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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5

11장의 트럼프 - 아와사카 쓰마오 : 별점 3.5점

11枚のとらんぷ - 6점
아와사카 쓰마오/東京創元社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주요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즈타 시마코가 살해당했다. 그녀가 소속된 마지키 클럽의 마술 공연 중이었다. 시신 주변에는 부서진 여러 가지 물건들이 널려 있었는데, 이는 클럽 회원인 카가와 슌페이가 쓴 "11장의 트럼프"라는 마술 트릭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품들이었다.

사건 직후 마지키 클럽의 회원들은 도쿄에서 열리는 세계 마술 대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프랑스 마술사 프랑수아 란슬롯의 카드 마술을 보게 된다. 이를 본 카가와 슌페이는 미즈타 시마코 살인 사건의 진상을 깨닫게 되고, 회원들 앞에서 범인이 클럽 회원 중 한 명인 마츠오 쇼이치로임을 밝힌다. 이후 마츠오는 사건을 저지른 이유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든건 시마코의 조상인 마술사 호큐사이의 유품때문이었다.

"아아이이치로 시리즈""복잡한 기계장치" 등으로 유명한 아와사카 쓰마오의 또다른 대표작 장편입니다. 여러 리스트(이거라던가, 이거 등)에 높은 순위로 랭크되어 있는 작품이지요. 명성만 보면 왜 국내에 번역 출간되지 않았는지 의아합니다. 항상 읽고 싶었었는데, 이번 기회에 도전하여 완독하게 되었습니다. 원서라 그런지 완독하는데 거의 1주일이 넘어 걸렸네요.

이 작품의 제일 큰 장점은 마술과 트릭의 절묘한 결합입니다.

특히 마츠오가 자신의 알리바이를 조작하기 위해 활용한 트릭이 대표적이에요.
마츠오가 공민관 무대에서 펼쳤던 카드 마술은 관객이 고른 카드를 정확히 맞추는 마술이었는데, 마지키 클럽 회원들은 공연 당시 조명을 조작하던 시마코가 카드를 확인한 뒤 특정 위치에 조명을 비추어 맞추도록 한 트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마코가 그때까지 살아있다고 착각하게 되었지요. 사실은 이미 살해된 후였는데도요. 마츠오가 카드를 맞출 수 있었던건 시마코의 도움이 아니라, 관객의 핸드백 금속 장식을 사용했던겁니다("타짜"의 지포라이터같은거지요). 또 이건 카가와가 프랑수아 란슬롯의 카드 마술을 보고 깨닫게 되는 핵심 요소로,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란슬롯의 책을 열심히 읽었던 추종자 마츠오가 란슬롯의 말대로 관객이 카드를 정말 자기 의지로 선택하게끔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츠오의 공연 직후 이어진 오타니 난잔이 벌인 '주머니 속의 미녀' 마술에서도 마찬가지로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원래는 시마코가 미치코의 대역을 맡는 마술이었으나, 마츠오가 1인 2역을 소화하면서 시마코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착각을 관객들에게 심어줬던 거지요.

소설 속에 등장하는 "11장의 트럼프"라는 소설도 흥미롭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다양한 마술 트릭들이 소개되어 독자들에게 재미를 선사할 뿐 아니라, 중요한 단서로 활용되기도 하거든요. 특히, 카가와는 시마코가 살해된 현장에서 가스 밸브가 열린 것을 범인이 알아채지 못한 점에 착안하여 범인이 후각을 상실한 사람일 거라 추리합니다. 그리고 누가 후각이 없는지는 "11장의 트럼프"를 통해서 밝혀내게 됩니다.

사건의 동기도 독창적입니다. 시마코가 물려받은 일본 초기 마술사 호큐사이의 마술 비법이 동기라는 설정은 이야기의 설득력을 높여줍니다. "복잡한 기계 장치"의 '가라쿠리'에 대한 설명과 비슷하게 일본 초기 마술의 역사를 흥미롭게 풀어낸 덕분입니다.

또한, 마지키 클럽의 마술 공연에서 벌어지는 소동도 유쾌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특히 '주머니 속의 미녀' 마술에서 미치코가 탈출해 공연장으로 들어가려다, 입장권이 없어서 접수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은 아주 기발했어요. "아아이이치로" 시리즈가 떠오르더군요.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단점으로는 여러 가지 설정과 캐릭터들의 반응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살인이라는 중대한 범죄가 벌어졌음에도 주요 인물들이 사건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는 이질적이었어요. 피해자가 함께 활동하던 동료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과 주변 인물들이 비교적 가볍게 대응하는 듯한 모습은 영 공감이 가지 않더라고요.
심지어 클럽 회원인 게이코와 다른 인물들이 범인인 마츠오를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범행 동기였던 호큐사이의 마술 비법을 함께 이용하려는 속셈이 엿보이는 결말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범인이 현장을 "11장의 트럼프" 속 물건들로 꾸미는 설정도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호큐사이의 마술에 대해 누군가 알고 있다면 자신의 범행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세간의 이목을 끌고자 했다는 의도가 앞뒤가 맞지 않는 탓입니다. 호큐사이의 마술을 아는 사람이 사건을 접했다 하더라도, '시마코는 호큐사이의 마술 때문에 살해당했다!'고 주장할리가 없잖아요. 더군다나, "11장의 트럼프"라는 소설은 거의 판매되지 않아 대중의 관심을 끌기도 어렵고요. 사건을 일부러 극적으로 연출하려 했다면, 시체의 목을 자르는 등 보다 직설적인 방법이 효과적이었을 겁니다.
사건 현장에서 ‘가스 밸브가 열린 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단서 역시 비약이 심합니다. 이를 근거로 범인이 후각이 없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지나치게 극단적인 추리였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마술과 본격 추리 소설을 잘 결합하고 있으며, 독자에게 모든 단서를 공정하게 제공하며 추리의 재미를 충실히 전달해 줍니다. 마술 트릭과 사건의 연결이 돋보이는 장면들이 많으며, 초반의 유쾌한 분위기도 좋고요. 살인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독특한 설정으로 독자의 흥미를 끌며, 마술 트릭을 활용한 본격 추리 소설로서 한 번쯤 읽어볼 만한 가치는 충분합니다. 마술이 등장하는 본격 추리물 중(이 작품이나 이 작품, 이 시리즈...)에서는 가히 최고를 다툰다 할 수 있으니까요.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2006/11/05

프레스티지(Prestige) - 크리스토퍼 놀란 (2006) : 별점 4점

19세기 말 영국 런던의 두 마법사, "그레이트 단톤" 앤지어와 "교수" 보든은 과거 수행시절 보든의 실수로 인해 앤지어의 아내가 죽은 뒤 원수 사이가 되었다. 서로의 마술쇼를 훼방놓으며 대결하던 중, 앤지어는 보든이 새로 개발한 "순간 이동" 마술의 비법을 파헤치지 못하자 마술 장치 개발자 커터의 도움으로 보다 화려한 순간이동 마술을 선보였다.

그러나 보든의 계략으로 쇼가 실패한 뒤, 보든을 협박하여 그의 비법의 단서를 찾은 앤지어는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 콜로라도에서 천재 과학자 테슬라를 만나 보든의 마술 장치를 재현해 줄 것을 부탁한 앤지어.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보든의 계략이었다는걸 알게된 앤지어는 좌절하고 마는데.... 

두 마술사의 잔혹하며 처절한, 어떻게 본다면 유치하기까지한 대결을 그리고 있는 영화입니다. 대결의 핵심은 서로의 "마술"의 트릭(여기서는 비법)을 밝혀 나가는 것이고요. 그런데 이 트릭을 밝히려는 대결이 워낙 흥미진진했고, 짜임새 있는 복선으로 전개되어 재미있게 감상했습니다. 

좀 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메멘토"의 감독답게 시간축을 교묘하게 흔들어서 관객을 몰입시킵니다. 아울러 마술사들이 각각 서로에게 한방 먹는 장면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그래서 뻔한 이야기를 복잡하면서도 색다르게 만드는 편집도 탁월했습니다. 상영시간도 제법 긴데 이렇게 편집의 묘를 잘 살린 덕분에 호흡이 딱딱 맞아 떨어지며, 긴장을 조이고 푸는 맛도 빼어납니다.

둘 사이의 두뇌게임도 치밀했고, 마술의 트릭을 밝히는 과정 역시 뒷부분에서 관객이 거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합리적이면서 제대로 단서를 전달해줄 정도로 추리의 묘가 잘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트릭은 좀 허황되지만, 추리 스릴러 물로서의 가치도 높은 편이에요. 반전의 맛도 살아있고요. 물론 정통파는 아니라 약간 사도에 가까와서 취향을 좀 탈 수는 있겠습니다만...

시각적으로도 당시의 고풍스러운 시대상황을 잘 살리면서도 마술쇼의 화려함을 여과없이 보여주도록 촬영되어서 풍성합니다. 마술 소도구와 여러 "비법" 들에 대한 묘사 역시 재미가 넘치고요. 캐스팅도 완벽해서 보든 역의 크리스챤 베일은 예의 사악하면서도 냉정한 연기를 잘 보여주며, 마이클 케인의 묵직한 연기도 좋습니다. 단 휴 잭맨의 앤지어 연기는 좋긴 한데 개인적으로는 울버린 느낌이 지워지지 않아서 약간 아쉽더군요. 아울러 스칼렛 요한슨은 정말 조연 2 정도의 비중이라 왜 포스터 한 가운데에 떡하니 나와 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습니다. 요한슨 팬이라면 실망하실수도....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수조들을 불빛이 관통해서 안에 들어있는 엔지어의 시체를 전부 보여주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살짝쿵 들긴 했습니다. 

그래도 나머지 부분은 제가 보기에는 그다지 흠 잡을데 없는, 전체적으로 크게 무리없는, 잘 만든 영화입니다. 원작 소설을 한번 읽어보고 싶어질 정도로요. 책을 사기는 좀 부담되니 집에 있는 니콜라 테슬라 전기나 일단 다시 읽어봐야 겠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2023/07/17

오전 0시의 상드리용 - 아이자와 사코 / 신우섭 : 별점 2점

오전 0시의 상드리용 - 4점
아이자와 사코 지음, 카토기 마리 그림, 신우섭 옮김/영상출판미디어(주)

<<유리탑의 살인>>으로 추리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아이자와 사코의 데뷰작. 제 19회 아유카와 테츠야 상 수상작입니다. 이전에 아유카와 테츠야 상 수상작 중 국내 출간된 작품은 다 읽어본 줄 알고 포스팅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 작품을 빼먹었었네요. 서둘러 찾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나' (스가와) 가 한 눈에 반한 마술이 특기인 미소녀 토리노와 함께 학교 내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사건들을 해결한다는 전형적인 일상계 학원 청춘 추리물로, '마술'이 주요한 요소로 사용되는게 특징입니다. 
단편들이 느슨하지만 확실하게 연결된 연작이라는 특징도 있는데, 수록된 4편의 작품이 자살한 소녀 '후지이 아야카' 를 주요 소재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작답게 여러가지 복선들도 이야기별로 잘 배치되어 있습니다. 2화에서 기호 fff를 설명하면서 등장했던 16진수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 이야기에서 결정적 단서로 써 먹는 식으로요.

그러나 미소녀가 뛰어난 마술사라는 만화같은 설정을 무리하게 도입한 것 치고는 마술이 그다지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는 못했습니다. 등장하는 사건 중 마술로 트릭을 풀어내는건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거든요. 장황하게 트럼프 카드를 이용하여 설명을 펼치는 정도일 뿐, 실제 트릭과는 거리가 멉니다. 성장기를 그리기 위한 소재에 불과할 뿐이에요. 이래서야 마술이 아니라 육상이든, 대학교 진학이든, 고시엔이건 마찬가지였을겁니다. 이 중 마술이 선택된건, 작가의 마술 지식 과시 외의 다른 이유가 있어 보이지 않네요.
추리적으로도 빼어나다고 보기 힘듭니다. 일상계답게 사건들도 별 볼일 없지만, 애초에 사건도 아닌걸 괜히 유령을 가져다 붙여서 이상 현상처럼 보이게 만든 탓입니다. 2화가 대표적입니다. 누군가 밀실에 나이프로 이상한 문자를 남긴게 유령의 짓이라는 소문이 퍼지는데, 알고보니 밀실이 아니었다는게 진상이라 허무합니다. 4화도 마찬가지에요. 후지이 야아카가 학교 인트라넷에 접속해서 소란이 일어난다는데, 이게 왜 사건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계정 정보만 알면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데 말이지요. 지인이건 가족이건 누군가 후지이 아야카의 계정을 아는 사람이 접속했다고 생각하는게 당연한거 아닐까요?

1화는 평범한 일상계스러운 추리물 분위기가 좋았고, 3화는 예지능력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괜찮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완성도 높은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었던 토리노에게 스가와가 진심을 고백하며 간단한 마술을 보여주는 마무리는 괜찮았는데, 이런 식으로 마술을 좋아하는 소녀와 추리 소설 매니아 소년간의 평범한 일상계 학원 청춘 미스터리로 가볍게 풀어나가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자살한 소녀 이야기를 이야기 전편에 억지로 풀어가며 연작 형태를 취할 필요는 없었어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헛도는 트라이앰프>>
도서실에서 발견한 작고 바퀴가 달려있는 책꽂이의 세 번째 단에 있는 잡지는 왜 전부 뒤집혀져서 꽂혀 있었을까? 잡지 중 딱 한 권, 한 가운데 있는 것만 책 등이 보였다.

화자인 스가와, 그리고 스가와가 빠져버린 미소녀 토리노라는 주인공들과 중요 설정이 설명되는 시리즈 제 1작.
빼곡하게 꽂힌 잡지 사이에 잡지를 꽂으려면, 표지가 말리지 않게 뒤집어서 꽂는게 좋다는 착안에서 시작되는 추리는 좋습니다. 책꽂이는 바퀴가 달려 있었기에, 누군가 책꽂이를 반대쪽으로 밀어 놓았던게 진상이었어요. 책 등이 보이던 잡지 한 권만 그 전에 누군가 밀어 넣었던 겁니다. 왜 책꽂이를 밀어 놓았는가?는 무언가 바닥에 있던걸 숨기기 위해서라는 추리로 이어지고요.

그런데 도서부원 요시나가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는 사진을 숨기려고 책꽂이를 밀어두었다는 동기는 별로였어요. 도서위원이라면 도서실에 있는 시간도 많았을텐데, 사진을 진작에 회수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탓입니다. 의외성도 별로 없고요.
그리고 책꽂이를 밀어두느니, 사진이 안 보이게 보이는 부분만 뜯어내던가, 아니면 아예 사진이 끼어버린 책장 밑으로 밀어 넣는게 더 상식적인 해결책이었을겁니다. 억지로 사건을 만든 느낌이에요. 별점은 2점입니다.

<<가슴 속 카드 스탭>>
토리노가 학교 음악실에서 마술을 보여준 뒤, 깜빡하고 두고왔던 나이프가 책상 위에 새겨진 세 개의 f 기호와 함께 발견되었다. 음악실 위 옥상에서 투신 자살했던 후지이 아야카의 유령이 남긴 메시지라는 소문이 돌았다.

음악실이 일종의 밀실 상태였다고 하지만, 알고보니 밀실이 아니었다는게 진상이라 도무지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는 작품. 비상계단을 통해 한참 돌아가기는 하지만 밖으로 나가 다시 들어올 수도 있었으니까요. 이래서야 트릭이고 뭐고 없는 셈입니다.
책상에 f자 세 개를 남긴 동기도 억지였습니다. 칼로 자기 악보를 찢다가 후배 손수건을 망가트린게 이런 조작을 벌일 정도로 대단한 일일까요? 이 정도를 숨기려고 체력을 소모하면서까지 이상한 조작을 하고, 괴소문을 퍼트린다는건 설명하기 힘듭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믿음이 가지 않는 프레딕터>>
스가와는 '영'이 보인다는 이이쿠라가 분실했다는 수첩에서 미래의 영어 시험 결과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정말 '영' - 후지이 아야카 - 이 보이는 걸까?
이런 스가와의 질문에 이이쿠라는 스가와가 떠올린 단어를 맞추는 솜씨를 보여주는걸로 답했다. 연극부의 미소녀 하탄마루와 함께 후지이 아야카로 보이는 형체까지 목격하게 된 스가와는 밤 잠도 설칠 정도로 겁에 질렸는데, 그를 도와준건 토리노였다.


이이쿠라 수첩에 적혀있던 영어 시험 결과에 대한 추리, 진상, 그리고 동기는 모두 괜찮았습니다. 이이쿠라가 방과 후에는 '노는 아이'로 변신한다는게 단서였어요. 그녀는 방과 후 밖에서 츠루미 선생님과 사귀고 있었던겁니다. 남자친구인 츠루미 선생 수첩에 스티커 사진을 붙였는데, 그걸 츠루미 선생은 분실했고 이를 입수한 분실물 담당자 무코지마 선생은 스티커 사진만 보고 여자아이 것으로 오인했던 거지요. 츠루미 선생은 학생과 사귀는걸 비밀로 하기 위해 똑같은 수첩을 구입해서 사용하면서, 원래의 수첩은 이이쿠라가 잃어버린 척 해서 찾아오라고 시켰고요. 그 와중에 혹시 몰라, 분실한 수첩과 쓰던 수첩을 바꿔치기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 영어 시험 결과를 적어 놓았던걸 스가와가 우연히 보고 미래의 영어 시험 결과를 예지했다고 착각한게 진상입니다. 수첩과 스티커 사진, 이이쿠라의 변신 등 여러가지 단서의 제공도 공정하며, 이를 조합해서 펼치는 추리도 깔끔했던 좋은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하지만 스가와가 하탄마루와 함께 본 유령의 정체는 영 미덥지가 않습니다. 하탄마루는 소녀 - 아마도 이이쿠라 (다른 사람으로 밝혀지지만) - 가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스가와에게 들켰다는걸 숨기려고 그녀가 몰래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데, 그렇다면 그녀가 유령이 아니라는걸 하탄마루는 왜 스가와에게 숨겼던 걸까요? 옷을 갈아입는걸 목격당한 소녀가 창피함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석연치 않습니다.
그리고 이이쿠라와 토리노 간에 마술,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툼, 이를 잘못 해석한 스가와의 말에 더 큰 상처를 받는 토리노의 모습은 다소 지루했습니다. 전형적인 청춘물스러운 전개라 식상했어요.이 시리즈에서 마술의 가치는 추리적인 요소보다는 청춘물 전개를 위해 필요한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고요.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다른 작품들보다 확실히 빼어났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습니다.

<<당신을 위한 와일드카드>>
후지이 아야카의 계정으로 학교 게시판에 글이 올라왔다. 유령이 없다는걸 증명하기 위해 스가와가 하탄마루와 함께 조사에 나섰지만 정체를 밝혀내는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앞둔 날, 스가와는 루리카와 선배의 자살 시도를 목격했다. 이를 막은건 토리노였다. 그녀는 후지이 아야카와 루리카와 사이에 있었던 과거와 아야카의 마지막 메시지를 알려주며 루리카와의 마음을 푸는데 성공한다....

진상은 별볼일 없었습니다. 후지이 아야카에게 동생이 있었고, 그 동생이 같은 학교에 입학했다는게 전부거든요. 동생이 요시나가라는건 첫 작품에서부터 삽입되었던 이런저런 복선으로 비교적 잘 설명되고요.

그러나 동생이 누구냐인 것 보다 후지이 아야카와 얽힌 친구가 루리카와 선배라는게 추리의 핵심인데, 단서인 후지이 아야카의 숫자 ID는 억지스러웠습니다. 숫자가 생일이 아니라 16진법으로 '루리색'을 의미한다는건 추리라기 보다는 상상의 영역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누가 봐도 생년월일에 가까운 숫자라서, 억지로 16진법 코드를 가져다 붙인 느낌이에요.
전개도 별로입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이를 유령 소동으로 돌릴 이유는 없습니다. 후지이 아야카가 루리카와에게 남긴건 글이 아니라 음악이었고, 그건 원망이 아니었다는 결말도 진부하기 짝이 없고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0/09/06

죽음과 모래시계 - 도리카이 히우 / 정대식 : 별점 1.5점

죽음과 모래시계 - 4점
도리카이 히우 지음, 정대식 옮김/영상출판미디어(주)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동의 작은 산유국 제리미스탄은 고갈되는 석유 자원 이후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감옥 국가"로 거듭났다. 거대한 사형수용 감옥을 만들고, 세계 각지의 사형수들을 돈을 받고 수감한 뒤 사형까지 집행해 주는 시스템이었다. 사형 제도가 쇠퇴함에 따라 흉악 범죄와 무기수의 종신 수용을 위한 비용 증가에 고심하던 각 국은 사형수 한 명당 수만 달러의 비용으로 제레미스탄 "종말 감옥"에 처분을 맡겼다. 

이 "종말 감옥"에 부모를 죽인 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앨런 이시다가 수감되었고, 그는 사형수로 감방장을 맡고 있는 슐츠의 조수가 되어 감옥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사건 해결에 나서는데....

2016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입니다. 모르는 작가의 모르는 작품이지만, 본격물의 애호가로서 놓치기 힘든 수상 이력이라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사형수를 수감하는 "종말 감옥"이라는 설정은 재미있습니다. 감옥의 운영, 죄수의 관리 및 감독 방식 - 죄수 몸 속에 삽입되어 죄수가 특정 지역을 벗어나면 전기 충격으로 기절하게 만드는 마이크로 칩 - 등을 꽤 그럴싸하게 그려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이런 설정들을 트릭에 잘 활용하고 있기도 하고요. 고작 수만불로 흉악한 사형수를 받아들인다는게 말은 안되지만, 이 정도는 눈 감아 줘야겠지요. 안그러면 이야기가 성립이 안될테니까요.

하지만 그 외에는 건질게 없습니다. 수록된 여섯 편의 단편 거의 모두가 설득력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망작들인 탓입니다. 그나마 처음의 두 편, "마왕 샤보 돌마얀의 밀실"과 "영웅 첸 웨이츠의 실종" 정도만 조금 볼만한 트릭이 나올 뿐이고, 다른 작품들은 이야기하기도 민망한 수준입니다.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다운 본격물도 별로 없고요. 읽어보신 분들이 대부분 칭찬하는 마지막 에필로그의 반전도 저는 별로였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평균 별점은 1점 이하 수준이지만, 종말 감옥의 설정만큼은 그런대로 재미있었기에 0.5점을 더합니다. 강호순 같은 범죄자는 이런 곳으로 보내버리면 좋겠네요.

짤막하게 요약한 수록 단편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 담겨있으니 참고하세요.

"마왕 샤보 돌마얀의 밀실" 

맨 몸에서 칼이나 만년필을 끄집어내는 물질화 마술로 '마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샤보는 사형 집행 전날 독방에서 난도잘당해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맞은편 독방의 용병 출신 사형수 난조는 목이 베여 죽었다. 완벽한 밀실이고 흉기도 발견되지 않은데다가, 사형 집행 전날 살인을 저지를 이유도 불분명한 상태였다...

샤보는 전쟁 때 손상된 엉덩관절을 인공관절로 교체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장착한 넙다리 인공골두 안이 텅 비어 있있지요. 그래서 그 안에 이런저런 물건을 넣어두었다가 꺼낼 수 있다는게 물질화 마술의 정체입니다. 피부에 작은 구멍을 통해 손을 넣어서 빼낸거지요. 때문에 물질화 마술로 꺼낼 수 있는건 가늘고 긴 물건들(만년필)로 한정되고요. 샤보는 이 트릭으로 몸 속에 숨겨두었던 칼을 꺼내어 던져 난조를 죽였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전쟁 때 용병 난조에게 가족을 잃었는데, 그 복수를 직접 하기 위함이었지요. 난죠를 죽인 뒤 칼(에 묶어둔 실 따위로)을 회수하여 자신의 몸을 난자한 뒤 실혈사했습니다. 난자한 이유는 마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피를 다 흘리기 전에 칼을 다시 숨길 수 있고, 상처가 많으면 칼을 꺼내는 구멍의 존재도 숨길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물질화 마술이라는 흥미로운 설정과 대담한 트릭은 볼 만 하지만 트릭이 그렇게 설득력 높아보이지 않으며, 자살한 뒤 칼을 다시 숨길 이유가 없다는건 눈에 거슬립니다. 마술의 트릭을 밝히지 않는게 마술사의 사명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죽을거 아픔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 몸을 난자한다는건 말도 안되잖아요? 구태여 사형 집행 전날 난조를 죽인 이유도 별로 와 닿지 않고요.

그나마 이게 이 단편집 최고 작품 중 하나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영웅 첸 웨이츠의 실종" 

종말 감옥에서 탈옥한 사람은 딱 한명, 의사 출신의 반체제 정치범 첸 웨이츠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마이크로 칩을 무력화하였을까? 그리고 왜 훤한 보름달이 뜬 밤 탈옥을 하였을까? 왜 가장 건장한 경비원 다르위시가 감시탑에서 근무할 때 탈옥을 하였을까? 다르위시는 어떻게 죽였을까? 제레미니스탄의 수장 사리흐 아리 파힐은 슐츠에게 사건 해결을 명하는데...

감옥이 나오니 탈옥 이야기가 안 나올리가 없겠지요. 두 번째 작품이 바로 탈옥물입니다.

첸 웨이츠가 의사 출신으로 중국인 죄수들의 신임을 얻은 뒤, 그들의 사체를 이용하여 마이크로 칩이 어디있는지 알아냈다는 추리는 괜찮았습니다. 100Kg이 넘는 다르위시가 경비하는 날을 노린 이유도 그럴듯해요. 다르위시의 목에 가죽 밴드를 엮은 끈을 걸어 살해하고, 그의 시체를 버팀돌 삼아 감시탑을 올라간게 진상이니까요. 탑을 오르기 위해서는 체중이 제일 무거운 경비원이 필요했던 겁니다. 보름달도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어 다르위시의 주목을 끌기 위한 목적이었고요.

하지만, 트릭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은 모두 설명도 부족하고 설득력도 낮습니다. 의무실의 허술한 보안으로 메스 한 두개, 죄수 구속용 밴드 여러개를 빼돌려 탈옥에 이용했다는 것부터가 그러하지요. 사형수들이 많은 감방에서 메스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3미터 위의 감시원 목에 올가미를 던져 건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어 있는 고정된 목표라면 모를까, 살아있는 경비원이 자신의 목으로 날아오는 올가미를 보고 피하지 않는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밝은 보름달 밤이라 죄수를 보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더더욱 그러하지요.
이거에 비하면 담을 넘은 뒤 야생 낙타를 올가미로 잡아 사막을 가로질렀다는 탈출 방법은 오히려 쉬워보이네요. 이렇게 거대하면서 대단한 감옥 도시가 CCTV없이 감시원에게만 의지하고 있으며, 감시원도 2인 1조가 아니라 1명만 근무를 선다는 등의 허술함에 바탕을 둔 탈옥이라는 점에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아울러 영웅 첸 웨이츠가 탈옥 후 현실의 벽에 부딛힌 나머지 30명이 넘는 사람을 죽이고 진짜 사형수가 되어 종말 감옥에 복귀한다는 결말은 최악입니다. 안 나오니만 못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발상은 나쁘지 않지만 추리 퀴즈 이상의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감찰관 제마이야 칼리드의 도회"

종말 감옥을 감찰하기 위해 찾아온 감찰관이 배를 칼로 찔려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유력한 용의자는 감찰에 걸려 좌천될 예정이었단 옥졸 무바라크였다.

악덕 옥졸 무바라크의 혐의가 짙어서 흥미를 불러 일으키지 못합니다. 작중 최악의 빌런이 용의자라면, 없던 죄도 만들어 누명을 씌울 판인데 그를 위해 진상을 밝힌다? 영 와닿지 않아요. 사건을 조사하는 슐츠와 앨런 입장에서는, 감찰관이 자살했건 살해당했건 아무 상관이 없는데 진상을 밝힐 이유도 없고요. 감찰관이 자살하면서 악덕 옥졸인 무바라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했다는 진상도 별로입니다. 업무에 대한 사명감으로 포장하고는 있지만 그렇게 설득력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감찰관이 지병을 앓고 있었으며, 이를 그의 삭발과 구토 흔적으로 추리해내는 부분 외에는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많이 줘 봤자 1.5점입니다.

"묘지기 라쿠파 걀포의 긍지"

티벳 출신 사형수로 제리미니스탄 어를 익히지 못해 소통이 불가한 죄수 라쿠파 걀포는 홀로 사형 집행된 죄수의 묘를 파는 일에 몰두했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 그가 사체를 다시 파헤쳐 먹었다는 소문이 돌고, 조사를 통해 최근에 묻힌 사형수 사체의 일부가 훼손되어 사라진건 사실로 확인되었다. 슐츠는 고심한 끝에 이를 숨기지만, 사형수 로드리고 소토홀의 시체가 완전히 훼손된게 밝혀지자 걀포 역시 곧바로 사형 집행을 받게 되는데...

소토홀과 걀포가 친구였으며, 티벳인 걀포는 소토홀을 위해 최고의 장례인 '조장鳥'을 치뤄주려 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앞서 시체를 훼손했던건 그 고기(?)로 독수리를 모으기 위해서였고요. 이 정도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나오네요. 애초에 수천명의 사형수의 묘지를 감옥 내에 만든다는 설정부터가 말도 안되지요. 본국 가족에게 인계하거나, 화장하는게 당연하잖아요? 증거도 걀포가 티벳인이라는게 전부입니다.

소토홀이 언어 천재였다는 복선으로 그가 걀포와 친구였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 외에는 뭐 하나 건질게 없는 망작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여죄수 마리아 스코필드의 잉태" 

남감방과 분리된 여감방의 죄수 한 명이 임신했다게 알려지고, 이 사건 진상 조사를 위해 여감방 의사 라일라는 추리력으로 유명한 슐츠의 도움을 받고자 찾아왔다. 그러나 슐츠는 이야기만 듣고 사건 조사를 앨런에게 위임했고, 앨런은 직접 여감방에 방문해서 임신했다는 여죄수를 만났다. 그런데 그 여죄수는 앨런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마리아였다.

장황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교도소 안에서 임신을 할 리 없지요. 그냥 앨런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작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어린 시절부터 앨런을 좋아했었고, 정말로 그의 아이를 임신하기 위해 레즈비언 관계였던 여의사 라일라에게 부탁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유와 동기, 결말 모두가 황당하고 어이가 없습니다. 이런 소문이 난다고 해서, 앨런이 여죄수 감방에 방문한다는건 생각하기 어려우니까요. 슐츠와 앨런에게 사건 의뢰가 전달되지 않았다면 라일라는 거짓말의 뒷 수습을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지도 궁금하고요. 또 이미 임신 3개월이라고 거짓말을 했는데, 그 시점에 앨런의 정자로 마리아를 임신시키면 주차가 맞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한 마디로 점수를 줄 수 없는 망작입니다. 이 정도면 나무한테 미안한 수준이에요. 별점은 0점입니다.

"확정수 앨런 이시다의 진실" 

앨런 이시다의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4일. 그 동안 앨런은 독방에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된 부모 살인 사건의 진상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게 되는데...

앨런 부모가 죽은 사건에 대한 앨런의 회고라 추리의 여지는 없습니다. 그나마 부모 사건의 도화선이 된 친아버지가 보낸 편지 - 자신이 TS 바이러스의 보균자라는걸 밝히는 - 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친아버지가 슐츠라는걸 알아내는 과정만 추리라 할 수 있지요.
슐츠는 생화학 병기를 연구하던 테러리스트로 신분을 드러낼 수 없어서 앨런의 어머니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이후 테러로 사형 선고를 받고 수감된 뒤, 종말 감옥에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메일 등을 활용할 수 없었던건 감옥이었기 때문으로, 앨런은 종말 감옥의 편지지 등을 확인하고 자신의 추리가 맞다는걸 확신합니다. 예상대로지만 나쁘지는 않아요.

그러나 이어지는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제레미니스탄의 수장 파힐이 직접 사형을 집행하는 집행인으로, 홀로 권총 한 자루에 의지해 사형을 집행한다는건 어이를 상실케 합니다. 이런 집행인 상대라면 인간 흉기급 사형수라면 너끈히 제압하고도 남을겁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차피 죽을거, 발악이라도 해 보는게 당연하고요.
파힐이 앨런에게 신경을 쓰는 틈을 타 몰래 잠입한 슐츠가 파힐을 협박하여 통행증을 받아 앨런에게 건네주고 탈옥시킨 뒤, 파힐을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는 결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말 감옥 경비의 허술함, 파힐의 무능함이 합쳐진 결과인데 이 정도라면 진작에 사단이 나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또 파힐이 전 세계 부호들에게 사형 순간을 생중계해 주는 댓가로 돈을 받고 있었다는 설정은 왜 넣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렇지않아도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아예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릴 뿐입니다.

이야기가 끝났다는것 하나만 위안이 되는 졸작. 별점은 0.5점입니다.

"에필로그" 

슐츠는 파힐의 시체를 숨긴 뒤 바이러스 발작이 일어남을 느낀다. 그는 갓난아기 앨런에게 TS 바이러스를 주입해 보균자로 만든 과거를 떠올리며 죽어간다...

읽어본 사람들 모두가 인상적이라 칭했던 반전이 등장하는 마무리입니다. 생화학 병기를 이용한 테러를 꿈꾸던 슐츠가 전 세계에 자신이 만든 TS 바이러스를 흩뿌린다는 결말로, 앞서 망작이었던 5, 6편 이야기는 모두 이 반전을 위한 복선이었습니다. 그 두 편이 왜 망작이었는지는 살짝 이해가 됩니다. 반전을 위한 부품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러나 위기에서 벗어난 순간 뒷통수를 쎄게 후려치는 의외성은 돋보이지만, 그렇게 빼어난 반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앨런이 보균자였다면 투옥되기 이전 생활에서부터 착실히 주변인들에게 감염을 이어왔을겁니다. 앨런의 탈옥이 무슨 계기라도 된 것처럼 부풀릴 필요는 없어요. 잠복기 수십년인 바이러스의 발작이 때마침 마지막 순간에 일어났다는 작위적인 전개도 거슬렸고요.

이런 류의 작품을 너무 많이 읽었나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13/03/09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 다카기 아키미쓰 / 김선영 : 별점 2.5점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 6점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술쇼를 위해 준비한 인형의 목이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난 뒤, 아야노코지 가문의 딸 유리코가 무대 장치 길로틴으로 목이 잘린 시체로 발견되었다. 마술 협회 회원들이 모인 별장 지수장 근처 철길에서 마네킹이 열차에 치인 뒤, 둘째딸 요시코마저 열차에 치어 죽자 명탐정 가미즈 교스케가 사건 해결을 위해 나섰다.

다카기 아키미쓰의 대표작 중 한 편입니다. 얼마 전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지요. "주간문춘 동서 미스터리 100"에도 실려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좋은 점부터 이야기하자면 다채로운 트릭들입니다. 무려 4건의 살인사건이 벌어지는데, 이 모든 사건들에 나름의 트릭이 구사되고 있거든요. 특히나 두 번째 사건의 트릭이 좋아요. 제목인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와 부합되는, 그야말로 상식을 깨는 멋진 알리바이 트릭이었습니다. 간단한 소실 트릭이나 현실적이고 "마술"을 테마로 한 작품에 어울리는 첫 번째 트릭, 사건 전체 음모의 핵심이자 배경이 되는 바꿔치기 트릭인 네 번째 사건 트릭도 괜찮았고요.

퍼즐 미스터리의 자존심? 이라고 할 수 있는 독자에의 도전이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완벽한 정통 본격물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트릭 외의 부분은 모두 실망스럽습니다. 그간 읽어왔던 작가의 다른 작품과 비교해 볼 때 이야기 수준이 너무 낮은 탓입니다. 우선, 일단 일본 굴지의 명탐정이라는 가미즈 교스케가 너무나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나마의 추리도 스기우라와 나카타니 죠지가 전한 자료와 단서에 근거하고 있고요. 이 둘보다도 추리력이 떨어진다는 뜻이잖아요? 결국 결말도 죽을 사람들은 다 죽고나서야 범인을 밝혀낸다는 것이니 이래서야 왜 명탐정인지 알 수가 없네요.

작위적인 전개와 설정도 짜증을 유발합니다. 예를 들어 스기우라가 진상에 대해 남긴 글입니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글이 아니라 암호같은 문구로 남긴건 추리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작위적 설정에 불과합니다. 앞서 장점에서 이야기했던 기차 트릭은 분명 걸작이지만, 범행이 실패했다면 결국 요시코와 미즈타니가 결혼하여 아야노코지 가문의 재산을 얻을 기회는 영원히 없었으리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작위적이었고요. 그 외에도 첫 사건에서의 마술 트릭 후 유리코가 보험에 가입한 이유, 나카타니 죠지의 정체가 무엇이며 무슨 꿍꿍이였는지, 요시코가 준비했다는 덫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사와무라가 진상을 눈치챘으나 왜 아무런 말도 안하고 혼자 겁에 질려있다가 살해당하는지 등 설명되지 않는 것도 너무 많습니다.

마술이라는 소재도 도입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올드 블랙 매직 어쩌구라는 악마 미사까지 등장시키면서 마법의 영역으로까지 분위기를 몰고가는 것은 지나쳤습니다. 딕슨 카의 고딕 호러 스타일 추리물의 아류작이라는 느낌만 전해 줄 뿐이었습니다. 변격물의 분위기가 남아있는 낡은 스타일의 문체는 작품이 발표된 시기를 감안하면 어쩔수 없었더라도, 지금 읽기에는 촌스러웠고요.

뒷부분에 실려있는 두편의 단편 "무고한 죄인"과 "뱀의 원"도 국내 초역이라는 점은 높이 평가하지만, 두 작품 모두 가미즈 교스케가 하는 일이 별로 없다는 점과 동기나 전개 모두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뱀의 원"에서 서로의 꼬리를 물고 맞물려 있는 두마리 뱀에 대한 이야기 정도는 괜찮았지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수준 이상이지만, 완성도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인형을 이용한 트릭을 먼저 떠올리고 억지로 장편으로 끼워 맞춘 듯한 작품이었어요. 고전 추리 애호가분들께는 출간 자체가 기쁜 소식이기는 하지만 지금 출간되기에는 너무 늦은 듯 싶습니다.

덧붙이자면, 띠지에서부터 일본 3대 명탐정 어쩌구하고 광고를 하는데 이런 리스트는 대체 누가 뽑는지 모르겠네요. 맥락도 없고 기준도 없고...

2022/09/12

흑마술의 여자 - 모리무라 세이이치 : 별점 2점

흑마술의 여자 - 4점 모리무라 세이이치 지음/동하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흑마술과 관련된 기묘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카미치 도키코는 다카네자와 다쿠야와 결혼하여 행복한 신혼 생활을 보내던 중, 남편 친구 우나하라 살인 사건의 중요 참고인이 되어 버렸다. 밀실인 그녀의 별장에서 우나하라의 시체가 발견된 탓이었다. 그녀는 또 다른 남편 친구 아리자와가 수상하다고 주장했지만, 아리자와마저 살해되어 버렸다.
경찰은 수사를 통해 성폭행 당한 뒤 살해당했던 미스기 게이코 사건과 이 사건이 관련이 있다는걸 알아냈고, 도키코를 추궁하여 결국 진상을 밝혀내게 되는데....


추석 연휴를 맞아 책을 정리하다가 집어들게 된, 거의 30여년 전 구입했던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장편.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사회파 추리 소설' 작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잔혹한 범죄에서 시작되는 범죄 스릴러물, 그리고 몇 가지 트릭이 등장해서 비교적 정통 추리물 느낌을 전해줍니다. 특히 '유니트 하우스'라는 건물의 특징을 이용한 밀실 트릭 아이디어가 돋보였어요. 우나하라는 도키코의 별장이 아니라 바로 옆 아리자와 별장에서 살해당했고, 아리자와가 별장 이층 방을 통째로 떼어내 교체했다는 겁니다. 실제로 수사 과정에서 도키코와 아리자와 별장의 이층 유니트가 바뀌어져 있다는게 드러나지요.
'이층 유니트를 통째로 바꾸는건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층을 통째로 교체하느니 지붕이나 벽면 일부만 떼어내어 사체를 옮기는게 더 편했을텐데 그러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등 이어지는 수수께끼도 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당연히 아리자와가 범행 후 유니트를 교체한건 아니었습니다. 진범은 도키코로 그녀는 우나하라를 별장에 먼저 초대한 뒤, 독이 든 위스키를 먹도록 유도하여 살해했던 겁니다. 유니트는 설치 당시 도키코가 자기 별장에 더 새 것처럼 보이는 유니트가 설치되도록 했던게 전부였습니다. 설치 공사는 명찰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에, 명찰만 바꾸는 걸로 교체가 가능했었죠. 유니트 하우스이니 설치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요. 나중에 범행을 아리자와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해 이 사실을 이용했던 겁니다.
경찰이 이를 증명하는 과정도 합리적입니다. 별장 해체 후 유니트 패널 조사를 통해, 우나하라 살해 사건 당시 별장 근처 아자마 산이 분화하여 화산재가 내렸는데, 패널에는 화산재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로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건 당시 유니트는 분해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당시로서는 꽤 첨단이었을 유니트 하우스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비현실적인 교체가 아니라 누군가를 모함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었다는 등 꽤 괜찮은 발상이 많이 보여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정작 밀실 살인에는 굉장히 간단한 트릭이 사용되었으며, 유니트가 바뀌었던 이유가 '자기 것을 더 좋은 걸로 만들고 싶은' 보편적인 인간 심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도 현실적이라 좋았습니다.

그리고 3인조 성폭행범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보였던 미스기 게이코 사건이 우나하라, 그리고 아리자와 살인 사건과 이어지는 복잡한 과정이 경찰 수사를 통해 설득력있게, 그리고 흥미롭게 드러나는 전개도 볼 만 합니다. 우나하라가 3인조 성폭행범 일당 중 한 명으로 그들은 게이코를 살해하지 않았으며, 미스기 게이코와 동행했다가 함께 성폭행범에게 납치되었던 '환상의 여자'가 도키코라는건 초반에 독자에게 공유되는 덕분입니다. 독자도 게이코 살해의 진상과 우나하라를 죽인 범인이 도키코인지 아니면 게이코의 약혼자였던 아리자와인지를 궁금해 할 수 밖에 없지요.
경찰이 우나하라가 3인조 중 한 명이라고 추리하여 나머지 일당을 체포하고 아리자와 사건의 진상을 밝혀는 것도 그럴싸 했습니다. 우나하라가 살해된 뒤, 남은 2인조가 아리자와가 복수했다 여기고 그를 살해했던 겁니다. 여기서 아리자와 사건은 게이코 사건과 연결되지 않으니, 우나하라 사건과 게이코 사건이 연결되며 두 사건의 범인은 도키코라는 결론에 이르는 추리도 합리적이었습니다. 도키코가 우나하라를 살해한 이유는 협박받았기 때문일텐데, 그 이유는 우나하라가 성폭행을 저질렀다는걸 폭로하겠다는 협박일리는 없습니다. 그 사실이 드러나면 잃을게 더 많은건 우나하라니까요. 결국 우나하라는 게이코를 죽인 진범이 도키코라는걸 폭로하겠다고 협박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환상의 여자'가 도키코임을 밝혀내고 결국 도키코를 체포하는 경찰의 집요하면서 끈질긴 수사 과정도 사회파 추리 소설 작가다운 디테일이 돋보였습니다. 고소우 경찰 부장 등 등장하는 경찰 캐릭터들도 생동감있게 잘 그려내고 있고요.

가장 마지막에 드러나는, 도키코가 게이코를 살해했던 이유는 정말 놀라왔습니다. 그녀는 선천적 기형으로 질결손 상태였는데, 성폭행범들 때문에 이 사실이 게이코에게 알려지자 그걸 숨기기 위해 살해했던 겁니다. 그 뒤 인공 질 성형술을 시술받아 결혼했고요. 좀 급작스러게 드러나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앞서 여러가지 복선으로 - 특히 다쿠야가 미국 출장을 간 사이, 도키코가 거리에서 만난 남자와 불륜을 저지른 이유처럼 - 설명되고 있어서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작품이 발표된 1974년이라는 시점에서는 상당히 시대를 앞서간, 신선한 아이디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비슷한 아이디어가 1975년 작품인 나쓰키 시즈코의 <<흑백의 여로>>에서도 사용된 바 있는데, 아마 당시 일본에서 사회 문제가 되었던게 아니었다 싶기도 하네요.

이렇게 3인조 성폭행범의 범죄에서 촉발된 연쇄 살인극만 놓고 보면 꽤 괜찮은 작품입니다. 나름의 트릭도 잘 사용되어 있고, 수사 과정과 진상 모두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작가 인생 최전성기에 발표된 작품답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제목에도 있는 '흑마술' 입니다. 이는 도키코의 남편 다쿠야가 흑마술과 집단 난교 등을 행하는 사이비 종교 단체인 '신비학회'의 본부가 있는 미국 라스베가스까지 날아가 비밀 모임에 몰래 참석하는 등 뭔가 대단한 배경이 있는 것 처럼 장황하게 설명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본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냥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끌기 위한 자극적인 소재에 불과해요.
추리적으로도 도키코가 아리자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노력하고는 있지만, 아리자와에게 알리바이가 있을 경우 대책이 없었다는 헛점이 크게 느껴집니다. 아리자와의 알리바이가 증명된 이후, 도키코는 빠져나갈 여지가 없어져 버렸으니까요. 아리자와가 운 좋게 (?) 살해당해서 시간을 벌었을 뿐입니다.
작가 특유의 성적 묘사도 지나쳐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장점도 분명하지만 단점이 너무 커서 완성도 측면에서는 점수를 주기가 어렵습니다. 그나마 흑마술과 성적 묘사 부분만 뺐더라도 훨씬 좋은 작품이 되었을텐데 아쉽네요. 구태여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어차피 절판되어서 구하기도 쉽지 않습니다만...

2017/04/21

아마겟돈 - 프레드릭 브라운 / 조호근 : 별점 3점

아마겟돈 - 6점
프레드릭 브라운 지음, 조호근 옮김/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그동안 유명세만큼 국내에 소개되지는 않았던 거장 프레드릭 브라운의 단편선입니다. 정식 소개된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네요. 반가운 마음에 바로 구입하였습니다. 

작가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 유머, 반전이 살아있는 단편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는데, 유일한 단점이라면 국내 소개가 너무 늦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2.66.... 인데 반올림해서 3점주겠습니다. 늦었지만 번역 출간된 것만 해도 충분히 점수를 줄 만하니까요. 같이 소개된 "아레나"도 빨리 구해봐야겠습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마게돈" 

마술사를 꿈꾸는 꼬마가 성수를 담은 물총으로 악마를 퇴치한다는 내용으로, 이전에 국내에 소개되었던 단편집 ("마술 반지" 였던가요?) 에서 접했던 작품입니다.

악마가 소환되는 과정의 의외성은 돋보이지만, 딱히 대단한 반전은 없습니다. 그냥 저냥한 소품이에요. 솔직히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기는 어려운데 왜 표제작인지 잘 모르겠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스타 마우스"

과학자 헤르 오베르부르커는 직접 만든 로켓에 생쥐 밋키(미키인데 오베르부르커 발음이 이렇습니다)를 태워 달로 보냈다. 소행성 프록슬에 착륙한 밋키는 프록슬인에 의해 지성을 갖게 되었다.
밋키는 쥐들의 지능을 인간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기계를 가지고 지구로 복귀해 쥐들의 나라를 만들 꿈을 꾸었지만, 아내 미니 우리에 설치된 전기 장치 탓에 원래의 생쥐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쥐가 놀라운 지능을 가지게 되지만 허무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내용은 "앨저넌에게 꽃을"이 떠오릅니다. 앨저넌도 쥐였지요. 

작품은 오베르부르커 시점에서 로켓 계획이 펼쳐지는 전반부와 밋키 시점의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 마지막에 말하는 쥐를 등장시킨 후, 그 이유를 후반부에서 설명하는 연재물같은 구성인데 덕분에 독자의 흥미가 끝까지 유지됩니다. 황당하지만 다소 허풍섞인 글도 매력적이고요. 복선인 미니 우리에 설치된 전기장치도 잘 안배되어 있습니다.

허나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소재임에는 분명합니다. 비슷한 류의 이야기는 이미 너무 많은 탓입니다. 물론 이 작품은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선구자적인 작품일거에요. 시대가 너무 지난 뒤 읽은게 안타깝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모자마술" 

두 커플이 더블 데이트를 즐기던 중, 밥이 카드 마술을 선보였는데 월터가 트릭을 말해버렸다. 자존심이 상한 밥은 월터에게 마술을 보여달라고 종용했고, 등쌀에 못 이긴 월터는 모자에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기묘한 생물을 꺼내어 보여주는데...

10페이지에 불과한 초단편인데 밥과 월터의 신경전으로 긴장을 자아내다가, 월터가 기묘한 생물을 꺼내는 클라이막스로 끌고 가는 과정이 탁월합니다. 

그러나 월터가 외계인일지도 모른다는 여운을 남기는 결말은 안이했어요. 좀 쉽게 간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불합리 행성" 

행성을 다니며 공연을 하는 '나'는 새로운 행성을 발견하고 고용 선장인 조니, 아내 , 딸 엘렌과 착륙했다. 행성에 '불합리 행성'(시리우스 1번, 2번 행성이 이미 있는 상태에서 '0'번이 되는 궤도의 행성을 발견한 것이므로)이라고 이름 붙인 후, 행성을 탐사하면서 상상하기 어려운 기묘한 생물과 현상을 목격하는데...

행성에 나타났던 기묘한 동물과 거리는 모두 바퀴벌레를 닮은 행성 거주민이 투사했다는 내용의 SF 단편입니다. 이전 다른 앤솔로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물질 대신 정신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설정은 꽤 자주 변주되었던 것인데, 이 작품처럼 1940년대부터 인용된 고전적인 소재라는건 몰랐네요. 그만큼 작가가 시대를 앞서갔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작품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조금 뻔하지만 코믹한 내용에 의외의 반전이라는 작가의 특징이 잘 나타나 즐겁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예후디 장치"

'나는 미쳐가고 있다.'라는 충격적인 글로 시작되는 단편으로  예후디 장치라는 이름의 - 정식 명칭은 자율 자동암시 교열진동 초가속기' - 기계가 핵심입니다. 사람을 가속시켜 원하는 일을 해 주도록 만들지만, 본인은 자기가 직접 빠르게 움직여 무언가를 했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계이지요. 그런데 예후디라는 "이름"을 부르는 탓에 무형의 존재가 실체를 갖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약간 동양적인 설정이죠? 이름을 불러야 의미를 갖는 꽃처럼 말이죠.
덕분에 '예후디'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명령인 "자살이나 하라고"에 따라 자살을 해 버려 동작이 멈춘다는 결말로 이어지는 전개가 아주 깔끔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예후디 장치를 이용해 '나'가 썼다는 마지막 반전도 놀라웠고요.

진으로 만든 칵테일인 '진 벅'이 주요한 소재 중 하나로 등장하는 것도 이채롭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칵테일로 먹지만 다음 잔은 진을 7/8 넣어서, 마지막은 진만 따르고 소다수는 건드리지도 않고 먹지요. 하긴 이런 기계를 보고 겪으면 제정신이기는 힘들테니까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디테일한 설정에 녹아든 동양 철학적인 사고 방식과 반전까지 잘 갖추어진 좋은 작품입니다.

"웨이버리" 

사자자리 어딘가에서 전파를 쫓아 지구로 온 베이더 (inavader)가 모든 전기를 빼앗은 후를 그린 단편입니다. 

분명 지구가 정복당한 상황인데, 주인공 조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더 행복해진다는 결말이 독특합니다. 전기는 없지만 증기기관, 말로 동력을 대체한 뒤 자전거 등으로 더욱 건강해지고, 텔레비젼과 라디오에 시간을 뺏기지 않아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취미 활동을 즐기게 된다는 내용이거든요.
이러한 점에서는 SF라기 보다 풍자극으로 보는게 타당할 수도 있습니다. 시사하는 바도 크고요. 현재를 무대로 인터넷을 잡아먹는 침략자가 등장하는 내용으로 변주해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하늘의 혼란" 

1945년 작품으로, 무대는 1987년입니다. 작중 등장하는, 하늘의 별을 조작하는 기계에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함이겠지요. 

그러나 천문학은 건판 사진기에 의지하고 있고, 라디오가 주요 미디어로 등장하는 등 미래에 대한 상상력만 놓고 보면 보잘 것 없습니다. 또 천문대 연구원 로저 플러터에서 물리학자 밀턴 헤일 박사로 주인공이 이동하는 과정도 매끄럽지 않습니다. 로저 플러터 없이 헤일 박사로만 이야기를 끌고나갈 수도 있었을텐데 괜히 이야기를 벌인 느낌이에요. 헤일 박사가 택시와 함께 장거리 여행을 하는 묘사도 불필요했고요.

그러나 이 작품은 분명 걸작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미래에 대한 상상력 자체는 별로지만 미래에 대해 진짜로 통찰력을 발휘한 부분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광고에 대한 것입니다. 하늘의 별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운동이 광고를 위한 것이었다는 반전, 결말은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아이이디입니다. 천재 스니블리가 자신의 발명품으로 비누 광고를 하는데 성공하지만, 철자가 틀려 쓰러진다는 결말도 유쾌하고요.

조금만 더 압축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리고 서두에 언급한 단점이 없었더라면 완벽했겠지만 아이디어와 반전만으로도 최고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노크" 

"지구 최후의 남자가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장 두 개로 이루어진 짧고 훌륭한 공포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단편입니다. 그러나 공포물은 아니고 기발한 SF에요. 주인공 월터는 잔이라 불리우는 외게인들에게 채집된 인간으로, 그 외 다른 인류는 모두 잔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월터는 백 종류에 달하는 무작위 채취된 동물 암수 한 쌍 중 하나로, 잔들의 동물원에 수용된 신세이고요.
거의 불멸에 가까운 수명을 가진 잔은 인간과 동물들의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월터는 방울뱀을 이용하여 잔 두명을 죽게 만드는데 성공하여 그들이 떠나게끔 유도합니다. 첫 두 문장은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여자, 이브가 될 그레이스가 월터의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고요.

그런대로 재미있지만 허술한 것도 사실입니다. 서두만큼은 괜찮았는데 말이죠.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저 같으면 어떻게 썼을까요? 지구 최후의 남자가 방 안에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린다... 과연 문을 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딜레마를 다뤘을 것 같아요. 누가 문을 두드렸는지 너무나 알고 싶어서 혹시 죽을지라도 그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다는 내용으로 말이지요. 혹시 내가 지구에 혼자 남은 생명체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과연 문을 두드린 것은 누굴까요? 아, 저도 궁금해지는군요.

"모든 선량한 벌레눈 괴물들이" 

SF 작가 엘모와 아내 도로시 앞에 안드로메다 2에서 온 외계인 5명이 동물들의 몸을 빌어 나타났다.

어딘가에서 봤음직한 내용입니다. 외계인들이 동물들의 모습으로 지구인 앞에 나타난다는 설정은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그러나 이 작품 속 외계인들이 엘모와 도로시 앞에 나타난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딱히 우주선을 고치는데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감시 때문에 사람만 부족해졌을 뿐이에요. 엘모에게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준다는 것도 창작력을 준 게 아니라 머릿 속에 있는 일종의 장애물을 제거해 주었다는 설정이라 여러모로 애매해보였고요.

그다지 기발하지도 않고 내용도 설득력이 낮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광기에 빠져라" 

조지 바인은 3년전 교통사고로 이전 기억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는데, 어느 날 편집국장 캔들러가 그에게 병을 핑계로 정신병원 잠입 취재를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기억 상실은 핑계일 뿐, 조지 바인은 27세의 나폴레옹이 시공을 초월하여 이식된 상태였다. 조지는 취재 지시의 목적이 자신의 정신병을 몰래 치료하려는 음모일 수도 있다고 여겼지만 취재에 응해 정신병원에 잠입하는데... 

인간은 실수이고, 기생충이고, 게임의 말일 뿐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백만 개의 행성에는 그 행성의 유일한 지성인 곤충 종족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지성이 한데 모여서 단 하나의 우주적 지성을 만든다. 바로 신을!

개미가 신과 같은 절대자라는 반전이 독특한 작품으로 수록작들 중에서는 가장 긴 작품 중 하나입니다. 70여 페이지에 이르니까요.

초반은 꽤 흥미롭습니다. 정신병원의 비밀도 궁금할 뿐 아니라 조지 바인은 사실 나폴레옹이라는 설정도 꽤 매력적이니까요.

그러나 나폴레옹은 개미들의 게임을 위해 시공을 초월한 것이라는 짤막한 해석 외의 초반 떡밥은 하나도 회수하지 못합니다. 정신병원의 비밀은 무엇인지, 조지 바인을 본인 몰래 정신병원에서 치료하기 위한 음모였는지 아닌지, 나폴레옹을 구태여 조지 바인에게 소환시키면서까지 하려고 한건 무엇인지 등등은 결국 등장하지 않으니까요.
아울러 인간은 별거 아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것이 진짜 절대자다라는 설정도 지금 읽기에는 식상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진실탐지기" 

2년 전 실종된 범죄 심리학자 채플 박사와 범죄자들이 거짓말 탐지기를 빠져나간 상황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유능한 탐정 벨라 조드가 사건 해결에 도전한다.

1999년을 무대로 한 SF 범죄물인데, 탐정과 범죄자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범죄는 그다지 비중이 없습니다. 유능하다는 탐정 벨라 조드의 수사도 변장과 함정 수사가 전부고요.

하지만 최면을 통해 기억을 지워 거짓말 탐지기를 통과하게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정말 획기적입니다. 사건 자체에 대해 기억을 하지 못하므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는건데, 참신하고 대단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처음 등장한 것인지 궁금하네요.
이어지는 반전도 그럴듯합니다. 거짓말 탐지기 통과를 요청한 범죄자는 모두 중범죄자들인데, 그들의 기억을 지워주면서 선량하게 살게끔 최면을 걸어 결국 범죄 자체가 없어지게 만든다는 것으로 역시나 탁월한 아이디어였어요.

한마디로 여러모로 시대를 앞서간 프레드릭 브라운의 아이디어가 빛나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불사조에게 보내는 편지" 

18만년 동안 살아온, 15만배 느리게 사는 남자의 독백으로 핵 전쟁이 일어나 문명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냉전시대의 공포를 희망적으로 설명하는 소품입니다. 불사에 가까운, 15만배 느리게 사는 남자에 대한 설정은 재미있으며, 인류는 역동적이기에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는 희망찬 메시지도 인상적입니다.

허나 배경이 되는 사상과 메시지 모두 지나치게 오래된 것이에요. 때문에 지금 시점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군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밋키 다시 우주로"

8년만에 다시 쓰여진, 똑똑해진 생쥐 밋키 이야기입니다. 어지간히 캐릭터들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이번에는 새로 투입된 흰색 생쥐 화잇티와의 사투를 그립니다. 일종의 모험물이랄까요? 화잇티가 X-19 장치를 조작하여 흰 쥐를 생태계 정점에 놓으려 한다는 악마적인 발상이 눈길을 끌며, 지성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결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앨저넌에게 꽃을"과 역시나 비슷하네요. 앨저넌 이름이 밋키였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녹색의 땅"

붉은 행성 크루거 4에 추락한 우주비행사 맥개리는 이 행성에 추락한 것으로 알려진 우주선 잔해를 찾아 정글을 헤멘다. 트랜지스터 부품을 구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그의 유일한 파트너는 5족 생물 '도로시'. 어깨 위에 올려놓은 도로시는 흡사 여성의 손길 같고, 그런 도로시에게 위안을 느끼며 말을 건넨다. 그러던 중 우주선 하나가 그를 발견한다!

붉은 행성에서 '초록색'에 대한 환상을 품고 살아가는 광인의 이야기입니다.
구하러 온 아처 중위에 의해 도로시는 존재하지도 않고, 4~5년이라고 믿었던 표류 기간이 무려 30년이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 까지는 버틸 수 있었지만 지구가 우주 전쟁으로 파괴되어 초록색이 남아있지 않다는 말에 결국 정신이 붕괴해버리고 만다는 결말은 섬찟합니다. 붉은 행성 크루거와 그곳의 생태계에 대한 짤막한 묘사도 상상력을 많이 자극하는데, 이 부분은 영상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이 역시 지금 읽기에는 조금 낡은 반전이었어요. 예전에 다른 앤솔로지에서 읽었기에 더 그러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인격 교환기" 

편집장 맥기에게 괴롭힘당하는 기자 '나'는 발명가 타킹튼 퍼킨스의 신발명 취재를 나선 후, 그가 '연격 교환가'라는 것을 발명한 것을 알게 되는데...

도라에몽스러운 발명품이 등장합니다. 내용도 성인용으로 변주한 도라에몽같고요. 발명품으로 소동이 일어나고, 결국 주인공들이 모두 행복해지는 결말은 도라에몽 그 자체이지요. 

하지만 소동 이후 모든게 제자리를 찾는 도라에몽 장치와는 다르게 타킹튼 퍼킨스와 맥기의 몸을 바꾸어서 최악의 파트너들끼리 함께 살게 만든다는 결말은 아주 통쾌했습니다.

평범한 아이디어를 전개와 결말로 보완한 작품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무기" 

그레이엄 박사는 궁극의 무기를 연구하고 있는 과학자로, 그의 유일한 고민은 정신지체아인 아들 해리였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니만트라는 인물이 찾아와 무기 개발을 그만둘 것을 부탁하는데... 

인류가 궁극의 무기를 가질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한 프레드릭 브라운의 답변. 

4페이지밖에 안되는 짤막한 분량이지만 흥미로운 도입부와 캐릭터, 진지한 주제에 놀라운 반전까지 모든 걸 갖춘 걸작입니다. 인류가 궁극의 무기를 갖는건, 백치가 장전된 리볼버를 갖는 것과 다를바 없다는 시각은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시대를 뛰어넘은 측면도 있습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카투니스트" 

끔찍하고 흉물스러운 외계인 만화를 그린 후, 빌 개리건은 그가 그린 외계인과 똑같이 생긴 외계인의 초대를 받았다. 그들은 만화에 감명해서 개리건을 황실 만화가로 임명하려 했다... 

"외눈박이 나라에 간 두눈박이" 이야기를 변주한 SF입니다. 서로를 끔찍하고 흉물스럽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점이 그러하지요. 그러나 결말은 정 반대입니다. 개리건이 외계인 모습이 된 다음에 익숙해진 후 모든 행복을 거머쥐거든요.

그러나 좋은 결말, 반전이었다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반전의 매력은 부족하며, 여러모로 쉽게 간 느낌이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돔" 

'죽음보다는 고독이 나은 법이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죽음보다는 나은 법이다.'

카일 브레이든은 핵전쟁이 발발했다는 뉴스를 듣고 구 형태로 완벽한 방어막을 이루는 "역장"을 작동시켰다. 카일은 죽음보다 고독이 낫다는 생각으로 30년을 버텼지만, 결국 홀로 죽기가 두려워 역장을 끌 결심을 하는데... 

착각으로 스스로 고립되어 이방인이 된 남자를 그린 작품으로 주제는 좋습니다. 냉전 시대를 극한까지 그려낸 설정도 볼만하고요. 하지만 홀로 돔 안에 갇히는 것을 선택한 카일 브레이든의 심정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고독보다는 죽음이 나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리고 밖의 세상은 유토피아가 되었다라는 반전도 평이합니다. 차라리 사랑을 고백한 '미라'가 그를 떠나지 않고 둘이서 같이 30년간 늙어가다가 유토피아를 만난다는 설정이 소설적으로는 더 나았을 것 같네요. 만약 그랬다면 미라에 의해서 지옥이 열렸을테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스폰서의 한마디" 

1954년 7월 9일 수요일 오후 8시 30분, 전 세계 라디오에서 기묘한 방송이 들려왔다.
아주 잠시 먹통이 된 후 차분하고 평범한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스폰서의 한 마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1초 후 다른 사람이 말했다. "싸워라."
미국 대통령은 이 방송이 현재 기술로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현상이라는 분석 결과를 전달받는데... 

'인간은 명령을 받으면 반대로 행동한다'는, 신뢰할 수 없는 심리학 설정에 기반을 둔 작품입니다. '밀그램 실험'이 있기 전에 쓰여진 이야기겠지요. 

그래도 과학적, 정치적인 분야에서 시작하여 종교적인 분야까지 전문가들에 의한 분석이 이어지면서, 이 명령은 들으면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만큼은 꽤 설득력있게 그려집니다. 사탄이 내린 명령이면 당연히 들으면 안되고, 신이 내린 명령이라면 지성과 선의가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신성한 반어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논리인데 그럴듯했어요. 분석 덕분에 여론도 싸우지 않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는 전개도 괜찮았고요.
또 이러한 평범한 냉전 시대를 무대로 한 우화임에도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끄는 요소가 존재하는 것도 장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스폰서"라는 단어죠. 대체 우리, 지구, 인류의 스폰서는 누구란 말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지 않고, 스폰서가 누군지 모르므로 명령을 들을 수 없다는 결론과 함께 작품은 끝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약간 흥미로왔을 뿐 기대에 부합하지는 못했습니다. 결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 큽니다. 별반 대단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무래도 냉전 시대 관련 설정의 작품은 여러모로 뻔하고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소재임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나와 플랩잭과 화성인" 

광산을 찾아다니는 나와 당나귀 플랩잭은 어느날 화성인을 만났다. 화성인은 내가 아니라 플랩잭이 지성체라 여겨 대화를 시도하고, 그들의 지구 침공 계획을 털어놓는데... 

이른바 '오해와 착각' 개그물입니다. 나와 플랩잭의 티격태격 묘사가 유쾌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오해로 인한 난처한 상황도 볼거리고요. 무엇보다도 플랩잭이 화성인에게 무언가 멋진 아이디어를 제공해서 그들이 지구 침공을 포기하고 돌아가는데, 나도 그렇고 독자도 그렇고 플랩잭이 준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결말까지 유쾌합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마크 트웨인이 쓴 SF를 읽는 느낌이었달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어린 양" 

수록작 중 가장 이질적이라 할 수 있는 싸이코 스릴러로 "진, 베르무트에 젖은 올리브 색깔"이라는 묘사나 여러 시, 음악, 밤이라는 배경에 대한 묘사는 '코넬 울리치'가 썼다 해도 믿을 정도로 디테일합니다. 아내 램이 살아 있는 것 처럼 묘사하다가 마지막에 그녀는 이미 죽은지 오래라는 것이 밝혀지는 장면도 섬찟했고요. 유머러스한 블랙 코미디나 반전이 있는 장르 문학에 강한 작가인줄 알았는데 이런 순문학적인 스릴러에도 능하다니 과연 거장은 거장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날개짓 소리"

15달러에 영혼을 팔려던 무신론자가 급하게 멈추고 15달러를 날린 이유는? 에 대한 짤막한 소품입니다. 주인공이나 독자나 답을 찾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뭐가 껄끄러웠던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특별히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이럴 바에야 영혼을 팔고 할아버지가 죽은 뒤 무언가 기묘한 일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가는게 더 재미있었을 것 같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거울의 방" 

시간을 되돌리는 일종의 타임머신이 등장하는 SF로 타임머신에 대한 아이디어와 함께 '50년'을 계속 되돌아가는 주인공에 대한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돔"의 주인공은 역장을 끄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 작품의 주인공은 타임머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면 인류가 '불사'의 존재가 될 수 있는 위험 때문에 갖혀 지낸다는 점에서 좀 비슷한데, 냉전 시대의 뻔한 SF인 "돔"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설정도 보다 디테일하고요. 50년 동안 무얼 어떻게 먹고 사는지 등 깊이 들어가면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평균 이상의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다음은 모두 1~2페이지짜리 쇼트쇼트입니다. 줄거리 요약은 생략하고 단평만 적겠습니다.

"해답" 두말할 필요 없는 걸작. 별점은 5점.

"데이지" 짤막하지만 담겨야 할 모든 것이 담겨있는 교과서적인 쇼트쇼트. 별점은 4점.

"대동소이" 뻔했음. 별점 2점. 

"예절" 이문화간 커뮤니케이션을 다룬 유쾌한 소품. 별점은 3점.

"허튼소리" SF 작가의 자조적인 농담으로 보이는 소품. 별점은 2.5점.

"화해" 뻔하고 뻔하도다. 별점 1점.

"탐색"신이 두려워한 사람이 누구인거죠? 주인공 피터의 정체는 신선했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별점은 2점.

"형기" 과학적인 농담인데 꽤 써먹음직한 반전이 돋보임. 별점은 2.5점.

"유아론자" 이 정도면 신성모독이 아닐까... 여튼 신선한 창조 이야기. 별점은 2.5점.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진정한 소리를 찾는 음악가 둘리 행크스가 우연히 만난 노음악가를 살해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호우보이'라는 악기를 손에 넣은 뒤 맞는 최후에 대한 이야기.
음악에 대한 장황한 묘사가 펼쳐지는 순문학스러운 범죄 판타지로 '하메룬의 피리부는 사나이'로 끝나는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19/11/18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1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5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1 - 6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카토우 모토히로의 시리즈 만화입니다. 지난 몇 년간 출간 자체를 잊고 살다가 찾아보니 꽤 많이 출간되어 있더군요. 주말에 몰아서 읽었는데, 리뷰는 천천히 한 권 씩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C.M.B와 Q.E.D는 서로 쌍둥이처럼 닮았지만 명백한 큰 차이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구성 면에서 그러합니다. 거의 예외 없이 1권에 2편의 이야기라는 구성을 선보이는 Q.E.D와는 다르게, 보통 3~4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짧기에 읽기 쉽다는건 장점이지만, 부족한 설명과 억지스러운 전개 때문에 완성도 면에서는 조금 부족할 수 있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또 추리적으로는 여러모로 Q.E.D 보다는 부족한 작품들이 많은 것도 분명하고요. 이번 권도 장, 단점은 그대로입니다.

그래도 오랫만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오래된 시리즈로 캐릭터는 식상하고 내용도 타성에 젖어있지만, 조금이나마 신선하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재미는 나쁘지 않은 편이니까요. 추리적으로 완성도 높은 이야기도 있고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세요.

"지옥혈"

도쿄 근교 시골 마을에서 산사태 발생 후 '지옥혈'이라고 불리우는 동굴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옥혈은 일본 전 지역에 널리 퍼져있는 '사후 세계와 통하는 장소' 중 하나로, 그냥 전통적인 민속 풍습이지만 마을 사람들이 6명이나 사라지자 방송국까지 출동하여 취재를 벌이는데...

산사태로 관광객이 줄었는데 마을에 갑자기 돈이 넘쳐난다는 설정만 보아도 무언가 수상하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억지로 마을 사람들을 모두 모이게 하는 행사가 진행된다는건, 이 행사에 맞추어 사건이 일어날거라는 것도 뻔하고요.

그러나 이를 '불법 산업 폐기물 투기'와 연결시키는 아이디어는 돋보입니다. 도쿄와 가까우며, 곧 메울 구멍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설득력도 높고요. 무엇보다도 지옥혈과 관련된 일본 전설을 복선처럼 깔고, '그쪽 세계의 음식' 이라는 소재로 사건을 저지른 사람들의 심리를 풀어내는 마지막 장면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수학과 과학보다 민속과 풍습, 전설 등을 이야기의 밑바탕에 깔고가는 C.M.B에 아주 잘 어울리기도 했고요.

C.M.B의 그간 부진을 충분히 만회할 만한 멋진 이야기였어요. 별점은 3.5점입니다.

"고스트 카"

캠핌장 외길에 반년 전에 죽은 화가 이누야나가의 알파 로메오가 나타난 뒤 사라져 버리고, 다음날 캠핑장에 찾아온 신라와 친구들은 근처 숲에서 기묘한 상황에 놓인 알파 로메오를 발견한다. 겸사겸사 사건에 휘말린 신라 일행은 이윽고 이누야나기 씨의 복잡한 집안 사정과 유산 상속 등에 관련된 문제를 듣게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유산 중에서도 핵심인 300호짜리 그림이 깜쪽같이 사라진 것. 아들 토라오와 요이치는 백부 네코지로를 의심하고, 네코지로는 토라오가 범인이라 확신하는데...

차가 숲 속에 떨어진 이유와 300호 그림이 사라진 사건을 엮은 진상은 괜찮습니다. 두 사건이 전혀 관계없는 것 처럼 전개하다가 마지막에 하나가 되는 과정이 꽤 그럴듯하거든요. 네코지로의 횡령은 사실로, 이누야나기씨가 이런걸 다 알고 유산 배분을 했다는 결말 - 네코지로에게 물려준 아틀리에는 거액을 들여 축대를 수리해야 하는 상황이라 - 도 나쁘지 않아요. 나름 완벽한 해피엔딩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전개 외에는 모든게 함량 미달입니다. 초반부의 알파 로메오의 등장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을 뿐더러, 차고가 움직인게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는 것도 설득력이 낮습니다. 범인인 백부 네코지로의 계획대로 잘 되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네요. 뭐 그래도 이전에 워낙 지뢰들이 많아서 이 정도만 되어도 고맙게 볼 수 있는 수준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돌아다니는 시체"

4인이 함께 사는 다세대 주택에서 주민 중 1명인 코노가 살해된다. 사체를 자신의 집에서 발견한 회사원 도이는 패닉 상태에서 유력한 용의자인 나카니시의 집으로 시체를 몰래 옮겨 놓는다. 나카니시도 또 다른 용의자인 츠다의 집으로 시체를 옮기고 츠다는 다시 도이의 집에 시체를 가져다 놓는다. 결국 이들은 모든 사건을 해결해준다는 소문을 믿고 신라에게 시체와 함께 찾아온다.

사건 관계자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이 중에서 중요한 단서를 뽑아내어 진상을 밝혀낸다는 전형적인 Q.E,D 스타일의 작품. 이게 왜 C.M.B 에피소드로 등장했는지 잘 모르겠어요.C.M.B 특유의 박물학적인 이론도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신라도 어린아이와 같은 캐릭터성 없이 평범한 탐정 역할만 수행하여 전혀 차별화되는 부분이 없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다세대 주택 주민들 모두가 코노와 원한 관계가 있었다고 해도, 범인이 시체를 그 안에 숨겨놓는 것 정도로 죄를 뒤집어 씌울 수 있다고 생각한건 말도 안되죠. 코노의 방에 시체를 돌려 놓는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잖아요? 일본 경찰이 아무리 무능하더라도 싸움을 한 것도 아니고, 말린 정도로 혐의를 씌워 체포할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지요.

결론적으로, 시리즈 특유의 매력도 없고 추리적으로 억지스러운 평균 이하 졸작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제 27회 탐정 추리 회의"

잡지사에서 상금 100만엔인 추리 게임 대회를 열었다. 사회자가 문제를 내면, 진상을 추리하여 정답자에게 상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7년전에 실제로 일어났지만 미궁에 빠진 사건이 문제로 등장했다. 경찰도 해결하지 못한 정답없는 사건이지만, 모든 수수께끼를 남김없이 밝힐 수 있는 해답이라면 정답을 인정한다는 조건이었다.
문제인 사건은 마술사 야마다 요시후미가 수조 탈출 마술을 펼치다 사망한 사건으로, 2명의 제자가 유력한 용의자였다. 둘 중 한 명은 후계자에서 탈락하여 앙심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수수께끼는 모두 세가지, 왜 요시후미는 예정대로 공연 직전에 후계자를 밝히지 않았는지? 누군가 마술 장치에 손을 댔다면 어떻게 감시를 피할 수 있었는지? 왜 무대 위에서 살해되었는지? 누전은 어떻게 일으켰는지? 신라는 사건의 진상을 풀 '경이의 방'으로 모두를 안내한다.

추리 게임 대회라는 형식을 빈 정통 추리물입니다. 진상은 공연 전 범인은 이미 요시후미를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시후미는 공연 전에 밝히기로 했던 후계자의 이름을 말할 수 없었고, 범인도 차분히 마술 장치에 손을 댈 수 있었던 겁니다. 수조에 전기를 흐르게 한 건 이미 죽은 사체가 움직이게 만들어 사망 시간을 위장한 뒤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함이었고요.

트릭만 놓고 보면 충분히 수긍할만해서 추리적인 완성도는 높습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추리 게임 대회라는 설정과 전개 방식입니다. 추리 게임 대회는 요시후미의 딸이 범인을 밝혀내기 위한 일종의 추리쇼였다는건데 솔직히 말도 안되거든요. 무엇보다도 유력한 용의자인 야마사키 토모히데, 즉 쿠로츠 유우키가 본인이 범인인 사건이 문제로 출제된 상황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평상시와 같은 논리로 의견을 주장한다는건 아무리 보아도 현실적이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도 경찰이 수조에서 죽은 건지, 외부에서 살해당한 뒤 수조에 넣어진 것인지를 알아내지 못했다는 등의 디테일도 눈에 거슬렸고요. 이렇게 억지스러운 게임 대회를 만드는 것 보다는, 마술 공연을 보던 신라와 타츠키가 현장에서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는 내용이었다면 훨씬 좋았을 거에요. 그랬다면 별점 4점도 충분했을텐데 말이죠. 별점은 2.5점입니다.

2009/05/19

최근 읽은 추리만화 짤막한 감상

누가 울새를 죽였나? - 6점
마사 지음, 나노 그림/학산문화사(만화)

세명의 남자가 외딴 산장에 모입니다. 모인 이유는 "울새"라고 하는 대화명의 남자가 자신이 유괴한 소녀의 몸값 받는 작전을 도와준다고 하면 2천만원의 돈을 주겠다고 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들은 산장에서 누군가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라는 이야기로 전개되는 작품으로 정통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클로즈드 써클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폐쇄된 공간에서 몇명 안되는 소그룹을 대상으로 누가 살인자인지 모르는, 그리고 큰 돈을 놓고 복잡한 계산이 오가는 심리전을 다루고 있거든요.

이글루스에서도 유명하신 마사토끼님의 원작을 "수요전"의 NANO가 극화한 단편으로 이곳저곳에서 유명하기에 구입해서 읽게 되었네요. 읽고나니 과연 유명할만 하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본 설정이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나름 탄탄하며, "총알" 과 같은 중요 물건과 돈의 이동을 잘 그려내고 있는 등 이야기의 핵심부분에서 설득력도 갖춘데다가 전개도 깔끔한, 한마디로 좋은 작품이네요.
무엇보다도 한국 쟝르물에서 보기 힘들었던 독특한 구성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폐쇄된 공간에서의 서로가 서로를 노린다는 심리전의 긴장감 역시 대단해서 후쿠모토 노부유키 + 가와구치 카이지의 "고백"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더군요. 그만큼 유괴된 소녀와 세명의 남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심리적인 긴장감의 밀도가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물론 문제도 있습니다. 일단은 세명의 남자가 소녀에게 휘둘리는 전개에서 설명이 너무 부족했어요. 총알 하나에 몇십억을 주고 사겠다고 하는데, 그 돈을 어떻게 줄 것인지를 떠나 애시당초 돈을 어떻게 받아낼 것인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잖아요? 차라리 소녀가 세명을 각각 조종하려고 했다면 자기 자신이 "범인이 누구인지 안다"와 더불어 "돈을 어떻게 받아내는지 알고 있다" 쪽으로 잡아가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요? 또 개인적으로는 결말도 불만인데, 순환구조를 갖춰나가는 구성도 좋지만 썩 개운하지는 않았어요. 이 나름대로 작품을 마무리하는데에는 전혀 문제는 없지만, 이야기의 배경 설명은 전혀 없이 작품 자체의 완결에만 너무 신경쓴 것으로 보였거든요. 만화에는 그래도 적합하겠지만 소설이었다면 정말 실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한국에서 이만한 수준의 작품을 찾아보기는 힘들기에 별 3.5점은 충분한 작품입니다. 덧붙이자면, 작화의 수준도 평균이상이긴 한데 표지가 너무 후져서 점수를 깎아먹은 감이 없잖아 있네요. 솔직히 표지만 봤을때는 전혀 사고싶지 않았습니다.


Q.E.D 큐이디 32 - 6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읽기는 한달도 훨씬 전에 읽었는데 추리만화 감상은 한번에 몰아서 올리려고 미루어 두었다가 이번에 올립니다. 이번권도 Q.E.D의 전통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한권에 두가지 이야기가 담긴 구성입니다. 한편은 소박한 일상계, 한편은 살인사건이라는 강약 조절도 여전하죠.

첫번째 에피소드 "매직 & 매직"은 마술사와 토마의 두뇌싸움 이야기입니다. 마술사가 자신의 쇼에서 가나에게 마술의 트릭을 설명하는 토마에게 토마가 산 책을 걸고 승부를 할 것을 제안합니다. 승부는 마술사가 토마를 "깜짝 놀라게 할" 마술을 선보이겠다는 것이죠. 일상계라 할 수 있는, 범죄가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지만 마술과 추리, 특히 "트릭"이라는 것의 연관성을 잘 그려낸 수작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뻔한 이야기를 긴장감 넘치게, 속도감 넘치게 그려낸 전개방식도 마음에 들고요. 마지막의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까지 좋았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그에 반해 두번째 에피소드 "레드 파일"은 앞서 말했듯, 한 은행원의 살인사건에서 토마의 과거 대학시절 지인이 말려들고, 토마가 여러 인물들의 증언을 조합하여 진상을 밝혀낸다는 다소 무거운 이야기입니다. 일단 추리물임에도 "트릭" 이라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굉장히 거창한 음모 - 거대은행과 파생상품 - 가 배후에 깔려 있어서 토마와 가나가 사건에 휩쓸리는 부분이 별로 자연스럽지가 않기 때문에 내용만 놓고 본다면 높은 점수를 주기가 힘든 작품이었습니다. 조금 이야기가 막힐만 하면 등장하는 토마의 미국 대학시절 지인 캐릭터도 이제는 지겨웠고요.

하지만 이 에피소드의 가치는 전혀 다른데에 있습니다. 뭐냐 하면 바로 "선물 옵션 거래" 라는 금융 파생상품을 너무나 잘 설명하고 있는 학습만화로의 가치가 엄청나거든요. 금융 파생상품에 대해서 이렇게 쉽고 머리에 쏙속 들어오게 설명하는 만화는 정말이지 처음이었습니다.

추리물로는 영 아니지만 이 학습만화(?) 로의 가치가 워낙 높기에 별점은 3점 주겠습니다. 결론적으로, 평점은 3.5점. 무난한 수준이네요. 역시 Q.E.D는 대체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단 말이죠^^

2019/12/08

C.M.B. 박물관 사건목록(씨엠비) 34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5점

[고화질] C.M.B. 박물관 사건목록(씨엠비) 34 - 6점
MOTOHIRO KATOU/학산문화사

이전 권은 기대 이하였다고 리뷰를 남겼었는데, 이번 권인 34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재미도 없고, 추리적으로도 눈길을 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맨 마지막 수록작인 "낡은 집"이 아주 괜찮은 덕분에 별점도 2.5점 줍니다.

이야기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은 참고 부탁드립니다.

"소멸 비행"

신라 박물관에 작가 카가미 요이치가 찾아왔다. 그는 1932년, 일본 운카이 운수의 화물 수송 비행기가 추락 후 사라진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는데, 비행기를 절에서 숨겼다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신라가 가진 CMB 반지의 권한을 써 줄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신라 일행의 조사를 지켜본 주지는, 당시 사고는 운카이 운수 라이벌 회사의 조작으로 일어난 것으로 비행기는 이미 회사에 반환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신라는 동굴 속, 숯으로 흑채를 만들어 숨겨놓은 비행기를 찾아내고 진상을 밝혀낸다. 

비행기 기술자들의 집념을 잘 그려낸 작품입니다. 트릭은 대단치 않으나 합리적이며, 1930년대 시대 상황하고도 잘 맞물린 사건의 전개도 나쁘지 않습니다. 지금의 보잉사처럼 영국 최신 기종의 결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운카이 운수의 사정도 충분히 설득력 넘치니까요.

그러나 무려 70년 이상 지난 시점에서 진상을 비밀로 유지하고 있다는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관계자들도 모두 사망하고, 운카이 운수마저 사라진 상태라면 비밀로 놔 둘 필요가 없잖아요? 주지 스님이 그렇게까지 충실하게 사명을 다할 이유는 없습니다.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마리아나의 환상"

1946년 아마존에서 마리아나는 일본계 연인 모리오와 결혼할 계획을 세우지만 그가 사기를 당한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마리아나는 에콰도르에서 '마녀'라는 별명으로 주술적 치료를 행하며 먹고 살고 있는데 일본으로 돌아왔던 칸베 모리오가 그녀를 찾아 에콰도르로 향하고, 모리오의 손자 부탁으로 역시 에콰도르로 향한 신라 일행은 1945년 종전 직후, 일본의 승패를 알 수 없던 상황에서 승리파와 패배파가 다툼을 벌여 혼란에 빠졌고, 승리파였던 모리오가 마리아나와 만난 직후 패배파로 돌아섰다는걸 알아냈다. 신라 일행은 마리아나의 행방을 추적하여 모리오가 그곳을 방문했으며, 마리아나의 보물을 찾으면 모리오도 찾을 수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보물을 찾아 나섰다.
마리아나가 당시 모리오에게 마술을 걸었는데, 그건 모리오의 의식을 넓혀 기억을 밖으로 밀어내는 것으로 문제는 마리아나에 대한 기억까지 잊어버리게 했다...

두 편으로 이어진 제법 긴 호흡의 이야기로 마리아나의 마술이 무엇인지, 그리고 마리아나의 보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결국 마술은 일종의 기억 상실이고, 보물은 그녀가 모리오를 위해 만든 마을이라는 순애보였다는 내용은 의외성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2차 대전 직후, 브라질 일본계 이주민들 사이에서 있었던 분쟁에 대해 알 수 있게 된 것도 수확입니다. 오지인 탓에 공신력있는 뉴스가 원할히 공급되지 못해서, 심지어 '일본이 승리했다'는 승리파가 다수 존재했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그러나 에피소드 2편 분량을 할애하여 길게 진행할 정도의 깊이있는 이야기였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야기가 너무 작위적인 탓이에요. 집 뿐 아니라 마을까지도 마리아나가 모리오를 위해 만든 것이었다는 설정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억지가 지나쳤어요 또 추리의 여지도 거의 없다는 것도 감점 요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낡은 집"

세토는 회사를 그만두고 연인과 함께 빵집을 차리기 위해 시골로 내려왔다. 운 좋게 집세가 0엔인 집을 구해 수리를 하고 살려고 하지만 마을에서 기묘하고 불쾌한 인상을 받고, 목수들도 모두 집 수리를 거절하는데...

의외로 깔끔한 일상계입니다. 줄거리만 보면 아시겠지만, 시골 마을이나 외국에서 외지인을 배척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는 류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괴물 가면을 쓴 범인이 나타나서 입주를 방해하고, 공포감을 조성하는 방식이 딱 그러했으니까요.
그러나 원인이 착해 보이는 집 주인 때문이었다는 진상은 놀랍습니다. 집세를 받지 않는 대신, 임대차 계약서를 쓰지 않은 점을 악용하여 세입자가 집을 수리하게 만든 뒤 쫒아낸 것이지요. 이를 집 주인의 아들이 집의 장미 덤불을 베어 넘기는 등의 기묘한 행동으로 추리해 내는 신라의 활약도 아주 볼 만 합니다.

사람의 선의는 무조건 의심해 봐야 한다는 씁쓸한 결말이지만, 일상계로는 최고 수준의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신라가 진상을 눈치채는 단서가 조금 작위적이기는 하나 큰 문제는 아니에요. 별점은 3.5점 입니다.

2025/04/11

거짓과 정전 - 오가와 사토시 / 권영주 : 별점 4점

거짓과 정전 - 8점
오가와 사토시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SF 대상을 수상했던 떠오르는 작가 오가와 사토시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인 "거짓과 정전" 외에도 "마술사", "시간의 문", "한 줄기 빛", "무지카 문다나", "마지막 불량배" 등 현실과 환상, 과학과 감성이 절묘하게 섞인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장점은 작가만의 독특한 세계관이 SF적 설정과 기발한 아이디어와 만나 매우 신선한 재미를 준다는 점입니다. 시간 여행을 마술 무대와 연결한 "마술사"부터 그러합니다. 마술에 대해 현실적이며 설득력있게 묘사하다가, 시간을 넘나드는 마술을 '타임머신'과 결합시켜 의외의 결말로 이끄는 솜씨가 정말 탁월합니다.

유행이 사라진 세상에서 유행의 의미를 되짚는 "마지막 불량배", 과거로 정보를 보내 세계를 조정하는 냉전 시대의 첩보극 "거짓과 정전"도 모두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품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불량배"는 유행과 취향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어, 디지털 시대의 콘텐츠 소비에 대해 많은걸 생각하게 해 줍니다. 예전처럼 하나의 앨범도 신중하게 고민하고 구입한 뒤, 그 앨범을 반복해 들으며 취향을 만들던 시대를 지나, 지금은 그런 고민없이 모든걸 쉽게 소비하는 세상이 되어 '취향'이라는게 사라지는 세상이 되었다는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거든요. 지금의 취향은 내가 아니라 인터넷이 만들어주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SF 외에도, 일상 속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들도 돋보입니다. "한 줄기 빛"은 아버지가 남긴 경주마의 계보를 따라가며 자아를 발견하는 성장물인데, “서러브레드가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 이유는 생명의 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라는 문장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깁니다. 조금 상황은 다르지만 안도현 시인의 시 -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무지카 문다나"에서는 음악이 화폐인 섬을 배경으로,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했던 아버지를 이해하고 화해하게 되는 과정을 감성적으로 풀어냅니다. 다이가의 아버지는 훌륭한 음악(다이가)을 듣기 위해 자신의 최고 걸작을 남겼지만, 다이가를 들은 뒤에는 음악을 포기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이가는, 스스로 '다이가'를 듣기 위해 포기했던 음악을 다시 시작할걸 결심하고요. 음악을 포기한 다이가에게 이 비밀을 알려주면 음악을 다시 시작하리라 여겼던 아버지의 배려(?), 그리고 미워했던 아버지의 속셈을 알면서도 속는 다이가의 모습이 짠합니다. 이처럼 판타지를 배경으로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밀도 높게 다루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이야기 자체의 재미도 뛰어납니다. "마술사"에서 시간여행은 실제로 일어났는지, "한 줄기 빛"에서 아버지의 꿈은 이루어졌는지, 템페스트, 레티시아는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 등을 따라가면서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추리적인 요소도 흥미롭습니다. "시간의 문"에서 오펜하임이 1932년 7월 31일, 나치당에 투표했을지?를 물어보는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전날밤 오펜하임은 남반구에서만 볼 수 있는 켄타우루스 자리를 보았습니다. 때문에 그는 독일 본토로 돌아가 투표할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건 교묘한 전개 능력도 한 몫 단단히 합니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결합되어 의외의 결론으로 향하는 "거짓과 정전" 처럼요. 작품은 엥겔스의 재판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바로 다음에 80년대 CIA 모스크바 지국 정보원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결국 두 이야기가 결합되며 마무리되는데 기발하고 교묘하게 잘 짜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수록된 모든 작품이 동일한 수준은 아닙니다. "시간의 문"은 우화에 가까운 작품으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전개나 반전이 평이해 다소 뻔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또한 SF적 설정으로 보자면, "거짓과 정전"을 제외하면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거나 단지 상징적인 장치로 사용된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의 문"에서의 기억 조작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우화적 도구에 가까우며, 인물의 존재가 사라지는 설정도 설득력 있는 논리로 뒷받침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몇몇 명쾌하지 않은 결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마술사"에서 정말 타임머신을 만들었는지, 시간여행의 모순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거든요. "거짓과 정전"의 '정전의 수호자'들이 역사 수정을 방지한다는 진상도 방법적으로는 잘 모르겠고, 설정도 과거 "타임캅"류의 타임 패러독스 방지물과 별다르지 않아서 시시했어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SF적인 상상력과 서정적 감성이 잘 결합된 작품들입니다. 일부 아쉬운 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몰입감 있고, 인상적인 독서 경험을 선사합니다. 아직 읽어보시지 않은 분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09/06/15

마술사가 너무 많다 - 랜달 개릿 / 김상훈 : 별점 3점

마술사가 너무 많다 - 6점
랜달 개릿 지음, 김상훈 옮김/행복한책읽기

영불 제국의 마술사 컨벤션이 열린 고급 호텔의 객실에서 런던 후작의 주임 법정 마술사인 서 제임스 즈윈지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피해자의 방은 완전한 밀실상태였다. 런던 수사 당국에서는 서 제임스의 라이벌이자 사건 현장을 발견한 노르망디 대공의 법정 마술사 숀 오 로클란을 용의자로 체포하여 런던 탑에 감금했다. 다아시 경은 숀을 구해내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왔고, 이 사건이 살해된 이중간첩 바르부르 사건 및 해군에서 새로 개발된 비밀 병기와 관련되어 있는 중대한 사건이라는 것을 알아내어 진상을 밝혀내기 위한 수사에 착수하는데...

"나폴리 특급 살인"을 읽고 급 뽐뿌가 와서 헌책방을 뒤져 구입한 책입니다.

그런데.... 읽고나니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특히 저같은 추리 애호가에게는 더욱요. 일단 트릭 자체는 괜찮습니다. 에드워드 호크의 밀실 추리소설 베스트 15에도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말이죠(그가 편저한 1981년 판 'All but impossible! an anthology of locked room and impossible crime' 의 서문에 등장). 순수 고전 트릭물에 쓰였어도 충분히 합리적이었을, 아주 괜찮은 아이디어였어요.

그러나... 괜찮은 트릭 하나만 가지고 장편 전체를 이끌어나가기에는 힘이 부족합니다. 추리적으로는 곳곳에 허점 투성이인 탓입니다. 예를 들자면, 마스터 유웬과 만나게 된 애슐리 경의 행동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애슐리 경은 마스터 유웬과 사력을 다해 싸울 필요도 없고, 다아시경을 구해줄 필요도 없었습니다. 

또한 도박장에서의 변명 역시 치졸해서 곧바로 탄로날게 뻔한 내용이었다는 것 등 치밀함도 부족하며, 서 제임스 즈윈지가 "두번 죽었다" 는 부수적인 이야기라던가 메치코에서 온 흑마술 전문가 존 케찰경, 다아시경의 사촌형 런던 후작과 그의 부관 본트리옴프경 같은 캐릭터는 단지 이야기를 길게 늘이기 위한 불필요한 요소에 불과했습니다. 이렇게 작품의 줄거리와는 상관없는 이야기가 많아지니 살짝 지루하기도 했어요. 마스터 숀의 쓰잘데 없는 마술쇼, 존 케찰경이나 메리 공작부인 같은 캐릭터를 다 날려버리고 중편정도로 꾸몄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장편으로 길게 늘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와 재미를 추가하기 위한 작가의 노력은 잘 알겠지만 외려 역효과였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해서 읽게 만드는 재미는 충분합니다. 물론 이 재미는 다아시경이라는 캐릭터와 독특한 SF-판타지 적인 설정 등에서 오는 요소일 뿐이지만 뭐 이런 요소를 기대한건 사실이고, 스토리와는 별개로 다아시경과 공작부인의 관계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나름 흥미가 생기기도 했으니 기대에는 값한 셈입니다. 마스터 숀과 유웬의 마술 대결도 무협지스러운 재미가 있어서 볼만했고요. 

덧붙여, 제목부터 "요리장이 너무 많다"의 패러디이기도 한 이 작품 속에는 다아시경의 사촌인 런던 후작 (네로 울프) - 본트리옴프 (아치 굿윈), 서 라이언 갠달푸스 (회색의 갠달프) 등 유머스러운 패러디 역시 많아서 쟝르문학 팬으로서는 무척이나 즐거웠습니다.

때문에 별점은 3점입니다. 아주 형편없지는 않고 평균정도는 되는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어렵게 구한 보람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뭐니뭐니해도 다아시경 시리즈의 유일한 장편이니 만큼 팬이라면 반드시 챙겨봐야겠죠.^^

2022/02/13

인외 서커스 - 고바야시 야스미 / 민경욱 : 별점 2.5점

인외 서커스 - 6점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하빌리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커스단 마술사 란도와 동료들은 급작스럽게 흡혈귀들의 습격을 당하고 말았다. 흡혈귀들이 그들을 흡혈귀 사냥 조직 컨소시움이 위장한 서커스단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흡혈귀들은 인간을 훌쩍 뛰어넘는 능력을 갖추었지만, 아크로바틱 곡예사 기프티와 비스트리 남매, 화살 묘기를 부리는 궁사 슈티, 동물 조련사 레이라, 공중 그네 묘기를 펼치는 리지와 진 컴비, 오토바이 곡예사 쿠와이, 마술사 란도와 조수 아야미, 그리고 피에로 단장까지 10명의 단원들은 그대로 물러서지 않고, 그리즐리가 이끄는 다수의 흡혈귀들과 자기들의 기술을 이용하여 처절한 사투를 벌이게 되는데...


고바야시 야스미의 중편. <<기억파단자>>처럼 능력자들끼리의 배틀을 다룬 배틀물인데, 한 쪽이 굉장히 불리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흡혈귀들은 뇌나 심장이 파괴되지 않으면 어떤 상처를 입어도 재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두에서 컨소시움 군대 수십명이 강력한 중화기로 무장하고도, 흡혈귀 퀸 비 일당 세 명을 모두 쓰러트리지 못했기에, 읽으면서 서커스 단원들에게 과연 승산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단원들이 각자의 능력을 펼쳐보이는 것에 더해, 그들에게 유리한 서커스 무대 장치 등을 활용하여 승리하는 과정이 설득력있게 그려져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처럼 쓸데없는 설정을 부여하지 않고, 단순 화끈하게 풀어나가는 전개도 매력적이었고요.

특히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란도의 활약이 대단했습니다. 슈티가 죽어가면서 쏜 화살에 흡혈귀 위젤이 맞고 죽은 것을 통해 흡혈귀들이 심장이나 뇌가 파괴되면 죽는다는걸 깨닫고, 자신이 직접 만든 탈출 마술 장치를 이용하여 그리즐리를 없애는데 성공하니까요. 잠깐 관에 갖혔던 그리즐리가 나오는 틈에, 귀로 화살을 쏴서 죽였던 거지요. 진짜 최종 보스 미티아 역시 이 마술 장치로 발을 붙잡은 뒤 공격해서 죽일 수 있었고요. 단순 무식한 배틀이 아니라, 마술 장치 등의 복선도 활용한, 잘 짜여진 두뇌 싸움이라는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조련사 레이라와 키리피시의 대결도 볼 만 했습니다. 사자와 호랑이와 함께 공격하면서 키리피시의 눈길을 끌고, 그 틈에 코끼리 점보를 탄 단장이 뒤에서 키리피시를 밟아 없앨 수 있었다는건데 상당히 설득력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헛점을 이용하여 예상치 못했던 일격을 날렸다는 점, 그리고 코끼리 점보의 존재를 계속 독자들에게는 알려주었다는 점에서 공정한 두뇌 싸움의 좋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지와 진이 공중 곡예로 캐터피라를 날려버리고, 쿠와이가 이 틈에 오토바이를 추돌시켜 불을 붙인 싸움은 그리 정교하지는 않았지만 흥미진진하기는 했습니다. 오토바이 공격이 아니라 휘발유를 부어버리는게 진짜 핵심이었다는건 괜찮은 발상이었어요.
뛰어난 곡예사이지만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기에 기프티처럼 끔찍한 최후를 맞는 피해자가 나오는 것도 이야기에 설득력을 더해 줍니다.

문제는 다소 뜬금없었던 두 개의 설정입니다. 첫 번째는 숲 속에 홀로 산다는 여행객 도쿠 할아버지입니다. 할아버지의 활약으로 캐터피라와 토타스를 없앨 수 있었지만, '산 속에 혼자 사는 무림 고수 은거 노인' 캐릭터는 너무 진부한 설정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토타스가 문으로 습격할걸 예측하여 문에 낚싯줄을 걸어 두었다는 것에 대한 설명도 부족했고요. 토타스는 할아버지가 뭐 하는지 뻔히 보고 있던 상황이라서, 이렇게 쉽게 함정에 걸린다는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슈티가 흡혈귀 중 최강자인 미티아였다는게 밝혀지는 일종의 반전 부분입니다. 흡혈귀들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리즐리 패거리에게 인간에게 패배했다는 망신을 주기 위해 이런 음모를 꾸몄다는 것부터 영 와 닿지 않았어요. 오랜 시간 동안 서커스에서 일해가며 안배한 계획으로 보기에는 여러모로 허술했을 뿐더러, 최초 계획대로 그리즐리 패거리에게 망신을 주는 선에서 끝냈어야 했습니다. 미티아 스스로 모레노와 위젤을 죽인건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아요. 이렇게 죽일 거였다면 미티아가 직접 그리즐리 패거리를 찾아갔을 때 싹 죽이는게 나았겠지요. 슈티가 한 말 실수에서 란도가 슈티의 정체를 눈치챈다는 것 역시 조금 억지스러웠고요.
기프티가 흡혈귀가 되어 버렸다는 에필로그도 조금 애매했습니다. 이런 여지는 구태여 남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적절한 분량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킬링타임용 읽을거리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전형적인 일본 배틀물 만화를 글로 옮겨 쓴 느낌인데, 만화 버젼이 있다면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2003/12/15

셰르부르의 저주 - 랜달 개릿 / 강수백 : 별점 3점

셰르부르의 저주 - 6점 랜달 개릿 지음, 강수백 옮김/행복한책읽기

예전 그리폰 북스에서 출간된 적이 있었던 "귀족탐정 다아시경"시리즈의 재간본입니다. 행복한 책읽기에서 나왔네요. 제가 좋아하는 단편 추리물+SF라서 주저없이 구입한 책입니다.

제목이기도 한 "셰르브루의 저주"를 포함해서 "두눈은 보았다", "새파란 시체","상상력의 문제", "전쟁 마술" 총 5편의 중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추리소설로서의 성격보다 대체역사 SF 의 성격이 강한만큼, 영불제국과 폴란드제국이라는 배경 설정부터, 노르망디 대공의 주임 수사관 다아시경과 그의 파트너 법정 마술사 마스터 숀 오 로클란같은 독특한 인물 설정같은것들이 재미있습니다.

특히 마법과 과학이 공존하는 시대의 특성을 잘 살린 이야기들로 꾸며져 있어 보는 재미를 더하는데요, 예를 들면 시체에서 얻어낸 단서를 가지고 물질 재구성 마법으로 그 형태를 밝혀 낸다던가, 시체에 방부처리 주문을 건다던가 하는 사소한 부분에서 부터 "두눈은 보았다"에 나오는 상황 재현 마법까지 여러가지의 마법을 작가가 적재적소에 표현해 놓은것이 돋보입니다.

또한 주인공 다아시경도 상당히 독특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라서 시리즈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셜록 홈즈 스타일의 인물인데, 현명하고 냉철한 수사관으로 추리력 또한 뛰어난 인물이거든요. 물론 다른 등장인물들의 묘사도 탄탄하고 설정 역시 재미있고요.
하지만 정통 추리에 가까운 이야기는 "상상력의 문제"정도이고 나머지 중단편은 마법이 중심이 된다던가, 아니면 폴란드제국과의 신경전을 주제로 한 이야기들이라 추리물로 보기에는 조금 약합니다.
 "두눈은 보았다"는 반전이 있지만 예측 가능한 수준이었고 "셰르부르의 저주"는 첩보 모험물 성격이 더 강하네요. "새파란 시체"도 추리물로서 손색없지만 주 트릭이 "마법"에 기인하고 있어서 약간 변칙인 듯 하고요. 마지막 단편 "전쟁마술"은 제목 그대로 마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그 설정이 독특하고 주는 재미도 상당합니다. 후속 시리즈가 나와도 계속 읽어보고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13/06/17

모자에서 튀어나온 죽음 - 클레이튼 로슨 / 장경현 : 별점 2.5점

모자에서 튀어나온 죽음 - 6점
클레이튼 로슨 지음, 장경현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컬트 신봉자 세자르 사바트 박사가 완벽한 밀실에서 교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를 찾아온 사람들 등 유력한 용의자들은 모두 마술사였다. 개비건 경감은 사건의 특수성 때문에 마술사 그레이트 멀리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말로만 들었던 클레이튼 로슨의 마술사 멀리니 시리즈 대표작. 출간은 작년에 되었는데 이제서야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멀리니가 영 별로였습니다. '괴도 키드'와 같은 후배들의 원조답게 굉장히 개성적일 것으로 기대했는데, 직업만 특이할 뿐 고전 황금기 시대의 다른 명탐정들과 딱히 구분되는 점이 없는 스테레오 타입의 뻔한 캐릭터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스테레오 타입 형태도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말 많은 천재형’이며, 그중에서도 최악인,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기 위한 쓸데없는 말만 많고 정작 중요한 것은 잘 알려주지 않는 타입(초기의 엘러리 퀸이나 파일로 밴스 타입)이라 더 화가 나더라고요. 범인이 누군지 알면 증거나 단서를 잡기 전에 행동부터 좀 하란 말이죠! 하여간 말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개비건 경감이 어떻게 참고 있는지가 궁금할 정도였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트릭입니다. 나쁘지는 않은데, ‘걸작’이라는 말을 듣기에는 부족해 보였습니다. 특히 범인이 마술사라는 점에 너무 많이 의지한다는게 문제에요. 예를 들자면, 첫 번째 사건에서의 손수건 바꿔치기, 두 번째 사건에서의 최면술 같은 건데, 이 정도 능력이면 거의 초능력 수준이라 일반적인 상황과 상식에서는 구현할 수도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웠어요. 마술에 의지한다는 점 때문에 독자와의 두뇌게임 역시 공정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문제고요. 최면술 같은 것을 사전에 단서로 공유해주는 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 이유는 멀리니도 말하듯 증거가 너무 없다는 겁니다. 게다가 이렇게 완벽하게 살인계획을 짤 생각이었다면 단순한 밀실 살인이 아니라, 범인으로 옭아맬 희생양도 필요했을 텐데 그냥 불가능 범죄를 연출했을 뿐이라는건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범인 입장에서는 들인 공에 비하면 별로 얻은 게 없는 상황이니까요. 이럴거라면 애초에 왜 밀실을 만들었을까요? "너버스 브레이크다운"의 안도가 말했지만, 가장 완벽한 밀실 살인은 자살이어야 합니다. 그게 살인으로 밝혀지면 범인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마지막 이유는 경찰력의 무능함을 극대화시킨 전개입니다. 중간에 등장하는 5만 달러나 되는 큰돈이라는 유력한 동기를 간과하고 멀리니에게만 기댄다? 직무유기에 가깝습니다. 이 부분에 주목해서 경찰 수사가 이루어졌더라면 범인을 잡아낼 수도 있었을 겁니다.

고전 황금기 시대 이름을 날린 작품다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마술의 미스디렉션을 살인의 기법과 연결시키는 발상 하나만큼은 높이 쳐주고 싶고, 초반의 타로가 사라지는 간단한 마술 트릭이라든가 첫 번째 사건에서의 바꿔치기 트릭 하나만큼은 치밀하게 짜여져 있어서 ‘과연 추리 소설사에 이름을 남길 만하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딕슨 카의 밀실 추리 이론 등 다양한 작품과 이론에 대한 소개 역시 볼거리이고요.

그러나 저의 컸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함이 더 컸다 생각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번역 출간 자체는 반갑지만, 저 같은 고전 본격물 애호가가 아니시라면 권하기 어려울 정도로 애매한 작품이었어요. 멀리니의 장광설만 좀 줄이고, 두 번째 사건에서의 최면술 트릭 하나만 보완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안타깝네요. 멀리니가 등장하는 단편집이 소개되기를 기대해봅니다.

2023/04/29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8. 만화경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8. 만화경

저녁이 가까워지자 니시키 빌딩의 사무실이 붐비기 시작했다. 하루 일과를 마친 임차인들이 사무실에 들러 연락 사항을 확인하기 때문이었다. 전화 사용도 많아져 통화 소리와 담배 연기가 좁은 방에 가득 찼다. 비가 내린 탓에 사무실 사람들은 모두 젖은 우산을 들고 있었다.

토모히로의 고별식 다음 날, 카오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었다. 데츠바가 마이코를 만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날짜는 토모히로의 초칠일 전인 토요일로 정했고, 시간은 추후에 알려주겠다고했다. 카오리는 전화를 끊으면서 내 생일을 잊지 않았겠지요, 라고 상기시켰었다.

그래서 시간 확인차 카오리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런데 아침부터 집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마와리 집안의 가정부였는데, 꼼꼼한 성격 탓인지 카오리가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사무실 전화번호를 꼼꼼히 물어보았다.

토우이치는 비밀리에 장례를 치렀다. 토시오는 토모히로의 장례식 이후 마사오를 만나지 못했다. 불과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새벽녘에는 마사오의 꿈을 꾸었다. 마사오는 죽은 줄 알았던 토모히로와 팔짱을 끼고 그의 곁을 지나갔다. 마사오는 샹보르관을 나왔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토시오는 가슴이 먹먹해져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꿈의 맛은 이상하게 달콤했고, 아침에도 좀처럼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9만 파운드짜리 자동 음악 기계인가 ......"

아까부터 신문을 읽고 있던 후쿠나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자동 음악 기계?"

마이코가 되물었다. 요즘 장난감이라고 하는 것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중이었다.

"미술품 경매입니다. 영국 버크셔 백작의 성, 멘트모어 타워스가 경매에 나왔다고 하네요."

"백작님도 돈에 쪼들리는건 마찬가지인가 보네요."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세금 문제지요. 7대째가 막대한 상속세를 물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이 사람은 달마니라는 성을 하나 더 가지고 있긴 하지만요. 눈에 띄는 미술품은 전부 그쪽으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경매에 나오는 건 극히 일부라고 합니다."

"일부라도 대단한 재산인가 보군요."

"그렇죠. 세계 각국에서 3만 명의 바이어가 사전 답사를 마치고 경매는 열흘 동안 계속된다고 합니다. 멘트모어 타워스는 18세기부터 백 년 동안 수집한 프랑스 그림과 가구, 도자기, 시계 등이 가득한 보물창고라니까요요. 예를 들어 루이 14세의 책상이 5만1천 파운드, 방금 말한 두 마리의 새가 조각된 루이 15세의 자동 음악 기계가 9만 파운드, 루이 16세 시대의 자카드 로스가 만든 필사 인형 같은 것도 있다고 합니다."

"필사 인형이라고 하면 글씨를 쓰는 인형인가요?"

"그렇겠지요."

"설마 인형 안에 아이 같은 걸 넣는 장치는 아니겠죠?" 

"하하하, 우다이 씨가 말씀하신건 멜첼의 자동 체스 인형인데요, 그런 트릭도 물론 있었지만  18세기에는 이미 카라쿠리 인형의 기술력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트릭이 아니라 실제로 기계만의 힘으로 노래하고 춤추고 글씨를 쓰는 인형이 많이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지루해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그렇군요. 그 사람은 그만큼 트릭을 좋아하나 봅니다. 물론, 장난으로 불가능한 부분을 트릭으로 보충하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재미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마술은 기계공에서 마술사의 손으로 넘어갔고, 기계공은 기계의 가능성만을 추구하게 되었어요. 프랑스 궁정에서는 유명한 자크 드 보캉송이 활약했습니다. 보캉송은 클레오파트라의 뱀, 파우누스 신의 옆구리 피리 부는 사람 등 많은 카라쿠리을 만들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은 오리였습니다. 이 오리는 살아 있는 오리처럼 헤엄을 치고, 소리를 내고, 물을 마시는데다가 먹이를 던져주면 목을 쭉 뻗어 쪼아먹고, 음식물을 소화하고 배설까지 했다고 하네요. 이 오리는 훗날 마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베르 우당(Robert Wodan)의 손에 의해 수리되었고, 동시에 모든 메커니즘이 밝혀졌다고 하고요."

"마술사가 인형을 고쳤다고요?"

"그 당시 우당은 아직 시계 장인이었습니다. 그 후 우당은 오리를 보고 영감을 받아 스스로 다양한 카라쿠리를 만들었지요. 줄타기하는 인형, 기계 없이 움직이는 시계, 컵과 구슬의 기예를 하는 인형까지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이 사람 역시 마술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모양으로, 나중에는 마술사로 변신해 마술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지요. 오리가 생각나는데, 내가 어렸을 때 셀룰로이드로 만들어진 수영하는 오리를 팔던 장사치가 있었어요."

"저는 몰라요."

"뭐 오래 전 이야기니, 그렇겠죠. 이 오리는 더러운 통 안에 떠서 신기하게도 스스로 헤엄쳐 다녔어요. 그리고 가끔은 먹이를 잡기 위해 부리를 물속으로 집어넣기도 하고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요."

"기계 장치인가요?" 

"아니요. 보캉송의 오리도 저렇게 생물처럼 움직이지는 않았을 거에요. 생물의 움직임에는 기계에는 없는 불규칙한 부분이 있는 법인데, 노점상 오리는 그것이 제대로 갖춰져 있었어요."

"어떻게요?"

"그 오리를 사면 어디서든 팔고 있는 평범한 셀룰로이드 오리를 줍니다. 다만, 한 장의 종이가 붙어있어요. 그리고 그 종이에는 오리를 움직이는 비결이 적혀있었죠."

"네?"

"<오리의 목에 실을 달고 그 끝에 살아있는 미꾸라지를 매달아 두어야 한다>라고 적혀 있었어요."

"그거, 사기 아닌가요?"

마이코는 입을 열었다.

"사기는 아닙니다. 속임수죠. 에도 시대부터 있던 장난감이에요. 원래 이름은 '부동새'였어요. 가마우지를 본뜬 장난감이었지요. 분세이 말기, 우에노야마시타 부근에서 처음 팔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셀룰로이드 오리는 장사치들 사이에서는 '즌부리코'라고 불렸습니다. ......반대되는 트릭도 있었어요. 이것은 만든 시체 인형을 살아있는 까마귀가 쪼아댄다는 것이었죠."

"시체 인형?"

"네, 막부 말기에는 기괴한 구경거리가 활발하게 등장합니다. 이른바 시체 세공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실제 있었던 익사체를 모방한 인형으로, 물벼락에 맞은 얼굴 등이 사실적으로 만들어진데다가 시체를 진짜 까마귀가 쪼아댔다고 하더군요."

"알겠어요! 그 시체에는 미꾸라지가 숨겨져 있었군요."

토시오는 무심코 몸을 떨었다.

"역시 우다이 씨네요. 맞아요. 재미있는 것은 미꾸라지를 너무 많이 먹은 까마귀가 쓰러졌다는 흔적까지 남아있다는 것이에요. 즌부리코도 한동안 보이지 않아서,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진 것 같은데 이 근처에서 팔면 돈벌이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지금 사람이라면 화를 낼 것 같네요"

"그게 문제에요. 옛날 사람들도 화를 냈어요. 하지만 아이디어 비용을 지불할 의향이 있다면, 싼 거지요. 저런 걸작은 아무렇게나 나오는 게 아니니까. 백화점 같은 데서 파는게 나을거에요. 아이디어를 존중하는 교육도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될 테고요. 아이디어라고 하면, 1870년대에 유행했던 미국의 메카니컬 뱅크도 아이디어만으로 팔렸죠."

"메카니컬 뱅크? 들어본 적 없는데요?"

"기발한 구조의 저금통이었는데요. 주물로 만든 견고한 구조로 동전을 넣는 상자 위에 사람이나 동물의 장난감을 얹어 놓은 것입니다. 이 중에 ‘조련사’라는 저금통을 한 번 알아볼까요? 동전을 조련사의 손에 들고 상자에 달린 레버를 누르면 옆에 있던 개가 뛰어올라 조련사의 동전을 물고 저금통 안으로 떨어트립니다. ‘광대’는 손바닥 위에 동전을 올려놓고 레버를 누르면 입이 열리고 손이 움직여 동전을 입에 집어넣고요. 가장 걸작은 '정치가'라는 저금통입니다. 큰 의자에 꼿꼿이 앉은 정치가의 손바닥 위에 동전을 올려놓으면 무게에 의해 팔이 움직여 주머니에 만들어진 동전 넣는 구멍에 동전을 쏙쏙 집어넣습니다. 정치가의 무표정한 얼굴이 참 웃기죠. 그 외에도 마술사, 펀치 앤 주디, 엉클톰, 링컨 등 200여 종의 제품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금통 위에 동전을 올려놓으면 모터가 움직이면서 상자 안에서 해골 손이 나와서 동전을 잡고 상자 속으로 사라지는 장난감을 본 적이 있어요."

"그래요, 그런 게 메카니컬 뱅크, 즉 기계식 저금통입니다. 처음 개발되었던 당시에는 모터 같은 건 사용하지 않았지만요. 오히려 그런 소박한 점이 좋았어요. 일본에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라쿠고(落語) 속에만 남아 있지만, 히다리 진고로(ひだりじんごろう)가 만들었다는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있는 마네키네코(招き猫)가 그것이에요. 손바닥 위에 정해진 수의 동전을 올려놓으면 사라져 버리는 장치인데, 이것도 메카니컬 뱅크, 기계식 은행의 일종이었을 것 같네요."

"히다리 진고로는 장난에 관련된 전설이 많네요."

"맞아요. 카라쿠리에는 전설이 많이 붙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카라쿠리를 만들었던 것도 사실이죠. 하지만 현존하는 물건은 극히 일부에 불과해요. 나무와 종이로 만든 집에 살았고, 도시의 역사는 큰 화재의 반복이었으니까요."

"외국에는 오래된 장난감이 많이 남아있을 것 같아요."

"그야 많죠. 물론 중요한 멜첼의 자동 체스 인형은 필라델피아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화재로 소실되었어요. 하지만 런던 박물관에 가면 17세기 마스켈라인의 카라쿠리을 볼 수 있습니다. 조라든가 사이코라든가 하는 이름이었던 것 같네요. 메카니컬 뱅크도 몇 년 전에 일본에서 전시회가 열렸을 때 취재한 적이 있어서 잘 기억하고 있는 것이고요. 뉴욕의 사미엘 F 프라이어 씨가 수집한 것으로 주모우의 카라쿠리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어요."

"주모우라고 하면 비스크 인형이네요."

"우다이 씨, 잘 알고 계시네요."

"저를 비스크 인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렇군요. 그래요, 그렇게 말하니 닮았네요. 주모우의 작품은 카라쿠리이 아니더라도 지금도 애호가들 사이에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는 것 같아요."

"자동 음악 기계가 9만 파운드나 한다니까요…."

소우지 씨는 주모우의 인형을 몇 점 갖고 있다고 했다. 그 외에도 골동품 가치가 있는 자동 기계 인형을 가지고 있다면 상당한 재산이 되지 않을까.

이야기 도중에 카오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자리를 비워서 미안해요. 하지만 카츠 씨 회사, 정말 바쁘신가 봐요. 몇 번을 전화해도 통화 중이었어요."

"미안해요." 

카오리는 시간을 지정했다. 내일 1시에 나사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우다이 씨와 함께 오라고 했다.

"카오리 씨는 어떤 꽃을 좋아하세요?”

토시오가 물었다.

“네, 카네이션이 좋아요. 연홍색으로, 아셨죠?"

카오리는 그렇게 말했다. 수화기 너머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연홍색 카네이션의 꽃말이 뭔지 알아?"

다음 날, 나사 저택으로 향하는 에그 안에서 마이코가 물었다.

"모릅니다."

"그렇겠지. 꽃말은 열애야."

"...... 그러나 그녀가 지정한 겁니다."

"놀리는 걸까, 아니면 의외로 진심인걸까?"

"카오리 씨에게는 슌키치라는 약혼자가 있어요."

"해바라기 공예의 직원이지?"

"맞습니다."

"그럼 오늘은 못 올거야. 크리스마스와 설날을 앞둔, 장난감 회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시기니깐. 토요일이라고 해도 정시에 퇴근하는 건 불가능해. 특히 젊은 평사원은 말이야."

"어떻게 할까요?"

"상관없어. 괜찮아. 정 어려우면 카오리의 억지에 당한 척 하라고."

어제 내린 비는 완전히 그쳤고, 오랜만에 하늘이 맑게 개었다. 시내를 벗어나 언덕을 오르니 씻겨 내려간 단풍의 색이 한층 더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곧 나사 저택의 중앙에 뾰족하게 솟은 첨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달빛 속에서 바라본 인상보다 푸른 하늘 아래에서는, 저택 건물의 비틀림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벽은 원래는 선명한 주홍색으로 빛났을 터였지만 지금은 기괴한 검붉은 색이었고, 벽을 감싸고 있는 울창한 담쟁이 덩굴이 겹겹이 쌓인 모양은 마치 거대한 뱀의 비늘을 연상케 했다. 당나라 풍의 기와에서 튀어 나와있는 푸른 오각뿔 모양의 탑은 기괴한 조합으로 보였다.

흙담은 곳곳이 무너져 무질서하게 관목이 가지를 뻗고 있었다. 당초 문양의 철책문은 열린 채였다. 토시오는 문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정원 한가운데에 고풍스러운 클래식 자동차가 놓여 있다. 소우지의 애마(愛車)일까? 토시오는 그 옆에 차를 세웠다.

황량한 정원이었다. 저택 맞은편은 낮게 경사져 있고, 내려다보이는 곳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 연못 왼쪽의 기하학적인 녹색 면이 이야기로 들었던 미로인 것 같다. 연못과 미로 건너편에는 녹나무, 소나무 등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카오리는 빨간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검은 옷을 입은 카오리만 알고 있던 토시오에게 카오리의 모습은 신선한 놀라움이었다.

"어서 오세요. 기다렸어요."

카오리는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표정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고, 가슴이 풍만하게 솟아오른 모습은 지금까지의 카오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토시오는 눈부시게 빛나는 꽃다발을 내밀었다.

"어머!"

카오리의 뺨에 금방이라도 수줍은 홍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방으로 안내할게요."

카오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현관에 들어서자 탑 아래가 홀이었다.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바로 카오리의 방이었다. 계단, 난간, 문짝의 나무는 모두 세월의 흔적이 묻어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방 안은 지금까지의 건물 인상과는 달리 밝은 색채로 가득했다. 창문이 두 개 있는데, 한 쪽 창문을 통해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이 아래가 오빠 방, 그 앞이 아버지 방이에요."

카오리 씨가 설명했다. 그 안쪽이 조리실이고, 가사 도우미의 작은 방이 있다고 한다. 2층은 카오리가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아틀리에라고 했다.

"그런데 아틀리에로 마사오 씨가 이사를 올지도 몰라요."

"마사오 씨가?"

토시오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래요. 두 사람이나 되는 가족을 한꺼번에 잃고 너무 쓸쓸해 보여서요. 제가 권하고 있어요."

"마사오 씨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직 결정하지는 못햇어요. 방금 전에도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마사오 씨는 이 집에 계신가요?"

"그래요."

카오리는 하얀 화병에 카네이션을 꽂아놓고 연신 모양을 다듬었다.

"뜻밖의 선물 ......"

카오리는 꽃병을 진열대에 올려놓고 바라보았다. 꽃병 옆에는 길쭉한 화장품 상자가 놓여 있었다.

카오리는 마사오와 소우지와의 관계를 모르는 것 같다고 토시오는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마사오를 불러들이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카오리는 잠시 시계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이거, 전부 카오리 씨의 작품인가요?"

마이코는 아까부터 벽에 걸려 있는 여러 그림을 보고 있었다.

카오리의 방에 화사한 색감이 넘쳐나는 것은 밝은 색감의 그림들 덕분이었다. 대부분의 그림은 추상적인 면과 선의 교집합이 선명한 색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실 조금 과장된, 시제품 같은 느낌이에요."

카오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에 관심을 가져준 것에 대해 만족스러운 듯 했다.

마이코는 그 중 한 장의 그림에 마음이 꽂힌 듯 했다. 중앙에 패턴이 있고, 그것이 반복되면서 화면 전체로 퍼져나가는 그림이었다.

"만화경을 보는 것 같네요......"

마이코는 이렇게 평했다.

"훌륭해요."

카오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바로 만화경이라는 제목이에요. 언젠가 만화경을 보다가 그 그림의 주제가 떠올랐어요. 만화경의 빙글빙글 도는 움직임을 표현하려고 애를 썼어요."

토시오는 만화경이라는 단어가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다.

"만화경이라고 하면, 장난감?"

"그래요, 만화경. 카츠 씨도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을 거예요. 지금은 어른들이 보기에도 좋은 멋진 만화경들이 많이 팔리고 있어요."

카오리는 일어서서 유리장 문을 열고 예쁘게 채색된 원통 몇 개를 꺼냈다. 그 중 하나를 토시오에게 건넸다. 원통은 미세한 체크 무늬가 있고 한쪽에 작은 렌즈가 달려 있었다.

"만화경의 원형은 영국의 데이비드 브루스터라는 물리학자가 만들었다고 해요. 원형은 통 안에 들어 있는 색종이를 사방의 거울에 비춰서 다른 쪽의 구멍을 통해 보는 것인데, 이 만화경에는 그 종이가 없죠. 파타노스코프라고 해요."

토시오는 원통에 눈을 돌렸다. 원통 안쪽에서 마이코의 얼굴이 여러 개로 분해되어 겹쳐 보였다. 그 기형적인 이미지에 숨을 죽였다.

"색종이 조각이 아니라 실제 풍경을 기하학적으로 바꾸어 버리는 거죠. 망원경과 만화경을 합친 거죠."

파타노스코프는 마이코에게 넘어갔다. 마이코도 신기하다는 듯이 방 이곳저곳을 들여다보았다.

"이것도 파생품 중 하나인데, 작은 조각은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지만 통을 움직이면 안쪽의 거울이 움직여요."

그 작은 조각은 불규칙한 색종이 등이 아니라 사람의 실루엣이었다. 통을 움직이면 인물이 요염하게 얽히고 설키며 갈라졌다.

"통이 아닌 만화경도 있어요. 스피아로스코프라는 것은 두 장의 맞닿은 거울 아래에서 무늬가 있는 원반을 돌려서 그림을 변화시키는 거죠. 그리고 가장 이상한 건 이거예요. 안티스코프예요."

카오리는 또 다른 검은색 통을 토시오에게 건넸다.

"내 얼굴 좀 보세요."

그것은 기괴한 모습이었다. 카오리의 얼굴이 삐뚤빼뚤하게 휘어져 있었다. 시점을 바꾸면 크고 작은 눈알이 흔들거렸다. 코만 거품처럼 날아와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

"만화경의 어떤 파생품에서도 기본은 변하지 않아요. 그것은 어떤 불규칙한 형태도 순식간에 규칙적인 대칭으로 바꿔버리는 거울의 마술이죠. 그런데 안티스코프는 어떤 질서정연한 대칭도 비틀어 버리고 말아요. 원통 안의 거울을 구부러뜨린 것이겠지요. 이걸로 보면 인간의 형상은 모두 벨마이어의 인형처럼 변해버리게 되지요. 이 ‘반’ 만화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계의 매력은 정돈된 형태가 순식간에 그로테스크하게 변하는 기괴함이에요."

토시오는 안티스코프로 카오리가 그린 만화경을 보았다. 색채가 뒤틀리고 흐르고 기묘하게 뒤섞여 마치 썩어가는 고기 덩어리처럼 보였다.

"만화경에 열광하는 나를 보고 오빠가 만화경을 준 적이 있었어요. 작은 평범한 만화경이었어요. 한참을 들여다 본 나에게 오빠가 이상하다며 거울을 건네줬어요. 거울로 보니, 내 눈 주위에 동그랗게 먹물이 칠해져 있었어. 만화경 눈과 맞닿는 부분에 먹물이 칠해져 있었기 때문이었죠. 정말 장난이 심하지 않아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가정부가 들어왔다.

"......어르신께서 손님을 모셔다 달라고 하십니다."

마이코와 카오리가 방을 나갔다.

토시오는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저택 바로 앞은 화단이었을 것이다. 잡초 사이로 기하학적인 흔적이 보인다. 왼쪽에 연못 쪽으로 튀어나온 석가산이 있고, 그 위에 기울어진 작은 정자가 있었다. 그 정자에 서면 정원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정자 앞은 가파른 경사면으로, 경사면 끝자락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개울에는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물줄기는 연못에서 시작되는 것 같았다. 연못 왼쪽 안쪽에 있는 미로에 눈이 갔을 때였다. 나무 사이로 움직이는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누구인지 확인하지 못한 채로, 나무 사이로 숨어 버렸다.

"볼품없죠?"

정신을 차려보니 카오리가 옆에 서 있었다.

"이런 정원도 운치가 있지요."

토시오의 말에 카오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카츠 씨, 아첨을 잘 못하시네요."

카오리는 토시오와 함께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저 하늘 저 멀리."

카오리가 중얼거렸다. 쳐다보니 카오리는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모히로 씨가 그런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마사오 씨와 함께 로스앤젤레스에 있었을 텐데...."

젊은 여성과 단둘이 있는 방에서, 그것도 여성이 감상에 젖어 있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카오리는 토시오를 잠시 쳐다보다가 화제를 바꿨다.

"우다이 씨 이야기란, 무슨 이야기인가요?"

모처럼의 배려이긴 하지만 마이코에 대해 이야기해도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뭔가 어려워 보이던데요."

"맞습니다 ......."

토시오는 뭔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아첨을 잘 못한다는 말을 듣고 위축되어 버린 것 같았다. 대답은 당연히 무미건조한 것이 되었다.

"연분홍색 카네이션의 꽃말을 아시나요?"

카오리는 정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아요. 열애일 거에요."

"알고서 주셨군요."

"카오리 씨의 희망이었으니까요. 슌키치씨가 오늘은 오지 않을 줄 알기도 했고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으니 회사가 바쁘겠죠."

카오리는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당신, 대단해요."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안돼요. 좀 더 센스 있는 대사를 쓰지 않으면 안 돼요. 이런 건 어때요? ‘나는 여심의 미로를 잘 알고 있어’”

"나는 여심의 미로를 잘 알고 있어."

토시오는 카오리의 말을 반복하면서 자신이 광대 같다고 생각했다.

"시도해 보지 않겠어요? 사실은, 진짜 미로가 있어요."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어제 미로에 관한 책도 조금 읽었죠."

"그럼 잘 알고 있겠군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카오리는 토시오의 손을 잡았다.

복도로 나와 현관을 등지고 정원에 면한 문을 열었다. 문은 무거운 기척을 내며 열렸다. 화단으로 나가는 돌계단을 내려가서 화단을 지나면, 길은 완만한 내리막길로 굽이굽이 연못을 향하고 있었다. 연못은 예상외로 물이 맑고 깨끗했다. 카오리의 모습을 발견한 새하얀 오리 서너 마리가 헤엄쳐 왔다.

"샘이 의외로 풍부해요."

카오리는 한 마리씩 오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연못을 따라 왼편으로 가니 나무가 우거진 광장이 나왔다. 광장 중앙에 높은 담장 같은 울타리가 보였다.

카오리는 울타리 앞에 섰다. 그곳은 울타리가 끊어지고 안쪽으로 길이 이어져 있었다.

"여기가 입구인데, 자신 있어요?"

"있습니다."

토시오가 대답했다.

"그럼 안내해주세요."

"카오리 씨는 미로 길을 모르시나요?" 

"몰라요. 어렸을 때는 오빠랑 자주 놀았는데, 그 때는 작은 나뭇가지의 조합이나 길의 느낌으로 절대 길을 잃은 적이 없었어요. 아이는 그런 직감이 예민하잖아요. 카드 뒷면의 작은 얼룩을 기억하는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안 돼요. 미로에 계속 들어가지도 않았고, 감도 둔해졌을 거예요."

"그럼, 제 손을 잡고 가시죠."

토시오는 울타리 사이로 들어갔다. 카오리는 토시오의 오른손을 잡았다. 토시오는 미로에 들어가자마자 왼손을 뻗어 울타리 왼쪽에 댔다.

"뭐하는 거에요?"

"미로 책에 나온 방법이에요. 이 왼손은 절대로 울타리에서 떼지 말고 걸어야 해요. 나머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도 왼손을 떼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 있어요. 다만, 조금 돌아갈 수는 있지만요."

"좋아요, 재미있을 것 같네요."

길은 쾌적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울타리 덤불이 길을 좁게 만들고, 나뭇잎에는 어제 내린 비가 아직 묻어 있었다. 서너 번 모퉁이를 돌자, 더 이상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오직 왼손만이 의지할 수 있는 길잡이였다.

한참을 걷다 보니 길가에 타원형의 돌멩이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뭐죠?"

"의자요. 길을 잃은 사람이 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돌의 중앙에는 빗물을 통과시키는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토시오는 의자 앞을 지나쳤다.

꽤나 긴 길처럼 보였다. 그리고 어느 모퉁이를 돌았을 때 갑자기 시야가 트였다.

"도착했나요?"

하지만 그것은 둘이 들어왔던 원래의 입구였다.

"실패했네요."

"아닙니다. 자, 아직 손이 울타리에서 떨어지지 않았죠. 책에 보면 미로를 한 번 빠져나와서 바깥쪽으로 돌아갈 때도 있다고 나와 있었어요."

"융통성 없는 방법이네요, 뭐, 괜찮아요."

두 사람은 미로의 바깥쪽을 한 바퀴 돌았다. 그래서 이 미로가 꽤 넓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미로 안으로 들어갔다.

"골인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뒤에서 카오리가 말했다.

"내기할까요?"

"무엇에요?"

"만약 카츠 씨가 골인하지 못하면 모두가 모였을 때 노래를 부르세요."

"노래는 잘못하는데요."

"하지만 미로에는 자신이 있지요?" 

"네, 있어요."

"있어요. 그럼 내가 골인 지점에 도착하면?"

"카츠 씨에게 키스를 할게요."

카오리는 진지하게 말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왠지 모르게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모퉁이를 돌자 다시 입구로 나왔다.

"내가 이겼네요."

"아니요, 아직입니다."

토시오는 카오리의 손을 놓았다. 손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내가 읽은 책에 따르면 미로에는 단연결 미로와 복연결 미로 두 가지가 있어요. 단연결 미로라면 지금의 방법으로도 골인할 수 있어요. 따라서 이 미로는 복연결 미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연결이 뭐예요?"

"이 미로의 울타리를 모두 끈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지금 끈의 한쪽 끝을 잡고 공중에 매달아 놓았다고 생각하면, 단연결 미로라면 모든 끈이 다 들어올려질 수 있어요. 하지만 복연결 미로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땅 위에 남겨진 밧줄이 생기게 됩니다. 햄튼 코트의 미로 역시 복연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복연결 미로에서도 골인 지점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길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뭐라고요?"

"예를 들어 백묵 등으로 길의 왼쪽에 선을 긋고 가는 거죠. 모퉁이를 돌면 원하는 방향으로 꺾어가는 거죠. 그렇게 가다 보면 양쪽에 두 줄로 체크된 길을 만날 때가 있어요. 양쪽에 두 개의 선이 있다는 것은 이미 한 번 갔다가 다시 돌아온 길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이 길은 피해서 지나가야죠. 그렇게 가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목표 지점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최단거리의 길을 찾을 수 있고요. 즉, 표시된 길 하나만 따라가면 되니까요."

"좋은 방법이네요.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에 잠입한 테세우스는 미녀 아리아드네스로부터 받은 비단실 구슬을 풀면서 나아갔다고 하죠. 테세우스도 분명 같은 생각이었겠지요. 비단실을 가져올까요?"

"백묵을 준비해 왔어요."

토시오는 주머니에서 백묵의 작은 상자를 꺼내 보여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요."

"왼손으로 벽을 쓰다듬으면서 갈 수는 없겠지요."

"그럼 나는 잠시 볼일을 보고 다시 올게요."

카오리는 시계를 보았다. 두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내기는 아직 끝난게 아닙니다."

"알아요. 도망치는 게 아니에요. 약속이 있어요."

카오리는 살짝 웃었다,

"그러니 최단 거리를 찾아줘요."

라고 말하고는 빙글 돌아서서 달려갔다.


미로를 백묵으로 체크하며 진행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땅은 어둡고, 백묵은 쉽게 끊어졌다. 땅에 웅크리고 선을 긋는 익숙하지 않은 동작 탓에 토시오는 몇 번이고 일어나서 허리를 크게 펴야 했다. 카오리는 현명하게도 이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작업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을까. 나중에 경찰 수사관에게 끈질기게 추궁을 당하게 되지만, 십오 분, 삼십 분 정도인 것 같았다.

갑자기 날카로운 폭발음이 들렸다.

토시오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허리가 뻐근하게 아팠다.

폭발음은 한 번 뿐이었다. 토시오는 귀를 쫑긋 세웠다. 다시 돌아온 고요함은 이전보다 더 깊게 느껴졌다. 그 고요함 속에서 작은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쿵'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에 이어 물이 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폭발음으로 인해 청력이 예민해져 있지 않았다면 못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소리는 금세 작아졌고, 곧 사라졌다.

토시오는 무언가 모를 느낌을 받았다. 그는 가느다란 백묵의 선을 따라 미로처럼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달렸다. 폭발음의 방향은 물론이고 방향도 알 수 없다. 금방이라도 길을 잃을 것 같았다. 마음은 급했지만 미로는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길을 잘 살펴본 덕에 막다른 골목에 빠지는 것만은 면했다.

미로를 벗어나자마자 연못 쪽으로 돌아갔다. 길은 그 길밖에 몰랐기 때문이었다. 언덕길을 화단 쪽으로 올라가려다 마주오던 마이코와 부딪혔다.

"무슨 소리야?"

마이코가 큰 소리로 외쳤다.

"모르겠어요. 미로 속에 있었으니까요."

"연못 쪽에서 소리가 들렸어."

"연못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미로 안에서도 소리는 들리지 않아요."

"그럼 전망대 정자 쪽으로 가보자."

마이코는 방금 왔던 화단 길을 되돌아갔다. 저택 앞에 소우지가 서 있었다.

"오, 비스크, 아니, 우다이 씨였군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모르겠어요. 소우지 씨는?"

"제 방에 있었어요. 왠지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나와 보았습니다."

"정자 쪽으로 가 보시죠."

세 사람은 일단 저택 앞을 나와 주차장이 되어 있는 공터 앞을 지나 정자로 향하는 완만한 오르막길을 따라갔다.

정자에 도착하기 전, 기울어진 지붕 아래로 붉은 옷이 보였다. 그 옆에는 마사오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부인, 무슨 일입니까?"

마사오는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카오리는 연못을 바라보며 마사오의 발밑에 엎드려 있었다. 토시오는 카오리를 일으켜 세웠다. 토시오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카오리의 얼굴 밑에 고인 피였다.

카오리의 얼굴이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왼쪽 눈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보였다. 눈알이 부서지고 찢어진 붉은 살덩어리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매캐한 피 냄새 속에서 토시오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카오리를 안고 있던 팔의 힘이 사라지고 주위가 하얗게 변했다. 그는 자신이 기절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