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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0

숲을 지나가는 길 - 콜린 덱스터 / 이정인 : 별점 3.5점

숲을 지나가는 길 - 8점 콜린 덱스터 지음, 이정인 옮김/해문출판사

1년 전, 배낭만 발견되어 실종 처리된 스웨던 여대생 카린 에릭손을 찾기 위해 경찰에서 벌였던 장기간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건은 미결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타임즈 지에 보내진 여대생 실종 사건과 관련된 수수께끼같은 독자의 투고詩로 경찰은 다시 수사에 착수했고, 기존의 존스 경감대신 모스 경감이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휴가 도중 복귀하여 사건을 맡게 된 모스 경감은 시에서 유추해낸 해답으로 와이탐 숲 수색에 착수했고 곧바로 숲에서 유골을 발견했다. 그러나 유골이 사실 남성의 것이었다는 것이 밝혀진 후, 사건의 중요 참고인 중 한명이었던 데일리 마저 살해되면서 사건은 또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데....

모스경감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1작인 "옥스퍼드 운하 살인 사건"은 재미는 있었지만 조금 짧고 모스의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별로 없어 아쉬웠는데 2번째 작품은 상당한 길이의 장편이 출간되었네요.

일단 이 작품은 그동안 제가 다른 작품들에서 보아온 모스 경감의 모습 중에서 가장 적나라하면서도 화끈한 모습을 여러번 보여줍니다. 어떻게 보면 모스라는 캐릭터의 전부랄까요? 호색한이면서도 음주와 클래식을 즐기는 모스의 모습은 천재 탐정으로서의 잘난척과 부조화속의 조화를 이루어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유쾌한 캐릭터를 잘 드러냅니다. 또 그동안 개그 캐릭터와 천재 탐정을 오가던 모스라는 인물 묘사에서 천재 쪽 비중이 더욱 높아서 사건에 대한 명쾌한 추리가 곳곳에 등장하며 사건 해결을 위한 활약도 상당한 편입니다. 거기에 더해 친하게 지냈던 검시의 맥스의 죽음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좋아하는 여인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경찰 조직의 힘을 동원 하는 등의 모스의 모습은 확실히 이전 작품과는 많이 차별화 될 정도로 디테일하고 재미있게 꾸며져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루이스는 의외로 비중이 작아서 조금 아쉬웠지만요.

추리적으로는 포맷은 전혀 다르지만 이전에 읽었었던 "사라진 소녀"와 유사한 점이 느껴졌습니다. 어떤 여인이 사라진 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설정이 흡사하거든요. 그래서 중반 이후에는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모스가 사건 초반의 단서들을 종합하여 스스로만의 해답을 내놓은 뒤 그것을 밝혀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새로운 해답을 만나게 된다는 전개는 역시나 다른 작품들과 유사하지만 이 작품은 모스가 처음 내 놓은 해답이 정답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과정이 일관되게 흘러간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이고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천재형"에 더 공을 들였달까요?

복선이나 독자에 대한 정보도 비교적 공정한 편입니다. 뭐 본격물로 보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이기도 하지만 "수사"를 기본으로 하는 "현대 경찰 수사물"이라는 한계상 이 정도면 상당한 수준이라 생각되네요.

하지만 이 작품에서 작가가 공을 가장 많이 들였음직한 사건의 열쇠가 되는 수수께끼 시는 일종의 암호 트릭인데 상당히 괜찮은 편이긴 하지만 영어를 잘 모르면 해독이 불가능 하다는 점, 그리고 결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알리바이 트릭이 생각보다는 맥빠진다는건 조금 아쉽습니다. 아울러 이른바 "정체"를 밝히는 부분의 단서가 너무 깔끔한 탓에 조금 시시하게 보여진 것도 그러하고요. 이것 역시 "현대 경찰 수사물"의 한계겠죠. 

내용적으로도 각 등장인물들의 연결고리에 너무 신경쓴 듯 우연에 의한 설정이 많은 것은 단점이며 더 압축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페이지 수는 약간 부담되긴 했습니다. 영국 추리물 답지 않게 호색적인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하여(물론 그 중 한명은 모스입니다^^) 성적인 묘사가 좀 과한 부분도 한국 문화와는 좀 맞지 않는 점이라 생각되었고요. 물론 비슷하게 "포르노 영화"를 소재로 했던 에드 멕베인의 "장화신은 고양이"에 비하면 7만배는 낫지만요.

이렇듯 약간의 단점이 있기는 하나 결론적으로는 추천작입니다. 이 긴 호흡의 이야기를 잘 마무리 해서 깔끔하게 정리하는 작가의 필력에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네요. 마지막 반전도 상당히 인상적이었고요. 별점은 3.5점입니다. 다음권이 기대되네요.

PS : 일부 독자들 간의 마지막에 찾아오는 여인의 정체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데 저는 클레어 오스본이라 생각됩니다.

2025/09/19

가공범 - 히가시노 게이고 / 김은모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도 부부 자택에 화재가 일어난 후, 도의원인 남편 도도 야스유키의 사체는 거실 소파에서 전소된 채, 전 여배우인 아내 도도 에리코 사체는 욕실에서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되었다.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고 자살한 걸로 보였지만, 수사를 통해 위장된 자살임이 금세 드러났다. 경찰은 원한 관계를 축으로 탐문 수사를 진행해 나갔고, 고다이, 야마오 컴비는 진술을 통해 도도 야스유키의 태블릿이 사라졌다는걸 알아냈다. 그 직후, 범인이라는 인물이 협박 편지를 보내어 태블릿 속 정보를 거래하자고 제안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작 장편입니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었습니다. '갈릴레오 유가와'나 '가가 형사'가 아닌, 새롭게 시작된 고다이 쓰토무 형사 시리즈이지요.

가장 큰 장점이라면 치밀한 수사 과정 묘사입니다. 주변 진술을 통해 태블릿의 존재를 확인하고, 태블릿 전원이 켜진 위치 데이터와 수상쩍은 언행으로 야마오 경부보를 유력 용의자로 포착하고, 과거 조사를 통해 야마오 경부보가 도도 부부와 고등학교 때 부터 알고 있었다는걸 알아내고, 현금 인출책의 결정적 증언으로 야마오 경부보를 체포하는 일련의 과정은 모두 철저하게 발로 뛰는 수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인터넷 정보 검색 따위는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범인에 대한 결정적 단서 역시 수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선보입니다. 도도 에리코는 귀한 손님에게만 티파니 찻잔을 낸다는데, 사건 현장 식기 세척기에서 그 찻잔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티파니 찻잔은 식기세척기에 넣으면 안 되는 물건입니다. 야마오는 사건 당일 차를 마시지 않았다고 말했고요. 그렇다면 범인은 최소한 야마오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티파니 찻잔에 대해 잘 모르는 귀한 손님, 또는 손님(범인)이 떠난 뒤 찻잔에 대해 잘 모르는 누군가가 찻잔을 현장에서 치웠던 것이지요. 

결국 수사를 통해 도도 야스유키가 살해당한 아내를 집에 있던 도구로 자살로 위장한 뒤, 스스로 집에 불을 지른 뒤 자살했다는게 밝혀집니다. 자기 딸이라고 생각한 미사키가 범인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이러한 진상 외에도, 수사 중간중간에 나오는 여러 증언을 통한 의문들 - 예를 들어, 도도 야스유키는 체력이 좋았는데 어떻게 범인에게 간단히 살해당했는지 - 까지 모두 수사로 밝혀지는 등, 수사의 디테일은 최고 수준입니다.

수사 과정에서의 고다이의 예리한 관찰력도 빛납니다. 범인은 도도 저택에서 에리코를 목매달 끈을 조달했는데 왜 그런 준비를 사전에 하지 않았을까? 전기밥솥도 마찬가지, 왜 예약을 해제하지 않았을까? 즉 범인은 간단히 간파당할걸 알면서도 왜 이렇게 우발적이면서도 어설픈 위장 공작을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관찰을 통해 제시하거든요.

그리고 야스유키의 유지를 이어받고 자신의 결의도 합쳐 미사키를 숨겨주기 위한 야마오 경부보의 범죄 계획도 흥미롭습니다. 사실 그는 일부러 단서를 흘려 체포되었던 겁니다. 제목 그대로 '가공범'인 셈이지요. 하지만 야마오는 몇 달 후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며, 그 시점이면 증거도 많이 사라져 진범을 체포하지 못한 채, 사건은 미제로 끝날 가능성이 높을 걸로 예상했습니다.

이는 거의 성공할 뻔 했지만, 고다이의 끈질긴 수사로 진범이 드러나게 됩니다. 고다이는 도도 에리코의 과거를 뒤져 고교 졸업 직후 숙모 집에 머물던 시기 임신했다는 정황을 잡고, 숨겨진 딸이 있으며 그녀가 도도 집을 드나들던 미사키였다는걸 밝혀냅니다. 도도 에리코의 임신을 밝혀내는건 수사 팀의 인해전술이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수사물이라는걸 선명하게 드러내기도 하고요.

야마오가 이런 계획을 진행한 동기인 40여년 전인 1985년 고등학생 시절의 야마오, 도도 부부가 엮인 연애와 욕망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팜므 파탈을 넘어서는 매력의 소유자 에리코의 존재감이 압권이었어요. 이런 설정에서는 일반적인, 학생과 관계를 가진 교사 도도 야스유키는 알고보니 굉장한 인격자에 선한 인물이라는 반전 설정도 신선했고요.
세 명의 관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짝사랑'에 대한 작가의 생각 - "경솔하게 사랑을 주고받으니까 잃게 되는 거에요. 짝사랑이라면 상처 입는 일도, 상처 주는 일도 없잖아요." - 도 와 닿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미사키의 범행 동기는 ‘버림받음’과 ‘비교에서 비롯된 분노’로 제시되는데, 이미 친모가 에리코라는걸 안지도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아무리 자기 딸이 비행을 저질러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하더라도, 갑작스럽게 살인으로 폭발하기까지의 중간 과정이 너무 부족합니다. 단순 폭행도 아니고 살인인데 말이지요.

가공범 설정도 지금 보기에는 다소 뻔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범행을 떠안는 모습은 "용의자 X의 헌신"과 별다를게 없으니까요. 너무 빠르게 야마오의 속셈이 드러나는 것도 문제고요.

핵심 동기인 도도 에리코의 출산과 아이 유기도 배경 설명이 빈약합니다. 아이는 야마오의 아이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구태여 낳을 필요부터가 없었습니다. 묘사된 둘의 관계로 보면요. 힘들게 낳는 선택을 했다면, 왜 곧바로 버렸는지도 알 수 없어요. 이 부분은 낙태가 금기시 되었던 시대적 배경이나 에리코의 개인사 같은게 추가적으로 보강되었어야 납득이 되었을 겁니다. 

진범이 밝혀진 뒤 사회적 파장이나 여론의 반응이 거의 다뤄지지 않아 결말의 현실감이 약하고, 나가마의 죽음은 결국 자살이었다는 점에서 불필요해 보인 등도 문제라 생각됩니다.
아울러 고다이 형사도 작가의 다른 시리즈 주인공들과 비교하면 존재감이 옅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성실함, 눈썰미 외에는 캐릭터적 매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그래도 치밀한 수사와 ‘가공범’이라는 아이디어가 만들어내는 긴장은 꽤 만족스럽습니다. 경찰 수사물로는 우수한 수준이에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경찰 수사물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나저나, 읽고나니 제일 불쌍한건 도도 야스유키네요. 자기 딸이라고 착각한 남의 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으니...

2010/04/04

웃는 경관 - 펠 바르, 마이 슈발 / 양원달 : 별점 3점

웃는 경관 - 6점
펠 바르. 마이 슈발 지음, 양원달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반전시위등으로 시끄러운 스톡홀름의 비 내리는 밤, 시체가 가득 실린 버스가 발견되었다. 살인과 주임 마르틴 베크는 시체 더미 속에서 부하 오케 스텐스토름 형사를 찾아냈다. 그는 오른손에 자기 권총을 꽉 움켜쥐고 2층 버스 뒤쪽 창가에 앉아 죽어 있었다. 부하의 책상 서랍을 살펴보던 베크는 약혼녀의 누드 사진을 보게 되는데...

국내에는 낯선 스웨덴 추리소설로 부부작가인 펠 바르 - 마이 슈발의 작품입니다. 명작으로 이름높은 작품인데 뒤늦게 읽게 되었네요.

소문대로 "87분서 시리즈"와 굉장히 유사합니다. 스톡홀름이라는 지명만 브룩클린으로 바꾸면 그냥 87분서 시리즈로 봐도 무방할 정도에요. 특별한 추리 없이 평범한 형사들 각각의 꾸준하고 디테일한 수사가 펼쳐지며, 각자의 수사 내용이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흘러가는 전개 모두가 경찰 수사 소설의 전형을 따르고 있습니다. 때문에 추리적으로는 그다지 눈여겨 볼 점이 많지 않다는 것 역시 비슷합니다. 어마어마한 강력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범죄 자체가 뭐 애시당초 완전 범죄하고는 거리가 먼 충동적 범죄인 탓도 크고요.

하지만 차이점이라면 펄프 픽션의 느낌이 강한 에드 멕베인 작품에 비해 심리묘사와 디테일이 잘 살아 있고 불필요한 묘사가 덜하기에 조금 더 고급스럽다는 점입니다. 또한 87분서의 주역 카렐라 형사가 단순 명쾌하고 호방한, 교과서적인 강력계 형사라면 이 작품의 마르틴 베크 형사과 주임은 어둡고 개인적인 문제도 안고 있으며, 딱히 행복하거나 사려깊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도 큰 차이점이겠죠. 물론 이건 북유럽쪽 추리 소설 주인공의 전형적 캐릭터 같기도 하지만요.
그리고 "87분서"에 비하면 이야기도 좀 더 자잘하게 분절되어 있습니다. 등장하는 형사들의 수도 더욱 많고 수사하는 내용도 전부 다르지만, 이야기별로 세밀하게 잘 쪼개어 전개하는 솜씨는 확실히 인상적입니다. 형사들 각자가 쫓는 내용들도 모두 다르지만 수사 과정은 설득력이 충분하고요. 정말 한 수사팀의 수사 과정 일체를 보는 느낌이었달까요?

한 마디로 말해서 전형적인 남성드라마인 "87분서 시리즈"에 북유럽과 여성의 터치를 입힌 작품입니다. 과연 소문만큼의 명작인지는 잘 모르겠고, 마쵸적인 드라마의 팬이라면 지루할 수도 있지만 하드보일드 경찰 수사물의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저는 추천하고 싶네요. 같은 스웨덴 작가의 추리소설인 헤닝 만켈의 쿠르트 발란더 시리즈보다는 좀 더 경찰 수사물에 가깝다는 점에서도 마음에 듭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4/09/14

가연물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2.5점

가연물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리드비

요네자와 호노부의 신작. 가쓰라 경부를 주인공으로 한 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국내 최고의 추리 소설 동호회인 하우 미스터리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이 자리를 빌어 관계자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작가 최초의 경찰 수사 본격 추리물인데, 손대는 거의 대부분의 장르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를 뽑아냈던 요네자와 호노부 작품치고는 평이한 수준이었습니다. 경부 캐릭터도 진부한 스테레오 타입이고요. 
하지만 "목숨빚"만큼은 빼어납니다. 이 작품 하나만으로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낭떠러지 밑"
눈밭에서 조난당한 두 사람 중 한 명이 목을 무언가에 찔려 살해당했다. 또 다른 한 명은 심한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끝이 날카로운 말뚝 같은 걸로 목을 찔러 살해했다는 감식 결과를 보았을 때에는 흉기가 고드름일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고의가 아니었다면, 낭떠러지에서 고드름이 떨어져 운 나쁜 피해자 목에 꽂힌 사고일거라 여겼지요. 하지만 다행히 그렇게 뻔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피해자 목에 혈액이 응고되는 반응이 있었다는 감식 결과를 토대로, 이는 다른 사람의 혈액이 들어갔을 때 일어나는 반응이니 범인 미즈노의 혈액이 포함된(?) 흉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즉, 흉기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때에 부상당해 튀어나온 미즈노의 팔 뼈였다는 추리로 이어집니다. 흉기는 신선한 편이고, 이에 이르는 추리와 단서 제공 모두 공정하고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경찰 수사물'에 잘 어울리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흉기가 뭐든 범인은 미즈노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기소에는 무리가 없어 보였기 - '고드름'이 흉기였다고 주장해도 될테지요 - 때문입니다. 수사가 아니라 '추리'에 방점을 둔 느낌입니다. 거장 반열에 오른 작가라도 처음 시도하는 경찰 시도물이라서 다소 혼선이 있었던게 아닌가 싶네요.
흉기 트릭도 신선하지만 현실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정말 엄청난 정신력이 아니면 실현 불가능했을 방법이니까요. 아울러 수사 기계같은 냉정한 가쓰라 경부의 묘사는 그리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다른 작품들 속 냉정한 수사 반장들 - 대표적으로는 "제 3의 시효" - 과 차별화되는 점이 없는 탓입니다. 이 작품을 위해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 시간이 부족했던 걸까요?

여러모로 평범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졸음"
유력한 강도 치상 사건 용의자 다구마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이송되었다. 경찰은 다구마의 신병을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교차로에서 발생한 사고 원인이 다구마의 신호위반일 경우, 체포 영장을 청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 새벽 3시 일어난 다구마의 교통사고를 무려 네 명이나 목격했고, 그들은 모두 다구마가 신호를 위반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쓰라 경부는 다구마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 즉 신호 위반을 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데...

처음에는 다구마가 교통사고를 빙자하여, 상대방 미즈우라와 신분을 바꿔 도망쳤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런 황당하면서도 뻔한 이야기는 아니더군요.
'거짓 증언 부수기' 설정의 작품으로, 피해자나 가해자와 전혀 관계없는 목격자들이 우연히 똑같은 거짓 증언을 하게 된 과정의 설득력이 높다는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불성실한 근무 태도로 언제 해고될지 모를 교통 정리원과 편의점 직원이 하필 사고 시점에 졸고 있었기 때문에, 의기투합해서 졸았다는걸 숨기려고 거짓 증언했다는건 말이 되니까요.

그런데 전개 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바로 가쓰라 경부의 확신 - 네 명 모두 거짓 증언을 한 것이다! - 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점입니다. 누가 봐도 다구마는 바로 체포해도 되는 상황입니다. 아니, 경찰 수사를 위해서는 증언이 없었더라도 체포 영장을 청구하는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새벽에 일어난 사건의 목격 증인이 네 명이나 되고, 이들의 증언이 일치해서 불신을 품었다? 말도 안됩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또 응급실 의사와 게임 클랜의 리더인 대학생도 졸아서 위증에 동참했다는건 과했습니다. 이 둘은 빼고 교통 정리원 가마타와 편의점 직원 고가가 입을 맞추었다는 정도로 끝내는게 깔끔했을 거예요. 의사와 대학생은 사고를 보지 못했다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뿐더러, 거짓 증언에 똑같이 동참할만한 접점도 마땅치 않으니까요.

이런 단점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목숨 빚"
유명 관광지에서 절단된 사람의 팔이 발견되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나머지 사체 부위들도 발견했다. 피해자의 신원은 노스에 하루요시로 밝혀졌다. 곧 피해자가 오래 전에 생명을 구해 주었다는 미아타무라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발견되었고, 경찰은 미야타무라를 체포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미아타무라의 흉기에 대한 증언 등 여러 가지 부분에서 가쓰라 경부는 납득하지 못하는데...

앞서와 마찬가지로 범인이 명확한 상황에서 가쓰라 경부가 의문을 품는 과정의 설득력은 약합니다. 특히 '사체를 절단하는 커다란 수고에 비하면 사소한, 치아를 뽑거나 부숴서 신원을 알아내지 못하게 하지 않은 것이 수상하다'고 하는건 억지스러웠어요. 사체 전달은 옮기기 편해서라는 이유가 더 클 테니까요. 유명 관광지에 사체를 흩뿌린게 이상하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급했다거나, 길을 잘 몰라 실수하는 등 이유는 여러가지 있습니다. 범인이 확실하다면 수상하다고 생각할 까닭이 없어요.

하지만 더 이상 빚과 노모의 간병을 감당할 수 없었던 하루요시가 자살한 뒤, 이를 살인으로 위장하면 보험금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여긴 미야타무라가 현장을 조작했다는게 충격적인 진상이 모든 문제를 덮어줍니다. 우리도 직면한 문제인 '부양하기 힘든 고령 인구의 증가, 중년의 노후 보장 없는 은퇴, 취직도 못하는 삼포세대 젊은이'라는 3대에 걸친 사회 현상을 정면으로, 그것도 제대로 된 추리물로 다루고 있는 덕분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회파 본격 추리 수사물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그리고 앞서 억지스럽다고는 했지만, 가쓰라 경부가 수상하다고 여긴 상황들이 진상에 딱 들어맞는건 추리물다와서 좋았어요. 우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관광지의 사체를 버린 이유는 빨리 발견되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사망이 확인되어야 보험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사체의 정체를 숨기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 흉기에 대한 거짓말도 같은 이유입니다. 미야타무라는 '노스에 하루요시를 살해했다'는게 진실로 여겨지기를 바랬으니 이렇게 주장할 수 밖에요.
사체를 토막낸 이유가 하루요시의 사체에서 '목을 맨 자국'이 드러나지 않게 숨기기 위해서였다는 트릭도 아주 괜찮았습니다. 다만, 독자에게 하루요시 사체 중 목의 중간부 일부가 사라졌다라는걸 정확하게 알려 주지 않은건 조금 아쉬웠지만요.

그래도 여러모로 볼만했던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가연물"
월요일 심야부터 방화로 의심되는 화재가 잇달아 발생하여 수사본부가 설치되었다. 잠복수사 결과 몇 명의 용의자가 떠올랐지만, 잠복근무 시작 후 방화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자 잠복 중인 형사가 범인에게 들킨 거 아니냐고 상관이 가쓰라 경부를 질책했다. 그러나 가쓰라 경부는 범인이 이미 목적을 달성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를 내놓았고, 어떤 목적으로 방화를 저질렀는지 동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유력한 용의자 중 한 명인 오노하라가 버린 쓰레기에서 착화에 쓰인 잡지가 발견되는데...


후더닛보다는 와이더닛 물인데, 왜 표제작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수록작 중 가장 처지거든요. 범인의 동기가 하찮을 뿐더러, 납득하기도 어려운 탓입니다. 화재에 대한 나쁜 기억 때문에 돌발적인 화제를 막으려고 안전한 방화를 저질렀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범인은 그냥 수사를 통해 체포하기 때문에 추리의 여지도 거의 없고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진짜인가"
이제사키 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권총을 가진 범인이 농성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게 점장 아오토와 아르바이트 생 유노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가쓰라 경부는 아오토와의 통화로 유노가 범인에게 살해당했다는걸 알게 되었다.
범인 시다는 아들에게 생일 선물로 파르페를 사주려고 가게를 찾았는데,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는 아들에게 견과류가 들어 있는 파르페가 서비스되어 화가 난 뒤 다툼이 시작된걸로 보였다. 유노는 파르페에 대해 시다에게 설명하지 않은 직원이었다.

비교적 독특한 사건이 등장하는 작품.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인질을 븥잡고 농성을 벌이는 사건은 웬만한 작품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지요. "스완"이 약간 비슷하지만, 결은 전혀 다르고요. 또 이런 작품에서 중요한 '인질범과의 협상'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독특했습니다. 오로지 가쓰라 경부의 추리에 의한 의외의 진상이 밝혀지는 구조가 돋보였고, 여러 명의 증언을 모아 진상을 추리해내는 전개, 가게 안 장난감 가게에서 타는 물총이 시다가 들고 있는 권총과 비슷하다는 단서 등 여러 가지 정보와 단서들 모두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진상도 재미있었습니다. 사건은 아오토 점장의 자작극이었습니다. 치정 문제로 유노를 살해한 직후, 시다가 사무실로 들이닥쳐 범행이 들키자 시다의 아들을 인질로 삼아 시다가 범인이고 자신은 피해자인 척 농성하는 연극을 시켰던 것이지요. 나중에 구출 직전 시다와 아들은 살해할 생각으로요.

그런데 조리 담당으로부터 사건 당시 오징어 먹물 파스타가 조리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추리해냈다는건 와 닿지 않았어요. 오징어 먹물 파스타 조리 시간을 감안하여, 시다가 항의차 점장을 찾은 뒤, 한참(약 10분?) 지나서 도망치라는 큰 소리가 나왔다는건 그리 큰 단서나 증거로 볼 수 없습니다. 짜증이 쌓여 한참 있다가 폭발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살해 현장을 무마하기 위해 농성이라는 연극을 벌인 것도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적으로 억지가 많아 감점합니다. 

2011/08/01

동기 - 요코야마 히데오 / 임경화 : 별점 2.5점

동기 - 6점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임경화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이런저런 작품들로 접해본 요코야마 히데오의 단편집. 딱히 큰 임팩트는 없는 작가라 별 관심은 없었는데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2007년판"에서 게스트들이 과거 18년 동안의 베스트 중 한 작품으로 꼽았기에 찾아서 읽게 되었네요. 제가 이런 류의 리스트에 굉장히 약하거든요.

이전에 제가 읽었던 작가의 작품은 장편 1편, 단편집 2권이었습니다. 단편집은 비교적 정통 사회파 추리 - 수사물 흐름을 따라갔던 반면, 장편 "사라진 이틀"은 섬세한 심리묘사와 전개, 설정은 탁월했지만 추리소설은 아니었습니다. 이 단편집은 "사라진 이틀"과 비슷합니다. 사회파 작품으로 보기에는 사건 자체가 소소하고, 일상계라고 보기에는 좀 무거운 이야기들이며 특별한 수사없이 주인공의 심리를 쫓아가는 형태로 전개되기 때문에 추리소설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요.

이러한 절묘한 균형은 장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묵직한 사회파 수사물이나 정통 추리물을 기대한 독자에게는 실망감을 가져다 줄 겁니다. 작가의 다른 단편집 분위기를 기대했던 저도 솔직히 실망했습니다.

그래도 표제작인 "동기"는 2001년 일본의 여러 추리소설상을 휩쓴 작품답습니다. 작가의 장점이 잘 살아있거든요. 전체 평균해서 별점은 2.5점입니다만, "동기" 한 작품만큼은 3.5점!입니다. 그 외의 다른 작품들도 섬세한 심리묘사 하나만큼은 탁월한 만큼 심리묘사를 즐기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단, 생각하시는 추리소설과는 좀 거리가 있다는 점 명심해 주세요.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동기"

표제작. 경찰서 내에서 보관 중이었던 경찰 수첩이 대량으로 분실된 사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경찰 수첩의 중요성에 대한 설정은 잘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내용을 볼 때, 우리나라로 치자면 거의 총기 분실 사고 쯤 되는 대형 사고로 보이네요. 이 사건을 주인공 가이세의 심리묘사만으로 끝까지 끌고가는 전개가 아주 탁월합니다. 마지막 소소한 반전도 인상적이었고요. '일상계 심리 스릴러 사회파 수사물'이라는 쟝르가 있다면 충분히 교과서로 쓰일만 한 작품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4점을 줄 수도 있으나 용의자가 너무 적다는 것에서 살짝 감점했습니다.

"역전의 여름"

자초하기는 했지만 반쯤은 불운한 탓에 살인을 저지렀고, 복역 후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야마모토에게 살인 청탁이 들어온다는 이야기. 

추리적으로는 가장 눈여겨볼 요소가 많고 설정과 전개도 흥미진진했습니다. 문제는 완전범죄 계획 치고는 별로 설득력이 높은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고요. 야마모토가 어쨌건 잔혹한 살인사건을 저지른 것도 사실이기에 감정이입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결말 역시 너무 좋게 마무리하려 한 느낌이 들어 별로더군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취재원"

한 지방지 여성 신문기자의 눈물겨운 분투를 다룬 드라마. 사건 수사를 다루고는 있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자신을 스카웃하려는 전국지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여기자의 고민입니다. 때문에 추리물이나 범죄 수사물로 보기에는 한참 거리가 있습니다. 취재원이 정보를 제공한 이유, 그리고 스카웃에 대한 나름의 반전이라면 반전이 있기는 한데,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밀실의 사람"

재판 중 졸았던 판사에게 닥친 위기를 그린 소품. 이게 좌천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큰 사건인지 이해도 안되지만, 판사 아내의 불륜이 원인이라는 결말도 너무 쉽게 간 듯 합니다. 추리물이나 수사물로 보기에도 문제가 많았고요. 무엇보다도 과거도 숨기고 결국 불륜까지 저질렀으면서 남편이 항상 법복을 입은 것 같다 어쩌구하는 편지를 남긴 판사 아내의 뻔뻔함 때문에 읽고나서도 기분이 나쁘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2016/03/01

주토피아 (2016) - 바이론 하워드, 리치 무어 : 별점 3점

"굿 다이노"가 망하기는 했지만 최근 분위기 좋은 디즈니의 최신작 애니메이션입니다. 주말에 딸아이와 함께 감상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어른들이 보아도 충분히 즐길 거리가 많은 괜찮은 작품입니다. 우선 전형적인 버디 액션 수사물의 형태로 시간 제한 있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벌어지는 긴장감이 제법입니다. 음모도 적절하게 구성되어 충분히 몰입할 수 있고요. '공포'를 통해 특정 집단을 자신의 추종 세력으로 만든다는 정치적인 행동은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설득력이 높지요.

동물들을 소재로 한 작품답게, 그리고 이쪽 바닥의 전설적인 명가 디즈니의 작품다운 깨알같은 개그들도 마음에 듭니다. 누구나 인정하는 씬 스틸러는 엄청 빠른 나무늘보 반짝반짝 플래시겠지만, 그 외 다른 동물들 모두 원래 동물 특성이 잘 보이도록 구현되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토끼와 여우의 빠른 몸놀림을 적극 활용한 속도감 넘치는 액션씬도 아주 볼 만하고요. 주토피아의 디테일과 아트웍 역시 최고 수준입니다.

무엇보다도 동물을 소재로 민감한 부분인 "인종 차별"과 "선입견"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작중 편견의 희생양이 되는 동물은 토끼와 여우인데 토끼 쥬디는 작고 약하다는 편견으로 평생 소원인 경찰이 되지만 경찰 내부에서 철저하게 무시당합니다. 여우 닉은 포식자에다가 약삭빠르고 교활하다는 편견으로 모든 집단에게서 신뢰할 수 없는 동물로 낙인이 찍혀 있고요.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흑인은 무조건 잠재적인 범죄자로 생각하고, 중동 이슬람 교도는 모두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생각하는 편겸과 선입견 가득한 작금의 행태와 엮어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중반부에 사라진 동물들이 야수화된 것에 대해 쥬디가 설명하는 장면에서 결정적으로 폭발합니다. 사실 작중의 포식자보다는 현실을 빗대어 생각하면 훨씬 와 닿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소녀 백인 경찰이 거리의 사기꾼인 흑인과 친해졌는데, 사건을 해결하고 인터뷰에서 흑인을 싸잡아 잠재적인 범죄자라고 말하는 꼴이니까요.

그러나 허술하게, 조금 쉽게 넘어간 부분이 눈에 띄긴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시장 보좌관의 음모로, 포식자를 야수로 만드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이를 어떻게 드러낼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없어 보였습니다. 무려 12마리나 야수가 되었는데 그 시점까지는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으며, 드러나게 된 것은 쥬디가 운 좋게 활약했을 뿐이잖아요? 공공장소에서 시장을 중독시키면 한방에 끝났을 텐데 왜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진행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더군요.

또 마지막에 닉이 경찰이 되는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사기꾼이 경찰이 될 정도로 경찰이 만만한 조직은 아니죠. 이게 무슨 "폴리스 아카데미"도 아니고... 차라리 닉이 어렸을 적 레인저가 되려다 왕따당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 대신, 경찰학교에 입학했었는데 주위의 편견으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더 설득력 높지 않았을까 싶네요.

허나 이런 부분들은 아이 시각으로 보면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지나치게 편견에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봐서 느낀 문제점들이죠. 작품에 큰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냥 신나게 즐길 수 있는 재미와 더불어 생각할 거리를 전해 준다는 점에서 추천합니다. 후속편이 기대되네요.

2020/03/04

가상가족놀이 - 미야베 미유키 / 김선영 : 별점 2점

가상가족놀이 - 4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선영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코로다 료스케라는 이름의 남자가 공사 현장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수사 끝에 사흘 전에 일어난 21세 여대생 이마이 나오코 살인 사건과의 연관성을 찾아냈고, 언뜻 평범한 직장인이자 가장인 것처럼 보였던 도코로다 료스케가 인터넷상에서 '아버지'라는 닉네임으로 몇몇 사람들과 함께 '가상가족놀이'를 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서로 얼굴도 실명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마치 가족처럼 아버지, 어머니, 딸, 아들로 연극을 해왔던 것이다. 게다가 딸의 닉네임인 '가즈미'는 도코로다의 친딸 이름이기도 했다.

진짜 가족을 내팽개친 채 인터넷상의 가상가족에게만 몰두한 피해자. 경찰은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전대미문의 계획을 세운다. 이윽고 진짜 가족이 매직미러 너머로 취조실을 지켜보는 가운데, 피해자와 함께 인터넷상에서 가족놀이를 했던 사람들이 차례로 불려오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미야베 미유키의 범죄 수사물입니다. 초반부에 살인 사건에 대한 설명이 잠시 등장한 뒤에는 취조실에서 진행되는 3 명의 가짜 가족에 대한 심문, 그리고 이를 매직 미러 뒤에서 지켜보는 피해자의 딸 가즈미와 그녀를 보호하는 경찰의 시점을 오가며 진행됩니다. 제한된 공간에서 제한된 인물만 등장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연극적이지요. 실제로 심문은 '연극' 이기도 하고요.

비교적 짤막한 길이에, 이야기도 재미있어서 쉽게 읽을 수 있다는건 장점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가짜 가족을 만들어 서로가 각자의 역할을 연기했다는 설정도 흥미롭고요. 가족 해체가 진행 중인 현재 시점에 통용될만한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미야베 미유키 특유의 은근하고 깊은 심리 묘사들도 여전히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문제는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은 별 재미가 없다는 점입니다. 가짜 가족을 데려다가 진행하는 심문부터가 아무리 봐도 진범을 밝히려는 목적은 없어 보인 탓입니다. 심문 과정의 이야기는 모두 과거, 가짜 가족 놀이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살인 사건은 언급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심문의 목적은 뭘까요? 서로 너가 죽였지! 너가 범인이야! 라고 싸우다가 누군가 자멸하여 자백할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가즈미가 가짜 증언에다가 범인과 가짜 가족들에 대한 지나친 복수심과 적대감을 드러내고, 심문이 진행되는 와중에 계속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등 수상쩍은 행동을 거듭하기 때문에 가즈미가 범인일거라는 추리는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심문은 가즈미가 동요하게 만들어 자백하게 하려는 목적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심문 자체가 연극이었다는 것 까지는 상상하기 힘든 부분이었지만요. 

그러나 이렇게 거창한 연극을 벌여가면서 가즈미의 범행을 드러내려 하는데, 그 방법이 고작해야 전화 통화를 엿듣는 정도라는건 어설픕니다. 또 경찰이 연극을 벌여가며 가즈미를 함정에 빠트리는게 영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사건 수사가 벽에 부딪혔다 하더라도, 이런 노골적인 함정 수사는 위법 아닌가요? 아울러 범행 때 사용된 파카라는 유력한 증거가 나온 이상, 어차피 가즈미의 애인 이시구로 다쓰야는 체포할 수 있었을테고, 그렇다면 범인을 잡는건 시간 문제였을텐데 말이죠. 실제 사건 해결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헛수고였어요. 연극에는 가즈미의 분노와 복수심을 달래기 위한 목적도 있어 보이지만, 경찰이 두 명이나 죽인 살인범을 특별히 배려해서 연극을 벌인다는건 말도 안되겠죠. 경찰이 아니라 또다른 피해자 이마이 나오코 가족이 연극을 벌였다던가 하는 식이었다면 차라리 더 나았을겁니다. (가면 산장 살인 사건?)

가즈미가 분노와 복수심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만든 동기도 이해가 되지 않는건 마찬가지에요. 아버지가 진짜 가족을 내버려두고 외부에서 가짜 가족, 심지어 딸 이름이 똑같은 가족을 만들어 놀았다는걸 알면 분노할 수는 있을거에요. 그러나 이게 살인으로 이어지게 될까요? 그것도 그 사실을 알고 난 직후가 아니라, 아버지의 전 젊은 연인이었던 이마이 나오코를 가짜 가족 가즈미로 착각해 살해한 다음에? 연기이건 아니건, 친아버지가 살인에 대해 어떻게든 도와주려 하는데 거기서 더 큰 살의가 생겼다는 뜻인데 이건 납득이 되지 않네요. 아무리 아버지 료스케가 실수를 많이 했다 해도, 이런 진심까지도 연기로 치부되어 살해된다는건 지나친 비약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불만과 단점을 잔뜩 썼는데, 이는 책 뒤 소개글에 낚인 탓도 큽니다. 책 뒤에서 두 번의 반전이 있다고 소개되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요. 일단 가즈미가 진범이라는 건 앞서 말씀드렸듯 반전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그녀에 대한 묘사가 영 수상쩍기 때문에요.
두 번째 반전인 세 명의 가짜 가족이 경찰의 대역이라는건 앞서 말씀드렸듯 예상하지 못한건 맞습니다. 이를 위한 복선도 초반부에 다케가미가 대역의 대사 운운하는 장면을 통해 제공해주고요. 그러나 이 사실이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는건 전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이런 연극을 할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요.
개인적으로는, 다쓰야의 파카에 엄청난 피가 튄 걸로 봐서 료스케 살인의 실행범은 다쓰야가 아닐까 싶기는 한데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즉, 반전물도 아니고, 그나마 있는 반전도 대단하지 않으므로 반전물을 기대한 저 같은 독자는 실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애초에 수사를 위해서는 진행할 이유가 없는 연극이 소재인 탓에 여러모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쉽게 읽을 수는 있지만 그 외의 장점은 딱히 없습니다.

2025/08/24

스펜서 컨피덴셜 (2020) - 피터 버그 : 별점 1점

경찰 스펜서는 부패한 상관 보일런을 폭행했다가 5년 동안 수감되고 말았다. 스펜서의 출소 직후 보일런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고, 선량한 경찰 테렌스가 누명을 썼다는걸 알게 된 스펜서는 룸메이트 호크와 함께 잔상 조사에 나섰다. 그리고 부패한 경찰들이 범죄 조직과 함께 대량의 마약을 유통한 자금으로 카지노 '원더랜드'를 개장하려는 음모를 꾸민다는걸 알아내는데...

로버트 B. 파커가 창조한 보스턴 사립탐정 ‘스펜서’ 시리즈 중 하나인 에이스 앳킨스(로버트 B.파커 사후 원작을 이어서 쓰고 있는 작가)의 "원더랜드"를 원작으로 하는 넷플릭스 장편 범죄 스릴러 영화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한 액션물로 범죄 스릴러, 액션, 버디 코미디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으나, 어느 쪽에서도 두드러지 못합니다.

특히 기대했던 범죄 스릴러, 수사물로는 최악에 가깝습니다. 일단,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수사는 전개상 거의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결정적인 단서들은 스펜서가 찾아낸 것이 아니라 주변 인물들이 우연히 제공해 주니까요. 예를 들어,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되는 도청 파일을 피해자 테렌스의 아내가 스펜서에게 직접 전해주는 식으로요.
스펜서의 옛 파트너 드리스콜이 악당이라는 사실도 너무 쉽게 밝혀집니다. 초반 살해 현장에서 발견된 이쑤시개 조각이라는 단서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추측이 가능한 수준이라 긴장감 있는 반전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부패한 옛 파트너, 마약 조직, 조직 내부의 은폐 구조 등 설정들도 지나치게 전형적이고요.

전개 또한 뻔하고 치밀함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중간 보스급인 벤트우드에게 쳐들어가서 물고문을 통해 마약 운송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는게 대표적입니다. 이럴 거라면 은밀한 수사 따위는 필요하지도 않았지요. 게다가 정보를 털어놓았다면 악당들도 운송 시간을 바꾸는건 당연한데, 예정대로 운송하다가 마약 트럭을 스펜서에게 탈취당하는건 대체 이게 뭔가 싶더군요.

스펜서 캐릭터도 원작 붕괴 수준입니다. 원작에서는 문학에 조예가 깊어서 시니컬한 말투, 심리 묘사 측면에서 복잡한 면을 보여주는데, 영화에서는 그냥 말빨(?)좋은 전형적인 마초 헐리우드 경찰, 형사 캐릭터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액션에서라도 화끈했어야 했는데, 작중 대부분 장면에서는 적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는 장면만 반복될 뿐입니다. 이럴거라면 권투에 일가견이 있다는 설정은 왜 덧붙였는지 모르겠어요. 마크 월버그도 그리 잘 어울리는 캐스팅이 아니고요.

액션은 다른 부분에서도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격투 장면들 모두 속도감이나 위력이 느껴지지 않는 탓에 맨손 액션의 쾌감을 기대하기 어려운 탓입니다. 호크가 덩치를 활용해 마지막에 잠깐 활약하긴 하지만, 이 역시 일방적인 구타에 가까워 액션적 재미는 떨어집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야기의 절정부입니다. 부패 경찰과 범죄 조직이 결탁한 악의 무리와 대단한 결전을 벌여야 할텐데, 스펜서가 트럭을 몰고 악당 본거지에 돌진한 뒤 호크가 몇 명을 때려눕히는 걸로 결전은 대체로 마무리됩니다. 스펜서와 드리스콜의 1:1 맞짱은 너무 작위적이라 어이가 없더군요. 부패 경찰들 때문에 보도도 못하고 사건이 은폐되었었는데, 스펜서와 호크의 활약 이후 사건이 대대적으로 폭로된다는 결말도 이해가 안되고요.

그래도 너무 바보같아서 아무 생각없이 볼 수 있다는건 오히려 장점이기는 하네요. 몇몇 유머 코드는 피식 웃게 해 주기는 하고요. 거인 호크, 조력자 헨리 캐릭터는 캐스팅이 좋습니다. 완전한 권선징악 마무리도 후련했고요.

다만 이 정도 장점은 이 영화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보완해주기엔 턱도 없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범죄물로서도, 수사극으로서도, 액션 영화로서도 건질게 없는 졸작입니다. 원작인 탐정 스펜서에 대한 모독이라 할 수 있는 쓰레기로 에필로그에서 후속작, 시리즈의 여운을 남기는데 어림도 없지요. 소리없이 망한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2026/05/01

잃어버린 얼굴 - 사쿠라다 도모야 / 최고은 : 별점 3.5점

얼굴이 훼손되고 손목마저 절단된 상태의 신원 불명 사체가 발견되었다. 다행히 피해자의 정체는 전직 탐정이었던 야기 다쓰오라는게 곧바로 드러났다. 고마네에서 벌어진 다른 살인 사건과 연루되었기 때문이었다.

사건 수사에 나선 수사계장 히노 유키히코는 이 사건이 10년 전 실종된 오누마 겐, 그리고 지역 신문에 실린 경찰의 부실 대응을 고발하는 투서와 연결되어 있다는걸 알아냈고 탁월한 추리력을 발휘하여 진상을 밝혀낸다...

"매미 돌아오다"로 좋은 인상을 심어준 사쿠라다 도모야의 장편 추리 수사물입니다. 

굉장히 정통적인 경찰 수사 추리물인데, 복선 회수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앞부분에 툭툭 던져놓은 것처럼 보였던 지역 신문 투고, 부부 싸움 끝에 벌어진 살인 사건, 표백제를 구입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 같은 요소들이 나중에는 모두 본 사건과 직접 맞물리기 때문입니다. 읽다 보면 정말 하나도 허투루 사용된 설정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이런 복선들과 이어지는 추리, 진상의 몇 가지 예는 아래와 같습니다.

  • 경찰의 부실 수사에 대한 투서 + 수상한 남자가 다이야라는 소년에게 접근했던 사건 + 투서 전 지방지에 실렸던 하야토의 시 + 다이야는 하야토의 친구였다 + 그날, 다이야는 하야토의 집에서 놀다가 나왔다 → 수상한 사람은 하야토의 존재를 시를 통해 알았고, 다이야를 하야토로 착각했다.
  • 시라카와 현장을 발견한 고다 미쓰코가 들고있던 다루마 위스키 병 + 죽은 야기가 구속 전 단골 바 바텐더에게 술을 보관해달라고 부탁 + 야기가 협박에 사용했던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 야기는 USB를 다루마 병 속에 보관하고 있었다.
  • 오누마 겐이 횡령을 저질렀다 + 오누마 겐은 사채도 쓰고 있었다 + 야기에게 불륜 조사를 의뢰한 사람 중 하나가 쓰지였다 + 쓰지의 아내 가나는 오누마 겐의 직장 동료였다 → 오누마 겐은 가나와 불륜을 저지르다가 야기에게 협박당했고, 쓰지를 살해했다.

이런 식으로 사소해 보이는 흩어져 있는 정보들이 진상으로 정리되는 과정은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수사계장 히노가 펼치는 추리의 짜임새도 좋습니다. 사소한 지점에서 이상함을 포착한 뒤, 그걸 기발한 방향으로 연결해 나가는 방식인데 신선하고 재미있어요. 대표적인게 시라카와가 살해되었을 당시 문고리가 걸려 있지 않았다는 점에 착안하는 추리입니다. 살인까지 저지른 사람이 그렇게 허술했을 리 없으니 이는 임시 상황이었고 누군가 곧 돌아올 예정이었다고 추리를 전개하는데 설득력이 높습니다. 이는 앞서 나온, 수상한 여자가 표백제를 구입했다는 이야기와 연결되어 범인이 '부부' 였다는걸 드러내게 되지요.
그 외에도 고다 미쓰코가 빼돌리려고 했던 USB가 숨겨진 장소를 밝혀내는 추리 등 히노의 명추리는 볼만한게 많습니다. 

오누마가 10년 전 쓰지를 살해한 뒤 그의 신분으로 바꿔치기해서 살아왔다는 반전도 괜찮습니다. 오누마로 의심되지만 혈액형이 달랐던 신원불명의 사체 등 관련된 정보도 충실히 제공됩니다.
화려한 액션이나 극적인 장치보다는 탐문과 방문 조사, 그리고 차곡차곡 쌓이는 증언을 통해 진상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묘사도 꼼꼼하여 수사물로서의 재미도 잘 살아 있고요.

다만 아쉬운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운과 우연이 과하게 작용하는 편입니다. 사건의 발단부터가 그러합니다. 오누마를 야기가 '우연히' 발견하고 뒤를 쫓았던게 시작이었으니까요. 오누마가 '아들일지도 모르는' 초등학생의 시를 지방지에서 읽은 것, 우에무라 교코가 오누마의 접근에 대해 투서를 보낸 것, 시라카와가 걸쇠가 걸리지 않은 야기의 집에 들어가 살해당한 것도 모두 우연입니다. 이런 부분은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지요.

그리고 경찰도 예전 사진을 통해서는 바로 알 수 없을 정도로 외모가 많이 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야기가 십여 년 전에 조사했던 상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도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뭐 이건 전직 탐정의 실력이라고 쳐도, 오누마가 쓰지를 살해한 뒤에도 사건 현장 근처에서 계속 살았다는건 정말이지 말도 안됩니다. 작품 안에서 나름대로 설명하려고 애쓰지만 솔직히 잘 와 닿지는 않습니다. 무리한 설정이었다고 밖에는 보이지 않아요.

주인공 히노의 성격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요. 오누마 구미에 대한 취조 과정 등에서 엿보이는데 너무 인간적인 탓입니다. 오지랖도 너무 넓어요. 쓰레기를 쌓아두는 폭력적인 사타케의 부친 이야기는 본 줄거리와 큰 관련이 없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설명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인간미를 부각하기 위한 장치로 보이는데, 하드보일드스러운 사건과는 영 어울리지 않아서 별로였어요. 차라리 좀 더 냉정하게 사건을 바라보는 형사 쪽이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좋은 평가를 받을만한 잘 짜여진 작품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추리 애호가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05/11/02

강력 1반 - 요코야마 히데오 글 / 토코로 주조 그림 : 별점 3.5점

강력1반 4 - 8점
토코로 주죠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석원님의 추천으로 보게 된 추리 만화 시리즈입니다.

몰랐는데 원작이 따로 있더군요. 원작자 요코야마 히데오는 일전에 "사라진 이틀"이라는 작품으로 접해 본 적이 있습니다. "사라진 이틀"의 경우 추리소설은 아니라 생각되었던 만큼 원작자가 이 사람인줄 모르고 구입했기에 표지만 보고 이거 또 뒤통수 맞는거 아닌가 싶었지만 의외로 정통적인 경찰 수사물이고 또한 재미까지 있어서 놀랐습니다.
현재 4권까지 발간중인데 1권은 수사 1과 1반, 2권은 2반, 3권은 3반이 각각 권마다 주역이 되어 하나의 이야기가 완결되며, 4권은 수사 1과 과장이 1,2,3반을 통솔하며 3건의 다른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으로 하나의 싸이클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다른 만화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상당히 독특한 방식으로, 매 권마다 저마다 특색있는 반원들과 캐릭터성이 강한 반장을 주인공으로 이야기 중심이 이동함으로써  흥미와 재미를 배가시킵니다.
경찰들이 주역으로 등장하는 무게감있는 수사물은 만화에서도 엄청나게 많았지만 보아온 바에 따르면 대체로 주인공의 활약에 기댄 액션 영웅물에 다름아닌 작품들이 태반이었죠. 하지만 이 작품은 수사과정 전개의 대부분을 용의자 취조에 할애하는 등 나름대로 현실감을 잘 살린 설득력있는 전개, 그리고 바스트샷을 위주로 하는 담담하면서도 리얼하지만 조용한 그림 등으로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면서도 "웃지않는" 야스마사 반장이나 공안 출신의 냉정한 2반 반장 마사미 같은 만화적인 캐릭터도 스토리에 잘 조합시켜 독특하면서도 성공적인 정통 추리-수사 만화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통 추리물로 보기에는 어설픈 면도 많이 눈에 띕니다. 특히 1권같은 경우에는 트릭이 좀 난데없고 진상을 파악하는 경위도 납득하기 어렵더군요. 그래도 2권 이후부터는 트릭이나 전개, 설정 모두 상당한 수준을 보여줘서 추리 매니아로서도 만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3권의 이야기가 추리적으로나 이야기의 완성도로나 제일 좋았다 생각되네요. (물론 저는 1반 반장인 "파란귀신" 야스마사가 제일 마음에 들어서 1권도 좋아하긴 합니다만...)

어쨌건 구입하고 후딱 읽어버린 재미난 작품이었습니다. 간만에 기대되는 추리-수사 만화를 하나 발견한 것 같아 기분이 무척 좋네요. 4권 이후가 빨리 나왔으면 합니다. 추천해 주신 석원님께도 감사드립니다.^^

2026/09/04

죽은 자의 윤무(死者の輪舞) - 아와사카 쓰마오: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수 범죄 수사과 형사 신스케는 경마장에서 우연히 살해당한 사체와 접촉하면서 연쇄 살인극 수사에 빠져들었다. 신스케의 파트너인 고참 형사 우미카타는 연쇄 살인극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를 추리해 내었고, 모든 피해자들이 사망한 뒤 가쓰하타 병원 원장이 자신이 주도하여 벌인 일이라는걸 고백한 유서가 발견되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우미카타가 신스케, 그리고 원장 조카인 야나기다와 함께 한 자리에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자 야나기다는 우미카타와 신스케를 죽여 입을 막으려 하는데...

아와사카 쓰마오의 장편 추리소설입니다. 최근 이 작가 작품만 읽고 있네요. 원서로 읽었습니다.

무려 여덟 명의 죽음이 이어지는데, 이들은 모두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는 순환 구조가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래서 제목에도 '윤무가 들어간거 같네요.

탐정역 형사 우미카타도 신선합니다. 경력이 많아 형사부장조차 어려워하는 인물로, 게으르고 거만한 데다 도박까지 좋아하는 평소 행동만 보면 좋은 형사라고 하기 어렵지만 사건을 대하는 능력만큼은 뛰어나다는 설정 덕분입니다. 빼어난 관찰력과 비상한 추리력을 갖추고 있으며, 명품 브랜드와 미식에도 이상할 정도로 해박하여 수사에 큰 도움을 주거든요. 문제 많은 비호감 인물이지만 형사로서는 유능하다는 상반된 설정을 잘 결합했습니다. 호색한에 기묘한 취미(?)가 있고 자기 분야에서는 전문가급 형사 명탐정이라는 점에서 모스 경감이 연상되기도 하네요.

비상한 추리력은 쓰쓰미 준의 사체가 발견된 집을 조사할 때부터 드러납니다. 집에서 광고지가 발견되었는데, 살림집이 아니라서 신문도 구독하지 않고 광고지에는 접힌 흔적조차 없습니다. 따라서 신문에 끼워져 배달되거나 우편함에 꽂혀 있던 물건이 아니라, 영업사원이 직접 집을 방문해 건넨 것이라고 추리하지요.

쓰쓰미 준의 방에서 인기 없는 만담가 다쓰다 이치엔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증언 처리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찰 조사 결과 당시 어떤 방송에서도 이치엔을 기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우미카타는 곧바로 이치엔 본인이 방 안에 있었다고 판단하거든요.
피해자의 벨트가 채워진 모양을 보고 경찰의가 왼손잡이라고 판단한 것과 달리, 여러 정황을 통해 오른손잡이인 다른 사람이 피해자에게 옷을 입히고 벨트를 채웠다고 알아내는 장면도 좋고요.

추리는 마지막 장면까지 이어집니다. 가쓰하타 병원 원장은 유서를 통해 여덟 명의 죽음이 서로 이어진 연쇄 살인이자 자살극이었다고 밝힙니다. 이는 모든 사건을 설명하는 완벽한 해답처럼 보였지만 우미카타는 유서의 내용과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을 비교하면서 여러 모순을 찾아낸 뒤 유서에 적힌 진상이 조작되었다고 추리합니다. 모순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 우미카타와 신스케가 처음 병원을 찾았을 때 원장은 D호실에 입원했던 환자들의 이름을 직접 입에 올렸다. 하지만 유서에는 이들의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유서가 사실이라면 원장이 처음부터 그 원칙을 스스로 어겼다는 이야기이므로 이는 모순이다.
  • 오쿠 후사의 집 문손잡이에 남아 있던 지문은 이상하다. 다섯 손가락의 지문이 모두 남아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문을 열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흔적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야나기다는 앞선 탐문 수사에서는 만담가 이치엔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신스케가 다쓰다 이치엔이라는 이름의 환자를 찾았을 때는 그런 환자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이는 야나기다가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이미 등장했던 여러 단서들, 증언의 모순을 근거로 진범을 추리해내는건 굉장히 본격 추리물 스러워서 마음에 듭니다. 마지막에 야나기다 앞에서 펼치는 추리는 고전적인 추리쇼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고요. D호실이라는 연결고리와 유서의 오류, 야나기다의 말실수까지 포함한 정보 모두 사전에 제공된다는 점도 본격 추리물로서의 가치를 높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대표적인건 다쓰다 이치엔의 죽음입니다. 그는 매가 물고 가다가 떨어뜨린 식칼에 찔려 죽는데,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너무 작위적입니다. 이치엔이 죽지 않고 경찰에 체포되었다면 사건의 진상이 훨씬 일찍 밝혀졌을 테니 작가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퇴장시킬 필요가 있었겠지만, 굳이 이렇게 우연에 의존하는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나 싶습니다.

여덟 명이 얽힌 연쇄 살인과 자살극도 아이디어에 비해 조금 길게 느껴집니다. 특히 동반 자살까지 시도했던 후나미즈와 고노 아유미 커플은 빠졌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겁니다. 신스케와 사오리의 관계도 불필요하게 느껴졌고요. 마지막에 우니카타와 신스케가 야나기다에게 죽을 뻔 하지만, 로쿠야마가 설치한 장치에 의해 야나기다가 죽고 만다는 결말도 뻔했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여덟 명의 연쇄살인을 피해자와 가해자가 계속 뒤바뀌는 순환 구조로 만든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이들을 가쓰하타 병원 외과 D호실이라는 하나의 접점으로 묶으면서 제공되는 단서들도 모두 공정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현대 경찰 수사물과 본격 추리물이 잘 결합되어 있는 추천작입니다.

2005/01/30

춤추는 대 수사선 2 - 레인보우 브릿지를 봉쇄하라! : 별점 2점


완칸서의 관할구역인 도쿄옆의 인공섬 ‘오다이바’는 수많은 빌딩들이 들어서고, 관광명소가 되어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길 안내, 미아 찾기, 교통정리 등 단순 업무로 정신없이 바쁜 와중 회사 중역이 로프에 묶여 살해된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 발생해 특별수사본부가 들어선다. 살인사건 특별 수사본부장으로는, 남녀평등을 홍보하려는 본청의 정치적 수단으로 여성인 오키다가 임명되고 무로이가 그녀를 서포트하게 된다. 그러나 경찰들의 필사적인 조사를 비웃는 듯 제 2의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두번째 사건의 목격자가 나타나고, 본청으로 돌아갔던 마시타가 네고시에이터의 특별교육을 받고 완칸서로 돌아와 범인과 접촉하기 시작하면서 실마리가 잡히기 시작한다.
연쇄살인사건과 완칸서 내부의 사소한 범죄들 사이에서 흔들리며 갈등하던 아오시마와 스미레였지만 유키노가 살인사건 범인에게 납치당하게 되면서 완칸서 전 직원은 하나로 뭉치고 오다이바를 봉쇄하려는 특별 작전이 시작되는데....

사실 저는 춤추는 대수사선의 팬이었습니다. 때문에 TV시리즈는 물론 특별편, 영화까지 굉장히 열심히 챙겨봤던 적이 있었죠. 하지만 이 영화 속편은 너무 세월이 흘렀기 때문일까요? 저도 좀 시들해졌었기 때문에 개봉 당시에는 놓치고 이제서야 보게 되었네요.

영화는 그야말로 TV 시리즈의 팬들을 위한 팬 서비스용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5년만에 돌아오긴 했지만 TV시리즈의 모든 주인공들이 다시 총 출동하고 있으며, 영화답게 약간 스케일이 커지긴 했지만 본청과 현장 요원들과의 갈등이라는 가장 중요했던 포맷 자체도 거의 그대로더군요.

때문에 네고시에이터 마시타를 축으로 범인과 대화하며 풀어나가는 과정 자체는 상당히 재미있었지만 그 외의 부분들은 범죄-경찰 드라마로서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요우나시(서양배 - 쓸모없는)"같은 억지스러운 메시지에 로프결박이나 꽃에 파묻는다는 의미없는 살해방식은 설득력이 너무 부족했고 수사의 과정 역시 우연에 기대고 있는 부분도 많으며 비약이 굉장히 심한 편이에요.
또 뭔가 있어보이던 주민 감시 장치를 동원한 모니터링이라는 수사방식이 결과적으로 별로 활약하지 못하는 이야기 전개도 좀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대단한 수사방식처럼 그려지더니 결국 아무것도 아니더라...라는 전개. 그리고 막판에 스미레쨩이 총에 맞는 장면은 사실 오바라 생각됩니다.

무로이 관리관 대신에 살인사건의 감독관으로 부임한 여자 관리관 오키타는 괜찮은 캐릭터가 될 수도 있었는데 불구하고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자가 큰일을 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라는 고정관념을 심어 주기 위한 홍보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말 짜증나는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아쉬웠어요. 극중에서 여러차례 묘사된 대로 "미인"도 아니고 말이죠.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1편보다도 영화적으로는 떨어지는. 국내에서 흥행에 실패한 것도 당연하다 생각되는 작품입니다. 뭐 아오시마와 완칸서의 팬들이라면, 춤추는 대수사선 시리즈의 팬이라면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영화입니다만, 추리적으로나 경찰-수사물로는 크게 기대치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2016/10/10

기억나지 않음, 형사 - 찬호께이 / 강초아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찰에게 가장 중요한 건 말야, 당연히 자기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지!
어떻게 하면 나를 드러내 보일까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 분수를 알고 나 자신을 지킬까 하는 거라고. - 쉬유이의 선배 화 선배가 하는 조언.

수사의 목적은 대답을 듣는 게 아니라 대부분 문제를 찾아내는 겁니다. - 쉬유이가 수사에 대해 아친에게 하는 말.

급작스러운 두통으로 차에서 잠이 깬 웨스턴 경찰서의 쉬유이 경장. 그는 고질적인 단기 기억상실증 탓에 지난 6년간의 기억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6년 전 당시 맡았던 둥청아파트 살인 사건의 후속 이야기를 취재하는 미모의 신문기자 아친의 취재에 동참한 후, 6년 전 사건을 풀어내기 위한 새로운 실마리를 접했고, 옌즈청이라는 스턴트맨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13.67"로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준 찬호께이의 장편 소설로 제2회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상 수상작입니다.

'기억을 상실한 인물이 자신에게 닥친 수수께끼를 해결해 나간다.'는 설정은 "공포의 검은 커튼" 이후 서스펜스 스릴러 장르의 전가의 보도와도 같습니다. 누가, 어떤 작품을 써도 기본 이상은 해 주니까요. "사라진 시간", "살인자의 기억법" 등 처럼요.

이 작품 역시 재미면에서는 합격점을 줄 만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재미를 위한 만능 조미료 같은 설정 - 6년간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 우연히 6년 전 사건의 재수사에 돌입한다 - 에 더해서, 초중반부까지의 흡입력이 정말 장난이 아닌 덕분입니다.
생생했던 6년 전 기억과 6년 후 새롭게 밝혀진 단서를 조합해나가는 과정의 설득력도 넘치며, 단기 기억상실증으로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본인이 얽혀있을지도 모른다는 긴장감 역시 독자의 흥미를 크게 높여줍니다.

또 작가에게 기대했던 추리적 요소 역시 기대에 값합니다. 6년 전 벌어진 잔혹한 둥청아파트 살인사건의 재조사가 시작된 후, 쉬유이가 새롭게 접한 몇 가지 단서들 - 사건 당일 피해자 이웃 후 어르신이 공격받지 않은 이유, 린젠셩의 아내 리징루가 건네준 린젠셩의 수첩 등 - 을 가지고 새로운 진상에 이르게 하는 추리가 놀랄 만큼 잘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경찰 수사물임에도 불구하고 고전 본격물의 향취가 느껴질 정도로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보였던 단서들 - 영춘권 도장의 위치,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 영국 TV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 쉬유이와 옌즈청이 같이 찍은 사진, 영화 촬영소에서의 대화 등등 - 이 큰 의미를 갖는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단서들 모두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된다는 점도 고전 본격물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중반부 이후부터는 힘이 서서히 빠집니다. 특히 쉬유이 경장이 병원에서 정신이 든 후 자신이 사실은 옌즈청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후 이야기는 모두 억지스럽습니다. 작가가 반전을 너무 의식한 탓인지 비현실적인 설정이 너무 많은 탓이 큽니다. 일단 옌즈청이 경막하출혈을 일으킨 등의 이유로 스스로를 쉬유이로 착각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 와중에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요. 최초 경찰서에서도 그렇고, 뤼후이메이가 사건 당시 담당 경찰이었던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역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또 착각의 이유가 된 옌즈청의 개인적 수사의 이유 역시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린젠셩의 무고를 확신한 이유가 고작 린젠셩이 걸어온 전화 한 통에 불과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고요. 이 약점을 보완하고자 인간 쓰레기로 묘사되었던 린젠셩이 급작스러운 사고로 고아가 된 옌즈청을 가끔 돌봐주었다는 식의 과거사를 추가한 것도 공정치 못합니다. 린젠셩의 자동차 사고는 고장에 의한 것이었다는 후일담은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작위적 설정의 극치였어요.

게다가 진범이 피해자 뤼슈란의 언니 뤼후이메이였다는 반전은 더 억지스럽습니다. 작가가 CCTV와 같은 제약 조건을 너무 많이 달아 놓은 탓에, 린젠셩이나 옌즈청이 범인이 아니라면 결국 범인은 최초 발견자이자 열쇠를 가지고 있던 뤼후이메이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를 설명하기 위한 내용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뤼후이메이가 본인 스스로를 뤼슈란으로 착각할 이유는 전혀 설명되지 않거든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착각과 그에 따른 동기보다는, 차라리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인간을 응징한다는 린젠셩의 동기가 더 설득력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뤼후이메이가 아친을 살해하려 한다는 결말 역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옌즈청이 진범이라는 옌즈청 본인 스스로의 수사는 당시의 알리바이로 이미 부정된 상황입니다. 때문에 린젠셩이 범인이 아님을 증명할 길은 없어요. 그런데 구태여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 아친은 그냥 조력자에 운전수 역할 정도일 뿐, 탐정 역할은 옌즈청 혼자라 아친을 죽일 이유는 없습니다. 살인으로 아친의 입을 막아 봤자 새로운 수사가 시작될 뿐이고요. 어차피 둥청아파트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가 개봉된다면 세간의 관심을 피할 길도 없을 겁니다.

아울러 단점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핵심 추리 중 하나인 린젠셩이 엄지손가락을 다쳤을 것이다라는 추리는 주어진 단서에 비해 비약이 심합니다. 서툰 글씨에 이은 당구 약속 취소 등으로 추론하고 있긴 하지만, 엄지손가락으로 힘을 주지 않으면 10센티미터가 넘는 상처를 낼 수 없다는 건 다소 약합니다. 두 손을 쓰면 되잖아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영화를 보는 듯한 감각적인 전개는 돋보이고 중반부까지의 몰입도는 역대급이지만 이후 억지스러운 반전의 반복으로 힘을 잃은 작품입니다. 재미 면에서는 나쁘지 않은 만큼 킬링 타임용으로 추천드립니다.

2010/02/11

교통경찰의 밤 - 히가시노 게이고 / 이선희 : 별점 2.5점

교통경찰의 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바움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연작단편집. 총 6편의 단편이 "교통사고"라는 일관된 주제로 실려있습니다.

먼저 단점부터 이야기하죠. 일단 이야기의 얼개가 대부분 허술했습니다. 사건에 우연이 많이 작용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그다지 정교하지 못하고, 여러모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탓입니다. 교통사고라는 주제에 있어 사회고발적인 메시지를 너무 직접적으로 강하게 드러내는 것도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세련되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초기작이기 때문이겠죠?

보다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먼저 우연에 의해 사건이 마무리되는 단편은 "천사의 귀"와 "버리지 마세요"를 들 수 있습니다.
첫번째 단편 "천사의 귀"는 장님소녀가 특이한 재능을 이용하여 교통사고의 진짜 가해자를 밝힌다는 발상은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작중에 이야기되듯 신호등 표시 시간이 변경되었는데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했으며 이러한 소녀의 노력과 관계없이 너무나 우연한 제 3자의 비디오 촬영이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는 것에서 정교한 느낌을 받기 어려웠어요.
다섯번째 단편 "버리지 마세요" 역시 우연에 의해 사건이 마무리되는 단편이죠. 나름 치밀한 살인극이 등장하기는 하는데, 이 살인극이 도로에 버린 캔 깡통과 연결되는 과정에서 결국 우연이 개입한다는 것은 너무 안일한 결말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피해자인 카메라맨이 범인의 범행을 눈치채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줄 알았는데 아예 다르게 풀어버리고 결말은 우연에 의해 진상이 드러난다는 것이라 솔직히 실망했습니다. 살인극 자체는 괜찮았던 만큼 아쉬움이 크네요.

그리고 설득력 부족은 "분리대"와 "불법주차"라는 단편에서 크게 느껴졌습니다. 두 작품모두 사회고발적 메시지는 두드러지나 동기와 결말에 있어 설득력이 약했거든요.
예컨데 두번째 단편 "분리대"는 독자의 공분을 불러 일으키는 아줌마 캐릭터 덕에 무단횡단에 대한 사회고발적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에는 성공하고는 있지만, 결말이 개운치 못합니다. 경찰의 약간의 조사만으로도 복수를 위한 자해라는건 쉽게 밝혀질테니까요.
네번째 단편 "불법주차"는 불법주차 차량으로 제시간에 병원에 가지 못해 죽은 아이의 복수라는 이야기로 역시나 사회고발적 메시지는 확실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작위적이라 별로 와닿지 않았습니다. 이래서야 "네비게이션이 부정확한 길을 알려줘서 그것때문에 손해본 사람이 복수한다" 라는 이야기와 다를것도 없잖아요. 뭐 나름 재미있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단점만 있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장점도 명확하죠. 위에 예를 든 단편들도 그렇지만 기본적인 재미를 갖추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한번 손에 잡으면 끝까지 한번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은 대단하니까요. 또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름에 값하는 추리적인 디테일도 잘 살아 있고 말이죠.
특히 세번째 단편 "위험한 초보운전"같은 경우 사건을 조작하는 과정이 치밀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외려 이 단편은 동기부분에서 다른 단편들에 비해 설득력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사건의 결말까지 범인이 의도한대로 정확하게 흘러가는 과정이 잘 짜여져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단편 "거울 속에서"는 우발적 사고를 토대로 한 공정한 추리 수사물로 우연과 작위성이 두드러지지 않는 정통 수사물이라 할 수 있죠. 독자가 예상할 수 있는 트릭이었고 결말이 미적지근하다는 것은 아쉽습니다만 알콩달콩한 러브라인의 등장이라던가 전체적으로 감도는 따뜻한 느낌 등 히가시노 게이고의 특징도 잘 살아있기에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별점을 매기자면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장단점이 명확한 만큼 2.5점 주겠습니다. 초기작인것을 감안한다면 너무 박한 평가일까요?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한번쯤 봐도 실망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 스토리텔러로서의 능력은 충분히 보여주니까요.

2010/09/08

이현세 폴리스 6부 : 형사수첩 - 이현세 : 별점 2.5점

오혜성은 유능한 경찰이나 서울에서의 사고로 당분간 휴식을 명령받았다. 마침 그에게 고향에서 일어난 사고를 다룬 신문기사를 보낸 인물이 있었던 차, 오혜성은 고향 원주를 방문했고 자신에게 보내진 사고들이 연쇄 살인 사건임을 깨닫는데...

이현세의 "폴리스" 시리즈 6부입니다. 오래전에 구입은 했지만 TV드라화가 되었었던 1부 이후로는 별 관심없어 버려두었었는데, 형이 6부는 제대로 된 사회파 냄새가 물씬 난다고 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과연, 생각보다는 괜찮은 사회파 수사물이더군요. '원주 지역 유지들의 연쇄 살인사건 - 살인 사건의 동기인 유언장 파악 - 유언장을 통한 유력한 용의자 체포 - 살인범 체포 / 살인범 자살 - 유력한 용의자가 사건의 동기가 된 과거의 사건 증언 - 모든 진상 파악 후 주범 체포'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경찰 수사'의 틀 안에서 제대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원주와 서울 간의 공조 수사라던가 여러가지 법의학적인 설명이 곁들여지는 등, 실제 경찰 수사를 보는 듯한 디테일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썩 매끄럽지는 않습니다. 결정적 단서를 잡아내는 방법이 '불법가택침입'이라는 것도 약점이고요. 무엇보다도 몇 건의 살인 사건은 범인의 계획에 불필요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범인의 실수가 눈에 많이 띈다는 점에서 완벽한 추리물로 보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자면, 범인이 정체를 숨기는데 성조차 바꾸지 않는다던가, 그냥 복수를 하면 되는데 괜히 복잡하게 사건을 만든다는 것 등이 그러합니다.
또한 범인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유언장' 인데,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제 국내 현실에서는 '유언장'이 이렇게 강력하게 쓰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뭔가 외국의 다른 컨텐츠를 많이 참고한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생깁니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폴리스'라는 이름이 붙을 수 있을 정도의 사회파 수사물이라 생각되네요. 폴리스 시리즈에서 보기드문 해피엔딩도 좋았고요. "블루엔젤"시리즈 보다는 떨어지긴 하지만 90년대 이현세 공장 시절에 양산된 시리즈 작품치고는 볼만한 수준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단점을 고치고 좀 더 깔끔한 전개를 했더라면 더욱 좋았겠지만.... 별점은 2.5점입니다.

2023/10/27

백조와 박쥐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점

백조와 박쥐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망높은 변호사 시라이시 겐스케가 살해당했다. 형사 고다이와 나카미치는 시라이시에게 연락했던 구라키 다쓰로가 수상하다는걸 알아내었고, 수사를 통해 구라키 다쓰로의 자백 - 구라키가 30여년 전 하이타니를 살해했다는걸 알게된 시라이시가 당시 유력한 용의자로 자살했던 후쿠마 준지 유가족에게 사죄하라고 강요했기 때문 - 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자백과 동기에 의문을 품은 구라키의 아들 가즈마와 시라이시의 딸 미레이는 각자 조사를 통해 구라키의 자백의 헛점을 각자 찾아내었고, 이는 경찰의 재수사로 이어지는데...


히가시노 게이고 추천 작품 30선에 있길래 읽어보게된 작품.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 인생 30년 기념작이라고도 하네요.

상당한 분량, 그리고 여러가지 사회 문제를 작품을 통해 고발하는 사회파 추리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읽기 쉽다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최대 장점은 여전합니다. 경찰이 무고한 시민을 억압하여 자살하게 만든 33년전 사건과 구라키 다쓰로의 자백으로만 이루어진 현재의 시라이시 겐스케 살인 사건을 통해 검찰, 경찰과 가해자 변호인 모두 재판에서 이기는게 목적이지 진상에는 관심이 없다는걸 드러내며 비판하는 것을 비롯하여 살인죄 공소 시효 폐지가 정당한지, 피고인의 진심어린 사죄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부모, 가족이 저지른 범죄로 다른 가족과 자녀가 피해를 입는다는게 말이 되는지, 황색 언론의 어거지 취재와 발표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 등의 여러가지 이슈를 녹여내고 있는데 무겁지 않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구라키가 공들여 만들어서 헛점이 거의 없었던 자백이 사소한 단서들에 의해 거짓이라는게 하나씩 밝혀지는 과정은 볼만합니다. 경찰과 유족, 관계자들이 모두 힘을 합쳐 각자의 영역에서 조사를 진행하는 덕분에 설득력도 높았고요. 예를 들어 구라키는 시라이시 변호사에게 TV에서 유산 증여에 대한 방송을 보고 궁금한 점이 생겨 전화를 한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이것만 놓고 보면 아무런 문제없는 자백이지요. 하지만 그 날 TV에서 관련된 내용은 방송되지 않았고, 구라키가 가지고 있던 명함첩을 통해 이미 다른 변호사에게 똑같은 내용을 물어보았다는게 추가 조사 결과 밝혀집니다. 이런 점에서는 잘 만들어진 수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라키가 거짓 자백을 해서 죄를 뒤집어 쓴 이유, 시라이시가 살해당한 이유에 대한 설명도 명쾌하게 이루어집니다. 33년전 사건이 도화선인건 맞아요. 다만 구라키가 아니라 시라이시가 진범이었던 겁니다! 이를 우연히 알게 된 당시 누명을 쓰고 자살했던 후쿠마의 손자 안자이 도모키가 복수를 위해 범행을 저질렀던게 진상이고요. 반전이라면 반전인데, 이를 위한 구성이 탄탄해서 별로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의 딸과 가해자의 아들이 진상을 밝힌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힘을 합쳐 사건을 조사한다는 설정도 괜찮았습니다. 제목 그대로 완벽한 정 반대의 커플의 조합이니까요. 둘이 힘을 합침으로서 혼자라면 불가능했을 단서 - 시라이시 겐스케의 어린 시절과 가족 관계, 그리고 진짜 동기 - 를 알아낸다는건 그야말로 무릎을 칠만 했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둘 사이에서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싹트게 된다는 것도 독자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게 해 줍니다.

하지만 다른 작품들에서 많이 보아왔던 소재와 설정을 뒤섞어 보여주는 자기복제에 가까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오래전 사건이 동기가 된다는건 작가의 수많은 다른 작품에서 보아왔던 설정이며, 살인자의 가족이라고 고통받는 이야기는 작가의 "편지" 등에서 선보였고, 살인자의 죗값에 대한 이야기는 "공허한 십자가"에서, 촉법소년과 사적 제재에 대한 이야기는 "방황하는 칼날"에서, 피해자의 이동 경로가 핵심 단서 중 하나가 된다는건 "기린의 날개"나 "신참자"를 연상케합니다. 정 반대측에 놓인 청춘 남녀가 함께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은 "몽환화"와 거의 똑같고요.

또 하나씩 제시되는 단서들을 통해 구라키의 자백이 거짓이라는게 하나씩 밝혀지데, 이 단서들이 단계별로 소개되지도 않아서 '추리'적으로 좋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예를 들어 앞서 구라키가 시라이시를 만났던 계기가 거짓말이라는 것 등은 모두 제각각 독립적인 단서들이며, 친할머니에게 하이타니가 사기를 쳤기 때문에 살해했다는 시라이시의 동기도 시라이시 겐스케의 어린 시절 사진과 호적 등본이라는 독립적인 단서로 밝혀지거든요. 즉, 이 단서를 먼저 접했다면 중간의 다른 조사는 불필요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의 단서가 다른 단서로 이어지는 식의 정교하게 잘 짜여진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 가즈마와 미레이가 힘을 합치게 되는 과정에 따른 빌드업만 있을 뿐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시라이시를 살해한 안자이 도모키의 동기를 설명하는 일종의 에필로그는 최악이었습니다. 소년은 자기 가족을 불행에 빠트린 진범을 응징했다고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이는 거짓말이었고 단지 살인에 흥미를 느껴 저지른 범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라이시가 고백하지 않아서 어머니가 이혼을 한건 명백한 사실이니 소년은 시라이시에 대해 원한을 가질 이유는 충분해요. 구태여 중학생 싸이코패스 설정을 집어넣어 이야기를 흐릴 이유는 없었습니다. '촉법소년' 제도를 고발하기에는 안자이 도모키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부족해서 별로 와 닿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이미 충분히 고통을 겪은 후쿠마 준지의 딸 아사바 오리에가 불쌍하기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누명을 쓰고 자살하고, 어머니와 자기는 살인자의 딸이라며 손가락질 받다가 이혼까지 당했고, 연심을 품었던 남자(구라키) 는 사랑을 받아주지도 않고 죽었는데 아들까지 살인범이 되었다니.... 이렇게까지 기구하고 잔혹하게 쓸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있게 읽었고, 생각할 거리도 많지만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부르기에는 한없이 미흡했습니다. 다른 작품들을 읽으셨다면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 없습니다.

2016/02/12

극비수사 (2015) - 곽경택 : 별점 1.5점

1978년 실제로 일어났던 '정효주양 유괴 사건'을 영상화한 작품입니다. 설 특선으로 TV에서 방영해주길래 감상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실망이 컸습니다. 실화 바탕의 정통 수사극을 기대했는데, 수사물로는 기대 이하였던 탓입니다. 사건 해결부터가 수사보다 김중산 도사의 예지력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에요. 아무리 실화 기반이라도 그렇지, 너무 비현실적이라 와 닿지 않더군요. 그나마도 재미있게 풀어내지도 못했고요. 전체 내용에서 수사가 차지하는 비중도 한없이 낮습니다. 유괴 수사에 초점을 맞추면 됐는데, 필요도 없는 조직 내 더러운 거래에 많은 시간을 소모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수사물인지 풍자물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에요.
조직 내 암투에 비중을 둘 거였다면 실제 정효주 양이 두 번 유괴당했다는 드라마를 잘 활용하는 것이 나았을 겁니다. 공 형사의 공을 빼앗아 독식한 중부서 형사들이 두 번째 유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고 공 형사에게 석고대죄하다시피 사건 해결을 부탁한다는 식으로요. 두 번이나 유괴당하는 것도 굉장히 드라마틱한 일인데 왜 살리지 않았을까요?

또 주인공 공길용 형사(김윤석 분)의 캐릭터도 전형적이라 지루했습니다. 여러모로 그간의 김윤석 캐릭터, 그 외 형사물 주인공들과 상당 부분 겹쳐요. 현실적이었을지는 몰라도 전혀 도사 같지 않았던 김중산 캐릭터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2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흥행작다운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78년 당시를 충실히 구현한 화면은 상당한 볼거리였으며, 수사물로서도 몇몇 장면은 괜찮게 느껴지긴 했습니다. 극 초반 공길용 형사가 '극비 수사'를 주장하며 범인에게 경찰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최대한 감추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여러모로 제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극장에서 보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네요. 덧붙이자면, 담배 피는 장면에서 담배에 모자이크를 한 방송국의 행태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거 좀 가린다고 뭔지 모를 것도 아닐 텐데,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2008/04/20

레이디 킬러 - 도가와 마사꼬 / 김갑수 : 별점 3점

주말 부부인 컴퓨터 전문기사 혼다 이찌로오는 평일에 도쿄에서 가명으로 여자들을 헌팅하여 시간을 보내는 일상을 보내며, 자신의 헌팅 이야기를 "사냥꾼의 일기"라는 노트에 자세히 기록해 놓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냥한 여성들이 연쇄적으로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혼다는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냥 여성을 찾아갔지만, 그 여성마저 살해된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주요 용의자로 수사선상에 오른 혼다는 여러가지 단서를 통해 정체가 드러나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변호사 하다나까와 신지는 혼다의 변호를 맡아 그의 무죄를 증명해 주기 위해 여러가지 조사에 착수하는데...

원제는 "사냥꾼의 일기"입니다. 도가와 마사코는 국내에 많이 소개된 작가는 아닙니다. 번역된 장편은 아마 이 작품이 유일할거에요. 단편은 몇편 더 있지만, 단편들과 이 작품은 분위기 자체가 많이 다릅니다. 단편은 일종의 괴기 환상 소설같은 작품들이 많이 소개되었고 완성도도 아주 별로거든요. 

그런데 단편들에 비해 이 작품은 제대로 된 추리물의 구조를 잘 따라가고 있어서 무척 의외였습니다. 일단 위에 간략하게 적어놓은 줄거리만 보아도 알 수 있지만 분위기가 이색적입니다. 법정물도 아니고 사회파 수사물도 아니고, 누명을 뒤집어 씌우는 완전범죄물도 아닌 중간 정도에 걸치는 중립성을 잘 유지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각 쟝르의 재미있는 부분만 잘 따다가 만든 느낌이 들 정도에요. 

전개도 나름 독특합니다.  전반부인 "사냥과 사냥감" 편에서는 "사냥꾼의 일기"의 저자(?) 인 혼다 이찌로오의 엽색 행각, 그리고 그가 서서히 함정에 빠지는 이야기를 상세하게 그리며, 후반부인 "증거의 채집" 편에서는 변호사 신지를 중심으로 혼다 이찌로우의 무죄를 밝혀내기 위한 수사 및 추리의 과정이 묘사됩니다. 1963년 작품 치고는 굉장히 신선한 아이디어라 할 수 있겠네요. 어떻게 보면 얼마전 읽었던 "이와 손톱"과 좀 유사한 전개인데, 아예 두가지 이야기를 확 나눠 버린 과감함(?) 은 이 작품이 조금 더 돋보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부족한 부분도 많습니다. 치밀한 완전범죄 공작을 깨트리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불꽃튀는 두뇌대결과 사소한 단서에서 밝혀지는 진상 등이 정교하게 묘사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탓입니다. 변호사 하다나까와 신지가 벌이는 약간의 조사로 중요한 단서들이 연달아 밝혀지고 있어서 경찰 수사의 헛점만 드러날 뿐이에요. 물론 1부에서 혼다가 너무나 명백하게 죄를 뒤집어 쓰는 바람에 경찰이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래도 조사가 어설퍼 보이는 것은 추리물에서는 큰 약점이라 생각됩니다.
마지막 반전 및 진상이 결과적으로는 범인의 "자백"에 의존한다는 것과 동기에 대한 설득력이 약간 떨어져 보이는 것 역시 단점입니다. 아무리 작품이 "헌팅" 에 뒤이은 붕가를 주요 소재로 삼고 있다지만 지나칠 정도로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는 점도 부담스러웠고요. 솔직히 저는 이런 묘사 굉장히, 아주아주 싫어합니다.

그래도 마지막 반전, 범인의 고백과 "사냥꾼의 일기"를 통해 밝혀지는 반전, 사건의 진상은 괜찮습니다. 어설프고 부족해 보이는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괜찮다고 기억하게 만들어 주지요. 그만큼 반전 하나는 아주 좋았습니다. 엄마 친구 아들같은 혼다가 수렁에 빠지는 내용도 디테일하면서도 참 감정이입하기 좋았고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한번 읽어볼 가치는 있습니다.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작가의 대표작인 "거대한 환영"도 꼭 한번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뭐, 취향은 좀 탈 것 같긴 하지만...

PS : 헌팅의 대상자 중에 작가를 희회한 듯한 "도다 마사꼬" 라는 인물이 나오는 것은 특이했습니다. 샹송가수였던 이력을 티내고 싶었나봐요^^

2023/01/06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3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2.5점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3 - 6점
한국일보 경찰팀 지음/북콤마

안녕하세요. 2023년 들어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1권2권에 이어지는 시리즈입니다. 지능범죄편이라는 부제 그대로 다양한 사기 범죄가 주제로 피해자들이 왜 속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단순하고 뻔한 사기도 있지만, 생각하지도 못했던 대담한 발상의 사기극도 등장합니다. 유명하고 잘 알려진 사건도 있지만, 잘 몰랐던 사건도 많아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범행에 대한 치밀한 수사로 범인을 잡아나가는, 수사물로서의 드라마가 느껴지던 1, 2권에 비하면 아무래도 그런 요소는 많이 부족한 편입니다.
사람들이 누구나 속아넘어갈만한 정교한 사기극은 거의 없고, 왜 속아넘어가는지 납득하기 어려운 뻔하고 단순한 사기극이 많다는 점도 실망스러웠어요. 이게 현실이겠지만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기억에 남는 사건 몇 가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행복팀 사건>>
심리적으로 약할 수 밖에 없는 농아들을 속여 가스라이팅한 뒤, 사이비 종교 교주처럼 군림하며 등쳐먹은 일종의 사이비 종교 사기극. 사이비 종교가 범죄로 처벌받아야 하는 이유를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아울러 범인들 때문에 자살 등 안타까운 죽음이 이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형량이 낮다는건 큰 문제로 보입니다. 이런 놈들은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해야 하는데 말이지요. 모쪼록 자살과 가장 붕괴의 원인이 된 사기 범죄를 저지른 범인들은 살인죄 이상으로 판결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대구 금호강 보험금 살인 사건>>
이 사건은 제가 봤던 <<그것이 알고싶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 중 하나였습니다. 범인의 억울하다는 투서에서부터 시작해서, 범인 가족이 억울하다며 울면서 인터뷰하는 장면에서 시작하는데, 알고보니 그놈이 진범이 맞아서 황당했었기 때문입니다. 성실하게 살던 15년 친구를 보험금때문에 살해하는 인간 말종이니 애초에 양심은 없겠지만, 아직도 무죄를 주장한다는데 입맛이 쓰더군요.
그나저나 생소했던 '법보행'이 결정적 증거였다는 것도 기억에 남은 요인으로 대체 얼마나 걸음이 특이하길래 주위 친구들이 모조리 알아볼까 싶은데, 걷는 모습을 자세하게 보고 싶네요.

<<로맨스스캠>>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유명한 범죄이지요. 책에서 범죄 흐름에 대해 상세히 소개해주고 있는데, 앞으로 이런 범죄 방지를 하자는 차원에서 짤막하게 소개해드립니다.
1. 채팅 앱에서 자신을 여군 간호장교라고 소개한 아만다 앰버는 그 후 메일을 통해 연애를 하자고 접근해온다.
2. 앰버는 자신의 신분증이나 군부대에서 찍은 사진을 종종 보내옴으로써 자신을 믿게 만든다.
3. 메일에서 '자기' '남편' 등 애칭으로 A씨를 부르며 전역한 뒤 한국에서 결혼하자고 구애한다. 어느 날 시리아 내전 지역에 파병됐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작전 중 사망할 때를 대비해 상속자 이름을 적었는데 '미래의 남편인 당신의 이름을 적어냈다”고 한다.
4. 앰버는 “작전 지역으로 급히 이동해야 하는데 돈을 찾을 적당한 곳이 없다"며 경비와 생활비 명목으로 10만~100만 원을 요구한다.
5. 앰버는 시리아에서 수색 작전을 하다 동굴에서 숨겨둔 무기와 함께 달러 뭉치를 발견했다며, 자기 몫인 500만 달러를 일단 런던 보안업체의 개인 금고로 빼돌리고 그것을 다시 주한미군 기지로 옮기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거액의 비용을 요구한다. A씨는 통관비와 항공수송비를 모아 앰버에게 보낸다.
6. A씨는 달러가 든 가방이 서울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1만 달러를 건넨 뒤에야 가방을 넘겨받는다. 가방에 든 금고에서 검은색 종이만 가득 나온다.


<<인천 공인중개사 전세 사기 사건>>
이중 전세 계약 사기입니다. 집주인에게서 월세 계약을 위임받은 공인중개사가 세입자에게 자신이 집주인이라고 속여 전세 계약을 하고, 그 돈으로 주인에게 월세를 지급한 사건입니다. 등기부등본에서 근저당권 설정 항목을 삭제한 뒤, 근저당권 없는 매물이라고 속여 계약하기도 했고요. 그 외에도 보증금 뻥튀기 등 다양한 사기 행각이 이어졌습니다.
아울러 '전세 사기'를 피하는 방법으로
① 집주인을 만나 신분증, 주소지, 생년월일 확인
② 전세 대금은 주인 명의의 계좌에 직접 입금
③ 등기부등본은 앱 등으로 직접 뽑아 확인

하라고 알려주는데, 아쉽게도 현실적이지는 않습니다. .저도 전세 계약을 몇 번 해 보았지만 본인 확인부터가 쉽지 않거든요. 실제 있었던 범행들처럼 대역을 내세우면 알아낼 방법이 사실상 없으니까요. 부동산 계약은 거액이 오가는 만큼 보다 명확한 본인 인증 거래가 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개선되는게 바람직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기 행각보다 더 큰 문제는 47명 전세자금을 떼먹었는데 고작 선고받은게 7년 형이라는 것입니다. 이러니 사기 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오죠.

<<온라인 암표>>
요새 꽤나 많이 회자되는, 온라인에서 암표를 팔기 위해 매크로를 이용해 표를 구입하는 방식이 소개됩니다. 특정 프로그램을 돌리는건데 캡챠까지 자동 해제하는 기능이 있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각 예매처가 사용하는 캡차 문자와 이미지 꾸러미를 미리 매크로 프로그램에 입력해놨다가, 특정 문자나 이미지가 뜨면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꾸러미에서 가장 유사한 것을 찾아 보안 절차를 해제하도록 하는 단순한 DB처리 방식인데, 캡챠가 이렇게 쉽게 뚫리는건지 몰랐네요.

<<검사 사칭 대출 사기>>
유부남 사기범이 검사를 사칭해서 거액을 빌리고 결혼 약속까지 하는 식의 뻔한 사기라 내용은 별게 없습니다. 자기가 거액을 빌려주고, 결혼할 사람 신분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건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되요. 전화 한 통화면 충분했을텐데 말이지요.
하지만 "공무원 사칭 사기는 전형적인 후진국형 사기다. 이런 사기가 여전히 통한다는 건 그만큼 한국 사화가 투명하지 않다고 보는 국민이 많다는 증거다."라는 마지막 마무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PC방 패보기 도박 사기>
대담한 발상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들은 당시 우리나라 PC방 컴퓨터의 66퍼센트 정도에 악성코드를 설치해서 사기 도박을 벌였는데요, 그 방법은 범인들이 5억원에 PC방 관리 프로그램 업체를 인수했던 것입니다! 범인 중 한 명이 개발자 출신으로 게임 회사를 운영할 정도로 IT계통에 정통했던 덕분이겠지만, 밝혀진 것만 40억원 정도를 패보기 도박으로 벌어들였다니 꽤나 남는 장사였던 셈이네요.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2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3.5점

2026/02/21

잔혹한 여로 - 야마무라 미사 : 별점 2점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에서 거주한 적이 있을 정도로 우리와 인연이 있는데, 국내에는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는 일본 여성 추리작가 야마무라 미사의 초기 단편집입니다. 설 연휴 때 원서로 읽었습니다. 

모두 일곱 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의외였던건, 수록작 중 세 편은 트릭을 전면에 내세우는 정통파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입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특히 "공포의 연하장"이 아주 괜찮습니다. 트릭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겨진 유류품을 통해 피해자는 당첨된 연하장을 상품인 우표와 오전 9시 이후에 교환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인 거래 증권회사 직원 가사하라는 오전 8시 40분에 출근했다는 철벽의 알리바이가 있습니다. 연하장은 가사하라가 보냈지만, 사전에 당첨 유무를 아는건 불가능해서 미리 알리바이를 만들 수도 없고요.
다카기 경부는 연하장에 소인이 없는 점(연하장은 12월 22일까지 접수분은 1월 1일 도착 보장이라 소인이 찍히지 않음)에 주목해서, 빌견된 당첨 연하장은 가사하라가 사건 당시에 가지고 간 것이라고 추리합니다. 당첨 연하장을 가사하라가 미리 확보할 수 있었던 건 증권회사가 직원에게 연속 번호의 연하장 500장을 주는 전통 때문이었습니다. 연하장 추첨에서 최하등 우표는 100장당 반드시 3장 당첨되므로, 가사하라는 보내지 않고 남겨 둔 100장의 연속 번호 연하장만 있어도 반드시 당첨 엽서를 확보할 수 있었지요. 즉 가사하라는 당첨 번호 발표 후 보관 중이던 연하장 중 당첨된 것을 고른 뒤, 사건 당일 피해자 집에 들고 가서 피해자를 살해하고 집에 있던 자기가 보낸 진짜 연하장과 바꿔치기했던 겁니다. 상품은 따로 교환해서 시체를 발견하러 갔을 때 몰래 피해자 주머니에 넣었고요.

이렇게 일본의 연하장 풍습과 증권 회사의 전통 등을 잘 결합하여 만들어 낸, 최근 본 작품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멋진 트릭입니다. 완벽한 알리바이였지만, 가사하라가 원래 피해자에게 보냈던 연하장이 드러나면서 범행이 밝혀지는 결말까지 깔끔합니다.

피해자와 가사하라의 육체 관계와 같은 불필요한 설정과 진짜 연하장이 발견되는건 순전히 운이었다는 단점은 있지만, 이 정도면 별점 4점도 충분한 수준입니다.

"검은 테두리의 사진"은 오사카로 출장간 범인이 전날 사진으로 찍어 두었던 방송이 오사카에서는 그날 방송된다는걸 알고난 뒤, 전날 찍었던 사진을 알리바이에 이용한다는 도서 추리물입니다.
사실 트릭이 대단하다고 보기는 어렵고, 우연과 운이 지나치게 많이 좌우되는 전개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도쿄와 오사카에서는 같은 방송이라도 방송하는 채널이 다른데, 경찰이 이를 눈치채고 체포한다는 결말도 설득력이 약했고요. 앞서 범인 오사와는 '화면만 사진에 담았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까요. 채널 다이얼이 어떻게 보였다는건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결말에서 호텔 종업원이 오사와의 알리바이를 깨는 증언을 했다고 증언했다니, 사진 따위는 아무런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사실 사진은 다른 사람이 찍어줄 수도 있으니, 애초에 그리 탄탄한 증거라고 하기는 어렵지요.

그래도 TV를 찍은 사진을 알리바이에 사용한다는 설정만큼은 독특해서 눈길이 갑니다. 현재 시점에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아날로그 방식인 덕분입니다. 시대를 초월하지는 못했지만, 시대상을 잘 반영한건 분명합니다.

"죽은 자의 손바닥"에서는 셀로판지를 이용하여 이미 죽은 사람의 손바닥 도장을 찍는 트릭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위의 두 편 보다는 별로에요. 범죄물, 수사물, 추리물의 모든 측면에서 기대 이하거든요. 경찰의 추리는 근거없는 첫인상에 기반하고 있고, 범행 방법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그런데 위의 세 작품을 제외하면 다른 작품은 모두 추리물로 보기도 어렵고, 내용도 그냥저냥합니다.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어요. 간략하게 소개드리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잔혹한 여로"는 일종의 범죄 반전물입니다. 진범이 드러난 뒤 진범마저 개미지옥에 빠진다는 마지막 부분은 꽤 그럴 듯 합니다. "50퍼센트의 행복"은 오래 전 친자 감정 방식에 대한 상세한 소개가 볼만했던 치정 드라마이고요.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지금 시점에 읽기에는 너무 뻔합니다. 결말도 안이하고요.

"고독한 증언"은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를 떠오르게 만드는 드라마입니다.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 가사이 나오미의 증언을 회사측, 유족측이 제각각 제멋대로 유리하게 이용하려 한다는 내용이지요.
설정은 나쁘지 않지만 나오미의 고뇌를 심도깊게 다루지도 못했고, 밝혀진 진상 - 폭탄 테러 - 도 설득력이 약하며, 가사이 나오미가 결국 자고 있었다며 입을 다무는 결말도 영 아닌 탓에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살의의 축제"는 오래전 살인 사건의 범인이 공소 시효가 지난 뒤, 돈으로 진범을 날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동기가 되는 살인범으로 몰린 사람은 가족마저도 영원히 떳떳하게 살아갈 수 없는 일본의 분위기 묘사, 그리고 당시 범인과 유족 측 인물들이 당시 상황을 복잡하게 밝히는 결말은 꽤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미 국내에 소개된 걸 읽은 바람에 다소 김이 빠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만, 잘 모르는 작가의 진면모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좋은 독서였습니다. "공포의 연하장"만큼은 국내에 소개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