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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18

고독의 노랫소리 - 텐도 아라타 / 양억관 : 별점 2점

고독의 노랫소리
텐도 아라타 지음/문학동네

젊은 여성을 노린 잔혹한 여성 연쇄 살인 사건과 편의점을 노린 강도 사건이 일어났다. 편의점 강도 사건 담당자 아사야마 후키는 강도 피해자인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자 인디 가수 준페이를 알게 된 후, 둘은 서로에게 묘한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후 후키의 옆집에 살고 있던 교코가 실종되자 후키는 준페이가 강도를 당할때 편의점에 있었던 손님과 살인사건과의 연관성을 의심하여 스스로를 미끼로 한 수사에 나서는데...

이 바닥에서는 희귀본인 전설적 작품 "영원의 아이"의 저자 텐도 아라타의 초기작으로 1993년 작품입니다. 평이 좋아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나칠 정도로 "양들의 침묵"을 벤치마킹'했습니다. 스스로에게 있는 일종의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는 여형사와 싸이코 연쇄살인범, 그리고 여형사의 조력자와도 같은 스스로의 세계에 갖혀있는 고독한 인물이라는 캐릭터 설정부터가 판박이에요. 거기에 연쇄 살인의 엽기성과 잔혹성만 더해졌을 뿐이에요. 그 외에도 고학력 살인범이 미모의 여성만 사냥하는 이야기 전개는 "천재 정신과 의사의 살인광고"와 비슷하며, 살인의 이유가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 더하기 모친의 비정상적인 가정 형성에 따른 정신붕괴... 라는 것도 너무 뻔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모로 표절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류작에 불과합니다.

물론 싸이코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작품이야 널렸을 뿐더러, 93년도 발표 작품이라면 아무래도 "양들의 침묵"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라 생각은 됩니다. 그래서 '범인을 어떻게 잡느냐'의 과정만이라도 잘 풀어냈다면 괜찮았을 거에요. 그러나 이 작품은 이러한 서스펜스보다는 3명의 주요 등장인물, 즉 형사인 후키와 조력자인 준페이, 범인 마쓰다 3인을 1인칭으로 한 심리묘사에 주력하고 있어서 서스펜스가 극히 제한적입니다. 솔직히 너무 겉멋을 부린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듭니다. 

추리적으로도 따져보더라도, 경찰이 범인을 검거하는데 취하는 행동은 거의 없고 외려 준페이라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의 활약으로 두개의 사건이 해결된다는 것이라 허무하기 그지 없고, 등장인물을 모두 1인칭으로 표현하는 등의 세밀한 묘사 방식도 불필요할정도로 과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등장인물 모두 심리적인 상처나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설정은 당쵀 왜 필요한지 잘 모르겠고요. 이러한 과거의 심리적인 상처가 너무나 작위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것도 문제이지요.

물론 유명 작가의 유명한 작품답게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몰입시키는 힘은 있습니다. 각 등장인물들의 1인칭 시점으로 시각을 계속 바꾸어나가며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솜씨 하나만큼은 일품이며 마지막 3인이 한자리에 모이는 장면까지의 서스펜스는 발군이거든요.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단점이 너무 크네요. 제 취향이라고 하기에도 힘들었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양들의 침묵"을 읽으셨다면 구태여 읽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2011/05/08

올댓편의점 / 올댓오타쿠 / 올댓 영화 속 무기도감

SKT가 테더앤미디어와 손잡고 흥미로운 앱 기획을 진행하고 있더군요. 이름하여 올댓(All That)! 인기 블로거들과 협업해 블로거들의 가치 있는 콘텐츠를 앱으로 만든다는 발상은 꽤 괜찮아 보입니다. 블로거들에게 광고 수익을 배분해 준다는 점에서 블로거들도 반길 만한 전략으로 보이고요. 제가 받아본 것은 이글루스 블로거이기도 한 채다인님의 "올댓 편의점", 만화 리뷰로 잘 알려진 아까짱님의 "올댓 오타쿠", 그리고 고어핀드님의 "올댓 영화 속 무기도감"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하지만 사용해 보니 앱 자체는 딱히 매력적이진 않았습니다. 각 블로거들의 콘텐츠를 그대로 앱으로 옮겨 놓았을 뿐, 앱만의 새로운 콘텐츠나 차별화된 사용자 경험이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블로그 내용을 앱으로 포장한 것이라면, 그냥 블로그를 방문해서 보는 것이 더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게다가 웹 연동이 필수인 사용 환경 역시 이런 생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Standalone으로 동작하지 않는다면 굳이 다운로드해서 사용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 외에도 "올댓 오타쿠"의 경우 실행할 때 세 번에 한 번꼴로 비정상적으로 종료되는 문제가 있어 완성도가 떨어지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제목도 다소 의아하더군요. "올댓 오타쿠"라니? 단지 일본 만화에 대한 상세한 리뷰를 다루고 있을 뿐인데, '오타쿠'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또한, 세 개의 앱 모두 UI 구성이 제각각입니다.

  • "올댓 오타쿠" - 카테고리 게이트웨이 방식
  • "올댓 영화 속 무기도감" - 게이트웨이 방식이지만 내부 콘텐츠는 스크롤 없이 좌우 페이지 전환
  • "올댓 편의점" - 최상단에 카테고리 메뉴 배치

차라리 UI를 통일해 하나의 시리즈 형식으로 제작했더라면 더 깔끔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제작 과정도 더 수월했을 테고, 사용자 경험도 일관되었을 텐데 말이죠.

이 프로젝트 자체는 블로거들에게도 흥미로운 시도이고, 저 역시 블로거로서 관심이 가는 기획이지만, 현재로서는 잘 만든 RSS 리더 이상의 가치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 듯합니다. 다른 "올댓" 시리즈를 사용해 보진 않았지만, 독립적인 하나의 앱으로서 Standalone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면, 아직까지는 개별 블로그를 직접 방문하는 것이 더 나아 보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각 2.5점입니다.

참고로 이 별점은 제가 다운로드한 앱의 콘텐츠를 이미 대부분 접해본 이유가 크며, 상기 블로거들의 재미있고 뛰어난 콘텐츠를 아직 접해보지 않으신 분들에게는 4점 이상의 가치가 있으리라 보장합니다. 관심 있으시다면 한 번 설치해서 둘러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제 블로그에 들어와 이 글을 읽으실 정도의 분들이라면 상기 블로거들을 모르실 리 없겠지만요...

2016/11/27

역시 빵이 좋아! - 야마모토 아리 / 박정임 : 별점 1점

역시 빵이 좋아! - 2점
야마모토 아리 지음, 박정임 옮김/이봄

조리사 면허를 취득한 일러스트레이터, 만화가 야마모토 아리의 빵에 대한 에세이 만화... 인 줄 알고 읽게 되었는데, 생각과는 전혀 다르네요. 130여 종의 일본 빵집의 빵을 한 개 당 1~2페이지 분량으로 빵 그림, 재료와 맛에 대한 설명, 잘 어울리는 술이나 음료를 소개하는게 전부거든요.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에요.

1. 빵 소개 : 눈이 번쩍하는 매운맛, 캐슈너트와 블랙 페퍼.
2. 특징 소개 : 블랙 페퍼의 매운 맛이 찌릿찌릿! 수제 효모 베이스의 산미도 서서히 올라와! 이 맛 엄청 자극적!
3. 부가 정보 : 이건 틀림없이 육류와 어울리는 맛이야. 비엔나 소시지와 정말 잘 맞아! 화이트와인이랑 드세요.

이외에 중간중간 아주 약간의 개그나 아이디어가 들어간 정도입니다. 만화라고 부르려면 최소한의 이야기는 필요한데 이래서야 빵 소개 책자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딱히 작화가 빼어난 것도 아니고요.

빵집 순례를 위해서도 부족함이 많습니다. 주로 도쿄에 있는 빵집들이 소개되지만 빵집 이름 뿐, 상세 주소나 지도가 소개되지 않는 탓입니다. 최소한 레시피라도 실렸더라면 좀 나았을 텐데, 빵의 특성상 집에서 만드는 것은 거의 무리이니 이 역시 기대할 게 못됩니다. 약간의 어레인지 정도(오븐 토스트에서 구워 먹는 게 좋다던가)만 실려 있는 수준이에요.

편의점에서 파는 빵인(세븐 일레븐) '버터 스카치', '휩크림 듬뿍 데니시' 소개 정도는 괜찮았는데 차라리 이런 소재로 끌고 가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빵이 아니라 '편의점이 좋아' 식으로 말이죠. 우리나라 기준으로는 편의점 여왕 다인님이 한번 쓰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여튼, 빵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기대가 컸는데 아쉽습니다. 차라리 우리나라에서도 구할 수 있는 빵 소개였다면 점수가 조금은 높지 않았을까 싶은데 정말이지 건질 게 없어요. 일본 맛집 소개 블로그를 보는 게 더 낫겠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2018/03/17

흐리거나 비 아니면 호우 1 - 반시연 : 별점 3점

흐리거나 비 아니면 호우 1 - 6점
반시연 지음, 김경환 그림/영상출판미디어(주)

국내 장르 영화, 장르 문학 관련 리뷰의 거목이신 mrkwang님이 극찬하신 글을 어디선가 읽고 관심이 가던 차에,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발견하고 구입했습니다. 어차피 절판 상태라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바로 전에 읽은 책에서 절판, 품절이라는 상황에 낚여 충동구매 하지 말라고 언급했었는데, 지금이 아니면 못 사는 것도 있으니까요.

책은 단편 연작물입니다. 주인공 호우가 과거 '셔터' 라 불리우는 일종의 해결사 일을 하다가 모종의 사건으로 폐인이 된 후, 지인들의 도움으로 기묘한 중고 물품 가게 '헤브닝' 에서 일하기까지 각 시기별로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구성이지요. 다행히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기대치가 그다지 높지 않기도 했지만 추리적으로 꽤 괜찮은 덕분입니다. 큰 사건이 벌어진다기 보다는 일상계 추리에 가까운 소소한 추론이 대부분인데 전부 이치에 맞고, 설득력이 높거든요. 모든 정보가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기도 하고요.

에피소드별로 간략하게 소개해드리자면, "로또 사모님" 사건이 등장하는 첫번째 에피소드 "우계"에서는, 단순히 캐릭터를 소개하기 위한 소품으로만 보였던 망사 스타킹, 그리고 비가 오는 날이라 당연해 보였던 엘리베이터 물기에 대한 묘사 등이 진상을 드러내는 중요한 단서로 사용되는게 좋았습니다. 의뢰받았던 아이의 행방 외에 남편이 어디에서 도박을 하는지까지 추론해낸다는 점도 마음에 들고요. 명확하게 캐릭터를 독자에게 알리는, 첫 작품으로 손색없는 이야기였습니다.

호우가 폐인이 된 이후 편의점에 나타난 성범죄자를 응징하는 "건기" 도 좋습니다. 주어진 정보들로 편의점의 안경남이 성범죄자였다는걸 알아내는 추리의 과정이 설득력이 높기 때문입니다. 전직 복서이기도 한 호우의 강함을 제대로 보여준다는 점도 주목할 만 하고요.
물론 전자발찌를 찬 성범죄자가 편의점에서 여성을 희롱한다는게 과연 현실적이고 가능한 설정인지는 의심스럽습지만요.

"주마등"은 호우가 넘버원 셔터로 잘 나갈 때, 사야를 만나고 그 뒤 고지를 만나 사야의 스토커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이야기입니다. 사야와 고지라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설명을 위한 소품으로 대단한 추리가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일상계로는 괜찮은 수준이기는 해요. 그러나 고지 정도 되는 능력자가 스토커 한 명 붙잡지 못한다는게 말이 안되서 그렇지... 여튼, 평범한 수준이었습니다.

"헤브닝" 은 폐인이던 호우가 현재를 극복하고 비이와 '노예 계약'을 맺는 과정이 그려지는 이야기로 가장 많은 추론이 등장합니다. 물에 젖어 읽을 수 없는 주소 쪽지를 보고 어떻게 '헤브닝'을 찾아 갔는지, 작가 이름도 없고 출판사도 없는 책의 정체는 무엇인지, 비이가 핸드 크림을 계속 바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전거 변속기가 고장났다고 전화한 손님의 문제는 무엇인지, 책을 반품하며 다른 책과 다르다고 우기던 일의 진상은 무엇인지, 나무 바닥이 미끄러운 이유는 무엇인지, 동네를 배회하는 대학생들이 찾는 장소는 어디인지, 피아노 모양 오르골은 왜 고장이 났는지 등 수많은 추리를 순식간에 토해내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입니다. 몇몇 이야기는 비약이 있고, 지나치게 끼워 맞춘 느낌도 들지만 추리들도 대체로 괜찮은 편입니다. 골고루 맛있는 종합선물세트같은 작품이에요. 개인적으로는 이 연작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그러나 마지막 이야기 "셔터" 는 완전히 기대 이하입니다.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암호 트릭 같지도 않은 암호 트릭이 핵심인 탓입니다. 차라리 등장하지 아니함만 못했습니다. 그냥 호우와 다른 등장인물들이 어울리는 만화같은 상황을 그리는 묘사만이 볼거리였달까요. 자기 개발서를 혐오하는 호우의 성격은 저와 비슷해서 무척이나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 뿐입니다.

그래도 대체로 추리 부분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요. 제가 읽어왔던 국내 추리물 중에서 손가락으로 꼽을만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만화적인 설정은 문제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두뇌와 프랑켄슈타인의 육체를 지녔다는 주인공 호우, 대부호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남이자 호우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고지, 대식가 츤데레 미녀이자 호우의 전 애인이자 고지의 현 애인 사야, 고지의 약혼자이자 대부호로 호우에게 빠진 비야 등 모든 캐릭터 설정이 비현실적이고 만화적입니다. 이름들도 하나같이 만화 속 인물들 같잖아요?
"건기"에서 "헤브닝" 으로 이어지는 동안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는 폐인이 된 호우에 대한 묘사 역시 만화적이라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대사와 상황들도 만화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힘을 쓰지 못하고(케로로인가?) 비이를 '주인님' 이라고 부르는 잘 차려입은 호우에 대한 묘사가 그 정점이고요.
이렇게 등장인물들이 비현실적이라 아무리 현실적인 추리를 한다 하더라도 썩 와닿지는 않는 문제도 생기기 때문에, 좀 더 현실적인 캐릭터를 기반으로 쓰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예를 들자면 학교 짱으로 공부는 못하지만 추리에 능한 호우, 소꼽친구 사야, 학생회장 고지, 부회장 비이였다면 어땠을까요?. 만화적인건 마찬가지지만 스케일을 줄임으로써 현실감을 조금이나마 더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고등학교를 무대로 해도 충분히 펼쳐질 수 있는 이야기들이니까요. 아니면 아예 현실적이지 않은 판타지 공간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던가요. 지금은 이래저래 어중간할 뿐이라 여러모로 아쉽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물로서의 성과는 뚜렷하나 묘사와 전개는 아쉽습니다. 재미있게 읽기는 했지만 2권을 읽게 될 지는 잘 모르겠어요. 작가의 만화적 설정 없는 정통 본격 일상계 추리물을 기대해 봅니다.

2018/07/15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0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0 - 4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한 때에는 엄청나게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어느덧 손을 놓게 된 C.M.B인데, 오랫만에 본가 방문했다가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시나 실망스럽네요. 모두 네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일상계 추리물인 "소우야 군의 실종" 외에는 마음에 드는, 평균 이상의 작품은 없었습니다 .언제나 가지고 있던 Q.E.D 쪽에 집중하는게 더 나은 선택이라는 생각에 확신만 심어줍니다. 

전체 평균한 별점은 2점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드림 캐쳐"

악몽을 막아주는 '드림 캐쳐'를 만들기 위해 장기 휴가를 내고 떠난 코하루의 남자 친구 다카오가 회사 동료로부터 소송당했다. 거액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코하루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박물관 전단지를 통해 드림 캐처를 아는 듯한 신라에게 도움을 청했다.
신라의 추리를 통해 일행은 알라스카로 향하는데...

주인공이 신라가 아니라 코하루와 다카오라는 전개, 그리고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핵심 소재인 알라스카 원주민이 만든다는 부적 드림 캐처라는 소재는 독특합니다. 같은 몽골리안이라 원래 인디언인 다카오를 일본인으로 착각했다는 아이디어도 괜찮고요.

그러나 그 외의 이야기는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기대했던 추리물이 전혀 아닌 탓이 큽니다. 다카오를 찾던 일행이 그리즐리 곰과 맞서 싸운다는 모험물적인 전개가 대부분이거든요.
그나마 유일한 추리 요소인, 다카오만 열 수 있던 서랍 속 공금이 사라졌다는 사건도 진상이 허무하기 그지 없어요. 망치로 책상의 뚜껑(?)을 땄다는 거라서 추리물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국적 풍광의 모험물일 뿐으로 평범 이하의 졸작입니다.

"소우야 군의 실종" 

대학 합격 후 도쿄로 상경한 츠가루에게 소우야라는 친구가 생겼다. 그러나 소우야는 츠가루에게 말도 없이 급작스럽게 사라지는데...

사라진 대학생을 찾아 나서는 일상계 추리물인데, 추리적으로는 여러모로 풍성합니다. 우선 소우야의 실종과 관계 있어보이는 여성 나루토의 행적을 찾는 과정이 괜찮아요.

  1. 그녀가 편의점에 온 이유는? 집이나 학교, 직장이 가까와서. 그런데 항상 정장 차림이었으니 직장이 가까웠을 것이다 
  2. 그런데 5월 이후부터 오지 않은 이유는? 다른 편의점이 근처에 생겨서, 혹은 오기 싫은 이유가 생겨서, 혹은 갓 입사하여 신입 연수를 본사로 왔다가 연수가 끝나 돌아가서 등... 

이렇게 추리가 이어지는데, 비약이 없지는 않지만 만화에는 잘 어울려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또 소우야의 실종은 실종이 아니라 자의적인 것이며, 이는 츠가루와의 커뮤니케이션 문제일 뿐이라는 진상도 좋았어요. 자기 중심으로 기준을 정하고 타인을 평가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인데 이를 잘 풀어낸 덕분입니다. 마지막의 하코네 관련 그림 퀴즈도 보너스로서 평균 이상은 하고요.

한마디로 좋은 일상계 청춘 추리물로 이번 권의 베스트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Joker"

바르셀로나의 대부호 베르나르도가 결혼식 날 칼에 찔렸다. 현장에 있던 마우는 용의자로 몰리자 신라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영국의 미술가 오웬 죤스와 그의 대표작이라는 트럼프 카드 그림이라는, 오랫만에 제대로 된 박물학 소재가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오웬 죤스 소재는 이야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추리적으로도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광대일을 하는 하비가 다른 곳에 계속 있었는데, 베르나르도 결혼식에도 같은 복장의 광대가 있었다는 상황에서 왜 하비와 동생 리카르도의 알리바이만 강조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 3의 인물이 개입된게 당연하잖아요? 바르셀로나 경찰은 다 바보인가...

딱 한 가지, 마우가 처음 찾아올 때 일으킨 교통 사고가 중요 단서가 된다는 복선은 괜찮았지만 이래서야 좋은 점수를 주는건 무리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피터 씨의 유산"

1억불이 넘는 유산의 행방을 알리지 않고 죽은 피터 씨의 유산을 찾기 위해 마우와 신라가 나선다는 이야기로 피터 씨의 취미, 수집품이 유산과 연결되는 과정은 흥미롭습니다. 피터 씨의 죽음을 둘러싼 진상도 그런대로 괜찮고요.

하지만 전개면에서는 아쉬움이 큽니다. 우선 색을 내는 재료들로 구성된 수집품이라는 단서는 흑백 만화로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어려운 탓입니다. 비슷한 소재로 쓰여진 요네자와 호노부"북관의 죄인" (in "덧없는 양들의 축연") 과 비교해 보아도 설명이 너무 부족했고요. 만화라면 소설보다 시각적인 단서를 주는게 더 쉬웠을 텐데, 공정하게 단서를 제공하려는 노력이 전무하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또 피터 씨 사건의 진상에 대한 추리는 피터 씨가 죽기 직전 심던 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는 아들 엔조의 증언 하나만이 단서인데, 비약이 너무 심합니다. 그 꽃이 무엇이며, 그것 때문에 싸움이 일어났다는 건 재판 과정에서도 얼마든지 밝혀졌을 부분으로 시간도 오래 지난 시점에서 이를 가지고 범인 취급하는 건 말이 안됩니다. 빠져나갈 부분은 얼마든지 있었을 거에요. 엔조의 죄책감이 이로 인해 터져나간다는 뒷 이야기도 너무 작위적이었고요.
아울러 피터 씨가 가족들에게 이야기 하나 않고 벌이는 취미 행각도 좋게 보이지는 않더군요. 이래서야 실제로는 가족을 사랑한 것이었다 어쩌구 하는 이야기는 전혀 와 닿지 않으니까요. 살아있을 때나 잘할 것이지....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트릭과 소재는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전개가 아쉬워서 감점합니다.

2024/09/14

가연물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2.5점

가연물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리드비

요네자와 호노부의 신작. 가쓰라 경부를 주인공으로 한 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국내 최고의 추리 소설 동호회인 하우 미스터리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이 자리를 빌어 관계자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작가 최초의 경찰 수사 본격 추리물인데, 손대는 거의 대부분의 장르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를 뽑아냈던 요네자와 호노부 작품치고는 평이한 수준이었습니다. 경부 캐릭터도 진부한 스테레오 타입이고요. 
하지만 "목숨빚"만큼은 빼어납니다. 이 작품 하나만으로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낭떠러지 밑"
눈밭에서 조난당한 두 사람 중 한 명이 목을 무언가에 찔려 살해당했다. 또 다른 한 명은 심한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끝이 날카로운 말뚝 같은 걸로 목을 찔러 살해했다는 감식 결과를 보았을 때에는 흉기가 고드름일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고의가 아니었다면, 낭떠러지에서 고드름이 떨어져 운 나쁜 피해자 목에 꽂힌 사고일거라 여겼지요. 하지만 다행히 그렇게 뻔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피해자 목에 혈액이 응고되는 반응이 있었다는 감식 결과를 토대로, 이는 다른 사람의 혈액이 들어갔을 때 일어나는 반응이니 범인 미즈노의 혈액이 포함된(?) 흉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즉, 흉기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때에 부상당해 튀어나온 미즈노의 팔 뼈였다는 추리로 이어집니다. 흉기는 신선한 편이고, 이에 이르는 추리와 단서 제공 모두 공정하고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경찰 수사물'에 잘 어울리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흉기가 뭐든 범인은 미즈노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기소에는 무리가 없어 보였기 - '고드름'이 흉기였다고 주장해도 될테지요 - 때문입니다. 수사가 아니라 '추리'에 방점을 둔 느낌입니다. 거장 반열에 오른 작가라도 처음 시도하는 경찰 시도물이라서 다소 혼선이 있었던게 아닌가 싶네요.
흉기 트릭도 신선하지만 현실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정말 엄청난 정신력이 아니면 실현 불가능했을 방법이니까요. 아울러 수사 기계같은 냉정한 가쓰라 경부의 묘사는 그리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다른 작품들 속 냉정한 수사 반장들 - 대표적으로는 "제 3의 시효" - 과 차별화되는 점이 없는 탓입니다. 이 작품을 위해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 시간이 부족했던 걸까요?

여러모로 평범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졸음"
유력한 강도 치상 사건 용의자 다구마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이송되었다. 경찰은 다구마의 신병을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교차로에서 발생한 사고 원인이 다구마의 신호위반일 경우, 체포 영장을 청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 새벽 3시 일어난 다구마의 교통사고를 무려 네 명이나 목격했고, 그들은 모두 다구마가 신호를 위반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쓰라 경부는 다구마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 즉 신호 위반을 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데...

처음에는 다구마가 교통사고를 빙자하여, 상대방 미즈우라와 신분을 바꿔 도망쳤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런 황당하면서도 뻔한 이야기는 아니더군요.
'거짓 증언 부수기' 설정의 작품으로, 피해자나 가해자와 전혀 관계없는 목격자들이 우연히 똑같은 거짓 증언을 하게 된 과정의 설득력이 높다는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불성실한 근무 태도로 언제 해고될지 모를 교통 정리원과 편의점 직원이 하필 사고 시점에 졸고 있었기 때문에, 의기투합해서 졸았다는걸 숨기려고 거짓 증언했다는건 말이 되니까요.

그런데 전개 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바로 가쓰라 경부의 확신 - 네 명 모두 거짓 증언을 한 것이다! - 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점입니다. 누가 봐도 다구마는 바로 체포해도 되는 상황입니다. 아니, 경찰 수사를 위해서는 증언이 없었더라도 체포 영장을 청구하는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새벽에 일어난 사건의 목격 증인이 네 명이나 되고, 이들의 증언이 일치해서 불신을 품었다? 말도 안됩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또 응급실 의사와 게임 클랜의 리더인 대학생도 졸아서 위증에 동참했다는건 과했습니다. 이 둘은 빼고 교통 정리원 가마타와 편의점 직원 고가가 입을 맞추었다는 정도로 끝내는게 깔끔했을 거예요. 의사와 대학생은 사고를 보지 못했다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뿐더러, 거짓 증언에 똑같이 동참할만한 접점도 마땅치 않으니까요.

이런 단점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목숨 빚"
유명 관광지에서 절단된 사람의 팔이 발견되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나머지 사체 부위들도 발견했다. 피해자의 신원은 노스에 하루요시로 밝혀졌다. 곧 피해자가 오래 전에 생명을 구해 주었다는 미아타무라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발견되었고, 경찰은 미야타무라를 체포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미아타무라의 흉기에 대한 증언 등 여러 가지 부분에서 가쓰라 경부는 납득하지 못하는데...

앞서와 마찬가지로 범인이 명확한 상황에서 가쓰라 경부가 의문을 품는 과정의 설득력은 약합니다. 특히 '사체를 절단하는 커다란 수고에 비하면 사소한, 치아를 뽑거나 부숴서 신원을 알아내지 못하게 하지 않은 것이 수상하다'고 하는건 억지스러웠어요. 사체 전달은 옮기기 편해서라는 이유가 더 클 테니까요. 유명 관광지에 사체를 흩뿌린게 이상하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급했다거나, 길을 잘 몰라 실수하는 등 이유는 여러가지 있습니다. 범인이 확실하다면 수상하다고 생각할 까닭이 없어요.

하지만 더 이상 빚과 노모의 간병을 감당할 수 없었던 하루요시가 자살한 뒤, 이를 살인으로 위장하면 보험금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여긴 미야타무라가 현장을 조작했다는게 충격적인 진상이 모든 문제를 덮어줍니다. 우리도 직면한 문제인 '부양하기 힘든 고령 인구의 증가, 중년의 노후 보장 없는 은퇴, 취직도 못하는 삼포세대 젊은이'라는 3대에 걸친 사회 현상을 정면으로, 그것도 제대로 된 추리물로 다루고 있는 덕분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회파 본격 추리 수사물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그리고 앞서 억지스럽다고는 했지만, 가쓰라 경부가 수상하다고 여긴 상황들이 진상에 딱 들어맞는건 추리물다와서 좋았어요. 우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관광지의 사체를 버린 이유는 빨리 발견되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사망이 확인되어야 보험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사체의 정체를 숨기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 흉기에 대한 거짓말도 같은 이유입니다. 미야타무라는 '노스에 하루요시를 살해했다'는게 진실로 여겨지기를 바랬으니 이렇게 주장할 수 밖에요.
사체를 토막낸 이유가 하루요시의 사체에서 '목을 맨 자국'이 드러나지 않게 숨기기 위해서였다는 트릭도 아주 괜찮았습니다. 다만, 독자에게 하루요시 사체 중 목의 중간부 일부가 사라졌다라는걸 정확하게 알려 주지 않은건 조금 아쉬웠지만요.

그래도 여러모로 볼만했던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가연물"
월요일 심야부터 방화로 의심되는 화재가 잇달아 발생하여 수사본부가 설치되었다. 잠복수사 결과 몇 명의 용의자가 떠올랐지만, 잠복근무 시작 후 방화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자 잠복 중인 형사가 범인에게 들킨 거 아니냐고 상관이 가쓰라 경부를 질책했다. 그러나 가쓰라 경부는 범인이 이미 목적을 달성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를 내놓았고, 어떤 목적으로 방화를 저질렀는지 동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유력한 용의자 중 한 명인 오노하라가 버린 쓰레기에서 착화에 쓰인 잡지가 발견되는데...


후더닛보다는 와이더닛 물인데, 왜 표제작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수록작 중 가장 처지거든요. 범인의 동기가 하찮을 뿐더러, 납득하기도 어려운 탓입니다. 화재에 대한 나쁜 기억 때문에 돌발적인 화제를 막으려고 안전한 방화를 저질렀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범인은 그냥 수사를 통해 체포하기 때문에 추리의 여지도 거의 없고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진짜인가"
이제사키 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권총을 가진 범인이 농성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게 점장 아오토와 아르바이트 생 유노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가쓰라 경부는 아오토와의 통화로 유노가 범인에게 살해당했다는걸 알게 되었다.
범인 시다는 아들에게 생일 선물로 파르페를 사주려고 가게를 찾았는데,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는 아들에게 견과류가 들어 있는 파르페가 서비스되어 화가 난 뒤 다툼이 시작된걸로 보였다. 유노는 파르페에 대해 시다에게 설명하지 않은 직원이었다.

비교적 독특한 사건이 등장하는 작품.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인질을 븥잡고 농성을 벌이는 사건은 웬만한 작품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지요. "스완"이 약간 비슷하지만, 결은 전혀 다르고요. 또 이런 작품에서 중요한 '인질범과의 협상'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독특했습니다. 오로지 가쓰라 경부의 추리에 의한 의외의 진상이 밝혀지는 구조가 돋보였고, 여러 명의 증언을 모아 진상을 추리해내는 전개, 가게 안 장난감 가게에서 타는 물총이 시다가 들고 있는 권총과 비슷하다는 단서 등 여러 가지 정보와 단서들 모두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진상도 재미있었습니다. 사건은 아오토 점장의 자작극이었습니다. 치정 문제로 유노를 살해한 직후, 시다가 사무실로 들이닥쳐 범행이 들키자 시다의 아들을 인질로 삼아 시다가 범인이고 자신은 피해자인 척 농성하는 연극을 시켰던 것이지요. 나중에 구출 직전 시다와 아들은 살해할 생각으로요.

그런데 조리 담당으로부터 사건 당시 오징어 먹물 파스타가 조리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추리해냈다는건 와 닿지 않았어요. 오징어 먹물 파스타 조리 시간을 감안하여, 시다가 항의차 점장을 찾은 뒤, 한참(약 10분?) 지나서 도망치라는 큰 소리가 나왔다는건 그리 큰 단서나 증거로 볼 수 없습니다. 짜증이 쌓여 한참 있다가 폭발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살해 현장을 무마하기 위해 농성이라는 연극을 벌인 것도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적으로 억지가 많아 감점합니다. 

2020/02/24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5)

쿠미카의 미각 1 - 6점
아키히로 오노나카 지음, 유유리 옮김/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식사가 필요없는 절약 근성 노력가 외계인 쿠미카가 지구에서 일하면서 서서히 음식에 길들여진다는 내용의 작품입니다.

쿠미카가 식사를 하면서 여러가지 감각을 느끼고,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전개는 일견 독특해 보이지만 반대로 뒤집었을 뿐, 이세계에서 이종족에게 이쪽 요리를 대접한다는 판타지와 별로 다르지는 않습니다. 새롭고 맛있는 요리를 먹고 감탄하며 놀라는 묘사도 동일하고요. 이야기도 새로운 음식에 놀란다는 경험이 반복될 뿐입니다.

요리 관련 이야기보다는 한 푼이라도 아껴 모성에 돈을 보내야 하는 쿠미카의 설정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처음으로 무언가를 구입해서 요리를 하게 될 때의 감정 묘사나, 처음으로 여자 외계인들끼리 파자마 파티를 할 때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는 모습들은 아주 귀여웠거든요. 억지로 음식 이야기를 집어넣지 말고 이런 이야기로 그려나가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절박한 상황에서 열심히 일하며, 다행히 호흡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쿠미카에게 음식의 맛을 알게 해 그녀에게 불필요한 돈을 쓰게 만드는 치히로는 정말이지 사악한 악당이라 생각됩니다. 천벌 받을 놈 같으니라고.

[고화질] 마감의 미식가 - 6점
츠치야마 시게루/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작년에 유명을 달리한 만화가 츠치야마 시게루의 단권 완결 일상계 음식 만화입니다. 마감과 작가들과의 교섭, 접대에 시달리는 편집자 시노하라 카오루 (38)가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그날 그날을 마감하기 위해 먹는 요리들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제목과 구성을 보면 "고독한 미식가" 시리즈의 인기에 편승한 기획물로 보이네요.

그래도 이 작품만의 특징도 확실합니다. 주인공이 편집 업무를 하면서 만나는 작가들과의 에피소드가 많은데, 그러한 만남을 어떻게든 음식과 이어가며 드라마를 만드는 노력이 돋보이거든요. 약간이나마 기승전결이 있다는 점에서는 "고독한 미식가" 보다는 나은 측면이 있어요. 츠치야마 시게루의 연륜이 돋보이는 그림도 나쁘지 않고요.

등장하는 음식들은, 초반에는 주로 그날 자기 전 마지막으로 먹는 음식들입니다. 말 그대로 그날 하루를 마감하는, 우리말로는 '야식'에 가까운 음식들로 모두 간편식에 가깝죠. 컵우동과 집에서 남은 카레를 섞어 만드는 카레 우동, 길거리 포장마차 라면, 편의점 오뎅 등이 그러하죠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자기 전이 아니라 그날 업무를 마감한 뒤 먹는 음식으로 바뀝니다. 아마 간단한 야식만으로는 이야기를 끌고나가기 힘들었던 탓이겠지요. 그래서 제대로 된 식당에서 제대로 된 음식들을 먹게 됩니다. 선술집이나 규동집 등 좀 대충 먹는 음식도 있지만 중화요리집의 교자와 라멘이라던가 기리탄포 나베, 굴 나베 등 갖춰진 음식도 많아요.

여튼, 별점은 3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후속권이 이어지지는 않은게 아쉬울 뿐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주문 배달의 왕자님 1 - 6점
타카세 시호 지음/대원씨아이(만화)

'배달 음식'을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배달 음식과는 다릅니다. 주로 일본 각 지역 유명 맛집 대표 요리를 배달용으로 가공한 것들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소재도 독특하지만 주인공인 이이다 역시 범상치 않습니다. 오타쿠 엔지니어로 사교성이 부족하고 자기 중심적인 성격으로 묘사되거든요. 배달음식으로 혼밥, 혼술을 즐기고 먹은걸 SNS에 '왕자님'이라는 닉네임으로 올리는게 유일한 취미고요. 그야말로 배달 음식과 딱 맞는 인물입니다.
야근이 잦고, 이런저런 독특한 인물들이 넘쳐나는 IT 업계의 묘사도 나쁘지 않습니다. 소소하게 이이다와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들도 좋았고요. 덕분에 극적인 드라마가 없더라도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았어요. 이런게 오히려 현실적이겠죠. 평범한 회사원 인생에 뭐 그리 특별한 일이 있겠습니까.

등장하는 배달 음식들은 일본에 실존하는 음식들로, 상당히 흥미로운 음식들이 많습니다. 완성된 음식 외에도 재료 배달에 가까운 음식도 많은데, 이이다의 요리 솜씨가 제법 괜찮아서 항상 그럴듯한 요리들이 태어납니다. 완성된 음식들도 나름의 어레인지로 이런저런 변화를 선사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적당한 재미에 그림도 좋고, 음식과 요리들도 만족스럽습니다. 배달 요리도 한계가 있는 만큼, 적당한 시점에 완결을 내 준 것도 마음에 든 점이에요. 비슷한 주인공을 등장시켜 우리나라 특유의 '편의점 레시피'를 만화로 만들어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4)

2026/02/14

진짜 도쿄 맛집을 알려줄게요 - 네모 : 별점 2.5점

일본 현지에 거주하는 저자 네모가 도쿄의 로컬 맛집을 직접 소개하는 가이드북입니다. 조만간 일본 여행을 앞두고 있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유명 체인이나 후기 위주의 맛집이 아니라, 실제 현지인이 일상 속에서 방문하는 식당과 요리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뢰가 가더군요. 

책은 음식 종류를 기준으로 챕터를 나누어 구성되어 있습니다. 돈부리, 라멘, 소바와 우동 등 면 요리, 고기와 생선 요리는 물론, 일본식 가정 요리와 양식, 카레, 베이커리, 디저트, 편의점 음식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는데, 관광객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음식들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는게 좋았습니다. 일본 현지인이 아니면 접하기 어려운 메뉴들 소개도 인상적입니다. 닭고기 사시미 스테이크나 멸치 육수 츠케멘, 낫토 소바, 토로로, 각종 후라이 요리처럼요.
또 소개된 식당들 대부분이 관광객들이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가격대라는 점도 좋았어요. 각 식당의 대표 메뉴, 가격, 위치, 영업 시간, 휴일 등 기본 정보 역시 충실하게 정리되어 있어 실용적이기도 하고요. 요리를 맛있게 먹는 팁은 정말 꼭 참고할만 합니다. 

츠케멘은 히가시이케부쿠로 다이쇼켄에서 개발한 메뉴로 원래는 가게 영업이 끝난 후 직원 식사용으로 남은 면에 라멘 국물을 찍어 먹던게 시작이다, 2000년대 중반에 대유행을 한게 진한 국물에 우동만큼 굵은 면을 찍어 먹는 스타일 츠케멘이다, 가마타마 우동은 가마아게 우동의 일종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우동에 날달걀을 얹은 메뉴이다, 이나니와 우동은 1600년대 아키타현 영주 가문에서 먹었던 음식이며 냉우동으로 츠유에 찍어먹는 스타일이다와 같이 각 요리들에 대해서 짤막하게라도 소개를 덧붙여 주어서 일본 음식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데에도 도움을 줍니다. 

이렇게 흥미로운 정보와 함께 요리를 워낙에 맛깔나게 소개하고 있어서 꼭 방문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아래 가게들은 구글 맵에 저장해 두었지요. 한두 군데라도 갈 수 있으면 좋을텐데, 웨이팅이 꽤 있다고 해서 걱정이 되네요.

  • 텐동 덴후쿠
  • 카츠동 엔라쿠
  • 토지나이 카츠동 즈이초
  • 소유라멘 키라쿠
  • 멸치 육수 츠케멘 미야모토
  • 이타소바 카오리야
  • 낫토 소바 바쿠잔보
  • 붓카케우동 오니얀마
  • 가마타마 우동 마루카
  • 야키니쿠 잠보
  • 야키니쿠와 곱창 호르몬 마사루
  • 우설 규탄 아라
  • 모츠니코미 아부쿠마테이
  • 아지후라이 아오키 쇼쿠도
  • 카키후라이 타라라
  • 크로캉 쇼콜라 365日
  • 철판 프렌치 토스트 빵토 에스프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분명 존재합니다. 우선 양식이나 카레는, 굳이 일본에서까지 먹을 필요가 있을까 싶네요. 물론 일본에서의 맛은 다를 수 있고, 이런 요리들 애호가도 있겠지만 보통의 여행자 입장에서는 굳이 시간과 동선을 들여 방문할 정도의 메뉴는 아니라 생각됩니다.

도판의 품질도 그리 뛰어나지 않으며, 특히 지도가 아예 제공되지 않는다는 점도 큰 단점입니다. 특정 지역별로 맛집을 묶어 ‘아침–점심–저녁’ 코스를 추천해주는 구성이 있었다면 활용도가 훨씬 높았을 텐데 말이지요. 가격 때문이겠지만 지나치게 런치에만 집중하고 있는 점도 아쉽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일본 여행을 앞두고 있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참고해 볼 만한 가이드북이라고 생각합니다.

2016/10/09

스트로베리 나이트 - 혼다 테쓰야 / 한성례 : 별점 1.5점

스트로베리 나이트 - 4점
혼다 테쓰야 지음, 한성례 옮김/씨엘북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택가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한 후 버려진 사체의 정체가 사무기기 임대 회사 오쿠라 상회의 영업맨 카네하라라는게 밝혀졌다. 아무런 원한관계도 없는 착실한 인물로, 수상한 점이라고는 매월 두 번째 일요일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 점, 그리고 최근 급작스럽게 업무에 열의를 보인 점 뿐이었다.

사건을 담당한 히메카와 레이코는 직감적으로 사체는 원래 발견 장소 바로 옆 우치다메 낚시터에 유기될 계획이었다고 추리했다. 단서는 피해자 복부 사후에 생긴 절창이었다. 이를 배에 가스가 차 떠오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낚시터에서 기생 아메바에 감염되어 사망한 젊은이 사건과 엮어 상부에 설명한 후, 낚시터를 긴급 수색한 끝에 낚시터 안에서 다른 시체를 발견했다.

발견된 피해자는 잘 나가는 광고맨 나메카와로, 그 역시 매월 두 번째 일요일의 약속, 그리고 최근 급격하게 업무에 열의를 보였다는게 카네하라와 일치했다...

혼다 테츠야의 '히메카와 레이코 시리즈' 첫 번째 작품입니다. 2006년도 발표된 작품으로, 동명의 드라마를 추천받은 적이 있는데 미처 감상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자주 가는 도서관에 책이 있길래 연휴 때 읽을까 하고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최악이었니다. 세간의 평가가 높은 이유를 도무지 알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백야행"처럼 드라마가 원작을 초월하는 완성도로 제작되어 높은 평가를 받는걸까요?

아주 약간이지만 장점을 언급하자면, 특정인에게 공개되는 살인쇼라는 설정은 "호스텔"과 유사하지만 살인쇼 참가자 중에서 피해자를 골라낸다는 아이디어만큼은 신선했습니다. 인터넷 뒤에 숨어 즐기는 비겁자가 많은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같다는 느낌도 들었고요.

또 초반 레이코와 검시관 쿠니오쿠가 국수를 먹으면서 나누는 시체 태우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 레이코가 이오카와 조를 이루어 카네하라 주변 인물에 대한 사정청취에 나섰을 때 등장하는 취조 방법에 대한 약간의 팁(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 말을 기록한다고 의식하면 입이 무거워지는 법이었다. 그래서 이오카는 보란 듯이 노트를 덮고 오자와가 입을 열기 쉽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등 몇몇 경찰 수사 과정의 묘사도 나쁘지 않습니다. 과거 성폭행을 당했던 레이코가 방범 카메라에 찍히기 위해 큰길을 통해 비디오 대여점과 편의점을 거쳐 집으로 간다는 설정과 묘사도 마찬가지고요.

가혹 행위를 당하며 살아온 한 소년의 추억과 현재 시점의 사건이 살짝 엮이며 진행되며, 이 소년이 후카자와(일 것)라는 것은 비교적 초반에 밝혀지지만, 경찰 시점에서는 후카자와가 이미 사망한 사람이라는게 밝혀지며 호기심을 자아내는 전개도 비교적 괜찮은 편입니다.

하지만 이외에는 건질 게 없습니다. 우선 추리적으로 너무나 별 볼일 없습니다. 사건의 원인이 매월 두 번째 일요일의 만남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기에 이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밝혀내는지가 핵심인데 이 과정이 나메카와의 친구에 의해 너무 쉽게 해결되어 다음 단계로 진행되는 탓입니다. 경찰 수사에 따른 결과라고는 해도 이래서야 너무 시시하죠.

게다가 뒷골목 탐정이라는 타쓰미가 돈 몇 푼에 수사의 핵심에 접근한다는건 해도 너무한 전개입니다. 약간의 돈과 시간으로 키타미가 진범이라는 것을 알아내는데, 이럴 거라면 경찰은 왜 필요한 걸까요? 자기들끼리 세력 다툼이나 하는 쓰레기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차라리 경찰을 전부 해고하고 타쓰미를 고용하는 게 훨씬 가성비가 높아 보여요.

소소한 전개 역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자기만 알고 레이코를 극도로 싫어하는 이기적인 형사 카쓰마타와의 대립, 레이코를 놓고 벌이는 부하 오쓰카 - 키쿠타의 대립 등 수사 과정에 있어 불필요한 드라마가 너무 많아요. 특히 카쓰마타는 상사도 아니고 계급도 같은데, 레이코가 성희롱을 넘어서는 폭언을 듣고도 참아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이해가 안 됩니다. 게다가 '사실은 카쓰마타도 좋은 경찰이었다!'라는 엔딩은 실소를 자아냅니다. "맛의 달인"의 우미하라, "분노의 늑대"의 야규 캐릭터 변절급인데, 앞선 작품들은 수십 권의 에피소드를 쌓아놓기라도 했지 이건 뭐... 요즘 말로 우디르급 태세 전환?

자극적이고 진부한 묘사도 무척 거북합니다. 특히 '스트로베리 나이트'의 실체가 살인쇼라는 것이 밝혀진 후 등장하는 고어한 묘사가 대표적이죠. 히메카와 레이코에 대한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당했던 성폭행은 비록 트라우마로 남았지만 그녀가 경찰이 되게 만들었다는건 뻔함과 진부함 그 자체였으니까요. 은인인 시타 형사 이야기는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고요.
후카자와 유카리가 진범이고 그녀가 자신이 여성임을 부정하는 행동을 보인다는 것, 그것이 과거 성폭행의 결과라는 것 역시 진부하다는 틀을 깨기는 역부족입니다. 여기에 더해 후카자와 유카리가 진범임을 숨기기 위한 장치도 작위적이라 짜증 날 정도예요. 담당 의사라 면담을 거부할 수는 있지만, 개인 기록은 당연히 넘겨줬어야 합니다. 초반에 주치의가 몇몇 특이 사항만 경찰에 이야기했더라도 사건은 바로 해결되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장점이라고 했던 살인쇼 참가자 중 피해자를 고른다는 아이디어도 발상에 비하면 디테일은 모두 부족합니다. 참가자 모집 방법도 현실적이지 못하고, 이 상황에서 참가자들이 죽음이라는 현실, 그리고 살아있다는 가치관을 재인식하게 해줘 삶에 열의를 갖게 한다는건 억지스럽기 짝이 없는 탓입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도망가지 못해 안달이 났을텐데 말이지요. 또 결국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찾아올게 뻔한데,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흥행을 의식한 저속한 펄프 픽션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세간의 고평가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네요. 세간의 평가는 드라마에만 한정된 듯합니다. 아주 약간의 장점이 있기에 제 별점은 1.5점입니다만, 도저히 후속권은 읽어 볼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2023/04/30

낮의 목욕탕과 술 - 구스미 마사유키 / 양억관 : 별점 2점

낮의 목욕탕과 술 - 4점
구스미 마사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지식여행

<<고독한 미식가>> 원작으로 유명한 구스미 마사유키의 에세이. 제목 그대로 낮에 목욕탕에 갔다가 술을 먹는 10군데의 여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먹는 즐거움은 포기할 수 없어!>>와 장단점은 같은데, 장점은 <<술 한장 인생 한입>>의 이와마 소타츠를 연상케하는 인생관이 글에 잘 녹아있다는 점입니다. '아직 밝을 때 목욕탕에 갔다가 또 아직 밝을 때 술을 마신다면 얼마나 기분 좋고 또 얼마나 맛있을까"라는 그야말로 소다츠스러운 생각이 담뿍 담겨있습니다. 누구나 공감할만한 생각이지만 소다츠라면 그야말로 격렬한 동의를 보일 법한 발상이에요.
맛깔나게 잘 쓴 글이기도 합니다. 특히 비유가 아주 찰집니다. 한낮에 타는 완행 열차를 '어른용 원숭이 열차 (아마도 우리나라로 따지면 유원지 코끼리 열차겠죠?)'에 비유하고, 목욕탕에서 벌거숭이가 되어 들어가는건 '낯선 땅의 야만스러운 공기 속에 나 몰라라 하는 이방인이 되어 몸을 던져 넣는 스릴이 느껴진다'는 식이에요. 이 중에서도 최고는 오래된 목욕탕 안젠탕을 블루스에 비유하는 부분이었습니다. 폐자재를 때는 목욕탕은 친환경을 이야기하는 현재와 맞지 않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갈 데 없는 괴로움, 끝도 없이 찢어지는 마음을 우스꽝스럽게 절규하는 블루스가 느껴진다는건데 캬, 정말 기가 막히더군요. 이 비유가 직접 작사한 가사가 어우러지는데, 이 부분은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음식의 군사>>에서 오뎅 먹는걸 제갈량의 진법에 비유하는 실력이 유감없이 드러나니까요.
벚나무들을 스쳐갈 때 차량 전체가 벚꽃색으로 물든다는 등 묘사력도 좋고, 특히 목욕을 끝내고 마시는 맥주에 대한 묘사가 정말 찰집니다. 이건 소개해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작가의 장점, 비유와 묘사력, 그리고 소다츠스러운 감성이 잘 살아있는 명문이기 때문입니다.

목을 타고 넘어간 맥주가 이윽고 위 안으로 스며든다.
아, 맛있어.
나는 지금, 온몸으로 맥주를 받아들이고 영혼을 다 바쳐서 맞아들인다.
사랑, 그런 느낌이다.
바보인가, 바보라도 좋아. 아니 바보라서 다행이다.
지혜 따위 필요 없다. 옳고 그른지 따질 것도 없어. 작전도 포기. 내일이야 어떻게든 되겠지, 뭐.
꼰대 아저씨 주제에, 목욕탕에서 다시 태어나 신제품으로 변신한 내가 전면적으로 맥주를 맞이한다.
지금, 맥주는 내 몸 안으로 무혈입성을 달성했다.
나의 모든 세포가 환희의 노래를 부르며 열광한다.
"맥주 만세!" "맥주 만세!" "임금님 만세!" "임금님 만세!"
물론 임금님은 나다. 어리석은 임금. 벌거벗은 채 왕관 하나 달랑 쓰고 당나귀 귀를 쫑긋 세워서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백성을 향해 손을 흔든다.
다시 한 모금, 쭈욱 들이킨다.
황금빛 액체가 목을 치달려 내려간다. 이미 길은 닦였다.
취기라는 아련한 벛꽃색 공기가 머리 쪽으로 출렁 흐르기 시작한다.
행복하다. 이것을 행복이라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위한 인생일꼬.

지극히 소다츠스럽지 않습니까? 여기에 더해 "술꾼이란 결국 마시고 만다. 반드시 마신다. 술집이 보이지 않으면 편의점 주류 코너라도 돌진한다."는 말까지 더하면 그냥 소다츠에요. 

목욕에 대한 찬양도 이에 못지 않습니다. '반년 만에 목욕을 하게 된다면,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갔다가 눈을 뜨면 빛이 있었다. 악마가 사라진 세계가 수증기 속에 펼쳐진다. 성스러운 탕 안에서 벌거벗은 내가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묘사는 목욕을 부활과 천지창조에 비유한건데, 이거보다 더한 극찬이 있을까 싶네요.
만화가답게 같은 사물을 보아도 독특한 발상으로 풀어내는 것도 재미 요소입니다. 일본식 목욕탕이 옛날 신사 스타일 지붕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일본인에게는 목욕이 종교와 가까운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 처럼요. 집에서도 할 수 있는데 구태여 목욕탕에 가는 이유가 그 때문이기도 하다는데, 그럴듯합니다.

새롭게 알게된 쓸데없지만 재미있는 상식들도 있습니다. 긴자에 목욕탕이 있다는 이야기처럼요. 작가가 전설의 만화잡지 <<가로>>에서 데뷰 후 겪었던 편집장 나가이 씨와의 에피소드 - 돈이 없으니 맛있는걸 대접할 수 없다. 그래서 목욕탕으로 먼저 데리고 가서, 싸구려 술집의 맥주를 몇 배 더 맛있게 마시게 하려고 했다 - 도 다른 책에서는 접하기 힘들겠지요. 물론 원고료도 주지 않으면서도 힘들면 죽어버리라는 말을 당당하게 하는 나가이 씨는 영 좋은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아서 씁쓸했습니다만....

그러나 이전 책처럼 자기 생각과 철학이 너무 강하다는 단점도 여전합니다. 지극히 꼰대스러운 사고방식이 넘쳐나는데,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건 목욕탕 손님들을 관찰하며 자기만의 생각을 펼치는 부분입니다. 재미를 떠나서 그들을 폄하하는 듯한 - 예를 들어 '큰 인물이 될 것 같지 않은 느낌, 어딘지 모르게 좀스럽다' -설명을 덧붙여 조롱거리처럼 삼는건 솔직히 불쾌했습니다. 나이 좀 들었다고 남을 폄하할 권리는 없으니까요. 여러모로 배려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꼰대스러움 가득한 글이었습니다.
음악 파트너 구리 짱을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개로 비유한 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리 짱이 이 글을 읽으면 굉장히 불쾌했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이런 글을 서슴없이 쓴건 도무지 이해가 안되네요. 본인도 바보로 비하하지만, 자신을 비하한다고 남을 비하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닙니다.
기대했던 음식 측면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목욕'에 더 집중하는 탓입니다. 꼬치구이 가게 <<만페이>>의 고기가 들어있지 않다는 소프트 햄버그스테이크만 처음 들은 메뉴라 기억에 남을 뿐입니다. 어육 소시지를 다져 만든 햄버그라고 하는군요. 

그래서 별점은 2점. 한번 쓱 읽기는 괜찮은 에세이이지만 구태여 찾아 읽을만한 글은 아닙니다. 이와마 소다츠가 누군지 모르신다면 아예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1/05/05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1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1 - 4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C.M.B도 40권을 넘어섰네요. 이번 권에는 4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수록된 이야기 모두가 설득력 측면에서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C.M.B의 또다른 매력인 현학적인 정보 제공 측면에서도 건질게 많지 않고요. 그래서 좋은 점수는 주기 힘드네요. 전체 평균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운영위원" 

신라와 타츠키가 학교 운영위원을 맡은 날, 원예부원들은 이사장이 지시했던 화단과 백엽상 철거에 반대하며 철거업자와 대치했고, 화장실 변기가 막혔고, 학교 입구가 진흙 발자욱으로 지저분해졌고, 요코아리가 식사용 빵을 도둑맞는 등 학교 안에서 여러가지 사고와 문제가 잇달아 일어났다. 원예부가 화단 철거를 막은 이유였던, 원예부 아이돌 소녀가 맡긴 씨앗의 정체는 신라가 밝혀낸다. 그러나 검역 문제로 결국 철거가 수포로 돌아가자, 철거업자는 항의하는데...

신라는 철거업자 중 한 명이 학교에 있는 고가의 그림을 훔치기 위해 잠입해 있었다고 추리합니다. 진흙발로 학교로 들어와 변기를 일부러 막았던 거지요. 사용금지 팻말이 붙은 화장실 안에 숨어 있으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요코아리의 빵은 먹으려고 훔쳤고요. 이렇게 별 거 아닌 걸로 보였던 디테일이 모여서,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는 전개는 꽤 볼만합니다.

그러나 원예부 소동은 예상할 수 없었기에, 이를 도둑과 엮는건 무리입니다. 애초에 무언가를 훔치려면, 소동이 일어난 날이 아니라 다른 날을 선택하는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오스트리아에서 허가받지 않고 들여왔다는 씨앗의 검역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라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어요. 

이렇게 억지스러운 부분이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봉인의 기담" 

메이지 시대 화족 부나가와 가문의 별장은 과거 2명이 죽고, 1명이 실종된 탓에 봉인되어 유령이 나온다는 전설 때문에 '봉인장'이라고 불리우고 있었다. 현재에 이르러 철거를 앞둔 봉인장은 기록을 위한 건설회사 조사가 시작되었고, 신라도 부나가와 당주의 부탁으로 조사에 참여했다. 

지하에서 죄인을 가두어두는 시설을 발견한 조사팀은 비싼 장비를 이 안에 넣고 휴식을 취했지만, 잠든 과장을 제외한 조사팀원은 차례로 습격받은 뒤 장비마저 도난당하는데...

봉인장 지하의 '치도리 격자'라는 독특한 감옥 구조를 이용해서 탈출구를 만드는 설정은 재미있었습니다. CMB 특유의 현학적인 재미를 잘 살리고 있어요.

그러나 다른 내용은 별로였습니다. 동기에 큰 문제가 있는 탓입니다. 특히 이렇게 용의자가 제한적인 상황에서까지 도둑질을 할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과장은 잠들어 있었고, 장비를 잃어버리면 책임을 져야 합니다. 편의점에 심부름을 갔던 직원은 영수증이라는 증거가 명확하고요. 이 둘을 제외하면 용의자는 세 명에 불과해요. 이 정도라면 당장은 빠져나갈 수 있더라도 장치를 회수하거나, 현금화하는 과정에서 범인이 누구인지는 쉽게 드러났을겁니다. 

신라의 추리도 빈약합니다. 범인만이 얻어맞고 기절한 쿠로마츠라는 직원이 어디있는지 알 수 있었다는 증거가 대표적이에요.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할 수도 있었잖아요? 때문에 격자에서 지문을 채취한다던가 하는 보강은 필요했습니다. 

전개도 문제가 많습니다. 초반에는 과거 봉인장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들지만, 이 역시 치도리 격자 구조를 이용해서 일으켰던 거라고 짤막하게 언급될 뿐입니다. 이래서야 '봉인장' 어쩌구 하면서 거창하게 접근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하마구리 가 사람들" 

경찰서에서 나오던 신라와 타츠키에게 하마구리 가 사람들이 자신들 아버지에 관련된 사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도내에 맨션 여러 채를 가지고 있는 부자 아버지 하마구리 기치사부로가 이웃집에 사는 수수께끼의 여자 마야에게 홀려 요가 강습료라는 명목으로 거액의 현금을 주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경찰은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방관했지만 하마구리 기치사부로가 사라졌고, 타츠키와 하마구리 가 사람들은 미행을 통해 마야가 다치가와류라는 기묘한 불교 분파 수행자라는걸 알게 되었다. 그 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라는 유서를 남긴 채 하마구리 기치사부로가 시체로 발견되자, 유족은 경찰에게 책임을 물었고 경찰은 어쩔 수 없이 기치사부로의 죽음을 사고사로 처리하는데....

신라가 추리한 사건의 진상은, 이 사건은 하마구리 가 사람들의 조작이라는 겁니다. 기치사부로가 갑작스러운 심장발작으로 죽게 된게 이유였어요. 상속 확정까지는 기치사부로의 계좌가 동결처리되어 돈을 빼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치사부로의 돈으로만 먹고 살던 기생충들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사망 확인을 최대한 늦추면서, 서둘러 계좌 속 돈을 현금화한겁니다. 거액을 인출한걸 설명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여자에게 속아 돈을 건넸다는 이야기를 만든거지요. 

이를 증명하기 위해 핏빗(?)을 스마트폰에 동기화시키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치사부로가 매일 1만보 걷기 등을 실천하던 사람이라, 어느 시점에서 움직이지 않았는지가 동기화를 통해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잠깐 떼어 놓을 수야 있겠지만, 이전 이력과 비교하면 이상 여부를 쉽게 알 수 있을테니, 확실한 증거는 아니더라도 참고 이상으로는 충분히 쓰일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웨어러블 장치가 일상회된 현재라면 말이지요.

하지만 하마구리 가 사람들의 조작은 거창하기만 할 뿐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수상한 옆집 여자 마야에게 현금을 주더라, 정도로 끝내는게 합리적이었어요. 돈을 건네 주다가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는건 별로 이상하지 않잖아요? 사이비 종교를 엮어서 구원 어쩌구 하는 이유를 들먹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외려 다치가와 류는 살아있는 채로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신라에게 의심을 사고 말았을 뿐입니다. 경찰도 아니고, 경찰 관계자도 아닌 평범한 고등학생 신라와 타츠키에게까지 사건을 이야기할 이유도 딱히 없었고요. 

설명도 부족합니다. 기차사부로의 사체를 어디에 보관했는지부터가 애매해요. 부검에서 사망 추정시간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요. 경찰에 신고하며 소동을 일으키려면 적어도 1주일 이상은 걸렸을 거잖아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설득력만 높여 주었더라면 훨씬 좋은 작품이 되었을텐데 조금 아쉽습니다.

"돌과 사진" 

마추피추 유적에서 스페인 여성 관광객 알마가 낙석에 맞아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 뒤 잉카의 저주라는 소문이 퍼졌다. 피해자가 잉카를 정복했던 스페인인이었고, 낙석은 다른 돌로 가로막혀 떨어질 수 없었던 위치에 놓여 있었던 탓이었다.

살인의 동기가 인스타그램일 수 있다는 전개는 꽤 시의적절했습니다. 피해자가 친구들 사진 아이디어를 도용해 사진을 올리고, 그걸로 인기를 얻었다는 내용이거든요. 물론 결정적인 동기는 따로 있기는 합니다만....

문제는 인스타그램 관련 내용 외의 모든 것입니다. 돌이 떨어진 진상부터가 허무하고 유치했어요. 가로막고 있던 돌을 피해서 굴린 뒤 피해자에게 떨어트린게 전부거든요. 밑에 굴리기 쉽게 태피스트리를 깔았다는데, 이건 트릭도 뭐도 아닙니다. 증거인 유리 구슬 파편도 너무 쉽게 드러나고요. 상식적으로도 자연스럽게 낙석이 일어난 것으로 위장하는게 당연합니다. 이렇게 억지로 불가능한 상황을 연출할 이유는 전혀 없어요. 다른 친구 두 명이 범인 엘자가 위로 올라가 돌을 떨어트린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2006/09/14

[번역] 이콜 Y의 비극 (1) - 노리츠키 린타로

프롤로그 :

차 공원의 호텔에서 열린 피로연은 4시 30분에 개장되었다. 피로연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던 도중, 토고 유카리는 같은 테이블 주위의 친구들과 로비에서 모일 것을 약속한 탓에 가져갈 물건을 챙기기 위해 호텔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4월 29일, 골든 위크 첫날의 결혼식이었다. 신부는 유카리가 전에 일하던 회사의 1년 후배였다. 같이 초대된 전 회사 동료들과 만나는 것도 자신의 송별회 이후 처음이었다.

유카리는 정리 해고자 대상자로 퇴사한 것은 아니었다. 도쿄의 여대를 졸업하여 도내의 부동산 회사에 취직, 4년간 OL로 일했지만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지셔서 가업을 돕기 위해 나고야로 돌아가게 된 것이었다.

그동안 맞선의 이야기도 몇번 있었지만 아직 이렇다할 인연은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8년간의 동경 생활때문의 유카리의 눈이 너무 높아진 이유도 있겠지만 양친이 데릴 사위를 강하게 희망한 탓도 컸다.

유카리는 아침의 신칸센으로 상경하여 1박 2일의 일정으로 다음날 밤에는 나고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가업인 주점은 주변 편의점과의 경쟁이 극심해져서 골든위크라는 이유로 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가 반쯤은 은퇴하신 상태라 무남독녀인 유카리는 가게의 영업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귀중한 전력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출발하기 직전까지도 되도록이면 오늘 안에 돌아와 줄 수 없겠냐는 말을 계속했지만 때때로 숨돌릴 틈도 필요하다는 어머니의 한마디가 그나마 효과가 있어서 오늘 하룻밤을 이곳에서 보내는 것이 겨우 가능했다.

예약한 호텔방은 창에서 도쿄 타워가 바라보이는 방이었다. 별로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유카리는 조금 얼굴이 달아오른 것을 느꼈다. 새로 맞춘 드레스도 조금은 거추장스러웠고, 피곤했기에 침대위에 가로 누워 구두도 벗고 잠시 쉬기로 했다. 신부는 예뻤고 처음 본 신랑도 정직하고 성실해 보였지, 뭐 나쁘지 않은 결혼식이었어. 그러나 피로연이라고 불리우는 이러한 파티는 왜 이렇게 피곤한걸까?

여섯시부터는 왁자지껄한 2차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다. 롯뽕기의 가게도 이미 빌려 놓았다고 했다. 유카리는 기억에 남을 정도로 흥겹게 보낼 생각이었다. 오랫만에 상경하여 기분이 붕 떠 있는 탓이겠지. 아버지가 그렇게 오늘 돌아올 것을 부탁했던 것도 딸이 다시 도쿄 생활을 강하게 그리워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어서였던 것일 수도 있다. 아버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니깐!

아버지에 비한다면 차라리 어머니 생각은 납득이 된다. 한숨 돌리는 기회로 기분좋게 하룻밤 정도 보내는 정도, 매일 숨쉴틈도 없이 보내는 와중에는 도쿄에서 혼자 살아가던 시절이 그리울 수 밖에 없었고 정말이지 이렇게라도 한번 정도 나와주지 않으면 정말 도망쳐 나오게 될 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다가 2차 장소로 출발하기 전에 미도리에게 연락해서 내일 약속을 미리 해 놓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래서 전화를 한통 걸어야 한다는 것이 생각났다. 아다치 미도리는 대학때부터의 친구로 지금은 결혼해서 사카자키로 성이 바뀌고 세타가야 키유텐의 맨션에 살고 있었다. 남편은 여섯살 연상의 투어 컨택터, 아직 아이는 없었다. 미도리가 결혼한 뒤에도 유카리가 도쿄에 살때에는 자주 만나곤 했었지만 나고야에 귀향한 뒤로는 얼굴을 보는 것은 물론, 전화로 이야기할 기회도 뜸해진지 오래였다. 오래간만에 올라온 도쿄였기 때문에 오랫만에 둘이서 식사라도 하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천천히 이야기하고 싶었다. 1박을 하게 된 것도 그것이 가장 큰 이유였었다.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전화해서 도쿄에 왔다는 사실을 말했다면 미도리는 무척 놀랐을 것이다. 사실은 도착하자마자, 아니 그 이전에라도 미리 알려줄 수도 있었지만 빠듯한 일정탓에 1박하는 것이 출발직전까지 결정되지 않아서 만나지 못할 수도 있어서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내일 충분한 시간이 있으니 괜찮겠지. 미도리도 특별한 약속이 없기를 바라며 백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저장해 놓은 미도리의 집 전화 번호를 호출했다.

그런데 그대로 전화를 걸기직전 유카리는 잠깐 손을 멈추었다. 침대 옆의 객실 전화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호텔 숙박비는 신부측이 지불하는 것으로 그 안에는 전화비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었다. 가게의 경리업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유카리는 지난 몇년간 그러한 계산에 굉장히 민감해져 있었다. 부랴부랴 나고야로부터 출발하였고 결혼식 축의금까지 냈기에 확실히 절약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카리는 객실 폰의 수화기를 집어들고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미도리의 집 번호를 눌렀다. 3번의 신호음이 울린 후 전화에서 들리는 목소리 -

"사카자키 입니다"
"여보세요. 미도리? 나 유카리야. 지금 여기 와 있어"
"- 죄송합니다. 언니는 지금 외출중이거든요. 어디시라고 전해드릴까요?"

미도리의 목소리가 모르는 사람처럼 냉담하게 답했다. 유카리는 깜짝놀랐다. 본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순간적으로 불쾌한 기분까지 들었지만 확실히 미도리의 동생은 전에 만나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고 이름도 곧 기억이 났다. 유카리가 곧바로 말했다.

"어머 아카네? 미안해요. 언니하고 정말 목소리가 똑같네요. 나는 토고 유카리라고 해요. 기억나지 않아요? 전에 만난적도 있는데?"
"유카리씨요? 언니의 대학 친구? 물론 기억나죠. 그러고보니 확실히 나고야 고향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그랬죠. 이번에 아는 사람 결혼식때문에 올라오게 되었어요. 내일 돌아가기전에 만날 수 없을까 생각했는데 미도리는 없나보네요"
"예. 오후부터 일이 있다고 하고 나갔거든요. 저에게 집을 좀 봐달라고 해서... 형부가  출장으로 집에 안 계셔서 어제부터 이 집에 놀러와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일이 있다고 했는데 쇼핑이라도 하러 나간건가요?"
"밤까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했기 때문에... 돌아오면 전화하라고 전해드릴까요?"

유카리는 잠시 생각했다. 2차 파티에 참석하기로 했기 때문에 언제 걸려올지도 모르는 전화를 방에서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또 그때쯤이면 아마 술에 취해 있을거야. 미도리가 내일 다른 일이 있는지만 확인해서 없다면 먼저 약속을 잡아버리는 쪽이 확실해 보였다.

"음...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것 보다도 내일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언니가 혹시 뭔가 다른 약속이나 예정이 있다고 말했었나요? 나는 저녁때 까지 밖에는 시간이 없어서"
"아뇨. 특별히 아무것도요. 형부가 돌아오는 것은 밤은 되어야 할 테니까요"
"그럼 내일 별다른 일이 없는거겠죠? 그렇다면 전화를 걸라고 하지 말고 제 말만 좀 미도리에게 전해주지 않겠어요? 갑작스레 상경했는데 식사라도 함께 하지 않겠냐고요. 만날 시간과 장소는 지금부터 말해줄께요"
"네. 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럼, 시간은 점심 1시. 장소는 그렇지! 역시 거기가 좋겠어요. [風見鷄 (카자미도리)]"
"[風見鷄 (카자미도리)]? 그 건물 꼭대기에 있는 그곳 말씀이세요?"
"예. 학생때 자주가던 喫茶店(카페)이었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면 알거에요"
"아 그럼 [風見鷄 (카자미도리)]라는 喫茶店(카페)에서 내일 오후 1시. 알겠습니다. 언니가 돌아오면 그렇게 전해드릴께요"
"혹시 뭔가 다른 일이 있거나 하면 제 휴대폰으로 전화해 달라고 전해주세요. 번호는 알고 있을거에요. 그럼 잘 부탁드려요 아카네"

유카리는 객실전화의 수화기를 내려놓고 사이드 테이블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5시 4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큰일났네-!)
사용하지 않은 휴대폰을 백에 집어넣다가 유카리는 혀를 찼다. 미도리에게 가르켜 준 것은 옛날 휴대폰 번호였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새 번호는 가르켜 주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나고야에 돌아가서 다시 만나 잠깐 교제했던 고등학교 동창이 헤어진 뒤에도 자꾸 전화를 걸곤 해서 어쩔 수 없이 얼마전 새롭게 전화, 번호를 교환했던 것이었다. 물론 전의 번호로 걸어도 새 번호는 알수 없도록 해 놓았었다.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자괴감과 더불어 불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나 창피하기도 해서 또 다시 전화를 거는 것은 왠지 내키지 않았다.

괜찮겠지. 내일 미도리가 와 주지 않겠어? 분명히 와 줄것이 분명해!

그렇게 혼자서 결정하여 원기회복한 유카리의 기분은 곧바로 예정된 2차 모임 쪽으로 향했다. 유카리는 백을 손에 들어 침대옆 서랍장에 집어넣었다. 피로연 때 까지 신랑 친구석의 몇명인가 눈을 마주친 남자가 있었다. 지금부터는 2차 모임까지 화장을 고치고 드레스를 점검하지 않으면 안돼...

: 노리츠키 린타로는 꽤 유명한 작가인데도 국내에 소개된 작품이 전혀! 없어서 전에 구해본 괜찮은 단편 하나를 직접 번역해 본 것입니다. 의역이 많아서 부끄럽긴 하지만.... 그리고 불펌은 없었으면 좋겠네요.

2008/09/17

고독의 구루메 (孤独のグルメ) - 久住 昌之 / 谷口 ジロー : 별점 3점

추석 연휴 기간동안 간만에 서울역 북오프에 가서 구입한 책입니다. 제목 그대로 주인공이 혼자서 여러 식당에서 밥을 먹는 이야기가 내용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담백한 만화네요.

하지만 심심하지 않도록 여러가지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데, 일단 술은 전혀 마시지 못하고 뭔가 운동을 한 듯한 (격투기?) 사연많아보이는 주인공의 설정이라던가 주인공이 홀로 밥을 먹는, 그것도 미식과 상관없는 거리의 식당 등에서 먹는 상황과 심리 묘사가 치밀합니다. 또한 이 만화에서 "음식"은 소재의 하나일 뿐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신선하고요. 맛있는 음식은 맛있을 뿐 음식을 통해 사건이 전개되지 않는다는 점이 여타 미식 만화하고는 차별화된 요소로 보였으며 무척 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맛없는 음식이 소재의 하나로 등장한다는 것도 미식 만화하고는 다른 점이겠죠. 심지어는 편의점 음식까지 등장하니까요.

무엇보다도 다니구치 지로의 엄청나게 치밀한 그림이 굉장히 매력적인 만화입니다. 실제 일본의 거리와 존재하는 가게를 그대로 구현해 놓은 듯한 공간과 음식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작가의 필력을 느끼게 해 줄 뿐더러 정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더군요.

구하기는 쉽지 않은 책이겠지만 맛있는 음식에 눈물을 철철 흘린다던지 음식 하나로 모든 인간관계와 문제가 정리되는, 또는 배틀물로 전락해버린 기존의 미식 만화에 식상한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네요.

별점은 3.5점입니다. 그림만으로도 3점은 충분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2020/01/30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3)

애정하는 작품인 "술 한잔 인생 한입"의 작가 라즈웰 호소키가 온갖 초밥을 연구하며, 심지어 직접 초밥을 쥐기까지 하는 과정의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다룬 작품입니다.

음식, 특히 초밥 및 각종 관련 정보를 재미와 함께 잘 제공해 주는게 좋습니다. 나무젓가락이 무려 네 등급이 존재한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또 단순한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직접 실험하고 경험한 내용이 많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편의점 초밥을 더 맛있게 먹는 방법을 여러가지 실험해보거나, 초밥과 가장 잘 어울리는 차를 찾기 위해 이런저런 차와 함께 먹거나, 초밥의 간을 여러가지로 만들어 먹어 본다던가, 맥주에 가장 잘 어울리는 스시를 만들어 본다던가(심지어 그 중 하나는 소시지 스시!) 하는 식으로요. 이 과정에서 터득한 레시피 제공도 아주 좋습니다. 스키야바시 지로의 메인 셰프인 지로 씨의 스시를 먹은 경험담 등도 값지고요.

그러나 단점도 큽니다. 가장 큰 단점은 1권과 2권은 1/3 가량이, 3권은 2/3 이상이 전혀 다른 만화로 채워져 있다는 점입니다. 1권은 작가가 여행하면서 이런 저런 음식을 먹었던 일상계 여행 에세이 만화가, 2권은 약간 소심한 식도락가 샐러리맨 에비코지 아지마로가 등장하는 "내 멋대로 1성 식당"과 "술 한잔 인생 한 입"의 스핀오프 같은 "소라의 술", 3권은 목욕이 취미인 공무원 센타로의 목욕 생활을 다룬 "속세 목욕"이 각각 수록되어 있거든요. 이 만화들이 재미가 없는건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분량을 차지해가면서 수록한건 반칙같이 느껴져 기분이 별로 좋지 않네요. "라스시"만으로는 두 권 분량으로 충분했을텐데 말이죠.
이 단점에 비하면 모든 음식들에 대해서 작가의 취향이 강하게 반영되었으며, 한글화가 매끄럽지 못하다는 단점는 사소할 뿐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고화질] 미식탐정 란포 2권 (완결) - 6점
Kusumoto Tetsu/미디어팜

'식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지론을 가진 탐정 우타가와 란포가 의뢰받은 조사 대상이 먹는 음식을 같이 먹으면서 의뢰를 해결한다는 내용의 작품입니다. 브리아 샤바랭탐정화한 아이디어지요.

억지도 있지만, 정말로 먹는 걸로 의뢰를 해결하거나, 상황을 예측하는게 나름 설득력있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같이 소금구이를 좋아하는 그녀의 진심이 알고싶다는 의뢰를 받고, 미행을 통해 사실은 그녀가 양념 구이도 좋아하는 사실을 밝혀내어 그녀의 마음을 알게된다는 식으로요. 또 주인공 란포의 식도락 철학과 각종 요리 관련 설명 및 묘사도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 패턴이 단순하며, 조사 대상이 란포가 있는 음식점에 찾아올 정도로 너무 일(미행, 탐문 조사 등)이 쉽게 풀리는 전개 탓에 드라마가 별 볼일없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아울러 요새 트렌드와 맞지 않는 작화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고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혼술 땡기는 날 - 4점
다케노우치 히토미 지음, 김진희 옮김/애니북스

집순이 히토미가 이런저런 술을 즐기는 이야기. 기본적으로 집에서 먹더라도 룸메이트가 있을 뿐더러, 여럿이서 같이 마시는 경우도 많아서 '혼술' 이라고 부르기는 조금 애매합니다. '집술'이라고 하는게 훨씬 맞는 표현일텐데 말이죠. 혼술 유행에 편승하려 한 느낌이에요.

그래도 내용은 나쁘지 않습니다. 맛있는 술과 그에 어울리는 안주를 먹는게 전부인데 종류도 여러가지이고, 다 맛있어 보여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레시피들도 대충대충이지만 실려있어서 이해를 돕고요. 

그러나 너무 대충 그린 작화는 문제입니다. 술과 요리까지도 성의없어 보이는 스타일로 일관하고 있는데, 이건 음식, 요리만화로서는 굉장히 치명적인 부분이라 생각되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작화만 받쳐주었더라도 평균 이상은 되었을텐데 아쉽습니다.

2008/10/08

인사이트 밀 (incite Mill) - 요네자와 호노부 / 최고은 : 별점 3점

The Incite mill 인사이트 밀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학산문화사(단행본)

여자친구를 만들기 위해 차를 구입하려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 잡지를 뒤적이고 있던 평범한 대학생 유키 리쿠히코. 그런 그에게 갑자기 등 뒤에서 한 미녀가 말을 걸어왔다. 그 여자와 함께 들여다본 잡지 귀퉁이에 실려 있던 광고에는 시급 112,000엔, 엄청난 고액의, 엄청나게 수상한 아르바이트가 실려 있었다.
'연령과 성별 불문. 일주일 기간의 단기 아르바이트. 어느 인문과학적 실험의 피험자. 하루의 구속 시간은 24시간. 인권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24시간 피험자를 관찰한다.' 수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엄청난 시급에 눈이 멀어 망설임을 이기고 연락을 넣은 유키는 지정된 장소 ‘암귀관’을 향한다. 참가자는 열두 명. 그리고, 등 뒤로 육중한 문이 닫힌 순간, 열두 명의 운명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을 향해 치닫는다.


2008년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에서 10위를 차지한 요네자와 호노부의 장편 소설입니다.

정말 재미있게 읽은 소설로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몰입하여 하루만에 읽어버리게 만드는 흡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추리소설 매니아를 두근거리게 만드는 작중의 설정 및 트릭도 굉장히 매력적이었고요. 또한 일상계 추리소설을 발표해 왔던 요네자와 호노부의 전작과 유사하게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이 일상인, 소시민들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여자친구를 사귀기 위해 중고차를 사려고 아르바이트에 응모하는 주인공이라니.. 정말 생동감이 넘칩니다.

하지만 분명 단점도 존재합니다. 제일 큰 단점은 모든 상황과 설정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이겠죠. 애당초 비밀의 조직에서 거액의 돈으로 아르바이트를 모집한 뒤 잘 기획된 폐쇄된 공간에 일단의 무리를 집어넣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만화적이잖아요. 법과 돈을 초월한 의문의 조직, 잘 짜여진 룰과 상황에 어울리는 최적의 무대, 이건 완벽하게 만화 “라이어 게임” 판박이죠. 게다가 이 비밀의 조직이 행하는 실험(?)의 이유조차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르바이트 잡지에 광고를 실었다는 결정적 증거가 있는 이상 관련한 수사가 진행된다면 분명히 꼬리가 잡혔을 텐데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되지 않는 점은 작가 스스로 쓰고싶은 부분만을 위해 억지로 가져다 붙인 설정이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앞서 말한 생동감 있는 소시민 캐릭터도 "스와나"라는 초슈퍼 엘리트 냉혈 미인 때문에 빛을 잃는 면도 없잖아 있고요. 인터넷 지인이신 decca 님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작위성이 매력이라고 하시던데 작위적인것도 정도껏 해야죠.... 제게는 만화를 소설로 억지로 각색한 느낌이 더 컸습니다.

또한 이 폐쇄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의 과정 역시 합리적인 이야기 진행과는 거리가 멉니다. 일단 한명 죽이면 몇배, 범인을 밝히면 몇배 식으로 배율을 정해놓고 살인 게임을 유도한다고 하는데, 사실 제일 힘이 센 인물이 한명만 동료로 끌어들여 연쇄살인을 뚝딱 저지른다면 곧바로 게임이 끝나고 엄청난 거액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거든요. 물론 양심에 호소하며 그러한 상황을 방지코자 하는 애매한 묘사가 나오긴 하지만 설득력은 떨어지죠. 작중에서도 결국 범인은 “2명”을 살해하는 상황인데 “2명”과 “10명”의 차이가 과연 존재할 지 의문이기도 하고요. 아울러 한 4~5명 살해하고 감옥에 갇히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었을까요? 가장 안전한 곳은 감옥이니 만큼 살해에 따른 보너스 수입과 안전을 손에 넣는다면 괜찮은 방법이었을 텐데 말이죠.

그리고 사건이 너무 “트릭”을 위해 작위적으로 짜여진 것도 껄끄럽더군요. 이 소설에서 진정한 이유를 가진 살인(?)은 첫번째 살인밖에 없으며, 이후 벌어진 살인은 전부 우발적이고 우연에 의한 것입니다. 물론 중간에 있는 두건의 살인은 확실한 동기가 나중에 밝혀지기는 하지만 살인이 벌어지는 상황이 우연과 우연이 결합된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작위적이었고, 극적인 결말을 위해 가져다 붙인 티가 많이 납니다. 우연과 우연이 결합되는 상황 역시 중간에 등장하는 “어디에 가나 3인 이상 이동” 이라는 그럴듯한 설정에 발목을 잡힌 듯 무리수를 둔 느낌까지 들고요.

이렇듯 단점이 좀 많고 아쉬운 부분도 많은 작품이라 비록 굉장히 재미있긴 하지만 자신있게 추천하기는 좀 애매한 작품입니다. 야구에 비유하자면 2사 1,2루 찬스에서 타점없이 진루만 가능한 짧은 안타를 친 격이랄까요. (번트안타?) 그래도 저는 손에 한번 잡으면 놓기 힘들 정도의 재미를 갖췄기에 별 3개 주겠습니다. 아무리 단점이 많고 만화같은 설정이라도 재미가 가장 중요한 법이니까요. 뭔가 속편을 암시하는 결말인데 속편이 나온다면 재미는 유지한채 보다 정교하고 철저한 설정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2019/10/20

기억 파단자 - 고바야시 야스미 / 주자덕 : 별점 1.5점

기억 파단자 - 4점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주자덕 옮김/아프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낯선 방에서 깨어난 니키치는 머리맡에 놓여 있는 한 권의 노트를 발견했다. 그리고 노트를 통해 자신이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타인의 기억을 개조하는 초능력을 가진 살인마와 대면하게 되는데……. 의지할 수 있는 건 노트와 잃어버린 기억력을 보완하기 위해 발달한 뛰어난 추리력과 판단력을 가진 두뇌뿐이다. 니키치는 과연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출판사 책 소개 인용)

"앨리스 죽이기" 등으로 접했었던 공학 박사 학위를 지닌 공대생 작가 고바야시 야스미의 장편 스릴러입니다. '기억 파탄'이 아니라 '기억 파단 (記憶破断)' 이라는 제목과 책 소갯글 그대로, '기억의 단절'을 핵심 소재로 다룹니다. 기억을 이어 나갈 수 없는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환자 니키치와 타인과 접촉하여 연속된 기억 속에 기억을 추가하여 기억 그 자체를 조작할 수 있는 초능력자 키라와 한 판 승부에서 단기 기억 상실증은 기억파단 그 자체이고, 기억 속에 다른 기억을 집어 넣어 왜곡하는 것 역시 연속된 기억을 파괴하는 행위니까요.

니키치는 자신이 기록한 노트로만 이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대응하며, 이 노트를 통해 키라와 맞서 싸우는데 이를 위해 등장하는 설정들이 상당히 괜찮습니다. 노트의 사용법과 생활 방법 등에 대한 디테일이 꽤 그럴싸한 덕분입니다. 그리고 기억을 온전하게 노트에만 의존하고 있는 상황을 반전 요소로 써먹는게 아주 좋았습니다. 반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억을 잃어버린 후 키라의 범죄 행위가 담긴 USB 메모리를 '서랍에 넣어 놓았다'는 노트 메모를 통해 알게 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데 애초에 이 메모 자체가 거짓이었습니다. 키라에게 헛수고를 하게 만들고 실제로 교코를 통해 USB를 안전하게 빼돌리려는 계획이었거든요. 이렇게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기억' 그 자체가 '단기 기억 상실증'이라는 병 때문에 쉽게 왜곡할 수 있다는게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또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기 때문에 기억을 조작하는 키라의 초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아이디어도 괜찮았어요. 본인이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던 사고 이후의 기억이 전혀 없는데, 새로운 기억이 생겨난건 분명 누군가의 조작이라는 논리인데 설득력있지요. 이걸 이렇게 써먹나 싶어 감탄스럽기도 했고요.

그러나 사실 이 반전 외에 딱히 건질게 많은,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니키치 관련 주요 설정은 명백히 영화 "메멘토"에서 설정을 따 온 것이니까요. 노트의 메모가 중요하며, 또 자신의 '글씨체'로 기록한 메모만이 중요하는 점과 사진을 주요 기적 보조재로 사용하는 점이 그러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기억은 쉽게 왜곡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판박이에요. 나쁜 기억 대신 자신이나 타인이 왜곡한 기억을 갖고 살아가는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부분의 메시지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단기 기억 상실증은 "메멘토" 등을 통해 구축된 설정과 세계관이 반영되어 나름 설득력이 높은데 반해 키라의 초능력은 너무 허황됩니다. 접촉을 통해 기억을 조작한다는 설정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구멍이 많아요. 누군가 모르는 사람의 접촉을 쉽게 허용한다는건 상식적이지 않으니까요. 왜곡된 기억이 많아지면 당연히 일어날 여러가지 모순을 정신 붕괴를 일으킨다며 대충 퉁치는 것 역시 마찬가지지요. 잘못된 기억이 주입된다면 그 이유를 따져 볼 사람이 없을리 없잖아요? 특정 기억에 대한 반대 기억이 명확한 경우, 예를 들어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났다' 가 '그 때 다른 누구와 무언가를 했다' 라는 분명한 기억과 겹칠 경우 더욱 그러할테고요. 기억 조작이라는건 전후관계와 디테일을 모두 고려해야 성공할 수 있을텐데 그런 부분은 이런 식으로 모두 대충입니다. 최소한 독자가 흥미를 가질만한 설득력있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었어요.
범행도 어이가 없습니다. 이 정도의 능력자가 편의점이나 털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을 폭행하고, 여자들을 성폭행하고 살해하는 수준 이하의 범죄만 저지른다는게 말이 될까요? 심지어 기억 조작도 어설퍼요. 지하철에서의 성추행같은 경우는 피해자와 정의감에 불타 나섰던 사람 2명의 증인의 기억만 조작해서 빠져나가는데, 실제로 니키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이 기묘한 상황을 눈치챕니다. 이렇게 백주대낮에 대중 앞에서 벌이는 범죄 행각들이 많다면, 아무리 CCTV의 사각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결국 꼬리를 잡혔을 겁니다.

작위적인 전개도 거슬립니다. 살인마를 쫓고 있는 상황에서, 또 살인마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니키치가 기억을 잃더라도 굉장히 필요한 정보만 잘 떠올리고 기억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침 딱 좋은 위치와 장소에서 노트 속 필요한 페이지를 읽게 되는 식이거든요. 기억을 잃는 시간도 정해져 있어 보이지 않고요. 뒤로 가면 갈 수록 이 친구가 기억 상실증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에요. 억지로 세계관을 확장하려는 이런저런 설정들도 좋아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니키치를 비롯한 캐릭터들의 묘사가 밋밋하다는 단점도 큽니다. 살인마 키라는 그냥 나쁜 놈, 니키치는 성격 묘사없이 그냥 키라와 싸우는 정의의 사도라는 이분법적인 구분만 있을 뿐 별다른 묘사는 없어서 평면적이고 만화적이기 때문입니다. 고바야시 야스미의 작품들이 대부분 그러한데, 매력적인 세계관과 설정 창조는 잘 하지만 캐릭터를 묘사하는 능력은 없는 듯 합니다.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조력자 도쿠 할아버지나 화법 교실 강사 교코도 다 어디서 본 듯한, 평면적인 캐릭터라는 점에서 다를게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일부 매력적인 설정과 돋보이는 아이디어가 없지는 않지만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낮습니다. 단기 기억 상실증 관련 이야기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분이 그러합니다. 작가의 팬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관심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2017/04/30

큐이디 Q.E.D 47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5점

큐이디 Q.E.D 47 - 6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큐이디 Q.E.D 50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점

아 이런 실수를... "큐이디. Q.E.D"를 완독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놓친 권이 있었습니다. 간만에 본가에 방문한 차에 빌려 읽고 리뷰 남깁니다.

"태양은 아직 높다" 

발리섬에서 일어난 기밀 연구 자료 도난 사건을 로키의 부탁으로 해결해 나가는 토마와 가나의 활약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용의자는 연구소장 기델 박사와 월터, 카를로스, 주디스라는 3명의 연구원, 그리고 기밀 자료 반출을 철저히 막고자 했던 NSA 요원 무티아라입니다. 이들 중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혀내는 와이더닛 물이자, 어떻게 파일을 빼돌렸는지를 밝혀내는 트릭물이기도 합니다.

'조사할 양이 늘어나면 시간이 극단적으로 걸려 풀기가 가속적으로 어려워지는 것'이라는 수학적 소재인 NP 클래스 문제 해결을 사건에 대입시킨 전개는 나쁘지 않습니다. 사건을 미궁으로 끌고 가기 위해 기델 박사가 일부러 연구원들을 범인으로 모는 증언을 한 이유가 설명되는 덕분입니다.
파일을 바꿔치는 일종의 순간 이동 트릭도 상식적이면서도 간단한 트릭이라 설득력이 높아요. 범인을 드러내는 증언도 합리적이고요. 범인밖에 알 수 없는 동기를 입 밖에 낸걸 눈치채는 장면인데 이치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장점에 대치되는 단점이 존재한다는 문제는 큽니다. 우선 NP 클래스 문제 해결을 대입시킨건 나쁘지 않더라도, 이 사건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능성을 여러 개 열어 놓았다 한 들, 토마에게는 한 입 거리에 지나지 않아 시간이 극단적으로 오래 걸리지 않게 되어버리니까요. 게다가 어차피 용의자가 몇 명 없는 상황에서 조사할 양이 그렇게 늘어날 일도 없어요.
범인밖에 모르는 동기로 범인을 특정한다는 것 역시 결론에 끼워 맞춘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돈'이 목적일 확률이 높기에 그렇게까지 실수한 증언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파일을 빼 낼 수 있었던 쓰레기 봉투에서의 회수가 너무 대충 그려져 있는건 아주 별로였어요. 앞서서는 절대로 파일을 가지고 나갈 수 없다고 한참 이야기하다가, 토마의 입으로 전혀 다른 진상을 드러내는 거니까요. 이건 완전히 반칙이죠. 또한 사건 당일에 무언가를 회수해 나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무티아라가 놓친 것은 직무유기에 가깝습니다.

마지막에 기델 박사가 사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결말도 허무합니다. 결국 박사의 장난에 놀아난 것에 다름없는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좋은 점, 나쁜 점이 골고루 있는 무난한 이야기입니다만, 추리적으로는 단점이 더 많습니다. 한 편의 이야기로 어떻게든 마무리한 솜씨는 높이 평가하지만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비탈길" 

아키와 가나는 중학교 동창회에서 조우했다. 사실 아키는 작은 왕따를 당한 아픈 추억이 있었지만, 자신을 감싸 주었던 가나를 잊지 못해 동창회에 찾아왔다. 그녀는 가나에게 당시 있었던 게임기 도난 사건의 범인이 아키가 아니라는걸 강하게 주장했던 이유를 물어보았지만, 정작 가나는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린 시절 있었던 일을 가나가 잊어버린 탓에 토마가 나서서 사건을 해결해 준다는 이야기는 이전(25권 "여름의 타임캡슐")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상은 가나가 잊어버린게 아니라 '숨긴 것' 이었다는 의외성이 돋보입니다. 앞서 동창회에서 숨긴 이유를 복선처럼 등장시키는 것도 탁월했고요.
또 가나가 사건을 덮은 이유를 아키가 오해해서 - 가나가 도둑이기 때문에 아키가 진범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던 것 - 또 다른 도난 사건을 꾸민다는 이야기도 꽤 괜찮았습니다. 아키가 사는 복잡한 골목을 이용한 트릭도 좋았고, 토마가 진상을 밝혀내는 추리도 굉장히 합리적인 덕분입니다. 봉투 속 돈만 훔쳐도 되는데 봉투까지 훔친 이유, 편의점도 없는 외진 동네라는 특이성 등을 가지고 설명하는데 무릎을 칠 만 했어요.

아키가 모델로 나아가는데 이러한 과정이 디딤돌이 된다는 전개, 그리고 마지막에 건방짐과 자부심을 헛갈린 듯 한 묘사는 솔직히 와 닿지 않지만 이 정도면 수준 이상의 멋진 이야기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항상 느끼지만 일상계쪽이 훨씬 낫네요.


이렇게 두 편 평균해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5/01/27

서랍 속 테라리움 - 구이 료코 / 박의령 : 별점 3점

서랍 속 테라리움 : 신장판 - 6점
쿠이 료코 지음, 김민재 옮김/㈜소미미디어

"던전밥"으로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는 구이 료코(쿠이 료코)의 국내 첫 번역 출간작입니다. 200페이지를 갓 넘는 분량에 무려 33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2페이지에서 10여 페이지 남짓한 작품들의 분량을 볼 때에는 쇼트쇼트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네요.

참고로 쇼트쇼트, 쇼트-쇼트는 사전적인 의미로 원고지 10매 안팎의 아주 짧은 소설을 지칭합니다. 꽁트보다 더 짧은, ‘마이크로픽션’ 혹은 장편(掌篇)에 해당하는 형식입니다. 호시 신이치가 이 장르의 대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제가 무척 좋아하는 장르이기도 합니다.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을 뿐더러 의표를 찌르는 반전, "기묘한 맛" 류의 독특함 가득한 작품이 많을 뿐더러 평범한 일상 드라마는 물론이고 SF, 추리, 범죄 스릴러, 판타지 등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성이 마음에 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호시 신이치나 아토다 다카시 같은 몇몇 쇼트쇼트 대가의 특징일 수도 있겠지만요.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도 이러한, 제가 알고 있는 쇼트쇼트의 특징이 가득한 작품들입니다. 정말 "기발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독특한 아이디어를 보여주고 있거든요. 그중 인상적이었던 것을 몇 가지 소개한다면,

  • 자신을 멀리하던 사장 딸이 사실은 자기를 너무나 사랑하는 변화무쌍한 아가씨였다는 것을 타임머신 원리를 이용한 데이터 전송이라는 설정과 함께 전개하는 "연인 카탈로그"
  • 일 년에 한 번 용을 먹는 마을에서 여러 가지 용고기 요리(회에서 숯불구이, 국물요리까지!)를 즐긴다는 "용의 역린"
  • 주인공의 인사를 무시한 직장 동료에 대해 마음속에서 법정을 열어 재판을 통해 결론을 내린다는 내용을 아가씨의 귀여운 심리 묘사와 함께 선보이는 "대리 재판"
  • 애완동물 아기를 키우는 이야기로 짙은 여운을 남기는 "봄볕"
  • 왕따에 대한 인형극을 창작하다가 토끼 나라에 대한 거대한 서사극을 만들어내는 "머나먼 이상향"
  • 편의점 음식만 먹는 서민스러운 삶을 살던 친구가 프렌치 코스 요리를 먹고 난 뒤 요리에 대해 기이하게 평가하는 "특식"
  • 우연히 찾아간 산속 식당에서 주위 손님들이 파란만장한 행동을 펼친다는 "이런 산 속에"

등이 그러합니다. 전체적으로 유머러스하고 밝은 분위기의 이야기들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나저나, 이런 이야기를 창작할 때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는지 너무 궁금해지네요.

쇼트쇼트의 또 다른 특징인 다양한 장르를 펼쳐 보여주고 있다는 장점도 큽니다. SF, 판타지, 구루메(?), 기이한 법정물, 일상계 드라마에 러브 코미디, 심리 썰렁물까지 오만가지 장르를 오가거든요. 장르에 따라 작풍을 바꾸는 그림 실력도 높이 평가할 만하고요. 정통 판타지스러운 고풍스러운 펜화, 전형적인 순정만화 스타일의 작화, 그리고 평범한 스타일의 일상계스러운 그림 등이 장르마다 적절히 어우려져 보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그러나 호시 신이치의 쇼트쇼트는 유명 거장의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졸작이 의외로 많은 편인데, 이 단편집 수록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작품이 빼어나지는 않아요. 아주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건 아니고, 거장의 졸작보다는 볼 만한 작품이긴 합니다. 그러나 뻔한 아이디어, 뻔한 전개의 식상한 이야기들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예를 들자면 사랑을 알게 된 인공 두뇌의 이야기라든가 상위 문명에 납치당해 사육당하는 미녀의 이야기가 대표적이겠죠. 흔한 이야기로 작가만의 별다른 상상력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집이라 생각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여러 가지 장르의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군청학사" 시리즈가 떠오르는데, "군청학사"보다는 훨씬 짧은 호흡의 이야기로 여운은 짙지 않지만 스피디하게,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차이점은 있습니다. 단편을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06/09/18

[번역] 이콜 Y의 비극 (2)

 제 1 막


노리츠키(法月) 경시가 세타가야구 키유텐의 범행현장에 도착한 것은 같은날 오후 아홉시 경이었다. 경시1과 소속이기에 골든위크라 하더라도 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살인사건의 달력에 연휴는 없기 때문이었다.

사체가 발견된 것은 "벨코포"라는 맨션으로 지도 위에는 세타가야구의 북서부, 코우슈 거리와 기치죠우지 거리가 교차하는 곳에 위치한 건물이었다. 게이오센의 치토세가라스야마 역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미타카, 쵸우후 양 시와의 경계가 바로 코앞, 지어진지 10년 정도의 저층 맨션으로 자동 잠금 장치 (오토록) 등의 방법 설비는 없었다. 밤이었지만 대충 둘러 보기에도 부자들이 거주하는 고급 맨션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요 몇주간, 인접한 양 도시를 중심으로 외국인으로 추정되는 강도단에 의한 피해가 속출해서 부근 지역에 특별 경계가 발령중이었다. 그러나 여태까지 습격당한것은 편의점과 점포 사무소 등으로 개인 주택에 침입한 예는 없었고, 시간대도 심야 위주로 초저녁때의 범행은 전무했었다. 물론 강도단에 의한 사상자도 있었지만 정황을 볼 때 이 사건은 관련 여부가 크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현관에 서서 경계임무를 맡고 있던 정복 차림의 세이쥬서 (成城署) 경찰요원이 경례로 경시를 맞으며 상황을 보고했다.

"수고많으십니다. 현장은 206호실. 이층의 제일 안쪽 방입니다"

경시는 보고를 받으며 우편함으로 거주인 이름을 확인했다.

[사카자키 요우스케, 미도리]

아이는 없는 젊은 부부 같았다. 살해된 것은 아내 사카자키 미도리 쪽인가? 경시가 들은 것은 젊은 여성의 교살사체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뿐으로, 피해자의 이름은 아직 듣지 못했었다.

206호실에는 한발먼저 도착한 구노우 경부가 현장의 지휘를 맡고 있었다. 감식과가 증거 보존과 채취작업을 하는 도중이라, 실내는 발디딜 틈도 없을 지경이었다. 경시는 작업에 방해되지 않게 하기 위해 조심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평범한 3LDK 타입으로, 피해자 여성은 마룻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전화를 놓아둔 사이드 보드가 바로 앞이었다. 옷은 운동복 상의에 청바지 차림. 운동복 상의의 견갑골 부근에 칼자루가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감찰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도착이 늦어지기 때문이겠지. 경시는 구노우 경부를 불러내어 여태까지의 조사 상황을 보고받기 시작했다.

"실내에 물건을 뒤진 흔적이 있습니다. 프로의 솜씨는 아니고요. 확실히 예의 무사시노강도단과는 확실히 수법이 다릅니다. 놈들의 범행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초보자가 있는 힘껏 방을 뒤진 듯 어질러 놓은 것 처럼 보입니다."
"강도사건쪽의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건가. 피해자는?"
"다치가와 아카네. 24세. 키치죠우지의 한 미니-코미 잡지의 편집을 하고 있었습니다"

구노우는 거실 가운데 놓여진 테이블에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테이블 위에는 워드프로세서로 인쇄된 원고가 쌓여 있었고, 원고에는 빨간색 볼펜으로 덧쓴 흔적이 남아 있었다. 노리츠키 경시는 아들의 방에서 이런 비슷한 물건을 자주 본 적이 있어서 잘 알고 있었다. 피해자는 습격당하기 직전까지, 인터뷰나 다른 뭔가 테이프를 들으며, 기사 수정같은 진지한 일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겠지.

"-그런데, 이 방 거주자와는 이름이 다르구먼. 누군가?"

계속 품고 있던 의문을 입에 담자마자 구노우는 그럴줄 알았다는 듯, 무언가 납득한 얼굴로 답했다.

"이곳 부부 중 아내의 여동생입니다. 오늘은 언니에게 부탁받아 집을 봐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편인 사카자키 요우스케는 회사의 출장으로 어제부터 집을 비우고 있었고요."
"옳커니. 그렇다면 원래 살고 있던 아내와 사람을 헛갈렸을 가능성도 있겠구먼. 첫 발견자는 누군가?"
"사카자키 미도리. 지금 말한 피해자의 언니입니다. 8시 반에 외출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아내 쪽이군. 그녀가 경찰에 신고한건가?"
"아뇨. 110번으로 신고한 것은 쯔부라야 아케미(円谷朱美)라고 하는 여성으로 이웃 205호의 거주자입니다. 전화도 여기가 아니라 옆집에서 걸려온 것입니다. 정확한 신고 시각은 오후 8시 35분입니다."

"곧바로 이웃집으로 달려가 도움을 요청한건가? 그럼 사카자키 미도리는 지금도 205호실에 있는건가?"
"예. 빈혈을 일으켜 침실에 누워있는 상태입니다. 이쪽에서 쉬게하려고 했었지만 거부하더군요. 이제부터 그녀와 직접 경찰에 신고했던 쯔부라야 아케미의 사정청취 입니다만, 경시님도 같이 가시겠습니까? 사카자키 미도리쪽은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상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요"
"같이 가자고. 그런데 시신의 상태도 신경이 쓰이는구먼. 감찰의는 아직 오지 않았나?"

경시는 피해자의 사체를 바라보며 물었다. 구노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곧바로 답했다.

"아까 조금 늦는다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연휴라서 일손이 많이 부족한 모양이더군요. 어쨌건 이곳은 감식반 여러분께 맡기고 먼저 저쪽 사정청취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감찰의가 도착하면 곧바로 알려달라고 말해놓겠습니다."

바로 옆집인 205호실의 거주자는 30대후반의 부부와 소학생의 아들까지 3인 가족으로 집구조는 이웃집과 완전히 똑같았다. 두사람은 거실로 들어갔다. 구청에 근무하고 있는 남편 쯔부라야 다카시는 휴일 밤 벌어진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아무말도 하지 않을 것 처럼 입을 앙다물고 있었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아내 아케미는 이웃에 면한 벽 한쪽에 기대어 옆집의 수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마도 이웃집의 참극 깊은 흥미를 보이고 있는 것이리라. 구노우 경부가 사카자키 아케미의 상태를 물었다.

"조금 더 누워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아직도 안색이 나쁘거든요. 얘 나오야! 너는 이제 곧 잘 시간이에요. 어른들의 이야기니까 빨리 너 방으로 가 주렴. 그런데 형사님. 이곳도 이제 위험한 동네가 되는건가요? 방을 완전히 헤집어 놓았던데. 그 외국인 강도단, 그놈들의 짓인가요? 도지사도 그런 이야기를 했던것 같아서, 하여간 무섭네요. 조금만 운이 나빴더라면 우리집이 습격당했을지도 모르잖아요?"

아케미는 그때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런데 이상하네요. 우리집은 오늘은 아침부터 유원지에가서 밤까지 집을 비워두고 있었거든요. 이웃집은 여동생이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왜 비어있던 우리집이 아니라 이웃집을 습격한 걸까요?"

경시는 그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은것 같다, 라고 말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노우는 천천히 수첩을 열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오늘 외출하였다고 했는데 어느 유원지입니까?"
"요미우리 랜드였어요. 게이오선으로 한번에 갈수 있기 때문인지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죠"

"귀가하신것은 몇시경입니까?"
"밖의 레스토랑에서 일찍 저녁을 먹었으니... 7시 30분 경이었어요. 돌아오자마자 옆집 초인종을 눌렀는데 대답이 없어서 그 때는 집에 없는건가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문 이미 그런 상태가 된 것이 아닌가 싶네요"

"돌아오자마자 초인종을? 뭔가 이상한 낌새라도 있었습니까?"
"아뇨. 택배가 올게 있었는데 혹 집을 비웠을때 배달이 오면 부재 시 옆집으로 배달해 달라고 했었거든요. 206호실에 물건을 배달해 놓았다는 연락표가 있어서 물건을 가지러 갔던 것 뿐이에요"

구노우는 순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고장, 혹은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기에 최근은 어느 택배업자도 물건을 옆집에 맡겨놓지 않는 것이 통례가 아닌가? 그러나 아케미는 바로 답했다.

"말씀드리자면 사가자키씨 집과는 친하게 지내고 있어서 이런 일은 전에도 몇번 있었어요. 별다른 문제도 없었고요. 문 밖에 짐을 그냥 두고 가버리는 것 보다는 이쪽이 훨씬 안심되지 않겠어요? 혹시 의심스러우시다면 연락표를 보여드릴께요"

아케미가 가지고 온 것은 택배업계 No.1인 대기업 야마네코 운송의 부재자 연락표였다. 고양이 얼굴을 모티브로 한 트레이드 마크로 유명한 바로 그 회사로, 연락표의 서명은 "벨코포 시모다 205호실 쯔부라야님"이었고 이어진 연결란을 보니 볼펜으로 "29일 17시 42분, 짐을 배달하였지만 부재중이셔서 206호실의 사카자키 씨에게 맡겨 놓았습니다"라고 기입되어 있었다. 담당자명은 이시와타리였었다. 노리츠키 경시는 연락표를 구노의 손에 돌려주고 206호실 상황의 상세한 것을 떠올려 보았다. 아케미가 물었다.

"부엌 입구 앞에 배달된 물건 박스가 놓여있지 않았나요?"
"네. 어쨌건 아주머니. 조금 이것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영업소에 문의하여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세요. 그 대신 우리 집 물건은 확실히 돌려주셔야 해요. 아직 이웃집에 놓여있는 상태라서... 두번째로 가지러 갔을 때는 이미 사카자키씨도 나도 그놈의 박스 따위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여서... 증거품의 압수라고 하시겠지만 요 다음에 박스까지 함께 돌려주셨으면 해요"
"좀 기다려 주십시오"

구노우는 손을 들어 아케미의 말을 가로막았다.

"잠깐, 두번째로 가지러 갔다니요?"
"그러니까, 사카자키 부인이 막 돌아왔을 때였어요. 아마 8시 반 정도였을까나... 밖의 통로에서 발소리가 들러와서 저는 밖으로 나가 아주머니를 불러 말을 걸었어요. 연락표를 보여주고 말했죠. 배달된 물건을 가져왔으면 좋겠다고, 7시 지나서 한번 벨을 울렸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까지 말이죠. 사카자키 부인은 이상하다는 듯이 '이상하네요? 동생에게 집을 좀 봐달라고 부탁해 놓았었는데요' 라고 말하고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그리고는?"

아케미는 턱에 손을 올리고 잠깐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사카자키 부인은 현관에 열쇠가 걸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 벨을 누르며 동생 이름을 불렀어요. 그래도 대답이 없자 '아카네 요것이 혼자서 돌아가 버린 것 같네요' 라고 불평하면서 백에서 자기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어요"

"그 때, 방 불은 켜져 있었나요?"
"아뇨. 그런데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동생의 구두가 있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란 듯 했어요. '얘가 불도 안 끄고 자고 있나보네. 동생이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해요. 짐은 지금 바로 가져다 드릴께요' 그런 이야기를 하며 사카자키 부인은 저에게 사과하면서 안으로 들어갔어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동생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곧바로 그게 비명으로 바뀌었고 사카자키 부인이 안에서 맨발로 뛰쳐나왔어요. 저도 정말 놀랐어요"

"그럼 동생분의 시체를 발견한 사카자키 부인이 이 댁에 도움을 요청하러 온 것이 아니라 반대였던 것이군요. 당신도 방안에 들어가셨나요?"
"예. 그럼 안되는 거였나요? 그래도 사카자키 부인이 '동생이.. 동생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방 안을 손가락으로 가르켜서, 듣는것 만으로는 뭐가 어떻게 된건지 알 수 없잖아요? 보통때는 항상 똑 부러지는 성격인 사람인데 그때는 정말 정신이 나간것 같았어요. 그래서 사카자키 부인을 복도에 남겨둔채 저도 안을 살짝 기웃거려 보았어요. 그랬더니 사람이 거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거 아니겠어요! 힐끗 보았지만 칼에 찔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다가가서 천천히 몸에 손을 대 보았지만 그때는 이미___"

아케미는 그 때는 입을 다물고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구노우 경부는 계속 물었다.

"피해자의 몸에 손을 댄 것 말고는 뭐 다른 물건을 움직이거나 만진 것이 있으십니까?"
"아뇨. 그때는 정말이지 더이상 그곳에 있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 버렸기 때문에 배달된 물건에 대한 것도 어느샌가 잊어버리고, 구두도 뒤집어 신은채로 그 집을 뛰쳐나왔어요. 밖에 있던 사카자키 부인도 끌어당기듯이 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집에 돌아왔죠. 사카자키 부인은 그 쇼크때문에 지금도 누워있고... 어쨌건 저는 남편이랑 아이가 도대체 무슨 일로 놀랐냐고 채근하는 것도 무시한채 110번을 눌렀어요. 그 뒤는 경찰이 출동했고... 그 때부터 이 집에서 한 발자욱도 나가지 않았답니다"

"역시 그렇군요. 그럼 그 전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7시 30분에 외출에서 돌아오셔서 8시 30분에 사카자키 부인이 귀가할때 까지 혹 옆집에서 사람의 목소리나 싸움소리같은 것이 들리지 않았습니까?"
"아뇨. 배달된 물건을 가지러 가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속 신경을 쓰고 있어서, 무슨 일이 있었으면 곧바로 눈채챘을 거에요"

남편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지만, 다카시는 대답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노우는 경시 쪽으로 고개를 돌려 뭔가 더 질문할 것이 있냐고 물었다. 경시는 조금 생각해 본 뒤 아케미에게 말했다.

"살해당한 사카자키 부인의 동생분과는 이전부터 면식이 있었습니까?"
"음.. 얼굴은 알고 있었어요. 자주 놀러왔기 때문에 몇번인가 복도에서 인사한 정도였어요. 이야기할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죠"

"사카자키씨 쪽은요? 어제부터 출장중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떤 일을 하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신쥬쿠의 여행 대리점에 근무하고 있어요. 그래서 출장이 많기도 해서 자주 보기도 힘들죠. 언제나 집에 있어서 왕래하는 부인과 비교해 본다면 사카자키씨는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에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사카자키 부인 주변에 최근 뭔가 이상한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는 않으셨습니까?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던가, 가까운 곳에서 수상한 사람을 보았다던가"
"스토커 같은 것 말인가요? 강도 사건이 아니었나요? 뭐 특별히 생각나는 것은 없지만요. 아 그렇게 말한다면-"

"뭔가 생각나는 것이라도?"
"음, 지금 말씀하신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요"

아케미는 순간 눈빛이 변하며 입을 살짝 가렸다. 그리고 사카자키 미도리가 쉬는 침실쪽을 한번 쳐다보고 속삭이듯 말했다.

"최근 사카자키씨는 남편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눈치더라고요. 언젠가는 불륜이라도 하지 않는가 의심하며 어떻게 하면 되는지 심각하게 물어본적도 있어요"
"그럼 안돼잖아 아케미.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사카자키씨 부인이 듣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야?"

쯔부라야 다카시가 아내를 타박했다. 아케미는 남편의 얼굴과 침실쪽을 교차하여 바라보고 '하지만-' 이라고 말한 후 금새 고개를 숙인채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다행히 침실쪽에서는 별 반응도 없었지만 순간 거실에 불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벨이 울리는 소리였다. 벨소리가 울리자마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아케미가 벌떡 일어나 현관 문을 열러 갔다. 곧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형사님. 지금 감찰의가 도착했다고 하네요-"

당번의 감찰의는 얼굴은 익히 알고 있는 나카지마라는 남자였다. 아들과 같은 연배로 노리츠크 경시로부터 보여지기에는 아직 너무 젊은 나이였다. 그는 도착이 늦어진 것과 그 이유를 잠깐 보고한 뒤, 곧바로 사체의 검안에 들어갔다.

"등의 찔린 상처로부터 출혈은 별로 없습니다. 그 대신 입에서 많은 피를 토한 흔적이 보입니다. 칼끝이 폐를 상처내지 않았나 싶네요. 칼이 일종의 다리 역할을 해서 폐 속의 혈액이 역류해 호흡 곤란으로 질식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직접적 사인입니다"
"즉사했나?"

구노가 서둘러 질문했다. 나카지마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뇨. 찔린 순간부터 사망할때까지 어느정도는 의식이 있었을 겁니다. 왼손이 피를 토하는 것을 막으려고 입을 누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바닥 위를 기어서 이동한 흔적도 있고요. 몸 아래 숨겨져 있지만, 자 보십시오. 몸에 눌려 가려졌지만 확실한 흔적이 있습니다"

경시는 나카지마가 가리킨 핏자국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럼 찔린 장소는 어디라고 생각하나?"
"테이블 앞에 앉아 뭔가 쓰고 있는 도중에 뒤에서 갑자기 습격당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불시에 찔렸달까요. 그 외의 외상은 없고, 찔리기 전에 피해자가 저항한 흔적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칼의 각도와 사체의 자세등을 고려한다면 그렇게 단정지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역시나"

감찰의의 답이 자신의 추정과 일치한것에 경시는 만족을 표현했다.

"사이드 보드에 전화가 놓여 있어서 바닥을 기어서 이동해서 전화기에 손을 뻗어 보았지만 너무 높았던 거군. 피해자는 전화로 구조를 요청하려 했지만 수화기에 손이 닿기 전에 힘이 빠져버린것 아닐까?"
"그렇군요- 아니 조금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손에 뭔가 쥐고 있습니다"

나카지마는 서둘러 사체의 오른손을 조사했다.

"볼펜같습니다. 엄청나게 꽉 쥐고 있네요. 손을 조금 벌려 보겠습니다"
"신중히"

구노가 답했다. 나카지마는 감촉을 확인하며 사체 오른손 손가락을 한개 늘려보고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후경직이 시작됐습니다. 이 느낌은 사후 약 3시간 정도겠네요"

경시는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9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 사망 추정 시각은 6시 반이라는 것인가"
"전후 30분 정도 오차를 둔다면 6시부터 7시 사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법해부에 들어갈때 까지 확답은 할수 없지만 어쨌건 그 정도일 겁니다- 꺼냈습니다. 이것은 그쪽에서 처리해 주십시오. 유체쪽은 이제 운반해 가도록 하겠습니다"

피해자가 쥐고 있었던 것은 버튼식의 2색 볼펜이었다. 색은 적과 흑. 검은 쪽의 버튼이 눌러져 있었고 앞의 볼 홀더가 밖으로 튀어나와있는 상태였다. 경시는 구노우와 얼굴을 서로 마주 보았다.

"뭔가 써서 남기려 한 것은 아닐까? 범인의 이름이라던가"
"그럴지도 모르죠"

곧바로 경시는 사체 주변을 조사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사이드보드의 전화 옆에 놓여진 메모패드와 펜 거치대 셋트였다. 팬 거치대에는 뚜껑을 덮은 검은 사인펜이 꽂혀 있었다.

메모패드의 제일 위의 종이는 새하얀 백지였다-

경시는 낙담의 한숨을 토했다. 그러나 곧바로 매보패드 우상단에 찢긴 메모지의 일부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가 바로 전의 한장을 급하게 찢어낸 것 같았다. 경시는 주머니에서 돋보기를 꺼내어 메모페드를 불빛에 비추어 자세히 보고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메모 용지 한 가운데에 뭔가 눌러 쓴 것 같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