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안녕 요정 -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엘릭시르 |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인 모리야 미치유키, 다치아라이 마치(센도), 시라카와 이즈루, 후미하라 다케히코 4명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유학 온 여학생 마야와 만나 그녀가 떠날 때까지 2개월간 함께 자잘한 일들을 경험했다. 그러나 2개월 후 유고슬라비아에 전쟁이 일어났고, 모두 걱정하지만 마야는 편지 하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기어이 귀국했다. 하지만 편지는 오지 않았고, 남은 친구들은 그녀가 유고슬라비아 연방국 중 어디에 머무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힘을 모으는데....
요네자와 호노부의 신작입니다. 긴 호흡의 이야기 속에 몇 가지 에피소드들이 들어 있는 구성이지요.
요네자와 호노부 작품은 놓치지 않고 찾아 읽는 편입니다. 작품들이 대체로 평균 이상의 재미를 선사하며, 추리적인 면에서도 합격점을 줄 만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상계 분야에서는 높은 수준의 작품들을 내놓기도 했고요.
이 작품 역시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그것도 전형적 일상계로, 왕도라고 부를 수 있는 구성이에요. 정말로 있을 법한 소소한 에피소드를 추리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이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라면 이즈루의 이름 유래를 알아내는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진위 여부를 알 수 없고, 너무 소소해서 추리라고 부르기 어려운 수준의 이야기도 있다는 겁니다. 허나 지방 소도시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로는 이 정도가 딱이겠지요. 오히려 이러한 소소한 이야기를 추리 소설로 만드는 능력이 참으로 대단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소개해드리자면, 제일 처음 등장하는건 첫 만남에서 마야가 이야기한 "일본인은 비에 익숙해서인지 비가 오는데도 우산을 펴지 않고 잡고 뛰어간 남자" 사건입니다. 모리야는 '우산은 고장 난 것이고, 남자는 불에 타지 않는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달려나간 것'이라고 추리합니다. 조금 경우는 다르지만 "경성탐정록"의 "소나기"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의 이야기였습니다.
두 번째는 마야가 신사 근처 구 시가지에서 들은 젊은 2인조가 남긴 수수께끼의 대사 "죽을 것 같으니 신사에 가자. 곤란하다. 떡을 만들어 간다 어쩌구"의 의미를 풀어내는 이야기입니다. 모리야는 2인조의 정체가 끈끈이로 새전함을 털려는 도둑들이라고 추리합니다.
일본식 대화를 가지고 풀어낸 것이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번역이 아쉬웠어요. 일본어의 뉘앙스를 살리기는 힘들었겠지만, 우리 식으로 "먹고 죽을래야 먹을 것도 없고, 끈끈한 떡이나 준비해야지" 정도로 풀어낼 수는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세 번째는 묘지 앞 공물이 홍백 만주와 붉은 샐비어라는 기이한 물건인 이유를 밝혀내는 이야기입니다. 진상은 그의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경사였다는 겁니다. 일상계의 왕도라 할 수 있는 이야기였어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떡은 홍백인데 꽃은 붉은 것밖에 없다는 상황을 통해 추가적인 이야깃거리를 뽑아내는게 특히 괜찮았고요. 개인적으로 추리로만 따지면 이 작품 속 베스트 에피소드라 생각됩니다.
네 번째는 마야 이별 파티에서 시라카와의 이름인 "이즈루"에 얽힌 비밀을 밝혀내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재미 여부를 떠나 일본인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라 별로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야와의 짧았던 추억담 이후, 현 시점에서 모리야가 그동안 제공된 정보를 종합하여 결국 마야가 유고슬라비아 연방국 중 어디로 돌아갔는지를 알아내는 것으로 작품 속 추리는 마무리됩니다. 정교하기는 하지만 작품 내에서 전체적으로 흩뿌려진 단서를 모아 결론을 내는 것으로, 추리라고 하기는 조금 어렵지 않나 싶었어요. 일종의 숨은 그림 찾기에 가까웠달까요?
이렇듯 소소한 이야기에 소소한 추리가 펼쳐지는 작품으로 심심하다 여겨질 수 있긴 하나 제가 워낙 일상계 추리물을 좋아하기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작자의 다른 유사 시리즈와 비교해 본다면 뚜렷한 차별화 요소나 매력 포인트가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고전부 시리즈"나 "소시민 시리즈"와는 주인공들이 정반대라는 차이는 있습니다. 모리야는 본인의 에너지를 투자하여 결과를 이끌어내는 인물이거든요. 처음 본 마야를 도와주는 것에서 시작하여 학교에서의 궁도부 활동, 마야와 함께하는 시간들, 거기에 본인의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도서관에 없는 책을 구입해 공부하는 열의까지 모든 면에서 말이지요. 또 다른 주역 센도는 굉장히 차갑고 냉정한, 일종의 "쿨 뷰티"로 성숙한 학급 위원장 느낌이고요.
하지만 "고전부 시리즈"와 "소시민 시리즈"는 의욕 없는 무채색 주인공들이 매력 포인트의 하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모리야는 너무 뻔해서 매력 포인트를 찾기 힘들었어요. 센도 역시 다른 캐릭터들이 수도 없이 연상되는 스테레오 타입이었고요. 마야는 외국에서 왔다는 것을 제외하면 "고전부 시리즈"의 지탄다와 다르지 않습니다.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고 수시로 메모장을 꺼내어 메모한다는 모습은 "신경 쓰여요~"와 똑같아요.
또 비교적 무거운 내용 역시 이전 두 시리즈와는 다르기는 하나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그냥 일상 속 청춘물과 달리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위해 아낌없이 배우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려는 캐릭터를 등장시킨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힘든 탓입니다. 다치아라이를 통해 밝혀지는 진상, 즉 마야는 이미 죽었다는 것은 충격적이지만 허무할 뿐이고요. 청춘의 노력은 무익할 뿐이라는 허망함을 전해주려는 의도였을까요? 도무지 모르겠네요.
아울러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를 작품 속에 녹이기 위해 1992년을 그리는데, 1992년에 대학교 1학년이라면 저와 동갑이라 동질감은 느껴지긴 합니다만, 나이와 시점 모두 작품과는 별 관계가 없으며, 딱히 1992년일 필요도 없다는 점에서 역시나 불필요한 설정이었습니다.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된 주인공들을 통해 성장기 느낌을 주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르지만, 이 역시 어설픕니다. 모리야가 어떻게 포장하더라도 유고슬라비아로 가고자 했던건 젊은 치기에 가깝고, 대학생이 된 후 다시 가려고 하는 것은 오기에 불과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상계 추리물이기는 합니다만, 추리의 밀도가 낮고 캐릭터의 매력도 떨어지며 드라마도 재미없기에 감점합니다. 유고슬라비아 이야기에 신경을 쏟지 말고 그냥 "고전부 시리즈"의 에피소드로 써먹는 게 나았을 것 같은데, 왜 별도의 이야기를 파생시켰는지는 모르겠네요. 작가 요네자와 호노부가 유고슬라비아 홍보대사쯤으로 임명된 뒤 쓴 작품이 아닐까 추측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