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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20

지뢰 글리코 - 아오사키 유고 / 김은모 : 별점 3점

오타쿠 탐정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의 작가인 ‘헤이세이의 엘러리 퀸’ 아오사키 유고의 단편 연작집입니다. 2024~25년에 걸쳐 일본의 4대 미스터리 랭킹 1위를 휩쓸었던 작품이지요. 저 역시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확실히 재미는 있었습니다.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의 유쾌함과 만화적인 설정, 그리고 치밀한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본격 미스터리를 보다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게임’의 영역으로 끌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의 장점을 극대화하면서도 단점을 최소화한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 속에는 모두 다섯 가지 게임이 등장합니다.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일반적인 게임이지만, 여기에 약간의 변주를 더했다는 점에서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모든 게임은 ‘정확하게 정해진 조건’ 아래에서 진행되며, 그 조건의 허점을 파악하고 상대를 교묘하게 속이는 플레이어가 승리하게 되고요. 이러한 점 덕분에 단순한 놀이를 넘어 두뇌 게임으로서도 충분한 재미를 전해줍니다. 계단 오르기나 가위바위보에 더해진 약간의 변주만으로 순수한 두뇌 게임을 즐길 수 있다니! 이 아이디어만으로도 여러 랭킹에서 좋은 성과를 얻은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어 보입니다.
축제 때 좋은 장소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든가, 마음에 들지 않는 카페 주인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라든가 하는 등 비교적 일상적인 이유인 게임의 목적들도 마음에 듭니다.

주인공인 이모리야 마토도 꽤 매력적으로 그려집니다. 놀라울 정도의 분석력을 지닌 천재이기는 하지만, 게임 이외의 부분에서는 그렇게 기이한 면모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사연이나 기묘한 습관도 없는, 다소 가벼워 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평범한 여학생입니다. 구누기 선배에게 거는 장난스러운 모습이 본래 모습처럼 느껴질 정도에요. 아래 만화판 이미지처럼요.
친구이자 주요 화자인 고다 역시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하며, 다른 등장인물들도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충분히 현실에서 있을 법 합니다.

그러나 사립 세이에쓰 고교와 화폐처럼 유통되는 S칩을 걸고 게임을 벌이는 후반부는 다소 아쉬웠습니다. 특히 마지막에는 거의 1억 엔에 가까운 돈이 걸린 게임까지 등장하는데, 이는 도박 실력이 학교 내 서열을 결정한다는 "카케구루이" 수준의 만화적이고 비현실적인 설정처럼 느껴집니다.
세이에쓰 고교와 얽히면서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예를 들어 학생회장 사부리나 이모리야와 비슷한 수준의 게임 천재인 우키타 에소라 등도 앞서 등장했던 평범한 학생들과는 상당히 다른, 다소 비현실적인 면모를 보여 마음에 들지 않네요. 마토가 세이에쓰의 용벙(?)처럼 활약한다는 여지를 남기는 에필로그도 영 별로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게임을 고도의 두뇌 게임 영역으로 끌어들인 아이디어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등장하는 이야기별 간략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뢰 글리코 :

학원제 때 옥상의 사용권을 놓고 마토와 학생회의 구누기 선배가 ‘지뢰 글리코’라는 게임으로 대결합니다. 가위바위보로 이긴 플레이어가 3의 배수만큼 계단을 올라가는 게임인데, 서로 계단에 ‘지뢰’를 장치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마토가 장치한 지뢰에 걸린 구누기 선배가 3연타로 30계단을 미끄러져 패배하고 맙니다.

3의 배수로 올라가는 상황을 이용하는 초반부 전개, 그리고 설치한 지뢰 위치에 선배가 서도록 유도한 마지막 승부는 볼 만합니다. 그러나 구누기 선배가 마토의 지뢰를 모두 밟아 열다섯 계단 차이가 벌어진 뒤 바로 패배 선언이 이어지는 결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가위나 보로 이기면 여섯 계단씩, 바위로 이기면 세 계단을 올라갈 수 있으니 3연승만 하면 따라잡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두뇌 게임이라면 모를까, 순수한 가위바위보 승부라면 3연승 정도는 그리 낮은 확률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스님 쇠약 :

카루타 카페에 출입 금지당한 카루타부를 위해, 카페 사장과 마토가 백인일수 카루타와 ‘신경 쇠약’을 결합한 ‘스님 쇠약’ 게임으로 승부를 벌입니다.

그런데 ‘두뇌 게임’이라는 측면에서는 가장 아쉬운 이야기였습니다. 카페 사장은 카루타 카드에 몰래 표시를 하여 사기 게임을 하고 있었고, 이를 간파한 마토가 카드를 바꿔치기해 승리합니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카드 마킹을 새로 한 뒤 바꿔치기한다는 방법 자체도 비현실적이고, 마지막 카드 조합 역시 운의 비중이 너무 큽니다.

차라리 사기를 고발해 망신을 주는 편이 학생들 입장에서는 더 현실적인 해결 방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자유 규칙 가위바위보 :

마토를 마음에 들어 한 학생회장 사부리 선배가 ‘자유 규칙 가위바위보’로 승부를 가리자고 제안합니다. 선배가 이기면 마토는 학생회에 들어가고, 마토가 이기면 선배가 마토의 중학교 동급생 에소라와의 진검 승부를 만들어 준다는 조건입니다.

‘자유 규칙 가위바위보’는 일반적인 가위바위보에 두 명의 플레이어가 각각 ‘독자손’을 추가해 7전 4선승제로 겨루는 게임입니다. 독자손은 형태와 이름을 정하고 그 효과를 설정할 수 있는데, 최소한 한 종류의 손에는 반드시 져야 한다는 규칙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세부적인 설정들이 꽤 복잡하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마토는 ‘형태가 일치해야 한다’는 조건을 교묘하게 활용해 마지막 대역전승을 이끌어냅니다. 핵심은 중반 이후 고다에게 부탁한 핫초콜릿을 마시기 위해 자연스럽게 왼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했던 장면입니다. 왼손과 오른손은 전혀 다른 손이므로 사실상 무효가 되어 그 판에서는 패배한 셈이었는데, 사부리 선배는 이를 독자손 설정의 효과로 오해해 마지막에 패배하고 맙니다.

이처럼 평범한 게임에 약간의 변주를 더해 두뇌 게임으로 만든 점이 인상적인 이야기이며, 주어진 조건을 정확히 파악해야 이길 수 있다는 전제도 가장 잘 구현된 작품입니다.

물론 사부리 선배가 이 게임의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제안했던 ‘스네일’의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럼에도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편이라 생각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달마 인형이 셈했습니다 :

에소라와의 진검 승부를 마련하기 위해, 먼저 사립 세이에쓰 고교 학생회와 게임을 벌입니다. 그들의 ‘S칩’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승부 게임은 ‘달마 인형이 셈했습니다’로, 방법은 한국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거의 같습니다. 다만 표적(술래)은 몇 개의 단어로 외칠지를 먼저 정하고, 암살자(공격자) 역시 몇 걸음을 움직일지를 미리 선언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사실 게임을 만든 스도는 그동안 잔꾀를 부려 ‘0’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숨겨 왔고, 그 덕분에 항상 승리해 왔습니다. 암살자는 최소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게 마련이니, 그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보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모리야는 이 트릭을 간파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표적에게 여러 가지 제한 조건을 걸어 둡니다. 예를 들어 떡갈나무 정면만 보고 움직여야 한다거나,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그리고는 표적이 보지 못하는 공원 밖으로 돌아 나간 뒤, 떡갈나무 뒤편으로 걸어 들어가 표적을 붙잡는 데 성공합니다.

주어진 조건을 활용해 승리한다는 두뇌 게임 측면에서는 흠잡을 데 없습니다만, 세이에쓰의 오케가와가 엄청난 청력으로 숫자를 추측한다는 설정은 다소 과합니다. 또한 비현실적인 거액이 게임에 걸리는 전개 역시 마음에 들지 않고요. 게다가 스도의 필승법도 소문이 나면 한 번밖에 쓸 수 없다는 점에서 그다지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4 Rooms Poker :

마토가 호적수 에소라와 S칩 전액을 걸고 세 장의 카드로만 패를 만들어 겨루는 포커 게임으로 승부를 벌이게 됩니다.
처음 받은 카드는 버리고 한 번 다시 받을 수 있는데, 일반적인 포커와 다른 점은 플레이어가 제한된 시간 안에 카드를 가지러 네 개의 무늬 방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 방에 놓여 있는 카드 중 원하는 카드를 직접 가져오는 방식이지요.

등장하는 게임 중 조건이 가장 많고 복잡하며 여러 장치들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게임 자체만 놓고 보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조건들 가운데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방에 불까지 지른다는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고 생각되네요.

마지막 승부 역시 아쉽습니다. 아무리 카드의 뒷면을 보지 않았다고 해도, 에소라가 최후의 승부 순간까지 뒷면의 색깔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탓입니다. 만약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뒷면을 보고 자신이 들고 있는 카드가 원래의 카드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면, 이야기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여기에 모든걸 걸기에는 너무 확률이 낮지 않나 싶어요.

무려 1억이라는 판돈을 쿨하게 포기하는 결말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마토의 성격이 아무리 그렇다 치더라도, 본인은 몸을 팔 생각까지 했는데 그걸 이대로 퉁친다는건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0/08/19

다우트 1~4 - 요시키 토노가이 : 별점 1점

다우트 4 - 2점
요시키 토노가이 지음/서울문화사(만화)

미지의 공간에 갇힌 사람들이 생명을 걸고 게임을 한다는, "극한추리 콜로세움"이나 "인사이트밀"과 같은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물입니다. 어딘가에서 꽤 호평인 리뷰를 읽고 관심이 가던 차에 '추리만화 몰아쳐 읽기' 시즌에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척 실망스럽습니다. 완성도가 높다고 할 수 없는 작화와 전개는 둘째치고서라도, 게임의 구성 자체가 한심한 탓입니다. 게임의 룰은 '누가 늑대인지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암묵적인 기본 법칙인 '단체 행동' 부터 결여된 초반부터 심상치 않더니만, 아니나다를까 늑대를 찾기 위한 두뇌 게임은 전무합니다. 단지 서로가 계속해서 다투다가 하나씩 죽어갈 뿐입니다. 조금이라도 머리를 쓰는 장면은 아예 등장하지 않아요.

또 '누가 늑대(범인)인가?'라는 수수께끼를 풀어내는데 있어 필요한 긴장감도 느끼기 어렵습니다. 누가 늑대인지 초반부에 알려주는 듯한 묘사와 더불어 초반에 갇혀있는 6명 중 3명이 죽어버리는 탓에 긴장감을 느낄 여지가 없거든요. 주인공 빼면 남는건 둘. 그리고 한 명은 확실히 수상함. 이걸로 이미 게임 끝이죠 뭐... 게다가 '각자 몸에 새겨진 바코드로 문 하나 만을 열 수 있다'라는 제약은 왜 등장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제약으로 범인을 특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내부 분열의 소재로만 쓰일 뿐이니까요.

마지막으로 반전과 진상이 너무나 황당한 수준이라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초반에 범인이 드러난다는 결정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반전을 집어넣어 이야기를 꼬아보려고 시도하는데 되려 작품을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고 맙니다. 뜬금없는 최면술을 이용한 결말은 도대체 밑바닥이 어딘지 가늠하기조차 힘들게 만들었고요. 이러한 기본적인 단점과 비교하자면 애시당초 미약한 동기, 어떻게 먹잇감(?)을 찾아내었는지에 대한 설명의 부재, 그리고 이렇게 죽일거라면 뭐하러 게임이랍시고 공들여 장치를 세팅하는지조차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것 정도는 걍 지나쳐버릴 정도의 사소한 문제로 보입니다.

한마디로 폐쇄형 미스터리 장르물의 재미가 어디서 비롯되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수준낮은 졸작입니다. 야구 만화에서 야구 시합 장면이 재미가 없다면, 도박 만화에서 도박 승부가 재미가 없다면 그 작품이 좋은 작품일리가 없잖아요?그나마 다른 유사 설정 작품들처럼 '막대한 돈' 운운하는 대신 단지 생존을 위해서 게임을 한다는 점 하나만 다른데, 어차피 현실성 제로인 만화같은 설정이라면 차라리 "라이어게임"이나 "도박패왕전 제로"와 같이 '거액의 돈을 둘러싼 두뇌게임' 쪽으로 끌고가는게 훨씬 좋았을겁니다. 아니면 최소한 "누가 울새를 죽였나?"처럼 덫에 걸린 사람들끼리의 긴장감 넘치는 두뇌 게임이라도 펼쳐주었어야죠. 아무리 생각해도 점수를 줄만한 여지가 없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2021/10/16

오징어 게임 (2021) - 황동혁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마 다 보셨겠지만

전 세계를 강타한 대 흥행작. 얼마전 감상했습니다.

사실 이런 류의 설정은 서브 컬쳐, 장르 문학 애호가들에게는 친숙합니다. 여러 사람이 갇힌 공간에서 거액이 걸린 게임을 펼친다는건 제가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라고 이름 붙인 장르물에 흔하게 있으니까요. 대표적인건 "도박묵시록 카이지", "라이어 게임", "살해하는 운명 카드" 등이 있습니다. 김전일도 "게임관 살인사건"이라는 희대의 망작으로 이 장르에 뛰어들었던 적이 있을 정도로 한때 크게 유행했었지요. 내용, 설정도 게임에서 패할 경우 죽느냐, 거액의 빚을 떠 앉느냐 정도의 차이일 뿐 대체로 비슷했고요.

그러나 이 작품은 456명의 참가자라는 거대한 스케일, 그리고 이해하기 쉬운, 친숙한 게임을 게임에 사용했다는 아이디어가 돋보였습니다. "마작"을 가지고 목숨을 건 배틀을 벌인다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움직이면 죽는다는건 전 세계 누구나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달고나에서 모양 뜯어내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게임이 초반 탈락자들을 다수 발생시키는데 유리했을 거라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싶어요. 

그리고 보통 이런 장르물은 게임을 벌이는 주최측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는데, 이 작품은 경찰이 잠입해서 나름 배경과 진상에 대해, 그리고 게임을 이끄는 프론트맨의 정체를 밝혀내는 등의 활약을 펼치고, 진짜 마지막에서 흑막의 일단락을 드러내 주는데 나름 괜찮았습니다. 

또 캐릭터별 서사와 게임이 시작된 후, 한 번 사회로 돌아가는 설정이 좋았습니다. 이를 통해 참가자들 모두 지옥에서 살고 있으며, 오징어 게임에 참가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걸 보여주어서 게임에 참가하는 것에 대한 설득력을 높여주거든요. 동네 친구였던 상우가 최종 보스급 악역으로 진화하는 과정도 잘 그려졌으며 장덕수, 한미녀 같은 조역들도 설정은 뻔했지만 좋은 연기력 덕분에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반면 두뇌가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는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대부분 운과 체력에 의존하는 게임이었던 탓입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첫 게임으로 패닉을 일으켜 많은 사람을 탈락시키기 위한 의도였겠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게임 중 달고나 뽑기와 유리 다리 건너기는 명백히 운이 중요했고, 줄다리기는 당연히 체력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그나마 두뇌가 개입할 여지가 있던건 구슬 따먹기가 전부였습니다. 상우가 알리를 등쳐먹는 걸로 잘 보여주고 있지요. 여기서는 기훈과 일남의 서사가 더 중요해서 묻혀버리고 말았지만... 

그래서 마지막 기훈과 상우가 오징어 게임으로 펼치는 결승전에서 기훈이 동네에서 제일 유명했던 천재 상우에게 두뇌로 한 방 먹이는 장면을 기대했는데, 처절한 아재들의 몸싸움이 전부라 실망스러웠습니다. 상우의 자살도 허무했고요. 

누군가를 이겨서 죽게 만들어야 살아남는 게임이라는 기본 원칙 그대로 전개와 결말을 가져갈 필요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 주최측 의도를 나름대로 농락하는 전개였다면 두뇌 싸움 느낌도 나고 좋았을텐데요. 예를 들어 '유리 다리 건너기'는 옷으로 끈을 만드는 식으로 협력이 충분히 가능했지요. "도박묵시록 카이지" 에서 카이지는 게임의 헛점을 잘 이용해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게끔 도와주었는데, 이런 점에서는 카이지의 초반부 몇 에피소드들이 더 나아 보였습니다. 하긴, 카이지 초반부 몇 에피소드는 이쪽 장르에서는 길이 남을 희대의 걸작이라 단순 비교는 좀 어렵겠지만요. 

마지막으로, 에필로그도 너무 길었으며, 후속 시즌을 노리는 느낌이 강해서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주최측이 원하지 않는 한, 기훈이 다시 게임에 참가할 방법은 애초에 없잖아요?

이렇게 아쉬움이 없는건 아니지만, 재미 측면에서는 두말할 나위 없었습니다. 이런 류의 장르물로 볼 때 우수한 편이에요. 별점은 3점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 만한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의 대박을 계기로 앞으로 우리나라 장르물이 더 활발히 제작되고 확산되면 좋겠네요.

2010/10/23

크림슨의 미궁 - 기시 유스케 / 김미영 : 별점 3점

크림슨의 미궁 - 6점
기시 유스케 지음, 김미영 옮김/창해

주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대기업 증권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회사가 도산해 실업자가 된 뒤 전락한 후지키는 아르바이트에 응모했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가 정신이 든 곳은 '화성' 이라는 설정의, 오스트레일리아에 위치한 '벙글벙글' 국립공원이었다. 후지키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게임'을 시작하게 되는데....

"검은집", "유리망치" 단 두 편만 읽었지만, 두 작품 모두 인상적이었던 기시 유스케의 장편입니다. 타자로 비유하자면 타율과 장타력을 겸비한 작가라고 할 수 있겠네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절반의 성공을 거둔 작품입니다. 가장 큰 장점은 단연 재미입니다. 후지키가 알 수 없는 게임에 휘말린 뒤 4가지 '선택지' 중 '정보'를 선택하고, 이후 게임의 단계별로 벌어지는 전개가 상당히 흥미진진합니다. 후지키가 자신의 정보와 아이템을 활용해 위기를 벗어나는 과정에서는 두뇌게임의 묘미도 느낄 수 있으며, '식시귀'라 불리는 식인종과의 마지막 추격전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들 정도로 긴장감이 넘칩니다. 재미만 놓고 본다면 매우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오래된 '게임북'이 중요한 역할을 하거나, '정보'라는 선택지를 통해 얻은 단서들이 복선처럼 기능하는 부분도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가장 큰 단점이 작품의 핵심이기도 한 '게임'이고요.

이 작품처럼 '모종의 알 수 없는 단체나 집단에 의해 원치 않는 게임에 참가한 이들이 벌이는 생존 경쟁과 학살극'이라는 설정은 이미 수많은 작품에서 사용된 익숙한 구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라 칭하는데, 이러한 설정의 작품들이 차별성을 가지려면 '게임' 자체가 얼마나 설득력 있고, 정교하며, 흥미로운지가 핵심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게임'은 초반의 4가지 선택지와 '정보'의 중요성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구조가 허술합니다. 예를 들어, 초반 선택지에서 '호신용'이라는 선택지의 중요성이 간과된 점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특별한 이변이 없다면 키가 2m에 달하는 세노오가 게임을 제압하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플레이어 선택 과정에서 세노오 같은 특출난 인물이 포함되었다는 것 자체가 오류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게임'의 목적이나 단계별 과정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참가자들이 아이템을 공정하게 공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최소한 '식량'이라도 공유되었다면 이야기가 전개되지도 않았을 테니, 이러한 요소들은 작위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럴 일은 없다'는 아야의 주장도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지만, 최소한의 논리적인 설명이 더 필요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게임 마스터'와 '촬영자'라는 설정이 흥미로운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작중에서 거의 하는 일이 없다는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게임 수행 과정에서 게임 마스터가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것은 왜 존재하는지 의문을 갖게 만듭니다.

상술한 요소 중 하나라도 문제가 발생했더라도 게임은 실패했을 겁니다. 때문에 후지키의 추측대로, 이 게임이 모종의 단체가 스토리가 있는 살육극을 스너프 필름으로 제작하고 판매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훨씬 더 정교한 구성이 필요했습니다. 수십억의 돈이 들어간 거대한 프로젝트니까요. 이러한 점에서 게임 설정의 설득력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이와 비교하면, 게임을 기획하고 실행한 주체가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 점이나 설명이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점은 오히려 단점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사실, 이러한 유형의 작품 대부분이 비슷한 방식을 취하긴 하지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만약 '게임' 설정이 좀 더 정교하고 설득력 있게 짜여 있었다면,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 내에서도 단연 빛나는 작품이 되었을텐데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2010/08/16

레이튼 교수와 영원의 가희 - 하시모토 마사카즈 : 별점 2점

레이튼 교수는 옛 제자였던 오페라 가수 제니스의 편지를 받고 루크와 함께 크라운 페트네 극장을 찾았다. 그녀의 오페라 관람은 명목상의 이유였고, 진짜 목적은 '고대 암브로시아 왕국의 불로불사 전설'에서 얻어냈다는 불사의 생명을 건 퀴즈 게임 참가였다.

원래는 NDS용 게임으로 유명한 작품이죠. 게임을 해 보지는 않았지만 동글동글 귀여운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었고 작품도 추리물 느낌이 강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많이 다르더군요. 이야기는 허술했고 기대했던 추리나 두뇌 게임, 퀴즈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한 탓입니다.

이야기가 허술한건 어린 아이들 대상 작품이기 때문이겠지만, 생명을 건 게임이라고 하면서 결국 패자들을 고이 살려서 보내준다던가, 배에서 탈출할 방법이 없다면서 이어지는 퀴즈의 답이 배 꼭대기 층에 있는 구명보트를 타는 것이라던가 하는 식이라는건 좀 너무했습니다. 요새 애들 수준을 무시하는 걸까요? 애시당초 이렇게까지 스케일을 키울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사건의 동기도 문제고, 밝혀지는 진상 역시 너무 뻔했습니다.몇 개 등장하지 않는 추리와 두뇌 게임, 퀴즈도 대부분 억지에 불과해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괜찮았던 것은 K-in-G 이라는 단어 트릭 뿐이었습니다.

숨가쁘게 사건이 이어지고 스케일이 계속 높아지는 등 볼거리는 제법 충실한 편이지만 이래서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죠. 별점은 2점입니다.

2026/05/16

사형집행중 탈옥진행중 - 아라키 히로히코 : 별점 1.5점

"죠죠의 기묘한 모험"으로 유명한 아라키 히로히코의 만화 단편집입니다. "사형집행중 탈옥진행중", "돌치 ~ 다이하드 더 캣", "키시베 로한은 움직이지 않는다 - 고해소", "데드맨즈 Q"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가 특유의 기묘한 상상력과 불길한 상황 설정을 짧은 이야기 안에 압축한 이야기들로, 인물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던져진 뒤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남거나 무너지는지를 주로 보여줍니다. 

감옥인지 호텔인지 알 수 없는 공간, 바다 위 요트에서 사람과 고양이간 벌어지는 기묘한 생존극, 죽은 뒤에도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 듯한 인물이라는 소재는 확실히 아라키 히로히코답습니다.
아라키 히로히코 특유의 기괴한 상상력도 돋보입니다. 평범한 공간을 순식간에 불안하고 위협적인 장소로 바꾸는 감각, 인물의 육체를 과격하게 몰아붙이는 작화와 연출, 현실적인 논리보다 불길한 이미지로 독자를 압박하는 방식은 분명 개성적입니다. 또한 "돌치 ~ 다이하드 더 캣"처럼 제한된 상황에서 작은 두뇌 게임을 활용하는 대목도 눈에 띕니다. 작가의 재치를 잘 느낄 수 있어요.

하지만 단점이 더 큽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서는 아무리 기묘한 사건이 벌어져도 스탠드라는 설정과 대결의 규칙이 있기 때문에 독자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 책 수록작들은 그런 뒷받침 없이 기괴한 상황만 먼저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가 기묘하다는 인상은 강하지만,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인물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은 부족합니다. 결말도 대체로 시시한 편이고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1.5점입니다. 별로 추천할 작품은 아닙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사형집행중 탈옥진행중"

표제작. 한 남자가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듯한 방에 갇히면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공간은 단순한 감옥이 아닙니다. 음식과 생활 시설은 지나치게 잘 갖춰져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호화로운 호텔 방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안의 모든 사물은 죄수를 죽이기 위한 장치처럼 움직이지요. 침대, 욕실, 식사, 창문까지 일종의 함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살아남기 위해 방 안의 구조를 파악하며 조금씩 탈출 가능성을 찾아갑니다.

이렇게 사형 집행과 탈옥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역설적인 상황이 핵심으로 주인공은 계속 죽음의 위협을 피하면서, 결국 탈옥 직전의 상황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그는 오랜 세월 탈옥을 포기한 채 그 안에 머무는 쪽을 택하는게 결말입니다. 

기괴한 발상은 인상적이고 중반부의 위기와 탈출 묘사는 흥미롭지만, 갖은 노력을 통해 탈출 직전의 상황을 만든 주인공이 수십 년 동안 그대로 남는다는 결말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최소한 몇 년 안에는 결정을 내렸어야 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대충 의도는 알겠지만 마무리의 설득력이 약해서 감점합니다.

"돌치 ~ 다이하드 더 캣"

난파한 요트 위에서 남자와 고양이 돌치가 생존을 두고 얽히는 이야기인데, 이 단편집에서 그나마 두뇌게임과 반전의 재미가 살아 있는 작품입니다. 단순히 기괴한 상황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제한된 공간 안에서 상대를 속이거나 유인하는 장면이 들어가는 덕분이지요. 특히 손가락을 이용해 돌치를 낚는 장면에서 아라키 히로히코 특유의 과장된 연출과 잔혹한 아이디어, 일종의 두뇌 게임이 잘 드러납니다. 대단히 정교한 추리나 전략은 아니지만, 짧은 단편 안에서 긴장감을 만들어 내는 장치로는 꽤 효과적입니다.

다만 이 작품 역시 결말까지 놓고 보면 강렬한 설정에 비해 뒷맛이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돌치가 생각보다 엄청난 능력이 있었다는 정도인데 반전도 아니고, 별로 통쾌한 결말도 아닌 탓입니다. 애초에 돌치의 능력에 대한 설명도 전무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키시베 로한은 움직이지 않는다 - 고해소"

나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내용과 작품 완성도만 놓고 보면 이 책 최고의 수록작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키시베 로한은 움직이지 않는다"를 통해 이미 접했다는 점입니다. 책 값도 제법 나가는 편인데 중요한 수록작 하나를 이미 접했다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데드맨즈 Q"

"죠죠의 기묘한 모험" 제4부와 이어지는 성격이 강한 단편입니다. 키라 요시카게가 죽은 뒤의 존재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은 상태에서, 어떤 의뢰나 임무를 수행한다는 내용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작품이 독립적인 단편으로 읽기에는 설명이 지나치게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키라 요시카게가 왜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탓입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 제4부를 읽은 독자라면 키라 요시카게라는 인물 자체에서 오는 흥미는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배경을 모른다면, 알 수 없는 인물이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알 수 없는 일을 하는 영문모를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어요.

즉, 단독 작품이라기보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을 이미 읽은 독자를 위한 후일담이나 외전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2/09/24

앨리스 살인게임 - 가코야 게이이치 / 김현화 : 별점 2점

앨리스 살인게임 - 4점
가코야 게이이치 지음, 김현화 옮김/㈜소미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식량 부족으로 파국을 맞은 2061년의 지구, 하루는 돈을 벌기 위해 VR로 가상 현실 세계 '앨리스'에 접속했다가 정체불명의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그녀 때문에 로그 아웃도, 다른 곳으로 이동도 불가능하며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는 시스템 컨트롤 불가 영역으로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피노키오'라고 불리우는 이 새로운 공간에서 가이드를 따라 목숨을 걸고 '빨간 새우의 집'에 도착한 하루는, 자기와 같이 끌려온 다른 생존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생존자들이 죽을 때마다 집의 잠겨진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그들은 마지막 생존자가 되기 위해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이게 되는데...

가상 공간을 무대로 한 액션 스릴러입니다. '피노키오'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는 '푸른 머리의 소녀'는 누구인지?에 대한 수수께끼 풀이도 있어서 약간의 추리물적인 성향도 갖추고 있고요. 

액션 스릴러적인 성향은 "빨간 새우의 집"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강을 건널 때 그 편린을 살짝 보여준 뒤, 빨간 새우의 집 안에서 생존자들이 목숨을 건 생존 게임을 벌일 때 절정에 달합니다. 하루가 LK와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그 중에서도 절정부이고요. 

여기서 가상 현실을 잘 이용한 두뇌 게임은 상당한 볼거리입니다. 하루가 시스템 내에서 아바타 외모를 다른 사람처럼 바꿀 수 있다는 걸 알아낸 뒤 시체를 자기로 위장시키고, 공간에 자기처럼 보이는 영상을 투영한 뒤 급습한다는 등으로 꽤 그럴듯했어요. 

가상 공간 피노키오에 대한 진상도 신선했습니다. 앨리스 시스템 내의 다른 공간이 아니라, 앨리스에서 접속할 수 있는 또다른 가상 공간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현실에서 앨리스에 접속했을 뿐인 하루 등은 어떻게 피노키오에 접속할 수 있었나? 라는 수수께끼가 새로 불거지는데, 이는 하루가 앨리스 내에서 활동하는 인공지능이었다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즉, 하루는 현실에서 앨리스에 접속한게 아니라, 앨리스에서 피노키오에 접속했었던 겁니다. '푸른 머리의 소녀'는 하루를 만들어낸, 진짜 현실의 인공지능 연구자였고요. 앨리스 안에서 인공지능을 만들어냈던건 현실 세계에서 대파국 이후 인구가 급속도로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대신해 앨리스 안에서 생활할 인공지능이 필요했다는 거지요. 이렇게 인공지능을 만들어 내려 했던 이유는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야기의 개연성이 터무니없다는 점입니다. 극한의 상황에 밀어 넣지 않으면 본성을 알 수 없어서 다양한 프로토타입을 특정 공간에 가두었다는 발상부터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이런다고 인간의 본성이 드러날리가 없지요. 설령 그렇다쳐도, 구태여 "피노키오의 모험"에서 불필요한 설정들을 따 오면서, 이상한 공간에서 생존 게임을 벌이게 할 이유는 없습니다. 생존 게임으로 알 수 있는건 가장 싸움을 잘하고 강한 인공지능이 누구인지일 뿐이니까요. 극한 상황이 필요했다면 앨리스 시스템 내의 문제로 시스템 컨트롤을 할 수 없는 특정 클러스터 - 현실의 무인도같은 - 에 갇히게 되었다는 설정으로 충분했을 겁니다.
생존자들에게 '푸른 머리의 소녀'라는 수수께끼를 던져준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추리력은 인간 본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피노키오'를 가져다 붙인 것도 억지스럽고요. 

생존 게임도 앞서 소개했던 배틀 자체는 그럴싸하지만, 설정은 진부합니다. 전형적인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들과 별로 다른 점이 없는 탓입니다. 과묵한 전사, 쎈 언니, 이해심 높은 조력자, 양아치 (?) 등 등장 인물들도 진부한데다가, 설정상 오류가 크게 느껴집니다. 이 등장 인물들은 모두 앨리스 내부에서 활동할 인공지능이라는 설정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평범한 인물들이었어야 했습니다. 문신충 앗슈라던가, 사교성없고 폭력적인 LK는 인공지능 프로토타입으로는 지극히 비상식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테스트를 반복해서 하루에게 부담이 걸렸다고 하는데, 이게 과연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시스템 설계를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초기화 후 업데이트된 버젼으로 테스트했다면 이전 히스토리를 알 수 없는게 당연할텐데요. 찬호께이의 "S.T.E.P"에서의 시뮬레이션처럼, 각 테스트는 모두 독립적으로 수행되는 결과라는 설정이 더 이치에 맞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좋았던 아이디어와 설정에 기묘한 생존 게임을 더해서 이야기가 산으로 가 버린 작품입니다. 아이디어를 잘 살렸다면 더 좋은 작품이 되었을 것 같은데 많이 아쉽습니다.

2010/11/22

24시간 7일 - 짐 브라운 / 하현길 : 별점 2점

24시간 7일 - 4점
짐 브라운 지음, 하현길 옮김/비채

다나는 미국 TV 리얼리티 쇼 "24시간 7일"에 참가하게 되었다. 쇼가 열리는 곳은 자메이카와 아이티 사이의 무인도 '바사섬'으로, 무인도였지만 쇼를 위해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였다. 그러나 쇼가 시작되자마자 참가자 12명을 제외한 모든 스태프가 괴바이러스로 사망하고, 참가자 12명도 시청자 투표를 통해 1명씩 바이러스에 의해 희생될 운명에 빠졌다. 방송은 차단되었지만, 인터넷과 위성방송 수신기를 통해 중계가 계속 되었고 미국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이 사건의 추이를 검토하며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데...

도서출판 비채의 트위터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게 된 작품입니다. 비채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줄거리 소개대로 무인도에 고립된 리얼리티 쇼 참가자들이 생존을 위해 싸워나간다는 내용은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의 공식에 충실한 듯 보이지만, 앞서 접했던 일본 작품들과는 확연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바로 게임을 어떻게든 설득력 있게 만들려는 배경 묘사가 충실하다는 점입니다. 리얼리티 쇼를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는 '컨트롤'이라는 수수께끼의 인물과, 그가 이 게임을 진행하는 이유를 나름대로 설명해 줍니다.

반면 이 장르의 핵심은 '참가자들이 어떻게 생존을 위해 싸워나가는지?'라는걸 잊은 듯합니다. 이 장르물은 대체로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스릴과 서스펜스를 보장하기 때문에, 이를 넘어선 무언가를 독자에게 전달하려면 흥미진진한 두뇌 게임이나 참가자 간의 갈등이 잘 표현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요소를 찾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참가자들의 생존을 결정하는 것이 그들 스스로가 아니라 '시청자'들의 투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는 극단적인 시청률 경쟁이 낳은 비윤리적인 미디어의 행태를 비판하는 의도를 담고 있겠지요. 문제는 게임 참가자들이 할 수 있는게 거의 없다는겁니다. 그래서 긴장감과 재미는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약간의 게임 요소, 그리고 시청자를 현혹하기 위한 작전이 등장하지만 전개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사족처럼 느껴졌어요.

또한 지나치게 헐리우드스럽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등장 인물들과 스케일 모두 헐리우드 영화를 보는 느낌이거든요. 불치병에 걸린 딸을 살리기 위해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는 여주인공 다나(밀라 요보비치?)와, 전직 비행기 조종사로 뛰어난 육체와 지능을 갖춘 저스틴(매튜 맥커너히?) 같은 스테레오 타입의 캐릭터 설정은 진부합니다. 결말 또한 너무나 완벽하게 정리된, 그야말로 한 편의 헐리우드 영화 같았고요. 거창한 스케일도 겉보기에는 화려할 뿐, 결국 속이 빈 강정처럼 허술한 부분이 많습니다. 바사섬이 공격받는 상황에서 탈출한 생존자들이 '헬리콥터'로 미사일을 피한다는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거대한 작전이 미국 정부 모르게 진행된다는 설정부터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여러 복선과 단서들이 단순한 '떡밥'처럼 보인다는 점도 단점입니다. 이야기를 촘촘하게 구성한 후, 그에 맞춰 단서를 배치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한 장치로 넣은게 아닌가 의심스러워요. '컨트롤'의 계획 역시 허술합니다. 참가자 중 누군가가 섬을 탈출하거나, 미군이 섬을 초토화시키는 방식으로 개입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고, 계획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허점이 많았습니다. 전개에 중요한 요소였던 '컨트롤의 협력자'에 대해 방송에서 오판한 로릭 박사에 대한 후속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 그리고 '컨트롤'의 동기와 사건의 배경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점도 감점 요소입니다.

퍼즐 천재로 사건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터커는 매력적이었고, 기본적으로 스릴과 서스펜스가 보장되는 장르물에 미디어 비판 요소를 결합하려 했던 시도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아무래도 작가의 욕심이 지나쳤던게 아닌가 싶네요. 장르물에 집중하거나, 아니면 미디어 비판에 집중하고 스케일을 줄여서 설득력 있게 진행하는 것이 나았을 겁니다. 현재의 결과물은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헐리우드식 스릴러일 뿐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이벤트로 읽게 된 도서라 보다 좋은 평을 남기고 싶었지만, 솔직한 리뷰를 남기는 것이 맞겠지요. 아마 앞으로 이벤트 당첨은 힘들 것 같습니다...

2010/09/16

성녀의 구제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5점

성녀의 구제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 이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 

마시바 요시타카가 자택에서 살해되었다. 사인은 아비산 중독.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그의 아내 아야네는 사망 시각 전후에 홋카이도에 있었다는 철벽의 알리바이가 있었다. 여자의 직감으로 아야네의 범행을 확신한 우쓰미는 유가와에게 해결을 요청한다...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의 최신작입니다. 작년 말에 출간되었는데 이제야 읽게 되었네요. 이 작품은 장편이긴 하지만, "용의자 X의 헌신"보다는 "탐정 갈릴레오""예지몽" 같은 단편집의 성격이 강합니다. 별다른 복잡한 전개나 구성 없이 '트릭' 하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죠. 특히나 초반부터 용의자는 아야네가 거의 유일하기 때문에 '범인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후더닛 물이 아니라, '어떻게 범행했나?'에 초점을 맞춘 와이더닛 물로, 이야기는 트릭에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갈릴레오"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순수하게 '트릭'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 구조가 단점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단편 수준의 이야기를 억지로 장편화하면서, 단편으로서 지닐 수 있었던 장점은 퇴색하고 단점이 더욱 두드러진 것 같아 아쉽네요.

이 작품의 가장 큰 단점은 유가와도 지적한 '비현실적인 트릭'입니다. 단편이라면 충분히 성립하고 독자도 수긍할 만한 괜찮은 트릭이지만, 장편에서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예를 들어, 1년 동안 같은 집에 사는 남편이 정수기 물을 마시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해 보입니다. 집이 굉장히 넓다는 묘사가 나오고, 아내도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니 남편이 혼자 있을 시간이 없었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억지스럽습니다. 또한, 치밀한 트릭이 필요했을 당위성도 충분히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단편을 장편으로 억지로 늘린 듯한 전개도 단점입니다. 단편에서는 유가와가 곧바로 배제해버리는 가설들의 수사와 재현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이 낭비되고 있고, 구사나기와 우쓰미의 수사도 계속된 탐문과 진술의 반복일 뿐, 이야기의 흐름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또한, 사건의 핵심 중 하나인 마시바의 전 애인에 대한 이야기가 중반 이후에야 등장하는 것도 이야기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늘리기 위한 장치처럼 보였습니다.

아야네를 범인으로 특정하여 전개할 것이었다면, 차라리 도서 추리물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 더 적절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물론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의 장점인 고전 미스터리 황금기의 미덕, 즉 천재라 불리는 물리학자 유가와와의 두뇌게임을 독자와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한 점은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또한, 샴페인 잔과 주전자의 지문 등 디테일한 부분에서 보여주는 추리적인 요소도 탁월했습니다. 전작에서 볼 수 없었던 구사나기의 말랑말랑한 심리 묘사도 독특했고요.

그러나 아무래도 단편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습니다. 장편이었던 "용의자 X의 헌신"도 트릭이나 동기 측면에서 비현실적인 요소가 있긴 했지만, 유가와의 라이벌이 등장해 펼쳐지는 불꽃 튀는 두뇌게임, 그리고 시리즈 팬들이 즐길 수 있는 유가와의 학창 시절 묘사 등이 어우러져 장편으로서 충분한 가치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장편으로 보기에는 다소 알맹이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13/10/30

킹을 찾아라 - 노리즈키 린타로 / 최고은 : 별점 2.5점

킹을 찾아라 - 6점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이한 별명의 네 사람이 모여 교환살인을 모의하고 대상과 순번을 정했다. 방법은 트럼프 카드 뽑기. 첫 번째 범인 와타나베 기요시의 범행을 시작으로 아무 관련 없는,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의 알리바이는 명확한 살인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노리즈키 총경은 아들 린타로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데...

노리즈키 린타로 장편. 이 작가 장편은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이후 두 번째네요.

작품의 시작은 네 명의 사람이 모여 교환살인을 모의하는 장면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일종의 도서 추리물 느낌을 전해 줍니다. 이후 범인 중 한 명인 와타나베 기요시의 범행을 디테일하게 묘사함으로써 더욱 그러한 생각을 갖게 만들었고요. 이후는 일반적인 추리물 형식이긴 하지만요.

어쨌거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전작보다는 쉽게 읽힙니다. 그러나 추리적인 완성도는 별로입니다. 이유는 우연과 작위적인 전개에 더해, 내용에서 경찰 수사의 헛점이 여실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완벽해 보이는 교환살인이 발각되는 이유가 와타나베의 바보 같은 실수였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실수는 노리즈키 총경이나 주변 증인들의 말을 빌리면, '한 번만 만져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위조지폐'로 비롯된 것인데, 와타나베는 맨손으로 지폐를 만져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또 지갑에는 어떻게 넣었을까요? 이후 와타나베가 은행에서 도주하다가 차에 치어 죽는다는건 작위적인 전개의 극치입니다. 여기서 체포되었더라면 진상은 한 번에 밝혀졌을 테니까요. 교환살인 추리의 근거가 되는 카드 발견 역시 나라자키가 카드를 남겨두고 도주한 탓으로, 순전히 운에 불과했습니다.

또 카드 발견 이후, 노리즈키 린타로가 등장하여 교환살인에 대해 두 명이 아니라 세 명, 세 명이 아니라 네 명이 얽혔다고 추리하는데 이건 딱히 대단한 추리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두 명이 아니라 세 명이었다면 네 명도 당연히 가능하겠죠. 추리라고 부르기도 어려워요.

이러한 점들로 인해 페이지가 중간을 넘어갈 때까지는 솔직히 별볼일 없었습니다. 작가의 이름값에서 기대되는 정통 추리물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어요.

그러나 후반부, 경찰이 숨통을 조여오고 위조된 협박장을 받은 이후 범인들이 오히려 자수하여 혐의를 축소하려는 공작을 벌이는 부분부터는 괜찮습니다. 첫 장면부터 독자를 범행모의에 끌어들여 앞부분 전개를 지루하게 만들지만, 중요한 정보를 교묘하게 감춘 탓에 독자와의 두뇌게임이 제대로 벌어지는 덕분입니다. 노리즈키 린타로와 독자가 공정한 정보를 제공받는 것은 물론이고요.

덧붙이자면 진상에 대한 아이디어도 탁월합니다. 교환살인을 테마로 한 작품은 많았지만 여태 이런 발상의 작품은 본 적이 없네요. 남겨진 용의자가 "살인을 모의했지만 나는 저지르지 않았다!"라고 주장한다니! 교환살인 모의가 중죄일 수는 있으나 범행 실행 이전이라면 그 형량은 상대적으로 낮을 것이라는 것을 이용한 건데, 교환살인의 가장 큰 맹점인 '첫 범행으로 이득을 본 뒷사람은 범행을 주저하게 되기 때문에 누가 먼저 범행을 저지르냐가 중요하다'를 한방에 해결해 준다는 측면에서도 아주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이 작품의 진상과는 살짝 어긋나지만, 누가 살인을 저지른 다음이라면 뒤에 남은 사람은 "사실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반은 장난이었다"라고 자수하면서 범행을 불어도 되니 정말로 타당한 발상이죠.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이 경우에도 보험금을 받을 수 있나라는 것인데, 순수하게 원한 관계였다면 아무 문제 없으리라 생각되네요. 단지 이 맹점만을 가지고 작품을 쓴 게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낯선 승객"이라면, 이 작품은 이 맹점을 가지고 두뇌게임을 벌인다는 점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작품의 완성도와는 별개로요.)

허나 탁월한 발상과 빅재미의 후반부 역시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먼저 앞서 이야기한 대로 경찰 수사의 헛점 부분인데, 세키모토 마사히코에 대해 충실히 수사했다면, 그래서 그의 진짜 동기를 알아내었더라면 사건은 보다 빨리 해결되었을 겁니다. 이런 대형사건이 자수한 용의자의 자백에만 의지하여 수사가 진행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그리고 나라자키를 살해했다는 내용은 완전히 사족이었습니다. 나름 교묘한 작전으로 혼자서는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었던 조시마에게 철퇴를 내리기 위한 작가적 의도로 보이긴 했지만, 좀 오버한 듯 싶더군요.

마지막으로 카드에 이름을 맞추었다는 발상과 그에 따른 진상은 꽤 그럴듯하고 재미도 있긴 하나 작위적이라는 점에서는 감점 요소이긴 합니다. 사실 카드가 킹이냐 조커냐는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설정과 전개는 진부하고 사건은 우연이 많이 개입되어 추리적으로 눈여겨볼 부분이 많지 않으나 마지막 부분의 아이디어는 돋보입니다. 후반부 아이디어를 보강하고, 정통파 추리소설보다는 범죄 스릴러로 전개하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겁니다.

2010/10/22

초록 캡슐의 수수께끼 - 존 딕슨 카 / 임경아 : 별점 3점

초록 캡슐의 수수께끼 - 6점
존 딕슨 카 지음, 임경아 옮김/로크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의 시골마을 소드버리 크로스에서 독이 든 초콜릿에 의한 독살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 해결을 돕기 위해 런던 경찰청의 엘리엇 형사가 수사에 합류했지만, 엘리엇이 도착하자마자 마을의 유지 마커스 체스니가 가족, 친지가 보는 앞에서 독살당했다. 마커스는 스스로 독살 사건의 증명을 위한 퍼포먼스를 벌였었다. 퍼포먼스로 빚어진 주요 용의자들의 확고한 알리바이 등으로 사건은 미궁에 빠졌고, 엘리엇은 기디온 펠 박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존 딕슨 카의 '기디온 펠 박사' 시리즈 장편으로, 국내에서는 처음 소개된 작품입니다.

다른 존 딕슨 카의 작품과 달리 이 소설은 소품 같은 느낌을 주며, 별다른 역사나 전설, 괴담과 연결되지 않는 점이 특징입니다. 가장 인상적인 요소는 피해자인 마커스 체스니가 스스로 '퍼포먼스'를 벌인다는 설정이고요. 이 퍼포먼스는 추리물의 맹점이라 할 수 있는 '가치 없는 증언'이라는 요소를 이용해 이중 삼중으로 꾸며진 일종의 추리쇼이며, 연극적인 느낌을 주는 동시에 아주 사소한 디테일에서 목격자들이 서로 다른 증언을 하는 등 세밀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퍼포먼스 추리쇼는 작품의 핵심 트릭이기도 합니다. 퍼포먼스와 이어지는 질문-답변을 통해 심리학자 잉그람 교수가 보여주는 진지한 두뇌게임 역시 볼거리 중 하나이고요.

기디온 펠 박사를 통해 작가가 독살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는 부분도 흥미로웠습니다. 여러 사례를 제시하며 독살범이 감수해야 할 세 가지 위험 요소—독살은 독을 넣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독을 넣을 기회와 동기가 없다는 것을 납득시켜야 하며, 독을 입수하는 과정에서 걸리지 않아야 한다—를 설명하는 부분은 현학적인 재미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 중에서 가장 도망가기 어려운 것이 독살이다"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도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러나 그 외의 부분에서는 존 딕슨 카의 작품답지는 않더군요. 완벽한 추리소설과는 다소 거리가 있거든요. 피해자가 주관한 퍼포먼스가 우연히도 범인의 혐의를 가리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설정이라 하더라도, 범인이 소드버리 크로스에서 무차별 독살 사건을 벌인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 않는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범인의 진짜 목적은 마커스를 살해하는 것이었는데, 불필요한 사건을 벌여 마을에 수사력을 집중시키는 것은 불합리한 설정입니다.

또한, 윌버를 가격하여 뇌진탕을 일으킨 부분도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윌버가 죽지 않았다면 모든 진상을 고백했을 가능성이 크므로, 범인은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며 계획이 치밀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카메라로 촬영한 필름 트릭은 억지스러운 요소가 강합니다. 낮과 밤의 구분이 그렇게까지 모호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고, 리허설과 실제 퍼포먼스가 완벽하게 동일했을 것이라는 전제 역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특히 주요 목격자가 두 명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트릭이 성공했다는 점은 지나치게 운에 의존한 설정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용의자가 제한된 상황에서 긴장을 유지하는 작가의 솜씨는 여전히 훌륭하며, 뻔한 상황을 노련하게 극복하는 전개 역시 거장다운 면모를 보여줍니다. 단점을 나열했지만, 공정한 두뇌게임이라는 본격 추리소설의 기본 원칙에 충실한 작품이며, 정통 퍼즐 미스터리로서의 추리적 수준 역시 높은 편입니다. 다만, 작가의 명성을 고려했을 때 지나치게 작위적인 요소가 많기는 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존 딕슨 카 작품 완독을 목표로 이 책을 읽었는데, 드디어 완독했다고 생각했더니 신작 "기묘한 사건, 사고 전담반"이 또 출간되었네요. 이 작품은 언제 읽어야 할까요...

"완독한 존 딕슨 카 작품 목록"

2021/05/07

통 - 프리먼 월스 크로프츠 / 오형태 : 별점 2.5점

 - 6점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 지음, 오형태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부두에서 포도주 통 하역 작업을 하던 해운회사 직원 보로턴은 통 한 개 안에 금화와 시체가 들어있다는걸 알아차렸다. 그런데 브로턴이 회사와 경찰에 신고하던 사이에 통을 누군가 가져가 버렸다. 번리 경감의 수사를 통해 통을 가져간 사람인 훼릭스 씨와 통, 그리고 통 속 금화와 시체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번리 경감은 파리 경시청 경감 르빠르쥬와 함께 피해자 아네트, 피해자의 남편 보와라크 수사에 나서는데....

1920년에 발표된, 고전 본격 추리 소설 황금기 최고 걸작 중 한 편입니다. 작가 F.W.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의 데뷰작이자 대표작이기도 하고요. 유명세답게 이런저런 리스트에서도 많이 언급되는 편입니다. '주간문춘에서 선정했던 동서미스터리 100'에서는 33위로, '에도가와 란포 본인 선정 미스터리'에서는 9위로 선정했었네요. '히치콕 매거진 선정 세계 10대 추리 소설' 중에서는 무려 2위이고요. 저도 오래 전에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모처럼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이 추리 소설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용의자들 중 누가 진범인지를 밝혀내는 후더닛, 혹은 불가능해 보이는 범죄를 어떻게 저질렀는지 알아내는 하우더닛과 같은 당대에 유행했던 '두뇌 게임', '퍼즐 미스터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작품 속 피해자 아네트는 단순한 교살로 살해되어 추리의 여지는 없습니다. 범인은 훼릭스가 아니면 보와라크 씨일 수 밖에 없거든요. 이 작품은 한 마디로 말해서, 두뇌 게임이 아니라 '수사를 통한 현실감'이 주는 재미를 처음으로 독자에게 선사한 작품입니다. 그 덕분에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겠지요.
1부에서 통을 누가 가져갔는지에 대한 수사도 볼 만 하지만 2부와 3부에 걸쳐 선보이는 본격적인 수사는 감탄을 자아냅니다. 2부는 번리 경감, 파리의 경시총감 쇼베 씨, 르빠르쥬 경감이 보와라크 씨의 알리바이가 완벽하고, 훼릭스가 범인이라는 증거를 발견하여 그를 체포하는 내용이며 3부는 훼릭스의 변호사가 고용한 탐정 조르쥬 라튀슈의 철저한 조사를 통해 보와라크가 진범임을 밝히는 내용인데, 20세기 초반 시대상을 잘 반영하면서 당시 최신 문물과 단서들을 활용하여 멋지게 표현해 냅니다.

무언가를 수사, 조사하기 위해서는 추리를 통해 가설을 먼저 세우는 덕분에 아예 추리의 여지가 없지는 않습니다만, 이 역시 수사의 영역으로 보는게 타당합니다. 사건 관계자의 증언을 듣고 이를 조사하여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탐문 수사가 대부분인 수사 과정은 추리할 부분이 많지 않고요. 2부에서 놓치거나, 간과했던 부분을 3부에서 검증, 보완하여 진상이 드러나게 될 뿐이거든요. 대표적인게 보와르크의 알리바이입니다. 보와르크는 파리에서 집사와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고 증언하고, 집사 등은 그 시간에 보와르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는걸 보장합니다. 그러나 라튀슈의 조사로 이 전화는 파리가 아니라 칼레에서 걸려왔다는게 밝혀지게 됩니다. 확실히 추리가 아닌 수사를 통해 깰 수 있는건 범인의 알리바이 밖에 없지요. 이런 점에서 광고 문구 그대로 '리얼리즘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현실적인 수사 과정에 반해, 고전 본격물에서 흔히 봄직했던, 시체가 들어있던 불길하고 기묘한 '통'의 존재가 결합되어 흥미를 자아내는 설정도 좋습니다. 시체가 들어 있을 수도 있어서 경찰에 신고했지만, 관계자들이 여럿 얽혀 왔다가다 하는 과정이 긴장감넘치고 심지어 웃음까지 자아내는 1부는 아주 흥미로왔으며, 마지막에 시체가 발견되는 클라이막스는 그야말로 압권이었어요.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고전 중심의 리스트말고, 'MWA 추천 베스트 미스터리 100'과 같은 최신 작품을 포괄하는 리스트에는 선정되어 있지 않은데 이 역시 당연합니다. 시대를 앞서나가고, 경향을 주도한 당대의 최신작이었지만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고, 문제도 많은 탓이에요. 보와르크 씨가 저지른 범죄부터가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그는 살해 후에 충분히 사체를 숨길 수 있었습니다. 훼릭스와 사랑의 도피를 했다고 이미 집사와 하녀가 믿은 상태니까요. 구태여 조각상을 한 개 더 주문하면서, 정체가 드러날걸 각오해가면서까지 통을 파리에서 영국으로, 다시 영국에서 파리로 옮길 수고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시체를 통 속에 넣어둔 뒤, 집사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하는걸 고민하는게 당연하지요. 훼릭스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그랬다는데, 그럴거라면 파리에서 훼릭스가 아내를 살해하고 도주했다고 꾸미는게 낫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훼릭스가 수상해 보이도록 만들어 누명을 씌울 생각이었다는데, 통이 깨져서 금화와 함께 시체가 살짝 드러나지 않았다면 사건이 커지지도 않았을 겁니다. 훼릭스에게 누명을 제대로 씌우려면, 이 작품에서처럼 훼릭스가 찾기 전에 시체가 드러났어야 하지만 이는 순전히 우연이었어요.

그래도 통의 이동은 작품의 핵심이니 그렇다 치죠. 그러나 2부에서 보와라크의 알리바이가 확실하다고 의견을 모으는 장면은 여러모로 어설픕니다. 예를 들어 보와라크가 1시 쯤 내린 집중호우를 맞아서 옷이 젖었다는게 그 시간에 밖에 있었던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경시총감 쇼베의 말대로 부인이 1시 전에 집을 나갔다는 것도 증명되지 않고요. 지나치게 보와라크를 무죄로 만드려는 억지로 보였습니다.
세부 설정들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훼릭스의 복권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이를 사건에 써먹을 생각을 했다는게 대표적입니다. 게다가 훼릭스와 친구 르 고티에 씨는 복권 이야기를 할 때 보와르크 씨가 있었다고 말하지도 않았어요. 이건 공정하지 않지요. 마지막에 보와르크 씨가 라튀슈에게 모든 범행을 고백한 뒤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자살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울러 가독성이 떨어지는 동서 추리문고의 번역도 역시나 문제가 많네요. '워타르 로드'는 '워털루 로드'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점 때문에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지금 시점에서 이 작품을 평가한다는게 온당한 처사는 아니겠지만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2부와 3부를 묶어서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드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2004/08/21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 애거서 크리스티 / 황해선 : 별점 3점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황해선 옮김/해문출판사

네, 바로 이어서 또다른 단편집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을 읽었습니다. 사실 아주 오래전에 읽기는 했지만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어차피 단편집은 좋아하니 소장용으로 구입해도 괜찮다 싶어 구입하게 되었네요.

첫번째 단편이자 표제작인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은 크리스티 여사가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맞춰서 쓴 듯한 경쾌하고 유쾌한 단편입니다. 한 외국 왕자의 스캔들을 해결하기 위해 왕자가 도둑맞은 보석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은 포와로가 도둑이 초대받았다는 영국 시골의 킹스 레이시 저택에 찾아가 레이시 가문 사람들과 크리스마스 파티를 벌이며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입니다.
사건 자체가 살인사건이 아니라 소박하기도 하고, 아무도 죽지 않으며 악당만 손해보는 전형적인 권선징악형 스토리 구조로 이루어져 추리소설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에요. 포와로의 캐릭터도 잘 살아있어서 아주 유쾌하고요. 특히 아이들과 벌이는 두뇌게임(?)이 재미있습니다.
"완전범죄"형 사건이 아니라서 트릭이랄게 별로 없다는 점이 좀 아쉽지만 별다른 사건과 트릭 없이 복잡한 복선들과 대화들만을 가지고 하나의 수준높은 단편으로 완성했다는 점에서 크리스티 여사의 거장으로의 풍모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두번째 단편 "스페인 궤짝의 비밀"은 밀실에서의 의문의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정통파 퍼즐 미스터리 본격 추리물입니다.
리치 대령이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 예정이다가 급한 일로 스코틀랜드로 가게되어 불참하게 된 클레이턴씨가 다음날 리치 대령의 집 거실에 놓여있는 스페인 궤짝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클레이턴 부인의 도움을 요청받은 포와로가 "회색의 뇌세포"를 이용하여 사건을 명쾌하게 풀어낸다는 내용이죠.
살인사건의 트릭 자체도 괜찮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레몬양의 캐릭터가 아주 잘 표현되어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마음에 들었어요. 사건의 해결에 아무런 증거가 없다.. 라는 것 정도가 유일한 약점이랄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세번째 단편 "꿈"은 매일 특정시각에 자살하는 꿈을 꾸는 백만장자의 상담을 받은 포와로가 실제로 그 시간에 백만장자가 자살하게 되자 참고인으로 불려언 뒤, 그야말로 앉은 자리에서(!)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으로 포와로의 추리력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죠.. 트릭 자체야 신선할게 없지만 독자와의 두뇌게임이 비교적 공정한 편이고 사건의 해결도 깔끔한 우수한 단편입니다. 역시나 별점은 3점.

마지막 작품 "그린쇼의 아방궁"은 마플양이 등장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단편입니다. 부유한 노부인 그린쇼 양의 의문의 살인사건을 현장 한번 방문하지 않고 관련자들의 증언과 진술만으로 진상을 짚어내는 마플양 특유의 모습이 잘 그려진 작품이죠. 다만 트릭면으로는 "꿈"과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에 "꿈" 바로 뒤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린쇼 양의 의미없어 보이는 말들과 마플양의 사소한 주변 사건들이 결국 진상으로 연결되는 구조는 역시 명불허전이에요. 역시 별점은 3점입니다.

결론 내리자면 전체 평균 별점은 3점. 포와로와 마플양의 매력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좋은 단편집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예전에 읽었던 기억은 있지만 정말 십년이상 된 듯 하고 그래서인지 트릭이나 내용이 모두 신선하게 느껴져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어요.

그러나 해문측의 편집인지, 아니면 전집에서 원래 그렇게 편집을 했는지 전부 6편의 작품이 실려있는 단편집이 4편만 실려있는 것으로 편집되어 있는데 독자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쁘네요. 모처럼 크리스티 여사가 요리에 비유하며 소개글까지 써 놓았는데 2편이나 빠지다니... "패배한 개"는 이번에 단편집을 구입했지만 24마리의 검은 티티새때문에 "쥐덫"을 또 살 생각은 없으니 이빨을 맞추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2024/02/14

키시베 로한은 움직이지 않는다 (2017~2020) : 별점 2.5점

"죠죠의 기묘한 모험" 시리즈 4부의 조연 키시베 로한이 주인공인 단편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작품. 원작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죠죠 시리즈는 좋아하기에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에피소드도 4편 뿐이라 부담없어서 좋았습니다. 한 번에 몰아서 보았네요.

특징이라면 호러물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기괴한 등장인물들과 더불어 대결 장면에서의 섬찟한 긴장감을 주는 묘사가 탁월한 덕분이지요. 최고는 "무츠카베자카"입니다. 오오사토 나오코가 실수로 남자친구를 죽이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집에는 약혼자가 찾아와서 시체를 치워야 하는데 시체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터져나옵니다! 상처를 붕대로 감고, 꿰메기까지 했는데도 피를 막을 수 없는 상황! 하지만 결국 문을 열고 들어온 약혼자는 피를 볼 수 없었습니다. 과연 나오코는 어떻게 피를 숨겼을까요? 
다른 에피소드들에서도 "고해소"는 악령, "부호촌"은 산신, "더 런"은 헤르메스 화신이라는 기괴한 적과의 대결이 선보여집니다.

죠죠 시리즈다운 두뇌 게임 요소도 있습니다. "부호촌"이 대표적입니다. 예의범절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내리는 산신을 상대로 함정을 간파하여 예의를 차림은 물론, 집사를 헤븐즈 도어로 조작하여 대결을 승리로 이끄는 식이거든요.
앞서 소개해드린 "무츠카베자카"에서 피를 숨긴 방법, "고해소"에서 비둘기 떼가 노리는 팝콘을 무사히 던져서 먹는 방법도 두뇌 게임이라 볼 수 있고요.

그러나 문제도 없지 않아요. 일단 작화 문제가 큽니다. 컬러와 디자인이 과해서 보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원작의 괴이한 패션 감각은 만화는 흑백이라서 그렇게 거슬리지 않지만, 풀 컬러 애니메이션에서는 거의 시각적 공해라고 해도 무방하겠더라고요. 핵심 장면 외에는 흑백으로 제작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동화도 그닥이에요. 잘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효과가 조금 화려한 슬라이드 쇼와 별로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습니다.
대결도 헤븐스 도어의 능력을 활용하여 마무리하는건 별로였습니다. "무츠카베자카"에서, 소녀가 사고로 죽었는데 헤븐스 도어로 과거로 시간을 되돌려 살려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낸다는건 무리일 뿐더러, 살려내는 방법도 단지 '키시베 로한을 알기 이전'으로 되돌리는게 전부라는건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부호촌"도 단순 대결물로 끌고가다가 헤븐스 도어의 능력으로 마무리한건 아쉬었습니다. 마을의 존재가 굉장히 흥미로왔는데도 말이지요.

그래도 재미 측면에서는 나무랄데없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다른 원작 에피소드들도 영상화되면 좋겠습니다.

2004/04/26

다이얼 M을 돌려라! - 알프레드 히치콕 : 별점 4점


전직 테니스 스타 토니(Tony Wendice: 레이 밀런드 분)는 부자인 아내 마고(Margot Wendice: 그레이스 켈리 분)와 결혼한 뒤, 테니스를 그만두고 사업가로 그럭저럭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아내가 옛 동창이자 추리 소설가인 마크(Mark Halliday: 로버트 커밍스 분)와 사랑에 빠지자 아내의 유산을 노리고 청부살인을 계획한다.
옛 동창생 스완(C.A. Swan/Captain Lesgate: 안소니 도슨 분)을 끌어들여 마고를 죽이도록 치밀한 계획을 꾸민 뒤, 자신은 알리바이를 위해 연적 마크와 함께 사교모임에 참석하나 마고는 자신을 목 졸라 죽이려는 스완과 격투를 벌이다 엉겁결에 바느질 가위로 그의 등을 찌르고, 스완은 뒤로 넘어지면서 가위에 깊이 찔려 숨지고 만다.
토니는 이 우연한 기회를 오히려 역전시켜 아내를 계획적인 살인범으로 몰아가며 사형 선고를 받게 하는데 성공하지만, 마고의 애인인 마크와 형사반장(Inspector Hubbard: 존 윌리암스 분)의 끈질긴 추격으로 결국 진상이 밝혀지게 된다.

굉장히 보고싶었던 영화인데 EBS에서 방영해 주길래 놓치지 않고 보리라 마음먹고 기다려서 본 작품. 초반부의 토니의 치밀한 살인 계획과 약간씩 어긋나는 실제상황, 그리고 중반 이후의 토니의 아내를 살인범으로 몰아가는 두뇌게임이라는 크게 두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 초반부는 추리소설가 마크가 이야기한대로 “실제로는 제대로 될 리가 없겠죠”라는 완전범죄의 실현 불가능한 현실적 요소들만 잘 보여주고 있어서 재미있더군요. 계획과 달리 외출하려고 하는 아내라던가, 갑작스럽게 멈춘 시계로 타이밍을 놓친다던가, 급한 전화를 하려 하는데 공중전화에 사람이 들어가 있다던가 하는 디테일이 긴장감 있게 진행됩니다.
중반 이후는 오히려 초반의 완전범죄 계획보다 토니의 애드립이 치밀함에서 더 빛을 발한다는 것도 굉장히 신선했고요. (역시 애드립인가!) 무엇보다도  정통 추리물의 구조에 비교적 충실하게 몇가지 단서, 그 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이었던 (!) 단 하나의 단서를 가지고 토니의 범죄를 밝히는 마지막 장면은 역시나 멋지더군요. 별볼일 없어 보이던 하버드 형사 반장의 추리가 정말이지 반짝반짝합니다. “마크, 역시 자네 말대로 잘 되지 않는군” 라는 마지막 토니의 명대사도 기억에 많이 남고 말이죠.
추리소설가 마크의 활약은 기대 이하라는 점, 그리고 바람을 피운 마고도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되기에 마크와 마고의 해피엔딩을 암시하는 결말부는 좀 아쉽긴 했습니다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명불허전!"의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히치콕의 걸작 중에서도 베스트에 꼽히는 작품답게 등장인물도 몇 없고 세트 하나에서 영화가 거의 다 이루어지지만 그 서스펜스와 치밀한 두뇌게임은 과연! 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토니역의 레이 밀렌드의 뻔뻔스러운 악당 연기와 마고역의 그레이스 켈리의 현재도 빛을 발하는 미모를 감상하는 것은 보너스고요.
때문에 별점은 4점. 아직 보시지 못하신 분들께서는 꼭 챙겨보시길 바랍니다.

덧붙이자면, 그동안 항상 궁금했었던 다이얼 M은 토니의 집 전화번호의 가장 앞에 있는 번호의 알파벳 이니셜이더군요. 여기서는 "Murder"의 의미도 있겠지만요.

2022/09/09

BOX ~상자 속에 무언가 있다 1~3 - 모로호시 다이지로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이야기의 진상 및 반전, 여러가지 트릭과 장치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형의 죽음으로 가정이 엉망이 된 고등학교 1학년 가쿠다 코우지에게 어느날 발신인 불명으로 세공상자가 배달되었다. 상자 퍼즐을 풀자 큰 소리와 함께 알수없는 무언가가 어디론가 향했고, 집과 어머니 머리 일부는 사라져 버렸다. 기묘한 사건을 풀기 위해 무언가가 향한 곳을 찾아간 코우지는 루빅스 큐브를 풀고 있던 마스다 메구미를 만났다. 그 뒤 둘은 공원의 기묘한 정방형 건물 앞에서 똑같이 발신자를 알 수 없는 퍼즐을 받았다는 다른 다섯 명을 만났고(두 명은 부부라서 네 팀), 호기심 넘치는 기묘한 여자 쿄우코와 함께 정방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출구는 곧바로 사라져버렸고, 건물 속 네비게이터라는 괴소녀가 건물을 빠져나가려면 '상자'가 제공한 퍼즐을 모두 풀어야 한다고 일행에게 말했지만, 일행 중 야마우치는 퍼즐을 풀지 않으려 했다. 건물과 관련된 민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들어간 사람 중 돌아오지 않거나 존재조차 사라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퍼즐을 풀면 그렇게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야마우치는 괴물로 변했고, 퍼즐을 풀지않고 편법으로 빠져나갈 생각이었던 고우다도 자기 퍼즐을 쿄우코에게 넘기다가 괴물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쿄우코, 코우지와 메구미, 치에코 네 명은 괴물 고우다의 공격, 상자 퍼즐 네비게이터 괴소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퍼즐까지 풀어내는데 성공했다. 괴소녀는 최후의 순간에 네 명을 모두 없앨 계획이었지만 이 역시 쿄우코가 기지를 발휘하여 무사히 빠져나오게 되는데...

좋아하는 작가인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장편(?)입니다. 국내에 소개된 작품은 아닙니다. 일본어 독해 실력은 형편없지만 읽고 싶은 마음에 도전해 보았는데, 전 3권으로 각 권당 200페이지 정도 분량 정도라 다행히 어떻게든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체 불명의 누군가가 보낸 초대장으로 모인 사람들이 폐쇄된 장소에서 생존 게임을 벌인다는 설정은 흔합니다. 하지만 초대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없애야 하는 서바이벌 게임이 아니라는건 독특했습니다. 초대장이기도 한 '퍼즐'을 모두가 푸는게 살아남는 조건이라서, 모두 살아남는 것도 가능하거든요. 

또 이런 류의 생존 게임은 게임이 진행되는 상황의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많았었는데, '상자'에 갖혀있는 '인과'를 잡아먹는 괴물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서 게임을 벌인다는 나름의 이유도 괜찮았습니다. 황당무계하게 스케일을 키워버리니까 오히려 번잡하고 비현실적인 게임이 더 말이 되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냥 사람들을 불러들였지만, 사람들이 패닉을 일으키며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자 - 당연합니다. 정체 불명의 공간에 갇혔을테니... -, 사람들이 단계를 밟아 나가며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퍼즐'을 풀게 했다는 설정, 그리고 '먹이'가 사람들이 버리고 싶은 것이라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괴물의 먹이가 '인과'인 탓에, 사람들이 상자에 두고 가서 '무언가'가 원래부터 없던게 되어버리면 - 예를 들어 아내를 상자에 준다면, 상자에서 나온 세상에는 아내가 처음부터 없다. -, 인과관계 변화가 크게 생겨서 그에 따른 에너지를 상자 속 괴물이 먹어치운다고 설명되는데, 상황에 대한 설득력은 충분했어요. 괴물의 실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작가가 자주 써먹는 특유의 크툴루 신화스러운 분위기를 적당히 살린 은근하게 묘사도 한 몫 하고요. 

다른 소소한 설정들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초대된 사람들이 6명인 이유는 '상자', 즉 육면체가 플레이어들을 선택하여 퍼즐을 풀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퍼즐을 풀었다는 증거인 카드가 죽은 사람 것이라도 반드시 필요했던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육면체에 카드를 붙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퍼즐'을 풀지 않는게 가장 중요한 규칙 위반이라서 그런 짓을 한 플레이어는 상자가 처단한다는 설정, 그리고 입장권과 퍼즐을 넘기면 플레이어로서의 권리를 넘길 수 있다는 설정도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뿐더러 이야기 절정부에서 아주 잘 사용되고요.

작중에 등장하는, 작가가 직접 고안했다는 퍼즐들도 좋습니다. 종이를 접어야 풀 수 있는 미로, 일행의 이름을 사용하는 힌트없는 크로스워드 퍼즐에서 시작해서, 각 에피소드 표지 그림 등 곳곳에 삽입된 그림 퍼즐들 모두 볼거리에요.

퍼즐 풀이에 긴장감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들도 적절합니다. 코우지는 세공 상자를, 메구미는 루빅스 큐브를 이미 풀었는데 상자에 들어갈 때 퍼즐을 풀었다는 증거인 카드를 받지 못했었지요. 오히려 '안'에서 다시 풀어야 한다는 이야기만 들었고요. 이는 세공 상자와 루빅스 큐브를 풀었던 방법을 상자 안에서 그대로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전개로 이어지는데, 아주 흥미진진했습니다. 세공 상자의 해법 순서대로 '문'을 열고 닫을 때 열린 문으로 괴물이 들어올 수 있는 상황에 처해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메구미가 풀어야 하는 퍼즐이 전체 면이 백색인 루빅스 큐브라는 것도 기발했습니다. 원래 밖에서 풀었던 큐브 순서 그대로 다시 풀어야 했던 거지요. 네비게이터가 이를 방해하기 위해 큐브를 건드리려 했었던 상황은 정말로 큰 위기였고요. 한 칸이라도 돌렸으면 푸는게 불가능했으니까요.

캐릭터 구성도 나쁘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소년 만화 주인공 쾌남 코우지를 비롯한 대부분 등장인물들의 활약이 잘 배분되어 있는 덕분입니다. 메구미가 상자에 갇힌 타니 부부를 데려오려 했던게 알고보니 중요했다는 - 타니 부부의 카드를 손에 넣을 수 있어서 - 게 대표적입니다. 딜러, 힐러 등으로 역할 구분이 되는게 아니라 모두 퍼즐을 푸는데 성공하는 두뇌파 모습을 공평하게 보여준다는 점과 코우지와 메구미, 치에코의 기묘한 삼각관계도 독특합니다. 패닉을 일으키는 어른 두 명과 네비게이터 괴소녀와의 대결을 통해 서바이벌 게임이 아닌 탓에 다소 부족했던 갈등과 대결 구도를 보완하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였고요.

그러나 '네비게이터'같은 설정 구멍이 없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목숨을 걸고 게임을 시키고, 그 결과 자기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걸 먹이로 준다는게 상자 퍼즐 게임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왜 이를 플레이어들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걸까요? 애초에 제대로 먹이를 주지 않으면 상자 속 괴물이 상자를 찢고 나올 수 있어서 이 게임을 벌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게임은 퍼즐을 잘 풀도록 도와줘서 필요없는걸 - 그리고 그에 따른 인과 에너지를 - 쉽게 받아내는게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구태여 플레이어들을 곤경에 빠트리고, 심지어 죽이려고 할 이유가 없어요. 그런다고 인과 에너지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네비게이터는 마지막에 카드에 표시되는, 자기가 바쳐야 할 무언가를 상자에게 주는걸 거부하면 그 플레이어 혼자서만 빠져나올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나 각자에게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는건데 그걸 거부하고 상자를 빠져나오는 선택을 하는 플레이어가 있을까요? 실제로 작중에서 코우지는 집안의 우환이 되어버린 죽은 형의 존재, 메구미는 성정체성장애를 겪는 자신의 '남성', 치에코는 자기를 고립되게 만든 '영감'을 주는데, 이것들은 그들이 너무나 쉽게 버릴 수 있고 버려야 하는 것으로 작 중에서 설명됩니다. 코우지 일행 중 이것들 때문에 배신을 할 사람이 있을리 없습니다. 이미 친구 이상이 되기도 했고요. 게다가 네비게이터는 쿄우코의 작전으로 진짜 '플레이어'가 되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직접 무언가를 주는걸 거부하면 됐습니다. 일행을 유혹해서 배신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어요. 모두가 필요없는걸 바친 정도가 목숨을 건 게임 보상이라는건 좀 시시했고요.

그래도 이런 설정 구멍은 빠른 전개와 여러가지 퍼즐의 배치로 읽으면서 눈치채기는 어렵지만, 더 큰 문제는 발암 캐릭터 쿄우코입니다. 이야기 맥락을 많이 끊을 뿐더러, 그녀가 네비게이터 소녀에게 싸움을 걸어서 코우지 일행이 위기에 처하게 되기 때문에 만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단순히 '흥미가 넘쳐서' 상자에 일부러 뛰어든다는 등의 캐릭터 설정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녀가 대활약하는 '착시 퍼즐' 부분은 퍼즐이라고 하기는 억지스러운, 다소 개그스러운 내용이라서 역시나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저자가 그녀는 '트릭스터'이며 "요괴헌터"의 히에다 교수의 제멋대로 무책임 버젼이라고 하는데, 차라리 히에다 교수 본인이 등장하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정신나간 여자가 어설픈 개그, 색기 따위를 보여주는것 보다는 말이죠.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모로호시 다이지로 테이스트가 잘 살아있으면서도 거북하지 않은 괜찮은 모험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모로호시 다이지로 월드 입문작으로 제격인 작품으로 생각되는 만큼, 국내에도 꼭 소개되기를 바랍니다.

2011/02/17

영능력자 오다기리 쿄코의 거짓말 1 - 카이타니 시노부 : 별점 2점

영능력자 오다기리 쿄코의 거짓말 1 - 4점
카이타니 시노부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원아웃""라이어 게임"이라는 두 작품으로 두뇌 배틀 장르에서 돋보이는 성과를 거둔 카이타니 시노부의 작품.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코믹한 분위기의 일상적인 에피소드가 많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얼마 전 일본에서 TV 드라마화도 될 정도의 인기작이니 당연히 뭔가 건질 게 있겠죠? 일단,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로 20세 때 FBI 수사요원으로 발탁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추리력을 바탕으로 '영능력자'라고 사기를 치는 시대의 아이콘, 오다기리 쿄코라는 캐릭터가 독특하고 유쾌합니다.

그리고 가볍게 즐길 만한 일상계 추리물로서는 적절한 수준의 추리적 완성도를 보여주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총 4편의 에피소드가 실려 있는데, 첫 번째 에피소드인 대학교 치한 체포 작전이라든가 두 번째 에피소드인 뇌졸중으로 쓰러진 노인이 그린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그러합니다. 독자가 범인과 진상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쉽지만, 그만큼 설득력 있고 효과적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죠.

마지막으로, 전작에서 느꼈던 정교한 설정에서 오는 두뇌 게임의 박진감과 의외의 결말이라는 요소를 경마장의 우승마 맞추기에 대한 이야기인 네 번째 에피소드 "적중"에서 선보여 주는 것도 좋았습니다. 작가의 특기를 잘 살린 작품이었으며, 반전도 괜찮았거든요.

그러나 캐릭터 구도가 "블랙 라군" 등과 별반 차이 없는 자기중심적 여걸 - 평범한 사람에서 우연히 말려든 불쌍한 청년이라는 전형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점, 남자 주인공 타니구치 이치로가 실제로 하는 게 거의 없다는 점, 그리고 주인공이 너무 과장되고 희화화되어 있다는 점 등은 감점 요소입니다. 이러한 요소는 이 작품의 대상 독자 연령대가 낮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네요.

아울러 앞서 장점으로 이야기한 '추리적 완성도' 역시 가벼운 일상계 추리물 수준으로 괜찮다는 것이었지, 작가의 전작들에서 기대했던 꽉 짜인 긴장감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이라 작가의 팬으로서는 실망스러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은 "바쿠만"에서 천재 니즈마 에이지가 그린 로맨틱 코미디가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한 이유와 일맥상통하네요. 작가에게서 기대하는 부분이 명확한데, 그걸 잘 살리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 선뜻 추천하기는 약간 어려운, 미묘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후속권을 구입해봐야 명확한 평가를 할 수 있을 텐데, 후속권을 구입해야 하는지부터가 망설여지네요...

2023/09/10

소문 - 오기와라 히로시 / 권일영 : 별점 2.5점

소문 - 6점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권일영 옮김/모모

<<아래 리뷰에는 진범,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짓 소문을 퍼트려 - WOM (Word of Mouth), 입소문 - 경쟁사의 매출을 떨어트리고, 특정 제품의 판매를 신장시켜온 '컴사이트'의 대표 쓰에무라는 '뮈리엘'이라는 향수 브랜드를 위해 죽인 여자의 발을 가져가는 살인마 레인맨은 뮈리엘 로즈 향수를 뿌린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그런데 실제로 고등학생 등 젊은 여성들이 살해당하고 발목이 사라진채 유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내를 잃은 뒤 고등학생 딸을 키우는 형사 고구레는 사건 수사에 투입되어 나이어린 신참 여성 경부보 나지마와 한 조가 되어 피해자들이 컴사이트에서 주도해서 레인맨 소문을 퍼트렸던 뮈리엘 향수 아르바이트를 했다는걸 알아냈다. 그리고 쓰에무라의 오른팔인 아소를 체포했지만, 그는 범인이 아니었다. 결정적 단서는 컴사이트 압수 수색에서 발견된 '카드 브레인스토밍' 자료였다. 사건이 시작되기 전에 레인맨 설정을 이야기한 사람이 있었으며, 그는 광고회사 직원 니시자키라는게 밝혀지는데....

오기와라 히로시의 장편. 2000년대에 출간되었다가 절판되었었던 작품입니다. 수년전 재간되었네요. '일본 미스터리 역사상 최고의 반전' 운운하는 띠지에 혹해 읽게 되었습니다. 오기와라 히로시 작품 타율도 대체로 괜찮은 편이었고요.

경찰과 일종의 게임을 벌이는 엽기 변태 연쇄 살인마와 형사의 대결이라는 설정의 작품은 많습니다. 그러나 전형적인 헐리우드 스타일 범죄 스릴러와는 다른 점은 경찰 수사가 정말 '발로 뛴다'는 겁니다. 어딘가의 천재가 활약하는게 아니라요. 고구레가 딸 뻘인 여자 아이들과 어울려 단서를 모으고, 나지마가 지인들을 동원하여 '레인맨' 소문이 퍼진 경로와 위치, 날짜를 수집하여 도식화하는 등의 과정은 굉장히 실감났습니다. 고구레의 말 그대로, '과수원에 벌레 먹은 사과가 있다면, 해야 할 일은 나무에 매달린 사과 가운데 벌레 먹은 사과를 찾는 일이 아니라 땅바닥에 엎드려 사과를 골라내는 일'인 것이지요. 덕분에 소문을 낸 원흉이 컴사이트의 쓰에무라라는게 밝혀지는 과정도 설득력이 충분했고요.
고구레와 나지마가 마지막에 발견된 피해자 발에 칠해진 패디큐어를 보고 펼치는 추리도 좋았습니다. 고구레는 범인이 왼손잡이라고, 나지마는 발톱에 범인 지문이 남아있을거라고 추리하는데 설명이 아주 그럴듯했거든요. 패디큐어 색깔이 다른건 범인이 색맹이기 때문이라는 추리도 마찬가지고요. 모든 수사 관계자가 모인 수사본부에서 마지막 스커츠 차림으로 발을 들어 올려 설명하는 장면도 극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짜임새도 발군입니다. 범인 니시자키가 왼손잡이라는걸 앞서부터 설명한다던가, 세 번째 발견된 피해자 미사키 야스요가 니시자키와 함께 살던 '사키'였고, 그녀가 이미 죽었음을 치밀하게 복선으로 깔아둔 전개 - 예를 들어 '냉장고에서 악취가 났다. 사키가 또 음식물을 썩힌 것이다' 등 - 에는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본청 캐리어와 출세는 포기한 관할서 형사라는 캐릭터, 두뇌와 실무로 나누어진 캐릭터 구도도 흔해 빠졌지만, 본청의 경부보인 나지마가 더 나이가 어린 여성이라는 점과 둘 다 남편, 아내를 잃은 편모, 편부 가정이라는 등의 세세한 설정을 덧붙여 이야기를 풍성하게 해 줍니다. 상당히 디테일하게 짜여져 있어서 정말로 이런 사람이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요.

사건 이면에 존재하는 WOM 이론도 흥미로왔습니다. 한 명이 WOM으로 정보를 전파하는 평균치는 일주일에 대략 2.5명, 대략 한 달 만에 10만명 가까운 사람에게 퍼진다는 데이터는 놀라왔고요. 실제로 쓰에무라처럼 괴소문을 퍼트려 매출을 떨어트리는 행위는 암암리에 있어 왔기에, 남의 이야기같지 않았습니다. 좀 극단적인 예이지만, 바로 옆 경쟁 점포를 음해하려고 했던 '밤식빵 쥐 혼입 조작 사건' 같은 것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죠.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어떤 정보가 진실인지를 알아내는게 더 중요한 시대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전 보았던 만화 <<로켓맨>>의 대사가 떠오르네요.


하지만 카드 브레인스토밍 자료와 사체에서 발견된 지문으로 범인이 니시자키라는게 밝혀지는 과정, 그리고 그 이후는 재미가 떨어집니다. 전개를 보면 니시자키는 딱히 의도적으로 범행을 숨기려거나 과시하려고 했던걸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체포되지 않은건 운이 좋아서 - 그리고 경찰이 멍청해서 - 였을 뿐입니다. 심지어 알 수 없는 이유로 고구레 앞에 나타나 직접 정보를 제공하기까지 했는데 말이지요. 즉, 이런 류의 작품에서 핵심인 '천재 범인과 경찰과의 두뇌 게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경찰의 수사만 있는 셈이에요.
물론 경찰과 게임을 펼치는 천재 범인이라는 만화적인 설정이 좋은건 아닙니다. 그러나 니시자키가 엽기적인 범행을 저지른 이유를 단지 정신이 이상한 변태라고 설명한건 아쉬웠습니다. 도화선이 된 '사키'의 존재도 억지스러웠고요. 변태 정신병자의 클리셰만 모아 놓아서 진부했는데, 그나마 클리셰의 재미 요소는 빼 먹은 셈입니다.

띠지에서 광고했던 반전도 그닥입니다. "마지막 4글자에 모든 것이 뒤바뀐다!"의 4글자는 '기나오싹'입니다. 고구레의 딸 나츠미가 만든 말이지요. 즉, 쓰에무라를 살해한건 나쓰미였다는 것이지요. 사회 문제를 드러내기 위한, 약간의 사회파적 성격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 생각됩니다. 작 중 고구레가 피해자들 부모를 만나며 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는데, 그 역시 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다는건 말 그대로 기나오싹 - 기분 나쁘고 오싹하다 - 했거든요. 굉장히 자상한 아빠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건데, 세대 차이를 충격적으로 드러내는데는 적당했습니다. 나츠미가 잦은 외박을 한다던가, 머리 색깔이 바뀌었다는 등의 복선도 충실히 설명되고요.
그러나 이 반전은 내용과는 별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궁금증만 더 키운다는 점에서 별로였어요. 평범한 여고생들이 어떻게 쓰에무라 집에 침입해서 살인을 저질렀고, 시체를 토막까지 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4글자라는걸 띠지에서 강조하는건 일종의 스포일러이기도 하고요. 기나오싹이 작중에서 좀 비중있게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띠지가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는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의 호토리가 미스터리를 읽는 방법을 따라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오기와라 히로시 작품답게 흡입력은 높습니다. 잘 짜여져 있기도 하고요. 반전 운운하는 마케팅만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것 같습니다.

2012/01/16

밀실살인게임 2.0 - 우타노 쇼고 / 김은모 : 별점 2.5점

밀실살인게임 2.0 - 6점
우타노 쇼고 지음, 김은모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이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약간 포함되어 있습니다.

채팅으로 대화를 나누는 동호인 다섯명. 반도젠 교수, 두광인, aXe, 쟌가, 044APD. 이 커뮤니티는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추리하는 '리얼탐정놀이' 커뮤니티였다.

저는 추리소설도 좋아하지만 야구도 무척 좋아합니다. 그리고 두 분야 모두 정통파를 좋아하지요. 추리는 정통파 본격 미스터리, 야구는 정통파 강속구 완투형 에이스 투수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러고보니 멸종해가고 있다는 공통점도 있네요.

어쨌건 이러한 야구 시각으로 본다면, 우타노 쇼고는 정통파 강속구 투수라기 보다는 제구력과 다양한 변화구로 승부하는 기교파 투수입니다. 잘 짜여진 플롯과 동기, 복잡한 인간관계가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와중에 트릭을 통한 두뇌게임이 펼쳐지는 고전적인 본격물보다는 기발한 트릭과 그에 따르는 전개에 치중하는 작품이 많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제가 읽은 작가의 다른 작품은 트릭이 중심인 기교파 소품들이었습니다.

물론 이게 나쁜건 아니에요. 이러한 방식으로도 역대급 작품이 된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 하네" 같은 강력한 결정구가 있으니까요. 다른 구질(작품)들도 충분히 제 몫을 하며, 팬들에게도 항상 기쁨을 주는 유형이니까요. 실제 야구에서도 이런 투수가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만큼 꾸준하고 성실한 활약을 보여주는 선수들이죠. 팔색조 조계현 선수처럼요.

이 작품 역시 이러한 비유에 딱 맞는 작품입니다. 트릭이 풍성하고 설정을 독특하게 가져가며 등장인물 캐릭터에도 트릭이 숨어 있는 등 특유의 화려한 퍼즐러, 트리커 스타일이라는 점에서 말이지요. 그러나 기교파로서의 단점 또한 도드라져서 안타깝습니다. 트릭, 즉 변화구의 각도와 위력은 좋았지만 동기와 설득력, 이야기 전개라 할 수 있는 제구가 영 꽝이었던 탓입니다. 온전히 트릭을 위해 짜맞춰진 작위적인 설정과 전개였거든요. 트릭이 없다면 작품으로 성립이 힘들 정도입니다. 이래서야 소설보다는 추리 퀴즈에 더 어울리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에요.

또한 아무리 사회부적응 잉여 오타쿠들이더라도 살인을 저지르면서까지 얼굴도 모르는 인물들과 어울리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 역시도 불가능합니다. 실제 범행 과정에 소요되는 돈과 노력, 리스크를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첫번째 에피소드처럼 미디어에 보도된 미궁에 빠진 사건을 아마추어 추리 애호가들이 모여 추리한다거나, 각자 생각한 트릭을 문제로 낸 뒤 서로 해결하기위해 머리를 짜내는 이야기 쪽이 훨~씬 좋았을거에요. 이편이 보다 스트라이크에 가까웠겠죠. 지금의 결과물은 트릭을 풀어나가는 면에서는 헛스윙을 기대할 수는 있지만 공 자체는 볼입니다.

때문에 별점은 2.5점입니다. 트릭이 비록 추리소설에서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나 전개면에서 현실성과 합리성을 지녀야 완성도를 인정받을테니 당연한 결과겠죠. 볼의 위력이 좋아도 도망다니는 투수보다는 일단 스트라이크를 던질 줄 아는 투수가 진짜 투수인 처럼요. 그래도 트릭만큼은 괜찮은 부분이 있었던만큼 다음 투구에서는 보다 제구력이 동반된 피칭을 기대해 봅니다.

이하 에피소드 상세 소개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Q1. 다음은 누가 죽입니까?

이야기의 시작. 다섯 명의 멤버가 접한 살인 사건 보도. 그들은 사건이 살인게임이라는 것을 직감한 뒤 진상을 추리하기 시작한다...

살인게임 동호인이 많다는 설정 자체도 넌센스에다가 아무리 오타쿠 추리 매니아들이더라도 추리를 하는 과정의 정도가 너무 심해서 단편집의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그닥 마음에는 들지 않았던 에피소드입니다. 트릭도 별다른 것은 없고 순수한 수사와 추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독자의 공정한 참여가 차단되는 측면이 강해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딱 한 가지, 달력에 예고를 남기는 것이 단지 날짜와 술래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범행 장소인 맨션의 형태와 관련이 있다는 아이디어는 괜찮았지만 전체적으로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더군요. 달력처럼 구성된 맨션의 체크된 날짜와 호수를 일치시켜 범행을 저지른다는 게 솔직히 말이나 됩니까... 애시당초 일반인에 가까운 커뮤니티 멤버가 도출 가능했던 연관된 살인사건에 대한 정보를 경찰이 모르고 넘겼을 가능성도 낮고요. 

놀라운건 이 에피소드가 멤버들의 범행이 아닌 조사와 추리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그나마 가장 현실적이라는 겁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Q2. 밀실 따위는 없다.

Q1에서 반도젠 교수가 낸 수수께끼와 그것을 응용한 두광인의 수수께끼에 대해 다루는 간단한 소품.

수수께끼 수준이라 딱히 언급할 것은 없습니다. 밀실살인은 현실에 대한 안티테제로 성립한 것으로, 밀실을 만드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고 열변을 토하는 aXe의 발언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추리 애호가로서 공감가기도 했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Q3. 살인마 잭 더 리퍼, 삼십 분의 고독

Q2에서 범행을 예고한 쟌가가 토막살인으로 밀실을 만든 뒤 그것을 모두가 추리하는 이야기.

다리 두 개를 문에 놓아둔 것만으로 밀실이라는 설정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리 두 쪽이 문에 기대어져 있다 한들 문을 여는 정도는 어렵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그래도 핵심 트릭은 충분히 한 번 정도는 써봄직한 괜찮은 아이디어이긴 했습니다. 시체를 훼손한 이유도 연관되어 있으니까요. 또 다른 작품 속 트릭이라 할 수 있는 온도계를 이용한 미끄럼틀 아이디어도 나쁘지는 않았고 말이죠. 물론 트릭대로 잘 됐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시체 속에 숨어 있었다는 트릭을 이용할 것이면 더 교묘한 밀실을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쉽긴 하네요. 피해자와 딸만 가지고 있는 열쇠를 이용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충분히 완전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을텐데 급하게 마무리 지은 느낌입니다. 그래도 트릭은 괜찮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Q4. 상당한 악마

Q3에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두광인의 귀축 단두살인사건 예고에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핵심 트릭은 두광인이 화상 채팅으로 커뮤니티 멤버들에게 특정 장소를 보여주고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이었고요. 커뮤니티 멤버가 일종의 증인이 되어 두광인의 알리바이가 완벽하다는걸 증명하게 된다는 발상의 전환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핵심 트릭이 그닥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과연 잘 됐을까 하는 의문도 들고요. 피해자 루카가 통화 중 실수 한 번만 하더라도 모든 게 틀어질 테니까요. 또 두광인의 정체가 밝혀지는 마지막 반전은 괜찮았지만 이 커뮤니티처럼 위험한 인간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공개한다는 것은 전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트릭과 반전이 합리적 전개보다 우선한 나쁜 사례죠. 별점은 2점입니다.

Q5. 세 개의 빗장

aXe군이 공들여 준비하고 있다는 트릭을 이용하여 구현한 눈 속의 밀실살인이 수수께끼로 던져지는 에피소드.

눈이 그친 이후에도 피해자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제시되나, 시체가 발견된 곳은 발자국 하나 없는 쓰레기장 한가운데의 전화박스 형태의 박스였습니다. 박스는 세 개의 빗장이 걸려있는 이중밀실이었고요. 이를 위해 aXe군이 계속 이야기하는 정교한 장치 트릭이 선보입니다.

이런 류의 트릭은 극 중 aXe의 입을 통해 말해지듯 시간과 노력이 너무 들어서 실효성이 없어서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이 작품처럼 순수하게 트릭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설정에는 제법 잘 어울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장소와 도구가 잘 맞아떨어진 괜찮은 트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장치의 정교함에 대한 묘사와 함께 숨은 그림 찾기와 같은 단서 제공이 필요해서 만화에 더 잘 어울렸겠지만, 평작 수준은 되는 에피소드라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경찰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추리 게임의 필요도 없이 진상은 이미 밝혀졌을 텐데, 경찰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게 아닌가 싶긴 했습니다.

Q6. 밀실이여. 잘 있거라

멤버 중 명탐정 역할을 담당한 044APD가 낸 수수께끼. 관리인과 현관 자물쇠로 잠긴 이중밀실에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남녀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다는 내용입니다.

트릭은 범인이 피해자이며 탐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신데렐라의 함정"을 생각나게 합니다. 핵심 트릭인 밀실살인 외에도, 별로 대단하지는 않지만 암호 트릭까지 등장하는 등 추리적으로 확실히 풍성합니다.

그러나 네 명이나 되는 사람들과 채팅을 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숨기고 일반적인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말도 안 되죠. 거기에다가 044APD와 마미야가 동일인물이라는 진상은 정말 트릭을 위한 것일 뿐, 동기 측면에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왜 자기 자신을 배달해서 죽일 필요가 있었을까요? 트릭은 화려하지만 그 외의 것은 뭐 하나 합리적인 것이 없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이런 식으로 마무리할 트릭은 아닌데, 트릭이 아깝네요.

2011/06/25

Q.E.D 정주행. 1권부터 30권까지 내맘대로 Best

뭔가 꽉 막힌 듯 답답한 게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요즘입니다. 좋아하는 독서를 마음 편히 즐긴 것도 오래전 일인 것 같네요. 그래서 기분 전환 삼아 쌓아둔 "Q.E.D"를 1권부터 다시 정주행했습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책장 어디를 펼쳐도 마음에 드는" 그런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느낌은 드니까요.

이왕 다시 정주행하는 김에 개인적으로 최고의 에피소드를 뽑아보았습니다. 생각보다 일상계 작품이 적어서 좀 의외였어요. 다른 분들의 선택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베스트 5

4권 - 야곱의 사다리

오늘날 "Q.E.D" 장기 연재의 발판이 된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캐릭터는 독특했지만, 다소 뻔했던 이전 에피소드들과 차별화되는, 이른바 수학·과학적 지식이 실제 사건과 잘 결합되면서 만화적 전개를 통해 그 시너지를 극대화시킨다는 "Q.E.D"만의 장점이 잘 드러난 에피소드이기 때문입니다. 동기가 좀 어이없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스케일도 적당한 편이고, 무엇보다도 인공생명을 의인화하여 성경 속 이야기와 결합한 전개가 아주 절묘했어요.

10권 - 마녀의 손안에

역시나 "Q.E.D"스러운 명 에피소드입니다. 토마가 10살 때인 MIT 재학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인 샐럼 마녀재판과 현대의 살인사건을 접목한 전개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범인이 1년여에 걸쳐 계획한 범죄와 트릭이 최고 수준입니다. 법정 드라마스러운 전개도 좋았고요. 전체 시리즈를 통틀어도 최고로 꼽을 만 합니다.

16권 - 죽은 자의 눈물

핵심 트릭으로 시체 감추기 + 알리바이 위장 공작이 등장합니다. 본격물답지만 흔해빠진 설정인데, 트릭의 설득력도 높고 범인의 계획이 꼼꼼하게 짜여 있는 웰메이드 추리물입니다. 토마가 범인을 눈치챈 이유도 깔끔해서 좋았고요. 무엇보다도 만화로는 보기 드문 심리 서스펜스를 묘사가 베스트로 선정한 가장 큰 이유입니다. 마지막 토마의 '사기극(?)' 역시 눈여겨볼 만한 부분입니다.

20권 - 다망한 에나리 씨

탐정 동호회 회장 에나리의 할머니에게 닥친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그린 전형적인 일상계 소품입니다. 정말로 별거 아닌 사건을 진지하게 본격 추리물로 구성한 일상계의 왕도! 그 와중에 웃음과 재치를 빼놓지 않은 점도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베스트로 선정되는 것이 당연한 에피소드입니다.

27권 - 입증 책임

학교 내 모의재판으로 배심원제도를 체험하는 행사에 참관하게 된 토마가 과거 실제 있었던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다는 작품. 

배심원 제도를 이해하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던, 역시 "Q.E.D"의 장점인 학습만화스러운 전개가 빛나며, 사건의 맹점을 파헤치는 추리적인 부분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법정물스러운 분위기도 합격점이고요. 마지막에 진상을 꿰뚫고 있으면서도 검찰의 입증 책임 때문에 무죄 쪽에 힘을 실어준 토마의 행동이 역시나 토마답다는 것도 좋았어요. 캐릭터가 이렇게 일관되게 유지되기도 힘든 일이잖아요?

그리고 아래는 아쉬운 가작들. 좋은 작품들이지만 아주 약간 아쉬움이 남아 베스트 5에는 아깝게 선정되지 못한 에피소드들입니다.


아깝다, 가작!

9권 - 얼어붙은 철퇴

이미 잊혀진 과거의 사건을 현재에 밝혀낸다는 줄거리인데, 흡사 "용의자 X의 헌신"을 보는 듯한 두 천재 수학자의 대결이 볼만합니다(선·악의 캐릭터가 뒤바뀐 감은 있지만요). 특히 결말 부분에서 카치도키 다리가 다시 열리는 순간의 재회라는 극적 장치 덕분에 굉장히 드라마틱한 작품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아쉽게도 핵심 트릭인 카치도키 다리 관 속에 시체를 넣는다는 트릭이 별로라서 가작이지만, 전개만큼은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11권 - 겨울 동물원

무명 추리작가가 자신이 고안한 트릭으로 사건을 저지른다는 일상계스러운 본격물입니다. 추리작가의 유령이 사건을 끌어가는 유머러스한 진행도 좋지만, 유치한 트릭을 한 번 더 포장하는 결말이 마음에 들어 가작으로 선정합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한 가지. 토마는 유령의 존재마저 눈치챘던 걸까요?

13권 - 재난의 사나이

로키와 에바 다음으로 출연 비중이 높은 토마의 대학 동기 알렌 브레이드와의 두뇌게임을 그린 에피소드. 렘브란트의 작품으로 장물이기도 한 그림을 놓고 벌이는 게임이 상당히 흥미진진합니다. 후쿠모토 노부유키나 카이타니 시노부 같은 게임 만화 거장들의 작품처럼 긴박감 넘치는 전개가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에피소드입니다.

17권 - 까마중

영화 촬영장을 무대로 한 밀실 트릭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로, 트릭 자체는 경찰 수사로 밝혀질 수준이라 높은 수준은 아닙니다. 하지만 설정과 트릭이 작품 속 영화 "까마중"과 병렬로 진행되며 완벽하게 맞물리는 점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트릭만 좀 더 정교했다면 만점을 받아도 될 만한 작품입니다.

24권 - 크리스마스 이브이브

크리스마스이브의 밤, 엄청나게 바쁜 노래방에서 벌어진 희한한 사건을 그린 일상계 에피소드. 소소하지만 짜임새 있는 전개와 함께 일종의 암호 트릭이 등장하는 등 풍성함이 좋았습니다.

25권 - 여름의 타임캡슐

가나가 초등학교 때 묻은 타임캡슐 속 보물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가는 이야기. 사건의 동기가 설득력 있고, 추리의 과정도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추억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여운이 인상적인 작품이라 가작으로 선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