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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5

저녁싸리 정사 - 렌조 미키히코 / 정미영 : 별점 3점

저녁싸리 정사 - 6점 렌조 미키히코 지음, 정미영 옮김/시공사

"회귀천 정사"에서 이어지는, 꽃을 주제로 한 연작 미스터리입니다. 메이지~쇼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서정적인 꽃 미스터리 단편 세 편과, 가벼운 현대물 유머 미스터리인 "양지바른과 사건부" 시리즈 세 편이 실려 있습니다.

꽃 미스터리 시리즈는 꽃을 소재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 표면적인 사건과는 다른 진상이 숨어 있다는 점에서 전작과 동일하지만, 전작에 비해 다소 처지는 작품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전작은 "도라지꽃 피는 집"과 "회귀천 정사"라는 확실한 투톱 에이스가 중심을 잡아준 반면, 이번에는 "국화의 먼지" 한 편만이 이름값을 하기 때문이죠. "양지바른과 사건부" 시리즈는 유쾌하고 즐겁기는 했으나, 추리적인 면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별점은 3점. 전체적으로 평범하지만 "국화의 먼지" 한 편이 압도적인 완성도를 보여 점수를 많이 끌어올렸습니다. 이 작품 한 편만큼은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붉은 꽃 글자"

"내 몸 안에 동백꽃이 떨어진 거야.... 떨어진 채 빨간, 새빨간 피 같은 색으로 피어 있어...."

자신의 친구와의 가슴 아픈 사랑 후 죽어간 여동생을 위한 복수극… 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철저한 계획살인이었다는 의외의 반전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진짜 동기가 뒤에 숨어 있는 구조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근친상간의 감정마저 보이는 캐릭터들을 꽃잎으로 대표되는 탐미적인 묘사로 넘칠 듯이 그려낸 전개가 인상적이었어요.

하지만, 진짜 악당인 주인공의 1인칭 시점에서 그려지는 이야기가 너무 탐미적으로 묘사되다 보니, 심리묘사가 지나치게 아름다운 쪽에만 치우쳐 있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반전이 밝혀지는 부분에서 악당다운 모습을 더 보여주었더라면, 반전이 더욱 극대화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말이지요. 또한, 복수를 위해 동기(미즈사와와 미쓰의 관계)를 설정하는 과정이 과연 생각대로 가능했을까 하는 점도 다소 미심쩍었습니다.

그래도 "정사" 시리즈의 이름값에는 준하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저녁싸리 정사"

유명한 정사 사건과 관련된 당사자의 일기를 토대로, 어린 시절 우연히 정사 사건을 목격했던 주인공이 감추어졌던 진상을 밝혀낸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세간에 아름답게 알려진 사랑 이야기와는 다른 진상이 있었다는 점, 그 와중에 몇몇 본격물스러운 트릭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회귀천 정사"의 판박이입니다.

그러나 "회귀천 정사"에 비하면 확실히 처집니다. 정사 사건에 감춰진 진상, 즉 몰락한 사족의 후예인 신노스케가 가진 사회주의자로서의 야망과, 그를 이용해 오히려 사회주의자를 말살하려 한 다지마의 계획은 정사 사건과 어울리지 않아 괴리감이 느껴졌어요. 화자의 어린 시절 짧은 기억에 의지하는 부분은 논리적 비약이 심했고요.

무엇보다도, 신노스케가 다카미 내무대신을 살해한다면 다지마가 굳이 유우와 함께 알리바이 트릭을 만들지 않더라도 진신샤를 타도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거라는 큰 약점이 있습니다. 실제로도 진신샤의 암살이라고 공표된 후, 신노스케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잖아요? 게다가, 다지마 유우의 장지문을 이용한 그림자 트릭을 신노스케가 고심 끝에 알아내 살인에 이용한다는 설정도 억지스러웠으며, 신노스케의 이름과 싸리꽃의 발음이 같다는 점을 이용한 증언 역시 일본어 말장난에 가까워 한국 독자가 읽기에는 다소 와닿지 않았어요..

서정적인 묘사는 여전히 뛰어나지만, "전편만 한 속편이 없다"는 격언이 떠오르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국화의 먼지"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날을 배경으로 한 단편입니다. 그날 자살한 전 육군 기병연대 장교의 죽음에 우연히 관련된 "나"가 사건에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된다는 내용인데, 걸작이라 할 만합니다.

짧지만, 작가 특유의 서정적인 묘사와 "나"의 일기가 교차되며 전개되는 방식이 훌륭하고, 적절한 "원격조종" 트릭을 활용한 정통 추리물로서의 가치 역시 뛰어납니다. 무엇보다도 막부가 몰락하고, 막부를 따르던 무사 가문의 후예들과 천황을 추종하는 군인이라는 인물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 등 20세기 초반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십분 활용하여 역사 추리물로서의 완성도를 높였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합니다.

이 시대가 아니면 그려내기 힘든 트릭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별점은 5점. 이 단편만큼은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양지바른과 사건부 제 1화 하얀 밀고"

다이토 신문사의 잔반처리과인 신문 자료부 제2과는 ‘양지바른과’라고 다른 부서 직원들에게 놀림받는 신세였다. 그러한 양지바른과에 다이토 신문사 기자 살인사건의 범인이 신문사 직원 "시즈타"라고 밀고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여사원 아이코가 그 이야기를 사회부에 전한 얼마 뒤, 같은 목소리로 269명에 대해 추가로 밀고하는 전화가 걸려오는데...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사뭇 다른, 현대를 배경으로 한 코믹 미스터리 연작입니다. 결함 있는 사원들만 모여 있는 독특한 집단 ‘양지바른과’의 설정과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상당히 유쾌합니다. 와카타케 나나미의 코지 미스터리가 연상될 정도로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었습니다. 너무 만화 같지 않나 싶을 정도로 과장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스타일은 이 바닥 고전인 마크 트웨인의 작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니 감안해야겠죠. 덧붙여, 작가의 묘사력은 감출 수가 없는지 "범인의 목소리가 하얗다"라는 아이코의 느낌에서 ‘하얀 밀고’라는 단어를 이끌어내는 표현이 인상적이었고, 아이코와 타로의 밀고 당기는 사랑 이야기 또한 귀여웠습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일단 협박 전화를 건 이유부터가 설득력이 부족하며, 이러한 협박 전화를 걸면 결국 범인이 신문사 모든 직원을 알고 있는 내부 직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뿐이라는 점에서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또, 사건의 발단이 된 아이코가 이름을 잘못 알아듣는 것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고요. 게다가, 과정이야 어쨌든 범인을 체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는데도 시마다 과장이 왜 욕을 먹어야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경찰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겁고 유쾌한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러한 유머 미스터리를 작가 자신만의 스타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감탄스럽네요. 역시 재능이라는 것이겠죠. 작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기에 만족스러웠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제 2화 네잎 클로버"

1화의 5개월 뒤, 양지바른과 멤버인 오가와가 학예부로 이동하는 송별회에서 아이코는 다시 타로와 재회했다. 재회의 장소는 타로가 신문사를 그만두고 개업한 좁디좁은 라면집이었다...

오가와가 인터뷰를 맡은 인기 혼성 듀엣 ‘라라와 루루’의 라라가 살해된 사건을 다룬 단편입니다. 라라가 쌍둥이였다는 가십이 터진 후, 사라진 라라의 쌍둥이가 용의자로 급부상하는 이야기인데, 루루의 독특한(?) 취미 등 억지스러운 설정이 많아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웠습니다. 라라의 성형수술 등 불필요한 이야기가 많다는 점도 감점 요소였습니다. 한마디로, 추리적으로는 부족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나마 전편에서부터 이어지는 아이코와 타로의 밀당과, 아이코의 복잡미묘하지만 순진하고 귀여운 심리 묘사가 더 재미있었던 작품입니다. 유머 미스터리라기보다는 미스터리 터치의 로맨틱 코미디에 가까웠달까요. 이런 분위기도 나쁘지는 않지만, 미스터리로서의 매력은 다소 부족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제 3화 새는 발소리도 없이"

"증발 중인 부인이 돌아왔다 뭐 그런 거요."
"그 여잔 앞으로도 당분간 기체로 지낼 걸."

로쿠스케에게 정체불명의 여자가 접근하여, 수배 중인 테러범 "철뇌조"의 거처에 대해 밀고하게 한 뒤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더해 로쿠스케의 가출한 아내 이야기, 아이코와 타로의 여전한 사랑 이야기가 곁가지로 펼쳐집니다.

앞선 두 편과는 달리 폭탄 테러범 등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장난스러운 밀고 전화를 중심으로 한 일상계 추리물에 가깝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는 일상계 미스터리에 더욱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유머와 재기 발랄한 대사,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죠. 전작들은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강력 범죄가 등장해 조화가 깨진 느낌도 있었는데, 이 에피소드는 일상계 느낌이 아주 잘 어울려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추리적으로 너무나 별 볼 일 없다는 것입니다. 예상 가능한 이야기였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사건성도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도 유쾌한 캐릭터들의 소동은 읽는 내내 즐거웠고, 완벽한 해피엔딩 역시 귀여운 작품에 걸맞은 마무리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거장이 그린 소품으로는 아주 적절했어요. 귀여운 이야기를 계속 접하고 싶은데, 시리즈 후속작이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2005/10/17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 실록 - 박영규 : 별점 3점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6점
박영규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요사이 흥미가 생겨 바짝 많이 읽고 있는 역사관련 서적입니다. 역시나 집에 오래전부터 있던 책인데 이제서야 읽게 되었네요. 제목 그대로 조선왕조 500년의 정사 실록을 다이제스트 해 놓은 고등학교 참고서 같은 책입니다. 학생때는 읽지도 않았던 책을 나이 들어 관심갖고 읽으려고 하니 왠지 좀 웃기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방대한 내용을 한권에 실으려다 보니 엄청나게 요약, 압축했고 전부 정사 위주이므로 재미있는 부분은 그다지 없지만 한번에 조선왕조의 역사를 훝어 내려갈 수 있다는 점에서는 꽤 괜찮은 독서였다 생각됩니다.
조금 특이한 것이 저자는 객관적이고 현실 논리를 바탕으로 자신의 논리를 피력하고 있는데 정사와 저자의 판단이 틀린 왕은 광해군 정도입니다. 아무래도 정사 실록을 바탕으로 한 만큼 왕들에 대해 어떻게든 좋은 평가를 내리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더군요. 이 책을 보면 조선조 왕 중에서 왕의 그릇이 안되었던 왕은 연산군 밖에는 없어요.
그리고 지금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조선 몰락의 단초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붕당"은 사실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같은 저자의 견해가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폭넓게 실려져 있는데 이런 해석들이 꽤 재미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읽었던 역사 서적들이나 여러 드라마들과 비교해서 읽는 재미가 있어서 더욱 좋았어요. 예를 들면 "운부"에 나오는 한중혁이 소론, 김춘택이 노론이었다는 것 같은 것 말이죠. 그 외에도 드라마로 따진다면 "용의 눈물"과 "여인천하", "불멸의 이순신" 등의 실제 내용을 요약해서 정리하는데 큰 도움을 주네요. 앞으로 역사 서적이나 드라마를 읽고 보는데 요긴하게 쓰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왕의 계보에 대한 도표 이외에는 도판이 전무한데 붕당의 성립 및 그 분열에 관한 도표 정도는 부록 형식으로 넣어주는 것이 어땠을 까 싶고 편찬 경위는 그닥 필요 없는 내용이 아니지 않았나 싶긴 하지만 일반인이 손쉽게 읽기에는 어려운 정사 실록을 바탕으로 읽기 편하게 새롭게 구성하였고 당시 사회상 및 세계 정세의 요약은 물론 중요 인물들에 대한 내용도 상당히 많으므로 역사에 흥미가 있다면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최소한 저는 고등학교때의 참고서보다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런걸 본다면 교과서도 보다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2009/03/08

경성 자살 클럽 - 전봉관 : 별점 3점

경성 자살 클럽 - 6점
전봉관 지음/살림

황금광시대, 경성기담, 럭키경성에 이어지는 전봉관의 경성 관련 서적 네번째 작품입니다. 출간된지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알고 구입해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식민지 조선의 경성에서 벌어진 자살 사건을 다루고 있는 책으로,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고 1부는 "근대 조선의 사랑과 전쟁", 2부는 "근대 조선 잔혹사" 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작들과 비교한다면 재미와 사료적 가치는 좀 떨어진다 생각됩니다.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등 유사 도서에서 이미 접했던 이야기가 많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죠. 1부에서 많이 다룬 연인들의 "정사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그러한데, 대표적인 것은 윤심덕과 김우진의 현해탄 정사와 평양 명기 강명화 정사사건, 그리고 2부의 홍옥임, 김용주 동성애 정사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또 몇몇 이야기의 경우에는 새롭고 재미있긴 했지만 관련 기사 한두건의 내용을 통하여 이야기를 재조명하고 있기에 탄탄한 느낌이 부족해 보이기도 했고요. 예를 들자면 "상하이 국제 삼각연애 살인사건" 의 경우는 내용 전체가 "개벽" 1934년 12월호 "국제 삼객애의 혈제"에서 발쵀한 내용이더군요.

물론 전봉관씨의 몇 안되는 자료에서 사건을 재구성하는 능력은 여전히 돋보이고 다른 책들에서도 많이 접했던 사건들의 이면을 설명한다던가 - 윤심덕, 김우진 사건의 경우 후일담이라 할 수 있는 "생존설"을 다루고 있기도 합니다 - 하는 부분은 기대에 충분히 부응했으며 입시 지옥에 관련된 내용 같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있기에 책 자체는 충분히 만족스러웠습니다. 그 외에 독립운동에 관련된 이야기도 재미있었고요.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 등장하는 것은 경성 관련 도서를 많이 읽다보니 생기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좀 더 드라마틱한 사건이나 새롭게 알게된 내용이 많았더라면 4점은 충분히 줄 수 있는 책인데 아쉽네요. 그래도 경성을 무대로 한 창작활동을 하는 입장에서 군말하기 어려운, 참으로 고마운 책이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2018/10/19

흑백의 여로 - 나쓰키 시즈코 / 추지나 : 별점 2점

흑백의 여로 - 4점
나쓰키 시즈코 지음, 추지나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에서 일하는 여대생 리카코는 삶의 의미나 재미를 찾지 못한 탓에, 유부남 애인 도모나가의 부탁으로 함께 자살 여행을 떠났다. 아타미의 아가미 깊은 산 속에서 수면제를 다량 복용했지만, 리카코는 구토 증상으로 수면 상태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옆에 누웠던 도모나가가 칼에 찔려 죽었다는 걸 알고 놀란 그녀는 도쿄로 돌아와 도모나가의 죽음에 얽힌 진상을 밝혀내려 하는데...

오랫만에 추리 소설을 집어 들었네요. "일본의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다소 과한 별명의 소유자인 일본의 여성 추리작가 나쓰키 시즈코가 1975년에 발표한 장편입니다. 이전에 읽었던 저자의 장편은 두 편인데 나름 복잡한 트릭이 등장하는 "W의 비극"이 평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짝퉁인 "그리고 누군가 없어졌다"는 완벽한 졸작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두 작품 중간 정도 수준이네요.

특징이라면 사회적인 문제, 이슈가 전면에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누구나 쉽게 위조할 수 있는 호적, 호모섹슈얼과 바이섹슈얼, 트렌스젠더를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일본 사회파 스릴러, 추리물의 얼개를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두 청춘 남녀가 등장해서 미궁에 빠진 살인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일본 전역의 여행을 통해 전개되며, 이 와중에 제법 기발한 트릭과 진상이 선보이는 내용은 사회파 작가 중에서도 당시 일본을 평정했던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초기작 영향이 아주 짙게 느껴졌고요. 하여튼, 예상 외의 장르라 놀랐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장점, 단점도 모리무라 세이이치 작품들과 비슷합니다. 장점부터 설명드리면, 첫 번째는 쉽게 읽힌다는 점입니다. 도모나가 죽음의 진상을 쫓는 리카코와 실종된 매형 이와타의 행방을 쫓는 다키이가 우연히 만나 함께 사건을 파헤쳐나가는 과정 속에서 잇달아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등 독자의 흥미를 끄는 솜씨가 아주 제법이에요. 펄프 픽션이기는 하지만 읽는 재미만큼은 충분합니다.

두 번째 장점은 나름의 트릭과 더불어 이어지는 반전과 진상이 괜찮다는 점입니다. 도모나가는 자살할 생각이 없었고, 성전환을 한 아내 유키코의 비밀을 알고 협박하던 이와타를 아내가 살해하자 그 시체를 은닉하기 위해 동반 자살을 가장했다는게 진상인데, "성전환 수술"이라는 1975년이라는 시대를 놓고 보면 꽤나 앞서간 소재를 활용한 반전이 돋보여요. 이를 앞 부분에서부터 계속해서 복선을 던져주며 중간중간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 흘려서 설득력도 높습니다. 리카코가 남장을 한다던가, 남장을 하면서 기묘한 매력을 느낀다는 묘사는 지나쳤고 복선이 과한 탓에 어느 정도 되면 진상은 눈치챌 수 있기는 하지만요. 참고로 덧붙이자면 모리무라 세이이치 작품 중 1974년 발표된 "흑마술의 여자"가 살짝 떠오르기도 하는 반전으로, 성전환까지는 아니지만 질 형성술에 대한 내용이 유사한데 아무래도 조금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세 번째 장점은 정사를 하러 떠난 아타미로의 여정, 아오야마에서 오모테산도 등 도쿄 시내와 가사이, 이와타의 뒤를 쫓아 헤메는 후쿠오카, 리카코와 도모나가의 고향인 시즈오카 방문 등 다양한 지방을 방문한 묘사들입니다. 디테일도 좋고 생동감이 넘쳐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직접 방문한 느낌이 팍팍 나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행이 막 시작되었을 여정 미스터리 느낌인데 이런저런 흥행 요소를 모두 가져다가 인기작을 만드려는 작가의 의지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장점으로는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독특한 시각이 빛나는 묘사들을 들 수 있습니다. 죽은 도모나가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는 은빛 예거 르쿨루트, 집으로 돌아온 리카코가 찾은 담배는 오래된 하이라이트, 다키이의 차는 회색 코로나, 다키이가 주문한 술은 미즈와리라는 식의 디테일들이 발군입니다.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묘사는 숨어 살게 된 리카코의 이사 선물이자 집들이 기념으로 다키이가 사온 선물입니다. 인스턴트 커피, 각설탕, 하얀 머그잔 두 개인데 정말 센스가 대단해요. 또 월경곤란증 치료약으로 경구피임약으로도 알려져 있는 필이 주요 단서로 쓰인 점은 확실히 여성 작가라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었고요. 중간에 지하철에 우연히 본 여성을 보고 스스로 남장을 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여성이기에 할 수 있는, 그런 묘사였다 생각되네요. 남과 여, 누명을 쓴 리카코와 진범 등 정 반대 상황을 은유하여 붙인 제목도 멋집니다. 아마도 모리무라 세이이치였다면 굉장히 직접적인 제목이었을테지요.

그러나 흥행을 노리고 이런저런 요소를 모두 모아놓기는 했지만, 모든게 구태의연하다는 단점도 명확합니다. 질퍽한 정사 장면에서 시작되는 첫번째 문단부터 흥행을 노린 티가 물씬 나고요. 또 아무리 이인증이라는 병을 조금 앓고 있더라도 꽃다운 스물한살 여대생이 불장난 같은 불륜 상대, 그것도 열 일곱섯 살이나 많은 연상의 남자와 동반 자살을 쉽게 결심한다는 설정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럴거면 보다 깊은 관계였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불거지는 '정사'라는 소재는 구태의연의 극치라 할 수 있지요.

정사 이후의 과정이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뻔하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리카코와 다키이가 서로 만나게 되는 상황부터가 그러합니다. 리카코가 도모나가의 집을 찾아가는거야 그럴 수 있다 쳐도, 다키이가 도모나가의 집을 찾아가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에 불과하니까요. 게다가 매형 이와타가 실종되고 사흘만에 범인의 집을 찾아내고, 나흘간 잠복하다가 리카코를 만나게 되는 식인데 이 정도면 경찰이 도대체 왜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평범한 직장인이 훨씬 유능하잖아요?
이어지는 전개도 작위적이고 우연에 기반한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가사이가 죽기 전 마키노 의사의 이름을 남긴게 가장 억지에요. 그냥 "유키노는 남자였다" 라고 이야기하는게 당연합니다. 의사의 입을 통해 성전환의 과정을 설득력있게 표현하려 한 작가의 의도는 알겠지만, 도가 지나쳐 이야기가 산으로 간 느낌입니다.
그 외에도 호적 위조를 통한 신분 세탁이 반복되고, 유키노의 무모한 범행이 성공리에 거듭되는 전개도 별다른 고민이 느껴지지 않아 별로였어요.

이렇게 장점, 단점이 명확한 작품으로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모리무라 세이이치 작품들과 가장 큰 차이점인 해피 엔딩이라는 결말은 나쁘지 않으며 쉽게 읽히기는 하는 만큼, 이 작품으로 사회파에 입문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다키이가 요 몇 주 동안 쓴 돈이 도대체 얼마나 될지 궁금해서 대충 큰 비용만 따져 보았습니다.

  • 후쿠오카 비행기 2명 왕복
  • 리카코가 묵는 싱글룸 2박에 다키이가 묵는 스테이션 1박 호텔비
  • 꽤나 장거리 (합쳐서 시외 편도 한시간?) 왕복 택시비
  • 기차로 한시간 반 정도 걸리는 시즈오카행 신칸센 왕복 비용
  • 시즈오카에서 편도 삼십분 정도 택시 비용
  • 마지막 추격에서 삿포로행 비행기 편도 두 장
  • 치토세 공항에서 오카다마 공항까지 택시비
  • 메반베쓰행 비행기 편도 두 장

이를 한국 기준으로 후쿠오카는 부산, 시즈오카는 광주, 삿포로는 제주로 대체해보면 전부 백오십만원 정도 쓴 듯 합니다. 여기에 리카코의 임시 거처까지 마련해 주었고요. 1급 건축사 면허 소유자로 설계부서 내 1팀 주임이라고 하는데, 돈벌이가 꽤 괜찮은가 봅니다.

2019/09/22

진실의 10미터 앞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3점

진실의 10미터 앞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엘릭시르

프리랜서 기자인 다치아라이 마치가 등장하는 단편들을 수록한 요네자와 호노부의 단편집입니다. 

다치아라이 마치는 '고전부'나 '소시민' 등 다른 시리즈 캐릭터에 비하면 지명도가 낮은 편입니다. 등장 작품이 "안녕 요정", "왕과 서커스" 두 편 뿐이며 그나마도 "안녕 요정"에서는 주인공이라고 하기 힘든 탓입니다.

작품 특징이라면 웃음기를 쫙 빼고 서술되고 있으며 살인이나 자살과 같은 강력 사건들이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한 수록된 여섯 편의 단편 모두요. 대부분 비극이거나 씁쓸한 뒷 맛을 남긴다는 점도 마찬가지고요.

모든 이야기에 '기자' 라는 직업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조금씩 다른 해석으로 실려있는 것도 눈에 뜨입니다. 이야기 속 다치아라이의 취재는 대다수 독자를 위해 진실을 규정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극소수의 독자를 위해 눈에 보이는 진실이 아닌 그 이면을 들춰내어 밝혀내고,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입게된다는 내용이거든요.

이를 화자인 '나'가 다치아라이 마치인 "진실의 10미터 앞"에서 시작해서 '나'가 범인인 "정의로운 사나이", 다른 기자가 화자인 "고이가사네 정사", 3인칭 전지적 관찰자 시점인 "이름을 새기는 죽음", 그리고 취재에 동행한 제 3자가 화자인 "나이프를 잃은 추억 속에"와 사건의 주요 관계자가 화자인 "줄타기 성공 사례"와 같이 다양한 시점 변화를 통해 강조하는 솜씨도 인상적입니다.
이러한 묵직한 내용과 현란한 기교는 작가 요네자와 호노부 스스로 고교생 일상계에서 벗어나 진지한 주제를 다루고 싶었던 욕심에서 비롯된게 아닐까 싶네요.

작가의 이름값에 걸맞게 추리적으로도 꽤 괜찮습니다. 사소한 단서에서 진실을 끌어내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상당히 설득력이 높은 덕분입니다. 실제로 있음직한, 생활감 넘치는 단서와 전개는 작가의 특기인 일상계 추리물을 연상케 하고요. 전화 통화 내용만 가지고 자신이 찾는 인물의 소재를 밝혀내는 과정을 그린 "진실의 10미터 앞", 자살을 각오한 고교생 연인의 노트에 쓰여진 '살려줘'라는 글귀, 그리고 함께 죽지 않은 기묘한 현장에서 다른 사건과의 관련성을 눈치챈다는 "고이가사네 정사", 한 노인의 고독사 이면에 있는 진상을 그린 "이름을 새기는 죽음"이 특히 괜찮았습니다.

조금 억지스러운 이야기도 없지는 않고, 기자 의식을 무리하게 집어넣은게 아닌가 싶은 이야기도 있기는 합니다. 일본 전국을 누비지만 기묘할 정도로 여정 미스터리 느낌이 나지 않는것도 단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약간 아쉽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전체적으로 완성도 높은 수작 단편집이라 생각되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팬이시라면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나처럼 작품별로 상세하게 소개하며 리뷰를 마칩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진실의 10미터 앞"

나 다치아라이 마치는 사진기자 후지사와 요시나리와 함께 야나마시로 향했다. 도산한 벤처 기업 퓨처스테어 홍보 담당인 하야사카 마리가 실종되었는데, 그녀의 행방을 찾을만한 단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단서는 그녀가 여동생과 통화한 통화 기록 뿐으로, 다치아라이는 통화 기록을 토대로 야마나시의 명물 호토를 파는 가게 중 한 곳을 특정하여 그녀를 발견하는데 성공한다.

통화 기록 속에 숨겨진 몇 가지 단서를 통해 하야사카 마리의 행적을 밝혀내는 추리가 화려하게 펼쳐집니다. '타이어 문제로 움직일 수 없다'에서 눈이 내린 지역을, '우동 같은 음식'으로 야마나시 명물 '호토'를, 술에 취했다는 말을 통해 호토와 술을 함께 밤 늦게까지 파는 가게를 찾고 '말도 잘하는 멋진 남자'에서 마지막 목격자인 외국인 가게 종업원을 찾아내는 이야기로 모두 이치에 합당하고 설득력이 높습니다. 추리만으로도 별점 3점은 충분한 좋은 작품이지요.

하지만 숨은 그림 찾기같은 추리 외의 이야기 자체로는 별다른 내용은 없습니다. 하야사카 마리는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고, 관련된 기사도 쓰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작품들과 같은 주제 의식을 드러내기에는 좀 부족해서 아쉽습니다.

"정의로운 사나이"

막 투신 자살 사고가 일어난 지하철 플랫폼에서 '나'는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초래하는 짜증나는 여기자를 발견하는데... 

20여페이지 남짓한 소품인데 플랫폼 끝이 아니라 중간 지점에서 투신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사고가 아니라 살인이 아닐까 생각한 다치아라이의 재치는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민폐를 끼치는 인물에 대한 불쾌감'이라는 동기도 현대 사회에서는 충분히 있음직 하고요.

그러나 그 외의 내용은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범인이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다치아라이를 관찰한다던가, 다치아라이의 행동을 민폐로 여기고 불쾌해한다던가 하는 설정과 전개 모두요. 기자 의식을 다룬 부분도 짤막하게 등장하기는 합니다만 그렇게 중요한 내용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사건을 만나 기쁘다는게 진심인지 아닌지는 결국 밝혀지지도 않고요. 한마디로 가벼운 소품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고이가사네 정사"

미에 현에서 고교생 2 명, 구와오카 다카노부와 가미조 마리의 동반 자살 사건이 일어났다. "주간 심층"의 기자 쓰루는 현지 취재를 나서서 코디네이터 다치아라이와 함께 행동하게 되었다. 유언장에 남겨져 있던 '살려줘'라는 글귀와 고교 선생님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다치아라이는 이 사건이 의원 폭탄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내고 이 정보를 쓰루와 공유하는데...

가족을 통해 성폭행을 당해 임신한 여고생과 그녀를 돕지못해 좌절한 남고생이 함께 자살한다는 정사 사건 속 또다른 진상을 밝혀낸다는 이야기입니다. 함께 죽기를 원했던 둘이었는데, 왜 마리만 칼에 찔려 죽고 다카노부는 물에 빠져 교각에 걸린 사체로 발견되었는지?와 유언장에 남겨진 글귀, 그리고 현장에 남겨져 있던 와인 속 맹독인 '황린'을 통해 진상에 이르는 과정이 합리적이면서도 깔끔합니다. 그나마 믿을만하다 생각했던 '선생'이 사실은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 쓰레기로 둘의 죽음을 자신의 범행 은닉에 이용했다는 진상과 결말은 굉장히 씁쓸하면서도 잔혹하고요.

다치아라이가 주변인처럼 그려지며 그녀가 취재하는 의원 폭탄 사건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왜 시모타키 선생이 의원들에게 발화 폭탄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지요. 그래도 추리와 이야기 전개 모두 빼어난 수작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이름을 새기는 죽음"

중학생 히노하라 교스케는 이웃집 노인 다가미 료조가 고독사한걸 최초로 발견했다. 얼마 뒤 프리랜서 기자 다치아라이 마치가 그를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하고, 교스케는 그녀의 취재에 동행하는데...

다가미 료조가 지역 신문에 투고한 글과 다른 사람의 투고글, 그리고 다가미 료조의 집에 남겨져 있던 엽서 필적을 통해 피해자의 아들 다가미 우노스케가 아버지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진상이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다가미 료조가 '직함'에 연연하여 '이름을 새기겠다'는 사명감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설정이 돋보입니다. 기묘하지만 아주 그럴싸하거든요. 실제로 직함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많은게 사실이기도 하니까요. 이를 노인 고독사와 연결하여 전개한 솜씨도 아주 일품이에요. 

아울러 다가미 우노스케가 쓰레기지만 그의 입을 빌어 다가미 료조 역시 나쁜 사람이라고 다치아라이가 결론내리는 마지막 장면은 그녀의 기자로서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멋졌어요. 진실도 좋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은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와 닿기도 했으니까요. 덕분에 교스케는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한 발자욱 더 나아갈 수 있었을테지요.

실제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상 속 사건과 독특한 아이디어가 잘 결합한 좋은 작품이었어요.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 최고 작품으로 꼽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나이프를 잃은 추억 속에"

'나'는 오래전 여동생의 친구였던 다치아라이 마치를 만나기 위해 시골 소도시 하마쿠라를 찾았다. 그리고 다치아라이가 취재하는 유아 살인사건 취재에 동행하며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가는데...

"안녕 요정"의 핵심 인물이었던 유고슬라비아 유학생 마야의 오빠가 등장합니다.
그는 다치아라이가 취재하는 마쓰야마 가린 살인 사건 취재에 동행하여, 그 과정에서 다치아라이와 같은 기자에 대한 실망감과 환멸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여주는 '눈' 역할이 아니라 사실을 가공하여 미력하나마 피해자를 구해주려고 노력하는 다치아라이의 진면목을 취재 동행을 통해 알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건보다는 다치아라이가 어떤 기자인지를 알려주는게 목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는 범인으로 지목된 마쓰야마 가린의 삼촌 마쓰야마 요시카즈의 수기가 일종의 암호라는 암호 트릭물인데 대단한 추리가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극 중 다치아라이의 말대로 추후 요시카즈가 사실을 고백하고 경찰이 수사에 집중한다면 밝혀낼 수 있는 수준의 사건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다치아라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이야기이기는 한데 추리물로는 부족해서 감점합니다.

"줄타기 성공 사례"

나가노 현 남부를 덮친 수해 현장에서 일흔이 넘은 도나미 부부가 극적으로 구출된다. 부부는 사흘 동안 콘플레이크를 먹으며 버틸 수 있었다. 현장 근처에서 가업을 이어 가게를 운영하는 오바에게 다치아라이가 찾아와 도나미 부부에 대해 물어보는데...

한 여름에 콘플레이크를 무엇에 타서 먹었는지? 가 수수께끼로 등장하는데 이게 왜 수수께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콘플레이크는 꼭 우유에 타 먹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식품이잖아요? 게다가 그게 문제가 된다는 상황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노부부가 전기, 가스가 모두 끊긴 집에 고립된 상황에서 매몰된 이웃집에서 가동되는 냉장고를 사용한게 죄가 될까요? 그 집 음식을 전부 가져다 먹어도 괜찮았을텐데 말이지요. 이런 점을 굉장한 민폐로 여기고 미안해하는 수준을 넘어서 오열하는 노부부의 모습도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바는 '행방불명된 사람의 집에 들어가 목숨을 연명한 부부는 비난받을거다' 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야기가 성립된다고 생각되지 않아서 좋은 점수를 줄 수는 없네요. 추리적으로도 별다른 내용이 없고요. 이 단편집의 워스트 단편으로 꼽겠습니다.

2007/09/15

빨간 고양이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수상 단편집) - 정태원 편역 : 별점 4점

빨간 고양이 - 8점
니키 에쓰코 외 지음, 정태원 옮김/태동출판사

이 책은 1회, 1948년 부터의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을 수상한 단편들을 정태원 선생님이 번역하신 책입니다. 나온다는 정보를 접하고 구입 의욕에 불타던 단편집이었지요. 출간 즉시 구입, 완독하였습니다. 그만큼 저같은 일본 추리 소설, 그리고 단편소설 매니아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책입니다. 국내에 첫 소개되는 작가도 많고, 유명하지만 소개되지 않았던 걸작도 수록되어 있는 덕분입니다.
물론 아토다 다카시의 "손님"이라던가 니키 에쓰코의 표제작이기도 한 "빨간 고양이", 구사카 게이스케의 "휘파람새를 부르는 소년" 같이 다른 앤솔러지에서 이미 접한 작품도 있지만, 제 기준으로는 열 여섯 편의 수록작 중 세 편에 불과해서 납득할 만 했습니다. 다 좋은 작품들이기도 하고요.

선정된 작품들은 괴이한 분위기의 "해만장 기담"이라거나 대하 역사물 같은 "매국노" 등 작품의 스펙트럼이 무지하게 넓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추리작가 협회상 수상작들이니 만큼 전부 추리소설들이기는 합니다.
또 전체적으로 문학적인 풍취가 넘치는 작품이 많다는 특징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무슨 상이라는 걸 타려면 문학적으로도 어느정도 성과가 있어야 할테니 당연하겠지만요. 이런 부분은 저같은 고전 트릭물 애호가에게는 추리적으로 약간 부족해 보여서 조금 아쉽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그래도 덕분에 보다 폭넓은 층에 다가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부디 널리 알려져서 잘 팔려주면 좋겠습니다. 뒷부분 해설을 보니 2부도 기획중이던데 2부 출간을 위해서라도 꼭이요!

하여튼 전체 별점은 4점입니다. 대부분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지만 가장 만족했던것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유명한 걸작 "돌아오는 강의 정사 (회귀천 정사)" 였습니다. 일본 시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독특한 이야기는 역시 명불허전이더군요. 비록 일본시가 한국어로 번역되며 그 풍취를 많이 잃었다 하더라도 걸작은 역시 걸작이구나 싶었습니다. 나머지 작품들도 다 좋은데 좀 취향을 탈 것 같은 작품들은 몇개 있긴 했습니다.

아울러 책의 내용말고 다른 점을 좀 짚어보자면 오탈자가 가끔 있는 편이라 초판 이후에는 수정되었으면 하고, 책의 두께도 엄청난 편인데 양장으로 출간되어 무게를 가중시키는 것도 문제로 보입니다. 폰트를 좀 줄여 두께를 줄이고 양장대신 평범하게 제작하여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말이죠. 과거 다른 태동 출판사의 책들 수준의 크기와 가격이었더라면 만족도가 훨~씬 높았을텐데 좀 아쉽습니다.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초승달 - 기기 다카타로

부유한 호소다 에이스케와 아야코 부부는 30살이 넘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야코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아야코 집안에서 살해 의혹을 들먹이며 변호사를 통해 위자료를 요구해 왔다. 사건의 진상은?

1948년의 첫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상 수상작입니다. 정태원 선생님 해설을 통해 작가가 작품에서의 문학적인 부분을 굉장히 강조했던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작품 역시 순문학적인 정취가 물씬 풍깁니다. 사실 트릭이라는 것이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라 본격물로 보기에는 힘들지만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완성도가 무척 높다는 느낌을 전해 주네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짤막한 단편이 본편보다도 훨씬 인상적이었습니다. 뭔가 환상특급 같은 느낌을 주었거든요.

2. 해만장기담 - 가야마 시게루

대 부호인 쓰가모토 박사는 지상에 지옥을 구현하였다는 해만장이라는 저택으로 유명했다. 박사의 외아들 고비오의 생일파티가 해만장에서 있던 밤, 박사의 딸인 마야와 고비오가 엽기적인 방식으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고지라의 원작자인 가야마 시게루의 작품으로 1948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신인상 수상작이라고 합니다. 

가야마 시게루는 전에 "넹고넹고"라는 환상문학적인 작품을 이미 접해보긴 했는데, 이 작품 역시 설정 자체가 약간은 허구에 근거하고 있어서 정통 추리물보다는 환상 추리 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저자의 방대한 박물학적 지식을 토대로 구현된 세계관은 압권입니다. 변격물과 정통파의 중간지점쯤에 위치했다고나 할까요? 과학적으로 뭔가 있어보이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실제 생물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트릭은 60여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새롭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작가의 지나치게 장황한 묘사는 부담스럽습니다.

3. 눈속의 악마 - 야마다 후타로

다마에라는 아름다운 무용수에게 반한 의대생 다치바나는 자신의 친구였던 부자 가타쿠라에게 그녀를 빼앗기고 좌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가타구라가 의처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뒤, 다치바나는 우연히 알게된 다마에의 비밀을 통해 의학적 지식을 활용한 음모를 꾸미는데... 

유명한 고전 일본 추리작가 야마다 후타로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지만 작품 자체도 명불허전! 특히 예전 읽었던 "마지막 인사"에 비교해 본다면 추리적 요소가 많다는 것 역시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순전히 다치바나의 1인칭. 그것도 서간문 형식으로만 구성된 전개 방식도 독특하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새로왔을 의학적 트릭을 이용하고 있다는게 놀라왔던 작품입니다. 심리를 잘 이용한 교묘한 트릭이라서 마음에 드네요. 

4. 허상음락 - 야마다 후타로

음독으로 빈사상태에 빠진 유미코는 시동생 우스케에게 치아키 의사가 있는, 자신이 과거에 근무했던 병원으로 옮겨줄 것을 부탁했다. 치아키 의사는 진료 중 유미코의 몸에 드러난 수많은 상처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데... 

위의 "눈속의 악마" 보다도 작가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그런데 작품은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탐미주의적 문학관이 짙게 옅보이는 심리극으로 보는게 맞습니다. 추리적 알맹이는 그다지 많지 않거든요. 

그러나 애증 관계의 색다른 해석과 덧없는 결말이 펼쳐지는 인물과 심리 묘사가 워낙 탁월하여 작품 자체로서 높이 평가받는 듯 합니다. 솔직히 추리물로 보이지는 않아서 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다는건  의외이지만요.

5. 린치 - 오쓰보 쓰나오

10년만에 출옥한 전 야쿠자 세이기치. 그는 도난당한 금불상의 행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로 알려진 탓에 야쿠자 조직의 표적이 되었다. 

과거의 금불상 도난 사건과 현재. 그리고 야쿠자 조직의 흥망성쇠가 얽힌 이야기로 복잡한 인간관계가 후반부에 가서 모두 밝혀지는 하드보일드적 작풍이 독특합니다. 사건이 트릭보다는 일종의 "해설"에 의해 설명된다는 것 역시 비슷했고요. 하지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이 동양적 정서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 하드보일드 작품과 차이점이라 할 수 있겠죠.

걸작까지는 아니지만, 많은걸 생각하게 해 주는 작품입니다.

6. 어떤 결투 - 미즈타니 쥰

야스코를 놓고 경쟁하던 두 젊은이 시라사키와 구보타는 결국 권총 결투를 벌이는데 시라사키가 죽고 말았다. 친구 그룹은 사건 은폐를 위한 조작을 시도하는데... 

이 단편집에 드디어, 처음으로 등장한 정통 추리물입니다. 짤막하지만 권총 결투라는 소재를 도입한 이국적인 설정이 돋보입니다. 단지 이국적인 느낌만 전해주려고 등장한 설정이 아니라, 실제 사건에 중요한 요소로 쓰이는, 트릭의 근간이 되는 설정이라는 것도 아주 마음에 들고요. 작품 중간에 등장하는 여러 조작과 그것을 밝혀나가는 경찰과의 두뇌싸움도 볼만 합니다. 

다른 작품들처럼 문학성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추리물로 즐기기에는 부족함 없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7. 매국노 - 나가세 산고

전쟁 (2차 세계 대전) 말기 중국 베이징에서 사토미야 료스케는 친일신문 사장 2명의 진상 조사를 체리라는 아가씨에게서 의뢰 받았다. 조사를 진행하던 중 그는 이 사건이 일본의 신기인 곡옥과 얽혀있는 것을 알게 되는데... 

실제 중국 거주민이었던 작가의 아주아주 디테일한 당시 묘사가 돋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사건의 트릭 자체는 너무 보잘 것이 없습니다. 대하 역사극에 일부로 추리적 요소가 삽입되었다고 보여질 정도로 추리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아요.

8. 여우의 닭 - 히가게 죠기치

신지는 나무를 하던 중 낮잠을 자다가 악몽을 꾼 직후, 형수 모치의 시체를 발견했다. 스스로 범행을 저질렀다 생각한 신지는 사건 은폐를 위해 시체를 숨겼지만, 또 다른 시체가 발견되어 경찰의 표적이 되는데...

전쟁 직후 귀환병의 비참한 생활을 잘 묘사한 문학적 흥취도 뛰어나지만 실제로 사건, 동기, 트릭의 3박자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걸작입니다. 날짜별로 구분된 챕터는 조금 거슬렸지만 워낙 묘사와 전개가 뛰어나 보는 내내 흥미진진하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여운을 남기는 결말 역시 인상적이에요.

9. 피리를 불면 사람이 죽는다 - 쓰노다 기쿠오

경찰청 담당 기자 료스케는 자신이 썼던 완전범죄 기사에 대한 반박글을 보냈던 에나라는 아가씨가 사건의 중요 참고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관계된 완전범죄를 실제로 목격하는데...

경찰과 관계자가 보는 앞에서 벌어지는 완전 범죄를 그린 단편입니다. 일반적인 범죄물로 그려지다가 한번의 반전을 통해 트릭물로서의 가치도 전해줍니다. 전후 일본의 혼란과 인간의 잔인합도 약간 그리는 사회파적인 특성도 조금 있고요.

10. 그린차의 아이 - 도이타 야스지

노배우 나카무라 가라쿠는 7년만에 무대 복귀를 결심하지만 복귀 무대의 아역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망설이고 있다가 지인과 함께 신칸센 그린차를 타고 도쿄로 떠났다. 그리고 그린차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소녀의 정체를 놓고 추리가 시작되는데..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라는 가부키 배우 나카무라 가라쿠가 등장하는 소품으로 대단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차분하고 소박한 내용이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일상 생활 속에서의 추리" 라는 점에서 정말이지 취향 저격이었어요. 아울러 가부키에 대한 작가의 깊은 이해와 지식이 특히나 돋보였고요. 

그런데 설정과 캐릭터에 비한다면 추리적인 요소는 약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11. 시선 - 이시자와 에이타로

가지하라 형사는 자신의 조카와 결혼을 앞둔 후배 시바타 형사와 탐문수사에서 돌아오던 중, 한 결혼식을 바라보다가 신부가 지난 은행강도 사건 피해자와 관련이 있는 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선으로만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라는 명제를 가지고 전개되는 짤막한 작품입니다. 단편에 최적화된 듯한 내용과 전개는 흡입력이 상당하더군요. 길이에 비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으로 드라마틱 하지는 않지만 묵직하게 전해주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12. 손님 - 아토다 다카시

이전에 읽었던 "Y의 거리"에 포함되었던 작품으로 아토다 다카시 특유의 반전이 인상적인, 서늘한 느낌의 작품입니다. 아토다 다카시의 대표작이자 최고 걸작은 "나폴레옹광"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작품 역시 만만치 않은 전율을 가져다 주는 좋은 작품이죠.

13. 빨간 고양이 - 니키 에쓰코

역시 이전에 읽었었던 "에도가와 란보상 수상작가 걸작선"에 포함되었던 작품입니다. "빨간 고양이"라는 인형에 함축된 중의적 의미를 풀어내는 트릭과 범인을 집어내는 과정이 합리적이고 타당한 정통 안락의자형 추리물로 추리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처량하고 너무 착하게 끝나는 결말은 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작가 니키 에쓰코의 작품군이 대체로 해피엔딩에 기반한 만큼, 작풍이라 보는 것이 맞겠죠. 어쨌건 정통 추리물 애호가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는 작품입니다.

14. 돌아오는 강의 정사 - 렌조 미키히코

근대의 천재시인 소노다 가쿠요는 2번의 정사 미수 끝에 자살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이기도 했던, 그리고 그의 전기를 쓰다가 중단한 "나"는 그의 2편의 정사 미수 후 발표된 "정가"와 "소생"이라는 시를 분석하여 그 사건의 진상을 알아챈다.

"문예춘추 선정 일본 미스테리 100선"에 9위로 선정된 "회귀천 정사". 바로 그 작품입니다. 천재 시인의 연작시를 토대로 과거를 밝혀내는 전개의 작품으로 시를 통해 발현되는 문학적 가치도 빼어나지만 사건 앞뒤에 포진한 단서와 복선을 가지고 결말까지 이르는 과정 역시 이치에 합당하며 정교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 한편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가 여러배 높아지는, 그만큼 뛰어나면서도 항상 읽고 싶었던 작품이기에 무척 만족스럽네요. 

단 일본어 였을 때 너무나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느껴졌을 싯구들이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그 맛을 좀 잃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점이 있고 정통 추리물이라고 하기에는 추리의 과정이 심심한 편이긴 합니다. 그래도 걸작은 걸작입니다.

15. 나무에 오르는 개 - 구사카 게이스케

"나"는 동생 겐지가 유일한 친구 히데오와 개가 나무에 올라갈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로 격렬하게 싸우는 것을 중재하다가 과거 헤어진 연인 마치코의 집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며칠 뒤 개가 우물에 빠지고  겐지마저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자 "나"는 모든 사고의 원인이 된 나무에 올라가 모든 사건의 결정적 단서를 찾아낸다. 

제가 그간 읽었던 구사카 게이스케의 작품은 항상 등장인물이 많지 않아서 소품 느낌을 주면서도 정교함과 더불어 독자의 뒷통수를 치는 반전이 인상적인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형 사건은 벌어지지 않지만 과거의 사건과 연결되어 정교하게 현재 시점의 사건을 다루는 솜씨가 역시나 탁월해서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반전도 인상적이고요.

16. 휘파람 새를 부르는 소년

역시나 "에도가와 란보상 수상작가 걸작선"에 수록되어 접해보았던 작품입니다. 거기서는 "꾀꼬리"라고 되어 있지만 같은 작품이죠. 위에 쓴 평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더 마음에 듭니다. 추리나 결말이 더 제 취향이었다고나 할까요?

2024/08/10

열린 어둠 - 렌조 미키히코 / 양윤옥 : 별점 2.5점

열린 어둠 - 6점
렌조 미키히코 저자, 양윤옥 역자/모모

"회귀천 정사"로 유명한 렌조 미키히코의 단편집. 원제는 "夜よ鼠たちのために (밤이여, 쥐들을 위해)". 모두 아홉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1983년에 출간된 나름 고전(?)으로 일본에서도 꽤 오래 절판 상태였었는데,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2014년 판에서 '복각(재출간) 희망! 환상의 명작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한 덕분에 2014년에 복간된 이력이 있습니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아래와 같이 극찬하는 인터뷰와 글을 남겼을 정도로 좋아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 미스터리의 재미 중 가장 큰 것은 무엇인가 하면, 역시 마지막의 반전, 결말의 의외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편에서 그걸 내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단편집은 모든 작품이 놀라운 반전 구조를 그립니다. 생각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전개를 실현한 작품들입니다. 마치 네거티브 필름이 포지티브로 바뀌는 것처럼, 결말에서 흑백이 뒤바뀝니다. 모든 작품에서 완전히 속아버릴 수 밖에 없어요. 전후 미스터리 단편집 중에서, 저는 이 책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표제작입니다. 미스터리라는 성격상, 스토리를 말하는 것은 스포일러가 되므로 삼가겠습니다만, 제가 만약 단편을 쓴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an・an」 1990년 11월 23일호, 아야츠지 유키토 「나의, 한 권. 멋진 반전의 구조. 전후 최고의 미스터리 단편집」에서)
  • 아야츠지: 렌조 작품은, 일반적으로는 나오키상 수상작인 연애소설 『연문』이 유명합니다만, 충격적이었던 것은 역시 먼저, 『회귀천 정사』, 『은밀한 상복』 등의 초기 단편집입니다. 지금은 고분사 문고로 읽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밤이여, 쥐들을 위해』입니다.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실업지일본사에서 신서판으로 나왔고, 신초문고와 하루키 문고로 차례로 옮겨졌는데, 현재는 절판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 서술 트릭 계열 단편집의 최고봉인데......아깝네요. (「작가의 독서도 제150회: 아야츠지 유키토」에서)

읽어보니 이 정도 극찬을 받을만한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호평은 이해가 됩니다. 서정성과 트릭이 잘 결합되어 있던 작가 최전성기 시절("회귀천 정사" 시절)답게, 추리적으로 굉장히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트릭이 사용된 정통 본격 추리물에서 유괴극, 복수극, 서술 트릭 반전극, 느와르 등 수록작의 장르도 다양합니다. 과하게 느껴졌던 작가의 묘사도 다른 후기작에 비하면 절제되어 있어서 부담이 덜하고요.
모든 수록작이 다 괜찮은건 아니지만, 더운 여름, 한 번 읽어볼만하다 생각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가득하다는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두 개의 얼굴"
화가 마사키 유스케는 아내 게이코가 신주쿠 호텔에서 살해당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택 침실에서 유스케가 살해해 뒷마당에 파묻었다. 호텔 사건의 여자가 게이코라면, 유스케가 집에서 죽인 여자는 누구인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유스케는 죽인 여자의 얼굴을 그날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유스케는 호텔 사건에는 알리바이가 있었기 때문에, 호텔에서 발견된 여자를 게이코로 만들어 버리자고 마음먹었다...

진상은 유스케의 범행을 목격한 동생 신지가 자신을 협박하던 꽃뱀 여자를 함께 처치해 버렸던 겁니다. 마침 몸매가 비슷해서 속일 수 있었지요. 이 때 집 안에 전화가 두 대 있는 것을 이용해서 '순간 이동' 트릭을 선보입니다. 전화가 걸려와 안부를 물으면 당연히 외부에서 전화를 했을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같은 집 안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간단하면서도 현실적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유스케가 살해한 아내의 사체가 이동한 이유도 잘 설명되고 있으며, 사건에 대한 유스케의 심리묘사도 독자의 흥미를 더해주는 요소입니다. 서스펜스가 제법이었어요.
하지만 단편이라서 설명이 부족하며, 작위적으로 전개한 부분은 눈에 거슬립니다. 우선 신지가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건 너무 뻔했습니다. 신지를 협박하던 꽃뱀 여자가 유스케 집까지 찾아와 지문을 남긴건 억지스러웠고요, 마지막 신지의 장난도 이유를 알기 어럽습니다.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7인 1역"과 유사하다는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과거에서 온 목소리"
'나'는 금수저 출신으로 형사일을 견디다 못해 2년만에 그만두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뒤, 그만 둔 이유에 대해 강 선배에게 편지를 썼다.
1년 전, 전일항공 부사장 야마후지 다케히코의 외아들 가즈히코 유괴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 부인을 전화기에 붙잡아 놓은 상태에서, 담을 뛰어넘어 아이를 유괴했다. 경찰은 몸값을 확보하고 도주하던 범인을 미행하다 놓치고 말았다. 다행히 몸값을 받은 범인은 아이를 무사히 풀어주었고, 이후 공개 수사로 전환한 경찰에게 정체가 드러난 범인 오카다는 자동차 사고로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유괴범에게 동정심을 느낀 '나'는 당시 일부러 범인이 도주하도록 수사를 방해했다. 유괴범 중 한 명이 강 선배라는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건 범인이 '내일'이 금요일인지 토요일인지 정하지 못했던 상황을 통해, 범인이 두 명이며 둘 사이 커뮤니케이션이 원할하지 않다는걸 추리해 내는건 아주 좋았습니다. 두 명 중 한 명이 아이를 유괴당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부잣집 아들을 유괴해 몸값을 받아내려 했다는 발상도 재미있었어요. 실행범은 자기 아이를 유괴한 범인의 요구사항을 자기가 유괴한 사건 피해자에게 그대로 전달만하면 된다는 아이디어인데, 정말 획기적인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강 선배가 오카다를 살해했을거라는 결말도 합리적입니다. 오카다가 체포되면 진상이 드러날 수 있으니, 경찰이 체포하기 전 정보를 흘려 유인한 뒤 살해했다는건 말이 되니까요.

그러나 유괴가 이렇게 겹쳐서 강 선배가 피해자이자 범인이 된다는건 다소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나'가 강 선배의 눈에서 이십 년 전 범인 눈빛을 떠올린 덕에 진상을 깨달았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나'가 집 안에 있는 신이치가 사실은 유괴당한 가즈히코라는걸 눈치챈건 앞선 복선으로 설명되지만, 독자는 눈치채기 힘들다는 점에서 공정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유괴 피해자가 몸값 마련을 위해 유괴범이 된다는 아이디어는 아주 좋았던만큼, 이를 확장한 장편으로 묵직하게 썼다면 "킹의 몸값"과는 또 다른 딜레마를 안겨다주는 좋은 작품이 될 수도 있었을것 같은데 아쉽네요. 그래도 아이디어만으로 별점 3.5점은 충분합니다.

"화석의 열쇠"
하반신 마비 소녀 지즈가 목이 졸려 죽을 뻔 했다. 피해자 집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창문은 모두 안에서 잠겨 있었고, 출입구는 현관문밖에 없는데 열쇠는 관리인 사와가 보관하고 있었다.

지즈가 엄마를 집에 들이기 위해 자물쇠 바꾸는 청년을 속여 헌 자물쇠를 달게 했고, 엄마와 아빠 모두 지즈가 부담되어 살해하려 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이를 드러내기 위한 정보 제공은 공정합니다. 지즈가 자물쇠 바꾸는 청년에게 상황에 맞지 않는 초콜릿 부탁을 한 것, 관리인 사와가 엄청나게 청소를 열심히 한다는 등 상황에 대한 공유는 확실하니까요. '열쇠 화석'이라는 말도 단서로서는 좋았습니다. 사와가 이 모든걸 깨닫는 전개는 일상계스러워서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 둘이 동시에 딸을 살해할 생각을 한다는건 와 닿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다면 자기가 빠져나갈 생각을 할까요? 신파적인 결말도 별로였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기묘한 의뢰"
흥신소에서 일하는 나에게 쓰치야 마사하루라는 의뢰인이 찾아왔다. 아내 동향 조사 의뢰를 위해서였다. 아내 사야코는 하릴없이 이곳 저곳에서 시간만 보냈다. 알고보니 그녀는 나의 미행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고, 나에게 오히려 남편 쓰치야의 행적 조사를 부탁했다. 알고보니 나를 이용해서 몰래 불륜 행각을 저지르기 위함이었다. 이 역시 쓰치야에게 들켜버렸고, 쓰치야는 자기 행적 조사를 거짓으로 전달하라고 했다. 전달하기 위한 쓰치야의 행적은 애인 유리의 맨션 주소와 연락처로 받으려 했는데, 그 뒤 유리가 살해되었다...

쓰치야는 유리의 다른 애인으로, '나'와 유리의 관계를 알고 유리를 살해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조사를 맡긴건 유리와 나의 관계를 확실히 알아내기 위해서였고요.

나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그리고 냉소적인 심리묘사가 대부분으로 추리적으로 딱히 눈에 뜨이는 부분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묘사로 '나'의 별로인 모습만 드러나 작품에 몰입하기 힘들다는게 문제입니다. 쓰치야 부부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모습은 무능력했고, 유리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는 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마지막에 자신이 쓰치야에게 농락당한 것에 불과하다는걸 알아 버렸지만, 그냥 그대로 끝나버리는 결말은 이게 뭔가 싶더군요. 이야기가 완결되었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어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밤이여, 쥐들을 위해"
어린 시절 불우했던 나는 교정을 받아 사회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를 잃은 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복수를 결심했다. 
병원 원장 요코즈미 다다오는 '나'의 협박 전화를 받고 서둘러 집을 나선 뒤 살해당했다. 경찰은 백만엔이라는 돈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나'의 원한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추정했다. 이후 원장 사위이자 내과 부장 이시즈의 사체도 발견되었다.

'나'인 쓰무라의 아내는 불치병 뇌종양이었고, 병원의 과실로 죽은게 아닙니다. 그런데 왜 백만엔이라는 돈을 건네려고 했을까요? 이 수수께끼는 흥미롭습니다. 알고보니 이하라의 아내 후미요에 대한 오진을 숨기려고 원장과 내과 부장이 그녀가 백혈병에 걸리게 만들었다는게 진상입니다. 생각도 하지 못했네요. 쓰무라와 이하라의 정체가 독자가 알고 있던 것과 정 반대라는게 드러나는 반전도 좋았습니다. 잘 짜여진 서술 트릭물로, 독자를 완벽하게 속이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단 둘의 흉터는 너무 노골적으로 속이겠다!는 의도가 보여 좀 별로였고, 어린 시절 쥐를 죽였던 원한으로 살인까지 저지른다는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하라는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수 밖에 없었으니 억지스럽더라도 죽일 수 밖에 없는 동기를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작가의 고충은 이해가 되지만, 억지는 억지에요. 그래도 심리 묘사가 탁월한 덕분에 생각보다는 잘 설명되는 편이라 다행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이중생활"
마키코는 열 여섯살 많은 슈헤이에게 젊음을 바쳤지만, 자신을 버리려하는 슈헤이에게 증오를 느꼈다.

정부인줄 알았던 마키코가 진짜 아내이고, 반대로 나이많은 시즈코가 정부이자 불륜녀라는 반전이 인상적입니다. 이 반전을 결말 부분까지 잘 숨기면서 전개한다는 점에서는 서술 트릭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마키코가 남편 슈헤이와 불륜녀 시즈코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살해당한 것처럼 자살한다는 반전, 그리고 이를 위해 데쓰오와 시즈코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방법도 잘 짜여져 있어서 범죄물로도 우수한 수준이고요.

그런데 마키코가 정부 데쓰오를 범행에 끌어들인건 억지스럽습니다. 불륜을 저지르다가 살해당한 모양새이니, 마지막 순간치고는 영 폼이 나지 않으니까요. 데쓰오 없이도 현장 상황 - 슈헤이가 받아온 수면제가 들어있는, 슈헤이가 즐겨 마시던 와인 - 과 스토브 지문으로 슈헤이에게 누명을 씌우는건 가능했을것 같거든요. 시즈코마저 옭아매기 위해 데쓰오를 이용했다고보면 말은 돼지만, 이 역시 나이든 시즈코와 데쓰오가 불륜 관계라는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작위적입니다. 조건이 갖춰진 뒤에야 실행 가능한 계획이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도 힘들고요. 

단편이 아니라 장편이었다면 좀 더 설득력있는 인간 관계를 쌓아올리는게 가능했다는 측면에서, 조금 긴 호흡으로 풀어나가는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대역"
인기 배우 하세쿠라 슌은 아내 료코와의 이혼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 자신과 꼭 닮은 남자 다카쓰 신야를 찾아냈다. 그러나 료코가 슌의 불륜을 알고 있었으며, 이혼할 생각도 없다는걸 알게된 뒤 료코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다카쓰 신야를 이용한 알리바이를 만들어서였다. 오사카에서 다카쓰를 자신인 척 연기시킨 뒤, 자신은 변장하고 도쿄로 가서 살해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료코는 없었고, 오사카로 돌아간 뒤 자신의 방에 죽어있는 기누에를 발견했다. 이 모든건 료코와 다카쓰의 음모였었다.


하세쿠라 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완전 범죄물로는 볼만합니다. 도무지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완벽한 계획이었습니다. 하세큐라 슌의 대타가 다카쓰 신야가 아니라, 료코와 기누에 입장에서는 그 반대였다는 반전도 인상적이었어요.
 
하지만 이야기의 현실성이 많이 떨어집니다. 애초에 이렇게 닮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 주위에 같은 여자들이 엮이게 된다는 것 부터가 말이 안되지요.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기는 했는데, 말이 되는 이야기로 만드는 데에는 실패한 셈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베이 시티에서 죽다"
동거녀와 믿었던 아우에게 배신당한 조직원이 출소 후, 둘이 함께 도망친 항구 도시로 찾아가 모두 죽여버린다는 느와르.. 묘사도 멋있고 배신의 진상 - 없던 죄를 뒤집어 쓴게 아니라 원래 내가 지은 죄였다는 - 도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딱히 흥미롭지는 않았습니다. 추리적인 맛은 거의 없고, 내용도 신선함이 떨어지는 탓입니다. 그냥 서정적인 '사나이' 이야기를 한 편 쓰고 싶어 쓴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열린 어둠"
불량 학생들만 다니는 사립 세이에이 고등학교 음악교사인 미즈키 마사는 '마더'라는 별명으로 학생들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어느날 퇴학당한 폭주족 블랙호크스 멤버 중 한 명인 노리코가 긴급한 도움 요청을 해 왔다. 리더 다카기가 살해당했다고 했다. 노리코와 함께 현장에 온 마사는 경찰에 신고하려 했지만, 노리코가 유력한 용의자라는걸 알고 한 시간만 더 고민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카기의 죽음이 학교 체육 교사 아카자와 다케시 살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아카자와는 동성애자였다.

불량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을, 학생과 얼마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열혈 신입 교사가 해결한다는 내용으로 7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청춘 미스터리'의 영향이 가득 느껴집니다. 동성애로 인한 삼각관계가 원인이라는 점은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신선한 편이고요. 요새 이런 설정이 유행이라는데, 나도 한 번 써볼까!라는 생각으로 쓴 듯한데 의외로 괜찮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습니다. 다카기가 폐소 공포증이라는게 핵심 단서인데 - 아카자와 선생의 차는 비가 오는데도 창문이 열려있었다 -, 이는 여러가지 단서로 독자에게도 공유됩니다. 노리코가 아침에 다카기의 방에서 쫓겨난 건 창문을 닫으려고 해서, 다카기가 초고층 맨션에서 뛰쳐나온건 엘리베이터를 탈 수가 없어서, 다카기가 폭주족이 된 건 차를 타기 싫어서였다는 식으로요. 
미즈키 마사가 학생들 앞에서 추리쇼를 펼쳐 진상을 밝히는 전개도 정통 본격 추리물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다카기가 스즈타에게 아카자와 살인 혐의를 뒤집어 씌우려고 현장을 조작했기에, 스즈타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걸 증명하려고 다카기를 살해하고 노리코에게 혐의를 씌웠다는 동기는 설득력이 약합니다. 후더닛 물로는 괜찮았지만, 와이더닛 측면에서는 좋다고 하기 어렵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2011/03/28

회귀천 정사 - 렌조 미키히코 / 정미영 : 별점 3점

회귀천 정사 - 6점
렌조 미키히코 지음, 정미영 옮김/시공사

꽃을 소재로 한 5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중단편집입니다. 국내 최고의 미스터리 커뮤니티인 하우미스터리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게 되었네요. 리뷰에 앞서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드립니다.

이 작품집의 대표작이자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회귀천정사"는 이전 "빨간 고양이"라는 좋은 앤솔러지에서 이미 접했었지만, 전체 연작 시리즈를 한 권으로 만나니 재미가 더욱 색달랐습니다. 무엇보다도 굉장히 시적인 묘사가 가득한 작품들로, 묘사만으로도 본전 생각은 나지 않습니다. 순문학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고급 문학으로서도 충분한 가치가 느껴지거든요. 

또한 잔잔한 전개 속에서 놀라운 진상을 밝히는 구조에 반전의 묘미가 잘 살아 있어서 추리 애호가로서도 충분히 즐길 만 했습니다.

단, 대체로 걸작 "회귀천정사"의 포맷을 따라 한 느낌이 강한건 조금 아쉽습니다. 사건의 진상은 대부분 화자의 단독 추리로 밝혀진다는 점이 특히 그러한데, 이러한 포맷은 결국 진상 자체가 화자의 상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크게 남긴다는 문제가 있으니까요. 단서들도 미려한 묘사와 전개 속에 뿌려 놓아서 알아차리기 힘들고, 그래서 공정하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웠던 것도 추리 소설로서는 감점 요소입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앞서 말한 '추리 소설'적인 감점 요인이 크지만, 순문학적인 정취와 뛰어난 묘사는 빼어납니다. 서정적이면서도 잔잔한 느낌의 추리물을 원하신다면 추천드립니다.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등나무 향기"

'나'는 첩 오누이와 함께 조야자카 거리에서 조용히 살고 있던 중, 연쇄 살인 사건에 휩쓸렸다가 결국 그 진상을 알아채게 된다.

'대필가'라는 존재와 함께 숨겨진 진상을 드러내는 결말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등나무 꽃'이라는 소재를 가져다가 연작에 포함시킨 것은 억지스러웠어요. 작품과는 별 상관이 없거든요. 그래도 조용하고 잔잔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반전이 있기에 평작 이상은 되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도라지꽃 피는 집"

건달 잇센마쓰 살인 사건을 수사하던 '나'는 사건과 관련이 깊은 유곽의 소녀 스즈에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 뒤 유력한 용의자 후쿠무라마저 잇센마쓰와 같은 모습으로 죽은 시체로 발견되는데...

스즈에라는 어린 소녀를 통해 전해지는 슬프고 서정적인 분위기도 좋지만, 주인공의 파트너였던 히시다 형사의 편지로 밝혀지는 진상이 충격적이면서도 가슴을 저미는 작품. 어떻게 보면 신파 멜로물 분위기지만, 유치하지 않게 전개한 작가의 솜씨가 감탄을 자아내는 작품으로 별점은 4점. 이 작품만큼은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오동나무 관"

야쿠자 누키타의 직속 부하인 '나'는 영문을 알 수 없는 형님의 부탁으로 고민에 빠졌다. 이어서 기이한 사건들이 벌어지게 되는데...

약간 긴 듯한 느낌을 주어서 지루했고, 진상에 대한 설득력이 떨어져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든 작품. 누키타의 행동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뭔가 비뚤어진 애증 관계를 다루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사건의 본질과는 너무 거리가 있던것 같아요. 사건을 모두 마무리하고 해피엔딩을 암시하는 결말은 마음에 들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하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흰 연꽃 사찰"

저주받았다는 어머니 때문에 도쿄로 올라와 살게 된 '나'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기억하고 있던 충격적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데...

요코미조 세이시 풍의 설정을 작가 특유의 스타일로 변주한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 분위기는 상당했지만 작위적인 느낌이 강해서 아쉽습니다. 어머니가 벌인 사건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도 약점이고요. 작위적인 설정 덕에 반전은 놀랍지만, 정교한 맛이 떨어져서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못했습니다. 평작 수준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회귀천정사"

"빨간 고양이"의 "돌아오지 않는 강의 정사" 리뷰 참고하세요. 

순문학과 추리가 어우러진 걸작. 새로운 번역으로 읽으니 느낌도 새로웠습니다. 추리적으로 완성된 작품은 아니라는 단점 때문에 약간 감점해서 별점은 4점입니다만, 뛰어난 작품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런 작품을 한 편 쓸 수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2008/10/17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 이철 : 별점 5점!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 10점
이철 지음/다산초당(다산북스)

이 책은 전에 읽었던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과 같은 시리즈로 제목 그대로 일제 강점기 시대를 중심으로 한 당시 조선의 스캔들(?) 11개를 풀어놓은 책입니다. 그야말로 "경성스캔들" 이죠.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은 읽고나서 실망이 컸지만 이 책은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두 책의 차이점은 정말로 "충격적이고 몰랐던" 역사를 얼마나 디테일하게 설명하면서도 쉽고 이해하기 쉽게 묘사했는지의 여부입니다. "조선을..."은 일단 읽는 것 자체가 힘들 뿐더러, 너무 주제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많아서 실망스러웠는데 이 책은 최소한 재미만큼은 확실합니다. 물론 이 책도 제목과는 다르게 당대에 그다지 충격을 전해주지 않은 스캔들도 몇 건 다루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들도 드라마틱하다는 점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해서 모든 에피소드가 기대했던 것 만큼의 충분한 재미는 전해 줍니다.

또한 11개의 스캔들 중 익히 알고 있었던 사건이 윤심덕과 김우진의 이른바 "사의 찬미" 사건이나 여류화가 나혜석의 사건 두가지 밖에 없었다는 것도 책의 가치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합니다. 아울러 이 두 사건 역시 알고 있는 내용보다 훨씬 자세하게, 당시의 자료를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지루한 맛은 전혀 없었다는 것도 탁월하고요.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사건은 친일파 대부호의 아들 장병천과 기생 강명화의 정사 사건이었습니다. 친일파 대부호의 아들과 기생이라는, 그야말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신분, 재력의 차이로 비극으로 끝난 너무나 순정 만화같고 일일 드라마 같은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순정파적이고 비극적인 로맨스가 1920년대에 존재했었다는데 놀랐네요. 여러 권의 소설과 영화로도 가공되었을 정도로 당시에 큰 충격을 준 건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이렇게 유명한 이야기가 지금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 이유도 조금 궁금해 지기는 했습니다. 아마도 해방 후 국무총리까지 역임했던 장병천 아버지의 형제인 장택상씨의 권세로 사건을 은폐한게 아닌가 싶은데,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도 드러나는 친일파들의 행각은 씁쓸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당대 매스컴들과 이른바 "지식인" 들의 편견과 비뚤어진 시각을 보여주는 김명순 사건과 독살미인 김정필 사건도 흥미로왔으며, 유명 공산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이 다수 등장하는 대하 서사시와도 같은 "제4부 - 경성을 붉은색으로 물들인 혁명적 연애 사건"의 이야기들도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공산주의 혁명가들의 불꽃같은 삶과 격동의 시대가 잘 표현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그야말로 조선과 중국, 소련, 해방 후 북한을 넘나드는 거대한 스케일에 정말로 조선 해방과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그들의 삶, 체포와 탈옥, 탈출, 고문 등의 고난의 세월 및 해방 후 공산주의자로 남한에서는 매도되었다는 점과 북한에서는 대부분 숙청되었다는 비극적 종말까지 모두 갖춘 극적인 이야기라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 외에도 당시의 여러 정사사건, 자유 연애주의자들과 신여성들에 대한 이야기, 동성애자 자살 사건 등 흥미로운 주제가 한 가득입니다. 목차만 읽어도 읽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말이죠.

역시나 "경성탐정록" 자료로서 구입한 책이었지만 의외의 재미와 새로운 역사를 알게되는 재미가 쏠쏠하여 횡재한 기분까지 드는 책으로 별점은 5점입니다. 재미와 더불어 당대의 여러 사료와 문헌을 다수 인용하고 있기에 자료적 가치까지 충분했으니까요. 일제 강점기 시대의 또다른 역사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꼭 읽어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2024/04/27

7인 1역 - 렌조 미키히코 / 양윤옥 : 별점 2점

7인 1역 - 4점
렌조 미키히코 지음, 양윤옥 옮김/모모

<<아래 리뷰에는 트릭과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명 모델 미오리 레이코가 자택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청산가리 중독이었다. 경찰은 그녀에게 농락당해 모든걸 잃은 의사 사사하라가 범인이라 생각했다. 사건 현장, 그리고 청산가리 봉투에 그의 지문이 있었고 그가 사망 추정일에 레이코를 방문한게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월드 섬유회사의 사장 사와모리 에이지로가 레이코를 죽였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해서 사사하라는 풀려났다.
그런데 사와모리 말고도 레이코가 평상시 원수라면서 이를 갈고 협박해오던 7명 모두가 똑같은 방법으로 레이코를 살해했다는게 밝혀지는데...
.

걸작 "회귀천 정사"로 유명한 렌조 미키히코의 장편. 1984년 첫 출간된 작품이라고 합니다.
렌조 미키히코는 정통 본격물보다는 "회귀천 정사"같은 서정적인 문체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렌조 미키히코하면 떠오르는 작품과는 사뭇 다른 스타일과 전개를 보여줍니다. 미오리 레이코 시점에서 상대방이 자신을 살해하도록 유도하는 범죄물이자 도서 추리물로 시작해서, 7명 모두가 똑같은 방법으로 레이코를 살해했다는게 드러나는 시점부터는 하우더닛 본격 추리물이 되는 작품이거든요.
 
가장 인상적인건 트릭입니다. 트릭을 잘 사용하는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꽤 현실적인 트릭을 멋드러지게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 트릭을 조금 설명해 드리자면, 레이코의 과거 직장 동료 이시가미 요시코는 레이코가 성형 수술을 했다는걸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며 돈을 뜯어내고 있었습니다. 레이코는 요시코를 꼬드겨 자기처럼 성형 수술을 시켜준 뒤, 그녀를 독살했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자택 침대 위에 놓아 두고, 7명의 원수들을 한 명씩 불러 거실에서 한바탕 연기 - 나에게 농락당한 의사 사사하라가 나를 죽이려고 독약을 가져왔지만 실패했다. 독약은 저 술잔에 들어있다라며 술잔을 바꿔치도록 유도 - 를 펼친 뒤, 술을 마신척 하고 침실로 뛰어들어가 곧바로 몸을 숨겼습니다. 뒤쫓아 침실로 온 손님들은 레이코와 똑같은 시체를 발견하고는, 자기가 술잔을 바꿔치기해서 레이코가 죽었다고 여기고 도망쳤고요. 이렇게 해서 7명이 한 명을 똑같은 방법으로 살해하는 범죄가 완성된 것입니다.
이 트릭을 성공시키려면 마지막에 레이코가 진짜로 독을 먹고 죽은 뒤, 그 시체를 숨길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게 사사하라였다는 진상도 괜찮았습니다. 청산가리를 준비할 수도 있었고, 세간에는 레이코 때문에 신세를 제대로 망친걸로 알려져있으니 독을 레이코 집에 가져온 동기도 누구나 납득할 수 있어서 사람들을 속이기에는 더할나위 없었던 덕분이지요.

단서도 적절히 제공됩니다. 사사하라가 경찰에 체포된 후, 레이코의 집을 방문할 날짜를 대충 얼버무리는게 대표적입니다. 무려 7명을 대상으로 벌인 계획이라 이틀에 걸쳐 진행했던 탓에, 날짜를 특정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날짜를 대충 둘러댈 수 밖에 없었습니다. 15일의 알리바이만큼은 억지로라도 만들어서 확실하게 제공하고 있는걸 통해, 7명 모두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는걸 드러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레이코의 입으로 완벽한 알리바이 계획이 설명되었기에, 이를 이용하여 15일 이후 범행이 일어났다고 착각하게 만들고 본인들은 15일의 알리바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금붕어 1마리가 죽은 수조를 보고 수사를 펼쳐서 원래는 7마리를 샀다는걸 알아내는 등의 경찰 수사 과정도 합리적으로 그려집니다. 결국 경찰은 이러한 꼼꼼한 수사를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사건 진상에 도달하고요. 이렇게 경찰이 나름 활약을 펼친다는건 여러모로 눈여겨볼만 했습니다. 특히 레이코, 하마노, 사사하라의 시점으로 작품이 전개되고 있는데 경찰까지 신경써서 분량을 안배해 준 정성(?)이 신기하더라고요. 사실 경찰은 헛다리를 짚는 수준으로 그쳐도 내용 전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거든요. 오히려 사와모리의 완벽한 자백 유서를 확인한 뒤에 개인적으로 수사를 진행한다는게 더 설득력이 없지요. 이건 작가가 '일본 경찰은 우수하다!'라는걸 어떻게든 드러내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캐릭터와 상황, 심리를 묘사하는 방법과 문체가 굉장히 옛스러워서 확실히 40여년 전 작품이라는 티가 물씬 납니다. 게다가 핵심 인물인 미오리 레이코에 대한 캐릭터 설정이 영 별로입니다. 그녀가 7명에게 원한을 품은 이유도 도무지 알 수가 없고요. 7명 모두 그녀에게 아픔을 주었을 수는 있지만, 거의 대부분 정당한 거래 관계였습니다. 오히려 그녀가 얻은게 훨씬 더 많아 보여요. 모두가 선망하는 대 스타가 되어 큰 돈을 만지게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멋대로 그들이 자기 인생을 망쳤다며 건수를 잡아 협박한다? 솔직히 죽어도 싼 여자라 생각됩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혼자만의 피해의식에 가까운 복수에 동참해서 스스로 그들을 모두 죽일 결심을 하는 사사하라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녀에게 아무리 푹 빠져다 한들, 이건 상식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보다 현대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같은 작가가 썼더라면 아마 걸작으로 널리 알려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결과물은 조금 부족합니다. 최소한 '동기'만큼이라도 설득력있게 만들어 주었어야 했습니다.

2017/01/23

야간열차 살인 사건 - 케리 그린우드 / 정미현 : 별점 1.5점

야간열차 살인 사건 - 4점
케리 그린우드 지음, 정미현 옮김/딜라일라북스

귀족 영애인 프라이니는 하녀 도트와 함께 밸러랫 행 열차로 여행 중, 일등실 객차에 클로로포름이 뿌려지는 상황에 마주쳤다. 프라이니의 기지로 승객들은 빠르게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승객 중 한명인 헨더슨 부인이 기차 근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헨더슨 부인의 딸 유니스는 명탐정으로 이름난 프라이니에게 사건을 의뢰했고, 프라이니는 기차 승객으로 기억을 잃은 제니까지 떠 맡은 채 사건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데..

귀족영애 탐정 프라이니 시리즈입니다. 어쩌다 보니 세 번째 부터 읽게 되었네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아무리 보아도 그 어떤 매력을 찾을 수 없는 졸작입니다. 일단 주인공 프라이니부터 한심합니다. 매력적인 외모와 두뇌, 행동력에 재산까지 갖춘 자유로운 신여성이라는 설정인데 도가 지나쳐서 짜증이 납니다. 비현실적인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요.
그나마 앞선 설정들이야 만화 등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뻔하디 뻔한 설정이라 쳐도, 남자가 마음에 들면 두 번째 만남만에 정사를 갖는 모습을 자유로운 신여성(?)이라고 포장하는건 무리입니다. 여성 모두를 유혹하는 싸구려 펄프 픽션 속 마초를 빗대어 만든 설정으로 보이는데, 일단 정통파 계보에 드는 탐정들 중에 그런 싸구려는 없으며, 있어도 대체로 그러한 유혹은 사건 해결을 위한 수단의 하나로 사용됩니다. 아니면 상대 여성이 여성의 매력을 이용해서 벌이는 음모이지요. 그러나 이 작품 속 정사는 사건 해결과는 무관한, 순전히 프라이니의 성욕을 해결하기 위한 용도입니다. 심지어 상대방 린지가 숫총각이라는 점에서 '숫총각 사냥하는 선배 누나 혹은 유부녀'가 등장하는 싸구려 성인물에 가깝습니다. 아니,  싸구려 성인물은 성욕 자극이라는 대 명제에 충실한 반면 이 작품은 그렇지도 못하니 더 별로입니다.

추리적으로도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의 연속입니다. 대단한 분장도 하지 않았는데 앨러스테어가 기차에서 보았던 젊고 핸섬한 승무원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부터 문제입니다. 아무리 클로르포름에 취했어도, 사건 직후 키라던가 얼굴 인상을 그대로 기억하고 하고 증언하는걸 보면 설득력이 낮습니다. 하지만 이건 실종된 헨더슨 부인 살인사건의 진상에 비하면 솔직히 약과입니다.

  1. 기차에서 헨더슨 부인의 목을 밧줄로 묶고
  2. 그 줄을 급수탑으로 던진 뒤
  3. 급수탑을 기어 올라가 밧줄을 잡아당겨 노인을 끌어낸 후
  4. 시체 위로 뛰어내렸다.

라는데, 비록 급수 때문에 3분간 정차했다 하더라도 2~3의 과정을 그 짧은 시간 어떻게 했다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헨더슨 부인을 창문에 기대어 놓은 후, 객실 지붕에 올라가서 헨더슨 부인의 목에 밧줄을 걸고 그것을 선로에서 10여미터 떨어진 급수탑에 던진 뒤 10미터를 전력 질주하고 급수탑을 올라간 뒤 밧줄을 잡아당겼다? 이게 3분 안에 과연 가능할까요? 설령 가능했다 하더라도 앨러스테어가 클로르포름을 이용하여 객실 승객들을 마취시킨 다음이라면 이러한 복잡한 행동으로 노부인을 살해할 이유도 없습니다. 도주에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고,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어 수사에 혼선을 주지도 못하니까요. 마지막까지 이유가 설명되는 것도 아니고요. 이럴 바에야 그냥 창 밖으로 내던지는게 훨씬 쉬웠을 겁니다.

또 승무원을 가장한 핸섬한 젊은이가 유력한 용의자이며, 동기와 외모 등을 종합해보면 앨러스테어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은 상태에서 그의 유일한 알리바이가 친구 린지에 의해 뒤집혀 버린다는 전개도 시시하기 짝이 없습니다. 추리의 여지도 없어서 프라이니가 사건 해결을 위해서 하는 것 역시 전무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수 있는 동거인의 조사조차 게을리한 경찰의 무능함만 돋보이입니다.

중간에 등장하는, 기억을 잃은 소녀 제인 사건은 프라이니와 그의 친구들(버트와 세스)의 활약으로 해결된다는 점에서 그나마 헨더슨 부인 살인사건보다야 낫긴 합니다. 하지만 어처구니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버튼이 최면술로 불쌍한 고아 소녀들이나 납치한 소녀들을 사창가에 팔아 넘긴다는 범행 자체가 문제에요. 최면술을 기억을 완벽하게 없앤다던가,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식으로 무슨 마법처럼 묘사하고 있는 탓입니다. 최면술이 설령 마법과 같은 효과를 발휘했더라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것 처럼 30여명 이상에게 모두 성공적으로 최면을 걸거나, 특정한 자극이나 신호 없이 눈빛과 대사만으로 순식간에 최면을 걸고 푸는건 무리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고양이에게 눈을 공격당한 최면술사 헨리 버턴이 그 능력을 잃게 된다는 결말도 후련하지만, 역시 과학적으로 보이지는 않았고요. 하여간 최면술이 등장한 작품치고 제대로 된 걸 못 봤어요.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책 만듬새도 괜찮고 여성 작가다운 꼼꼼한 묘사에 약간의 점수를 더하나 추리물로서는 그 어떤 가치를 찾아볼 수 없는 망작입니다. 앨리스테어가 행하는 여자에 대한 막되먹은 행동과 "자고로 여자란 출산 이후엔 전부 쓸모없어지지" 등의 대사를 보면 작가의 의도는 대충 짐작이 가긴 합니다. 유능하고 강력한 여성이 멍청한 남자들을 가지고 놀고 사악한 마초를 응징하는 페미니즘 영웅물을 노골적으로 그리려 한 것이겠지요. 뭐 그 생각이 잘못된건 아니에요. 문제는 그게 뭐든간에 최소한의 완성도는 있어야 했습니다. 2017년 들어 처음 읽은 추리 소설이 이따위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네요.

덧붙이자면 TV 시리즈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역시나 그닥 기대가 안되는군요. 추리보다는 작중 묘사되는 온갖 화려한 의상들이나 세세한 디테일들, 그리고 사창가에서의 격투라던가 마지막 프라이니 집 앞에서 앨러스테어와 벌이는 격투 등 액션의 비중이 높은 추리 속성이 조금 들어간 시대극 액션물이라 생각되거든요. "각시탈" 처럼요! 잠깐 찾아보았는데 프라이니 캐릭터도 딱히 매력적이지도 않고요. 여튼 이 작품에 대해서는 책이든 영상물이든 더 찾아볼 일은 없을 겁니다.

2013/02/24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 김성남 : 별점 3점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 6점
김성남 지음, 이용규 그림/수막새

우리가 익히 아는 삼국지를 등장하는 주요 전투 중심으로 서술한 책입니다. 그야말로 삼국지라는 세계관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를 모두 망라해 놓았습니다.

이렇게만 설명하면 다른 삼국지 관련 유사 도서와 별다를 게 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으나, 실제 역사, 특히 전사(戰史) 개념으로 접근했다는 큰 차이점을 보입니다. 전투의 배경 및 각 세력의 주요 병력과 작전은 물론이고, 실제 전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풀컬러로 된 간략한 흐름도와 함께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전투 이후에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까지 알려주고 있는 덕분입니다.

또 당연하겠지만 연의에만 의존하지 않고 정사도 많이 참고한다는 점, 연의의 세계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캐릭터의 설정이나 허구에 가까운 일기토는 극단적으로 배제하고 있다는 점도 좋았으며, 그 외에도 다양한 자료 도판과 실제 해당 지역의 현재 모습을 사진으로 실어주는 등의 배려도 마음에 든 부분입니다. 한국 작가가 쓴 책답게 고구려의 역할을 언급한 양평 전투가 포함된 것도 좋았고요.

딱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책보다는 영상 다큐멘터리에 더 어울리는 콘텐츠로 였다는 점입니다. 제가 돈을 나중에 많이 벌면 영상화하고 싶을 정도로요. 전투의 흐름도는 애니메이션 효과와 함께 실제 지도와 잘 매핑했더라면 이해를 훨씬 더 도와줄 수 있었을 테고, 연의 - 정사 - 기타 역사를 오가는 전개 역시 교차 편집을 활용했더라면 더 나았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결론 내리자면 추천작. 소설이나 만화에서 한두 명의 무장에 의존한 것으로 묘사된 전투들이 실제 어떠했는지 그야말로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책으로, 차별화된 재미와 함께 지식까지 전달해 줍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삼국지 팬이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2014/10/20

삼국지가 울고 있네 - 리동혁 : 별점 2.5점

삼국지가 울고 있네 - 6점
리동혁 지음/금토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갑작스러운 해외 출장으로 한 주 정도 블로깅을 쉬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책은 삼국지 관련 서적입니다. 중국 동포 출신 작가가 이문열의 삼국지를 읽고 오류가 너무 많다 느껴 이를 지적하기 위해 썼다고 하네요. 한자를 잘못 본 번역 오류는 물론, 당대 역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까지 포함해 깨알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이문열 삼국지에 얼마나 많은 오역과 오류가 있었는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하나하나 다 들기도 어려울 정도인데요, 물론 이야기의 큰 줄기를 바꾸는 오류는 아니지만, 유비가 조조와 술자리를 가지다가 천둥이 치는 것을 겁내는 장면처럼 원작자의 의도가 무시된 부분은 심각한 각색이자 오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기억에 남는 오역, 류를 몇 가지 꼽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장수들이 "창을 끼고" 달려 나간다는 표현은 원래 "꼬나쥐다" 또는 "들다"가 맞고, "대도를 찬다"는 표현도 틀렸습니다. 고대의 다다오(대도)는 자루가 긴 언월도 형태로, 허리에 찰 수 없는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원술이 겨드랑이에 두 벌의 보검을 걸고 있었다는 표현 역시 오류이고요. "손을 어루만지며 크게 웃다"라는 표현도 현대어로는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고대에서는 "손을 두드리다"라는 뜻이라 "손뼉을 치며 크게 웃다"가 정확한 번역이라고 합니다. 코미디에 가까운 오역도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자객 예양을 "예"와 "양"이라는 지명으로 잘못 번역했다든지, "하늘이 가죽띠에 그 뜻을 밝혀 무왕이 주를 치게 했다"는 문장은 사실상 "혁명"이라는 단어를 잘못 해석한 결과라고 합니다.

비슷한 글자를 오독한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뜻하는 "훠"라는 글자를 순욱의 이름인 "위"로 착각한 것, 손책을 "주둥이 노란 어린놈"으로 번역한 것도 오역인데, 황구(黃口)는 단순히 "어린아이"를 의미한다고 하네요. "카이"라는 말은 갑옷을 뜻하는데, 작품에서는 계속 투구로 묘사되었다고 하고요. 또 "물이 쏟아지고 흙이 밀려오듯 적군이 덮쳐 와야 맞서겠다는 뜻입니까?"라는 하후돈의 말도 잘못된 번역으로, 실제 의미는 "물이 밀려오면 흙으로 막고, 장수가 오면 군사로 막는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적군이 오니 맞서 싸우자는 의미죠. 산과 관련된 표현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저자의 말처럼 실제 전투 상황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문열 삼국지의 오역과 오류 지적 외에도 이 책은 다양한 조사와 고증을 통해 당대 무기나 진법, 역사적 상황 등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알려줍니다. 예를 들어 장팔사모가 뱀 모양이라는 주장은 허구일 가능성이 높고, 실제로는 "삭모"라는 말에서 유래된 긴 창일 가능성이 높다는 해석도 흥미로웠습니다.
무게 단위 관련해서는 후한 시대의 1근이 지금의 약 500g이 아닌, 222.73g 정도였다는 정보가 대표적입니다. 정사에서 유일하게 언급된 전위의 쌍철극이 80근이라고 하니, 약 18kg 정도로 장사라면 들 수 있는 무게였겠죠.
신체 치수도 당대 척도의 차이에 따라 정리되어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1자는 약 19.91cm라 공자의 키는 약 191cm, 후한 시대의 1자는 약 23~24cm로, 제갈량의 키는 184~196cm로 추정되며 관우의 경우 정사에는 키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합니다. 

조운의 활약도 당대 사료들을 바탕으로 보면 과장된 측면이 많았다고 설명하고, 조조가 언제부터 악의 화신이 되었는지, 관우가 언제부터 신으로 떠받들어졌는지 등에 대한 탐구도 흥미롭습니다. 특히 촉나라 인물들이 유독 미화된 이유로, 촉은 사관이 없었던 반면 위나 오에는 사료가 남아 있어 인물들의 전설화가 어려웠다는 분석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초한지 인물과 삼국지 인물을 연결한 전설도 흥미로웠는데, 명나라 후기 소설집 "유세명언"에 실린 내용에 따르면 초한지의 인물들이 삼국지 속 인물로 환생한 배경이 꽤 논리적으로 설명되더군요.

중국 역사를 인용한 실제 사례들도 흥미로웠습니다. 예를 들어 모택동이 실제 공성계를 실행에 옮겼다는 이야기나, 항일전쟁 시기 허베이성 민병들이 금속 조각을 구하기 위해 가짜 목표를 설치해 일본군의 총포 사격을 유도하고 파편을 회수한 일화는 "풀 실은 배로 화살을 얻다"는 고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또, 유비의 관상을 설명하며 1970년대 말 백전풍을 앓던 한 농민이 황제를 자칭하면서 자신의 몸에 있는 흰 점을 근거로 들었던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결국 그는 체포되어 총살당했다고 하네요. 그 외 흥미로운 이야기로는 제갈량과 같은 사주팔자가 1981년 8월 3일 12시~14시 사이에 태어난 사람과 동일하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말은, 중국인들은 삼국지를 인생 지침서나 성전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삼국지를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과는 대화를 하지 말라"는 말은 실제로는 허구이며, 광고 문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이문열 삼국지에 대한 오류 증명이 중심이라 피식 웃게 되는 재미 외에는 큰 깊이는 없지만, 삼국지 팬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국내에서 이문열 삼국지가 정본처럼 여겨지는 현실에서는 더더욱 의미 있는 작업일 수도 있겠죠. 이 책이 조금이나마 영향력을 발휘해, 지적된 오류들이 수정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물론 제가 다시 이문열 삼국지를 읽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2004/12/16

한낮의 유괴 - 모리무라 세이이치 : 별점 2점

인기 탤런트 야기하시 노리코와 불륜관계인 도오토 대학 조교수 미야모토는 어느날 정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뒤, 아내 구미코의 시체와 함께 아들 미사오가 유괴된 것을 알게되었다. 그는 노리코와 의논하여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시체를 숨기고, 유괴범과 접촉하여 아들을 돌려받기 위해 나섰다.
유괴범이 요구한 500만엔을 들고 접선을 시도했지만 유괴범의 재치로 돈만 잃은 후, 호텔에 정통한 유괴범의 정체에 의문을 품고 해당 호텔의 직원 명부를 뒤지고 여러 단서를 조합하여 용의자를 발견했지만 용의자는 도주 끝에 눈 앞에서 사고로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 뒤 미야모토는 오히려 노리코와 함께 경찰에 아내 살해 혐의로 체포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 이면에는 미야모토의 아내와 불륜관계였던 인기작가 마키노 케이스케의 뺑소니 사건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작품. 흔치 않게 "유괴"가 메인 테마입니다. 조사해보니 1973년 작품이네요(공식사이트 참조). 비교적 초기 작품이라서 상당히 기대가 컸습니다. 이 작가의 작품은 초기 작품이 훨씬 좋거든요.
우선, 대학 조교수 미야모토 부부의 2중 불륜사건(미야모토-노리코 / 마키노- 구미코 )과 뺑소니 사건과 유괴 살인사건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 결국 하나로 귀결되는 작가 특유의 전개는 좋았습니다. 작가의 작품인 "죽음의 연립방정식"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중반부의 "유괴범"을 찾기위한 미야모토와 아키코의 활약까지만 재미있고 이후는 지루합니다. 무엇보다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는 살인범과 유괴범이 다르다라는 결정적 트릭이 너무 쉽게 드러난다는게 가장 큰 약점이에요. 불필요한 장면도 많습니다. 초반부의 코인로커의 열쇠에 대한 의문과 열쇠를 삼킨 아이라는 설정, 이것들과 연결되는 마지막의 어이없는 에필로그는 대체 왜 들어갔는지 모르겠어요. 그렇잖아도 지루해진 작품을 쓰레기로 만들어 버라서 황당할 뿐입니다. 이 정도 막장 전개에 비하면 "지유가오카"라는 지명을 "자유 언덕"이라고 번역하는 등의 오역은 오히려 애교로 보입니다.
또한 불륜과 불륜이 겹친다는 지나친 통속소설류의 설정은 읽을수록 더 불쾌해지더군요. 왠놈의 정사장면은 이다지도 많은지... 이런 설정 없이도 충분히 재미있게 스토리를 끌고 나갈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나마 유괴범과의 두뇌싸움은 꽤 흥미진진하고 특히 호텔맨 출신의 모리무라 세이이치 본인의 경험을 살린듯한 리얼한 호텔 묘사, 이른바 "3차원" 전달 방식이라는 기발한 몸값 전달 방법, 그리고 유괴범의 주소를 찾기 위한 일련의 단서들을 조합한 추리는 괜찮은 편입니다. 하지만 기대에 비하면 좀 많이 별로였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절판된 작품을 헌책방에서 어렵게 구해보 읽긴 했지만 두번 읽게될 것 같지는 않군요.

2006/11/26

삼국전투기 1 - 최훈 : 별점 3점

삼국전투기 1
최훈 지음/길찾기

최훈은 굉장히 좋아했던, 현재도 애정이 유지되고 있는 몇 안되는 국내작가 중 한명입니다. (처절하게 배신당한 기분을 느끼는 작가는 수도 없죠. 형민우, 양경일, 권가야 등등등) 데뷰작에 가까운 "하대리"가 워낙 충격적이고 재미있었기 때문에 좋아하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하대리 1부"는 "아즈망가"에 뒤지지 않는 단편-장편의 경계를 허무는 수작 개그 만화라 생각합니다. 전체적으로 하나의 긴 스토리가 일관되게 흐르지만 각각 한편 한편이 한페이지로 마무리 되는 이야기의 응집력과 특유의 개그 센스가 빛나기 때문이죠. 무엇보다도 두만전자의 에이스 하대리의 매력이 넘치며 최훈만의 화풍이 내용과 너무 잘 어울렸던 작품이었죠.

그러나 하대리 1부 이후 2부부터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하더니 이후 작품은 지나치게 성적인 부분에서의 희화화와 너무 매니아적인 부분이 많아져서 쉽게 즐기기도 힘들고 공감가기도 힘든 작품을 발표하더군요. 그나마 하대리 시리즈는 나았지만 최근 스포츠 서울에 연재하는 "구보씨"는 그야말로 한창 인기인 "샐러리맨 시트콤 쟝르물" 일 뿐입니다.

그러나 특유의 매니아적인 요소를 극한으로 부각시켜 하나의 쟝르로 만들어 성공한 작품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네이버의 "MLB카툰"이고 또 하나가 이 "삼국 전투기" 라 할 수 있습니다.

"MLB카툰"은 정말이지 굉장히 매니아적이면서도 특유의 개그센스가 빛나는 스포츠 만화로 너무 동양적인, 특히 한국적인 개그만 제외한다면 본토에 수출해도 먹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메이저리그와 선수에 대해 적나라하면서도 특유의 시각으로 제대로 패러디하고 있어서 무척이나 마음에 듭니다. (단 요새는 개그 센스의 농도가 옅어지고 소개에 그치는 부분이 점점 많아지는 듯 합니다)

소개가 좀 길었는데 또 다른 매니아적인, 전문용어로 "오덕후적인" 시각으로 성공한 작품이 바로 이 "삼국전투기" 입니다. 이 작품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삼국지"를 특유의 시각으로 파헤치고 있는 작품으로 무엇보다도 매니아적인 패러디가 적재적소에 쓰이고 있는 이색작입니다. 화타는 블랙잭으로, 원소와 조조는 가르마와 샤아로 설정하면 정말 단순히 그림만으로도 확 와닿지 않습니까? 이러한 절묘한 패러디 이외에도 당시의 지도와 세력 분포, 전투시의 진영까지 간략하게 설명하는 부분은 그 어떤 삼국지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친절하면서도 독자의 이해를 돕습니다. 또한 정사와 나관중의 연의를 비교 분석하여 스스로 원하는 부분만 취하여 전개하면서도 관련된 설명을 빼 놓지 않는 것 역시 마음에 들고요.

그러나 이런 패러디 표현이 과하고 (개인적으로 유비에 대한 묘사는 지나치다 못해 짜증날 지경이었습니다)  그 패러디가 건담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 애니메이션, 만화 쪽에 치우쳐져 있다는 것, 또한 스토리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개그를 위해 쓰이는 여러 장면과 대사들은 이 작품을 애시당초 정정당당하게 평가받기가 좀 애매하고 어려운 위치로 자리매김 하게 합니다. 이러한 패러디들이 대부분 역사와 시대를 뛰어넘기 힘들다는 것 역시 본질적인 한계라 보여지고요. DC인사이드의 뚫흙이나 아시아프린스같은 패러디가 대체 몇년동안 먹힐수 있을까요?

특유의 화법으로 적절한 유머와 패러디를 섞어 자신만의 방식으로 삼국지를 꾸민다는 것, 그리고 그 작품이 반응이 있다는 것은 작가로서 굉장히 축복받은 일이지만 위의 이유로 인해 이 작품이 높이 평가되거나 그 인기가 지속되리라는 생각은 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니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삼국지 인물군의 캐릭터 이미지를 거의 최초로 제시한 고우영 화백의 작품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인지 새삼 실감케 하네요. 고우영 화백만의 특유의 유머와 패러디, 심지어 시사적인 비평까지 곁들여져 다양한 요소가 넘치지만 고우영 화백의 작품은 확실히 시대를 뛰어넘었거든요.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즐겁게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오덕후적인 시각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최훈씨의 취향이 저와 비슷하기도 합니다. 일본 만화와 프로레슬링은 확실히 제 취향이거든요. 또한 적절한 패러디는 확실히 재미나고 이해를 돕는 요소가 강하니까요. 이야기도 확실히 쉽게쉽게 다이제스트 되어 있기도 하고요. 삼국지 자체가 재미난 작품이기도 하니 기본만 해 주어도 원체 재미는 보장하는 작품이기도 하잖아요? 작가의 시각이 거의 연의와 정사에 한정되어 있는 만큼 새롭거나 신선한 요소는 없지만 또 그러한 진부함이 매력이기도 합니다. 나와 같은 시각인데 어떻게 표현했을까? 라는 생각으로 다음 등장인물들의 묘사와 패러디가 기대가 되거든요.
외려 위의 문제점들은 일본에 수출하면 장점으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살짝 드는군요. 삼국지를 가지고 미소녀 게임을 만드는 나라니 뭐가 안 먹히겠습니까만... 여튼, 제 별점은 3점입니다.

PS : 장단점을 떠나 제가 이 책을 구입한 가장 큰 이유는 개인적으로 약간 알고 있는 원종우 대표님이 계시는, 한국 만화만 전문적으로 출간하는 "도서출판 길찾기"에서 출간된 책이기에 꼭 성공하였으면 하는 바램으로 구입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신문에서 보셨더라도 한국만화 발전을 위해 관심있으시면 한두권 구입해 주시길... 책에는 부록 형식으로 패러디에 대한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세 내용이 실려 있으니 많은 도움 되실겁니다.

2005/07/04

Japan 미스터리 걸작선 1 - 한국, 일본 추리작가협회 추천 / 정태원 번역 : 별점 3점

J 미스터리 걸작선 1 - 6점
정태원 옮김/태동출판사

일본 추리 작가 협회 창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펴낸 책입니다. 그런데 선정을 한국 추리 작가 협회에서 했다는 점이 특이하네요. 예전에 읽었지만, 다시 구입했기에 읽고 리뷰 남깁니다.

낯선 작가의 낯선 작품들이 많다는 것이 눈에 띄는데, 책 뒤의 설명을 보면 다른 단편선 등에서 이미 소개된 작품이 아닌 새로운 작품을 선정하려는 의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는 50주년 기념 앤솔로지라는 주제와는 좀 맞지 않는다 생각됩니다. 그동안 소개된 작품들이 일본 추리 문학의 대표작에 더 가까운게 당연하잖아요. 또 이러한 기획 의도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였다면, 진짜 국내에 초역되는 작품들만 모아 놓았어야 했습니다. 정작 그렇지 않은 작품들이 수록된 건 이상해요.
정통 추리나 스릴러가 아닌 환상문학과 호러, 그리고 SF에 가까운 작품까지 실려 있어 기준이 약간 모호하다는 것도 솔직히 잘 납득이 가지는 않습니다.

그나마 수록된 작품들도 특정 시대나 작가별로 편찬된게 아니라 무작위로 수록되어 있는데, 에드가상 수상작품집처럼 어느 정도는 목차에서도 시대순 같은 기준을 가지고 분류하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한국 추리문학 협회가 선정한 일본 추리 단편이라는 기획 자체가 그냥 놓치기에는 너무 흥미로울 뿐더러 전체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재미까지 가져다 주는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개인적인 베스트로는 "광기의 계보", "정사의 배경" 그리고 "살의" 를 꼽겠습니다.
총 세 권이 발간되었는데 제가 가지고 있는건 이번에 구입한 이 1권 뿐인데, 언젠가는 2, 3권도 발견하여 책장에 추가하고 싶네요.

작품별 상세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아파트의 귀부인 - 아카가와 지로

새로 이사온 옆집의 미모의 귀부인이 하는 요리의 냄새를 알아 맞출 정도로 후각이 민감한 아내를 가지고 있는 구보는 옆집의 부인에게 호감을 느껴 아내가 집에 없는 틈에 옆집에 찾아간다. 

다른 앤솔로지에서도 많이 소개된 아카가와 지로의 단편입니다. 추리 문학이라기 보다는 반전의 맛이 있는 스릴러에 가까운데, 너무 뻔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군요.

2. 나체의 방 - 호시 싱이치

일본 단편의 거장 중 한명인 호시 싱이치(호시 신이치)의 작품입니다. 우연히 여러 남녀들과 복잡한 관계를 가지게 된 남자의 이야기로 상황 설정이 재미있고 여운을 주는 맛도 잘 살아있어서 역시나 단편의 거장이구나! 싶네요. 다만, 추리물은 절대! 아닙니다.

3. 나폴레옹 광 - 아토다 다카시

아토다 다카시의 초 유명 단편이지요. 제가 이전에 "Y의 거리" 소개 때에도 리뷰했기에 패스합니다. 

4. 고양이의 목 - 고마츠 사쿄

고양이를 키우면 죽는 미래의 어느 도시에서 일어나는 짤막한 이야기입니다. 고양이를 워낙 좋아하는 일본이라서 나올 수 있던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반전의 맛도 어느정도 있고 재미도 있지만 추리물도 아니고 호러도 아니고 SF도 아니고... 여러모로 좀 어정쩡한 느낌입니다.

5. 광기의 계보 - 후지이 레이코

초등학교 교사 게이코는 우연히 들춰본 학생 기누코의 일기를 통해 그녀의 계모가 기누코를 광기로 몰고 가고 있는 상황을 알게 된다... 

여성작가의 느낌이 잘 살아있는 작품으로 일기를 주요 매개체, 단서로 하여 전개된다는 특이함에 더해 극적 반전까지 뛰어납니다. 약간의 호러 분위기가 잘 살아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고요. 그런데 왠지 영상물에 더욱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6. 3억엔의 악몽 - 니시무라 교타로

평범한 올드미스 여사원 교코는 어느날 찾아온 변호사에게서 자신이 친절을 베푼 한 노인에게 3억엔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 변호사는 자신과 다른 인물을 착각하고 있었고, 교코는 유산을 상속받는 진짜 인물인 아리사와 나미코를 찾아가 담판을 지으려 하는데... 

여정 미스테리의 달인이라는 니시무라 교타로지만 이 작품은 의외로 "지푸라기 여자" 같은 인물 설정을 가진 완전 범죄물입니다. 조금 의외였달까요. 그러나 기발한 발상에 비해 전개가 뻔하고 치밀함이 많이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7.얼굴 - 마츠모토 세이쵸

살인 사건을 저질렀던 배우 이노 료기치는 자신이 주연인 영화가 전국 개봉되기 전에 자신이 저지른 살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이시오카를 살해하려 하는데... 

"거장" 세이쵸 선생의 작품입니다. 세이쵸 선생 단편은 대표작들에 비해 많이 격이 떨어지는 편인데 이 작품은 꽤 괜찮네요. 특히 범인이 배우이고 영화 개봉 때문에 목격자를 죽이려 한다는 설정은 참신합니다. 하지만 결말이 너무나, 너무나 심하게 아닙니다...

8. 정사의 배경 - 츠츠야 다카오

한 주부가 음독 자살했다. 그녀는 죽기 직전, Y타임즈의 독자 투고란에 과거의 애인에게서 협박받고 있다는 투고를 보내 상담을 의뢰한 상태였다. Y타임즈의 기자 소네는 단순 자살 사건은 아니라는 판단에 독자적인 조사를 개시하는데... 

잘 모르는 작가인데 작품이 굉장히 좋아서 놀랐습니다. 독자 투고와 음독 자살한 여인을 연결시키는 발상도 뛰어나지만 실제 사건의 트릭도 괜찮고 무엇보다 전개가 굉장히 깔끔합니다. 진범과 동기도 납득할 수 있고 단서도 공정한 편이고요. 이 단편집 최고의 단편 중 하나입니다.

9. 조건반사 - 오타니 요타로

여배우 미즈사와 미나코는 연기지도 담당 오모리 세이지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아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 희로애락을 표현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며 그와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 후 알콜 중독으로 바닥으로 추락한 세이지를 거추장 스러워한 미나코는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른바 "조건반사"에 의한 다이잉 메시지가 등장하는 작품인데 여기서처럼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네요. 때문에 기발하긴 하지만 현실성은 떨어져 보입니다. 그래도 꽤 재미있었어요.

10. 벽 - 고다카 노부미츠

아내와 그녀의 정부에 의해 벽속에 파묻히게 된 남자의 이야기. 이 한줄이 이 작품의 전부입니다....

11. 살의 - 다카키 아키미츠

옆집의 이마노 부부를 돌봐주던 타누마 변호사는, 이마노의 부인 준코가 질투로 저지른 살인 사건 변호를 맡게 되었다. 타누마는 그녀를 감형시켜 집행유예를 받게 하는데 성공하지만, 어느 날 이마노로부터 충격적인 고백을 듣게 되는데... 

거장 다카키 아키미츠의 단편입니다. 

이른바 "살인을 하기 위한 살의의 정도를 법적으로 판단하는 잣대가 어디에 있는가?"가 이 작품의 핵심입니다.이 살의를 최소한으로 나타내기 위한 범인의 치밀함, 법의 헛점을 잘 꿰뚫고 저지른 범행이 아주 충격적입니다. 1952년에 발표된 작품이라고는 보이지 않게 세련되고 꽉 짜여진 구성이 놀랍네요.

12. 소라 - 야마무라 마사오

추리물은 아닙니다. 못살던 시대의 불우한 가족의 이야기를 리얼하게, 적나라하게 그린 순문학에 가까운 단편입니다.

13. 무서운 선물 - 유키 소지

한 여자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키스했다가 저주(?) 받는 한 바람둥이의 이야기. 전해주는 꽃들의 꽃말로 마음을 나타내는 이야기 전개는 괜찮지만 마지막에 저주니 어쩌니 하며 마무리하는 결말은 납득이 안됩니다...

14. 연습게임 - 후지무라 쇼타

가지키는 아내 구니코의 수다를 겨우겨우 참고 살다가 우연찮게 불륜을 저지른 상대 미와와의 달콤한 미래를 위해 그녀를 살해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아내와 몰래 만나기로 한 장소에 아내는 오지 않고, 오히려 다른 장소에서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어 가지키는 함정에 빠지게 되는데... 

함정에 빠지는 인물이 등장하는 "함정물"인데, 어차피 가지키는 아내 구니코를 죽이려 했으므로 그다지 용서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네요. 전혀 관계없는 인물이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면 모를까... 반전의 여운을 남기기는 하지만 좀 약합니다.

15. 우물이 있는 집 - 미나카와 히로코

과거 자신이 유괴당한 집에 신혼여행을 오게 된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전개가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 흘러가는데,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함과 미묘함이 잘 살아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흥미진진한 줄거리에 비해 결말이 시시해서 아쉽습니다.

16. 복안 - 소노 다다오

일본의 손다이크 박사라고 불리운다는 복안전문 범의학자 고이케 고로라는 캐릭터가 나와 두개골 복안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인 작품. 캐릭터 이외의 설정과 전개는 평이합니다.

17. 사랑 - 미야자키 준

동물 뇌세포를 집어넣은 육아 로봇이 저지른 아동 살해 사건 이야기. 아시모프 작품과 유사한 분위기지만 반전은 인상적입니다.

18. 산키치의 식욕 - 와타나베 게이스케

어려운 시대, 어렵게 살아가는 고학생 산키치가 우연히 주운 3엔으로 한끼를 해결하는 이야기. 이야기는 꽤 재미있고 진지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만 순문학 단편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네요. 작가도 그렇고 작품도 그렇고 왜 이 단편선에 실려있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19. 쇼윈도의 연인 - 요코미조 세이시

소설에 빠져드는 기이한 습성이 있는 청년 다마루 소진은 최근 간행된 소설 "쇼윈도의 연인"을 읽은 직후, 한 양품점 쇼윈도의 마케팅을 사랑하게 되는데...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요코미조 세이시의 단편이라는 점만으로도 가치가 있지만, 작품도 인상적입니다. 처음에는 다른 외국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성도착적인 애정에 대해 다루는 듯 했는데, 급변하여 놀라운 반전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발표 시대를 감안한다면 정말 기발한 상상력과 아이디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네요. 거장다운 작품입니다.

20. 범인은 누구인가 - 구사카미 진

쌍동이 중 한명이 범인인 것은 확실한데 누구인지를 몰라 궁지에 몰린 경찰이 사건을 결국 해결한다는 이야기. "음악"을 주요 소재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다지 인상적이진 않지만 트릭과 설정은 마음에 들었어요.

21. 계단을 오르는 남자 - 마유무라 다쿠 

세계가 거대 빌딩화되어 엘리베이터가 기차처럼 다니는 세계. 한 남자가 25.000층의 건물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하고 그는 계단을 올라 새로운 층에 도착할 때마다 점차 여행자에서 모험가, 그리고 성자로까지 추앙받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그가 꼭대기 층에 다다르게 되는 날이 오고 군중이 그를 보기 위해 운집한다... 

아이디어가 정말 기발합니다! 엘리베이터가 기차처럼 다니는 초고층 빌딩 사회에서 목적없이 그냥 계단을 오르는 남자가 주변 인물들에 의해 성자로까지 추앙받게 되는 과정이 묘하게 현실감 있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말은 너무나 시시해서 아쉽습니다. 좀 더 생각했더라면 정말 마음에 드는 걸작 단편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2005/01/03

황새 - 장 크로스토프 그랑제 / 이재형 : 별점 2.5점

황새 1 - 4점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재형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랜덤하우스중앙)

루이 앙티오슈는 공부에 지친 육신을 환기시키고자 양부모가 소개시켜준 막스 뵘이라는 조류학자의 "황새 추적" 아르바이트에 응한다. 막스 뵘이 고리를 끼운 황새들이 둥지로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황새떼를 추적하여 밝혀내는 것이 목적, 이후 막스 뵘의 급작스럽게 사망 이후 죽음에 대한 의혹이 깊어지나 루이는 아르바이트를 계속한다.
하지만 아르바이트 중간에 만난 집시 조류학자와 이스라엘 청년의 의문의 죽음 (심장이 사라지고 난도질 당한 시체)을 접하고 막스 뵘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재산, "천국의 아이들"이라는 거대 의료 봉사 조직에 대한 의문이 생긴 뒤 루이는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황새들의 기착지인 중앙아프리카에 도착한 루이는 막스 뵘이 황새 다리에 끼운 고리를 통해 중앙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다이아몬드를 밀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새로운 심장이 없어진 변사체를 발견한 뒤 진정한 조직의 실체와 흑막을 알게 된다...

프랑스작가의 스릴러물. 방대한 조사와 기발한 아이디어가 잘 결합된 깔끔한 전개의 작품입니다. 특히 황새떼의 출발지점과 도착지점을 분석하여 "1. 황새가 운반할 수 있다 2.돈이 된다 3. 그 나라의 특산품이다"라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유일한 물건으로 "다이아몬드"를 설정한 아이디어가 신선합니다. 이 아이디어 하나만으로도 작품의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죠.
묘사도 괜찮아서 불가리아의 집시들과 이스라엘, 중앙 아프리카는 아주 실감나서 작가의 엄청난 사전 조사를 가늠케했습니다. 아프리카의 묘사는 정말 대단했고요. 뭐라 표현하기도 어렵네요.

하지만 심장이 사라진 시체들과 진정한 조직의 흑막을 연결시키는 부분이 너무 작위적인 것은 단점입니다. 대상자들이 우연찮게 황새떼를 쫓는 루이와 접촉하게 되는 설정은 우연치고는 너무 심하거든요. 또 진정한 흑막으로 묘사되는 인물은 그야말로 "악의 화신"같은 인물로 그려지는데 묘사가 허황되고 만화적이라 앞부분의 치밀하고 교묘한 설정을 다 말아먹습니다. 요새 일본 만화도 이 정도로 유치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이죠. 악의 정체가 얼마전에 읽은 "철의 장미"와 똑같다는 것도 저에게는 조금 아쉬웠고요.
거기에 더해 보스와의 최종 결전에서의 황당함은 그야말로 어이 상실이었어요. 앞부분에 잠깐 등장했던 인물의 혜성과도 같은 등장으로 해결되는데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질구레한 묘사와 설명 없이 그냥 루이가 끝내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텐데, 이건 데우스 엑스 마키나도 아니고 당쵀 뭔지 모르겠더라고요.
이외에도 흥행을 의식한 듯한 불필요한 요소들 -이스라엘 여성 사라와의 로맨스나 아프리카에서 동행한 티나라는 여성과의 정사 장면,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잔인한 묘사들 등- 이 많은 것도 불만스러웠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작가의 "미숙함"이 티가 나서 완성도가 떨어지지만 전체적인 설정과 짜임새가 제법 잘 살아있어서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던 작품이기는 합니다. 우직하게 한길로 밀어 붙이는 원숙함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데뷰작이라니 뭐 이 정도면 합격점을 줄 만 하겠죠. 워낙 설정이 좋았고 묘사력도 수준급인만큼 후속작을 기대해 봅니다.

2020/08/28

사고 -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 유혜자 : 별점 3점

사고 - 6점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유혜자 옮김/아래아

섬유회사에 다니는 나이 마흔다섯 살의 신체 건강하고 외무 준수한 알프레도 트랍스는 그의 애차 스투데베커의 급작스러운 고장으로 한 시골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트랍스를 저녁 식사와 함께 하는 그들의 게임에 초대하고, 트랍스는 초대를 받아들였다. 게임은 전직 판사, 검사, 변호사에 사형 집행인이었던 집주인과 손님들이 벌이는 모의 법정 놀이로, 그 날은 트랍스가 피고가 되어 그의 유죄를 증명하게 되는데....

독일 작가 프레드리히 뒤렌마트의 짤막한 단편입니다. 평범한 영업맨으로 보였던 트랍스가 상사였던 기각스를 해치우기 위한 범행을 계획하고 실천한 살인범이라는게 드러난다는 내용으로 일종의 완전 범죄물이지요. 

트랍스는 직장 상사 기각스의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면서 기각스가 심장이 약하다는 걸 알게되고요. 그 뒤 회사 내에서 기각스와 잘 소통하는 직원에게 불륜을 털어놓아 기각스가 그 사실을 알게끔 만들었고, 그 탓에 기각스는 심장 이상으로 죽고 맙니다. 

문제는 어느정도 고의였다 하더라도 트랍스의 행위만으로는 범행을 증명하기는 애매하다는 점입니다. 진지한 법정에서라면 트랍스가 유죄 판결을 받는건 불가능했을거에요. 그런데 이를 '모의 법정 놀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돌파하고 있습니다. 모의 법정 놀이는 트랍스가 방문한 시골 마을에서, 은퇴한 옛 법조인들이 함께 하는 저녁 만찬에서 벌어지는 놀이인데, 판사와 검사, 변호사와 사형 집행인까지 조합은 완벽하지만 놀이인 탓에 분위기는 시종 일관 난장판입니다. 참석자들이 나오는 음식과 술을 과다 섭취한 탓도 있고요. 이렇게 반쯤은 미쳐 날뛰는 광란의 도가니탕이라 트랍스마저도 스스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할 정도로 휩쓸려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스스로 범행을 저지른 살인자임을 자각하게 되지요. 

이렇게 왁자지껄 떠들썩한 모의 법정 놀이는 그야말로 현대적이면서도 참신한 아이디어였습니다. 1956년 출간된 작품이니 무려 반세기도 더 지난 고전인데도 말이지요. 작중에 나오는대로 소크라테스, 예수, 잔다르크, 드레퓌스의 모의 법정 놀의 결과도 한 번 보고 싶어지네요. 이러한 현대적인 설정과는 반대로 혼외 정사, 불륜을 전혀 범죄라 인지하지 못하는 트랍스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시대를 느끼게 해 주고요.

하지만 마지막 결말은 좀 뜬금없었습니다. 트랍스는 자신이 완벽한 범죄를 저지른 전능한 범죄자로 인식되어 유죄, 그리고 사형 판결을 받아 굉장히 기뻤던 나머지, 법정 놀이를 완벽하게 완성하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하지만 오히려 남은 전직 법조인들에게는 짜증나는 결과였다는 결말인데, 납득이 가지는 않았어요. 사람은 모두 죄를 짓기 마련이고, 인생사는 결국 희극이라는걸 표현하려는 작가의 의도였을까요? 짐작하기가 쉽지 않네요.

그래도 추리적으로 충분히 좋은 작품입니다. 모의 법정 놀이라는 아이디어도 기발하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굉장히 짤막하고 읽기도 편한 만큼,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작가의 이름값(?)도 있는만큼, 읽고 난 뒤의 만족감은 두 배 이상이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2003/12/15

낯선 시간 속으로 (化石の荒野) - 니시무라 쥬코 : 별점 3점


의문의 조직에 의해 살인누명을 쓰게된 과묵한 형사 니시나 소오스께. 그는 우여곡절끝에 생명을 담보로 조직의 명령을 받아 나까오미 가쓰아끼(정계의 거물 나까오미 하루요시의 아들)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나까오미 가쓰아끼는 일본의 험한 산만 골라서 정밀 조사를 하고 있는 와중으로 주인공은 나까오미의 조직과 또다른 의문의 외국 조직 등과 물고 물리는 신경전, 혈투 끝에 모든 사건과 조사는 2차대전 종전 직전 사라진 전쟁자금 2천톤의 금괴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1975년에 발표된 소설로 간만에 읽은 일본 추리소설. 
줄거리 요약만 보셔도 '추리소설'보다는 모험, 어드벤쳐 소설에 가깝다는걸 알 수 있지요? 그래도 영화화(위의 예고편 참고하세요) 된 소설답게 영화적인 요소가 가득하고, 서스펜스도 넘칩니다. 덕분에 시간가는줄 모르고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네요. 개인적으로는 모험소설 전문 작가 알리스테어 맥클린과 비슷한 풍이라 느꼈습니다.
"테러리스트의 파라솔" 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스타일의 설정, 그리고 약간 허무적이고 음울하면서도 고집센 주인공과 도움을 주기도 하는 악당캐릭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는 이 책 쪽이 7만배는 더 좋네요.

중간 중간에 있는 불필요해 보이는 복수극, 더더욱 불필요했던 정사장면, 그리고 끝을 너무 쉽게 한번에 정리해버리는 (주요 악역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여서 사이좋게 죽어버리는) 엔딩은 다소 아쉽지만 이 정도는 덮어버릴 재미는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1982년에 영화화 되었는데 DVD까지 나왔으니, 언젠가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리뷰에 따르면 영화쪽은 많이 아니라는 평이 지배적이니 걱정도 좀 되는군요)

2015/11/01

삼국지 스피리츠 1 - 아라카와 히로무, 토코 준 / 김동욱 : 별점 2.5점

삼국지 스피리츠 1 - 6점
아라카와 히로무, 토코 준 지음, 김동욱 옮김/애니북스

삼국지 연의 120회의 각 회별 내용 및 주요 정보 요약에 "강철의 연금술사"로 일세를 풍미했던 아라카와 히로무가 삼국지 매니아로 유명한 만화가 토코 준과 함께 수다떤 내용, 마지막으로 아라카와 히로무의 4컷만화 두 개씩을 실어놓은 기획 만화입니다. 1권에는 전부 60회까지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사실 만화라고 하기에는 대담의 비중이 높고, 대담집이라고 하기에는 팬이나 매니아 관점에서의 수다 수준이라 이래저래 애매한 부분이 많습니다(저의 분류로는 "역사책"입니다!).

허나 삼국지 팬으로서 즐길거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연의 120회를 회차별로 요약 소개하는 구성이 일단 괜찮아요. 주요 등장인물, 퇴장인물이라던가 주요 용어에 대한 소개도 적절할 뿐더러, 정사도 적절히 인용되고 있어서 마음에 듭니다. 대담도 단순한 팬보다는 더 깊숙한, 매니아 수준의 지식이 뒷받침되어 있고 나름대로 신선한 시각도 즐길 수 있고요. 글이 좀 많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정작 기대했던 만화의 재미가 무척이나 낮은 게 아쉽습니다. 황개의 고육지계, 노숙에 대한 소개, 손권이 동생을 유비와 결혼시키는 장면 등 피식할 만한 것들도 몇 개 있긴 한데 성에 차지는 않네요.

그래서 결론 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삼국지 팬이라면 한번쯤 볼 만합니다. 단, 만화를 기대하시면 안 되고 좀 색다른 삼국지 정보(?) 서적을 읽는다고 생각하시는게 좋겠습니다.
덧붙이자면, 15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에 9,000원이라는 가격은 너무 쎕니다. 2권을 구입할지는 좀 고민해 봐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