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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18

신입사원 강회장 (2026) : 별점 2점

얼마 전 종영된 최신작으로 재벌 회장 강회장과 신입사원 황준현의 몸이 뒤바뀌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에 살인 음모와 미스터리를 더한 드라마입니다. 티빙으로 감상했습니다. 

"재벌집 막내 아들" 원작가인 산경의 원작을 따르지만, 추리 요소를 크게 강화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강회장이 황준현의 몸에서 깨어난 뒤 회사를 노리는 자식들의 음모와 자신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추적하는게 핵심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강회장의 호적수인 나병모 회장의 딸이자 강회장의 며느리인 나은세가 강재경으로 변장해 병원에 잠입하고 강회장을 죽이려 했다는 진상도 인상적이에요. 동기와 근거가 설득력 있게 제시되는 덕분입니다. 제법 추리적으로도 볼만했어요

원작 대비 바뀐 설정들도 매력적입니다. 특히 황준현의 설정이 좋습니다. 평범한 신입사원이 아니라 유망한 축구 선수였지만 뺑소니 사고로 꿈을 접은 인물이라는 배경은 강회장이 그의 삶을 이해하고 반성하는 과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니까요. 죽은 줄 알았던 강회장이 살아 돌아오는 반전과 황준현이 원래 몸을 되찾는 해피엔딩도 원작보다 만족스러웠고요.

그러나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이 자식들 교육을 방치하고 황준현을 무시했던 강회장 자신의 잘못인 만큼, 피해자로서 복수를 이어가는 전개는 완전히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결말도 별로입니다. 강재경과 강재성 남매가 충분한 대가를 치른 것처럼 보이지 않고, 황준현과 강방글의 러브 라인이 이루어지는게 급작스러웠던 탓입니다. 마지막 에필로그의 또 다른 몸 바뀜 역시 유치하기만 했습니다. 차라리 없는게 더 좋았습니다.

그리고 "재벌집 막내아들"과 비교하면 황준현(강회장)의 능력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 점도 약간 아쉬웠어요. 회장 시절 알고 있던 정보를 활용하는건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눈에 띄는 활약이 적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재미있게 볼 수 있었으며, 킬링타임용으로는 충분히 추천할 만합니다. 최소한 원작보다는 훨씬 좋았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6/02/15

더 립 (2026) - 조 캐너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팀장 재키가 살해된 뒤, 팀장 대행 데인이 이끄는 팀은 밀고를 받고 출동한 현장에서 2천만 달러라는 거액의 현금을 발견했다. 돈을 빼돌리려는 데인에 맞서 제이디와 마이크 로는 각자 어떻게든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조직의 습격 후 데인과 제이디의 대립은 격화되고 말았다. 결국 현장에 지인인 DEA 요원 마테오 팀이 출동하여 대립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지만, 압수 현금을 이송하던 중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는데...

 넷플릭스의 최신 장편 범죄 스릴러 액션 영화입니다. 연휴를 맞아 감상하였습니다. 2천만 달러의 현금을 둘러싸고 출동한 경찰 팀 내부의 갈등과 배신을 그린 작품으로, 거액의 돈, 부패한 경찰, 내부 밀고자라는 익숙한 재료를 활용하지만 반전이 포함되어 있다는게 다른 유사 헐리우드 액션 스릴러와 다른 점입니다.

이야기는 거액의 현금이 숨겨진 집에 경찰 다섯 명이 출동하면서 시작됩니다. 팀 리더 데인과 제이디, 마이크 로, 누마, 롤로 형사가 현장을 통제하고 집주인 데시와 대치하는 가운데, 단순한 압수 작전처럼 보이던 상황은 점점 미묘한 긴장감으로 변해 갑니다. 데인이 돈을 빼돌릴 의도를 드러내고, 제이디는 이에 의심을 품으며 같은 경찰이지만 서로 대립하게 되는데 이 전개가 아주 일품이에요. 절정부 직전까지 영화는 대부분 이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진행되며, 인물 수도 많지 않고 무대 역시 크지 않지만 흥미진진한 전개 덕분에 지루함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전개의 핵심은 부패 경찰과 그에 맞서는 경찰의 대립인데 데인 역의 맷 데이먼, 제이디 역의 벤 애플렉, 마이크 로 역의 스티브 연 등 화려한 이름값의 배우들이 호연을 펼쳐 설득력을 더해 주고요.

반전도 인상적입니다. 데인이 돈을 빼돌리려 했던 것은 실제 횡령이 아니라 내부 밀고자를 찾아내기 위한 연극이었고, 진짜 밀고자는 마이크 로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거든요. 데인은 팀원들에게 각각 다른 액수의 돈을 찾으러 간다고 말해 두었고, 그 정보가 외부로 흘러나간 경로를 추적함으로써 배신자를 특정해 내었던 겁니다. 영화 "밀정"에서 사용된 트릭과 동일한데, 특별하지는 않아도 효과적이며 현실적이라서 마음에 드네요. 앞서 무심히 지나갔던 대사가 반전의 단서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정교하다는 느낌도 전해주고요.

이렇게 밀고자 마이크와 그와 연결된 협력자 마테오의 정체가 드러난 뒤에는 카 체이스와 총격전이 이어지는데,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꽤 화끈합니다. 문제의 가방 안에는 현금이 아니라 전화번호부 등이 들어 있었고, 실제 현금은 한 푼도 빼돌려지지 않은 채 모두 압수되며 정의로운 경찰들이 승리하는 해피엔딩도 깔끔했어요. 

그러나 이야기의 설득력은 많이 부족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흑막인 마테오의 행동입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현장에 출동한 시점에서 데인 일행을 모두 제거하고 현금을 탈취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습니다. 카르텔의 습격으로 위장해 상부에 보고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데 말이지요. 게다가 누마와 롤로 형사를 현장에 남겨둔 채 데인과 제이디만 차에 태워 이동한다? 이건 정말 납득하기 어려워요. 데인을 포섭해 제이디를 제거하고 돈을 나눌 생각이었다면 다른 형사들 역시 정리하거나 끌어들였어야 했고, 둘 다 제거할 생각이었다면 그 장면을 목격한 인물들을 그대로 둘 이유가 없으니까요. 

데인의 연극 또한 집주인 데시가 마이크만을 정의로운 형사로 오해한 뒤, 마이크에게 데인이 펼친 연극을 밀고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연극은 사실상 불필요했습니다. 대놓고 마이크에게 돈을 빼돌릴 계획을 설명해 주더라도 결과는 다를게 없는 탓입니다. 데인과 제이디가 마이크의 비밀 휴대전화를 확보한 상황에서 굳이 마테오를 기다려야 했는지도 의문입니다.
악당들의 행동도 어설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데인 일행에게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주고, 30만 달러만 가져가라는 식의 경고를 하는 장면은 긴장감을 위한 장치로 보이지만 현실성은 떨어집니다. 돈을 노리는 범죄자라면 전부를 노렸어야 자연스럽습니다. 

촬영도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넷플릭스 영화인 탓일까요? 전반적으로 저렴해 보이는 느낌이 들어서 영 별로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정교한 범죄 스릴러라기보다는 킬링 타임용 헐리우드 액션 스릴러에 가깝습니다. 그냥 시간 때우기 용으로 적당한 수준입니다.

2026/01/31

아사토호 - 니이나 사토시 / 김진아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나쓰히의 쌍둥이 동생 아오바가 나쓰히와 아키토 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대학생이 된 나쓰히의 지도 교수 후지에다가 실종되었고, 교수를 찾던 친구 아즈사도 자살했다. 다른 실종 사건이 여럿 있었으며, 이 모든 사건은 '아사토호'라는 책과 관련이 있다는걸 알아낸 나쓰히는 다시 재회한 아키토와 함께 '아사토호'의 정체에 대해 찾아 나섰다. 이 모든건 사람을 하나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드는 천과 관련이 있었다...

신예 작가 니이나 사토시의 장편 소설입니다. 미스터리 호러 장르물이지요.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펼쳐져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어린 시절, 나쓰히와 아키토 앞에서 아오바가 신비한 천에 의해 사라진 뒤, 둘 말고는 아무도 아오바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 대학생이 된 나쓰히의 지도교수 후지에다의 실종과 교수를 찾던 아즈사의 기묘한 자살, 이 모든 것과 얽힌 책 '아사토호'에 관련된 수수께끼가 이어지는데 손을 떼기 힘들 정도로 재미있었어요.

나쓰히와 아키토가 여러 자료를 토대로 아사토호에 대해 조사하는 과정은 한 편의 추리 소설을 방불케합니다. 아사토호를 발견했다고 주장한 마쓰무라의 자서전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마쓰무라의 산장 위치를 추적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아키토는 기록의 증기 기관차에 탔던 시간과 버스를 탄 거리를 토대로 대략의 위치를 특정해내는 데 성공하고, 그 장소에서 결국 기요하라 병원까지 이어지는 단서들을 수집해 내어 진상에 도달하게 되니까요.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아사토호'에 대한 상세한 설정들도 굉장히 설득력 높습니다. 저자가 실제로 문학사 전공인 덕분이겠지요. 정말로 이런 책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연구자가 연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에 대한 설명은 굉장히 실감납니다.

추리적으로는 그 외에도 괜찮은 부분이 제법 많아요. 아키토가 영매사로서 선보이는 짤막한 에피소드처럼요. 일종의 콜드 리딩, 사전 답사와 의뢰인의 현황—신혼부부가 굳이 교외에 있는 단독 주택을 산 이유는?—을 토대로 추리를 통해 신뢰를 얻는 데 성공하지요.

호러 장르물로서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습니다. 특히 아즈사가 남긴 논문이 유서처럼 이어지는 장면이라던가, 후지에다 교수의 아내 미나미의 등장, 그리고 나쓰히가 사라지고 아오바가 나타난 시점에서 '아사토호'라는 책이 고전 걸작으로 널리 퍼졌고 결말까지 달라진 - 원래는 온나니노미야가 추녀였다는 한심한 결말이었는데, 아오바처럼 얼굴에 큰 상처가 있었다는 결말로 - 세계관으로 전환되는 부분 등은 꽤 섬찟했습니다.

모든 건 앞뒤가 딱 맞게 말이 되는 패턴이고, 이런 패턴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에는 반드시 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쓰히의 생각이 이 모든 것의 원인인 '천'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였기 때문이라는 진상도 잘 풀어냈습니다. 단순 괴기현상으로 풀어낸 게 아니라,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고 말이 되는 설정을 집어넣었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할 만 해요. 나쓰히는 아오바와 아키토의 환상 속 존재였다는 진상과 이에 따른 시점 변화도 적절했고요.

하지만 단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천이, 천을 함께 본 사람들이 원하고 빠져드는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졌다고 하는데, 이야기의 결말을 잘 설명하지는 못하거든요.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아키토가 일으킨 사고로 크게 다쳐 흉터가 생긴 아오바가 상처 없는 나쓰히로 거듭난 건 해피엔딩입니다. 그런데 굳이 아오바에 대해 나쓰히와 아키토가 이상한 기억을 공유하고, 새롭게 추적에 나선다는 이야기를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리고 아즈사가 원한 건 연구자로서의 성공이었는데, 천이 심어준 건 좌절감이었고, 그녀는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성립한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말이 되는 건 원했던 후지에다 교수를 차지한 미나미 이야기뿐입니다.

천을 본 사람들이 하나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일종의 다중 우주 세계관이라서 하나의 우주에 천을 본 사람들이 여럿 얽힌다는 것도 이상했어요. 하나의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들이 개입하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되니까요. '천'이 만든 이야기에서 '천'의 진상을 밝히는 결말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도요. 기껏 꿈 속에 데리고 왔는데, 이게 꿈이라는걸 밝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탓입니다.

마지막으로 천의 정체가 밝혀진 뒤의 분량은 많이 길고 애매했습니다. 아오바가 천과 일체화되어 죽음을 선택하려 한다는 장면이 특히 길었어요. 감정 과잉이라 여겨지기도 했고요. 이런 부분을 조금 더 정리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예를 들자면, "메두사"처럼 환상은 환상처럼 여운을 남기는 결말이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도 오랜만에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와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보실 만한 작품으로 추천드립니다.

2025/10/31

배트맨 이어원 - 프랭크 밀러 / 데이비드 마주켈리 : 별점 3.5점

프랭크 밀러 각본, 데이비드 마주켈리 작화의 한 권짜리 단일 이슈 배트맨 만화입니다. 그래픽 노블이라고 분류되어 있기는 한데, 제 기준으로는 만화입니다. 

배트맨의 탄생을 다루는 이야기를 고든의 시선으로 풀어낸 게 특징입니다. 브루스 웨인이 아닌 제임스 고든의 부임기와 고군분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거든요. 그래서 슈퍼 히어로물이라기보다는 부패한 경찰 조직과 맞서는 고든 중심의 느와르 장르 느낌을 강하게 전해줍니다. 배트맨도 전지전능한 영웅이 아니라, 늘 어딘가 다치고 실수하는 불완전한 인간으로 그려져 있기도 하고요.

프랭크 밀러 각본답게 이야기 완성도도 높습니다. 고든은 부패한 경찰 조직 안에서 고립된 채 홀로 싸우고, 브루스 웨인은 자경단 활동을 통해 정체성을 찾아갑니다. 이런 각자 정의를 추구하는 두 사람의 노선이 여러 위기를 겪다가 최종 결전에서 하나로 합쳐지며, 부패한 경찰들이 무너지고 고든과 배트맨이 각자의 위치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전개가 깔끔한 덕분입니다.

거칠고 묵직한 작화도 매력적입니다. 마초적이고 러프한 선이 느와르 장르 및 무거운 고담 분위기와 잘 어울립니다. 본편 외에도 콘티, 인터뷰, 캐릭터 설정 등 다양한 부록이 수록돼 있어 소장가치도 높고요.

다만 독특한 점은 있다 하더라도, 배트맨 탄생 이야기는 너무나 뻔한 이야기라는 문제는 큽니다. 이를 뒤집을 만큼 전개에서도 극적인 드라마가 충분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성 캐릭터들이 대부분 주변 인물로 소비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고든의 아내나 불륜 대상인 동료 여성은 그렇다 쳐도, 캣 우먼 셀리나 카일은 왜 나오는지도 모르겠더군요. 하비 덴트도 비중에 비해 존재감이 별로 없어서 아쉬웠고요.

그래도 배트맨 단편 그래픽노블 중에서는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프랭크 밀러가 왜 이 바닥에서 명불허전인지 잘 알려주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배트맨 팬이라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25/09/28

소스 코드(2011) - 던칸 존스 : 별점 2.5점

시카고행 열차 안에서 콜터 스티븐스 대위는 "션 패트리스"라는 남자의 몸안에서 눈을 떴다. 8분 후 열차는 폭발했고, 콜터는 어둡고 비좁은 캡슐 속에서 깨어났다. 지상 통제관 굿윈과 프로젝트 책임자 러틀리지는 그가 ‘소스 코드’라는 시스템을 통해 션의 뇌파 잔상으로 들어가고 있으며, 제한 시간 8분 이내에 열차 폭발의 범인을 8분 안에 찾아내라고 명령했다. 시카고를 향한 후속 대형 폭탄 테러를 막기 위해서였다.

콜터는 수없이 폭발로 인한 죽음과 소스 코드를 통한 귀환을 반복하며, 범인 후보를 줄여나가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어 2차 테러를 선제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그 뿐만 아니라 8분이 지나도 콜터는 소스 코드를 통해 복귀하지 않고 "션 패트리스"의 육체로 살아남게 되었다. 이후 콜터는 새로 가지친 시간선에서 굿윈에게 메시지를 보내 소스 코드가 단순한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평행한 현실 분기를 생성함을 알려주었다.

군에서 개발한 실험 기술을 통해 사망자의 마지막 8분으로 진입해 폭탄 테러범을 찾아낸다는 타임 루프, 시간 여행, 멀티버스 설정의 SF 스릴러입니다. 10년도 더 전에 흥행했던 작품인데 넷플릭스를 통해 이제서야 감상했습니다. 

타임 루프·시간여행·멀티버스 장르물은 흔해 빠졌지만, 군사용 ‘소스 코드’라는 설정은 신선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거나 마법, 초능력이 주류였던 타임 루프 방법을 말도 안되기는 하지만 과학적인 이론으로 풀어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군에서 개발한 기술로 테러를 막기 위해 이용한다는 발상도 그럴듯 했고요.
또 이를 통해 정의되는 8분이라는 시간 제한도 큰 재미 요소입니다. 실패를 반복해가며 정답을 찾아내는건 다른 타임 루프물과 동일하지만, 8분이라는 짧은 시간은 엄청난 제약으로 작용하여 긴박함을 더해주거든요. 영화라는 매체에 잘 어울렸던 아이디어이기도 합니다. 짧은 시간은 과거를 최대한 많이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결말부에서 제시되는 해피 엔딩도 여운을 남깁니다. 콜터가 ‘션 패트리스’의 몸으로 평행 세계에서 살아가게 된다는건 예상 가능했지만, 죽을 뻔 했던 사람들과 즐기는 스탠딩 개그 쇼와 굿윈에게 보낸 메시지를 통해 콜터의 신체는 '잔해'만 남아있다는게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지금 보기에는 너무 뻔하다는건 확실한 단점이고, 핵심 설정인 ‘8분’이라는 시간 제약도 논리적으로 어설픕니다. 설명에 따르면 8분이 지나면 션의 의식으로 복귀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원칙이 ‘8분 뒤엔 반드시 죽는다’는건 설명이 안됩니다. 원 시간선에서 션이 폭탄 테러로 사망했기 때문에 반드시 죽음으로 수렴해야 한다는, "데스티네이션"과 동일한 운명론적 설정이라면 크리스티나 역시 예외일 수 없는데 그녀는 살아남는 시간선이 있어서 모순이 생깁니다.
결말에서 콜터의 정신이 션의 육체에 남는 설정도 이상합니다. 소스 코드는 ‘덧씌움’이 될 수 없습니다. 8분이라는 찰나 동안만 임시로 의식을 옮기는 것이라고 설명되니까요. 만약 영원한 덧씌움이라면, 사고로 죽은 뒤 콜터에게 의식이 돌아온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무엇보다도, 도대체 '션 패트리스는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제이크 질렌할이라는 배우를 기용했음에도 액션이 별볼일 없고, 거의 대부분의 장면이 기차와 콜터의 캡슐 안에서 이루어지는 등 스케일이 작은 점도 아쉬웠던 점입니다. 3200만 달러라는, 비교적 적은 제작비 탓이겠지만요.

그래도 별점은 2.5점입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너무 뻔한 전개, 헐거운 설정 등의 단점은 있지만, 즐기기에는 충분했습니다. 흥행에 성공한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2025/06/06

노인의 전쟁 - 존 스칼지 / 이수현 : 별점 2점

“맹세코 그놈을 때려눕히려고 했다니까. 월드시리즈 우승도 한번 못하고 200년이 지났으니 컵스는 마이너리그로 강등 시켜야 한다지 뭔가."

75세를 맞은 존 페리는 사랑했던 아내 캐시와 사별한 뒤, 미련을 버리고 '젊은 육체'를 준다는 우주개척연맹(CDF)에 입대했다. CDF는 외계 생명체로부터 우주 식민지를 보호하는 군대로, 외계에서 구한 최신 과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젊고 강화된 육체를 갖게 된 존 페리는 혹독한 훈련을 거쳐 방위군에 복무하게 되었고, 특유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통해 전쟁 영웅으로 거듭나는데...

SF 독자라면 한 번쯤 들어보있을 유명작입니다. 미국 작가 존 스칼지의 데뷔작으로, 읽은지 제법 되었는데 리뷰가 늦었네요..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75세 이상의 노인들이 입대하면 최신의 젊고 강하며 잘생긴 육체로 바꾸어준다는 설정의 참신함입니다. 고령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늙어가고 있는 저 자신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설득력 역시 무척 강하게 느껴졌어요. 물론 최전선에서 외계인과 전투를 벌여야 하는데 제대가 가능한 10년 뒤의 생존율이 25%에 불과하고, 두 번 다시 지구 땅을 밟을 수 없다는 조건이 붙지만, 어차피 더 잃을 게 없다면 충분히 걸어볼 만한 도박이니까요. 아마 저도 가족에 대한 미련만 없다면 입대했을거에요.

젊은 군인으로 거듭난 존 페리가 같이 입대한 전우들과 훈련을 받는 장면도 생생합니다. 월남전을 다룬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악덕 상사 루이즈의 입담이 돋보였는데, 특히 젊었을 때 광고 문구를 썼던 존 페리와 루이즈 상사 간의 추억담 티키타카가 백미였습니다. 왜 상사들은 이렇게 입담이 좋은걸까요? 사뭇 궁금합니다.

훈련 후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외계 종족과의 전투도 흥미롭습니다. 지구인보다 앞선 과학 문명을 지녔지만 독특한 종교관으로 인해 전면 전쟁을 벌이지 않는 콘수 종족의 설정은 이렇게 소비되기에는 아까울 정도였어요. 3부 마지막 코랄 행성 전투에서, 어떻게 코랄인들이 도약 추진한 전함의 위치를 파악해 타격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와 대응안도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고요. 콘수인이 관련 기술을 전해 주었지만 협상을 통해 기기 한 대만 전달된 것이 확인되어, 이를 파괴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는 전개가 기승전결이 완벽하여 몰입도를 높여주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단점 또한 분명합니다. 우선, 젊어져서 훈련을 받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전형적인 SF 밀리터리물에 불과해져 버리고 맙니다. "스타쉽 트루퍼스"가 바로 떠오르더라고요. 이 과정에서 노인이었던 전생의 경험과 기억이 뭔가 역할을 해 준다면 독특함을 이어갈 수 있었을텐데,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이는 존 페리가 전쟁 영웅으로 거듭나는 과정의 비현실성을 높이는 데에도 한 몫 단단히 합니다. 한 번 죽을 뻔했지만, 그 외에는 영웅이 되기까지 탄탄대로인데, 이를 설득력 있게 만들려면 지구에서의 전생이 관련되어야 했습니다. 다른 군인들도 모두 노인이었던건 마찬가지니, 정말 독특한 경험과 기억이 있었다는 설정이었다면 좋았겠지요. 예를 들어 프로 바둑 기사라서 전략적으로 대국을 볼 줄 알았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전개도 후반부로 가면 처집니다. 여러 행성에서 벌어진 전투가 단편 에피소드처럼 나열되는 탓입니다. 게다가 사별했던 아내 캐시가 ‘제인’이라는 클론으로 되살아났다는 설정은 최악이었습니다. 지구의 그 누구라도 클론으로 되살릴 수 있다면 굳이 노인들을 징집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냥 시체를 수거해 육체를 복제하면 될 일입니다. 같은 이유로 초반부에 젊어지는 시술을 받기 직전 지병으로 사망한 존 페리의 룸메이트 디크는 왜 되살려 클론으로 만들지 않은걸까요? 그냥 존 페리의 러브라인과 해피엔딩을 위한 사족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초반 설정은 흥미롭고 몰입도도 높았지만, 이후의 전개가 전형적이고 개연성에서도 아쉬움이 커서 감점합니다. 후속권이 있던데 더 읽어보지는 않을 듯 합니다.

2025/02/28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 다카노 가즈아키 / 김수영 : 별점 2점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 4점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황금가지

이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단편집으로, 비일상적인 순간에 타인의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대학원생 야마하 케이시의 능력을 핵심 소재로 한 다섯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수록된 작품의 장르가 다양하다는 점입니다. "6시간 후 너는 죽는다"와 "3시간 후 나는 죽는다"는 시간 제한이 있는 서스펜스 스릴러물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안 되는 날"은 일상계 추리 판타지 드라마고요. "시간의 마법사"와 "돌 하우스 댄서"는 케이시가 주변 인물로 등장하며, 미래와 현실에 대한 고민을 담은 잔잔한 드라마입니다. 때문에 여러 취향의 독자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추리 애호가 입장에서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추리적인 요소는 부족하고, 서스펜스 스릴러로는 뻔했던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요시에는 케이시로부터 자기가 6시간 뒤 칼에 찔려 살해당한다는 예지를 들었다. 6시간 뒤는 요시에의 25번째 생일이었고, 마침 여성들이 생일에 칼에 찔려 살해당하는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던 참이었다. 요시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데이트 클럽에서 만났던 스토커가 범인일거라 생각하고 케이시와 함께 추적에 나섰다..

케이시의 첫 등장과 그의 능력에 대해 소개되는 시리즈 첫 작품입니다. 

살인이나 사고를 제한된 시간 안에 막아야 한다는 류의 '시간 제한 서스펜스 스릴러'는 매우 흔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 시리즈만의 특징은 나름 확실합니다. 케이시의 예지 능력에 여러 제약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비일상적인 순간'만 볼 수 있어 정확한 장소와 상황을 알기 어렵고, '시간'도 예지된 장면 속 시계를 봐야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제한이 있기 때문에 죽음을 피하려는 노력은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고, 이는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하지만 스릴러로서는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스토커 누마타가 범인이 아니라면, 용의자가 극단적으로 줄어드는 탓입니다. 유력한 용의자는 예지를 핑계로 요시에와 함께 행동하는 케이시인데, 케이시의 예지 능력은 '진짜'라는 설정이 맨 앞에 추가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피해자인 데이트 클럽 여성들의 신상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 범인인데, 데이트 클럽 사장은 체포되어 구속되었으니 이 정보를 아는 건 경찰 사와키밖에 없습니다. 즉, 그가 범인인 것이지요. 너무 뻔해서 의외성이나 재미를 주기는 힘들었습니다. 마지막에 '방탄, 방인조끼'를 입고 반격을 가한다는 반전도 마찬가지로 뻔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예지 능력이 등장하는 도입부는 신선했지만, 평범한 시간 제한 스릴러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흥미를 끌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시간의 마법사"

"미쿠짱은 할 수 있으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분명 이겨낼 수 있어.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지만 마음으로부터 웃을 수 있는 날은 꼭 오니까, 그날을 믿고 힘내는 거야."

플롯 라이터 미쿠는 극작가로 성공을 꿈꾸지만, 기약없는 데뷰와 고된 생활에 지쳐갔다. 어린 시절의 행복을 떠올리고자 오랫만에 고향을 찾았다가, 20년 전 자신을 만나 하루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일종의 타임 리프, 타임 슬립물입니다. 본인은 아무 기억이 없지만, 20년 전의 잃어버렸던 하루를 20년 뒤 다시 보내게 된다는 내용이지요. 미쿠가 현실의 벽에 부딪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간다는 잔잔한 일상계 드라마로 케이시는 순전히 주변 인물로 등장하며, 예지 능력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작품도 잘 쓰는 작가라는 걸 처음 알았네요.

추리 애호가로서 특별히 점수를 줄 부분은 없지만, 희망찬 미래를 품고 살아가야 한다는 주제는 잘 전달해 주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안 되는 날"

남자를 숱하게 사귀고 헤어짐을 반복하던 미아에게 케이시가 "수요일에는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날 미아는 사고로 누군가 죽는 장면을 목격한 뒤, 지나가던 야마기시 신고에게 도움을 받고 그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신고는 점점 이중인격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퇴마 성수를 이용하여 이를 해결하려던 미아는 신고를 영원히 잃고 마는데..

미아는 당시 사고에서 죽은 남자가 신고에게 빙의했다고 생각해서 그를 물리치려고 퇴마 작업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신고에게 죽은 남자가 빙의했던 것이 아니라, 신고가 죽은 남자였다는 반전이 인상적입니다. 신고의 혼이 '스즈키 히로시'라는 남자에게 빙의했던 것이지요. 신고는 미아가 벌인 퇴마 작업으로 영원히 떠나버리고 말고요

신고의 정체에 대해 밝혀지는 과정에서 추리물적인 성향이 살짝 보이기는 하지만, 일상계 판타지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대했던 장르물은 아니었지만,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돋보여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돌 하우스 댄서"

프로 댄서를 꿈꾸는 미호는 계속해서 오디션에 떨어져 좌절하던 중, 자신이 접하는 현재를 어디선가 보았다는 기시감을 느끼게 되었다. 기시감은 어린 시절 찾았던 '돌 하우스'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자신의 현재를 담은 인형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시간의 마법사"와 똑같은 잔잔한 일상계입니다. 현실의 벽에 부딪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간다는 내용도 비슷하고요. 하지만 "시간의 마법사"와는 전혀 다른게, 미쿠는 극작가로서의 미래를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분명 좋은 날이 올 거라면서요. 하지만 미호는 댄서로서의 꿈을 포기하고 평범한 여성으로서의 행복을 찾기로 결심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대사가 이 작품을 대표하는 메시지지요.

개인적으로는 하고 싶은 일에서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인생은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평범한 삶 속에서도 행복을 찾는게 더 중요하다는 "돌 하우스 댄서"가 주는 감동이 더 강렬했습니다. 꿈을 쫓는 삶을 살기에는 제가 나이가 많은 탓이겠지요.

케이시는 이름만 언급될 뿐 등장하지 않아서 연작물로서의 가치는 다소 낮지만,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3시간 후 나는 죽는다"

"6시간 후 너는 죽는다.(이하 "6시간 후...")" 사건 5년 후, 요시에가 일하던 예식장에 케이시가 하객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케이시는 자신이 3시간 후 죽는다는 예지를 보았고, 이야기를 들은 요시에는 케이시의 죽음에 이르는 사고를 막기 위해 분투하게 된다...

케이시와 요시에가 또다시 생존을 위해 시간 제한이 있는 사건 해결에 나선다는 내용으로 "6시간 후..."의 진짜 후속편에 해당합니다.

"6시간 후..."처럼 예지 능력의 제약을 잘 활용해 서스펜스를 제공한다는건 같은데, 후속편답게 조금 업그레이드된 서스펜스를 제공합니다. 이번에는 시간과 '불에 타 죽는다'는 상황만 알 수 있거든요. 왜 불에 타 죽는지 조차 알 수 없고요. 또 토도 교수의 은퇴식 피로연장에서 죽게 되는데, 그 자리에는 백 명이 넘는 사람이 있어서 더 큰 긴장감을 가져다 줍니다. 예지와 식장의 상세한 조사를 거쳐 폭발 사고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이를 밝히고 도움을 얻는건 불가능한 상황도 서스펜스를 극대화시키고요.

계속 "운명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도 좋았습니다. 케이시는 정해진 운명은 바꿀 수 없다며 3시간 후 반드시 죽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러나 미오는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미래를 바꾸는 데 성공하지요. 요새 작품이라면 '멀티 버스'라고 부를, 평행 우주의 다른 루트로 옮겨 탄 결말인데, 뻔했지만 완벽한 해피엔딩이라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작품의 완성도는 많이 부족합니다. 토도 교수의 자살을 저지하기 위해 경찰이 발포했고, 총알이 운 나쁘게 복도의 가스통을 맞춰서 폭발하게 된다는 상황부터 어처구니 없었어요. 게다가 이는 사전 조사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고라, 시간 제한 서스펜스를 근본부터 흔드는 잘못된 설정이었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2024/11/24

하승진의 유튜브 콘텐츠 "턴오버" : 시즌 1 완결 - 별점 3점

하승진의 "턴오버"는 프로 농구 선수를 꿈꾸지만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에게 재도전의 장을 열어주는 취지로 진행한 유튜브 컨텐츠입니다. 작년 9월부터 거의 1년여 진행했는데 얼마 전 시즌 1이 완결되었습니다.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한 선수들이 KBL 드래프트를 목표로 훈련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유튜브 영상으로 만든 것으로, 훈련 뿐 아니라 재활, 연습 경기 및 개인 브이로그까지 다양한 종류의 컨텐츠를 담고 있습니다. 

농구를 좋아하기에 보게 되었는데, 오랜만에 진정한 '열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도저히 넘지 못할 것 같은 벽을 열정 하나로 넘어서려는 선수들의 모습은 큰 울림을 주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열정, 울림은 유튜브라는 플랫폼의 특성 덕분에 극대화되고 있습니다. 선수 개개인에게도 포커스를 맞추는 장면과 컨텐츠가 많은 덕분이지요. 팀원이 10명에 불과하다는 점도 보다 밀도있는 이야기를 가능케 해 주었고요. 이런 류의, 프로 도전에 실패했던 청춘들의 재도전을 담은 "청춘 FC"도 재미있게 보았었는데, 그보다는 훨씬 마이크로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해피엔딩이 아니었다는 점은 아쉬웠습니다. "최강 야구"에서 프로 지명 선수가 나왔을 때 느꼈던 감동을 또 느껴보고 싶었는데, 확실히 현실의 벽은 너무 높더군요. 유튜브이기에 가질 수 있었던 장점도  분명 있지만, 방송사와 비교하면 여러모로 자본력의 부족함도 느껴졌고요. 이게 방송사에서 방영된 컨텐츠였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좋은 결과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듭니다. 정희현 선수가 일본 B3 리그에 진출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해요. 최소한 이승구 선수는 선발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3점. 하태 컴비가 시즌 2를 언급하던데, 재미있게 보기는 했지만 시즌 2는 조금 더 자본력을 투입할 수 있는 곳에서 했으면 합니다. 

2024/05/12

문라이트 마일 - 데니스 루헤인 / 조영학 : 별점 2점

문라이트 마일 - 4점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하지만 옛날처럼 살면 우린 벌써 죽었을 거야."

아내와 딸의 부양을 위해 위험한 일은 지양하고, 양심에 반하는 일까지 닥치는대로 하면서 살고 있던 켄지 앞에 베아트리체가 나타났다. 그녀는 12년 전, 켄지가 찾아주었던 소녀 아만다의 숙모였다. 켄지는 아만다를 사랑했던 납치범 삼촌으로부터 소녀를 되찾아 알콜 중독에 빠진 형편없는 엄마에게 돌려주었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아만다가 또 사라졌다고 말했고, 켄지는 돈 한 푼 받을 수 없지만 과거에 종지부를 찍는 의미로 아만다를 다시 찾아나섰다.
그러나 아만다의 실종은 러시아 갱단과 관련이 있었고, 갱단은 켄지의 주소까지 알아내어 아만다가 가지고 사라진 아이와 '벨라루스 십자가'를 찾아오라는 협박을 시작했다...

데니스 루헤인을 대표하는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 완결편. 책 소개를 보니 "가라, 아이야, 가라"의 후속작 성격이라고 하네요.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답게 납치, 절도에 살인과 폭력 등 각종 범죄가 난무합니다. 그 중에서도 러시아 갱들이 도박으로 수렁에 빠트린 의사 드레를 아동가족부에 취업시킨 뒤, 어린 임산부들에게 몰래 아이를 낳게 한 뒤 팔아치워왔다는 범죄 행각이 독특하더군요.
범죄들과 관련된 여러가지 죽음들이 끔찍한 시리즈 특징도 여전하고, 돈 때문에 기본적인 인간성을 저버리는 등장인물들에 얽힌 이야기들도 여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한 술 더 뜹니다. 심지어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 켄지마저도 돈과 가족 때문에 양심을 파니까요. 이런게 이 시리즈의 매력이기는 한데, 역시나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래도 켄지와 제나로, 딸 가비의 사랑과 유대감, 신뢰에 대한 묘사도 많습니다. 완결편인 덕분이겠지요? 이는 켄지가 탐정일을 완전히 은퇴하는 시리즈 결말에 대한 설득력도 높여 줍니다. 본인이 양심을 팔고 돈을 택했던 몇몇 사건들에 대한 회한과 함께 더 이상 위험과 폭력이 가득한 세상이 아니라, 평범한 삶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이유로 지켜야 할 가족보다 완벽한건 없겠지요. 아만다가 딸(?) 클레어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습니다.
이런 완벽한 해피엔딩을 위한 결말도 깔끔합니다. 러시아 갱 예핌이 약에 중독된 두목 키릴 등과 인간 쓰레기 아만다의 의붓아버지 케니를 모두 죽이고 켄지와 아만다, 납치했던 소피와 기타 등등을 풀어주고 끝나거든요. 마침 크리스마스이기도 하니 시점도 완벽한 셈입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잘 짜여진 이야기는 아닙니다. 앞서의 해피엔딩은 대미를 장식하기는 하나, 설득력이 떨어지는 문제는 커요. 예핌이 왜 이들을 살려주는지 설명이 없는 탓입니다. 어차피 네 명을 죽인 상황에서 세 명을 더 죽이는게 별 문제도 아니었을텐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요? 중요 목격자인데요. 다른 악당이라면 다 죽이고 켄지의 집으로 찾아가 가족도 다 죽였을 겁니다.
드레를 아만다가 의도적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어요. 기차가 달려오는 것도 모르고 십자가를 주으러 달려갈만큼 멍청한 사람은 없을겁니다. 직전에 약에 취했다는 묘사가 있기는 한데, 이 정도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마침 기차가 달려오는 순간을 딱 맞췄다는 것도 작위적이었고요.
대체로 우연이나 특별한 기회를 통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전개도 그닥입니다. 예를 들자면, 켄지가 아만다의 집을 몰래 들어가 수색하다가 아만다의 가족들과 소피를 만나는데, 그 때 마침 러시아 갱단이 습격해서 소피를 납치해갑니다! 갱을 추격하던 켄지는 면허증을 빼앗겨서 가족이 위험에 처하게 되고요. 이런 전개는 독자가 무언가 추리할 여지를 아예 없게 만듭니다.
그나마 아만다가 보스턴 레드삭스 19번 유니폼을 애지중지 가지고 있었는데, 정작 레드삭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부분은 약간 추리물 성격을 보이기는 합니다. 알고보니 아만다가 어린 시절 유괴당했을 때 살았던 마을 이름이 '베켓' 이었던 거지요. 좋은 추억만 가득했기에 레드삭스 19번 조쉬 베켓의 유니폼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켄지와 제나로는 베켓에서 아만다를 찾아내지요. 하지만 이 역시, 아만다의 행적을 뒤쫓는데 그리 중요한 단서가 되지는 못해요. 19번 유니폼이 없어도 '베켓'을 찾아가는건 당연한 수순으로 보이니까요.
핵심 인물인 아만다도 와 닿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 혹독한 경험을 했다고 모두가 천재가 되는건 아닙니다. 친구의 아기를 자기 딸인양 돌볼 이유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요. 아만다의 현재는 켄지의 심경 묘사 정도의 비중은 할애해서 설명해 줘야 했습니다. 지금은 치기어리고 겁없는 사춘기 10대인지,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복잡한 내면을 갖춘 인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 킬링타임용으로 적합한 펄프 픽션입니다. 시리즈 팬이시라면 '완결편' 이라는 의미도 있고하니 읽어볼만 하겠지만, 팬이 아니시라면 구태여 찾아 볼 필요는 없습니다.

2024/01/26

수상한 진흙 - 루이스 새커 / 김영선 : 별점 2.5점

수상한 진흙 - 6점
루이스 새커 지음, 김영선 옮김/창비

우드리지 사립학교에 다니는 타마야는 친한 이웃 오빠 마셜과 평소에 다니지 않던 숲 속 '지름길'로 하교하던 중 문제아 채드와 마주쳤다. 채드는 마셜을 미워해서 때리기 시작했고, 타마야는 근처에 있던 진흙을 잡아 채드 얼굴에 문지르고 마셜과 함께 도망쳤다. 그런데 그날부터 타마야의 손에 원인모를 발진이 일어났고, 다음날 채드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타마야는 홀로 채드를 찾기 위해 숲으로 향했다. 진흙에 빠지는 악전고투 끝에 도와주러 온 마셜 오빠와 함께 채드를 구해 내었다.
사건의 원인은 에르고님이라는 유전자 조작 생명체의 변이가 발생하여 퍼진 탓이었다. 지역 주민들도 전염되면서 필라델피아 전체가 봉쇄되었지만, 결국 치료제 개발이 성공하여 타마야, 채드 등은 건강을 되찾았다.


딸의 논술 교재로 숲에서 탈출하는 타마야 일행을 그린 모험 소설이자, 유전자 조작 생명체 '에르고님'이 변형을 일으켜 인간에게 감염되는 재앙을 그린 재난 소설. 원인모를 발진이 일어나면서부터, 그리고 숲에서 진흙이 퍼지며 고립되지만 탈출을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서스펜스가 괜찮습니다. 장르물로는 충분한 재미를 갖추고 있어요.
감염을 일으키는 진흙이 대체 에너지 연구를 통해 비롯되었다는 설정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꽤 디테일한 묘사를 통해 탄탄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으며, 아주 낮은 확률이더라도 인류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대체 에너지가 필요할까?와 같은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도 던져주었기 때문이에요. 정답은 없는 질문이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원자력 발전'은 일본에서의 대형 사고 이후에도 연구와 설치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문제가 아무리 많더라도 다른 대안들보다는 그래도 안전하고 효율적이기 때문이겠지요. 이 책의 에르고님처럼 자동 생산에 (자가 분열에 따른 증식) 생산 일정도 짧다면 도입을 적극 검토해야 할 겁니다. 변이가 일어날 수 있는 생물학적 방안보다는 명확한 과학적 방안이 우선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만.

여튼 재미도 쏠쏠하고 담고있는 내용도 나쁘지 않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단, 어른이 읽을만한 책은 아닙니다. 어른용이었다면 진흙이 광범위하게 마을을 포위하여 마을은 고립되고, 감염병도 많이 퍼져서 채드를 비롯한 여러 명이 처참하게 죽었겠지요. "BM 넥타"가 퍼진 일본처럼요. 결말도 이 책처럼 해피 엔딩은 아니었을겁니다!

2023/11/25

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 - 스튜어트 터튼 / 최필원 : 별점 2점

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 - 4점
스튜어트 터튼 지음, 최필원 옮김/책세상

<<아래 리뷰에는 진상,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년 전, 장남 토마스가 관리인 카버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던 하드캐슬가의 저택 블랙히스 하우스에서 그날의 손님들을 고스란히 다시 불러모은 파티가 열렸다.
손님 중 한 명인 의사 서배스천 밸은 팔에 큰 부상을 입고 숲에서 깨어나 애나가 괴한에게 살해당하는걸 목격했다. 기억을 잃은 그의 앞에 흑사병 의사 옷차림을 한 남자가 나타나 여러가지 경고를 날렸다. 이런 저런 경고와 조언 속에서 시간을 보내던 서배스천은 누군가 자기에게 죽은 토끼를 선물한걸 발견하고 실신했다. 그리고 정신이 들고난 뒤, '나'는 집사 콜린스로 깨어났다는걸 알게 되었다. 흑사병 의사는 '나' 에이든 비숍에게 그는 모두 여덟 명의 다른 사람으로 하루를 반복하게 되며, 무도회에서 살해당하는 하드캐슬의 장녀 에블린을 누가 죽였는지 알아내면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다. 이 루프 속에 다른 두 명의 경쟁자가 있다는 말과 함께.
에이든 비숍은 하룻동안 8명 - 마약 판매상이기도 한 의사 서배스천 벨, 집사 스탠윈, 늙고 뚱뚱한 레이븐코트, 강간범 더비, 에드워드 댄스, 순경 짐 래시턴, 도널드 데이비스, 화가 그레고리 골드 - 의 몸을 오가며, 에블린 하드캐슬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본인과 애나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된다.


"미래는 경고가 아니야, 미래는 약속이라고. 그리고 그 약속은 우리가 결코 깨버릴 수 없어. 바로 그게 우리가 갇힌 이 덫의 본성이라고."

어딘가에서 추천하는 글을 읽고 알게 된 영국 대장편 판타지 미스터리. 무슨 리스트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영화 "사랑의 블랙홀"처럼 하루를 반복하는 루프물이라는 아이디어는 특별한건 아닙니다.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일곱 번 죽은 남자"는 제목처럼 계속 반복해 살해당하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막으려고 노력한다는 내용마저도 비슷하지요. 루프보다는 시간 여행에 가깝지만, 과거를 반복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는 "사라진 세계", "리피트", "나만이 없는 거리", "타임 리프"등 수도 없이 많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런 설정에 딱 한 가지 차이를 두어 차별화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바로 "한 명이 하루를 반복하는게 아니라, 8명을 통해 하루를 반복한다"는 설정입니다. 

루프에 갖힌걸 모른 채 에블린 사건의 범인을 찾아야 한다는 설정이 드러나는 도입부는 신선하고 흥미로왔습니다. 사건 자체는 심플합니다. 에블린 하드캐슬이 자살한건 부모가 돈 때문에 레이븐코트 경과 억지로 결혼시키려는걸 막으려고 동생 마이클 등의 도움을 받아 벌인 연극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에블린으로 알고있던건 사기꾼 펄리시티 매덕스였습니다. 오랫만에 유럽에서 돌아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던 겁니다. 에블린은 하녀 마들렌으로 변장하고 있었고요. 그리고 마이클은 연극이라 믿고 있었던 펄리시티 매덕스를 살해해서 자살로 보이는 살인을 완성했습니다.
동기는 19년 전 토마스 살인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사실 토마스를 죽였던건 에블린이었습니다. 토마스가 에블린과 마굿간지기 파커 사이의 부도덕한 관계를 눈치챘기 때문이었습니다.  레이디 하드캐슬과 불륜 관계로 에블린의 진짜 부친이었던 카버는 딸 에블린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누명을 쓰고 교수대로 향했죠. 그러나 레이디 하드캐슬이 에블린이 진범이라는걸 알아채서 입막음 댓가로 가문을 위해 에블린에게 레이븐코트와 억지 결혼을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에블린은 부모도 죽이고, 자기 자신도 자살한걸로 위장하려 했던 겁니다.

에블린의 자살이 연극으로 위장한 살인이었다는걸 증명하는 단서도 제대로 제공됩니다. 대표적인게 "왜 권총 두 정을 모두 가져갔는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마이클이 나머지 한 정으로 죽은 척하던 에블린 - 으로 변장한 펄리시티 매덕스 - 를 살해하기 위해서였던 겁니다. 그 외 발견된 신호용 피스톨 (총 소리만 내기 위함), 피를 담아둔 병도 자살 연극에 사용되었다는 추리로 잘 이어집니다.
루프를 오가는 중간중간마다 '체스말'같은 연결고리도 충실히 제공되고 있어서 잘 짜여졌다는 느낌을 전해주고요.

하지만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을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8명을 통해 하루를 반복한다는 설정은 참신하기는 한데, 이야기를 괜히 복잡하게 만드는 측면이 더 강해요.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각 인물별로 시간대와 처한 상황이 다르고, 에이든 비숍이 얻는 정보도 전부 다르기 때문에 제대로 확인하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인 굉장히 복잡한 구성과 전개를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요한 정보와 단서는 전개 후반인 순경 짐 래시턴 시점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앞서 다른 사람들 - "호스트"라고 불리우는 - 의 정보들은 추리적으로 크게 의미를 두기는 어렵습니다. 
게다가 8명의 '호스트' 들의 설정들도 불필요하게 장황합니다. 서배스천이 마약을 몰래 공급해왔다던가, 레이븐코트가 식탐이 엄청난 고도비만이었다던가, 더비가 성범죄자라던가하는건 에블린 살인 사건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협박범 스탠윈, 하드캐슬 가문의 사생아 커닝햄, 또다른 루프 참여인물 대니얼 콜리지 등의 주변 인물들 설정과 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장황하더라도 설명이 명확하다면 그래도 괜찮은데, 정작 중요한 설명은 부족합니다. 예를 들어 대니얼 콜리지가 에이든을 방해하는건 당연하지만 - 루프에서는 한 명만 탈출할 수 있어서 -, 애나가 에이든에게 협조하는 이유는 제대로 설명되지 못합니다.

결정적으로 이 루프의 정체 - 일종의 감옥 - 는 황당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재소자들을 살인 사건 안에 가두고 그들에게 타인의 사건을 해결하는 것으로 자기가 저지른 범죄를 속죄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저만 이해를 못하는걸까요? 그리고 에이든 비숍은 애나를 찾아 제발로 루프에 들어왔기 때문에 배석 판사 흑사병가면이 호스트 통제권 및 여러가지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일반 감옥이라고 치면, 감옥 재소자를 제 발로 찾아온 선량한 시민에게 감옥에서 지낼 수 있는 편의를 제공했다는 말과 같은데 이건 말도 안되죠. 그냥 일종의 "두뇌 게임"을 펼치기 위한 장을 억지로 만든 것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사악했던 괴물 애나벨 코커는 비숍의 여동생을 고문해 죽였지만, 그녀는 죽고 지금의 애나는 갱생했다! 비숍을 위해 자기를 희생함으로 증명했다! 며 두 명 모두 풀어주는 마지막의 해피 엔딩도 허무했습니다.

복잡하고 일견 치밀해 보이는 구성이지만 핵심 전개와 수수께끼를 풀어내기 위한 전개는 부족하고, 기본 설정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복잡하지만 알고보니 알멩이 없는 미국 드라마같은 작품입니다. 정통 추리물을 기대하신다면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2023/06/23

까마귀의 엄지 - 미치오 슈스케 / 유은정 : 별점 2.5점

까마귀의 엄지 - 6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유은정 옮김/문학동네

<<아래 리뷰에는 진상,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케자와는 실수로 직장 동료 빚을 떠앉은 뒤 사채를 끌어쓰다가 몰락하고 사채업자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채무자의 남은 돈을 쥐어짜는 일이었다. 그러다 한 편모 가정의 어머니가 자살한 뒤 다카자와는 충격을 받고 조직의 비밀 서류를 빼돌려 경찰에 신고했다. 조직은 괴멸되고 두목 히구치는 체포되었지만, 다케자와는 보복을 당해 열두살 딸 사요를 잃고 말았다.
7년이 흘러 다케자와는 똑같이 사채로 아내를 잃은 데쓰와 팀을 이루어 자잘한 사기를 저지르며 먹고 살았다. 다케자와 때문에 자살한 여자의 딸들 - 마히로, 야히로 - 과 그 남자친구 -간타로 - 와 우연찮게 동거하던 중, 다케자와를 노리는 누군가가 나타났다. 히구치의 복수임을 직감한 다케자와는 도망치려 했지만, 데쓰와 마히로, 야히로, 간타로의 조언과 도움으로 반격을 결심했다.
도청 장치를 설치한 선불폰을 이용하여 사채 조직의 계좌 정보를 빼낸 뒤, 도청 탐지 업체를 위장하여 조직에 잠입하여 금고 속 현금을 털 계획을 세웠고, 5명 모두가 역할을 맡고 실행에 나서는데....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은 여태까지 모두 일곱 권 읽어보았습니다.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은 좋았지만, 그 외는 대체로 그냥저냥이었어요. 서술 트릭과 무리한 설정에 기대는 경우가 많았던 탓입니다. 그래도 이 작품은 이런저런 랭킹에서 추천했고, 아베 히로시 주연의 영화로도 개봉된 적이 있는 대표작이기에 관심이 가던 차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작품은 크게 심각한 사채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전반부, 유쾌한 범죄를 그리는 후반부로 나뉩니다. 전반부에서 묘사되는 다케자와와 데쓰의 과거는 사채가 원흉이 된 가족의 파멸이라는 점에서 <<화차>>를 떠오르게 만드는데, 중반 이후 분위기는 돌변합니다. 다양한 인물들이 개성을 뽐내며, 비교적 유쾌하게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외눈박이 원숭이>>와 비슷하게요. 또 다케자와 일당이 히구치 조직의 돈을 빼돌리려고 한탕 작전의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은 <<스팅>>이나 <<뉴욕을 털어라>>와 같은 케이퍼 소설 - 범죄자가 주인공으로 범죄를 유쾌하고 가볍게 다룬 소설 - 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고요.

그런데 전반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다케자와가 빚을 진 이유는 본인 실수입니다. 무고한 소시민이 사채의 늪에 빠져든게 아니라요. 일종의 사기를 당한거긴 하지만, 누구 탓을 할 건 못됩니다. 빚을 졌으면 갚아야죠.
게다가 딸마저 잃고 좌절한 다케자와가 '사기'로 먹고 살게 되었다는건 최악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등쳐먹는 사기꾼이야말로 사채업자보다 더 나쁜, 최악의 인물 아닌가요?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던들, 현재의 사기 행위에 면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자잘한 범죄를 통해 기획력, 행동력을 선보이며 마지막 큰 '한탕'을 계획할만한 인물이라는걸 설명하기 위한 어쩔 수 없던 설정이라 생각되는데, 감정이입하기는 힘들었습니다. 사기꾼 주인공이 나올 수는 있어요. 다만 그럴거라면, <<스팅>> 처럼 대놓고 범죄물로 그리는게 나았을겁니다. 괜히 사채업자의 피해자라는 설정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이야기와 별 관계도 없고요.
자잘한 사기 행각 - 은행에서 출금한 손님의 현금을 빼돌리는 사기, 데쓰와 다케자와가 처음 만날 때 데쓰가 저질렀던 자물쇠 교체 사기, 전당포를 이용한 사기 등 - 도 재미는 있었지만 치밀하고 잘 짜여진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아울러 <<외눈박이 원숭이>>가 떠오르는 다소 과장된 인물 설정도 감정이입을 방해합니다. 다케자와와 데쓰 외에는 비현실적인 인물들인 탓입니다. 화룡정점은 마술사 간타로입니다. 말투와 행동 묘사 모두가 도저히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같지 않았어요.

그래도 후반부 한탕 작전은 꽤 재미있었습니다. 아래와 같이 그럴싸한 단계를 거치면서 상당한 설득력을 보여주는 덕분이지요. 흥미진진하기도 하고요.
  1. 일당은 싼 가격으로 유혹하여 히구치의 사채 조직이 도청 장치를 심어놓은 선불폰을 구입하게 만들었다.
  2. 도청으로 사채 조직의 계좌 번호를 빼 낸 뒤, 이를 알리는 편지를 보내어 계좌 속 현금을 사무실에 보관하게 만든다.
  3. 도청 감지 업체를 위장하여 사무실에 잠입한 뒤, 금고 속에 도청 장치가 있다고 속여 금고를 열게 만든다.
  4. 장난감 총을 진짜처럼 보이도록 속여 돈을 강탈한다.
  5. 달아나던 마히로가 건물에서 떨어져 죽은 것 처럼 위장하고 돈을 빼돌린다. (돈이 들었던 봉투를 바꿔치기 함)
알고보니 작전은 히구치가 이미 알고 있었으며 히구치가 모든걸 용서하고 끝낸다는 마무리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다들 과거를 잊고 각자의 인생을 사는 완벽한 해피 엔딩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일당이 저지른 행위는 엄연히 범죄이니만큼 이 정도로 마무리되는게 현실적이었겠지요.

하지만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가짜 총까지 동원해서 돈을 훔치려고 했다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일당 중에 마술사가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봉투를 바꿔치기하는게 더 현실적이었을거에요. 계획대로 히구치 조직이 연극에 속아넘어갔다 하더라도, 금고에 돈을 돌려 놓을 때 봉투가 바뀐걸 알아챘을테니까요. 저 연극이 그렇게 시간을 많이 벌어주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불법 추심 사채업체라 하더라도, 돈을 훔쳐 달아나던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고 그냥 돈만 회수하고 물러난다는 것도 애매했습니다. 돈을 어떻게 모았건 간에, 모은 돈을 도둑맞았으니 엄연히 피해자입니다. 구태여 몸을 사릴 필요는 없어요.

다행히 마지막 반전이 이 단점들을 한 방에 해결해 줍니다. 다케자와 일당이 모든걸 걸었던 한탕 작전은 데쓰가 꾸민 연극이었다는 반전입니다.
데쓰는 마히로, 야히로 자매의 아버지로 자기가 집을 떠난 뒤 아내가 자살한 것에 대한 복수, 다케자와에 대한 연민 등이 겹쳐 남은 사람들이 모든걸 털고 새롭게 일어날 수 있도록 이런 일을 벌였던 겁니다. 그는 굉장한 경력과 실력의 사기꾼으로 연극에 사용한 거액의 돈은 진짜 히구치에게 사기쳐서 확보했고요. 그래서 다소 어설퍼보였던 작전, 그리고 이상할정도로 낭만적이었던 결과 - 히구치가 모든걸 용서하고 놓아주는 - 가 설명됩니다. 다케자와가 '사기꾼'이라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전반부도, 사기는 나쁘다는걸 확실하게 알려주며 마무리되어서 납득할 수 있게 만들고요.
데쓰가 모든걸 꾸몄다는걸 교묘하게 이야기 속에 숨겨서 진행한 것 역시 감탄스러웠습니다. 초반, 데쓰가 애너그램에 능하다는 것에서 시작해서 다케자와가 데쓰의 사기를 눈치챌 때부터 모든 부분에 관련된 단서를 교묘하게 삽입하고 있으며, 이를 마지막에 드러내는 솜씨는 절묘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그냥 케이퍼 범죄물로 끌고가는게 훨씬 좋았을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한 번 읽어볼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영화가 궁금하네요.

2023/05/27

당신의 과녁 - 고태호 : 별점 2점

당신의 과녁 5 - 4점
고태호 지음/3rdpost(써드포스트)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스무살 청년 최엽은 연쇄 살인범 석규남의 함정에 빠져 누명을 쓴 뒤,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다행히 석규남이 노환으로 죽고, 남은 가족들이 발견한 증거를 제출한 덕분에 17년 후 풀려났다. 
그러나 17년 만에 돌아온 세상은 지옥과 같았다. 연인은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가족은 생업을 잃고 갖은 욕을 먹었으며, 어머니는 무죄를 탄원하는 거리 시위를 하다가 쓰러져 식물인간 상태였다. 이에 최엽은 연쇄 살인마의 손녀를 납치해 자기와 똑같이 17년간 감금하기로 결심했다.
죄책감으로 최엽의 협력자가 된 경찰과 당시 기자, 그리고 여동생과 절친 3인방은 최엽의 계획을 알고나서, 17년 감금할 시설 공사를 한다는 핑계로 최엽과 주말마다 어울렸다. 사회의 따뜻함, 가족의 온정 등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최엽은 석규남의 손자 - 납치 대상의 남동생 - 으로부터 자기가 무죄라는걸 알고도 그 가족들이 증거 제출을 10년이나 미루었다는걸 알고난 뒤, 납치를 결행했다. 그러나 납치 대상이 여성 연쇄 납치범 일당에 납치당하는걸 목격한 최엽과 일행들은 납치범들을 뒤쫓아 결국 그들을 체포하고 납치 대상을 구해냈다....


간략한 줄거리 소개만 보고 혹해서 보게 된 웹툰입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는 최엽의 심리 묘사입니다. 뎃셍력이 별로라 인물 형태가 계속 깨지며, 모든 묘사에서의 디테일이 부족해서 작화는 등 좋은 편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지만, 미묘한 심리 묘사는 놀라울정도로 탁월했습니다. 최엽이 분노하는 장면은 묘사의 달인 윤태호의 <<야후>>를 보는 듯한 섬찟함마저 느껴졌으니까요.
만화의 컷 구성을 잘 활용하고 있는 것도 돋보입니다. 엣 연인을 다시 만나 각자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에게 아이가 있다는게 마지막 컷에서 드러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좋은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기대했던 복수극으로는 뜨뜻미지근한 탓입니다. 최엽의 복수 외길 전개가 아니라, 최엽이 친구들을 만나 다시 흉금을 터 놓게 되는 과정처럼 주변 인물들과 관계 복원을 이루는 출소자의 사회 적응기, 주변 인물들과 여러가지 즐거운 추억을 쌓는 일종의 일상 시트콤, 거기에 연쇄 부녀자 납치범들과 대결하는 액션 추적극이 뒤섞여 있습니다. 이런 곁가지 이야기들이 비중만 놓고 보면 복수 자체보다 더 커요.
게다가 복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납치하려던 여자를 도리어 구해주게 된 뒤, 최엽이 복수를 포기한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더 큰 악을 만나서 그들을 물리치고나니 모든게 허탈해졌다는 건지, 아니면 주변 사람들을 더 이상 위험에 빠트릴 수 없었던 건지 알 수가 없어요. 이 과정에서 석규남 가족의 진심어린 사죄도 없고요.
여기까지는 그렇다쳐도, 자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한 뒤 식물인간이 되었던 어머니가 깨어난다는 말도 안되는 해피엔딩은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너무 뜬금없었어요. 최엽이 겪은 고생에 대한 보상으로 이 정도는 줘야지!라는 작가의 의도일까요? 이런 애매한 해피엔딩보다는 차라리 화끈한 복수가 더 맞는 방향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최엽 캐릭터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190cn가 넘는 거구의 근육질로 묘사되는데, 딱히 대단한 전투력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두뇌가 비상한 것도 아니고, 돈을 많이 모은 것도 아니라서 강력 범죄를 계획하는 인물로의 설득력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맨몸 운동을 조금 한 정도로 세상과 맞서 싸우기는 어렵지요. 경찰과 기자라는 조력자, 그리고 죄책감을 느낀 검사의 유산 - 납치범을 가둘 일종의 별장 - 이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했어요. 흥미진진한 전개를 위해서는 최엽이라는 인물에게도 보다 설득력을 부여했어야 했습니다.
납치 계획도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만약 납치에 성공했었더라도 체포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을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납치가 핵심인 범죄물이 아무리 아니더라도, 이래서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지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흥미로운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기대했던 복수극이나 범죄 스릴러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더 글로리>> 류의 화끈한 복수극을 기대하고 보신다면 실망하실겁니다.

2023/02/19

리버티 바 - 조르주 심농 / 임호경 : 별점 2점

리버티 바 - 4점
조르주 심농 지음, 임호경 옮김/열린책들

바캉스 분위기 가득한 휴양지 앙티브에서 과거 전쟁 당시 프랑스 정부를 위해 일했던 윌리엄 브라운이 살해되었다. 경찰은 메그레 경감을 파견했다. 첩보전에 관련된 사건이라는 괴소문을 막기 위해 빠른 진상 파악이 필요했던 탓이었다.
수사 결과, 브라운은 오스트레일리아 거대 목장주였지만 유럽에 왔다가 향락에 빠진 나머지 아내와 가족으로부터 의절당해 빈털털이가 된 신세였다. 수입은 매달 아들이 보내주는 5천 프랑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중 2천 프랑 정도만 정부에게 주고 나머지 돈은 한달에 9일 정도를 칸의 리버티 바에서 보내며 써 버렸다는 것, 그리고 아들 해리 브라운이 그가 재산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조건으로 백만프랑을 제안했지만 윌리엄 브라운은 가족을 귀찮게 하려는 일념하나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는 것이 수사를 통해 밝혀졌다.
리버티 바에서 사는 창녀 실비가 해리와 만난 뒤 2만 프랑을 손에 넣는걸 발견한 메그레 경감은 그 돈은 윌리엄 브라운의 유언장 댓가라는 증언을 확보했다. 알고보니 윌리엄은 정부와 장모, 리버티 바의 주인 자자와 실비에게 유산을 남겼었다....

조르주 심농의 대표작인 메그레 경감 시리즈. 완역 출간 시도가 좌절된 국내 출간된 시리즈 중 17번째 작품입니다. 1932년에 발표되었던 고전이지요. 메그레 경감이 휴양지 앙티브, 그리고 칸을 무대로 활약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무대만 휴양지일 뿐, 피폐하고 팍팍한 소시민의 삶이 작가 특유의 묘사를 통해 가득 담겨있습니다. 하긴 메그레 시리즈에서 꿈과 희망, 여유를 느낀다는건 말도 안되죠. 모든걸 잃은 남자가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인 리버티 바의 묘사도 아주 멋드러집니다. '방탕한 게으름'이라는 표현이 아주 기억에 남네요.

장점이라면 '드라마'로서의 재미입니다. 밑바닥 인생끼리 얽힌 기묘한 인간 관계에서 동기가 빚어져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의 극적인 전개가 아주 볼만한 덕분입니다. 원래 창녀 출신이었던 리버티 바의 여사장 자자는 단골 윌리엄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윌리엄이 실비와 관계를 가지자 격분하여 살해하고 말았던게 진상이거든요. 이 진상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은 일종의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함으로서 상당한 재미와 흥미를 가져다 줍니다.

자자가 윌리엄을 정말 사랑했기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그리고 칼에 찔린 윌리엄 브라운이 자자에 대한 마지막 애정과 책임을 쥐어짜서 차를 몰고 별장으로 돌아간 뒤 죽었다는 점에서는 진짜 사랑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이 수차례 영화화된 이유도 이런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라는 이유가 클 것 같아요. 사건을 마무리하고 메그레 경감이 부인과 나누는 아래의 마지막 대사는 정말이지 심금을 울립니다.
"그는 한 선술집과 한 착한 늙은 여자를 찾아냈어. 그러고는 같이 술을 마셨지."
"술을 마셔요?"
"그래요! 그들이 술을 마시면 세상이 다르게 보였지. 그들이 세상의 중심이 되었거든……. 그들은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었지……."
"그러고 나서요?"
"늙은 여자는 그게 왔다고 믿게 되었어."
"뭐가 왔는데요?"
"누군가가 자기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자기가 영혼의 짝을 찾게 되었다고! 모든 것을 찾게 되었다고!"
메그레 경감이 죽을 날이 머지 않은 자자를 풀어주고 사건을 대충 마무리하는 결말도 진짜 사랑 이야기에 잘 어울렸습니다. 해피 엔딩이라고 하기는 애매합니다만.

그러나 추리적으로 딱히 별볼일 없다는건 아쉬웠습니다. 메그레 경감 시리즈가 고전이지만 대단한 트릭이 사용된 작품이 거의 없다시피한데, 이 작품은 제가 읽었던 시리즈 중에서도 손꼽을만큼 추리물 요소는 찾아보기 힘들었어요. 메그레 경감의 끈질긴 수사로 진상이 밝혀지는 과정은 잘 그려져 있지만, 우연과 운이 많이 좌우했다는 점에서 정교한 이야기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실비와 해리가 만나는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다면 진상을 알아낼 수 있었을까요? 아마 불가능했을겁니다.
스스로 자기 파괴적인 행동만 반복하는, 또 여러가지 이유를 대며 자신의 삶을 나락으로 몰고가는 여러 등장인물들 묘사도 지나칠 정도로 뻔했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메그레 시리즈에서 그동안 많이 등장했던 인물들과 별로 다르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드라마로서는 볼 만 했지만, 추리물로 보기는 다소 어렵기에 감점합니다.

유튜브를 찾아보니 브루노 크레머 주연의 1991년도 제작된 TV 시리즈 버젼이 올라와 있더군요. 프랑스어를 몰라서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대체로 원작을 그대로 영상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원작을 읽으셨다면 한 번 비교해보셔도 재미있을겁니다.

2023/02/12

황제의 코담뱃갑 - 존 딕슨 카 / 전형기 : 별점 5점

황제의 코담뱃갑 - 10점
존 딕슨 카 지음, 전형기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브는 이혼 후 거주하던 프랑스 휴양지 바로 옆 집에 사는 로스 경의 아들 토비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했다.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한 전남편 네드 애트우드가 한 밤중에 몰래 침실로 숨어든 날, 둘은 로스 경이 살해당한 직후를 목격했다. 토비를 비롯한 이웃 가족의 오해를 살까 두려웠던 이브는 이 사실을 필사적으로 숨겼다. 그러나 애트우드가 빠져나가다가 계단에서 굴렀을 때 흘렸던 코피와 로스 경이 살해될 때 만지고 있었던 코담배 케이스 파편이 잠옷에 묻어 있었던 등의 증거와 이브를 미워하는 하녀 이베트의 증언 탓에 유력한 용의자로 몰렸다. 결국 이브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모든 사실을 고백했지만, 정작 애트우드는 뇌진탕 탓에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나선건 영국인 정신분석 전문의 킨로스 박사였다.

존 딕슨 카의 대표작 중 하나. 구입해서 읽은지는 오래되었지만, 얼마전 <<마녀의 은신처>>도 읽은 참에 국내 출간작 전권 리뷰를 올리고자 재차 읽게 되었습니다. - 참고로, 엘릭시르의 새 출간본은 아니고 동서문화사 판본입니다. - 역시나, 다시 읽어도 걸작이더군요. 이웃집에서 일어난 수상한 사건을 목격했다가 위기에 빠진다는건 <<이창>> 등 여러 작품에서 사용된 소재이기는 한데, 이 작품은 1942년이라는 발표 시점을 보아도 원조격인데다가 목격자가 오히려 범인으로 몰린다는 독특한 전개부터 굉장한 긴박감을 자아냅니다. 전남편과 벌인 다소 우발적인 사고, 주인을 미워하는 하녀의 돌발 행동 등이 겹쳐져 이브가 범인으로 몰리는 과정도 꽤 설득력 넘치고요. 사건 직후 피묻은 잠옷을 입고 집으로 들어왔다는건 누가 봐도 수상한 일이니까요.

킨로스 박사의 말 하나하나 모두가 논리적이며, 그의 지극히 논리적인 추론이 바탕이 된 이야기 전개가 많다는 점도 추리 애호가로서 반가왔습니다. 토비가 그날 밤 일을 고백한 이브를 추궁할 때 킨로스 박사가 그를 몰아붙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토비는 그녀가 애트우드와 침실에 있었으니 자신을 배신했다면서, 또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게 아니냐고 추궁하는데 킨로스 박사는 이 두 사건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며 토비의 입을 닥치게 만들지요. 이브를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고롱 서장을 설득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브에게는 동기가 없거든요. 고롱 서장은 로스 경이 이브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살해당했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로스 경은 그날 이미 토비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했고, 토비는 그 때문에 이브에게 전화까지 걸었습니다. 즉, 그게 무슨 비밀이건 약혼자가 이미 알고난 다음이기에 로스 경을 죽일 이유는 사라져 버리고 만 셈입니다. 무엇보다도 압권은 범인을 밝혀내는 마지막 추리쇼입니다. 박사는 사람들에게 범인인줄 알았던 갈색 장갑의 정체를 먼저 알려줍니다. 그건 토비였어요. 그는 정부인 프뤼 양이 이브와의 결혼을 훼방놓는걸 막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아버지 소장품 중 하나인 드 랑발 부인 목걸이를 훔쳐서 프뤼 양에게 주려고했던 겁니다. 그러나 그는 범인이 아니었습니다. 킨로스 박사는 이브가 이야기했던 사건 당일 서재에서 일어난 일 중 이브가 목격하기 전 상황은 모두 애트우드가 해 준 말에 지나지 않았으며, 암시에 빠지기 쉬운 성격이었던 이브는 이를 자기가 목격했던걸로 착각했던 거라고 설명해줍니다. 애트우드는 이미 로스 경을 살해하고 이브의 침실에 침입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로스 경이 살아있는 척 꾸민 뒤, 그 상황을 드러내는걸 가장 싫어할 이브를 통해 증언될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었던거에요. 재니스 로스 양의 말 그대로 "여자에게 나쁜 소문이 나서는 안 된다고 입을 다물게 하고, 스스로는 조금도 꺼릴 것이 없는 목격자가 실은 범인이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킨로스 박사는 먼 곳에서 본 물건을 '코담배 케이스'라고 말했다는 실수를 통해 애트우드가 범인이라는걸 알아냅니다. 코담배 케이스는 그냥 보면 회중시계와 똑같이 생겨서 첫 눈에 알아보는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마지막에 말한 뒤, 예심판사 사무실 문을 열어 범인 애트우드를 선보이는 장면 - 애트우드는 뇌진탕에서 회복한 뒤 토비가 범인이라고 지목하기 위해 억지로 찾아왔던 것 - 은 역대 추리쇼 등장 작품 중에서도 첫 손을 꼽을만한 마무리였습니다.

정확한 내용을 몰랐던, 사건 당일 로스 경이 산책을 갔다 온 이후 왜 기분이 나빴는지, 동물원에서 누군가를 왜 만났었는지가 애트우드의 동기와 이어지는 전개도 깔끔했습니다. 이를 로스 경이 형무소 관련 업무를 진행하며 만났던 재소자 얼굴을 기억했다는 과거 이야기와 절묘하게 연결시키는 덕분입니다. 로스 경은 애트우드가 전과자이자 탈주범이라는걸 알고 있어서, 자기 아들과 이브의 결혼을 방해하려는 애트우드를 쫓아내려고 경고했다가 살해당했던 것이지요. 그 외의 여러가지 추리적인 장치들과 복선들 - 사건 현장에 떨어져있던 드 랑발 부인 목걸이에 혈흔이 묻어있었던 이유, 오르골 태엽이 풀려있었던 이유, 하녀 이베트가 이브를 옭아매기 위해 노력했던 이유 등 - 에 대한 설명도 확실합니다. 목걸이에 혈흔이 묻어있던던 건 목걸이를 훔쳐내려다 아버지가 죽은걸 알고 허둥대던 토비가 묻혔던거지요. 오르골 태엽은 그 와중에 동작해서 풀렸고요. 이베트가 이브를 잡아넣으려고 노력했던건 그녀가 프뤼 양의 친언니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든 수수께끼가 완벽하게 정리되기에 마지막까지 읽으면 굉장히 후련한 기분마저 느낄 수 있어요. 아울러 추리적으로는 일종의 독자에의 도전이 삽입되어 있다는 것도 특기할 만 합니다. 킨로스 박사가 이브에게 그날 밤 일어났던 일을 듣고 범인을 알아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독자도 그 장면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보았고, 그 장면만 알면 범인이 누군지 알 수 있다는걸 선언한 셈입니다. 실제로도 그러했고요.

다만 지금 읽기 다소 낡은 설정은 있습니다. 이브가 초반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사건을 방관해 버렸던건, 약혼자 가족이 이웃집에 살고 있어서, 침실에 숨어든 전 남편을 어쩌지 못한 탓 - 들켜서 오해를 살까봐 - 이라는게 대표적입니다. 애트우드와 토비가 버젓이 바람을 피우면서 이브에게 정숙을 강요하는 행태도 그러하고요. 너무 뻔뻔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어요. 참고로, 에드보다 오히려 토비가 더 극혐이었습니다. 순진한 척을 다 하다니 알고보면 뒤에서는 다른 여자에게 돈을 요구받을 정도로 놀아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면서 자기 합리화만 하면서 이브를 차버리는 장면은 정말 기도 안 차더군요. 이브가 남자 복이 너무 없고, 남자들 유혹(?)에 너무 쉽게 빠지다는 것도 낡은 설정이고요. 또 시계처럼 생긴게 알고보니 "코담배갑"이었다는게 핵심인데, 이걸 비교적 노골적으로 알려주고 있다는 것도 낡아보였습니다. 최근 작품이라면 이렇게까지 드러내지는 않았을거에요. 하긴, 이 작품은 아래와같이 책 표지에서부터 노골적으로 알려주고 있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걸작이라는걸 부인하기 힘든 멋진 작품입니다. 이브와 킨로스 박사가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해피엔딩까지 완벽합니다. 제 별점은 5점입니다. 오컬트 분위기 전무한, 일종의 영웅담에 가까운 정통 추리물이니만큼 딕슨 카 입문자라면 이 작품부터 시작하는게 좋겠습니다.

덧붙이자면 that woman opposite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는데 유튜브에 Full Movie가 올라와 있네요. 애트우드의 암시로 이브가 착각하는 장면을 어떻게 찍었을지 궁금해서 잠깐 봤더니만, 걍 말로 퉁치고 끝나서 실망했습니다. 오래전 작품이기는 하지만 연극과 다를게 없는 평면적인 구성에 그쳤더라고요. 게다가 마지막에 애트우드가 이브를 없애려고 찾아오는 장면을 삽입해서 더 영웅담처럼 각색했던데, 좋은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2022/06/10

버드 박스 - 조시 맬러먼 / 이경아 : 별점 2점

버드 박스 - 4점
조시 맬러먼 지음, 이경아 옮김/검은숲

4년 전, 갑자기 나타난 크리쳐를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발광하여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자살했다. 생존을 위해 창문을 가리고 숨어 살던 임산부 멜로리는 언니 섀넌이 발광하여 자살해버린 뒤, 위험을 무릅쓰고 생존자들이 모여 사는 조지의 집으로 향했다. 조지는 죽었지만 리더 톰의 원만한 성품 덕분에 멜로리, 그리고 그 집에 있던 펠릭스, 줄스, 셰릴, 올림피아는 몇 개월 간 짧은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멜로리의 출산일에 그녀와 갓난 아기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어버리고 말았다. 비관주의자 돈이 다른 생존자 게리를 만난 뒤 세뇌되어, 집 창문을 가렸던 것들을 모두 치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4년 후 멜로리는 4살된 두 아이와 함께 거주지를 떠났다. 4년 전, 톰의 전화로 연결된 생존자 '릭'의 거처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이 모험을 위해 그녀는 두 아이의 청각을 극도로 강화시키는 훈련을 해 왔다...

신예 작가의 SF 크리쳐물입니다. 

무언가를 본 뒤 발광한다는 소재로 평범한 사람들에게 닥친 위험과 공포, 그리고 극복 방법을 실감나게 그려낸 묘사는 좋습니다. 폐쇄 공간에서 빚어지는 여러 긴장감도 잘 살아있고요. 단순히 '물을 뜨러 가는 행위', '배설물을 버리러 가는 행위'에서 긴장감을 빚어내는 솜씨에는 감탄했습니다. 

생존자들이 모여 사는 집은 수력 발전으로 전기가 공급되며, 마당에 우물이 있고 일단은 몇 개월 버틸만한 식량을 갖추었다는 식으로 생존에 대한 설득력을 높여준 것, 그리고 "크리쳐를 보면 발광하기 때문에 집의 창문까지 모두 닫은 폐쇄 공간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설정을 "다른 매체, 예를 들어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크리쳐를 보아도 발광한다.", "동물들도 크리쳐를 보면 발광한다."는 식으로 디테일을 보강한 것도 마음에 들어요. 비디오 카메라는 정말 생각도 못했었네요.

하지만 이외에는 볼 만한 부분이 별로 없습니다. 소재부터가 너무 진부합니다. 기묘한 상황 탓에 사람들에게 재난이 닥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많으니까요. 예를 들어 특정 현상을 바라본 사람들이 모두 실명한다는 설정은 "걷는 식물 트리피드"에 등장했었지요. 운 좋게 재난을 피한 생존자들이 최대한 조심하면서 살지만 위기가 닥친다는 전개 역시 크리쳐물 대부분에서 뻔하게 반복되어 왔던 것이고요. 좀비물 거의 대부분이 이런 내용이잖아요? 

물론 보기만 해도 사람, 동물을 발광시키는 크리쳐의 특수한 능력만큼은 독특한 요소였고, 이를 작품 안에서 잘 부각시키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크리쳐에 대해 어떤 과학적인 근거나 설명은 없이 주인공 멜로리의 시점에서의 경험만 나열된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탓에 뒤로 가면 갈 수록 식상해지기만 할 뿐이니까요. 뭔가 살아남거나, 해결책은 없이 그냥 버티고 살아가는게 전부이니까요. 톰이 주도해서 활로를 모색하는 전개가 더 등장했더라면 좋았을텐데, 개 몇 마리를 데려오는게 전부라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또 전개의 클라이막스를 차지하는 돈의 폭주에서, 게리가 크리쳐를 보았음에도 어떻게 멀쩡했는지 설명되지 않는건 정말 답답했습니다. 설명이 부족해도 정도껏 했어야 하는데 말이지요.

멜로리와 올림피아가 임신했는데, 마침 그 둘이 출산할 때 돈이 폭주해서 모두가 죽는다는 작위적인 설정도 별로였고, 마지막에 멜로리가 안식을 찾게되는 피난처가 맹인 '릭'이 이끄는 맹인들 학교였다는 약간의 반전 역시 만족스럽지는 못했습니다. 읽으면서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사느니 차라리 스스로 맹인이 되는게 낫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별로 다르지 않은 엔딩이니까요. 의외성이 전무한 셈입니다. 나름대로 해피 엔딩이라는 점 만큼은 나쁘지는 않았습니다만, 반전 요소를 갖추려면 개인적으로는 릭이 멜로리와 아이들 눈을 멀게 만든다는 결말이 더 나았을 것 같네요. 앞서 아이들에게 이런저런걸 보게 해 주고 싶다는 바람과 대조되면서 더 큰 울림을 가져다 즐 수 있었겠지요. 솔직히 현실적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소소한 일상계 크리쳐물 분위기는 괜찮았지만 진부한 소재를 뻔한 전개로 풀어냈고, 결말도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감점합니다. 딱히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넷플릭스에서 영화화한 모양인데, 영화에 더 잘 어울릴 것 같기는 하네요.

2022/05/07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10)

남자의 면 - 4점
츠치야마 시게루 지음/미우(대원씨아이)

츠치야마 시게루 화백의 먹부림 만화입니다. 면과 라쿠고를 너무나 사랑하는 영업맨 이케다 멘타로가 이런저런 면 요리들을 먹으며 겪는 일화들 여섯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소바와 우동, 냉면과 오키나와 소바, 나고야면 (기시면, 녹말소스 스파게티, 타이완 라면, 된장곰탕 우동), 라면, 야키소바 등 평범한 면들이 소개되며 에피소드들도 평범한 직장인들이 마주칠 법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내용도 모든 면은 다 맛있다! 류의 만만세 해피엔딩이 대부분이고요. 대기업 츠카모토 전기 회장이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있기는 하지만, "맛의 달인"처럼 면 요리로 모두가 하나된다는 결말입니다. 

약간의 특징이라면 주인공이 이케다 멘타로이기는 한데,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주체는 면 요리라는 점이었습니다. 이케다 멘타로가 주도적으로 뭔가를 하는건 초반의 두, 세 개 정도이며, 다른 이야기들은 전부 그냥 면 요리를 먹으면서 이야기가 생겨나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장인 정신이 지나친 라면 가게를 '진검 승부' 하는 집이라며 마음에 들어해서 좋아하는 여직원을 데리고 갔지만, 즐겁게 먹는게 더 중요하다는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린다는 이야기처럼요.

하지만 역시나, 다른 요리, 먹부림 만화와 확실히 구분되는 무언가를 찾기 힘들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여섯 편의 에피소드만 남기고 사라졌겠지요. 면 요리 만큼은 정말로 맛있게 그려지기는 했지만, 이 정도만으로 넘쳐나는 먹부림 만화 시장에서 살아남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미식가 탐정 료지 1,2" 블랙 잭을 닮은 요리사 아지사와 료헤이가 등장하는 만화 '더 쉐프' 시리즈의 작가 카토 타다시의 작품입니다. 만화 도서관 Z에서 무료로 읽어 볼 수 있습니다. 뭐 볼게 없나 하고 뒤져보다가 제목에 호기심이 동해서 읽어보게 되었네요.

제목만 보았을 때에는 음식과 추리가 결합된, "절대미각 식탐정" 류의 추리물로 생각했었는데 아니더군요. 추리의 비중이 극히 낮습니다. 등장하는 탐정 소재 이야기 중 볼만했던건 부사장파와 전무파가 세력 다툼을 하는 회사에서 전무파의 핵심 인물인 개발부부장 뒷조사를 위해 그의 집에 잠입해서 PC를 열어보는 에피소드 뿐이거든요. 이를 통해 부장이 컬트 (사이비) 교단 핵심 관계자였다는게 드러나게 되지요. 북해도 출신 가출 소녀를 찾을 때, 사투리를 무심코 대답하게 만드는 작전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만, 이외에는 탐정 업무로 볼 만했던 내용은 없었습니다. 대부분 불륜 조사로 미행 후 호텔로 들어가는 사진을 찍는 정도이며, 그 외에는 아들 결혼 상대에 대한 상세 조사, 데릴 사위에 대한 탐문 조사 등이 전부입니다.

반면 음식, 요리 관련 이야기는 이야기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합니다. 주인공 탐정 렌죠 료지부터가 일류 요리집 쥬가와의 주인 토가와의 아들로 요리에 굉장히 박식하고 능숙하다는 설정이니까요. 초반부는 그가 조사 및 탐문 과정에서 우연히 먹게 된 요리가 너무 형편없어서 한 마디 했다가 결국 그 요리를 업그레이드시켜준다는 전개가 많고요. 

하지만 이런 전개는 억지의 극치죠. 탐정이 이런 일을 해 줄 이유가 없잖아요? 작가도 억지라는걸 알았는지 뒤로 갈 수록, 탐정업 보다는 요리에 집중합니다. 요리 승부가 계속 펼쳐지는 식으로요. 문제는 흥미를 돋우는 효과는 있지만 작품의 정체성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욱 하는 성격으로 승부를 한다고 해도 한 두번이지, 세 편 연속 요리 승부는 지나쳤어요. 

아울러 렌죠 료지와 그의 아버지에 얽힌 이야기는 "맛의 달인"과 흡사해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렌죠 료지가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바로 발끈하며 비판하는 모습, 그리고 그의 목표가 아버지로부터 자기가 만든 요리가 '맛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는 등 캐릭터 설정도 "맛의 달인"과 거의 똑같더라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추리, 요리 만화 붐에 편승해서 이런저런 인기있는 소재를 가져다 썼지만 결과물은 영 신통치 않았던 망작입니다. 유일한 장점은 공짜로 봤다는 것 뿐입니다.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9)

2022/03/05

미스테리아 35호 - 미스테리아 편집부 : 별점 2점

미스테리아 35호 - 4점
미스테리아 편집부 지음/엘릭시르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알라딘 온라인 중고로 미스테리아 36호를 사다가 곁다리로 구입하였습니다. 배송비를 내지 않기 위해서였지요. 

관심이 없던건 '少年'이라고만 적혀있는 뭔지 모를 특집 때문이었는데, 읽어보니 역시나였습니다. 제목의 소년은 "20세기 소년"에서 따온 것으로, "20세기 소년"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었던 오사카 만국박람회, 그리고 올림픽과 1970년대 전기 소설의 유행을 다루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도 잘 모를 정도로 두서없는 글들입니다. 전기 소설에 대한 부분만 괜찮았는데, 차라리 이 부분만 조금 더 깊게 파고드는 특집을 꾸미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뒤이은 '피서지에서 생긴 일'이라며 휴가 여행에서 생기는 사건들을 다룬 글은 완전 별로입니다. 앞의 글들과 맥락이 맞지도 않았을 뿐더러, 소개되는 작품 절반 이상이 크리스티 여사님 작품들인 탓입나다. 소개라도 다양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그나마 여기까지는 추리 문학 애호가로서 참고 볼만한 내용이기는 했는데, 영화 "스파이의 아내"에 대한 정성일 평론가의 27페이지에 달하는 리뷰와 분석은 지루함의 끝판왕이었습니다. 보지도 않았고, 볼 생각도 없는 영화 리뷰가 재미있을리도 없지만, "미스테리아"라는 잡지에 이렇게 많은 분량으로 소개될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더군요, 이 영화가 정통 추리물이거나, 혹은 그 쪽 장르에 부합하는 영화일까요? 그 외의 글들도 대부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제가 쓰는 글과 코드가 비슷해서 좋아하는 정은지 작가의 '미스터리 속 음식 이야기'가 이번에는 피터 윔지 시리즈 전반을 다루는데 눈여겨 볼 부분이 많있습니다. 저도 미스터리 속 샌드위치에 대한 짤막한 글을 써볼까 하고 있었는데, "부자연스러운 죽음"에서 샌드위치가 결정적 단서라는 글이 특히 눈길을 끌었습니다. 전자책으로 출간된 모양인데, 이번 주말에 읽어봐야 겠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특집과 인터뷰, 리뷰 등 기사 대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아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 정도? 중고책으로 저렴하게 구입해서 별다른 내상은 없기는 한데, 앞으로는 특집이 별로면 절대 구입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수록 단편의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해피엔딩" 서미애

이트 폭력을 그린 단편입니다. 전기 충격기로 디지털 도어 잠금을 풀 수 있다는 생활 상식(?) 말고 기억에 남는 부분은 없습니다. 전개가 너무 뻔한 탓이었습니다. 도무지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탐정이 살인하는 법을 배우다." 곽재식 

1949년, 탐정은 친분이 있던 이 선생님 행사에 게스트로 초대되었다. 이 선생이 완전범죄 비결을 탐정에게만 - 관객들에게 알려주면 완전범죄가 늘어날거라는 이유로 - 알려주고, 탐정이 비결은 그럴듯했다고 인정하며 마무리되는 행사였다. 그 뒤 누군가 탐정을 납치했다. 완전범죄 비결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탐정에게 협박과 고문을 가했고, 탐정은 '거래'를 위해 믿을만한 사람이 필요하다며 유명한 해결사 황금지네의 전화번호를 건네주었다. 그러나 전화를 받고 나타난건 복수를 위해 황금지네를 쫓던 사채업자 용산쌍룡이었다....

해방 직후를 무대로 해결사 황금지네, 황금지네에게 원한이 있는 사채업자 용산쌍룡, 정체불명의 남자와 탐정, 완전범죄에 대해 떠벌이는 전직 형사 이선생 등 기묘한 등장인물과 완전범죄 좌담회라는 비현실적인 설정이 가득한 작품입니다. 뭔가 만화같은데, 이런 설정을 잘 살린 묘사만큼은 일품이긴 합니다. 특히 가난하지만 입담하나는 최고인 탐정 캐릭터 묘사가 괜찮았어요. 이 선생이 황금지네였다는 반전도 나쁘지는 않았고요.

그러나 완전범죄 계획은 실망스러웠습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낯선 승객" 등에서 익히 보아왔던, 일종의 살인 대행업을 조금 키운 형태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이디어를 다크 웹 형태로 운영한다는 "디 아더 피플" 속 설정과 별로 다르지도 않고요. 양념 정도라면 모를까, 비중있게 가져갈 설정은 아니었습니다. 이보다는 차라리 범죄자들끼리 쫓고 쫓기는 구도를 조금 더 정교하게 배치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도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범죄물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시리즈를 계속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으니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3시 정각" 코넬 울리치 

시계 장인 스텝은 아내의 불륜을 눈치챈 뒤, 그녀를 지하실에 설치한 폭탄을 터트려 죽일 계획을 꾸몄다. 이를 위해 오랫동안 조금씩 화약을 모으고, 장치를 만들어나간 끝에 마지막 D-day에 맞춰, 지하실에 잠입해 자명종을 셋팅했다. 그러나 스텝은 집에 들어온 강도들에 의해 지하실 기둥에 묶이는 신세가 되어버리는데....

스스로 설치한 시한 폭탄 타이머가 눈 앞에서 움직이는걸 보는 상황의 묘사가 실로 일품인 작품입니다. 왜 코넬 울리치 (윌리엄 아이리시)가 서스펜스 스릴러의 제왕인지 다시금 느낄 수 있었던 명편이에요. 지하실에서 아내의 불륜이 사실이 아니라는걸 깨닫고 개과천선하는 장면에서 시작해서, 가스 검침원과 공놀이하던 꼬마를 통해 어떻게든지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과정의 빌드업이 특히 대단했어요. 희망을 아주 약간 주었다가 곧바로 빼앗아버리는 장면을 이렇게 잘 묘사할 수 있는 작가가 또 있을까요?

스텝이 급작스럽게 강도들에 의해 갇혀버린다는 작위적인 설정, 그리고 결국 스텝은 미쳐버렸고, 아내가 화약을 모르고 버린 탓에 폭발은 없었다는 다소 진부했던 결말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래도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2022/01/16

작가 형사 부스지마 - 나카야마 시치리 / 김윤수 : 별점 2점

작가 형사 부스지마 - 4점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김윤수 옮김/북로드

제목처럼 전직 형사이지만 은퇴 후 작가로 데뷰해 인기를 얻으면서, 형사 지도원으로 복귀한 부스지마가 신참 형사 아스카와 함께 작가들이 관련된 여러 사건들을 해결한다는 내용의 단편 모음집입니다. 이런 저런 작품들로 많이 접해 보았었던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이지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지극히 만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 나가는 작가로 문학계에 정통하며 온갖 냉소와 비난을 사정없이 날리는 작가 형사 부스지마의 설정부터가 만화적이니까요. "부호 형사"와 별다를게 없는 과장된 설정입니다. 등장하는 편집자와 작가들에 대한 설정들도 억지가 느껴질만큼 과장되어 있다는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사회파에 가까운, 묵직한 작품들을 선보였던 작가답게 마냥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출판계, 특히 작가들에 대해서 부스지마의 입을 빌어 통렬한 비판을 가하는건 나름 메시지를 전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좀 부족했고, 이야기 구성이 대체로 한가지 패턴이라는 단점은 큽니다. 전체 평균한 별점은 (간당간당한)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트릭과 진상, 범인을 모두 까발리는 스포일러 가득한 리뷰'라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워너비의 심리 테스트" 소설 스메라기 신인상 1차 심사위원이었던 도메키가 자루없는 날카로운 알루미늄 송곳에 꿰뚫려 살해당했다. 용의자는 도메키가 심사평을 험하게 썼던 신인상 출품 작가들 3명 - 다다노 구스오, 오우미 히데오, 아이카와 시오리 - 이었다. 그러나 작가들의 심문에 넌더리가 났던 아소 반장과 이누카이 형사는 신참 아스카에게 형사 지도원 부스지마의 도움을 받아 수사를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사건 설명을 들은 부스지마는 3명을 각각 만나, 그들 면전에서 더욱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데....

주요 설정과 등장인물들이 소개되는 시리즈 제 1작. 이 시리즈가 어떤 작품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부스지마가 얼척도 없이 자기 작품에 대해 자신감만 가득차 있는 신인 작가들을 통렬하게 깨부시는 장면이 가장 핵심이라는 점에서 말이죠.

추리적으로 빈약하다는 특징도 두드러집니다. "자루가 없는 알루미늄 송곳"이 화살인건 너무 명백하니까요. 이를 초반에 알아채서 이야기하지 않는게 더 이상했습니다. 부스지마가 용의자들을 도발해서 재차 범행을 시도하도록 만드는데, 범인이 이에 넘어가 부스지마를 죽이려 한다는 전개도 다소 유치했고요. 오우미 히데오가 기계 공작 회사를 다니다가 정년 퇴직했다는 정보를 이용하여 흉기를 추리해 낸 뒤, 가택 수사로 증거를 잡는게 더 추리물다왔을겁니다. 부스지마가 직접 표적이 되어 현장에서 범인을 체포한다는 과장된 추리쇼는 불필요했을 뿐더러, 억지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아무리 방탄복을 입었다고 한 들, 화살을 머리에 맞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신인 작가들에 대한 비난도 나름 새겨들을 부분은 있지만, 대상자인 3인이 안 좋은 신인 작가의 단점만 극대화하여 합쳐놓은 인물들이라는 것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일관한다는 점에서, 만화적인 느낌을 부각시킬 뿐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편집자(編集者)는 편집자(偏執者)" 

편집자 마다라메 아키라에게 신인 작가들이 연이어 찾아왔다. 하고로모 사야는 데뷰 전 동인 작품의 출간을 막고자, 그리고 그녀 원고 속 트릭 아이디어를 반강제로 중견 작가에게 넘긴걸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덴도 구이치로 역시 항의가 목적이었다. 데뷰작에서 사용하라고 마다라메가 전해 준 트릭과 반전이 인기작가 아야메 작품을 베낀 것이어서, 덴도는 표절 작가로 낙인찍혀 작가 인생을 망쳤기 때문이었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출판, 문학계를 통렬히 비판합니다. 신인 작가들 약점을 쥐고, 자기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폭언을 내뱉는 악덕 편집자 마다라메, 그리고 제대로 된 작가도 아니면서 자기 작품과 소설가라는 직업에 헛된 신념을 품은 신인 작가를 통해서요. 문단에서 라이트노벨 작가는 일회용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는 등의 업계인스러운 이야기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나카야마 시치리 시선을 보자면, 편집자보다는 작가 문제가 훨씬 큰 것으로 그려져 이채롭더군요. 편집자가 작가와 이인삼각으로 작품을 완성해 나가면 좋지만, 수익을 중시하는 편집자도 당연히 필요하다는게 나카야마 시치리의 논리거든요. 출판도 시장이니까요. 마다라메도 문제는 있지만,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는 측면으로는 우수한 직원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작가들은 일반인의 상식도 갖추지 못한, 자의식에만 쩌든 괴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덴도 구이치로는 아예 동정도 가지 않을 정도에요. 소설가라는 놈이 편집자가 제공한 트릭과 반전으로 글을 썼다면, 이건 작가가 아니라 그냥 대필 기계일 뿐이니까요. 이런 주제에 자기가 창작자다 뭐다 운운하며 뭔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인 것 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욕을 먹어도 쌉니다. 조금 낫기는 하지만 하고로모 사야도 마찬가지에요. 또 이런 작가들이 단순한 비지니스 파트너에 불과한 편집자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모습도 통렬하게 꼬집습니다.

다행히 이 작품은 비판 외에도 추리물로도 볼 만했습니다. 사용된 알리바이 트릭이 꽤 괜찮았거든요. 우선 하고로모가 흉기를 준비하고, 범행 현장인 호텔 지하 주차장까지 마다라메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범행 시각에는 너무나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듭니다. 그리고 호텔 바에서 술을 마시던 덴도가 화장실을 가는 척 잠깐 자리를 비운 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 트렁크 안에 가두었던 마다라메를 찔러 죽이고 바로 돌아온 겁니다. 나중에 하고로모가 차를 회수하면서, 시체도 유기했고요. 꽤 그럴듯했어요. 

그러나 문제는 호텔은 CCTV가 완벽하게 존재하는 곳이라는 거지요. 지하로 향하는 모든 입구, 엘리베이터와 주차장 CCTV만 조사해도 트릭이 드러나는건 순식간이었을 겁니다. 덴도가 호텔 바에 있었다는걸 검증하기 위해 경찰이 철저하게 수사했을테니 빠져나가기는 힘들었을테고요. 그런 점에서 정교한 계획이라고 보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이는 수사의 문제일 뿐, 트릭을 폄하하기는 힘들고 독자가 추리하기 위한 정보도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는 만큼 별점은 2.5점 주겠습니다.

"상을 받긴 했지만" 

신인상 수상작가들에게 쓴 소리를 하던 노 작가가 살해된 사건이 등장합니다. 당연히 쓴 소리를 들은 작가들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자의식 과잉으로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한 애송이들에 불과하고요. 부스지마가 풋내기들 정신 교육을 시킨다는 전개도 앞서 이야기들과 똑같습니다. 한마디로 원 패턴으로 일관하는 자기 복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최악이에요. 트릭이나 단서, 증거같은건 등장하지도 않거든요. 부스지마의 정신 공격(?)에 무너진 범인이 스스로 범행을 자백하는게 전부니까요. 작가들을 쓴 소리로 비판하면서, 본인은 이런 작품을 버젓이 발표하는건 무슨 정신머리인지 모르겠네요. 최악 중 최악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애독자" 

작가 다카모리 교헤이 토크쇼 간담회에 3명의 독자가 참석했다. 한 명은 인터넷에 혹독한 비판만 올리며 즐거워하는 일종의 악플러인 구와에 도모미. 한 명은 다카모리 교헤이에게 강하게 연심을 품은 정신병자 스토커 마키시마 히나코. 마지막 한 명은 다카모리 교헤이에게 어떻게든 자기 작품을 보여주려고 발악하는 작가 지망생 가노 이쿠였다. 그리고 간담회 직후 다카모리 교헤이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여러모로 앞서의 시리즈 다른 작품들과는 차이점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는 작가가 아니라 작가에게 비틀린 애정을 품은 독자들이 주요 용의자라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부스지마가 이 독자들에게는 독설을 날리지 않는다는 점이고요. 마지막 세 번째는, 범인이 따로 있었다는 점입니다! 다카모리 교헤이는 여자 관계가 복잡해서, 아내가 그를 살해했던게 진상이었습니다. 최신간 속지 부분을 뜯어내어 현장에 두었던건, 사인을 받았을 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했던 것이고요. 이 페이지만 뜯어진 채 시체 밑에 책이 놓여져 있던 것, 사인이 번지는걸 막기 위함인 간지가 현장에 없었던 것, 그리고 현장에 있던 책은 2쇄본이었는데, 2쇄본이 작가 서재에 없었던 걸로 보아 서재에서 꺼내온 책이라는 결정적 증거 등으로 진상을 추리해내는 과정도 합리적이었습니다. 이 중 간지가 현장에 없었던게 증거가 되기는 힘들어 보이기는 했지만, 그 외 내용은 아주 괜찮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원 패턴이었던 전개를 탈피했다는데 점수를 주고 싶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스포일러 가득한 악담을 리뷰랍시고 올리는 구와에 도모미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등장하는데, 살짝 찔리더군요. 저도 거의 모든 리뷰에 스포일러를 가득 담고 있으니까요. 앞으로는 리뷰 내용에 스포일러가 있다는걸 더 잘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원작과 드라마 사이에는 깊고 어두운 강이 있다" 

부스지마의 트리콜로 시리즈의 드라마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듀서 소네는 원작의 인지도만 원했기에, 주인공도 여자로 바꾸고 없던 러브라인, 해피엔딩을 추가했으며 핵심인 보험금 살인도 스폰서 눈치를 보느라 치정 살인으로 바꾸고 말았다. 결국 부스지마와 편집자 신보는 방송사 관계자와 담판을 짓는 자리를 갖고, 부스지마는 언제나의 말투로 이 모든걸 소설이나 기사 형태로 폭로하겠다며 관계자들을 비웃었다. 그리고 그날 밤, 소네는 살해당했고 부스지마도 용의자로 떠올랐다.

작가 지망생들보다는 TV 드라마 관계자들을 비웃고 비난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비판할 악당의 악행을 먼저 묘사해서 독자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킨 뒤, 부스지마가 면전에서 한 방 먹이는 방식은 전작들과 거의 같습니다. 한마디로 원 패턴이라 식상했어요. 

추리적으로도 건질게 별로 없습니다. 부스지마가 시나리오 작가 후세가 소네를 공격한 방법을 과거 드라마에서 찾아내는 등의 활약은 하지만, 후세와 신보의 발자욱을 현장에서 입수했기 때문에 추리로 범인을 밝혀낼 여지는 전무하니까요. 후세는 단순 폭행이었고, 실제로 질식사하게 만든건 편집자 신보였다는 추리도 설득력이 낮습니다. 무엇보다도 신보가 자백하지 않았다면, 범행을 증명하기 쉽지 않았을겁니다. 기절한 사람을 돌려 놓으면 질식사 할 수 있다는 책을 함께 작업했다는 것 정도가 증거가 될 수는 없을테니까요.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 2인 3각으로 작품을 만든 신보를 직접 고발하는 부스지마가 자기는 작가 이전에 형사였다는 멋진 말을 한 직후, 이를 소재로 작품 하나를 쓸 수 있겠다고 하는 장면은 부스지마 캐릭터가 어떤 인물인지를 잘 드러내기는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느껴져서 별로 자연스럽게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2021/10/09

늑대의 왕 - 니클라스 나트 오크 다그 / 송섬별 : 별점 2.5점

늑대의 왕 - 6점
니클라스 나트 오크 다그 지음, 송섬별 옮김/세종(세종서적)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79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방범관 카르델은 호수에서 시체 하나를 건져내었다. 시체는 살아있을 때 몇 개월에 걸쳐 혀, 이빨, 눈, 귀 및 사지가 하나씩 훼손된 후, 치료되었다는게 밝혀졌다. 인데베토우 치안본부 소속의 세실 빙에는 치안총감 놀린의 부탁으로 사건을 맡고, 카르델과 힘을 합쳐 수사에 착수했다. 놀린은 세력가 레우테르홀름의 간섭으로 치안총감 자리를 오래 유지하기 힘든 상태였고, 빙에도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중이라 남은 시간은 별로 없었다. 카르델의 탐문 수사, 그리고 빙에가 시체를 감쌌던 천을 추적해서 둘은 시고위층 비밀 조직 에우메니데스가 소유한 고급 창관이 시체를 버렸다는걸 알아냈는데....

18세기 후반 스웨덴을 무대로 펼쳐지는 역사 추리 소설입니다. 무식과 야만, 과학이 공존하던 비슷한 시기 유럽을 무대로 하는 "사형 집행인의 딸" 시리즈와 분위기가 비슷하지만, 구스타프 3세가 일으켰던 대 러시아 전쟁, 그 중에서도 스벤스크순드 해전이 꽤 비중있게 등장하고, 프랑스 혁명도 사건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등, 역사적인 배경을 더 짙게 깔고 전개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팩션' 인 셈이지요.

이런 역사적인 부분의 디테일은 아주 빼어납니다. 당시 문화와 시대상, 생활상을 잘 알 수 있을 정도니까요. 예를 들면, 머리가 맑아진다는 이유로 독한 아라비카 커피를 자주 마신다는 세실 빙에의 묘사처럼요. 전형적인 지知-용勇 컴비 - 허약한 두뇌파 탐정 세실 빙에와 엄청난 완력과 터프함을 자랑하는 카르델 - 설정도 이 작품에서는 효과적으로 작동합니다. 웁살라 대학교 법학과 출신으로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빙에, 왼 팔을 대 러시아 전쟁 중에 잃었던 역전의 용사 카르텔은 그들에 대한 설명과 그들 각자의 회상 만으로도 작품의 역사적인 배경과 디테일을 보다 강화시켜 줍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빙에와 카르델이 수사를 통해 창관까지 찾아가기는 하지만, 피해자와 범인이 드러나게 되는건 피해자 다니엘 데발을 그 꼴로 만든 집행자 크리스토페르 블릭스가 남긴 편지가 빙에에게 보내졌기 때문입니다. 범인인 발크가 크리스토페르를 자유롭게 풀어준 이상, 체포되는건 시간 문제이기도 했고요. 크리스토페르가 죄책감에 밍기적거리며 시간을 낭비하지만 않았어도 사건은 더 빨리 해결되었을 겁니다. 

그나마 컴비가 창관으로 찾아가기까지의 수사를 그린 1부, 크리스토페르가 범행을 저지르게 되는 과정을 그린 2부는 수사와 범죄 과정이 상세히 등장하기라도 하는데, 안나 스티나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그린 3부는 존재 자체가 불필요했습니다. 재미도 있고, 당시 스웨덴이 얼마나 무식한 국가였는지, 노역장이 얼마나 생지옥이었는지, 방범관들이 얼마나 쓰레기인지 등의 시대상을 드러내는데에는 효과적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3부를 읽지 않아도, 그리고 안나 스티나는 등장하지 않아도 이야기 전개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최악의 방범관이자 새디스트인 페테르손이 카르델에 의해 비참한 결말을 맞는다는 에필로그라도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그것도 아니었고요. 또 안나 스티나는 마지막에 살인까지 저질렀으니, 아무리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한들 그냥 봐 주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아울러 요한네스 발크가 이런 무서운 범행을 저지른 동기가 '프랑스에서처럼 혁명을 일으키기 위함이었다'는건 팩션이라는 측면에서는 잘 어울렸으나 쉽게 와 닿지는 않았어요. 데발을 사랑했지만, 데발이 자신을 배신하고 팔아먹으려고 했던, 전 치안총감 릴옌스파레의 끄나풀이었기 때문이라는걸 알게 되어 살의를 품었다는 발크의 동기는 누가 보아도 명백합니다. 때문에 그가 재판정에 서 봤자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는 부족했을 겁니다. 사랑했던 연인의 배신으로 살인을 저지른 귀족의 후예 때문에 폭동이 일어난다? 그럴리가 없잖아요.

그래도 4부에서 피해자 뱃 속에서 발견한 반지의 문장을 통해 피해자 신원, 그리고 범인이 누구인지를 더듬어가는 부분만큼은 좋았어요. 반지의 문장은 전 치안총감 릴옌스파레의 문장을 흉내낸 것이었고, 이를 통해 반지 주인이 릴옌스파레가 풀어놓은 정보원이었다는게 밝혀지는 과정이 앞서의 복선 등으로 꽤 설득력있게 그려지고 있는 덕분입니다. 피해자가 자기 배설물을 먹었던 것도 리스토페르가 사지를 잘라내는 시술을 피해자에게 가하던 중에 문장이 새겨진 반지를 먹여서 나중에 부검을 통해 그의 신원이 드러나게끔 조치했기 때문이라는 합리적인 이유로 설명되며, 피해자가 처한 끔찍한 상황과 잘 맞아 떨어져 극적인 효과를 더해줍니다. 빙에가 "사실 다니엘 데발은 발크를 배신한게 아니라 그를 사랑했다"고 데발의 편지를 위조해서 발크를 속인 끝에 그가 순순히 죽음을 맞게 만든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감동을 주는 듯 하다가, 사실은 빙에의 조작이었다는게 드러난건 확실히 새로왔어요. 세실 빙에와 그의 아내에 관련된 가슴 아픈 사연과 맞물려 여운을 남기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독특한 역사물로의 재미는 확실하고, 추리적으로도 볼 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잔혹한 범죄, 범죄 만큼이나 끔찍한 당시 스웨덴 상황 등은 부담스러워서 감점합니다. 해피 엔딩에 악당들은 확실히 응징하는 "사형 집행인의 딸" 시리즈가 훨씬 더 제 취향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