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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8

포토로그 신화와 전설 - 필립 윌킨스 / 김병화 : 별점 3점

신화와 전설 - 6점
필립 윌킨스 지음, 김병화 옮김/21세기북스(북이십일)

신화-전설 백과사전으로 전 세계 각지의 신화와 전설을 집대성하여 다양한 풀컬러 도판과 함께 소개해주는데 그야말로 양과 질 모두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사전식 구성으로 모든 주제가 도판 포함해서 한 장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쉽게 쉽게 읽을 수 있어서 좋더군요.

개인적으로는 베다 - 라마야나 - 마하바라타를 중심으로 신들과 신화, 전설을 소개해주는 힌두교 부분이 여러모로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읽으면서 "3×3 아이즈"라던가 "신들의 사회"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이렇게 여러 가지 장르물들을 접할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라던가 오딘, 아서왕 전설과 같이 익히 알고 있었던 이야기들이 대량 포함된 서구권 신화, 전설이 거의 1/3을 차지하며, 일본의 신화 비중이 불교 비중보다 많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전체적인 비중 조절에 실패한 느낌이 들어요. 한 장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요약이 지나친 탓에, 깊이 있는 내용을 얻기 조금 어렵다는 단점도 있고요. 번역과 교정도 조금 미흡해 보였습니다.

그래도 이 책 한 권만 제대로 읽어도 전 세계 신화와 전설에 대해 기본적인 수준의 지식은 갖출 수 있을 정도로 잘 정리되어 있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심지어 저는 알라딘 15주년 기념행사로 10,000원이라는 가격에 구입하기도 했으니까요. 만화책도 비싼건 만 원 가까이 하는 현실에서 300페이지가 넘는 풀컬러 양장본이 만 원이라니... 가성비만 놓고 보았을 때는 별점 5점도 충분합니다!

2014/05/28

미사고의 숲 - 로버트 홀드스톡 / 김상훈 : 별점 2.5점

미사고의 숲 - 6점
로버트 홀드스톡 지음, 김상훈 옮김/열린책들

2차 세계 대전 후 스티븐은 군에서 제대하고 라이호프 숲 가장자리에 있는 잉글랜드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형 크리스찬과 해후했지만, 크리스찬의 기묘한 행동에 의구심을 느끼게 되었다. 알고보니 크리스찬은 숲에 매료된 나머지 "숲"이 만들어 낸 소녀 귀네스의 환영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이는 오랜 기간에 걸쳐 강박적으로 라이호프 숲의 내부를 조사했던 박물학자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크리스찬은 아버지처럼 숲속에서 행방을 감췄고, 홀로 남은 스티븐은 아버지가 남긴 일기를 읽은 뒤 "숲"에는 사람의 무의식적인 사고를 실체화하는 불가사의한 힘이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는데...

'신화는 인간의 무의식적 사고를 실체화한 것이 보여지는 것'이라는 독특한 설정이 등장하는 전설적인 작품입니다.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제서야 읽게 되었네요. Mythago는 신화(myth)와 심상(imago)의 합성어입니다. 바로 이 실체화된 결과물을 의미하지요. 개인적으로는 美思考, 즉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본다는 한자어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좀 의외였습니다.

하여튼, 작품은 크게 아래의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제1부 미사고의 숲
  • 제2부 사냥꾼들
  • 제3부 숲의 심장

1부는 고향으로 돌아온 스티븐이 형 크리스찬을 통해 미사고에 대해 알게 되지만, 형이 귀네스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 숲으로 들어간 뒤 그를 잃게 되는 과정까지의 이야기입니다. 2부에서는 귀네스가 실체화된 후 스티븐이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만, 돌아온 크리스찬이 이끄는 매의 전사들에게 습격당해 그녀를 빼앗기게 되고요. 3부는 귀네스를 되찾기 위해 스티븐이 해리 키튼과 함께 숲의 내부로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단계별로 이야기가 점점 업그레이드되고 스케일이 커지는데, 개인적으로는 2부까지가 딱 좋았습니다. 특히 2부에서 매의 전사들이 나타나는데, 그 우두머리가 나이를 한참 먹은 크리스찬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반전이 괜찮았어요. 그러나 3부는 지나치게 신화화를 의식한 느낌이라 별로였습니다. 특히 스티븐까지 신화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 묘사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과 전투 장면, 여러 마법과 기묘한 인물들이 실체화되어 등장하기 때문에 재미만 놓고 보면 가장 흥미롭긴 하나, 단순한 모험물에 불과해 새로움이나 깊이를 느끼기 어렵기도 했고요. 이 장대한 설정이 결국은 연인을 구하기 위한 모험담이자 사랑 이야기였다는 것도 실망스러웠습니다. 언젠가는 돌아올 귀네스를 기다리는 스티븐이 그 자체로 전설이자 신화가 되었다는 케케묵은 결말은 "백발마녀전"과 뭐가 다른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리고 80년대 출간 당시라면 꽤나 신선하고 인상적이었을 수 있으나,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은 느낌이에요. 무의식 속 무언가를 실체화한다는 설정은 일본 만화 등에서 많이 본 것이기도 하죠. "파프리카"처럼요. 신화냐 꿈이냐의 차이일 뿐, 사람의 무의식을 실체화하고 그것에 외려 사람이 휘둘린다는 설정 자체는 동일하니까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신화라는 것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시리즈로 이어질 만한 재미와 설정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딱히 특별한 것이 없는 흔해빠진 판타지 모험담에 불과합니다. 시대가 너무 많이 흐른 탓이지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시대를 뛰어넘는 작품은 아니었다는 뜻도 되겠지요. 시리즈 후속권이 국내 출간되지는 않았는데, 출간되었더라도 더 읽어볼 생각은 없습니다.

덧 : 그래도 유명작품이니 만큼 인터넷 상에 정보는 많네요. 제가 본 것 중 가장 괜찮은 귀네스 이미지 한 장 올려봅니다.

2011/05/05

공포의 보수 - H.P 러브크래프트 / 정광섭 : 별점 2점

공포의 보수 - 4점 H. P. 러브크래프트 지음, 정광섭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광기의 산맥"으로 유명한 H.P. 러브크래프트의 중단편집입니다. 러브크래프트 하면 보통 "크툴루 신화"가 연상되죠. 하지만 개인적으로 대체 그게 뭔지 그동안은 접해보지 않았었는데, 이 책을 통해 어느 정도 궁금증이 해소되었습니다. 작품들 모두 유사한 설정을 갖추고 있기도 하지만, 마지막 이야기가 바로 크툴루 신화 그 자체인 "크툴루가 부르는 소리"거든요.

읽고 나니 대체 왜 "크툴루 신화"가 세대를 초월한 전설이 되었는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압도적인 상상력과 묘사는 정말 발군이었어요. 20세기 초엽에 쓰인 작품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말이죠. 또 모든 점에서 현대 그로테스크 호러 장르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에요. 워낙 오래된 작품이라 이야기가 새로울 게 없고, 플롯이 원패턴일 뿐만 아니라 전개가 진부하기 짝이 없어서 압도적인 분위기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습니다. 또 "크투루프"라는 일본어 중역 발음이나 "견신론자" 등의 낯선 용어는 번역에서 아쉬운 부분이었어요. 생각만큼 번역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인 용어 정도는 현대적으로 통일해 줬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마지막 작품 "크툴루가 부르는 소리"만큼은 3.5점을 줄 만큼 좋은 작품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는 진부하고 낡은 느낌을 극복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건 21세기에 읽은 제 탓이 크지만, 과연 제가 이 작품을 당대에 읽었다면 어땠을까요? 대단한 컬처 쇼크를 받았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과연 호평을 했을지 혹평을 했을지 궁금합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인스마우스의 그림자"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을에 우연히 방문한 외지인이 뜻밖의 위험에 빠진다는 호러 장르물은 그야말로 수도 없이 많습니다. 보통 마을의 비밀이 무엇인지에 재미의 초점이 맞춰지곤 하죠. 이 작품도 역시 마을의 비밀을 중심으로 전개되는건 마찬가지에요. 그야말로 한가운데 직구 승부지요. 

그런데 직구의 구위가 정말 엄청납니다. 비밀이 일종의 고대 괴물에 대한 의식과 관련이 있다는 설정에 "혼혈"이라는 요소를 추가해 변화를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한밤중에 인스마우스를 탈출하는 과정의 묘사는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대단합니다.

다만 후반부는 아쉽습니다. 이야기가 산으로 가버리거든요. 마지막에 어설픈 변화구 하나 섞다가 역전 홈런을 허용한 기분이에요. 그만큼 작위적일 뿐 아니라 설득력도 전무한 반전이었습니다. 차라리 자살했다는 큰아버지 이야기를 앞부분에 복선으로라도 살짝 넣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말이죠.

정말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긴박감과 그로테스크한 묘사는 러브크래프트라는 작가 이름에 값하지만, 어설픈 마무리는 실망스럽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벽속의 쥐"

저주받은 혈통과 그 비밀을 파헤치는 고딕 호러물로 이 바닥의 거장인 포만큼의 현란한 묘사는 아니지만,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함 묘사는 더 뛰어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발군이었습니다. 고대에서 시작된 저주받은 의식의 스케일도 엄청나고요.

그러나 후반부의 각성과 뒤이은 결말은 너무 갑작스러웠습니다. 가문이고 뭐고 다 잊은 채 미국에서 한 재산 모은 후손이 저주의 현장을 보자마자 각성한다? 너무 설득력이 없잖아요. 이럴 거였다면 전문가로 이루어진 발굴팀은 대체 왜 등장시켰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초·중반부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한 용두사미 결말인데, 차라리 앰브로즈 비어스처럼 짧게 마무리하는 게 좋았을겁니다.

"어둠 속의 속삭임"

시골 지주 에이크리가 신비학자 월모트에게 보낸 편지와, 홍수 때 발견된 기묘한 생물체의 사체 목격담에서 시작되는 작품입니다. 이 생물체들이 명왕성에서 온 외계인이라는 진상과 함께, 에이크리의 비참한 종말 또는 상상으로 끝맺는 SF - 호러입니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묘사는 역시 발군입니다. 정말 이 작가의 괴기스러운 묘사는 타고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예요. 그러나 후반부 급작스러운 에이크리의 편지에서부터 이어지는 결말은 너무 뻔하고, 상상력의 범주 안에 있어서 아쉬웠어요. 극적 반전이 대단할 필요는 없지만, 너무 예상대로 전개되는 것도 문제지요. 덧붙여 밝혀지는 외계인들의 정체도 식상했고요.

뇌를 담는 원통과 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을 그려낸 상상력은 현대 SF에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결말은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월모트의 탈출이 별로 긴박하게 그려지지 못한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크툴루가 부르는 소리"

앞선 이야기들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크툴루 신화를 전면에 드러낸 정통 그로테스크 호러 작품으로 단편집의 메인 수록작입니다. 

주인공의 학술적 탐구를 통한 수기 형식으로 쓰여져 있어서 상당한 수준의 설득력을 보입니다. 물론 몇몇 인물의 증언에만 기대고 있다는 약점이 있기는 하나, 천재 조각가, 경찰, 선원 등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이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는 전개는 지금 읽어도 압도적이에요.

무엇보다도 태고의 신이 별자리가 제자리로 돌아올 때 다시 지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이만큼이나 설득력 있게 묘사했다는 점이 러브크래프트의 진정한 능력 아닐까요? 노르웨이 뱃사람의 기록을 통해 밝혀지는 신화적인 유적지와 크툴루에 대한 묘사는 너무 대단해서 말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학술적 탐구에 이어 일종의 유언으로 끝나기 때문에 급작스럽기도 하고, 완결된 이야기라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는 게 단점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생명력을 가진 채 수없이 모방되고 인용되는 거대 서사의 기원이라는 점에서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06/08/21

내이름은 콘래드 (This Immortal) - 로저 젤라즈니 / 곽영미, 최지원 : 별점 4점

내 이름은 콘래드 - 10점
로저 젤라즈니 지음, 곽영미.최지원 옮김/시공사

지구가 핵전쟁으로 거의 멸망하고 타이탄과 화성 등지에 이주해 있던 이주인들이 외계인 베가인들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연명하여 지구도 베가인들과 테일러에 있는 부재자 정부를 통해 타격받지 않았던 지역을 중심으로 지배되는 시기.
지구 정부의 예술 유적 문서 보존국의 국장 콘래드 노미코스는 코르트 미슈티고라는 중요한 지위의 베가인의 지구 관광을 가이드할 것을 명령받고 래드폴이라는 저항 단체의 수장 도스 산토스와 경호원 하산 등 수상쩍은 인물들과 이집트와 그리스 등을 경유하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콘래드 노미코스는 수백년을 살아온 인물로 일찌기 래드폴을 결성하여 지구정부와 베가인들에 대항했었고 그 이외에도 수많은 전설을 남긴 인물. 그는 이 여행에 뭔가 숨겨진 의미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미슈티고의 경호를 강화하지만 수많은 위험이 그들을 기다리게 되는데...


젤라즈니 선생의 첫 장편입니다. 좋아하는 작가라는 이야기를 몇번 한 것 같은데 지금 와서 읽었다고 하니까 좀 늦은 감도 있고 창피하기도 하지만 어쨌건 완독하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네요.
다른 장편이었던 "신들의 사회"는 동양권, 그 중에서도 주로 인도 신화와 관련된 이야기가 펼쳐졌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리스 신화 중심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예를 들자면 주인공인 콘래드의 설정 -불노불사의 인물인것 같다는 것과 타고난 괴력과 체력, 그리고 독특한 외모- 은 그리스 신화의 한 영웅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온 것 같고, 콘래드가 외계인 관광 가이드(?)를 하며 펼치는 괴물, 식인종들과 벌이는 모험 역시 헤라클레스의 모험과 굉장히 유사하죠. 심지어 식인종 우두머리의 이름은 "프로쿠루스테스" (침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죽였던 신화속 악당) 이기까지 하니까요.
하지만 신들의 사회는 신들 그 자체의 이야기가 중심인데 비해 이 작품은 "인간" 의 이야기로 전개되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개인의 능력이나 파워, 그리고 불노불사의 존재라는 것은 물론이고 한 개인이 범 우주적인 거대한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것 자체를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자기 자신이 시도한 노력이 지금 와서는 무의미한 것으로 보인다라는 전개는 달리 생각해 본다면 "초인 로크"와 가장 비슷할 것 같네요. 히지리 유키가 이 작품에서 뭔가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개인적으로는 콘래드가 자신의 신성이나 영웅성을 거부하고 한 인간으로 남은 이후에 장편이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것이 굉장히 특이하면서도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전체적인 스케일 자체는 작아졌지만 오히려 더 현실감있게 와 닿는 설득력있는 전개가 된 것 같거든요. 외계인에 대항해 싸우는 슈퍼 히어로물보다는 전 이쪽이 훨씬 마음에 들더군요. 뭐 중간중간에 불필요한 액션 장면이 너무 길고 특히 "흑수"라는 존재와의 마지막 사투는 너무 우연에 의지하는, 뜬금없는 감이 있지만 읽는 재미는 확실한, 젤라즈니 선생의 필력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수작이라 생각합니다.

뒷부분에 같이 수록된 "프로스트와 베타" 역시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SF적으로 풀어낸 걸작이죠. 물론 저는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에 수록된 버젼으로 이미 읽긴 했지만 이 책에는 번역가가 관련된 정보를 잘 제공해 주고 있어서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 같네요. 하여간 아직 젤라즈니 선생의 글을 접하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한번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은 책이었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2004/08/20

헤라클레스의 모험 - 애거서 크리스티 / 황해선 : 별점 2점

헤라클레스의 모험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황해선 옮김/해문출판사

알라딘 할인행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동안 구입을 미루어 두었던 해문의 빨간책 아가사 시리즈 중 읽지 않았던 단편집을 전부 구입했습니다. 제일 먼저 읽은 것은 에르큘 포와로의 "헤라클레스의 모험" 입니다. 에르큘이라는 이름과 헤라클레스를 연결시켜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의 12가지 모험을 재구성하여 이루어진 작품집이죠.
  1. 네메아의 사자
  2. 레르네의 히드라
  3. 아르카디아의 사슴
  4. 에리만토스의 멧돼지
  5. 아우게이아스 왕의 외양간
  6. 스팀팔로스의 새
  7. 크레타섬의 황소
  8. 디오메데스의 말
  9. 히폴리테의 띠
  10. 게리온의 무리들
  11. 헤스페리스의 사과
  12. 케르베루스를 잡아라

라는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의 모험의 제목을 그대로 딴 12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포와로가 12가지의 사건 (모험?)을 해결하는 내용입니다.

이 중 비교적 괜찮았던 작품은 탈옥한 흉악한 죄수가 숨어든 고립된 호텔에서의 범죄를 다룬 4편 "에리만토스의 멧돼지"와 유전되는 광인의 피를 괴로워하는 젊은 청년과 그의 아버지의 비극을 다룬 7편 "크레타섬의 황소", 도난당한 루벤스의 그림과 실종된 여학생의 연관성을 다룬 9편 "히폴리테의 띠" 입니다. 트릭이나 설정, 전개가 무난한 편이고 추리적인 재미, 이야기의 전개도 깔끔하거든요.
강아지 도난 사건을 다룬 1편 "네메아의 사자"와 소문의 무서움을 다룬 2편 "레르네의 히드라", 한눈에 반한 금발머리 하녀를 찾아달라는 정비공의 의뢰를 다룬 3편 "아르카디아의 사슴", 저질 신문의 스캔들 폭로때문에 두려워 하는 정치가의 이야기인 5편 "아우게이아스 왕의 외양간", 한 부자가 잃어버린 골동품 황금잔을 찾는 11편 "헤스페리스의 사과"는 소품 느낌이 강한 범작들이었어요. 비교하자면 다른 가벼운 소품 단편집이었던 "리스터데일 미스테리"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간단한 사기극을 보여주는 6편 "스팀팔로스의 새"와 8편 "디오메데스의 말"은 설정 자체가 억지스러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며, 사이비 교주와 의문의 연쇄 살인사건이 등장하는 10편 "게리온의 무리들"과 포와로의 예전의 사랑! 백작부인이 깜짝 출연하는 마약범죄물 12편 "케르베루스를 잡아라"는 그야말로 최악의 작품들이었습니다.
특히 10편 "게리온의 무리들"은 신화와 최대한 비스무레하게 설정하려는 캐릭터들은 좋았지만 사이비 종교 교주의 살인 트릭이 여사님답지 않은 대충대충 느낌이 강해서 12편 중에서도 가장 형편없는, 수준 이하의 작품이었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제가 읽은 여사님 작품들 중에서는 가장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여사님의 욕심이 과했던 걸까요?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신화에 끼워 맞추려는 억지성이 짙고 기대만큼의 재미와 트릭, 추리적 흥분을 가져다 주는 작품은 부족한 기대이하의 단편집입니다.

2004/05/28

트로이 - 볼프강 페터슨 : 별점 2점


고대 그리스, 가장 잔인하고 불운한 사랑에 빠지고 만 비련의 두 주인공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올란도 블룸)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다이앤 크루거).
사랑에 눈 먼 두 남녀는 트로이로 도주하고, 파리스에게 아내를 빼앗긴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 (브렌든 글리슨)는 치욕감에 미케네의 왕이자 자신의 형인 '아가멤논'(브라이언 콕스)에게 복수를 부탁한다. 이에 아가멤논은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규합해 트로이로부터 헬레네를 되찾기 위한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나 전쟁의 명분은 동생의 복수였지만, 전쟁을 일으킨 진짜 이유는 모든 도시 국가들을 통합하여 거대한 그리스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이었다.
그러나 '프리아모스' 왕(피터 오툴)이 통치하고 용맹스러운 '헥토르' 왕자(에릭 바나)가 지키고 있는 트로이는 그 어떤 군대도 정복한 적이 없는 철통 요새. 트로이 정복의 결정적인 키를 쥐고 있는 것은 불세출의 전쟁 영웅 위대한 전사 '아킬레스' (브래드 피트) 뿐. 그러나 아킬레스는 전리품으로 얻은 트로이의 여사제 브리세이스(로즈 번)를 아가멤논 왕이 빼앗아가자 몹시 분노해 더 이상 전쟁에 참가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고 칩거해버린다. 아킬레스가 전의를 상실하자 연합군은 힘을 잃고 계속 패하게 되고 트로이의 굳게 닫힌 성문은 열릴 줄을 모른다. 병사들이 점차 지쳐갈 때쯤, 이타카의 왕인 지장 오디세우스(숀 빈)가 절묘한 계략을 내놓는다. 그것은 바로 거대한 목마를 이용해 트로이 성을 함락시키자는 것...

보기가 망설여졌던 영화입니다. 평이 워낙에 안 좋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의외로 재미있더군요! 일단은 “전쟁” 보다는 인간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 전개 방식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여러 주요 등장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방식은 큰 전투 위주의 기존의 대하 역사극과는 사뭇 다른 전개를 보여주는데 나름대로 괜찮더라고요. 아킬레스와 헥토르를 중심으로 각 등장 인물들을 어느 정도 비중 있게 묘사하지만 이야기의 밀도가 별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마음에 들고요. 이런게 감독의 역량이겠죠.
배우들의 캐스팅도 좋은 편입니다. 무엇보다 “에릭 바나!” 헥토르 역의 에릭 바나는 이 영화 최고의 수확이에요. 헐크에서는 몰랐지만, 서사 시대극에 어울리는 외모와 진지한 카리스마 곁들여진 연기를 통해 헥토르라는 캐릭터를 정말 근사하게 보여줍니다. 광신자이지만 자비롭고 현명한 왕 프리아모스 역의 피터 오툴이라던가, 나오자마자 아킬레스의 일격에 죽어버리기는 하지만 WWE 스타 출신의 레슬러 네이선 존스도 반가왔어요.

하지만 2억불이나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기대보다 대작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은 것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춘 탓이죠. 딱히 전투씬이 압도적으로 그려지거나 하지 않아서 스펙터클은 기대 이하입니다.
그리고 기존 신화를 각색한 방향성에도 문제가 많아요. 신화적인 요소를 철저히 배격하고 인간 중심의 새로운 역사극으로 각색한 것, 또 아가멤논이라는 캐릭터를 최대의 악역으로 설정한 것은 나쁘지 않은데 몇몇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감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다른 여러 매력적인 영웅들이나 신들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아쉽습니다. 트로이의 목마가 너무도 시시하게 그려져서 극의 긴장감이 많이 떨어지는 것도 단점이고요.
무엇보다 주인공 아킬레스 역의 브래드 피트가 제일 문제에요. 사실 비쥬얼만 놓고 본다면 아킬레스보다는 파리스역에 훨씬 잘 어울리는 배우라 생각되거든요. 아무리봐도 지상 최강의 전사는 아니고 달달한 “가을의 전설” 필의 로맨틱가이로 밖에는 보이지 않아서 영 와닿지 않더라고요.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던 파리스역의 올랜도 블룸도 실망스러웠으며 그리스 최고의 미녀 헬레네를 비롯한 여배우들도 다 그냥 그랬습니다. 특히나 여주인공인 브리세이스...전 처음엔 신지인줄 알았습니다. 흐....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에릭 바나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재미있게 감상했습니다만 2억불짜리 대작답지 않다는 허전함은 어떻게 해도 채우기 어렵군요. 세세한 인간 관계와 현실적인 신화 이야기는 좋았지만 2억불짜리는 그만한 스펙터클이 있어야하는 법이겠죠.

2026/03/13

봉래동의 연구 - 다나카 히로후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봉래동의 연구"

사립 덴키 학원 뒤 상세의 숲에는 ‘봉래동’이라는 동굴이 있는데, 이 동굴을 지나면 늙지도 병들지도 않고 배고픔도 없는 낙원 ‘봉래향’으로 이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져 왔다. 그러나 봉래를 찾으러 들어간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고, 동굴에는 용이 산다는 무시무시한 소문도 있었다. 
신입생 모로보시 히카루는 왕따 학생 미쓰메 토오루가 누군가로부터 봉래향의 존재를 들은 뒤 실종되자,  그를 구하기 위해 이런 정보에 정통한 민속학 연구회에 가입하여 회원들과 함께 상세의 숲으로 향했다. 수색은 실패로 끝났지만, 동급생 호시노가 봉래동의 정체를 알아내어 실종된 학생들 구출에 성공한다.

"대남무아미동의 연구"

모로보시 히카루는 학교 축제인 '히루메야마'제에서 연구회 대표로 뽑혀 오코노미야키 조리에 나섰지만 절망적인 요리 실력으로 처참히 실패했다. 팔지 못하고 남은 600장의 오코노미야키를 버리려던 히카루는 상세의 숲에 살고 있던 괴수를 만나게 되었다...

"검은 동굴의 연구"

민속학 연구회는 합숙을 위해 동북 지방의 작은 마을 기가시라 마을로 향했다. 숙소에서 모신다는 일종의 신인 '오시라사마'를 볼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낙뢰가 포함된 폭풍우로 발이 묶인 상황에서 숙소 여관의 여종업원과 주인 아들, 여주인이 연쇄적으로 살해당했다. 연구회원들은 살아남기 위해 옛날 어떤 고귀한 인물이 숨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검은 동굴’로 도망쳤다. 그리고 사건의 원흉인, 하자쿠라 기미코가 불러낸 악의 근원 스토쿠 상황과 마주쳤다...

일본 작가 다나카 히로후미(田中啓文)의 ‘학원 전기(伝奇) 미스터리 소설’인 “사립 덴키 학원 민속학 연구회(私立伝奇学園高等学校民俗学研究会)”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최근에 읽은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원서로 읽었습니다.

작품의 무대가 되는 덴키 학원의 정식 명칭은 사립 덴나카 기하치 학원 고등학교입니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개성이 강한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이며, 학교 행사와 규칙 역시 상당히 기묘합니다. 게다가 학교 옆에는 ‘상세의 숲’이라 불리는 거대한 밀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교장의 개인 소유지로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는 덴키 학원 민속학 연구회에 신입생 모로보시 히카루가 가입하면서 시작됩니다. 히카루는 개성 넘치는 연구회 멤버들과 함께 다양한 사건에 휘말리고요.
이 사건들이 ‘전기(伝奇) 미스터리’라는 명칭에 걸맞게 전설과 신화, 민속과 초자연적 존재들과 관련되어 있다는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첫 번째 이야기이자 표제작인 “봉래동의 연구”입니다.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다는 낙원 ‘봉래향’과 이어진 동굴이라는 전설이 등장하고, 민속학 연구회 멤버들은 이 전설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는데 그 중 하나가 봉래동에 산다는 ‘용’은 ‘출세소라’라는 겁니다. 조개인 법라패(호라카이)가 수천 년을 살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데, 용이 빠져나간 구멍이 동굴이 되었는 해석이지요.
이후 히카루가 발견한 동굴은 도자기처럼 매끈한 재질이었고, 근처에서는 괴물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립니다. 처음에는 실제 괴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히카루의 동급생 호시노가 밝혀낸 진상은 의외의 것이었습니다. 그 동굴은 사실 거대한 조개 껍데기였으며, 실제로 출세소라의 껍데기였습니다! 괴물의 울음소리 역시 소라 껍데기를 불 때 나는 소리와 같은 원리였습니다. 거대한 껍데기 내부를 통과하는 바람이 울림을 만들어냈고, 그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괴물의 포효처럼 들렸던 거지요.
진상은 작품 속에 제시된 여러 단서와도 연결됩니다. 예를 들어 히카루가 발견한 작살은 고둥류인 이모가이가 쏘아내는 치설과 같은 것이고, 사무라이가 뱀의 몸이 되었다는 전설도 치설에 의한 피부 손상이었다는 식으로요.

이처럼 전설과 신화를 해석하는 과정이 실제 괴물의 존재와 이어지는 구조는 꽤 흥미롭습니다. 앞서 제시된 단서들이 결말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점에서 추리적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 하고요. 이 작품만큼은 이런 '전기 미스터리'의 마스터라 할 수 있는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최고작과도 견줄만합니다. 별점 3점 이상도 충분해요. 

그러나 이후 이어지는 작품들은 영 별로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인 “대남무아미동의 연구”는 상세의 숲에 오래전에 멸종된 거대 나무늘보가 살아 있었다는게 진상입니다.
문제는 괴물이 극 초반부터 등장해 버리는 탓에 미스터리로서의 긴장감이나 추리의 재미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대왕 나무늘보를 뜻하는 일본어 ‘오오나마케모노’를 일본 신화의 신 ‘오오나무치’와 연결하고, 나아가 아마테라스가 대왕 나무늘보를 길렀을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해석도 근거가 발음의 유사성뿐이라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지고요. 그나마도 일본 독자라면 어느 정도 흥미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한국 독자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는 설정이었습니다.

마지막 작품인 “검은 동굴의 연구”는 더욱 실망스럽습니다. 이야기 전반이 비슷한 발음에서 비롯된 말장난 위주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하자쿠라 기미코가 불러낸 ‘스토쿠 상황’은 ‘스토쿠인’이라는 원호로 추존되었는데, ‘스토쿠인’과 ‘스타킹’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스타킹이 흉기로 사용되었다는 식입니다. 이후 호시노가 설명하는 여러 진상 역시 비슷한 방식이라 설득력이 부족해요. 스토쿠 상황에 대한 역사적 설명도 그 자체는 흥미롭지만,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요.

만화적인 설정과 분위기도 감점 요소입니다. 배경이 되는 덴키 학원부터 시작해서 고무술 ‘코마’의 후계자이자 엄청난 대식가인 모로보시 히카루, 천재이지만 흥분하면 반말을 하는 호시노, 미신 때문에 머리를 절대 자르지 않는 연구회 부장 이즈미야, 역사광이자 스모 도장의 후계자로 촌마게 머리를 하고 다니는 부부장 시라카베, 미모의 여장남자 이누즈카 등 주요 인물들의 설정 모두 만화적입니다. 등장인물들의 언행 역시 현실적인 느낌보다는 과하게 코믹해서 만화적이기는 마찬가지고요.
여러모로 전반적인 분위기도 가볍기 그지 없는 탓에, 전설과 고전, 역사 이야기를 풍부하게 끌어다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인상은 본격 미스터리보다는 라이트 노벨에 가까운 장르물이라는 느낌을 전해 줍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봉래동의 연구”만큼은 괜찮지만, 뒤의 두 편이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데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만화적인 정서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될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만약 번역되어도 “봉래동의 연구” 한 편만 읽어 보아도 충분합니다.

2003/12/15

낙원 - 스즈키 코지 : 별점 1점

낙원 - 2점
스즈키 코지 지음/씨엔씨미디어
스즈키 코지의 일본 팬터지 노벨 2회 대상 수상작이자 데뷰작.

"링"류의 작품을 기대했었는데 오산이었습니다. 팬터지 노벨 수상작답게 신화의 세계에서부터 현대까지 1만년에 걸쳐 이어지는 팬터지 사랑이야기더군요. 우리나라 작가 양귀자 씨의 "천년의 사랑" 까지는 아니더라도 동양인에게 친숙한 윤회설과 많이 맞닿아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은행나무 침대"도 떠올랐어요.

동양계 핏줄의 기원에서부터 이야기를 진행시켜 동양인 주인공의 윤회설에 바탕을 둔, 그리고 종족 기원과 대륙 이동까지 들먹이는 거대한 스케일의 사랑이야기를 쓰려고 한 의도는 좋았는데..... 도대체 신화의 세계와 유럽의 대항해 시대, 현대의 뉴욕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최소한의 설명도 하지 않고 단순히 독자의 상상에 의존하는 전개는 심히 불쾌하고 내용의 비약이 너무 많아서 지루했습니다.

스즈키 코지라도 대표작 이외에는 아니다 싶은 작품도 있는 법이군요. 결론적으로, 제가 보기에는 천재의 데뷰작답지 않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혹 재미있게 읽으신 분들껜 죄송하지만... 제 취향은 이쪽이 아닌가 봐여....

2010/02/06

꼭두각시 오데트 (전6권 완결) - 스즈키 주리에타 : 별점 2점

꼭두각시 오데트 6 - 4점
스즈키 주리에타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악마와 돌체"로 먼저 알게된 스즈키 주리에타의 실질적 연재 데뷰작입니다. 천재 과학자가 만든 로봇 오데트가 인간의 감정을 배워가며 사랑을 알게 된다는 내용의 작품이죠.

이러한 인간 외의 존재와의 사랑 이야기는 정말 쎄고 쎘습니다. 전설이든 신화든 만화든 영화든 수백개의 예를 들 수 있을 정도죠. 그리스 신화 "피그말리온"에서부터 이어져 온 수 천년 된 컨셉이니까요. 하지만 이 다른 존재가 "인간"으로 화하지 않는다면 비극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어쨌건 사람은 나이를 먹고, 죽을 수 밖에 없잖습니까. 그러나 이 만화는 별다른 고민없이 오데트는 결국 로봇일 뿐이다...라는 결론으로 너무 쉽게 끝맺습니다. 필연적일 수 밖에 없는 비극적 결말을 피하기 위해 상대역인 이사오와의 애정 관계도 애매하게 처리하고 있고요.

오데트라는 무표정한 안드로이트 캐릭터는 잘 잡아내고 있고, 여성 작가 특유의 연애 감정에 대한 심리 묘사, 이사오와의 감정 줄다리기 등의 디테일, 개그 센스와 대사들도 적절해서 재미는 있었지만 발상과 전개 모두 지나치게 쉽게 흘러간 느낌입니다. 첫 연재작이라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겠지만 아쉬운 부분입니다. 물론 진지하게 흘러가면 흘러갈 수록 "스톱! 히바리군"의 예처럼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정리할 확률이 더 높았겠죠. 그렇지만 최소한의 고민이라도 해 주었으면 싶었는데 그러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기껏해야 별점 2점정도 수준이라 생각됩니다.

5권에 등장한 외전격인 폭탄내장 암살로봇 크리스 10호 에피소드는 깔끔하니 완성도가 높았는데, 역시 이런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야 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군요. 이 에피소드만은 별점 3점.

2010/12/02

주석 달린 셜록 홈즈 2 - 아서 코난 도일, 레슬리 S 클링거 / 승영조 : 별점 3점

주석 달린 셜록 홈즈 2 - 6점
아서 코난 도일 원작, 레슬리 S. 클링거 주석, 승영조 옮김/북폴리오

"주석 달린 셜록 홈즈 1권"에 이어 드디어 2권마저도 완독했습니다. 1권 못지않은 무게와 두께 덕분에 들고 다니기는 어려워서 침대에 모셔두고,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에 한 편씩 읽었습니다. 한 달 정도 걸렸네요.

2권 역시 1권과 마찬가지로 단편집 "돌아온 셜록 홈즈", "그의 마지막 인사", "셜록 홈즈의 사건집"에 실린 작품들을 상세한 주석과 자료를 추가하여 편집해 놓았습니다. 단편들은 이미 이전에 다 읽었지만, 관련된 다양한 주석과 해설, 여러 자료가 곁들여지니 보다 깊이 있는 독서가 가능해서 좋았어요.

그러나 1권에서도 느꼈던 점이지만, 너무 '셜록 홈즈'와 관련된 사건 및 등장인물을 실존 인물인 것처럼 해석하는 주석은 과도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신화는 신화대로 두면 좋을 텐데,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정체를 분석하고 다양한 학설을 덧붙이고 있거든요. 덕분에 불필요하게 내용이 길어지기도 했고요. 물론 이런 부분이야말로 이 책의 존재 이유이자 주요 재미 요소이니 비판은 온당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요. 저 역시 한 달 동안 즐겁게 읽었으니 만족합니다.

그래도 1권에 비해 자료적 가치가 높은 주석이나 해설은 다소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1권은 할인된 가격에 구입했는데 2권은 정가로 구매했다는 점(!)이 약간 아쉬웠습니다.(물론 제 개인적인 기분 문제이긴 합니다만...) 별점은 3점입니다. 셜록 홈즈의 팬이시라면 장식용으로라도 추천드립니다. 두 권이 나란히 책장에 꽂히니 보기만 해도 풍성하니까요.

덧붙이자면, 셜록 홈즈의 열렬한 팬이 아니라면 일반 단편집 세트를 구입하시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 책 한 권의 가격이면 전집 9권 풀세트를 장만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으며, 방대한 주석도 어떤 면에서는 허황된 논의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셜록키언'을 위한 책입니다. 그리고 주석이 많은 만큼 찾기도 어렵고 가독성이 떨어지는 점을 고려할 때, 향후 이러한 스타일의 주석·해설서는 전자책으로 출간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네요. 검색의 용이성과 하이퍼링크 활용도가 훨씬 높아질 테니까요.

2021/01/29

빵의 지구사 - 윌리엄 루벨 / 이인선 : 별점 2.5점

빵의 지구사 - 6점
윌리엄 루벨 지음, 이인선 옮김, 주영하 감수/휴머니스트

얼마 전 "향신료의 지구사"를 읽고 탄력받아 한권 더 집어든 '지구사' 시리즈입니다. 이 시리즈도 이제 여덟 번째 리뷰군요. 시리즈 완독까지는 두 권 남았네요.

그 동안 읽었던 '지구사' 시리즈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건 "커리의 지구사" 였습니다. '커리'가 무엇인지에서 시작해서, 커리의 역사와 세계화된 과정, 대표적인 커리 요리까지 화려한 도판과 함께 짤막하면서도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리즈 다른 책들은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고요.

물론 아주 건질게 없는건 아니에요. 특히 이 언제, 어디서 생겨났는지?에 대한 설명은 마음에 듭니다. 어떤 빵을 어떻게 만들었을지에 대해 관련 사료를 통해 잘 알려주고 있는 덕분입니다. 특히 농경 생활을 택한 뒤 빵을 먹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수렵과 채집 생활에 비해 부정적이었다는 시각이 독특했습니다. 예를 들어, 장 자크 루소는 농경 도입으로 노예 제도가 생겨났다고 주장했고, 창세기를 다룬 구약 성경과 유대 신화에서도 농업은 부정적이었다고 하네요. 최초의 농부였던 카인은 가장 처음 살인을 저지르고, 하느님에게 거짓말을 하며, 비자발적 노역으로 도시를 세운 인물로 그려졌기 때문이랍니다. 유대 신화에서는 불신의 상징인 저울과 자를 끌어들였고요. 그럴듯하죠? 

하지만 농경 생활은 필연적이었고, 결국 이 덕분에 문명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이를 '빵'과 연결하여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게 우르크 발굴 결과를 토대로 한 설명입니다. 기원전 3200년경, 이라크 남부 지방에서 농경지에 효과적으로 물을 대는 중앙관개농법이 발달하면서 '잉여 생산물'이 쌓이게 되었고, 그 덕분에 전 인구가 농사에 매달리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으며, 결국 분업과 전문화가 진행되어 인구가 3만명에 달하는 대도시로 진화했다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고대 빵 역사에 대한 자세한 서술에도 불구하고,밀의 종류, 배합, 이스트의 종류 등을 모두 정확하게 알아낼 수 없어서 현재 어떤 빵인지 재현하는건 어렵다고 하는 주장도 신기했습니다. 고대 이집트, 로마 시대 등 빵에 대해 많은 자료가 남아 있는 시대 모두 마찬가지라고 하니까요. 저자의 말에 따르면 재현이 가능한 빵은 근세시대 (1500년 이후)에 처음 등장한다는군요.

이러한 빵의 탄생 이후는 부자와 빈자가 빵으로도 구분되는 시기에 대한 설명도 기억에 남습니다. 저버스 마컴의 "영국 주부" (1615) 속 하류층 농장 노동자를 위한 갈색 빵 레시피가 아주 충격적이기 때문이에요. 특징은 완두콩 가루를 섞은 것인데, 놀랍게도 저자 마컴이 경주마에게 먹이는 빵보다도 못한 빵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뒤 재료, 맛 모두가 별로였던 하위 계층의 빵은 당연히 상위 계층은 거부해 왔는데. 이 현상이 빵의 역사를 이끌었다고 보는 저자의 주장은 잘 와 닿지는 않습니다. 16세기 ~ 18세기 흰 빵은 부의 상징이며 갈색 빵은 가난의 상징으로, 이런 상징은 저도 당시를 다룬 소설 등에서 많이 접해보았었습니다. "하이디"에서도 '하얀 롤빵'이 선망의 대상이었죠?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호밀빵을 멀리하는건 현대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이건 모든 식품, 사치품, 기호품에 해당되는 내용이 아닌가 싶어요. 구태여 '빵'에 한정지을 이유는 없습니다.

또 맛있는 빵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도 별로에요. 밀가루의 종류, 발효 방법, 설탕을 넣는지 소금을 넣는지 등 다양한 빵 제조법을 소개하는 내용이 대부분인데, 설명은 깔끔하지만 기대했던 지구사적인 설명은 아니었거든요. 좀 더 빵의 역사에 대해 파고들줄 알았는데 말이죠.

이어지는 세계의 빵 소개는 더욱 실망스럽습니다. 그냥 국가별 빵 몇 가지가 등장할 뿐이며, 미래의 빵도 자가 제조 기계가 발전하고 공장제 빵도 진화할거라는 일반적인 이야기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제 특성상 유럽 중심의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점도 약점이에요.

다행히 부록처럼 수록된 주영하의 한국 빵 역사가 실망을 조금은 만회해 줍니다.조선 시대 이기지가 청나라 연행길에 먹었던 카스테라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일제 시대 널리 퍼졌던 빵 문화가 해방과 6.25 후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잘 요약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제과제빵의 거목인 삼립 식품과 크라운 제과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아주 나쁘지는 않고, 얻을게 없지도 않지만 제목처럼 빵의 범지구적 역사를 다룬 책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습니다.

2015/10/15

군화와 전선 2- 하야미 라센진 / 성동현 : 별점 2.5점

군화와 전선 2 - 6점
하야미 라센진 지음, 성동현 옮김/이미지프레임(길찾기)

하야미 라센진의 판타지 밀리터리 만화 2권, 완결권입니다.

나쟈와 바센카 콤비가 동부전선에서 독일군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가 옴니버스 단편물로 수록되어 있다는 건 1권과 같습니다. 특징이라면 러시아 고유 신화와 전설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고요. 신성한 곰, 물가에 사는 정령 루살카, 파르티잔 리더 "승리의 유리"(성 게오르기), 악령 쵸르트, 여름의 정령 폴루드니차, 전설의 영웅 일리야 무로메츠와 불사신 코시체이, 괴물 솔루베이 라즈보이닉, 집에 사는 노파 요정 키키모라, 성녀 파트니차, 머리 셋 달린 악룡 즈메이 고리니치(킹기도라?) 등 마지막 편을 제외하면 모든 이야기에 러시아산 정령과 영웅들이 등장합니다. 이는 1권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2권에 등장하는 신화와 전설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이야기, 특히 "전쟁"에 개입해 드라마를 만들어간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설의 영웅들이 러시아의 승리를 위해 싸우기 때문입니다.
또 2차대전과는 관계없이 마지막 결말에서 나쟈가 "죽음"과 한 판 승부를 벌여 바센카를 구해내는데, 여기서 약간 백합물스러운 느낌을 전해주는 것도 나름 괜찮았습니다. 작가가 노린 듯싶기도 합니다.

다만 1권보다는 아무래도 신선함이 떨어진다는 점, 마녀 바센카의 활약보다는 이런저런 정령과 요정들의 활약이 주가 된다는 점은 단점입니다. 2권 만에 완결된 것도 작가가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무엇보다 작품의 매력이라 할 수 있는 일러스트 칼럼의 재미가 많이 반감된 것은 정말 아쉬웠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 군복이나 혁명 전 프랑스 드레스, 여걸들, 중세와 근대 유럽의 식사와 일본의 식사 등 다양한 소재를 망라해 소개하고 있는데, 작가의 넓은 지식은 충분히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그다지 관심이 가는 소재들이 아니었습니다. 1권에서는 러시아산 무기나 각종 장비 등 관심거리가 많아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게다가 글이 너무 빽빽해서 읽기조차 힘든 점도 문제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무난한 수준이지만 1권보다는 재미와 신선함 모두 부족했기에 감점합니다. 그래도 깔끔하게 완결된 점 하나만큼은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2005/11/01

신화 진시황릉의 비밀 - 당계례 : 별점 1.5점


고고학자 잭은 친구인 물리학자 윌리엄의 요청으로 고대의 "무중력"세계를 구현했던 유적지를 찾아 그 수수께끼를 풀려 한다. 하지만 이 수수께끼에 다가갈 수록 자신이 계속 꾸는 진시황 시절 몽 장군과 옥수 공주의 사랑에 대한 꿈과 겹쳐지는 것을 느끼게 되고, 결국 꿈에서 본 장소인 한 폭포 속에서 완벽한 무중력으로 구현된 진시황의 지하 궁전을 발견하게 되는데...

공사가 다망한 관계로 (?) 포스팅이 뜸했네요. 짬내서 주말에 본 성룡의 최신작입니다.

사실 성룡 영화를 저도 예전에는 매년 놓치지 않고 봤었지만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슬슬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중안조" 이후의 영화는 안 본 영화가 더욱 많은 것 같네요. 이유야 여러가지이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성룡의 유머가 슬슬 사라지면서 영화의 재미가 많이 떨어졌다는 느낌이 강했거든요. 왠지 유머와 재치를 돈으로 커버하려 한 듯한 느낌이 많이 나서 싫어지더군요.

그런데 이 영화 역시 제가 싫어한 부분을 극대화해서 답습하고 있습니다. 성룡의 유머와 재치는 거의 드러나지 않고 액션도 성룡 특유의 아크로바틱 코믹 액션은 묘지에서의 액션과 끈끈이 공장에서의 액션, 딱 2장면에서만 드러나고 나머지는 흔해빠진 중국 무협 영화의 도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서 불만스럽고요. 제일 용서가 안되는건 클라이막스의 액션을 와이어로 땜빵한거에요. 이건 성룡이 아니야!
이야기도 당위성과 설득력 모두 굉장히 부족할뿐더러 "불사의 약"에 관련된 시공을 초월한 사랑과 윤회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진용"에서 써먹은 것이라는 점, 그리고 식상해진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10여년 전에 발표된 "진용" 쪽이 이야기의 밀도나 설득력은 훨씬 높다는 것 역시 당황스러운 점이었어요. 이야기가 해피엔딩이었으면 좀 더 마음에 들었을지 모르는데 언해피 엔딩이라는 것도 별로였고 말이죠. 게다가 악당역의 "구선생"이 왜 무공 고수인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해 불가능의 영역입니다. 떡하니 등장해서 최고수의 무예를 급작스럽게 선보이니 기가 막힐 뿐이죠. 중국은 쿵후 고수만 교수를 할 수 있나?
이러한, 10여년 전에서 전혀 발전하지 못한 전개와 설정은 빼 놓더라도 장예모 쪽이 성룡보다는 더욱 진나라 무사에 어울리는 비쥬얼이라는 문제도 큽니다. 성룡은 아무리 생각해도 외모상으로만 본다면 미스 캐스팅이에요.

그래도 무중력에 관한 접근이 진시황릉의 비밀로 이어지는 과정과 그것을 구현한 상상력 하나는 꽤 괜찮았다고 보여지고, 김희선의 연기는 잘 모르겠지만 비쥬얼 하나만큼은 정말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성룡도 몇몇 장면에서 나이를 잊은 듯한 모습과 액션을 가끔 보여주는만큼, 성룡과 김희선의 팬이라면 볼 만한 수준의 영화라 생각되긴 합니다. 그래도 대단한 팬이 아니시라면 TV에서 방송할 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 훨씬 낫을거에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1/02/19

빵의 역사 - 하인리히 야콥 / 곽명단, 임지원 : 별점 3.5점

빵의 역사 - 8점 하인리히 야콥 지음, 곽명단.임지원 옮김/우물이있는집

이전 올렸던 "빵의 지구사" 리뷰에 댓글로 홍차도둑님이 추천해 주셔서 읽게 된 세계사, 식문화 서적입니다. 새로 복간된 버젼은 아니고 예전에 절판되었던 버젼입니다. 

그런데 '빵의 역사'라는 제목과는 담고 있는 내용이 달라서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농사'와 '농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희생되고 숨겨진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집트부터 책이 쓰여진 2차대전 이후까지 주요 문명별로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담고 있는 내용이 무척 깊고 넓어서 간략한 리뷰로 정리하기는 불가능한 역작입니다만 저자 주장의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보자면, 일단 처음 '빵'(효모로 부풀리는)과 '오븐'이 태어난 이집트는 모든게 신성화된 왕의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관료가 엄청 많을 수 밖에 없어서 농업에 기반을 둔 농업 국가였음에도, 모든 영광은 관료들이 차지했습니다. 농민들은 농노에 가까왔지만 신성화된 왕에게 소유됨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서 문명은 잘 유지되었지요.

반면 그리스 문명은 토지 특징 상 농업이 주가 될 수 없었습니다. 곡물은 주로 수입에 의존했어요. 저자는 '황금 양털 가죽'을 찾아 모험을 떠난 이아손과 영웅들은 곡물상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대신 목축이 주였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나 서사시에서 소유한 가축의 양과 질로 부유한지 아닌지가 결정되었다는걸로 알 수 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하룻만에 아우게이아스의 마굿간을 청소한 신화도 그들이 농사를 짓지 않았다는걸 의미한다네요. 농부였다면 소중한 퇴비의 재료가 되는 마굿간 퇴적물을 물로 씻어 버렸을리가 없다는 이유인데,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솔론의 개혁으로 토지가 분배되었고, 그 덕분에 농민들이 아테네를 다스리게 됩니다. 사유지 확장을 금하고, 정해진 이상의 개인 토지를 몰수한 이 법은 소농들 권한을 강화시켜 아테네를 농업 민주 국가로 변모시켰고, 농민 신분도 상승했습니다. 대지와 곡식, 그리고 '빵'의 여신 데메테르를 숭배하는 엘레우시스교가 아테네의 국교가 될 정도로요. 엘레우시스교는 뒤이은 로마에서도 나름 건재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이 토지를 점차 장악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농지 분배를 받지 못한 뒤 로마 토지는 이윤이 많이 남는 축산업에 활용되고, 곡물은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주로 아프리카 정복지를 통해 수입되었죠. 그러나 반달족 습격으로 아프리카를 잃고, 유대 지방 곡물의 수탈이 시작되자, '농업인' 예수가 세력을 넓히지만 로마에 의해 살해당하게 됩니다.

로마가 식량 부족으로 동과 서로 나뉜 뒤, 북방 민족이 로마 제국 영지를 차지합니다. 목축 중심이었던 그들의 경제 활동이 농사로 바뀐 건 필연이었어요. 6인 가족의 중앙 아시아 유목민이 보통 환경에서 생활하기 위해서 가축 300마리가 필요하다니, 굶어죽지 않으려면 당연했겠지요. 그러나 농사를 싫어하는 민족 특성으로 로마식 노예 제도가 이 때부터 뿌리내리게 됩니다. 그래도 중세 초기에는 지주는 농노를 잘 보살폈습니다. 일을 잘 하게 만들기 위함으로, 자유민들도 군복무를 하지 않고 안전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농노가 되었고요. 

농민들이 그나마 살 만 했던건 이 시기까지였습니다. 곧바로 가진자들의 수탈이 시작됐거든요. 도시 문명이 발달하며 도시민, 상인, 그리고 길드 소속 장인들 권리는 신장되었지만 농민들의 노동은 홀대받았습니다. 이는 '농사는 아담과 이브가 죄를 저질러 낙원에서 쫓겨난 탓에 어쩔 수 없이 종사해야 했던 원죄'라는 기독교적 사고 방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탓으로 설명됩니다. 결국 13세기, 농민들에 의한 봉기가 일어났지요. 그런데 조금 재미있는건 당시 종교 개혁이 이 농민 봉기와 관련이 있다고 해석한 부분입니다. 교회의 토지 수탈을 비판하던 종교 개혁가들이 농민 편에 섰기 때문이라는군요. 그러나 놀랍게도 종교 개혁의 핵심 인물 루터가 배신(?)한 탓에 봉기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루터의 교회도 수탈로 토지를 확보했을 뿐더러, 루터가 책임 전가를 겁내어 자기를 추종했던 농민 전쟁 참가자들을 배신했던 걸로 보입니다. 봉기 실패 이후 농민들은 더 가혹한 삶을 강요받게 되었고요.

저자는 농민들의 미대륙 이주를 이러한 처절한 삶을 탈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던, 즉 독립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지주와 농민 세력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요. 다른 국가들의 군대는 농민이 아니었지만 미국 독립군은 사실상 농민군으로, 전쟁에서 질 경우 모든걸 잃고 다시 도망쳐 나왔던 대토지 소유 제도 하에서 고통받아야 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박에 없었다는 해석이지요. 이 해석이라면 13세기 농민 봉기가 실패한 이유가 잘 설명되지는 않지만, 꽤 그럴싸했습니다. 농민들이 주도권을 쥐게 된 미국은 광대한 땅에서 농사를 효율적으로 짓기 위해 여러가지 참신한 시도로 세계 최대의 농업 생산국이 되었고, 결국 빵이 풍부해서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다는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유럽 정국이 요동치고, 그들이 패권을 잃은 과정 역시 저자에 따르면 농민 세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이후 농민을 포함한 민중이 이런저런 인쇄물과 매체를 통해 여러가지 '생각'을 접하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근대화에 접어듭니다. 그러나 일부 중농주의자들을 제외한 왕의 측근들이 농업보다는 상공업이 국가의 미래라고 생각했던 탓에, 기근과 가뭄이 닥쳐 방앗간에서 밀가루 생산이 멈추자 시민들이 빵을 달라며 혁명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마찬가지로 공업을 신봉한 탓에 무너졌습니다. 그는 백성과 군대가 잘 먹어야 한다는 현실 자체는 인지했지만,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곡물 수입이 막히자 패망한 거지요.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들이 일으켰다는 차이가 있지만, 노동자들은 농민들과 타협했습니다. 1921년 농민들은 농작물 세금만 납부하면 남은건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지요. 스탈린이 러시아를 공업 국가로 만들기 위해 모든 토지를 국영화하고 농민들을 집단 농장 소속 농부로 만들었지만, 이는 스탈린이 그만큼 막강한 권력을 지닌 독재자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농민들보다 강했던 파시즘이 유럽을 휩쓸었던 시기이기도 했고요.

이렇게 세계 역사의 주요한 흐름을 농민들의 존재와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통해 풀어내는게 아주 신선했습니다. 그동안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시각이었으니까요. 각 시기별로 주요한 에피소드, 인물, 콘텐츠를 인용하여 설득력도 높이고요. 

그러나 유럽 중심의 역사만 다룬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한계와 약점이 느껴집니다. "빵"이 아니라 농민 중심으로 흘러간 문명사를 쓰려는게 의도였다면 당연히 중국 역사도 포함시켰어야 했습니다. "고문진보"만 보아도 농부의 노고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노래한 고시 - “봄에 곡식 한 알 뿌리면, 가을엔 만 알의 곡식 거두네. 천하에 놀리는 밭이 없는데, 농부들은 굶어 죽는다네 (春種一拉東, 秋收萬顆子, 四海無閑田, 農夫餓死)." - 가 등장하는데 말이지요.

또 농민들의 존재, 그들의 위치로 큰 세계사 흐름을 설명하려다 보니 억지스러운 점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인게 미국 남북 전쟁은 북부가 곡물 생산량이 높아서 승리했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해석이에요. 유럽 역사에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유대 민족에 대한 비중이 높다는 점도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저자가 유대인인 탓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엘레우시스교 축제에 대한 장황한 설명같이 지루한 이야기나 주제이기는 동떨어진 이야기 비중도 만만치 않다는 단점도 큽니다. 성찬 의식에 대한 견해 차이의 역사를 서술한 부분이 좋은 예입니다. 몰랐던 내용이라 신기하긴 했으나, 이 책 주제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생각되네요.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발표 시기가 오래된 탓에 최신 정보를 담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약점이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사를 바라보게 해 주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추천해주신 홍차도둑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빵의 지구사 - 윌리엄 루벨 / 이인선 : 별점 2.5점

2004/01/29

Happy SF 03 : 신들의 사회 - 로저 젤라즈니

신들의 사회 - 8점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행복한책읽기

먼 미래의 어느 행성인 이곳에 우주선 “인도의 별”을 타고온 1세대 이주민 중 한명으로 과학 기술로 다들 신으로 군림하던 1세대인들에게 “촉진주의”의 기치를 들고 반란을 일으키나 패배한 뒤 추방당했던 "샘"을 죽음의 신 “야마-다르마”가 기계장치의 도움으로 부활시킨다. 샘은 몇번에 걸친 전투와 환생 끝에 마지막으로 제 1세대 중 한명이었지만 전 세계를 기독교화 하려는 야심가 “니리티”와 신들의 전쟁에 참전하는데…

뉴 웨이브 SF의 걸작으로 인도신화를 배경으로 한 장대한 서사 SF입니다. 힌두 신화의 신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방대한 세계관과 역사관 속에서 서양인이 잘 이해할 수 없을 불교 사상과 윤회, 전생, “업” 등등의 종교적 요소와 신들의 무기인 “열추적 미사일 = 루드라의 화살”, “우레의 전차 = 공격형 비행선”, 등 같은 SF적인 요소를 잘 결합시킨 작품이죠.

사실 힌두의 신들이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싸운다.. 라는 설정은 이제 21세기가 된 지금에는 그다지 특이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더군요. "공작왕", “3X3 eyes”도 있고, “수라왕 슈라토”도 있고 clamp의 “리그-베다 (성전)” 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책의 세계관과 역사관, 설정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냥 단순한 신들의 설정만 빌려와 전투 능력만을 강조한 후대 일본의 여타 작품들과는 달리, 온갖 동양철학과 사상을 집어넣어 방대하면서도 심오하게 묘사하고 있거든요. 그렇지만 딱딱하지만은 않고 소설적으로도 굉장히 재미있는 것이, 흡사 무협지를 읽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예를 들자면 다양한 능력과 기술로 전투를 묘사할 뿐더러 전투 와중에 설법을 교환하는 특이한 장면들이 그러합니다. 목을 조르면서 “아무도 공기를 찬미하는 자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없을 경우를 생각해 보라!” 라는 장면이 대표적이죠
샘이 “불타”의 모습으로 설법을 하는 중간부분까지는 조금 지루하지만 뒷 부분의 전투장면등은 확실히! 재미있습니다.

사람 취향을 좀 타는 책일 수도 있지만 책을 전체적으로 봤을 때, 너무나도 가볍고 얄팍한 설정의 기존 환타지에 비하면 확실히 무게감이 느껴지는 수작입니다. 물론 저도 재미있게 읽었고요. SF와 환타지를 좋아하시는 장르문학 팬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작품이 아닐까 싶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PS : 번역이 조금 딱딱해서 읽기가 좀 어렵더라고요. 더 부드럽게… 표현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2014/11/21

허큘리스 (2014) - 브랫 래트너 : 별점 2.5점

[블루레이] 허큘리스 : 극장판 & 확장판 - 6점
브렛 래트너 감독, 존 허트 외 출연/워너브라더스

이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모험으로 신격화된 영웅 "허큘리스"와 그의 동료들은 트리키아의 왕 코티스에게 고용되어 반역자 레수스와의 전쟁에 나섰다. 그러나 승리하자마자 허큘리스는 진짜 악당이자 흑막은 코티스 왕이었다는걸 깨닫는데...

한때 할리우드에서 잘 나갔지만, 최근에는 그다지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던 브렛 래트너 감독의 신작입니다. 화려하고 발랄한 액션 영화에 강했던 감독이라 고대 서사물, 이른바 에픽 영화에는 어울릴까 걱정스러웠는데, 의외로 화면은 꽤 깔끔했습니다. 전사, 궁수, 예언자 Munk(창을 다루는), 도적(단검), 광전사, 음유시인 등으로 구성된 허큘리스 파티원들이 각자의 특기를 살려 벌이는 전투 장면도 잘 만들어져 있고요. 특히 중반부, 급조된 군대를 이끌고 벌이는 야만인과의 전투에서 종족(?) 특성을 잘 활용한 전개가 인상 깊었습니다. 박빙이었던 전세가 전차 두 대에 썰리며 허무하게 끝나는 장면은 다소 당황스러웠지만요.

액션 외에도 "허큘리스가 신화 속 존재가 아니라 실존 인물일 수 있다"는 설정도 흥미를 자아냈습니다. 허큘리스의 모험은 괴물을 상대한게 아니라 가면을 쓴 인간들과의 싸움이었다는 식으로 설명되는데, 꽤 그럴듯했거든요. 오히려 이 설정을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

캐스팅도 적절합니다. 허큘리스 역의 드웨인 존슨, 일명 더 락은 비주얼적으로 정말 잘 어울렸습니다. "트로이"의 브래드 피트나 에릭 바나는 최강의 전사로 보이지 않았었는데, 드웨인 존슨은 실제로 혼자서 사자 한 마리쯤은 때려잡을 것처럼 보이니까요. 아무래도 영화 특성상 연기력보다는 이런 외모가 훨씬 중요하지요. 그 외 캐스팅도 존 허트(코티스 왕 역), 단역에 가깝지만 조셉 파인즈(에우리스테우스 왕 역)가 등장하는 등 나름 충실합니다.

하지만 아주 좋은 영화냐 하면, 그렇진 않습니다. 전개에 헛점이 많은 탓입니다. 첫째, 돈 받고 싸우는 용병인 허큘리스가 왜 정의감을 앞세워 쓸데없는 전쟁을 벌이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둘째, 코티스가 악역으로 밝혀지는 과정과 그 이후의 전개입니다. 반란군을 제압하려고 용병을 고용한 것 자체는 문제될 게 없으며, 강해진 군대를 바탕으로 제국을 건설하려는 건 군주로서 자연스러운 욕망입니다. 그런데도 코티스가 악역으로 설정되고, 허큘리스가 그를 제거하면서 제국의 가능성을 무너뜨리는 전개는 납득이 어렵습니다. 트리키아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허큘리스가 철천지 원수가 아닐까요?
또한 아리우스를 볼모로 허큘리스 일행을 협박하는 장면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코티스가 이미 아리우스를 후계자로 인정한 상태라면 죽일 이유도, 협박이 성립될 이유가 없습니다. 공주의 행동도 납득하기 어려워요. 아리우스가 좋은 왕이 될 거라고 믿는다면 코티스를 막지 말고 그냥 제국을 건설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더 이득이니까요. 결과적으로 허큘리스가 돌아와 코티스를 물리치지 않았더라도 전세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며, 괜히 동료 한 명만 죽은 셈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허큘리스가 신화적인 영웅으로 거듭나는 연출은 나쁘지는 않았지만, 전투 중심의 전개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지는 바람에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치 실전 이종 격투기 시합을 하다가 갑자기 프로레슬링으로 변해버린 느낌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연출 자체는 나쁘지 않고, 제작비가 적절히 쓰인 흔적도 있으며, 흥미로운 아이디어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완성도는 다소 부족하며, 서사적 설득력도 떨어집니다. 그래도 머리를 비우고 즐기는 킬링 타임 용에는 적절하며, 더 락 팬이라면 충분히 즐길 수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트리키아 군대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하는 허큘리스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If you smell~”을 외칠 것 같았습니다. 에우리피데스나 코티스에게 락 바텀을 날려주었더라면 아주 좋은 팬 서비스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웰컴 투 더 정글"처럼 말이죠.

2018/07/14

블랙 팬서 (2018) - 라이언 쿠글러 : 별점 2.5점



이번에 해외 출장 가면서 비행기에서 감상한 영화입니다. 마블 시리즈는 나름 팬이라 자부하는데, 최근에는 이런 기회가 아니면 통 보기가 힘들군요.

하여튼, 이 작품이 MCU 세계관 작품 안에서도 단독 타이틀로는 독보적이라 할 만큼 흥행한 영화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보기 전에는 좀 의아했었어요. 대단히 유명한 히어로도 아니고, 공개된 장면 장면들이 그렇게 매력적이거나 끌리지는 않았던 탓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 이유를 알겠네요. 아프리카과 아프리칸은 작품 속 킬몽거의 주장대로 정복자도 될 수 있고, 티칠라의 선택대로 자애로운 조력자도 될 수 있는 위대하고 강한 대륙이며 민족이다라는 메시지를 한 껏 담아 선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정 인종이라면 안 보고는 못 배길 테지요.
빌런 킬몽거가 뻔한 악당이 아닌, 흑인의 해방이라는 큰 사명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인물로 사명감과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충분히 왕위를 노릴 자격이 있다는 탄탄한 설정도 좋더라고요. 이렇게 소모되는게 아쉬울 정도로요.

하지만 슈퍼 히어로 무비로는 조금 약하기는 합니다. 기둥 줄거리가 목숨을 건 결투로 결정되는 왕위 다툼인 탓입니다. 그래서 슈퍼 히어로 무비보다는 신화나 역사 속 어떤 시대를 무대로 한 에픽 서사물 느낌이에요. 빌런 킬몽거도 정당한 왕위 후계자라는 점에서 그가 정말 빌런인지? 에 대한 의문도 강하게 들고요. 강한 자가 왕이 되고, 나라의 정책이 왕에 따라 결정되는건 당연한데 이를 거부한다? 거부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반역자잖아요?
아울러 클라이막스의 블랙 팬서와 재규어의 슈트 액션도 육탄전 중심으로 역시나 슈퍼 히어로 액션물로는 아쉬웠습니다. 사실 "부산" 장면 말고는 전체적으로 액션은 기대 이하였어요. 이는 와칸다의 슈퍼 오버 테크놀로지에 대한 묘사가 부실한 것도 한 몫 합니다. 뻔한 상상력의 범위 내라서, 신화와 SF의 결합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 "토르" 시리즈와 비교하면 여러모로 실망스러웠습니다. 가장 중요한 소재인 비브라늄에 대해 두루뭉실 넘어가는 것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고요.

두 시간이 훌쩍 넘는 상영 시간을 잘 끌어나가는, 꼭 흑인이 아니더라도 재미만큼은 보장되는 좋은 작품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확실히 마블이 영화를 잘 만들기는 하네요. 하지만 다음 작품이 이어진다면 액션 장면 만큼은 연출이 보강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큽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0/07/31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8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8 - 4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시리즈 38권으로 이번 권은 기존 C.M.B와는 구성이 좀 다르다는게 특징입니다. Q.E.D처럼 조금 긴, 이야기 두 편만 수록되어 있거든요.

하지만 긴 호흡에도 불구하고 두 편 모두 설득력이 부족한 편입니다. 본 편 이야기와는 상관없는 고사, 역사 이야기 비중이 높은 반면, 본 편 쪽은 여러모로 설명도 부족하고 헛점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럴 바에야 언제나처럼 이야기의 양으로 승부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두 편 모두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목격증인"

하루미는 여자친구 마미를 칼로 찌른 죄로 4년 징역을 살고 풀려난 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줄 증인 이시바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 정보를 전해준 간다는 마미의 아버지 스미다에 의해 회사가 망했다는 이유로 하루미를 도와 주었다. 하루미는 간다의 지원으로 원양어선을 탄다는 이시바나의 행적을 3년 동안 뒤쫓는데...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고사인 한단지몽, 그리고 소품으로 등장하는 환등기처럼 '환상'을 소재로 풀어나가는 이야기입니다. '환상'은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이라고 사전에서 풀이되는데, 이야기 속에서 하루미가 찾으려는 이시바나가 바로 환상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시바나 우게츠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인물이라는게 너무 뻔해서 좀 시시했어요. 이름부터 그렇잖아요. 돌에 핀 꽃, 빗 속의 달이라는 뜻이니까요.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하루미가 범행을 저지른 진범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범행을 저지른 사실을 잊어버린채 있지도 않은 증인을 찾아 나선다는 내용입니다. 하루미가 누군가 (간다)의 꼬임에 넘어가서 자신이 무죄라는걸 '날조할 수 있을' 증인을 찾아나서는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처럼 하루미 스스로가 본인이 무죄라고 굳게 믿는다? 이건 말도 안됩니다. 기억상실이라도 걸리지 않는 한에는요. 환상이 그 비밀, 정체를 아는 사람에게도 환상으로 보여질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이시바나의 존재를 던져주어 하루미가 3년 동안 허송세월하게 만든 간다가 마미의 아버지 스미다가 변장한 것이라는 진상, 그리고 그 동기만큼은 괜찮았습니다. 하루미가 선고받은 7년 형이 판결에서 4년으로 감형되었기 때문에 모자라는 3년을 더 썩게 만들려는 의도였다는데 꽤 그럴듯했어요. 간다의 이름을 핵심 소재이기도한 고사 '한단지몽'에서 이름을 따 온 아이디어도 좋았고요. 물론 간다의 이름 트릭은 일본인이 아니면 알아차릴 수 없겠지만요.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을 납득할 수 없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빛의 거인"

성배나치라는, "인디애나 존스"로 친숙한 소재가 대거 등장합니다.

'아이슬란드'와 게르만 신화의 아버지 스노리라는 소재는 신선한데, 이야기는 어설픕니다. 게르만 신화의 원류가 "에다"의 고향 아이슬란드이기 때문에, 아이슬란드에 성배가 있다!는 추리부터 어설프지요. 설득력도 없고요. 아버지가 보내온 소포 속 물건인 방해석이 아이슬란드에 많이 난다는 단서는 나쁘지 않지만, 아이슬란드가 방해석의 유일한 산지는 아니라서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에요. 현무암이었다면 무대가 제주도가 되었을까요?
애초에 료타의 아버지가 보낸 소포 암호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누군가 찾아오기를 바랐다면 그냥 편지를 쓰면 되니까요. 어차피 미행당하고 있어서 위치가 드러나는건 숨길 수 없었기에,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는 암호를 보내는건 의미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단서인 "빛의 거인"도 형태는 그럴듯하지만 바로 직전 권 수록작인 "고양이 꼬리"의 자가 복제에 불과해서 아쉬웠고요.

마지막 클라이막스에 등장하는 성배가 있는 장소의 함정도 억지스럽습니다. 시랍화된 사체를 간헐천에 넣으면 폭발한다는걸 이용한 함정이라는 아이디어만큼은 괜찮아요. 그러나 이 함정은 1회성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번 폭발하면 현장은 난장판이 될 테니까요. 그런데 800년 전에 설치한 함정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게다가 잘 동작했다? 토목 공사의 신이라도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그래도 함정 정도는 만화적인 상상력으로 넘어간다고 치면, 건질게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스노리가 올슨의 병을 낫게 했다는 성배는 버드나무로 만든 잔을 물에 끓인 것으로, 이는 천연 아스피린 성분이었다는 이야기는 마음에 들었어요. 이런 이야기야 말로 C.M.B의 진수라고 할 수 있겠지요. 본 편 이야기와 함께 나란히 진행되는 스노리의 파란만장하면서도 호쾌한 생애도 역시나 C.M.B다운 현학적 재미를 가득 안겨다 주었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아주 나쁘지도 않지만 납득이 가는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 한단지몽이란?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일이다. 도사 여옹은 한단(邯鄲)으로 가는 도중 주막에서 쉬다가 노생이라는 젊은이를 만났다. 그는 산동(山東)에 사는데, 아무리 애를 써봐도 가난을 면치 못하고 산다며 신세한탄을 하고는 졸기 시작했다. 여옹이 보따리 속에서 양쪽으로 구멍이 뚫린 도자기 베개를 꺼내 주자 노생은 그것을 베고 잠이 들었다. 노생이 꿈 속에서 점점 커지는 베개 구멍 속으로 들어가보니, 고래등 같은 집이 있었다. 노생은 최씨 명문가인 그집 딸과 결혼하고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순조롭게 승진하여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 그 후 10년간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역적으로 몰려 잡혀가게 되었다. 노생은 포박당하며 "내 고향 산동에서 농사나 지으면서 살았으면 이런 억울한 누명은 쓰지 않았을 텐데, 무엇 때문에 벼슬길에 나갔던가. 그 옛날 누더기를 걸치고 한단의 거리를 거닐던 때가 그립구나"라고 말하며 자결하려 했으나, 아내와 아들의 만류로 이루지 못했다. 다행히 사형은 면하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수년 후 모함이었음이 밝혀져 다시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후 노생은 모두 고관이 된 아들 다섯과 열 명의 손자를 거느리고 행복하게 살다가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그런데 노생이 기지개를 켜며 깨어 보니 꿈이었다. 옆에는 노옹이 앉아 있었고, 주막집 주인이 메조밥을 짓고 있었는데, 아직 뜸이 들지 않았을 정도의 짧은 동안의 꿈이었다. 노생을 바라보고 있던 여옹은 "인생은 다 그런 것이라네"라고 웃으며 말했다. 노생은 한바탕 꿈으로 온갖 영욕과 부귀와 죽음까지도 다 겪게 해서 부질없는 욕망을 막아준 여옹의 가르침에 머리 숙여 감사하고 한단을 떠났다.

2019/08/25

테러호의 악몽 1, 2 - 댄 시먼스 / 김미정 : 별점 3점

테러호의 악몽 1 - 6점
댄 시먼스 지음, 김미정 옮김/오픈하우스
테러호의 악몽 2 - 6점
댄 시먼스 지음, 김미정 옮김/오픈하우스

1845년, 최신식 함정 이리버스호와 테러호를 타고 북서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출발한 존 프랭클린 경 탐사대는 무리한 항해 끝에 얼음 속에 고립되고 말았다.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탐사대를 키가 4m가 넘는 하얀색 괴물이 습격하기 시작했고, 괴물과 추위, 식량 부족 등의 문제가 겹치며 프랭클린 경을 비롯한 탐사대원들이 하나씩 죽어가자 테러호의 함장 크로지어는 배를 버린 후 생존한 탐험대 전부와 함께 육로로 탈출을 결행했다.
그러나 계속된 괴물의 습격과 식량 부족은 생존자들을 계속 괴롭혔고, 누수방지공 히키를 중심으로 한 대원들의 반란까지 일어나는데...

"칼리의 노래"로 접했었던 댄 시몬즈의 장편 호러 팩션입니다. 실존했던 싱클레어 탐험대에게 닥친 비극과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작가적 상상력으로 그려낸 작품이지요. 실존하는 미해결 미스터리를 풀어낸다는 점에서는 코난 도일"J.하버쿡 젭슨의 진술"이 떠오릅니다.

이전부터 굉장히 기대했었는데 역시나,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1, 2권 합쳐서 9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순식간에 읽어버렸을 정도로요. 재미의 가장 큰 요소는 끔찍한 초극한 상황의 생생한 묘사입니다. 이들에게 닥친 비극은 작 중에서도 언급되다시피 포경선 에식스 호의 비극과도 유사합니다. 그러나 에식스 호는 십 수명의 선원들이 주로 '굶주림' 과 싸우며 그래도 다섯 명이나 생존했지만, 싱클레어 탐험대는 백명을 훌쩍 넘는 대원들이 아무 것도 잡지 못해 줄어드는 자원만으로 버텨야 해서 직면한 굶주림은 물론, 상상을 초월하는 추위와도 싸워야 한다는 점에서 몇 수 위입니다. 최고 영하 60도 이하로 떨어져 맨 손으로 총을 잡으면 살갗이 벗겨질 정도니까요.

탐험대를 곤경에 빠트리는 요소로는 괴혈병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묘사도 굉장합니다. 모공 등 모든 몸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이빨이 빠지고, 붓기가 심해지며 피부의 탄력도 사라지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몇몇 선원들이 걸린 납중독 묘사도 처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죽어가는 핏제럴드 함장의 최후가 특히나 끔찍합니다. 

탐험대를 습격하는 거대 괴물 툰바크의 위협도 어마어마한 수준입니다. 4m도 넘는다는 거대한 체구에 속도도 엄청나며 총을 맞아도 죽지 않는 괴물로 인간은 도저히 제압할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나마 탐험대의 발버둥은 테러 호의 항해장 블랭키가 괴물에 맞서 오랫동안 버티며 살아남는 정도에 불과해요. 참고로 블랭키의 사투는 박력이 넘쳐서 전체 내용 중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수많은 어려움에서 드러나는, 인간 관계를 통한 드라마도 탄탄해서 재미를 더합니다. 작중 최고 악역인 누수방지공 코닐리우스 히키의 존재는 비교적 평범한 편이나, 다른 인물들의 묘사와 설정이 아주 빼어납니다. 실력은 없지만 운과 허세에 의존하는 존 프랭클린을 비롯, 실력은 뛰어나나 아일랜드인이라는 출신 성분 탓에 뼛 속 깊이 분노를 품고 사는 크로지어 함장, 순수한 군인이자 '인간' 인 어빙 소위, 체력이나 능력은 딱히 없지만 열정과 신념으로 무장한 해리 굿서 등 모든 인물들이 눈에 보이듯 그려져 정말 살아 숨쉬는 듯 합니다.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다가 죽어가는 인물들과 인간임을 포기하고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 인간 군상들의 대비도 확실하고요. 사실 극한 상황에서 군율과 군기가 유지된다는게 처음에는 영 와 닿지 않았는데, 묘사를 통해 국가와 인간에 헌신적인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 덕분에 나름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탐험대가 전멸할 때 이누이트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게 영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히키가 어빙을 죽이고 이누이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탓이라는 설명이 더해진 것도 좋았습니다. 탐험대가 이누이트를 복수 명목으로 학살해서 도움을 받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아쉬운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탐험대의 생존 경쟁만 그렸으면 좋았을텐데, 초자연적이고 신화적인 영역의 이야기가 너무, 지나칠 정도로 많은 탓입니다. 가장 실망스러웠던 건 툰바크, 그리고 툰바크와 관련된 벙어리 여인 실나의 정체입니다. 실존한다기 보다는 결국 이누이트 신화 속의 존재라는 진상은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크로지어 함장이 '천리안'을 갖춘 인물로 그 역시 실나와 결혼하고 이누이트 주술사로 거듭난다는 결말 역시 전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프레데터'와 총으로 싸우다가 나중에 부적을 붙여 퇴치한다는, 크리쳐 호러물이 갑작스러운 퇴마물로 전환되는 셈인데 영 개운치 못했거든요.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TV 시리즈에서는 툰바크가 실체가 있는 괴물로 그리고 있던데 그게 더 나은 선택인건 분명합니다.

그래도 워낙에 압도적인 내용이 많고 재미 또한 빠지지 않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결말만 더욱 현실적으로 그려내었더라면 4점도 아깝지 않았겠지만 지금 수준으로도 충분히 좋은 작품인건 분명합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밀리의 서재' 처음 한 달 무료 프로모션을 통해 읽게 되었는데, 아직 '밀리의 서재' 가입을 하지 않으셨다면 무료로 읽어보실 수 있을 겁니다. 

덧붙이자면 TV 시리즈도 무척 땡기지만, 심하게 무서울 것 같아 망설여지는군요. 호러 무비는 취향이 아니다보니...

2021/06/18

눈물점 - 미야베 미유키 / 김소연 : 별점 2점

눈물점 - 4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미야베 미유키에도물미시마야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입니다. 모두 4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번 권 부터는 전작에서 시집간 오치카를 대신해서 도미지로가 괴담을 듣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런데 전작에서부터 예견된 이 교체는 별로 기대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었지요. 결과물은 역시나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냥 괴담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는 한량이라서, 괴담 이야기를 듣는 진지한 목적이 사라져 버린 탓입니다. 괴담 이야기에 대한 별다른 책임감도 느낄 수 없었고요. 그 외에도 전작들에 비하면 괴담들의 섬찟함이나 무서움이 훨씬 덜한 편이라는 점, 그리고 가장 대작인 "구로타케 어신화 저택"이 특히 지루했던 점 등도 감점 요소였습니다. 

그래서 전체 별점은 2점입니다. 도미지로로의 주역 교체에 대해 갖고 있던 불안감이 현실이 된 만큼, 이후 이 시리즈를 읽을 일은 없을 듯 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에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눈물점" 

도미지로에게 어린 시절 소꿉친구였던 하치타로가 찾아왔다. 그는 과거 자신의 집이었던 두부가게 '마메겐' 일가족을 파괴했던 눈물점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과거 마메겐에서는 형수들과 누나가 남자 가족을 잇달아 유혹했었다. 마지막에 큰 누나가 아버지를 유혹하는 상황에서 어머니가 큰 누나의 '눈물점'을 잡아 뜯어 잘근잘근 씹어버렸지만, 죄책감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가출한 뒤 죽었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악령이 눈물점 형태로 여자에게 씌워지면, 남자를 유혹하게 된다는 뻔한 이야기인데다가, 악령이 '마메겐' 여자들에게 씌워져 가문을 박살낸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답답합니다. 아버지가 사과했다던가, 가출했다던가 하는걸 미루어보면 뭔가 여자에게 원한을 산 듯 한데, 암시만 줄 뿐 속 시원하게 밝혀지는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냥 재수없게 귀신에게 씌웠다라고 한다면, 아버지가 가출해서 죽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창피해서? 그렇다면 눈물점의 여자가 아버지가 죽은 자리에 귀신으로 나타날 이유는 없지요. 어머니가 가족이 흩어지는걸 허락한 이유도 불분명하고요.

하치타로의 부인은 얼굴이 점투성이었다는 결말과, 어린아이답지 않게 똑똑했던 막내 누나 치이 캐릭터는 괜찮았습니다. 치이는 눈물점이 수상하다는건 알지만, 이를 방관하는걸로 그려지는데, 차이가 주도적으로 활약하면서 이야기를 끌어갔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장점보다는 아무래도 단점이 더 많았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시어머니의 무덤" 

꽃놀이 철, 비단 장사집 노부인 오하나가 찾아와 고향 벚꽃 마을에서 있었던 무서운 과거를 이야기해주었다. 마을에는 묘지 언덕에서 꽃놀이를 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나 오하나의 집 가가리야의 여자들은 참석할 수 없었다. 가가리야 증조 할머니가 며느리를 미워하다가 자살한 뒤 가가리야 여자들은 꽃놀이 때 묘지 언덕에 오르면 죽는 저주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가가리야에 며느리 오케이가 들어온 뒤, 당찬 그녀의 주도로 가가리야 여자들은 묘지 언덕 청소를 위해 꽃놀이 전날 묘지 언덕에 올라갔다. 그 때 무언가에 씌인 어머니가 며느리를 죽였고, 그 뒤 행복했던 가족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과거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내렸다는 저주에 대한 괴담. 미야베 미유키가 얼마나 뛰어난 이야기 꾼인지 새삼 느끼게 해 준 작품입니다. 꽃놀이 묘사에서 시작해서 평화로왔던 벛꽃 마을 묘사, 말괄량이 며느리 등 저주와는 관계없어 보이는 시시콜콜한 내용을 재미있게 묘사하다가, 과거 증조 할머니의 저주와 그 저주의 재림이 이어지는 클라이막스까지 달려가는 전개가 절묘하고, 호흡과 긴장감도 최고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앞서의 "눈물점"처럼 저주에 대한 이유 설명이 없지 않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증조할머니가 비정상적으로 며느리를 미워해서 생겨난 것으로 설명되고 있거든요. 물론 왜 미워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합니다. 며느리 뱃속 아기까지 죽인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웠고요. 심지어 그 저주가 미워하는 대상인 며느리가 죽고 나서도 몇 대를 이어서 내려올 까닭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정도라도 설명이 없는 것 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괴담이나 퇴마물에서 저주는 어쨌건 이유가 명확해야 이야기가 성립되니까요. 저주를 없애기 위해서, 혹은 저주 때문에 죽거나 피해를 받더라도 이유를 알아야 하는 탓이지요.

그러나 이 괴담이 현실화된 과정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벚꽃 마을 사람들 행동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거든요. 마을의 유력자인 가가리야 가문 며느리가 꽃놀이 때 저주로 비참하게 죽었다면 꽃놀이를 계속 그 곳에서 하는건 말이 안되잖아요... 최소한 위험한 묘지 언덕을 오르는 계단은 보수했었어야 합니다. 이래서야 저주로 인한 죽음을 그냥 가만히 기다린 것에 불과해 보입니다. 너무 설득력이 없어요. 

마지막에 도미지로가 오하나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어깨의 손자욱은 밀기 위함이 아니라 안아주기 위함이다."라고 말한 것도 멋지기는 하지만 도미지로가 말해서 별로 어울리지 않더군요. 결혼도 안 했고, 당연히 아이도 없으며 여자도 아니고 그리 오래 살지도 않았고 아픈 경험도 딱히 겪어본 적 없는 도미지로가 한참 어른인, 산전수전을 다 겪은 오하나에게 할 말은 아닌 듯 싶었거든요. 도미지로가 이야기를 듣는 역할로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제 생각이 더욱 굳어지게 만든 결말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괴담으로의 재미는 확실했고, 미시마야 시리즈 특징을 잘 살린 작품이지만 단점도 명확해서 감점합니다.

"동행이인"

이번에 이야기를 해 주기 위해 미시마야를 찾아온 건 나이 쉰 살의 파발꾼 출신 지배인 가메이치였다. 그는 파발을 위해 달리던 어느날 들러붙었던 귀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귀신이 그에게 들러 붙었던 이유는, 귀신 간키치처럼 가메이치도 당시 처자식을 잃고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작품들과 장, 단점이 완전히 반대인 작품입니다. 장점이자 차이점이라면, 귀신 및 기타 기묘한 현상에 대한 설명이 완벽하다는 점이에요. 가메이치에게 귀신이 달라붙은 이유는 줄거리 소개와 같고, 간키치가 귀신이 되어 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 앞에 나타난건 더 이상 울지 않는다는걸 보여주기 위함이고 (얼굴이 없으므로), 얼굴없이 가메이치를 뒤 쫓을 때 고개를 계속 끄덕이던건 울고 있어서였습니다. 아버지 찻집에 벼락이 떨어진건 단순히 운이 나빴기 때문이고요. 물론 여관 부뚜막에서 화재를 일으킨 이유는 애매합니다만, 이 정도면 귀신에 관련된 거의 모든 현상에 대해 충실하게 설명해 준 셈이지요. 

파발꾼 이야기답게, 당시 에도에서 도카이도를 통해 가는 지방과 길에 대한 풍부한 묘사도 특징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시대물이지만 약간 여정 미스터리 느낌도 전해주네요. 파발꾼과 파발 업무에 대한 세세한 설명도 좋았고요.

하지만 전혀 무섭지 않다는 단점은 큽니다. 가족을 잃은 슬픔과 치유에 대한, 감동 계열의 이야기인 탓입니다. 솔직히 이게 괴담인가? 싶을 정도에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괴담이라면 일단 무섭고 봐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구로타케 어신화 저택" 

정체 불명의 저택에 여섯 명의 사람이 모였다. 괴저택은 죽을 죄를 지은 사람들을 모아 신처럼 그들을 가지고 놀 속셈이었다. 과거 예수교를 믿었었지만, 기도에 보답받지 못하고 오히려 비참한 일을 겼었던 저택 주인의 분노와 원념 탓이었다. 올곧은 무사 긴에몬이 지휘했지만 여섯 명은 차례대로 비참하게 죽어갔고, 결국 긴에몬, 진자부로, 오아키 3명만 남게 되었다. 그들은 최후의 힘을 모아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저택의 심장부인 불타는 화산 장지문을 뚫고 나갔다. 그 때 긴에몬은 저택 주인인 검은 무사와 싸운 뒤 용암에 삼켜졌지만 진자부로와 오야키는 살아서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저택에서의 일로 건강을 해친 진자부로는 죽기 전 이 경험을 도미지로에게 이야기해 주는데...

한 편의 장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분량을 자랑하는 대작. 정체불명의 장소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모인 뒤,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다는건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물을 연상케 합니다. 제가 명명한 명칭인데 (원조!), 이 장르는 보통 서로 경쟁해서 이겨야 살아남는 방식, 또는 갇힌 공간의 수수께끼를 풀어서 탈출하는 방식 중 한 가지 방식을 따릅니다. 특정한 룰을 따라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고요. 

이 작품에서의 룰은 "6명 중 5명이 죽어야 탈출할 수 있다", 즉 최후의 한 사람만 탈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택은 초반에 이를 노골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첫 번째 방식, 즉 사람들간의 아귀다툼과 생존경쟁으로 진행되나 싶었어요. 그러나 의외로 이야기 전개는 두 번째 방식이더군요. 서로 힘을 합쳐서 어떻게든 탈출하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니까요. 이는 인격자이자 참 리더인 긴에몬의 존재 덕분입니다. 하긴, 한 명만 살아남는다면 검술에 능한 무사를 하녀와 부잣집 마나님, 도박에 미친 한량과 주정뱅이 목수, 약국집 후계자가 이길 수 있을 턱도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요.

문제는 탈출하는 방법을 합리적으로 밝혀낸다는, 이러한 전개의 핵심 재미요소를 간과한다는 점입니다. 이들이 저택에 갇히고, 죽을 위기에 처한건 모두 초자연적인 힘에 의한 것이며, 제령이나 퇴마의 방법도 합리적이지 못한 탓입니다. 애초에 이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 합리적인 설명이 없으니, 없애는 방법이 합리적일리 없지요. 마지막 탈출도 모 아니면 도 방식으로 우격다짐에 불과했고요. 

또 모두 힘을 합쳐 노력하다보니 별로 무섭지도 않다는 점도 단점이에요. 차라리 첫 번째 방식으로 서로 살아남고자 서로를 죽이려고 하는 식으로 전개하는게 더 좋았을겁니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건 전형적이기는 하지만, 호러물에 꽤 잘 아울리는 방식이니까요. 미시먀야 시리즈 초반에 비슷한 이야기가 몇 편 있었지요. 이 시리즈도 점점 인간미,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는걸 알려주는 이야기가 많아지는걸 보면, 미야베 미유키도 나이를 먹었구나 싶네요. 아울러 이런 전개로 반전이라면 반전인, "진자부로는 죽을 죄를 짓지 않았다"는 설정을 잘 살리지 못한 것도 유감스러웠습니다.

이야기도 다른 작품들에 비교하면 지루합입니다. 저택이 악의를 드러내는 과정까지가 너무 긴 탓입니다. 우선 오아키가 한텐을 보내어 에둘러 이야기거리가 있다고 요청하는 시작부터 진자부로의 이야기까지의 분량 낭비가 심하거든요. 괴저택의 기묘한 디테일도 어린아이들 동화같은 내용과 분위기라 지루하기는 마찬가지였고요. 내용에서 불거지는 "예수교" 설정도 전개에는 불필요한, 분량 낭비였습니다. 저택 주인의 원한과 분노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설득력있게 그려지지도 못했어요. 꽤 괜찮은 설정이었는데, 불필요한 정보로 낭비된 느낌이 들어 아깝더군요. 화자인 진자부로도 등장 인물들 중 가장 호감가지 않는 인물이라 읽는 재미를 반감시킵니다. 가진 재주도 없고, 용기도 없고, 별다른 계획도 없으면서 일행 마사키치를 질투하는 꼴사나운 모습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진자부로가 도박에 미쳤다는 묘사도 지나치게 많고요. 엄연히 진자부로가 도미지로에게 해 주는 이야기이니만큼, 이런 쓸데없는 묘사들은 좀 걷어내는게 좋았을거에요.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도미지로가 최악이라는걸 다시금 느꼈습니다. 마지막에 예수교 관련 천조각이 들어간 한텐을 한 번 만났던 골동품 가게에 맡기는 행동 때문입니다. 여러 명의 목숨이 걸려 있을 물건인데, 굉장히 무책임했어요. 이야기 때 무슨 과자를 먹을지 정도의 고민도 하지 않은 듯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래서야 오야키가 '미시마야의 괴담회는 단순한 놀이일 뿐'이라고 일갈해도 할 말이 없겠지요. 제 생각도 오야키와 같습니다.

그래도 저택이 악의를 드러낸 뒤, 이노스케가 딸을 사창가에 팔아먹은 죄를 고백하고 검은 무사에게 참살당하는 장면에서부터 생존자들이 탈출할 때까지 달려주는 부분만큼은 꽤 재미있었습니다. 괴현상이 사람을 집어삼키는 묘사가 탁월하고, 괴저택과 그 안의 괴이 현상에 대한 상상력도 빼어난 덕분이지요. 에도 시대에 대한 디테일도 역시나 최고 수준으로, 특히 예수교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어땠는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교라는 말만 듣고도 도미지로가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장면을 통해, 평범한 사람이 예수교를 얼마나 배척했는지 드러내고 있는데, 이런 작품은 이전에 본 적도 없네요. 신불을 믿는 사람이 예수교 교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그럴듯하게 설명되고 있고요. 현재와 사뭇 다른 당대 상황에 대한 설명과 묘사는 그 외에도 많습니다. 마사키치가 이노스케가 죽은 뒤 충격으로 미쳐버렸다는 설정이 대표적이에요. 온갖 자극에 익숙해진 현대인이라면 이 정도로는 정신이 무너지지 않겠지요.

이렇게 장점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무섭지도 않았고, 설명도 부족하며, 도미지로의 부족함이 두드러진 작품이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