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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8

칼리의 노래 - 댄 시먼스 / 김미정 : 별점 3점

칼리의 노래 - 6점
댄 시먼스 지음, 김미정 옮김/오픈하우스

죽었다고 알려졌던 시인 M.다스가 아직 살아있고, 캘커타에 나타났다는걸 알게 된 잡지사의 의뢰로 시인 보비는 아내 암리타, 젖먹이 딸 빅토리아와 함께 캘커타로 향했다. M.다스의 신작 확보와 그에 대한 기사 작성이 목적이었다. 보비는 그를 찾아온 조력자 "크리슈나"로부터 M.다스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의 신작에 얽힌 "칼리" 신을 모시는 신앙과 폭력에 대해 들었다.
여차저차 M.다스의 신작을 입수해 독파한 보비는 반은 협박에 가까운 어거지로 M.다스를 직접 만나는데 성공했지만, 이후 다스의 죽음과 카팔리카 교단의 납치와 폭력에 휩쓸리고 말았고, 크리슈나의 도움으로 간신히 호텔에 돌아왔지만 빅토리아가 유괴되었다는걸 알게 되는데....

장르 소설가 댄 시먼스의 데뷰작입니다. '세계환상문학상' 수상작으로, 스티븐 킹, 딘 쿤츠 등이 격찬한 공포 소설이라기에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캘커타를 무대로 범죄 집단의 광기에 휩쓸린 시인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과연 명성이 허언은 아니더군요. 확실히 재미있었어요. 

사실 보비의 임무(?)는 별게 없습니다. 죽은 것으로 알려진 시인의 복귀작을 구해오고, 관련된 기사를 쓰는게 전부니까요. 그러나 이를 독자에게 흥미롭게 전달하는 솜씨가 정말 빼어나며, 그 바탕에는 발군의 묘사력이 자리합니다. 캘커타라는 곳에 절대로 가고 싶지 않게 만드는 글 솜씨가 가장 돋보여요. 이 작품의 첫 문장부터가 그러합니다. "어떤 장소는 너무나 사악하여 그 존재를 허락할 수 없다. 어떤 도시는 지독히 악랄해서 용납할 수 없다. 캘커타는 그런 곳이다." 작품 내내 이 첫 문장을 그대로 증명하듯 캘커타의 치부와 오점만을 상세하게 그려냅니다. 이러한 캘커타 묘사 덕에 "폐쇄공포증"이라고 불러도 좋을 공포감이 모락모락 생겨나고요. 특정 장소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데 그 장소나 너무나 혐오스럽게 묘사되니 당연한 결과겠지요. 이렇듯 특정 장소에 대한 혐오감과 폐쇄 공포증을 불러 일으키는 위력은 스티븐 킹의 "아주 비좁은 것"과 좋은 비교가 될 정도에요. 이런 곳에서 하나 뿐인 아이가 사라져 버렸으니... 그 공포는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러한 공포에 감정이입이 가능하도록 묘사한 덕분에 그 위력은 더욱 배가되고요. 

다른 묘사들도 대단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무크타난다지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지는 카팔리카의 예배 의식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좋은 예입니다. 엄청난 자료 조사가 뒷받침되어 있어 보이는 디테일, 신상이 밟고 있는 시체와 들고 있는 참수된 목을 이용한 아이디어도 아주 공포스러워서 좋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익사한 시체가 다시 살아났다는 장면은 정말이지 압권이었고요. 이국적이면서도 충분히 무섭기에 시각화하더라도 아주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아직 영상화되지는 않은 듯 해서 좀 의외였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이기도 한 "칼리의 노래"에 대한 아이디어도 아주 좋아요. 일종의 서사시와 현대 문명을 결합하여 설명하는데, 번역된 결과물로는 천재 시인의 작품인지 잘 모르겠더라도 아이디어만으로 놀라운 결과물로 느껴졌습니다. 현대 문명이 진정한 폭력의 시대라는 것을 광고나 뉴스 기사와의 결합을 통해(의도한 것이던 아니던) 잘 드러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시 속 표현 그대로 "칼리의 시대가 열렸도다"! 인 것이죠. 

적절하게 등장하는 소소한 액션, 빅토리아를 잃었지만 보비와 암리타 부부는 결국 어둠을 극복하고 새로운 한 발을 내딛는다는 나름대로의 해피 엔딩도 괜찮았습니다. 제가 해피 엔딩을 좋아하기도 할 뿐더러, 이 정도 고초를 겪었으면 좀 행복해져도 될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이야기의 개연성이 많이 떨어진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주요 인물인 보비, 크리슈나의 급격한 심리 변화와 행동들의 이유, 목적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보비가 다스를 꼭 만나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 - 보비가 원고를 손에 든 시점에서는 M.다스를 만날 이유는 없음 -, 만남 이후 크리슈나가 건네준 권총을 M.다스가 부탁한 시집 속에 숨겨 넣은 이유, 마지막에 보비가 발작적으로 캘커타로 돌아가 닥치는 대로 폭력을 행사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는 등 이야기의 핵심 변곡점 모두가 그러합니다.
크리슈나 즉 산자이의 목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카팔리카가 되고 싶었지만, 되고 난 이후에는 왜 보비를 도와주지 못해 안달이 났는지를 전혀 모르겠거든요. 칼리 신의 뜻도 아니고, 그 스스로 칼리 신을 거역하고 독자적인 길을 걸을 정도의 실력자로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지요. 만약 크리슈나의 행동이 카팔리카의 목적이라면 M.다스를 죽인 이유도 이해 불가입니다. 그냥 놔 두었어도 어차피 오래 갈 목숨은 아니고, 시의 출간을 막기 위해서라면 보비와의 만남과 죽음은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요. 이 모든 것이 칼리 신의 안배라고 한다면 최소한 그 안배, 계획이 무엇인지 정도는 설명되었어야 했습니다. 이 세상에 폭력의 시대가 돌아왔음을 선언한다... 정도로는 많이 부족했어요.
빅토리아를 납치한 것도 밀수품 운반을 위한 악당들의 음모였는지, 칼리 교도인 카팔리카들의 복수인지도 결국은 증명되지 않습니다. 단순히 악당들의 음모라면 사전의 안배 - 다스의 조카라는 카마키야 브하라티의 존재 - 라던가, 차터지가 M.다스와의 면담을 주선하는 것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카팔리카가 연류되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좀 애매해요. 이렇듯 좀 모호한 이야기가 '환상문학' 스타일이기는 합니다만 제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아울러 보비가 과거 성폭행을 저지른 적이 있다는 등의 짤막한 묘사는 완전히 사족에 불과했고요.

아울러 공포 소설이라고 알고 있는데 생각만큼 무섭지는 않다는 단점도 있지만 사소합니다. 재미도 있고 묵직한, 좋은 장르 문학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만큼 장황하면서도 재미를 줄 수 있는 작품을 만나보기는 쉽지 않지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러고보니 아주 무섭지는 않지만 환상 문학 쪽으로는 최고 수준이라는 점은 앰브로스 비어스 작품과도 비슷하군요. 여튼, 아직 이 작품을 읽어보지 못하신 장르문학 팬 분들 모두에게 추천드리는 바 입니다.

덧붙이자면, 그 동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번 독서로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인도는 절대 가면 안된다는 것을. 댄 시먼스가 캘커타에 대체 왜 이렇게까지 앙심을 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 생각에는 이 책을 읽은 독자의 대부분은 캘커타라는 곳을 방문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2007/01/13

핑거스미스 (Finger Smith) - 세라 워터스 / 최용준 : 별점 2점

핑거스미스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열린책들

장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입스씨와 석스비 부인에 의해 양육된 사영수의 딸 수전 트린더는 입스씨와 친분이 있는 건달 "젠틀먼" 리버스의 계획, 즉 부유하지만 삼촌에게 얽매여 사는 세상 물정 모르는 처녀를 꼬셔 결혼한 뒤 유산을 가로챈다는 계획에 협조하기 위해 모드라는 처녀의 하녀로 임시 고용되어 "브라이어"라는 저택으로 향한다.
음란서생 삼촌에게 기계처럼 양육되며 고독한 생활을 보내던 모드와 친분을 쌓으며 연민의 정을 키워나가던 수전은 그녀를 사랑하는 감정까지 들 정도로 깊이 빠지지만 3천파운드라는 거금 때문에 모드와 결혼한 뒤 그녀를 정신병원에 집어 넣는다는 리버스의 계획에 협력하여 그녀가 리버스와 결혼하는 것을 돕게 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빅토리아 시대를 무대로 한 레즈비언 소설"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 것 같은데 2005년판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의 해외판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추리계에서 유명한 작품이죠.

읽고나서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정말로 두꺼운 책이라는 것. 즉 대 장편이라는 것이 제일 인상적이었습니다. 판형은 작지만 페이지는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거든요. 이렇게 긴 이유는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과 브라이어, 정신병원 등의 배경은 물론 등장인물들의 옷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묘사한 것에 더하여 주인공들의 심리묘사가 엄청나게 장황한 탓이 큽니다. 여성 작가들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심리묘사가 책의 반을 차지한다 싶을 정도로 디테일하더군요. 디테일이 지나쳐서 나오는 인물들이 다 미친것 처럼 보일 정도니까요. 뭐 실제로 미친 애들도 있고.
읽기가 쉽지는 않은 분량이라 3개로 나누어진 - 수전 트리더, 즉 수의 1인칭 시점으로 쓰여지는 1부, 그리고 모드의 시점으로 쓰여지는 2부, 다시 수의 1인칭으로 돌아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3부 - 이야기를 각각 3권의 책으로 분책하여 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무겁고 길기에 들고 다니면서 읽은 제 자신이 대견스럽기까지 하네요.

그러나 길이에 비한다면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고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재미는 물론이고 빅토리아 시대의 하층 계급들과 음란서생(?)등 성적인 요소를 등장시키면서도 싸구려스럽지 않고 나름의 품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당 시기에 대해 방대한 묘사를 통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대에 못 미칠 정도로 추리물의 궤도에서는 꽤 많이 빗나가 있다는 것이 좀 아쉽더군요. 물론 뻔한 사기극으로 전개되다가 충격적으로 터지는 1부 마지막의 반전은 정말 효과적이었고, 2부에서 밝혀지는 1부와의 연관성도 굉장히 흥미로운 설정이기는 해요. 그러나 추리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핑거포스트와는 달리 별다른 단서도, 복선도 없고 "고백"에 의존하는 전개이기 때문이며 진상 그 자체도 그리 복잡하거나 뒤틀린 구조는 아니었거든요. 또한 진상 자체가 워낙 고전적 설정이기에 1부 이후에는 크게 충격적이지도 않았고요.
그나마 1부와 2부는 나름 추리물의 구조를 지니지만 3부는 소설의 마무리를 위해서만 존재하기에 전혀 추리물스럽지 않습니다. 아울러 나름 해피엔딩을 좋아하긴 하나 이 작품의 대단원은 별로 작품에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됩니다.

결론내리자면 꽤 재미있고 가치도 있지만 제 취향은 절대 아닌 작품이었어요. 레즈비언 코드는 제껴놓더라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작품은 추리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나름의 가치는 충분하나 자료 조사 목적이 아니라면 두번 읽게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토대로 제작했다는 TV 시리즈는 꽤 관심이 가는군요. 영상으로라면 무척 화려하리라 생각됩니다. 

2026/01/09

러브데이 브룩, 탐정 - 캐서린 루이자 퍼키스 : 별점 1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셜록 홈즈의 라이벌 중 한 명인 러브데이 브룩 단편집입니다. 이전에 단편은 다른 앤솔로지(이거, 이거)를 통해 읽어본 적이 있지요. 그녀가 등장하는 일곱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곱 편이 그녀 시리즈의 전부인데, 저자 사후 70년이 지나 저작권이 만료된 덕분에 국내 소개된 것으로 보입니다.

주인공인 러브데이 브룩은 2025년 지금 시점에서 바라보아도 독특한 매력을 뽐냅니다. 뛰어난 관찰력과 ‘여성’이라는 점을 활용한 활약이 지금보다 여성 인권이 확연히 낮았을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추리라기보다는 관찰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도 당시 시대에 잘 어울립니다. 실종된 아가씨 방을 둘러본 뒤, 이건 하녀가 정리한 솜씨라는 걸 눈치채는 장면처럼요.

그러나 좋은 작품들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고전 본격물이라고 보기에는 추리적으로 보잘것없는 탓이 큽니다. 러브데이 브룩이 관찰을 통해 수집한 정보와 단서는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지 않아요. 그래서 독자가 추리할 여지는 거의 없습니다. 자기만 아는 정보로 자기의 추리 결과를 진상이라고 마지막에 털어놓는 게 전부일 뿐입니다.

그나마 추리의 핵심인 러브데이 브룩의 관찰도 비약이 심합니다. “공주의 복수”가 대표적입니다. 러브데이 브룩이 집사가 수상하다는 걸 눈치챈 건 ‘눈빛’ 때문이었고, 결정적 단서인 모자 가게의 이름을 알아낸 것도 러브데이 브룩이 탐정이라는 걸 밝히자 그윈 부인이 모자를 쳐다보았기 때문입니다. 눈빛으로 수상한 사람을 알아챌 수 있다면, 추리가 왜 필요할까요?

트릭도 실망스럽습니다. 수록작 중 무려 네 편, “현관 앞 검은 가방”, “레드힐 수녀회”, “그려진 단검 사건”, “실종”에서 변장과 착각이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실종”에서는 죽은 어머니의 사체를 본 아버지가 딸로 착각하는 상황이 펼쳐지기까지 합니다. 아무리 둘이 닮았다는 설정이라도 쳐도, 이건 너무 말도 안되지요.

범행들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레드힐 수녀회”에서 존 머레이는 자기 집에 세 들어 사는 수녀들이 강도단일지 모른다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경찰이 그녀들에게 집중하는 사이 스스로 강도짓을 벌일 생각으로요. 하지만 그냥 강도짓을 벌였으면 사전에 주목도 받지 않았을 겁니다. 이게 무슨 헛짓거리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 외에도 빅토리아 시대의 짜증 나고 이상한 사고방식도 가득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제 별점은 1점입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통했을지 모르지만, 지금 읽기에는 시대착오적인 망작입니다. 역시 잊혀진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네요.

2025/12/20

세계문학단편선 39 윌키 콜린스 (꿈 속의 여인 외 9편) - 윌키 콜린스 / 박산호 : 별점 1.5점

근대 미스터리, 추리 소설의 초창기 거장 중 한 명인 윌키 콜린스의 단편집입니다. 저자의 단편은 이전에 몇 편 읽어보았는데, 재미있던 기억이 있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실망스럽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감성 그대로의, 낡고 지루한 내용이 가득한 탓입니다. 이야기는 모두 예상대로이며 신선함이나 새로움은 당연히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물론 거장의 편린이 엿보이는 작품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쌍둥이 자매"는 첫 눈에 반한 여성 제인과 결혼하게 된 스트릿필드가 결혼식 날, 자신이 반했던 여자는 제인이 아니라 그녀의 쌍둥이 동생 클라라는걸 깨닫는다는 상황 설정이 기가 막힙니다.

"페루지노 포츠 씨의 인생길"은 영국 신사임을 자처하는 속물 포츠 씨가 거구의 이탈리아 여성에게 속박당하는 수난의 과정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합니다. 이른바 영국식 유머 소설 느낌인데, 포츠 씨 일기라는 형태의 1인칭 시점으로 화끈하고 깨는 맛을 더해주는게 좋습니다. 이런 작품도 잘 쓰는 작가라는건 처음 알았네요.

"아주 기묘한 침대"는 10여년 전에 읽었던 단편인데 여전히 재미있었어요. 침대가 서서히 내려오는 묘사는 그야말로 압권이고요.

제미나이로 그려본 아주 기묘한 침대가 놓여진 방

하지만 예전보다는 장황함이 지나치게 느껴졌는데, 빅토리아 시대 원전에 충실한 번역 탓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덕분에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내 방 여행하는 법"을 언급하며 방을 꼼꼼히 살핀게 '나'가 생명을 구한 이유가 되었다는걸 알게 되었지만, 예전만큼 '걸작'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좋은 작품이기는 합니다.

"죽은 자의 손"에서의, 경마 시즌이라 빈 방이 없던 탓에 여관 주인의 '말없고 조용한 동숙인'이라는 말에 속아 시체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 아서 홀리데이의 상황만큼은 기발합니다. 시체를 바라보다가 시체가 움직인걸 알아챈 순간의 묘사 - 이제 거길 보자 침대 옆으로 축 늘어진 길고 흰 손이 보였다. 그 손은 시체의 머리 쪽과 발치를 가린 두 장의 커튼이 만나는 곳에 꼼짝도 않고 늘어져 있었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커튼은 모든 것을 감춘 채 길고 흰 손만 보여 주었다. - 도 일품이고요.

하지만 이외 작품들은 모두 지루하며, 눈여겨 볼 부분도 거의 없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사고 방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은 볼거리이기는 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시대착오적입니다. "얼어붙은 땅"에서 연적과 표류하게 된 리처드처럼요. 그는 목숨걸고 연적 프랭크를 옛 연인에게 데려다 주고 죽고 맙니다. 순애보도 아니고, 그에게는 일종의 '임무'였기 때문이라는데, 참 낡아빠진 발상이지요.

좋았다고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도 일부 상황 설정이 재미있을 뿐, 낡고 고루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자의 손"이 대표적이에요. 시체와 함께 있는 두려운 상황을 한껏 고조시켜 가다가, 죽은게 아니라 살아있었는 사람이었고 그는 아서 홀리데이의 의붓형일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결말입니다. 이런 식의 작위적인 전개가 대부분의 작품에 가득하다는 문제도 크고요.

기대했던 범죄, 추리 계열 작품도 없다시피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전체 평균한 별점은 1.5점입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2018/03/02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 애거서 크리스티 / 송경아 : 별점 2.5점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송경아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스 마플은 카리브 해의 한적한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라피엘 소령과 어울렸다. 라피엘 소령은 여러 과거의 무용담을 이야기하며 살인자의 사진을 보여주겠다고 하다가, 무언가를 보고 갑자기 사진을 치워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소령은 시체로 발견되었고, 사인은 지병인 고혈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미스 마플은 소령의 죽음에 의문을 품는데...

카리브 해의 한적한 호텔을 무대로 한 여사님미스 마플 시리즈 장편입니다.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이하 "공략")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소개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영상물로는 굉장히 실망했었지만 연출의 문제였을 수도 있고, 지금은 내용이 기억도 나지 않기도 해서요.

읽으면서 가장 놀라왔던 것은 이야기의 속도감입니다. 무려 3명이 살해당하고, 1명은 미수에 그치는 연쇄 살인극이 펼쳐지지만 중편 분량에 가깝거든요. 이전 "다섯 마리 아기 돼지"와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묘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덕분입니다. 최근 읽었던 몇몇 대장편들에서 보았던 짜증나고 지루한 심리 묘사, 장황하기만 할 뿐 쓰잘데 없는 배경 묘사 등은 거의 찾아볼 수 없어요. 미스 마플의 심리는 비교작 자주 묘사되는 편이지만 모두 전개에 필요한 요소들이라 납득할만한 수준이었고요. 이런 점은 현대 작가들이 좀 배웠으면 좋겠네요.
물론 이런 묘사의 부족으로 '카리브 해' 라는 배경이 잘 드러나지 않기는 합니다만 - 원주민 종업원 이야기만 없다면 우리나라 온양 온천이라고 해도 딱히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배경 묘사는 별 게 없습니다 - 장점에 비교하면 지극히 사소한 문제입니다.

또 미스 마플의 은밀한 탐정 활동도 상당한 볼거리입니다. 평범한 할머니가 손님들과 나누는 수다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통해 추리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정식 수사가 아닌 탓에 여러가지 제약이 생겨버리거든요. 대표적인 것이 이야기들의 진위 여부입니다. 심지어 3인칭 시점으로 오간 대사마저도 정말로 그렇게 말했는지? 를 고민하게 만든건 정말 시대를 앞서간 아이디어라 생각합니다. 조금만 잘 가공하면 꽤 괜찮은 서술 트릭으로 써 먹어도 무방할 정도에요. 지극히 평범한 할머니의 수사와 추리는 현실감 넘치는 분위기를 선사해주기도 하고요.

아울러 "공략"에서 언급한대로 "킥 애스" 의 힛걸과 같은 현대적 여성 영웅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는 독특한 히어로물로의 가치도 높습니다. '결핍', 즉 뭔가 부족한 영웅이 활약하는 현실적인 모험담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는데 읽어보니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고요. 힛걸은 뛰어난 격투 실력을 갖추었지만 부모도 없는 어린아이이고, 미스 마플은 천재 탐정이지만 늙은 독신 할머니라 '결핍' 측면에서 보면 거의 동일하니까요. 아, 정말이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싶어서 감탄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아요. 트릭은 별볼일 없지만 "공략"에서 말한대로 '사건이 일어나기 전 드라마' 를 참으로 흥미진진하게 끌어나가고 있는 덕분입니다. 몇 안되는 등장 인물들이 각자 비밀이 있고, 나름의 동기가 있으며, 한 명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식이거든요. 이 과정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이 모두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정교한 구성도 볼만하고, 누가 범인인지 마지막 순간까지 알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에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쉬움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라피엘 소령은 살인범이 누군지 알아챈게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걸 그 자리에서 밝히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구태여 감출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는 빅토리아가 고혈압 약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를 안다면 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동거남이 있는 이상 그녀를 살해한다고 입막음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도 간과된 부분입니다.
또 몰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살해한다고 하더라도, 빅토리아와 럭키는 그렇다쳐도 라피엘 소령 살인죄까지 묻기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비록 대사들을 통해 사진 속 독살범이 '여자일 수도 있다' 는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독자는 3인칭 시점으로 된 대사를 통해 이미 그 독살범이 남자라는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작품이 발표된 1960년대 시점으로 보아도 단지 가계에 정신병자가 있었다는 정도로 연쇄 살인을 일으킨다는 발상의 설득력은 낮습니다. 무엇보다도 무려 세 명이나 살해당한 상황에서 몰리를 마지막으로 독살하려고 시도하는 행동은 설득력있다고 보기 어렵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공략" 에서 별점 5점을 주면서 걸작이라고 극찬한 탓에, 기대는 컸지만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공략" 에서 말한대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멋지다는' 미스 마플의 도움 요청 장면도 독특하기는 한데 그렇게 멋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야말로 리뷰가 원작을 초월한 모양새입니다.

2026/06/27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8) 카레가 건너 온 추리 소설

카레는 친숙한 요리입니다. 한국군 전투식량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요. 우리와 교류가 적었던 인도의 전통 요리가 이렇게 친숙해진 건, 영국의 인도 식민지 지배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 시기, 식민지에 진출했던 영국인들이 현지에서 고용했던 요리사들과 함께 귀국하면서 여러 인도 요리가 영국에 들어왔지요. 이후 이 음식들은 영국인의 입맛에 맞게 밀가루를 넣은 스튜 형태로 변형되었고, 때마침 영국 회사 C&B에서 인도 향신료를 배합한 가정용 분말을 출시하면서 널리 퍼졌습니다. 

고기와 채소를 썰어 넣은 걸쭉한 스튜처럼 조리하되, 시판 향신료 분말로 이국적인 맛과 향을 더한 음식. 영국인들은 이를 인도 타밀어로 ‘소스’라는 뜻의 ‘카리(Kari)’에서 따와 ‘커리’라고 불렀습니다. 정작 인도에는 없는, 영국에서 탄생한 인도 요리인 셈입니다. 참고로 커리라는 명칭은 카릴, 혹은 카리라고 불리던 매콤한 남부 인도 요리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영국인들의 삶 속에 커리가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지는 빅토리아 시대를 무대로 한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경주마 은점박이" 사건에서 마방 조교사 집의 저녁 식사로 양고기 카레가 등장하니까요. 범인은 마굿간 청년들에게 맛이 강한 아편 분말을 섞어 먹이기 위해 이 요리를 택했습니다. 커리의 강렬한 맛이라면 웬만한 약을 숨기기에 적절했을 테니, 범인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홈즈가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도 하지요.

"해군 조약"에서는 의뢰인 펠프스와 함께하는 식사 메뉴 중 하나로 닭고기 커리가 나옵니다. 허드슨 부인의 특기처럼 소개되는데, 이렇게 평범한 저녁 메뉴로 등장할 정도라면 당시 영국에서 커리는 우리나라의 김치찌개 정도 위치의 음식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영국에서 커리의 인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2001년, 영국 외무부 장관 로빈 쿡은 인도 카레라이스의 일종인 치킨 티카 마살라를 ‘진정한 영국의 국민 음식’이라고 선언했을 정도니까요. 2015년에 발표된 피터 스완슨의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도 정통 인도 커리인 치킨 코르마가 자주 먹는 요리로 소개됩니다. 코르마는 주 향신료인 마살라에 버터와 크림, 요거트 등을 넣어 부드러운 맛을 내는 커리인데 여주인공 릴리는 단골집에서 테이크아웃해 온 치킨 코르마에 견과류를 갈아 넣습니다. 심한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는 연인 에릭을 살해하기 위해서요. 에릭은 예상대로 치킨 코르마를 먹은 뒤 발작을 일으키고, 릴리가 치료제를 숨긴 탓에 결국 질식사합니다. 약을 섞지도 않은, 그야말로 완전범죄라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이렇게 영국인의 일상에 깊이 자리 잡은 커리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카레는 단순한 서양식 요리를 넘어, 밥과 함께 먹는 국민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일본에는 1870년대 국비유학생 야마가와 겐지로가 최초로 영국식 커리를 전래했습니다. 이때 일본식 발음으로 ‘카레’라는 이름이 붙었고요. 당시 일본에 여러 서양 요리가 전파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카레는 독보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때마침 일본 해군이 영국군을 따라 카레를 장병들에게 보급했던 덕이 컸습니다. 일본인에게 익숙한 쌀밥과 함께 먹을 수 있도록 제공한 것이 주요했지요. 고기도 작게 썰어 넣어, 육고기가 익숙하지 않았던 당대 일본인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후 다이쇼 시대에 돼지고기와 감자, 당근이 들어가는 현대적인 레시피가 정착합니다. 영국 C&B 카레 가루를 국산화한 카레 가루 제조사도 등장하면서, 우리가 잘 아는 ‘카레라이스’가 가정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3분 카레’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즉석 카레 역시 1968년 일본 오츠카식품이 레토르트 파우치에 카레를 넣어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 시초입니다. 일본은 카레에 정말 진심이었던 모양입니다.

일본에서 카레의 인기는 밥과 함께 먹는다는 개념을 넘어, 여러 음식으로 확장된 모습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카레빵이 대표적입니다. 이름 그대로 속에 카레를 넣은 빵이지요. 도쿄 명화당이 1927년 특허 등록한 양식 빵이 원조라고 합니다. 라쿠고가 엔시 씨가 등장하는 일상계 추리소설 "가을꽃"에서 맛있게 빵을 먹는 삼원칙 이야기가 나올 때도 언급되었지요.

카레 우동은 1909년 와세다대학 옆의 오래된 소바집 ‘산초안’에서 개발한, 메밀국수 위에 카레와 파를 얹은 카레 남만이 발전한 음식입니다. "시인장의 살인" 도입부에서 낯선 여학우가 무슨 메뉴를 주문할지를 두고 아케치와 하무라가 추리 대결을 펼칠 때, 아케치가 선택한 메뉴이기도 합니다. 일본 전통 요리와 카레가 결합된 음식이라는 점에서, 좀비물과 본격 추리물이 절묘하게 결합된 이 작품과도 잘 어울립니다.

이런 나라니 당연히 카레 전문점도 많습니다. ‘아비꼬’나 ‘코코이찌방야’ 같은 일본 카레 전문점은 우리나라에서도 영업 중이지요. 와카타케 나나미의 "광취"에는 ‘파라다이 로스트’라는 카레 가게가 등장합니다. 이 가게는 미나코가 중학생 때 교회 부설 고아원인 ‘성모의 정원’에서 임신했다는 이유로 쫓겨난 뒤 시작한 곳입니다. 그녀의 아들 분지는 정신지체아로, 성장한 뒤 가게에서 함께 일하게 됩니다.
미나코는 성모의 정원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하지만, 수녀들은 더럽다는 이유로 그녀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녀가 성모의 정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근처에서 실종된 어린아이를 찾기 위해 교회에 모인 자원봉사자들에게 카레를 제공했을 때뿐이었지요.
그 뒤 죽어서도 교회 묘지에 묻히기를 거절당한 미나코를 성모의 정원 안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분지는 먼저 어린아이를 유괴합니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교회에 모인 자원봉사자들에게 미나코의 사체로 만든 카레를 제공합니다. 고기의 특성을 지울 수 있는 카레였기에 가능했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처럼 영국에서 태어나 일본의 생활 음식으로 자리 잡은 카레는, 카레는 우리나라에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본격적으로 소개되었고, 곧바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쌀밥과 함께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컸을 것입니다.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킨 윤봉길 의사도 경성지방법원에 호송된 뒤 법원 구내 식당에서 카레라이스를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김치가 아주 잘 어울린다는 장점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사냥개 탐정"의 류몬 다쿠는 후쿠신즈케가 곁들여지지 않은 것은 카레라이스라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에게 김치도 한 번 권해 주고 싶네요.

하지만 카레가 세계적으로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는 가장 확실한 이유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슴 따뜻한 드라마 "녹나무의 파수꾼"에서 알려주듯 “날마다 먹어도 질리지 않고, 그러면서도 영양 균형이 좋은 음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도에서 출발한 향신료 요리는 영국에서 스튜가 되었고, 일본에서 밥과 만났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김치와 함께 먹는 일상식이 되었습니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바뀌었지만, 한 끼를 든든하게 채우고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점만은 같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은 카레가 어떠신가요? 기왕 먹을 것이라면, ‘컨트리 캡틴 치킨’을 한 번 시도해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이 요리는 1849년 출간된 책에 실린 ‘리델 박사의 컨트리 캡틴 치킨’ 레시피로 널리 알려졌는데, 시기적으로 볼 때 허드슨 부인이 홈즈를 위해 만들었던 닭고기 커리도 이와 비슷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리델 박사의 컨트리 캡틴 치킨
로버트 플라워 리델, "인도 가정과 요리책", 1849

  1. 닭고기를 잘게 썬다. 
  2. 양파는 채 썰어 버터에 갈색이 되도록 볶는다. 
  3. 닭고기에 소금과 커리 가루를 뿌리고 노릇해질 때까지 볶는다. 
  4. 스튜 냄비에 수프 1파인트와 재료를 함께 넣는다. 
  5. 국물이 반으로 줄 때까지 뭉근히 끓인 다음 밥과 함께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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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2

배트맨 : 가스등 아래의 고담 - 브라이언 어거스틴 외 / 이한 : 별점 3점

배트맨 : 가스등 아래의 고담 - 6점
브라이언 어거스틴 외 지음, 이한 옮김/세미콜론

스팀 펑크 세계관에 배트맨을 등장시켰다는 전설적인 작품으로 다양하게 미디어 믹스된 바 있고, 얼마전에는 애니메이션도 출시된 표제작 "가스등 아래의 고담", 그리고 동일 세계관 시리즈인 "미래의 주인" 두 편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읽으면서 스팀 펑크 세계관이 아니었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왜 스팀 펑크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특히나 "가스등 아래의 고담" 은 그냥 빅토리아 시대를 무대로 하여 배트맨을 등장시킨, '팩션'이라고 해도 무방할 설정의 작품이었습니다. 실존 인물인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브루스 웨인의 스승으로 등장하고, 잭 더 리퍼 사건이 이야기의 핵심으로 전개되는 등 현실과 허구의 혼합이 절묘한 덕분입니다. 고담도 미국이기는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 런던의 분위기를 자아내며, 배트맨 역시 과학 기술과는 무관한, 순전히 단련된 육체에 의지하는 인물로 그려져서 현실감을 더해 줍니다. 슈퍼 히어로가 아니라 "자경단원" 이자 "탐정"으로서의 배트맨이 그려지는 것 역시 현실적이면서 마음에 든 점이고요.

아이디어는 굉장히 탁월하고 작화도 독특하고 좋은데, 아쉽게도 작품의 완성도는 기대 이하입니다. 브루스 웨인이 잭 더 리퍼로 오인받아 체포되고, 감옥에서 정보를 끌어모아 진범을 알아내는 과정의 긴장감과 이야기의 설득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브루스 웨인에게는 삼촌같았던 변호사 제이콥 패커가 진범임이 드러나는 과정이 특히 그러해요. 단순히 같은 연대 소속이었다는게 범인이라는 증거가 될까요? 또 제이콥 패커는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와 같은 연배인 노인으로 애초에 배트맨과 일기토를 벌인다는 건 불가능해서 최후의 대결에서의 긴장감도 제로에 가깝습니다.

결론적으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걸작이라는 명성에 비하면 실망이 더 큽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차라리 이 작품보다는 함께 실려있는 "미래의 주인" 이 재미면에서는 한결 낫습니다. 우선 빌런 알렉상드르 르루아의 존재감이 출중합니다. 배트맨의 맞수로 부족함이 없어요. 적당히 미치기도 했고, 적당한 능력도 갖추고 있으니까요. 또 르루아가 비행선에 달린 장치를 이용하여 '태양의 불길'을 내리쳐 고담시에서 열리는 박람회를 비롯하여 고담시 일부를 불에 태워 백 명 이상의 사망자를 발생시키는 음모의 스케일도 크고, 이를 막기 위한 배트맨과의 일기토도 적절하여 재미를 더합니다. 르루아의 파괴는 그와 손잡은 악덕 기업인이 있었다는 진상을 밝혀내는 '탐정' 배트맨의 활약과 그의 정체를 간파한 약혼녀 줄리 캐릭터도 볼거리였고요. 그리고 르루아의 비밀 무기도 "스팀 펑크 세계관의 배트맨" 이라는 말에 더 어울리는 소재였어요. 아주 초월적인 무언가는 아니고, 상식선의 무기로 보이긴 하나 적당히 SF적이고 적당히 레트로한게 꽤나 잘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딱 한 가지, 전형적인 미국 극화체 작화만큼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작화만 "가스등 아래의 고담" 스타일이었다면 별점 5점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그래서 두 작품 평균 별점은 3점입니다. 유명세에 비하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으나 예상치 못한 다른 작품 덕분에 평균 이상의 재미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세계관의 다른 시리즈도 보고 싶어집니다.

덧 1 : 배트맨이 등장하는 슈퍼 히어로물이지만 분위기는 잭 더 리퍼 사건을 해결하는 범죄 액션 스릴러에 가까우므로 분류는 "추리 - 호러" 로 하겠습니다. 덧 2 : 아무리 풀 컬러지만 120페이지도 안되지만 14,000원은 좀 비싸네요. 한 페이지에 100원이 넘는 셈이잖아요? 이렇게 비싼 이유가 있는걸까요?

2024/12/07

사악한 소년 - 케이트 서머스케일 / 김희주 : 별점 4점

사악한 소년 - 8점
케이트 서머스케일 지음, 김희주 옮김/클

이 책은 1895년, 런던 이스트 런던의 웨스트햄 지역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13세 로버트 쿰스와 12세 너새니얼 형제가 어머니 에밀리를 살해한 뒤, 열흘 동안 시신과 함께 지내며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이어갔던 사건이지요. 

사건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물론, 에밀리를 살해한 이유, 내티가 범행에 얼마나 관여했는지와 같은 법정 쟁점들이 당시의 보도 자료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하나씩 드러나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변호인이 로버트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다며 사형 선고를 막으려 했던 전략은 법정 추리물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을 자아내고요.

사건 자체도 흥미롭지만, 이 기이하고 끔찍한 사건이 당시 영국 사회에 안긴 충격, 그리고 형제의 재판이 불러 일으킨 여러 논란을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상세하게 알려주는 것도 좋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웨스트햄 지역의 환경에서부터 시작해, 살인 사건이 발생한 장소의 모습, 법정에서의 증언과 공방, 그리고 이를 둘러싼 사회적 반응은 물론이고, 사건과 관련된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설명이 엄청난 수준인 덕분입니다. 예컨대, 로버트의 지능이 뛰어났음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초등교육법과 의무교육 체계가 소개되는 식이지요. 이를 통해 19세기 후반 영국은 이미 선진국이었다는걸 새삼 깨닫게 되었네요. 또한, 형제가 탐독했던 저급 출판물 ‘페니 드레드풀’이 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은 현대의 게임 유해론과 연결되어, 시대를 초월한 논쟁의 공통점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의무교육 덕분에 문맹이 적어졌지만, 이들이 저급한 출판물을 탐독하게 된 현실은 뭔가 아이러니가 느껴지네요.

재판 후, 정신 질환이 인정되어 처벌받지 않은 로버트가 수용되었던 브로드무어 정신병원의 진보된 환자 관리 방식도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19세기 후반임에도 강력 범죄를 저지른 정신병자들에게 안정적이고 편안한 환경을 제공했다는게 무척이나 놀라왔어요. 당연히 구속복을 입히고, 엄청나게 통제된 시설에서 가혹하게 환자를 다루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이는 앞서의 교육 체계와 더불어 당시 영국의 진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만듭니다.

로버트 쿰스의 이후 인생 역시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그는 정신병원에서 재단 기술을 익힌 뒤, 17년 후 서른 살 때 석방되어 호주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1차 대전에 참전하여 갈리폴리와 서부 전선에서 무공훈장을 받을 만큼 인상적인 복무를 기록한 전쟁 영웅으로 변모했거든요. 이 정도면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현실이 아닌가 싶네요. 이 때 그가 속했던 대대가 치루었던 전투에 대한 묘사도 괜찮았습니다. 로버트가 군악병이자 들것 운반병이라는 보직을 수행하여 전투를 치루었다는게 신선했기 때문입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멜 깁슨 주연의 영화로만 접해 보았었는데, 그런 전투를 겪고도 살아남았다는게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서부 전선의 참호전 역시 마찬가지고요. 책에서는 정신 병원에서 오래 수감된 덕에 가혹한 군 생활에 쉽게 익숙해지고 잘 버텨냈을거라 추측하는데 그럴싸했습니다.

로버트가 남은 여생은 호주 시골 마을에 정착해 살며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이웃 소년의 후견인이 되어 그가 성공적인 삶을 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은 사건의 비극적 출발과 대비되어 큰 울림을 전해줍니다. 다른 인물들 - 아버지 로버트 쿰스, 동생 내티, 변호사, 검사, 기타 친척들 등 모두 - 대부분의 후일담도 함께 제공된다는 점도 좋았고요.

책의 만듬새도 좋습니다. 판형과 디자인 모두 제 취향이고, 도판도 많지는 않지만 충실한 편이에요. 주석 및 출처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로버트가 왜 어머니를 살해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제시되지 않는게 가장 아쉬웠습니다. 로버트의 증언을 통해 어머니 에밀리가 자식들에게 가혹한 폭행을 가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 증거는 없는 탓입니다. 이전에도 형제는 어머니를 피해 도망친 적이 있었다고 설명되기에, 살인이라는 극단적 선택의 이유가 도무지 설득력 있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내티가 사건에 어느 정도까지 관여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범행이 어머니가 내티를 폭행할까 우려해 저질러졌다는 로버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티 역시 공범으로 간주되어야 하지만, 재판에서는 증인 정도로 취급된건 좀 이상하더라고요. 이 부분에 대한 작가의 명확한 결론이나 추측조차 부족해 독자에게 답답함을 남깁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에드가 상 등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범죄 실화 논픽션' 보다는 사건과 사회적 맥락을 함께 알려주며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에 가까운 책입니다. 빅토리아 시대 미시사 서적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09/02/21

구부러진 경첩 - 존 딕슨 카 / 이정임 : 별점 3점

구부러진 경첩 - 6점
존 딕슨 카 지음, 이정임 옮김, 장경현 감수/고려원북스

몰링포드 마을의 대지주 판리 가문의 후계자 존 판리가 거처하는 판리 클로스에 어느날 낯선 손님이 변호사와 함께 찾아온다. 찾아온 이유는 자신이 진짜 존 판리라는 것. 그는 약 25년 전 타이타닉 호를 타고 미국에 있는 친척을 찾아가던 10대 소년 존 판리가 타이타닉 호 침몰 사고 시에 다른 소년과 신원이 뒤바뀐 채로 자라났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두명 중 누가 진짜인지를 놓고 줄다리기를 한 지 1개월여만에 결정적 증거를 가진 25년전의 가정교사 케넷 머레이를 판리 클로스로 초빙하고, 2명의 존 판리는 각자의 변호사를 대동하고 케넷 머레이와 대면하여 결정적 증거를 통해 진위를 가리고자 하는데....

존 딕슨 카의 미번역된 최대 대표작인 "구부러진 경첩" 을 드디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최근 고전 명작들을 다시 읽고 있는데 이렇게 새롭게 소개되는 고전 명작들을 볼때마다 정말이지 기분이 좋네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타이타닉호 침몰이라는 대형 사건, 그리고 그에 따르는 인물 바꿔치기에 대한 이야기는 흡사 "마틴 기어의 귀향"을 생각나게 하기도 했고요. 그러나, 이 작품은 전에 읽었던 "녹색은 위험" 처럼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든 작품이었습니다. 읽기 전부터, 추리소설을 알고 접해온 20여년 동안 가져온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요?

일단 딕슨 카 특유의 오컬트 적인 요소가 별로 두드러지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이야기를 오컬트쪽인 방향으로 너무 끌고가기 위해서 쓸데없는 사건 - 마녀 숭배 의식과 관련된 살인 사건 - 을 가져다 붙인 느낌이 강했습니다. 실제 본편의 중심 사건과는 별로 연관되는 것이 없을 뿐더러 이 마녀 숭배 의식 살인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야기의 전개는 그다지 무리가 없이 수정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작가의 욕심이 너무 지나친게 아니었나 싶어요.

또 본편에 등장하는 메인 사건의 불가능한 설정, 즉 주위에 아무도 없는,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는 상태에서 한 인물이 눈깜짝할 사이에 살해당한다라는 불가능 범죄에 대한 설정은 딕슨 카 다운 아주 좋은 설정이기는 합니다. 문제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단서, 그리고 핵심 트릭이 좀 애매한 편이라는 거지요. 저 개인적으로는 기디온 펠 박사가 밝혀내는 가설 (혹은 진상일지도?) 쪽이 훨씬 마음에 들더군요. 이 소설의 자칭 범인이 주장하는 트릭에 대한 설정은 현실성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범행에 대한 현실성은 물론 작품 내부에서 별 필요는 없지만 이상하게 자주 등장하는 "자동인형" 조작에 대한 설득력도 부족했고 말이죠. 이러한 부분에서는 정통 추리물로 독자와 공정한 승부를 진행하는 작가의 배려가 조금 아쉽더군요. 아주 약간의 복선만 등장해 주었더라도 좀 더 수긍이 갔을텐데 말이지요.

아울러 기디온 펠 박사도 마지막의 추리쇼 이외에는 별로 활약이 눈에 뜨이지 않았으며, 뭔가 있어보이는 제목 역시 "작품 내용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 라는 점, 빅토리아 데일리 사건의 진상은 대관절 뭐냐라는 문제, 사건의 동기가 너무 약한게 아닌가 하는 문제 (가짜라면 오히려 당당하게 이혼을 주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마녀 집회 문제가 그렇게 큰 이슈였을까요 ?), 그리고 너무 빡빡하게 자동인형 조작에 대한 설정을 적용한 것이 아닌가 (사실 C.M.B 에 등장한 설정이 더 합리적이겠죠)하는 등의 문제점들도 눈에 거슬리더군요.

그래도 그동안 추리 애호가로 지내오면서 너무나 읽고 싶었던 작품 중 하나임에는 분명했고, 고전 명작으로 이름이 높은 작품이라 구입해서 읽은 것에는 전혀 후회가 없습니다. 한 10년 전에만 읽었더라도 더 좋은 평을 할 수 있었을텐데, 너무 소개가 늦게 된 것이 아쉬울 뿐이죠. 별점은 3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원래 영국을 소란스럽게 했다는 이 작품의 원전격 사건인 "틱본 사건 (아서 오턴 준남작 사칭 사건)"과 보다 연관시켜 존 판리의 진위를 따지는 부분만 좀 더 디테일하게 파고들었더라면 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으면서도 좀 더 짧게 정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타이타닉 침몰 사건까지 등장하는 등 인물 바꿔치기에 대한 내용이 충분히 드라마틱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작가 특유의 분위기를 고집한 탓에, 사족이 많은 탓에 쓸데없이 길어진게 아닌가 싶거든요. 어쨌건 이로써 딕슨 카 작품은 현재까지 국내 출간된 책은 전 작품 구입-완독이라는 재패의 기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덧붙여, 고려원북스에서 이 책을 출간해 주신 것에는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만, 이 책은 제가 최근 몇년간 본 책 중 최악의 표지 디자인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꼭 지적해 드리고 싶습니다. 작품과는 별 상관없는 여성의 일러스트를 아동용 동화책에나 나올듯한 스타일로 전면 배치한 과감함도 경악 그 자체지만 그에 더하여 책날개를 뒤집은 듯한 앞표지는 보관과 독서, 양쪽 모두 불편할 뿐이었습니다. 제발 원서 표지를 참고라도 해 줬으면 좋겠네요.

2014/04/08

J. 하버쿡 젭슨의 진술 - 아서 코난 도일 / 송기철 : 별점 2점

J. 하버쿡 젭슨의 진술 - 4점
아서 코난 도일 지음, 송기철 옮김/북스피어

코난 도일의 출세작인 표제작을 포함한 네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단편집입니다. 홈즈 시리즈 외의 다른 작품을 읽어본 경험에 따르면 지금 읽기에는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만, 표제작부터 그동안 궁금했던 작품일 뿐더러 마이클 더다의 '코난 도일을 읽는 밤'"에서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소개한 "북극성 호의 선장", "249호 경매 품목"이 함께 실려 있어서 구매하게 되었네요.

그러나 역시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예상대로였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모두 낡아버린 소재와 전개의 이야기들입니다. 재미와 현재의 가치만 따지면 별점은 2점 이상 주기 어렵습니다.

물론 코난 도일 경을 경애하고 있으며 고전 추리문학 애호가이기도 한 저 같은 사람에게는 소장할 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하며, 출간된 것만으로도 반가운 일입니다. 앞으로도 북스피어와 임프린트 에스프레소 노벨라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J. 하버쿡 젭슨의 진술"

선박 관련 사건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인 "메리 셀레스트호 사건"을 픽션으로 재구성한 작품입니다. 작품에서는 "마리설레스트호"라고 등장합니다. 'J. 하버쿡 젭슨'이라는 꽤나 그럴듯한 이력의 인물을 등장시키고, 그가 마리설레스트호의 유일한 생존자이며 죽기 전 진상을 고백한다는 내용이지요.

워낙 유명한 사건을 다룬 작품이긴 하나, 이야기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배에 남겨진 모든 것들이 너무나 평온했다는 실제 사건과 달리, 작품 속 진상은 거의 선상 반란에 가까워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래도 코난 도일이라는 작가의 시작점을 엿볼 수 있는 상세한 설정은 인상적이에요. 하버쿡 젠슨이 흑인 노예에게 받은, 사람 귀 모양의 기묘한 돌에 대한 묘사라던가 이 돌이 그의 목숨을 구해준다는 설정은 흥미로웠거든요. 사건의 흑막인 혼혈아 고링도 돋보였어요. 첫 등장부터 손가락이 없는 손이라는 묘사로 오싹함을 전하고, 고링이 설파하는 복수와 흑인들의 국가를 세우겠다는 이상은 꽤 설득력 있게 다가왔던 덕분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실제로 관계된 사람이 많은 사건을 픽션으로 다룬 것이 가능했던 것은 빅토리아 시대라서였을까요? 지금 시점에 "천안함 제대병이 이야기하는 천안함의 진상!" 같은 제목으로 UFO가 배를 파괴했다는 소설을 쓴다면 아마 잡혀가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지요.

"가죽 깔대기"

거대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깔대기에 얽힌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기묘한 맛"류의 작품입니다. 브랑빌리에 후작부인을 등장시켜 역사 추리물스러운 분위기를 전해주는 점도 좋았고요.

그러나 역시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았습니다. 깔대기 주둥이에 있는 이상한 자국의 정체는 쉽게 눈치챌 수 있었고, 강력한 염원이 있으면 그에 대한 꿈을 꿀 수 있다는 설정도 시대를 고려하면 대단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허황되고 장황했어요. 이렇게 길게 끌 필요는 없었습니다. 특히 깔대기의 정체가 드러난 이후에도 전개가 늘어진 점은 아쉬웠습니다.

결론적으로는 평작. 거장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작품임은 분명하지만 시대를 초월하지는 못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경매품 249호"

동양 사상에 정통한 음침한 친구가 경매품 249호 미이라를 구입한 뒤, 그 친구의 원수에게 기묘한 습격이 일어나고, 같은 건물에 살던 스미스 등이 그의 방에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내용의 작품입니다.

분량은 가장 길지만, 그러한 분량을 갖출 필요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웠습니다. 누가 봐도 미이라를 조종하는 음모라는 게 명확한데, 이를 대단한 서스펜스처럼 길게 끌고 가는 순진함이 다소 안쓰럽게 느껴졌어요.

그나마 긴 분량에 걸맞는, 영국스러운 상세 묘사는 그런대로 볼만했습니다. 보트 대회라든가 학교 생활에 대한 이야기, 특히 흑막 벨링엄을 찾아가 정중하게 협박하여 미이라를 비롯한 관련 물품을 불태우는 결말은 굉장히 영국적인 결말이었다고 생각되니까요.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시대착오적인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북극성호의 선장"

포경선 북극성호가 빙원에 고립된 후 유령과 조우하여 벌어진 기묘한 사건을 그린 작품입니다.

다른 선원들의 목격담이나 동요도 있지만, 주로 선장에게 일어난 변화를 중심으로 서술됩니다. 지금 읽기에는 일종의 순애보 같은 느낌도 들었고, 고유성 화백의 대표작인 "복제인간"도 연상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장의 심리묘사 외에는 특별한 내용이 없어, 재미나 가치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솔직히 마이클 더다가 왜 그렇게 극찬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17/03/19

벙어리 목격자 - 애거서 크리스티 / 원은주 : 별점 3점

벙어리 목격자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어리석은 낙천주의 따위는 가지지 않았다. 쉽게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는 게 보통이었다. - 에밀리 아룬델이 누군가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할 때의 묘사

살인의 특징은 살인자의 기질을 암시해 주기 때문에 범죄의 실마리를 잡는 데 있어 필수야. - 포와로.

마켓 베이싱의 리틀 그린 하우스에 거주하는 부유한 노부인 에밀리 아룬델은 조카들과 함께 한 부활절 연휴 때 계단에서 떨어져 다쳤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고, 애견 밥이 가지고 놀던 공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무언가 이상하다는걸 눈치챈 에밀리 아룬델은 포와로에게 편지를 보냈고, 무려 두 달 이 지나서야 이를 받은 포와로는 마켓 베이싱으로 향했지만 에밀리 아룬델은 이미 한 달 전에 사망했다...

몸 속 필수 영양소 중 하나인 고전 본격물 성분이 많이 부족해져서 집어든 여사님 장편입니다. 제게는 탄수화물급 영양소거든요. 바로 전 읽었던 "도서관의 살인"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제대로 된 고전 본격물을 선택했습니다. 의도는 아니었지만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혀내는 후더닛물이더군요. "도서관의 살인"과 마찬가지로요.

포와로가 사건에 뛰어들게 되는 이유인 노부인의 의뢰 편지가 그녀가 사후 발송되었다는 도입부부터 무척 흥미롭습니다. 뒤이어 다양한 등장인물의 증언들로 진상에 접근해 가는 과정 역시 고전 본격물다운 공정함을 자랑하고요. 무엇보다도 고전 본격물의 핵심인 동기 부여와 이에 따라 용의자들이 속출하는 전개가 대단합니다. 주요 관계인인 찰스와 테레사 남매, 벨라와 타니오스 부부 모두 유산 상속에 혈안이 된 것으로 묘사되어, 누구 한 명 용의선상에서 빠지지 않는 덕분입니다. 심지어 찰스와 테레사의 어머니는 남편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은 사람이라는 설정까지 갖췄으며, 그 외 등장인물 모두 수상한건 마찬가지에요. 이미 유산을 상속받은 로슨 양이 심령술에 빠진 이상한 노처녀로 그려지는 식으로요. "도서관의 살인"에서 가장 부족했던게 바로 이겁니다. 이런게 본격물이죠!

하지만 이러한 점은 본격물이 갖춰야 할 기본 요소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탁월한건 증언과 인물 묘사가 결합되어 독자를 교묘하게 함정에 빠트리는 전개입니다. 놀랍게도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증언은 모두 진실이에요. 하지만 말을 한 사람이 워낙 수상한 탓에 독자들 모두 "이 사람 말은 못 믿겠는데?"라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뒤이은 증언들도 부정하게 되어 결국 진상에 이르지 못하게 되지요.
찰스 아룬델이 한 말이 대표적입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에밀리 아룬델을 만났을 때, 그녀가 수정한 유언장을 보여주었다는 증언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모두 찰스가 돈 때문에 심한 짓도 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식으로든 에밀리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유언장을 미리 보았다는 증언은 자신이 유산을 상속받지 못하리라는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에밀리를 죽일 동기가 없다고 위장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게다가 여동생 테레사와의 다툼은 증언의 신빙성을 더욱 떨어트리고요.
이야기 전체가 이런 구성이라서 저는 함정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런게 본격물이죠!

세세한 디테일로 범인을 드러내는 점도 본격물스럽습니다. 타니오스 부인이 테레사를 따라, 하지만 보다 저렴하게 옷을 구해 입었다는 묘사와 에밀리 아룬델의 가족들에 대한 설명, 주치의 그레이너 박사가 후각을 상실했다는건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단순한 설정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뭐 하나 허투르게 활용되지 않아요. 로슨양이 거울로 본 브로치는 이니셜이 반전되어 있을 것이며 그것은 아나벨라 타니오스의 약자다, 브로치는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가격이 싸져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테레사 패션을 따라하는 벨라가 서슴없이 구입했다. 벨라는 화학 교수의 딸로 인을 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레이너 박사는 인 중독의 뚜렷한 징후인 입에서 나는 마늘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는 식으로 모두 추리에 이용되니까요. 심지어 아무 의미 없어보였던 로슨 양의 강령회 관련 증언까지도요. 그녀는 에밀리 양이 강령회 때 빛나는 심령체에 의한 "후광을 둘렀었다"라고 이야기하는데 모두가 정신나간 소리라고 치부했지만, 포와로는 그것이 '인관성 호흡'이라는 것을 간파하거든요. 이런게 본격물이죠!

트릭도 괜찮습니다. 간이 나빴던 피해자에게 인을 투여하여 간견병과 별 차이 없는 예후로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건데, 굉장히 현실적이었어요. 로널드슨 의사의 자연사 확진 판정에 많은 것을 기대고 있기는 하나 에밀리가 평소 유사 증상을 오래 앓고 있던 환자라 충분히 걸어볼만 한 도박이었으니까요. 피해자가 자주 먹던 캡슐 중 하나에 투입하여 일종의 시한 장치를 만든 것도 그럴듯했고요.

또 이번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완역판이라 주장하는 판본으로 읽었는데, 확실히 번역도 한층 높은 완성도가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포와로의 프랑스 어를 섞는 말버릇도 맛깔나게 잘 살려 놓았으며, 헤이스팅스와의 재담도 재미있게 그려져 있거든요. 헤이스팅스가 이렇게나 유머러스하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그러나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등장인물들을 모두 수상쩍게 그리는 묘사가 과해서 읽는 내내 짜증이 난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입니다. 이게 왜 문제냐 하면, 실제 범인은 아니지만 제발 죽어줬으면... 하고 바라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포와로의 추리가 진상에 도달하여 진범을 밝혀내기는 하는데,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점입니다. 심약한 타니오스 부인이 시체를 재검시하자는 포와로의 주장에 겁을 먹고 자살을 하지만, 실제 재검시를 했어도 사인을 밝히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설령 실제 사인이 밝혀졌다고 해도 타니오스 부인이 그랬다는 증거도 없고요. 로슨양이 거울을 통해서 목격한, 타니오스 부인이 계단에 장치를 설치했다는 증언도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었을거에요. 마침 범인이 딱 좋게 자살했을 뿐, 제대로 범인을 옭아매었다고 보기는 여러모로 어렵습니다. 뭐 이런 점도 본격물이기도 합니다만.

하여튼,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장, 단점 모두 고전 본격물스러운 작품입니다. 저와 같이 고전 본격물 성분(?)이 부족해 지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책 뒤 소개글처럼 "훌륭한 평균작품보다도 잘못 쓴 크리스티 작품이 더 낫다" 이니까요. 이 작품은 잘 못 쓰지도 않았고요.

2011/11/05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 - 아서 코난 도일 외 / 정태원 : 별점 3점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 - 6점
아서 코난 도일 외 지음, 정태원 옮김/비채

제목 그대로 빅토리아 시대 셜록 홈즈의 인기로 촉발된 20세기 초반까지의 단편 추리소설과 시리즈 탐정물 전성기에 발표되었던 작품들을 엄선하여 싣고 있는 단편 앤솔러지입니다. 고 정태원 선생님의 유작이기도 해서 고전 단편 본격 추리물의 애호가로서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네요. 출간과 동시에 구입하였으나, 여러모로 사정이 있어 완독에 시간이 좀 많이 걸렸습니다.

일단 690여 페이지, 모두 10명의 작가 - 30편의 작품이 실려있는 방대함은 독자를 압도할 만합니다. 번역도 훌륭하고 각종 주석도 공들여 삽입되었으며 ,당시 삽화도 충실하게 수록되는 등 책의 만듦새도 무척 뛰어나고요. 심지어는 서표용 끈이 검은색, 빨간색 두 개가 달려있는 부분에서는 역시 추리 애호가가 만든 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더군요. 이러한 앤솔로지 형태 단편집에서는 처음부터 차분히 읽기보다는 여러 작품을 동시에 읽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실려있는 작품들이 지금 읽기에는 지나치게 낡았다는 어쩔 수 없는 단점이 존재하며,국내 초역된 작품이 적다는건 감점 요소입니다. 기존에 소개되었던 작품들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번역 덕에 신선함을 느낄 수 있기는 했지만요. 아울러 개인적으로 기대가 컸던 오스틴 프리먼의 또 다른 필명 클리포드 애시다운의 작품이나 어네스트 윌리엄 호넝의 '괴도 래플스' 시리즈가 생각보다 별로였다는 것은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방대하다는 수식어가 적합할 정도로 수록작이 많기에, 눈에 띄는 작품도 제법 됩니다. 해당 작품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캐서린 루이자 퍼키스의 여탐정 러브데이 브룩 시리즈 중 한 편인 "문간의 검은 가방".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가방과 그 속의 메모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이 시대적 배경과 절묘하게 결합되어 합리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마음에 드는 작품입니다. 여류 작가다운 꼼꼼함이 이러한 전개 과정에서 빛나고요. 조금 작위적인 부분이 있기는 하나 이 정도면 충분히 홈즈의 라이벌로 평가받을만 합니다.

아서 모리슨의 마틴 휴이트 시리즈인 "포갯 살인사건", "딕슨 어뢰 사건".

"포갯 살인사건"은 작품 서두에 언급되는, '범인을 특정할 수 있는 특징'이라는 주제를 시대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증명하는 과정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굉장히 낡은 설정과 캐릭터이고 추리도 별게 없는데도 덕분에 꽤 재미있었어요.

"딕슨 어뢰 사건"은 사무실에서 없어진 어뢰 설계도에 대한 이야기. 당시 작품들에 왜 이렇게 비밀무기 설계도 이야기가 많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그러한 설계도 도난 사건 장르물(?)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작품입니다. 설계도를 살짝 빼돌리는 아이디어도 좋지만 범인을 옭아매기 위한 마틴 휴이트의 활약이 대단해서 이야기의 끝까지 긴장감을 갖게 만드는 전개 역시 일품이거든요.

재크 푸트렐의 생각하는 기계 밴 듀슨 시리즈인 "녹색눈의 괴물"

국내 출간된 단편집 "13호 독방의 문제"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이라 반가웠는데, 내용도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럴듯한 일상계로 지금 읽어도 낡지 않은, 영원히 한결같을 여성 심리를 이야기 속에 녹여낸 독특한 작품이거든요.

딱 한 가지, 밴 듀슨 교수 캐릭터도 잘 살아있지만 그닥 뛰어난 풍모를 보이지 않는 것 하나는 좀 아쉽네요. 여자에 대해 잘 모를 교수 캐릭터에게는 당연한 일이겠지만요.

브레트 하트의 "사라진 시가상자"

홈즈 패러디물로 햄록 존스가 등장하는 작품인데 한마디로 최고입니다. 셜록 홈즈 패러디로는 그야말로 일급으로 이른바 셜록 홈즈식 귀납법 추리의 오류와 문제를 너무나 진지하게 풀어나가면서도 어떤 점이 개그의 포인트인지를 잘 짚고 있기 때문이에요. 추리물로도 패러디로도 개그로도 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수작으로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추리 애호가들은 닥치고 읽어야 하는 작품!


시대를 초월하기 힘든 부분은 있기에 감점해서 별점은 3점입니다만 저와 같은 고전 정통 추리소설 애호가분들에게는 정말로 좋은 선물과 같은 단편집임에는 분명합니다. 이 작품들 이외의 작품들도 일독할 가치는 분명 있고 말이죠. 고전 정통 추리소설 애호가가 아니시더라도 최소한 "사라진 시가상자"는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고 정태원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리뷰를 마칩니다.

2017/08/25

험담꾼의 죽음 - M.C.비턴 / 지여울 : 별점 2.5점

험담꾼의 죽음 - 6점
M. C. 비턴 지음, 지여울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어와 송어 낚시 전문 로흐두 낚시 교실'에 낚시를 배우기 위해 8명의 수강생들이 모였다. 그러나 그들 중 '레이디 제인'은 엄청난 재앙 덩어리로, 그녀의 특기는 낚시 교실 참가자들을 뒷조사해서 약점을 잡고 흔드는 것이었다. 다른 수강생들은 물론 낚시 교실 운영자 존과 헤더 부부마저 그녀에게 진절머리를 내며 하루하루가 흘러가던 중, 4일 째 되는날 레이디 제인이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스코틀랜드 북부의 작은 마을 로흐두의 순경 해미시 맥베시 시리즈 제 1작입니다. 눈에 띄는건 정통 영국 미스터리, 그 중에서도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님의 스타일을 쏙 빼닮았다는 겁니다. 시골 촌 마을을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 부르조아들과 계급 문화 등 바탕이 되는 설정이 굉장히 영국적이라는 점, 시골 촌 마을의 인간 관계가 여러 사건 관계자들의 경우와 맞아 떨어져 추리의 바탕이 된다는 점, 무엇보다도 누구나 죽이고 싶어한 험담꾼 레이디 제인의 설정과 그녀의 협박 재료들 모두 그야말로 여사님의 재림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문제는, 지금 읽기에는 좀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입니다. 묘사부터가 빅토리아 시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에요. 1985년 작품이라는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요. 부유한 상류층과 일반인들이 어우러져 각각의 속셈으로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룬 소집단이라는 설정부터가 별로 현대적이지 않잖아요?
게다가 로맨스 관련 이야기들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진부합니다. 이야기의 주역 중 하나인 앨리스는 20세기 아가씨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순진해 빠졌고, 해미시 순경과 지역 유지의 딸 프리실라의 로맨스 역시 고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전형적인 부자집 망나니 제레미도 켸켸묵은 설정인 것은 마찬가지고요.

물론 현대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캐릭터들이 나름 적극적이고 입체적이기는 합니다. 레이디 제인이 좋은 예입니다. 은근하게 사람들을 상처주던 여사님 작품 속 할머니나 부르조아 귀부인과는 다르게, 직접적인 짜증 유발자로 잘 묘사되고 있거든요. 작중 등장인물 뿐 아니라 독자마저도 분노케 만들 정도로요. 최근 작품들 중에서 이렇게 누구나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 등장인물은 오랫만에 봅니다.
앨리스가 제레미에게 넘어가 밤을 같이 보내는 묘사가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여사님 작품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나름 현대적인 부분입니다.

해미시 순경 역시 멍청한 바보가 아니라 진취적으로 생각하고 할 말 다 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신선합니다. 레이디 제인이나 찰리 백스터의 어머니에게 일갈하는 장면은 개중 백미입니다. 여성이 아니라 남성으로서 여성에게 조리있게,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만큼 할 말 다 하는 정말로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를 굉장히 잘 그려냈습니다.
탐정 역할로도 괜찮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미스 마플 스타일의 인간 관계를 바탕으로 한 추리력에 더해 "누가 범인인지 알고 싶다면 말을 걸고 질문을 던지고 대답에 귀를 기울이고 관찰하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라는 지론도 인상적입니다. 

로흐두라는 마을과 주변 묘사의 디테일도 상당한 수준이며, 이야기의 큰 축인 낚시 교실 이야기가 아름답게 펼쳐져서 여정 미스터리의 느낌도 전해줍니다.

그러나 해미시 순경 등 멋드러진 캐릭터만으로는 역부족이네요. 여러모로 원조 여사님 작품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무엇보다도 추리적으로는 실망스러운 탓이 큽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소소한 시골 마을의 일상과 에피소드를 사건에 접목하는 추리 방식이라던가 마지막에 해미시 순경이 사건 관계자들을 모아놓고 추리쇼를 벌이는 등의 추리 과정만큼은 고전 스타일인데, 실제 '추리'는 전혀 고전 본격물스럽지 않아요.
일단 공정하지가 않습니다. 핵심 단서인 "BUY BRIT...", 그리고 스트리퍼 에이미에 대해 순경이 알아낸 정보를 독자에게 공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독자도 에이미 로스가 "레드훅"이라고 말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순경이 인맥을 통해 전화를 걸어 알아낸 정보를 독자가 끌어낸다는건 불가능하니까요.
게다가 이 핵심 단서도 헛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스트리퍼가 성공해서도 과거 예명을 계속 사용한 이유, 술잔이 비었을 때 호텔이라면 마땅히 종업원이 있어야 하지만 에이미가 모두에게 술을 따라준 이유 등이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그나마의 사진도 '증거'라고 밀어붙이기는 영 부족하고요.
무엇보다도 밀렵꾼에게 목격되었다는 말로 자백을 유도한 것은 최악이었습니다. 정통 본격물이라면 상상하기도 힘든, 탐정의 야바위 짓이잖아요. 살해 동기도 영 시원치 않고요. 이럴거라면 차라리 소거법으로 근거를 보강했어야 합니다.

  • 어린아이인 찰리 백스터는 거구의 레이디 제인을 살해해 옮기기 어려우니 제외.
  • 앨리스는 과거의 치부를 이미 제러미에게 밝혔기에 드러난다고 크게 문제될 것이 없으니 제외.
  • 제러미와 프레임 소령의 비밀은 아는 사람은 다 알 뿐더러 알려면 누구나 알 수 있고, 게다가 알려진다고 해도 본인이 창피할 뿐 해가 될 일은 당장 없기에 제외.
  • 대프니의 과거 정신병 이력이야말로 드러난다고 해도 무엇 하나 해로울 게 없기에 제외.
  • 존과 헤더 부부가 살해했다면 최소한 존의 낚시에 시체가 걸려 끌려 나오도록 처리하지는 않았을터이니 제외.

그러면 결국 정계 진출을 노리고 있지만 과거가 드러나면 위태로울 수 있는 마빈 로스와 에이미 로스 부부만이 남게 되지요.
여기서부터 해미시의 조사 결과와 추리를 이어가면 그런대로 괜찮았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내용은 전무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적당한 내용, 묘사, 분량이라 쉽게 읽힌다는 장점만큼은 확실하며 현대적인 캐릭터들도 볼거리이기는 합니다. 비록 추리적으로는 꽝이더라도 현대물에 여사님의 작풍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텍스트이기도 하고요. 무엇보다도 해미시 순경이 마음에 들었기에, 후속권도 읽어볼 생각입니다. '코지 미스터리'라고 분류하고 연애질이나 해 대는 여타 작품들에 비하면 추리적인 부분도 적절하고, 책도 예쁘게 잘 나온 편이니까요.

2026/04/25

가구, 집을 갖추다 - 김지수 : 별점 2.5점

가구와 인테리어를 단순히 취향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생활사와 주거문화의 변화 속에서 풀어내는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읽으면서 가장 눈에 들어온 장점은 가구와 인테리어 전문가인 저자의 식견이 곳곳에서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화장대 설명에서 청동기시대의 거울 대체품 이야기에서 출발해, 르네상스 이후 화장 문화의 변화, 17세기의 로보이 화장대, 18세기의 토일렛 테이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더치스 화장대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자연스럽게 정리하며 화장대가 단순한 가구가 아니라 미의식, 계급 문화, 생활양식의 변화와 함께 발전해 왔다는 점을 알려주는 식입니다.

이런 설명은 서양 가구사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조선 말기의 경대, 유리 거울의 보급, 좌식 문화에 맞추어 발달한 소반의 구조와 쓰임, 사랑채와 안방의 변화를 통해 한국의 주거문화와 가구를 연결해 설명해 주기도 하거든요.
덕분에 읽다보면 왜 과거의 가구들이 작고 이동하기 편한 구조였는지, 왜 안방이 오랫동안 생활의 중심이 되었는지, 또 근대 이후에는 거실과 식탁 중심의 공간으로 어떻게 옮겨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온돌의 일반화와 좌식 문화의 정착, 그리고 그에 따라 소반이나 경대 같은 생활 가구가 발달해 나갔단 것이지요. 

현재의 생활 방식과 이어지는 제안들도 흥미롭습니다. 소파보다 식탁에 투자하라는게 대표적입니다. 이는 단순한 인테리어 조언이 아니라, 거실과 부엌을 통합하고 한 공간에서 함께 있으면서도 각자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생활 방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따라 하고 싶은지와는 별개로, 집을 꾸민다는 일이 결국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와 연결된다는 점을 생각하게 만드네요. 이사를 계획 중인데 여러모로 참고가 됩니다.

엠파이어 스타일, 리젠시 양식, 아르데코 같은 서양 디자인사의 흐름을 대중문화와 사회 변화 속에서 풀어내는 대목도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예술가와 장인, 파리지엔느와 프렌치 시크 등의 설명도 재미있게 읽었고요.

다만 책의 성격에 비해 도판이 부실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설명을 뒷받침해주는 시각 자료가 꼭 필요한 책인데 말이지요. 저자의 일러스트가 수록될 필요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아울러 인문학 서적으로 보기에는 전문성이 조금 부족합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와 넓은 범위의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정작 근거는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부분이 적지 않거든요. 

그래도 가구와 집을 둘러싼 역사, 문화, 생활양식에 대해 쉽게,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크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2025/07/12

올드 가드 2 (2025) - 빅토리아 마호니 : 별점 1.5점

앤디 일행은 무기를 밀매하는 조작을 소탕했지만, 흑막이 여전하다는 사실에 고민했다. 하지만 이전에 추방했던 부커를 통해, 500년 전 앤디의 동료였던 '꾸인'이 돌아왔고 이 모든건 최초의 불사자 '디스코드'의 음모라는걸 알게 되었다.

원자력 발전소를 점거한 디스코드와 꾸인을 막기위해 일행은 출동했고, 불사의 해제 조건을 알게 된 부커에 의해 앤디는 불사의 능력을 회복했다. 하지만 디스코드의 목표는 테러가 아니라 일행의 납치였고 앤디를 제외한 모든 일행은 납치되고 말았다. 

전편에 이어서 곧바로 본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입니다. 

이번 편은 1편에서 제시된 ‘불사의 끝’이라는 설정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1편에서 나일이 앤디와 격투 중 칼로 찌른 장면이 있었는데, 나일이 상처를 입힌 불사자는 그 힘을 잃는다는 설정이지요. 뒤이어 이를 알게된 부커가 의도적으로 나일에게 상처를 입고, 자신의 불사의 시간을 끝내며 앤디에게 불사의 힘을 돌려주는 전개로 무리 없이 이어지고요. 최초의 불사자인 디스코드가 힘을 되찾기 위해 나일을 이용하려 한다는 음모 역시 이 설정을 바탕으로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아무래도 불사자인 디스코드와 꾸인, 그리고 앤디 일행의 대결이라 전편보다는 "아인"스럽게 불사자들을 사로잡을 계획이 펼쳐지는 점도 볼거리입니다. 디스코드는 액체질소를 이용한 냉각 후 진공 포장시키는 방법을 사용하더군요. 

하지만 이외에 건질건 없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영화가 독립된 이야기로 완결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후반부는 다음 편을 예고하는 형태로 마무리되는 탓입니다. 하나의 작품으로서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설정의 일관성도 떨어집니다. 1편에서는 나일에게 찔린 앤디의 상처는 회복되었고, 불사의 힘을 잃은 시점은 그보다 훨씬 나중이었습니다. 반면 2편에서는 부커와 꾸인이 나일에게 찔리자마자 곧바로 힘을 잃습니다. 같은 조건임에도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디스코드가 나일을 이용해 힘을 되찾으려는 계획도 논리적 연결이 부족합니다. 불사의 힘을 잃게되는 당사자가 자발적으로 수락해야 이전된다는 설정인데, 앤디 일행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으니까요.

인물 간 감정선도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꾸인의 분노와 앤디와의 관계 회복은 배우들의 연기에 의존할 뿐, 이야기 내에서 납득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부커가 죽음을 택하는 장면도 개연성이 약하고, 극적인 효과 외에는 큰 의미를 남기지 못합니다. 솔직히 개죽음이었습니다.

액션의 완성도도 낮은 편입니다. 여성들간 격투가 주로 벌어지는데, 아무래도 속도감과 임팩트가 부족합니다. 특히 꾸인과 앤디의 격투는 많이 실망스러웠어요. 여러모로 장르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설정을 이어가는 몇몇 장치는 흥미로웠지만, 전체적으로 완결된 이야기로 보기 어렵고, 후속편을 위한 연결에 그친 영화였습니다. 온전히 이 영화만으로 평가하는건 무리입니다. 3편은 어쩔 수 없이 보기야 보겠지만 영 기분이 좋지 않네요. 샤를리즈 테론의 경력이 아깝습니다. 

2008/03/07

카리브해의 비밀 - 크리스토퍼 페티트 감독 / 헬렌 헤이즈 외 : 별점 1.5점

카리브해의 비밀 - 4점
헬렌 헤이스, 로버트 루이스 외 출연/워너브라더스

세인트 메리 미드에서 카리브해로 휴양 여행을 떠난 미스 마플은 같은 또래인 팔그레이브 소령과 친해진다. 소령은 자신의 회고록 이야기를 하며 과거 자신이 들었던 살인사건과 관련된 사진을 보여주려다가 갑자기 뭔가에 놀라서 그만두는데 그날 밤 중령이 시체로 발견된다.
최초에는 고혈압으로 인한 자연사로 보였지만 연달아 객실 하녀 빅토리아가 칼에 찔려 살해당한 뒤의 조사로 중령도 살해되었다는 것으로 밝혀진다. 미스 마플은 진범을 찾기 위해 추리를 시작하는데...


작년에 형한테 생일선물로 받은 아가스 크리스티 콜렉션 박스 셋트의 첫번째 편으로 "카리브해의 비밀"을 감상하였습니다. 조금 조사해 보니 1983년에 영국에서 제작된 TV 영화더군요.

그런데.... 솔직히 정말 많이 지루했습니다. 거의 연극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정적인 연출은 추리물 특성상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긴장감이 전혀 없는 전개가 끔찍할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마지막 범인이 밝혀지는 장면조차 지루했으니 뭐 말 다했죠. 미스 마플 시리즈는 극적인 요소가 많지 않은 차분한 분위기의 작품이지만 이 영화는 그 정도가 좀 심했습니다. "나일 살인사건" 처럼 이집트의 풍광이라도 보여줬다면 지루함이 덜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예산 탓인지 카리브해의 모습은 나오지도 않더라고요. 단지 짤막하게 등장하는 셋트 느낌 물씬나는 거리 풍경 이외에는 영화 전부가 호텔에서만 이루어 집니다. 셋트에서 촬영했더도 히치콕처럼 긴장감있게 연출할 수도 있었을텐데, 여러모로 아쉽기만 합니다.

미스 마플 역의 헬렌 헤이즈는 무척 적역으로 생각되었으나, 크리스티 팬이라도 지루함을 느낄 것 같은 영화라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네요. 소설도 이렇게 재미가 없었나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다음번에는 박스셋 중에서 좀 더 유명하고 드라마틱한 작품을 골라 봐야 겠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11/06/16

누명 - 애거서 크리스티 / 이가형 : 별점 2.5점

누명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가형 옮김/해문출판사


부유한 자선사업가인 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쟈코 아가일은 감옥에서 죽었다. 그리고 2년 뒤, 지질학자 아서 캘거리는 아가일 가문을 방문하여 살해 당시 쟈코의 알리바이를 증명했다. 하지만 당시 어머니를 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가일 저택에 거주하던 가족들 뿐이었다. 내놓은 자식이었던 쟈코가 유죄판결을 받은 것을 당연시 여기던 가족들은 누가 진범이냐를 놓고 큰 충격과 의심, 공포에 빠지게 되는데...

지난 주부터 저만의 애거서 크리스티 섭렵이 이어지고 있네요. 이번에 읽은 작품은 "누명"입니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직접 선정한 자신의 작품 베스트 10에 들어가는 작품입니다. 사실 완독한 것은 며칠 전으로 리뷰 글을 다 써 놓았었는데, 편집 버튼 누른 뒤 알 수 없는 버그가 발생해서 다 날아갔네요. 망할 에버노트.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씁니다.,, 리뷰 내의 오류나 텐션이 떨어지는 것은 다 에버노트 탓입니다...

이 작품은 1958년에 발표된 작품입니다. 여사님 작가 인생의 비교적 후반기라 할 수 있죠. 그래서 작중에 폭스바겐 비틀과 스푸트니크가 언급되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단순한 배경 뿐만이 아니라, 여사님의 유명 시리즈 탐정이 등장하지 않는 등 전체적으로 이색적인 부분이 많이 보입니다. 여러모로 원숙기를 넘어선 작가의 여유같은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여사님의 전공인 전통 본격 추리물보다는, 패트리시아 하이스미스 스타일의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성향이 엿보이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미 해결된 것으로 보였던 과거의 사건을 다시 끄집어 낸 뒤, 가족 중 누가 살인범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의 증폭되는 오해와 증오 등 복잡한 심리 묘사가 주로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이러한 묘사를 뒷받침하는, 촘촘히 짜여진 가족 구성원들의 설정도 충분히 설득력있고요. 그래서 아주 재미있게,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심리 드라마는 아니며 여사님 명성에 걸맞게 추리적으로도 특출난 부분이 있습니다. 앞선 여러가지 복선들, 예를 들어 자코의 중년 여성 대상 사기 행각이나 비밀 결혼 같은 별것 아닌듯한 정보가 사건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범인의 정체와 진상도 놀라운 점이 있고요.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는 팬들도 즐길거리가 많은 편이에요.

하지만 쟈코가 유죄 판결을 받고나서 사망할 때까지, 6개월 동안의 수감생활 중 왜 모든 것을 사실대로 밝히지 않았는지가 설명되지 않은건 옥의 티입니다. 심리 묘사가 중요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중반 이후에는 헤스터의 심리 묘사에만 너무 치우치는 것도 문제고요. 심리 묘사의 디테일도 부족할 뿐더러, 가족 구성원 개개의 심리 묘사는 진범의 심리를 건드릴 수 없기에 깊숙이 진행할 수 없다는 한계가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건을 게임처럼 생각해서 장난스럽게 접근하던 필립 듀란트의 비중이 큰 것은 작품을 지루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필립 듀란트가 밝혀낸 진상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관절 이 친구는 뭘 위해서 등장해서 기웃거리다 죽어버렸는지 알 수가 없네요. 뭔가 하긴 한 것 같은데 죽어서도 뭘 했는지 밝혀지지 않으니 정말로 안습한 캐릭터랄까요. 그 외에 탐정역의 아서 캘거리의 활약이 좀 뜬금없었고, 빅토리아 시대의 향취가 느껴지는 해피엔딩은 시대에 걸맞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긴장감넘치는 심리묘사가 계속 이어졌더라면 대단한 걸작이 되었을텐데 앞서 언급한 한계가 발목을 잡은 느낌이에요. 그래도 고전 황금기 이후 현대화된 정통 본격 추리물과 심리 스릴러의 가교 역할을 하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추천드립니다.

덧붙이자면, 사실 이 작품은 오래전 TV에서 영상화된 작품을 먼저 접했었습니다. 아주 재미있게 감상했던 기억이 나네요.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1인칭 심리 묘사를 다루면서도 그 중에 범인이 있는 작품이라면, 아무래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영상물이 더 어울리는게 당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영화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작품인 것 같은데 도널드 서덜랜드의 캘거리 박사, 페이 더너웨이의 레이첼 아가일, 크리스토퍼 플러머의 레오 아가일이라는 화려한 캐스팅이 인상적이라 다시 구해보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페이 더너웨이의 레이첼 아가일이라.... 이 아줌마 의외로 크리스티 영화에 많이 나왔네요?

2004/11/24

죽음의 사냥개 - 애거서 크리스티 / 정성희 : 별점 2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정성희 옮김/해문출판사
드디어! 크리스티 여사의 단편집 전권을 완독했습니다.
이 작품집은 11편의 단편이 수록된 작품집인데 코난 도일경처럼 말년에 심령현상에 심취했던 여사의 취향을 반영하듯 대부분 심령 호러물로 채워져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목차와 쟝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죽음의 사냥개 - 심령 호러 (?)
  2. 집시 - 심령 호러(?)
  3. 등불 - 심령 호러
  4. 아서 카마이클 경의 기묘한 사건 - 심령 서스펜스 (?)
  5. 목련꽃 - 심리 드라마
  6. 개 다음에 - 드라마
  7. 이중 범죄 - 추리
  8. 말벌 둥지 - 추리
  9. 의상 디자이너의 인형 - 심리 서스펜스
  10. 이중단서 - 추리
  11. 성역 - 추리
그런데 호러와 서스펜스를 표방한 대부분의 작품이 21세기 독자의 시각으로는 심심한 편입니다. 공포를 효과적으로 전해주지도 않으면서, 공포의 실체조차 두리뭉실 표현하는 점은 역시 빅토리아 여왕 시대 작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끔 했고요. 한마디로 말해 썰렁했어요.
포함되어 있는 4편의 추리물 역시 단편집 전체의 성격을 반영하듯 전체적으로 시시한건 마찬가지입니다. 포와로가 활약하는 "이중범죄"와 "말벌 둥지", "이중단서" 3편 모두 대단한 사건다운 사건없는 영국 시골에서 벌어지는 촌극 느낌이고, 마플양의 "성역" 역시 추리물적인 성격도 적을 뿐더러 마플양 작품 같지도 않거든요.
트릭적으로 본다면 그나마 "이중범죄" 쪽이 제일 본격적인 추리물에 근접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닥 신선하지도, 흥미롭지도 않으며 "이중 단서"는 로사코프 백작부인이 처음 등장하여 포와로와 대결을 펼친다는 점에서는 점수를 줄 만 하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때문에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전체적으로 크리스티 여사의 단편집으로 보기에는 기대 이하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차라리 심령 미스터리 쪽으로 가려면 더 화끈하고 더 무섭게 가는 것이 좋았을텐데 말이죠. 단편집을 완독했다는 성취감은 크지만 그 이상의 즐거움을 찾아보기는 어렵군요.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죽음의 사냥개"
한 수녀의 고대로부터 전해진 일종의 초능력과 그 비밀을 둘러싼 이야기. 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정직하게 흘러가다가 끝나버려서 별다른 반전의 묘미가 느껴지지 않아 아쉽네요.

"집시"
사람의 운명을 예견하는 집시에 대한 이야기. 내용이 별로 설득력이 없을 뿐더러, 갑작스러운 마지막 해피엔딩은 당황스러웠습니다.

"등불"
저택에 살고있는 굶어죽은 아이의 유령과 새로 이사온 가족의 이야기. 결국 새로 이사온 가족의 아이가 죽은 다음 유령이 2명이 된다..는 어떻게 보면 섬뜩한 이야기로 그나마 제일 무서웠던 작품입니다. (물론 현대 독자의 시각으로는 많이 썰렁합니다만)

"아서 카마이클 경의 기묘한 사건"
꽤 유명한 작품이지요. 유산 때문에 의붓아들 아서 카마이클 경에게 고양이를 대입시키는 묘한 최면을 거는 계모의 이야기입니다.
줄거리 자체는 상당히 참신하고 결말 또한 제법 설득력 있지만 설정 자체가 비현실적이라는 한계가 명확합니다.

"목련꽃"
일종의 심리 드라마입니다. 한 여자가 남편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사랑했지만, 남편 때문에 배신했던 다른 남자에게 찾아가 남편의 죄를 증명하는 서류를 받아오려 합니다. 그리고 서류를 받던 그 순간, 자신이 남편에게도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는 내용입니다. 
상당히 공감가는 이야기로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습니다.

"개 다음에"
애견때문에 오히려 불행해져가는 한 여성이 개의 자살과도 같은 죽음 직후에 새로운 인생을 되찾게 된다는 드라마인데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더군요. 심리 묘사는 탁월하지만 글쎄요....

"이중 범죄"
포와로 단편입니다. 포와로가 헤이스팅스와 같이 버스 여행 중 만난 아가씨의 귀중품 도난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의 소품이지요. 사건이 소박한 만큼 내용도 그다지 멋진 트릭이나 전개를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그나마 이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본격적인 추리물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멍청한 (?) 헤이스팅스를 잘 드러내는 부분만 재미있었지만요...

"말벌 둥지"
케이블 TV에서 이미 영상 버젼으로 감상한 작품으로 어떤 단편인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보게 되었네요. 한 남자의 자살-살인을 병행하려는 계획을 포와로가 미연에 방지하는 내용으로 영상 버젼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소설은 극적인 요소가 별로 없이 무미건조하게, 평이하게 흘러갑니다.

"의상 디자이너의 인형"
의상 디자이너들이 한 벨벳 인형에게 어느날 문득 공포를 느끼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그냥 그뿐입니다. "사랑받고 싶었다"라는 결론은 허무할 뿐이고요.

"이중 단서"
포와로가 보석 도난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으로 용의자도 4명뿐이고, 트릭도 러시아어와 영어의 알파벳을 이용한 트릭이라 대단치 않습니다. 그나마 포와로 작품에서 라이벌로 등장하는 백작부인의 첫 등장이라는 점에서만 점수를 줄 만 합니다.

"성역"
미스 마플이 깜짝 찬조 출연하는 작품인데 추리적 요소는 거의 전무합니다. 살인사건이 등장하지만 내용 자체는 도난 당한 보석에 관한 이야기로 소품이기도 하고요. 단서도 의뢰인이 다 찾은 것으로 마플양은 경찰을 부르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어드바이저 정도의 역할 뿐입니다. 마플양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한다면 처져보치는건 저만 그런걸까요?

2024/01/06

필요의 탄생 - 헬린 피빗 / 서종기 : 별점 3점

필요의 탄생 - 6점
헬렌 피빗 지음, 서종기 옮김/푸른숲

냉장고 도입에 따른 가정의 변화를 알려주는 과학사, 미시사, 인문학 서적.

냉장고 도입의 역사는 얼음과 아이스박스에서 시작됩니다. 가정 내에서 얼음을 사용한 역사가 생각보다 오래되었더군요. 17세기에 시작되어 18세기에는 귀족들 계층에 확고하게 자리잡았고,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는 일반 가정에도 보급되었다고 하니까요.
그리고 유명한 19세기 영국의 만국 박람회에 여러가지 제빙기의 등장 후 모든게 바뀌었습니다. 얼음을 언제든지 대량으로 생산하는 시대가 열리자 저온 유통 체계가 자리잡아서 식료품 공급망에 엄청난 영향을 줬습니다. 한 마디로 신선한 식품들이 계절과 지역에 상관없이 전 세계 곳곳에서 값싸게 거래되는 세상이 된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가정용 냉장고가 도입된건 필연적인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유럽보다도 보급은 훨씬 빠르고 광범위 했습니다. 이유는 20세기 초 근교 주택이 성장하여, 미국의 주택 크기가 계속 커진 덕이 큽니다. 그래서 실내에 냉장고를 충분히 설치할 수 있었거든요. 반면 유럽의 주택 크기는 그대로라 냉장고 크기는 작을 수 밖에 없었을 뿐더러, 영국의 경우는 식품 저장고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서 가정 내에 냉장고를 들이기가 여의치 않았다고 하네요. 1953년에도 영국 전체 가구의 5% 정도만 냉장고를 보유했다고 할 정도로요. 그러나 이후 신규 주택 단지에 냉장고가 기본 설치되고, 중앙 난방의 보급으로 식품 저장고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등의 이유로 냉장고 보급은 가속화되었습니다. 음식의 보존 기간을 늘리기 위한 각종 첨가물이 금지된 것도 한 몫 단단히 했습니다. 건강을 강조한 광고도 이런 분위기를 이끌었고요. 심지어 1950년대 뉴질랜드에서는 냉장고에 보관하지 않은 우유를 파는게 범법행위에 해당하기도 했다니, 보급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인겁니다.

그 외에도 냉장고 문 안쪽에 선반을 단 발명 특허는 사장될 뻔 했다던가, 선반 특허를 반격했던 회전식 선반은 좋은 아이디어였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사장되었다, 냉장고 소리를 감추기 위해 라디오를 다는 발명도 있었다는 등 소개되는 냉장고 관련 잡학들도 재미있었어요. 그 중 냉장고에 음성 메시지를 남기는 발명은 최근에서야 여러가지 센서와 칩으로 가능했을 기술같은데, 이미 1970년대에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를 이용해서 구현했다는게 놀라왔습니다.

'냉장고'하나만으로 미국과 유럽의 주거 환경, 가정 내 상황, 그리고 미국의 교외화 현상 등을 설명할 수 있다는게 인상적이었던 독서였습니다. 냉장고와 냉동 기술이 핵심 이유는 아니겠지만 최소한 영향을 미쳤다는건 부인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이렇게 하나에 대해 깊이 파고 들면, 관련된 다른 것들에 대해 이해하기 쉬워진다는게 미시사의 묘미가 아닐까 싶군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16/09/19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레시피 - 존 피셔 / 이승민 : 별점 1.5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레시피 - 4점 존 피셔 지음, 이승민 옮김, 존 테니얼 그림/정은문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음식, 요리 관련 항목을 발췌한 후, 해당 요리 레시피를 함께 소개하는 식으로 구성된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추리 소설에 등장하는 요리"에 대한 컬럼을 준비하고 있어서 혹 참고가 될까 싶어 읽어보았습니다.

허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구성부터 별로예요. 요리가 등장하는 항목에 대한 상세한 소개와 요리에 대한 설명이 곁들여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발췌된 내용은 아무런 부연 설명 없이 정말 소설 속 해당 단락을 그대로 실어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거기에 레시피가 더해졌을 뿐이에요.

레시피나 요리 관련 항목도 별 재미가 없습니다. 제법 그럴싸한 것도 있지만, 소설 속 내용을 멋대로 해석하여 레시피를 억지로 연결시킨게 많은 탓입니다. 먹으면 몸이 작아지는 '나를 마셔요 수프'의 경우, 소설 속 내용에는 조리법을 짐작케 하는 단서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오렌지와 레몬 등 각종 과일을 끓인 과일 수프 레시피를 곁들이는 식으로요. 심지어는 요리와 전혀 상관없는 내용에 레시피를 결합시키기까지 합니다. 앨리스가 체셔 고양이를 처음 만난 장면 뒤에 '체셔 고양이 수염'이라는 요리 레시피를 덧붙인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요리가 대중적이고 유명하다면 아예 관련이 없지 않겠지만, 검색해보니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네요.

물론 빅토리아 시대의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놀이라는 '스냅드래곤'의 실체 - 그릇에 브랜디를 채우고 건포도를 넣은 다음 술에 불을 붙이고 불꽃 속에서 건포도를 낚아채 불이 꺼지기 전 입안에 넣는 것 - 등 처음 알게 된 내용이 없지는 않습니다. 부록으로 수록된 "정신의 식생활"이라는 컬럼도 아주 인상적이고요.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으면 몸에 해롭듯,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책을 읽거나 너무 책을 많이 읽으면 마음에 좋지 않다는 시각이 독특했던 덕분입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발표 당시 그려진 존 테니얼의 삽화도 고풍스러운 매력이 넘쳐 마음에 들며, 책의 디자인도 예쁜 편이에요.

허나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으며, 170페이지 정도 분량에 13,000원이라는 가격도 과하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팬이 아니라면 구태여 구해볼 필요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