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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4

관찰자 - 샤를로테 링크 / 서유리 : 별점 2점

관찰자 - 4점
샤를로테 링크 지음, 서유리 옮김/뿔(웅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삼손 시걸은 직업도 없이 형, 형수와 함께 낡은 집에서 머물며 동네 여자들을 살펴보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는 청년이다. 그런데 그의 흠모의 대상인 질리언 워드의 남편 토머스 워드가 살해당하자 삼손의 형수 밀리는 경찰에 삼손의 일기를 신고했다.

유력 용의자로 몰린 삼손은 도주했고, 질리언 워드 남편 살해범은 카를라 로버츠와 앤 웨스틀리라는 독거 노부인 두명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과 동일 인물로 추정되었기 때문에 경찰의 수사가 집중되었지만 삼손은 질리언의 불륜 상대자인 존 버턴의 도움을 얻어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존 버턴은 토머스 살인 사건은 원래 질리언을 노린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사건 수사에 뛰어드는데...

 독일 여류작가 샤를로트 링크의 작품입니다. 충격적인 프롤로그는 아주 인상적입니다. 왠만한 내용으로는 충격을 받기 힘든 요즈음이지만 아동 성애자는 이야기가 다르지요. 솔직히 기분은 아주 불편했습니다만...

그리고 이 프롤로그가 3건의 연쇄 살인이 펼쳐지는 본문 내용으로 연결되는데, 이 과정에서 10월, 11월, 12월 등 순차적으로 기입된 날짜들로 친절하게 구분된 목차가 단지 시간 흐름 뿐만이 아니라 상당히 정교한 복선을 바탕에 두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띕니다. 첫 도입부인 10월 생일 파티 현장에서의 에피소드가 모든 사건의 발단이며, 타라가 이미 12월에 눈치챘던 존의 과거 성범죄 기소 이력을 1월까지 모른 척 한 것, 질리언이 타라에게 부동산 업자 루크 팜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 등이 모두 마지막 반전, 진상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이책으로 69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 어울릴만큼 잘 짜여져 있지는 않습니다. 쓸데없는 묘사와 내용이 많은 탓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스코틀랜드 야드의 수사 관련 내용입니다. 놀랍게도 완전히 불필요합니다. 결국 사건은 혼자 수사하는 전직 경찰 존 버턴의 활약에 의해 해결되며, 그것도 존 버턴이 혼자 잠복하여 리자 스탠퍼드를 만난 것이 결정적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존 버턴도 경찰 내부에서 결정적 정보를 얻지만 이는 경찰 수사 방향과는 무관하기에 경찰은 전혀 하는게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게다가 첫 등장, 수사 과정에서 비교적 유능한 것으로 생각된 피터 필더 경감은 경찰을 그만둔 뒤 잘나가는 존 버턴에게 질투나 느끼는 한심한 중년에 불과하다는게 밝혀지는 등 전반적인 경찰에 대한 묘사는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초반부 뭔가 있어 보임직했던 사회부적응자 삼손 시걸의 묘사도 분량에 비하면 별 볼일이 없어서 당황스럽습니다. 이러한 경찰 관련 묘사와 삼손 시걸 묘사만 들어내도 1/3 이상 깔끔하게 압축할 수 있었을 겁니다. 여성 작가 특유의 장황한 심리 묘사까지 덜어낸다면 금상첨화일 테고요.

추리적으로 놓고 보아도 별 볼일 없습니다. 탐정역인 존 버턴의 수사는 우직한 탐문, 그리고 '운'이 좋았던 것 불과해서 추리의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리자 스탠퍼드의 거처를 알아낸 순간 이야기는 끝난거나 다름없습니다. 두 피해자와 질리얼 모두와 관계가 있는건 타라밖에 없으니까요.
범죄 측면에서도 무언가 의미가 있어보였던 엘리베이터 장난과 심야의 드라이브는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어요. 단지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행동이라는 동기 자체는 설득력 있다 하더라도, 정체가 드러나기 쉬운 무모한 행동임에는 분명하니까요. 꽤 오랫동안 이런 행위를 반복했는데도 타라가 들키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운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그녀 어머니 사체를 진작에 치워버리지 않은 것과도 일맥상통하고요.
아울러 범행의 핵심 동기인 '구조 불이행죄' 역시 설득력이 낮습니다. 실제로 범행을 저지른 인물보다 그것을 방조한 인물의 죄가 더 크다는 논리는 다른 몇몇 작품에서도 접했었지만, 단 한번도 그게 합리적이라 느낀 적이 없는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나마의 설명도 미쳤다는게 전부라면 아예 이런 동기도 필요 없지 않을까 싶고요. 마지막 숨겨진 별장에서의 범행 고백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작위적이라 허무하기까지 했습니다. 질리언을 다른 피해자들처럼 질식사 시키지 않은 이유도 모르겠네요.

물론 장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다른 유사 작품들과는 다르게 이 작품에서 타라의 분노는 어린 시절 지옥을 맛보게 한 의붓 아버지의 성폭행을 방조한 어머니로 향하며, 다른 방관자들에 대해서도 어머니와 같은 분노를 느꼈다는 식으로 설명되는건 그럴듯 했어요. 삼손 시걸의 캐릭터도 독특해서 이런 류의 작품에 등장하는 싸이코치고는 착한 인물이라는 의외성에 더해 마지막 장면에서의 활약은 나쁘지 않은 등 독특한 면은 분명 있고요. 불륜을 저지른 질리언이 잠깐의 실수로 앞으로 살아가며 정말 힘든 노력을 해야할 것이라는 전개도 마음에 듭니다. 불륜을 쉽게만 보는 다른 작품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측면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여러모로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비스무레한 타 범죄 스릴러 대비해서 딱히 차별화되는 점도 없고요. 그냥저냥한 평작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교보문고 전자 도서관에서 대여해서 읽었는데 종이책은 이미 절판되었더군요. 딱히 찾아 읽으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덧붙이자면, 독일 작가 작품인데 영국을 무대로 한 것은 좀 희한합니다. 미치광이 엘리트 살인자가 나돌아다니는 작품을 모국 무대로 쓰기는 싫다는 기묘한 애국심이 작용한 것은 아닐테고, 이유가 궁금합니다.

2010/08/26

데드트릭 1,2 - 카린펜 (華倫変) : 별점 3점


나나모토서에 근무하는 순사장 이치모리 잇페이, 과학수사 연구소 수사관 도쿠가와 도쿠코, 그리고 변태 명탐정인 경시청 수사1과 경부 하다케야마 미치아키가 나나모토서 관할구역에서 발생한 기상천외한 범죄사건을 수사하여 해결하는 정통파 수사 추리만화입니다. 국내 소개된 작품은 아니고 원서로 구해봤죠.

슥 한번 훝어봤을때는 작화나 전개가 왠지 어설픈 부분이 많이 보여서 크게 기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권을 읽었을 때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평범한 추리만화 이상의 완성도를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추리강국 일본의 힘이겠죠?
범인이 앞부분에서 살짝 드러나는 도서 추리물 형태임에도 진상트릭은 끝까지 숨겨놓고 수사가 중심이 되는 본격 추리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도 제법이지만 독자가 추리의 과정에 동참할 수 있는 만큼의 정보와 단서를 수사과정과 맞물려 제공하는 전개방식 역시 정통 본격 추리물에 걸맞는 수준이라 만족스러웠어요. 곳곳에서 느껴지는 추리라는 장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더불어 과학수사에 대한 세밀한 자료조사 역시 돋보이는 부분이었고요.

작화, 컷 구성 등 만화적인 완성도가 떨어지며 캐릭터들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점 (주역인 도쿠코조차 전개에 사실 큰 필요가 없습니다), 1권에 비해 2권은 완성도가 현저히 낮은 수준이라는 것은 아쉬우나 기대 이상의 신선한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3점입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작가라 궁금해서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카린펜 (華倫変 かりんぺん)은 에로망가 출신 작가로 5권의 작품만 남기고 2003년 급성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고 하네요. 젊은 나이에 사망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국내 출간은 어려워 보이지만, 이 작품이라도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권 : "연속자궁 강탈 살인사건"
나나모토 고교 여고생과 양호 교사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두 사체 모두 자궁이 적출된 상태였다. 경찰은 나나모토 고교에서 발견된 육망성 표식 등을 근거로 '악마 숭배' 의식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 추정했다.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것은 왕따이자 저주와 주술 등에 취미를 가지고 있던 2학년생 츠지모토 가즈야였다.

제목 그대로 '자궁 적출'이라는 잭 더 리퍼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연쇄살인극이 펼쳐집니다. 그러나 연쇄살인극이 단지 악마 숭배나 잔혹함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진상을 내포하고 있으며, 용의자에게 사건을 뒤집어 씌우기 위한 주도면밀한 계획이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공정하게 독자를 속인다는 점에서 정통 고전 본격 추리물 성향을 잘 따른다고 할 수 있고요.
그 외에도 추리 애호가를 사로잡을만한 요소가 많습니다. 잭 더 리퍼 사건의 가설 중 하나를 채용한 진상이라던가, 탐정역인 하다케야마가 진범을 찾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로 진상을 풀어낸다는 결말은 형사 콜롬보를 연상케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증거를 제시하라는 범인 앞에서 범인의 통화 녹음을 듣고 주변 소음으로 위치를 추적한 뒤, '공중전화'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 공중전화에서 범인의 지문이 묻은 동전을 찾아내는 등의 과학에 기반한 철저한 수사도 볼거리였고요.

과연 자궁 적출이라는 행위를 단시간에 처리할 수 있었을지에 대한 의문 등 설명이 부족한 부분도 있고,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 유머 등이 지나치게 길다는 점, 작화면에서 세련되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기대 이상의 재미를 선사하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2권 : "도쿠코의 범죄"
연휴에 도쿠코에게 친구 미에가 찾아온다. 그녀와 술을 마시다 잠들어버린 도쿠코는 자신의 옷이 피에 젖어 있다는 것, 그리고 피로 물든 칼이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4일 후 다카이라는 청년이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고, 도쿠코가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도쿠코 옷과 칼의 피가 피해자의 것이었고 그녀의 모발이 피해자 방에서 발견된 것!
도쿠코를 구하기 위해 이치모리는 하다케야마의 도움을 요청하는데...

도쿠코가 범인일리가 없기 때문에, 독자는 미에가 범인임을 확실히 알고 이야기를 읽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미에는 피해자 사망 추정시각에 교통사고로 체포되었는데, 체포장소에서 범행장소까지는 차로 2시간이 걸려서 그녀는 범인일리 없다'알리바이 트릭을 어떻게 깰 것인지에 대해 자연스럽게 촛점을 맞추게 되고요.

그러나 이 트릭은 특별한 조작이 있던건 아니었고, 경찰 수사의 헛점으로 철벽의 알리바이가 생겼다라는 설정이라 좀 별로였습니다.
오히려 도쿠코가 범인이 아님을 증명하는 철저한 과학 수사가 더 인상적이었어요. 모발의 상태와 헤어 스프레이의 성분조사를 통한 오류 증명 - 현장에서 발견된 모발은 두종류의 스프레이가 뿌려져 있기에 같은날 떨어진 것으로 볼 수 없다 - , '곤약'은 위에서의 소화시간이 길기 때문에 사망시간 추정할 때 감안해야 한다는 것, 이문(耳紋)의 채집을 통해 범인 미에가 현장에 있었다는걸 증명하는 것 모두가 철저한 과학 수사에 기반합니다. 이런 류의 다른 컨텐츠들에 못지 않은 수준으로요.

설정과 내용에 비하면 지나치게 길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는 앞서 말했듯 경찰 수사의 헛점으로 우연히 발생하는 알리바이가 핵심이고, 범인의 동기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고요.

그래도 평작은 충분히 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제대로 된 편집자가 붙어서 보강했더라면 아주아주 좋은 작품이 되었을텐데 조금 아쉽네요. 

"이치모리군의 도전장"
이치모리가 자신이 신참때 해결한 사건을 도쿠코에게 풀어보라고 소개하는 이야기. 
밀실에서 소녀가 교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열쇠를 가진 사람은 경비원 뿐이었고, 처음에 아이 어머니와 조사할 때 방은 비어있었다. 다시 조사할 때 시체를 발견하였으나 경비원은 항상 아이 어머니와 함께였다. 범인은 경비원인데 어떻게 살해했나? 라는 문제였다. 
단서는 처음 시체 발견 시에는 모포가 뒹굴고 있었으나, 구급차를 부르고 돌아왔을 때에는 모포가 사라졌다는 것 뿐.

미스터리 매니아 이치모리의 추리소설담이 펼쳐지는 소품으로 쩌리 이치모리가 낸 문제답게 추리적으로는 별볼일 없습니다. 작중 토쿠코가 이야기하듯 흔해빠진 거울 트릭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미스터리 매니아 이치모리의 장황한 이야기가 나름 재미를 줍니다. 특히나 본격물은 프로레슬링, 사회파는 아마레슬링이라고 비유하는게 기억에 남네요. 아마레슬링이 각본없는 진정한 승부지만 작위적인 프로레슬링이 훨씬 재미있다는 논리죠. '바보같지만 재미있어!'랄까요.

또 사건의 동기와 이후 이야기를 작위적으로 짜맞추는 이치모리의 모습에서 최근 추리만화를 풍자하는 느낌이 풍기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1/03/06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 권일용, 고나무 : 별점 3점을 읽는 자들 - 권일용, 고나무 : 별점 3점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 6점
권일용.고나무 지음/알마

권일용은 국내 최초의 프로파일러입니다. 경찰 학교를 졸업하고 일선 형사로 근무하다가 발탁되었지요. 감식 업무에서 재능을 발휘했던걸 눈여겨 보았던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장 윤외출의 덕이었습니다. 그 뒤 여러 수사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프로파일러로서의 입지를 굳혔고요. 

이 책은 권일용이 프로파일러로서 수사에 참여했던 6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국내 수사 기관에서 프로파일링이 어떻게 시작되어 성장했는지를 설명해주는 논픽션입니다.

첫 번째 사건은 2001년 조현길이 저질렀던 여아 살인 사건입니다. 가장 중요한 단서는 피해 여아 사체를 냉동실에 보관해서 사체 등 부분에 생겨난 일정한 간격의 가늘고 긴 눌린 흔적으로 냉장고 모델을 찾아낸 겁니다. 해당 냉장고는 업소용 중대형이었고, 이를 비롯한 여러가지 직접 확인한 단서를 토대로 권일용은 한국 범죄 사건 수사 역사상 처음으로 프로파일링 보고서를 제출하게 됩니다. 그의 보고서가 수사에 기여한 바가 있고, 보고서 속 범인상이 진범 조현길과 대체로 일치했던 덕분에 이후 국내 범죄 수사에서도 프로파일링이 활용되게 되었고요. 국내 프로파일링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뒤이어 권일용이 투입되었던 2003년 유영철 사건에서는 연쇄 살인을 알아채지 못하는 실패를 겪게 됩니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유영철이 경찰 수사 방향을 인지했기 때문입니다. 유영철은 범행 수법을 바꾸었고, 그 탓에 권일용은 이전 사건과 이후 사건을 연결짓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정통 수사기법의 한계도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수사팀은 대낮에 범행을 저지르고 피가 묻은 상태에서 도망을 갔는데도 목격자가 없다는 점에 착안하여 차량을 이용한 범죄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습니다. 그리고 차량 수색에 집중했지요. 하지만 권일용은 시대가 바뀌어서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지 않는걸 깨닫고, 차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들어맞았습니다.
최초 노인 살인 사건 현장 근처에 교회가 있었던게 나름 의미가 있었다는 것도 권일용의 생각대로였습니다. 유영철은 '교회가 옆에 있지만 바로 앞에 사는 이 사람도 무참히 죽는다’라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고 합니다.
물론 사체 매장 현장에 표식을 한건 완전히 헛다리를 짚기는 했습니다. 권일용은 범인이 자신의 살인 행위를 반추하고 되돌아볼 것이라는 낭만적인 추정을 했는데, 유영철은 그냥 '사체를 묻은 데를 또 파면 귀찮아서' 표시를 한 것 뿐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단순한 실패보다는 나름 성과가 있었던 유영철 사건이 있었던 덕분에 권일용은 더욱 성장했고, 경찰 내에도 프로파일링 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뒤이은 정남규 사건에서는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단순 강도 상해범으로 체포되었던 정남규가 서울 서남부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임이 드러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자백을 권일용이 이끌어내게 되거든요.

2009년 강호순 사건에서도 권일용 팀의 분석이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 범인은 '호의동승'으로 피해자들을 유인했고, 이를 위해 고급차를 탔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인물일거라는 분석이었는데 실제로 강호순은 에쿠스를 탔으며, 범행 당시 깔끔한 양복을 입기도 했고, 차 대쉬보드 위에 개와 함께 있는 사진을 장식해 놓는 등 치밀하게 본인을 위장했다고 밝혀졌으니까요. 주변 사람들 평가도 굉장히 좋았다고 하지요

강호순 사건 중간에 맡았던 2007년 제주에서 발생했던 아동 성범죄자 성유철 사건은, 프로파일링의 활용보다는 아동 성범죄에 대한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2007년에 벌어졌던 고정민 (가명) 양 실종 사건에서는 사람의 자백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실제 범행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거짓 자백에 이르는 과정과 거짓 자백 후 범행의 줄거리를 지어내는 모습 모두 교과서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더라고요. 흔히 이야기하는, 성폭행 피해자들이 확 물어버리고 소리를 지르는걸 왜 못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체를 제대로 설명하기는 힘든 '공포심' 때문이라는데 굉장히 와 닿았어요.

또 끔찍한 연쇄 살인 사건을 통해 1960~1970년대에는 살인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죄였는데, 왜 그 양상이 달라졌는지에 대한 분석도 상세합니다. 자본주의로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사회가 일부 구성원들을 스트레스로 압착할 때 일부 반사회적인 범죄자들이 복수심으로 무차별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살인자의 반사회성은 후천적 영향일 가능성이 높고요. 서구 사회에서는 반사회성에 유전적 요인이 있다고 여기지만, 단일 민족인 한국에서 유전적 이유로 누구는 괴물이 된다는 건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인데 그럴듯합니다. 복수심, 사회에 대한 분노로 가득차 있었던 유영철, 정남규와는 다르게 진짜 서구적인 쾌락 연쇄 살인을 저지른 강호순과의 차이도 잘 드러나고요. 하지만 저는, 과거에도 잔혹 범죄는 존재했던 만큼 연쇄 살인이 양극화로 더 증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경찰 수사력의 발달로 과거 사건화되지 않았던 사건들도 밝혀지고, 이게 과거보다 발달한 매스컴을 통해 널리 알려진 탓에 증가한걸로 보이는게 아닌가 싶거든요. 이런 부분에 있어 깊게 연구된 자료가 있으면 좋겠네요.

그 외 단순히 당시 벌어졌던 범죄와 그 수사, 해결 과정 뿐 아니라 수사에 참여했던 프로파일러들의 생각과 행동도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프로파일러가 무슨 마법사나 천재가 아니라, 수사를 돕는 역할이라는게 잘 드러나지요. 수사 현장에서 쓰이는 전문적인 은어 등 디테일도 좋습니다. 그리고 피해자 가족들의 가슴 아픈 현실도 충분히 설명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사형 제도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잠깐 스쳐지나가듯 등장하기는 하지만, 권일용도 사형 집행에 찬성하는 입장이더군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도소에서 교정, 교화가 가능하다고 쳐도,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의 중죄를 저지른 범인을 교정, 교화시켜 사회에 복귀시킬 이유는 없습니다.

이렇게 여러모로 읽어 볼 만한 논픽션인건 분명한데, 건조한 르포르타쥬 문체가 아니라 권일용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적인 구성과 문체로 쓰여진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데, 저는 확실히 불호 쪽이에요. 분명 실화인데 뭔가 각색되어서 왜곡되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국 프로파일링의 역사를 담기 위한 취지 탓이었겠지만, 익히 알려진 사건에서 누구나 다 아는 정보를 빼곡하게 채워 놓은 부분들도 조금은 아쉬웠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한국 범죄사, 프로파일링 역사에 대해 알고싶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4/05/20

64 - 요코야마 히데오 / 최고은 : 별점 3.5점

64 - 8점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검은숲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형사부에서 홍보담당관으로 발령난 미카미는 교통사고 가해자 익명 보도건 때문에 기자단과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허나 경찰총장의 방문이 예정되어 어느 때보다 기자단의 역할, 홍보담당관의 역할이 중요해져 난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중, 경찰총장의 방문이 사실은 형사부장을 캐리어로 교체하려는 의도라는 걸 알아챘다. 형사의 피가 흐르는 탓에 이러한 음모에 맞서지만, 딸의 가출 후 조사를 도와준 경무부장 아카마와 알력다툼이 벌어지던 와중에 14년 전에 벌어졌던 유괴사건, 속칭 64 사건을 쏙 빼닮은 사건이 발생하는데...

경찰이라는 조직과 그 조직에서 겉돌게 되는, 그러나 천상 경찰일 수밖에 없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경찰 소설입니다. 작가 요코야마 히데오는 이와 유사하게 조직과 개인의 갈등이 주요 소재인, 경찰이 등장하는 일련의 시리즈로 잘 알려진 유명 작가지요. 제가 리뷰를 쓴 작품도 제법 됩니다.

이 작품은 거의 700페이지에 이르는 대장편입니다. 분량에 걸맞게 여러 가지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데, 간략하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미카미의 딸 가출 사건
  • 14년 전에 벌어져 아직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 채 시효가 코앞으로 다가온 유괴살인사건 64
  • "고다 메모"라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64사건 당시 일어났던 형사부의 치부
  • 주변 인물들에게 걸려온 장난전화
  • 형사부장을 캐리어로 교체하려는 본청 / 경무부의 음모와 이에 맞서는 형사부
  • 기자단과 홍보실의 다툼
  • 메사키 가스미 유괴사건

이러한 사건들이 64사건의 범인 체포라는 큰 주제로 묶이는데, 뭐 하나 허투루 진행되는 것이 없고 이야기 하나가 완결되면 또다시 위기가 닥치는 연재소설 같은 구성을 갖추고 있어서 흡입력이 대단합니다. 그야말로 지하철에서 읽다 보면 내릴 정거장을 깜빡해서 지나치게 만들정도로요(저는 한 정거장 지나쳤습니다).

경찰 출신이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현실감 넘치는 묘사도 여전합니다. 경찰 내 복잡한 조직 구성 및 조직 간 역할 관계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해주는 작품이 있을까 싶네요. 비교할만한 "제 3의 시효"역시 같은 작가 작품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경찰에 대한 깊은 내공이 다시금 느껴집니다.
또 법의관이나 형사가 주인공인 작품은 많이 있지만, 이 작품처럼 홍보담당관이 주인공인 작품은 처음이라 더욱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관련된 디테일도 대단하고요. 경찰 담당 기자가 나오는 오시마 야스이치의 "특종 사건현장"과 여러모로 비교되는데, 만화에서는 기자와 경찰이 서로 협력 관계로 공생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이 작품에서는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모습으로 주로 그려진다는 차이가 크게 다가옵니다.

경찰이라는 무대 설정만이 특이한 게 아니라 추리적으로도 제법 괜찮습니다. 미카미가 "고다 메모"를 둘러싼 수수께끼를 파헤치는 수사 과정의 디테일도 볼거리이지만, 64사건에서 범인이 몸값 회수에 성공하는 트릭도 괜찮습니다. 유괴범이 범행에 성공한다는 전개의 작품은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64사건의 피해자 아마미야가 유괴범의 목소리를 확인하기 위해 현 내의 사람들에게 전화번호부 순서대로 전화를 한다는 진상이 백미입니다. 이 설정에서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라 생각될 정도로 뛰어난 아이디어였어요. 아-이-우-에-오 순으로 이어진다는 트릭적인 요소도 충분히 설득력 있을 뿐더러, 딸을 잃고 남은 게 없는 아버지의 절절함이 전해지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사고 당시 실수의 충격으로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버린 히요시가 자신의 경력(NTT 직원)을 이용하여 독자적으로 수사를 벌인 것이라 예상했었는데, 의외의 진상이라 더욱 놀랐습니다.

결말도 인상적입니다. 미카미의 딸 아유미가 어떻게 되었는지, 메사키가 정말로 64의 진범인지(먹어버린 메모지에 쓰인 글귀는 무엇인지), 고다 메모를 둘러싼 형사부의 치부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결국 하나도 정리되지 않고 끝납니다. 이러한 것들을 미카미가 짊어지고 끝까지 책임지겠구나 하는 정도로 마무리하는데 무척 세련되면서도 진한 여운을 남기는 결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존재합니다. 가장 중요한 메사키 가스미 유괴사건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메사키가 경찰에 신고했으리라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메사키를 경찰에게 넘겨준다는 일련의 행동은 수사 지휘관 마쓰오카가 메사키가 64사건의 범인임을 눈치채고 모든 진상을 파악했으리라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데 솔직히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무슨 초능력자도 아니고... 이런 번잡하고 불편한, 그리고 범죄에 가까운 사건을 벌이느니 청장이 방문하기로 했을 때 청장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게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겁니다. 대형 범죄를 저지른 메사키가 같은 현에서 계속 살아왔다는 것도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고요.

그 외에도 경무부와 형사부의 갈등 관계를 만드는 후타와타리가 고다 메모를 들먹이며 형사부를 들쑤시는 행동의 저의가 조직을 지키기 위한 선의였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냥 소문만 흘리는 게 훨씬 간단했을 테니까요. 이는 이야기를 번잡스럽게 만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여경 미쿠모도 왜 등장하는지 잘 모르겠더군요. "얼굴"의 미즈호를 객관적으로 그린 듯한, 여경이지만 일 욕심 있고 남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인물인데 이야기에서 별 영향을 주지도 않고, 작품 내에서 뚜렷이 성장하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 탓입니다. 그냥 얼굴마담에 불과해서 아니 나오니만 못했습니다.

그래도 문학적 성취와 대중소설의 재미, 추리적 완성도도 두루 갖춘 좋은 작품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재미와 함께 유괴라는 범죄의 비정함, 자녀를 잃은 부모의 마음 등을 드러내는 데 성공하고 있으니까요. 너무 길다 싶긴 하지만, 주변에서 들리는 호평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경찰이 등장하는 경찰 수사, 추리소설을 좋아하신다면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아버지 얼굴과 똑같은 얼굴로 생겼다고 좌절하여 가출까지 하다니... 저 역시 딸아이 아버지일 뿐더러 딸아이가 저하고 똑같이 생겼다는 말을 많이 듣는지라 벌써부터 걱정이 됩니다.

2020/09/01

익명의 전화 - 야쿠마루 가쿠 / 최재호 : 별점 1.5점

익명의 전화 - 4점
야쿠마루 가쿠 지음, 최재호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년 전, 담당도 아니었던 아라이 사건을 수사하다가 누명을 쓰고 경찰에서 쫓겨난 아사쿠라는 그 뒤 가족과도 등을 돌렸다. 그러나 딸 아즈사가 유괴당한 뒤, 유괴범을 홀로 잡으려다가 유괴범들의 목적이 3년 전 사건의 진실이라는걸 알게 되는데...

흥미를 자아내는 설정, 몰입감을 주는 전개로 다수의 인기 작품을 발표한 작가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도 도입부만큼은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야기의 설득력이 낮은 탓입니다.
3년 전, 마약에 취해 사고를 일으켜 유치원생을 포함한 7명을 사망케 한 아라이 사건의 진실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라이 사건을 몰래 수사하다가 경찰 조직에 의해 인생을 망친 경찰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고요. 그렇다면 당연히 그 경찰을 만나서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다시 떳떳해지자고 설득하는게 순서일겁니다. 그런데 대뜸 유괴부터 한다? 대체 어디서 나온 생각인지 모르겠네요.
유괴범들이 나오미와 아사쿠라가 몸값을 들고 뺑뺑이 돌게 만들 이유도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몸값은 아라이 사건의 진상이라고 요구하면 되니까요. 경찰인 치하루가 유괴범 중 한 명이었으니, 뺑뺑이를 통해 경찰 신고 여부를 파악할 필요도 없어요. 오히려 이 과정에서 아사쿠라가 유괴범으로 몰리기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생겨서 조사만 불편해지고,1억이라는 돈을 낭비하기만 했을 뿐입니다. 심지어 1억은 마약상에게 준거라 동정의 여지도 없고요. 

뺑뺑이 과정도 복잡하게 서술하여 치밀해 보이지만 나오미가 범인이 준, 거는게 불가능한 핸드폰을 가지고 범인에게 휘둘리는 장면에서 메모를 적어 역무원이나 건물 경비원에게 줄 생각은 왜 못했는지 등의 단점만 눈에 띕니다. 유괴극이니 반드시 몸값 전달하는 장면이 등장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등장한 장면이 아닐까 생각되더군요. 아사쿠라가 이미 남과 같은 자신에게 처음 전화가 걸려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내 나오미가 경찰에 신고하려는걸 막는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건 마찬가지에요.

이후 아사쿠라가 아라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과정은 더 가관입니다. 현직 경찰 시절에 몇일에 걸쳐 조사해도 밝혀내지 못했던 진상을, 경찰에 쫓기는 수배자 신세로 하룻밤만에 알아낸다? 설득력이 없습니다. 사기꾼 범죄자 키시타니의 도움이 있기는 하지만, 현역 경찰 신분에서 발휘할 수 있는 수사력과는 비교하기 어렵지요.
조사 방법도 스스로를 미끼로 내걸어 경찰의 움직임을 떠 본다던가, 급작스럽게 카라키를 불러낸 뒤 먼 곳에서 쌍안경 관찰로 의중을 파악한다던가, 일부러 아라이의 공범이었던 이와키가 속한 조직에게 잡혀간다는 식으로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계획과는 무관한 즉흥적인 발상 투성이입니다. 이 모든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도 맞으면서 버티는 '몸빵' 밖에는 없고요.

진상을 알아낸 것도 아라이의 공범인 전직 경찰 이와키를 찾아내 이야기를 듣는게 전부인데, 역시 어처구니 없습니다. 사고는 도주하던 아라이가 경찰의 총에 맞아 일어났으며, 아라이는 유력 정치인 니시자와를 협박하던 범인이었기 때문이라는게 겁니다. 니시자와는 매춘부 아케미와 마약을 하다가 아케미가 죽게되자 아는 경찰을 통해 사건을 무마시키켰는데, 이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던 거지요. 그래서 니시자와와 연결되었던 경찰이 무리해서 협박범을 잡으려다가 사고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니시자와의 관계 여부를 떠나서 일곱 명이나 죽은, 그것도 희생자 중에 어린 유치원생이 포함된 사건을 덮는다는게 21세기에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총소리를 들은 증인이 분명히 있었고, 당시 수사를 하던 아사쿠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정도였는데 말이죠. 게다가 생존한 유치원 버스 운전사 미카미의 입을 막기 위해 그를 살해했다? 이 정도면 거의 국가에서 움직여 조작한 수준입니다. 주택가에서 차량 추격 중 총질을 한다는 헐리우드 영화스러운 발상도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또 이 진상은 마지막 클라이막스를 어색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사건 은폐에 앞장서던 카라키가 나오미에게 위증을 강요하는 대화는 다 녹음되었고, 카라키가 아사쿠라를 협박하는 영상까지 찍혀 완벽하게 외통수에 몰리게 되기는 하지만 , 7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은 사고를 덮었는데 고작 이 정도 사건을 덮지 못한다는건 설득력이 약한 탓입니다. 아사쿠라가 이와키로부터 확보한 증거도 빈약하기 짝이 없으니까요. 최소한 니시자와와 아케미가 함께 마약을 하고 정사를 나누던 비디오 테이프는 확보했어야 했습니다. 지문이 묻은 마약 봉투와 영수증 따위는 증거가 될 수 없어요. 봉투와 영수증의 지문이야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잖아요? 솔직히 증거로서의 효력은 없습니다.
설령 증거가 된다고 한 들, 니시자와가 마약을 했다는 증거이지 그가 아케미 사건, 그리고 아라이 사건에 관계되어 있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사건 은폐에 앞장섰던 장인 마사타카가 아사쿠라의 호소에 개심해서 자수한다는 끝맺음은 최악 중 최악이고요.

그 외에도, 유괴 수사를 벌이는 와중에 유괴 아동의 어머니인 나오미가 태연하게 외출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돌아다니는 전개도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유괴와 상관없는 제3자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거든요. 조력자로 등장하는 토다의 존재도 불필요했습니다. 나오미가 아사쿠라의 진심을 알게되는 계기가 된 증언을 한 게 전부니까요. 이는 치하루가 해도 되는 역할입니다. 토다의 과거도 뻔하디 뻔하고요. 단순한 분량 늘리기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재미와 설득력, 현실성 등 뭐 하나 갖추지 못하고 흔해빠진 설정들로만 이루어진 졸작입니다. 찾아서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04/11/04

화성 여대생 실종 사건

요새 매스컴에서 많이 인용되는 화성 여대생 실종 사건에 대한 현재까지의 개요입니다. 주변분들 정말 걱정 많으시겠습니다. 꼭 범인을 검거했으면 좋겠네요. 제가 "구석의 노인"은 아니지만 어떤 단서라도 찾을 수 있으면.. 하고 검토해 보았는데 어렵군요. "강남에서 목격된 납치 여성"에 대한 수사가 이루어 지고 있지 않는게 좀 이상합니다. 중점 수사를 해야 하는 상황인 것 같은데 말이죠....
이젠 공개수사로 전환하였고 경찰도 노력하고 있는 만큼 좋은 결과 있기를 기원합니다.

2004년 10월 27일 :
K대 2년 N양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이 PM 08:30, 에서 3Km 떨어진 경기도 화성의 한 스포츠 센터 (화성 복지관) 에서 1시간 동안 초급반 수영 강습을 받은 후, 집에 들어가겠다는 휴대 전화 메시지를 남긴 후 연락 두절. 어머니가 PM 11:00경 화성서 태안 지구대에 신고.

2004년 10월 28일 :
AM 07:30 경 화성 복지관과 반대편으로 4.2Km 떨어진 모 아파트 식당 앞길에서 휴대 전화 발견. 이어 N씨의 집과 휴대 전화가 발견된 식당 앞 사이 도로변에서 검정색 가디건, 보라색 티셔츠, 청바지,브래지어,운동화(왼쪽),운동화(오른쪽) 등 N씨의 유류품이 100 ∼700m간격을 두고 발견.

N씨의 귀가길과 유류품이 발견된 도로는 43번 국도로 향하는 편도 1차선 도로로 보통리 저수지를 둘러싸고 카페와 식당 등이 연이어 있어 일반인이나 아베크족 차량 의 왕래가 적지 않은 곳.

경찰은 최소 2명이상이 차량을 이용해 N씨를 납치한 것으로 보고 N씨 주변인물과 동네 우범자 등을 상대로 수사중. 특히 화성 연쇄 살인 사건 피살체가 발견된 곳과 반경 5Km 내의 사건 집중 발생 지역인 점을 중시, 화성사건과의 관련여부에도 주목하고 있음.

한편 같은날 AM 08:30 경 서울 강남의 한 주유소에서 검은색 뉴 그랜저 한대가 3만원 어치 주유를 하는 과정에서 뒷 좌석에 납치된 듯한 여성이 타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으나 차량은 차적 조회 결과 등록되지 않은 대포차로 판명되었고 목격된 여성이 N모양과 같은 긴 머리라는 것과 실종 사건 발생 바로 다음날 목격되었다는 점을 중시하여 연관성 집중 조사 중.

2004년 10월 29일 :
경찰은 경진여객 소속 34번 시내버스에 설치된 CCTV를 통해 27일 PM 08:25 N씨가 태안읍 화성복지관 정류장에서 승차하는 장면이 찍혀있음을 확인. N씨가 청바지에 셔츠, 점퍼 차림에 가방을 메고 있었으며 탑승 10분 뒤인 오후 8시35분께 하차하는 모습도 확인됨.

경찰은 화성복지관 정류장에서 시내버스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정거장이 융.건 릉 정류장(4분15∼37초)을 한 정류장 지난 와우리공단정류장(5분20여초)인 것으로 실측을 통해 확인.

경찰은 N씨 가족의 진술을 통해 N씨가 평소 수영을 마치고 버스를 탈 경우에는 와우리공단 정류장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집에 온다는 사실을 추가로 확인.

이에 따라 경찰은 N씨가 와우리공단에서 집에 오는 사이 또는 집근처에 도착해서 납치 등 범죄피해를 당했을 것으로 추정, 태안과 봉담 등 납치 의심 장소 일대를 운행하는 화성 지역 택시를 상대로 사건 당일 N씨의 승차여부 조사 중.

2004년 10월 30일 :
경찰은 집 근처 도로에서 발견된 A씨의 청바지에서 혈흔 및 모발이 발견됐고 엉덩이 부분에 흙이 많이 묻어 있으며 상의에는 발견지점 에서 자라지 않는 풀이 묻어 있는 점으로 미뤄 범인이 제3의 장 소에서 범행을 한 뒤 옷가지를 나중에 버린것으로 추정 중. 혈흔 및 발견된 모발 8점의 정밀 감식 의뢰.

유류품 감식 결과 옷에 붙어 있던 풀은 음지에서 자라는 주름 조개풀임을 확인. 발견된 풀을 근거로 실종 직후 인근 야산을 거쳐갔을 것으로 보고 집중 수색.

또한 속옷 등이 집에서 2Km 떨어진 보통리 저수지 밑 둑에서 추가 발견. 저수지 수색 작업 병행 진행.

2004년 10월 31일 :
30일 속옷 등이 발견된 정남면 보통리 저수지에서 보통리 마을 방향으로 1.2 Km 떨어진 도로변에서 N양의 수영복과 수영모, 물안경 등 추가 유류품 발견. 이에 따라 범인들이 차량으로 이동하며 유류품을 유기한 것으로 추정.

이후 발견 장소에서 1Km 떨어진 곳에서 쇼핑백 추가 발견.

2004년 11월 1일 :
N양의 최후 목격자로 보이는 여성의 CCTV확보. N양이 하차한 정류장에서 함께 버스에서 내린 것으로 확인된 여성이 수원 영통 그랜드 백화점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탄 것을 확인. 목격자 신원 확인에 주력.

2004년 11월 2일 :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해 시내버스 CC(폐쇄회로)TV를 정밀분석한 결과 여대생이 하차할 당시 형상이 뚜렷하지 않은 남자 1명이 와우리공단 정류장에서 여성 1명과 함께 내려 여대생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찍혀 있는 것을 확인. 경찰은 최초 경기경찰청에서 분석할 당시에는 CCTV 화질이 좋지 않아 남자의 형상을 잘 분간할 수 없었다고 설명. 이어 남자의 신원을 밝히는데 수사력 집중.

경찰은 이와 함께 속옷 등 유류품 발견지점 인근인 화성시 봉담읍 보통리저수지 물을 빼 수색작업을 벌이기로 하고 이날 오전 11시30분쯤 수문을 열고 물빼기 작업에 착수.

2004년 11월 3일 :
N양과 함께 내린 여성 신원 확인. 이 여성이 교통카드 (신용카드 겸용)로 버스 요금을 지불했다는 사실을 CCTV 정밀 분석을 통해 밝혀낸 후 교통 카드에 대한 압수 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카드 사용자 신원 확인. 하지만 경찰 조사에서 이 30대 여성은 함께 내린 여대생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

2004년 11월 4일 :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에서 목격 여성 상대로 최면 수사 진행.

2023/11/04

허상의 어릿광대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점

허상의 어릿광대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최신작. 모두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가로서 원숙기를 넘어선 달인의 경지에 이른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드라마 전개가 능수능란합니다. 사건에서의 불가능한 현상 조사를 구사나기가 의뢰하는 단순한 패턴에서 벗어나서, 유가와가 사건에 뛰어드는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며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끼워넣는 솜씨가 기가 막힐 정도에요. 덕분에 유가와의 조사도 사건과 별 관계가 없는 이야기 - "2장 투시하다", "4장 휘다" - 와, 반대로 유가와가 경찰까지 속여가며 범인의 실수를 유도하는 이야기 - "5장 보내다" - 가 공존하는 등, 변주의 폭도 굉장히 넓습니다. 이렇게 내용을 풍성하게 가져간건 영상화를 염두에 둔 행보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네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그닥이었습니다.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라 할 수 있는 과학을 이용한 트릭들이 별로인 탓이 큽니다. 추리의 여지도 많지 않습니다. 유가와의 도움 없이 경찰 수사만으로 범인이 밝혀지는 이야기도 많은데다가, 동기 면에서 설득력이 부족한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에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이야기꾼으로서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능력은 느껴지지만, 정교한 본격 추리물로의 가치는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장 현혹하다"
종교단체 구아이회의 교조 렌자키는 "염"을 사람에게 보내는 능력이 있었다. 주간지 기자가 취재차 참석한 자리에서 경리담당 부장 나카가미가 염을 받다가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아무도 나카가미에게 손을 대지 않아서 사건은 자살로 굳어져 갔고, 기자도 '염'을 받고 몸이 따뜻해짐을 느낀 뒤 기사를 발표해서 구아이회의 교세는 더 확장되어 갔는데....

상대방의 몸을 따뜻하게 만들고, 경우에 따라 자살까지 유도한 방법이 무엇인지가 핵심 수수께끼입니다. 유가와가 밝혀낸 진상은 일종의 '전자레인지' 효과였습니다. 원격으로 상대방에게 투사하여, 피부 아래를 따뜻하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추리의 여지는 없다시피 합니다. 애초에 교조가 '염'을 보내는건 특별한 방 안에서만 가능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방에 무언가 장치가 되어 있다는건 당연합니다. 경찰이 진작에 수색 영장을 발급받아 건물을 조사하지 않은게 의아할 뿐입니다. 
또 장치 출력을 강하게 해서 나카가미가 지독한 뜨거움으로부터 도망치려다 자살하도록 유도했다는 진상은 다소 억지스러웠습니다. 상식적으로 나카가미가 조금만 자리를 이동해도 뜨거움으로부터 해방되었어야 하거든요. 방 안의 모든 사람이 '염'을 받으면 안되니 장치는 명확한 조준이 필요했을테고, 그 범위도 그리 넓지 않았을테니까요.
유가와가 대학 노트 사이에 감열지를 숨겨놓아서 트릭을 눈치챘다는 방법도 이상했습니다. 그냥 주머니같은데 넣어 두었어도 똑같았을텐데, 지나치게 멋을 부리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트릭 만큼은 과학적 근거가 있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들은 모두 아쉬웠습니다.

"2장 투시하다"
투시 능력이 있는 호스티스 미카가 살해당했다. 수사 결과 손님이었던 니시하타가 범인이었다. 가방에 넣어두었던 공금 횡령의 증거를 미카가 투시했던게 동기였다. 그런데 미카는 어떻게 명함과 가방을 투시했을까?

구사나가기 해결하기 어려운 트릭을 밝혀내기 위해 유가와를 찾아가곤 했던 그간 시리즈의 전개 방식과는 조금 다릅니다. 구사나기의 수사만으로 범인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사체에 남겨졌던 희귀한 담뱃재가 클럽 손님 중 한 명과 관련이 있었고, 그와 같은 회사에 다녔던 니시하타가 미카와 마지막에 만났던 손님이었다는걸 알아내서 체포로 이어지게 되거든요. 
그래도 유가와도 범인 체포와는 무관하게 미카의 투시가 적외선 카메라를 이용했다는걸 밝혀내는 활약을 선보입니다. 최신 장비인데 나름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밝혀낸 단서가 계모의 진심을 담은 메모를 찍은 사진이었다는 전개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작 중에서처럼 명함을 읽는게 문제가 없을 정도로 잘 찍힐까?라는 의문은 가시지않았고, 어두운 바나 영화관 같은 공간에서 카메라로 찍은 결과물을 확인했다면 들통났을 것 - 밝은 액정 화면이 티가 날테니 - 같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경찰이 가택 수사를 했음에도 이 특수한 카메라의 존재를 알아내지 못한 것도 이상하고요. 무엇보다도 미카와 계모와의 관계를 다룬 신파조의 이야기는 많이 유치했습니다. 우리나라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3장 들리다"
구사나기는 병원에서 난동을 부리던 환자 가야마를 제압하다가 부상을 입고 입원했다. 가야마는 환청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수사해보니 가야마와 같은 회사에 근무했던 영업부장 하야미 다쓰로가 기묘한 단어를 검색한 뒤 자살했었다는게 밝혀졌다.

범인이 피해자들에게 환청을 들리게 만들었다는건 추리할 필요도 없습니다. 초반에 이명 현상을 겪는 여직원 무쓰미가 등장했고, 가야마가 환청 현상을 겪었다고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어떤 기술을 이용했는지만이 궁금할 뿐인데, 범인이 전자파를 피해자들 머리에 쏴서 소리를 들리게 했다는 진상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작중에서도 소형화가 어렵다는 설명이 될 정도의 장치인데, 이런걸 개인이 개발해서 소지하고 운용한다는건 비현실적이니까요.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남 탓만하는 범인 고나카 설정도 진부했고요.

수사를 구사나기의 경찰학교 동창이자 관할서 형사인 기타하라가 맡도록 해서 수사 1과와 관할서 사이 갈등을 그려낸건 좋았고, 유가와의 논리 정연함을 기타하라와의 대화를 통해 새삼 드러내는 솜씨는 좋았지만 이야기에 별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4장 휘다"
프로야구 선수 야나기사와의 아내가 강도에게 살해당했다. 수사를 맡았던 구사나기는 방출 후 트라이아웃을 준비하던 야나기사와가 전성기 때의 폼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이런저런 데이터 측정을 도와줄 수 있는 유가와를 소개시켜주었다. 그러나 상심에 빠진 야나기사와의 기량은 좀처럼 올라오지 않는데...

강도 살인사건 범인은 구사나기에 의해 쉽게 체포됩니다. 이후 야나기사와의 재활과 더불어 피해자 다에코가 가지고 있던 쇼핑백 속 선물이었던 자명종을 누구에게 주려고 했는지?를 밝혀내는 전개로 진행됩니다. 이런 점에서는 강력 사건이 등장하지만 일상계에 가까운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에코가 '자명종'을 남편의 현역 생활 연장에 도움이 될 대만 프로야구 관계자에게 선물하려 했고, 중국에서는 시계를 선물하는 행위인 '송종'의 발음이 '임종'과 똑같아 자명종 선물을 받지 않았다는 진상도 일상계스러웠고요. 

다에코가 타고 있던 차에 소화기 분말이 묻었다는걸 알고, 호텔 주차장에서 소화기가 분출된 시간을 알아내서 다에코가 누구를 만났는지를 조사하는건 경찰 구사나기가 아니
었다면 조금 힘들었겠지만, 일상계물로 높은 점수를 줄 만한 수작입니다. 이런저런 에피소드들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 이번 단편집 수록작들 중에서도 에피소드들이 가장 잘 어우러진다는 점도 마음에 들고요. 별점은 3.5점입니다.

"5장 보내다"
하루나는 텔레파시로 쌍둥이 언니 와카나에게 불길한 일이 일어났다고 느껴 형부 이소가이에게 연락했다. 서둘러 귀가한 이소가이는 중상을 입은 와카나를 발견했다....

쌍둥이 사이에 텔레파시가 오갈 수 있다는걸 범인도 믿을 수 있게끔 그럴듯하게 설명한 뒤, 범인의 실수 - 친한 지인인 진범을 모른척하고, 진범이 외모를 크게 바꾸는 등 - 를 유도한다는 설정은 좋았습니다. 데이토 대학 교수 유가와가 직접 나서서 텔레파시가 근거가 있는 것 처럼 조사했기 때문에 범인도 깜빡 속아넘어갔던 것이지요. 이 모든걸 안배한 유가와의 추리와 능력이 빛나는 이야기였습니다. 텔레파시는 실체가 없지만, 자매간의 정은 유효하다는 결말도 좋았고요. 

다만 이소가이의 동기가 명확하므로, 경찰 수사로 충분히 범행이 드러나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6장 위장하다"
구사나가와 유가와는 시골 읍장이 된 대학 동창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살인 사건 수사를 돕게 되었다. 유가와는 구사나기가 찍은 현장 사진을 보고 현장이 조작되었다는걸 알아내는데....

흔들의자에 앉은채 산탄총에 맞은 시체라는 현장 사진만 보고 조작을 눈치챈 유가와의 추리력은 빛납니다. 운동에너지, 작용과 반작용을 언급하며, 흔들의자에 앉은 사람이 총에 맞으면 반동 때문에 앞으로 쓰러질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인데 그야말로 물리학자다운 추리였어요. 발견자 다에가 현장을 조작한 이유도 그럴듯했습니다. 원래는 의붓아버지 다케히사가 다에의 친모인 아내를 죽이고 자살했습니다. 그런데 다에의 어머니가 먼저 죽으면, 다에는 유산을 상속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순서가 반대인 것처럼 현장을 조작했던 겁니다.

다만 사건의 동기인 아내의 불륜은 식상했으며 , 다에가 현장을 조작했다는 증거가 거의 없는데 이를 유가와의 말대로 '우수한 일본 경찰'이 현장 조사로 밝혀낼 수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7장 연기하다"
극단 '파란 여우'의 연출가 고마이가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는 전 애인 아쓰코로, 그녀의 알리바이 트릭은 구사나기가 이미 밝혀냈지만,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유가와는 소도구인 칼이 흉기라는건 이상하다는데 주목하여 진상을 추리해낸다.

아쓰코가 고마이를 찌르고 휴대폰을 조작하여 알리바이를 만드는 과정이 맨 처음에 나오는 도서 추리물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그런대로 공들인, 정교한 트릭이라 생각하고 흥미롭게 읽었는데 곧바로 구사나기가 모든걸 꿰뚫어보고 밝혀내서 좀 놀랐습니다. 구사나가도 그리 만만한 친구는 아니네요. 
고마이의 현 애인 구도 사토미가 진범이었다는 반전도 의외였으며, 경찰이 사건 진상을 파헤치기 힘들었던 불꽃놀이 사진은 단순히 유리창 반사에 의한 현상이었다는 디테일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살인범이 되어 경찰에게 쫓기는 심리를 느껴보고 싶었다'는 아쓰코의 동기, 그리고 재봉 가위를 흉기로 사용한 사토미의 범행을 감추기 위해 극단 소도구인 칼을 흉기로 위장한건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범인을 극단 사람 내부인으로 한정해버리면 기껏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짜낸 트릭들의 가치도 떨어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0/05/24

폐허에 바라다 - 사사키 조 / 이기웅 : 별점 2.5점

폐허에 바라다 - 6점
사사키 조 지음, 이기웅 옮김/북홀릭(bookholic)

"에토로후 발 긴급전"의 작가 사사키 조단편집입니다. 홋카이도 도경 경부보 센도 타카시가 이런저런 부탁으로 개인적인 수사를 벌인다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탐정사전"에서 멋지게 소개된 덕에 기억하고 있다가, 우연찮게 읽게 되었네요. 

센도는 이전 사건 때문에 PTSD 장애를 입어 현장에 복귀하지 못하고 장기 요양 중으로, 의사 말에 따르면 "경찰에 관련된 일은 모두 잊어라, 가능하면 신문도 읽지 마라, 책은 읽어도 상관없지만 범죄 소설은 금물이다"라는 상황이지만 주위의 요구에 응해 이런저런 방법으로 수사를 돕습니다.

니세코 스키장, 홋카이도 동부 토카치 온천 여관, 유바리 시, 삿포로 시내, 히다카 등 북쪽 지방 이곳저곳을 자동차로 돌아다니며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데, 관련 묘사들이 인상적입니다. 예를 들어, "폐허에 바라다" 속 소도시는 가공의 마을 같지만 그렇게 생각되지 않아요. 유바리 시 인근 쿠라야마 초 등 현존하는 곳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덧붙여진 덕분입니다. 마을로 향하는 길에 대한 묘사는, 지금이라도 차를 타고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거든요. 연어 정치망 어업과 가리비 양식이 주인 오오츠크해 연안 항구 마을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러한 묘사 덕분에 여정 미스터리 느낌도 강하게 전해 줍니다. 또 매 이야기마다 실제 사건을 담당한 형사가 등장하는데, 제각각 독특한 개성을 뽐내는 것도 재미요소에요. 사건 해결을 위해 센도를 이용하는 형사가 있는가하면 센도를 방해꾼 취급하면서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형사도 있고, 애주가도 있고 패션 감각이 빼어난 패셔니스타도 있거든요. 무엇보다도 나오키 상을 수상했을 만큼 문학적인 묘사가 돋보입니다. 사회파스럽게 현실에 대한 고발, 비판 의식을 이야기에 잘 담아낸 솜씨도 빼어나고요.

그러나 현실 고발없이 단순 범죄에 대한 이야기로만 끌고간 몇 몇 작품들은 기대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그냥 멋드러지게 쓴 범죄가 등장하는 드라마일 뿐, 추리 소설이나 범죄, 수사물로 보기에는 영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합한 별점은 2.5점. 문학적으로는 근사하고, 뭔가 품격이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추리적으로 빼어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저와 같이 추리물에는 어느 정도 수수께끼 풀이나 트릭같은 요소가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추리 애호가 분들께는 별로 권해드리고 싶지 않네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지가 좋아하는 마을"

60여 페이지에 불과한 짤막한 단편입니다. 이야기도 대단한건 없어요. 센도 타카시가 휴직 중인 탓에 치밀한 수사를 벌일 수도 없고요. 하지만 고작 하룻밤 조사로 아서에게 쏠린 혐의를 돌릴만한 정황 증거를 담당 형사에게 들이민다는건 너무하다 싶었어요. 그것도 잠깐 관계자 옆자리에 동석했던 정도라면, 현재 담당 경찰들이 수사를 등한시 했다는 이야기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현지 경찰들이 '오지'에게 한 번 맛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치더라도, 이건 너무 심하죠. 용의자 아서의 아내는 일본인이고, 그의 자식 역시 일본인일테니 이렇게 푸대접을 받을 이유도 없고요. 특별한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으며, 인간 관계 및 경제적인 이득 등 동기까지 명확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사토미와 아서가 관계를 맺었다는 등의 설정도 불필요했습니다.

스키장 마을의 묘사라던가, 이야기를 쉽고 명쾌하게 전달하는 전개는 나쁘지 않은데 특별히 점수를 줄 만 한 부분도 없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폐허에 바라다"

지독한 가난으로 어린 시절, 여동생을 죽이고 자살하려는 어머니를 목격한 뒤 범죄에 빠져버린 후루카와의 범행을 건조하게 그려냅니다. 후루카와를 한 때는 융성했지만 지금은 쇠락해버려 폐허가 되어버린 탄광촌 마을에 빗대는게 인상적이에요. 후루카와가 바란건 죽음이었고, 결국 자살로 센도 앞에서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장면은, 제목과 겹쳐지고요. 폐허에 바라는건 결국 흉물스러운 모습을 창피하게 드러내어 명줄을 유지하는게 아니라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는 뜻으로 읽히거든요. 이런 내용으로 본다면, 사회 고발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회파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 볼 만한 부분은 전혀 없습니다. 사건이 워낙 명확한 탓이에요. 후루카와와 만나기로 한 센도의 의도를 야마기시가 어떻게 알고 추적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가 있기는 하나,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아닙니다.

이렇게 형사가 등장하고, 비참한 현실과 그 때문에 생겨난 비극을 범죄 드라마로 그려내었다는 점에서는 김성종"어느 창녀의 죽음"과 비슷합니다. 드라마로서 볼 만하고, 묘사도 특출난 부분이 있지만 추리적 요소는 거의 없다는 점도 비슷하고요. 일본 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도 충분히 수긍이 갑니다. 그러나 일본의 버블 붕괴 및 지방 경기의 몰락을 그렸기 때문에, "어느 창녀의 죽음"만큼이나 우리에게 와 닿기는 힘들지요. 이런 점을 감안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

"오빠 마음"

'토'라는 어부들의 조합 때문에 사건이 벌어지는데 흉기가 어부들이 쓰는 마키리라는 등 어업과 관련된 디테일한 묘사가 돋보입니다. 지저분한 마을 유력자의 음모, 그와 손을 잡은 폭력단의 만행이 동기라는 점에서 사회파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사회 고발에만 그치지는 않습니다. 사건 속 수수께끼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용의자 이시마루가 피해자 다케우치를 폭행한건 인정했지만, 칼은 가져가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단지 칼을 가져가지 않았을 뿐, 칼로 찌른건 명백한 사실이며 이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끝에 그냥 손에 잡힌 칼로 범행을 저지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를 밝히기 위한 수사를 진행하면서, 이시마루의 가족들이 이시마루가 범인이라고 못 박은 이유가 드러나는 과정은 볼 만 했어요. 앞서 이야기한 사회파적인 고발이 함께 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단순한 센도의 추측 - 추리라고 하기는 어려운 - 만으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전개는 너무 뜬금없었습니다. 지나치게 쉽고 짧게 소비되어 버린 느낌도 들고요. "붉은 수확" 처럼 마을의 실력자, 여러 세력들 사이에서 분투하는, 장편 사회파 하드보일드물로 그려낼만한 이야기였는데 말이지요.

센도의 추리에 좀 더 설득력을 부여하고, 좀 더 드라마틱한 세력간 갈등을 그려낼 수 있는 장편이었다면 별점 3점 이상도 충분했을텐데, 지금의 결과물은 별점 2.5점입니다.

"사라진 딸"

범행은 강력하게 의심되지만, 시체가 없어서 본격적으로 수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을 그리고 있는 작품. 경찰이 직접 일을 벌일 수 없어서 경찰 타나베가 미야우치에게 센도를 소개시켜 준 것입니다. 센도가 사건을 해결한 건 타카다 방에서 발견한 평범한 스냅 사진 속 인물에게 주목했던 덕분이고요. 그 인물의 정체를 알아낸 뒤, 전화 한 통으로 시체 은닉 장소를 알아내게 되거든요. 경찰이 수사 중 간과했던 단서에 주목한게 주효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경찰 수사의 디테일 부족으로 사건이 미궁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꽤 그럴듯했습니다. 추리적으로 대단하지는 않지만 나름 현실적이기도 하고요. 시체가 발견되지 않아서 타카다의 과거를 상세하게 조사할 정도로 경찰이 수사를 확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도 설득력을 더합니다.

아주 빼어나지는 않지만, 실감나는 이야기라는건 분명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바쿠로자와의 살인"

저자 후기를 보니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영감을 받아서 썼다고 합니다. 아버지에게 아들들이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고 있고,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원수로 여기는 젊은이가 살인을 저지르도록 유도했다는 진상이 좀 비슷하기는 합니다.
여기에 더해 유언장이 주요 동기 중 하나로 등장하며, 지방 영주의 성 같다는 오하타 목장의 저택 묘사, 말을 키우는 목장 묘사 등이 더해져 굉장히 이국적인 느낌을 전해 줍니다. 일본이 아니라 영국 어딘가를 무대로 한 작품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작가의 의도는 러시아였겠지만요.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 외에, 추리적으로 건질건 없습니다. 내용을 보면, 17년 전 피해자였던 나가누마의 어린 아들이 장성해서 복수를 한게 뻔해 보이고, 새로 온 잡역부 청년 하라다가 마침 18살이라 수수께끼고 뭐고 이야기할게 별로 없네요. 오히려 하라다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지 않은 경찰의 무능함만 돋보일 뿐이에요.

추리 소설이 아니라 범죄에 대한 순문학, 드라마를 그리고 싶었다면 좀 더 길고 풍성한 묘사가 필요해 보였던 작품입니다. 지금의 결과물은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수준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복귀 전날"

센도의 PTSD의 원인이 된 사건이 회자되며 센도의 완쾌를 알리는, 단편집의 대단원을 이루는 작품. 그러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추리적으로 대단한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유미코의 전화는 도움 요청인줄 알았지만, 알고보니 하루카가 진범이라는걸 드러내기 위한 목적의 밀고 전화였다는 반전이 있기는 하지만요. 

하지만 이 역시 그렇게 의외의 반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전화 내용이 사실과 달랐다면, 전화를 건 사람이 거짓말을 한게 당연하니까요. 오히려 왜 이렇게 밀고를 하려 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라던가, 범행에 무언가 트릭이라도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내용도 없어서 이게 추리 소설인지도 의심스러울 정도에요. 유미코의 동기는, 센도가 처음 만났을 때 손에 반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라는 디테일과 하루카가 피해자인 나오와 남자 문제로 다투었다는 증언이 순차적으로 드러나니 그리 대단한 수수께끼는 아니거든요. 하루카의 범죄 역시,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나오를 죽이고 불에 태웠는지에 대한 진상은 드러나지 않고 그냥 그녀가 범인일 수 있다는 정황 증거 정도만 추가될 뿐이라 속 시원하게 해결되지도 않고요.

물론 이렇게 추리적으로 허술하다는게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어차피 이 단편집 수록작 모두가 마찬가지이기도 하고요. 또 아는 사람, 잘 해주는 듯한 사람이 더 무섭다라는 명제를 잘 전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이를 위해 억지로 센도를 엮었다는 점입니다. 수록된 다른 작품들은 모두 센도가 사건에 개입되는게 나름 이유가 명확한데,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미코 본인이 와인바 사장인 유키에가 겪은 일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그게 중요한 단서가 될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걸 그냥 경찰에 제보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구태여 센도를 중간에 연락책으로 사용할 이유가 없어요. 오히려 가족을 밀고한다는 자신의 치부를 아는 사람을 만들 필요도 없고요.

이렇게 시리즈를 위한 억지 투성이인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3/10/07

방황하는 칼날 - 히가시노 게이고 / 민경욱 : 별점 2점

방황하는 칼날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하빌리스
<<아래 리뷰에는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번 생긴 ‘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가령 가해자가 갱생하더라도 그들이 만들어낸 ‘악’은 피해자들 속에 남아, 영원히 마음을 갉아먹습니다.

나가미네가 아내와 사별 후 홀로 키워왔던 딸 에마가 강간 살해당했다. 좌절한 나가미네에게 범인이 도모자키와 스가노라는 메시지가 전달되었고, 메시지 속 주소로 도모자키의 집에 잠입한 나가미네는 에마가 강간당하는 동영상을 확인하고 분노에 휩싸여 도모자키를 잔혹하게 죽였다. 그리고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스가노가 있다는 나가노 현으로 향했다. 도모자키 살해범이 나가미네라는걸 알아낸 경찰 역시 그의 뒤를 쫓는데....

우연찮게 제 구글 홈에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한국 영화 소갯글이 떳길래 잠깐 찾아보았다가 급 호기심이 생겨 구독 중인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무섭다 알고리즘!

작품은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 범인이 미성년자라는 이유도 가벼운 형을 선고받는게 과연 옳은지를 비판하는 사회파 범죄 소설입니다. 미성년자 범인들이 저지르는 범죄를 극도로 흉악하게 설정한 덕분에 읽는 내내 나가미네에게 감정이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딸이 강간 살해당했다면 어떤 아버지가 가만 있을 수 있을까요? 심지어 그 상황의 동영상까지 보았다면 피가 꺼꾸로 솟는다 정도의 말로는 부족한 분노에 휩싸이는게 당연합니다. 때문에 범인들 - 특히 도주한 스가노 - 이 나가미네에게 합당한 응징을 받기 원하며 응원하면서 읽었습니다. 
미성년자 범죄에 대해 강력한 응징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다시 하게 되었네요. 요새처럼 아이들 성장이 빠른 시기에 오래전 잣대를 기준으로 판단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저는 중학생부터는 성인범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봅니다. 무관용 원칙으로요. 하긴 그래봤자 술을 먹어서 심신 미약이었다던가, 초범이라던가, 깊이 뉘우치고 있다던가 하는 식으로 빠져나올 놈들은 다 빠져나오는게 현실이라는게 더 씁쓸하기는 합니다만.
최근 언론에 언급되는 여러 학부모들의 민원(?)과 같이, 미성년자 범죄자들의 부모들의 눈 뜨고 못 볼 작태들도 잘 묘사됩니다. 이런걸 보면 미성년자 범죄는 그 부모도 함께 처벌해야 한다는 생각도 드네요. 이 역시 무관용 원칙으로요.

하지만 나가미네가 결국 응징에 실패하고 경찰에게 사살당한다는 결말은 씁쓸했습니다. 이 마지막 장면, 그리고 경찰 수사 과정과 경찰들의 생각을 통해 경찰의 자괴감 - 그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 죄를 저질러도 어떤 보복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국가가 그들을 보호해준다는 사실을. 우리가 정의의 칼날이라고 믿는 것이, 정말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나?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 칼날은 진짜일까? 정말 ‘악’을 벨 힘을 가지고 있나? - 을 잘 드러내기는 하나 독자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어요.
특히 경찰 히사쓰카 반장이 나가미네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는 반전은 최악이었습니다. 자수를 결심했던 나가미네가 사살당한건 히사쓰카 반장이 준 정보 탓입니다. 이렇게 애매한 정보만 전달하고 수사는 수사대로 진행하기 보다는 직접 수사를 뛰는 마노, 오리베와 같은 부하들을 설득해서 더 적극적으로 나가미네를 도와주는게 맞지 않았을까 싶어요. 과거 유사 범행의 수사를 맡았던 경험 때문이었다는 동기도 별로 와 닿지 않고요. 
정보를 나가미네의 핸드폰으로 보내는 것도 당황스러웠어요. 잠깐이라도 핸드폰을 켜서 메시지를 확인하면 현재 위치가 바로 추적되지 않나요? 경찰이 이 정도 수사도 하지 않는다는건 솔직히 억지스러웠습니다.

짜임새도 헐겁습니다. 중간에 매스컴이 단순히 화제와 시청률을 위해 보도를 벌이는 장면은 그냥 뻔한 이야기를 답습하는 느낌이었습니다
펜션 여주인 와카코가 나가미네에게 협력자가 된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나가미네에게 협력자가 필요했던 상황도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은신처를 제공받으며 스가노 추적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는 했지만, 그녀 없이도 이야기를 풀어갈 방법은 많았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없으면서 하룻밤 보낼 수 있는 장소를 찾다가 스가노가 폐업한 펜션에 숨어 있을 수 있다는걸 깨닫는게 훨씬 자연스러웠을거에요.
그리 기대하지 않았지만 당연히 추리적인 요소도 거의 없습니다. 나가노에 있던 나가미네가 범인 스가노에게 안도감을 주기 위해 일부러 아이치에서 편지를 보냈다는 정도만 약간 머리를 쓸만 했을 뿐입니다.

한국 영화 소개를 보니 제가 언급한 단점들을 인지했는지 보다 명확하게 이야기를 정리한 듯 하더군요. 펜션 여주인 와카코의 존재를 지우고, 직접 수사에 뛰어든 형사가 정보 제공도 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결국 나가미네가 사살당하는건 변함이 없던데, 자수해서 집행유예를 받은 뒤, 스가노를 끝없이 추적한다는 결말은 어땠을까 싶네요. 다른 피해자 가족들과 연대해서요. 스가노 같은 녀석 때문에 인생을 망칠 이유는 없습니다. 군자의 복수는 몇 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 법이고요. 살아서 스가노와 그 일당, 가족들에게 영원한 지옥을 선사하는게 복수로서 더 의미가 있었을겁니다. 지금의 죽음은 그냥 개죽음이니까요.

하여튼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몰입해서 읽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이기는 한데, 완성도와 결말 부분은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덧붙이자면, 범죄자 가족이라고 모두 고통받아야 하는지? 에 대해서 히가시노 게이고 자신이 <<편지>>를 통해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일반인들이 범죄의 종류와 범죄자 상황을 다 고려해서 선별적으로 비난하기는 불가능하니, 참 어려운 이야기지요....

2024/09/14

가연물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2.5점

가연물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리드비

요네자와 호노부의 신작. 가쓰라 경부를 주인공으로 한 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국내 최고의 추리 소설 동호회인 하우 미스터리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이 자리를 빌어 관계자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작가 최초의 경찰 수사 본격 추리물인데, 손대는 거의 대부분의 장르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를 뽑아냈던 요네자와 호노부 작품치고는 평이한 수준이었습니다. 경부 캐릭터도 진부한 스테레오 타입이고요. 
하지만 "목숨빚"만큼은 빼어납니다. 이 작품 하나만으로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낭떠러지 밑"
눈밭에서 조난당한 두 사람 중 한 명이 목을 무언가에 찔려 살해당했다. 또 다른 한 명은 심한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끝이 날카로운 말뚝 같은 걸로 목을 찔러 살해했다는 감식 결과를 보았을 때에는 흉기가 고드름일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고의가 아니었다면, 낭떠러지에서 고드름이 떨어져 운 나쁜 피해자 목에 꽂힌 사고일거라 여겼지요. 하지만 다행히 그렇게 뻔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피해자 목에 혈액이 응고되는 반응이 있었다는 감식 결과를 토대로, 이는 다른 사람의 혈액이 들어갔을 때 일어나는 반응이니 범인 미즈노의 혈액이 포함된(?) 흉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즉, 흉기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때에 부상당해 튀어나온 미즈노의 팔 뼈였다는 추리로 이어집니다. 흉기는 신선한 편이고, 이에 이르는 추리와 단서 제공 모두 공정하고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경찰 수사물'에 잘 어울리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흉기가 뭐든 범인은 미즈노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기소에는 무리가 없어 보였기 - '고드름'이 흉기였다고 주장해도 될테지요 - 때문입니다. 수사가 아니라 '추리'에 방점을 둔 느낌입니다. 거장 반열에 오른 작가라도 처음 시도하는 경찰 시도물이라서 다소 혼선이 있었던게 아닌가 싶네요.
흉기 트릭도 신선하지만 현실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정말 엄청난 정신력이 아니면 실현 불가능했을 방법이니까요. 아울러 수사 기계같은 냉정한 가쓰라 경부의 묘사는 그리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다른 작품들 속 냉정한 수사 반장들 - 대표적으로는 "제 3의 시효" - 과 차별화되는 점이 없는 탓입니다. 이 작품을 위해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 시간이 부족했던 걸까요?

여러모로 평범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졸음"
유력한 강도 치상 사건 용의자 다구마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이송되었다. 경찰은 다구마의 신병을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교차로에서 발생한 사고 원인이 다구마의 신호위반일 경우, 체포 영장을 청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 새벽 3시 일어난 다구마의 교통사고를 무려 네 명이나 목격했고, 그들은 모두 다구마가 신호를 위반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쓰라 경부는 다구마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 즉 신호 위반을 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데...

처음에는 다구마가 교통사고를 빙자하여, 상대방 미즈우라와 신분을 바꿔 도망쳤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런 황당하면서도 뻔한 이야기는 아니더군요.
'거짓 증언 부수기' 설정의 작품으로, 피해자나 가해자와 전혀 관계없는 목격자들이 우연히 똑같은 거짓 증언을 하게 된 과정의 설득력이 높다는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불성실한 근무 태도로 언제 해고될지 모를 교통 정리원과 편의점 직원이 하필 사고 시점에 졸고 있었기 때문에, 의기투합해서 졸았다는걸 숨기려고 거짓 증언했다는건 말이 되니까요.

그런데 전개 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바로 가쓰라 경부의 확신 - 네 명 모두 거짓 증언을 한 것이다! - 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점입니다. 누가 봐도 다구마는 바로 체포해도 되는 상황입니다. 아니, 경찰 수사를 위해서는 증언이 없었더라도 체포 영장을 청구하는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새벽에 일어난 사건의 목격 증인이 네 명이나 되고, 이들의 증언이 일치해서 불신을 품었다? 말도 안됩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또 응급실 의사와 게임 클랜의 리더인 대학생도 졸아서 위증에 동참했다는건 과했습니다. 이 둘은 빼고 교통 정리원 가마타와 편의점 직원 고가가 입을 맞추었다는 정도로 끝내는게 깔끔했을 거예요. 의사와 대학생은 사고를 보지 못했다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뿐더러, 거짓 증언에 똑같이 동참할만한 접점도 마땅치 않으니까요.

이런 단점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목숨 빚"
유명 관광지에서 절단된 사람의 팔이 발견되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나머지 사체 부위들도 발견했다. 피해자의 신원은 노스에 하루요시로 밝혀졌다. 곧 피해자가 오래 전에 생명을 구해 주었다는 미아타무라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발견되었고, 경찰은 미야타무라를 체포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미아타무라의 흉기에 대한 증언 등 여러 가지 부분에서 가쓰라 경부는 납득하지 못하는데...

앞서와 마찬가지로 범인이 명확한 상황에서 가쓰라 경부가 의문을 품는 과정의 설득력은 약합니다. 특히 '사체를 절단하는 커다란 수고에 비하면 사소한, 치아를 뽑거나 부숴서 신원을 알아내지 못하게 하지 않은 것이 수상하다'고 하는건 억지스러웠어요. 사체 전달은 옮기기 편해서라는 이유가 더 클 테니까요. 유명 관광지에 사체를 흩뿌린게 이상하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급했다거나, 길을 잘 몰라 실수하는 등 이유는 여러가지 있습니다. 범인이 확실하다면 수상하다고 생각할 까닭이 없어요.

하지만 더 이상 빚과 노모의 간병을 감당할 수 없었던 하루요시가 자살한 뒤, 이를 살인으로 위장하면 보험금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여긴 미야타무라가 현장을 조작했다는게 충격적인 진상이 모든 문제를 덮어줍니다. 우리도 직면한 문제인 '부양하기 힘든 고령 인구의 증가, 중년의 노후 보장 없는 은퇴, 취직도 못하는 삼포세대 젊은이'라는 3대에 걸친 사회 현상을 정면으로, 그것도 제대로 된 추리물로 다루고 있는 덕분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회파 본격 추리 수사물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그리고 앞서 억지스럽다고는 했지만, 가쓰라 경부가 수상하다고 여긴 상황들이 진상에 딱 들어맞는건 추리물다와서 좋았어요. 우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관광지의 사체를 버린 이유는 빨리 발견되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사망이 확인되어야 보험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사체의 정체를 숨기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 흉기에 대한 거짓말도 같은 이유입니다. 미야타무라는 '노스에 하루요시를 살해했다'는게 진실로 여겨지기를 바랬으니 이렇게 주장할 수 밖에요.
사체를 토막낸 이유가 하루요시의 사체에서 '목을 맨 자국'이 드러나지 않게 숨기기 위해서였다는 트릭도 아주 괜찮았습니다. 다만, 독자에게 하루요시 사체 중 목의 중간부 일부가 사라졌다라는걸 정확하게 알려 주지 않은건 조금 아쉬웠지만요.

그래도 여러모로 볼만했던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가연물"
월요일 심야부터 방화로 의심되는 화재가 잇달아 발생하여 수사본부가 설치되었다. 잠복수사 결과 몇 명의 용의자가 떠올랐지만, 잠복근무 시작 후 방화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자 잠복 중인 형사가 범인에게 들킨 거 아니냐고 상관이 가쓰라 경부를 질책했다. 그러나 가쓰라 경부는 범인이 이미 목적을 달성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를 내놓았고, 어떤 목적으로 방화를 저질렀는지 동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유력한 용의자 중 한 명인 오노하라가 버린 쓰레기에서 착화에 쓰인 잡지가 발견되는데...


후더닛보다는 와이더닛 물인데, 왜 표제작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수록작 중 가장 처지거든요. 범인의 동기가 하찮을 뿐더러, 납득하기도 어려운 탓입니다. 화재에 대한 나쁜 기억 때문에 돌발적인 화제를 막으려고 안전한 방화를 저질렀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범인은 그냥 수사를 통해 체포하기 때문에 추리의 여지도 거의 없고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진짜인가"
이제사키 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권총을 가진 범인이 농성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게 점장 아오토와 아르바이트 생 유노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가쓰라 경부는 아오토와의 통화로 유노가 범인에게 살해당했다는걸 알게 되었다.
범인 시다는 아들에게 생일 선물로 파르페를 사주려고 가게를 찾았는데,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는 아들에게 견과류가 들어 있는 파르페가 서비스되어 화가 난 뒤 다툼이 시작된걸로 보였다. 유노는 파르페에 대해 시다에게 설명하지 않은 직원이었다.

비교적 독특한 사건이 등장하는 작품.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인질을 븥잡고 농성을 벌이는 사건은 웬만한 작품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지요. "스완"이 약간 비슷하지만, 결은 전혀 다르고요. 또 이런 작품에서 중요한 '인질범과의 협상'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독특했습니다. 오로지 가쓰라 경부의 추리에 의한 의외의 진상이 밝혀지는 구조가 돋보였고, 여러 명의 증언을 모아 진상을 추리해내는 전개, 가게 안 장난감 가게에서 타는 물총이 시다가 들고 있는 권총과 비슷하다는 단서 등 여러 가지 정보와 단서들 모두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진상도 재미있었습니다. 사건은 아오토 점장의 자작극이었습니다. 치정 문제로 유노를 살해한 직후, 시다가 사무실로 들이닥쳐 범행이 들키자 시다의 아들을 인질로 삼아 시다가 범인이고 자신은 피해자인 척 농성하는 연극을 시켰던 것이지요. 나중에 구출 직전 시다와 아들은 살해할 생각으로요.

그런데 조리 담당으로부터 사건 당시 오징어 먹물 파스타가 조리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추리해냈다는건 와 닿지 않았어요. 오징어 먹물 파스타 조리 시간을 감안하여, 시다가 항의차 점장을 찾은 뒤, 한참(약 10분?) 지나서 도망치라는 큰 소리가 나왔다는건 그리 큰 단서나 증거로 볼 수 없습니다. 짜증이 쌓여 한참 있다가 폭발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살해 현장을 무마하기 위해 농성이라는 연극을 벌인 것도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적으로 억지가 많아 감점합니다. 

2016/10/09

스트로베리 나이트 - 혼다 테쓰야 / 한성례 : 별점 1.5점

스트로베리 나이트 - 4점
혼다 테쓰야 지음, 한성례 옮김/씨엘북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택가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한 후 버려진 사체의 정체가 사무기기 임대 회사 오쿠라 상회의 영업맨 카네하라라는게 밝혀졌다. 아무런 원한관계도 없는 착실한 인물로, 수상한 점이라고는 매월 두 번째 일요일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 점, 그리고 최근 급작스럽게 업무에 열의를 보인 점 뿐이었다.

사건을 담당한 히메카와 레이코는 직감적으로 사체는 원래 발견 장소 바로 옆 우치다메 낚시터에 유기될 계획이었다고 추리했다. 단서는 피해자 복부 사후에 생긴 절창이었다. 이를 배에 가스가 차 떠오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낚시터에서 기생 아메바에 감염되어 사망한 젊은이 사건과 엮어 상부에 설명한 후, 낚시터를 긴급 수색한 끝에 낚시터 안에서 다른 시체를 발견했다.

발견된 피해자는 잘 나가는 광고맨 나메카와로, 그 역시 매월 두 번째 일요일의 약속, 그리고 최근 급격하게 업무에 열의를 보였다는게 카네하라와 일치했다...

혼다 테츠야의 '히메카와 레이코 시리즈' 첫 번째 작품입니다. 2006년도 발표된 작품으로, 동명의 드라마를 추천받은 적이 있는데 미처 감상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자주 가는 도서관에 책이 있길래 연휴 때 읽을까 하고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최악이었니다. 세간의 평가가 높은 이유를 도무지 알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백야행"처럼 드라마가 원작을 초월하는 완성도로 제작되어 높은 평가를 받는걸까요?

아주 약간이지만 장점을 언급하자면, 특정인에게 공개되는 살인쇼라는 설정은 "호스텔"과 유사하지만 살인쇼 참가자 중에서 피해자를 골라낸다는 아이디어만큼은 신선했습니다. 인터넷 뒤에 숨어 즐기는 비겁자가 많은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같다는 느낌도 들었고요.

또 초반 레이코와 검시관 쿠니오쿠가 국수를 먹으면서 나누는 시체 태우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 레이코가 이오카와 조를 이루어 카네하라 주변 인물에 대한 사정청취에 나섰을 때 등장하는 취조 방법에 대한 약간의 팁(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 말을 기록한다고 의식하면 입이 무거워지는 법이었다. 그래서 이오카는 보란 듯이 노트를 덮고 오자와가 입을 열기 쉽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등 몇몇 경찰 수사 과정의 묘사도 나쁘지 않습니다. 과거 성폭행을 당했던 레이코가 방범 카메라에 찍히기 위해 큰길을 통해 비디오 대여점과 편의점을 거쳐 집으로 간다는 설정과 묘사도 마찬가지고요.

가혹 행위를 당하며 살아온 한 소년의 추억과 현재 시점의 사건이 살짝 엮이며 진행되며, 이 소년이 후카자와(일 것)라는 것은 비교적 초반에 밝혀지지만, 경찰 시점에서는 후카자와가 이미 사망한 사람이라는게 밝혀지며 호기심을 자아내는 전개도 비교적 괜찮은 편입니다.

하지만 이외에는 건질 게 없습니다. 우선 추리적으로 너무나 별 볼일 없습니다. 사건의 원인이 매월 두 번째 일요일의 만남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기에 이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밝혀내는지가 핵심인데 이 과정이 나메카와의 친구에 의해 너무 쉽게 해결되어 다음 단계로 진행되는 탓입니다. 경찰 수사에 따른 결과라고는 해도 이래서야 너무 시시하죠.

게다가 뒷골목 탐정이라는 타쓰미가 돈 몇 푼에 수사의 핵심에 접근한다는건 해도 너무한 전개입니다. 약간의 돈과 시간으로 키타미가 진범이라는 것을 알아내는데, 이럴 거라면 경찰은 왜 필요한 걸까요? 자기들끼리 세력 다툼이나 하는 쓰레기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차라리 경찰을 전부 해고하고 타쓰미를 고용하는 게 훨씬 가성비가 높아 보여요.

소소한 전개 역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자기만 알고 레이코를 극도로 싫어하는 이기적인 형사 카쓰마타와의 대립, 레이코를 놓고 벌이는 부하 오쓰카 - 키쿠타의 대립 등 수사 과정에 있어 불필요한 드라마가 너무 많아요. 특히 카쓰마타는 상사도 아니고 계급도 같은데, 레이코가 성희롱을 넘어서는 폭언을 듣고도 참아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이해가 안 됩니다. 게다가 '사실은 카쓰마타도 좋은 경찰이었다!'라는 엔딩은 실소를 자아냅니다. "맛의 달인"의 우미하라, "분노의 늑대"의 야규 캐릭터 변절급인데, 앞선 작품들은 수십 권의 에피소드를 쌓아놓기라도 했지 이건 뭐... 요즘 말로 우디르급 태세 전환?

자극적이고 진부한 묘사도 무척 거북합니다. 특히 '스트로베리 나이트'의 실체가 살인쇼라는 것이 밝혀진 후 등장하는 고어한 묘사가 대표적이죠. 히메카와 레이코에 대한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당했던 성폭행은 비록 트라우마로 남았지만 그녀가 경찰이 되게 만들었다는건 뻔함과 진부함 그 자체였으니까요. 은인인 시타 형사 이야기는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고요.
후카자와 유카리가 진범이고 그녀가 자신이 여성임을 부정하는 행동을 보인다는 것, 그것이 과거 성폭행의 결과라는 것 역시 진부하다는 틀을 깨기는 역부족입니다. 여기에 더해 후카자와 유카리가 진범임을 숨기기 위한 장치도 작위적이라 짜증 날 정도예요. 담당 의사라 면담을 거부할 수는 있지만, 개인 기록은 당연히 넘겨줬어야 합니다. 초반에 주치의가 몇몇 특이 사항만 경찰에 이야기했더라도 사건은 바로 해결되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장점이라고 했던 살인쇼 참가자 중 피해자를 고른다는 아이디어도 발상에 비하면 디테일은 모두 부족합니다. 참가자 모집 방법도 현실적이지 못하고, 이 상황에서 참가자들이 죽음이라는 현실, 그리고 살아있다는 가치관을 재인식하게 해줘 삶에 열의를 갖게 한다는건 억지스럽기 짝이 없는 탓입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도망가지 못해 안달이 났을텐데 말이지요. 또 결국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찾아올게 뻔한데,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흥행을 의식한 저속한 펄프 픽션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세간의 고평가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네요. 세간의 평가는 드라마에만 한정된 듯합니다. 아주 약간의 장점이 있기에 제 별점은 1.5점입니다만, 도저히 후속권은 읽어 볼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2019/08/10

봉제인형 살인사건 - 다니엘 콜 / 유혜인 : 별점 2점

봉제인형 살인사건 - 4점
다니엘 콜 지음, 유혜인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쇄 살인 방화범 칼리드 체포 과정에서 정신 병원에 입원했다가 복직한 형사 울프는 무려 여섯 명의 사체를 꿰메어 만든 '봉제 인형 살인 사건' 수사를 맡게 되었다. 범인은 울프의 전처인 기자 안드레아를 통해 여섯 명의 살인을 더 예고했다. 경찰은 예고 살인을 막기 위해 애썼지만, 공개된 명단 속 인물들은 차례로 살해당하고 말았다. 울프와 수사팀은 이 모든 사건이 칼리드와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아채나 범행을 막지는 못했고, 경찰 대학을 나온 브레인 에드먼즈가 혼자만의 조사를 통해 울프가 사건의 핵심 인물이라는걸 밝혀내는데...

최근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지요. 여섯 명의 사체를 결합해 만든 '봉제 인형' 이 등장하는 서두도 강렬하지만, 경찰의 눈 앞에서 피해자들이 차례대로 살해되는 과정과 경찰의 수사가 숨돌릴 틈 없이 진행되는데 속도감과 흡입력은 상당합니다.

그러나 재미 외의 요소는 부족합니다. 싸구려 펄프 픽션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어요. 많은 부분에서 설득력이 결여되어 있는 탓입니다. 별다른 재산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홀로 행동하는 범인 매스가 어떻게 놀라운 범행을 계속 벌일 수 있었는지부터 전혀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보통 이렇게 전능한 악당의 경우, 경찰 관계자이거나 본인 스스로가 어떤 식으로든 - 머리가 좋다던가, 돈이 많다던가, 초능력이 있다던가... - 대단한 능력을 갖춘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작품 속 매스는 정신병을 앓고있는 퇴역 군인에 불과합니다. 턴블 시장을 살해하기 위해 그의 천식 흡입기를 어떻게 바꿔치기 했는지? 갈랜드 기자를 죽이기 위해 연극에 사용한 보호대를 어떻게 바꿔치기 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요.
특히 천식 흡입기는 그나마 그렇다쳐도, 갈랜드 기자가 죽은 것 처럼 꾸미기 위한 작전은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그가 어떤 보호대를 쓰고 어떤 연극을 할 지 매스는 알 도리가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마지막에 울프가 희생자로 예고된 상황에서는 울프가 개인 행동만 벌이지 않았어도 범행을 성공할 방법이 없었을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도 궁금합니다.
꼭 이 연쇄 살인이 아니더라도 봉제 인형을 만들기 위해 무려 여섯 명이나 되는 인물들을 납치하여 토막낸게 시체 발견 시점까지 사건화 되지 않은 이유도 알기 어렵습니다. 피해자들이 부랑자나 노숙자도 아니고, 파트너급 변호사나 경찰 등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말이지요. 그 전부터 매스는 이른바 '악마의 거래'로 살인 행각을 계속해 왔지만, 아무도 정체를 몰랐다는 설정도 어이가 없습니다. 그만큼 영국의 치안이 허술하다는 이야기일까요? 이 정도면 정말 사람 살 곳이 아니네요.

추리적으로도 볼만한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범인을 후반부에 알아내기는 하는데 앞 부분의 수사는 별 관련이 없거든요. 에드먼즈의 프로파일링으로 도출된 인물상에 해당하는 인물을 DB를 통해 뒤지다가 사진 속 눈동자를 보고 범인임을 직감한다는데, 이럴거면 앞에서 벌였던 온갖 수사는 대체 뭔가 싶습니다. 왜 진작에 이렇게 수사를 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도 불분명하고요.
사건 전개도 혼란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울프를 주인공으로 하여 피해자들의 정체를 알아내어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밝히는 과정, 예고된 범행을 막는 과정이 한참 펼쳐지다가 갑자기 에드먼즈 쪽으로 시점이 이동하여 울프가 진범이 아닐까? 라는 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이럴거면 애초부터 시점을 울프가 아니라 에드먼즈 쪽으로 했어야 말이 됩니다. 에드먼즈 시점으로 전개되는 과정이 훨씬 흥미롭기도 하니까요. 정신병원에서 울프가 벽에 새겨놓은 피해자들의 이름을 드러내는 장면만큼은 아주 괜찮았는데 많이 아쉽네요. 울프의 수사는 현재로, 에드먼즈의 수사는 과거를 뒤지며 결국 두 시점이 하나로 합쳐지는 식으로 했더라면 설득력도 높고 추리적으로도 괜찮았을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내용에서 불필요한 부분도 너무 많습니다. 자극적인 뉴스로 시청률을 올리려고 혈안이 된 방송국장 엘리야와 그 밑에서 수족처럼 일하며 양심과 싸우는 울프의 전처 안드레아 이야기는 정말이지 쓰잘데 없어요. 이런 매스컴의 행각을 지적한 다른 컨텐츠에서 흔하디 흔하게 보아왔던 스테레오 타입의 재탕일 뿐 아니라 실제 이야기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안드레아의 개입은 사건을 혼란스럽게만 만들 뿐입니다.
에밀리 벡스터 형사와 울프의 친구 이상 연인 이하라는 설정에 할애한 분량도 마찬가지입니다. 등장해서 하는거라곤 울프와 울프 주변 여자들과의 감정 싸움 말고는 없는데 이러느니 없어도 될 캐릭터가 아니었나 싶어요. 싸구려 매스컴의 행태는 대폭 줄이고, 울프 주변의 여자 관계도 모두 쳐냈다면 이야기는 절반 정도 분량으로도 충분했을 겁니다. 거기에 에드먼즈 시점에서 썼다면? 1/3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한때 유행처럼 쏟아졌던 '전능한 살인마의 예고 연쇄 살인'을 별 생각없이 재탕한 결과물입니다. 에드먼즈가 활약하는 부분만큼은 흥미를 자아내지만 그 외에는 그닥 마음에 들지 않네요. 딱히 권해드릴 작품은 아닙니다.

2014/08/11

사망 추정 시각 - 사쿠 다쓰키 / 이수미 : 별점 3점

사망 추정 시각 - 6점
사쿠 다쓰키 지음, 이수미 옮김/소담출판사

지역 유지 와타나베 쓰네조의 외동딸 미카가 유괴당한 뒤, 1억원의 몸값을 요구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은 치밀한 범인의 계획 때문에 몸값을 잃을까 우려하여 몸값 전달을 포기했다.
그러나 곧바로 미카의 시체가 발견되어 경찰은 수사상의 문제가 없었는지에 대한 비난 위기에 직면했고, 특히 현경의 모리타 본부장은 쓰네조로부터 검은 돈을 받아왔기 때문에 더욱 심한 압박을 받았다. 그래서 경찰은 사망 추정 시각에 대한 검시 조서를 조작했다. 동네 건달 쇼지를 범인으로 날조하기 위해서였다....

잘 몰랐던 작가의 신선한 법정물. 작품은 크게 세 부분 - 미카 사건의 상세한 수사과정이 펼쳐지는 초반부, 시체 근처의 지갑에서 돈을 훔친 뒤 시체를 발견하고 도망간 동네건달 고바야시 쇼지를 범인으로 날조하는 과정이 그려지는 중반부, 가와이 도모아키 변호사가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쇼지의 국선 변호인으로 임명된 뒤 조사해본 기록들을 통해 쇼지가 진범이 아님을 확신하고 항소심에 임하는 후반부 - 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법조인 출신이라는 작가의 이력다운 디테일이 제일 큰 장점입니다. 이는 작품을 읽는 내내 강하게 독자를 몰입하게 만듭니다. 특히 쇼지에게 누명을 씌우는 수사기관의 조작 과정은 정말 숨이 막힐 정도였습니다. 본부장 이하 모든 담당자가 어떻게든 쇼지를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날조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펼쳐지기 때문인데, 이후 가와이 변호사가 그 헛점을 여러개 눈치챌 정도로 허술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정말 이 정도까지 적극적으로 나서면 그 누구도 쉽게 빠져나갈 수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그야말로 천라지망이랄까요. 우리 나라에서도 검찰, 경찰때문에 실형을 선고받은 뒤 무죄가 된 실제 사례가 몇 건 있었기에 남의 일 같지 않기도 했고요. 바로 얼마 전에도 "친딸 살해 누명을 20년만에 벗어났다"는 뉴스가 떴었지요.

이외에도 유괴범이 몸값을 받아내려는 작전도 추리적으로 꽤 괜찮았고, 이후 가와이 변호사가 항소를 준비하고 법정에서 승부를 벌이는 후반부는 법정물의 모범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긴박감이 잘 살아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첫번째는 촌동네이고 동네 건달을 상대로 했다 하더라도, 조작 수사 과정은 지나쳤습니다. 인권을 무시한 강요된 수사로 미란다 원칙에 대한 설명도 없고, 변호사도 없는 상태에서 밤을 세워가면서 폭력으로 진술을 얻어낸다는건 작품의 무대인 2001년에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돼잖아요? 이게 20세기 초중반, 아니 한 80년대만 되도 그러려니 했을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초반부터 와타나베 쓰네조는 범인을 이미 짐작한 것으로 보이지만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유력한 용의자의 이름을 초반에 대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만, 딸은 금지옥엽처럼 귀하게 키웠을 뿐더러 자신의 적은 가차없이 부숴버리는 냉혈한으로 묘사되니까요. 딸이 죽은 다음에 모든 활력을 잃었다고는 해도, 최소한 복수는 했을 것 같은 인물이라 이상했어요. 범인이 유카를 죽인 이유도 솔직히 잘 와닿지 않았고요.

마지막으로 가와이 변호사의 노력은 항소재판은 속심이 아니라 사후심이라는 것, 즉 1심 판결이 타당하다는 재판장의 논리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끝나는데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경찰 수사의 왜곡이야 본부장이 검은 돈을 받은 것이 원인이라는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법부가, 그것도 현장과 떨어진 도쿄에서의 재판이 이렇게까지 대충 이루어진다는게 말이 될까요?

무엇보다도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는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고 쇼지의 누명 역시 벗겨지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작품이 약간 모호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작품의 가장 특이한 점이기도 한 부분인데, 제게는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범인도 멀쩡히 있고, 쇼지는 누명을 쓴 채 무기징역인데 가와이 변호사 혼자 사법제도의 모순을 깨닫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라는 식으로 끝맺으니 맥이 빠질 수 밖에요. 뭐 논픽션, 르포르타쥬 수준의 사회 고발성 강한 작품으로 본다면 큰 단점은 아니긴 합니다. 현실적이기도 할테고요. 그러나 하나의 완성된 소설로 보기에는 미완성인 결말로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신사회파라는 홍보문구에는 걸맞게 이 사회의(특히 사법제도) 모순, 부조리와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재미 또한 별로 빠지지 않는 만큼 법정물에 관심있으신 분들께 추천 드립니다.

2024/04/27

7인 1역 - 렌조 미키히코 / 양윤옥 : 별점 2점

7인 1역 - 4점
렌조 미키히코 지음, 양윤옥 옮김/모모

<<아래 리뷰에는 트릭과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명 모델 미오리 레이코가 자택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청산가리 중독이었다. 경찰은 그녀에게 농락당해 모든걸 잃은 의사 사사하라가 범인이라 생각했다. 사건 현장, 그리고 청산가리 봉투에 그의 지문이 있었고 그가 사망 추정일에 레이코를 방문한게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월드 섬유회사의 사장 사와모리 에이지로가 레이코를 죽였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해서 사사하라는 풀려났다.
그런데 사와모리 말고도 레이코가 평상시 원수라면서 이를 갈고 협박해오던 7명 모두가 똑같은 방법으로 레이코를 살해했다는게 밝혀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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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 "회귀천 정사"로 유명한 렌조 미키히코의 장편. 1984년 첫 출간된 작품이라고 합니다.
렌조 미키히코는 정통 본격물보다는 "회귀천 정사"같은 서정적인 문체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렌조 미키히코하면 떠오르는 작품과는 사뭇 다른 스타일과 전개를 보여줍니다. 미오리 레이코 시점에서 상대방이 자신을 살해하도록 유도하는 범죄물이자 도서 추리물로 시작해서, 7명 모두가 똑같은 방법으로 레이코를 살해했다는게 드러나는 시점부터는 하우더닛 본격 추리물이 되는 작품이거든요.
 
가장 인상적인건 트릭입니다. 트릭을 잘 사용하는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꽤 현실적인 트릭을 멋드러지게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 트릭을 조금 설명해 드리자면, 레이코의 과거 직장 동료 이시가미 요시코는 레이코가 성형 수술을 했다는걸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며 돈을 뜯어내고 있었습니다. 레이코는 요시코를 꼬드겨 자기처럼 성형 수술을 시켜준 뒤, 그녀를 독살했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자택 침대 위에 놓아 두고, 7명의 원수들을 한 명씩 불러 거실에서 한바탕 연기 - 나에게 농락당한 의사 사사하라가 나를 죽이려고 독약을 가져왔지만 실패했다. 독약은 저 술잔에 들어있다라며 술잔을 바꿔치도록 유도 - 를 펼친 뒤, 술을 마신척 하고 침실로 뛰어들어가 곧바로 몸을 숨겼습니다. 뒤쫓아 침실로 온 손님들은 레이코와 똑같은 시체를 발견하고는, 자기가 술잔을 바꿔치기해서 레이코가 죽었다고 여기고 도망쳤고요. 이렇게 해서 7명이 한 명을 똑같은 방법으로 살해하는 범죄가 완성된 것입니다.
이 트릭을 성공시키려면 마지막에 레이코가 진짜로 독을 먹고 죽은 뒤, 그 시체를 숨길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게 사사하라였다는 진상도 괜찮았습니다. 청산가리를 준비할 수도 있었고, 세간에는 레이코 때문에 신세를 제대로 망친걸로 알려져있으니 독을 레이코 집에 가져온 동기도 누구나 납득할 수 있어서 사람들을 속이기에는 더할나위 없었던 덕분이지요.

단서도 적절히 제공됩니다. 사사하라가 경찰에 체포된 후, 레이코의 집을 방문할 날짜를 대충 얼버무리는게 대표적입니다. 무려 7명을 대상으로 벌인 계획이라 이틀에 걸쳐 진행했던 탓에, 날짜를 특정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날짜를 대충 둘러댈 수 밖에 없었습니다. 15일의 알리바이만큼은 억지로라도 만들어서 확실하게 제공하고 있는걸 통해, 7명 모두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는걸 드러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레이코의 입으로 완벽한 알리바이 계획이 설명되었기에, 이를 이용하여 15일 이후 범행이 일어났다고 착각하게 만들고 본인들은 15일의 알리바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금붕어 1마리가 죽은 수조를 보고 수사를 펼쳐서 원래는 7마리를 샀다는걸 알아내는 등의 경찰 수사 과정도 합리적으로 그려집니다. 결국 경찰은 이러한 꼼꼼한 수사를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사건 진상에 도달하고요. 이렇게 경찰이 나름 활약을 펼친다는건 여러모로 눈여겨볼만 했습니다. 특히 레이코, 하마노, 사사하라의 시점으로 작품이 전개되고 있는데 경찰까지 신경써서 분량을 안배해 준 정성(?)이 신기하더라고요. 사실 경찰은 헛다리를 짚는 수준으로 그쳐도 내용 전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거든요. 오히려 사와모리의 완벽한 자백 유서를 확인한 뒤에 개인적으로 수사를 진행한다는게 더 설득력이 없지요. 이건 작가가 '일본 경찰은 우수하다!'라는걸 어떻게든 드러내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캐릭터와 상황, 심리를 묘사하는 방법과 문체가 굉장히 옛스러워서 확실히 40여년 전 작품이라는 티가 물씬 납니다. 게다가 핵심 인물인 미오리 레이코에 대한 캐릭터 설정이 영 별로입니다. 그녀가 7명에게 원한을 품은 이유도 도무지 알 수가 없고요. 7명 모두 그녀에게 아픔을 주었을 수는 있지만, 거의 대부분 정당한 거래 관계였습니다. 오히려 그녀가 얻은게 훨씬 더 많아 보여요. 모두가 선망하는 대 스타가 되어 큰 돈을 만지게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멋대로 그들이 자기 인생을 망쳤다며 건수를 잡아 협박한다? 솔직히 죽어도 싼 여자라 생각됩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혼자만의 피해의식에 가까운 복수에 동참해서 스스로 그들을 모두 죽일 결심을 하는 사사하라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녀에게 아무리 푹 빠져다 한들, 이건 상식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보다 현대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같은 작가가 썼더라면 아마 걸작으로 널리 알려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결과물은 조금 부족합니다. 최소한 '동기'만큼이라도 설득력있게 만들어 주었어야 했습니다.

2020/04/05

무증거 범죄 - 쯔진천 / 최정숙 : 별점 2점

무증거 범죄 - 4점
쯔진천 지음, 최정숙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년 전부터 일어나고 있는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은 현장에 지문과 ‘날 잡아주세요’란 메시지가 인쇄된 종이 한 장만을 남기고 다른 어떤 허점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한 네 번째 특별조사팀마저 성과 없이 해산되자, 경찰은 수학 교수로 일하고 있는 범죄논리학 전문가 옌량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편 한순간의 실수로 불량배를 죽이게 된 청년 앞에 한 남자가 다가와 증거를 없애줄 테니 범죄를 부인하라며 경찰 대처법을 가르쳐주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수정 인용)

중국 추리 소설찬호께이의 작품 3편 - "13 .67", "망내인", "기억나지 않음, 형사" - 과 원샨의 "역향유괴" 만 읽어보았습니다. 찬호께이의 작품은 대체로 평작 이상이었지만 원샨의 작품은 기대 이하였었는데, 이 작품은 어떨까 싶어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트릭이 존재하는 본격 추리물은 아니며, 범죄자와 탐정두뇌 싸움이 핵심인 범죄 스릴러입니다. 그러나 제목의 '무증거 범죄'가 의미하는 완전범죄에 대해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꽤 재미있었습니다. 전前 수사전문 요원이었던 뤄원이 깡패 소태보가 살해된 현장을 조작하는 과정의 디테일, 그리고 이 사건이 범죄논리학자 옌량에 의해 하나씩 단서가 드러나며 진상이 밝혀지는 과정이 볼 만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2만 위안이 넘는 큰 돈을 하트 모양으로 작게 접어서 사건 현장에 숨겨 놓는다는 아이디어가 기발했어요. 이 돈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현장에 몰려들어 현장이 훼손되게 만드려는 의도였는데, 아주 설득력 넘쳤습니다.
이 사건과 항저우 시에서 "나를 잡아주십시오"라는 메모를 남기고 벌어진 연쇄 살인극이 맞물리는 전개도 좋습니다. 뤄원이 자신의 아내와 딸이 실종된 현장에 남겨진 지문의 소유자를 찾기 위해, 그 지문의 소유자가 범인인 살인극을 조작하여 일으켰다는 동기였는데 대담한 아이디어일 뿐 아니라, 설득력도 충분합니다. 이러한 설득력 덕분에, 이야기를 끝까지 읽게 됩니다. 

옌량이 추리한, 뤄원이 주후이루와 궈위가 저지른 살인 은폐를 도와준 이유도 그럴듯합니다. 뤄윈이 소태보를 애초부터 살해할 목적이었지만, 선수를 빼앗긴 뒤 은폐를 도와주었다는 이유인데, 여러가지 정황 증거들이 그게 사실이라는걸 암시하니까요. 좀 작위적이기는 해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이외에 익숙치 않은 중국식 묘사들도 흥미로왔습니다. 제목의 '무증거 범죄(완전범죄)'를 비롯하여 상식적이다, 이론적이다라는 말을 '유물론자'라고 표현한다던가, 범인이 경찰 수사에 대해 잘 알고있다는 걸 '역수사 능력' 이라고 표현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으며, 두뇌 싸움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옌랑과 경찰이 뤄원을 잡아 넣을 증거를 찾아내는데 결국 실패하는 탓이 가장 큽니다. 옌량의 활약이 없는건 아니지만, 두뇌 싸움의 결과는 일방적입니다. 게다가 고차방정식 운운하며, 증거가 없으니 범인부터 대입해서 시나리오를 짠다는 옌랑의 방법론은 일견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특정 인물을 범인으로 만드는 조작극과 별로 차이가 없어서 아주 실망스럽습니다. 이는 뤄원이 "모든 이야기가 들어맞는다고 해서 내가 범인이라곤 할 순 없어. 자네의 시나리오는 아무한테나 죄를 뒤집어씌운 다음 범행 동기를 설명할 수 있지."라고 통렬하게 부정하지요. 옌랑은 마지막에는 감정에 호소해서 어떻게든 자백을 이끌어내는게 전부로, 한 마디로 뤄원한테 완패한 셈입니다. 이래서야 공정한 두뇌 싸움으로 보기는 어렵죠.
또 뤄원이 연쇄 살인극을 벌이는 와중에, 과연 단 한 번도 경찰 수사 물망에 오르지 않을 정도의 완전범죄가 가능했을지?에 대한 설명도 많이 부족합니다. 뤄원이 대단한 전문가라는걸로 퉁치기는 힘들어요. 실제로 공원에서의 범행은 목격자도 있었는데 말이죠. 하긴, 이는 뤄원의 아내와 딸을 살해한 범죄가 완전범죄가 된 것에 비하면 약과이기는 합니다. 우발적으로 급작스럽게 벌인 범행인데도 불구하고, 경찰 최고의 전문가가 사력을 다해 찾았지만 범인이 누군지 밝혀내지 못할 완전 범죄가 성립된걸 단지 운이라고 치부하는게 가능할까요? 작 중에서 뤄원의 능력이 시종일관 대단한걸로 묘사되는 것과는 배치되는 내용이기도 해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아울러, 옌랑이 뤄원을 수상하다고 여긴 계기가 된 뤄원의 차에 대한 감상은 억지스럽습니다. 뤄원답지 않은 좋은 차는, 범행을 저지르고 용의선상에서 쉽게 빠져나가기 위함이라고 추리하지만, 뤄원이 과거 출원했던 특허로 성공한 부자라고 설명되는 만큼, 좋은 집과 좋은 차는 그 재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의심을 할 이유는 없어요. 또 그게 수상했다면 좋은 집에 사는 건 왜 트집을 잡지 않았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단점들은 사소할 뿐, 가장 큰 문제는 책 뒤 해설에서도 실려 있듯이, "용의자 X의 헌신"과 너무나 비슷한 구조라는 점입니다. 수학, 과학과 관련된 천재들의 두뇌 대결, 순전히 선의에 의해 사건 은폐에 가담한다는건 완전 판박이입니다. 애틋한 사랑을 키워나가던 두 청춘 남녀가 결국 파멸한다는 결말까지도 똑같고요. 작가 스스로도 영향을 받았다는걸 인정했다는데, 그렇다면 오리지널을 뛰어넘는 무언가 새로운게 있었어야 했습니다. 공정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요. 그러나 그러한 새로운 요소는 중국이라는 무대의 특성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한 마디로, 오리지널 만큼의 수작은 아닙니다. 그나마 캐릭터를 가져오려면 제대로 가져왔어야 했는데, 옌량과 뤄원 모두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갈릴레오 유가와 역인 옌량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범죄자와의 승부에서 이기지 못한다는 결정적 단점이 있으며, 뤄원은 아무리 아내와 딸 실종 사건의 진범을 찾기 위해서라지만, 잔챙이 범죄자들을 다섯 명이나 살해했기 때문에 동정심을 가질 여지가 없으니까요. "용의자 X의 헌신" 속 이시가미처럼 뤄원이 아내와 딸의 실종 이후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를 독자에게 잘 공감시키지 못하기도 했고요. 이건 작가가 놓쳤다고 밖에는 볼 수 없겠죠. 어설프게 캐릭터를 베끼지 말고, 초반부에 옌량이 똥이 있는 엘리베이터에 갇힌 뒤 벌어지는 사고는 재미있었던 만큼, 이런 식으로 좀 어설픈 인물로 그려가는게 차별화되고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읽는 재미는 나쁘지 않지만, "용의자 X의 헌신"에 비교하자면 한없이 부족하네요. 중국 추리 소설이 궁금하신게 아니라면,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 중국 추리 소설은 찬호께이만 믿고 가야겠습니다.

2022/09/12

흑마술의 여자 - 모리무라 세이이치 : 별점 2점

흑마술의 여자 - 4점 모리무라 세이이치 지음/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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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흑마술과 관련된 기묘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카미치 도키코는 다카네자와 다쿠야와 결혼하여 행복한 신혼 생활을 보내던 중, 남편 친구 우나하라 살인 사건의 중요 참고인이 되어 버렸다. 밀실인 그녀의 별장에서 우나하라의 시체가 발견된 탓이었다. 그녀는 또 다른 남편 친구 아리자와가 수상하다고 주장했지만, 아리자와마저 살해되어 버렸다. 

경찰은 수사를 통해 성폭행 당한 뒤 살해당했던 미스기 게이코 사건과 이 사건이 관련이 있다는걸 알아냈고, 도키코를 추궁하여 결국 진상을 밝혀내게 되는데....

추석 연휴를 맞아 책을 정리하다가 집어들게 된, 거의 30여년 전 구입했던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장편입니다.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사회파 추리 소설' 작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잔혹한 범죄에서 시작되는 범죄 스릴러물, 그리고 몇 가지 트릭이 등장해서 비교적 정통 추리물 느낌을 전해줍니다. 특히 '유니트 하우스'라는 건물의 특징을 이용한 밀실 트릭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우나하라는 도키코의 별장이 아니라 바로 옆 아리자와 별장에서 살해당했고, 아리자와가 별장 이층 방을 통째로 떼어내 교체했다는 겁니다. 실제로 수사 과정에서 도키코와 아리자와 별장의 이층 유니트가 바뀌어져 있다는게 드러나고요.

'이층 유니트를 통째로 바꾸는건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층을 통째로 교체하느니 지붕이나 벽면 일부만 떼어내어 사체를 옮기는게 더 편했을텐데 그러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등 이어지는 수수께끼도 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당연히 아리자와가 범행 후 유니트를 교체한건 아니었습니다. 진범은 도키코로 그녀는 우나하라를 별장에 먼저 초대한 뒤, 독이 든 위스키를 먹도록 유도하여 살해했던 겁니다. 유니트는 설치 당시 도키코가 자기 별장에 더 새 것처럼 보이는 유니트가 설치되도록 했던 것이고요. 설치 공사는 명찰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에, 명찰만 바꾸는 걸로 교체가 가능했었죠. 유니트 하우스이니 설치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요. 나중에 범행을 아리자와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해 이 사실을 이용했던 겁니다. 

별장 해체 후 유니트 패널 조사를 통해, 우나하라 살해 사건 당시 별장 근처 아자마 산이 분화하여 화산재가 내렸는데, 패널에는 화산재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진상을 증명하는 경찰의 수사도 설득력 높습니다. 즉, 사건 당시 유니트는 분해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당시로서는 꽤 첨단이었을 유니트 하우스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비현실적인 교체가 아니라 누군가를 모함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었다는 등 꽤 괜찮은 발상이 많이 보여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정작 밀실 살인에는 굉장히 간단한 트릭이 사용되었으며, 유니트가 바뀌었던 이유가 '자기 것을 더 좋은 걸로 만들고 싶은' 보편적인 인간 심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도 현실적이라 좋았습니다.

그리고 3인조 성폭행범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보였던 미스기 게이코 사건이 우나하라, 그리고 아리자와 살인 사건과 이어지는 복잡한 과정이 경찰 수사를 통해 설득력있게, 그리고 흥미롭게 드러나는 전개도 볼 만 합니다. 우나하라가 3인조 성폭행범 일당 중 한 명으로 그들은 게이코를 살해하지 않았으며, 미스기 게이코와 동행했다가 함께 성폭행범에게 납치되었던 '환상의 여자'가 도키코라는건 초반에 독자에게 공유되는 덕분입니다. 독자도 게이코 살해의 진상과 우나하라를 죽인 범인이 도키코인지 아니면 게이코의 약혼자였던 아리자와인지를 궁금해 할 수 밖에 없지요.

경찰이 우나하라가 3인조 중 한 명이라고 추리하여 나머지 일당을 체포하고 아리자와 사건의 진상을 밝혀는 것도 그럴싸 했습니다. 우나하라가 살해된 뒤, 남은 2인조가 아리자와가 복수했다 여기고 그를 살해했던 겁니다. 여기서 아리자와 사건은 게이코 사건과 연결되지 않으니, 우나하라 사건과 게이코 사건이 연결되며 두 사건의 범인은 도키코라는 결론에 이르는 추리도 합리적이에요. 도키코가 우나하라를 살해한 이유는 협박받았기 때문일텐데, 그 이유는 우나하라가 성폭행을 저질렀다는걸 폭로하겠다는 협박일리는 없습니다. 그 사실이 드러나면 잃을게 더 많은건 우나하라니까요. 결국 우나하라는 게이코를 죽인 진범이 도키코라는걸 폭로하겠다고 협박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환상의 여자'가 도키코임을 밝혀내고 결국 도키코를 체포하는 경찰의 집요하면서 끈질긴 수사 과정도 사회파 추리 소설 작가다운 디테일이 돋보였습니다. 고소우 경찰 부장 등 등장하는 경찰 캐릭터들도 생동감있게 잘 그려내고 있고요.

가장 마지막에 드러나는, 도키코가 게이코를 살해했던 이유는 정말 놀라왔습니다. 그녀는 선천적 기형으로 질결손 상태였는데, 성폭행범들 때문에 이 사실이 게이코에게 알려지자 그걸 숨기기 위해 살해했던 겁니다. 그 뒤 인공 질 성형술을 시술받아 결혼했고요. 좀 급작스러게 드러나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앞서 여러가지 복선으로 - 특히 다쿠야가 미국 출장을 간 사이, 도키코가 거리에서 만난 남자와 불륜을 저지른 이유처럼 - 설명되고 있어서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작품이 발표된 1974년이라는 시점에서는 상당히 시대를 앞서간, 신선한 아이디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비슷한 아이디어가 1975년 작품인 나쓰키 시즈코의 "흑백의 여로"에서도 사용된 바 있는데, 아마 당시 일본에서 뭔가 뉴스가 있었던게 아닌가 싶네요.

이렇게 3인조 성폭행범의 범죄에서 촉발된 연쇄 살인극만 놓고 보면 꽤 괜찮은 작품입니다. 나름의 트릭도 잘 사용되어 있고, 수사 과정과 진상 모두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작가 인생 최전성기에 발표된 작품답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제목에도 있는 '흑마술' 입니다. 이는 도키코의 남편 다쿠야가 흑마술과 집단 난교 등을 행하는 사이비 종교 단체인 '신비학회'의 본부가 있는 미국 라스베가스까지 날아가 비밀 모임에 몰래 참석하는 등 뭔가 대단한 배경이 있는 것 처럼 장황하게 설명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본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냥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끌기 위한 자극적인 소재에 불과해요. 추리적으로도 도키코가 아리자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노력하고는 있지만, 아리자와에게 알리바이가 있을 경우 대책이 없었다는 헛점이 크게 느껴집니다. 아리자와의 알리바이가 증명된 이후, 도키코는 빠져나갈 여지가 없어져 버렸으니까요. 아리자와가 운 좋게 (?) 살해당해서 시간을 벌었을 뿐입니다. 작가 특유의 성적 묘사도 지나쳐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장점도 분명하지만 단점이 너무 커서 완성도 측면에서는 점수를 주기가 어렵습니다. 그나마 흑마술과 성적 묘사 부분만 뺐더라도 훨씬 좋은 작품이 되었을텐데 아쉽네요. 구태여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어차피 절판되어서 구하기도 쉽지 않습니다만...

2020/08/09

테미스의 검 - 나카야마 시치리 / 이연승 : 별점 3점

테미스의 검 - 6점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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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저지른 죄를 동족 인간이 판단하는 행위 자체가 불손하고 오만하네. 구로사와 재판관 (시즈카 재판관의 스승) 

쇼와 59년 (1984), 부동산업자 구루마 부부가 살해당했다. 우라와 경찰서 검거율 1위인 나루미 경부보는 유력한 용의자 구스노키 아키히로를 불법으로 연행하여 심문한 뒤 자백을 이끌어냈다. 나루미의 파트너인 신참 형사 와타세는 나루미의 방식에 거부감을 느꼈지만, 말없이 따랐다.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아키히로는 결국 몇 년 뒤 구치소에서 자살했다. 

헤이세이 1년 (1989) , 나루미의 은퇴 후 도지마와 파트너가 된 와타세는 가미키자키에서 발생한, 고급 주택에서 아이와 아이 엄마가 강도에게 살해된 사건 수사에 나섰다. 주변에 목격자가 없는 환경이라 수사는 난항을 겪지만, 도지마와 와타세 컴비는 이 사건이 단순 빈집털이 사건인 오하라 현장과 유사하다는걸 알아낸 뒤, 흉기와 도구에서 열쇠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확인하고 관련자들을 수사해 나간 끝에 범인 사코미즈를 체포했다. 그리고 와타세는 이 사건이 쇼와 59년 부동산업자 살인 사건과 유사하다는걸 깨닫고 심문을 통해 사코미즈가 진범임을 밝혀냈다. 

와타세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다가 조직으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지만, 시즈카 재판관 등의 조언을 받고 사코미즈의 조서를 공개했다. 이후 언론의 대대적인 공세와 함께 사건 관계자들은 모두 좌천되거나, 해임되고 말았다. 그러나 핵심 수사관이었던 나루미는 이미 퇴임한지 3년이 지났기 때문에, 그리고 와타세는 내부 고발자로서 온다 검사로부터 보호받아 처분에서 빠져나갔다. 와타세 본인은 이에 대해 크게 자책하며 두 번 다시 수사에 오점을 범하지 않는 형사가 될 것을 결심한다.

23년 뒤인 헤이세이 24년 (2012).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사코미즈는 출소 직후 공중 화장실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당했고, 수사 1과 1반을 맡는 경부가 된 와타세는 독자적인 사건 수사에 나선다...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시리즈 등으로 접했던 작가 나카야마 시치리의 장편입니다. 잘못된 수사와 판결에 의한 '원죄'를 주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 왜 가해자보다 피해자 가족이 더 비참해져야 하는지, 흉악한 살인범도 인권이라는게 있는지 등 여러가지 질문을 많이 던져준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회파 소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사회파스러운 소재에 더해진 본격 추리라는 작풍이 작가의 특징인 듯 한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에요. 특히 '재판, 특히 사형 판결을 내린다는게 얼마나 무거운 행위인지' 알려주는 작품은 여러 편 보아 왔지만 묵직한 내용을 추리적으로 잘 포장한 작품은 "데이비드 게일" 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그런 점에서는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이야기는 시대순으로, 사건별로 구분되어 전개되지만 크게는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중반부까지 이어지는, 부동산 업자 부부 살인사건 용의자 아키히로의 자백을 받아내어 그는 사형 선고를 받지만, 5년 뒤 일어난 고급 주택가 모자 강도 살인 사건 수사를 통해 진범이 드러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과정에서 수사에 대한 묘사는 빼어납니다. 우선 부동산 업자 부부 살인 사건에서는 나루세 경부보가 용의자 아키히로를 옭아매는 조작 수사와 그 결과에 의한 재판이 아주 상세하고, 5년 뒤 일어난 고급 주택가 모자 살인 사건에서는 와타세 형사의 추리에 이은 수사에 대한 설득력이 높습니다.
모자 살인 사건 범인은 '열쇠업자' 일거라는 착안이 특히 빼어납니다. 범인은 도주하면서 직접 만든 자물쇠 따는 도구인 '피크'를 버렸는데, 와타세는 다시 만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리한 뒤 관련자 수사에 나서 범인을 체포하게 되거든요. 이후 범인 사코미즈가 전편에 등장했던 부동산업자 살인도 저질렀다는걸 알아차리는 과정 역시 이치에 합당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중반 이후, 진범 사코미즈가 모범수로 감형되어 23년 후 출소하자마자 살해된 사건에 대해서 다룹니다. 앞서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수사 중심이지만, 의외로 본격 추리물 느낌도 강하게 전해 줍니다. 알리바이 조작, 흉기 은닉과 같은 정통 트릭이 등장하는 덕분입니다. 마지막에 와타세 경부가 범인인 아키히로의 부친을 찾아가 사건 시각에 경운기에 탔던건 치매에 걸린 아내이고, 흉기는 농기구인 경운기 부품이었다고 밝히는 장면은 추리쇼와 다를게 없고요. 여기에 사코미즈 사건의 배후에 숨겨진 반전 -그를 죽이려는 온다 검사의 음모였다는 - 까지 더해져 추리적으로는 아주 풍성한 편입니다.

주인공인 와타세 경부도 매력적이에요. "연쇄 살인범 개구리 남자"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수사 기계처럼 등장했었는데, 이 작품에서 그 이유가 잘 드러납니다. 과거 원죄를 저지른 과오를 깊게 인식하고 두 번 다시 수사에 오점을 범하지 않는 형사가 될 것을 결심하는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수사 기계보다는 인간적인 모습, 고뇌하고 고민하는 입체적인 모습이 많이 보여져서 좋았습니다. 내부 고발자라 주위의 눈총을 받는 탓에 출세를 포기하고 범인 체포에 열중하는 모습도 설득력 높고요. 작품 속 진짜 수사 기계인 나루미 경부보는 알고보니 사건 해결에만 집착하는, 자기 중심적인 악당이라서 대비가 강렬했던 탓에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 것 같습니다. 본 작품이 와타세 경부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이라는데, 후속권도 계속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개구리 남자"의 주인공이었던 고테가와의 카메오 출연도 반가왔고요.

그러나 '진짜 흑막은 온다 검사!'라고 내세운 반전은 지나쳤습니다. 초반에 정의로운 모습을 보였던 온다 검사가 부동산 부부 살인 사건의 목격자로, 사건 당시 현장 근처 러브호텔에서 불륜을 저지르다가 범인을 목격했지만 나서서 증언하지 않은 바람에 애꿎은 아키히로가 사형 선고를 받고 죽게 되었다는 설정까지는 그럴싸 합니다. 범인 사코미즈도 '커플에게 들켰지만 경찰은 찾아내지 못한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비오는 밤에 커플이 사코미즈의 얼굴을 기억했을지 여부도 불투명하거니와, 사코미즈가 당시 목격자인 온다 검사의 얼굴을 기억하여 협박하려 했다는건 정말이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무려 28년 전 비오는 밤에 잠깐 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게 가능한 사람은 거의 없을겁니다.

또 와타세 경부의 수사처럼, 28년 전 사건의 첫 목격자가 당시 '유명 연예인을 닮은 사람'을 보았던걸 떠올린 덕분에 그 선을 수사하여 진상을 알아냈다는건 그나마 말은 됩니다. 허나 이 역시 그 연예인 닮은 사람이 진짜 그 연예인이었다는건 지나친 우연으로 느껴집니다. 이런 불확실한 목격 증언에 기대는 것 보다는, 사코미즈가 출옥한다는 편지를 피해자 가족에게 보낸 누군가를 상세히 캐 보는게 더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싶군요.

그리고 사코미즈가 아키히로 부친에게 살해당한다는건 더욱 억지스러웠습니다. 직접적인 피해자 가족인 부동산 업자 부부의 딸이나, 모자 살인 사건의 남편이 살해했다면 말은 됩니다. 하지만 아키히로의 부친이 진범 사코미즈를 살해한다? 부친이 원죄 사건에 대해 복수를 하고자 하면 최우선 목표는 나루미 경부보가 되어야 합니다. 사코미즈는 원죄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아키히로가 사형 판결을 받고 자살한건 경찰의 무리한 수사, 검찰의 무리한 기소, 그리고 이를 제대로 확인못한 재판관의 잘못이니까요. 그리고 와타세 경부도 이야기 하듯, 무려 28년을 (아키히로가 자살한 것부터로는 25년 쯤?)참고 살다가 급작스럽게 복수를 결심한다는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아울러 이 세 명이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온다 검사는 어쩔 셈이었는지 설명되지 않는 것도 문제에요. 사코미즈를 없애기 위해서는 세 명의 피해자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는 정도로는 불충분했을텐데 말이죠. 애초에 편지를 보내는 것 보다는 그냥 사코미즈의 주장을 무시하는게 정답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그리고 중반부에서 경찰 조직이 과거의 실수를 알아채고 증거 (조서)까지 확보한 와타세가 이를 밝히려하자 철저히 격리시키고, 심지어 폭행까지 저지르는 과정이 지나치게 뻔하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조직의 잘못을 알게 된 언론도 대중과 영합하여 총 공격에 나서며, 관계자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보호되고 처벌받으며 이 와중에 지나친 관료 주의가 대두되는 등등 모두가 이런 류의 작품에서 너무 많이 보아왔던 묘사들이에요. 게다가 와타세가 관계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며 사죄하는 모습은 솔직히 어이가 없더군요. 당연한 결과인데 말이지요. 본인이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은 것은 의아해할 수 있어도, 이는 조직에서는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내부 고발자는 보호하는데 마땅하니까요. 와타세는 나루미 경부보만 처벌받으면 된다는 순진한 생각을 한 것일까요? 말리는 선배까지 힘으로 눌러버리던 모습은 다 어디갔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묘사는 와타세 경부라는 캐릭터를 위해서는 불필요했다 생각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비록 단점은 있지만 묵직한 주제를 추리적으로 재미있게 포장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원죄에 대한 뻔한 묘사는 조금 줄이고, 온다 검사 수사에 조금만 더 설득력을 부여했더라면 별점 4점도 충분했을거에요. 물론 이 정도로도 충분히 좋은 작품이니만큼,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께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2010/11/12

금요일 밤의 미스터리 클럽 - 구지라 도이치로 / 박지현 : 별점 1.5점

금요일 밤의 미스터리 클럽 - 4점
구지라 도이치로 지음, 박지현 옮김/살림

시부야에 있는 니혼슈 전문 바 '숲으로 통하는 길'. 그곳에서 바의 마스터, 경시청 경부 구도, 술을 못하는 범죄 심리학자 야마우치는 자칭 '야쿠도시' 트리오를 이루며 다양한 화제로 수다를 나누다가, 매주 금요일만 나타나는 사쿠라가와 하루코라는 미모의 여성과 어울리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녀는 미궁에 빠진 사건을 듣고 곧바로 해결하는 알리바이 깨기의 명수였다...

"행각승 지장스님의 방랑"과 유사하게, 니혼슈 전문 바를 무대로 한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물입니다. 설정 자체는 매우 고전적이지만, 니혼슈 바라는 공간적 특징을 살려 각 에피소드마다 맛있는 술과 요리, 안주가 등장하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또한 다양한 잡학 지식이 펼쳐지는 부분에서는 "심야식당"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추리 요소를 결합한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특히 술과 요리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모든 에피소드를 '...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설정하여 사건을 동화와 연결시킨 점도 나름대로 흥미로웠습니다.

그러나 추리소설로는 다소 실망스럽습니다. 트릭이 단순한 탓이 가장 큽니다. 모든 사건이 알리바이 트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대부분 우연과 운에 의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몇몇 트릭 장치는 지나치게 유치했고요. 게다가 '알리바이'만 강조될 뿐, 기타 현장 조사나 탐문 수사는 거의 생략되어 있습니다. 경찰이 보다 철저하게 수사했다면 쉽게 해결될 사건도 많습니다. 즉,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추리 퀴즈'에 가깝습니다.

또한 니혼슈와 다양한 요리뿐만 아니라, TV 드라마, 예능, 광고, 가수 등과 관련된 대화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할 정도로 비중이 크고, 이로 인해 사건 자체에 대한 설명은 부족해집니다. 이러한 잡학 정보가 캐릭터들의 개성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여러모로 불필요한 요소였습니다. 이야기와는 무관하게 작가가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동화와 사건을 연결하려는 시도는 억지스러웠습니다. 동화 속 숨겨진 진실을 사건과 엮는 방식이 흥미롭기는 했지만, 기존에 출간된 "어른들을 위한 그림동화"와 같은 책들에서 다루어진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아 신선함이 부족했거든요.

결론적으로, 읽기 쉬운 짧은 에피소드 구성과 술과 안주, 요리에 대한 묘사, 다양한 잡학 지식이 흥미로울 수는 있지만,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차라리 요리책으로 나왔다면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정말 읽을 책이 없으신 분들이라면 한 번쯤 가볍게 읽어볼 수도 있겠지만, 굳이 찾아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헨젤과 그레텔의 비밀"

등장 요리: 조개구이, 송이버섯구이 (숯불에 구워 간장으로 양념) 

등장 니혼슈: 아즈마이치 (東一), 하루가스미 (春霞) - 아키타현의 향이 풍부한 다이긴조슈 

사건: 도미사와 이시라는 과자 회사 사장이 자택의 간이 소각로에서 타 죽은 채 발견되었다. 용의자는 두 명이지만, 모두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는데...

첫 번째 에피소드로, 사망 시간을 조작하는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합니다. 트릭 자체는 유치하고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여러 단서가 모여 결말에 이르는 전개는 비교적 탄탄했습니다. 동화의 내용을 사건과 연결하는 방식도 효과적으로 활용되었고요.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완성도가 높았던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빨간 모자의 비밀"

등장 요리: 날치 튀김 (신선한 미야케지마 산 날치와 참마를 다져 튀긴 요리, 레몬즙과 간장을 곁들여 섭취) 

등장 니혼슈: 사쿠라가와 (桜川) - 도호쿠 남부 지방에서 빚은 과일향이 나는 다이긴조슈

사건: 71세의 할머니와 21세의 손녀딸이 살해당했다. 사인은 모두 교살이며, 용의자는 손녀딸 이즈미의 남자친구 미타무라와 이즈미 계모의 애인인 백수 시모이였다. 그러나 시모이에게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사망 추정 시각의 공백을 이용한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범인이 알리바이를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즉, 순전히 우연과 경찰의 부주의한 수사로 인해 꼬였을 뿐인거지요. '시각 실인증'이라는 개념은 흥미로웠지만, 효과적으로 활용되지 못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브레멘 음악대의 비밀"

등장 요리: 돼지고기 소시지 구이

등장 니혼슈: 아즈마이치 (東一), 오토코야마 (男山), 센주시라뵤시 (千壽白拍子) - 야마다니시키 100%를 원료로 시즈오카 효모로 빚은 술. 첫맛은 깨끗하고, 뒷맛은 산뜻함

사건: 악단 '사계'의 멤버 세 명이 집에서 발생한 화재로 죽었다. 화재가 발생하기 전까지 아무도 출입하지 않았기에 사고로 여겨지는데...

"명탐정 코난"에서도 사용된 팩스를 이용한 방화 트릭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정교하지 못하고, 기화하는 수면제라는 설정도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신데렐라의 비밀"

등장 요리: 생굴 (간장과 레몬을 곁들여 섭취)

등장 니혼슈: 시라마유미 (白真弓) - 기후현 히다의 명주

사건: 캐슬 호텔 오너의 아들 조 다쿠야의 애인 요시노 리호코가 절벽 아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녀가 추락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있었기에 사망 시각은 확실했다. 그런데 유력한 용의자 조 다쿠야의 알리바이는 완벽했다...

고전적인 시체 이동 트릭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경찰 수사가 부실하게 진행되었고, 알리바이 또한 범인의 의도가 개입되지 않은 '우연'에 의한 것이기에 설득력이 떨어졌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백설공주의 비밀"

등장 요리: 애플파이, 자오우 산기슭에서 직송된 화이트치즈 (와사비 간장 소스), 샐러드를 곁들인 호로새 훈제구이 (마요네즈 소스)

등장 니혼슈: 시라유키 (白雪) - 효고에서 생산된 명주. 마쓰오 바쇼, 치카마츠 몬자에몬 등이 즐겨 마셨음

사건: 유키코는 계모 도모미로부터 살충제가 든 애플파이를 선물받았다. 그러나 파이를 먹기도 전에 둔기에 의해 살해당하는데...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차로 1시간, 오토바이로 30분이 걸리는 장소를 순간 이동하듯 이동하는 트릭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연에 의지한 알리바이이며, 범인의 행동이 눈에 띌 가능성이 매우 높은 점이 문제였습니다. 경찰 수사가 조금만 철저했다면 알리바이 없이도 쉽게 해결될 사건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장화 신은 고양이의 비밀"

등장 요리: 광어회

등장 니혼슈: 메이보 (明眸) - 아이치현 세토산

사건: 채팅 사이트에서 바람잡이로 활동하던 네코다 마사미가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인 가라바는 사망 추정 시간에 한 시간 이상 떨어진 공원에서 데이트 중이었다는 알리바이 증명 사진을 경찰에 제출했다.

고전적인 트릭인 '시계 앞에서 찍은 사진'을 활용한 알리바이 조작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트릭이 조잡하고 유치한 수준이라 실망스러웠습니다. 해당 시간대의 탐문 수사만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쉽게 해결될 사건이었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비밀"

등장 요리: 참치와 방어조림

등장 니혼슈: 히카리 백춘 (白春) 다이긴조 - 과일향이 나는 미주

사건: OL 노하라 유메코가 음독 자살했다. 그런데 그녀는 자살 직전까지 중학교 동창인 탤런트 히키다 신지에게 줄 스웨터를 뜨고 있었다.

일종의 원격 살인 트릭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범죄성이 낮고, 이러한 이유로 사람이 죽을 가능성이 적어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치사량' 개념을 활용한 추리는 흥미로웠지만, 그 외의 요소들은 미흡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염소의 비밀"

등장요리 : 소 혓바닥 요리, 돼지고기 조림, 수제 로스햄, 흑돼지구이 - 사쓰마 자연 방목 흑돼지 로스를 간장에 절여 숯불에서 구운 것. 양파 슬라이스 곁들임

등장 니혼슈 : 와카다케 (若竹),

고시노칸바이 (越乃寒梅) - 매화의 명소에서 만들어진 니가타의 명주. 지방술 붐의 선두주자.

사건 : 보모 쓰키오리 아즈미 살해사건. 자택에서 교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용의자는 직장 동료인 모토야 마사카즈였다.

경찰의 무능함이 부각되는 조잡한 알리바이 트릭입니다. 용의자 핸드폰 통화 내역이나 주변 탐문 수사만 했더라도 뻔하게 드러났을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트릭의 핵심이 변장이라는건 정말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차라리 1:1 비율의 사진을 오려 붙였다고 하던가... 점수를 주기 힘든 졸작입니다. 구태여 점수를 주자면 1점입니다.

"꼬마 요정과 구둣방 할아버지의 비밀"

등장요리 : 도오바찜 - 돼지고기를 간장, 미린, 설탕을 넣고 푹 끓여 찐 요리. 슈토 (酒盜) - 토사 명물 가다랭이 젓갈. 기본 안주임.

등장 니혼슈 : 덴구마이 (天狗舞) - 이시카와 현의 저온 장기숙성 준마이슈

사건 : 지난 1년간 시부야를 휘저으며 보석만 훔치는 괴도 S89호가 '요정의 구두'라는 100캐럿 다이아몬드를 훔쳤다. 하루코는 S89호의 정체를 밝혀내는데...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편'이어야 하지만... S89호의 정체도 어이가 없을 뿐더러 증거라고 들이대는 것들도 설득력이 약해 추리 소설로서의 가치가 전무합니다. 그냥 마지막 편이라는 의미 이외의 것을 찾기 어렵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2025/02/07

붉은 박물관 - 오야마 세이이치로 / 한수진 : 별점 2점

붉은 박물관 - 4점
오야마 세이이치로 지음, 한수진 옮김/리드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사 1과의 데라다 사토시 경사는 수사 중 실수를 저질러 경시청 부속 범죄 자료관(붉은 박물관)으로 좌천되었다. 그곳은 경시청 관내에서 일어난 사건의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일정 기간 경과 후 관할 경찰서에서 받아와 보관하고, 그것을 조사 연구 및 수사관 교육에 활용하여 향후 수사에 도움이 되게끔 하는 곳이었다. 관장 히이로 사에코는 수집된 미해결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고, 데라다에게 직접 수사를 맡겨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오야마 세이이치로의 정통 본격 추리 단편집. '붉은 박물관' 관장 히이로 사에코가 안락의자 탐정으로, 기존 수사 기록과 데라다를 시켜 모은 정보로 미해결 사건을 추리해 낸다는 내용입니다. 모두 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드라마가 발표되었을 정도로 인기작이었던 모양입니다.

오래 전 미해결 사건에 대한 정보가 모이는 부서에서 사건을 추리한다는 설정은 로이 비커즈의 "미궁과 사건부"와 똑같습니다. 딕슨 카의 "기묘한 사건, 사고 전담반"과도 비슷하고요.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는 장르 성격도 동일합니다. 수록작들 모두 어느 정도 트릭이 사용되었으며, 탐정이 독자들과 똑같이 단서를 제공받는 고전적인 안락의자 탐정물인 덕분입니다. 덕분에 독자도 탐정과 동일한 조건 하에서 추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급해드린 고전 명작 수준은 아닙니다. 대부분 작품 속 트릭이나 범행 동기가 별로 현실적이지 않고, 억지스러운게 많은 탓이 큽니다. 트릭도 5편 중 한 편("죽음에 이르는 질문")을 제외하고는 'A인 줄 알았던 사람이 알고보니 아니었다.'같은 사람 바꿔치기일 뿐이고요. 사건을 풀어나가는 전개 방식도 작위적이거나 우연에 기반한게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캐릭터들도 영 별로입니다. 탐정역인 박물관 관장 히이로 사에코는 일본 컨텐츠에 나오는 쿨 뷰티 안경녀의 전형으로, 생생함을 느끼기 힘든 인물이었습니다. 열혈도 아니고, 사명감도 딱히 없어 보이는 미지근한 초식남 데라다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고전적인 안락의자 탐정물을 다시 불러온 의욕은 좋았지만, 완성도는 고전 걸작들에 미치지 못합니다.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빵의 몸값

1998년 2월 일어났던 나카지마 제빵 사장 살해 사건이 벌어졌다. 사장은 빵에 바늘을 집어넣은 범인에게 1억엔을 건네주려다 살해당했다. 밖에서 숨어있던 경찰들은, 현장인 저택 내부 방공호의 존재를 몰라 범인을 놓치고 말았다. 

현장인 폐허로 들어갔던건 사장이 아니었습니다. 수사를 위해 차 안에 숨어있던 경찰 도리이였습니다. 그는 출발할 때 차고에서 가발과 안경, 마스크를 착용하여 사장으로 변장했고, 차 안에서는 1인 2역의 연기를 펼쳤습니다. 사장으로 폐가에 들어간 뒤, 변장을 풀고 수사관인척 나타났고요.
사장이 다른 사람을 살해할 때의 알리바이를 만드는게 목적이었습니다. 사장과 도리이는 뺑소니 사고를 일으켜 사람을 사망케 했는데, 함께 있던 야스다가 자수하려고 해서 죽이려고 했던거지요. 하지만 사장은 야스다에게 반격당해서 죽어버렸고, 이 사실을 들은 도리이는 사장인 척 연기에 나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장과 도리이 경부가 바뀌었다는 트릭은 나쁘지 않습니다. 당시 상황 - 협박범에게 돈을 건네주기 위해 이동하던 - 과도 잘 어울리는 편이고요. 그러나 그 외에는 대부분 억지스럽습니다. 경찰이 뺑소니 사망 사고를 일으킨걸 숨기려다 범행을 저질렀다는 동기부터가 말이 안됩니다. 게다가 공범자 중 한 명을 죽이기 위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무려 1억엔의 돈이 걸린 협박 사건을 꾸며냈다? 알리바이는 경찰인 도리이 경부가 거짓말로라도 증명해주면 됩니다. 이런 거대한 사건을 꾸며낼 이유가 없어요. 그야말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허무맹랑한 설정 놀음일 뿐입니다.

트릭도 운에 너무 많이 기대고 있습니다. 저택 안에 방공호가 없었더라면 어쩔 셈이었을까요? 야스다가 자살같은 사고사를 당하지 않았더라면요? 여러모로 이야기의 완성도가 높아보이지는 않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복수 일기

데라다 사토시는 1993년 9월 하치오지시 살인 사건 범인 다카미 교이치의 일기를 읽었다. '헤어졌던 애인 마이코가 살해당했다. 나는 몇 가지 단서를 토대로 범인이 오쿠무라 교수라고 추리했고, 교수와 담판을 짓던 끝에 그를 살해했다.'는 내용이었다. 일기장은 도둑맞았었는데 도둑이 경찰에 신고했고, 다카미는 출동한 경찰을 피해 달아나다가 차에 치어 죽었다.
히이로 사에코는 일기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챈 뒤, 데라다 사토시에게 재수사를 명령했다. 데라다는 명령대로 마이코의 부모님 집으로 찾아가, 오쿠무라 교수 살해 당시 알리바이를 물었다...

히이로 사에코가 일기에서 포착했던 '이상한 점'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꽤 치밀한 범행 계획을 세웠음에도 흉기를 가져가지 않고 현장의 페이퍼 나이프를 쓴건 확실히 이상했어요. 에어컨을 껐다는 묘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체가 일기 내용대로 범행 뒤 무더위 속에 방치되었던게 아니라, 시원한 실내에 놓여 있었다면 사망 시각은 훨씬 이전이 될 테지요. 

결론적으로, 오쿠무라 교수는 일기보다 이전에 살해당했습니다. 오쿠무라가 일기를 조작하여 경찰에 보내면서까지 진범을 자처했던건, 진범이 마이코였기 때문이고요. 이틀의 시차를 둔 건, 마이코의 알리바이(이미 사망했음)를 확실하게 만들 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진상을 추리해내는 과정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보다야 낙후되었다 하더라도, 90년대 과학 수사가 무려 이틀 이상의 사망 시각 차이를 밝혀내지 못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운에 의지하고 있는 부분도 너무 많습니다. 마이코 자살 사체가 발견되기 전, 다카미가 마이코의 집을 방문했다는걸 아무도 몰랐고, 하숙집에서 가짜 도둑 소동을 일으켰을 때에도 들키지 않았고, 오쿠무라 집의 에어컨 조작을 들키지 않은 것 등은 모두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에어컨 조작의 경우, 전기 사용량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죽음이 공범자를 갈라놓을 때까지

데라다 사토시는 눈 앞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피해자 도모베 요시오가 사망하기 직전에, 25년 전 교환 살인을 저질렀다는 고백을 들었다. 조사해보니 실제로 25년 전, 유력한 용의자의 알리바이가 확실하여 해결되지 못했던 사건들이 있었다...

교환 살인을 소재로 한 작품은 흔한데("낯선 승객"), 데라다 사토시에게 죄를 고백한 도모베 요시오는 가짜였고, 도모베 마사요시 살인 사건의 진짜 청부인도 도모베 요시오가 아니라 아내 마키코였다는 바꿔치기 트릭이 합쳐져 신선한 재미를 선사해주는 작품입니다. 마키코는 가짜 도모베 요시오인 사이토 아키히코와 초등학교 동창으로 범행을 모의했습니다. 마키코는 2년 전 도모베 요시오를 살해한 뒤, 사이토 아키히코를 대역으로 삼아 살아왔습니다.
데라다가 들은건 도모베 요시오가 아니라 사이토 아키히코의 고백이었기 때문에, 25년 전 사건 조사를 할 때 혼돈을 일으켰던 것이고요.

진상을 드러내는 추리 과정도 매끄럽고, 단서 제공도 가짜 도모베 요시오의 면허 취득 기간을 감안하면 믿을 수 없는 운전 실력, 폐업 후 지방으로 내려간 상황, 근육질인 마키코의 체형(그래서 25년 전 여성 한 명을 살해하기 용이했다) 등 과할 정도로 제공됩니다. 

때마침 데라다 앞에서 교통 사고가 일어나고, 마침 피해자가 경찰에게 지은 죄를 고백한다는  상황은 작위적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정통 본격 추리물로는 충분한 완성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불길

사진작가 에미리는 21년 전 부모와 이모를 잃었다. 세 명은 청산가리로 독살당했고, 집과 사체는 범인이 지른 불로 전소해버렸다. 이모의 연인이라는 남자 소행으로 보였지만, 사건은 해결되지 못했다. 사건에 대한 글을 잡지에서 읽은 히이로 사에코는 데라다에게 에미리에 대한 추가 조사를 지시했다. 

에미리의 친모 도모코는 친모가 아니었습니다. 남편과 동생 아키코가 불륜을 저질러 에미리가 태어났지요. 그런데 둘 사이에 또 애가 생기자 복수심에 범행을 저질렀던게 진상입니다. 에미리를 임신했을 때와 겹쳤던 아키코의 유학 및 실종 기간, 아키코의 애인 이야기는 도모코의 말 뿐이었다는 것, 도모코는 연장 보육 제도 이용도 고려했다는 등의 단서 및 이를 통한 추리도 깔끔합니다. 사건의 동기도 끔찍하지만 충분히 설득력있고요. 수록작 중에서는 범행 동기와 과정만큼은 가장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가장 큰 문제는 증거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사건을 해결했다기 보다는, 그나마 말이 되는 추리를 추가했을 뿐이지요. 그래서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추리 퀴즈에 가까와 보이기도 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질문

26년 전 발견되었던 피살체와 똑같은 상태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피해자는 26년 전 사건의 피해자와 연령이 같았고, 사망 추정 시각 및 사체 유기 현장도 똑같았으며 심지어 흉기마저 일치했다. 이번에도 피해자 스웨터 소매에 피해자가 아닌 사람의 피가 묻어 있었다. 수사 1과는 동일범의 소행이라 여겨 자료관에서 26년 전 자료를 가져갔다. 이런저런 이유로 수사관이 범인일 수 있다는 감사팀의 지시를 받아 데라다는 홀로 사건 수사에 나섰다...

범인은 기자 후지노 준코였습니다. 그녀는 26년 전,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후쿠다 도미오를 살해했습니다. 후쿠다 도미오 소매에 묻은 피는 아버지의 피였습니다. 준코를 학대하던 아버지는 후쿠다를 끌어들였다가 살인 사건에 휘말려 입을 다물게 되었고요.
그리고 26년 후,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의 친자임을 확인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소매의 피는 DNA 조사를 할 테고, 이를 통해 가족 관계가 드러날걸 노렸던 겁니다. 

이를 드러내는 '26년 전 피가 묻었던 소매와 지금 피가 묻은 소매의 위치가 다르다'는 단서도 좋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에는 어느 쪽 소매에 피가 묻었는지 전혀 공개되지 않아서, 범인은 이를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팀 생각대로 수사팀 관계자가 범인이었다면, 26년 전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을테니 위치를 틀렸을리가 없지요. 그렇다면 범인은? 피에 대한 경찰 조사 결과를 입수할 수 있는건 보도 관계자일테고, 관련되어 질문을 하는 관계자가 범인일거라는 추리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리의 과정은 영 별로입니다. 비약이 심한 탓입니다. 보도 관계자가 범인일 수는 있지만 다른 가능성도 널려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DNA 분석 요원일 수도 있잖아요? 아니면 기자회견을 맡는 수사관이 아닌 경찰 직원이라던가... 기자 회견장에서 후지노 준코가 DNA 조사를 물어본 것도 작위적이었습니다.

추리 과정보다 더 큰 문제도 있습니다. 동기와 범행의 설득력이 낮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DNA가 범행 당시 핏자욱밖에 남아있지 않다면,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으니 자수하고 그 증거로 혈흔이 아버지 것이라는걸 증명하는게 훨씬 간단한 해결책입니다. 억지로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를 이유는 없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인 '정통 본격 추리물'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망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