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검색어 외계인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외계인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21/08/06

FoP 소설 : 산책하는 침략자 - 마에카와 도모히로 / 이홍이 : 별점 2점

FoP 소설 : 산책하는 침략자 - 4점
마에카와 도모히로 지음, 이홍이 옮김, 최재훈 그래픽/알마

축제에서 금붕어를 손에 넣은 할머니가 아들 부부를 살해하고 본인 몸도 난자하여 자살했다. 유일한 생존자이자 목격자인 손녀 아키라는 심한 충격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 사건 취재 차 마을을 찾은 르포 기자 사쿠라이는 자기가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고교생 아마노를 만났고, 취재를 위해 서로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한편, 나루미는 남편 신지가 축제에 갔다가 금붕어 하나를 가진 채 병원에 입원한 뒤, 신지가 이전 남편과 전혀 다른 무엇이라는걸 알아챘다.

사람들로부터 '개념'을 빼앗는 외계인인 아마노와 아키라가 만나서 지구 정복을 계획하고, 이를 막기 위해 사쿠라이는 나루미, 신지와 함께 도망친다. 신지는 나루미로부터 '사랑'이라는 개념을 빼앗게 되는데...

연극과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마에카와 도모히로의 SF 소설로 별다른 정보없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도입부는 정말 대박입니다. 정확하게는 할머니가 축제에서 낚은 금붕어를 집에서 '회'라고 하면서 산 채로 잡아 먹고, 그 다음날 아들 부부를 살해하고 자살하는 장면까지요. 굉장히 짧은 분량 속에서 공포심과 흥미를 모두 불러 일으킨 덕분입니다. 

중반부까지도 그런대로 재미있습니다. 이른바 '외계인'들이 선보이는 독특한 능력 덕입니다. 외계인들은 대화하는 상대방이 특정한 단어의 이미지를 머릿 속에 떠올리면, 그걸 빼앗아 올 수 있습니다. 빼앗긴 사람은 그게 뭔지를 잊어 버리게 되고요. '개념'을 수집한다는 목적을 위해서인데, 이를 통해서 여러가지 해프닝이 벌어지게 됩니다. 나루미의 동생 아스미로부터 신지가 '가족' 이라는 개념을 빼앗아 온 뒤, 아스미가 가족에 대해 모든걸 잊고 아빠를 변태로 생각해서 경찰에 신고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중반 이후 결말까지는 완전 별로였습니다. 외계인의 지구 침략 계획을 막기 위한 르포 기자 사쿠라이의 노력이 그려지는데, 하는건 외계인 아마노가 외계인 아카리를 만난 뒤 도망친게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밖에 하는 일들 거의 모두가 즉흥적이라 치밀한 느낌은 전무합니다. 제법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제대로 된 설명도 부족합니다. 신지를 다른 두 외계인과 못 만나도록 막기 위해 노력하지만, 외계인들이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설명되지 않는 것 처럼요. 

이야기의 다른 한 축인 나루미와 신지 이야기는 잔잔한 사랑 이야기일 뿐이라 지루합니다. 사랑 이야기가 나쁜건 아닙니다. 저도 아주 좋아하고요. 하지만 나루미에게서 '사랑' 이라는 개념을 빼앗은 신지가 새롭게 태어나서, 나루미를 위해 살아갈 결심을 하는 마지막 장면이 너무 황당해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잔혹한 외계인이 등장하는 이야기 결말이 "사랑이 지구를 구한다"라니, 독서에 들인 시간이 아까울 정도입니다.

핵심 설정인 "개념 빼앗기"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묘사되는 것도 이상했습니다. 앞서 아스미는 "가족" 이라는 개념을 빼앗긴 뒤, 가족을 아예 기억하지 못했지요. 의사는 아예 폐인이 되어 버렸고요. 하지만 신지에 대한 "사랑"을 빼앗긴 나루미는 멀쩡한 채로 신지를 그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건 전개를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을 바꾼, 편의적 발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볼 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결론적으로는 수준 이하였습니다. 차라리 "기생수"처럼 개념을 빼앗는 외계인들의 냉혹한 행각을 자세하게 보여주는 전개가 더 나았을거에요. 선한 마음을 가진 신지와 개념 빼앗기에 골몰하는 아마노, 아키라의 행각을 대비시키면서요. "개념" 빼앗기는 "죠죠" 시리즈에 등장했던 스탠드 능력과 흡사한만큼, "죠죠", 혹은 "기억파단자"처럼 두뇌 배틀처럼 그렸어도 괜찮았을 것 같고요. "사랑"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메시지 전달이 핵심인 현재의 작품에는 전혀 맞지 않는 방향이었겠지만, 최소한 지금보다야 재미는 있었을 겁니다.

2020/06/12

Q.E.D Iff 증명종료 6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점

Q.E.D Iff 증명종료 6 - 4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CMB만 읽던 와중에 확인해 보니, 본가인 Q.E.D도 2부격인 iff가 어느새 9권까지 나왔네요. 

이번 권은 한 편의 일상계와 한 편의 강력 범죄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Q.E.D 전통의 구성이지요. 보통 한 권에 4편 정도의 이야기를 수록하여 빠르게 진행하는 CMB와는 다르게, 한 개의 이야기를 보다 긴 호흡으로 디테일하게 전달해 주는게 QED의 특징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두 편 모두 이렇게 길게 늘일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디테일한 이야기 전개보다는, 지루하다는 느낌이 더 강해요. 특히 첫 번째 이야기인 "지구에 떨어졌다 말하는 남자"가 심합니다. 미국에서 마약 조직간 항쟁에 휩싸인 와타루의 이야기와 자신이 '외계인' 이라고 주장하는 사이먼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길었던 탓입니다. 사이먼이 토마와 30만 광년 떨어진 곳에서 웜홀을 통해 지구로 이동한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었어요. 이보다 낫기는 했지만 "추락" 역시 여러모로 썩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힘들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에나리와 그 일당이 대학에 진학해서 여전히 탐정 동호회 놀이를 하고 있다는 등 오랜 팬으로서 반길 요소가 없지는 않았지만 추리적으로는 영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다음 권에서는 분발해 주면 좋겠네요.

에피소드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지구에 떨어졌다 말하는 남자"

1986년, 모리타 리사는 미국에서 도미니코를 만나 결혼하지만, 이혼 후 양육비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되었다.
10년 후, 리사의 아들 와타루는 가난한 환경 때문에 마약 판매 조직의 일을 하게 되었지만, 4년 뒤인 14살 때 마약 조직간 항쟁에 휘말려 총상을 입고 버려졌다.
현재, 대학에서 미스터리 연구회를 만든 에나리와 홈즈, 멀더는 수수께끼를 찾다가 멀더의 할머니에게 찾아온 이상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금발의 남자 사이먼이 스스로 우주인이라고 말하며 할머니를 돌보기 시작했다고 했다. 가족은 사이먼이 의절한 고모인 리사의 아들 와타루라고 생각하고 모발을 습득하여 DNA 검사를 진행하는데...

서두에 나오는 미국에서의 잔혹한 갱단간 싸움이 멀더 모리타의 가족과 관련된 일상계로 이어지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핵심 수수께끼는 사이먼의 정체입니다. 우선, 사이먼이 와타루라면 외계인이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유산이 탐난다면 더더욱 본인이 와타루라는걸 밝히는게 도움이 될 테니까요. 그렇다면 왜 외계인이라고 주장할까요? 별다른 사기를 치거나, 할머니 돈을 훔쳐 달아나는 것도 아니니 그 정체는 궁금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DNA 검사 결과를 통해 할머니와 사이먼은 조손 祖孫 관계라는게 드러나서 사이먼은 와타루일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러나 리사와 와타루는 모두 사망했다는게 확인되었다고 통보되어 사이먼의 정체는 미궁에 빠지고 말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이먼은 와타루가 맞습니다. 토마의 추리에 따르면 리사와 와타루가 죽었다고 알려진건 갱단 조직 재판의 증인으로 참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증인 보호 프로그램에 의해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지나치게 묵직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별로 와 닿지도 않네요. 비슷한 주제로 만화를 거의 90여권 가까이 (CMB 포함) 발표하다 보니, 일본 내에서의 이야기로는 이제 한계를 느꼈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미국의 증인 보호 프로그램을 일본 일상계 안에 가져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입니다.
그리고 이 진상이 와타루가 '외계인'을 자칭할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는 문제는 여전합니다. 딸과 의절하고 원조를 거절하여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내게 만든 할머니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게 목적이었다면, '외계인' 이라는 수상쩍은 주장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정체에 대한 의심만 불러오니까요. 수상쩍은 남자를 집에 들인 것도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부탁 때문이지, 외계인이라는 사이먼의 주장은 문제만 일으켰을 뿐이에요. 

또 에나리와 그 일당(?) 들, 토마와 가나의 활약도 거의 없고 주어진 정보에 따른 안락의자 탐정 역할만 마지막에 수행하기 때문에 이야기도 딱히 재미있지 않았어요. 현학적인 재미를 전해주는 부분도 '외계인' 사이먼과 웜홀 등에 대해 논하는게 전부로 이야기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없어서 영 별로였습니다.

이 보다는 차라리 백화점에서 사이먼이 미행을 따돌리고 사라진 방법이라던가, 열쇠가 없는데 집에 들어온 방법에 대한 일상계다운 추리가 더 볼 만 했습니다. 특히 가족 중 유일하게 집에 돌아오지 못한 '리사'를 위해, 그녀가 열쇠를 숨겨두던 곳에 열쇠를 여전히 두고 있었다는 건, 트릭으로서도 괜찮지만 가족 간의 정을 드러내는데 꽤 효과적이라 마음에 드네요.

그래도 긴 이야기에서 건질게 이 정도라면 많이 부족하죠.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평균 이하의 지루한 이야기였습니다.

"추락"

TV 인기 드라마 프로듀서인 에코다 와타루가 빌딩에서 떨어져 죽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옥상에서 탈출하려다가 떨어져 죽은 사고사로 처리되었지만, 한 가지 의문을 남겼다. 왜 그는 직접 탈출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것일까?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 문이 위에서부터 차례로 잠겨서 아무도 올라갈 수 없었던 상황을 풀어낸 트릭은 괜찮았습니다. 경비가 위에서부터 문을 잠그고 순찰하면서 내려온다는 시간차를 이용한 것이지요. 현실적이면서도 설득력 높아서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이 트릭 외에는 모든 부분, 진상과 동기, 진범의 정체 등 모든게 다 엉망이었습니다. 일단 사건부터 보면, 범인이 똑똑해보이지만 문제가 너무 많아요. 에코다의 죽음을 사고사로 위장하기는 했지만 너무 많은 의문이 남게 되니까요. 특히 탈출하기 전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건 바보같은 경찰도 바로 눈치챌 정도로 이상했으며, 토마의 현장 조사를 통해 에코다 와타루가 오른손에 쥐고 있었던 옥상 난간의 콘크리트 조각의 위치는 왼손 쪽이라는게 밝혀지는 것도 범인이 들인 공에 비하면 많이 어설펐습니다.

에코다를 아래쪽 창문으로 들어오라고 유도했다는 상황도 영 이해가 되지 않아요. 조금 기다린다고 얼어 죽을 날씨도 아닌데 건물 옥상에서 아래 층 창문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를 한다? 저는 죽어도 못합니다. 차라리 창문으로 들어오라는 범인에게 경비를 불러달라고 하는게 현실적이잖아요? 

수갑으로 묶여있던 여배우 츠루미 안나가 진범이라는 것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1층에 있던 각본가 온다가 아무도 올라가지 않았다는걸 증명했다는게 중요한 근거로 사용되는데, 온다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건 증명되지 않았으니까요.
Q.E.D에서 자주 써 먹는 인기 소재인 '모든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 상황' 에서 증언만으로 진범을 찾아내는 이야기인데, 이 작품에서는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온다와 신인 여배우 츠무기, 미술 책임자 가즈야가 입을 맞추면 츠루미의 이상한 계획보다는 더 그럴싸한 범행을 저지를 수도 있었을테니까요. 때문에 온다보다는 1층에 아르바이트를 왔던 가나가 있었다고 설명하는게 더 바람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안나의 범행 동기도 설득력이 낮아요. 에코다가 미성년 매춘을 했다는걸 알고, 그의 스캔들 때문에 중요한 배역을 놓칠까봐 살해했다는데 그가 죽었다고 스캔들이 표면화되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프로듀서의 사망이 스캔들로 해고되는 것과 비교했을 때 문제가 덜하리라는 보장 역시 없고요. 에코다가 스캔들로 해고될 경우, 각본가가 미는 배우 츠무기에게 배역을 빼앗길 수도 있었겠지만, 이는 에코다가 사망한 경우도 마찬가지니 구태여 모험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심지어 어느정도 성과가 있는 여배우라고 묘사되는 안나가 직접 범행을 저지른다? 말도 안 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아무리봐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 억지투성이 이야기였습니다. 이 실망감을 다음 권에서는 보란 듯이 만회해주면 좋겠네요.

2024/01/24

외계+인 2부 (2024) - 최동훈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몸속에 가둬진 외계인 죄수의 탈옥을 막으려다 과거에 갇혀버린 ‘이안’(김태리)은 우여곡절 끝에 시간의 문을 열 수 있는 ‘신검’을 되찾고, ‘썬더’(김우빈)를 찾아 자신이 떠나온 미래로 돌아가려고 한다.
한편 이안을 위기의 순간마다 도와주는 ‘무륵’(류준열)은 자신의 몸속에 느껴지는 이상한 존재에 혼란을 느낀다. 그런 ‘무륵’ 속에 요괴가 있다고 의심하는 삼각산 두 신선 ‘흑설’(염정아)과 ‘청운’(조우진), 소문 속 신검을 빼앗아 눈을 뜨려는 맹인 검객 ‘능파’(진선규), 신검을 차지하려는 ‘자장’(김의성)까지 ‘이안’과 ‘무륵’을 쫓기 시작한다.

현재,
탈옥한 외계인 죄수 ‘설계자’가 폭발 시킨 외계물질 ‘하바’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우연히 외계인을 목격한 ‘민개인’(이하늬)은 이것이 시작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모든 하바가 폭발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48분,
마침내 시간의 문을 열고 무륵, 썬더, 두 신선과 함께 현재로 돌아온 이안.
외계인에 맞서 하바의 폭발을 막고 사람들을 구해야만 한다!


지난 주말 감상한 영화. 2024년 첫 극장 감상 영화네요. 1부는 넷플릭스로 감상했었는데, 당시 여러모로 바빠서 리뷰를 적지 않았었습니다.

오락 영화로서는 괜찮습니다. 긴장감을 전해주는 전개와 함께 스케일 큰 폭발과 액션이 연이어 펼쳐져서 숨 돌릴 새 없이 흥미진진하게 감상할 수 있었거든요.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기차가 탈선하면서 벌어지는 파괴 장면은 정말 입이 딱 벌어지는 수준이었습니다. 덕분에 2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습니다.
중간중간 개그 요소들도 적절했고 - "이성계가 왕이 되었는가?" -, 무륵이 아니라 아인이 몸 속에 '설계자'가 들어갔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중요 내용은 요약하여 제공해주어서 1편을 기억하지 못해도 감상에 무리가 없다는 것도 좋았고요.

그러나 고려 시대 도사, 신선들이 펼치는 액션은 80~90년대 홍콩 영화 느낌이라 별로였습니다. 의상은 물론, 사용하는 무기와 기술들 모두 "천녀유혼" 등을 떠오르게 만들더군요. 과거로 가는게 중요했다면, 고려 시대보다는 70년대 쯤으로 넘어가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어요. 작중 이하늬가 분한 민개인처럼 평범한 현대인(도사의 후손이기는 하나)이 외계인과 맞서 싸울 정도의 무예를 갖추었다면, 다른 현대인들도 가능한 사람들이 등장하게끔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라한 장풍 대작전"처럼). 여러모로 설명도 부족하고 억지스러웠던 민개인 역할에 대한 설명도 되었을 테고요.
설명이 부족한건 그 외에도 많습니다. 우왕, 좌왕이 썬더에 의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라는걸 잊고 지낸 이유라던가, 무륵이 신검에 가슴이 찔리는 등의 큰 부상을 입고도 죽지 않은 이유, 진작에 외계인들이 우주선과 썬더를 확보하지 않았던 이유 (신검만 있다고 현재로 돌아올 수는 없으니 오히려 이 둘 만 확보해 두었더라면 신검을 찾으려고 그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음) 등등등.... 5시간 가까운 시간을 할애해도 설명을 충분히 할 수 없었다면 불필요한 소재는 뺐어야 했습니다. 아니, 애초에 1, 2편으로 나눌 필요가 있었는지도 의문이에요. 합치면 5시간 가까이 되는 작품인데, 과연 이렇게까지 길게 끌고갈 이야기였을까요? 길게 끌고간 결말이 신검을 우주선 심장부에 던져넣는 것이었다는 마무리도 시시했습니다. 흥행을 위해서라도 1편으로 만들 수 있게끔 시나리오 단계에서 정리가 필요했었습니다. 여러모로 아쉽네요.

그래도 재미는 있었기에, 그리고 국내에서 이런 SF 판타지 대작을 과감하게 제작해서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제작비를 건지는건 불가능해보이지만, 모쪼록 무운을 빕니다.

2017/04/21

아마겟돈 - 프레드릭 브라운 / 조호근 : 별점 3점

아마겟돈 - 6점
프레드릭 브라운 지음, 조호근 옮김/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그동안 유명세만큼 국내에 소개되지는 않았던 거장 프레드릭 브라운의 단편선입니다. 정식 소개된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네요. 반가운 마음에 바로 구입하였습니다. 

작가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 유머, 반전이 살아있는 단편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는데, 유일한 단점이라면 국내 소개가 너무 늦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2.66.... 인데 반올림해서 3점주겠습니다. 늦었지만 번역 출간된 것만 해도 충분히 점수를 줄 만하니까요. 같이 소개된 "아레나"도 빨리 구해봐야겠습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마게돈" 

마술사를 꿈꾸는 꼬마가 성수를 담은 물총으로 악마를 퇴치한다는 내용으로, 이전에 국내에 소개되었던 단편집 ("마술 반지" 였던가요?) 에서 접했던 작품입니다.

악마가 소환되는 과정의 의외성은 돋보이지만, 딱히 대단한 반전은 없습니다. 그냥 저냥한 소품이에요. 솔직히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기는 어려운데 왜 표제작인지 잘 모르겠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스타 마우스"

과학자 헤르 오베르부르커는 직접 만든 로켓에 생쥐 밋키(미키인데 오베르부르커 발음이 이렇습니다)를 태워 달로 보냈다. 소행성 프록슬에 착륙한 밋키는 프록슬인에 의해 지성을 갖게 되었다.
밋키는 쥐들의 지능을 인간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기계를 가지고 지구로 복귀해 쥐들의 나라를 만들 꿈을 꾸었지만, 아내 미니 우리에 설치된 전기 장치 탓에 원래의 생쥐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쥐가 놀라운 지능을 가지게 되지만 허무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내용은 "앨저넌에게 꽃을"이 떠오릅니다. 앨저넌도 쥐였지요. 

작품은 오베르부르커 시점에서 로켓 계획이 펼쳐지는 전반부와 밋키 시점의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 마지막에 말하는 쥐를 등장시킨 후, 그 이유를 후반부에서 설명하는 연재물같은 구성인데 덕분에 독자의 흥미가 끝까지 유지됩니다. 황당하지만 다소 허풍섞인 글도 매력적이고요. 복선인 미니 우리에 설치된 전기장치도 잘 안배되어 있습니다.

허나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소재임에는 분명합니다. 비슷한 류의 이야기는 이미 너무 많은 탓입니다. 물론 이 작품은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선구자적인 작품일거에요. 시대가 너무 지난 뒤 읽은게 안타깝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모자마술" 

두 커플이 더블 데이트를 즐기던 중, 밥이 카드 마술을 선보였는데 월터가 트릭을 말해버렸다. 자존심이 상한 밥은 월터에게 마술을 보여달라고 종용했고, 등쌀에 못 이긴 월터는 모자에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기묘한 생물을 꺼내어 보여주는데...

10페이지에 불과한 초단편인데 밥과 월터의 신경전으로 긴장을 자아내다가, 월터가 기묘한 생물을 꺼내는 클라이막스로 끌고 가는 과정이 탁월합니다. 

그러나 월터가 외계인일지도 모른다는 여운을 남기는 결말은 안이했어요. 좀 쉽게 간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불합리 행성" 

행성을 다니며 공연을 하는 '나'는 새로운 행성을 발견하고 고용 선장인 조니, 아내 , 딸 엘렌과 착륙했다. 행성에 '불합리 행성'(시리우스 1번, 2번 행성이 이미 있는 상태에서 '0'번이 되는 궤도의 행성을 발견한 것이므로)이라고 이름 붙인 후, 행성을 탐사하면서 상상하기 어려운 기묘한 생물과 현상을 목격하는데...

행성에 나타났던 기묘한 동물과 거리는 모두 바퀴벌레를 닮은 행성 거주민이 투사했다는 내용의 SF 단편입니다. 이전 다른 앤솔로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물질 대신 정신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설정은 꽤 자주 변주되었던 것인데, 이 작품처럼 1940년대부터 인용된 고전적인 소재라는건 몰랐네요. 그만큼 작가가 시대를 앞서갔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작품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조금 뻔하지만 코믹한 내용에 의외의 반전이라는 작가의 특징이 잘 나타나 즐겁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예후디 장치"

'나는 미쳐가고 있다.'라는 충격적인 글로 시작되는 단편으로  예후디 장치라는 이름의 - 정식 명칭은 자율 자동암시 교열진동 초가속기' - 기계가 핵심입니다. 사람을 가속시켜 원하는 일을 해 주도록 만들지만, 본인은 자기가 직접 빠르게 움직여 무언가를 했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계이지요. 그런데 예후디라는 "이름"을 부르는 탓에 무형의 존재가 실체를 갖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약간 동양적인 설정이죠? 이름을 불러야 의미를 갖는 꽃처럼 말이죠.
덕분에 '예후디'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명령인 "자살이나 하라고"에 따라 자살을 해 버려 동작이 멈춘다는 결말로 이어지는 전개가 아주 깔끔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예후디 장치를 이용해 '나'가 썼다는 마지막 반전도 놀라웠고요.

진으로 만든 칵테일인 '진 벅'이 주요한 소재 중 하나로 등장하는 것도 이채롭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칵테일로 먹지만 다음 잔은 진을 7/8 넣어서, 마지막은 진만 따르고 소다수는 건드리지도 않고 먹지요. 하긴 이런 기계를 보고 겪으면 제정신이기는 힘들테니까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디테일한 설정에 녹아든 동양 철학적인 사고 방식과 반전까지 잘 갖추어진 좋은 작품입니다.

"웨이버리" 

사자자리 어딘가에서 전파를 쫓아 지구로 온 베이더 (inavader)가 모든 전기를 빼앗은 후를 그린 단편입니다. 

분명 지구가 정복당한 상황인데, 주인공 조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더 행복해진다는 결말이 독특합니다. 전기는 없지만 증기기관, 말로 동력을 대체한 뒤 자전거 등으로 더욱 건강해지고, 텔레비젼과 라디오에 시간을 뺏기지 않아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취미 활동을 즐기게 된다는 내용이거든요.
이러한 점에서는 SF라기 보다 풍자극으로 보는게 타당할 수도 있습니다. 시사하는 바도 크고요. 현재를 무대로 인터넷을 잡아먹는 침략자가 등장하는 내용으로 변주해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하늘의 혼란" 

1945년 작품으로, 무대는 1987년입니다. 작중 등장하는, 하늘의 별을 조작하는 기계에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함이겠지요. 

그러나 천문학은 건판 사진기에 의지하고 있고, 라디오가 주요 미디어로 등장하는 등 미래에 대한 상상력만 놓고 보면 보잘 것 없습니다. 또 천문대 연구원 로저 플러터에서 물리학자 밀턴 헤일 박사로 주인공이 이동하는 과정도 매끄럽지 않습니다. 로저 플러터 없이 헤일 박사로만 이야기를 끌고나갈 수도 있었을텐데 괜히 이야기를 벌인 느낌이에요. 헤일 박사가 택시와 함께 장거리 여행을 하는 묘사도 불필요했고요.

그러나 이 작품은 분명 걸작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미래에 대한 상상력 자체는 별로지만 미래에 대해 진짜로 통찰력을 발휘한 부분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광고에 대한 것입니다. 하늘의 별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운동이 광고를 위한 것이었다는 반전, 결말은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아이이디입니다. 천재 스니블리가 자신의 발명품으로 비누 광고를 하는데 성공하지만, 철자가 틀려 쓰러진다는 결말도 유쾌하고요.

조금만 더 압축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리고 서두에 언급한 단점이 없었더라면 완벽했겠지만 아이디어와 반전만으로도 최고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노크" 

"지구 최후의 남자가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장 두 개로 이루어진 짧고 훌륭한 공포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단편입니다. 그러나 공포물은 아니고 기발한 SF에요. 주인공 월터는 잔이라 불리우는 외게인들에게 채집된 인간으로, 그 외 다른 인류는 모두 잔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월터는 백 종류에 달하는 무작위 채취된 동물 암수 한 쌍 중 하나로, 잔들의 동물원에 수용된 신세이고요.
거의 불멸에 가까운 수명을 가진 잔은 인간과 동물들의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월터는 방울뱀을 이용하여 잔 두명을 죽게 만드는데 성공하여 그들이 떠나게끔 유도합니다. 첫 두 문장은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여자, 이브가 될 그레이스가 월터의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고요.

그런대로 재미있지만 허술한 것도 사실입니다. 서두만큼은 괜찮았는데 말이죠.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저 같으면 어떻게 썼을까요? 지구 최후의 남자가 방 안에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린다... 과연 문을 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딜레마를 다뤘을 것 같아요. 누가 문을 두드렸는지 너무나 알고 싶어서 혹시 죽을지라도 그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다는 내용으로 말이지요. 혹시 내가 지구에 혼자 남은 생명체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과연 문을 두드린 것은 누굴까요? 아, 저도 궁금해지는군요.

"모든 선량한 벌레눈 괴물들이" 

SF 작가 엘모와 아내 도로시 앞에 안드로메다 2에서 온 외계인 5명이 동물들의 몸을 빌어 나타났다.

어딘가에서 봤음직한 내용입니다. 외계인들이 동물들의 모습으로 지구인 앞에 나타난다는 설정은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그러나 이 작품 속 외계인들이 엘모와 도로시 앞에 나타난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딱히 우주선을 고치는데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감시 때문에 사람만 부족해졌을 뿐이에요. 엘모에게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준다는 것도 창작력을 준 게 아니라 머릿 속에 있는 일종의 장애물을 제거해 주었다는 설정이라 여러모로 애매해보였고요.

그다지 기발하지도 않고 내용도 설득력이 낮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광기에 빠져라" 

조지 바인은 3년전 교통사고로 이전 기억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는데, 어느 날 편집국장 캔들러가 그에게 병을 핑계로 정신병원 잠입 취재를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기억 상실은 핑계일 뿐, 조지 바인은 27세의 나폴레옹이 시공을 초월하여 이식된 상태였다. 조지는 취재 지시의 목적이 자신의 정신병을 몰래 치료하려는 음모일 수도 있다고 여겼지만 취재에 응해 정신병원에 잠입하는데... 

인간은 실수이고, 기생충이고, 게임의 말일 뿐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백만 개의 행성에는 그 행성의 유일한 지성인 곤충 종족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지성이 한데 모여서 단 하나의 우주적 지성을 만든다. 바로 신을!

개미가 신과 같은 절대자라는 반전이 독특한 작품으로 수록작들 중에서는 가장 긴 작품 중 하나입니다. 70여 페이지에 이르니까요.

초반은 꽤 흥미롭습니다. 정신병원의 비밀도 궁금할 뿐 아니라 조지 바인은 사실 나폴레옹이라는 설정도 꽤 매력적이니까요.

그러나 나폴레옹은 개미들의 게임을 위해 시공을 초월한 것이라는 짤막한 해석 외의 초반 떡밥은 하나도 회수하지 못합니다. 정신병원의 비밀은 무엇인지, 조지 바인을 본인 몰래 정신병원에서 치료하기 위한 음모였는지 아닌지, 나폴레옹을 구태여 조지 바인에게 소환시키면서까지 하려고 한건 무엇인지 등등은 결국 등장하지 않으니까요.
아울러 인간은 별거 아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것이 진짜 절대자다라는 설정도 지금 읽기에는 식상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진실탐지기" 

2년 전 실종된 범죄 심리학자 채플 박사와 범죄자들이 거짓말 탐지기를 빠져나간 상황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유능한 탐정 벨라 조드가 사건 해결에 도전한다.

1999년을 무대로 한 SF 범죄물인데, 탐정과 범죄자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범죄는 그다지 비중이 없습니다. 유능하다는 탐정 벨라 조드의 수사도 변장과 함정 수사가 전부고요.

하지만 최면을 통해 기억을 지워 거짓말 탐지기를 통과하게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정말 획기적입니다. 사건 자체에 대해 기억을 하지 못하므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는건데, 참신하고 대단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처음 등장한 것인지 궁금하네요.
이어지는 반전도 그럴듯합니다. 거짓말 탐지기 통과를 요청한 범죄자는 모두 중범죄자들인데, 그들의 기억을 지워주면서 선량하게 살게끔 최면을 걸어 결국 범죄 자체가 없어지게 만든다는 것으로 역시나 탁월한 아이디어였어요.

한마디로 여러모로 시대를 앞서간 프레드릭 브라운의 아이디어가 빛나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불사조에게 보내는 편지" 

18만년 동안 살아온, 15만배 느리게 사는 남자의 독백으로 핵 전쟁이 일어나 문명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냉전시대의 공포를 희망적으로 설명하는 소품입니다. 불사에 가까운, 15만배 느리게 사는 남자에 대한 설정은 재미있으며, 인류는 역동적이기에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는 희망찬 메시지도 인상적입니다.

허나 배경이 되는 사상과 메시지 모두 지나치게 오래된 것이에요. 때문에 지금 시점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군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밋키 다시 우주로"

8년만에 다시 쓰여진, 똑똑해진 생쥐 밋키 이야기입니다. 어지간히 캐릭터들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이번에는 새로 투입된 흰색 생쥐 화잇티와의 사투를 그립니다. 일종의 모험물이랄까요? 화잇티가 X-19 장치를 조작하여 흰 쥐를 생태계 정점에 놓으려 한다는 악마적인 발상이 눈길을 끌며, 지성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결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앨저넌에게 꽃을"과 역시나 비슷하네요. 앨저넌 이름이 밋키였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녹색의 땅"

붉은 행성 크루거 4에 추락한 우주비행사 맥개리는 이 행성에 추락한 것으로 알려진 우주선 잔해를 찾아 정글을 헤멘다. 트랜지스터 부품을 구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그의 유일한 파트너는 5족 생물 '도로시'. 어깨 위에 올려놓은 도로시는 흡사 여성의 손길 같고, 그런 도로시에게 위안을 느끼며 말을 건넨다. 그러던 중 우주선 하나가 그를 발견한다!

붉은 행성에서 '초록색'에 대한 환상을 품고 살아가는 광인의 이야기입니다.
구하러 온 아처 중위에 의해 도로시는 존재하지도 않고, 4~5년이라고 믿었던 표류 기간이 무려 30년이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 까지는 버틸 수 있었지만 지구가 우주 전쟁으로 파괴되어 초록색이 남아있지 않다는 말에 결국 정신이 붕괴해버리고 만다는 결말은 섬찟합니다. 붉은 행성 크루거와 그곳의 생태계에 대한 짤막한 묘사도 상상력을 많이 자극하는데, 이 부분은 영상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이 역시 지금 읽기에는 조금 낡은 반전이었어요. 예전에 다른 앤솔로지에서 읽었기에 더 그러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인격 교환기" 

편집장 맥기에게 괴롭힘당하는 기자 '나'는 발명가 타킹튼 퍼킨스의 신발명 취재를 나선 후, 그가 '연격 교환가'라는 것을 발명한 것을 알게 되는데...

도라에몽스러운 발명품이 등장합니다. 내용도 성인용으로 변주한 도라에몽같고요. 발명품으로 소동이 일어나고, 결국 주인공들이 모두 행복해지는 결말은 도라에몽 그 자체이지요. 

하지만 소동 이후 모든게 제자리를 찾는 도라에몽 장치와는 다르게 타킹튼 퍼킨스와 맥기의 몸을 바꾸어서 최악의 파트너들끼리 함께 살게 만든다는 결말은 아주 통쾌했습니다.

평범한 아이디어를 전개와 결말로 보완한 작품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무기" 

그레이엄 박사는 궁극의 무기를 연구하고 있는 과학자로, 그의 유일한 고민은 정신지체아인 아들 해리였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니만트라는 인물이 찾아와 무기 개발을 그만둘 것을 부탁하는데... 

인류가 궁극의 무기를 가질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한 프레드릭 브라운의 답변. 

4페이지밖에 안되는 짤막한 분량이지만 흥미로운 도입부와 캐릭터, 진지한 주제에 놀라운 반전까지 모든 걸 갖춘 걸작입니다. 인류가 궁극의 무기를 갖는건, 백치가 장전된 리볼버를 갖는 것과 다를바 없다는 시각은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시대를 뛰어넘은 측면도 있습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카투니스트" 

끔찍하고 흉물스러운 외계인 만화를 그린 후, 빌 개리건은 그가 그린 외계인과 똑같이 생긴 외계인의 초대를 받았다. 그들은 만화에 감명해서 개리건을 황실 만화가로 임명하려 했다... 

"외눈박이 나라에 간 두눈박이" 이야기를 변주한 SF입니다. 서로를 끔찍하고 흉물스럽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점이 그러하지요. 그러나 결말은 정 반대입니다. 개리건이 외계인 모습이 된 다음에 익숙해진 후 모든 행복을 거머쥐거든요.

그러나 좋은 결말, 반전이었다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반전의 매력은 부족하며, 여러모로 쉽게 간 느낌이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돔" 

'죽음보다는 고독이 나은 법이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죽음보다는 나은 법이다.'

카일 브레이든은 핵전쟁이 발발했다는 뉴스를 듣고 구 형태로 완벽한 방어막을 이루는 "역장"을 작동시켰다. 카일은 죽음보다 고독이 낫다는 생각으로 30년을 버텼지만, 결국 홀로 죽기가 두려워 역장을 끌 결심을 하는데... 

착각으로 스스로 고립되어 이방인이 된 남자를 그린 작품으로 주제는 좋습니다. 냉전 시대를 극한까지 그려낸 설정도 볼만하고요. 하지만 홀로 돔 안에 갇히는 것을 선택한 카일 브레이든의 심정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고독보다는 죽음이 나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리고 밖의 세상은 유토피아가 되었다라는 반전도 평이합니다. 차라리 사랑을 고백한 '미라'가 그를 떠나지 않고 둘이서 같이 30년간 늙어가다가 유토피아를 만난다는 설정이 소설적으로는 더 나았을 것 같네요. 만약 그랬다면 미라에 의해서 지옥이 열렸을테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스폰서의 한마디" 

1954년 7월 9일 수요일 오후 8시 30분, 전 세계 라디오에서 기묘한 방송이 들려왔다.
아주 잠시 먹통이 된 후 차분하고 평범한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스폰서의 한 마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1초 후 다른 사람이 말했다. "싸워라."
미국 대통령은 이 방송이 현재 기술로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현상이라는 분석 결과를 전달받는데... 

'인간은 명령을 받으면 반대로 행동한다'는, 신뢰할 수 없는 심리학 설정에 기반을 둔 작품입니다. '밀그램 실험'이 있기 전에 쓰여진 이야기겠지요. 

그래도 과학적, 정치적인 분야에서 시작하여 종교적인 분야까지 전문가들에 의한 분석이 이어지면서, 이 명령은 들으면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만큼은 꽤 설득력있게 그려집니다. 사탄이 내린 명령이면 당연히 들으면 안되고, 신이 내린 명령이라면 지성과 선의가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신성한 반어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논리인데 그럴듯했어요. 분석 덕분에 여론도 싸우지 않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는 전개도 괜찮았고요.
또 이러한 평범한 냉전 시대를 무대로 한 우화임에도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끄는 요소가 존재하는 것도 장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스폰서"라는 단어죠. 대체 우리, 지구, 인류의 스폰서는 누구란 말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지 않고, 스폰서가 누군지 모르므로 명령을 들을 수 없다는 결론과 함께 작품은 끝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약간 흥미로왔을 뿐 기대에 부합하지는 못했습니다. 결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 큽니다. 별반 대단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무래도 냉전 시대 관련 설정의 작품은 여러모로 뻔하고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소재임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나와 플랩잭과 화성인" 

광산을 찾아다니는 나와 당나귀 플랩잭은 어느날 화성인을 만났다. 화성인은 내가 아니라 플랩잭이 지성체라 여겨 대화를 시도하고, 그들의 지구 침공 계획을 털어놓는데... 

이른바 '오해와 착각' 개그물입니다. 나와 플랩잭의 티격태격 묘사가 유쾌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오해로 인한 난처한 상황도 볼거리고요. 무엇보다도 플랩잭이 화성인에게 무언가 멋진 아이디어를 제공해서 그들이 지구 침공을 포기하고 돌아가는데, 나도 그렇고 독자도 그렇고 플랩잭이 준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결말까지 유쾌합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마크 트웨인이 쓴 SF를 읽는 느낌이었달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어린 양" 

수록작 중 가장 이질적이라 할 수 있는 싸이코 스릴러로 "진, 베르무트에 젖은 올리브 색깔"이라는 묘사나 여러 시, 음악, 밤이라는 배경에 대한 묘사는 '코넬 울리치'가 썼다 해도 믿을 정도로 디테일합니다. 아내 램이 살아 있는 것 처럼 묘사하다가 마지막에 그녀는 이미 죽은지 오래라는 것이 밝혀지는 장면도 섬찟했고요. 유머러스한 블랙 코미디나 반전이 있는 장르 문학에 강한 작가인줄 알았는데 이런 순문학적인 스릴러에도 능하다니 과연 거장은 거장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날개짓 소리"

15달러에 영혼을 팔려던 무신론자가 급하게 멈추고 15달러를 날린 이유는? 에 대한 짤막한 소품입니다. 주인공이나 독자나 답을 찾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뭐가 껄끄러웠던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특별히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이럴 바에야 영혼을 팔고 할아버지가 죽은 뒤 무언가 기묘한 일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가는게 더 재미있었을 것 같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거울의 방" 

시간을 되돌리는 일종의 타임머신이 등장하는 SF로 타임머신에 대한 아이디어와 함께 '50년'을 계속 되돌아가는 주인공에 대한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돔"의 주인공은 역장을 끄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 작품의 주인공은 타임머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면 인류가 '불사'의 존재가 될 수 있는 위험 때문에 갖혀 지낸다는 점에서 좀 비슷한데, 냉전 시대의 뻔한 SF인 "돔"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설정도 보다 디테일하고요. 50년 동안 무얼 어떻게 먹고 사는지 등 깊이 들어가면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평균 이상의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다음은 모두 1~2페이지짜리 쇼트쇼트입니다. 줄거리 요약은 생략하고 단평만 적겠습니다.

"해답" 두말할 필요 없는 걸작. 별점은 5점.

"데이지" 짤막하지만 담겨야 할 모든 것이 담겨있는 교과서적인 쇼트쇼트. 별점은 4점.

"대동소이" 뻔했음. 별점 2점. 

"예절" 이문화간 커뮤니케이션을 다룬 유쾌한 소품. 별점은 3점.

"허튼소리" SF 작가의 자조적인 농담으로 보이는 소품. 별점은 2.5점.

"화해" 뻔하고 뻔하도다. 별점 1점.

"탐색"신이 두려워한 사람이 누구인거죠? 주인공 피터의 정체는 신선했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별점은 2점.

"형기" 과학적인 농담인데 꽤 써먹음직한 반전이 돋보임. 별점은 2.5점.

"유아론자" 이 정도면 신성모독이 아닐까... 여튼 신선한 창조 이야기. 별점은 2.5점.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진정한 소리를 찾는 음악가 둘리 행크스가 우연히 만난 노음악가를 살해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호우보이'라는 악기를 손에 넣은 뒤 맞는 최후에 대한 이야기.
음악에 대한 장황한 묘사가 펼쳐지는 순문학스러운 범죄 판타지로 '하메룬의 피리부는 사나이'로 끝나는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17/03/25

삼체 - 류츠신 / 이현아 : 별점 2.5점

삼체 - 6점
류츠신 지음, 이현아 옮김, 고호관 감수/단숨

나노 공학자 왕먀오는 경찰에게서 오래전 흠모해왔던 여성과학자 양둥이 자살했다는 소식과 함께, 그녀가 속했던 단체 '과학의 경계' 조사를 부탁받았다. 완곡하게 거절했지만, 이후 갑자가 왕먀오 눈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카운트다운이 보이는 현상이 일어났다. 왕먀오는 이 현상을 밝히기 위해 온라인 게임 '삼체'에 접속하여 플레이하는 한 편, 양둥의 어머니 예원제로부터 과거 중국이 만들었던 '홍안' 시스템에 대해 듣게 되는데..

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는 중국산 SF입니다. SF는 아주 좋아하지는 않지만, 호기심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중국산 장르문학 추리물 두 편 -"13 .67", "기억나지 않음, 형사" -이 괜찮았던 기억도 한 몫 했고요.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첫 번째는 양둥을 비롯한 '과학의 경계'에 소속된 세계 석학들의 잇단 자살 사건, 그리고 눈 앞에 기묘한 카운트다운이 펼쳐진 나노 기술 과학자 왕먀오가 경찰 스창등과 함께 진상을 추적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과정에서 온라인 게임 "삼체 (theree body)" 플레이가 상세하게 설명되지요.
두 번째는 여성 과학자 예원제를 주인공으로, 그녀가 문화대혁명 기간 박해를 받다가 우연히 '홍안' 시스템에 근무하게 된 후 외계와 교신에 성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부분에서 모든 수수께끼가 밝혀지고, 이후 삼체인들의 지구 침공 계획이 상세하게 드러나며 마무리됩니다.

이 이야기들 모두 탄탄한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놀라운 상상력을 담아내고 있으며, 묘사와 깊이가 실로 대단합니다. 특히 수학적으로 꽤 오래된 문제라는 '삼체 문제'를 활용한, 세 개의 태양이 불타는 센타우루스성 알파 삼중성계의 삼체 문명을 그려낸 묘사와, 이 삼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라인 게임에서 각종 해법을 제시하는 부분이 돋보입니다. 그 중에서도 한 가지를 꼽으라면, 진시황의 3천만 군사를 이용하여 컴퓨터를 만드는 장면을 꼽고 싶네요. 컴퓨터를 인력으로 대체하는 아이디어인데 그야말로 대국적인 발상과 과학이 잘 결합된 어마무시한 장면이었기 때문입니다. 상상만해도 웅장하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압도적이었어요. 영상화가 기대될 정도로 말이죠.
그 외의 디테일들도 실제 과학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예원제가 우연히 태양이 전파 증폭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 삼체인과 통신이 가능했다는 핵심 설정 역시 이런저런 과학적 이론을 곁들여 그럴듯하게 설명해 주며, 마지막에 큰 활약을 하는 나노 소재 '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중국산 SF답게 중국적인 설정이 듬뿍 담겨있습니다. 예원제가 겪은 문화 대혁명에 대한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홍위병이 예저타이를 핍박하는 과정의 묘사부터 섬찟합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과학을 철학과 사상으로 포장하려는 헛된 노력도 눈물겹고요(물리학은 잘 모르지만 빅뱅이론이 신의 존재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는 정말이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특이한 배경 설명에 그치지 않고, 문화대혁명의 병폐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통해 예원제가 삼체인을 불러들이게 된 핵심 이유인 '인간에 대한 실망감' 이라는 것에 굉장한 설득력을 더해주는 것도 좋았습니다.
아울러 모든 이야기의 발단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이 외계 문명과의 교신을 위해 1960년대 이미 전파를 송출하는 안테나를 설치했다는 배경 설정도 그럴싸했습니다. 정말 그랬음직하다! 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그런데 홍위병, 문화 대혁명에 대한 비판이 엄청나다는 것은 좀 신기하네요. 그만큼 엄청난 과오이자 실책임에는 분명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중국 내에서 이렇게까지 비판적인 작품이 나올 정도인지 좀 의문이거든요.

삼체인과 지구인의 관계도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삼체 반군이 '인류 사회는 이미 자신의 능력으로 자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광기를 억제할 수 없기에 주께서 강림해야 한다. 주께서 사악한 인류에게 처벌을 내려야 한다'는, 전 인류 멸망이 소망인 강림파와 어떻게든 삼체의 움직임을 밝혀내어 삼체인을 구원하려 하는 구원파로 나뉜다는 설정도 괜찮아요. 사실 강림파 쪽 아이디어는 제법 많이 보아 왔지만(기생수의 히로가와도 비슷한 인물이죠), 구원파쪽은 확실히 신선했어요. '주'라고 불리울 정도로 전능한 존재가 스스로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도 아이러니컬한데, 그들이 벌레로 부르는 미약한 존재들이 '주'가 살아날 수 있도록 노력을 한다니 이래저래 재미있는 관계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삼체인이 지구의 과학을 무너트리려고 획책한다는 발상도 나쁘지 않아요. 그들의 기술력으로도 지구에 도착하기까지는 400여년 걸리는데, 그 사이에 지구인이 맞서 싸울 수 있는 과학력을 보유할 수도 있으니 그걸 원천봉쇄하자는 생각은 충분히 합리적이지요. 그것을 위해 '지자'를 만들고, 이런저런 작전으로 과학자들이 자살하게 만드는 등의 과정도 특유의 묘사력을 발휘하여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고요.

그러나 이러한 상상력과 묘사를 뺀다면 좀 별로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세 가지 이야기가 서로 잘 엮여져 있지 않은 탓이 큽니다. 특히 마지막, 삼체인이 '지자'를 만들어 지구 침공에 활용한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겉돕니다. 앞부분에서 현재의 지구를 기준으로, 벌어지는 수수께끼에 대한 장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다가 갑자기 외계인 기준으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풀어내니까요. 차라리 현재의 왕먀오, 과거의 예원제 이야기를 가지고 현재의 수수께끼를 밝혀내는 이야기를 1부로, 2부는 삼체인 시점으로 지구 침공 작전을 다룬 이야기로, 3부는 400여년 후 지구에서 두 세력이 자웅을 겨루는 방식의 3부작 구성이 더 나았을 것 같아요. 제목과도 잘 어울리잖아요. '삼체 삼부작'.

또 현란한 설정으로 포장하고는 있지만 이야기가 진부하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핵심 내용은 외계인의 지구 침공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깊숙히 들어가도 '외계인과 통신하며 지구 문명 멸망을 바란 삼체 반군을 처단하고, 400년 후 도착할 삼체인과 맞서 싸우기 위한 결의를 다진다'가 전부입니다. 이게 애니메이션이라면 도입부에 불과하지요. 앞서 말씀드렸듯 3부작의 1부에 해당할 뿐이에요.
외계인이 생존을 위해 지구를 침략한다는 내용도 쎄고 쎘습니다. 그들 행성이 모종의 이유로 절멸의 위기를 맞는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이 작품에서 '삼체'를 가지고 조금 더 과학적으로 그럴듯하게 그려내었을 뿐 설정 외의 새로운 점은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삼체인에 대한 설정도 극단적으로 생존만을 위해 모든 것을 억압하고 말살했다는 점에서 진부합니다. 젠트라디와 별로 다를것도 없더라고요. 이래서야 지구에 침공하더라도 민메이 어택에 쓸려나갈지도 모르겠어요.

삼체 게임을 통해 설명되는 알고리즘 역시 현란하기는 하지만 이야기와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이른바 '구원파'가 삼체인을 구원하기 위해 세개의 태양 움직임 예측을 어떻게든 밝혀내기 위한 게임이라는 설정인데, 지구보다 과학이 훨씬 발전한 삼체인에게 지구인이 무언가 해결 방법을 내 놓는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같은 물리적 세계관을 지녔다는 설정이기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모순관계를 그려낸 설정이라고 이해는 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비중이 컸어요.

물론 재미있고 괜찮은, 신선한 SF라는건 맞습니다. 재미도 있고요. 무엇보다도 자국의 아픈 역사와 하드 SF를 결합한 아이디어만큼은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뻔한 이야기를 과대 포장한 느낌도 지우기는 힘드네요. 중국이 무대가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이 무대였다면, 아니면 일본을 무대로 한 애니메이션 작품이었다면 이렇게 신선하게 느껴지지도 않았을테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06/08/21

내이름은 콘래드 (This Immortal) - 로저 젤라즈니 / 곽영미, 최지원 : 별점 4점

내 이름은 콘래드 - 10점
로저 젤라즈니 지음, 곽영미.최지원 옮김/시공사

지구가 핵전쟁으로 거의 멸망하고 타이탄과 화성 등지에 이주해 있던 이주인들이 외계인 베가인들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연명하여 지구도 베가인들과 테일러에 있는 부재자 정부를 통해 타격받지 않았던 지역을 중심으로 지배되는 시기.
지구 정부의 예술 유적 문서 보존국의 국장 콘래드 노미코스는 코르트 미슈티고라는 중요한 지위의 베가인의 지구 관광을 가이드할 것을 명령받고 래드폴이라는 저항 단체의 수장 도스 산토스와 경호원 하산 등 수상쩍은 인물들과 이집트와 그리스 등을 경유하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콘래드 노미코스는 수백년을 살아온 인물로 일찌기 래드폴을 결성하여 지구정부와 베가인들에 대항했었고 그 이외에도 수많은 전설을 남긴 인물. 그는 이 여행에 뭔가 숨겨진 의미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미슈티고의 경호를 강화하지만 수많은 위험이 그들을 기다리게 되는데...


젤라즈니 선생의 첫 장편입니다. 좋아하는 작가라는 이야기를 몇번 한 것 같은데 지금 와서 읽었다고 하니까 좀 늦은 감도 있고 창피하기도 하지만 어쨌건 완독하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네요.
다른 장편이었던 "신들의 사회"는 동양권, 그 중에서도 주로 인도 신화와 관련된 이야기가 펼쳐졌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리스 신화 중심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예를 들자면 주인공인 콘래드의 설정 -불노불사의 인물인것 같다는 것과 타고난 괴력과 체력, 그리고 독특한 외모- 은 그리스 신화의 한 영웅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온 것 같고, 콘래드가 외계인 관광 가이드(?)를 하며 펼치는 괴물, 식인종들과 벌이는 모험 역시 헤라클레스의 모험과 굉장히 유사하죠. 심지어 식인종 우두머리의 이름은 "프로쿠루스테스" (침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죽였던 신화속 악당) 이기까지 하니까요.
하지만 신들의 사회는 신들 그 자체의 이야기가 중심인데 비해 이 작품은 "인간" 의 이야기로 전개되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개인의 능력이나 파워, 그리고 불노불사의 존재라는 것은 물론이고 한 개인이 범 우주적인 거대한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것 자체를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자기 자신이 시도한 노력이 지금 와서는 무의미한 것으로 보인다라는 전개는 달리 생각해 본다면 "초인 로크"와 가장 비슷할 것 같네요. 히지리 유키가 이 작품에서 뭔가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개인적으로는 콘래드가 자신의 신성이나 영웅성을 거부하고 한 인간으로 남은 이후에 장편이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것이 굉장히 특이하면서도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전체적인 스케일 자체는 작아졌지만 오히려 더 현실감있게 와 닿는 설득력있는 전개가 된 것 같거든요. 외계인에 대항해 싸우는 슈퍼 히어로물보다는 전 이쪽이 훨씬 마음에 들더군요. 뭐 중간중간에 불필요한 액션 장면이 너무 길고 특히 "흑수"라는 존재와의 마지막 사투는 너무 우연에 의지하는, 뜬금없는 감이 있지만 읽는 재미는 확실한, 젤라즈니 선생의 필력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수작이라 생각합니다.

뒷부분에 같이 수록된 "프로스트와 베타" 역시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SF적으로 풀어낸 걸작이죠. 물론 저는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에 수록된 버젼으로 이미 읽긴 했지만 이 책에는 번역가가 관련된 정보를 잘 제공해 주고 있어서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 같네요. 하여간 아직 젤라즈니 선생의 글을 접하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한번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은 책이었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2014/10/24

트랜스포머 - 사라진 시대 (2014) - 마이클 베이 : 별점 3점

오토봇과 디셉티콘의 전투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정부의 한 조직에서 오토봇과 디셉티콘 구분 없이 모든 외계 로봇을 말살하려는 작전을 시작했다. 작전에 휘말려 큰 상처를 입은 옵티머스 프라임은 고물차로 변장해 몸을 숨겼고, 우연히 이 고물차를 구입한 가난뱅이 발명가 케이드 예거는 딸, 친구 등과 함께 정부와 또 다른 외계 로봇 락다운, 오토봇, 그리고 지구인이 개발한 트랜스포머 갈바트론과 스팅어 군단의 거대한 전투에 휩쓸리는데...

역시나 출장 때 본 영화입니다. 이전에 봤던 것들은 전부 갈 때고 이제부터 소개하는 영화들은 모두 올 때 봤습니다.

사실 이전 시리즈가 갈수록 별로여서 큰 기대는 없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대박이더군요! SF 액션 블록버스터로는 그야말로 왕도격 작품이었습니다.

이야기 전개는 딱히 대단하진 않지만, 오토봇도 디셉티콘처럼 외계인이니 말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부 관료가 악당이라는 아이디어는 꽤 괜찮았습니다. 외계인의 사체(?)를 가지고 자체 제작 로봇을 만들려는 기업인 조슈아 조이스가 엮이는 등의 복잡한 이야기를 길지만 한 편의 영화로 밀도 있게 녹여낸 솜씨도 전성기 시절의 마이클 베이를 떠오르게 만들었고요.

무엇보다도 액션은 그야말로 명불허전입니다. 로봇들의 격투는 물론, 주인공 일행도 예비사위의 카 체이스, 마크 월버그의 맨손 격투 및 최종전에서의 난입 활약 등으로 로봇들에 못지않은 비중으로 다양한 액션을 소화해 주어서 눈이 즐거웠습니다. 마크 월버그가 나와서 뭘 하려나 했는데 이렇게까지 활약해 줄지는 정말 몰랐네요.
제목에 걸맞게 드리프트, 하운드 등의 새로운 로봇들도 볼거리인데, 단지 눈요기에 그치지 않고 뚜렷한 활약을 보여주며 마지막에 옵티머스가 깨우는 다이노봇들은 정말 압권이에요.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멋진 장면들이 정말 최고였습니다.

단점이라면 외계인 협력자인 락다운의 역할이 무엇인지 좀 애매하다는 점, 그리고 조슈아가 너무 쉽게 개과천선한다는 점이 있는데 작품에 큰 흠이 될 정도는 아닙니다. 조슈아가 우리 편으로 돌아선 뒤에 보여주는 깨알 같은 유머와 잔재미를 생각한다면 점수를 더 줄 수도 있고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 A급 오락영화로 스트레스와 짜증을 날려버리는 오락영화 기존의 가치에 충실한, 그야말로 마이클 베이다운 영화입니다.

2014/04/28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 - 고마츠 사쿄 / 이동진 : 별점 1.5점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 - 4점
고마츠 사쿄 지음, 이동진 옮김/폴라북스(현대문학)

노노무라는 은사의 친구 반쇼야 교수가 발굴했다는 기묘한 모래시계 때문에 탐사여행을 떠났다. 모래시계는 어느 방향으로 뒤집든 끊임없이 모래가 떨어지는 4차원적인 구조를 가진 물체였다. 그러나 발굴 현장인 고분을 탐사하던 모든 일행과 관계자가 잇달아 사망하거나 실종되었고, 노누무라 역시 시속 70킬로미터로 달리던 택시 안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저자인 고마츠 사쿄는 호시 신이치, 츠츠이 야쓰타카와 함께 이른바 일본 3대 SF 작가 중 한명입니다. 그러나 다른 두명에 비하면 국내에서의 인지도나 대접이 시원치 않아서 영화로 더 잘 알려진 "일본침몰" 이외에는 소개된 적이 없었죠. 그래서 소개만으로도 무척 반갑고 기쁜 일인데다가, 이 작품은 일본 SF 최대 걸작 중 하나로 이런저런 매체에서 항상 소개되고 있어서 큰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끝없이 떨어지는 모래시계, 모래시계가 발굴된 고분의 기이한 구조, 모래시계와 고분 탐사에 관련된 인물들에게 벌어진 기묘한 사건이라는 초반부만큼은 이해하기도 쉽고 굉장히 흥미로왔습니다. 노노무라 - 사요코 커플의 장대한 러브스토리 역시 인상적이었고요.

그런데 결국 도대체 뭘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인지 전혀 모르겠더군요. 짧게 이해한 바로는, 노노무라는 신에게 선택받았지만 우매한 인류에게 지혜를 전해주려다가 신에게 쫓기게 되었으며. 이는 최후의 순간에 신에게 가까이 다가서긴 하는데 결국 추락하여 평범한 인간이 되어버린다는 타천사 루시퍼 이야기의 변주로 보였습니다. 여기에 진화와 우주에 대한 이야기가 복잡하게 꼬여있고요.

그런데 이를 설명하는 초반 이후의 이야기는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초과학 연구소에서 일어난 폭발사건, 태양의 이상현상으로 멸망이 닥친 지구에 찾아온 외계인들, 외계인들에 의해 분류되는 인류, 이어지는 습격과 추격 등은 모두 토막나 있어서 제대로 연결되지도 않고 앞뒤의 인과관계도 불명확한 탓입니다. 게다가 반쇼야 교수는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외계인들이 찾아온 뒤에 지구가 멸망한 것인건지 아닌건지, 엘마와 한스 마리아 후민은 어떻게 되었다는건지, 애초에 대립하는 두 단체의 성격과 대립의 과정은 무엇인지 등 뿌려놓은 복선도 제대로 회수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모래시계의 정체를 일종의 발신기라고 설명하는건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이래서야 모래시계는 작품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그냥 흥밋거리 소도구에 불과하니까요. 그야말로 전형적인 맥거핀, 흥미거리 떡밥이랄까요. 여튼, 작가의 욕심만 지나칠 뿐 이야기를 제대로 정리하고 마무리짓는 힘이 부족하다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쓸데없이 복잡합니다. 시공간을 4차원 축으로 놓고 어쩌구 한다는 이론은 작품 이해에 도움을 주기는 커녕, 작가가 나 이만큼 똑똑해! 라고 현학적 능력을 과시한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어요. 이러한 현학적 과시의 대표적인 예는 네안네르탈인 집단에 던져진 호모 사피엔스 생존자를 묘사하던 부분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피해자가 한다는 말이 "1930년에 발굴된 이스라엘 카르멜 산 동굴 기억하나?" 어쩌구라니 오버도 정도가 있어야죠.

차라리 초반부 이야기만 더 깔끔하게 정리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아쉽습니다. 시간 이동에 대한 SF 멜로는 "민들레 소녀"가 이미 한 정점을 찍기는 했지만 이 작품은 물리적인 시간 이동과는 조금 다르게 설명되기 때문에 평행 우주 이론을 살린다던가 하는 식으로 다른 방식도 가능했을 것 같거든요. 모래시계가 발신기라는 작중 아이디어를 더하여 다른 시공에 있지만 모래시계의 한쪽 끝이 연결된 사요코에게 모르스부호와 같은 신호를 보낸다던가 하는 식으로 모래시계도 적절하게 이용해가면서 말이죠.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적어서 좋은 별점을 준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로저 젤라즈니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작가의 생각을 잘 전달하는 작품은 쎄고 쎘죠. 예를 들어 불멸의 삶과 그에 따른 진화, 생명에 대한 고찰은 "불새 우주편"이 훨씬 쉽고 재미있었어요. 그 어렵다는 "쿼런틴" 조차도 이 작품에 비하면 차라리 재미있었던 것 같네요.

제가 나이가 든 탓에 쉽게 쉽게 읽히는 간단한 독서에 익숙해진 탓도 있겠으나, 뭔가 있어보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 좋은 대접을 받았던 시대의 유산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고마츠 사쿄라는 작가의 작품을 접한 기쁨은 크지만 널리 권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2/03/27

프로젝트 헤일메리 - 앤디 위어 / 강동혁 : 별점 3점

프로젝트 헤일메리 - 6점
앤디 위어 지음, 강동혁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태양의 에너지가 급감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난 페트로바선이 에너지를 빼앗아 갔기 때문이었다. 태양 에너지를 흡수하는 외계 생명체 아스트로파지가 대량 증식하여 이산화탄소를 찾아 금성으로 향하며 에너지를 내뿜는게 페트로바선의 정체였다. 아스트로파지의 증식과 감염으로 모든 항성들이 10% 정도의 에너지를 잃었지만 타우세티만 건재하다는걸 알아낸 페트로바 대책위원회는, 그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우주선 헤일메리를 건조했다.

'나'는 기억을 잃고 나는 기억을 잃고 우주선 안에서 홀로 깨어났다. 동료 두 명은 수면 여행 중 사망한 상태였다. 서서히 기억을 되찾은 '나'는, 내가 지구의 운명을 걸고 타우세티로 향한 헤일메리호의 유일한 생존자 라일랜드 그레이스 박사라는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타우세티에서, 같은 목적으로 이 별을 찾아온 외계인 '로키'를 만나게 되는데...

"마션"의 원작자가 쓴 장편 SF 소설입니다. 

지구를 살리기 위해 용감한 전문직 종사자가 목숨을 건다는 내용의 작품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일단 "아마게돈"이 생각나네요.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과학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날아오는 운석을 파괴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태양 에너지를 빼앗고, 이산화탄소를 향해 움직이면서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증식하는 아스트로파지의 생태에 대한 상세한 설정이 특히 돋보입니다. 뒤 이은,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위해 전 지구의 의지를 모으는 과정에 대한 묘사도 대단합니다. 라일랜드 그레이스가 아스트로파지에 대해 연구하여 그 생태의 비밀을 알아내는 과정,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일종의 반물질 에너지원같은 아스트로파지를 우주선 연료로 사용하려는 모습 모두 적절한 과학적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굉장한 설득력을 보여줍니다. 전혀 개념은 다르지만, 엄청난 효율의 에너지원이기도 한 아스트로파지는 '시즈마 드라이브'가 연상되더군요.

타우세티에 도착한 후, '항성 40 에리다니'에서 온 외계인 로키와 만나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하고, 목숨을 건 모험 끝에 아스트로파지를 먹어치우는 '타우메바'를 채집하는 장면도 박진감 넘치고 흥미롭습니다. 탄탄한 과학적 배경을 바탕에 둔 건 마찬가지고요. 아스트로파지의 천적 타우메바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스쳐지나가는 듯한 '진화' 관련 담론이 인상적이었어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진화한 로키와 그레이스가 어떻게 같은 주파수 소리를 듣는지에서 시작해서, "왜 같은 속도로 생각하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지는데 답이 아주 그럴듯했기 때문입니다. 그레이스의 가설은 각자 행성을 확실히 지배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지능을 갖춘 뒤 진화를 멈췄다는 겁니다. 그 기준은 '중력'이고요. 중력이 높아지면 땅과 접촉하는 시간이 늘어나므로, 움직임이 더 빨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데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과학자 역할의 그레이스, 그리고 뭐든지 만들어내는 엔지니어 로키로 확실히 구분되어 있는 팀 구성도 재미를 더해줍니다. 서로의 언어를 습득하고 진짜 친구가 된 뒤, 그레이스가 죽을걸 알면서도 로키를 구해주러 가는 장면은 뭉클하기까지 했습니다. "가고 있어 친구. 기다려"는 정말 명대사였어요.

전편에 흐르고 있는 유머도 남다릅니다. 프로젝트의 어원부터가 미식축구 등에서 경기 종료 직전에 역전을 노리고 시도하는 성공률이 매우 낮은 작전을 일컫고, 그레이스도 자기 부정 등이 포함된 기묘한 유머 감각으로 상황을 그려낼 뿐더러, 상황 자체가 유머스럽게 그려진게 많거든요. 목숨을 건 임무를 거부했던 그레이스를 속여서 강제로 우주선에 태운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총책임자 에바의 행동이 대표적입니다. 충격적인 반전이기도 한데 솔직히 너무 웃겼습니다.

그러나 편의적인 전개가 너무 많기는 합니다. 그레이스와 로키가 만나고, 서로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한다는 것 부터가 그러합니다. 이게 가능하다면, 아이큐가 80이 넘는다는 돌고래와는 왜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한건지 설명이 안됩니다. 설령 가능했다 하더라도, 만나고 얼마 되지도 않아서 아스트로파지를 없애는 방법을 함께 찾을 정도로 서로의 언어에 숙달하게 되었다는건 억지입니다. 외계인이 언어 체계를 제외하면, 사고 방식 등이 모두 인류와 유사하다는 설정도 지나치게 편의적이었고요. 그 외에도 타우메바의 진화가 쉽게 이루어지는 등 비교적 해결책이 쉽게 도출된다던가, 진화한 타우메바가 제노나이트를 뚫고나와 아스트로파지를 먹어치우는 위기에서 타우메바의 유일한 천적(?)인 질소를 우주 비행사 중 한 명이었던 두보이스가 자살용으로 헤일메리에 실어놓았었다는 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7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 과학적인 설명도 가득 담겨있음에도 불구하고 재미까지 있어서 무척 놀라왔던 작품입니다. 별점 3점은 충분하지요. 베스트셀러 작가는 확실히 다르네요.

2018/02/16

패러독스의 세계 - 다무라 사부로 : 별점 2.5점

패러독스의 세계 - 6점
다무라 사부로/전파과학사

오래전 사랑했던 추억의 전파과학사 문고가 저렴한 가격의 ebook 대여 행사를 하길래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행사가 끝났네요.

이 책에는 연인의 사고사 후 자살하려던 천애고아 미다 타로가 우연히 외계인 퀴리그인에게 납치된 후, 퀴리그 별에서 가정교사 및 기술자로 일하며 여러가지 수학 논리를 설명해 주었던 과거에 대한 일종의 수기와 "웃지 말 것 - 웃음과 패러독스", "읽지 말 것 - 수학과 패러독스" 라는 두 개의 챕터로 여러가지 패러독스 상황을 관련된 이야기들로 설명해 주는 전혀 다른 내용의 이야기가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미다 타로의 수기 부분은 솔직히 왜 이런 기묘한 설정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구태여 외계 행성 설정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설명 가능한 부분이었거든요. 그래도 초-중학생 수준의 외계인 아이들에게 수학과 논리를 가르친다는 설정 덕분에, 수학에 기반을 둔 내용이 많음에도 아주 어렵고 심오하지 않아서 이해가 쉽다는 장점은 있습니다. 가르치는 내용들이 제목 그대로 "패러독스" 관련된 역설 이야기가 많아서 퍼즐을 푸는 듯한 재미도 넘치고요. 각종 공작이나 퍼즐, 심지어 미다 타로가 외계인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요술' 관련된 도판까지 도판이 생각 외로 많은데 이 역시 읽는 즐거움을 더해줍니다.

단순한 즐거움 외에도 현학적인,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는 기쁨 역시 컸습니다. "12 척의 배를 가진 부자가 장남에게는 1/2을, 차남에게는 1/4을, 막내에게는 1/6을 주기로 했는데 1척이 침몰해버렸다. 그런데 이웃에서 배를 빌려와서 장남에게 12척의 1/2인 6척, 차남에게는 1/4인 3척, 막내에게는 1/6인 2척을 주니 모두 11척이라 이웃에게 배를 돌려줄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인가?" 라는, 오래 전부터 궁금했지만 답을 몰랐던 수학 문제의 답을 알게 된 것 처럼요. 정답은 애초부터 잘못된 유언이라는 것입니다! 1/2 + 1/4 + 1/6 이 "1" 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 명이 여관에 숙박비로 1인당 1만원 씩 지불했다. 그런데 여관 주인이 서비스로 5천원을 깎아 주었다. 그러나 이를 돌려주던 종업원이 2천원을 슬쩍하고 3천원만 돌려주었다. 각자 1만원 씩 냈는데 1천원씩 돌려 받았으니 1인당 낸 돈은 9천원이고, 3명이서 2만 7천원을 내었다. 여자 종업원이 2천원을 슬쩍한걸 더하면 2만 9천원. 1천원은 어디로 갔을까?" 라는 문제도 이 책 덕분에 속 시원하게 정답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관 주인이 받은 돈은 2만 5천원이고, 종업원이 가로챈건 2천원이라 이는 손님 세 명이 지불한 돈과 일치합니다. 여기에 깎아준 3천원을 더하면 처음의 3만원이 됩니다. 이 돈에 또 슬쩍한 돈 2천원을 억지로 더해서 발생하는 오류지요.

이러한 퍼즐같은 이야기 외에도 정통 수학에 기반을 둔 이야기도 흥미로왔습니다. '앞의 두개의 수의 합이 다음 수가 되는 피보나치 수열의 이웃한 3개의 수는 항상 한가운데 수의 제곱과 양 끝 두 수의 곱은 언제나 1만큼 다르다' 라는 사실 등 새롭게 알게 된 이론도 많고요.
'큰 원의 원 둘레와 작은 원의 원 둘레가 1:1로 대응하더라도 길이는 똑같다고 할 수 없다' 는 이유 등 몰랐던 수학 이론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도 좋았습니다. "1/3 + 1/3 + 1/3 은 1인데 1/3은 0.333333333..... 이라 1/3을 더하면 완벽한 1이 되지 않는데?"라는 문제에 대한 답도 미력하나마 깨우칠 수 있었고요.

수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논리 퍼즐도 대미를 장식할 만 합니다. 아주 인상적이었기 상세하게 소개해 드릴께요. 일단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두 개의 문이 있는 방이 있다. 한 방은 정답, 다른 방은 오답이다. 방에는 언제나 사실을 말하는 정직 족, 언제나 거짓말을 하는 거짓말쟁이 족으로 이루어진 별에서 온 두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이 어느 부족인지는 모른다. 이 두 사람 중 한 명에게 한번만 질문할 수 있다. 그들의 답은 "팔" 또는 "다아" 중 하나이다. 이 "팔"과 "다아" 중 어느 쪽이 yes이고 어느 쪽이 No 인지는 알 수 없다. 무슨 질문을 해야 하고, 답은 어떻게 되는가?" 입니다. 논리 퍼즐로 한참 고민해도 됨직한 멋진 이야기죠? 이 책에서는 놀랍게도 이를 수학 공식화하여 설명해 줍니다! 내용 중 "동치" 개념과 교환율, 간략화 공식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공식으로 "왼쪽의 문이 정답입니까? 라고 질문을 받으면 당신이라면 "팔" 이라고 대답합니까?" 라는 답이 도출되는 과정은 놀라왔습니다. 수학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지요. 여러분들도 이 답이 맞는지는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책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미타 타로의 수기와 비교한다면 이어지는 "웃지 말 것 - 웃음과 패러독스" 부분은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습니다. 여러가지 패러독스를 다양한 글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데, 라쿠고나 잡지의 유머 등을 인용하여 이해를 돕는건 좋지만 너무 장황한 탓입니다.
물론 유머, 우스개 들에서 패러독스 이론을 끄집어 내는건 대단했고, 유머만 소개되는게 아니라 체스터턴의 단편과 "라쇼몽"이 인용되는 등 볼거리가 많긴 합니다. 그래도 글 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도판이나 다른 보조 장치가 필요했어요. 거짓말 관련된 패러독스가 내용의 대부분이라는 점도 아쉬웠고요. 마지막의 "읽지 말 것 - 수학과 패러독스"에 제목처럼 수학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기는 한데, 그 비중이 높지 않습니다. 도입부에서 칸토어의 정리를 쉬운 집합 형태로 바꾸어 설명하는 부분은 재미있었지만, 이외에는 패러독스를 수학으로 설명하기 위한 여러가지 이론 설명 비중이 더 크거든요.

그래도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읽을만한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책의 가치를 번역이 반 이상 깎아먹고 있는건 안타깝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수학 이야기인데 어떤 항목은 번역된 글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 정도였으니까요. 책 자체는 별점을 3점 이상 주고 싶어도 번역 때문에 도저히 2.5점 이상은 주기 힘드네요.
수학을 공부하는 중학생 정도라면 쉽게 이해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내용들이라 생각되어 수학을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리고 싶은데, 번역 때문에 선뜻 권해드리기 어렵군요. 조금 현대적으로 각색해서 새롭게 번역되어 출간된다면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2012/11/24

칠석의 나라 1~4 - 이와아키 히토시 : 별점 3.5점

칠석의 나라 4 - 8점
이와아키 히토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지금은 거장 대우를 받는 이와아키 히토시의 90년대 작품. "타지카라오"를 읽은 뒤 생각이 나서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설정 자체는 뻔해요. 80~90년대 유행했었던 "외계에서 찾아온 지능체와의 만남, 그리고 그 후예들의 후일담"이라는 설정이니까요.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마루카미 교수의 실종과 주인공 미나미마루의 초능력을 둘러싼 미스터리 스릴러 형태로 전개됨으로써 흔해빠진 작품들과는 차별화된 재미를 보장해 주고 있습니다.

외계인 등장 설정도 마루카미의 문장(까치 - 원 - 손)에서 시작해서, "창을 본다"라고 불리는 외계를 보는 능력과 "창에 손이 닿는다"라고 불리는 물질을 외계로 보내는 능력에 대한 설명, 그리고 이 능력이 발현된 이후 외계인이 더 찾아오지 않게 된 이유 등이 작가 특유의 전개로 설득력 높게 표현되는 덕분에 유사품과는 격이 다릅니다.

주인공 미나미마루의 캐릭터도 마음에 들어요. 이런 류의 작품들 주인공과는 전혀 다른 낙관적이고 천하태평인 성격에다가 강력한 초능력을 가졌지만 당면한 고민은 취직일 뿐이라는 점, 능력에 대해 어떻게 사용할지를 긍정적으로 고민하면서 스스로를 감추는 점 등이 현실적이면서도 매력적이거든요.

이러한 탄탄한 설정과 이야기가 요새 기준으로는 길지 않은 4권이라는 분량으로 완결되도록 빠른 호흡을 지녔다는 것 역시 큰 장점입니다(특히나 요새는 보기 힘든 장점이죠). 물론 호흡이 너무 빠른 탓에 마루카미 교수라던가 요리유키 등 주요 등장인물들 설명이 많이 부족하고, 정부가 나섰음에도 결국 별다른 해결 없이 대충 정리되는 결말 등 소소한 단점이 조금 있습니다. 그래도 불필요하게 길게 늘어지는 것보다는 마음에 들어요.

한마디로 다시 읽어도 여전한 재미와 완성도를 갖춘 수작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천편일률적인 외계인 이야기가 식상하시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09/11/03

디스트릭트9 - 네일 블롬캠프 : 별점 3점


인터넷상의 엄청난 호평 때문에 보게된 영화입니다.

그런데 넘치는 대단한 호평이 개인적으로 썩 납득이 가지는 않더군요. 서로 다른 종족(?), 그것도 주종족에게 굉장히 천대받는 종족을 박해하는 최일선에 서 있는 인물이 서서히 천대받는 종족으로 변해가며 자기 자신도 변해간다는 이야기는 정말이지 쎄고 쎈 이야기라 생각되거든요.
탈출한 안드로이드를 잡아죽이는 킬러가 스스로가 안드로이드임을 알게되고 안드로이드와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라던가, 게이를 박해하던 마초가 스스로의 성 정체성에 눈뜨며 자기 자신이 게이임을 알게된 후 다른 마초들에게 집단 린치를 당한다는 이야기라던가, 흑인을 박해하던 인종차별주의자가 자기 자신의 핏줄에 흑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알게되는 이야기라던가... 경성탐정록 식으로 변주하면 조선인을 박해하던 일본인 지주의 젊은 아들이 자기가 조선인 하녀에게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것을 알게된다고 바꿀 수도 있겠네요.
어쨌건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이지 흔하디흔한 이야기가 아닌가 보여집니다. 외계인이라는 설정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새롭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아쉬워요.

물론 마지막 외계인 크리스토퍼가 탈출하며 과연 돌아올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라는 문제와 외계인으로 변한 비커스가 사랑을 잃지 않는다는 여운의 결말은 충분히 인상적이며, 극단적 이기주의자에 가까운 비커스가 막판에 거의 "히어로" 급으로 거듭나게 되는 극적인 장면과 더불어 펼쳐지는 액션은 굉장히 화려해서 볼거리가 많은 영화임에는 분명합니다. 특히 이 마지막 액션씬에서 펼쳐지는 헐리우드영화에서 보기 드문 파워드 슈츠(?)액션과 고어에 가까운 폭죽쇼는 확실히 재미있었어요. 헐리우드스럽지 않은 전개와 촬영도 마음에 들었고 말이죠.

때문에 결론적으로 재미만 놓고 따진다면 별점 3점은 충분한 영화로 만족스럽게 관람하긴 했습니다. 뭐 이 영화가 새롭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다 제 나이 탓이겠죠... 이제 트렌드를 쫓아가지 못하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 같네요. 쩝.

2015/03/16

SF 명예의 전당 1 - 아이작 아시모프 외 / 박병곤 : 별점 3점

SF 명예의 전당 1 - 6점
아이작 아시모프 외 지음, 로버트 실버버그 엮음, 박병곤 외 옮김/오멜라스(웅진)

SFWA (미국과학소설작가협회)가 생긴 후인 1964년 12월 31일 이전에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회원들이 투표를 진행하여 가려 뽑은 작품들을 모은 앤솔러지입니다. 1965년 이전 작품 15편과 30위까지의 작품 일부를 더한 구성이며, 1권과 2권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4권 세트 e-book을 종이책 대비 엄청 저렴한 29,700원에 팔고 있어서 구입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SF라는 장르에는 e-book이 가장 적합한 콘텐츠 형태가 아닐까 싶네요.

1권을 먼저 읽었는데, 수록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 어스름 Twilight - 존 캠벨
  • 전설의 밤 Nightfall - 아이작 아시모프
  • 무기 상점 The Weapon Shop - A.E. 밴 보그트
  • 투기장 Arena - 프레드릭 브라운
  • 허들링 플레이스 Huddling Place - 클리포드 D. 시맥
  • 최초의 접촉 Firt Contact - 머레이 라인스터
  • 남자와 여자의 소산 Born of Man and Woman - 리처드 매디슨
  • 커밍 어트랙션 Coming Attraction - 프리츠 라이버
  • 작고 검은 가방 The Little Black Bag - 시릴 콘블루스
  • 성 아퀸을 찾아서 The Quest for Saint Aquin - 앤소니 바우처
  • 표면장력 Surface Tension - 제임스 블리시
  • 90억 가지 신의 이름 The Nine Billion Names of God - 아서 클라크
  • 차가운 방정식 The Cold Equations - 톰 고드윈

대충 봐도 SF계의 대가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작품의 수준도 당연히 높습니다. SF 작가들이 직접 선정한 고전 명작이니만큼, 작품의 수준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겠지요.

하지만 제가 SF를 싫어하는 이유가 이 작품집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는건 아쉬웠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불필요하게 어렵게 쓴, 혹은 번역된 내용이 많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을 두고 굳이 어려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지요. "역장", "정신인자", "윤충류" 등이 대표적입니다. 교황을 '로마 주교이자 사도 전승 카톨릭 성교회의 수장,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는 — 그러니까 교황은 —'이라고 장황하게 소개하는 묘사도 마찬가지고요. 배경이 되는 기본 설정 소개도 인색한 편입니다. "Coming Attraction" 같은 경우, 핵전쟁 이후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가상 역사 SF인데, 단편적인 정보만 설명되는 탓에 전체적인 그림은 미루어 짐작만 가능할 뿐입니다.
SF가 장르적 특수성이 강해서 작가가 '독자가 이 정도는 알겠지'라는 생각을 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작가의 잘난 척인지 모르겠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대중성은 떨어지고 읽기만 어려워지는 듯 한데 말이지요.

아울러 냉전 시대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나 기계 문명과 신성을 빗대어 설명하는, 지금 읽기에는 낡은 소재가 많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예를 들자면 먼 미래의 지구는 어떤 이유로든 멸망했고, 영원히 동작하는 기계가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다는 "Twilight", 앞서 말씀드린 "Coming Attraction", 가상 역사 SF이자 기계 문명과 신성을 이야기하는 "The Quest for Saint Aquin" 등이 그러합니다. "Nightfall", "The Cold Equations" 같이 다른 앤솔러지에서 익히 접했던 작품들이 제법 된다는 것도 아쉽고요. 물론 이 책의 취지가 시대를 초월한 걸작들을 모아놓은 것이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요.

그러나 당연히, 그리고 다행히도 시대를 뛰어넘는 멋진 작품도 많습니다. 그중 제 개인적인 베스트 작품을 소개해 드리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The Weapon Shop"

"우주선 비글호" 시리즈로도 유명한 밴 보그트의 작품입니다. 독재 정권에 이용해왔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맹목적으로 충성만 하던 서민이 우연한 계기로 자유를 위한 투쟁에 참여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에 빗대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 가장 놀라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와 가진 자들에게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맹목적인 지지를 보낸다는게 정말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SF 뿐 아니라 정치 풍자극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이 높습니다. 일종의 먼치킨 같은 역할을 하는 "무기상점"이라는 아이디어도 참신하게 느껴졌고요. 시대를 초월한 걸작입니다.

"Arena"

외계의 두 종족 간 전면전이 벌어질 찰나, 지구인 주인공이 기묘한 장소로 소환됩니다. 그 이유는 전면전이 벌어지면 두 종족 모두 멸망하게 되므로, 신이 한 종족만이라도 남기기 위해 두 종족의 대표 전사를 소환해 생명을 건 전투를 벌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롤러 형태의 외계인과 1:1로 생명과 인류의 존망을 걸고 벌이는 전투라는 설정 자체가 매력적인데, 거장 프레더릭 브라운의 명성에 어울리는 전개도 압권입니다. 소환된 장소의 다양한 환경을 이용하는 과정과 마지막 승부에 활용되는 복선까지 잘 짜여져 있는 덕분입니다.

SF가 꼭 심오하게 인류의 미래, 신의 존재와 같은 주제를 다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재미를 위해 쓰더라도 이만큼의 흥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존재 이유는 충분하지요. 별점을 준다면 5점입니다.

"First Contact"

게 성운에서 우연히 조우한 지구인과 외계인 비행선. 서로 마음을 열어가면서도 결국 생명을 걸고 양쪽이 전투를 벌여야 할 것이라는 묘한 상황에 빠집니다. 그러나 다행히 놀라운 아이디어로 싸우지 않고, 서로의 정보를 공평하게 가지고 귀환하게 되지요.

외계인을 만났을 때의 딜레마가 잘 표현된 작품으로 완벽한 해피엔딩에 이르는 반전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밝고 유쾌하게 쓰여졌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약간은 냉전 시대의 소산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시대를 뛰어넘는 즐거움을 준다고 생각됩니다.

"The Little Black Bag"

미래에서 온 마법의 의사 가방을 놓고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사건을 그린 작품입니다.

여러 가지 설정과 이야기가 한데 뒤섞여 있는데, 한 작품에 쓰이는 게 아깝다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게 많습니다. 다만 미래의 사람들은 대부분 "바보"가 된다는 설정은 불필요해 보였어요. 그냥 미래에서 의사 가방이 보내지고, 그것이 사용되다가 살인 사건이 벌어져 동작이 취소된다는 정도만 등장해도 충분했을텐데 말이지요. 작가의 욕심, 의욕이 지나쳤습니다. 

그래도 읽는 재미는 뛰어나고 마지막 마무리까지 완벽합니다.

"Surface Tension"

호시노 유키노부의 "2001밤 이야기"가 연상되는 식민화 우주선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호시노 유키노부 작품보다는 압도적으로 뛰어난 상상력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식민화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기는 한데, 그 별에 가장 적합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고, 작품의 무대가 된 행성에서는 미생물 — 윤충류! — 로 인류가 탄생하게 되거든요. 이후 이러한 미생물 인류가 이른바 "외계"로 나가기 위해 나름의 "우주선"을 만들고, 살고 있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여정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는 내용은 인류의 우주 진출과 비교되며, 살짝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여러모로 잘 짜여진 SF 모험물입니다.


다른 작품에는 불만과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은 충분합니다. SF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라도 최소한 "Arena"만큼은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책 서두에 소개되어 있는, SFWA에서 가장 표를 많이 받은 15위까지의 작품은 알려드리며 리뷰를 마칩니다. 그런데 영문으로만 소개되어 있는건 이해가 안 되네요. 책에는 한글 제목으로 실어놓았는데 말이죠. 또 3위인 "Flowers for Algernon"은 영문 제목이 잘못되어 있기까지 합니다. 거기에 더해 이 작품들을 어떻게 1, 2권으로 나누었는지도 설명되지 않았는데, 여러모로 세심한 배려가 아쉽습니다.

  • 1. "Nightfall" - 아이작 아시모프
  • 2. "A Martian Odyssey" - 스탠리 와인봄
  • 3. "Flowers for Algernon" - 대니얼 키스
  • 4. "Microcosmic God" - 테오도어 스터전
  • (동률) "First Contact" - 머레이 라인스터
  • 6. "A Rose for Ecclesiastes" - 로저 젤라즈니
  • 7. "The Roads Must Roll" - 로버트 하인라인
  • (동률) "Mimsy Were the Borogoves" - 루이스 패짓
  • (동률) "Coming Attraction" - 프리츠 라이버
  • (동률) "The Cold Equations" - 롬 고드윈
  • 11. "The Nine Billion Names of God" - 아서 클라크
  • 12. "Surface Tension" - 제임스 블리시
  • 13. "The Weapon Shop" - A.E. 밴 보그트
  • (동률) "Twilight" - 존 캠벨 
  • 15. "Arena" - 프레드릭 브라운

2025/05/23

여왕국의 성 1,2 - 아리스가와 아리스 / 김선영 : 별점 2.5점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이토 대학 추리소설 연구회 EMC 회원인 모치즈키, 오다, 아리스가와, 마리아 네 명은 렌트카로 가미쿠라로 향했다. 가미쿠라에 위치한, 외계인을 믿는다는 신흥종교집단 '인류협회' 본거지로 떠났던 에가미 선배의 연락이 끊긴 탓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에가미 선배를 만나는데 성공했지만, 그들은 인류협회의 '성'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에 휘말리고 말았다. 하지만 인류협회는 경찰을 부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감금하였고, 에가미 선배와 일행은 성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사건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데...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시마다 소지의 계보를 잇는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 작가이지요. 국내에도 많은 작품들이 소개되었는데, 이 작품은 작가의 유명 시리즈 중 하나인 '학생 아리스' 시리즈(또 다른 시리즈는 명탐정 히무라 히데오가 등장하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 장편입니다. 신흥 종교집단의 본거지인 ‘성’을 배경으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루는데, 1권과 2권을 합쳐 9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자랑합니다. 완독에 1주일 정도 걸렸네요.

명성답게 추리적으로는 상당히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2008년 '주간분슌 선정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위", '제 8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했다는게 이해가 될 정도로요.
우선, 공정한 단서 제공이 단연 돋보입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사건 해결에 필요한 정보들을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제공해 줍니다. 마지막 추리쇼 직전에는 ‘독자에의 도전장’이 삽입되어 있기도 하고요. 전통적인 본격 추리물 애호가라면 누구나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구성이지요.

사건과 트릭, 추리도 나쁘지 않습니다. 11년 전 총기 실종 사건 트릭은 단순하면서도 현실적인 조건을 이용하고 있다는게 마음에 들었어요. 밀실인 현장에서 자살한 피해자의 총기를 가져간 범인은 어린아이로, 아이는 작은 체구를 이용해 쓰러져있던 사체 뒤에 숨어 창 밖에서 바라보던 쓰바키 등 목격자 시야에서 벗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방 안에 들어왔을 때는 문 뒤에 숨었고요. 그리고 쓰바키가 경찰이 올 때 까지 정문 앞을 지킬 때 총을 가지고 뒷문으로 탈출했던 겁니다. 복잡한 장치를 활용한 트릭이 아니라, 상황과 조건을 정교하게 활용한 현실적인 트릭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높고, 어린 아이라는 범인 특징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현재 시점의 연쇄 살인 사건은 전형적인 후더닛 추리인데, 아래 의문이 핵심입니다. 

  • 첫째, 총기는 어떻게 삼엄한 보안이 이뤄진 인류협회 본부로 반입되었는가? 
  • 둘째, 어떻게 총기가 11년전 사라졌던 그 총일 수가 있었는가? 

이에 대한 추리는 아래와 같고요.

  • 첫째, 총기는 성스러운 동굴 안에 숨겨져 있었는데, 인류협회 쪽이 아닌 마을에서 들어오는 입구는 좁아서 어린 아이만 들어올 수 있었다. 즉, 총기를 숨긴건 어린 아이였다. 
  • 둘째, 총기가 11년 전 사건의 흉기였던 권총이기 때문에, 범인은 11년 전 사건에서 총기를 훔쳤던 사람이다. 

이렇게 범인은 11년 전 마을에 살고 있던 어린 아이라는게 밝혀집니다. 현재 인류 협회 소속 인원 중에서 이에 해당되면서, 사건 당시에 알라바이가 없는건 아오타밖에 없고요. 즉 아오타가 범인입니다!

이런 추리적 요소와 더불어 사건들이 벌어지는 배경인 인류협회의 설정도 흥미롭습니다. 외계인을 신으로 믿는다는 다소 황당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의 교리, 협회의 구성, 생활 방식과 본거지 '성'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현실감을 부여합니다. 교주 노사키 기미코가 유괴당해서 에가미 일행이 감금될 수 밖에 없었다는 진상 역시 그럴듯했어요.

등장인물들의 성격 묘사와 팀워크도 돋보입니다. EMC 멤버인 모치츠키, 오다, 아리스, 마리아 모두 톡톡 튀는 매력을 갖추고 있으며 중반부에 '성'에서 탈출하려는 모험도 풋풋하고 귀엽게 그려지고 있는 덕분입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보다는 이 작품 쪽이 더 "청춘 미스터리"의 범주에 들어맞는게 아닌가 싶네요. 버블 경제 몰락 직전의 분위기에 대한 언급, 그리고 멤버들을 통해 중간중간 등장하는 문학, 드라마, 영화에 대한 인용도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카프카의 "성"을 이렇게 읽어보고 싶게 만들게끔 소개한 글은 정말이지 처음 봅니다.

다만 몇 가지 아쉬움도 있습니다. 우선, 전체 분량이 과합니다. 거의 900페이지 분량 중 인류협회와 '성'에 대한 설명에 많은 분량이 할애되는데 이렇게까지 길 필요는 없었습니다. 특히 '성'의 경우, 내부 구조도까지 곁들인 상세한 묘사로 과다한 정보를 주지만 이는 실제 사건과 거의 관계가 없어서 허무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이야기 중간에 마리아의 시점으로 전환되는 장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점 변경이 새로운 정보나 심리적 깊이를 제공하기보다는 서사 전개의 리듬을 끊는 것에 불과하거든요. 지루함도 가중시키고요.

그리고 사건 해결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장면에서 지나치게 절묘한 우연이 개입되었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번역자도 후기를 통해 언급한 문제인데, 범인이 5시 경에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던 도이를 살해한 뒤 곧바로 동굴에 들어가 총기를 꺼냈다면, 지즈루와 일정 시간 동굴 내부에 함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한쪽이 인기척이나 이상한 낌새를 느꼈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이보다는 차라리 범인이 마주친 지즈루마저 살해하여 사체를 숨겼다가 발각된 후, 지즈루가 동굴 안에 있던 시간을 여러가지 증거(깨진 시계라던가, 할아버지 증언이라던가...)로 알아내어 범인을 특정한다는 이야기가 추리적으로는 더 나았을 겁니다. 잔혹하긴 하지만요.

아울러 에가미의 추리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문제가 많습니다. '어린아이만 동굴을 통과할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이 특히 그러합니다. 입구 측에서 총을 종이와 비닐 등으로 공 모양으로 감싸 던진 뒤 출구 쪽('성'의 동굴)에서 회수하거나, 개에 묶어서 들여보내는 등 여러가지 대안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저 권총을 흉기로 써서 꼬리를 밟힐 이유부터 설명이 부족합니다. 인류협회에 대한 원한으로 예언을 망치기 위해 살인을 저지렀다는 동기부터 비현실적이지만, 정말로 이게 목적이었다면 둔기나 칼을 사용해도 문제가 없었으니까요. 

아오타가 사체 강직을 이용해 총을 쏘게 만든 이상한 알리바이 트릭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앞서의 동기가 진짜라면, 에가미의 말대로 자기가 범행을 저질렀다며 세상에 진상을 드러내는게 더 좋은 방법입니다. 알리바이 트릭을 써 가며 은폐를 기도할 이유는 없어요. 심지어 제대로 동작할지도 모르는 애매한 방식의 트릭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정통 본격 추리의 규칙을 철저히 따르면서도, 현대적인 감성과 설정을 조화롭게 결합한 신본격 추리 소설이 뭔지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일단 재미는 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본격 추리물 애호가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겁니다.

2023/07/16

천국대마경 (Tengoku-Daimakyo / heavenly delusion) 시즌 1 : 별점 4점

디즈니 플러스로 감상한 애니메이션 시리즈. 흔해빠진 포스트 아포칼립스 물이라고 생각해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DVD프라임 사이트에서 추천글을 읽고 보기 시작했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물로도 설정과 묘사가 상당히 탄탄하며, 뼈대가 되는 타카하라 학원에 대한 설정도 참신한 부분이 많은, 잘 만들어진 SF더군요. 재미있게 감상했습니다.
현재 시점의 마루와 키루코의 여행과 모험, 그리고 15년 전 타카하라 학원의 일상이 교차시키는 전개도 빼어납니다. 추리물처럼 복선과 단서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덕분입니다. 현재 시점의 떡밥들은 모두 과거 학원 이야기를 통해 밝혀지는데, 예를 들어 '히토구이'의 정체는 병으로 죽은 학원생이고, '마루'와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은 학원생 토키오와 코나의 아들 클론 (누가 진짜인지는 불명)이며, '천국'은 아마도 타카하라 학원이라는 등이 그러합니다. 그 외의 소소한 것들 모두 학원과 현재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다가 결국 두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고 모든 진상이 드러나게 되겠지요. 던져지는 복선과 떡밥은 모두 회수되고 있으니까요. 이런 복선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것도 대단한 장점입니다. 다른 부가적인 공부, 연구가 필요하지 않다는건 요즘과 같이 복잡한 컨텐츠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분명한 미덕이라 생각합니다.

시즌 1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는 내용 중 중요한건 아이들의 정체 - 외계인으로 보이는 아스라의 모습을 보면 외계인을 통한 유전자 조작? -, 왜 마루가 클론에게 무언가를 주사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나자키 로빈이 폭주한 이유와 그 목적 정도인데 이 중에서는 이니자키 로빈에 관련된 내용들이 특히 궁금합니다. 학원생도 아니었고, 거리 고아들의 리더 정도에 불과했던 인물이 몇 년 만에 의학 기술을 깨우치고 히토구이와 사람의 접합을 시도한다는건 도무지 납득하기 힘들었거든요. 학원의 마지막 시험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는데, 여러모로 다음 시즌이 너무 궁금해집니다. 

현재의 여행과 모험을 통해 선보이는 여러 단발성 에피소드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개그스러운 내용들은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의 작가다운 웃음을 전해주면서도, 얼마나 현재가 끔찍한지 - 이른바 '대마경' - 와 함께 여전히 살아있는 인간성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건 제 8화입니다. 연인 호시오를 히토구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발병 부위를 잘라내가며 버텨왔지만, 결국 그녀를 마루의 힘으로 죽게 만든 우사미가 호시오의 마지막 말 - 정말 좋아해 - 을 보고 눈물을 터트리는 장면이지요. 아,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유튜브에 다양한 시청자들이 감동하는 리액션을 모아놓은 동영상도 있을 정도로요.
 

애니메이션 자체의 완성도도 높습니다. 음악도 좋고요. 다만 중간중간 몇 편에서 원화가 조금 튀고, 이상한 일본 신화를 설정에 집어넣은건 별로이기는 한데 큰 문제는 아닙니다. 최근 TV용 시리즈 애니메이션을 제대로 본 기억이 없는데, 오랫만에 아주 재미있는 작품을 감상했습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빨리 시즌 2가 나오면 좋겠네요.

2005/03/18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1,2,3,4,5- 더글러스 애덤스 : 별점 2.5점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세트 - 전6권 - 6점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책세상

영국인 아서 덴트는 자기의 집이 우회로 건설을 위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목욕가운 차림으로 불도저 앞에 누워 있던 중 자신이 사실은 외계인이며 지구가 지금 파괴 직전이라고 주장하는 친구 포드 프리펙트에 의해 정말로 지구가 파괴되기 직전 함께 우주로 탈줄하게 된다.

그들은 자포드 비블브락스라는 외계인과 트릴리언 (트리시어 맥밀란)이라는 지구인 여성과 함께 은하계를 여행하며 모험을 하게 되며 그 와중에 지구가 사실은 은하계 제일의 컴퓨터가 우주와 삶에 대한 질문에 대해 "42"라는 답을 내 놓고, 그 질문의 본질을 대답하기 위해서 설계한 거대한 유기컴퓨터였었다는 사실, 그리고 유일한 생존자인 아서의 뇌 속에 그 해답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그 질문의 근본적인 답이 "6 곱하기 9" 라는 것을 깨닫고 황당해 하게 된다.

결국 이 질문에 대해 포기한채 과거의 지구에서 살아가게 된 아서 덴트는 우주의 종말을 가져오려는 크리킷 행성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과거의 동료들의 모험에 휩쓸리게 되며 삶과 우주에 대한 진실한 해답을 알게 된다.

다시 살아난 지구로 돌아와 펜처지라는 묘한 여자와 사귀게 된 아서 덴트는 우주 창조 신의 메시지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며 우주를 여행하다가 차원이동의 실수로 펜처지를 잃고 좌절한 채 조난당하여 이름모를 별에서 "샌드위치의 대가"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어느날 자신이 기증한 정자은행의 정자로 수정된 자신의 딸을 데리고 트릴리안이 찾아오게 되고 지겨움과 외로움을 참지 못해 자신에게 배달된 궁극의 "안내서"와 함께 지구로 도망간 딸을 찾기 위해 포드 프리펙트와 함께 다시 지구로 되돌아가게 된다...

음, 일단 이쪽 바닥 팬들에게는 전설과 같이 전해지던 바로 그 책입니다. 이전 판본으로 어렵게 1,2권만 헌책방에서 구했었는데 읽지 않고 있다가 이번에 (아마도 영화화 소식때문이겠지만) 전권이 새롭게 번역, 출간되어 한번에 읽게 되었습니다.

먼저 놀라운 것은 이 거대한 코미디를 전개시키는 작가의 상상력과 그 기발함입니다. 우주적인 설정과 무대를 굉장히 어처구니 없는 상황과 잘 접목시킴은 물론, 십수년에 걸쳐 아무 개연성없이 쓰여진 작품군임에도 불구하고 책들이 하나의 거대한 줄기를 이루는 것 같이 쓴 점은 정말 대단하네요. 여러가지 말장난으로 읽는이의 실소를 자아내는 솜씨도 좋고요.

하지만 어떠한 목적의식 없이 단지 "흥행"과 "재미"를 추구하는 라디오극이 원형이라 그런지 내용에서 깊이는 전무합니다. 삶과 우주를 논하며 지구, 그리고 우주의 지배자와 창조신의 메시지조차 유머로 다루는 착상은 높이 평가할 만 하지만, 그 착상에서 파생된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이 너무나 가볍고 시니컬해서 아이디어가 상당히 아깝다고 느껴지네요.
이야기 전개가 대부분 "대사"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용 전개가 복잡한데 등장인물도 로봇 "마빈"만이 독특한(?) 개성을 보여줄 뿐, 다른 인물들은 독특한 척 위장하고 말만 많다 뿐이지 잘 구분되지 않아서 굉장히 혼란스럽거든요. 그나마 1권부터 3권까지는 괜찮지만 4,5권은 억지와 이야기의 비약이 심해지고 멤버도 아서와 포드로만 거의 제한됨으로 인해 단순히 "속편"으로서의 가치만 남아서 더욱 지루하게 느껴지더군요.
"영국식" 코미디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생각만큼 웃긴 장면도 많지 않다는 것도 단점이죠. 번역으로 인해 원문의 많은 유머를 놓쳤을지도 모르지만 역시 국내 정서에는 그다지 유머로 접근할 수 있는 소재는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그리고 도대체 포드 프리펙트가 아서 덴트와 같이 탈출한 이유부터 저는 이해가 안되더군요. 오로지 생각나는 이유라면 라디오에서 현재 상황을 포드의 독백으로 처리할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선택된 상대역이라는 것인데, 그러기에는 아서의 비중이 너무나 커져서 결국 시리즈 후반부에는 포드보다도 중요한 인물이 되니 아이러니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하긴 유머소설에서 개연성을 논하는 것부터가 말이 안되긴 하지만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재미만으로 따진다면, 술술 읽히고 웃음을 주기는 합니다. 허나 단지 그것뿐이랄까요? 읽고나서 남는 것은 하나도 없기에 전부 1500페이지 정도의 방대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얄팍하다는 느낌 뿐이에요. 번역되어 나왔다는 사실 자체에는 무척 감사하지만 끝까지 다 읽었음에도 이 작품의 평가가 높은 이유를 아직도 잘 모르겠네요.
큰 재미는 없지만 대체로 쉽게쉽게 읽히면서도 책의 판형도 작으므로 민방위 훈련용이나 지겨운 강의시간 용으로 추천할 만 합니다.

PS : 그나마 영화화 하기에는 범 우주적인 위기와 "우주전쟁"을 다룬 3권의 내용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두고 봐야 겠네요.

PS2 : 시리즈 권수가 5권이나 되고 페이지도 꽤 많은 편이라 1주일 정도는 후딱 보내는 묘미도 있습니다만....

2004/03/16

내 차 봤냐? (Dude! Where’s My Car?) - 대니 레이너 : 별점 3점

……

주말내내 여러가지 일이 많았네요. 몸도 안좋고 기분도 별로고 해서 보면서 아무 생각 할 수 없는 영화를 골랐보았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꽤 성공작이라 생각되네요.

우둔하고 어설프기 이를 데 없는 단짝 제시와 체스터. 늦잠을 자고 일어난 늦은 아침. 집에는 모르는 사람이 아무 곳에나 실례를 하고, 냉장고에는 1년을 족히 먹고도 남을 푸딩으로만 가득 차 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던 두 사람.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들의 애마. 자동차가 없어졌다는 것.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두 사람. 차를 어디에 두었는지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 무작정 차를 찾아 나서지만 그들에게 있는 단서는 단 하나! 주머니 속의 성냥갑에 적힌 "Kitty Kat Strip Club"이라는 글씨. 그곳으로 향한 제시와 체스터. 클럽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반기고, 환상적인 무대에 빠져든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여장 남자는 제시에게 돈가방을 내놓으라고 위협하고, 그를 피해 다시 밖으로 나와 여자친구인 쌍둥이 자매의 집으로 간 제시와 체스터. 청소를 도와주려다가 오히려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고 다시 쫓겨난다. 거리에서 이상한 단체에 가입되어 있는 괴한들어게 납치되었다 풀려나고, 겨우 진정한 그들에게 이번엔 또 늘씬한 미녀 외계인들이 몰려오는데...

줄거리만 보면 황당무계한게 정리가 잘 안되지만 실제로 보면 영화는 꽤 명쾌한 편입니다. 화면과 개그만 보며 즐기는 “덤앤더머”류의 바보 코미디이기는 한데 단순히 슬랩스틱이나 화장실 코미디만 신경쓰던 다른 코미디와는 달리 나름대로 제법 신경 쓴 각본도 좋고요. 예를 들자면 처음에 나오는 푸딩이나 체스터가 즐겨보는 동물 다큐멘터리 같은 복선을 절묘하게 연결하는 부분이 그러합니다.
아울러 위대한 지도자 “졸탄”, 차원이동기인지 뭔지 하는 류빅스 큐브와 같은 설정은 최고였어요. 아무 생각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제시와 체스터 컴비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웃기고요. 주인공 컴비인 숀 윌리암 스콧이나 애쉬튼 커처는 상당히 핸섬한 편인데 주로 바보 역으로 많이 나오네요. 뭐 그래도 잘 어울립니다만. 쌍둥이 중 키큰 쪽인 “제니퍼 가너”의 어렸을 때의 모습도 기억에 남는군요.

하지만 욕심이 지나쳤던지 너무 이곳저곳으로 벌려놓은 이야기를 조금 더 정리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중간의 경찰서 취조 장면이나 타조농장 에피소드, 여장남자의 돈가방 이야기는 정말 사족이었던 듯 싶네요. 마지막의 “거대여자 외계인”은 그 상상력이 좀 과했던 것 같고요.

그래도 B급 무비 정신이 투철한, 간만에 머리를 비우고 웃으며 볼 수 있었던 영화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케이블 TV에서도 방영한다고 하니 한번 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약간 취향이 애매한 영화이긴 합니다만…..

덧 : 제목이기도 한 그 차는 정말 똥차더군요…

2007/05/20

저스티스 리그 - 가드너 폭스

저스티스 리그
가드너 폭스 감독, 케빈 콘로이 외 목소리/워너브라더스

화성 탐사원 출신인 카터의원을 중심으로 한 법안이 발의되어 미국은 군축을 실시하며 군축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안보 문제를 슈퍼맨에게 일임하게 된다. 그러나 메트로폴리스를 비롯, 세계 각국에 외계인이 침공하며 이들로부터 살아남은 유일한 화성인 생존자 존 존즈는 지구를 도와주기 위해 왔다가 사로잡힌 뒤 텔레파시로 지구의 슈퍼 영웅들, 즉 슈퍼맨, 호크걸 그린 랜턴, 배트맨, 플래시에게 알리고, 텔레파시를 받은 슈퍼맨은 존을 구출한다. 그리고 영웅들은 침략자들에 맞서 싸우게 되는데...

저스티스 리그의 첫번째 에피소드로 저스티스 리그가 결성되게 된 이유, 원더우먼의 또다른 설정, 존 존즈의 정체 등 제가 몰랐던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장편 작품입니다.

일단 이 애니메이션의 최고 강점은 미국 슈퍼 영웅물의 엑기스가 담겨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누구에게나 친숙한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플래시 등이 중점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이 반가운 점이었죠. 그리고 저스티스 리그의 출범에 관한 계기가 자세하게 펼쳐지고 있어서 시리즈 초보자로서도 무척 마음에 들었고요. 또한 작화 역시 TV 시리즈 답지 않게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아울러 스토리가 왠지 "광기의 산맥"을 연상케 하는 점이 눈길을 끄네요. 미국 애니메이션에 흔히 등장하는 악당들이 아닌 외계인 침략자라는 설정도 독특했지만 그 디자인 및 세세한 점이 러브크래프트 스러운 것이 인상적이었거든요. 촉수라던가... 형태라던가 하는 점이 말이죠.

그러나 세부적인 부분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마지막의 살짝 반전은 인상적이지만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맥락이 왠지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디테일에 있어서는 너무 대충 넘어가는 느낌이 강하고 무엇보다도 히어로들의 활약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군요. 날지 못하는 배트맨의 한계도 여실히 느껴지지만 존 존즈라는 놈은 전혀 슈퍼 히어로 같지 않게 약하고 그나마 기대해 볼 만 했던 슈퍼맨은 잇단 삽질 (눈에서 쏘는 광선을 진작에 활용하지 않는다던지 등) 밖에는 보여주지 못합니다. 원더우먼과 그린 랜턴, 플래시가 더 멋져 보일 정도라니... 이거 주객이 전도된 느낌마저 들 정도 였습니다. 이야기도 좀 심각하고 우울한 분위기가 강해서 아무래도 바로 전에 포스팅한 "져스티스 리그 언리미티드" 와 비교한다면 확실히 대중성이나 세세한 재미는 떨어지는 편이라 할 수 있겠네요.

그래도 저와 같은 미국 히어로물 팬들은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하겠죠. 흔치 않은 장편이기도 하니 팬이시라면 싼맛에 구입해서 감상하셔도 괜찮으실 듯 싶습니다. 지금 현재 무척 싸게 팔고 있으니까요^^

2020/02/24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5)

쿠미카의 미각 1 - 6점
아키히로 오노나카 지음, 유유리 옮김/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식사가 필요없는 절약 근성 노력가 외계인 쿠미카가 지구에서 일하면서 서서히 음식에 길들여진다는 내용의 작품입니다.

쿠미카가 식사를 하면서 여러가지 감각을 느끼고,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전개는 일견 독특해 보이지만 반대로 뒤집었을 뿐, 이세계에서 이종족에게 이쪽 요리를 대접한다는 판타지와 별로 다르지는 않습니다. 새롭고 맛있는 요리를 먹고 감탄하며 놀라는 묘사도 동일하고요. 이야기도 새로운 음식에 놀란다는 경험이 반복될 뿐입니다.

요리 관련 이야기보다는 한 푼이라도 아껴 모성에 돈을 보내야 하는 쿠미카의 설정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처음으로 무언가를 구입해서 요리를 하게 될 때의 감정 묘사나, 처음으로 여자 외계인들끼리 파자마 파티를 할 때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는 모습들은 아주 귀여웠거든요. 억지로 음식 이야기를 집어넣지 말고 이런 이야기로 그려나가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절박한 상황에서 열심히 일하며, 다행히 호흡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쿠미카에게 음식의 맛을 알게 해 그녀에게 불필요한 돈을 쓰게 만드는 치히로는 정말이지 사악한 악당이라 생각됩니다. 천벌 받을 놈 같으니라고.

[고화질] 마감의 미식가 - 6점
츠치야마 시게루/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작년에 유명을 달리한 만화가 츠치야마 시게루의 단권 완결 일상계 음식 만화입니다. 마감과 작가들과의 교섭, 접대에 시달리는 편집자 시노하라 카오루 (38)가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그날 그날을 마감하기 위해 먹는 요리들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제목과 구성을 보면 "고독한 미식가" 시리즈의 인기에 편승한 기획물로 보이네요.

그래도 이 작품만의 특징도 확실합니다. 주인공이 편집 업무를 하면서 만나는 작가들과의 에피소드가 많은데, 그러한 만남을 어떻게든 음식과 이어가며 드라마를 만드는 노력이 돋보이거든요. 약간이나마 기승전결이 있다는 점에서는 "고독한 미식가" 보다는 나은 측면이 있어요. 츠치야마 시게루의 연륜이 돋보이는 그림도 나쁘지 않고요.

등장하는 음식들은, 초반에는 주로 그날 자기 전 마지막으로 먹는 음식들입니다. 말 그대로 그날 하루를 마감하는, 우리말로는 '야식'에 가까운 음식들로 모두 간편식에 가깝죠. 컵우동과 집에서 남은 카레를 섞어 만드는 카레 우동, 길거리 포장마차 라면, 편의점 오뎅 등이 그러하죠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자기 전이 아니라 그날 업무를 마감한 뒤 먹는 음식으로 바뀝니다. 아마 간단한 야식만으로는 이야기를 끌고나가기 힘들었던 탓이겠지요. 그래서 제대로 된 식당에서 제대로 된 음식들을 먹게 됩니다. 선술집이나 규동집 등 좀 대충 먹는 음식도 있지만 중화요리집의 교자와 라멘이라던가 기리탄포 나베, 굴 나베 등 갖춰진 음식도 많아요.

여튼, 별점은 3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후속권이 이어지지는 않은게 아쉬울 뿐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주문 배달의 왕자님 1 - 6점
타카세 시호 지음/대원씨아이(만화)

'배달 음식'을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배달 음식과는 다릅니다. 주로 일본 각 지역 유명 맛집 대표 요리를 배달용으로 가공한 것들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소재도 독특하지만 주인공인 이이다 역시 범상치 않습니다. 오타쿠 엔지니어로 사교성이 부족하고 자기 중심적인 성격으로 묘사되거든요. 배달음식으로 혼밥, 혼술을 즐기고 먹은걸 SNS에 '왕자님'이라는 닉네임으로 올리는게 유일한 취미고요. 그야말로 배달 음식과 딱 맞는 인물입니다.
야근이 잦고, 이런저런 독특한 인물들이 넘쳐나는 IT 업계의 묘사도 나쁘지 않습니다. 소소하게 이이다와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들도 좋았고요. 덕분에 극적인 드라마가 없더라도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았어요. 이런게 오히려 현실적이겠죠. 평범한 회사원 인생에 뭐 그리 특별한 일이 있겠습니까.

등장하는 배달 음식들은 일본에 실존하는 음식들로, 상당히 흥미로운 음식들이 많습니다. 완성된 음식 외에도 재료 배달에 가까운 음식도 많은데, 이이다의 요리 솜씨가 제법 괜찮아서 항상 그럴듯한 요리들이 태어납니다. 완성된 음식들도 나름의 어레인지로 이런저런 변화를 선사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적당한 재미에 그림도 좋고, 음식과 요리들도 만족스럽습니다. 배달 요리도 한계가 있는 만큼, 적당한 시점에 완결을 내 준 것도 마음에 든 점이에요. 비슷한 주인공을 등장시켜 우리나라 특유의 '편의점 레시피'를 만화로 만들어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4)

2011/05/05

공포의 보수 - H.P 러브크래프트 / 정광섭 : 별점 2점

공포의 보수 - 4점 H. P. 러브크래프트 지음, 정광섭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광기의 산맥"으로 유명한 H.P. 러브크래프트의 중단편집입니다. 러브크래프트 하면 보통 "크툴루 신화"가 연상되죠. 하지만 개인적으로 대체 그게 뭔지 그동안은 접해보지 않았었는데, 이 책을 통해 어느 정도 궁금증이 해소되었습니다. 작품들 모두 유사한 설정을 갖추고 있기도 하지만, 마지막 이야기가 바로 크툴루 신화 그 자체인 "크툴루가 부르는 소리"거든요.

읽고 나니 대체 왜 "크툴루 신화"가 세대를 초월한 전설이 되었는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압도적인 상상력과 묘사는 정말 발군이었어요. 20세기 초엽에 쓰인 작품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말이죠. 또 모든 점에서 현대 그로테스크 호러 장르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에요. 워낙 오래된 작품이라 이야기가 새로울 게 없고, 플롯이 원패턴일 뿐만 아니라 전개가 진부하기 짝이 없어서 압도적인 분위기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습니다. 또 "크투루프"라는 일본어 중역 발음이나 "견신론자" 등의 낯선 용어는 번역에서 아쉬운 부분이었어요. 생각만큼 번역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인 용어 정도는 현대적으로 통일해 줬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마지막 작품 "크툴루가 부르는 소리"만큼은 3.5점을 줄 만큼 좋은 작품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는 진부하고 낡은 느낌을 극복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건 21세기에 읽은 제 탓이 크지만, 과연 제가 이 작품을 당대에 읽었다면 어땠을까요? 대단한 컬처 쇼크를 받았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과연 호평을 했을지 혹평을 했을지 궁금합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인스마우스의 그림자"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을에 우연히 방문한 외지인이 뜻밖의 위험에 빠진다는 호러 장르물은 그야말로 수도 없이 많습니다. 보통 마을의 비밀이 무엇인지에 재미의 초점이 맞춰지곤 하죠. 이 작품도 역시 마을의 비밀을 중심으로 전개되는건 마찬가지에요. 그야말로 한가운데 직구 승부지요. 

그런데 직구의 구위가 정말 엄청납니다. 비밀이 일종의 고대 괴물에 대한 의식과 관련이 있다는 설정에 "혼혈"이라는 요소를 추가해 변화를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한밤중에 인스마우스를 탈출하는 과정의 묘사는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대단합니다.

다만 후반부는 아쉽습니다. 이야기가 산으로 가버리거든요. 마지막에 어설픈 변화구 하나 섞다가 역전 홈런을 허용한 기분이에요. 그만큼 작위적일 뿐 아니라 설득력도 전무한 반전이었습니다. 차라리 자살했다는 큰아버지 이야기를 앞부분에 복선으로라도 살짝 넣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말이죠.

정말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긴박감과 그로테스크한 묘사는 러브크래프트라는 작가 이름에 값하지만, 어설픈 마무리는 실망스럽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벽속의 쥐"

저주받은 혈통과 그 비밀을 파헤치는 고딕 호러물로 이 바닥의 거장인 포만큼의 현란한 묘사는 아니지만,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함 묘사는 더 뛰어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발군이었습니다. 고대에서 시작된 저주받은 의식의 스케일도 엄청나고요.

그러나 후반부의 각성과 뒤이은 결말은 너무 갑작스러웠습니다. 가문이고 뭐고 다 잊은 채 미국에서 한 재산 모은 후손이 저주의 현장을 보자마자 각성한다? 너무 설득력이 없잖아요. 이럴 거였다면 전문가로 이루어진 발굴팀은 대체 왜 등장시켰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초·중반부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한 용두사미 결말인데, 차라리 앰브로즈 비어스처럼 짧게 마무리하는 게 좋았을겁니다.

"어둠 속의 속삭임"

시골 지주 에이크리가 신비학자 월모트에게 보낸 편지와, 홍수 때 발견된 기묘한 생물체의 사체 목격담에서 시작되는 작품입니다. 이 생물체들이 명왕성에서 온 외계인이라는 진상과 함께, 에이크리의 비참한 종말 또는 상상으로 끝맺는 SF - 호러입니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묘사는 역시 발군입니다. 정말 이 작가의 괴기스러운 묘사는 타고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예요. 그러나 후반부 급작스러운 에이크리의 편지에서부터 이어지는 결말은 너무 뻔하고, 상상력의 범주 안에 있어서 아쉬웠어요. 극적 반전이 대단할 필요는 없지만, 너무 예상대로 전개되는 것도 문제지요. 덧붙여 밝혀지는 외계인들의 정체도 식상했고요.

뇌를 담는 원통과 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을 그려낸 상상력은 현대 SF에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결말은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월모트의 탈출이 별로 긴박하게 그려지지 못한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크툴루가 부르는 소리"

앞선 이야기들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크툴루 신화를 전면에 드러낸 정통 그로테스크 호러 작품으로 단편집의 메인 수록작입니다. 

주인공의 학술적 탐구를 통한 수기 형식으로 쓰여져 있어서 상당한 수준의 설득력을 보입니다. 물론 몇몇 인물의 증언에만 기대고 있다는 약점이 있기는 하나, 천재 조각가, 경찰, 선원 등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이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는 전개는 지금 읽어도 압도적이에요.

무엇보다도 태고의 신이 별자리가 제자리로 돌아올 때 다시 지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이만큼이나 설득력 있게 묘사했다는 점이 러브크래프트의 진정한 능력 아닐까요? 노르웨이 뱃사람의 기록을 통해 밝혀지는 신화적인 유적지와 크툴루에 대한 묘사는 너무 대단해서 말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학술적 탐구에 이어 일종의 유언으로 끝나기 때문에 급작스럽기도 하고, 완결된 이야기라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는 게 단점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생명력을 가진 채 수없이 모방되고 인용되는 거대 서사의 기원이라는 점에서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