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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2

살인해드립니다 - 로런스 블록 / 이수현 : 별점 2.5점

살인해드립니다 - 6점
로런스 블록 지음, 이수현 옮김/엘릭시르

감성 킬러 켈러를 주인공으로 하는 로런스 블록 (로렌스 블록)연작 단편집입니다. 원제는 "Hit Man"이고요. 모두 10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두번째 이야기는 "미스테리아 1호"에서 읽었던 작품입니다.

살인 청부업자가 의뢰를 받고 특정 지역에 잠입하여 타겟을 제거한다는 이야기는 많습니다. 하지만 이 단편집 수록작들은 다른 킬러물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사람을 죽이는 작전이 내용의 핵심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켈러가 작전을 위해 방문한 지역과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다양한 상황이 더 상세하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켈러의 심리 묘사 역시도 발군이고요. 이러한 묘사들과 전편에 흐르는 감수성은 확실히 로런스 블록의 작품답다는 느낌을 전해줍니다.

물론 타겟 제거 작전도 허투루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치밀한 준비와 범행을 하는 순간의 묘사가 빼어난 작품도 있거든요. 자신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여겨 경호를 철저히 하는 타겟을 살해하기 위해 소금통에 독약을 넣는 "개를 산책시키고 화분에 물을 줍니다", 의뢰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낸다는 "현장의 켈러"는 작전과 일상이 잘 조화되어 있습니다. 켈러가 속아넘어간다는 내용의 "빛나는 갑옷을 입은 켈러"와 "켈러의 마지막 피난처"도 독특한 맛이 좋았고요.

또 작품들의 설정과 시점이 모두 이어져 있어서 긴 호흡의 장편을 읽는 느낌을 준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이를 통해 켈러가 점점 인간성을 회복해가는 전개를 선보이는 점도 인상적이고요. 흐름으로 본다면 첫 단편 "솔저라고 부르면 대답함"에서는 타겟과는 대화하는 정도이며, 켈러가 그 지역에 대해 흥미를 잃자마자 바로 냉정하게 살해합니다. 하지만 두 번째 단편 "말을 탄 사나이 켈러"에서는 타겟에 대해 알게된 뒤 오히려 의뢰인을 살해하게 됩니다. 세 번째 단편 "켈러의 상담 치료"에서는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하다가 우연찮게 개를 맡아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개 넬슨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식으로 감정을 드러내며("개를 산책시키고 화분에 물을 줍니다"), 작전 때문에 부재 시 넬슨을 돌봐주기 위해 고용한 앤드리아와 동거는 물론이고 자신의 정체까지 밝힙니다("켈러의 카르마"). 그리고 앤드리아가 넬슨과 함께 떠난 후 켈러는 은퇴를 결심하고, 우표 수집이라는 취미를 갖게 되지만 취미에 돈이 너무 많이 들자 복귀하면서 마무리되지요.
이러한 전개는 작품에 일상성을 부여하며, 묘하게 현실적인 느낌을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켈러라는 캐릭터를 극적으로 드러내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옆집 아저씨가 킬러더라'라는 느낌을 현실적으로 구현했달까요? 여튼 이러한 캐릭터 설정과 묘사 만으로도 충분히 읽을만 합니다.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시리즈의 한권으로 만든 모양새, 크기 모두 좋다는 것도 마음에 든 점이고요.

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큰 문제는 켈러의 정체를 너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알아챈다는 것입니다. 10편의 작품 중 첫번째의 잉글먼, 세번째의 브린, 앤드리아, 여덟번째의 월리까지 무려 네 명이 알아내거든요. 그것도 그냥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켈러가 치밀하지 못한 탓에 정체가 드러나는 이야기가 많아서 답답합니다. 첫번째 작품 "솔저라고 부르면 대답함"에서 타겟이 운영하는 '퀵 프린트'에 잃어버린 개를 찾는다는 전단 복사를 의뢰하지만, 전단지에 쓰여진 번호가 실존하지 않는 다는 것을 타겟이 전화를 직접 걸어보고 눈치챈다는 식으로요. "켈러의 상담 치료"에서는 정신과 의사에게 미행당하고요.

게다가 앞서 말씀드렸듯 "빛나는 갑옷을 입은 켈러"와 "켈러의 마지막 피난처"에서는 사기까지 당합니다. 그나마 도트에 의해 의뢰받은 "빛나는 갑옷..."이야 그렇다쳐도 "켈러의 마지막 피난처"는 아마추어에게 농락당하는 수준이라 많이 실망스러워요. 이래서야 진작에 체포되지 않는게 신기할 정도죠.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나름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킬러를 등장시킨 색다름은 좋았지만 정교함이 부족하여 감점합니다. 드라마로서는 충분히 재미있지만 범죄물로 보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어요. 한마디로 로런스 블록의 장점, 단점을 그대로 갖춘 작품집입니다. 로런스 블록의 팬이 아니시라면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2024/02/11

놀라운 반전이 있는 미스터리들 - 북오프 칼럼

가끔 소개해드리는 이러저런 미스터리, 추리소설 추천 정보. 이번에는 북오프 온라인 칼럼 하나를 찾아 소개해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의역이 많은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촘촘히 짜여진 수많은 복선, 상상할 수 없는 전개, 충격적인 결말 ...... 소름이 돋는 오싹함을 찾아 추리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많을겁니다.
그 중 '반전'이 뛰어난 미스터리 작품들을 아는 사람만 아는 작가들과 유명 작가들로 나눠 소개해 드립니다.
꼭 한번, 그 '반전'에 감탄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만 '반전'의 작품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아는 사람만 아는 작가
"가면병동" 치넨 미키토
"If의 비극" 우라가 가즈히로 (국내 미출간)
"신의 숨겨진 얼굴" 후지사키 쇼
"출판금지" 나가에 토시카즈 (국내 미출간)

유명 작가
"연쇄살인마 개구리 남자" 나카야마 시치리
"미로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
"어둠 속의 기다림" 오츠 이치
"살인귀" 아야츠지 유키토

"가면 병동"
강도로 인해 밀실로 변한 병원, 숨 막히는 심리전의 막이 오른다!
요양병원에 강도가 침입해 자신이 쏜 여자의 치료를 요구한다. 사건에 휘말린 외과의사 하야미즈 슈고는 여자를 치료하고 탈출을 시도하던 중 병원에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된다. 폐쇄된 병원에서 펼쳐지는 궁극의 심리전. 그리고 충격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현직 의사가 그리는 단숨에 읽을 수밖에 없는 '본격 미스터리×메디컬 서스펜스'. 저자 첫 문고판 장편소설!

인기 시리즈 제1탄.
의료 소설이라고 하면 난해하고 접근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겁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알기 쉽고, 읽기 쉽습니다. 라이트 노벨 같은 경쾌한 터치로 독자를 쏙쏙 끌어당깁니다.
게다가 치넨 씨는 현직 내과 의사로 의사의 시선으로 바라본 전문적 견해를 바탕으로 집필되어 있어 단순한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점도 매력적인 점입니다.
마음에 드셨다면 속편인 '시한부 병동'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If의 비극"
소설가 가노는 사랑하는 여동생의 자살을 의심한다. 결국 여동생의 약혼자였던 오쿠츠의 불륜이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오쿠츠를 불러내어 살해한다. 하지만 위장공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노가 운전하는 차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나는데....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두 가지로 나뉜다. A는 남자를 치어 죽인 경우, B는 아슬아슬하게 남자를 치지 않은 경우. 두 개의 평행세계가 하나로 연결될 때, 예측할 수 없는 충격적인 진실이 밝혀진다!
식인 작가(사람을 잡아먹는 소설을 많이 써서)로 알려져 '미스터리계의 기인'으로 불리는 우라가 카즈히로 씨의 작품. 경력이 거의 공개되지 않아 그 수수께끼 같은 부분을 좋아하는 독자도 많다고 합니다.
"절대 속지 않는다!"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운 이 작품이지만, 절대 속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 반전에 역시나 격침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신의 숨겨진 얼굴"
신과 같은 청렴결백한 교사, 츠보이 세이조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통곡의 밤은 슬픔에 휩싸여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참석자들이 '신'을 추모하는 가운데, 엄청난 의혹이 제기되었다. 사실 츠보이가 흉악한 범죄자가 아니었을까...? 츠보이의 아름다운 딸, 후배 교사, 제자인 중년 남성과 요즘 여자, 이웃집 주부와 개그맨. 두 번, 세 번 뒤집어지는 그들의 추리는? 반전이 있는 결말이 화제!!!
제34회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 '대상' 수상작. 아리스카와 아리스, 온다 리쿠, 구로카와 히로유키, 미치오 슈스케라는 쟁쟁한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를 받았다는 놀라운 작품입니다.
'웃음을 자아내는 절묘한 유머 감각이 있고, 서비스 정신이 넘친다 (온다 씨)', '개그맨으로 활동한 경험 때문인지, 말투가 매우 유쾌하고 유머 감각은 본받고 싶을 정도였다 (미치오 씨)'라는 심사평에서 알 수 있듯이, 어쨌든 유머가 넘치는 작품입니다. 반전도 훌륭하고요. 꼭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출판금지"
작가인 나가에 씨가 손에 쥔 것은 "카뮈의 자객"이라는 소문난 원고였다. 저자는 작가 와카바시 고세이. 내용은 유명 다큐멘터리 작가와 동반 자살을 시도했지만 살아남은 신도우 나나오와의 단독 인터뷰였다.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산장, 동반 자살의 모든 것을 기록한 영상. 불륜의 끝에서 벌어진 비극인가? 왜 여자만 살아남은 것일까? 숨막히는 전개, 무서운 반전. 기형적인 걸작 미스터리.
작가인 나가에 씨는 원래 호러와 서스펜스를 전문으로 하는 TV 감독이었습니다. 컬트적인 인기를 자랑했던 프로그램 '방송금지'(후지TV)의 기획, 각본, 감독도 담당했다고 하네요. 이 책은 그런 경력을 가진 나가에 씨가 가상의 사건을 취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읽다 보면 마치 논픽션처럼 느껴져서, 도중에 공포에 질려서 더 이상 읽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
수수께끼가 수수께끼를 불러일으키는, 스릴 있고 무서운 작품이라 추리소설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연쇄살인마 개구리 남자"
어느 도시에서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시신은 아파트 13층에서 갈고리에 매달린 알몸의 여성이었다. 그런 시체 근처에는 어린아이가 쓴 것 같은 히라가나로만 쓰여진 조악한 범행 진술서가 있었다. 이후 제2, 제3의 엽기 살인이 일어난다. 한 기자는 세상을 공포에 떨게 하는 범인에게 '개구리 남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
이 작품은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에서 최종 후보까지 올랐던 작품입니다. 기괴한 살인을 다룬 서스펜스 넘치는 미스터리지요.
마지막 반전에 이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반전은 볼만한 가치가 충분해 마지막까지 눈을 뗄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범인의 책임능력을 묻는 형법 제39조가 강하게 개입된 사회파 미스터리의 면모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미스터리로서도 재미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작품입니다.

"미로관의 살인"
추리소설계의 거장 미야가키 요타로에 의해 신예 작가 4명이 '미로관'이라는 기괴한 관에 모였다. 미야가키의 비서는 미야가키가 자살했다며 카세트 테이프를 대신 건네 주었다. 테이프에는 '미로관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써달라', '가장 좋은 작품을 쓴 사람에게 유산의 절반을 주겠다'는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도리없이 네 사람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관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관 시리즈'는 "십각관의 살인", "시계관의 살인" 등 반전과 의외의 결말이 있는 작품이 많은데, 이 작품 역시 큰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다.
곳곳에 깔려있던 복선이 회수되고 여러 가지 장치가 차례로 밝혀지는 후반부 전개가 특히 압권입니다. 이 작품은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까지 눈을 뗄 수 없는 걸작이에요.
참고로 이 작품은 시리즈 작품이지만, 이 작품만으로 독립된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어 이 권부터 읽어도 무방합니다.

"어둠 속의 기다림"
살인 혐의로 경찰에 쫓기던 아키히로는 눈이 보이지 않는 미치루라는 여자가 혼자 사는 집에 숨어들었다. 미치루는 '자신의 집에 누군가가 있다'며 아키히로의 기척을 느꼈지만 계속 모른척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맹인 여자와 살인 용의자인 남자의 기묘한 동거 생활이 시작되는데...
여자가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살인 용의자인 남자가 무단으로 여자의 집에 숨어든다 - 이런 줄거리를 보면 앞으로 도대체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작품이 아닙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점차 유대감 같은 것이 싹트기 시작하거든요.
마지막에는 깜짝 놀랄 만한 반전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살인귀"
'TC멤버스'는 중학생부터 성인까지가 소속된 친목 단체다. 그런 TC멤버스 일행이 후타바산으로 캠핑을 떠난다. 하지만 즐거워야 할 캠프는 후타바산 살인마에 의해 피비린내 나는 참극으로 변해가고, 한 명, 또 한 명씩 살해당하는데............
이 작품은 스플래터 호러 소설입니다. 그 모습을 극명하게 묘사하기 때문에 상당히 그로테스크해서 이런 작품을 싫어하는 분들께는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로테스크한 묘사가 전부는 아닙니다. 후반부에는 아야쓰지 유키토다운 깜짝 놀랄만한 장치가 준비되어 있으며, 거기서 그려지는 반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로테스크한 작품에 면역이 있는 분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2021/02/07

Q.E.D Season 1 정주행, 내맘대로 Best - part 2

거의 10년 전, Q.E.D 1권부터 30권 까지 중 베스트 에피소드를 정리했던 적이 있습니다. 시즌 1이 50권으로 마무리되었으니, 이어서 나머지 31~50권 중 베스트 에피소드를 꼽아봅니다. 시즌 2라고 할 수 있는 iff도 넘버링이 10을 훌쩍 넘어간 지금 시점에서는 다소 뒤 늦은 감이 있지만요.

"베스트 5" 

32권 "매직 & 매직" 

추리마술, '트릭' 이라는 요소가 핵심이라는건 동일하지만, 추리는 트릭을 밝혀야 하는 반면 마술은 트릭을 밝히면 그 가치가 없어져 버린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를 잘 드러내는 내용으로, 토마마저 놀라게 만드는 반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34권 "모야당" 

두 개의 트릭이 등장하는 본격물. 특히 기발하면서도 독자의 허를 찌르는 첫번째 밀실 트릭이 좋았습니다. 풀장에서 심장 마비를 일으키게 만든 두 번째 트릭도 주요 단서가 명확하게 남아있을 뿐 아니라 다이빙하는 시간을 특정할 수가 없는 등 문제는 있지만 나쁘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제목인 '모야당'이라는 전설과 사건 내용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전개가 일품이었던 작품입니다. 

35권 "크리스마스 선물" 

언제나 기본 이상 재미를 보장해 주는 에나리 회장과 추리 동호회가 등장하는 일상계 작품. 토마가 쓴 각본으로 공연되는 연극 "오각관 살인사건"에 관련된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다른 추리적인 요소 모두 좋았지만 특히 연극이라는 상황에 최적화되어 있는 "오각관 살인사건" 속 밀실 트릭이 귀엽고 유쾌해서 마음에 들었어요.

42권 "에셔호텔" 

제목 그대로 에셔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기이한 호텔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에 사용된, 에셔의 작품을 응용한 트릭이 좋았습니다. 범인이 살인을 저지른 눈물나는 동기를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진상을 밝히고 범인을 옭아매는 토마의 냉정함도 인상적이었고요. Q.E.D만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46권 "순례" 

여러가지 증언 속에서 진실을 찾아낸다는 Q.E.D에 자주 등장하는 전개의 작품. 하지만 일본군과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전투를 벌이던 당시를 무대로 해서 시대 상황을 이야기에 잘 녹여낸, 완성도 높은 역사 추리물이었습니다. 결말도 깔끔해서 만족스러웠어요.

이렇게 5편이 제가 선정한 후반부 베스트 5입니다. 이전 선정작과 합쳐 저만의 'Q.E.D season 1 (1~50권)의 베스트 에피소드 10'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덧붙여, 아깝게 베스트로 선정되지 못한 가작들도 소개해드립니다.

33권 "추리소설가 살인사건" 

추리 소설가가 트릭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다는건 "Nervous Breakdown"에서도 등장했었던 설정이지요. 거기에서도 '미키가 노래하는 미버'라는 초월 번역이 돋보이는 좋은 작품이었지만, 이 작품도 만만치 않아요. 괜찮은 밀실 트릭과 추리 소설가들의 심리를 잘 그려낸 덕분입니다. 아쉽게도 용의자가 너무 적고, 트릭이 만화적이라는 단점 때문에 살짝 감점하나 가작으로는 충분합니다.

35권 "두 용의자" 

강도 사건에 대한 추리물로 이야기 자체는 뻔합니다. 하지만 본 사건과 관계없는 과거의 사건을 들먹여 독자를 속이려고 시도하는, 추리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전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기에 가작으로 선정합니다.

38권 "17" 

일본 수학인 "화산"을 다루고 있는 일종의 가상 역사 수학물로, 추리적인 요소보다 현학적인 측면에서 큰 만족감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이런 점도 Q.E.D의 핵심 재미 요소라고 할 수 있겠지요.

40권 "밀실 No.4" 

금고 속 돈을 훔치는 방법에 대한 트릭이 돋보였던 일상계 소품이었던 "4각관계"도 좋았지만, 추리 동호회의 에나리가 등장하는 본격물인 "밀실 No.4"야 말로 진정한 가작입니다. 밀실 살인 사건 해결을 테마로 한 여행 상품 체험 중 벌어진 진짜 밀실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지요. 여행 상품 속 밀실 트릭은 억지스럽지만 재미는 있었습니다. 실제 살인 사건에 사용된, 촛불을 이용한 시간 착오 트릭도 괜찮은 착상이었고요. 그러나 이 작품의 핵심은 토마가 용의자에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덕분에 가작으로 꼽습니다. 상세 내용은 링크 속 리뷰를 참조하시길.

41권 "카프의 탑" 

추리적으로는 별 볼일 없어요. 그러나 논리 퍼즐에 대한 학습 만화로는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이런 학습 만화적인 부분도 Q.E.D만의 볼거리이자 매력 포인트라고 생각하기에, 가작으로 꼽습니다.

2022/10/15

이별의 수법 - 와카타케 나나미 / 문승준 : 별점 2.5점

이별의 수법 - 6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리뷰에는 많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랫동안 근무하던 탐정사무소가 폐업한 탓에 빈둥거리다 미스터리 전문서점 ‘살인곰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하무라 아키라. 위험한 구석이라곤 없는 서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그녀의 불행은 멈추지 않는다. 뇌진탕과 갈비뼈 골절, 폐 손상으로 병원에 입원하고, 말기 암으로 입원해 있던 왕년의 스타 배우와 같은 병실을 쓰게 된다. 얄궂게도 그녀는 하무라 아키라에게 20년 전 가출한 자신의 딸을 찾아달라고 의뢰한다.

하무라는 실종 직후 딸의 행방을 좇았던 탐정을 찾아가지만, 그 탐정 또한 20년 전에 실종되었음을 알게 된다. 또한 의뢰인의 6촌 조카는 교살당했으며, 의뢰인의 집에서 일했던 두 명의 가정부의 행방마저 묘연하다. 왕년의 배우를 둘러싼, 우연의 일치라기엔 너무 잦은 살인과 실종 사건들. 20년 전 실종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사건들 사이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그리고 탐정은 왜 사라졌을까? 하무라 아키라는 20년이라는 긴 시간의 터널을 지나 오래된 비밀과 마주한다. (출판사 제공 소개)


와카타케 나나미의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장편. '살인곰 서점' 시리즈가 국내에 출간된지는 꽤 되었는데, 이 작품이 살인곰 서점 시리즈 중에서는 첫 작품입니다. 해설을 읽어보니 시리즈 연착륙을 노리고 단편집부터 발간했던게 이유였다는데, 독자로서는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는 처사입니다.

작품은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답게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소설 스타일 그대로입니다. 별 것 아닌 의뢰로 보였는데, 조사가 진행되면서 의외의 사건으로 발전해 나가며 그 와중에 거친 (?) 액션이 폭발한다는 이야기거든요. 일반인들, 그리고 평범한 일상속 이야기가 많았던 다른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와는 다르게 정통, 본토 (?) 하드보일드 냄새를 물씬 풍긴다는 점이 조금 특이했습니다. 과거 유명 여배우이자 유력 정치인의 접대부 (?)였던 의뢰인, 의뢰 대상인 실종된 여배우의 딸은 유력 정치인의 손녀 + 강간 피해자 + 연쇄 살인범, 딸이 저지른 연쇄 살인의 끝은 어머니 살해라는 내용이니까요. 스케일은 본토 못지 않아요. 제목부터가 <<기나긴 이별>>스러웠는데, 알맹이도 만만치 않았던거지요.

다행히 이런 스케일 크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설득력있게 잘 그려내고는 있습니다. 하무라 아키라와 그녀가 조사하는 인물들이 현실적으로 잘 묘사된 덕입니다. 전개도 매끄러우며 하무라 아키라의 조사 과정도 아주 현실적이에요. 경찰이 아닌 일반인 탐정이 가능했을 조사의 최고점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남다른 하무라의 눈썰미와 추리력은 여전하고, 사소한 단서들로 진상이 드러나는 구조도 잘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본 사건 외에 함께 진행되는 사건들의 완성도도 높아요. 후부키가 하무라에게 사건을 의뢰하는 계기가 되었던, 백골 발견 사건처럼요. 살아있는 줄 알았던 아내 에이코가 알고 보니 변장한 남편이었고 백골이 에이코였다는 트릭인데 꽤 그럴듯했기 때문입니다. 사라진 탐정 이와고 사건의 진상도 설득력 높아서 마음에 들었고요. 장편 속에서 지나가는 사건으로 등장하는게 아니라 하나의 단편으로도 충분했을, 완성도 높은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하무라 아키라 2기 살인곰 서점 시리즈의 막을 여는 작품답게 백곰 탐정사 설립 유래도 등장하고, 도야마 점장의 미스터리 소개 등 팬으로 즐길거리도 많아서 5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에 읽어내릴 수 있었습니다. 2016년 발표 당시 이런저런 리스트에서 베스트 10 안에 포함된건 - 주간문춘 베스트 미스터리 10위, 고노미스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6위 등 - 당연하다 생각되네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 않습니다. 전개 중간중간마다 억지스러운 부분이 눈에 걸리는 탓입니다. 우선 후부키가 하무라에게 딸 시오리를 찾아달라고 의뢰한 것 부터가 억지입니다. 과거 시오리가 사라졌던건 후부키가 시오리의 살인 행각을 알고난 뒤 시오리를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 뒤 후부키는 시오리가 죽었고, 충직한 비서 야마모토가 사체를 처리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그녀 주변에 시오리를 닮은 누군가 (알고보니 진짜였지만)가 출몰했기 때문에 그 진상을 알기 위해 사건을 의뢰했다는데, 이건 말도 안됩니다. 20년 전에 시오리를 처리했다는 충직한 비서 야마모토는 건재했으니까요. 그냥 야마모토에게 연락해서 진상을 알아보면 될 일이었어요!
야마모토가 시오리와 관계를 가진 탓에 미안해서 연락을 못 받았다는 묘사가 있지만, 그랬다면 의뢰는 비서를 찾아달라는걸로 족합니다. 시오리를 찾아달라고 의뢰한다면, 탐정의 조사를 통해 과거의 연쇄 살인이 드러날지도 모르잖아요. 20년 전 처럼 시오리 친부가 누구인지에 대한 소동이 일어날 수도 있고요. 실제로 하무라는 시오리의 부친이 누구인지는 물론이고 그녀가 사라진 이유 등 모든 진상을 알아내는데 성공했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되는 억지스러운 의뢰였습니다.

시오리의 연쇄 살인도 하무라의 조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지만, 급작스러울 뿐더러 비현실적인 사건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습니다. 이건 시오리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다시피해서 그녀의 캐릭터가 제대로 구성되지 못한 탓입니다. 고등학교 때 성폭행을 당했었다는 과거 언급이 전부인데, 이 아픈 기억이 연쇄 살인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전혀 설명되지 않고, 범행에 대한 묘사도 전무하기 때문이지요. 그나마 야마모토의 여동생 유코는 그녀가 시오리를 도발했다는 말이라도 나오는데, 가정부와 이모 할머니는 대체 왜 죽인건지도 모르겠어요.
후부키가 시오리의 최종 목표였다는 것도 의문입니다. 그럴거라면 과거에 가정부와 이모 할머니를 살해했을 때 같이 죽이려 했어야지요. 또 시오리가 입원 중이었던 병원을 몰래 빠져나온지도 3주 정도 지났다고 설명되는데, 왜 주위만 맴돌고 진작에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을까요?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뚱뚱한 시오리가 후부키를 덥치고, 그걸 막는 하무라와의 사투는 지나칠정도로 전형적이면서 크리쳐물을 연상케 할 정도로 과장되어 있어서 현실감을 느끼기 어려웠고요.
매니저 야마모토의 복수 - 성폭행을 저질러 시오리를 연쇄 살인마로 만든 안자이에 대한 - 도 뜬금없었고, 20년 전 1990년대에 이렇게 많은 죽음이 제대로 조사되지 못한 이유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단순 실종이나 자연사로 위장한 이모 할머니 사건이야 그렇다쳐도 명확한 살인 사건이었던 하나 사건, 유코 사건은 경찰 수사가 이루어졌을텐데 그 경과는 대충 넘어갑니다.

또 곁가지 사건 중 친구인 줄 알았던 악녀 마미가 얽힌 사건은 비중은 제일 큰 반면 내용은 별게 없어서 다소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래도 이벤트를 가장한 불법 카지노 운영 방식에 대한 추리는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순진한 사기 피해자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하무라를 속여넘긴 프로 범죄자이자 일종의 생활밀착형 사이코패스 마미 묘사만큼은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에 계속 등장하는 민폐 캐릭터의 확장형이기도 한데, 이후 시리즈가 생활밀착형으로 방향을 전환하게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재미만큼은 분명합니다. 단점을 잔뜩 언급하기는 했지만 읽는 동안에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나쁜 토끼>>의 비현실적인 세계관에서 생활밀착형 하드보일드인 살인곰 서점 시리즈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하는 작품으로 작가의 스토리텔러로서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줍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8/11/23

맥파이 살인 사건 - 앤서니 호로비츠 / 이은선 : 별점 3점

맥파이 살인 사건 - 6점
앤서니 호로비츠 지음, 이은선 옮김/열린책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별고 없는 조용한 마을 색스비온에이번에서 대저택 파이 홀의 가정부 메리 블래키스턴의 장례식이 치뤄졌다. 추도식을 맡은 목사, 음흉한 앤티크 숍 주인, 고인과 갈등을 겪은 아들, 시신을 발견한 관리인 등 등장인물들의 미심쩍은 행동과 죽음을 둘러싼 소문들이 밀도 있게 흘렀고, 이후 파이 홀의 주인인 매그너스 파이마저 기이한 죽음을 맞았다. 소식을 접한 탐정 아티쿠스 퓐트는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하는데... 라는 내용의 인기 추리 소설 시리즈 아티쿠스 퓐트 시리즈 최신작 "맥파이 살인 사건" 원고를 읽던 담당 편집자 수전 라일랜드는 소설의 결말이 누락된 것을 알아챘다.
원고를 전해 준 출판사 사장 찰스로부터 작가 앨런 콘웨이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수전은, 사라진 원고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앨런의 자택과 주변 인물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차 앨런 콘웨이 죽음이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데...

작 중 최고의 인기 추리 소설 시리즈 중 하나인 아티쿠스 퓐트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맥파이 살인 사건"과, 이 책의 출판을 담당하는 클로버리프 북스의 소설팀 팀장 수전 라일랜드가 저자인 앨런 콘웨이 사망 사건에 얽힌 진상을 추적하는 두 개의 소설이 함께 수록된 작품입니다.
본 이야기 속에 하나 이상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는 일반적인 액자 소설이라기보다는 "맥파이 살인 사건"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완성된 추리 소설로 수전 라일랜드 이야기의 동기로 사용된다는 점이 특이했습니다. 보통 액자 소설은 본편 주인공에게 소설 내용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데, 이 작품에서의 "맥파이 살인 사건"은 강력한 동기 외에는 딱히 다른 역할을 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인기 시리즈로 베스트셀러가 확실한 작품인데다가 수전 라일랜드부터가 굉장한 추리소설 매니아라서 안 찾고는 못 배겼을 거라는, 굉장히 확실한 동기라는 측면에서는 설득력은 높습니다. 

문제는 "맥파이 살인 사건"이 앨런 콘웨이 사건에서 큰 단서가 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앨런 콘웨이가 추리 소설을 싫어하고 증오했는지를 설명해 주는 도구로만 사용될 뿐입니다. 딱히 대단한 단서나 트릭이 숨겨져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 도구로의 사용도 대부분 앨런 콘웨이의 장난에 불과해서 크게 와 닿지 않고요. 오히려 "맥파이 살인 사건" 이라는 추리 소설 자체만으로의 완성도가 높은 수준이라 이렇게 사용되는게 아깝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1955년을 무대로 하고 있는데 크리스티 여사님으로 대표되는 당대 본격 추리물과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을 정도였거든요. 단서의 제공도 공정하며 모든 등장 인물들이 동기가 있고 수상하다는 전개도 본격물스러우며, 범인을 추리하는 과정도 무척이나 합리적이며 범인의 동기도 확실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수전 라일랜드의 활약을 그린 본 편도 흥미롭습니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딱히 대단한 능력은 없는 출판사 직원이 보여줄 수 있는 한계의 최대치를 뽑아내는 전개도 좋으며 ,본격물답게 엄청나게 많은 용의자가 엄청나게 많은 수상한 점을 드러내지만 이 모든게 마지막에 제대로 밝혀지는 결말까지는 아주 완벽했어요.

하지만 범인이 드러난 직후부터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아요. 일단 범인이 찰스였다는 진상은 놀랍습니다. 그러나 이게 밝혀지는 이유가 잠깐 스쳐지나간 해고된 비서와의 대화에서 비롯된다는건 우연에 기댄 작위적인 전개일 뿐 아니라, 찰스의 행동이 너무나 허술해서 황당할 정도에요. 앨런 콘웨이을 사전에 만났고, 이미 완성된 원고를 전달받았다는걸 수전이 아는 순간 모든게 끝나 버리잖아요? 마지막에 수전을 죽일 생각이 들었다면 비서부터 죽였어야지요.
동기에 대한 설득력도 낮습니다. 앨런 콘웨이가 아티쿠스 퓐트 시리즈를 완벽한 조롱거리로 끝장내기로 작정했다 하더라도, 그의 계획과 인터뷰는 책을 화제로 만들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작품 자체의 수준도 높은 만큼, 판매에 지장이 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아요. TV 시리즈야 물 건너 갈 수도 있겠지만 판매량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증명한다면 영상화 판권을 소유한 업체가 쉽게 포기할 것으로 보이지도 않고요. 즉, 수전 라일랜드가 처음에 찰스를 의심하다가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일 리 없다'고 생각을 접은게 타당한 추리입니다. 수전만큼의 추리 소설에 대한 애정을 찰스가 보였다면 그나마 조금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이래서야 현실성이 없죠.
아울러 앨런 콘웨이가 시리즈 제목을 활용하여 '애너그램' 이라는 말을 만들어 안배한게 고작 '아티쿠스 퓐트의 이름을 풀어서 해석하면 욕이다'라는 핵심 동기는 물론, 앨런이 추리 소설을 우습게 보았다는 각종 설정(예를 들어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지하철 역 이름이나 만년필 회사 등으로 대충 지은 것)도 딱히 이상하다 느껴지지는 않았어요.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를 우습게 보고 그것을 조롱하고자 했더라면 좀 더 거대한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수전을 죽이려고 시도한 후 경찰에 체포되어 출판계 동료들이 수전을 배신자라 생각하여 등을 돌렸다는 후일담도 와닿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앨런 콘웨이는 모든 사람들이 싫어해서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더라도, 수전을 죽이려고 시도한 것은 엄연한 범죄인데 배신자는 무슨 배신자입니까... 마지막 수전이 그리스로 옮겨가는 에필로그는 솔직히 완전한 사족이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두 편의 완성도 높은 추리 소설을 한 권으로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은 굉장하지만 위의 단점으로 감점합니다. 욕심이 좀 지나쳤달까요? 차라리 "맥파이 살인 사건" 만으로 출간되었더라면 더 나았을 겁니다.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볼만한 부분이 많고, 현대에 전통 본격물을 제대로 복원한 공 만큼은 인정합니다. 추리 장르 애호가시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2/10/02

미로관의 살인 - 아야츠지 유키토 / 권일영 : 별점 3점

미로관의 살인 - 6점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권일영 옮김/한즈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리 소설계의 거장 미야가키 요타로는 환갑을 맞아 자신의 저택 '미로관'에 제자 작가 4명과 평론가, 담당 편집자, 친한 추리소설 애호가를 초대했다. 그리고 미로관에 모인 그들에게 미야가키의 비서 이노 미쓰오가 요타로가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함께 공개된 유언장에는 4명의 제자 중 한 명에게 거액의 유산을 줄 생각인데, 그 한 명은 앞으로 닷새 동안 미로관에서 그들이 각각 쓴 추리 소설을 함께 참석한 편집자, 평론가, 애호가들의 심사로 결정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사람이 죽기는 했지만, 워낙 거액이 걸려있는 탓에 작가들과 심사 위원들은 요타로의 유언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작가 중 한 명인 스자키가 살해당했으며 나머지 생존자들 모두는 미로관에 갇혔다는걸 알게 되었다. 유일하게 사라진건 비서 이노였다. 작가 중 한 명인 기요무라는 이노가 범인이라며, 유언에 따른 추리 소설 창작 대결을 속행할 것을 주장하는데....


신본격의 탄생을 알렸던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세 번째 작품. 일본에서는 1988년에 출간되었던 작품이지요.
사실 이 작품은 나름대로는 비교적 빠르게 국내에 소개되었던 편입니다. 1997년에 학산 문화사에서 정식 출간되었었으니까요. 하지만 절판은 더 빨랐었습니다. 이유는 인터넷이 발달했던 시대가 아니어서 정보가 전달되고 소개되는게 많이 늦었던 탓입니다. 저 역시 추리 소설 애호가를 자처하고 있었지만 이 시리즈가 출간되었던 것 조차 잘 알지 못했던, 그런 시대였거든요. 인터넷 서점도 거의 없었고요.
그래서인지 오히려 절판 이후 인기가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 덕분이지요. 덕분에 중고책 가격도 꽤나 올라가게 되었었고요. 그러고보면 이러한 프로세스 '1. 국내 출간 -> 2. 광속 절판 -> 3. 인터넷 등으로 유명세, 가치 상승 -> 4. 중고가 상승'을 거친 책들이 1990년대 후반에 꽤 많았었습니다. <<점성술 살인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그래도 저는 절판 직후 연이 닿아서, 2000년대 초반에 <<십각관>>, <<수차관>>, <<시계관>>, 그리고 <<인형관>>을 구해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내용도 대체로 기억나고요. 그런데<<미로관의 살인>> 만큼은 이상하게도 내용이 전혀 기억 나지 않았습니다. 분명 읽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러던 차, 추리 소설 관련 정보를 조사하다가 한 랭킹에서 마지막 한 줄의 반전이 빼어난 작품으로 <<미로관의 살인>을 꼽고 있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호기심도 생겼고, 오래된 숙제를 마치는 기분도 느낄 겸 해서 알라딘 전자책으로 구입하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 오래 전에 읽지 않았던 작품이 맞더군요. 모든 내용이 새로왔기 때문입니다. 당초에 왜 읽었다고 생각했을까요? 사람의 기억이라는게 얼마나 오류가 많은지 다시금 느끼게 되네요.

각설하고 작품에 대해 소개해드리자면, 이야기는 '시마다'가 시시야 가도미라는 작가의 <<미로관의 살인>>을 선물받아 읽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미로관의 살인>>이라는 소설 속 소설이 곧바로 이어지는, 일종의 액자 소설같은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미로관의 살인>>은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가 만든 '미로관'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 사건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고요. 시마다 기요시가 다른 시리즈들과 마찬가지로 탐정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우선 미로관의 주인이자 추리 소설계의 거장인 미야가키 요타로가 자살하면서, 4명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인물에게 유산을 넘겨줄 생각으로 그들을 미로관에 불러 모았다는 도입부부터 시선을 확 잡아 끕니다. 이들을 닷새 동안 미로관에 가두고 작품을 쓰게한 뒤, 같이 초대했던 평론가와 편집자, 추리소설 애호가에게 심사 위원 역할을 맡길 셈이었다는 계획은 꽤 그럴싸해 보였거든요. 뛰어난 신진기예 작가들의 실력을 극한으로, 하지만 공정하게 뽑아내기 위해서는 이만한 방법도 없을테니까요. 물론 공정함을 위해 현장에서 동일한 주제 - 무대는 미로관이며 피해자는 작가 본인으로 할 것 - 를 주기는 했지만, 작가 중 누구라도 자기가 쓰려고 했던 다른 작품에서의 획기적 트릭을 유용할 수 있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 실제로 다이잉 메시지를 쓰려고 했던 작가가 있었는데, 이는 장소와 피해자가 누구라도 상관없는 트릭이니까요 - 아주 공정했다고 보기는 힘들긴 하지만요.
이후 4명의 제자들이 각자 작업했던 작품에서처럼 살해당한다는 전개도 무척 흥미로왔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 만 합니다. 피해자들이 살해당한 현장 등 여러가지 단서들과 정보들 모두가 화자격인 우타야마를 통해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제공되는 덕분입니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진상 역시 합리적이고요.
조금 상세히 설명드리자면, 가장 처음 살해당했던 스자키는 목이 거의 떨어져 나간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목 부분에는 소 머리 박제가 놓여 있었고요. 하지만 왜 머리를 아예 잘라 놓거나, 아니면 간단하게 박제 머리를 올려놓지 않고 이렇게 어중간하게 현장을 만들었을까요? 시마다 기요시의 추리는 범인이 현장에서 피를 흘렸기 때문에, 피를 피로 덮기 위해서 목을 잘랐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나중에 사실로 판명되고요.
마찬가지로 하야시는 입구에 바리케이트까지 쳐 놓았을 정도로 준비가 철저했었는데, 왜 범인은 쉽게 방 안으로 들여 보냈는지? 후나오카가 살해당한 방은 빗장까지 걸린 완벽한 밀실 상태였는데 범인은 어떻게 도주한 것인지? 에 대한 답은, 미로관의 각 방은 비밀 통로가 있었다는 추리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야시가 남겼던 다이잉 메시지, 후나오카가 죽기 직전 거울을 가리켰던 행위로 비밀 통로의 존재는 밝혀지고, 이로써 진범은 죽은 줄 알았던 미야가키 요타로였다는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는 살인이 하고 싶어서 4명의 제자를 죽였다는 유서를 남기고 비밀 통로로 이어지는 방에서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지요.
이렇게 기묘한 현장 조작과 밀실 살인, 원격 조종 살인 등이 함께 펼쳐져 추리의 여지가 많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냥 이 정도로 마무리되었다면, 이 작품이 그렇게까지 추리적으로, 그리고 반전에 대해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을 겁니다. 워드프로세서의 키보드 배치 문제, S가 하나 더 표기된 MINOSS 왕의 철자, 지속적으로 나카무라 세이지가 만든 건축물은 특별한 장치가 있다며 시마다 기요시가 비밀 통로에 대해 수차례 언급하는 등 다이잉 메시지와 비밀 통로에 대해서는 정보가 많이 주어지고 있어서 아주 대단한 추리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비밀 통로'는 트릭으로서는 반칙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작품 내에서도 반칙이라고 언급될 정도지요.
기요무라를 살해한 트릭을 제외하고는 '미로관'이라는 말 그대로 미로를 이용한 트릭이 부족한 것도 조금은 실망스러웠던 부분입니다. 기요무라 살해 트릭도 우타야마의 입을 통해 '통로에서의 위화감'이 계속 언급되고 있어서 특별히 대단한 추리가 필요하지도 않았고요. 아울러 기요무라가 가면이 아니라 평면도를 통해 이동해서 함정에 걸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을지 등 상세한 내용 설명이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하지만 에필로그를 통해 드러나는 반전과 또다른 진상이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들어 줍니다. 작품 전체에서 당연히 남자인줄 알았던 사메지마가 여자였다는 서술 트릭이 사용되었던 겁니다! 이로써 스자키의 목을 잘랐던건 시마다 기요시의 추리가 맞았다는게 판명됩니다. 당시 현장에서 그 누구도 출혈을 일으킬만한 상처가 없어서 범인을 알아내지 못했었는데, 사메지마가 갑자기 생리가 터졌던게 출혈의 원인이라는게 밝혀지거든요. 그녀와 미야가키의 오래된 인연, 장애가 있는 그녀의 아이 등 사건의 동기 역시 모두 공정하게 설명되고 있고요. 자살을 위장해서 미야가키 요타로만 살해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유산의 전부나 일부가 미야가키 요타로가 만들려고 했던 추리상 기금으로 사용될 수 있었으니 그를 살인범으로 몰아 죽게 만들었다는건 충분히 합리적이었습니다. 연쇄 살인마가 만든 추리상을 받고 싶은 작가는 없을테니까요. 액자 소설 형태를 취했던 이유도 알고보니 이 서술 트릭을 위해서였는데, 상당히 깔끔하게 마무리 되고 있어서 완성도도 높고요.
서술 트릭물답게 성별은 물론, 여성이라고 짐작 가능하게끔 사메지마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 등 알고보면 억지가 없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납득할 만 합니다. 이는 에필로그의 대화를 통해 '일부러 그렇게 썼다'는 작가의 말로 재치있게 빠져나가고 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사건의 무대인 미로관과 사람이 죽어나가는 중에 벌어지는 추리 소설 창작 대결 등 비현실적인 소재가 많다는 등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라나 신본격의 중흥을 이끌었던 작가의 당시 대표작다운 재미는 충분합니다. 추리적으로도 기본 이상은 해 주며 그리 길지 않다는 미덕도 크고요. 아직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해드립니다.

2021/03/06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 권일용, 고나무 : 별점 3점을 읽는 자들 - 권일용, 고나무 : 별점 3점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 6점
권일용.고나무 지음/알마

권일용은 국내 최초의 프로파일러입니다. 경찰 학교를 졸업하고 일선 형사로 근무하다가 발탁되었지요. 감식 업무에서 재능을 발휘했던걸 눈여겨 보았던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장 윤외출의 덕이었습니다. 그 뒤 여러 수사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프로파일러로서의 입지를 굳혔고요. 

이 책은 권일용이 프로파일러로서 수사에 참여했던 6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국내 수사 기관에서 프로파일링이 어떻게 시작되어 성장했는지를 설명해주는 논픽션입니다.

첫 번째 사건은 2001년 조현길이 저질렀던 여아 살인 사건입니다. 가장 중요한 단서는 피해 여아 사체를 냉동실에 보관해서 사체 등 부분에 생겨난 일정한 간격의 가늘고 긴 눌린 흔적으로 냉장고 모델을 찾아낸 겁니다. 해당 냉장고는 업소용 중대형이었고, 이를 비롯한 여러가지 직접 확인한 단서를 토대로 권일용은 한국 범죄 사건 수사 역사상 처음으로 프로파일링 보고서를 제출하게 됩니다. 그의 보고서가 수사에 기여한 바가 있고, 보고서 속 범인상이 진범 조현길과 대체로 일치했던 덕분에 이후 국내 범죄 수사에서도 프로파일링이 활용되게 되었고요. 국내 프로파일링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뒤이어 권일용이 투입되었던 2003년 유영철 사건에서는 연쇄 살인을 알아채지 못하는 실패를 겪게 됩니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유영철이 경찰 수사 방향을 인지했기 때문입니다. 유영철은 범행 수법을 바꾸었고, 그 탓에 권일용은 이전 사건과 이후 사건을 연결짓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정통 수사기법의 한계도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수사팀은 대낮에 범행을 저지르고 피가 묻은 상태에서 도망을 갔는데도 목격자가 없다는 점에 착안하여 차량을 이용한 범죄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습니다. 그리고 차량 수색에 집중했지요. 하지만 권일용은 시대가 바뀌어서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지 않는걸 깨닫고, 차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들어맞았습니다.
최초 노인 살인 사건 현장 근처에 교회가 있었던게 나름 의미가 있었다는 것도 권일용의 생각대로였습니다. 유영철은 '교회가 옆에 있지만 바로 앞에 사는 이 사람도 무참히 죽는다’라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고 합니다.
물론 사체 매장 현장에 표식을 한건 완전히 헛다리를 짚기는 했습니다. 권일용은 범인이 자신의 살인 행위를 반추하고 되돌아볼 것이라는 낭만적인 추정을 했는데, 유영철은 그냥 '사체를 묻은 데를 또 파면 귀찮아서' 표시를 한 것 뿐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단순한 실패보다는 나름 성과가 있었던 유영철 사건이 있었던 덕분에 권일용은 더욱 성장했고, 경찰 내에도 프로파일링 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뒤이은 정남규 사건에서는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단순 강도 상해범으로 체포되었던 정남규가 서울 서남부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임이 드러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자백을 권일용이 이끌어내게 되거든요.

2009년 강호순 사건에서도 권일용 팀의 분석이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 범인은 '호의동승'으로 피해자들을 유인했고, 이를 위해 고급차를 탔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인물일거라는 분석이었는데 실제로 강호순은 에쿠스를 탔으며, 범행 당시 깔끔한 양복을 입기도 했고, 차 대쉬보드 위에 개와 함께 있는 사진을 장식해 놓는 등 치밀하게 본인을 위장했다고 밝혀졌으니까요. 주변 사람들 평가도 굉장히 좋았다고 하지요

강호순 사건 중간에 맡았던 2007년 제주에서 발생했던 아동 성범죄자 성유철 사건은, 프로파일링의 활용보다는 아동 성범죄에 대한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2007년에 벌어졌던 고정민 (가명) 양 실종 사건에서는 사람의 자백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실제 범행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거짓 자백에 이르는 과정과 거짓 자백 후 범행의 줄거리를 지어내는 모습 모두 교과서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더라고요. 흔히 이야기하는, 성폭행 피해자들이 확 물어버리고 소리를 지르는걸 왜 못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체를 제대로 설명하기는 힘든 '공포심' 때문이라는데 굉장히 와 닿았어요.

또 끔찍한 연쇄 살인 사건을 통해 1960~1970년대에는 살인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죄였는데, 왜 그 양상이 달라졌는지에 대한 분석도 상세합니다. 자본주의로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사회가 일부 구성원들을 스트레스로 압착할 때 일부 반사회적인 범죄자들이 복수심으로 무차별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살인자의 반사회성은 후천적 영향일 가능성이 높고요. 서구 사회에서는 반사회성에 유전적 요인이 있다고 여기지만, 단일 민족인 한국에서 유전적 이유로 누구는 괴물이 된다는 건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인데 그럴듯합니다. 복수심, 사회에 대한 분노로 가득차 있었던 유영철, 정남규와는 다르게 진짜 서구적인 쾌락 연쇄 살인을 저지른 강호순과의 차이도 잘 드러나고요. 하지만 저는, 과거에도 잔혹 범죄는 존재했던 만큼 연쇄 살인이 양극화로 더 증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경찰 수사력의 발달로 과거 사건화되지 않았던 사건들도 밝혀지고, 이게 과거보다 발달한 매스컴을 통해 널리 알려진 탓에 증가한걸로 보이는게 아닌가 싶거든요. 이런 부분에 있어 깊게 연구된 자료가 있으면 좋겠네요.

그 외 단순히 당시 벌어졌던 범죄와 그 수사, 해결 과정 뿐 아니라 수사에 참여했던 프로파일러들의 생각과 행동도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프로파일러가 무슨 마법사나 천재가 아니라, 수사를 돕는 역할이라는게 잘 드러나지요. 수사 현장에서 쓰이는 전문적인 은어 등 디테일도 좋습니다. 그리고 피해자 가족들의 가슴 아픈 현실도 충분히 설명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사형 제도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잠깐 스쳐지나가듯 등장하기는 하지만, 권일용도 사형 집행에 찬성하는 입장이더군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도소에서 교정, 교화가 가능하다고 쳐도,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의 중죄를 저지른 범인을 교정, 교화시켜 사회에 복귀시킬 이유는 없습니다.

이렇게 여러모로 읽어 볼 만한 논픽션인건 분명한데, 건조한 르포르타쥬 문체가 아니라 권일용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적인 구성과 문체로 쓰여진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데, 저는 확실히 불호 쪽이에요. 분명 실화인데 뭔가 각색되어서 왜곡되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국 프로파일링의 역사를 담기 위한 취지 탓이었겠지만, 익히 알려진 사건에서 누구나 다 아는 정보를 빼곡하게 채워 놓은 부분들도 조금은 아쉬웠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한국 범죄사, 프로파일링 역사에 대해 알고싶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0/03/27

잠자는 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 / 김윤정 : 별점 2.5점

잠자는 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3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윤정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국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영국으로 온 그웬더는 남편 자일스가 오기 전, 보금자리로 힐사이드 저택을 구입했다. 그런데 그녀는 집에 대해 알아갈 수록, 자신이 그 집에 대해 이미 기억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웬더는 남편이 없는 동안 도움을 청하기 위해, 남편의 사촌인 유명 소설가 레이먼드 웨스트 부부를 찾았다가 미스 마플을 만났다. 그리고 유령에 대한 연극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후, 미스 마플에게 급작스럽게 떠오른 자신의 기억을 털어놓았다. 그것은 그녀가 오래전 힐사이드에서 헬렌의 시체를 보았던 기억이었다.

미스 마플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인터넷 도서관에서 e-book으로 대여해 읽었죠.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에서의 별점은 3.5점입니다. "공략"에서 이야기하듯, 미스 마플의 존재감이 상당히 희미하다는게 특징입니다. 실제로 사건에서 많은 역할을 하는건 그웬다와 자일스 부부거든요. 그웬다가 떠올린 과거의 기억에 대한 진상을 둘이 함께 파헤친다는 내용이니까요.

하지만 미스 마플의 비중과는 별개로, 이야기는 재미있고 쑥쑥 읽힙니다. 특히 초반부, 그웬다가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는 장면 묘사가 왠만한 호러물 저리가라 할 정도인 덕분입니다. 그래서 쉽게 몰입할 수 있었어요. 겨자색 침실 벽을 '새빨갛고 작은 개양귀비꽃과 수레국화가 번갈아 피어 있는 무늬의 벽지'로 바꾸는게 좋겠다고 생각한 뒤, 침실에 있는 오랫동안 열지 않은 붙박이 장을 열고 난 뒤의 묘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붙박이장 안 쪽만 겨자색으로 덧칠이 되지 않고 '새빨갛고 작은 개양귀비꽃과 수레국화가 번갈아 피어 있는 무늬의 벽지' 상태로 남아있었거든요. 아, 이건 정말 영상으로 봤다면 아주 기가 막혔을거 같아요.

미스 마플도 비중에 비하면 활약은 확실해서 팬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명탐정으로서의 역할부터 제대로에요.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추리는 물론, 세세한 추리들 모두 돋보입니다. 그웬더가 기억하는, 선장이 2명이었다는 말을 통해 두 번의 긴 항해가 있었다고 추리하고, 난간 위가 아니라 난간 사이로 홀을 내려다 보았다는 말을 통해 그녀가 어린아이였을 때의 기억이라고 추리하는 식인데 모두 합리적이에요. 게다가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웬더를 죽이려는 케네디 박사를 층계참으로 뛰어 올라와 비눗물을 뿌려서 퇴치한다는 액션까지 선보입니다. 할머니 특유의 친화력과 풍부한 휴먼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하는 모습도 인상적이고요.

추리물로서도 꽤 볼만한 편입니다. 대단치는 않아도 설득력 넘치는 트릭들이 연이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헬렌의 메모가 진짜인지 필적 감정을 할 때, 케네디 박사가 제공한 편지와 필적 견본 모두 본인이 써서 제공한다는게 첫 번째 트릭입니다. 덕분에 메모는 진짜인걸로 일단 판명나죠. 간단하면서도 실현 가능한 트릭이라는 점에서 마음에 듭니다.
릴리가 왜 케네디 박사가 알려준 열차가 아니라 한 시간 전에 도착하는 기차를 타서, 케네디 박사가 알려준 역 전의 역에서 내렸는지에 사용된 두 번째 트릭도 괜찮습니다. 진상은 박사가 살인을 저지른 뒤, 원래 주었던 편지를 없애고 수정된 시간과 장소가 적힌 편지를 남겨놓았을 뿐입니다. 덕분에 경찰은 이 상황을 릴리가 박사를 만나기 전, 누군가를 협박하러 갔다고 오판합니다. 그럴듯하죠?
헬렌이 옷을 가져갔지만, 드레스는 가져갔지만 드레스와 셋트인 벨트와 슬립은 두고 가는 등 조합이 안 맞는다는걸 드러내는, 여성 특유의 관찰력이 돋보이는 장면도 좋습니다. 미스 마플의 추리는 아니고 하녀 릴리가 알아낸 것이지만요.

아울러 살인 사건에 관여하지 말라는 충고도 돋보였어요. 문제가 되었던 사건이라면, 지역 토박이인 정원사 등이 몰랐을리 없다. 즉, 모두에게 숨긴 완전범죄였기 때문에, 지금 그 사건을 파헤치는건 현명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크리스티 여사의 또다른 작품인 "누명"이 연상되는 충고죠. 모두가 잊기를 원하고 잊혀졌다면, 그대로 놔 두는게 맞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네요. 참고로 잠자는 살인이라는 멋드러진 제목은 이 충고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오래전 살인 사건인데, 아무도 모르고 있는 잠자는 살인으로, 자게 내버려 두는게 낫다라는 의미입니다.

그 외에, 이야기와 별 상관은 없지만 딜머스에 가기 위해 주치의 닥터 헤이독에게 바닷가 휴양을 조언해 달라고 우길 때의 티격태격도 재미있었습니다. 미스 마플이 과거의 살인을 파헤치러 가기 위해 "딜머스에서 2, 3주일 지내는 것은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겠죠?"라고 물어보자 "당신의 임종이 가까워 올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식인데, 닥터 헤이독이 이렇게 기지가 넘치고 위트있는 인물인지는 몰랐네요.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읽기에는 쉽다는 문제가 좀 큽니다. 부부가 미스 마플의 충고를 무시하고,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새어머니 헬렌의 오빠 케네디 박사를 만나는 초반부에서 모든 진상이 드러나는 탓입니다.
케네디 박사는 새어머니 헬렌은 다른 남자와 도주했으며, 아버지 핼러데이는 급격히 건강이 좋지 않아져서 요양소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즘 독자들은, 이런 증언은 피해자는 새어머니이며, 켈빈 핼리데이 소령이 아내를 살해한 뒤 시체를 처리하고 도망갔다고 오해하기 만들기 위함이라는걸 금방 눈치챌 겁니다. 그래서 소령이 범인이 아니라면, 소령이 케네디 박사에게 찾아가 살인을 고백하고 함께 돌아왔을 때 시체는 어디갔을까요? 또 헬렌이 다른 남자와 떠났다고 믿게끔 짐을 챙기고 그에 대한 메모를 남긴건 누구일까요? 그리고 헬렌이 살아있다고 믿게 만들기 위해 몇 개월 뒤 전해졌다는 편지는 누가 보냈을까요? 이 조작을 한 인물은 동일 인물일겁니다. 자일스의 말처럼 핼리데이가 범행을 저질렀지만 은폐할 속셈이었다면, 케네디 박사를 찾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때문에 핼리데이는 살인을 했을지언정, 은폐 시도와 관련된 조작을 하지는 않았다는게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케네디 박사일 수 밖에 없죠. 현장에 있었고, 현장 조작 및 시체 은닉, 핼리데이의 증언 위조 등이 가능했던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동기는 이 단계에서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여동생에 대한 집착 같은 이유였겠지요. 헬렌이 남자와 떠난다는 메모는 나중에라도 준비할 수 있으니, 시체를 어떻게 없앴는지만 고민하면 됩니다. 이건 아마 변경된 집의 구조와 관련이 있는게 뻔하며, 결국 기묘한 정원 계단을 파헤치면서 사실로 밝혀집니다.

이렇게 초반에 주어진 정보만으로 진상은 모두 추리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케네디 박사 등장 이후에는 부부가 헬렌과 관련되었던 3명의 남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혐의를 씌우는 쪽으로 진행됩니다. 그러나 초반에 던져준 정보가 너무 확실하며, 이 세 명 중에서도 살인을 실제로 저지를만한 인물은 월터 페인밖에 없어서 눈길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어스킨 소령이 헬렌과 사랑에 빠졌다 한들 그는 유부남이라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고, 재키 애플릭은 사랑을 훼방놓은 케네디 박사와 월터 페인을 살해하면 모를까, 헬렌을 살해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또 지역 내 명사인 의사와 변호사 월터 페인은 그렇다쳐도, 어스킨 소령과 재키 애플릭, 어스킨 소령 부인은 밤에 무덤을 파는게 레어니에게 발각되었다면 빠져나기가 쉽지 않았을거에요. 심지어 재키는 식사에 초대도 받지 못할 정도의 불청객이었죠.
이렇게 범인 후보를 늘리기 위해 월터 페인을 거미에 비유하고, 그가 어린 시절 장난감을 망가트린 형을 거의 죽일 뻔 했다는 등의 묘사를 덧붙인다던가, 어스킨 소령 부인의 극렬한 질투심을 표현하는 등으로 수상쩍게 만들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런 억지스러운 묘사는 오히려 범인이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더 강하게 들게 만들더군요. 제가 추리 소설을 너무 많이 읽긴 많이 읽었나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용의자를 늘리는 전개 탓에 일관성도 좀 없어요. 예를 들면, 미스 마플은 한 사람의 증언만 들으면 안되고, 여러 명의 증언을 모아야 한다는데 그 말에 따르면 헬렌은 문란한게 맞습니다. 동네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문란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마지막에 그녀는 그냥 호기심 많은 처녀였을 뿐이라고 얼버무리는건 여러모로 힘들어 보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시대를 초월할만큼 좋은 작품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발표된지 80여년 정도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죠. 미스 마플의 팬이시라면 읽어보셔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여사님의 다른 걸작들부터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여사님이 직접 뽑은 본인 작품 베스트 10이 더 좋은 선택일거에요.

2022/12/25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2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3.5점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2 - 8점
한국일보 경찰팀 지음/북콤마

1권과 동일하게 각종 사건들의 상세한 소개에 더해 수사와 특별히 관계되어 있던 법의학법과학 방식이 소개되는 논픽션.
이번에는 거짓말 탐지기, DNA 분석, 루미놀 시약, 삭흔, 뼈, 법보행 등이 등장합니다. 그 외에도 범죄의 종류 - 실종, 도굴 - 이라던가 수사 방식 - 잠복, 공개 수배 -, 범인의 특징 - 싸이코패스, 피해망상 -, 단서로 사용되는 여러가지 요소들 - 자백, 간접증거 - 등 많은 범죄 관련 소재가 언급됩니다. 이건 법의학과 법과학 관련 소재가 떨어졌기 때문이었을걸로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사건 쪽에 관심이 많이 가게 되는데, 특기할만한 점 첫 번째는 여러 지능범들의 등장이었습니다. 사체 인멸, 현장 조작에 알리바이 트릭까지 사용하는 놀라운 범인들의 모습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두 번째 특기할 점은 범인들이 뻔뻔하기 그지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인면수심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범인들의 행태에 대한 언급을 읽으니 사형 제도의 부활을 간절히 소망하게 되네요.

특정 주제에 맞는 대표적인 사건을 선정하기 쉬웠을 1권보다는 주제부터가 다소 정리되지 않았다는건 아쉽지만, 상세한 사건 정리가 여러 자료와 도판 등으로 뒷받침되는 좋은 범죄 논픽션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두 타석 연속 장타!
마지막으로 앞서 말씀드렸던 범죄 특징들이 잘 살아있는 몇몇 사건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사건 몇가지를 아래에 소개해드립니다.

<<아산 노부부 살인 방화 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1).
범인은 범행을 저지른 다음날 알리바이 조작을 위해 현장에 다시 침입했습니다. 양초를 이용한 장치로 시간 조작 방화를 일으키려고요. 범인은 집을 비웠던 시간에 영화 다운로드를 걸어 두어서 집에 있는척 했다는 알리바이 트릭까지 써먹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확실히 만화와 다른 법입니다. 범인은 한 달도 더 지난 사건 당일 행적을 너무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다운로드했던 영화 제목을 기억하지 못해서 덜미가 잡히고 말거든요. 체포되어서 다행입니다.

<<환경 미화원 살인 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2)
추리 소설에서나 봄직했던 정교한 시신 유기가 놀라왔던 사건입니다.
범인은 피해자를 살해한 뒤 철물점에서 사온 50리터짜리 검은색 비닐봉투 15장과 이불로 시신을 감싸고 그 위에 100리터짜리 종량제 쓰레기봉투 2장을 덧씌웠습니다. 이불을 쓰레기 봉투에 담아 버리는 걸로 보이도록요. 그리고 환경 미화원이었던 범인은 자기 담당 구역에 '쓰레기'로 위장한 시신을 미리 가져다 놓은 뒤, 다음날 시신을 함께 일하는 동료와 함께 쓰레기 수거 차량에 던져 넣었습니다. 시신은 그대로 전주 시내의 한 소각장으로 이동 후 소각 처리되고 말았다는군요. 무섭습니다.

<<거여동 여고 동창 살해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3)
단순 질투로 친구와 친구 아이 두 명을 살해했던, 비상식적인 잔혹함으로 충격을 안겨다 주었던 사건으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손에 목장갑만 꼈어도 덜미를 잡히지 않았을 정도의 지능범으로 방 열쇠를 넣은 핸드백을 방범창 안으로 던져 넣는 식으로 일종의 밀실 트릭까지 사용된, 거의 성공했던 완전범죄였다고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 않더군요. 아이들이 너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는 것, 그리고 피해자가 손에 현장에는 없었던 종잇조각을 쥐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고 판단했던 현장 수사관들의 식견에 경의를 표합니다. 참고로, 종잇조각은 범행 도구로 준비해왔던 페트병으로 만든 빨랫줄 고정판에 붙어 있던 것이었다네요.
하지만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을거라고 경찰을 도발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집에 범행 기록을 꼼꼼히 적어둔 일기장을 남겨두었다는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과시욕' 이라는게 있었던걸까요?
아울러 이런 계획 살인의 경우는 당연히 사형 선고를 받았어야 했는데 무기 징역에 그쳤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제발 이런 범인은 좀 죽입시다.

<<신혼부부 니코틴 살인 사건>>
범인은 신혼 여행을 떠났던 일본에서 범행을 저질렀고, 시신 화장을 서둘러 증거 인멸을 시도했지만 일본 경찰의 부검 감정서로 덜미가 잡힌 경우입니다. 피해자의 사인은 혈관 내 다량 투여된 니코틴에 따른 급성 중독사인데, 시신의 왼쪽 팔에서 두 곳, 오른쪽 팔에서 한 곳, 총 세 곳에서 주사바늘 자국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살인이 입증되었거든요. 처음 주사했을 때 바로 독성이 나타났을터라, 그 다음 나머지 두 곳에 스스로 주사를 놓는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스스로가 아니라면 타인이 주사를 놨다는 것이고, 사망 장소에는 남편밖에 다른 이는 없었으니 범인은 뻔한 셈입니다.
단지 돈 목적으로 결혼하자마자 아내를 살해한 인면수심의 뻔뻔한 살인범이라는 특징도 잘 살아있는 사건으로, 남편이라는 놈은 이 증거가 드러나자 자살 방조라고 우겼다는데,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네요. 이런 놈도 좀 죽입시다....

뻔뻔함이라면 <<포천 암매장 살인 사건>>범인도 빼 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싸이코패스인 범인이 완벽한 증거 앞에서도 범행을 끝까지 부인하는 가공할만한 뻔뻔함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첫 조사에서 "사건 당일 피해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발뺌하더니, 두 사람이 함께 포천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찍힌 폐쇄회로 TV 화면을 제시하자, “함께 갔지만 피해자는 포천이동갈비를 먹으러 갔다"고 바로 말을 바꾼다던가, "함께 어머니 산소에 들렀는데, 피해자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비상식적 변명을 늘어놓는 식이었다네요. 이런 변명이 통할거라 생각한 것도 어이가 없고, 끝까지 범행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도 놀라왔어요.

<<미아동 노파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DNA가 남아시아계라는게 결정적 증거가 되었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건 잠복 중이던 형사가 혼혈로 보이는 어린 형제를 보고 사진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이 중 큰 아이가 "아빠다!"라고 외쳐서 범인임을 확신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정말 잔인한 행동이었어요.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 범인은 잡아야하는게 맞습니다. 하지만 혼혈 아이들의 집만 알아내어도 다른 방법으로 아이들 아빠 신원을 알 수 있었을텐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요?

<<울주 노인 연쇄살인 사건>>
사건 현장에 범인의 DNA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고 폐쇄회로 TV 영상도, 목격자도 없었지만 "내가 살인범이다"라는 자백 진술과 이 진술에 신빙성을 더하는 정황증거가 더해지면서 용의자가 범인이 됐던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자백'이 증거가 되기 위한 조건이 얼마나 까다로운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고요.
피고인의 자백이 곧바로 유죄 증거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최근에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법적으로도 자백이 고문, 폭행, 협박 또는 기망 등으로 인한 것이라고 의심되거나, 혹은 피고인의 자백이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일 땐 자백은 유죄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하고요. 자백을 증거로 인정하는 조건도 까다롭다네요. 과거 '약촌 오거리 택시기사 강도 살인'처럼 허위 자백으로 억울하게 옥살이했던 경우가 많은 탓이겠지요.

<<이천 무덤 연쇄 도굴 사건>>
정신병자가 저지른 범행으로 범행 자체는 특기할게 없는데, 피해자가 너무 안타까왔던 경우입니다. 피해자 중 한 명인 최씨는 부모 무덤이 도굴당한건 자신에 대한 원한 때문이라고 믿어서 11년간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친지와 가족 대부분을 잃었다고 하거든요. 정신병자 한 명 때문에 인생이 망가져버렸는데, 이런건 정말 누구한테 하소연해야 할까요?

<<제주 보육교사 피살 사건>>
미제 사건인줄 알았었는데, 과학 수사를 통해 이전에도 수사 선상에 올라 있었던 택시 운전사가 검거되었더군요. 사건 당시에는 피해자 사망 추정 시각에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어서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과학 수사를 통해 피해자 사망 시각이 재조정되어 결국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동물 사체를 이용한 실험 결과로, 시신이 발견된 배수로는 그늘인 데다 바람이 심했고, 사후 일주일이 넘은 뒤에도 부패가 진행되지 않았다는걸 확인하는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정적 물증이 없다는 약점이 있어서 경찰은 다시 철저한 재조사에 들어갔는데, 9년 사이 미세 증거물을 증폭해 보는 기술이 발달한 덕에 다행히 추가 증거를 수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피해자 옷에서 범인 옷과 동일한 섬유 조각이, 범인의 차에서 피해자 섬유 조각이 수집되었던 것이지요. 섬유 조각이 범인이나 피해자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교차 발견되는게 많아지면 둘이 만났다는 의심이 높아질 수 밖에 없겠지요.
이 책에서는 이렇게 수사를 통해 용의자를 구속 기소하는 단계까지만 언급되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용의자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합니다. 역시나, 섬유 증거만으로는 증거력이 약하네요. 그 외의 증거들도 용의자가 범인이다! 라고 하기 어려운 것들이었고요. 법원의 판단을 존중해야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쉽습니다. 언젠가 진범이 잡혀 피해자의 원한이 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1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4점

2021/07/24

살인과 창조의 시간 - 로렌스 블록 / 박산호 : 별점 2.5점

살인과 창조의 시간 - 6점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매튜 스커더에게 비밀스러운 봉투를 맡겼던 스피너가 살해당했다. 소식을 들은 매튜는 봉투를 열었고, 봉투 안에는 스피너가 협박해 왔던 세 명에 대한 증거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 셋 중 누군가가 스피너를 죽였다고 생각한 매튜는 그들에게 접근해서 협박을 이어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렇다면 스피너처럼 자신에게도 범인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프레이저는 자살했고, 베벌리는 이혼당해 모든걸 잃었다. 진상을 알아챈 매튜 스커더는 세 번째 협박 대상인 휘샌들을 찾아가, 그가 스피너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걸 알리며 마지막 담판을 벌이는데...

로렌스 블록매튜 스커더 시리즈로 매튜 스커더가 술을 끊고 알콜 중독자 치료 모임에 다니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술을 엄청나게 많이 마시거든요. 찾아보니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네요.

얼마 전 읽었던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가 하드보일드의 탈을 쓴 헐리우드 스타일의 펄프 픽션 범죄물이었다면, 이 작품은 정통 하드보일드에 가깝습니다. 매튜 스커더는 진짜 사나이로 거의 범죄에 가까운 방법을 동원해가면서 정의 구현에 최선을 다합니다. 베벌리 에스리지라는, 유혹과 살인을 동시에 행하는 전형적인 팜므 파탈도 등장하고요.

하지만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에서 설명해 주었던, 변해버린 시대상을 반영한 하드보일드 작품이기도 합니다. 우선 탐정역인 매튜 스커더부터 알콜중독자라는 약점을 지니고 있고, 타인의 죽임에 대해 고민하는 나약하고 감성적인 인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정의 구현에 나섰지만 실제로 정의로운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프레이저는 스피너 죽음과는 무관했고, 그가 협박당했던 과실도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던 선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매튜 스커더가 스피너를 죽인 범인을 찾는다며, 기존에 스피너가 했던 협박을 이어갔기 때문에 프레이저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매튜 스커더 스스로는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게 살인이 아니라면 뭐가 살인일까요? 오래전 하드보일드에서 탐정 때문에 죽어나가던 등장인물들은 모두 죽어 마땅했었는데, 탐정 때문에 지극히 선량한 인물이 죽음을 택하는 경우는 처음 봤네요. 이런 정의, 선과 악이 모호한 설정은 시대가 변했다는걸 강하게 느끼게 해 줍니다. 팜므 파탈이 부자 남편을 잃었지만, 나름대로 개과천선하고 매튜 스커더와 친구?가 된다는 결말도 마찬가지고요. 

여기에 더해 “나도 목석은 아니거든요.”라며 방을 찾는 베벌리에게 “내 호텔이 있지."라고 말하는 매튜 스커더의 마지막 대사는 화룡 정점이었어요. 몰락한 팜므 파탈과 불완전한 탐정이 '몸친구' 사이가 되는 결말이라니! 이 얼마나 현대적입니까! 고전 하드보일드에 흔하게 등장했던 복잡하고 꼬인 인간 관계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당연하겠죠. 이제는 과거와 같은 깊은 정을 나누는 관계가 사라져버렸으니까요. 세 명의 협박 피해자들 외에는 고작해야 프레이저의 딸 스테이시 정도가 살짝 스쳐지나갈 뿐입니다.

하지만 현대적으로 구현해 낸 하드보일드 캐릭터와 설정들에 비해 추리적으로는 특별한 건 없습니다. 세 명 중 한 명이 범인이다!라는 생각에, 세 명 모두에게 자기가 새로운 표적이라는걸 알리고 공격을 기다리는게 전부인 탓입니다. 이 중 스피너를 죽였던 휘슬러의 하수인과 베벌리의 옛 남자 룬드그렌이 각각 공격 시도를 했으며, 매튜 스커더는 모든 공격을 룬드그렌이 했던 것으로 착각했을 뿐이지요. 결국 프레이저는 죽었고, 베벌리도 아니라면 남는건 휘슬러 뿐이라는 간단한 결론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명의 공격이 겹쳤다는 것도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문제인데, 이 결론을 토대로 마지막에 휘슬러와 담판을 짓는 장면은 더 억지스럽습니다.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까요. 휘슬러가 스피너가 죽었다는걸 알고 놀랐다는걸 증거라고 제시하는데, 이건 증거도 뭐도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범죄가 등장하는 드라마에 가까와 보입니다.

그래도 읽기 적당한 분량에, 결말까지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던 재미는 확실했던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현대적인 하드보일드가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그리고 매튜 스커더 시리즈 팬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04/08/28

쥐덫 - 애거서 크리스티 / 유명우 : 별점 3점

쥐덫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해문출판사

최근 불붙은 여사님 단편집 구입 러쉬의 마지막 작품. 진작에 읽어보았던 작품이라 구입계획은 없었는데 신촌 숨어있는 책에서 1000원에 발견해서 그냥저냥 소장 겸하여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전부 9편의 중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사님의 시리즈 캐릭터인 미스 마플과 포와로는 물론 할리 퀸까지 등장하기 때문에 흡사 종합 선물 세트같은 느낌을 전해주네요.
제일 먼저 실려있는 표제작이자 크리스티 여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쥐덫"은 추리소설의 전형적 소재인 눈으로 폐쇄된 하숙집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 작품입니다.

신혼부부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저택을 하숙집으로 개조하여 영업하던 중 런던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범인이 하숙집으로 숨어 들어왔다는 첩보와 함께 형사가 찾아오게 된다. 이후 눈으로 고립되고 전화마저 끊긴 하숙집에서 투숙객 중 한명인 보일 부인이 살해당하며 이 사건은 과거에 있었던 아동 학대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세마리의 눈먼 쥐" 라는 동요를 소재로 세명이 살해 당할 것이라는 암시와 함께 누가 범인인줄 모르는 긴장감과 더불어 폐쇄적인 상황을 잘 이용하는 작품입니다. 영국에서는 연극으로 50년이 넘게 공연되고 있는데 연극에 정말 잘 어울리는 소재라 생각되네요.
이전에 이미 읽어서 범인이 누구인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재미는 덜 했습니다만 폐쇄된 곳에서 벌어지는, 동요와 연관되는 연쇄 살인극이라는 상황의 원본이자 모범 답안으로서 추천할 만한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두번째 작품 "이상한 사건"은 미스 마플양이 나오는 일종의 암호 추리물인데 "거액을 투자하여 종이 한장분량으로 숨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명제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이 명제와 트릭은 당대에는 기발하고 신선했을 것 같지만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았다는 문제가 큽니다. 후대 작가들의 수없는 인용으로 신선함이 떨어지니까요. 그래도 마플양의 캐릭터는 아주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세번째 작품 "줄자 살인사건"은 마플양의 범인을 잡기 위한 실제적인 활약이 펼쳐지는 특이한 이야기로, 트릭이나 동기 등이 깔끔하게 구성되어 있긴 하지만 제목으로 범인을 특정할 수 있었던, 제목 자체가 스포일러인 어처구니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제목만 빼면 별점은 2.5점. 원제가 조금 궁금합니다.

네번째 작품 "모범 하녀"는 살인 사건이 아닌 도난 사건을 소재로 하여 두 자매의 집에 새롭게 들어온 모범 하녀의 이야기인데, 트릭 자체는 "사람바꾸기"라는 평범한 것으로 추리적으로 그닥 신선하지는 않지만 워낙 설정이 기발하고 이야기도 척척 들어 맞아서 재미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의 베스트라고 생각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다섯번째 작품 "관리인 노파"는 마플양을 찾아온 헤이독 의사가 마플양의 원기 회복을 위해 과거에 있었던 루이즈 랙스턴 부인의 사고를 수수께끼로 전해 주고 그것을 마플양이 전형적인 안락의자형 방식으로 (즉 생각만으로) 해결하는 내용입니다. 그냥 저냥 평범한 수준이더군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여섯번째 작품 "4층 아파트"는 포와로가 등장합니다. 아랫층에 사는 젊은이들이 우연히 발견한 살인사건을 해결해 주는 이야기로 "어두운 방 안에서라도 항상 같은곳에 있는 것이 있다"라는 당연한 사실로 진상을 풀어내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사건의 해결방법은 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추리적인 재미 부분에서 점수를 주고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일곱번째 작품 "조니 웨이벌리의 모험"은 웨이벌리 가문에 발생한 유괴사건을 의뢰받은 포와로가 의외의 진상을 밝혀내는 내용입니다. "회색 뇌세포"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작품으로 탄탄한 구성과 더불어 추리적으로도 색다른 재미를 전해 줍니다. 하지만 경찰의 수사 방법이 너무 미흡하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든 건 조금 아쉽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여덟번째 작품 "24마리의 검은 티티새"는 우연히 찾아간 식당에서 매주 같은 요일에 항상 같은 음식만 주문하는 괴짜 손님을 포와로가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괴짜 손님이 시체로 발견되자 포와로는 독자적인 조사를 통해 죽음의 진상과 범인을 밝혀내는데 성공한다는 내용으로 우연히 주목한 사소한 사실에서 진상을 밝혀내는 구조가 완벽하고 동기 및 시간의 흐름도 깔끔한 수작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아홉번째 작품 "연애 탐정"은 마지막 작품답게 이색적으로 세터드웨이트 씨와 할리퀸이 등장하네요. 이야기는 할리 퀸 스럽지 않게 할리 퀸이 너무 정보를 많이 뿌려주는 감이 있고 내용도 조금 빈약하지 않나 싶습니다. 서로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주는 두명의 공범자라는 소재는 너무 뻔했거든요... 별점은 2점입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다양하고도 멋진 작품들이 실려 있고 탐정 캐릭터들도 여럿 등장하며 거의 대부분의 작품이 우열을 가리기 힘든 좋은 단편집입니다. 개인적 베스트는 "모범하녀" 와 "24마리의 검은 티티새" 이지만 다른 작품들도 거의 대부분 일정 수준 이상이거든요. 추리 소설의 팬이시라면, 거기에 크리스티 여사의 팬이라면 꼭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아울러 여기 실린 포와로 단편은 전부 케이블 TV의 "아가사 크리스티 추리극장"에서 극화되어 방영되었기 때문에 드라마 까지 구해 본다면 금상첨화일것 같습니다.

이로써 제가 소장한 총 13편의 크리스티 여사 단편집은 "화요일 클럽의 살인", "검찰측의 증인", "명탐정 파커 파인", "쥐덫", "포와로 수사집", "부부탐정", "수수께끼의 할리 퀸", "리스터데일 미스터리",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패배한 개", "리가타 미스터리", "헤라클레스의 모험" 입니다. 혹 다른 단편집이 있으면 꼭 알려주세요~

PS : 다 좋은 작품들이지만 베스트라면 역시 "화요일 클럽의 살인" 이 아닐까 싶네요^^

2013/09/09

세계 추리소설 걸작선 2 - 아놀드 베넷 외 : 별점 1.5점

세계 추리소설 걸작선 2 - 4점 아놀드 베넷 외 지음, 한국추리작가협회 엮음/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도서출판 한스미디어에서 야심차게 선보인 추리소설 앤솔러지. 유명 고전 작가들의 단편은 물론이고 초창기 추리 이론까지 풍성하게 실려있습니다.
1, 2권으로 출간되었는데 1권은 읽은 작품이 너무 많고 지나치게 고전 취향이라 2권부터 구입하게 되었네요. 2권 역시 다른 책에서 읽어본 작품이 제법 많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나 워낙에 목차가 괜찮고 또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고전 황금기 작품들을 주력으로 하고 있기에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실망스러웠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번역입니다. 일본어 중역 느낌이 물씬 날 뿐더러 그 자체가 별로 매끄럽지 않아 읽기 힘들었어요. 악명 높은 동서 추리문고 최악의 번역도 이거보다는 좋게 느껴질 정도니 말 다했죠. 고전 황금기 걸작이 아닌 몇몇 현대 일본작가 작품이 섞여 있는 것도 기획 의도가 모호해 보여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때문에 별점은 1.5점입니다. 기획의도만으로 3점은 충분하지만 번역은 용서가 안되네요. 좋은 기획의도가 번역 때문에 다 망가진 것 같아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한스미디어의 다른 작품들은 괜찮았었던 것 같은데 대관절 영문을 모르겠군요.

몇몇 작품은 걸작이지만 대부분 다른 책에서 훨씬 좋은 번역으로 읽을 수 있다는 점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사라진 기억" | 배리 퍼론

극작가 애닉스터가 완벽한 밀실살인 트릭을 생각했는데, 교통사고로 트릭을 잊어버린 탓에 술집에서 트릭을 알려주었던 사람을 찾아 나선다는 내용.

교통사고로 딱 필요한 기억만 상실한다는 작위적인 설정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꽤 그럴듯한 전개, 그리고 마지막에 애닉스터가 상황을 깨닫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남자에게는 애닉스터만이 유일한 위험인물이었다!

한마디로 서늘한 반전류의 교과서적인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

"살인!" | 이넉 아놀드 베넷

명백한 살인사건인데, 경찰이 수사 결과 몇몇 남겨진 단서를 통해 자살로 결론 내린다는 내용의 소품. 솔직히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심리 묘사에 대한 번역에 문제가 많았던 것 같은데 제대로 된 번역으로 다시 읽고 싶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피트 모란, 다이아몬드 헌터" | 퍼시벌 와일드

"탐정 피트 모란"에 수록된 단편입니다. 그때는 너무너무 재미있게 읽었는데 번역이 너무나 별로인 탓에 작품마저도 후지게 느껴지는 기묘한 체험을 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실망하신 분들께서는 "탐정 피트 모란"으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번역 때문에 별점을 주기조차 어렵네요.

"골초는 빨리 죽는다" | 이자와 모토히코

"역설의 일본사" 말고 읽어본 적은 없지만, 이런저런 상을 많이 수상했던 유명 작가의 단편.

두 명의 대화로만 전개되는 형식과 담배로 촉발된 살의라는 설정은 독특한데, 결말이 너무 심하게 별로였습니다. 반전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좀 어이없는 결말이었거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먹이" | 토마스 테셔

이형 생물체가 등장하는 크리쳐 호러물. 스티븐 킹의 비슷했던 작품(한 소년의 아버지가 점액질 괴물이 된다는 이야기)와 비슷한데, 이 작품은 "애정"이 포함되어 있으며 비극적 결말이라는게 차이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라서 평하기는 어렵지만 공포도 아니고 심리묘사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결말에서 반전이 돋보이는 것도 아닌 그냥저냥한 소품이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이콜 Y의 비극" | 노리즈키 린타로

제가 개인적으로 번역했던 작품이죠. 읽어보니 원작을 "직역"한 번역으로 읽기가 어렵더군요. 순수하게 작품만 놓고 평가하면 별점은 3점인 좋은 작품인데 안타깝네요. 솔직히 제 번역과도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녀들의 쇼핑" | 쓰쓰이 야스타카

다른 앤솔러지에서 접해본 적 있는 이색작. 생활고에 시달리는 주부들이 강도단을 조직한다는 내용입니다. 작품 자체의 수준은 그냥저냥이지만, 작가 특유의 섬뜩한 풍자 하나만큼은 인상적입니다. 특히 마지막 대사가 백미! 순수하게 작품만 놓고 평가하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살의" | 다카기 아키미쓰

역시나 다른 앤솔러지에서 접했던 작품으로, 굉장한 걸작입니다. 이른바 "일사부재리" 원칙의 모순을 정면으로 다루는데, 마지막 반전까지 빼어난 단편의 모범 답안 같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그러고 보니 "살의"라는 말이 들어간 작품들 ("이런거"라던가 "이런거"라던가 "이런거"라던가....)은 하나같이 괜찮네요.

"아버지" | 토마스 H. 쿡

토마스 H. 쿡의 장편은 몇 권 읽어보았지만 단편은 처음입니다.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지만 장편 못지않은 묵직함이 잘 전해지는 묘사가 아주 좋더군요. 별점은 3점입니다.

"무대 뒤의 살인" | 에드워드 D. 호크

총 3편의 초단편 Short-Short로 이루어진 작품.

예전에 읽었던 "4페이지 미스터리"와 유사하나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는 훨씬 높습니다. 3편의 이야기 모두 논리정연하면서도 예상을 뒤집는 정통 추리물이거든요.

첫번째 작품은 사진 필름 원판을 가지고 협박하는 협박자가 살해된 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는 이런저런 논리 퍼즐에서 많이 보았던, 다섯 번째 남자마다 처형당하는 상황에서 살아남는 주인공의 이야기, 마지막 이야기는 이집트 전시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입니다.

첫번째 작품은 에스터가 범인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이 돋보였어요. 특히나 1만 2500달러라는 애매한 비용과 30분이라는 시간 공백을 설명하는 게 제법이었거든요.
마지막 작품은 살인사건은 전혀 상관없는 동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는 반전이 인상적이었고요.

결론내리자면 단편의 제왕 에드워드 D. 호크의 명성에 걸맞는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오번 가문의 비극" | 매슈 핍스 실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단편 미스터리 시리즈인 "프린스 자레스키" 시리즈!

그러나 별로 건질 게 없었습니다.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인 프린스 자레스키 설정은 너무나 만화 같았고 사건도 설득력이 너무 떨어지거든요. 아버지가 광인이 된 것을 왜 숨겨야 하는지도 불분명하고 사건 현장 윗층에서 과학교실을 열고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조작을 하는 것도 와닿지 않았어요. 그냥 본인이 자살하는 것이 더 빠른 해결책이었을 텐데 말이죠.

한마디로 수준 이하의 작품.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한 것은 물론 번역까지 별로라 도저히 점수를 줄 수가 없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불도그 앤드류" | 아서 체니 트레인

터니게이트 - 애플보이 사이의 영토 분쟁에서 불도그 앤드류가 지나가던 터니게이트를 문 뒤 기소되어 법정에 선다는 법정극.

추리소설로 보기에는 좀 무리지만 유머스러운 일상계 법정극으로는 충분히 읽을 만 했습니다. 재판장의 마지막 한마디를 통해 약간의 반전이 있는 것도 인상적이고요.
번역이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마크 트웨인이 연상되는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아내의 외출" | 자크 푸트렐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에 수록된 사고기계 시리즈 단편(이 책에 수록된 제목은 "녹색눈의 괴물"이죠). 당대 보기 드문 일상계로 가치 높은 수작입니다.

그러나 별점을 주기 민망할 정도로 번역이 너무 엉망이라서 도저히 읽을 맛이 나지 않네요. "셜록 홈즈의 라이벌들"로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A 분장실의 수수께끼" | 자크 푸트렐

역시나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에 수록된 것과 같은 사고기계 시리즈 단편. 여배우의 증발사건을 다룬 작품인데 장치적으로는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가 선보입니다.

그러나 트릭의 핵심이 "최면술"이라는 게 문젭니다. 당시 최면술이 마법처럼 받아들여진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물로 생각되는데 지금 읽기에는 너무 설득력이 떨어지니까요. 번역 역시 수준 이하였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알리바바의 주문" | 도로시 세이어즈

피터 윔지 경 단편. 다른 앤솔러지에서 읽었던 "검은별"과 동일한 스타일의 모험극. 추리적으로 눈여겨볼 만한 부분은 거의 없는 평균 이하의 작품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오필리어 살해" | 오구리 무시타로

"흑사관 살인사건"의 오구리 무시타로가 쓴, 범죄학자이자 탐정 노리미즈 린타로가 등장하는 단편. 셰익스피어 스타일 연극 무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무대 장치를 이용한 기계장치 트릭에 더해 심리적 착각을 이용한 트릭이 등장하죠.

현실적이지 못한 트릭,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현학적인 전개와 묘사, 거기에 동기까지 애매하여 전체적인 완성도가 낮습니다. 정통추리물로 보기도 어려웠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그의 마음은 찢어졌어" | 크레이그 라이스

"스위트홈 살인사건"의 크레이그 라이스가 쓴 단편. 주인공인 술꾼 찌질이 변호사 말론은 시리즈 캐릭터라고 하네요.

의뢰인인 사형수 폴 파머 자살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내용으로, 폴 파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끊어지지 않았어"를 단서로 마지막에 추리쇼까지 펼쳐 보이며 사건을 해결하는 정통파 추리물입니다.

정통파답게 추리적으로는 상당한 수준을 갖추고 있습니다. 초반부 딕슨 의사와의 대화로 병원에서 탈옥한 죄수가 있다는 단서를 전해주는 등 독자에게 공정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도 좋았고요.

메들레인 스타가 그냥 폴 파머와 결혼하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었을 텐데 성공 확률이 낮은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은 옥의 티이긴 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0/07/17

젤리피시는 얼어붙지 않는다 - 이치카와 유토 / 김은모 : 별점 1.5점

젤리피시는 얼어붙지 않는다 - 4점 이치카와 유토 지음, 김은모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U국에서 개발한 소형 신예 기낭식 비행정 젤리피시의 보급이 확대되던 어느날, 젤리 피시 개발 주역인 UFA사의 기술개발부 멤버 6명 전원이 탑승한 신규 시험용 기체가 추락하여 불타버렸다. 기술 개발부 멤버도 모두 불에 탄 사체로 발견되었는데, 그들 모두 불에 타기 전 살해당했다는 검시 결과가 드러났다. 독으로 죽은 두 명은 누군가 시체를 단정하게 놓았으며, 총에 맞은 사체는 남은 흔적이 근거리에서 맞은게 아니었다. 칼에 찔려 죽은 사체는 칼이 뽑혀 있었고 뒷통수를 둔기로 타격당해 죽은 사체는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마지막 사체는 머리 등이 토막나 있는 상태였다..

형사 마리아와 렌 컴비는 신규 젤리 피시 개발을 의뢰한 공군과 함께 범인을 쫓기 시작하는데....

세상에는 참 많은 상이 있습니다. 추리 문학계도 예외는 아니죠. 신인 작가를 발굴하는 상도 많습니다. 아유카와 데쓰야 상은 많은 신인상 중 하나입니다. 신인상 중에서는 최초로 본격 미스터리에 중점을 두었다고 합니다. 1989년 시작되어 2020년 30회 째 수상작이 발표되었는데, 역대 수상작 중 제가 읽어본건 가노 도모코"일곱가지 이야기", 곤도 후미에"얼어붙은 섬", 아오사키 유고"체육관의 살인",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시인장의 살인"입니다. 작품들 면면을 보면 추리적으로는 볼만한 작품들입니다. 본격 미스터리에 중점을 두었다는게 허언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26회 (2016년) 수상작인 이 작품 역시 본격 추리물 애호가로서 큰 기대를 품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기대대로 추리적으로는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악천후로 접근, 탈출이 어려운 등산로도 없는 설산 구석에 6명의 승무원이 탑승한 젤리피시가 추락하였는데, 6명 모두 타살 사체로 발견되었다. 범인은 누구이며 어떻게 탈출했나?'가 핵심 수수께끼인데, 이를 '젤리피시는 원래 2대였다!'라는 대담하고 스케일이 큰 아이디어로 풀어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멤버들은 공군의 요청 사항을 검증하기 위한 비교 대조 실험을 핑계로 3명씩 나누어 젤리 피시에 탑승했으며, 범인이 모두를 죽이고 한 척을 불태운 뒤, 남은 한 척을 타고 탈출했던 것이지요.

사고가 일어나고, 한 명씩 살해되는 과정과 함께 사건 발생 이후 현재의 수사 과정이 병렬로 배치되어 있는데, 사고 당시 승무원들 시점의 묘사가 이루어짐에도 이들이 함께 한 배에 타고 있는게 아니라 나누어 타고 있다는걸 교묘하게 숨기는 전개도 제법입니다. 서로 만나는 경우는 정박지에 한하고, 운항 중에는 같은 젤리 피시에 탑승한 사람들끼리만 마주치며, 통신은 무전기로 하고 있는 식으로 독자가 트릭을 쉽게 눈치채지 못하게 서술하고 있거든요. 이러한 전개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여섯 명의 탑승자 중 마지막 인물이 줄곧 이야기에 등장하던 에드워드 멕도웰이 아니라 다른 기술개발부 멤버인 사이먼 애트우드라는게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도 역시 서술 트릭에 가깝습니다. 범인인 에드워드가 미리 토막낸 사이먼의 시체를 집에 넣어 몰래 숨긴 뒤, 자신은 탈출하고 시체를 남겨놓은 건데, 마지막까지 이를 잘 숨겨서 충격을 배가시키는 솜씨는 일품이에요. "십각관의 살인"에서 모리스의 정체가 드러나는 장면과 비슷한데, 그만큼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젤리피시 제조에 쓰이는 화학식을 이용한, 13년 전 리베카 자살 위장 사건 트릭도 괜찮습니다. 문을 틀어막은 플라스틱 조각은 밖에서 넣을 수 없었다는 상황을, 밖에서 부드러운 상태로 밀어넣은 뒤 화학 반응을 일으켜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건데 이야기와 잘 어울리는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이렇게 여러가지 트릭들이 등장하고, 잘 설명되고 있어서 추리적으로는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다른 수상작들과 비교했을 때, 현저히 낮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만화적인 인물들로 만화적으로 가볍게 써내려간 탓입니다. 주인공이자 탐정역인 마리아와 렌 컴비가 대표적입니다. 거유의 몸매 좋고, 어딘가 칠칠맞은 마리아와 딱 부러지고 냉정침착한 렌의 조합부터 지극히 만화적이고 평면적이에요. 수사 과정에서 빚는 갈등, 티격태격도 모두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지 않고요. 갓 대학에 입학한 리베카가 천재라서 젤리피시를 만드는 공식을 완성했다는 설정도 만화적이기는 마찬가지이며 젤리 피시 내에서의 연쇄 살인 사건 묘사도 캐릭터들이 평면적이라 천편일률적이고 지루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 이 작품 속 캐릭터 중 자신만의 매력을 갖춘 캐릭터는 전무합니다. 80년대, 비행선이 날아다는 가상의 세계를 무대로 하고 있는건 괜찮아요. 젤리 피시의 제조 방법과 그 존재가 트릭의 핵심이니만큼, 이런 기계가 떠다니는 무대가 필요했을테니까요. 하지만 이를 표현하는 묘사도 모두 유치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비행정이 2대였다는 핵심 트릭은 좋지만 범행 자체의 설득력은 낮습니다. 모두 악당이기는 하지만, 자살로 보이는 사체를 옮겨 완벽한 자살로 위장하고, 연구 성과를 독차지한게 과연 죽어 마땅한 범죄일까요? 연구 성과가 그들의 것이 아니라는걸 리베카의 노트로 밝혀낼 수 있다면 더더욱 죽일 이유는 없습니다. 살아서 사회적인 매장을 지켜보는게 더 큰 복수일테니까요. 최소한 복수를 한다 해도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그들의 영향력이 바닥에 떨어진 뒤 하는게 더 현실적일겁니다.
그리고 6명 중 유일하게 죽어 마땅한건 리베카를 능욕하고 살해한 윌리엄 뿐입니다만, 에드워드는 그 사실을 모르고 일단 멤버들을 죽이고 시작하니 이래서야 누가 악당인지도 모를 지경이에요. 목숨을 걸고 6명이나 살해한 이유가, 13년 전 몇 번 말을 나눈 뒤 사랑에 빠져서 그랬다는 동기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묘사가 유치해서 에드워드의 마음이 전혀 와 닿지도 않았고요.

트릭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헛점 투성이입니다. 사건에 사용된 젤리피시는 새로 만든 것과 첫 개발자 (로 알려진) 교수가 소유하고 있던 영호기를 개조한 것 두 대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젤리피시는 거의 백만 달러에 이르는 상당히 비싼 물건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경찰과 주변 인물들이 그 존재를 아예 모른다는건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거의 집 한채 크기의 비행정이 2대가 비행하는데 사람들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도 석연치는 않고요. 시간차를 두고 비행했더라도, 분명 눈에 띄었을텐데 말이지요.

증거도 빈약합니다. 마리아가 증거라고 이야기한, 젤리피시의 잔해가 눈보라를 조금이라도 더 견딜 수 있는 암벽 밑이 아닌 남쪽에 치우쳐져 발견되었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이건 증거가 될 수 없어요. 사고 후 눈사태가 일어났다는 설명도 있고, 크고 무거운 기체가 비상 착륙했다면 그게 어디건 착륙 위치에 머물러야지 암벽 밑에 옮기지 못하는건 당연하니까요.

사이먼의 시체와 5명이 비행한게 아니라, 비행정에는 6명이 탑승했다는 증거가 정박한 체크포인트 다섯군데에서 일용품을 산 행위라는 것도 어설픕니다. 물건을 산 사람이 전부 다른 사람이라는게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증명되지도 않았고 교수가 물건을 사러 내리지 않았다는 것도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또 설령 술에 절어 있는 교수를 제외한 서로 다른 5명이 번갈아 물건을 샀다고 한 들, 그들 중 한 명이 사이먼 애트우드가 아니라 에드워드 맥도웰이라는게 증명되는 것도 아니고요.

죽은 여섯 명이 모두 살해당했다는걸 곧이 곧대로 믿는 것도 억지스럽습니다. 먼 거리에서 총이 발사되도록 한다던가, 뒷통수를 둔기로 맞게 만든다던가, 죽은 뒤 칼이 뽑히던가 하는 식의 트릭은 많잖아요? 현장이 불에 탔다면 이런 트릭을 위한 흔적을 지우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겁니다. 솔직히 말해 범인 에드워드가 누군가가 다 죽이고 자살한 것처럼 현장을 조작하지 않아서 사건을 미궁에 빠트린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5명이나 (정확하게는 4명) 죽인 살인범이 사건을 일부러 미궁에 빠트릴 이유는 없어요.

범행을 위한 전개도 엉망입니다. 비교대조 실험을 핑계로 2척이 비행에 나서지 않았다면, 그리고 사이먼이 비행에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네빌이 사이먼을 살해하지 않았다면 어쩔 셈이었을까요? 에드워드의 계획이 성공하려면 이 모든 준비가 갖추어져야 했는데 말이죠. 에드워드가 정말로 살인을 계획했다면 직접 사이먼을 살해하고 그가 도주한 것처럼 꾸민 뒤, 핵심 멤버로 비교대조 실험을 내걸어 2대의 운항을 끌어내는 게 타당했습니다. 사이먼을 죽인 뒤 진정한 복수귀로 거듭났다는 식으로 진행되는 식으로 말이지요.

살인 계획도 스케일은 크지만 운에 의지하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젤리 피시 2척의 자동 항행 프로그램등을 건드려 악천후 속에서 설산에 착륙하게 만든다는 계획부터 그러합니다. '천운'이 따른 덕분에 두 척 모두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다고 범인이 직접 이야기할 정도거든요. 네빌을 독살시킨, 컵에 독을 넣는 방법도 운에 의지한건 마찬가지고요. 크리스가 몰래 가지고 온 총의 존재를 몰라 위기를 맞는다는 돌발 상황이야 있을 수 있다 쳐도, 위기를 넘기는 것도 순전히 운이고.... 마지막 생존자인 윌리엄에게 칼과 총이라는 무기를 모두 넘겨주고 습격한다는 마지막 살인도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최소한 총은 넘겨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장점보다 단점이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폐쇄된 공간에서 한 명의 응징자에게 여러명이 차례로 살해된다는 이야기를 보시려먼 차라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나 "십각관의 살인"을 추천드립니다. 같은 아유카와 데쓰야 상 수상작이라도 "얼어붙은 섬"이나 "시인장의 살인"역시 폐쇄된 공간에서 연쇄 살인이 일어난다는 클로즈드 서클 계열인데 이 작품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이 작품은 지나칠정도로 만화적이니만큼, 만화화되면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만화적이라는 점에서는 아유카와 데쓰야 상이 아니라, 메피스토 상 수상작이었다면 차라리 납득이 되었을 듯 합니다. 메피스토 상은 '엔터테인먼트'를 추구하는 만화적이고 가벼운 설정의 작품에 수여되곤 했으니까요.

2016/11/09

말레이 철도의 비밀 - 아리스가와 아리스 / 최고은 : 별점 2.5점

말레이 철도의 비밀 - 6점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북홀릭(bookholic)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희망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름다운 말이군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죠."
출국 시간이 정해져있는 히무라에게 아즈란이 시간 내 사건 해결이 가능할지를 물은 상황에서 오가는 대사.

히무라와 아리스가와는 말레이시아의 낭만적인 휴양지 카메론 하일랜드로 여행을 떠났다. 대학시절 친구 타이론 덕분에 여유로운 여행을 즐기던 그들은, 우연히 알게 된 일본인 모모세 준코의 초대로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그러나 둘은 그곳에서 의문의 변사체를 발견했고, 뒤이어 일어나는 사악한 범죄에 빠져드는데…

일본의 신본격 작가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시리즈 탐정인 범죄학자 히무라 히데오, 추리소설가 아리스가와 아리스 컴비가 등장하는 국명 시리즈 장편입니다. 이 시리즈는 단편집으로 두어권 읽어 본 정도이며 장편은 처음입니다.

읽기 전에는 별로 기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작가의 타율 자체가 낮은 편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읽어보니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가장 큰 장점이라면 신본격 기수 중 한명이라는 작가의 명성, 그리고 엘러리 퀸 국명 시리즈를 오마쥬하고 있는 시리즈 특성에 걸맞는 수준의 고전적인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입니다. 첫 사건부터 본격물다운 굉장히 기묘한 밀실 - 피해자 웡후가 살해된 채 발견된 트레일러 하우스의 모든 출입문, 창문은 안쪽에서 테이프로 봉해져 있는 상태였다는 - 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라는  불가능 범죄를 선보이고 있거든요. 
트릭도 상당히 괜찮습니다. 사건 현장을 외부에서 조작하여 범인이 원하는 밀실로 만들었다는건 오래 전에 읽었던 삼색털 고양이 홈즈 시리즈 첫 작품 "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추리"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추리"에서는 거대한 크레인이 필요하다는 점 탓에 현실성이 떨어졌다면, 이 작품은 간단하게 차량수리용 잭을 활용하여 실현할 수 있어서 보다 설득력이 높습니다.
이를 설득력있게 만들기 위해 묘사된 습도 조절용 물컵과 같은 디테일도 빛납니다. 컵을 접착제로 붙이고 물을 얼려놓는다는 설정은 그 자체만으로 트릭으로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어요.

정보와 단서 모두가 독자에게 모두 공정하게 제공된다는 점 역시 본격물답습니다. 특히 기발했던 부분은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영어실력이 부족하다는 설정, 현지 카페 주인 존을 영국인 작가 앨런 글래드스턴이 영국식으로 '잭'이라고 부른다는 설정을 교묘하게 결합하여 글래드스턴 살인 사건으로 이르는 동기와 범인을 밝혀내게끔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최근 읽었던 작품 중에서도 손에 꼽을만큼 잘 짜여진 장면이었습니다.

두 컴비가 오래전 지인 위 타이론을 만나기 위해 말레이시아의 휴양지 카메론 하일랜드(하이랜드) 여행을 떠나는 설정 덕분에 여정 미스터리물 느낌도 많이 난다는 점도 독특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현지 명소에 대한 묘사가 많아서 읽는게 즐거웠어요.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일단 아리스가와 아리스 작품에서 항상 느낄 수 있는 점인데, 그다지 글을 잘 쓴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불필요한 설정과 묘사가 너무 많아요. 딱히 필요해 보이지 않는 페미니즘 관련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반딧불 어쩌구 하면서 사랑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어내는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고요.

그리고 대부분의 본격물이 가지고 있는 문제인 작위적인 상황 설정도 눈에 거슬렸습니다. 첫 번째 범행인 웡후 살인부터 그러합니다. 복수를 위해 모모세를 덮치지만 되려 살해당한다는 것부터 작위적이며, 말레이시아 법률은 잘 모르겠지만 모모세가 웡후 살인 사건을 자살, 혹은 다른 범죄로 위장할 이유가 있어 보이지 않은 탓입니다. 림 의사를 살해한건 히키이며 모모세는 실행범이 아닙니다. 아무런 증거없이 죽어가는 히키의 전화만으로 모모세가 범인이라 우길 근거는 너무 빈약하지요. 제가 모모세라면 모든건 오해라고 당당하게 맞섰을 겁니다. 웡후를 죽인 후에라도 같은 이유로 경찰에게 역시 당당했을 수 있었을테고요.
게다가 두번째 츠쿠이 살인은 순전히 우연에 기인한 것입니다. 아울러 앞부분 묘사에서 모모세 준코의 차에 잭이 있다는 것이 설명되니 모모세가 잭을 구하러 멀리 갈 필요도 없고요. 

또 앞서 트릭을 칭찬하기는 했지만 현장을 조작하는 방법 외에는 약점도 존재합니다. 실제로 트레일러하우스를 좀 기울이는 정도로 과연 창문의 테이프를 잘 붙일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거든요. 

마지막으로 모모세가 과거 보험금으로 사업을 일으킨 점 등 트릭을 모르더라도 정황 증거만 조합하면 대충 범인이 누군지 답이 나온다는 것도 조금은 아쉬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만 놓고보면 나쁘지는 않지만 이런저런 단점과 구멍도 존재합니다. 그래도 본격물 팬이라면 추리적으로 즐길거리가 많으니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 : 초반 언급되는 마츠모토 세이초가 썼다는, 카메론 하일랜드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과 타이의 실크왕 짐 톰슨 실종사건을 엮어서 만든 "뜨거운 비단"이라는 작품이 궁금해집니다.

2013/11/19

한국의 CSI - 표창원, 유제설 : 별점 3점

한국의 CSI - 6점
표창원.유제설 지음/북라이프

미드 CSI로 잘 알려진, 과학수사 기법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책. 목차는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CSI를 탄생시킨 과학수사 실패 사례 1
Part1. 현장 감식, 모든 수사의 출발점
Part2. 지문, 감춰진 범죄자의 흔적
◆CSI를 탄생시킨 과학수사 실패 사례 2
Part3. DNA, 살인자의 또 다른 얼굴
Part4. 혈흔 형태 분석, 범죄 상황의 생생한 증언
Part5. 미세 증거, 범인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증거
◆CSI를 탄생시킨 과학수사 실패 사례 3
Part6. 검시, 사체가 말하는 진실
◆CSI를 탄생시킨 과학수사 실패 사례 4
Part7. 화재 감식, 화염으로도 감출 수 없는 범죄

가장 큰 특징은 항목별로 실제 사례를 등장시켜 이해를 돕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자면 혈흔에 대한 설명에 실제 "도망자"로 유명한 샘 셰퍼드 사건을 등장시키는 식입니다. 사건에 얽힌 후일담이 상세하게 실려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샘 의사가 킬러라는 닉네임으로 프로레슬러 생활을 했는지는 몰랐네요.

내용들 모두 흥미로우나 개인적으로는 과학수사 실패 사례를 소개하는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총 4개의 사건이 등장하는데 상세하게 소개하자면,

존배넷 램지 사건

"서프라이즈"에서도 방송되었던 미국의 아동 성폭행 살인사건으로 영구 미제 사건이기도 하지요. 초동 수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잘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범인 비스무레한 인물도 드러났고, 최소한 부모가 누명을 벗었다는건 다행입니다. 

오제이 심슨 사건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 설명은 생략합니다만 변호인 측의 전략과 주장이 상당히 짜임새 있어서 놀랐습니다. 덧붙이자면 오제이 심슨이 범인인 줄 알았는데 그의 전처 아들이 유력한 용의자라는 것은 처음 알았네요.

김성재 사건

유명한 사건이죠. 외국 도서와는 다르게 국내 유명 사건이 소개되는 점은 확실히 좋네요. 워낙에 널리 알려진 사건이지만 이 책에서는 변호인단의 논박과 증거들에 대한 변론이 디테일하게 소개된다는 점에서 차별화되고 있습니다. 저도 여태까지는 고 김성재의 애인이 유력한 용의자라고 생각했는데 변호인단 의견도 확실히 타당성이 있더군요. 그나저나 유력한 증거인 동물 마취제 성분의 독극물이 왜 크게 인정받지 못했는지는 조금 궁금합니다.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

워낙에 유명한 영구 미제 사건이죠. 아직 여러모로 의견이 분분한 사건으로 제 개인적인 평을 담을 필요는 없지만 확실히 변호인 주장에 더 무게가 실리기는 합니다. 그러나 경찰 말대로 아내의 불륜이 사실이었다면 남편에게 가장 확실한 동기가 있었다는 것도 부인하기는 어렵네요. 변호인이 밝힌 용의자인 치정남은 살인을 저지를 하등의 이유가 없잖아요? 돈 때문에 협박한 거라면 남편한테 밝혀버리는 게 맞지... 여튼 이 사건 이후 여러모로 발전한 경찰과 국과수의 노력으로 만삭 아내 살인사건 같은 사건이 제대로 수사되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겠죠.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관련 서적은 여러 권 읽어보았지만 그 중에서도 손꼽을만한, 딱딱할 수 있는 과학수사 이론을 흥미로운 실제 사례와 결합하여 소개하는 이상적인 구성을 갖춘 책이라 생각됩니다. 한국화된 사례들도 마음에 좋았고요. 이론보다는 조금 재미에 치우친 편이긴 한데 도판과 자료를 조금만 더 보강한다면 이쪽 분야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살인은 증거를 남긴다"와 겨루어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관심 있으신 모든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2021/02/06

숙명 - 히가시노 게이고 / 권남희 : 별점 2점

숙명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소미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역 최고 회사인 UR 전산 대표였던 우류 나오아키가 병사한 뒤, 회사 사장이 된 스가이 마사히코가 살해된채 발견되었다. 흉기는 우류 나오아키가 생전에 수집했던 무기 중 하나인 독이 든 석궁이었기 때문에, 범인은 우류 가문 관계자로 압축되었다.

그러나 사건 수사를 맡은 형사 중 한명인 와쿠이 유사쿠는 살인 사건이 아니라 우류 가문이 숨기고 있던 비밀에 대한 수사에 집중한다. 어린 시절, 우류 가문 아들 우류 아키히코와 엮였던 여러가지 인연과 추억 때문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1990년에 발표한 비교적 초기 장편입니다.

UR 전산 사장 스가이 마사키요 살인 사건은 후더닛보다는 와이더닛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흉기를 통해 범인은 우류 가 근처에 있는 사람들로 특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기만 알아내면 범인이 누군지 알 수 있지요. 당연히 이야기도 '왜 살인 사건을 저질렀는지' 에 대한 탐구가 핵심이고요.

탐구 결과, 스가이가 우류 나오아키가 사망한 뒤 그의 유품 중에서 강탈한 '전뇌' 어쩌구가 써 있었다는 오래된 파일, 스가이가 뇌 의학 전문가에게 접촉했다는 증언, 관계자인 우에하라 박사와 우류 아키히코 모두 뇌의학자이며 오래전 죽은 사나에의 지능에 문제가 있었다는 등 중요 단서들이 모두 초반에 드러납니다. 독자는 이를 통해 과거 사나에에게 불법으로 뇌에 관련된 실험이 자행되었고 비밀 파일은 그 실험을 다룬 것이며, 스가이는 이 실험을 묻어두려는 관계자에 의해 살해되었다는걸 쉽게 눈치챌 수 있고요. 지금 읽기에는 많이 뻔한 소재인 탓입니다.

하지만 그냥 뻔하지만은 않습니다. 형사 와쿠라 유사쿠의 수사로 30여년에 걸친 장대한 비밀이 한꺼풀 씩 드러나는 전개가 굉장히 흥미로운 덕분입니다. 조금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쟁 직후 우에하라 마사나리는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획기적인 발견을 하게 됩니다. 뇌의 특정 부분을 자극하여 사람의 감정 조작이 가능하다는 발견이었습니다. 연구 성과 발표는 묻혀버렸지만, 대기업 우류공업 대표이사 우류 가즈아키가 우에하라 박사를 지원하며 연구가 은밀하게 재개됩니다. 그들은 7명의 남녀 피실험자를 모아 '전뇌식 심동 조작 방법' 이라고 이름붙인 연구를 진행했어요.
그런데 뇌수술을 받고 실험 중이던 피실험자들 중 4명은 탈주하고, 남은 3명은 원상 복구 수술을 받은 뒤 2명은 죽어버립니다. 유일한 생존자인 여성 사나에도 심각할 정도로 지능이 퇴화해 버리고요. 이런 비참한 결과를 본 우류 가즈아키와 우에하라 박사는 연구를 영원히 묻어 버리기로 결심했던 겁니다.

여기에 더해 의외성 있는 설정과 전개가 많아서 지루할 틈이 없었어요. 백미는 우류 아키히코가 범인이 아닐까 하는 단서가 작품 곳곳에 드러나지만, 진범은 우류 나오아키의 충신 중 유일하게 회사에 남았던 마쓰무라 겐조 상무였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억지스럽과 과장된 부분이 많다는 문제는 큽니다. 어린 시절부터 숙명의 라이벌이었던 와쿠라 유사쿠와 우류 아키히코가 사실은 사나에가 낳은 쌍둥이 형제였다는건 눈에 거슬릴 정도였어요. 우류 아키히코야 그렇다쳐도, 와쿠라 유사쿠까지 사나에 아들이라고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사나에가 쌍둥이를 낳았다면, 우류가문에서 두 명 다 입양하는게 맞지, 한 명만 전혀 관계없는 다른 곳에 입양보낸다는건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또 이란성 쌍둥이라면 아무리 외모가 다르더라도 성격이나 취향은 닮은 점이 많았을텐데, 마지막에 비밀이 드러난 뒤에서야 이를 언급하는건 반칙이라 생각됩니다.

7인의 실험체 중 한명이었던 에지마 소스케의 딸 미사코와 유사쿠가 고등학생 때 교제했다가 헤어진 뒤, 미사코가 우류 아키히코와 결혼했다는 것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왜 아키히코가 미사코와 결혼했는지도 설명이 부족했고요. 형제라서 이성에 대한 취향도 비슷했다는 것일까요?

그 외에도 우류 아키히코의 배다른 동생들인 히로마사와 소노코가 의기 투합해서 스가이를 죽이려고 한게, 마침 살인 사건이 저지른 딱 그 날 그 시간이라던가, 우류 아키히코가 석궁 화살촉을 수리했던 순간접착제를 떨어트린걸 마침 아내 미사코가 발견한다던가 하는 등 우연이 너무 많이 반복됩니다. 작품이 그만큼 정교하지 않다는 뜻으로, 이래서야 완성도가 높다고 하기는 어렵지요.

추리적인 부분도 별로에요. 딱히 건질게 없습니다. 범행을 저지른 범인과 석궁을 현장에 가져다 둔 사람이 다르다는 트릭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현실적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투서를 보내서 경찰에게 이 트릭이 간파된 뒤에는, 사건은 해결된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관계자 중에서 오전 시간에 석궁을 가져다 놓을 수 있던건 가사 도우미 스미에 씨 밖에 없었으니까요. 지나가던 여중생들 증언이 아니었더라도, 마쓰무라 겐조의 운명은 정해진거나 다름이 없었던거지요. 석궁 화살깃 수리와 같은 디테일은 솔직히 불필요한 사족으로 느껴졌고요. 

유사쿠가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였던 사나에 죽음에 대한 진상도 어색했습니다. 실험 재개를 노렸던 스가이 가문이 납치하려 할 때 병실에서 떨어져 죽었다는데, 누가봐도 분명한 살인 사건을 경찰이 이렇게 쉽게 덮는게 가능했을까요? 가능했다 치더라도, 유사쿠의 아버지가 사나에가 유사쿠 모친이라는걸 알았다는게 사건을 덮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모르겠더군요. 저라면 아이 어머니 복수를 위해서라도 발 벗고 나섰을거 같은데 말이죠. 최소한 사건을 덮었다면, 죽을 때 유사쿠에게 남긴 비밀 수사 노트에 그 진상은 써 놓았을 겁니다.

우류 가문이 지켜왔던 비밀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는 있지만 석연치는 않습니다. 우류 가즈아키와 우에하라 박사부터가 좀 웃겨요. 연구를 묻어버리기로 했다면 파일도 바로 없애버렸어야죠. 왜 화근을 남겼는지 모르겠어요.

스토리텔러로서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 솜씨가 잘 드러나는 흥미로운 작품이기는 하나, 단점이 너무 많아서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킬링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았으니 관심 있으시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오래전 숨겨왔던 가문의 비밀이 도화선이 된 사건이으로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건 오다 경부보이고, 주인공 유사쿠는 순전히 과거의 비밀에 집중한다는 구조 등은 작가의 다른 작품인 "몽환화"가 살짝 떠오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밝은 미래를 향해 젊고 열정적인 커플이 발을 내딛는다는 "몽환화"하고는 반대로, 이 작품의 유사쿠는 숙적이자 형제인 아키히코에게 완패하고 쓸쓸히 물러선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시대가 느껴지네요. 버블이 막 끝날 1990년의 일본과, 아베노믹스로 막 부활하기 시작한 2013년 일본의 시대상이 그렇게 달랐으리라 짐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