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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2

우아함과 탁월함의 역사 - 윤병권 : 별점 2.5점

우아함과 탁월함의 역사 - 6점
윤병권 지음/상

세계의 명문 호텔들에 대해서 소개하는 책으로 모두 13개의 호텔이 소개됩니다. 익히 잘 알려진 파리의 릿츠 호텔, 홍콩의 페닌슐라 호텔, 싱가포르의 래플즈 호텔, 도쿄의 데이코쿠 호텔, 뉴욕의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 방콕 오리엔탈 호텔, 도쿄 오쿠라 호텔 등 여러 유명 초고급 호텔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관광 안내 서적은 아닙니다. 알라딘의 책 분류로는 문명 / 문화사 서적으로 되어 있을 정도로 각 호텔 별로 상세한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호텔 업계의 큰 흐름을 잘 알 수 있도록 구성이 짜여져 있는 덕분입니다.
예를 들어 호텔의 왕 릿츠의 파리 릿츠 호텔을 다루는 첫번째 챕터를 보면, 릿츠 호텔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최초에 오픈하여 현재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요약 설명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릿츠 호텔의 특징들에 대한 상세한 소개가 이어지고요. 마지막으로는 릿츠 호텔에 관련된 여러가지 에피소드 - 독일 가수 타코의 노래, 헤밍웨이의 릿츠에 대한 헌사 등 - 들로 마무리 되는 구성입니다. 

이러한 구성에서 특히 호텔의 역사와 에피소드들이 흥미롭습니다. 홍콩의 별 볼일 없는 오지 주룽이 페닌슐라 호텔의 번창 이후 지금의 '침샤초이'가 되었다던가, 런던 사보이 호텔에 관련된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 - 모네가 발코니에서 템스 강변의 풍경을 그렸다, 가수 멜바를 위한 '피치멜바'의 탄생지이다, 영국에서 유일하게 우측 통행을 하는 도로가 있다 등 -,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의 초대 총지배인 조지 C. 볼트를 발탁한 에피소드와 조지 C. 볼트가 '사우전드 아일랜드 드레싱'을 만들었다는 등의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소개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자가 서울 신라 호텔 증축 및 개수부터 참여하여 호텔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라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소개되는 호텔들에 대해서 창문으로 바라본 경치가 좋다! 집기가 고급스럽다!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전문가적 식견에 기반하여 설명해 주거든요. 호텔 창업자의 철학, 호텔의 역사, 해당 지역에 대한 설명 및 호텔의 방향성 등 여러가지를 통틀어 자세하게 정보를 전달해 주니까요. 또한 모두 저자가 직접 방문하여 호텔에 대해 구석구석 살펴보고, 그 서비스를 접해본 곳들이라 설득력도 높습니다.

그러나 도판의 질이 낮다는 단점은 크게 느껴집니다. 풀컬러도 아닌데다가, 기껏 실린 사진들도 해상도가 낮아서 모자이크 현상을 일으킵니다. 책의 만든 모양새도 별로고요. 최고급 호텔에 대해 설명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전혀 꾸미지도, 돌보지도 않은 모양새라 실망스럽습니다.
그리고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뭐한데, 수록된 호텔들을 선정한 기준도 모호합니다. 단지 저자의 마음 속 순위로 보이는데, 보다 객관적인 지표로 호텔들 순위를 매겼더라면 어땠을까 싶어요.

그래도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전문 호텔 안내서라는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알 수 있는 정보들이더라도 그 것을 모아서 한 번에 소개한다는 용이성 측면도 간과하기 어려운 장점이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딸 아이가 조금 더 크면 여기 소개된 호텔들 투어를 떠나고 싶군요. 막대한 돈이 들겠지만...

2018/12/09

호텔 - 도미타 쇼지 / 유재연 : 별점 2.5점

근대 일본에서 호텔이 형성되는 과정을 당시 분위기와 함께 소개하고 있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이 책을 통해 근대 일본 호텔의 역사에서는 크게 3개의 키워드가 도출된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 그건 바로 외국인과 서구화, 그리고 철도죠.

우선 외국인은 호텔의 역사에서 떼놓고 생각하기 힘듭니다. 최초에 호텔이 생긴 이유도 외국인들 대상의 숙박 업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니까요. 우리나라만 해도 최초의 호텔로 유명한건 "손탁 호텔" 이기도 하지요. 이후 요리가 유명한 작은 호텔들이 한, 두 개씩 생기다가 정부 주도의 영빈관 호텔이 들어서면서부터 "서구화"가 추진됩니다. 일본이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을 맺은 이후라서 외교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부 주도로 "서구화"를 강하게 추진한게 그 이유로, 당시 도쿄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던 독일인 의사 베르츠는 일본인들이 고유 문화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할 정도였다고 하네요. 이렇게 서구화가 국가의 핵심 과제인 상황에서 외국인 손님들, 특히 영국 황태자같은 외국 왕실 일가가 방문을 하게 되면서 서양식 호텔을 서둘러 건축하고, 이는 각 지방으로 널리 퍼져나가게 됩니다. 천황 일가의 방문도 겹쳐서 더욱 영빈관스러운 분위기를 추구하게 된 것이고요. 아울러 서구화는 단지 건축 양식 뿐 아니라 식사 및 호텔의 각종 운영 방식 모두가 포함되어 서비스됨으로써 전통 "료칸"과 더욱 차별화되게 됩니다. 결과야 어쨌건 결국 이를 통해 서구 문화를 접하게 되었기에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비싼 가격으로 "고급" 이미지가 함께 형성된 건 덤이라 할 수 있겠죠.

이후 각 지역 관광 산업이 활성화되면서 관광지와 함께 생겨난 호텔이 소개됩니다. 이러한 관광지는 교통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일본을 대표하는 관광 휴양지 중 하나인 가루이자도 요코가와와 가루이자와 간 아프트식 철도 개통으로 피서객이 급증한게 발전의 가장 큰 이유라네요. 이렇게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숙소가 필요해져 호텔이 속속 도입되게 되었고요. 비슷한 내용은 "에키벤"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철도 회사가 호텔을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식민지 만주에서는 주요 철도역마다 "만철"이 운영하는 거대 호텔이 들어섭니다. 서구화 단계를 지나선 일본이 식민지 사람들이 외경심을 갖게끔 거대하고 웅장한 호텔을 짓기 위해서였다는데 참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심지어 부산과 경성에 세웠던 호텔마저 소개되니까요. 다행히 이 책의 저자는 식민지에서의 호텔 산업은 식민지 주민들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고 쓰고는 있습니다만, 씁쓸합니다.

이 세 개의 큰 키워드를 중심으로 실제로 세워졌던 다양한 호텔들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는게 주요 내용인데 지금은 사진으로 밖에 남아있지 않은 호텔이 대부분이며, 호텔 건설 및 운영에 참여한 인물들 소개는 딱히 관심이 가지 않는 등 조금은 불필요한 내용이 많은건 아쉽습니다.
특히나 여러 인물 소개는 영 별로입니다. 인물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탓으로 실제로 뭘 했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단순히 호텔을 세우거나 운영한 사람들이 많아서 뭐 이렇게까지 소개했어야 하나 싶기도 했고요. 또 아쿠다카와 류노스케 등 유명 인사에 관련된 에피소드는 재미있기는 했지만 분량에 비하면 소개되는 호텔과 인물이 과한 편이라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에요. 이럴 바에야 이전에 읽었던 "우아함과 탁월함의 역사" 처럼 주요 호텔에 보다 촛점을 맞추어 소개하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근대 일본의 분위기, 시대상을 호텔이라는 소재로 잘 드러낸 내용은 마음에 들고 당대 문화(특히 숙박업과 관광 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사료적 가치가 크지만 단점도 명확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래도 나름의 가치는 확실하니 근대 일본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한번 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2013/02/18

손탁 호텔 - 이순우 : 별점 2점

손탁 호텔 - 4점
이순우 지음/하늘재

"정동과 각국공사관"과 같이 조선 후기 ~ 일제 강점기를 다룬 이순우 씨의 미시사 서적. 이번에 다룬 주제는 제목 그대로 "호텔"입니다.

제목만 봤을 때에는 대한제국 최초의 호텔로 유명한, 그리고 격변하던 시대에서 외교의 중심지로 각국의 스파이들이 출몰하던 (또는 출몰했던?) 손탁 호텔에 대한 디테일한 소개가 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내용은 "호텔의 역사"에 좀 더 집중하고 있더군요. 조선에 최초로 생긴 호텔이 어디였는지에서부터 시작해서 초기 호텔들의 흥망성쇠와 뒷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초기 호텔은 상점을 겸해서 육혈포와 총탄까지 팔았으며 각종 희귀한 유럽의 식재료도 구할 수 있었다든지, 익히 알려진 대로 손탁 호텔은 최초의 호텔이 아니며, 손탁 호텔의 요리는 굉장히 평이 좋았다는 등의 내용은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관심 있었던 손탁 호텔과 손탁 여사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는 수준이라 실망스러웠습니다.
호텔 이야기가 끝나는 책의 후반부에 "개화기 풍물의 이모저모"라는 제목으로 커피, 활동사진, 당구장, 신식 결혼식 등 당대 유행했던 문물들을 소개하는 부분은 너무 주제와 동떨어집니다. 수준 역시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도에 그치고요. 흔한 주제인데다가, 내용도 별로 건질 게 없거든요. 이 부분을 빼고 가격을 낮추는 게 나았을 겁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 초기 호텔의 역사를 일람한다는 측면에서 볼만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기대했던 부분이 조금 소홀하고 불필요한 정보도 많아서 감점합니다. 정가를 다 주고 사기에는 아까운 책이었어요. "근대 호텔의 역사"를 정리한다는 취지로 제목을 고치고, 그런 방향으로 수정되면 좋겠습니다.

2020/03/26

[번역] A 사이즈 살인사건 (1) - 아토다 다카시

A 사이즈 살인사건 - 아토다 다카시 : 별점 3점

이 책은 대략 13년 쯤 전에 원서로 읽었었습니다. "나폴레옹 광"으로 유명한 쇼트쇼트의 대가 아토다 다카시 유일의 본격 추리 소설 단편집입니다. 1978 ~ 79년에 '월간소설'에 연재되었던 이야기들로 모두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A사이즈 살인사건'은 단편집 표제작이자, 각종 설정과 이야기 구조를 확립하는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추리적인 완성도도 개중 높은 편이고요. 코로나 사태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보니, 번역도 손을 대게 되었네요.

의역으로 가득찬 졸역이지만, 심심하신 분들께 위안거리가 될까 싶어 창피함을 무릅쓰고 올리니, 부디 즐겁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길이가 길어 세 편으로 나누어 올리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세외승경(世外勝境)'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낡은 문기둥에 쓰여져 있는 글자이다. 바로 옆에까지 빌딩이 세워진 절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다. 수행자들의 관습이려나? 아니면 이 문을 세웠을 무렵은 일대가 훨씬 속세를 벗어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석문을 지나면 앞쪽에 본당이, 오른편 나무문 안쪽에 주지 스님 가족이 머무는 안채가 있다.

"실례합니다."

"예"

까까머리에 터틀넥 스웨터를 입은 수행승이 나타나 큰절을 올렸다.

"이쪽, 2층으로 올라오세요."

미리 전화로 연락해 놓았던 덕분인지, 2층의 손님 방은 이미 패널 히터로 따뜻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벌써 바둑판까지 놓여 있었다.

사무라 에이스케는 크고 푹신한 방석에 앉아, 수행승이 가지고 온 차를 입에 머금었다.


묘법사의 주지 스님과 알게 된 건, 순직한 친구의 묘가 묘법사에 있기 때문이었다. 가끔 성묘를 오면서 스님과 얼굴을 익혔고, 어느 날부터 함께 바둑을 두는 사이가 되었다. 사무라는 서른, 스님은 쉰을 서너 살 넘은 나이로 나이 차는 크지만 묘하게 마음도 잘 맞았다. 바둑 솜씨는... 사무라는 자신이 조금 더 낫다고 믿지만, 스님은 동의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주지 스님의 경력까지는 사무라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다만 묘법사는 스님의 생가는 아니며, 스님은 데릴사위이다. 이만한 사찰의 주지인 만큼 불교 대학에서 전문 수업을 배우고 어느 정도 수행도 쌓았겠지만, 처음부터 승직에 도전한 사람은 아니다. 젊은 시절에는 하고 싶은 대로 대충 살아왔지만, 도중부터 무언가의 사정으로 스님이 되었고, 지금은 어느새 주지 스님의 위치라 사뭇 신묘한 척 불도를 설파하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어, 오래 기다렸지?"

주지 스님도 검은 터틀넥 스웨터 차림으로 나타나 말했다. 스님이라기보다는 변두리 가게의 장인 같은 모습이었다.

"춥지는 않나? 저녁 식사는? 이미 했다고? 그럼 술이나 한잔할까?"

이 스님은 동네 카바레 소문까지 통달하고 있을 정도이니, 술이나 회 정도는 문제도 아니다.

"이거 참, 그동안 소식이 뜸했네요."

"바빴나 봐?"

"조금..."

"자네가 한가한 게 세상에는 좋은 일이긴 한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스님은 바둑판을 잡고 끌어당겼다.

살인 담당 형사와 주지 스님의 조합, 이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의외로 가까운 조합이다. 형사도 스님도 시체가 없으면 장사가 시작되지 않으니까.

"선을 가려볼까."

스님이 백돌을 한 움큼 집어 들었다. 사무라는 흑돌 두 개를 판에 올렸다. 스님이 집은 돌을 세어보니 열세 개였다. 사무라가 규칙에 따라 백을 잡았다. 수행승이 술과 안주를 쟁반 위에 얹고 와서 둘 곁에 내려놓았다.


사무라가 묘법사에 오는 건 바둑을 두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주지 스님을 상대로 조용한 방에서 바둑을 두며 맛있는 술을 대접받는 건, 방문 목적으로 충분하고도 남았다. 아니, 이왕이면 그 목적만으로 묘법사의 문을 넘고 싶었다. 그러나 수사 1과의 형사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호텔 저수조에서 젊은 여자의 시체가 나왔어요."

승부가 중반에 접어들 무렵, 사무라는 본격적으로 오늘의 용건을 내비쳤다.

"매춘으로 잠깐 쉬었다 가는, 그런 곳인가?"

스님은 바둑판을 노려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도대체 스님의 머릿속은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 죽으면 꼭 부검해 보고 싶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생각해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으니 말이다.

"아니요, 에메랄드 호텔입니다. 초일류라고는 할 수 없어도 어엿한 호텔이에요."

"알아, 알아, 그곳이라면. 이런! 실수를... 잘못 두고 말았네."

사무라는 스님만큼 재주가 있는 건 아니라서, 찬찬히 생각하고 돌을 놓은 뒤 원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호텔 뒤편에 직원용 출입구가 있고, 직원은 거기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각 층으로 갑니다. 그 출입구를 지나면 풀숲에 오래된 저수조가 있어요. 누군가 풀어둔 금붕어가 있고 초록색 이끼가 떠 있지요."

"깊은가?"

"2m 정도에요. 돌무더기를 묶어서 가라앉혔습니다."

"사인은?"

"교살입니다. 목을 졸랐어요."

"죽인 뒤에 시체를 저수조 속에 빠트렸다는 이야기인가?"

"맞습니다."

"시체를 발견한 건?"

"호텔 보이입니다. 좀처럼 사람이 가지 않는 곳입니다만, 3월 3일 아침에 저수조 표면이 얼어붙었다는걸 알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보이가 대나무 장대로 얼음을 깨려다가 수조 바닥에 이상한 게 있다는 걸 눈치챈 거죠."

"얼음은 그날 아침에 언 걸까?"

"아니요, 3일 아침은 그렇게 춥지 않았습니다. 추웠던 건 2일 아침으로, 결빙 상태를 보면 얼음이 언 건 2일 아침으로 보입니다. 그늘이라 쉽게 녹지 않은 걸로 보입니다."

"여자가 죽은 건?"

"아마도 1일 오후입니다. 1일 정오 조금 전에 집에서 나갔다고 하거든요."

"그럼, 범인의 범위도 그렇게 넓을 것 같지는 않은데? 범행 시간, 시체를 수조에 감춘 시간 모두 한정되어 있으니까. 아이고, 그나저나 자네가 묘한 이야기를 꺼낸 탓에 바둑이 엉망이 되어 버렸네."

"던지시겠습니까?"

"응, 이번 판은 내가 졌네. 그럼 아까 그 이야기, 재미있어 보이는데 더 들려주지 않겠어?"


사무라가 스님의 기묘한 재능을 깨달은 건 서로 바둑을 두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사무라가 맡았던 클럽 마담 살인 사건이 피해자의 문란한 남자관계 때문에 도무지 진도가 나아가지 못하던 중이었다. 사무라는 주지 스님과 바둑을 두던 중 무심코 사건 이야기를 잠깐 꺼냈었다. 며칠 뒤 사무라가 다시 방문하자, 스님은 사건에 대해 몇 가지 궁금한 점을 사무라에게 물어보고 나서, 이내 훌륭한 추리를 들려주었다. 사무라는 약간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지만, 스님의 추리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기에 그 선을 따라 수사를 진행했고, 결국 범인을 체포할 수 있었다. 모든 게 스님의 추리대로였었다.

그 후 비슷한 경험을 한두 번 더 겪고 난 지금은, 사무라도 완전히 벽에 부닥친 사건의 경우는 묘법사를 찾아가 바둑을 두며 스님의 의견을 듣는 게 습관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번 사건은 발생 당초에는 그다지 어려운 사건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피해자는 N 대학의 4학년생인 에토 준코, 시체 발견 장소는 스님에게 이야기한 대로 에메랄드 호텔 직원용 출구 뒤쪽에 위치한 낡은 저수조 안, 발견된 것은 3월 3일 아침 11시경.

에토 준코는 N대학의 학생들로 이루어진 악단 '빅&큐티'의 클라리넷 연주자였다. 악단 이름의 유래는 멤버 중 남성은 모두 덩치가 크고, 여성은 작은 것에서 유래했다. '빅&큐티'는 아마추어 악단이기는 했지만, 매니저인 타무라의 수완이 좋았고 멤버 각자의 실력도 뛰어났기 때문에 이런저런 클럽과 호텔에서 출연 제의가 많았다. 에메랄드 호텔에서도 3월 1일부터, 즉 에토 준코가 살해되었다고 추정되는 날 밤부터 7층 라운지에서 '빅&큐티'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 공연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나?"

스님은 두꺼운 술잔에 입을 대고 몸을 약간 비스듬히 눕히며 들이켰다.

"네, 10일까지요. 클라리넷이 하나 부족하긴 했지만, 계약은 계약이니까요. 어쨌든 예정대로 끝내기는 했답니다."

"그럼 우선은, 그 죽은 아이 이야기부터 해 보시게."

"네, 뭐라고 해야 하지? 집은 특별히 부유하지도 않고, 가난하지도 않아요. 보통의 중산층입니다. 어머니가 계모고요."

"집에서는 걸림돌 취급받고 있었나?"

"특별히 심한 취급을 받은건 아니지만... 어머니 쪽 이복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으니까요. 피해자에게는 그렇게 아늑한 집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친구들이나 남자 친구는?"

술이 텅 빈 것을 깨달은 스님은 벽에다 툭툭 손을 치면서 말했다. 절 주변이 조용하기 이를 데 없어서, 스님이 손을 치는 소리는 아래층까지 잘 울려 퍼졌다. 수행승이 술 한 병을 들고 와 문을 열었다. 이런 고요한 상황에는 '세외승경'이라는 말도 과장은 아니고 잘 어울린다.

"악단 동료들과의 교류가 대부분이었어요. '빅&큐티'에는 남자 멤버 몇 명인가가 있는데, 그들 중 두 세 명과는 꽤 깊은 관계까지 간 모양입니다."

"그건 육체관계를 의미하나?"

"그럼요. 요즘 여대생들은 금방 거기까지 가 버리니까요."

"같은 악단 내에서, 이 남자, 저 남자와 그런 관계를 맺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여러 남자와 몰래 사귀는데에는 엄청나게 능숙했던 모양이더라고요. 비밀리에 말이죠."

"밝혔나 보지?"

"음, 피해자가 그런 걸 좋아했을 수도 있지만, 계모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외로움을 많이 탔다더군요. 하여튼, 악단원 중에서도 적어도 세 명과는 깊은 관계가 있었어요."

"호오, 그 세 명은?"

"피아노의 이케다, 기타의 야마우치, 그리고 같은 클라리넷의 오오이다입니다. 셋 다 이미 끝난 관계라곤 하지만요."

"그 셋이 제일 수상한가?"

"하지만 이케다와 야마우치의 알리바이는 탄탄합니다. 오오이다도 마찬가지에요. 손쓸 방법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호텔 내부 사람이나 떠돌이의 범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그건 좀 성급한 생각 같은데. 그 여자애 이름이 뭐였더라?"

"준코, 에토 준코입니다."

"그래, 그래, 준코가 살해된 건 1일의 몇 시쯤일까?"

"부검 결과로는 오후 한 시에서 세 시 사이에요."

"흠, 그날 밤 연주하기 위해 악단 멤버가 모두 모인 시간은? 준코가 그렇게 서둘러 호텔로 올 필요가 있었나?"

"네, 그게 문제에요. 매니저의 증언으로는 호텔 집합 시간은 오후 7시 30분까지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모두 그 시간 즈음에 모여 있었고요."

"왜 그녀만 그렇게 이른 시간에 호텔에 갔을까? 호텔이 아니라 저수조 옆이었을지도 모르지만... "

"네... 누군가를 만날 약속이 있었다는 등, 그 이유에 대해 아직 밝혀진 사실은 없습니다."

"그녀는 뭐라고 하고 집을 나왔다고 하던가?"

"언제나처럼 별말 없었다고 하네요. 그냥 저녁밥은 필요 없다 정도였답니다."

"호오, 어쨌건 악단 멤버들의 알리바이는 모두 확실한 것 같군. 자네의 우울한 얼굴을 보니."

"그 말 그대로입니다. 우울한 건 마작 그룹 때문이기도 하고요."

"마작 그룹?"

"학생은 편해서 좋아요. 4학년이라 이제 졸업식을 기다릴 뿐이라 그런지, 악단 멤버 중 이케다, 야마우치, 다니키, 노무라, 이 네 사람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인 야시로 집에 모여 철야 마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28일 밤부터.... 야시로는 외삼촌 댁에 하숙하고 있는데 외삼촌이 여행을 가서 안 계신 틈에 학생들을 불러 모은 거죠."

"이케다, 야마우치, 다니키, 노무라, 거기에 야시로라.... 마작은 넷이서 하는 것이지 않은가?"

"보통 이런 경우 한 판이 끝나면 꼴등이 빠집니다. 꼴등은 잠을 자거나, 옆에서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하죠."

"그럼, 도중에 집을 몰래 빠져나간 사람은 없다, 그런 뜻인가?"

"그렇습니다."

"그 집은 어디인가?"

"우라와에서도 제일 깊숙이 들어간 곳입니다. 에메랄드 호텔까지는 편도로도 두 시간 가까이 걸릴 겁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마작 그룹 멤버들이 서로 입을 맞추고 범행을 벌였을지도....."

"음,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닐 거에요. 지금 말한 멤버 중 한 명인 노무라가 제 조카거든요."

"이런, 이런"

"이상한 형태로 관계자가 되어버린 터라 조금 난감하고, 또 우울합니다만.... 조카는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녀석입니다. 거짓말 따위 할 수 있는 놈이 아니에요. 하물며 살인 사건에 관계되었다면 말이죠. 그런 일을 숨겨둘 수 있을 리가 없어요. 그래서 이 멤버들이 28일부터 1일 오후 4시 넘어서까지 마작을 하고, 저녁에 모두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야시로의 승합차를 타고 제시간에 에메랄드 호텔까지 온 건 일단 틀림없는 사실일 겁니다. 확신합니다."

"그렇군.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 조카가 한 말은 맞는 말이겠지. 공동 모의한 범행은 없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그날 무엇을 했을까...."

스님은 취기 탓에 살짝 붉어진 이마를 두드리며 바둑돌을 다시 잡았다. 자연스럽게 두 번째 판이 시작되었다.


시체가 발견됐을 때부터 범인의 가능성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에토 준코의 교우 관계 쪽, 특히 '빅&큐티'의 멤버. 다음은 호텔 직원 혹은 관계자, 그리고 마지막은 우연히 호텔 근처에 온 방랑자.

두 번째, 세 번째의 가능성이 완전히 부정된 것은 아니지만, 사무라는 애초부터 첫 번째 가능성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낮의 호텔은 - 특히 직원 출입구 근처는 - 결코 사람의 출입이 적지 않다. 젊은 여자를 우연히 살해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에토 준코는 왜 예정보다 5시간이나 빠른 시각에 호텔로 왔을까? 누군가 지인과 약속이 있었던 게 아닐까? '빅&큐티'의 멤버는 에토 준코를 제외하면 매니저 겸 사회자 타무라와 마작 그룹 멤버인 이케다, 야마우치, 타니키, 노무라, 야시로, 드럼의 우치노, 기타의 오오스기, 뭐든지 능숙하게 연주하는 오오이다, 그리고 여성 멤버인 클라리넷의 치노와 플루트 겸 보컬인 와카이의 11명이다. 에토 쥰코가 오쿠보의 집을 나온 건 3월 1일 정오 조금 전이고 그 이후의 행동은 알 수 없다. 클라리넷을 들고나왔으니 그대로 저녁 공연에 참여할 생각이었음은 틀림없다. 클라리넷은 핸드백과 함께 호텔에서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중간의 하수도에서 발견되었다.

에토 준코의 사망 추정 시각이 오후 1시부터 3시 사이이니, 그녀는 집을 나간 후 수 시간 사이에 살해당한 셈이다.

2020/08/08

Q.E.D Iff 증명종료 10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점

Q.E.D Iff 증명종료 10 - 4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Q.E.D 시즌 2도 대망의 10권째입니다. 그러나 수록작 두 편 모두 수준 미달이라 아쉽네요. 기본적인 재미, 추리의 완성도 모두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11권부터는 예전의 명성을 회복해 주면 좋겠네요.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한 법이니까요.

이야기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아웃로스"

떠다니는 카지노인 호화 유람선 킹 마이다스 호에서 '더 아웃로스 쇼'가 개최되었다. 배의 소유주 리치 부어만이 직접 선택한 아웃로 6개팀이 참가하는 게임이었다. 룰은 다음과 같다.

  1. 팀은 각자 한 개 씩 열쇠를 받는다. 6개를 모두 모아야 보검이 있는 금고를 열 수 있다.
  2. 시간 제한은 3시간으로 1시간마다 열쇠를 가지고 있는지 검사하고, 열쇠가 없으면 바로 실격한다.
  3. 마지막 시간 종료 때 까지 열쇠 6개를 모아 보검을 손에 넣지 못하면, 남은 팀 중 열쇠를 많이 가진 팀이 이긴다. 

상금은 1억달러! 과연 어느 팀이 승리할 것인가?

아웃로스가 뭔가 했더니 Outlaws더군요. 토마는 무법자는 아니고, 주최자 부어만의 부탁으로 게임에 참가합니다. 부어만은 딸 케이트가 라스베가스에서 사기 도박을 벌이는걸 고칠 목적으로 도박의 무서움을 몸소 체험하게 하게 할 생각이었지요. 

게임의 규칙은 위의 지극히 간단합니다. 변수라면 여섯 팀은 각자 변장, 3D 프린팅, 소매치기 등의 특기가 있다는 설정인데 정작 과정은 실망스럽습니다. 간단한 규칙이지만 온갖 변수를 만들어내어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카이지"와 같은 박진감은 찾아볼 수 없는 탓입니다. 참가자들이 열쇠를 너무 쉽게 빼앗기기 때문이에요. 약간의 변장, 소매치기 등에 의해 열쇠를 빼앗겨버리니, 이래서야 세계적인 아웃로 어쩌구 하면서 모아 놓은 참가자로는 실격입니다. 특히나 열쇠를 그냥 방에 놔 두었다가 빼앗긴다는 게 제일 황당했어요. 무려 1억불이 걸려있는 열쇠인데,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객실에 완벽한 보안 장치가 가동 중이라더라도요.
또 토마가 객실 열쇠를 훔쳐내는 과정도 억지스럽습니다. 금고털이인 맥거폰 부부의 계획을 눈치채고, 그들이 전기를 차단할걸 예측했다는건데, 주어진 단서라고는 게임 시작 전 물어본 질문밖에 없었으며,  이 질문에서 끄집어 낼 수 있는 추리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게임의 결말도 당황스럽습니다. 마지막 남은 두 팀 중 케이트가 가진 열쇠는 2개이고 토마, 가나 팀은 4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케이트가 3백만 달러를 줄테니 열쇠를 전부 걸고 포커를 하자는데, 상식적으로는 이를 받아들일 이유는 없습니다. 상금이 1억불인데, 3%밖에 안되는 돈에 혹해서 확실한 승리를 내팽개칠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를 수락하고 포커 승부를 펼친 토마에게 필승의 비법이 있다는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예상대로 흘러갑니다. 다른 동료가 있어도 되는 규칙인데, 딜러가 토마와 한 패였던 거지요. 결국 딜러는 리치 부어만의 변장으로 밝혀지고 딸 케이트와 눈물의 정을 나눈다!는 흔해빠진 신파로 마무리되... 는 줄 알았는데 뜬금없는 반전이 이어집니다. 리치 부어만은 알고보니 게임을 관전하기 위해 참가한 수많은 부자와 스타들의 폰을 해킹하여 정보를 빼돌리려는 사기꾼이었다는 거지요. 폰에서 게임에 배팅하기 위해 접속하는 상황을 이용했다나요?

그런데 그럴거면 구태여 유람선에서 게임을 벌일 이유는 없었습니다. 또 토마를 끌어들일 이유도 없고요. 리치 패거리를 체포하기 위해 경찰이 잠수함을 타고 나타나는 마지막 장면은 황당함의 정점입니다.아울러 Q.E.D스럽게 수학 이론인 '부동점정리'가 등장하는데, 설명은 이해하기 어려웠고 이 이론이 '나비 효과'와 연결되는 것도 잘 설명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절대 변하지 않는 부동점' 이 항상 있다는건 게임과 아무 관련도 없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게임이면 게임, 사기면 사기, 어느 한 쪽에 집중하는게 훨씬 좋았을텐데 괜시리 스케일만 크면서 이야기의 설득력은 전무하고, 재미도 없는 어정쩡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유일하게 건질건 플레이어 중 한 명인 에멧이 가나로 변장하여 토마를 유혹하듯 다가와 뺨에 키스하는 장면 뿐인 망작이에요.

"다이잉 메시지"

80년대 개발되던 남쪽 섬의 리조트는 버블 붕괴 후 회사가 도산하고 관계자가 도망쳐 30년 넘게 방치되어 '유령 호텔'로 불리고 있었다. 그런데 호텔을 철거하기 위해 내부 기둥을 해체하던 중 기둥 속에서 백골 사체가 발견되었다. 유령 호텔 건설 당시, 리조트용 토지를 불법적 수단으로 빼앗긴 피해자들을 대신해 개발 회사를 고소했던 변호사 치아키 실종 사건이 있었고, 30년 전 일이라 유전자 감식은 불가능했지만 경찰은 사체가 그녀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호텔 건설 당시 어둠의 보스라고 불리었던, 호텔 부지 소유와 관련이 있는 원 총무부 부장 스에요시 분지는 건설에 대해서는 당시 건설 책임자 유하마 메이에게 물어보라고만 말했는데, 그녀 역시 30년 전에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메이가 치아키를 살해하고 사체를 호텔 기둥 속에 집어 넣은 것일까? 

조사하던 중 유령 호텔은 내진 기준을 만족하지 못했지만 여러가지 도움과 돈의 힘으로 개업 허가를 받았다는게 밝혀졌다. 그리고 부동산 업자의 의뢰로 사건을 조사하던 사립 탐정 나카노사토가 중상을 입은 채 유령 호텔 방 안에서 발견되었는데, 방의 입구는 안쪽에 냉장고를 놓아 막아 놓고 창문은 합판을 못박아 놓은 상태의 밀실이었다...

수수께끼는 두 가지입니다. 30년 전 백골 사체 사건의 진상과 현재의 나카노사토 탐정이 발견된 밀실에 대한 것입니다. 

30년 전 백골 사체 사건의 경우, 시체는 기둥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러려면 건물 완성 전에 기둥 안에 시체를 넣어야 하고 유하마 메이는 건물 낙성식에 참석했으니 시체는 치아키일거라는게 경찰과 가나 들의 추리입니다. 그러나 토마의 추리는 한 발 더 나아갑니다. 호텔이 내진 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증언을 통해, 낙성식 당시 기둥은 '껍데기만 있는 가짜'였을거라는 거지요.

그리고 현재 유령 호텔의 이상한 기둥 배치를 통해 원래 껍데기만 있는 가짜 기둥에 콘크리트를 담아 굳혀 진짜 기둥을 만들었다고 추리합니다. 이 때 기둥 하나에 시체를 넣고 굳혔던 것이지요. 이 방법을 사용하면 피해자도 치아키가 아니라 유하마 메이가 될 수 있습니다. 낙성식까지는 가짜 기둥이었다는 이야기니까요. 

추리는 대담하고 재미있습니다만 문제는 증거가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가짜 기둥은 껍데기만 있었다라는게 핵심인데, 이건 도저히 증명할 수 없어요.
또 미와코로 변장하여 나타난 치아키의 행동도 영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치아키가 호텔 부지를 매입하여 개발에 나선 것 까지는 말은 됩니다. 리조트를 없애고 해안을 원상복구 시키는건 30년 전의 목적이기도 했으니까요. 호텔 해체 작업 시 사체가 발견되고, 옷을 갈아입힌 덕분에 피해자가 치아키로 오인되면 유력한 용의자가 스에요시 분지가 될 거라고 예상한 것 역시 큰 문제는 없고요.
그러나 사체 발견 시 살인 사건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 이유는 석연치 않습니다. 또 탐정이 사건 조사를 시작한건 미와코가 살인 사건 해결없이는 부지 매입을 하지 않겠다고 주장해서, 부동산에서 어쩔 수 없이 고용한게 발단입니다. 나카노사토 탐정에 의해 미와코가 치아키이며 그녀가 범인이라는걸 알아낸 탓에 계획에 차질이 생겨버렸으니, 한 마디로 긁어 부스럼을 만든거지요. 

아울러 탐정이 진상을 알아냈다 한 들, 스에요시를 옭아매는 계획만 실패할 뿐입니다. 그녀 자신의 범행은 30년 전의 사건이라 공소시효도 이미 끝났을테니까요. 이 진상 때문에 탐정을 습격한다는건 더욱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나이로 보면 상당히 버거울, 빨래 운반 통로를 수직으로 기어올라 탈출하면서까지 밀실을 만들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또 이 두 번째 수수께끼인 밀실 트릭은 추리라고 부르기도 힘든 민망한 내용이에요. 수사를 통해 빨래 운반 통로가 발견되지 않은 것 부터가 이상합니다. 사람이 충분히 지나다닐 수 있는 통로가 있다면 밀실은 아닌데 말이지요. 그리고 치아키가 어떻게든 스에요시 분지를 엮어 범인을 만들 생각이었다면 탐정을 살해했어야 합니다. 단순히 중상을 입힌걸로는 부족했어요. 어차피 탐정이 깨어나면 증언을 통해 모든게 밝혀질테니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도 없고요.

마지막으로 미와코가 호텔에 결함이 있다는걸 알고 있었다고 말한게 앞선 대담한 추리 - 사체는 유하마 메이이며 기둥은 원래 가짜였다! - 의 단서가 되었다는 것 역시 설득력이 전무합니다. 토마는 호텔의 결함은 범인만 알고 있을거라 단언하는데, 그 전제부터가 잘못된 겁니다. 근거도 없고요. 게다가 곰곰히 생각해보면 말도 안됩니다. 호텔이 내진 검사를 통과하지 못할 정도의 부실 건물이라는걸, 건설 반대파를 대표하는 변호사 치아키가 알고 있었다? 고발 등 모든 조치를 동원하여 개업을 방해하는게 당연하잖아요. 즉, 치아키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야 하는게 정상입니다. 설령 범행 때 알게 되었다 한들, 유하마 메이를 죽인 뒤 시멘트를 붓는 등의 공작을 혼자서 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이런 작업을 혼자서 하는건 절대로 불가능했을겁니다.

이렇게 여러모로 억지스러운 부분이 많아서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볼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만. 완성도는 영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2005/05/04

초고층 호텔 살인사건 - 모리무라 세이이치 : 별점 3점

초고층 호텔 살인사건 모리무라 세이치 지음, 김정우 옮김/해문출판사

크리스마스 이브, 동양 최대의 호텔인 이하라 호텔의 개장을 기념하는 파티가 열리던 중, 이하라 호텔의 거대한 빛의 십자가 모양의 조명 앞으로 사람이 떨어져 죽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목격하게 된다.
피해자는 미국 넬슨사에서 파견된 이하라 호텔의 지배인 토마스 소렌센. 그의 죽음은 살인사건으로 보이지만 그가 투숙해 있던 16층의 방은 사실상 밀실 상태여서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그 뒤, 이하라 그룹 사장 비서 오자와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고 오자와의 부하 직원의 증언으로 경찰은 소렌센 사건에서의 트릭 및 소렌센-오자와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하게 된다.
하지만 철벽의 알리바이를 깨지 못해 고민하던 중, 이하라 그룹의 라이벌인 부용은행의 차남 고레나리 도시히코마저 밀실에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며, 경찰은 이 세 사건의 연관성을 연구하여 철벽의 알리바이와 밀실트릭을 깨트리고 진범을 검거하게 된다.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작품. 꽤 유명한 작품이지만 예전 번역본은 구하기가 어려워 손을 놓고 있던 차에 해문의 미스테리 베스트로 출간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작가의 1971년 작품으로 비교적 초기작에 속하고, 이 작가의 초기작은 꽤 괜찮은 작품이 많아 읽기 전 부터 상당히 기대를 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작가의 후기작은 작품이라 부르기 미안한 수준의 작품마저 양산한 작가라서.....

여튼, 이전에 읽었던 "고층의 사각"과 유사하다는 것이 눈에 먼저 뜨이네요. 호텔에서 실제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설정이 꽤나 요긴하게 쓰이는 점, 그리고 고층의 호텔 밀실이라는 점은 판박이로 보여져요.
그러나 데뷰작 이후 어느정도 내공이 쌓인 덕인지, 인물과 드라마는 훨씬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무엇보다도 호텔에서 발생한 밀실 살인 트릭과 시간차를 이용한 장소이동 알리바이 트릭, 그리고 체인으로 밀실을 만드는 3종의 트릭이 등장해서 추리적인 재미를 마음껏 느끼게 해 주는 것은 최대의 장점이겠죠.
허나 "고층의 사각"에 비해 너무 흥행을 의식한 티가 나는 것은 감점 요소입니다. 난잡한 상류계층의 생활과 범죄를 그리는 것이야 모리무라 세이이치 작품의 특징이라 치더라도 이 작품은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만화같은 느낌마저 들거든요. 인물 및 배경 설정에서 현실감이 너무 떨어지기도 하고요. 모리무라 작품에서 항상 느껴왔던 것이지만 이러한 설정들이 좋은 트릭과 전개를 너무 흐리고 있어서 아쉽습니다.

그래도 그냥 트릭만 놓고 본다면 모리무라 세이이치 작품에서도 꽤 높은 수준이기는 합니다. 개인적으로 평가한다면 첫번째 사건 -초고층 호텔 살인사건- 은 제목으로까지 쓰인 임팩트 있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트릭은 수긍하기 어려운, 그냥저냥한 수준이었지만 다른 2개의 트릭은 상당히 재미있고 깔끔하니까요. 특히나 2번째 시간차 알리바이 트릭이 아주 좋은 편인데, 기발하기도 하거니와 범인들이 보다 치밀한 함정을 파기 위한 공작을 벌이다가 오히려 꼬리를 잡히게 되는 전개가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작가의 최고 대표작이라고 보기는 무리가 있지만 추리작가로서의 모리무라 세이이치를 잘 느낄 수 있고, 길이도 그다지 길지 않아 쉽게 읽을 수 있어서 심심풀이 독서로는 괜찮은 선택이었다 생각됩니다.
아울러 접하기 힘든 작품을 과감하게 선정해서 소개해 주는 점, 거기에 계보도까지 그려놓고 시간차 트릭을 깨기위한 시간대를 표로 구성하여 삽입한 출판사의 센스에도 박수를 보냅니다. 역시 추리전문 출판사는 다르군요.

2024/06/15

살인의 쌍곡선 - 니시무라 교타로 / 이연승 : 별점 2.5점

살인의 쌍곡선 - 6점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야카와 혼자서 운영하는 도호쿠의 외딴 호텔 '관설장'에 회사원인 예비 부부 교코와 가쓰로, 역시 회사원인 야베, 마사지 업소에서 일하는 아야코, 범죄를 연구하는 대학원생 이가라시, 택시 운전사 다지마가 초대되었다. 누군가 설상차를 망가트리고 전화선을 끊어서 고립된 상태에서, 야베를 시작으로 한 명씩 살해당하기 시작했다. 범행 현장에는 복수가 이루어졌다는 메시지와 함께 원에 사선을 그은 기묘한 부호가 그려진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하야카와, 교코, 아야코만 살아남은 상태에서 운 좋게 전화가 연결되어 경찰과 취재 기자들이 곧바로 찾아왔지만, 관설장에 살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기차 시간표를 이용한 트릭으로 유명한, '여정 미스터리'의 거장 니시무라 교타로의 초기 장편입니다. 이전에 읽었던 작가의 작품은 명성에 걸맞는 여정 미스터리, 기차 시간표 트릭이 활용되었었던 반면, 이 작품은 비교적 정통 고전 본격 추리물에 가깝습니다. 특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많이 의식하고 있다는게 눈에 뜨이네요. 고립된 공간에서 한 명씩 차례대로 살해당한다는 점, 그 때마다 볼링핀이 사라지고 메시지가 남겨져 있다는 설정은 거의 똑같거든요.

하지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오마쥬했다는 "그리고 누군가 없어졌다"와 같은 질낮은 졸작은 아닙니다. 추리적으로 볼 만한 부분이 많은 덕분입니다. 특히 '고립된 호텔에서 범인은 투숙객들을 전부 죽이고 어떻게 도망쳤는지?'에 대한 트릭이 일품이었습니다. 설명드리자면, 범인 하야카와 형제는 쌍둥이였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 호텔 지배인으로 변장하고 투숙객들을 살해했지요. 그리고 호텔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외부에 흘려 경찰과 기자들이 출동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한 명은 기자로, 처음에는 경찰과 다른 기자들과 함께 호텔로 달려왔지만 호텔 앞에서 은근슬쩍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호텔에 남아있던 범인이 기자인 척 했던 겁니다. 지금 읽어도 그럴싸한 괜찮은 트릭이었어요.

앞서 작가가 '쌍둥이를 활용한 트릭을 사용했다'고 직접 밝히고, 본문에서도 쌍둥이 고시바 형제가 강도 행각을 벌이지만 경찰이 체포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호텔 연쇄 살인 사건과 겹쳐 진행시켜 트릭을 독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만드는 전개도 괜찮았습니다. 작가가 활용한 쌍둥이 트릭 이야기는 하야카와 형제 탈출 트릭이 아니라 고시바 형제 사건에 사용되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고시바 형제의 강도 행각과 형제를 뒤쫓는 경찰과의 밀땅도 재미있었고요. 
참고로, 이 트릭은 도진기 작가의 "악마의 증명"에 사용되었던 트릭과 같습니다. 당시 모 드라마와 표절 시비가 있었던 듯 한데, 애초에 특별히 오리지널임을 내세울 아이디어는 아니었던 것이네요....

여기에 더해, 아야코가 범인임을 의심하게 만든 초대장 필적과 유서 - 초대장은 이가라시가 필적 감정을 한다며 모두에게 쓰게했고, 유서는 첫 날 일종의 내기 결과에 따른 자필 문장이었을 뿐 -를 확보한 방법, 다지마가 스키를 부쉈다고 이야기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추리 등도 괜찮았습니다. 아야코 범인설을 보도하여 하야카와가 기자를 사직하게 만든 결말-진짜 기자가 아닌 가짜였으니-까지 안배한건 보통 솜씨가 아니에요.

하지만 추리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낮습니다. 작가의 묘사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영문도 모르고 호텔에 갇혀 살해당하는 피해자들의 심리가 그려지지 않아서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교코는 약혼자가 눈 앞에서 살해당하기까지 했는데 말이지요. 각 등장인물들의 매력도 제대로 그려져있지 못합니다. 깔끔하고 담백한건 좋지만, 이 작품은 너무 과했습니다.
범인 하야카와 형제가 이런 거창한 범행을 벌인 동기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만원 전철에서 쓰러진 어머니를 방관했다!'는 이유로 피해자들을 살해했다는게 말이 안되는건 아니지만, 무려 6명(정확하게는 7명이지만요)을 살해할 정도의 동기인지는 설명해 주었어야 합니다. "상복의 랑데뷰"처럼요. "상복의 랑데뷰"는 짤막하게나마 연인에 대한 깊은 사랑을 알려주고, 그 뒤 이어지는 복수극 과정에서도 1인칭 심리 묘사를 삽입하여 복수와 범행에 대한 설득력을 높여주었지요. 이 작품도 그런 묘사가 반드시 나와 주었어야 했습니다.

고시바 형제가 벌인 강도 행각도 소소한 부분들은 억지스러웠습니다. 괜히 얼굴을 드러내고 범행을 저지를 필요는 당연히 없었습니다. 얼굴을 드러내서 형제 중 한 명이 범인이라는게 밝혀졌으니까요. 쌍둥이라서 당장 체포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체포는 시간문제에 불과했습니다.
고시바 형제도 복수 대상이어서 강도짓을 제안하고 체포되게 만든다는 전개도 억지스러웠으며, 고시바 형제 사건에 휘말린 어린 소녀의 죽음으로 하야카와의 가면을 벗기는 마무리도 작위적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추리적으로는 나무랄데없지만, 완성도는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그래도 작가의 다른 졸작들에 비하면 눈이 부실 정도의 좋은 작품입니다. 명성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네요. 분량도 짧은 편이니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13/03/17

매스커레이드 호텔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매스커레이드 호텔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도쿄에서 의문의 살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피해자는 30세 전후의 회사원, 43세의 주부, 53세의 고등학교 교사였고, 사건 현장에는 수수께끼의 숫자가 남겨져 있었다.

45.761871, 143.803944
45.648055, 149.850829
45.678738, 157.788585

경찰은 이 숫자를 해독해내는 데 성공했다. 숫자는 다음 범행장소를 예고하는 메시지였다. 메시지에 의해 다음 범행장소로 예고된 곳은 최고급 호텔 코르테시아도쿄 호텔이었다.

경찰은 네 번째 살인을 막기 위해 호텔에 수사관들을 대거 급파하고 벨보이, 하우스키퍼, 투숙객 등으로 위장한 형사들이 잠복근무에 돌입했다. 닛타 형사도 호텔의 간판 부서인 프런트 직원으로 위장해 잠입 수사를 시작했다. 진짜 호텔리어처럼 보이기 위해 베테랑 호텔리어인 야마기시 나오미의 지도를 받으며, 둘은 사건 해결을 위해 함께 협력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비교적 최신 장편. 기둥 줄거리는 연쇄살인사건이라는 강력 사건이지만, 가운 절도, 장님인 척하는 할머니, 스토커에게 쫓기고 있다는 미인, 끊임없이 어이없는 클레임을 거는 손님이라는 일상계 사건이 연달아 벌어진다는 구성이 독특합니다.

또한 이 일상계 사건들이 모두 나름대로의 트릭이 존재하고, 이 트릭들에서 힌트를 얻어 범행의 진상에 접근해 나가는 전개는 가가 형사 시리즈 "신참자"를 연상케 합니다. 단편 연작물 느낌을 주면서도 기둥 줄거리와 잘 엮어나가는건 판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상계물에 비하면, 본편 이야기인 연쇄살인사건 이야기는 많이 별로입니다. 일단 상관없는 살인들을 연쇄살인사건으로 위장하여 진상을 흐리게 만든다는 설정부터가 "ABC 살인사건" 등 다양한 작품에서 이미 사용되었기에 뭔가 다른 아이디어가 필요했을 텐데, 그런 게 전혀 없다는 문제가 너무 큽니다. "호그 연속살인" 정도의 임팩트는 줬어야 했을 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암호도 억지스럽습니다. 연쇄살인처럼 보이게 하려면 "살인범 X" 같은 이니셜로도 충분했을 테고, 모방 범죄가 우려된다면 특별한 폰트와 사이즈 정도만 써도 충분했을 텐데 괜히 어렵게 꼬아놓기만 했으니까요. 호텔을 콕 집어 범행 장소로 지정할 이유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경찰의 주목을 끌어서 유리한 점이 뭐가 있을까요?

그 외에도 각 사건별로도 어설픈 점이 많아요. 예를 들면 오카베의 알리바이는 억지스럽습니다. 그때 옛 애인이 전화를 했으리라는 보장도 없을 뿐 아니라, 경찰에서 통화 내역을 조사했더라면 금방 진상을 알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혼자만 PC를 사용하게 만들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요.

진상도 어딘가에서 본 듯한 내용이며 - "낯선 승객"이 생각나네요 -, 범인의 동기 역시 설득력이 떨어져서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물론 닛타와 야마기시 나오미의 밀당도 재미나고 소소한 일상계 트릭들은 충분히 즐길 만했습니다. 호텔이라는 장소에서 일하는 여러 전문가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점도 좋았고요.  제 별점은 2.5 점입니다. 차라리 호텔을 무대로 한 일상계 추리물이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무리하게 장편을 만든 느낌이에요.

2024/01/28

사라진 근대건축 - 박고은 : 별점 3점

사라진 근대건축 - 6점
박고은 지음/에이치비프레스

여러가지 근대 건축물 중 지금은 사라졌거나, 그 원형을 찾기 힘든 건축물들을 당대 사진과 자료를 통해 알려주는 건축사, 미시사 서적. 

목차는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그리고 군사 정권과 발전 국가 시대로 구분하고 있는데, 해당 시기별로 많은 건축물을 일람하며 소개하지는 않습니다. 몇몇 건축물 - 일제 강점기의 조선 총독부 청사 (구 중앙청), 조선 신궁, 반도 호텔과 발전 국가 시대의 자유 센터, 그리고 중앙 정보부- 에 집중하는 편이에요. 그리고 이 건축물들이 왜, 어떻게 사라졌는지와 남은 유적과 잔해를 일목요연하게 알려주는 구성을 취하고 있고요. 남산 조선 신궁의 경우, 광복 다음날 일본인들이 주요 건축 부속물 수거 후 일본으로 옮겼고, 남아있던건 한국인들이 파괴했다는걸 알려주는 식입니다. 참배길은 돌계단은 일부가 서울특별시교육청 과학전시관 남산분관 옆으로 옮겨져 남아있다고 하네요.
이 건축물들의 디자인, 양식과 같은 주요한 특징 소개도 상세합니다. 특징적인 곡선 지붕 등 자유 센터를 대표하는 형태는 건물 후면부로, 이는 위정자가 주 출입구로 들어와 건물 후면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서서 건물 후면 아래 광장에 모인 궁중들 위에 군림하는 듯한 효과를 노렸다는군요. 레니 리펜슈탈의 나치 정권 홍보 영화가 떠오르는데, 역시 독재자들이 생각하는건 어디나 다 비슷한가 봅니다.
사진 자료들도 풍성하여 읽는 재미를 더해 줍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건 반도 호텔 영빈관 사진입니다. 일제 강점기 후 이승만 대통령 지시로 외국인 전용 영빈관으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호텔을 리노베이션했다는데, 실내 사진이 굉장히 세련되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외 여러 일화에 대한 소개도 많습니다. 반도 호텔은 일본인 대재벌 노구치 시타가우가 조선호텔에 숙박하려다 허름한 옷차림으로 문전박대당한 탓에 조선호텔보다 큰 호텔로 바로 앞에 만들게 되었다는 건설 비화가 대표적입니다.
한국 전쟁 때 인천 상륙 작전을 위해 서울 폭격이 진행되었는데, 이 때 주 일본 대학민국공사 김용주가 맥아더와 면담하면서 폭격에서 보호할 구역을 논의했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고궁, 남대문, 을지로 지역 정도가 무차별 폭격의 대상이 되지 않은건 이 면담 덕분이겠지요. 다른 건축물들을 보호하지 못했고, 파괴된 건물들도 재건하지 못했던건 지금 시점에서 보면 아쉽지만, 당시 전 세계적으로도 최빈국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 상황으로는 어쩔 수 없었겠지요.

다만 소개 건축물들이 두서가 없고, 중앙 정보부 소개가 지나치게 긴 등 편집의 문제는 있습니다. 도판이 중요한 책인데 도판 인쇄질도 그리 좋지는 않고요. 해상도 낮은 원본 사진을 그대로 사용한 탓인데, 이런 사진은 후보정을 거쳐 보다 선명하게 소개해주는게 좋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사라져버린 근대 건축물에 대해 쉽게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책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3D, 가상 현실처럼 구현한 다큐멘터리로 만들어도 재미있것 같습니다.

2024/07/24

2024년 7월 부산 파라다이스 호텔 중식당 남풍 코스

신라 호텔에서 코스를 즐겼던게 엊그제같은데, 다시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할 일이 생겼네요. 이번에는 부모님이 거주하시는 부산에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부산은 잘 모르지만, 부산 어르신들이 가장 높게 평가하는 식당이 파라다이스 호텔 중식당 남풍이라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약 후 지난 일요일 점심에 코스 요리를 즐겼습니다.
저희 가족이 고른건 Steve Jun 코스였습니다. 디저트까지 모두 8개의 요리와 식사가 이어지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1. Steve Jun 스페셜 냉채 :
랍스터 회, 찐 전복, 해파리 냉채, 멘보샤(?), 닭 조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재료도 좋지만 회부터 튀김, 조림까지 다양한 구성에 간도 적당하여 맛있게 먹었습니다.

2. 남풍 시그니처 딤섬 3종 : 
하가우, 샤오마이, 구채하 3종. 새우와 부추가 섞인 구채하가 제일 좋았습니다. 다른 2종은 비교적 흔하게 먹을 수 있기도 하니까요.
3. 최고급 통 상어지느러미 찜 :
크기로 압도하네요. 4년 전 신라호텔에서 먹은 것 보다 소스가 훨씬 묵직하고 진한데, 크기가 커서 그런지 잘 어울렸습니다. 고급이라는 느낌도 강하게 전해 주고요.
4. 남풍 서해산 어자 해삼 활전복 :
'어자'는 소스 이름인 듯 합니다. 재료가 좋아서 맛있게 먹었지만, 간은 다소 심심했습니다. 조금 더 짭짤한게 좋았습니다. 
5. 북경 오리 1마리 :
셰프님이 직접 와서 손질해 주시고 말아주셨지만, 가장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배가 부르기 시작해서 양이 적고 조금 자극적인게 좋지 않을까 싶었는데, 지극히 평범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는 북경 오리를 뺀 조금 더 저렴한 코스를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 홍삼 고법 불도장 :
불도장은 제가 좋아하는 요리입니다. 맛있었습니다. 재료도 좋았고요. 하지만 역시 뭔가 좀 심심하다는게 아쉬웠어요.
그리고 식사로는 랍스터 짬뽕, 마지막으로 다과로 구성된 디저트로 마무리하였습니다. 식사와 디저트는 사진을 찍지 못했는데, 두 개 모두 별로였습니다. 랍스터 짬뽕은 랍스터는 질겼고 간도 애매했으며, 디저트도 가격에 걸맞는 퀄리티로 여겨지지는 않은 탓입니다. 

신라 호텔과 비교해본다면, 신라 호텔 쪽이 압승입니다. 맛이 없는건 아닌데, 남풍의 간이 전반적으로 제 입맛과는 잘 맞지 않았던 탓이 큽니다. 많이 심심했는데, 이런 간이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는 이유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그래도 가족과 함께 한 좋은 식사였기에 만족합니다. 서비스도 좋았고요. 다름에 방문하게 된다면, 맛있게 즐겼던 요리 단품으로 몇 가지 시킬 생각입니다.

2018/04/29

매스커레이드 이브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점

매스커레이드 이브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한국 한정 추리 소설의 제왕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매스커레이드 호텔"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몇 년 전 전편을 읽고 호텔을 무대로 한 일상계 추리 단편이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는 평을 남겼는데, 작가도 같은 생각이었던 걸까요? 이번에는 전편 시점에서 수년 전을 무대로 하고 있는 중, 단편집입니다. 전부 네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일상계와 강력 사건이 적당히 섞여 있는 구성으로 모든 이야기가 사람들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있다는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는게 특징입니다. 

주제를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드러낸다는 점은 좋지만, 추리적으로는 영 별로라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지만 "루키 형사의 등장" 편을 제외하면 추리적으로는 점수를 주기 힘든, 작가의 다른 작품이나 시리즈보다는 못한 범작입니다. 작가의 대단한 팬이 아니라면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은데,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가면도 제각각"

신참 호텔리어 야마가시 나오미는 업무 때문에 투숙한 옛 연인 미야하라의 급작스러운 부탁으로, 그의 불륜 상대인 니시무라 미에코를 찾아 나서는데...

전편의 주역 중 한 명인 나오미가 신참 호텔리어로 등장합니다. 그녀의 과거사, 신참으로서 호텔리어의 사명감을 이야기하는 부분 등 전반적으로 젊음이 한껏 느껴집니다. 주제 의식을 잘 드러내는 결말도 괜찮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그닥입니다. 미야하라의 보스인 전 프로야구 스타 "대장" *오야마가 실제로 불륜을 저지른 장본인이라는 걸 알아내는 장면은 그럴듯 했지만, 미에코가 현재 어디 있는지를 알아내는 부분은 나오미가 우연히 본 룸서비스 주문 내용을 통한 것으로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지 않고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든 탓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루키 형사의 등장"

전편에 나오미가 등장하니 이번에는 당연히 닛타 형사가 등장할 차례죠? 닛타가 신참 형사일 때 맡았단 요식업자 거부 다도코로 살인 사건을 다룹니다.

실제 사건만 놓고 보면 범인이 운이 좋아서 당장 체포되지 않은 것 뿐, 경찰 수사가 조금만 더 이루어졌더라면 금방 체포되었으리라는 점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다도코로 미치요의 요리 학원 수강생들에 대해 수사만 진행했어도 요코모리 히토시를 유력 용의자로 끄집어 내는 건 어렵지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범행 현장의 특수성에 따라 범인이 자전거를 탔다고 추리한다던가, 현장의 담배 꽁초는 위장이고 어딘가에서 입수한 것이라는 추리는 꽤 그럴듯 했으며, 무엇보다도 다도코로 미치요가 남편 살해를 사주한 진짜 악녀라는게 드러나는 마지막이 아주 괜찮았어요. "입술 틈새로 분홍빛 혀를 살짝 내밀었다. 그 표정은 사냥감을 노리는 뱀을 연상하게 했다"는 일본식 팜므파탈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묘사, 남자를 조종하여 완전 범죄를 성공시키는 모습은 한 편의 등장으로 그치는 게 아깝다 싶을 정도였어요. 다도코로 미치요 캐릭터만으로도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가면과 복면"

코르테시아 도쿄 호텔에 유명 신인 복면 작가 다치바나 사쿠라가 작업 때문에 투숙하자, 그녀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오타쿠들이 몰려와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는데...

핵심 수수께끼인 다치바나 사쿠라의 정체가 중년 아저씨가 아니라 그녀의 딸이라는걸 비교적 쉽게 눈치챌 수 있다는 문제는 큽니다. 때문에 두 명이 투숙한 상황이라는 진상을 쉽게 눈치챌 수 있고, 중년 아저씨의 외근과 편집자와의 통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등의 소소한 수수께끼 역시 특별할 게 없습니다.

한마디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소품으로 쉬어가는 이야기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 소설이라기 보다는 "호텔 퀸시" 의 또 다른 에피소드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매스커레이드 이브"

닛타는 공대 교수 오카지마 살인 사건 수사를 위해 교통과에서 지원나온 젊은 여경 호즈미 리사와 팀을 꾸렸다. 유력한 용의자는 특허 사용에 따른 거대 이권이 얽힌 준교수 난바라인데, 그는 혐의를 전면 부정했다. 그러나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핑계와 함께 정작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는 제시하지 못했다. 사건 당일 난바라가 투숙한 호텔에서 일하는 나오미는 수사를 나온 호즈미 리사에게 자신의 추리를 들려주는데...

표제작이자 작품집의 핵심인 150여 페이지에 이르는 중편입니다. 하지만 대미를 담당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합니다. 이야기에 비하면 분량도 너무 길고요. 

우선, 범인이 난바라라는게 너무 명확한데 왜 구속 수사를 하지 않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 "교환 살인" 은 지금 시점에서는 그리 특별한 아이디어도 아닐 뿐더러, 난바라와 함께 투숙한 여성이 하타케야마 레이코라는 게 밝혀지면 구태여 교환 살인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쉽게 해결될 사건이라는 점에서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이전 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경찰 내부 DB에 남아 있지 않을리가 없잖아요? 경찰 내부에서 레이코가 유력한 용의자였던 이무라 유리 사건만 짚어내면 이 사건을 난바라와 엮어 생각하는 건 추리도 뭐도 아닙니다.
레이코 일당이 왜 약속한 날이 아니라 그 전날 범행을 저질렀는지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서 답답합니다. 알리바이가 너무 완벽하면 의심을 살 수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지요. 이럴거면 차를 옮겨 하루의 시간을 벌 필요도 없었어요. 그냥 두었더라면 호즈미 리사의 말대로 지갑을 가져간 강도의 소행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아울러 난바라가 투숙했던 오사카 호텔에서 근무하던 나오미가 난바라와 레이코를 엮어서 생각하게 되는 향수 이야기는 작위적이기 짝이 없어요. 짙은 향수 냄새로 두 명의 관계를 의심하게 된다는 설정이야 말이 안되는 건 아니지만, 타월을 무심코 가지고 나가다가 돌려준다는 건 솔직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닛타 형사와 함께 짝을 이룬 명랑하고 단순하면서도 의욕 넘치는 호즈미 리사 캐릭터 하나만큼은 마음에 들긴 했습니다. 문제라면 "춤추는 대수사선"의 아오시마 (오다 유지)와 별로 다를게 없는, 수사 본부에 지원 나온 교통 경찰 캐릭터라는 겁니다. 그동안 너무 많이 보아 온 탓에 읽다보니 식상해 지더라고요. 차라리 호즈미 리사의 단순한 추리가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준다는 식으로 끌어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말이지요. 이래서야 '캐리어'는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패배 의식만 심어줄 뿐입니다.

이렇게 단점이 더 도드라지는 작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나오미 - 닛타 컴비 시리즈로 만들기 위한 억지만 없었더라도 조금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2004/11/28

실화극장 죄와 벌 - 주병진 강간치상 사건 -

2000년 11월,(주)좋은사람들의 대표이사 겸 개그맨으로 유명한 주병진이 여대생을 강간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팬들은 물론 동료 연예인들로부터 존경과 부러움을 받았던 그는 이 사건으로 그 동안 쌓아왔던 명예를 하루아침에 잃고 말았다.


#여대생,개그맨 주병진에게 강간당해 경찰 신고
2000년 11월 19일 새벽,한 여대생이 개그맨 주병진에게 자신이 강간을 당했다는 신고를 했다. 경찰 진술서에서 강민지(당시 26세,실명)는 눈물로 호소를 했다.
H호텔 가라오케에서 평소 서로 알고 지내던 언니 김자영(예명),후배 신희수(예명)와 술자리를 갖던 중 민지는 호텔에서 나와 집에 가려는 자신을 주병진이 데려다주겠다며 호텔 주차장의 차로 끌고 가 뒷자석에 강제로 밀어 넣어 저항하는 자신을 폭행한 후 강간을 했다고 주장했다.

#벤츠 승용차 안에서의 진실
강간을 당했다는 강민지의 주장에 주병진 측은 다음과 같이 맞섰다. 자신의 차가 주차된 위치는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호텔 현관 앞이었고, 또 강민지는 스스로 차 뒷자석에 탔으며 서로 합의 하에 성관계를 가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대립되면서 사건은 법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강민지는 재판 중에 진술을 여러 번 번복하고 주병진에게 합의금까지 받았음을 폭로한다. 그녀는 주병진이 2억으로 합의를 요구, 강간이 아니었다는 진술을 하기로 했으나 무고죄가 두려워 모든 사실을 밝힌다고 말했다

#합의금으로 강간사실 무마,주병진 징영선고
사건의 쟁점이 강민지가 스스로 조수석에 타서 합의 하에 성관계를 가졌느냐는 것, 또 자연스럽게 성관계를 갖고 주병진이 그저 뺨을 두드려서 생긴 상처인가 폭행을 한 후 강간을 한 것인가를 두고 법정 공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병진이 강민지에게 합의금을 준 사실은 결정적으로 불리한 작용을 했다. 실제 정액이 채취되지 않은 사실과 무죄를 증명하기 위한 호텔 벨맨 등의 증언이 있었다.그러나 재판부는 강간치상에 대한 합의금 사실을 인정하며 주병진에게 징역2년6개월, 집행유예4년을 선고한다.

#순진한 여대생이 술집 여 종업원? 강민지 꽃뱀의 의혹
그러나 1심 판결 후 강민지에 대한 소문과 제보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 변호사 앞으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강민지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녀는 순진한 여대생이 아닌 술집 종업원이고, 현재 술집에 종사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이에 주병진의 동료,선,후배인 이휘재,이성미,김자옥은 강민지를 잠복 추적하며 진실을 밝히려 한다. 결국 강민지는 룸살롱에서 이휘재와 마주치게 된다.

#강민지의 정체는 무엇인가?
주병진은 항소심을 준비하던 중 변호사로부터 강민지가 학생이 아닌 룸살롱 여직원이라는 사실을 듣게 된다. 변호인 측은 자긴의 신원에 대해 거짓 진술 한 것은 신빙성이 없음을 주장하며 강민지가 소속되어 있다는 룸살롱을 찾아가 주인을 증인으로 신청한다. 이에 검사 측은 강민지가 학교에서 제적당한 것을 몰랐기 때문에 학생인 줄 알았고, 피해자가 술집에 나가는 것은 개인 사생활일 뿐이고 프라이버시임을 주장하며 첨예한 대립을 한다.

#궁지에 몰린 강민지,자신의 동생과 비슷한 수법 사용
변호인 측은 당시 사건 현장을 재현하며 상황을 예로 들며 차 뒷좌석에서는 강간을 당하기가 힘들다는 점, 그리고 강제로 강간을 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옷이 찢어지지도 않은채 멀쩡했음을 증거로 들었다. 이에 검사 측은 피해자가 주병진과 동의 하에 성관계를 가졌다면 가방을 맨 채로 있었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양측의 팽팽한 주장 가운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증인으로 출석한 한 룸살롱 주인 최범수(가명)의 증언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강민지의 동생(예명)에게 이와 같은 방법에 의해 강간범으로 몰렸다가 무명을 벗었다며 증언대에 섰다.

#재판정을 뒤흔든 충격적 폭로, 그리고 증거 조작
뿐만 아니라, 1심에서 증언을 했던 강민지 친구들의 증언 번복은 관계자를 놀라게 했다. 이들은 1심에서의 증언과는 달리, 피해자 강민지가 친구 신희수(예명)를 시켜 자신의 얼굴을 때리게 해 상처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강민지가 이 대가로 친구에게 이천만원의 돈을 지급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또한 강민지가 위장 자살을 계획했다는 새로운 증언까지 내놓았다. 게다가 강민지는 처음 주병진으로부터 받은 합의금 2억을 법정 증인으로 출석한 친구들과 분배,이태리 명품 여행에 모두 탕진한 사실이 드러난다. 결국 주병진은 무죄 판결을 받고 강민지는 해외 불법 체류로 행방이 묘연한 상태에서 지명 수배중이다.


집에서 주말에 뒹굴거리다가 우연히 케이블 TV를 통해 보게 되었습니다. 2003년에 방송한 것이니 상당히 옛날 방송이군요.

1심과 항소심을 1, 2부로 나누어서 진행되었는데 상당히 드라마로서 긴박감이 있었고 실존 인물들이 실명으로 (물론 대역이지만) 등장하고 당시 자료화면을 많이 써서 사실감을 높인 것도 좋았습니다.

궁금했던 사건이었는데 결말을 잘 몰랐었기때문에 흥미진진하게 봤습니다. 1차적으로 주병진이 거액으로 합의하려한 사실때문에 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게 되었는데 항소심에서 여자측의 치밀한 작전이 서서히 드러나며 결국 무죄로 판명되게 되었습니다. 완전범죄(?)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여자측이 별로 득될것이 없었던 재판까지 끌고간 행동과 여자측의 숨겨진 과거가 밝혀진 것이 불리했고 결정적으로 친구들의 배신(?)이 치명타가 되어 버렸네요.

주병진의 문란한 사생활과 돈으로 해결하려한 처음의 행위는 분명! 잘못한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상황을 몰고가면 멀쩡한 사람 강간범 되는게 정말 순식간일 것 같습니다. 어쨌건 꽃뱀한테 잘못 걸린 주병진씨는 앞으로 액땜한 셈 치고 열심히 사시길 바랄 뿐입니다.

PS : 옛 듀스의 김성재 사건도 재 조명 되면 좋겠는데 말이죠... 전 아직도 그 애인이었던 여자의 범행이라 믿고 있습니다.

2021/02/14

이름없는 사나이 (결정적 증거 중) - 로드리게스 오토렌기 (1895)

 <<1>>

사무실에 있던 번스 씨에게 심부름꾼 소년이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성함은?"

"없는데요!"

"그럴리가. 그건 이름을 대지 않았다는 얘기잖아. 이름은 있기 마련이지. 하여튼, 들어오시라고 해."

곧바로 손님이 들어왔다. 그는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 말했다.

"탐정 번스 님 맞으시죠?"

"네, 제가 번스입니다."

탐정은 대답했다.

"성함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야 물론 그러고 싶습니다만..."

손님은 계속했다.

"그게 생각이 나지 않아요."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번스 씨의 눈이 반짝였다. 재미있을 듯한 사건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바로 그겁니다. 제 자신이 누군지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여기에 왔습니다. 제가 누군지 알아내려고요. 다 큰 어른이니 직업이나 가족 등 과거가 있을텐데, 기억이 텅 비어 버렸어요. 아침에 일어나보니 이렇게 되었더라고요."

"저런."

"그래도 다행히 머리는 또렷한 편이라서요, 명탐정에게 의견을 묻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모로 수소문한 끝에 당신을 찾아오게 된 겁니다."

"매우 재미있군요. 아, 이건 제 관점입니다. 당신에게는 불행한 사건이지요. 하지만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비슷한 사건들은 이미 많이 기록되어 있거든요. 일단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조만간 기억은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올 거에요. 그래도 수수께끼는 빨리 풀어 버리는 게 좋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좀 폐를 끼치겠습니다. 몇 가지 질문에 대답 부탁드립니다."

"네, 뭐든지 괜찮습니다.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대답하겠습니다."

"우선, 당신은 뉴욕에 살고 계십니까?

"전혀 모르겠어요."

"저를 찾아 가라는 말은, 누구로부터 들으셨나요?"

"월도프 호텔의 종업원입니다. 어젯밤에 거기에 묵었거든요."

"제 주소도 호텔 종업원에게 들었겠군요. 여기까지 어떻게 갈 수 있는지, 방법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나요?"

"아, 아니요. 신기하네요. 확실히 여기까지 어렵지않게 왔네요. 이건 중요한 사실이지요, 번스 씨?"

"그렇지요. 뉴욕에 대해 잘 안다는 뜻이니까요. 하지만 이곳에 살고 계신지 아닌지가 더욱 중요하겠지요. 호텔 숙박부에는 뭐라고 쓰셨었나요?"

"M.J.G, 레밍턴, 시티."

"그렇다면 레밍턴이 당신 이름이겠군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오늘 아침 식사가 끝나고 종업원이 두 번이나 그 이름으로 불렀는데, 저는 로비를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어떤 남자분 한 명이 어깨를 두드리더니 종업원이 부르고 있다고 알려주었죠."

"그냥 지나쳤다...."

"네, '레밍턴'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 이름이 아닌 것 같아서요.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종업원에게 '왜 레밍턴이라고 부르는 거지?'라고 물어보았습니다만, 종업원은 '그렇게 쓰여 있어서요.'라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그 뒤 종업원이 이상한 사람처럼 쳐다보길래, 대충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지요."

"호텔에 짐은 없었나요?"

"하나도요. 가방도 없었습니다."

"주머니에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없습니까? 편지 같은?"

"찾아보았는데 아무것도 못 없었습니다. 그나마 지갑은 있더군요."

"돈은요?"

"500달러 정도."

번스 씨는 테이블로 돌아앉더니 종잇조각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러는 사이 의뢰인은 금으로 된 회중시계를 꺼내 자판을 힐끔 쳐다본 후, 다시 주머니에 넣으려 했다. 그 찰나 번스 씨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멋진 시계군요. 그런데 좀 특이하게 생겼네요. 제가 오래된 회중시계에 관심이 많거든요."

의뢰인은 순간 어리둥절해 했지만, 회중시계를 넣으며 답했다.

"별로 특이한 건 아닙니다. 평범한 유품일 뿐입니다. 제가 지금 가진 것 중 가장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제 사건 말입니다. 번스 씨, 언제쯤 제가 누구인지 떠올릴 수 있을까요? 이름도 모른채 이렇게 사는 건 정말이지 별로거든요."

"물론 그렇겠지요."

탐정은 말했다.

"최선은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단서가 전혀 없네요. 결과가 어떻게 하면 될지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만, 48시간이면 충분할 겁니다. 그때 쯤이면 뭔가 발견했을 것 같거든요. 모레, 열두 시 정각에 다시 방문해 주시겠어요?"

"상관없습니다. 그때 제가 누군지만 알려준다면요. 그리고 제가 누군지 알려준다면, 당신은 말 그대로 명탐정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는 일어서서 떠나려 했다. 그 순간 번스 씨는 발로 테이블 아래 단추를 눌렀다. 부하에게 의뢰인을 몰래 미행시키기 위한 신호를 보내기 위함이었다. 번스 씨는 미행 준비가 갖추어지도록 의뢰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실 건가요, 레밍턴 씨? 진짜 이름을 찾을 때까지는 이렇게 불러도 되겠죠?"

"네, 그렇게 하시죠. 48시간 동안 무엇을 할까... 그래, 관광으로 시간을 보내는 게 좋겠네요. 산책하기 딱 좋은 날이니까요. 센트럴 파크를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관광 같은 게 좋지요. 기억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다른 어떤 일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 당연히 직업을 얻거나, 장사 같은 걸 할 수야 없겠죠."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어떤 상품을 주문했다고 칩시다. 레밍턴이라는 이름으로요. 그렇다면 나중에 진짜 신원이 돌아왔을 때, 사기꾼으로 체포될 수도 있어요."

"오, 그런 건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제 입장은 생각보다 심각하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틀 동안 관광으로 시간을 보내는 게 확실히 가장 안전하겠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약속한 날에 뵙지요. 행운을 빕니다. 혹시라도 빨리 당신 신원을 확인한다면, 호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리고는 인사말과 함께 번스 씨는 책상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의뢰인이 방을 나설 때까지, 책상 위 종이 조각에 정신이 팔린 척했다. 하지만 의뢰인이 떠나자 곧바로 서랍 속에서 벨이 울렸다. 의뢰인이 건물 밖으로 나갔다는 뜻이었다. 번스 씨는 서둘러 다른 옷으로 갈아 입었다. 머리 색깔도 바꿔서 번스 씨임을 알아보려면 한참을 바라 보아야 할 정도였다.

번스 씨가 거리에 나왔을 때, 의뢰인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번스 씨는 건너편 건물 현관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파란 펜으로 '북쪽'이라고 쓰여 있었다. 번스 씨는 북쪽으로 향한 뒤, 다음 모퉁이 현관을 조사했다. 그곳에는 '오른쪽'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의뢰인이 어디로 향했는지를 알려 주는 표시였다. 번스 씨가 미행에 나설 때 도움이 되도록, 부하에게 미리 알려 놓은 방법이었다. 번스 씨가 두 번째 표시에 도착할 때쯤이면, 부하가 근처에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역시 예상대로였다. 번스 씨는 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두 블록 정도 나아간 뒤, 쉽게 부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직접 의뢰인에게 가까이 다가가 미행하기 시작했다.

의뢰인은 번스 씨와 이야기를 나눈 대로, 관광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센트럴파크에 도착한 뒤, 5번가 쪽 문으로 들어가 동물원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원숭이 산을 관람하는 인파에 섞여 원숭이들을 바라보았다. 번스 씨는 몰래 의뢰인 뒤로 다가가 그의 웃옷 옷자락에서 손수건을 재치 있게 뽑아낸 뒤, 재빠르게 자신의 손수건과 바꿔치기 하였다.

<<2>>

다음날 정오 전, 번스 씨는 서둘러 5번가 호텔 열람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쪽에 훌륭한 마호가니로 만들어진 작은 별실 세 개가 있었다. 별실은 윗부분에 유리가 끼워진 이중문으로 입실할 수 있었다. 유리는 노란 비단 장막으로 장식되었고, 중간에 방 번호가 쓰여 있었다. 보통 별실은 전화실로 사용되곤 했다. 사용자가 원하면 문을 꼭 닫고 외부 소음과 차단된 채 은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번스씨는 담당자에게 이야기하고 5번 방으로 향했다. 채 5분도 지나기 전에, 리로이 미첼 씨가 열람실로 들어 왔다. 그는 바쁜 표정으로 서류, 쪽지를 훑어보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본 뒤, 1이라고 적힌 별실에 들어 갔다. 10분쯤 지나 별실에서 나온 리로이 미첼 씨는 요금을 지불하고 호텔을 나섰다. 번스 씨도 뒤따라 별실에서 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표정이 가득했다. 번스 씨는 미첼 씨를 뒤쫓는 대신, 열람실 옆문을 통해 23번가로 나왔다. 그곳에서 고가 역을 지나 중심가로 향한 번스 씨는, 20분 뒤 미첼 씨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하인이 나와 주인은 부재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점심 때에는 귀가하시겠지?"

탐정은 물었다.

"그렇습니다."

"미첼 부인은 집에 계신가?"

"안 계십니다."

"로즈 양은?"

"계십니다."

"아! 그럼 기다리지. 명함을 전해 주지 않겠나?"

번스 씨는 호화로운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잠시 뒤 미첼 씨의 양녀 로즈 양이 응접실에 나타났다.

"아빠가 없어서 죄송해요, 번스 씨"

소녀가 말했다.

"그래도 기다리시면 점심 식사에 맞춰 돌아오실 거에요."

"고마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생겨서 로즈 양 아버지를 만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요."

"재미있는 사건인가요, 번스 씨?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 유감스럽게도 이야기해 드릴 만한게 아닙니다. 며칠 전에 로즈 양 아버지가 자전거를 사고 싶다고 말씀하신 것 때문에 찾아 왔습니다. 어제 우연히 최신형 자전거를 봤는데, 지금까지 만들어진 것 중에 최고라고 생각되더라고요. 그래서 아직 미첼 씨가 자전거를 사지 않으셨다면, 보고 싶어 하실 것 같아 알려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아쉽지만, 너무 늦었네요. 아빠는 벌써 자전거를 사버렸거든요."

"정말입니까? 어떤 디자인의 제품인가요?"

"전혀 모르겠지만, 보고 싶으시다면 아래 홀로 가시면 돼요. 거기 놓여 있어요."

"아닙니다. 별 의미가 없네요. 미첼 씨가 갖고 싶은 자전거를 발견하고 사셨다면, 제가 구태여 다른 자전거에 대해 이야기 할 필요는 없지요. 구매를 후회하게 되실지도 모르니까요."

"그럴까요?"

"아, 그래도 홀로 내려는가 보고 싶군요. 식당으로 안내해주시겠어요? 미첼 씨가 사냥했다고 자랑한 사슴 박제를 보고 싶어졌거든요. 박제사로부터 돌려받으셨죠?"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이쪽으로 가시면 돼요."

두 사람은 식당으로 내려갔다. 번스 씨는 사슴 박제와 미첼 씨의 사격 솜씨를 칭찬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홀에 놓여 있는 자전거를 관찰했다. 그 사이 로즈는 식당의 블라인드를 열고 있었다. 그 뒤 두 사람은 응접실로 돌아가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미첼 씨가 돌아오지 않은 탓에, 번스 씨는 더 기다릴 수 없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떠나면서 로즈 양에게 말했다.

"미첼 씨에게 내일 정오에 제 사무실에서 보자고 전해 주십시오. 꼭이요."

<<3>>

다음 날, 약속 시각에 맞춰 레밍턴 씨는 번스 씨의 사무실에 찾아왔다. 탐정은 사무실에 있었다. 리로이 미첼 씨는 몇 분 전 막 도착한 참이었다.

"레밍턴 씨에게 들어 오시라고 말해줘."

번스씨가 심부름꾼 소년에게 말했다. 의뢰인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그가 미첼 씨를 보고 놀라기 전에, 번스 씨가 말했다.

"미첼 씨, 이쪽은 당신을 만나고 싶어했던 신사분입니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모티머 J. 골디 씨입니다! 스포츠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G.J. 모티머로 알려진 단거리 자전거 경주 챔피언이지요. 바로 최근 400m 트랙에서 1분 56초라는 경이로운 기록으로 1마일을 완주했습니다."

번스 씨는 두 손님을 향해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첼 씨는 몹시 흥분했으며, 의뢰인은 진짜로 놀라 어안이 벙벙하며 번스 씨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의뢰인은 의자에 쓰러지듯 앉으며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아내셨나요?"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탐정은 대답했다.

"당신의 과거도 자세히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내 말이 진실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기억이 돌아왔다면요."

번스 씨는 미첼 씨를 향해 무언가 짐작된다는 듯 윙크했다. 미첼 씨는 한바탕 폭소를 터트린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패배를 인정하는 게 좋겠어, 골디. 번스 씨는 우리 힘으로는 어림도 없군."

"하지만 어떻게 알아내셨는지는 꼭 알고 싶네요."

골디 씨가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꾸민 수수께끼를 이렇게나 빨리 해결할 수 있었나요?"

"기꺼이 비결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번스 씨가 말했다.

"제일 먼저, 이쪽 신사 레밍턴 씨가 이틀 전에 저를 찾아와서 기억을 잃었다고 말했지요. 저는 듣자마자 의심했습니다. 그래도 레밍턴 씨가 제 의심을 깨닫지 못하도록 노력했어요. 이런 사건은 드문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식으로요. 이건 당신이 한 말을 제가 믿는 것 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이름 마저 잊어버린 사람이 잊어버린걸 이해한다? 이건 믿기 힘들죠. 저는 들어본 적도 없어요.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이 이름까지 모두 잊어버리는 일은 있겠지만요."

"대단하군, 번스 씨."

미첼 씨가 말했다.

"그렇게 빨리 속임수를 의심하다니, 확실히 매우 날카롭네."

"뭐 그 때는 수상하다고 생각하기까지 한 건 아닙니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을 뿐이지요. 그래서 그 후 이야기를 나누면서 계속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곧 자기가 누군지는 잊어버렸는데, 뉴욕을 기억하고 있다는걸 알아챘습니다. 별다른 안내 없이 이곳에 왔다고 시인했거든요. 이 역시 간과할 수 없었지요."

"기억납니다."

골디 씨가 답했다.

"네, 뉴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었죠? 제가 이걸 확신한 건, 센트럴 파크에서 하루를 보낸다고 말한 뒤, 이곳을 나가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센트럴 파크로 향하는 걸 보았을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저를 미행했다는 말인가요? 뒤에 아무도 없었는데요."

"네, 미행했습니다."

번즈 씨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처음에 당신 뒤를 쫓은 건 제 부하입니다. 센트럴 파크에서는 제가 미행했지만요. 그리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저의 추리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호텔 명부에 M.J.G. 레밍턴이라고 쓰셨다고 하셨지요. 이게 가장 큰 단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고 잠시 뒤, 당신은 회중시계를 꺼냈었지요. 저는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책상 거울을 통해 회중시계 뚜껑에 이름이 새겨져 있는걸 알아차렸습니다. 제가 뒤돌아보면서 시계에 관해 물었는데, 당신은 부랴부랴 주머니에 다시 넣으며 그냥 평범한, 낡은 유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요?" 

"저런, 골디, 완전히 실수했구먼."

미첼 씨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바보 같은 실수였네요."

골디 씨도 웃었다.

"자 이렇게,"

번스씨가 계속했다.

"이름을 잊어버렸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추리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에 또 두 가지를 알아챘습니다. 첫 번째는 조끼에 붙어 있는 자전거 배지였습니다. 미국 자전거 연맹 기장이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지요."

"오!"

미첼 씨가 외쳤다.

"이럴 수가, 골디, 이건 정말이지 완전한 실수라고!"

"배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골디가 말했다.

"하지만"

탐정은 계속했다.

"다리를 꼬고 있을 때, 신발 밑창이 움푹 파인 걸 보았기 때문에 배지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당신이 자전거 선수라는걸 추리해내는 건 어렵지 않았을겁니다. 그럼 이제 이름과 그 의미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우선 정말로 당신이 기억을 잃어버렸다면, 호텔 명부에 쓴 이름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는건 불가능했을 거에요. 그러나 당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뒤에는, 선택한 이름 역시 의도가 있다고 추리했지요."

"오! 재미있는 곳에 접어들었는걸"

미첼 씨가 말했다.

"선택한 이름은 아무리 보아도 묘했어요. M.J.G라고 이니셜 3개를 쓴 게 특히 이상했습니다. 기억을 잃어버리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남자가 그렇게 많은 이니셜을 선택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으니까요. 그럼 세 가지 이니셜은 어떤 이유로 선택했을까? 이 세 개의 이니셜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번스 씨가 계속 말했다.

"가명은 보통 본명을 재정렬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개의 이니셜은 분명히 본명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레밍턴이라는 마지막 이름은? 레밍턴사는 총, 재봉틀, 타자기와 함께 자전거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여기에 앞서의 배지, 그리고 신발 밑창에서 알아낸 정보를 더해 당신이 자전거 선수라는걸 확신했습니다. 가명의 이니셜로 본명을 택했다면, 이름의 레밍텅도 그만큼 친숙한 단어를 선택한 거지요. 혹시 레밍턴 사 자전거 판매상일 수도 있어서 대화 중에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사지 말라고 조언해 보았는데, 아무것도 사지 않겠다고 곧바로 말씀하시더군요. 그렇다면 확실히 판매상은 아니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공원에서 손수건을 훔친 끝에 당신의 정체를 확신했습니다. 손수건의 이니셜도 M.J.G였었거든요."

"이런, 자기 이니셜을 손수건에 새겨 놓다니!"

미첼 씨가 외쳤다.

"너무 바보 같잖아! 교활한 범죄자는 될 수 없겠군, 골디."

"아마 그럴 거예요! 물론 슬프지는 않습니다만."

"이쯤에서 저는 성공을 확신했습니다."

번스씨가 계속했다.

"그런데 다음 단계에서 좌절했어요. 미국 자전거 연맹 명단에는 딱 맞는 이름이 눈에 띄지 않았거든요. 이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한마디로 말해 재료가 너무 많아 국물이 엉망이 된 것과 마찬가지였던 셈입니다. 손수건이 없었다면 더 잘 할 수 있었을 거예요. 하여튼, 다음으로 레밍턴 카탈로그를 구해서 공인 대리인 명단을 찾아보았는데 이것 역시 실패했어요. 하지만 사무실에 돌아와서 부하의 보고를 받고 난 뒤 길이 열렸습니다. 골디 씨의 연기는 좋았지만 공중전화에 들어가 누군가를 호출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하가 전화 교환수에게 뇌물을 주고 정보를 얻어내었습니다. 그런데 5번가 호텔의 별실의 누군가와 통화했다는 것밖에는 알아낼 수 없었어요. 부하는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저는 골디 씨가 사전에 전화 상대방과 약속한 시각, 약속한 장소에 전화를 걸어 의논하는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간이 정오였기 때문에 다음날, 즉 어제입니다만, 저는 같은 시간 조금 전에 5번가 호텔의 별실로 가서 숨어있었습니다. 전화로 이야기하는 내용을 엿듣고자 했지만 그건 무리더군요. 별실이 워낙 잘 만들어져 있어서 방음이 완벽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미첼 씨가 룸에 있는 건 확인할 수 있어서 만족했습니다."

"왜?"

"왜냐고요? 당연히 미첼 씨를 보자마자 이 모든 계획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재능을 시험하려고, 기분 전환으로 조작한 사건이라는 걸요. 이를 알아채자마자, 미첼 씨가 치과에 있다는 걸 알았기에 곧바로 진상을 파헤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 집을 바로 찾아갔던 것이지요. 로즈 양과 수다를 떨려고요. 정보를 캐내기에는 딱 좋더군요."

"아이고, 빌어먹을! 번스 씨"

미첼 씨가 말했다.

"어린아이의 순진함을 이용하다니, 염치도 없구먼!"

"부끄러울 건 없었습니다. 아무튼 잘 됐어요. 현관에서 골디 씨의 자전거를 발견했는데, 짐작대로 레밍턴이더라고요. 번호를 적어서 대리점을 찾아가니 누구의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었고요. 586번은 정규 레이싱 팀의 일원인 G.J. 모티머가 타는 자전거더군요. 그리고 여기서 모티머의 본명이 모티머 J. 골디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가명에 대한 추리가 맞았기에 이 역시 반가운 정보였습니다. 자전거를 탈 때는 레이싱 네임으로 성을 바꿔서 사용했기 때문에 아까의 명단에서는 찾아낼 수 없었던 겁니다."

번스 씨가 말했다.

"아까 말했듯이, 슬쩍 실례했던 손수건이 없었다면 더 잘할 수 있었을 겁니다. 저는 미국 자전거 연맹 명단에서 G만 찾았었거든요. 손수건만 없었다면 G는 물론, J, M도 찾았을텐데 말이지요. 그렇다면 곧바로 G.J 모티머를 찾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잘했어, 번스 씨"

미첼이 말했다.

"한동안 이름 없는 남자를 연기해 달라고 골디에게 부탁한건 나라네. 자네를 한 방 먹여 주고 싶었거든. 그런데 번스 씨가 우리에게 한 방 먹인 것 같구먼. 하지만 만약 내가 주연을 맡았다면, 아무리 자네라도 이렇게 빨리 정체를 간파하지 못했을 걸세."

"어! 글쎄요"

번스씨는 말했다.

"다음에 한 번 시도해 보시지요"

"그래, 다음에 자네에게 함정을 팔 때는 나를 주역으로 발탁할걸세."

"그거 기대되는군요"

번스 씨가 말했다.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그나저나, 이번 게임에서 지셨으니 최소한 저녁은 사셔야겠습니다."

"기꺼이 한턱내겠네"

미첼 씨가 말했다. 골디 씨가 거들었다.

"아닙니다. 진 건 제가 실수했기 때문이에요. 제가 내겠습니다."

"둘이서 함께 내세요"

번스 씨가 외쳤다.

"그보다 빨리 가시죠. 배가 고파졌어요!"

그들은 곧장 델모니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덧 : 아주 오래전 읽었던 단편입니다. 모처럼 시간이 나서 번역을 진행해 보았습니다. 언제나처럼 의역 가득한 엉망인 번역입니다. 그래도 즐겁게 읽어주시면 좋겠네요.

2020/10/02

살인 현장은 구름 위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점

살인 현장은 구름 위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단편집입니다. 신일본 항공 승무원인 하야세 에이코를 탐정으로 내세운 시리즈이지요. 에이코는 통칭 A코로 불리우는, 도쿄 대학을 중퇴하고 입사하여 훈련생 수석까지 차지한 재원으로, 마른 몸매의 고전적 외모의 미녀이기까지 하지요. 그녀가 겨우 합격하고 훈련생에서도 꼴찌인 동기 후지 마미코(통칭 B코)와 콤비로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읽어보면 구태여 승무원이 주인공일 필요는 딱히 없어요. 승무원 설정을 살린 이야기가 한 편 정도? 때문에 버블 시대에 승무원 관련 컨텐츠 유행에 편승한 설정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B코 역시 등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추리에 도움을 주지도 않고, 민폐만 끼칠 뿐이니까요. 사실 등장할 때 마다 짜증만 날 정도였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 만한 이야기는 많이 없어요. 무리한 설정이 너무 많은 탓입니다.

이런 단점들 때문에 시리즈가 이어지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K호텔 살인의 밤" 

가고시마로의 비행 후 언제나처럼 바 '와이키키'에 모여 한 잔 하던 승무원들 모임에 그날 승객이었던 혼마가 동석했는데, 마침 그 때 혼마 아내의 전화가 걸려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웨이터가 그녀의 호텔 방으로 샌드위치를 배달하는건 호텔에 있던 B코가 목격했다. 4시간 정도 술을 마시고 새벽 1시 경 호텔로 돌아간 그들은, 혼마 아내의 시체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 때 A코의 눈에 들어온건, 혼마 씨 부인 시체가 하이힐을 신고 있었던 것이었다....

강도가 구태여 트윈룸에 침입할리 없으며(두 명이 있을 수 있으니), 오토록으로 잠긴 문을 돌파할 방법도 없습니다. 여기에 누구나 알리바이 공작임을 알아챌 수 있는 술자리 설정을 더하면 범인이 혼마 씨라는건 쉽게 짐작 가능합니다. 이렇게 범인이 뻔하기에, 트릭이 중요합니다.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끌기 위해서는요.

그러나 트릭은 단순한 변장 트릭이라 시시합니다. 배달된 샌드위치를 받았던 건 변장한 조카였거든요. 둘은 자신들의 유산을 혼마 씨 부인이 멋대로 주식에 투자해서 큰 손해를 보자, 의기투합하여 살인을 공모했던 겁니다. 간단하고 현실적이기는 한데, 재미있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그나마 사체 부검 결과 위장 속에 있었던, 먹은지 30분 정도 지난 샌드위치는 배달 전에 따로 구입한걸 혼마 씨가 부인에게 먼저 먹였다는 조금 고심한 트릭이 곁들여져 있기는 합니다만, 이 역시 새롭거나 기발한 발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추리를 경찰이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조카가 피해자로 변장했다는걸 밝혀내기는 불가능하니까요. 혼마 씨가 따로 샌드위치를 샀다는걸 결정적 증거처럼 취급하고 있는데, 이건 단순한 정황증거일 뿐입니다. 혼마 씨 조카의 지문이 피해자 방에서 나왔다면 모를까, 증거가 샌드위치가 전부라면 무죄 판결을 받는게 그리 어려워보이지는 않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분실물에 유의하세요" 

베이비 투어에 참가했던 25쌍의 가족이 탑승했던 비행이 끝난 뒤, B코는 실내를 정리하다가 남겨진 아기를 발견했다. 서둘러 베이비 투어 일행을 찾았지만 아이는 25명이 모두 있었다. 아이는 누구이며, 왜 혼자 남겨져 있었을까? 결국 사건은 방송을 타게 되는데, 다행히 교토에 사는 아기 엄마가 나타난다. 아기는 엄마와 함께 산책 중 실종되었었다...

A코는 베이비 투어 일행이 교토에서 그 공원에 들렸던 걸 알아낸 뒤, 참석했던 부부 중 누군가가 자기들 아기와 똑같은 옷을 입은 남의 아기를 착각해서 데려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추리라고 할 것도 없는, 상식 수준의 이야기에요.

그래도 비행기에서 내린 베이비 투어 참석자의 아기가 25명이었던 이유에 대한 추리는 꽤 괜찮습니다. 남편이 먼저 자기 아기를 데리고 도쿄로 먼저 출발한 겁니다. 부인은 남의 아기를 데리고 원래의 투어용 비행기에 탑승했고요. 착륙 후 남의 아기는 자리에 남겨두고, 공기 인형 따위에 아이 옷을 입혀 위장한 뒤 비행기에서 내렸고, 곧바로 남편을 만나 자신들의 진짜 아기를 안고 있던 겁니다.

그러나 사건 자체가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실수로 데려온 남의 아이와 함께 비행기까지 탄 뒤 비행기에서 유기한다는건 너무 억지스럽지요. 투어였다면 가이드와 상의해서 처리하는게 상식적이잖아요? 비행기에서 유기하는 순간 애가 울기라도 했으면 빠져나갈 방법도 없고요. 마찬가지로 남의 아기를 태연히 버린 부모를 용서할 수 없던 A코와 B코가 그 부부의 아기를 인형과 바꿔치기 한 뒤 옥상에서 떨어트리는 쇼를 펼쳐 응징한다는 결말도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이 역시 중범죄인 탓입니다. 경찰에 신고하는게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상황은 흥미롭지만, 억지로 만들어 낸 이야기라는 티가 너무 많이 났습니다.

"중매석의 신데렐라"

B코는 비행 중 친해진 나카야마라는 승객으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운전사 딸린 벤츠로 B코를 에스코트한 뒤, B코에게 청혼했다. B코는 재산을 노리는 나카야마 친척들의 욕심을 좌절시켜야 한다며 A코에게 완벽한 신부 연기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친척들을 만나러 가는 길, 나카야마의 벤츠로 이동하던 A코는 운전사 다무라를 어디선가 보았다고 느끼는데...

간단한 일상계 소품. 나카야마와 B코의 결혼은 나카야마의 부탁으로 진행했던 연극이었습니다. 나카야마가 진짜 연인과 함께 하기 위해 연극을 꾸민거지요. 나카야마의 연인이 남자인 운전수 다무라였기에 친척들이 반대할게 뻔했기 때문이라는게 그 이유인데, 2020년 관점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특이한 설정이나 반전은 아니었어요. 게다가 마지막에, 다무라를 성전환 시키겠다는 이야기는 이게 뭔가 싶더군요. 그럴거라면 성전환 후에 당당하게 결혼하면 되잖아요? 이렇게 억지 연극을 벌일 이유는 없죠.

전체적으로 억지스럽고 작위적일 뿐 아니라, 결말이 황당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나카야마가 연극 상대로 B코를 점찍은 이유가 다무라와 B코가 닮았다는 것 정도만 재미있었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길동무 미스터리" 

후쿠오카 전통 과자 가게 도미야의 주인 도미타 게이조가 호리이 사키코라는 여성과 함께 도쿄의 호텔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남자는 욕조에서 손을 그어 출혈사하였고, 여자는 칼에 가슴이 찔린 채였다. 처음에는 치정에 의한 자살로 생각되었지만, 그들이 마셨던 커피 잔 두 잔 중 한 잔은 지문이 지워져 있던 상태였고, A코와 B코를 통해 둘은 아무 관계도 아니었으며 같은 호텔에 투숙한 것 역시 우연이라는게 드러났다.
도미야가 경영 위기였고, 도미타가 거액의 생명보험에 가입되어 있어서 아내의 범행도 의심했지만 알리바이는 철벽이었다. 또 자살 시 보험금을 받을 수 없는데 자살로 보이는 애매한 상황을 만들리도 없어서 그녀는 용의선상에서 빠져나가는데...

진상은 도미타가 보험금을 목적으로 자살하려 했다는 겁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한걸로 위장하려고 열쇠를 쓰레기통에 버린 뒤 손을 그었지요. 그러나 투숙객 사키코가 열쇠를 주운 뒤, 친절하게도 방에 가져다 주었습니다. 도미타는 자살 시도가 밝혀지면 보험금을 받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죽이고 자살했고요. 찻잔을 위장할 수는 있었지만, 열쇠를 다시 버리러 갈 여유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지나친 우연이 겹친 작위적인 사건이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도미타의 유서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경찰이 진상을 밝혀내는건 불가능하겠지만, 그렇다고 살인사건으로 처리될지는 확실치 않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문제고요. 자살로도 처리될 수 있는 애매한 상황이니까요.

무엇보다도 도미타의 아내가 진상을 알고 나서도 보험금을 꼭 받겠다고 단언하는 마무리는, 개죽음당한 사키코에 대한 배려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아주 중요한 분실물" 

A코는 비행 중 화장실 앞에서 유서를 주웠다. 27명의 승객 중 화장실을 간 승객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 직장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 일흔살 쯤 되어 보이는 은발의 노부인, 여자 중학생, 머리가 벗어진 중년 남자, 인텔리 남자 회사원, 염치없는 중년 여성, 그 중 누구의 유서인가?

유서에 서명이 없는게 결정적 단서가 되는게 독특했던 작품. 소녀는 어머니의 재혼으로 성이 바뀌게 되어서, 어떤 성을 써야 할 지 몰랐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는 소품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허깨비 승객" 

신일본 항공 객실과 승무원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남자는 A코에게 자신이 어제 신일본 항공 승객을 죽인 뒤 도쿄만에 유기했다고 털어놓으며, 돈을 내 놓지 않으면 비행기 승객을 계속 죽일거라고 협박했다. 경찰은 수사에 나서지만, 찾은 건 피가 묻은 핸드백 뿐으로 시체는 발견되지 았다. 핸드백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핸드백 속 탑승권으로 수소문한 끝에 그녀를 목격했다는 승객이 나타났다. 그러나 조사 결과 그런 여자 승객은 없었다는게 드러나는데...

앞서 협박 전화가 있기는 했지만, 핸드백 주인이 왜 나타나지 않는지가 핵심 수수께끼인 일종의 일상계 작품입니다.

이 모든건 그녀를 목격했다는 승객 나리타의 계획이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만난 여성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꾸민 범행이지요. 피 묻은 핸드백을 버려두고 협박 전화를 건 뒤, 핸드백 주인을 보았다고 하면 얼굴을 확인시키기 위해 다른 승객들을 만나게 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겁니다.

이를 핸드백 속 립스틱으로 알아챈 A코의 추리력은 빛납니다. 립스틱은 신상으로 출시된지 일주일도 안됐는데 많이 닳아있던걸 보고 조작을 간파했던 것이지요. 일부러 쓰던 것 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의미니까요. 장난이 아니라 협박이 사실이라면, 피해자의 신원이 드러나야 범인에게 유리한데 그렇지 않다는건 아주 공들인 장난일 거라는 추리 역시 합리적이고요.

무엇보다도 여성 승객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가 가장 마음에 들어요. 승무원 중 한명인 A코들의 선배 기타지마 가오리가 그날따라 승객으로 탑승했던겁니다! 그녀가 핸드백 주인이 아니라는건 전 승무원들이 아는 만큼 수사 초기에 밝혀졌으니, 범인 나리타에게 그녀의 사진을 보여줄 이유가 없었지요.

그러나 일반인이 선뜻 실행하기에는 너무 큰 범죄라는 점에서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장난이라도 형사 처벌을 피할 수 있어 보이지 않아요. 또 B코가 번호를 잘못 눌러 발신번호 추적이 실패했다는 설정은 황당했습니다. 이건 경고 정도로 넘어가기는 불가능한 실수잖아요?

그래도 승무원이라는 직업과 예상치 못했던 동기가 잘 결합되어 있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이 단편집 최고의 작품이었습니다. 

"누가 A코를 노리는가" 

결혼과 함께 승무원을 그만 둔 전 선배 기타지마 가오리가 승객으로 탑승한 비행을 마친 A코는 가오리로부터 그녀 옆에 앉았던 이상한 승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뒤 휴일에 쇼핑을 나선 A코는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걸 깨닫고 불안해서 귀가하던 중, 차량의 습격을 받았다. 다음날, 출근한 A코에게 형사가 찾아왔다. 어떤 남자가 그녀가 기타지마 가오리와 함께 했던 비행편에 탑승했는지 확인해 달라는 부탁 때문이었다. A코는 경찰이 보여준 사진을 보고, 그가 대학 동창이자 전 연인 쓰카하라라는걸 알고 놀랐다. 그는 모리오카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주요 참고인이었다. A코는 쓰카하라의 연락을 받고 그를 만나게 되는데...

진상은, 쓰카하라는 범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직장 동료 다구치가 범인이었지요. 다구치가 알리바이 조작을 위해 비행기로 이동 중, 우연히 기타지마 가오리 옆 자리에 앉았던게 발단입니다. A코가 기타지마 가오리에게 "오랫만이에요"라며 아는 척 했는데, 승무원끼리는 개인적인 대화를 삼가하는 관습 때문에 대 놓고 아는척 하지 못한 기타지마 가오리가 눈인사만 전한게 화근이었어요. 다구치가 인사말을 자기에게 한 걸로 오해했거든요. 그래서 A코가 자신을 알아보았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녀를 죽이려고 한게 자동차 습격 사건의 진상입니다. 3개월 전, A코의 옛 연인이기도 했던 쓰카하라가 A코와 우연히 재회했을 때, 다구치는 쓰카하라와 함께 있었던 탓도 큽니다. 그래서 더 쉽게 오해했던 것이지요.

우연에 의지하고 있고, 조금은 작위적이라는 단점은 있습니다. 그래도 승무원의 업무에 대해 잘 이해하고 쓰여졌다는 생각이 드네요. 별점은 2.5점 입니다.

2021/09/17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 설혜심 : 별점 3점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 6점
설혜심 지음/휴머니스트

지적인 흥분과 읽는 재미를 동시에 전해주는 여러 미시사 저작물을 발표했던 설혜심 교수의 신작입니다. 책을 펴낸 이유를 설명하는 서두를 보니, 코로나로 인해 여러모로 쌓였던 스트레스 해소 차 썼다고 합니다. 본업과 별개로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이만한 책을 쓸 수 있다니, 그 내공이 정말 놀랍네요.

하여튼, 저자 스스로 이 책은 '애거서 크리스티 다시 읽기'로 요약할 수 있다는데 독자가 보기에는 'B급 문학을 역사 연구의 소재로 활용'해보는 모험적 시도의 결과물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립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을 통해 당시 '영국의 세계관'을 다시금 되새겨보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이니까요. 그만큼 여사님 작품이 당시의 실재를 잘 반영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사님 작품에 온갖 저택이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여사님 본인이 집 보러 다는게 취미일 정도로 열성적인 부동산 투자자이기도 했습니다만, 당시 영국인들이 대체로 집에 대한 집착이 어머어마했다는걸 설명해 주거든요. 이 집착이 '대영제국'을 만들었다는 해석도 그럴 듯 했습니다.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인들은 새로운 땅을 발견하면 거창하고 복잡한 소유권 선언 의식부터 했는데, 영국인들은 사는 집부터 짓고 자기 영역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랍니다. 점유를 통해 해당 땅을 지배한다는 현대적인 부동산 논리인 거지요. "아무리 낡아 빠진 집이라도 그것이 살인의 동기가 될 수 있다."고 푸아로가 말하는 작품도 있는데, 이제야 그 좀 납득이 되네요.

1차, 2차 세계 대전 중 '병역 면제'에 대한 사실과 사회적 인식도 여사님 작품을 통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부머랭 살인 사건"의 주인공 보비 존스가 입대 직후 시력 문제로 제대했던 이유부터 볼까요? 1차 대전 때 입대 전 신체 검사를 민간 의사들이 시행했는데, 이들의 수당을 적합 판정을 내린 신병 수만큼 지급했던 탓이랍니다. 그래서 '적합' 판정이 남발되어서 군대에 가면 안되면 보비 존스조차 입대하게 된 것이었지요. 

그런데 이건 1차 대전 이야기입니다. 반대로 2차 대전 때는 징집 대상이 여성까지 확대되었지만, 국가 차원에서 중요한 직업군은 오히려 병역이 배제되었으며, 여기 농부가 포함되어 있어서 당시 농과 대학 입학 경쟁이 치열했다는 등의 사실을 "파도를 타고"의 롤리와 린을 통해 알려줍니다. 전쟁 당시 롤리는 일하던 농장에 묶였지만, 약혼녀 린은 징집되어 참전했었다는 설정이거든요. 더불어 롤리가 지옥같다고 묘사한 이 상황으로 당시의 사회적 인식도 쉽게 알 수 있고요. 

또 "쥐덫" 등 여사님 작품들은 대체로 군대에서 복무했던 여성들은 똑똑하고 유능했던 반면, 남성들에게는 군대가 지능이 별로 필요없는 집단이라는걸 드러내는 묘사가 많았다는 걸로 당시 군인에 대한 여사님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실패했던 첫 결혼의 상대방이 장교 출신인 탓도 어느정도 있었겠지요? 당시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하게 대접받고 경쟁할만한 곳은 전시 군대가 유일했다는 점도 한 몫 했겠지요.

이른바 '영국성'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다양한 작품에서의 등장인물들 대사로 제국주의, 인종 및 타 국가에 대한 편견과 같은 당시 영국 국민들 의식을 쉽게 알 수 있었어요. 여사님 스스로가 이를 '섬나라 근성'이라며 비꼬는 묘사도 인상적이었고요. 이유보다 현상만 채집하여 선보이고 있다는 약점은 있지만, 이런게 실재하는 역사이자 진정한 사람들 관점의 미시사라는 생각도 듭니다.

"돈" 항목은 이런 관점의 미시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터펜스가 "비밀 결사"에서 이야기했던, 오직 세 가지 뿐인 돈 버는 방법에서 시작됩니다. "물려받거나, 결혼하거나, 직접 벌거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사님 작품에 많이 나오는 몰락한 귀족과 미국 부자의 결혼이라는 상황과 실제로 20세기 초반 귀족들이 몰락하면서 미국 대부호 딸과 결혼했던 사례를 연이어 소개해 줍니다. 대표적인 "달러 프린세스"로 소개된건 처칠의 어머니 레이디 랜돌프 처칠이었고요. 실제로 돈을 벌어 자수성가한 사람들 이야기가 없는건 조금 아쉬웠지만, 여사님 작품 속 이야기를 실재 역사적 상황과 맞추어 설명한 아주 좋은 사례라 생각되네요.

하녀, 하인들 이야기가 주로 소개된 "계급"도 미시사적인 측면에서 볼 만 합니다. "돈"과 마찬가지로 하녀에 대한 당시 시각과 인식을 여사님 작품은 물론, 여러가지 실제 자료를 통해 잘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인식과는 다르게 20세기 초만 해도, 어머니들이 딸들에게 하녀 일을 추천했었다는게 기억에 남네요. 도시의 악덕으로부터 젊은 처녀를 보호하고, 상층 계급의 사회적 규범을 익힐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나요? 운만 좋으면 좋은 혼처를 찾을 수도 있었고, 여사님 작품에서처럼 거액의 돈을 상속받을 수도 있었으니 나쁘지는 않았을 것 같네요. 상류층들도 하인에게 예의를 갖추는게 제 1원칙이었다니 지금보다도 고용살이하기는 더 나은 시대였을걸로 생각도 되고요. 물론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주머니 속의 호밀" 등 하녀가 불쌍한 희생자가 되는 작품도 제법 많습니다만....

그 외에도 심령 현상, 강신술과 관상 등으로 대표되는 '미신'에 대한 당시 인식, 미스 마플 이야기와 미시사라는 학문의 핵심이 일치한다는 주장 등도 모두 미시사적으로 볼만 했었습니다. 미시사에 대한 이론은 특히 와 닿았습니다. 저는 그냥 쉽게 특정한 분야, 특정 시기만을 집중적으로 조망하는게 미시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미스 마플이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 처럼, 일반적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일반 사람들과 개인의 삶을 집중적으로 고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관계를 밝혀내는 것이지요. 앞으로 이런 부분을 좀 더 유념해서 책을 읽어봐야 겠습니다.

순수하게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의 팬으로서 즐길 요소도 많았습니다. 탐정 에르큘 푸아로 캐릭터 유래처럼요. 그가 벨기에인이었던건 여사님이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을 쓸 무렵, 근처에 살고 있었던 벨기에 난민을 떠올렸던게 계기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영국인들 도움에도 별로 고마와하지 않고 불평을 늘어 놓았는데, 거기서 푸아로의 까탈스러운 성격이 빚어졌다고 하네요. 푸아로는 벨기에라는 나라가 당시 영국인들에게는 '무시해도 좋을' 나라라서 쉽게 받아들여졌다고 하는데, 프랑스 인이었다면 지금의 푸아로와 같은 인기는 없었을지도 모르겠군요. 

'탈 것'을 통해 여사님 작품 속 자동차, 기차, 비행기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었습니다. 오리엔트 특급이 대표적이에요. 밀실처럼 폐쇄된 공간이고, 승객들은 모두 우연히 모엿으며, 갇혔지만 창 밖을 볼 수 있고 중간중간 정차해서 변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기차는 추리 소설 무대로 적합하다는 이론도 기억에 남습니다. "부산행" 영화가 재미있는 이유와 일치했던 덕분입니다.
그런데 탈 것에 '배'가 등장하지 않는건 좀 의외네요. "나일강의 죽음"의 주 무대가 유람선이었는데 말이지요. 외국 여행을 위해 유람선에 모인 영국인들은 미시사 적으로 해석하기 아주 적합한 소재인데 왜 빠졌을까요?

하지만 모든 주제가 여사님 작품으로 당시 영국 세계관, 상황을 돌아볼 수 있다는 목적에 충실하게 구성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예컨데 "독약"은 당시 영국 상황보다는 애거서 크리스티 개인에 관련된 주제였습니다. "교육"에 등장하는 여러가지 상황들도 마찬가지에요. 여사님이 사립학교 출신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던 건, 해로 출신이자 난봉꾼이었던 오빠 몬티 탓, 그리고 여사님이 제대로 된 학교 생활 경험이 없다는 탓이 컸으니까요. 

그리고 "섹슈얼리티", "신분 도용"은 여사님 작품 속 해당 주제에 대해서는 잘 분석되어 있는 결과물로 재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여사님 작품 속 동성애, 포와로와 헤이스팅스의 관계 분석은 팬으로서는 눈여겨 볼 수 밖에 없는 내용이었고요. 그러나 이를 당시 시대상과 잘 엮어서 설명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호텔" 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보이 호텔과 리츠 호텔의 간략한 역사와 함께 "버트램 호텔에서"의 버트램 호텔 모델이 어디인지에 대한 해석이 거의 전부로, 일종의 미시사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호텔에 국한된 내용이었을 뿐입니다. 

반대로 "배급제"는 전쟁 때 시작되어 1950년대까지 이어진 배급제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지만, 정작 여사님 작품은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나마 여사님 관련 이야기도 작품보다는 자서전 내용이 중심이고요. 또 앞서 말씀드렸던 미시사적인 부분들도 재미는 있지만, 뒷받침하는 사료와 근거가 많지 않고, 분량도 적어서 깊이있는 내용으로 보기 어려웠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유명 작품, 여사님이 직접 뽑은 베스트 10 과 같은 작품보다 "파도를 타고"와 같은, 특정 작품에 등장했던 상황과 대사 소개가 많은 것도 아쉬웠어요. 여사님의 전작을 둘러본다는 느낌을 받기는 힘들었으니까요. 저자가 소개한 소재도 미시사적으로 좀 더 의미있게 선보였다면 좋았을 겁니다. 예를 들어 "탈 것"에서 다양한 차들을 열거하는데 그치지 말고, 그 차들의 연대 순으로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식으로 말이지요. 아울러 저자의 책 치고는 도판도 딱히 볼만한게 없었습니다. 여사님 소싯적(?) 사진들 정도가 눈에 뜨이는 정도입니다. "탈 것"에서 열거된 차들 사진과 같은 도판은 수록해주는게 좋았을 거에요.

그래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역사적인 깊이 측면, 그리고 여사님 작품의 깊이 있는 분석 양쪽 모두에서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래도 여사님 팬이라면 흥미를 느낄 수 밖에 없는 주제인데다가, 여사님 작품을 미시사적으로 접근한다는 아이디어 만큼은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글도 쉽고 재미있게 쓰여져 있고요. 추리 소설, 역사 관련 저서를 모두 좋아하는 저에게는 불만없는 독서였어요.

2024/08/10

열린 어둠 - 렌조 미키히코 / 양윤옥 : 별점 2.5점

열린 어둠 - 6점
렌조 미키히코 저자, 양윤옥 역자/모모

"회귀천 정사"로 유명한 렌조 미키히코의 단편집. 원제는 "夜よ鼠たちのために (밤이여, 쥐들을 위해)". 모두 아홉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1983년에 출간된 나름 고전(?)으로 일본에서도 꽤 오래 절판 상태였었는데,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2014년 판에서 '복각(재출간) 희망! 환상의 명작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한 덕분에 2014년에 복간된 이력이 있습니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아래와 같이 극찬하는 인터뷰와 글을 남겼을 정도로 좋아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 미스터리의 재미 중 가장 큰 것은 무엇인가 하면, 역시 마지막의 반전, 결말의 의외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편에서 그걸 내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단편집은 모든 작품이 놀라운 반전 구조를 그립니다. 생각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전개를 실현한 작품들입니다. 마치 네거티브 필름이 포지티브로 바뀌는 것처럼, 결말에서 흑백이 뒤바뀝니다. 모든 작품에서 완전히 속아버릴 수 밖에 없어요. 전후 미스터리 단편집 중에서, 저는 이 책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표제작입니다. 미스터리라는 성격상, 스토리를 말하는 것은 스포일러가 되므로 삼가겠습니다만, 제가 만약 단편을 쓴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an・an」 1990년 11월 23일호, 아야츠지 유키토 「나의, 한 권. 멋진 반전의 구조. 전후 최고의 미스터리 단편집」에서)
  • 아야츠지: 렌조 작품은, 일반적으로는 나오키상 수상작인 연애소설 『연문』이 유명합니다만, 충격적이었던 것은 역시 먼저, 『회귀천 정사』, 『은밀한 상복』 등의 초기 단편집입니다. 지금은 고분사 문고로 읽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밤이여, 쥐들을 위해』입니다.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실업지일본사에서 신서판으로 나왔고, 신초문고와 하루키 문고로 차례로 옮겨졌는데, 현재는 절판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 서술 트릭 계열 단편집의 최고봉인데......아깝네요. (「작가의 독서도 제150회: 아야츠지 유키토」에서)

읽어보니 이 정도 극찬을 받을만한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호평은 이해가 됩니다. 서정성과 트릭이 잘 결합되어 있던 작가 최전성기 시절("회귀천 정사" 시절)답게, 추리적으로 굉장히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트릭이 사용된 정통 본격 추리물에서 유괴극, 복수극, 서술 트릭 반전극, 느와르 등 수록작의 장르도 다양합니다. 과하게 느껴졌던 작가의 묘사도 다른 후기작에 비하면 절제되어 있어서 부담이 덜하고요.
모든 수록작이 다 괜찮은건 아니지만, 더운 여름, 한 번 읽어볼만하다 생각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가득하다는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두 개의 얼굴"
화가 마사키 유스케는 아내 게이코가 신주쿠 호텔에서 살해당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택 침실에서 유스케가 살해해 뒷마당에 파묻었다. 호텔 사건의 여자가 게이코라면, 유스케가 집에서 죽인 여자는 누구인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유스케는 죽인 여자의 얼굴을 그날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유스케는 호텔 사건에는 알리바이가 있었기 때문에, 호텔에서 발견된 여자를 게이코로 만들어 버리자고 마음먹었다...

진상은 유스케의 범행을 목격한 동생 신지가 자신을 협박하던 꽃뱀 여자를 함께 처치해 버렸던 겁니다. 마침 몸매가 비슷해서 속일 수 있었지요. 이 때 집 안에 전화가 두 대 있는 것을 이용해서 '순간 이동' 트릭을 선보입니다. 전화가 걸려와 안부를 물으면 당연히 외부에서 전화를 했을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같은 집 안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간단하면서도 현실적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유스케가 살해한 아내의 사체가 이동한 이유도 잘 설명되고 있으며, 사건에 대한 유스케의 심리묘사도 독자의 흥미를 더해주는 요소입니다. 서스펜스가 제법이었어요.
하지만 단편이라서 설명이 부족하며, 작위적으로 전개한 부분은 눈에 거슬립니다. 우선 신지가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건 너무 뻔했습니다. 신지를 협박하던 꽃뱀 여자가 유스케 집까지 찾아와 지문을 남긴건 억지스러웠고요, 마지막 신지의 장난도 이유를 알기 어럽습니다.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7인 1역"과 유사하다는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과거에서 온 목소리"
'나'는 금수저 출신으로 형사일을 견디다 못해 2년만에 그만두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뒤, 그만 둔 이유에 대해 강 선배에게 편지를 썼다.
1년 전, 전일항공 부사장 야마후지 다케히코의 외아들 가즈히코 유괴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 부인을 전화기에 붙잡아 놓은 상태에서, 담을 뛰어넘어 아이를 유괴했다. 경찰은 몸값을 확보하고 도주하던 범인을 미행하다 놓치고 말았다. 다행히 몸값을 받은 범인은 아이를 무사히 풀어주었고, 이후 공개 수사로 전환한 경찰에게 정체가 드러난 범인 오카다는 자동차 사고로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유괴범에게 동정심을 느낀 '나'는 당시 일부러 범인이 도주하도록 수사를 방해했다. 유괴범 중 한 명이 강 선배라는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건 범인이 '내일'이 금요일인지 토요일인지 정하지 못했던 상황을 통해, 범인이 두 명이며 둘 사이 커뮤니케이션이 원할하지 않다는걸 추리해 내는건 아주 좋았습니다. 두 명 중 한 명이 아이를 유괴당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부잣집 아들을 유괴해 몸값을 받아내려 했다는 발상도 재미있었어요. 실행범은 자기 아이를 유괴한 범인의 요구사항을 자기가 유괴한 사건 피해자에게 그대로 전달만하면 된다는 아이디어인데, 정말 획기적인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강 선배가 오카다를 살해했을거라는 결말도 합리적입니다. 오카다가 체포되면 진상이 드러날 수 있으니, 경찰이 체포하기 전 정보를 흘려 유인한 뒤 살해했다는건 말이 되니까요.

그러나 유괴가 이렇게 겹쳐서 강 선배가 피해자이자 범인이 된다는건 다소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나'가 강 선배의 눈에서 이십 년 전 범인 눈빛을 떠올린 덕에 진상을 깨달았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나'가 집 안에 있는 신이치가 사실은 유괴당한 가즈히코라는걸 눈치챈건 앞선 복선으로 설명되지만, 독자는 눈치채기 힘들다는 점에서 공정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유괴 피해자가 몸값 마련을 위해 유괴범이 된다는 아이디어는 아주 좋았던만큼, 이를 확장한 장편으로 묵직하게 썼다면 "킹의 몸값"과는 또 다른 딜레마를 안겨다주는 좋은 작품이 될 수도 있었을것 같은데 아쉽네요. 그래도 아이디어만으로 별점 3.5점은 충분합니다.

"화석의 열쇠"
하반신 마비 소녀 지즈가 목이 졸려 죽을 뻔 했다. 피해자 집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창문은 모두 안에서 잠겨 있었고, 출입구는 현관문밖에 없는데 열쇠는 관리인 사와가 보관하고 있었다.

지즈가 엄마를 집에 들이기 위해 자물쇠 바꾸는 청년을 속여 헌 자물쇠를 달게 했고, 엄마와 아빠 모두 지즈가 부담되어 살해하려 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이를 드러내기 위한 정보 제공은 공정합니다. 지즈가 자물쇠 바꾸는 청년에게 상황에 맞지 않는 초콜릿 부탁을 한 것, 관리인 사와가 엄청나게 청소를 열심히 한다는 등 상황에 대한 공유는 확실하니까요. '열쇠 화석'이라는 말도 단서로서는 좋았습니다. 사와가 이 모든걸 깨닫는 전개는 일상계스러워서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 둘이 동시에 딸을 살해할 생각을 한다는건 와 닿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다면 자기가 빠져나갈 생각을 할까요? 신파적인 결말도 별로였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기묘한 의뢰"
흥신소에서 일하는 나에게 쓰치야 마사하루라는 의뢰인이 찾아왔다. 아내 동향 조사 의뢰를 위해서였다. 아내 사야코는 하릴없이 이곳 저곳에서 시간만 보냈다. 알고보니 그녀는 나의 미행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고, 나에게 오히려 남편 쓰치야의 행적 조사를 부탁했다. 알고보니 나를 이용해서 몰래 불륜 행각을 저지르기 위함이었다. 이 역시 쓰치야에게 들켜버렸고, 쓰치야는 자기 행적 조사를 거짓으로 전달하라고 했다. 전달하기 위한 쓰치야의 행적은 애인 유리의 맨션 주소와 연락처로 받으려 했는데, 그 뒤 유리가 살해되었다...

쓰치야는 유리의 다른 애인으로, '나'와 유리의 관계를 알고 유리를 살해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조사를 맡긴건 유리와 나의 관계를 확실히 알아내기 위해서였고요.

나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그리고 냉소적인 심리묘사가 대부분으로 추리적으로 딱히 눈에 뜨이는 부분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묘사로 '나'의 별로인 모습만 드러나 작품에 몰입하기 힘들다는게 문제입니다. 쓰치야 부부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모습은 무능력했고, 유리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는 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마지막에 자신이 쓰치야에게 농락당한 것에 불과하다는걸 알아 버렸지만, 그냥 그대로 끝나버리는 결말은 이게 뭔가 싶더군요. 이야기가 완결되었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어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밤이여, 쥐들을 위해"
어린 시절 불우했던 나는 교정을 받아 사회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를 잃은 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복수를 결심했다. 
병원 원장 요코즈미 다다오는 '나'의 협박 전화를 받고 서둘러 집을 나선 뒤 살해당했다. 경찰은 백만엔이라는 돈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나'의 원한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추정했다. 이후 원장 사위이자 내과 부장 이시즈의 사체도 발견되었다.

'나'인 쓰무라의 아내는 불치병 뇌종양이었고, 병원의 과실로 죽은게 아닙니다. 그런데 왜 백만엔이라는 돈을 건네려고 했을까요? 이 수수께끼는 흥미롭습니다. 알고보니 이하라의 아내 후미요에 대한 오진을 숨기려고 원장과 내과 부장이 그녀가 백혈병에 걸리게 만들었다는게 진상입니다. 생각도 하지 못했네요. 쓰무라와 이하라의 정체가 독자가 알고 있던 것과 정 반대라는게 드러나는 반전도 좋았습니다. 잘 짜여진 서술 트릭물로, 독자를 완벽하게 속이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단 둘의 흉터는 너무 노골적으로 속이겠다!는 의도가 보여 좀 별로였고, 어린 시절 쥐를 죽였던 원한으로 살인까지 저지른다는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하라는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수 밖에 없었으니 억지스럽더라도 죽일 수 밖에 없는 동기를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작가의 고충은 이해가 되지만, 억지는 억지에요. 그래도 심리 묘사가 탁월한 덕분에 생각보다는 잘 설명되는 편이라 다행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이중생활"
마키코는 열 여섯살 많은 슈헤이에게 젊음을 바쳤지만, 자신을 버리려하는 슈헤이에게 증오를 느꼈다.

정부인줄 알았던 마키코가 진짜 아내이고, 반대로 나이많은 시즈코가 정부이자 불륜녀라는 반전이 인상적입니다. 이 반전을 결말 부분까지 잘 숨기면서 전개한다는 점에서는 서술 트릭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마키코가 남편 슈헤이와 불륜녀 시즈코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살해당한 것처럼 자살한다는 반전, 그리고 이를 위해 데쓰오와 시즈코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방법도 잘 짜여져 있어서 범죄물로도 우수한 수준이고요.

그런데 마키코가 정부 데쓰오를 범행에 끌어들인건 억지스럽습니다. 불륜을 저지르다가 살해당한 모양새이니, 마지막 순간치고는 영 폼이 나지 않으니까요. 데쓰오 없이도 현장 상황 - 슈헤이가 받아온 수면제가 들어있는, 슈헤이가 즐겨 마시던 와인 - 과 스토브 지문으로 슈헤이에게 누명을 씌우는건 가능했을것 같거든요. 시즈코마저 옭아매기 위해 데쓰오를 이용했다고보면 말은 돼지만, 이 역시 나이든 시즈코와 데쓰오가 불륜 관계라는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작위적입니다. 조건이 갖춰진 뒤에야 실행 가능한 계획이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도 힘들고요. 

단편이 아니라 장편이었다면 좀 더 설득력있는 인간 관계를 쌓아올리는게 가능했다는 측면에서, 조금 긴 호흡으로 풀어나가는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대역"
인기 배우 하세쿠라 슌은 아내 료코와의 이혼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 자신과 꼭 닮은 남자 다카쓰 신야를 찾아냈다. 그러나 료코가 슌의 불륜을 알고 있었으며, 이혼할 생각도 없다는걸 알게된 뒤 료코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다카쓰 신야를 이용한 알리바이를 만들어서였다. 오사카에서 다카쓰를 자신인 척 연기시킨 뒤, 자신은 변장하고 도쿄로 가서 살해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료코는 없었고, 오사카로 돌아간 뒤 자신의 방에 죽어있는 기누에를 발견했다. 이 모든건 료코와 다카쓰의 음모였었다.


하세쿠라 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완전 범죄물로는 볼만합니다. 도무지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완벽한 계획이었습니다. 하세큐라 슌의 대타가 다카쓰 신야가 아니라, 료코와 기누에 입장에서는 그 반대였다는 반전도 인상적이었어요.
 
하지만 이야기의 현실성이 많이 떨어집니다. 애초에 이렇게 닮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 주위에 같은 여자들이 엮이게 된다는 것 부터가 말이 안되지요.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기는 했는데, 말이 되는 이야기로 만드는 데에는 실패한 셈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베이 시티에서 죽다"
동거녀와 믿었던 아우에게 배신당한 조직원이 출소 후, 둘이 함께 도망친 항구 도시로 찾아가 모두 죽여버린다는 느와르.. 묘사도 멋있고 배신의 진상 - 없던 죄를 뒤집어 쓴게 아니라 원래 내가 지은 죄였다는 - 도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딱히 흥미롭지는 않았습니다. 추리적인 맛은 거의 없고, 내용도 신선함이 떨어지는 탓입니다. 그냥 서정적인 '사나이' 이야기를 한 편 쓰고 싶어 쓴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열린 어둠"
불량 학생들만 다니는 사립 세이에이 고등학교 음악교사인 미즈키 마사는 '마더'라는 별명으로 학생들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어느날 퇴학당한 폭주족 블랙호크스 멤버 중 한 명인 노리코가 긴급한 도움 요청을 해 왔다. 리더 다카기가 살해당했다고 했다. 노리코와 함께 현장에 온 마사는 경찰에 신고하려 했지만, 노리코가 유력한 용의자라는걸 알고 한 시간만 더 고민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카기의 죽음이 학교 체육 교사 아카자와 다케시 살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아카자와는 동성애자였다.

불량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을, 학생과 얼마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열혈 신입 교사가 해결한다는 내용으로 7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청춘 미스터리'의 영향이 가득 느껴집니다. 동성애로 인한 삼각관계가 원인이라는 점은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신선한 편이고요. 요새 이런 설정이 유행이라는데, 나도 한 번 써볼까!라는 생각으로 쓴 듯한데 의외로 괜찮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습니다. 다카기가 폐소 공포증이라는게 핵심 단서인데 - 아카자와 선생의 차는 비가 오는데도 창문이 열려있었다 -, 이는 여러가지 단서로 독자에게도 공유됩니다. 노리코가 아침에 다카기의 방에서 쫓겨난 건 창문을 닫으려고 해서, 다카기가 초고층 맨션에서 뛰쳐나온건 엘리베이터를 탈 수가 없어서, 다카기가 폭주족이 된 건 차를 타기 싫어서였다는 식으로요. 
미즈키 마사가 학생들 앞에서 추리쇼를 펼쳐 진상을 밝히는 전개도 정통 본격 추리물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다카기가 스즈타에게 아카자와 살인 혐의를 뒤집어 씌우려고 현장을 조작했기에, 스즈타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걸 증명하려고 다카기를 살해하고 노리코에게 혐의를 씌웠다는 동기는 설득력이 약합니다. 후더닛 물로는 괜찮았지만, 와이더닛 측면에서는 좋다고 하기 어렵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2015/01/31

존 윅 (2014) - 데이빗 레이치, 채드 스타헬스키 : 별점 2.5점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미중년 액션물입니다.


1952년 생인 이 형이나

1954년 생인 이 형에 비하면 키아누 리브스는 비교적 젊어보이지요.



그러나 키아누 리브스도 1964년 생으로 나이가 쉰이 넘었으니, 미중년이라 해도 무방할 겁니다. 오히려 앞의 두분인 지금 보니 미노년이라고 칭하는게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여튼, "테이큰" 이후 쏟아져 나온 유사 장르물이기는 하나 다른 경쟁작들과는 다른 나름의 차별화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일단 존 윅은 순수하게 본인의 '사소한' 복수를 위해서 움직입니다. 목숨을 걸 만큼 사랑했던 아내가 죽기 전 남긴 마지막 선물인 개를 잃게 되자 분노가 폭발했다는 설정이거든요. 딸을 구하기 위해 나서는 "테이큰"보다야 황당하고 비현실적이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아가씨들을 위해  목숨을 건다는 이야기보다는 설득력이 높습니다. 남이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아도 나는 손톱이 깨져도 아파 죽는 것처럼, 자기 일은 자기만 아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왕년에' 주인공이 어떤 활약을 했는지 다른 경쟁작들은 디테일로 살짝 보여줄 뿐 딱히 설명이 없는데 반해,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응징할 대상인 러시아 마피아 두목부터가 스스로 존 윅의 대단함을 강조함으로서 그의 강함에 대한 설득력을 강하게 느끼게 해 줍니다.

무엇보다도 본편 이야기와 상관없는 디테일들이 상당히 볼거리입니다. 금화로 이루어진 킬러들의 경제 체제, 존이 죽인 시체를 처리하는 장의사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 중에서도 영화 속 킬러들의 호텔인 콘티엔탈 호텔에 대한 설정은 군계일학입니다. 킬러들이 자연스럽게 묵는 호텔로 호텔 안에서는 "사업" 관련된 일을 하면 안된다는 불문률이 있는 곳으로 그려지는데, 이 장소만 가지고도 괜찮은 영화 몇편 뽑아낼 수 있을만큼 멋드러진 이야기였습니다.
친구 킬러인 마커스 캐릭터도 괜찮았어요. 악당 보스의 말 대로 "노병" 느낌으로 원거리 스나이퍼 캐릭터인데 여러모로 매력적이었어요. 간만에 본 윌리엄 데포가 적역을 맡아 호연을 보여주기에 감정이입이 더 잘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화 자체만 놓고보면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헤드샷이 특기인 원샷원킬의 먼치킨 최강자와 의외로 헛점도 많고 그다지 강하지 않은 현실적인 중년 남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느낌이 든 탓입니다. 중반에 나이트 클럽을 휩쓰는 장면은 정말 대단한데, 직후에는 허무하게 잡히는 등 뭔가 앞뒤가 안맞아 보이니까요. 특히나 마지막에 할아버지 보스와 1:1로 싸우는 장면은 밸런스가 영 맞지 않네요. 아무리 몸 상태가 별로라 하더라도 러시아 마피아 조직 하나를 혼자서 쓸어버리는 킬러가 할아버지와 1:1이라니, 이건 말도 안돼죠. 차라리 영화 속 설정과 소문처럼 먼치킨으로 묘사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어요. 나이는 경쟁자들에 비해 열살이나 어린데 능력은 가장 못해 보이니 안쓰러울 따름입니다.
덕분에 액션 역시 화끈할 때와 밋밋할 때가 구분되는 것도 단점이에요. 시종일관 강하게 달려주는게 훨씬 좋았을텐데 말이죠. 아울러 라이벌로 등장하는 퍼킨스 양의 결말도 영 뜬금없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 정도면 짧은 시간동안 즐기기에 적당한, 킬링타임용으로는 괜찮은 작품이기는 합니다. 1시간 30분 남짓한 시간동안 존 윅의 복수, 아들을 잃은 마피아 두목의 복수, 악당에게 고용된 여자 킬러의 습격 등의 이야기가 아주 깔끔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시원하게 펼쳐지니까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아울러 키아누 리브스가 최근 부진하죠. 이 작품은 박스오피스 모조로 확인해보니 제작비는 2천만불인데 월드와이드 합산 흥행 수익은 7천만불로 다행히 제법 성공한 편이더군요. 키아누 리브스를 위해서라도 후속작을 기대해봅니다.

덧 : 제작자 중 한명이 에바 롱고리아네요. 본인이 제작한 영화라면 작은 역할이라도 나와주는게 여러모로 낫지 않았을까요?

2017/02/26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 - 기타무라 가오루 / 오유리 : 별점 3점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 - 6점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오유리 옮김/작가정신

일상계 추리소설로 유명한 기타무라 가오루가 출판사에서 일하는 코사카이 미야코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술 때문에 벌어진 온갖 에피소드들을 일종의 만담처럼 써 내려 간 작품입니다. 짤막한 이야기들이 이어지면서 전개된다는 점에서는 연작 단편 소설 느낌도 듭니다. 등장인물들이 한명씩 결혼하고, 마지막은 미야코가 화가 오코조와 결혼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거든요.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술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들 - 술 먹고 상사에게 실수를 한다던가, 중간에 잠들어서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던가 등 - 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고 뻔합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냥 술 먹고 사고치는 이야기만 수록된건 아닙니다. 사건들의 디테일이 좋고 기승전결, 게다가 반전까지 맞아 떨어지는 재미난 이야기들도 많아요. 예를 들면 미야코가 술을 먹고 엔도 편집장에게 와인을 쏟게 되는 사건 이야기가 있습니다. 와인을 쏟는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지만, 이는 이야기로 따지면 '기승'에 불과합니다. '전', 즉 극적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부분은 아내에게 잡혀사는 엔도에게 술취한 다음날 아내가 화를 내면서 와인을 누가 쏟았냐고 물어보는 장면부터입니다. 엔도는 회사 여직원이 취해서 쏟았다고 이실직고하지요. 그런데 아내가 보여준 것은 런닝이었습니다! 엔도는 기겁을 합니다. 셔츠는 전날 술집에서 빨아주어서 얼룩이 없어진걸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술취해서 술을 쏟았는데 셔츠가 아니라 런닝에만 묻었다.... 여기가 '전' 부분입니다. 다행히 셔츠에 묻은 와인도 지워진게 아니라 어두운 조명 탓에 지워진걸로 보였다는 결로 이어지고요. 재미있지 않나요?

추리 소설가다운 에피소드들도 제법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세토구치 마리에, 통칭 문 언니가 오랜 동료 이케이의 결혼 축하 회식에서 이케이의 결혼 반지를 잃어버리는 에피소드입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결국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도 반지를 찾지 못해 우는 문 언니를 이케이가 위로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미야코의 추리가 긴 여운을 남깁니다. '어쨌거나 문 언니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싶었던게 아닐까? 그러면 그 핑계로라도 울 수 있을 테니까...' 일상계다운 멋진 이야기였어요.
다음은 미야코가 친구 사나에와 함께 가루이자와로 출장갔을 때의 에피소드입니다. 함께 술을 먹고 미야코가 깜빡 잠든 사이, 사나에가 사라집니다. 미야코는 한참 찾다가 호텔 방 밖에서 자고 있는 사나에를 발견하지요. 그런데 그녀를 데리고 들어 오려다 호텔 방 문이 닫혀 못 들어 오게 됩니다! 만화 등에서 흔히 보아 온 이야기의 재탕이긴 한데 진상에 대한 추리가 그럴 듯 했습니다. 사나에가 사는 집 구조가 호텔과 비슷했기 때문에, 술에 취해서 집에 온 것으로 착각했던 사나에가 호텔 방 밖에서 뻗었던 겁니다. 집에서처럼 욕실에서 나온 다음, 좌측으로 돌아 문을 열고 난 뒤 바로 쓰러졌는데 방의 배치가 정 반대였던 것이지요.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탄탄한 묘사도 볼만합니다. 누군가가 이야기 해 주는 듯한 문체도 독특하고요. 특히 코사카이 미야코의 심리묘사와 대사들이 정말로 찰집니다. 정말로 어딘가에 있는, 현실 속 누군가를 그대로 그려낸 듯 생생한 덕입니다. "뭐가 구시렁이고 뭐가 불평인가. 그 기준점은 명확히 정의할 수 없다. 하지만 전자에 약간의 유머와 여유가 있다면, 후자는 오로지 암흑의 구렁텅이 같은 이미지다." 같은 식으로 요. 이외에 온갖 맛있는 술과 안주에 대한 소개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애주가, 특히 만화 "음주가무연구소"를 재미있게 읽은 분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완전히 취향 저격이실 겁니다.

2004/12/16

한낮의 유괴 - 모리무라 세이이치 : 별점 2점

인기 탤런트 야기하시 노리코와 불륜관계인 도오토 대학 조교수 미야모토는 어느날 정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뒤, 아내 구미코의 시체와 함께 아들 미사오가 유괴된 것을 알게되었다. 그는 노리코와 의논하여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시체를 숨기고, 유괴범과 접촉하여 아들을 돌려받기 위해 나섰다.
유괴범이 요구한 500만엔을 들고 접선을 시도했지만 유괴범의 재치로 돈만 잃은 후, 호텔에 정통한 유괴범의 정체에 의문을 품고 해당 호텔의 직원 명부를 뒤지고 여러 단서를 조합하여 용의자를 발견했지만 용의자는 도주 끝에 눈 앞에서 사고로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 뒤 미야모토는 오히려 노리코와 함께 경찰에 아내 살해 혐의로 체포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 이면에는 미야모토의 아내와 불륜관계였던 인기작가 마키노 케이스케의 뺑소니 사건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작품. 흔치 않게 "유괴"가 메인 테마입니다. 조사해보니 1973년 작품이네요(공식사이트 참조). 비교적 초기 작품이라서 상당히 기대가 컸습니다. 이 작가의 작품은 초기 작품이 훨씬 좋거든요.
우선, 대학 조교수 미야모토 부부의 2중 불륜사건(미야모토-노리코 / 마키노- 구미코 )과 뺑소니 사건과 유괴 살인사건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 결국 하나로 귀결되는 작가 특유의 전개는 좋았습니다. 작가의 작품인 "죽음의 연립방정식"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중반부의 "유괴범"을 찾기위한 미야모토와 아키코의 활약까지만 재미있고 이후는 지루합니다. 무엇보다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는 살인범과 유괴범이 다르다라는 결정적 트릭이 너무 쉽게 드러난다는게 가장 큰 약점이에요. 불필요한 장면도 많습니다. 초반부의 코인로커의 열쇠에 대한 의문과 열쇠를 삼킨 아이라는 설정, 이것들과 연결되는 마지막의 어이없는 에필로그는 대체 왜 들어갔는지 모르겠어요. 그렇잖아도 지루해진 작품을 쓰레기로 만들어 버라서 황당할 뿐입니다. 이 정도 막장 전개에 비하면 "지유가오카"라는 지명을 "자유 언덕"이라고 번역하는 등의 오역은 오히려 애교로 보입니다.
또한 불륜과 불륜이 겹친다는 지나친 통속소설류의 설정은 읽을수록 더 불쾌해지더군요. 왠놈의 정사장면은 이다지도 많은지... 이런 설정 없이도 충분히 재미있게 스토리를 끌고 나갈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나마 유괴범과의 두뇌싸움은 꽤 흥미진진하고 특히 호텔맨 출신의 모리무라 세이이치 본인의 경험을 살린듯한 리얼한 호텔 묘사, 이른바 "3차원" 전달 방식이라는 기발한 몸값 전달 방법, 그리고 유괴범의 주소를 찾기 위한 일련의 단서들을 조합한 추리는 괜찮은 편입니다. 하지만 기대에 비하면 좀 많이 별로였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절판된 작품을 헌책방에서 어렵게 구해보 읽긴 했지만 두번 읽게될 것 같지는 않군요.

2006/09/14

[번역] 이콜 Y의 비극 (1) - 노리츠키 린타로

프롤로그 :

차 공원의 호텔에서 열린 피로연은 4시 30분에 개장되었다. 피로연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던 도중, 토고 유카리는 같은 테이블 주위의 친구들과 로비에서 모일 것을 약속한 탓에 가져갈 물건을 챙기기 위해 호텔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4월 29일, 골든 위크 첫날의 결혼식이었다. 신부는 유카리가 전에 일하던 회사의 1년 후배였다. 같이 초대된 전 회사 동료들과 만나는 것도 자신의 송별회 이후 처음이었다.

유카리는 정리 해고자 대상자로 퇴사한 것은 아니었다. 도쿄의 여대를 졸업하여 도내의 부동산 회사에 취직, 4년간 OL로 일했지만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지셔서 가업을 돕기 위해 나고야로 돌아가게 된 것이었다.

그동안 맞선의 이야기도 몇번 있었지만 아직 이렇다할 인연은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8년간의 동경 생활때문의 유카리의 눈이 너무 높아진 이유도 있겠지만 양친이 데릴 사위를 강하게 희망한 탓도 컸다.

유카리는 아침의 신칸센으로 상경하여 1박 2일의 일정으로 다음날 밤에는 나고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가업인 주점은 주변 편의점과의 경쟁이 극심해져서 골든위크라는 이유로 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가 반쯤은 은퇴하신 상태라 무남독녀인 유카리는 가게의 영업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귀중한 전력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출발하기 직전까지도 되도록이면 오늘 안에 돌아와 줄 수 없겠냐는 말을 계속했지만 때때로 숨돌릴 틈도 필요하다는 어머니의 한마디가 그나마 효과가 있어서 오늘 하룻밤을 이곳에서 보내는 것이 겨우 가능했다.

예약한 호텔방은 창에서 도쿄 타워가 바라보이는 방이었다. 별로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유카리는 조금 얼굴이 달아오른 것을 느꼈다. 새로 맞춘 드레스도 조금은 거추장스러웠고, 피곤했기에 침대위에 가로 누워 구두도 벗고 잠시 쉬기로 했다. 신부는 예뻤고 처음 본 신랑도 정직하고 성실해 보였지, 뭐 나쁘지 않은 결혼식이었어. 그러나 피로연이라고 불리우는 이러한 파티는 왜 이렇게 피곤한걸까?

여섯시부터는 왁자지껄한 2차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다. 롯뽕기의 가게도 이미 빌려 놓았다고 했다. 유카리는 기억에 남을 정도로 흥겹게 보낼 생각이었다. 오랫만에 상경하여 기분이 붕 떠 있는 탓이겠지. 아버지가 그렇게 오늘 돌아올 것을 부탁했던 것도 딸이 다시 도쿄 생활을 강하게 그리워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어서였던 것일 수도 있다. 아버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니깐!

아버지에 비한다면 차라리 어머니 생각은 납득이 된다. 한숨 돌리는 기회로 기분좋게 하룻밤 정도 보내는 정도, 매일 숨쉴틈도 없이 보내는 와중에는 도쿄에서 혼자 살아가던 시절이 그리울 수 밖에 없었고 정말이지 이렇게라도 한번 정도 나와주지 않으면 정말 도망쳐 나오게 될 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다가 2차 장소로 출발하기 전에 미도리에게 연락해서 내일 약속을 미리 해 놓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래서 전화를 한통 걸어야 한다는 것이 생각났다. 아다치 미도리는 대학때부터의 친구로 지금은 결혼해서 사카자키로 성이 바뀌고 세타가야 키유텐의 맨션에 살고 있었다. 남편은 여섯살 연상의 투어 컨택터, 아직 아이는 없었다. 미도리가 결혼한 뒤에도 유카리가 도쿄에 살때에는 자주 만나곤 했었지만 나고야에 귀향한 뒤로는 얼굴을 보는 것은 물론, 전화로 이야기할 기회도 뜸해진지 오래였다. 오래간만에 올라온 도쿄였기 때문에 오랫만에 둘이서 식사라도 하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천천히 이야기하고 싶었다. 1박을 하게 된 것도 그것이 가장 큰 이유였었다.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전화해서 도쿄에 왔다는 사실을 말했다면 미도리는 무척 놀랐을 것이다. 사실은 도착하자마자, 아니 그 이전에라도 미리 알려줄 수도 있었지만 빠듯한 일정탓에 1박하는 것이 출발직전까지 결정되지 않아서 만나지 못할 수도 있어서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내일 충분한 시간이 있으니 괜찮겠지. 미도리도 특별한 약속이 없기를 바라며 백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저장해 놓은 미도리의 집 전화 번호를 호출했다.

그런데 그대로 전화를 걸기직전 유카리는 잠깐 손을 멈추었다. 침대 옆의 객실 전화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호텔 숙박비는 신부측이 지불하는 것으로 그 안에는 전화비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었다. 가게의 경리업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유카리는 지난 몇년간 그러한 계산에 굉장히 민감해져 있었다. 부랴부랴 나고야로부터 출발하였고 결혼식 축의금까지 냈기에 확실히 절약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카리는 객실 폰의 수화기를 집어들고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미도리의 집 번호를 눌렀다. 3번의 신호음이 울린 후 전화에서 들리는 목소리 -

"사카자키 입니다"
"여보세요. 미도리? 나 유카리야. 지금 여기 와 있어"
"- 죄송합니다. 언니는 지금 외출중이거든요. 어디시라고 전해드릴까요?"

미도리의 목소리가 모르는 사람처럼 냉담하게 답했다. 유카리는 깜짝놀랐다. 본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순간적으로 불쾌한 기분까지 들었지만 확실히 미도리의 동생은 전에 만나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고 이름도 곧 기억이 났다. 유카리가 곧바로 말했다.

"어머 아카네? 미안해요. 언니하고 정말 목소리가 똑같네요. 나는 토고 유카리라고 해요. 기억나지 않아요? 전에 만난적도 있는데?"
"유카리씨요? 언니의 대학 친구? 물론 기억나죠. 그러고보니 확실히 나고야 고향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그랬죠. 이번에 아는 사람 결혼식때문에 올라오게 되었어요. 내일 돌아가기전에 만날 수 없을까 생각했는데 미도리는 없나보네요"
"예. 오후부터 일이 있다고 하고 나갔거든요. 저에게 집을 좀 봐달라고 해서... 형부가  출장으로 집에 안 계셔서 어제부터 이 집에 놀러와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일이 있다고 했는데 쇼핑이라도 하러 나간건가요?"
"밤까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했기 때문에... 돌아오면 전화하라고 전해드릴까요?"

유카리는 잠시 생각했다. 2차 파티에 참석하기로 했기 때문에 언제 걸려올지도 모르는 전화를 방에서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또 그때쯤이면 아마 술에 취해 있을거야. 미도리가 내일 다른 일이 있는지만 확인해서 없다면 먼저 약속을 잡아버리는 쪽이 확실해 보였다.

"음...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것 보다도 내일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언니가 혹시 뭔가 다른 약속이나 예정이 있다고 말했었나요? 나는 저녁때 까지 밖에는 시간이 없어서"
"아뇨. 특별히 아무것도요. 형부가 돌아오는 것은 밤은 되어야 할 테니까요"
"그럼 내일 별다른 일이 없는거겠죠? 그렇다면 전화를 걸라고 하지 말고 제 말만 좀 미도리에게 전해주지 않겠어요? 갑작스레 상경했는데 식사라도 함께 하지 않겠냐고요. 만날 시간과 장소는 지금부터 말해줄께요"
"네. 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럼, 시간은 점심 1시. 장소는 그렇지! 역시 거기가 좋겠어요. [風見鷄 (카자미도리)]"
"[風見鷄 (카자미도리)]? 그 건물 꼭대기에 있는 그곳 말씀이세요?"
"예. 학생때 자주가던 喫茶店(카페)이었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면 알거에요"
"아 그럼 [風見鷄 (카자미도리)]라는 喫茶店(카페)에서 내일 오후 1시. 알겠습니다. 언니가 돌아오면 그렇게 전해드릴께요"
"혹시 뭔가 다른 일이 있거나 하면 제 휴대폰으로 전화해 달라고 전해주세요. 번호는 알고 있을거에요. 그럼 잘 부탁드려요 아카네"

유카리는 객실전화의 수화기를 내려놓고 사이드 테이블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5시 4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큰일났네-!)
사용하지 않은 휴대폰을 백에 집어넣다가 유카리는 혀를 찼다. 미도리에게 가르켜 준 것은 옛날 휴대폰 번호였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새 번호는 가르켜 주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나고야에 돌아가서 다시 만나 잠깐 교제했던 고등학교 동창이 헤어진 뒤에도 자꾸 전화를 걸곤 해서 어쩔 수 없이 얼마전 새롭게 전화, 번호를 교환했던 것이었다. 물론 전의 번호로 걸어도 새 번호는 알수 없도록 해 놓았었다.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자괴감과 더불어 불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나 창피하기도 해서 또 다시 전화를 거는 것은 왠지 내키지 않았다.

괜찮겠지. 내일 미도리가 와 주지 않겠어? 분명히 와 줄것이 분명해!

그렇게 혼자서 결정하여 원기회복한 유카리의 기분은 곧바로 예정된 2차 모임 쪽으로 향했다. 유카리는 백을 손에 들어 침대옆 서랍장에 집어넣었다. 피로연 때 까지 신랑 친구석의 몇명인가 눈을 마주친 남자가 있었다. 지금부터는 2차 모임까지 화장을 고치고 드레스를 점검하지 않으면 안돼...

: 노리츠키 린타로는 꽤 유명한 작가인데도 국내에 소개된 작품이 전혀! 없어서 전에 구해본 괜찮은 단편 하나를 직접 번역해 본 것입니다. 의역이 많아서 부끄럽긴 하지만.... 그리고 불펌은 없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