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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2

미각의 번역 : 요리가 주는 영감에 대하여 - 도리스 되리 / 함미라 : 별점 2.5점

독일 여성 영화 감독 도리스 되리의 요리 관련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접한 음식과 사람들, 그 안에서 느낀 단상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단순한 요리 소개나 맛 묘사에 그치지 않고 음식과 문화, 기억, 철학이 뒤섞인 글들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 많아서 일기같다는 느낌도 많이 들고요.

놀랐던건 저자의 방대한 식견입니다. 김치에 대한 언급이 대표적이에요. 한국의 김장을 단순한 발효 기술이 아니라 ‘인간적인 정을 만드는 레시피’라고 표현하는데, 외국인이 쓴 글에서 김치가 아니라 김장을 이 정도로 이해하고 언급했다는게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우유에 대한 글에서 부처가 고행으로 쇠약해졌을 때 젊은 여인이 건넨 우유로 생명을 구했다는 불교 일화를 인용하고, 두부를 이야기할 때 일본 선종의 도겐 젠지의 말을 함께 소개하는 부분을 보면 독일 사람이 이런 정보를 대체 어디서 얻었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글 사이사이에 동물이 급격한 변태를 겪는 이유가 ‘더 많은 먹이를 먹기 위해서’라는 과학계 이론같은 여러 정보들이 등장하는 것도 볼거리입니다. 예를 들자면 바움쿠헨이 일본에 전해진 과정은 의외로 전쟁사와 연결되어 있다고 하네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에서 제빵사로 일하던 독일인 유흐하임이 전쟁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이송된 뒤 굽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합니다. 뉴욕의 대표 음식으로 언급된 ‘루스 앤 도터스’의 비알리와 베이글 이야기도 재미있었어요. 이 가게는 1907년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조엘 루스가 세 딸과 함께 1935년 창업한 곳이라는 군요.

간단한 레시피도 몇 가지 소개됩니다. 독일에서 품종 보호 정책으로 사라졌다는 ‘린다’ 감자를 활용한 감자샐러드는 감자를 껍질째 삶아 얇게 썰고, 여기에 양파, 식초, 설탕, 식용유를 넣어 만듭니다. 한 번 도전해보고 싶네요.
연두부 반쪽과 아보카도 반쪽을 함께 갈아 얼굴에 바르라는 피부 관리용 레시피도 새로왔고요. 아보카도가 저렇게 쓰기에는 좀 고가라 도전은 꺼려집니다만..

이외에도, 커피 유행에 대한 단상처럼 공감할 만한 일상적 시선도 있어서 좋았고, 책의 만듦새도 깔끔합니다. 선명한 일러스트, 판형, 종이질과 인쇄 및 장정 모두 빼어나거든요. 어른들을 위한 선물용 책으로도 괜찮겠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글루텐 프리나 환경오염, 미세 플라스틱 같은 주제를 다룬 글들은 다소 단조롭고 설명 위주로 흘러가는 탓에 흥미가 떨어집니다. 전체적으로 정보는 많지만 글마다 담고있는 내용, 수준의 편차도 있는 편이고요. 그리고 '요리'나  '식문화', '음식', '미식' 등의 내용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런 내용은 기대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일상적인 요리 이야기보다는, 음식에 얽힌 문화나 개인적 사유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5/02/23

세인트 세이야: 더 비기닝 (Knights of the Zodiac) (2023) - 토마스 바진스키 : 별점 1점

"세인트 세이야"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실사 영화. 원작의 오랜 팬으로, 옛 추억을 되살리고자 넷플릭스로 감상했습니다. 

장점이라면 주인공 세이야 역을 맡은 아라타 맛켄유의 비쥬얼, 그리고 일부 액션 장면입니다. '성투사'의 싸움답게 맨몸 액션이 펼쳐지는데, 세이야가 각성한 뒤 카시오스를 포함한 구라드의 부하들을 인형처럼 내동댕이치는 장면이라던가, 성투사 피닉스의 성의 액션, 마이록을 연기한 마크 다카스코스가 선보인 권총과 곤봉을 활용한 액션 등이 그러합니다. 원작 팬이라면 비교적 원작에 가깝게, 하지만 촌스럽지 않게 구현된 마린의 등장은 만족할 만 하고요.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장점을 제외하면 영화의 완성도는 전반적으로 처참합니다. 우선, 무슨 이야기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세이야는 마린에게 훈련을 받던 중, 알먼이 누나 패트리샤를 납치한 일당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훈련을 중단하고 떠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갑자기 아테나를 데리러 온 구라드를 막기 위해 카시오스 일당과 싸웁니다.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장면들이 계속 이어져서 전개가 엉성하고 난잡합니다. 아테나가 각성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구라드는 아테나를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고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처럼 보였던 도스카라스가 구라드의 부하에게 한 방에 쓰러져 포로가 되는 장면도 황당했어요. 배우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입니다.

각본이 별로라면 적어도 볼거리라도 화려해야 하지만,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CG 티가 강하게 나는 화면도 조악하고, 앞서 언급한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전체적인 액션 연출도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맛켄유의 액션 연기가 어색해서 많이 거슬렸습니다. 그나마 볼만했던 액션 장면들은 성의를 입은 후에야 등장하는데, 이 점을 고려하면 주요 액션 장면에서는 대역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이 되어야 할 성투사들의 싸움이 맛보기 수준이며 심지어 페가수스 유성권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원작 팬들이 가장 기대했을 대표적인 기술이 빠진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덕분에 페가수스와 피닉스 성투사의 클라이맥스 대결 장면은 80년대풍 특촬 영화보다 못한 빔 공격 연출이 반복되면서, 원작의 느낌을 살리지 못하고 어설프게 마무리되고 맙니다.

결론적으로, 영화의 완성도는 매우 낮습니다. 스케일을 줄이고 원작 초반부의 줄거리를 충실하게 따르면서, 성투사 변신 장면과 성투사들 간의 격투를 좀 더 멋지게 연출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별점은 1점인데, 솔직히 1점을 주기도 아깝습니다. 여러분들은 시간 낭비 하지 마시고, 이 작품은 쳐다도 보시지 말기 바랍니다.

2024/04/19

미술관에 간 과학자 - 미우라 가요 / 지종익 : 별점 3점

미술관에 간 과학자 - 6점
미우라 가요 지음, 지종익 옮김/아트북스

과학자가 쓴 미술 작품 해설(?) 책은 전에도 읽어보았습니다. 이 책 역시 유명 작품을 저자의 전문 분야로 분석하는 책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약간 달랐습니다. 과학적으로 분석하는건 맞습니다. 다만 그게 화학이나 물리학이 아니라 '심리학'이더라고요.

심리학으로 그림을 분석한 책은 처음 보았는데,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습니다. 사진 등을 통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던 장면의 묘사가, 실제 눈을 통해 지각할 수는 없다는건 놀라왔어요. '초점'이 빛나간걸 확인할 수 없다는 것처럼요. 상식적으로 바라보는 사물에 초점이 맞을 수 밖에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인데, 여태까지 생각하지도 못했었습니다.
시간과 날짜 등에 따라 다른 색의 변화를 그려낸 아래의 모네의 루앙 성당 연작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이걸 눈으로 확인하는건 무척 어렵다는군요. 인간의 눈은 조명이나 그림자를 배제하고 원래의 색으로 보게끔 만들어져 있는 탓입니다. 즉, 모네는 '뇌'로 그림을 그렸다는 의미입니다! 여태까지 빛의 변화를 인상파 작가들처럼 느끼지 못했던 저의 둔감한 센스를 탓했었는데 알고보니 그게 당연한거라니, 위안이 됩니다.
잭슨 폴록의 그림이 프랙탈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연구도 신기했습니다. 프랙탈 차원 값은 1에서 2까지로 2로 갈 수록 복잡해지는데, 폴록의 초기작은 인간이 가장 기분 좋음을 느끼는 1.45 정도였다가 말년으로 갈 수록 수치가 상승해서 1950년 작품은 최대치라 할 수 있는 1.9에 이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냥 물감을 뿌린게 아니라 굉장히 고민하고 연구하여 그렸다는건데 어떻게 연구해야 저런걸 물감을 뿌려 완성할 수 있는지 짐작도 되지 않습니다. 확실히, 거장이 달리 거장이 아니네요. 이를 통해 코끼리가 그린 그림이 예술이 아닌 이유도 알 수 있었고요. 연구와 고민이 뒷받침되지 않은 단순한 우연의 산물은 예술 작품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지요.

이외에도 그림에서 안정, 불안감을 느끼는 요인 - 광원이 왼쪽에 있는게 안정적임 - 이라던가 그림속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 방향 - 왼쪽에서 오른쪽 -, 그림 속 인물들의 시선 방향에 따른 감상자의 생각들, 광택이 나는 장식품을 투명하게 만드는 방법에 따른 '투명시' 설명 등 그림의 여러 요소들을 이용한 연구들이 가득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또 예시 작품들이 흔히 보지 못했던 독특한 것들이 많아 좋았습니다. 인간의 시각은 복수의 정보를 통해 얻은 정보를 콜라주해서 얻었다는걸 호크니의 사진 콜라주를 통해 알려주는게 대표적이에요. 호크니는 화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사진 콜라주 작품도 발표했는지 몰랐네요.

다만 도판이 너무 작아서 알아보기 어렵고, 어떤 내용은 정보와 내용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이해하지 못한 설명도 제법 되고요. '인간의 눈에는 단파장, 중파장, 장파장에 반응하는 세 종류의 시세포가 있다. 이중 빨간색을 지각하는 건 장파장에 반응하는 시세포로 알려져 있다. 놀랍게도 전형적인 빨강에 해당하는 파장 760나노미터가량의 빛에 대한 시세포의 반응은 거의 0에 가깝다. 빨강은 눈길을 사로잡는 색이지만 눈의 입구에서는 보이지 않는 색이라는 것이다. 이 장파장에 반응하는 시세포의 절정은 656나노미터 정도로, 우리에게는 황색으로 보인다. 즉, 단파장, 중파장, 장파장의 세 시세포는 청, 녹, 적이라는 빛의 삼원색에 반응하는 수용기가 아니다. 어떤 색으로 보일지는 세 종류의 시세포가 반응하는 비율에 따라 결정된다. 그 결과, 보일 리 없는 빨간색이 어떤 색보다도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는 글처럼요. 빨간색이 왜 선명하게 보인다는건지, 저는 이 글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애초에 글 자체가 친절하게, 쉽게 쓰여져 있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목차 구성도 불만스럽습니다. 앞서 광원 등의 위치로 심리적 안정감과 시간의 흐름이 정해진다는 설명은, 글을 반대로 읽는 일본이나 아랍권에서의 예를 비교해주면서 설명해 주는게 당연히 좋았을거에요. 하지만 일본의 예는 한참 뒤에 따로 소개되어 흐름이 끊기는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어요.

그래도 워낙 좋은 내용이 많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서구권, 그리고 일부 일본 작품만 연구에 활용되었는데, 우리 작품도 이런 시각으로 연구한 책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021/08/15

지도로 읽는다 리스타트 한국사 도감 - 유성운 : 별점 1점

지도로 읽는다 리스타트 한국사 도감 - 4점
유성운 지음/이다미디어

총 6장 구성으로, 이런저런 한국의 역사적 상황이 현재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걸 알려주는 역사서입니다. 신라 4대왕 석탈해의 다파나국은 캄차카반도인가?, 고대 남부 한반도 왜의 위치는 한반도 남부를 포함할 수 있다, 처용은 페르시아 왕자일 수 있다, 金을 왜 금이 아니라 김이라고 읽게 되었나?, 왕건의 호남 차별론은 사실인가? 등 목차만 보아도 흥미로우며, 재미있는 내용도 많았습니다. 다양한 사료와 근거를 바탕으로 이해하기 쉽도록 도와주는 구성도 좋았고요. 도판들도 빼어나며 특히 제목처럼 지도를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인상적이었던 내용을 소개하자면, 金을 김이라고 읽게 된 이유입니다. 원래는 조선 왕가와 관련된 음양오행설 때문이라는 설이 있었는데, 최근 설은 수, 당 시대만 해도 '금'에 가깝던 발음이 5대 10국을 거치며 '김'에 가까운 발음으로 변했기 때문이라는군요.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고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특히 몽골 상류층 이름에 金이 많아서 발음 변화가 퍼졌다는 설인데 꽤 그럴싸했어요. 

왜 중국의 왕조들이 한반도를 완전히 정복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에 대한 답도 나름 괜찮았습니다. 이른바 '실용적인 외교'를 잘 했기 때문이라며, 대표적인 예로 서희가 거란과 강동 6주를 얻어낸 담판을 들고 있습니다. 고려와 거란의 국교를 위해서는 여진이 머무는 압록강 일대 확보가 필요하니, 그걸 달라는 요청이었다면서요.

하지만 당시 고려군은 이미 두 번의 승리를 거두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냥 말 만으로, 외교만으로 평화와 땅을 얻어낸건 아니지요. 이게 적합한 예인지는 아리송합니다. 이 보다는 항복하러 몽골로 향하던 고려 태자 왕전이, 몽케 칸이 급작스럽게 죽자 후계자 후보 중 쿠빌라이에게 미래를 걸었던 행동이 더 좋은 예라 생각됩니다. 아무리 자료와 소문을 수집했다 하더라도 이건 순전히 '감' 이었다고 생각은 됩니다만... 

고려 말, 토지 개혁을 외치며 건국했던 건국 공신들이 결국은 자기들 잇속을 챙겼다는 이야기는 씁쓸했습니다. 공신 조준이 받은 표지는 현재 기준으로 약 124만 7,300평이나 된다니까요. 고려에서도 최고의 권문세족 가문이었던 조준이 혁명에 동참했던건 다 이런 이유가 있던 거지요. 왠지 청렴한 학자일 것 같은 퇴계 이황도 무려 36만평이 넘는 땅부자였다고 하니, 돈이 없으면 성공 못하는 세상인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것 같네요.

이외에도 17세기, 전 세계를 강타했던 소빙기 한파로 조선이 입었던 피해를 상세하게 알려주는 부분이라던가, 조선에서도 서울 주택 가격은 100년 동안 10배 가량 뛰었다는 등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큽니다. 가장 큰 단점은 지나치게 본인 생각이 많이 담겨있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게 임진왜란 당시 끌려간 도공 이야기를 하면서, 이들이 일본에 남은건 비극이 아닐 수도 있다, 이들이 조선에 남았더라면 이런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는 시각이에요. 당시 끌려간 포로 일부는 조선 귀환을 거부했다는 사료를 토대로, 조선이 문제였다고 마무리하는데 이게 말이 됩니까?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기 때문에 조선이 빨리 발전할 수 있었다는 논리하고 똑같죠. 애초에 왜 끌려갔는지를 망각한 망발입니다.

이러한 친일적 시각은 왜의 위치에 대해 분석하며, 그들이 실제로 가야와 신라 이남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리라 보는 내용 등에도 진하게 묻어 나옵니다. 아울러 역사적 상황이 현재와 별로 다르지 않다며 추가한 저자의 개인 의견들도 마찬가지에요. 한국사 도감에 이런 내용이 들어갈 이유도 없고, 그나마도 한 쪽에 치우쳐진 개인적인 시각이라 불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신진 사대부를 강남 좌파에 비유하는 정도에서 그쳤다면 좋았을텐데 말이죠. 이런 내용이 포함된줄 모르고 읽기 시작했는데, 알았다면 절대로 읽어보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제대로 된 역사서로 볼 수 없습니다. 개인의 잡문에 가깝습니다.

2021/07/04

태평양 전쟁 - 유진 B. 슬레지 / 이경식 : 별점 3점

태평양 전쟁 - 6점
유진 B. 슬레지 지음, 이경식 옮김/열린책들

저자 유진 B. 슬레지가 직접 참전해서 싸웠던 2차 대전 태평양 전쟁에서의 경험을 서술한 회고록이자 전쟁사 서적입니다. 책은 저자가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슬레지(별명은 이름에서 따온 "슬레지해머")는 샌디에이고 훈련소에서 여러 주에 걸친 가혹한 훈련을 받고 한 명의 해병대원으로 성장한 뒤, 제 1 해병사단 제 5연대 3대대 소속 박격포병으로 1944년 펠렐리우 섬에서의 격전, 1945년에 오키나와 전선에 투입됩니다. 그리고 운 좋게 부상없이 생환하였지요.

저자가 겪은 2차 대전은 고작 1년도 안되는 기간입니다. 실제 전선에서 싸운건 그 절반에도 훨씬 못 미치고요. 하지만 일본군이 반자이 돌격없이, 섬에 방어망을 철저하게 구축하여 저항했던 마지막 전선이기에, 그리고 한 곳은 땅을 팔 수도 없는 열사의 산호섬이고, 또 한 곳은 항상 비가 오는 진흙탕이었고. 일본군 병사들의 목적도 오로지 죽기 전 미군을 한 명이라도 죽이려는 생각이었다니 그 끔찍함과 고생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덕분에 560여 페이지에 달하는 꽤 긴 분량이지만 술술 읽힙니다. 

다른 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생생함도 쉽게 읽을 수 있게 도와주는 요소였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건 시체가 널려있던 전선 상황에 대한 묘사였습니다. 일본군의 시신은 산호섬이라 묻을 수도 없어서 사방에 방치되어 있었고, 더운 날씨 탓에 바로 썩어들어가서 그 악취가 어마어마했다고 하네요. 당연하게도 파리도 굉장히 많았는데, 시체에 붙어있던 거대한 파리떼가 식사로 먹던 레이션에 달려들었다는 이야기는 정말 섬뜩했고요. 이렇게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상상하기도 힘들, 그런 생생한 묘사들이 곳곳에 가득합니다.

전쟁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분량이 할애되어 있습니다. 일본군과 미군이 서로에 대해 갖는 증오심이야 뭐 서로 겪은게 있으니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각자 서로에게 집행하는 상상 이상의 폭력이 정말 충격적입니다. 아직 살아있는 일본군의 금니를 뽑으려고 입을 대검으로 찢었다던가, 기념품으로 일본군 포로의 손을 잘라 챙겼다던가, 일부러 일본군 시체에 대고 오줌을 쌌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숱하게 등장합니다. 저자가 미 해병대원이다보니 미군 시점의 이야기가 많은데, 일본군도 별반 차이가 없었겠지요. 

이와는 정 반대로, 전투를 겪으며 미치거나 피폐해지는 병사들에 대한 서술도 적지 않아요. 죽은 일본군의 반쯤 날아간 머리를 계속 개머리판으로 쳐 댔다는 미군 병사 이야기처럼요. 그동안 일본군은 거의 전멸했던 반면, 미군은 실종 포함한 사망자는 7,631명, 부상자는 3만 1,807명이라 큰 피해는 받지 않았다고 생각해 왔었습니다. 부상자들이 복귀만 한다면 전선 유지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부상자 중 2만 6,221명이 정신적인 부상자라는 이 책의 설명을 읽고나서는 생각을 바꿨습니다. 정신적인 부상자들은 군 복귀는 물론, 일상 생활로의 복귀도 힘들 사람들이 많았을테니까요. 저자는 전투는 참가한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사람들은 그 끔찍한 흔적을 안고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정말 살아도 산게 아닌 사람들이 너무 많을 것 같아요. 저자 역시 운 좋게 무사히 살아남기는 했지만 마음에 많은 상처를 입은건 분명하다는게 이런저런 회고와 묘사에서 여실히 드러나고요. 고작 20살에 불과한 저자와 비슷한 또래의 전우들이 겪기에는 지나치다는 말로도 부족할 지옥이었겠지요. 정말이지 전쟁은 무섭네요.

그래도 다행히, 멋진 전우들도 많고 그들의 활약으로 목숨을 건지거나, 죽음을 넘나드는 와중에 웃을 수 있는 여유도 보여지곤 하더군요. 담배를 피지 않던 슬레지가 펠렐리우 상륙 작전 직후에 바로 담배를 찾았다던가, 두 박격포병들이 거의 목숨을 걸고 싸운건, 탄약 상자 속 포탄 용기 안에서 발견한, 은색 립스틱을 바른 여자의 입술로 키스를 한 자국이 있는 사거리표 카드를 서로 갖겠다는 이유였다는 이야기처럼요. 이런 일도 없다면 진작에 다 미쳤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역시 20년도 더 지난 옛 군 생활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 때 그 친구들은 다 어디서 무엇을 하려나....

이렇게 가치있는 회고가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기승전결의 구조가 없다는건 좀 아쉬웠습니다. 회고록인 탓입니다. 각 시기별 경험들을 모두 이어 붙여 놓았을 뿐이니까요. 때문에 뭔가 정리된 이야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등장 인물들도 두서없이 등장해서 죽거나, 사라지곤 하는 편이고요. 또 잔혹한 쓰레기였던 분대장 맥의 후일담이 궁금했는데, 등장 인물들 중 살아 남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후일담을 적어주면 좋았을 것 같네요.

그래도 일반 병사 시점에서 본 전쟁이라는 특이함에 더해, 생생함이 놀라운 수준이라 별점은 3점입니다. 태평양 전쟁, 아니 일반 병사의 전쟁이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21/05/22

밤과 낮 사이 1 - 마이클 코넬리 외 / 이지연 : 별점 2.5점

밤과 낮 사이 1 - 6점
마이클 코넬리 외 지음, 이지연 옮김/자음과모음(이룸)

영미권 장르소설 비평가와 편집자들이 선택한 최고의 단편 컬렉션이라는 책입니다. 장르 문학 단편을 좋아하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볼륨은 풍성합니다. 무려 5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에 열 여섯 편이나 되는 단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본격 추리물, 범죄물, 스릴러, 액션물에 섬찟한 느낌을 전해주는 '기묘한 맛' 계열 등 수록 장르도 다양한 덕분입니다. 조이스 캐롤 오츠, 마이클 코넬리와 같은 유명 작가들 작품이 수록된 것도 반가웠고요.

하지만 워낙 많은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서 작품별 편차가 큽니다. 첫 수록작인 "그들 욕망의 도구"처럼 좋은 작품도 있지만, 뻔한 설정과 전개를 보여준다던가, 심리 묘사에 치중할 뿐, 이야기 자체는 모호한 등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든 작품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앤솔러지인데 선정 기준을 잘 모르겠다는 것도 조금 아쉬웠어요. 누가, 무슨 기준으로, 어떻게 선정하여 출간한 것일까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대략 2.5점입니다. 1권과 거의 동일한 분량과 볼륨을 자랑하는 2권도 있는데, 읽어볼지 말지는 조금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들 욕망의 도구" 

'나'는 죽기 전, 짐 오빠를 만나 그가 로니 언니를 이용했던 70년 전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듣기로 결심했다. 1931년, 아버지 가출 후 어려워진 가족을 위해 짐 오빠가 로니 언니에게 몸을 팔게 했었던 사건이었다...

끔찍했던 과거에 대한 회상에서 시작해서, 몸을 팔았던건 로니 언니가 아니라 짐 오빠 자신이었다는 충격적 반전까지 완벽했던 단편입니다. 탁월환 회상과 심리 묘사는 독자를 반전으로 이끄는 선입견을 잘 쌓아 올려주고요. 

아빠 실종에 관련된 설정은 지금 읽기에는 뻔하고, 짐 오빠의 고백 후 결말까지가 조금 늘어지는 감은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은 사소합니다. 단편의 맛을 잘 살린 걸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밤과 낮 사이" 

표제작. 주인공이 겨우 열기구에 매달려 있고, 두 명이 열기구에서 떨어져 죽거나 불구가 되는 첫 장면부터 호기심을 자아내는 범죄 스릴러입니다. 주인공들이 뜬금없이 열기구에 매달리게 된 배경이 흥미로울 뿐 아니라, 결국 열기구 속 아이를 잃게 된 아버지이자 살인 강도인 브래들리가 주인공에게 복수심을 품고 습격해서 죽이기 일보 직전까지 가는 과정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하지만 브래들리가 탈옥해서 주인공을 습격한 뒤의 이야기는 모두 작위적이라는건 단접입니다. “전적이 있는 은행 강도로 풀려난 지 고작 이삼 일 만에 기구를 탈취해서 도와주려던 착한 이웃을 죽게 만든 놈인데, 그래 그놈을 튀게 놔뒀다고요?”라는 주인공 말 처럼 쉽게 이루어진 브래들리의 탈옥, 브래들리가 탈옥 후 주인공 집을 바로 찾아와 주인공을 납치한 것, 마지막 죽기 일보 직전에 사라진 열기구를 발견하는 것 등 모두가 말이지요. 주인공이 브래들리가 3만달러라는 돈을 숨겨놓았을 코인 락커 열쇠를 강탈한 뒤 죽게 만든다는 것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였고요.

또 주인공의 뉴요커 스타일 심리 묘사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가득차 있는 작품이라면, 주인공은 보다 현실적으로 묘사하는게 나았을것 같습니다. 아니면 주인공이 3만 달러를 거의 손에 넣었지만, 로키 산맥 끝자락까지 몰고 왔던 머스탱이 고장나서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게 될 거라는, 쇼트쇼트스러운 결말로 마무리하던가요.

그래도 도입부만큼은 역대급이며 스릴과 서스펜스 측면에서는 충분히 합격점을 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환상특급"같은 TV 시리즈로 만들었어도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책 제본가의 도제" 

베네치아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던 미국인 졸리 매독스는 부유한 괴짜 노인 샌본과 친해진다. 그는 졸리와 여자 친구 루치아를 식사 자리에 초대하는데....

굉장히 뻔했던 작품입니다. 제목과 책 제본에 대한 장인 정신 가득한 묘사, 희귀 서적 수집가와 책 제본가가 루치아의 피부 문신을 열광적으로 바라보는 묘사 등에서 결말이 쉽게 예상된 탓입니다. 마지막에 졸리가 받은 선물이 인피로 제본된 책이라는것 역시도 뻔했고요. 

샌본과 제본가 주치니가 인피 제본 책을 졸리에게 선물할 이유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졸리가 책 제본에 매력을 느껴 제자가 될 것을 결심할 거라는걸 알려줄만한 단서는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이래서야 편의적인 전개에 불과하지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별다른 재미도 느끼기 힘들어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차라리 졸리는 사실상 이용가치가 없고 루치아의 인피만 중요한 상황인 것 처럼 끌고 가서 결국 졸리가 체포되도록 만드는 결말이었더라면 더 나았을겁니다. 졸리의 여자친구 사체 (머리?)를 여행가방에 몰래 넣어 두는 식으로요.

"스킨헤드 센트럴" 

짐 부부는 아들을 잃은 뒤 시골 마을로 이사왔다. 그곳에서 스킨헤드 머리를 한 데일에게 집안 일을 시킨 뒤, 짐 아내의 패물이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뒤, 데일의 동생 제이슨이 패물을 돌려주는데...

가정 폭력에 따른 범죄를 그린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뭘 말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더군요. 이야기가 명쾌하지 못해요. 동생 제이슨을 폭행한건 형 데일인지? 그렇다면 형 데일을 폭행해서 사과하게 만든건 그 아버지인지? 짐 부부 집에 데일이 불을 지르려고 한 이유는 무엇인지? 등이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또 형제의 아버지가 폭력 성향을 간직한채 10여년을 살아왔다고 해도, 데일이 저지른 범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애초에 데일은 절도를 저질렀고, 이는 맞아도 싼 짓이었으니까요. 때문에 아이를 매질했다고 짐이 이야기하는건, 그 아버지 말대로 오지랖에 불과합니다. 

마지막에 집에 불을 지른 데일을 육군 훈련소에 보내는 결말도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당연히 경찰을 불렀어야 했습니다. 방화는 굉장한 중범죄니까요. 이미 성인이 된 데일은 그에 대한 책임을 졌어야 합니다. 비교적 길게 설명되는 짐 부부 아들이 죽은 비참한 사고도 이야기를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일조합니다. 데일 가족 이야기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요. 데일을 자기 아들처럼 여겼다? 이 역시 오지랖이죠.

좀 있어보이는 드라마를 쓰려고 했지만, 알맹이는 그닥인 모래성같은 이야기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심술생크스 여사 유감" 

늙은 노파가 온갖 사람들에게 심술궂은 편지를 보내는 취미가 있다는 설정은 고전 영국 추리 소설에 등장하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고전 속에서 이런 편지는 은근한 협박이나 스캔들 폭로였던 반면, 이 작품 속 생크스 여사의 편지는 훨씬 적나라하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고전이 은근한 심리 서스펜스라면, 이 작품은 현대물답게 스플래터 하드고어물인 셈입니다. 편지를 받는 사람들 상황 묘사와 엮어서, 독자에게 이 노파는 죽어도 싸다는걸 확실히 알려주거든요. 살인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교사 시절 학생의 게이 성향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던 행위가 대표적입니다. 정말 치가 떨릴 지경이었어요. 진작에 살해당하지 않은게 신기할 정도니 말 다했지요. 마지막에 생크스 여사가 살해되지만, 동기를 가진 인물이 너무 많아서 범인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고요.

'끔찍한 범행'과 '처단' 자체의 자극적 쾌감에 비해 이야기가 평이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재미를 주는 작품이란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첫 남편" 

잘 나가던 변호사 리오나드가 아내의 첫 남편 사진을 발견한 뒤, 자격지심과 질투로 오해를 만들고, 결국 첫 남편 야드만을 죽인다는 범죄극입니다. 비교적 분량이 긴데, 리오나드가 붕괴해가는 심리 묘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탓입니다.

긴 만큼 디테일한 묘사는 좋지만, 전개는 평이합니다. 리오나드가 야드만을 죽인다는 결말은 뻔했고요. 아내 발레리도 죽였을 거라는 암시가 살짝 등장하기는 하는데, 제대로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야드만을 죽인 뒤, 그의 렌트카를 타고 돌아와야 하는 상황에서 차안에 있던 야드만의 애견에 의해 습격을 당해 죽거나 범행이 드러난다는 결말이 훨씬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지금도 개 때문에 범행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우연히 지나가던 차량이 있었다는 작위적인 전개에 기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길이만큼 좋은 작품은 아니었어요

"운이 좋아" 

텔레파시 능력자 수키 스택하우스와 마녀 아멜리아 브로드웨이에게 보험 사업을 하는 그레그가 사건을 의뢰했다. 누군가 그의 사무실에 침입해서 서류철을 뒤졌는데, 누구인지 알아내 달라는 의뢰였다.

텔레파시 능력자, 마녀, 뱀파이어, 마술사 등이 나오는 판타지 범죄물로 그레그의 경쟁 업자 중 한명이 그레그의 비정상적인 행운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서류철을 뒤졌다는게 진상인데, 이를 수키 스택하우스가 더듬어 밝혀내는 과정은 꽤 재미있습니다. 이런저런 소동으로 뒤섞인 상황에 대한 정리도 깔끔하고 유쾌하게 묘사하며, 판타지적인 설정과 능력들을 조사 과정과 이야기에 잘 써먹고 있는 덕분입니다.

하지만 만화스러운 설정만큼이나 만화스러운 전개는 아쉽습니다. 디테일을 챙기지 않고 대충 넘어가는게 많아요. 그레그가 주변 행운을 빨아들여서 사업이 잘 되었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이거야말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기 충분한 설정인데, 어떻게 동작하는지 설명도 없이 그냥 끝나버리고 말거든요.

그래도 재미만큼은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아버지날"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 단편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벌어졌던, 더운 날씨에 차 안에 방치되어 사망한 아이 사건이 그려집니다.

아이에게 장애가 있었고, 그 때문에 부모가 의도적으로 아이를 방치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게 진상인데, 아내와 남편을 분리시킨 뒤 심문하여 이를 이끌어내는 과정 묘사가 빼어납니다. 아내가 먼저 자백했다며 자백을 유도하는 장면은 그 중 백미이고요. 또 그냥 심증이 아니라 '이미 그만 둔 보모를 재 고용하는 광고를 내지 않은 점' 에 착안하여, 어차피 아이가 죽을걸 예상했다는 추리를 이끌어내는 것도 좋았습니다.

조금 아쉬웠던 점이라면, 부모 시점에서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게 얼마나 힘든지가 전혀 설명되지 않았던 부분입니다. 아무래도 범인의 동기가 치열하게 드러나지 않는 탓에, 드라마의 깊이가 부족했어요. 전개와 결말도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 있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경찰 수사물로는 기본은 하는, 좋은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과연 저명한 해리 보슈 시리즈다웠달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개 산책 시키기" 

토론토에 사는 부유한 미시 로라 프랜시스는 개 산책 중에 단역 배우 레이를 만난 뒤 불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레이와 함께 하기 위해 남편 로이드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데...

정부에게 남편 살인 청부를 맡기지만, 남편이 선수쳐서 정부는 죽고, 선수친 남편도 정부가 의뢰했던 살인 청부업자에게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딘가에서 많이 보아왔던 -헨리 슬레셔였던가요? - 뻔하디 뻔한 내용이라 한숨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포르노를 연상케 하는 로라와 레이가 벌이는 질퍽한 정사 장면 묘사는 그나마의 수준을 더 낮고 저렴하게 보이게 만들고요. 이럴 바에야 뻔해서 짝퉁스러운 반전을 끼워넣지 말고, 포르노에 가까운 싸구려 펄프 픽션으로 갔어야 했습니다. 그럼 지금보다는 조금 더 볼 만한 부분이 있었을겁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모자족인" 

부유한 의료기기 사업가 제더버그 마틴이 살해당했다. 스무살이나 어린 젊은 아내 나네트는 정체불명의 거한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데....

언니의 전 남자 친구인 카일 헤이에스 형사 밑에서 일하게 된 감식관 테스 캐시디가 주인공인 작품. 

단서, 증거, 동기 모두 애매하고 설명은 부족하지만, 본격 추리물입니다. 테스 캐시디가 몇 가지 단서와 정보를 가지고 귀납법 추리를 통해 범인을 밝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서는 두가지입니다. 고인이 생전에 불을 두려워했으며, 친아들이 반대하는데도 나네트가 화장을 고집한 이유가 첫 번째, 흉기인 도끼에 찍힌 커다란 엄지손가락 지문이 두 번째입니다. 테스는 도끼에 찍힌 엄지손가락 지문은 고인의 엄지발가락 지문이었고, 이를 감추기 위해 화장을 서두른 것으로 추리합니다.

이 엄지발가락 지문에 대한 추리를 우연히 테스가 알게 된 '모자족인' - 아이가 바뀌는걸 방지하기 위해 엄마의 손가락 지문과 어린아이의 엄지발가락 지문을 찍는것 - 과 연결시키는 전개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현대 법의학으로 발가락과 손가락 구분이 불가능했을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설령 구분이 불가능했다 치더라도, 동기가 있는건 나네트와 아들 스티븐 뿐이니 어떤 식으로든 범행은 드러났을테고요. 이런 점에서 현대물보다는 근대물에 더 적합했으리라 생각되네요. 아울러 테스와 상관과의 관계도 전개에는 불필요한 요소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뱁스" 

라스베이거스를 무대로 한 뒷골목 싸구려 범죄극. 주인공이 스트리퍼 뱁스와 함께 마약 전달책을 찾아가 마약을 강탈해오는게 전부입니다. 온갖 비속어가 난무하지만 특기할 만한 내용은 전무합니다. 주인공이 때때로 '십자가'를 본다던가, 대학교를 나왔다던가 하는 기묘한 설정이 덧붙여져 있는데, 작품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도 않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죽음과도 같은 잠" 

묘지 관리인 그레이브 디거는 과거 마크 틴들이라는 과거 용병이었다. 실수로 포로가 되었었지만, 상관 월터 잭슨의 희생으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묘지에 월터의 시신이 매장되게 되는데, 얼빠진 아르바이트생들이 시신을 모욕하자 그는 용병 마크 틴들로 돌아간다....

그레이브 디거가 용병으로 돌아온다는, 영화로 따지면 캐릭터 탄생을 알리는 도입부 격입니다. 그나마 마지막 각성은 조각내버렸다는 한 마디로 끝이고요. "존 윅"에 빗대어 보면, 자동차와 개의 복수는 하지도 않고, 다시 킬러로 각성해서 집에 쳐들어온 마피아 조직원을 죽이는 장면에서 이야기가 끝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완성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없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즐거운 응원단" 

고등학교 응원단에 미모의 호랑이 코치가 부임했다. 그녀는 단원들에게 맹훈련을 시켰는데, 단원 중 3명은 그녀가 스터드 하사와 불륜을 저지르는걸 목격했다. 코치는 그녀들을 꼬드겨 친해지지만, 3명 중 한 명인 베스의 도발로 결국 트러블이 일어나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코치가 불륜을 저지른 뒤 아이들을 입막음 시키려고 억지로 친한척을 한건 알겠어요. 아이들 중 한 명인 베스가 계속 입을 놀리자 그녀를 견제한 것도 알겠고요. 

하지만 코치라는 사람이 아이들을 데리고 불륜남 친구들과 마약 파티를 벌인다? 한국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불륜남 스터드의 친구 프라인이 베스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결말도 뭔가 싶어요. 죽인 것도 아니고, 설령 이 자리에서는 죽였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될게 뻔하잖아요? 볼짱 다 본 막장 인생 이야기도 아닌데, 왜 이렇게 설명되지 않고 답없는 전개와 결말을 그려냈는지 알 수가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교차로" 

3인조 은행 강도인 잭 일당은 서부 텍사스 일대를 떠돌다가, 교차로에 있는 작고 낡은 주유소 겸 잡화점에 들르게 된다. 그곳에서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던 더브와 로이간에 다툼이 벌어지고, 둘은 충동적으로 가게 주인인 노부부를 살해한다. 둘은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두목 잭의 분노가 두려워, 잭에게도 총격을 가하는데....

서부 텍사스의 황량한 묘사, 그리고 작은 가게에서 벌어지는 총격전 묘사가 볼 만했던 범죄 액션극. 가게를 찾은 꼬마가 가지고 있던 총으로 잭이 기사회생하고, 꼬마가 잭의 새로운 동료가 된다는 결말은 독특했습니다. 주어진 암시와 내용을 보면 잭은 악마이고, 나이가 들어 쓸모없어진 인간 부하들을 때때로 교체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별다른 내용은 없지만 액션 장면만으로도 별점 2점은 충분합니다.

"악마의 땅" 

소몰이꾼 출신으로 서던퍼시픽 철도탐정으로 일했지만 해고당한 형제는, 핑커튼 탐정사 취직을 위해 바바리 해안으로 향했다. 구스타프 형은 사람을 관찰해서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내는, 셜록 홈즈같은 취미가 있었다. 하숙집 주인 메그가 둘에게 수상쩍은 일자리를 제안했다. 구스타프는 동생에게 일행인걸 들키지 말자고 말했고, 찾아간 술집에서 갑작스럽게 구스타프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출판사에 보낸 원고에 대해 기묘한 독촉을 하는 편지에서 시작해서, 편지를 쓴 사람이 형 구스타프와 겪었던 사건으로 끝나는 작품.

사람이 술집에서 삽시간에 사라져 버린 불가능 범죄를 다루고 있는 본격물로 셜록 홈즈만큼 똑똑하다는 구스타프 형이 아니라, 힘쓰는 쪽인 동생이 추리를 하는 탐정과 이야기를 하는 화자 역할인 왓슨, 그리고 액션 담당인 브라운 신부의 동료 프랑보우 역할까지 수행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셜록 홈즈의 경구를 떠올리며 추리하는 과정은 홈즈 팬에게는 큰 즐거움이었고, 설득력도 높습니다. 술집에서 급작스럽게 피아노를 친 이유는 '소리'를 감추기 위해서이며, 좌, 우로 빠져나갈 수 없다면 위나 아래로 사라졌을 거라고 추리하는 식입니다. 결국 동생은 바닥에 문이 있다는걸 알아내고 형을 구해내게 되지요. 

또 소몰이꾼 1인칭 시점의 말투로 전개하는 묘사, 특히나 중간중간 삽입된 소몰이꾼 감성 유머가 아주 유쾌해서 마음에 들었어요. 근대 미국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약간 무식한 막노동꾼 탐정이 등장하는 본격물이라는 점에서 "탐정 피트 모란"이 살짝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바닥의 문은 셜록 홈즈 운운하지 않아도 관찰만 한다면 알아낼 수 있었을 거라 생각되고, 메그의 술집에서 벌어진 다툼같은 불필요한 요소는 감점 요소이지만, 장점이 명확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시리즈로 보이는데 다음에는 구스타프 형이 활약하는 이야기도 읽어보고 싶네요.

"킴 노박 효과" 

제목은 주인공이 벌이는 사기의 명칭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그가 애착을 가진 존재를 등장시켜 사랑에 빠지게 한 뒤 돈을 울궈내는 사기지요. "현기증"에서의 킴 노박 역할에서 따 와 붙인 이름이라고 하네요.

주인공의 킴 노박 효과 사기 생각이 이어지다가, 주인공이 정조역전세계처럼 나이든 과부들에게 킴 노박 효과를 일으키며 돈을 빼 먹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결말은 독특했습니다. 이게 바로 남녀평등이겠죠. 질퍽하면서도 상세하게 묘사된 범죄와 심리 묘사도 볼거리였습니다. 엘모어 레오나드의 작품들이 떠오를 정도였어요.

하지만 '주교님'에게 사로잡힌 주인공이 빠져나온 뒤, 남창 역할을 하게 되는 결말은 설명이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완벽한 범죄자였던 주인공을 몰락시키려면, 정교한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쉽게 약점을 잡혀버려서 인생이 막장에 몰려 버린다면, 앞서 대단해 보였던 사기와 범죄 행각에 대한 장황한 묘사도 힘을 잃을 수 밖에 없고 결국 이 작품은 시간 낭비에 불과해버리고 마니까요.

주인공과 성형외과 의사, 킴 노박 효과를 일으켰던 배우, 피해자 등의 시점을 오가는 전개는 괜히 복잡하게 보일 뿐, 이야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또 킴 노박 효과도 의문스럽습니다. 어떤 사람이 옛날 사랑했던 애인이나 전처, 혹은 영화배우와 비슷한 외모의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게 과연 사기일까요? '그 사람이다!'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분명 다른 사람이라는건 당하는 사람도 알고 있는 상황이잖아요. 거짓말로 돈을 울궈내는건 사기일 수는 있지만, 이 정도면 추억에 대한 댓가로 보는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이들고 부자인 남자가 젊은 여자를 만나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작품은 단편에 어울리지는 않았어요. 훨씬 길고 정교한 작품으로 만들었어야 했습니다.

2021/05/21

n분의 1의 함정 - 하임 샤피라 / 이재경 : 별점 4점

n분의 1의 함정 - 8점
하임 샤피라 지음, 이재경 옮김/반니

여러가지 상황과 게임을 예로 들어 게임 이론을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 주는 교양서입니다. 

게임 이론은 참가한 선수들간에서 누군가의 결정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상호작용 상황에서, 전략적으로 어떤 결정을 할지 예측하는 학문입니다. 선수들의 목표는 본인의 이득 최대화이고요.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여서 책 소개만 보고 흥미가 동했었는데, 읽다보니 의외로 수학 이론 책 치고는 재미까지 있어서 놀랐습니다.

재미있는 이유는 게임 이론에 대해 여러가지 실제 게임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죄수의 딜레마'를 비롯하여 '공갈협박범 딜레마' '최후통첩 게임', '남의 떡 역설' 등 제목만 보아도 어떤 게임인지, 어떤 전략을 쓰는지 두근두근하게 만들거든요. 

'최후통첩 게임'은 두 사람이 정해진 돈을 나누는 게임입니다. A가 B에게 얼마를 주겠다고 제안한 뒤, B가 수락하면 각자 제안대로 돈을 나눠 갖고, B가 거부하면 둘 다 한 푼도 못 받는 룰입니다. 재미있는건, 남자는 상대 여자가 미인이라고 해서 딱히 더 후하지 않았지만 여자는 매력적인 남자에게 훨씬 후한 제안을 했다는 실험 결과였습니다. 저자는 여자들은 1회성 게임을 시리즈 게임으로 발전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현실세계에서는 여성이 이런 성향 때문에 남성보다 전략적이고 창의적인 우위를 점한다고 하네요. 자신의 행동과 대처가 상대에게 장기적 영향을 미치기를 바라는 성향은 의사결정 프로세스에서 매우 중요하고 각장 환영받는 자질이기 때문이랍니다. 한 번 만남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기일회 정신은 이미 낡아버려 시대에 맞지 않는 걸까요? 또 이른바 '뒷끝을 남기지 않는' 남자들 성향이 오히려 장기적 전략에는 해가 되는게 아닌가 생각도 해 봅니다.

'추측 게임'을 통해 예상과 다른, 황당한 결과가 초래되는다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여러 명의 사람들에게 0부터 100까지 숫자를 고르라고 한 뒤, 이 숫자의 평균을 내고 0.6을 곱한 결과에 가장 근접한 숫자를 고른 사람이 이기는 게임입니다. 여기서 수학적으로, 전략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은 '0' 입니다! 사람들이 무작위로 숫자를 고른다고 한다면, 평균은 50이니 50에 0.6을 곱한 30이 정답이지요. 하지만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해서 30을 고른다면? 18을 선택해야 합니다.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렇게 계속 진행되어 정답이 0이 되는 거지요. 하지만 결과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게임 참가자들이 모두 현명하고 합리적이지도 않으며, 현명하고 합리적이라 하더라도 감정에 휩쓸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감정이야말로 예측하기 힘들다는 뜻이지요.

'내시 균형'에 대한 상세하고 다양한 설명도 흥미로왓씁니다. 내시 균형은 상대의 전략에 대응하는 나의 최적 전략과, 나의 전략에 대응하는 상대의 최적 전략이 일치하는 경우를 뜻합니다. 몇 명의 간수가 대량의 포로를 이송하는게 가능한 이유도 바로 내시 균형 덕분이라네요. 포로들이 단체로 탈추하거나 폭동을 일으켜 공격하면, 성공할 가능성은 높지만 시도한 누군가는 죽거나 다치게 되겠지요. 즉, 내 입장에서 내시 균형은 탈주나 폭동이 일어날 경우,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죄수의 딜레마'야 말로 내시 균형의 가장 좋은 예입니다. 상황 종료 후 자신의 선택과 결과를 후회하지 않으려면 배신을 선택하는게 최적의 전략이기 때문이에요. 상대가 침묵하거나 배신하거나, 배신한 쪽만 후회할 일이 없으니 당연합니다.

'내시 균형'을 만들기 위해서는 '목표'를 명확히 세워야 한다는 내용은 굉장히 와 닿았습니다. 사랑의 작대기와 같은 룰의 '쌍쌍 파티'를 통해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지요. "나는 누가 봐도 최고인 A와 파트너가 되어야겠다!"라는게 목표면 무조건 A에게 표를 주어야 합니다. 대안은 없으니까요. 반대로 "나는 최악인 Z만 피하면 된다!"라는게 목표면 Z 바로 위의 Y에게 표를 주는게 최적의 전략이고요. 각자 무엇을 먹던, n분의 1로 식대를 지불하는 상황도 마찬가지에요. 목표가 "나는 절대 손해를 보지 않겠다!"인지, "나는 A를 꼭 먹겠다!"인지, 아니면 "나는 무조건 돈을 적게 내겠다!"인지에 따라 주문하는 메뉴가 달라지게 되겠죠.

하지만 내시 균형 전략이 적용될 수 없는 상황도 있습니다. '자원자 딜레마'가 그러합니다. 이는 n명의 사람들이 한 방에 모여 있을 때, 최소 한 명이 자원자로 나서면 전원이 두둑한 상금을 받지만 자원자는 상금에서 위험 비용을 제한 금액을 받는 상황 속 딜레마를 뜻합니다. 이 게임에서 내시 균형 전략에 따라 자원하지 않는다면 한 푼도 못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한 혼합 전략으로 대응해야 한다네요. 또 내시 균형 전략에 따른 해법이 오히려 최적의 해법과 상극인 상황도 존재합니다. '여행자의 딜레마'라고 부르는데, 두 명에게 5달러에서 100달러까지 원하는 대로 돈을 써 내라고 하고, 둘이 같은 금액을 쓰면 같은 금액을 주지만 금액이 다를 경우는 낮은 금액을 쓴 사람에게 5달러를 더 주고 높은 금액을 쓴 사람에게서 5달러를 공제한다는 딜레마입니다. 여기서 내시 균형에 따른 최적 전략은 5달러를 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를 극대화하는게 우선 목표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면 99달러를 써야합니다. 99+5달러가 최선이니까요. 하지만 상대도 바보가 아니라서 98달러를 쓰고... 이런 생각이 반복되어 결국 둘 다 5달러를 써 내는 선택만이 후회가 남지 않게 됩니다. 뭔가 익숙한 상황이 많이 떠오르네요.

죄수의 딜레마를 연장한 게임에서 필승 전략인 '팃포탯' 전략도 기억해 둘 만 합니다. 이 전략은 출발은 신사적으로, 두번째 게임부터 상대가 직전에 했던 행동을 따라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상대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 줄까가 아니라, 상대가 내게 먼저 어떻게 했는지를 생각해서 행동하라는건데, 실제 상황에서도 많이 통용될 수 있는 전략이라 생각됩니다.

이외에도 사슴 사냥 게임처럼 신뢰와 협력이라는, 그야말로 사회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게임 이야기라던가 통계 관련 이야기, 도박장에의 전략 등 눈여겨 볼 만 한 재미있는 내용이 가득합니다. 도박은 한 번에 과감하게 가는게 좋다네요. 내가 불리한 게임은 게임 횟수를 최대한 죽이는게 맞는 전략이라면서요. 나름대로 그럴듯합니다. 영국 정치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했다는 말대로인 거지요. “절벽 사이를 두 번에 나누어 뛰는 것만큼 위험한 짓도 없다 단지 수학 이론서나 교양서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필요한 전략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도 좋은 독서였고요. 목차가 잘 정리되지 못한 느낌이 드는건 아쉽지만, 그 외에 별로 흠잡을 부분은 없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마지막 장에 요약되어 있는, 주옥과 같은 게임이론 가이드라인 중 몇가지를 공유하며 리뷰를 마칩니다.

- 협상에 임할 때 유념해야 할 세 가지
첫째, 아무런 합의 없이 회담이 결렬될 가능성을 참작해야 한다.
둘째, 게임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셋째, 자신의 노선과 마지노선에 깊은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고수해야 한다.

- 게임의 수학적 해법을 너무 믿지 말 것. 수학적 해법은 질투심, 모욕감 같은 중요한 감정들과 그것들이 만드는 변수를 간과하기 일쑤임.

- 어떤 결정이 됐든 의사결정을 하기 전에, 만약 모두가 나처럼 생각한다면 일이 어떻게 될지 한 번쯤 자문해볼 것. 동시에 모두가 나처럼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사실 또한 기억할 것.

- 목표가 단순히 이기는 것이라면, 괜히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고 상황을 복잡하게 풀면서 곁길로 빠지지 말 것.

- 게임에서 내가 ‘불리한’ 입장에 있을 때는 되도록 게임의 횟수를 줄여야 함. 약자에게는 한판승이 가장 승산이 높다. 위험을 회피하려 애쓰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다.

2021/01/16

스파이스 - 잭 터너 / 정서진 : 별점 2점

스파이스 - 4점
잭 터너 지음, 정서진 옮김/따비

스파이스, 즉 향신료가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그리고 왜? 향신료가 이렇게 큰 인기를 끌고 교역 대상이 되었는지를 상세하게 알려주는 식문화사이자 미시사 서적입니다.

이 중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부분은 굉장히 흥미로왔습니다. 책이 향신료 교역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그리스, 로마 시대 부터가 아니라 콜럼버스, 바스쿠 다 가마 등 포르투칼과 스페인 탐험가 이야기에서 시작되는데, 읽다보니 그 이유를 알겠더군요. 이 부분이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니까요. 모험과 탐험 이야기이니까 당연하겠지요. 특히 다 가마가 인도 캘리컷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간단한 제노바어와 카스티야어를 할 수 있던 튀니지인을 만났던 순간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 튀니지인 : 빌어먹을, 당신네들이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지?
  • 데그레다도 (처음 외지인과 접촉하는 사람) :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향신료를 찾아서 왔다.

이 엄청난 대모험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이후 포르투칼인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캘리컷에 포격을 퍼붓고 잔인하게 포로를 죽였다는데, 유럽인들의 자기 중심적인 논리가 극초기부터 작용했다는건 씁쓸하네요. 그들이 '미개인' 이라고 불렀던 신대륙이야 그렇다쳐도, 그들 이상의 문화와 문명을 가진 다른 세계는 대화를 통해 협조를 구하는게 마땅했습니다. 하긴, 이런 자국 중심 논리는 지금도 없어지지 않았지요.

그리고 본격적인 향신료 무역 역사가 소개되는데, 로마 시대에 이미 인도와의 향신료 교역로가 개척되어 존재했다는건 놀랍더군요. 이집트가 로마의 속주라 홍해를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었던 덕분입니다. 홍해를 지나 아라비아 반도, 인도양을 지나 계절풍을 타고 서고츠 산맥 근처 항구에 기항하는 항로였습니다. 여기서 확보한 후추 및 각종 향신료는 로마 사회에서 널리 쓰였습니다. 가격도 우리 생각만큼 비싸지는 않더라고요. 후추 1파운드 (450g)가 자유 노동자 이틀치 일당이었다니, 대충 최저 시급을 9천원으로 계산하면 14만원 정도 되는 셈입니다. 100g에 3만 2천원 정도라면. 아주 대단한 사치품이라고 하기는 조금 어렵겠지요.
조금 의외였던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 향신료를 항상 과하게 사용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 도를 넘는 향신료 소비가 이어졌고, 이러한 향락, 사치 풍조가 로마 멸망의 원인이니, 향신료도 로마 멸망에 일조한 셈입니다. 이후 이슬람 세력이 홍해 항로를 장악하며 직접 교역이 끊기면서 비잔틴, 이슬람 상인을 통해 향신료를 수입해 사용하다가 앞서 설명한 포르투칼과 스페인에 의해 대항해 시대가 열려 향신료 수입 무역이 재개되었으며, 포르투칼과 스페인의 패권이 네덜란드, 영국에 의해 무너지고 현재에 이르는 과정이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향신료가 이렇게 널리 사용되고, 큰 돈을 벌어다 주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는데 몇가지 핵심만 요약하자면, 일단 유럽인들은 향신료가 파라다이스, 즉 지상낙원에서 자란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종교적 상상을 뛰어넘는 일종의 진리이자 신조에 가까왔다고 하네요. 즉, 향신료는 에덴 동산에서 온, 기쁨과 같은 의미를 가진 어휘였던 거지요. 향신료 중에는 이름이 아예 grains of paradise라는 것도 있었다니까요. (지금의 멜레구에타 후추입니다) 그래서 '향기' 를 이용하기 위해 종교적으로 굉장하 중요하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중세 의학의 중심이었던 체액론에서 향신료가 중요한 요소였던 탓도 큽니다. 건강, 그리고 '성' 측면에서 향신료가 치료제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음식 부패가 심해서 냄새와 맛을 감추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향신료를 사용하는 것 보다 새로 재료를 사는게 더 싸니 당연하겠지요. 오히려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순절이나 겨울철에 보존을 위해 소금에 절인 생선 등만 먹는 경우가 많아서 향신료가 어쩔 수 없이 사용되었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향신료 와인은 당시 술의 품질이 굉장히 떨어져서 생겨났다고 하고요. 이외에 당연히 사치, 과시를 위해 쓰여진 측면도 존재했기에, 이런 이유들로 왕실에서는 많이 사용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비쌌고, 무역업자들에게는 큰 이익을 가져다 주었죠.

근대로 접어들면 후추는 수입이 늘어나며 꾸준히 가격이 하락했고, 상류층 관심은 좀 더 희귀한 향신료로 이동하였다고 합니다. 클로브나 넛메그같은 향신료로요. 넛메그를 손에 넣기 위해 네덜란드가 뉴암스테르담, 즉 뉴욕을 포기한 이야기도 등장하는데, 다른 곳에서는 러시아가 알라스카를 미국에 판 것과 비슷한 멍청한 행동으로 소개되지만, 당시에는 충분히 그럴만 한 행동이었어요. 네덜란드가 넛메그로 벌어들인 이익은 원가의 2,000%에 달했다고 하니까요. 몇 년 장사를 잘 했다면, 다시 돈으로 뉴욕을 확보할 수도 있으리라 여겼겠죠. 

뒤이어 설탕, 차, 초콜릿, 커피 등에게 그 지위를 넘겨준 현재가 짤막하게 소개되고 책은 마무리됩니다. 스파이스 시대의 종말이 찾아온 이유는 간단합니다. 스파이스가 흔해졌기 때문입니다. 종교 개혁 이후 탐욕을 금했고, 종교 시장에서 향신료는 퇴출되었으며, 근대에 접어들면서 향신료가 가지고 있었던 이런저런 신비로운 이미지는 모두 희미해지고 재료의 맛을 강조하는 레시피가 유행하는 등의 영향도 컸고요. 이 책에 언급된대로 지금은 향신료를 많이 쓴 요리는 왠지 모르게 후진적이라는 이미지가 덧 씌워져 있지요.

이렇게 큰 틀에서 향신료, 스파이스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데, 문제는 단점도 크다는 겁니다. 제일 큰 단점은 지루하다는 점입니다. 특히 향신료가 널리 사용된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엄청나게 지루합니다. 종교적, 의학적, 식문화적 등의 이유가 나열되는데, 비슷한 이야기가 수백 페이지에 걸쳐 계속 반복되는 탓이에요. 주제별로 묶어서 핵심만 요약했어야 했습니다. 도판도 별다른게 없어서 더욱 그러합니다.

디테일한 설명은 좋지만, 너무 세부적인 부분에 집착해서 거시적인 흐름을 보기 힘들다는 단점도 만만치 않습니다. 향신료가 인기가 있었다는건 반복된 설명으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향신료 교역은 항로를 개척했던 몇몇 인물들과 몇몇 교역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만 소개될 뿐, 어떻게 항로와 무역 흐름이 진행되고 변화되어 왔는지가 설명되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국가간의 큰 흐름없이 세부적인 사건과 에피소드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포르투칼과 스페인이 향신료 교역을 직접 인도 항구에서 시도했다면, 그들은 무엇으로 교역을 했을까요? 또 어떻게 이들의 패권을 네덜란드가 빼앗아 올 수 있었을까요? 다른 유럽 국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 와중에 인도양을 지배하던 이슬람 세력, 그리고 동방의 맹주 중국은 왜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을까요?
또 항로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면서, 제대로 된 지도 하나 수록되지 않은 것도 큰 문제에요. 읽으면서 계속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는데, 불편하기도 불편할 뿐더러 항로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지도는 없어서 여러모로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분량은 방대하지만, 쓸데없이 길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직전 읽었었던 "외국어 전파담" 처럼 세계사적인 흐름과 합쳐서 더 큰 시각으로 볼 수 있도록 정리되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구태여 권해드릴 만한 책은 아닙니다.

2020/08/16

소년탐정 칼레 2 -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 햇살과나무꾼 : 별점 3점

소년탐정 칼레 2 - 6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논장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름 방학, 붉은 장미군과 흰 장미군의 처절한 (?) 전투가 벌어졌다. 흰 장미군이 빼앗은 붉은 장미군의 보물 '성상'을 지키기 위해 안데스는 에바 로타에게 성상의 위치를 옮겨놓을 것을 지시했고, 명령을 수행하던 에바 로타는 살인 사건 현장을 목격하고 말았다. 범인은 유일한 증인인 에바 로타를 없애고, 증거인 차용증을 회수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데...

1권에 이어 읽게 된 2권입니다. "녹슨 도르래"에서 도야마 점장이 추천한건 이 2권이기 때문입니다. 와카타케 나나미와 도야마 점장 모두 대단합니다. 제가 아동용 추리 소설 시리즈를 2권이나 사게 만들다니!

그런데 2권은 확실히 추천할만 하더군요. 1권에서 단점이라고 말씀드렸던 '장미 전쟁'이 이 작품에서는 글렌 할아버지 살인 사건복선으로 잘 활용되고 있거든요. 에바 로타가 차용증 때문에 다툼이 난 걸 알게된 것 부터 '장미 전쟁' 덕분이에요. 장미 전쟁 중 포로로 잡힌 안데스의 상태를 관찰하기 위해 글렌 할아버지 집 지붕에 올라가다가 할아버지와 손님이 하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니까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린 빈 집 지주 저택에서 에바 로타가 범인과 맞닥뜨렸을 때 위험을 알린 방법도 '장미 전쟁'에서 사용된 일종의 암호인 '산적말' 이며, 범인을 지주 저택에 한 개 밖에 없는 열쇠 있는 방에 가두는 데 성공하는 것 역시 '장미 전쟁' 때 한 번 갇혔었기 때문이고요.
에바 로타에게 배달된 초콜릿에 이 들었다는게 밝혀지는 이유도 '장미 전쟁' 덕분입니다. 안데스가 전쟁의 핵심인 '성상'을 숨기려다가 먹지 않고 남겨두었던 초콜릿을 개에게 주었는데, 개가 다음날 크게 아파서 독을 먹었다는게 밝혀지기 때문이죠. 에바 로타와 칼레가 초콜릿을 왜 안 먹었는지는 설명이 부족하지만 이 정도면 복선으로서 두말할 나위 없는 역할을 수행한 셈입니다. 

또 삼총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 경찰을 불렀던게 '붉은 장미군'이라는건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칼레가 오줌이 마렵다면서 숲에 들어가, 한창 전쟁 중이라 숲에 숨어있던 '붉은 장미군' 식스텐 삼총사에게 부탁을 해서 경찰이 도착하게 된 것이지요. 주인공 삼총사 외에 다른 지원군은 없을 거라는 맹점을 잘 파고든 좋은 이야기였어요.

그러나 고리대금업자가 살해당한다는 강력 사건이 등장하는 탓에 이게 정말 어린아이용 작품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듭니다. 범인이 유일한 목격자인 아이들마저 죽이려는 흉악범이라는 묘사 역시 그닥이었고요. 살인보다는 차용증 절도 정도로 좀 가볍게 (?) 넘어갔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쉬웠습니다. 아무래도 옛날이 이런 부분에서는 아동용이라도 가차없고 과격했던 듯 합니다.

그래도 별점은 3점입니다. 도야마 점장의 추천만큼의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3권도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2020/04/26

우연한 걸작 - 마이클 키멜만 / 박상미 : 별점 2.5점

우연한 걸작 - 6점
마이클 키멜만 지음, 박상미 옮김/세미콜론

여러 예술가들의 걸작들을 전부 10개의 주제로 나누어 왜 그 작품이 걸작인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책으로 예술에 대해 깊이있는 식견을 바탕으로 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하지만 전혀 쉽지는 않아요.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 설명하는 느낌이거든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많이 어려웠습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요약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몇가지 기록해 볼 만 한 내용들을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보나르의 작품들은 영원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현대 인상파'라 부를 수 있는 좋은 그림이기 때문에 걸작이라는군요. 도판만 보았을 때에는 인상파라기 보다는 좀 더 괴기 쪽에 가깝지 않나 싶지만요.
아마츄어리즘은 적은 노력으로 큰 만족을 얻는 쪽으로 발전했으며, 이는 밥 로스와 일맥상통하기에 밥 로스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습니다. 아마츄어들이 그림을 그리는 목적은 프로와 별 다를게 없다는 이유이기도 한데, 확실히 그런 부분이 있지요. 게다가 별다른 목적없이 그리거나 찍은 작품이 '우연과 실수'라는 측면에서 초현실주의와 연결되어 걸작으로 인정받게 된다는군요. 이유는, 이 책에 쓰여진대로라면 그 작품에서 무언가 놀랍거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걸작이라는 거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특히 현대 미술은 기존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과정도 포함되었다고 하니 더더욱 그러해 보여요.
문제는 그런 평을 전문 비평가가 해야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는 진정한 아마추어리즘과는 좀 분리된게 아닌가 싶은 생각은 드네요. 철학자이자 미술 평론가 아서 딘토는 아름다움은 더 깊은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어떤 것이라고 했는데, 이 노력에 대한 설명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작품의 수준이 판가름날 테니까요. 제가 '이게 걸작이야!'라고 제 딸 아이 그림을 평가해도 세상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요? 결국 다 평론가들 놀음이라는 점에서는 입맛이 좀 씁니다.

또 시대에 따라 경험이 변해서, 아름다움의 정의가 변한다는 것도 와 닿았습니다. 명확한 사실이니까요. 현대에 사는 우리가. 여러가지 매체에서 수없이 보았을 '모나리자'를 보고 놀라움을 느낄 이유는 전혀 없지요. '놀라움' 을 느낄 여지가 적어졌다는 점에서, 현대는 정말 예술을 하기 힘든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존 케이지의 음악처럼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도 못할 기괴한 발상이 난무하고 있죠.
그래도 재미있는 작품과 발상들이 몇 가지 눈에 뜨이기는 합니다. 저자의 친구 알렉스의 서재가 대표적입니다. 알렉스는 원룸 집 벽에 나무 책장을 들여 놓았는데, 책으로 가득차 책 한 권을 더 꽂으려면, 그 두께만큼 다른 책을 빼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서재는 자츰 진화하고, 가꾸는 물건이 되었으며 결국 알렉스 자신을 표현하게 되었죠. 여기에 더해 가차없으면서도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기에 이는 예술이며 작품이 되었다는 논리인데, 그럴듯합니다!
존 레넌의 아내였던 오노 요코의 작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존 레넌을 유혹하는데 성공한 외국 여자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상당한 수준의 교육과 깊이를 가진 여성이라는건 처음 알았네요. '수동성'을 표현했다는 그녀의 여러가지 작품들도 인상적이었고요.
 수집 자체가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설명도 기억에 남습니다. 수집은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로, 감식안과 더불어 일종의 상징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등의 이유인데, 이유보다도 앨버트 C. 반스의 수집품이라는 실례로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만의 독특한 진열 방식으로 수집품이 진열되었는데, 덕분에 그림을 새롭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거든요.

오노 요코 외에도 새로 알게된 사실은 많아요. 화가들도 규칙적으로 생활하면서 그림을 그린다던가, 우리가 알고 있듯이 루이스 캐럴은 변태가 아니었다는 것, 보나르의 아내 마르트에 대한 집착 같은 것들 말이지요. 특히 보나르가 생의 마지막 시기에 옛 연인 르네를 그린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놀랍습니다. 보나르 작품에 언제나 등장하는 마르트가 잘 보이지도 않게 등장해서, 화면 중앙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르네와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보나르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궁금하지만, 르네야말로 그의 마음 속 천사였고, 마르트는 그를 뒤에서 지배하는 움울한 지박령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드네요. 르네가 마르트와 눈이 마주친건, 결국 지박령의 승리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굉장히 암울한 그림이라 할 수 있고요. 아,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니 이런게 예술인거겠죠?

몇가지 작품들에 대한 소개는 굉장히 흥미로와서 인터넷에서 더 많은 정보를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나치 포로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은 유대인 아가씨 샬로트가 죽기 직전까지 몰두하여 만들었다는, 1300쪽에 이르는 글과 그림으로 구성된 "인생? 혹은 연극?"이 대표적입니다. 그게 뭐든, 양이 많으면 일단 독보적인 무언가가 되는 듯 합니다.
자수로 프로야구 선수들 초상화를 만든 죄수 출신 작가 레이 매터슨의 작품들, 초창기 남극 탐험에서 목숨을 걸고 찍은 사진으로 불멸의 이름을 남긴 프랭크 헐리의 기록 사진들도 찾아볼 만 하더군요. 저자가 작품 창작 과정을 직접 관찰한 화가 펄스타인의 작품들 역시 괜찮았습니다. 한 점 구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도 많았어요. 그 중에서도 거대 작품, 해당 작품이 놓인 장소로 여행을 떠나야지만 볼 수 있는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가 제일 이상했습니다. 감상 순간의 주변 환경이 중요한 장소 특정적 예술이라는게 있다는 논리에서 시작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현대의 이런 작품들은 그냥 크기로 승부하는, 크기로 놀라움을 주는 단순한 아이디어가 전부가 아닌가 싶기 때문이었어요. 거대 기념비와 별 다를게 없는데 이게 과연 예술인가요? 화가나 조각가가 만들었다고 큰 돌덩어리가 예술이 되는건 아닐텐데 말이지요. 이에 비하면 일상 속 아름다움을 간단 명료하게 표현한 샤르댕이나 티보의 작품들이 훨씬 예술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도판이 부실한건 굉장히 아쉽네요. 컬러로 수록된 도판도 부족할 뿐더러, 그나마 수록된 도판들도 저자가 설명하는 작품들을 전부 담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궁금한건 인터넷으로 직접 찾아볼 수 밖에 없었어요. 그나마 수록된 도판도 흑백이 많아서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고, 예술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볼 계기가 되었으니 좋은 독서임에는 분명합니다. 단지 제 취향과 맞지 않았을 뿐이지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0/01/05

한 권으로 읽는 맛의 달인 미식 특강 - 카리야 테츠 / 김숙이 : 별점 2점

한 권으로 읽는 맛의 달인 미식 특강 - 4점
카리야 테츠 지음, 김숙이 옮김/창해

제목만 보면 "맛의 달인"의 엑기스만 모아놓은 책 같은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만화의 원작자 카리야 테츠가 저술한 음식 관련 에세이집입니다. "맛의 달인"에 수도 없이 등장했던, 여러가지 요리에 대해 작가의 생각을 풀어놓는 식의 이야기들입니다. 지금의 꽁치는 모두 냉동이고 너무 일찍 잡아서 예전의 맛이 나지 않는다, 지금의 닭고기와 돼지고기는 그냥 인공적으로 만든 단백질에 불과하다.. 같은 식으로요. 때문에 일부 글들은 뻔하고 지루합니다.

그러나 작가의 사고방식이나 라이프 스타일이 독특해서 재미있는 부분도 제법 됩니다. 예를 들자면 돈은 꽤나 번 것 같은데 다 먹어버려서 남은게 없다, 호주에서 살고 있는데 그곳의 진짜 맛있는 두부는 한국인 할머니가 만든다는 등입니다. 도쿄대 출신인 것도 처음 알았고요. 

아울러 "맛의 달인" 원작자 다운 음식 관련한 프로페셔널한 에세이도 괜찮았어요.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것을 꼽아보자면, 우선은 35만엔 짜리 "최고의 라면" 이야기를 꼽겠습니다. 값비싼 중국산 화퇴와 자연산 닭의 칭탕에다가 최고의 다시마와 가다랑어포로 국물을 내고 조미료는 당연히 천연 간장에 구슈의 다네가시마 흑돼지 최상급 로스를 숯불 화로에 구워 올린 라면이라고 합니다. 재료비, 교통비를 모두 감안한 가격이 35만엔이라고 하는데 한번 먹어보고 싶어지네요.
다음으로는 5밀리 정도로 얇게 썬 가지를 넉넉히 참기름을 두룬 팬에 센불로 볶은 뒤 간장으로 마무리하는 가지 참기름 볶음입니다. "맛의 달인" 31권에 나오는, 제 기억으로는 가지 공포증이 있는 나카마츠 반장과 후쿠이 차장 아들에게 먹이던 요리였는데 만화로 볼 때보다도 더 집에서 해먹고 싶은 생각이 이 들게 만든게 의외였습니다. 아무래도 글이 그림보다 분위기, 식감, 느낌을 전달하는데 있어 상상력을 자극할 여지가 더욱 많기 때문인 듯 합니다.
마지막으로 작가의 글을 읽으니 만두만들기도 도전해보고 싶어지더군요. 작가의 가족처럼 피까지 만드는 것은 무리겠지만요. 또 "맛의 달인" 12권에 등장한 중국식 파이 "로빙"이 원래 있거나 유명한 요리가 아니라 순전히 작가의 아버지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맛의 달인"에서는 뭔가 대단한 중국 전통 가정요리처럼 묘사되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 외에도 에세이와 연관된 "맛의 달인"에 등장한 그림들이 충실히 실려있을 뿐 아니라 본문에 나온 음식이 맛의 달인 어느 권에 나오는지 부록이 실려있는 등 "맛의 달인" 팬에게는 여러모로 즐길거리가 많은 책이었습니다. 때문에 내용은 딱히 새로운 것은 없으나 팬이라면 한번쯤 읽어볼만한 에세이집이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0.01.05 추가 ----이전에 읽었었던 걸 모르고, 다시 리뷰를 작성했었습니다. 별점과 내용에 대한 인상은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개인 아카이브 차원에서 추가합니다.

"맛의 달인"의 원작자 카리야 테츠의 미식 관련 에세이집. 본문 내용은 "맛의 달인"과는 크게 관련은 없습니다. 하지만 "맛의 달인"에 소개되었던 요리들이 많이 등장하고, 삽화는 모두 "맛의 달인" 속 이미지를 활용하고 있어서 아예 떨어트려 놓고 생각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저자 카리야 테츠의 생각이나 행동거지가 '우미하라'로 대표되는 "맛의 달인" 이라는 작품에서 특정 음식과 맛을 고집하는 '맛꼰대' 그대로라서 더욱 그런 느낌이 짙어요. 예를 들어 요새 꽁치, 돼지고기나 닭고기 등등등 (등장하는 거의 모든 식재료)는 먹을게 못된다, 옛날 친환경으로 길렀던 재료들에 비하면 음식도 아니다라는 주장이 책 전체에 가득하거든요. 좀 더 전문적인 무언가를 기대했는데, "나 때는 말이야~"와 다를바 없는 꼰대스러운 이야기가 대부분이라 실망이 컸습니다. 게다가 이 주장에 등장하는 브로일러 닭, 응고제 글루코노델타락톤을 사용한 두부가 맛이 없다는건 "맛의 달인"에서도 여러 번 써 먹은 주제라서 딱히 흥미로운 내용도 아니고요. 이럴 바에야 그냥 "맛의 달인"을 보는게 낫죠.

물론 전문가스러운 이야기가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버블 시대 방송국 지원으로 완벽한 라멘을 만든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함수 (칸스이 / 감수)를 넣지 않고 밀가루와 달걀만으로 반죽한 뒤 홍콩 전문가를 통해 면을 뽑고, 중국햄 화퇴와 닭으로 상탕을 낸 뒤 다시마와 가다랑어포로 일본식 맛을 더하고, 숙성 간장으로 간을 한 뒤 고명으로는 흑돼지를 구워 만든 차슈를 얹어 만들었다네요. 재료는 모두 자연산, 최고급을 사용했기 때문에 한 그릇 만드는 비용은 35만엔!이라고 하고요. 35만엔으로 왜 라면을 먹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두부의 부자가 왜 "썩다"라는 의미의 한자를 썼는지에 대한 고찰도 재미있었습니다. 치즈 만드는 과정과 연결하여 '유부'라는 말에서 유자 대신 콩 자를 붙여 만든 말일 수도 있다는 설인데 꽤 그럴듯했습니다. 관련 자료가 있는지 찾아보고 싶어질 정도였어요. 사시미의 어원도 충실한 자료 조사를 통해 잘 설명해 주고 있고요. 레시피도 틈틈이 실려있는데 가지 참기름 볶음도 간단해서 해 먹어봄직 하고, 집에서 만두를 만드는 이야기를 하면서 소개하는 '로빙' 레시피도 볼 만 합니다. "맛의 달인" 12권에서도 등장했던 바로 그 요리인데, 한 번 먹어보고 싶네요. 언젠가 꼭 도전해 보겠습니다. 만드는 김에 "맛의 달인" 60권에 등장했던 중화식 파호떡도 함께 만들어 보면 좋겠죠.

그러나 이런 류의 이야기는 극소수일 뿐더러, "맛의 달인"에 등장했었던 이야기가 많다는 약점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래서야 구태여 이 책을 구입해서 읽어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맛의 달인" 팬을 위한 책이긴 한데, "맛의 달인" 팬이라면 딱히 읽어볼 필요가 없는 기묘한 아이러니를 지닌 책입니다. 2권까지 나왔던데 구입해 볼지 말지가 고민이네요. 어차피 절판되기는 했지만요.

2019/11/30

드라큘라 그의 이야기 - 레이몬드 맥널리, 라두 플로레스쿠 / 하연희 : 별점 3점

드라큘라 그의 이야기 - 6점
레이몬드 맥널리.라두 플로레스쿠 지음, 하연희 옮김/루비박스

드라큘라라는 컨텐츠의 실체에 대해 다루는 책입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흡혈귀 드라큘라의 실제 모델인 루마니아 왈라키아 공국의 군주 드라큘라의 자취를 추적해 나가는 전반부, 그리고 브람스토커를 중심으로 흡혈귀와 드라큘라 컨텐츠에 대해 다루는 후반부로 나뉩니다.

전반부에서는 실제 왈라키아 공국을 방문하여 현지 답사도 진행하고, 거의 남아있지는 않지만 유적의 자취도 탐색하는 노력에 더해 방대한 당시 사료들을 조사하여 드라큘라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깊이와 디테일은 가히 최고 수준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지요. 잔인무도했다는 몇 가지 에피소드들만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는데, 일대기 자체가 아주 흥미로운 인물이더라고요. 그래서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간략하게 그의 일대기를 소개하자면, 드라큘라는 어린 시절 발칸 반도를 집어심킨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볼모로 잡혀가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그 와중에 형은 산채로 생매장 당하는 등의 아픔도 겪고요. 몇 년 뒤 탈출하여 트란실바니아의 후냐디의 도움으로 왈라키아 군주 자리에 오른 뒤, 동맹인 트란실바니아의 색슨족들을 가혹하게 제압합니다. 왈라키아 인들을 위해서였지만 이 때 벌인 잔혹한 학살 때문에 생긴 악명이 그를 지금과 같은 불멸의 존재로 만들게 되었죠. 이후에는 투르크와 큰 전쟁을 벌입니다. 다뉴브에서 대승을 거두지만 병력 규모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났던 탓에 험준한 산림을 이용한 유격전, 전염병을 이용한 세균전과 보급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청야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고, 후퇴에 후퇴를 거듭한 끝에 이웃나라 헝가리로 동맹을 요청하러 탈출하지만 무려 12년간 헝가리 왕국의 포로로 세월을 보냅니다. 헝가리 왕국은 꼭두각시 군주를 통해 왈라키아를 지배하에 두고, 투르크와 휴전을 통해 평화를 강구하려는 속셈이었을거에요.헝가리에서 러시아 정교에서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은 드라큘라는 투르크의 지원을 받는 왈라키아 군주 바사라브 3세를 쓰러트리기 위해 출진하여 전투를 벌이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며 삶을 마칩니다.

보시다시피 일생 자체가 포로, 배신, 전쟁으로 이루어진 인물입니다. 후대에 드라큘라로 알려지게 된 이유인 잔혹한 통치 방법도 이런 삶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공포로 충성심을 잡아두지 않으면 자리가 위태롭다고 여긴 듯 합니다. 그래서인지 왈라키아 주민들에게는 비교적 괜찮은 군주였다는군요 그 유명한 말뚝형의 대상은 주로 언제든 반기를 들 수 있는 지역 유지인 보야르와 그 일당들, 왈라키아에서 새력을 펼치는 게르만계, 그리고 당연히 오스만 제국과 이웃 나라의 병사들과 포로들 등이었다고 하니까요. 자신에게 충성하는 주민들만 평양에 모아놓은 북한 정권을 보는 듯 합니다. 덕분에 악명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군주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겠지요.

말뚝형으로 대표되는 잔혹함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가득합니다. 터번을 벗지 않으려는 오스만 제국 사신의 머리에 터번째 못을 박았다던가, 말뚝형에 꽂힌 시체 냄새가 지독하다고 불평한 귀족을 가장 높은 말뚝에 꽂아 세워 놓았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전설인줄로만 알았던 황당한 이야기가 많은데 출처도 명확히 소개해주고 있어서 놀랐습니다. 아무리 전설이라도 당대 문헌에 이 정도로 많이 소개되었다면 꽤나 신빙성이 높은 이야기들일테니까요. 과연 후대에 잔혹한 흡혈귀의 모델이 될 법한 인물이구나 싶더라고요. 그런데 조금 의외였던건 영화와는 다르게 드라큘라는 엄청나게 독실한 신자였다는 겁니다. 수도원을 세워 헌금을 하고, 죽는 순간에 진실로 참회하면 모든 죄가 사하여진다고 믿었다는데 솔직히 가당치도 않지요. 그렇다면 수도사까지 말뚝형에 처한건 또 왜였는지 궁금하네요.

이러한 드라큘라의 일대기와 발자취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한 뒤, 흡혈귀에 대한 유럽의 전설과 민담, 엘리자베스 바토리 백작부인의 무서운 이야기 등을 거쳐 본격적인 흡혈귀 문학에 대해 소개해주는 후반부가 이어집니다. 내용의 핵심은 브람스토커와 그의 대표작 "드라큘라"이기는 한데, 그 외에도 조세프 셰리단 르 파누의 "카르밀라"라는 흡혈귀 이야기의 고전 걸작, "프랑켄슈타인" 이야기의 탄생과 폴리도리, 뒤마, 플랑쉬 등이 발표한 다양한 흡혈귀 이야기도 연대별로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카르밀라"는 얼마전 읽었던 "요녀전설"과도 이어진다는 점에서 흥미로왔으며, 브람스토커의 작품도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건 아니고 다양한 작품들에 영향을 받았다는게 인상적이었어요.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드라큘라'라는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재창작해 낸 아이디어 덕분에 불멸의 명성을 얻은 듯 한데, 남들과 다른 아이디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해 줍니다. 브람스토커 이후의 다양한 흡혈귀 관련 컨텐츠 소개는 현대 컨텐츠까지 쭈욱 계속되고요. 재미는 물론 어떻게 '흡혈귀'가 호러 소설의 소재로 등장하여 널리 퍼졌는지를 쉽게 알 수 있는 보기드문 자료라 아주 좋았습니다. 특히 잘 알려져있지 않은 관련 컨텐츠 소개가 소설 뿐 아니라 영화에 이르기까지 폭 넓고 풍성해서 마음에 쏙 들었어요.

책의 마지막은 부록입니다. 지도를 비롯한 드라큘라의 일대기 및 관련된 당대 자료들의 번역본, 그리고 흡혈귀 관련 영화 소개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참고 문헌 목록까지 합치면 부록의 분량이 100페이지 정도나 될 정도로 풍성하며, 그 수준도 깊고 방대하여 빼 놓기 힘들 정도의 귀한 자료임에는 분명합니다. 왜 부록으로 뺐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흡혈귀 컨텐츠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꼭 읽어봐야 할, 자료적 가치가 높은 서적입니다. 도판도 아주 충실하니까요. 장르 문학 매니아로서 추천하지 않을 수 없네요. 장르 문학, 그 중에서도 호러, 또 그 중에서도 흡혈귀 관련 장르 애호가시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16/12/16

용의 귀여운 일곱 아이 - 구이 료코 (쿠이 료코) / 김완 : 별점 3점

용의 귀여운 일곱 아이 : 쿠이 료코 작품집 - 8점
구이 료코 지음, 김완 옮김/㈜소미미디어

"용의 학교는 산 위에"만큼의 긴 제목을 지닌 쿠이 료코의 단편집으로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용의 학교는 산 위에"는 영 아니었지만, 그래도 팬심으로 구입했는데 다행히도 아주 괜찮았습니다. 발상도 기발하며, 모두 길이에 걸맞는 완결성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입니다. "서랍 속 테라리움"과 비교하자면, 의외성은 덜하지만 완성도가 더 높은 편이에요. 쇼트쇼트와 일반 단편의 차이점처럼요.

작품별 편차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가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쿠이 료코 팬들께는 적극 추천드립니다.

"용의 소탑"

바다 나라와 산 나라의 전쟁을 가로막는 국경 지대 용의 새끼가 부화하여 둥지를 떠날 때까지,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에 머물렀다. 교류가 끊긴 양국은 기본적인 물자 보급에도 문제가 생겼고, 마침 산 나라에 포로로 잡혔던 청년 '사난'은 소금을 가져다 준다는 약조 후 풀려나는데...

전형적인 중세풍 세계관에 ''이 등장하는 식으로 약간의 판타지가 결합된 시대물로, 막강하면서도 기묘한 존재 탓으로 적대하던 사람들이 하나가 된다는(외계인이 쳐들어오면 힘을 합치듯이), 왕도스러운 내용입니다.
그러나 쿠이 료코스러운 변주가 딱 하나 들어간 덕분에 독특한 매력을 전해 줍니다. 바로 '교역'입니다. 전형적인 이야기에 딱 한 가지의 설정 추가로 독특함을 만들어 낸다는 점은 "던전밥"과 똑같네요. 결국 사난과 유르카가 하나가 된다는 해피엔딩도 마음에 들었고요.

등장하는 크리쳐는 '용'이라기보다는 그리폰 같았다는건 조금 이해가 안되지만,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인어금렵구"

누가 봐도 인어인 기묘한 생명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무대로 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특별한 일은 벌어지지는 않아요. 인어가 멀리 떨어진 학교로 가고 싶어하고, 주인공은 그것을 도와준다. 그리고 그것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라는, 한여름날 짧은 만남 이후 추억과 여운을 남기고 각자의 길을 간다는 전개는 전형적인 "보이 미트 어 걸" 그대로고요. 이 와중에 약간의 성장기 느낌을 전해주는 것 역시 동일합니다.

그러나 "용의 소탑"이나 "던전밥"처럼 '인어'라는 설정이 추가되어 독특한 매력을 풍깁니다. 이 설정에 더해 비교적 짧은 분량 안에서 '서로 다르기에 마음을 전하기 힘들다'는 주제를 설득력 넘치게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실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깔끔하면서도 흑백톤 위주의 작화 역시 이야기에 꼭 맞아 떨어져서 마음에 들었고요.

한마디로 익숙한 주제에 약간의 변주를 더해 새로운 것을 만드는 작가의 능력이 최고치로 발휘된 작품. 별점은 4점입니다.

"나의 신"

중학교 입시를 앞둔 소녀가 갈 곳을 잃은 물고기 신을 어항에서 키운다는 이야기로 신은 별다른 능력이 없고, 소녀는 입시에서 떨어진다는 현실적이면서 일상적인 결말이 눈길을 끕니다.

하지만 이야기만 놓고 보면 딱히 대단할 것은 없는 소품이에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늑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늑대인간이 주인공인 드라마로 남녀 관계가 아니라 모자 관계 설정이 신선했습니다. 늑대인간이 실제 인간 세계에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상세한 설정들도 인상적이고요.

단, 지나치게 일상계스러운 내용으로 주인공 케이타의 약간은 철없는 행동이 사건, 드라마의 전부라는 것은 조금 시시했습니다. 그만큼 설득력은 높았지만, 이만큼의 상세한 설정을 만들었다면 더 극적인 이야기를 전개해도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무일푼 뱌쿠로쿠"

천재 화가 타카가와 뱌쿠로쿠가 무일푼이 된 후, 자신이 그렸던 사자, 호랑이, 용 등을 실체화시켜 큰돈을 벌고자 한다는 시대극 판타지입니다.

가장 큰 장점은 일본화를 모티브로 한 작화입니다. 붓을 주로 사용한 듯한데 정말로 빼어나고 시원시원한 구도도 돋보인 덕분입니다. 뱌쿠로쿠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위작의 이야기는 진부하지만, 나중에 아들이 그린 그림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며 진한 여운을 남기는 것도 인상적이고요.

한마디로 쿠이 료코라는 작가의 넓은 스펙트럼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제 자식이 어여쁘다고 용은 운다"

왕자 준이 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용의 비늘을 얻으려 나섰다. 길 안내를 맡은건 마을 이방인 준이었다.
용을 잡으러 가는 험한 길에서 병사들은 계속 낙오되었고, 결국 부상당한 왕자만 남았을 때 준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왕이 자신의 아들을 죽였기에 그것을 복수하려 한다는 것...

뻔한 복수극으로 의외성도 없고, 이야기도 좀 막 나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용의 알과 자식을 동일시하는 전개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수록작 중에서는 제일 처집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누타니 일족"

초능력 가문 이누타니 일족의 집에 소년 탐정 도다이치 코우스케가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실수로 일족의 초능력이 들통날 위기에 처해 그것을 숨기려 하나, 오히려 도다이치 코우스케는 연쇄 살인극으로 의심하며 겉잡을 수 없이 폭주하는데...

제목(원전은 "이누가미 일족"이지요)과 설정부터 여러 작품을 패러디하고 있는 작품으로 다양한 초능력을 지닌 가족들의 행동을 ‘살해당했다’고 오해해 진상을 추리하려는 탐정의 행동이 이야기의 핵심인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나 싶을 정도로 기발하면서도 재미있었습니다. "오렌지로드"에서 초능력을 감추려는 카스가 패밀리의 노력이 겹쳐져 왠지 모를 향수가 느껴진 건 덤이고요.
강대한 힘을 과신하다가 화를 부른 상황에서, 가장 쓸모없을 줄 알았던 아리사의 ‘입고 있는 옷을 파자마로 바꾸는 능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반전도 돋보였습니다.

또 보통 소년 탐정이 사건에 뛰어드는 이유 — 자기와 관계도 없고 부탁한 사람도 없는데 왜 이렇게 애를 쓰지? — 에 대해 ‘자기 능력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힘을 써야 할 때 쓴다’라는 슈퍼 히어로스러운 마인드로 알려주는 점도 괜찮았어요. 하기사 명탐정이 슈퍼 히어로와 다를 건 별로 없지요.
‘힘을 써야 할 때는 최선을 다해서 쓴다, 그러나 힘을 과신하지 말라’는 주제 역시 여러모로 생각해볼 거리가 많아서 좋았습니다.

다양한 장르물에 대한 깊은 이해에 더해 유쾌한 분위기, 적절한 반전, 심오한 주제까지 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명작입니다. 단점이라면 너무 짧다는 것과 결말이 약간 시시했다는 것 정도? 그래도 별점 4점은 충분합니다. 장르소설 애호가라면 이 작품만큼은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2016/04/09

그들이 본 임진왜란 - 김시덕 : 별점 2점

그들이 본 임진왜란 - 4점 김시덕 지음/학고재

17~19세기 일본 에도 시대 베스트셀러였다는 오제 호안의 "다이코기", 하야시 라잔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보", 호리 교안의 "조선정벌기", 그리고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유행한 장편 역사 소설 "에혼 다이코기"를 통해 당시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설명해 주는 책입니다. 주제가 흥미로워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 임진왜란을 일으켰는지부터 시작하여, 전쟁의 전초기지인 나고야성 건립,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를 중심으로 한 전쟁 서사, 명나라 원군의 출정과 화의 시도, 정유재란과 히데요시의 죽음, 그리고 전쟁의 종결까지를 순차적으로 설명해 주는데,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많아 특별히 새로운 정보는 없었습니다. 시각의 차이는 존재해도, 역사적 사실 자체는 크게 다르게 다루어지지는 않은 탓입니다.

그래도 인상적인 부분이라면, 통역에 대한 설명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전쟁 중이니만큼 통역은 필수였고, 쓰시마번의 소 요시토시가 보유한 통역뿐 아니라 점령지에서 확보한 인력도 활용했다고 합니다. 그 중 가장 놀라웠던 것은 "고려말에 대하여"라는 한국어 회화집이 존재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 길인가", "곧이 이르라", "나이 몇이고", "자식 있는가" 같은 질문형 문장부터, "피리 부는가", "장인인가", "글 하는가"처럼 포로 중 유능한 인물을 식별하기 위한 문장들, "잘 씻으라", "술 덥혀라", "이거 가지고 있어라" 등 포로를 부리기 위한 표현, 그리고 "사람 많이 죽였다", "네 목 벨 것이야"처럼 위협적인 문장까지 수록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실전 상황에서 상당히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씁쓸했던건 여성을 성폭행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고운 각시 더불어 오라", "옷을 벗으라" 같은 문장이 회화집에 있었다는 설명은 읽는 것만으로도 불쾌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로 진출하여 '오란카이'라는 말을 듣고 '오랑캐'를 상대하겠다며 여진족 지역을 침공했다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고, 당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한극함을 공격해 승리한 전투가 문헌상에 "세루토스"라는 거인을 이긴 전투로 묘사되는데 '세루토스'는 절도사를 의미하는 표현이었다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일본 측 문헌이긴 하지만, 조선군 인물의 활약도 일부 언급됩니다. 유극량을 비롯해 송상현, 류성룡, 신각, 곽준, 곽재우 등이 기록되어 있고, 이순신은 아예 '영웅'으로 칭해집니다. 물론 이러한 서술은 일본군의 우수함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였겠지만, 그럼에도 조선 인물의 언급 자체는 반가웠습니다. 행주산성 전투에 이가 지역의 닌자가 투입되었다는 기록도 꽤 신선하게 느껴졌고요.

다만 이 책에서 묘사된 전쟁은 삼국지의 장면처럼 과장되고 영웅화되어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특히 가토 기요마사는 영웅으로 이상화된 반면,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에도 시대 가치관과 무관하지 않다고 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전한 고니시가 할복하지 않고 처형된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당시의 유교적 가치와 충돌했다는 해석이 붙습니다. 흥미롭기는 했지만, 사료적 가치 측면에서는 그리 높다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깊이 있는 내용도 부족하고, 이야기 자체도 흥미롭다고 하기에는 다소 평이해서 추천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이 책 보다는 "징비록" 정도만 읽어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6/01/18

엠브리오 기담 - 야마시로 아사코 / 김선영 : 별점 3점

엠브리오 기담 - 6점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엘릭시르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딘가에서 읽었던 서평이 기억에 남아 주말 동안 읽기 위해 집어든 책으로 에도, 아니 메이지로 보이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환상 문학 단편집입니다. 온천에 대한 여행기를 쓰는 길치 이즈미 로안과 그의 짐꾼이자 동료인 미미히코가 등장하는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시대물 설정, 거기에 전부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괴담이라는 점에서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물이나 교코쿠 나쓰히코의 작품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 작품들보다는 환상 문학에 훨씬 가깝고, 교코쿠 나쓰히코의 작품들보다는 읽기 쉽고 명확한 내용이라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수록 작품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점에서는 레이 브래드버리나 리처드 매드슨 등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구태여 구분하자면 "엠브리오 기담"은 일상계 크리처물, "라피스 라줄리 환상"은 윤회 판타지, "수증기 사변"과 "끝맺음"은 일상계 괴담, "얼굴 없는 산마루"는 일상계 드라마, "있을 수 없는 다리"는 전형적 괴담, "지옥"은 끔찍한 고어 호러, "빗을 주워서는 아니 된다"는 괴담 분위기의 자살극으로 넓은 장르를 포용하기 때문입니다("자. 가요." 소년이 말했다는 그냥 사족입니다)

이렇게 많은 장르물을 포괄하면서도 대체로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보인다는 점도 대단합니다. 코미디에서 호러까지 오가는 선배 작가들만큼의 넓은 변화 폭은 아니긴 하지만요. 이 정도면 이름 모를 작가 치고는 제법이라 생각했는데, 후기를 보니 야마시로 아사코는 오츠 이치의 또 다른 필명이더군요. 솔직히 취향이 아니라 많은 작품을 찾아 읽지는 않았지만, 특유의 팔색조 매력은 여전한 듯 하여 아주 반가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최초 서평이 기억에 남았던 이유도 오츠 이치의 이색작이라는 소개 때문이었던 듯 싶습니다. 이놈의 기억력...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말도 안 되는 설정이 제법 있는 등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허나 이 정도면 null괴담물로 기본은 해 주었으며, 오츠 이치의 단점이라 여겼던 만화적인 상상력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좋은 작품입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만, 사족인 마지막 이야기를 제외한 별점은 3점입니다. 괴담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덧 1 : 앞서 말씀드린 대로 수록 작품들의 장르가 천차만별이지만 절반 이상이 '괴담'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추리 / 호러' 장르로 분류합니다.

덧 2 : 저도 온천을 좋아하는데 딸아이가 좀 더 크면 온천이나 다녀봐야겠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끔찍한 경험은 사절입니다만 끔찍한 경험을 한 이즈미 로안과 미미히코가 그래도 온천을 다니는 것을 봐서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게 분명하겠죠.

단편별 상세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엠브리오 기담"

미미히코는 갓난아기 전 인간의 모습인 '엠브리오'를 우연히 구했다. 금세 죽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엠브리오는 살아남았고, 도박빚에 시달리던 미미히코는 엠브리오를 이용하여 돈 벌 계획을 세우는데...

인간의 태아(이전 단계)인 '엠브리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엠브리오에 대한 설정 - 하얀 애벌레 같아 허여멀건 몸뚱이에 볼록 튀어나온 배, 발달이 덜 되어 단순한 돌기에 지나지 않는 손발, 몸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머리에 점을 콕 찍은 듯한 눈, 도마뱀처럼 꼬리 같은 것까지 있고 갓난아기 피부와 내장 표면의 딱 중간 정도 피부로 쌀뜨물을 먹고 미지근한 물을 좋아한다 등등 - 이 실제 존재하는 생물처럼 상세하다는 것이 재미 요소입니다. 이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는 '기묘한 상상력'이 크리처에 발휘된 환상 문학이지요.

다만 결말은 아쉽습니다. 아이를 원하는 부부에게 엠브리오를 넘겨 무사히 출산하게 하고, 수년이 지나 미미히코와 그 아이가 재회한다는건데, 공식대로라서 식상했던 탓입니다. 그래도 더 이상의 좋은 결말을 찾기는 어려웠으리라 짐작되며, 전체적으로는 무난한 수준이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라피스 라줄리 환상"

도매 서점에서 일하는 린은 행수 어르신의 지시로 이즈미 로안과 미미히코의 여행에 동행했다.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일행은 마침 발견한 마을에서 잠깐 머무는데, 다음날 촌장의 증손자가 고열로 쓰러졌다. 마침 린이 가지고 있던 약으로 아이는 생명을 구했고, 답례로 촌장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라피스 라줄리(유리)'를 선물하는데...

린이 '라피스 라줄리'를 받은 이후, 인생을 되풀이한다는 윤회 판타지입니다. 윤회를 하면서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내용도 잔잔하니 읽을 만한데, 작품의 핵심은 반전입니다.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간다는 촌장 노파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이 태어날 때 죽는 어머니를 위해 뱃속에서 탯줄을 스스로 목에 감는 방법으로 자살을 한다는 결말이거든요. 행복한 결혼 생활도 해 보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공부도 해 보았지만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는 것인데 참 절절했습니다.
다른 수록 작품과는 다르게 미미히코 시점이 아니라 린 시점 묘사라는 점도 특이했고요.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라피스 라줄리의 힘이 어디서 온 것인지 등 세세한 설정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린은 이전 기억을 계속 쌓아나가기 때문에 환생할 때마다 강해질 수밖에 없는데 지나칠 정도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건 설득력이 약해 보였거든요. 미래도 읽을 수 있고, 그에 어울리는 공부도 한다면 세계를 바꿀 만한 재산이나 세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래도 평균 이상은 되는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수증기 사변"

로안과 미미히코는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뒤 산기슭 온천 마을을 찾아냈다. 둘은 마을의 허술하기 짝이 없는 여관에 묵으며, 마을 온천을 밤에 찾아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밤에 온천에 몸을 담근 미미히코는 어린 시절 소꿉친구로 죽어버린 유노카를 온천에서 만는데...

저승과 연결되어 있는 온천을 그리고 있습니다. 유령이 등장하는 괴담으로 죽은 사람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이유, 어린 시절의 추억과 유노카의 죽음에 대한 진상 등 이런저런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기본적으로는 잔잔한 일상계입니다. 마지막에 미미히코가 유노카의 모습을 떠올리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문제는 너무 잔잔해서 극적인 재미가 없다는 겁니다. 유노카의 죽음이 단순 사고보다는 드라마틱했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사실은 미미히코의 잘못으로 죽었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끝맺음"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로안과 미미히코가 묵어 가게 된 바닷가 마을. 그곳은 모든 사물이 사람의 얼굴로 보이는 기묘한 곳으로 식재료마저 그랬던 탓에 미미히코는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해 아사 직전에 놓이는데...

모든 사물이 사람의 얼굴로 보인다는 이토 준지스러운 상상력이 돋보이는 기묘한 작품입니다. 만화나 영화 같은 시각 매체로 발표되었더라면 굉장히 그로테스크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상상의 여지가 더욱 많은 소설이 섬찟함을 느끼게 하는 데 더 좋긴 하겠지만요.

게다가 굶어 죽기 직전의 미미히코가 자신을 끔찍하게 따르던 닭 아즈키를 잡아먹고 살아난다는 결말도 마음에 듭니다.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를 잘 드러낸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자기 혼자 살아남기 위해 친구를 팔아넘기고 살아남는 왕따물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마을의 정체가 무엇인지 등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 조금 감점합니다만,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있을 수 없는 다리"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로안과 미미히코는 근사한 구름다리를 발견했다. 허나 마을에서는 구름다리는 이미 사십 년 전에 무너졌다고 했다. 둘의 말을 들은 숙소의 노파는 밤중에 넌지시 구름다리로 데려다 줄 것을 부탁했다. 그녀는 구름다리가 무너졌을 때 아들을 잃었는데, 지나는 여행객들로부터 다리에서 아들의 모습을 보았다는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미히코는 다리에서 노파의 아들을 발견하고 둘의 상봉을 주선하는데...

감동적인 상봉을 기대했지만 실상 소년은 그야말로 '귀신'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는 존재였다는 반전이 돋보입니다. 이전 수록작인 "수증기 사변"과 비슷한 작품이라 생각하고 읽다가 깜짝 놀랐네요. 하긴 이게 귀신의 본모습이겠죠.

반전에 더해 묘사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소설보다는 영상화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귀신이 본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의 묘사도 좋지만, 특히 귀신이 노파를 데려가려고 하자 그녀가 미미히코를 붙잡고, 미미히코는 욕설을 하면서 노파를 어떻게든 떼어 내려 하는 처절한 묘사가 기억에 남습니다.

재미도 있고 반전도 있는, 괴담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작품으로 별점은 4점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얼굴 없는 산마루"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로안과 미미히코가 우연히 방문한 마을 사람들은 미미히코를 보고 놀랐다. 이유는 그가 사고로 죽은 마을 사람 모키치와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미미히코가 자신과 똑같이 생기고 비슷한 인생을 살아간 모키치의 가족을 만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는 일상계 소품. 잔잔하고 여운을 주는 내용은 좋았습니다.

허나 모키치의 아내 야에의 말을 듣고 다시 여행을 떠난다는 뻔한 결말, 그리고 미미히코가 모키치와 모든 면에서 똑같은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는건 단점입니다. 그냥 닮았다고만 해도 충분했을 텐데 흉터까지 같다는 것은 무리수였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조금 쉬어가는 느낌의 작품입니다.

"지옥"

이즈미 로안과 미미히코는 여행 중 강도를 만났다. 사로잡힌 미미히코는 신혼부부 후지와 요이치와 함께 축축한 구덩이 속에 갇혔다. 셋은 강도 가족이 던져주는 육포 조각을 먹으며 삶을 이어갔는데, 강도들이 한 명을 꺼내 준다고 제안해서 여성 후지를 올려 보냈다...

구더기 그득한 축축한 구덩이 감옥 묘사도 사람 잡는데, '후지가 빠져나간 뒤 육포가 아니라 신선한 고기가 던져진다'에서 시작되는 공포스러운 묘사가 압권인 작품입니다.

핵심은 강도 가족이 사람을 죽여 먹고, 가죽으로 생활용품 등을 만든다는 설정으로 스코틀랜드의 소니 빈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게 분명해 보입니다. 허나 단순히 영감을 얻은 수준은 아닙니다. 아이가 사람 얼굴 가죽으로 만든 가면을 쓰고 노는 등의 디테일이 잘 살아 있거든요.

이러한 묘사에 더해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전개도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미미히코가 머리카락을 엮은 줄을 이용하여 요이치를 끌어 올렸던 밧줄을 회수하고, 구덩이에서 탈출하여 역으로 강도 가족을 구덩이에 쳐 넣는 데 성공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찾아가 보니 강도 가족이 구덩이 속에서 서로를 잡아먹고 있었기에 뚜껑만 덮고 도망쳐 온다는 결말까지 정말 손에서 떼기 힘들 정도로 몰입감을 선사해 줍니다. 이런 류의 돌직구 고어 호러는 오츠 이치의 특기이기도 하죠. "ZOO - seven rooms"처럼요.

물론 해당 단편과 단점은 동일합니다. 왜 강도 가족이 포로를 잡자마자 죽이지 않고 귀한 육포를 먹여 가며 살려두는지가 설명되지 않는 점 등 세부 설정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제법 있는 탓입니다.

그래도 섬찟함과 독자를 몰입시키는 맛은 수록작 중 최고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이전 작품이 쉬어가는 느낌이라 공포심이 더욱 배가된 듯한데, 목차도 작가의 의도인지 살짝 궁금해지는군요.

"빗을 주워서는 아니 된다"

전편의 경험으로 미미히코가 여행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즈미 로안은 다른 고용인과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온 로안은 미미히코에게 동행인이 죽었다며, 그의 죽음에 대해 알려주는데...

떨어진 빗을 줍는 것은 고통과 죽음을 줍는 것이기에 꼭 빗을 주워야 할 때는 발로 한 번 밟은 뒤 주워야 한다는 설정이 바탕입니다. 빗을 그냥 주웠다는 고용인이 머리카락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죽은 시체로 발견되는데, 입에 들어 있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니 엄청난 양이 나왔다는 부분까지는 평범한 괴담입니다.

그러나 노파가 빗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거짓말로 그가 지어낸 이야기이며, 머리카락은 죽은 어머니의 것이라고 밝혀지는 결말이 아주 독특했습니다. 괴담을 너무 좋아한 청년이 자작극을 벌이면서까지 괴담이 되려 했다는 내용이니까요. 누군가의 이야기가 괴담이 된다는 점에서 "백귀야행"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단순 괴담이 아니라는 점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자. 가요." 소년이 말했다

결혼한 뒤 온갖 괴롭힘을 당하던 여자가 우연히 한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그녀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데...

이즈미 로안이 길치가 아니라 사실은 차원을 이동하는 능력을 가진 텐구의 자식이라는 설정을 알려주기 위한 이야기.

단순한 설정 보강용이라 하나의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자를 괴롭히던 시댁에 뭔가 천벌이 내렸다는 이야기라도 있었더라면 완결성이 있었을 텐데요. 별점은 빵점입니다.

2014/08/27

제2차세계대전의 에이스들 - 김진영 : 별점 2점

제2차세계대전의 에이스들 - 4점
김진영 지음/가람기획

"연합함대"로 접해보았던, 출판사 가람기획의 세계전사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제목 그대로 제2차 세계대전 중 각국의 에이스들 - 독일 에이스 6명, 영국 에이스 6명, 미국 에이스 3명, 일본, 소련, 핀란드 각 1명 - 18명이 소개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저술되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절반 이상은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자료와 흡사합니다. 특히 독일군 에이스들 이야기에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에리히 하르트만이나 아돌프 갈란드, 아프리카의 별 한스 요하임 마르세유, 발터 노보트니 등은 다양한 관련 서적은 물론, 나무위키를 통해 더 자세한 정보를 접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분량도 한 편 씩 웹진에 소개될 정도의 분량에 불과해서 그다지 상세하지도 않고요. 전투 기술에 대한 묘사보다는 인간적인 고뇌와 같은 디테일이 살아 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그래도 워낙 많은 인물이 소개되는 덕분에 새롭게 알게 된 부분도 적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격추 대수가 200대를 넘었던 슈퍼 에이스 중 한 명이었던 헤르만 그라프는 독일 패망 후 소련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중 공산주의자가 되겠다고 하여 소련의 선전 활동에 이용되었고, 결국 귀국은 일찍 했지만 ‘배신자’라는 낙인을 극복하지 못한 채 용접공으로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만화 "수리부엉이"에도 비슷한 캐릭터가 등장했었죠. (인터넷에 자세한 글이 있긴 한데, 이 책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여 퍼온 것으로 보입니다.)

또 상대적으로 유명한 독일군 에이스들에 비해 영국과 미국의 에이스들은 아무래도 격추 대수가 독일군에 비하면 부족하고 인기도 그리 높지 않다 보니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 책에서는 비슷한 비중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내용도 꽤 흥미로워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영국의 전투기 무장사 출신으로 비교적 많은 나이에 기량이 만개하여 28기의 일본기를 격추한 프랭크 캐리, 38기의 독일기를 격추하고 전후 영국군 부원수 자리에까지 올랐던 쟈니 존슨 등이 그러합니다. 에이스들의 전투 상황에 대한 상세한 증언도 아주 좋았습니다. "스핏파이어로 고도 4000미터에 도달한 뒤 슈퍼차저를 켜 속도를 올려 적기의 꽁무니를 따돌릴 수 있었다"는 식의 구체적인 장면 묘사처럼요.

이렇게 장점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별점은 2점입니다. 절반 가량이 인터넷 등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라는 단점이 너무 크네요. 물론 이 책이 원전 중 하나일 수는 있겠지만, 독보적인 무언가가 있지는 않으며, 위인전으로 보기에도, 미시사 서적으로 보기에도, 전사로 보기에도 애매하다는 점도 감점 요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관심 가져볼 만하겠지만, 그렇지 않으시다면 굳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2/08/23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상) - 스티븐 킹 / 조영학 : 별점 2.5점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 상 - 6점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하) - 스티븐 킹 / 조영학 : 별점 2.5점

먼저 읽었던 하권에 이은 상권.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4호 부검실
검은 정장의 악마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잭 해밀턴의 죽음
죽음의 방
엘루리아의 어린 수녀들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그다지 무섭지 않으며 강한 심리 묘사가 중심이라는 특징은 하권과 동일합니다. 그래도 교훈적인 주제는 하권만큼 많지는 않더군요. 조금 더 재미에 치중한 작품들이었습니다. 별점은 2.5점. 개인적인 베스트는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입니다.

<제 4호 부검실>
의식이 있지만 몸 전체가 마비된 주인공이 부검실에서 부검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을 깨닫는다는 스릴러. 그에게 닥칠 부검이 언제 시작될 것인지에 대한 긴장감이 부검실 의사들의 유머러스한 대화와 맞물린다는 점에서 블랙코미디같은 느낌도 큽니다. 결말이 예상대로이긴 하나 코미디로 보면 괜찮은 듯. 별점은 2.5점입니다.

<검은 정장의 악마>
한 노인이 20세기 초엽, 자신이 아홉살 때 만났던 악마에 대해 털어놓는다는 내용. 너새니얼 호손의 <영 굿맨 브라운>에 대한 개인적 헌사이며 킹 본인은 별볼일 없는 결과물로 생각했지만 반응도 좋았고 상도 탔다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킹 의견에 동의합니다. 별볼일 없었어요. 호손 시대에 쓰여진듯한 오래된 감수성이 확실히 느껴지기도 했을 뿐더러 별로 무섭지도 않았거든요.
게다가 전개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악마가 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거짓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고 제대로 추격하지 않은 이유도 명쾌하지 못한 등 떡밥만 가득할 뿐이라서 말이죠. 중후반부 악마와의 추격전 하나만큼은 긴장감이 넘치지지만 단점이 워낙 명확하기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한 세일즈맨이 자살을 하려다 평생 모은 화장실 낙서에 대한 노트의 처리를 놓고 고민한다는 드라마. 탁월한 심리묘사에 화장실 낙서라는 이질적인 소재를 잘 어우른 걸작 소품. 길이도 적당할 뿐더러 삽입된 낙서들이 참 적절하더군요. 그리고 열린 결말이 정말 잘 어울렸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잭 해밀턴의 죽음>
딜린저 갱단의 일원이었던 잭 해밀턴의 죽음을 딜린저의 오른팔 호머 반미터가 회고하는 안티 히어로 물이자 신화이자 팩션. 실제로 있었음직한 생생함이 압도적입니다. 딜린저에 대해 모르면 즐기기 어렵다는 단점은 있지만... 저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창작 동기가 킹이 호머 반미터가 파리에 올가미를 던지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라고 하는데 단지 그 정도의 소스로 이렇게나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꾸며내다니, 역시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 하나만큼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구나 싶더군요. 별점은 3점입니다.

<죽음의 방>
남미 한 국가 고문실에 잡혀온 미국기자 플레쳐의 탈출을 그린 모험물.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전개가 일품인, 서스펜스 하나만큼은 최고로 치고 싶은 작품입니다. 금연한 사람에게 담배를 피고 싶게끔 만드는 효과도 있는데 흡연 장려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지나치게 낙관적인 결말은 그닥이나 흥미진진한 것은 확실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엘루리아의 어린 수녀들>
<다크 타워> 시리즈의 번외편 단편이라고 합니다. 원전을 읽지 않아 세계관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느낌은 <북두의 권> + <트라이건> 정도 되려나요? 이 작품집에서 가장 긴, 중편에 가까운 길이를 자랑합니다.
일단 수녀들의 정체, 녹색 괴물들과 끔찍한 벌레들이 등장하는 등 호러 판타지로서의 묘사와 설정은 좋습니다. 그러나 포로가 된 히어로와 그를 돕는 비련의 히로인 그리고 둘에게 닥친 비극적 결말이라는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에서 조금도 더 나아간 것이 없어서 아쉽습니다. 이래서야 인어공주의 다크버젼일 뿐이죠. 물거품이 아니라 벌레가 되었을 뿐.
때문에 제게는 알맹이가 별로 없는 흔해빠진 호러 판타지였을 뿐입니다. 젤라즈니가 왜 대단한지 다시금 느끼게 해 주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사람을 자살로 유도하는 초능력을 가진 딩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관에 고용되어 안락한 삶을 누리지만 자신이 살인에 이용되었음을 깨닫고 탈출을 결심한다는 이야기.
설정도 흥미진진하고 이야기도 재미있기는 한데 영화로 따지면 기본 설정과 주인공 소개 후 막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려 할 때 끝나는 느낌이에요. 기-승 까지만 있다는 느낌? 그래서 완성도는 높이 쳐주기 어렵네요. 뒷부분을 따로 본다면 모를까.
덧붙이자면 작가 스스로 밝힌, 창작 동기인 잔돈을 버리는 청년에 대한 설명도 그닥 잘 되어 있지 않더군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12/04/30

혹성 탈출 - 피에르 불 / 이원복 : 별점 3점

혹성 탈출 - 6점
피에르 불 지음, 이원복 옮김/(주)태일소담출판사

베텔게우스 계로 우주여행을 떠난 기자 윌리스 메루 일행은 지구와 거의 흡사한 환경의 "소로르"라는 행성에 착륙하여 그곳의 인류와 만났다. 그러나 소로르의 인류는 지성은 없는 원시 상태였고, 윌리스 일행은 고릴라가 인류를 사냥하는 충격적인 상황에 직면했다. 곧이어 윌리스도 고릴라들에게 포로로 잡혀가게 되는데...

70년대를 풍미했고 2000년대를 거쳐 얼마 전 프리퀄(또는 리부트) 신작이 나와 히트한 바로 그 영화의 원작 소설. 저야말로 이 영화의 직접적인 영향권(?) 안에 있는 세대입니다. 영화는 어렸을 때 TV에서 전편을 소개해 줄 때 감상하였고, 팀 버튼의 괴작도 극장에서 감상했거든요. 이렇게 워낙 많이 접하다 보니 원작 소설도 영화 올드 버전 1편의 내용과 거의 동일할 것이라 생각해서 썩 관심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의외의 요소가 많더군요. 일단 제일 놀라웠던 것은 정통 SF라는 점이었습니다. 영화에서와 같은 모험물적인 속성은 거의 없는 작품으로, SF적인 디테일도 괜찮더군요. 항성 간 우주여행 등의 설정이 잘 묘사되어 있는 덕분입니다. 문명의 진보에 대한 이론은 솔깃하기까지 했고요.
게다가 SF 세계관 속에 인류의 무기력한 미래에 대한 풍자를 녹여낸 솜씨는 지금 읽어도 대단했습니다. 블랙코미디가 아닌가 생각되는 부분 ("넌 너무 못생겼어!")도 기가 막혔고요. 전혀 낡아 보이지도, 유치해 보이지도 않는, 시대를 초월한 부분이 분명히 있는 작품이었어요.

그러나 전개 면에서 조금 아쉬웠던 것이 몇 가지 있기는 합니다. 가장 거슬렸던건 인류가 급격하게 몰락한 이유를 구태여 드러내려 한 부분이에요. "뇌 수술"을 통한 일종의 "빙의 현상"이라는 수단부터가 작가가 너무 쉽게 간 느낌이라 별로인데, 이유 자체도 단순한 무기력이라는 것이라서 와닿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독자의 상상에 맡기고 설명하지 않는 게 훨씬 좋았을 텐데 말이죠.
두 번째는 앙텔 교수의 정신 붕괴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혼자 떨어져 몇 달 지냈다고 이 소설에서처럼 급격한 정신적인 퇴행이 이루어진다는건 말이 안 됩니다. 이 부분만큼은 영화에서처럼 뇌 수술 쪽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그 외에 윌리스 메루의 이름부터 패러디의 의미가 있다는 등의 (이름은 율리시즈이지만 성은 물고기?) 원어 한정 풍자를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것도 조금은 안타까웠고요.

마지막 반전 두 개 (윌리스가 지구에 도착한 이후와 마지막 장면) 모두 상상의 범위 안에 있다는 것도 아쉽기는 한데, 이건 문제라고 하기는 어렵겠네요. 이 작품이 선구적인 작품이니까요. 단지 국내 정식 소개가 늦어서 손해를 본 것 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3점.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통할 만한 아이디어와 재미를 갖춘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이 바닥의 클래식으로, 장르 문학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려요. 너무 늦게 출간된 것은 안타깝지만, 지금이라도 읽을 수 있게 된 것에는 감사해야겠죠.

2012/03/18

화성의 존 카터 - 버로우즈 작 / 최인학 역 : 별점 2점

존 카터 청년이 애리조나의 산골짝에서 금광을 찾고 있을 때의 일. 이상한 일이 일어나서, 카터의 몸은 어찌 된 셈인지 우주를 날고 있었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화성에 착륙하고 있었습니다.

자, 그럼 화성은 어떤 세계였을까요? 카터는 말 같은 8개의 발을 가진 괴물 짐승을 탔으며, 4개의 손을 가진 거인의 일행도 만났습니다. 그들은 녹색인이었습니다. 그밖에 붉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붉은 사람은 지구의 사람과 흡사했습니다. 여기는 싸움을 잘하는 자가 뽐내고, 항상 싸우는 것이 일인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카터는 쾌남자였습니다. 정의를 존중하는 사나이였으며, 칼싸움의 명수로서 무서움을 모릅니다. 녹색인에게 포로가 된 붉은 사람의 아름다운 왕녀를 지키며 놀라운 활약을 거듭합니다. 여러분, 통쾌한 카터 청년을 응원해 주십시오. <책 소개에서 발췌>

최근 개봉한 블록버스터 무비 "존 카터: 바슘 전쟁의 서막"의 원작으로 유명한 작품. 영화 덕분에 정식 완역본도 출간되었지만 저는 직지 프로젝트의 아이디어 회관 문고본으로 읽었습니다. 아동 대상의 번역일 뿐 아니라 굉장히 요약되어 있어서 읽기는 좀 불편했지만(솔직히 번역은 아이디어 회관 문고본 최악 1, 2위를 다툴 듯), 뭐 일단 읽었다는 데 의미를 둘까 합니다.

내용은 다른 곳에서 접했던 대로 굉장히 전형적인 스페이스 오페라, 아니 판타지더군요. 무대만 살짝 바꿔놓으면 전형적 이세계 판타지 군웅물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해당 장르의 전형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세계로 소환된(?) 주인공과 이세계에서 가지는 특수한 능력. 그리고 이세계 종족 간의 거대한 전쟁에 휩쓸리고 그곳의 공주를 돕게 된다는 설정. 이세계의 기이한 애완동물. 음...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니 "신비의 세계 엘하자드 TV ver."?

이러한 판타지적 전형성에 더하여 역시나 전형적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복수"를 사크족의 타르가스 대장 캐릭터를 통해 구현해 놓은 등, 흥행이 될 만한 요소는 다 들어가 있더군요. 이 정도면 히트를 치지 못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겠죠.

그러나 아쉽습니다. 사실 이 작품이 출간된 시기를 감안한다면 이러한 전형의 원조라 해도 무방할 터이나, 그동안 국내에는 정보가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오히려 이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한 후대 작품들 때문에 이 작품의 참신함이나 신선함이 훼손되어 버렸으니까요. 무려 백여 년이 지난 뒤지만 그래도 어마어마한 예산의 블록버스터로 재탄생했다는 데 위안을 삼아야 하려나요? 문제는 영화 역시도 너무 늦게 제작되어 참신함이나 신선함이 없다... 라는 이유 탓에 흥행에서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겠지만요.

사실 정식 번역된 결과물은 훨씬 재미있고 뛰어날 테지만 저 역시도 같은 이유, 즉 새로운 부분이 거의 없을 것이기에 구태여 원전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아바타" 전에는 소개되었어야 할 것 같은데, 너무 늦은 게 아쉬울 뿐이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의외로 SF라는 말에 어울리는 디테일이 살아 있다는 것에서 조금 놀랐습니다. 에테르 세계관과 라듐엔진 등의 몇몇 과학장치들 등이 그러한데, 특히나 중립을 지키는 공기 정화 시스템의 아이디어는 확실히 괜찮았어요. 이 역시도 "토탈 리콜"의 원전격 아이디어가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2011/04/27

로빈슨 크루소 - 다니엘 디포 / 남명성 : 별점 4점

로빈슨 크루소 - 8점
다니엘 디포 지음, 남명성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펭귄 클래식 코리아에서 출간된 완역본입니다. 50% 세일행사 때 구입한 것입니다. 충동구매였는데 로빈슨 크루소의 파란만장 표류기 자체만으로도 재미가 넘칠 뿐 아니라 나름의 교훈을 잘 전해주고 있기에 구입을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삶이 얼마나 불행한지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동양적인 무송, 안빈낙도의 철학과 맥락이 같기도 하고요. 

또 두꺼운 분량에 걸맞게 옛날 아동용 책으로 보았을 때는 미처 몰랐던 사실들이 정말 많은데, 하나하나가 모두 드라마틱하다는 것도 마음에 듭니다. 로빈슨이 제법 괜찮은 중산층 자식으로 나름 훌륭한 교육을 받았지만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뱃사람이 되어 불운이 시작되었다는 것에서 시작하여, 터키의 포로가 되어 2년 간 노예 생활을 하다가 탈출에 성공한 뒤 브라질에서 농장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본인에게는 별 의미없는 항해에 나섰다가 30여년을 살게 되는 카리브해의 무인도로 표류하게 되었다는 등 로빈슨 크루소의 인생역정이 정말로 드라마틱하게 그려지거든요.

그 외에도 프라이데이가 사실은 식인종 출신이라던가, 섬을 탈출하게 된 것은 영국배에서 일어난 선상 반란 진압을 도와주었기 때문이라던가, 이후 브라질 농장을 처분하여 거부가 되어 표류했던 섬을 스스로의 영지로 삼았다는 후일담까지 새로운 내용이 무척 많았습니다.

아울러 아동용에서는 대충 넘어간 표류 생활 자체의 디테일도 발군이더군요. 그야말로 서바이벌 전문가 급의 내공이 보이는 것도 재미의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물론 로빈슨 크루소가 표류한 섬은 먹을 것과 식수를 구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고, 로빈슨 크루소도 난파한 배에서 이거저거 필요한 물건을 잔뜩 얻는다는 설정이 있는 탓에 베어 그릴스하고 비교하기는 어렵겠습니다만... 그래도 깨알같은 디테일은 놀라울 정도에요. 사냥, 농사, 집을 만드는 과정부터 여러가지 방법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과정이 그만큼 상세합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건 역시나 "담배파이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인데, 확실히 담배가 중독성이 강하긴 강한가봅니다.

그러나 쓰여진 시기가 18세기 초반인 만큼 제국주의적인 사고방식(만나는 유색인종은 모두 노예?)과 종교적 색체가 너무 짙은 것은 좀 아쉬웠습니다. 이중 종교적인 부분은 쓰여진 시기와 로빈슨 크루소에게 분명 신이 필요했던 순간이 있었던걸 감안하면 납득이 되지 않는건 아닙니다. 다만 지금 읽기에 정도가 과했던게 문제입니다. 그래도 식인종들을 하나의 인간으로 대해주며 학살하지 않으리라 결심하는 모습 등에서 약간이나마 진보적인 사고방식이 엿보인 것은 다행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4점. 저도 혼자서 표류하듯 떠나고 싶은 요즈음이라 좀 후하게 준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정말 읽기를 잘 한것 같아요. 왜 지금까지 이렇게나 많이 읽히는 지를 잘 알려주는 완역본입니다. 아동용 모험물로만 접하셨던 모든 성인분들께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