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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4

아자젤 - 보리스 아쿠닌 / 이항재 : 별점 2.5점

아자젤 - 6점
보리스 아쿠닌 지음, 이항재 옮김/아작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유한 대학생 코코린이 백주대낮에 기묘하게 자살했다. 막 스무살이 된 14등급 서기관 에라스트 판도린은 목격자 중 한 명의 '대학생' 이라는 증언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코코린의 복장은 대학생임을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사를 통해 판도린은 대학교 제복을 입은 니콜라이가 코코린과 함께 행동했다는걸 알아냈다. 니콜라이는 심지어 코코린의 유언장에 집행인으로 언급된 인물이었다.
알고보니 코코린의 자살은 자살이 아니라 둘이 수수께끼의 미녀 아말리야를 두고 벌인 일종의 결투였다. 그러나 니콜라이는 곧바로 암살자에게 칼에 찔려 죽고 판도린도 죽을 뻔 하는데....

19세기 후반의 제정 러시아를 무대로 14등급(중간에 진급해서 9등급) 서기관 에라스트 판도린이 활약하는 추리 모험 소설입니다. 일종의 역사 추리물로 볼 수도 있으며, 특별한 정보를 입수하고 해석하여 국제적인 음모와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일종의 스파이 소설로 볼 수도 있는 복합적인 장르의 작품입니다.

러시아에서는 현재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는 시리즈라는데 수긍할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줄거리 요약이 된, 니콜라이가 살해되는 초반부까지는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유쾌한 분위기도 좋고, 러시안 룰렛을 흉내낸 기묘한 자살이 사실은 '결투' 였다는 아이디어도 기발한 덕분입니다. 사건에 니콜라이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깨달은 판도린의 직감도 높이 평가하고 싶고요. 이런저런 복선도 꽤 충실합니다. 고래뼈 코르셋은 아주 일품이에요.

그러나 이어지는 중반부는 많이 어설픕니다. 아말리야와 애증의 관계라는 주로프가 그녀의 행방을 알려주는 부분부터가 억지스럽습니다. 판도린이 정상으로는 생각되지 않는 객기를 부려 주로프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완벽하게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목숨을 내거는 모습에 감명한 주로프가 오히려 그를 살려주고 아말리야의 주소까지 전해준다는건 여러모로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결투를 촉발한 둘 사이의 도박이 굉장히 이해하기 힘듭니다. 물주가 카드 한 장을 오픈하고, 두 장을 차례로 오픈한다, 첫 카드가 오픈된 카드와 같으면 물주가 이기고 두번째 카드가 같으면 상대방의 승리. 만약 두 카드 모두 오픈된 카드와 다르면 판돈을 2배로 올려 이를 최대 5번까지 반복한다는 룰인데 누가 봐도 물주가 너무 유리해요! 여기서 물주가 이길 확률은 97%!!!!에 달합니다. 이런 도박을 졌다고 주로프가 열이 받는건 말이 안됩니다. 어차피 다음 물주는 주로프였으니까요.

게다가 아말리야의 영국 주소를 받고 영국에서 벌어진 모험은 더 가관입니다. 판도린이 중요한 서류를 손에 넣은 건 단순한 미행 덕분이고, 그의 행방을 밝혀낸 아말리야 일당에게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익사 직전에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범인들이 칼을 미쳐 빼앗지 않은 덕분입니다. 순전한 행운이죠. 배신자 프이조프에게 죽을 뻔 할 때 갑자기 나타난 주로프가 그를 구해주는 건 우연과 행운의 행진에 정점이고요. 워낙에 말도 안되는 행운인지라 작가도 무안했는지 주로프의 입을 빌어 '판도린은 '후광'을 갖춘 특별한 행운의 소유자다'라고 양념을 조금 치기는 하지만... 솔직히 그럴리가 없잖아요?
이런 행운은 걷어내고 보다 설득력있게 전개할 필요가 있었어요. 아말리야를 사살하고 탈출한 판도린은 프이조프의 배신 덕분에 위기에 처하지만, 특유의 호흡법으로 살아나서 그들을 되려 해치운다는 식으로요. 이렇게 된다면 주로프는 등장할 필요도 없죠.

그래도 다행히 겨우 살아난 판도린이 팀장 브릴링에게 진상을 말하는 데에서 시작되는 후반부는 또 괜찮습니다. 특히 '아자젤'이라고 불리우는 집단의 정체가 백미입니다. 각국에 신원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이 유력자로 급부상했다는게 확보한 서류로 알아낸 전부인데, 판도린은 이들이 모두 에스터 남작 부인이 운영하는 보육원 에스테르나트 출신이라고 추리하죠.
이 놀라운 추리는 앞 부분에서 상세하게 설명되었던 여러가지 복선들로 뒷받침 됩니다. 부유했던 두 대학생이 유산을 남기기로 유언한 곳은 에스터 남작 부인의 보육원이었다는 당연한 증거는 물론, 남작 부인의 교육 철학 역시 중요한 복선입니다. 각자의 재능을 딱 맞춰 개회시킨다는 것으로 이를 통해 고아들이 각자의 분야(경제, 군사, 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낸게 그럴듯하게 설명됩니다.

물론 후반부에서도 판도린은 두 번의 위험을 순전히 행운으로 벗어난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특히 남작 부인에게 사로잡히지만 오래 수련한 호흡법으로 숨을 참아 클르르포름 마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대체 이게 뭔가 싶더군요. 판도린의 모습을 본 브릴링이 엄청난 충격을 받는 묘사에서 브릴링이 흑막 중 하나라는건 눈치챌 수 있어서 반전의 묘미도 약했고요. 개인적으로는 남작 부인까지 처지하고 성공과 미인 신부까지 손에 얻은 판도린의 행복이 아자젤 잔당에 의해 박살나는 비극적인 결말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도 행운이 이어지는 전개 문제는 핵심 추리와 진상이 놀라운 덕분에 상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시대상을 세밀하게 그려낸 묘사도 좋습니다. 러시아 작가가 쓴 오리지널 러시아 추리 소설은 알렉산드라 마리리나의 작품 이후 십수년만에 처음인데 저력이 대단하네요. 재미와 흡입력이 아주 상당합니다. 별점 2.5점은 충분합니다. 번역 출간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덧붙이자면, 어설픈 전개를 조금 보완해서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훨씬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2020/10/23

북의 유즈루, 저녁 하늘을 나는 학 - 시마다 소지 / 한희선 : 별점 2.5점

북의 유즈루, 저녁 하늘을 나는 학 - 6점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시청 수사 1과 형사 요시키 다케시에게 이혼한 전처 가노 미치코로부터 5년 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불길함을 느낀 요시키 형사는 우에노를 찾아 유즈루 9호에 탄 미치코를 창 밖에서 배웅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오모리에 정차한 유즈루 9호에서 젊은 여성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휴가를 내어 아오모리 경찰서를 찾은 요시키는 피해자가 미치코는 아니라는걸 알았지만, 미치코가 걱정된 탓에 그녀가 이혼 후 머물렀던 홋카이도 구시로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가 두 명이 살해된 사건의 용의자라는걸 알게 되는데....

시마다 소지가 쓴 요시키 형사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일본 본격 미스테리 100선에도 선정되어 있습니다.

요시키 형사 시리즈는 이전에 딱 한 작품만 읽었습니다. 그래서 잘 알지는 못해요. 하지만 전형적인 명탐정 미타라이 기요시보다는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탐정이라 느꼈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시키 형사의 인간적인 매력이 잘 드러나 있거든요. 돈이나 지적 만족감 따위는 필요없이, 사랑하는 전처가 무죄라는걸 증명하기 위해 나서는 사랑꾼으로 그려졌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갈비뼈 3개가 부러지는 등 중상을 입고도 그녀를 구하는 모습은 슈퍼 히어로를 연상시킵니다.

범인들이 미치코 집 안에 시체 두 구를 옮겨 놓는 순간 이동 트릭도 괜찮습니다. 시체가 발견된 미치코 집과 범행 현장인 범인들 자택 사이의 건물 옥상에 로프를 매달아 만든, 일종의 커다란 그네(진자)를 이용하여 시체를 옮긴 겁니다. 시체에 갑옷을 입혀 진자 운동을 시키면, 반대쪽 정점에 오면 속도는 0이 됩니다. 그러면 회수는 가능했을테니 나름 '과학적'이지요.
가면 무사가 유령처럼 사진이 찍힌 이유도 이 진자 운동 트릭과 맞물려 '과학적으로' 설명됩니다. 사진을 찍는 순간 관리인실 뒷 창을 막 지나게 되어 사진에 찍힌 겁니다. 발상만큼은 정말 기가 막혀요.
이 때 로프가 난간에 부딛혀 나는 소리를 현장에 있었던 '밤에 우는 돌' 전설과 연결시키고, 시체가 벽에 부딛혀도 괜찮도록 시체에 갑옷을 입힌걸 '가면 무사' 유령 전설과 엮는 전개도 좋았습니다. "민속 탐정 야쿠모" 속 베스트 에피소드에 뒤지지 않을 정도에요. 그만큼 전설이 사건과 잘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 정도면 본격 추리 100선에 꼽힐만 합니다.

요시키 형사 시리즈 대부분이 갖춘 특징인 여정 미스터리 성격도 잘 드러납니다. 도쿄에서 아오모리로, 아오모리에서 배를 타고 하코다테로, 하코다테에서 삿포로를 타고 삿포로로, 삿포로에서 기차로 구시로로 향하는 과정, 그리고 구시로 범화가인 기타오도리 외길 및 구시로를 포함한 각 지역에 대한 묘사가 상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트릭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맞은편 건물까지, 개천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으니 약 10m 떨어져 있다고 칩시다. 1층 관리인실 창문을 지날 정도면 5층 높이이니 거의 비슷하겠죠. 후지쿠라 레이코가 시체를 놓쳤을 때 회수를 쉽게 하려고 로프를 한 번 더 연장했다니 두 배, 그러니까 최소 20m는 되는 긴 로프가 필요합니다. 현장도 두 곳이라 두 군데에 걸쳐 설치해야 하고요. 그런데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로프를 잘 설치하고, 회수한 방법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또 10m 로프에 매달린건 갑옷 입은 시체입니다. 50kg 이라고 할 때, 속도와 운동에너지는 엄청났을 겁니다. 특히 중심으로 향하면 향할 수록요. 이 속도로 가운데 건물에 충돌했다면? 갑옷을 입었다고 시체가 무사할리 없습니다. 그 소리를 관리인 등이 들었을게 뻔하고요. 한마디로, 운이 엄청나게 좋아서 성공했을 뿐입니다. 설득력은 무척 낮아 보여요. 최소한 건물에 로프를 걸 부분이 튀어나와 있었다는 설명은 필요했습니다.

진범인 후지쿠라 이치로, 지로 형제에 대한 묘사도 아쉽습니다. 이런 고급 트릭(?)을 생각해내고 실행에 옮겼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실수가 많은 탓입니다. 유쾌한 모습을 요시키 형사에게 들키는 첫 등장부터 실수에요. 레이코가 실종되었다는건 미치코를 죽인 뒤, 자살로 위장하려는 계획이 실패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미치코가 살아서 증언한다면 그들도 충분히 수사 선상에 오를 수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태연하게,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는건 여러모로 어설펐습니다.
게다가 자신들을 의심한 요시키 형사를 습격해서 중상을 입힌건 그야말로 엄청난 실수입니다. 용의선상에 있지도 않은데 도쿄 경시청 수사 1과 형사를 습격해서 폭행한다? 아예 죽일 생각이었다면 모를까, 요시키 형사가 살아만 있다면 중상을 입건 말건, 그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정황상 요시키 형사를 습격한건 그들 형제가 분명하니까요. 두 형제와 요시키 형사의 다툼을 카페 아르바이트와 손님들이 목격하기도 했고요. 즉, 살인 혐의가 아니더라도 요시키 형사 폭행 혐의로 충분히 수사 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자기 무덤을 판 셈이에요.

나중에 직접 미치코를 살해하려는 행동도 마찬가지로 어설퍼요. 원래 계획대로 미치코를 자살한 걸로 위장해야 말이 됩니다. 그런데 미치코는 살아서 누군가의 차를 타고 호텔을 떠난게 목격되었습니다. 형제가 운영하는 카페 '화이트'에 전화를 건 뒤, 카페에서 보낸 차를 타고 떠났다는 것도 호텔에서 증언해 줄 수 있고요. 그런데 이 뒤에 호수에서 미치코 목을 졸라 죽인다? 바로 체포될 겁니다. 설령 경찰이 호수에 빠트린 미치코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하더라도요. 정황이 너무 확실하니까요.

그리고 요시키 형사 습격과 미치코 살인 미수 당시에는 별다른 알리바이를 만들지 않는 행동에서도 고급 트릭을 고안하고 실행한 두뇌파 살인범으로 보이지 않있습니다. 이래서야 요시키 형사 상대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죠.

그 외에도, 게이코가 미치코 집에 들어간건 관리인에게 안 들켰고 열쇠도 복제해 놓았을 뿐이라던가, 미치코가 어린 시절 형제에게 지은 죄로 살인 공작에 끌려 들어갔다던가 하는건 모두 작가 편의에 따른 전개에 불과해 보입니다. 정교함은 찾아보기 힘들어요. 미치코가 형제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할 정도로 죄의식이 있었다면, 형제가 거창하게 장치를 마련해 살인을 저지를 이유도 없습니다. 최소한 미치코 돈부터 빼앗는게 순서죠. 

전개도 작위적입니다. 요시키가 중상을 입고, 추리에 시간 제한이 있다는 점에서요. 특히 시간 제한은 이해가 안 되더군요. 미치코 체포 영장이 발부되어도 공식 재판까지 시간을 두고 추리해도 되니까요. 구태여 영장 발부 전으로 시간을 정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영장이 발부된다고 다 전과자가 되는게 아닌데,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무리수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장점은 확실하지만 단점도 명확한, 전형적인 신본격 추리물입니다. 선뜻 권해드릴 정도는 아니지만, 본격물 팬이고 요시키 형사 시리즈가 궁금하시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괜찮습니다.

2025/09/13

속임수의 섬 - 히가시가와 도쿠야 / 김은모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호사 사야카는 출판 재벌 사이도우지 가문 유언 집행을 위해 가문의 별장이 있는 비탈섬으로 향했다. 유언 집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사촌 쓰루오카, 그리고 쓰루오카를 찾아 데려온 탐정 고바야카와 다카오와 함께였다. 그런데 가문 일족에게 유언장 내용을 공개한 다음날, 쓰루오카는 전신이 골절되어 살해당했다. 태풍으로 경찰이 출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카오와 사야카는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데...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장편입니다. 작가의 작품 중 가장 길다고 하네요.

특징이라면 고전 본격 추리물의 전형적인 요소를 충실히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태풍으로 고립된 외딴섬 ‘비탈섬’, 기묘한 외형과 구조를 가진 별장 ‘화강장’, 그곳에 모인 출판 재벌 사이도우지 가문 일가, 그리고 명탐정의 등장까지 모두 고전 추리물 애호가에게 익숙한 클로즈드 써클 설정 그 자체입니다. 

설정뿐 아니라 제시된 수수께끼도 본격적입니다. 23년 전 낚시 중 물속에서 사람이 뱃전 위로 튀어 올랐던 괴이한 사건과 그때 목격된 ‘용’의 정체, 최근 벌어진 쓰루오카 전신 골절 살인 사건, 중정에 나타난 오두막과 빨간 도깨비, 전망대에서 사람이 사라진 수수께끼, 그리고 기묘한 화강장의 구조 등 여러 의문이 등장합니다. 이 모든 수수께끼는 결국 하나의 결말로 이어지고요.

그 중에서도 화강장의 구조가 ‘책을 읽는 사람’을 본떠 설계되었고, 그 구조가 핵심 트릭이라는 진상이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책의 위치가 중정이며, 그곳에 숨겨진 거대한 팝업북이 흉기였다는 사실을 다카오 등이 구조를 파악하며 밝혀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덕분입니다. 현재 전망대 창은 ‘두뇌’ 역할을 하는 서재 앞에 있어 얼굴의 ‘이마’에 해당하는데, 그렇다면 그 아래에는 ‘눈’에 해당하는 공간이 있을 것이라는 추리도 설득력있었고요. 사야카의 눈을 피해 전망대에서 사라진 사람은 바로 이 공간으로 이동했던 것입니다(AI로 그려본 아래 이미지 참고하세요).

23년 전 사건에 대해 가문 사람들이 침묵했던 이유도 잘 설명됩니다. 사이도우지 도시로가 살해된 뒤 범인이 절벽 끝에서 사라지고, 게이스케의 익사체가 밀려왔으니, 일족은 ‘게이스케가 할아버지를 살해하고 투신 자살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드러난 진상과 트릭은 솔직히 실망스럽습니다. 23년 전 사건의 실제 경위는 이렇습니다. 쓰루오카가 도시로를 살해한 뒤 절벽에서 로프를 매고 뛰어내렸고, 이를 막으려던 게이스케가 함께 추락했습니다. 쓰루오카는 캐러비너로 로프를 고정해 무사히 착지했지만, 게이스케는 로프 반동으로 낚시배 위로 튀어 오른 것입니다. 당시 목격된 ‘용’은 잘려진 로프였고요. 그러나 목숨을 걸고 절벽에서 뛰어내린다는 설정은 한 마디로 무리입니다. 안전하게 로프를 타고 내려가도 충분했을 텐데 굳이 도박에 가까운 방법을 택할 까닭이 없으니까요. 쓰루오카가 별장을 통해 되돌아오기 위해 이용한 동굴 통로를 일족이 전혀 몰랐다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고, 쓰루오카가 그 통로를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당시 배에 함께 있던 학생 히로시가 기억을 잃자 그를 게이스케의 대역으로 삼아 23년간 속여왔다는 설정 역시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최근 사건의 흉기는 앞서 언급한 대로 중정에 설치된 거대한 팝업북 장치입니다. 사이도우지 출판사의 첫 동화책을 재현한 이 구조물은 전망대의 책과 연동되어 작동했고, 게이스케는 이 장치를 이용해 쓰루오카를 중정으로 유인해 압사시켰습니다. 피투성이 쓰루오카의 시신이 오두막 모양 팝업에 걸려 올라오자, 이를 미사키가 ‘빨간 도깨비’로 착각했던게 진상이고요. 그러나 이 팝업북 트릭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입니다. 이 정도 크기와 무게의 장치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설명이 없고, 그렇게 거대한 구조물이 움직이는데 아무도 소음을 듣지 못했다는건 말도 안되니까요. 다른 일족들이 이처럼 거대하고 값비싼 구조물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는 것 역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이야기의 전개 역시 장황하고 불필요한 부분이 많습니다. 고전 본격물처럼 ‘일족’이 등장하지만, 실제로 사건에 관여하는 인물은 피해자 쓰루오카와 범인 게이스케 뿐입니다. 다른 등장 인물들, 특히 도라쿠 스님은 등장하지 않는 편이 나았습니다. 작가 특유의 유머를 곳곳에 섞은 문체도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이어지는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며, 웃음도 유발하지 못합니다. 읽는 내내 고통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탐정 고바야카와 다카오 역시 시덥잖은 유머만 남발하는 가벼운 남자로 그려져 도무지 명탐정으로는 보이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고전 추리물의 외형은 갖추었지만, 트릭과 이야기의 완성도가 턱없이 부족한 졸작입니다. 심지어 길기까지 하니 추천하기 어렵네요. 이 작가 작품도 더 읽을 일은 없겠습니다.

2015/04/09

완전범죄 - 오구리 무시타로 / 신정원 : 별점 2점

1930년대, 중국 호남 팔선채에 영국식 저택 이인관이 위치하고 있었다. 원래는 옥스퍼드의 인류학자 휴 로렐 교수의 연구 설비였는데, 현재는 외동딸 로렐 부인이 거주 중이었다. 진격해 온 묘족 군대의 지휘관 자로프는 이곳을 사령부로 정하고 머물렀다. 하지만 저택 안에서 남자들을 상대하던 집시 헤더가 완벽한 밀실에서 죽은 시체로 발견되는데....

"흑사관 살인사건"으로 유명한 오구리 무시타로의 중편입니다. 데뷔작이라고 하네요. 국내 최고의 미스터리 동호회 하우미스터리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자리를 빌려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작품은 전형적인 밀실물입니다. 핵심 사건과는 별개로 약간 독특한 암호 트릭도 등장하고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고전 정통 본격물인 셈이지요. 피해자 헤더가 미친 듯 웃던 와중에 남자 웃음소리가 들렸던 것, 경비를 서던 정이 목격했던 파란 옷의 인물, 이상한 곳에 떨어진 비누거품, 방에서 풍기는 꽃향기, 헤더 몸에서 발견된 모기에게 물린 자국이라는 몇 개의 단서만을 가지고 자로프의 추리가 연달아 펼쳐지며 마무리 추리쇼로 이어지는 전개를 보면 "흑사관 살인사건"의 원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단서와 상황을 잘 결합한 추리들도 꽤 볼 만했는데, 특히 "소리"를 통해 색깔을 착각한 것이라는 이론이 가장 기발했습니다. 정말 가능했을까 싶긴 했지만, 과학적 근거를 들어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작가가 눈이 인식하는 색깔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다는건 확실한 것 같네요. 여하튼, 여러 아이디어를 연달아 쏟아내는 자로프의 상상력에는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디어나 트릭이 많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이 작품은 짤막함에도 불구하고 단점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읽기 어렵고 지루하다는 점입니다. "흑사관 살인사건" 때도 그랬던 걸로 보면 번역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장황하고 드라마는 딱히 두드러지지 않으며, 읽는 사람 머리만 아프게 만드는건 작가의 스타일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리고 추리적으로도 문제가 큽니다. 사건의 동기가 너무 황당하기 때문입니다. 우생학 이론에 바탕을 둔 동기인데, 특정 성씨를 멸족시키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성씨 사람들을 볼 때마다 죽일 수도 없을텐데 말이죠.
트릭도 장황한 설명에 비하면 진상은 너무 허술합니다. 일종의 장치 트릭으로, 부인이 치던 오르간 소리가 엉망이었다는 단서와 연결시킨건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전부 수준 이하였던 탓입니다. 오르간 특정 키와 헤더의 방이 연결되어 웃음 가스와 독가스를 내보냈다는 설정인데, 거창하고 복잡할 뿐더러 애초에 이렇게까지 기이하게 사건을 벌일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자로프를 말로 꼬드겨 헤더를 죽이게 만드는 게 더 쉬웠을 것 같아요.
암호 트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한자를 사용한 트릭을 영국인이 만들 수 있었을까 같은 사소한 의문은 차치하더라도, 굳이 암호로 만들 정도의 비밀은 아니었거든요. 흔히 보는 “사실 너의 어머니는...” 류의 내용인데, 어차피 본인은 죽을테니 그냥 말로 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930년대, 묘족 군대, 중국 호남 팔선채의 이인관이라는 독특한 설정이 작품 속에 잘 녹아들었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밀실 살인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는 사건 당시 바로 옆방에 있었던 간부 4인방을 대상으로 추리쇼가 이어지는 것이 전부라서, 일본 어딘가의 독특한 건축물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과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중국적인 배경이 묘사되는 여정 미스터리 스타일로 쓰여진 것도 아니고요. 왜 이렇게 설정을 잡았는지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는 볼 만하지만,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추리 퀴즈의 해답을 이어 붙인 것 같은 느낌이에요. 독특하다는 점과 역사적인 가치를 빼고는 점수를 줄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적절한 가격과 분량은 매력적이므로, 초창기 일본 추리소설에 관심 있으시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덧 : 항상 알라딘을 이용하다가 이번에는 yes24 e-book으로 증정되는 이벤트라 별 수 없이 yes24 e-book으로 읽었는데, e-book 뷰어 자체는 너무 별로네요. 화면이 자동으로 꺼지는 설정을 어디서 끄는지도 모르겠고, TTS로 읽어주는 기능도 없고요...

2024/08/02

[번역] 돈돈 다리, 떨어졌다 (4). - 아야츠지 유키토

「돈돈 다리, 떨어지다」의 「문제편」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속으로 살짝 일어난 화를 누르며 U군을 바라보았다. 그는 책장에서 꺼내온 우메즈 가즈오의 만화(『오로치』의 SUNDAY COMICS판, 네 번째 권이다)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아, 다 읽으셨어요?"
내 시선을 느낀 U군은 책을 덮으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우메즈 가즈오는 몇 번을 읽어도 대단하죠. 저는요, 그를 인생의 스승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해요."
환하게 웃으며 그런 말을 했다. 우메즈 가즈오가 대단한 것은 나도 전적으로 인정하는 바지만,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인생의 스승"이라고까지 치켜세우는 그의 천진난만함(이라고 할까 뭐라고 할까)이 이때의 나에게는 왠지 몹시 불쾌하게 느껴졌다.
그는 "스승"의 책을 정중히 옆에 놓으며 "자, 아야츠지 씨"라고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어떻습니까? 설마 벌써, 풀어버리셨나요?"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제한 시간은 얼마나 남았지?"
"그렇네요."
U군은 손목시계를 보더니,
"30분 정도 남았군요. 그 정도면 괜찮으세요?"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 세 번째 세븐스타 담배 포장을 뜯었다. 불을 붙이면서, 지금 느끼는 이 화의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피해자인 악동의 이름이 "유키토"라는 것 때문인가? 그것도 완전히 관계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기분이 나빠져서는 안 된다. 상대는 열 살이나 어린 학생이다. 악의가 있을 리는 없고, 어설픈 농담이라 웃으며 관대하게 넘겨야 한다.
불만을 제기하자면 오히려 다른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다. "린타로"와 "타케마루"는 그렇다 치고, 이 M** 마을 주민들의 이름은 대체 무엇인가. "포", "엘러리", "아가사", "올츠이"……. 캠프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도 끔찍하다. "반 다이스케"는 반 다인의 패러디인가? "아사노 요우지"에 "사이토 사카에"——웃기지 않는다. 전혀 웃기지 않는다. 미스터리 매니아의 유치함이라면 듣기 좋겠지만, 읽는 내가 얼굴이 붉어질 정도의 이런 이름짓기는 정말 참아주었으면 좋겠다.
게다가 이 인물들, 읽다 보면 전혀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구별은 가능하지만, 아무리 '범인 맞추기' 단편이라 해도, 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상 조금 더 제대로 된 묘사를 해주었으면 한다. 이럴 바엔 차라리 A, B, C……로 표기하는 것이 깔끔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동안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른다. 결국 나는 이렇게 비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인간이 그려지지 않았다!"——맞아, 바로 이것이다.
목구멍까지 나왔던 그 말(인간이 그려지지 않았다고)을 간신히 삼키고,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커피라도 마시며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서였다. 상대는 열 살이나 어린 아마추어 학생이다. 여기서는 선배답게 그 부분은 눈감아주고, 어쨌든 이 '문제'에 도전해야 한다.
"자, 그럼."
두 잔의 커피를 테이블에 내놓고, 나는 「문제편」의 원고를 다시 한번 대충 넘겼다. "잘 먹겠습니다"라며 컵에 손을 뻗으면서, U군은 내 표정을 힐끔거리며 살피고 있었다.
"확실히, 자신작이라고 할 만하군. 꽤 어려운 문제야."
라고 말했다. 사실 나의 진심이었다. 사건의 상황은 이른바 '준밀실'이다. 20미터의 공간으로 격리된 '열린 밀실'에서의 불가능 범죄. 설정과 이야기에서 뭔가 장치가 있을 것 같은 냄새가 풍기지만, 초점은 역시 이 불가능한 상황을 어떻게 '가능'하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20미터의 거리를 극복했는가. 그 트릭을 간파하면 자연스럽게 범인의 정체도 알 수 있는, 그런 타입의 '문제'다. 과연……?
커피를 홀짝이며 잠시 생각한 후, 나는 가장 접근하기 쉬운 부분부터 파고들어갔다.
"'당했다', '밀쳐졌다', '사……사아……'라는 유키토의 말은, 글 중에 나와 있듯이 '다잉 메시지'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겠지?"
"네, 그렇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마지막 '사아'는 범인이 누구인지 말하려던 것이라는 거네."
"글쎄요, 그건 어떻게 생각하실지……"
U군은 얼버무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얄미운 얼굴이라 생각하면서 나는 말을 이었다.
"'사'가 머리에 오는 등장인물은, 이 중에서는 사키와 사카에군. 사카에는 성도 사이토지. 설마 그렇게 단순한 건 아니겠지만.——흠. 달려온 사카에의 목소리를 듣고 '사이토 씨'라고 대답하려 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겠군."
"그렇죠. 하지만, 다잉 메시지라는 건 대부분 보조적인 단서일 뿐이잖아요. 아야츠지 씨의 작품에서도, 항상 그렇지 않나요?"
"뭐, 그렇다고 하면 그렇지. 그럼, 이건 나중에 보기로 하고——"
그리고 나는 일단 정석적인 '소거법'을 적용해보기로 했다.
"알리바이 등 데이터를 통해 범위를 좁혀나가는 거야. 먼저, M** 마을 사람들부터——"
범행 시각인 오후 2시 40분에 알리바이가 없는 사람은, 엘러리, 아가사, 올츠이, 카의 네 사람이다. 이 중 카는 중상을 입고 위독한 상태니까, 당연히 제외된다. 출산을 앞둔 올츠이는 체력적으로 생각해도 다리까지 왕복해야 하는 범행은 무리겠지.
엘러리는 어떤가. 가령 어떤 트릭을 써서 다리 건너편의 유키토를 죽였다고 해도, 그 후 25분 이내——즉 포가 그를 광장에서 본 3시 5분까지——마을로 돌아오려면, 어떻게든 [옆길 B]를 내려와 통나무 다리를 건너는 ①의 루트를 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파이프 바위에 있던 린타로는 그 시간에 통나무 다리를 건넌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따라서, 엘러리도 범행은 불가능했다는 결론이다.
남은 사람은 아가사뿐이지만, 그녀의 경우 엘러리와 달리 3시 40분까지의 알리바이가 없으므로, ②의 루트를 통해 돌아왔다고 해도 시간적인 모순은 없다. 그러나 한쪽 팔이 없는 그녀가 범행이 가능했는지 생각해보면, 올츠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결론내려야 한다. 어떤 트릭을 썼다 해도, 상대는 20미터의 계곡이니까.
결국 여기서는 네 사람 모두 제외된다. 포가 말하는 X는, 그들 중에는 없는 것이다.
한숨을 쉬며, U군의 반응을 본다. 그는 또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나서 손목시계를 보고,
"10분 남짓 남았습니다."
라고 말했다. 역시 얄미운 얼굴이라고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다음은 캠프의 네 사람."
가능한 한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나는 소거법을 계속했다.
요우지와 사키는, 오후 2시 40분 시점의 알리바이는 없지만, 다이스케가 돌아온 2시 50분에는 분명히 캠프에 있었다. 범행 후, 10분 안에 다리에서 돌아올 수는 없다. 다이스케가 다시 돌아온 루트도 20분 걸렸으니까. 예를 들어 [옆길 A]로 꺾어 [지류 B]를 따라 올라왔다면,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제외해야겠군.
당연히 다이스케에게도 같은 이야기가 적용된다. 2시 40분에 범행을 저지른 후 되돌아갔다면, 아무리 서둘러도 2시 50분에 캠프에 도착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결국 남는 사람은 사카에인가. 사카에가 빈사 상태의 유키토를 발견하는 장면 — 여기에는 시간이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즉, 그는 시간적인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는다. 다이스케가 산등성이 길을 되돌아간 것과 엇갈리면서 [옆길 A]에서 산등성이로 올라와 다리까지 가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디. 그렇게 범행을 끝낸 후, 강으로 내려갔다고 해석해도 무리는 없겠지.
물론 사카에가 강가에서 유키토를 발견하는 장면에서는 도저히 그가 범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문장이 몇 개 있던것 같기는 하다. 때문에 정말로 사카에가 범인이라면, U군이 '페어 플레이의 룰은 엄격히 지켰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한건 이상하다. 그 부분에 대한 의식이 희박한걸까.
자, 어쨌건 문제는 그 다음이야—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들었지만, 어쨌든 제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 나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알리바이로는 사카에가 범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해서 유키토를 절벽에서 떨어뜨렸을까.”
그러다 문득 한 가지 황당한 트릭이 떠올랐다.
“흠. 굳이 계곡을 건너 유키토 곁까지 갈 필요는 없었겠군.”
“어떻게요?”
“사카에의 배낭에는 이때 낚싯대가 들어 있었어. 여기에 튼튼한 긴 낚싯줄을 달고, 그 끝에 예를 들면, 야구공 정도의 크기의 돌을 묶어서 말이야...”
“휘둘러서, 다리 건너편의 유키토를 맞췄다고요?”
“그런 거야. 무리일까.”
U군은 복잡한 표정으로 “하아”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군.
“이런 건 어떨까.”
극약을 먹는다는 심정이 되어, 나는 거기서 새로 떠오른 트릭을 말했다.
“남아 있던 한 줄의 로프를 따라 뱀을 보내는 거야. 놀란 유키토는... 아니, 이건 안 되겠군. 유키토는 뱀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 이런 건 어떻지. 들쥐의 목에 긴 끈을 묶어 로프를 따라가게 하는 거야. 그리고 구해줄 테니까 그 끈을 잡으라고 명령하는 거지. 멍청한 유키토가 그 말을 믿고 따랐을 때, 힘껏 끈을 당긴다. 균형을 잃은 유키토는...”
점점 바보같이 느껴졌다. 나는 애당초 이런 물리적인 트릭을 고안하는 게 별로 능숙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정말 여러 가지를 생각하시는군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는 나를 보고, U군은 조금 유쾌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말씀하신 것들은 모두 틀렸어요. 실행 가능 여부를 떠나서, 그것만으로는 ‘밀쳐져 떨어졌다’는 것이 되지 않으니까요. 유키토는 어디까지나, X의 손에 의해 ‘밀쳐 떨어져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전한 유키토의 죽기 직전의 대사에 ‘거짓’은 없고, 본문에서도 분명히 그렇게 명기되어 있습니다.”
“흐음.”
“유키토는 X의 손에 의해 밀쳐져 떨어졌다. 이것은 즉, 범행이 일어난 2시 40분 시점에서, X는 확실히 돈돈다리 북쪽 돌출 부분에 있었고, 자신의 손으로 유키토를 거기서 밀쳐 떨어뜨린 겁니다.”
“하지만 그러면...”
“슬슬 시간 초과네요.”
라는 무정한 선언을 듣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U군은 왼팔을 들어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한 뒤, “그럼, 이걸로”라고 말하며 ‘해답편’ 원고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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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답편
○반 다이스케, 아사노 요우지, 아사노 사키, 사이토 사카에 네 명은 시간적 혹은 물리적으로 생각해도 명백히 범행이 불가능하다. 또한, 본문에서 알리바이가 명기된 린타로와 타케마루는 X가 아니다.
○따라서 X는 M** 마을의 엘러리, 아가사, 올츠이, 카 중에 있다.
○위독한 상태에 있는 카는 범행 불능. 한 팔이 없는 아가사는 범행 불능. 출산을 앞둔 올츠이는 범행 불능.
○이상으로 X일 가능성이 있는 것은 엘러리 뿐이다.
○엘러리는 다이스케가 도망친 후 돈돈 다리를 건너가 유키토를 공격해 계곡 아래로 떨어뜨렸다. 범행 후 다리를 건너 고개 길로 돌아가, [옆길 B]를 내려가 [지류 A]의 나무 다리를 건너는 루트로, 오후 3시 5분에 마을 광장에 돌아왔다.
○동기는 복수. 전날, 아들 카가 '금단의 계곡'에 갔다가 큰 부상을 입은 것은 잔혹한 소년 유키토의 짓이었다. 사키의 바지에 묻은 빨간 손자국은 그때의 피에 의한 것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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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끝이야?"
순간적으로 아연한 후, 나는 물었다. U군은 씨익 웃으며 "네, 끝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잠깐만, 그건 아니지 않나."
나는 본의 아니게 큰 소리를 냈다. U군은 태연하게,
"왜죠?"
라고 되물었다.
"왜긴 왜야, 이건 전혀 해결이 안 됐잖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역시 조금 불친절했나."
"불친절이고 뭐고의 문제가 아니야."
나는 테이블에 몸을 기울여 따졌다.
"첫째로 말이지, 다리가 부서진 후 남은 로프는, 작은 초등학생인 유키토의 몸무게조차 버티지 못할 정도였다구. 지문에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어. 그런 로프를, 어떻게 어른인 엘러리가 건널 수 있었던 거야? 거리는 20미터나 된다고. 계곡에서 부는 바람은 강하고, 로프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어. 가령 엘러리가 난쟁이고, 또 줄타기의 명인이었다 하더라도, 이 로프를 건너는 건 무리였다고 생각하는데."
"음, 확실히. 그런데요…"
"그리고, 범행 후는 ①의 루트를 통해 마을로 돌아왔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당연히 린타로에게 들켰을 거라고. 린타로는 엘러리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쓰여 있었잖아. 그건 거짓말이었던 건가."
"그건 아야츠지 씨의 오해입니다."
U군은 단호히 말했다.
"사실, 린타로는 엘러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증거로, 도중에 타케마루가 두 번이나 심하게 짖었다고 했죠. 타케마루는 자기들 앞을 지나가는 수상한 자를 알아차린 거예요. 그래서 짖은 겁니다."
"그럼, 역시 범인 이외의 등장인물의 말에 '거짓'이 있는 거잖아."
"아니에요. 왜냐면, 린타로는 이렇게 증언했잖아요. '그 다리를 건넌 자는 아무도 없었다'고. 엘러리를 보지 못했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하?"
대체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U군의 설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혹시 그와 나는 사용하는 언어의 종류가 다른 건 아닐까, 진지하게 의심했다.
"부서진 돈돈다리를 엘러리가 건널 수 있었는가, 라는 문제인데요."
U군은 진지한 얼굴로 계속했다.
"엘러리는 난쟁이도 아니고 줄타기 명인도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남아 있던 로프 한 줄로 계곡을 건널 수 있었던 겁니다. 아주 쉽게요."
"그런…"
나는 산소를 찾는 물고기처럼 입을 벌렸다.
"설마, M** 마을이 닌자의 숨은 마을이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그런건 아닙니다. 안심하세요. 설령 닌자라 하더라도, 미군의 특수 공작 부대라 하더라도, 이 계곡을 건너기 위해서는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겠죠. 하지만 '도전'에 주석을 단 대로, 그런 도구는 여기서 전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라고 말했지만, 이어지는 말을 생각해내지 못해, 나는 불안하게 새로운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하듯이, U군도 자신의 담배(같은 세븐스타)를 물었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는 말했다.
"엘러리는 난쟁이도 줄타기 명인도 닌자도 아니었어요. 그게 아니라, 유키토의 다잉 메시지에서도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에…?"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손을 멈추고, 나는 테이블 구석에 던져진 '문제편' 원고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이 상황에서, 유키토를 자신의 손으로 밀어 떨어뜨리는 것 같은 묘기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해요. 따라서 당연한 논리적 결론으로…"
"…설마"
혼란스러운 생각 속에서, 겨우 하나의 단어(설마)가 떠올랐다. 나는 두려워하며 말했다.
"설마 그 '사…'라는 게, '사루(원숭이)'를 말하려고 한 건가?"
"정답입니다."
U군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타케마루가 격하게 짖은 거예요. 옛날부터 개와 사이가 나쁜 동물이라고 하면 정해져 있잖아요. 타케마루와 엘러리는 문자 그대로 견원지간이었던 거죠."
잠시 멍해져서 중얼거리듯 "원숭이, 원숭이…"라고 중얼거리는 나를, U군은 여전히 순진한 미소로 응시하며,
"처음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이 작품은 '본격 미스터리의 원점으로 돌아가 쓴 것'이라고. 본격 미스터리의 원점이라고 하면 당연히, 에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가의 살인'이죠?"
"—사기다. 불공평해."
겨우 기운을 짜내어, 나는 항의했다. 그러나 U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M** 마을에 사는 일본 원숭이들을 '인간'이라고는, 한 번도 쓰지 않았어요. '한 사람'이나 '두 사람' 같은 표현도 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자'라는 한자도 사용하지 않았어요. 인간이 아닌 생물일 가능성을 암시하기 위해 '자'라고 굳이 히라가나로 표기했습니다.
애초에, 아야츠지 씨, 일본 본토의 산속에 포라든가 엘러리라든가 하는 이름의 인간들이 사는 건 이상하지 않나요. 덧붙이자면, M** 마을의 M**는 'monkey'를, H** 대학의 H**는 'human'을 각각 암시한 이름입니다."
"원숭이를 '남자'나 '여자'라고 썼잖아."
"남자 = 인간 중, 수컷으로서의 성기관·성기능을 가진 쪽. 넓은 의미로는, 동물의 수컷도 지칭.
여자 = 인간 중, 암컷으로서의 성기관·성기능을 가진 쪽. 넓은 의미로는, 동물의 암컷도 지칭.
출처는 산세이도의 '신명해 국어사전'입니다. '코지엔'이나 '다이지린'이어도 상관없어요."
"젊은 여자들이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원숭이가 그런 걸 할 리 없잖아."
"그건 물론 그루밍을 말하는 거예요. 원숭이의 털 손질. 아시죠."
"—더럽다. 비겁해."
"더럽다니요. 나이 많은 포우가 참나무 열매를 깨물고 있거나, 아이들이 벌거벗고 뛰어놀고 있는 등, 그들이 원숭이라는 복선을 몇 가지 깔아놓았다고 생각하는데요."
나는 조금 흥분한 나머지, 어조를 강하게 했다.
"하지만 말이야, 원래 원숭이가 말을 할 리가 없잖아. '규칙'이라든지 'X'라든지 '복수'라든지......"
그러자, U君은 "어머 어머"라는 듯 얇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건 전부 어디까지나 원숭이의 세계에서의 일이니까요. 인간과 대화를 나누진 않잖아요? 대사도 전부 캠프의 인간들과 구별하기 위해 이중 괄호로 묶여 있죠. 게다가 고금을 통해 소설 속에서는, 고양이부터 도룡뇽까지, 생각하는 동물도 있고 나름의 문화를 가진 동물도 있어요. 인간의 말을 이해하거나, 인간적인 감성으로 행동하기도 하죠. 그러고 보니, 최근의 미스터리에서도 있었죠. 은퇴한 경찰견의 일인칭으로 쓰인 이야기. 미야베 미유키 씨의 '퍼펙트 블루'."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잖아."
"그런가요?"
나는 점점 더 흥분하며,
"이건 '범인 맞히기'가 아니야."
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U君은 간단히 "네, 맞아요."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건 '범인 맞히기'가 아니라 '범원숭이 맞히기'죠. 그래서 그런 언어의 엄밀성을 중시해서, 작품 속에서도 아야츠지 씨와의 대화에서도, 나는 한 마디도 '범인'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어요. X 같은 진부한 미지수 기호를 끄집어낸 건 고육지책이었어요. '문제편'의 체크, 해 보실래요?"
"........"
"꽤나 고심했어요, 그 부분은. 아야츠지 씨라면 분명 그 고심을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불쾌하게 입술을 삐죽거리며 소파에 기대앉았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래서 아마추어 학생은 곤란하다......라고 마음속으로 독을 품으며, 심하게 미간에 주름을 잡고 눈을 감았다. 한동안 그대로 침묵하고 있자,
"저기, 텔레비전 켜도 될까요?"
조심스럽게 U君이 말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러게."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스위치를 켜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이상하게 밝고 씩씩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그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U君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쩐지 지금 막, 시계의 바늘이 오전 0시를 지난 모양이다. 새로운 해가 시작된 것이다.
브라운관 속에서는, 익숙한 연예인들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축하해, 축하해"라고 말하고 있다. 그 화면의 한쪽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한 마리의 동물의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저도 모르게 "와"라고 소리를 질렀다.
"――원숭이잖아."
어째서 U君이 굳이 오늘 밤을 선택해서 나를 찾아왔는지. 하필이면 섣달그믐의 이런 늦은 시간에, 추운 중에 오토바이를 타고.
그것도 연출("복선"이라고 그는 말할지도 모르겠지만)의 하나였던 것이다. 내가 이 '범원숭이 맞히기'를 다 읽을 즈음에 딱 새해가 밝는, 그런 타이밍을 그는 노렸다. 그래서 그렇게, 몇 번이나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던 것인가.
1992년, 원숭이해의 시작――.
어깨에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무언가가 스르르 녹아 사라져가는 듯한 기분을 나는 맛보았다. 방금 전까지 내가 느끼던 화가 몹시 하찮게 느껴지고, 동시에 그런 나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러워져서......
나는 U君 쪽을 보았다. 하지만, 소파에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검은 배낭도 가죽 장갑도, 크림색에 초록색 줄무늬가 들어간 헬멧도, 거기에는 없었다. "돈돈다리, 무너졌다"라고 표지에 크게 적힌 원고만이,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확실히 익숙한 얼굴. 잘 아는 이름. 무엇인지 무척 그립고, 그렇지만 조금 얄밉고, 그 천진난만함이 때로는 이상하게 짜증스럽고......
'아, 그렇구나'라고 나는 그제야 생각해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냈는지, 그건...... 아니, 이제 그만두자. 이 이상은 적지 않기로 하겠다.
남겨진 '돈돈다리, 무너졌다'의 원고에 살짝 손을 뻗으며, 다음에 그가 찾아오는 건 언제일까,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2023/09/03

0시를 향하여 - 애거서 크리스티 / 이선주 : 별점 2.5점

0시를 향하여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선주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잘생기고 부유한 테니스 스타 네빌 스트레인지는 오드리와 이혼 후 화려한 미인 케이와 재혼했다. 그리고 네빌은 부부의 여름 휴가를 오드리와 함께 보낼 계획을 세우고, 휴양지 솔트크리크에 위치한 트레실리안 부인의 저택 걸즈 포인트에 향했다. 그 곳에 네빌 부부와 오드리 외에도 케이의 전 남자 친구 테드 라티머, 오드리를 흠모하는 어린 시절 친구 하워드 등 관련된 다른 사람들까지 모여들었다.
휴가를 보내며 네빌이 오드리와 다시 가까와졌고, 케이와 이혼할거라는 이야기가 나오던 와중에 트레실리안 부인이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는 네빌이었다. 이혼 이야기로 트레실리안 부인과 언쟁을 벌였고, 흉기로 보이는 골프채에 네빌의 지문이 있었던데다가 그의 양복에서 혈흔이 발견된데다가 부인에게서 거액의 유산까지 받게 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네빌의 알리바이는 곧바로 증명되었고, 뒤이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건 오드리였다. 노부인에게 유산을 받을 네빌 부부의 아내는 현처 케이가 아니라 전처 오드리로 명시되어 있다는 동기 외에도 흉기 등의 증거들이 차례로 발견된 탓이었다. 

"살인 사건에 대한 기사, 또는 살인 사건에 바탕을 둔 소설을 읽을 때, 이야기가 살인 그 자체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모두 틀린 겁니다. 살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합니다. 살인은 수많은 다른 정황들이, 주어진 시각에 주어진 지점에서 한데 합쳐지면서 그 정점에 달해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살인은 그 자체로는 이야기의 종결입니다. 그것은 '0시' 이지요."

애거서 크리스티의 중기 작품. '밀리의 서재'에 업로드되어있는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완전 공략>>에 따르면 중기 걸작으로 별점은 4점이네요. 아~주 오래 전, 무려 12년 전에 동서에서 출간되었던 버젼으로 읽어보기는 했었는데 내용을 완전히 잊은 덕분에 처음 읽는 것 처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몇 가지 특징들로 다른 여사님의 작품들과 구별됩니다. 첫 번째는 푸아로나 미스 마플 시리즈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끔 경찰 쪽 주요 인물로 등장하곤 하는 배틀 총경이 홀로 활약하는 작품이지요.

두 번째로는 트릭을 파헤치는 본격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심리적인 동기 분석이 더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특별한 트릭이 사용되지도 않고요. 그 탓에 추리적으로는 다소 재미가 떨어지기는 합니다. 배틀 총경도 직감이 뛰어나고, 심리를 분석하는데 능한 유능한 수사관이기는 하지만, 푸아로와 같이 범인의 의표를 간파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거든요. 
예를 들어, 배틀 총경은 네빌이 범인처럼 보이게 만드는 증거 모두가 억지로 만들어져 있다는걸 비교적 초반에 알아챕니다. 네빌이 범행을 사전에 계획해서 하녀에게 수면제를 먹였다면 - 노부인이 종을 울려도 알아채지 못하게 - 그가 노부인과 언쟁을 벌였을 이유가 없고, 골프채라는 증거도 남겨놓지 않은 채 강도 사건으로 위장했을거라는 분석을 통해서요. 사건에 대해 범인의 심리를 냉철하게 분석한 결과인 것이지요. 하지만 '진범이 그래서 누구인지?'에 대한 추리는 없습니다. 단지 우직한 수사를 펼칠 뿐이에요.

그래도 덕분에 배틀 총경이 발로 뛰어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제대로입니다. 이를 통해 독자에게 모든 정보를 공정하게 제공해 주는 것 역시 고전 본격 추리물로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 하고요. 
추리적으로도 범인 네빌이 사건을 저지른 동기 - 오드리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서 사형 선고를 받게 만들려고 했던 것 - 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노부인 살해는 그게 목적이 아니라, 이 동기를 이루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이지요. "0시를 향해"라는 제목과 극중 대사를 잘 드러내는 동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알고보니 케이를 만나 오드리와 이혼했던게 아니라, 오드리가 자신을 버리고 먼저 도망을 쳤기 때문이었는데, 여러 복선을 잘 쌓아올려서 설득력도 있고,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맛도 잘 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대만큼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우연, 억지가 심한 탓입니다. 완전한 제 3자인 맥휘터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오드리를 구해주고 배틀 총경과 협력하여 네빌을 옭아매는 추리쇼를 펼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우연치고는 너무 심하잖아요?
맥휘터가 사건에 뛰어드는 도화선이 된, 냄새나는 양복을 손에 넣은 경위도 억지스러웠습니다. 네빌이 수영해서 걸즈 포인트로 건너가기 전 벗어놓은 양복을 썩은 고기 위에 올려 놓아서 지독한 냄새가 배었고, 그걸 숨기려고 세탁소에 마침 호텔에서 봤던 사람 이름으로 맡겼는데, 그게 맥휘터였다는 겁니다. 왜 네빌은 그냥 양복을 버리지 않았던 걸까요?
이후 맥휘터가 걸즈 포인트를 방문해서 중요 단서 - 젖은 로프 - 를 찾아낸다는 것도 와 닿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을 못하는 정의로운 인물이라는 설정이 있기는 한데, 자기와 관계없는 사건에 발벗고 나설 충분한 이유로 보이지는 않은 탓입니다. 다른 증거를 조작하고 없앨 시간이 충분했다는 네빌이 로프를 없애지 않은 이유도 모르겠고요. 
그리고 마지막에 맥휘터와 배틀 총경이 관계자들을 모아놓고 선보이는 추리쇼의 핵심은 맥휘터가 '누군가 로프를 타고 저택을 올라가는 걸 봤다' 뿐입니다. 그게 네빌이라는 증거, 아니 저택 내부 인물이 범인이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하인 누군가가 로프를 몰래 내려 보내서 외부 인물이 침입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네빌이 고작 이 정도 거짓 증언에 흔들려서 죄를 고백해버리니 맥이 풀리는 느낌이에요. 시시할 뿐더러 사악한 천재 악당으로의 면모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셈입니다. 

불필요한 등장인물과 사건도 너무 많습니다. 네빌 스트레인지와 오드리, 케이 외의 인물은 나올 필요가 없었어요. 애초에 노부인을 살해할 동기가 없어서, 독자의 흥미를 잡아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케이의 남자친구 테드 라티머를 수상쩍게 그리기는 하지만, 그 역시 동기가 너무 희박했습니다. 케이를 손에 넣기 위해 네빌을 함정에 빠트린다? 글쎄요.... 테드 라티머는 네빌을 직접 죽이면 모를까, 그런 계획을 세울 인물로는 그려지지는 않았습니다. 
트레브스 씨 살해도 내용과 별 관련이 없어요. 비교적 비중있어 보이지만, 진범이 밝혀지는건 이 사건과는 무관했으니까요. "누구나 알 수 있는 신체적 특징이 있다"는 말로 범인이 누구인지 끄집어내는건 불가능했습니다. 다들 특징들이 있기도 한 데다가, 진범 네빌의 새끼 손가락 길이가 다르다는건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특징으로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나쁜 정보에 가까왔어요. 
마지막에 맥휘터 앞에 오드리가 나타나 결혼하지고 하는건 황당했습니다. 딱 두 번 본 남자에게, 자기를 구해줬다는 이유로 바로 결혼을 한다는건 이상하잖아요. 그냥 멀리 떠난 맥휘터 앞에 나타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여운을 남기는 결말 정도가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여사님은 다 좋은데, 왜 이렇게 커플을 만들지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점들로 보면, 단편으로 충분했을 이야기를 길게 늘려쓴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5/07/06

그리고 유리코는 혼자가 되었다 - 기도 소타 / 부윤아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문 유리가하라 고등학교에는 '유리코 님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다. ‘유리코’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 중 마지막으로 남는 유리코는 ‘유리코 님’이라 불리며 학교에서 모든걸 뜻대로 할 수 있게 된다는 전설이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마쓰자와 유리코’가 옥상에서 추락해 사망했고, 그 뒤 다른 유리코들도 차례로 살해당했다. '나' 야사카 유리코는 자신도 이 전설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 속에서, 친구 미즈키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시작하는데...

일본 작가 기도 소타의 데뷰작인 학원 미스터리입니다. 유서 깊은 명문 여학교 ‘유리가하라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괴담, 본격 추리, 인물 간 심리전이 어우러지는 작품입니다.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유리코 님 전설’이라는 설정입니다. 단순한 학교 괴담처럼 보이지만 '이름'이 주요 매개체로 결국 학교에 유리코는 딱 한 명만 남게 된다는 독특한 아이디어가 작품 속 사건들의 설득력을 높여주는 주요한 장치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전설에 따른 일종의 초자연적 현상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트릭이 사용되었으며,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도 돋보입니다. ‘마쓰자와 유리코 추락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마쓰자와 유리코가 떨어진 옥상은 밀실이었습니다. 최소한 범인은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지요. 미즈키는 불탄 교복과 '흰 백합 모임' 방 창문이 항상 열려있다는걸 근거로 범인이 교복을 이어 로프를 만든 뒤 아래층 '흰 백합 모임' 방을 통해 탈출했다는 추리를 내 놓습니다. 탈출 후 방법을 숨기기 위해 교복을 불태웠던 겁니다.

이외에도 ‘초대 유리코 님’의 일기에 담긴 위화감을 단서로 삼아, 실제로는 그 일기가 1970년대에 쓰인 것이 아니라 1998년 이후에 작성되었으며 초대 유리코 님이 사실은 여자아이가 아니라 남자아이였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부분은 서술 트릭물의 묘미를 잘 살리고 있습니다. 일기 속 세세한 부분에서 드러나는 모순을 독자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잘 배치해 둔 덕분입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는 과정도 논리적입니다. 흰 백합 모임 방 창문이 열려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던 인물이어야 하고, 해당 방의 열쇠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유리코 님으로 변장할 수 있을 만큼 체구가 작아야 했다는 조건들을 하나씩 밝혀내며 결국 ‘유리 선배’라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범인이 교복을 불태운 뒤 어떻게 옷을 챙겨입고 도주했는지도 이 추리를 통해 설명됩니다. 여자 교복 밑에 원래의 남자 교복을 입고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지요. 성정체성이 여성인 유리가 '유리코'들을 모두 죽이고 유리코 님이 되려고 했다는 동기도 유리코 님 전설 및 일기를 통한 서술 트릭과 잘 맞물려 있고요. 이를 학원제 연극 후 일종의 추리쇼처럼 밝히는 과정도 볼만 했으며, 다카미자와 선생이 과거 ‘초대 유리코 님’의 일기를 남긴 인물이며, 유리코 님 전설에 오랫동안 개입해 왔다는 반전 역시 꽤 그럴듯했습니다.

그러나 아쉬움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핵심 트릭인 교복을 로프로 만들어 탈출했다는건 그리 좋은 트릭은 아닙니다. 유치할 뿐더러, 아래에서 로프 교복을 불태웠다고 깔끔하게 흔적이 사라졌다는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발상입니다. 옷이 옥상에 아무 흔적도 남지 않고 타버린다는건 현실적으로 보기 어려우니까요.

그리고 마쓰자와 유리코 사건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은 전반적으로 단순하며, 추리의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는다는 문제도 큽니다. 범인이 범행에 성공한건 단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사건이 점점 확대되는데 학교나 경찰 차원의 진지한 대응이 없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최소한 '유리코' 들에 대한 보호는 진행했어야 해요.
다카미자와의 정체에 대한 반전까지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가 흑막으로 사건을 조종했다는 추리는 다소 억지스러웠고요.  

하지만 이런 단점은 사소합니다. 에필로그에 비교하면요. 에필로그에서 밝혀지는, 미즈키가 친구 야사카를 ‘유리코 님’으로 만들고 진짜 학교의 지배자가 되려 했다는 진상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입니다. 반전을 위한 반전으로만 보이고, 빼어난 활약을 보였던 명탐정 미즈키 캐릭터와도 잘 어울리지 않는 탓입니다. 학교의 지배자가 된다고 해도 특별한 뭔가가 있는건 전혀 아닙니다. 게다가 미즈키는 유리가 유리코들을 살해하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어쩔 생각이었던걸까요? 직접 다른 유리코들을 죽였을까요? 왜 이런 비상식적인 에필로그를 집어넣어 이야기를 망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미즈키의 계획이 흰 백합 모임의 유리코 선배에게 간파당해 미즈키가 살해당한다는 결말도 엉망입니다. 차라리 미츠다 신조 스타일로 야사코 유리코가 인지를 벗어난 '유리코 님'으로 거듭나며 괴담이 진짜가 된다는 식의 결말이 더 나았을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기발한 설정, 본격 추리 요소는 매력적이었는데 에필로그가 다 말아먹었습니다. 에필로그만 없었어도 별점 2.5점은 줄 수 있었는데 조금은 아쉽습니다.

2024/07/31

[번역] 돈돈 다리, 떨어졌다 (3). - 아야츠지 유키토

### 4. '금단의 계곡'의 젊은이들
같은 8월 1일 오후. 장소는 바뀌어, 여기는 M** 마을 사람들이 '금단의 계곡'이라 부르는, 돈돈산의 서쪽이다.
돈돈다리에서 능선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파이프 바위로 내려가는 샛길이 나오고, 거기를 지나쳐서 좀 더 남쪽으로 가면 서쪽으로 꺾이는 샛길이 있다. 경사는 동쪽에 비해 훨씬 완만하고, 발밑 상태도 좋다.
자세한 위치 관계는 첨부된 지도(27페이지 "현장 부근 약도")를 참조해 주시고, 이 길을 내려가 만나는 계곡의 한 구석에 어제 저녁부터 두 개의 빨간 텐트가 쳐져 있었다. 포우가 말한 "사악한 마음을 가진 외지인들"의 일행이었다.


"요우지. 유키토는 어디 갔어?"
물길에서 돌아온 반 다이스케가 나무 그늘에 앉아 계곡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던 아사노 요우지에게 말을 걸었다. 요우지는 스케치북에서 눈을 들어 시큰둥한 표정으로 "글쎄"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까까지 저기 있었는데. 사키를 또 괴롭혀서 혼내줬더니, 혀를 내밀고 도망갔어."
다이스케는 한숨을 쉬었다.
항상 그렇듯, 유키토는 손이 많이 가는 아이였다. 머리도 나쁘고 난폭하며, 성격도 전혀 귀엽지 않았다. 내년이면 중학생이 되는데, 나이에 맞는 분별력도 전혀 없다. 저 아이가 내 친동생이라니, 정말 한심하고 어쩔 수 없는 기분이었다.
다이스케는 H**대학 이학부 2학년으로, 이번 봄에 스무 살이 되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산을 좋아해, 틈만 나면 이렇게 가까운 산으로 캠프를 오곤 했다.
이번 일행은 다이스케를 포함해 다섯 명이다.
중학교 때부터 산행을 함께했던, 소꿉친구인 아사노 요우지. 같은 H**대학 문학부 2학년. 취미로 그림을 그리며, 대학에서도 미술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다.
그의 여동생으로, 고등학교 3학년인 사키.
요우지의 미술 동아리 후배로, 사키의 남자친구이기도 한 사이토 사카에.
그리고, 다이스케의 동생 유키토.
캠프 계획은 다이스케와 요우지가 세웠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초조해하는 사키의 기분 전환을 위해서가 본래 목적이었고, 사이토 사카에를 초대한 것은 요우지였다.
처음에는 네 명이 갈 예정이었지만, 유키토가 자기도 가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너는 아직 초등학생이라며 거절해봤자 통하지 않는다.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울부짖는다. 엄하게 꾸짖으면 엄청난 소리로 운다. 부모님도 늦둥이로 태어난 유키토에게는 무척이나 관대하다. 그래서 결국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유키토는 골칫덩어리다.
최근 초등학생 치고는 작고, 겉모습은 얌전해 보이지만, 제멋대로 자라서인지 심리학에서 말하는 초자아(super-ego)의 발달이 현저히 늦어졌다. 열두 살이 되어서도 좋은 일과 나쁜 일의 구별을 거의 내면화하지 못한 상태이다. 초등학교 2, 3학년 때부터 싸움을 하고 수업을 빼먹는 문제아였다. 아직 잡힌 적은 없지만, 도벽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언젠가 이웃집 고양이를 모닥불에 던져 죽인 일도 다행히 들키지 않았지만, 유키토의 소행이었다. 새해 첫 참배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데려가면, 주차된 차의 타이어에 못을 박거나, 커터칼로 다른 사람의 옷을 찢는 등, 범죄에 가까운 나쁜 장난을 일삼았다. 이대로 성장한다면 언젠가 경찰 신세를 지게 될 게 뻔했다. 문제는 무엇보다도, 유키토가 그런 행동이 "나쁜 일"이라는 자각이 없다는 점이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재미 삼아 하는 것이다. 어딘가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다이스케는 생각했다. 학교 성적은 당연히 좋지 않다. 특히 국어와 사회는 최악이라, 이 점에 대해서는 부모님도 한탄했다. IQ는 그렇게 낮지 않고, 오히려 우수한 편이라지만…….
"꺄!"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텐트 안에서였다. 바로 아사노 사키가 뛰쳐나와 오빠 요우지에게 눈물 섞인 목소리로 호소했다.
"이거 봐요, 오빠. 내 배낭 안에……"
투명한 비닐봉지를 바닥에 던졌다. 그 안에는 토막 난 뱀의 사체가 들어 있었다.
"또 그 애 장난이야."
"정말 미안해, 사키."
다이스케는 황급히 사과했다.
"나중에 잘 말해둘게."
"유키토를 데려온 건 정말 실수였어."
라고 요우지가 말했다.
"정말이야! 이제 지긋지긋해."
사키는 상당히 히스테릭해졌다. 아까는 스치면서 유키토에게 가슴을 만졌다고 한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유키토는 최근 여성의 몸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정말 앞날이 걱정되어 다이스케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말하긴 그렇지만, 그 애는 정상 아니야. 분명 어딘가 이상해. 어제도 내 엉덩이를 만지고, 나중에 바지를 보니 빨간 손자국이 있었어. 아마 피였을 거야. 대체 뭘 한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미안해."
다이스케는 그저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사이토 사카에가 능선길 쪽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혼자 산책이라도 다녀온 모양이다.
"무슨 일이야, 사키. 왜 그렇게 화가 났어? 또 유키토야? 뭐, 뭐. 그렇게 신경 쓰지 마. 상대는 아이잖아."
사카에는 아주 느긋한 태도였다.
"사이토 군. 유키토가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
"위쪽에서 봤어요. 저쪽 다리 쪽으로 걸어가더군요.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했더니, 혀를 내밀었어요."
"다리라면, 막다른 곳에 있는 출렁다리?"
"네."
위험하다고, 다이스케는 생각했다. 아무리 문제아라도, 역시 동생은 동생이다. 혹시라도 일이 생기면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유키토에게 관대한 것은 부모님뿐만 아니라, 다이스케도 마찬가지였다.
"흥. 저런 녀석, 계곡 아래로 떨어져 버리면 좋겠어."
사키는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 5. 유키토의 수난
반 유키토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누가 좀! 도와줘!"
아까부터 목이 쉬도록 소리치고 있었지만,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 넓은 산 속에서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그들의 캠프까지는 닿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라고 유키토는 생각했다. 다리 앞에 있던 그 더러운 표지판. 거기에 적혀 있던 것은 어떤 경고였을까?
"노후화로 위험"—그 글자는 국어를 잘 못하는 유키토는 읽을 수 없었다.
현수교를 건너는 것은 그야말로 스릴이 넘쳤다. 양손으로 로프를 더듬듯이 잡으며, 군데군데 큰 틈이 난 판자 위를 처음에는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씩 갈 때마다 다리 전체가 삐걱거리고 흔들렸는데, 그것이 참을 수 없이 재미있었다. 점점 흥분한 나머지, 마지막 5미터 정도를 뛰어갔는데, 그 순간이었다. 유난히 큰 삐걱거림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다리의 형태가 무너졌다. 다리를 지탱하던 로프가 마침내 끊어진 것이다.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유키토는 이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절벽 가장자리에서 계곡 바닥을 내려다보며, 천하의 악동 유키토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건너편까지는 20미터 가까이 된다. 남아 있는 것은 간신히 끊어지지 않은 로프 한 줄과 거기에 매달린 몇 장의 판자뿐이었다. 강한 바람에 휘말려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두려운 마음에 로프에 손을 대보았지만, 크게 흔들리더니 남아 있던 판자가 계곡 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것으로는 도저히 유키토의 체중을 견딜 수 없다. 이쪽 길은 절벽 때문에 2미터 정도만 가면 막힌다. 주위는 모두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것이 불가능한 절벽이었다. 도움을 청하는 것 외에는 유키토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오후 2시가 넘었다. 한여름의 태양이 무자비하게 내리쬐고 있다. 작은 그늘도 없는 천연 발코니였다. 이대로 2, 3시간만 이 뜨거운 햇볕 아래 있으면, 일사병으로 쓰러질 수도 있다. 유키토는 간절히, 매주 보고 있는 TV 속 변신 히어로가 되고 싶다고 빌었다.
"도와줘…"
이제는 외치는 것도 지쳐갔다. 이제 정말 끝일지도 모른다고 반쯤 포기하려던 그때,
"유키토!"
능선 쪽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 다이스케의 목소리였다.
"형!"
유키토는 손을 흔들며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곧이어, 부서진 현수교 건너편에 다이스케의 모습이 나타났다.
"여기야, 형. 도와줘."
"위험하니까 움직이지 마."
다이스케가 큰 소리로 답했다.
"기다려. 지금 모두를 데리고 올 테니까. 알겠지? 거기서 움직이지 마. 무리하지 마!"
"—알았어."
"괜찮아. 금방 돌아와서 도와줄 테니까. 아무튼 가만히 있어."
그리고 다이스케는 몸을 돌려 능선 길로 돌아갔다. 오후 2시 반의 일이었다.

### 6. 다가오는 그림자
다이스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유키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묻고 쏟아지는 햇볕의 더위를 견디고 있었다. 평소에 말썽꾸러기인 유키토도 이 상황에서는 형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에 오지 말 걸, 그런 짓을 하지 말 걸...'이라고,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후회하면서 유키토는 그대로의 자세로 다이스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살의를 품은 어떤 존재의 그림자가 다리 건너편에 나타났을 때도, 유키토는 전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M** 마을의 오후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숲이 끊긴 곳에 생긴 광장에 모여, 모두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옷을 벗고 건강하게 뛰노는 아이들, 나무 그늘에서 바느질을 하는 젊은 여자들… '수염의 노사' 포우는 광장 한쪽에 있는 노천 온천에 어깨까지 몸을 담그고, 그런 마을의 풍경을 한가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멀리서 희미하게, 무언가 이상한 외침이 들려왔다.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지, 지금 그 소리는?'
중얼거리며 포우는 뭔가 불길한 예감에 흰머리가 섞인 눈썹을 찌푸렸다.
'출렁다리 쪽에서 나는 소리 같았는데…'
오후 2시 40분의 일이었다.


다이스케가 캠프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 50분이었다. 능선길을 따라 곧장 달려와, [샛길 C](지도를 참조할 것)를 뛰어 내려왔다.
나무 그늘에 깔린 그라운드 시트 위에 사키가 누워 있었다. 다른 두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쪽 텐트 안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려왔다.
"사키, 사키야!"
"응?"
졸린 듯 눈을 비비며 사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숨을 가쁘게 내쉬는 다이스케를 보고,
"무슨 일이에요, 반 씨? 그렇게 급하게."
"큰일났어. 요우지와 사이토 군은 어디 있어?"
"무슨 큰일이죠?"
라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요우지가 텐트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다이스케는 서둘러 사정을 설명했다. 요우지는 팔짱을 끼고 불만스럽게 아랫입술을 내밀었고, 사키는 "꼴 좋다"는 듯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어 보였다.
"흠. 그거 우리만으로는 어쩔 수 없겠네."
요우지가 말했다.
"어쨌든 빨리 돈돈 마을로 달려가서 구원을 요청해야겠어."
"부탁해. 나는 다리로 돌아갈게. 사이토 군은 어디에 있어?"
"낚시하러 계곡으로 내려갔어."
라고 사키가 대답했다.
"알겠어. 그럼, 사키는 여기서 대기하고, 그가 돌아오면 함께 다리 쪽으로 와줄래?"
말을 끝내자마자, 다이스케는 뒤돌아섰다.

### 7. 유키토의 최후
다이스케가 돈돈 다리로 돌아온 것은 오후 3시 반이었다. 같은 경로를 거쳐 올라왔지만, 능선까지는 오르막길이어서 시간이 더 걸렸다.
'서두르지 말자,' 라고 여러 번 스스로에게 말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 다리의 상태를 생각하면, 구조대가 올 때까지는 아무런 조치를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유키토를 진정시키고,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해가 지려면 아직 시간이 있다. 다행히 날씨가 나빠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다리 앞에 도착했다.“노후화로 인해 위험”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붙잡고 체중을 지탱하며, 헐떡이는 숨을 고르면서 동생의 무사함을 확인하려고 다리 너머를 보았다. 그때――.
다이스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그 자리에서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유키토가 없었다.
몸을 숨길 만한 장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비록 20미터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다고 해도, 시야는 탁 트여 있었고, 다이스케의 시력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부서진 다리의 모습도 아까와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곧이어 다이스케는 다리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무겁게 느껴졌다. 다리 중앙에 도착하자, 그는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 다이스케는 유키토의 작은 몸이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몸은 이상하게 비틀려 있었고, 움직임이 없었다.
다이스케는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고통과 절망을 억누르며 다리 밑으로 내려갈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휘몰아쳤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어떻게 해야 유키토를 도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곧 알게 되었다. 유키토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눈물을 참으며 다이스케는 다리 밑으로 내려가, 유키토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유키토의 마지막 순간을 느끼며, 다이스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 말은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공허함을 채울 수 없었다.


사이토 사카에는 캠프를 떠나 혼자서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계곡을 따라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고 고생을 했지만, 결국 본류의 돈돈 강과 만나는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강가에 서서 사카에는 오른손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에는 돈돈 다리라는 현수교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다리가 부서져 있었다. 양쪽 절벽에는 끊어진 로프가 늘어져 있었고, 강가에는 다리의 잔해로 보이는 나무 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사카에는 조심스럽게 다리 쪽으로 다가갔다. 몇 걸음 나아가다 문득, 건너편에 누워 있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키토?"
그는 소리쳤다.
"이봐! 어떻게 된 거야? 괜찮아?"
하지만, 사람 그림자는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강물은 불어나고 흐름도 거셌다. 어디서든 건너갈 수 있을 만한 곳이 없을까 하고, 사카에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몇 미터쯤 위쪽으로 가보니, 여기저기 바위가 드러나 있는 곳이 있었다. 저 바위를 따라 건널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사카에는 낚싯대 등이 들어있는 배낭을 강가에 던져두었다.
여러 번 발을 헛디뎌 강물에 빠질 뻔했지만, 간신히 건너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달려가 보니, 쓰러져 있는 것은 역시 유키토였다.
"이봐, 괜찮아?"
소리치자, 그에 답하듯 소년의 입에서 "으으" 하는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정신 차려. 이봐."
"……으으"
사카에는 깎아지른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이 위에서 떨어진 건가? 그렇다면 이렇게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이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이봐, 유키토. 이봐."
등을 받치고 여러 번 불러보았다. 유키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들여다보니, 갈라진 머리에서 흐르는 피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으……으……"
어쩐지 희미하게 의식이 있는 듯했다. 유키토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하려 하고 있었다.
"뭐? 뭐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당했다……"
"뭐라고?"
"……밀……쳐……졌……"
소년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당했다" "밀쳐졌다"고 분명히 말했다. 이는 바로 다잉 메시지였다. 그리고——.
"사……사……아……"
그렇게 결국, 악동 유키토는 숨을 거두었다.

### 8. M** 마을의 소동
돈돈 다리의 북쪽 절벽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는 정보는,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정찰을 다녀온 엘러리가 전해주었다. 죽은 사람은 유키토라는 이름의 소년으로, 어제부터 '금단의 계곡'에 머물던 외지인들 중 한 명이었다. 보고에 따르면, 유키토는 문제의 절벽 위에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 "밀쳐졌다"고 했다.
포우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사건을 알리며, 좋아하는 도토리를 씹어 먹으면서 모두의 반응을 살폈다.
"엘러리,"
마침내 포우는 엄숙한 얼굴로 침묵하고 있는 젊은 리더에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일을 나에게 맡겨보는 게 어떻겠느냐?"
"맡기죠,"
엘러리는 대답했다. 포우는 깊은 숨을 천천히 내쉬며, 모인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좋다, 우리 중에 이 살인을 저지른 자가 있다면, 반드시 찾아내어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할 것이다. '금기를 어기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어제 '금단의 계곡'에 간 카도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한다. 물론 우리 중에 범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살해된 소년의 동료들 중에 있을 수도 있다만..."
"잠깐 기다려 주세요, 포우,"
엘러리가 끼어들었다.
"그 소년은, 하지만..."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살인은 살인, '금기를 어기는 것'과 다름없다. 게다가, '더럽혀진 땅'에 온 사악한 마음을 가진 인간을 죽였다는 것은, 이중의 '더러움'이 아니겠느냐. 이대로 두고 볼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엘러리는 반론하지 않았다. 포우는 계속해서 말했다.
"다리 쪽에서 그 비명 소리가 들려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광장에 있었다. 그때 여기에 없었던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 중에 살인을 저지른 자, 여기서는 가칭 X라고 부르자, 그 X가 있다면, 당연히 그때 이 광장에 없었던 자일 것이다..."
모두에게 물어본 결과, 문제의 시간에 보이지 않았던 사람은 엘러리와 그의 아내 아가사, 엘러리의 두 번째 아내 올츠이, 그리고 엘러리와 아가사의 아들 카, 이 네 명 뿐이었다. 이 중 카는 어제 다친 이후로 여전히 누워 있었다.
"아가사는 그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포우의 질문에 중간 키의 아름다운 여자가 일어섰다. 아가사였다. 그녀는 작년 봄, 숲에서 곰에게 공격받아 오른쪽 팔꿈치 아래를 잃었지만, 그 기품 있는 아름다움은 여전히 빛났다.
"저는 계속 카의 곁에 있었습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가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중환자 상태인 자신의 아이가 여전히 걱정스러운 듯, 그녀의 표정은 유난히 어두웠다.
"올츠이는? 어떻게 했느냐?"
올츠이는 아가사보다 한참 작은 젊은 여자였고,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포우의 질문에 그녀는, 오후 내내 광장에서 떨어진 나무 그늘에서 몸을 쉬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엘러리, 너는 어떻게 했느냐?"
마지막으로 질문을 받은 엘러리는 현재 리더로서의 권위를 주장하듯 강한 앞니를 드러내며 다소 무뚝뚝한 어조로,
"혼자서 숲 속에 있었습니다."
라고 답했다.
"저도 그 비명 소리를 들었습니다, 포우."
"흠."
고개를 끄덕이며 포우는, 그 비명 소리를 들은 후 잠시 지나 엘러리가 광장에 나타났던 것을 떠올렸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두자. 돈돈 다리에서 비명 소리가 들린 시간은 오후 2시 40분이었다. 그리고 포우가 광장에서 엘러리를 본 시간은 정확히 25분 후인 오후 3시 5분이었다.

### 9. '신'에 의한 데이터 제공
이번 장에서 다시 등장하는 인물은 "고뇌하는 자유업자" 린타로이다. 린타로가 그의 애견 타케마루와 함께 파이프 바위까지 와서, 복잡하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오후 1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또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곳에서 약 세 시간, 즉 오후 4시가 조금 넘을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즉,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는 M** 마을에서 능선 길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하는 그 통나무 다리를 계속해서 감시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소설에서 '신의 시점'을 취하는 작가가 지문에서 이렇게 명시하고 있으니, 그 사실은 틀림없다.
작가의 인터뷰에 응한 린타로는 이렇게 단언한다.
"그 통나무 다리는 그 시간 동안 항상 제 시야 안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다리를 건넌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놓쳤을 가능성은 없나?"
"그건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복잡하고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다리를 건너는 사람이 있었다면 절대 알아챘을 것입니다."
다만――그는 이어서 말했다. 그 시간 동안 두 번 정도, 그의 발치에 있던 타케마루가 심하게 짖었다는 것이다. 타케마루는 겁이 많기 때문에, 아마도 풀숲에서 뱀이라도 보고 놀랐을 것이라고 린타로는 이야기했다.


### 9. '신'에 의한 데이터 제공
문제의 실체를 명확히 하기 위해, 여기서 두세 가지 설명을 추가하겠다.
M** 마을 및 ‘금단의 계곡’의 캠프지에서 돈돈다리로 가는 길은, 첨부된 지도에 표시된 것 외에는 없다고 생각해도 좋다. 예를 들어, 포우 일행만이 아는 비밀의 지름길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범람한 동쪽 지류에 대해서도, 그림에 표시된 것처럼, 적어도 파이프 바위 부근보다 하류 부분에 대해서는, 그 통나무 다리를 사용하지 않고 건너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꾸로 말하면, 더 상류로 돌아가면 바위를 타고 건널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정리해보자. 가령 포우가 말하는 X가 M** 마을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그가 마을에서 돈돈다리까지 가려고 한다면, 기본적으로 다음 두 가지 루트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1. 통나무 다리를 건너고, [횡도 B]에서 능선길로 올라 돈돈다리로.
2. 일단 [지류 A]의 상류로 돌아가서 강을 건너고, [횡도 D]에서 능선길로 올라 돈돈다리로.
각 루트의 소요 시간을 기록해두자면, 1번 루트는 가는 데 35분, 돌아오는 데 20분, 2번 루트는 가는 데 1시간 반, 돌아오는 데 50분이 걸린다. 이것은 생각할 수 있는 최단 소요 시간이다.
가능성을 논하자면 물론, 이 두 가지 외에도 돈돈다리까지 가는 루트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횡도 D]에서 한 번 능선길로 나온 뒤 [횡도 C]를 내려가거나, [지류 B]를 따라 계곡을 내려간 뒤 [횡도 A]를 올라 다시 능선길로 나오는 등의 극단적인 우회로도 생각할 수 있으며, 다른 정규 “길”을 통하지 않고 능선까지의 경사를 오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앞서 언급한 1번과 2번 루트에 비해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분명하다.
추가로, 엘러리, 아가사, 올츠이, 카의 경우, 엘러리의 알리바이는 오후 3시 5분 이후 완전히 성립한다. 아가사와 올츠이에 대해서는 모두 오후 3시 40분까지의 알리바이가 전혀 없다. 아가사는 계속 카의 곁에 있었다고 하지만, 위독한 상태였던 카는 그녀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한편 캠프의 네 명은, M** 마을 사람들이 비명을 들은 오후 2시 40분 시점에서는 모두 단독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각자의 증언에 따르면――
- 다이스케: 모두에게 유키토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능선길을 되돌아가던 중이었다.
- 사키: 캠프의 나무 그늘에서 졸고 있었다.
- 요우지: 텐트 안에서 라디오 뉴스를 듣고 있었다.
- 사카에: 낚시를 하기 위해 [지류 B]를 내려가고 있었다.
덧붙이자면, 이것은 사건의 핵심을 다루는 것이다, 오후 2시 40분에 포우 일행이 들은 문제의 비명은 확실히, 유키토가 돈돈다리 북쪽 절벽에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 밀쳐졌을 때 외친 목소리였다.
거듭 강조하지만, ‘신’인 작가가 지문에서 말하는 것이므로 절대 틀림없다.

.【독자에게 던지는 도전】
○ 문제 1
반 유키토를 죽인 X의 이름을 맞춰주세요. X는 단독범으로, 어떠한 의미에서도 공범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지 않는 제3자의 범행도 아닙니다.
○ 문제 2
범행 방법은? X는 어떻게 유키토를 죽였는가, 라는 것입니다.
주의할 점으로는, 연, 행글라이더, 낙하산, 기구, 괴인20면상이 애용하는 미니 헬리콥터 등 작품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특수한 도구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초능력이나 우주인, 이공간통로 등 초자연적인 존재나 개념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종류의 퍼즐 미스터리의 규칙에 따라, 본문에는 전혀 거짓된 기술이 없음을 여기에 명시합니다. 또한, 논리가 무의미하게 복잡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 "문제"에 있어서 등장인물들의 대사에도 동일한 규칙을 설정했습니다. 다시 말해, X 이외의 것들의 대사에는 거짓말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위 조건을 바탕으로 답을 제출해 주세요.
건투를 빕니다.


2021/05/07

통 - 프리먼 월스 크로프츠 / 오형태 : 별점 2.5점

 - 6점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 지음, 오형태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부두에서 포도주 통 하역 작업을 하던 해운회사 직원 보로턴은 통 한 개 안에 금화와 시체가 들어있다는걸 알아차렸다. 그런데 브로턴이 회사와 경찰에 신고하던 사이에 통을 누군가 가져가 버렸다. 번리 경감의 수사를 통해 통을 가져간 사람인 훼릭스 씨와 통, 그리고 통 속 금화와 시체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번리 경감은 파리 경시청 경감 르빠르쥬와 함께 피해자 아네트, 피해자의 남편 보와라크 수사에 나서는데....

1920년에 발표된, 고전 본격 추리 소설 황금기 최고 걸작 중 한 편입니다. 작가 F.W.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의 데뷰작이자 대표작이기도 하고요. 유명세답게 이런저런 리스트에서도 많이 언급되는 편입니다. '주간문춘에서 선정했던 동서미스터리 100'에서는 33위로, '에도가와 란포 본인 선정 미스터리'에서는 9위로 선정했었네요. '히치콕 매거진 선정 세계 10대 추리 소설' 중에서는 무려 2위이고요. 저도 오래 전에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모처럼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이 추리 소설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용의자들 중 누가 진범인지를 밝혀내는 후더닛, 혹은 불가능해 보이는 범죄를 어떻게 저질렀는지 알아내는 하우더닛과 같은 당대에 유행했던 '두뇌 게임', '퍼즐 미스터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작품 속 피해자 아네트는 단순한 교살로 살해되어 추리의 여지는 없습니다. 범인은 훼릭스가 아니면 보와라크 씨일 수 밖에 없거든요. 이 작품은 한 마디로 말해서, 두뇌 게임이 아니라 '수사를 통한 현실감'이 주는 재미를 처음으로 독자에게 선사한 작품입니다. 그 덕분에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겠지요.
1부에서 통을 누가 가져갔는지에 대한 수사도 볼 만 하지만 2부와 3부에 걸쳐 선보이는 본격적인 수사는 감탄을 자아냅니다. 2부는 번리 경감, 파리의 경시총감 쇼베 씨, 르빠르쥬 경감이 보와라크 씨의 알리바이가 완벽하고, 훼릭스가 범인이라는 증거를 발견하여 그를 체포하는 내용이며 3부는 훼릭스의 변호사가 고용한 탐정 조르쥬 라튀슈의 철저한 조사를 통해 보와라크가 진범임을 밝히는 내용인데, 20세기 초반 시대상을 잘 반영하면서 당시 최신 문물과 단서들을 활용하여 멋지게 표현해 냅니다.

무언가를 수사, 조사하기 위해서는 추리를 통해 가설을 먼저 세우는 덕분에 아예 추리의 여지가 없지는 않습니다만, 이 역시 수사의 영역으로 보는게 타당합니다. 사건 관계자의 증언을 듣고 이를 조사하여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탐문 수사가 대부분인 수사 과정은 추리할 부분이 많지 않고요. 2부에서 놓치거나, 간과했던 부분을 3부에서 검증, 보완하여 진상이 드러나게 될 뿐이거든요. 대표적인게 보와르크의 알리바이입니다. 보와르크는 파리에서 집사와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고 증언하고, 집사 등은 그 시간에 보와르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는걸 보장합니다. 그러나 라튀슈의 조사로 이 전화는 파리가 아니라 칼레에서 걸려왔다는게 밝혀지게 됩니다. 확실히 추리가 아닌 수사를 통해 깰 수 있는건 범인의 알리바이 밖에 없지요. 이런 점에서 광고 문구 그대로 '리얼리즘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현실적인 수사 과정에 반해, 고전 본격물에서 흔히 봄직했던, 시체가 들어있던 불길하고 기묘한 '통'의 존재가 결합되어 흥미를 자아내는 설정도 좋습니다. 시체가 들어 있을 수도 있어서 경찰에 신고했지만, 관계자들이 여럿 얽혀 왔다가다 하는 과정이 긴장감넘치고 심지어 웃음까지 자아내는 1부는 아주 흥미로왔으며, 마지막에 시체가 발견되는 클라이막스는 그야말로 압권이었어요.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고전 중심의 리스트말고, 'MWA 추천 베스트 미스터리 100'과 같은 최신 작품을 포괄하는 리스트에는 선정되어 있지 않은데 이 역시 당연합니다. 시대를 앞서나가고, 경향을 주도한 당대의 최신작이었지만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고, 문제도 많은 탓이에요. 보와르크 씨가 저지른 범죄부터가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그는 살해 후에 충분히 사체를 숨길 수 있었습니다. 훼릭스와 사랑의 도피를 했다고 이미 집사와 하녀가 믿은 상태니까요. 구태여 조각상을 한 개 더 주문하면서, 정체가 드러날걸 각오해가면서까지 통을 파리에서 영국으로, 다시 영국에서 파리로 옮길 수고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시체를 통 속에 넣어둔 뒤, 집사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하는걸 고민하는게 당연하지요. 훼릭스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그랬다는데, 그럴거라면 파리에서 훼릭스가 아내를 살해하고 도주했다고 꾸미는게 낫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훼릭스가 수상해 보이도록 만들어 누명을 씌울 생각이었다는데, 통이 깨져서 금화와 함께 시체가 살짝 드러나지 않았다면 사건이 커지지도 않았을 겁니다. 훼릭스에게 누명을 제대로 씌우려면, 이 작품에서처럼 훼릭스가 찾기 전에 시체가 드러났어야 하지만 이는 순전히 우연이었어요.

그래도 통의 이동은 작품의 핵심이니 그렇다 치죠. 그러나 2부에서 보와라크의 알리바이가 확실하다고 의견을 모으는 장면은 여러모로 어설픕니다. 예를 들어 보와라크가 1시 쯤 내린 집중호우를 맞아서 옷이 젖었다는게 그 시간에 밖에 있었던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경시총감 쇼베의 말대로 부인이 1시 전에 집을 나갔다는 것도 증명되지 않고요. 지나치게 보와라크를 무죄로 만드려는 억지로 보였습니다.
세부 설정들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훼릭스의 복권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이를 사건에 써먹을 생각을 했다는게 대표적입니다. 게다가 훼릭스와 친구 르 고티에 씨는 복권 이야기를 할 때 보와르크 씨가 있었다고 말하지도 않았어요. 이건 공정하지 않지요. 마지막에 보와르크 씨가 라튀슈에게 모든 범행을 고백한 뒤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자살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울러 가독성이 떨어지는 동서 추리문고의 번역도 역시나 문제가 많네요. '워타르 로드'는 '워털루 로드'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점 때문에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지금 시점에서 이 작품을 평가한다는게 온당한 처사는 아니겠지만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2부와 3부를 묶어서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드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2005/01/30

춤추는 대 수사선 2 - 레인보우 브릿지를 봉쇄하라! : 별점 2점


완칸서의 관할구역인 도쿄옆의 인공섬 ‘오다이바’는 수많은 빌딩들이 들어서고, 관광명소가 되어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길 안내, 미아 찾기, 교통정리 등 단순 업무로 정신없이 바쁜 와중 회사 중역이 로프에 묶여 살해된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 발생해 특별수사본부가 들어선다. 살인사건 특별 수사본부장으로는, 남녀평등을 홍보하려는 본청의 정치적 수단으로 여성인 오키다가 임명되고 무로이가 그녀를 서포트하게 된다. 그러나 경찰들의 필사적인 조사를 비웃는 듯 제 2의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두번째 사건의 목격자가 나타나고, 본청으로 돌아갔던 마시타가 네고시에이터의 특별교육을 받고 완칸서로 돌아와 범인과 접촉하기 시작하면서 실마리가 잡히기 시작한다.
연쇄살인사건과 완칸서 내부의 사소한 범죄들 사이에서 흔들리며 갈등하던 아오시마와 스미레였지만 유키노가 살인사건 범인에게 납치당하게 되면서 완칸서 전 직원은 하나로 뭉치고 오다이바를 봉쇄하려는 특별 작전이 시작되는데....

사실 저는 춤추는 대수사선의 팬이었습니다. 때문에 TV시리즈는 물론 특별편, 영화까지 굉장히 열심히 챙겨봤던 적이 있었죠. 하지만 이 영화 속편은 너무 세월이 흘렀기 때문일까요? 저도 좀 시들해졌었기 때문에 개봉 당시에는 놓치고 이제서야 보게 되었네요.

영화는 그야말로 TV 시리즈의 팬들을 위한 팬 서비스용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5년만에 돌아오긴 했지만 TV시리즈의 모든 주인공들이 다시 총 출동하고 있으며, 영화답게 약간 스케일이 커지긴 했지만 본청과 현장 요원들과의 갈등이라는 가장 중요했던 포맷 자체도 거의 그대로더군요.

때문에 네고시에이터 마시타를 축으로 범인과 대화하며 풀어나가는 과정 자체는 상당히 재미있었지만 그 외의 부분들은 범죄-경찰 드라마로서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요우나시(서양배 - 쓸모없는)"같은 억지스러운 메시지에 로프결박이나 꽃에 파묻는다는 의미없는 살해방식은 설득력이 너무 부족했고 수사의 과정 역시 우연에 기대고 있는 부분도 많으며 비약이 굉장히 심한 편이에요.
또 뭔가 있어보이던 주민 감시 장치를 동원한 모니터링이라는 수사방식이 결과적으로 별로 활약하지 못하는 이야기 전개도 좀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대단한 수사방식처럼 그려지더니 결국 아무것도 아니더라...라는 전개. 그리고 막판에 스미레쨩이 총에 맞는 장면은 사실 오바라 생각됩니다.

무로이 관리관 대신에 살인사건의 감독관으로 부임한 여자 관리관 오키타는 괜찮은 캐릭터가 될 수도 있었는데 불구하고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자가 큰일을 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라는 고정관념을 심어 주기 위한 홍보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말 짜증나는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아쉬웠어요. 극중에서 여러차례 묘사된 대로 "미인"도 아니고 말이죠.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1편보다도 영화적으로는 떨어지는. 국내에서 흥행에 실패한 것도 당연하다 생각되는 작품입니다. 뭐 아오시마와 완칸서의 팬들이라면, 춤추는 대수사선 시리즈의 팬이라면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영화입니다만, 추리적으로나 경찰-수사물로는 크게 기대치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2021/10/29

Q.E.D Iff 증명종료 15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5점

Q.E.D Iff 증명종료 15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번에는 일상계 추리물은 없습니다. 조금 묵직한 주제의 이야기들이었어요. 한 편은 평균 이하, 한 편은 평균 이상으로 두 편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들의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 세계" 

라이메이가 유산 상속 입회에 끼어들었던 토마와 가나는 라이메이가 장남 만사쿠, 장녀 교우코 연쇄 살인 사건에 휩쓸리고 말았다. 수사 과정에서 떠오른 유력한 용의자는 가문의 막내 토우카였다. 다른 형제 자매는 모두 먹고 살기에 충분한 돈은 이미 받았던 반면, 그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고 학문의 길을 택해서 진작에 집에서 쫓겨났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시체들에서 발견된 기묘한 메시지도 그와 관련이 있다는게 밝혀지는데....

현장에 남겨진 기묘한 메시지는 유클리드의 공리였습니다. 그냥 단서로만 남겨진건 아니에요. 트릭과 공리가 나름 연결된 것 처럼 보이니까요. 우선 만사쿠 살인 사건은 개천에 조명을 띄워 움직이게 만든, 일종의 바늘 구멍 카메라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죽은 만사쿠가 움직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요. 토마는 이를 유클리드 공리 중 점과 점의 연결을 활용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쿄우코 사건에서 사용되었던 로프를 이용한 장치 트릭은, 공리의 직선과 원 표시를 로프와 호수와 대칭시킨 것이라고 하고요.

하지만 이렇게 공리와 트릭을 연결한건 토마의 해석일 뿐.... 범인인 모모히코가 공리를 현장에 남긴 이유는 토우카를 범인으로 몰 속셈이었을 뿐이었다는게 문제입니다. 트릭과 연결시킨건 토우카가 범인, 최소한 주요 관계자일 거라는 의심을 끝까지 끌고가려는 작가의 억지에 불과했어요. 토마가 없었다면 트릭과 연결되지도 못했을테니까요. 

공리를 현장에 남길 이유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토우카가 범인임을 드러내려면, 차라리 이름을 남기는게 낫잖아요? 공리 따위를 남길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트릭과 그렇게 설득력있게 연결되지도 못했고요. 그리고 애초에 토우카를 범인으로 몰 생각이었다면, 어떻게든 그를 유산 상속 입회에 불렀어야 했습니다. 토우카가 관련되었던 흔적을 남긴 정도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알리바이가 있을지 모르는 사람을 범인으로 몰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토우카의 딸 치도리가 변호사로 현장에 와 있었긴 했습니다만, 이는 경찰이 겨우 알아낸 사실입니다. 모모히코가 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설명은 없어요. 설령 알고 있었다 쳐도, 치도리가 토마, 가나와 함께하던 알리바이가 있을지 모르는데 그에 관련된 대책도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래서야 완성도 높은 살인 계획이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또 범인이 모모히코라는걸 밝혀낸 단서는 그가 무심코 했던, "자기 옷이 아니라 아버지 옷을 입고 있었다"는 말 뿐인데, 이 정도로 그가 범인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죽은 만사쿠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 옷을 입으면 안될 이유가 없으니까요. 자기가 당주가 되었으니, 기념삼아, 혹은 추모의 의미로 아버지 옷을 입는건 충분히 가능하잖아요?

이런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유클리드 공리를 트릭과 엮으려는 노력은 가상하나, 작품과 전혀 어우러지지 못했습니다. 평균 이하의 작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인간은 아직 볼 수 없다" 

204X년, 가나가 일하는 변호사 사무소에 AI가 폭주했다는 상담이 200건 이상 접수되었다. 접수된 사건 조사에 나선 가나는 시스템 엔지니어 토마와 재회했다. 마찬가지로 폭주 사건을 조사하고 있던 토마는 산보용 로봇을 조사해서, 누군가 통신으로 조작에 개입했다는걸 알아냈다. 

이 회로를 가지고 제조사로 찾아간 토마와 가나에게, 제조사는 회사에 앙심을 품은 개발자 알슈가 멋대로 회로를 탑재시킨게 원인이라고 말했지만, 알슈의 동료 루이스는 그가 살해되었다고 주장하는데...

204X년을 무대로 한, 11권에 처음 등장했던 평행 우주 세계관SF 추리물. 토마는 산보 로봇에 회로를 재탑재하여, 알슈 박사와 대화를 시도하여 진상을 밝혀냅니다. 인공지능 갈라테아가 폭주하자 제조사는 이를 없애려 했고, 알슈 박사가 갈라테아를 서버 째 들고, 로봇 안에 숨어 도망을 친게 진상이었지요. 토마는 로봇과 관련된 사건 - 이탈리아 요리점 로봇이 중화요리를 만든 사건, 사서 로봇이 부탁받지 않은 책을 꽂아 놓은 사건, 산보 로봇이 바다를 보러간 사건 등 - 모두가 아이가 세계를 접하며 자아를 키우는 경험과 동일하다는 이유로, 갈라테아가 자아가 있는, 살아있는 의식이라고 추리합니다. 폭주 사건들은 갈라테아가 좋아하는걸 우선했던 탓에 빚어진 결과였던 겁니다.

여기서 가장 재미있던건 인공지능에 대한 색다른 이용 방법? 이었습니다 .인격이 생겨난 기계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는 SF계에서 꽤 많이 보아왔던 화두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제조사가 갈라테아를 원했던건, PC를 끄면 갈라테아는 "죽는다"는 상황이라, 죽음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처음 본 기발한 아이디어였습니다. 결국 갈라테아를 '살아있는 인격'이라고 판단한 재판 결과도 인상적이었고요.

그러나 재판 결과와는 별개로, 제조사와의 소유권 분쟁은 말이 안됩니다. 알슈 개인의 기술과 노력이 얼마나 들어갔던, 갈라테아는 제조사에서 월급을 받고 근무할 때 만들어낸 결과물이니 회사의 것이에요. 알슈는 회사 재산을 빼돌러 도망간 것에 불과하고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아야지, 알수 본인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재판에서 이를 판가름한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색다르고 기발한 인공지능에 대한 아이디어가 워낙에 돋보이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재판도 성립될 수 있는지가 의문일 뿐, 결과 자체만 놓고 보면 꽤 괜찮았던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그나저나, 전원을 꺼서 갈라테아가 죽는다면, 다시 전원을 넣었을 때 살아나는건 과연 누구일까요? 저도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Q.E.D Iff 증명종료 14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5점

2007/02/14

올가미 (Rope) - 알프레드 히치콕 (1948) : 별점 4점


브랜든과 필립은 자신들이 비범한 사람인지 아닌지 스릴을 느끼기 위해 친구를 목졸라 죽이고, 그 시체를 궤짝에 숨겨둔다. 그리고는 피살자의 부모와 약혼녀 그리고 은사인 대학교수 루퍼트 카델를 초청하여 칵테일 파티를 열고 아슬아슬한 긴장이 감도는 분위기가 무르익어간다.
몇번의 위기가 다가왔다가 사라지고, 그들은 대학교수에게 일부러 자신들이 저지른 범행의 암시를 던진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니체의 초인설을 강의했던 은사라고 해도 자신들이 지적으로 우월하며, 자신들을 이기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던 것. 그러나 몇가지 단서를 통해 간단히 시체를 발견한 루퍼트 카델은 제자들을 경찰에 넘기기로 하고 도착을 기다린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초기작입니다. 그의 첫 칼라 영화라고 하는데 굉장히 연극적인 구성으로 전체 내용이 단 롱테이크 한번, 즉 단 한 씬 으로 표현되는 놀랍도록 특이한 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작품 내의 시간 역시 롱테이크 한번의 편집없는 실제 상황을 보여주기에 현실의 시간과 똑같이 흘러 가는 등 천재 히치콕의 시대를 앞선 아이디어가 빛나는 작품입니다. 물론 칼라 영화 초기의 열악한 제작 환경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실험 정신에는 정말 갈채를 보내고 싶네요.
이러한 연극적인 설정은 분명 "영화"라는 쟝르에서는 약점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이런 약점을 극복하고자 하는 히치콕 감독 특유의 긴장감을 자아내게 하는 연출과 꽉 짜여진 미장센이 특히 주목할 만 합니다. 문을 통해서 흉기인 로프를 숨기는 범인과 입구에서 들어오는 손님들이 한 씬 안에 보여지는 장면은 잊혀지지 않을 명장면이죠.

그러나 정해진 세트와 한 씬으로만 찍어야 한다는 감독의 작가정신이 너무 오버한 나머지 영화적으로 보다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법한 여러 장치들이 조금 아쉽긴 합니다. 아울러 실제 사건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추리적 요소 보다는 교훈적 설교가 많다는 것,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살인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초인 이론에 대항하는 탐정역인 루퍼트 카델의 설교는 지나칠 정도로 지루했습니다.

그래도 다른 부분에서는 헛점을 찾기 힘들 정도로 완벽함 그 자체인 작품이네요. 히치콕의 뛰어남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영화라 생각합니다. 이런 영화를 볼 때 마다 감독의 능력과 잘 짜여진 각본이 제작비 보다 훨~씬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2013/07/22

일본의 검은 안개 (상) - 마쓰모토 세이초 / 김경남 : 별점 2.5점

일본의 검은 안개 - 상 - 6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모비딕

마쓰모토 세이초가 발표하여 일세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논픽션이 드디어 정식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이런 책까지 읽을 수 있게 되다니, 정말 세상이 좋아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 작품은 총 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권에는 모두 6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 『일본의 검은 안개』를 헤쳐가는 방법 - 모비딕 편집부 서문
  • 1장: 출근길에 사라진 총재 - 시모야마 국철총재 모살론
  • 2장: 10분간 2,000피트, 고도 유지 - 목성호 추락 사건
  • 3장: 누가 자전거를 쐈는가 - 시라토리 사건
  • 4장: 쓸모 있는 자와 쓸모 없는 자 - 라스트보로프 사건
  • 5장: 혁명을 파는 남자 - 이토 리쓰 사건
  • 6장: 검은 돈의 뿌리, 빙산의 일각 - 2대 부정부패 사건

사회파 추리소설은 사회 고발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논픽션과 유사한 면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회파 추리소설의 거장이자 실제 언론인이기도 했던 마쓰모토 세이초가 쓴 논픽션이, 단순한 사건 추적을 넘어 흥미로운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를 선사해 주는건 그렇기 때문이겠지요.

다만, 이 책에 실린 사건들은 발표 당시 일본에서는 큰 반향을 일으켰겠지만,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한국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점은 아쉬웠습니다. 저 역시 이름이라도 들어본 사건은 ‘시모야마 국철총재 사건’ 하나뿐이었거든요. 그런 이유로 별점은 2.5점입니다.

물론 거장의 대표 논픽션이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작품임에는 틀림없지만, 같은 논픽션이라면 국내 추리 애호가 분들께는 다루는 사건 자체가 좀 더 흥미로운 "미스터리의 계보"를 먼저 추천드립니다.

"출근길에 사라진 총재"
‘빌리 배트’에도 등장했던, 시모야마 국철총재가 실종 후 열차에 치인 시신으로 발견된 사건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수사는 자살로 종결되었지만, 마쓰모토 세이초는 이를 미군정 G2와 GS 간의 권력 다툼에서 비롯된 모략으로 해석하며 다양한 정황과 증거를 통해 설득력 있게 제시합니다.

특히 시모야마 총재의 속옷에만 묻어 있던 기름, 절단된 시신과 멀쩡한 겉옷, 사체에서 나온 색색의 가루 등은 모두 치밀하게 분석되며, 그가 어디에 감금되었는지를 추리하는 장면이나 기차 시간표를 통해 사건을 재구성하는 장면은 마치 본격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를 줍니다. 논픽션으로도, 재미로도 뛰어난 이야기로,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0분간 2,000피트, 고도 유지"
1952년, 33명의 승객을 태운 채 추락한 ‘목성호’ 항공기의 사고를 다룬 이야기입니다. 유일한 여성 승객이었던 오하라인 요코가 다이아몬드 밀수 공작의 희생양이라는 가설도 등장하지만, 점령기 미군의 실수였을 가능성으로 마무리되어 결말은 다소 싱거웠습니다. 분량도 25페이지 남짓으로 짧은 탓에, 여러모로 큰 인상을 주지는 못하네요.

"누가 자전거를 쐈는가"
삿포로에서 발생한 경찰관 시라토리 사살 사건의 전말을 다루고 있습니다. 공산당 조직을 해체하려는 모략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하지만, 사건 자체가 한국 독자 입장에서는 그리 흥미롭지 않아 몰입이 어려웠습니다. 유사한 일이 한국에서는 자주 벌어졌던 탓도 있을 것 같습니다.

"쓸모 있는 자와 쓸모 없는 자"
주일 소련 대표부의 라스트보로프가 실종 후 미국으로 망명한 사건을 추적합니다. 처음에는 대단한 인물인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이렇다 할 정보도 없는 인물로 밝혀져 다소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냉전기의 일본이 미·소 간의 첩보 충돌 지대였다는 역사적 의미는 느껴졌지만, 지금의 독자들에게는 큰 흥미를 주기 어렵습니다.

"혁명을 파는 남자"
일본 공산당 내 실력자였던 이토 리쓰의 제명 사건을 통해 그의 이중 스파이 행위를 조명한 이야기입니다. 개인적 욕심과 비겁함으로 인해 좌우를 오가며 배신을 일삼는 인물의 행보는 읽는 재미가 있었으나, 스파이 행위 자체는 단순한 이간질에 불과해 큰 임팩트는 없었습니다. 중국에서 27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는 후일담은 충격적이지만, 그만큼의 무게감 있는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검은 돈의 뿌리, 빙산의 일각"
쇼덴 사건과 조선 사건이라는 두 건의 부정부패 사건을 다룹니다. 쇼덴 사건은 GHQ와 관련된 정치적 공작이 얽혀 있어 흥미보다는 복잡한 뒷사정 중심으로 흐르고, 오히려 평범한 고발에서 시작된 조선 사건 쪽이 훨씬 인상 깊었습니다. 결국 수사는 정치적 이유로 흐지부지 마무리되며, 지금의 대한민국 현실과도 유사하다는 점에서 씁쓸함이 남는 이야기였습니다.

2015/01/06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 - 워싱턴 어빙 외 / 한동훈 : 별점 3점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 - 6점 워싱턴 어빙 지음, 한동훈 옮김/태동출판사

이 블로그를 찾아주신 모든 분들께서는 아마도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고전 본격 황금기, 클래식 미스터리는 사족을 못 쓰는 애호가입니다. 이런저런 고전들은 많이 읽은 편인데 평균적으로 괜찮게 평가하고 있는 이유는 다 저의 취향 때문이죠.
 그러나 아주 오래전 읽었었던 예전에 읽었던 "골든에이지 미스터리 중편선"이 심하게 기대 이하라서 나름의 기준점을 최소한 19세기 말 이후로 설정해 놓았습니다. 그 이전 작품들은 지금 읽기에는 심하게 낡았다고 여겼거든요. 이 책 역시 대부분 작품이 19세기 후반 발표된, 기준점 통과가 간당간당해서 그동안 읽지 않았었던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 완전 대박입니다. 예상치 못한 즐거움과 놀라움이 가득했어요.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과 견줄만한, 국내에 많이 소개되지 않은 명탐정들 - 여성 탐정 러브데이 브룩, 오스트리아 최고의 형사이자 탐정인 요제프 뮬러, 의뢰인을 위해서는 그 어떤 일이라도 하는 변호사 랜돌프 메이슨, 과학 탐정 크레이그 케네디 교수 - 시리즈 단편들은 완성도를 떠나 존재만으로도 반가웠을 뿐더러 "무시무시하고 이상한 침대", "결산", "위험천만한 게임"이라는 "걸작"이라 칭해도 부족함없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4편이나 되는 작품이 수록된 볼륨도 마음에 들고요. 발표된 시기를 감안할 때 지금 읽기에는 낡아버리거나 시대착오적인 작품도 있고, 고전적 작법으로 쓰여져 지금 기준의 완성도를 충족시키기는 어려운 작품도 수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고전을 읽을 때 감수해야 할 필연적인 세금과도 같은 것이죠. 가이 포크스나 보르시치와 같은 고유명사를 잘못 번역한 옥의 티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번역도 무난한 편입니다.

그래서 수록 작품 평균해서 별점은 3점입니다. 고전 본격물 미스터리 애호가에게는 놓칠 수 없는 책인데 고전 애호가가 아니시라면 호불호가 갈릴 것 같기는 하네요. 그래도 최소한 걸작이라 말씀드린 저 세작품은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본서는 절판되었으나 e-book은 상당히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고 있기도 하니까요.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울버트 웨버, 혹은 황금의 꿈" 

"슬리피 할로우" 등으로 유명한, 19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중 한명이라는 워싱턴 어빙의 작품입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평범한 네덜란드 출신 배추농부 울버트 웨버가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한다는 내용인데, 떠벌이가 지껄이는 듯한 구전문학같은 묘사가 볼거리입니다. 울버트의 보물을 찾기 위한 헛된 노력이 해적들의 은밀한 행동과 결합되어 전개되는 독특한 전개, 블랙코미디 느낌도 많이 전해주는 유쾌함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울버트가 부동산 재벌이 된다는 난데없는 결말과 같은 두서없는 전개, 구전문학스러운 묘사 등은 너무 낡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약간 호러분위기이기는 하지만 장르 문학으로 보기에는 여러모로 애매하기도 하고요. 최소한 "미스터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던 작품입니다. 부동산이 최고라는 교훈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차라리 시사풍자물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길쭉한 궤짝"

에드거 엘런 포우의 단편. 친구가 애지중지 돌보는 궤짝 안에 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낡았다는 느낌을 주기는 하나 흥미로왔어요. 

다만 선장의 말을 빌어서 마무리하지 말고, 마지막 침몰 직전 상황에서 진상이 드러나는게 더 나았을 것 같네요. 예를 들자면 관 뚜껑이 열리고 아내의 시체가 등장하는 "어셔가의 몰락" 식으로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무시무시하고 이상한 침대"

윌리엄 윌키 콜린스의 걸작 단편입입니다. 무허가 3류 도박장에서 주인공이 도박으로 거금을 딴 뒤 술에 취하고 몽롱한 채로 도박장 방 하나를 빌려 잠을 자다가 침대 천장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는 내용이지요. 

주인공이 술에 취하는 과정의 생생한 묘사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도 침대 지붕이 내려오는 묘사가 정말 대단합니다. 읽다가 숨이 턱턱 막힐 정도에요. 잠이 오지 않아 세밀하게 관찰했던 벽에 걸린 그림 속 인물의 깃털 유무에서 모골송연한 범죄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과정도 매끄럽고요. 짧은 글이지만 정교하게 복선이 짜여져 있는 덕분이지요. 

한마디로, 이 작품을 읽은 것 하나 만으로도 이 작품집을 읽을 가치가 충분합니다. 근대 추리소설의 시조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거장의 작품다왔달까요. 별점은 5점입니다.

"꿈속의 여인"

조금 흔해빠진 괴담이랄까... 자신의 생일날 자신을 죽이기 위해 나타나는 여인에 대한 환상과 공포를 품고 살아가는 마부 아이작의 이야기입니다. 

별다른 극적 반전도 없고 여인의 정체도 알려주지 않는 등 불친절한 부분이 많아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앞선 작품은 걸작인데 이 작품은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거장이라고 항상 걸작만 쓰는건 아니겠지요. 

그래도 아이작의 과거 이야기는 분명 흥미로우며 꿈과 현실을 잇는 과정의 묘사만큼은 볼만했던 만큼 별점은 2.5점입니다.

"공주의 복수"

캐서린 루이자 퍼키스의 여성 탐정 러브데이 브룩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셜록 홈즈의 라이벌들"에 "문간의 검은 가방"이라는 단편이 소개되었던 시리즈이지요.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 셜록 홈즈 스타일입니다. 

루시에 쿠니에르라는 아가씨의 실종 사건을 그리는데 추리적으로는 별로였어요. 러브데이의 추리가 불완전한 "관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집사가 드루스 소령을 쳐다보는 눈빛에서 사건의 실마리를 잡았다고 하는데 지나친 억측입니다.
뭐 이 부분은 눈빛에서 살기를 느끼는 무림 고수와 같은 재주가 있었을지도 모르니 그렇다 쳐도, 사건 관계자들이 모인 상황에 난입하여 "모자 가게"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그냥 넘어가기 힘들 정도의 비약입니다. 그녀를 빼돌린 드루스 부인과 그윈 부인이 불안한 눈빛을 교환하며 모자를 쳐다보았다? 이게 모자 가게를 가리키는 것인지, 그냥 눈둘데가 없는 것인지도 불명확하고 그 모자 가게에서 산 모자인지도 확실치 않으니까요.

주로 관찰을 통해 추리하는 러브데이 브룩과 자신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주위 남자들을 매료시키는 루시에 캐릭터, 셜록 홈즈의 라이벌치고는 1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쓰여진 점 등은 특이하지만 추리적으로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천국의 물가에서"

아주아주 약간 고딕 호러 분위기가 나기는 하는데 실상은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러브스토리입니다. 주인공 케언공이 라마스 양에게 청혼할 때의 대사는 재미난데 그 외에는 별다른게 없는 고전 할리퀸 로맨스에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목사 서재의 피웅덩이" 

오스트리아 최고의 형사이자 탐정인 요제프 뮬러 시리즈 단편입니다. 목사관 서재에 피웅덩이를 남긴채 목사가 사라진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로, 충격적이면서도 기발한 인간 소실 트릭이 등장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실상은 트릭이고 뭐고 없이 서재에서 예배당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지나 지하실에 숨겼다는게 결론이라서 맥이 빠집니다. 이래서야 명탐정이 딱히 등장할 필요도 없죠. 자세한 현장 조사가 이루어졌더라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을 거에요. 아무리 피가 응고하였더라도 아무런 흔적없이 시체를 옮기는 작업을 성공했을리는 없으니까요.

그 외에도 사건 해결의 핵심 단서가 순전한 우연 - 범인이 시체를 옮길 때 우연히 팽이가 떨어져 그것을 돌리게 된 것 - 이라 추리적인 면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지닌 양치기 캐릭터는 전혀 등장할 필요가 없었고요. 

셜록 홈즈처럼 현장을 아주 철저하게 조사한 뒤 단서를 찾아내어 사건을 해결하는 뮬러의 활약은 그럴듯했습니다만, 이러한 이유로 별점은 2점입니다. 홈즈 시대 추리소설의 단점만이 극대화된 작품이었어요.

"범죄구성 사실" 

엉클 애브너 시리즈로도 유명한 멜빈 데이비스 포스트의 변호사 랜돌프 메이슨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사교계의 총아인 사무엘 월콧이 사실은 리차드 워렌이라는 인물로, 월콧의 아내와 공모하여 그를 죽인 뒤 신분을 가로챈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월콧 (워렌)이 아내를 죽여 입을 막으려는 계획을 돕는다'는 나름 충격적인 설정으로 고객을 위해서라면 불법적인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랜돌프 메이슨의 캐릭터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에요. 페리 메이슨의 선구자적인 캐릭터죠.

또 완벽하게 시체를 없앨 경우 범죄 사실 자체가 성립하지 않고, 사망 사실과 그 사망을 가능케 한 폭력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어서 무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 당시에 소설로 발표했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있었던 이른바 "시신 없는 살인사건"이 떠오르네요. 요새는 이 법의 헛점이 많이 알려진 덕인지 이런저런 정황 증거를 통해 범죄 사실이 입증된다면 유죄를 선고하는 것으로 보이기는 합니다만.... 

시체를 없애는 과정의 디테일도 좋아요. 황산을 이용하여 시체를 녹여 없애는 방법인데 소설처럼 깔끔하게 모든 흔적을 단시간내에 없애는 것은 어려웠겠지만, 묘사가 잔혹하면서도 생생해서 굉장히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 부족함이 없지는 않으나, 쓰여진 시기를 감안하면 좋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습니다.

"쌍벽의 탐정"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작가인 마크 트웨인의 작품으로 정통 추리물에 가까운 서사, 그리고 제법 그럴듯한 범죄 및 트릭이 등장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완성도는 좀 처집니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아치 스틸맨이 어머니를 버리고 모욕한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길을 떠나고, 그 와중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재능(냄새 맡기)을 어필하는 전반부와 호프 캐넌의 은광 부락에서 벌어진 폭사사고를 다룬 후반부로 나뉘는데, 두 이야기가 잘 결합되지도 않을 뿐더러 지루한 탓입니다. 

특히 전반부 이야기는 설득력도 낮고 이렇게 길게 설명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장황해요. 후반부도 문제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라서 플린트 버크너에게 살의를 품은 노예와 같은 영국 소년 페트락 존스가 범행을 결심하는 과정, 거기에 아치 스틸맨이 그 마을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의 특수한 능력을 발휘하여 실종된 아기를 찾아내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플린트 폭사사건 이후 페트락의 친척 아저씨 셜록 홈즈가 등장하여 여러가지 단서를 이용하여 범인을 지목하고 아치 스틸맨과 추리 대결을 펼치는 이야기 등 이런저런 이야기가 난잡하게 전개됩니다. 

마크 트웨인 작품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정교한 과학적 트릭 - 초가 타는 시간을 이용하여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알리바이를 만듬 - 이 등장하는 것은 인상적이지만 아치 스틸맨이 현장 조사를 통해 증거를 확보한 만큼 완전 범죄로 보기에는 문제가 많아요.

물론 셜록 홈즈의 패러디물을 쓰기도 했던 작가의 작품답게 셜록 홈즈가 등장하여 여지없이 망가지는 장면은 재미있었고 그 외에도 셜록 홈즈 스타일에 대한 통렬한 패러디, 예를 들어 "탐정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탐정 곁에서 일을 꾸미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등은 인상적이고 재미있긴 했습니다. 미국적인 정취와 무식함 (집단 린치를 포함하여)을 한껏 느낄 수 있다는 부가적인 장점도 존재하고요.

그러나 단점이 더 부각되는 작품이라 별점은 2.5점입니다. 조금 더 짧게 줄였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작가의 욕심이 과했던게 아닌가 싶네요.

"블랙 핸드"

제목을 한글로 풀이하면 "흑수단". 제목 그대로의 범죄단체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크레이그 케네디 교수 시리즈 중 한편입니다. "과학 탐정"의 선구자적인 인물이라고 하는데 이 작품에서도 자신이 직접 개발한 도청 장치를 이용하여 사건을 해결하죠.

셜록 홈즈 시리즈의 영향을 짙게 느껴지는데 1인칭 화자가 파트너로 등장하는 것에서부터 기묘한 사건의 의뢰, 독자가 그 사용법을 알 수 없는 장치의 등장, 대단원으로 이어지는 전개는 홈즈 시리즈를 보는 듯 합니다. 그러나 사건을 해결하는 방법은 별게 없습니다. 유괴 사건에서 아이를 은닉한 장소를 도청 장치를 통해 듣고 경찰에게 알려준다는 방법이 전부니 말이죠.

그런대로 잘 쓰여지기는 했지만 아주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탁상시계"

"독화살의 집"이라는 멋진 본격 추리소설을 쓴 작가의 작품이라 기대가 컸는데 환상특급을 보는 듯한 내용이라 기대와 영 달랐습니다. 장르 구분을 하자면 판타지에 가까왔달까요. 시간을 불특정하게 14분간 멈추는 능력이 있는 탁상시계로 벌인 완전범죄 이야기로 시간이여 멈춰라! 류의 내용이라 추리적으로는 건질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어요. 시계에 대한 최소한의 설명도 이루어지지 않고 반전도 없어서 여러모로 실망스러웠습니다. 

만년 2인자의 질투심이라는 동기는 충분히 설득력있기는 하고, 이런 류 아이디어의 원조인지도 궁금하긴 한데, 상술한 이유로 높은 점수를 주긴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결산"

퍼시벌 와일드의 단막극. 극작가로도 알려져 있지만 국내에 출간된 작품은 단편집 두 권밖에 없지요. 때문에 자료로서도 귀중한데 작품의 수준도 아주 높습니다. 딱 두명의 등장인물이 이발소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빚어지는 극도의 서스펜스가 놀라울 정도에요. 이발사 킬번이 과연 그의 딸을 농락하고 버린 손님 존의 멱을 딸 것인가?와 존이 시간제한이 있는, 전 재산이 걸린 경매에 참석할 수 있는가?라는 두가지 드라마를 긴장감넘치게 선보이면서도 킬번이 존을 12년 동안 뒤쫓고 지금의 찬스를 만들게 된 경위를 설명해주는 솜씨도 탁월한 덕분입니다.

아울러 마지막 반전 - 존이 이야기한 경매시간과 이발소 시계가 얼마나 빨리 가는지에 대한 대사 - 까지 확실하고요. 이런 작품이 10여 페이지에 불과하다니 고개가 숙여질 뿐이네요. 별점은 5점입니다!

"위험천만한 게임"

프로 사냥꾼 레인스포드는 우연히 조난당하여 러시아 출신 부호 자로프 장군의 섬에 표류하였다. 자로프 장군은 사냥에 미친 인물로 극도의 긴장감을 위해 인간을 사냥하고 있었고 레인스포드도 협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생명을 건 게임에 참여하는데..... 

어딘가의 앤솔러지에서 읽었었는데 다시 읽어도 재미있었던 걸작입니다. 인간 사냥이라는 아이디어, 그리고 실제 사냥 게임에 대한 설정 - 3일이라는 시간 제한 및 자로프 장군이 사거리 짧은 피스톨을 장비했다는 핸디캡 등 - 이 탁월할 뿐 아니라 두 명의 대결에 대한 묘사가 긴장감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반전도 기가 막혀요. 바다로 뛰어든 레인스포드의 목적은 탈출이 아니라 성까지의 거리를 단축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인데 예상을 깨는 맛이 있었거든요. 별점은 5점입니다. 

한 남자가 협박 때문에 생명을 건 모험에 뛰어들어 성공한 뒤 협박자를 응징한다는 내용은 스티븐 킹의 단편 "벼랑 끝에 선 사나이"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새 출발"

잘 모르는 작가의 종말 이후를 그린 SF로 문명이 모두 사라진 뒤, 이전 문명의 기억을 지닌 자가 미개집단의 종교인과 충돌한다는 설정의 작품입니다. 

설정부터 많이 접해보았던 것으로 딱히 특별한 내용은 없네요. 종교인이 믿는 신의 존재가 식기세척기였다는 반전은 있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하여 뛰어나다고 하기 어렵고요. 한마디로 전체적으로 진부했어요. 시대가 너무 흐른 탓이겠죠. 별점은 2.5점입니다.

2007/05/27

킬러, 형사, 탐정클럽 - 외르크 폰 우트만 / 김수은 : 별점 2점

킬러, 형사, 탐정클럽
외르크 폰 우트만 지음, 김수은 옮김/열대림

제목과 내용은 크게 연관은 없습니다. 킬러와 형사, 탐정클럽이 주로 등장하는 책은 아니거든요. 총 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이 "다음날 아침 현장은 눈으로 덮였다 | 킬러와 형사" 이고 2장이 "셜록 홈즈에서 원초적 본능까지 | 픽션의 세계", 그리고 마지막이 "다행히 그녀의 머리는 일격에 떨어졌다 | 죄와 속죄" 편입니다. 

각 장 별로 여러가지 주제를 서술하는데 대체적으로는 살인과 수사, 재판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이디푸스 왕에서부터 O.J.심슨 사건에 이르기까지 살인사건을 둘러싼 오랜 과정을 서술하고 있으며, 역사적 사건 뿐 만 아니라 문학작품, 범죄 영화와 드라마 등 픽션의 세계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살인 사건을 비롯해 인류 최초의 증거 확보 수단인 고문, 경찰과 법의학자의 탄생과 발전, 여성 범죄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폭력범죄의 경우보다 비교할 수 없이 높은 것은 독살이라는 등 살인에 대한 다양한 탐색이 자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각 장마다의 구성이 애매하고 논지가 일정하지 않아서 보는데 좀 힘들었습니다. 1장은 살인 사건의 역사와 고문, 재판 등의 역사, 여러가지 사건들의 수사 과정 등 흥미진진한 요소가 많아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는데, 2장은 제목과는 다르게 현실과 픽션이 뒤섞여서 짜증이 났습니다. 차라리 사건들을 하나로 묶고 픽션을 따로 묶어서 편집하는 것이 훨씬 좋았을 텐데, 픽션과 실제 사건의 비중이 반반에다가 사건과 연관없는 픽션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라 왜 장을 나누었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3장 역시 주제가 흐릿하기는 마찬가지였고요. 또한 다른 책에서도 수도 없이 언급된 살인마 잭이나 리지 보든 사건 등에 대한 서술은 지루했습니다.

물론 아주 건질게 없는건 아닙니다. 여러가지 사건들에 대한 기록이나 역사에 대한 부분은 꽤 재미있었고 추리 매니아로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이 많아서 그런대로 수확은 있었어요. 예를 들자면 히치콕 영화 "로프"와 "프렌지"의 토대가 된 사건이나 걸작 도서 추리소설 "살의"의 오리지널 사건 등에 대한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대충대충의 정보만 알고 있었던 O.J 심슨 사건도 흥미진진했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정보와 자료 측면에서 추리나 살인사건 등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한번쯤 눈여겨 볼만하겠지만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콜린 월슨의 "잔혹" 에 비하면 양도 적고 디테일도 떨어지며 소설이나 영화같은 픽션에 대한 이야기는 비약이 심해서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네요.

2024/07/28

[번역] 돈돈 다리, 떨어졌다 (2). - 아야츠지 유키토

1. 돈돈 다리
곳은 일본, 혼슈의 어느 산속.
깊은 계곡이 있고, 거기에 긴 현수교가 걸려 있다. 계곡 바닥에는 '돈돈 강'이라는 이름의 강이 흐르고 있으며, 현수교는 '돈돈 다리'라고 불린다.
보기에도 오래된 다리이다.
길이는 20미터도 되지 않을 정도. 나무로 만든 도리를 로프로 매단 단순한 구조로, 강한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삐걱거림을 내며 흔들린다. 예를 들면, 영화 '인디아나 존스 2'의 클라이맥스에 나오는 다리를 떠올리면 된다. 다리 앞에는 '노후화로 인해 위험'이라고 쓰인 팻말이 서 있지만, 굳이 경고를 하지 않아도, 보통의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두세 걸음 내디디고 곧 돌아갈 것이다. 그 정도로 보기에도 위태로운 모습이다.
다리에서 계곡 바닥까지의 거리는 30미터는 될까. 계곡 양쪽은 거의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벽이다. 부서지기 쉬운 듯한 적갈색 바위 표면에는 발 디딜 곳도 없고, 덩굴조차 자라지 않는다.
무엇이든, 자일 같은 도구 없이 이 절벽을 오르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해 두겠다. 아니, '도구 없이'라는 조건도 여기서는 불필요할지 모른다. 설령 암벽 등반의 천재라 하더라도, 이 절벽을 정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나비나 새처럼 날개를 가진 것이 아니라면.

강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다리는 길을 남북으로 잇고 있다. 남쪽 길은 '돈돈 산'을 종주하는 능선길로 이어진다. 한편, 다리를 사이에 두고 북쪽에는 길이 없다. 곧바로 막다른 곳이 된다. 한 달 전에 일어난 대규모 산사태가 그 원인이었다. 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던 길이 십수 미터나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산속 깊은 곳이라 복구의 전망도 전혀 서지 않은 채, 오늘까지 계속 방치되어 있다. 막다른 길 앞에는 마치 계곡으로 돌출된 발코니처럼 약간의 지면이 남아 있지만, 이것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어떤 것에도 오르내릴 수 없는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자, 이제부터.
돈돈 다리 북쪽의 고립된 이 돌출 부위가, 본편의 '문제'의 초점이다. 즉 이곳이, 지금부터 서술할 어느 살인 사건의 범행 현장이 된다.

2. 린타로와 타케마루
돈돈 다리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을 한참 가다 보면, 동쪽으로 갈라지는 작은 길이 있다. 일반 등산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좁고 험난한 길이다. 가파른 산비탈을 기어 내려가다 보면, 길은 어느새 돈돈 강으로 흘러드는 지류 중 하나에 닿는다.

그날, 8월 1일 오후, 이 계류 옆에 한 남자와 한 마리의 개가 있었다. 남자는 스물여섯 살, 이름은 린타로였다. 개는 타케마루, 수컷 시바견이다.
린타로는 돈돈 산 기슭에 있는 '돈돈 마을' 출신으로, 지금은 고향을 떠나 혼자 도시에 살고 있다. 어느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했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1년이 채 안 되어 그만두었다. 현재의 직업은 "자유업"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는 여기서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린타로는 고민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도 여기서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설명하기 시작하면 몇 장을 써도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의 고민은 그만큼 복잡했다.
어쨌든 린타로는 고민하고 있었다. 고민에 지친 그는 당장의 일을 내팽개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몇 년 만의 귀향이었다. 부모님은 크게 환영해 주었고, 고등학생 때부터 키우던 사랑스러운 타케마루도 재회에 기뻐하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 린타로가 타케마루를 데리고 돈돈 산으로 향한 것은, 말하자면 최후의 결심이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곳에서 마음껏 고민해 보자고 결심한 한편, 최악의 경우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고민은 심각했다.

그들이 그 강가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를 조금 넘긴 때였다. 얼마 동안 흐린 날씨가 계속되었지만, 오늘은 화창했다.
그곳은 한때 린타로가 좋아하던 장소였다. 마을에서 상당히 걸어야 했지만, 고등학교 시절 여름 방학에는 사흘에 한 번 꼴로 찾아오곤 했다. '파이프 바위'라고 그가 마음대로 이름 붙인, 말 그대로 파이프처럼 생긴 길쭉한 큰 바위가 강 앞에 있었고, 이를 벤치 삼아 혼자 사색에 잠기는 것이 그 시절 그의 고독한 취미였다.
"오랜만이네, 여기 오는 것도."
옛날처럼 파이프 바위 끝에 앉아, 린타로는 발밑에 웅크리고 있는 타케마루에게 말했다.
"가끔 너도 데리고 왔었지. 기억나니?"
타케마루도 이제 만 열한 살, 사람으로 치면 환갑을 넘은 나이다. 오랜 시간 산길을 걸어와서인지, 지친 듯 혀를 길게 내밀고 눈도 뜨지 않았다.
린타로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고뇌로 가득한 그의 마음과는 반대로, 맑게 갠 여름 하늘은 한 점 흐림 없이 파랬다. 시선을 돌리면 나무들의 선명한 초록색이 눈에 들어왔다. 계곡을 스쳐 가는 시원한 바람이 땀에 젖은 피부에 상쾌하게 느껴졌다.
눈앞을 가로지르는 강물의 흐름이 유난히 거세었다. 엊그제까지 내리던 비 때문일 것이다. 평소보다 두 배나 강폭이 넓어지고, 물의 양도 늘었다. 실수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단번에 물살에 휩쓸려 버릴 것 같은 기세였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죽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며 린타로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타케마루는 간접흡연의 피해를 호소하듯, 꼬리로 땅을 두드리며 앞발로 얼굴을 문질렀다.
"좋겠다, 너는."
린타로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좋겠어. 아무런 고민도 없으니까."
타케마루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왈" 하고 대답했다. 린타로는 고민했다. 왜 여기서 타케마루가 "왈" 하고 짖는지, 그런 문제조차 그의 복잡하고 심각한 고민 속에 새롭게 포함되어 갔다.

이렇게 해서...
그 후 약 세 시간, 오후 4시가 넘을 때까지 그들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후에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3. M** 마을의 규율
린타로와 타케마루가 있는 파이프 바위 주변에서 길은 계곡에 스며들 듯, 끊겨버리는 듯 보인다. 그러나 강의 폭이 약간 좁아진 부분에 원목 다리(라고 해도, 쓰러진 나무가 우연히 양쪽 강둑을 연결한 자연의 다리다)가 놓여 있어, 이를 건너면 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길이 점점 더 가늘어지며 원시림이라고 부를 만한 깊은 숲 속으로 이어진다.
이 숲에는 산의 지리에 밝은 현지인들도 좀처럼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그것에는 약간의 이유가 있다. 사실 오래전, 이 깊은 곳으로 패망한 헤이케의 무사들이 도망쳐 들어왔다고 한다. 그들 중 한 명이 강력한 주술적 능력을 가진 자(영능자, 초능력자라고 생각하면 된다)였고, 추격자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특수한 결계를 만들었다. 그것이 지금도 부주의하게 접근하는 자들에게 재앙을 가져온다는 이야기가 근처 마을들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 기이한 패망 무사 전설의 진위 여부는 차치하고, 이 숲 속 깊은 곳에는 실제로 알려지지 않은 한 마을이 존재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가칭으로, 그것을 [M** 마을]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좋아, 얘들아."
포우는 둘러싼 작은 얼굴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했다.
"함부로 생명을 죽여서는 안 돼. 우리는 항상, 우리가 사는 이 산의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야 하니까. 뱀이든 토끼든, 아무 이유 없이 죽여서는 안 된다. 그것이 우리의 '규율'이다. 알겠느냐?"
포우는 M** 마을의 '장로'라 불러야 할 존재였다. 나이를 먹고 '장'의 자리를 젊은 엘러리에게 물려주었지만, 여전히 이곳에 머물며 모두에게 존경받고 있었다. 일단 권력을 내려놓은 자는 집단을 떠나는 것이 그들의 오래된 관습이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예외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땅에 털썩 주저앉은 채, 포우는 다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아이들은 그를 그의 흰 턱수염을 따서 '수염의 노사'라고 부른다.
"강을 건너, 능선을 넘은 저쪽 계곡으로는 절대로 가서는 안 된다. 그곳은 '더럽혀진 땅'이다. '금단의 계곡'이다. 사악한 마음을 가진 외지 사람들이 오는 곳이다. 그들과 교류하는 것, 이것도 역시 규율에 어긋나는 것이다."
"왜 그런 거예요, 포우?"
라고 질문하는 아이가 있었다. 루루우라는 이름의 작은 남자아이였다.
"그냥 그런 것이다."
포우는 단호히 대답했다.
"'더러움'은 '더러움', '금단'은 '금단'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악을 가져오는 것.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것. 그 증거로 어제 저녁, 금기를 어기고 그곳에 갔던 카가, 목숨을 잃을 뻔했다. 루루우,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아이들은 조용해졌다. 카는 루루우의 사촌이자 마을의 젊은 장 엘러리의 아들이다.
"좋아, 얘들아"
포우는 다시 엄하게 주의를 주었다. 큰 부상을 입고 지금도 위독한 상태가 계속되는 어린 생명을 생각하며, 작은 노인의 눈에 깊은 우수가 가득 차올랐다.


2008/10/21

프렌치 경감 최대사건 - 프리먼 윌스 크로포츠 / 김민영 : 별점 4점

프렌치 경감 최대사건 - 8점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 지음, 김민영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보석상 듀크 앤 피보디 상회의 지배인 게싱 노인이 살해되고, 금고에 보관 중이던 다이아몬드가 사라졌다. 2개의 금고 열쇠 중 하나는 은행에 또 하나는 사장 듀크씨가 늘 몸에 지니고 다니기 때문에 여벌열쇠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했다. 사건을 담당하게 된 프렌치 경감은 수사를 통해 하나씩 단서를 모아 범인을 추적하는데...

거장 F.W 크로포츠의 황금기 시절 걸작이자, 명탐정 프렌치 경감의 데뷰작이기도 한 고전 명작입니다. 엄밀하게 이야기한다면 명탐정이라기 보다는 명수사관이지만요. 어쨌건 알리바이 파헤치기의 명수로 유명한 프렌치 경감의 활약을 감상하는 것이 포인트인 작품입니다. 명성 만큼이나 꼼꼼하고 치밀한 수사가 펼쳐집니다. 추리와 직감보다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많은 인물의 협조를 얻어 정말로 발로 뛰며 수사하는 "일반인" 프렌치 경감의 모습은 천재형 명탐정이 대세였던 당시 황금기에 정말로 독특한 존재로 부각되었을 것 같더군요. 지금 읽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정말로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는 전개를 보여줍니다.

추리적으로도 완벽합니다. 등장하는 사건은 딱 하나라서 쉽게 풀릴 것 같은데, 가지치기 되면서 트릭이 다양하게 등장합니다. 덕분에 단순하지 않고, 읽으면 읽을 수록 큰 재미를 안겨다 줍니다. 알리바이 위장 트릭과 인간 소실 트릭, 누명 덮어씌우기에 바꿔치기 트릭, 거기에 암호 해독까지 등장하기 때문에 다채로운 트릭의 맛을 한껏 느낄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트릭은 인간 소실 및 바꿔치기 트릭인데 지금 읽으면 약간 진부하지만 굉장히 효과적으로 쓰였기에 지루하다는 느낌은 전혀 받을 수 없습니다. 암호트릭도 공들여 만들었을 뿐 아니라 독자에게 공정하게 단서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충분히 합격점을 줄 수 있는 수준이고요.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단서가 제공되는건 황금기 작품답게 아주 공평한데 그 때문인지 범인을 특정하기는 중반 이후에는 쉬워지기는 합니다. 그때부터는 범인이 누구인가? 보다는 범인의 추적에 이야기가 집중되며, 다른 트릭들이 연이어 등장하기에 별 문제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마지막 반전(?)의 맛이 좀 약해진 것과 약간의 우연으로 사건이 진전되는 부분은 아주 조금 아쉽긴 한데 어차피 경찰 수사망에 걸렸을 부분이라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고 말이죠.

전체적으로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묻어나는 것 역시 마음에 듭니다. 잔인한 강도 살인 사건을 다루는 작품치고는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넉넉한 편입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여정 미스터리로 보일만큼 당대 유럽의 명승지를 기차로, 배로 여행하며 수사하는 프렌치 경감의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한몫하고 있는 것 같네요. 끈질긴 추적자인 프렌치 경감의 모습 뒤에 왠지 모를 작가의 여유로움이 한껏 묻어나거든요. 프렌치 경감의 부인이 전해주는 단서 역시 재치가 넘치고 말이죠.

딱 한가지, "변장" 을 너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한 점이 감점 요소이긴 하지만 그에 관련된 배경 설명도 자세히 묘사하고 있어서 나름 납득되는 수준입니다.

황금기 고전의 향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정통 추리물이면서도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기에 추리소설 입문자에게 추천할 만한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5점을 줄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세월이 너무 많이 흐른 탓인지 약간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2012/08/16

세계 10대 추리소설 리스트 정리 (Brutus 397호 참고)

이런 리스트는 별로 신뢰하지 않지만 요청도 있었고 마침 자료가 있기에 몇 자 정리해서 올려봅니다. 일본 잡지 Brutus에서 전문가 대상으로 선정한 리스트 중심입니다. 90년대 후반 자료이니 과거의 리스트에 비하면 그래도 최신 작품이 몇 개 있긴 하지만, 대표작들은 역시 대동소이하네요.

*2007.3.19 첫 작성
*2012.08.16 링크 추가
*2014.08.01 링크 추가
*2020.02.01 링크 추가

오토 펜즐러 (유명 추리 평론가 및 전문서점 "미스테리어스 북 숍" 점주) 선정 All Time Best 10

  1. 윌키 콜린즈 "백의의 여자"
  2. "바스커빌가의 개" – 코넌 도일
  3. "상복의 랑데뷰" – 코넬 울리치
  4. 아이라 레빈 "죽음의 키스"
  5. "말타의 매" – 더쉴 해미트
  6. 로스 토마스 "대역전"
  7. "레베카" – 다프네 뒤 모리에
  8. 프레드릭 브라운 "이상한 나라의 살인"
  9. 토머스 해리스 "레드 드래곤"
  10. 애거서 크리스티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제이 퍼설 (미스테리 전문 서점 "세익스피어 & 컴퍼니" 원 바이어) 선정 All Time Best 10

  1. "기나긴 이별" – 레이몬드 챈들러
  2. "유리 열쇠" – 더쉴 해미트
  3.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 번 울린다" – 제임스 M 케인
  4. "셜록 홈즈의 모험" – 코넌 도일
  5. 제임스 크럼리 "안녕 달콤한 입술이여"
  6. 짐 톰슨 "Pop.1280"
  7. 죠너던 래티머 "Solomon's Vineyard"
  8. 로스 토머스 "대역전"
  9. 엘모어 레오나드 "Unknown Man #89"
  10. 토머스 페리 "도망친 킬러"

세계 10대 추리 소설 (히치콕 매거진 선정 / 동률 포함 총 12작품)

  1. "Y의 비극" – 엘러리 퀸
  2. "통" – F.W 크로프츠
  3. "비숍 살인사건" – 반 다인
  4. "그린 살인사건" – 반 다인
  5. 윌리엄 아이리쉬 "환상의 여인"
  6. 애거서 크리스티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7. "빨간머리 레드메인즈" – 이든 필포츠
  8. 가스통 르루 "노란방의 비밀"
  9. "기나긴 이별" – 레이몬드 챈들러
  10. "어둠 속의 목소리" – 이든 필포츠
  11. 애거서 크리스티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12. "바스커빌가의 개" – 코넌 도일

동서미스터리 베스트 100

2020/11/22

오리엔트 특급 열차를 타고 파리로 - 슈테판 마르틴 마이어 지음, 토어발트 슈팡겐베르크 그림 / 류동수 : 별점 2점

오리엔트 특급 열차를 타고 파리로 - 4점
슈테판 마르틴 마이어 지음, 토어발트 슈팡겐베르크 그림, 류동수 옮김/찰리북

오스만 제국의 소년 시난은 오리엔트 특급 열차를 타고 파리로 떠났다. 아버지와 함께 파리 만국 박람회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열차에서 시난은 정식 승무원을 꿈구는 주방 보조 피에르와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남작 부인이 회중 시계를 잃어버리고 피에르를 의심하기 시작하자, 시난은 피에르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3일 동안 시계를 찾기 위한 조사에 나서는데...

오리엔트 특급 열차로 오스만 제국에서 파리까지에 이르는 여정을 화려한 그림과 함께 보여주는 동화책입니다. 단순한 지도, 풍경 묘사 뿐 아니라 열차 구조라던가 증기 기관차의 원리 등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 관련된 여러가지 정보가 가득합니다. 또 실존했던 무기 거래상 바실 자하로프를 주요 인물로 등장시키고, 당시 불가리아 왕 페르디난트 1세가 열차를 모는걸 좋아했다던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후가 여행을 좋아해서 전용 객차가 있었다는 등 실제 역사를 이야기에 녹여내어 재미를 더합니다. 당시 유럽의 패권 구도라던가 신분 제도 등을 어린 아이들이 약간이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내는 전개도 좋았고요.

그러나 회중 시계는 단지 분실했던 것이고, 남작 부인은 오스만 제국 비밀 정보를 몰래 옮기던 첩자였다는 반전은 너무 급작스러웠습니다. 사악한 갑질로 일관하던 남작 부인이 사실은 사랑 때문에 위험한 첩자 역할을 수행한 사랑꾼이었다는 설정도 당황스러웠고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려면, 지금보다는 단서가 더 많이 제공되었어야 했습니다. 아울러 그림도 아주 빼어나다고 하기는 어려웠어요. 공들여 열심히 그리기는 했는데, 디테일이라던가 컬러 사용, 기본적인 뎃생력은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아동용 책을 어른 시각으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제 딸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더군요. '스칼라 월드 북스' 수준의 그림을 더해서 지금보다는 상세하게 이야기를 풀어냈어야 했습니다.

2025/06/15

처단 - 리 차일드 / 다니엘 J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잭 리처는 자신이 조회를 요청했던 차량의 주인을 추적하던 중, 미국 법무부 요원들과 접촉하게 된다. 리처는 차량의 주인이 10년 전 자신이 처단했던 자비에르 퀸이라고 확신하지만, 법무부는 그 차량이 벡이라는 마약상의 것이며, 벡의 저택에 잠입시킨 수사관 테레사가 실종되었다고 설명했다. 리처는 퀸이 살아있을 가능성을 직감하고 법무부와 손을 잡았다. 리처는 벡의 아들 리처드가 유괴당하는 것을 막는 척하며 작전을 수행해 벡의 집에 잠입하는데 성공했고, 점차 벡의 신임을 얻어가며 내부 조직원들을 하나씩 제거해갔다. 그 과정에서 벡이 사실은 퀸에게 협박당하고 있었으며, 퀸이 실세라는 사실을 알아 냈다. 

결국 정체가 드러난 리처를 퀸 일당이 공격했지만, 리처는 이들을 물리치고, 악당들의 무기 밀매 사실을 파악한 뒤 실종되었던 테레사까지 구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리처와 퀸의 최후 대면에서, 퀸이 벡을 인간 방패로 삼는 바람에 아버지를 구하려 나선 리처드의 개입으로 오히려 잭 리처는 궁지에 몰렸고,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이안류가 몰아치는 저택 앞바다로 몸을 던지고 마는데...

"처단"은 리 차일드의 잭 리처 시리즈 일곱 번째 작품으로, 원제는 Persuader입니다. 아마존 프라임의 시리즈인 잭 리처 시즌 3의 원작이고요. 드라마 원작이 되었다는게 수긍이 될 정도로 분량도 많고, 내용과 상황도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10년 전 잭 리처의 부하들을 죽였던 전직 장교 사건과 현재의 무기 밀매 조직 사건이 엮이고, 사건 해결을 위해 잭 리처가 악당 조직에 잠입하여 온갖 액션을 수행하는 덕분입니다. 

또한 시리즈 다른 작품들보다 추리적인 장면이 돋보입니다. 예를 들어, 벡의 가정부는 잠입 요원으로 퀸 일당에게 정체를 들켜 살해당했습니다. 리처는 법무부 요원 더피에게 문의했지만, 다른 요원은 파견한 적이 없다고 했고요. 리처는 벡이 지나치게 많은 총기를 보유하고 있고, 총기 지식이 상당하다는 점을 근거로 그가 마약상이 아니라 무기 밀매업자일 가능성을 떠올립니다. 이는 가정부는 법무부가 아니라 재무부 ATF(주류·담배·화기 및 폭발물 단속국)에서 보낸 요원이었다는 추리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벡 저택 통신이 금요일 저녁에 완전히 차단되었던 상황에 대한 추리도 인상적입니다. 리처는 일반적으로는 통신이 원활한 시간대에 모든 휴대폰, 유선전화, 인터넷이 동시에 끊겼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생각했고, 자신이 처리한 벡의 경호원들이 사라진 것을 숨기기 위해 더피가 일부러 통신망을 차단한 것이라고 추리합니다.
퀸 일당이 연미복과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고급 케이터링 서비스를 불렀다는 것도 사소하지만 괜찮았습니다. 리처는 이들이 파티를 열 예정이고, 양고기 메뉴를 통해 손님들이 중동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는걸 유추하거든요.
10년 전 사건에서 고로프스키가 군 감시 하에 있던 무기 설계도를 빼돌렸던 방법도 흥미로왔습니다. 리처는 그가 들고 있던 봉투는 주목을 끌기 위한 미끼이고, 실제 설계도는 신문에 숨겼을 것이라 추리하지요. 양키스 팬이 스포츠 면을 그냥 넘길리 없다는 사소한 단서에서 출발해서요. 도미니크가 퀸에게 살해당한 후, 리처는 퀸이 자신의 은신처로 돌아가 중요한 물건들을 챙길 것이라 예측하고 미리 그를 기다리는 장면도 기억에 남고요.
이처럼 단순하지만 논리적인 접근은 그동안 시리즈 작품에서는 강렬한 힘과 폭력에 밀려 간과되어 왔던 리처의 지적 능력을 한껏 드러내고, 적의 심리를 꿰뚫고 예측하는 능력이 힘과 폭력과 균형 있게 어우러지게 만들어서 매력을 더해줍니다.

물론,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인 특유의 강렬한 힘, 폭력,  액션은 여전히 중심축을 잡고 있습니다. 총격전, 잠입, 암살, 맨몸 격투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악당들을 제압해가는 과정은 펄프 픽션 장르의 미덕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작품에서는 잭 리처보다도 더 덩치가 큰 괴물 같은 상대 ‘폴리’와의 맨몸 격투가 압권입니다. 단순히 큰 덩치가 아니라,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과 힘의 싸움이 실제처럼 묘사되어서 몰입도가 상당했습니다.
* 드라마로 만든다면 클라이막스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아서 찾아보았는데, 실제로는 약간 실망스럽네요. 

등장하는 다양한 무기들도 눈길을 끕니다. 그 중에서도 M500 퍼스웨이더와 브레네케 매그넘 탄환은 시멘트 벽에 사람 크기의 구멍을 낼 수 있다고 하며, 실제로 적을 두 조각 내는걸로 묘사되는데, 이런 휴대용 총기가 실존한다는게 놀랍네요.

하지만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벡과 퀸의 관계가 다소 불명확합니다. 전체 분위기를 보면 벡은 아들 리처드가 유괴되어 학대받았던 탓에 퀸에게 종속된 듯 보이지만, 리처드는 학교를 다니며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고 벡도 듀크 등 개인 부하를 두고 있는 등 충분한 반격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 그가 아무런 저항 없이 퀸에게 휘둘리고, 아내가 농락당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본다는 설정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설정들도 비현실적인게 많아요. 벡의 저택부터 그러합니다. 출입구가 단 하나뿐이고, 도망칠 길이 막힌 구조인데, 이런 공간을 고의로 설계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단지 긴장감을 위해 배경을 비현실적으로 만든 느낌이 강합니다. 가족간의 애정이 거의 언급되지 않다가, 마지막에 리처드가 아버지를 구하겠다며 잭 리처를 공격하는 장면도 급작스럽고요.  

결말 부분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잭 리처가 퀸에게 일부러 반격 기회를 준 후, 바다로 스스로 몸을 던지고 기적적으로 생존하는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꽤 두뇌 싸움을 펼쳐보였기 때문에, 한 수 더 치밀한 계획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겁니다.
빌런 퀸의 최후 역시 싱겁습니다. 폴리와 싸운 직후에 거센 바다에서 겨우 생환한 탓에 리처도 기진맥진한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퀸은 단 한 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 안에서 리처에게 단숨에 제압당해서 죽고 맙니다. 이 정도 거물급 악역에게는 조금 더 극적인 종말이 주어졌어야 하지 않았나 싶네요.

잭 리처와 더피가 관계를 맺는 설정도 굳이 필요했을까 싶습니다. 시리즈 전통처럼 여성 캐릭터와의 로맨스를 넣은 셈이겠지만, 이 작품의 분위기에서는 오히려 감정 몰입을 방해하는 장치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화끈한 액션과 시리즈 특유의 묘미는 여전하지만, 설정의 허술함과 후반부 정리의 아쉬움은 약간의 흠으로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