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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08

금지된 장난 - 시미즈 가루마 / 최주연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오토 가족은 교외 주택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나오토의 아내 미유키가 교통 사고로 끔찍하게 사망한 후, 어린 아들 하루토는 어머니의 손가락을 마당에 묻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소생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뒤, 예전 나오토의 직장 동료였던 프리랜서 카메라맨 히로코에게 괴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히로코는 과거 나오토와의 불륜을 의심했던 미유키로부터 괴현상 공격을 받았던걸 떠올리고 나오토를 찾아가는데... 

시미즈 가루마의 장편 호러 소설입니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기를 바랐지만, 돌아온건 그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었다는 익숙한 설정의 작품입니다. 설정은 무척 뻔하지만, 초중반부에 미유키가 이형의 존재로 자라나는 과정은 꽤 섬뜩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특히 아내가 재생하고 있다는걸 눈치챈 나오토가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봐 외딴 집 담 안쪽에 스스로 더 높은 담을 두르는 등의 과정 묘사가 좋습니다.

높은 담을 두른 집 내부가 나오토와 함께 점점 황폐해지는 과정, 이와 반대되는 하루토의 명랑함이 공포심을 잘 자극해 줍니다. 나오토의 집을 방문했던 히로코의 카메라에 살짝 찍힌 마당을 확대했을 때, 움직이던 흙무덤 사이로 미유키의 눈알이 보였다는 묘사는 화룡정점이에요. 직접적으로 괴물을 보여주는 것보다, 사진 속에 우연히 찍힌 일부를 통해 마당 밑에서 무언가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확인하게 만드는게 확실히 더 효과적이더군요. 아마 영상화된다면, 이 장면만큼은 엄청날 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이런 간접적 묘사에 이어지는, 거의 좀비 상태로 부활한 미유키가 히로코, 나오토를 쫓는 추격전도 크리처 호러물로서 기본은 해 줍니다. 미유키를 키운건 미유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미유키의 피를 물려받은 아들 하루토의 힘이었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고요.

하지만 장점은 일부일 뿐, 사랑하는 사람의 부활과 재앙, 순진하지만 악마였던 아이, 원령의 질투에 이은 빙의와 폴터가이스트, 좀비에 가까운 크리처 호러까지 인기 있을 만한 소재들을 잔뜩 끌어왔지만 새로운건 하나도 없는 진부한 망작입니다. 나오토가 하루토의 살점을 마당에 묻고 부활을 기도하는 에필로그마저도 진부합니다. 뻔한 소재를 가져다가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전개하며 마무리했다는 느낌만 줍니다.

이야기도 완성도가 부족한데, 가장 큰 이유는 히로코가 위험에 빠진 이유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나오토가 과거 히로코에게 호감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두 사람 사이에 구체적인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미유키가 단지 남편이 호감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히로코를 저주하고 죽이려 한다는건 너무 억지스러웠어요. 물론 이런 질투가 하루토 때문이라는 설명이 살짝 덧붙여져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단지 호감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위험에 빠진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네요. 

후반부 추격전도 박진감에 비해 공포는 부족했습니다. 부활한 미유키는 흉측하기는 하지만, 정확히 어떤 능력을 가진 존재인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좀비에 가까운 괴물처럼 보이기도 해서, 성인 남녀가 힘을 합치면 충분히 퇴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초반부에 보여준 폴터가이스트 현상이나 중반부의 빙의 같은 능력이 마지막 추격전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것도 이상했습니다. 앞에서 여러 초자연적 능력을 보여주었다면, 마지막 폭주 장면에서도 그 능력들이 결합되어 더 위협적인 공포를 만들어냈어야 했습니다. 결국 화재로 전소하고 만다는 결말도 시시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진부하고 별로 무섭지도 않아서 점수를 줄 부분이 거의 없네요. 추천드릴 작품은 아닙니다.

2025/12/13

피안장의 유령 - 아야사카 미쓰키 / 김은모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대 초반의 야마모토 히나타는 강력한 염동력으로 사고를 일으킨 뒤 가족과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한 소꿉친구 사라와 함께 기지마 그룹 후계자 렌의 의뢰를 받고 외딴 저택 '피안장'으로 향했다. 피안장에 일어나는 괴현상 조사에 협조해 달라는 의뢰였다. 조사에는 예지 능력자 시게키, 사이코메트러 미즈키, 정신감응 능력자 도시코, 자동서기 능력자 아키라, 일렉트로키네시스 나기도 함께 참여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조사에 나섰지만, 저택의 괴현상은 실재했고 첫날 밤 시게키가 소파 속 비밀 공간에서 혈액이 모두 사라진 채 전신이 찢긴 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일행은 저택의 의지에 의해 감금되어 버리고 마는데...

제미나이로 그려본 피안장

초능력자들이 대거 등장하는 '특수 설정' 미스터리물임과 동시에 하우스 호러물과 정통 본격 미스터리도 결합되어 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초능력과 저주받은 피안장 내 특수한 조건에 의해 일어난 괴사건을 정통 본격물처럼 논리적으로 추리하여 진상을 드러내거든요.

특히 나름대로 정통 본격물이라는 게 밝혀지는 마지막 히나타의 추리쇼가 빼어납니다. 논리적으로도 확실하며, 단서들과 추리에 대한 근거 모두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제공되는 덕분입니다. 

히나타의 추리에 따르면, 첫 번째 사건인 '혈액이 모두 사라진 채 전신이 찢긴' 시게키 사건은 사고였습니다. 시게키가 사라에게 장난치기 위해 소파 빈 공간에 들어갔는데, 근처에 있던 나기가 천둥번개와 정전으로 놀라서 일렉트로키네시스 능력을 발동했던 겁니다. 이 충격에 시게키가 휩쓸려 체내 혈액이 전기분해되어 피는 수소와 산소로 분해되어 사라지고, 발생한 수증기 탓에 신체 표면이 파열되어 죽었습니다. 나기의 고의가 아닌 일종의 사고였기 때문에 도시코의 정신감응 능력으로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고요.

두 번째 사건인 도시코 추락 사건은 밤이 되면 옥상 테라스에는 한 명만 올라갈 수 있어서, 사람을 심리적으로 쫓기게 만드는 저택의 능력에 의한 자살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히나타는 과거 모녀가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죽었던 기사를 통해 '의식을 잃은 사람'은 머릿수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추리합니다. 즉, 누군가가 도시코를 때려 기절시킨 후 테라스로 끌어올려 떨어뜨려 죽였던 겁니다.
이는 미즈키의 사이코메트리로 도시코가 뒷통수를 가격당했다는 게 밝혀져 증명되고, 범인은 렌의 독살 미수 사건으로 드러납니다. 독이 든 와인잔은 아키라 앞에 놓여 있었는데, 아키라는 포도 알레르기라고 전날 아침에 밝혔습니다. 포도 알레르기인 사람을 와인으로 독살하는건 말이 안되니 범인은 그걸 모르는 사람이지요. 그때 자리에 없던건 렌, 가즈히사, 유토였고요. 이 중, 독을 마시고 죽을 뻔한 렌은 제외됩니다. 유토는 앞서 테라스 살인에 사용된 머릿수에 대해 알 수 있는 기사를 볼 기회가 없었고요. 즉, 소거법으로 범인은 가즈히사입니다. 렌이 독으로 쓰러졌을 때 신속하게 위세척 등을 진행한 행동이 그가 독을 넣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주요 사건에 대한 본격물스러운 추리에 더해서 소소한 추리들이 곳곳에 삽입되어 재미를 더합니다. 렌의 이모부 부부가 자살했던 사건에 대한 추리 — 이모부가 렌에게 성적인 학대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서, 이모가 이모부를 죽이고 자살했다 — 라든가, 사라의 염동력 힘의 원천이 히나타였다는 추리 등이 그러합니다.

정통 오컬트 호러 판타지 스타일의 마지막 박진감 넘치는 피안장 탈출 묘사는 꽤 볼만 했고, 히나타가 조사에 아르바이트로 참여한 연구 조수 유토와 사귀게 되어 결혼까지 이른다는 완벽한 결말과 에필로그도 마음에 듭니다. 최근 작품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깔끔한 마무리였어요. 수미쌍관식 구성이라고도 볼 수 있는 꽃잎 묘사도 여운을 남깁니다.

그러나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우선 렌이 초능력자들을 저택에 모은 이유부터 설명이 부족합니다. 저택을 깨우기 위해 초능력자들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주장에 대한 근거는 전무한 탓입니다.
또 조사 참가자들이 머문 사흘 동안의 사건은 확실히 진상이 밝혀지지만, 과거 피안장에서 일어났던 괴사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택 안에서 행방불명된 남자가 일주일 후 온몸의 피를 잃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이를 단지 저택의 저주라고 하기에는 애매합니다. 저택이 이런 능력이 있다면, 렌 일행을 모두 직접적으로 처리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고요..
첫날 밤 위기에 처했던 도시코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도 설명이 없으며, 가즈히사의 동기가 결국 ‘저택에 사로잡혔다’는 게 전부라는 것 등도 여러모로 납득하기가 힘듭니다. 뭔가 있어보였던, 아키라가 자동서기 능력으로 그렸던 '스페이드 모양 문고리가 달린 문' 설명도 흐지부지 넘어가고요.

전개 부분의 완성도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미즈키, 도시코, 아키라 등으로 시점을 전환하는 부분이 특히 별로입니다. 저택 괴현상 때문에 놀라는 심리 묘사 외에는 시점을 전환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키라만 별도 설정을 풀어낼 필요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키라 시점 부분의 전개는 워낙 비호감으로 그려지는 탓에 짜증만 났습니다. 
그리고 예지 능력자 시게키의 죽음 이후에도 참가자들이 무방비하게 행동하는 모습은 비현실적입니다. 도시코의 능력으로 시게키 사건의 범인이 조사 참가자들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면, 협력해서 움직이는 게 당연했을 겁니다. 왜 저주받은 저택에서 밤을 홀로 보내다가 위기에 처하는 걸까요? 이 부분의 설득력이 낮아서 감정 이입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항상 그래왔지만, 거의 모든 묘사가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점도 아쉽습니다. 지나치게 쿨한 염동력 미소녀 사라, 입이 험하지만 알고 보면 따뜻한(?) 색기 넘치는 누님 미즈키 인물 묘사 및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피안장에 대한 묘사는 물론 저택 내에서 반복되는 괴현상 역시 식상한 헌티드 하우스 호러물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서 실망스럽습니다.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하우스 호러와 본격 미스터리의 혼합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개성을 가진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킬링 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았어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25/08/22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 세스지 / 전선영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핫한 모큐멘터리 형식의 호러 장편입니다. 과거 기사와 취재 기록, 독자 투고, 인터뷰, 인터넷 게시글 등 서로 결이 다른 텍스트를 이어 붙여 실존하는 괴이 현상을 추적한다는 실감을 한껏 느끼게 해 줍니다. 한마디로 다큐멘터리와 괴담집이 섞인 느낌이에요.

여러 형식으로 펼쳐지는 작품 속 괴담들은 짧지만 강렬한게 많습니다. 저주받은 아파트에 살던 어머니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기다린건 ‘누군가가 투신하는 순간’이었다는 고백, 그리고 빨간 코트를 입은 여자가 점프를 반복하는 이유가 밝혀지는 대목이 특히 섬뜩합니다. 빨간 여자는 자살한 아키라의 어머니였는데, 생전에 나무에 목을 맨 아들을 내려달라며 펄쩍 뛰던 모습이 그대로 남았다는 설명이지요.
묘사도 발군입니다. 특히 ‘저주 스티커’는 굉장합니다. 기괴한 디자인과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저기에 붙이고 다니는 이상 행동이 그야말로 섬찟함을 자아내는 덕분입니다.

여러가지 형식으로 괴담과 괴이현상이 소개되기 때문에 신선한 발상도 많습니다. 동영상 때문에 귀신에 씌운 대학원생의 에피소드에서의 공포물 반응을 실험하려고 여러 공포 체험 영상을 짜깁기했다는 설정처럼요. 공포물에 익숙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구분되는 실험 결과도 재미있었어요. 인터넷 실황으로 심령 스팟 돌입을 생중계하는 등 새로운 형식도 선보이고요. 이런 독특한 형식은 이야기에 현실감을 불어넣어 더 소름돋게 만들어 줍니다. 확실히 영화화 되는게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인상적인 부분이 제법 많아요. 

이렇게 호러물로서 충분한 완성도를 지닌 개별 괴담들이 기사, 인터뷰, 인터넷 글, 독자 투고 등 서로 다른 형식으로 선보이다가, 이야기 전체가 하나로 묶여 완결에 이르는 과정도 꽤 깔끔합니다. 괴담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끝내버리는(원래 있었던 괴이 취급을 하며) 미쓰다 신조 스타일과는 다르게, 어쨌건 괴담, 괴이 현상의 정체는 결말에서 밝혀주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제가 파악한 정체는 아래와 같습니다.

  1. 긴키 지방 산속에서 여성을 꾀는 존재 : 과거 노총각 마사루의 원념입니다. 노모를 모시느라 결혼도 못 한 채 인형과 감을 애지중지하던 그는 한 여성을 돌로 때려죽인 뒤 스스로 그 돌에 머리를 박고 죽었습니다. 그 뒤 여자들에 돌에 머리를 박고 죽는 사건이 반복되자 돌은 신사에 모셔졌습니다. 사람들은 인형과 감을 공양했지요. 그런데 세월이 흘러 잊혀져버리자, 다시 나쁜 짓 - 여자를 꾀어 데려오는 - 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 빨간 코트의 여자 : 아키라의 어머니입니다. 아키라는 마사루의 원념이 원하던 ‘여자’의 대역으로 희생되었었지요. 어머니는 아들을 잃은 뒤 마사루의 돌을 훔쳐 아들을 닮은 무언가를 되살렸습니다. 아울러 아이 유령 목이 고정되지 않고 흔들리는건, 목을 메다가 부러졌기 때문이겠지요...
  3. 저주 스티커 : 아키라의 어머니가 아들의 ‘먹이’를 찾기 위해 퍼뜨린 장치였습니다. 스티커를 통해 저주에 걸린 사람의 혼은 아키라의 먹이가 되고, 남은 껍데기는 자살처럼 위장된 시체로 발견됩니다. 이 때문에 긴키 지방의 아파트와 댐에서는 자살 사건이 잇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반면 단점도 있습니다. 몇몇 괴담은 반복 패턴이라 신선도가 떨어지고, 서로 다른 형식이 뒤섞인 서술은 때로는 산만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괴담과 괴이 현상의 핵심 정체는 밝혀주지만, 상세한 모든걸 밝혀주지는 않습니다. 편집자는 어디로 실종되었는지, 저주에 씌워진 희생자들이 외우는 기묘한 주문은 무엇인지, 스티커의 의미와 스티커를 눈에 띄는 전면에 붙이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궁금한게 많은데 모두 그냥 '저주'로 퉁치고 마는 탓입니다.

무엇보다도 너무 급작스러웠던 마지막 진상 고백은 다소 아쉽습니다. 앞서의 이야기에서 쌓아올렸던 장치들과 무관한, 빨간 코트의 여자 독백 한, 두페이지로 끝나버리는 탓입니다. 이는 이야기의 완성도를 다소 떨어트립니다. 비유하자면 "링"의 사다코가 TV에서 기어나와 자신의 원한을 한, 두 페이지 독백으로 마무리하는 결말인 셈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매체 텍스트들을 하나의 서사로 묶어내는 방식이 능숙하고, 섬찟함을 유지하는 기술도 좋습니다. 호러 소설, 그중에서도 괴담을 좋아하신다면 충분히 즐기실 만한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다만 서사적 완결성보다는 순간순간 장면의 섬뜩함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2025/04/20

사유리 - 오시키리 렌스케 : 별점 2점

[고화질] 사유리 (완전판) - 4점
오시키리 렌스케/대원씨아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모님, 누나와 남동생, 모두 7명으로 이루어진 노리오의 가족은 그동안 꿈꿔왔던 단독주택으로 이사왔다. 그러나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 뒤 남동생은 사라졌고, 할아버지도 급사하고 말았다. 누나와 어머니마저 자해, 자살하여 순식간에 노리오와 치매에 걸린 할머니만 남게 되는데...

오시기리 렌스케의 하우스 호러. "하이스코어 걸"이라는 레트로 청춘 연애 코미디로 유명하지만, 사실 이 작가는 "미스미소우"로 대표되는 호러물로도 유명하지요. 이 작품도 호러물이고요. 이런 작품이 있다는걸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영화화가 되었다고 하여 찾아보니 우리나라에도 이북으로 출간되어 있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한 권 분량이라 부담도 없었고요.

행복했던 7인 대가족이 꿈에 그리던 단독주택으로 이사한 뒤, 온갖 괴현상을 겪으며 한 명씩 죽어나가는 과정은 귀신들린 집(Haunted mantiion) 설정 그대로, 하우스 호러물의 전형대로 진행됩니다. 가족이 이사한 집은 '사유리'라는 소녀가 가족들에게 살해당하고 암매장된 곳이라, 사유리가 행복한 가족들에게 복수를 하고 있던 겁니다.

그래도 다행히, 가족들이 차례로 죽고, 자살하고, 사라지는 과정의 묘사는 그렇게 뻔하지는 않습니다. 일견 자연사처럼 보이는 평범한 죽음이 점차 진화해 나가는건 충분히 공포스러웠거든요. 누나가 혼자 혀를 물어 뜯는 묘사는 굉장했어요.

그리고 노리오와 치매에 걸렸던 할머니를 제외한 전 가족이 죽은 상황에서, 할머니 정신이 돌아오는 부분부터는 아주 신선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강단있고 행동력 강한 할머니 캐릭터가 굉장히 강렬했기 때문이지요.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담배를 한 대 피우는 모습은 와~ 정말 '핵간지'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르더군요. 귀신에게 지지않는 생명력을 갖추고, 오히려 복수를 위해 사유리를 죽인 사유리 가족을 모두 납치해서 죽이려 하는 모습은 광기어리면서도 통쾌했고요.

하지만 사유리가 자기를 죽인 가족도 가족이라고, 그들을 동정해서 약해진 탓에 노리오의 죽은 가족들에게 끌려가 성불하는 결말은 솔직히 영 아닙니다. 너무 급작스럽잖아요. 애초에 자기를 죽인 가족에게 원한을 품지 않은 이유도 불분명하고요. 할머니와 사유리의 제대로 된 대결이 펼쳐지지 않은 것도 실망스럽습니다. 남편과 아들, 며느리에 손자, 손녀까지 5명이나 죽인 악령을 그냥 놓아준다는게 앞서의 할머니 캐릭터와는 영 어울리지도 않았어요. 죽은 할아버지에게 이야기해서 영혼이라도 갈기갈기 찢어버렸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전형적인 전개를 특유의 스타일, 그리고 독특한 캐릭터로 풀어낸건 좋았는데, 결말은 전혀 그렇지 못해서 감점합니다.

2024/09/13

피가 흐르는 곳에 - 스티븐 킹 / 이은선 : 별점 2.5점

피가 흐르는 곳에 - 6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황금가지

스티브 킹의 중편집. 세 편의 중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빌 호지스 3부작' 시리즈 후속편이 수록되어 있다고 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표제작 "피가 흐르는 곳에"를 제외한 두 편은 순문학에 가깝습니다. 순문학 성향이 두드러지는 스티븐 킹의 말년 작품답네요. 말년 작품이라도 왕년의 화끈함, 끔찍한,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을 보여준 작품들이 없지는 않았는데, 그런 느낌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고, 완성도도 높습니다. 다만 '호러의 제왕'이라는 이름값에 걸맞는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해리건 씨의 전화기"
초등학생 크레이그는 똑똑했던 덕분에 마을 굴지의 대부호 헤리건 씨에게 책을 읽어 주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뒤, 때마다 헤리건 씨에게 복권을 선물받았다. 마침 선물받은 복권이 당첨된 어느 해, 크레이그는 해리건 씨에게 아이폰을 사 주었다. 해리건 씨는 평소 이런 제품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금새 아이폰에 푹 빠졌다. 그리고 헤리건 씨가 노환으로 사망한 뒤, 크레이그는 해리건 씨 관에 아이폰을 몰래 넣어 두었다. 그런데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해리건 씨의 전화기는 끊어지지 않았다. 크레이그는 자신을 괴롭히던 케니 얀코에 대해 헤리건 씨의 전화기에 넋두리를 늘어놓은 날, 케니 얀코가 자살했다는걸 알게 되는데...

스마트폰이 처음 도입되었던, 아이폰이 첫 출시되었던 시대에서 시작되는 작품. 
핵심은 해리건 씨입니다. 나이는 많지만 똑똑하고, 자신의 눈 밖에 난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지만 자기 사람에게는 굉장히 따뜻한 괴팍한 노인을 생생하게 잘 그리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에 대한 헤리건 씨의 탁월한 식견 등은 그를 단순한 노인 이상으로 구체화합니다. 여러모로 "재벌집 막내아들"이 떠올랐습니다. 주인공은 크레이그(진도준)이지만, 해리건 씨(진양철 회장)에게 눈길이 더 간다는 점과, 현재 시각으로 과거 - 여기서는 스마트폰 도입 - 의 경제 효과를 예측하고 있다는 점이 비슷합니다. 실제로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을 때 이런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큰 돈을 벌었겠지지요. 스티븐 킹이 과연 애플과 아마존 주식을 샀을지 궁금하네요.
조숙하고 똑똑한 크레이그, 그리고 크레이그의 아버지라던가 케니 얀코, 하긴슨 선생님 등 주변 사람들에 대한 묘사도 괜찮았습니다. 크레이그가 초등학생에서 시작하여 대학 졸업 후 직장인이 될 때까지 겪는 성장기로도 볼 만 했고요.

그러나 특별히 눈에 띄는 부분은 없습니다. 크레이그와 해리건 씨의 우정(?)과 크레이그의 성장기를 제외하고는 무덤 속 해리건 씨에게 전화를 거는게 거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전화를 건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설명되지 않아요. 이래서야 단순한 저주나 주술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으니까요. 매개체가 밀짚인형이나 생닭같은게 아니라 아이폰이라는 것만 다를 뿐입니다. 작가 후기를 보면 '관에 휴대폰이 들어갔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작품이라는데, 그 아이디어를 잘 살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네요.
크레이그가 옛 은사를 위한 복수를 마치고 전화기를 버리는 결말도 시시했습니다. 옛날 스티븐 킹이라면 좀 더 화끈하게 달려주었을텐데 말이지요. 스티븐 킹도 나이가 들면서 문학적이면서도 은근하고, 다소 애매한 결말을 즐기는데 이 작품에는 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글솜씨 하나는 정말 대단하다, 일가를 이루었다 싶은 생각은 듭니다. 다만 기대했던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척의 일생"
3막 : 고마왔어요, 척!
자연재해로 미국은 서서히 멸망해가고 있었다. 마틴을 비롯한 주민들 눈 앞에는 찰스 크란츠의 은퇴를 알리는 광고만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결국 최후가 다가왔다....

2막 : 길거리 공연
길거리 드럼 연주가 제러드 프랑크의 연주에 맞춰 시작된 척의 춤은 구경꾼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제니스도 합류하여 대단한 공연을 마쳤고, 척은 호텔로 가면서 왜 춤을 추기 시작했는지를 떠올렸다.

1막 : 내 안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척의 할아버지는 다락방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본 그대로 할머니 할아버지가 세상을 뜬 다음에, 척은 잠겨진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자신이 병원에 누워 있는 환영을 보았다. 하지만 척은 그를 없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열심히 살아갈 것을 결심했다. '내 안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담겨 있기" 때문에.

3막이자 맨 첫 번째 이야기에서 마틴과 주민들이 사는 곳은 척의 인생입니다. 불치병에 걸린 척이 죽어 가자, 그가 은퇴한다는(죽는다는) 광고가 계속 표시되었고 숨을 거두자 세계가 멸망하게 된 겁니다. 척의 안에 담겨있는 '무수히 많은 것들'은 바로 이 세계였다고 해도 되겠지요. 사실 뻔한 설정이기는 하지만 워낙 글을 잘 써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3막에서 서서히 세계가 멸망해가는 모습도 마음에 들었지만, 일상 속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한 때를 묘사한 2막이 가장 좋았어요. 후기를 보면 크리스토퍼 워켄의 팻 보이 슬림 뮤직비디오를 보고 영감을 얻은 듯 한데, 저는 "패리스 뷸러의 해방"의 거리 퍼레이드 장면이 떠오르더군요.
 

그러나 척이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해 주는 2막, 그리고 척이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1막은 문학적인 성취와는 별도로 사족에 가깝습니다. 3막만으로도 이야기가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1막은 킹 스스로가 후기에서 1년 뒤에 덧붙였다고 하니 사족임에 분명해 보입니다.
이럴 바에야 3막의 이야기에 가필하여 짧지만 반전이 있는 이야기로 만드는게 더 나았을겁니다. 독특한 디스토피아 세계관과 마틴의 눈 앞에 척의 광고만 떠오르는 묘사는 나름 공포스러웠는데, 이를 잘 살리지 못한 느낌이거든요. 설명도 많이 부족했고요.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잘 살리고, 척 내면 세계라는걸 짧지만 강렬하게 드러내는 식으로 쓰는게 좋았을 것 같네요.
현재의 결과물은 장르 문학보다는 순문학에 가까와서 평가하기 어려운데,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피가 흐르는 곳에"
파인더스 키퍼스의 탐정 홀리 기브니는 뉴스를 보다가 캐스터 채트 온도스키가 테러를 저지른 범인이라는걸 알아챘다. 홀리는 전직 경찰 벨 씨와 벨 씨 손자의 협조로 온도스키가 모습을 바꿔가며 저질렀던 오래전부터의 사건들 증거를 확보했다. 온도스키를 만나 살해할 계획을 세운 홀리는 파인더스 키퍼스 사무실에서 대결을 준비했지만, 제롬과 바버라의 등장으로 계획은 어그러지고 말았다....

"미스터 메르세데스" 시리즈 후속작 중편. 빌 호지스 사후 파인더스 키퍼스를 운영하게 된 홀리 기브니가 주인공입니다. 제롬과 바버라 등 전작의 주요 등장인물도 건재합니다.
수록작 중 유일한 범죄 호러 스릴러물로 체트 온도스키의 정체를 파헤치는 과정은 흥미진진한 수사물로 손색이 없으며, 그가 마음대로 모습을 바꿔가며 오랫동안 살아온 '괴물'이라는 설정은 일종의 크리쳐 호러물을 연상케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언급되는, 사람의 얼굴은 몇 가지 타입밖에 없다는 이론도 재미있었습니다. 홀리의 조력자 벨 씨가 탁월한 그림 실력을 갖춘 전직 경찰 몽타주 작성 전문가였고, 그의 손자는 음악 전문가로 성문 분석이 가능하다는 설정도 좋았고요. 온도스키가 과거부터 모습을 바꿔가며 암약했다라는 걸 과학적으로 드러내는 좋은 장치였어요. 호러와 과학 수사가 절묘하게 결합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습도 바꿀 수 있고, 빠른 속도를 지닌 온도스키가 고작 엘리베이터에서 떨어진 정도로 죽어 버렸다는 결말은 맥빠집니다. 홀리가 이를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웠다고는해도, 이러한 괴물 상대로는 약해보였기 때문입니다.제롬과 바버라가 사건에 휩쓸리는 전개도 좀 억지스러웠고요. 그래서 읽는 재미는 좋지만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영문학과 교수 드류는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장편 소설을 완성하고자 아버지의 오두막 집에 틀어박혔다. 집필 중 심한 감기에 걸린 상태에서 폭풍이 몰아쳐 오두막집에 고립된 드류는, 자신이 구해준 쥐가 소설 완성을 가지고 거래를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쥐는 소설 완성과 동시에 드류의 멘토 앨이 죽을거라고 말했고, 드류는 거래에 응했다...

소설을 완성하는데 작가들이 문장과 단어 하나 가지고 얼마나 머리를 싸매는지를 재미있으면서도 실감나게 풀어낸 작품. 드류가 태풍으로 오두막집에 고립되었는데, 아프기까지 해서 위기에 처하는 상황도 그럴듯 했습니다.

그러나 환상인지 모를 쥐(악마)가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거래를 한다는 건 다소 뻔했습니다. 특히 그 거래가 일종의 사기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요. 이런 류 작품들은 보통 비슷한 설정을 가지고 있는 탓입니다. 제 졸작 "계약은 충실하게"도 같은 이야기였지요.
앨이 죽은 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인지, 그래도 소설 완성의 기쁨이 더 큰 것인지 잘 모를 다소 애매한 결말도 아쉬웠습니다. 물론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최근 킹의 스타일이긴 하지만, 악마와의 거래가 나오는 이야기에서는 좀 더 화끈한 맛이나 반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24/07/17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 (2023) - 케네스 브래너 : 별점 3점

명탐정 에르큘 푸아로는 은퇴 후 베니스에서 조용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푸아로의 친구이자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 올리버가 찾아와 심령술사 조이스 레이놀즈에 대해 검증해 달라고 부탁했다.
할로윈 날, 교령회가 열리던 로웨나 드리에크의 저택을 방문한 푸아로 앞에서 조이스는 죽은 로웨나의 딸 알리시아의 목소리로 "나는 살해당했다, 범인은 이 안에 있다"고 말한 직후 살해당하고 말았다.
마침 몰아친 폭풍우로 저택마저 고립되었고, 푸아로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맞서 싸우면서도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였다. 그 와중에 로웨나 집안의 주치의 레슬리마저도 잠긴 방 안에서 칼에 찔려 죽은 시체로 발견되는데....


딸아이 때문에 가입한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감상한 영화입니다. 캐네스 브래너의 푸아로 시리즈 전작인 "오리엔트 특급 살인"과 "나일강의 죽음"은 원작도 원작이지만, 영화 버전으로도 이미 감상했기에, 아무리 추리 애호가라지만 별로 볼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제가 원작 "핼로윈 파티"를 읽지 않았던 덕분에 흥미롭게 볼 수 있었습니다.

원래 제목부터 "A Haunting in Venice"인 것처럼, 전통적인 '저주받은 저택' 소재의 호러물과 결합되어 있다는 특징이 눈에 띕니다. 등장인물들이 머물고 있는 저택에 유령이 많다는 설정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서, 초반부 교령회에서부터 시작해 푸아로가 세면대에서 유령을 보는 장면 등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들이 많거든요. 주로 탐정과 등장인물들 간의 대사로 전개되고, 액션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으며, 범행이 일어나는 장면도 대체로 숨겨져 있어서 - 범인이 드러나면 안되므로 - 시각적으로 볼거리가 없는 정통 고전 본격 추리물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였을 텐데,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덕분에 지루함 없이 즐길 수 있었습니다. 
촬영과 미술도 뛰어납니다. 인물들은 물론 무대가 되는 저택 곳곳의 디테일도 좋고, 모두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했습니다. 푸아로가 유령을 보고 느낀 이유가 약물에 중독된 탓이며, 이를 통해 과거 알리시아의 죽음이 약물로 인해 벌어진 사고였다는 추리로 이어지는데, 그 과정도 합리적이고, 약물이 들어있는 '꿀'에 대한 묘사가 곳곳에 등장하는 식으로 단서도 공정히 제공됩니다. 그리고 범인이 엄마 로웨나였다는 진상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짜여져 있습니다. 살아남은 등장인물들 앞에서 펼치는 추리쇼도 고전적이면서도 멋있었습니다.

물론 관객이 약물에 대해 알아채는 건 다소 한계가 있고, 로웨나가 오랜 시간 동안 '꿀'을 없애지 않은 이유도 설명되지 않는 등 사소한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 푸아로가 은퇴하여 은거하고 있던 중이라는 설정도 구태여 넣을 필요가 있을까 싶고요. 일부 지루한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고전 정통 추리물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누구나 즐겁게 볼 수 있는 잘 만든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4/02/14

키시베 로한은 움직이지 않는다 (2017~2020) : 별점 2.5점

"죠죠의 기묘한 모험" 시리즈 4부의 조연 키시베 로한이 주인공인 단편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작품. 원작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죠죠 시리즈는 좋아하기에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에피소드도 4편 뿐이라 부담없어서 좋았습니다. 한 번에 몰아서 보았네요.

특징이라면 호러물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기괴한 등장인물들과 더불어 대결 장면에서의 섬찟한 긴장감을 주는 묘사가 탁월한 덕분이지요. 최고는 "무츠카베자카"입니다. 오오사토 나오코가 실수로 남자친구를 죽이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집에는 약혼자가 찾아와서 시체를 치워야 하는데 시체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터져나옵니다! 상처를 붕대로 감고, 꿰메기까지 했는데도 피를 막을 수 없는 상황! 하지만 결국 문을 열고 들어온 약혼자는 피를 볼 수 없었습니다. 과연 나오코는 어떻게 피를 숨겼을까요? 
다른 에피소드들에서도 "고해소"는 악령, "부호촌"은 산신, "더 런"은 헤르메스 화신이라는 기괴한 적과의 대결이 선보여집니다.

죠죠 시리즈다운 두뇌 게임 요소도 있습니다. "부호촌"이 대표적입니다. 예의범절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내리는 산신을 상대로 함정을 간파하여 예의를 차림은 물론, 집사를 헤븐즈 도어로 조작하여 대결을 승리로 이끄는 식이거든요.
앞서 소개해드린 "무츠카베자카"에서 피를 숨긴 방법, "고해소"에서 비둘기 떼가 노리는 팝콘을 무사히 던져서 먹는 방법도 두뇌 게임이라 볼 수 있고요.

그러나 문제도 없지 않아요. 일단 작화 문제가 큽니다. 컬러와 디자인이 과해서 보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원작의 괴이한 패션 감각은 만화는 흑백이라서 그렇게 거슬리지 않지만, 풀 컬러 애니메이션에서는 거의 시각적 공해라고 해도 무방하겠더라고요. 핵심 장면 외에는 흑백으로 제작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동화도 그닥이에요. 잘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효과가 조금 화려한 슬라이드 쇼와 별로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습니다.
대결도 헤븐스 도어의 능력을 활용하여 마무리하는건 별로였습니다. "무츠카베자카"에서, 소녀가 사고로 죽었는데 헤븐스 도어로 과거로 시간을 되돌려 살려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낸다는건 무리일 뿐더러, 살려내는 방법도 단지 '키시베 로한을 알기 이전'으로 되돌리는게 전부라는건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부호촌"도 단순 대결물로 끌고가다가 헤븐스 도어의 능력으로 마무리한건 아쉬었습니다. 마을의 존재가 굉장히 흥미로왔는데도 말이지요.

그래도 재미 측면에서는 나무랄데없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다른 원작 에피소드들도 영상화되면 좋겠습니다.

2024/02/02

흉인저의 살인 - 이마무라 마사히로 / 김은모 : 별점 2.5점

흉인저의 살인 - 6점
이마무라 마사히로 지음, 김은모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핵심 트릭과 진상,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무라와 겐자키는 나루시마의 의뢰로 폐허 놀이동산으로 유명한 드림 시티로 향했다. 드림 시티의 대표 후기 겐스케로부터 구 마다라메 기관에서 연구했던 무언가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나루시마는 용병들까지 고용하여 만전을 기했다. 드림 시티 안에 있는, 후기 겐스케가 거주하는 흉인저는 매달 종업원 한 명이 불려간 뒤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입한 일행은 흉인저 안에서 후기를 제압하는데에는 성공했지만, 모두 갇힌 채 외팔이 살인마 거인을 만나 도륙당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거인이 햇빛을 싫어하여 낮에는 비교적 안전하게 탈출을 고민할 수 있었다. 폐쇄된 문을 부수는건 거인이 밖으로 나가 더 큰 사고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기에, 첫 날 살해당한 코치맨이 가지고 있던 열쇠를 어떻게든 회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탈출을 준비하던 중 생존한 일행 내부에 또다른 살인자가 있다는게 드러났다. 후기와 흉인저 고용인 사이가가 살해당한 탓이었다. 뒤이어 거인을 유인하여 열쇠를 회수하는 작전도 실패했고 나루시마마저 거인에게 살해당했다.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하무라와 겐자키 시리즈 세 번째 작품. 마다라메 기관이라는 연구 기관에서 비롯된 괴물, 괴인들이 핵심 소재인 '특수 설정'이 여전히 작품의 중심입니다. 이번에는 강화된 신체를 얻은 살인마가 등장합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상당한 분량임에도 쉽게 읽힙니다. "13일의 금요일"과 유사한, 초강력 살인마가 등장하는 슬래셔 호러물로 기본 이상의 재미를 선사해주는 덕분입니다. 살인마를 피해 탈출하기 위한 작전과 쫓고 쫓기는 상황에 대한 묘사도 흥미진진하고요.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습니다. 후기를 살해한 범인이 고리키 미야코라는걸 밝히는 겐자키의 추리부터 깔끔했습니다. '거인이 거주구역을 오가는 철문을 연 건 딱 한 번 뿐이었다, 거인은 외팔이라 머리 두 개를 들 수 없었다, 머리를 잠깐 내려 놓았을 수는 있지만 후기의 머리는 먼지가 묻지 않고 깔끔했다' 등의 근거를 통해 합리적으로 설명되는 덕분입니다. 모든 단서와 근거들은 독자들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고요. 고양이 장식 눈에 박혀있던 '알렉산드라이트'에 대한 말실수는 좀 오버스럽긴 했지만요.
사이가를 살해하고, 살해된 사이가의 머리를 머리 무덤으로 옮겨 놓은 사건은 불가능 범죄라 더 흥미롭습니다. 아침이 되기까지 사이가의 시체가 놓여있던 부구획에 드나든 건 거인밖에 없었습니다. 부구획은 하무라와 아울이, 주구획은 보스가 밤새 감시를 했었지요. 주구획 쪽에서 창문 너머로 목을 절단하기도 불가능했습니다. 밤이 되기 전 사이가의 목을 미리 잘라놓은게 아닐까?라는 것도 현장에 있던 중식도는 거인이 깨어난 뒤 나루시마가 후기의 방에서 가지고 나간 물건이었다는 점에서 부정되고요. 시신 주변에 고인 피가 굳은 상태로 보면 목이 절단되고 아홉 시간 가까이 지났기에 거인이 아침에 자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누가 어떻게 사이가의 목을 절단했을까요? 겐자키는 '목이 야간에 절단되었다'는걸 증명하는건 피가 굳은 상태 뿐이라는데 주목해서 거인과 같은 특수 능력을 갖춘 '생존자'가 창문으로 손을 내밀어 자신의 피를 뿌려 굳혔다는 트릭을 밝혀냅니다. '생존자'는 경이적인 생명력과 치유력을 갖춘 덕분에, 피를 많이 흘리고도 멀쩡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인이 아침에 거처로 돌아가면서 시신의 목을 절단했던겁니다. 이렇게 특수 설정이 트릭으로 활용된건, 정통 본격물로는 반칙이겠지만 이 작품에는 굉장히 잘 어울렸다고 생각됩니다. 재미도 있었고요.
반드시 피해자 목을 절단한 뒤 '머리 무덤'에 버리는 거인의 버릇을 이용해서 열쇠를 회수한 마지막 장면도 감탄스러웠습니다. '생존자' 우라이는 코치맨의 시체에서 열쇠를 회수한 뒤 열쇠를 입 안에 넣었고, 머리 무덤 안에 숨어있던 겐자키가 거인이 가져다 버린 우라이 머리에서 열쇠를 회수했다는건데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머리 무덤'의 존재와 거인의 버릇이라는 특수 설정을 활용했다는건 두 번째 살인 사건 트릭과 유사한데, 이런게 이 작품의 묘미겠지요.
미스터리 애호회에 가입하려는 친구들에게 테스트를 하는 도입부도 "9마일은 너무 멀다"가 떠오르는 소소한 재미가 좋았으며, 그 외 안락의자 탐정에 대한 의견이나 탐정과 범인의 역할에 대한 담론 및 기타 추리들도 풍성한 편입니다.

그러나 '특수 설정'을 위한 여러 설명들이 유치하고 작위적이라는 문제는 큽니다. 거인의 과거를 설명하기 위한 케이라는 소녀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그녀가 거인이며, 살육은 바이러스로 인해 사람들을 원숭이 괴물로 착각했기 때문이라는 나름의 반전은 뻔하면서도 억지스러웠습니다. 미쳐버린 케이를 후기가 그동안 어떻게 돌봐왔는지도 설명되지 않고요. '생존자'는 거인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능력을 얻었는데, 유사한 생명력과 치유력을 갖췄다는 것도 지극히 편의적인 설정이었으며, 우라이 고타가 무려 30년 전에 케이와 했던,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린 함께'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쓸데없는 살인 (사이가 살해)을 저지른 것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이 사건은 작품의 핵심이라서, 이렇게 동기가 부실하다는건 추리물로는 큰 약점일 수 밖에 없어요.

작위적인 설정은 그 밖에도 넘쳐납니다. 사회 생활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만 고용하고, 이들 중 한 명을 매달 거인에게 산제물로 바친다는 설정은 이게 과연 21세기의 이야기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가문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마다라메 기관의 연구 성과를 노린다는 나루시마, 사고를 불러오는 명문가의 영애 겐자키 설정도 한결같이 만화스러웠고요. "13일의 금요일"이 떠오르는 거인 케이 설정 역시 뻔해서 고민한 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이런 점들은 '특수 설정 미스터리'가 가질 수 밖에 없는 고질적인, 당연한 문제이기는 합니다만, 이를 설득력있게 포장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은 필요했습니다. 
이보다는 차라리 2차 대전 때 생체 실험을 하다가 괴물을 만들었고, 전후 공습으로 폐허가 된 연구소 내에서 생존한 연구원이 괴물을 데리고 연구를 이어왔지만 괴물의 친구가 모든걸 끝내기 위해 찾아왔다는 정도로 끌어나가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이가도 단순 고용인이 아니라, 연구소 내 연구원 중 한명이었다고 설명하면 동기가 설명되었을거고요. 너무 "경성크리처"스러웠을까요?
아울러 '흉인저''의 복잡한 구조에 대한 설명이 장황한 것도 별로였습니다. 계속 앞 부분에 수록된 약도를 찾아 읽게끔 하는 상세한 묘사가 이어지는데, 사건과 추리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아니었던 탓입니다. 일종의 맥거핀에 불과했어요.

이렇게 단점이 적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특수 설정 미스터리'라는건 감안해야겠지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최소한 "마안갑의 살인"보다는 좋았습니다.

2023/06/27

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 - 모로호시 다이지로 : 별점 3점

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 - 6점
모로호시 다이지로 지음/대원씨아이(만화)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초창기 단편집. 1990년에 발표되었던 <<성>>을 제외한 다른 작품들은 1981년부터 1985년 사이에 발표되었기에, 초창기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이 BS 망가 야화에서 소개되었을 정도니까요.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방주가 오던 날
  2. 난파선
  3. 진수의 숲
  4. 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
  5. 늪의 아이
  6. 유사(流砂)
  7. 쿠로이시지마(黑石島) 살인사건
  8. 성(城)
  9. 파란 무리
  10. 그림자의 거리
이 중 앞의 두 편은 아주 짤막한 가벼운 개그물로 언급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크리쳐 호러(?)물 <<진수의 숲>>, <<늪의 아이들>>은 <<자선단편집>>에 수록되었던 작품이고요 (궁금하신 분들은 이전 리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 외 작품들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해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
자신이 외계인이며 UFO를 타고 어디론가 떠난다고 말하는 동급생 후리오와 어울리다가, 약간의 차원 뒤틀림(?)을 경험한다는 내용.
작가의 말에 따르면, 폴 사이먼의 노래 (Me and Julio Down by the Schoolyard)에서 제목을 따 와 만들었다고 합니다. 내용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서요. 


그런데 가사를 잠깐 찾아보니 '훌리오와 내가 교정 (학교 운동장)에서 만나는데 엄마가 뭔가 법에 위배되는걸 봤고, 그래서 나와 훌리오를 잡으면 구치소에 집어 넣는다'는 내용이더라고요. 정확한 의미는 영 알 수가 없는데 (폴 사이먼 본인도 엄마가 본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답변했답니다.), 이런 노래의 모호함이 만화의 결말과 일치한다는게 재미있습니다. 후리오가 UFO를 타고 갔는지, 그냥 버스를 타고 평범하게 떠났는지 제대로 드러내지 않고 여운을 남기니까요.
보는 시각에 따라서 일상 속에서 약간의 뒤틀림을 보여주는 일상계 SF물, 아니면 평범하지만 조금은 독특한 성장기로 볼 수 있는데, 저 개인적으로는 SF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더 폴 사이먼, 그리고 모로호시 다이지로 스타일에 가까우니까요. 흥겨운 노래하고도 잘 어울리고요. 기껏 상상력을 발휘했는데 그냥 버스타고 이사간거라면 너무 슬프잖아요.
대표작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 여러모로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유사>>
주인공과 친구들은 사막과 엄청난 유사 폭포 탓에 감옥과 다름없는, 미래가 없는 별 볼일없는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 분투한다. 그러나 마을 사람 모두가 합심해서 그들을 막아서는데....

SF의 탈을 쓰고 있기는 하나 현실에 안주하려고만 하고 위기에는 전혀 대응하지 않으려는, 그리고 젊은 청춘의 뒷다리만 잡는 기성 세대를 풍자하는 작품입니다. 작품이 발표된 1980년대는 모로호시 다이지로도 기성세대보다는 청년에 가까운 나이라 그릴 수 있었겠지요? 사력을 다하는 청춘을 기성 세대가 뒤쫓는 결말은 여운을 남깁니다.
 

그러나 지금 읽기는 낡은 소재와 전개라는건 단점입니다. 불합리한 현실을 탈출하려고 애쓰는 청춘 이야기는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예를 들어, 이런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 불법적인 범죄를 저지르면? <<총몽 (알리타)>>이 되는거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쿠로이시지마 살인사건>>
외딴 섬에서 젊은 여성의 사체가 발견되어 형사가 파견되었고, 섬 사람 누군가의 딸로 여겨져 장례식이 열렸다. 그런데 장례식 와중에, 그 딸이 살아있다는게 밝혀진다.
다른 사람이 피해자일 것이다!라고 생각했지만 그녀 역시 살아있었고, 바닷물의 영향으로 사체마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형사에게 없었던 일로 하자며 반 쯤은 협박하듯이 부탁하는데....


우리나라 모 섬에서 일어났던 범죄가 떠오르는 작품. 폐쇄적인 공동체 안에서 '좋은게 좋은거다'라는 식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흔합니다.
그런데 전형적인 모로호시 다이지로 그림체인데다가, 전개 방식도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호러물스타일이라서 기묘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개그 콘서트 꽁트를 정극 배우들이 제대로 연기하는 느낌이랄까요? <<유사>>처럼 현실에 안주하려는 기성 세대에 대한 풍자로 볼 수도 있을테고요.
흔한 이야기인데 여러모로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기묘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성>>
대기업에 서류 하나를 전해주러 왔던 사원의 출장은 서류에 관계된 회사간의 복잡한 정리, 대기업의 인사 이동 등으로 장기화되고 말았다. 팩스로 지시를 기다리는 자택 대기 명령을 받은 뒤, 오랜 시간이 흘러 그가 죽었을 때 지시가 전달되었다. 일반 사원들은 1층 이상 올라가보는게 꿈이라는 본사 건물 15층으로 오라는 지시였다....

대기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벌어질 수 있는 부조리한 현실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 드라마. 지금 읽기에는 다소 뻔했습니다. 결말도 다소 뜬금없었고요. 왜 마지막에 15층으로 부른 걸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파란 무리>>
장기 매매가 일반화된 미래. 하층민은 장기를 팔고 인공 장기로 교체하여 삶을 이어나간다. 판매된 장기는 하나로 모아져 부자 노인의 뇌를 이식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알고보니 장기를 팔아 인공 장기로 교체하는건 단순한 빈민 대책으로 무의미한 시술이었고, 이 모든건 권력자들이 권력을 쥐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80년대 유행했던 전형적인 디스토피아 SF물.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은 이야기였습니다. 기묘한 세포 덩어리로 피해자들을 변질시킨다는 결말에서 모로호시 다이지로 특유의 이형 생태 결합을 선보이기는 하는데, 장기 매매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서 이야기에 잘 녹아들지 못하더군요.  <<소일런트 그린>>정도의 충격적인 반전도 아니었고요. 지금 시점에서 다시 언급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그림자의 도시>>
한 초등학생이 모르는 아이에게 이끌려 낯선 골목길로 향했다. 그 곳에서는 괴물이 나타나 사람과 건물을 잡아먹었다. 꿈인줄 알았는데 실제로 잡아먹혔던 아이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잡아먹힌 학원도 불에 타 버렸다.
괴물이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걸 깨달은 아이는 괴물에게 모델건을 쏘고 기절했다. 그리고 정신이 든 뒤, 싫은 일이 생길 때 마다 모르는 골목길로 항하게 되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영향을 주었다는걸로 유명한 작품. 아래의 장면 덕분일겁니다.


그러나 내용은 다소 뻔했습니다. 이세계에서 경험한 일이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벌어진다는 이야기는 많으니까요. <<앨리스 죽이기>>가 떠오르네요. 때문에 지금 읽기에는 진부했습니다.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작화로는 작품의 분위기를 잘 시각화하지 못하고 있고요.

하지만 초등학생이 주인공이고 진짜 악당 - 싫어하는걸 없애버리는데 주저함이 없으니 - 이라는 점은 특이했습니다. 이 점 하나만큼은 높이 평가하고 싶어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3/01/15

한밤의 지하철 공포미스테리 걸작선 - 정태원 편역 : 별점 2점

<<밤에 걷다>>와 <<본인방 살인 사건>> 다음에 집어든 오래된 책입니다. 최근 오래전 책을 다시 뒤져보는 취미에 푹 빠졌거든요. 이 책도 출간된지 벌써 30년이나 되었네요.
정태원 님께서 편역한 앤솔러지입니다. 서두에서는 공포를 다룬 미스테리 작품을 모았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다 그런건 아닙니다. 공포 보다는 서늘한 느낌을 가져다주는 '기묘한 맛'에 더 가깝다거나, 아예 블랙 코미디스러운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는 탓입니다. 질 드레'를 '지르도 레'처럼 번역한걸보면 일본어 판본을 번역한 듯 하며, 그런걸 보면 정식 허가를 받고 출간된 책은 아닐 것으로 여겨지네요.
그래도 유명한 추리 소설 전문가 정태원 님이 편역한 책 답게, 작품별 작가 소개와 작품들의 출처를 대체로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다는건 좋았습니다. 미국과 유럽, 일본 작품들이 고루 포함된 점도 장점이고요. 수록작 13편 중 눈여겨 볼 만한 좋은 작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아내가 불륜 상대와 자살한 뒤, 홀로 남은 아들을 외국에서 키우다가 아들이 이미 미쳐버렸다는걸 깨닫는 <<길고 어두운 겨울>>입니다. 아들을 말도 통하지 않는 베이비시터에게 맡겨두고, 일본에서 가져온 똑같은 동화책만 계속 읽는걸 방관했는데, 알고보니 동화책은 잘못 제본된 책이었고 아들은 동화책을 읽는게 아니었다는게 - 그냥 멍하니 같은 자세로 있었던 것 -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이 대단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위한 빌드업도 탄탄하고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였어요. 작가 소노 아야꼬는 경력을 보면 이런 장르물을 발표했을걸로 생각되지 않는 작가인데 다른 작품도 궁금해집니다.
아내가 낳은 딸을 없애기로 결심한 남자가 어두운 공간에서 마녀의 시체라며 토막난 무언가를 건네준다는 <<10월 게임>>도 등골 서늘한 결말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레이 브래드버리 작품다왔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다소 뻔했지만 <<오리 대신에>>, <<비만클럽>>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리 대신에>>는 짤막한 분량으로 깜짝 반전을 가져다 준다는 점에서, <<비만클럽>>은 살찌워진 남편이 사람들에게 먹힐 때 일종의 특권으로 조리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데 '산채로 먹힘'을 선택한다는 발상이 독특했기 때문입니다. 내용의 설득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기묘한 맛' 쇼트쇼트로는 우수한 편입니다.
조숙하고 다소 정신나간 아이가 어른을 없앤다는 설정의 <<식용 거북이>>와 <<살인유전>>은 각각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빼어난 묘사력, 스탠리 엘린의 반전 구성 능력이 돋보였습니다. <<식용 거북이>>는 예상 가능했다는 점에서, <<살인유전>>은 서사를 쌓아나가는 과정에서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은 있으나 평균 수준은 됩니다.

하지만 실망스러운 작품들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앤솔러지 전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클라이브 바커의 작품들이 문제라 생각됩니다. '공포'를 다룬 장르물에 적합한건 사실입니다만, <<피의 책>>이라는 작가의 단편집에 이미 수록된 작품들을 그대로 수록해 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새로운 작품을 발견하는 기쁨은 전혀 느낄 수 없었어요.
최소한 여러 단편집에서 대표작만 엄선하여 수록했어야 했는데, <<피의 책>> 수록작 중에서 최고의 작품들인지도 솔직히 미심쩍었습니다. <<한밤의 지하철>>은 <<미드나이트 미트 트레인>>이라는 영화로 재탄생할 정도로 유명한 작품으로 기승전결은 확실하고 화끈하게 달려주는 괜찮은 작품이라 예외로 치더라도, 마을 사람들이 거인을 만들고 자멸한다는 <<언덕에 마을이>>와 암세포가 사악한 크리쳐로 변해 사람들을 습격한다는 <<영화관의 악령>>은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기괴한 상상력 외에는 건질게 없었으니까요. 결과물도 재미보다는 혐오쪽에 가까왔습니다. <<영화관의 악령>>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형과 사투를 잔혹한 묘사로 버무린게 전부라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신 투명인간>>은 존 딕슨 카의 정통 추리물로 작품 수준을 떠나 왜 이 앤솔러지에 수록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호러물과는 전혀 궤를 달리하는 작품인데 말이지요. 추리적으로도 영 별로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이전에는 평균 이상이라 호평했었는데, 번역의 문제였을까요?
<<아내 살인 되돌리기>>, <<살고 싶어했던 여자>>는 양산형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로 많이 흔해빠진 설정과 전개를 보여주는데다가 별로 무섭지 않은 등 감점 요소가 많았습니다. <<두 병의 소오스>>는 걸작이라는건 분명하나 이 앤솔러지에서는 빼는게 맞지 않았을까 싶네요. 워낙에 많은 이런저런 앤솔러지에 수록된만큼 신선함도 떨어질 뿐더러, 공포와는 좀 거리가 있는 '기묘한 맛'에 가까운 작품이니까요.

그래서 전체적인 별점은 2점입니다. 30년이 지나는 동안 정식 출간된 좋은 앤솔러지가 많아진만큼, 다른 책을 구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어차피 절판된지 오래라 구해보시기도 힘드실거에요. 알라딘에서는 책 검색조차 되지 않는군요.

2022/10/10

외눈박이 원숭이 - 미치오 슈스케 / 김윤수 : 별점 2.5점

 

외눈박이 원숭이 - 6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윤수 옮김/들녘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청 전문 탐정 미나시는 다니구치 악기가 의뢰한, 구로이 악기가 디자인을 표절하고 있는지 여부를 조사하던 중 우연히 살인 사건 순간을 엿듣게 되었다.
미나시는 피해자 무로이가 만나기로 했었던 여성 '다바타'가 파트너 후유에이며, 후유에가 7년 전 지인 아키에 자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걸 알게 되는데....


미치오 슈스케의 장편. '트릭이 굉장하다!'는 랭킹에 선정되어 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워낙 고전 스타일,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는 탓에 트릭이 굉장하다니 도저히 안 읽어볼 수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읽어보니 '트릭이 굉장하다!'라는 말은 어폐가 좀 있더군요. 일단 이야기의 핵심인 무로이 살인 사건은 별로 볼게 없습니다. 범인은 다니구치 악기의 간부이자 미나시를 고용했던 가리타였습니다. 거액을 횡령한걸 악덕 탐정사 요쓰비시 에이젼시에게 들켜서 협박을 당하다가, 요쓰비시 에이젼시의 클라이언트인 구로이 악기의 무로이를 살해하고 죄를 요쓰비시 에이젼시 탐정 다바타 후유에에게 뒤집어 씌울 계획을 짜 냈던게 진상이지요.
동기는 말이 되는데, 아쉽게도 별다른 트릭은 없습니다. 거짓 정보를 미나시에게 주고 범행 시간에 도청하게 만든게 유일하다시피 합니다. 그리고 '귀'로만 도청하고 있던 미나시에게 범인이 여자인걸 알리기 위해 ,가리타가 하이힐을 신고 구로이 악기 건물에 침입해 살해했던 정도에요. 변장 트릭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데 '눈' 대신 '귀'가 사용되었다는게 독특했고 나름대로 현실적이라는 점에서는 마음에 듭니다만, 기발하거나 새로운 맛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가리타가 범인이라는걸 입증할 증거가 전무하다는 겁니다. 흉기가 들어가 있던 봉투에는 후유에 지문이 묻어 있었고, 미나시의 지시로 후유에가 구로이 악기 사무실에 잠입했던 탓에 그녀 지문이 현장에서 발견되는 등 후유에가 범인이라는 증거만 넘쳐납니다. 증거도 없이 추리쇼를 펼친 미나시에게 가리타가 진상을 줄줄 털어놓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미나시가 이를 몰래 녹음했는건 더 억지스러웠고요. 가리타의 불륜 상대였던 마키노가 이 때 미나시를 살해하려 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시체를 대체 어쩔 셈이었을까요? 이렇듯 이 사건만 놓고 보면 별점 2점도 과하다 싶을 정도에요.

이런 점을 놓고 본다면, 아무래도 '트릭이 굉장하다!'는건 작품 전체에 사용된 일종의 서술 트릭을 이야기하는게 아닐까 싶네요. 그 정도로 서술 트릭만큼은 일품이었거든요. 비현실적인 여러가지 설정, 그 중에서도 미나시와 그가 거주하는 맨션 로즈 플랫 주민들에 대한 설정 - 귀에 특이한 문제가 있는 '천리귀' 미나시, 눈에 문제가 있어서 항상 선글라스를 끼지만 먼 곳을 볼 수 있는 듯한 '천리안' 후유에부터 시작해서, 제대로 발음을 하지 못하는 미나시의 스승이었던 전(前) 탐정 노하라, 샴 쌍동이같이 행동하는 도우미, 마이미 자매, 뇌에 문제가 생겨 언어 능력을 잃은 대신 트럼프로 예언을 할 수 있게 된 도헤이 등 - 이 현실이라는게 밝혀지는 반전에는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등장인물들 모두가 제목의 '외눈박이 원숭이' 처럼 뭔가 결여되어 보였던건 진짜!였다는건데 억지스럽지 않게 잘 짜여져 있으니까요. 예를 들자면 노하라 할아버지 발음 문제는 그가 과거 매독에 걸려서 '코'를 잃었기 때문이었고, 둘이서 게임 패드 하나로 게임을 하는 쌍동이 자매는 알고보니 각각 왼손, 오른손을 사고로 잃은 아이였다는게 밝혀지는 식입니다. 진상을 중반부에 도헤이의 카드 예언으로 드러내는 전개도 본격 추리물의 '독자에의 도전' 같아서 좋았습니다.
미나시의 도청은 귀에 특별한 능력이 있는게 아니라, 단순히 도청기를 통한 것이었다는 진상도 현실적이며, 어린 시절 눈에 파묻혔던 사고로 귓볼이 떨어져 나갔다는 이유도 작 중에서 여러번 이야기하는 경험이 바탕이라는 것도 구성과 복선이 치밀하게 짜여져 있다는걸 의미하지요.

서술 트릭은 7년 전에 자살했던 아키에 사건 이야기에서도 잘 써먹고 있습니다. 악덕 탐정 사무소 요쓰비시 에이젼시는 자신들이 손에 넣은 불륜과 같은 범죄 정보를 이용하여 당사자들을 협박하는게 주요 영업 수단이었는데, 그들이 7년 전 여자 화장실 몰카로 아키에가 남자였다는걸 알아내어 협박했던게 자살의 원인으로, 아키에가 남자라는걸 진상이 드러날 때 공개해서 독자를 놀라게 만들거든요.
또 이 진상을 통해 그녀가 자살했을 때 긴 머리를 대충 짧게 자르고 새 것인 운동복을 입고 있었던 이유, 가방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가 깔끔하게 설명되는 것도 좋았습니다. 자신이 여장을 하고 지냈다는걸 부모에게 알리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는건 충분히 말이 되니까요.

초반에 후유에가 지하철에서 혼자 큭큭 웃고, 심지어 먼 곳의 비행기 추락을 본 '천리안' 같다는 설정의 진상에 대한 추리처럼 추리적으로 볼 만한 부분도 제법 있어요. 작 중에 계속 반복되는, 미나시가 자주 듣는 아침 방송과 후유에도 좋아한다는 이탈리아 호러물이 단서가 된다는게 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공정함' 측면에서는 더할나위 없는 셈이지요.
참고로 진상은 그녀는 라디오를 들으며 웃었고, '오치루 (떨어지다)' 는 라디오 퀴즈를 위해 이탈리아 감독 '루치오 폴치'의 이름을 거꾸로 읽었다는 것으로, 작위적이기는 하지만 재미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약간 모험물, 액션물 성격도 있습니다. 요쓰비시 에이젼시를 그만두려는 후유에를 구하기 위해 로즈 플랫 거주자들이 총 출동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화끈하고, 달릴 때 달려주는 미덕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기대했던 것 만큼 트릭이 대단한 본격 추리물은 아닙니다. 그래도 재미도 있고, 서술 트릭과 소소한 디테일에서 재미 요소가 많으므로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덧붙이자면, 독특한 인물들과 비현실적인 설정, 세계관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이 모든게 '현실' 이라는게 드러나면서 의외의 진상, 반전이 드러난다는건 작가의 다른 작품인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해바라기가 피는 여름>> 쪽에 더 점수를 주고 싶네요.

2022/02/05

마가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 별점 3.5점

마가 - 8점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사건 진상과 진범 등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마는 새아빠의 동생인 삼촌과 여름 방학을 보내게 되었다. 재혼한 엄마가 임신 후, 미국 이주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탓이었다. 삼촌의 별장인 고무로 저택은 오래전에 부자 고무로 도쿠야로부터 받은 선물로, 실종되었던 도쿠야의 손자 히사시를 찾아 주었던 보답이었다. 그러나 별장은 왠지 모르게 섬뜩한 장소였다. 별장 뒤 숲에서는 아이들이 여러 명 실종되었었고, 근처 별장에서는 참극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유마는 별장에 머물면서 어린아이 형상의 누군가가 3층 다락방에 머물고 있다는걸 눈치챘다. 결국 '세이'라는 아이를 만난 뒤, 세이의 꼬드김으로 유마는 혼자 들어가면 안된다는 사사 숲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유마는 한 남자의 추격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게 되는데....

저주받은? 귀신들린? 저택을 무대로 한 호러의 명수 미쓰다 신조의 작품. 제가 읽은 작가의 유사 소재 작품만 해도 "흉가", "백사당", "사관장", "기관" 등이 있습니다. 대부분 평균 이상의 수작이었던걸 보면 '명수'라는 호칭이 과한건 아니겠지요.

작품의 특징이라면 다른 작품들과는 목표하는 독자 연령대가 낮아 보인다는 점입니다. 영 어덜트 판타지를 연상케하는 표지에서부터, 초등학교 6학년이 '잘 모르는 넓은 저택'과 '넓은 숲, 동굴' 에서 펼치는 모험 활극에 가까운 내용, 그리고 피가 튀기는 고어물도 아니고, 아주 무섭지도 않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호러 작가로서의 솜씨가 사라진건 아닙니다. 유마가 저택 안을 배회하는 정체 불명의 무언가와 말없이 암투를 벌이는 광경, 이계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사 숲과 나무 동굴 속에서 벌어지는 목숨을 건 추격전 등의 묘사는 공포심을 충분히 자극시켜 줍니다. 

작가 특유의 호러와 범죄, 추리 소설과의 결합도 성공적입니다. 특히 초, 중반까지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반전을 통해 '범죄 소설'로 전환되는 구성이 인상적이에요. 반전을 통해 삼촌이 유마를 돌보려고 했던게 아니라, 유괴를 했던 거라는게 드러나거든요. '삼촌이 삼촌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변한 것 같았다'는 유마의 느낌, 밤중에 삼촌이 기묘한 목소리로 유마와 사람들의 이름을 표준어로 말하는 연습을 했던 것등은 모두 공포스러운 연출이라고 여겼었지만, 사실 전부 유괴라는 범죄에 대한 단서였던 겁니다! 별장으로 향할 때 삼촌이 해 주었던 말, 삼촌이 별장에 유마가 머물 줄 알고 미리 책을 사 두었던 이유, 어머니와의 통화 등도 알고보니 모두 단서와 복선이었고요.

고무로 히사시를 비롯한 과거 유괴 사건들도 사실은 삼촌이 일으켰었고, 이 때 사사 숲에 아이를 숨겨두면 아이들이 유괴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다는걸 눈치채서 범행을 계획했다는 진상도 이야기와 잘 맞아 떨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10년 전, 고이즈미 마사토는 실수로 죽이고 말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도 깔끔했고요. 유마가 저택에서 만났던건 고이즈미 마사토의 유령이었던 거지요. 유령도 이야기에서 큰 역할을 수행합니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과거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유마에게 알려주는 식으로요. 

이렇게 등장하는 설정, 소재를 허투루 소비하지 않고 모두 이야기에 녹여내는 것도 돋보였던 장점으로, 유마가 이계 공간을 오갈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능력 덕분에 삼촌의 공범이었던 유괴범에게 쫓기다가 혼자서 사사 숲 이계 공간에서 무사 귀환할 수 있었으며, 삼촌도 유마를 아예 죽일 생각이었다는걸 명확하게 독자에게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다소 뜬금없었던 설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적절히 활용한 셈이라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확실히 대가는 다른 법이네요. 무엇보다도 맨 마지막 한 줄의 반전, 유마가 옥상에 RC카를 두고 온건 실수가 아니었다는건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유마에 의해 삼촌이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다는 최후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여러가지 치밀함을 발휘하여 유마를 옭아매던 삼촌의 최후치고는 너무 허무했으니까요. 세이의 유령이 뭔가 도움을 줄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고요. 

추리적으로도 호러와 결합은 잘 하고 있지만, 정교함은 부족한 편입니다. 유괴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몸값을 받는 부분입니다. 이전 고이즈미 마사토 사건에서는 마사토의 새아버지로부터, 마사토가 돌아오지 않는 조건으로 돈을 받았으니 그건 별로 어렵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유마의 어머니는 그럴리가 없으니, 깜쪽같이 돈을 받아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몸값을 받는 계획이 조금이나마 등장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건 유괴물로는 큰 단점입니다. 

범행 후 삼촌이 유마를 죽이고 사체를 유기했더라도, 관리인이 유마를 목격한 이상 수사가 이루어지면 삼촌이 빠져나가기는 힘들었을거라는 점도 문제입니다. 관리인도 살해할 생각이었을까요? 그렇다 해도 조카가 유괴당한 후 실종되었는데 그 삼촌은 갑자기 생긴 거액의 돈으로 사업상 위기를 해결했고, 삼촌 소유의 별장이 있는 별장지 관리인이 살해당했다면, 경찰 수사가 시작될 경우 용의선상에 올라 철저한 조사를 받는건 당연했을겁니다. 여러모로 허술한 범죄라는 생각을 지우기 힘드네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한 편이며, 읽다보면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공포는 덜하지만, 범죄 소설로 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분량도 적당하고요. 호러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미쓰다 신조 월드 입문자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22/02/04

금요일의 괴담회 - 전건우 : 별점 1.5점

금요일의 괴담회 - 4점
전건우 지음/북오션

한국 작가의 괴담 모음집입니다. 금요일에 리뷰 올리기 좋은 제목이네요. 모두 열 일곱 편의 괴담이 수록되어 있는데, 수록작 대부분은 괴담답게 기승전결보다는 괴이현상, 섬찟함 등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수록작 중에서 "여우고개", "열세 번째 계단"의 두 편은 아주 좋습니다. 뻔한 이야기를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범죄, 사건과 결합하여 독특하게 풀어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모두 평균, 수준 이하입니다. 괴담치고는 별로 무섭지 않았던 탓이 가장 큽니다. 지나치게 짧다는 것도 단점이고요. 설명도 부족할 뿐더러, 설정 등에서 아무런 밀도를 느낄 수 없습니다. 미쓰다 신조 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야기가 성립할 수 있도록 기본 바탕은 깔아주었어야 했어요. 그리고 너무 뻔한 이야기가 많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대체로 어디선가 접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답습할 뿐입니다. 최소한의 반전, 아니면 최소한의 새로움이라도 더해 주었다면 나름대로 가치가 있었겠지만, 예상을 벗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래서 좋은 이야기를 살리지 못한 측면도 없지 않아요.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여러모로 그리 권할만한 책은 아닙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조용한 집" 

새로 이사온 집에서 불길한 기운을 느끼다 독감에 걸려버린 규선에게 그 집에 살다가 요양원에서 죽은 노인의 가족이 찾아와 노제를 하고 떠났다. 그래도 이상한 꿈을 꾸는 등 괴현상이 계속되자, 규선은 빈 집을 찍울 수 있도록 핸드폰을 셋팅하고 외출했다. 나중에 확인한 핸드폰 영상에는 소리를 지르는 시커먼 형체가 찍혀 있었다... 

노망에 걸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노인의 원혼이 집에 깃들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이야기로 보기에는 완성도가 낮습니다. 일단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노인이 왜 집에 집착하는지 설명되지 않습니다. 규선이 저주를 받을 이유도 딱히 없고요. 또 노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노제를 했다면 원혼이 사라졌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게 아니라면 구태여 노제는 전개에 들어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원혼이 규선을 덮치는 결말도 예상 가능했고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여우고개" 

할머니는 어린 시절, 색연필을 훔쳤던 자기를 쫓아온 여우 '매구'를 매실의 힘을 이용하여 자기 대신 친구를 잡아가게 만들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무에 걸려있던 빨간 카디건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카디건이 사라지자, 할머니는 다른 동료 할머니 3명이 카디건을 숨겼다고 오해하고 그들에게 농약 사이다를 먹이고 마는데... 

가끔 뉴스에 나오곤 했던 '농약 사이다' 사건을 '매구'라는 요물 여우가 배후에 있다는 괴담 형태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작품 속 매구는 특정 물건에 집착하는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여 다른 사람을 해치고 죽게 만든다는 설정인데, 이를 정신이 나간듯한 할머니 시점의 끔찍한 묘사들과 잘 섞어서 설득력있게 그려낸 솜씨가 일품이에요. 한국식 사회파 호러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매구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걸 명확하게 하는게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 할머니 친구가 실종된게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 역시 할머니가 죽였다는 진상이 드러나는 식이었다면 말이 됐을테니까요. 지금처럼 매구가 있는지 없는지, 카디건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호한 상태로 끝나버리면 할머니가 나쁜게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인데, 이런 마무리는 호러물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싶거든요. 깔끔한 느낌도 들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그 여름의 흉가" 

여름 한 철, 나는 호러 가이드로 일하면서 어머니처럼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그리고 강원도 흉가 체험을 한 어느날, 열정적으로 살라는 투어 멤버의 조언을 듣는데... 

손님을 가장하여 투어에 참가한 어머니의 영혼을 만나 정신차리고 열심히 살게 된다는, 성장물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한 명 더 있던 손님, 죽은 어머니의 영혼과 사진의 존재 등 전형적인 괴담 클리셰를 모아서 만든 이야기로 뻔한 내용에 주인공이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이유도 설명되지 않는 등, 여러모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자살하는 캐릭터" 

신작 게임 블라인드 테스트 중, 이상한 NPC가 발견되었다. 그 NPC를 참혹하게 죽여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었다. 알고보니 개발팀에서 폭언을 듣고 자살한 신입 개발자 은정이가 NPC가 되었던 것이었다. 그 뒤 개발팀 멤버들이 하나, 둘씩 은정이가 게임에서 죽은 방식대로 죽어갔다... 

저주를 게임의 NPC를 통해 풀어낸건 참신했지만, 그 외에는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작품입니다. NPC 목을 베어 죽였던 주인공 목에 금이 간다는 결말까지 뻔했습니다. 저주를 푸는 방법이라던가, 저주의 실체에 대해 보다 심도깊게 파고들었다면 아주 흥미로운 작품이 되었을텐데 아쉽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한밤의 엘리베이터" 

여자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배달원과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와 함께 갇히고 말았다. 엘리베이터는 곧 정상 가동되었지만, 찜찜함을 느낀 여자는 중간에 내려 계단으로 향했다... 

배달원이 여자를 쫓고 있었다는 결말인데, 너무 뜬금없을 뿐더러 흔해빠진 이야기라 반전의 묘사도 느낄 수 없습니다. 수십년 전에 보았던 영화 "캠퍼스 레전드" 도입부가 바로 떠올랐거든요. 한 여자가 주유소였나? 어딘가에 잠깐 들렀는데, 굉장히 수상해보이는 주인이 갑자기 쫓아오기 시작해서 부리나케 도망을 칩니다. 그러자 주인은 뒤에서 "차 뒷 자리에 누군가 숨어있단 말이야!"라고 소리친다는건데, 거의 똑같지요? 

게다가 이야기의 완성도만 놓고 보면 "캠퍼스 레전드"쪽이 훨씬 낫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양복입은 남자의 존재가 제도로 설명되지 않는 등 단점이 더 많은 탓입니다. 이래서야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지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인형 뽑기" 

회식에서도 팀장에게 시달리던 세호는 우연히 인형 뽑기 기계를 마주쳤다. 기계에는 인형에 눈, 코, 입을 그려 넣고 이름을 붙이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세호는 뽑은 인형에 팀장의 이름을 붙인 뒤 눈, 코, 입을 그리고 인형을 패대기쳤다. 다음날, 세호는 팀장이 사고로 인형과 똑같은 부분에 큰 부상을 입고 당분간 회사를 쉬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세호가 인형을 뽑아 자기를 괴롭히던 상사들에게 복수하지만, 세호도 부하 직원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내용입니다. 기승전결이 명확한 하나의 이야기라는건 장점이지만 그 외는 그닥입니다. 진부하기 짝이 없으니까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저주받은 숲" 

미스터리 사이트에 무서운 숲 사진을 올리고, 그 곳에서 캠핑을 하겠다는 글이 올라왔다. 누군가가 회색 숲은 음기가 강하고 귀신이 많으니 도망치라는 글을 올렸지만 처음 글쓴이는 캠핑을 감행했고, 뒤이어 이상한 현상에 대한 글을 계속 올리기 시작하는데... 

미스터리 사이트 게시판에 올라온 글과 댓글들로 전개되는 작품입니다. 파운드 푸티지라는, 한 시대를 풍미했고 지금도 선보이고 있는 호러 영화 장르물을 글로 옮기면 이런 형태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하지만 저는 이 장르를 싫어합니다. '현실감'을 주는데 치중해서,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는 볼 수 없는 작품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블레어 위치"가 대표적이지요. 이야기 결말도 보통 주인공이 사라지는 형태로 애매모호하게 끝나곤 했었지요. 이 작품 역시 완성된 이야기가 아니고, 처음에 글쓴이, 구해주러 갔던 직업 군인, 숲에 대해 썰을 풀어놓는 박수무당 등 주요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 등에서 똑같습니다. 

이렇게 제가 싫어하는 점을 답습했을 뿐더러, 새로운 아이디어도 딱히 찾아보기 힘들어서 좋은 점수는 줄 수 없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화분" 

선미는 시장에서 빨간 색 꽃이 핀 화분을 사 왔다. 그리고 꽃에게 자기 소원을 이야기한 다음날, 소원이 이루어져 연적인 이 대리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걸 알게 되었다... 

선미가 생기, 젊음을 댓가로 김 대리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이상한 꽃에게 소원을 빌지만, 마지막에 소원을 빈 목적이었던 김 대리마저 죽게 만든 뒤, 자기에게 꽃을 팔았던 할머니처럼 선미도 시장에서 화분을 팔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소원을 들어주는 저주받은 물건'에 대한 이야기는 하늘의 별만큼 많습니다. 그 중에서 변별력을 가질 만큼의 새로운 이야기로 생각되지는 않네요. 김 대리가 죽고 만다는 결말은 괜찮았지만, 그 외는 평이했습니다. 소원은 이루어졌지만, 본인도 불행에 빠진다는 전형적인 결말도 뻔했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열세 번째 계단" 

한 계단 씩 올라갈 때마다 피를 한 방울 흘리면, 열세 번째 계단까지 올라가서 뒤를 돌아볼 때 서 있을 여자 아이에게 소원을 말해주면 뭐든지 들어줄 것이다. 

전교 1등을 죽이면 자기가 전교 1등이 될 거라는 괴담의 파생형입니다. 여기에 성적 때문에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 이야기가 결합되어 있고요. 

짧은 분량 안에서 할 이야기는 다 하고 있고, 깔끔하게 마무리되는건 좋습니다. 1등 원석이가 계단에 소원을 빈 게 아니라, 노는 척 하면서 죽을만큼 공부했다는 진상이 특히 와 닿네요. 괴담을 현실로 만드는데 정말로 적절한 소재였다 생각되거든요. 부모를 죽이고, 원석이의 장난까지 알아버리자 완전히 미쳐버려 계단에서 여자 아이를 보게 된 주인공의 시점 변화도 탁월했고요.

주인공의 부모의 비정상적인 집착이 좀 더 묘사되었더라면, 그리고 부모를 죽인 주인공이 부모로부터 피를 받아 왔을텐데, 그 이야기를 더 무섭게 푸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기는 합니다. 부모 머리를 잘라왔다는 식이었다면 더 충격적이지 않았을까요? 좀 은근하게, 지나치게 흉칙하지 않게 묘사하는게 이 책 수록작들의 특징이기는 한데, 이 이야기만큼은 보다 엽기적인 묘사를 하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어차피 범죄 자체가 극단적인 패륜 범죄이니까요.

그래도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습니다. 약간 사회파 느낌을 전해 주는 것도 마음에 들었어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가위" 

주인공 혜미가 가위에 눌린 이야기가 전부인 소품. 무섭지도, 재미있지도 않았습니다. 괴담으로 보기에도 너무 알멩이가 없고요. 별점은 1점입니다.

"외로운 아이 부르기" 

중학교 2학년 친구들 세 명이 몰래 학교에 숨어들었다. '외로운 아이 불러내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제목은 좀 있어보였지만, 알고보니 '외로운 아이 불러내기'는 '분신사바'와 거의 똑같더군요. 불러낸 외로운 아이가 질문을 잘못한 탓에 화가 나서 아이 하나를 데리고 가는게 전부인 이야기는 무섭지도 않고, 의외성도 없고요. 별점은 1점입니다.

"자유로 귀신" 

헌팅한 여자가 파주로 가자는 말에 남자는 차를 몰고 자유로를 탔다. 여자는 '자유로 귀신' 이야기를 꺼냈다. 

뭔가 했더니, 음주 운전 차량에 희생된 여자가 원혼이 되어 자유로를 음주 운전으로 지나가는 운전자들을 응징한다는 내용이더군요. 그렇게 완성도 높은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어요. 별로 무섭지도 않고요. 함께 수록된 사진이 더 무서웠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음주 운전자는 죽어도 싸다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어서, 그 부분에 약간의 점수를 더합니다. 모든 음주 운전자가 이런 귀신을 만나서 천벌을 받기를 바랍니다.

"유괴" 

지수는 아영을 데리고 놀이 공원에 갔다. 그런데 한 할머니가 자기가 미래를 볼 줄 안다면서, 아이 앞날이 어둡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지수는 유괴범이었고, 아영이를 놀이 공원에 데리고 온 건 몸값을 받으러 왔던 거라는 진상이 반전으로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현실적인 범죄가 등장하는 범죄물로 유괴범 시점으로 바라본 유괴극이라는 아이디어는 꽤 독특합니다. 그러나 이상한 할머니의 존재는 도무지 뭔지 모르겠어요. 할머니가 지수의 정체가 유괴범이라는걸 알아낸 방법이 무엇이었는지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건 미래를 본다는 능력과 별 상관도 없잖아요? 또 할머니가 아영이를 지수 몰래 데리고 가려고 했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경찰에 신고하는게 당연하니까요. 

별로 무섭지도 않았고, 제목 자체가 스포일러라는 점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든 요소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더블"

진수는 자기와 똑같이 생긴 남자를 두 번째 본 뒤, 옛 군대 선임인 박수무당 영우를 찾아갔다. 영우는 산 사람한테 붙어 영혼을 빨아먹는 악랄한 홉혼귀라며 부적을 한 장 써 주었다. 한 번 더 홉혼귀를 보면 죽는다는 말과 함께. 그러나 세 번째로 홉혼귀를 마주치자, 영우는 분노에 휩싸여 그를 죽이고 마는데... 

자기와 똑같은 사람에게 분노를 품고 죽였는데, 죽이고나니 하나도 안 닮았더라... 는 이야기. 홉혼귀다, 도플갱어다 하면서 뭔가 설정을 깔기는 하는데 그런게 무슨 상관인지 잘 모르겠을 정도로 허무한 결말이었어요. 진수를 홉혼귀가 쫓아다니는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1킬로미터" 

한수는 이상한 문자 메시지를 따라가 어플을 하나 깔았다. 깔고나니 일종의 매칭 어플이었다. 한수는 어플에서 이상형인 박수희를 발견해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는데... 

어플을 통해 젊은 남자를 납치한 뒤 고깃배에 태우는 범죄 조직이 등장하는데,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어요. 대한민국에서 백주대낮에 건장한 남자를 폭행 후 납치한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어림반푼어치도 없지요. 마지막에 GPS로 위치를 확인하여 한수의 집까지 침입한다는 결말은 어이를 상실케 했고요. 별점은 1점입니다.

"화장실" 

데이트 중에 갑자기 배가 아파 화장실을 찾았는데, 옆 칸에서 누군가 노크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화장실 안에 붙어있는 장기 매매 스티커 번호를 물어보았다... 

장기가 적출되는건 나였고, 이건 여자 친구의 음모였다는 이야기. 

누구나 잘 알고 있는 화장실 장기 매매 스티커를 이야기 전개에 활용한건 좋은 아이디어였는데, 그 외 모든 내용과 과정은 뻔하고 억지스러웠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그 목소리" 

윤미 일행은 도심 근교 펜션으로 여행을 떠났다. 우울증 약을 건너 뛴 윤미는 남자친구 동민과 친구 영화가 윤미를 몽키 스패너로 처리할거라는 음모를 엿들었다... 

우울증 약을 먹지 않아서 정신착란을 일으킨 윤미가 남자친구, 자기 친구와 그 남자친구까지 모조리 죽인다는 이야기입니다. 

피해자로 보였던 여주인공이 알고보니 가해자였다는건 많이 보아왔던 설정입니다. 그러나 이 설정이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는 못했습니다. 윤미에게 우울증이 있다는게 밝혀지자마자 곧바로 살인으로 이어져버리니까요. 이런 급발진 전개 덕분에 아무런 복선이나 반전도 없어서 시시했습니다. 이야기의 설득력도 낮고요. 별점은 1점입니다.

2022/01/28

노조키메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 별점 3점

노조키메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괴이 현상의 진상 등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괴담을 수집하던 미쓰다 신조는 '노조키메'라는 괴이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후, 우연히 민속학자 아이자와 소이치가 오래전 겪었던 경험을 기록했던 노트를 입수했다. 그리고 노트 속 내용이 이미 수집해서 "엿보는 저택의 괴이"라고 이름 붙였던 괴담과 시간은 다르지만, 같은 장소에 일어났던 일이라는걸 깨달았다.

두 편의 이야기를 묶어 "종말 저택의 흉사"라고 이름 붙이고 발표한 후, 미쓰다 신조는 괴이 현상에 나름의 추리를 덧붙이는데....

미쓰다 신조호러 추리물입니다. 

미쓰다 신조가 입수한 두 개의 괴담을 엮어 선보이고, 괴담에 대한 진상을 추리하는 결말로 이어지는 구성은 "괴담의 테이프"와 유사합니다.

첫 번째 괴담인 "엿보는 저택의 괴이"는 이야기를 전해 준 시게루의 대학생 시절 체험담입니다. 당시 시게루는 사이코, 카즈요, 유타로와 함께 여름 방학 동안 산골 마을 별장 관리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관리인이었던 미노베는 절대 가면 안되는 산책길이 있고, 순례자가 나타나면 자기에게 꼭 알리라는 당부와 경고를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순례자 모녀를 만나서 산길을 걸었다는 카즈요의 제안으로 네 명은 가면 안되는 길을 걷다가 폐허가 된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무언가에 씌워졌고요.

미쓰다 신조 특유의 집요한 묘사가 돋보이는 폐허가 된 마을 묘사, 그리고 이 곳에서 '괴이'에 씌워진 뒤 모든 틈새에서 시선을 느끼게 되는 등장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대단합니다. 방 안에 처박혀 모든 틈새를 막고, 눈까지 막아버린 카즈요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시게루가 귀가한 뒤, 찬장 안에서 시선을 느끼고 그 문을 열자 비좁은 찬장 안에 몸을 웅크려 시게루를 응시하고 있던 이와노보리 카즈요의 모습을 봤다는 장면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기억에 남네요. '무언가 쳐다보는 느낌'을 이만큼 글로 잘 표현한 작품은 또 없을 것 같아요.

그러나 유타로와 사이코는 지나치게 씌워졌던 탓에 죽고, 영험한 기도사의 기도로 시게루와 카즈요는 살아남았다는 결말은 설명이 부족하고 급작스러웠습니다. 물론 괴담은 이렇게 설명이 부족한게 더 현실적이기는 하겠지요. 미쓰다 신조 스스로가 작 중에서 괴담과 기담에 완결을 원하는건 뭘 모르는 행동이며, 오히려 이야기 도중에서 뚝 하고 끊어지는게 더 무섭다고도 하니까요. 카즈요가 시게루를 몰래 엿보는 버릇이 생겨 둘의 관계가 끝장났다는 후일담도 오싹하기는 했던만큼, 이 정도면 괜찮은 호러, 괴담 단편으로는 충분했던 수작이었다 생각됩니다.

두 번째 이야기 "종말 저택의 흉사"는 전편 괴담의 프리퀄입니다. 이 작품에서 폐허가 된 마을에 대한 이야기와 '엿보는 괴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민속학에 관심이 많았던 학생 아이자와 소이치가 비명횡사해 버린 친우 사야오토시 소이치의 고향 마을 토노무라에 명복을 빈다는 핑계로 방문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사야오토시 가문은 마을에서 배척받는 존재였고, 그 이유는 조상 중 한 명이 순례자 모녀를 참살했던 뒤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문은 저주를 풀기 위해, 원령에 씌워지는 '시즈메'라는 역할을 하는 소녀를 데려오기에 이르렀지요. 그러나 시즈메들도 역할을 하다가 미쳐버려 여러 사건을 일으켰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그 역할을 할 소녀가 없어서 이미 4년 전에 명맥이 끊겼습니다.
마침 아이자와 소이치가 도착했을 때 사야오토시 가문은 할머니 코노에의 죽음으로 장례 절차를 진행 중이었습니다. 이를 엿본 소이치 앞에, 사야오토시 가족을 엿보는 꼬마 여자 아이가 소이치에게만 보이는 등 여러가지 괴이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야오토시 가문 당주 기이치, 아내 노리코, 조린 주지, 그리고 그 외 사야오토시 일족 모두가 차례로 죽고 말았습니다. 소이치는 홀로 살아남아 원래 참살당했던 모녀 공양 목적의 순령당 옆에 지어진, 비밀스러운 사당 문을 열어본 뒤 사건의 진상을 깨닫고 도망치는데 성공한다는 걸로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재미, 공포보다는 지루함을 더 많이 느낀 작품입니다. 전편 괴담은 분량도 짧고, 일행의 모험(?)과 공포 체험이 1회성에 그치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아이자와 소이치가 토노무라 마을에서 겪는 괴이 체험이 계속 1인칭 시점으로 반복되는 탓에 금새 식상해질 수 밖에 없었거든요. 괴이 체험도 실체가 있는 공포라기 보다는 착각과 기분 탓에 불과한게 많아서 섬찟함을 전해주기는 부족했어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자기를 쏘아보는 시선을 느꼈다"는건, 솔직히 이런 시골 마을에 외지인이 찾아가면 누구나 겪을 당연한 경험이잖아요? 

묘사도 너무 장황합니다. 소이치가 직접 '노트'에 적었다는 일종의 수기가 이렇게 길고 상세한 묘사로 쓰여졌을리 없다는 점에서는 현실성도 떨어지고요. 더 큰 문제는, 아이자와 소이치가 지나칠 정도로 민폐를 끼치고 다녀서 영 호감을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 말라고 하는 것만 골라서 하고 다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사고뭉치에요. 이를 호기심, 용기라고 포장하는건 불가능합니다. 그가 겪는 공포 체험은 모두 본인 탓으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았고, 그만큼 캐릭터가 비호감이라 몰입하기도 힘들었어요. 쉽게 이야기하면 대학생 호러물에서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철부지 대학생이 주인공인 작품이었달까요? 문제는 대학생 호러물에서는 이 철부지들은 초반에 끔살당해 나름 카타르시스를 전해주는 반면, 이 작품에서는 끝까지 혼자 살아남는다는 점이겠지요....

하지만 이런 고구마스러운 답답함은 다행히 마지막 종장에서 해결됩니다. 미쓰다 신조가 부조리한 존재인 '노조키메'에 대해 논리적으로 해석한, 나름대로 시원한 동치미스러운 결과를 내어 놓는 덕분입니다. 이 결과를 내 놓는 과정은 한 편의 추리물과 다를게 없고, 심지어 그가 수기에서 숨겨져 있는, 알아내야 하는 항목 8개를 목록으로 소개하는 부분은 '독자에의 도전'과 유사합니다! (목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아이자와와 대화 중 사야오토시가 '어떤 사람이 조린 주지라고 이야기하는걸 주저한 이유
  2. 조린 주지에게 환대받으면서도 아이자와는 그가 자기를 쫓아내고 싶어한다고 느꼈던 이유
  3. 사야오토시 가에 시즈메가 없는 상태가 계속되면 노조키메가 나타나서 앙화가 내린다는걸 알면서도 4년간 방치한 이유
  4. 열 살 무렵의 사야오토시 소이치와 자기 아이 쇼이치를 겹쳐보고 토키코가 어두운 얼굴을 한 이유
  5. 순령당에 신찬을 바치는 역할이 노리코가 아니라 토키코에게 인계된 이유
  6. 토키코가 맡은 일을 할 때 무섭고 괴롭다고 한 이유
  7. 노조키메가 된 순례자 모녀 공양 목적으로 세워진게 순령당인데, 그렇다면 순령당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그 옆에 사당이 새로 지어진 이유와 사당에 모셔진게 무엇인지?
  8. 사야오토시가의 종말 저택이 지사이 저택이라고도 불린 이유

독자도 똑같은 수기를 읽었으니, 정보 제공도 공정하다는 점에서 완벽한 본격 추리물인 셈이지요. 괴담, 호러와 본격 추리의 조합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추리는, 사야오토시 가에서는 시즈메 대신에 '지사이'를 이용했다는 겁니다. 4년 전 순례자 모녀가 찾아왔을 때 딸은 시즈메 역할에 부적합했지만, 주술에 정통했던 조린 주지가 딸을 '지사이', 즉 액맞이 역할로 삼은 것이지요. 딸은 병약한 모친을 순령당에서 모시는 조건으로 이를 수락하고, 순령당 옆에 새로 세운 사당에서 살았습니다. 이 주술을 강화하기 위해 조린 주지는 의식주를 챙겨주는 것 외에, 소녀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도록 했었고요.
그러나 소녀의 어머니가 죽고 말자 사야오토시가는 어머니가 살아있는 척 꾸몄습니다. 처음에는 연기에 능했던 코노에가 어머니 역할을 맡았고, 코노에가 증손자의 사고사로 몸져 누운 뒤로는 어머니와 나이가 비슷한 토키코가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사실을 알아낸 소녀가 사야오토시 가문을 멸족시켰고, 손님이었던 아이자와만 살려준게 진상이었습니다. 

이 추리는 모두 합리적이며, 덕분에 여러가지 괴현상들도 모두 설명 가능해집니다. 소녀가 아이자와 눈에만 보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모르는 척 했기 때문입니다. 코노에 화장 시 시체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어 따로 움직였던건, 아래 쪽에 죽은 순례자 모친을 함께 화장했기 때문이고요. 사고가 일어날 수 없었던 벌목 현장에서 기이치가 사고로 죽었던건, 소녀가 마을 지리와 상황에 정통했던 덕분이었습니다. 그러고보면 표지가 스포일러인 셈이군요.... 

아울러 코노에 할머니가 과거 극단 출신으로 연기에 능했다는 등의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았던 단서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등, 한 편의 잘 짜인 추리물로 보아도 손색없습니다. 아이자와의 부인이 이 소녀였을 거라는 여운을 남기는 것도 아주 좋았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앞의 이야기는 괴담으로는 충분한 완성도를 보여주었고, 두 번째 이야기는 비록 지루했지만 종장에서의 놀라운 추리가 단점을 상쇄해 줍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기대가 됩니다.

2021/12/18

일곱 명의 술래잡기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 별점 2.5점

일곱 명의 술래잡기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니시도쿄의 생명의 전화 자원봉사 상담원 누마타 아예는 "다~레마가 죽~였다 ..." 라는 섬뜩한 전화를 자정 경에 받았다. 어린아이가 놀이를 하는듯한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전화는 곧이어 자살을 결심했다는 남자로 연결되었다. 다몬 에이스케는 자살할 생각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동네 신사를 찾았다가, 옛 추억이 떠올라 당시 함께 놀던 친구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전화가 연결되지 않으면 목을 맬 요량이었다. 그러나 친구는 그를 포함해 여섯 명 뿐이어서 월요일부터 한 명 씩, 다섯 명의 옛 친구에게 전화를 걸은 뒤 토요일에 생명의 전화에 전화를 건 것이었다. 

이후 다몬이 실종되었고, 친구들도 괴전화를 받은 뒤 한 명씩 차례로 살해당하기 시작했다. 유준, 사야에 토시까지 죽고, 사건 해결을 위해 힘을 함친 다츠요시와 고이치만 남게 되었다. 그들은 일곱번째 친구 '사카야노 요시코'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요시코와 관련되었던 무서운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데...

미쓰다 신조의 장편 소설입니다. 

가장 큰 특징은 호러가 아니라 정통 추리물에 가깝다는 점입니다. 탐정역인 하야마 고이치가 호러물 설정으로만 보였단 '다레마의 귀신 들린 아이'가 실존했고, 그 사건과 자기들의 어린 시절 놀이가 어떻게 엮였는지를 밝혀내는 과정이 꼼꼼하면서 합리적인 덕분입니다. 

여기서 과거, "오오니타 군"을 "오오타 군" 이라고 말하는 식으로 세 번째 음절을 빼먹고 말했던 요시코의 버릇을 떠올려 요시코가 '사카야노 요시코'라고 말한건 사실 '사카X야노 요시X코", 즉 "사카나야노 요시히코"라고 말했던 거란걸 걸 밝혀내는 추리도 굉장했고요. 

오오니타가 남겼던, TF라는 일종의 다이잉 메시지를 이용하는 추리도 깔끔합니다. 이건 완성된 메시지가 아니며, TEL을 쓰려고 했다는 것을 설득력있게 풀어내기 때문입니다. 전화 상담을 했던 누마타 야예가 진범이었다는게 여기서 드러나게 되지요. 

이어지는 누마타 아예의 범행 동기와 과정도 이치에 맞습니다. 아무리 30년 전 일이라고 해도, 금쪽같았던 아들이 사라지고, 남편이 자살한 사건에 관련된 아이들에게 살의를 품는건 당연합니다. 범행을 실제로 저질렀던 '귀신 들란 아이'도 나쁘지만, 이 범행 사실을 알고도 침묵했던 아이들도 큰 잘못을 한건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연쇄 살인극에서 오오니타를 마지막에 죽이려 했던 이유가 그가 술래였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인상적이었어요. 술래는 처음부터 엔카쿠, '귀신 들린 아이'가 뒤에 있다는걸 알고 있었는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제일 악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데 아주 그럴듯했습니다.

물론 미쓰다 신조의 작품답게, 마지막에 하야마 고이치가 추리쇼를 펼치기 직전까지는 호러물로의 가치도 높습니다. 연쇄 살인극이 마타테 시에서 아직도 두려움의 대상인 다레마 가문의 귀신 들린 아이, "다~레마가 죽~였다 ..."는 동요와 결합되어 섬뜩함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동일한 "다~레마가 죽~였다 ..." 놀이를 하다가 술래가 뒤를 돌아보자,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는 이야기를 가지고 공포스럽게 풀어낸 솜씨도 절묘했어요. 그래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친구들을 한 명 씩 술래가 잡았던 거지요, 설득력 넘치면서도 호러물에 딱 맞는 그런 상황과 이야기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어린 시절에 겪었던 끔찍한 기억은 봉인되고 말았다는 지극히 편의적인 설정입니다. 무려 여섯 명이나 되는 친구들 모두가, 그것도 초등학교 4학년이라는 비교적 고학년인데 요시코가 납치되는걸 보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모두 똑같이 기억을 잃었다? 말도 안돼죠. 게다가 "다~레마가 죽~였다 ."는 동요를 듣자 봉인이 풀리고 다시 기억을 떠올린다는건 더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설정도 지나칠 정도로 전형적입니다. 마타테 시에 아직도 영향력을 끼치는 다레마 가문과 그들의 융성과 몰락을 가져왔단 다레마 신사의 다루마, 몰락의 상징같은 잔혹했던 후계자 '귀신 들린 아이' 등의 설정은 이런 류의 작품에서 너무 많이 보아와서 식상하다 못해 지겨울 정도였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공정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 큰 문제가 있습니다. 처음에 다몬 에이스케가 생명의 전화에 걸었던 전화 내용 묘사가 그러합니다. 사실을 적시하는 것 처럼 쓰여 있지만, 이 전화 내용만 가지고 상담원 누마타 야에가 자기 아들의 실종과 죽음이 다몬 에이스케와 친구들과 관계가 있다는걸 알아채는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한게 분명합니다. 즉, 애초부터 공정함과는 거리가 먼 설정이 아니었나 싶어요. 처음에 "다~레마가 죽~였다 ."는 노랫소리가 들려온 것도 설명되지 않고요. 

또 야에의 범행도 세세한 면에서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습니다. 구호단체 직원들보다 먼저 현장을 찾아가 다몬 에이스케를 살해한 첫 번째 범행이 대표적입니다. 현장에 누군가 출동한다는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범행을 저지른다? 이보다는 어차피 자살을 앞두고 있었다면, 자살하도록 놔두고 친구들 정보를 빼 내는게 훨씬 손 쉬운 방법입니다. 그가 구조를 받는다면, 그 뒤에 죽여도 되고요. 다른 범행들도 어설프기는 마찬가지며, 범행 전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서 "다~레마가 죽~였다 ."를 들려준 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범행 과정 전반에 죽은 요시히코의 원념이 도왔을거라는 지극히 미츠다 신조스러운 설정이 덧붙여져 있습니다만, 이건 합리적인 추리물과는 거리가 멀지요. 

엔카쿠 다카야키 경부가 다레마가의 귀신 들린 아이였다는걸 밝히는 마지막 추리쇼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근거는 오오니타가 남겼던 TF라는 메시지로, 이는 TE를 쓰다가 만 것으로 사건 관계자 중 TE라는 이니셜을 가진 엔카쿠 다카아키 경부밖에 없다는게 요지였지만 이건 TEL을 쓰려고 했다는 거니까요. 이 이니셜을 엔카쿠 경부와 엮을 필요는 없었어요. 이런저런 디테일로 그가 사건 해결에 소극적이었다는걸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그가 요시히코 등을 납치해서 죽였던 다레마가의 귀신 들린 아이였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비약이 너무 심해서 제대로 된 추리라고 하기 어려웠습니다. 현장에 나타나 하야미 고이치와 대면한다는 지극히 작위적이면서 편의적인 상황 설정은 둘째치고서라도요.

그 외에도 다레마 신사에 모셔진 다루마의 정체라던가, 다몬 에이스케가 전화를 하려고 했던 일곱번째 친구가 누구인지 결국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에요. 사건 해결에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것 처럼 보였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는 '맥거핀'의 전형적인 예가 아닐까 싶네요. 

이렇게 불필요하고 진부했던 설정을 일부 제외하고, '귀신 들린 아이'가 엔카쿠 경부였다는 비약을 잘 정리했더라면 훨씬 간결하면서도 완성도 높은 작품이 되었을텐데 여러모로 아쉽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1/09/25

좀비 연대기 - 로버트 E. 하워드 외 / 정진영 : 별점 2.5점

좀비 연대기 - 6점
로버트 E. 하워드 외 지음, 정진영 엮고 옮김/책세상

근대 시기 유명 장르 소설가의 좀비 관련 중단편을 모아 놓은 앤솔러지입니다. 작가들의 명성과 장르 문학치고는 고전급에 속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과 성격은 유사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낡은 느낌이 강했던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과는 다르게, "지옥에서 온 비둘기"라던가 "좀비 감염 지대"같은 시대 초월 명작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최초로 '좀비'라는 말을 만들고, 아이티 부두교 좀비 설정을 확립했다는 "마법의 섬"과 같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작품도 눈여겨 볼 만 하고요. 크리쳐 호러물 외에도 저주받은 저택, 호러 모험 액션, 판타지에 SF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장르 스펙트럼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열 두편의 수록작 중 수준 이하 졸작도 제법 됩니다. 발표된지 100여년이 다 되어가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요. 그리고 제목에서 기대했던, 우리가 지금 '좀비'라고 하면 떠올릴 몬스터가 등장하는 작품도 없습니다. 아이티 등 열대 섬나라에서 부두교 주술 등으로 죽은 사람을 되살려 노예처럼 부렸다는 초기 좀비 전설에 기반한 이야기가 대부분이거든요. 물론 이게 단점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동일한 설정을 그대로 반복한 판박이같은 작품이 많다는거지요. "노예에게 소금은 금물",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시체들" 가 그러합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클래식이라는 명칭에 걸맞는 그런 앤솔러지였습니다. 좀비라는 크리쳐의 창작 초기 설정과 이야기들이 궁금하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다음과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옥에서 온 비둘기" 

그리스웰과 존 브래너는 비둘기 떼가 날아가버린 폐가에서 하룻 밤을 보내게 되었다. 밤중에 공포스러운 휘파람 소리에 잠을 깬 그리스웰은 2층으로 올라간 뒤, 도끼에 맞아죽은 브래너가 자기를 죽이려고 해서 도망쳤다. 도망치던 그리스웰을 구해준 보안관 버크너는 흉가 블래슨빌 저택에 얽힌 수수께끼와 브래너 살인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자 늙은 부두교 주술사를 찾아갔지만, 주술사도 뱀에 물려 죽었다. 사건을 매듭짓기 위해 버크너와 그리스웰은 흉가에서 하룻 밤을 보내지만, 그날 밤 그리스웰은 악령에게 홀려 2층으로 향하는데...

좀비물이라기 보다는, 저주받은 저택 장르물로 보는게 타당합니다. 죽은 브래너의 습격, 마찬가지로 사람을 습격해 죽이는 실비아 블래슨빌 모두 시체가 되살아난 것이기는 하지만, 이는 복수를 위해 부두교 주술로 저주한게 원인이고, 사람을 잡아먹지도 않으니, 저주물에 더 가깝고요.

저주받은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내다가 악령에게 습격받는 초반부 묘사는 지금 읽기에는 다소 진부하고 심심했지만, 버크너 보안관 등장 이후부터는 아주 재미있었어요. 특히 버크너가 브래너의 시체를 발견한 뒤의 전개는 추리 소설을 떠올리게 해서 독특했습니다. 상황은 그리스웰이 범인일 수 밖에 없어요. 둘만 있던 흉가에서 한 명이 도끼에 머리를 맞아 죽었으니까요. 그러나 버크너는 그리스웰의 옷에 피가 전혀 튀지 않았던 점, 그리고 그리스웰이 범인이라면 죽은 버크너가 자기를 죽이려 했다는 주장을 했을리 없다는 이유로 추가 조사를 벌입니다. 그리고 핏자욱을 따라 2층의 사건 발생 현장으로 이동한 뒤, 무언가 이상한 존재가 얽혀있다는걸 알게 되지요. 단서를 통한 추리,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수사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비밀 방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3명의 가족이 목을 메고 죽어 있었다는, 흉가 블래슨빌 저택에 얽힌 진상도 오싹했습니다. 사람들을 습격해 죽였던 괴물 '주벰비'가 실비아 블래슨빌을 원망했던 혼혈 하녀 조안이 아니라, 실비아 블래슨빌이었다는 반전도 충격적이었고요. 조안은 주벰비가 되는 검은 술을 자기가 먹지 않고 주인에게 몰래 먹였던 겁니다. 이거야말로 진짜 복수네요.

믿음직하고 용감한 보안관 버크너와 겁 많은 애송이 그리스웰의 조합도 반 헬싱 교수와 조나단 하커 관계와 좀 비슷한데, 전형적이지만 이런 류의 이야기에 딱 맞는 조합이더군요. 무서움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겁쟁이와 사건을 해결하고 악령을 응징하는 용감한 보안관이 조합되니, 두려움과 공포, 액션과 정의의 응징을 다 얻을 수 있잖아요!

그러나 딱 한 가지, 너무 옛스럽게 쓰여졌다는 건 좀 아쉽습니다. 공포를 효과적으로 묘사하기 여러모로 부족한 묘사가 특히 거슬렸어요. 오래된 폐가, 몰락한 가문, 뱀으로 상징되는 저주의 주술,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령, 도망쳤던 생존자가 남긴 일기 등 모든 면에서 미쓰다 신조의 "흉가"가 떠오르는데, 공포를 자아내는 묘사와 전개는 전혀 미치지 못했거든요. 미쓰다 신조가 같은 작품을 썼다면 훨씬 무섭게 쓸 수 있었을 겁니다. 아니면 차라리 지금 방식으로 영상화하면 훨씬 대단한 작품이 될 것이라 생각되네요. 

그래도 좋은 작품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검은 카난" 

커비 버크너는 고향 카난에서의 긴급 호출을 받고 귀향하다가 혼혈인 마녀의 유혹을 받았다. 최면에 걸렸던 버크너는 운 좋게 정신을 차리고 습격한 거구의 흑인 세 명을 물리쳤다. 마을에 도착한 버크너는 마을 흑인들이 모두 도망갔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고, 조사를 통해 늪지대에 사는 괴인 솔 스타크가 배후에 있다는걸 알아냈다. 그러나 조사 중 버크너는 마녀의 최면에 걸려 솔 스타크의 본거지로 본의 아니게 끌려가게 되었고, 친구 브랙스턴이 그를 돕기 위해 따라가는데....

부두교 주술사가 카난이라는 마을을 장악하려 하지만, 마을 지도자 버크너가 이를 물리친다는 호러 액션 활극입니다. 마녀의 최면, 주술로 만든 물고기 인간같은 공포스러운 요소가 등장하지만,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버크너 시점의 심리 묘사만 있는 탓이 큽니다. 버크너 캐릭터는 전형적인 서부 영화의 쾌남 영웅 스타일이라 공포를 크게 느끼지 않거든요. 공포에 사로잡힌 묘사도 잘 와 닿지 않더군요. 마녀와 괴물들이 총에 맞으면 죽는다는 것과, 최면술말고는 주인공을 크게 위협하지 못한다는 것도 작품이 무섭지 않은 이유이고요.

그래도 모험 활극으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주인공 버크너는 전작의 버크너 보안관의 선조, 혹은 동일인물이 아닐까 싶은데, 버크너 유니버스도 한 번 제대로 소개되면 좋겠네요.

"천 번의 죽음" 

물에 빠진 나를 구해준 건 아버지와 그 부하들이었다. 알고보니 아버지는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연구를 하고 있었고, 나도 물에 빠져 죽었었지만 아버지의 연구 덕분에 살아났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죽이고 되살리는 식으로 연구를 계속하는데....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등장하는 SF 호러 범죄물을 잭 런던이 썼다는건 특이했지만, 내용은 평이합나다. 죽은 사람을 되살린다는건 "프랑켄슈타인" 에서부터 내려온 고전적인 설정이니까요.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섬에 틀어박혀 생체 실험을 한다는건 "닥터 모로의 섬"과 똑같고요. 물론 생체 실험의 대상이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로, 그가 반복적인 죽음과 소생을 거듭한다는 설정으로 확실히 차별화되기는 합니다. '폭력에 의하지 않고, 신체 장기에 아무런 훼손이 없는 죽음은 단지 생명의 보류 상태'라며 죽음과 소생을 보다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점도 독특했어요.

하지만 차별화 요소를 잘 살렸다고 보기는 어렵네요. 독약, 질식 등으로 수차례 죽음을 맞는 고통이 잘 그려내지 못한 탓입입니다. 생체 실험의 고통을 극명하게 그려냈다면 호러물로 충분히 값했을텐데 말이지요. 과학적인 설명도 그럴듯해 보일 뿐, 실상 알맹이 없는 서술에 불과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갖은 노력 끝에 물질을 원소 상태로 되돌리는 장치를 개발했고, 이를 이용하여 아버지와 그 부하들을 없애고 탈출한다는 결말은 최악이네요. 아버지의 흑인 부하들이 자기 방으로 한 명씩 차례로 들어올 때 마다 없애고, 마지막에는 방에 들어선 아버지를 없앴다는데, 이럴 바에야 그냥 방에 한 명씩 들어올 때마다 칼로 찌르는게 빨랐을겁니다. 특별한 장치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롭고, 피해자들도 한 명씩 들어와 사라질 정도로 감시가 느슨했는데 왜 진작에 탈출하지 않은건지도 이유를 모르겠고요. SF스럽게 만들기 위한 억지 장치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엄청난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보였던 아버지의 최후라기에는 너무 허무했고요.

유사한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되는 요소가 있는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호러물로는 공포를 자극하는 요소가 부족했고, 결말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노예에게 소금은 금물"

나는 아이티 호텔에서 머물다가, 호텔에서 일하는 노파 마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지역 주민들과 호텔 직원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과거 아이티 독립 전쟁 당시 '소금을 먹지 마라'는 금기를 어겼다가 시체가 된 연인 트레생에 대해 말해 주는데...

뒤에 수록된 "좀비와 함께 걷다"를 읽어야 설정이 이해가 되는 작품입니다. "좀비와 함께 걷다"에 따르면, 좀비는 소금을 먹으면 자신이 죽었다는걸 깨닫고, 무덤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한다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트래생은 물론 마리도 진작에 죽었던 좀비였다는 뜻이고요. 트래생이 흑인 해방 등의 의식을 가질 정도로 똑똑했던 이유는 설명되지 않지만 노예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였다니, 다른 좀비들과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고 보면 되겠지요.

문제는 이 설정 외의 특별한 내용은 없다는 겁니다. 마리도 좀비였다는 결말은 너무 뻔했고요. 죽었다는걸 깨달은 좀비들이 무덤으로 폭주하는 장면 묘사 정도만 괜찮았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귀환자들의 마을" 

좀비 전설이 있는 열대 섬마을에 어느날 미모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에게 유혹당한 파파는 절벽에서 떨어져 죽게 된다...

괴담 소설로 유명한 라프카디오 헌의 단편인데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좀비와 다른, 열대 섬나라 좀비에 대한 설명과 파파가 관련된 이야기가 아예 별개로 진행되어 혼란스럽고, 별다른 내용도 없는 탓입니다. 섬마을의 여러 풍광에 대한 관능적이면서도 상세한 묘사를 걷어내고 '이야기'에만 집중하면 한, 두페이지로도 충분했을 이야기입니다. 수록작 중 최악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나트에서의 마법" 

조티크 대륙의 절반이 사막인 나라 지라의 왕자 아다르는 노예 상인 샤라그에게 납치된 약혼녀 달리리를 찾아 여러 왕국을 헤멨다. 그러다 그녀가 향했다는 요로스 왕국으로 가는 상선에 탑승했지만 항해 중 폭풍에 휘말렸고, 상선은 사악한 섬 나트로 표류하다가 침몰했다. 달릴리의 구조로 홀로 살아남은 아다르는 나트의 마법사 우두머리 바카른을 만나, 그녀는 바카른이 되살려낸 익사자라는 걸 알게 되는데....

"코난 더 바바리안"을 연상케 하는 작품. 존재하지 않는 고대 왕국을 무대로 마법사와 영웅이 등장해서 대결을 펼치는 고대 판타지라는 점에서요. 그런데 결말이 예상 외라 놀랐습니다. 영웅 포지션인 아다르가 권력과 재산을 차지하기 위한 바카른의 두 아들 음모에 가담하여 바카른을 죽이려다고 되려 찔려 죽고 말거든요. 그리고 바카른의 아들에 의해 되살아나 좀비가 된다는게 끝입니다. 달릴리와 뭔가 관계가 이루어진다던가, 정의가 이루어진다던가 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중간에 등장하던 족제비 괴물은 어떻게 되는지도 설명되지 않고요.

이런 이유로 방대한 설정으로 이루어진 긴 서사물의 일부만 수록된 느낌입니다. 최소한 아다르와 달릴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주었어야 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아이티 공화국 헌법에 좀비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는 말에서 시작해서, 아이티에 진짜 좀비가 있다는 다양한 증언들이 이어지는 작품. 페이크 다큐멘터리 방식의 파운드 푸티지 영화같은, 페이크 논픽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좀비는 소금을 먹지 않고, 좀비가 소금 맛을 보면 죽었다는걸 깨닫고 열일 제쳐놓고 죽을 자리를 찾기 위해 무덤으로 향한다는 설정에 기반한 경험담이 이어질 뿐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화이트 좀비" 

아프리카 엔스와지 지방의 행정관 제프리 에일럿은, 어느날부터 느껴지는 악취 탓에 겁에 질렸다. 안개 자욱한 어느날, 결국 에일럿은 쓰러지고 말았다. 그를 돌봐준 신부는 과거 에일럿과 함께 했던 전우 싱클레어의 미망인이 수상하다고 말했고, 에일럿은 탐문과 잠복 끝에 그녀가 부두교 주술로 시체들을 조종하는 현장을 목격하는데...

서인도 제도가 아니라 아프리카를 부대로 부두교 주술이 등장하는 이색작입니다. 서술은 장황하지만, 정작 내용은 에일럿이 잠복해서 부두교 좀비 축제? 현장을 목격하고, 거기서 싱클레어의 모습을 확인한 뒤 부두교 주술솨를 쏴 죽인다는게 전부입니다. 악취라던가 불길한 안개 등의 설정은 왜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신부의 존재도 불필요했어요.

게다가 좀비 사건의 원인, 결과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싱클레어 부인이 부두교 주술에 빠져 시체를 되살렸는지는 아프리카의 심장 운운하며 농장 관리 목적이었다고 소개되지만 명확하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싱클레어를 되살릴 이유도 없었고요. 에일럿이 악취를 느낀 이유 역시 밝혀지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아프리카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딱히 아프리카일 이유를 찾기도 힘들었습니다. 묘사만으로 작 중 무대가 아프리카처럼 느껴지지도 못했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할로 맨" 

한 남자가 아프리카로부터 15년만에 영국으로 찾아왔다. 그는 부두 거리를 헤메다 모모의 식당으로 들어섰다. 

모모는 자신이 15년 전에 죽여 매장했던 고팍이 자기 식당으로 들어오는걸 보고 경악했다. 고팍은 표범 인간이 자신을 깨웠다며, 자기를 책임지라고 요구했다. 모모가 자신을 죽였기 때문이라면서. 식당에 고팍이 머문 뒤, 식당은 서서히 망해갔고, 딸 버블스마저 고팍에게 홀려 생기를 빼앗기자 모모는 고팍을 또 다시 한 번 죽일 결심을 하게 되는데....

죽은 자가 돌아왔다가, 다시 죽음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찾는다는 내용의 작품. 그렇게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무서울 수 있는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무서운 포인트를 제대로 묘사하고 있지 못하는 탓입니다. 일단 모모 시점의 심리 묘사가 부족해요. 과거에 저지른 죄로, 손을 씻고 가족과 열심히, 단란하게 살아가던 소시민에게 지옥문이 열린 상황인데, 고팍의 존재를 너무나 쉽게 인정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묘사에서는 절박함이나 어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거든요. 내용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습니다. 왜 표범 인간이 고팍을 되살렸는지, 고팍이 영국에는 어떻게 왔는지 등이 모두 드러나지 않아요. 버블스의 생기를 빼았는다는 것도 대충대충 넘어가고요. 결말도 허무합니다. 결국 고팍은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걸로 마무리되는데, 이럴 거였다면 왜 진작에 없애지 않았는지 의문이에요.

여러모로 오래된 작품이라는 티만 물씬 났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시체들" 

나는 농부 폴리니스로부터 아이티 지역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다양한 존재들에 대해 들었다. 다른건 유럽과 흡사했지만, 이 지역에만 있는 존재가 있었다. 그건 바로 좀비였다. 나는 좀비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부탁했다

"좀비"라는 단어의 기원이 되었다는 작품으로 아이티에서 사람들이 단단한 대리석 무덤에 묻히고 싶어하고, 자기 집 마당에 묘를 만들고, 사람들 왕래가 많은 길가나 도로변에 무덤이 많은 이유로 좀비를 설명하는 등, 좀비를 실존하는 것 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여러 장치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아이티 형법을 증거로 내미는 장면도 그런 장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폴리니스가 해 준 늙은 추장 조제프가 데려온 좀비 이야기는 이 책에 앞서 수록되어 있는 다른 아이티 좀비 이야기들과 똑같습니다. 좀비가 소금기를 접한 뒤 다시 시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최후까지요. 좀비가 되었던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조제프에게 복수를 했다는 결말 정도만 차이점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원조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발표 당시에는 굉장히 새롭고, 무서운 이야기였을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잘 짜여져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오히려 이 작품을 다른 유사 작품들보다 앞서 수록하지 않은 이 책의 문제가 너무 커 보입니다. 지금 책의 구성은, 후대의 아류작으로 원조의 가치가 퇴색되는 셈이거든요.

하여튼, 원조라는 역사적 가치를 더해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투셀의 창백한 신부" 

흑인 부자 마티외 투셀은 스무살은 어린 혼혈 아가씨 카미유와 결혼했다. 그리고 첫 번째 결혼 기념일에 투셀은 카미유를 시체와 함께 하는 파티에 초대했고, 카미유는 미쳐버리는데....

화자가 직접 들었다는 이야기를 쓴 글 형태로, 화자의 말대로 '흐지부지되었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작품입니다. 결말이 없거든요. 투셀이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투셀이 파티가 연 의도가 무엇인지, 시체들은 누구였는지, 아내에게 1년간 비밀을 지키다가 갑자기 시체 파티에 초대한 이유는 무엇인지 전혀 밝혀지지 않아요. 그렇다고 딱히 무섭지도 않았고요.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는 문제가 많았던 소품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점비" 

그랜빌리 씨는 1차 대전에서 폐를 다친 뒤, 서인도 제도 세인트크로이 섬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다. 섬에서 친해진 제프리 다 실바와 럼주 칵테일을 함께 하던 어느날, 그랜빌리 씨는 '점비'에 대해 물었고 다 실바는 자기가 젊었을 때 목격했던 일을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신학교를 나온 집사 출신이라는 작가 이력이 특이했던 작품. 이런 이력이라면 좀비가 실제 있는 것 처럼 묘사되는 작품은 쓰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그러나 작품은 작가 이력만큼 특이하지는 않습니다. 다 실바가 친구 이베르센이 죽은 날, 이베르센의 유령을 만나고, 밤길에서 공중에 떠 있는 점비를 목격하고, 이베르센 집에서 개 인간을 만났다는 체험담이 이어질 뿐으로, "내가 했던 무서운 체험" 류의 기승전결없는 괴담의 나열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점비'나 개인간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도 없고요. 이래서야 좋은 점수를 줄 래야 줄 수가 없지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좀비 감염 지대" 

고든 파넘 박사는 아발론 섬에서 불사에 관련된 연구를 하다가, 죽은 시체를 되살리는 혈청을 개발했다. 마침 섬에 닥친 화산 폭발로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자, 박사는 혈청을 이용하여 그들을 되살릴 생각을 하는데...

부두교 주술로 되살아난 시체가 아닌, 과학의 힘으로 되살린 좀비가 등장하는SF 호러물입니다. 앞서 잭 런던의 단편과 비슷한 소재이지만, 되살리는 과정을 나름 과학적으로 잘 설명해 주는게 큰 차이점이자 볼거리입니다. 특히 인체는 기계와 같다는 등의 고든 파넘 박사의 생명에 대한 이론이 아주 재미있고 풍성했어요. 이 이론과 박사가 여러 동물로 진행하는 실험으로 이야기 여러 개는 충분히 뽑아낼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요. 예를 들어 '불멸성을 부여받은 실험체들이 번식을 통해 불멸성 유전을 증명했지만, 태어난 실험체들이 태어난 상태를 유지할 뿐이었다'는 이야기는 별도의 단편으로 꾸며도 재미있겠더라고요.

시체가 되살아나지만, 영혼과 두뇌가 없이 본능만 남은 상태라 야수로 돌변한다는 발상도 아주 좋았어요. 이들이 죽지 않는 상태로 군대, 경찰을 휩쓸어버리고, 잘려진 손발이 꿈틀대며 잘린 조각들이 엉망으로 붙어 괴물이 되어버리는 묘사도 일품이었고요. 절대 죽지 않는 존재를 없애기 위해 화산 폭발을 이용하여 우주 공간으로 날려버린다는 아이디어도 신선합니다. 스케일이 정말 남달라요.

물론 화산 폭발을 사람이 제어한다는건 지금도 상상하기 힘들기에, 설득력이 높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등장하는 작품에서 이 정도 허풍은 충분히 허용범위 안쪽이라 생각됩니다. 오히려 시대를 앞서간, 아니 시대를 초월한 끔찍한 아비규환을 그려낸 SF 좀비물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영화로 나와도 아주 근사했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2021/09/03

리처드 매시슨 - 리처드 매시슨 / 최필원 : 별점 3점

리처드 매시슨 - 6점
리처드 매시슨 지음, 최필원 옮김/현대문학

호러, 장르 문학의 거장인 리처드 매시슨의 걸작선. 이전 '리처드 매드슨'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단편집은 거의 모두 읽어볼 정도로 좋아하는 작가라 기쁜 마음으로 구입해서 읽어보았습니다.

수록작들 대부분이 좋은 작품들이라 만족스러웠습니다. 무려 33편이나 되는 볼륨도 풍성하고요. SF, 호러, 범죄물, 드라마, 서스펜스 스릴러, 심지어 서부극까지 아우르는 장르적인 스펙트럼도 엄청나게 넓습니다. 전부 걸작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별점 5점, 4.5점, 4점의 걸작과 수작도 포함되어 있기에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그나저나 무슨 기준으로 선정된 작품들인지는 궁금하네요. 작가가 직접 선정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요. 이전에 읽었던 작품 중 분명 걸작이라고 생각했던 작품이 빠져있기도 하거든요.

"남자와 여자에게서 태어나다" 

흉칙한 무언가가 부모님에 의해 지하실에 쇠사슬에 묶여 갇혀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2021년에 읽기에는 많이 뻔합니다. 괴물이 다음 번에는 지하실에서 탈출해서 사람들을 덮친다는 여운을 남기지만, 명확한 결말이 더 낫지않나 생각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사냥감" 

아멜리아는 애인에게 줄 선물로 기묘한 인형을 샀다. 인형을 구속한다는 금줄이 풀리자, 인형은 아멜리아를 죽이기 위한 공격을 시작하는데...

예전에 읽었던 작품입니다. 일종의 크리쳐물로 20cm밖에 안되는 나무 인형과 사투를 벌이는 묘사가 압권이에요. 시대가 흘렀어도 여전히 멋집니다. 

하지만 결말과 담고 있는 주제가 제 기억과 사뭇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아멜리아가 처참하게 희생된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멜리아가 인형을 처단한 뒤, 스스로 사냥꾼이 되어 어머니를 죽이게 된다는 결말이더라고요. 착각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억과 달라서 더 재미있게 읽은 것 같아요.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던 사회적인 메시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미 장성해서 독립한 자녀를 구속하는게 살의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시사적이면서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넘어가던 시기였을 발표 시점에는 충분히 공포스러웠을 시의적절한 메시지였다 생각되네요. 이런 메시지를 돌직구로, 매력적으로 한 가운데 꽂아넣는 작가의 솜씨도 대단하고요.

단, 결말에서 어머니를 죽일 결심을 한 아멜리아가 문의 빗장을 쉽게 연 건 좀 안일했습니다. 인형에게서 도망칠 때에는 여러번 실패했던 걸로 묘사되니까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사회파' 크리쳐 호러라는 신경지를 장르 문학 초창기에 개척한 명작입니다.

"마녀 전쟁"

군에서 키우는 일곱 마녀가 쳐들어오는 적군을 마법으로 물리친다는 이야기로, 마녀들이 각자 특기로 소환한 불과 물, 거대한 암석, 사자 등으로 적을 잔혹하게 몰살시키는 묘사가 내용의 전부입니다. 단지 이런 파괴적인 묘사를 쓰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어요. 이외에는 기승전결이 있지도 않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파괴 묘사만큼은 확실히 볼 만 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판본보다 번역이 훨씬 좋은 덕분이지요. 약간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 느낌도 드는데, 이런 설정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군요.

"깔끔한 집" 

소설가인 나는 아내 루시와 함께 굉장히 저렴한 아파트로 이사왔다. 하지만 얼마 뒤, 아내는 아파트 지하실에 거대한 엔진이 있고, 관리인은 뒷통수에 눈이 달려있다는 말을 하면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나는 처음에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관리인을 미행하여 이 모든게 사실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친한 이웃 필, 마지 부부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함께 아파트가 이륙을 준비할 때 탈출에 성공하는데....

아파트가 로켓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 그리고 마지가 미치지 않았을까?라는 분위기를 풍기다가 그녀가 말했던게 모두 사실이라는게 드러나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었던 SF 단편입니다. 서스펜스가 뭔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아파트가 아니라 사실은 블록 전체가 우주선이라서 탈출이 불가능했다는 반전도 인상적이었고요.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침략하는게 아니라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보디스내쳐"가 연상되기도 하네요.

독특한 설정, 아이디어와 함께 전개에서 긴장감과 흥미를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난 걸작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피의 아들" 

기묘한 아이 쥴스는 드라큘라가 되고 싶다는 망상에 빠졌다. 쥴스는 학교도 그만두고 배회하다가 동물원에서 흡혈 박쥐를 훔쳐내는데...

꽁트에 가까운 짤막한 단편으로, 분량과 흡혈 박쥐가 진짜 드라큘라였다는 반전으로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반전은 뜬금없었고, 리처드 매시슨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는 찾아보기 힘든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이야기에 대한 설명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현재 이야기는 쥴스가 정신병자인지, 진짜 흡혈귀와 관련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나는 잠에서 깬 뒤, 관에 갖혀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이게 적들의 수작이라고 믿은 나는, 관을 탈출하기 위한 갖은 노력 끝에 결국 관 뚜껑을 부수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데...

'나'가 관에서 탈출하기 위한 노력이 작가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로 잘 그려져 있을 뿐 아니라, '나'는 이미 7개월 전 죽었고, 거울로 본 '나'는 썩은 시체였다는 반전이 굉장히 좋았던 작품입니다. "환상특급" 등의 원작으로도 잘 어울릴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시점 전환되는, 그래서 거울 속 모습에 좀비가 보이는 식의 카메라 워크가 곁들여지면 아주 멋지지 않았을까요?

재미와 충격 외에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사소합니다. 얼마 전 읽었었던 좀비물 앤솔러지에 수록되었던, 흔해빠지고 수준 이하였던 작품들 보다는 몇 배 뛰어난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사막 카페"

밥과 진 부부는 여행 중 우연히 사막에 위치한 카페에 들렸다. 진이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밥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데...

외딴 마을에서 맞이한, 남편 밥의 실종과 그에 따른 위기 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여행하던 외지인이 외딴 마을에서 겪는 위기를 그린 작품은 많습니다. 저도 많이 읽어보았고요. 이전 스티븐 킹의 "밴드가 엄청 많더군" 리뷰에서 언급했던 적도 있는데, 보통은 외딴 마을의 기묘한 집단 광기를 그리곤 하지요.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범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정통 범죄물로, 궁지에 몰린 피해자 진의 심리 묘사를 통해 순수한 공포, 서스펜스를 극대화한다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희생자를 화장실에서 납치하는 것에 불과한 단순한 범죄인데다가, 보안관 등장 후 별다른 위기없이 깔끔하게 해결된다는 건 조금 아쉽지만 단점은 사소할 뿐입니다. 장르물이 주어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를 꿰뚫고 제대로 달려주는 수작이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위조지폐"

생계에 지쳐 일탈을 꿈꾸던 윌리엄 O. 쿡씨는 복제인간을 만드는 장치를 개발합니다. 복제인간에게 온갖 귀찮은 일을 시키고 자신은 놀 생각으로요. 그러나 쿡씨의 복제인간답게, 복제인간도 놀고 싶어해서 결국 복제인간이 급증하게 된다는 블랙 코미디 콩트입니다.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이기도 하고요. 설정은 재미있는데 기계가 폭발하고 복제인간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는 결말은 시시했습니다. 뭔가 반전이 있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유령선" 

로스 선장과 메이슨, 미키는 외계 행성에 착륙했다. 우연히 목격한 인공물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추락한 우주선으로 밝혀진 인공물 속에서 발견한 건, 그들 세 명의 시체였다...

일행들이 자기들의 시체를 목격하고 느끼는 공포와 현재 상황에 대해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잘 그려진 SF 단편입니다. 

그러나 자기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는 이미 죽었고 시체를 바라보는 자신은 유령이라는 걸 깨닫는다는 결말은, 발표 당시였다면 모를까 지금 읽기에는 다소 낡은 설정입니다. 제목부터가 스포일러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체의 춤" 

대학 신입생 페기는 나쁜 선배들에게 이끌려 법적으로 금지된 루피 춤을 보러 갔다가 충격에 기절하고 마는데...

세기말 감성이 살아있는 독특한 SF. 예전에 읽었던 작품인데, 그 때와 평가는 거의 동일합니다. 페기 시점으로 묘사된 광란의 루피 춤 공연 묘사는 아주 좋습니다. 순진한 신입생이 거부하고 싶은 방탕과 쾌락도 끔찍하게, 그러면서도 잘 그려내고 있고요. 일종의 좀비인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의 발작을 '춤'이라고 이름 붙여 공연한다는 끔찍한 아이디어도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페기도 잘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방탕함에 빠져버린다는 듯한 결말은 별로였습니다. 이 결말이 루피 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페기가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가 되었다던가, 같은 반전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의 결과물만 놓고 보면, '호기심으로 좀비를 보러 갔다 왔다. 무서웠다." 정도의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몽둥이를 든 남자" 

타임스퀘어에 온 몸이 털로 덮이고 몽둥이를 든 원시인 같은 남자가 나타났다. 출동한 경찰이 총을 쏴서 겨우 원시인을 제압했다.

조금 무식하고 무례한 젊은 마초 양아치 1인칭 대화체로 진행되는 이야기인데 화자 설정도 진부했고, 결말도 뻔했습니다. 핵심은 원시인이 온 곳이 '미래'였을 수도 있다는 건데, 미래에 문명이 퇴화할 거라는 설정의 이야기는 고전 "타임머신"을 비롯해서 너무 많으니까요. 조금 지적인 노인네를 '빨갱이'라고 지칭하는 부분에서 시대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다른 부분은 딱히 건질게 없더군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버튼, 버튼" 

영화까지 나왔던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부부 사이도 서로 모른다'는 걸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기묘한 설정에 더해 서늘하고 섬찟한 느낌과 반전이 있는, '기묘한 맛'류의 쇼트쇼트입니다. 예전에 읽었을 때에는 박한 평을 했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기묘한 맛' 류로는 손에 꼽을 만한 좋은 작품이네요. 왜 나쁜 평가를 했었을까요? 별점은 4.5점입니다.

"결투" 

스티븐 스필버그의 극영화 데뷰작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진 작품. 격렬한 카 체이스를 어떻게 글로 묘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있다면, 모범 답안이라고 해도 좋을 작품입니다. 주인공이 트럭에 쫓기면서 느끼는 공포와 긴장감 등이 아주 잘 드러나 있으니까요.

그러나 트럭 운전사의 분노가 잘 이해되지는 않고, 마지막 트럭의 최후가 너무 뜬금없다는게 아쉽습니다. 확실한 급커브였다던가 등 속도를 반드시 줄여야 했다는걸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심판의 날" 

루크는 심부름을 왔다가 목이 잘린 과부 블랙웰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녀의 아들 짐은 시체를 본 뒤, 극심한 공포로 광란 상태였다. 루크의 아버지 샘은 현장 조사를 통해 과부가 아들을 의도적으로 미치게 만들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그녀는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남편을 죽게 만든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려다가 죽었음) 아들을 증오했었다....

과부 블랙웰이 증오심 때문에 의도적으로 아들 짐이 자신이 없으면 미쳐버리도록 차근차근 준비한 뒤,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결말이 놀라운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끔찍한 공포가 짧은 분량 안에 모두 포함되어 선명하게 드러나는 걸작이에요. 블랙웰 부인이 목을 멘 칼이 어디 갔을지?에 대한 부분이 설명되지 않은건 약간 아쉽지만, 단점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이 단편 하나를 읽은 것 만으로도 돈이 아깝지가 않네요.

덧붙이자면, 엄청난 의지로 저지른 자살이라는 설정은 크리스티 여사님의 걸작 심령 서스펜스 호러물인 "네번째 남자"가 살짝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 작품도 시대를 앞서간 걸작이었지요.

"죄수" 

1944년, 비밀 연구소에서 핵분열을 연구하던 핵물리학자 필립 존슨은 폭발 사고 후 눈을 뜨자, 자신이 2시간 뒤 사형당할 1954년의 사형수 존 라일리 몸 속에 들어와 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핵폭발이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는 SF적인 발상을 담은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과연 필립 존슨이 자신이 사형수 존 라일리가 아니라는걸 2시간 안에 증명할 수 있을까?가 서스펜스의 핵심이고요.

그러나 필립 존슨의 노력은 신부를 한참 설득하다가 아내 전화번호를 주는 것 뿥입니다. 그 외에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요. 덕분에 긴장감이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신부가 그의 아내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며 마무리되는 결말도 애매했습니다. 진짜 필립 존슨의 아내가 없었는지, 아니면 신부가 귀찮아서 거짓말을 한 건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필립 존슨이 모든걸 체념하는 마지막 장면은 영 별로였습니다. 곧 죽을 상황인데, 어떻게든 발버둥 쳐 봤어야죠..

아이디어, 설정은 좋았지만 끌고가는 힘이 부족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하얀 웨딩 드레스" 

세상을 떠난 엄마 드레스에 푹 빠진 아이가 친구에게 몰래 엄마 방과 드레스를 보여주다가 폭주한다는 내용의, 미치광이 1인칭 시점으로 그려낸 혼란스러운 심리극입니다.

그런데 익히 보아왔던 설정과 내용이라 진부합니다. 더 큰 문제는 여백이 많아서 완성된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고요. 엄마는 못생겼고 드레스도 피투성이에 총 구멍이 나 있었다는게 살짝 드러나기는 하지만, 아이가 친구를 죽였는지, 엄마 사인은 무엇인지, 아이는 지금 어디 갇혀서 어떻게 된건지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발"

더운 여름날, 조는 기묘한 손님을 맞아 이발을 해 주었다. 손님은 손톱이 계속 자란다는 등 혼잣말을 읆조리고, 역한 냄새가 났다...

손님이 죽은 사람이었다는건 에상 가능했던 결말이었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은 설정이네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을 때 흙이 떨어진게 아니라, 손은 뼈 밖에 없었다고 하는게 좋지 않았을까요? 신선하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았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윌슨은 출장을 위해 탑승한 비행기 창문을 통해, 괴물이 비행기 날개 위에 앉아 있는걸 발견했다. 괴물은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숨어버려서 윌슨 눈에만 보였다. 비행기 엔진을 부수려고 시도하는 괴물을 막기 위해서, 윌슨은 비행 중인 비행기 문을 여는데...

영화판 "환상특급" 에피소드로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비행기를 타는 것에 대한 공포심, 신경증을 '날아가는 비행기 날개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는 괴물'로 형상화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윌슨이 커튼을 열고, 비행기 창문을 통해 자기를 노려보는 괴물을 처음 보는 장면 묘사는 정말이지 압권이에요.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총을 가지고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등의 묘사에서는 시대를 느낄 수 있고요.

괴물에게 결국 총을 쏜 윌슨이 승객들에게 제압 당한 뒤 비행기 착륙 후 옮겨지는 결말은 다소 시시하지만, 아이디어와 묘사력이 발군이기에 추천하지 않을 수 없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례식" 

클루니스 장례식장 장의사 모튼 실크라인에게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찾아와서 최고급 장례식 준비를 요청했다. 그는 고인이 자신이라고 말했고, 장례식 날에는 하인인 곱추 이고르, 마녀, 늑대인간과 다른 흡혈귀들이 찾아 오는데...

드라큘라를 연상케하는 뱀파이어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스스로의 장례식을 치룬다는 블랙 코미디로, 마지막에 다른 괴물 손님이 찾아온다는 반전도 좋아서 '쇼트쇼트'로는 더할나위 없었던 작품입니다. 장례식에서의 소동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것도 좋았고요.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코미디의 정체성이 잘 살아있어서 놀랐습니다. 거장은 뭘 써도 거장인 법이겠지요? 오래 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역시나 그 때도 좋은 평가를 했었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태양에서 세번째" 

우주 비행사가 세계 멸망을 앞두고, 다른 행성으로 처자식과 이웃 사람들까지 우주선에 몰래 태우고 출발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태양에서 세 번째 행성이었다...

화자인 우주 비행사와 그 가족들이 다른 행성으로 떠나기 전 겪는 마음 속 불안과 혼란을 그리다가, 마지막에 그들이 있던 곳이 지구가 아니라 향한 곳이 지구라는 반전이 등장하는 짤막한 쇼트쇼트. 일종의 서술 트릭물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쇼트쇼트로서는 우수한 수작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최후의 날" 

최후의 날을 맞아 음주, 난교, 광기어린 파괴 행위 등을 즐기던 리처드는, 가족의 소중함을 께닫고 마지막 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내려 한다.

리처드가 어머니와 함께 최후의 순간을 맞으며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걸 깨닫는다는 드라마. 여동생 가족이 죽음을 택하기 위해 약을 먹는 장면은 찡하면서도 괜찮았지만, 그 외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평이했습니다. 소설보다는 "환상특급"과 같이 영상물에 더 잘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도 나쁘지 않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거리 전화" 

몸이 불편한 미스 킨에게 어느날 한 밤중, 폭풍우가 불어올 때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뒤에도 전화는 계속 걸려왔고, 속삭임과 단조로운 흥얼거림에 이어 상대방으로부터 '여보세요'라는 목소리까지 들려오게 되었다. 전화 회사의 조사 결과 이 전화는 묘지에서 걸려온걸로 밝혀지는데...

정체 모를 전화가 계속 걸려온다는건 충분히 공포스러운 일이지요. 이런 설정의 이야기는 많이 있는데, 아쉽게도 이 작품은 다른 이야기만큼 공포스러운 상황을 잘 살리지 못했습니다. 일단 미스 킨의 불안부터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간호사의 말대로 전화를 그냥 끊던가, 수화기를 내려 놓던가, 전화선을 뽑아 놓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걸 "제가 댁으로 갈게요." 라는 마지막 전화 목소리로 알려주는 결말은 괜찮았습니다만, 묘지에서 걸려왔다는게 드러났을 때 이미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설득력 낮은 진부한 이야기라 별점은 2점입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행복한 가정의 아빠인 회계사 로버트 카터는 어느날 면도를 하다가 깊숙하게 베였다. 그리고 상처 속 전선과 기계 장치를 보고, 자기가 로봇이라는 걸 깨달았다. 충격에 거리를 배회하던 카터는 도시가 로봇들로 가득차 있었고, 음식들도 모두 기름이었다는 걸 알아 채는데...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통상적인 의미, 즉 이야기를 모두 해결해 버리는 전능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사전적 의미인 "기계 장치의 신"에서 가져온 이야기라는게 독특하네요. 내가 내가 아니라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흔한 설정을 독보적인 로버트 카터의 심리 묘사로 차별화시킨 솜씨도 거장다왔으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전개도 괜찮았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로버트 카터가 진짜 로봇인지, 아니면 죽은 뒤 환상을 보는 건 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열린 결말은 좀 아쉬웠습니다. 보다 명확한 설명이 뒤따르고 반전도 있는 결말을 기대했거든요. 물론 로버트 카터가 쓰러지면서 떠올리는 성경 구절 - "하느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의 사람을 만들고..." - 은 그가 기계라는걸 연상케 합니다만, 명확하게 증명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계라고 한다면, 그들을 만든 '하느님'이 누구인지도 설명이 필요해 보였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자신이 기계라고 믿는 주인공 이름이 '로버트'라는게 의미심장하네요. 우리나라로 변주한다면 '노보두 씨' 정도로 부르면 되겠지요?

"기록적인 사건" 

가방끈 짧은 쉰 아홉살의 대학교 건물 관리인 프레드는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깬 뒤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교 건물 청소 및 수리를 하면서 대학의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되는데....

갑자기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된다는 독특한 설정과 그 이유가 인상적이었던 소품. 외계인들이 지구의 지식을 손에 쉽게 넣고자 프레드 머릿 속에 대학교 지식을 집어 넣은 뒤 그걸 한 방에 빼 먹은 것이지요. 한마디로 프레드를 일종의 외장 하드로 사용한 셈입니다. 좋은 쇼트쇼트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안에서 죽다" 

돈과 베티 부부에게 '돈 타일러'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돈은 자기는 돈 마틴이라고 주장히먀 화를 냈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돈을 죽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누군가 부부의 집에 침임했고, 돈을 제압한 침입자는 돈이 저질렀던 과거 범죄와 배신에 대해 추궁하는데....

과거 저질렀던 범죄에서 발을 빼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온지 10년 만에 위기가 찾아온다는 서스펜스 범죄물. 돈이 침입자인 심슨과 사투를 벌인 끝에 그를 죽이고, 모든걸 알게 된 아내 베티가 경찰에 빈집털이가 들어와 싸우다 사고가 났다고 신고하는 결말까지 깔끔했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긴장감은 약한 편입니다. 악당 심슨이 침입한 뒤 하는게 없는 탓이에요. 총으로 부부를 위협하고, 과거 이야기를 떠벌이는게 전부거든요. 서스펜스를 끌어올릴 한 방이 필요했습니다. 코넬 울리치가 썼더라면 훨씬 멋진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정복자" 

1871년, 그랜트빌 잡화상 주인인 나는 남북전쟁 때 죽은 아들 루와 닮은 젊은 청년과 역마차를 함께 타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는 그랜트빌 최고의 총잡이와 싸울 목적이었다. 라이커라는 청년은 그랜트빌의 총잡이 바스 셀커크를 깔끔하게 사살했지만, 습격해 온 셀커크의 부하들에게 난사당해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 느낌이 드는 현실적이면서도 허무한 서부극입니다. 라이커 캐릭터가 아주 인상적이에요. 서부극 총잡이들이 영웅이 아니라 허깨비라는걸 잘 보여주거든요. 어릴 때 부터 총잡이를 동경하여 연습을 거듭한 끝에 빠른 속사와 사격술을 익혔지만, 정신적으로는 애와 다름없는 철부지로, 1대 1 결투에서는 이겼지만 여섯 명의 악당이 습격하자 울며 애원하다가 총에 맞아서 꼴사납게 죽기 때문이지요. 풍자적이면서도 현실 비판적인 느낌이 좋았던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홀리데이 맨" 

데이비드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내키지 않는 출근길에 나선다...

데이비드가 출근을 하기 싫어했던 이유는 그의 직업이 끔찍했던 탓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죽음을 미리 지켜보고, 사망자 수를 예측하는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데이비드의 심리 묘사가 그닥이었고, 업무의 끔찍함도 잘 드러나지 않는게 단점입니다. 이 업무가 아무리 끔찍해도 누군가 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느끼기 어려웠고요. 전개가 밋밋하고 반전도 그닥이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분명 예전에 읽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걸 보면 예전에도 별로 인상에 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뱀파이어란건 없다" 

루마니아에 있는 작은 마을 솔타에 사는 게리아 부인은 어느날 밤, 누군가의 습격으로 목을 물어 뜯겨 피를 빨린채 발견되었다. 게리아 박사는 다음날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부인을 지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결국 게리아 박사는 후배 미카엘 바레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크리쳐 호러물로 시작해서 깔끔한 범죄물로 마무리되는 작품입니다. 왜 범죄물이냐 하면, 뱀파이어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리아 박사가 커피에 아편을 타서 아내를 재운 뒤, 목에서 피를 뽑아냈던 거지요. 이유는 그녀가 후배 바레스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이었고요. 마지막은 바레스가 뱀파이어인 것 처럼 꾸민 뒤, 그 심장에 말뚝을 박아 넣을 거라며 마무리됩니다. 

기발한 소재와 불륜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 의외의 반전, 내용은 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비교적 짤막한 분량이라는 점 등 전형적인 미국식 쇼트쇼트의 특징을 모두 갖춘 작품입니다. 트릭도 조금 유치했지만, 뱀파이어 전설이 살아있는 루마니아라는 설정이라서 나름 설득력있고요. 너무 전형적이라서 작가 특유의 긴장감은 찾아보기 힘들다는게 조금 아쉬웠지만,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깜짝 선물"

늙은 호킨스 씨는 집 앞을 지나는 어린 소년들을 부르곤 했다. 소년들에게 "땅을 파면 깜짝 선물을 찾을 수 있다는" 주문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니에게는 주문이 아니라 정확하게 어디를 파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깜짝 선물이 금괴라고 확신한 어니와 친구들은 그 곳을 파기 시작했다...

당연히 선물이 뭔가 나쁜거라는 짐작은 되지요? 어니가 찾은건 일종의 관이었고, 그 안에서 호킨스 씨가 튀쳐 나온다는게 결말입니다. 그러나 결말의 반전은 약했으며 설득력도 없고, 동기도 불분명한 등 설명까지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어니가 땅을 파게 만드는데 까지의 전개는 좋았는데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산타클로스를 만나다" 

켄은 산타클로스를 만나고 싶다고 떼를 쓰는 아들 리처드와 함께 다시 백화점으로 향했다. 아내 헬렌은 차에 남겨둔 채였다. 사실 켄은 이 기회를 빌어 헬렌을 죽일 생각으로 살인청부업자에게는 돈을 지급했었다. 그러나 산타클로스를 만나러 가는 동안, 그는 죄책감, 양심 등으로 심하게 갈등하는데...

아내를 죽이려고 하지만, 실제로 실행하는 순간이 되자, 켄이 겪는 극심한 마음 속 갈등과 혼란이 핵심인 심리 스릴러. 심리 묘사가 아주 빼어나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긴장감을 느끼게 만드는 심리 묘사야 말로 작가의 특기 중 특기지요. 살인과 극명히 대비되는 크리스마스, 산타클로스라는 소재를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로, 특히 '착한 일을 해야 선물을 받는다'는 산타클로스와의 약속을 결말에서 제대로 써 먹고 있습니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켄의 삶이 조금 더 비참해 졌다는 결말이니까요. 켄은 선물 (아내의 죽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읽히는데, 현실적이기도 해서 마음에 듭니다. 별점 4점은 충분한 수작입니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강남길 씨가 아내를 죽이려고 노력하던 TV 단막극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켄과 리처드가 많이 걷지 않아도 되도록 차를 옮겨 놓겠다는 아내의 말에 켄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장면에서요. 하지만 강남길 씨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었지만, 켄에게는 지옥이 열릴 거라는 결말은 천지차이이기는 합니다만, 이런게 미국과 한국의 감성 차이인지도 모르겠네요.

"춤추는 손가락"

장거리 버스 여행 중 내 앞에 앉은 여성은 장애인이었다. 그녀는 옆에 앉은 돌보미 여성에게 끊임없이 수화로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다가 장애인 여성이 내 자리를 빼앗았고, 어쩔 수 없이 원래 그녀 자리에 앉은 나에게, 옆자리 돌보미 여성이 해준 이야기는 자신과 장애인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수화로 수다를 떨 수 있다는 발상에서 시작해서, 장애인 여성의 수화 수다로 돌보미 여성이 그녀를 벗어나고 싶어했고, 돌보미를 놓아주기 싫었던 장애인 여성이 괜찮은 남자를 물색해서 노리개로 던져준다는, 일종의 '남자 사냥' 으로 이어가는 전개가 자연스럽고 좋았던 작품. 아이디어 발상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체험한 느낌이 드는 독특한 작품이었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남자를 유혹하던 여성이 갑자기 식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결말이 너무 허무하네요. 남자 사냥은 돌보미를 바꾸기 위함이었다던가, 아니면 최소한 남자를 잡아 먹기라도 했어야지요. 지금은 기승전까지는 흥미롭고 재미있는데, 결이 너무 급작스럽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벙어리 소년" 

시골 마을에 살던 닐젠 부부가 화재로 죽고, 부부의 아들 팔은 보안관 해리와 코라 부부에게 위탁되었다. 학교도 다니지 않고 말도 못했던 팔을 코라는 사랑으로 돌보고, 죽은 자기 아들 대신으로 여겼다. 그래서 코라는 남편이 시도했던 닐젠 부부 지인에게의 연락을 훼방놓았다. 그래서 닐젠 부부가 죽은 뒤 한참 뒤에야 부부의 지인 베르너 교수가 팔을 찾아 왔다. 그러나 그 사이, 학교를 다녔던 팔은 그가 가졌던 독특한 텔레파시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팔은 벙어리가 아니라 부모의 텔레파시 교육을 받았던 텔레파시 능력자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고, 부모는 텔레파시 능력이 훼손될까봐 특정한 이미지, 단어로 설명되는, '말'을 익히는 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겁니다. 단어로 이루어지는 교육이 한계가 있다는 발상은 꽤나 시대를 앞서간 느낌이에요.

그러나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닐젠 부부의 사고, 코라가 팔을 양자로 들이고 학교에 보낸 것, 베르너 교수의 방문 등 여러가지 사건이 두서없이 펼쳐지는 탓이 큽니다. 닐젠 부부가 죽은 화재 사고의 원인도 결국 밝혀지지 않고요. 또 팔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건 엄연한 아동 학대입니다. 팔이 가진 능력이 대단하고 아름답다고 포장할 이유도 없어요. 실상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 그냥 말 없이 생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게 전부인데, 이러느니 말로 하는게 더 낫잖아요? 근거리에서만 가능한 듯 싶으니 결국 신문이나 방송을 접하려면 글을 익혀야 하는건 당연하고요. 왜 이렇게까지 팔을 옭아맸어야 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마찬가지 이유로 현실 학교 교육이 팔의 정신을 좀먹는다는 묘사도 불필요했습니다. 

팔이 말을 하기 시작해서 텔레파시 능력이 사라졌다는 결말도 맥빠집니다. 어차피 대단한 능력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아쉬운 일로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팔에게는 코라의 사랑이 더욱 필요했으니, 앞으로는 행복해질 일만 남아 있을테고요.

차라리 '사랑은 말이 없어도 알 수 있는 감정이다'는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멋진 설정을 더 부각시키는 쪽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싶네요. 팔이 능력의 편린을 유지한채 성인이 되어 여자 마음을 잘 아는 능력자가 된다는 식으로요. 지금은 설정, 이야기가 따로 노는 느낌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충격파" 

교체를 앞둔 교회 오르간이 폭주해서 교회를 파괴한다는 내용의 작품.

늙고 낡아버려서, 사랑했고 필요로 했던 것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교체되는 것에 대한 공포를 그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그런데 딱히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공포를 자아내는 맛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파이프 오르간의 폭주는 상식적인 선에 그쳐서 크리쳐물로 보기도, 재난물로 보기도 어려운 애매한 작품이 되어버렸어요. 예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요. 별점은 2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