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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7

양심의 문제 - 제임스 블리시 / 안태민 : 별점 1.5점

양심의 문제 - 4점
제임스 블리시 지음, 안태민 옮김/불새

과학자 4명이 외계 행성 리티아에 파견되었다. 그들은 파견 기간 마지막에 리티아를 어떻게 할 것인지 투표를 했고,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리티아를 처리하려 했지만 그들 중 예수회 소속 성직자인 루이스-산체스 신부가 리티아의 근원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데...

국내 유일의 SF 전문 출판사 불새의 "불새 과학소설 걸작선" 네 번째 작품입니다. 1959년 휴고상 장편부문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명성도 익히 들었던 작품인데다가 "SF 명예의 전당 1"에 수록된 "표면 장력"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기에 기대가 무척 컸습니다.

허나 기대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재미를 떠나서 이야기의 핵심인 '외계 행성 리티아의 원주민들은 거대 파충류로 지성을 갖춘 존재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공동체는 완벽한 수준 (전쟁, 범죄는 커녕 "갈등"을 뜻하는 말 조차 없다)이다.' 라는 루이스-산체스 신부의 주장을 이해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었던 탓입니다. 철저하게 지구의 카톨릭 종교관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외계 행성을 왜 카톨릭 신앙 체제로 해석해야 하나요? 과학은 과학으로 해석해야죠. 구태여 종교를 끌어들여 이상한 결론을 내리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외계인들의 고도 문명을 보고 고작 하는 생각이 사탄이 만들었네, 이 행성이 교회를 부정하게 만들겠네라니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이에 비하면 차라리 호전적인 클리버가 주장하는 군수 공장 계획이 훨씬 논리적이에요. 세부 진행에 디테일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최소한 과학적으로 설명은 되니까요.

후반부는 더 별로입니다. 리티아인 슈트카에게서 선물로 받은 그의 아들 에그트베르치가 지구에서 성장한 후, 갈등과 혼란을 조장하는 주역이 된다는 내용인데 진부할 뿐더러 딱히 와 닿지도 않으니까요. 마지막에 에그트베르치가 리티아로 돌아가려 하는 것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종교적인데 굉장히 불쾌합니다. 에그트베르치가 지구에서는 위험 인물이었지만 리티아에서도 그러할 것이라는 확신부터 잘못된 것 아닌가요? 설령 그렇다치더라도 리티아인들이 모두 정신적으로 감염되어 위험하게 될 것이라는 것 역시 지나친 확대 해석입니다. 오히려 지구의 안 좋은 것을 배운 에크트베르치가, 리타이를 멋대로 개조하려는 지구에 대항하여 싸우는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가정을 억지로 부정하는 것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혹 리티아인들이 지구와 적대적이 된다 하더라도 그들을 모두 지워버린다는 결말은 더 끔찍합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에 버금가는 맹목적인 광신도들의 마인드와 다를게 없어요. 리티아 폭발의 도화선이 된 것이 신부의 엑소시즘 기도문이라는 것은 코미디에 가깝고요.

하긴 이 모든 것이 제국주의적 발상으로 보면 당연해 보이는 이야기이긴 합니다. 종교적 이유로 타 국가를 침략하여 그곳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던 과거의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 것과 똑같거든요. 리티아를 지워버리는 행동도 제국주의 시대 종교, 혹은 기타 이유로 학살을 자행했던 과거와 명확히 겹치고요.
그런데 이러한 과거를 SF로 바꾸어 당당하게 써내려간 이유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단순한 침략이나 정복이 아니라 진지한 수도사 시점의 이야기를 그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작품이 "미션"이 되는건 아니죠. 루이스-산체스는 철저하게 제국주의 세계관에 기반한 인물이니까요.
제목의 "양심의 문제"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양심이 이러한 제국주의와 종교에 기반하고 있다면 양심부터가 왜곡된 것이 아닌지 한번 의심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명성에 값하는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리타아에 대한 설정만큼은 압도적이에요. 리티아의 수도 코레데시치 스파아트에 대한 상세한 묘사에서 시작되는 설명은 리티아인들의 행태와 문화, 기술과 과학 지식 전반을 아우르는 방대한 내용인데 창의적인데다가 설득력있게 쓰여져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리티아인들의 출생에서 성장까지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었어요.

허나 이해도, 동의도 할 수 없는 이야기에 높은 점수를 줄 수는 없습니다. 책의 장정과 디자인 역시 익히 알고 있었던 대로 수준 이하고요. 퀄리티에 비하면 가격도 터무니 없다 생각될 정도입니다. 엄청난 미주가 붙어있는데 각주 처리를 하지 않은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도무지 팔 수 없어 보이는 이런 작품을 출판한 용기가 가상하여 아무리 잘 봐주고 싶어도, 양심상 제 점수는 이게 전부입니다.

덧붙이자면 카톨릭, 혹은 기독교 단체를 통해 판매했더라면 조금이나마 성적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군요. 과학으로 포장한 종교관 홍보물이라는 점에서는 과거 라엘리안에서 발표했던 일련의 소설들과 비슷하니까요.

2016/06/29

이 사람을 보라 - 마이클 무어콕 / 최용준 : 별점 2점

이 사람을 보라 - 4점
마이클 무어콕 지음, 최용준 옮김/시공사

어렸을 때부터 기묘한 관심병과 자기 비하로 점철된 찌질한 인생을 살아온 칼 글로거는, 서점 모임에서 우연히 알게 된 과학자가 타임머신을 만든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 여행자 지원 제안은 거절했지만, 오랜 시절 알아온 연인같은 섹스 파트너 모니카의 변절 후 즉흥적으로 시간 여행에 자원하여 예수가 십자가 형을 받기 1년 전으로 향하는데...

걸작으로 소문난 작품이죠. 이런 저련 소개 자료를 통해 관심이 가던 차에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우선 카톨릭 - 기독교적 사고방식이 작품을 관통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뜨입니다. 이건 직전에 읽었던 "양심의 문제"와 비슷합니다. 허나 "양심의 문제"가 카톨릭 세계관의 확고부동함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 이 작품은 어떻게보면 신성을 부정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정 반대의 시각을 보여줍니다. 아울러 과학적 설정과 크게 관계가 없다는 것도 큰 차이점이고요. 시간 여행을 다루고는 있지만 그 방법이 자세히 설명되지 않는 등 과학적 설정은 작품의 부수적인 요소에 불과하거든요.

하지만 확실히 시대가 너무 많이 지난 듯 싶습니다. 외계인이 인류를 창조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무리없이 받아들여지는 시대에서 '예수는 미래에서 시간여행을 한 관심병자 찌질이였다'는 내용이 충격적으로 다가올리 없지요. 작품이 발표된 1969년 당시였더라면 모를까, 지금은 그 때만큼 종교적 신념이 굳건하지도 않으며 더 충격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왔기에 딱히 대단한 이야기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칼 글로거가 예수 역할을 수행하리라는 것도 쉽게 예측 가능하기에 의외성을 찾기도 힘들었고요.

아울러 후대 전해진 성경 그대로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비판적으로 묘사하는건 오류라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세례 요한을 구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이 성경 그대로야 하기 때문에 참수되도록 방치하고, 수제자들은 이름을 보고 뽑고, 제자 중 유다를 시켜 자기 자신을 고발케 하는 등의 모습이 그러한데 이는 타임 패러독스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성경 그대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현대인의 상식이기도 하고요. 외려 그가 역사를 바꾸었더라면 더 큰 문제가 생겼을 겁니다. 칼이 정상인은 아니며 이 행동을 통해 그가 신이 아니라 가짜 흉내내기에 불과했다는 주제를 강조하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번지수가 좀 틀렸습니다.
그나마도 완벽하게 성서 그대로도 아니에요. 특히 가장 어려울 부활을 대충 넘어간 것은 아쉽습니다. 그의 시체에 특별한 효험이 있다는 사람들에 의해 시체가 도난당해 사라졌기에 생긴 소문이라고 설명되는데 많이 부족했습니다. 후대에 그렇게 받아들였을 과학적인 무언가가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고전 걸작답게 의외성을 포기한다면 생각할거리가 많긴 합니다. 예수의 신성을 모욕했다기 보다는, 그도 그냥 인간이었을 것이다는 의견에 시간 여행을 접목한 새로운 견해로 볼 수 있으니까요. 칼의 전 연인 모니카의 다음과 같은 대사처럼요. "과학 의식이 훨씬 더 우월한데 그걸 제치고 종교 의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종교는 지식의 그럴싸한 대체물이야. 하지만 이제 그런 대체물이 더는 필요가 없어. 칼, 과학은 사고 체계와 윤리를 형성할 수 있는 굳건한 바탕을 제공해준다고. 과학은 행동의 결과를 보여주고. 사람들은 그러한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자신들이 쉽사리 알 수 있어 이제 더는 천국에서 내려주는 당근이나 지옥에서 휘갈기는 채찍 따위는 필요 없단 말이야." 말 그대로 과학이 종교를 만든 것이나 다름 없다는 해석인데, 작품 설정과 연계해 보면 나름 새로운 맛이 느껴집니다. 과학이 세상을 지배했던 60년대의 분위기도 잘 알 수 있고요.

작가의 필력도 대단합니다. 특히 우울증과 자기 혐오에 사로잡힌 무능력한 관심병자 칼 글로거에 대한 장황한 서사와 묘사가 압도적이에요. 왠지는 모르겠지만 고급스러우면서도 천박한 양 극단을 오가는 묘사는 확실히 영국 작품이구나 싶은 생각도 들고요. 시간 여행 후 칼 글로거가 예수로 거듭나는 과정과 칼 글로거의 일대기를 병행하여 전개하는데, 중간중간 심리 묘사와 대사를 적절히 끼워넣는 솜씨도 일품입니다.
요셉의 아들 예수는 정신지체아였고 마리아는 창녀와 다를바 없는 여자였는 식의 약간의 반전도 나쁘지 않았으며,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를 It's a lie, It's a lie, It's a lie로 풀어낸 마지막 장면은 최고였습니다. 현대의 랩으로 응용해도 라임이 딱딱 맞아 떨어지죠. "잇츠어라이, 잇츠어라이, 옐로이옐로이, 사박타니..."

결론내리자면 장, 단점이 명확한 작품입니다. 물론 단점의 가장 큰 요인은 늦게 소개된 탓이라 마냥 감점하기는 어렵습니다. "양심의 문제"보다 나은건 분명하고요. 허나 개인적으로는 "도라에몽"보다 나은 점을 모르겠더군요. 역사적 가치와 의의가 더 큰 고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SF 팬이시라면 한번 읽어봐야 할 작품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딱히 읽어볼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2019/11/08

살인의 문 1, 2 - 히가시노 게이고 / 이혁재 : 별점 2점

살인의 문 1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재인
살인의 문 2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재인

다지마 가즈유키는 치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유복하게 보냈다. 그러나 할머니의 죽음 뒤 들불처럼 번진 소문 탓에 부모가 이혼한 뒤 아버지가 꽃뱀에게 걸려 집안이 파산하고 말았다. 겨우 취직한 다지마는 어린 시절 친구 구라모치 때문에 이런저런 사기 행각에 발을 들이게 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2003년 발표 장편입니다. 제목은 주인공 다지마가 마지막에 구라모치를 죽이려다 망설인 순간, 구라모치가 습격당해 식물인간이 된 사건에서 형사가 한 말에서 따 왔습니다. 어떤 계기가 주어짐으로써 살인이라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다지마에게는 그 계기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계기가 있어야 살인자가 되는 문을 통과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작품은 제목만큼 거창한 사건이 벌어지는 추리물이나 범죄물은 아닙니다. 불행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듯한 주인공 다지마가 초등학교 동창이자 친구 구라모치와 악연으로 엮여 보낸 평생을 그리는 대하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평생이라고 해도 30대 정도에 불과하지만....
하여튼, 작가의 다른 작품인 "백야행"이나 "비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도 장기간에 걸친 등장 인물들의 드라마를 그리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환상적인 요소도 없고, 범죄물이나 추리물도 아닌 드라마로 접근하고 있다는게 차이점입니다.

물론 다지마를 정신적으로 옭아매는 구라모치의 사기 행위와 직접적인 살인을 비롯하여 수 차례의 살인 미수, 혼인 빙자 사기와 결혼 사기 등 온갖 범죄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범죄물로 볼 여지도 있습니다. 특히 사기 행위의 디테일, 그 중에서도 두 번째 사기인 금 예탁 사기의 디테일은 상당한 수준입니다.
다지마가 자신을 함정에 빠트린게 아내 미하루라는걸 밝혀내는 과정도 아주 그럴싸 합니다. 뻔한 트릭이고, 증거도 스토커 행위로 얻기는 하지만 그래서 더 설득력이 높게 느껴졌어요. 

그러나 이러한 범죄는 모두 다지마가 구라모치 때문에 평생 짊어지고 가게 된 불운의 한 종류일 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범죄 소설 전문가라서 범죄가 소재로 사용되었던 것에 불과하지요. 그래서 아무리 봐도 보조적인 장치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야구 이야기였다면 에이스였지만 어깨가 망가져서 선수 생명이 끝나고, 연인은 타 팀 4번 타자와 결혼한다는 "공포의 외인구단" 서두와 다름없는 셈이에요. 오혜성에게는 손 감독이라는 스승이자 멘토, 그리고 엄지라는 목숨을 건 집념의 대상이 있었지만 다지마에게는 불운만 가져다주는 악우 구라모치만 있었다는 정도만 다릅니다.

이렇게 범죄물, 추리물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기대와 살짝 다르지만 흡입력 만큼은 정말 대단합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이혼, 아버지의 파산에 이은 몰락과 전학 등으로 겪게 되는 이지메, 첫사랑 소녀는 구라모치와 사귄 뒤 자살하고 그 뒤 구라모치와 엮여 이런저런 사기 행각에 가담하다가 조금 삶이 나아지나 싶을 때 만난 여자 탓에 비참한 결혼 생활을 거쳐 이혼하는 등 행복이라는 걸 거의 느끼지 못하는 어마무시한 삶이 정말로 파란만장하기 때문입니다. 불행의 수준만 놓고 보면 기리노 나쓰오의 주인공들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에요.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에서 이렇게 불행한 등장 인물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파란만장하기는 한데,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면 딱히 알맹이가 없다는 문제는 큽니다. 일단 지나치게 작위적이에요. 다지마의 선택이 항상 안 좋은 결과를 낳는게 너무 뻔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 실수를 했을까 싶을 정도라 설득력이 떨어지고 답답합니다.

게다가 중요한 실수는 모두 다지마 본인의 실수라서 딱히 구라모치 탓을 할 이유도 없어요. 첫 직장에서 다단계 판매 회사의 사기스러운 아르바이트에 대해 잠깐 만나던 가나에에게 말한 것도 다지마 본인의 실수이고, 미하루와 결혼을 결심한 것도 다지마 본인이니까요. 미하루와의 결혼은 구라모치의 음모가 있었다 하더라도 결혼하라고 등을 떠민건 아니니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결혼한 뒤 삶이 팍팍했다 하더라도 불륜을 저지른 것도 명백한 본인 잘못이고요.

첫사랑 요코의 자살도 구라모치에게 책임을 묻기는 어려워요. 정황 상 요코의 아이가 구라모치의 아이라는건 증명할 수 없거든요. 결국 진상은 밝혀지지도 않잖아요?
그 외에도 보석을 파는 다단계 회사 사기, 동서 상사의 금 예탁 사기, 마지막의 찬스 메이크 주식 사기 모두 본인이 돈 때문에 구라모치와 협력한건 사실입니다. 양심의 가책 어쩌구 해도 무려 3번이나 유사한 범죄에 발을 담근 주제에 정의로운 척을 하는건 어림 반푼어치도 없지요. 아무리 바보라도 이 쯤 되면 구라모치를 멀리하는게 당연할텐데, 그런 부분에서의 설득력도 약합니다.

아울러 다지마가 불행에 빠지게 된 계기인 부모님의 이혼은 구라모치가 퍼트린 소문에서 시작되었다는 마지막의 반전도 문제에요. 구라모치가 금수저 다지마에게 열등감을 가진 나머지 그만큼 성공하지 못하면 내 수준으로 떨어트리겠다! 고 결심했다는 설정은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맥락을 보면 다지마의 어머니가 시어머니에게 살의를 품었던건 분명한 사실이에요. 시도도 있었고요. 즉, 구라모치가 소문을 낸 건 잘못이라 하더라도 그 소문은 진짜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운이 좋아 범행이 밝혀지지 않았을 뿐, 소문을 내지 않았어도 동일한 결과가 빚어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모든 원인을 구라모치에게 돌리는 건 무리입니다.
그리고 다지마의 집안이 몰락한 결정적인 이유는 아버지가 꽃뱀에 걸려든 탓입니다. 이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꽃뱀을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가정일 뿐이지요. 아버지는 결혼 중에도 가정부 아주머니와 불륜을 저지른 호색한이니 별 차이가 없었을 것 같아요.

구라모치가 다지마에게 집착했던 이유로 구라모치의 성공 철학 - 성공하려면 내버릴 돌이 필요하니 버리기에 만만한 인재를 항상 곁에 두어야 하고, 그 인재는 믿을 수 있어야 하는 상대여야 한다 - 이 소개되는데 이 역시 합리적이지 못해요. 구라모치가 다지마를 사기 사업에서 내버린 적은 없으니까요. 오히려 다지마는 월급 한 번 밀리지 않고 잘 빠져나간 편입니다. 특히 마지막 사건인 찬스 메이크 주식 사기에서는 구라모치가 마음만 먹으면 다지마를 사기의 책임자, 총책으로 둔갑시키기 어렵지 않았던 점에서 볼 때 더더욱 그러합니다.
수차례 등장하는 다지마의 살해 계획도 반복되어 지루한건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청산가리 등 기껏 구했던 독극물은 다 어쨌는지 제대로 설명되지도 않고요.

캐릭터도 분량에 비하면 별로입니다. 특히나 다지마는 묘사된 양에 비하면 알맹이가 너무 없어요. 대표적인게 어린 시절 독에 탐닉했다는 묘사입니다. 덕분에 이지메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딱히 어울리는 결과를 빚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지마가 반했던 유키도 사기꾼에 대항하던 강단있는 아가씨에서 어느새 구라모치에게 푹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여성으로 전락하고요. 언변좋은 사기꾼 구라모치만 그나마 볼 만 했습니다.
그런데 구라모치의 행각을 보면 다지마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었건 간에 액면가만 놓고 보면 평균 이상의 친구가 맞아요. 금전적인 면에서는 확실히 그러합니다. 이전 사기 행각에서의 소소한 도움은 둘째치고라도 마지막에 찬스 메이크 주식 사기에서는 거액의 돈을 댓가없이 빌려주고, 회사에서 고액의 연봉을 지급하며 임원 대우로 데리고 있었을 정도니까요.

이렇게 재미는 있지만 설득력없고, 흥미위주의 이야기가 반복된다는 점에서는 무협지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문제는 무협지는 주인공이 성장이라도 하지, 다지마는 끝까지 제자리 걸음이라는 점이지요. 즉, 무협지보다도 못합니다. 흡입력은 대단해서 킬링 타임용으로는 아주 빼어나나 작가의 최고작으로 보기에는 무리네요. 팬이 아니시라면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16/12/31

2016 내 블로그 리뷰 총결산

2015 내 블로그 리뷰 총결산

13차, 열 세번째를 맞는 블로그 결산입니다. 숫자부터 정리해보면, 2016년 읽은 책 중 리뷰를 남긴 책은 추리 / 호러 장르문학 53 (53)권, 기타 장르문학 8 (10)권, 역사서 18 (12)권, 디자인 및 스터디 도서 4 (5)권, Food 및 구루메 관련 도서 9 (7)권, 기타 도서 15 (21)권으로 모두 107 (107)권입니다(괄호는 작년). 작년과 거의 비슷하군요.

각 항목별 베스트 - 워스트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올해 발표된 작품 기준이 아니라 제가 올 한해 보고 읽은 것들 기준입니다.


2016년 베스트 추리소설 :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단평 : 세상은 넓고, 모르는 작가도 많고, 재미있는 작품도 아직 이렇게나 많다! 

올해 추리, 호러 장르물 중 별점 4점 이상 작품은 단 한편도 없습니다. 그런데 별점 3점짜리는 "별도 없는 한밤에", "천사들의 탐정", "미스테리아 8호", "사냥개 탐정", "검은 수도사", "가면 무도회 1,2",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엠브리오 기담"의 여덟 편이나 됩니다. 

다 좋은 작품들이지만 한편을 꼽기 위해서 우선 잡지인 "미스테리아 8호"를 뺐습니다. 호러 성향이 강한 "별도 없는 한밤에", "엠브리오 기담"과 역사 모험물 성격이 강한 "검은 수도사"도 빼면 네 편이 남네요. 다 좋은 작품들이지만 이 중 추리적으로도 괜찮고 재미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새로운 발견의 기쁨을 선사한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를 올해의 베스트로 꼽습니다.

2016년 워스트 추리소설 :

"추억의 시간을 수리합니다" 

단평 : '미스터리'가 아니었다... 

2016년에는 별점 2점 이하의 작품이 무려 16편이라고 한탄했는데 올해는 26편입니다! 읽은 작품 중 반 가까이가 수준 이하였다는 이야기지요. 참으로 너무합니다. 최악인 별점 1.5점 이하도 무려 열 편이나 되고요.

하지만 최악 중의 최악인 별점 1점을 획득한 작품은 이 작품 뿐입니다. 최악인 이유는 책의 완성도를 떠나 '미스터리'가 아닌 탓이에요. 그냥 청춘 연애물일 뿐이거든요. 작품의 수준을 떠나 구태여 추리물이라고 소개하여 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 괘씸한 마케팅 때문에 올해의 워스트로 꼽습니다.

2016년 베스트 기타 장르문학 : 

"제라르 준장의 회상" 

단평 : 시대를 뛰어넘다. 

올해의 기타 장르문학에서는 별점 3.5점의 이 작품이 베스트입니다. 모두 10권도 읽지 않아 한권의 베스트를 꼽기는 좀 애매하지만요. 여튼 코난 도일 경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고전 명작 모험물입니다.

2016년 워스트 기타 장르문학 : 

"양심의 문제" 

단평 : 바탕에 깔린 사상 문제. 

도서출판 불새의 용기있는 행보에는 항상 박수를 보내는 바이지만... 이 작품만큼은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역겨운 식민지 시대의 유산인 제국주의적 세계관을 은연 중에 포장하여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2016년 베스트 역사 도서 : 

"신들의 연기, 담배" 

단평 : 교양과 재미의 절묘한 결합. 

이 책은 올해의 유이한 별점 4점짜리 책입니다. 교양과 재미,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놀라운 결과물이죠. 제가 꼭 흡연자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2016년 워스트 역사 도서 : 

"조선의 武와 전쟁" 

단평 :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역사 도서는 좀 가려읽는 편이라 워스트가 대체로 없는 편인데 올해는 이 책이 뽑혔습니다. 단평대로 기대한 내용에 전혀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도저도 아닌 결과물이었어요.

2016년 베스트 디자인 / 스터디 도서 : 

올해 이 분야는 달랑 4권만 읽었기에 별도로 평하지는 않겠습니다. 내년에는 이 쪽 분야도 좀 더 열심히 읽겠습니다.

2016년 베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백미진수" 

단평 : 실력자가 애정을 담아 쓴 미식 에세이의 진수.

이 책은 올해 유이한 별점 4점짜리 책입니다. 읽는 내내 즐거우면서도 유용한 좋은 에세이였어요.

2016년 워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레시피" 

단평 : 발췌에 이은 레시피 소개에 그친, 날로 먹은 책 

제목 그대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한 음식, 요리를 발췌한 후 해당 레시피 소개가 전부인 책. 저자의 아이디어는 눈꼽만치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2016년 워스트 기타 도서 :

"서프라이즈 : 인물편" 

단평 : 이 책이 존재할 이유를 모르겠다. 

올해 기타 도서는 전부 고만고만해서 베스트를 꼽기는 쉽지 않네요. 별점 3점짜리 작품이 있기는 하지만 ("장서의 괴로움") 독보적이라고 하기는 어렵거든요. 하지만 워스트는 확실합니다. 총 4편의 별점 1.5점짜리 망작들 중에서도 이 책이 선명하게 빛나기 때문입니다. 왜 책이 나왔는지 이유 자체를 모를 무의미한 결과물입니다.

2016년 베스트 기타 Comic :

"피너츠 완전판" 

단평 : 발간만으로도 감사한 완전판! 

올해 별점 3점을 넘는 만화는 많았지만 그렇다고 압도적으로 점수가 좋은 작품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총 4권을 읽었고, 대체로 별점이 우수했던 "피너츠 완전판"을 올해의 작품으로 꼽아봅니다. 단평 그대로 발간된 것 만으로도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2016년 워스트 기타 Comic : 

"역시 빵이 좋아!" 

단평 : 만화로 보기에는 여러모로 애매했다. 

올해 별점 1점짜리 망작은 본 작 외에 "스파이 vs 스파이", "산적 다이어리 2"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은 최소한 '만화' 이기는 한데 이 작품은 아무리 봐도 만화가 아닙니다. 빵 소개서를 만화처럼 만든 것에 불과하니까요. 최소한의 이야기와 재미도 없기에 올해의 워스트로 꼽습니다.

그외 영화, 만화 등은 대체로 부분별로 5편 이상 감상한 것이 없기에 올해는 선정하지 않습니다.


결산평 : 

총 독서 권수가 작년과 똑같다는게 놀라운데 여튼 올해도 100권을 넘겼습니다. 이 정도면 취미인으로 할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제가 나이가 든 탓인지, 아니면 출간작들의 수준이 갈 수록 떨어지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평균 이하의 작품들 수가 급증했다는 겁니다. "장서의 괴로움"에 나온 유명한 장서가 다니자와의 명서 감정술처럼 - "명저라는 홍보에 넘어가 샀던 책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류 이하 책을 이것저것 찾아 읽지 않았다면 초일류를 초일류라고 인정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 좋은 작품을 만나기 위한 통과의례일 수는 있겠지만, 몇몇 망작들은 그야말로 읽는 시간조차 아깝기 그지 없었습니다. 뭐 좋게 생각하면 이런 작품들을 소개하는게 제 미미한 블로그의 존재 의미겠죠. 찾아주시는 분들의 시간이라도 아껴야 할 테니까요.

하여튼,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여러분들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고 성취하시는 한해가 되셨으면 합니다. 

작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분들이라면 남들이 관심갖지 않는 사소하고 디테일한 것들에도 관심을 가지시는, 정말로 세심한 분임이 분명할테니 내년에는 더욱 잘 되실거에요. 사랑합니다~!

2023/02/18

책과 열쇠의 계절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3점

책과 열쇠의 계절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엘릭시르

요네자와 호노부청춘 학원 추리 단편집. '고전부'나 '소시민' 시리즈와 비슷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탐정의 역할입니다. 이 시리즈는 두 주인공인 호리카와와 마쓰쿠라가 각자 추리를 펼치며 서로를 보완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약간 버디물스러운 느낌도 들어요. 뛰어난 관찰력과 독특한 발상의 추리력을 갖춘 호리카와는 뻔한 고등학생 탐정 캐릭터인 반면, 모든걸 의심하면서 추리를 시작하는 마쓰쿠라의 독특함은 나쁘지 않았고요.

또 두 주인공이 도서위원이라서 대부분의 이야기에 주제가 되는 책이 등장한다는 것도 차이점인데, 저 역시 독서 애호가(?)인지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일상계로 한 획을 그은 작가답게 평범한 일상계로는 우수한 시리즈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일상계를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913><913>>
도서위원 호리카와 지로와 마쓰쿠라 시몬은 선배 우라가미로부터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금고를 열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과거 둘이 에도가와 란포의 <<흑수조>> 속 암호를 풀었던 모습을 눈여겨 보았던 탓이었다.
일요일, 우라가미 선배 집에 방문한 둘은 할아버지 서재 방에 놓여져 있었던, 어울리지 않았던 책들이 단서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마쓰쿠라는 정보를 바로 공개하지 않고 따로 조사가 필요하다며 호리카와와 밖으로 나온 후, 그가 생각했던 의심을 털어놓는데...


등장하는 책은 많지만, 중요한건 할아버지가 남긴 단서가 되는 책들

마쓰쿠라의 의심은 우라가미 선배가 후배 둘에게 금고를 열어달라고 부탁한 이유가 무엇인지에서 시작됩니다. 가족이 정당한 유산 상속인이라면 금고를 여는 전문가를 부르면 됐으니까요. 그래서 마쓰쿠라는 우라가미 선배와 선배의 가족은 금고를 그렇게 쉽게 열 수 없는 사람이라고 추리합니다. 선배 집에서 대접받았던 차는 시판차와 똑같은 맛이었는데 그걸 끓여서 따로 찻주전자에 내 놓은 이유, 화장실을 간다고 했을 때 화장실 문 앞에서 기다렸던 이유 등 기묘했던 행동은 그 집이 선배 가족의 집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찻잎이 어디있는지는 모르지만 살고 있는 척을 해야 해서 차를 끓여 내 놓았고, 화장실 문 앞에서 기다렸던건 집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닐까봐 걱정했던 것이었지요.
할아버지의 단서는 이상한 책의 분류 번호에 대한 것으로, 그것을 통해 금고를 열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이를 이용하여 선배 가족의 정체를 밝히는 작전을 펼친 것도 눈여겨 볼 만합니다. 책 4권의 3자리 분류 번호를 50음도로 변환하면 모두 6자, "타스케테쿠레 (살려줘)"라는 말이 된다고 조작하는 방식으로요. 이 작전으로 선배와 선배 가족의 눈을 돌린 틈에, 마쓰쿠라가 집 안을 조사하여 노인을 발견하고 구해내게 됩니다.
금고 안 내용물은 할아버지 그림과 가족 앨범이었다는 결말도 깔끔했어요.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눈에 뜨이기는 합니다. 할아버지가 말했던건 서재방에 단서가 있고 그건 "어른이 되면 알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허나 서재방의 책 중 다른 책들과 사뭇 다른 책이 있다는건 어른이 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금고 번호가 도서 분류 기호라는건 어른이 된다고 알 수 있는건 아니고요. 즉 할아버지가 말했던 단서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선배 가족이 금고를 열기 위해 후배를 부른 것도 이상했어요. 저 같으면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는 정도로 끝냈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은 아쉬웠습니다.

<<록 온 로커>>
도서위원 컴비 둘은 함께 미용실을 찾았다. 함께 가야 40% 할인이 되기 때문이었다.

점장이 "귀중품은 '반드시' 지참하실 것"을 말했고, 이걸 이발 중 이야기하는걸 저지했다, 그리고 곧 종료 시간이라고 말하고 난 뒤 염색이 필요해 보이는 손님을 받았다는 등의 단서를 조합하여 마쓰쿠라는 미용실에 최근 도난 사건이 있었고, 범인을 잡기 위해 점장이 함정을 팠다는 추리를 펼칩니다. 호리카와는 마쓰쿠라의 도움으로 둘의 예약을 받았던 곤도가 범인이라는걸 알게 되고요. 이 작전을 모르는 사람을 점장이 의심하고 있으니, 그걸 모르고 예약을 받은 곤도가 범인이라는 추리로요. 이는 결국 사실로 밝혀집니다.
마쓰쿠라의 추리에 이어 호리카와의 추리가 이어지는 티키타카가 볼만했고, 마지막에 범인 곤도가 도주하는걸 저지할 수도 있었지만 나서지 않았던건 소시민 시리즈와 비슷한 감성을 느끼게 해 주어서 좋았습니다. 평범한 일상계로는 적절했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일본의 미용실 모습은 우리나라와 별 차이가 없는데 비해 남자 둘이 미용실을 가는게 굉장한 금기인 것처럼 묘사되는게 신기했습니다.

<<금요일에 그는 무엇을 했나>>
기말고사가 진행되고 있는 중에 후배 도서위원 우에다 노보루가 호리카와와 마쓰쿠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지난주 금요일, 학교에 누군가 침입하여 교무실 앞 창문이 깨졌는데 그걸 보고 학생지도부 요코세 선생이 노보루의 형인 불량 학생 우에다 쇼가 시험 문제를 훔치려 했다고 의심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요코세 선생은 이른바 '명탐정' 같은 사람으로, 무슨 사건이 터지면 무조건 학생 누군가를 아무런 근거없이 범인으로 지목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우에다 쇼가 그 날, 밤 늦게 돌아왔는데 무슨 일을 했는지 밝히지 않고 있는 점이었다...
둘은 우에노 쇼가 결백하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형제가 같이 쓰는 방을 수색하는데...


등장하는 책은 <<파랑새>>. 유리창을 깬 원인이기도 한 새와 연결되는 장치. 헌책방에서 산 이름을 알 수 없는 애장판 만화도 중요한 단서 중 하나. 그 외에도 노보루가 관심있어하는 책으로 나니아 연대기를 비롯한 판타지 시리즈가 언급됨.

추리를 통해 밝혀낸 우에다 쇼의 알리바이는 가족과 별거 중인 아버지 병문안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동생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있어서 그 사실을 숨겼던 것이지요.
우에다 쇼의 바지 주머니에서 '라이라이켄'이라는 라면집 쿠폰을 찾아낸 뒤, 이상할 정도로 좁았던 집 등의 단서를 통해 아버지가 별거 중이라는 노보루의 답변을 끌어내어 우에다 쇼의 그날 행적을 추리해내는 과정은 깔끔했습니다. 완벽한 일상계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이 사건을 맡아서 끌어가는 과정과 결말이 다소 석연치 않습니다. 우에다 노보루의 부탁부터 억지스럽습니다. 왜 호리카와에게 부탁했는지 모르겠어요. 작중에서도 우에다 혼자서는 도저히 알리바이를 찾을 수 없어서 그랬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호리카와에게 부탁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호리카와가 딱히 알리바이 찾기로 이름을 떨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친한것도 아니니까요.
호리카와가 부탁을 선뜻 받아들인 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에초에 우에다 쇼는 증거가 집에 있다는 말은 하지도 않았으니까요. 설령 부탁을 받아들인다 해도 집을 뒤지느니 우에다 쇼를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게 더 나은 해결책이었어요.

이에 대해 마쓰쿠라의 추리 - 우에다 노보루가 형의 퇴학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도 좁고 어차피 형은 아버지랑 살 터였기에. 그래서 알리바이 증거를 찾아내서 없애려고(형을 퇴학시키기 위해) 호리카와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호리카와는 인간 관계가 깨져도 무방한 사람이었으니까 - 는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형의 퇴학을 바란다면 알리바이를 증명하지 못하는 현재 상황이 이상적입니다. 구태여 알리바이를 찾아내고, 또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을 늘린다는건 말이 안되잖아요? 애초에 학교에서 퇴학당할 정도의 위기에 처한다면, 증거 유무와 관견없이 병문안 당사자였던 아버지가 가만히 있지도 않았을테고요. 모든 상황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마쓰카와의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한 주장으로 보이지만, 이전에 보여줬던 추리력과 상반될 정도의 비합리적인 주장이라서 오히려 캐릭터에 안 좋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리창을 깬건 마쓰카와였다는 결말도 별로였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없는 책>>
3학년 선배 고다가 자살한 뒤, 자살한 선배의 친구 하세가와가 도서실에 나타났다. 그는 고다가 책 사이에 유서를 넣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라며, 빌렸던 책을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둘은 하세가와의 빌린 책에 대한 언급을 통해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걸 알아채는데....


등장하는 책은 이와나미 문고에서 나온 쇼펜하우어의 <<자살론>>.

극히 적은 정보만 가지고 원하는 책을 찾아준다는 이야기는 서점이나 도서관이 무대인 작품에서는 굉장히 많습니다. 아예 이런 내용이 핵심인 <<서점원 하야미>>라는 만화가 떠오르네요. 이번 이야기는 이런 류의 전형적인 스타일로 전개되다가, 마지막에 반전과 함께 여운도 남기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하세가와가 찾아달라고 하며 알려준 핵심 정보는 고다가 책을 읽다가 덮었는데 책 등이 보였고, 밑에 바코드 스티커가 있었다는 겁니다. 고다가 좋아했던건 소설책이고요. 그런데 현장 조사를 통해 하세가와는 고다의 오른쪽에 있었다는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일본의 소설책은 대부분 세로쓰기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기므로, 책을 읽다가 덮으면 하세가와의 위치에서 책 등과 스티커를 함께 보는건 불가능합니다. 즉, 하세가와의 말은 거짓말이었던 것이지요.
마쓰카와는 고다 선배의 유서를 날조하려는 속셈이었다고 하세가와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호리카와는 고다 선배의 유서는 육필이라 위조할 수 없고, 오히려 유서를 받은 뒤 친구가 자살한 탓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은밀하게 유서를 드러내려고 했던 거라고 추리하며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묵직한 내용에 추리적으로도 좋았으며, 두 주인공의 차이를 강하게 드러내는 결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람의 선의를 믿지 않고, 무조건 나쁜 의도일 것이라 짐작한 마쓰카와의 잘못과 이를 반박하는 호리카와의 말이 대미를 장식하거든요.
선배 교실에 가서 불필요한 연극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문제는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옛날 이야기를 해줘>>
마쓰카와는 호리카와에게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숨겨두었던 현금을 함께 찾아보자고 부탁했다. 그간 호리카와의 추리력을 눈여겨 보았던 탓이었다.
호리카와는 마쓰카와가 내 놓았던 과거의 단서들를 함께 검토하다가 과거 마쓰카와 가족에게 차가 한 대 더 있었다는걸 추리해내었고, 둘은 결국 그 밴을 찾아내는데...


여러 책이 등장하지만 핵심은 아버지 밴 안에 있었던 마쓰모토 세이초의 "제로의 초점".

보물찾기 이야기인데 마쓰카와가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 호리카와가 잡아낸 마쓰카와의 이야기 속 단서 - 동생이 멀미를 했다는 것 - 라는 착안점은 좋았습니다. 그때까지 마쓰카와는 당시 탔던 차가 렌트카라고 생각했는데, 동생의 멀미는 담배 냄새 때문이라는걸 깨닫고 담배 냄새가 나는 차를 렌트할리가 없었다는걸 깨닫게 되거든요. 결국 그 차는 빌린 차가 아닌 아버지 차였다는 추론에 이르게 됩니다. 또 이 추리는 자동차로 여행을 가다가 동생이 심하게 멀미를 했었다는 별게 아닌 추억담이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는 점과 호리카와는 마쓰카와가 잊고있던 기억을 떠오르게끔 도와주는 정도의 도움을 줄 뿐이라는 점에서 완벽한 일상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뒤 차를 찾아내는 과정, 그리고 차 속에서 발견한 열쇠의 '501호'가 어디인지를 추리하는 과정도 그럴듯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책'이 중요 단서로 사용된다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차 안에 굴러다니던 헌 책이 도서관 '제적본' 책이라는걸 알아낸 뒤, 도서관이 위치한 도시의 5층 건물을 검색한다는 것으로 도서위원인 아이들의 특기가 발휘된 것은 물론이고, 그 도시는 차로만 갈 수 있다는 등의 설정이 덧붙여져 있어서 여러모로 설득력이 높았습니다.

일상계 보물 찾기로는 더할나위 없긴한데 딱 한가지 억지가 있습니다. 주차장에 주차해 둔 차라면 당연히 주차비를 냈을테니, 주차비를 내는 누군가는 차의 존재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 누군가가 그렇게 했던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 그 누군가가 몇 년 동안 차를 뒤져 그 안의 보물을 가져가지 않았을리도 없겠지요. 즉, 자동차가 주차장에 장기 주차되어 있었다는게 밝혀진 순간 보물찾기는 끝났어야 마땅합니다. 이걸 바로 떠올리지 못한건 이상해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친구여, 알려 하지 마오>>
호리카와는 도서관 검색을 통해 마쓰카와의 아버지가 돈을 도둑맞은 피해자가 아니라 돈을 훔쳤던 가해자였다는걸 알아낸다. 단서는 마쓰카와 시몬, 레이몬 형제 이름과 이에 대해서 마쓰카와가 '3/5이다'라고 했던 말이었다. 시와 예 (레이)는 중국 고전 5경에서 따왔으니 아버지 이름도 그럴 것이다라고 추리하여 아버지 이름을 검색했던 것이다.

호리카와도 전편에서 독자가 가졌던 의문을 그대로 가지고, 자신의 추리 결과로 도서관에서 기사를 검색하게 됩니다. 자동차가 월 정액 주차장에 남겨져 있었던건 누군가 돈을 계속 냈다는 의미라는 추리는 저와 같은데요, 호리카와는 왜 돈을 계속 냈을까?에서 또 다른 추론을 얻어냅니다. 주차장에 놓여진 차를 처분할 수 없었던건 그 안의 열쇠 때문이었고, 열쇠를 지금 당장은 회수할 수 없었다는 처지였다고요.
그리고 줄거리 요약처럼 '오경'의 한자를 통해 마쓰카와 아버지 이름을 추측하여 검색한 결과, 마쓰카와의 아버지가 절도범이었다는걸 알게됩니다. 즉, 마쓰카와의 아버지는 지금 구속 수감 중이라 열쇠를 회수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여기까지의 추리는 기가 막힌데 그 뒤는 특별히 추리적인 부분은 없습니다. 뒷부분은 마쓰카와가 돈이 필요한 이유, 그리고 그에 대해 반론하는 호리카와 사이의 자기 주장 대결이 대부분이에요.
마쓰카와가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 평소에 돈을 아끼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인 이유 등 약간 사회파스러운 분위기가 눈에 뜨이기는 하지만, - 약점이란 건 그런 거야. 약점 하나로 세상은 변해….. - 어차피 고등학교 2학년 생이 하는 이야기니 그렇게 깊이있는 이야기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호리카와 역시 이상론만 이야기해 줄 수 있을 뿐이고요.
이야기는 마쓰카와가 그 돈을 찾으러 후미쿠라 정에 가서 건물들을 뒤졌는지, 그래서 돈을 찾았는지 밝혀지지 않고, 평범한 도서위원으로 마쓰카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호리카와 시점에서 마무리됩니다. 아무래도 마쓰카와가 돈을 찾으면 더 이상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을텐데, 어떻게든 마쓰카와가 평범한 도서위원으로 돌아와 이야기가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추리도 괜찮았고, 대단원의 막을 장식하기에는 나무랄데 없는 깔끔한 전개의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2010/01/28

클로버의 악당들 - 퍼시벌 와일드 / 정태원 : 별점 4점

클로버의 악당들 - 8점
퍼시벌 와일드 지음, 정태원 옮김/태동출판사

1900년대 초반의 미국을 무대로, 어렸을 때 집을 뛰쳐나와 6년간 프로도박사로 활동하다가 코네디컷에 농부로 눌러 앉은 25살의 빌 파믈리가 친구이자 주로 "사건"을 일으키는 트러블메이커를 전담하는 토니 클랙혼과 함께 사기 도박을 밝혀낸다는 류의 총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유쾌한 단편집입니다.

이전에 소개했던 "퀸의 정원"의 "제 1기 근대"에 포와로, 뤼팽, 피터경 등과 함께 분류되어 있으며, 수록작 중 몇 안되는 국내 출간작이기도 합니다. "퀸의 정원" 분류표에서도 H.Q.S, 즉 역사적 중요성, 문학적 가치, 입수 곤란하다는 3관왕을 달성하고 있네요. 국내 출간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는데 저도 이번에야 알고 냉큼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일단 "퀸의 정원"에 선정된 작품답게 추리적인 내용이 상당히 비범한 편입니다. 사기 도박을 밝혀낸다는 것이 범죄자가 완벽하게 만들어 놓은 범죄를 몇 안되는 단서를 통해 탐정이 밝혀내는 추리의 과정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일 텐데요. (뭐 사기 도박이 아니라 사기라는 범죄를 밝혀내는 여러 작품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겠죠) 이러한 작품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정교한 사기"가 무려 100여년 전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 대단한 점이겠죠. 주로 다양한 장치 트릭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장치를 뒤집어 써먹는다던가 하는 두뇌싸움도 효과적으로 써먹고 있다는 것도 재미를 더해주고요.

또한 1900년대 초반 발표된 작품이지만 뭔가 개척시대의 유쾌한 도박사 일당 이야기 - 매버릭 - 와 같은 시끌벅쩍 유쾌한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와 더불어 젊지만 느물느물한 속을 알 수 없는 고수이자 장난꾸러기인 주인공 빌 파믈리, 사고뭉치에 주제를 파악할 줄도 모르지만 미워할 수 없는 멍청이인 토니 클랙혼 등 등장인물들도 톡톡 튀며 재치있는 대사와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넘치는 것이 왠지 예전에 읽었던 "O.헨리의 미스터리 걸작선" 느낌을 가져다 주더군요.

추리 애호가 뿐만 아니라 오 헨리의 팬이시라면 한번 읽어보셔도 후회하지 않으실 것 같네요. 별점은 4점. (솔직히 희귀하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주긴 했습니다^^)

아울러 국내 추리문학을 위해 노력하시는 정태원 선생님이 손수 구한 책을 가지고 번역하신 것이라 더욱 뜻깊은 작품이기도 한데, 앞으로도 이런 고전 명작들이 번역 출간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작품 해설을 통해 알려주신 이 작가의 다른 대표작인 검시재판이나 탐정 피트 모란 시리즈라면 더할나위 없겠죠.

심벌 (The Symbol)
집을 뛰쳐나와 도박사로 먹고살던 빌 파믈리가 고향 코네티컷에 돌아가 아버지와 포커 승부를 벌인 뒤 개심하여 농부가 되는 과정을 그린 시리즈의 서두에 해당하는 작품입니다.
빌이라는 주인공의 성장 배경을 독자에게 알려주는 핵심 이야기로 두건의 사기 도박이 등장합니다.
첫번째는 빌이 벌이는 사기도박으로 카드 바꿔치기에 대한 내용으로 별다른 건 없습니다. 두번째 아버지와의 승부는 빌이 카드를 조작하지만 결국 아버지의 "정직한 승부"에 패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갑작스러운 빌의 난조가 명쾌하게 설명되지는 않지만 승부 자체도 재미있고 부자의 관계 회복도 설득력 있는 작품이죠.

사기꾼의 카드 (The Run of the Cards)
빌 파믈리가 토니 클랙혼과 만나는 시리즈 두번째 이야기. 사기 도박으로 거액을 잃은 토니의 아내와 우연히 만나게 된 빌이 토니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를 도와주게 된다는 내용입니다.'사기 방법에 대한 단서 제공도 공정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포커 승부 자체가 굉장히 박진감있게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죠. 마지막의 상대방의 사기를 역으로 공격하여 승리하는 장면이 압권입니다. 마지막 공정한 승부에 대한 짤막한 반전도 인상적이고요. 별점 5점짜리 단편입니다.

포커 도그 (The Poker Dog)
토니가 또다시 처남 테드와 함께 사기에 걸려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빌은 슈워츠라는 그 사기꾼과 대결하기로 한다. 그러나 그가 정작 토니에게 부탁한 것은 개를 한마리 사달라고 한 것 뿐.
전보로 시작하는 유쾌한 서두 - 완벽한 사기꾼 슈워츠에 대한 묘사로 분위기 고조 -갑작스러운 빌의 강아지 찾기를 통한 의외성 도출 - 마지막 승부에서의 화끈한 결말 이라는 기-승-전-결 에 충실한 교과서같은 단편입니다. 운에 의지하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즐겁게 읽을 수 있었는데, 이런게 완벽한 기승전결의 힘이겠죠.

레드 앤 블랙 (Red and Black)
부자이지만 천하의 싸가지 덩어리인 휘트니가 룰렛에서 큰 돈을 잃고 토니와 그의 친구 빌에게 사건 해결을 의뢰하는 이야기.
이번편 부터 의뢰를 통한 본격적인 "사기꾼 박살내기" 시리즈로 돌입하게 됩니다. 전편들과는 달리 "룰렛"이 등장하고 이를 파헤치기 위한 도구 역시 카메라와 쌍안경을 조합한 장치라는 점이 특이하더군요. 사실 사기행각보다는 휘트니라는 싸가지의 행동거지와 말로를 보는게 더 재밌는 작품이었습니다.

양심의 문제 (A Case of Conscience)
유서깊은, 그래서 회원이라는 것이 명예인 "윈저클럽" 회원인 토니는 항상 있는 필 터너와 램지 폴웰의 카드게임에서 램지 폴웰이 언제나 일방적으로 진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잘 모르는 "카지노"라는 카드 게임을 소재로 했기에 몰입하기가 약간은 힘들었지만 미덕이 넘치는 반전 탓에 (그래서 지나칠 정도로 오 헨리 스럽긴 했지만) 훈훈한 느낌이 전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역시 발상의 전환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고 말이죠. 사고뭉치 토니의 캐릭터가 극단적일 정도로 부상하기에 짜증까지 나기는 했습니다만, 뭐 원래 이런 캐릭터니까요.^^

초보의 행운 (Beginner's Luck)
피트 커니라는 도박사의 사기를 밝혀달라는 앨런 그레이엄의 편지를 받은 빌과 토니. 빌은 자기 대신 토니를 보내며 여러가지 조언을 해 준다.
캐릭터 바꿔치기의 묘미와 더불어 반전을 거듭하는 줄거리가 인상적인 좋은 작품입니다. 혼자 착각한 토니의 좌충우돌이 굉장히 웃기기도 하고요. 무적의 갬블러 피트의 비결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약간 아쉽지만 별점 4점은 너끈할 것 같네요.

불기둥 (The Pillar of Fire)
해변가에서 포커를 하는 특이한 섬 리그스에 빌과 토니가 참가한다. 하지만 빌 파믈리는 연이어 대패하고, 수영복만 입은 해변가에서 그 어떤 사기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는 난감함에 처하는데...
빌 파믈리가 한번 궁지에 몰리는 전개가 이색적인 단편입니다. 그런데 독자에게 너무 정보를 공정하게 제공해 준 탓에 사기의 방법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재미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결말이 화끈해서 재미있게 읽은 작품입니다. 덧붙이자면, 작품 내 등장하는 "최고의 독심술 마법"은 다른 책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작품내에서 제대로 써먹었더군요.

붉은 느릅나무 (Slippery Elm)
J 햄프톤 후지스트라튼이라는 이름의 사나이가 메트로폴리턴 체스 클럽에 입회한다. 그리고 그는 강자들을 차례로 꺽으며 강자로 부상하지만 모든 회원들은 그를 미워한다.
빌이 29달러 55센트의 사례금을 받고 뛰어든 이색 사건. 즉 후지스트라튼을 클럽에서 쫓아내기 위한 체스 사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거창한 천국 입장을 다루며 시작하는 분위기부터 오 헨리 스타일의 작품인데 이후의 전개도 치밀하고 마지막 승부에 대한 조작 및 결말까지 완벽해서 재미있게 읽은 작품입니다. 역시나 별점 4점은 충분하겠죠.^^

타락 천사의 모험
브리지에서 항상 이기는 테리스를 조사해 달라는 친구들의 요청을 수락한 토니는 사기수법을 지적하지만 외려 역공을 당한다...
일단 이 작품은 원본 단편집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국내 출판본만의 특전과 같은 작품입니다. 일단 정태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작품은 브리지 사기 수사에서 의외로 포커 클럽인 히말라야 클럽의 과거 사기사건으로 이동하여 전개되는 내용으로 사기꾼의 집념이 잘 그려진 독특한 작품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데 정말 사기의 세계란 대단한 거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테리스가 사기를 쳤는지 안 쳤는지도 불분명한 등 사건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듯 싶어서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약간 처지긴 하더군요. 그냥저냥한 평작이었습니다.

2018/02/24

지문 - 콜린 비번 / 유혜경 : 별점 3점

지문 - 6점
콜린 비번 지음, 유혜경 옮김/황금가지

지문이 신원 확인에 사용된다는건 지금은 일반 상식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지문이 신원 확인의 수단이 되었을까요?
이 책은 지문이 현재의 자리를 차지하기 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지문의 역사에 대한 일종의 미시사 서적이자 과학사 서적입니다. 거기에 더해, 지문이 이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결정적 사건인 뎁퍼드가에 위치한 채프먼 화방의 강도 살인 사건의 전말 및 재판 과정과 최종 판결까지의 전말이 지문의 역사와 함께 소상하게 펼쳐지는 논픽션 성격도 띄고 있습니다. 즉, 지문의 역사가 뎁퍼드가 사건을 비롯한 다양한 실제 지문 응용 사례와 함께 전개되는 구성이지요.

'지문학'의 역사는 학술적인 내용이 많은 편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재미있습니다. 지문이라는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주목한 이후, 지문의 여러가지 특성에 대한 연구 과정과 실제 지문을 분류하는 방법 등의 디테일과 지문 연구의 발명자(?)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한 이전투구가 아주 흥미로왔던 덕분입니다. 흡사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했어요. 사고방식부터 썩어빠진 거물 쓰레기 골턴이 또다른 쓰레기 허셜과 손잡고, 실제 지문 연구의 권위자로 이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던 폴즈의 연구를 빼앗은 후 폴즈를 부정하는 양심도 없는 행각이 그것으로 다행히(?) 골턴도 다른 인물들에 의해 영광의 월계관을 빼앗기고 잊혀진다는 결말인데, 씁쓸하면서도 많은걸 생각하게 해 줍니다.
또 폴즈가 지문을 알리기 위해 절박한 노력을 하던 와중에 발표되었던 기사가 마크 트웨인의 "미시시피에서의 삶" 이라는 작품 속 "엄지손가락 지문 채취와 그 결과" 라는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복수를 위해 '수상가' 로 위장하여 살인범을 찾아나선 인물의 이야기라는데 내용이 궁금해지네요.

하지만 아무래도 지문학의 역사보다는 관련된 사건들 쪽이 더욱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유아 살인 사건 등 초창기 지문을 활용하여 해결한 범죄들 모두 흥미진진하며, 지문이 사용되지 않아 문제가 되었던 범죄들 이야기도 아주 재미있었어요. 여러 명의 피해자 증언으로 수년간 구속되었었지만 진범이 다른 사람으로 드러났던 아돌프 벡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면식 식별이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는데, 책에 실려있는 사진을 보니 범인과 벡은 정말 닮긴 닮았더라고요. 이러니 명확한 개인별 확인 수단이 필요할 수 밖에요.

그 외에도 많은 사건들이 소개되는데, 그 중에서도 압권은 역시나 서두와 마지막을 장식할 정도로 작품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서술되는 뎁퍼드가 살인 사건입니다. 몇가지 정황 증거는 있지만 실질적인 증거는 범인의 지문 밖에 없는 상황, 지문이 아직 널리 인정받지 못한 때에 지문만 가지고 과연 용의자들에게 유죄 선고, 더 나아가 '사형 선고' 를 내릴 수 있는지? 라는 딜레마를 잘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문학의 아버지 폴즈 역시 '지문으로 사형 선고를 할 수 있는지?' 에 대한 개인적 의구심으로 변호인 측에 협력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요.
또 이 과정에서 범인측 변호사와 증인들, 검찰측이 벌이는 치열한 법정 싸움도 아주 볼만합니다. 지문 도입으로 자리를 잃게 된, 전 원래 영국 경시청 신원 확인 전문가로 일했던 복수심 불타는 가슨 박사와 검사측이 벌이는 논쟁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잘 짜여진 법정물로도 손색없어 보였습니다. 결국 체포된 두 형제 모두 교수대로 향했는데, 아마 제가 배심원이었다 하더라도 지문 외 증거들로 유죄 판결을 내리는 데에는 문제가 없지 않았을까 싶긴 합니다. 지문은 밥 숟가락 한 개 얹은 정도의 재판이긴 했으니까요. 그래도 이후 지문이 증거로 채택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니 제 몫은 충분히 다 한 셈이겠죠.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서로 다른 손가락에서 채취한 두 개의 지문이 동일할 수 없다' 는 것은 아직도 증명되지 않았다'는 말도 인상적이었어요니다. 이를 증명하는 한 방법은 현재 살아있는 모든 사람의 지문끼리 서로 비교하는 것 밖에는 없는데 이는 불가능하니까요.

지문 관련 이야기 외에도, 당대 지문의 가장 큰 경쟁자였던 '베르티용'과 베르티용의 측정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소개해줍니다. 실험을 통해 두 사람이 어느 특정 치수가 똑같은 경우는 4:1의 비율로, 모두 11가지 측정치를 보유하는 베르티용 측정법을 통해 두 사람에게 모두 동일한 치수가 나올 확률은 4의 11제곱 대 1이었다는 기본 이론과 베르티용 측정법이 지니고 있던 구조적인 문제(측정 자체가 번거롭고 어려우며 측정 기준도 상황, 장소, 사람에 따라 일정치 못함)를 비롯, 베르티용도 지문을 등록하는건 찬성했지만 이를 상세 분류하는 것을 반대하여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모나리자 도난 사건' 의 범인 확인이 늦어지게 되어 치명타를 입었다는 이야기 등은 이전에 미쳐 알지 못했던 내용들이었어요.

이렇게 재미와 지적 호기심을 모두 만족시키는 괜찮은 책입니다. 법의학이나 법과학 등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이 책만 읽으면 지문이 어떻게 신원 확인에 이용되어, 중요한 증거의 하나로 자리잡았는지를 잘 알 수 있으니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05/06/17

아내의 여자친구 - 고이케 마리코 / 오근영 : 별점 3점

아내의 여자 친구 - 6점 고이케 마리코 지음, 오근영 옮김/대교북스캔(대교베텔스만주식회사)

석원님 블로그에서 관련 정보와 리뷰를 읽고 구입하게 된 책입니다. 장정과 디자인, 제목만 보아서는 추리쪽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서 석원님 글이 없었다면 영원히 모르고 지나갔을 것 같은데 먼저 감사 드립니다.

일본에서 꽤 잘 나간다는 여성 작가 고이케 마리코의 단편집으로 총 6편의 단편이 실려있습니다. 단편들의 소재가 주로 "가족"과 그 갈등관계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사건들도 이 갈등관계를 축으로 벌어지고 있어서 스케일이 작은 대신 현실감이 넘쳐서 독특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예를 들자면 첫번째 작품 "보살 같은 여자"는 고모, 새엄마, 여동생으로 이루어진 여성 중심 가족과 돈줄인 아버지와의 갈등관계. 두번째 작품 "추락"은 장인을 정점으로 하는 "가키누마 패밀리"에 속한 데릴사위 대학교수 가키누마의 은밀한 문제. 세번째 작품 "남자 잡아먹는 여자"와 네번째 작품 "아내의 여자 친구" 역시 한 가정 내에서 커지는 갈등관계를 다루고 있죠.
여성 작가다운 디테일하고 감칠맛나는 심리 묘사도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만큼 추리적 요소가 많지는 않았고 괜찮은 설정에 비해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부분에서는 억지스러운 부분이 제법 있기는 합니다. 여운을 남기는 깊은 맛은 로얄드 달이나 아토다 다카시 같은 작가들에 비해서는 부족한 편이에요.

그래도 결론내리자면 추천작입니다.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 되는 맛이 제법 있어서 추리적인 요소에 치우치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부분이 많았거든요. 여성판 아토다 다카시 느낌, 혹은 요시모토 바나나가 쓴 추리소설같은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저의 베스트는 제일 정통 추리 소설에 가까운 "보살 같은 여자"와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남자 잡아먹는 여자", 표제작 "아내의 여자친구"입니다. 나머지 작품들도 읽는 재미는 있는 만큼 주위에서 발견하신다면 한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작품별 상세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보살같은 여자" :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여성으로 이루어진 요시마루 가문. 집안의 돈줄인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의 거동이 어려워지며 점점 히스테리가 심해지고 집안의 다른 모든 가족은 그러한 아버지에게 살의를 서서히 품게 된다.
이 작품으로 89년 일본 추리 작가 협회상 단편상을 수상했네요. 제일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 트릭이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동기와 수법이 확실한 제일 정통 추리적인 성향이 강한 작품입니다.

"추락" :
여사원 사카모토 미야코는 소설가를 꿈꾸며 자신이 다니는 문화센터 창작반의 강사 가키누마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와중에 사고로 추락사하게 된다. 하지만 가키누마는 미야코와 드라이브할 때의 뺑소니 사건을 은폐했던 이유로 그 기록을 미야코가 남기지 않았을까 고민하게 되는데.....
미야코가 추락사하기 전에 남기는 글 때문에 자살로 포장되는 사고사 과정이 기발합니다. 뭔가 다른 트릭으로 포장해서 쓴다면 근사한 정통 추리물이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될 정도로 좋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전개는 좀 실망스럽네요.

"남자 잡아먹는 여자" : 
하나뿐인 남동생이 결혼만 하면 남편이 사고로 죽는 여인과 결혼하여 같이 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의문의 사건들. 먼저 오랫동안 키워온 개가 죽고 다음에는 주인공의 아들이 사고로 죽게되며 이에 앙심을 품은 주인공은 시동생을 죽이려고 시도한다...
주인공의 심리의 흐름을 주로 묘사하는 심리드라마로 설정이 굉장히 좋습니다. 실제로도 있을법한 이른바 "남자 잡아먹는" 여인을 공포와 사건의 원흉으로 몰아가는 이야기구조는 흥미진진하면서도 설득력 있고 결말도 깔끔하면서도 나름의 반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전개에서 애완견의 죽음에 대한 진상은 결국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약점으로 보이네요.

"아내의 여자친구" :
약간 거동이 불편한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주인공이 아내가 학창시절 여고 동창과 친해지며 집밖에 나가는 시간이 잦아지자 그 여고 동창을 살해하게 된다. 하지만 중요한 단서를 현장에 두고왔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주인공의 심리를 처음에 집중적으로 묘사하여 주인공이 아내를 지극히,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과 그 이유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과정을 설득력있게 보여주며 마지막 반전으로 독자의 뒷통수를 칩니다. 이 단편집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군요.

"잘못된 사망장소" :
한 방송인의 불륜상대인 여성이 그 방송인을 살해한 후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 방송인의 가족에게 사실을 고백하지만 가족은 오히려 온 가족이 나서 그의 시체만 서둘러 본가로 옮기려고 하는데....
여기서는 "가족"이 주인공이 아니라 주변인으로 그려지고 있는 점이 좀 특이하군요. 내용도 쉽게쉽게 진행되며 그다지 긴장감도 없고 설득력이 떨어져 이 책에서는 가장 처지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종막" :
감독의 아내와의 불륜으로 주연자리를 차지한 주인공은 그 여자의 집착을 견디지 못해 살의를 품고 우연찮게 찾아온 기회를 통해 알리바이를 위장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준비하여 범행을 실행에 옮기는데...
범인, 그리고 범행의 과정이 먼저 나오는 도서형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트릭을 단서에 의해 밝혀내는 구조는 아니고 범인의 실수를 통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기 때문에 완벽한 추리물로 보기는 좀 어렵네요. 그래도 알리바이 트릭 자체는 단순하지만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2024/05/12

문라이트 마일 - 데니스 루헤인 / 조영학 : 별점 2점

문라이트 마일 - 4점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하지만 옛날처럼 살면 우린 벌써 죽었을 거야."

아내와 딸의 부양을 위해 위험한 일은 지양하고, 양심에 반하는 일까지 닥치는대로 하면서 살고 있던 켄지 앞에 베아트리체가 나타났다. 그녀는 12년 전, 켄지가 찾아주었던 소녀 아만다의 숙모였다. 켄지는 아만다를 사랑했던 납치범 삼촌으로부터 소녀를 되찾아 알콜 중독에 빠진 형편없는 엄마에게 돌려주었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아만다가 또 사라졌다고 말했고, 켄지는 돈 한 푼 받을 수 없지만 과거에 종지부를 찍는 의미로 아만다를 다시 찾아나섰다.
그러나 아만다의 실종은 러시아 갱단과 관련이 있었고, 갱단은 켄지의 주소까지 알아내어 아만다가 가지고 사라진 아이와 '벨라루스 십자가'를 찾아오라는 협박을 시작했다...

데니스 루헤인을 대표하는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 완결편. 책 소개를 보니 "가라, 아이야, 가라"의 후속작 성격이라고 하네요.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답게 납치, 절도에 살인과 폭력 등 각종 범죄가 난무합니다. 그 중에서도 러시아 갱들이 도박으로 수렁에 빠트린 의사 드레를 아동가족부에 취업시킨 뒤, 어린 임산부들에게 몰래 아이를 낳게 한 뒤 팔아치워왔다는 범죄 행각이 독특하더군요.
범죄들과 관련된 여러가지 죽음들이 끔찍한 시리즈 특징도 여전하고, 돈 때문에 기본적인 인간성을 저버리는 등장인물들에 얽힌 이야기들도 여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한 술 더 뜹니다. 심지어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 켄지마저도 돈과 가족 때문에 양심을 파니까요. 이런게 이 시리즈의 매력이기는 한데, 역시나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래도 켄지와 제나로, 딸 가비의 사랑과 유대감, 신뢰에 대한 묘사도 많습니다. 완결편인 덕분이겠지요? 이는 켄지가 탐정일을 완전히 은퇴하는 시리즈 결말에 대한 설득력도 높여 줍니다. 본인이 양심을 팔고 돈을 택했던 몇몇 사건들에 대한 회한과 함께 더 이상 위험과 폭력이 가득한 세상이 아니라, 평범한 삶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이유로 지켜야 할 가족보다 완벽한건 없겠지요. 아만다가 딸(?) 클레어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습니다.
이런 완벽한 해피엔딩을 위한 결말도 깔끔합니다. 러시아 갱 예핌이 약에 중독된 두목 키릴 등과 인간 쓰레기 아만다의 의붓아버지 케니를 모두 죽이고 켄지와 아만다, 납치했던 소피와 기타 등등을 풀어주고 끝나거든요. 마침 크리스마스이기도 하니 시점도 완벽한 셈입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잘 짜여진 이야기는 아닙니다. 앞서의 해피엔딩은 대미를 장식하기는 하나, 설득력이 떨어지는 문제는 커요. 예핌이 왜 이들을 살려주는지 설명이 없는 탓입니다. 어차피 네 명을 죽인 상황에서 세 명을 더 죽이는게 별 문제도 아니었을텐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요? 중요 목격자인데요. 다른 악당이라면 다 죽이고 켄지의 집으로 찾아가 가족도 다 죽였을 겁니다.
드레를 아만다가 의도적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어요. 기차가 달려오는 것도 모르고 십자가를 주으러 달려갈만큼 멍청한 사람은 없을겁니다. 직전에 약에 취했다는 묘사가 있기는 한데, 이 정도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마침 기차가 달려오는 순간을 딱 맞췄다는 것도 작위적이었고요.
대체로 우연이나 특별한 기회를 통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전개도 그닥입니다. 예를 들자면, 켄지가 아만다의 집을 몰래 들어가 수색하다가 아만다의 가족들과 소피를 만나는데, 그 때 마침 러시아 갱단이 습격해서 소피를 납치해갑니다! 갱을 추격하던 켄지는 면허증을 빼앗겨서 가족이 위험에 처하게 되고요. 이런 전개는 독자가 무언가 추리할 여지를 아예 없게 만듭니다.
그나마 아만다가 보스턴 레드삭스 19번 유니폼을 애지중지 가지고 있었는데, 정작 레드삭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부분은 약간 추리물 성격을 보이기는 합니다. 알고보니 아만다가 어린 시절 유괴당했을 때 살았던 마을 이름이 '베켓' 이었던 거지요. 좋은 추억만 가득했기에 레드삭스 19번 조쉬 베켓의 유니폼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켄지와 제나로는 베켓에서 아만다를 찾아내지요. 하지만 이 역시, 아만다의 행적을 뒤쫓는데 그리 중요한 단서가 되지는 못해요. 19번 유니폼이 없어도 '베켓'을 찾아가는건 당연한 수순으로 보이니까요.
핵심 인물인 아만다도 와 닿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 혹독한 경험을 했다고 모두가 천재가 되는건 아닙니다. 친구의 아기를 자기 딸인양 돌볼 이유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요. 아만다의 현재는 켄지의 심경 묘사 정도의 비중은 할애해서 설명해 줘야 했습니다. 지금은 치기어리고 겁없는 사춘기 10대인지,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복잡한 내면을 갖춘 인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 킬링타임용으로 적합한 펄프 픽션입니다. 시리즈 팬이시라면 '완결편' 이라는 의미도 있고하니 읽어볼만 하겠지만, 팬이 아니시라면 구태여 찾아 볼 필요는 없습니다.

2023/04/28

도덕의 시간 - 오승호 / 이연승 : 별점 3점

도덕의 시간 - 6점
오승호 지음, 이연승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진상,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꽤 이름이 알려진 영상 저널리스트 후시미는 몇 개월째 백수 상태였다. 진행하던 작업 중 자신이 하는 일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도예 스승 난보의 장례식날, 아들 도시키가 친구 마코토를 때린 폭행 사건에 휘말렸다. 급전이 필요해진 후시미는 오랜 지인 다나베의 소개로 신예 감독 오치의 프로젝트 Q.M (Question of Morality, 도덕의 문제)에 카메라맨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프로젝트 Q.M은 13년 전 일어났던 마사키 쇼타로 살인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다. 초등학교에서 강연 중 마사키는 옛 제자 무카이에게 살해되었고, 무카이는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오치는 공개되지 않았던 사건 당시 현장을 찍었던 비디오 테이프, 그리고 무카이와의 인터뷰를 무기로 다큐멘터리를 만들 생각이었다.
오치는 무카이가 진범이 아니라 초등학교 선생으로 강연을 주도했던 미야모토가 진범일 수 있다는 식으로 끌고갔고, 후시미는 이를 반대했다. 그런 후시미에게 오치는 미리 찍어두었던 미야모토의 인터뷰 영상을 보여주었다. 무카이의 친구였던 미야모토, 가지무라는 미성년자로 매춘을 하던 무카이의 여동생 미유키의 손님이었고, 미유키가 바로 오치였다. 그녀는 Q.M을 만든건 둘에 대한 복수라고 했다.
후시미는 날조된 Q.M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개인적으로 오치 - 무카이 미유키 - 에 대한 조사에 나섰고, 무카이가 사건을 저지른 진짜 이유를 알아낸다. 그는 소설가로 성공하기 위해서, 유명해지기 위해 사건을 저질렀었다....

재일교포 오승호 (고 가쓰히로)의 데뷰작으로 제 61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입니다.
무카이가 과연 진범일까?에 대한 수수께끼를 다큐멘터리 촬영이라는 장치로 서서히 풀어나가는 전개는 흥미롭습니다. 마지막에 미야모토의 증언으로 왜 미야모토가 무카이의 이상을 감지하고 서둘러 나섰는지, 왜 강연을 촬영하던 카메라가 쓰러졌는지, 미유키는 왜 사라졌는지 등이 극적으로 밝혀지는 장면은 오치가 날조한 현재를 보여주고, 후시미 단독 촬영으로 무카이의 진짜 의도가 드러나는 일종의 반전이 이어지면서 Q.M이 완성되는 과정은 잘 짜여져 있습니다. 왜 후시미를 카메라 맨으로 선택했는지? 등 소소한 수수께끼도 나름 설명되고요. 오치는 후시미가 자기를 조사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랍니다. 영상 저널리스트 후시미는 그런 인물이라서요
이 모든 과정이 다큐멘터리라는 설정에 맞춰, 주변 인물들의 증언과 명확한 증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잘 어울렸습니다. 이를 통한 무카이와 미유키의 끔찍했던 유년 시절의 건조한 묘사는 이질적이면서도 기묘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이와시로 기자가 초등학교 때 무카이가 썼던 연극 대본 내용을 말해주는 장면 - 개를 잡아 먹었다는 - 는 정말 소름이 쫙 돋았어요.
Q.M과 함께 나루카와 시내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벌어졌던 경범죄와 난보 선생 사건에서 현장에 적혀있던 낙서, 그리고 후시미의 아들 도시키의 그림이 망가진 사건 등이 정리되고 해결되는 과정도 깔끔했습니다. 오히려 Q.M보다 이 사건 쪽이 추리적으로는 더 볼만합니다. 여러가지 단서가 비교적 공정하게 제공되며, 동기에 대한 설명도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덕분입니다. 예를 들어 그림이 망가진건 아이들이 난보 선생 집에서 놀았다는걸 감추기 위해서였다는 식으로요.

마사키 쇼타로의 교육론, 후시미가 실제로 고뇌하는 자식 교육 문제 등으로 '교육'에 대해 이런저런 담론을 전개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후시미가 동네 주민 고마이와의 대화가 개인적으로는 인상적이었어요. 일본에서 문제가 되고 있던 '유토리' 교육 방침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유토리 교육 (예유있는 교육)은 학력이라는 획일화된 평가 기준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어, 각각의 다양한 특기와 재능을 살리자는 취지의 교육이었다고 합니다. 방침은 아주 좋죠. 그러나 실패는 필연이었습니다. 사회가 그런 방침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기와 재능을 살려봤자, 사회에서 성공하는건 고학력자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학력은 사회에서 부여한 과제를 잘 처리하는 능력을 가늠하는 기준이기에, 당연하다고 설명하고요. 저도 오랜 직장 생활 경험자로서 많이 공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화 <<신입사원>>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결국 사회 (대표적인게 회사)에서 어떤 사람을 평가하려면, 가장 쉽고 일반적인 기준은 학력이지요.
마사키 쇼타로가 '모두 씨'라고 부른 '도덕' 개념도 그럴듯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항상 있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 같아요. 내가 하는걸 항상 누군가 지켜보니 행동에 조심하라는 뜻이지요. '신'의 존재를 초등학교 아이들 수준으로 알기 쉽게 해석한 듯 한데, 나쁘지 않았어요. 작품에서 잘 활용하고 있기도 하고요.
후시미가 좌절했던 계기였던 사건 이야기도 스쳐 지나가는 수준이지만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다 죽어가는 노인과 결혼하여 재산을 물려받은 여자를 취재했는데, 그 여자가 사는 아파트의 노인 주변은 화려한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노인은 몸을 움직이지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심지어 마르거나 시든 꽃도 없었고요. 즉, 여자는 그 노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데, 후시미 혼자 멋대로 여자가 나쁘다고 단정짓고 악을 만들어 버렸다는 이야기지요. 뭐든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한다는, 오래된 진리를 다시 떠오르게 만듭니다.

그러나 범행을 저질러 유명해진 뒤, 그 명성으로 소설가가 되겠다! 라는 무카이의 동기는 잘 와 닿지 않더군요. 범행을 저지르기 전에 소설가로서의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은걸로 보입니다. 본인, 그리고 동생의 끔찍했던 과거를 노출시키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고요. 살인보다는 이런 노력들을 먼저 하는게 당연하지 않았을까요? 현재의 전개로는 살인까지 저지렀어야 했던 절박함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살인 대상이 마사키 선생님이었던 이유도 사회에 충격을 주기 위한 목적 말고는 없었다는데, 저같으면 현장에서 미야모토를 죽였을겁니다. 그래야 가지무라를 - 그리고 미유키를 - 구태여 현장에 불러 촬영을 맡긴 이유가 설명이 되니까요. 미야모토는 줄일 예정이니 촬영을 맡길 수가 없잖아요? 그리고 친구인줄 알았던 가지무라와 미야모토가 여동생의 손님이었다, 여동생은 내가 지켜주지 못했다, 그래서 죄인 둘에게 단죄와 경고를, 여동생에게는 내가 앞으로 지켜주겠다! 는 의지를 보여준거다... 같이 독자가 납득할 수 있는 설명도 가능했고요. 아니면 인격자인줄 알았던 마사키 선생님마저도 미유키의 손님이었다는 충격적인 반전이라도 드러내는게 나았을겁니다.
제목에서부터 노골적으로 강조되는 '도덕'에 대한 설정과 문답들은 작위적입니다. 마사키 쇼타로 선생의 모두 씨 개념, 저널리스트로서 날조를 막아야 하는 양심, 그리고 경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도덕에 관한 문장 등 '도덕'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야기 핵심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무카이의 동기를 독자에게 숨기기 위한 추리적인 장치, 그리고 작품을 뭔가 있어보이게 하는 소재에 불과합니다. 괜히 머리만 아프게 만드네요.
아울러 후시미는 일본 사회파, 하드보일드 작품에서 흔히 보는 고집 센 한 마리 늑대와 다를바 없습니다. 많이 뻔했어요.

그래도 데뷰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완성도의 수작입니다. <<스완>>은 충격적인 설정에 비하면 다소 심심하고 억지스러운 전개로 실망했었는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 작가가 최근 뜨거운지 잘 알려주는 좋은 작품이었어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19/01/06

돌이킬 수 없는 약속 - 야쿠마루 가쿠 / 김성미 : 별점 2점

돌이킬 수 없는 약속 - 4점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능한 바텐더 무카이는 원래 얼굴의 큰 반점 탓에 사람들이 기피하여 자잘한 범죄를 저지르며 먹고 살다가 야쿠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던 범죄자였다. 다행히 도주 중에 만났던, 딸이 잔혹하게 살해된 노부코로부터 거액을 받고 15년 전 호적을 구입해서 재탄생에 성공했다.
그러나 당시 노부코 딸의 복수를 약속했었는데, 노부코의 딸을 죽인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두 명의 범죄자가 풀려났다는 편지가 날아왔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의 가족들에게도 위해를 가한다는 협박이 이어지는데...

란포상 수상작가 야쿠마루 가쿠의 2015년 작품입니다. 무려 15년 전 했던, 지키고 싶지 않은 약속을 지켜야 하는 딜레마가 흥미롭습니다. 평범한 바텐더가 누명을 쓴 후 도주를 하면서 범인이 누군지 더듬어 가는 과정도 박진감있게 묘사되어 있고요. 덕분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범인들의 주소를 알아내기 위해 옛 동창을 가장해서 편지를 보냈다는 아이디어도 좋았어요.

그러나 완성도 측면에서 아쉬움이 많습니다. 제일 큰 문제는 주인공 무카이와 범인, 그리고 피해자라 할 수 있는 가도쿠라와 이이지마의 관계입니다. 책 소개에서 "한 번 죄를 저지른 사람은 새 삶을 꿈꿀 수 없는 것일까?" 운운하는데 소갯글부터 오류투성이에요.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빚을 졌기 때문이고, 그것도 생명을 빚졌다면 생명을 걸고 갚아야 하는게 당연합니다. 한 여인이 죽기 전 전재산을 주면서까지 부탁한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는 무카이의 태도는 정말이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평온한 삶을 놓치기 싫어하는 소시민적인 모습을 부각시키는건 나름 설득력이 있긴 하지만 죽을 뻔한 사람을 구해주고 새 삶을 살게 해 주었다면 은혜갚을 생각을 해야죠. 노부코의 딸을 잔혹하게 능욕하고 살해한 가도쿠라와 이이지마는 죽어 마땅한 놈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원한 해결 사무소" 급의 화끈한 복수가 이어져도 시원치 않을 판에 청부업자가 양심 운운하며 도망칠 생각이나 하는 판이니 이게 대체 뭔가 싶네요. 

반대로 범인 오치아이가 무카이의 딸을 죽이려고 하는 것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복수의 대상이 영 잘못됐잖아요? 가도쿠라와 이이지마가 출소하지 않더라도 복수를 하는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을텐데 15년이나 기다린 이유도 잘 모르겠고, 무카이의 모든 걸 빼앗으려 했다면 지금의 방법을 쓰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했을테니까요. 예를 들어 남편의 정체를 알고 배신감에 몸부림치는 무카이의 아내를 꼬셔서 결혼하는 식으로요. 지금의 설정은 여러모로 억지스럽습니다.

전개도 여러모로 짜임새가 부족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개미지옥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무카이의 심리묘사는 괜찮지만 가도쿠라 살인사건 이후부터는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작위적인 부분이 많은 탓입니다. 이이지마가 서둘러 도주하는 바람에 신발을 버려두고 가는데 신발 안에 GPS가 들어 있었다던가, 도주하다가 정말로 우연히 옛 피해자에 대한 탐문 조사를 벌여 피해자의 아들 이름이 고헤이라는걸 알게 된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이 대표적입니다.
게다가 오치아이의 복수극임이 밝혀진 후 이어지는 급전개는 정말이지 가관입니다. 연인의 자살이 무카이 탓이라고 믿는 오치아이에게 그녀는 사실 친아버지에게 강간당했다는 진상을 털어놓고, 이를 고헤이가 짠하고 나타나서 사실이라고 말해주는 장면은 황당하기 짝이 없어요. 고작 이 정도로 마무리하려고 3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을 소모했나 싶어 화가 날 정도입니다.

또 범행 기도 당시 장갑을 끼고 있었기에 칼에 지문이 묻어있다면 당연히 바 내부 인물을 의심해야 하는데 이를 대충 넘긴 것도 문제입니다. 이 부분과 오치아이가 초반에 만난지 15주년을 기념하는 건배를 제의한 날이 실제로는 다른 날이었다는 등의 단서를 연결하면 충분히 범인을 짐작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하긴 이 정도로 단서를 줘 봤자 오치아이가 15년을 기다린 이유가 설명되지 않아서 알아채기는 어려웠을 테지만...
또 무카이가 다카토 후미야라는걸 아는건 노부코가 외에는 호적을 구해 준 마카베 밖에는 없다는건 분명 합리적 추론인데, 마카베가 이 정보를 십 수년 뒤 복수극에 써먹을 이유는 없습니다. 당연히 노부코가 나갔던 피해자 모임에서 관련된 연결고리가 생겼다고 보는게 타당합니다. 최소한 고헤이에 대해 우연하게 알아채는 것 보다는 이 쪽이 설득력이 높아요. 여러모로 소득없고 전개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 마카베 추적은 분량 늘이기에 불과해 보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읽는 재미만큼은 괜찮지만 여러모로 문제가 더 크기에 감점합니다. 가벼운 킬링타임용 읽을거리 이상의 책은 아닙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09/12/17

백야행 (Byakuyako, 白夜行, 2006)

감기에 너무 심하게 걸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요... 아픈 와중에 본 작품으로 얼마전 개봉한 영화가 아닌 일본 드라마입니다. 회사 동료가 추천하기에 보게 되었죠.

"피해자의 아들과 가해자의 딸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설정은, 사실 정파 무림의 후계자와 마교 교주의 딸 사이의 사랑 이야기같이 흔해 빠졌습니다. 비련의 주인공들을 그리기에 아주 좋으니 당연하지요. 그런데 이 작품은 이 케케묵은 설정을 추리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뒤집어서 독특한 캐릭터를 창조해 내었을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작가와 작품의 명성답게 탄탄한 구성으로 이루어져서 재미있게 시청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제 1화인 유키호와 료지의 어렸을때의 사건 이야기는 정말 몰입해서 보게 만드는 힘이 느껴졌어요. 이러한 둘의 관계가 마지막까지 이야기의 축인 중요한 소재인데, 굉장히 설득력있게 잘 짜여져 있는 덕분입니다.
한마디로 기본 설정과 더불어 전체적인 내용의 완성도가 굉장히 충실합니다. 몇 개 등장하지는 않지만 추리적인 장치도 기대에 값하고요.

하지만 아무래도 드라마라서 그런지 호흡이 좀 균일하지 않고 캐릭터들 성격이 일관성이 없다는 것, 두 주인공 이외의 부가 사건이 너무 많다는 것은 약간 아쉬웠습니다. 6부작 정도로 압축해서 이야기를 꾸몄더라면 어땠을까 싶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최초의 키리하라 살인사건 - 마츠우라 살인사건 - 유키호 이혼관련 사건 - 사사가키 준조 살인미수 사건 정도만 나와도 별 문제는 없어보였거든요.
예를 들자면 두건의 성폭행 사건과 료지의 카드 사기 행각, 그리고 재벌 2세인 시노즈카는 정말이지 "안나와도 될 것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두번째 성폭행 사건은 유키호라는 캐릭터를 그리는데 중요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보다는 차라리 료지의 죄의식을 이용해 신분상승을 꽤하는 악녀로서의 유키호를 그려나가는게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아울러 굉장한 천재 - 각종 범죄행각의 치밀함 뿐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래밍까지 정규교육 없이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료지 및 만만치 않은 유키호 - 인 두 아이들이 첫 범행을 저지른 나이가 사실상 법의 엄중한 저촉을 받지 않는 나이였다는 것과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공소시효까지 벌벌 떨어야 했던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 않는 것은 확실한 옥의 티입니다. 양심때문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희생해야 할 게 많잖아요?

그래도 불만이야 어쨌건 분명 재미는 있었습니다. "너는 내 태양이었어" 같은 닭살대사가 난무하는 드라마를 이렇게 재미있게 볼 수 있다는게 놀라운데, 단순한 재미 이외에도 높은 완성도와 아야세 하루카 등 초호화캐스팅의 배우진, 그리고 상당히 뛰어났던 음악도 괜찮았던 등 여러가지로 볼거리가 많은 덕분이겠지요.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원작가에게는 죄송스럽게도 심하게 취향이 아닌것을 알아버린 탓에 소설로는 안 읽고 영상화된 작품만 보게되는데 ("호숫가 살인사건", "게임의 이름은 유괴", "용의자 X의 헌신" 등) 다음에는 책도 좀 사봐야겠네요(변명같지만 "비밀"과 "용의자 X의 헌신"은 샀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 두개 남깁니다.

  1. 한국영화버젼은 어떻게 2시간 정도로 압축했죠? 유키호와 료지가 어둠속에 빠지게 되는 초등학교 5학년때의 사건만 하더라도 사건의 여러가지 추리적 장치들과 훗날까지 이어지는 등장인물 및 복선들을 감안한다면 최소 30분 이상 할애했어야 할 것 같고, 고등학교때는 건너뛰더라도 료지가 유키호의 그림자로 살아가는 과정을 그리게되는 일련의 과정은 최소 1시간 정도 필요할테고, 여기에 집념의 형사 사사가키의 추격과정과 여러 사건들을 풀어나가려면 역시나 최소 1시간... 결말까지 감안한다면 아무래도 3시간은 되어야 그나마 완성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말이지요.
    어차피 평이 너무 안좋아 볼 생각은 없지만 정말 궁금합니다.
  2. 왜 사사자키 준조라는 형사는 이 둘을 못잡아 먹어서 안달일까요? 이 형사만 잠자코 사건을 묻어놓았더라면 여러명이 더 행복해 질 수 있었을텐데 괜히 긁어 부스럼만 만든 꼴이에요. "프리즌브레이크"에서 지 형 하나 살리자고 수많은 사람들 (대통령까지!) 죽어나가게 만든 석호필이 괜시리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그냥 불쌍한 애들 조용히 내버려 둘 것이지....

2024/03/31

이웃 사냥 - 해리슨 쿼리, 매트 쿼리 / 심연희 : 별점 1.5점

이웃 사냥 - 4점
해리슨 쿼리.매트 쿼리 지음, 심연희 옮김/다산책방

<<아래 리뷰에는 내용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리와 사샤는 대학 동창으로 결혼 후 산에 살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아이다호주 티틴 산맥에 위치한 농장을 구입하였다. 꿈을 이룬 기쁨도 잠시, 이웃 농장주 부부인 댄과 루시로부터 봄, 여름, 가을에 나타나는 악령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듣고 해리는 격하게 화를 내었다. 전 해병대원이자 파병용사로 전투에 익숙했고, 비과학적인건 싫어하는 기질 탓이었다.
그러나 악령을 의미하는 이상 현상은 진짜로 일어났고, 해리와 사샤도 노부부가 알려준 퇴치법을 이용하며 점차 악령에 익숙해져 갔다. 농장에서의 삶은 안정을 찾았지만 간혹 나타나는 악령은 봄, 여름, 가을을 지나며 점점 끔찍해졌고, 해리와 사샤는 이 농장 땅의 주인이 된 사람들은 이사를 갈 수 없다는 저주까지 알게 되었다. 심란해진 해리는 참지 못하고 노부부의 방침과 다르게 악령에게 싸움을 걸었고, 그 결과 댄이 죽음을 맞게 되었다....


2019년 미국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의 괴담 게시판 연재작을 소설로 개작했다는 호러 소설. 게시판에서 인기를 끌었다면 최소한의 재미는 보장될거라 생각하여 읽게 되었습니다. 넷플릭스에서 10억을 들여 판권 계약을 해서 영상화를 추진 중이라는 광고에도 혹했고요.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완전 별로였습니다. 일단 무섭지가 않아요. 여름의 악령인 곰에게 쫓기는 나체의 남자, 가을의 악령인 허수아비들, 겨울의 악령인 해리가 전장에서 죽였던 적들 모두 이미지만 떠올리면 나름 섬뜩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퇴치하는 방법이 명확해서 공포심을 느끼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정해진 규칙대로만 처리하면 되는데 무서울게 뭐가 있겠습니까. 인디언 조 가족은 물론 댄과 루시 부부도 그렇게 수십년을 살아왔다고도 하고요. 농장에 출몰하는 곰이나 늑대보다도 위협적이지 않은 셈입니다.
악령이 하는 것도 별게 없습니다. 개울의 빛은 그냥 빛날 뿐이고, 곰에게 쫓기는 나체의 남자는 곰에게 잡아먹히는게 전부거든요. 해리가 죽였던 적병의 모습을 한 악령들은 그냥 전형적인 악령이라 식상했고요. 그나마 허수아비들의 기묘한 모습과 발버둥칠 때의 행동은 해리의 마음을 뒤흔들기는 했지만, 글로는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악령의 정체, 기원이라도 공포스럽게 풀어나갔다면 좋았을텐데 그런 설명도 전무합니다.

이야기도 작가 편의에 따라서 흘러가는게 훤히 보입니다. 처음에 했던 이야기에서 계속 부풀려지고, 새로운 설정이 덧붙여지는 식이거든요. 애초에 댄은 봄, 여름, 가을에만 악령이 나타나며 정해진 방법대로 물리치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땅을 떠나면 죽는다는 설명이 추가됩니다. 해리가 악령에게 이 땅은 자기 것이라는 말을 하며 도발했다가 댄이 죽게 되고요. 왜 처음부터 악령에게 말을 걸면 안된다던가 하는 등의 조건을 자세히 알려주지 않은걸까요? 댄이 죽은 다음에서야 악령에 대해 잘 아는 인디언 조가 나타나서 겨울에는 해리가 죽인 적들이 악령으로 나온다는 말을 해 주는 것도 황당했습니다.
해리와 사샤가 악령을 받아들인 뒤 (?) 악령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이어지는 결말은 그야말로 최악었습니다. 앞서 아무런 설명도, 복선도 없었던 뜬금없는 결말이었기 때문입니다. 뒤로 가면 갈 수록 별로인데, 결말까지 이 지경이니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몇 안되는 등장 인물들도 모두 전형적이며 식상합니다. 해리가 아프간 전쟁 참전 용사였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게 없어요. 게다가 해리는 쓸데없이 악령에게 도발을 하는 발암 캐릭터라 짜증을 불러 일으키고요.
댄과 루시도 굉장히 좋은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 그런지 의심스럽습니다. 첫 만남 때 해리와 사샤에게 악령이 나온다고 설명은 해 주었지만 면박을 당했다고 방관한건, 첫 봄에 해리와 사샤가 충고를 따르지 않아서 죽어도 양심의 가책은 느끼지 않았을거라는 이야기인데 이래서야 좋은 사람들이라고 보기는 어렵잖아요? 처음부터 악령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없을텐데 말이지요. 스티븐 킹의 "장마" 속의, 피해자들을 산제물로 여기며 방관하는 마을 사람들과 별다를게 없어 보였어요.

결론적으로, 권해드리기 어려운 망작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미국 시골 대농장의 한적한 분위기 묘사는 여정 미스터리 느낌을 주며, 조금 독특한 악령들 - 곰에게 쫓기는 남자와 허수아비 - 은 영상화에 어울리겠다 싶기는 한데, 그 외 건질건 없습니다

덧붙여 레딧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이유를 생각해보았는데, 게시판에 실제 상황처럼 글을 썼던 덕분이었던 것 같아요. "꿈꾸던 외딴 농장을 구입해서 이사왔는데, 옆집 노부부가 봄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다며 그걸 피하는 방법을 알려주었어요! 어떻하죠?" 뭐 이런 식으로 시작해서, "진짜 불빛이 나타났어요!" 등등으로 글이 업데이트되었을테고, 이용자들이 각자 댓글을 달고 하는 식으로 흥미를 끌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픽션으로 가공해버리니 '뭔지 모르지만 무서운게 진짜로 나타났다!'는 핵심 공포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네요. 우케쓰의 "이상한 집"의 실패 이유와 거의 비슷한 셈이지요. 이런걸 보면 괴담은 그냥 괴담처럼 써내려가는 미쓰다 신조 방식이 차라리 낫지 싶습니다.

2009/03/24

매직아워 (The Magic Hour / 2008) - 미타니 코키 : 별점 2.5점

매직아워 - 6점
츠마부키 사토시 외, 미타니 코오키/CJ 엔터테인먼트

술집 주인 빙고는 보스의 여자와의 밀애 장면을 들켜버렸다. 목숨을 위협받던 그는 보스가 찾던 전설의 킬러 "데라 토가시"가 자신의 친구라며, 데라를 데려오는 조건으로 겨우 살아났다. 그러나 데라 토가시를 모르던 탓에 보스가 정한 시간은 흘러만 갔고, 빙고는 어쩔 수 없이 무명 영화배우 무라타를 데라 토가시라고 소개했다. 무라타에게는 새로운 영화촬영이라 속였다.
대본도 없는 실험적인 영화라는 황당한 상황에서 무라타의 혼신의 연기는 계속되었고, 그러한 그의 연기에 반한 보스는 상대 조직과의 최종 결전을 준비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라타를 속이던 빙고는 점차 양심때문에 고뇌하게 되는데...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의 각본 - 감독이었던 미타니 코키의 신작입니다. 역시 본지는 좀 되었지만 나름 1/4분기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사실은 최근 통 책 읽을 시간이 없기에 땜빵용으로) 포스팅합니다.

일단 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일요일 낮에 방영하는 모 영화 소개 프로그램 때문이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서 정말 너무나 재미있게 소개를 해 줬거든요. "배우는 영화 촬영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는 유명한 전설의 킬러로 포장되어 갱단에게 비추어 지고 있다"라는, 서로의 오해가 뒤섞여 웃음을 자아내는 핵심 장면만 잘 편집하여 소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앞뒤만 맞아 준다면 꽤 재미를 줄 수 있는 설정이라 생각했기에 곧바로 DVD를 빌려 보았지요. 
그러나... 영화는 생각만큼 웃기지 않았어요! 아주 제대로 낚인 기분이야! 아니, 제대로 낚였어!

재미가 부족한 이유는 영화속 현실도 굉장히 연극적이고 허구적인, 영화 세트장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며 캐릭터들의 설정 역시 만화적이라 현실성이 떨어지는 탓입니다. 그래서 현실과 영화 촬영이 뒤섞이는 부분의 감흥이 많이 떨어지고, 재미와 웃음의 요소가 많이 약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진지한 현실이어야 할 킬러와 갱들의 이야기가 환상적인 공간에서의 동화처럼 느껴지니 어쩔 수 없지요. 만화 주인공들이 펼치는 만화속 영화를 보는 기분이랄까요? 
더군다나 후반부는 완전히 막장이었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반전과 더불어 진짜 전설의 킬러가 등장하지만, 그를 영화 촬영 트릭으로 퇴치한다는 이야기는 도대체 뭘 이야기하고 싶은지 자체를 알 수 없게 만들더군요. 만약 진짜 데라 토가시였다면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싹 쓸어버렸을 겁니다. 영화 촬영이 실제 진실보다 더 리얼하다는 메시지를 전해주려는 건지는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실적이지도 않고, 웃기지도 않고 황당하기만 한 결말이었을 뿐입니다.

그 외에도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왔다갔다하는 전개도 문제입니다. 빙고가 살아남기 위한 작전이 영화의 주된 내용인지, 아니면 3류배우 무라타의 열연과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그려내는 것이 영화의 주된 내용인지 헛갈릴 정도로 중심이 잡히지 않고 정리가 잘 안되어 있어요. (아, 물론 주인공은 무라타죠)

그래도 나름의 미덕과 장점은 분명히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 비현실적이지만 따뜻했던 세트와 주연 배우의 설정과 캐릭터들- 특히 보스의 정부로 나온 후카츠 에리!- 은 충분히 즐거움을 가져다 줄 뿐 아니라, 영화 속에서 주인공 무라타의 소원 (단 한번이라도 스크린 가득 펼쳐지는 자신의 모습) 이 이루어지는 과정, 이른바 "매직 아워"라는 시간에 대한 나름의 정의 같은 소박한 곳에 행복이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는 부분과 거의 모두가 행복해지는 해피엔딩은 아주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장점만 가지고는 실망을 덮기에는 부족합니다. 물론 "웰컴 투 미스터 맥도날드"를 굉장히 재미있게 봤기 때문에 기대가 컸던 탓도 큽니다. 영화 소개만 보고 굉장히 웃길줄 알고 봤는데, 사실은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다른 영화라 실망하기도 했고요. 이런 류의 영화라면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를 대표작으로 들 수 있을텐데, "인생은 아름다워"를 목표로 해서 코미디에 대한 욕심보다는 무라타를 중심으로 하여 따뜻하고 소박한 부분을 더 끄집어 내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빙고 관련 에피소드는 좀 들어내고요. 뭐 크게 달라지진 않았겠지만....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하지만 영화 소개만 보면 별은 4점 이상이야! 영화 소개 프로그램의 대단한 편집 능력에 다시한번 감탄하며 글을 마칩니다.

2019/12/30

2019 내 블로그 리뷰 총 결산

16차, 열 여섯번 째 블로그 리뷰 총 결산입니다. 이글루스 블로그도 어느덧 고등학생 레벨에 진입하였군요. 감개무량합니다.

리뷰에 대해 숫자로 정리해보면, 2019년 읽은 책 중 리뷰를 남긴 책은 추리 / 호러 장르문학 48 (40)권, 기타 장르문학 1 (3)권, 디자인 or 스터디 4 (0), 역사서 15 (9)권, Food 및 구루메 관련 도서 11 (18)권, 기타 도서 18 (21)권으로 모두 97 (91)권입니다(괄호는 작년). 작년과 비슷한 수준으로, 이 정도면 취미가 독서라고해도 부끄럽지는 않아 보이네요. 올해에는 책 출간과 같은 개인사로 독서에 집중하기 어려웠던 시기도 있었으니까요. 내년은 올해보다도 많이 읽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럼 언제나처럼 각 항목별 베스트 - 워스트를 소개해드립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올해 발표된 작품 기준이 아니라 제가 올 한해 보고 읽은 것들 기준입니다.

2019년 베스트 추리소설 : "블러디 프로젝트"

올해의 베스트는 바로 "블러디 프로젝트"입니다. 문체와 같은 작품 외적인 문제로 약간 감점해서 별점은 3.5점이지만 내용과 완성도 모두 빼어나며, 재미 뿐 아니라 생각해 볼만 한 메시지를 함께 전해주는 좋은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2019년 워스트 추리소설 : "살인 카드 게임" 

올해 읽었던 추리 소설들은 처참한 수준의 작품이 많았습니다. 47편의 작품 중 평균 이하를 의미하는 별점 2점 이하의 작품이 30작품이나 될 뿐만 아니라, 졸작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별점 1.5점 이하의 작품은 무려 15편이나 되거든요. 읽은 작품 중 졸작 비중이 31%나 되다니, 무척이나 가혹한 한 해였어요. 심지어 졸작 오브 더 졸작, 정말로 종이가 아깝고 나무에게 미안한 별점 1점의 작품도 "귀신나방""살인 카드 게임"의 두 편이나 됩니다.

두 작품 모두 엉망이지만 올해의 워스트로는 "살인 카드 게임"를 선정합니다. 작가의 이름값이나 출판사의 홍보 등을 미루어 보면 "귀신나방"은 그나마 찾아서 읽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 같은데, "살인 카드 게임"은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더 이상 피해자가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2019년 베스트 / 워스트 기타 장르문학 : 

올해 기타 장르문학은 딱 1권을 읽었을 뿐이라 별도로 선정하지는 않겠습니다.

2019년 베스트 디자인 or Study : "편집자를 위한 북디자인" 

저는 디자인 전공자이기는 하지만 북 디자인에 대한 이해도는 무척 낮았습니다. 제가 학교를 다닐 때와는 여러가지로 상황이 많이 변하기도 했고요. 이 책은 저와 같은 북 디자인 초보자라던가, 제목 그대로 북디자인을 잘 알아야 하는 편집자, 혹은 관련 직업인에게 굉장히 유용한 책입니다. 참 많은걸 배웠던, 좋은 독서였어요.

2019년 워스트 디자인 or Study :

이 분야의 독서는 4권 밖에 되지 않고, 그 중에서도 가장 나쁜 별점이 2점이기에 올해는 별도 워스트 선정은 없습니다. 도판만 충실해도 기본은 해 주는 분야니까요.

2019년 베스트 역사 도서 : "소비의 역사" 

작년에도 "그랜드 투어"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설혜심 교수의 역작. 제목 그대로 소비라는 개념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데, 400 페이지 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소재가 흥미롭고 내용의 재미가 대단해서 술술 읽히는 마법과도 같은 책입니다. 도판과 편집도 모두 완벽한 수준이고요. 미시사를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19년 워스트 역사 도서 : 

올해 역사 도서는 가장 나쁜 별점이 2점이었습니다. 이 정도로 워스트로 꼽기에는 너무 가혹하기에, 올해는 별도로 선정하지 않겠습니다. 역사 도서는 대체로 선방한 분위기네요.

2019년 베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맛의 천재" 

정말 오랫만에 등장한 별점 5점! 이탈리아 요리와 그 요리에 관련된 역사까지 상세하게 소개해주는, 요리와 미시사 양쪽 분야 모두에서 탁월한 놀라운 책입니다. 단점을 찾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완벽함을 자랑하지요. 요리, 특히 이탈리아 요리를 사랑하신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 이탈리아인들은 정말로 위대한 민족이에요. 요리와 예술 측면에서는 말이죠. 참고로, 이 역시 이 분야의 베스트로 꼽을 수도 있겠지만 추리 / 호러 분야와 마찬가지로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군요.

2019년 워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역사 분야와 마찬가지로 별점 2점 이하의 작품이 없기에 올해는 이 분야의 워스트는 없습니다.

2019년 베스트 기타 도서 : "이웃집 살인마" 

기타 도서에는 작년에 이어서 별점 4점을 받은 트리오가 존재합니다. 바로 "이웃집 살인마""위작의 기술", 그리고 "위험한 저녁식사"의 3편입니다. 다 좋은 책이라 우열을 가리기 힘들긴 하지만 "위험한 저녁식사"는 지금 읽기에 조금 낡은 이야기가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위작의 기술"은 다른 책과 겹치는 내용이 있다는 점에서 아쉽지만 베스트에서 제외하였습니다. 물론 모두 좋은 책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은 없습니다.

2019년 워스트 기타 도서 : "일상 기술 연구소" 

평범한 생활 속 기술 중 유용한 '꿀팁'을 소개하는 그런 책이라 생각했는데, 제목에서 연상되는 '기술'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실망을 안겨다 준 책. 내용도 영 와닿지 않아서 제 주변인에게 절대로 권해주고 싶은 책은 아니었습니다.

2019년 Movie 리뷰 : 

영화는 제법 많이 보았지만 고작 4편의 리뷰만 올렸으니 베스트와 워스트를 꼽는게 무의미해보입니다. 올해는 선정 없이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2019년 베스트 Comic - 추리 or 호러 : 

2019년 추리 or 호러 만화는 전통의 시리즈인 Q.E.D와 C.M.B의 후속권을 읽었을 뿐입니다. 각 권의 수준도 고만고만하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베스트 권이 아닌 수록작 중 베스트 에피소드를 꼽도록 하겠습니다.

올해는 Q.E.D가 아니라 C.M.B 쪽이 볼만했다는게 특징입니다. 별점 3.5점짜리 에피소드가 무려 3편이나 등장했거든요. C.M.B 박물관 사건목록 (씨엠비) 34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낡은 집", C.M.B 박물관 사건목록 (씨엠비) 32의 두 번째 에피소드인 "혼선", C.M.B 박물관 사건목록 (씨엠비) 31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지옥혈"이 그 주인공입니다. 

다 좋은 작품이지만 여기서 한 작품을 꼽는다면 "혼선"을 꼽겠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아이의 장난이 강력 범죄와 엮이고, 이 범죄가 극적인 반전과 함께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는 전개가 깔끔한 수작입니다.

2019년 워스트 Comic - 추리 or 호러 : 

베스트와 마찬가지로 워스트 에피소드를 꼽겠습니다. 별점 1.5점의 졸작 에피소드도 Q.E.D iff 3권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세 명의 자객", C.M.B 박물관 사건목록 (씨엠비) 33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보이지 않는 사수", C.M.B 박물관 사건목록 (씨엠비) 32의 세 번째 에피소드인 "사시 부적"의 세 편이니 됩니다.

뭐가 더 낫다고 말하기 애매하지만 한 편을 꼽는다면 "보이지 않는 사수"입니다. 다른 두 작품은 그래도 '추리'와 '트릭'이 등장하는 반면 이 작품은 너무 작위적이며, 추리의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이에요.

2019년 베스트 Comic - 기타 : 

2019년 기타 만화는 별점 2.5점을 넘는 작품이 없기에 베스트는 별도로 선정하지 않겠습니다.

2019년 워스트 Comic - 기타 : "2001+5 Space Fantasia Anthology" 

2019년의 워스트는 호시노 유키노부의 단편집입니다. 이 작품말고 다른 단편집인 "요녀전설 1"도 마찬가지로 별점이 1.5점이니 가히 올해의 워스트 작가라고 할 수 있겠네요. 타석이 두 번이었는데 두 번 모두 병살타를 친 셈입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군요. 

참고로 똑같이 별점 1.5점짜리 졸작 중 "2001+5 Space Fantasia Anthology"를 선택한 이유는? 미완성으로 결말도 없는 작품을 버젓이 책으로 간행하여 팔아먹는 빌어먹을 행태 때문이에요. 이 정도면 병살타가 아니라 거의 게임 엔딩 수준의 실책이라 생각되어 용서가 안되네요.

결산평 : 

16년 째라니... 강산이 변해도 이제 한번 반넘게 변했네요. 올 한 해 우리 가족 모두가 무탈하게, 건강하게 보냈다는게 너무나 기쁩니다. 개인적인 가장 큰 목표였던, 제 책을 출간한다는 목표도 이루었으니 보람도 있었고요.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분들께서는 올 한해 어떠셨나요? 좋은 일 많으셨었다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새해에는 원하시는 일 다들 이루시는 그런 한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작년, 그리고 재작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분들이라면 남들이 관심갖지 않는 사소하고 디테일한 것들에도 관심을 가지시는, 정말로 세심한 분임이 분명할테니 내년에는 더욱 잘 되실거에요. 사랑합니다~!

2018 내 블로그 리뷰 총 결산

2021/09/03

리처드 매시슨 - 리처드 매시슨 / 최필원 : 별점 3점

리처드 매시슨 - 6점
리처드 매시슨 지음, 최필원 옮김/현대문학

호러, 장르 문학의 거장인 리처드 매시슨의 걸작선. 이전 '리처드 매드슨'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단편집은 거의 모두 읽어볼 정도로 좋아하는 작가라 기쁜 마음으로 구입해서 읽어보았습니다.

수록작들 대부분이 좋은 작품들이라 만족스러웠습니다. 무려 33편이나 되는 볼륨도 풍성하고요. SF, 호러, 범죄물, 드라마, 서스펜스 스릴러, 심지어 서부극까지 아우르는 장르적인 스펙트럼도 엄청나게 넓습니다. 전부 걸작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별점 5점, 4.5점, 4점의 걸작과 수작도 포함되어 있기에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그나저나 무슨 기준으로 선정된 작품들인지는 궁금하네요. 작가가 직접 선정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요. 이전에 읽었던 작품 중 분명 걸작이라고 생각했던 작품이 빠져있기도 하거든요.

"남자와 여자에게서 태어나다" 

흉칙한 무언가가 부모님에 의해 지하실에 쇠사슬에 묶여 갇혀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2021년에 읽기에는 많이 뻔합니다. 괴물이 다음 번에는 지하실에서 탈출해서 사람들을 덮친다는 여운을 남기지만, 명확한 결말이 더 낫지않나 생각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사냥감" 

아멜리아는 애인에게 줄 선물로 기묘한 인형을 샀다. 인형을 구속한다는 금줄이 풀리자, 인형은 아멜리아를 죽이기 위한 공격을 시작하는데...

예전에 읽었던 작품입니다. 일종의 크리쳐물로 20cm밖에 안되는 나무 인형과 사투를 벌이는 묘사가 압권이에요. 시대가 흘렀어도 여전히 멋집니다. 

하지만 결말과 담고 있는 주제가 제 기억과 사뭇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아멜리아가 처참하게 희생된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멜리아가 인형을 처단한 뒤, 스스로 사냥꾼이 되어 어머니를 죽이게 된다는 결말이더라고요. 착각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억과 달라서 더 재미있게 읽은 것 같아요.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던 사회적인 메시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미 장성해서 독립한 자녀를 구속하는게 살의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시사적이면서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넘어가던 시기였을 발표 시점에는 충분히 공포스러웠을 시의적절한 메시지였다 생각되네요. 이런 메시지를 돌직구로, 매력적으로 한 가운데 꽂아넣는 작가의 솜씨도 대단하고요.

단, 결말에서 어머니를 죽일 결심을 한 아멜리아가 문의 빗장을 쉽게 연 건 좀 안일했습니다. 인형에게서 도망칠 때에는 여러번 실패했던 걸로 묘사되니까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사회파' 크리쳐 호러라는 신경지를 장르 문학 초창기에 개척한 명작입니다.

"마녀 전쟁"

군에서 키우는 일곱 마녀가 쳐들어오는 적군을 마법으로 물리친다는 이야기로, 마녀들이 각자 특기로 소환한 불과 물, 거대한 암석, 사자 등으로 적을 잔혹하게 몰살시키는 묘사가 내용의 전부입니다. 단지 이런 파괴적인 묘사를 쓰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어요. 이외에는 기승전결이 있지도 않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파괴 묘사만큼은 확실히 볼 만 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판본보다 번역이 훨씬 좋은 덕분이지요. 약간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 느낌도 드는데, 이런 설정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군요.

"깔끔한 집" 

소설가인 나는 아내 루시와 함께 굉장히 저렴한 아파트로 이사왔다. 하지만 얼마 뒤, 아내는 아파트 지하실에 거대한 엔진이 있고, 관리인은 뒷통수에 눈이 달려있다는 말을 하면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나는 처음에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관리인을 미행하여 이 모든게 사실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친한 이웃 필, 마지 부부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함께 아파트가 이륙을 준비할 때 탈출에 성공하는데....

아파트가 로켓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 그리고 마지가 미치지 않았을까?라는 분위기를 풍기다가 그녀가 말했던게 모두 사실이라는게 드러나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었던 SF 단편입니다. 서스펜스가 뭔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아파트가 아니라 사실은 블록 전체가 우주선이라서 탈출이 불가능했다는 반전도 인상적이었고요.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침략하는게 아니라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보디스내쳐"가 연상되기도 하네요.

독특한 설정, 아이디어와 함께 전개에서 긴장감과 흥미를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난 걸작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피의 아들" 

기묘한 아이 쥴스는 드라큘라가 되고 싶다는 망상에 빠졌다. 쥴스는 학교도 그만두고 배회하다가 동물원에서 흡혈 박쥐를 훔쳐내는데...

꽁트에 가까운 짤막한 단편으로, 분량과 흡혈 박쥐가 진짜 드라큘라였다는 반전으로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반전은 뜬금없었고, 리처드 매시슨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는 찾아보기 힘든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이야기에 대한 설명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현재 이야기는 쥴스가 정신병자인지, 진짜 흡혈귀와 관련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나는 잠에서 깬 뒤, 관에 갖혀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이게 적들의 수작이라고 믿은 나는, 관을 탈출하기 위한 갖은 노력 끝에 결국 관 뚜껑을 부수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데...

'나'가 관에서 탈출하기 위한 노력이 작가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로 잘 그려져 있을 뿐 아니라, '나'는 이미 7개월 전 죽었고, 거울로 본 '나'는 썩은 시체였다는 반전이 굉장히 좋았던 작품입니다. "환상특급" 등의 원작으로도 잘 어울릴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시점 전환되는, 그래서 거울 속 모습에 좀비가 보이는 식의 카메라 워크가 곁들여지면 아주 멋지지 않았을까요?

재미와 충격 외에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사소합니다. 얼마 전 읽었었던 좀비물 앤솔러지에 수록되었던, 흔해빠지고 수준 이하였던 작품들 보다는 몇 배 뛰어난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사막 카페"

밥과 진 부부는 여행 중 우연히 사막에 위치한 카페에 들렸다. 진이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밥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데...

외딴 마을에서 맞이한, 남편 밥의 실종과 그에 따른 위기 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여행하던 외지인이 외딴 마을에서 겪는 위기를 그린 작품은 많습니다. 저도 많이 읽어보았고요. 이전 스티븐 킹의 "밴드가 엄청 많더군" 리뷰에서 언급했던 적도 있는데, 보통은 외딴 마을의 기묘한 집단 광기를 그리곤 하지요.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범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정통 범죄물로, 궁지에 몰린 피해자 진의 심리 묘사를 통해 순수한 공포, 서스펜스를 극대화한다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희생자를 화장실에서 납치하는 것에 불과한 단순한 범죄인데다가, 보안관 등장 후 별다른 위기없이 깔끔하게 해결된다는 건 조금 아쉽지만 단점은 사소할 뿐입니다. 장르물이 주어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를 꿰뚫고 제대로 달려주는 수작이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위조지폐"

생계에 지쳐 일탈을 꿈꾸던 윌리엄 O. 쿡씨는 복제인간을 만드는 장치를 개발합니다. 복제인간에게 온갖 귀찮은 일을 시키고 자신은 놀 생각으로요. 그러나 쿡씨의 복제인간답게, 복제인간도 놀고 싶어해서 결국 복제인간이 급증하게 된다는 블랙 코미디 콩트입니다.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이기도 하고요. 설정은 재미있는데 기계가 폭발하고 복제인간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는 결말은 시시했습니다. 뭔가 반전이 있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유령선" 

로스 선장과 메이슨, 미키는 외계 행성에 착륙했다. 우연히 목격한 인공물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추락한 우주선으로 밝혀진 인공물 속에서 발견한 건, 그들 세 명의 시체였다...

일행들이 자기들의 시체를 목격하고 느끼는 공포와 현재 상황에 대해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잘 그려진 SF 단편입니다. 

그러나 자기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는 이미 죽었고 시체를 바라보는 자신은 유령이라는 걸 깨닫는다는 결말은, 발표 당시였다면 모를까 지금 읽기에는 다소 낡은 설정입니다. 제목부터가 스포일러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체의 춤" 

대학 신입생 페기는 나쁜 선배들에게 이끌려 법적으로 금지된 루피 춤을 보러 갔다가 충격에 기절하고 마는데...

세기말 감성이 살아있는 독특한 SF. 예전에 읽었던 작품인데, 그 때와 평가는 거의 동일합니다. 페기 시점으로 묘사된 광란의 루피 춤 공연 묘사는 아주 좋습니다. 순진한 신입생이 거부하고 싶은 방탕과 쾌락도 끔찍하게, 그러면서도 잘 그려내고 있고요. 일종의 좀비인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의 발작을 '춤'이라고 이름 붙여 공연한다는 끔찍한 아이디어도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페기도 잘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방탕함에 빠져버린다는 듯한 결말은 별로였습니다. 이 결말이 루피 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페기가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가 되었다던가, 같은 반전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의 결과물만 놓고 보면, '호기심으로 좀비를 보러 갔다 왔다. 무서웠다." 정도의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몽둥이를 든 남자" 

타임스퀘어에 온 몸이 털로 덮이고 몽둥이를 든 원시인 같은 남자가 나타났다. 출동한 경찰이 총을 쏴서 겨우 원시인을 제압했다.

조금 무식하고 무례한 젊은 마초 양아치 1인칭 대화체로 진행되는 이야기인데 화자 설정도 진부했고, 결말도 뻔했습니다. 핵심은 원시인이 온 곳이 '미래'였을 수도 있다는 건데, 미래에 문명이 퇴화할 거라는 설정의 이야기는 고전 "타임머신"을 비롯해서 너무 많으니까요. 조금 지적인 노인네를 '빨갱이'라고 지칭하는 부분에서 시대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다른 부분은 딱히 건질게 없더군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버튼, 버튼" 

영화까지 나왔던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부부 사이도 서로 모른다'는 걸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기묘한 설정에 더해 서늘하고 섬찟한 느낌과 반전이 있는, '기묘한 맛'류의 쇼트쇼트입니다. 예전에 읽었을 때에는 박한 평을 했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기묘한 맛' 류로는 손에 꼽을 만한 좋은 작품이네요. 왜 나쁜 평가를 했었을까요? 별점은 4.5점입니다.

"결투" 

스티븐 스필버그의 극영화 데뷰작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진 작품. 격렬한 카 체이스를 어떻게 글로 묘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있다면, 모범 답안이라고 해도 좋을 작품입니다. 주인공이 트럭에 쫓기면서 느끼는 공포와 긴장감 등이 아주 잘 드러나 있으니까요.

그러나 트럭 운전사의 분노가 잘 이해되지는 않고, 마지막 트럭의 최후가 너무 뜬금없다는게 아쉽습니다. 확실한 급커브였다던가 등 속도를 반드시 줄여야 했다는걸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심판의 날" 

루크는 심부름을 왔다가 목이 잘린 과부 블랙웰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녀의 아들 짐은 시체를 본 뒤, 극심한 공포로 광란 상태였다. 루크의 아버지 샘은 현장 조사를 통해 과부가 아들을 의도적으로 미치게 만들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그녀는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남편을 죽게 만든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려다가 죽었음) 아들을 증오했었다....

과부 블랙웰이 증오심 때문에 의도적으로 아들 짐이 자신이 없으면 미쳐버리도록 차근차근 준비한 뒤,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결말이 놀라운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끔찍한 공포가 짧은 분량 안에 모두 포함되어 선명하게 드러나는 걸작이에요. 블랙웰 부인이 목을 멘 칼이 어디 갔을지?에 대한 부분이 설명되지 않은건 약간 아쉽지만, 단점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이 단편 하나를 읽은 것 만으로도 돈이 아깝지가 않네요.

덧붙이자면, 엄청난 의지로 저지른 자살이라는 설정은 크리스티 여사님의 걸작 심령 서스펜스 호러물인 "네번째 남자"가 살짝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 작품도 시대를 앞서간 걸작이었지요.

"죄수" 

1944년, 비밀 연구소에서 핵분열을 연구하던 핵물리학자 필립 존슨은 폭발 사고 후 눈을 뜨자, 자신이 2시간 뒤 사형당할 1954년의 사형수 존 라일리 몸 속에 들어와 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핵폭발이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는 SF적인 발상을 담은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과연 필립 존슨이 자신이 사형수 존 라일리가 아니라는걸 2시간 안에 증명할 수 있을까?가 서스펜스의 핵심이고요.

그러나 필립 존슨의 노력은 신부를 한참 설득하다가 아내 전화번호를 주는 것 뿥입니다. 그 외에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요. 덕분에 긴장감이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신부가 그의 아내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며 마무리되는 결말도 애매했습니다. 진짜 필립 존슨의 아내가 없었는지, 아니면 신부가 귀찮아서 거짓말을 한 건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필립 존슨이 모든걸 체념하는 마지막 장면은 영 별로였습니다. 곧 죽을 상황인데, 어떻게든 발버둥 쳐 봤어야죠..

아이디어, 설정은 좋았지만 끌고가는 힘이 부족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하얀 웨딩 드레스" 

세상을 떠난 엄마 드레스에 푹 빠진 아이가 친구에게 몰래 엄마 방과 드레스를 보여주다가 폭주한다는 내용의, 미치광이 1인칭 시점으로 그려낸 혼란스러운 심리극입니다.

그런데 익히 보아왔던 설정과 내용이라 진부합니다. 더 큰 문제는 여백이 많아서 완성된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고요. 엄마는 못생겼고 드레스도 피투성이에 총 구멍이 나 있었다는게 살짝 드러나기는 하지만, 아이가 친구를 죽였는지, 엄마 사인은 무엇인지, 아이는 지금 어디 갇혀서 어떻게 된건지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발"

더운 여름날, 조는 기묘한 손님을 맞아 이발을 해 주었다. 손님은 손톱이 계속 자란다는 등 혼잣말을 읆조리고, 역한 냄새가 났다...

손님이 죽은 사람이었다는건 에상 가능했던 결말이었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은 설정이네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을 때 흙이 떨어진게 아니라, 손은 뼈 밖에 없었다고 하는게 좋지 않았을까요? 신선하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았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윌슨은 출장을 위해 탑승한 비행기 창문을 통해, 괴물이 비행기 날개 위에 앉아 있는걸 발견했다. 괴물은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숨어버려서 윌슨 눈에만 보였다. 비행기 엔진을 부수려고 시도하는 괴물을 막기 위해서, 윌슨은 비행 중인 비행기 문을 여는데...

영화판 "환상특급" 에피소드로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비행기를 타는 것에 대한 공포심, 신경증을 '날아가는 비행기 날개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는 괴물'로 형상화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윌슨이 커튼을 열고, 비행기 창문을 통해 자기를 노려보는 괴물을 처음 보는 장면 묘사는 정말이지 압권이에요.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총을 가지고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등의 묘사에서는 시대를 느낄 수 있고요.

괴물에게 결국 총을 쏜 윌슨이 승객들에게 제압 당한 뒤 비행기 착륙 후 옮겨지는 결말은 다소 시시하지만, 아이디어와 묘사력이 발군이기에 추천하지 않을 수 없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례식" 

클루니스 장례식장 장의사 모튼 실크라인에게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찾아와서 최고급 장례식 준비를 요청했다. 그는 고인이 자신이라고 말했고, 장례식 날에는 하인인 곱추 이고르, 마녀, 늑대인간과 다른 흡혈귀들이 찾아 오는데...

드라큘라를 연상케하는 뱀파이어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스스로의 장례식을 치룬다는 블랙 코미디로, 마지막에 다른 괴물 손님이 찾아온다는 반전도 좋아서 '쇼트쇼트'로는 더할나위 없었던 작품입니다. 장례식에서의 소동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것도 좋았고요.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코미디의 정체성이 잘 살아있어서 놀랐습니다. 거장은 뭘 써도 거장인 법이겠지요? 오래 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역시나 그 때도 좋은 평가를 했었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태양에서 세번째" 

우주 비행사가 세계 멸망을 앞두고, 다른 행성으로 처자식과 이웃 사람들까지 우주선에 몰래 태우고 출발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태양에서 세 번째 행성이었다...

화자인 우주 비행사와 그 가족들이 다른 행성으로 떠나기 전 겪는 마음 속 불안과 혼란을 그리다가, 마지막에 그들이 있던 곳이 지구가 아니라 향한 곳이 지구라는 반전이 등장하는 짤막한 쇼트쇼트. 일종의 서술 트릭물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쇼트쇼트로서는 우수한 수작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최후의 날" 

최후의 날을 맞아 음주, 난교, 광기어린 파괴 행위 등을 즐기던 리처드는, 가족의 소중함을 께닫고 마지막 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내려 한다.

리처드가 어머니와 함께 최후의 순간을 맞으며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걸 깨닫는다는 드라마. 여동생 가족이 죽음을 택하기 위해 약을 먹는 장면은 찡하면서도 괜찮았지만, 그 외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평이했습니다. 소설보다는 "환상특급"과 같이 영상물에 더 잘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도 나쁘지 않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거리 전화" 

몸이 불편한 미스 킨에게 어느날 한 밤중, 폭풍우가 불어올 때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뒤에도 전화는 계속 걸려왔고, 속삭임과 단조로운 흥얼거림에 이어 상대방으로부터 '여보세요'라는 목소리까지 들려오게 되었다. 전화 회사의 조사 결과 이 전화는 묘지에서 걸려온걸로 밝혀지는데...

정체 모를 전화가 계속 걸려온다는건 충분히 공포스러운 일이지요. 이런 설정의 이야기는 많이 있는데, 아쉽게도 이 작품은 다른 이야기만큼 공포스러운 상황을 잘 살리지 못했습니다. 일단 미스 킨의 불안부터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간호사의 말대로 전화를 그냥 끊던가, 수화기를 내려 놓던가, 전화선을 뽑아 놓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걸 "제가 댁으로 갈게요." 라는 마지막 전화 목소리로 알려주는 결말은 괜찮았습니다만, 묘지에서 걸려왔다는게 드러났을 때 이미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설득력 낮은 진부한 이야기라 별점은 2점입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행복한 가정의 아빠인 회계사 로버트 카터는 어느날 면도를 하다가 깊숙하게 베였다. 그리고 상처 속 전선과 기계 장치를 보고, 자기가 로봇이라는 걸 깨달았다. 충격에 거리를 배회하던 카터는 도시가 로봇들로 가득차 있었고, 음식들도 모두 기름이었다는 걸 알아 채는데...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통상적인 의미, 즉 이야기를 모두 해결해 버리는 전능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사전적 의미인 "기계 장치의 신"에서 가져온 이야기라는게 독특하네요. 내가 내가 아니라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흔한 설정을 독보적인 로버트 카터의 심리 묘사로 차별화시킨 솜씨도 거장다왔으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전개도 괜찮았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로버트 카터가 진짜 로봇인지, 아니면 죽은 뒤 환상을 보는 건 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열린 결말은 좀 아쉬웠습니다. 보다 명확한 설명이 뒤따르고 반전도 있는 결말을 기대했거든요. 물론 로버트 카터가 쓰러지면서 떠올리는 성경 구절 - "하느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의 사람을 만들고..." - 은 그가 기계라는걸 연상케 합니다만, 명확하게 증명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계라고 한다면, 그들을 만든 '하느님'이 누구인지도 설명이 필요해 보였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자신이 기계라고 믿는 주인공 이름이 '로버트'라는게 의미심장하네요. 우리나라로 변주한다면 '노보두 씨' 정도로 부르면 되겠지요?

"기록적인 사건" 

가방끈 짧은 쉰 아홉살의 대학교 건물 관리인 프레드는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깬 뒤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교 건물 청소 및 수리를 하면서 대학의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되는데....

갑자기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된다는 독특한 설정과 그 이유가 인상적이었던 소품. 외계인들이 지구의 지식을 손에 쉽게 넣고자 프레드 머릿 속에 대학교 지식을 집어 넣은 뒤 그걸 한 방에 빼 먹은 것이지요. 한마디로 프레드를 일종의 외장 하드로 사용한 셈입니다. 좋은 쇼트쇼트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안에서 죽다" 

돈과 베티 부부에게 '돈 타일러'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돈은 자기는 돈 마틴이라고 주장히먀 화를 냈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돈을 죽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누군가 부부의 집에 침임했고, 돈을 제압한 침입자는 돈이 저질렀던 과거 범죄와 배신에 대해 추궁하는데....

과거 저질렀던 범죄에서 발을 빼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온지 10년 만에 위기가 찾아온다는 서스펜스 범죄물. 돈이 침입자인 심슨과 사투를 벌인 끝에 그를 죽이고, 모든걸 알게 된 아내 베티가 경찰에 빈집털이가 들어와 싸우다 사고가 났다고 신고하는 결말까지 깔끔했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긴장감은 약한 편입니다. 악당 심슨이 침입한 뒤 하는게 없는 탓이에요. 총으로 부부를 위협하고, 과거 이야기를 떠벌이는게 전부거든요. 서스펜스를 끌어올릴 한 방이 필요했습니다. 코넬 울리치가 썼더라면 훨씬 멋진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정복자" 

1871년, 그랜트빌 잡화상 주인인 나는 남북전쟁 때 죽은 아들 루와 닮은 젊은 청년과 역마차를 함께 타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는 그랜트빌 최고의 총잡이와 싸울 목적이었다. 라이커라는 청년은 그랜트빌의 총잡이 바스 셀커크를 깔끔하게 사살했지만, 습격해 온 셀커크의 부하들에게 난사당해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 느낌이 드는 현실적이면서도 허무한 서부극입니다. 라이커 캐릭터가 아주 인상적이에요. 서부극 총잡이들이 영웅이 아니라 허깨비라는걸 잘 보여주거든요. 어릴 때 부터 총잡이를 동경하여 연습을 거듭한 끝에 빠른 속사와 사격술을 익혔지만, 정신적으로는 애와 다름없는 철부지로, 1대 1 결투에서는 이겼지만 여섯 명의 악당이 습격하자 울며 애원하다가 총에 맞아서 꼴사납게 죽기 때문이지요. 풍자적이면서도 현실 비판적인 느낌이 좋았던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홀리데이 맨" 

데이비드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내키지 않는 출근길에 나선다...

데이비드가 출근을 하기 싫어했던 이유는 그의 직업이 끔찍했던 탓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죽음을 미리 지켜보고, 사망자 수를 예측하는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데이비드의 심리 묘사가 그닥이었고, 업무의 끔찍함도 잘 드러나지 않는게 단점입니다. 이 업무가 아무리 끔찍해도 누군가 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느끼기 어려웠고요. 전개가 밋밋하고 반전도 그닥이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분명 예전에 읽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걸 보면 예전에도 별로 인상에 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뱀파이어란건 없다" 

루마니아에 있는 작은 마을 솔타에 사는 게리아 부인은 어느날 밤, 누군가의 습격으로 목을 물어 뜯겨 피를 빨린채 발견되었다. 게리아 박사는 다음날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부인을 지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결국 게리아 박사는 후배 미카엘 바레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크리쳐 호러물로 시작해서 깔끔한 범죄물로 마무리되는 작품입니다. 왜 범죄물이냐 하면, 뱀파이어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리아 박사가 커피에 아편을 타서 아내를 재운 뒤, 목에서 피를 뽑아냈던 거지요. 이유는 그녀가 후배 바레스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이었고요. 마지막은 바레스가 뱀파이어인 것 처럼 꾸민 뒤, 그 심장에 말뚝을 박아 넣을 거라며 마무리됩니다. 

기발한 소재와 불륜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 의외의 반전, 내용은 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비교적 짤막한 분량이라는 점 등 전형적인 미국식 쇼트쇼트의 특징을 모두 갖춘 작품입니다. 트릭도 조금 유치했지만, 뱀파이어 전설이 살아있는 루마니아라는 설정이라서 나름 설득력있고요. 너무 전형적이라서 작가 특유의 긴장감은 찾아보기 힘들다는게 조금 아쉬웠지만,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깜짝 선물"

늙은 호킨스 씨는 집 앞을 지나는 어린 소년들을 부르곤 했다. 소년들에게 "땅을 파면 깜짝 선물을 찾을 수 있다는" 주문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니에게는 주문이 아니라 정확하게 어디를 파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깜짝 선물이 금괴라고 확신한 어니와 친구들은 그 곳을 파기 시작했다...

당연히 선물이 뭔가 나쁜거라는 짐작은 되지요? 어니가 찾은건 일종의 관이었고, 그 안에서 호킨스 씨가 튀쳐 나온다는게 결말입니다. 그러나 결말의 반전은 약했으며 설득력도 없고, 동기도 불분명한 등 설명까지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어니가 땅을 파게 만드는데 까지의 전개는 좋았는데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산타클로스를 만나다" 

켄은 산타클로스를 만나고 싶다고 떼를 쓰는 아들 리처드와 함께 다시 백화점으로 향했다. 아내 헬렌은 차에 남겨둔 채였다. 사실 켄은 이 기회를 빌어 헬렌을 죽일 생각으로 살인청부업자에게는 돈을 지급했었다. 그러나 산타클로스를 만나러 가는 동안, 그는 죄책감, 양심 등으로 심하게 갈등하는데...

아내를 죽이려고 하지만, 실제로 실행하는 순간이 되자, 켄이 겪는 극심한 마음 속 갈등과 혼란이 핵심인 심리 스릴러. 심리 묘사가 아주 빼어나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긴장감을 느끼게 만드는 심리 묘사야 말로 작가의 특기 중 특기지요. 살인과 극명히 대비되는 크리스마스, 산타클로스라는 소재를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로, 특히 '착한 일을 해야 선물을 받는다'는 산타클로스와의 약속을 결말에서 제대로 써 먹고 있습니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켄의 삶이 조금 더 비참해 졌다는 결말이니까요. 켄은 선물 (아내의 죽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읽히는데, 현실적이기도 해서 마음에 듭니다. 별점 4점은 충분한 수작입니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강남길 씨가 아내를 죽이려고 노력하던 TV 단막극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켄과 리처드가 많이 걷지 않아도 되도록 차를 옮겨 놓겠다는 아내의 말에 켄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장면에서요. 하지만 강남길 씨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었지만, 켄에게는 지옥이 열릴 거라는 결말은 천지차이이기는 합니다만, 이런게 미국과 한국의 감성 차이인지도 모르겠네요.

"춤추는 손가락"

장거리 버스 여행 중 내 앞에 앉은 여성은 장애인이었다. 그녀는 옆에 앉은 돌보미 여성에게 끊임없이 수화로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다가 장애인 여성이 내 자리를 빼앗았고, 어쩔 수 없이 원래 그녀 자리에 앉은 나에게, 옆자리 돌보미 여성이 해준 이야기는 자신과 장애인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수화로 수다를 떨 수 있다는 발상에서 시작해서, 장애인 여성의 수화 수다로 돌보미 여성이 그녀를 벗어나고 싶어했고, 돌보미를 놓아주기 싫었던 장애인 여성이 괜찮은 남자를 물색해서 노리개로 던져준다는, 일종의 '남자 사냥' 으로 이어가는 전개가 자연스럽고 좋았던 작품. 아이디어 발상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체험한 느낌이 드는 독특한 작품이었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남자를 유혹하던 여성이 갑자기 식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결말이 너무 허무하네요. 남자 사냥은 돌보미를 바꾸기 위함이었다던가, 아니면 최소한 남자를 잡아 먹기라도 했어야지요. 지금은 기승전까지는 흥미롭고 재미있는데, 결이 너무 급작스럽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벙어리 소년" 

시골 마을에 살던 닐젠 부부가 화재로 죽고, 부부의 아들 팔은 보안관 해리와 코라 부부에게 위탁되었다. 학교도 다니지 않고 말도 못했던 팔을 코라는 사랑으로 돌보고, 죽은 자기 아들 대신으로 여겼다. 그래서 코라는 남편이 시도했던 닐젠 부부 지인에게의 연락을 훼방놓았다. 그래서 닐젠 부부가 죽은 뒤 한참 뒤에야 부부의 지인 베르너 교수가 팔을 찾아 왔다. 그러나 그 사이, 학교를 다녔던 팔은 그가 가졌던 독특한 텔레파시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팔은 벙어리가 아니라 부모의 텔레파시 교육을 받았던 텔레파시 능력자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고, 부모는 텔레파시 능력이 훼손될까봐 특정한 이미지, 단어로 설명되는, '말'을 익히는 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겁니다. 단어로 이루어지는 교육이 한계가 있다는 발상은 꽤나 시대를 앞서간 느낌이에요.

그러나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닐젠 부부의 사고, 코라가 팔을 양자로 들이고 학교에 보낸 것, 베르너 교수의 방문 등 여러가지 사건이 두서없이 펼쳐지는 탓이 큽니다. 닐젠 부부가 죽은 화재 사고의 원인도 결국 밝혀지지 않고요. 또 팔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건 엄연한 아동 학대입니다. 팔이 가진 능력이 대단하고 아름답다고 포장할 이유도 없어요. 실상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 그냥 말 없이 생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게 전부인데, 이러느니 말로 하는게 더 낫잖아요? 근거리에서만 가능한 듯 싶으니 결국 신문이나 방송을 접하려면 글을 익혀야 하는건 당연하고요. 왜 이렇게까지 팔을 옭아맸어야 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마찬가지 이유로 현실 학교 교육이 팔의 정신을 좀먹는다는 묘사도 불필요했습니다. 

팔이 말을 하기 시작해서 텔레파시 능력이 사라졌다는 결말도 맥빠집니다. 어차피 대단한 능력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아쉬운 일로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팔에게는 코라의 사랑이 더욱 필요했으니, 앞으로는 행복해질 일만 남아 있을테고요.

차라리 '사랑은 말이 없어도 알 수 있는 감정이다'는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멋진 설정을 더 부각시키는 쪽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싶네요. 팔이 능력의 편린을 유지한채 성인이 되어 여자 마음을 잘 아는 능력자가 된다는 식으로요. 지금은 설정, 이야기가 따로 노는 느낌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충격파" 

교체를 앞둔 교회 오르간이 폭주해서 교회를 파괴한다는 내용의 작품.

늙고 낡아버려서, 사랑했고 필요로 했던 것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교체되는 것에 대한 공포를 그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그런데 딱히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공포를 자아내는 맛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파이프 오르간의 폭주는 상식적인 선에 그쳐서 크리쳐물로 보기도, 재난물로 보기도 어려운 애매한 작품이 되어버렸어요. 예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요. 별점은 2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