 등장하기 때문에, 다른 식인물과 충분히 차별화됩니다.
전개도 괜찮아요. 단서와 정보도 공정하게 제공해줄 뿐 아니라 시바타 가즈시와 가와우치 미노리로 화자를 바꾸어가며 전개하는데, 결국 시바타 가즈시와 가와우치 이노리가 사실은 두 명이었다는 일종의 서술 트릭을 활용한 반전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좋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추리와 트릭을 위해 만들어진 설정이 허황되고 비현실적인데다가, 사건들 대부분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우연과 운이 많이 작용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완성도가 낮습니다.
핵심 트릭인 '클론으로 사람 바꿔치기'부터가 비현실적입니다. 후지야마는 노다 조타로를 살해할 때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자기 클론을 활용했습니다. 클론은 성장 촉진제를 사용하여 두뇌 개발이 더디다고 했는데, 어떻게 후지야마인 척 할 수 있었을까요? 이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게다가 알리바이를 만들거라면 대중들 앞의 노출된 장소에서 뭔가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게 나았을겁니다. 매춘부를 만나는 것 보다는 말이죠.
같은 이유로 시바타에 의해 가축으로 키워진, 실제 나이로는 몇 살 되지 않을 차보의 남다른 지성, 그리고 차보가 감금 장소를 마음대로 빠져나가며 이런저런 행동을 했다는 것, 그리고 클론이 후지야마를 살해한 뒤 그 자리를 꿰찼고, 차보가 후지야마의 클론과 손을 잡고 클론 해방과 시바타에 대한 복수로 일련의 사건을 일으켰다는 진상도 허황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보다는 성형 수술이나 쌍둥이 쪽이 더 말이 되는 트릭이었을거에요.
또 공들여 만든 클론 관련 설정이 이렇게 작가 편의에 따라 변경되는 탓에, 이는 트릭을 위해 만들어진 억지라는 느낌을 강하게 전해줍니다. 상식적으로도 사람을 위한 치료제를 만들었다면, 동물 대상으로 못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고액을 들여 인간 클론을 고기로 만드는 공장을 만드는 것 보다도 동물용 치료제를 만드는게 싸게 먹힐테고요. 설령 동물용 치료제가 만들어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동물성 단백질을 대체할 식물성 단백질은 많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무슨 큰 일이 나는건 아닙니다. 콩 등에서 뽑아낸 성분으로 고기를 만드는 공장도 최근 많이 늘어나고 있고요.

추리적으로도 뭔가 수수께끼가 많고 복잡해보이지만 결론적으로 별건 없습니다. 노다 조타로 사건은 클론을 이용한 알리바이 트릭, 후지야마 클론 머리 오배송 사고와 플라나리아 센터에 잡입한 괴한 사건, 테러 사건은 모두 시바타를 함정에 빠트리고 센터를 폭파시키려고 후지야마 클론이 실행범으로 일으켰다는게 전부거든요. 즉, 어떻게보면 시바타의 주장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증거만 없을 뿐이었지요. 
이 와중에 시바타가 '후지야마는 약시다! '라는게 증거라고 믿었던건 어이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약시인 것과, 범행과 무슨 관계가 있지요? 무엇보다도 약시가 범인이라는걸 드러내는 괴한의 센터 침입 사건의 목격자는 시바타 본인입니다. 이걸 경찰이 어떻게 믿고 수사를 하겠습니까..... 설령 그 범행을 약시인 사람만 저지를 수 있었다 한 들, 그건 단순히 정황 증거에 불과하고요.
또 마지막 테러 사건까지의 모든 사건이 차보가 계획한 음모의 한 셋트인데, 여러모로 헛점이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플라나리아 센터에 잠입한 괴한을 시바타가 제압했다면? 시바타가 센터 테러 사건 와중에 공장 내부에 남지 않았다면? 유시마 미키오가 죽지 않았다면? 뭐 하나라도 변수가 생겼다면 성립할 수 없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권해드릴 수준의 작품은 전혀 아닙니다.

2023/09/17

전래 미스터리 - 홍정기 : 별점 1점

전래 미스터리 - 2점
홍정기 지음/몽실북스

DC인사이드의 추리소설 갤러리에서 괜찮은 한국 추리 소설이라고 누군가 소개하길래 읽어보게 된 작품.

결론부터 말하면, 대실망이었습니다. 완성도가 지나치게 낮은 탓입니다. 전개와 묘사 모두 수준 이하에요. 전래 동화가 바탕이 된 이야기에서 '변태 스토커', '알리바이', '스위치' 라는 말이 나온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고증은 둘째치고서라도 문체, 묘사라도 고전처럼 가져갔어야 했습니다. 잔인하고 자극적인 묘사가 쓸데없이 많은 것도 불쾌했으며,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부분도 거의 없어요. 
고전을 모티브로 잔혹함을 버무렸다는 점에서 한 때 유행했던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시리즈를 떠오르게 하지만 그만한 가치도 없습니다. 조선 후기를 무대의 괴담물인 <<삼개주막 기담회>>와 비교해도 그 수준 차이가 어마어마하고요. <<삼개주막 기담회>>는 이 작품(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에 비하면 노벨문학상 감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1점. 아마츄어가 어딘가 커뮤니티에 올렸던 반 장난스러운 글이 출판된 걸로 보여지는데, 결과물 수준에 대해서는 출판 담당자의 책임도 커 보입니다. 최소한 어느정도 완성된 글로는 보이게끔 방향을 알려줬어야 했어요. 뭐 지금 말해봤자 별 의미는 없겠지만요. 앞으로 이 작가, 이 출판사 책을 두 번 다시 읽어볼 일은 없을 듯 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콩쥐 살인사건>>
콩쥐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내용으로 팥쥐가 원님과 결혼하기 위해 발목을 스스로 자른다던가, 원님의 칼에 언년이 머리가 토막난다단가, 마지막에 팥쥐 목이 배달(?)되어 오는 등 쓸데없이 잔인한 묘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별로입니다. 급작스럽게 언년이가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하고, 트릭도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핵심 트릭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팥쥐가 도깨비 감투를 쓰고 방을 몰래 빠져나갔다는 트릭, 또 하나는 쥐가 언년이의 손톱을 먹은 뒤 언년이로 변신했다는 트릭이지요. 그러나 도깨비 감투 트릭은 창문이 작아서 어차피 성립할 수 없었고, 쥐가 언년이를 대신한 알리바이 트릭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 쥐를 변신시킨게 아니라, 마침 쥐가 변신한걸 보고 즉흥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말이 안됩니다. 주객이 전도된 셈이니까요.
단서 제공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콩쥐가 죽은 어머니로부터 기이한 보물을 물려받았고, 그 덕분에 계모가 시킨 말도 안되는 임무를 완수했다는 정도만 앞에서 설명될 뿐입니다. 이런걸 추리 소설이라고 부르는건 말도 안됩니다.

고전 설화 속 설정을 트릭으로 써먹는다는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지만, 결과물은 아쉽기만 합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나무꾼의 대위기>>
사슴과 사냥꾼이 짜고 선녀 날개옷을 훔치도록 유도했다는 설정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극적인 반전도 생기고요. 하지만 그 외에는 도저히 점수를 줄 부분이 없습니다.
 
일단 선녀와 나무꾼에서 나무꾼이 관음증 환자일 수 있다는 설정은 워낙에 흔해서 새로울게 없었습니다. 금도끼 은도끼 신령이 갑자기 나오고, 탐정역으로 토끼가 나오는 등의 뜬금없는 전개는 황당했고요. 탐정역인 토끼는 이 모든게 나무꾼을 범인으로 몰기 위한 산신령까지 포함된 음모의 결과라는데, 그 때문에 산신령이 범인 선녀, 나무꾼, 사슴을 참살하는 결말도 영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옥황상제 앞에서의 공식 재판도 아니었으니, 그냥 나무꾼을 죽이고 거짓말로 고해 바치면 되는게 아니었을까요? 이런 연극을 꾸밀 이유가 전혀 와 닿지 않았어요. 굶주린 사냥꾼이 토끼를 잡아먹는다는 결말도 이해가 되지 않는건 마찬가지입니다. 배가 고팠다면 애초에 사슴을 죽여서 잡아먹었어야 하잖아요?

추리적으로도 엉망입니다. 범인 선녀가 물 속에서 죽은 선녀 다리를 끌고 움직이는 척 해서 옮긴 뒤, 온천의 뜨거운 열로 시체가 사후 강직이 풀리는걸 이용하여 스스로 주저 앉는것처럼 꾸몄다는 트릭인데, 만화에서도 써먹기 힘들겁니다. 뜨거운 물 속에 숨느라 갈대를 입에 물었다는 디테일도 유치하기 짝이 없고요. 애초에 사슴이 말하고, 선녀가 날아다니는 세계관에서 이런 어처구니 없는 트릭을 쓴다는게 설득력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해와 달>>
떡장수 아주머니가 식인범에게 사로잡혀 산채로 먹히는 장면은 잘 그려냈습니다. 식인범의 설정도 꽤 탄탄하고 무서웠고요. 마츠모토 세이초의 <<전골을 먹는 여자>>를 떠오르게 만드는데, 그만큼 설득력 느껴지는 좋은 이야기였어요. 식인범이 어미의 머릿가죽을 뒤집어쓰고  찾아와 딸을 속이려 하는 장면, 그 뒤 정체가 탄로난 식인범이 딸과 사투를 벌이는 부분도 괜찮았습니다. 리처드 매드슨의 크리처물인 <<사냥감>>이 떠오르는 박진감넘치는 묘사와 전개가 인상적이었거든요.

그러나 해와 달이 쌍둥이고, 해는 타고난 살인마였다는 진상은 영 아니었습니다. 시간대별로 풀어가는 전개도 불필요했고요. 착한 남매가 기지를 발휘하여 식인범을 없애는 식으로 - 썩은 동아줄을 활용한다면 더 좋고 - 이야기를 풀어가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그나마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연쇄 도살마>>
보름이 될 때마다 집의 가축들이 차례로 죽어나가고, 큰 아들 일남은 막내 미호가 가축의 생간을 뽑아먹었다고 하는데...

여우가 가축의 생간을 뽑아 먹는다는 이야기를 추리적으로 풀어낸 이야기. 
알고보니 일남이 진범이었다는 반전은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문제 투성이입니다. 우선, 가축들을 차례로 죽이고, 나중에 부모 형제까지 죽였다면 이렇게 공을 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한 번에 다 죽이면 되잖아요? 뭐하러 땅을 파고 몸을 숨겨가면서까지 범행을 숨겼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미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이유도 없어요.
미호의 짓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미호의 신발을 신고 발자욱을 남긴건 괜찮았지만, 미호 시체를 소의 항문을 통해 쑤셔 넣어 은폐했다는건 어이를 상실케 합니다. 
추리물 흉내를 조금 내기는 했지만 설득력 떨어지는 전개로 일관하는 졸작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스위치>>
나는 백정의 아들로 파란눈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데 눈을 누군가 나뭇조각을 댓가로 가져갔다. 나는 나뭇조각이 타인의 신체를 가지고 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걸 깨달았다. 그 능력이 마을 주민들을 기괴한 모습으로 죽게 만든 연쇄 살인극의 진상이었다.

스위치라는 표현을 천연덕스럽게 쓴다는 것부터 황당했던 이야기. '혹부리 영감'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한 신체 전환(?) 설정은 그래도 볼 만 했지만, 나이가 들어서 죽기 전에 뇌를 바꿨는데, 갓난 아이가 되어서 실패했다는 황당한 결말로 점수를 다 깎아먹습니다. 한 10살 정도 되는 아이하고 뇌를 바꿨으면 될 것을 왜 갓난아이랑 바꿨는지 설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당연한걸 모를리 없을 정도로 능력을 계속 써 왔다는 점에서 설득력도 떨어지고요. 초반에 등장하는 마을 사람들의 연쇄 살인극도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써 나간게 아닌가 싶은 이야기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2023/08/06

'동산 박주환 컬렉션 특별전' 관람

지난 달의 '젊은 모색 2023' 전시회에 이어, 이번 달에도 국립 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관람하였습니다. '동산 박주환 컬렉션 특별전'입니다.
동산방화랑의 설립자 동산 박주환이 수집하고 그의 아들 박우홍이 기증한 작품 209점 중 90여점을 선별하여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재조명하고 있는 전시입니다.

주로 한국화 중심으로, 근대에서 현대까지의 한국화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남종 화단의 명맥을 이었다는 허백련의 그림을 비롯하여 김은호, 이상범, 박승무, 이용우, 최우석 등의 산수화나 매화도 등은 익히 알고 있던 조선시대의 그림 바로 그것입니다.
노수현의 <<추경>>은 공들인 인왕산의 바위 암벽 묘사가 굉장히 인상적인 작품이었어요.
근대 회화라 그런지, 의외의 디테일도 재미있었습니다. 아래의 이용우의 작품 속 작은 인물과 같이요. 이런 디테일들이 쌓여 다름 단계로 나아가는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렇게 나무들을 '마계'의 식물들처럼 묘사한 이유가 조금 궁금해지더군요. 이용우의 작품 외에도 아래와 같이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마계의 식인 식물같은 나무들이 눈에 뜨였거든요. 조금 손을 대고 가공하면 현대적인 게임 일러스트로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준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근대 초기를 넘어, 중기 이후 작품들이 이어지는데 가장 마음에 들었던건 운보 김기창의 <<매>> 였습니다. 상당히 큰 그림인데, 먹의 농담만으로 표현된 배경, 큰 붓의 움직임으로 표현한 나무와 깃털, 거기에 엄청나게 디테일한 매의 얼굴 묘사가 잘 어우러지는게 아주 멋졌습니다. 거장이 왜 거장인지를 알려주네요.
운보 김기창이 아니더라도, 아래와 같이 디테일한 부분에서 서양화에 뒤지지 않는 작품들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한국화의 저력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한국 전쟁 이후, 현대로 접어들면서는 서양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도 많이 등장합니다. 동양화의 번짐과 같은 효과로 원근법, 일렁이고 출렁이는 물과 바람을 표현한 아래의 작품들은 한국화임에도 굉장히 현대적으로 보입니다.
현대적인 한국화라면 빼 놓을 수 없는게 아래의 <<신몽유도원도>>였습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현대적으로 재 해석한 작품이라는데 마크 로스코의 작품에 뒤지지 않는 원색적이면서도 오묘한 색 표현이 아주아주 빼어나다고 생각되거든요. 영화 <<바비>>에 등장해도 어색하지 않을, 핑크핑크하면서도 현대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상당히 유명한 시리즈라는게 충분히 이해되더라고요. 저도 한 점 걸어두고 싶을 정도였어요.
전형적인 산수화 스타일이지만 거친 마띠에르를 느낄 수 있는 <<북한산>>도 또 다른 현대적 한국화이면서도, 제 마음에 쏙 든 작품입니다. <<신몽유도원도>>가 다소 여성적이라면, 굉장히 남성적인 작품이라서 두 작품을 같이 전시하면 여러모로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외에도 좋은 작품들이 많아서 굉장히 눈이 즐거웠던 전시였습니다. 한국화에 애정이 깊은 컬렉터가 엄선하여 수집한 작품들이라 그런지, 확실히 남다른 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딱 한가지, 한국화임에도 불구하고 액자로 설치된 작품이 많았다는건 좀 아쉬웠습니다. 아무래도 조명이 반사되는 탓에, 온전히 그림을 감상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는 유리없이 감상하고 싶네요.

2021/07/17

THE 좀비스 - 중 - 스티븐 킹 외, 존 조지프 애덤스 / 최필원 : 별점 2점

THE 좀비스 - 중 - 4점
스티븐 킹 외 33인 지음, 존 조지프 애덤스 엮음, 최필원 옮김/북로드

THE 좀비스 - 상 - 스티븐 킹 외, 존 조지프 애덤스 / 최필원 : 별점 2점 

좀비가 핵심인 단편들을 모아놓은 앤설러지 두 번째 권인데, 전에 읽었던 상권보다 별로입니다. 어디선가 보았던 이야기에 좀비를 끼워넣었거나, 좀비가 왜 등장하는지도 모를 이야기가 많은 탓입니다. 뭔가 있어 보이게끔 노력했지만, 의도가 뻔히 들여다보이고 알맹이 없는 이야기들도 많고요. 여러모로 실망스러웠어요. 차라리 정통 좀비 아포칼립스물이라면 평작은 될 텐데 아쉽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한 권 남았는데, 다음 권은 읽어볼 것 같지 않군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스톡홀름 증후군"

좀비 떼로 둘러쌓인 집에 갖힌 나는 아들과 닮아서 '빌리'라고 이름지은 좀비 관찰에 재미를 붙였다. 빌리는 이웃집 침입을 위해 판자를 뜯어내는 일에 골몰하는데...

제목 그대로 가해자인 좀비와 동질화되어, 좀비가 사람을 죽이는걸 보아도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 감정을 잃어버린 주인공을 통해, '살아있는 것과 사는 건 다르다'는 걸 알려주는 작품. 그냥 버티기만 할 뿐, 이렇게 살아가는건 좀비와 다를게 없다는 거지요. 동질화된다는 측면에서는 전권의 "나처럼 죽어봐"와 조금 비슷한데, 이 작품에서는 절박함이나 처절함은 다소 부족한 반면, 조금 더 설득력이 높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웃집을 좀비떼가 습격하는 장면 묘사도 괜찮았고요.

하지만 주인공 사고 방식에는 동의하기 힘들었더군요. 일반적으로는 총알이 딱 한 발 남을 때 까지 살아남아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차라리 거리로 뛰어들어 좀비가 되어 버리던가.... 이런 저런 사람들이 있고, 이런 저런 상황들이 있는 법이기는 하지만, 이런 사고 방식과 행동은 별로 와 닿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난극" 

페스트로부터 구해진 오버라머가우 마을 전통의, 10년에 한 번 진행되는 예수 수난극 공연이 시작되었다. 이번 공연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장면을 위해, 좀비를 분장시켜 정말로 십자가에 못 박을 생각이었다. 마이어 신부는 이를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했고, 결국 마지막에 신의 저주와 함께 파국이 찾아오고 만다.

마이어 신부는 좀비도 영혼이 있어서, 인간이 그들을 잔혹하게 이용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좀비에게 영혼은 있을리 없습니다. 이미 죽었으니까요. 종교적으로 논쟁거리가 될 여지도 없어요. 좀비를 연극 소품으로 잔혹하게 대하는 행동은 조금 거슬렸지만, 좀비들은 그동안 더 잔혹한 행동을 보여 왔으니 딱히 큰 문제로 보이지도 않았고요. 이게 문제라면 가축 도살이 더 큰 문제아닐까요? 이러한 점들 때문에, 마이어 신부의 행동은 도무지 공감할 수도,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마지막에 좀비를 구해주려는 신부의 행동에 분노한 관객들이 신의 저주로 좀비가 된다는 결말은 너무 뻔했습니다.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페스트 유행 당시를 배경으로 했던 영화가 떠오릅니다. 페스트에서 안전했던 성에서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해 잔혹한 행동을 보이지만, 결국 성주에게 페스트가 전염된다는 결말이었는데, 페스트가 좀비로 바뀌었을 뿐 똑같은 맥락이지요. 아니, 그보다도 못해요. 페스트는 어쨌건 공기로도 전염될 수 있지만, 좀비 바이러스가 급작스럽게 사람들에게 퍼진다는건 아무런 설명이 없으니까요.

이렇게 종교를 끌어들인 전개는 무리수였을 뿐더러 새로움도 없고, 잔혹함도 덜합니다. 무섭지도 않고요. 점수를 줄 여지가 별로 없어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아름다운 것" 

테러로 희생된 러스티는 시체 소생 기술로 되살아났다. 정치인이 그의 희생을 선거에 이용할 목적이었다. 하지만 연설 당일, 러스티는 정치인 요구와는 다르게 죽음은 아프니, 삶을 즐기라는 마음 속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죽은 사람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정치인의 행태는 우리도 익히, 그리고 지금도 계속 보고 있습니다. 이를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 좀비로 비판한다는건 아주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이렇게 되살아난 테러범과 희생자 모두가 정치인 생각과 전혀 다른 진심을 털어 놓는다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그들의 진심이 "죽기 전에 즐겨라!" 라니? 황당했습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와 별로 다르지도 않지요. 좀비들이 이런저런 소품들에 환장한다는 설정도 기발했지만, 이 황당한 메시지 전달에 활용될 뿐이고요. 또 딱히 좀비가 등장할 필요도 없었어요. 유령이라던가, 빙의한 영혼이라던가, 뭐든 좋을 그런 이야기거든요. 진짜 아이디어가 아까왔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섹스, 죽음, 그리고 별빛" 

좀비들이 연극을 한다는 이야기로 공포 문학의 거장 클라이브 바커의 작품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좀비물에서 기대할만한 내용은 하나도 없는, 기묘한 이야기였어요. 좀비들이 나름 지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은 특이했지만, 그들은 연극 외에 다른 목적이 없거든요. 식인 따위는 원하지도 않고요. 죽은 여배우가 섹스를 요구하는 장면이라던가, 사악한 제작자를 죽이는 장면 정도가 조금 섬찟했습니다만,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좀비들이 벌이는 연극으로 현재의 연극계를 풍자하는 블랙코미디로 보는게 맞을 것 같은데, 문제는 그렇다면 더 웃기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무섭지도 않고 의외성도 없으니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시체의 길" 

신으로부터 이 땅에서 악을 몰아내라고 명 받은 총잡이 목사 제비디아는 보안관보가 체포한 악당 빌을 호송하기 위한 여정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중간에 괴물이 나온다는 '시체의 길'을 지나가기 때문이었다. 그 곳을 지나가던 일행은 괴물이 된 양봉업자 기멧의 습격을 받게 되는데...

기멧이 괴물이 된 이유는? 저주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납치했던 소녀가 죽은 뒤, 소녀 어머니가 저주한 것이지요. 그런데 저주로 죽기는 했지만, 기멧이 이내 벌통이 가슴 속에 위치한 괴물로 되살아났다는건 좀 이상하더군요. 이게 저주가 맞나요? 어차피 악당이었으니, 무적의 괴물이 되면 더 좋은거 아닌가 싶은데 말이지요. 

또 괴물의 설정도 죽은 자가 돌아온 것이지만, 벌 떼와 함께 이동하며, 초인적인 힘과 빠르기를 갖추고 있어서 일반적인 좀비와는 전혀 다릅니다. 식인이 목적도 아니고요. 그래서 좀비물이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크리쳐물에 가깝습니다. 악을 없애기 위해 악을 접하면 불타는 성서, 악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은총알 등의 설정이 곁들여진 것도 크리처물 설정일테고요. 이야기 전개도 고생 끝에 괴물을 처치하는 크리처물 그대로라 특별한건 없습니다.

그래도 제비디아 목사의 활약은 화끈합니다. 괴물의 잔혹함도 잘 묘사되고 있고요. 덕분에 머리를 비우고 단순하게 읽는 킬링 타임 물로는 나름 적당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서부 개척 시대를 무대로 악을 멸하는 총잡이 신부가 등장하는 크리쳐물이라는 점에서는 "프리스트"가 연상되더군요. "프리스트"는 헐리우드에서 영화화도 되었던 만큼, 나름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바비 콘로이, 살아 오다" 

바비 콘로이는 배우로서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고향에서 맡은건 조지 로메로라는 감독의 "시체들의 새벽"이라는 영화의 좀비역이었다. 톰 새비니가 해 준 좀비 분장을 한 바비는, 촬영장에서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 해리엇과 재회했다. 그녀는 결혼해서 아들과 함께 분장하고 영화에 참여 중이었다...

좀비가 주제이기는 한데 방향이 굉장히 독특했던 작품입니다. 좀비가 아니라, 기념비적인 좀비 영화 "시체들의 새벽"에서 좀비 역할을 맡은 배우들의 이야기거든요. 아 이런 발상, 아주 마음에 들어요. 좀비를 주제로 단편을 써와! 라고 했는데, 아슬아슬하게 가이드에 맞춰서 첫사랑과 현재에 대한 달달하면서도 아련한 이야기를 써 온 셈이니까요.

하지만 행복한 해리엇 가족에게 바비가 나타나서 훼방을 놓는 결말이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바비는 해리엇 가족, 특히 그 아들에게는 좀비보다 더한 괴물이 되는, 좀비물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지금 이야기는 발상에 비해 평이하고, 조금 뻔한 그런 이야기라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용서를 구하는 자들" 

칼라는 메레디스를 찾아와 심장마비로 죽은 남편 아서의 소생을 부탁했다. 그녀가 바람피운걸 사과하고자 하기 위해서였다지만, 되살려보니 아서는 칼라가 쏜 총에 머리를 맞고 죽었던 것이었다. 살해된 좀비는 살인범을 죽이는게 본능으로, 칼라는 죄책감때문에 자살할 생각이었다...

작가의 인기 캐릭터라는 시체 소생 전문가 메레디스가 등장하는 작품. 살인자가 죄책감으로 피해자에게 죽기를 원한다는 설정과 시체 소생에 대한 이런저런 디테일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아서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걸 알고 난 후, 칼라가 죽는 결말까지는 좀 시시합니다. 예상대로의 이야기였거든요. 뭔가 좀 의외성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별점은 2.5점은 충분합니다.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농학자 닥 프리먼은 좀비 떼를 피해 콜로니를 만들고 생존자들의 공동체를 성공적으로 수립했다. 콜로니는 안전했지만, 생산과 성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출산은 금지되어 있었다. 아이가 생긴 톰 부부는 낙태를 지시받고, 콜로니 외부 클리닉으로 수술을 위한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좀비 때문에 격리된 폐쇄 공간은 생산량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조직적으로 출산까지 관리한다는 설정은 꽤 설득력있었습니다. 낙태를 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외부 수술실로 향하는 아이러니도 기발했고요. 무엇보다도 낙태한 태아가 살아돌아오지 않는 걸로 보아, 그들은 생명이 아니라는 시각은 아주 독특하게 다가왔습니다. 여기에 좀비가 된 낙태 반대주의자를 날려버리는 결말을 더하니, 저자가 낙태를 찬성한다는건 잘 알겠더라고요. 

내용도 신선했고, 여러가지 볼 거리가 많았던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서두에 소개된 저자가 주제를 찾은 방법도 인상적이었어요. 그동안의 좀비 주체 작품이 극단적 섹스 장면을 등장시키는 경향이 강하다며, 지금까지 한 번도 다루어진 적이 없는 터부를 고민해보다가 정치에서 그 답을 찾았다고 하네요. 가장 논쟁거리가 되는 정치 이슈가 '낙태' 였다면서요. 우리나라도 따지면 '부동산'을 주제로 좀비물을 쓴 격이겠지요? 아 이거 재미있겠네요.

"죽은 아이" 

동네 깡패 루크 브래들리의 무리에 가입하고 싶었던 나에게 브래들리는 조건을 내걸었다. 살아있는 아이 시체와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인공 소년이 희생양인 좀비 아이를 악으로부터 구해주고 구원받는다는 내용의 작품.

주인공 설정과 분위기 등은 모두 스티븐 킹"그것"이나 "스탠 바이 미"를 연상케합니다. 특히나 시골 마을에서 또래 깡패와 맞서 싸우는 아이의 성장기이며, 아이 시체가 중요한 소재라는건 "스탠 바이 미"의 그대로입니다.

문제는 아류작이면서도 "스탠 바이 미" 보다 훨씬 못하다는 겁니다. 주인공과 동생 앨버트는 좀비 시체를 상자에서 꺼내준 정도 밖에 한 게 없고, 이들의 여정도 하룻밤 나들이에 불과했기 때문이에요. 뭔가 성장을 기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과정이지요. 이 과정도 환상 소설처럼 모호하게 처리해서 고생스러움도 전혀 느낄 수 없었고요. 단편 분량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는건 변명에 불과합니다. 최소한 브래들리의 패악질만큼의 설명은 해 주었어야 해요. 루크 브래들리의 깡패짓 말고는 드라마라고 부를 내용도 없고요. 게다가 아이 시체가 좀비일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그냥 시체여도 무방한, 그런 이야기거든요.

좀비 소재 단편을 의뢰받고 "스탠 바이 미"에 좀비를 우겨넣은 만들어낸, 졸속 창작물에 지나지 않는 졸작. 별점은 1점입니다.

"좀비들과 함께라면" 

중 2병에 걸린 소녀의 성장기랄까요. 서정적인 1인칭 묘사는 괜찮았고, 좀비보다 현실이 더 무섭다, 현실은 가혹하다는 메시지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40대 후반의, 직장 생활도 20년차가 넘은 아저씨에게는 별로 와 닿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가혹하더라도 받아들여야만 하는게 현실이니까요. 그리고 현실은 최소한 좀비보다는 낫습니다. 아울러 아무리 봐도 좀비물로 보기는 힘드네요. 작품에서 좀비가 진짜 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거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좀비만도 못한"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방탕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이. 어느날 마약과 술에 취한 채로 이상한 클럽을 찾았다. 좀비를 학대하고 죽이는 스너프 필름을 상영하는 곳이었다. 클럽에서 시간을 보낸 뒤, 그들은 일행이었던 제인을 죽이고 마는데...

변호사인 저자가 쓴, 브렛 이스턴 앨리스 소설의 패러디라는 작품. 원작을 모르니 뭘 어떻게 패러디했는지 모르겠는데, 내용도 잘 모르겠어요. 젊은이들의 타락과 방황을 묘사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게 좀비물인가?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주인공과 친구들이 좀비인건가요? 설령 그들이 좀비라 해도 그게 작품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괜히 뭔가 있어보이게끔 한 묘사들도, 결국은 별다른 알맹이는 없고요. 뭘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내용이 뭔지 이해할 수 없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미트하우스 맨" 

시체 취급자들이 시체를 조종해서 온갖 일을 하는 시대. 유능한 시체 취급자 트래거는 사랑을 찾아 이런 저런 곳을 전전하게 되는데...

"왕좌의 게임"의 작가 조지 R.R 마틴의 작품. 사랑없는, 자극만이 넘쳐나는 미래 세계에서 사랑을 찾아 떠도는 트래거의 모습은 "쿄시로 2030"의 쿄시로가 살짝 연상되더군요. 순정으로 접근하던 트래거가 여자에게 배신당한 뒤, 뒷골목 깡패나 하는 시체 검투 경기에 참여하게 되는건 곽철용의 명대사 "니가 이런 식으로 내 순정을 짓밟으면은, 마 그때는 깡패가 되는 거야!"가 떠올라서 좀 웃겼고요. 

하지만 완성도가 높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들이 반복되며, 별다른 드라마도 없는 탓입니다. 요약하면 "사랑을 믿었던 트래거가 배신당한 뒤, 돈과 향락을 택했다"는 지극히 뻔하고 뻔한 이야기가 전부에요. 작가가 쓸 때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고 하는데,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왠만한 단편보다는 긴 분량을 갖춘만큼, 소개되는 방대한 설정만큼은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특히 제목의 '미트하우스' 관련 설정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시체를 살아있는 것 처럼 조종해서 성욕을 채워주는 곳인데, 시체 취급자가 아니라 피드백 회로를 통해 조종되고 있다는 등 이런저런 디테일이 빼어나거든요. 시체 취급자 (스트레커)와 관련된 설정들도 괜찮았고요. 하지만 이야기가 별로라면, 좋은 설정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겠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1/06/19

THE 좀비스 - 상 - 스티븐 킹 외, 존 조지프 애덤스 / 최필원 : 별점 2점

THE 좀비스 - 상 - 4점
스티븐 킹 외 33인 지음, 존 조지프 애덤스 엮음, 최필원 옮김/북로드

여러 단편들에서 엄선했다는 좀비 관련 단편을 모아 놓은 앤솔러지입니다. 여름에는 좀비물이지요. 원래 책으로는 무려 서른 네 편, 모두 합치면 천 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분량을 자랑하지만, 상, 중, 하로 분권된 e-book으로 읽었습니다. 한 번에 읽기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양이니까요.

상권에는 모두 11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스티븐 킹, 댄 시먼스, 제프리 포드 정도가 제가 아는 작가인데, 다른 작가들도 소갯글만 보면 모두 나름대로 유명 작가들로 보입니다. 좀비라면 바로 떠오를 고어와 액션이 어우러지는 전통적인 좀비 아포칼립스물을 비롯하여, SF, 범죄 드라마, 풍자, 블랙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들이 수록되어 있고요. 덕분에 풍성하기는 한데, 작품들 편차는 큽니다. "올해의 학급 사진"과 같은, 기존 좀비물 팬을 만족시키는 걸작도 있지만 한 편의 이야기로 성립하지 않거나, 저는 이해할 수 없었던 작품들도 존재하거든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가정 분만" 

스티븐 킹의 단편집 "악몽과 몽상 1"을 통해 이전에 읽었던 작품입니다. 좀비 아포칼립스를 출산을 앞둔 임산부 시점에서 그려낸 작품이지요. 

그런데 이전에 읽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는 좀비의 기원까지 설명되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번역 문제였는지 뭔가 누락된 탓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하여튼, 보통은 주인공이 도와주는 역할은 임산부가 주인공이며, 무대가 섬마을이라서 한 개 뿐인 묘지만 사수하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는 상황이 독특했습니다. 버티는 와중에 죽은 남편을 한번 더 죽이는 처절함,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도 인상적이었고요.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전형적인 좀비 아포칼립스물과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를 주인공과 무대 설정의 독특함을 더해 스티븐 킹의 필력으로 써 내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작품입니다. 어설픈 변화구 보다는, 그냥 한가운데 직구 승부가 더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니까요. 심지어 그 공을 던지는게 스티븐 킹이라면 더더욱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가슴은 무덤까지 가져간다" 

재벌들이 과시용으로 데리고 사는 '트로피 와이프'가 무덤에서 살아 돌아온 뒤 벌어진 일들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좀비로 돌아온 트로피 와이프는 이성은 그대로 갖추고 있고, 사람을 뜯어먹거나 하지 않습니다. 누가 자기를 부활시켰는지를 찾아 헤멜 뿐이지요. 이런 설정은 독특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영 재미가 없더군요. 드라마틱한 이야깃거리가 발생하지 않는 탓이에요. 시체가 되살아난건 충분히 드라마틱한 사건인데, 이를 담담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묘사는 탓입니다. 마지막에 그녀를 부활시켰다는 여동생이 찾아 오는건 아주 뜬금없었고요. 

작가가 뭘 말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어요. '야경'을 감상하고 싶다는 말로 끝맺는 마지막 장면은 외모, 돈과 사치품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알려주는가 싶은데, 자동차 한 대 값을 들였다는 실리콘 가슴만 쳐지지 않고 영원이 남았다는 묘사에서 '적절한 투자는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기도 해서, 뭐가 맞는지는 좀 혼란스럽더라고요. 재미만 놓고 보자면 후자 쪽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만.

하여튼 좀비물로 보기는 여러모로 석연치 않았고, 쟝르도 모호하며 이야기도 딱히 볼만하지 않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올해의 학급 사진" 

노년의 가이스 선생은 좀비 아포칼립스 이후, 혼자 살아남았다. 그녀는 포획한 좀비 아이들을 가르치고자 노력하는데...

좀비 설정에 뭔가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은 전혀 없어요. 그냥 좀비 때문에 세상이 망한 뒤를 그리고 있거든요.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좀비 아포칼립스물입니다. "가정 분만"과 같이, 뻔한 설정을 그리고 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더 급진적입니다. 하지만 '교육' 이라는 주제 의식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꽤 잘 그려내고 있기도 하고요. 좀비가 되었지만 아이들이 교실로 돌아오는 결말은 깊은 울림을 가져다 주네요. 단지 치킨 너겟 때문에 돌아왔을 수도 있지만, 뭐 그것도 학습이라면 학습이니까요.

"칼리의 노래", "테러호의 악몽" 등의 공포 소설로 유명한 댄 시먼스다운 필력도 돋보였습니다. 이야기의 설득력을 가져다주는 디테일이 특히 압권이에요. 좀비 아이들을 포획하고, 이들을 교실에 묶어 놓은 뒤 수업을 진행하는 과정과 학교를 요새처럼 만든 상황에 대한 묘사들이 아주 빼어난 덕분입니다. 좀비물로서의 기본 재미도 놓치지 않습니다. 학교로 수백명의 좀비가 몰려오고, 이를 가솔린 해자와 레밍턴 소총, 권총으로 처단하는 가이스 선생의 활약이 그려지는 클라이막스는 아주 화끈합니다.

뻔하지만 독특한 설정에 더해, 재미도 기본 이상인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역시나 작가적 명성은 허투루 얻어진게 아니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유령의 춤" 

커스터 기병대가 좀비로 되살아나 사람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사건을 추격하던 FBI 요원 에드거는 좀비의 습격에 대한 모든걸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데...

쓰레기 백인 경찰관이 인디언을 몰래 학살하다가 되살아난 좀비 커스터 기병대에게 잡아 먹힌다는 도입부 외에는 건질게 없습니다. 그냥 에드거 요원이 좀비 기병대의 잔학한 행동을 모두 알게되는 신기한 능력을 얻었다가 전부인 뒷부분은 뭘 이야기하려고 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야기가 끝나는 것도, 그렇다고 열린 결말도 아니니까요. 군대식 명령으로 좀비떼를 제어할 수 있다는 설명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걸로 좀비떼를 격퇴했다던가 하는 결말도 아니고요. 한 마디로 말해서, 제 기준으로 이 작품은 완성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시체" 

아프리카 수용소를 통해 좀비를 대량 생산하여 유통시킬 계획을 혐오스럽게 생각했던 도널드는 좀비 격투가를 보고 생각을 바꾼다. 그러나 바로 그 날, 좀비 매춘부를 만난 뒤 인류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뻔한 설정이에요. AI, 인공지능과 로봇이 일상화된 이후, 인간의 삶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해 현재 한참 이루어지고 있는 논의들과 별다를게 없거든요. 하지만 AI를 좀비로 바꾼 아이디어가 참으로 그럴듯했습니다. 사람의 생명 가치가 폭락하고, 심지어 성적인 노리개로 이용되는 상황에 대해서 더 큰 충격을 안겨다 주기 때문입니다. 내용은 평이했지만 이 아이디어만으로도 별점 2.5점은 충분합니다.

"죽음과 선거권" 

시체가 되살아나 투표를 하기 시작해서, 대통령 선거는 다시 진행되게 되었다. 버튼 후보의 보자관 롭은 지고있던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서, 총기 사고로 희생되었던 소녀 데이나 맥과이어가 되살아나 좀비가 된 모습을 광고로 만들어 방영했고, 버튼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시체가 되살아난 이유는 정의가 이루어지는걸 보기 위해서라는 조금은 황당한 설정을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설정은 나쁘지 않지만, 주인공 롭이 어린 시절 저질렀던 총기 오발 사고와 가족의 죽음이 함께 펼쳐질 필요는 없어 보였습니다. 솔직히 혼란스러웠거든요. 시체들이 되살아난게 롭 때문인지 아닌지도 분명치 않고요. 또 정의가 무엇인지도 불분명합니다. 버튼이 대통령이 되는게 왜 정의인걸까요? 좀비물이나 호러물적인 속성이 전무한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대초원" 

모종의 탐험대가 대륙 횡단을 하면서 괴멸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대항해 시기 쯤, 그러니까 탐험가들이 신대륙을 찾아왔을 때를 무대로 하고 있는 듯 합니다. 탐험대가 굶주림과 초현실적인 존재와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아주 약간 댄 시먼즈의 "테리호의 악몽" 느낌도 들고요. 

하지만 탐험대는 시체들과 산 사람들을 학살하고 식인까지 저지르는 악당들이라는 차이는 큽니다. 화자인 '나' 조차도 대륙 횡단에만 골몰해서 학살, 식인을 꺼리지 않는 정신병자라서 제대로 된 이야기가 펼쳐지지 못합니다. 디테일도 사뭇 부족하고요. 왜 시체가 되살아나 배회하는지, 시체를 되살린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결말도 모호해서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 힘드네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잔혹하기만 할 뿐입니다.

"세 번째 시체"

매춘부를 유혹한 뒤 살해하는 연쇄살인마 리치의 희생자였던 '나'가 되살아나서 리치를 찾아간다는 내용으로 복수극으로 보이기도 하고, 멜로물로도 보이기도 하고, 범죄 드라마로도 볼 수 있는 그런 작품입니다. 그런데 별로 의외성이 없고, 리치가 경찰에 체포되는 결말도 밋밋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무엇보다도 무섭지도 않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밤처럼 아름다운" 

성인 모델들 촬영으로 거부가 된 네이선 그라임스는 좀비 사태 발발 후 카리브 해의 섬 요새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모델들과 좀비 사태가 진정될 때 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좀비 사태가 끝나면 아름다운 모델 수요가 폭증할 걸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실패했고, 모델들은 좀비가 되어버렸으며 심지어 이성이 남아있는 듯 네이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네이선도 생존자를 가장했던 좀비에게 물려 서서히 좀비가 되어 가는데...

플레이보이의 창업자 휴 헤프너를 떠오르게 만드는 주인공과 성인지 모델들이 좀비가 되고, 좀비들이 생전의 목표를 그대로 가지고 행동한다는 설정이 독특합니다. 하지만 전개는 뻔했고, 애매한 결말도 별로 와 닿지 않더군요. 독특한 설정을 잘 살리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나처럼 죽어봐"

좀비가 지구를 지배하게 된 뒤,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그리고 있습니다. 좀비가 살아있는 사람을 어떻게 습격하는지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생각을 하지 않으니 소리나 냄새, 체온 등에 반응한다는게 말이 안되지요. 이 작품에서는 '생각을 하는 것'이 문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비 떼 속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네요. 단순하게 배고플 때 먹고, 피곤할 때 자고, 추울 때 따뜻한 곳을 찾는 정도의 행동만 하면요. 실제로 주인공은 그렇게 좀비 떼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와중에 같은 삶을 살아가는 수지를 만나 섹스를 하는 설정도 이색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말 모르겠습니다. 삶 자체가 의지인 상황인데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게 말이 될까요? 이렇게까지 생각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설명은 부족합니다. 가족도 모두 죽어버린 상황이니까요.

물론 자기가 인간임을 드러내고 죽어봤자 좀비들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죽음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나름 와 닿기는 합니다만, 그렇다해도 저라면 진작에 자살을 택했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맬더시안의 좀비" 

이웃 노인 맬더시안은 어느날 나에게 자신이 뇌 수슬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좀비를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맬더시안이 급작스럽게 사망한 뒤, 나는 그가 숨겨두었던 좀비를 떠맡아서 변화를 관찰하게 되는데...

기존의 '좀비', 즉 부두교 주술로 조종하는 사람이라는 정의에 잘 들어맞는 좀비가 등장합니다. 

뇌 수술처럼 뭔가 있어보이는 장황한 설정이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환상 소설에 가깝게 풀어나가는 점이 특징입니다. 전개와 묘사 모두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기보다는, 환상적이고 뭔가 애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탓입니다.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이라는 환상 소설을 쓴 작가 작품다왔달까요. 결말을 잘 이해할 수 없다는 점 까지 말이지요. 좀비가 등장해서 급격하게 노화한 뒤, 맬더시안이 되었다는게 결말인데,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멜더시안이 심장마비로 죽은건 명백한 사실인데, 그가 어떻게 젊은 좀비가 되었고, 다시 급격하게 노화해서 멜더시안이 된 이유는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목적이 환생이라면 젊은 육체로 있는게 맞을텐데, 이런 일을 벌인 동기도 잘 모르겠고요. 

주인공도 이 이야기가 정리되지 않는다고 끝맺는데, 작가로서 무책임한 태도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평가가 가능한데, 그런 평가가 가능한 작품은 아니었어요.

2020/05/02

악몽과 몽상 2 - 스티븐 킹 / 이은선 : 별점 2.5점

악몽과 몽상 2 - 6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엘릭시르

어쩌다보니 1을 읽지않고 2부터 읽게 된 스티븐 킹중단편집입니다. 12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보너스격인 논픽션 "고개를 숙여"와 시 "브루클린의 팔월", 우화인 "거지와 다이아몬드"를 제외하면 수록작은 9편입니다.

그간 순문학적인 부분으로 흘러가던 중, 단편집들과 비교해볼 때, 좀 더 화끈한 작품이 많다는게 특징이에요. 과거의 스티븐 킹 스타일을 보여주는 작품이 많기 때문입니다. 거장과 과거에 대한 오마쥬 형식의 작품들도 신선했고요. 전통적인 크리쳐 호러인 "장마", 기발한 호러 액션 모험물인 "10" 등이 과거 킹의 스타일을 보여준다면, "다섯 번째 4분의 1"은 화끈한 마쵸 하드보일드 액션, "크라우치앤드"는 러브크래프트크툴루 신화 오마쥬, "의사가 해결한 사건"은 셜록 홈스 파스티쉬로 모두 나름 매력있는 작품들이었습니다. "클라이드 엄니의 마지막 사건"도 하드보일드 탐정물에 변주를 가한 독특함이 좋았고요. "10"을 제외하면 대체로 클리셰로 가득한 친숙한 이야기들이지만, 워낙에 필력이 원숙하고 묘사가 대단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걸 특별하게 만드는, 이런게 바로 장인의 솜씨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할아버지의 충고가 전부인 "내 귀염둥이 조랑말", 일종의 타임 슬립물인 "죄송합니다, 맞는 번호입니다", 기묘한 가족 드라마 SF인 "메이플 스트리트의 그 집"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화끈함이 부족했던 탓입니다. 부록격인 논픽션과 시, 우화는 딱히 점수를 주기 애매하고요.

그래도 12편 중 6편, 제대로 된 수록작만 치면 9편 중 6편이 평균 이상의 재미를 선사하니 전반적으로 괜찮은 작품집에는 분명합니다. 아주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이 정도면 본전치기는 하는 셈이지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장마"

시골 마을 윌로에서 여름을 보내기 위해 찾아온 젊은 부부에게 마을 사람들이 그날 하루만 다른 곳에서 보낼걸 요구했다. 이유는 그날이 칠 년에 한 번 찾아오는 '두꺼비 장마'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존과 앨리스 부부는 객기를 부려 윌로에서 머무는데, 오래지않아 비처럼 내리는 무시무시한 식인 두꺼비 떼와 조우하게 된다.

그야말로 스티븐 킹! 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크리쳐 호러물입니다. 무언가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마을 사람들, 비가 곧 오기 직전인 축축한 공기에 대한 묘사로 가득찬 도입부에서, 식인 두꺼비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부부를 습격하는 중, 후반부까지의 전개 모두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눈을 떼기 힘들 정도였어요. 정말로 두꺼비가 장마처럼 쏟아진다니, 상상도 못했습니다... 두꺼비들이 모두 다음날 햇볕과 함께 녹아서 사라지는 이유가 젊은 부부를 장마 직전인 7년에 한 번씩 인신공양한 덕분일 거라는 결말도 꽤 참신했어요. 보통 이런 크리쳐 호러물의 경우, 원인이 무엇인지, 해결책은 무엇인지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게 대부분인데 최소한의 설명 정도는 덧붙인 셈이니까요.

달릴 때 확실히 달려주는 킹의 맛이 잘 살아 있는, 읽는 재미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마을 사람들의 권유대로 부부가 장마날 다른 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조금 궁금한데, 소설의 결말처럼 결국 벌어질 일은 벌어졌겠죠?

"내 귀염둥이 조랑말"

할아버지가 "어른이 되면, 이상하게 시간이 빨리 갈 때가 있다"는 충고를 손자에게 해 주는게 전부입니다. 시골 마을에 대한 묘사도 좋고, 시간이 빨리가는 상황 설명도 흥미롭지만, 한 편의 이야기로 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별다른 드라마도 없는데다가, 엄마는 알콜 중독에, 누나는 외모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뭉쳐있다는 등의 불필요한 묘사가 많아서 읽기도 지루했고요.
아니나 다를까, 책 뒤 해설을 보니 손자 클라이브 배닝이 살인 청부업자가 된 이야기를 그린 오래전 '리처드 바크만' 필명으로 착수했던 동명 장편에서 뽑아낸 회상 장면이라는군요.

순문학적인 소양이 엿보이기는 하나, 구태여 찾아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죄송합니다, 맞는 번호입니다"

작가 빌 위더먼이 아내, 세 명의 자식과 함께 살고 있는 집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끔찍하고 처절한 목소리로 "제발 데려가..."는 말을 남기고 끊어진 전화를 받은 아내 케이티는, 그 목소리가 자기 가족이 확실하다고 느끼고 기숙사의 딸, 어머니 등의 안부를 확인했다. 그리고 동생이 연락이 되지 않자 남편과 함께 그 집으로 찾아가는데....

시나리오로 쓰여진 작품입니다. 덕분에 시각적인 상상과 여러가지 배경 음악들을 머릿 속에 떠올리기 좋았습니다. 전화를 걸어온게 다름아닌 '미래의 케이티' 였다는 진상도 그럴듯했고요. 목소리를 듣자마자 가족임을 확신했다는데 그게 바로 자기였다니! 이런거야말로 발상의 전환이 아닐까 싶네요. 시공을 초월하여 메시지를 나누는 작품은 많지만, 연인이나 가족이 아니라 본인 자신이었다는 작품은 처음 봤습니다.

그러나 "제발 데려가.."는 그날 바로 심장발작을 일으킨 빌 위더먼을 병원으로 데려가라는 뜻이었다는건 좀 허무합니다. 전화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면, 걸 때에 보다 명확하게 메시지를 남기는게 당연하잖아요? 빌 위더먼이 처제의 집을 찾아가며 느끼는 서스펜스는 나쁘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작가에게서 기대해 봄 직한 공포나 스릴, 서스펜스도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고요.

소품에 가까운 작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이대로 영상화되었다는데, 영상물로 보는게 훨 낫지 싶네요.

"10"

출근 후 잠깐 담배를 피우러 나온 브랜든 피어슨은 '박쥐 인간'을 보고 충격에 휩싸였다. 비명을 지르려던 그를 진정시킨건 같은 회사 프로그래머 듀크였다. 듀크는 '박쥐 인간'은 흡연자들에게만 보인다며 브랜든을 '박쥐 인간'을 본 사람들 모임에 초대했다. 그러나 모임은 리더 델레이의 배신으로 박쥐 인간의 습격을 받게 되고, 브랜든은 모임에서 처음 만난 캐머런, 모이라와 함께 탈출하는데....

아, 세상에 이런 작품이 있다니! 출근 후 10시, 지정된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끼리 일종의 유대 관계가 생길 수 있다는 건 저 역시 과거 흡연자라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수의 흡연자들만 그들을 지배하는 사악한 '박쥐 인간'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생각은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죠. 금연 열풍, 담배 혐오가 널리 퍼지고 있는 현대 사회에 대한 작가의 역습이자 발버둥같은 작품이에요. 물론 흡연자들에게는 경전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테고요. 스티븐 킹이 흡연자일 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러나 좋았던 아이디어에 비하면 전개는 그냥 그렇습니다. 일단 박쥐 인간과의 혈투가 시시합니다. 끔찍하게 생겼을 뿐, 별다른 능력이 있지도 않고 물리적 공격에 바로 격퇴되기 때문입니다. 어찌어찌해서 겨우 오마하로 탈출한 뒤, 브랜든 일행이 다시 '10시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박쥐 처단에 나선다는 한 페이지짜리 후일담으로 끝낼 이야기도 아니었고요. 서둘러 대충 끝낸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좀 아쉬웠어요. 아울러 '10시의 사람들'은 그냥 흡연자가 아니라 '담배를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라는 디테일도 사족이었다 생각되네요.

하지만 그 어떤 단점에도 워낙에 아이디어가 압도적이라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이런 생각과 발상은 정말이지 본받고 싶네요. 아직도 담배를 피우는 제 주변 흡연자들에게 권해주고 싶습니다.

"크라우치 엔드"

남편이 실종되었다며 미국인 로니 프리먼이 경찰에 신고했다. 그녀는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 채, 경찰 베터와 로버트 파넘 순경에게 부부가 방문했던 런던 근교 '크라우치엔드'에서 겪었던 기묘한 경험을 상세하게 이야기하는데...

크라우치엔드가 크툴루를 위한 '크라우치엔드 토운'으로 이어지고, 그곳에서 부부가 크툴루를 만난다는 이야기입니다. 러브크래프트를 위한 오마쥬로 러브크래프트와 크툴루 신화의 팬이라면 제법 즐길만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특별한 드라마는 없습니다. 부부가 겪는 공포스러운 상황만 이어질 뿐 크라우치엔드가 왜 크라우치엔드 토운으로 이어지는지, 어떻게 그 거리로 빠져들어 희생되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고요.물론 이런게 러브크래프트 작품이라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한 마디로 요악하자면, "지나치게 잘 쓴 팬픽"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메이플 스트리트의 그 집"

장남 트렌트, 여동생 리사와 로리, 막내 브라이언은 의붓 아버지 루와 함께 사는 집에서 기묘한 금속 생명체가 자라난다는걸 알게 되었다. 트렌트는 엄마가 루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로 기절까지 하자, 금속 생명체를 이용하여 루를 없앨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기는데...

집 안에서 기묘한 금속 생명체가 자라나고, 이윽고 그 생명체가 만든 시한장치에 의해 지하실에서 알 수 없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된걸 트렌트가 알아채는 부분까지는 꽤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카운트다운은 '미국에 사는 남자아이라면, 시계가 0을 가리키면 폭발하든지, 이륙하든지 둘 중 하나라는걸 알고 있다'는 설정에 따른 결말은 좀 안이했습니다. 아이의 생각 그대로, 단지 카운트다운에 의해 나중에 '이륙해 버린다'는건 너무 단순한 발상이었으니까요. 또 이 기계 생명체가 무엇인지, 왜 성장한 끝에 이륙했는지 등 설명이 전무해서 답답했습니다. 어차피 가상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설득력을 조금이나마 보충해 줄 만한 최소한의 설명은 필요했는데 말이지요.
그리고 아무리 엄마가 힘들었다 하더라도, 새 아빠에 집까지 없어져버리면 엄마가 네 아이를 데리고 잘 살 수 있었을까? 라고 질문하면 그리 희망적인 답을 할 수는 없을거에요. 실제로 엄마가 루를 엄청나게 사랑했을 수도 있고요. 한마디로 무책임한 결말입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잔인함은 전혀 찾아보기 힘든, 가족 드라마스러운 내용은 이색적이나 아이디어를 전개와 결말이 잘 받쳐주지 못했습니다.

"다섯 번째 4분의 1"

바니의 친구 제리는, 키넌에 의해 죽어가는 바니에게 들은 정보로 키넌과 병장을 습격했다. 이유는 바니에 대한 복수와 그들 4명이 나눠가진, 현금이 묻힌 4장의 지도 조각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부제는 "레이먼드 챈들러가 "4"을 쓴다면?" 인데, 내용도 그에 걸맞는 충실한 하드보일드 액션물입니다. 보물 지도 때문에 사람들을 서로 죽이는 고전적인 설정에 더해, 4인 중 마지막인 재거와 벌이는 죽음의 사투가 인상적이에요.

'다섯 번째 4분의 1'이라는 제목은 이미 죽은 바니와 주인공 제리, 그리고 키넌과 병장, 재거라는 등장인물 5명을 의미합니다. 등장인물은 5명 뿐이고 (심지어 한 명은 이미 죽었고), 장소도 키넌의 집과 병장의 집이 전부이며 분량도 굉장히 짧지만 화끈한 액션이 휘몰아쳐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라기 보다는 미키 스필레인에 가깝지 않나 싶더군요. 그만큼 파괴적이고 화끈했거든요.

한마디로 고전적이고 화끈한 마초 하드보일드 액션물로는 최고에요. 달릴 때 확실히 달려준, 그런 작품인 셈이죠. 딱히 드라마가 돋보이지는 않지만, 그런건 애초에 불필요해요. "터미네이터"에게서 내면 연기를 기대할 필요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의사가 해결한 사건"

홈스에게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찾아왔다. 헐 경이 밀실에서 살해되었는데, 방이 완벽한 밀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헐 경은 가족들에게 가혹하게 대했던 터라, 아내와 아들들 모두 동기가 있던 상태였는데, 함께 방을 조사하던 왓슨이 사건의 진상을 꿰뚫는다.

와, 이제는 이런 작품까지 등장하네요. 스티븐 킹의 셜록 홈스 파스티쉬이자, 트릭이 사용된 본격물을 쓰다니!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습니다. 작품도 놀라운 점이 많습니다. 홈스가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어서 제대로 현장 검증을 하지 못할 때, 왓슨이 진상을 꿰뚫고 추리 쇼를 벌이는 탐정 역을 맡는다는 과감한 설정, 피해자인 헐 경이 가족의 마음을 가지고 논 인간 말종이라 진범과 진상 모두를 알았지만 홈스, 왓슨, 레스트레이드 모두 진상을 덮고 단순 강도 사건으로 위장한다는 결말까지 모두 특이하거든요.

밀실 트릭의 정체는 화가인 둘째 아들 조리 헐이 엄청난 하이퍼 리얼리즘 기법으로 그려낸 배경 그림을 테이블 다리 사이에 설치하고, 그 뒤에 숨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수 효과나 마술에서 쓰임직한 방법이죠. 주로 거울을 쓰는데, 하이퍼 리얼리즘, 극사실주의라는 미술 기법을 활용했다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개인적으로 비슷한 트릭을 예전 "경성탐정록" 창작 시절 써 먹어 볼까 고민했던 적이 있어서 그런지 무척 반갑기도 했고요.
또 이 트릭 하나 뿐만이 아니라, 헐 경은 통풍으로 걸을 때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조리가 아버지를 지나쳐 서재로 먼저 들어갈 수 있었다던가, 조리가 방에 들어가 있던건 모든 가족이 알고 있어서 그들 모두가 공범이라는 등 추리적으로 볼 만한 부분이 많다는게 놀라왔어요.

물론 본격물 치고는 허술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헐의 아내와 아들들이 모두 공모해서 헐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구태여 이런 복잡한 장치를 설치해가며 밀실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요. 다 모여있는 응접실에서 범행을 저지른 뒤, 함께 현장을 조작하는게 더 현실적이잖아요? 하인 스탠리의 증언? 정 필요하면 스탠리까지 죽이면 됐을테고요...
트릭도 비록 헐 경이 비명을 질렀다는 변수가 있다손 치더라도, 애초에 너무 거창한 장치가 필요한 트릭이었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그림자까지 가짜로 만들어야 해서 공이 지나치게 많이 들고, 날씨에 따른 변수도 있었다는 점에서도 영 별로죠.
아울러 파스티쉬인데 캐릭터에 대해 지나치게 창조적인 해석이 들어간 것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불호 쪽입니다. 왓슨의 성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게 특히나 이질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여러모로 독특하며, 제가 읽은 최초의 스티븐 킹 본격물이자 셜록 홈스 파스티쉬라는 가치는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셜록 홈스 팬이시라면 놓치기 마시길 바랍니다.

"클라이드 엄니의 마지막 사건"

유능한 사립탐정 클라이드 엄니는 어느날, 자신을 둘러싼 모든게 이상해졌다는걸 깨닫는다. 매일 시끄럽게 만드는 이웃 데믹 부부가 조용하고, 매일 아침 신문을 사는 신문팔이 피오리아가 복권에 담청되고, 단골인 식당 블론디스는 문을 닫고, 사무실이 있는 건물 엘리베이터 안내원 버넌이 은퇴한다고 하는 등 익숙치 않은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클라이드 엄니 앞에 새뮤얼 D.랜드리라는 인물이 나타나, 그를 둘러싼 모든건 모두 소설 속 설정이며 자신이 그 모든걸 창조한 창조주, 작가라고 이야기하는데...

소설이나 영화 속 캐릭터와 현실의 작가, 또는 현실 세계가 만나서 사건이 벌어지는 작품은 많습니다. 특정 컨텐츠로 현실 인물이 빠져들어 벌이는 모험담이야 쌔고 쌨고, 현실과 픽션이 결합하여 벌어지는 일종의 패러독스를 다룬 작품도 있지요. 오래전 "라스트 액션 히어로"처럼요.

이 작품은 구태여 이야기하자면 후자 쪽에 가까운데, 특징이라면 픽션으로 빠져드는 현실 속 인물이 주인공이 아니라, 픽션 속 캐릭터의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세계를 멋대로 비집고 들어와, 그 세계를 엉망으로 만들고 심지어 나 자신을 지워버리는 멋대로인 창조주의 희생양이라는 포지션이에요. 마른 하늘에 날벼락 제대로 맞는 캐릭터인데, 이런 비현실적으로 암담한 상황 묘사야 말로 킹의 특기 중 하나이지요.

또 클라이드 엄니는 더쉴 해밋 등 정통파 하드보일드 작가의 영향을 짙게 받은 캐릭터이기 때문에 작 중에서 상황에 휘둘리면서도 추리하거나, 또는 상황 반전을 위해 노력하는 여러가지 행동들이 그야말로 클리셰대로라는 것도 재미있던 점입니다. 상대방에게 이야기를 계속 하도록 유도하는게 대표적이에요. 당연히 실패하지만요.

결국 새뮤얼 랜드리에게 자신의 세계를 빼앗긴 클라이드 엄니가 현실의 새뮤얼 랜드리가 된다는 결말도 독특합니다. 일종의 바꿔치기가 일어난건데, 클라이드 엄니는 하드보일드 탐정답게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소설을 창작하여 자신의 세계를 되찾을 결심을 한다는 마지막 장면도 인상적이에요.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죽어도 포기하지 않는게 탐정이니까요. 과연 클라이드 엄니가 새뮤얼 랜드리에 의해 붕괴한 자신의 소설 속 세계를 재 구성하여 되 찾을 수 있을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뻔한 설정이지만 약간의 변화로 새로움을 안겨다 준다는 점, 특별한 액션 없이 둘의 대화가 거의 대부분이지만, 긴장감도 넘친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고개를 숙여"

스티븐 킹의 아들 오언 킹이 뛰는 리틀 야구팀 뱅고어 웨스트가 지구 우승을 차지한 시즌에 대해 기록한 논픽션입니다. 리틀 야구이기는 하지만 마지막 회에 역전 홈런을 쏘아 올리는 등 상당히 드라마틱한 경기 묘사가 이어져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별점을 주기에는 좀 애매한 결과물이에요. 제가 원한건 스티븐 킹의 논픽션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이 작품을 비롯하여 나머지 부록들에 대한 별점은 따로 없습니다. 참고하시길.

2019/11/29

회색 인간 - 김동식 : 별점 2점

전문적인 글쓰기 교육을 받지 않은 작가가 오늘의 유머 사이트에 꾸준히 업로드한 글이 인기를 얻은 덕분에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온 결과물입니다. 과거 하이텔 시기에나 존재했을 법한 이야기의 재림이네요. 올린 글의 분량만 따지만 거의 "태백산맥"에 육박한다니 그 열정과 노력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러나 하이텔 시기 인기를 끌었던 "퇴마록" 등과는 명확히 다른 점은, 굉장히 짧은 꽁트, 아니 쇼트쇼트라고 불러도 무방한 이야기들이 표제작을 포함하여 무려 스물 네 편이나 수록된 단편집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솔직히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한 편의 이야기로의 완성도가 부족한 탓입니다. 게다가 모든 이야기들이 대체로 비슷하다는 단점도 큽니다. 기묘한 설정, 그리고 그 기묘한 설정 때문에 인간들의 집단 이기주의나 탐욕이 생겨나 결국 파국을 초래한다는 결말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에요.
기묘한 설정이라도 재미있다면 괜찮지만, 그냥 기묘하다는 상황에만 매몰되어버린 이야기들이 많아서 아쉽습니다. 건물이 급작스럽게 식인 괴물로 변하여 밖의 사람들을 잡아먹는다는 "식인 빌딩", 인간이 녹았다가 다시 돌아오면 완벽한 컨디션이 된다는 기적의 물 정화수가 대유행한다는 "흐르는 물이 되어"가 대표적이에요.
또 기묘한 설정에 기댈 뿐, 이야기는 예상대로 흘러가고 반전도 뻔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아우팅"에서 인류 모두가 인조인간이라는게 밝혀지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차라리 연구소 경비병들만 진짜 인간이었다는 반전이라도 넣어 주었어야 했어요. 그나마 조금 신선한 반전들도 대체로 기존 상식이나 그때까지의 현실을 반대로 뒤집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괜찮아 보여도 읽으면 읽을 수록 식상해 질 수 밖에 없어요. "영원히 늙지 않는 인간들"에서 나이를 먹지 않게 만드는 영원의 구가 사실은 저주였다던가, "공 박사의 좀비 바이러스"에서 좀비 바이러스는 무적의 재생력을 안겨다주는 선물로 사람들은 다시 인간이 되려 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피노키오의 꿈"에서 피노키오의 소원이 인간이 되는게 아니라 건강한 소나무가 되는 것이었다는 결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반전이라도 있는 이야기는 조금 나은 편입니다. 특별한 반전 없이 인간미, 감동 쪽에 방점을 찍으려 노력한 이야기들은 더 엉망이에요. 표제작인 "회색 인간"이 대표적입니다. 1만여 명의 사람들이 갑자기 납치되어 땅을 파는 가혹한 노동에 시달립니다. 먹을게 부족해서 문화는 사치였지만, 어느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나타나 문화가 생겨난다는 결말입니다. 문화가 사라지면 인간도 아니라는 주제인데, 솔직히 억지스럽죠. 이런 상황이라면 집단이 생기고, 자체적인 법률이 생기는게 타당한데 그런 내용은 전혀 없이 그냥 살기 힘든 상황만 길게 묘사되는 것도 지루하고요. 가혹한 노동 환경에서도 추구하는 문화에 대한 욕구와 인간미는 "도박묵시록 카이지 외전 반장의 일일 외출록" 에서 훨씬 더 재미있게 잘 그려졌다 생각됩니다.
손가락 여섯개인 신인류를 낳게 만드는 비정상적인 계획이 비선 실세의 농간으로 밝혀진 후, 손가락 여섯개인 아이들을 차별하지 말자는 생각이 모든 차별을 없앤다는 꿈같은 이야기도 황당하기 그지 없고요. 괴물이지만 또 인간이기도 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처럼 다른 작품들에서 흔히 접했었던 설정도 많습니다. 어설픈 풍자, 별 것 아닌 내용을 길게 늘려쓴 이야기도 눈에 거슬렸어요.

하지만 인터넷에서 널리 인기를 끌었던 이야기답게 반짝이는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무인도에 표류한 생존자들이 얼마 안 되는 식량을 노인에게 나누어주기를 거부하자 노인이 자신이 부자라면서 통조림을 500만원에 사겠다고 제의하는 데에서 시작하는 "무인도의 부자 노인", 신에게 소원을 빌 당사자로 선택되는 개인에게 닥치는 집단 광기를 설득력있게 보여준 "신의 소원", 노인을 가상 세계에 모신다는 발상이 그럴싸 했던 "디지털 고려장" 등이 그러합니다. 다만 문제는 이후의 전개가 뻔하고 결말의 반전이 억지스럽거나 작위적이거나 아예 없다는 단점은 그대로라는 점입니다 .

다행히 설정도 좋고, 전개도 괜찮으며 결말과 반전도 완성도 높은 보석과도 같은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 재활용" 입니다. 돈만을 위해 살아온 두석구가 딸이 교통사고로 죽자, 13일 내 시체 세 구를 섞어 넣으면 한 명이 부활한다는 주술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생존은 랜덤이라 딸이 살아나지 못하자 두석구는 전 재산을 투자해서 13일 동안 이 주술을 계속 시도하고요.
그런데 영혼들이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하고, 영혼들은 두석구의 딸 부터 영혼을 찢어발긴다는 마지막 반전이 아주 기가 막혔습니다. 두석구는 딸이 살아날 때 까지 주술을 시도할테니 영혼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딸부터 처치하는건 당연하니까요. 이를 고통스러워 하는 딸의 마지막 대사도 좋았고요.
쇼트쇼트로는 그야말로 완벽했던 작품으로 수록작 중에서 베스트입니다. 이 정도면 호시 신이치의 대표작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만 합니다.

"보물은 쓸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도 평균 이상입니다. 정대리가 가진 보물인 쇠구슬은 손을 대면 비가 오게 만듭니다. 김대리는 이를 훔쳐내는데 성공하지만 그가 아무리 손을 대도 비는 오지 않습니다. 아내 역시 흐려지기만 할 뿐이고요. 그런데 아기가 손을 대자 지진이 발생하여 결국 집이 무너지고 맙니다. 원리는 비가 오는게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날이 실현된다는 이야기지요. 기묘한 설정도 좋지만 제 생각대로 전개되지 않았던 덕분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세 모녀, 한 사내와 협곡에 갇힌 김남우가 극심한 굶주림 끝에 식량으로 희생될 사람을 뽑는 제비뽑기에 참여하는 "협곡에서의 식인"도 기묘한 맛 측면에서는 꽤 괜찮습니다. 김남우의 편인줄 알았던 사내가 놀랍게도 급작스럽게 김남우를 살해하는데, 알고보니 그들 4명은 모두 가족이었던 반전 덕분입니다. 김남우가 가족을 경계하고 오히려 위협할까 두려워 남인척 김남우 편에 섰다가 배신을 했던 거지요. 살아난 가족이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는다는 마지막 한 방도 묵직하고요.
아쉬운건 에이즈가 지금은 그렇게 위험한 병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좀 더 '천벌'에 가까운 병에 걸리는게 나았을 거에요. 그런 면에서는 "살인단백질 이야기"에 나왔던 프리온을 활용한 병이 어땠을까 싶네요. 식인으로 전염되고, 치사율 100%이니까요.

"지옥으로 간 사이비 교주"도 반전이 좋습니다. 사이비 종교 교주 두석구가 지옥에서 악마들의 부탁으로 죄인들에게 환생을 약속하는 환생교를 만들어 포교합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어 통제를 잘 하려는 악마들의 계획으로 생각하고요. 그러나 1년 뒤, 절대자가 강림하여 두석구를 찢어 발기고 죄인들의 희망을 끝냅니다. 죄인들에게 어설프게 희망을 주었다가 큰 고통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결말인데 아주아주 그럴 듯 했습니다.

하여튼, 전체 평균해서 별점을 주자면 2점입니다. 모든 수록작 중 세네 편 정도가 중간 수준, 세 편 정도가 중간 이상, 한 편이 수작이고 나머지가 모두 기대 이하이니 이 정도가 적당해 보입니다. 반 타작도 하지 못한 셈이니 전반적으로 좋은 단편집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네요. 다음 권은 읽어볼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도 일하면서, 전문적인 교육도 받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계속 창작하여 발표한 작가의 노력에는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등단도 한 만큼, 괜찮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다음에는 보다 완성도있게 다듬어 발표해 주기를 바랍니다.

2018/08/25

음식과 전쟁 - 톰 닐론 / 신유진 : 별점 2.5점

음식과 전쟁 - 6점
톰 닐론 지음, 신유진 옮김/루아크

부제는 '숨겨진 맛의 역사'인데, 처음에 제목만 보고 음식을 두고 둘러싼 전쟁을 다룬 미시사 서적, 혹은 전쟁으로 비롯된 음식을 다룬(이런 책 같은) 미시사 서적일 것이라 생각하고 구입했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제 생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전쟁과는 무관한 몇몇 특정 주제를 가지고 해당 음식과 관련된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대했던 전쟁 관련된 이야기는 없지만 재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동안은 잘 몰랐던 주제들이라 새롭기도 하고, 저자만의 독특하고 새로운 시각이 엿보이는 내용이 많은 덕분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풀 컬러로 화려한 도판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고요.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주제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에서는 로마 시대 양어법이 대중화되는 과정이 설명됩니다.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에 잉어가 급격히 퍼졌는데, 이유는 잉어의 놀라운 생존 능력에서 비롯된 저렴하고 효과적인 단백질 공급원이라는 특징에 더해, 카톨릭 교단이 금요일마다 육류 섭취를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미국에도 도입되었지만 인기를 얻지 못했다며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왜 미국에서는 잉어가 각광받지 못했을까요? 달리 먹을게 많은 풍요로운 나라였기 때문일까요? 이런 점을 좀 더 자세히 짚어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조금 아쉽네요.

그리고 "4"는 식인에 대한 역사를 다룹니다.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 많지만 딱 한가지, 아즈텍 제국에서는 사람이 당연한 식재료였다는 설명은 뜻밖이었습니다. 그동안은 일종의 제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옥수수 중심의 불균형적인 식량 체계와 융통성 없는 수직적 사회 체제 덕분에 벌어진 필연적인 결과였다는군요. 당연한 식재료였기에 사람을 소금, 후추, 토마토와 함께 끓이는 표준 레시피까지 있었다니 놀랐습니다. 그렇지만 저자의 시각에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관점이라면 '이스터 섬' 에서도 식인이 활발하게 벌어졌었어야 하니까요. 거대 석상 제조를 위해 자연을 파괴하여 식량이 부족한데, 거대 석상 제조가 이루어질 만큼 수직적인 조직 체계가 유지된 상황이라면 아즈텍 제국과 마찬가지잖아요? 이런 부분에서는 연구가 좀 더 필요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소스 전쟁에서 살아남은 우스터셔 소스의 이야기를 그린 "6" 에서 우스터셔 소스의 복잡한 맛은 '카레'와 비슷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던 덕분이며 이는 창조자 샌디스 경의 동양에서의 경력 덕분일 것이라는 비화와 우스터셔 소스는 일종의 바이럴 마케팅 덕분에 성공했다는 시각도 흥미롭습니다. 

"8" 에서는 바비큐가 소개되는데 단순한 직화가 아니라 오랜 시간 낮은 온도에서 익혀 고기를 둘러싼 섬유질 콜라겐을 젤라틴으로 바꾸는 요리법이라는 정의는 처음 알았습니다. 이게 저자의 의견인지 사전적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이외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지만, 위의 예에서 언급해 드렸던 몇몇 불만들처럼 내용이 부실해서 보다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많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많아야 20 페이지 안팎의 분량으로 해당 주제를 소화하는데 도판의 분량이 1/3 정도를 차지하니 깊이있는 설명은 애초에 불가능한 탓입니다.
또 모든 이야기들이 다 마음에 든 건 아닙니다. 디너 파티와 초콜릿 등 별로 관심이 없거나 너무 잘 알려진 주제들도 많고, 무엇보다도 흑사병을 막을 수 있었던 이유가 레몬 껍질 덕분이었다는 "2"와 같이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화려한 도판 덕분에 소장 가치는 높지만 이 책만 가지고 특정 요리와 문화에 대해 깊이있게 이해하는 건 어렵습니다. 그래도 음식과 문화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재미삼아 도전해 보셔도 나쁘지는 않을겁니다. 책 가격이 2만원을 훌쩍 넘는다는 문제는 있지만요.

2018/06/08

메두사호의 조난 - A. 코레아르.H. 사비니 / 심홍 : 별점 2점

메두사호의 조난 - 4점
A. 코레아르.H. 사비니 지음, 심홍 옮김/리에종


뗏목에서 여러명의 사람들이 절박하게 구조를 기다리는, 메두사 호의 조난을 제리코가 그린 위의 그림은 한 번씩 보신 기억이 있으실 겁니다. 이 책은 그림의 소재가 되었던 메두사 호 해상 조난 사건의 피해자의 수기로 이루어진 논픽션입니다. 이런 류의 해상 재난 관련 논픽션"바다 한 가운데서"를 재미있게 읽기도 했고, 책 소개도 그럴듯해서 관심이 가던 차에 읽어보게 되었네요.

책은 메두사 호가 항해하게 된 이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1814. 15년 파리 조약을 통해 원래 프랑스 땅이었지만 영국이 보유하고 있던 아프리카 서해안의 권리가 명확해 진 후, 프랑스가 자신들의 소유지인 거점 도시 생 루이를 다시 차지하기 위해 4척으로 구성된 세네갈 원정대가 출발한 것이 이유입니다. 식민지를 유지해야 했으므로 3개 중대 250여명의 군인은 물론 신부, 의사, 정원사에 제빵 기술자 등 다양한 직업의 인원들로 구성되었고, 같은 이유로 다양한 물자도 운반하였는데 이 중에는 무려 10만 프랑에 이르는 자금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능한 원정 함대 사령관 쇼마레 탓에 원정대의 기함 메두사 호는 케이프 블랑코 모래톱에 좌초하였고, 무익한 노력이 이어지다가 배의 파손이 심해져 결국 구명정 등으로 탈출하였습니다. 당연히 악천후 등에 의해 망망대해에서 배가 침몰한 사고라 생각했었는데, 부주의로 인해 육지 근처 모래톱에 좌초했던 사고라는게 황당했어요.

하지만 이 정도로 끝났다면 당연히 이 사건이 그림의 소재가 될 정도로 유명하진 않았겠죠? 조난자들의 절반 가까이인 152명이 프리깃함의 자재로 대충 만든 뗏목에 탑승했는데, 노 하나 없어서 다른 구명정 들이 끌어주어야 함에도 이들이 예인줄을 풀어버렸기 때문에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다가 소수만 구조되는 처참한 비극이 찾아오고 맙니다.
이 비극이 책의 절반 정도 분량을 차지합니다. 주로 뗏목에서 당시 군의관 사비니와 인부 리더 코레아르가 활약하는 내용이고요.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듯 조난당한 이유도 황당하지만, 무려 백 명이 넘는 사람이 타야 할 뗏목의 준비 역시 황당하기 그지 없더군요. 나침반 하나 없고 음식도 제대로 싣지 않고 출발했을 뿐 아니라 그 이후에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문제가 닥치거든요. 심지어 일부 승선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기까지 하니 말 다했지요. 이 과정에서 당연하다면 당연할 식인도 시작되고요. 결과적으로 10%인 15명만 생존하고, 이 중 5명도 구조되자마자 바로 죽어버리는 참혹한 표류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펼쳐집니다.

뗏목 조난 외의 나머지 절반 분량은 다른 구명정과 상륙정에 탑승했던 조난자들이 육지로 상륙하여 도보로 사막을 가로지르는 이야기인데 이 역시 처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확실히 바다보다는 사막이 생존에는 더 낫다 싶긴 했어요. 물과 식량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고 탐욕스러운(이들의 말에 따르자면 그렇습니다. 멀쩡한 남의 나라를 자기 멋대로 식민지로 만드는 무리들이 염치도 없지...) 무어인들을 만나 고초를 겪기도 하지만, 그래도 사망한 사람은 소수라는 점에서요. 애초부터 메두사 호에 있던 군인들 중심으로 확실하게 규율을 잡고, 식량을 확실하게 확보한 후 도보로 이동하는게 더 나은 판단이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표류, 조난 외에도 구조된 이후의 후일담도 상세합니다. 생존자 대부분이 가진 재산 모두를 약탈당하고 알거지가 된 데다가 국가와 국민들로부터 잊혀졌고, 심지어 사비니의 수기는 정치적인 음모로 이용되고 코레아르는 정부 관계자에게 완전히 무시당하는 등 살아 남은 뒤에도 고초를 겪었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 수기가 쓰여진 목적은 사비니와 코레아르가 자신들의 영웅적인(?) 행동에 대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걸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묘사들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었어요. 식량이 없어 죽어나가며 식인도 했다고 서술하면서, 또 어떤 부분에서는 국왕 폐하의 신하들을 바닷 속으로 돌려보냈다는 식으로 장례를 치뤄 주었다고 쓰는 등 앞 뒤도 잘 맞지 않고요. 때문에 정말로 함대 사령관 쇼마레의 무능과, 총독의 무자비함도 별로 신뢰가 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이런 류의 사건이 벌어졌을 때 문제는 보통 윗 사람들 때문이라는 고금동서의 전례가 있기는 합니다만 아무 것 증명된 건 없으니까요. 솔직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포도주를 독차지하고 죽은 사람들의 고기를 먹은 인간 말종들이었을 수도 있죠.
게다가 수기 내내 스스로의 영웅적인 행동과 박애정신에 감탄하고, 자기들이 조국과 국왕에 충성하며 헌신하는 국민이라는 걸 강조하는 것도 읽으면서 솔직히 짜증이 났습니다. 이유는 역시나 자신들에 대한 보상 목적이라 생각되는데 오히려 이런 불필요한 묘사로 정작 중요한 표류, 생존을 위한 투쟁에 대한 묘사가 희석되고 깊이가 없어지는 탓입니다.

그래도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여러가지 디테일들 - 뗏목에서 더위를 잊기 위해 모자에 바닷물을 담가 얼굴을 씻고, 머리를 적시고, 물속에 손을 넣는 것을 반복했다, 사막을 도보로 횡단하던 중 약 2미터 깊이로 모래를 파면 물을 얻을 수 있었다, 무어인은 큰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불을 붙인 나무뿌리와 함께 잡은 황소를 던져 넣고 모래로 덮은 후, 다시 그 위에 숯불을 덮어 조리했다. 무어족 가죽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염소 가죽은 방수가 완벽했다 등 - 은 나쁘지 않습니다.
이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도보 횡단 중 만난 무어인의 왕 자이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자이드 왕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에 대해서도 잘 알고있는 국제인으로 소개되거든요. 왕이라기 보다는 좀 큰 유목민을 이끄는 리더로 보이는데 당대 아프리카 서부 세네갈의 한 지역 부족장이 이 정도의 국제 감각과 지식을 지니고 있다는건 상당히 신기하게 다가왔습니다.
토착 민간 요법으로 열병을 치료하는 방법도 인상적이었어요. 럼주를 넣은 매우 뜨거운 펀치를 '카엔 후추' 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고추 삶은 물과 함께 큰 잔에 넣어 마시는 것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소주에 고춧가루를 타 먹는 것과 진배 없어 보이네요.

하지만 살기 위한 처절한 투쟁 묘사는 그닥 상세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애초 글이 쓰여진 목적이 조금은 불순하고, 그래서 저자 시점에서 왜곡된 내용이 많은 듯 하여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인쇄 상태, 폰트 등 책의 만듬새도 마음에 들지 않고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이런 류의 해상 조난 관련 논픽션을 원하신다면 이보다는 "바다 한 가운데서"를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디테일, 깊이 모두 차원이 다릅니다.

2018/02/03

중국 초청 SF 단편들

중국 SF로부터의 초대장

자주 찾는 블로그 이웃 잠보니님 글을 통해 소식을 듣고 읽어보았습니다.중국 SF는 이전에 "삼체" 를 꽤 재미있게 읽어서 기대도 되었고요.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여섯 편의 단편 중 딱 한 편, "기아의 탑" 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의 이야기로서의 완성도가 수준 이하인 탓입니다. 설정은 그럴듯하지만 최소한의 설명도 없고, 이야기도 편의대로 흘러가기 때문이지요. 뭔가 있어보이려고 노력은 했지만, 결과는 딱히 괜찮다고 보기 어렵네요. 과거 모뎀 시절 유행했던 함량미달의 한국 SF 단편들이 떠오르는, 그런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독특하다는 점은 주목할만 하지만 구태여 찾아 읽으실 내용은 아닙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기아의 탑" 

추락한 우주선의 생존자들이 먹을 것 하나 없는 수도원에 고립된 상황을 그립니다. 생존자들이 식인으로 치닫는다는 전개는 뻔하지만,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도대체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라는 약간의 수수께끼와 "진동으로 가득 찬" 행성이라는 SF적인 설정이 잘 결합되어 있는 덕분에 충분한 재미를 전해 줍니다.
수도원에서 생각을 증폭시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나름 철학적이면서도 신선한 설정과 이를 흉폭한 야성이 무위로 되돌린다는 결말도 괜찮았고요. 그게 뭐가 되었건 '최후의 말 한마디'는 들어 주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겨줍니다.

그런데 이전에 거주하던 수도사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설명해주지 않는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생각을 증폭시켜 열반에 이르렀다는 설정일까요? 또 생존자들을 습격하는 괴물의 정체도 뭔가 복선처럼 풀어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테고요.

그래도 중국 SF의 저력을 확인하는데는 문제없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고래자리를 본 사람" 

행위 예술가인 아버지는 딸의 숙제를 위해 '만들어 낸' 행성이 '진짜' 라고 주장했지만, 그 주장을 증명하지 못해서(혹은 증명하기 위해서) 모두의 지탄을 받는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딸 릴리안은 아버지와 떨어져 성장하여 우주 비행사가 된 후, 웜홀을 통과하여 고래자리 델타를 직접 보고 나서야 아버지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과학이 기반이 된 행위 예술이 등장하고, 주인공 릴리안이 웜홀을 통과하는 우주 비행사라는 등 SF적인 설정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진의를 나중에서야 이해하게 된다는 내용이니까요. 저 역시 딸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조금 뭉클하게 다가오긴 했지만, 별로 SF 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아버지가 어떻게 고래자리 델타성을 보았는지에 대해 설명되지 않는겁니다. 이래서야 본격 SF라고 하기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지하철의 충격" 

사람으로 가득찬 출근길 지하철이 시공을 초월하여 달리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갖가지 기묘한 현상을 그리는 작품으로 초반 설정은 참신합니다. 출근길 지하철을 타 본 적이 있는 사람을 자극하는 원초적인 공포가 리얼하게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암벽등반가 샤오지가 열차 밖으로 나가 앞으로 이동하면서 목격하는 다른 차량의 상태, 현상에 대한 묘사부터 이야기는 그야말로 폭주합니다. 이 모든게 초자연적인 무언가에 의한 진화, 새로운 생태계를 만드는 과정이라는 내용인데,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아무리 봐도 하나의 이야기로 성립한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대사에서 특히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무슨 호접몽도 아니고...

기묘한 상황에 대한 묘사가 대부분이며 이야기로 성립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는 중국 고전 기담을 연상케 하는데, 고전 기담 쪽이 이야기로서의 완성도는 더 높습니다. 점수를 주기 어려운 망작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인류의 여신 G" 

선천적 결함을 지닌채 태어나 정상적 성생활, 출산이 불가능했던 G는 기도를 통해 전신 성감대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그녀는 상류층의 구경거리로 전락하나,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대중의 정점에 서는데...

일본 에로 만화에서 접했음직한 설정이 등장하여 인간의 해탈, 전도와 좌절, 한 단계 위로의 진화라는 일종의 종교 프로세스를 섹스에 빗대어 풀어내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딱히 신선하거나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SF로서는 함량 미달입니다. G의 변신은 기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정부터 G가 대중을 사로잡는 과정과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서 설득력이 전무한 탓입니다. 결국 자신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말한 뒤 과격 종교집단에 쫓기는 신세가 된 그녀에게 일어난 결말 역시 잘 이해가 되지 않고요. 고자와 석녀가 함께 절정에 이르렀다?

애매하게 종교적인 내용을 넣지 말고, 불감증에 시달리던 인류에게 전신 성감대 미녀가 등장하여 인류를 자위만으로도 충분한, 한단계 더 높은 쾌락의 세계로 이끈다는 식으로 가는게 더 화끈하고 좋았을겁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탈피" 

탈피를 거듭하는 혈인이지만 약물의 힘으로 탈피 충동을 억누르며 배우로 성공한 공은 투라는 다른 혈인에게 연기를 가르쳤다. 투도 배우로 성공했는데, 투는 배우로서의 삶이 아니라 탈피를 택하고 말았다. 공도 탈피에 대한 욕망은 크지만 탈피 후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변할지 알지 못해 주저하는데...

이종족 판타지로 9번의 탈피를 끝내고, 혈인으로서 죽어가느냐 아니면 자신의 본능을 숨기고 인간 세계에서 살아갈 것인지 선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딱히 재미는 없습니다. 늑대 인간이나 뱀파이어로서의 삶을 선택하느냐!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유사 딜레마들과 구분될만한 내용도 없고요.

'배우'라는, 일종의 가장된 삶의 대표격인 직업을 선택한 정도가 조금 신선했지만 그냥저냥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우주표 담배" 

우주정거장만한 담배를 만든다는 이야기로 스케일 하나 만큼은 높이 사 주고 싶습니다. 흡연 인구가 엄청난 중국에서 생각했음직한 내용이네요. 이 모든게 환상이고, 담배는 값싼 대용품 센티멘털 니코틴에 밀려났다는 결말도 뻔하지만 괜찮았고요. 전통적인 산업의 종말을 블랙 코미디 식으로 그린 느낌인데, 바로 얼마전의 미국 토이저러스 오프라인 매장 폐쇄 사태가 떠오르더군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17/12/03

독서광의 모험은 끝나지 않아! - 미카미 엔, 구라타 히데유키 / 남궁가윤 : 별점 2.5점

독서광의 모험은 끝나지 않아! - 6점
미카미 엔.구라타 히데유키 지음, 남궁가윤 옮김/북스피어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의 작가 미카미 엔과 "R.O.D"의 작가 쿠라타 히데유키가 여러가지 책에 대해서 이야기한 대담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얼마 전에도 읽었던 북스피어의 '박람강기' 프로젝트의 한 권이지요.
자연스러운 일상생활 속 대화같은 대담이 인상적입니다. '술집 옆자리에서 두 남자가 주고받는 대화를 귀 기울여 들었더니 꽤 재미있더라'는 책 뒤 소갯글 그대로의 내용이에요. 구라타 스스로도 북 가이드라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런 시시콜콜한 대담까지 책으로 출간되는 일본 출판 시장이 부럽기도 하네요. 우리나라 같으면 팟캐스트나 유튜브 방송 정도로 소모되고 끝날 내용이거든요. 좋게 말하자면 읽기 쉽고 나름 재미도 있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그다지 깊이가 있거나 진지한 내용은 아닙니다.
그래도 독서광 작가들이 모여 수다를 떤 내용이라서, 독서광까지는 아니더라도 독서에 있어 명함을 내밀 정도는 되는 저로서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순서대로 한 번 살펴볼까요?

우선 모던 호러가 주제인 수다에는 스티븐 킹, 딘 쿤츠, 클라이브 바커 등 익숙한 작가들의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다만 내용은 딱히 새롭지 않아요. 모던 호러라는 주제를 이야기하면 누구나 이야기할만한 내용이었거든요.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롱 워크"를 극찬하는 등 저와 취향이 다른 탓도 크고요. 하지만 잭 케첨 소개는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구라타 히데유키 말에 따르면 "이웃집 소녀"는 구입한 그 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책을 다 읽지 않으면 오늘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거야 라고 생각했을 정도라니 꼭 읽어 봐야 겠습니다. 마침 국내에 유일하게 소개되어 있기도 하고요. 그 외에도 소니빈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는 데뷔작 "비수기" 와 후일담 "더 우먼"도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은데, 이 두 작품은 아쉽게도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았네요.

요코미조 세이시에도가와 란포, 야마다 후타로를 소개하는 챕터는 너무 뻔하더군요. 다 알고 있는 내용이거든요. 그래도 딱 한 가지, 일본 초등학생이 읽기 힘들어했다는 토로는 색달랐지만요. 구라타 왈, 모르는 단어가 많이 나와서라고 하는데 저는 그런 인상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번역을 잘 한건지 아니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만큼 역사와 과거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네요. 그냥 일본 초등학생보다는 제가 이해력이 좋기 때문인걸까요?
그래도 좋아한다고 언급하는 작품들이 대체로 저 역시 좋아하는 작품들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백일홍 나무 아래" 만 빼고 말이죠. 그 외 작품으로는 읽어본 적 없는 식인 테마 작품인 "어둠에 꿈틀거리다"가 궁금했습니다. 국내 출간되었는지 찾아봐야겠군요.
그런데 갑자기 야마다 후타로와 "마계전생" 이야기로 넘어가는건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야마다 후타로의 대표작이라는 "인법첩" 시리즈도 영화, 만화로 접한게 전부라 딱히 수다에 공감하거나 이해할 내용도 별로 없었고요.

영화화된 작품 원작에 대한 수다는 가도카와 하루키가 이끌던 가도카와 문고와 영화 전성 시대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작가 시점에서 아카가와 지로를 나름 극찬하는 - 쉽게 대사를 쓴, 일종의 라이트 노벨 선구자라는 등 - 정도만 눈에 뜨일 뿐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듯한 아카가와 지로가 쓴 크리쳐 호러 소설 "밤"이 그나마 궁금하지만, 최고 걸작이라는 "마리오네트의 덫" 수준을 미루어 본다면 구태여 읽어볼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좌절본은 읽다가 포기하거나 여러가지 이유로 아예 그 생각이 없었던 작품들에 대해 수다를 떠는 챕터로 보통은 어려운 책 - 커트 보니컷의 "제 5 도살장"이나 케플러의 "우주의 신비" 등 - 이거나 너무 길어 포기한 작품들이 대부분입니다. 100권이 넘는 "구인사가", 미완으로 끝났다는 일본의 시대소설 "대보살고개" 등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제 5 도살장" 이 어렵다는 주장은 동의하기 어렵고 "삼국지" 나 "삼총사" 같이 재미도 있고, 읽기도 쉬운 작품이 좌절본에 포함되어 있는 등 제 생각과는 조금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미카미보다는 구라타 취향이 특히 그런데, 뭐 이런 것이야 말로 개인 취향이겠지요. 허나 오래전 작품이라 요새 취향과 맞지 않기 때문에 읽기 힘들다는 이유로 "반지의 제왕" 은 좌절본이다!라는 의견만큼은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이런 류의 독서광들 수다라면 빼 놓을 수 없는 진귀한 책, 기이한 책이 이야기도 물론 들어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희귀 도서들보다는 재미있는 아이디어의 책들 소개가 더 인상적이었어요. 아와사카 쓰마오의 "산 자와 죽은 자 - 명탐정 요기 간지의 투시술" 이 대표적입니다. 모든 페이지가 16 페이지 단위로 봉해져 있어서 그대로 읽으면 25페이지 짜리 단편이지만, 다 읽고 봉한걸 풀면 새로운 장편 소설이 된다는 책으로 여러모로 신기했거든요.
우리나라에도 소개되다 만 게모노기 야세이의 만화 "Palm" 소개도 기억에 남습니다. 무려 30년간 이어진 연재의 설정을 초기에 확립하여 그대로 끌고갔다니 대단해요. 미카미 엔이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는게 이해가 되더라고요. 국내에는 절판되어 말 그대로 진귀한 책이 되어버렸는데, 어떻게 다시 구해보고 싶어 지네요.

추억 속에 깊게 남은 인상적이었던 책도 언급하는데, 구라타를 독서가로 이끈 책은 "투명인간", "우주전쟁" 이라고 합니다. 덕분에 SF에 빠졌다가 미스터리로 관심이 이동한 전형적인 장르 애호가 루트를 밟았더군요. 또 다른 추억의 책은 폴란드 아동문학인 "크레크스 선생님의 학교"를 꼽았고요.
미카미 엔은 "마더 구스", 히노 히데시의 만화 "죠로쿠의 기묘한 병"를 이야기하는데 이 책들은 국내 소개되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미카미 엔이 소설을 쓰자고 마음먹은 계기가 되었다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단편집 "에렌디라" 속 수록작인 "단순한 에렌디라 와 무정한 할머니의 믿을 수 없이 슬픈 이야기" 정도만 국내 출간되었을 뿐입니다. 마르케스 작품은 많이 읽어보지 못했는데 '일정한 틀의 캐릭터에서 빠져나온 뭔가를 소설에서 배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라는 미카미의 말이 마음에 들기에 한 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저런 만화 이야기도 하는데, "블랙잭" 이야기에서는 확실히 두 사람의 깊은 내공이 느껴지더군요. 미카미 엔이야 블랙잭이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 한 편에서도 소개되었으니 그렇다 쳐도, 그에 뒤지지 않는 구라타가 참 대단했습니다.
후지코 후지오 이야기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라 더 반가왔어요. "Utopia"도 아마 "비블리아 고서당" 에서 소개되었었죠? 개인적으로는 "만화의 길" 에서 접했기에 더욱 반가왔고요. 어차피 지금은 복간되어 구하기 그리 어렵지 않기는 하지만요. "모쟈코"와 "에스퍼 마미"는 개인적으로 좋아해서 언급되는게 기뻤습니다. 또 "유혈귀" 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의 내용을 상당히 길게 언급하는데 결말이 뭔지 궁금해 미칠 지경으로 만들어서 구해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흡혈귀는 신인류고, 구인류는 선량한 신인류의 피를 흘리게 만드는 유혈귀였으며 결국 주인공도 신인류?가 되어 즐겁게 살아간다는,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굉장히 시대를 앞서간 호러물이더군요. "만화의 길" 에서는 데즈카 오사무, 이시노모리 쇼타로, 아카츠카 후지오 등 다른 거장들보다 못한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누가뭐래도 후지코 후지오 역시 뒤지지 않는 천재임에는 분명해요. 

그리고 소설가로 계속 활동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기억에 남습니다. 소설가가 되고 처음 안 사실은 계속 하는게 정말 어렵다는 점이라는군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쌓아두었던 것을 토해내면 첫 번째 책은 어떻게든 모양은 갖출 수 있지만, 문제는 그 뒤로 세 번째, 네 번째 때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만이 프로로서 해 나갈 수 있다는 말인데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전해줍니다. 데뷰작이 가장 좋은 작가들이 많은 이유도 마찬가지겠지요.

책을 사랑해서 벌어진 에피소드들도 이야기하는데, 주로 재미있는 책을 읽었을 때의 경험들에 대한 수다입니다. 미카미 엔이 코니 윌리스의 "항로" 라는 소설을 읽을 때, 절묘한 부분에서 상권이 끝났지만 한밤중이라 문을 연 서점이 없었다는 이야기처럼요. 저도 이런 경험이 몇 번 있습니다. "용오"의 복제 예수 에피소드 다음 권을 사기 위해 업무 중 홍대 앞 한양 문고로 뛰어갔던 적도 있고, "불멸의 용병" 이라는 해적판으로 접한 "베르세르크" 의 그리피스 편 다음을 읽기 위해 한 밤중에 도서대여점을 돌아다닌 적도 있으니까요.
페이지를 접거나 메모하는 행동에 대한 대화도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이야기같아 좋았습니다. 저는 둘 다 안합니다만. 책 때문에 담배를 끊고 심지어 하루에 라면 한 개로 버틴다는 이야기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의 베스트셀러는 왠지 꺼린다는 미카미와 구라타의 말도 공감이 갔습니다. 저도 좀 청개구리과라서, 인기가 있다고 하면 그냥 좀 싫거든요.

이렇게 다양한 책에 대한 수다가 장황하게 펼쳐지는데, 공감가는 이야기도 있고 동의하지 못하는 이야기도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고 뭐 그렇습니다. 그래도 재미만 놓고보면 나쁘지는 않았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러나 "탐정, 범죄, 미스터리의 간략한 역사" 리뷰에서 적었듯이, 수다 중 언급되는 작품들 중 국내 출간된 작품 정도는 조사하여 알려주었어야 했습니다. 하루도 안 걸렸을 것 같은데, 이 정도 수고도 하지 않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네요.

2017/06/18

미스테리아 5호 - 미스테리아 편집부 : 별점 2점

미스테리아 5호 - 6점
미스테리아 편집부 엮음/엘릭시르

구하게 되면 읽곤 하는 장르문학 전문 잡지 미스테리아 5호입니다. 작년 초에 출간된 한참 전 과월호지요. 언제나처럼 특집 기사와 신간 소개, 이런 저런 연재 기사, 인터뷰, 수록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장 관심 있던건 특집입니다. "음식 미스터리"가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장르 문학 속 요리'에 대해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있어서 좋은 비교, 혹은 참고가 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아주 별로였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소재가 진부하다는 겁니다. 추리 애호가라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흔해 빠진 내용이에요. 도입부의 식인 천재 범죄자 한니발 렉터, 미식가 탐정 네로 울프가 대표적입니다. 그나마도 인터넷을 뒤지면 알 수 있는 내용일 뿐이고요. 정작 기대했던 내용은 실려있지도 않습니다. 저라면 한니발 렉터의 '전두엽 소테'나 네로 울프의 '소시스 미뉴이'를 소개할 때 최소한 해당 음식의 레시피와 조리 사진을 수록했을 겁니다.
이어지는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속 독약에 대한 소개는 '음식 미스터리'의 범주에 넣기는 무리입니다. 차라리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같은 작품 소개가 더 적절했을 것입니다.

작품 속 요리를 재현하는 코너 역시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주제와 연결되는 요리들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미스테리아 측에서 별다르게 창작한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 참고 도서 속 - 주로 "미국 미스터리 작가들의 요리책" -  요리를 재현한 것에 불과해요. 그나마 셜록 홈즈가 '해군 조약문'을 극적으로 등장시키기 위한 장치로 사용했던 "해군 조약문" 속 치킨 커리 정도만 어느정도 주제에 값할 뿐, 재현한 요리가 작품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도 않았고요. 

마지막의 '10권의 맛있는 미스터리' 소개는 실망의 정점을 찍습니다. 기준, 근거를 알기 어려운 탓입니다. 일단 소개작 중 "스위트 홈 살인사건",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 "기나긴 이별"은 절대로 음식 미스터리로 포장할 수 없습니다. 억지에요. "어느 백만장자의 죽음"은 아슬아슬하게 음식 미스터리 범주 안에는 들기는 한데, 지금은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책을 추천 도서로 떡 하니 내미는 행위는 받아들이기 힘드네요. 조앤 플루크의 한나 스웬슨 시리즈는 빈말로도 좋은 작품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그 외 작품들도 음식 미스터리로는 볼 만 하지만, 추천할만한 수준의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개인적으로는 "특별 요리""맛" 외에는 모두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점수를 주자면 1.5점 정도? 제 개인 프로젝트에 필적할만한 내용이 없다는 점에서는 조금 안심했지만, 여러모로 점수를 주기 힘든 기획입니다. 

다행히 특집 외에는 나쁘지 않습니다. 특히 빼어난 리뷰가 많아서 "미스테리아"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신간 소개 코너는 역시나, 사람을 혹하게 만드는 좋은 리뷰들이 많더군요. 솔직히 읽어본 결과에 따르면 좀 과한 홍보의 결과물이라 생각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이번에 소개된 작품 중 마쓰모토 세이초의 "범죄자의 탄생"은 꼭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원작, 영화를 함께 소개하는 코너에서 "검은 옷을 입은 신부""상복의 랑데뷰"보다 낭만적인 애상으로 넘쳐흐른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네요. 완성도 면에서 천지차이니까요. 영상화된 작품이라는 이유로 소개되기는 했지만, 정보는 공정하게 제공해 주면 좋겠습니다.

연재물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와 건축가 야스이 도시오의 밀실에 대한 대담은 재미있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라 써먹기는 힘들다는 단점은 있지만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았어요. 특히 다다미를 걷어내면 아마추어는 다시 깔 수 없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울러 이 코너를 통해 소개되는 정보를 토대로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내 놓는 아이디어 - 다양한 기술자들이 등장하는 탐정물 - 도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미로관을 예로 들며 전기비가 많이 들었을 것이라는 언급을 하는 등 건축 전문가의 식견이 느껴지는 여러 코멘트들도 기억에 남고요.

한국의 50~60년대 추리 소설을 발굴한 추리소설 평론가 박광규 씨와의 인터뷰 역시 좋습니다.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화재 사고와 관련된 논픽션, 폴란드에서 실제로 있었던 젊은 지식인 발라가 자신이 저지른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쓴 소설 이야기도 아주 흥미로웠는데, 특히 범인 크리스티안 발라와 그의 작품 "아목", 형사 브로블레브스키라는 키워드는 꼭 기억해두었다가 나중에 찾아봐야겠습니다.
 한국 미스터리 소설의 계보를 추적하며 잃어버린 고리를 찾는다는 기획물인 '동아시아 미스터리, 정치적 죄와 서스펜스'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대중 서사의 최고봉이라는 이병주의 "관부 연락선", "별이 차가운 밤이면"과 김내성의 "청춘 열차"는 틈 나는 대로 한번 읽어봐야 겠습니다.
마지막에 수록된 두 편의 단편도 나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전체 별점은 2점입니다. 척박한 한국 장르 문학의 구심점 역할을 해 주는 좋은 잡지이지만, 이번호는 특집이 너무 별로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마지막으로 수록된 2편의 단편의 짤막한 리뷰로 글을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나비 부인의 커튼콜" 

전직 사회부 기자 박희윤과 퇴출 형사 갈호태, 두 남자가 운영하는 카페 '이기적인 갈 사장' 건너편에 '나비 부인'이라는 카페가 개업했다. '나비 부인'은 가면을 쓰고 서빙하는 독특한 컨셉과 인테리어, 커피 맛이 입소문을 타 맛집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던 중, 기묘한 노인이 '나비 부인'에서 진상을 부린 다음 날 '나비 부인' 사장이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최혁곤의 단편입니다. 시리즈 캐릭터로 전직 사회부 기자 박희윤과 퇴출 형사 갈호태 콤비가 등장하는 단편집 "탐정이 아닌 두 남자의 밤"에서 이어지는 시리즈입니다.

전작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유쾌한 분위기의 버디물인데, 아쉽게도 추리적으로는 그닥입니다. 별로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 않는 탓입니다. 초반에 나왔던 수상쩍은 노인이 범인으로 체포되는 등 수수께끼의 여지도 없고요. 

특히 후더닛 물로는 영 아니올시다에요. 오히려 인터넷 상에서 사람을 공격하여 죽게 만드는 일종의 '사이버 테러'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사회파적 측면이 강하며, 이것이 동기로 밝혀지는 과정이 이야기의 핵심인 와이더닛물에 더욱 가깝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좀 가볍고 유머러스한 분위기와 사회파적 설정이 잘 어울리지는 않네요. 인터넷의 비방글로 자살을 한다는 것도 와 닿지 않고요. 또 고3 수험생 투신 사건도 불필요할 정도로 질질 끄는 느낌입니다. 동기 부분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도 와이더닛물로는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진범 검은 뿔테가 살인을 저지른 이유도 불분명하니까요. 남자 친구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낮아요.
진소담의 가족 관계 증명서 정도만 나름 증거일 뿐, 추리가 모두 정황 증거에 기반한다는 약점도 크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읽는 재미는 있지만 추리적으로는 기대 이하였던 범작이었습니다. 그래도 버디물로서는 충분히 즐길만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만큼, 단편집은 한번 읽어 볼 생각입니다. 

"죽음이 갈라 놓을 때" 

기흥 보리산 자락에 있는 무당의 당집에서 처참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완벽한 밀실 안에서 홀로 생존한 채 발견된 유홍석이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되어 사형이 구형되었다. 그러나 판사에게 유홍석의 편지가 도착하는데...

한국에서 보기 드문 본격 추리물들을 발표하고 계신 도진기 판사님 - 현 시점에서 변호사가 되셨지만 - 의 스탠드얼론 단편입니다.

다른건 몰라도 작가가 뼛속까지 고전 본격물 애호가라는 것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입니다. 1인칭의 수기 형태로 전개되며, 끔찍한 사건이 초자연적인 현상과 얽혀 일어난다는 점이 완전 고전 스타일이었거든요. 비교하자면 코난 도일경의 "J. 하버쿡 젭슨의 진술"이라던가, 앰브로스 비어스의 "아울크리크 다리에서 생긴 일"에 수록된 작품들이 떠오릅니다. 제가 워낙 고전물을 좋아하기에, 완전 제 취향이라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게다가 단지 스타일을 따온 것에 그치지 않고, 무당 '인문희'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덕분에 독특한 한국적 오컬트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다는 점도 큰 장점이에요. 특히 그녀가 서상표의 집에 몰래 부적을 붙인게 드러나는 장면은 굉장히 섬찟합니다. 만약 영상화한다면 클라이막스로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문희에 비하면 서상표는 전형적인 한국 쓰레기 남자와 다를 바 없어 지루합니다. 무엇보다도 진상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어요. 괜찮은 고전 오컬트물이 갑자기 크리쳐 호러로 변질되는데 영 어울리지 않았던 탓입니다.
게다가 잘린 목이 경동맥을 물어 뜯었다면 부검으로 밝혀지는게 당연한데 간과되고 있고, 유홍석이 현장 문을 잠가 밀실로 만든 이유도 끝까지 설명되지 않는 등 디테일에서도 문제가 많아요.

하지만 한국에서 보기 드문, 고전 스타일 오컬트 호러 스릴러임에는 분명합니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를 굉장히 탈 텐데 저한테는 호 쪽에 가깝습니다. 무엇보다도 앞서 말씀드린 부적이 드러나는 장면 하나만으로도 별점 2.5점은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