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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8

노상강도 - 에드 멕베인 / 박진세 : 안타깝지만 별점 2점

노상강도 - 4점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여성을 노린 연쇄 노상강도 범인이 범행 후 정중한 자기 소개 — "클리퍼드가 감사를 전합니다. 마담" — 로 유명해졌다. 87분서는 검거를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한편 순찰경관 버트 클링은 오랫만에 찾아온 친구 벨의 부탁으로 그의 처제 지니 페이지를 도와주려 하나 실패했고, 그 뒤 지니는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노상강도 사건과의 연관성이 의심되어 총력 수사가 진행되는데...

"경관혐오" 바로 다음에 발표된 87분서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스티브 카렐라 형사는 작중에서는 내내 신혼여행 중으로 묘사됩니다. 때문에 주역으로는 순찰경관 버트 클링이 비중 있게 등장합니다. "경관혐오"에서 총에 맞아 입원했었지요. 내용은 줄거리 요약에 있는 대로 노상강도 사건을 축으로, 지니 페이지 살인 사건이 함께 진행됩니다.

이 중 노상강도 사건은 윌리스 등 형사들의 수사과정이 꽤나 자세하게 묘사되어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끄나풀이 등장하고, 불법 도박장에 잠입하고, 심지어 여성 경관을 이용한 함정 수사까지 펼치는 등 수사 방법도 다양하게 선보입니다. 결국 범인을 잡게 된 단서가 함정수사를 통해 입수한 종이 성냥이었다는 식으로 체포까지의 과정도 아주 깔끔한 편이고요. 한 마디로, '발로 뛰는 수사로 확보한 단서를 토대로 한 범인 체포'라는 수사물의 왕도격 전개를 보여줍니다. 범인이 가명이 아니라 정말로 "클리퍼드"라는 이름이었다는 점에서 경찰 수사가 너무 미진한 게 아니었나 싶기는 하지만요.
유도 고수 윌리스나 폭력 형사 하빌랜드와 같은 형사들의 독특한 캐릭터도 돋보이고, 마이어 마이어가 끝까지 미는 농담 — 고양이 절도 사건과 그 진상인 Instant pussy — 까지 깨알같은 재미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또다른 이야기인 지니 페이지 살인 사건은 영...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내용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에드 멕베인의 또다른 필명인 에반 헌터 명의의 주정꾼 탐정 커트 캐넌 시리즈 중 한 편인 "프레디는 그곳에 (Now Die in It)"와 완벽하게 똑같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과 직업을 제외하면 친구가 처제의 비밀을 밝혀달라고 의뢰하고, 처제가 살해당하고, 처제의 남자를 찾아나서고, 결정적 단서는 받았던 메모였다는 전개와 내용 모두 동일합니다. 시기상으로도 이 "노상강도"가 3년 뒤 발표된 것이니 표절, 혹은 확대 재생산된 작품이 맞는 것이죠. 심지어는 왜 탐정–경찰에게 처제의 비밀을 밝혀달라고 의뢰하는지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단점까지 같아요.

물론 자신의 단편을 장편으로 만든 사례가 다른 거장들에게 없는 것은 아니긴 합니다. 아가사 크리스티 여사님 등 유사한 전례는 제법 되니까요. 어차피 본인의 작품을 본인이 표절한 것이니만큼 비난하기도 뭐하고요. 허나 최소한 책 소개에서는 언급해주었어야 합니다. 읽다보니 완벽하게 똑같은데, 이래서야 돈을 주고 구입한 독자에 대한 예의는 아니었다 생각됩니다. 전혀 모르고 있다가 뒷통수 맞은 기분이에요.

그래서 개인적인 별점은 2점입니다만, 버트 클링 순경의 재담과 클레어 타운센드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 그리고 시적인 몇몇 묘사는 좋습니다. 초기작다운 순수한 하드보일드 스타일 전개도 인상적이고요. "주정꾼 탐정"을 먼저 읽지만 않았어도 충분히 고득점이었을 겁니다.  "주정꾼 탐정"을 읽지 않으셨다면 추천드립니다.

아울러, 버트 클링이 이 사건 이후 특진되어 87분서에 형사로 배속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후 작품에 등장하던가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2008/04/12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 미야베 미유키 / 김소연 : 별점 3.5점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 8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대답은 필요없어" 이후 정말이지 간만에 읽은 미야베 미유키 책이네요. 사실 "쓸쓸한 사냥꾼"과 착각하고 구입한 책입니다. 단편 미스터리물이라고 해서 착각했어요.
 7가지의 불가사의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에도시대의 혼조 후카가와를 무대로 한 단편 연작 미스터리 물(?)로, 탐정겸 형사로 오캇피키 모시치가 전편에 등장하고 있고 장소와 시간대가 동일하기에 연작 미스터리라고 칭한 듯 합니다.
7개의 이야기는 '외잎 갈대, 배웅하는 등롱, 두고 가 해자, 잎이 지지 않는 모밀잣밤나무, 축제 음악, 발 씻는 저택, 꺼지지 않는 사방등'입니다. 뻔한 괴담들이긴 하지만 작품 내용과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이 참 재미있게 꾸며놓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역자 후기를 보니 원래 전승되는 이야기라고 해서 또 한번 놀랐습니다. 원래 있던 이야기와 연관되도록 이야기를 또 꾸미는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을텐데 참 대단한거 같아요. 무엇보다도 모든 작품에서 "희망"을 느낄 수 있는 메시지가 전해지는 것이 마음에 들더군요.
재미있게 읽었고 워낙 좋은 작품이라 별점은 3.5점입니다. 아울러 개인적인 베스트는 "두고 가 해자" 였습니다. 모두 다 일정 수준 이상의 단편들이지만 추리적 요소가 가장 많이 담겨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미스터리보다는 시대물 + 드라마적인 요소가 강했습니다. 대부분의 사건에서 범인 체포는 함정수사나 잠복에 의존하고 있고 추리라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거든요. 미야베 여사의 필력이 느껴지는 좋은 작품인 것은 분명하나 추리팬에게 추천하기는 조금 난감하다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약간의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잎 갈대는 초밥집 오우미야의 주인 도베에의 강도 살해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7개의 이야기 중에서 기이한 이야기와 제일 연관이 없다는게 특징입니다. 그래도 작품의 완성도도 높고 내용도 마음에 들었어요. 문제는 사건을 해결이 가장 중요한 단서인 "나무 부스러기"를 통해 이루어지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우연이 많이 좌우하고 있어서 추리물로 보기는 힘들다는 겁니다.

배웅하는 등롱은 주인 아가씨의 사랑을 이루어주기 위해 한밤중에 에코인으로 매일 다녀와야 하는 하녀 오린의 이야기입니다.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기는 한데 추리물은 아닙니다.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한 심리묘사로 애틋한 느낌이 잘 살아난 서정적인 드라마라고 할 수 있지요. 과연 등롱을 들고 오린을 매일 바래다 주는 것은 누구였을까요?

두고 가 해자는 남편이 살해당한 오시츠의 이야기입니다. 원래 전해진다는 기이한 이야기도 제일 괴담에 가까우며 내용도 추리물로 보기에 충분할 정도로 잘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단서와 복선이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고 전개도 아주 명확하거든요. 물론 아주아주 정교한 내용은 아니고 결국은 함정수사지만, 뭐 에도시대니까요.

잎이 지지 않는 모밀잣밤나무는 잡곡가게 오하라야 근처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계기로, 오하라야의 며느리 후보 오소데가 낙엽을 열심히 치우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사건 자체가 불명확하며 전혀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는 등 좀 모호한 부분이 많다는 단점은 있지만, 따뜻한 내용이 좋았던 작품입니다. 오소데가 뭐라고 편지를 썼는지는 궁금한데, 이런 부분을 드러내지 않음으로 해서 여백의 미를 살린 것도 좋았습니다.

축제 음악은 상상속에서 사람을 죽이는 아가씨 오요시와 모시치의 조카딸 오토시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얼굴베기"라는 악당을 실제 검거하기 위한 노력과 오토시의 질투가 얽히는 추리적인 요소도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축제 음악이라는 비유가 아주 적절하게 쓰이고 있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워낙에 심리묘사가 탁월하기에 더 와 닿기도 했고요.

발 씻는 저택은 재산을 노리는 연쇄 살인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곳곳에서 수수께끼들과 기이한 상황들이 계속 발생하지만 추리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는 것이 의외라면 의외였던 작품입니다. 진상이 그다지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평이한 것이기에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의 시점과 심리를 통해 진행되는 묘사는 좋았지만, 평범한 수준입니다.

꺼지지 않는 사방등은 홀로 열심히 살아가는 오유라는 아가씨가 부자집인 이치케야의 정신나간 사모님을 위해 딸 역할을 부탁받는 이야기. 추리적 요소는 거의 없는 부부간의 치정극으로 역시나 평범한 수준입니다. 사방등과 부부간의 관계를 빗대어 사방등의 연료, 불꽃을 지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묘사와 디테일은 과연 미야베 미유키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기는 한데, 워낙 이야기가 알맹이없고 별다른 것이 없어서 연작집의 마지막을 마무리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2007/07/22

주정꾼 탐정 - 에반 헌터 / 김병선 (자유추리문고 50) : 별점 3점

드디어 어렵사리 구하게 된 자유추리문고의 "주정꾼 탐정" 입니다. 정말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네요.

작품의 작가 에반 헌터는 "87분서" 시리즈의 작가 "에드 멕베인"입니다. 에드 멕베인은 거장이기는 하지만 워낙 다작인 탓에 실망스러웠던 것도 제법 있었죠. 특히 후반기 작품들은 많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이 작품은 작가의 초기작으로 당시 유행의 끝자락이던 초기 하드보일드 정서를 제대로 전해주는 것과 동시에 정통 본격 추리물스러운 점이 많아서 마음에 들더군요. 서정적인 문체와 묘사도 아주 인상적이었고요. 하드보일드계의 서정시인 로스 맥도널드가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주정꾼 탐정인 주인공 커트 캐넌의 캐릭터가 무척 독특한데 알콜중독 룸펜 탐정으로 "800만가지 죽는 방법"의 매튜 스커더의 형님뻘로 로렌스 블록이 많은 부분 영향을 받아서 매튜 스커더를 창조한 것은 확실합니다 . 탐정 면허증도 없는 알콜중독자로 심리 묘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유사한 수준을 넘어서니까요. 개인적으로는 과거의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는 매튜 스커더보다는 바람난 아내를 응징하려다가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커트 캐넌이 더 설득력있게 다가왔습니다. 역시 아류가 원조를 뛰어넘기는 힘든 법이에요.

그러나 8편의 단편이 다 추리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지는 않을 뿐더러 작품별 편차도 좀 있고, 작가의 히트작인 "87분서" 시리즈와 유사한 스토리, 분위기가 반복된다는 것은 단점이기는 합니다. 특히 몇몇 작품의 세부 묘사는 굉장히 비슷하더라고요. "대중소설" 작가인 에드 멕베인이기 때문인지 거의 모든 편에서 처음 만난 여성과의 정사가 그려지는 등의 통속적 요소도 거슬리는 점이었고요.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기다렸던 만큼, 기대했던 만큼의 재미를 전해주기에 무척 즐겁게 읽었습니다. 명작이나 걸작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할 수 있지만 추리소설 황금기 막차(?)의 느낌은 잘 전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8편의 단편 중 개인적인 추천작은 "다시 만남"으로 추리적인 요소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제일 마음에 들더군요. "주정꾼 탐정" 으로서의 캐릭터가 가장 잘 살아있는 다른 추천작이라면 "나도 산타클로스"를 꼽겠습니다.

1. 떠나지 않는 유령 (Die Hard) 

커트 캐넌은 한 남자로부터 마약중독에 빠진 자기 아들을 구해달라는 의뢰를 받지만 거절했다. 그러나 남자가 자기 눈 앞에서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한 뒤, 사건 수사에 뛰어든다.

아마 커트 캐넌 시리즈 제 1작이겠죠? 뉴욕 뒷골목의 묘사와 인물 묘사가 일품이긴 한데 범인이 너무 쉽게 드러나는 약점이 있더군요.

2. 죽은 사람의 꿈 (Dead Men Don't Dream)

소꼽친구 찰리의 장례식에 참석한 커트 캐넌은 다른 친구들로부터 그 지역 건달들에게 상납금을 내지 않아 찰리가 살해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건달 소탕에 나선다. 

하드보일드 액션물로 커트 캐넌이 동네 건달들과 한판 벌이는 내용이 전부입니다. 전체적으로는 마이크 해머스러운 느낌으로 추리적으로 특기할 것은 없네요.

3. 프레디는 그곳에 (Now Die in It)

지인 루디가 처제 베티의 임신 사실을 고백하며 상대 남자가 누구인지 밝혀줄 것을 의뢰한다.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베티가 살해당한 뒤 사건 수사에 나서게 되는데...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추리물로 룸펜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수사가 어떤 것인지를 잘 묘사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루 아처 시리즈 단편과 꽤 유사한 느낌을 받기도 했는데 범인이 누구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는 단점은 있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4. 착한이와 죽은이 (Good and Dead) 

룸펜 친구 조이가 살해당한 뒤 커트는 그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어서 살해당한 것이라는 중국인 칭크의 말을 듣고 관련 인물 조사에 나선다. 

한여름 더위의 묘사가 탁월합니다. 역시 "경관혐오"의 작가 답다는 느낌이 물씬 나더군요. 추리적으로는 별다를게 없고 관련 사건의 연결고리가 너무 쉽게 드러나는 단점때문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지만 묘사가 정말 좋아서 읽는 재미 만큼은 끝내줬습니다.

5. 나의 죽음 (The Death of Me) 

커트 캐넌은 신문에서 그가 죽었다는 기사를 읽은 뒤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나선다.

커트 캐넌이 드디어 노숙자 신세로 전락한 시즌의 이야기로 내용은 갱들의 세력 다툼이 대부분이라 추리적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팜므파탈, 갱, 킬러 등 하드보일드 액션물의 모든 요소가 등장해서 스케일이나 캐릭터에서 영화적인 느낌을 많이 전해주기는 하는데 뭔가 좀 어수선했고요. 아무래도 단편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소재가 아니었나 싶네요.

6. 나도 산타클로스 (Deadier Than the Mail) 

커트 캐넌은 유년시절 친구 키트 오드닐의 부탁으로 생활보호 대상자들의 복지수표 도난 사건 수사에 착수한다.

영문 원제가 너무 범인을 뚜렷이 암시하고 있으며 범행이 우발적이고 좀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추리적으로 문제점은 많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와 묘사가 마음에 들은 작품입니다. 무엇보다도 맹점을 찌르는 맛이 좋아서 추천하고 싶네요.

7. 다시 만남 (Return) 

커트 캐넌에게 헤어진 옛 아내 토니가 다시 찾아와 새출발 할 것을 약속하고 그에 고무된 커트 캐넌은 부랑자 룸펜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탐정일을 제대로 시작할 것을 결심한다. 

커트 캐넌 시리즈의 핵심 인물인 전처 토니가 주연급으로 등장하는 작품으로 정통 하드보일드적인 냄새도 나면서도 여러가지 곁가지 설정들이 양념처럼 재미를 더하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재미도 재미지만 커트 캐넌의 심리 묘사가 특출나다는 것도 인상적이었고요. 범인의 공작이 너무 얄팍하지 않나 싶은 생각은 들지만 (예를 들자면 저같으면 확실한 알리바이 공작을 하고 있었겠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개인적인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8. 거리에 내리는 주먹비 (The Beating) 

룸펜들을 노리는 테러가 연달아 발생하고 결국 한명이 살해당하게 된다. 경찰 수사를 믿지 못하는 커트 캐넌은 스스로 미끼가 되어 밤거리를 배회하기 시작하는데... 

역시나 여름 묘사가 발군인 단편으로 진상이 밝혀지기까지의 조사과정이 허술할 뿐더러 단서없이 함정수사(?)로 범인을 잡는 결말이라 조금 시시했어요. 커트 캐넌과 부랑자 이웃간의 애정이랄까... 하는 감정만큼은 독특하긴 했으나 그냥저냥한 평작으로 생각됩니다.

2020/03/04

가상가족놀이 - 미야베 미유키 / 김선영 : 별점 2점

가상가족놀이 - 4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선영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코로다 료스케라는 이름의 남자가 공사 현장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수사 끝에 사흘 전에 일어난 21세 여대생 이마이 나오코 살인 사건과의 연관성을 찾아냈고, 언뜻 평범한 직장인이자 가장인 것처럼 보였던 도코로다 료스케가 인터넷상에서 '아버지'라는 닉네임으로 몇몇 사람들과 함께 '가상가족놀이'를 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서로 얼굴도 실명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마치 가족처럼 아버지, 어머니, 딸, 아들로 연극을 해왔던 것이다. 게다가 딸의 닉네임인 '가즈미'는 도코로다의 친딸 이름이기도 했다.

진짜 가족을 내팽개친 채 인터넷상의 가상가족에게만 몰두한 피해자. 경찰은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전대미문의 계획을 세운다. 이윽고 진짜 가족이 매직미러 너머로 취조실을 지켜보는 가운데, 피해자와 함께 인터넷상에서 가족놀이를 했던 사람들이 차례로 불려오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미야베 미유키의 범죄 수사물입니다. 초반부에 살인 사건에 대한 설명이 잠시 등장한 뒤에는 취조실에서 진행되는 3 명의 가짜 가족에 대한 심문, 그리고 이를 매직 미러 뒤에서 지켜보는 피해자의 딸 가즈미와 그녀를 보호하는 경찰의 시점을 오가며 진행됩니다. 제한된 공간에서 제한된 인물만 등장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연극적이지요. 실제로 심문은 '연극' 이기도 하고요.

비교적 짤막한 길이에, 이야기도 재미있어서 쉽게 읽을 수 있다는건 장점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가짜 가족을 만들어 서로가 각자의 역할을 연기했다는 설정도 흥미롭고요. 가족 해체가 진행 중인 현재 시점에 통용될만한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미야베 미유키 특유의 은근하고 깊은 심리 묘사들도 여전히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문제는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은 별 재미가 없다는 점입니다. 가짜 가족을 데려다가 진행하는 심문부터가 아무리 봐도 진범을 밝히려는 목적은 없어 보인 탓입니다. 심문 과정의 이야기는 모두 과거, 가짜 가족 놀이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살인 사건은 언급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심문의 목적은 뭘까요? 서로 너가 죽였지! 너가 범인이야! 라고 싸우다가 누군가 자멸하여 자백할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가즈미가 가짜 증언에다가 범인과 가짜 가족들에 대한 지나친 복수심과 적대감을 드러내고, 심문이 진행되는 와중에 계속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등 수상쩍은 행동을 거듭하기 때문에 가즈미가 범인일거라는 추리는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심문은 가즈미가 동요하게 만들어 자백하게 하려는 목적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심문 자체가 연극이었다는 것 까지는 상상하기 힘든 부분이었지만요. 

그러나 이렇게 거창한 연극을 벌여가면서 가즈미의 범행을 드러내려 하는데, 그 방법이 고작해야 전화 통화를 엿듣는 정도라는건 어설픕니다. 또 경찰이 연극을 벌여가며 가즈미를 함정에 빠트리는게 영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사건 수사가 벽에 부딪혔다 하더라도, 이런 노골적인 함정 수사는 위법 아닌가요? 아울러 범행 때 사용된 파카라는 유력한 증거가 나온 이상, 어차피 가즈미의 애인 이시구로 다쓰야는 체포할 수 있었을테고, 그렇다면 범인을 잡는건 시간 문제였을텐데 말이죠. 실제 사건 해결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헛수고였어요. 연극에는 가즈미의 분노와 복수심을 달래기 위한 목적도 있어 보이지만, 경찰이 두 명이나 죽인 살인범을 특별히 배려해서 연극을 벌인다는건 말도 안되겠죠. 경찰이 아니라 또다른 피해자 이마이 나오코 가족이 연극을 벌였다던가 하는 식이었다면 차라리 더 나았을겁니다. (가면 산장 살인 사건?)

가즈미가 분노와 복수심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만든 동기도 이해가 되지 않는건 마찬가지에요. 아버지가 진짜 가족을 내버려두고 외부에서 가짜 가족, 심지어 딸 이름이 똑같은 가족을 만들어 놀았다는걸 알면 분노할 수는 있을거에요. 그러나 이게 살인으로 이어지게 될까요? 그것도 그 사실을 알고 난 직후가 아니라, 아버지의 전 젊은 연인이었던 이마이 나오코를 가짜 가족 가즈미로 착각해 살해한 다음에? 연기이건 아니건, 친아버지가 살인에 대해 어떻게든 도와주려 하는데 거기서 더 큰 살의가 생겼다는 뜻인데 이건 납득이 되지 않네요. 아무리 아버지 료스케가 실수를 많이 했다 해도, 이런 진심까지도 연기로 치부되어 살해된다는건 지나친 비약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불만과 단점을 잔뜩 썼는데, 이는 책 뒤 소개글에 낚인 탓도 큽니다. 책 뒤에서 두 번의 반전이 있다고 소개되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요. 일단 가즈미가 진범이라는 건 앞서 말씀드렸듯 반전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그녀에 대한 묘사가 영 수상쩍기 때문에요.
두 번째 반전인 세 명의 가짜 가족이 경찰의 대역이라는건 앞서 말씀드렸듯 예상하지 못한건 맞습니다. 이를 위한 복선도 초반부에 다케가미가 대역의 대사 운운하는 장면을 통해 제공해주고요. 그러나 이 사실이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는건 전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이런 연극을 할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요.
개인적으로는, 다쓰야의 파카에 엄청난 피가 튄 걸로 봐서 료스케 살인의 실행범은 다쓰야가 아닐까 싶기는 한데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즉, 반전물도 아니고, 그나마 있는 반전도 대단하지 않으므로 반전물을 기대한 저 같은 독자는 실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애초에 수사를 위해서는 진행할 이유가 없는 연극이 소재인 탓에 여러모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쉽게 읽을 수는 있지만 그 외의 장점은 딱히 없습니다.

2008/07/22

제 3의 시효 - 요코야마 히데오 / 김성기 : 별점 3점

제3의 시효 - 6점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김성기 옮김/노블마인

요코야마 히데오의 연작 단편집으로 만화 "강력1반"의 원작이기도 합니다. 작품은 F현 경찰청 강력반의 이야기로 총 6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1편은 1반, 2편은 2반, 3편은 3반, 4편은 3반 모두의 이야기이며 5편은 1반의 신참형사, 마지막 6편은 1반과 3반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반의 이야기가 좀 많긴 한데 나름 균형은 잘 맞추고 있는 편입니다.

전부 3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는 조직에서 각 반마다 지나칠 정도로 치열한 경쟁의식을 품고 있다는 설정도 특이하지만 각 반마다 특색있는 반장들이 그려지는데 이 반장들 캐릭터가 굉장히 잘 살아 있습니다. 1반의 절대 웃지 않는 "파란 귀신" 구치키와 2반의 전 공안 출신의 엘리트이자 감정없는 냉혈한인 구스미, 3반의 절대 육감의 소유자인 무라세라는 캐릭터들이 각각의 별명과 설정에 잘 어울리는 수사방법, 즉 구치키의 끈질기고 합리적으로 물고 늘어지는 정공법 스타일과 구스미의 용의자를 함정에 빠트리는 지능형 스타일, 그리고 구스미의 육감을 이용하여 범인을 그려내는 수사방법들이 작품에 잘 드러나고 있거든요.

경찰들이 주인공인 경찰 소설이기에 본격 추리의 맛을 느끼기는 좀 어렵지만 대부분의 작품에서 상당한 수준의 트릭이나 두뇌게임이 등장해서 추리 애호가로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던 것은 덤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을 준다면 3점은 충분한 작품으로 보이네요. 아울러 개인적인 베스트를 꼽자면 제일 마지막 작품인 "흑백의 반전"을 꼽겠습니다. 다른 작품들도 좋지만 만화로 이미 접한 작품은 신선함이 조금 떨어지긴 했으니까요.
만화화 된 것은 1편에서 4편까지이며 나머지 2편은 처음 접한 작품인데 원작을 읽고나니 만화쪽도 비록 복사본을 많이 사용해서 쉽게 만든 작품이기는 하지만 캐릭터도 잘 구현하고 스토리도 매끄럽게끔 잘 극화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화도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1. 침묵의 알리바이
구스미의 1반이 맡은 사건은 현금차량 탈취 살인 강도 사건으로 용의자 유모토를 체포하는데 성공하나 유모토는 법정에서 범행을 전면 부인한다. 알리바이를 제시함에 따라 조사를 맡았던 시마즈의 미숙함과 더불어 찾아온 위기에 1반 반장 "파란 귀신" 구치키가 직접 나서게 된다.
추리물로 보기에는 단서가 부족하고 법정물로 보기에도 애매하지만 구치키의 캐릭터와 함께 몇가지 사소한 단서에서 풀어내는 진상이 인상적인 단편입니다. 조금 더 길게 가져가서 정통 수사물로 만드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은 생각은 들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2. 제 3의 시효
부녀자 강간 후 남편 살해사건을 저지르고 도망중인 용의자 다케우치의 공소시효를 앞두고 2반은 다케우치의 범행 피해자의 집으로 출동한다. 다케우치가 1주일 간 대만으로 도피했던 것으로 공소시효가 연장된 것을 모를 것이라 여기고 과거의 인연으로 다케우치가 연락할 것을 기다린 것.
냉혈한 구스미와 1반 소속 형사로 2반에 지원나온 모리 형사가 주축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공소시효 연장에 따른 긴장감도 넘치지만 구스미의 치밀한 계략에 따른 "제 3의 시효"와 진범에 대한 추리가 아주 좋았습니다. 단서도 비교적 공정한 편이라 추리 애호가로서 즐겁게 읽은 작품입니다.

3. 죄수의 딜레마
형사과장 다하타는 자신의 휘하 3반 소속 반장들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서로의 경쟁 때문에 고민이 많다. 마침 진행되는 사건은 3건. 1반의 주부 살인사건과 2반의 조리사 살인사건, 3반의 증권맨 살인사건.
3건의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을 형사과장 시점에서 그린 이색작입니다. 2반의 사건은 제목의 "죄수의 딜레마"를 끄집어 내기 위한 장치일 뿐이지만 구스미의 심리 조작이 빛났고 1반, 3반의 사건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사건이라 보다 흥미진진 했습니다. 나름 형사들의 인정이나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라 훈훈함이 남다르기도 했고요. 추리적으로도 눈여겨 볼 부분이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4. 밀실의 탈출구
무라세 반장이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3반의 히가시데가 반장 대리를 맡는다. 마침 백골로 발견된 여성 사체 사건의 용의자를 알아낸 히가시데는 용의자의 맨션을 덮치지만 용의자는 깜쪽같이 사라져버리고, 이 사건을 위한 대책회의가 열리는데..
3반이 주역이지만 주역은 무라세 반장이라기 보다는 반장 대리 히가시데 입니다. 반장 대리의 역할을 맡았지만 동기인 이시가미와의 경쟁으로 날카로운 심리 상태와 용의자가 사라진 것에 대한 의심 등 다양한 심리를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어서 읽는 재미가 느껴지더군요. 흡사 본격물의 느낌을 주는 제목만큼의 대단한 트릭이 나오지는 않지만 비교적 합리적인 트릭이기도 하고, 정보의 제공이 공정하며 추리의 과정도 설득력이 높다는 점 역시 만족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5. 페르소나의 미소
청산가리를 이용한 노숙자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과거의 트라우마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신참 형사 야시로가 수사를 맡게된다.
1반의 신참 형사 야시로가 주인공인 단편입니다. 야시로의 과거의 트라우마 (어렸을 때 유괴사건 범행에 연루된 것) 가 자세하게 설명되는 등 추리와 수사보다는 한 개인에 대한 소품같은 느낌을 많이 가져다 준 작품입니다. 등장인물도 굉장히 적어서 더욱 그런 느낌을 받은 것 같기도 하네요. 과거의 사건들과 연결되는 트릭은 괜찮았지만 이 단편집에서는 제일 처지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6. 흑백의 반전
일가족 세 명이 칼에 찔려 살해된 사건이 발생한다. 다하타 과장은 3반이 맡은 이 사건에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며 1반을 보조로 투입시키지만 두 반은 경쟁의식으로 과열되어 과장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수사가 전개된다.
2반이 등장하지 않고 1반과 3반이 경쟁하는 작품입니다. 두 반의 반장 캐릭터와 유사한 각각의 수사방법이 잘 묘사되어 있기도 하지만 트릭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모처럼 "본격" 스러운 작품이라 굉장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결국 과장이 의도한 대로 시너지(?) 효과를 불러 일으키며 사건이 종료되는 것 역시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결말이기도 했고요. 사건의 동기와 범인, 트릭, 수사과정 모두 합리적이고 잘 짜여진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습니다.

2022/07/30

알렉스 - 피에르 르메트르 / 서준환 : 별점 2.5점

알렉스 - 6점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다산책방

<<아래 리뷰에는 범행 동기, 범인 및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알렉스는 트라리외에게 납치되어 '새장'이라 불리우는 작은 상자에 갇혀 죽을 운명에 처했다. 알렉스에게 살해당한 아들의 복수를 위해서 일을 벌였던 트라리외는 경찰에게 체포되기 직전 자살했지만, 알렉스는 경찰이 구조하기 전에 자력으로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카미유 반장의 수사 결과 알렉스는 산성 용액으로 남자들을 죽이고 다녔던 연쇄 살인범으로 밝혀졌고, 그녀는 경찰의 추적 아래에서도 살인을 거듭해 나가는데....


프랑스 작가 피에르 르메테르의 500페이지가 훌쩍 넘어가는 대장편 범죄 스릴러. 형사반장 카미유 베르호벤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입니다. 얼마전 접했던 모 리스트에서 '신감각 납치 미스터리' 라던가 '서점 대상, 고노미스 대상 등 모든 상을 휩쓴 사상 최초 7관왕 작품!'이라는 등 엄청난 수식어로 소개하고 있길래 궁금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3부 구성입니다. 1부에서는 알렉스가 괴한에게 납치된 뒤, 외딴 건물 속 '새장'이라 불리는 상자에 갇힌 채 죽어가는 과정과 납치 사건을 쫓는 카미유 반장 팀의 수사가 교차됩니다. 2부에서는 알렉스가 진한 산성 용액으로 여러 명을 살해하는 범죄 행각이 그려지고요. 알렉스가 자살한 뒤의 이야기인 3부에서 알렉스가 저지른 범행이 알고보니 그녀의 오빠 바쇠르가 알렉스에게 오래 전부터 저질러왔던 성범죄 탓이었고, 알렉스는 자살한게 아니라 오빠에게 살해당했다는게 밝혀지며 끝납니다.

1부에서 볼거리는 상자에 갇힌 알렉스가 좁아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몰려든 쥐떼와 극한의 승부를 펼쳐가며 탈출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입니다. '신감각 납치 미스터리'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로 정말 실감나서, 읽는 독자마저도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듭니다.
2부에서의 알렉스가 저지르는 연쇄 살인 사건 묘사도 꽤 그럴싸했습니다. 특히 알렉스가 자신의 정체를 숨겨가며 대담한 범행을 저지르는 과정의 설득력이 높습니다. 남자들 (그리고 여자 한 명)을 유혹해서 함정에 빠트리는건 그녀의 미모 묘사로 보면 손쉬웠겠지요. 당당히 얼굴을 드러내면서 범행을 반복했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이 그녀를 쉽게 체포하지 못하는 이유도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지문이 등록되어 있지 않으니 '범인이 알렉스다!'라는 것만 드러나지 않으면 되는데, 이건 현장에서 체포되거나 명확한 단서가 있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니까요. 여기에 더해 작품에서처럼 현금 결재를 기본으로 소지품을 최소화하여 잦은 이동과 은신을 반복한다면 더더욱 어려웠을테고요.
3부는 일종의 대단원으로, 알렉스 과거 일기를 토대로 그녀가 11살 때 부터 오빠 바쇠르에게 성폭행을 당해왔으며, 심지어 오빠 때문에 성매매까지 하다가 산성 용액으로 하복부에 엄청난 상해를 입었다는 과거와 그 탓에 살인을 저질러 왔다는게 밝혀지고, 마지막에는 그녀를 오빠가 죽였다는게 드러납니다. 서로 별 관계가 없어 보였던 2부에서의 피해자들이 사실은 오빠 피에르의 지인들이었고, 그녀를 아프게했던 가해자라는게 함께 밝혀지고요. 1, 2부를 종합적으로 정리해서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는 점에서는 좋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베르호벤 반장의 수사추리도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납치당했던 알렉스가 어디로 어떻게 귀가했는지?에 대한 추리였어요. 몰골과 상태가 말이 아니었을테니 걷거나 택시나 버스는 눈에 뜨였을텐데 어디로 어떻게 이동했나? 라는 수수께끼인데 베르호벤 반장은 불법 체류자들이 모는 불법 택시를 이용했을 거라고 추리한 뒤, 이를 토대로 알렉스의 거처를 알아냅니다.
극도로 단서가 제한된 상태에서 납치된 여성을 찾기 위해 현장 근처에 차량이 대기할 만한 장소를 우선 파악한 뒤, CCTV로 수상한 트럭에 대한 정보를 얻는 등 다른 수사들 모두 합리적이고요.

그러나 잘 짜여진 구성에도 불구하고 지루한 편입니다. 베르호벤 반장에 대한 불필요한 심리 묘사와 서술이 많은 탓이 가장 큽니다. 전작에서 사망했던 아내 이렌을 잊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묘사 등이 그러합니다. 이런 부분들은 역시나 프랑스 소설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추리적으로도 베르호벤 반장이 펼치는 약간의 활약을 제외하고는 건질게 전무합니다. 진상이 드러나는 3부는 발견된 알렉스의 일기를 토대로 진행되고, 독자는 전혀 모르는 오빠 바쇠르와의 과거가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상당한 지능범으로 카미유 반장 팀과 심문 중 배틀을 벌일 정도로 뻔뻔했던 바쇠르가 현장에 자기 지문과 모발을 남겼다는 어처구니 없는 결말도 추리물로서의 완성도를 저해합니다. 굉장히 기발하게 범행이 드러날 것으로 생각했는데, 단순한 현장 감식만으로 드러난다는건 실망스럽더군요. 지능범답지도 않았고요. 바쇠르 캐릭터를 3부 내내 잘 쌓아올려 갔는데, 마지막 한, 두 페이지로 그 모든게 무너져버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애초에 현장 감식에서 그의 지문과 모발이 발견되었다면, 3부에서 장황하게 펼쳐졌던 바쇠르와의 대결(?)은 존재 의미를 상실한다는 문제도 큽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2부에서 알렉스가 죽음에 이르는 장면 묘사였습니다. 3부에서 알렉스는 자살한게 아니라 오빠 바쇠르에게 살해당했다고 설명됩니다. 그러나 알렉스가 머리를 세면대에 짓찧고, 술과 함께 약을 섭취하는 마지막 장면은 분명 그녀의 의지였던걸로 묘사됩니다. 지문이 지워진 뒤에 덧 씌워진 술병 지문 등을 보면, 오빠의 범행이 맞는 듯 한데, 그렇다면 이렇게 알렉스가 자살하는 듯한 심리 묘사는 거짓이에요. 이런 불공정한 정보를 중요 순간에 드러내고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는건 좋은 추리물이라고 보기 어렵게 만듭니다.
아니면 바쇠르의 주장대로 그녀가 자살하면서 오빠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다는게 맞다면, 오빠의 모발같은걸 어디서 어떻게 가져와서 흘려두었는지 등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나 많고요.

범행 동기도 석연치 않았습니다. 알렉스를 힘들게 했던 원흉은 오빠 바쇠르,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도 외면했던 어머니입니다. 성매매를 했던 다른 남자들은 모두 가해자이기는 해도 오빠보다 죄가 많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정작 오빠는 죽이지 않고, 오히려 오빠에게 살해당한다는건 이상했어요. 제대로 된 이야기였다면 오빠에게서 과거의 가해자들 주소를 입수한 뒤에는, 오빠를 죽였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알렉스의 범행은 앞서 설명했듯 설득력이 높지만, 그녀가 항상 얼굴을 드러내놓고 다녔다는건 분명 문제입니다. 경찰은 그녀의 사진도 이미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작에 공개 수사로 전환했더라면 체포는 몰라도 마지막 한, 두 건의 범행은 막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요. 이렇듯 경찰의 수사도 여러모로 딱히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키가 145cm밖에 안되는, 유명 화가의 아들인 카미유 베르호벤 반장과 거구에 고도 비만인 상관 르 구엔 상관, 카미유의 부하로 명품을 휘감고 다니는 부자 루이와 구두쇠 아르망처럼 서로 대비되는 여러 캐릭터들도 비현실적이고 작위적이라서 별로였어요. 특히 베르호벤 반장에게 이런 핸디캡과 캐릭터 적인 특성을 부여한 이유를 모르겠네요. 키가 작은게 수사에 불리한건 하나도 없으니, 이는 단지 '독특함'만을 위해 부여한 특징 같은데 오히려 능력보다는 카미유 베르호벤 반장의 불안한 심리만 부각시켰을 뿐입니다.
피해자를 둔기로 타격한 뒤, 아황산을 입에 주입해 끝장내는 알렉스의 잔혹한 범죄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3부를 통해 이 범죄가 그녀가 당했던 고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게 드러나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지나치게 자극적인 묘사로 분량을 채울 필요는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알렉스가 어린 시절 아황산으로 입은 상처 역시 과했던 설정이라 생각됩니다. 성폭행만으로도 범행 동기로는 차고 넘쳤다고 보이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작가의 전작도 그닥이었기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는데, 몇 개의 반전이 이어지고, 감금과 범행 과정에 대한 설득력이 높은 등 좋은 평가를 받을만한 부분은 제법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만만치 않은건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알렉스만 주인공으로 해서, 그리고 그녀가 정확하게 오빠를 덫에 걸리게 만들었다는 결말로 마무리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억지로 카미유 베르호벤 시리즈로 만든게 여러가지 단점들의 가장 큰 원인이니까요. 한 번 읽어볼 만은 하지만 해외 미스터리 랭킹 베스트 10에 당당히 꼽힐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18/09/01

경성 새점 탐정 - 김재성 : 별점 2점

경성 새점 탐정 - 4점
김재성 지음, 이영림 그림/푸른책들

기억을 잃어버린 소녀가 청계천에서 새점을 치는 할머니를 만나 함께 살게 되며 새점 치는 법을 배운 후, 새점을 빙자한 추리 (?) 쇼를 통해 여러가지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는 이야기의 아동용 추리 소설입니다. 경성을 무대로 한 독특한 추리물로 보여서 읽어보게 되었네요.

추리적으로는 분량에 비하면 제법 풍성합니다. 작품 속에서 새점 탐정이 해결하는 사건은 모두 네 건 - 1대 새점 탐정인 할머니가 해결하는 주먹코 할아버지 가보 도난 사건, 주인공 소녀 강영재가 처음으로 전면에 나서는 미쓰비시 백화점 사장 아들 납치 사건, 할머니가 죽는 계기가 되는 박준성 살인사건, 그리고 마지막 떠나기 전에 해결하는 일상계스러운 청계천 아이들 동전 도난 사건 - 이나 되거든요.

무엇보다도 탐정 설정 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새점은 새가 무작위로 쪽지를 물어오는게 아니라 점쟁이가 점을 치려는 사람들의 표정, 눈빛, 옷차림, 걸음걸이 등을 관찰하여 새에게 해답에 맞는 쪽지를 뽑게 하는 것이라는 점쟁이 탐정 설정이 아주 좋은 덕분입니다. 지역, 신문 기사 등으로 주요 사건을 파악하고 온갖 지식에 능통하며 이를 통해 결과를 도출하는 추리력도 갖추고 있다는 배경 설명으로 충분한 설득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점쟁이 탐정'이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아주 괜찮아요. 특히 우리나라에는 딱입니다. 탐정업이 공식적으로는 존재한 적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 우리나라에 어떤 '의뢰인'이 찾아와서 돈을 주면서 특정 사건에 대해 답을 요구하는 직업으로는 이만한 게 없잖아요? 실제로 "극비수사" 라는 영화의 실재 사건에서도 점쟁이에게 아이의 행방을 물어보았다고 하니 탐정역으로 충분히 등장할만한 직업이라 생각됩니다. 앞으로 잘 써먹고 싶은 설정이에요.

새점이라는 지금은 사라진 일종의 전통 풍습, 청계천과 수포교, 다방과 설렁탕집 등 당대 거리를 이야기에 적절히 녹여낸 점도 볼거리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작품의 가치를 끌어올리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우선 추리적으로 수준이 너무 낮습니다. 정말 몇 안되는 단서로 결론을 도출하는데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탓입니다. 마지막 청계천 아이들 동전 도난 사건은 추리가 아니라 그냥 함정 수사에 불과하고요. 
분량에 비하면 사건이 너무 많아서 잘 정리되지도 못했고, 무리하게 독립군과 주인공 소녀 강영재의 이야기를 엮은 것도 문제에요. 아무리 독립군이 정의의 조직이라고 해도 어린아이를 납치한 건 용서하기 어려운 범죄이며, 김필두가 강영재를 찾아와 칼을 책상에 꽂아가며 협박하는 묘사도 잘못한 건 마찬가지니까요. 어린 소녀에게 이게 뭐하는 짓인지 잘 모르겠네요. 차라리 일본 순사 기무라가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금전적인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는 더 좋은 인물로 보일 정도입니다.
나중에 납치범들과 김필두는 독립군이며, 할머니 죽음은 김필두가 아니라 기무라가 관련되어 있다는 식의 생뚱맞은 결말도 영 납득이 가지 않았어요. 기무라가 할머니를 죽일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할머니가 영재의 잃어버린 기억에 대해 이미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알려주지 않은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되찾지 못하면 잃어버린 나라도 찾을 수 없다"는 이유인데, 말도 안됩니다. 잘못하면 청계천에서 몹쓸 짓을 당하고 죽어버렸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신선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이야기 전개면에서는 아쉬움이 많아서 감점합니다. 점쟁이 탐정, 새점 탐정이라는 설정만 가져와서 성인 취향의 정통 추리물을 썼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2017/03/10

북로우의 도둑들 - 트래비스 맥데이드 / 노상미 : 별점 4점

북로우의 도둑들 - 8점 트래비스 맥데이드 지음, 노상미 옮김/책세상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대공황 직후 약 1930년대까지)까지 기승을 부렸던 책 전문 절도범들, 그리고 그들을 잡아 넣기 위한 도서관 특별 수사관들의 활약을 그린 논픽션입니다. 제목의 북로우는 맨해튼 애스터 플레이스에서 유니언 스퀘어까지 죽 이어진 4번가의 여섯 블록을 의미합니다. 책들이 늘어선 거리, Book Row라는 말에 걸맞게 책방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고 하네요. 도둑들은 북로우 일부 서적상들 및 그들이 지휘하는 도둑들(북 스카우트)을 의미하고요.

북로우에 터전을 잡고 활동하던 악덕 서적상 골드가 뉴욕 공공도서관 소장품인 에드거 앨런 포의 초판본 "알 아라프, 티무르" 초판본을 손에 넣은 뒤(정확하게는 골드 밑에서 북 스카우트로 일한 듀프리가 뉴욕 공공도서관에서 알 아라프, 티무르와 주홍 글씨 초판본, 백경 초판본을 훔친 뒤), 그를 잡기 위해 활약했던 공공도서관 특별 수사관 버그퀴스트의 노력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외 다른 서적 절도 사건도 다수 언급되며, 희귀본 시장이 어떻게 커져갔는지와 그에 따라 도서관들이 어떻게 책 절도범들에게 노략질 대상이 되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배경 설명도 함께 합니다.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논픽션다운 디테일입니다. 특히 당대 책 절도에 대한 설명은 타의추종을 불허합니다. 책 절도는 대단한 기술이나 전략이 필요치 않다, 도서관과 사서들의 부주의 탓에 절도가 쉬웠다, 필요한 것이라곤 훔친 책을 집어 넣을 수 있는 커다란 코트와 가끔 가다 쫓길 경우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다리 정도였다는, 시대를 연상케하는 언급부터 시작하여 책을 훔친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 눈에 띄는 마크나 도장 제거 등 - 와 북 스카우트라고 불리운 도서관 책 절도범들과 책서점 주인이 손을 잡고 사업을 키워가는 과정이 상세하게 설명됩니다.
참고로, 이렇게 도서관 책 절도범이 기승을 부린 이유는 책 절도범을 잡더라도 치안판사들이 고소를 취하하는 등 심각하게 처벌하지 않은 탓이 크다고 하네요. 리스크는 적고 수익은 높아지니 많은 사람들이 뛰어든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네 사고 방식인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말과 서울대 출신 책도둑, 공시생 책도둑 등이 선처를 받고 훈방되었다는 뉴스가 떠오르네요.

도둑들을 잡기 위해 뉴욕 공공도서관 설립 된 후 특별 조사관으로 활동한 길야드, 버그퀴스트의 활약의 디테일도 못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것을 꼽아보면, 도서를 대출한 후 반납하지 않고 대출자가 사라진 사건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길야드는 대출자가 살았던 우체국장에게 우편물을 전송하는 새 주소를 알려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개인정보 유출 방지 목적?), 옛 주소로 먹지 한 장을 숨긴 등기 서류를 보냈습니다. 등기 서류가 우체국에 도착하면 주소록이 고쳐질 것이라 생각하고, 봉투에 이사 간 곳의 새 주소가 쓰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발송 되기 전 회수한다는 전략이었지요.
버그퀴스트는 뭐니뭐니해도 핵심 이야기인 골드 체포 작전의 활약이 가장 눈부십니다. 수사 권한이 없었기에 함정 수사를 펼치는 등 노력도 눈물겹지만, 끝까지 노력해서 결국 골드에게 실형을 선고받게 만드는 결말이 아주 통쾌한 덕분입니다. 그것도 싱싱 교도소에 수감시켰던만큼, 기쁨이 더 컸을 것 같네요. 이 과정에서(인간의 갱생 가능성에 대해 낙관적 태도를 갖추고 있는) 버그퀴스트의 진심어린 설득에 넘어가 책 절도 박멸에 동참하는 구 절도범 마호니, 윔스와의 인연은 시대를 느끼게 해 주고요. "자네도 볼장 다 봤잖아. 우리 쪽으로 오지그래?" 같은 말이 자연스럽게 오가는, 의리물이 떠오르는 낭만적인 이야기였거든요. 그런 시대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참고로, 후일담은 조금 씁쓸했습니다. 뻔뻔한 절도범 헤럴드, 절도 조직의 우두머리였던 골드와 스미스 등 악덕 서적상들 모두 범죄가 밝혀진 이후 짤막한 재판과 수형 생활을 거치고나서 다시 떵떵거리면서 살았다니까요. 그나마 골드 사건이 마무리되고 희귀본과 값진 책들은 도난 당하지 않도록 따로 분리해 이용을 엄격히 제한하게 되었으며, 책을 수집하던 사람들도 죽으면서 소장품과 희귀본을 도서관과 대학에 기증하는 사람이 많아져 시장 자체가 사라진 덕에 현재는 이런 류의 절도가 거의 없어졌다고 하니 다행일 뿐입니다. 최근은 도서관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도서관에서 책을 훔치는 것도 많이 어려워졌지요.

그 외에도 다양한 희귀본 관련 재미있는 이야기도 가득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포의 작품 관련 이야기들이 재미있었습니다. 뭉텅이로 팔린 책 더미에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이 처음으로 발표된, 표지가 떨어져 나가고 없는 그레이엄스 매거진이 포함되어 있었다던가, 가난하게 살던 노파가 근방 서적상 존 루미스 씨에게 옛날 책을 팔려다가 포의 첫 시집 "알 아라프"를 팔게 되었다는 등입니다.

이렇게 햇수로는 40 ~ 50년에 걸친, 방대하고 자세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등장 인물과 사건도 많지만 시대 순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내용도 재미있어서 쉽게 읽히는 멋진 책입니다. 잘 알지 못했던 20세기 초반 책 절도에 대한 지식도 상세하게 알 수 있고요. 
개인적으로는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희귀본을 탐색하던 추억이 떠올라 더 공감이 갔습니다. 그때 구했던 책들 중 다수 - "점성술 살인사건", "불야성""석양에 빛나는 감""얼굴에 흩날리는 비""내가 죽인 소녀" 등등등 - 거진 다 복간되어 이제는 의미가 없습니다만ㅡ 괜히 그 시절이 떠오르네요. 아 그립습니다.

다만 수사관들이 도둑들에 비하면 열세라 밀고 땡기는 맛이 부족하다는 점은 조금 아쉽습니다. 도둑들이 잘 먹고 잘 살았다는 후일담 역시 씁쓸한데 이 모두 실화에 기초한 만큼 어쩔 수 없는 부분겠지요. 논픽션을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2010/03/16

마노스케 사건 해결집 - 하타게나카 메구미 / 김소연 : 별점 3점

마노스케 사건 해결집 - 6점
하타케나카 메구미 지음, 김소연 옮김/가야북스

한시치 체포록에 이어 연이어 읽게 된 에도물. 마을의 나누시 (일종의 동네 이장?) 후계자인 주인공 마노스케가 마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들을 중재하는 이야기가 실린 단편 옴니버스물입니다. 제목은 "사건해결집"이라고 되어 있고 홍보도 일상 미스터리라고 하고 있는데 반해 그다지 대단한 추리물은 아닙니다. 하긴 17~18세기의 에도에서 봉행소에서 관여할 정도가 아닌, 소소한 상인급 인물들의 재정이 주였던 나누시에게 대단한 사건이 있을리가 없었겠지만요. 추리물보다는 일상 속 유쾌하면서도 소소한 드라마 정도로 보는게 맞습니다.

그래도 일단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일상계 작품이라는 특이함이 좋았고, 워낙에 작품 자체가 유쾌하면서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이야기들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사건을 의뢰하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주요 이야기이기에 추리적인 부분도 약간이나마 포함되어 있으며, 주인공 마노스케와 그의 친구들같은 독특한 캐릭터가 그야말로 작품에서 뛰어논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톡톡튀는 맛도 좋습니다. 나누시의 후계자이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청년이 되면서 정줄을 놓아버렸다는 평가를 받는 허술해보이고 장난기넘치지만 의외로 총명한 청년 마노스케가 아주 마음에 들기도 했고요.
에도물다운 치밀한 묘사 역시 볼거리입니다. 에도의 유곽 요시와라와 기녀들에 대한 묘사, 당대 사람들의 생활사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요시와라같은 경우 생각보다는 꽤 자유분방하고 일반 백성들과 연계된 오픈된 공간으로 묘사되는 등 참고할만한 (?) 내용이 많더라고요. 차남은 완전히 찬밥신세였다던가, 가게를 이어나가는 우선순위 같은 당대의 시대상을 알게되는 현학적 재미도 충분하고 말이죠.

딱 한가지 아쉬운 점은 결국 마노스케와 세이주로도 철이 들고 성장한다... 는 성장기 같은 느낌도 전해주는 탓에 만약 시리즈가 이어진다 하더라도 이전만큼 유쾌한 모습은 보여주지 못할 것 같다는 것입니다. 마노스케의 유쾌한 매력을 계속 즐기고 싶은데 후속작 소식도 없고 하니 작가의 다른 작품이나 찾아봐야겠네요.

개인적인 별점은 3점으로 추리적 요소가 부족해서 점수를 좀 짜게주기는 했는데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나오키상 후보에 오를 정도의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어쨌건 역사물을 좋아하시면서도 유쾌하고 가벼운 소품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네요.

덧붙이자면, 저자는 원래 만화가 출신이라고도 하는데 작가 정보에 만화쪽 이력은 나와있지 않군요. 작품에서의 디테일한 묘사와 유쾌한 분위기 때문에 만화도 한번 찾아보고 싶었는데 약간 아쉽네요. 설마 일본에서도 만화쪽을 소설에 비해 차별하는 풍토가 있는건 아니겠죠? 혹 작가의 만화 작품 아시는 분 계시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오노부의 진실>
시집안간 마을 처녀가 임신했는데 아버지를 찾아달라는 그 가족의 청을 마노스케가 묘한 인연으로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로 마노스케가 사건에 발을 담그게 되는 과정부터 시작해서 결말까지 일사천리로 달려주는 유쾌한 작품입니다. 추리적으로는 대단한 것은 없지만 "함정수사"의 초창기같은 발상이 에도시대 분위기와 맞물려 무릎을 치게 만들더군요.

<감 반개>
자수성가했지만 상처한 뒤 홀로 살아가는 전당포 주인의 감나무에서 감을 훔쳐 따 먹은 인연으로 마노스케와 친구들이 전당포 주인의 옛 사랑 이야기와 엮이게 되는 내용인데 그야말로 소품이라 별로 언급할건 없네요. 일상 속 드라마 그 자체라 생각되긴 합니다.

<만년청의 주인은?>
고가라고는 하지만 결국은 화분일 뿐인 "만년청"이라는 화분의 소유권 다툼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재미 포인트는 세가지인데 첫번째는 에도시대 유행했다는 "만년청"이라는 화분에 대한 현학적 재미, 두번째로는 갑자기 등장한 마노스케의 약혼자(?)와 그에 따른 왁자지껄하는 분위기, 세번째는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나름 진지한 추리적인 탐구가 벌어지는 것이죠. 약혼자를 자칭한 오스즈씨의 당찬 모습과 설득력있는 추리가 마음에 들었던 작품입니다.

<누구의 아이인가>
다이묘 휘하 무사가 자신의 후계자인 손자를 찾는 이야기로 한장의 편지를 통해 진지한(?) 수사를 펼쳐 결과를 도출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중간에 삽입된 유령 이야기를 통한 복선과 결말도 마음에 들었고요. 그 외에도 마노스케가 갑자기 정줄을 놓아버린 이유를 짐작케 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하는 등 여러가지로 즐길거리가 많아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병문안 가는 길>
마노스케가 약혼자 스즈와 인연이 있는 마타시로를 병문안 가는 길에 선물을 사기 위해 들른 가게에서 주운 개(칭)와 불량배들에게서 구해준 아가씨 오신을 둘러싼 소동이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이 단편집 안에서 가장 추리적인 재미가 많은 작품입니다. 정체를 숨기려고 하는 오신이 어느 동네 사람인지를 맞추는 과정이 셜록 홈즈식의 디테일한 관찰에 따른 추리로 펼쳐지는 것도 볼만했고 오카핏키가 찾는 고린이라는 아가씨의 정체를 밝히는 마노스케의 모습 역시 추리적으로 비약이 심하긴 하지만 나름의 설득력은 갖추고 있더군요. 그 외에도 마노스케가 정줄을 놓아버린 이유가 살짝쿵 등장하기도 하는 등 잔재미도 쏠쏠해서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싶네요.

<고타 유괴사건>
마노스케의 친구이자 역시 나누시의 후계자인 세이주로의 동생 고타가 유괴되는 이야기로 에피소드들 중에서 가장 강력범죄가 일어납니다. 마지막 편이기 때문인지 모든 등장인물이 총 출동하며 - 마노스케의 첫사랑 오유와 드센 약혼자 오스즈양까지! - 추리적으로도 재미가 쏠쏠해서 몸값의 에도스러운 전달방법도 기발하고 사건 해결까지의 과정 역시 설득력있게 잘 짜여져 있습니다. 결국 마노스케의 결혼식으로 마무리되는 대단원 역시 깔끔하게 정리되고 있어서 단편집을 잘 마무리하고 있다 생각되네요. (마노스케의 성장으로 대미를 장식하는데, 앞서 이야기했듯이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2008/04/20

레이디 킬러 - 도가와 마사꼬 / 김갑수 : 별점 3점

주말 부부인 컴퓨터 전문기사 혼다 이찌로오는 평일에 도쿄에서 가명으로 여자들을 헌팅하여 시간을 보내는 일상을 보내며, 자신의 헌팅 이야기를 "사냥꾼의 일기"라는 노트에 자세히 기록해 놓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냥한 여성들이 연쇄적으로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혼다는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냥 여성을 찾아갔지만, 그 여성마저 살해된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주요 용의자로 수사선상에 오른 혼다는 여러가지 단서를 통해 정체가 드러나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변호사 하다나까와 신지는 혼다의 변호를 맡아 그의 무죄를 증명해 주기 위해 여러가지 조사에 착수하는데...

원제는 "사냥꾼의 일기"입니다. 도가와 마사코는 국내에 많이 소개된 작가는 아닙니다. 번역된 장편은 아마 이 작품이 유일할거에요. 단편은 몇편 더 있지만, 단편들과 이 작품은 분위기 자체가 많이 다릅니다. 단편은 일종의 괴기 환상 소설같은 작품들이 많이 소개되었고 완성도도 아주 별로거든요. 

그런데 단편들에 비해 이 작품은 제대로 된 추리물의 구조를 잘 따라가고 있어서 무척 의외였습니다. 일단 위에 간략하게 적어놓은 줄거리만 보아도 알 수 있지만 분위기가 이색적입니다. 법정물도 아니고 사회파 수사물도 아니고, 누명을 뒤집어 씌우는 완전범죄물도 아닌 중간 정도에 걸치는 중립성을 잘 유지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각 쟝르의 재미있는 부분만 잘 따다가 만든 느낌이 들 정도에요. 

전개도 나름 독특합니다.  전반부인 "사냥과 사냥감" 편에서는 "사냥꾼의 일기"의 저자(?) 인 혼다 이찌로오의 엽색 행각, 그리고 그가 서서히 함정에 빠지는 이야기를 상세하게 그리며, 후반부인 "증거의 채집" 편에서는 변호사 신지를 중심으로 혼다 이찌로우의 무죄를 밝혀내기 위한 수사 및 추리의 과정이 묘사됩니다. 1963년 작품 치고는 굉장히 신선한 아이디어라 할 수 있겠네요. 어떻게 보면 얼마전 읽었던 "이와 손톱"과 좀 유사한 전개인데, 아예 두가지 이야기를 확 나눠 버린 과감함(?) 은 이 작품이 조금 더 돋보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부족한 부분도 많습니다. 치밀한 완전범죄 공작을 깨트리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불꽃튀는 두뇌대결과 사소한 단서에서 밝혀지는 진상 등이 정교하게 묘사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탓입니다. 변호사 하다나까와 신지가 벌이는 약간의 조사로 중요한 단서들이 연달아 밝혀지고 있어서 경찰 수사의 헛점만 드러날 뿐이에요. 물론 1부에서 혼다가 너무나 명백하게 죄를 뒤집어 쓰는 바람에 경찰이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래도 조사가 어설퍼 보이는 것은 추리물에서는 큰 약점이라 생각됩니다.
마지막 반전 및 진상이 결과적으로는 범인의 "자백"에 의존한다는 것과 동기에 대한 설득력이 약간 떨어져 보이는 것 역시 단점입니다. 아무리 작품이 "헌팅" 에 뒤이은 붕가를 주요 소재로 삼고 있다지만 지나칠 정도로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는 점도 부담스러웠고요. 솔직히 저는 이런 묘사 굉장히, 아주아주 싫어합니다.

그래도 마지막 반전, 범인의 고백과 "사냥꾼의 일기"를 통해 밝혀지는 반전, 사건의 진상은 괜찮습니다. 어설프고 부족해 보이는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괜찮다고 기억하게 만들어 주지요. 그만큼 반전 하나는 아주 좋았습니다. 엄마 친구 아들같은 혼다가 수렁에 빠지는 내용도 디테일하면서도 참 감정이입하기 좋았고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한번 읽어볼 가치는 있습니다.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작가의 대표작인 "거대한 환영"도 꼭 한번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뭐, 취향은 좀 탈 것 같긴 하지만...

PS : 헌팅의 대상자 중에 작가를 희회한 듯한 "도다 마사꼬" 라는 인물이 나오는 것은 특이했습니다. 샹송가수였던 이력을 티내고 싶었나봐요^^

2022/02/25

종장 - 니콜라스 블레이크 / 정병조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탐정 나이젤 스트렌지웨이즈는 출판사 웬함 앤드 제랄딘사로부터 사건 의뢰를 받았다. 누군가 교정쇄를 손 대어 도레스비 장군 회고록의 삭제 필요 문구가 그대로 출간되었고, 그 결과 출판사가 고소당한 사건 때문이었다. 출판사 관계자들 대상으로 탐문 수사를 벌인 결과, 여류작가 밀리센트 마일즈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다. 교정 담당 스티븐 프로더로오가 그녀 소설의 재출간을 반대했던 탓에, 교정쇄에 문제를 일으켜 프로더로오를 제거하려고 했던게 아닐까 의심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그녀는 출판사 안에서, 그것도 프로더로오 바로 옆 사무실을 빌려서 자서전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도 충분했다. 그러나 주말을 앞둔 금요일 밤에 밀리센트 마일즈는 살해당했고, 범인은 그녀가 쓰던 자서전 원고를 수정하고 달아났다. 교정쇄 사건이 살인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걸 알아챈 나이젤은 수사 끝에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는데...

시인으로, 그리고 명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아버지로 유명한 니콜라스 블레이크의 작품입니다. 전설의 삼중당 추리문고에서 발간된 고전이지요. 지금은 절판된지 오래라 구하기도 힘들지만, 읽는 것도 만만치않게 힘들었습니다. 오래전 일본어 버젼을 번역한 듯한 낡은 문체와 장황한 묘사, 그리고 세로 쓰기 등이 지루하고 장황한 내용과 결합된 탓입니다. 

교정쇄에 손을 댄게 누군지 조사하는 초반부는 그야말로 지루함의 극치입니다. 중요한 등장인물만 해도 스티븐 프로더로오, 밀리센트 마일즈와 출판사 공동 경영자 3인 -아아더 제랄딘, 리즈 웬함, 바질 라일 -에 밀리센트 마일즈의 아들 시프리안 그리이드까지 여섯 명이나 되는데, 이들에 대한 설명과 과거, 설정 모두를 대화를 통해서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끝없는 대화가 엉망인 번역으로 자연스럽지 않게 이어지니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게다가 정작 교정쇄를 누가 손 댔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정보는 이 부분에서는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밀리센트 마일즈를 바질 라일이, 스티븐 프로더러오를 리즈 웬함이 흠모하고 있었다는 정도의 인간 관계가 드러날 뿐입니다.

다행히 이 초반부를 극복하고, 밀리센트 마일즈가 살해된 다음부터는 꽤 재미있어집니다. 특히 범인이 범행을 저지르는 장면을 그대로 묘사해서 충격을 배가시키는 부분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범인이 그녀를 살해하고 자서전 원고를 직접 타자를 쳐서 수정하고 달아나는 장면을 일종의 도서 추리 소설처럼 묘사한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이러한 범인의 공작이 모두 경찰에 의해 곧바로 밝혀져 버린다는 전개가 아주 신선했거든요. 독자에게 모두 알려져버린 부분에 분량을 낭비하지 않는건 정말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이를 피해자 지문이 타자기에 잘못 찍혀 있다는 등의 단서로 밝혀내는 추리 과정도 볼 만 했고요.

명탐정 나이젤의 수사와 추리 과정도 흥미롭습니다. 경찰은 밀리센트의 아들 시프리안 그리이드를 유력한 용의자로 생각했습니다. 유산이라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근거도 있었고요. 그러나 나이젤은 남겨진 밀리센트 마일즈의 자서전 원고를 읽고, 또 이어지는 대화 중심의 탐문 수사를 통해 아아더 제랄딘과 스티픈 프로더로오 두 명에게 유력한 동기가 있다는걸 알아냅니다. 아아더 제랄딘은 밀리센트 마일즈를 강간하려다 실패했던 옛 과거에 덜미가 잡혀 있었고, 스티븐 프로더러오는 동생이 밀리센트 마일즈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그녀의 변심으로 불행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동기를 여러가지 단서와 증언을 조합하여 밝혀내는 나이젤의 모습은 명탐정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두 명 중 아아더 제랄딘이 더 유력한 용의자처럼 보이게 함정을 파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전개도 그럴싸했고요. 

또 이를 통해 교정쇄에 손을 댄건 스티븐 프로더로오라는게 밝혀지는 것도 깔끔합니다. 아들 포올이 학살당하게 만든 총독의 무능을 폭로하기 위해서였다는건 누가 봐도 확실한 이유가 되니까요. 이후 프로더로오가 진범이라는걸 알아낸 추리 역시 나쁘지 않아요. 사건 발생 전 이미 현장을 떠난게 확실했던 나이젤을 제외하면, 진범은 교정쇄를 손 댄 프로더로오일 가능성이 높았고, 여기서 출발해서 프로더로오의 알리바이 파괴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거든요. 사소했지만 연결 고리가 되는 단서들도 하나, 둘 씩 설명되고요.

이렇게 추리물적인 가치도 높지만, 이 작품의 진짜 가치는 밀리센트 마일즈라는 독특한 악녀 캐릭터에 있습니다. 앞서 설명드린 동기들만 놓고 보면, 아아더 제랄딘이나 스티븐 프로더로오가 악당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읽다보면 모든건 밀리센트 마일즈의 계획이자 음모, 그리고 그녀의 악한 마음으로 생겨난 사건들이었다는게 드러납니다. 그녀는 타고난 거짓말장이로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노는데 능숙했던 거지요. 살해당한 것도 교정쇄를 손댄걸 알고 프로더로오를 협박했기 때문이 아니라, 몇 개월에 걸쳐 그의 옆에서 일하면서 독설을 퍼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직자였던 스티븐 동생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낙태하겠다고 협박했다는건 정말 생각도 못했던 악행이었어요. 성직자에게는 그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지옥이 아니었을까 싶으니까요. 하여튼, 제가 보아왔던 모든 소설을 통틀어서 가장 독특했던 악녀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템포 자체가 느리다는건 중, 후반부도 마찬가지이며 억지도 많습니다. 우선 밀리센트 마일즈를 흠모했지만 잔인하게 거절당한 바질 라일이 범행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건, 빼어난 묘사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을 갖추기는 어렵습니다. 범인일 수 있는 용의자를 여럿 내세우는건 본격 정통 추리물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한 두명에 그쳐야지 이렇게 모든 등장인물을 싸잡아 엮는건 무리에요. 

그 외에도 패륜아 시프리안 그리이드가 살인 사건 용의자로 의심받는 상황에서 나이젤을 살해하려고 독을 사용했다는건 아예 설명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스티븐 프로더로오의 유력한 동기 중 하나로 제시되었던, 밀리센트와의 관계가 끝나버리고 더 이상 시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도 저자같은 시인이라면 모를까, 일반 독자에게 와 닿는 동기는 아니었고요.

아울러 나이젤이 스티븐 프로더로오를 범인이라고 확신한건, 주요 용의자들 대상으로 소거법을 벌인 결과입니다. 하지만 이 결과만으로는 프로더로오가 범인임을 확신하기는 힘들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나이젤 외의 다른 인물들일 수도 있고, 심지어 유력한 용의자였던 시프리안 그리이드도 여전히 범인일 수 있으니까요. 증거도 프로더러오의 알리바이가 무의미하다는걸 밝혀낸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나이젤이 바질과 프로더로오를 데리고 범인의 살해 수법을 재현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궁지에 몰린 프로더로오의 자살로 진상을 드러내기 위한 어쩔 수 없었던 선택으로 보이거든요. 작가도 이후 경찰 수사 등의 지루한 설명을 이어나갈 필요도, 의지도 없었을 것 같고요. 

문제는 이는 연극적이면서도 과장된 억지의 정점으로, 탐정의 깜짝쇼라는 클리셰의 저열한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러모로 해결 부분에서의 나이젤은 전혀 명탐정스럽지 않았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았고, 진부하고 지루한 부분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장점도 있고, 한 번 읽어볼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번역이 굉장히 아쉬웠는데, 제대로 된 번역으로 출간된다면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2008/04/22

악마의 공놀이 노래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3점

악마의 공놀이 노래 - 6점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시공사

긴다이치 코스케는 휴양차 오카야마의 귀수촌에 머물게 된다. 귀수촌은 23년 전 의문의 살인사건이 벌어졌던 마을로 긴다이치는 당시 사건 담당자 중 한명인 이소카와 경부로 부터 해당 사건에 대한 재 조사까지 의뢰받는다. 마침 마을에서는 23년 전 살인사건 범인으로 지목된 인물의 사생아가 영화배우로 성공하여 귀향하여 떠들썩한 분위기인데 갑자기 의문의 연쇄 살인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입니다. 이로써 국내에 출간된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시리즈는 완독하게 되었습니다. 전부해서 "혼진 살인사건", "팔묘촌", "옥문도", 그리고 이 작품이죠. "나비부인 살인사건"은 긴다이치 시리즈는 아니니까 제외하더라도 말이죠.

일단 이 작품은 혼진 살인사건과 팔묘촌 중간 정도에 걸치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혼진 살인사건과 같은 완전 본격물은 아니지만 팔묘촌 같은 모험물 성격도 아니고, 본격과 어느정도의 드라마가 잘 조화된 작품으로 생각되네요. 이러한 작풍은 "옥문도"와 유사한 성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상기 타 작품들과 비교해서 이 작품의 가장 특이한 점은 긴다이치 시리즈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골 촌 마을의 독특하고 기괴한 가족 관계와 유별난 캐릭터들이 비중있게 등장하지 않는 것이죠. 물론 시골 촌 마을과 촌 마을을 지배하는 가문 (유라 가문 - 니레 가문)이라는 일관된 설정(?)은 유지하고 있고, 또 이 가문과 얽힌 여러 인물의 복잡한 인간관계 역시 여전하지만 그래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부 정상적인 성격과 캐릭터로 묘사되고 있거든요. 외모적으로 장애를 지니고 있는 캐릭터가 한명 나오기는 하지만 비련의 공주같은 캐릭터로 다른 작품들처럼 호러 분위기를 전해주지는 않죠. 때문에 작품의 분위기도 한결 본격물에 가까우며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세련되고 현대적인 느낌을 전해 줍니다.

추리적으로는 총 4건(과거의 살인까지 5건)의 살인사건이 벌어지는데 사건 자체의 트릭은 빼어난 것은 없지만 범인이 과연 누구인가? 와 진상에 대한 추리적 접근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전개도 좋지만 독자에 대한 공정한 설명, 즉 단서에 대한 접근이 충분히, 합리적으로, 공평하게 제시되는 만큼 추리적인 완성도 역시 상당한 수준이죠.

그러나 마을에 전해지는 "공놀이 노래"를 토대로한 범행은 솔직히 좀 작위적이었습니다. 이 동요 그 자체만으로는 그런대로 괜찮은데 가문의 "옥호"를 통해 피해자가 특정된다는 전개는 너무 짜맞춘 티가 나거든요. 이 바닥 전설적인 작품 중 하나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 비하면 억지스러움이 너무 커 보일 정도로 말이죠. 또한 "변장" 등의 설정은 사실 그렇게 합리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며 마지막의 범인 체포를 위한 함정 수사 부분은 약간 기대에 미치지 못한 감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런대로 합리적인 단서에 더하여 사건의 동기 및 진행과정 역시 설득력있게 전개되는 추리물의 미덕을 잘 보여주면서도 긴다이치 시리즈만의 독특함도 놓치지 않는 수작이라 생각되네요. 뭐니뭐니 해도 긴다이치가 연쇄살인의 피해자로 예정된 사건을 한번은 막아낸다는 점이 참으로! 독특한 점이죠. 비련의 주인공들과 어두운 과거사, 아이돌 등 등장인물들만 놓고 본다면 하야미 레이카 - 겐모치 경감 등 올스타 캐릭터가 총 등장하는 만화판 "김전일" 시리즈의 분위기와 가장 유사한 작품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결론은 추천작입니다. 별점은 추리적 요소가 약간 부족한 점 때문에 3점이지만 재미만 따진다면 그 이상의 점수를 줄 수도 있는 작품으로 생각되네요.

2005/06/01

실험부부 (炎の女) - 다카기 아키미쯔 / 홍영의 : 별점 3.5점

정치가 가네꼬 센죠와 시오다 고헤이는 서로 앙숙으로 가문도 원수같이 지내는 상황. 가네꼬의 딸 하츠에와 시오다의 아들 쇼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임에도 헤어져야만 했고 하츠에는 앙갚음의 심정으로 쇼지의 회사 상사 모리 나오키와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한 뒤 모양새만 갖춘 부부로 지내게 된다.

이러한 하츠에를 견디지 못한 모리는 정부 리츠코와 공모하여 알리바이를 만들고 하츠에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나 알리바이를 위해 리츠코가 하츠에로 변장한 직후 화재사고로 화상을 입어 하츠에의 신분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며, 리츠코가 입원한 이후부터 시오다 가문의 주변에 연쇄살인이 발생하고 모든 살인 사건 현장에 하츠에를 암시하는 향수에 적신 손수건이 발견되는데...


다카키 아키미쯔의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 시리즈. 제목이 너무나도 황당한데 원제도 "불꽃(같은) 여자"라는 조금은 낡은 듯한 제목이네요. 제목과 너무나도 형편없는 책 디자인에 비해 번역은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얼마전에 읽었던 "밀고자" 이후의 작품으로 시리즈의 다섯번째 장편이라고 합니다. 발표년도는 1967년이군요.

전작들처럼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가 여러 단서를 모아 조합하여 추리하는 전개인데, 정통물에 가깝게 모든 정황과 사건에 관한 증거들이 독자들에게 공평하게 제공되기 때문에 지적인 만족감을 느끼면서 즐길 수 있는 정교한 작품입니다. 여전히 현실적이고 냉정한, 그리고 평범한 인물에 가까운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라는 캐릭터도 그다지 튀지는 않지만 사건들을 차분히 이해하고 평가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사건을 해결하는, 한마디로 해설자와 탐정을 결합한 또다른 형태의 탐정상을 보여주고 있어서 마음에 들고요.
그간 읽었던 2편의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 시리즈와는 다르게 4명이나 살해당하는 연쇄살인이 벌어진다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연쇄살인극은 사건이 많으므로 단서도 많이 제공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용의자가 점점 줄어들어 막판에는 범인이 누구인지 알기 쉬워진다는 약점이 존재하나 이 작품은 치밀한 전개와 기발한 트릭으로 이러한 약점을 끝까지 잘 커버하고 있습니다.
또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를 제외하고 주 화자로 등장하는 리츠코의 심리묘사가 상당히 디테일해서 사건마다 급변하는 주변 상황에서 오는 불안감과 공포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도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 되면서도 돋보이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작인 "야망의 덫 (밀고자)"와 비슷한 전개라 전작을 읽은 독자라면 약간 (정말 아주 약간~) 식상할 수도 있는 트릭이라는 점,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 증거보다는 일종의 함정수사를 펼친다는 점은 반칙으로 느껴졌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결정적인 증거 자체가 없다는 점은 정통파로서는 큰 약점이라 생각되고요.
그리고 범인이 막판에 사건을 "미궁"으로 모는데까지는 성공하지만 결정적인 범인역의 희생자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도 천재적 발상의 범죄에 비해 조금 부족해 보여서 아쉬웠어요.

그래도 전작보다 훨씬 복잡하고 정교하게 발전된 구조로 전개되기 때문에 읽기전에 실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작가의 작품에서도 상당히 완숙기에 접어든 시기의 작품이라 그런지 시대적으로 낡은 티도 적으며 즐길거리도 많거든요. 무엇보다도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와 천재적이고 악마적인 범인과의 두뇌 게임 하나만으로도 추천할 만한 작품입니다. 범인이 "거의" 성공할 뻔 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죠. 구하실 수 있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25/05/31

옥토버리스트 - 제프리 디버 / 최필원 : 별점 2점

옥토버리스트 - 4점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비채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브리엘라는 딸 세라를 유괴당했다. 유괴범 조셉은 가브리엘라의 사장인 찰스 프레스콧이 가지고 있던 '옥토버리스트'와 돈 50만 달러를 요구했다. 가브리엘라는 우연히 만나 친해진 펀드회사 대표 대니얼의 도움으로 리스트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조셉과 협상에 나서는데...

제프리 디버는 링컨 라임 시리즈로 잘 알려진 작가지만 이 작품은 링컨 라임 시리즈가 아닙니다. 어딘가의 리스트에서 걸작이라고 추천했던 기억이 나서 읽어보게 되었네요. 무슨 리스트인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요.

36장에서 시작해 1장으로 거꾸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형식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영화 "메멘토"에서 처음 접했던 방식인데, 소설로는 처음 접해보았습니다. 이 역순 전개는 단순한 실험을 넘어서, 이야기 전체를 끌고 가는 중요한 구조적 장치로 작용하며, 덕분에 등장인물과 사건에 대한 선입견이 하나씩 깨지는 묘한 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랭크가 칼로 사람을 찔러 죽였는데 실제로는 게임 속 상황이었고, 교회 집사라 선한 인물일 거라 생각했던 노란 셔츠의 딕슨이 사실은 킬러였으며, 엘레나가 차에 치인 줄 알았던 장면도 알고 보니 연기였다는 식입니다.
이러한 일종의 반전 요소들은 이야기의 후반부로 갈수록 강도가 더욱 커져 긴장감을 높입니다. 대니얼이 킬러였다는 첫 번째 반전을 시작으로, 가브리엘라는 대니얼을 잡기 위해 함정 수사를 벌이던 형사였다는 두 번째 반전, 그리고 가브리엘라 역시 다른 조직과 연계된 킬러로 애초에 대니얼 일당을 제거하는게 본래 목적이었다는 마지막 반전으로 이어지거든요.

결말에서는 대니얼 일당은 가브리엘라의 계획대로 조셉에게 살해당하고, 경찰이 가브리엘라의 행방을 놓쳤던건 그녀가 소지품을 쓰레기차에 버렸기 때문이었다는 등 모든 떡밥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기도 합니다. 이런 떡밥에는 '옥토버리스트'는 대니얼을 유인하기 위해 대충 만들어낸 맥거핀으로 명칭조차 "옥토버 페스트"에서 따왔다던가, 대니얼이 의미심장하게 언급했던 ‘프리스턴 솔루션’은 알고 보니 요트 커버 색깔에 불과했다는 등도 있고요.
책 맨 마지막에 수록된 목차의 진짜 제목들이 이런 정리를 도와주는데, 예를 들어 챕터 35의 제목은 ‘대니얼의 무덤’입니다. 대니얼은 이 챕터에서 죽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역순 전개가 반전을 위한 장치로만 활용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이야기의 설득력을 희생하고 맙니다. 예를 들어, 케플러와 수나리 형사는 이미 가브리엘라가 형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작품 중반까지 이에 대한 단서나 암시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내용을 전부 이해한 뒤 돌이켜보면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주요 반전들이 충분한 복선 없이 갑작스럽게 등장한다는 점도 아쉽습니다. 가브리엘라가 형사이자 킬러였다는 설정, 대니얼의 정체 등이 대표적인데요. 모두 과거 사건이나 대화 장면을 갑자기 삽입해 설명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반전은 많지만 정교하게 설계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특히 가브리엘라가 킬러였다는 반전은 반드시 필요했는지 의문이에요. 깜짝 놀라게 만드는 반전에 집착한 나머지, 전체적인 설득력이 떨어져 버린 셈입니다.

또한 프랭크처럼 중요한 인물처럼 보였지만 결국 큰 역할 없이 사라지는 인물들이 많았다는 점도 단점입니다.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로 보이기는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이야기의 밀도를 떨어뜨립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독특한 형식과 실험 정신은 분명히 흥미롭지만, 반전 위주의 전개가 지나치게 억지스럽고 전체적인 설득력이 부족해서 감점합니다. 굳이 찾아 읽을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04/08/23

패배한 개 - 애거서 크리스티 / 강호걸 : 별점 2.5점

크리스티 여사 단편집 몰아보기 3번째 입니다. 표제작인 "패배한 개"는 100여페이지에 달하는 중편, 나머지 7편은 20~30 페이지 내외의 비교적 짧은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작품집입니다.
패배한 개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강호걸 옮김/해문출판사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에서도 소개했지만 첫 작품이자 표제작인 "패배한 개"는 원래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에 실리기로 되어 있었는데 편집상 이 쪽으로 넘어와서 출간되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이 작품만 다른 7편에 비교해 이야기가 더욱 길고 헤이스팅스가 나오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내용은 저택의 자신의 방에서 살해당한 애스트웰 경의 살인사건을 포와로가 의뢰받으면서 시작됩니다. 이미 조카인 찰스 레버슨이 체포되어 여러가지 불리한 증거로 인해 거의 범인으로 확정된 상태이지만 애스트웰 부인은 여성의 직감을 내세워 비서인 오웬 트레퍼시스씨를 범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후 포와로가 저택에 머물며 애스트웰 경의 주위 사람들의 행적과 동기를 면밀히 조사하여 진범을 찾아내게 된다는 이야기죠.
분량이 제법 되는 중편이지만 트릭이 별로인데다가 이야기도 그닥 매끄럽지 못하며 포와로가 사건을 해결하는데까지 너무 오래 걸린다는 등의 단점이 커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일종의 "함정수사"를 통해서 범인을 잡아내는 포와로의 비겁한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딱 한가지, 범인의 심리상태를 "패배한 개"에 비유하여 전개하는 방식 하나만큼은 괜찮지만 전체적으로는 기대 이하의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두번째 작품 "플리머스 급행열차"는 급행열차 안에서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된 대 부호의 딸의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입니다. 트릭도 괜찮고 이야기도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전형적인 퍼즐 미스테리 단편이랄까요? 편집자 주석으로 달려있는 "독자에의 도전"도 괜찮았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세번째 작품 "승전 무도회 사건"은 가장 무도회에서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된 젊은 귀족 크론쇼 경의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입니다. 가장 무도회의 의상이 가장 중요한 트릭인데 시각적으로 그 정보를 알 수 없다는 것은 아쉽지만 포와로 특유의 "회색의 뇌세포"를 활용하는 추리 방식과 마지막의 연극적인 사건 해결 방식은 볼 만 합니다. 적당한 수준의 작품이었다 생각되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네번째 작품 "마켓 베이징의 수수께끼"는 밀실에서 자살한 듯 발견된 시체를 놓고 벌어지는 굉장히 짤막한 작품입니다. 트릭이 굉장히 단순해서 독자의 맹점을 찌르는 맛은 있지만 작중 검시관이나 기타 관련자들까지 그 사실을 간과한다는 전개는 조금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너무 쉽게 간 느낌이에요. 별점은 2점입니다.

다섯번째 작품 "르미서리어 가문의 상속"은 전통있는 르미서리어 가문의 전설, 즉 "장자는 항상 불행하게 죽어 상속받지 못한다"라는 전설이 실제로 현대에도 이어져서 르미서리어 가문의 장자에게 비극적인 죽음이 닥치고 현재 상속자의 큰아들에게게도 위험한 사고가 닥치는 것을 해결하는 내용. 범인의 행동이나 동기가 마지막의 큰 반전으로 이르는 내용이 참 멋집니다. 역시 거장다워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여섯번째 작품 "콘월의 수수께끼"는 자신이 독살당할 것이라고 의심하는 펜젤리 부인이 포와로에게 사건을 의뢰하며 귀가후 바로 독살당하게 되자 포와로가 자책하며 사건에 뛰어드는 내용입니다. 일종의 치정극 스타일로 범인을 옭아매는 포와로의 모습이 독특했던 작품입니다. 무난했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일곱번째 작품 "클럽의 킹"은 이국의 왕자와 곧 결혼하게 되는 배우 세인트클레어 양에게 닥친 괴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브릿지"를 소재로 하고 있어서 중간 부분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아서 다른 작품들 만큼 재미있게 읽지는 못했습니다. 문화적 차이이기는 하지만... 별점은 2점입니다.

마지막 작품 "잠수함의 설계도"는 다른 앤솔로지에서 이미 읽었던 작품으로 수상의 저택에서 도난당한 잠수함 설계도를 찾아내기 위한 이야기인데 일종의 심리적 맹점을 노리고 쓴 듯 합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비슷하다고 할까요? 정통 퍼즐 미스테리이긴 하지만 약간 변화구인것 같네요. 재미있긴 했지만 조금, 어떻게 보면 시시할 수 있는 이야기라 아쉬웠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인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별점이 아주 높지는 않지만 정통 퍼즐 미스테리의 애호가들이라면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작품들임에는 분명합니다. 첫번째 작품 이외에는 전부 헤이스팅스가 등장하는 것도 좋았고 정통파의 명제-"가장 수상한 사람은 범인이 아니다!"-를 충실히 따르는 이야기 전개 고전적인 전개도 마음에 들었고요. 다만, 이 명제를 너무 충실히 따라서 오히려 약점이 되는 점이 조금 안타깝기는 했습니다만... 뭐 쓰여진 시기를 감안해야겠죠.

읽고나서 생각해 보니 이야기가 거의 전부 케이블 TV에서 방영된 "크리스티 추리 극장"에 나왔던 이야기들이라 저는 더욱 즐겁게 읽었습니다. 녹화해 놓은 테이프를 다시 한번 찾아 봐야겠네요.

2011/04/16

CMB 박물관 사건목록 14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3점

CMB 박물관 사건목록 14 - 6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Q.E.D의 스핀오프에서 시작해서 나름 자리 잡은 인기 시리즈. 총 세 편의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3점. 장편 에피소드는 별로였지만 간만에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난 작품들이라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박물학적인 지식을 녹여내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구태여 이게 독립적인 시리즈로 존재해야 하나 라는 의문이 다시 생기네요. 좋았던 뒤의 두편은 Q.E.D 에피소드였어도 충분했을 것 같거든요. 신라라는 캐릭터가 토마에 비해 매력적인 것도 아니고... 작가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하나에 집중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수록작별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세상의 끝" 

대영박물관 주임연구원 쇼 벤트레와 함께 아르헨티나까지 날아가 전설의 황제 노랑나비의 사진에 대한 수수께끼를 파헤치는 내용입니다. 30년의 세월과 함께,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시절의 어두운 면을 녹여내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지요.

문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복수의 대상에게 왜 3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야 겨우 복수를 하게 되었는지는 설명되지 않고, 신라가 사건에 개입하는 과정도 별로 설득력이 느껴지지 않는 탓입니다. 

황제 노랑나비라는 나비에 대한 박물학적인 지식과 함께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에 대해 쉽게 풀어주는 과정은 역시나 볼만했지만, 상기의 이유와 함께 추리적으로 점수를 줄만한 부분은 없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주사위 게임" 

전형적인 일상계 작품입니다. 돈독한 우정을 나누던 세 명의 할머니들 사이에서 벌어진 2만엔 실종 사건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짤막하지만 정말로 있음직한 오해에서 비롯된 사건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완고한 노인들이라 서로 오해를 풀기 쉽지 않았다는 설정도 좋았고 말이죠. 짤막해서 군더더기없는, 작가의 장점이 잘 발휘된 멋진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4점입니다. 

"꽃집 아가씨" 

일상계스러운 분위기에 도서 추리물의 형식이 가미된 이색작입니다. 사법고시 수험생이 앞집에 사는 꽃집 아가씨를 흠모하여 엿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녀가 살해당하는 순간을 목격한 뒤, 되려 범인으로 몰리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전개 방식과 마지막의 반전은 좋았지만 범인이 수험생을 궁지에 모는 과정의 설득력이 약하고, 마지막 반전은 금기라 할 수 있는 '함정 수사'라는 점에서 약간의 아쉬움이 있어서 별점은 3점입니다. 

2014/02/10

Q.E.D 큐이디 44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점

Q.E.D 큐이디 44 - 4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튜바와 무덤"

탐정동호회 3인이 등장하는 작품. 그들이 엮인 사건 치고는 놀랍게도 살인 사건이 다루어집니다. 개그  담당인건 여전하지만, "탐정"의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에나리의 모습은 나름의 성장이 느껴져서 좋았고요.

그런데 사건 자체만 놓고 보면 아쉬움이 많습니다. 우선, 목격자가 확실한 상태에서 당장 시체만 발견되지 않는다고 범인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목격 증언이 있다면 아무리 알리바이가 확실하더라도 현행범으로 바로 체포될테니까요. 물론 작품 내에서는 에나리 등의 실수로 증언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설명되고는 있지만, 살인 사건은 경우가 다르죠.

또 트릭도 문제가 많습니다. 경찰이 현장 주변은 빼고 공장만 뒤진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범인이 잠깐의 시간을 이용하여 튜바와 시체를 바꿔치기 하고 튜바를 훼손하여 쓰레기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핵심 트릭은 비현실적으로 보였던 탓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10분 이상은 걸릴 것 같은데 말이지요. 튜바를 부수는 소음은 어떻게 했을지도 모르겠고요.

마지막에 "교살"이라는 살해 방법에 대한 범인의 증언 실수를 이용하여 옭아매는 모습도 발상은 나쁘지 않지만, 전형적인 함정 수사인데다가 딱히 강한 설득력을 지닐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때문에 별점은 2점. 저는 탐정동호회의 소소한 일상계 이야기가 훨씬 더 마음에 드네요. 그들도 성장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진지하고 묵직한 사건에는 별로 어울리지는 않았습니다.

"Question!"

이혼 조정 신청 중인 두 쌍의 부부와 토마 일행이 일종의 퀴즈쇼에 참가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Q.E.D 특유의 학습만화스러운 전개가 인상적인 작품. "페르마의 정리" 및 그와 연관된 골드바하의 추측, ABC 예상, 타원곡선 등에 대해 잘 알려주고 있으며, 참가한 사람들의 지식을 활용하여 단서를 제공하고 이것을 페르마의 정리와 엮어서 풀어나가는 전개 역시 일품이었습니다. 일종의 반전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의 흑막(?)이 누구인지에 대한 것도 꽤 설득력 높았고요. 아울러 토마가 일종의 '조력자' 포지션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도 조금 이채로웠어요. 수학자들끼리는 서로 통하는 게 있는 거겠죠.

그러나 기대했던 추리, 퀴즈와 퍼즐을 풀어나가는 재미는 뛰어나다고 보기는 어려웠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학습만화로는 최고 수준이기는 한데... 뭔가 좀 아쉽네요. 똑똑한 귀요미 소녀 미오 캐릭터가 낭비된 느낌도 강하고요.

결론적으로 전체 평균 별점은 2점. 재미가 없다고 하기는 뭐하나 추리적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다음 권에서는 추리적으로도 명성에 걸맞는 결과물이 나왔으면 합니다.

2006/07/09

퀴즈 [QUIZ] (2000)

영어강사인 다카노 마이는 어느날 한통의 메일을 받는다.

제목: 퀴즈입니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
힌트: 이미 없어졌습니다.


그 순간 그녀가 떠올린 것은 초등학교 2학년생인 아들 쇼가 아직도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 학교나 친구들에게도 연락해보지만 아들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하고 그 후 또 한 통의, 정체불명의 메일이 도착한다.

‘아들을 데리고 있다. 경찰에게는 알려선 안 된다.
퀴즈: 경찰에게 알리면 아이는 어떻게 될까?
힌트: 도레미파솔라…시(시는 일본어로 죽음) 죽음?!!!


다카노 마이는 경찰에 신고하고 경시청의 유괴 전담반인 SIT의 키리코 카오루가 사건 수사 지휘본부에 투입된다. 수사 지휘자인 오자와 형사과장과 사사건건 충돌하면서도 범인의 감시카메라를 피해 다카노가에 잠입에 성공한 형사 시라스나와의 협력 수사로 범인의 퀴즈를 하나씩 해독해 나가며 사건의 진상에 접근하는데...


2000년에 방영되었던 일본 드라마입니다. 누군가의 추천으로 보게 되었는데 극의 흡입력 하나는 정말 대단하네요. 이틀만에 다 볼 정도로 재미있었습니다.

유괴범이 "퀴즈"를 보내고 경찰과 두뇌게임을 펼친다는 전개는 비스무레한 작품이 많아서 그다지 신선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는 퀴즈 자체, 즉 일종의 퍼즐을 시청자가 몰입하면서 볼 수 있는 수준으로 제시하며 적절하게 사용한다는게 다른 복잡한 심리 스릴러 극과 차별화됩니다. 퍼즐 풀이의 재미로 상당한 몰입감도 전해주고요. 스토리도 단순한 유괴극으로 끝나지 않고 2중, 3중으로 포장되어 있으며, 이러한 요소를 설명하기 위한 복선 역시 많아서 정교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극의 긴박감도 일품이고요.
범인이 6억엔을 요구하여 도주하는 장면은 정말 머리를 많이 썼구나 싶을 정도로 잘 짜여진 트릭이었으며, 이 도주극에서 주인공 키리코 카오루의 또다른 함정 역시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거기에 결말부분의 반전이 유명하던데 저도 놀랐습니다! 솔직히 상상도 하지 못했거든요. 물론 이 반전 역시 쌩뚱맞게 튀어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반전을 설명하기 위한 여러 장치가 드라마 전체적으로 잘 드러나 있거든요. 각본진의 노고가 느껴질 정도로 잘 짜여진 작품이라 할 수 있겠지요

또한 제작진이 "케이조쿠"의 제작진 그대로라고 하는데 케이조쿠에서 인상깊었던 몽환적인 화면이나 순간순간의 교묘한 이미지 편집, 절묘한 음악과 화면의 조화로 긴장감을 자아내는 여러 장면들, 그리고 드라마의 미술적 감각은 지금 보아도 전혀 유치하지가 않은 수준입니다. 이미지 과잉이라는 생각도 들기도 했지만 비쥬얼 적으로는 만족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일본 드라마에서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요소인 배우들의 오버가 이 작품에서는 심하지 않아서 더욱 좋았습니다. 주인공 키리코 카오루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설정은 분명 만화적이고 심리가 극도로 불안하여 환영을 본다는 설정은 불필요하다 생각되지만, 자이젠 나오미라는 배우는 그 만화적인 설정을 커버해 줄 정도의 연기력은 충분히 보여주었고, 남자 주인공격인 시라스나가 굉장히 현실적인 형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마음에 드네요. 또한 트릭의 개그형사 야베역의 배우가 맡은 오자와 형사반장의 연기 역시 그간의 이미지를 완전히 깨 주는 멋진 연기와 설정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실감 있는 연기와 더불어 심각한 극의 전개가 설정과 오버가 가득한 그간 일본 드라마의 편견을 많이 불식시켜 준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 외의 조연도 친숙한 얼굴들이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만화적인 설정, 즉 키리코 카오루라는 캐릭터의 설정은 너무나 불필요했기에 아쉬움이 남으며, 다카노가를 비롯한 주변 가족들의 일상 및 심리상태 묘사도 좀 오버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11부작에서 요런 부분을 줄였으면 한 6부작 정도로 충분히 끝낼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진범을 사주한 인물에 대한 설득력이 거의 제로에 가깝기에, 또 이 인물로 인해 반전의 충격이 많이 희석되는 것, 그리고 좀 억지에 가까운 해피엔딩은 각본진이 좀 몸을 사린 것 같았습니다. 지나치게 공포-충격요법을 전달하기 위해 군더더기 -클로즈업만 되면 눈알을 굴리는 연기를 하는 등- 가 좀 많았던 것도 불만스러웠고요. 아무래도 디테일에서 좀 작위적인 연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유괴당한 다카노 쇼 역의 아역배우의 연기는 솔직히 독서낭독회 수준이라서.... (뭐 7살짜리 아역한테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잘못이겠지만요)

뭔가 후속편을 부르는 듯한 여운도 살짝 남기는데 후속편이 없는 것으로 보면 드라마의 인기는 별로였나 보네요. 그래도 몰입력 하나는 대단한, 그리고 여름에 보면 더더욱 좋을 것 같은 서늘한 맛을 잘 전해주는 재미있는 드라마였습니다. 비록 방영한지는 6년이 지났지만 지금 보아도 전혀 유치한 느낌을 주지 않는 내용과 비쥬얼로 포장되어 있으니 휴가철에 하루이틀 몰아서 보면 딱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제가인 "Toy Soldier"도 마티카의 원곡을 번안해서 부르는데 극의 내용(?) 이나 이미지와 잘 부합하고 있고 오랫만에 들으니 더욱 반가왔습니다. 

2019/11/24

C.M.B. 박물관 사건목록(씨엠비) 33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점

[고화질] C.M.B. 박물관 사건목록(씨엠비) 33 - 4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한동안 출간 자체를 모르고 살다가 전자책으로 출간된 덕분에 읽게 되었습니다. 한 때는 국내 출간된 모든 추리 만화를 다 소장하겠다!는 꿈을 가졌던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보던 시리즈도 놓치는 상황이 되어 버렸네요.

어쨌건, 이전에 읽었던 두 권은 모두 평균 수준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권인 33권은 개인적으로는 기대 이하였습니다. 그럭저럭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기는 한데, 추리적으로는 너무나 별로인 탓입니다. 억지스러운걸 넘어서 솔직히 말도 안되는 수준의 트릭이 남발되어 실망스러웠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번 권은 딱히 권해드리지 않습니다.

이야기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세요.

"움직이는 바위"

게임을 좋아하는 하나오카는 문부과학성 관료의 딸과 결혼하여 출셋길이 열렸지만, 처가의 엄격함 때문에 게임이 금지되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1년에 두 번, 온천에서 2박 3일 게임을 즐기기로 타협하고 시골 온천으로 향했다.
친구들과 게임, 맥주를 즐기던 그곳에서 전설의 '움직이는 바위'가 나타나고, 움직이는 바위를 보면 죽는다는 전설과 비슷하게 온천 여관 주인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하나오카의 친구인 회사원 겐부 유리가 용의자로 몰렸지만, 마침 다른 조사차 현장에 있던 신라가 전설의 정체와 진상을 파헤친다.

'움직이는 바위'에 대한 이야기는 꽤 재미있습니다. 절벽에서 떨어진 낙석에 형광 성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돌이 떨어진 후 남겨진 자국이 빛나서 사람들이 바위가 움직인거라 착각했다는게 진상이지요. 이를 확인하기 위해 조사하던 사람 몇 명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사고가 있었으리라는 추론도 합리적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전설이 고착화되었고요. 전설과 토속 신앙은 무언가 이유, 근거가 있다는 이론에 기반한 이야기인데 그런대로 설득력이 높습니다.

그러나 사건 이야기는 영 아닙니다. 불륜을 온천 여관 주인에게 들킨 하나오카가 그녀를 살해하고, 죄를 겐부에게 뒤집어 씌운게 진상인데 설득력이 너무 낮아요. 하나오카가 겐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건 겐부도 불륜을 알고 협박했다고 착각했기 때문인데, 실제로 그랬다면 범인 누명을 쓴 순간 하나오카도 수상하다고 이야기했을게 뻔하잖아요. 자기에게 누명을 씌울 만한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사람이 누군지 경찰에게 말하는게 당연하니까요. 또 실제로 누명을 쓰고 체포되었다 한 들, 협박이 멈출리도 없고요.

친구 네 명이 같이 이동하는 중에, '움직이는 바위'를 보면 죽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앞만 보고' 가는 상황을 이용하여 혼자 살짝 빠져나와 여관 주인을 죽였다는 트릭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달랑 네 명이 움직이는데 아무리 살짝 빠져나갔다 해도 아예 그 상황을 모른다는 것 부터가 말도 안됩니다. 앞만 본다고 해서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시골 마을의 전설을 풀어낸 전개는 괜찮았지만, 추리적으로는 도저히 점수를 줄 수 없는 망작입니다.

"읽지 못한 문학전집"

남편과 사별한 후 하와이로 장기 여행을 떠난 요네쿠라 리츠코의 여행 목적은 읽지 못한 문학 전집을 모두 읽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행 첫 날, 발코니에서 책을 읽던 그녀는 아래 방갈로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목격해서 경찰에 신고했지만, 시체를 발견하지 못한 경찰은 수사를 더 이상 진행하지 않는데...

요네쿠라 리츠코가 문학 전집을 읽지 않은 이유, 그건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걸 깨닫고 남편과의 사랑을 돌이켜보는 마지막 장면이 괜찮았던 작품입니다. 타츠키가 정말로 오랫만에 나름 활약을 펼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어요. 여러모로 이야기의 완성도는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찰이 아무리 무능했더라도, 나무 그림자 바로 앞 시체를 놓쳤을 것 같지는 않네요. 설령 놓쳤다 치더라도, 이건 순전히 '운'에 불과한 거라 트릭이라 부르기도 어렵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뿔매미"

우라메 컨설턴트에서 일하는 이가사는 별 것 아닌 내용을 기묘한 전문용어로 포장할 뿐인 사기꾼으로 회사에서 유일하게 진실된 컨설팅을 하는 요시즈를 그만두게 하기 위해 사장의 임명장을 위조했다. 그러나 오히려 사장실에서 거액의 돈이 사라진 뒤 범인으로 몰려 체포되는데...

뿔매미라는 매미는 처음 들어보았네요. 이 책에 따르면 개미 등으로 의태하여 개미 속에 숨어지내며 남는 당분을 제공해주고, 대신 개미는 뿔매미를 지켜준다고 합니다.
이가사가 스스로 뛰어나다는 생각을 지나치게 한 나머지 이상하게 의태해버린 결과 - 본인이 범인이 아닌데도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 를 이 뿔매미를 빗대어 설명하는게 꽤 그럴듯합니다. C.M.B 특유의 학습 만화스러운 재미는 충분해요.

트릭도 간단해서 설득력이 높은 편입니다.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소품을 문에 끼어 놓아서 문이 자동으로 잠기지 않게 만드는 정도라면 누구나 가능하니까요. 물론 이가사가 문이 정말로 닫혔는지도 확인하지 않을 정도로 허술하고 멍청한 인간이었다는 설정이 앞 부분에 조금이라도 등장했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그게 조금 아쉽네요. 

그래도 이야기의 완성도, 특유의 박물학적 지식을 전해주는 학습만화스러운 재미, 추리 만화로서의 설득력도 갖춘 이번 권 최고의 이야기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보이지 않는 사수"

연극에서 리어왕 역할을 맡은 나가타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등 가운데에 화살을 맞았지만, 무대 뒷 쪽은 꽉 막혀있던 상태였다. 경찰은 시종역으로 옆에 서 있었고, 소도구인 석궁을 가지고 있던 요츠야를 체포했다. 요츠야의 무죄를 믿는 타니바타 경위는 쿠지라자키 경감의 소개로 신라를 찾아와 사건 해결을 부탁하는데...

흔해빠진 이야기의 반복에 불과한 수준 이하의 졸작입니다. 트릭과 이야기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탓입니다. 범인을 밝혀내는 것도 수사 정보를 흘려 함정을 판다는 유치한 작전이며, 트릭도 독특한 장치로 화살을 쐈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등에 화살이 꽂힌 것도 나가타가 화살을 피하려고 몸을 비트는 순간을 노렸다는건데 너무 작위적이에요.
원래 둘이 교제하고 있었는데, 나가타가 다른 여자를 사귀려고 했다는 범인인 이다의 살해 동기도 경찰 수사의 부실함을 증명할 뿐입니다. 아무리봐도 요츠야보다는 더 확실한 동기잖아요?

게다가 C.M.B에서 유일하게 기대해볼만한 박물학적인 재미 역시 전무합니다. 타니바타 경위가 신라에게 사건을 의뢰할 때 케이크를 가져올 정도로 신라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이에요. 마지막에 감사 인사로 귀중한 식물을 보낸다며 준 것도 네잎 클로버고요! 물론 웃기기는 했습니다만.... 

하여튼, 별점은 1.5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점수를 줄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2024/11/08

고양이 혀에 못을 박아라 (猫の舌に釘をうて) - 츠즈키 미치오 : 별점 2점

猫の舌に釘をうて (德間文庫) - 4점
쓰즈키 미치오/德間書店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소개될 일은 없겠지만 참고하세요.

3류 추리 작가 아와지는 사랑하던 유키코와 결혼한 쓰카모토에게 살의를 품었다. 정말로 살인을 저지를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단골 카페 손님 고토의 커피잔에 유키코에게 받은 감기약을 몰래 타는 정도로 살의를 달래려 했다. 그런데 커피를 마신 고토는 정말로 죽고 말았다.
아와지는 자신이 범인인데다가, 유키코의 감기약에 독이 들어있었기에 누가 독을 넣어 유키코를 죽이려했는지를 밝히기 위해 스스로 탐정 역할을 자처한다. 이를 진범이 알게되면 아와지를 살해할 수 있어서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나선 행동이었다.
아와지는 경찰과도 협력하며 수수께끼의 남자 고토의 뒤를 캐면서 사건을 수사해나갔으나, 유키코마저 자택에서 열린 파티에서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런 리스트, 이런 리스트 등에 작품이 선정될 정도로 꽤 유명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소개된 적이 없는 츠즈키 미치오의 장편 소설. 이 리스트에서는 무려 59위에 선정될 정도로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샤라쿠 살인사건"보다도 순위가 높네요. 원서를 구해 읽어보았습니다. 번역에 ChatGPT의 도움을 크게 받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원서인 탓에 오래 걸렸습니다. 이번 주 한 주는 이 책만 읽었네요.

유명한 작가의 유명한 작품답게 재미있는 구석이 제법 있습니다.

우선 아와지가 연습삼아 죽이려 했던 고토가 실제로 죽어버리고, 끝까지 지키려 했던 유키코가 살해당한다는 이야기 자체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아와지가 쓰는 수기와 그의 실제 행동을 번갈아 보여주는 독특한 전개 방식도 독자들에게 큰 몰입감을 주고요. 아와지가 '범인이자 탐정이며 동시에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설정도 좋아요. 이야기의 긴장감을 배가시키거든요. 
그리고 도입부의 설정이 결말에서 동일하지만 다른 상황이었다는게 드러나는, 일종의 수미쌍관식 구성으로 마무리되는 것도 좋았습니다. 진상은, 아와지가 유키코를 살해했지만 고토의 죽음과는 연루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토를 죽인 진범은 협박을 당하던 고토의 동생 쓰카모토였고, 아와지는 진범을 밝혀내는 탐정 역할이자, 이 진실을 덮으려는 쓰카모토 일당에게 살해될 수 있는 피해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지요. 이렇게 이야기는 치밀하게 얽힙니다. "신데렐라의 함정"도 떠올랐는데, 유명세는 "신데렐라의 함정" 쪽이 더 크지만, 설정을 더 정교하게 다듬은건 이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추리적으로도 깔끔합니다. 대부분의 단서가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제공되고요. 특히 유키코 사건의 진상 규명은 돋보이는데, 유키코를 끔찍이 아끼던 아와지가 그녀가 외설적인 게임에 참여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는건 확실히 설득력 있었습니다. 고토와 쓰카모토가 형제라는 설정, 오노기와 고바야카와가 형제라는 사실 역시 이야기 속에서 충분히 독자에게 설명됩니다.

더불어 아와지의 입을 빌려 츠즈키 미치오와 그의 작품 "고양이 혀에 못을 박아라"를 작품 속에 삽입한 재치도 눈에 띕니다. 아와지가 욕을 하면서도 가지고 있던 츠즈키 미치오의 책이 그의 범행 기록을 담은 일지를 숨기기 위한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반전 역시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였어요.

이 책이 발표된 1961년 당시의 도쿄를 생생하게 묘사한 점도 눈에 띕니다. 전쟁 이후 사회적 혼란, 아직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도시 문화, 히로뽕 중독에 대한 설명, 그 와중에 현재를 떠올리게 하는 지명과 거리 분위기 등 당시 분위기가 손에 잡힐 듯 묘사되어 있거든요. 이는 작품의 몰입도를 한층 높여 줍니다. 

하지만 추리 소설로 아주 높은 평가를 하기는 무리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아와지 본인이 언급했듯, 범행 동기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와지가 유키코를 살해한 이유는그녀가 고바야카와와 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라는데, 이는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유키코가 여러 남자와 만났다는 묘사가 이미 존재하는 탓입니다. 고바야카와와의 관계만을 살인 동기로 삼는 것은 비합리적이에요. 그녀의 죽음에 대해 수기에서 제대로 표시하지 않은건 반칙이고요.
또한 아와지가 고토를 살인 리허설 대상으로 삼으려 했던 순간에, 그가 진짜로 살해당했다는건 지나칠 정도로 우연이 겹친 상황이라 좋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수기와 실제 사건을 뒤섞은 전개도 문제입니다. 아와지 1인칭 시점으로만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그가 유키코를 살해한 진범이라는걸 독자에게 속이기 위한 목적은 달성하고 있지만,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너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탓입니다. 아와지가 범인일 수 밖에 없다는 상황은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었다고 보기도 어렵고요.
오노기가 갑자기 탐정으로 등장해 진상을 밝히는 부분, 여기서부터 이어지는 짤막한 분량의 결말도 급작스럽고 뜬금없었습니다. 그나마 아와지 집도 몇 번 찾아오곤 했던 무라코시 경부보가 사건을 해결하는게 차라리 나았을거에요.

마지막에 아와지가 정말로 피해자가 되어 살해될지도 모른다는 결말도 이상합니다. 고토와 유키코를 살해한게 아와지라는게 드러난 이상, 쓰카모토가 그를 죽일 이유는 없으니까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정통 추리 소설과 치정 범죄극을 섞은 결과물은 재미로만 본다면 꽤 괜찮습니다. 그러나 추리적인 부분과 설득력, 그리고 결말 부분에 문제가 있어 감점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소개될 일은 없겠지만, 설령 소개된다고 해도 특별히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