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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31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 - 셜리 잭슨 / 성문영 : 별점 2점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 - 4점
셜리 잭슨 지음, 성문영 옮김/엘릭시르

블랙우드 일가는 6년 전, 윌리엄 삼촌과 콘스탄스, 매리캣 자매를 제외하고 일가족이 모두 독살당한 사건으로 마을에서 고립되었다. 당시 요리를 했던 콘스탄스는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여전히 범인으로 의심받고 있었다. 매리캣은 사고 후 미쳐버린 윌리엄 삼촌, 광장공포증으로 집 울타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콘스탄스와 함께 어렵지만 단란하게 살아가는데, 사촌 찰스가 방문한 다음부터 생활에 균열이 시작되는데...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열 한 번째 책. 고딕 호러의 대가라는 셜리 잭슨의 작품입니다.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무섭다거나 섬뜩한게 아니라, 불편하다는 감정에 가깝습니다. 작가의 엄청나게 상세한 묘사들 때문입니다. 특히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집요한 광기로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이 작품 속 사건 사고의 원흉인 화자 매리캣의 성격 묘사는 정말 압권입니다. 초반에 열여덟 살이라는 나이를 밝혀주지만, 내용 내내 초등학생 이상의 연령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순수하고, 그만큼 완전히 미쳐버린 여자아이의 심리 묘사가 그야말로 극에 달해 있거든요. 이런 류의 캐릭터, 성격은 혐오감을 가질 정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굉장히 불편했는데, 개인적으로는 "파이 바닥의 달콤함"의 소악마 플라비아 들루스가 연상되었습니다.

또 시골 마을에서 고립된다는 설정은 "이끼"나 얼마 전 보았던 "그것이 알고 싶다"의 "사자개 저택의 비밀"이 바로 떠오를 정도로 흔하디 흔하지만, 고립된 자매의 묘사에서 보이는 상세함과 깊이가 대단해서 엄청난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과연 누가 얼마나 미친 것일까? 이러한 광기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하는 궁금증도 생겼고요. 마지막 화재 이후 벌어지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묘사도 인상적이라 궁금증을 더해줍니다.

그러나 고딕 "호러"라는 말이 어울리는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무서운 부분은 전혀 없습니다. 독살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도 초반에 이미 짐작할 수 있어서, 대단한 반전으로 느껴지지도 않았고요. 미쳐버린 노인과, 범인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언니를 제외하면 과연 누가 남겠습니까? 또 완벽하게 미쳐버린 매리캣 시점으로만 전개되어 광기나 범행의 이유 같은 게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도 답답했습니다. 그게 뭐든, 최소한 '태양이 너무 뜨거웠다' 식으로라도 뭔가 설명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개인적으로 "화형법정"이나 "어두운 거울 속에"와 같은 추리적인 재미 요소를 기대했었는데, 그러한 기대는 완벽하게 빗나갔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묘사는 압도적이지만 추리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미스터리 책장’이라는 레이블로 출간될 작품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담고 있는 건 작가가 경험했다는 고립에 대한 두려움과 광기 뿐이니까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단편선들 같은, 약간 마음 불편한 순문학을 원하신다면 좋은 선택일 수 있지만, 정통파적인 추리 혹은 공포를 원하신다면 추천드리기 어렵습니다.

2014/10/30

침묵 - 엔도 슈사쿠 / 공문혜 : 별점 3점

침묵 - 6점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홍성사

17세기, 박해받던 일본의 키리시탄들을 위해 예수회 선교사 로드리고가 밀입국하여 활동하다가 결국 사로잡혀 마지막에는 결국 배교까지 한다는 내용으로, 저 역시도 항상 가지고 있던 "사람이 정말 괴롭고 힘들 때 신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순문학 작품입니다.

이전에 읽었던 "순교자" 관련 글을 찾아보다가 이 작품의 소개글을 읽고 관심이 가서 읽게 되었습니다.

로드리고 신부가 고문을 앞두고 코고는 소리를 듣는데, 그 소리는 다른 신자들이 고문을 받으며 내는 신음소리였다는 것, 그리고 무지렁이 신자들이 배교를 하느냐 마느냐는 중요한게 아니고 신부가 배교하기 전까지는 그들의 괴로움이 끝나지 않는다는 무간지옥이 작품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저는 신부가 과연 무엇을 얻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것 역시 핑계가 아닐까요? 본인의 믿음이 정말로 확고했다면, 괴로움도 모두 다가올 천국에 대한 일종의 보상 측면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현세의 고통을 내세에서 보상해 준다는 일종의 거래가 서구식 종교의 핵심 중 하나니까요. 물론 이 책의 주제는 그것을 다루고자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일본에서 받아들여진 가톨릭은 다른 것이라는 페레이라 신부의 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토속신앙, 혹은 전통적인 가치관과 결합하여 또 다른 무언가가 되어버린 것이라는 뜻인데, 국내의 일부 종교단체들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더욱 와닿았습니다.

여튼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작품으로, 종교의 현실적인 문제와 어려움을 잘 짚어낸 수작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 : 은밀히 자기들만의 조직을 만들어 종교 활동을 이어가던 가쿠레 키리시탄들 앞에 외국인 신부가 나타나 그들을 인도한다... 는 동일한 소재에 "모비 딕"을 결합시켰던 호시노 유키노부의 단편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2014/10/29

홍차의 세계사, 그림으로 읽다 - 이소부치 다케시 / 강승희 : 별점 3점 -> 미정

홍차의 세계사, 그림으로 읽다 - 6점
이소부치 다케시 지음, 강승희 옮김/글항아리

"차"보다는 "홍차" 중심으로 기원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소개해 주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입니다. 도판과 자료가 화려해서 즐겁습니다. 차를 마실 때 사용했던 눈이 휘둥그레지는 각종 도구, 다기들, 차와 관련된 그림과 사진, 지도 등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거든요.

책은 유럽에 최초로 소개된 차는 녹차였는데 이것이 왜 홍차로 바뀌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영국물은 미네랄이 많이 함유되어 경도가 높은 탓에 녹차를 우리면 차의 떫은맛 성분인 탄닌이 제대로 우러나지 않는데, 녹차 대비 탄닌 함유량이 높은 발효차는 중국에서는 떫지만 런던의 경수에서는 순하게 우려져 좋은 맛이 되었기 때문이라네요.

원래 홍차가 실패한 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도 흥미롭습니다. 어쩔 수 없는 환경적 요인으로 반발효차를 만들지 못해 완전 발효차가 되었고, 차를 만드는 공장에서 찻잎을 건조시키는 땔감으로 쓴 소나무의 연기가 찻잎에 착향된 것이 미묘한 향이 난다는 보히차, 정산소종이 되었다고 하니까요. 그러나 원산지인 우이산의 보히차가 영국의 소비량을 따라가지 못하고, 격동기의 중국에서 차를 확보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가짜 보히차가 범람하고, 더욱 강한 맛과 향을 착향시키기 위해 강제로 훈연한 랍상소종이 지금은 영국의 전통적인 차로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니 세상 일은 정말 모를 일입니다.

또 차의 기원을 찾아 이런저런 곳을 돌아다니며 찾은 여러 가지 차에 대해 소개해 주는데, 홍차 관련된 장소에 대한 기행문이라는 점에서는 "커피견문록"이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는 지노족이라는 소수민족의 량반차가 인상적이었어요. 왜냐하면 반찬처럼 먹는 차이기 때문이에요. 차의 생엽을 유념하여 생강, 마늘, 고추, 소금과 함께 섞어 뜨거운 물을 부은 뒤 먹는다고 합니다. 꽤 맛있을 것 같죠? 비슷하게 반찬처럼 먹는 차가 미얀마에도 있는데, 이곳에서는 약간 발효한 절인 음식처럼 먹는다고 하네요.

이외에 여러 가지 차에 관련된 중요한 역사의 흐름도 짤막하게 알려줍니다. 물론 "보스턴 티 파티"가 빠질 수 없죠. 아편전쟁도 어떻게 보면 차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해석하는 관점도 새로웠고요.
홍차 관련 주요 인물들 어떤 활약(?)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얼 그레이 홍차를 만든 그레이 백작을 비롯해 중국에서 차 수입이 어려워지자 인도의 아삼이나 스리랑카의 실론 등의 식민지를 차 생산지로 활용하기 위해 노력했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지금도 그 이름을 강하게 남기고 있는 홍차의 왕 "립턴"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네요. 다른 사람들은 정말 홍차를 재배하고 널리 퍼트리는 데 노력한 사람들이라면, 립턴은 순수한 사업가로 생산과 판매에 남다른 재주를 발휘하여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거대 기업을 세운 것이니까요. 참고로 얼 그레이는 유명한 홍차 상회 트와이닝에서 정산소종의 훈연향이 랍상소종만큼 강하지 않자, 다른 향기에 주목하여 베르가못의 향을 첨가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차가 전래되면서 미국인의 실용적인 관점으로 새롭게 등장한 티백, 아이스티, 레몬티 등이 소개되고, 마지막은 맛있는 홍차를 만드는 방법으로 끝맺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통해 읽었던 조지 오웰의 수필을 중심으로 설명되고 있어서 더 반갑더군요. 내용의 핵심은 "우유를 먼저 붓느냐, 차를 먼저 붓느냐"였는데 조지 오웰의 주장은 우유의 양을 조절할 수 있으므로 우유를 나중에 부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MIF, MIA 논란은 계속 이어졌는데, 왕립화학학회까지 나서서 내린 결론은 "우유가 먼저(MIF)"입니다. 우유를 나중에 넣으면 우유 속의 단백질이 고온의 차에 의해 변성되어 차의 맛과 향이 나빠지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과학이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아주 좋은 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재미는 물론 자료적 가치도 충분한 만큼, 차를 좋아하신다면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책의 장정, 디자인도 아주 예쁘고 실려 있는 도판들도 컬러로 제대로 수록되어 있는 등 책의 완성도도 높은 편입니다.

2014.10.30 수정) 댓글을 읽어보니 책 내용에 오류가 제법 있는 것 같습니다. 참고하세요.

2014.11.06 수정) 댓글을 읽어보니 오류 정도가 아닌 것 같기에 별점은 미정으로 최종 수정합니다. 잘 아는 분야에 대해서만 리뷰를 남길 수는 당연히 없습니다. "독서"가 자신의 교양을 쌓고 부족한 것을 채우는 데 목적이 있기도 하니까요. 잘못된 정보를 주는 책을 잘 모르는 독자가 읽었을 때의 폐해의 대표적인 경우라 생각하겠습니다.

2014/10/28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 (2014) - 마크 웹 : 별점 2점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 : 초회 한정판 (2disc) - 4점
마크 웹 감독, 제이미 폭스 외 출연/소니픽쳐스

출장 중 본 영화의 마지막 리뷰. 샘 레이미의 3부작 "스파이더맨"에서 리부트 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리부트 1탄인 전작을 감상하지 않았었는데, 이 작품을 보니 저는 영화의 대상 연령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군요. 일단 주인공들이 지나치게 어리게 설정되어 감정이입이 어려웠습니다. 단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캐릭터 자체가 틴에이저처럼 묘사되는데, "스파이더맨"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청춘 영화를 감상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캐릭터 형성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덕분에 성격 묘사가 너무 피상적인 것은 아쉬웠습니다. 영웅으로서의 스파이더맨과 궁상덩어리인 자신과의 괴리감에 몸부림치던 피터 파커의 모습이 잘 그려졌던 샘 레이미 시리즈에 비하면, 이번 작품 속 캐릭터들은 애들에 불과해 보인 탓입니다. 피터 파커와 그웬 스테이시는 사랑 때문에 갈팡질팡하는 전형적인 10대의 모습이고, 해리 오스본은 왕따 기분을 느끼는 철부지, 심지어는 악역이자 '어른'인 일렉트로마저도 누군가 관심만 가져주면 좋은 관심병 환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배우들도 스파이더맨에 잘 어울린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피터 파커와 그웬 스테이시는 너무나도 상큼한 청춘이라 고민 하나 없을 것 같은 비주얼을 뽐내며, 해리 오스본은 전성기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나 에드워드 펄롱을 연상케 하는 꽃미남이라 심각한 몸 상태나 고민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스파이더맨"이 아니라 "비버리 힐즈 90210"을 보는 기분이 들 정도였어요. 일렉트로가 흑인이라는 것도 도발적인 캐스팅에 비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얻은 게 많지 않아 보였고요.

전개도 별로 매끄럽지 않았습니다. 일렉트로 정도만 등장했더라면 깔끔했을 텐데, 해리 오스본(그린 고블린 2)은 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니스터 식스를 등장시키기 위한 제작사의 장삿속 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또, 일견 강력해 보였던 일렉트로의 최후도 어처구니없더군요. 전기를 왜 받아들이고만 있죠? 쏠 줄도 아는데 들어오는 대로 내뱉으면 그만이지요... 해리가 그웬을 죽인다는 마지막 장면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애들 투정의 정점이었어요.

이런저런 이유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여러분의 친구 스파이더맨"의 유쾌함은 잘 살아 있고, 헐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로서의 볼거리도 나쁜 편은 아니지만, 취향이나 분위기가 너무 어린 탓에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샘 레이미 감독의 영화가 최고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궁상맨 스파이더 캐릭터라든가 친구였지만 원수가 되는 피터–해리의 관계는 훨씬 잘 그려내었다고 생각되네요. 배우들도 더 나았던 것 같고요. 흥행에 크게 재미를 보지 못했다는데, 사람들 생각은 역시 다 비슷한가 봅니다.

2014/10/27

화성 연대기 - 레이 브래드버리 / 김영선 : 별점 2.5점

화성 연대기 - 6점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김영선 옮김/샘터사

SF계의 거장 레이 브래드버리의 작품으로, 화성인 시점에서 지구인이 아직 화성에 오기 이전부터 지구인 탐험대가 수 차례에 걸쳐 도착하고, 이후 지구인의 이주와 화성인의 멸망, 이주민들의 귀환... 순으로 이어지는 여러 단편이 수록된 연작 단편집입니다.

연대순 배치는 제목처럼 "연대기"라는 느낌을 전해 주는 데 크게 기여하지만, 수록된 작품들이 하나로 통일된 구성은 아닙니다. 본격 하드 SF는 물론 서정적인 동화, 블랙 코미디까지 장르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거든요. 그래서 몇몇 작품은 다른 작가가 쓴 느낌마저 들 정도입니다.
"일러스트레이티드 맨"처럼 아예 대놓고 다양한 작품들이 수록되었더라면 더 나았을텐데, "화성 연대기"라는 속성의 작품만 모아 놓다 보니 송곳처럼 확 튀어나오는 작품이 많지 않다는 점은 조금 아쉽더군요.

그래도 한 페이지짜리를 포함한 스무 편이 넘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 볼륨 덕분에 괜찮은 작품도 제법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매력 포인트라 할 수 있는 블랙 코미디 반전물들이 인상적이었어요. 지구에서 온 탐험대가 화성인들에게 정신병자로 오해받는다는 "지구인"은 이런 류의 농담물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지적 논리를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고, 아담과 이브가 되었는데 이브가 너무 못생겨서 도망쳐버린 사나이 이야기인 "적막에 휩싸인 도시들"은 이야기의 재미도 재미지만 주인공 월터의 심리 묘사가 대단해서 감정이입이 절로 되었습니다.
이런 블랙 코미디 외에도 화성인의 텔레파시 능력을 기반으로 한 독특한 이야기인 "3차 탐험대"나 "화성인"도 좋은 작품이며, 화성이라는 곳을 망치는 침략자로서의 지구인을 묘사한 "달은 지금도 환히 빛나건만"은 분명한 걸작입니다. 화성인이 멸망한 것이 지구인의 '수두'라는 전염병 때문이라니요!

하지만 환상을 다룬 설정이 반복되고, 작가 특유의 '기묘한 맛'을 느끼기 어려웠던 점 등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또 낡은 소재들이 있기 때문에 "일러스트레이티드 맨"과 같이 지금 시점에 먹히기에는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때문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좋은 작품인 것은 분명한데 시대가 너무 많이 지났네요. 이 작품을 실시간으로 접했던 당대 독자들이 부럽기만 할 따름입니다. 거장다움은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만큼 장르문학 팬들에게는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허나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도 조금 묵직한 편이니, 만약 브래드버리 입문자이시라면 다른 단편집을 먼저 찾아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덧 : 책의 디자인과 장정은 아주 예뻐서 소장 가치가 충분한데, 출판사가 "샘터"라는 것이 신기하네요. 앞으로도 꾸준히 장르 소설을 출간해 주었으면 합니다.

2014/10/24

트랜스포머 - 사라진 시대 (2014) - 마이클 베이 : 별점 3점

오토봇과 디셉티콘의 전투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정부의 한 조직에서 오토봇과 디셉티콘 구분 없이 모든 외계 로봇을 말살하려는 작전을 시작했다. 작전에 휘말려 큰 상처를 입은 옵티머스 프라임은 고물차로 변장해 몸을 숨겼고, 우연히 이 고물차를 구입한 가난뱅이 발명가 케이드 예거는 딸, 친구 등과 함께 정부와 또 다른 외계 로봇 락다운, 오토봇, 그리고 지구인이 개발한 트랜스포머 갈바트론과 스팅어 군단의 거대한 전투에 휩쓸리는데...

역시나 출장 때 본 영화입니다. 이전에 봤던 것들은 전부 갈 때고 이제부터 소개하는 영화들은 모두 올 때 봤습니다.

사실 이전 시리즈가 갈수록 별로여서 큰 기대는 없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대박이더군요! SF 액션 블록버스터로는 그야말로 왕도격 작품이었습니다.

이야기 전개는 딱히 대단하진 않지만, 오토봇도 디셉티콘처럼 외계인이니 말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부 관료가 악당이라는 아이디어는 꽤 괜찮았습니다. 외계인의 사체(?)를 가지고 자체 제작 로봇을 만들려는 기업인 조슈아 조이스가 엮이는 등의 복잡한 이야기를 길지만 한 편의 영화로 밀도 있게 녹여낸 솜씨도 전성기 시절의 마이클 베이를 떠오르게 만들었고요.

무엇보다도 액션은 그야말로 명불허전입니다. 로봇들의 격투는 물론, 주인공 일행도 예비사위의 카 체이스, 마크 월버그의 맨손 격투 및 최종전에서의 난입 활약 등으로 로봇들에 못지않은 비중으로 다양한 액션을 소화해 주어서 눈이 즐거웠습니다. 마크 월버그가 나와서 뭘 하려나 했는데 이렇게까지 활약해 줄지는 정말 몰랐네요.
제목에 걸맞게 드리프트, 하운드 등의 새로운 로봇들도 볼거리인데, 단지 눈요기에 그치지 않고 뚜렷한 활약을 보여주며 마지막에 옵티머스가 깨우는 다이노봇들은 정말 압권이에요.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멋진 장면들이 정말 최고였습니다.

단점이라면 외계인 협력자인 락다운의 역할이 무엇인지 좀 애매하다는 점, 그리고 조슈아가 너무 쉽게 개과천선한다는 점이 있는데 작품에 큰 흠이 될 정도는 아닙니다. 조슈아가 우리 편으로 돌아선 뒤에 보여주는 깨알 같은 유머와 잔재미를 생각한다면 점수를 더 줄 수도 있고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 A급 오락영화로 스트레스와 짜증을 날려버리는 오락영화 기존의 가치에 충실한, 그야말로 마이클 베이다운 영화입니다.

2014/10/23

고질라 (2014) - 가레스 에드워즈 : 별점 2점

출장 중 본 영화 세 번째. 시차 적응 실패로 비행기에서 영화만 봤네요.

일본 특촬물의 전설 "고지라"의 헐리우드 버전 리메이크입니다. 1998년에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에 의해 "고질라"라는 동명의 제목으로 제작되기는 했지만 흥행에 썩 재미를 보지 못했고, 팬들의 반응도 그다지 좋지 않았었지요. 당시 팬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던 이유는 한마디로 "괴수물에 대해서 잘 모르고 만들었다!"였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이 영화는 그러한 비판을 잘 수용한 느낌입니다. 육중함이 살아 있는 고질라 디자인과 함께 일종의 재난물처럼 괴수들의 습격이 그려지고 있는 덕분입니다. 원작과 비슷하게 원자력 사용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는 점도 반가운 요소였고요.

그러나 이러한 괴수 재난물 속성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면에서는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특히나 스토리는 정말 최악이에요. 리뷰에 줄거리를 정리할 수도 없을 정도니까요.

일단 주인공부터가 대체 왜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와의 고향집 뒤지기에서 시작해서 원폭 운송, 마지막 해체까지 하는 것마다 족족 실패하거든요. 또 주인공 가족 이야기도 사족일 뿐입니다. 과거 원전 사고로 어머니를 잃었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는건지 모르겠어요. 어머니의 마지막 장면만큼은 원자력의 공포도 잘 알려주는 괜찮은 씬이었고, 원폭에 대한 공포를 괴수와 연결시키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그냥 선량한 피해자가 있었다 정도로 끝냈어야 했습니다. 주인공 이야기는 깔끔하게 원폭 수송 작전만 넣고, 가족을 잃어버렸다는 등의 작위적인 이야기는 넣지 않았으면 훨씬 좋았을거에요.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진상에 집착한다는 아버지가 거의 시작하자마자 리타이어되고, 그토록 오랜 시간 찾아 헤매던 진상이 하루 만에 전 세계로 알려진다는 전개도 어이를 상실케 합니다.
뭔가 있어 보였던 세리자와 박사 역시도 잉여임에는 마찬가지입니다. 괴물 이름 붙이는 것밖에는 하는 게 없는 해설에 가까운 존재니까요. 아니, 몇 시간 뒤에 알게 될 그놈의 진상 때문에 주인공 가족을 데려와서 결국 죽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민폐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군요. 군인이라는 주인공이 왜 박살을 내버리지 않았는지 솔직히 의문이에요.

무토 디자인이 고질라에 비해 괴수 느낌이 덜한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곤충 느낌이기는 한데 첫 등장 말고는 딱히 압도적이다 싶지 않았어요. 고질라와의 결전도 뭔가 어색할 뿐더러, 도시를 파괴하던 위용에 비하면 강력함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고질라와 괴수의 위력을 일종의 재난물처럼 표현한 박력은 볼 만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이야기 전개는 "D-war"보다 나은 게 없었습니다. 아무리 괴수를 보기 위해 보는 영화라지만, 이 정도라면 차라리 스토리는 없는 편이 나았습니다. 속편이 나올 모양이던데, 괴수 영화라면 미약한 존재인 인간 이야기는 젖혀두고 괴수에만 집중해 주었으면 합니다.

2014/10/22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2014) - 브라이언 싱어 : 별점 2.5점

트라스크 박사가 발명한, 돌연변이 (뮤턴트)를 찾아내어 살육하는 센티널 때문에 X맨들은 전멸의 위기에 빠졌다. 그들은 키티 프라이드의 능력으로 울버린을 1973년 과거로 보내어 현재를 바꾸려고 시도했고, 무사히 과거에 도착한 울버린이 찰스 (자비에르)와 에릭 (매그니토)와 함께 사건의 발단이 된 레이븐 (미스틱)을 막으려고 노력해 나갔다. 한편 미래의 X맨들에게 센티넬 대부대의 공격이 시작되는데...

출장 중 감상한 영화 두 번째 작품. 시리즈의 최신작이죠. 그동안 날개 없이 추락하던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간만에 복귀했군요.

작품의 특징이라면 이전 X맨 3부작과 리부트된 전작의 세계관을 이어준다는 겁니다. 그러나 단순한 연결고리는 아닙니다.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재미도 상당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미래 시점에서의 액션씬이 아주 좋았습니다. 이전에 등장하지 않았던 다양한 뮤턴트들의 멋진 액션들이 굉장히 화려하게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블링크의 능력이 아주 멋졌어요. 악역인 궁극 병기 센티넬의 강함도 인상적으로 표현되고요. 최강자 중 한 명이라 생각했던 스톰의 죽음 등 X맨들이 하나씩 박살나는 묘사는 나름 충격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정말 ‘아작난다’는 표현이 적당했거든요.

그에 비해 과거에서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액션보다는 스토리에 집중한 느낌이라 화려함은 덜합니다. 그래도 퀵실버의 등장과 활약은 명불허전이었고, 마그네토 역시 기차 레일로 센티넬을 장악하는 장면 등에서 기대에 걸맞는 최강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도 초능력의 특성상 뭔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힘든 찰스(자비에르)가 능력을 회복한 뒤, 공항에서 레이븐(미스틱)과 일종의 텔레파시로 대화를 나누는 씬은 정말 명장면이었어요. 또 그간 비중이 적었던 레이븐 (미스틱)의 활약이 멋지게 그려진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모든 사건의 발단이자 중간까지 핵심 역할을 수행하며 마지막 대단원을 장식한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진주인공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 외에도 제 출생년도와 같은 1973년이 무대라는 것도 아주 반가웠는데,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디테일이 상당해서 깨알 같은 재미를 안겨줍니다. 의상이나 자동차와 같은 소품은 물론, 케네디 암살이라는 토픽을 적절하게 이야기에 녹여내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단점도 명확했습니다. 일단 울버린은 처음 등장해서 조무라기 악당들을 해치우는 것 외에는 당최 하는 게 없어서 울버린 빠로서는 실망스러웠어요. 마그네토도 좋아하는데 하이라이트 장면에서의 모습은 비행하는 폼이라던가 의상이 뭔가 코스프레한 듯이 어색해서 별로였고요.

세세한 부분에서 설명이 부족한 전개 역시 아쉬운 점입니다. 마그네토(에릭)가 트라스크 박사 습격 장소에서 레이븐을 죽이려고 하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냥 트라스크 박사를 죽이고 레이븐을 데리고 가면 되잖아요. 레이븐이 스트라이커에게 사로잡히지 않은 것으로도 미래가 바뀌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다리를 쓰면 초능력을 못 쓴다는 찰스의 설정도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불구가 된 건 총알에 맞아서인데, 백신은 뮤턴트 능력을 억제하는 것이니 전혀 관계가 없어요. 마지막으로 마그네토(에릭)가 센티넬을 자기 것으로 만든 시점에서 왜 야구장을 들어다 놓는 쇼를 펼치는지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위해 만들었다는 센티넬이 공개 장소에서 인간을 때려잡는 영상만 나가도 박사와 센티넬을 뭉개버리기에는 충분했을 텐데 말이지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나쁘지는 않지만 성공적인 리부트였던 전작보다는 스토리의 탄탄함이 부족해 보입니다. 미스틱의 활약이 괜찮다고 쓰기는 했지만 울버린이나 다른 액션 히어로가 활약하는 게 화려함 면에서는 더 도움이 되었을 테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세계관을 잘 짜 맞추면서 재미를 주는 데에도 성공한 만큼 후속작도 기대해 볼 만할 것 같네요.

덧 1 : 늙지 않는다는 울버린이 많이 늙은 게 티가 나서 안타까웠습니다.

덧 2 : 마그네토는 대체 어떻게 나는 겁니까?

2014/10/21

엣지 오브 투모로우 (2014) - 더그 라이먼 : 별점 3점

가까운 미래, '미믹'이라 불리는 외계 종족의 침략으로 인류는 멸망 위기를 맞이했다. 인류는 이에 맞서 전 세계 군대가 연합한 연합방위군(United Defence Force, UDF)을 창설했다. 그러나 방위군은 정훈장교였던 육군 소령 빌 케이지(톰 크루즈 분)는 장군의 명령으로, 훈련이나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자살 작전이나 다름없는 전투에 투입되었다. 결국 미믹의 함정으로 인해 군대는 전멸하고 케이지 역시 전사했지만, 죽기 직전 자신이 죽인 미믹의 피를 뒤집어쓴 그는 작전 시작 직전으로 되돌아가게 되는데…

출장 중 비행기에서 꽤 많은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며칠간은 영화 리뷰가 쭉 이어질 것 같네요. 첫 번째작품은 가장 먼저 본 "엣지 오브 투모로우"입니다. 

 이 영화는 널리 알려진 대로 일본 라이트노벨 "All You Need Is Kill"을 원작으로 한 할리우드 SF 액션 블록버스터입니다. 동일한 삶을 반복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사랑의 블랙홀"과도 유사  타임 루프물입니다. 차이점이라면 "사랑의 블랙홀"은 잠들거나 하루가 지나면 리셋되는 반면, 이 작품은 죽음에 의해 리셋되는 구조이고, 나름 과학적인 설명도 덧붙여졌다는 점입니다. 물론 설득력이 높다고 하기는 어렵지만요.

이렇게 삶이 리셋된다는 독특한 설정과 더불어, 전투 장면의 육중함과 리얼함도 돋보입니다. 죽음을 반복하면서 점점 자신을 단련시키는 과정도 설득력 있게 그려진 덕분입니다.
절망적인 전투 외에 도망이라는 선택지를 탐색해가는 과정의 짜임새도 좋아요. 여러가지 디테일들 덕분인데, 대표적인 예는 여주인공 리타와 함께 헬기가 있는 곳에 도착한 장면에서 "설탕은 세 개 넣지?"라는 대사를 통해 루프의 누적이 얼마나 길었는지를 실감케 만드는 장면을 들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오메가의 피를 뒤집어쓴 케이지가 더 과거의 시점으로 점프하여 여주인공과 다시 만나게 되는 해피엔딩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톰 크루즈의 상큼한 미소도 오랜만에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고요.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오메가라는 존재는 다소 유치하게 느껴졌고, 마지막 작전의 전개는 비약이 심했습니다. 오메가의 위치를 파악한 시점에서는 더 이상 도망칠 이유가 없었고, 리타가 오메가를 쏘는 편이 더 합리적이었을 테니까요. 게다가 오메가를 죽인 뒤 다시 리셋되었을 때,   이미 오메가가 죽은 세계가 펼쳐진다는 결말은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이전의 규칙대로라면 리셋은 되더라도 오메가가 죽은 시점이 유지되는 건 말이 안 되고, 만약 그렇게 바뀌었다면 케이지가 깨어나는 지점도 변경되어야 했겠지요.

이렇게 불만 요소가 없지는 않지만, 웰메이드 SF 활극임은 분명합니다. 톰 크루즈라는 이름은 이제 톰 행크스나 브래드 피트처럼 그 자체로 브랜드가 된 것 같네요. 물론 가끔 실패는 하지만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14/10/20

삼국지가 울고 있네 - 리동혁 : 별점 2.5점

삼국지가 울고 있네 - 6점
리동혁 지음/금토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갑작스러운 해외 출장으로 한 주 정도 블로깅을 쉬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책은 삼국지 관련 서적입니다. 중국 동포 출신 작가가 이문열의 삼국지를 읽고 오류가 너무 많다 느껴 이를 지적하기 위해 썼다고 하네요. 한자를 잘못 본 번역 오류는 물론, 당대 역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까지 포함해 깨알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이문열 삼국지에 얼마나 많은 오역과 오류가 있었는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하나하나 다 들기도 어려울 정도인데요, 물론 이야기의 큰 줄기를 바꾸는 오류는 아니지만, 유비가 조조와 술자리를 가지다가 천둥이 치는 것을 겁내는 장면처럼 원작자의 의도가 무시된 부분은 심각한 각색이자 오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기억에 남는 오역, 류를 몇 가지 꼽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장수들이 "창을 끼고" 달려 나간다는 표현은 원래 "꼬나쥐다" 또는 "들다"가 맞고, "대도를 찬다"는 표현도 틀렸습니다. 고대의 다다오(대도)는 자루가 긴 언월도 형태로, 허리에 찰 수 없는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원술이 겨드랑이에 두 벌의 보검을 걸고 있었다는 표현 역시 오류이고요. "손을 어루만지며 크게 웃다"라는 표현도 현대어로는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고대에서는 "손을 두드리다"라는 뜻이라 "손뼉을 치며 크게 웃다"가 정확한 번역이라고 합니다. 코미디에 가까운 오역도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자객 예양을 "예"와 "양"이라는 지명으로 잘못 번역했다든지, "하늘이 가죽띠에 그 뜻을 밝혀 무왕이 주를 치게 했다"는 문장은 사실상 "혁명"이라는 단어를 잘못 해석한 결과라고 합니다.

비슷한 글자를 오독한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뜻하는 "훠"라는 글자를 순욱의 이름인 "위"로 착각한 것, 손책을 "주둥이 노란 어린놈"으로 번역한 것도 오역인데, 황구(黃口)는 단순히 "어린아이"를 의미한다고 하네요. "카이"라는 말은 갑옷을 뜻하는데, 작품에서는 계속 투구로 묘사되었다고 하고요. 또 "물이 쏟아지고 흙이 밀려오듯 적군이 덮쳐 와야 맞서겠다는 뜻입니까?"라는 하후돈의 말도 잘못된 번역으로, 실제 의미는 "물이 밀려오면 흙으로 막고, 장수가 오면 군사로 막는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적군이 오니 맞서 싸우자는 의미죠. 산과 관련된 표현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저자의 말처럼 실제 전투 상황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문열 삼국지의 오역과 오류 지적 외에도 이 책은 다양한 조사와 고증을 통해 당대 무기나 진법, 역사적 상황 등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알려줍니다. 예를 들어 장팔사모가 뱀 모양이라는 주장은 허구일 가능성이 높고, 실제로는 "삭모"라는 말에서 유래된 긴 창일 가능성이 높다는 해석도 흥미로웠습니다.
무게 단위 관련해서는 후한 시대의 1근이 지금의 약 500g이 아닌, 222.73g 정도였다는 정보가 대표적입니다. 정사에서 유일하게 언급된 전위의 쌍철극이 80근이라고 하니, 약 18kg 정도로 장사라면 들 수 있는 무게였겠죠.
신체 치수도 당대 척도의 차이에 따라 정리되어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1자는 약 19.91cm라 공자의 키는 약 191cm, 후한 시대의 1자는 약 23~24cm로, 제갈량의 키는 184~196cm로 추정되며 관우의 경우 정사에는 키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합니다. 

조운의 활약도 당대 사료들을 바탕으로 보면 과장된 측면이 많았다고 설명하고, 조조가 언제부터 악의 화신이 되었는지, 관우가 언제부터 신으로 떠받들어졌는지 등에 대한 탐구도 흥미롭습니다. 특히 촉나라 인물들이 유독 미화된 이유로, 촉은 사관이 없었던 반면 위나 오에는 사료가 남아 있어 인물들의 전설화가 어려웠다는 분석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초한지 인물과 삼국지 인물을 연결한 전설도 흥미로웠는데, 명나라 후기 소설집 "유세명언"에 실린 내용에 따르면 초한지의 인물들이 삼국지 속 인물로 환생한 배경이 꽤 논리적으로 설명되더군요.

중국 역사를 인용한 실제 사례들도 흥미로웠습니다. 예를 들어 모택동이 실제 공성계를 실행에 옮겼다는 이야기나, 항일전쟁 시기 허베이성 민병들이 금속 조각을 구하기 위해 가짜 목표를 설치해 일본군의 총포 사격을 유도하고 파편을 회수한 일화는 "풀 실은 배로 화살을 얻다"는 고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또, 유비의 관상을 설명하며 1970년대 말 백전풍을 앓던 한 농민이 황제를 자칭하면서 자신의 몸에 있는 흰 점을 근거로 들었던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결국 그는 체포되어 총살당했다고 하네요. 그 외 흥미로운 이야기로는 제갈량과 같은 사주팔자가 1981년 8월 3일 12시~14시 사이에 태어난 사람과 동일하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말은, 중국인들은 삼국지를 인생 지침서나 성전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삼국지를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과는 대화를 하지 말라"는 말은 실제로는 허구이며, 광고 문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이문열 삼국지에 대한 오류 증명이 중심이라 피식 웃게 되는 재미 외에는 큰 깊이는 없지만, 삼국지 팬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국내에서 이문열 삼국지가 정본처럼 여겨지는 현실에서는 더더욱 의미 있는 작업일 수도 있겠죠. 이 책이 조금이나마 영향력을 발휘해, 지적된 오류들이 수정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물론 제가 다시 이문열 삼국지를 읽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2014/10/13

사라진 테니스 스타 - 까뜨린느 아를레 : 별점 2점

사라진 테니스 스타 - 4점
까뜨린느 아를레 지음/추리문학사

테니스 세계랭킹 1위 이반 파첵이 자택 근처에서 조깅 도중 납치되었다. 테니스 협회는 납치범들이 요구한 100만 달러의 몸값을 거절했지만, 이반 파첵의 테니스 생명을 걱정한 세계랭킹 2위 데렉 빌더가 대신 몸값을 지불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몸값 지불 장소였던 전미오픈 경기장에서, 데렉 빌더마저 헬기를 이용한 범인들에게 납치되고 마는데…

김성종 최신세계추리소설 시리즈로, "지푸라기 여자"로 유명한 카트린 아를레(까뜨린느 아를레)의 작품입니다. 제목 그대로 납치된 테니스 스타와 몸값 지불을 둘러싼 유괴극입니다. 인질이 세계 랭킹 1, 2위의 프로 테니스 선수라는 설정이 특징이지요. 

내용은 유괴극답게 몸값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촛점이 맞춰져 있는데, 범인들이 거의 성공에 이르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완전범죄극이었던 "지푸라기 여자"의 작가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납치했던 이반 파첵을 활용하여 더 큰 돈을 다시 벌어들인다는, 몸값 전달 방식에 대한 꽤나 치밀하게 구성된 트릭 덕분입니다. 프로 테니스와 유괴를 결합한 소재 자체도 독특했고요.

그러나 이 몸값 전달 작전을 제외하면, 추리적으로나 내용적으로 크게 특기할 만한 점은 없습니다. 오히려 작가의 명성에 비교하면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허술한 부분이 많습니다. 전미 랭킹 1위의 프로 선수가 경호도 없이 쉽게 납치된다는 도입부터 현실성이 부족한데, 데렉 빌더가 생중계 중인 테니스 경기장에서 헬기를 이용해 납치되는 장면은 정말이지 황당했습니다. 아무리 경찰이 무능하다 해도, 백주대낮에 납치극이 벌어지는데 수수방관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요. 모든 경찰력을 동원하면 헬기가 내리는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을 테고, 헬기가 영화 촬영에 쓰인 소품이라는 점만 확인했더라도 범인들의 위치를 추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이쯤 되면 경찰이 공범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또 범죄의 흑막이 있었다는 식의 마무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폴란드 민주화 운동을 위한 자금 확보라는 원래 범죄 의도만으로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기에, 이런 설정은 오히려 사족처럼 느껴졌어요. 후속작을 염두에 둔 복선이었을까요? 어차피 후속작을 볼 일은 없겠지만요.

이렇게 일부 아이디어 면에서는 장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설득력이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긴 어렵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번역의 완성도도 떨어지니 굳이 찾아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절판되었으니 찾기도 힘들지만요.

2014/10/10

린 UX- 제프 고델프, 조시 세이던 / 김수영 : 별점 2.5점

린 UX - 6점
제프 고델프.조시 세이던 지음, 김수영 옮김, 김창준 감수/한빛미디어(한빛아카데미)

정말로 오랜만에 읽어본 전공 및 업무 관련 책입니다. "린(Lean)" 사고방식으로 UX를 개발하기 위한 방법론을 설명해주는데 쉽게 말하자면, '정해진 적은 자원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방법론입니다.

입문자용 안내서라기보다는 전공자 혹은 관련 업무 종사자를 위한 이론서에 가까운데, 그런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나름 재미있게 읽히는 편입니다. 꽤 흥미롭게 느껴진 덕분입니다. 실무에 도입해 볼 만한 부분도 몇 가지 있었고요. 개인적으로는 이 방법론은 하나의 큰 완성된 제품보다는 단위별로 쪼개진 기능이나 항목들을 개선하는 데에 더 효과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실무자가 상황에 맞게 수정하고 응용한다면 전혀 새로운 대형 과제에도 유용하게 쓸 수 있겠지만, 그만큼의 고민과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겠죠.

다만 이 방법론은 "가정"에 많은 부분을 의존한다는 점에서 약점이 있습니다. 사용자 조사나 페르소나 구축 단계에서도 많은 내용을 가정에 기반해 진행한다는 것은 다소 문제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더구나 아예 세상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 과제라면, 책에 제시된 방식대로 가정을 수립하기도 어렵고요.
그리고 각 단계별로 단순히 설명에 그치는게 아니라 이 방법론이 실제로 적용되었던 구체적인 사례, 그리고 방법론을 통해 개선할 수 있었던 예시를 더 자세히 소개해 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도 생깁니다.

그래도 전공서적으로서는 비교적 읽기 쉬웠고, 분량도 적절했습니다. UX 업무를 하는 주니어뿐 아니라 시니어에게도 눈여겨볼 만한 내용이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4/10/08

세상을 바꾼 50가지 의자 - 디자인 뮤지엄 / 권은순 : 별점 4점

세상을 바꾼 50가지 의자 - 8점
디자인 뮤지엄 지음, 권은순 옮김/홍디자인

영국의 디자인 박물관 "디자인 뮤지엄"이 인간의 생활과 밀접한 디자인 분야의 주요한 오브젝트를 선정해 소개한다는 디자인 뮤지엄 시리즈 한국어판 제1권입니다. 생활 디자인 중에서는 조명과 함께 하나의 장르로 여겨질 정도가 된 "의자"에 대한 이야기로, 지난 150년간의 디자인 역사를 되짚어보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네요.

디자인사에서 의미 있는 50개의 의자를 선정하여 한 장씩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는데, 제목이나 주제에 어울리게 이 책만 읽어도 어느 정도 디자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는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예를 들자면 나무로 시작해서 모더니즘, 미술공예운동, 바우하우스, 플라스틱과 알루미늄, 믹스 앤 매치, 팝아트 등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습니다.

구성과 내용도 만족스러웠고, 비교적 관심 있던 주제이기도 해서 더욱 즐겁게 읽었습니다. 읽다 보면 익숙한 디자이너나 의자가 등장해 반갑기도 했는데요. 마르셀 브로이어, 미스 반 데어 로에, 임스 부부, 필립 스탁, 부흘렉 형제 같은 디자이너들, 그리고 크리스틴 킬러 스캔들 사진으로 유명한 모델 3107 같은 의자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인쇄 품질이 약간 아쉽고, 책의 장정도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자료적 가치와 더불어 눈까지 즐거운 책이었습니다. 분량도 짧아서 부담 없이 읽기 좋았고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디자인 전공자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현재 인터넷 서점에서 원래 가격의 50% 할인된 가격에 판매 중인데, 이 정도 가격이면 정말 살 만합니다!

그나저나 이 책에 등장하는 의자들을 실제로 소장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저 같은 사람들을 위해, 나중에라도 이 의자들을 3D 모델링해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앱을 통해 모든 각도를 볼 수 있게 제공하는 서비스가 나오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2014/10/07

zum닷컴 소개

얼마 전에 올렸던 "세계 7대 불가사의" 리뷰가 zum닷컴 이글루스 밸리 인기글에 소개되었더군요. 소개해주신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만 제목이 사뭇 내용과는 달라 조금 죄송한 마음도 듭니다. 실제로는 진위 여부보다는 각 항목에 대한 느낌 위주로 작성했는데, 제목이 다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을것 같네요

어쨌든 국내 3위 포털업체에 소개되다 보니 방문자 수가 오랜만에 폭주했고, 덕분에 무척 기뻤습니다. 아무리 마이너 블로거를 자처하더라도 많은 분들이 찾아주시는 건 역시 기쁜 일이죠.

이런 행운이 자주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지만, 이번에 찾아주신 분들이 부디 한 번 방문으로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쭉~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보틀넥 - 요네자와 호노부 / 권영주 : 별점 2점

보틀넥 - 4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엘릭시르

사가노 료는 동급생 스와 노조미가 추락사한 곳에서 실수로 떨어져 버렸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린 곳은 같은 장소지만, 유산되었다는 누나 사키와 죽어버린 노조미가 살아 있는 또 다른 평행우주의 세계였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장편입니다.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청춘 성장기, 혹은 청춘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작가 특유의 주인공 스타일에 대한 비판이 눈에 뜨입니다. 주변 환경을 거스르지 않고 최대한 은근하게 살아가자는, 회색이 되고 싶어하는 "소시민 시리즈"의 고바토나 "고전부 시리즈"의 오레키 호타로가 연상되는 1인칭 주인공인데, 이러한 성격 탓에 문제가 발생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제목 그대로 '보틀넥(병목현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랄까요. 이런 점에서, 주인공이 가진 문제에 대해 자각하고 반성의 의미로 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단순한 비판에 그치지는 않습니다. 다른 시리즈 주인공들과 달리, 사가노 료는 별다른 추리력이 없고 탐정 역할은 누나 사키가 맡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거든요. "추리력 없는 소시민은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또 적절한 분량에 쉽게 읽힌다는 장점도 있고, 추리적으로도 완전히 건질 게 없는 것은 아닙니다. 도로를 위험하게 가로막은 은행나무를 둘러싼 이야기나, 노조미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히는 부분에서는 특유의 일상계 추리물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후미카라는 캐릭터가 설득력을 가질 만큼 충분히 묘사되지 않아 다소 아쉽지만요.

사키가 현명함과 행동력으로 '더 나은 세계'를 만들지만 그 결과에 충격을 받고,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는 결말도 끔찍하고 충격적이에요. 자신은 최선이라 생각했고 아무런 악의도 없었지만, 결국 주변 인물들이 자신으로 인해 붕괴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건 저주와도 같지요.

그 외에도 실제 지명을 작품에 잘 녹여낸 묘사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여정 미스터리"가 연상될 정도로 그곳에 살았거나 가 본 적이 있다면 무척 반가웠을 장소들이 상세하게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노조미가 추락사했다는 "도진보", "가나자와의 21세기 미술관", 와카마쓰정, 무로우 사이세이의 시비 등이 있습니다. 조사해보진 않았지만 자주 등장하는 자스코(Jasco)도 실제로 존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나 이러한 캐릭터 중심의 드라마 외에는 딱히 특기할 만한 점이 없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평행우주"라는 SF적 설정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는 료와 사키를 대비하여 그들의 세계에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며, 별다른 설명이나 과학적 근거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솔직히 추리물을 기대했는데 정작 접한 것은 청춘 반성, 성장기였기에 실망한 탓이 큽니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추리물"을 좋아하신다면 굳이 찾아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4/10/06

세계 7대 불가사의 - 피터 A. 클레이턴 외 / 김훈 : 별점 2점

세계 7대 불가사의 - 4점
피터 A. 클레이턴 외 지음, 김훈 옮김/가람기획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건축물들에 대해 현재까지 밝혀진 사실을 바탕으로, 진위 여부 및 상세한 설명을 해 주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제목만으로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별로였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책의 완성도가 현저하게 낮은 탓입니다. 번역의 문제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고 발음도 부정확하며(예: 쿠푸왕이라고 표기하고 배는 "케오프스(쿠푸)의 배"라고 표기), 여러 가지 단위를 현재의 단위로 변환하지 않은 것도 불친절하게 느껴졌습니다. 도판들의 인쇄 상태도 영 아니고요. 가람기획의 책들은 대체로 내용에 비해 완성도가 많이 아쉬운 경우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특히나 심했어요.
내용도 익히 알려진 세계의 7대 불가사의에 대한 학술적인 설명이 전부라, 생각만큼 흥미롭지 않았고요.

그래도 각 항목별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소개해 보자면,

"피라미드"
피라미드 근처에서 완벽한 형태의 배(케오프스의 배)가 출토된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무려 5,000여 년 전의 배가 원형 그대로 발굴되다니! 이집트는 항상 가보고 싶었던 곳인데, 이런 정보까지 접하니 더 가고 싶어지네요.

"바빌론의 공중정원"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기록되어 있기는 하나, 실제 바빌론 유적에서는 관련된 유물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네요. 아직도 그런지 조금 궁금해집니다.

"제우스상"
남겨진 기록들을 통해 실제 제우스상이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상세하게 설명해주는게 좋았습니다. 높이 13m 정도의 거대한 조각상은 현대에도 볼 만한 것들이 많지만, 이 신상은 예술적 성취를 이룬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축조 방식이 나무로 틀을 만든 후 작은 조각들을 이어붙인 것이라는 설명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고요. 이후 신상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진 뒤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기록이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책에 쓰인 대로 황폐해지더라도 그냥 올림피아에 남아 있었더라면 뼈대 정도는 전해져 현대인들이 그 위용에 감탄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상당히 방대한 분량이지만, 실제 구조에 대한 설명이 장황할 뿐 핵심적인 내용은 부족했습니다. 기둥의 수가 너무 많아 '기둥숲'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구조물이었다는 건 알겠는데, 실물이 사라져 버렸으니...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도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유물인데, 이번에도 역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십자군들이 성벽을 만들기 위해 훼손하고 파괴한 것도 많지만, 최초 붕괴 당시 토사에 묻혀 운 좋게 살아남은 거대 조각들(특히 지붕의 전차상 일부)의 위용은 대단하더군요. 그것이 발견된 위치를 토대로 높이를 추산하고, 남은 유물들과 사료를 통해 재현해보는 고고학적 과정은 마치 추리물을 보는 듯한 재미도 있었고요. 그런데 왜 이러한 유물들이 대영박물관에 있는 건지 당최 모르겠네요. "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에서 언급된 우리 문화재도 떠오르는데, 원래 자리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생깁니다.

"로도스의 거상"
이 거상이 세워진 과정을 알게 된 것이 큰 수확이었습니다. 알렉산더 사후 도시국가 로도스가 프톨레마이오스 편을 들었다가 적대 세력인 안티고노스에게 포위 공격을 받았지만, 이를 이겨낸 기념으로 세워졌다고 하네요. 공사비는 적이 남기고 간 공성 장비들을 팔아서 마련했다고 하니, 진정한 전승 기념비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익히 알려진, 두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로 배가 지나간다는 형태는 허구이며, 하나의 통 형태에 가까웠을 것이라는 주장도 탄탄한 사료를 바탕으로 설득력 있게 전개되어 신뢰가 갔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상세한 사료가 많이 남겨진 유적이라는 점을 실감했습니다. 다른 항목들이 미터 단위로만 설명되어 있다면, 이 책은 센티미터 단위까지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조금 크다는 것 외에는 왜 이 건축물이 불가사의로 선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본문에 언급되었던 인근 바다에서 인양된 10m에 이르는 이시스 석조 조각상이 오히려 더 인상 깊었고, 그 자료를 더 찾아보고 싶어질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쓰고 나니 건진 내용도 제법 되네요. 허나 여러모로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2014/10/02

포르노 영화 역사를 만나다 - 연동원 : 별점 2.5점

포르노 영화 역사를 만나다 - 6점
연동원 지음/연경문화사(연경미디어)

포르노 영화의 역사를 다룬 미시사 서적입니다. 영화라는 산업의 초창기부터 음지에서 존재해 오다가 "딥쓰로트"의 흥행 성공과 함께 합법화 및 대형화되었고, 이후 비디오의 등장과 21세기로 이어지는 과정의 역사를 짚어줍니다. 실제 사람들의 생활을 바꾼 포르노의 이면이 인상적인데, 예를 들어 홈 비디오의 보급에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것이 포르노였다는 사실이 그러합니다.

이러한 역사와 함께 "딥쓰로트"나 "Devil in Miss Jones", "녹색 문 뒤에서" 같은 나름 의미 있는 작품에 대한 평가, 유명한 관계자들 이야기, 정치권의 탄압이라든가 범죄조직과 엮인 포르노 영화계의 뒷이야기, 부록으로 실린 유명 배우 린다 러브레이스, 존 홈즈, 치치올리나 등의 약력과 같은 흥미로운 소재가 가득합니다. 제가 어둠의 경로로 일찍이 감상했었던 유럽의 포르노 제국 프라이빗의 몇몇 작품 소개는 반갑기까지 했고요.

단점이라면 깊이 있는 분석은 없는 단순한 소개라는 점, 그리고 유럽 포르노 영화도 약간 소개되기는 하나 거의 미국 중심의 구성이라는 점입니다.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일본 쪽 내용이 없는 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국내 현실상 도판이 상세하지 못한 것도 문제라 생각되지만, 이건 뭐 어쩔 수 없고요.

여튼 남자들이라면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주제이기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영화 역사에 관심 있으시다면 한 번쯤 봐도 실망하지는 않으실 것 같네요. 아주 오래전 영화 잡지 "키노"에 실렸던 전설적인 공포영화 소개 기사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확실히 하드코어와 하드 고어는 통하는 데가 있나 봅니다.

그나저나 책보다는 영상 매체 다큐멘터리가 훨씬 더 어울리는 내용이라 생각되는데, 저자가 인용한 히스토리 채널의 포르노그래피의 역사를 다룬 다큐도 보고 싶네요.

2014/10/01

지구의 마지막 날 - 필립 와일리 : 별점 3점

지구를 향해 두 개의 별이 다가오는게 발견되었다. 발견자의 이름을 따 "브론슨 알파"와 "브론슨 베타"라고 불리게 된 두 별의 접근으로 지구는 파괴될 위기에 놓였다. 헨드론 박사의 지휘로 과학자들이 모여 지구 파괴 후 지구 궤도에 안착하여 또 다른 지구가 될 "브론슨 베타"로 이주하기 위한 "노아의 방주" 계획이 시작되는데...

필립 와일리의 고전 SF. 바로 직전에 읽은 "하늘의 공포"와 같이 "직지 프로젝트" 결과물입니다. 구글북스를 통해 무료로 읽은 점, 아동용에 가까운 결과물이라는 점도 동일합니다. 때문에 상당 부분 축약이 있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문어체 형식이 많은 등, 번역의 질도 낮고요.

허나 축약과 번역 문제를 무시한다면, 작품 자체는 지구 멸망을 다룬 고전 SF의 걸작으로 널리 읽힐 만한 재미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1930년대 작품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시대를 앞서간 측면도 분명 있고요. 특히나 외계 운석이 격돌하여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는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두 개의 별"이 다가오고, 그중 한 개가 지구 궤도에 안착할거라는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실제로 "브론슨 베타"가 지구 궤도에 안착하였다고 해서 과연 사람, 아니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일까?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하지만, 이 정도는 수천억 분의 일의 우연이라도 있을 수 있으니 수긍할 만합니다. 첫 번째 접근 이후 지구가 황폐해진 묘사는 "매드맥스"나 "북두의 권"과 같은 세기말, 문명 멸망 이후의 세계를 그린 작품들의 설정과 유사한 점이 많아서 흥미롭기도 하고요. 아울러 냉전 이전이라 소련이나 핵의 위험과 같은 요소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물론 작품 내에 몇 가지 의문점이 존재하기는 합니다. 첫 번째는 헨드론 박사가 우주선을 제조하기 위해 거대한 공장 및 집단 거주 단지를 건설하는데, 이러한 계획의 비용과 장비를 누가 후원했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화 버전의 줄거리를 보면 시드니 스탠턴이라는 부호가 원조를 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책에서는 전혀 그런 이야기가 없거든요.
그리고 처음에 거의 2년에 걸쳐 100명 정도만 탑승할 수 있는 우주선을 만들다가, 고작 몇 개월 사이에 남은 인원이 모두 탈 수 있는 두 번째 우주선을 만든다고 하는 설정 파괴도 이해할 수 없는 전개였습니다.

아울러 헨드론 박사를 중심으로 1,000여 명이나 되는 인력이 똘똘 뭉쳐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단결력을 보여주는 과정은 일종의 종교적 광기가 느껴지기도 했는데, 이런 부분들 때문에라도 정식 번역본, 아니면 평가가 좋은 영화 버전을 한번 보고 싶어지네요.

그래도 아동용 번역본이라는 것이 문제일 뿐, 80여 년이 흘렀지만 읽을 가치는 충분한 좋은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리고 함께 수록된 베리야에프의 단편 "열려라 참깨"가 의외의 재미를 선사해 준 것도 아주 좋았어요. 괴팍한 노인과 충직한 하인 앞에 기술자가 나타나서 로봇을 판다는 이야기에서 갑자기 잘 짜인 범죄물로 마무리되는 의외성이 돋보였거든요. 자동문을 음성인식으로 열 때 목소리 톤에 따라 문이 열리지 않고, 개를 짖게 하면 안 된다는 복선도 잘 녹아들어 있는 등 짜임새도 괜찮았고요. 특히 음성인식 자동문은 제가 음성인식을 이용한 제품 개발에 참여해 보았기 때문에 더 와 닿았습니다.
SF보다는 코믹 범죄물로 봐야겠지만 분명한 수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이 작품만큼은 추리-범죄물 애호가시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나저나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인 "합성 인간"은 기이한 SF였던 기억이 나는데, 이런 작품을 발표했다니 상당히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