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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26

지하인간 - 로스 맥도널드 / 강영길 : 별점 3점

지하인간 - 8점 로스 맥도날드 지음, 강영길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루 아처는 우연히 6살짜리 소년 로니를 알게 된다. 로니의 부모는 이혼 직전으로 로니의 아버지 스탠리 브로더스트는 아들과 미인 여대생 수전 크란돌을 대리고 어머니 엘리자베스 브로더스트의 산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산장 근처에서 산불이 나자, 로니의 어머니 진은 루 아처에게 로니를 데려와 줄 것을 의뢰하지만 산장 근처에서 스탠리의 시체가 발견된다. 스탠리가 평소 15년전에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간 아버지 리오의 행방을 쫓고 있었다는 것과 이 아버지의 행방이 사건의 중요한 단서가 됨을 깨달은 아처는 로니와 함께 사라진 수전의 행방을 뒤쫓으며 사건의 과거를 파고들어 진상을 알게 된다.


국내에 출간된 루 아처 시리즈 중에서는 가장 말년인 1971년에 발표된 작품. 발표 당시의 평도 무척 좋았죠. 그동안 계속 벼르다가 형이 생일선물로 구입해 주어서 이제야 읽게 되었네요. 아래와 같은 전형적인 패턴의 루 아처 시리즈입니다.

루 아처 패턴 :
1. 우연히 루 아처가 사소해 보이는 사건을 의뢰받는다.
2. 루 아처가 사건 조사 중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3. 관계자들을 조사하니 서로 복잡한 과거의 사건에 얽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4. 결국 진실이 밝혀지며 관계자 반 정도는 죽거나 다친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여성들이 약하고 보호를 원할 뿐더러 원치않는 사건에 휩쓸려 자신을 잃게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여성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는 특유의 여성관과 정신 분석에 대한 깊이 있는 묘사 역시도 시리즈 다른 작품들과 유사했고요.
또 루 아처 시리즈의 장점인 인간의 야비하고 무서운 속성에서 발생하는 비극을 스릴과 서스펜스 속에 잘 녹이고, 사건 자체에 대한 진상과 맥락을 치밀하게 정리하여 나름의 추리적인 만족감을 전해주는 점도 잘 살아 있습니다. 얼핏 보면 아무 관계없어 보이는 살인사건과 등장 인물들간의 연관성이 과거의 '한 사건'에 맞춰지며 그에 따라 모든 등장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를 통해 복선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죠. 항상 가정은 파탄나고 결딴다는 루 아처 시리즈 중에서는 유별나게도 나름의 안정(?)을 찾는 크란돌 가족이 그려지는 것은 좀 이색적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아미스테드 부부와 제리 킬패트릭 같이 이야기 전개에 별 도움 안되는 불필요한 등장인물들이 너무 많이 등장해서 혼란스럽다는 점과 단서보다 정황에 의한 추리가 많다는 약점까지 전작과 비슷한 것은 좀 아쉽네요. 보다 단순화해도 좋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래도 미국 사회에 있는 일종의 정신적 공황과 부도덕, 범죄를 추리소설로 묘사하며 나름의 문학적 수준까지 끌어올린 루 아처 시리즈는 평균 이상의 재미를 항상 보장하는, 언제 읽어도 볼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PS : 비슷한 풍의 제임스 옐로이의 하드보일드와 비교하면 이 당시만 해도 참 순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무서워지기까지 합니다.......

2004/09/22

움직이는 표적 - 로스 맥도널드 / 이가형 : 별점 3.5점

움직이는 표적 - 8점 로스 맥도날드 지음, 이가형 옮김/해문출판사

루 아처는 백만장자 랠프 샘프슨 실종 사건 의뢰를 받았다. 단서는 랠프의 양복 주머니에 들어있는 여배우의 사진 한 장 뿐이었다. 루 아처는 사진 속 여배우 페이에게 접근해 단서를 캐 나가며 여러 인물들을 만났다. 그러던 중 몸값 10만 달러를 요구하는 협박장이 샘프슨의 집에 도착했고, 아처와 변호사, 검사, 보안관은 돈을 지불한 뒤 일당을 일망타진하려는 작전을 펼쳤지만 아처의 앞에서 돈을 가지고 도주하던 유괴범은 죽고 돈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이윽고 아처는 살해당한 유괴범의 정체와 정보를 알게된 후 진정한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를 파악하게 되는데...

"소름"의 기억이 살아있던 차에 다시 집어들어 읽게 된 루 아처 시리즈입니다. 기념할만한 데뷰작이지요.
데뷰작답게 작가가 오랜 시간 준비한 티가 물씬 납니다. 상당히 복잡한 플롯이지만 굉장히 치밀하고 잘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행방불명된 백만장자가 약간 미쳤다'는 근거로 쓰인 한 광신자에게 준 사당과 사원이 사실은 백만장자의 사업과 관련이 있다는 내용, 중반부에 잠깐 나오는 바다로 향해 날아가는 검은 원반의 정체 등 인물 하나 하나, 장면 하나 하나가 결과적으로 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소름" 처럼 나름의 한방, 반전을 가지고 있는데 단지 반전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표현으로 여타 작품들보다 수준 높은 품격을 보여주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황금 만능 주의 사회에 울리는 경고의 메시지도 좀 담겼달까요? 이런 비슷한 상황이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다는 부분이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네요.
제목 "움직이는 표적"도 작중에서는 효과적으로 쓰이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인상적인 대사로 인용되며 루 아처라는 캐릭터를 부각 시키는데 유용한 장치였다고 생각됩니다. 또 일단 굉장히 멋지잖아요?

하드보일드의 전통이 잘 살아 있으면서도 루 아처만의 매력을 풍기는 시리즈의 특징 그대로 루 아처의 활약도 여전합니다. 액션이면 액션, 추리면 추리, 배짱이면 배짱 모든면에서 충분히 인상적이며 자신만의 존재를 잘 어필하고 있거든요. 또한 악역이던 선역이던 여성들을 대하는 시각에서 감성적인 부분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확실히 다른 하드보일드 작품들과 차별화되는데 저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거의 모든면에서 완벽한 데뷰작입니다. 루 아처라는 탐정의 될성부른 떡잎(?)을 알아보는데는 모자람 없는 작품이었고 미국 하드보일드의 계보를 짚는데도 중요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문제는 너무 복잡해서 한번에 읽지 않거나 캐릭터들 상관관계를 정리하지 않으면 읽기가 약간 까다롭기도 하다는 점이지만 약간의 어려움만 감수한다면 일급 하드보일드 추리물의 진수를 느끼실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덧 : 분명 영화화가 되었으리라 생각해서 조사해 봤더니 "영국"영화로 1966년도에 제작되었더군요. 제목은 "Harper!" 명배우 폴 뉴먼과 로렌 바콜이 나오는데 주인공 이름이 "루 하퍼" 입니다. 이름을 바꾼 이유인 즉슨 폴 뉴먼이 H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지는 것이 영화 성공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프로듀서의 의견 때문이었다군요. 허 참...

덧 2 : 읽으실 때 도움되실 캐릭터 일람 추가드립니다~

  • 루 아처 : 사립 탐정, 주인공
  • 랠프 샘프슨 : 괴짜 백만장자. 점성술과 사이비 종교에 빠져 있으며 최근 실종됨.
  • 샘프슨 부인 : 랠프 샘프슨의 부인으로 사건 의뢰자. 승마하다가 낙마한 이후 다리가 부자연 스럽다.
  • 미란다 샘프슨 : 샘프슨의 딸. 앨런 태거크를 사랑하지만 아버지의 압력으로 앨버트 그레이브스와의 결혼을 진지하게 고민중인 천방지축 아가씨.
  • 앨버트 그레이브스 : 샘프슨의 고문 변호사. 이전 아처의 상관인 지방검사였다
  • 앨런 태거트 : 랠프 샘프슨의 자가용 비행기 조종사. 2차대전 당시의 전쟁 영웅 출신으로 굉장히 핸섬한 젊은이
  • 드와이트 트로이 : 지저분한 갱. 술집 "미치광이 피아노"의 주인.
  • 페이 이스터브룩 : 왕년의 영화 스타. 랠프의 친구로 점성술에 관심이 많다.
  • 베티 프레일리 : "미치광이 피아노"의 재즈 가수. 마약 중독자.
  • 퍼들러 : "미치광이 피아노"의 보디가드. 트로이의 오른팔.
  • 클로드 : 샘프슨이 산과 수도원을 기증한 사이비 종교 교주.
  • 에디 레시터 : 샘프슨 납치범 중 한명.
  • 피터 콜튼 : FBI 수석 검사관. 과거 아처의 상사.
  • 스패너 : 보안관.
  • 험프리스 : 지방검사.

2014/06/30

위철리가의 여인 - 로스 맥도날드 / 이원경 : 별점 3점

위철리가의 여인 - 6점
로스 맥도날드 지음, 이원경 옮김/시작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석유개발회사의 사장 호머 위철리는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뒤, 자신의 딸 피비가 실종된걸 알고 사립탐정 루 아처에게 딸을 찾아줄 것을 의뢰했다. 루 아처는 실종이 호머의 전처 캐서린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호머는 캐서린이 수사에 개입되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다. 이에 아처는 피비의 남자친구 보비, 캐서린 등을 차례로 만나 사건의 전모를 서서히 알아가는데...

대실 해밋, 레이몬드 챈들러와 함께 하드보일드의 삼두마차 중 한 명인 하드보일드의 서정시인 로스 맥도날드(왜 맥도널드가 아닐까요?)의 루 아처 시리즈 장편입니다. 이전에 다른 버전으로 여러 번 읽어보았던 작품입니다. 새로운 번역이 어떨까 궁금하여 읽어보게 되었네요. 마침 리뷰도 그동안은 남기지 않았었으니까요.

그런데 읽고 나니 좀 의외였습니다. 상당한 걸작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그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사건이 쉽게 연결되고, 지나치게 작위적인 부분이 눈에 많이 뜨이는 탓입니다. 사건 수사도 일사천리로 진행되고요. 예를 들면 캐서린, 피비를 협박하던 협박범 메리먼을 알게 된 건 캐서린이 집을 내놓은 부동산 업자이기 때문이며, 그와 컴비를 이룬 악당 스탠리는 벤의 처남이자 캐서린-피비가 잠시 머문 아파트 옆집에 거주했다는 식입니다. 덕분에 빠르고 쉽게 전개되긴 하지만 정교한 느낌은 받기 힘듭니다. 등장인물들은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게임의 NPC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메리먼과 스탠리가 처음에 캐서린을 협박하게 된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단점도 크게 다가옵니다. 캐서린의 놀이 상대였을 수도 있다는 정도의 정보로는 부족했습니다.

또 제목의 "여인"의 원제가 복수인 women이 아니라 단수 woman이라는 점에서 강하게 시사하는, 위철리 가의 여인은 딱 한 명밖에 없다는 비교적 괜찮은 서술 트릭도 루 아처가 직접 그녀를 만나보았음에도 어색하거나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는 묘사 때문에 설득력이 많이 떨어집니다. 스무 살 이상 차이나는 엄마와 딸인데 아무리 화장을 떡칠하고 피곤과 스트레스로 엉망이 되었다 하더라도 못 알아보았다? 루 아처의 직업적인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점 때문에 루 아처가 그렇게 뛰어난 탐정이 아닌 것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동기 역시도 마찬가지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이것은 트레버의 마음가짐이 설득력 있게 전달되지 못한 탓이 큽니다. 무려 이십여 년을 참고 지냈을 뿐더러 나이도 먹고 병도 있다면 어떤 협박이나 어려움이 있더라도 초월할 것 같은데 말이지요. 이 정도면 아예 자포자기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랬다면 애초에 살인을 저지르지도 않았겠죠?

또 "소름"과 유사하다고 느껴진 점도 아쉽습니다. 물론 이 작품이 "소름"보다 먼저 발표된 작품이기는 하지만 '가족의 현재 위치를 뒤집는 설정'이 핵심이라는게 똑같으니까요. 그런데 "소름"만큼의 충격을 가져다주지 못해서 "소름" 대비 여러모로 2%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피비가 가진 아이의 아버지가 칼 트레버였다던가 정도의 충격은 전해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도 평가절하하기는 어려운 고전이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순문학에 가까운 미려한 문체는 여전한 볼거리예요. 일어 중역본에서 느끼지 못했던 명문들도 가득하고 루 아처의 캐릭터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편이니까요. 특히 "연민"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 루 아처의 심리 묘사를 통해 당대 다른 하드보일드 탐정과 차별화되는 독특한 개성도 유감없이 선보이고 있습니다.

일견 복잡해 보이지만 결국 순수한 욕망의 몸부림으로 시작해 살인으로 끝난다는 칼 트레버의 고백이 내용의 전부라는 심플한 구성도 마음에 듭니다. 대부분의 하드보일드가 그러하지만 "돈"보다는 "욕망"이라는 포인트가 괜찮았어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과 가진 것을 지켜야 하는 욕망이 교차하는 동기는 언제나 설득력 있기 마련이죠.
피비가 호머 위철리가 아니라 칼 트레버의 딸이었다는 반전도 캐서린이 죽으면서 남긴 다잉 메시지를 잘 설명해주면서도 칼 트레버가 왜 이렇게 사건에 깊숙이 개입하여 고뇌하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고요. 주변 남성들을 모두 파멸로 몰고 가는 독특한 팜므파탈 캐서린 위철리의 존재감도 대단하며, 작품 내에서 단 한 번도 살아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과거형으로 묘사하는 방식도 신기하고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시대를 초월한 걸작은 아니지만 하드보일드 거장의 솜씨는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가작입니다.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처럼 좋은 추억만을 간직할 것을 괜시레 다시 읽었다가 평점만 깎은 것 같아 내심 미안하기도 하군요. 제 올타임 베스트 중 한 편인 "소름"도 지금 다시 읽으면 별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데, 시간 나면 한번 뒤적여 봐야겠습니다.

2022/03/09

블랙 머니 - 로스 맥도날드 / 박미영 : 별점 2점

블랙 머니 - 4점
로스 맥도날드 지음, 박미영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내용, 진상, 범인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촌 몬테비스타를 찾은 루 아처는 피터 제이머슨의 의뢰로 수상쩍은 남자 프란시스 마텔의 조사에 착수했다. 피터의 약혼녀였던 지니가 홀딱 반했기 때문이었다. 조사 결과, 마텔의 정체는 몬테비스타 테니스 클럽에서 웨이터로 일했던 가난뱅이 불법 체류자 펠릭스 세르반테스였다. 그는 7년 전, 지니 아버지 로이가 자살한 직후 파리 유학을 떠난 뒤 출세해서 첫 눈에 반했던 지니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유학은 라스베가스 도박사 케첨 (레오 스필먼)의 도움 덕분이었고, 마텔이 가지고 있던 현금 십만여달러 역시 레오 스필먼의 돈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런 과거를 더듬어 가는 와중에 지니의 어머니 마리에타, 마텔이 차례로 살해당하는데...

하드보일드 3대장 중 한 명인 로스 맥도날드의 루 아처 시리즈 장편. 제목의 블랙 머니는 라스베가스에서 도박장을 운영하는 레오 스필먼이 탈세로 빼돌린 돈을 의미합니다. 카지노에서 큰 돈을 잃은 사람들을 찾아가, 할인된 금액으로 수금을 하는 식으로 빼돌렸던 거지요.

거장의 작품답게 읽는 재미는 상당합니다. 별 것 아닌 듯한 의뢰가 점점 커져가고, 이 와중에 등장인물들이 서로 더럽게 얽히고 섥힌 관계가 드러나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스릴러임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완급 조절과 흥미를 돋우는 묘사와 전개로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솜씨가 빼어난 덕분입니다.

그러나 완성도는 그닥입니다.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등장하는 사건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풀어보지요.

  1. 7년 전, 레오 스필먼은 도박 빚 대신 딸을 상납하기로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은 로이 파블론을 구타했습니다.
  2. 혼절한 로이 파블론을 태블론 교수가 수영장 속에 밀어 넣어 살해했습니다.
  3. 펠릭스 세르반테스는 레오 스필먼을 협박해서 유학을 떠납니다.
  4. 펠릭스는 유학 후 프란시스 마텔이라는 가명으로 신분 세탁을 한 뒤, 파나마 영사관에서 일하게 됩니다.
  5. 마텔은 영사관 직원 신분을 이용하여 레오 스필먼의 블랙머니 세탁을 돕습니다.
  6. 7년이 후, 레오 스필먼이 뇌졸증으로 쓰러지자 프란시스 마텔은 모든 블랙머니를 들고 달아닙니다.
  7. 마텔은 몬테비스타를 찾아 첫 눈에 반했던 버지니아 (지니) 파블론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합니다.
  8. 지니는 태블론 교수와 불륜 관계로 단지 돈이 필요해서 마텔과 결혼했습니다. 곧바로 이혼하고 위자료를 챙길 셈이었고요.
여기까지가 이야기에서는 후반부에 드러나지만, 전체 시간 순서상으로는 사건의 도입부인 셈인데, 인간들이 서로 엮이게 된 동기가 명확하고 나름 말은 됩니다.

그런데 이 뒤, 현재 시점에서 벌어지게 되는 태블론의 범행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순서대로 써 보자면,

  1. 지니는 마텔과 결혼해서 집을 떠났습니다.
  2. 이 때 마리에타는 지니로부터 남편 로이 죽음의 진상을 듣게 됩니다.
  3. 마리에타가 무언가 언급하려 하자, 태블론은 그녀를 살해합니다.
  4. 뒤이어 태블론은 마텔을 살해하고 돈을 갖고 도망칩니다.
인데, 우선 태블론은 마리에타를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마리에타가 로이의 범행을 폭로할걸 우려했다? 마리에타도 지니에게서 이야기를 들은게 전부일 뿐입니다. 아무런 증거가 없어요. 경찰도 모두 자살이라고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몰락한 알콜중독자 아줌마의 하소연을 누가 제대로 귀담아 들어주었을리도 없습니다.

지니가 7년이 지나서야 태플론의 범행을 어머니에게 털어놓은 까닭도 모르겠어요. 마텔로부터 진상을 들었다 한 들, 그걸 어머니에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고요. 마텔을 죽이고 현금을 가지고 도망친 이유 역시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마텔이 블랙머니를 빼돌려 쫓기고 있었다는건 태블론이 알 턱이 없었으니 이를 위장해 살해한다는건 불가능했으니까요. 로이 살인 사건의 유일한 증인인 마텔을 죽이고, 마리에타를 죽인 범죄를 마텔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해서였을 수 있긴 합니다. 문제는 그랬다면 마텔의 시체를 숨겼어야 했습니다. 지니의 도움을 받았으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을텐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요? 살인 하나를 덮기 위해 또다른 살인을 저지르고 바로 발각된다는건 바보나 할 범행이지요. 아울러 죄를 뒤집어 씌울 의도였다 한들, 마텔은 이미 지니와 결혼해서 집을 떠났으니 마리에타를 죽일 하등의 동기가 없습니다. 경찰을 속이기는 힘들었을 거에요. 차라리 지니와 함께 도피하기 위한 자금 마련 목적이었다면 말이 되었겠지만, 미적거리며 집에 머물고 있었으니 이 역시 설명으로는 부족합니다.

루 아처가 태블론이 진범이라는걸 깨닫는 과정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추리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였어요. 태블론이 베스와 결혼한 이야기를 들은 정도로 그가 지니와 깊은 관계였다는걸 깨닫기는 불가능한 까닭입니다. 게다가 지니도 단지 돈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했고, 베스는 루 아처를 노골적으로 유혹하며, 레오 스필먼은 남의 아내 키티를 빼앗아 사실혼 관계로 살고 있고, 실베스터 의사의 아내 오드리는 로이 파블론과 불륜 관계인 등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문란하기 때문에, 이를 태블론만의 문제로 돌릴 이유도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모든 면에서 지나치게 전형적이라는 문제도 큽니다. 등장인물들이 너무 비밀을 숨긴 탓에 사건이 커져버린다는 뻔한 전개를 답습하는 탓입니다. 예컨데 지니가 태블론과의 관계만 일찍 밝혔어도 사건은 진작에 해결되었겠지요. 지니가 어머니가 살해된 이후에도 태블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건 설명되지도 않습니다. 어머니보다 태블론을 훨씬 더 사랑했다는걸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 탓도 커요. 

탐정이 들쑤시고 다녀서, 모두에게 지옥문이 열렸다는 결말도 다른 하드보일드 작품들과 차이를 보이지 못합니다. 루 아처가 없었다면, 마텔의 죽음은 블랙 머니를 둘러 싼 악당들의 복수극으로 마무리 되었을 수도 있었을겁니다. 태블론은 10만 달러로 가정의 평화와 불륜을 이어갈 수 있었을테고요. 피터 제이머슨의 의뢰는 마텔의 죽음으로 끝난 상황이라서, 루 아처가 사건에 계속 개입할 명분도 없는데 왜 진실을 밝히지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캐릭터 설정도 진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남자들은 도박과 여자 때문에 파멸하고, 여자들은 자신의 미모 때문에 파멸한다는 이야기는 흔하디 흔하지요. 미모를 제대로 활용한 여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건 조금 독특하기는 했지만요. 또 첫 사랑을 되찾기 위해 온갖 더러운 일을 하며 거액을 모은 뒤 살해당하고 마는 프란시스 마텔은 "위대한 개츠비" 설정과 너무 똑같아서 더 실망스러웠습니다.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에 따르면 하드보일드 범죄 소설은 시대를 반영한다고 하는데, 이 작품만큼은 전통에만 기대고 있을 뿐 변화된 시대에 걸맞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비교적 후기작인데, 확실히 초기작들보다는 많이 처지네요. 코엔 형제가 영화화한다고 몇 년 전 언급했던데, 영화 버젼이 차라리 더 기대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감독이 코엔 형제니 기본 이상은 해 줄거라 확신합니다.

2004/09/01

소름 - 로스 맥도널드 / 강영길 : 별점 4.5점


소름 - 10점 로스 맥도날드 지음, 강영길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사립탐정 루 아처는 갓 결혼한 아내가 실종되었다는 청년 알렉스 킨케이드의 의뢰를 받고 행방불명된 신부 도로시의 행적을 수사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도로시가 피투성이에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며 발견된다. 원인은 친구이자 지도교수였던 헬렌 헤거티의 시체를 발견한 것. 보안관 사무실에서는 도로시를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하게 된다.
아처는 도로시의 실종은 호텔에 방문한 의문의 사나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의문의 사나이 책 베그리의 정체를 추적, 그는 10여년전 어린 소녀였던 도로시 매기의 법정 증언때문에 아내를 죽였다는 혐의로 10여년 복역한 도로시의 아버지 토머스 매기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이 과거의 죽음과 현재의 살인, 그리고 또 다른 제 3의 살인이 서로 관련되어 있으리라 짐작한 아처는 헬렌 해거티와 도로시(달리)가 다녔던 대학의 지도 부장 로이 브래드쇼와 그 어머니 미세스 브래드쇼, 헬렌의 친구 설리 버크와 그 남동생 등 수많은 인물들의 실타래를 풀며 사고로만 알려졌던 과거의 루크 딜로니 사건이 사실은 살인사건이었다는 점과 이 세개의 살인사건의 연관성을 파악하게 된다....

"움직이는 표적"과 "위철리 여자", 단편 "미드나잇 블루" 이후 읽은 루 아처 시리즈입니다. 워낙 평이 좋아서 꼭 읽고 싶었는데 얼마전 알라딘 할인행사로 구입하여 읽게 되었네요.

"주의! 아래 리뷰에는 진범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다수 들어 있습니다!"

이야기 전개는 다른 하드보일드와 거의 다름 없는 형태로 진행됩니다. 우연히 사소한 사건을 맡게 된 사립탐정이 그 사소한 사건에서 파생되는 살인사건을 접하게 되고 그 살인사건이 과거의 다른 사건과 연관됨을 눈치챔으로써 결국 진정한 진상을 깨닫게 된다는 전개인데 다른 하드보일드와 거의 대동소이하죠. (몰타의 매..는 제외할 만 하겠네요) 작품답게 수많은 인물들이 스쳐지나가며 각각의 인물들이 사건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지라 한번에 읽지 않으면 조금 힘들다는 것도 유사하고요.

그러나 루 아처라는 건조하고 관찰력 뛰어난 캐릭터는 그만의 우울함과 고독함을 유별나게 강조한 덕에, 터프함과 마쵸스러움을 과시하면서도 일종의 기사도 정신을 보여주며 시니컬한 유머를 내뱉는 여타 하드보일드 탐정 캐릭터와 확실한 차이가 느껴집니다. 다른 여러 캐릭터들도 굉장히 독특하고 성격들이 강해서 각자의 에너지가 느껴지는 것이 좋았고요. 또한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최소한 알렉스 부부의 행복은 지켜진다는 점도 차이점이라 할 수 있겠네요. 전체적으로 심리학과 시적 정서가 감싸고 있는 듯한 독특한 분위기는 이 작품만의 매력이고요.

이러한 다른 장점들도 많지만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핵심이자 중요한 요소인 사건의 진상, 마지막 3페이지에 걸쳐 나오는 진상이야말로 모든 인물관계와 사건을 깔끔하게 정리해 버릴 뿐더러 다른 하드보일드와 비교하여 이 작품을 비교 우위에 서게 하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이 브래드쇼와 미세스 브래드쇼라는 모자간으로 알았던 둘만의 비밀스러운 결혼 생활과 아내이자 어머니 역이였던 미세스 브래드쇼 (티시)의 상상 이상의 질투와 증오..... 아무도 예상 못했지만 오히려 20여년 동안 관계를 숨겨왔다는 그 비현실성과 부조리 때문에 광적인 한 인간의 잔인성과 비 인간성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가져다 주는 것 같습니다. 정말 생각치 못했던 이 마지막 3페이지 만으로도 이 작품은 추리 역사에 기억될 것입니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은 이 진상 때문에 알렉스가 의뢰를 중도에 잠깐 포기하였을 때 사건을 계속 뒤쫓고 있던 아처가 미세스 브래드쇼에게 대신 사건을 맡아달라고 의뢰하는 장면이 어색해진다는 것입니다. 결말과 연관시켜 보면 아처가 사실 살해당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으로 보여지거든요. 범인에게 "내가 당신 사건을 당신 돈으로 조사하고 싶다"고 말하는 탐정이라니.... 물론 이 전개로 인해 이 부인과 지속적인 연결고리를 가져가게 되는 부분은 있지만 그래봤자 전화 몇 통화 뿐이라 설득력이 약해요.

그러나 단점은 사소할 뿐, 하드보일드 3대 거장 중 한명의 대표작다운 품격과 재미를 갖춘 걸작임에는 분명합니다. 챈들러와 해미트 보다 국내에서의 대중적인 지명도는 어떻게 보면 약하지만 (아마 영화화가 적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네요) 결코 그들에 뒤지지 않는 작품이에요. 동서 추리문고에서 건진 또다른 수확이라 생각되며, 이 대단한 작품을 실버 대거에 머물게 한 해당 년도의 골드 대거 수상작도 꼭 읽어 보고 싶습니다. 별점은 4.5점입니다.

PS : 솔직히 이 마지막 반전은 어떻게 보면 소설이라는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트릭이 아닌가 싶습니다. 미세스 브래드쇼라는 노부인의 외모와 행동을 그 나이와 현실보다도 과장되게 묘사하고 브래드쇼 교수를 보기보다 "젊게" 묘사하며 교수의 생활을 극단적으로 젊음이 가득한 곳으로 설정하여 상대적으로 그 차이를 보다 심하게 독자가 느낄 수 있게 한 고도의 트릭이거든요.

2017/09/03

미스테리아 13호 - 미스테리아 편집부 : 별점 2.5점

미스테리아 13호 - 6점
미스테리아 편집부 지음/엘릭시르

미스테리 장르문학 전문잡지 미스테리아 최신간입니다. 창간 2주년 기념호라 그런지 특별 보급가이기도 하고, 항상 관심있게 찾아보던 주제인 "경성"을 특집으로 하고 있어서 구입했습니다.

특집인 "경성" 관련 기사들은 기대에 값합니다. 1930년대 경성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장르 문학'과 관련된 시각으로 설명해주는데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았던 덕분입니다. "별건곤"에 실렸다는 경성 7대 특수촌이나 5대 마굴에 대한 탐사기는 충분히 하나의 작품 소재가 될 만큼 재미있었어요.
경성을 탐정 소설의 배경으로 바라보고 분석한 기사들도 좋았습니다. 예를 들면 "염마"에 등장하는 서광옥의 X별장은 "체신국 뒤로 해서 개천을 메워가지고 새로 낸 큰길을 단 후 누상동 큰거리에서 언덕 위에 지은 큰집을 찾았다"라는 묘사를 통해 '아방궁'이라 불렸던 친일파 윤덕영의 저택을 모델로 했다고 알려주는 식입니다.
여기에 더해 남촌과 북촌의 특수성과 같은 사회적인 부분, 아편굴과 같은 특수 장소와 같은 당대 경성에 대한 갖가지 디테일이 가득하여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박태원의 "최후의 억만장자"는 예전에 읽어봤던 작품으로 내용은 별 볼일 없지만, 삽화를 맡았던 월북 화가 정현웅의 그림은 마음에 들었어요. 목판화 스타일의 삽화는 지금 보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는 수준의 완성도니까요.

물론 이런저런 한국 추리 소설 역사서에 실려있는 내용에서 불과한 기사들도 제법 됩니다. 김동인의 "수평선을 넘어서"에 대한 기사가 대표적이에요. 얼마전 읽었던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3 : 추리물"에 수록된 내용과 별로 다르지 않아요. 주제에 맞춰 "경성"이라는 공간, 배경에 집중하지 않고, 당시 사회적 배경을 통틀어 설명하고 있는 탓입니다. 이렇게 풀어내면 다른 유사한 컨텐츠와 변별력을 가지기 힘들지요.

그러나 특집 외의 기사들은 기대 이하의 결과물이 많습니다. 홍보 문구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는, 그래픽 디자이너 8인에게 가상 표지를 제안했다는 "세상에 아직 없던 책"은 그 중에서도 최악입니다. 박철희의 "환상의 여인" 정도만 괜찮을 뿐, 그외 표지들은 실제 책이 출간되더라도 구매 욕구가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에요. 요새 대학생들 과제도 이것보다는 나을 듯 한데, 차라리 왠만한 미술 대학 디자인 학과와 연계하여 결과물을 수록하는게 좋았을 겁니다.

"미스테리아"의 핵심 컨텐츠인 리뷰 형태의 새 책 소개도 이번에는 그냥저냥입니다. 그닥 끌리는 책이 없더군요. 게다가 리뷰어 중 한 분은 직업이 "인형사, 자유기고가"라고 되어 있어서, 대체 이 리뷰가 무슨 기준인지도 헛갈립니다. 꼭 전문가가 좋은 리뷰를 쓴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볼 수 있는 컨텐츠가 아니라, 비용을 들여 구입한 책의 리뷰라면 그만큼의 전문성은 보장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미스터리 애호가라면 최소한 인터넷을 통해 잘 알려진 분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잠깐 인터넷을 찾아보았는데 당쵀 뭐하시는 분인지 모르겠더군요. 이 분이 소개하는 기타무라 가오루, 요네자와 호노부의 작품들도 구태여 리뷰가 필요한지도 의문입니다(심지어 요네자와 호노부 작품은 '소시민'시리즈 최신간!). 이 잡지를 구해 읽어볼 정도의 독자라면, 이 두 작품은 딱히 리뷰가 필요없을테니까요. 새책 소개는 다른 곳에서는 잘 소개되지 않는 독특한 작품을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입니다.

뒤 이은 영화 "불한당"의 감독 인터뷰 역시 개인적으로는 별로였습니다. 감독이 SNS를 통해 실수했던 이력만 기억에 남을 뿐으로 이런 인물을 지면을 할애해가며 인터뷰를 한 이유를 모르겠거든요. "불한당"이 국내 범죄, 느와르 영화에서 특기할 만한 성취를 이룬 작품이라서 일까요?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별로 그랬을 것 같지도 않네요.

특집 외 기사들 중에서는 미스테리 속 음식에 대해 파헤치는 정은지 작가의 컬럼과 3편의 논픽션 정도만이 그나마 괜찮은 편입니다. 정은지의 컬럼에는 국내에는 소개된 적이 없는 형사 몬탈바노 시리즈를 소개하며, 작 중 등장하는 다양한 이탈리아 요리들의 소개가 곁들여지고 있는데 재미도 있고 신선했습니다. 제가 준비 중인 '장르 문학 속 음식 이야기'라는 컬럼과 비교되어 자극도 되었고요.
3편의 논픽션은 법의학자가 분석한 평범한 일상 속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미국에서 화제가 되었던 살인 매뉴얼, 한강변에서 발견된 시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중 마지막 이야기가 가장 강렬합니다. 범인을 조작하려는 경찰의 노력에, 무고한 용의자가 겨우 혐의를 벗는 과정, 그리고 결국 미제 사건으로 범인은 커녕 피해자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라는 결말까지 모두 충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3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역시 이전 호들과는 다르게 수준 이하의 작품이 더 많네요. 우선 로스 맥도널드의 "사라진 여인"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루 아처 시리즈라는 점을 제외하면 특기할 만한 점이 전무한 소품입니다. 루 아처가 묶은 모텔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루 아처가 진상을 파헤친다는 내용인데 루 아처가 하나씩 손에 넣은 단서를 되짚어가면 진상이 드러나는 전개라 추리의 여지도 없고 이야기도 원사이드하게 흘러갑니다. 선택지가 하나 뿐인 미션을 수행하는 느낌이랄까요? 딱히 반전이 있는 진상도 아니고요. 이 정도면 평범 이하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국내작가 차무진의 "비형도"는 전개는 흥미로우나 좋은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런 단서나 복선도 없이 귀신들 사이에 어울린다는 결말이 영 납득이 되지 않거든요. 물론 조상병이 살의를 품은 순간, 그 장소에 있던 귀신들 속으로 들어가 귀신들의 역할극이 벌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되기는 합니다만... 개연성도 없는 역할극이 전체 분량의 90%에 달하는 작품을 좋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죠. 생각한대로 현실이 바뀌는 "열린 우주"라는 핵심 설정 및 이를 통해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은 아주 재미있었는데 아쉽네요. 하기사 좋았던 부분들도 여러모로 애매하긴 합니다. 사건의 시작은 학예사의 뿔테 안경이 아니라 "껌"이었어야 할 것 같고, 학예사가 목을 메다는 장면은 이게 뭔가 싶으니까요. 여튼, 이 역시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래도 피터 러브시의 "오이스터 브라운이 저지른 범죄"는 아주 괜찮습니다. 펄, 오이스터 자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 트리거의 의심을 독자에게 공유하게 만드는 전개는 정말로 일품이에요. 분명 언니가 사라졌는데 애써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오이스터의 행동의 이유는? 평생 써도 다 쓰지 못할 퇴비화 속도가 빨라지는 발효 촉진제를 산 이유는? 집에 아무도 들이지 않는 이유는? 이런 질문들은 가장 설득력 있는 추리, 즉 "펄은 죽었고 오이스터가 그녀를 자체적으로 처리하려 한다"로 이어지니까요.
하지만 진상은 정말로 터무니없었고 황당하다는 점에서 독자의 뒷통수를 칩니다. 거장다운 장난스러운, 그렇지만 또 서늘한 결말도 매력적이에요. 트리거가 어디로 갔는지 정말 아무도 몰랐을지, 그리고 트리거의 차가 집 앞에 있으므로 완벽한 인멸은 불가능 했으리라는 점에서 조금 감점하여 별점은 3.5점입니다만, 거장의 실력만큼은 유감없이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렇듯 다양한 기사, 읽을 거리로 가득차 있는데 특집과 정말로 몇 안되는 기사, 한 편의 단편만이 기대에 값하기에 전체 별점은 2.5점입니다. 가격이 저렴하지 않았다면 2점 이상 주기는 힘들었을거에요. 식민지 경성, 그리고 그 공간을 무대로 한 장르 문학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읽어보셔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딱히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2015/09/03

소름 - 로스 맥도널드 / 김명남 : 별점 4점

소름 - 8점
로스 맥도날드 지음, 김명남 옮김/엘릭시르

"소름" - 로스 맥도널드 / 강영길 : 별점 4.5점

하드보일드 삼대장의 한 명인 로스 맥도널드의 걸작입니다. 이미 십년도 더 전에 동서문화사 동서추리문고 출간본으로 읽어보았지만, 이번에 엘릭시르에서 재출간되었기에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도 별점 4.5점을 주었는데, 다시 읽어도 흥미롭더군요. 확실히 걸작은 걸작이에요. 범인과 진상을 알고 읽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색다른 재미가 느껴졌습니다. 루 아처가 단서를 하나씩 짚어나가며 20년 전과 10년 전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는 수사가 마지막에 어떻게 범인으로 연결되는지 더 집중하며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읽는 터라 단점도 제법 눈에 띄었습니다. 우선 범인이 피해자들에게 경고 전화를 하고 방문해 살해한다는 설정이 그렇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행위인데, 정작 이유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헬렌과 로라 서덜랜드에게만 한 것도 이상해요. 콘스탄스에게는 왜 하지 않았을까요? 모든 것이 드러난 상황이라 체포되기 딱 좋은 마지막 순간에 굳이 "내가 너 죽이러 갈게"라고 전화를 한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전화를 제외하더라도 범행이 지나치게 운에 의지한 부분이 많다는 약점도 있습니다. 헬렌 사건만 해도 루 아처가 그곳에 남아있지 않았던 건 우연이고, 저드슨 폴리가 조금만 빨리 방문했어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요.

또한 범인 티시가 로라 서덜랜드를 어느 시점에서든 살해했다면 사건은 사실상 거기서 끝입니다. 헬렌이 살아있었다면 진상을 폭로했을 것이고, 먼저 죽었다 하더라도 티시가 빠져나가기는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경찰 수사가 제대로 시작되면 로라 서덜랜드 살인 동기는 브래드쇼 부인에게 있다는 점이 밝혀졌을 테니 이야기는 끝이죠. 주요 용의자인 돌리, 맥기 모두 구류 상태였으니까요. 헬렌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맥기를 범인으로 몰기는 어려웠고, 아처가 수사기관에 저드슨에 대한 정보만 제공했어도 그를 옭아매어 헬렌이 누군가를 협박했음을 끌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여간, 사립탐정들은 공권력의 적이에요.
하여튼, 이런 이유들로 인하여 아처가 티시의 정체를 깨닫는 반전의 힘은 강하지만, 사건 해결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이미 사건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요.

그 외에도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묘사나 설정이 분량을 제법 차지하는 점이 아쉽습니다. 예를 들어 헬렌이 창녀와 다름없었다는 증언이 대표적입니다. 과거 사건으로 아버지에게 심한 말을 한 것도 그때뿐이었고, 결국 그녀가 로이 브래드쇼 협박범이 되었다는 점은 씁쓸합니다. 팜므파탈도 아니고 피해자도 아닌 어정쩡한 포지션으로 캐릭터가 애매해지고 말았어요. 차라리 돌리처럼 어린 시절 겪었던 덜로니 사건의 트라우마를 간직한 인물로 설정하는 편이 더 좋았을겁니다.

마지막으로 덜로니 부인이 동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산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로이 브래드쇼의 재산은 결국 부인의 재산이고, 합리적으로 재산이 이동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흔적이 있었을 텐데 이를 전혀 모를 수는 없지요. 또 사건을 덮기 위해 능력을 동원한 덜로니 부인이 동생 티시의 사망증명서를 미리 떼어놓은 것도 이해하기 어려워요. 덜로니 사건은 자살로 종결되었으니 조작할 이유가 없고, 오히려 사망증명서는 재혼을 계획하는 로이 브래드쇼에게만 좋은 일이었으니까요.

이렇게 쓰다 보니 단점만 잔뜩 언급하게 되었지만, 걸작인 것은 분명합니다. 서정적이면서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 많다는 점에서는 독보적입니다. 맥기를 감옥의 무게에 짓눌린 성자로 묘사한다든가, 협박범에 불과한 헬렌에 대해 가엾음을 느끼는 아처의 모습이 대표적입니다. 남자는 첫 결혼에 신중해야 하고, 여자가 더 빨리 늙는다는 교훈을 마음 깊이 새기게 해주는 것도 좋았습니다. 단지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는 정도입니다.

언제 읽어도 여전한 흥분과 재미를 주는, 제 All-time best 10에 늘 포함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 아직 읽지 않으신 분은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번역도 좋습니다.

2014/01/20

몰타의 매 - 대실 해밋 / 김우열 : 별점 4점

몰타의 매 - 8점
대실 해밋 지음, 고정아 옮김/열린책들

샘 스페이드의 탐정 사무소로 원덜리라는 이름의 젊은 여성이 찾아온다. 자신의 어린 여동생이 서스비라는 남자와 도주했기 때문에, 서스비를 찾아내 여동생을 되찾고 싶다는 의뢰였다. 동료 탐정인 아처가 의뢰를 맡고 서스비를 미행하지만, 밤사이 변사체로 발견된다. 더군다나 그가 미행하던 서스비까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상황. 경찰은 용의자로 스페이드를 지목하고, 그는 자신의 혐의를 벗기 위해 사건을 추적해 나간다. (책소개에서 인용) 

대실 해밋의 샘 스페이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고전 하드보일드 추리 장편. 1930년 발표되어, 하드보일드의 전형을 구축한 작품입니다.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 읽어도 충분한 가치와 재미를 갖추고 있다는게 놀랍습니다. 지니고 있는 명성이 쉽게 이해가 될 정도에요.

이 작품의 가장 큰 가치는 뭐니뭐니해도 시대를 앞서간 주인공 샘 스페이드입니다. 마초이자 상남자에다가 나쁜 남자이기까지 하거든요. 파트너의 아내를 유혹해서 불륜을 저지르고, 쿨함이라고는 전혀없는 돈귀신으로 도움을 얻으려고 찾아온 여자에게서도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500달러를 악착같이 받아냅니다. 거기에 더해 총으로 위협하는 악당들도 맨손으로 제압하는 완력, 경찰에게도 굴하지 않고 농담과 비야냥으로 받아치는 반골정신도 겸한, 그야말로 안티 히어로의 표본같은 인물이에요. 샘 스페이드를 설명하는 묘사도 탁월합니다. 얼굴에 여러개의 V가 표시된다는 첫 등장 시의 묘사부터 독자를 사로잡지요.
등장 이후 단 한번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팜므파탈 오쇼네시 역시 추리 소설사에 길이 남을 악녀로, 스페이드와 함께 완벽한 컴비플레이를 보여줍니다. 

역사적 유물인 "몰타의 매"을 소재로 녹여낸 참신함, 그리고 "몰타의 매"를 찾는 보물찾기라는 내용은 이후의 하드보일드 작품에서 보기 드물었기에 오히려 돋보입니다. 몰타의 매의 유래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부분은 나름 그럴듯 하기도 했고요. 

다른 하드보일드 작품들 같이 명대사가 난무하는, 그런 문학적 향취는 별로 없지만 깔끔하고 간결한 문장도 인상적입니다. 이야기 중간에 스페이드가 이야기한 일화 - 한 사내가 우연히 죽을뻔한 뒤 아예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종적을 감춘다 - 는 뭔가 울림을 전해주기까지 합니다.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될만한 내공은 확실히 느껴졌어요. 

하지만 추리소설이라고 부르기는 좀 애매하다는건 단점입니다. 하드보일드 추리물이 별다른 트릭이 없는 장르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은 트릭이고 뭐고 정말 전혀 없는 탓입니다. 유일한 수수께끼는 서스비가 매 조각상을 어디에 감추었는지? 뿐인데, 이건 오쇼네시의 뒤를 쫓는다면 충분히 찾아낼 수 있다고 설명되기 때문에 스페이드가 활약할 여지가 없어요. 실제로 거트먼과 카이로는 스페이드의 도움 없이 매가 있는 곳을 찾아내는데 성공했지요. 

전개도 속도감있고 빨라 독자를 몰입시키지만, 세세한 부분에서의 설득력은 부족합니다. 카이로가 스페이드를 찾아온 이유, 거트먼이 스페이드를 고용하려는 이유 등 스페이드가 사건에 엮이는 과정 모두가 그러합니다. 오쇼네시가 스페이드를 고용했더라도, 생판 관계없는 사람을 끌어들이느니 위에서 이야기한대로 그녀를 미행만 해도 충분했을테니까요. 하긴 오쇼네시가 서스비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스페이드를 끌어들인것 부터 설득력이 없으니... 아처를 쏴버린 것처럼 그녀 스스로 서스비를 쏴버리는게 제일 깔끔했을텐데 왜 이렇게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었을까요? 어차피 경찰도 그녀의 존재는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서스비가 과거 도박조직에 연루된 원한으로 살해된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는데 말이죠.
마지막에 스페이드가 경찰에 오쇼네시를 넘기는 것도 잘 이해가 안됐습니다. 스페이드가 그녀를 넘기지 않으면 바로 체포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희생양은 거트먼 일당으로 충분했을것 같은데, 한명 죽이나 두명 죽이나.... 

그래도 결론적으로는 추천작. 단점은 조금 있으나 사소할 뿐 이 바닥의 영원한 고전, 원전으로서의 가치와 재미를 유지하고 있는 보기드문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아직 읽지 못하신 모든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덧 1 : 오쇼네시에게 교수대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전기의자를 쓰지 않았었나요? 이 당시 하드보일드에서 흔히 이야기되는건 "싱싱 (형무소)"과 "전기의자" 인데 이 작품은 예외적이라 의아했습니다.

덧 2 : 샘 스페이드의 파트너가 마일스 "아처"라는 것이 좀 특이했습니다. 하드보일드 3대 탐정 중 한명인 "루 아처"가 바로 떠올랐기 때문이에요. 묘한 인연인데 로스 맥도널드가 루 아처 창작 시 이 점을 염두에 두었는지 좀 궁금하네요.

2005/03/20

리틀 시스터 - 레이먼드 챈들러 / 박현주 : 별점 2점

리틀 시스터 - 4점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북하우스

필립 말로는 캔자스시티 출신의 소녀 오파메이 퀘스트로부터 소식이 두절된 자기 오빠 오린을 찾아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하루 경비는 20달러. 호기심과 동정심에 사건을 맡은말로는 오빠가 살고 있었다는 베이시티의 하숙집을 찾아갔지만, 하숙집에는 까닭모를 범죄의 냄새가 가득했고 하숙집 관리인조차 얼음송곳에 찔린 시체로 발견되었다.

돌아온 말로에게 중요한 물건을 맡아달라는 의뢰 전화가 걸려왔고, 호텔로 찾아간 말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의뢰인의 시체였다. 그는 베이시티 하숙집의 오린의 방에서 보았던 인물로, 말로는 순간의 기지를 발휘하여 시체에서 "물건"을 입수하는데 성공했다.
말로는 입수한 전표에서 얻은 사진으로 사진에 찍힌 인물이 경찰이 추적하고 있는 거물갱 위피 모이어라는 사실, 그리고 그의 범행을 증명하는 유일한 단서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는 사진에 같이 찍혀있던 위피의 애인인 헐리우드 여배우 메이비스 웰드에게 수사를 집중하여, 점차 갱단과 연예계에 걸친 커넥션을 밝혀나가는데...

6번째로 읽은 필립 말로 시리즈 장편입니다. 작가가 헐리우드의 각본가 생활 이후 내 놓은 후기작이죠. 헐리우드 경험때문인지 연예계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디테일한 것이 제일 먼저 눈에 띕니다. 챈들러라는 작가가 느낀 헐리우드에 대한 복잡미묘한 감정(주로 경멸과 혐오겠지만요)이 잘 투영된 어떻게 보면 자전적인 소설이랄까요?

당시 미국의 꼬여버린 가족사나 인간의 잔인성을 표현하는 것은 루 아처를, 헐리우드를 무대로 하여 갱들과 경찰들을 묘사한 부분은 제임스 옐로이를 닮았지만 챈들러는 역시 이 바닥의 왕고참답게 자신만의 방법으로 작품의 레벨을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파메이 퀘스트를 비롯해서 헐리우드 여배우인 메이비스 웰드와 곤잘레스 양이라는 여성을 3명이나 등장시키고 각자에게 확실한 역할을 줌으로서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는 점이 이전과는 좀 다르더군요. 무엇보다 작가의 애증이 교차하는 중요 인물인 헐리우드 스타 여배우 메이비스가 그나마 가장 괜찮고 믿을만한, 실제로 사랑에 빠지기 직전의 여인이었으며 가장 범죄와 거리가 멀어보이던 소녀 오파메이 퀘스트가 사악한 존재였다는 반전은 놀라왔어요. 마지막에 말로의 독설과 시니컬한 유머를 뒤섞어 사건을 정리하는 부분도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상당히 부실합니다. 일단 오파메이 퀘스트가 사건을 의뢰하는 이유조차 타당성이 약해요. 또한 가장 중요한 단서인 사진에 찍힌 인물이 위피 모이어라는 것에 대해서 그 어떠한 정황증거도 내놓지 못하고 있고요. 또한 각 살인사건 (총 4건이나 발생하죠)의 범인들이 각각 누구인지조차 한번 읽었을때는 명확하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고 있지 못합니다. 등장인물도 상당히 많은 편이지만 우연과 추정으로 얽힌 관계들이 많아서 이야기만 복잡해진 느낌이에요. 단적인 예로 대체 라가르디 박사라는 인물은 왜 나오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무엇보다 사건들의 인과관계가 우연으로 이루어지고 말로는 "사건을 부르는" 역할만 담당할 뿐 변변한 활약 자체를 보여주지도 못하는 점이 가장 아쉬운 부분입니다. 흡사 코난의 모리탐정 같아요. 사건만 맡으면 살인사건이 발생한다는 점이...

결론내리자면 챈들러의 장편은 이제 거의 다 접해보았으나 이 작품은 솔직히 그간의 시리즈중에서는 최악이었습니다. 내용면으로나 추리적으로나 수긍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거든요. 말로 시리즈 중에서는 가장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에 한번 읽어볼 가치는 충분하나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번역되어 나온 것 만으로도 감사한 일이겠지만...

PS 1: 책 뒷부분의 해설이 참 마음에 듭니다. 책의 소제에 걸맞게 헐리우드에서의 챈들러를 주로 다루고 있는데 재미도 있고 상세한 설명이 무척 좋더군요.

PS 2 : 해설에서 다루는 이 책의 게임판이라는 "Private Eye"라는 게임은 국내에도 한글화 되어 정식 발매된 적이 있어서 그 당시 해봤었는데 그 당시 감상 역시 "무슨 내용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였죠. 소설을 읽고 나니 한번 더 구해서 해보고 싶어지기는 하는군요.

2007/07/22

주정꾼 탐정 - 에반 헌터 / 김병선 (자유추리문고 50) : 별점 3점

드디어 어렵사리 구하게 된 자유추리문고의 "주정꾼 탐정" 입니다. 정말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네요.

작품의 작가 에반 헌터는 "87분서" 시리즈의 작가 "에드 멕베인"입니다. 에드 멕베인은 거장이기는 하지만 워낙 다작인 탓에 실망스러웠던 것도 제법 있었죠. 특히 후반기 작품들은 많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이 작품은 작가의 초기작으로 당시 유행의 끝자락이던 초기 하드보일드 정서를 제대로 전해주는 것과 동시에 정통 본격 추리물스러운 점이 많아서 마음에 들더군요. 서정적인 문체와 묘사도 아주 인상적이었고요. 하드보일드계의 서정시인 로스 맥도널드가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주정꾼 탐정인 주인공 커트 캐넌의 캐릭터가 무척 독특한데 알콜중독 룸펜 탐정으로 "800만가지 죽는 방법"의 매튜 스커더의 형님뻘로 로렌스 블록이 많은 부분 영향을 받아서 매튜 스커더를 창조한 것은 확실합니다 . 탐정 면허증도 없는 알콜중독자로 심리 묘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유사한 수준을 넘어서니까요. 개인적으로는 과거의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는 매튜 스커더보다는 바람난 아내를 응징하려다가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커트 캐넌이 더 설득력있게 다가왔습니다. 역시 아류가 원조를 뛰어넘기는 힘든 법이에요.

그러나 8편의 단편이 다 추리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지는 않을 뿐더러 작품별 편차도 좀 있고, 작가의 히트작인 "87분서" 시리즈와 유사한 스토리, 분위기가 반복된다는 것은 단점이기는 합니다. 특히 몇몇 작품의 세부 묘사는 굉장히 비슷하더라고요. "대중소설" 작가인 에드 멕베인이기 때문인지 거의 모든 편에서 처음 만난 여성과의 정사가 그려지는 등의 통속적 요소도 거슬리는 점이었고요.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기다렸던 만큼, 기대했던 만큼의 재미를 전해주기에 무척 즐겁게 읽었습니다. 명작이나 걸작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할 수 있지만 추리소설 황금기 막차(?)의 느낌은 잘 전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8편의 단편 중 개인적인 추천작은 "다시 만남"으로 추리적인 요소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제일 마음에 들더군요. "주정꾼 탐정" 으로서의 캐릭터가 가장 잘 살아있는 다른 추천작이라면 "나도 산타클로스"를 꼽겠습니다.

1. 떠나지 않는 유령 (Die Hard) 

커트 캐넌은 한 남자로부터 마약중독에 빠진 자기 아들을 구해달라는 의뢰를 받지만 거절했다. 그러나 남자가 자기 눈 앞에서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한 뒤, 사건 수사에 뛰어든다.

아마 커트 캐넌 시리즈 제 1작이겠죠? 뉴욕 뒷골목의 묘사와 인물 묘사가 일품이긴 한데 범인이 너무 쉽게 드러나는 약점이 있더군요.

2. 죽은 사람의 꿈 (Dead Men Don't Dream)

소꼽친구 찰리의 장례식에 참석한 커트 캐넌은 다른 친구들로부터 그 지역 건달들에게 상납금을 내지 않아 찰리가 살해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건달 소탕에 나선다. 

하드보일드 액션물로 커트 캐넌이 동네 건달들과 한판 벌이는 내용이 전부입니다. 전체적으로는 마이크 해머스러운 느낌으로 추리적으로 특기할 것은 없네요.

3. 프레디는 그곳에 (Now Die in It)

지인 루디가 처제 베티의 임신 사실을 고백하며 상대 남자가 누구인지 밝혀줄 것을 의뢰한다.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베티가 살해당한 뒤 사건 수사에 나서게 되는데...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추리물로 룸펜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수사가 어떤 것인지를 잘 묘사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루 아처 시리즈 단편과 꽤 유사한 느낌을 받기도 했는데 범인이 누구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는 단점은 있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4. 착한이와 죽은이 (Good and Dead) 

룸펜 친구 조이가 살해당한 뒤 커트는 그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어서 살해당한 것이라는 중국인 칭크의 말을 듣고 관련 인물 조사에 나선다. 

한여름 더위의 묘사가 탁월합니다. 역시 "경관혐오"의 작가 답다는 느낌이 물씬 나더군요. 추리적으로는 별다를게 없고 관련 사건의 연결고리가 너무 쉽게 드러나는 단점때문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지만 묘사가 정말 좋아서 읽는 재미 만큼은 끝내줬습니다.

5. 나의 죽음 (The Death of Me) 

커트 캐넌은 신문에서 그가 죽었다는 기사를 읽은 뒤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나선다.

커트 캐넌이 드디어 노숙자 신세로 전락한 시즌의 이야기로 내용은 갱들의 세력 다툼이 대부분이라 추리적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팜므파탈, 갱, 킬러 등 하드보일드 액션물의 모든 요소가 등장해서 스케일이나 캐릭터에서 영화적인 느낌을 많이 전해주기는 하는데 뭔가 좀 어수선했고요. 아무래도 단편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소재가 아니었나 싶네요.

6. 나도 산타클로스 (Deadier Than the Mail) 

커트 캐넌은 유년시절 친구 키트 오드닐의 부탁으로 생활보호 대상자들의 복지수표 도난 사건 수사에 착수한다.

영문 원제가 너무 범인을 뚜렷이 암시하고 있으며 범행이 우발적이고 좀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추리적으로 문제점은 많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와 묘사가 마음에 들은 작품입니다. 무엇보다도 맹점을 찌르는 맛이 좋아서 추천하고 싶네요.

7. 다시 만남 (Return) 

커트 캐넌에게 헤어진 옛 아내 토니가 다시 찾아와 새출발 할 것을 약속하고 그에 고무된 커트 캐넌은 부랑자 룸펜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탐정일을 제대로 시작할 것을 결심한다. 

커트 캐넌 시리즈의 핵심 인물인 전처 토니가 주연급으로 등장하는 작품으로 정통 하드보일드적인 냄새도 나면서도 여러가지 곁가지 설정들이 양념처럼 재미를 더하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재미도 재미지만 커트 캐넌의 심리 묘사가 특출나다는 것도 인상적이었고요. 범인의 공작이 너무 얄팍하지 않나 싶은 생각은 들지만 (예를 들자면 저같으면 확실한 알리바이 공작을 하고 있었겠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개인적인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8. 거리에 내리는 주먹비 (The Beating) 

룸펜들을 노리는 테러가 연달아 발생하고 결국 한명이 살해당하게 된다. 경찰 수사를 믿지 못하는 커트 캐넌은 스스로 미끼가 되어 밤거리를 배회하기 시작하는데... 

역시나 여름 묘사가 발군인 단편으로 진상이 밝혀지기까지의 조사과정이 허술할 뿐더러 단서없이 함정수사(?)로 범인을 잡는 결말이라 조금 시시했어요. 커트 캐넌과 부랑자 이웃간의 애정이랄까... 하는 감정만큼은 독특하긴 했으나 그냥저냥한 평작으로 생각됩니다.

2005/01/11

호수의 여인 - 레이몬드 챈들러 / 박현주 : 별점 4점

호수의 여인 - 8점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북하우스

사립탐정 필립 말로는 자신만만하고 거친 사업가 드레이스 킹슬리로부터 바람난 자신의 아내 크리스탈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말로는 크리스탈의 애인 크리스를 찾아가나 별 소득을 얻지 못하고, 크리스의 바로 앞집에 살고 있는 의사 알모어의 신고로 경찰 드가르모 경위를 만나게 된다.
이후 크리스탈이 마지막에 있었던 리틀 폰 레이크의 산장에서 산장 관리인 빌 체스의 아내가 크리스탈과 비슷한 시기에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되나 그녀의 시체를 발견하고, 다시 찾아간 크리스가 살해당한 것도 확인한 후 경찰에게 크리스탈 킹슬리가 유력한 용의자라는 것, 기타 사건에 관계된 모든 사실을 알린다.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된 크리스탈로부터 도피자금 요청이 오자 말로는 어쩔 수 없이 메신저 역할을 떠맡았다가 그녀의 죽음까지 목격하게 되는데...

국내에 출간되고 있는 레이몬드 챈들러 시리즈 전집의 한권으로 4번째 장편입니다.

이 소설은 그간의 챈들러 소설과는 약간 다른 분위기로 전개되고 있어서 독특했습니다. 조금 더 유머와 서정성이 짙어진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작품으로 각종 배경과 그림, 디테일에 대한 묘사가 대단합니다. 책 뒤의 해설처럼 로스 맥도널드의 "루 아처" 시리즈가 연상되는, 조금 이색적인 느낌이었어요. 이전 작품들 보다 구구절절 복잡한 묘사가 왠지 많아진것 같다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묘사들이 단순한 수준에 머물지 않고 작품을 보다 재밌게 해 주는 감초역할과 복선 역할을 충분히 해 줌으로써 전체적인 수준을 높인다는 점에서 과연 거장은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들게도 만들고요.
이야기 전개는 일관되지만 우직하게, 그리고 결정적 트릭을 항상 품고있다가 여러 복선을 통해 한방에 터트리는 전형적인 챈들러풍으로 역시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나 그간 보아왔던 작품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악녀",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팜므-파탈이 등장하여 저를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캐릭터가 지닌 매력에 비해 등장횟수나 분량이 적어서 안타깝긴 했습니다만....
추리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트릭이 초반에 등장하지만 여러 복잡한 세부묘사와 관계 설정으로 눈에 띄지 않게 잘 가리고 있어서 좋더군요. 간단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효과적으로 속임으로써 막판 반전에 효과적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번역도 읽기도 편했고 내용도 잘 이어지는 편입니다. 국내에 나온 챈들러 작품들 중에서는 번역쪽으로는 가장 우수한 편이라 생각될 정도로 말이죠. 특히 책 끝의 해설이 굉장히 친절하고 자세하여 마음에 들었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4점. 역시나 거장은 거장다웠어요. 대표작에 비하면 잘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PS : 예전 한창 영화에 관심이 많을때 읽던 서적들에서 인용되었던 영화사상 전무후무한 "1인칭 시점" 영화 "호수의 여인"이 바로 이 작품이라는 사실을 책 후반 해설에서 알게되어 더욱 반갑더군요^^

2016/07/13

사냥개 탐정 - 이나미 이쓰라 / 신정원 : 별점 3점

사냥개 탐정 - 6점
이나미 이쓰라 지음, 신정원 옮김/손안의책

"세인트 메리의 리본"에 이어 읽은 사냥개 탐정 류몬 다쿠 단편집으로 총 4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크게 보면 "세인트 메리의 리본"에서의 감상과 동일합니다. 추리적으로는 약하지만 진짜 사나이의 이야기가 엄청나게 멋드러지게 펼쳐진다는 점에서요. 허나 시리즈로 묶여 나온 덕분에, 이 작품만의 매력이 보다 강하게 느껴지는게 좋았습니다.

우선 작품의 핵심인 류몬 다쿠가 정말 멋지게 등장합니다. 하드보일드를 표방했다고는 하지만 전형적인 마초는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샘 스페이드나 필립 말로우 등은 남보다 "자기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런 인물들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었겠지만요. 이를 잘 이어받은게 "불야성"의 류젠이일 테고요.
그러나 류몬 다쿠는 다릅니다. 거친 터프가이로 목적을 가로막는 악당들을 파괴하는 강한 겉모습은 고전 하드보일드와 유사하나, 약한 존재에 대한 연민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로스 맥도널드의 루 아처가 떠올랐어요.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전형적인 서부 영화의 주인공 캐릭터인 셈입니다. 정의와 지켜야 할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열악한 환경에서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하는, 그러면서도 여성과 아이들에게 한없이 따뜻한 진짜 남자들이요. "셰인"이나 "하이 눈"에서 처럼요. 현 시점에서는 너무 낡아빠진 설정일 수도 있지만, 저는 이런 캐릭터들이 너무나 좋습니다!
작가도 이를 인지했는지는 몰라도 서부 영화의 악당들과 비슷한 악역이 눈에 띄기도 합니다. "수르랑, 따라랑", "사이드킥" 두 편이 그러한데, 자비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마초 목장주 악당은 작중 언급된 대로 OK 목장의 악당이 떠오를 정도예요.

추리적으로도 내세울 부분은 많지 않지만 전작보다는 사건성 높은 이야기들이 등장하며, 현실적인 탐정의 활약도 그럴싸하게 그려지기 때문에 그런대로 만족할 만 합니다. "악역과 비둘기"에서 도시를 관통하는 하천의 존재에서는 나름 추리의 묘미가 느껴지기도 했고요.

작품을 뒷받침하는 섬세한 묘사도 대단한 수준입니다. 류몬 다쿠의 생활 하나하나를 드러내는 디테일한 묘사들 — 사냥, 식사, 대화, 독서 등등등 — 하나하나가 모두 그러합니다. 사냥 이야기에서 새의 내장을 빼는 묘사는 "산적 다이어리"에서 보았던 것인데 정말 생생하게 묘사해서 만화보다도 더 뇌리에 박히는 느낌이에요. 덕분에 가공의 인물이 실존하는게 아닌가 착각이 들게 만드네요.

하지만 단점도 없지는 않아서, 낭만적인 분위기와 고전 서부극 분위기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습니다. "기타와 사냥개"에서 의뢰인의 개를 잠깐 돌봐주는 길거리 가수 다마미즈의 가족 이야기, "악역과 비둘기"에서 스트리트 파이터 덴도의 시노부를 향한 애틋한 연심과 안타까운 결말도 감정 과잉으로 보이고요.

쓸데없는 액션이 많은 것도 조금 아쉽습니다. "기타와 사냥개"에서 취객들을 제압하는 것 처럼요. "사이드킥" 앞부분에서 쓸데없이 야쿠자와 엮이는 전개도 불필요했으며, 중간에 다바타와 실버 고스트가 폭주족에게 쫓기는데 우연히 동승했던 학생이 신호총으로 오토바이를 날려버린다는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소소한 액션의 연속으로 마지막에 류몬이 스가이의 사주를 받은 야쿠자를 날려버리는 멋진 액션이 빛이 바래 버립니다. 딱 한 번만 임팩트 있게 보여주는 것이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재미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한 편, 한 편만 놓고 볼 때는 최고라 하기 어렵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도 마음에 들고 진짜 사나이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게 좋았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진짜 사나이의 묵직하면서도 서정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덧 1: 나리타 공항 건설 반대 운동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1970년대를 무대로 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시대가 중요한 작품은 아니지만 발표 시기는 1990년대인데 의외네요.

덧 2: 류몬 다쿠는 3만 5천 평의 대지주이지만 현금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허나 개 한 마리 찾아주는 대가가 50만 엔이라는 거액이라 잘 와닿지는 않더군요. 지금도 거액인데 1970년대에는 더 큰 돈이었겠죠. 게다가 모든 작품에서 보수를 받는 데 성공하는데 이게 1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면, 먹고사는 데 정말 문제없는 수준일 테고 말이죠. 있는 놈이 더한 느낌이랄까...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수르랑, 따라랑"

영화 기획자이자 예비 감독인 가네마키가 류몬 다쿠를 찾아왔다. 가네마키는 "성야 이야기"라는 영화 연출을 위해 유명 동물 사육자 기타 조켄의 '기타 동물 랜드'를 방문한 후, 기타 조켄의 후처 에미와 사랑받지 못하는 아들 고유키, 살처분을 앞둔 순록 수르랑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고유키가 수르랑과 사라졌다는걸 에미에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냥개는 아니지만 가네마키가 김계화의 시동생이라는 점, 그리고 딱한 사정을 이해한 류몬은 순록을 찾아 나서는데...

살처분을 앞둔 순록과 아버지에게 버림받다시피한 아들이 함께 탈출한다는 설정이 너무 뻔했던 작품. 마지막 엔딩도 작위적입니다.

고유키가 연약한 외모와는 다르게 진짜 사나이였다는 마무리는 작품의 주제와 일맥상통하며, 세세한 묘사는 빛을 발하나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기타와 사냥개"

류몬은 우메즈의 의뢰를 받아들여 사냥개 그레이를 찾아 나섰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포스터를 활용한 뒤, 택시 운전사에게서 그 개가 길거리 가수 다마미즈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사냥개를 찾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며, 수사 방법도 포스터를 통한 목격자 확보라는 현실적인 것이라 마음에 들었던 소품입니다. 일상계로 볼 수도 있을 정도에요.

하지만 개를 찾는 과정에서의 드라마가 약한 탓에 몇 개의 무리수가 조금 눈에 거슬립니다. 독특한 괴한인 의뢰인 우메즈, 다마미즈에게 시비를 건 취객들에 대한 폭행, 마지막으로 다마미즈의 가족 이야기가 그러했습니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냥 소품 느낌으로 깔끔하게 가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사이드킥"

일본 굴지의 서러브레드 경주마 조련소 서일본농장 사장 스가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사라진 저먼 셰퍼드를 찾아달라는 의뢰 전화였다. 일단 의뢰를 받아들였지만, 알고보니 진짜 의뢰 내용은 셰퍼드와 함께 사라진 마필 관리사 다바타와 그가 끌고 간 과거의 명마 실버 고스트의 행방을 찾는 것이었다.
눈에 띄는 3인조이기에 트럭을 이용했으리라 짐작한 류몬은, "세인트 메리의 리본"에서 알게 된 트럭 운전 기사 가와타니에게 수소문을 부탁하는데...

"수르랑, 따라랑"과 유사한 동기, 즉 살처분을 앞둔 가족과도 같은 경주마와 탈주한다는 동기가 등장하합니다. 동기는 뻔하지만 마필 관리사 다바타의 우직함은 매력적으로 묘사됩니다. 갈 데도 마땅치 않고, 연약한 소년보다야 나이는 들었지만 마필 관리사 쪽이 보다 현실적인 건 당연하니까요. 명확한 목적 — 수의사에게 보여주어 말이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음을 밝힌다! — 도 분명 존재하고요.

한마디로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타인에게 폐를 끼치려고 하지 않는 진정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스가이와 담판을 짓는 류몬 다쿠의 마지막 장면까지 멋집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단 딱 한 가지, 앞서 말씀드렸듯 초·중반에 쓸데없는 액션 장면에 대한 묘사는 불필요했습니다.

"악역과 비둘기"

스트리트 파이터 덴도가 조깅할 때 데리고 다니던 이웃집 사냥개가 도둑맞았다. 의뢰를 받은 류몬 다쿠는 연이어 걸려오는 전화를 통해 사냥개 도난 사건이 잇달아 벌어지고 있으며, 사냥개를 암거래하는 조직적인 범죄가 있다는걸 눈치챘다. 지형적으로 사건 현장 중심을 흐르는 하천을 통해 배로 개를 옮기는 것을 알게 된 류몬은 덴도와 함께 밀거래선을 덮치는데...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비교적 스케일이 큰 작품. 혈통 있는 사냥개를 노리는 거대 조직과의 승부가 그려집니다. 대단치는 않지만 나름의 추리가 펼쳐지는 작품이기도 하죠.

하지만 시리즈의 매력을 잘 살리지는 못했습니다. 이전 시리즈가 자연과 함께하는 산사나이의 이야기라면 이 에피소드는 그냥 전형적인 액션물 느낌이 더 강한 탓입니다. 시노부가 자살한다는 비극적인 엔딩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그냥 덴도와 함께 류몬의 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는 게 훨씬 더 잘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생각되네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액션물로서의 재미는 충분하지만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기에는 아쉬웠습니다.

2004/12/01

위대한 개츠비 - E.S 피츠제럴드 : 별점 2.5점

위대한 개츠비 - 6점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최일호 옮김/홍신문화사

미국 문학의 대표작 중 한편입니다. 사실 굉장히 예전에 로버트 레드포드가 개츠비로 나왔었던 영화를 이미 보았었지만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기에 소설을 읽을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해 왔습니다. 하지만 고등학생때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한창 빠져있을 때 "노르웨이의 숲"의 주인공이 굉장히 찬양하던 작품이라 눈길이 갔었고 그 이후에도 이런 저런 이유로 손을 떼고 있다가 겨우 이제서야 읽게 되었습니다. 햇수로 따져본다면 처음 영화로 접하고 거의 20년만에 읽은 것 같네요.

일단 이 소설에서 돋보였던 점은 개츠비라는 캐릭터입니다. 지극히 영화적이고 독특한, 묘한 인물인데 정말 매력적으로 그려내고 있거든요. 당대 미국인들의 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이죠. 야망과 입지전적인 스토리를 보면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드라이저의 "아메리카의 비극"의 클라이드와 유사하지만 개츠비는 단편적이지 않은 복잡 미묘한, 2000년대에도 여전히 먹힐 수 있는 현대적인 캐릭터라는데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또 하드보일드의 원형처럼 보이는 분위기도 인상적이었어요. 왠지 루 아처 시리즈가 생각날 정도인데 과거사에 얽매여 꼬여있는 인간관계와 서로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주인공들, 사소한 오해와 실수로 벌어지는 비극적인 살인 사건이 바로 하드보일드의 정취를 짙게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에요. 후대 하드보일드처럼 적나라하지 않고, 상류계층의 시각에서만 쓰여졌다는 차이가 있긴 하나, 간간히 보이는 물질 만능과 미국식 자본+퇴폐주의의 뒤에 숨어있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 역시 하드보일드 단골 소재니까요. 조사해 보지는 못했지만 초창기하드보일드 작가들에게 나름의 영향은 주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이런 작품도 하드보일드로 보이는 제가 이상한 것일지도....)

그러나 미국 상류층의 퇴폐적인 삶과 허무, 그리고 "미국의 꿈"이 얼마나 환상일 뿐인가를 알려준다는 작품평과 같은 느낌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예일대학, 옥스퍼드 대학 같이 출신 운운하며 파티만 즐기고 연애활동만 일삼는 상류사회에 대한 지나친 묘사의 정도가 너무 심해서 짜증이 날 정도였어요. 상류층에 대해 작가가 지나친 동경을 품고 있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말이죠.
또 단순히 설명적인 묘사, 사건 나열보다는 개츠비와 데이지의 교통사고에 얽힌 진상을 잘 포장해서 복잡하게 꾸미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그 편이 보다 소설적으로 흥미진진하게 접근할 수 있었을 같거든요.
아울러 개츠비 역시 멋지긴 했지만 이전 영화속의 로버트 레드포드에 비하면 그다지 인상적이진 못했습니다. 소설에서도 여러가지로 복잡하고 꿈과 잃어버린 과거를 동경하는 모습은 충분히 전해주지만 전성기때의 말쑥한 외모로 눈빛하나로 모든것을 말해주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모습이 20여년이 지났지만 더 기억에 남네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시대를 뛰어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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