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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1

불티 - 시즈쿠이 슈스케 / 김미림 : 별점 2.5점

불티 - 6점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미림 옮김/arte(아르테)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쿄 지방법원의 판사 가지마 이사오는 일가족 살해 혐의를 받던 다케우치 신고 재판을 마지막으로 퇴관했다. 그의 마지막 판결은 무죄판결이었다. 그리고 2년 뒤, 다케우치기 가지마 이사오 바로 옆 집으로 이사왔다. 가지마 가(家)의 모든 대소사에 성의를 다하는 그에게 집안 사람들 모두는 호감을 느꼈지만, 며느리 유키미만은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는데...

법률 미스터리로 유명하다는 작가 시즈쿠이 슈스케의 장편입니다. 한번 손에 잡으면 내려 놓을 수 없다는 뜻의 '철야책' 이라는 별명이 있다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조금 다르더군요. 작가의 이력, 그리고 초반부의 판사 가지마 이사오의 재판과 그에 관련된 딜레마 때문에 당연히 법률 미스터리인 줄 알았는데 싸이코 살인마 다케우치와 가지마 가(家)의 대결을 그린 전형적인 서스펜스 스릴러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대결에서 전해지는 서스펜스가 읽는 내내 넘쳐서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해 주기 때문에 '철야책' 이라는 별명에는 충분히 값합니다.
다케우치가 가지마가(家)와 친하게 지내기 시작하면서 유일하게 비협조적인 인물인 며느리 유키미를 배제해 가는 첫번째 과정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의심들이 쌓여 진상을 알게 된 어머니 가지마 히로에가 위험에 처하는 전개, 뒤이어 집안일에 무심했다가 뒤늦게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가지마 이사오와 그를 돕는 유키미의 활약이 교차되는 후반부까지 정말로 흥미진진한 덕분입니다. 다케우치가 수상하다는건 상당히 초반부터 암시되어서, 어떻게 남은 500여 페이지를 끌고 갈까 궁금했는데 여러가지 장치를 통해 흥미를 더하는 솜씨가 일품이에요. 특히 유키미 배제에 그녀의 딸 마도카를 이용하는 아이디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쿠르트로 밤 잠을 못 자게 하고, 창문으로 보이는 자기 집에서 약간의 조작으로 마도카가 인형 놀이를 과격하게 하게끔 유도하면서 유키미의 폭행을 끌어내는 식인데 치밀하면서도 설득력이 높아 감탄했습니다.

아울러 싸이코 다케우치의 설정도 독특해서 나름의 재미를 선사합니다. 사실 착하고 평범해 보였던 지인이 알고 보니 싸이코 살인자더라.. 라는 설정의 작품은 쎄고 쎘죠. 스플래터 고어 호러가 아닌 싸이코 살인자가 등장하는 대부분의 작품이 아마 비슷한 설정일 거에요. 주인공이 살인자의 정체를 알아내지만 주위 사람들은 주인공 말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주인공이 살인자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다는 식의 이야기 전개 역시 대부분 비슷할테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살인자 다케우치가 자신의 재력을 활용하여 상대방에게 무한에 가까운 호의를 베풀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상대방으로부터의 애정과 호감을 강요하는 인물이라는 설정이 큰 차이점입니다. 한마디로 애정과 호감을 자신의 돈과 성의로 사려고 하고, 이를 거절당했을 때 격렬한 살의를 품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호감을 자신만의 기준으로 착각하는 스토커, 혹은 자신의 편의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싸이코패스소시오패스들처럼 자신의 이득을 중시하는 인물이 아니라는게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다케우치는 가지마 이사오가 재판관 시절 무죄 판결을 내린 피고 출신이라는 설정도 새롭습니다. 이는 다케우치가 가지마가(家)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정말 무죄로 보이는 다케우치의 묘사를 통해 독자들도 정말 진범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중반부의 가장 큰 승부인 피해자 유족 이케모토와 대면한 다케우치가 이케모토가 진범이 아니냐고 되묻는 장면이 특히 그러합니다. 주인공인 유키미마저 속아넘어갈 정도이니 독자야 오죽 하겠습니까.

하지만 단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원죄 운운한다던가, 재판관으로서 사형 선고를 내리는 심경을 그려내는 등의 법률 미스터리스러운 설정은 내용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불필요한 묘사였습니다 제목의 '불티' 부터가 사건의 원인이 된 다케우치의 무죄 판결을 뜻하는데(아마도), 내용만 보면 이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에 다케우치를 스스로 단죄하고 죗값을 받는 가지마에 대한 에필로그도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자기 눈 앞에서 아들을 죽이려 하는 살인자를 누가 가만 놔 두겠어요? 이러한 전개를 통해 사형 선고 등 현재 사법 시스템의 문제와 딜레마를 짚고 넘어가려면 앞부분에서 가지마 이사오가 사형 선고에 극도의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더 드러냈어야 합니다. 현재 수준으로는 죄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걸 간접 살인이라고 생각하던 인물이 스스로 사람을 죽인 상황에 대한 딜레마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는 억지로 법관 설정과 모호한 주제 의식을 끼워 넣은 탓이 큽니다. 그냥 평범하고 착하게만 살아온 동네 할아버지가 주인공이었다면 그럴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분량과 내용도 훨씬 깔끔했을테고요.

그 외에도 다케우치의 무모한 범죄가 이어지는 와중에 그가 수상하다는 걸 가지마 이사오가 몇일에 불과한 조사로 알아내는 전개는 경찰과 검찰이 대체 무엇을 했는지 의심을 품게 만들며, 사건의 핵심인 다케우치 등에 나 있던, 도저히 혼자서 낼 수 없는 상처를 낸 트릭도 솔직히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방망이에 줄을 묶어 기둥을 축으로 회전시켜 등을 때렸다는 건데... 이 정도로 세 명이나 살해당한 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무죄 판결이 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히로에의 시어머니 간호와 고부 갈등, 유키미의 집안 문제도 사족입니다. 시어머니의 죽음이 사건의 도화선이며 장례 일정과 이야기가 발 맞춰 돌아가기는 하지만 시어머니, 시동생 이야기는 뺐어도 됐을 것 같아요. 읽으면서 가장 짜증이 났던 부분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읽는 재미는 충분하지만 단점도 있기에 감점합니다. 그래도 드라마화도 두 번이나 되었을 만큼 재미만큼은 확실하니 조금 고급진(?) 킬링 타임용 소설을 찾으시는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참고로, 두번째로 제작된 드라마는 다케우치 역을 춤추는 대수사선의 마시타 유스케 산타마리아가 연기했다니 한 번 보고 싶어지네요. 조금 조사해보니 결말 부분이 다르긴 하지만요. 가지가 이사오가 마지막에 다케우치에게 진짜 유죄 판결을 내리고 다케우치는 자살을 택하는 결말인데 앞서 말씀드렸던 제가 느꼈던 문제점 - 가지마가 살인을 저지르고 죗값을 받는다는 와닿지 않는다 - 을 제작진도 공감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2011/02/19

호수 살인자 - 로베르트 반 훌릭 / 구세희 : 별점 2점

호수 살인자 - 4점
로베르트 반 훌릭 지음, 구세희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도 근처 고을 한위안의 수령으로 부임한 디공을 위해 마을의 유지인 한우형은 호수 위에서 큰 연회를 열었다. 연회 도중, 기녀 펜토화가 넌지시 디공에게 무언가 중요한 것을 알려준다고 했는데, 직후 펜토화가 살해당했다. 디공은 사건을 조사하면서 무언가 중요한 음모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쇠못 살인자 (쇠못 세 개의 비밀)""쇠종 살인자 (종소리를 삼킨 여자)", 그리고 블로그에 리뷰를 쓰지는 않았지만 읽은 것이 확실한 "황금 살인자"에 이은 디판관 시리즈. 작년에 국내 개봉했던 영화 "적인걸"의 실제 모델인 디런지에(디젠지에) 이야기입니다. 포청천의 라이벌로 유명하기도 하죠. 드디어 국내에 소개된 시리즈를 모두 완독했네요.

그러나 시리즈 중에서는 많이 처집니다. 다른 작품들은 여러 개의 단편이 모여 있는 형식이었던 반면, 이 작품은 기녀 펜토화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데 별로 재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비약과 과장, 그리고 작위적인 느낌도 강합니다. 기녀가 죽은 이유를 반란조직 '백련회'와 연결시키는 과정이 매끄럽지 못하며, 범인이 그 사실을 눈치챈 것이 '독순술' 덕분이라는 것, 기녀가 곧바로 사실을 알려주면 될 것을 왜 기보를 이용한 암호로 전달하려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 등이 대표적입니다. 핵심 트릭인 암호 자체도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입니다. '죽림서생'의 정체, 펜토화와 범인의 관계 및 범인의 변장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였고요.

또한, 작중 두 번째 사건인 '신부 실종 사건'은 사건 자체가 비합리적입니다. 첫날밤 관계 때문에 신부가 죽는다? 그리고 무리한 고발로 거대 조직의 수장이 스스로의 무덤을 판다는 것도 말이 안 되죠.

물론 첫 등장하는 제3형리인 타오간의 등장과 활약은 눈여겨볼 만하고, 원래부터 디공의 심복이었던 마중 - 차오타이 컴비의 모험은 포청천 시리즈의 전조를 보는 듯한 재미가 느껴지긴 합니다. 아울러 시리즈의 특징이기도 한 고대 중국의 한위안을 무대로 한 세밀한 묘사도 여전하고요. '개방'을 암시하는 묘사까지 등장할 정도니, 디테일 하나만큼은 최고급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전작들에서 느꼈던 추리적인 재미를 느끼기 어려웠고, 디공의 활약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전작의 광팬이 아니시라면 굳이 찾아 읽을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2014/12/15

반가운 살인자 - 서미애 : 별점 2점

반가운 살인자 - 4점
서미애 지음/노블마인

한국의 여성 추리 작가인 서미애의 단편선입니다. 일상계 범죄 스릴러에 가까운 작품들로 총 10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표제작이 영화화되기도 해서 궁금하던 차에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영 제 취향은 아니더군요. 이야기들의 설득력이 부족해서 감정이입이 힘들었던 탓입니다. 거의 모든 작품들에서 천편일률적인 똑같은 심리 묘사가 등장하는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누군가에게 살의를 품은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는 모두 다른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똑같습니다.

아울러 작품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도 잘 모르겠어요. 정통파 본격 추리물도 아니고, 기묘한 맛의 반전물도 아니고, 스릴러도 아니고... 굳이 분류하자면 범죄가 테마인 드라마가 대부분인데 그렇게 접근하기에는 묘사력이나 깊이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도진기 작가의 작품집처럼 최소한 한두 작품이라도 아주 뛰어난 작품이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그렇지도 않고요.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 정통 추리물이나 스릴러 애호가분들께 상기의 이유로 권해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가운 살인자"

보험금 때문에 사고로 죽어야 하는 가장이 자신을 죽여줄 연쇄살인자를 찾아다닌다는 내용입니다. 

솔직히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지요.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사고로 위장한 자살을 연구하는 게 당연합니다. 연쇄살인마가 어디서 나올 줄 알고 헤매고 다닙니까? 그거 쫓아다니면 오히려 운동이 되어서 더 오래 살겠네요. 아울러 재미를 위해서라면 연쇄살인자의 정체라던가, 이야기의 흐름에서 반전이 한번 정도 나와줬어야 합니다. 

영화화가 되었다고 해서 잠깐 조사해보았는데, 사뭇 다른 각색으로 제작된 것 같더군요. 영화는 보지 않았지만 연쇄살인마를 찾아다니는 백수가 연쇄살인마로 몰린다는 영화의 설정이 더 나아 보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남편을 죽이는 서른 가지 방법"

남편을 죽이는 방법에 골몰하던 주부가 실제 남편이 죽은 것을 알고 당황하다가, 완전범죄 이야기로 넘어가는 작품입니다. 정신과 의사와 주인공의 관계가 드러나면 꼬리가 밟힐게 뻔해서 잘 짜여진 이야기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수록작 중에서 추리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작품입니다. 나름 반전이 있다는 점도 괜찮았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냄새 없애는 방법"

냄새에 민감한 여주인공이 이웃집의 개 때문에 이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그런데 주인공부터 정상이라 하기 힘들 정도로 예민해서 감정이입하기 힘들었습니다. 나중에 보면 거의 초능력 수준으로 묘사되는데, 이럴 거면 슈퍼히어로물을 만드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또 공동주택에 살면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할 것이 있는 게 당연한 상식이며, 단지 6개월치 월세를 선불로 주었다고 이사를 고려하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피냄새를 지우는 방법을 알게 된 204호 남자가 덕분에 연쇄살인을 이어갈 수 있었다는 반전이 있기는 한데 대단하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딱 하나, 남자의 이름이 "유영철"이라고 밝혀지는 정도만 괜찮았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살인 협주곡"

부부가 서로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으로 앞서 이야기한 천편일률적인 심리묘사가 이어져서 지루합니다. 서로 미워하는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왜 이혼 같은 손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는지도 설명되지 않아서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차라리 블랙코미디로 풀어나가는 게 나았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이전에 읽었던 "완벽한 부부"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완전범죄를 계획하다가 둘 다 죽는다는 걸작 단편과 굉장히 유사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예요. 에필로그까지 완벽했던 해당 작품과 비교할 때 완성도도 더 낮아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정글에는 악마가 산다"

파파라치로 돈을 벌려는 찌질이에게 닥친 가혹한 현실을 다룹니다.

최근 이슈인 수원에서 발견된 토막 살인 사건과 약간 겹쳐지는 부분이 조금 있어서 신기했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공통적인 문제는 여전합니다. 장기 밀매를 하는 범인들이 시체를 서툴게 처리한 이유, 주인공이 사건의 핵심에 접근할 때 무방비로 접근하는 이유 등 설명되지 않는 것도 너무 많고요. 채팅 프로그램이 트리거가 된다는 아이디어 하나만 신선했을 뿐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숟가락 두 개"

평생 중 교도소 생활이 더 길었던 전과자와 벙어리 아가씨가 가족이 된 뒤 벌어진 가혹한 현실을 다룬 일종의 드라마입니다. 김성종 선생님의 "어느 창녀의 죽음"이 떠올랐는데, 약간 억지스러운 감동 외에는 별다른 반전이나 극적 요소가 없어서 감히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너무 뻔하기도 했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녀만의 테크닉"

친구가 자기의 남자를 빼앗았다고 생각한 여인의 납치극으로 시작되어, 다중인격 백합물로 끝나는 이색작입니다. 아무런 복선 없이 급작스럽게 진상이 드러나는 구성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광기 묘사도 별로 새롭지 않았고요. 차라리 완벽한 서술트릭물로 꼼꼼하게 작업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비밀을 묻다"

불륜 관계였던 친구 남편의 죽음을 파헤치려는 프리랜서 방송작가의 이야기. 촬영 테이프에 찍힌 자동차 번호판과 친구의 지인은 별로 중요한 단서로 생각되지 않으며, 경찰이 유력한 용의자인 아내의 친구에 대해 조사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근거가 설명되지 않는 등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그나마 조금 괜찮았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경계선"

왕따와 원조교제 소녀의 기이한 교제와 학교 일진의 죽음에 얽힌 진상을 다룬 작품입니다. 핸드폰을 숨겨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반전은 괜찮았지만 그 외의 요소는 사족에 불과합니다. 원조교제 소녀는 당췌 왜 나왔는지도 잘 모르겠네요. 콩가루 집안의 설정은 나쁘지는 않았지만 작품과는 별 상관없는 내용이었으니까요. 가족관계의 회복을 그린 것도 아니고... 뭔가 다른 미디어믹스를 노린 티도 너무 납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거울 보는 남자"

살인자의 관상이 따로 있다는 뻔한 아이디어를 현대적으로 풀이한 설정은 나쁘지 않았지만, 전개의 비약이 너무 심해서 마음에 들지 않네요. 교수의 분노나 주인공의 범죄가 딱히 설득력 있어 보이지도 않았고요. 좀 더 짧고 임팩트 있게, 서늘하게 써야 했을 작품이 아닌가 싶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2014/09/25

인터뷰 - 루드비코 : 별점 4점

인터뷰 - 8점
루드비코 글.그림/세미콜론

긴 무명 시절을 거친 뒤 단 한 권의 책 "주황색 스카프"로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올랐지만, 이후 깊은 슬럼프에 빠져 아무런 영감을 얻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고 있는 소설가를 삼류 기자가 찾아왔다. 원래 인터뷰를 극도로 싫어하지만, 차기작을 구상하던 중 독자의 솔직한 평가를 듣고 싶었던 작가는 구상 중인 소설을 듣고 감상을 말해달라는 조건으로 인터뷰를 수락했다. 

"인터뷰"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 대화 장면과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 이 두 가지 틀로 이루어진 액자식 구성의 만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현실과 작가의 이야기는 서로를 반영하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여버리는데… (알라딘 책 소개 인용)

평상시에 자주 찾아보는 잠뿌리님의 리뷰를 통해 알게 된 후 독파한 웹툰.

미국 만화(혹자들이 그래픽노벨이라 칭하는)를 연상케하는 정교한 일러스트풍 작화도 좋지만, 내용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슬럼프에 빠진 작가가 자신을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온 기자에게 자신이 창작했던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주며 평을 요구하는데, "헝가리 사진사", "작은 마을의 요괴", "양목장의 살인자"라는 세 가지 이야기 모두 재미있고 완성도도 높기 때문입니다. 특히 "양목장의 살인자"는 그냥 이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잘 만든 호러 스릴러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짜여졌더군요.
또 이야기가 개별적인 하나하나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경험과 현실에서 비롯된 일종의 연작들이며 실화라는 것이 드러나는 전개 역시 굉장히 흡입력 있습니다. 정말이지 숨 돌릴 틈 없이 읽어버렸네요.

허나 하나하나의 이야기 완성도가 높은데 구태여 이걸 묶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었어야 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기기는 합니다. 예를 들자면 "양목장의 살인자"가 앞의 "헝가리 사진사"와 이어진다는 마지막 장면은, "양목장의 살인자"라는 하나의 이야기만 놓고 보면 완전한 사족이었던 탓입니다.

그래도 이러한 사족(?)도 "인터뷰"라는 작품 전체의 완성을 위해서 꼭 필요한 부분이라는 것은 확실하며 작화, 내용 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완성도 높은 웹툰임에는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추후 유료화되더라도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에요. 어울리는 BGM 정도만 제공해 준다면 더욱 좋을 테고 말이죠. 아직 다음에서 무료로 볼 수 있으니 보지 못하신 분들은 서두르시길.

아울러 루드비코는 개그만화 그리는 엽기토끼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뛰어난 실력을 갖춘 작가였다니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앞으로도 멋진 작품을 많이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작가의 인터뷰를 통해 이 작품은 "부조리 만화"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작가가 언급한 "부조리극"은 연극적인 특수성이 강하기에 이 "인터뷰"라는 작품은 결과물만 놓고 보면 부조리극이 아니라 전형적인 스릴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2011/09/03

연쇄살인범 파일 - 헤럴드 셰터 / 김진석 : 별점 3점

연쇄살인범 파일 - 6점
헤럴드 셰터 지음, 김진석 옮김/휴먼앤북스(Human&Books)

연쇄살인의 정의에서 시작해 수많은 연쇄살인범들의 사례는 물론 그들의 최후와 미결 사건들, 그리고 연쇄살인범과 관련된 다양한 서브컬처까지 담아낸,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연쇄살인 백과사전입니다.

과거 콜린 윌슨의 저서에서 접했던 내용을 가볍게 뛰어넘는 방대함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푸른수염 질 드레, 마리 드 브랭빌리에 등 역사적 인물에서 시작해 17~19세기를 거쳐 2000년대까지 거의 전 시대를 망라합니다. 슈퍼스타이자 원조 격인 잭 더 리퍼는 물론, 샘의 아들 버코위츠, 보스턴 교살자 드살보, 언덕의 교살자들 비안치와 부오노, 고속도로 살인자 보닌, 새크라멘토의 뱀파이어 데이비드 카펜터, 미친 짐승 안드레이 치카틸로, 캔디맨 딘 코얼, 밀워키의 식인종 제프리 다머, 달빛 광인 앨버트 피쉬, 살인 광대 존 웨인 게이시, 플레인필드의 시체도둑 에드 게인, 고릴라 살인자 넬슨, 소년 미치광이 제시 포메로이, 나이트 스토커 리처드 라미레즈, 붉은 거미 루시안 스타니악, 조디악 등 그 수를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연쇄살인범들이 소개됩니다.

또한, 서구에 집중된 다른 저서들과 달리, 타 문화권 범죄에 대한 정보가 상세하게 담긴 점도 마음에 듭니다. 20세기 최악의 연쇄살인범 유력 후보 중 하나인 콜롬비아의 루이스 알프레도 가라비토(1992년부터 7년 동안 140명 이상 살해), 아이들을 100명 죽이는 것이 목표였고 결국 달성했다는 파키스탄의 자베드 이크발, 안데스 산맥의 괴물 페드로 로페스(110명을 살해했다고 자백), 미해결 상태인 이탈리아 플로렌스의 괴물 사건, 중국의 매춘부 살인자 리 원시엔(홍콩에 떠내려온 잔혹한 피해자의 사체로 서방 세계에 정체가 알려짐) 등의 정보는 다른 책에서는 접하기 힘들었거든요. 추후 증보판에는 "한국의 연쇄살인"에서 다룬 범죄자들이 추가되면 더욱 완벽해질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과학적, 역사적인 고찰도 포함되어 있는 점도 눈에 뜨입니다. 깊이가 아주 깊거나 디테일하지는 않지만, 중세의 늑대인간 전설을 사이코패스와 연관 지은 것은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사체의 상태를 고려하면, 당시 사람들이 짐승의 짓이라 여긴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죠. 또한, 거의 대부분의 연쇄살인범들이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끔찍한 유년 시절을 겪었거나 머리에 외상을 입었다는 설명(물론 이러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모두 연쇄살인범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특정 인물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 프로파일링 관련 이야기 등도 흥미로웠습니다.

연쇄살인범들이 체포된 계기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경찰의 집요한 노력 외에도 범인의 실수나 순전한 우연이 작용한 경우가 많더군요. 대표적인 사례로, 릴링턴가의 괴물 존 레지널드 크리스티는 부엌 찬장에 시체 3구를 숨기고 벽지만 바른 뒤 이사를 갔다가 덜미를 잡혔다고 합니다. 또한, 영국의 ‘제프리 다머’라 불리는 데니스 닐슨은 토막 낸 사체를 화장실에 버리고 물을 내리다가 건물 파이프가 막혀 발각되었다고 하네요.

너무 많은 주제를 담아내려다 보니 편집이 다소 혼란스럽고, 목차와 색인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검색이 어렵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또한, 특정 인물이 여러 주제에 중복되어 등장하는 문제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쪽 방면에 관심이 있다면 반드시 소장할 만한 자료라고 생각됩니다. 충실한 각종 자료와 괜찮은 도판 등 여러모로 볼거리도 많은 편입니다. 너무 끔찍한 내용이 많아 남에게 권하기는 힘든 책이지만, 순수하게 자료적 가치로만 평가하면 별점은 3점입니다.

하지만 집에 이 책을 두면 근처의 원귀들이 모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드는군요...

2011/10/16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2 - 페르디난 트 폰쉬라크 / 김희상 : 별점 1.5점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2 - 4점
페르디난 트 폰쉬라크 지음, 김희상 옮김/갤리온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 / 김희상 : 별점 4점

1권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기에 후속작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1권에 비해 여러모로 부족했습니다. 전편만 한 속편이 나오기 힘들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네요.

가장 큰 문제는 작가가 어설프게 '문학'의 탈을 쓰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저는 논픽션을 기대했는데, 저자는 피해자와 가해자, 범행 당시 분위기를 상상해 하나의 소설처럼 구성했습니다. 나쁜 방식은 아니지만 균형을 잡는 데 실패하면서 소설도, 논픽션도 아닌 애매한 형태가 되어버렸어요.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에 의존한 전개가 지나치게 많아 천편일률적이고, 저자인 변호사의 역할도 거의 없어서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제목에서 기대할 법한 요소는 거의 없었죠. 이래서는 "뺑끼통"같은 한물간 범죄 실화 소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한, 등장하는 사건들도 1권에 비하면 충격적이지 못합니다. 성범죄나 폭력 사건이 많기는 하지만, 선악 구도가 뚜렷해 예상 가능한 전개로 흘러가 버렸습니다. 1권에서 보여줬던 '픽션을 능가하는 현실'이라는 충격을 주기엔 부족했어요. 어쩌면 1권에서 이미 밑천을 다 드러내버린 탓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15편의 이야기 중 아래의 몇몇은 전편 못지않았습니다. 

"아이들"

어린아이들의 잘못된 증언으로 인해 성폭행범으로 몰려 인생이 망가진 남자의 이야기. 아동 성범죄 관련 증언의 신뢰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자신의 집을 마약 제조 공장으로 빌려주었던 노인이 체포되었는데, 흉기 소지 혐의로 중형을 받을 위기에 빠집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칼을 휴대한 이유는 이가 하나도 없어서 음식을 잘게 썰기 위함이었습니다. 진상이 드러나는 법정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열쇠"

25만 유로라는 거금과 마약을 둘러싼 암투를 다루는데, 전체적인 분위기가 코믹합니다. 영화 "펄프픽션"을 연상시킬 정도로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심판"

인간 말종 남편 살인 사건에서 흉기와 가해자 체포 당시의 사진을 통해 의외의 진상을 밝혀낸다는 내용으로 한 편의 추리소설을 방불케 합니다.

하지만 위와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전체 분량의 1/4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는 기획된 후속작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1권의 성공에 기대 제작된 작품이라는 느낌이 강했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2017/10/03

살인자의 선택 - 에드 맥베인 / 박진세 : 별점 2점

살인자의 선택 - 4점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애니 분은 일하던 주류 판매점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그녀가 어떤 여성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당구를 즐기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쾌활한 여자인지,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 금욕주의자인지, 누군가의 정부이고 만나는 남자하고 모두 자는 방탕한 여자인지, 플라토닉한 연애를 즐기는 순수한 여자인지, 장애인 청년의 말벗이 되어주는 박애주의자인지..
경찰은 그녀의 전남편, 정부, 애인들을 샅샅이 조사하지만 그들 모두에게 확고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한편, 악덕 경찰 하빌랜드가 강도에게 살해되고, 이 사건을 수사하던 스티브 카렐라는 30분서에서 이동한 형사 코튼 호스의 실수로 용의자에게 죽을 뻔한 위기를 겨우 넘기는데...

87분서 시리즈 신작 장편(신작이라 함은 국내 소개 기준입니다)입니다. 

87분서 시리즈답게 수사 과정의 디테일은 마음에 듭니다. 그야말로 발로 뛰는 수사의 모범이랄까요. 또 팔색조 매력의 피해자 여성 애니 분 설정도 좋아요. 그녀의 전 남편, 애인, 친구들 모두에게 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기묘한 캐릭터로, 제목인 "살인자의 선택"은 그 중 하나였다는 설정인데 참 마음에 들었어요. 일본 만화에서는 히로인일 팔색조 슈퍼 우먼이 단순한 피해자라니! 시대를 앞서간 발상의 전환입니다! 이대로 마무리되기에는 아이디어가 아깝다 싶을 정도에요.
애니 분 외의 캐릭터들 묘사도 좋습니다. 그녀의 딸 모니카 분에 관련된 묘사들 - 특히 버트 클링과의 밀땅과 재치 -도 아주 귀엽고, 이번 이야기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코튼 호스의 데뷰도 아주 강렬하거든요. 코튼 호스의 첫 실수는 정말이지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후 시리즈에서도 가끔 언급될만한, 그런 이야기니까요.

작가 특유의 묘사력, 상상력도 여전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승강기 운전원이 수사 중인 버트 클리에게 하는 대사가 굉장히 기억에 남습니다. 그는 밖에 비가 오는 줄도 모릅니다. 빌딩 안 승강기에 8시 부터 저녁 5시까지 묶여있기 때문이지요. 점심도 빌딩 안 지하층 골방에서 먹고요. 때문에 그는 자기와 도시 사람들을 "두더지"라고 묘사합니다. 아이솔라는 현대판(작중 시점으로) 마굴이고, 모두 그 속을 기어다니는 벌레에 불과하다는건데, 지하와 실내만 오가는 상황만 놓고보면 지금도 그렇게 다르지는 않기 때문인지 굉장히 와 닿네요. 더위나 추위를 끔찍하게 그려내어 아이솔라라는 도시를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로 느껴지게 만든 전작들에 비하면 좀 부드러운 편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현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낸 명장면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장점은 이 정도일 뿐, 단점이 더 많습니다. 우선 추리적으로는 완전히 꽝이에요. 애니 분 사건은 전개 중 중요한 단서로 등장한 '괴편지'를 찾아낸 것이 해결 방법의 전부입니다. 전체 250여페이지 분량 중 마지막 10페이지 분량에서 해결되어 버려서 허무하기가 이루 말할데 없어요. 이 편지의 필적 감정을 통해 범인이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또한 운전면허 등록증 서명이 필적 감정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상황도 어설픈데, 정교한 알리바이 트릭을 준비한 범인이 충동적으로 자필 편지를 써서 스스로 범행을 드러낸다는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곁가지로 삽입되어 전개되는 하빌랜드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상 강도와의 다툼으로 허무하게 죽음을 맞는 상황도 어처구니 없을 뿐 아니라, 범인 찰스 페터릭의 행보가 여러모로 황당하기 그지 없으니까요. 그는 도난 차량을 도색하는 상황에서 정직하게 본명과 주소를 기입하는 등 모든 과정에서 정직 그 자체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때문에 찰스 페터릭을 찾아나가는 과정은 꼼꼼한 수사가 바탕이 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추리적인 여지는 전무합니다. 백번 양보해도 경찰까지 살해한, 도주 중인 강력범으로 보이지는 않았어요.

마지막으로 코튼 호스도 영 별로입니다. 작가 후기에 따르면 의도적으로 인기를 노리고 투입한 캐릭터인데도 불구하고요. 감식반에서 감식반원 피트와 말다툼하는 장면이 좋은 예입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에 대한 최소한의 매너가 느껴지지 않아서 화가 날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용의자를 체포하러 갔을 때는 노크를 한다? 이중인격자도 아니고 이게 뭔가 싶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인기없는 악덕 경찰을 퇴출시키고, 인기가 있을만한 새 캐릭터(코튼 호스)를 등장시키라는 편집부의 요구 사항이 뭔가 부족한 이야기에 결합된 결과물로 보입니다. 이야기 완성도가 낮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차라리 애니 분의 독특한 매력을 극대화시켜 다른 작품으로 썼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2023/10/27

백조와 박쥐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점

백조와 박쥐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망높은 변호사 시라이시 겐스케가 살해당했다. 형사 고다이와 나카미치는 시라이시에게 연락했던 구라키 다쓰로가 수상하다는걸 알아내었고, 수사를 통해 구라키 다쓰로의 자백 - 구라키가 30여년 전 하이타니를 살해했다는걸 알게된 시라이시가 당시 유력한 용의자로 자살했던 후쿠마 준지 유가족에게 사죄하라고 강요했기 때문 - 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자백과 동기에 의문을 품은 구라키의 아들 가즈마와 시라이시의 딸 미레이는 각자 조사를 통해 구라키의 자백의 헛점을 각자 찾아내었고, 이는 경찰의 재수사로 이어지는데...


히가시노 게이고 추천 작품 30선에 있길래 읽어보게된 작품.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 인생 30년 기념작이라고도 하네요.

상당한 분량, 그리고 여러가지 사회 문제를 작품을 통해 고발하는 사회파 추리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읽기 쉽다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최대 장점은 여전합니다. 경찰이 무고한 시민을 억압하여 자살하게 만든 33년전 사건과 구라키 다쓰로의 자백으로만 이루어진 현재의 시라이시 겐스케 살인 사건을 통해 검찰, 경찰과 가해자 변호인 모두 재판에서 이기는게 목적이지 진상에는 관심이 없다는걸 드러내며 비판하는 것을 비롯하여 살인죄 공소 시효 폐지가 정당한지, 피고인의 진심어린 사죄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부모, 가족이 저지른 범죄로 다른 가족과 자녀가 피해를 입는다는게 말이 되는지, 황색 언론의 어거지 취재와 발표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 등의 여러가지 이슈를 녹여내고 있는데 무겁지 않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구라키가 공들여 만들어서 헛점이 거의 없었던 자백이 사소한 단서들에 의해 거짓이라는게 하나씩 밝혀지는 과정은 볼만합니다. 경찰과 유족, 관계자들이 모두 힘을 합쳐 각자의 영역에서 조사를 진행하는 덕분에 설득력도 높았고요. 예를 들어 구라키는 시라이시 변호사에게 TV에서 유산 증여에 대한 방송을 보고 궁금한 점이 생겨 전화를 한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이것만 놓고 보면 아무런 문제없는 자백이지요. 하지만 그 날 TV에서 관련된 내용은 방송되지 않았고, 구라키가 가지고 있던 명함첩을 통해 이미 다른 변호사에게 똑같은 내용을 물어보았다는게 추가 조사 결과 밝혀집니다. 이런 점에서는 잘 만들어진 수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라키가 거짓 자백을 해서 죄를 뒤집어 쓴 이유, 시라이시가 살해당한 이유에 대한 설명도 명쾌하게 이루어집니다. 33년전 사건이 도화선인건 맞아요. 다만 구라키가 아니라 시라이시가 진범이었던 겁니다! 이를 우연히 알게 된 당시 누명을 쓰고 자살했던 후쿠마의 손자 안자이 도모키가 복수를 위해 범행을 저질렀던게 진상이고요. 반전이라면 반전인데, 이를 위한 구성이 탄탄해서 별로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의 딸과 가해자의 아들이 진상을 밝힌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힘을 합쳐 사건을 조사한다는 설정도 괜찮았습니다. 제목 그대로 완벽한 정 반대의 커플의 조합이니까요. 둘이 힘을 합침으로서 혼자라면 불가능했을 단서 - 시라이시 겐스케의 어린 시절과 가족 관계, 그리고 진짜 동기 - 를 알아낸다는건 그야말로 무릎을 칠만 했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둘 사이에서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싹트게 된다는 것도 독자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게 해 줍니다.

하지만 다른 작품들에서 많이 보아왔던 소재와 설정을 뒤섞어 보여주는 자기복제에 가까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오래전 사건이 동기가 된다는건 작가의 수많은 다른 작품에서 보아왔던 설정이며, 살인자의 가족이라고 고통받는 이야기는 작가의 "편지" 등에서 선보였고, 살인자의 죗값에 대한 이야기는 "공허한 십자가"에서, 촉법소년과 사적 제재에 대한 이야기는 "방황하는 칼날"에서, 피해자의 이동 경로가 핵심 단서 중 하나가 된다는건 "기린의 날개"나 "신참자"를 연상케합니다. 정 반대측에 놓인 청춘 남녀가 함께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은 "몽환화"와 거의 똑같고요.

또 하나씩 제시되는 단서들을 통해 구라키의 자백이 거짓이라는게 하나씩 밝혀지데, 이 단서들이 단계별로 소개되지도 않아서 '추리'적으로 좋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예를 들어 앞서 구라키가 시라이시를 만났던 계기가 거짓말이라는 것 등은 모두 제각각 독립적인 단서들이며, 친할머니에게 하이타니가 사기를 쳤기 때문에 살해했다는 시라이시의 동기도 시라이시 겐스케의 어린 시절 사진과 호적 등본이라는 독립적인 단서로 밝혀지거든요. 즉, 이 단서를 먼저 접했다면 중간의 다른 조사는 불필요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의 단서가 다른 단서로 이어지는 식의 정교하게 잘 짜여진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 가즈마와 미레이가 힘을 합치게 되는 과정에 따른 빌드업만 있을 뿐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시라이시를 살해한 안자이 도모키의 동기를 설명하는 일종의 에필로그는 최악이었습니다. 소년은 자기 가족을 불행에 빠트린 진범을 응징했다고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이는 거짓말이었고 단지 살인에 흥미를 느껴 저지른 범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라이시가 고백하지 않아서 어머니가 이혼을 한건 명백한 사실이니 소년은 시라이시에 대해 원한을 가질 이유는 충분해요. 구태여 중학생 싸이코패스 설정을 집어넣어 이야기를 흐릴 이유는 없었습니다. '촉법소년' 제도를 고발하기에는 안자이 도모키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부족해서 별로 와 닿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이미 충분히 고통을 겪은 후쿠마 준지의 딸 아사바 오리에가 불쌍하기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누명을 쓰고 자살하고, 어머니와 자기는 살인자의 딸이라며 손가락질 받다가 이혼까지 당했고, 연심을 품었던 남자(구라키) 는 사랑을 받아주지도 않고 죽었는데 아들까지 살인범이 되었다니.... 이렇게까지 기구하고 잔혹하게 쓸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있게 읽었고, 생각할 거리도 많지만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부르기에는 한없이 미흡했습니다. 다른 작품들을 읽으셨다면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 없습니다.

2022/09/25

살인자의 사랑법 - 마이크 오머 / 김지선 : 별점 2점

살인자의 사랑법 - 4점
마이크 오머 지음, 김지선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이는 20년 전, 자기 동네에서 벌어졌던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 이웃 글로버라는걸 알았지만 그가 도망가는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만보았던 과거 탓에 프로파일러가 되었다. 그러나 글로버는 그녀 주위를 끊임없이 맴돌며 회색 타이를 보내는 방식으로 자기의 존재를 계속 어필해 왔다.
그리고 현재, 시카고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을 돕기 위해 조이는 FBI요원 테이텀과 함께 수사팀에 합류했다. 언론에서 '목조르는 장의사'라 부르는 살인범은 살해한 여자들을 방부처리하여 시내에 유기하고 있었다. 조이는 프로파일링과 수사를 진행하면서, 사건의 범인이 20년 전 사건의 범인 글로버일 것이라 생각하는데....


시체를 가지고 장난치는 연쇄 살인마와 프로파일러, FBI 요원 컴비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 작품. <<살인자의 기억법>>과 비슷한 제목 때문에 영 손이 가지 않았던 작품인데, 읽어보니 생각보다는 훨씬 재미있었습니다 추리적으로 꽤 괜찮았던 부분이 많았던 덕분이지요.
우선 연쇄 살인마인 '목조르는 장의사'의 정체를 밝혀내는 과정이 흥미롭게 그려집니다. 초반에 방부처리된 사체를 보고 가짜 프로파일러가 범인은 전문 장의사일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체의 발목 부분이 부패했다는걸 조이가 간파하고 범인은 이러한 사체 처리에 익숙하지 않은 초짜라는걸 밝혀내는 첫 장면부터 그럴듯했어요.
연쇄 살인의 패턴을 파악하여 범인의 정체를 추리하는 과정도 여타 연쇄 살인물과 비슷하지만 추리의 여지는 많은 편입니다. 예를 들어 피해자들의 키가 전부 달랐는데, 딱 맞는 옷을 입고 있었던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범인은 살해 전에 피해자들에게 옷을 사 입혔던 겁니다! 첫 희생자 집 배관이 자주 역류했다던가, 납치되었던 피해자가 범인에 대해 재갈이 물린채 했던 말 등을 통해 범인이 배관공이라는걸 드러내는 식으로 단서 제공도 비교적 공정한 편이고요.

범인이 여성들을 방부처리한 이유와 유기한 시체들이 전부 우는 듯한 표정이었던 이유를 범인이 오랫동안 함께 한 '연인'을 꿈꿨고, 그녀와 헤어지게 되자 사체들이 슬퍼하는 것 처럼 연출했다는 황당무계한 추리도 나름대로 설득력있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그냥 범인의 광기 묘사에 집증하는 경우가 많은데, 비교적 객관적인 서술이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광기어리고 비참했던 유년 시절의 끔찍했던 학대가 원인이었다는건 다소 뻔했습니다만, 도화선이 된 사건은 동기로서는 충분하다 생각될 정도로 잘 그려져 있거든요.
아직 살아있는 피해자 목에 칼을 대고 협박하던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조이가 범인의 판타지를 활용하여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범인 앞에서 옷을 벗으며, 팬티에 감춘 권총을 테이텀이 잡게 만드는 마지막 클라이막스도 영화화하면 괜찮았겠다 싶더라고요.
현재의 사건과 병행 진행되는 20년 전 과거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글로버가 진범이란걸 확신한 뒤, 그의 집에 몰래 잠입해서 증거를 뒤지다가 글로버와 마주치는 장면, 글로버가 조이의 집에 쳐들어와서 자매를 협박하는 장면은 굉장한 서스펜스를 안겨줍니다. 21세기 작품다운 속도감있는 전개 역시 좋았어요

그러나 워낙 뻔한 설정이라 비슷한 작품과의 큰 차이를 느끼기는 어려웠고, 캐릭터가 진부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프로파일러 조이 캐릭터가 대표적입니다. 어린 시절 겪었던 공포스러운 기억, 그에 따른 불면증, 감정적이면서 도전적인 말투와 행동 등 어디서 많이 보아왔던 여성 수사관 캐릭터와 별다를게 없거든요. <<양들의 침묵>>의 클라리스가 바로 떠오를 정도었어요. 그나마 조이에게는 여동생 안드레아, 그레이에게는 여든 살 넘은 할아버지 마빈이라는 가족이 굳건한 유대를 보여준다는건 좋았지만 , 이야기와 크게 관련이 있는 부분은 아니었습니다.

편의에 따라 작위적으로 쓰여진 부분도 눈에 뜨입니다. 20년 전 사건 관련 내용에 특히 그러합니다. 우선 12살 중학생의 고발이라 하더라도 이를 무시해버린 처사는 쉬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고발 직후 소녀들 집에 침입해서 협박하다가 도주까지 했는데 말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범인으로 몰려 자살했던 용의자 매니 앤더슨의 부모가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또 1996년이라는 시기는 그리 옛날도 아닙니다. 어느정도 법의학이 정립되어 있었을터라 분명 단서도 남아있었을텐데, 경찰이 매니 앤더슨에게만 촛점을 맞춘건 말이 안됩니다. 글로버의 철벽같았던 알리바이가 알고보니 매니 앤더슨을 옭아매기 위해 검시 보고서가 조작된 탓에 불과했다는건 솔직히 어이가 없더군요. 글로버는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이야기니까요. 이를 테이텀이 짧은 시간 동안 밝혀냈다는 것도 당황스러웠어요.
또 현재의 시카고 사건에 갑작스럽게 글로버가 끼어드는건 전혀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글로버가 등장하는 속편을 강하게 암시하는 결말은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설득력도 없어요. 조이가 동생 안드레아의 심층 트라우마를 일깨울까봐 글로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안드레아가 글로버를 알아보지 못하고 납치될 수도 있다는건데, 조이가 스토킹을 당했다면 안드레아도 글로버의 먹잇감이 될 수 있는건 당연합니다. 진작에 최대한 상세히 정보를 제공해 주었어야 했어요.
덜 떨어진 것 처럼 보였던 글로버가 20여년 동안 FBI의 자문역도 맡고 있는 전문가를 거리낌없이 스토킹하며, 나중에는 덮치는데 성공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과거의 알리바이도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인 충동적 범죄자에 불과하니까요. 게다가 조이가 습격당한건 대낮이었습니다. 미국의 치안이 이 정도로 엉망일까요?
납치되었던 피해자 전화를 통해 위치를 파악하려는 시도 외에는 범인을 잡아낼 방법이 없어 보인다는 것도 별로 와 닿지 않더군요. 범인이 범행을 저질렀던 거리까지 알아냈는데도 불구하고 범행 장소도 결국 특정하지 못하는 등, 시카고 경찰의 무능만 작품 전체에 걸쳐 도드라지고, 범인을 잡은건 오로지 조이의 프로파일링 덕분인데 이는 현실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장점이 없지는 않지만 아주 매력적이라고 보기는 힘드네요. 킬링타임용으로 적합한 작품입니다.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5/08/15

리버스 - 미나토 가나에 / 김선영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문 대학을 졸업했지만 작은 사무용품 회사에 근무하는 후카세에게는 숨기고 싶은 비밀이 하나 있었다. 10년 전, 대학 친구들 - 아사미, 다니하라, 무라이, 히로사와 - 과 떠났던 여행에서 술을 마신 친구 히로사와가 운전대를 잡게 하여 죽게 만들었던 사건이었다. 취미인 커피와 연인 미호코 덕분에 안정을 찾은 후카세에게 ‘후카세는 살인자다’라는 의문의 편지가 배달되었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똑같은 메시지가 공개적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을 들었다.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낀 후카세는 휴가를 얻어 범인을 찾는 대신, 죽은 히로사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아보기 시작하는데...

"고백"으로 잘 알려진 미나토 가나에의 중편 소설입니다. 이전, 한 유튜버의 '결말이 충격적인 미스터리 5편'에 선정되었길래 관심을 갖고 있다가, 여름 휴가를 맞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후카세가 히로사와의 옛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히로사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탐색해 나가는 과정이 중심입니다. 때문에 정통 추리물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열등감으로 가득찬 후카세가 탐색을 통해 성장한다는 점에서 성장기로 볼 수도 있고요.
이 과정에서 모두가 의지했던 말이 없고 묵묵한 히로사와가 — "뽀로로"의 포비가 떠오르는 — 오히려 후카세나 후루카와처럼 존재감 없는 친구들에게 의지하고 있었다는게 밝혀지는건 신선했습니다. 꽤 묵직한 여운을 남기기도 하고요.

이러한 드라마 외에도 10년 전 사건을 고발하는 편지를 보낸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한 수수께끼도 흥미롭고, 히로사와의 과거를 되짚는 여정도 군더더기 없이 빠르게 전개되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살인자라는 메시지를 보낸게 미호코라는 진상은 좀 아쉽습니다. 운과 우연에 의지한 측면이 많기 때문입니다. 후카세가 여자친구 사진을 친구들에게 공개했더라면 금방 들통났을테지요. 졸업 앨범을 통해 아사미의 동료 기다가 히로사와의 동창이라는걸 알아냈더라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히로사와의 연인이었던 미호코가 히로사와 사망 이후 후카세와 교제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도 억지스럽습니다.
이외에도, 미호코가 유독 후카세에게만 간접적인 방식으로 고발장을 보낸 이유도 명확히 설명되지 않고, 후카세가 진상 - 그들이 히로사와가 운전대를 잡게끔 만들었다 - 을 술술 털어놓은 것도 역시 잘 납득이 되지 않네요.

무엇보다도 미호코가 메시지를 보낸 동기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게 문제입니다. 메시지를 보낸게 자기라는게 드러나면 형사 처벌 대상이 될겁니다. 심지어 다니하라는 기차에서 밀치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려 10년 전 죽은, 잠깐 사귀었던 연인을 위해 증명도 하지 못할 범죄를 고발하려 한다? 전혀 와 닿지 않아요.

히로사와가 메밀 알레르기가 있었기 때문에 술이 아니라 후카세 만들어 준 메밀꽃 벌꿀 커피가 사고의 직접적 원인이었다는 반전도 과합니다. 솔직히 나올 필요가 없었어요. 불운한 사고를 딛고 후카세가 한 뼘 성장해 가는 흐름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마무리가 가능했으니까요.
아울러 벌꿀을 넣은 커피, 지역 특산물 벌꿀 등의 언급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히로사와의 알레르기 설정이 반전 직전에야 언급된다는 점에서 치밀함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급작스럽기만 했어요.
한마디로, '결말이 충격적인'게 아니라 '충격적인 결말'을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강박에 가까운 반전일 뿐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인간 드라마에 가까운 작품으로, 미스터리적 재미보다는 인간 관계와 내면 심리에 집중한 구성이 돋보입니다. 흥미롭고 빠르게 읽히는 장점도 크고요. 다소 과했던 반전만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겁니다.

덧붙이자면, 벌꿀을 넣은 커피는 한 번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으로 등장하는데,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후속 권이 나온다면 소개해드리고 싶네요.

2015/03/06

비독 소사이어티 - 마이클 카프초 / 박산호 : 별점 3점

비독 소사이어티 - 6점
마이클 카프초 지음, 박산호 옮김/시공사

비독 소사이어티는 82세로 생을 마감한 비독을 기리기 위해 인종, 성, 연령, 국적을 가리지 않고 총 82명의 세계 최고의 형사들과 범죄 수사 과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신들의 능력을 범죄 해결을 위해 제공하는 일종의 재능기부 단체, 자원봉사 탐정들이라고 합니다. 단, 발생한 지 2년 이상이 지나 경찰의 공식 협조 요청이 있을 경우에만 해당 사건의 조사에 응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공권력을 넘보지 않기 위해서겠죠. 사건 해결을 하더라도 그들의 이름은 빠지는, 철저하게 조력자 역할에 충실한 전문가들입니다. 쿨하고 멋있죠?

이 책은 비독 소사이어티 소속 수사관들이 가 요청받은 미해결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56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통해 수많은 사건과 수사관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세계 5대 프로파일러 중 한 명으로 셜록 홈즈의 재림이라 불리는 골초 프로파일러 리처드 월터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처드의 프로파일링은 신급으로 묘사되는데, 사건을 맡으면 범인 체포를 자신하며 "내가 범인이라면 익지 않은 바나나는 사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캐릭터성도 확실해서 독신주의에 엄청난 골초, 전자제품은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고 양복은 단 한 벌 뿐, 그런데 피아노 연주 능력은 뛰어난 음악가이며 모든 일에 시니컬한 천재로 묘사됩니다. 작중 표현 그대로 "셜록 홈즈와 싱크로율 90%"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20년 전 가족을 몰살시키고 도주한 존 리스트 사건 해결입니다. 리스트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어떤 차를 탈지까지 정확하게 예측해 내거든요. 폭주족 살인자 나우스에 대한 프로파일링도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정확했고요.
이러한 프로파일링 실력 뿐 아니라 "내가 듣고 싶은 것은 수갑소리야"라는 말로 대표되는 실질적 범인 검거 능력도 인상적입니다. 스콧 살인 사건에서는 자료만 보고 범인이 레이샤일 것이라 확신하며, "시체가 없으면 기소가 불가능하다"는 지방 검사에게 "현장의 혈흔은 누군가 죽었음을 충분히 증명한다. 피도 시체의 일부다"라고 설득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입니다.

이러한 능력은 개인적인 천재성으로 설명되기에, 그 비결이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살인자를 4가지 성격 유형으로 나누는 "헬릭스 이론"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이 분류를 통해 한밤중 마트에서 세 번 살해당한 브룩스 사건을 해결하는 장면도 인상 깊고요.

그러나 다른 수사관들은 리처드에 비해 활약은 별로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협회를 만든 윌리엄 플라이셔는 사건 해결보다는 리더십을 갖춘 마당발, 얼굴마담 역할이며, 또 다른 중심 인물 프랭크 벤터는 과거 사진만으로 존 리스트의 현재 모습을 예측한 흉상 제작으로 유명세를 얻은 천재이지만 범죄 전문가라기보다는 예술가에 가까운 탓입니다.

해골을 통한 얼굴 복원, 실종 용의자의 현재 모습을 조각하는 일 등을 담당하므로 이야기 중심에서는 조금 비켜나 있지요. 비교하자면 천재 아이언맨이 리처드 월터, 리더십 중심의 캡틴 아메리카가 윌리엄 플라이셔, 과학보다는 신화 기반의 토르가 프랭크 벤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사건, 수사관, 수사 이야기는 모두 흥미롭습니다. 비독 소사이어티에 의뢰될 정도의 사건이라면 기존 경찰 수사로는 해결이 어려웠던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미제 사건을 천재들이 해결해 나간다는건 추리 소설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설정(예를 들자면 이런 작품)인데, 그게 실제 사건이라면 왠만한 소설 이상으로 흥미로울 수 밖에 없지요.

아울러 공소시효 없이 미제 사건을 끝까지 추적하는 미국 사법당국의 노력도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흉악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 폐지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의 몇몇 사건처럼, 사건 발생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DNA 감식 등의 수사기법 덕분에 진범이 밝혀진 사례도 있으니까요.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미제 사건을 부각시켜 해결하려는 시도를 한 바 있는데, "화성 연쇄살인" 같은 경우는 비독 소사이어티에 의뢰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프랭크 벤터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화성 연쇄살인범의 몽타주는 철저히 가상이기에 현재 모습을 조각할 수는 없겠지만, 리처드 월터의 능력을 빌린다면 훨씬 정밀한 프로파일링이 가능할지도 모르니까요.

이처럼 재미와 가치를 지닌 책이지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논픽션과 소설의 중간적 형태를 띠고 있어 불필요한 묘사와 지나치게 장황한 설명은 읽는 데 부담을 줍니다. 다른 유사한 논픽션과는 전혀 다른 접근법인데, 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리처드와 프랭크의 천재성에 대한 묘사는 지나쳐서 오히려 거부감을 줄 뿐이고요. 차라리 이들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는게 더 나았을 거에요.

아울러 너무 극적인 성공 사례만 실려 있는 점도 좀 아쉬웠습니다. 프로파일링은 본질적으로 데이터와 직감에 기대는 작업인데, 100% 적중이라는 건 비현실적이니까요. 한두 건의 실패 사례가 들어갔다면 오히려 설득력이 높아졌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상자 속 소년" 사건의 진범이 끝내 밝혀지지 않는 것도 불만이며 부실한 번역과 교정은 정말로 큰 문제입니다. 인터넷 리뷰에서도 공통적으로 지적된 문제인데, 18,000원짜리 책이라면 그에 맞는 완성도를 갖췄어야 했습니다. 초판 독자가 베타테스터도 아니고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4점을 줄 수도 있었지만, 책의 완성도 부족으로 1점 감점합니다. 다만 범죄 분석과 프로파일링에 관심 있으신 분들께는 매우 추천할 만한 책입니다.

덧붙이자면, 대니 드비토가 운영하는 제작사가 비독 소사이어티 관련 영화 판권을 구입했다고 하는데, 어떤 영화가 나올지 궁금합니다. 리처드와 프랭크가 중심이라면 아마도 존 리스트 사건이 소재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06/02/08

살인자들의 섬 (Shutter Island) - 데니스 루헤인 / 김승욱 : 별점 4점

살인자들의 섬 - 8점
데니스 루헤인 지음, 김승욱 옮김/황금가지

화려한 군 경력을 지닌 역전의 용사지만 아내가 방화에 의해 죽은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던 연방보안관 테디(에드워드)는 파트너 처키와 함께 비밀임무를 띄고 수수께끼의 정신병원이 있는 외딴섬으로 향했다. 표면적으로는 병동에서 불가사의하게 사라진 레이첼 솔란도라는 여성 환자의 수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헐리 상원의원의 특명으로 정신병원 내부에 만연하는 불법 시술을 밝히는 임무와 함께 아내를 죽게 만든 방화범 레이디스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심을 품고 수사에 임했다.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불어닥친 허리케인으로 고립된 테디와 처키는 레이첼 솔란도가 남긴 암호를 해독하며 진상에 접근해 갔고, 허리케인으로 병원 내부의 감시가 허술해진 틈을 타 직접 행동에 나서는데.... 

"미스틱 리버"의 작가 데니스 루헤인의 장편 스릴러입니다. 이 작가의 책을 읽어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사실 스릴러물이라 불리우는 이런 쟝르도 굉장히 좋아하긴 하지만 그동안 읽어 보았던 현대 미국 작가의 책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많이 본 듯한 뻔한 내용이 많아서 최근에는 별로 읽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동안의 저의 선입견을 완전히 깨버리네요. 한마디로 물건입니다. 현실과 망상을 오가는 전개와 묘사의 탁월성도 놀랍지만 독자를 빨아들이는 재미와 몰입도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입니다. 하루만에 다 읽어버릴 정도의 대단한 흡입력, 그리고. 서두와 결말, 그리고 놀라운 반전까지 한치의 오차 없는 치밀한 구성과 함께 중간중간의 디테일한 묘사까지도 책의 내용과 완벽하게 부합된다는 것에서 작가의 어마어마한 내공과 역량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스릴러물이라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나름의 "암호트릭"이 등장하는 것도 추리 매니아로서 상당히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어요. 정통파 추리물로 보기에는 조금 부족할 수도 있지만 내용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작품의 재미를 충분히 살려주는 조미료 같은 역할을 잘 해 내었다고 생각되네요.

그러나 딱 한가지, 반전 이후에 나오는 에필로그와 같은 마지막 날 오전의 풍경은 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잡역부 중 한사람이 나르던 물건은 과연 뭐였을까 하는 궁금증도 생기고요. 또 주인공 테디의 캐릭터는 작품 설정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으리라 생각은 되지만 이런 류의 작품에 항상 나오는 스테레오 타입 (터프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지닌 트라우마로 괴로워 하며 자살 충동마저 느낀다는) 이라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그간 읽은 미국식 스릴러의 천편일률적인 전개에 질렸던 참인데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은 책이었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고 읽었기 때문에 더욱 즐거웠던 것 같네요. 미스틱 리버도 읽어봐야겠다는 것과 앞으로 현대 미국 작가 책도 눈여겨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작품으로 별점은 4점입니다.

영화화 이야기도 있는데 책의 내용만 잘 살린다면 "야곱의 사다리" 못지않은 이바닥의 수작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물론 잘 살린다는 것이 어려운 이야기겠지만요....

2004/04/26

브라운 신부 전집 3,4,5 : 의심-비밀-스캔들 - G.K 체스터튼 : 별점 3점

의심 - 6점 G. K. 체스터튼 지음, 장유미 옮김/북하우스
비밀 - 6점 G. K. 체스터튼 지음, 김은정 옮김/북하우스
스캔들 - 6점 G. K. 체스터튼 지음, 이수현 옮김/북하우스
단편 추리소설의 황금기의 최고의 명탐정이자 현재까지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되는 탐정 브라운 신부. 명성에 비하면 국내 소개가 잘 안된 편이었지만 북하우스에서 전집이 몇년 전 출간되었었죠. 구입한지는 제법 된 것 같은데 읽는게 좀 늦었습니다. 그 중 1,2권인 결백과 지혜편은 예전 자유추리문고본으로 먼저 읽어 보았기에 3,4,5권을 먼저 읽게 되었네요.

먼저 각 권에서 인상적이었던 작품들만 말씀드리자면,
3편 의심에서는 일종의 알리바이 깨기 트릭인 “기드온 와이즈의 망령”과 불가해한 밀실 살인 사건을 다룬 “하늘에서 날아온 화살”, 역시 밀실 트릭의 일종이지만 사건 현장 근처에 있던 개의 심리를 사건과 결부시키는 걸작 “개의 계시”, 괴기스러운 느낌의 복수극으로 완전범죄를 완성하려는 살인범의 트릭을 파헤치는 “날개달린 단검” 이,

4편 비밀에서는 브라운 신부가 자신의 추리의 비밀을 털어놓는 “브라운 신부의 비밀”, 광기의 복수극을 그린 “보드리 경 실종사건”, 연극에 관련된 밀실 살인 사건인 “배우와 알리바이”, 3편의 “날개달린 단검”과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최악의 범죄”, 범인으로 몰린 시인의 누명을 벗겨주는 한편 다른 동기에서 진범을 찾아내는 “판사의 거울” 편이,

5편 스캔들에서는 사람의 인상과 기억의 오류를 바탕으로 한 장난인 “폭발하는 책”과 텅빈 술집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의 진범을 찾는 “퀵 원”, 살인자와 피해자에 대한 오류를 바탕으로 한 “블루 씨를 쫒아서”, 명망있는 제독의 살인사건을 범인의 말 한마디로 파헤치는 “그린맨”, 조그만 마을에 파란을 몰고온 목사 아들의 패륜행위의 뒤에 숨겨진 범죄를 밝혀내는 “마을의 흡혈귀”, 기발한 시체 은닉 트릭이 등장하는 “핀 끝이 가리킨 것”이
좋았습니다.

그외에도 대체로의 단편들이 하나하나가 전부 일정 수준이상을 넘어서는 작품들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탐정들과는 다르게 직관과 인상, 정황에 주력하여 자신의 느낌으로만 사건을 꿰뚫어보는 브라운 신부의 특징도 전편에 걸쳐 잘 살아있고요. (참고로 브라운 신부의 추리의 비밀이 4편 “브라운 신부의 비밀”에서 설명되고 있기도 하죠.)

하지만 참으로 읽기는 힘든 작품들이기도 합니다. 단편집이란 모름지기 쭉쭉 읽어나가는 맛이 있어야 되는 법인데 대사나 묘사가 장황하여 한번에 읽어내리기 어려웠어요. 체스터튼이 워낙 당대의 유명 문인이었던 만큼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문학에서도 뭔가 독특한 자신만의 문체를 도입하여 쓴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예전 다른 문고본에서 읽고 느꼈던 유머러스한 부분이 많이 빠져 있는 것을 본다면 번역 문제인것 같기도 한데 여튼 여러모로 아쉬웠어요.
또 다른 단편집들도 가지고 있는 문제이기는 한데, 하나의 트릭을 변형하여 여러 곳에 쓰고 있는 편입니다. 특히나 “살인자”<>”피해자”의 역할 바꾸기 라던가 잘못된 증언의 오류를 짚어내는 방식이 자주 등장하더군요. 뭐 등장하는 단편마다 다른 상황에서 재미있게 사용하고 있어서 큰 단점으로 보기는 어렵지만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읽는 재미 측면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지만, 전집으로 출간된 것에 대해서는 고맙기만 할 따름이라 점수를 조금 더 얹어 봅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문체로, 유머스러운 브라운 신부를 보여줄 수 있도록 번역이 조금 수정되면 더욱 좋겠네요.

2009/06/21

데니스 루헤인 단편집 "코로나도" - 데니스 루헤인 / 조영학 : 별점 3점

코로나도 - 6점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살인자들의 섬"으로 엄청난 내공을 보여주었던 데니스 루헤인의 단편집입니다. 다른 장편도 유명하기는 하지만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던 차에, 단편집이 있다는 것을 알고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읽고 난 감상은, 기대와는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추리나 스릴러 장르물을 기대했는데, 수록작 모두 깊이 있는 드라마인 탓입니다. 물론 모두 범죄에 관련되어 있으며, 캐릭터와 배경에 대한 묘사도 탁월하고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힘은 여전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에드 멕베인과 스티븐 킹을 섞은 듯한 숨막힐 것 같은 끈끈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던 "들개사냥", 그리고 여러 상을 수상했던 작품으로 독특한 시점과 전개, 묘사가 인상적인 "그웬을 만나기 전" 이 좋았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완성도만큼은 4점을 주어도 충분할 정도로 높지만, 아무래도 "추리"와 "스릴러" 쪽으로는 좀 부족했기에 감점합니다. (카테고리는 추리 / 호러 관련입니다) "그웬을 만나기 전"을 희극으로 만든 "코로나도"가 가장 분량이 많은 작품임에 불구하고, 소설에 비해서는 별로 인상적이지 못한 탓도 큽니다.

그래도 좋은 단편집임에는 분명합니다. 김성종 선생님의 "어느 창녀의 죽음"과 비교해 보고 싶을 정도로 문학적인 부분의 성취가 뛰어납니다. 수록작별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들개 사냥 : 

에덴이라고 불리우는,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위치한 그야말로 깡촌 소도시를 무대로 한 작품입니다. 마을 부흥을 위해 "에덴동산"이라는 일종의 테마파크 유치 사업이 막 시작되었다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지요. 사업을 위해 마을의 골칫거리인 들개 사냥을 맡기려고 시장은 베트남전 참전용사인 블루를 고용합니다. 주인공은 블루의 친구이자 같은 참전용사인 엘진으로, 그는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블루가 들개 사냥과 더불어 이상한 집착과 광기에 사로잡혀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미국 남부 소도시스러운, 뜨거운 열기가 넘쳐나는 "에덴"과 등장인물들의 묘사,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블루의 광기와 집착이 이글거립니다. 읽으면서 갈증을 느낄 정도로 박력 넘치는 작품이에요.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결말도 작품에 잘 어울렸고요. 덧붙이자면, 주인공들의 심리묘사 등에서 "살인자들의 섬" 느낌도 좀 나더군요.

ICU

정체를 알 수 없는 조직에 쫓기던 남자가 우연찮게 그들을 따돌리고 대형 병원에 숨어들어가 병동을 전전하며 생활한다는 소품입니다. 문제는 주인공과 알 수 없는 조직의 정체나 배경 설명이 전무하다는 겁니다. 때문에 병원에서 스쳐지나간 사람들과의 드라마만 있을 뿐, 정작 스릴러스러운 느낌은 전혀 없어서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코퍼스 가는 길

고등학교 풋볼팀의 망나니들이 자신들의 미래가 걸린 시합에서 실수를 한 팀 동료 라일 비뎃의 집에 찾아가 그 집을 박살냅니다. 그리고는 라일의 여동생이자 그 집안에서 내놓은 자식 룰린을 따라 더 큰 집으로 이동하지요. 그런데? 주인공은 무력함을 느낍니다. 그 집의 위세에 압도당해서요. 자신의 상상과 힘을 뛰어넘는 존재에 직면하자마자 좌절하는, 그리고 뒤에서 소심하게 분노하는 모습이 흡사 요즈음의 우리들 같기도 합니다. 성장기이기도 하고 세태풍자로 볼 수도 있는 독특한 작품이네요.

독버섯

10페이지도 안되는 꽁트 수준의 작품입니다. 주인공이 자신의 동생을 실수로 죽게 만든 실베스터라는 악당을 남자친구 KL을 이용하여 살해하는 이야기이긴 한데, 잘 모르겠어요. 과연 주인공이 잘 한건지, 아니면 죽은 동생의 말대로 바보인지... 어쨌건 미래가 전혀 없어보이는 주인공의 말은 씁쓸한 여운을 남깁니다.

그웬을 만나기 전

주인공 바비는 사기꾼인 아버지의 꼬드김으로 여자친구 그웬과 함께 300만달러의 다이아몬드를 우연히 발견한 광부 조지를 속여 다이아몬드를 훔치려다가 사고로 총을 맞은 뒤 경찰에 체포됩니다. 그리고 4년 뒤, 출소한 바비를 찾아온 아버지는 다이아몬드를 어디에 숨겼는지를 집요하게 물어봅니다. 이어지는 아버지와 바비의 짧은 두뇌 싸움 끝에 바비가 승리하고, 모든 사실을 알아낸 뒤 악을 응징해 버리지요. 바비를 2인칭으로 놓고 전개하는 묘사를 비롯해서, 시공을 초월한 중첩되어 전개되는 등 굉장히 특이했던 작품입니다. 장편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러한 특이한 전개 등은 작가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때문에 대표작으로 불러도 무방하다 싶을 정도로 좋았어요. 작가의 말대로 "내츄럴 본 악인" 그 자체인 아버지 캐릭터도 굉장히 인상적이었고요.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정말 "영화"에 어울리겠다 싶어 잠깐 조사해봤더니, 역시나, 제작은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네요. 2009년 5월 개봉 예정이었는데 소식이 없는걸 보니 어찌된것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이 작품이야말로 "사랑" 이 있는 "잔혹한 복수극" 이자 "순수한 악인"이 등장하는 영화이니 만큼 박찬욱 감독님이 영화화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버지 역은 백윤식!

코로나도

"그웬을 만나기 전"을 토대로 희극화 한 극본입니다. 기본 내용은 똑같지만 바비의 부모로 보이는 인물들이 드라마에 끼어들고, 결말 부분에서 약간의 희망을 넌지시 암시하는 등 이야기는 조금 더 풍성해 졌습니다. 원작보다는 대중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수정한 느낌도 들고요. 하지만 저는 소설과 같은 날 것 그대로의, 더 적막하고 스산하면서도 여지를 남기지 않는 분위기가 더 좋네요. 바비에게 희망은 사치라 느껴지거든요. 태어날때부터 불쌍한 녀석이니....

2015/01/23

연쇄살인범 지도 매핑 - 브렌다 랠프 루이스 / 이경식 : 별점 2점

연쇄살인범 지도 매핑 - 4점
브렌다 랠프 루이스 지음, 이경식 옮김/휴먼앤북스(Human&Books)

이런 류 연쇄살인범 관련 논픽션은 그동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꾸준히, 많이 읽어왔습니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애호가로서의 흥미, 그리고 창작을 지망하는 사람으로서 자료 및 아이디어 확보 측면에서 말이죠. 허나 세계적인 연쇄살인마가 흔한 것도 아닌만큼 몇권 읽으면 충분하기는 합니다. 특히나 미국에서 발표된 책이라면 미국 중심이기에 미국의 유명 살인마들 - 에드 게인테드 번디, 샘의 아들, 나이트 스토커 등등 - 은 이제 지겨울 정도로 많이 알고 있기도 하고요.

그래도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제목 때문입니다. 연쇄 살인범의 범죄 행각을 지도에 매핑했다는 제목에서 뭔가 색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거든요. 미드 <넘버스>의 에피소드 하나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수학자 동생이 무작위로 보이는 범죄 행위가 실제로는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수학이론을 통해 밝혀내고 (범인이 범행 장소와 자신과의 연관성을 숨기기 위해 무작위적으로 범행 장소가 바뀌지만 이러한 무작위는 외려 작위적인 수열을 형성하므로 그 시작점을 수학적으로 알아낼 수 있다.. ) 범인이 어디 있을지 추론하던 에피소드였죠.

그러나... 지도 매핑은 그냥 범죄 행위를 지도에 그려놓은 것일 뿐이라 실망스러웠습니다. 지도가 실려있을 뿐 연쇄살인범들과 그들의 범죄행각을 요약해서 소개해주는 방식은 다른 책들과 대동소이해요.
물론 이 책만의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도가 별 정보를 전해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없는 것 보다는 당연히 있는 것이 낫고 그 외의 도판들, 예컨데 피해자 사진들이 조금 더 많이 수록되어 있는 점도 괜찮았어요.
무엇보다도 다른 책에서는 보지 못했던, 비키니 살인마 찰스 소브라즈, 트럭 운전사 연쇄 교살범 폴커 에케르트 등의 연쇄살인마들이 수록되어 있는 점에서는 나름 가치가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씌여졌기에 최근의 범죄, 배낭여행객 살인자 이반 밀라트나 유명한 사건이었던 워싱턴의 저격수 존 앨런 무하메드와 리 보이드 말보, 베르사체 저격범 이야기가 실려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얼마전 보았던 영화 <툼스톤>의 원작 <무덤으로 향하다>의 범인들 모델로 생각되는 싸이코패스 컴비인 태평양 연안 고속도로 살인마 비태커와 노리스 이야기도 충격적이고 놀라왔습니다.


다른 책들에 비해 소설처럼 조금 더 생생하게 쓰여진 것과 체포와 수사 과정 및 범인들이 체포된 이후 사법거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던가, 사형을 기다리고 있다던가, 사형을 당했다던가, 아니면 놀랍게도 해당 국가의 형법이 정해져 있어서 석방되었다던가! (안데스의 괴물 페드로 로페즈) 등의 후일담까지 꼼꼼한 것도 특징입니다. 이반 밀라트 차에 탔던 영국인 여행자가 가방과 여권을 모두 버려두고 달아난 사례처럼 적극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한 경우 의외로 살아난 경우가 많거나, 최소한 범인을 잡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경우가 많다는 것은 처음 알았네요.

허나 장점보다는 제목에 낚인 듯한 기분도 크며 내용도 아주 새롭거나 하지는 않아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제 이런 책은 좀 많이 지겹습니다...

그나저나 외국 살인자들은 자칭이건 타칭이건 별명이 있는데 참 기묘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식으로 별명을 붙이면 장난스럽다고 엄청 공격받을 것 같은데 말이죠. 국가마다 문화가 달라서 그런 걸까요?

2007/11/04

후루하타 닌자부로(古畑任三郞) - Final

일전에 소개한 적이 있던 TV 시리즈 "후루하타 닌자부로"의 TV Special로 완결편인가 보네요. 총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뭐 극의 구성은 전에 소개한 내용과 동일하니 생략하도록 하고, 자세하게 각 에피소드를 다루어 보죠.

먼저 첫번째 이야기는 "지금 소생하는 죽음" 이라는 타이틀로 귀절촌이라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게스트 배우는 후지와라 타츠야. 이 이야기에서 천재형 범죄자로 자부하는 장면이 있는데 데스노트의 야가미 느낌이 살짝 묻어나오는게 재밌더군요.

하지만 작품 자체는 개인적으로는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일종의 "인간 조종 트릭" 이 등장하는데 아무리 그 인간에 대해 꿰뚫고 있다 한들 살인이라는 범죄를 그렇게 쉽게 예견하여 조종할 수 있냐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졌거든요. 범인 캐릭터 역시 초등학교 때 작성한 내용을 토대로 완전범죄를 구상한다는 것에서 썩 와닿지 않았고요.

그래도 기존 시리즈와는 다르게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것과 그 진범을 옭아매는 마지막 장면 하나는 괜찮았습니다. 수작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지만 평작 정도는 된다 생각됩니다.

두번째 이야기는 "공정한 살인자". 게스트는 그 유명한 "이치로" 선수가 실명으로 직접 출연합니다!
이야기는 후루하타 닌자부로 시리즈에 계속 나왔었던 경찰관 네코지마가 사실은 협박을 당하고 있었고, 이치로는 네코지마의 이복 동생으로 형을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는 이야기인데 이치로 선수의 이미지 때문인지 시종일관 경찰과 게임을 하는 "공정한 살인자"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이채롭네요.

마지막에 이치로 선수의 범행을 최초에 눈치챈 장면이 어디냐는 물음은 역시 무릎을 칠 만 했고, 제목 그대로 범인과의 두뇌게임도 잘 표현되어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사건의 현실성이 너무나 떨어진다는 단점은 있지만 생각보다 이치로 선수의 연기가 괜찮았기에 평작 정도의 점수를 주고 싶네요.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는 "라스트 댄스". 마츠시마 나나코가 1인 2역을 맡은 작품으로 공동 필명을 쓰는 쌍둥이 각본가 자매의 이야기입니다. 이마이즈미 등 고정 캐릭터의 개그도 재미나지만 트릭이 상당히 현실성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너무 쉽다는 단점은 있지만 쉽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성이 있다는 이야기이니까요.

쌍둥이 캐릭터를 사용하는 트릭은 정통물에서는 반칙(?)에 가깝지만 어쨌건 완성도는 제일 높아서 세가지 에피소드 중 최고로 치고 싶네요. 후루하타 닌자부로 시리즈 제일 첫 작품이던 만화가 살인사건이 언급되는 것에서 아련한 향수가 느껴지는 것도 좋았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생각보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명불허전! 다른 추리물에서 느낄 수 없는 정통의 느낌이 많이 살아있다는 점에서 후루하타 닌자부로 시리즈는 언제나 추천작이죠. 정말 마지막이라면 너무 아쉬운데, 다시 돌아와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2020/03/06

식스웨이크 - 무르 래퍼티 / 신해경 : 별점 2.5점

식스웨이크 - 6점
무르 래퍼티 지음, 신해경 옮김/아작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기 2493년, 4백 년 항해 예정의 항성 간 이민 우주선 승무원인 마리아 아레나는 마른 피로 얼룩진 클론 재생 탱크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이런 상황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곧 마리아는 새로 깨어난 클론이 자기뿐만 아니라 여섯 명 승무원 전원임을 깨닫게 되고, 클론 재생실에는 칼에 찔려 죽은 승무원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 외로운 밀실 우주선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게다가 모든 승무원이 죽었다면 살인자는 누구란 말인가….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책 소갯글에 혹해서 읽게 된 SF 미스터리 장편입니다. 우주선에 탑승한 여섯 명의 승무원이 서로 죽고 죽여서 전멸한 뒤, 사건 당시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 클론으로 재생된다는 설정이 아주 매력적이라 읽게 되었습니다. 누가 살인자인지, 동기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상황이 이보다 더 잘 맞아 떨어질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기대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사건에 대한 추리적인 내용보다는, SF 소설로서의 비중이 훨씬 높거든요. 물론 나쁜건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SF 적인 부분은 아주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클론에 대한 세세한 설정이 아주 돋보입니다. 이 세계의 클론은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거쳐 철저한 법률에 근거하여 관리되고 있다는 것이 탄탄한 묘사를 통해 설득력있게 설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클론의 존재에 대해 거대한 다툼과 많은 죽음이 발생한 후 이를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됩니다. 이를 통해 복수의 클론은 금지되며, 복수의 클론이 적발될 경우 가장 나중에 복제된 클론 외에는 모두 폐기한다, 마인드맵을 저장한 뒤 클론에 그대로 이식하여 기억을 이어나갈 수 있지만 마인드맵을 수정하는 마인드해킹 행위는 엄금한다, 그리고 클론은 생식능력을 제거하며 재산은 그 자신에게 상속된다는 등의 세세한 법안이 제정됩니다.
이는 단지 설정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클론에 대한 설정은 승무원들의 과거와 직,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우주선 내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의 동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클론을 증오하는 엔지니어 폴이 모두를 살해한게 진상이니까요. 

또 이 사실이 밝혀지는 승무원들의 과거 이야기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특히 클론에게 영혼이 없다고 주장하던 오르만 신부가 반대파에게 납치된 후 클론으로 재생되었다는 이야기는 이 작품 속 등장인물의 과거 에피소드로만 놓기 아깝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과연 클론에게 영혼이 있을까? 부터가 흥미로울 뿐 아니라, 해커들이 마인드맵을 해킹하여 대상자의 성격을 비롯하여 모든걸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건, 영혼이 숫자로 치환되어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는 이야기와 다를게 없어서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클론에게 가족을 잃었다고 생각하여 복수심을 불태우는 엔지니어 폴이 복수를 완성한 뒤, 정작 그 자신이 클론으로 복제되어 재생되었다는 이야기도 아주 괜찮았어요.

이외에도 현재 시점에서 아직 선장은 죽지 않고 혼수상태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새로 만들어진 클론이 이전 선장을 폐기해야만 하는 딜레마, AI 이안은알고보니 원래 인간이었는데 마리야가 마인드맵을 해킹하여 만들어낸 인공지능으로 약간의 조작을 통해 다시 인간으로 클론 복제할 수 있었다라는 반전 등 재미난 디테일이 많습니다. 클론 복제를 음식을 만들어내는 음식 인쇄기를 통해 진행한다는 결말도 복선을 통해 잘 설명되고 있고요.
주인공들이 탄 우주선 도르미레 호의 설정도 그럴듯합니다. 도르미래호는 아르테미스라는 머나먼 별로 떠난 일종의 이민선입니다. 여섯명의 승무원들은 수천명의 냉동 클론을 무사히 아르테미스까지 운송하는 대신, 그들이 지은 중죄를 사면받는 조건으로 승선한 범죄자들이죠. 이렇게 범죄자들이 사면을 조건으로 거대 계획에 종사한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오래된 이야기이긴 하나, 이를 SF로 변주한 아이디어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대로 추리적으로는 그다지 정교하지 못합니다.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지구의 실력자 샐리 미뇽이 거대 이민선을 비롯하여 승무원들, 심지어 인공 두뇌까지 관계자들을 투입한 이유부터가 제대로 설명되고 있지 않거든요 '복수' 때문이라고 설명되기는 하는데, 샐리 미뇽은 워낙에 실력자라서 구태여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종의 악취미로 단지 승무원들이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붕괴하기를 바랬을 수는 있겠지만, 그들 사이에서 사건이 일어나는데 무려 2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으니 그리 효율적이라고 볼 수는 없고요.
아울러 협박과 고문 탓이지만 마리아가 볼프강, 히로를 해킹하여 엉망으로 만든건 사실입니다. 이는 충분히 살해 동기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볼프강과 히로가 마리아에게 살의를 품는건 말이 됩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원수로 알고 있는 폴이 마리아 외 다른 사람들도 모두 죽인다는 진상은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클론이라서 다 죽일거였다면 20년 동안 참을 이유도 없고요. 게다가 폴은 볼프강에게 대적할 수 없는 체형과 체력의 소유자라는게 이미 설명되기도 했거든요.
그 외에도 어차피 죽일거라면 마리아만 왜 독미나리로 중독시켰는지, 히로는 대체 왜 자살했는지도 그렇게 납득이 가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다중 인격이 된 히로가 폭주하는 이유도 마찬가지고요. 결론적으로 처음에 여섯 명 모두가 죽게된건 단지 우연이었을 뿐이며, 그들이 클론으로 되살아난 것 역시 즉사하지 않은 마리아가 재생 버튼을 눌렀을 뿐이라는 작위적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마리아가 펼치는 추리쇼 형태 느낌의 마지막 클라이막스도 딱히 단서가 탄탄하게 뒷받침된게 아니라 여러모로 아쉬웠습니다. 복선을 좀 더 치밀하게 짜 두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죠. 폴이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작아서 공정하게 단서를 얻는것 자체가 힘들었던 것도 나쁜 추리물의 전형이고요. 이야기에 거의 등장하지도 않는 사람이 알고보니 범인! 이라니, 이건 좀 너무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흥미로운 도입부와 여러가지 설정 덕분에 몰입해서 읽을 수는 있지만, 추리적으로는 약간은 용두사미 느낌이라 아쉬웠습니다. SF로는 완벽하나 추리적으로는 더 탄탄한 구성이 필요했습니다. 그래도 재미만큼은 확실하니, 이런 류의 장르 문학을 좋아하시는 분들께서는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1/07/24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 / 김희상 : 별점 4점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 8점
페르디난 트 폰쉬라크 지음, 김희상 옮김/갤리온

이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유명 변호사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가 직접 맡았던 11건의 기막힌 사건을 담담하게 풀어놓은 논픽션. 현실이 영화나 소설보다 더욱 놀랍다는 명제를 잘 보여줍니다. 책에 실린 모든 사건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막힌 이야기들이거든요. 혼인 서약을 지키기 위해 악처의 잔소리를 40년이나 참아온 존경받는 의사가 아내를 도끼로 무자비하게 살해한 사건, 일본인 사업가 타나타의 금고를 털려다 오히려 범죄 조직 보스까지 엮이며 모두 무참히 살해당한 사건, 교통사고로 폐인이 된 동생을 살해한 누나의 이야기 등이 그렇습니다. 하나하나가 한 편의 소설보다도 더 놀라운 이야기로 설정도 극단적이고 묘사 역시 끔찍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픽션이라 의심될 정도였습니다.

그중에서 추리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건 세 가지를 꼽자면, 첫 번째는 ‘고슴도치’ 편입니다. 범죄자들로만 이루어진 가족에서 유일하게 똑똑했던 주인공 카림이 뛰어난 작전으로 형을 무죄로 만드는 재판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요. 작전이 대단히 교묘하지는 않지만, 형제들의 얼굴이 비슷하다는 점을 잘 이용한 현실적으로도 와닿는 내용이라 인상 깊었습니다. 이러한 변호를 진행한 저자도 사실 썩 양심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손해 본 사람이 없으니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만족한 사건이었겠죠.

두 번째는 콜걸로 일하는 여대생 살인 사건 재판을 다룬 ‘서머타임’입니다. 제목 그대로 서머타임을 이용해 가장 유력한 용의자를 무죄로 만드는 극적인 재판 과정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검찰 측의 결정적 사진 증거, 즉 용의자가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 찍힌 사진에서 손목시계 시간을 보여주는 장면은 한 편의 영화 클라이맥스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용의자가 여대생을 돈으로 산 부도덕한 인간이라는 점은 문제지만, 이후 이혼 소송을 당하는 등의 결말이 나오니 나름대로 죗값을 치른 셈이겠죠?

마지막으로는 자신을 칼과 야구방망이로 협박하던 네오나치 양아치를 단 한 번의 반격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정체불명의 인물 변호를 다룬 ‘정당방위’입니다. 스티븐 시걸 영화에서나 봄직한,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두 명의 건달을 쓰러뜨린 수수께끼의 인물이라는 도입부부터가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이 인물을 위해 국제적인 조직이 움직이며 결국 그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이 내려집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가 정체를 숨긴 채 또 다른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될 수도 있다는 반전이 더해지면서 이야기가 끝을 맺죠. 현실 세계의 "자칼" 같은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처럼 놀라운 사건들이 가득해 읽는 재미도 뛰어나지만, 법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든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모든 범죄가 일률적으로 같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던지기도 하고요.

재미와 더불어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이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2권이 출간되어 있던데, 빨리 구해서 읽어봐야겠네요.

2023/07/09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5. 즌부리코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5. 즌부리코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마사오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시락을 주면 먹고, 차를 내밀면 조용히 마셨다. 목적지도 신경 쓰지 않는듯 했다. 마이코의 코트에 감싸여 그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기차 여행 내내, 약한 비가 모든 곳에서 끝없이 내렸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객들은 언제나 익숙한 표정과 모습으로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둘만 이질적인 여행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타미의 바다는 하늘과 같은 회색으로 저 멀리에서 그대로 하늘과 이어져 있었다. 후지산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의 후지산이 보이지 않는게 이 여행에 더 어울렸다.

토시오는 미시마에 내려 곧바로 공중전화로 에토를 불렀다. 에토는 상대가 토시오라는 것을 알고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카츠? 라디오 들었어?"
"안 들었어."
에토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너, 살인 용의자와 함께 도망쳤다는 게 정말이야? 방금 뉴스에서 들었어."
오랜만에 듣는 에토의 억양에는 사투리가 돌아와 있었다.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자. 그보다 여관 방 하나만 잡아줘."
"그건 맡겨 둬, 지금 어디야?"
"미시마 역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 사이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거야? 되도록이면 사람들에게 얼굴을 드러내지 말라고."
"...... 슈젠지까지 갈 수 있을까?"
"야, 잠깐만. 사람이 많은 곳은 위험해. 이렇게 해. 오히토(大仁)에서 내려서 상가를 지나 가노가와(狩野川)의 오히토 다리 쪽으로 걸어가. 그러면 내가 차로 데리러 갈게."
전화를 끊자 마사오가 슬픈 눈빛으로 말했다.
"친구에게 폐를 끼치는 건가요?"
"당신이 신경쓰실 일은 없습니다."
토시오는 그렇게 말하고 걸어 나갔다.
미시마에서 이즈 하코네 철도를 탔다. 차 안에는 학생들이 많았다. 에토의 말에 따르면, 자신도 뉴스에 보도되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토시오는 전철 구석에 서서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마사오의 모습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전철은 느리고 정차역이 많았다. 오히토까지는 삼십 분도 채 안 되는 거리지만, 멀게만 느껴졌다.
오히토에서 내리는 승객은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이 눈에 띌 정도로 적지도 않았다. 토시오는 에토의 배려를 알게된게 기뻤다.
오히토 역을 나와 앞에 있는 짧은 언덕을 오르면, 옆 쪽으로 상가가 펼쳐져 있었다. 상가를 오른쪽으로 가면 가노가와 강이 나온다고 에토는 말했다. 상가에 들어서자 갑자기 날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차가운 비바람이 거세게 두 사람을 감쌌다.
우산을 샀다. 비는 약하게 내렸지만, 우산을 쓰는게 사람들 시선으로부터 훨씬 안전할 것 같았다.
상점가는 길지 않았다. 상점가 끝에서 제방으로 이어지는 길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걷고 있던 두 사람 곁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푸른색 경트럭이었다. 운전석에서 에토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로 봐서는 아주 건강해 보이네."
에토는 두 사람을 차에 태우며 말했다. 차 안은 생선 비린내가 진동했다.
"미안해…."
토시오가 말했다.
"아냐, 오히려 날 기억해줘서 고마운걸."
에토는 뻣뻣한 얼굴의 수염 사이로 하얀 이빨을 드러냈다.
"구마사카에 친숙한 여관이 하나 있어. 작지만 조용하지. 그곳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차는 가노강을 건넜다. 넓고 깊은 강바닥은 검은 돌로 채워져 있고, 물은 그 사이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가노강을 건너자 차는 좌회전해 제방 위를 달렸다. 건너편 제방 위를 달리는 차의 불빛이 작게 이어졌다.
여관으로 향하면서 에토는 자기 얘기만 했다. 약혼녀가 미인이라는 것, 일이 바쁘다는 것 등이었다.
제방을 내려와 밭을 지나 낮은 산자락을 돌았다. 산 중턱에 성처럼 생긴 건물이 희미하게 보였다.
"오히토 산이야. 아무리 채굴해도 더 이상은 광물이 나오지 않지만 폐광은 남아 있어. 여름에도 그 안은 시원하지."
좁은 길을 한참 달리다 '섬집'이라고 적힌, 불이 켜진 작은 간판 아래에 차를 세웠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전화해줘."
에토가 말했다.
"그리고 너 이름은 야마다 타로야. 한심한 이름이지만 워낙 급했으니 참아줘."
작지만 잘 정돈된 숙소였다. 이름을 말하자 두 사람은 별채로 안내되었다. 벌레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조용하네."
마사오가 중얼거렸다.
토시오는 유카타와 단젠 (*일본의 남성용 겨울 실내복)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식판이 정리되자 마사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거짓말 같네요........ ......"
마사오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벌레 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도망칠 수 있었던 건 당신 덕분이에요. 하지만 카츠 씨까지 도망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당신이 곤경에 처한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어요"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았어요. 나는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기로 했어요. 어떤 행운이 닥쳐오더라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당신이 체포되더라도요?"
"그래요."
"사형에 처해지더라도요?"
"그래요."
"사형에 처해지면 죽습니다."
"사형에 처해지지 않아도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거예요. 같은 거에요. 사람을 죽여도, 안 죽여도 마찬가지에요."
마사오는 멍하니 말했다.
"당신이 죄가 있다는게 오히려 나에게는 다행입니다."
마사오의 침착함이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토시오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당신을 경찰의 손에서 구해냈고, 앞으로도 운명을 함께 할 겁니다."
".... 내가 살인자라고요?"
마사오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당신이 한 일을 모두 알고 있어요. 나한테만 숨기려고 하지 말아주세요."
".... 내가 살인자가 아니라면요?"
마사오는 같은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대로 돌아가겠습니다. 당신은 너무 똑똑하고 아름다워요. 나 같은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아요."
"괜찮아요......"
마사오는 천천히 일어선 뒤, 등을 돌려 미닫이 문을 열었다. 옆 방은 이부자리가 펼쳐져 있었다. 마사오는 전등을 껐다. 침대 옆 스탠드만 켜져 방을 살짝 붉게 물들였다.
단젠이 마사오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마사오는 유카타의 끈을 뒤로 풀고 바닥에 떨어트렸다.
"......데츠바의 약병에 독을 넣은 것은 나에요."
마사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마사오는 인형처럼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마사오에 대한 애정은 가까워질수록 더욱 강렬해졌다. 그것은 광기 어린 격정으로 변했다. 온갖 감정이 뒤섞여 온몸을 휘감았다. 그 격정을 마사오는 조용히 받아들였다.
몸을 떼어내자 마사오는 눈을 떴다.
"...... 나, 이제 안 되겠어요."
목소리를 담은 숨결이 토시오의 어깨에 닿았다.
"안 된다는 말은 싫어요. 슬퍼지니까요. 우리는 이제 막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은 것 아닙니까?"
토시오가 말했다.
"그랬군요. 미안해요."
마사오는 다시 한 번 사과했다. 토시오는 마사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미로 속에 있는 것 같아요."
"...... 나사 저택의 동굴에 들어갔던 적이 있었군요."
"토모히로에게 들었어요. 토모히로는 동굴의 지도까지 만들어 놓았어요."
토시오는 문득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췄다.
"그 동굴 어딘가에 제니야 고헤에의 은닉 재산이 있다는 것도?"
"그것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꿈같은 일은…. 믿지 않았어요."
"하지만 실제로 동굴에 들어갔었잖아요?"
"그야 저도 호기심은 있었으니까요. 토모히로가 죽고, 토모히로가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제니야 고헤에의 재산 이야기가 허황된 이야기라고 생각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토모히로의 지도를 믿고 동굴에 들어갔는데, 도중에 겁이 났어요. 캄캄한 동굴의 맞은편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어요........ ......"
"폭포 소리예요."
"맞아요, 살아있는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동굴 안에서 구불구불하게 움직이는 폭포를 보고 순간 겁이 났어요. 나는 중간에 돌아섰지만, 저렇게 큰 무대가 있는 걸 보니 토모히로가 말하는 숨겨진 재산의 존재를 믿을 수 밖에 없게 되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소우지, 카오리, 데츠바 씨 등은?"
"소우지 씨가 알았다면 바로 손을 대서 써버렸을 거에요. 카오리 씨가 알았다면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 것 같고요. 데츠바 씨가 알았다면 사업을 더 확장했을테죠."
"즉, 숨겨진 재산이 있다는 건 당신과 남편, 두 사람만 알고 있었다는 거군요"
"그런 것 같아요."
"토모히로 씨는 그 재산을 혼자서만 갖고 싶었던 것이고요."
마사오는 입을 다물었다.
"그 토모히로 씨의 유지를 당신이 이어받으려 한 것이군요."
마사오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숨이 목구멍에 걸려서 마치 흐느끼는 소리처럼 들렸다.
"당신은 소우지와 인연을 끊지 못한 탓에, 토모히로 씨에 대한 죄책감이 마음속에 무겁게 쌓여 있었어요. 이번 여행에서 토모히로 씨에게 고백과 사과를 하려고 했는데, 토모히로 씨가 기이한 사고를 당해 그 기회가 영원히 사라져 버려서 당신의 마음속에는 죄책감만 무겁게 남아 버렸죠."
"맞아요......."
"토모히로 씨의 죽음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토우이치 군까지 죽었죠. 토우이치 군의 죽음은 자신의 실수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사고였고요. 이 사고는 토모히로씨에 대한 죄책감을 더욱 더 키워서 당신이 짊어지기 버거울 정도로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지요."
"나는 계속 남편을 외면하고 있었어요. 미안한 마음에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당신은 미쳤어요. 마음의 평형을 잃고 자신을 잃고 말았죠. 지금 당신은 사람을 죽여도 괜찮을 것 같은,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당신은 토모히로 씨에게 사과하기 위해 그의 유지를 이어받기로 결심했죠."
마사오의 눈꼬리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이 귀로 흘러내렸다.
"당신의 마음속에 토모히로 씨의 인격이 들어갔습니다. 항상 토모히로 씨를 경멸하던 소우지가 미웠습니다. 소우지는 토모히로 씨의 아내까지 빼앗아 농락하고 있었으니 소우지의 죽음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나는 소우지 씨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마사오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오노 벤키치의 역립인
형에 독침을 장치했어요. 그 인형은 오직 소우지만이 만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우지가 당신에게 태엽을 감게 하려고 했습니다. 당신은 마음속으로 곤란하다고 생각했겠지만, 기계를 잘 모른다는 핑계를 대고 거절할 수 있었어요."
마사오는 조용히 토시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역립인형에 독침을 장치했을 때, 당신은 이미 소우지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어요. 대담해진 당신은 카오리 씨를 총으로 쏴 죽였어요. 총소리가 났을 때 나는 미로 속에 있었지요. 우다이 씨는 테츠바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요. 소우지는 방에서 막 뛰쳐나온 참이었습니다. 당신만이 카오리 씨 곁에 서 있었어요........"
"맞아요, 나만 카오리 씨 곁에 서 있었죠."
"그때 나는 절대로 당신을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범인이라고 믿고 있었죠. 그 범인은 발자국도 남기지 않았고,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매우 신기했어요. 그런데 당신을 범인으로 생각하니 모든 것이 설명이 되더라고요. 또 당신이 다가왔다면 카오리 씨도 경계를 하지 않았을테죠."
"카오리 씨를 쏜 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트릭이 사용됐어요. 나사 저택에서 일어난 세 건의 살인 사건은 모두 교활한 트릭이 사용된게 가장 큰 특징이죠. 소우지를 죽이기 위해 역립 인형을 이용했듯이, 카오리 씨를 죽인 흉기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카라쿠리 즌부리코가 사용되었어요."
"즌부리코?"
"예전에 길거리나 장터 등에서 장난감으로 만든 움직이는 오리를 팔았어요. 오리는 일반 셀룰로이드 재질로 만들어졌지만, 움직이기 위해서는 또 다른 장치가 필요했습니다. 장난감 오리 목에 실을 묶고 그 끝에 미꾸라지를 연결해 탁한 물이 담긴 수조에 넣는 거지요. 그러면 장난감 오리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헤엄쳐 다니거나 먹이를 잡아먹는 듯한 동작을 하게 됩니다. 카오리 씨를 죽인 흉기는 없앤 방식은 이와 같아요. 그때 당신 곁에는 연못의 오리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카오리 씨를 쏜 후 바로 종이끈으로 권총을 오리에 묶어 놓았습니다. 오리는 곧장 연못으로 돌아갔고요. 종이끈은 물에 녹아내리고 권총은 연못 바닥에 가라앉게 된 겁니다."
마사오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토시오는 그것을 패배자의 웃음으로 해석했다. 자신도 권투에서 패하고 나서 마사오처럼 웃은 적이 있었다.
"데츠바 씨의 약병에 독을 넣는 데에도 트릭이 필요했죠. 데츠바 씨는 두 자식가 죽고 나서 극도로 조심스러워졌습니다. 방에 자물쇠를 걸어놓고 그 누구라도 거의 접근하지 못하게 했죠. 그 데츠바 씨의 약을 독약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요. 아무도 그 약병에 손도 대지 못했죠.”
"그래서 트릭이 필요했던 겁니다. 이번 트릭에 사용된건 아무도 모르는 동굴이었고요. 당신은 데츠바 씨가 살해당하기 전날 밤, 미로에서 이어진 동굴로 데츠바 씨의 방으로 몰래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잠든 사이, 약병의 캡슐을 독이 든 캡슐로 바꿔치기했고요. 당신은 자신말고는 나사 저택에 동굴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다이 씨는 동굴을 찾아냈어요. 만약 동굴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누구도 당신의 범행을 입증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군요."
마사오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세 가지 범행은 모두 치밀한 계산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계산에서 벗어난, 예상치 못한 일도 일어났어요. 그 중 첫 번째는 우다이 씨가 동굴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죠. 그래서 데츠바 씨의 약병 속 캡슐을 바꿔치기한건 당신 외에는 생각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는 소우지가 그 장소에서 역립인형을 움직일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서 소우지는 카라쿠리를 움직이려고 했고 당신은 그것을 막을 수 없었어요. 억지로 막으면 오히려 의심을 받게 되니까요. 그 결과 우리는 범인의 수법을 알게 된 겁니다. 역립인형 안에 독침을 장치해 둔 범인의 수법 말이에요. 범인은 역립인형으로 소우지를 죽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을텐데 말이죠.”
"알려지는걸 원치 않았다고요?"
마사오의 눈빛이 한 곳을 응시하며 멈췄다.
"그렇습니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소우지의 시신은 무수한 장난감들 속에서 발견됐을 거예요. 역립인형은 다른 장난감들 속에 섞여 있고, 안에 장치된 독침은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을테고요. 당신은 범인이 외부인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 아닙니까?"
"외부인?"
"그래요, 그래서 당신은 또 다른 미끼 주사기를 준비해서 나사 저택 밖에 떨어뜨려 놓았던 것이겠죠."
"미끼 주사기......."
"그것도 오늘 우다이 씨가 찾아냈어요. 주사기 안에는 액체가 남아 있었고요. 분명 소우지를 죽인 독극물과 같은 것으로 밝혀질테죠. 바늘에는 소우지의 피가 묻어 있었을지도 모르고요. 치밀한 준비가 필요했겠지만, 소우지에게 주사를 놓아본 당신에게 불가능한 공작은 아니였겠죠."
마사오의 눈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토시오는 마사오의 얼굴을 손가락 끝으로 들어 올린 뒤 입술을 탐했다.
"...... 내 말에 틀린 점이 있습니까?"
마사오는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서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은 사라졌다.
"조금 다른 부분이 있지만 ...... 괜찮아요."
"다른 부분? 어디가요?"
"괜찮아요."
마사오는 팔을 뻗어 토시오의 손을 잡았다.
"부탁이 있어요."
마사오는 토시오의 손을 자신의 목에 갖다 댔다.
"...... 이대로, 힘을 주세요!"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토시오는 마사오의 팔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마사오의 상체가 드러났다.
토시오 밑에서 마사오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마사오는 토시오의 등에 팔을 두르고 몇 번이나 하얀 목을 내밀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토시오는 마사오의 냄새를 맡았다.

반쯤 깨어난 상태에서 토시오는 팔을 뻗었다. 토시오는 그렇게 하면서 마사오의 몸을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토시오의 팔은 하늘을 향해 뻗어 버렸다. 토시오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마사오는 없었다.
방은 밝아져 있었다. 옆의 침구류가 가지런히 접혀서 쌓여 있었다. 토시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시오는 옆방을 열었다. 정리된 책상 위에는 흰 종이가 놓여 있었다. 그 종이 위에는 빨갛고 하얀 눈을 드러낸 마도죠가 문진으로 놓여져 있었다. 토시오는 마도죠를 치우고 종이를 손에 쥐었다.
"카츠 씨의 호의가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있을 수 없습니다.
부디 저를 찾으려고 하지 말아주세요.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이것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마사오”

…….죽으려고 하는구나. 토시오는 직감했다.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마사오가 숙소를 떠난 시간은 7시였다. 한 시간 전이었다.
"어디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
토시오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물었다. 물론 마사오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 뒤 전화가 걸려왔다. 에토였다.
"무슨 일이야? 그녀는?"
에토가 물었다.
"......그게, 사라져버렸어."
토시오는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도망쳤지?"
"그래."
"이거 참… 도망가는게 유행도 아니고. 그럼 너는 어떻게 할거야?"
"...... 아직 생각하지 못했어."
"하지만 너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사라져버리는게 괜찮을 것 같은데. 그나저나, 정말 여자는 알 수가 없군."
토시오는 우스갯소리로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에토의 말에 의심이 생겨났다.
“...정말 여자는 알 수 없네…. 라고?”
마사오는 나사 저택으로 돌아간 것이 아닐까. 어제는 자기가 방해가 된 것이다. 마사오는 다시 한 번 동굴에 숨겨져 있는 비밀 재산을 되찾으러 나간 것이다. 그 때문에 마사오는 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무일푼으로 마사오가 따라올 거라 생각한 자신의 생각은 얄팍했다.
여종업원이 와서 아침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토시오는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종업원이 가지고 온 새 손전등을 방 안의 비상용이라고 적힌 꼬리표 아래에 걸려고 했다.
"그건?"
토시오는 무심코 물었다.
"어머, 모르셨나요? 먼저 가신 손님분께서 실수로 떨어뜨려서 망가뜨렸다고 하셔서 ...... 네, 대금은 받았습니다."
마사오는 손전등을 들고 떠났다. 마사오의 행선지는 나사 저택의 동굴이다. 확실하다.
토시오는 옷을 갈아입고 숙소를 나섰다. 여전히 가랑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저녁에 산 우산은 그대로였다.
마이코의 코트를 입고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마사오의 작은 등이 보이는 듯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 

2021/04/09

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 - 엘러리 퀸 / 정영목 : 별점 2점

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 - 4점
엘러리 퀸 지음, 정영목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네덜란드 병원에서 수술을 앞두고 있던 백만장자 노부인 애비게일 도른이 수술을 살해당한다. 범인은 병원 내에 있는건 확실하지만 수사는 난항에 빠지고, 주요 사건 관계자였던 외과 과장 닥터 프랜시스 재니까지도 살해된 채 발견된다. 실마리를 잡지 못해 괴로워하던 엘러리는 친구인 네덜란드 병원 의료과장 존 민첸이 한 말 덕분에 범인을 추리해 낸다.

엘러리 퀸의 국명 시리즈입니다. 국명 시리즈다운 본격 추리물로, 독자와의 공정한 두뇌 게임이 펼쳐집니다. '독자에의 도전'도 적절한 위치에 삽입되어 있고요.

공정하다는 측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모든 단서를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에 더해, 중요 단서는 엘러리 퀸이 중요하다고 콕 짚어 주기까지 하니까요. 때문에 추리 자체는 비교적 쉽게 느껴집니다. 아무래도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인 1931년에 발표되었던, 비교적 초기작인 탓이겠지요.
가장 중요한 단서라고 언급하는 '구두'가 대표적입니다. 처음 발견되었을 때 이미 엘러리는 안쪽으로 말려들어간 '구두 혀가죽'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며, 닥터 제니의 구두 사이즈를 물어봅니다. 키가 165cm밖에 되지 않는 작은 닥터 제니의 발 사이즈도 245밀리미터인데, 발견된 구두는 240밀리미터밖에 되지 않았지요. 이를 통해 독자는 범인은 발이 240밀리미터보다 작은, 아마도 여성일거라는 추리를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구두 끈을 수선했던 반창고도 마찬가지에요. 닥터 민첸이 "외부인들은 아무도 뭐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반면, 병원에서 이런 물건들이 어디 있는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사람들은 그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지"라고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범인은 병원에서 일하는 여성일 거라는걸 알 수 있습니다.
동기도 쉽게 드러납니다. 애비게일 도른이 죽으면 이득을 얻는 사람은 많지만, 닥터 재니가 죽음으로써 이득을 얻는 사람은? 닥터 재니의 아들로 밝혀진 토머스 스완슨밖에 없습니다. 책을 함께 쓰고 있다고 밝힌 닥터 존 민첸이 책을 오롯이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을 수도 있지만, 엘러리 퀸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니 구태여 살인이라는 무리수를 둘 이유는 없으니까요. 즉 범인은 토머스 스완슨과 관계가 있는, 네덜란드 기념 병원에서 일하는 여성인 거지요.

물론 그냥 이렇게 사건이 밝혀지지는 않습니다. 트릭도 적절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범인인 루실 프라이스가 어떻게 닥터 재니로 변장한 범인과 함께 범행 시각에 함께 있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트릭으로, 그녀가 닥터 재니로 변장하고, 목소리는 자기 목소리만 내었다는 간단한 1인 2역 트릭이지만 꽤 효과적으로 보였습니다. 트릭은 언제나 간단하면 간단할 수록 설득력이 높은 법이지요.
범인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추리쇼도 멋졌습니다. 속기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루실 프라이스를 모든 수사 관계자가 모여있는 범행 현장에 불러 경찰청장에게 보내는 메모를 쓰게 만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범인을 눈치 챈 퀸 경감이 "‘도른 부인과 닥터 재니의 살인자는…….’ 토머스, 이 여자를 잡게! ‘루실 프라이스입니다!’”라고 외치는데, 셜록 홈즈의 <<주홍색 연구>>에서, 짐을 가져온 마부를 붙잡고 범인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떠오르더라고요.
나중에 추리 과정을 설명하는 부분도 설득력이 높습니다. 그렇게 쉽고 단순하지만은 않고, 나름 여러가지 변수를 생각해서 추리를 했다는걸 잘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셜록 홈즈만큼 멋지지고, 높은 완성도를 보인다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주요한 부분에서 작위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낸 티가 물씬 나는 탓입니다. 가장 작위적이었던건 '사라진 캐비닛' 입니다. 원래 닥터 재니가 살해된 현장에는 캐비닛이 있었습니다. 등 뒤 캐비닛으로 향하는 사람을 닥터 재니가 의심하지 않아서 살해당했고, 이로써 닥터 민첸이 초반에 말했던 "그 기록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재니와 나 그리고 재니의 조수인 프라이스 양뿐일세. 프라이스 양은 훈련받은 간호사인데, 일반적인 사무를 본다네.” 를 통해 범인이 드러나는 중요한 단서죠. 그러나 캐비닛의 존재는 마지막에서야 밝혀집니다. 함께 책을 쓰던 닥터 민첸이 모든 관련 서류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라면서요. 서류를 없앨 때 '캐비닛' 째로 가져가는게 말이나 될까요? 게다가 살인 사건이 일어난 현장에서, 서류가 아니라 휴지 한 장을 가져가도 문제가 될 상황인데 캐비닛 째로 무언가를 가져가서 없앴다? 현장을 지키던 경찰이 허수아비도 아니고, 이건 정말이지 있을 수 없는 설정이었습니다. 게다가 캐비닛으로 들어가려면 좁은 책상 틈을 통과하여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는데, 시체를 놔 둔 채로 캐비닛을 어떻게 치웠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고요.
또 앞서 구두와 반창고 때문에 범인이 병원에서 일하는 여자라는건 이미 추리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병원에 있던 모든 관계자, 그 중에서도 여성들의 인적 사항을 낱낱이 파헤치는게 경찰의 할 일인데, 도대체 경찰은 뭐 하는지, 엘러리는 왜 이야기를 안 해 주었는지 모르겠어요.
두 번째 사건이 벌어진 마침 그 시간에 모든 주요 관계자들 알리바이가 증명되지 못하는 것도 작위적이며, 제목 역시 마찬가지에요. '네덜란드' 는 이야기와 별 상관이 없습니다. 사건 무대가 된 병원 이름이 네덜란드 기념 병원일 뿐이니까요. 국명 시리즈는 작위적이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많은데, 이 작품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네요.

아울러 전개도 불만스럽니다. 수상한 용의자들을 잔뜩 만들기 위해, 모든 등장인물들이 협조하지 않는다고 하는건 억지스럽고 짜증만 났어요. 살인 사건 수사에 나선 경찰 앞에서 모든 주요 관계자들이 뻔뻔하게 자신이 했던 일, 만났던 사람은 사건과 관계가 없다고 주하는에 이게 말이나 됩니까... 이들이 사실만 이야기했어도 절반 분량의 이야기는 필요가 없었을겁니다. 이런 억지는 고전 본격 추리의 황금기 시절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기는 합니다. <<비숍 살인사건>>에서 처럼요.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묘사였습니다.
등장인물들도 억지스러워요. 정신나간 인물들이 태반이에요. 정신병자이자 광신자인 사라 풀러, 누이 돈을 축내며 살아가는 기생충 헨드릭 도른은 고전 본격물에 등장하는 짜증나는 용의자의 스테레오 타입 그 자체였고, 기묘한 합금을 발명한다는 헛똑똑이 모리츠 크나이젤은 엘러리 퀸이 호적수를 만났다 운운하면서 띄워줬는데, 바로 다음에 자신이 살인자의 목표라는 허황된 추리를 떠벌여서 왜 등장해야 하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더군요. 아이가 죽고, 산모도 곧 죽을거라는 잔인한 대사를 서슴없이 내뱉는 산부인과 의사 닥터 펜니니도 사악함만 기억에 남을 뿐 등장할 이유가 없던건 마찬가지고요.
사라 풀러를 강간하다시피해서 훌다 도른을 낳게 한 내과 의사 루시우스 더닝은 그야말로 최악의 쓰레기였는데, 적절한 응징을 받았어야 했습니다. 엘러리 퀸이 인물 묘사에 약하기는 한데, 여러모로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공정함' 측면에서는 백만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본격 추리물로서의 묘미를 잘 갖추고 있지만, 추리 자체는 추리 퀴즈 수준인데다가 작위적인 전개와 함량 미달의 인물들로 가득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국명 시리즈는 저와 맞지 않는 듯 합니다. 세상에 읽어야 할 추리물은 많으니, 국명 시리즈는 이제 그만 읽어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