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검색어 두뇌 배틀에 대한 글을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관련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두뇌 배틀에 대한 글을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관련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24/08/09

폭포의 밤 - 미치오 슈스케 / 김은모 : 별점 2.5점

폭포의 밤 - 6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청미래

<<아래 리뷰에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치오 슈스케의 연작 단편집. "절벽의 밤"에 이은, '안 된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수록작들은 독립적인 단편이지만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제 1장 "묘진 폭포에서 소원을 빌어서는 안 된다"에서 벌어진 여고생 히리카 실종 사건은 마지막 제 4장 "소원 비는 목소리를 연결해서는 안 된다"와 곧바로 이어집니다. 4장에서 히리카의 사체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 3장 "그 영상을 조사해서는 안 된다"의 진상이 밝혀집니다. 3장에서 지기는 자신을 학대하던 아들 다카시를 살해한 뒤, 사체를 요메가 숲에 묻은 것처럼 경찰을 속인 것으로 설명되었습니다. 사실은 자기 집 바닥에 사체를 숨겼지만요. 하지만 집 바닥에 사체를 묻으려다가 오히려 히리카의 사체를 발견했던겁니다. 다카시가 히리카를 살해하고 은닉했던 것이지요. 지기는 히리카의 사체를 요메가 숲에 암매장하였습니다. 다카시 사체를 요메가 숲에 묻은 척 했던 건 경찰을 속이려는게 아니라, 히리카의 사체를 찾게 만들어서 히리카 부모에게 진상을 알려주려던 마음이었고요. 

다만 2장 "머리 없는 남자를 구해서는 안 된다"는 독립적인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1장에서 살아난 것처럼 보였던 모모카가 살해당했다는게 밝혀지기는 하지만, 그 목적보다는 2장의 주인공인 초등학생 신을 4장에서 활약시켜 경찰에게 히리카 사건 진상을 알게 하도록 만든 목적이 더 큽니다. 전개에 필수적인 징검다리 역할인 셈이지요.
 
이렇게 사건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미고오리 시와 묘진 폭포, 가쿠레이 산과 등산로, 무쿠로 다리, 고코 강, 요메가 숲 등 시의 주요 장소들을 무대로 사건이 일어나고, 묘진 폭포에 소원을 비는 행위가 진상으로 이어지며, 서로 다른 사건들이지만 수사를 맡은건 모두 구마지마 형사라는 식으로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절벽의 밤"과 같은 시리즈답게 '사진'을 이용하여 진상을 드러내는 장치도 삽입되어 있으며, 추리적으로도 괜찮았습니다. 1장에서는 시점과 상황을 속이는 서술 트릭이 사용되었으며, 3장은 일부러 시간 제한이 있는 블랙박스 메모리를 남기는 아이디어가 괜찮았어요. 4장은 다카시의 폭주와 히리카 실종 시점의 일치, 히리카 핸드폰이 잠깐 켜졌던 이유 등에 대한 진상이 설득력있게 밝혀지고요.

각 단편별로 조금 더 내용과 의견을 덧붙이자면,
1장은 제일 처집니다. 모모카가 언니 히리카의 행방을 우연히 발견한 부계정 SNS를 통해 추리해내는건 볼만 합니다만 그 외 전개는 다소 식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산장 관리인 오쓰키가 냉동고 안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고, 오쓰키 어머니는 실종된게 아니라 아버지가 살해했다는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서 흥미를 반감시킵니다. 그렇다면 이를 눈치챈 모모카에게 위험이 닥치는 서스펜스라도 잘 표현했어야 하는데 이 역시 좋지 못합니다. 오쓰키 캐릭터를 잘 표현하지 못한 탓입니다. 아버지가 죽여 은닉한 모친의 사체를 모모카가 발견했다고 그녀를 바로 살해할만한 인물로 보이지는 않았어요. 그 외 단서들 - 오쓰키가 만든 눈인형, 모모카가 입고있던 옷 사진 - 도 평면적입니다. 무엇보다도 사진이 없으면 진상을 완전히 알아내기 어렵다는 단점이 큽니다. "절벽의 밤"에서도 마음에 들지 않았었던, 장난같이 여겨지는 장치라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오쓰키를 뻔하더라도 전형적인 단순한 '산장 살인마'로 그리고, 사진의 역할은 배제하는게 서스펜스 스릴러로는 더 나은 선택이었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장은 신의 삼촌이 은둔형 외톨이가 된게 어린 시절 물놀이 사고에서 아버지를 죽게 만든 트라우마라는게 드러나는 일상계에 가까운 소품입니다. 다소 무서운 진상 - 삼촌이 자살하고 말았다는 - 을 사진으로 보여주어서 단점이라 할 수 있는데, 앞서 말했듯 주요 사건과는 관계가 없어서 다행입니다. 사진을 빼고 이야기를 마무리했더라면 더 완성도 높은 단편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3장은 지기 씨가 아들을 살해했다며 자수했지만 사체가 발견되지 않아 풀려나고, 이는 지기 씨 부부가 의도했던(?) 완전 범죄였다는 범죄물입니다. 경찰과 범죄자의 두뇌 배틀물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지기 씨가 '딱 한 가지 했다는 거짓말'을 형사 구마지마가 알아채고, 이를 통해 다카시의 사체를 찾아내려 하지만 이도 지기 씨의 계획이었다는 전개이니까요. 이야기는 흥미롭고 결말도 깔끔합니다. 다른 작품과의 연결없이 단독으로 읽어도 기승전결이 완벽하다는 점도 마음에 들고요. 다만 딱 한 가지, 정황 증거와 자백까지 있는데 시체가 없다고 용의자를 풀어주는건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감점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4장은 1장의 히리카 사건, 3장의 다카시 사건이 한데 이어져 대단원에 이르는 내용입니다.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앞에서 설명드린 그대로입니다. 특별한 추리없이 지기 씨의 아내 지에코의 회상으로만 진상이 밝혀져서, 흥미롭지만 추리적인 맛과 정교함이 부족한게 아쉬웠습니다. 신이 지에코를 구한 뒤, 히리카 사건의 핵심 열쇠가 되는 핸드폰을 가져다 주는 결말은 앞서의 복선 - 빌린 물건은 제대로 된 상태로 돌려줘야 한다 - 로 설명되는 등 정교한 느낌을 주기 위해 노력한건 좋아요. 하지만 신과 지에코가 엮이는 과정은 작위적이고, 목소리를 잃은 신이 할머니를 구하기 위해 다시 말문이 트였다는건 유치하기까지 합니다. 별로 고민한 느낌을 주지 못해요. 이런 무리수를 두는 것 보다는 구마지마 형사의 추리와 활약으로 해결하는게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등장인물들이 폭포에 빈 소원은 모두 이루어졌지만 그 대신 모모카, 히리카 자매가 모두 죽었다는 결말도 안타까왔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이렇게 해서 전체적인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평이하지만 "절벽의 밤"보다는 좋았어요. "절벽의 밤"은 '사진'을 사용한 실험이 지나쳤는데, 여기서는 이야기 자체에 중심을 두고 있는 덕분입니다. 시리즈 1작은 평균 이하, 2작은 평균 수준은 돼니 3작은 기대해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2024/07/07

이브의 대관람차 - 유우야 토시오 / 김진환 : 별점 1.5점

이브의 대관람차 - 4점
유우야 토시오 지음, 김진환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전직 경찰관 나카야마 히데오는 이혼 후 전처가 키우던 딸 린과 오랫만에 만났다. 화제가 되고 있는 대관람차인 '드림아이' 탑승권이 당첨되어 함께 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드림아이는 '난장이'라는 괴한에게 통제권을 탈취당했고, 탑승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난장이는 나카야마에게 자신의 요구사항을 경찰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나카야마는 드림아이 테러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경시청 수사 1과 형사 카이자키와 연락을 시작했다. 사실 나카야마와 카이자키는 경찰학교 동기이자 5년 전 후카 살인 사건으로 멀어진 사이였다.
곤돌라가 연이어 떨어지고, 범인의 8엔억 요구 등으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지면 결국 드림아이 통제권을 회수하여 남은 승객들을 구출하고 범인을 체포했다. 범인은 5년 전 후카 살인 사건 때문에 이 테러 사건을 계획했었다....


일본 신인 작가의 데뷰작품. 버티고 레이블에서 일본 작품으로 소개되는 첫 번째 작품이라 호기심을 자아내어 읽게 되었습니다. 

천재적(?)인 범인이 장교하게 설계한 범죄에 맞서, 탐정역의 주인공이 여러 사람의 생명을 걸고 게임을 벌인다는 점에서, 두뇌 배틀 장르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장르물이 성공하려면, 범인의 도전적인 계획과 이를 막기 위한 주인공의 두뇌 싸움이 탄탄하게 연결돼야 합니다. 또한 범인의 동기가 명확하게 설명되어야 하며,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내는 과정도 타당성 있어야 하고요. 마지막으로 범인이 그런 행동을 취한 이유도 제대로 밝혀져야 합니다. 영화 "스피드"를 보자면 범인은 버스 속도계와 연동된 폭탄으로 거액을 요구합니다. 구출 시도는 CCTV로 감시하며 대응하고요. 범인의 정체는 FBI 수사로 나름 그럴듯하게 밝혀집니다. 동기도 마찬가지지요.

그러나 이 작품에서 이런 요소들은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드림아이의 장악과 곤돌라를 떨어트린 범행부터 설득력이 전혀 없습니다. 드림아이의 제어권을 아르바이트생이 훔친 카드키 입력만으로 빼앗을 수 있는 점부터 이상합니다. 이런 시스템은 일반적으로 복수의 관리자에 의해 보호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곤돌라를 어떻게 떨어트렸는지, 통신망에 어떻게 장애를 일으켰는지 등에 대한 설명도 전무합니다. 범인 중 한 명인 타키구치가 공대생이라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범인들의 몸값 요구도 매우 이상합니다. 후카가 죽은건 제국부동산 비자금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범인 카나모리가 체포되지 않은건, 제국부동산으로부터 돈을 받은 카이자키가 증거 인멸을 하며 그를 보호한 결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범인들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진범이 카나모리라는걸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설명이 없고요. 만약  이들 모두를 알고 있다면, 대관람차로 다른 피해자들을 불러모을 까닭도 없습니다. 핵심 원흉과 범인에게는 손도 대지 않고 단순 방관자들에게만 지옥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요.
또 범인들이 제국부동산의 비자금을 폭로할 이유, 비자금 관리자 미야우치를 살해할 이유도 없습니다. 미야우치는 후카 사건과는 정말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무고한 인물이었으니까요. 범인들은 그냥 무작정 살인을 저질렀다는건데,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비자금 위치를 어떻게 알아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고요.
조부모와 언니가 동생의 죽음으로 이런 거대한 테러를 벌인다는 것도 설득력이 낮고, 조부모가 언니를 끌어들인 이유도 전혀 와 닿지 않습니다. 죽은 손녀를 위한 복수로 산 손녀를 살인범으로 만든다는게 말이 될리가 없잖아요?

카이자키가 후카 사건에서 정액이라는 명확한 증거를 남겼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증거를 인멸하려면 시신을 불태워버렸어야죠. 어설픈 처리로 시간만 낭비한데다가, 제국 부동산 비자금을 맡았던 카츠라기가 누명을 쓰고 죽게 만들었고, 카츠라기가 나카야마에게 했던 증언으로 꼬리마저 밟히게 되었으니까요. 이런 허술함은 작 중 냉정하고 뱀같이 묘사되는 카이자키 분위기와도 맞지 않습니다.
후카 살인 사건의 진범이 카나모리라는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앞서 아무런 단서를 제공해주지 않는 탓입니다. 너무 뜬금없어서 황당할 지경이었어요.

다른 설정과 전개도 이해가 되지 않는게 많습니다. 나카야마가 카츠라기의 증언을 숨기고 경찰을 떠나고 이혼까지 했다는 과거가 대표적입니다. 나카야마가 의심을 받아서 그만 두었나? 그런 설명은 없습니다. 약간 수상하다는 것만 묘사될 뿐입니다. 별도의 조사나 수사도 받지 않았고요. 내사를 받은건 후카 사건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면 카이지키를 범인이라고 고발해서 경찰 내 공공의 적이 되었나? 아닙니다. 카이자키는 용의선상에 오른 적도 없습니다. 나카야마가 당시 카이자키를 봤을 때 몸이 젖어 있었다(긴 시간 동안 증거를 인멸하느라)는 정도로는 고발도 불가능했을테고요. 
관할 내 친했던 소녀가 무참히 살해당한 사건에 가책을 느껴 경찰을 그만 두었다는 정도가 말이 되는 설명인데, 이 정도로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이혼까지 하는건 말이 안되지요. 카이자키가 지속적으로 나카야마를 범인으로 몰고 있었다면 모르겠지만요.
나카야마가 사건을 미리 예지한다던가, 편집증같이 계획을 짜는데 몰입한다는 등의 설정도 호기심을 자아내지만, 이야기와는 별 관계가 없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이름이 '나카야마 히데오'라는게 좀 재미있었던 정도입니다. 요코야마 히데오에서 따왔겠지요?

괜찮은 부분이 없는건 아닙니다. 대관람차를 탈취한다는 설정은 꽤 기발했고, 놀이공원을 찾은 손님들이 관객이 되어 피해자들을 바라보게 한 이유가 동기와 연결되는 - 후카를 방조한 피해자들 - 건 괜찮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범인 난쟁이가 드림아이 곤돌라 중 하나에 탑승했다는걸 밝혀내는건 좋았어요. 곤돌라 승객들은 핸드폰을 버리게 한 탓에 현재 시간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시계탑 시계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난쟁이가 정해진 시간보다 전화를 늦게 걸어서 위치가 탄로나게 됩니다. 경찰이 시계탑 시계를 늦춰 놓있기 때문입니다. 범인 시계가 망가진 이유도 복선으로 제시해 주고 있고요.

그러나 좋은 점수를 주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합니다. 인기있을만한 소재만 잔뜩 끌어와서 어설프게 조립한 치기어린 결과물에 불과합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2/09/24

앨리스 살인게임 - 가코야 게이이치 / 김현화 : 별점 2점

앨리스 살인게임 - 4점
가코야 게이이치 지음, 김현화 옮김/㈜소미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61년, 식량 부족으로 파국을 맞은 지구, 하루는 돈을 벌기 위해 VR로 가상 현실 세계 '앨리스'에 접속했다가 정체불명의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그녀 때문에 로그 아웃도, 다른 곳으로 이동도 불가능하며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는 시스템 컨트롤 불가 영역으로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피노키오'라고 불리우는 이 새로운 공간에서, 가이드를 따라 목숨을 걸고 '빨간 새우의 집'에 도착한 하루는, 자기와 같이 끌려온 다른 생존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생존자들이 죽을 때마다 집의 잠겨진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그들은 마지막 생존자가 되기 위해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이게 되는데...

가상 공간을 무대로 한 액션 스릴러입니다. '피노키오'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는 '푸른 머리의 소녀'는 누구인지?에 대한 수수께끼 풀이도 있어서 약간의 추리물적인 성향도 갖추고 있고요.
액션 스릴러적인 성향은 "빨간 새우의 집"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강을 건널 때 그 편린을 살짝 보여준 뒤, 빨간 새우의 집 안에서 생존자들이 목숨을 건 생존 게임을 벌이면서 절정에 달합니다. 하루가 LK와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클라이막스고요. 여기서 가상 현실을 잘 이용한 두뇌 게임은 상당한 볼거리였습니다. 하루가 시스템 내에서 아바타 외모를 다른 사람처럼 바꿀 수 있다는 걸 알아내고 시체를 자기로 위장시킨다던가, 공간에 자기처럼 보이는 영상을 투영한 뒤 급습한다는 식인데 꽤 그럴듯했거든요.
가상 공간 피노키오에 대한 진상도 신선했습니다. 앨리스 시스템 내의 다른 공간이 아니라, 앨리스에서 접속할 수 있는 또다른 가상 공간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현실에서 앨리스에 접속했을 뿐인 하루 등은 어떻게 피노키오에 접속할 수 있었나? 라는 수수께끼가 새로 불거지는데, 이는 하루가 앨리스 내에서 활동하는 인공지능이었다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즉, 하루는 현실에서 앨리스에 접속한게 아니라, 앨리스에서 피노키오에 접속했었던 겁니다. '푸른 머리의 소녀'는 하루를 만들어낸, 진짜 현실의 인공지능 연구자였고요. 앨리스 안에서 인공지능을 만들어냈던건 현실 세계에서 대파국 이후 인구가 급속도로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대신해 앨리스 안에서 생활할 인공지능이 필요했다는 거지요.
이렇게 인공지능을 만들어 내려 했던 이유는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야기의 개연성이 터무니없다는 점입니다. 극한의 상황에 밀어 넣지 않으면 본성을 알 수 없어서 다양한 프로토타입을 특정 공간에 가두었다는 발상부터가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이런다고 인간의 본성이 드러날까요? 설령 그렇다쳐도, 구태여 <<피노키오의 모험>>에서 불필요한 설정들을 따 오면서, 이상한 공간에서 생존 게임을 벌이게 할 이유는 없습니다. 생존 게임으로 알 수 있는건 가장 싸움을 잘하고 강한 인공지능이 누구인지일 뿐이니까요. 극한 상황이 필요했다면 앨리스 시스템 내의 문제로 시스템 컨트롤을 할 수 없는 특정 클러스터 - 현실의 무인도같은 - 에 갇히게 되었다는 설정으로 충분했을 겁니다. 생존자들에게 '푸른 머리의 소녀'라는 수수께끼를 던져준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추리력은 인간 본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피노키오'를 가져다 붙인 것도 억지스럽고요.
생존 게임도 앞서 소개했던 배틀 자체는 그럴싸하지만, 설정은 진부합니다. 전형적인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들과 별로 다른 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묵한 전사, 쎈 언니, 이해심 높은 조력자, 양아치 (?) 등 등장 인물들도 진부한데다가, 설정상 오류가 크게 느껴집니다. 이 등장 인물들은 모두 앨리스 내부에서 활동할 인공지능이라는 설정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평범한 인물들이었어야 했습니다. 문신충 앗슈라던가, 사교성없고 폭력적인 LK는 인공지능 프로토타입으로는 지극히 비상식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테스트를 반복해서 하루에게 부담이 걸렸다고 하는데, 이게 과연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시스템 설계를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초기화 후 업데이트된 버젼으로 테스트했다면 이전 히스토리를 알 수 없는게 당연할텐데요. 찬호께이의 <<S.T.E.P>>에서의 시뮬레이션처럼, 각 테스트는 모두 독립적으로 수행되는 결과라는 설정이 더 이치에 맞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 좋았던 아이디어와 설정에 기묘한 생존 게임을 더해서 이야기가 산으로 가 버린 작품입니다. 아이디어를 잘 살렸다면 더 좋은 작품이 되었을 것 같은데 많이 아쉽습니다.

2022/02/13

인외 서커스 - 고바야시 야스미 / 민경욱 : 별점 2.5점

인외 서커스 - 6점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하빌리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커스단 마술사 란도와 동료들은 급작스럽게 흡혈귀들의 습격을 당하고 말았다. 흡혈귀들이 그들을 흡혈귀 사냥 조직 컨소시움이 위장한 서커스단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흡혈귀들은 인간을 훌쩍 뛰어넘는 능력을 갖추었지만, 아크로바틱 곡예사 기프티와 비스트리 남매, 화살 묘기를 부리는 궁사 슈티, 동물 조련사 레이라, 공중 그네 묘기를 펼치는 리지와 진 컴비, 오토바이 곡예사 쿠와이, 마술사 란도와 조수 아야미, 그리고 피에로 단장까지 10명의 단원들은 그대로 물러서지 않고, 그리즐리가 이끄는 다수의 흡혈귀들과 자기들의 기술을 이용하여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데...

고바야시 야스미의 중편 액션 호러 스릴러입니다. "기억파단자"처럼 능력자들끼리의 배틀을 다룬 배틀물이라고 할 수 있데, 한 쪽이 굉장히 불리하다는게 특징입니다. 흡혈귀들은 뇌나 심장이 파괴되지 않으면 어떤 상처를 입어도 재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두에서 컨소시움 군대 수십 명이 강력한 중화기로 무장하고도 흡혈귀 퀸 비 일당 세 명을 모두 쓰러트리지 못하는 묘사가 등장해서, 읽으면서도 서커스 단원들에게 과연 승산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단원들이 각자의 능력을 펼쳐보이는 것에 더해, 그들에게 유리한 서커스 무대 장치 등을 활용하여 승리하는 과정이 설득력있게 그려진 덕분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처럼 쓸데없는 설정을 부여하지 않고, 단순 화끈하게 풀어나가는 전개도 매력적이었고요.

특히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란도의 활약이 대단합니다. 슈티가 죽어가면서 쏜 화살에 흡혈귀 위젤이 맞고 죽은 것을 통해 흡혈귀들이 심장이나 뇌가 파괴되면 죽는다는걸 깨닫고, 자신이 직접 만든 탈출 마술 장치를 이용하여 그리즐리를 없애는데 성공하니까요. 잠깐 관에 갖혔던 그리즐리가 나오는 틈에, 귀로 화살을 쏴서 죽였던 거지요. 진짜 최종 보스 미티아 역시 이 마술 장치로 발을 붙잡은 뒤 공격해서 죽일 수 있었고요. 단순 무식한 배틀이 아니라, 마술 장치 등의 복선도 활용한, 잘 짜여진 두뇌 싸움이라는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조련사 레이라와 키리피시의 대결도 볼 만 합니다. 사자와 호랑이와 함께 공격하면서 키리피시의 눈길을 끌고, 그 틈에 코끼리 점보를 탄 단장이 뒤에서 키리피시를 밟아 없앨 수 있었다는건데 상당히 설득력이 높습니다. 상대방의 헛점을 이용하여 예상치 못했던 일격을 날렸다는 점, 그리고 코끼리 점보의 존재를 계속 독자들에게는 알려주었다는 점에서 공정한 두뇌 싸움의 좋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지와 진이 공중 곡예로 캐터피라를 날려버리고, 쿠와이가 이 틈에 오토바이를 추돌시켜 불을 붙인 싸움은 그리 정교하지는 않았지만 흥미롭기는 하고요. 오토바이 공격이 아니라 휘발유를 부어버리는게 진짜 핵심이었다는건 괜찮은 발상이었어요. 뛰어난 곡예사이지만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기에 기프티처럼 끔찍한 최후를 맞는 피해자가 나오는 것도 이야기에 설득력을 더해 줍니다.

문제는 다소 뜬금없던 두 개의 설정입니다. 첫 번째는 숲 속에 홀로 산다는 여행객 도쿠 할아버지입니다. 할아버지의 활약으로 캐터피라와 토타스를 없앨 수 있었지만, '산 속에 혼자 사는 무림 고수 은거 노인' 캐릭터는 너무 진부한 설정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토타스가 문으로 습격할걸 예측하여 문에 낚싯줄을 걸어 두었다는 것에 대한 설명도 부족해요. 토타스는 할아버지가 뭐 하는지 뻔히 보고 있던 상황이라서, 이렇게 쉽게 함정에 걸린다는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슈티가 흡혈귀 중 최강자인 미티아였다는게 밝혀지는 일종의 반전 부분입니다. 흡혈귀들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리즐리 패거리에게 인간에게 패배했다는 망신을 주기 위해 이런 음모를 꾸몄다는 것부터 영 와 닿지 않았어요. 오랜 시간 동안 서커스에서 일해가며 안배한 계획으로 보기에는 여러모로 허술했을 뿐더러, 최초 계획대로 그리즐리 패거리에게 망신을 주는 선에서 끝냈어야 했습니다. 미티아 스스로 모레노와 위젤을 죽인건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아요. 이렇게 죽일 거였다면 미티아가 직접 그리즐리 패거리를 찾아갔을 때 싹 죽이는게 나았겠지요. 슈티가 한 말 실수에서 란도가 슈티의 정체를 눈치챈다는 것 역시 조금 억지스러웠고요. 기프티가 흡혈귀가 되어 버렸다는 에필로그도 조금 애매했습니다. 이런 여지는 구태여 남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적절한 분량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킬링타임용 읽을거리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전형적인 일본 배틀물 만화를 글로 옮겨 쓴 느낌인데, 만화 버젼이 있다면 한 번 보고 싶네요.

2021/10/16

오징어 게임 (2021) - 황동혁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마 다 보셨겠지만

전 세계를 강타한 대 흥행작. 얼마전 감상했습니다.

사실 이런 류의 설정은 서브 컬쳐, 장르 문학 애호가들에게는 친숙합니다. 여러 사람이 갇힌 공간에서 거액이 걸린 게임을 펼친다는건 제가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라고 이름 붙인 장르물에 흔하게 있으니까요. 대표적인건 "도박묵시록 카이지", "라이어 게임", "살해하는 운명 카드" 등이 있습니다. 김전일도 "게임관 살인사건"이라는 희대의 망작으로 이 장르에 뛰어들었던 적이 있을 정도로 한때 크게 유행했었지요. 내용, 설정도 게임에서 패할 경우 죽느냐, 거액의 빚을 떠 앉느냐 정도의 차이일 뿐 대체로 비슷했고요.

그러나 이 작품은 456명의 참가자라는 거대한 스케일, 그리고 이해하기 쉬운, 친숙한 게임을 게임에 사용했다는 아이디어가 돋보였습니다. "마작"을 가지고 목숨을 건 배틀을 벌인다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움직이면 죽는다는건 전 세계 누구나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달고나에서 모양 뜯어내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게임이 초반 탈락자들을 다수 발생시키는데 유리했을 거라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싶어요. 

그리고 보통 이런 장르물은 게임을 벌이는 주최측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는데, 이 작품은 경찰이 잠입해서 나름 배경과 진상에 대해, 그리고 게임을 이끄는 프론트맨의 정체를 밝혀내는 등의 활약을 펼치고, 진짜 마지막에서 흑막의 일단락을 드러내 주는데 나름 괜찮았습니다. 

또 캐릭터별 서사와 게임이 시작된 후, 한 번 사회로 돌아가는 설정이 좋았습니다. 이를 통해 참가자들 모두 지옥에서 살고 있으며, 오징어 게임에 참가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걸 보여주어서 게임에 참가하는 것에 대한 설득력을 높여주거든요. 동네 친구였던 상우가 최종 보스급 악역으로 진화하는 과정도 잘 그려졌으며 장덕수, 한미녀 같은 조역들도 설정은 뻔했지만 좋은 연기력 덕분에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반면 두뇌가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는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대부분 운과 체력에 의존하는 게임이었던 탓입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첫 게임으로 패닉을 일으켜 많은 사람을 탈락시키기 위한 의도였겠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게임 중 달고나 뽑기와 유리 다리 건너기는 명백히 운이 중요했고, 줄다리기는 당연히 체력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그나마 두뇌가 개입할 여지가 있던건 구슬 따먹기가 전부였습니다. 상우가 알리를 등쳐먹는 걸로 잘 보여주고 있지요. 여기서는 기훈과 일남의 서사가 더 중요해서 묻혀버리고 말았지만... 

그래서 마지막 기훈과 상우가 오징어 게임으로 펼치는 결승전에서 기훈이 동네에서 제일 유명했던 천재 상우에게 두뇌로 한 방 먹이는 장면을 기대했는데, 처절한 아재들의 몸싸움이 전부라 실망스러웠습니다. 상우의 자살도 허무했고요. 

누군가를 이겨서 죽게 만들어야 살아남는 게임이라는 기본 원칙 그대로 전개와 결말을 가져갈 필요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 주최측 의도를 나름대로 농락하는 전개였다면 두뇌 싸움 느낌도 나고 좋았을텐데요. 예를 들어 '유리 다리 건너기'는 옷으로 끈을 만드는 식으로 협력이 충분히 가능했지요. "도박묵시록 카이지" 에서 카이지는 게임의 헛점을 잘 이용해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게끔 도와주었는데, 이런 점에서는 카이지의 초반부 몇 에피소드들이 더 나아 보였습니다. 하긴, 카이지 초반부 몇 에피소드는 이쪽 장르에서는 길이 남을 희대의 걸작이라 단순 비교는 좀 어렵겠지만요. 

마지막으로, 에필로그도 너무 길었으며, 후속 시즌을 노리는 느낌이 강해서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주최측이 원하지 않는 한, 기훈이 다시 게임에 참가할 방법은 애초에 없잖아요?

이렇게 아쉬움이 없는건 아니지만, 재미 측면에서는 두말할 나위 없었습니다. 이런 류의 장르물로 볼 때 우수한 편이에요. 별점은 3점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 만한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의 대박을 계기로 앞으로 우리나라 장르물이 더 활발히 제작되고 확산되면 좋겠네요.

2021/08/06

FoP 소설 : 산책하는 침략자 - 마에카와 도모히로 / 이홍이 : 별점 2점

FoP 소설 : 산책하는 침략자 - 4점
마에카와 도모히로 지음, 이홍이 옮김, 최재훈 그래픽/알마

축제에서 금붕어를 손에 넣은 할머니가 아들 부부를 살해하고 본인 몸도 난자하여 자살했다. 유일한 생존자이자 목격자인 손녀 아키라는 심한 충격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 사건 취재 차 마을을 찾은 르포 기자 사쿠라이는 자기가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고교생 아마노를 만났고, 취재를 위해 서로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한편, 나루미는 남편 신지가 축제에 갔다가 금붕어 하나를 가진 채 병원에 입원한 뒤, 신지가 이전 남편과 전혀 다른 무엇이라는걸 알아챘다.

사람들로부터 '개념'을 빼앗는 외계인인 아마노와 아키라가 만나서 지구 정복을 계획하고, 이를 막기 위해 사쿠라이는 나루미, 신지와 함께 도망친다. 신지는 나루미로부터 '사랑'이라는 개념을 빼앗게 되는데...

연극과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마에카와 도모히로의 SF 소설로 별다른 정보없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도입부는 정말 대박입니다. 정확하게는 할머니가 축제에서 낚은 금붕어를 집에서 '회'라고 하면서 산 채로 잡아 먹고, 그 다음날 아들 부부를 살해하고 자살하는 장면까지요. 굉장히 짧은 분량 속에서 공포심과 흥미를 모두 불러 일으킨 덕분입니다. 

중반부까지도 그런대로 재미있습니다. 이른바 '외계인'들이 선보이는 독특한 능력 덕입니다. 외계인들은 대화하는 상대방이 특정한 단어의 이미지를 머릿 속에 떠올리면, 그걸 빼앗아 올 수 있습니다. 빼앗긴 사람은 그게 뭔지를 잊어 버리게 되고요. '개념'을 수집한다는 목적을 위해서인데, 이를 통해서 여러가지 해프닝이 벌어지게 됩니다. 나루미의 동생 아스미로부터 신지가 '가족' 이라는 개념을 빼앗아 온 뒤, 아스미가 가족에 대해 모든걸 잊고 아빠를 변태로 생각해서 경찰에 신고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중반 이후 결말까지는 완전 별로였습니다. 외계인의 지구 침략 계획을 막기 위한 르포 기자 사쿠라이의 노력이 그려지는데, 하는건 외계인 아마노가 외계인 아카리를 만난 뒤 도망친게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밖에 하는 일들 거의 모두가 즉흥적이라 치밀한 느낌은 전무합니다. 제법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제대로 된 설명도 부족합니다. 신지를 다른 두 외계인과 못 만나도록 막기 위해 노력하지만, 외계인들이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설명되지 않는 것 처럼요. 

이야기의 다른 한 축인 나루미와 신지 이야기는 잔잔한 사랑 이야기일 뿐이라 지루합니다. 사랑 이야기가 나쁜건 아닙니다. 저도 아주 좋아하고요. 하지만 나루미에게서 '사랑' 이라는 개념을 빼앗은 신지가 새롭게 태어나서, 나루미를 위해 살아갈 결심을 하는 마지막 장면이 너무 황당해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잔혹한 외계인이 등장하는 이야기 결말이 "사랑이 지구를 구한다"라니, 독서에 들인 시간이 아까울 정도입니다.

핵심 설정인 "개념 빼앗기"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묘사되는 것도 이상했습니다. 앞서 아스미는 "가족" 이라는 개념을 빼앗긴 뒤, 가족을 아예 기억하지 못했지요. 의사는 아예 폐인이 되어 버렸고요. 하지만 신지에 대한 "사랑"을 빼앗긴 나루미는 멀쩡한 채로 신지를 그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건 전개를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을 바꾼, 편의적 발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볼 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결론적으로는 수준 이하였습니다. 차라리 "기생수"처럼 개념을 빼앗는 외계인들의 냉혹한 행각을 자세하게 보여주는 전개가 더 나았을거에요. 선한 마음을 가진 신지와 개념 빼앗기에 골몰하는 아마노, 아키라의 행각을 대비시키면서요. "개념" 빼앗기는 "죠죠" 시리즈에 등장했던 스탠드 능력과 흡사한만큼, "죠죠", 혹은 "기억파단자"처럼 두뇌 배틀처럼 그렸어도 괜찮았을 것 같고요. "사랑"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메시지 전달이 핵심인 현재의 작품에는 전혀 맞지 않는 방향이었겠지만, 최소한 지금보다야 재미는 있었을 겁니다.

2017/04/18

클레이모어 1~27 - 야기 노리히로 : 별점 2.5점

클레이모어 Claymore 27 - 6점
야기 노리히로 지음/대원씨아이(만화)

클레이모어: 여전사의 싸움을 그린 다크판타지

"엔젤 전설"로 오해 학원 개그물의 한 장을 열은 야기 노리히로의 다크 판타지 장편 액션 만화입니다. 햇수로 따지면 거의 20년 가까이 된 작품이지만, 몇 주 전에야 겨우 완독하였습니다. Lionheart님 리뷰를 읽고 몇 자 적습니다.

이전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초반부 한 두어 권 읽다가 접은 이유는 도무지 정이 가지 않은 작화 탓이 컸습니다. 개그 만화에는 적당했지만 다크 판타지 액션에 걸맞는 작화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액션 장면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어요. 인간을 먹는 요마와 요마를 사냥할 수 있는 반인반요의 여성 전사 설정도 너무 뻔하다 싶었고요.

그러나 전 권을 몰아서 읽어보니 확실히 인기가 있었던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뻔하고 도식적인 것은 초반부 뿐, 이른바 '각성' 이라는 것이 핵심 설정이 되면서 부터는 독특한 맛이 느껴집니다. 이후 밀리아에 의해 밝혀지는 요마, 전사의 정체와 조직의 존재 이유도 꽤 그럴 듯 했고요. 결말도 깔끔해서 마음에 듭니다. 좀 급하게 끝낸 것 같다는 의견도 더러 있지만 저는 괜찮았어요. 불필요하게 질질 끄는 것 보다는 훨씬 나으니까요.
떡밥 회수도 충실합니다. 요마가 아닌 전사를 취해, 전사가 된 클레어가 각성한 형태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이 대표적인데 이야기 결말에 잘 어울리는 아이디어였어요.
작품의 파워 밸런스가 일정하다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강적들인 '심연의 주인들'과 주인공 멤버들 간의 밸런스가 끝까지 유지되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밀리암을 리더로 하는 7명의 전사들이 무려 7년 동안 은신하여 수련했지만, 심연의 주인들과의 전투는 그들 한 두 명으로는 어림도 없고, 어쩌다 이기는 것도 전원이 달려들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야 한다는 식인 덕분입니다. 의외로 아주 현실적인 설정이라서 기억에 남네요.
강적을 쓰러트리면 또다른, 더 강한 강적이 등장하는 전형적인 소년 만화 전개에서 벗어나 상당히 초반부에 등장한 적이 마지막 결전 상대가 된다는 점도 독특했습니다.

덧붙이자면, 다크 판타지이며 주인공의 처절하고 외로운 싸움을 그렸다는 점에서 "베르세르크"의 영향이 짙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각성자들과 심연의 강자들의 디자인, 그리고 '대검(클레이모어)'를 활용하여 전사들이 요마들과 사투를 벌이는 부분이 그러한데, 그래도 전사들을 모두 여성으로 설정하는 등의 디테일과 앞서 이야기한 파워 밸런스, 그리고 전투에서 두뇌 배틀 속성이 들어가는 식으로 확실히 차이점을 전해 주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베르세르크"보다는 희망을 듬뿍(?) 담고 있다는게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베르세르크"만큼 한 획을 긋지믄 못했어도 당대의 인기작으로서의 재미는 충분합니다.

2016/10/11

ONE OUTS 1~20 - 카이타니 시노부 : 별점 3점

One Outs 20 - 6점
카이타니 시노부 지음/대원씨아이(만화)

카이타니 시노부의 출세작입니다. 

이른바 '원 아웃'으로 불리우는 갬블의 달인 토쿠치 토아가 합류한 후, 만년 약체 리카온즈가 우승에 이르기까지의 한 시즌이 펼쳐지는데, 지장으로 불리우는 시로오카가 이끄는 버거브즈와 비밀무기 대주자 존슨과의 대결, 온갖 방법으로 사기를 치며 홈 구장에서 승리를 계속해온 블루마즈의 트릭 파헤치기, 그리고 라이벌인 최강팀 마리너즈와의 우승 결전이 중요하게 그려집니다. 이 과정 속에서 토아와 사이카와 구단주와의 지략 대결이 함께 펼쳐지고요.

시합의 승패와 토아, 사이카와의 대결은 실력 이외의 지략이 크게 좌우하기 때문에 야구 만화라기보다는 "라이어 게임" 같은 두뇌 배틀물에 가깝습니다. 무엇보다도 작품의 근간이 되는 토아의 절묘한 제구력과 심리전은 분명 허구의 영역이기도 하고요. 빗맞은 볼이 안타로 연결될 수 있는 등, 공은 둥글기 때문에 이변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심리적 문제가 있던 무르와카와 쿠라이가 최대 승부처에서 각성한다는 내용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설정면에서의 오류도 있습니다. 토아의 공을 이데구치가 받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최종 결전을 앞두고 마리너즈의 타카미가 만들어낸 파해법은 '공을 받기 어렵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리카온즈 타자들이 적응해서 부숴버린 요시다 히토시를 이후 만났을 때에는 그러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물론 공은 둥글고, 여러 변수가 존재하는게 야구라서 오류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면에서는 정교함이 조금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래도 야구 만화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요소는 많습니다. 마리너즈의 최강 타선에 숨겨진 비밀은 바로 '출루율'이라는 것이 대표적으로 야구 만화에서는 보기 드문 디테일이었어요. 초반 토아가 처음으로 대량 실점하며 사이카와가 승기를 잡지만 결국 토아가 우천 노게임 - 게임 포기 선언을 이끌어내는 장면처럼 지략 대결도 철저하게 야구 '룰'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시합 장면도 충분히 드라마틱하고요.

또 안티 히어로라고 할 수 있는 토쿠치 토아의 캐릭터도 강렬한 매력을 뽐냅니다. 그야말로 이기기 위해 태어난 듯한 갬블러라는 것이 너무나 설득력 있게 묘사되어, 큰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안배하는 전개가 잘 와 닿았어요. 공 하나하나, 승패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프로야구의 본질은 이기기 위해서라는 것을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보여준 캐릭터는 많지 않지요. 헤어스타일부터 승부욕과 승부사적 기질, 치밀한 심리전과 작전 구사 등은 여러모로 "아이실드 21"의 히루마에게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결론은 추천작입니다. 리그 우승을 확정 지은 뒤 단 몇 페이지로 정리해버리는 결말이 조금 미흡하기는 하지만 야구 만화로도, 두뇌 배틀물로도 모두 볼만한 괜찮은 작품입니다. 애니메이션으로까지 제작된 인기는 거저 얻는 것이 아니죠.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구단주와 특정 개인이 어마어마한 돈을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베팅하고, 그 때문에 구단주와 대결한다는 내용은 "공포의 외인구단"과 비슷하네요. 이를 위해 영입된 사교성 없는 선수들이 구 선수들과 대립하여 팀 내 분열을 가져온다던가, 막강한 라이벌팀과 천재 타자가 그것을 가로막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물론 이 작품은 최종 보스 토아가 절대 흔들리지 않고, 여자 관계 따위는 등장하지도 않으며 끝까지 자기가 세운 계획대로 완벽하게 승리한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시대가 달라도 너무 달라졌어요.

2015/04/06

사상학 탐정 1 - 미쓰다 신조 / 이연승 : 별점 3점

사상학 탐정 1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이연승 옮김/레드박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인에게 나타난 사상(死相)을 보는 특수한 능력이 있는 쓰루야 슌이치로가 탐정 사무소를 개업한 날, 사야카라는 여인이 찾아왔다. 그녀는 청년 IT 재벌 아키라와 약혼했지만, 약혼자가 급작스럽게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한 후 자신의 주변에 떠도는 죽음에 이유가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아무런 사상도 보지 못한 쓰루야는 의뢰를 거절했다.

하지만 그녀가 약혼자의 본가인 이리야가에 함께 살게 된 후, 기이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고 그녀는 다시 쓰루야를 찾았다. 쓰루야는 그녀를 뒤덮은 섬뜩한 사상을 확인한 뒤 사건의 조사를 위해 이리야가를 방문했다. 그러나 기이한 사건은 멈추지 않고 아키라의 이복형 나쓰키부터 한 명씩, 차례대로 가족이 죽어나가기 시작하는데...

타인에게 나타난 사상(死相)을 볼 수 있다는 특수 능력의 소유자가 주인공으로, 주인공 쓰루야 슌이치로는 탐정이라는 직함을 걸고 있지만 별다른 추리력은 없습니다. 자신의 특수 능력과 일본 최고의 무녀인 할머니 아이젠에게서 배운 지식과 경험에 의존할 뿐입니다. 사건도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영역이 아니라 ‘주술’의 영역에서 벌어지고요. 이런 점에서 정통 추리물보다는 일본식 퇴마 판타지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만화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뻔한 퇴마 배틀물은 아닙니다. 쓰루야의 능력은 사상을 보는게 전부로 다른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백귀야행"의 리쓰가 탐정 사무소를 열었다고 해도 될 정도에요. 쓰루야와 리쓰는 능력치도 거의 비슷하니까요. 실제 스물스물 움직이는 저주의 실체를 보고도 도망치는 게 고작이거든요. 주술, 저주가 정말 일상 속에 있을 법한 것으로 그럴듯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 역시 "백귀야행"스럽습니다. 이렇게 설득력 넘치는 괴이 묘사는 민속 탐정 시리즈를 써왔던 미쓰다 신조답습니다. 마찬가지로 작가 특유의, "백귀야행"과는 다른 섬뜩한 묘사들도 볼거리이고요.

이러한 설득력 넘치며 섬뜩한 분위기에 더해 작가의 명성과 "탐정"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추리적인 부분도 나름 볼 만 합니다. 비과학적인 영역이기는 하지만, 주술과 저주에 적용된 일종의 법칙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야기의 핵심인 덕분입니다. 부제 그대로 '13'에 관련된 법칙인데, 정교하게 짜인 복선과 함께 쓰루야의 메모를 중심으로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하여 두뇌 싸움을 벌이게 만드는 솜씨가 돋보입니다. 이리야가 전 당주 및 가족들의 취미와 엮은 자잘한 설정들도 흥미로웠고요.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었던 점은 굉장히 빠르게 전개되는 현대적인 작품이라는 점입니다. 지루할 틈 없이 사람이 계속 죽어나가면서 책을 손에서 놓기 힘들게 만듭니다. 사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은, 고작 두 권 읽은 게 전부지만, 어렵고 복잡한 일본 민속 관련 지식을 고풍스럽고 무겁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탓에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읽고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일반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흡사 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으니까요. "나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젊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나이는 잘 모르겠지만, 프랑스에서 젊은 감독들이 새로운 영화 운운하며 누벨바그 운동(장 뤽 고다르로 대표되는)이 일어났을 때, 거장 르네 끌레망이 정말 새로운 영화를 보여주겠다며 "태양은 가득히"를 발표한 일화가 떠올랐어요.

이렇듯 독특함과 재미를 모두 갖춘 좋은 작품이기는 하나 단점도 있습니다. 일단 '13'에 관련된 법칙이 재미는 있지만, 합리적인 구조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점입니다. 설정에 맞춰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해 보였어요. 숫자만 들어가면 무엇이든 되기 때문에 단서들의 비약이 심하고, 억지스러운 전개도 제법 있고요. 작중에서도 언급되듯 나이 든 사람들만, 그것도 일본이라는 환경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점도 쉽게 공감하기 어렵게 만드는 점입니다. 사야카가 쓰루야에게 단서를 전해주려 애쓴다는 설정도 쓰루야의 무능함만 돋보이며, 혹 쓰루야가 정말로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어떻게 했을지 설명되지 않는 것도 단점입니다.

아울러 동기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아요. 작품에서처럼 사야카가 모든 저주의 흑막이라면, 그녀는 아키라 재산의 60%로 왜 만족하지 못했을까요? 설령 아키라의 배다른 형제를 모두 죽였다 치더라도 60%가 80%가 될 뿐 - 20%는 죽이고 싶지 않았던 아키라의 어머니 도시코의 몫이기에 - , 예를 들어 유산이 한 40억이라고 한다면 24억이 32억이된다... 본인까지 저주를 걸 정도로 의미가 있는 금액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설령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방법적으로 무리수가 너무 많습니다. 저 같으면 그냥 형제들에게 저주를 걸고 어디 외국이라도 가 있었을겁니다. 사인이야 어차피 급성 심부전이니 수상하기는 해도, 증거는 없었을테니까요. 구태여 같이 저주에 걸려가며 상종하고 싶지 않은 인간들과 동거할 이유는 없습니다.
쓰루야에게 사건을 의뢰한 이유도 사건이 언젠가 쓰루야나 아이젠 귀에 들어갈까봐 의뢰했다는 것인데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증명하기 어렵다는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설령 귀에 들어갔다손 치더라도, 주인공이나 주인공 할머니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마지막으로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이리야 가문의 설정, 판에 박은 의붓형제 캐릭터인 나쓰키, 하루미 등은 고민이 부족해 보여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새로운 시리즈의 시작이자 미쓰다 시존의 새로운 모습을 알리는 측면에서는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무엇보다도 몰입해서 읽는, 재미라는 측면에서 좋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에스프레소라면 달달한 카푸치노같은, 아주 무섭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은 작품이니 미쓰다 신조의 작품이 궁금하신 입문자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14/09/22

생존 Life 1~3 - 후쿠모토 노부유키 / 가와구치 가이지 : 별점 2.5점

생존 Life 1 - 6점
가와구치 가이지 지음/삼양출판사(만화)

딸은 14년 전에 실종되고, 아내마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자신마저 암으로 시한부 인생이라는 걸 알게된 다케다는 자살을 결심했다. 그런데 목을 메려는 찰나, 실종된 그의 딸 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고백"과 마찬가지로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원작을 가와구치 가이지 (카와구치 카이지)가 그림을 그려 만든 합작 만화입니다. "제 3의 시효" 리뷰 댓글을 통해 marlowe님이 추천해 주셨는데 이제서야 읽게 되었네요.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 2권에서는 딸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를 끈질기게 추적하는 다케다의 모습이 그려지며, 3권에서는 범인과 공소시효를 둘러싼 치열한 두뇌 싸움이 펼쳐집니다. 추적자 다케다의 모습에서는 가와구치 가이지 특유의 인간드라마를, 그리고 마지막 권에서는 후쿠모토 노부유키 특유의 두뇌 배틀을 즐길 수 있으며, '공소시효'라는 것을 아주 효과적인 장치로 사용하고 있다는게 장점입니다. 특히 마지막 클라이막스에서 두뇌 배틀은 물론, 다케다의 남은 수명과 사건의 공소시효가 동일하다는 설정이 주는 긴장감은 그야말로 최고입니다.

추리적으로도 '아버지'이기 때문에 가능한 끈기 있는 추적만큼은 인상적입니다. 해당 시기에 그곳을 여행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그때 찍었던 사진을 한 장 한 장 확인하여 딸이 등장한 사진을 찾아낸다는게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추적 과정에서 심하게 운이 좋아 보이는 장면이 많다는 건 조금 아쉽습니다. 위의 예를 든 사진을 찾아내는 것은 물론, 폐차장에서 십수 년 전에 폐차시킨 차를 찾아내는 게 대표적입니다. 솔직히 가능한 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차가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는 작위적으로 보이기까지 했고요.

뭐 작위적으로 보자면 마지막 두뇌 싸움이 더 심하긴 합니다. 차 트렁크에 메시지를 남길 시간이 있었더라면 더 자세한 내용을 적을 수도 있었을 테고, 또 평범하게 날짜와 요일, 시간을 적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평범한 사람은 알기도 힘들 주가를 적어 놓았을까요? 주가를 적어 놓더라도 날짜 정도는 같이 적는 게 상식이었을 테고요. '한방'의 임팩트는 있었지만 억지스러웠습니다.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묵직한 묘사와 공소시효를 핵심 소재로 놓고 전개한 치밀한 전개는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두 작가의 팬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14/04/16

라이징 임팩트 1~17 - 스즈키 나카바 : 별점 1.5점

라이징 임팩트 17 - 4점
스즈키 나카바 지음, 정선희 옮김/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완결된지 10년도 더 넘게 지났지만, 최근에 골프에 관심을 둔 친구가 많아져서 이런 저런 작품을 읽다가 만나게 된 작품입니다.

그런데 골프 만화는 아닙니다. 전형적인 왕도형 배틀 판타지 만화입니다. 초등학생이 400야드가 넘는 드라이버샷을 날리고, 수십미터짜리 버디 퍼팅과 칩인 어프로치를 당연하게 성공시키고, "기프트"라고도 불리우는 각자의 필살기("라이징 임팩트", "샤이닝 로드"…)를 가지고 있고, 주인공이 아무리봐도 초등학생 같지 않은 라이벌들과 싸워 나가고, 그 라이벌들과 한팀이 된 이후 다른 라이벌 팀과 싸워 나가고, 그 라이벌 팀과의 싸움이 끝난 뒤 진정한 라이벌 팀이 나타나고… 하는 식의 전형적인 배틀 판타지 액션 소년 만화의 공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만화에서 골프는 단지 소재일 뿐입니다. 골프 시합은 성투사들과의 전투, 라이징 임팩트는 페가수스 유성권으로 바꿔도 이야기는 가능하겠지요.

그래도 배틀 판타지로는 왕도형이라 기본적인 재미는 갖추고 있습니다. "점프"에서 단행본 17권 분량까지 연재되었다는게 증거이고요. 다양한 홀의 구성과 환경에 맞춰 서로의 필살기를 펼쳐나가는 것이 꽤 그럴듯한 덕분입니다. 몇몇 장면에서는 두뇌 싸움을 보는 맛도 약간 느껴지고요. 또 천연계 주인공 가웨인 캐릭터는 이런 류의 만화에서는 보기 드문 캐릭터라는 점에서 차별화됩니다. 다른 캐릭터들은 별다른 새로움을 보여주지 못했지만요.

그러나 갈수록 너무 뻔해지는게 심상치 않았는데, 카멜롯과 그렐 킹덤과의 최종 결전에서 "자 이제 승부를 시작해볼까!"라는 말과 함께 바로 10년 후로 넘어가 후일담이 이어지는 어처구니없는 결말은 좀 황당했습니다. 편집부의 압력 ("당장 집어쳐!")이 느껴지더군요. 그나마 후일담으로 거의 모든 등장 인물들에 대해서 정리해준게 다행이에요.

여튼 기대와는 전혀 달랐던 전형적인 소년 만화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중년에 접어든 제가 읽기에는 너무 유치했어요. 킬링타임용으로 오래 기억될 작품은 아니네요.

덧붙이자면 주인공은 가웨인에 라이벌은 란슬롯, 끝판왕은 트리스탄, 다니는 학교는 카멜롯인 등 아더왕 전설에서 모티브를 따 오기는 했으나 그냥 그뿐입니다. 제대로 하려면 최소한 끝판왕은 모드레드에 모르가나 정도는 나와줬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고요. 일본이 무대인 만화에 왜 억지로 이런 이름을 가져다 붙였는지 작가에게 물어보고 싶어집니다.

2014/03/24

기생수 1~8 (애장판) - 이와아키 히토시 : 별점 4점

기생수 애장판 1~8 박스 세트 (완결, 묶음) - 8점
이와아키 히토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발표된 지 30년을 향해 달려가는 고전 명작. 지금 읽고 감상을 남기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긴 숙제를 끝낸 기분으로 리뷰를 남깁니다."

"칠석의 나라"와 "히스토리에" 모두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이 작품은 이상하게 손이 잘 가지 않더라고요. 취향이 아닌 작화 탓도 있지만, 저의 청개구리 마인드가 가장 큰 이유입니다. 남이 걸작이라 칭송하면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읽고 나니 역시나 명불허전. 왜 이제서야 읽었는지 반성하게 되네요. 만화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특히 재미와 함께 인간, 그리고 인간성이란 무엇인지를 묻는 묵직한 주제를 결합하여 전달하는 솜씨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이런 주제의 작품이 이만큼이나 재미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랄 뿐입니다. 특히나 타미야 료코를 통해 인간성이 사랑과 희생에 기반하고 있다는걸 알려주는 장면은 만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 중 하나라 생각됩니다. 우라카미를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지 한 번 더 묻고, 사토미를 통해 답을 알려주는 마무리도 깔끔하고 적당했습니다.

작품의 또 다른 핵심 중 하나인 기생수끼리의 사투 역시 잘 표현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여러 가지 설정이 조합된 두뇌 배틀 형식이 많아 단순 배틀물 이상의 재미를 선사해 주는게 좋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신이치가 자신의 몸으로 오른쪽이와 연계 공격(제트스트림 어택?)을 하는 장면처럼요. 기생수 + 강화 인간의 조합이라서, 고토와 같은 특별한 적이 아니라면 웬만한 기생수는 혼자서 때려잡는 게 가능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시청에서 기생수를 제압하는 자위대, 그리고 그들을 도륙하는 고토의 전투도 굉장히 임팩트 있었어요. 카나가 기생수들과 신이치를 과연 구별할 수 있었을지(신이치는 그래도 기생수와는 다른 존재일지)같은 세세한 디테일들도 볼거리였고요.

허나 몇몇 부자연스럽거나 아쉬운 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지만 기생수에 협력하여 쓸데없는 인간을 정리하려는 히로카와 캐릭터는 훨씬 중요하게 사용될 수 있었는데 낭비된 듯한 느낌이고, 카나도 비중에 비하면 그다지 효과적으로 소비된 것 같지 않네요. 또 최종보스라 할 수 있는 기생수 고토와의 마지막 결전이 "운"에 의해 끝난다는건 좀 시시했어요.
그리고 단점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환경 보호에 대한 것과 "인간이 가장 나쁘다"라는 주제는 너무 많이 사용되고 언급된 것이라 지금 읽기에는 진부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결론은 추천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견신"이라든가 "타지카라오"와 같은 유사품과는 격을 달리하는,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 바닥 고전 걸작으로서의 가치는 강산이 두어 번 바뀐 지금에도 유효합니다.

2011/06/09

0시간으로 - 애거서 크리스티 / 안동림 : 별점 3점

0시간으로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안동림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표제작 외에 <포켓에 호밀을>까지 총 두 편의 중편이 수록된 동서추리문고 판본입니다. "13인의 만찬"을 읽은 뒤, 갑자기 생겨난 크리스티 여사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로 읽게 되었습니다.

"0시간으로"는 시골 노부인의 별장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 여사님 특유의 후더닛물입니다. 서로의 악의와 증오가 교차하는 전반부, 그리고 사건 후 해결 과정을 그리는 후반부로 나뉩니다.

일단 배틀 총경이 활약한다는 점이 굉장히 특이했습니다. 배틀 총경은 "4개의 시계" 등에서는 우직하고 끈기 있는 형사로 탐정의 조력자 역할이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경험에 기반한 끈기 있는 수사 능력에 더해 감수성과 자애로움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벨기에인 탐정 포와로를 들먹이며 단서를 찾아내는 모습에서는 ‘과연 사람은 배우면서 성장하는 동물이구나’ 싶은 생각도 들더군요.

그러나 깔끔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의 해결 과정은 약간 아쉬웠습니다. 전혀 다른 장소에 있던 제3자가 우연히 등장해 사건의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는 급작스러운 전개도 별로였고, 단지 정신병으로 치부된 살인의 동기도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돈도 많고 유명한 스포츠 스타가 전처에게 집착한다는 설정은 이해하기 어려웠으니까요. 이혼 후 더 예쁜 아내를 얻어 잘 살고 있으면 그게 복수지, 뭐 이리 어렵게 일을 꾸몄나 싶었습니다. 교수대에 올라가는 모습을 원했다면 차라리 직접 죽였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고요.

또 후더닛물의 공통적인 단점이기도 한데, 모든 등장인물을 치우침 없이 공평하게 다루다 보니 초반부 전개가 약간 늘어지는 감이 있었습니다. 배틀 총경이 ‘눈빛이 어쩌고’ 하면서 수사를 진행하는 것도 딱히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따뜻한 배려심의 소유자 배틀 총경의 모습과 함께, 급작스럽기는 하지만 나름 완벽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별점 2점, 추리적으로 완전범죄에 가까웠던 범인의 계획과 독자에게 공정하게 단서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0.5점을 더해 별점은 2.5점입니다.

두 번째 작품 "호밀 속의 죽음"은 독특한 점이 많았던 "0시간 속으로"와는 달리 전형적인 여사님 작품입니다. 콩가루 대저택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마더 구스 동요를 바탕으로 한 살인사건이라는 설정이 딱 그러합니다. 작품도 중박 이상은 되는 편이라, 용의자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묘하면서도 공정하게 독자와의 두뇌싸움을 펼치는 고전 정통 추리물의 미덕이 아주 잘 살아 있습니다. 또 미스 마플 팬이라면 시리즈에서 가끔 언급되곤 했던 글래디스 마틴이라는 하녀가 등장하는 것도 볼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욕심이 좀 과하긴 했습니다. 저택의 왕고모님이 뭔가 아는 척하면서 던지는 이야기들이 모두 진상을 흐리는 별 볼 일 없는 내용이라는 것은 그렇다 쳐도, 마더 구스 동요를 끌고 들어온 것은 확실히 무리였어요. 최초의 티티새 장난은 범인의 계획과는 전혀 상관없는 우연이었다는 점, 그리고 범인이 과거 티티새 광산주의 딸이 어떤 식으로든 복수에 관여했을 것이라 생각한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 않기에, 그냥 흥미거리 소재에 머물고 맙니다.

범인이 자신의 범죄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희생양으로 삼을 만한 다른 용의자가 딱히 없었다는 것도 완전범죄라는 측면에서는 감점 요소였어요.

그래도 트릭과 함께 사건의 진상은 상당히 놀랍고 동기도 나름 합리적이기에 만족합니다. 마지막 글래디스의 편지도 심금을 울리는 적절한 에필로그였고요. 별점은 3.5점입니다.

그래서 평균 별점은 3점입니다. 두 작품 모두 아주 뛰어난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어렵지만, 중박 이상은 되고 즐길 만한 요소가 많기에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1/02/17

영능력자 오다기리 쿄코의 거짓말 1 - 카이타니 시노부 : 별점 2점

영능력자 오다기리 쿄코의 거짓말 1 - 4점
카이타니 시노부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원아웃""라이어 게임"이라는 두 작품으로 두뇌 배틀 장르에서 돋보이는 성과를 거둔 카이타니 시노부의 작품.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코믹한 분위기의 일상적인 에피소드가 많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얼마 전 일본에서 TV 드라마화도 될 정도의 인기작이니 당연히 뭔가 건질 게 있겠죠? 일단,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로 20세 때 FBI 수사요원으로 발탁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추리력을 바탕으로 '영능력자'라고 사기를 치는 시대의 아이콘, 오다기리 쿄코라는 캐릭터가 독특하고 유쾌합니다.

그리고 가볍게 즐길 만한 일상계 추리물로서는 적절한 수준의 추리적 완성도를 보여주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총 4편의 에피소드가 실려 있는데, 첫 번째 에피소드인 대학교 치한 체포 작전이라든가 두 번째 에피소드인 뇌졸중으로 쓰러진 노인이 그린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그러합니다. 독자가 범인과 진상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쉽지만, 그만큼 설득력 있고 효과적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죠.

마지막으로, 전작에서 느꼈던 정교한 설정에서 오는 두뇌 게임의 박진감과 의외의 결말이라는 요소를 경마장의 우승마 맞추기에 대한 이야기인 네 번째 에피소드 "적중"에서 선보여 주는 것도 좋았습니다. 작가의 특기를 잘 살린 작품이었으며, 반전도 괜찮았거든요.

그러나 캐릭터 구도가 "블랙 라군" 등과 별반 차이 없는 자기중심적 여걸 - 평범한 사람에서 우연히 말려든 불쌍한 청년이라는 전형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점, 남자 주인공 타니구치 이치로가 실제로 하는 게 거의 없다는 점, 그리고 주인공이 너무 과장되고 희화화되어 있다는 점 등은 감점 요소입니다. 이러한 요소는 이 작품의 대상 독자 연령대가 낮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네요.

아울러 앞서 장점으로 이야기한 '추리적 완성도' 역시 가벼운 일상계 추리물 수준으로 괜찮다는 것이었지, 작가의 전작들에서 기대했던 꽉 짜인 긴장감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이라 작가의 팬으로서는 실망스러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은 "바쿠만"에서 천재 니즈마 에이지가 그린 로맨틱 코미디가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한 이유와 일맥상통하네요. 작가에게서 기대하는 부분이 명확한데, 그걸 잘 살리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 선뜻 추천하기는 약간 어려운, 미묘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후속권을 구입해봐야 명확한 평가를 할 수 있을 텐데, 후속권을 구입해야 하는지부터가 망설여지네요...

2011/02/01

웃지 않는 수학자 1, 2 - 모리 히로시 / 윤덕주 : 별점 2점

웃지않는 수학자 2 - 4점 모리히로시/서울문화사

전설적인 천재 수학자 텐노지 박사가 자신의 저택 '삼성관'에서 가족들을 중심으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다. 모에와 사이카와는 모에의 아버지와 텐노지 박사와의 인연으로 초대받았다. 크리스마스 파티의 흥이 한껏 오른 저녁, 텐노지 박사는 저택 입구의 거대한 청동상을 사라지게 하는 마술을 시연했고 참석자들은 모두 크게 놀랐다. 그리고 그 수수께끼를 풀기도 전에 텐노지 박사의 며느리 리츠코와 손자 순이치가 차례로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모든 것이 F가 된다"의 사이카와 - 모에 컴비 시리즈입니다.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죠. 국내에는 1996년이라는 국내 추리소설 시장 암흑기에 소개된 탓인지 광속으로 절판되었었습니다. 7~8년 전에 읽었었지만, 얼마 전 아무 생각 없이 다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올해 첫 완독한 책이기도 하네요.

그러나 예전 감상과 비교하자면 영 아니올시다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제일 큰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트릭과 동기, 그리고 모호한 결말의 세 가지죠. 그 외에도 이상한 번역 등 꼽고 싶은 게 많습니다만...

일단 트릭은 장치 트릭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비교적 참신하고 스케일은 크지만 정도가 지나쳤습니다. 비현실적인 수준이 도를 넘었어요. 그러한 장치를 만든 이유도 불분명하고 말이죠. 만화였다면 어울렸을지 모르지만, 진지한 본격 추리물에는 그다지 어울리는 트릭으로 생각되진 않습니다. 덧붙이자면, 무대가 된 '삼성관'이 원래 '천문대'였다는 중요한 단서를 너무 대충 넘겨 이야기를 모호하게 만든 것도 공정하지 않은 처사라 생각되네요.

그래도 트릭은 '왜 1호실의 리츠코가 밖에서 죽고 아들인 순이치가 헝클어진 침대 아래에서 죽어 있었나?'라는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를 푸는 데에는 딱 들어맞고, 나름 재미도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동기에요. 범인이 왜 범행을 저지르는지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어이가 없을 정도에요. 이후의 과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또, 단순한 미움으로 이렇게 오래 범행을 준비한다는 것이 가능할지도 의심스럽지만, 이렇게 때를 기다려 왔다면 왜 불필요한 등장인물인 사이카와 - 모에 컴비가 초대되었을 때 범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 설득력이 없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비하자면 완전 범죄에 희생양을 등장시키지 않는 범인의 실수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겠죠...

마지막의 모호한 결말은 "모든 것이 F가 된다"를 의식한 탓일까요? 천재 괴물의 탄생을 알리는 결말로 보이는데, 괴물의 정체와 이러한 결말로 흐르는 이유 자체를 알 수 없기에 작위적으로만 느껴졌습니다. 그냥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끝내는 것이 훨씬 좋았을 텐데, 괜히 뒷맛만 찜찜해져 버렸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실제 공학교수이기도 한 저자의 특기를 살린 수학자의 두뇌 배틀이라는 테마와 함께, 앞서 말한 주요 수수께끼의 전개 과정과 중간중간의 수학 퀴즈, 그리고 사이카와 - 모에의 알콩달콩 귀여운 밀당은 볼 만했지만 전체적인 완성도는 평균 이하였습니다. 제가 나이를 훨씬 더 많이 먹은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예전의 좋았던 기억은 절판된 책을 구했다는 기쁨이 컸던 게 원인이 아니었나 싶군요. 절판된 지 한참 지났지만, 구태여 구해보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2010/05/23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 이시모치 아사미 / 박지현 : 별점 3점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 6점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박지현 옮김/살림

대학 경음악부 '알코올중독분과회'의 멤버로 술을 좋아해서 친하게 된 대학 동창들이 오랫만에 동창 중 한명인 안도의 가족이 운영하던 초고급 펜션에서 동창회를 갖는다. 그리고 저녁식사 직전 동창회의 리더이기도 한 후시미 료스케는 후배 니이야마를 죽이고 완벽한 밀실 살인을 만들어낸다. 저녁식사 이후까지 모두들 니이야마가 피곤하여 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서서히 의심이 쌓여가고, 후배인 우스이 유카가 합리적인 추리를 통해 서서히 범행을 재현해 나가기 시작하는데...

"네이버 일본 미스터리 즐기기 카페에서 뽑은 2009년 미스터리"에서 17위를 차지한 작품입니다. 사실 이 작가는 예전에 "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라는 작품에서 너무 실망이 컸기에 다시 작품을 구해볼 생각은 없었는데 블로그 지인이신 kisnelis님 의 평도 좋고 마침 도서관에도 비치되어 있어서 읽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두 가지 독특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인공 후시미가 완벽한 밀실 트릭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에서 시작하는 도서 추리물이면서도, 뒷 부분에서 밝혀지는 이유 때문에 시간까지 철저히 계산된 계획에 따라 밀실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완벽한 밀실 트릭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그것이 곧바로 밝혀지면 안 되는 상황을 일정 시간, 즉 10시간 동안 유지해야만 하는 것이죠.

두 번째는 이 시간 동안 밀실을 앞에 두고, 제목 그대로 '문이 아직 닫혀 있는 동안' 탐정역인 유카와 후시미가 불꽃 튀는 두뇌 대결을 펼쳐 나간다는 점입니다. 유카는 "현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며 방 안과 니이야마의 상태를 추리하고, 후시미는 이러한 추리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면서 첫 번째의 이유, 즉 '밀실 상태를 일정 시간 유지해야 하는 이유'로 인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조성하려고 애쓰는 대결 구도가 이루어집니다.

도서 추리물에서 탐정과 범인이 두뇌 싸움을 벌이는 작품이 흔하지만, 특정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벌이는 배틀은 자주 접하지 못한 설정이라 굉장히 신선했습니다. 추리 배틀 자체도 완성도가 높고요. 특히 탐정과 범인의 지력이 대등한 수준이라 서로 주고받는 심리전이 흥미진진했습니다. 주로 유카가 먼저 논리적인 펀치를 날리는데, 예를 들어 방을 밀실로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 도어스토퍼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지, 창밖에서 내부를 확인할 방법은 없는지 등, 합리적이면서도 이야기 전개에 걸맞은 단계별 논리를 선보입니다. 앞부분에 제공되는 단서들, 예컨대 위스키 병이나 니이야마의 시력 등은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어 독자도 추리에 참여할 수 있게끔 배려된 점도 좋았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마사토끼"의 만화를 떠올리게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유카와 다른 동창생들의 발언과 추리가 촉발시키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오는 서스펜스도 상당히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전 작품과 마찬가지로 '동기' 부분에서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에서의 동기를 쉽게 설명하자면,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부상 위험이 있는 선수가 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되어 팀에 피해를 주지 못하게 하려고 그 선수를 죽인다'는 이야기와 다름없습니다. 이런 설정은 작가 미쓰하라 유리가 책 뒤에서 해명하고 있지만,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우연과 운에 의존하는 전개가 많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니이야마가 약에 의해 수면 상태에 빠지는 것이 대표적이며, 다른 동창생들의 심리가 후시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 역시 운에 의지한 억지 설정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거든요. 작 중에서 이런 우연을 작가가 스스로 해명하기도 했지만, 차라리 작가가 책 뒤에서 설명한 대로 '심야에 범행을 저지르는 설정'이 훨씬 설득력이 높았을 겁니다. 물론 그런 방식이었다면 소설로서의 재미가 크게 줄어들었겠지만요.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정통 본격 추리소설의 매력을 잘 살려 재미있게 몰입해 읽을 수 있었으며, 번역도 훌륭하고 책의 디자인도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을 통해 이시모치 아사미라는 작가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된게 좋았어요. 앞으로 작품 한두 개만으로 작가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지 말아야겠습니다.

2010/03/18

마왕 (쥬브나일 리믹스) 1~10 - 이사카 고타로 원작 / 오스가 메구미 그림 : 별점 2.5점

마왕 10 - 6점
이사카 고타로 지음, 오스가 메구미 그림/대원씨아이(만화)

이사카 고타로의 소설을 오스가 메구미가 만화화한 작품으로, 한 인물이 타고난 카리스마로 정점에 선다는 정치적인 이야기에 더불어 그를 막으려는 두 형제의 초능력에 대한 브레인배틀물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들었던 점이라면, 브레인배틀에 대한 설정과 전개가 굉장히 흥미진진하다는 것을 들 수 있겠네요. 형 안도의 복화술과 동생 준야의 예지능력과 더불어 여러 킬러들의 설정도 좋았고, 이러한 능력들을 여러가지 제한조건을 두어가며 두뇌싸움으로 몰고가는 것이 굉장히 탄탄하다 생각되거든요. 능력을 밝혀가는 과정에서의 추리적인 느낌도 괜찮았고요. 아울러 만화적으로 등장인물들이 살아 숨쉬는 것 처럼 표현된 작화도 괜찮았습니다. 덧붙이자면, 작가의 다른 작품인 "그래스호퍼"와 세계관이 동일해서 여러 친숙한 인물들이 활약한다는 것도 친숙해서 반가운 요소였죠. (그래스호퍼 만화 자체는 헬이었지만...)
그러나 과장되고 설득력없이 표현된 부분이 많다는 것은 좀 아쉬웠습니다. 특히나 이누카이라는 일종의 악역 -카리스마 넘치지만 실상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파시스트 - 에 대한 묘사가 구태의연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과정 역시 별다른 고민없이 흘러간다는 것은 너무 고민없이 전개된 것이 아닌가 싶었어요. 정치가 무슨 장난도 아니고 동네 이장급 이야기가 펼쳐지다가 결국 총리까지 된다니 심하잖아요?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루기에는 정말로 어울리지 않았어요. 그 외에 악역들의 악행 역시 진부했으며 일부 설정은 과장이 너무 심해서 유치해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냥 살인행위라면 모를까 막판에는 천재지변을 일으키는 정도까지 능력이 올라가서 X-men 이 되어버리거든요. X-men도 좋은 만화이긴 하지만 성격이 너무 달라요!
물론 이러한 단점들은 만화가 노리는 타겟이 저연령 학생층이라 일부러 소설보다 쉽게, 화끈하게 극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만... 소설을 읽어보지 않아 단정하긴 힘드네요. 소설을 읽어봐야 하나....

결론내리자면 생각보다는 깊이가 좀 덜하고 말초적인 재미 (배틀 등)에 치중한 작품이었달까요? 덕분에 쉽게 읽히고 재미는 있었지만 작품 전체의 수준은 평작 수준이라 생각되어 별점은 2.5점입니다. 차라리 이런저런 곁가지 묘사들을 들어내고 능력자 배틀 위주로 분량을 2/3 정도로 압축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2009/11/15

이무리 1,2 - 미야케 란죠 : 별점 2점

이무리 1 - 4점
미야케 란죠 지음/중앙books(중앙북스)

마지행성의 지배일족 카마에서도 고위층의 아들인 듀르크는 학생대표로 선발되어 이웃 행성 룬으로 떠나게 된다. 룬은 모든 카마인의 고향이자 원주민 "이무리"가 살고 있는 행성. 듀르크는 룬에 대한 꿈을 계속 꾸는 등 룬과의 모종의 연관성을 짙게 느끼는데...


독특한 SF 판타지 물로 가장 큰 특징은 작품만의 설정과 세계관이 무척이나 방대하다는 겁니다. 다양한 계급체계는 물론이고 종족별 특징도 상세할 뿐 아니라 내부의 권력 구조 및 힘의 세력관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배계급의 독특한 정신 지배 능력인 "침범술"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인상적이었어요. 작가의 그림체도 캐릭터 구분이 점점 힘들어지는 등 단점은 명확하지만 이야기와는 잘 어울리는 편이고요.

하지만 설정이 방대하고 세밀하다고 해서 무조건 재미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겠죠. 오히려 이 작품의 1권은 이러한 방대한 설정의 나열 정도로만 그치고 있어서 재미를 느끼기는 힘들었습니다. 만화라기보다는 설정자료집으로 느껴질 정도였어요. 점차 나아지기는 하지만... 
또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성격도 천편일률적이라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특히나 악역들은 평면적이고 유치한 것이 그야말로 다 똑같다 싶었습니다.
그나마 계속해서 등장하는 "침범술"을 가지고 "브레인 배틀" 형식의 배틀이라도 전개되었더라면 관련된 재미라도 있었을텐데 그쪽으로는 별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도 않아서 의아했습니다. 상대방의 이름을 알아야된다던가, 단계가 있다던가 등으로 디테일하게 설명되고 있어서 두뇌게임으로 충분히 전개할 수 있었을텐데, 단순히 스쳐지나가는 정도로 그쳐서 설정이 아깝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다행히도 2권에서 행성 룬에서의 반란이 일어난 뒤 전개가 급박해지면서 조금 재미있어지지만, 작품 자체가 독특한 설정 이외에는 굉장히 흔해 빠진 소재의 이야기라 생각되기에 ("지구에" 하고 뭐가 다른지도 잘....) 3권부터는 분명한 재미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으로 보입니다. 이후에도 여태까지의 전개와 유사하다면, 과연 연재가 제대로 이어져서 작가의 생각대로 이야기가 마무리 될 수 있을지 살짝 걱정되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평균 2점 정도랄까요? 아직까지는 뭐라 평가하기 좀 어려운데, 한 10권 분량이 되었을때 쯤에서야 제대로 된 평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긴 하네요.

2008/11/19

Arms 암스 1~22 - 미나가와 료지 : 별점 3점

Arms 암스 21 - 6점
료우지 미나가와 지음, 박련 옮김/세주문화

료는 평온하게 학교생활을 보내는 평범한 고등학생. 그러나 그의 학교에 하야토가 전학온 뒤 그의 일상이 급변한다. 료는 몸에 나노 생체 병기가 이식된 실험체, 이른바 “암스” 의 한명이었던 것. 료는 하야토, 그리고 또다른 암스인 다케시 등과 함께 자신들을 노리는 비밀의 조직 “에그리고리”에 맞서게 된다.

최근 남는 시간에 만화책 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읽게 되었네요. 
이 만화는 이른바 90년대 식 소년 만화의 왕도랄까.. 뭐 그렇습니다. 외계에서 온 미지의 무언가에 의해 전투 무기가 되는 소년(들), 그리고 그 소년(들)이 그들을 쫓는 범세계적인 어둠의 조직과 맞서 싸운다는 배틀물로 지금 읽기에는 너무나 낡은, 흔해 빠진 설정이지만 당시 상당히 유행을 이루었던 소재로 기억됩니다. “열혈”과 “근성”, 그리고 “노력”으로 대표되는 소년만화 감수성이 강한 것 역시 90년대라는 시대를 느끼게 하기에는 충분하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러한 설정을 답습한 배틀물이 전부인건 아닙니다. 외계에서 온 생체병기(?)와 “진화”가 뒤섞인 이야기는 이미 “가이버”가 써 먹긴 했지만, 접근 방식이 전혀 다른 독특함을 지니고 있어서 아류작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요. “진화”를 곁들인 이야기의 변주가 괜찮았고, 이른바 “암스”라는 존재 보다는 “인간”이 더 강하고 소중하다는 주제가 꽤 그럴싸했던 덕분입니다.
아울러 주인공이 두뇌파에 실력을 겸비한 소년이라는 것 역시 독특했습니다. 주인공이 그 자체로는 이미 완성된 인물이라는 접근은 새로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암스 "자바워크"를 다루기 위한 약간의 성장통은 등장합니다만) 덕분에 “성장기” 로서의 소년만화적인 접근은 주인공 료보다 주인공 친구 하야토, 그리고 케이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도 신선했고요. 그 외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에서 따온 몇가지 장치들도 작품에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문제점도 확실합니다. “가이버”를 너무나 연상시키는 줄거리야 앞서 말했듯 “유행”이라고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단편 옴니버스 스타일이 아닌 장기 연재 장편이기 때문인지 곳곳에 스토리상의 헛점이 눈에 뜨입니다. 점점 강해지는 악당 캐릭터들의 상성도 문제점이었고요.
캐릭터들도 애매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라면 “백토끼” 다케시와 “하트의 여왕” 케이, 그리고 악당 중 한명인 “키스 그린”을 들 수 있습니다. 다케시와 케이는 "오리지널 암스"라는 거창한 칭호에 걸맞지 않게 주인공 친구 1, 2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이야기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할 정도로 비중이 모호하고, 잔인하고 냉정한 악당 “키스 그린’ 역시 갑작스럽게 카츠미에게 버닝하며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영 이해가 되지 않았던 탓입니다. 아울러 료의 부모인 전설의 용병 부부는 “만화” 라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과장의 극치라 설득력이 0에 수렴합니다.

그래도 적당한 길이로 완결지어 다행이랄까요? 이야기는 전형적이지만 완벽하게 마무리되고 결말 또한 뒷끝없이 깔끔한 해피엔딩이라 마음에 듭니다. 왕도의 길을 걸은, 마음 비우고 뒤적이기에는 좋은 작품이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그림도 좋은 편이니까요. 아직까지도 읽지 않으셨다면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2006/10/08

4개의 시계 (The Closcks) - 애거서 크리스티 / 황해선 : 별점 2.5점

4개의 시계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황해선 옮김/해문출판사

셰일라 웨브는 캐븐디시 비서용역 사무실에서 일하는 속기 타이피스트. 어느날 손님의 요청으로 윌브러햄 크레슨트가 19번지라는 낯선 주소로 출장을 간 그녀는 그곳에서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해양 생물학자이지만 영국 정보원으로 비밀리에 일하는 콜린 램은 크레슨트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사회주의 조직을 조사하다가 우연히 현장을 목격한 뒤, 사건을 맡은 하드캐슬 경부의 조력자로 사건에 뛰어들지만 집 주인이 장님인 맹아학교 교사라는 것, 피해자가 누구인지 도무지 밝혀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현장에서 한시간 빨리 가도록 조작된 4개의 시계 등의 수수께끼를 해결하지 못하고 아버지와 자신의 친구인 에르큘 포와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최근은 묘하게 크리스티 여사님 책만 열심히 읽게 되네요. 이 작품은 여사님의 54번째 추리 장편입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특이한 점이 있다면 화자로 "콜린 램"이라는 배틀 총경의 아들을 내세워 완전한 1인칭 시점으로 전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콜린 램 혼자 행동하고 관찰하여 수집한 정보를 포와로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라서 포와로는 그의 말 그대로 "안락의자 탐정" 역할만 수행하고 있으며, 독자 역시도 포와로와 똑같이 정보를 제공받기 때문에 진정한 독자와의 추리 대결이 가능한 방식인 것이죠. 그야말로 정통파 고전 미스테리로서 완벽한 조건을 갖추었다고나 할까요? 트릭 역시 깔끔하고요. 무엇보다도 초보자도 쉽게 수긍하고 즐길 수 있는 간단한, 그렇지만 정교한 여러 장치를 통해 사건이 해결되는 구조였다는 점에서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제일 중요한 첫 사건 이후에도 관련된 살인사건이 2건이나 더 발생하기 때문에 독자의 흥미가 계속 유지되며 콜린 램의 정보요원으로서의 활약도 약간이나마 사건과 교차하여 벌어지고 있어서 읽는 재미도 뛰어난 편이고요.

그러나 제목이기도 한 "4개의 시계"가 사실은 별 의미가 없다는 점은 큰 맹점이라 생각되네요. 셰일라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과정의 설득력이 제로에 가까웠기에 더더욱 불필요한 장치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어요.
또 트릭 자체도 분명 괜찮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단편으로 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나 상황묘사를 통해 조금씩 밝혀지는 진상을 결론에서 터트리는 방식이라서 이야기가 길게 늘어지면 질 수록 단서를 숨기기는 쉬웠겠지만 여사님 내공이라면 보다 이야기를 압축하면서도 핵심만 짚어낼 수 있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는 길어서 늘어지는 감이 있었거든요. 별반 중요치 않은 "비밀 정보요원" 콜린 램의 활약을 부각시킨 탓도 크겠지만.

그래도 역시 고수의 범작은 범인의 걸작과 맞먹는 법이죠. 아주 유명한 작품은 아닐 뿐더러 몇몇 단점들이 눈에 확연히 드러나 최고 걸작이라고 하기에는 모자라나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는 재미와 정교한 트릭이 곁들여진 두뇌싸움이 펼쳐진다는 점에서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