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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3

제츠메시 Road 시즌 1, SP - 별점 2점

평범한 직장인인 주인공 타마오가 매주 금요일 저녁 출발해서, 아무 지방으로나 내려가 차에서 1박 후 '제츠메시'를 먹고 돌아오는 여정을 그린 드라마. '제츠메시'는 말 그대로 곧 사라질지 모르는 동네 식당의 음식입니다. 보통 주인이 나이가 많은데 후계자가 없는 식당들이 대부분이더군요. 티빙을 통해 감상했습니다. 
"고독한 미식가" 히트 이후 쏟아진 유사한 형태의 짤막한 일상계 구루메 드라마입니다. 평범한 주인공이 실존하는 평범한 식당에서 한끼를 해결하는 내용이라는 점은 동일합니다. 차로 지방을 이동해서 '차박'을 하고, '제츠메시'를 일부러 찾아 먹는다는 차이점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도 아내와 딸이 아이돌 그룹 티어드롭스의 광팬이라서 주말마다 콘서트를 따라다니기 때문에 주말에 차박을 할 수 있다던가, 용돈 한도 내에서 여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무조건 차박을 한다는 설정은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재미는 없어요. 일단 제츠메시 부터 별 감흥이 없습니다. 워낙 지방들이라 어차피 제가 먹으러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 특별한 요리도 없으니까요. 
타마오의 회사 생활과 가족 이야기도 진부한 설정 - 직장에서는 상사와 후배 사이에 치여 살고, 집에서는 아내와 딸 사이에 치여 사는 연약한 가장 - 을 답습하고 있어서 지루하기만 했습니다. 차라리 차박을 하던 중에 폭주족들의 습격을 받는다던가, 차박 동료 츠토무와 만난다던가, SP에서처럼 너무 추워서 얼어죽을 뻔 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차박 관련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었는데 짧아서 아쉬웠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워낙에 짧아서 잠깐 잠깐 보기는 괜찮은데, 딱히 챙겨볼 필요는 없습니다.

2024/10/12

세상 끝의 살인 - 아라키 아카네 / 이규원 : 별점 1.5점

세상 끝의 살인 - 4점
아라키 아카네 지음, 이규원 옮김/북스피어
"아래 리뷰에는 진범 및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24년 9월 7일,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한다는 뉴스가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충돌 날짜는 정확히 반년 뒤인 2025년 3월 7일이었다. 그 뒤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하루의 가족도 뿔뿔이 흩어졌다. 어머니는 도망갔고, 아버지는 자살했기 때문이었다. 남동생 세이고는 뉴스 전부터 중학교 때 학교 폭력을 저지른 탓에 히키코모리가 되어 있었다. 매일을 운전 면허 교습을 받으며 소일하고 있던 하루는 고속도로 실습날인 12월 31일에 운전학원 실습차 트렁크에서 칼에 찔려 죽은 여성 사체를 발견했다. 
전직 형사였던 운전학원 강사 이사가와와 함께 얼떨결에 사건 수사에 나선 하루는, 동일한 수법으로 살해당한 피해자들이 있는 하카타와 이토시마에서 펼친 끈질긴 수사로 사건에 NARU라는 인물이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냈다. 그런데 NARU는 하루의 동생 세이고였다. 모든건 세이고가 중학생 때 다른 친구들과 나카노 이쓰키라는 동급생을 심하게 이지메하고 괴롭혔던 과거와 관련되어 있었다.

제 68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얼마 뒤 지구는 멸망하는데 운전학원에 다니는 여자와 운전을 가르치는 여자 교관이 차 트렁크에서 시체를 발견한 뒤, 연쇄 살인 사건 수사에 나선다는 기발한 설정이 돋보입니다.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난 상황도 그럴듯합니다. 세이고는 유이치, 준야와 함께 지구 멸망 전, 자기가 괴롭혔던 이쓰키에게 사과하려고 변호사 히츠미의 도움으로 그를 불러냈던 겁니다. 그런데 마침 불러낸 현장이 폭주 택시 연쇄 살인마인 경찰 이치무라가 시체를 버리던 초등학교였지요. 범행이 들통났다고 여긴 이치무라는 우선 세이고를 현장에서 살해했고, 도주한 유이치, 준야, 히쓰미를 차례대로 살해했던 겁니다. 이 때 세이고의 차를 유이치가 타고 달아나서 범인의 동선이 기묘해졌던 것이고요. 
피해자들이 방심한 상황 - 왜 차 안에서 창문을 열어서 범인이 손쉽게 찌를 수 있게 했는지 - 을 통해 범인이 경찰이라는걸 은근히 드러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정의감이 너무 넘치는 탓에 범죄자들을 극도로 혐오하는 이사가와 강사 캐릭터도 강렬합니다. 그외 멸망을 앞둔 상황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도 다채롭고요.

하지만 추리 소설이라고 부르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히쓰미의 신원을 알아내어 사건 파일을 입수하고, 피해자 준야를 처음 발견했다는 료도 형제와 우연찮게 만나게 되어 이야기를 듣고 동행하고, 세이고의 '마지막 사과'와 그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현장에 있었던 이쓰키가 하루에게 전화를 걸어 직접 알려주고, 이치무라가 직접 나타나서 하루 등을 납치하지만 료도 형제와 중간에 만났던 소녀 나나코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서 생명을 구한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정해진 순서대로 흘러가는 탓입니다. 이 과정에서 추리가 개입될 여지는 전무합니다. 이사가와 강사의 추리력이 번득이는 장면이 없지는 않지만, 본 사건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그리고 범인이 경찰 이치무라라는건 떠올리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경찰차 범퍼에 가해진 손상이 비중있게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폭주 택시'가 경찰차라는걸 목격자들이 놓쳤다는게 더 말이 안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높은 가드레일 탓에 경찰차 특유의 도장을 확인할 수 없었던 탓이라고 설명되는데, 지극히 운과 우연에 기반하고 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이치무라의 동기가 작품의 핵심인 '지구가 곧 멸망하는데 사람들을 죽이는 까닭이 뭔지?'를 잘 설명하고 있지 못한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무대 설정만 기발할 뿐, 결국 뻔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극과 다를게 없는 탓입니다. 특수 설정 미스터리라면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작품처럼 그 설정이 추리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1점에 가까운 1.5점입니다. 추리물도 아니고, 특수 설정도 이야기에 잘 녹여내지 못해서 감점합니다. 다른 후보작이 어땠기에 이 작품이 만장일치 수상을 했는지 모르겠네요. 

2024/10/11

이상한 그림 - 우케쓰 / 김은모 : 별점 2.5점

이상한 그림 - 6점
우케쓰 지음, 김은모 옮김/북다
"아래 리뷰에는 트릭과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사키는 후배 쿠리하라의 도움으로 '나나시로 렌'이라는 블로거가 올린 이상한 내용과 그림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림의 크기를 원래대로 맞추고, 기준점(번호) 중심으로 정렬하자 나나시로 렌의 아내 유키가 출산하는 모습이 드러났다.
아들 유타와 둘이서 살고 있는 나오미는 어린이집 선생 하루오카로부터 유타가 그린 이상한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다음날, 누군가가 나오미를 쫓다가 집의 위치를 알아낸 후 유타가 사라져버렸다. 하루오카 선생은 그림을 통해 유타가 학대받았다고 추리했지만, 유타가 그린 그림은 '묘비'였다. 묘비의 주인은 유타의 친모 유키였고, 알고보니 나오미는 유타의 할머니였다.
1992년, 고등학교 미술 교사 미우라 요시하루가 살해당했다. 3년 뒤, 사건을 다시 조사하기 위해 미우라의 제자였던 신문기자 이와타는 실제 사망 당일 미우리의 행동 그대로 등산에 나섰다. 그리고 미우라가 죽기 전 영수증에 그린 풍경 그림은, 미우라가 사망했다는 시각에는 역광이라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는걸 알아냈다. 이를 통해 미우라의 사망 시각이 조작되었기 때문이라고 추리했지만, 그날 밤 이와타도 진범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상한 집"으로 유명한 우케쓰의 후속작. 크게 세 편의 단편이 연결된 연작 소설로, 모든 이야기에 미우라 요시하루의 아내 나오미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선, 책 서두에 등장하는, 모친을 살해했다는 소녀 - 그리고 이상한 그림을 그린 - 가 나오미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블로그 속 글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 존재가 암시되어 있는 인물도 나오미입니다. 그녀는 나나시로 렌의 친모이며, 유키를 죽게 만든 범인이기도 합니다. 유타의 모친처럼 보였지만 알고보니 할머니였다는 나오미도 바로 이 나오미입니다.
그녀는 남편 미우라가 아들 다케시를 힘들게 하자 그를 살해했습니다. 어린 시절 모친으로부터 당했던 학대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유키가 낳는 아기도 자신이 모친이라는 이상한 모성애가 발동하여 유키가 출산 중에 사망하도록 몸을 악화시켰고요.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케시가 자살했던 겁니다. 유타와 함께 살아가던 나오미를 쫓았던 건 이와타의 선배 구마이였습니다. 그는 이와타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고 지난 10년간 고민하고 추리하여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냈습니다.

제목처럼 '이상한 그림'을 가지고 펼치는 수수께끼도 재미있습니다. 특히 '나나시로 렌 블로그' 속 그림에 대한 수수께끼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나하나의 그림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그림에 포함된 번호의 동그라미를 기준으로 크기를 맞추고, 번호대로 겹치면 무서운 그림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산모 배에서 아이를 억지로 꺼내는 듯한 그림이지요.
미우라 요시하루 사건에서의 그림도 흥미롭습니다. 보이지 않는 풍경 그림을 왜 그려서 남겼을까?라는 수수께끼인데, 이는 사망 시각이 조작되었을거라는 증거로 그림을 남겼다는 다이잉 메시지로 설명됩니다. 미우라가 먹은 하나야기 도시락의 소화 상태로 사망 시각이 추정되었는데, 그건 아침에 범인이 억지로 먹였던 것이고요.
그 외의 수수께끼들도 소소하지만 적절하게 사용됩니다. 나나시로 렌 블로그 속 글을 통해 드러나는 또다른 동거인, 미우라 사건에서 범인이 팥빵과 침낭을 가져간 이유 - 전날 저녁에 미우라가 먹은건 돈가스 샌드위치였고, 침낭으로 하룻밤을 보냈기에 범인은 이를 숨기기 위해 샌드위치와 함께 샀던 팥빵과 침낭을 가지고 사라졌던 것. 범인이 먹을걸 전부 가져갔다고 속이기 위해서, 그리고 침낭은 잤다는 흔적이 남아있어서 가져갈 수 밖에 없었다 -, 연약한 여자가 미우라와 이와타를 살해할 수 있었던 방법 - 침낭에서 자던 피해자들이 나올 수 없게 침낭 자체를 묶어버렸다 - 등이 그러합니다. 유타의 엄마로 보였던 나오미가 할머니라는게 밝혀지는 이야기는 서술트릭 기법이 사용되어 재미를 더해주고요. 나오미가 범행을 저지른 동기도 앞서의 사건으로 설득력을 높여주며, 사뭇 달라 보이는 이야기가 결국 하나로 묶이는 구조도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전작은 인터넷에 올렸던 상상에 허황된 설정이 결합되어 있을 뿐인, 완성된 소설로는 보기 어려운 망작이었던 반면에 이 작품은 최소한 한 편의 완성된 소설입니다. 실력이 많이 늘었네요.

하지만 그림을 가지고 풀어내는 수수께끼 자체만큼은 주택 평면도에서 기묘한 범행을 추리해내는 전작이 더 괜찮기는 합니다. 이 작품에서의 그림 수수께끼는 재미는 있는데 상황 자체가 억지스럽기 때문입니다. 유키가 그린 그림을 결합한다는 아이디어는 좋아요. 하지만 이렇게 복잡하게 그림을 남길 이유는 알기 힘듭니다. 그냥 남편에게 사실을 고백하면 됐을 겁니다. 왜 가만히 죽음을 받아들였을까요? 또 이 그림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낸들, '아이를 낳다가 죽는 미래'로만 보일 뿐입니다. 특별한 범죄를 나타낸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프로 일러스트레이터였던 유키가 그린 기도하는 모습의 여성이 '나오미'였다는걸 남편이 눈치채지 못한 것도 설명되지 않고요. 유타가 묘비를 그리려다가 지운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미우라 사건의 풍경화는 더 억지스럽습니다. 나오미가 풍경화를 눈치챘지만, 오히려 '알리바이가 있는 오전에 사건이 일어났다는 증거'로 삼기 위해 남겨두었다는게 특히 그러합니다. 용의자 중 그 시간에 알리바이가 없는건 유키 뿐인데, 애초에 유키가 알리바이가 없다는걸 이 시점에 나오미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흉폭하게 사체를 훼손했다 한 들, 1992년의 법의학이 사망 추정 시각을 단순히 소화 상태에만 의지해 발표했다고 보기도 어렵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들은 있지만 흥미로운 소재를 잘 풀어냈다는건 분명합니다. 작가로서 실력이 일취월장했으니, 다음 작품도 기대되네요.

2024/10/09

삼대 기서의 다음은 이거다! 추리 소설의 틀을 넘는 실험적 미스터리

오랫만의 미스터리 추천 소개입니다. 가끔 소개해드리는 honto 북트리에서 발견한 추천이지요.
이른바 '일본 삼대 기서'는 유명하기는 한데, 솔직히 큰 재미를 느끼기는 힘든 작품들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오래 전 동서 버젼의 "흑사관 살인 사건"을 읽어보려고 시도했다고 중간에 포기한 기억이 있습니다.그래도 뭔가 새로운 시도를 했기 때문에 '삼대 기서'라고 불리웠을텐데, 지금 읽기에는 그렇게 새롭게 느껴지지 못하는게 문제일 뿐이지요.
아래 소개 작품 중 두 편은 읽어보았는데, 새롭다는 느낌은 잘 받지 못했습니다. 평도 그럭저럭이고요. 언제나처럼 이런 리스트는 참고만 하는게 좋겠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미스터리 소설. 그중에는 "도구라 마구라", "흑사관 살인 사건", "허무에의 공물"처럼 '일본 삼대 기서'로 불리는 작품들이 있다. 이 작품들은 기존의 추리 소설이나 탐정 소설의 형식을 뒤엎고, 메타픽션적 요소를 포함한 실험적인 기법으로 쓰인 안티-미스터리 같은 소설이다. 이번에는 그러한 독특한 미스터리 소설을 소개한다.

1. "불타버린 지도" - 아베 코보
- 반년 전 실종한 남편의 수색을 의뢰받은 탐정이, 수색을 하면 할수록 실종자와의 거리는 점점 벌어지며, 결국 자신도 도심 속을 헤매게 된다는 기묘한 추리 소설. 도시는 타인만 존재하는 사막으로 묘사되며, 소외된 인간의 압도적인 고독감이 그려진다. 아베 코보 특유의 부조리와 탐정 소설 형식이 절묘하게 융합된 걸작.

2."신기하게도 우리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살인 사건" - 하시모토 오사무 (국내 미출간)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를 읽고 탐정을 찾는 노파. 손녀를 통해 그녀를 찾아온건 탐정과는 거리가 먼 도쿄대 졸업의 일러스트레이터였다. 주인공은 기토우 가문 옛 당주의 13번째 제사 중 벌어진 살인 사건을 둘러싸고, 어딘가 비현실적인 인간관계를 맺으며 사건의 진실에 다가간다. 메타 요소가 빛나는 포스트모던 미스터리.

3. "로트레크 저택 살인 사건" - 쓰쓰이 야스타카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쓰쓰이 야스타카가 추리 소설을 쓴다면? 이 작품이 그 답변. 교외의 서양식 저택 '로트레크'에서 여름 휴가를 즐기던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참극을 맞이한다.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 교묘한 트릭이 숨어 있어, 독자들이 사건을 추리하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다.

4. "누구나 할 수 있는 살인/관 속의 쾌락" - 야마다 후타로 베스트 컬렉션 (국내 미출간)
"인간장"이라는 목조 아파트에 이사 온 남자는 방 안쪽에 숨겨진 검은색 노트북을 발견한다. 그 안에는 과거의 입주자들이 경험한 살인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으며, "인간장"의 기묘한 인간 군상을 알게 된다. 단편 소설집처럼 보이지만 교묘한 장치로 독자를 놀라게 하는 야마다 후타로의 필력이 돋보인다.

5. "우부메의 여름" - 쿄고쿠 나쓰히코 
'쿄고쿠도' 시리즈의 출발점이자 쿄고쿠 나쓰히코의 데뷔작. 기묘한 소문이 돌고 있는 구온지 산부인과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친구 추젠지 아키히코(쿄고쿠도)에게 전한 세키구치 타미츠. 그들은 구온지 가문을 둘러싼 소문의 진상을 밝히려다가 예기치 못한 사건에 직면하게 된다. 요괴, 유령, 철학 등 방대한 지식과 독특한 등장인물이 펼치는 탁월한 괴기 미스터리.

2024/10/07

2024 두산 베어스 시즌 단평

드디어 2024 시즌이 끝났습니다. 18이닝 무득점으로 초유의 와일드카드 업셋을 당하며 많은 후폭풍(?)을 몰고 오고 있네요. 가장 말이 많은건 이승엽 감독에 대해서일테고요. 작년에 이어 간략하게 시즌을 정리해 봅니다.

제 평은 한마디로, '욕먹는건 당연하다'는 겁니다.
선발 투수들의 유래없는 부진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기 힘든 상황이기는 했습니다. 일단 네 명의 외국인 투수가 거둔 승수가 모두 13승에 불과하니까요. 알칸타라, 브랜든 선수가 합쳐서 24승을 거두었던 23년에서 -11승인데다가, 4선발로 낙점했던 최승용 선수의 부상 이탈 등이 겹쳤으니까요.
여기서 팀과 감독이 탱킹을 할 수 없었다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부임 이후 FA 계약에만 250억을 넘게 들인 상황이니 어쩔 수 없었겠지요.

하지만 윈나우에 적합한 성적을 거두지 못한게 이승엽 감독이 욕을 먹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올해 성적은 불펜 투수들을 지나치게 갈아 넣은 덕분일 뿐입니다. 금강불괴 이영하 선수마저 탈이 났었고, 최지강 선수는 두 번이나 부상자 명단에 올랐습니다. 이병헌 선수는 70경기가 넘는 경기에 등판해서 막판에는 자기 구속이 나오지도 않았으며, 고졸 신인 김택연 선수조차 70이닝 가까이 투구를 했을 정도로요. 이미 23년에 김명신 선수를 갈아 넣어서 올해 안식년을 만든 전과가 있는데도 배운게 없네요.

게다가 올해 와일드 카드 결정전 두 게임 18이닝 동안 단 한 점도 내지 못한건 결정적입니다. '국민 타자'라는 별명의 거포 출신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타선을 완전히 망쳐버렸습니다. 올해 두산 타선을 보면, 출루율이 형편없습니다. 30홈런을 넘게 친 양석환 선수, 커리어 하이라는 강승호 선수의 OPS가 8할 초반에 불과합니다. 김재환 선수는 8할 후반이기는 하지만 무려 168개의 삼진을 먹은 삼진왕이고요. 머니볼을 통해 진작에 정립된 세이버 매트릭스 이론을 무시하는 기조는 황당할 뿐입니다. 불펜이 좋으니 스몰볼을 선택할 수는 있습니다. 탱탱볼 시대에 맞는 전략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면 당연히 출루율은 높아야 합니다. 아니면 작전이라도 잘 수행해야하는데, 리그 10팀 중 둘째로 많은 85회의 희생 번트를 대고 그중 30번을 실패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러는걸까요? 
발빠른 쌕쌕이들을 중용한 이유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도루왕 조수행 선수가 대표적입니다. 타이틀은 거머쥐었지만 OPS는 0.627에 불과합니다. 왜 이 선수가 정수빈 선수의 백업이 아니라 선발 좌익수로 기용되는걸까요? 상식적으로는 OPS가 그래도 7할인 이유찬 선수를 쓰는게 당연합니다. 아니면 기회를 주었을 때 나름의 성과를 보였던 홍성호, 전다민 선수를 쓰던가요. 조수행 선수 자리도 그렇고, 양석환, 강승호 선수의 부진과 허경민 선수와 박준영 선수의 부상 이탈 등이 있어서 유망한 신인 타자들에게 100타석 씩은 충분히 기회를 줄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한건 반성해야 합니다.

또 작년부터 가을 야구에서 단 한 게임도 이기지 못한건 물론이고, 시즌 내내 중요한 경기에서 패배만 반복합니다. 이기려는 노력도 느끼지 못했고요. 여러모로 윈나우에 적합한 감독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최소한 승부사 김태형 감독이라면, 투수를 갈아 넣었더라도 지금보다는 나은 성적을 거두었을 겁니다. 

그리고 '윈나우'라고 해도, 두산 베어스가 우승할 수 없는 전력인건 자명했습니다. 혹자는 팬들은 그래도 이기는 경기를 원한다, 이승엽 감독이 잘못한게 뭐 있냐고 하는데 두산 베어스 팬들은 이미 7년 연속 한국 시리즈를 경험한지 10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가을 야구 한, 두 게임 더 하는건 대단한게 아니에요. 왜 긴 호흡으로 팀을 운영하지 않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올해는 브랜든 선수가 아웃 되었을 때 이미 끝난 시즌이에요. 그 때부터 내년을 준비하면서 운영하는게 바람직했습니다. 

과거 베어스는 각목곰, 깡패곰, 육상부, 판타스틱 4 등 화려한 수식어를 바탕으로 한 분명한 컬러가 있었던 팀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베어스는 '투마카세'라는, 투수들을 갈아넣는다는 비하적인 호칭만 남았습니다. 국민 타자의 팀으로 보기에는 더 없이 한심한 상황이지요. 문제는 내년에도 똑같을 것 같다는 겁니다. 노장들은 나이를 더 먹을 테고, 신예 야수들은 당연히 몇 타석 소화하지 못할테고, 순위도 잘해야 4위 정도일테고요. 젊은 투수들의 부상만 없기를, 그리고 감독의 교체만 바랄 뿐입니다.

2024/10/06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 미쓰다 신조 / 권영주 : 별점 3점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핵심 트릭과 진상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조 겐야는 대학교 선배 아부쿠마가와 가라스로부터 하미 지역의 특별한 제의와 기묘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하미에는 네 개의 마을에 각각 신사가 있고, 홍수나 가뭄 때마다 신사마다 돌아가며 지역 농사의 젖줄인 미쓰 천의 원류 진신 호에서 미즈치 신을 모시는 제의를 행해왔는데, 13년 전 제의에서 사요촌 미즈시 신사 신관 류지의 큰아들 류이치가 죽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으나, 터무니없이 무서운 어떤 것을 본듯한 형상이었다. 그 뒤 제의에서도 신관들은 기묘한걸 목격했다고 했다. 
이 소재를 탐방하기 위해 도조 겐야는 편집자 소후에와 함께 가뭄 탓에 행해지는 하미의 기우제에 참석했다. 그리고 제의 중 신남 역할을 맡은 류지의 둘째 아들 류조가 가슴에 미즈치 님의 신기 중 하나인 뿔에 찔려 죽은걸 목격했다. 그러나 현장인 집배는 완전한 밀실이었다. 겐야는 현장을 확인한 뒤, 자살이라고 추리했고 류지가 동의하여 사건은 마무리 되는 듯 했다. 그러나 미즈시 신사 외눈 광에 제물로 류지의 의붓손녀 사요코가 감금돠었다는걸 다른 신관들과 관계자들이 알게 되었다. 사요코를 풀어달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류지는 주술을 푸는데 시간이 걸린다며, 다음 날 풀어 줄 것을 약속했다. 

그날 밤부터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 미즈치 신사의 다쓰키치로, 미쿠마리 신사의 다쓰조 신관이 차례로 살해당했고, 스이바 신사 류코 신관은 중상을 입었다. 류지는 소후에를 감금한 뒤 겐야를 협박하여 범인을 밝혀낼 것을 종용했고, 겐야는 관계자들 앞에서 범인은 류지의 의붓 손자 쇼이치라고 추리했다. 겐야가 내 놓은 범인의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건 쇼이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추리쇼 직후 류지마저 총격으로 살해당했고, 도조 겐야는 소후에를 구해내 스이바 신사 후계자 류마와 함께 마을 밖 경찰서로 향하는 차 안에서 류마에게 진짜 진범이 누구인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 때 네 개의 마을은 폭우로 범람한 미쓰 천에 모두 휩쓸리고 말았고, 도조 겐야는 경찰에 살해된 사람들과 범인들 모두 실종된 것으로 신고했다.

"나 개인적으로는 자신감 있는 오만한 명탐정보다 도조 겐야 쪽이 마음에 드는 걸. 연쇄살인이 발생해 몇 명 죽고 난 다음에 겨우 사건을 해결해 놓고 실은 처음부터 범인을 알고 있었다고 지껄이는 명탐정보다,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는 댁이 훨씬 더 믿음이 가." - 류마.

도조 겐야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 제 10회 일본 본격미스터리 대상 수상작입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인데, 굉장히 흡입력있고 재미있는 내용이라서 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미즈치 신을 모시는 제의와 사건, 트릭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게 아주 돋보였습니다. 제의는 공물을 담은 큰 통을 호수에 빠트리면서 진행되는데, 이 통 안에 '산제물'인 사람을 넣어 두었던게 밀실 트릭의 진상입니다. 13년 전 제의에서 처음 산제물을 바쳤는데, 이 때 통에 갇혔던 산제물 이치로가 물 속에서 튀어나와서 류이치는 깜짝 놀라 심장마비를 일으켰던겁니다. 이치로는 지하 수로로 빨려들어갔고요. 그리고 이번 사건에서는 산제물은 사요코였는데, 그녀 역시 통을 호수에 빠트릴 때 빠져나와 류조를 찔러 죽였습니다. 통 안에 공기가 남아있어서 관계자들이 현장을 보고 떠날 때 까지 숨어있을 수 있었고요. 이 과정에서 집배가 한 번 더 흔들린 이유 - 떠오른 통에 부딪혀서 - 까지 설명되는게 아주 좋았습니다.
사건에 대해 겐야가 내 놓는 여러가지 추리도 볼 만 합니다. 우선 겐야는 범인에게 해당되는 일곱 개의 조건을 꺼내어 놓습니다.
  1. 미즈치님 제의에 산재물이 부활했다는 걸 알 수 있는 인물
  2. 쓰루코 대신 사요코가 제물이 되었다는 걸 알 수 있는 인물
  3. 산재물이 통 안에 들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인물
  4. 사요코가 제물로 바쳐졌음을 알고 범행을 결심한 인물
  5. 류마의 잠수 장비가 어느 광 어느 궤짝에 들어 있는지 알 수 있는 인물
  6. 잠수 장비를 착용하고 활동할 수 있는 인물
  7. 호수에 드나드는 방법을 알 수 있는 인물.
이 조건에 맞는 사람들을 추려낸 후, 하나씩 소거해가는 과정이 아주 그럴듯했어요. 이를 통해 범인이 쇼이치라는걸 드러내는 추리도 합리적이고요. 물론 이는 나중에 아닌걸로 밝혀지지만요.
미즈시 신사가 '산제물'을 바쳤다는걸 밝혀내는 추리도 돋보입니다. 신에게 바치는 '신찬'은 누가 보아도 산제물인 여성을 형상화한 것인데, 류지가 이를 대충 고르는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꼈다는 등의 단서는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알려줍니다. 여러모로 '본격추리대상'을 탈만큼 추리적으로는 풍성합니다.
다만 도조 겐야의 추리는 일본어를 이용한게 많아서 한국 독자는 풀어내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 약간 아쉬웠습니다. '산제물'을 추리해내는 추리가 특히 그러했습니다. 이런걸 원어로 보고 이해하며 추리에 동참할 수 있는 일본 독자들이 부럽기만 할 따름입니다.

전쟁 당시 일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눈에 뜨였습니다. 류마가 해군 자살 특공대 후쿠류 출신이라는 설정인데, 류마의 입을 빌어 전쟁 당시 자살 특공대에 대해 개죽음이라고 비판하는 부분이라던가, 자식이 죽어도 체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낙후된 촌락의 사고방식을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사고방식과 빗대는 부분이 그러합니다. 아버지나 자식이 죽어도, 형이나 동생이 목숨을 잃어도 슬퍼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기뻐했던건 비정상적이라는 것이지요.
쇼이치가 어떻게 되는지 밝혀지지 않은 후일담은 다소 마음에 걸리지만, 자매가 행복을 찾았다는 결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것도 몇 가지 있습니다. 사요코가 산제물로 통 안에 갖혔을 때 미즈치의 뿔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처럼요. '불안함을 느껴 호신의 의미로 가지고 있었다'는 정도로 대충 넘어가는데, 제대로 된 설명은 아닙니다. 그렇게 아무나 가져갈 수 있게 두었다는 것부터가 설득력이 떨어지니까요. 그것도 제의 전에 말이지요. 또 호수에서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강하게 이야기했는데, 사요코가 범행을 저지른 뒤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설명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물론 공기가 들어있는 통을 사용했다는 트릭이 활용되기는 했는데, 과연 얼마나 숨을 쉴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물 밖으로 나온 뒤 사건에 대해 증언하지 않고, 숨어서 신관 연쇄 살인 사건을 일으킨 동기도 불분명합니다. 자신을 산 제물로 삼으려고 했다는게 신관들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라고 믿었다 한 들, 최우선 복수의 대상은 류지여야 합니다. 다른 신사의 신관들이 아니라요. 그리고 복수심에 불탔다 한들 신관들을 미즈치 님의 신기로 살해할 이유도 없습니다. 상식적이었다면 자신들의 편일 세이지, 류마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마을 밖 경찰서에 신고했어야 했어요.
류지가 산제물을 바치기로 결심한 뒤에도 외눈광을 유지한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의 때마다 산제물을 바친다면, 필요 없는 곳입니다. 미즈치 신을 모시는 곳이라서 쉽게 허물 수가 없었던 것일까요? 그렇다쳐도 첫 산제물을 바친게 13년 전이니,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습니다.
이미 13년 전에 통 뚜껑을 잘 닫지 않아 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또 통 뚜껑이 열렸다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았던 점이고요.

아울러, 미쓰다 신조의 작품을 어느 정도 읽은 지금 시점에서 보면, 작품의 거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쇼이치 시점의 이야기는 너무 길고 지루했습니다. 쇼이치를 통해 하미 지방에 미즈치 신 외에도 기묘한 어떤 것 - '팽것', 귀녀 등 - 이 있다는 설정을 장황하게 풀어내고 있는데, 이러한 이형 존재에 대한 서술은 다른 미쓰다 신조 작품과 거의 똑같았던 탓입니다. 추리적으로 도움이 되는 부분도 거의 없고요. 그나마 진신 호에서 미쓰 천으로 이어지는 지하 수로는 여러 통로로 접근할 수 있다 정도만 추리에 도움을 주지만, 이 역시 류마가 조성한 무덤 - 이치로의 시체가 떠내려 온 - 과 이치로의 사체가 발견된 곳 등으로 알려주기 때문에 그렇게 필요한 정보는 아니었습니다. 다 읽고나서 쇼이치 부분을 빼고 도조 겐야 부분만 추려서 읽어도 충분히 말이 될 정도였으니까요.
쇼이치 가족의 어머니가 '가가구시촌의 사기리'였다는건 시리즈 제 1작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과 연결되는데, 이 역시 천편일률적인 묘사로만 이어질 뿐 특별한 소재로 사용되지는 못합니다.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별점은 3점입니다. 재미있는건 분명하니까요. 도조 겐야 시리즈, 혹은 호러 미스터리를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24/10/05

그림자 없는 남자 - 대실 해밋 / 구세희 : 별점 2점

그림자 없는 남자 - 4점
대실 해밋 지음, 구세희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유한 아내의 사업체를 관리하며 유유자적하는 닉은 원래 전직 탐정이었다. 그에게 그가 몇 년 전 다루었던 사건의 의뢰인 와이넌트의 딸 도로시가 찾아왔다.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와이넌트의 비서 줄리아가 살해당한채 발견되었고, 와이넌트의 행방도 묘연한 상태였다. 닉은 옛 인연으로 도로시를 도우며 사건의 범인을 찾아 나서는데....

대실 해밋 전집 다섯 번째 작품. 전직 탐정 닉과 노라 부부가 우연찮게 만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징이라면 전직 탐정이자 지금은 처가 사업체를 관리하는 사업가인 주인공 닉입니다. 전통적인 하드보일드 탐정의 스타일을 보여주면서도, 결혼한 남자답게 어느 정도 매너와 배려를 선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혼에 성공했겠지요. 닉이 아내를 잘 만나 상류층이 된 덕분에 미국 상류층들의 시끌벅적, 흥청망청 분위기 한 가운데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점도 독특합니다. 보통의 하드보일드 탐정들은 이런 분위기의 주변인물들이었는데, 정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진상을 드러내는 추리쇼도 괜찮았습니다. 닉의 추리로는, 와이넌트 작업실에서 발견된 시체는 와이넌트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4개월 동안 와이넌트를 만났다고 한 건 그의 변호사 맥컬리밖에 없습니다. 작업실에서 일하던 기계공들이 해고되고, 작업실의 문을 닫은 다음 작업실 임대 기간을 연장하고 계속 비워 놓은 것도 이상하고요. 줄리아는 공범이었는데 그녀가 겁에 질려했거나, 혹은 입막음을 위해 살해했습니다. 넌하임은 줄리아 살해 당시 맥컬리를 목격했었기 때문에 없앴고요. 이후 와이넌트의 채권을 미미에게 준 것도 맥컬리지요. 와이넌트를 만나 받은거라고 시킨 겁니다.
추리를 위한 단서들도 모두 사전에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와이넌트 행방이 4개월 동안 묘연하다는 것, 그와의 연락은 전보나 전화 등으로만 이루어졌다는 것, 미미가 돈에 환장했다는 것, 와이넌트 작업실의 존재 등 모든 것들이 말이지요.

하지만 여러모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하드보일드'라고 보기 어려운 탓입니다.  이 작품과 정통파 하드보일드는 "도박묵시록 카이지"와 "일일외출록 반장" 정도로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하드보일드 특유의 끔찍한 인간 관계, 잔혹한 현실 등은 전혀 그려지지 않습니다. 범행 동기도 그냥 돈 문제였을 뿐입니다. 닉도 밑바닥 탐정이 아니라 상류층 인물이고, 호화롭고 흥청망청한 생활 중심으로 그려지고 있어서 사람이 세 명이나 - 와이넌트, 줄리아, 넌하임 - 살해되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닉은 탐정이 아니라서 정식으로 의뢰를 받지도 않았고, 닉 본인이 관련된 사건도 아니라서 닉에게 별 위험이 닥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대실 해밋이 쓴 크리스티의 "부부 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추리 역시 후더닛 측면에서 보면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줄리아를 살해할 등기가 있었던 건 와이넌트 밖에는 없습니다. 그녀에게 거액을 사기당했으니까요. 그런데 와이넌트의 동기도 줄리아가 사기친 금액이 고작 4천 달러라는 점에서 애매해집니다. 와이넌트는 1년에 수만 달러의 특허료를 받는 부자이기 때문이지요. 또 다른 유력한 용의자는 와이넌트 부인 미미인데, 그녀가 줄리아를 살해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와 같이 살고 있으니 질투라는 동기는 말이 안되고, 돈이 목적이라면 줄리아가 아니라 와이넌트를 살해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4개월 전에 누군가가 와이넌트를 죽이고 살아 있는 걸로 위장한 뒤, 줄리아를 살해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비서였던 줄리아가 입을 맞추지 않으면 와이넌트가 살아 있다고 속일 수도, 그의 재산을 빼돌릴 수도 없었으니 그녀는 공범이었고요. 그렇다면 와이넌트와 줄리아를 죽인건 동일인물이고,  와이넌트와 그동안 연락을 했다라고 주장하는 건 변호사 맥컬리밖에 없으니 범인은 그밖에 없습니다. 경찰이 진작에 맥컬리를 체포하지 않은 이유를 떠올리기는 힘듭니다.
전개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여러 등장인물이 나와 서로 얽히며 여러 사건을 동시에 진행해 나가는게 하드보일드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은 하나의 사건을 여러 증인의 입으로 풀어내는게 전부라서 잘 짜여졌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증인들이 이곳저곳에서 두서없이 등장하여 혼란스럽고, 도로시의 동생 길버트의 기묘한 행동 등 불필요한 이야기도 너무 많고요. 읽으면서 졸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하드보일드 답지 않다는게 신선하기는 한데, 그게 장점은 아닙니다. 별로 권해드리고 싶은 작품은 아닙니다.

2024/10/04

당일치기 조선여행 - 트래블레이블 : 별점 3점

당일치기 조선여행 - 6점
트래블레이블 지음, 이도남 감수/노트앤노트
딸과 함께 종로 투어를 할 때 도움이 될까 싶어 읽어본 책.
실제 가이드가 투어를 하듯이, 코스를 짜고 그 코스 안의 여러가지 사적지들에 대해 설명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수록된 코스는 모두 14개인데 크게는 조선 코스 6개, 일제 강점기 코스 8개로 구분됩니다.

경복궁 코스는 광화문 - 홍례문 - 영제교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순입니다. 실제 궁궐에 들어가는 순서이지요. 광화문의 '광화'는 빛으로 세상을 교화시키다는 의미로 세종이 지은 이름입니다. 즉, 왕이 백성들에게 한 약속이지요. 홍례문은 '예를 널리 편다'는 의미로 대궐 문을 들어선 관료들에게 일러주는 말이고요. 홍례문을 지나 삼도를 거쳐 영제교를 건넙니다. 다리의 이름은 원래는 '금천교'였습니다. 왕이 있는 곳이라 건너가는 것을 금하는 의미로요. 하지만 세종은 영원히 건널 수 있다는 뜻의 '영제교'로 바꿨습니다. 이 다음부터는 왕의 공간입니다. 근정문과 근정전은 공식적인 행사를 치루는 곳입니다. 회사로 따지면 행사장, 회관같은 곳이겠지요? '부지런하게 정치하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고요. 사정전은 실제 업무를 보던 곳으로 한 마디로 사무실입니다. 이름도 그런 뜻이겠지요. 그리고 뒤의 강녕전, 교태전은 왕과 왕비의 침전과 사적 공간입니다.
창덕궁 코스는 돈화문 - 금천교 - 인정문 - 인정전 - 선정전입니다. 창덕궁은 태종 이방원이 만든 궁이라 강한 왕권이 유지되었기 때문인지 금천교가 그대로 있는게 특이합니다. 말 그대로 왕과 신하를 구분한 것이지요.
창경궁 코스는 홍화문 - 옥천교 - 명정문, 명정전 - 문정전 - 경춘전 - 환경전이며, 뒤에 춘당지 - 대온실 로 이어집니다. 홍화문은 '천지를 밝히고 적의 조화를 넓혀 보살핀다'는 뜻입니다. 이름 그대로 과거 홍화문 앞은 넓은 마당으로 백성과 왕실이 서로 어울리는 공간이기도 했고요. 다른 궁궐들처럼 궐내 다리인 옥천교를 건너면 왕의 공간으로, 명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입니다. 공식적인 의례와 행사를 진행한 곳이지요. 창경궁은 왕의 주거 공간 목적으로 지은 궐이라 다른 궐보다 규모가 작다는게 특징입니다. 다른 궐은 모두 삼문 원칙으로 3개의 문을 통과해야 정전에 도달할 수 있지만, 정전까지의 문도 2개만 지나게 됩니다. 문정전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곳으로 유명합니다. 경춘전은 정조가 태어난 곳, 환경전은 소현세자가 죽음을 맞이한 곳입니다. 주거 공간 목적답게 이런 역사가 많네요. 춘당지와 대온실은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며 위락시설로 전락시킨 산 증거입니다. 궁궐을 일반 대중들이 방문하는 곳으로 만든 것이지요.
경희궁 코스는 홍화문 - 서울고등학교 터 비석 - 방공호 - 서암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경희궁 자체가 고종 때 경복궁 증건을 위해 헐려 빈 터만 남은 탓에 내용이 적습니다. 이 중 '서암'이라는 바위에 얽힌 이야기가 흥미로왔습니다. 숙종이 강한 왕권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조선 시대 왕 중 딱 7명만 가진 '적장자' 타이틀 덕분이었는데 이건 인조 반정이 성공해서 얻은 타이틀입니다. 인조가 정당한 왕이라는걸 증명하기 위해 원래부터 집에 왕기가 서려있었다!며 평범한 바위에 '왕의 기운이 어렸다'고 숙종이 직접 '서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타이틀이라는게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 왕들에게는 정말로 어마무시한 위력을 발휘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코스는 서암말고는 딱히 볼 건 없어보였습니다.
종묘 코스는 정문인 외대문을 지나 종묘의 부속된 건물들을 차례대로 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부속 건물에 대한 상세한 설명보다는 종묘가 어떤 곳인지에 대한 설명 위주이고요.

덕수궁 코스는 황궁우 - 대한문 - 중화문 - 중화전 - 석조전 - 중명전, 돈덕전 - 함녕전 순입니다. 이 코스는 '대한제국'과 '황제'라는 지위를 알리는 건물들 중심이에요. 덕수궁은 대한제국 때 고종이 법궁으로 선택하여 큰 발전을 이룬 궐이니까요. 우선 황궁우는 고종이 황제가 된 걸 알리는 건물이고, '대한문'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우며 한양이 넓고 크게 뻗어나가기를 기원하며 지은 이름입니다. 중화전도 '황제'의 국가를 증명하기 위해 황금색과 황제의 상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석조전은 황제가 된 고종이 새로운 근대 궁전을 만들려고 돌로 지은 건물이고요. 이 뒤의 건물들은 일제강점기를 나타냅니다. 석조전 서관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일제가 궁의 격을 낮춰 아무나 드나들 수 있게 미술관으로 만들었던 건물이며, 그 옆의 중명전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 돈덕전은 고종이 강제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한 곳이거든요. 함녕전은 고종의 침전으로 급작스럽게 승하한 곳입니다. 고종과 대한제국의 짧았던 운명을 잘 느낄 수 있는 코스입니다.
정동은 궁궐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속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코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 미국공사관 - 구 프랑스공사관 - 구 러시아공사관 - 구 영국공사관 - 광혜원 - 배재학당 - 이화학당 - 언더우드 사택 -  정동제일교회 - 손탁 호텔을 둘러보게 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남아있는 건물은 몇 개 없네요. 그나마 주한 영국대사관이 1890년대 영국이 만들었던 구 영국 공사관 건물 그대로라는데, 한 번 가 봐야겠습니다.
서울역, 서대문 형무소는 건물만의 코스입니다. 서울역은 많이 가 보았지만, 이 책에서 소개한 장소는 기억에 없군요. 다음 기회에 한 번 둘러볼 생각입니다.
성북동은 혜화문 - 한양 도성 해화동 전시 안내 센터 - 최순우 고택 - 간송미술관 - 수연산방 - 심우장 순서입니다.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간성미술관은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장소가 아니라서, 시간을 내어 둘러보기는 다소 어려운 코스로 보입니다. 대한민국의 3대 전통 정원이자 의친왕 이강이 죽기 전까지 머물던 것으로 유명한 성복동 별서는 한 번 가 보고 싶지만요.

이렇게 재미있는 여행 코스들과 정보들이 가득한데, 몇몇 코스는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고궁 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 같이 특정 장소만을 중심으로 안내하는 코스가 특히 그러합니다. 종묘와 서울역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지요. 
또 여러 명의 가이드가 글을 쓴 것 같은데, 사람에 따라 내용이 들쭉날쭉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어떤 코스는 구태여 시간을 내어 둘러보기는 애매해 보였기 때문에 코스들도 선별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고요. 무엇보다도 여행 코스라면 둘러보는데 얼마나 걸리는지에 대한 정보는 꼭 들어갔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별점은 3점입니다. 조선 궁궐에 대한 책은 몇 권 읽어 보았는데, 그 책과는 다르게 돌아볼 수 있는 코스 중심으로 설명하여 실제로 관람 시 도움이 됨직한 책이라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궁궐의 구성도 코스 중심이라 더 잘 알 수 있었고요. 사료적인 가치가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번 둘러보면서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적당한 그런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더 관심이 생기면 그때 본격적으로 궁궐 관련 책을 읽는 순서로 읽어 나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