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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6

수집이야기 - 야나기 무네요시 / 이목 : 별점 2.5점

수집이야기 - 6점
야나기 무네요시 지음, 이목 옮김/산처럼

일본 민예운동의 창시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수필집. 자신의 수집 경험을 바탕으로 수집이라는 것에 대한 나름의 정의 등, 수집의 도(道)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렇게 장황하고 섬세하게 무슨 철학처럼 설명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수집이라는 것이 꼭 누구한테 보여주고 중요한 것을 모아야 하는 것은 아닐겁니다. 개인적인 취미일 수도 있으니까요. 한마디로 수집의 범위가 광범위해진 요즈음에 어울리는 주장은 아닙니다. 동의하기도 힘들었고요.

아울러 자신이 수집한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도 실려있는데 싸게 산 것을 자랑하는 내용 아니면 가격에 연연한 나머지 구입 기회를 놓치고 훗날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손에 넣었다는 일화가 대부분이더군요. 물론 이것도 수집의 방법이겠지만 참 없어 보였어요.

그냥 이런 책도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정도에 그친, 시대에 뒤떨어진 수필집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 : 저 개인적으로는 수집과 구입에 대한 것이라면 아래와 같은 마다라메의 철학이 훨~씬 더 마음에 듭니다.

"가격만 비교해봐야 의미가 없어. 소프트의 재미는 결코 가격과 비례하지 않으니까.
스스로의 판단으로 결정하자. '이건 좋은 것'이란 생각이 들면 돈을 내는거야.
난 그렇게 선택해온 것들에 대한 긍지를 갖고 있어. 왜냐하면 그건 내 것이니까!
그게 야겜이건 동인지건, 옷이건 마찬가지야!!"
- 현시연 5권 제 26화 마다라메식 지르기 응용편 -

2010/10/25

책 사냥꾼 - 존 백스터 / 서민아 : 별점 4점

책 사냥꾼 - 8점
존 백스터 지음, 서민아 옮김/동녘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작가이자 언론인이며 영화인이며, 스스로를 '책 사냥꾼'이라 부르는 존 백스터의 '책 수집'과 그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취미이자 직업이기도 한 '책 수집'이 중심이며, 존 백스터라는 인물의 저작이나 주요 활동은 언급되지 않아 자서전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방대한 책을 읽고 수집하며 다양한 활동을 해온 사람답게 이야기가 너무나 흥미로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시골 마을 출신으로 철도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책의 세계에 빠져들고, SF 팬이 된 후 언론인과 작가가 되어 세계를 돌아다닌 그의 일생도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책 수집'이라는 분야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설명입니다. 관련자들과 직접 겪은 경험을 토대로 어디서, 어떻게, 어떤 책을 구했는지를 상세하게 들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다양한 문학작품에 빗대어 이야기하거나 실제 작가들과의 일화를 통해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지적인 즐거움까지 선사합니다.

특히, 저자의 인생을 바꿔 놓은 몇몇 작품들은 저도 꼭 구해서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은 이미 읽었지만, 할 클레멘트의 "중력의 임무"나 제임스 블리시의 "지구인, 고향에 오다" 같은 SF 작품, 그리고 트루먼 커포티의 단편집 같은 것들은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먼 린지의 그림이나 앨런 존스의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저자의 삶 자체도 흥미롭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책 사냥'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다양한 경험까지 아우릅니다. 심지어 '난교 파티' 경험까지 언급할 정도이니, 솔직한 수다라는 점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책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단순히 책을 수집하는 것이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책을 구했을 때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저 역시 오랜 추리소설 애호가로서 절판되었던 구 동서출판사의 책을 선물받았을 때의 기쁨,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을 신촌 '숨어있는 책'에서 발견했을 때의 희열,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을 고속터미널 재고떨이 서점에서 발견했을 때의 전율을 잘 알기에, 저자의 감정에 깊이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또한, 형이 과거 로저 코먼이 방한했을 때, 모 영화제에서 그의 사인을 받은 적이 있는데, 앞으로는 이런 기회가 있을 때 해당 작가의 책을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순히 책의 가치를 높이는 행위를 떠나, 좋은 기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과거 이벤트를 통해 증정된 저자 사인본 "경성탐정록"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요?)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번역입니다. 번역 자체는 좋은 편이고, 작품별로 국내 출간된 정보를 알려주는 세심한 주석도 돋보였지만, 원문을 그대로 살리는 방식이 아쉬웠습니다. 예를 들어, '어메이징 스토리즈'를 '놀라운 이야기들'로 번역하는 식이었는데, 물론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원문 잡지명은 고유명사인 만큼 그대로 표기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별점은 4점. 한 개인의 장황한 수다가 이토록 재미있고 유익할 수 있을까요? 책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께 추천합니다.

그나저나, 가까운 미래에는 전자책이 활성화되면서 자연스럽게 "화씨 451"과 같은 사회가 구현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책'을 소장한다는 것이 단순히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우표 수집과 같은 취미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크겠죠. 그렇다면 이런 책 사냥꾼들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요? 그 부분도 궁금해집니다.

2016/05/31

박물관 보는 법 - 황윤 : 별점 3점

박물관 보는 법 - 6점
황윤 지음, 손광산 그림/유유

부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감상자의 안목"입니다. 간략한 책 소개와 부제를 보고, 다양한 박물관에 대해 어떤걸 관람하면 좋을지를 알려주는 실용서라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내용은 제 생각과는 많이 다르더군요. 우리나라 박물관과 유물 수집가의 역사를 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미시사 서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을 정도로요.

책은 을사늑약 이후 일본의 도굴꾼이 창궐했다는 1909년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에서 시작합니다. 다행히 1908년 왕립 이왕가 박물관이 세워진 이후, 시장에 나도는 유물들을 웃돈을 얹어 구매함으로써 유물의 유출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하네요. 1908~1917년까지 왕실이 수집한 유물의 규모는 무려 1만 122점, 구입비만 21만원이었다고 하니 대단합니다. 1원이 5만원 정도라고 한다면 100억원 정도 쓴 거니까요. 특히나 국립 중앙 박물관의 핵심 유물인 "금동반가사유상"을 1912년 2,600원이라는 거금에 구입한 것이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판매자 일본인 고미술상은 경주 남산 기슭에 있는 어느 절에서 찾아낸 이 유물을 40원이라는 금액에 사들였다고 하니 정말 남는 장사 했네요. 천벌이나 받아라! 여튼 이왕가 박물관 덕에 해외로 유출되지 않았으며 지금 보험 평가액만 500억원 수준이라는게 다행일 뿐입니다.

다음에 설립된 것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입니다. 식민 통치의 일환인데 총독부의 권력을 앞세워 1930년대 말에는 1만 4천점이 넘는 막대한 전시품을 유치했다고 합니다. 이때 일본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본국 총리로 임명되어 귀국할 때 자신이 수집한 유물을 기증했는데 여기 포함된 것이 또 다른 금동반가사유상이었습니다! 본인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우리나라를 위해 그나마 좋은 일을 해 준 것은 고맙네요.

그 뒤에는 유물 수집가와 그들이 수집한 유물들 이야기입니다. 간송 전형필 이야기는 너무 많이 접해보아서 조금은 식상했습니다만, 이외의 인물들도 소상하게 소개해 줍니다. 악명 높은 유물 반출범 오구라에서 시작하여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 중 조선 최상류층의 친일파 의사 박창훈과 서민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산 성모 병원을 세운 박병래 이야기가 인상적입니다. 박창훈은 치부의 대상으로 유물을 수집했고, 1940~41년 사이 소장품 전부를 경성미술구락부에 모두 팔았습니다. 거의 600점 가까운 소장품을 4000~7000원 사이의 고액에 매각했다니 어마어마한 돈이죠.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했다는 후일담은 입맛을 씁쓸하게 만드네요. 반면 박병래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백자 중심의 수집을 이어간 뒤 후일 소장품 전부를 국립 중앙 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 가서 유물 카드에 '수정 (박병래의 호)'가 적힌 유물은 관심 있게 봐 두어야겠어요.

또한 출신 대학이 아니라면 쉽게 가보지 못할 대학 박물관에 대한 상세한 정리도 눈길을 끕니다. 친일파로 유명한 김활란이 이화여대 박물관을 위해서는 대단한 활약을 보였다는 일화가 특히 재미납니다. 박물관의 상징인 국보 백화철화포도문 항아리를 1960년대 1,500만원 (현재 시세로 30억 이상)에 구입한 것이 그것인데, 이 항아리는 장택상의 소유로 그가 야당 지도자로 활동할 때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내놓았다는건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

이어서 사립 박물관과 사립 미술관이 소개됩니다. 미국의 게티 미술관을 소개하며 진정한 문화재단의 역할을 알려주는데, 한국 기업 휘하의 박물관과 미술관에서는 아무래도 요원한 일이겠죠. 그나마 우리나라에서는 호림 박물관이 공공재로서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제 공부가 부족한 탓에 호림 박물관은 가본 적이 없는데 근시일 내에 꼭 한번 가 봐야겠습니다.

마지막은 근대 미술 및 천안의 씨킴과 아라리오 프로젝트, 아라리오 뮤지엄 소개로 마무리됩니다. 이 부분은 익히 알고 있는 내용도 있었는데 한눈에, 책 한 권을 통해 읽게 되니 뭔가 통사적인 흐름이 느껴져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네요.

이러한 미시사적 이야기는 물론, 박물관별로 주요 소장품도 함께 소개됩니다. 주요 소장품이야말로 관람할 때 가장 먼저 체크해야 할 테니 소개되는건 당연합니다. 이 부분은 책에 대해 가졌던 원래의 제 생각과 비슷하네요. 부록으로 국립 중앙박물관의 경우, 간략한 약도와 최적의 동선도 수록되어 있고요.

책의 저자인 역사학자 황윤에 대해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 박물관과 유물에 대한 애정만큼은 깊이 느껴지는 글들도 좋았습니다. 230여 페이지라는 적절한 분량, 책날개도 없는 오래전 문고본 형태의 심플한 디자인에 적절히 삽입된 정밀한 일러스트도 마음에 들고요.

단 불필요한 장식, 군더더기를 덜어내어(심지어 표지조차 2도 인쇄에 불과합니다) 보급형 책을 만들겠다는 의지와는 다르게, 9,000원이라는 정가가 적합한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더 저렴하던가, 아니면 조금만 가격을 올려서 표지 정도라도 딴딴하게 (?) 만드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도 박물관을 좋아하시고 우리 유물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꼭 한번 보실 만한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저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책에 실린 박물관별 꼭 보아야 할 유물 목록을 요약하며 글을 마칩니다.

  • 국립 중앙 박물관 - 금동반가사유상, 2층 기증 전시실의 수정 박병래가 기증한 백자들
  •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 백자철화포도문항아리
  • 호암미술관 - 15~16세기 초기 청화백자, "수월관음도" 등
  • 플라토 미술관 - 로댕의 "지옥의 문", "깔레의 시민"
  • 부암동 서울 미술관 - 이중섭의 "황소" 외 근현대 작품

2015/08/08

불타고 찢기고 도둑맞은 - 릭 게코스키 / 박중서 : 별점 2.5점

불타고 찢기고 도둑맞은 - 6점 릭 게코스키 지음, 박중서 옮김/르네상스

도둑맞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파괴되고 소실된 여러 예술품들에 대해 쓴 책입니다. 해당 예술품에 대한 범죄 사실을 자세하게 기록한 논픽션이라 생각했는데, 실제 내용은 에세이더군요. 희귀 초판본 거래를 업으로 하는 작가가 예술 작품들로 "상실", 그리고 "영원"에 대해 써내려간 것이 핵심이거든요. 예술 작품들이 사라진 과정도 상세하게 적혀있기는 하지만요.

예를 들면 <부재와 갈망이 주는 기쁨> 편을 보죠. 여기서 제임스 조이스가 아홉 살에 쓴, 최초의 인쇄물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인쇄물이 어떻게 세상에 알려졌으며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설명해주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수집의 강박"입니다. 물건 자체의 가치는 0이지만 물신화된 가치에 의해 가격이 100만 달러가 넘을 것이라는 이 인쇄물이야말로 수집의 강박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며, 수집은 물건 자체의 가치로 재단하면 안 된다는 내용이에요. 참고로 저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마다라메도 말했죠. "가격만 비교해봐야 의미가 없어. 소프트의 재미는 결코 가격과 비례하지 않으니까. 스스로의 판단으로 결정하자. '이건 좋은 것'이란 생각이 들면 돈을 내는 거야. 난 그렇게 선택해 온 것들에 대한 긍지를 갖고 있어. 왜냐하면 그건 내 것이니까! 그게 야겜이건 동인지건, 옷이건 마찬가지야!!"

또 바이런의 자서전과 키츠의 일기를 상속인들이 파기한 일화를 소개하는 이야기도 재미있었어요. 예술 작품과 그 창조자의 개인적 사생활을 결부시키는 행위에 대한 의문을 표명하기 때문입니다. 작품 자체만 가지고 판단해야겠지만 쉬운 건 아니죠. 얼마 전 이병현 스캔들과 그 때문에 개봉이 연기된 <협녀> 사태가 떠오르네요.
폰트 "길 산스"의 창조자인 조각가 에릭 길이 사후 일기를 통해 딸들과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 알려졌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이 정도 비밀이라면 일기에도 적지 말았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뭐 이런 썅놈이 다 있나...

이라크 전쟁에서 바그다드 이라크 국립 박물관에서 일어난 약탈 행위를 다룬 편도 인상적입니다. 부시 정권, 그 중에서도 국무부 장관 럼스펠드가 얼마나 무식한 인간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지거든요. 유적에 있던 문화재를 각 나라가 떼어가 전시하는 행위에 대한 긍정과 부정 역시 읽을 만한 내용이었고요. 파르테논에 있는 조상을 떼어간 영국의 "엘긴 컬렉션"을 다루며, 엘긴경이 아니었다면 파르테논에는 조상이 아예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용인데 일부는 수긍할 만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남의 이야기는 아니고요.

그 외 다른 이야기들 모두 그동안 생각치도 못했던 색다른 시각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모나리자에 대해 이야기하며 "모나리자 앞에 모여든 인파는 그림을 보는 게 목적이 아니라 유명 인사를 보는 것이 목적이다. 심미적 파파라치인 셈이다"라고 하는 식으로 말이죠.

단점이라면 단순 흥미로 읽기 어렵다는 점이겠죠. 특히나 저와 같이 범죄 관련 논픽션을 기대한 독자들은 많이 당황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리고 담고 있는 주제에 걸맞는 도판을 갖추지 못한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이야기마다 한 개 정도 대충 실려 있는 수준이거든요. 언급되는 작품들이 방대하고 가격도 17,000원이나 한다면 도판도 그에 걸맞는 볼륨을 보여줬어야 하는데 많이 부족하네요.

그래서 결론 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로만 읽을 책은 아닙니다. 미술 역사, 아니면 예술품에 대해 색다른 시각을 느끼고 싶으신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2022/03/04

시크릿 스파이 - 헤더 베센트 외 / 박지영 : 별점 2점

시크릿 스파이 - 4점
헤더 베센트 외 지음, 박지영 옮김/시그마북스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첩보 활동의 역사를 정리해서 알려주는 책으로, 시대 순으로 유명 스파이와 첩보 활동, 주요 활약상을 소개하고 있으며 중간중간 스파이들이 사용했던 장치, 암호 등도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250여 페이지의 분량을 풀 컬러로 가득 채운, 화려한 도판입니다. 모든 주제를 한 장 안에 도판과 함께 담고 있어서 읽기 쉽다는 점도 장점이고요. 흥미로운 주제를 짤막하게 요약하여, 다양한 도판과 함께 담았다는 점에서 '카드 뉴스'를 연상케 합니다.

역사 속 유명 스파이, 첩보 활동을 모두 담고 있어서 새로왔던 내용도 많았습니다. 남북전쟁 때, 노예해방론자들과 흑인 노예들은 남부 연합 안에서 정보원 활동을 했었고, 반대로 노예제를 지지했던 사교계 인사 로즈 오닐 그린하우는 북부에서 정보를 수집해 전달했다는 이야기처럼요.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소재네요. 영국이 인도 지형을 조사할 때 고용했던 현지인들 중 가장 유명했던 '1번' 나인 싱 라와트도 보다 상세하게 조사해 보고 싶어졌고요.
1차 대전 시기부터는 친숙한, 고전적인 스파이 활동 이야기가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소설이나 영화 등으로 익히 알고 있는, 약간 낭만적이기까지도 한 그런 이야기들 말이지요. 외다리였던 몸을 이용하여 측량 기계를 의족을 숨긴 채 독일의 알프스 지역 요양원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캐고 다녔던 미국인 하워드 버넘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건강 악화로 죽을 때 유언마저도 '독일군은 알프스 산맥에 전선을 구축할 계획이 없다' 였다니, 죽음마저도 고전전이군요. 프랑스에서는 평범한 주부였던 루이즈드 베티니가 첩보망을 조직, 운영하였고, 벨기에에서는 '하얀 여인' 첩보방을 전화 기술자 발테르 드베가 운영했다는 등, 일반인 영웅들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반면 미국에서는 부유한 사회 지도층 아마츄어들 - 백만장자 빈센트 에스터, 루스벨트 주니어 - 이 뭉쳐서 '더 룸' 이라는 명칭으로 첩보 활동을 했다니 확실히 미국적이다 싶네요. 당시 미국인이 머나먼 유럽 등을 정탐하기 위해서는 큰 돈이 필요했을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또 러시아에서 활약했다는 영국의 에이스 스파이 시드니 라일리는 사실 별 활약 없이 1925년, 볼셰비키 타도를 목적으로 러시아에 재입국하다가 체포되어 총살되었다는 등의 팩트 체크도 볼거리였고, 치머만 전보의 암호 해독처럼 실제로 전쟁에 큰 역할을 했던 놀라운 성과들도 눈에 뜨였습니다.

2차 대전 때부터는 막강해진 국가별 정보 기관들과 고위층 스파이 '두더지' 들, 상대편 스파이들을 속여서 체포하고, 내부 스파이들을 솎아낸 뒤 처형하거나 변절자로 만드는 (더블 크로스 시스템) 등 현대적인 스파이 작전 이야기가 많아집니다. 독일 해외방첩청 아프베어의 수장이었던 빌헬름 카나리스 이야기가 기억에 많이 남네요. 반나치 정책을 나름대로 펼친 끝에, 종전 직전 사형당했다는데 과연 살아있는채로 종전을 맞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조금 궁금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반나치 주의자였다 한 들, 방첩조직의 우두머리였다면 처벌을 피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런데 미드웨이에서의 일본군 패배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전사는 모두 정보가 미리 유출되었기 때문이며, 영국이 에니그마를 해독한게 승리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내용은 좀 과장된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연합군의 승리는 필연적인 것이었으니까요. 물론 독일 침공을 사전에 첩보원들이 파악하여 제보했지만, 이를 무시했던 스탈린의 사례를 볼 때, 첩보 활동 자체가 중요하다는건 의심의 여지가 없기는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스탈린이 이렇게 그를 위해 일했던 첩보원들을 전쟁 후 모두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는 후일담이 더 인상적이기는 했습니다만....
독일 최고의 스파이로 중립국 터키의 영국 대사 휴 내치불휴게슨의 부하였던 바즈나의 활약도 그냥 지나치기 힘듭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코드네임이 오버로드라는 등의 고급 정보를 넘기는 활약을 했지만, 독일은 그 정보의 진가를 몰라봤다지요. 심지어 그에게 준 30만 파운드의 거액도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서 찍어내었던 위조지폐였다고 하고요. 기승전결이 완벽한, 한 편의 영화같은 일화였습니다.

냉전부터는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존 스마일리의 세계가 펼쳐닙니다. 로젠버그 부부 이야기 등 익히 잘 알려진 사건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M16의 수장으로 KGB 스파이였던 킴 필비와 그의 동료들이었던 이른바 케임브리지 5인조와 이스라엘이 시리아 고위층에 침투시켰던 스파이 엘리 코헨의 흥망성쇠가 흥미로왔습니다.
IBM과 히타치의 분쟁 등 산업 스파이 이야기도 빼 놓을 수 없는데, F1 레이스에도 산업 스파이가 개입했었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자동차 디자인과 설계가 성공의 필수적인 요소이니까요. 페라리의 정비사 나이절 스테프니가 멕라렌에게 정보를 넘겼던 사건인데, 스테프니의 불행한 죽음으로 마무리되어버려 조금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사이언톨로지교가 자기들의 면세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백설 공주 작전'이라는걸 벌였다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국세청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연방 검사 사무실까지 뒤졌다니 종교의 힘이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나라도 힘 있는 사이비 종교들이 최근 많아진 듯 한데, 항상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첩보 활동 외. 첩보 기술에 대한 설명들도 볼만했습니다. 동독의 '로미오 스파이' 작전처럼요. 25~35살 사이의 교육을 잘 받은, 잘 생기고 매너 좋은 남자들을 이용하여 서독 여성들을 포섭했다지요. 러시아의 여성 해외 정보 요원 '스패로'는 이와 반대로 남성을 유혹하기 위해 훈련받았다는데, <<레드 스패로>>라는 영화가 나올 정도로 흥미로운 소재인건 분명해 보입니다. 두 작전 중 어느 쪽이 더 효과가 좋았을지 조금 궁금하기는 합니다.
카메라, 통신 장비, 암살 장비 등의 소개는 비밀 무기류에 사족을 못 쓰는 제 동심을 자극해 주었습니다. 독침 우산과 청산가리 가스총이 언급되는데, 이 둘을 합친 장비가 <<마스터 키튼>>에 등장했었지요. 고양이 몸 속에 배터리, 안테나, 마이크를 장착하여 도청하려는 '어쿠스틱 키티' 계획도 황당하지만 멋졌고요. <<쉬리>>가 얼마나 좋은 아이디어였는지 새삼 감탄하게 만드네요.
1984년 미국 모스크바 대사관, 레닌그라드 영사관의 타자기에 설치되었다는 키 자동 기록기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결합한 기묘한 레트로함이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타자기 내부에 설치되어 활자 뭉치가 회전하며 일으키는 자기장 교란을 측정하여 입력되었을 법한 글자를 추측한 뒤, 전차를 터트려 도창자에게 수집한 정보를 보내는 장치였다는데, 당시 기술을 생각해보면 엄청난 하이테크 기기였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재미있고 새로왔던 이야기도 많지만, 아쉬운 점도 많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주제를 한 장으로 요약한 탓에 깊이가 없으며, 스파이와 관련이 없는 이야기도 많다는 점입니다. 특히 고대 시대 이야기는 너무할 정도로 허술했습니다. 한니발의 패배가 스파이 덕분인 것 처럼 써 놓았을 정도로요. 실제 내용을 보면 스파이가 아니라, 단순히 사전 염탐을 한 것에 불과한데 말이지요.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의 패배 역시 정찰이 부족한 탓이었을 수 있겠지만, 이 역시 스파이 활동과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이슬람교의 패권이 무함마드가 스파이 활동에 통달한 덕분이었다는 언급도 어처구니 없었고요.
이런 류의 과장은 뒤에도 계속됩니다. 나폴레옹이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러시아,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게 스파이 카를 슐마이스터가 거짓 정보를 뿌려 오스트리아 군이 속았기 때문이라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남북 전쟁 당시, 영국에 사무소를 두고 남부 목화 판매 댓가로 전쟁 물자를 구입했던 제임스 불럭을 스파이라고 부르는 것도 억지였고요. 이건 단순한 통상 업무에 지나지 않잖아요?
암살과 테러범들 이야기를 스파이라고 소개하는 것도 별로 와 닿지는 않았어요. 심지어 고급 창부였던 '크리스틴 킬러' 마저도 한 챕터를 차지한다는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또 암호에 대한 소개가 적지 않은데, 9세기 학자 야쿱 이븐 이스하크 알 킨디가 암호학을 발전시켰고,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어떤 글자가 다른 글자보다 많이 사용된다는 원리인 빈도의 원리를 발전시킨 것이라는 등 볼거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관련된 도판도 충실했고요. 그러나 이런 류의 책은 이미 <<암호의 과학>> 등에서 많이 보아와서 별로 새롭지 않았고, 책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으나, 가격에 비하면 별로 깊이가 없어서 감점합니다. 이 책 보다는 특정 스파이 활동과 작전, 혹은 암호 등에 촛점을 맞춘 다른 전문 서적을 읽어보는게 훨씬 낫겠습니다.

2023/07/21

우중괴담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 별점 2점

우중괴담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북로드

미쓰다 신조가 직접 듣고 기록했다는 다섯 편의 괴담이 수록된 단편집. 다 그런건 아니지만, ' 이 이야기는 <<노조키메>> 1부의 바탕이 되었던 체험담을 이야기 해 주었던 작가가 해 주었던 이야기다'라는 식으로 설명되어 조금 더 현실감을 부여해 주는게 독특했습니다.
그러나 '전해들은 괴담'인 탓에 이야기의 설명이 부족하고, 기승전결도 애매한게 많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완성된 단편으로 보기 어려웠습니다. '소설'로 완성하기는 시간이 걸리니, 괴담이라는 핑계로 빠져나간게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드네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찾아온다는 것도 그간의 미쓰다 신조 과담들과 비슷해서 식상했고요. 무서운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이런 이유로 감점하여 별점은 2점입니다.

작품별 상세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은거의 집>>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시골의 외딴 집에 맡겨졌었다. 할머니 홀로 밭을 돌보며 생활하던 집은 주변에 기묘한 결계같은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일주일을 머물며 일곱살이 되는걸 기다려야만 했다. 울타리 밖을 나가면 안되고, 본명이 아니라 '도리쓰바사'라 불리우고, 할머니도 할아버지라고 부르고, 누군가와 절대 이야기를 나누어선 안되고, 휘파람을 불면 안되는 등의 몇가지 규칙도 있었다.
그러나 어린아이었던 '나'는 집을 찾아온 아이와 친해졌다. 아이의 필사적인 요청으로 '나'는 울타리를 넘어 아이를 따라갔다가 무언가에 잡힐 뻔했다. 할머니가 주었던 부적을 잃어버린 탓이 컸지만, 입고있던 기모노의 힘으로 겨우 탈출했다. 그러나 집 안에 '무언가'가 함께 따라 들어왔고, 결국 할머니마저 '무언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다행히 '나'는 일곱살이 되는 날 아침을 맞아 아버지와 함께 돌아왔다....


전형적인 괴담입니다. 왜 일곱살이 될 때까지 이상한 규칙을 따르며 결계 안에 있어야 하는지, '무언가'의 정체는 무엇인지 , 할머니는 누구였고 어떻게 되었는지 등 핵심 설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고, 그냥 그런 체험을 했다는게 전부입니다. 체험담을 이야기해 주었던 '나'가 미쓰다 신조에게, 자기 손자가 곧 일곱살이 되는데 밤마다 휘파람 소리를 듣는다는 이야기 - 즉 손자에게도 똑같은게 찾아올거라는 의미 - 로 마무리되는 일종의 에필로그도 설명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른건 몰라도 '나'의 아버지가 나에게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리고 괴담치고 별로 무섭지도 않아요. '무언가'가 집 안에 들어와 와글와글하며 휘파람을 부는 장면, '나'를 밤새 지켜주던 할머니가 '무언가'에 사로잡힌 뒤 결계인 모기장 밖에서 나에게 얼굴을 쓱 들이미는 장면 등은 묘사에 심혈을 기울이기는 했는데 밋밋했습니다. 할머니가 갑자기 휘파람을 분다던가, '무언가'의 실체를 좀 더 그려주었다면 더 나았을텐데 말이지요. 
설정도 어디선가 본 듯해서 신선하지도 못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예고화>>
미쓰다 신조는 아이들의 사망사고에 있어서, 아이들이 생전에 그린 그림들 중 사고사를 암시하는 그림 '예고화'에 관심을 가지던 중, 초등학교 교사 구보타 나오트의 체험담을 듣게 되었다.
구보타 나오토는 초등학교 1학년 담임이었는데, 다쓰토라는 학생이 그린 그림이 미래의 사고를 예지한다는걸 알아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다쓰토의 그림은 구보타 나오토를 노리기 시작했다. 이전 그림과는 다르게, 나오토의 시점으로 그려진 그림은 명백한 사고를 예고하고 있었다. 구보타 나오토는 그림 수업을 중지하는 식으로 저항했지만, 나오토가 개인적으로 그리는 그림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나오토는 살아남기 위해 온수풀 수업에서 다쓰토를 익사시킨 뒤 다른 학교로 옮겨갔다...

단순한 괴담은 아니고, 하나의 완성된 호러 단편입니다. 저주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기승전결도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 저주의 방법 - 다쓰토의 그림
  • 저주의 대상 - 다쓰토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들 : 통학로에서 사납게 짖는 개, 자기를 귀찮게 하는 반장, 어머니를 독차지하는 아픈 할머니, 그리고 구보타 나오토
  • 해결방법 - 그림을 고쳐서 대상자를 바꾼다
덕분에 중요한 부분을 설명하지 않고 대충 넘기는 괴담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이야기를 들은 미쓰다 신조가 체험담 속 몇몇 단어와 변화 포인트를 짚어내어 다쓰토의 어머니와 구보타 나오토가 불륜관계라는걸 밝히는 부분은 추리 소설같은 느낌도 전해주고요.
'예고화'라는, 실재 존재하는 사례를 바탕으로, 초등학생이 그림으로 저주를 내린다는 발상, 그리고 피해자 시점으로 그려졌던 그림에 다쓰토를 그려넣어 저주의 대상을 바꾸었다는 결말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쓰토가 죽은 뒤에도 나오토가 저주를 다시 겪었다는 일종의 에필로그는 불필요했습니다. 첫 번째 저주 - 물에 빠지는 것 - 는 다쓰토가 피해자가 되어 끝난 저주인데, 이게 다시 되풀이된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요. 설명이 부족했어요. 나오토는 저주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 차라리 그림으로 싫은 사람을 없애게 되었다는 식으로 흘러가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데스노트? 하지만 그림은 사람을 그려넣는게 제한적이니...) 이렇게되면 단편 분량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웠겠지만요.
 
그래도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였습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모 시설의 야간 경비>>
센바는 신인상 수상 뒤 직장을 그만두었다.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리며 창작에 매진하기 위해 야간 경비원을 하게 된 센바는 종교시설 광배회의 야간 경비를 맡게 되었다. 기묘한 공원같은 '십계원' 순찰을 하다가 괴이한게 따라오는 체험을 한 뒤, 이에 대해 광배회 관계자와 이야기하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십계원'에서 연달아 자살 사건이 일어나서 출입 금지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경비의 목적은 야간 경비들이 체험했던 괴현상을 수집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센바에게 정식 임금 외 사례금까지 제안했고, 센바는 창작을 위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5일 째 순찰날, 센바는 '십계원'에 나타난게 경비원 연수 때 동기인 이사코라는걸 알게되는데...

미쓰다 신조가 작가 센바 아츠오에게 들은 전형적인 괴담으로, 센바 아츠오가 겪은 끔찍한 체험이 대부분입니다. 괴담답게 십계원 괴현상의 이유가 무엇인지, 이사코가 왜 십계원을 떠도는 괴이가 되었는지 등은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괴상한 오브제로 가득차있는 십계원의 묘사와 센바의 체험담도 박진감이 넘쳐서 읽는 재미는 있지만, 설명이 없으니 결국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더군요. 무엇보다도 이전에 십계원 경비를 맡았던 경비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는건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지난 몇 개월간 이런 일이 벌어졌고, 이사코처럼 사라져버린 경비들이 있었다면 소문이 나지 않는게 불가능하니까요.
 
센바가 이사코를 처음 인지했던게 '보살계'였고, 뒷걸음질치다가 '불계'까지 들어왔다는게 뭔가 중요한 포인트처럼 묘사되는데 이것도 좀 이상했어요. 십계원의 끝이 '불계'라서, 괴이 이사코가 십계원을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불계도 엄연히 십계원 내부이니, 여기서 쉽게 나갈 수는 없습니다. 그게 가능했다면 다른 '계'에 있어도 가능했겠지요. 물론 센바가 있었던 경비실이 불계 내부에 있어서, 괴이가 경비실을 들어오려고 했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비실만 십계원 밖에 설치하면 경비원 보호 문제는 해결됩니다.
아울러 광배회가 사례금까지 지불하면서 야간 경비를 맡겼다면, 왜 2인 1조로 경비를 돌게 하지 않았을지?도 의문입니다. 괴현상 수집이 목적이었다면 괴현상을 수집하는 이유도 설명되었어야 했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기묘한 공간 덕분에 읽는 재미는 제법 괜찮았지만, 설명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부르러 오는 것>>
대학생 아이다 나나오는 매년 오봉 때 할머니가 홀로 다녀왔던, 나메라의 오이노쇼 씨 집에 향전 바치는 행사를 맡게 되었다. 할머니가 아팠던 탓이었다.
기차와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시골의 대저택에 찾아간 나나오는, 향전만 바치고 바로 돌아와야 한다는 약속을 어기고 창고를 찾아가 2층에 있는 사람을 불러달라는 한 노파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 뒤, 오봉마다 나나오의 집에 '무언가'가 찾아와 나나오를 불렀고, 나나오가 없자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을 데려가기 시작했다. 할머니, 어머니를 잃은 나나오는 결혼한 뒤 성이 바뀐 덕분에 더 이상 '무언가'의 부름을 받지 않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미쓰다 신조는 경찰 간부 출신으로 유령 따위는 없다는 철저한 현실주의자 아버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 올렸다.
지역 유지 아마노가의 임대주택에 거주하는 교사 부부가 이사를 간다며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 부인만 홀로 집에 있을 때, 기분 나쁜 초인종 소리와 함께 누군가 찾아오는데 실제로는 아무도 벨을 누른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척을 하자 부엌문을 노크하기 시작해서... 이사를 간다는 이야기였다.


본편인 아이다 나나오 이야기는 전형적인 괴담입니다. 나나오가 겪은 체험이 전부에요. 아무런 설명이 없다는 점도 마찬가지고요. 시골 마을에서 모시던 무언가에 씌워져서 저주(?)를 받는다는 이야기는 식상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제가 읽은 비슷한 이야기만해도 열 편은 넘을거에요.

그러나 아버지 이야기는 재미있었습니다. 현실주의자인 아버지답게 논리적인 추리를 내 놓거든요. 부인만 혼자 집에 있을 때 유령이 아니라 집주인 아마노 영감이 찾아왔다는 거지요. 그걸 피하려고 집에 없는 척을 하니 아예 문까지 두드리게 되었고요. 그래서 남편과 의논했지만, 집주인이고 지역 유지라 험담을 할 수도 없으니 이사를 하면서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을 퍼트리려고 했다는 겁니다. 아주 그럴듯하지요? 
이런 식으로 '현실주의자 경찰이 괴담을 파헤친다!'는 이야기였더라면 훨씬 재미있었을 것 같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우중괴담>>
미쓰다 신조는 예전에 알았던 장정가 마쓰오로부터 괴담을 들었다. 그는 장정을 맡은 교정지를 산책로에 있는 정자에서 읽곤 했는데, 그곳에서 비오는 날 한 노인으로부터 괴담을 듣게 되었다. 노인의 어렸을 때 이야기로, 당시 그는 사냥꾼 할아버지가 두고 간 도시락을 전해주러 사냥 오두막에 갔다가, 폭우가 쏟아질 때 오두막 밖에서 들여보내달라는 한 여인의 부탁을 받았었다. 여인이 들어오기 직전, 위기의 순간에 할아버지가 나타나 구해주었지만, 그 뒤 할아버지는 사냥꾼 오두막에서 혀가 뽑힌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마쓰오는 또다시 비오는 정자에서 이번에는 어린 여자아이를 만났다. 아이가 마쓰오에게 한 이야기는 아빠와의 그림자 놀이였다.
그 뒤는 아이 아빠가 학교 선생으로 학교 숙직 때 있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흰 형체를 쫓느라 시간가는줄 모르다가 숙직실에 돌아가니 아내가 와 있었고, 아내와 밤을 보내려고 했는데 숙직실로 집에 있던 아내가 전화를 걸어왔고 그 뒤 아내가 임신했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차례로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은 마쓰오는, 다음날 가족과 관계된 누군가가 실제로 해를 입었다고 했다....

표제작으로 대미를 장식합니다. 여러 명으로 부터 들은 괴담을 마쓰오가 겪은 체험과 합쳐 이야기해 주기 때문에 단순 괴담보다는 훨씬 복잡한 구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괴담이 중심이라는건 다른 이야기들과 다를게 없지만, 다른 이야기들과는 조금 다르게 노인과 그 가족들이 마쓰오에게 이야기를 해 준 이유는 명확하게 알려주기는 합니다. 마쓰오의 가족 구성이 노인의 가족 구성과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노인과 그 가족들이 마쓰오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해 줄 때마다, 원래는 마쓰오 가족이 해를 당했어야 했지요. 그런데 마쓰오가 별거 중이라 홀로 나와 살고 있던 탓에 마쓰오 주변 사람들이 대신 해를 입게 된 겁니다.
마쓰오가 미쓰다 신조에게 메일을 보내지 않고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해 준 이유도 그가 이미 괴이 쪽에 속해있었다고 설명해 줍니다. 마쓰오 사무실의 책들이 전부 낡은 것이었다는 단서로 이를 알아내는 미쓰다 신조의 추리도 돋보였고요.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해서 마쓰오 가족에게 해를 입히려고 한 이유는 설명이 없습니다. 누군가 마쓰오 가족에게 원한을 품고 저주를 내렸던 걸까요? 마쓰오가 미쓰다 신조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해 줬어야 하는 이유도 없고요. 이 논리대로라면 미쓰다 신조 주변의 누군가도 해를 입었어야 했는데 (괴담을 들었으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마쓰오가 언제 괴이 쪽에 속하게 되었는지, 이후 그의 가족은 어떻게 되었는지 등이 설명되지 않아서 답답하기만 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단순 괴담보다는 낫지만, 뭔가 부족하고 애매하다는 인상을 지우기는 힘들었습니다.

2023/08/06

'동산 박주환 컬렉션 특별전' 관람

지난 달의 '젊은 모색 2023' 전시회에 이어, 이번 달에도 국립 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관람하였습니다. '동산 박주환 컬렉션 특별전'입니다.
동산방화랑의 설립자 동산 박주환이 수집하고 그의 아들 박우홍이 기증한 작품 209점 중 90여점을 선별하여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재조명하고 있는 전시입니다.

주로 한국화 중심으로, 근대에서 현대까지의 한국화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남종 화단의 명맥을 이었다는 허백련의 그림을 비롯하여 김은호, 이상범, 박승무, 이용우, 최우석 등의 산수화나 매화도 등은 익히 알고 있던 조선시대의 그림 바로 그것입니다.
노수현의 <<추경>>은 공들인 인왕산의 바위 암벽 묘사가 굉장히 인상적인 작품이었어요.
근대 회화라 그런지, 의외의 디테일도 재미있었습니다. 아래의 이용우의 작품 속 작은 인물과 같이요. 이런 디테일들이 쌓여 다름 단계로 나아가는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렇게 나무들을 '마계'의 식물들처럼 묘사한 이유가 조금 궁금해지더군요. 이용우의 작품 외에도 아래와 같이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마계의 식인 식물같은 나무들이 눈에 뜨였거든요. 조금 손을 대고 가공하면 현대적인 게임 일러스트로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준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근대 초기를 넘어, 중기 이후 작품들이 이어지는데 가장 마음에 들었던건 운보 김기창의 <<매>> 였습니다. 상당히 큰 그림인데, 먹의 농담만으로 표현된 배경, 큰 붓의 움직임으로 표현한 나무와 깃털, 거기에 엄청나게 디테일한 매의 얼굴 묘사가 잘 어우러지는게 아주 멋졌습니다. 거장이 왜 거장인지를 알려주네요.
운보 김기창이 아니더라도, 아래와 같이 디테일한 부분에서 서양화에 뒤지지 않는 작품들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한국화의 저력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한국 전쟁 이후, 현대로 접어들면서는 서양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도 많이 등장합니다. 동양화의 번짐과 같은 효과로 원근법, 일렁이고 출렁이는 물과 바람을 표현한 아래의 작품들은 한국화임에도 굉장히 현대적으로 보입니다.
현대적인 한국화라면 빼 놓을 수 없는게 아래의 <<신몽유도원도>>였습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현대적으로 재 해석한 작품이라는데 마크 로스코의 작품에 뒤지지 않는 원색적이면서도 오묘한 색 표현이 아주아주 빼어나다고 생각되거든요. 영화 <<바비>>에 등장해도 어색하지 않을, 핑크핑크하면서도 현대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상당히 유명한 시리즈라는게 충분히 이해되더라고요. 저도 한 점 걸어두고 싶을 정도였어요.
전형적인 산수화 스타일이지만 거친 마띠에르를 느낄 수 있는 <<북한산>>도 또 다른 현대적 한국화이면서도, 제 마음에 쏙 든 작품입니다. <<신몽유도원도>>가 다소 여성적이라면, 굉장히 남성적인 작품이라서 두 작품을 같이 전시하면 여러모로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외에도 좋은 작품들이 많아서 굉장히 눈이 즐거웠던 전시였습니다. 한국화에 애정이 깊은 컬렉터가 엄선하여 수집한 작품들이라 그런지, 확실히 남다른 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딱 한가지, 한국화임에도 불구하고 액자로 설치된 작품이 많았다는건 좀 아쉬웠습니다. 아무래도 조명이 반사되는 탓에, 온전히 그림을 감상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는 유리없이 감상하고 싶네요.

2020/07/12

붉은 눈 - 미쓰다 신조 / 이연승 : 별점 3점

붉은 눈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이연승 옮김/레드박스

여덟 편의 단편과 작가가 수집한 네 편의 짤막한 실제 괴담이 수록된 공포 단편집입니다. 즐겨찾는 블로거이신 각시수련님이 올리신 미쓰다 신조 관련 글을 읽고 구해 읽었습니다. 여름에는 역시 공포 소설이지요.

미쓰다 신조 작품은 많이 읽어보지 않았지만, 제가 읽었던 작품들과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 모두 집에 대한 묘사는 상당히 무섭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무서운 집에 대한 상세한 묘사에 이어, 이런 집에 대한 사는게 정상적인 무언가일리가 없다는 식으로 긴장감을 끌어냅니다. 그러나 다른 장편과의 차이점이라면, 수록작들 대부분인 작가이자 편집자인 미쓰다 신조가 직접 수집했거나 경험했던 '괴담'에 가깝다는 점입니다. 현실감이 더해져 무섭고 오싹하기는 한데, 기승전결이 완벽한 한 편의 소설로는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괴담으로서,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본연의 목적에는 충실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붉은 눈" 

초등학교 1학년 시절 동급생이었던 마도 다카리가 사람에게 찾아와 죽음을 선사하는 붉은 눈을 지닌 무언가였다는 이야기.

마도 다카리가 이상하다는 묘사에서 시작하며, '나'와 함께 마도 다카리의 집을 찾아갔던 요네쿠라가 병으로 죽어버리고, '나'를 무당이었던 할머니가 지켜주었다는 결말까지 전개는 일직선입니다. 사악한 뭔가에 씌워져, 친구는 죽고 나는 할머니 덕분에 겨우 살아남는다가 이야기의 전부니까요. 마도 다카리의 정체라던가 퇴치 방법이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특별한 반전 역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덕분에 읽기 쉽고, 전개도 깔끔하지만 그렇게 무섭지는 않더군요. 

고전적인 설정과 내용인 탓도 큽니다. 무언가에 씌워지면 죽는다는 설정부터 고전적이잖아요? 꿈을 통해 마도 다카리가 근처에 있다는걸 느끼게 되면, 그 사실을 빨리 다른 사람에게 알리라는 결말은 "링"과 흡사하고요. 마도 다카리가 이상한 아이라는게 초반부터 드러나서 별다른 의외성도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괴담 성격에는 충실하나 그렇게 무섭지 않고 새롭지도 않아서 감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어린 시절 경험했던 괴담' 수준의 이야기였습니다.

"괴담 사진 작가" 

월간지 부편집장인 '나'는 특집 기사 때문에 사이언 마스든이라는 괴기 사진 작가 사진집을 출간한 출판사 트레빌을 찾았다. 그리고 업무 후 귀가 중에 트레빌에서 일하는 미즈키 요리코라는 여성을 만나 모쿠노 요시미라는 사진 작가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모쿠노 요시미의 자택을 찾는데, 그 곳은 화마가 휩쓸고 간 흉가였다....

괴기 사진 작가가 온갖 괴기스러운 사진을 찍고 현상하다가, 그 현장에 있던 '무언가'를 집으로 데려온 꼴이 되어 결국 본인은 죽고, 여동생은 무언가에 사로잡힌 광인이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오래전, 사진이 처음 도입될 당시에는 사람들이 사진 찍기를 기피했었습니다. 사진이 영혼을 빼 내어 간다는 소문때문에요. 간단한 조작으로 사람을 그대로 종이로 옮겨버리니 그런 소문이 돈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지요. 만약 이 소문이 소문이 아니라면, 피사체의 영혼과 사진이 찍히는 장소에 있는 '무언가'도 빼 내어 갈 수 있다는 뜻도 될 테고요. 이런 발상을 토대로 쓰여진 작품입니다.

그리 많이 보지는 못한 설정도 신선했고 모쿠노 요시미의 자택, 비서를 자칭하는 여동생, 자택 가득한 모쿠노 요시미의 사진들 모두 괴기스러운 묘사로 가득차 있어서 흥미진진합니다. 모쿠노 요시미와 그 여동생의 정체가 드러나는 클라이막스까지의 전개도 깔끔해요. 

편집자 미쓰다 신조 시점의 경험담으로 쓰여졌다는 것도 공포를 배가시킵니다. 엄청난 현실감을 가져다 주는 덕분이죠. 그 중에서도 '나'가 발견한 모쿠노 요시미는 등신대 사진을 잘라놓은 종이 인형에 불과했고, 여동생이 '나'를 이 곳으로 끌어들인 미즈키 요리코였다는게 드러나는 클라이막스 묘사는 백미입니다.
또 이 클라이막스 반전을 위해 앞 부분에 뿌려놓은 복선, 단서도 적절하고 공정합니다. 번역자가 공들여 이 단서를 설명하기 위해 이름 부분만 공들여 한자를 병기하여 표기한 탓에 이게 뭔가 의미가 있다는 티가 물씬 났던건 문제였지만요. 어차피 한국 독자가 해석하기는 무리였고요.

그런데 미즈키 요리코가 '나'를 이 집으로 끌어들여 뭘 어떻게 하려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과연 미즈키 요리코는 그 저택에서 어떻게 되는건지, '나'가 저택에 남아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등도 마찬가지고요. 속 시원하게 밝혀진게 전무한 탓에 완성된 이야기로는 약간 부족하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공포만큼은 확실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영상화에 적합한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미쓰다 신조 시점의 현재와, 괴기 심령 사진을 찍다가 데려온 무언가가 여동생에게 씌워져 파멸하는 모쿠노 요시미 시점을 오가며 모쿠노 요시미에게 씌워진 무언가가 현재, 과거에서 동시에 '개화'하는 장면을 클라이막스로 만들면 아주 좋을 것 같아요.

"내려다 보는 집"

어린 시절, 교차로 벼랑 위쪽에 지어져 '나'를 내려다 보는 느낌을 가져다 주었던 집이 있었다. 흉가는 아니었지만, 지어진지 오래 되었지만 아무도 사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그 집 때문에 기묘한 느낌을 받던 나와 친구 K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집을 조사해 볼 계획을 세운다. 마침 함께 있었던 K의 어린 동생과 함께 4~5명의 아이들은 집 수색에 나서는데...

작가 미쓰다 신조로 보이는 '나'의 어린 시절 있었던 추억 괴담으로 "괴담 사진 작가"와 마찬가지로 작가 본인이 경험했었던 정말 있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 식의 묘사가 탁월하며, 작품과 잘 어울립니다. '내려다 보는 집'에서 K의 동생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여자를 만나 사람 얼굴이 그려진 유리 구슬을 받고 놀았다는 상황도 상당히 공포스럽고요.

그러나 '공포'를 전해줄만한 실체는 친구 K의 동생의 이상한 행동과 증언 뿐이며, '내려다 보는 집'에 대해서는 뭐 하나 속 시원하게 빍혀지는게 없는 결말은 많이 답답합니다. 이야기의 현실감을 유지하면서 공포를 극대화시키는 결말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듯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조금 기묘한 이웃집을 무단 침입한 아이들 이야기 정도니까요. 덕분에 현실감넘친다는 장점도 있지만.... 별점은 2.5점입니다.

"한밤중의 전화"

공포 소설가인 '나'에게 새벽 2시에 전화가 걸려왔다. 어린 시절 친구가 5년전 취한 채로 찾아갔던 심령 스폿에 방문해 있다는 전화였다...

친구인줄 알고 긴 통화를 이어가는데, 알고보니 친구가 아니고 이형의 존재였다는 내용의 이야기로 전형적인 괴담입니다. 친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건 고전 괴담 '너는 내가 아직 니 엄마로 보이니?'와 다를게 없지요.

하지만 심령 스폿인 묘지에 있는 괴상한 집에 대한 묘사 - 코 앞에 늪이 있는, 연한 빨간색에 집 안은 붉은 벽돌로 되어 있고 온갖 불쾌한 쓰레기가 가득한, 창무하나 없으며 대문의 위치도 기묘한, 기분 나쁜 그림이 붙어있고 안 쪽에서 회반죽이 칠해져 입구가 봉해진 - 는 아주 빼어납니다. 전작들인 "화가", "기관"는 물론 이 단편집에 수록된 다른 작품들 모두 마찬가지인데, 미쓰다 신조는 공포스러운 공간을 그려내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는게 분명합니다. 불현듯, 미쓰다 신조가 개포동 은마 아파트를 보고 그에 대한 글을 쓰면, 그 자체가 바로 괴담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단지 무서운 공간 묘사에 그치지 않고 '내가 그쪽으로 가면 되니까.' "다 왔다.."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도 섬찟합니다. 뻔하지만 이야기로서도 잘 완결되기는 했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나방 남자의 공포"

'나', 즉 미쓰다 신조는 S 지방의 어느 온천 마을에 머무르던 중, 온천 여관 뒷 쪽에 있는 길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산책을 나섰다. 그 길의 끝에서 이런저런 정체 불명의 폐가와 폐허를 목격하고 돌아온 뒤, 자정이 넘은 시간 노천탕을 찾았다가 낯선 남자를 만났다. 그는 여관 선선대 부인의 오빠라면서, 미쓰다 신조에게 과거 '재나방 남자'라는 살인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는데...

재나방 남자 사건은 가즈오라는 소년이 기묘하게 살해된 사건입니다. 낯선 남자는 당시 용의자로 몰렸지만 곧바로 풀려났다고 합니다. 곤도 순경의 증언 덕분에요. 그는 가즈오와 헤어진 5분 뒤, 곤도 순경과 스쳐 지나갔는데 곤도 순경은 시체가 발견된 연못 옆에서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연못을 지나 반대쪽 길로 향하던 순경은 두부 장수 오누키와 마주쳤고, 바로 뒤 오누키가 시체를 발견했고요. 그래서 낯선 남자는 범인이 될 수 없다는게 증명된 것입니다.

이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는게 이야기의 핵심이기 때문에, 여관 뒤 오솔길에서 발견한 폐허와 박쥐 남자, 재나방 남자라는 기묘한 살인귀 이야기가 덧씌우져 있기는 하나 기본적으로는 본격 추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인 미쓰다 신조의 추리도 대담하며 그럴듯합니다. 범인은 곤도 순경이거나, 낯선 남자일 것이라는 추리인데, 낯선 남자가 범인일 경우 가즈오의 시체를 감춘 트릭을 파헤치는게 특히 인상적이에요. 낯선 남자는 사건 당시가 절분이라 가지고 있던 콩을 곤도 순경이 나타나기 직전 순간적으로 시체 위에 뿌린겁니다. 비둘기를 불러모아 시체를 숨기 위해서라는데, 주어진 정보 제공도 공정한 편이며, 실현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살짝 의구심이 들기는 하지만 현실감있게 잘 포장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괴담으로서의 역할도 그리 빠지지는 않습니다. 결말에서 낯선 남자는 살인귀 재나방 남자로 오래전 죽었으며, 지금도 가끔 노천탕에 출몰한다는 마무리는 뻔하지만 확실해서 이야기 완성도 측면으로는 마음에 들고요.

한마디로 공포와 추리 양쪽 모두 기본 이상의 재미를 전해주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뒷골목의 상가"

미쓰다 신조는 E씨에 대한 으스스한 이야기를 "백사당" 안에 녹여내려다가, 무서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오싹한 바람 소리와 함께 하는 누군가가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결국 미쓰다 신조는 원고 속 E씨 체험담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 뒤 취재원이었단 야카게 씨가 E씨가 죽었다며, 괴담에 대한 섬뜩한 원고를 보내오는데...

도입부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모두 E씨 시점의, E씨가 겪었다는 괴담입니다. E씨가 어린 시절 야반도주하여 숨어 살게 된 교토 '뒷골목' 집에서 공포스러운 존재와 마주한다는 내용이죠.

어떤 거리, 공간이 특정 시간이나 특정 조건에서 이계와 연결되어 그 곳의 이형과 조우한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많습니다. 러브크래프트 작품에서도 보아왔던 내용이니까요.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는 어떤 조건에서 이계와 연결되는지, 이형의 정체는 무엇인지, 이형이 노리는게 무엇인지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냥 공포스러운 존재로만 묘사될 뿐입니다. 공포의 핵심도 E씨가 '지이이이이잇.....' 소리를 내는 소름끼치는 여자에게 쫓기는 과정이고요.

하지만 이 여자가 E씨의 뒤를 쫓고, 집 안으로 숨어들어오는 과정의 묘사는 가히 일품이라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고양이 한 마리가 겨우 드나들 틈새를 지나 뒤로 나타나서 뒷쪽 창틀을 움켜쥐는 장면 묘사는 특히 압권이었습니다.
E씨는 아직 그 곳에 살고 있다는 말로 시작되는데, E씨 원고의 결말은 E씨가 그 곳에서 이사를 갔다는 모순 가득한 결말도 인상적입니다. 아예 아무 것도 드러내지 못할 바에야, 모든 걸 이렇게 모호하게 풀어내는 방법도 나쁘지는 않네요.
괴담으로서는 최고 수준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맞거울의 지옥"

미쓰다 신조가 젊은 시절 교토에 있는 출판사 편집자로 일할 때, 도쿄 출장 중 캡슐 호텔 화장실에서 맞거울을 보며 에도가와 란포의 "거울 지옥"을 떠올리다가 다른 손님을 만났다. 그도 괴담을 좋아해서 의기투합한 미쓰다 신조는 함께 호텔 로비에서 캔 맥주를 나누며 괴담으로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그 남자의 동생과 맞거울에 얽힌 괴담을 듣게 되는데...

거울과 거울 사이, 맞거울의 무한 공간에는 귀신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풀어내는 작품. 작품은 그다지 의외성이 없지만 겹쳐진 거울 속 어딘가에 있는 귀신이 거울을 건너뛰면서 나이를 먹고, 결국 나 자신의 모습으로 거울 앞에 나타난다는 클라이막스는 아주 근사합니다. 소설로도 멋지지만 영상화한다면 정말 환상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클라이막스만으로도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죽음이 으뜸이다. 사상학 탐정" 

사람에게 나타나는 죽음의 상, 즉 사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슌이치로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사상이 보이지는 않지만 죽음 그 자체로 보였기에 슌이치로는 쫓아내지 않았다. 이누마는 자기처럼 괴담을 좋아하는 친구 가이즈카, 요코가와, 이와세와 함께 한 밤중에 인터넷 상에 유명한 오드아이 소녀가 얽힌 괴담이 있는 폐가를 찾았다가, 친구들이 죽고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이 단편집 표제작이자 첫 번째 작품인 "붉은 눈"의 마도 다카리와 그녀의 집이 또 다시 등장하는 작품. 그리고 친구들과 무모한 심령 스폿 탐험을 나선다는 설정은 "한밤중의 전화"와 같습니다. 거기에 주인공이 사상학 탐정 슌이치로이고, 마도 다카리가 거주하는 흉가에 대한 오싹한 묘사까지 곁들여져 있으니 가히 미쓰다 신조 월드를 집대성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집대성 작품답게 오싹한 묘사는 역시나 대단합니다. 무너져가는 집을 탐험하는 과정부터 오싹해요. 불당 안의 불상 눈이 파내어져 있었다는 묘사가 특히 기억에 남네요. 무엇보다도 차로 돌아가던 4명에게 닥친 공포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폐가 방문을 거절하고 차 안에 남아있던 이와세가 "그 여자애가 왔다. 계속 차에 들여보내달라고 애원했다. 그래서 들였다."라고 말하는 장면이지요. 등골이 서늘해 집니다! 친구들이 절규하기 시작했다는 직후 묘사도 오싹합니다. 대체 무엇을 본 걸까요?

본인 경험 괴담이 아니라 소설적인 구성을 갖추어서 그런지 기승전결 구조도 좋습니다. 슌이치로를 찾아온 이누마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또는 그에 가까운 상태였다)는 결말이 특히 좋아요. 이누마에게 사상이 보이지 않은 이유, 슌이치로의 고양이 보쿠가 이누마에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이유가 합리적으로 설명되니까요.

중반부의 오싹한 장소를 뒤지는 전개는 담력 시험 수준이라 특별한건 없고, 마도 다카리의 정체와 왜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죽게 만드는지 그 이유가 밝혀지지 않는건 여전하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05/08/16

indemnity Only - 사라 파레츠키 / 홍영의 : 별점 2.5점

제트 파일 - 6점
사라 파레츠키 지음, 홍영의 옮김/문학관

여탐정 V.I 워쇼스키는 시카고 은행업계의 실력자 존 세이어로부터 아들 피터와 교제 중인 여성 아니타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피터 세이어의 하숙집으로 찾아간 워쇼스키는 피터의 시체를 발견했고,  이를 존에게 보고하러 갔다가 사건을 의뢰한 사람이 존 세이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워쇼스키에게 사건을 의뢰한 인물은 시카고의 노동조합장 앤드류 메글러였다.
워쇼스키는 앤드류 메글러의 딸을 계속 찾지만 거리의 폭력배인 알 슈마이센 일당에게 폭행당하며 사건에서 손을 뗄 것을 강요받았고, 존 세이어마저도 살해된 후 앤드류 메글러는 사건 의뢰를 취소했다. 그러나 피터 세이어가 죽음 직전 가지고 있던 서류를 발견한 워쇼스키는 사건의 배후에 보험금 지급을 둘러싼 음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사라 파레츠키의 V.I 워쇼스키 시리즈 첫번째 작품입니다. 제가 구입한 책은 "문학관"이라는 출판사에서 간행된 책인데 제목이 "제트파일" 이군요... 제목이 너무 싼티나서 원제를 적어놓았습니다.
작품의 특징이라면 일단 캐릭터를 들 수 있겠죠. 미모, 액션까지 어느정도 가능, 거기에 더해 말발까지 장난 아닌 여탐정 워쇼스키는 헐리웃적이고 만화적인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여성작가답게 옷차림이나 요리, 생활용품에 대한 진지한 묘사를 통해 나름 그럴듯하게 형상화하고 있어서 꽤 괜찮은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거든요. 또 보통 이런 작품들은 뉴욕이나 L.A 가 배경이었는데 무대가 시카고인 것도 특이하네요.

내용적으로는 단순한 실종자 찾기에서 흑막이 있는 거대한 음모로 발전되어 간다는 전형적인 헐리우드 스릴러의 공식을 따라가고 있지만 "범인이 누구인가?" 보다는 "증거가 어디 있는가?"에 촛점이 맞추져 있기 때문에 증거 수집 단계별로 분기점이 확실히 존재합니다. 즉 첫 단서, 피터 세이어가 가지고 있던 서류를 발견하는 1단계와 서류의 정체를 알게 되는 2단계, 그리고 최후의 증거를 수집하게 되는 3단계로 구분해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으며 단계별로 주요한 사건들이 각각 벌어지고 있는데 단순하기는 하지만 읽기에는 확실히 편하더라고요.

물론 우연에 의지한 전개가 약간 있고 마지막 범인과의 한판 대결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V.I 워쇼스키라는 특이한 여성탐정 캐릭터를 만끽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읽기 쉬워서 쭉쭉 진행된다는 점에서 더운 여름날 읽을 거리로 추천할 만 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PS : 소설을 읽고 나니 예전 영화버젼에서의 "캐서린 터너"는 정말 적역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는 망했지만요...

2010/04/15

명품의 탄생 - 이광표 : 별점 4점

명품의 탄생 - 8점
이광표 지음/산처럼

제목만 보면 된장남녀를 위한 명품 가이드같지만 실상 내용은 조선시대에서부터 현대까지의 한국의 컬렉션과 컬렉터들을 다루고 있는 일종의 미시사적 역사서입니다. 각 시기별로 유명한 컬렉터들과 그들이 수집한 컬렉션을 다양한 사진 자료와 함께 소개하고 있어서 자료적 가치도 높지만 무엇보다도 내용이 흥미진진해서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책의 목차는 크게는 조선시대 - 조선 후기 - 일본 강점기 - 6.25 이후 현대의 4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아무래도 시기가 시가였던 만큼 일본 강점기 시대 이야기가 제일 흥미로왔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일본인 손에 들어갔다가 해방 직전 다시 국내로 돌아오게 된 일화라던가 일본 강점기 시대 문화재 약탈과 경매, 그것을 막기 위한 간송 전형필 등 여러 컬렉터들의 노력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재미가 넘치거든요. 전형필을 조선인이라 무시한 일본인 소유자와의 기싸움(?) 등의 이야기는 나중에 "경성탐정록"에 꼭 한번 등장시켜야 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또한 일본이 우리의 많은 문화재를 강탈해갔지만 외려 해방이 되면서 서둘러 도망(?) 가는 바람에 한국에 두고 갈 수 밖에 없었던 오타니 컬렉션 같은 문화재가 우리나라에 남겨지게 된 것에는 묘한 아이러니도 느껴졌고요.

그 외의 이야기들도 모두 좋았기에 결론은 추천작. 제목이 왜 이따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한국의 컬렉터와 컬렉션 이라고 하는게 좋았을텐데 말이죠) 미시사 서적 좋아하신다면 강추입니다. 제 개인적 별점은 4점입니다. 가격이 좀 쎈 편이라는 것은 좀 아쉬운데 그만큼 도판이나 기타 자료도 충실한 편이니 감수해야겠죠.

그나저나 이 책을 읽고나니 국립 중앙 박물관에 또 가 보고 싶어지네요. 아니면 주말에 삼성 리움 미술관에라도 가서 호암 가족이 수집했다는 국보급 문화재라도 좀 보고 와야 겠습니다.

2020/04/26

우연한 걸작 - 마이클 키멜만 / 박상미 : 별점 2.5점

우연한 걸작 - 6점
마이클 키멜만 지음, 박상미 옮김/세미콜론

여러 예술가들의 걸작들을 전부 10개의 주제로 나누어 왜 그 작품이 걸작인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책으로 예술에 대해 깊이있는 식견을 바탕으로 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하지만 전혀 쉽지는 않아요.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 설명하는 느낌이거든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많이 어려웠습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요약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몇가지 기록해 볼 만 한 내용들을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보나르의 작품들은 영원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현대 인상파'라 부를 수 있는 좋은 그림이기 때문에 걸작이라는군요. 도판만 보았을 때에는 인상파라기 보다는 좀 더 괴기 쪽에 가깝지 않나 싶지만요.
아마츄어리즘은 적은 노력으로 큰 만족을 얻는 쪽으로 발전했으며, 이는 밥 로스와 일맥상통하기에 밥 로스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습니다. 아마츄어들이 그림을 그리는 목적은 프로와 별 다를게 없다는 이유이기도 한데, 확실히 그런 부분이 있지요. 게다가 별다른 목적없이 그리거나 찍은 작품이 '우연과 실수'라는 측면에서 초현실주의와 연결되어 걸작으로 인정받게 된다는군요. 이유는, 이 책에 쓰여진대로라면 그 작품에서 무언가 놀랍거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걸작이라는 거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특히 현대 미술은 기존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과정도 포함되었다고 하니 더더욱 그러해 보여요.
문제는 그런 평을 전문 비평가가 해야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는 진정한 아마추어리즘과는 좀 분리된게 아닌가 싶은 생각은 드네요. 철학자이자 미술 평론가 아서 딘토는 아름다움은 더 깊은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어떤 것이라고 했는데, 이 노력에 대한 설명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작품의 수준이 판가름날 테니까요. 제가 '이게 걸작이야!'라고 제 딸 아이 그림을 평가해도 세상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요? 결국 다 평론가들 놀음이라는 점에서는 입맛이 좀 씁니다.

또 시대에 따라 경험이 변해서, 아름다움의 정의가 변한다는 것도 와 닿았습니다. 명확한 사실이니까요. 현대에 사는 우리가. 여러가지 매체에서 수없이 보았을 '모나리자'를 보고 놀라움을 느낄 이유는 전혀 없지요. '놀라움' 을 느낄 여지가 적어졌다는 점에서, 현대는 정말 예술을 하기 힘든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존 케이지의 음악처럼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도 못할 기괴한 발상이 난무하고 있죠.
그래도 재미있는 작품과 발상들이 몇 가지 눈에 뜨이기는 합니다. 저자의 친구 알렉스의 서재가 대표적입니다. 알렉스는 원룸 집 벽에 나무 책장을 들여 놓았는데, 책으로 가득차 책 한 권을 더 꽂으려면, 그 두께만큼 다른 책을 빼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서재는 자츰 진화하고, 가꾸는 물건이 되었으며 결국 알렉스 자신을 표현하게 되었죠. 여기에 더해 가차없으면서도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기에 이는 예술이며 작품이 되었다는 논리인데, 그럴듯합니다!
존 레넌의 아내였던 오노 요코의 작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존 레넌을 유혹하는데 성공한 외국 여자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상당한 수준의 교육과 깊이를 가진 여성이라는건 처음 알았네요. '수동성'을 표현했다는 그녀의 여러가지 작품들도 인상적이었고요.
 수집 자체가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설명도 기억에 남습니다. 수집은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로, 감식안과 더불어 일종의 상징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등의 이유인데, 이유보다도 앨버트 C. 반스의 수집품이라는 실례로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만의 독특한 진열 방식으로 수집품이 진열되었는데, 덕분에 그림을 새롭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거든요.

오노 요코 외에도 새로 알게된 사실은 많아요. 화가들도 규칙적으로 생활하면서 그림을 그린다던가, 우리가 알고 있듯이 루이스 캐럴은 변태가 아니었다는 것, 보나르의 아내 마르트에 대한 집착 같은 것들 말이지요. 특히 보나르가 생의 마지막 시기에 옛 연인 르네를 그린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놀랍습니다. 보나르 작품에 언제나 등장하는 마르트가 잘 보이지도 않게 등장해서, 화면 중앙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르네와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보나르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궁금하지만, 르네야말로 그의 마음 속 천사였고, 마르트는 그를 뒤에서 지배하는 움울한 지박령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드네요. 르네가 마르트와 눈이 마주친건, 결국 지박령의 승리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굉장히 암울한 그림이라 할 수 있고요. 아,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니 이런게 예술인거겠죠?

몇가지 작품들에 대한 소개는 굉장히 흥미로와서 인터넷에서 더 많은 정보를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나치 포로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은 유대인 아가씨 샬로트가 죽기 직전까지 몰두하여 만들었다는, 1300쪽에 이르는 글과 그림으로 구성된 "인생? 혹은 연극?"이 대표적입니다. 그게 뭐든, 양이 많으면 일단 독보적인 무언가가 되는 듯 합니다.
자수로 프로야구 선수들 초상화를 만든 죄수 출신 작가 레이 매터슨의 작품들, 초창기 남극 탐험에서 목숨을 걸고 찍은 사진으로 불멸의 이름을 남긴 프랭크 헐리의 기록 사진들도 찾아볼 만 하더군요. 저자가 작품 창작 과정을 직접 관찰한 화가 펄스타인의 작품들 역시 괜찮았습니다. 한 점 구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도 많았어요. 그 중에서도 거대 작품, 해당 작품이 놓인 장소로 여행을 떠나야지만 볼 수 있는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가 제일 이상했습니다. 감상 순간의 주변 환경이 중요한 장소 특정적 예술이라는게 있다는 논리에서 시작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현대의 이런 작품들은 그냥 크기로 승부하는, 크기로 놀라움을 주는 단순한 아이디어가 전부가 아닌가 싶기 때문이었어요. 거대 기념비와 별 다를게 없는데 이게 과연 예술인가요? 화가나 조각가가 만들었다고 큰 돌덩어리가 예술이 되는건 아닐텐데 말이지요. 이에 비하면 일상 속 아름다움을 간단 명료하게 표현한 샤르댕이나 티보의 작품들이 훨씬 예술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도판이 부실한건 굉장히 아쉽네요. 컬러로 수록된 도판도 부족할 뿐더러, 그나마 수록된 도판들도 저자가 설명하는 작품들을 전부 담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궁금한건 인터넷으로 직접 찾아볼 수 밖에 없었어요. 그나마 수록된 도판도 흑백이 많아서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고, 예술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볼 계기가 되었으니 좋은 독서임에는 분명합니다. 단지 제 취향과 맞지 않았을 뿐이지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2/04/08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 히가시노 게이고 / 최고은 : 별점 2.5점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쿄에서 건축사로 일하는 마요는 중학교 선생으로 재직하다 정년퇴임한 아버지가 살해당했다는 연락을 받고 고향으로 향했다. 현장에서 십여년 만에 만난 삼촌 다케시는 스스로 범인을 찾아내겠다며 수사에 나섰고, 마요도 삼촌과 힘을 합쳤다.
다케시는 오래전 사무라이 젠이라는 예명의 마술사여서 온갖 트릭과 심리전의 달인이었고, 덕분에 결국 범인을 알아내는데 성공하는데....

일본 추리 문학계의 거물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작. 제목처럼 지명이 명확하지 않은 시골마을. 주인공 마요의 표현대로라면 '이름도 없는 마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와본 적 없는 작고 평범한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그린 작품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답게 쉽게 읽히기는 합니다. 이런저런 수수께끼를 배치해서 흥미를 배가시키는건 솜씨도 여전했고요. 살인 사건을 저지른 범인이 누구인지? 범인은 왜 흉기를 따로 준비하지 않고 수건같은 기묘한 도구를 사용했는지? 범인은 왜 이상하게 피해자 집을 어지렵혔는지?와 같은 핵심 수수께끼 외에도 장례식장에 나타났던 모리와키 아쓰미의 정체는 무엇인지? 가미오 에이치가 도쿄까지 가서 만났던 인물은 누구인지? 모모코의 남편은 왜 간사이에 파견 근무를 갔다고 거짓말을 했는지? 마요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비밀은 무엇인지? 등 작 중에 스치듯 등장하는 수수께끼를 합치면 열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입니다. 이에 대한 답들도 모두 합리적으로 공개되고 있고요. 최소한 불필요하게 등장해서 끝까지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 맥거핀은 없습니다.

여기에 더해 탐정역을 소화하는 '블랙 쇼맨' 가미오 다케시가 보여주는 여러가지 현란한 트릭들도 볼거리입니다. 도청기나 몰래 카메라같은 장치의 효과적인 사용은 기본이고, 손재주를 이용해 경찰 스마트폰을 몰래 빼돌려 정보를 입수하고, 사람들을 경험과 마술 트릭에 기반한 심리전으로 현혹시켜 필요한 정보를 알아내는데 분명 과장되었지만, 그럴듯하게는 묘사되고 있습니다.
특히 장치, 손재주에 비해 심리를 활용하는 부분이 꽤 설득력있는 편입니다. 마요를 처음 만났을 때 "고양이를 좋아하고, 그림을 잘 그린다"고 말할 수 있었던 방법처럼요. 나중에 알고보니 고양이를 싫어하는 여자 아이는 없고, 그림도 일단 잘 그린다고 칭찬했을 뿐입니다. 어차피 칭찬이니 큰 문제는 안되며, 설령 그림을 못 그리더라도 누군가 칭찬하는걸 들었다고 할 생각으로요.
"일반적으로 인간은 뭔가를 상상하며 이야기하려 할 때 시선이 오른쪽 위로 향하는 경향이 있어. 반대로 사실을 떠올릴 때는 왼쪽 위를 향하지. 대강 말하면 거짓말을 할 때는 오른쪽, 사실을 말할 때는 왼쪽이야."라는 주장은 억지스러울 수 있지만, 이전에 수차례 가키타니 경위를 만나서 확인했다는 전제가 뒷받침 된 덕분에 꽤 일리있는 추론의 근거로 사용되고요. "대화를 통한 정보수집의 철칙은 딱 하나다. 침묵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일 것. 10년지기처럼 대화를 즐겨."와 같이, 전문성이 느껴지는 대사들도 좋았습니다.

그가 수집한 정보들로 펼치는 추리들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되었던 기름 라이터 오일 자국에 첫 수수께끼였던 '수건을 흉기로 쓴 이유'를 결합한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마요는 범인이 몸싸움을 하다가 오일이 샌 게 아니냐고 했었지만, 라이터의 오일은 왠만하면 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오일 자체를 가지고 왔던 것이고, 이유는 무언가를 불태우기 위해, 즉 방화라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오일을 적시기 위해서 가져왔던 수건이 흉기가 되었던 거지요.

그러나 정교하거나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아서 추리할 여지는 적습니다. 애초에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를 피해자 가미오 에이치 주변 인물들 조사를 통해 드러내는, 일종의 '와이더닛' 계열 범죄물이거든요. 문제는 동기가 이야기 속 당대 최고의 인기만화 <<환라비>>를 그린 만화가 구기야마와 관련되어 있다는게 예상 가능했다는 점이습니다. '이름없는 마을'과 반대로, 당대 최고의 만화로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계속 이름이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해 가미오 에이치가 다가오는 중학교 동창회 겸 쓰쿠미 추모식에서 무언가를 공개하려고 했었고, 쓰쿠미는 생전에 구기야마와 아주 절친했다는 정보가 결합되면 답은 뻔합니다. 구기야마는 중학생 시절, 죽은 쓰쿠미와 함께 했지만 공개되면 안되는 추억이 있었던 것이지요. 즉, 구기야마의 매니저를 자처하는 고고노에 리리카가 구기야마와 함께 있었다는 알리바이가 깨진 시점에서, 범인은 구기야마가 되는 셈입니다.
작가도 이렇게 뻔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는 없었는지 가시와기가 주도했던 '환라비 하우스'와 관련된 잇권 다툼을 내세우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퇴직한 중학교 교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요. 급작스럽게 동창회를 앞두고 범행이 일어날 이유도 없고요.
추리도 억지가 많습니다. 고고노에 리리카가 범행 시각에 구기야마와 함께 있었다는 알리바이를 파헤쳐서, 그녀가 스기시타와 불륜 관계였다는걸 드러낸 추리처럼요. 아무런 근거도 없을 뿐더러, 애초에 고고노에 리리카의 상대가 같은 동창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아울러 다케시 캐릭터는 심하게 작위적이라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더군요. 첫 등장에서부터 고구레 경감과 다투기 시작하는데, 과장이 너무 심했어요. 전형적인 천재형 독불장군으로 새로운 맛도 없고요. 조카에게서도 돈을 우려내는 모습 등 안티 히어로적인 묘사도 만화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며, 마지막에 사건에 관련되었던 동창들 앞에서 다케시가 추리쇼를 펼치는 것도 오랜 추리 소설 애호가로서는 즐길거리였지만 대체로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여전히 엔터테이너로는 뛰어나다는걸 입증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재미 외에 읽어볼 만한 뚜렷한 가치는 비록 없어도, 재미가 가장 중요하지요. 제 별점은 2.5점 입니다. 킬링 타임용으로 적합한 작품이에요.

2009/11/28

시미가의 붕괴 - 기타무라 가오루 / 김해용 : 별점 3점

시미가의 붕괴 - 6점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김해용 옮김/황매(푸른바람)

"하늘을 나는 말"이라는 작품이 굉장히 유명한, 그래서 많이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국내 추리 독자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기타무라 가오루의 작품입니다. 사실 대표작도 아니고 해서 이 작품이 어떻게 번역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워낙 컸던 탓에 구입하게 되었네요.

일단 이 작품집은 크게 3가지 성향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추리를 기반으로 한 블랙코미디적인 작품, 그리고 일상의 소소함을 디테일하게 추리와 결합시키는 (하지만 추리물은 아닌) 일상계 추리분위기 소품, 마지막으로 인간의 심리를 디테일하게 그린 드라마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번째 블랙코미디 류(類)로는 표제작이기도 한 "시미가의 붕괴"와 "죽음과 밀실", 그리고 "옛날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들 수 있을테고 두번째 일상계 소품은 "하얀 아침"과 "주사위, 데굴데굴", "오니기리, 꾹꾹"이 해당되며, 마지막 심리드라마는 "녹아간다"와 "나비", "나의 자리" 가 해당된다 생각됩니다. 이중 개인적으로는 일상계 소품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일상계 미스터리로 유명한 작가답다고나 할까요? 추리적인 요소가 녹아있으면서도 그것이 그야말로 일상과 밀결합되어 있고 내용과 캐릭터들도 너무 귀여워서 읽는 내내 아~주 흐뭇했거든요.

물론 그 외의 대부분의 작품들 역시 추리적인 성향과 기발한 아이디어가 포함되어 있기에 재미있게 읽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블랙 코미디 류의 작품군은 조금 더 절제했더라면 동화적인 세계관에서 벌어지는 독특한 추리물로 와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나칠 정도로 설정이 과장되어 있다는 것이 약간은 아쉽더군요.

그래도 국내에서 접하기 힘들었던 작가의 작품집이고 작가 특유의 센스가 충분히 느껴지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정통 추리물들도 아니고 작가의 대표작도 아니긴 해도 가볍게 즐기기에 좋아서 추리소설에 거부감을 느끼실 수 있는 초심자분들에게 추천할만 하다 생각되네요. 특히 여성분들이 좋아하시지 않을까 싶어요.

아울러 이 단편집을 계기로 추후 일상계 소품으로만 묶인 (대표작인 "하늘을 나는 말" 시리즈면 더욱 좋고요) 단편집이 나와준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PS : 최근 너무 바빠서 좀 격조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읽은 책이 쌓여가는데 포스팅할 시간이 없네요...
녹아간다
평범한 회사원 미사키의 정신 붕괴과정을 "만화"라는 독특한 매개체를 통해 표현한 심리 드라마입니다. 치밀한 묘사는 볼거리이지만 정신 붕괴, 즉 미쳐가는 과정에 대한 이유가 합리적이지 않아서 결과물만 놓고 본다면 평범한 수준이라 생각되네요.

시미가家의 붕괴
천재탐정과 그의 조수가 탐정의 친구인 장서수집가 시미가를 방문했다가 시미의 아내 가즈코가 밀실에서 살해된 것을 발견한다.
과장된 동화같은 설정의 블랙코미디에 가까운 추리물입니다. 일단 서두의 등장인물 소개가 너무 장황하고 허무맹랑해서 당황스럽더군요. 그냥 천재탐정과 조수였어도 충분했을텐데 조수의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사랑한다는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탐정의 천재성도 정말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채워놓고 있거든요. 하지만 중반 이후에 등장하는 밀실 살인과 다이잉 메시지트릭을 적절하게 사용한 덕에 그나마 황당한 이야기안에 추리적인 이야기가 깔끔하게 녹아들어 있는 것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덧붙이자면, 이 작품에 대한 책 소갯글이 더 예술적입니다. 별거없는 반은 장난같은 이야기를 흡사 고전 전통 트릭 미스터리와 고딕 호러의 결합물 처럼 소개해 놓았더군요.
(탐정에게 사건이란 이미 읽은 책이나 다름없다! 인간의 가장 깊은 욕망을 파헤치는 천재 탐정의 놀라운 활약!
완벽히 다 갖추어지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수집 강박증. 단순한 호기심과 관심의 경계를 넘어선 그것은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치명적인 욕망으로 자라나 목숨마저 위협한다. 책 수집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장서가 부부에게 어느 날 찾아온 죽음이라는 손님. 책에 대한 무모한 집착이 부른 재앙 앞에서 탐정은 진실의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겨 나가는데…….
아무리 채워도 꽉 차지 않는 서가의 구석에서 발견된 부인의 다잉 메세지. 남편의 가장 깊은 욕망이 드러나는 순간, 시미가는 마치 꿈처럼 아스라이 붕괴하고 만다.)


죽음과 밀실
노인 추리작가들이 모여사는 공동체 "환상의 정원"에 정말이지 완벽한 밀실살인사건이 발생하는데...
시미가의 붕괴와 연결되는 천재탐정과 조수 이야기로 추리소설의 이상적인 형태를 냉소적으로 비웃는듯한 작품입니다. 추리소설로 보기는 어려운, 추리애호가들을 위한 블랙코미디에 더 가까웠달까요?

하얀 아침
주인공이 과거 소녀였을때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1인칭 시점의 이야기로, 청춘드라마같은 깜찍한 사랑이야기가 나름의 추리적 요소 (누가 왜 아버지 차 백미러 성에를 닦아놓았을까?)와 잘 결합된 일상계 소품입니다. 여성작가다운 특유의 세밀한 심리묘사와 더불어 과연 일상계 미스터리의 거장이구나.. 싶을 정도로 사소한 이야기에서 추리적인 전개를 이끌어내는 것이 놀라운 작품이죠.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의 베스트 중 한편으로 추리물에 대해 별로 내켜하지 않는 지인들에게 따로 권해주고 싶을 정도로 부드럽고 따뜻한 이야기였습니다.

주사위, 데굴데굴
출판사 신입사원 치하루씨는 우연하게 한 남자가 떨어트린 십면체 주사위에 관심을 갖는데...
5페이지짜리 이야기로 이정도면 소품이라기 보다도 꽁트라 해도 무방한 분량이죠. 하지만 이야기가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아주 일상스럽지만 귀여운 발상의 트릭이 깜짝 등장하기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여간.. 아이들 머리는 정말이지 못 당하겠어요^^

오니기리, 꾹꾹
치하루씨는 회사 선배 미즈마치와 함께 이와테로 현장조사를 나간다...
전편과 같은 주인공 치하루씨 시리즈로 이번엔 분량이 약간 기네요. 하지만 역시나 귀여운 소품답게 이와테로 무대가 옮겨갔어도 여전히 일상스럽고 밝은 이야기입니다. 등장 인물들이 모두 착하디 착한 사람들이라는 것도 그러하고요.

추리의 요소는 두가지로 한가지는 버린 깡통이 어떻게 멀리 있는 계곡까지 굴러가는지와 제목의 오니기리를 만든 결과물에 대한 추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대다한 트릭이나 추리는 아니지만 이야기와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은 역시나 마음에 들었어요.

나비
한 여성의 술자리 잡담이랄까... 심리묘사는 좋은데 두서도 없고 이야기도 없는 단상만 모아놓은 짧은 잡문이랄까요. 언급할게 별로 없네요....

나의 자리
주인공이 평상시와 다른 일상을 통해 누군가의 자리를 빼았는다는 설정도 굉장히 독특하지만 이러한 자신이 느낀 일상속의 불편함이 결국 자기자신과 연결된다는 결과가 굉장히 서늘해서 "기묘한 맛" 류의 작품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반전으로 이르는 전개와 묘사도 군더더기 없는, 작가의 필력과 센스를 잘 느낄 수 있는 수작이라 두번째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옛날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있지 않은 일본의 전래동화 "카치카치야마" 이야기 (할아버지가 밭일을 하다가 잡아온 너구리로 너구리죽을 만드려 하는데 너구리가 외려 기지를 발휘해서 풀려난 뒤 할머니죽을 만든다는 엽기 이야기?)를 추리물 형식으로 꾸민 내용으로 서두에 지극히 개인적인듯한 느낌의 장황한 옛날 이야기 해석에 대한 이론이 묘사되는 등 작가 스스로의 생각을 대화하듯이 써내려간 형식이 무척 이채로웠던 작품이었습니다. 뭐 달리 이야기하자면 좀 쭉쭉 써내려간 느낌도 들긴 하네요. 왠지 좀 장난스러움이 많이 묻어나는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고요. 어차피 모티브가 된 전래동화가 내용을 잘 모르는 일본 전래동화이기 때문에 몰입하기 힘든 탓도 크겠죠.

하지만 워낙 개인적인 단상이 많은 글이다보니 실제 기타무라 가오루라는 작가에 대해 조금 더 알게된 것 같아 흐뭇한 느낌도 들고 추리적으로도 이야기를 잘 구성해 놓아서 감탄했습니다. 전래동화를 앞뒤가 맞아 떨어지는 추리물로 각색할 생각을 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결과물도 상당한 수준이니 놀라울 따름이죠. 덕분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나뉠것 같은 작품인데 저에게는 무난한 평작 수준으로 생각되네요.

2007/01/07

말더듬이 주교 - E.S 가드너 / 정계춘 (자유추리문고 17) : 별점 1.5점

말더듬이 주교 - 4점
얼 스탠리 가드너 지음, 장백일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페리 메이슨 사무실로 멜로리 주교가 찾아와 더듬는 말투로 한 과실치사 사건에 대한 변호를 의뢰하며 억만장자 렌월드 C 블래운리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 상세한 내용은 추후 관련인물들을 통해 알려주겠다고 전한 후 사라진다. 페리 메이슨은 사립탐정 폴 드레이크를 통해 주교에 대한 모든 정보와 과실치사 사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나 곧바로 주교가 폭행당한 뒤 사라지고 주교에게 고용되었던 간호사 아가씨마저 종적을 감춘다.
페리 메이슨은 주교가 말한 과실치사 사건의 당사자이자 블래운리 가문에서 내쳐진 며느리인 줄리아 블래너와의 만남을 가진뒤 정확한 사건의 개요를 파악하게 되나 곧바로 렌월드 C 블래운리가 살해당하며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줄리아 블래너가 체포되고 페리 메이슨은 증거를 얻기 위한 활동 덕에 오히려 궁지에 몰리게 되는데...


미국 추리소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드보일드 쪽이야 걸작도 많고 이래저래 접한 작품이 많지만 그외의 작품들은 뭔가 흥행을 굉장히 의식한 듯한, 시드니 셀던 류의 작품이 너무 많다고 여겨졌거든요. 때문에 진정한 흥행 대마왕인 페리 메이슨 시리즈 역시 선뜻 손이 가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자유추리문고 구입에 포함되어 있어 모처럼 주말에 진득하게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위의 그림은 동서문화사 판이지만 뭐 어차피 같은 작품이니까...)

"관리인의 고양이"라는 작품을 포스팅 하는 등 이전에도 페리 메이슨 시리즈는 몇편 읽어보았는데 이 작품은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조금 다른 분위기였어요. 정통 추리적인 부분이 부족하고 외려 하드보일드적인 성격이 상당히 강하기 때문입니다.
페리 메이슨과 하드보일드는 잘 어울릴 듯한 소재는 아니지만 이 작품은 페리 메이슨이 혼자 쳐들어가서 악당을 두들겨 패는 장면이나 악당과의 담판 등 세세한 분위기 및 범행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뚜렷하게 하드보일드적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전개 역시도 여러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사건의 본질을 추적해 나간다는 하드보일드의 기본 원칙에 충실하더라고요.
그래서 정통 추리물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밖에 없어요. 무엇보다도 사건은 단 한건의 살인 사건만 벌어질 뿐이며 그 동기가 너무 뚜렷하고 악당 캐릭터가 눈에 보일 정도로 도드라져서 정통 추리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물론 어차피 페리 메이슨 시리즈에서 사실 기대하는 것은 정통파적인 요소보다는 법정쇼겠죠.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페리 메이슨 시리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법정쇼" 대신 일종의 속임수로 범인의 자백을 이끌어 내는 결말이기에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물론 법정쇼는 등장하긴 하지만 사건의 해결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시간을 벌기 위한" 자리였기에 긴장감이 떨어지거든요.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다양한 증언과 증거 수집,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법정쇼라는 최대의 매력이 없는 앙꼬없는 찐빵같은 작품이었습니다.

페리 메이슨, 델라 스트리트, 탐정 폴 드레이크라는 고정 캐릭터 3인의 협력 관계 등 시리즈의 팬이라면 즐길 만한 요소가 많고 위에서 이야기한 하드보일드적인 부분때문에 색다른 느낌도 전해주며 페리 메이슨 시리즈의 최대 장점인 "쭉쭉 읽히는" 재미는 여전하지만 단지 추리소설로만 놓고 본다면 높은 수준의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번역도 좀 애매한 편이고요. 제목에서 유래되는 주교의 정체를 밝혀나가는 초반부가 외려 저는 더욱 마음에 들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런데, "주교는 말을 더듬지 않는다"라는 일종의 통설이 구미권에서는 속담처럼 널리 쓰이는 말인가보죠? 제목이 저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는데 작품 안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의 하나로 쓰이고 있어서 궁금해지긴 하네요.

2020/10/08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 에릭 앰블러 / 최용준 : 별점 2.5점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 6점
에릭 앰블러 지음, 최용준 옮김/열린책들

영국인 추리 소설 작가 레티머는 터키 이스탄불을 여행하다가 우연히 디미트리오스라는 범죄자의 시체를 보게 되었다. 래티머는 디미트리오스에게 강한 흥미가 생긴 나머지 디미트리오스의 행적을 좇아 유럽을 횡단해 가며 이런저런 조사를 벌이는데...

에릭 앰블러가 발표했던 스파이 소설의 고전입니다. 이쪽 바닥에서는 일찌기 걸작으로 인정받은 작품이지요. MWA 선정 베스트 미스터리 100 순위도 17위라는 고순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파이 소설로 알려진 바와 다르게, 범죄자를 쫓는 탐정 수사물로 보는게 맞습니다. 물론 래티머는 제대로 된 탐정은 아니고, 수사도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소개받아 추억담같은 이야기를 듣고 수집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옛 동화나 민요를 수집하는 민속학자 활동에 가깝지요. 차이점이라면 디미트리오스는 정말로 사악한 범죄자이며, 이야기되는 추억담은 모두 범죄라는 정도고요.

읽으면서 아직도 걸작으로 회자되는 이유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흔해빠진 스파이 소설이나 느와르, 하드보일드 물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고급스러움이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는 빼어난 묘사들과 생생한 캐릭터들 덕분입니다. 유유부단하며 체면을 중시하는 속물이자 샌님인 주인공 래티머부터 눈부실정도로 생생해요. 뭔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알맹이는 없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모습은 실존하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전해 줄 정도입니다. 탐정 수사, 모험물 주인공이 이렇게 평범하고 소심하기도 힘든데, 거의 백여년전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해 내고 있는게 놀랍네요.

조역들도 현실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범죄물, 특히 느와르나 하드보일드에서 자주 등장했던 쌍욕을 하는 범죄자, 보자마자 사람을 죽이는 킬러, 여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마초와 폭력배들은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사악한 범죄자 디미트리오스조차도 나름 신사적이며, 그를 등쳐 먹으려는 시시한 사기꾼 악당 피터슨조차 철학사를 옆에 끼고 사는 인물로 그려지는 등, 후대의 느와르나 하드보일드와는 캐릭터가 사뭇 달라요. 요즘 작품이라면 당연시되는 불필요한 정사 장면 묘사나 고어, 포르노에 가까운 혐오스러운 폭력 묘사 역시 찾아보기 힘들고요.

실제 등장은 마지막 몇 페이지에 그치는 디미트리오스의 존재감도 발군입니다. 그야말로 '씬 스틸러' 로 돈과 권력을 탐하는 순수한 악당이지만, 기묘한 조직력과 행동력, 관찰력이 잘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가난뱅이 악당 시절, 이웃이었던 프레베자를 범죄에 끌어들이며 한 말이 기억에 남네요. "내가 당신을 고른 건, 비록 당신이 무르고 감상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약삭빠르고 쉽게 흥분하지 않기 때문이야. 내가 그날 당신 방에 갔을 때, 나는 당신이 커튼에 돈을 숨겨 놓았을 거라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당신 같은 사람들은 늘 커튼에 돈을 숨겨 놓거든. 낡은 수법이지. 하지만 당신은 초조한 눈으로 핸드백을 계속 주시했고, 그래서 나는 당신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았어." 라는데,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프레베자는 자기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이 말에 넘어가 버리고 말지요.

디미트리오스의 여러 악행을 1920~30년대 유럽에서 일어났던 실제 역사에 잘 녹여낸 전개도 그럴듯합니다. 예를 들자면, 디미트리오스는 1922년 터키와 그리스 전쟁으로 벌어진 스미르나 대학살 당시, 피난민들 움직임을 이용하여 그리스로 도주했고, 1924년에 터키 지도자 케말 퍄사 암살 음모에 가담했었으며, 1926년에 유고슬라비아가 오트란토 해협에 설치한 기뢰 위치가 기록된 지도를 빼돌려 프랑스에 팔아먹으려고 했다는 식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약간 팩션 느낌도 전해 주고요.
래티머가 당시 교통 수단을 이용하여 이스탄불에서 스미르나, 아테네, 소피아, 제네바를 거쳐 파리로 향하는 여정도 마찬가지로 볼 만 합니다. 그런데 구글 지도로 확인해보니 4,162Km에 달하는 거리더라고요. 단순한 호기심으로 이렇게 긴 수사 여행을 떠나는 래티머도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긴 하네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그닥 도드라지는 부분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수사는 별 볼일 없고 - 영국인 작가가 밝혀낼 수 있는 상식적인 수준에 그칩니다. - 디미트리오스의 악행과 범죄는 모두 관계자 증언만 있는 탓입니다. 증거라고는 전무합니다.

그나마 딱 한 가지, 이전 디미트리오스를 협박했던 피서르가 살해된 후 디미트리오스로 위장된 경위를 설명하는 피터슨의 추리 정도만 볼만 했습니다. 여러명이 함께 요트 여행을 간 뒤, 다른 승객이 내릴 때 피서르에게만 따로 이스탄불로 함께 가자고 유혹했다는 추리지요. 그리고 이스탄불에서 피서르를 살해하고 자기 옷을 입혀 바다에 버린 후, 자신은 피서르의 이름으로 투숙한 뒤 떠난 겁니다.
다만 피서르가 자신이 협박하던 디미트리오스와 선뜻 단 둘이 항해를 떠났다는건 설명하기 어렵고, 역시나 증거라곤 하나도 없다는 문제는 큽니다.

또 래티머가 확인했던 사체가 사실은 디미트리오스가 아니라 피서르였다 한 들, 이를 밝힐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프랑스 경찰이 뭘 할 수 있지도 못해서 딱히 디미트리오스에게 위협이 될 사건도 아닙니다. 피터슨이 협박하자 디미트리오스는 살인으로 입을 막으려 하는데,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어보였거든요. 

그리고 피터슨이 디미트리오스에게서 백만 프랑을 울궈낸 뒤, 당연한 보복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건 마찬가지에요. 온갖 범죄를 저질러 왔던 악당인데, 협박범을 그냥 놔 둘리 없잖아요? 래티머도 위험한건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협박은 엄연한 범죄인데 래티머가 공범으로 함께 자리하는 전개도 쉽게 납득하기는 어려웠어요.

피터슨과 래티머를 궁지에 모는 데 성공한 디미트리오스가 래티머를 제압하지 못해 최후를 맞는 결말도 많이 시시했습니다. 래티머는 바닥 양탄자에 미끄러진 탓에 디미트리오스가 쏜 총알을 피할 수 있었고, 이어진 격투로 총을 빼앗는데 성공하는데, 이렇게 운과 우연에 의해 살아남는게 소시민 래티머에게 어울리기는 하지만 조금 더 정교한 무언가를 기대했는데 아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고급스러움을 얻기 위해 도입한 장황하면서 옛스러운 묘사, 그리고 느릿느릿한 전개와 말투는 독서를 방해하는 요소였습니다. 고급스러움의 반대급부로 지루함이 생겨난 셈이지요. 예를 들어 제목은 래티머가 디미트리오스를 처음 만났을 때 떠오른, '인간은 악마의 가면처럼 얼굴을 사용한다. 얼굴은 자기감정을 보충해 주는 감정을 타인의 가슴속에 불러일으키기 위한 도구다.' 라는 상념에서 비롯된겁니다. 얼굴이 가면같다니! 멋지긴해도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발표 당시에는 걸작이었을테고, 지금 읽어도 멋진 작품이기는 하지만 기대만큼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추리적인 요소와 재미 측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에 감점합니다. '추리' 보다는 '순문학'에 가까운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열린책들'에서 '세계문학' 으로 출간한게 이해가 됩니다.

덧 1 : 해설이 아주 좋습니다. 서점에서 뒷부분 해설만이라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덧 2 : 원래 "디미트리오스의 관"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해설에 따르면 원래는 "가면"이 맞다고 하는군요. 미국 출간 당시 제목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도 관 보다는 가면 쪽이 작품에 더 적절합니다.

2003/08/29

북극성 - 마틴 크루즈 스미스 : 별점 3점

북극성 - 6점 마틴 크루즈 스미스/김영사
미국과 소련의 합동 선단의 일원인 소련의 북극성호에서 여승무원 지나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선장은 전 정보부원 (KGB) 출신인 선원 아르카디 렌코를 불러 사건의 조사를 맡긴다. 미국과의 합동 조업이라는 상황, 지나의 복잡한 남자관계 등을 고려하여 내린 조치.하지만 의외로 렌코는 우직하게 수사를 해 나아가며 미국 선단의 감추어진 음모와 복잡한 인간관계를 모두 밝혀내고 사건을 해결하게 된다.

두께와 잘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작가 이름으로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던 작품. 그런데 한번 손에 잡고 나니 끝까지 손에서 떼기 힘든 재미를 주더군요! 특히나 주인공인 아르카디 렌코라는 캐릭터의 묘사가 굉징히 재미있고 맛깔납니다. 냉소적인 성격 등 캐릭터 자체는 전통적인 미국 하드보일드 탐정의 DNA를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몰락한 정보부원 출신의 하층 어부라는 설정으로 인해 이국적이고 허무적인 면까지 첨부한, 신선한 외국계 하드보일드 히어로였어요.

물론 여승무원 추락사 (나중에 살해당한것으로 밝혀지지만)가 결국은 여러명 죽어나가는 거대한 음모로 커진다는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는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고 사건의 개연성같은게 부족한 부분은 있습니다. 무엇보다 쓸데없는 여러 묘사로 지나치게 소설이 길어진 등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수사 과정에서 수집된 단서를 보아 진상에 접근해 나간다는 추리 스릴러적인 재미는 충분합니다. 또 앞서 이야기한 주인공 캐릭터의 매력에 더해 렌코의 룸메이트나 여러 선원들, 배의 구조나 선단에 대한 것이라던가 구소련 시절에 대한 치밀한 묘사도 대단하고요. 작가의 정보수집능력에는 정말이지 감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마틴 크루즈 스미스라는 작가, 기억해 둘만 합니다. 지루함을 조금만 참으면 괜찮은 스릴러 하나 읽으실 수 있으실 수 있을 거에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22/01/28

노조키메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 별점 3점

노조키메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괴이 현상의 진상 등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괴담을 수집하던 미쓰다 신조는 '노조키메'라는 괴이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후, 우연히 민속학자 아이자와 소이치가 오래전 겪었던 경험을 기록했던 노트를 입수했다. 그리고 노트 속 내용이 이미 수집해서 "엿보는 저택의 괴이"라고 이름 붙였던 괴담과 시간은 다르지만, 같은 장소에 일어났던 일이라는걸 깨달았다.

두 편의 이야기를 묶어 "종말 저택의 흉사"라고 이름 붙이고 발표한 후, 미쓰다 신조는 괴이 현상에 나름의 추리를 덧붙이는데....

미쓰다 신조호러 추리물입니다. 

미쓰다 신조가 입수한 두 개의 괴담을 엮어 선보이고, 괴담에 대한 진상을 추리하는 결말로 이어지는 구성은 "괴담의 테이프"와 유사합니다.

첫 번째 괴담인 "엿보는 저택의 괴이"는 이야기를 전해 준 시게루의 대학생 시절 체험담입니다. 당시 시게루는 사이코, 카즈요, 유타로와 함께 여름 방학 동안 산골 마을 별장 관리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관리인이었던 미노베는 절대 가면 안되는 산책길이 있고, 순례자가 나타나면 자기에게 꼭 알리라는 당부와 경고를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순례자 모녀를 만나서 산길을 걸었다는 카즈요의 제안으로 네 명은 가면 안되는 길을 걷다가 폐허가 된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무언가에 씌워졌고요.

미쓰다 신조 특유의 집요한 묘사가 돋보이는 폐허가 된 마을 묘사, 그리고 이 곳에서 '괴이'에 씌워진 뒤 모든 틈새에서 시선을 느끼게 되는 등장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대단합니다. 방 안에 처박혀 모든 틈새를 막고, 눈까지 막아버린 카즈요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시게루가 귀가한 뒤, 찬장 안에서 시선을 느끼고 그 문을 열자 비좁은 찬장 안에 몸을 웅크려 시게루를 응시하고 있던 이와노보리 카즈요의 모습을 봤다는 장면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기억에 남네요. '무언가 쳐다보는 느낌'을 이만큼 글로 잘 표현한 작품은 또 없을 것 같아요.

그러나 유타로와 사이코는 지나치게 씌워졌던 탓에 죽고, 영험한 기도사의 기도로 시게루와 카즈요는 살아남았다는 결말은 설명이 부족하고 급작스러웠습니다. 물론 괴담은 이렇게 설명이 부족한게 더 현실적이기는 하겠지요. 미쓰다 신조 스스로가 작 중에서 괴담과 기담에 완결을 원하는건 뭘 모르는 행동이며, 오히려 이야기 도중에서 뚝 하고 끊어지는게 더 무섭다고도 하니까요. 카즈요가 시게루를 몰래 엿보는 버릇이 생겨 둘의 관계가 끝장났다는 후일담도 오싹하기는 했던만큼, 이 정도면 괜찮은 호러, 괴담 단편으로는 충분했던 수작이었다 생각됩니다.

두 번째 이야기 "종말 저택의 흉사"는 전편 괴담의 프리퀄입니다. 이 작품에서 폐허가 된 마을에 대한 이야기와 '엿보는 괴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민속학에 관심이 많았던 학생 아이자와 소이치가 비명횡사해 버린 친우 사야오토시 소이치의 고향 마을 토노무라에 명복을 빈다는 핑계로 방문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사야오토시 가문은 마을에서 배척받는 존재였고, 그 이유는 조상 중 한 명이 순례자 모녀를 참살했던 뒤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문은 저주를 풀기 위해, 원령에 씌워지는 '시즈메'라는 역할을 하는 소녀를 데려오기에 이르렀지요. 그러나 시즈메들도 역할을 하다가 미쳐버려 여러 사건을 일으켰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그 역할을 할 소녀가 없어서 이미 4년 전에 명맥이 끊겼습니다.
마침 아이자와 소이치가 도착했을 때 사야오토시 가문은 할머니 코노에의 죽음으로 장례 절차를 진행 중이었습니다. 이를 엿본 소이치 앞에, 사야오토시 가족을 엿보는 꼬마 여자 아이가 소이치에게만 보이는 등 여러가지 괴이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야오토시 가문 당주 기이치, 아내 노리코, 조린 주지, 그리고 그 외 사야오토시 일족 모두가 차례로 죽고 말았습니다. 소이치는 홀로 살아남아 원래 참살당했던 모녀 공양 목적의 순령당 옆에 지어진, 비밀스러운 사당 문을 열어본 뒤 사건의 진상을 깨닫고 도망치는데 성공한다는 걸로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재미, 공포보다는 지루함을 더 많이 느낀 작품입니다. 전편 괴담은 분량도 짧고, 일행의 모험(?)과 공포 체험이 1회성에 그치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아이자와 소이치가 토노무라 마을에서 겪는 괴이 체험이 계속 1인칭 시점으로 반복되는 탓에 금새 식상해질 수 밖에 없었거든요. 괴이 체험도 실체가 있는 공포라기 보다는 착각과 기분 탓에 불과한게 많아서 섬찟함을 전해주기는 부족했어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자기를 쏘아보는 시선을 느꼈다"는건, 솔직히 이런 시골 마을에 외지인이 찾아가면 누구나 겪을 당연한 경험이잖아요? 

묘사도 너무 장황합니다. 소이치가 직접 '노트'에 적었다는 일종의 수기가 이렇게 길고 상세한 묘사로 쓰여졌을리 없다는 점에서는 현실성도 떨어지고요. 더 큰 문제는, 아이자와 소이치가 지나칠 정도로 민폐를 끼치고 다녀서 영 호감을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 말라고 하는 것만 골라서 하고 다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사고뭉치에요. 이를 호기심, 용기라고 포장하는건 불가능합니다. 그가 겪는 공포 체험은 모두 본인 탓으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았고, 그만큼 캐릭터가 비호감이라 몰입하기도 힘들었어요. 쉽게 이야기하면 대학생 호러물에서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철부지 대학생이 주인공인 작품이었달까요? 문제는 대학생 호러물에서는 이 철부지들은 초반에 끔살당해 나름 카타르시스를 전해주는 반면, 이 작품에서는 끝까지 혼자 살아남는다는 점이겠지요....

하지만 이런 고구마스러운 답답함은 다행히 마지막 종장에서 해결됩니다. 미쓰다 신조가 부조리한 존재인 '노조키메'에 대해 논리적으로 해석한, 나름대로 시원한 동치미스러운 결과를 내어 놓는 덕분입니다. 이 결과를 내 놓는 과정은 한 편의 추리물과 다를게 없고, 심지어 그가 수기에서 숨겨져 있는, 알아내야 하는 항목 8개를 목록으로 소개하는 부분은 '독자에의 도전'과 유사합니다! (목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아이자와와 대화 중 사야오토시가 '어떤 사람이 조린 주지라고 이야기하는걸 주저한 이유
  2. 조린 주지에게 환대받으면서도 아이자와는 그가 자기를 쫓아내고 싶어한다고 느꼈던 이유
  3. 사야오토시 가에 시즈메가 없는 상태가 계속되면 노조키메가 나타나서 앙화가 내린다는걸 알면서도 4년간 방치한 이유
  4. 열 살 무렵의 사야오토시 소이치와 자기 아이 쇼이치를 겹쳐보고 토키코가 어두운 얼굴을 한 이유
  5. 순령당에 신찬을 바치는 역할이 노리코가 아니라 토키코에게 인계된 이유
  6. 토키코가 맡은 일을 할 때 무섭고 괴롭다고 한 이유
  7. 노조키메가 된 순례자 모녀 공양 목적으로 세워진게 순령당인데, 그렇다면 순령당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그 옆에 사당이 새로 지어진 이유와 사당에 모셔진게 무엇인지?
  8. 사야오토시가의 종말 저택이 지사이 저택이라고도 불린 이유

독자도 똑같은 수기를 읽었으니, 정보 제공도 공정하다는 점에서 완벽한 본격 추리물인 셈이지요. 괴담, 호러와 본격 추리의 조합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추리는, 사야오토시 가에서는 시즈메 대신에 '지사이'를 이용했다는 겁니다. 4년 전 순례자 모녀가 찾아왔을 때 딸은 시즈메 역할에 부적합했지만, 주술에 정통했던 조린 주지가 딸을 '지사이', 즉 액맞이 역할로 삼은 것이지요. 딸은 병약한 모친을 순령당에서 모시는 조건으로 이를 수락하고, 순령당 옆에 새로 세운 사당에서 살았습니다. 이 주술을 강화하기 위해 조린 주지는 의식주를 챙겨주는 것 외에, 소녀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도록 했었고요.
그러나 소녀의 어머니가 죽고 말자 사야오토시가는 어머니가 살아있는 척 꾸몄습니다. 처음에는 연기에 능했던 코노에가 어머니 역할을 맡았고, 코노에가 증손자의 사고사로 몸져 누운 뒤로는 어머니와 나이가 비슷한 토키코가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사실을 알아낸 소녀가 사야오토시 가문을 멸족시켰고, 손님이었던 아이자와만 살려준게 진상이었습니다. 

이 추리는 모두 합리적이며, 덕분에 여러가지 괴현상들도 모두 설명 가능해집니다. 소녀가 아이자와 눈에만 보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모르는 척 했기 때문입니다. 코노에 화장 시 시체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어 따로 움직였던건, 아래 쪽에 죽은 순례자 모친을 함께 화장했기 때문이고요. 사고가 일어날 수 없었던 벌목 현장에서 기이치가 사고로 죽었던건, 소녀가 마을 지리와 상황에 정통했던 덕분이었습니다. 그러고보면 표지가 스포일러인 셈이군요.... 

아울러 코노에 할머니가 과거 극단 출신으로 연기에 능했다는 등의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았던 단서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등, 한 편의 잘 짜인 추리물로 보아도 손색없습니다. 아이자와의 부인이 이 소녀였을 거라는 여운을 남기는 것도 아주 좋았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앞의 이야기는 괴담으로는 충분한 완성도를 보여주었고, 두 번째 이야기는 비록 지루했지만 종장에서의 놀라운 추리가 단점을 상쇄해 줍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