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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8

일본잡지 모던일본과 조선 1939 : 별점 3점

일본잡지 모던일본과 조선 1939 - 6점
모던일본사 지음, 한비문 엮음, 윤소영 외 옮김/어문학사

일본 출판사인 문예춘추사에서 1930년 10월 창간한 월간잡지 「모던일본」의 조선특별호인 '조선판'을 완역한 책. 천편일률적인 일본인의 조선 인식을 비판하며 보다 폭넓은 조선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기획되었던 책이라고 합니다.

일단, 당대 가장 인기 있던 잡지를 그 모습 그대로 번역, 재현했다는게 돋보입니다. 폰트와 지질(紙質) 외의 모든 것, 실려 있는 콘텐츠는 물론 광고 하나까지도 모두 그대로예요.

내용은 소설, 사설, 보고서, 기행문 및 수필과 콩트에 만화와 기타 읽을거리 등 여러 가지가 뒤섞여 있는 그야말로 "잡지"인데, 이 중 보고서와 사설들은 내선일체론 강요가 본격화되던 시점인 탓에 도무지 평가가 불가능하더군요. 당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 이외의 가치는 전무했어요.

그러나 재미 위주의 읽을거리는 깨알 같은 재미가 가득합니다. 당시 아이돌 걸그룹 급의 인기가 느껴지는 기생들의 화려한 화보에서부터 시작해서 소설, 조선에 대한 기행문과 수필, 각종 좌담회와 인터뷰, 많은 사진과 만화 등의 시각적 자료들, 광고들에서 당대의 '모던함'을 한껏 즐길 수 있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기생에 관련된 것, 그중에서도 평양 기생들을 대상으로 한 좌담회와 조선의 당대 명사들을 다룬 기사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또 문맥과 표현을 통해 시대 상황을 추측케 하는 것들도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평양을 무대로 한 기행문과 단편 소설이 많은데, 읽어보니 대부분 평양이 '기생'의 본고장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던가, 임질약 광고가 많다는 것에서 성병이 정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것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거의 대부분의 삽화가 기생(이나 기생을 연상케 하는 여인)의 그림이라는 점에서 이 책 주요 독자층의 최대 관심사는 '기생'이라는 것도 잘 알 수 있었고요.

허나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분명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잡지였을 텐데 일반 국내 도서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것으로 변경한 것입니다. 물론 읽는 데 큰 지장은 없습니다만, 일부 만화 등은 약간 불편하더라고요.

두 번째는 주석이 방대한데 모두 미주로 실려 있다는 것도 문제예요. 각주로 처리한다면 원래 잡지 모습 그대로를 구현한다는 컨셉에서 위배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읽기가 너무 불편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책의 두께가 500페이지가 넘는데 책 자체의 완성도가 그닥이라 벌써 중간 부분의 제본이 벌어져 버렸다는 것도 아쉬운 점이었어요.

그래도 소장해서 읽어도 될 정도로 재미와 자료적 가치 모두 뛰어난 책이라 생각되기에 제 별점은 3점입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 대해 궁금하지 않은 분들이라면 구태여 볼 필요도 없는 옛날 잡지일 뿐이겠지만, 당대 조선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덧붙이자면 다른 잡지들, 예를 들면 "선데이 서울"도 이렇게 복간(?)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심 있는 출판사들의 많은 도전이 있었으면 합니다.

2023/09/02

근대 사물 탐구 사전 - 정명섭 : 별점 3점

근대 사물 탐구 사전 - 6점
정명섭 지음/초록비책공방

근대를 대표하는 사물들 8종에 대해 언제 들어와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뀌었고,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추적하여 알려주는 미시사 서적.
대부분 다른 유사 미시사 서적에서 접했던 사물들이지만, 그 시작과 끝을 철저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습니다. 바라보는 시각도 분석적이며 냉철하고요. 도판들도 충실하게 실려있어서 보는 즐거움을 더해줍니다.

하지만 제가 이런 류의 책들을 워낙 많이 읽은 탓에 중복되는 정보가 많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무성 영화>>는 <<식민지 조선의 또 다른 이름, 시네마 천국>> 내용과 비슷합니다. 변사 스타일이 여러가지 있었다던가, 장르별로 선호된 변사들이 달랐다는 등 색다른 설명이 있기는 하지만 대동소이해요. 무성 영화가 사라진건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성냥>>은 성냥이 개발된 과정이 오히려 더 중심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근대와는 큰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조선에도 여러 회사들이 있었다 정도인데, 그 회사들도 대부분 일본인이 운영했다니..... 어원이 '석류황'이라는 것만 기억에 남습니다. <<석유 풍로>>는 굉장히 혁신적인 물건이었던건 분명합니다만, 그렇게 근대와 관계가 있는 물건인지 좀 아리송했어요.

그래도 상세하게 소개하는 만큼 기억에 남는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노면 전차>>
노면 전차는 서구의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여 국가를 개혁시킨다는 광무개혁의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저자는 이는 서구의 시간과 속도를 받아들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통수단이 미약하고 시간에 대해 명확한 개념이 없던 시대에는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로 이동하는게 어려웠지요. 시간도 정확히 알 수 없었고요. 그러나 전차는 원하는 장소에 원하는 시간에 도착하는걸 가능하게 해 주었습니다. '시간'에 대한 개념이 더 명확해진 것과 같지요. 그러나 저자는 전차의 첫 노선이 죽은 왕비 (명성황후)의 무덤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점에서 광무개혁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고종은 역시, 개혁 군주로 칠 수 없는 인물임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또 전차가 대한제국에 부설된 시기가 굉장히 빠른 편이었다는게 신기했습니다. 일본에서도 전차는 교토와 나고야에만 있었지 오히려 수도 도쿄에는 없었다고 하네요. 진짜 제대로 개혁만 했어도 뭔가 이루어졌을 시기로 보이는데,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그 외 전차를 타려면 전차표를 썼다는 것, 다양한 할인 정책과 회수권, 정기권 등 여러 형태가 있었다는 등의 디테일도 좋았습니다. 광복 후까지 미제 전차를 도입하면서 노면 전차는 운행되었지만, 궤도를 깔고 전신주를 세우는 등의 절차가 필요없는 버스의 숫자가 증가하는 등의 이유로 결국 사라져버렸다는데, 무려 1968년까지 운행되었다는건 몰랐었네요.

<<재봉틀>>
전 세계 재봉틀 점유율 1위였던 싱거사가 1905년에 한성에 지점을 세우고 할부와 같은 공격적 마케팅으로 조선 시장을 장악했다는 유래담은 신기했습니다. 이렇게 일찍 들어와서 모두에게 알려진 사물이었다는건 여태까지 몰랐었거든요. 세일즈맨과 여성 강사 - 여교사라고 불리운 - 를 한 팀으로 가정집을 방문하여 판매했다는, 당시 시대 상황 - 여성이 바깥 출입을 자유롭게 할 수 없었던 - 에 꼭 들어맞는 영업 방식도 인상적이었어요. 역시 세계 1위는 뭔가 달라도 다르네요. 이를 통해 조선 시장을 장악한 싱거사의 조선 지점은 1930년대 이미 200여개에 직원은 2,000명에 달했다고 하니 대단합니다. 판매량도 1937년에는 2만 5,000여대를 팔았는데, 동시기 일본에서 4만여대를 팔았다니 두 나라간 경제력과 인구수를 감안하면 조선에서의 매출은 엄청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요.

<<인력거>>
여러가지 규칙과 조항이 있었다는 걸로 보면 근대적인 탈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현대의 택시와 별로 다를게 없더라고요. 10리 안에는 40전의 기본 요금이 책정되었으며 승차 거부는 금지되어 있었다던가, 인력거꾼에게 영업 허가증을 발급해 주었으며 인력거 주차장도 있었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그리고 1925년 1월에 진남포에서 있었던 기생들의 결의는 눈길을 끕니다. 기생들이 인력거를 타지 않고 걸어서 요리점까지 가기로 하자, 인력거 회사 사장이 이유를 물었습니다. 기생들은 '사람이 어찌 사람이 끄는 인력거를 탈 수 있느냐'고 답했다고 합니다. 기생보다도 인력거꾼들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다는 것, 그리고 기생들이 당대 상당히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여성들이었다는걸 알 수 있네요.
그리고 인력거꾼은 광복 이후에도 살아남았지만 1961년에 결국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이유야 여러가지겠지만, 결국 다른 탈 것과의 경쟁에서 뒤쳐졌기 때문이겠지요.

<<축음기>>
유성기라는 명칭의 어원으로 조선인들이 이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알 수 있다는 말에 공감이 갔습니다. 가격을 비롯하여 1932년 <<황성의 적>>이라는 음반이 대략 5만장 쯤 판매된 공전의 히트작이었다는 등의 다양한 정보가 함께 제공됩니다.

<<고무신>>
인천의 이성원이라는 양화점 주인이 전 세계에서 수입된 다양한 신발을 보고 조선만의 독자적 신발을 만들 결심을 한 게 고무신의 시작이었습니다. 1913년 특허받은 그의 경제화는 바닥은 가죽, 서양식 구두와 같은 뒤축에 나머지는 천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바닥을 고무로 만든 경제화도 나왔지요. 이를 모방하여 1921년 이화영이 신발 전체를 고무로 만든 신발을 내 놓습니다. 이는 조선 양반들이 신던 당혜라는 가죽신 모양을 차용하여 거부감이 덜했고, 사람들이 어색해하던 뒤축이 없어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됩니다. 이화영의 대륙고무회사는 당시로서는 독특한 마케팅도 도입했는데, 하나는 '대장군표'라는 브랜드를 붙여 브랜딩한 것이고, 또 하나는 유명인을 적극 활용한 겁니다. 순종에게 진상하고 이를 홍보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이외에도 정말 많은 정보가 소개되니, 이런 류의 미시사 서적을 좋아하시거나 한국 근대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겁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08/10/17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 이철 : 별점 5점!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 10점
이철 지음/다산초당(다산북스)

이 책은 전에 읽었던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과 같은 시리즈로 제목 그대로 일제 강점기 시대를 중심으로 한 당시 조선의 스캔들(?) 11개를 풀어놓은 책입니다. 그야말로 "경성스캔들" 이죠.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은 읽고나서 실망이 컸지만 이 책은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두 책의 차이점은 정말로 "충격적이고 몰랐던" 역사를 얼마나 디테일하게 설명하면서도 쉽고 이해하기 쉽게 묘사했는지의 여부입니다. "조선을..."은 일단 읽는 것 자체가 힘들 뿐더러, 너무 주제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많아서 실망스러웠는데 이 책은 최소한 재미만큼은 확실합니다. 물론 이 책도 제목과는 다르게 당대에 그다지 충격을 전해주지 않은 스캔들도 몇 건 다루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들도 드라마틱하다는 점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해서 모든 에피소드가 기대했던 것 만큼의 충분한 재미는 전해 줍니다.

또한 11개의 스캔들 중 익히 알고 있었던 사건이 윤심덕과 김우진의 이른바 "사의 찬미" 사건이나 여류화가 나혜석의 사건 두가지 밖에 없었다는 것도 책의 가치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합니다. 아울러 이 두 사건 역시 알고 있는 내용보다 훨씬 자세하게, 당시의 자료를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지루한 맛은 전혀 없었다는 것도 탁월하고요.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사건은 친일파 대부호의 아들 장병천과 기생 강명화의 정사 사건이었습니다. 친일파 대부호의 아들과 기생이라는, 그야말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신분, 재력의 차이로 비극으로 끝난 너무나 순정 만화같고 일일 드라마 같은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순정파적이고 비극적인 로맨스가 1920년대에 존재했었다는데 놀랐네요. 여러 권의 소설과 영화로도 가공되었을 정도로 당시에 큰 충격을 준 건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이렇게 유명한 이야기가 지금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 이유도 조금 궁금해 지기는 했습니다. 아마도 해방 후 국무총리까지 역임했던 장병천 아버지의 형제인 장택상씨의 권세로 사건을 은폐한게 아닌가 싶은데,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도 드러나는 친일파들의 행각은 씁쓸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당대 매스컴들과 이른바 "지식인" 들의 편견과 비뚤어진 시각을 보여주는 김명순 사건과 독살미인 김정필 사건도 흥미로왔으며, 유명 공산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이 다수 등장하는 대하 서사시와도 같은 "제4부 - 경성을 붉은색으로 물들인 혁명적 연애 사건"의 이야기들도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공산주의 혁명가들의 불꽃같은 삶과 격동의 시대가 잘 표현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그야말로 조선과 중국, 소련, 해방 후 북한을 넘나드는 거대한 스케일에 정말로 조선 해방과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그들의 삶, 체포와 탈옥, 탈출, 고문 등의 고난의 세월 및 해방 후 공산주의자로 남한에서는 매도되었다는 점과 북한에서는 대부분 숙청되었다는 비극적 종말까지 모두 갖춘 극적인 이야기라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 외에도 당시의 여러 정사사건, 자유 연애주의자들과 신여성들에 대한 이야기, 동성애자 자살 사건 등 흥미로운 주제가 한 가득입니다. 목차만 읽어도 읽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말이죠.

역시나 "경성탐정록" 자료로서 구입한 책이었지만 의외의 재미와 새로운 역사를 알게되는 재미가 쏠쏠하여 횡재한 기분까지 드는 책으로 별점은 5점입니다. 재미와 더불어 당대의 여러 사료와 문헌을 다수 인용하고 있기에 자료적 가치까지 충분했으니까요. 일제 강점기 시대의 또다른 역사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꼭 읽어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2010/04/20

오빠는 풍각쟁이야 : 대중가요로 본 근대의 풍경 - 장유정 : 별점 3점

오빠는 풍각쟁이야 - 6점
장유정 지음/민음인

"경성탐정록"의 자료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찾아보는 식민지 경성을 다룬 미시사 서적 중 한권으로, 이 책은 제목과 부제에서 연상되듯이 19~20세기 초반까지의 국내 "음반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1899년부터 시작되었다는 국내 음반 역사에 대한 여러가지 사실을 년도별로 다양한 자료를 통하여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는 것이겠죠. 다른 경성관련 서적들에 비해 한가지 분야만 집요할 정도로 파 들어갔기에 확실히 그만큼의 깊이가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인 분석에 더하여 굉장히 흥미진진한 소재들을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이게 대박!이에요. 예를 들자면 "국내 최초의 얼굴없는 가수는 누구인가?" 라던가 "조선 최초의 재즈 공연은?" 같은 것들인데, 그 자체로서도 굉장히 재미있지만 추리 소설의 소재로 삼아도 될 정도로 매력적인 내용들이라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거든요. 경성의 유명한 얼굴없는 가수 "미스 리갈"의 정체를 둘러싸고 여러명의 기생이 등장하여 자신이 진짜라고 우기는 와중에 기생과 가수 연쇄살인사건 발생! 음반사간 전속 경쟁이 불러온 참극! 흥미진진할 것 같지 않나요?

물론 단점도 몇가지 있습니다. 재미있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학술적으로 접근하였기에 읽기에 약간 딱딱한 부분이 있다는 것과 생각보다 비싼 가격은 확실히 옥의 티죠. 그래도 자료적 가치와 재미가 동시에 있는 저작물이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경성과 경성의 가요계, 음반계를 무대로 한 창작물을 기획한다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라 생각되네요. 단 이러한 창작물이 많이 있지는 않다는게 이 책이 가진 유일한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2018/09/08

조선을 사로잡은 꾼들 - 안대회 : 별점 2점

조선을 사로잡은 꾼들 - 4점
안대회 지음/한겨레출판

몇몇 사료를 바탕으로 주로 조선 후기에 이름을 날렸던 기인들을 소개하는 인물사 - 미시사 서적입니다. 내용 대부분은 조수삼의 "추재기이"가 바탕이지만, 그 밖의 다양한 사료를 찾아 증명하고 보완하여 설명하려는 노력도 돋보이고 전체적으로 어렵지 않게, 쉽게 쓰여져 있어서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제목과 부제인 "시대를 위로한 길거리 고수들 이야기"만 보면 거리를 무대로 한 사기꾼이나 범죄자들이 연상되는데, 의외로 지금으로 따지면 엔터네이너(?) 들이 주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독특한 기예로 인기 연예인이었던 사람들이나 기생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거든요. 

지금으로 따지면 성대 묘사의 대가인 "구기"의 달인 박뱁새가 대표적입니다. 다양한 동물, 상황, 사람 목소리를 흉내내어 혼자서 극을 이끌어 나가는 공연의 달인으로 소갯글을 보면 무척 재미있겠더라고요. 지금은 실전되었다고 하는데, 남보원 선생님 등의 공연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걸로 생각됩니다.
종친 남원군이 스승으로 모셨다는 전설적인 음악 거장 김성기의 존재도 눈길을 끕니다. 신분이 천했지만 남원군은 "재능이 있는 곳이 바로 스승이 있는 곳이다. 나는 재능을 스승으로 삼을 뿐, 귀천이 있고 없고는 모른다"고 했다는데, 캬~ 정말 멋진 말이에요. 암요, 실력이 중요하지요.
그 외에도 재미있는 이야기, 즉 재담의 달인이었다는 김옹. 책을 재미있게 읽어주는 소설 구연 직업인 '전기수' 등 여러 당대 예인들의 소개가 이어지는데 모두 재미있습니다. 재담은 지금으로 따지면 개그맨으로, 소설 구연은 오디오 북으로 이어지고 있는 등 그 명맥이 계속된다는 점에서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사람들이 좋아하는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그리고 당대 조선의 사고 방식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웠던 노처녀 삼월이와 같은, 예인이 아닌 기인들 이야기도 많습니다. 삼월이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배필이라 여기며 장사하여 돈을 벌어 스스로를 꾸미며 항상 당당했다는데 이 역시 현재의 골드 미스와 비슷하죠? 이외에도 사랑 때문에 불가를 등진 비구니, 몰락한 양반 거지, 우월감 때문에 값비싼 서화골동품을 수집했다는 모지리들 이야기 모두 지금 시점에서 그렇게 낯설어 보이지 않는게 신기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합니다.
참고로, 삼월이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삼월이보다 조선 후기 혼수를 애걸하는 박도령의 호소문이었습니다. 결혼하고 싶다는 절절한 내용이 이어지는 중간에 "기분이 안 좋을 때 마누라를 패는 재미가 어찌 없으랴?"라는 문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거 참, 결혼 못해도 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제목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의 이야기가 많은건 아쉬웠어요. 기생 이야기들 대부분이 그러했습니다. 한 남자에게 순정을 바쳤다던가, 번 돈을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베풀었다는 정도의 이야기인데 조금 독특할 뿐 시대를 대표한다던가, 무언가를 사로잡았다고 할 만한 내용은 아니에요.
아예 사료에 기반하지 않은 전설이나 야담에 가까운 이야기들은 실망스러운 수준이고요. 물고기로 변신한 여인, 의적 일지매와 점쟁이 이야기들로 전체 내용과 어울리지도 않고, 사료적인 가치도 없는 탓입니다.
또 제목에 어울릴 만한 굵직한 인물의 묵직한 이야기가 전무해서 여러모로 기대에 미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고 저잣거리의 평범하지만 나름 명성을 떨쳤던 사람들을 모아 소개한다는 발상은 좋지만 재미 외의 또다른 가치 측면에서는 부족했기에 감점합니다. 몇몇 꼭지만 따로 분리해서 '살림 지식 총서' 분량으로 나누어 내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2020/02/29

광고로 보는 근대문화사 - 김병희 : 별점 2점

광고로 보는 근대문화사 - 4점
김병희 지음/살림

살림 지식 총서 501입니다. 제목 그대로 근대 신문 광고 분석을 통해 당시 문화를 조망해 본다는 취지의 문화사, 미시사 서적이지요.

살림 지식 총서치고는 두꺼운, 140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도 좋지만 다방 광고를 통해 당시 (1911년) 다방에서는 소라와 전복까지 팔았다는 소소한 정보를 비롯하여, 미술관이나 도장 가게의 광고는 현재와 사뭇 다르기도 하면서도, 시대상과 문화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재미있었습니다. 권번 기생 연합이 봉사료를 신문에 광고로 개제한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당시에는 기생이 당당한 직업이었다는 뜻이니까요.
신문 광고를 통한 사기극 역시 흥미로왔습니다. 10원을 투자하면 월 100원을 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30전을 보내면 알려주마!라는 광고로 이런 사기의 전형적인 모습이지요. 과연 얼마나 현혹되었을지 무척 궁금합니다.
그 외에도 '순수한 처녀의 피 (?)'라는 놀라운 카피의 포트 와인 광고나 콘돔 광고 등도 인상적이었으며, 미국 의학박사로 한국에 와서 간호사 양유식과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의 죽음 후 순애보를 이어갔다는 '어을 빈'의 이야기는 더 찾아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도판과 출처, 번역도 꼼꼼하여 자료적 가치도 높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광고를 기반으로 문화를 조망한다는 취지의 다른 책들에 비해 더 나은 점이 많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자의 의견이 많이 개입된 탓이 큽니다. 그것도 당대 문화에 대한 의견보다는 현대 세태 등에 대한 개인 의견들이 많아요. 이래서야 책 취지에는 영 걸맞지 않지요.
뒤로 가면 갈 수록 이러한 개인 의견 추가가 많아지는데, 특히나 해방 이후가 심합니다. 고려교향악단 정기연주회 광고를 통해 타악기의 결정적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원자력 책 광고를 소개하면서 지금의 원자력에 대한 인식을 논한다는 식으로요. 이래서야 역사서보다는 에세이에 가깝겠죠.
어머니와 아이의 일러스트를 크게 선 보인 광고를 소개하며, 지금의 '미니미 룩' 같다는 언급은 억지스러웠으며 저자의 말장난같은 글도 지나칩니다.

또 다른 유사 도서들과는 다르게 디자인에 포커스를 맞춘다던가, 재미있는 카피나 광고 문구에 주목하는건 좋지만, 이러한 내용이 별다른 카테고리 분류없이 단순 시대 흐름대로 두서없이 등장하는 건 아쉬웠어요. 차라리 '재미있는 광고 문구들', '시대를 앞서간 디자인' 등과 같이 명확히 주제 구분을 해 주었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저렴한 가격에 괜찮은 정보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살림 지식 총서 대부분이 이 정도 수준에 그치는데, 앞으로는 구해 읽어보지 않을 생각입니다.

2025/04/19

금병매 살인사건 - 야마다 후타로 / 권일영 : 별점 1.5점

금병매 살인사건 - 4점
야마다 후타로 지음, 권일영 옮김/스토리텔러

원제는 "妖異金瓶梅 (요이 금병매)". 중국 고전 "금병매" 속 인물들과 설정으로 본격 추리극을 만든 15편의 독특한 단편들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주로 서문경의 새로운 부인을 질투하여 없애는 반금련의 계획이 그려지며, 탐정역은 서문경의 난봉꾼 친구인 응백작이 맡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리스트(대표적으로 이거)를 통해 언급되던 작품이지요. 국내에 출간되었다는걸 몰랐었는데, 얼마 전 알고 읽게 되었습니다. 

특징이라면 본격 추리물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역사 소설 느낌도 난다는 점입니다. "금병매" 세계관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는 덕분이지요.

그러나 추리물로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수록작 거의 대부분의 동기가 "반금련의 질투"이며, 핵심 트릭 대부분도 "반금련의 변장"으로 의외성과 설득력도 거의 없는 탓입니다.  이런 설정으로 이야기가 반복되기 때문에 뒤로 가면 갈수록 지루해지고요. 

게다가 마지막 몇 작품은 아예 추리물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반금련이 서문경을 너무 사랑한 탓에 사건을 일으켰고, 반춘매와 응백작, 심지어 무송까지 금련 주변 인물들도 모두 금련을 사랑했다는 결말은 황당하고요. "메이지 단두대"에서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는데, 차라리 이게 추리 소설에는 더 어울렸습니다. '사랑' 때문이라는건, 호색한 서문경이 주인공인 "금병매"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주제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수록작별 대부분이 별로였고, 지루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금병매"와 "수호지"를 바탕으로 쓴 팬픽 정도에 불과한 느낌입니다. 다만 딱 한 작품, "인어등롱"만큼은 빼어납니다. 작품에 반복되는 반금련의 질투로 인한 살인과 억지 변장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으며, 적당히 현실적이고 "금병매" 세계관과도 잘 어울리는 덕분입니다. 궁금하시다면 이 작품 한 편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는 "저택의 사육제" 정도 말고는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딱히 "금병매"의 애독자가 아니라면 말이지요. 

이런 작품까지 꼼꼼하게 번역, 소개해 준 출판사와 번역가의 노고에는 경의를 표하지만, 이 작품보다는 "메이지 단두대" 쪽이 훨씬 낫습니다. "메이지 단두대"가 제대로 소개되는게 더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붉은 신발"

서문경의 부인 둘이 다리가 잘려 죽었다. 범인은 또 다른 부인 손설화로 의심되었다. 몽유병 증세가 있던 설화가 과형이라는 다리를 잘라 집행하는 사형 집행 과정을 본 뒤, 원한이 있었던 두 부인을 살해했다고 의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문경의 친구인 난봉꾼 응백작은 여성 다리에 대해 성적 집착을 가지고 있는 하인 내왕야가 범인이라고 추리했다. 죽은 부인들의 다리를 가져다 놓고 옮긴 과정이 설화의 짓으로 보기 어려웠던 탓이었다. 그러나 응백작은 장례식 날, 송 부인과 봉 부인의 발이 바뀐걸 보고 이 모든걸 꾸민 진범은 반금련이라는걸 알아챘다.  

반금련이 자신을 얕잡아 보는걸 절대 용서하지 않는 독부라는걸 잘 알려주는 에피소드입니다. 동기 때문입니다. 반금련은 송 부인의 발이 자기 발보다 작다는걸 공개적으로 과시해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송 부인의 발을 봉 부인 발과 바꿔친 후, 장례식에서 송 부인 발이 자기보다 크다는 말을 남기려고 다리를 옮겼던 겁니다.

그러나 범행이 자극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문제는 있습니다. 반금련 혼자 다리를 잘라 옮기는게 가능했으리라 보이지도 않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미녀와 미소년"

서문경이 총애하는 두 명의 미소년 화동과 금동은 사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금동이 반금련과 정을 통하자, 화동은 이를 서문경에게 고해 바쳤다. 서문경은 반금련에게 탁랍형을, 금동에게는 궁형(거세형)을 내렸다. 형을 받은 금동은 동굴에 갇혀 화동을 원망했는데, 어느날 동굴 앞에서 화동이, 집 안에서는 금동이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범인은 서문경이었습니다. 발자국이 하나 밖에 없는건, 서문경이 사체를 업고 날랐기 때문이고요. 사체를 업고 옮길 수 있는건 서문경 밖에 없다는걸 밝혀내는 응백작의 추리는 괜찮았습니다.  전족을 한 여자들에게는 무리였으니까요.

하지만 반금련이 두 남자에게 질투하여 모두를 죽이려고 짜낸 계책이라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금동이 거세된 뒤에는 죽일 이유가 없어졌으니까요. 또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반금련이 화동으로 변장했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억지였습니다. 서문경이 이를 몰라보았다는건 말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반금련이 질투로 살인을 저지르고, 반금련이 먼저 상대방을 유혹하며, 반금련의 변장은 천하무적이라는 설정은 이후 모든 단편에서 반복되는데,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염마천녀"

양산박 도적 소탕 실패에 책임을 지게 된 사돈 양 제독 탓에, 딸과 사위 진경제는 서문경의 집으로 도피했고 서문경도 함께 근신하는 신세에 놓였다. 서문경은 이 와중에 사위 진경제의 몸종 주향란을 새로이 일곱번째 첩으로 들였다. 그러나 진경제와 주향란은 이미 정을 통하던 사이였다. 반금련은 잔경제를 유혹했지만 들통난 뒤, 진경제는 서문경의 저택 우리에 갖혔다. 그리고 도성의 일이 정리된 날, 누군가 주향란의 혀를 물어 뜯었는데...

주향란의 혀를 물어 뜯은건 누구일까?라는 후더닛 물인데, 특별한건 없습니다. 당연히 반금련이니까요. 정액을 발라 남자 냄새를 풍겼다는 일종의 변장 트릭이 등장하지만, 변장을 너무 과대평가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남자마다 유혹하고 다니는 반금련을 그냥 놔두는 서문경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저택의 사육제"

지현의 색기 넘치는 부인이 서문경 저택을 방문했다. 맛있는 요리를 먹기 위해서였다. 반금련은 그녀를 덮칠 계획을 서문경에게 알려주었다. 연회에서 술게임을 해서 취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술에 너무 취한 임부인은 2층 창문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임부인이 떨어져 죽은건 반금련의 계획이었고, 그녀의 시체를 지현의 부하들에게 고기 구이로 속여서 먹였다는 내용입니다. 솔직히 엄청나게 뻔하지요. 하지만 여러 음식 및 작가 특유의 광기어린 분위기의 묘사는 좋았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모란꽃 살인"

유명 화가 소용면이 서문경의 처첩 초상화를 그려주는 날, 새로운 일곱번째 첩 양염방이 벌에 쏘였다. 반금련이 건네 준 모란 꽃 때문이었다. 그 뒤 자기 때문에 자살한 소자허의 원혼이 보인다며 난동을 부리던 염방은 반금련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소용면이 함께 한 술자리에서 양염방이 독살당하는데...

스스로 벌에 쏘인 반금련이 양염방인 척 연기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일부러 벌에 쏘인 상처가 가라앉을 때까지 숨어 있으려고 머리카락이 잘린 척 했다는건 괜찮았어요.

그러나 변장 트릭이 너무 허황됩니다. 소용면만 있던 것도 아니고, 서문경과 응백작 및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함께했던 술자리에서 변장한 반금련을 수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몰라봤다는게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거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돈에 환장한 사내"

인색하기로 유명한 서문경의 생약가게 부지배인 한도국이 어느 날, 아내의 전남편 송철곤을 모두에게 소개했다. 송철곤은 납을 은으로 만드는 비법을 완성했다고 주장했고, 철곤에게 속은 서문경은 가마를 만들고 거액의 은도 투자했다. 그런데 가마에서 풀무질을 하던 중, 서문경은 한도국의 아내이자 유명한 추녀 요금에게 급작스럽게 음심을 품게 되었다. 그 뒤 한도국에게 요금을 아내로 달라고 제안했는데, 요금은 철곤 도사의 블꽃쇼 도중 화살에 맞아 죽고 도사도 가마 안에서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되었다...

상당히 복잡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송철곤 도사의 연금술 사기, 서문경의 새로운 부인 맞이, 철곤 도사의 불꽃쇼와 새부인 요금 살해 사건, 철곤 도사 살해 사건, 한도국 살해 사건이 차례로 벌어지는 탓입니다. 

철곤 도사의 연금술 비법은 당연히 사기인데, 나름 기발한 점이 있습니다. 가마 앞에서 음탕한 행동을 하면 은이 납으로 변한다고 말한 뒤, 풀무질을 하는 사람들에게 미약을 탄 술을 먹여 음란한 짓을 하도록 유도했던 것이거든요. 이게 서문경의 새로운 부인 맞이로 이어지는 전개도 나쁘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전별금'이라는, 한도국이 송철곤을 죽인 이유가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극히 수전노스러운 동기로, 제가 여태 보아왔던 그 어떤 작품에서도 본 적 없던 동기였던 덕분입니다.

그러나 핵심 트릭은 어처구니없네요. 삶은 달걀을 억지로 밀어넣어 목을 막아 죽였다는 방법도 황당하지만, 대충 만들어 자동으로 발사되게 만든 화살이 형편좋게 요금의 등에 맞았다는 것도 비현실적이기 때문이에요. 도사를 살인범으로 모는 것도 과연 잘 되었을지 의문이고요. 한도국이 돌아온 뒤, 반금련이 파 놓은 함정에 빠져 죽는 결말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도주해야 했던 사람이 구태여 반금련을 만나 사지로 걸어들어갈 이유는 없으니까요. 요금 이야기를 빼고 사기에만 집중하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여인의 향기"

서문경과 반금련에게 원한을 품은 호걸 무송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문경 가족은 저택에 숨어있기로 했다. 심심했던 반금련은 향기로 여자 맞추는 게임을 제안했는데, 게임 도중에 무송이 쳐들어왔다. 서문경은 기생 이계저와 함께 관 속에 숨은 뒤 험한 꼴을 당한다... 

모든건 응백작과 반금련이 힘을 합처 꾸며낸 연극이었습니다. 소란 틈에 응백작은 돈을 훔치고, 반금련은 기생 이계저를 쫓아내기 위해서요. 거대한 무송은 응백작 어깨 위에 반금련이 올라타 연출했지요.

살인이 아니라 일종의 장난으로 경쟁자 이계저를 쫓아냈다는 점에서 다른 이야기보다는 조금 낫더군요. 무송이 엮이는 설정도 흥미로왔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그림 속 미녀"

여섯째 부인 이병아가 죽은 뒤, 서문경은 애틋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한 편, 반금련은 금동의 여동생 춘연을 몸종으로 들인 뒤, 금동이 죽은 사건의 진상을 말해주는데....

춘연에게 옻독을 옮겨, 춘연을 덮치려 한 서문경이 혼비백산하게 만든다는 반금련의 계획이 등장합니다. 이병아 초상화에 장난을 쳐서, 이병아에 대한 마음을 없애려는 목적으로요. 

죽은 사람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라는 동기는 독특했는데, 방법이 잔혹하고 유치해서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자신이 죽인 남자의 여동생마저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점에서요. 별점은 1점입니다.


"아름다운 눈동자"

새로 들인 여섯째 부인 유여화는 눈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유여화가 반금련과 서문경이 사랑을 나누는걸 엿보다 시력을 잃는다는 내용인데, 거울을 이용한 트릭이라는게 너무 뻔했습니다. 노골적으로 거울을 강조하고 있는 전개 탓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유여화의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하더라도, 이미 서문경은 흥미를 잃었다는데 그런 여자를 해할 필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 질투심이라면, 왜 자기보다 먼저 처첩이 된 이전 부인들은 죽이지 않고 가만 두는지 납득이 되지 않고요. 별점은 1점입니다.


"낙인 찍힌 미녀들"

새 부인 빙금보가 진주를 훔쳤다는게 밝혀져 쫓겨났다. 대식국에서 온 조오라 공주는 등에 십자가 낙인이 찍혀, 기독교를 포교하고 다니는 신하 알 무타츠와 함께 돌풍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두 개의 사건과 트릭이 등장합니다. 빙금보가 깜깜한 곳에서 진주를 훔친 방법은,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눈을 감고 있었다는게 전부라 시시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불에 달군 무언가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는데, 공주 등에 낙인을 찍은 트릭은 새로왔습니다. 화상이 아니라 얼음을 이용해 만든 동상이었다는게 진상이에요. 이를 풀어내기 위해 공주가 흠뻑 젖었다는 상황도 잘 설명되고 있고요. 대식국 출신 승려가 기독교를 포교한다는 독특한 설정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편을 섞은 술을 마셨다 하더라도, 동상을 입을 정도로 얼음 위에 오래 정자세로 누워있는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마지막에 급작스러운 돌풍이 승려와 공주를 데리고 갔고, 반금련의 몸에 십자가 상처를 남겼다는 결말도 억지스럽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검은 젖가슴"

반금련은 서문경이 눈을 가린 채 시력을 잃은 유여화의 몸을 탐닉하는걸 목격했다. 그 뒤, 반금련은 유여화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서문경이 새 첩 갈취병에게 푹 빠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자기의 눈을 멀게한게 반금련이라는걸 알아챈 유여화는 복수에 나섰지만, 오히려 죽은건 갈취병이었다. 왜 갈취병이 반금련이 방에서 자고 있었고, 왜 그녀의 시체가 유여화 방에 나타났을까?

유여화가 실명했다는걸 이용해서 위치를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트릭인데 솔직히 너무 뻔했어요. 손가락 촉감에 자신있다는 서문경을 비웃듯, 반금련이 갈취병인 척 했다는 일종의 변장 트릭도 뻔한건 마찬가지였고요. 이젠 지겹기까지 합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얼어붙은 환희불"

서문경이 자기 탓에 죽은 사람들의 귀신을 본다고 앓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반금련은 서문경과 함께 퇴마를 위해 태산에서 수행 중인 수도승을 찾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무송이 이끄는 양산박 무리와 마주쳤다. 무송은 서문경과 반금련을 쫓아온 것이었다. 반금련의 활약으로 둘은 목숨을 건지지만, 여자로 변장한 낭자 연청의 화살에 죽을뻔한 서문경은 그 뒤부터 여자를 두려워하게 되는데...

죽음 앞에서 당당한 반금련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반금련은 모야차가 인정할 기개를 보여 목숨을 건지거든요. 이 부분은 수호지 설정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수호지는 억지로 끼워넣은 느낌이 강합니다. 게다가 결말은 황당하기 그지 없네요. 여자에 흥미를 잃은 서문경과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 낭자 연청을 가장하여 죽게 만들었다? 이젠 정말이지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네요. 별점은 1점.


"여인 대마왕"

서문경의 장례식, 반금련은 불륜을 저지르던 첩 향초운과 상대남 유포를 잡아 죽이자고 제안했다. 이 기회에 유산을 노리는 버러지들을 쫓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불륜남녀와 함께 서문경 사체가 목이 베인채 발견되는데...

불륜남녀와 서문경 사체의 목을 자른 이유가 기발했습니다. 반금련이 자기 혼자 서문경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꾸민 짓이었거든요. 처음 무덤으로 향한 서문경의 상여 속 사체는 서문경 머리와 유포의 몸이 붙어 있었습니다. 반금련은 무덤에서 나중에 서문경의 머리만 빼 온 뒤, 특별한 장례도 없이 매장된 유포의 몸으로 위장한 무덤에 합쳤고요. 

반금련이 서문경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극진했는지를 알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중국 전통과도 잘 맞아 떨어지는 등, 이 작품만 놓고 보면 평작은 됩니다. 다만, 반금련의 서문경에 대한 '사랑'이 당쵀 납득이 되지 않는게 문제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연화왕생"

무송이 나타나 모야차와 함께 반금련의 몸종 춘매를 협박했다. 수비부 책임자 주수와 결혼한다는 반금련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히려 반금련은 이 기회를 이용해 무송의 복수를 끊어버릴 계책을 짜냈다.

반금련의 죽음, 그리고 무송이 결국 반금련에게 반하고 만다는 최악의 설정이 등장합니다. 뭐라 더 할 말이 없네요. 별점은 없습니다.


"살아있는 반금련"

방춘매는 주수비의 아내가 된 후, 주수비가 청하현 모든 남자를 양산박 토벌 작전에 징집하도록 만들었다. 모든건 반금련을 음탕하다 조롱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춘매의 계획대로 남자가 없는 귀부인들은 음탕한 축제에 빠져들었다. 결국 주수비가 토벌 작전에서 죽은 뒤, 거란군은 남자가 없는 청하현을 덮쳤다. 그러나 응백작은 얼음에 재워둔 반금련의 시체로 무송 일행을 꿰어내어 청하현을 구했다.

줄거리만 보아도 황당하기 그지 없지요? 춘매가 금련에게 이렇게까지 충성을 바치는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귀부인들이 남자가 없다고 삽시간에 음탕한 축제에 빠져든다는 설정도 어이가 없습니다. 게다가 얼음에 재워둔 반금련의 사체를 보고 아직 그녀가 살아있다 여긴 무송과 양산박 일행이 거란군을 물리친다는 마지막 장면은 제가 뭘 읽고 있는지도 모르게 만드네요. 역시나 별점은 없습니다. 아니, 별점을 준다면 마이너스에요.


"인어등롱"

앞서의 "낙인찍힌 미녀들"을 일부 수정한 이야기. 진주를 훔치는 트릭은 동일한데, 범인만 갈취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야기의 완성도는 훨씬 높습니다. 진주를 훔친 사건에 집중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잔혹한 서문경이 갈취병 뱃속의 진주를 낚시로 꺼내려다 그만 낚시바늘이 취병의 위에 박히는데, 반금련은 갈취병에게 염주를 먹게 하여 그 무게로 바늘을 빼게 만드는 기지를 발휘합니다. 

또 이 모든 건,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부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금련이 갈취병의 아름다운 치아를 부수기 위해 꾸민 계획이라는 반전도 돋보였습니다. 새로운 처첩을 이 정도 계책으로 쫓아내고, 아름다움을 훼손시키는 정도가 확실히 현실적이기도 합니다. 새로 들어온 처첩이 계속 죽어나간다는건 말도 안되잖아요?

제 기준으로는 수록작 중 가장 빼어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12/11/03

꼿 가치 피어 매혹케 하라 - 김태수 : 별점 4점

꼿 가치 피어 매혹케 하라 - 8점
김태수 지음/황소자리

신문광고를 중심으로 근대에 대해 설명하는 미시사 서적.

근대 조선의 생활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큽니다. 그래서 관련된 책을 제법 많이 읽어 왔습니다. 이 블로그에서 리뷰한 것만 열 권이 넘을 정도로요. 그런데 어느 정도 읽으니, 주제와 내용면에서 겹치는게 많이 눈에 뜨이더군요. 주요한 일상생활사를 주로 별건곤에서 인용하는 책들이 많은 탓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명확한 차별화 포인트가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신문광고라는 주제가 아주 좋아요. 당대의 사회상과 관심사를 한눈에 보여주는데 광고만한 것이 또 있을까요? 여러가지 자료를 토대로 해당 광고에 대해 설명해 주는 방식인 덕분에 다른 근대 미시사 서적과 겹치는 주제가 있기는 하지만, 내용면에서 "다르다"라는 느낌을 확실하게 전해줍니다. 각 꼭지별로 상세한 자료조사를 통해 당시 광고를 그대로 보여주는 등, 자료적 가치도 뛰어나고요.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 기생|개쌍놈도 데리고 노는 민중화의 세상이라
  • 고무신|강철은 부서질지언정 별표 고무는 찢어지지 아니한다
  • 성병약|화류병은 문명의 병이다
  • 영어|입신의 기초이며 출세의 자본이라
  • 아지노모도|끄내라, 끄내! 밥상 드러온다
  • 과자|포켓트에 너흘 수 있는 호화로운 식탁
  • 산아제한|'가정화합의 벗' 삭구를 아시나요?
  • 전쟁|캬라멜도 싸우고 있다
  • 창씨개명|나의 조선 이름은 촌티가 나서......
  • 영화|촤뿌린씨의 눈물과 웃음, 거리의 등불은 빛난다
  • 자동차|제갈량의 목우유마냐 옥황상제의 용마냐
  • 라디오|문명이 운다 조선의 라듸오!
  • 위생|건전하고 매력 있는 살바탕을 맨드러야
  • 박가분|부인 화장계의 패왕
  • 백화점|백화점 승강긔 바람에 억개가 읏슥하다
  • 술|맥주는, 가로대 자양품이라
  • 커피|양탕국이냐, 독아편이냐
  • 손기정|축! 마라손 왕 손남 양군 만세
  • 전당포|훈장 3원, 요강 50전
  • 바리캉|경제계의 대복음, 이발계의 혁명
  • 양장|유방을 해방하자
  • 포르노그래피|밤의 쾌락을 맛볼랴는 남녀에 권함

목차만 읽어도 너무나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저는 전부 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항목은 "강철은 부서질지언정 별표 고무는 찢어지지 아니한다"라는 현란한 카피가 돋보이는 별표 고무의 광고 등이 실린 고무신, 화류병 (매독) 치료를 위한 다양한 제품의 광고를 선보이며 당시 성병의 전파 경로 등을 고찰하는 성병약, 당대의 피임약과 아들낳는 약 등을 소개한 산아제한, 창씨개명을 위한 개명에 돈을 받은 작명소 광고에서 부터 창씨개명에 대한 여러가지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창씨개명 등이 있습니다. 전병하라는 농부가 성을 "전농"으로, 이름의 병하를 한자를 바꾸어 일본 발음으로 "덴노 헤이카"가 되었다는 등의 사연이 참 재미있더군요. 현재 두산의 모태인 박승직 상점의 "박가분"이 조선 화장품의 패왕이 되었다가, 연독 (납) 중독이 발견 및 보도됨으로 사멸했다는 내역이 기록된 박가분도 흥미로왔고요.

결론내리자면 최근 읽은 관련 미시사 서적 중에서는 가히 최고라 생각됩니다. 흥미로운 주제, 주제에 대한 소개 및 설명. 충실한 도판 등을 통한 자료적 가치 모두 뛰어나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근대 조선, 경성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께 강력하게 권해드립니다.

2016/10/09

스트로베리 나이트 - 혼다 테쓰야 / 한성례 : 별점 1.5점

스트로베리 나이트 - 4점
혼다 테쓰야 지음, 한성례 옮김/씨엘북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택가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한 후 버려진 사체의 정체가 사무기기 임대 회사 오쿠라 상회의 영업맨 카네하라라는게 밝혀졌다. 아무런 원한관계도 없는 착실한 인물로, 수상한 점이라고는 매월 두 번째 일요일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 점, 그리고 최근 급작스럽게 업무에 열의를 보인 점 뿐이었다.

사건을 담당한 히메카와 레이코는 직감적으로 사체는 원래 발견 장소 바로 옆 우치다메 낚시터에 유기될 계획이었다고 추리했다. 단서는 피해자 복부 사후에 생긴 절창이었다. 이를 배에 가스가 차 떠오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낚시터에서 기생 아메바에 감염되어 사망한 젊은이 사건과 엮어 상부에 설명한 후, 낚시터를 긴급 수색한 끝에 낚시터 안에서 다른 시체를 발견했다.

발견된 피해자는 잘 나가는 광고맨 나메카와로, 그 역시 매월 두 번째 일요일의 약속, 그리고 최근 급격하게 업무에 열의를 보였다는게 카네하라와 일치했다...

혼다 테츠야의 '히메카와 레이코 시리즈' 첫 번째 작품입니다. 2006년도 발표된 작품으로, 동명의 드라마를 추천받은 적이 있는데 미처 감상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자주 가는 도서관에 책이 있길래 연휴 때 읽을까 하고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최악이었니다. 세간의 평가가 높은 이유를 도무지 알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백야행"처럼 드라마가 원작을 초월하는 완성도로 제작되어 높은 평가를 받는걸까요?

아주 약간이지만 장점을 언급하자면, 특정인에게 공개되는 살인쇼라는 설정은 "호스텔"과 유사하지만 살인쇼 참가자 중에서 피해자를 골라낸다는 아이디어만큼은 신선했습니다. 인터넷 뒤에 숨어 즐기는 비겁자가 많은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같다는 느낌도 들었고요.

또 초반 레이코와 검시관 쿠니오쿠가 국수를 먹으면서 나누는 시체 태우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 레이코가 이오카와 조를 이루어 카네하라 주변 인물에 대한 사정청취에 나섰을 때 등장하는 취조 방법에 대한 약간의 팁(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 말을 기록한다고 의식하면 입이 무거워지는 법이었다. 그래서 이오카는 보란 듯이 노트를 덮고 오자와가 입을 열기 쉽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등 몇몇 경찰 수사 과정의 묘사도 나쁘지 않습니다. 과거 성폭행을 당했던 레이코가 방범 카메라에 찍히기 위해 큰길을 통해 비디오 대여점과 편의점을 거쳐 집으로 간다는 설정과 묘사도 마찬가지고요.

가혹 행위를 당하며 살아온 한 소년의 추억과 현재 시점의 사건이 살짝 엮이며 진행되며, 이 소년이 후카자와(일 것)라는 것은 비교적 초반에 밝혀지지만, 경찰 시점에서는 후카자와가 이미 사망한 사람이라는게 밝혀지며 호기심을 자아내는 전개도 비교적 괜찮은 편입니다.

하지만 이외에는 건질 게 없습니다. 우선 추리적으로 너무나 별 볼일 없습니다. 사건의 원인이 매월 두 번째 일요일의 만남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기에 이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밝혀내는지가 핵심인데 이 과정이 나메카와의 친구에 의해 너무 쉽게 해결되어 다음 단계로 진행되는 탓입니다. 경찰 수사에 따른 결과라고는 해도 이래서야 너무 시시하죠.

게다가 뒷골목 탐정이라는 타쓰미가 돈 몇 푼에 수사의 핵심에 접근한다는건 해도 너무한 전개입니다. 약간의 돈과 시간으로 키타미가 진범이라는 것을 알아내는데, 이럴 거라면 경찰은 왜 필요한 걸까요? 자기들끼리 세력 다툼이나 하는 쓰레기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차라리 경찰을 전부 해고하고 타쓰미를 고용하는 게 훨씬 가성비가 높아 보여요.

소소한 전개 역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자기만 알고 레이코를 극도로 싫어하는 이기적인 형사 카쓰마타와의 대립, 레이코를 놓고 벌이는 부하 오쓰카 - 키쿠타의 대립 등 수사 과정에 있어 불필요한 드라마가 너무 많아요. 특히 카쓰마타는 상사도 아니고 계급도 같은데, 레이코가 성희롱을 넘어서는 폭언을 듣고도 참아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이해가 안 됩니다. 게다가 '사실은 카쓰마타도 좋은 경찰이었다!'라는 엔딩은 실소를 자아냅니다. "맛의 달인"의 우미하라, "분노의 늑대"의 야규 캐릭터 변절급인데, 앞선 작품들은 수십 권의 에피소드를 쌓아놓기라도 했지 이건 뭐... 요즘 말로 우디르급 태세 전환?

자극적이고 진부한 묘사도 무척 거북합니다. 특히 '스트로베리 나이트'의 실체가 살인쇼라는 것이 밝혀진 후 등장하는 고어한 묘사가 대표적이죠. 히메카와 레이코에 대한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당했던 성폭행은 비록 트라우마로 남았지만 그녀가 경찰이 되게 만들었다는건 뻔함과 진부함 그 자체였으니까요. 은인인 시타 형사 이야기는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고요.
후카자와 유카리가 진범이고 그녀가 자신이 여성임을 부정하는 행동을 보인다는 것, 그것이 과거 성폭행의 결과라는 것 역시 진부하다는 틀을 깨기는 역부족입니다. 여기에 더해 후카자와 유카리가 진범임을 숨기기 위한 장치도 작위적이라 짜증 날 정도예요. 담당 의사라 면담을 거부할 수는 있지만, 개인 기록은 당연히 넘겨줬어야 합니다. 초반에 주치의가 몇몇 특이 사항만 경찰에 이야기했더라도 사건은 바로 해결되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장점이라고 했던 살인쇼 참가자 중 피해자를 고른다는 아이디어도 발상에 비하면 디테일은 모두 부족합니다. 참가자 모집 방법도 현실적이지 못하고, 이 상황에서 참가자들이 죽음이라는 현실, 그리고 살아있다는 가치관을 재인식하게 해줘 삶에 열의를 갖게 한다는건 억지스럽기 짝이 없는 탓입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도망가지 못해 안달이 났을텐데 말이지요. 또 결국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찾아올게 뻔한데,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흥행을 의식한 저속한 펄프 픽션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세간의 고평가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네요. 세간의 평가는 드라마에만 한정된 듯합니다. 아주 약간의 장점이 있기에 제 별점은 1.5점입니다만, 도저히 후속권은 읽어 볼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2010/07/20

식민지 조선의 풍경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외 / 최관 외 : 별점 3점

식민지 조선의 풍경 - 6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나카지마 아쓰시.유아사 가쓰에 지음, 최관.유재진 옮김/고려대학교출판부

아쿠타가와 상으로 더욱 유명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나카지마 아쓰시, 유아사 가쓰에 3인이 조선이 일본 식민지이던 시절 발표했던 단편을 모아 놓은 단편집입니다. "경성탐정록" 후속작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읽게 되었죠.
총 4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작품별로 짤막하게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첫 작품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김장군"은 임진왜란때 고니시 유키나가를 죽였다는 조선 장군 김응서와 기생 계월향 이야기를 그린 달랑 7페이지짜리 단문입니다. 김응서가 유키나가를 죽인거야 그렇다쳐도, 계월향이 유키나가의 아이를 가졌다고 계월향을 죽이고 뱃속의 아이를 끄집어낸다는 결말이 엽기적이라 당황스러웠어요. 뭐 책 뒤 해설에 따르면 "임진록"등 다양한 텍스트에서 인용한 것이라고는 하더군요. 하여간에 너무 짧고 분명 우리나라 텍스트를 인용한 것이기에 뭐라 평가하기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두번째 작품인 나카지마 아쓰시의 "호랑이 사냥"은 작가가 경성중학교를 다니던 1920년대 초반, 조선인 친구 조대환과의 에피소드를 나열하는 형식의 수필입니다. 반도인 조대환이 내지인과 학교를 다니며 보인 여러가지 행동들과 저자가 조대환 부자와 호랑이 사냥을 갔을때 조대환이 하인에게 보여준 잔인함, 그리고 30년대 중반 내지 -동경- 에서 우연히 조우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솔직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20년대 초반 경성과 30년대 중반 동경을 디테일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것과 - 노량진 근처에 텐트를 치며 야영하던 경성중학교 교련 시간에 대한 묘사 / '혼고 도로변의 헌책방을 대충 해메고 다닌 나는, 꽤 눈이 피곤하다고 느끼며 아카몬에서 혼고 3초메 쪽을 향해서 걷고 있었다' 류의 묘사 등 - 무엇보다도 특히 이야기의 핵심인 호랑이 사냥에 대한 묘사가 볼만했기에 본전 값어치는 한 것 같네요.

세번째 작품인 같은 작가의 "순사가 있는 풍경"은 조선인 순사를 주인공으로 하여 조선인 시각에서 쓰여진 것이 이채로운 단편입니다. 지배자 일본인의 차별과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이 잘 드러난 작품이더군요.
1920년대 조선의 겨울은 무척 추웠다라는 것, 한강의 잉어 낚시나 남대문 밖에서 얼어죽은 시체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에요.
기억에 남는 묘사는 '조선인의 배 모양 같은 나막신. 일본 아가씨의 반짝반짝한 조리. 지나인의 곰발 같은 털 구두. 금방 넘어질 것 같은 일본인 서생의 게다. 광을 낸 조선귀족학생의 구두. 원산에서 도망쳐 온 백계 러시아인의 굽 높은 빨간 구두...' 를 들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작품인 유아사 가쓰에의 "망향"은 일본을 떠나 조선에 정착한지 오래된 전직 군인 후키야 고스케의 회한을 다룬 단편입니다. 나름 조선에서 성공을 맛봤지만 동포에게 배신당한 뒤 더욱 조선이라는 땅을 좋아하게 된다는,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다른건 모르겠고 군인 출신이라 접객이 서툴고 오로지 "정직"이 모토인 후키야 고스케가 장사로 성공한 자기 나름대로의 상법이 독특해서 인상적이었어요. 손님이 올때 알아서 가져가라고 하고 돈도 알아서 거슬러 가라고 하니 손님들이 알아서 더 정직하게 굴더라... 라는 건데 꽤 그럴싸해 보였거든요.

그리고 "해설을 대신하여"라는 제목으로 단편 한편 정도 분량으로 "김장군"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 논문이 실려있습니다. 임진왜란에 대해 일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일본 작가가 임진왜란 소재로 어떤 작품들을 발표했는지 궁금하다면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나저나 재미라기 보다는 순전히 "경성탐정록"을 위한 자료로 읽은 작품이라 별점을 매기기는 좀 애매하네요. 그래도 자료적인 가치를 감안해서 별점은 3점입니다. 일본 작가들이 조선을 다룬 텍스트에 관심 있으시다면 얇은 책이니 만큼 한번 쓱 읽어보셔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2009/08/17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2 - 에도가와 란포 / 김은희 : 별점 3.5점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2 - 6점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은희 옮김/두드림

제목 그대로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이자 변격물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에도가와 란포의 단편선집입니다. 1권 다음에 3권이 먼저 나온 뒤 나온 2권입니다. 순서조차 엽기적이군요.... 1권과 3권을 이미 읽고 소장하고 있기에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이런 추리 단편을 워낙 좋아라하기도 하고 말이죠.
그러나 아쉽게도 이미 접한 작품도 많고 "본격물" 로 보기에는 어려운 작품들도 제법 많아서 1 - 3 권을 읽고 느꼈던 것보다는 조금 못합니다. 그래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단편집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겠죠. 전체적인 평점은 3점입니다.

최고 베스트는 "음울한 짐승" 이긴 한데, 너무 잘 알려진 작품이라 조금 식상하다면 "그는 누구인가"를 꼽고 싶네요. "악귀"도 괜찮았고요.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하자면,

호반정 사건 :
거울장치로 남을 엿보는 취미가 있는 주인공인 나는 묵고있던 여관 목욕탕에 몰래 숨겨놓은 장치를 통해 한 여인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여관에서 친구가 된 코우노와 함께 사건의 조사에 착수한 나는 사건이 벌어진 이후 여관 잔치에 불려나왔던 기생 쵸키치가 실종되고 정체불명의 손님들이 커다란 트렁크를 든 채 서둘러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경찰까지 수사에 나서지만 결국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데...
작가의 변격적인 취향이 잘 반영된 "거울장치"라는 설정은 인상적이지만 본격물에는 미치지 못한 조금은 애매한 작품입니다. 본격물로 기능하기 위한 트릭은 그런대로 합격점이긴 하며 쵸키치의 실종이라던가 군불지기 산조우의 존재 등을 통해 이야기도 나름 설득력 있게 전개하고는 있지만 "거울장치"라는 소도구 자체가 우연을 토대로 한다는 점과 정체불명의 손님들과 거액의 돈이라는 설정 역시 지나칠정도로 작위적이기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이야기는 중편 길이에 가까우나 알맹이가 없는 작품이라 별점은 2점입니다.

악귀 :
추리소설가 토노무라 쇼우이치는 고향에서 우연히 친구인 오야 코우기치가 연루된 사건에 휘말린다. 오야의 정혼자 츠루코가 참혹하게 훼손된 시체로 발견되었기 때문. 마침 오야는 파혼을 주장하며 유키꼬라는 아가씨와 사귀고 있었기에 완벽하게 범인으로 몰린다. 결국 토노무라는 친구의 누명을 벗어주기 위해 나서는데...
작가 스스로도 책 뒤의 해설에서 이야기하듯 결정적 트릭을 홈즈 단편 중 하나인 "브루스파팅턴 잠수함 설계도의 모험"에서 차용한 작품으로 정통 본격물입니다. 비록 중요 트릭이 모방이라 하더라도 다른 트릭들, 즉 1인 2역 트릭 같은 것들이 중요 트릭과 함께 작품과 잘 결합되어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결말이 조금은 쌩뚱맞긴 한데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한 작품이죠. 별점은 3점입니다.

지붕 속 산책자 :
백수 코우다는 명탐정 아케치 코고로와 친분을 맺은 뒤 "범죄"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던 중 새로 이사한 하숙집 천장으로 통하는 통로를 우연히 발견한 그는 다른 하숙생들을 염탐하는 취미에 빠져들다가 싫어하는 하숙생 엔도우를 완벽하게 살해할 수 있는 계획을 실행하게 된다...
대표작 중 하나로 과거 동서 추리문고의 "음울한 짐승"을 통해 먼저 접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변격물적인 성향에 더해 범행이 먼저 이루어지는 약간은 도서추리적인 전개, 그리고 사건을 밝혀내는 아케치 코고로의 추리쇼가 돋보이며, 특히나 범행을 행하는 과정까지의 서스펜스가 정말 장난이 아니라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죠.
코우다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의 심리묘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과 범행의 유력한 증거가 결국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격물로 보기는 힘들겠지만 에도가와 란포라는 작가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네요. 별점은 3점.

그는 누구인가 :
유우키 소장의 아들 히로카즈가 도둑에게 저격당해 불구가 된다. 그러나 범인이 남긴 불가사의한 발자국 등 알 수 없는 여러 정황증거 때문에 사건이 미궁에 빠진다. 결국 추리광인 히로카즈 스스로 탐정역을 소화하려 하고, 유우키 가문의 손님인 아카이씨 역시 사건 해결에 나서는데...
범인이 하늘로 꺼지는 발자국이라는 불가능 범죄의 설정을 가진 본격물입니다. 지도까지 도입한 치밀한 구성, 잘 짜여진 캐릭터 구도와 완벽한 동기 등 본격물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죠. 덕분에 상당한 길이의 중편이지만 작품 내내 계속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많아 지루하지 않게 읽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아케치 코고로가 등장한다는 것 역시 팬으로서는 반가운 일이었고요.
저자 스스로는 자신의 냄새가 많이 나지 않아 별로 화제가 되지 못했다고 이야기하지만 후대의 팬으로서는 오히려 기대하지 않았던 보석을 발견한 듯한 기쁨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달과 장갑 :
카츠히코는 고리대금업자 마타노를 우발적으로 살해한 뒤 자신의 애인이기도 한 마타노의 아내 아케미와 공모하여 사건을 은폐할 결심을 한다...
장치를 이용한 일종의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하는 도서 추리물입니다. 작가 후기에서 "황제의 코담배갑" 같은 "범인이 자신의 범행을 멀리서 바라본다"라는 알리바이 트릭을 언급하는데 사실 그 정도는 아니죠. 완전 오버에요... 이 작품은 트릭 자체는 별게 없고 오히려 이를 밝혀내기 위한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는 서스펜스가 더욱 돋보이는 스릴러적인 성향이 강한 작품입니다.
아케치 코고로의 이름이 잠깐 언급되는 것도 눈여겨볼만 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호리코시 수사1과장 귀하 :
도쿄 경시청의 호리코시 수사1과장은 5년전 관내에서 벌어진 미궁의 천만엔 도난사건에 대한 편지를 받는다...
서간문 형식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1인 2역 트릭을 다루고 있습니다. 트릭과 설정은 뻔해서 역시나 본격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전개과정이 뻔한 아이디어를 덮을 수 있을 만큼 흡입력이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모처럼 결말까지 깔끔할 뿐 아니라 훔친 돈의 은닉에 대한 몇가지 아이디어 등도 재미있었기에 별점은 3점. 무난하고 평이했습니다.

음울한 짐승 :
추리작가인 나는 실업가 오야마다 로쿠로의 부인인 오야마다 시즈코라는 여성과 우연히 친분을 쌓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나에게 오에 슌데이라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추리작가에 대해 문의하고, 나는 오에 슌데이가 과거의 연인이었다가 스토커로 돌변한 히라타 이치로라는 그녀의 고백을 듣게 된다. 히라타 이치로의 스토킹과 편지의 강도가 세지던 와중에 결국 오야마다 로쿠로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다...
나왔다! 이 작품도 동서추리문고를 통해 소개된 대표작이기도 한 변격물입니다. 에도가와 란포 스스로 작중의 오에 슌데이, 즉 히라타 이치로라는 인물에 자기 자신을 투사하여 작품을 써 나갔기 때문에, 란포의 여러 작품들이 오에 슌데이의 작품으로 인용되는 등 작가와 왠지 일체화된 느낌이 강한 작품이기도 해서 대표작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비록 읽어본 작품이기는 하지만 번역이 다른 탓에 굉장히 신선한 기분을 느끼면서 새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스토킹이나 가학증 등 변격물적인 성향도 잘 드러나 있지만 본격물로 보아도 손색없을 정도로 여러가지의 트릭 - 특히 오야마다 로쿠로 살인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볼거리입니다 - 이 복합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약간 여운을 남기는 애매한 결말까지도 인상적이라 에도가와 란포 작품 중에서도 탑 클래스에 들만한 좋은 작품이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2016/10/03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 유승훈 : 별점 2.5점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 6점 유승훈 지음/살림

한국의 도박사를 다룬 미시사 서적입니다. 도박은 제의와 점술에서부터 출발하였다는 이론에서 시작하여 신라, 백제, 고려, 조선, 근현대에 걸친 각종 도박을 소개해 줍니다. 도박에 관심이 있다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주제이지요.

목차는 크게 9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중 개인적으로는 "윷놀이", 조선을 주름잡았던 "쌍륙"과 "투전"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다른 도박들에 비하면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될 뿐더러, 그동안 관심이 있었던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백제인의 저포, 윷놀이의 조상인가"에서 소개되는 윷놀이는 중국의 저포에 가깝지만 한국에 특화되어 토착화된 것이라는 기원에서부터, 윷놀이판이 하늘의 천체를 상징하며 말이 가는 길은 해가 가는 길로 비유된다는 것, 도개걸윷모의 확률 - 윗면이 곡면이라 확률은 평면 대 곡면이 6:4, 이것을 기준으로 하면 걸-개-윷-도-모 순으로 나오게 됨 -, 윷사위 이름의 유래 - 도: 돼지, 개: 개, 윷: 소, 모: 말, 걸은 다양한 이론 존재 - 등 내용 모두가 흥미로웠습니다.

"양반과 기생, 쌍륙판에서 내기를 벌이다"와 "조선 후기의 투전, 도박의 전성시대를 열다"에서 소개되는 쌍륙과 투전은 고전 소설이나 근대 개화기를 다룬 미시사 서적에서 접했었지만 정체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이 책에 어떤 것인지를 도판과 함께 설명해 주어서 좋았습니다. 하는 방법까지 알려주는 투전 - 짓고땡과 거의 동일! - 에 비하면 쌍륙은 소개된 내용 정도로는 시도하기 어려운 수준이라 조금 아쉽긴 합니다만, 그래도 이 정도면 가려운 데는 충분히 긁어주었습니다. 이성계의 증조부 익조가 여진족과 쌍륙 승부를 할 때 원하는 숫자가 나오도록 조작한 주사위로 야바위를 쳐서 이겼다는 고사와 같이 사료로 확인되는 관련 일화들도 자주 등장하여 재미를 더해주고요.

이어지는 식민지 시기 화투 이야기도 상세합니다. 매국노 이지용의 도박 중독 이야기는 다른 책에서도 접했었지만, 당시 '골패 세령'이라는 것이 제정되었다는 등 새로운 내용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수록 내용 모두가 기대에 값하지는 않습니다. 우선 안압지 출토 주사위를 가지고 풀어나가는 "신라의 귀족, 주사위 놀이로 밤을 지새다"는 근거부터가 도박과는 거리가 있어서 주제에 걸맞지 않습니다. 고려시대의 격구를 스포츠 도박이라고 장황하게 소개하는 "고려시대의 격구는 스포츠 도박이었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격구가 도박일 수는 있지만 "스포츠"에 더 가까운 것인데 비약이 너무 심했어요. 현대 이후 고스톱을 다룬 부분 역시 관심사와 다를 뿐더러 내용도 특별하지 않아 실망스러웠습니다.

아울러 저자가 연구자일 뿐 도박과는 거리가 멀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앞서 말씀드렸듯 소개되는 도박의 "방법"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어 아쉽습니다. 뭐, 비결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의 묘수 정도는 소개해 주는 것이 좋았을 텐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한국 최초의 도박사(史)라는 점에서 의의를 둘 만하지만 내용의 깊이가 아주 깊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도판 및 책의 장정, 디자인은 그냥 무난한 수준이고요.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덧붙이자면 출판사가 "살림 지식 총서"로 유명한 살림출판사인데, 흥미로웠던 주제(윷놀이, 투전과 쌍륙)를 살림 지식 총서처럼 분권으로 출간하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2020/10/24

명작순례 - 유홍준 : 별점 5점

명작순례 - 10점
유홍준 지음/눌와

우리 옛 그림, 글씨와 궁중미술 중 주목할만한 일품에 대해 소개하는 책입니다. 그림이 책의 중심으로 총 32점이 조선 전기, 중기, 후기로 나뉘어 설명되며, 뒤이어 글씨 9점과 궁중미술 8점에 대한 소개가 이어집니다.
그림에 대한 소개에 그치지 않습니다. 작가 및 작가 관련 일화, 그림이 그려진 상황 및 시대 배경 등도 함께 평가하고 소개해주고 있지요.

제일 큰 장점은 시각적인 만족감, 그리고 읽기 쉽다는 점이었습니다. 시각적인 만족감은 도판이 화려하고 인쇄질이 좋은 덕입니다. 읽기 쉬운건 유홍준 교수의 쉽고 편안한 글 솜씨와 짤막한 분량 덕이고요. 이야기 한 편 당 4~5페이지 분량밖에 안 되거든요. 하루에 조금씩 읽다보니 금방 읽게 되더라고요. 시대별로 대표작가와 대표작들이 소개되는, 일종의 연대기 식 구성이라는 점도 좋았습니다. 조선 서화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었으니까요. 잘 몰랐던 대가와 작품에 대해 알 수 있었던 좋은 기회이기도 했고요. 수월헌 임희지가 그린 난초, 몽인 정학교가 그린 괴석 그림들은 지금 보아도 가히 일품이라 할 만 하더군요.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오원 장승업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저는 솔직히 조선 문인화가 왜 좋은지 잘 모릅니다. 선비들이 그림을 그리는건, 글씨와 어우러질 때만 뭔가 있어보이지, 그림만 놓고 보았을 때 그 결과물이 대단한 감동을 주는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책 속 오원 장승업 소개를 보니, 환재 박규수라는 분 생각이 저와 같더군요. 문인화가 극에 달한 탓에 아마추어리즘이 가득해져버렸다고요. 그래서 추사 이후 주눅들어있던 전문 화원들에게 '직업 화가라면 프로 의식을 찾으라!'고 호소했고, 이런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서 나타난게 오원 장승업이라고 합니다. 요약하자면, 선비라는 한량들이 얼척없는 그림을 서로 돌려보며 뭔가 있어보이는 듯 자화자찬하던 상황에서, "진짜 프로는 이런거다!"라며 튀어나와 그들을 압살해버린 겁니다. 심지어 장승업은 일자무식이었다고 하는데에도 그림 하나로 당대를 평정했다니 그 실력은 두 말할 필요 없지요. 소개된 "수리"와 "고양이" 그림은 이를 잘 증명해주는 걸작이었습니다.
또 16세기 함경도 기생 홍랑이 임과 헤어지면서 쓴, 아주 오래전 교과서에서 보았던 "묏버들 가려 꺽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라는 시조를 직접 한글로 쓴 '절유시'는 글씨가 너무 예뻐서 감탄이 절로 나오더군요. 이 시조가 아직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러나 만약 수록되어 있다면, 홍랑이 직접 쓴 이 서예 작품도 함께 실어주면 참 좋을 듯 합니다. 학생들에게 우리 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알려줄 수 있을거에요.

물론 새로운 내용, 작품, 작가만 소개된건 아닙니다. 당연히 신사임당, 공재 윤두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표암 강세황 등등 일찌기 잘 알고 있던 대가와 명작들도 함께 소개되고 있지요. 조선 서화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작가와 작품들이라 어쩔 수 없었을거에요.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렇게 여러모로 좋은 책입니다. 편집과 디자인도 완벽한 수준이고요. 이런 책을 소장하지 않으면 무슨 책을 소장하겠습니까. 별점은 5점입니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보니, 제가 구입한 책은 2013년 초판 2쇄 버젼인데, 지금은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시리즈 두번째 권으로 표지까지 바뀌어서 재출간되었네요. 제가 예전에 구입했던 "국보순례"도 이 시리즈에 포함되어 재출간되었고요. 이럴거면 처음부터 시리즈로 출간하는게 좋았을텐데 말이죠. 가격을 올리려는 꼼수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2012/12/18

사라진 직업의 역사 - 이승원 : 별점 3점

사라진 직업의 역사 - 6점
이승원 지음/자음과모음(이룸)

조선과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에 걸친 근대 초기에 생성되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9개의 직업의 흥망성쇠에 대해 다룬 인문 교양, 미시사 서적입니다. 소개하고 있는 9개의 직업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소리의 네트워커, 전화교환수
2. 모던 엔터테이너, 변사
3. 문화계의 이슈 메이커, 기생
4. 이야기의 메신저, 전기수
5. 트랜스 마더, 유모
6. 바닥 민심의 바로미터, 인력거꾼
7. 러시아워의 스피드 메이커, 여차장
8. 토털 헬스 케어? 물장수
9. 메디컬 트릭스터, 약장수

목차만 보아도 너무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저는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단순히 어떻게 생겼고 어떤 과정을 거쳐 사라졌는지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당시 자료들을 통해 실존했던 인물들과 그에 얽힌 에피소드도 풍부하게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이 중에서도 당대 최고의 변사였으나 유성영화 도입과 마약 중독으로 몰락한 변사 서상호에 대한 이야기와 "물장수"에 대해 다룬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서상호 이야기는 그간 궁금했던 점을 시원하게 긁어준 느낌이 들었어요. 중간중간 실려 있는 실제 변사의 대사(서상호의 "암굴왕" 등)도 좋은 참고가 되었고요. 아울러 물장수 관련 이야기는 다른 어떤 책에서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자세하게 실려 있어서 좋았습니다. 물장수들의 조합에서부터 물을 어디서 퍼 왔는지, 수도가 생긴 후 어떻게 되었는지 등… 그야말로 흥망성쇠를 잘 다루어주고 있으니까요.

"경성탐정록"의 첫 단편인 "운수 좋은 날"의 주요 설정 중 하나가 인력거꾼이었기에 관련 이야기도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 책을 보니 "경성탐정록"의 시대적 배경인 1930년대에는 인력거가 이미 거의 사멸한 상태였더군요. 고증에 더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몇 가지 있기는 합니다. 근대, 특히 일제강점기에 집중된 이야기일 것으로 기대했는데, "전기수"와 "유모"에 대한 이야기는 보다 이전 시대 이야기라 기대와는 좀 달랐다는 점을 먼저 들고 싶네요.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확실히 예상과는 달랐어요. 특히 "전기수" 이야기는 내용과 자료적인 가치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도 했고요.
"약장수" 편은 실제 약장수 이야기보다는 양약의 도입과 약 광고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책의 주제와는 조금 동떨어져 있습니다. 실제 약장수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짤막하게 다루는데 그치니까요.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더 자세하게 약장수에 대해 소개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생깁니다.
아울러 도판 등 자료적인 부분에서 다른 유사 도서에 비해 부족함이 느껴지는 것도 단점이었고요.

이러한 약간의 단점 때문에 별점은 3점입니다. 그래도 재미와 자료적 가치 모두를 갖춘 책으로, 근대에 대해 관심 있는 분들에게 추천드립니다.

2015/04/23

조선의 풍경, 근대를 만나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별점 2.5점

조선의 풍경, 근대를 만나다 - 6점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엮음/채륜서

근대 조선 풍속에 대한 미시사 서적입니다. 저자가 "단국대학교 동양학 연구원"으로 되어 있고 각 항목별로 저자 이름이 명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근대 조선의 풍속"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연구원들이 작성한 글을 모아 놓은 듯합니다.

크게 세 단락으로 나뉘어 있어 단락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 "조선 풍속기, 하나_ 욕망의 늪에 빠진 근대"

기생, 패션, 화장, 성병 등을 다루는 단락입니다. 납이 포함된 박가분 이야기, 성병에 대한 풍속사적 접근 등 흥미롭지만, 다른 책에서 이미 본 내용이 많아 새롭진 않았습니다. 여성들을 피해자로 보는 시각은 일관되긴 하나, 시대적 배경은 고려했어야 합니다. 당시 시대로는 당연했던 일일 수 있으니까요.

두번째 "조선 풍속기, 둘_ 놀이의 이중성"

신식 장난감이 어떻게 도입되었고,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한 내용은 신선하고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실린 미두 관련 내용은 주제와 동떨어져 있으며, 특히 반복창(반지로)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책에서 반복되어 온 내용이라 시시했습니다.

세번째 "조선 풍속기, 셋_ 신풍속의 탄생"

신풍속이 어떻게 도입되고 정착했는지를 설명해 주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신식 결혼식, 벚꽃 심기, 어린이날 유래, 크리스마스 도입 등 다양한 사례가 소개되어 있고, 어린이날이 독립운동과 연계되어 일본에 의해 금지되었다는 사실 등 처음 알게 된 내용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고, 연구원이 썼지만 논문체가 아닌 대중 친화적인 글이라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으며, 자료 출처가 명확하다는 장점은 큽니다.

하지만 근대 조선에 대한 미시사에 관심이 있어 이미 많은 책을 접해온 입장에서는 새로운 정보가 적고, 도판의 질도 평이했습니다. 또한 풍속이라는 테마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가 끼어 있다는 점, 대표적으로 두 번째 단락의 미두 이야기는 감점 요소입니다. 차라리 세 번째 단락처럼 조선에 없었던 신풍속에 집중했더라면 더 나은 구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근대사, 미시사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지만, 유사 도서들과 비교할 때 특별히 두드러지는 부분은 없습니다.

2015/10/04

베테랑 (2015) - 류승완 : 별점 3점

오랜만에 극장에서 감상한 '최신' 영화입니다. "쥬라기 월드" 이후 3개월 만이네요.

얼마 전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고 하는데, 과연 재미있기는 했습니다. 특히나 각본이 아주 좋았어요. 최근 문제가 된 사회적 공분의 대상인 재벌과 권력자들의 패악을 선악구도에 녹여낸 구성이 아주 괜찮더라고요. 적절하게 삽입된 개그와 대사도 빛났습니다. 그리고 조태호가 사건을 은폐하려고 사력을 다한 이유가 밝혀지는 반전, 즉 투신이 아니라 폭행에 의한 과실치상을 감추기 위한 살인미수였다는 설정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이었고, 그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잘한 요소들이 허투루 쓰이지 않고 단서로 연결되는 디테일은 추리 애호가로서도 만족스러웠습니다.
연기들도 좋았는데, 특히 많이 언급되는 유아인은 정말 최고였습니다. 덕분에 감정이입하면서 볼 수 있었습니다. 

류승완 감독 영화답게 액션도 괜찮습니다. 스타일리시한 액션은 아니지만, 특유의 묵직한 실전 액션 느낌을 잘 살린 연출이 인상적이었어요.

다만 마지막 조태호를 옭아매는 마약 파티가 열리게 되는 과정은 조금 작위적이라고 느껴졌습니다. 또 와이프와 이야기를 나눴던 부분인데, 유해진만큼은 적역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여 아쉬움이 남습니다. 평소의 사투리 쓰는 된장냄새 나는 촌남자 이미지가 강해서, 이 작품처럼 재벌의 찌꺼기로 권력에 기생하는 하이클래스이면서도 비굴한 역할에는 어울리지 않았거든요. 악당 느낌도 별로 들지 않았고요. 차라리 피해자인 트럭운전사 역의 정웅인이 이 역할을 맡았으면 더 설득력 있었을 겁니다.

그래도 평범한 경찰이 악당 권력자를 박살내는 과정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에는 충분한 영화였습니다. 영화로나마 대리만족이라도 해야죠.  별점은 3점입니다.

천만을 넘었고 광역수사대 팀은 건재한 만큼 속편도 기대됩니다. 조만간 극장에서 또 볼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