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검색어 팩션에 대한 글을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관련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팩션에 대한 글을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관련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26/06/26

1888 잭 더 리퍼 (一八八八 切り裂きジャック) - 핫토리 마유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888년, 국비 유학생 가시와기 가오루는 '엘리펀트 맨' 연구를 위해 찾은 런던에서, 먼저 와 있던 도쿄대 동창 다카하라 고레미쓰와 함께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다카하라가 스코틀랜드 야드 근무를 하던 탓에, 가오루는 그해 막 시작된 '잭 더 리퍼' 사건에 휩쓸렸다. 그러면서 앨버트 에드워드 전하를 비롯한 다양한 명사들 - 황태자비, 황태손, 작가 에드거 라이더 해거드와 리처드 버튼, 버너드 쇼, 신지학 영매 마담 블라바츠키 등 - 과 어울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함께 찾아 나가게 된다.

일본 작가 핫토리 마유미의 장편 추리 소설입니다. 원서로 읽었습니다.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1888년 런던 묘사입니다. 화이트채플을 비롯한 여러 장소가 실제로 발로 뛰어 쓴 것처럼 생생하고 안개와 거리의 분위기가 좋습니다. 다카하라와 가오루가 머무는 하숙집도 방의 구조와 가구, 집주인 보몬트 부인의 관리와 접대까지 생활감 있게 그려져 있고요. 일본 작가가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수준입니다.

이방인인 일본인이 영국에 압도당하는 묘사도 좋습니다. 가오루는 당대 최대 선진국인 영국을 바라보며 감탄하면서도 위축되는데, 그 심정이 굉장히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동시에 일본의 현실도 냉정하게 바라봅니다. 원래 백성이었던 자들이 영국을 흉내 내어 공작이니 백작이니 하며 으스댄다는 식인데 꽤 통렬합니다. 소설가가 되기를 결심하기까지의 가시와기 가오루의 심리 묘사도 설득력 넘치고요.

팩션답게 많은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데 - 앨버트 에드워드 황태자, 앨버트 빅터 황태손, "동굴의 여왕"의 작가 에드거 라이더 해거드, 신지학 마담 블라바츠키, "아라비안 나이트"의 소개자 리처드 버튼, 잭 더 리퍼 후보이기도 했던 변호사 몬터규 존 드루잇에 심지어 어린 시절의 버지니아 울프까지! - 이 묘사 역시 뛰어납니다. 이 중 옆 집 6살 소녀인 버지니아와 성공하고 싶어 하는, 자기 과시욕이 강한 가난한 아일랜드인으로 그려지는 버너드 쇼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실제로 잭 더 리퍼로 오해받았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잘 어울렸어요.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엘리펀트 맨" 조지프 케리 메릭에 대한 묘사도 좋습니다. 과거의 ‘공연’은 그 자신도 감수했던 행동이었고, 현재의 안락을 유지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가오루 등과의 교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그의 심성이 아주 인상적이거든요.

잭 더 리퍼가 저질렀던 범죄에 대한 묘사도 강렬합니다. 다른 잭 더 리퍼 관련 작품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낙서를 지운 이유와 그 낙서의 의미를 풀어내는 부분처럼 익히 알려져 있는 설도 이야기 속에 잘 녹여내고 있고요. 수사를 맡았던 경찰 조직과 지휘 체계, 수사 방식에 대한 묘사도 상세해서 재미를 더합니다. 마지막 피해자 메리 켈리와 가오루가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다는 설정도 좋습니다. 가오루가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고 메리 켈리를 사랑한 존 드루잇과 가오루 사이의 접점도 더해지기 때문에, 그녀의 최후가 더 끔찍하게 다가오니까요. 잭 더 리퍼 사건을 바라보는 런던 시민들의 태도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내세운 범인은 트리브스 의사인데, 트리브스는 화이트채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므로 매춘부들이 경계하지 않았고, 피투성이가 되어도 의심받지 않았으며, 병원에서 물을 마음대로 써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근거인데 꽤 그럴듯 합니다. 트리브스가 보호하는 '엘리펀트 맨' 조지프 메릭이 얽혀있다는 추리도 괜찮습니다. 트리브스는 메릭의 보호자였기 때문에, 밤중에 병원으로 들어올 때 메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는 추리이지요. 단서는 메릭이 몸을 씻을 때 보였던 핏자국입니다. 메릭은 피를 흘리지 않았으므로, 그 피는 다른 곳에서 비롯된 것일 테니까요. 메릭이 입을 다문 이유도 앞서 가오루가 눈치챈, 지금의 안락을 놓치고 싶지 않은 심정 때문이고요. 

가오루가 첫 눈에 반했던 비토리아는 드루잇의 여장 모습이었고, 드루잇은 스티븐과 여장을 하는 동반자였는데 드루잇이 메리 켈리와 사랑에 빠져서 일어난 사건도 재미있습니다. 드루잇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스티븐이 잭이라고 확신하고, 그를 비밀방에 감금해 버리고 말았거든요. 버지니아가 스티븐의 사무실에서 들었던 '유령 소리'도 여기서 복선처럼 사용됩니다. 스티븐이 여장할 때 사용하던 옷장 속 비밀 방에서 난 소리였던 겁니다.

범행 도구로 보이는 메스가 가오루에게 전해진 메릭이 만든 이별 선물 안에 있었다는 일종의 반전도 나쁘지 않고, 그 외 시기와 잘 맞춰 사용된 사건과 소품들도 볼거리에요. 수시니의 비너스, 자전거, 베르티용 측정법과 지문, 맹장염 수술법, 빌헬름 1세의 죽음과 마지막의 관동 대지진까지 모두 적재적소에 잘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 짜여진 추리 소설로 보기는 무리입니다. 트리브스 의사가 진범이라는 추리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없는 탓입니다. 황태손이 범인이고 왕실 주치의가 은닉을 도왔다는 식의 다른 잭 더 리퍼 관련 추론보다 더 설득력 있다고 보기 어려워요. 동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리브스 의사가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증거도 없고 동기도 부족해서, 후더닛과 와이더닛 양쪽 모두에서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 황태자 연회에서 펼쳐지는 다카하라의 추리쇼도 어처구니 없습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지문을 확보했다며 연회에 참석한 상류 계급 의사들을 대상으로 협막을 하는게 말이나 됩니까. 지문이 일반적이지도 않은 시대인데도 말이지요. 트리브스가 범인이라는걸 황태자에게 설득하는데 성공했다면, 이런 추리쇼보다는 몰래 트리브스 의사를 사고로 위장해 죽이는 쪽이 더 현실적이었을 겁니다.

분량도 문제입니다. 780여 페이지에 달하는데, 가시와기 가오루의 갈팡질팡하는 혼란스러운 심리 묘사, 연회와 만찬 장면, 주변 인물 묘사가 너무 많습니다. 상상을 초월한 미남으로 황태자를 비롯한 온갖 상류층과 깊은 교분을 쌓은 다카하라 캐릭터 설정도 영 별로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잭 더 리퍼 사건과 실존 인물들을 활용한 팩션으로는 볼 만 하지만 추리 소설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국내 소개가 될지 잘 모르겠지만,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5/03/22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 엘리스 피터스 / 최인석 : 별점 2점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 4점
엘리스 피터스 지음, 최인석 옮김/북하우스
이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캐드펠 수사는 수도원의 영예를 위해 성녀 위니프리드의 유골을 가져오려는 로버트 부수도원장의 웨일즈행 여정에 동참했다. 유골이 있다는 웨일즈 귀더린에 도착한 일행은 유골 이전을 반대하는 마을 지주 리샤르트와 갈등을 빚었다. 그래서 논의를 다음날 이어가기로 했는데, 리샤르트는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유력한 용의자는 외지인 엥겔라드였다. 엥겔라드는 평소 리샤르트의 딸과 결혼 문제로 다툼을 벌였으며, 범행에 사용된 흉기도 그의 화살이었다...

영국 작가 앨리스 피터스(Ellis Peters)의 캐드펠 수사(Brother Cadfael)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이 시리즈는 20여 년 전 번역 출간되었던 바 있는데, 이번에 북하우스에서 완역본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이전 번역 출간본 제목은 "성녀의 유골"이었지요. 시리즈 중 대표작입니다. 미국 추리 작가 협회(MWA)와 영국 추리 작가 협회(CWA)에서 각각 선정한 all time best 100에 포함되었을 정도로요.

시리즈 특징인 12세기 영국의 풍경과 분위기를 생생하게 재현한 묘사는 여전히 뛰어납니다. 시리즈의 다른 작품과 달리 웨일즈 귀더린 지방을 배경으로 하는데, 영국 본토와는 다른 웨일즈 특유의 분위기가 마을과 그곳 사람들의 세세한 묘사를 통해 손에 잡힐 듯 그려집니다.

성녀 위니프리드의 유골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로버트 부수도원장과 마을 지주 리샤르트의 갈등도 흥미로웠습니다. 세속적 욕망으로 변질된 종교가 아무리 권위를 갖추었다 해도, 순수한 신앙과 믿음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한지를 잘 보여주거든요. 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그리고 수도사가 주인공인 작품의 시대적 분위기와도 잘 어우러졌고요.

추리적인 부분에서도 몇몇 장면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리샤르트의 사체 검시를 통해 사건 현장의 조작 여부를 밝혀내는 캐드펠의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나름 과학 수사인데, 12세기라는걸 감안해도 별로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멋진 추리였습니다. 또한, 쇼네드가 범인 콜룸바누스 수사를 추궁하다가 실수로 그를 죽게 만든 뒤, 그를 성녀의 유골과 함께 ‘빛의 세계’로 보낸 것처럼 꾸미는 마지막 장면이 아주 기발했습니다. 수사가 사라진걸 기적으로 포장하는, 시대에 걸맞는 완전범죄였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신념을 세속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려 한 수도원에 대한 통렬한 복수로도 해석될 수 있고요. 2년 뒤 모두가 행복해졌다는 에필로그도 만족스러웠어요.

그러나 all time best 100에 포함될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뛰어난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탓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용의자가 지나치게 제한적이라는 점입니다. 리샤르트를 살해할 동기를 가진 사람은 마을 사람들 중에는 없습니다. 다툼이 있었다는 외지인 엥겔라드가 범인일 경우, 그가 현장에 자기 화살을 그대로 남겨둔 것은 이해하기 어렵고요. 현장을 조작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남는 용의자는 성녀의 유골을 슈루즈베리 수도원으로 옮기려 했던 캐드펠 일행뿐입니다. 리샤르트만 없다면 유골을 쉽게 옮길 수 있으니, 이는 확실한 동기가 됩니다. 그러나 사건 당시 캐드펠과 함께 있었던 수도사들은 범인일 수 없습니다. 결국 기도하러 나갔던 제롬 수사나 콜룸바누스 수사 중 한 명이 범인입니다. 당연히 야망 넘치는 콜룸바누스 수사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고요. 

이 정도로 용의자가 좁혀지면, 사실 둘 중 누가 범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지요. 문제는 둘 중 누가 범인인지 밝히기 어렵다는 겁니다. 콜룸바누스 수사에게 처방했던 양귀비액이 줄어든 것(그가 제롬 수사에게 먹여 잠들게 만들었기 때문)은 증거가 될 수 없어요. 결국 쇼네드가 성녀로 변장한 뒤, 콜룸바누스를 자극하여 자백을 유도하는 식으로 이야기는 흘러갑니다. 이렇게 논리적 증거 없이 심리적 압박만으로 범인을 밝혀내는건, 이 작품을 정통 추리소설로 보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중세 영국의 역사적 분위기와 종교적 갈등을 효과적으로 담아낸 점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합니다. 하지만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다소 아쉬워 감점합니다. 역사 미스터리보다는 팩션 드라마에 더 가까운 작품이에요. 정통 추리물을 선호하는 저로서는 앞으로 이 시리즈를 더 읽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2025/03/01

명탐정 코난 :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 (2024) - 나가오카 치카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홋카이도의 하코다테에서, 괴도 키드가 히지카타 토시조에 썼다는 일본도를 훔치려 했다. 이 칼들을 모으면, 오노에 재벌 선대가 남긴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핫토리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키드는 칼을 훔쳐갔지만, 암호를 풀 수 없어서 코난 일행에게 돌려주었다.

이 때 오노에 가문 변호사가 살해되었고, 경찰은 모리 탐정, 핫토리와 함께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될 보물 찾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보물을 노리는 무기 상인 카도쿠라가 오노에 선대로부터 칼을 맡았던 전직 사범 후쿠시로를 납치했고, 괴도 키드를 쫓던 나카모리 경부도 카도쿠라에게 저격받아 중상을 입고 마는데...

"흑철의 어영"에 이은 명탐정 코난 극장판 시리즈의 27번째 작품입니다. 일본의 유명 관광지 하코다테를 배경으로 전설적인 보물과 연쇄 사건이 얽힌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선, 추리적으로는 꽤 흥미롭습니다.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한 암호가 등장하는데, 전통 일본도의 구조와 히지카타 토시조가 남긴 시집, 하코다테의 오릉곽 등 실존하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허구가 아니라는 점에서 몰입감을 높이며, 사라진 성릉도 대신에 히지카타 토시조가 칼싸움 중 남겼다는 자국의 본을 떠서 코등이를 만드는 이야기는 팩션같은 재미도 줍니다. 덕분에 2차 대전 당시 숨겨진 무기라는 다소 비현실적인 설정도 그럴듯하게 포장됩니다.

주 무대인 오릉곽은 물론, 여러 하코다테의 실제 명소들이 등장하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코다테 뿐 아니라 모미지가 좌충우돌하면서 다른 홋카이도의 명소를 보여주기까지 하고요. 덕분에 단순한 미스터리가 아니라 '여정 미스터리' 같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엔딩에서는 실제 사진이 보여지는데, 꼭 한 번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극장판 코난 특유의 비현실적인 액션도 여전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납득할 만한 수준이었습니다. 케이블카 선로를 따라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달리거나, 비행기 날개 위에서 검술 대결을 펼치는건 고속 열차가 탈선하거나, 거대한 건물이 무너지고 침몰하는 것에 비교하면 소소한 편이지요. 실제 명소들이 무대인 덕분이기도 할 텐데, 앞으로도 이러한 방향성이 유지된다면 좋겠습니다.

시리즈 팬으로는 핫토리 헤이지가 핵심 멤버로 활약한다는게 좋았습니다. 제 최애 캐릭터 중 한 명이거든요. 핫토리가 카즈하에게 고백하려고 전전긍긍하는 모습, 모미지의 훼방으로 고백에 실패하는 장면 등은 충분히 즐길만 했고요. 신이치와 괴도 키드가 닮은 이유(알고보니 사촌간!)가 밝혀지는 쿠키 영상도 호불호가 갈린다는데, 저는 재미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괴도 키드 세계관과 엮을 필요는 없어 보이긴 했지만요.

그러나 단점도 없지 않습니다. 일단, 이야기가 너무 허술합니다. 초반에는 칼을 훔치려는 키드와 핫토리, 코난과의 대결이 펼쳐지고, 그 뒤에는 보물을 찾으려는 암호 해독이 진행됩니다. 이 이야기만 중심으로 전개해도 차고 넘쳤을 텐데, 경찰이 개입하게 하기 위해 변호사 살인 사건을 삽입한건 무리수였습니다. 애초에 범인이 저지를 이유가 없었던 사건이기도 했고요. 키드 역시 칼을 훔치려다가 돌려준 이후에는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이유가 없어서, 계속 등장하는건 억지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건의 동기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2차 대전 당시에는 전황을 바꿀 수 있을 만큼 강력했던 무기라 하더라도, 21세기에 경제적 가치를 가질리 없습니다. 이 당연한 이치를 무시하고, 악당들이 경찰에게 총질을 하고 일본 대도시에서 폭탄 테러를 하면서까지 이를 찾아다니는 전개는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다른 이야기도 이 때문에 여러모로 이상하고요. 차라리 금괴가 보물이라는 설정을 밀어붙이는 것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추리적으로도 암호 풀이의 과정은 좋지만,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밝혀내는 마지막 장면은 많이 허술했습니다. 트릭은 성릉도의 코등이(?)의 모양이 오릉곽과 동일하다는 점을 이용한 것입니다. 먼저 기구를 띄운 뒤 칼을 바라보면서 오릉곽과 코등이의 형태가 일치하는 고도를 찾아냅니다. 기구 고도에 위치하는 장소는 하코다테 산 밖에 없으니, 하코다테 산의 이 고도 위치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건데, 실존하는 장소에 기반한 트릭이라는건 장점이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선, 기구를 띄우는 위치를 정확하게 모르면 고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칼을 세우는 위치에 따라서도 오차가 생길 가능성이 크고요. 기구에서 산을 가리키는 정확한 방향을 모르면, 이 역시 오차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이래서야 '하코다테 산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라는 말과 별다를게 없어서, 이렇게까지 고생해서 암호를 풀 필요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는데, 이 정도면 그래도 평작은 된다 싶네요. 킬링 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2025/01/10

메이지 단두대(明治斷頭台) - 야마다 후타로 : 별점 3점

明治斷頭台 山田風太郞ベストコレクション (角川文庫) (文庫) - 6점
山田 風太郞/角川書店(角川グル-プパブリッシング)

아래 리뷰에는 트릭,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이지 단두대"는 일본 소설가 야마다 후타로가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쓴 단편집입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격변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메이지 시대의 사회적 혼란과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을 탐구합니다. 일본 플레이보이지 선정 "미스테리 - 철야본을 찾아라!"에서 당당히 1위로 선정되었기에 계속 궁금했던 작품인데, 이번 기회에 원서를 ChatGPT의 도움으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호평에 걸맞는 장점들이 눈에 띕니다. 첫 번째 장점은 실존 인물과 메이지 시대 풍광을 활용한 팩션적 재미입니다. 츠키지 호텔관, 에이타이바시 다리, 코덴마초 감옥 등 메이지 시대의 상징적인 장소들이 사건 속 배경으로 등장하고, 사회적 변화와 증기선같은 기술 발전이 트릭의 핵심 요소로 작용합니다. 주역 중 한 명으로 근대 경찰의 아버지 카와지 토시요시가 등장하고, 그 외에도 사이고 다카모리라던가 '마지막 사무라이' 키리노 토시아키, 일본 육군 창설자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실존 인물들이 다수 등장해서 독자들에게 현실감과 역사적 몰입감을 전해줍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가공의 이야기와 결합해 당시 시대적 풍광을 생생히 재현하며, 작품의 팩션적 매력을 극대화합니다.

두 번째 장점은 추리적 재미와 정교한 트릭의 사용입니다. "괴담 츠키지 호텔관"에서는 일본도 양 끝에 게다를 고정시키고, 게다 굽을 나선형 계단 난간에 걸쳐 위에서 미끄러트린 장치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범인 나카사카 큐우치는 이를 이용해 자신은 옥상 전망대에 있는 모습을 보이면서, 아래층에서 올라오던 피해자를 공격해 살해했지요.
"미국에서 보내는 사랑"에서 범인은 인력거를 혼자서 움직이게 만들었는데, 진상은 인력거 두 대를 묶어서 일종의 4륜 차량으로 만들었던 겁니다. 이를 언덕 위에서 밀어서 굴러내려가게 한건데, 굉장히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트릭이었다 생각됩니다. 다만 라소츠(나졸)들의 위증(?)과 마지막 현장에서 인력거가 묶여 있지 않았던 점(얇은 끈으로 묶여 풀렸다?) 등이 애매했던 점인데, 이는 라소츠들이 진범의 도우미였다는 마지막 단편을 통해 잘 설명되고요.
"에이타이바시의 교수형"에서는 밧줄과 배의 움직임을 이용해 자살로 위장된 사건이 등장합니다. 범인 테라니시 진주로는 피해자를 강 위 증기선으로 유괴한 뒤, 미리 에이타이바시에 설치해 두었던 밧줄 고리에 목을 밀어넣고, 반대쪽 끝을 자신이 잡아당겨 자살처럼 보이게 위장했습니다. 증기선을 타고 있어서 당시 상식으로는 이동할 수 없는 곳에 있었다는 알리바이도 만들 수 있었고요. 앞서 설명드렸던 사회적 변화와 기술적 발전이 사용된 멋진 트릭입니다.
"자신의 목을 안고 있는 시체"에서는 범인이 아리사카 이헤이를 살해한 뒤, 그의 신원을 감추기 위해 피해자의 몸과 처형된 죄수의 목을 붙여 위장한 사건입니다. 핵심은 '어떻게 죄수의 목을 빼돌렸는지?'인데, 이는 마지막 이야기에서 라소츠의 속임수였다는 게 밝혀지면서, 앞서 모든 작품에서 라소츠가 한 몫했다는 걸 결정적으로 증명하게 됩니다.

세 번째 장점은 충격적인 결말입니다. 마지막 단편 "정의로운 정부는 존재할 수 있는가"에서 '탄정대 대순찰 케이시로가 모든 사건의 흑막이었다'는 놀라운 반전이 드러나는 덕분입니다. 그는 정의를 위해 악인들을 처단하는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해 라소츠들의 협력을 얻었던 겁니다. 사실 사건 대부분에서 라소츠들의 부정부패와 속임수가 바탕이 되고 있어서 독자들에게 답답함을 유발했는데, 알고 보니 과거 무사였던 라소츠들은 탄정대 대순찰 케이시로의 이상에 공감하며 범죄에 협력했고, 케이시로는 이들의 범죄를 묵인하며 자신의 계획을 이어갔던 것이었지요. 모든 걸 밝힌 케이시로가 스스로 단두대를 사용해 자살하는 장면도 충격적이며, 정의와 권력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전해줍니다. 이후 체포하는 척했던 라소츠들이 에스메랄다를 탈옥시키며 막을 내리는데, 이 역시 괜찮은 결말이었다 생각됩니다.

그러나 몇 가지 단점도 존재합니다. 우선, 작품의 배경인 일본 메이지 시대는 국내 독자들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집니다. 사츠마와 조슈번의 갈등과 같은 역사적 맥락이 주요 요소로 등장하지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전 지식이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추리 소설로 기대했는데, 실제로 트릭이 활용된 본격 추리 단편은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이야기 "탄정대 대순찰"은 케이시로와 라소츠들, 탄정대와 단두대의 배경 설명에 치중되어 있고, 이어지는 "무녀 에스메랄다"는 에스메랄다에 대한 소개가 대부분이거든요. 마지막 "정당한 정부는 가능한가"는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이는 자백을 통해서일 뿐입니다. 그리고 추리보다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중점을 두고 있고요. 따라서 본격적인 추리 요소는 부족한 편입니다.

케이시로가 정의를 추구하며 폭주하는 이유, 라소츠들이 케이시로에게 충성을 바치며 목숨까지 거는 이유에 대한 설명 역시 부족합니다. 이는 작품 전체의 설득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입니다. 소소한 악행을 저지르는 평균 이하 범죄자들인 라소츠들의 심경 변화가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데, 어떤 식으로든 설명이 필요했어요. 반대로 에스메랄다가 프랑스의 사형 집행인 상송 가문의 후예로, 일본에서는 '무녀'로 활약한다는 설정은 너무 과했고요. 만화적이라서 영 별로였습니다.

그래도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추리 팩션으로서의 재미는 충분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바실리스크"같은 닌자 액션물(?) 원작으로만 알고 있었던 작가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제대로 된 번역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기를 바랍니다.

2024/05/17

리브 바이 나이트 : 밤에 살다 - 데니스 루헤인 / 조영학 : 별점 3점

리브 바이 나이트 : 밤에 살다 - 8점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거물 앨버트의 애인 에마와 사랑에 빠진, 갓 스무살이 된 조는 경찰관 세 명이 죽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조는 도주 중에 에마의 배신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찰스타운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교도소에서 우여곡절을 겪다가 앨버트의 라이벌인 마소의 생명을 구해주었고, 출소 뒤  마소의 명령으로 탬파 지역으로 향했다. 지역 밀주 사업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머리를 써서 밀주 원료를 독점하게 된 조는 앨버트를 지역에서 축출한 뒤, 탬파 지역의 왕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마소가 조의 구역을 아들에게 넘겨주려한 탓에 두 세력은 엄청난 격돌을 벌였고, 큰 희생끝에 마소를 제압한 조는 조직을 이탈리아인인 부하 디온에게 넘기고 은퇴한 뒤 조직의 자문역으로 표면적으로 합법적인 사업에만 관여하였다. 하지만 조 때문에 딸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미쳐버린 전 경찰서장 어빙의 총격으로 아내 그라시엘라를 잃고 마는데...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네가 세상에 뿌린 씨앗은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어."

경찰의 아들로 템파 지역 밀주 사업을 장악해 거물이 된 조지프(조) 커글란이 은퇴(?)하기까지의 반생을 그린 범죄 스릴러.

기본 뼈대는 흔해빠진 밀주시대 암흑가 거물 성공담입니다. 1990년대 영화 "몹스터즈" 등과 별로 다를게 없어요. "몹스터즈"의 주인공이었던 실존 인물 찰리 '럭키' 루치아노가 임팩트있게 등장하기도 하고요.
그러나 저자의 필력은 이야기를 아주 뻔하지 않게 만듭니다. 방대한 분량으로 쌓아올린 등장인물들의 서사는 모두 일품이며, 조에게 닥치는 온갖 위험과 역경이 워낙에 창의적이고 생생해서 독자를 몰입시키기 때문입니다. 찰스타운 교도소에서 자기 아버지의 힘을 이용하려는 마소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운 좋게 마소의 생명을 구해주는 것부터 나름대로 기발했습니다. 탬파 지역 밀주 사업을 장악하기 위해서 군함의 무기를 털어야했던 작전도 그럴듯했고요. 조가 사업을 위해 흑인들과 손을 잡은걸 꺼림직하게 여겼던 KKK단의 훼방도 신선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도박 사업을 일으키려다가, 서장의딸 로레타의 광적인 전도 활동 탓에 꿈을 접는건 창의적인 역경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건 살짝 웃기기까지 했어요.
또 이런 일련의 서사와 역경을 통해 소개된 여러가지 복선들이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잘 짜여져 있다는 느낌을 전해줍니다. 마지막에 마소가 조의 사업을 통째로 자기 아들에게 주려고 조를 죽이려했던 부분에서 이런 복선들이 특히 잘 활용됩니다. 조의 거짓말 - 나를 배반한건 디온이 아니라 그의 형이다 - 을 밝히기 위해 초반에 무대에서 사라졌던 앨버트가 다시 나타나고, 시멘트 구두를 신고 수장당할 위기에 놓인 조가 죽은줄 알았던 에마가 찍힌 사진으로 시간을 끌고, 마지막에 조를 구해낸건 사업 초기부터 언급되었던 '기관총이 장착된 운송용 비행기' 덕분이라는 식입니다.

묘사도 출중합니다. 총격전은 많이 벌어지지 않고, 벌어져도 담담한 편이지만 '처단' 장면만큼은 인상적으로 잘 쓰여져 있습니다. 조와 마소 조직원들이 격돌하는 클라이막스에서 개틀링 기관포를 무력화 시키는 비행기의 공격도 화끈했고요. 배경 묘사도 뒤지지 않아서 찰스타운 교도소의 끔찍함과 탬파 지역의 무더위, 쿠바 담배 농장의 풍광 등은 모두 손에 잡힐 듯 생생했습니다. 읽으면서 '냄새'가 느껴질 정도도 말이지요. 이는 실존했던 금주법 시기 일화 및 인물들, 역사적인 배경과 결합되어 일종의 '팩션'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조 커글란이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는건 운이라고 해도 지나쳤습니다. 두뇌파 범죄자로 금주법이 끝나는걸 대비해 정상적인 양조 사업을 미리 준비하는 등 사업(?)에 있어서는 상당한 식견과 비젼을 지닌 것으로 보이지만, 위기 상황은 운으로만 모면한다는건 그리 좋은 설정은 아니었어요. 마소가 조를 불렀을 때, 별다른 준비없이 호랑이굴로 들어간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소가 호텔방에서 조의 거짓말 - 디온이 배신했다! - 를 밝혀낸 뒤 바로 조를 죽이지 않은 것 처럼요. 괜시리 시멘트 구두를 신겨 수장시킬 이유는 없었습니다.
또 앞서 인물들의 서사는 이 작품의 장점이라고 했는데, 과한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로레타의 자살과 그의 아버지 어빙과의 관계를 의심하는 부분은 많이 거슬렸고요. 이왕 이렇게 갈 거였다면 좀 더 확실히 상황을 드러내던가.... 
서로를 미워하던 토머스와 조 부자가 조가 큰 부상을 입고 회복한 뒤, 갑자기 친밀해지는 것처럼 인간 관계의 변화도 급작스러운게 많습니다. 이 시점에서 토머스는 조 때문에 모든걸 잃었기 때문에 미움이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가까와질 이유는 없어 보였는데 말이지요. 아내 그라시엘라가 죽은 이후 전개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조 커글란이 사랑에 목숨거는 순정남이라는건 어린 시절 에마와의 에피소드에서는 충분히 먹힐 수 있었습니다. 어린 애송이였으니까요. 그러나 나이도 먹은데다가 큰 조직의 수장이 된 현재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조가 쿠바 농장을 대하는 태도는 총칼을 앞세우고 약간의 호의만 제공했을 뿐인데, 이를 의미있는 것처럼 포장하는건 전형적인 식민지 지배자의 논리라 불쾌했고요.
무엇보다도 아내가 죽은 뒤 조는 범죄 세계를 떠났다는 한 페이지의 에필로그가 전부인 결말은 이 책만의 평가를 어렵게 만듭니다. 이 작품이 3부작의 가운데 권인 탓인데,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전혀 몰랐으나, 이 정도로 후속권과 이어진다면 각 권을 별개로 출간하지 말고 1~3권의 긴 장편으로 출간하는게 맞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속았다'라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그래서 이 책만의 별점은 3점입니다. 묘사와 전개 모두 좋은 1급 범죄 스릴러이지만, 이 책만으로는 온전한 평가를 내릴 수 없다는 점에서 감점합니다.

2024/05/15

DC : 더 뉴 프런티어 1,2 - 다윈 쿡 / 임태현 : 별점 2점

DC : 더 뉴 프런티어 - 4점
다윈 쿡 지음, 임태현 옮김/시공사(만화)
DC : 더 뉴 프런티어 2 - 4점
다윈 쿡 지음, 임태현 옮김, 데이브 스튜어트 그림/시공사(만화)

"파커" 시리즈를 통해 기억해 두었던 작가 다윈 쿡이 만들어낸 새로운 DC 히어로 세계관 이야기. 1950~50년대를 무대로, 실제 역사와 히어로들의 이야기를 섞어 선보이고 있습니다.

다윈 쿡의 작화는 역시나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DC 히어로물을 자신만의 세계에 당시 시대 분위기에 잘 녹아들도록 구현했거든요. 흑백 뉴스, 신문 기사, 심지어 그림책 등을 곳곳에 삽입하는 구성도 일품이었고요.

그러나 내용은 그닥이었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와치맨"을 연상케하는 것도 문제고요. '매카시즘'과 같은 당시 정치적인 환경을 주요 배경으로 삼으면서, 정부측 히어로(슈퍼맨과 수어사이드 스쿼드, 챌린저스 오브 디 언노운 | 닥터 맨해튼과 코미디언)와 숨어서 활동하는 히어로(배트맨 | 로어샤크)가 나뉘고, 아에 은퇴 상태로 본업에 종사하게 된다던가(원더우먼 | 2세대 나이트 아울), 정부의 탄압 속에 체포되고 사망하는 히어로(아워맨 |모스맨)와 폭도들에 의해 사망하는 히어로(스틸 | 1세대 나이트 아울)가 생기는 등의 캐릭터 설정은 거의 판박이에요. 거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적의 침략으로 모든 히어로들이 힘을 합쳐 대항하게 된다는 결말부는 "와치맨"에서 '오지만디아스'의 계획이 이루어진 세계관과 똑같다는 생각만 들었고요. 게다가 "와치맨" 만큼의 정치적인 메시지나 사회 비판 요소는 포함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결국 정의는 승리한다는 판에 박힌 내용이에요.
결론적으로, 약간 팩션 느낌으로 가공한 히어로물의 한 변주일 뿐입니다. 

마션 맨헌터 존 존스와 그린 랜턴 할 조단, 그리고 플래시 배리 앨런의 비중이 높은 편인데, 이 역시 "와치맨"가 비교하면 많이 별로였습니다. 존 존스와 할 조단은 영웅으로 거듭나기 이전의 이야기가 대부분인데, 영웅이 되는 과정에서의 고민이라던가, 현재 정치, 사회적 상황에서의 갈등은 거의 그려지지 않아서 이야기 주제와 따로 노는 느낌이 너무 강합니다. 플래시 배리 앨런이 히어로를 은퇴하기로 결심한 장면은 너무 뻔했고요.
현재 사회의 가장 큰 갈등 상황 중 하나인 인종 차별로 인해 탄생한 히어로 스틸 존 헨리 이야기가 그나마 주제와 가장 잘 맞아 떨어졌는데, 단순히 스쳐지나가는 짤막한 소품일 뿐이라 아쉬웠습니다. 이 이야기만 단편으로 따로 내는게 훨씬 좋았을거에요. 결말까지 완벽한 걸작이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나쁘지는 않은데, 기대만큼 신선하거나 새롭지는 않아서 감점합니다. 애니메이션이나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2024/02/21

천재탐정 미타라이: 살인사건의 진실 (2016) - 이즈미 세이지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진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잡지 편집자인 오가와가 미타라이를 찾아와 미해결 수수께끼 사건 해결을 요청했다. 미타라이는 고고섬에 변사체가 연달아 떠내려온 사건에 흥미를 갖고, 조사와 추리로 사체는 후쿠야마에서 해류를 타고 내려왔다는걸 알아냈다.
후쿠야마로 향한 미타라이는 다른 외국인 변사체와 함께, 류진 폭포 부근에서 눈과 입이 꿰메어진 부부와 그들의 죽은 아기가 발견된 사건과 마주쳤다. 그리고 사건에는 후쿠야마 굴지의 기업인 사이쿄 화학 공업과, 과거 '세이로'라고 불리우던 전국시대 병기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밝혀내는데....


작가가 허락하지 않아서 영상화가 늦어졌다는, 시마다 소지의 미타라이 시리즈 첫 번째 영화. 티빙에서 감상했습니다. 지난 연초에 감상했는데 리뷰가 늦었네요.

여러 사건이 등장해서 추리적으로 풍성하다는게 장점입니다. 아래 순서로 사건이 일어납니다.
  1. 고고 섬으로 6구의 변사체가 떠내려온다. 한편 후쿠야마 바다에서는 '수룡'을 목격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2. 류진 폭포 부근에서 눈과 입이 꿰메어진 이비 부부와 그들의 죽은 아기가 발견되었다.
  3. 후쿠야마에서 외국인 여성 변사체가 발견되었고, 경찰은 사체를 옮기려던 외국인 무리를 검거했다.
  4. 역사 연구가 타키자와가 전국시대 병기 '세이로'의 존재를 알아냈다.
  5. 타키자와가 수상한 외국인과 부딪혔는데, 그는 이상한 알약을 떨어트렸다. 그 뒤 타키자와를 외국인 무리가 습격하려다 그녀의 저항으로 되려 추락사했다.
여기서 '외국인'들이 관련되어 있는 고고 섬 변사체, 후쿠야마 여성 변사체, 타키자와 습격 사건은 한 묶음입니다. 위험 약물을 제조 판매하던 외국인 무리가 관련자들 사체를 바다에 버렸고, 타키자와가 비밀을 눈치챘다 여기고 죽이려 했던 겁니다. 

이 사건들을 빼면 핵심 사건은 이비 부부 사건과 수룡의 정체, 두 가지로 중반 이후에는 두 사건, 그 중에서도 정통 추리물이라 할 수 있는 이비 부부 사건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이 사건은 아기 보모 타츠미가 실수로 아이가 추락사한걸 감추려고 유괴극을 꾸몄으며, 복수를 위해 이비 씨 가족을 감시하던 마키타 사장이 이를 눈치채고 부부마저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는게 진상인데 여러가지 단서, 복선을 나름 공정하게 보여주면서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마키타 사장이 협박 편지를 남긴게 아니라서, 이비 씨에게 편지 내용을 읽어보라고 시켰고(내용 파악을 위해), 몸값 약속 시간도 선뜻 바꾸어 주었다는 등의 추리도 합리적이었어요.
'세이로'가 수룡이며, 이는 알고보니 잠수함이었다는건 역사 추리물 형태인데, 역사 속 기록과 연결하여 팩션처럼 전개하는게 재미있었습니다. 전국시대 병기가 흑선에 대항할 비밀무기로 기능한다는건 말도 안되지만, 잠수해서 흑선의 '외륜'만 노린다면 혹시?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설득력도 있었고요.

영화 만듦새도 좋습니다. 특히 촬영이 아주 인상적이에요. 요새 영화에서 보는 선명한 조명이 아니라, 자연광을 쓴 듯 자연스럽고 다소 낮은 채도의 약간 오래 전 영화같은 화면을 보여주는데 굉장히 좋았어요. 작위적일 수 밖에 없는 추리물이지만 이런 자연스러운 화면이 그래도 생생함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촬영 덕분에 후쿠야마, 세토 내해 일대를 배경으로 삼는, 일종의 '여정 미스터리'로서의 가치도 높습니다.
주연 타마키 코지의 미타라이 연기는 본격물 탐정으로서의 모습에 충실해서 나쁘지 않았어요. 전형적이지만 이런 작품 속 탐정들이 뭐 대부분 그러하니까요. 만약 미타라이가 실제로 있다면 이렇게 생겼을 것 같다!는 이미지는 잘 전해줍니다.
하지만 추리면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이비 부부 사건은 마키타 사정의 동기, 그리고 경찰 수사 부분에서 아쉽거든요. 단순 복수로 이런 엽기적인 범행을 벌인다? 설득력이 낮습니다. 아기가 이미 죽었다면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앙값음이 되었을텐데 말이지요. 외국인 수하들을 시켜 진작에 복수할 수도 있었는데 이런 기묘한 범행을 구태여 저지른 이유도 설명되지 못합니다. 이비 씨 가족을 꾸준히 감시해왔다는 설정, 성공한 사업자가 자기 공장에서 불법 의약품을 제조한 이유도 작품 내에서 조금 설명해주는게 좋았을 겁니다.
그리고 경찰은 이비 씨가 과거 과격한 환경 단체 시위를 했고, 그 시위 탓에 사이쿄 화학공업 관계자가 자살했다는걸 알아냈습니다. 그렇다면 자살자의 가족을 찾아 나섰다면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을거에요. 영화에서처럼 '하나 뿐인 아들의 행방은 지금 알 수 없다'며 대충 흘려보낸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잠수함 세이로를 마키타 사장이 타고 도주하던 화물선에 충돌시켜 멈추는 장면은 뭔가 했습니다. 이유도 알 수 없고, 당황스럽기만 했거든요. 이렇게까지 해서 화물선을 멈춰야할 이유도 없었으니까요.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미타라이 시리즈 팬이라면 즐길만한 작품인건 분명합니다. 2시간 남짓한 상영시간동안 저는 충분히 즐거웠어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3/08/26

명탐정의 제물 - 시라이 도모유키 / 구수영 : 별점 2.5점

명탐정의 제물 - 6점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리뷰에는 트릭, 진상 그리고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탐정 오토야 다카시의 조수 리리코는 민박집에서 일어났던 밀실 사건을 멋지게 해결한 뒤, 학회에 참석해야 한다며 사무실을 떠났다. 귀국 예정일이 지나도 리리코가 돌아오지 않자, 그녀를 구하기 위해 오토야는 가이아나의 조든 타운으로 향했다. 알고보니 리리코는 짐 조든이 이끄는 종교의 광신도들이 모여 만들어진 마을 조든 타운을 조사하기 위해 찰스 클라크가 조직한 조사단의 일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착 직후 오토야와 동행했던 저널리스트 노기가 타운의 보안군에게 총살당했고, 뒤이어 클라크 조사단원들이 한 명씩 차례대로 불가능 상황에서 살해된채 발견되었다. 리리코는 오토야와 함께 조사를 펼친 끝에 미국 하원의원 라일랜드가 조든 타운을 방문한 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사건들은 모두 사고였고 불가능 상황이 된 건 신도들의 의지였다는 추리를 밝혔다.
그러나 라일랜드 일행을 타운 보안군이 사살하고 리리코마저 살해당한 날, 오토야는 대규모 자살쇼를 앞둔 조든과 신도들 앞에서 숨겨져 있었던 진상을 폭로하기 시작하는데....

최근 추리 애호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어 있는 일본 본격 추리물. 2023년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을 비롯하여 '고노미스',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등 유명 미스터리 어워드 상위권을 휩쓴 작품이지요.

유치해보이는 표지와 부제 탓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화려한 수상 이력이 증명하듯 '본격 추리물'로의 가치가 높다는게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조든 타운에서 벌어진 무려 4건의 불가능 범죄를 비롯하여, 도입부의 요코야부 요스케 밀실 살인 사건 등 사건도 풍성하고, 사건에 관련되어 있는 단서가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제공되며, 오토야와 리리코를 통해 각 사건마다 여러가지 추리가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리리코가 왜 오토야에게 가짜 서명이 되어 있는 <<탐정 교과서>>를 가져왔었는지 등 사소하지만 디테일한 추리들도 잘 짜여져 있고요.
특히 핵심이 되는 조든 타운에서 벌어진 불가능 범죄에 대한 트릭과 추리가 기발해서 만족도가 높습니다. 사건만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은데요.
  1. 전 FBI 조사관으로 인민교회 간부로 위장한 알프레드 덴트가 밀실인 자기 방에서 칼에 찔려 죽음.
  2. 조든 타운 요리반 멤버들과 티 타임을 갖던 사이비 과학 탐정 조디 랜디가 청산가리 중독으로 죽었는데, 차는 함께 했던 요리반 멤버들 모두가 같이 마셨음.
  3. 한국인 이하준이 상, 하반신이 토막난 사체로 발견되었는데, 이하준은 가방에 갇혀서 오토야와 리리코의 눈을 피해 빠져나갈 수 없었음.
  4. 묘지에서 리리코를 살해한건 아이였는데, 묘지 관리인 크리스티나는 아이는 누구도 묘지에 절대 들어오지 않았다고 단언함.
여기서 진상은 '조든 타운의 광신도들은 스스로 아무도 질병이나 몸의 이상이 없으며, 사람들을 이상이 없는 완전한 모습으로 바라보지만 외부인들은 그들의 모습을 현재 그대로 바라본다'는, 오토야의 표현을 빌자면 '외부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추리를 통해 밝혀지게 됩니다.
첫 번째 사건에서, 덴트는 이미 칼에 수차례 찔린 채로 방에 들어간 뒤 문을 닫고 밀실을 만든 뒤 죽었습니다. 그러나 방에 가던 덴트를 목격했던 Q는 덴트의 치명상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조든 타운의 신도가 몸에 상처가 있을리 없기에, 기억에 왜곡을 일으켰던 겁니다.
두 번째 사건에서 조디 랜디는 오른 손으로 차를 마시는 사람의 입이 닿는 부분에 묻혀진 독을 먹고 죽었습니다. 함께 했던 요리반 멤버 중 크리스티나는 오른 손이 없었고, 블랑카는 왼손잡이였으며 레이첼은 오른 손가락이 골절되어 오른 손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혼자서 오른 손으로 차를 마셨기 때문이지요. 이를 위해 범인은 사전에 레이첼의 오른 손가락을 부러뜨렸지만, 레이첼은 아픔을 느끼지 못했고 주위 사람들도 레이첼이 다쳤다는걸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사건에서 범인은 감방에서 이하준을 살해한 뒤, 상하체를 토막내어 각각을 간수 프랭클린을 이용해 밖으로 옮겼습니다. 프랭클린은 자신의 다리가 있다고 믿었기에, 휠체어 하반신 쪽에 설치(?)된 사체 토막의 존재를 몰랐습니다. 시체를 옮길 때 마다 범인에 의해 기절했던 것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요. 
네 번째의 리리코 사건은 범인 레이 모튼이 어른이지만 하이랜더 증후군을 앓던 탓에 아이같은 외모를 가졌던게 이유였습니다. 오토야는 실제 그대로 어린아이를 목격했지만, 묘지 관리인 크리스티나의 눈에 레이 모튼은 정상적인 성인이었기에 상반된 증언에 의한 불가능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광신자 집단의 잘못된 믿음같은 일종의 대규모 집단 최면은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하기는 했었습니다. 제가 읽었던 작품 중에서는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신의 로직, 인간의 매직>>이 대표적이지요. 특정 집단 전체에 걸려있는 일종의 최면으로 정보 자체가 왜곡된다는건 동일합니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밀실 대도감>>에서 소개된 <<다카마가하라의 범죄>>는 '현인신은 신이라서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 무녀가 조서를 들고 2층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 보초 눈에 보이지 않았다'라는, 종교 단체의 신앙으로 비롯된 현실 왜곡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는 아예 똑같은 발상일테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과 트릭을 꽤 현실적으로, 설득력있게 만드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제로 있었던, 정신병자 교주가 주도하여 신도들이 집단 자살했던 가이아나 존스 타운 사건 (인민 사원 사건)을 사건의 바탕으로 삼고있는 덕분입니다. 실제 사건을 본격물로 풀어내어 다채로운 트릭을 선보인 것도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다소 팩션같은 느낌을 전해주는게 좋더라고요.

하지만 이 '외부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추리 외의 추리들은 설득력이 약하다는 문제는 큽니다. 리리코의 추리부터 살펴보자면, 그녀는 사건들은 모두 사고였다고 - 덴트는 밀실에서 실수로 칼에 찔려 죽었고, 조디 랜디는 지병인 협심증으로 사망했으며, 이하준은 간수 프랭클린으로 변장하여 휠체어를 타고 급경사에서 고속으로 도주하다가 와이어에 걸려 토막이 났다 - 생각했습니다. 이를 발견한 조든 타운의 신도들이 '질병도 없고, 사고도 없는 조든 타운'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현장을 조작했다고 추리했고요. 
그런데 협심증이야 그렇다쳐도, 밀실에서 칼이 튀어 등에 찔려 죽었다? 고속 휠체어 이동으로 몸이 토막났다? 솔직히 어이없는 발상입니다. 이런 추리에 수긍하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이상해 보였습니다.

물론 이는 사건을 대충 수습해서 무마하기 위해 억지로 풀어낸 추리였다는 전제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 오토야의 '신앙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추리는 더 한심했습니다.
오토야는 덴트의 방을 밀실로 착각하게 만든 열쇠와 조디 랜디에게 다과회 시점에 녹아내리도록 독이 든 캡슐을 낮은 온도에서 녹는 저융점 합금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저융점 합금은 별다른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조든 타운에서도 어떻게든 가공할 수 있는 소재였을 수는 있어요. 문제는 이 합금이 그렇게 흔하지도 않았을테고, 원하는 모양으로 딱 맞춰 만들기도 쉽지 않았을 뿐더러, 때 맞춰 녹아내리도록 한다는건 더 말도 안된다는 겁니다. 이건 그야말로 만화에서나 사용될 수준의 트릭이었어요. 그나마 3일 전 사망했던 오토야의 지인 노기의 사체를 토막내어 이하준 사체로 위장한 뒤 발견되도록 만든 다음에 이하준을 살해했다는 추리 정도만 괜찮았습니다. 이후 이하준 사체를 토막내서 공동묘지 관리 오두막의 노기 사체와 바꿔치기 했다는 것이죠.
'신앙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추리의 끝이 짐 조든이 범인이라는건 설득력이 더욱 약했습니다. 저융점 합금을 사용할 수 있고, 이하준의 사체를 빼돌리기 위해 1감옥에 갇혀 있던 오토야와 리리코를 석방시킬 수 있었던건 짐 조든 밖에 없었다는게 근거인데, 애초에 저융점 합금을 사용했다는게 말도 안될 뿐더러, 짐 조든은 앞서 맹인에 가까울 정도로 시력이 낮다는게 이미 언급되기에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조든이 카리스마와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신의 천벌같은 불가능 범죄를 저질렀을거라는 동기도 미흡하기 짝이 없고요. 설령 조든이 그런 생각을 했다 한들, 직접 범행을 저지를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수족같은 간부나 광신자를 이용하겠지요. 맨슨 패밀리의 찰스 맨슨이나, 오움 진리교의 이시하라 쇼코가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애초에 '명탐정' 들이 다수 등장하는 설정부터가 별로에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괴사건 해결 전문 명탐정을 실체 있었던 사건과 결합하여 풀어나가니 괴리감만 크게 느껴집니다. 오토야와 리리코를 사이비 종교 전문가로 설정해서 조든 타운으로 향하게 만드는게 훨씬 좋았을거에요.
정보도 공정하게 제공되기는 하나, 너무 과해서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느낌도 들게 만듭니다. 대표적인게 덴트 방 옷장의 혈흔입니다. 등에 칼을 찔렸다고 혈흔이 저렇게나 튄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문이 어떻게 열리든 그게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았고요.

도입부의 밀실 살인 사건도 그닥입니다. 밀실 안에서 죽은 사람은 유명탐정 요코야부 유스케였고 사체에 남겨진 탄환 감식 결과, 그를 쏜 건 10여년 전 권총을 훔친 뒤 11명을 사살했던 108호 사건의 범인이었다는 사건이지요. 오토야는 추운 날씨인데도 요코야부가 얆은 옷에 난방도 켜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이는 범인이 요코야부의 겉옷을 벗겨갔으며, 그 이유는 겉옷에 총을 쏜 흔적을 숨기기 위해서였고, 따라서 요코야부는 자살했다, 이유는 요코야부가 108호였기 때문으로, 실수로 권총이 오발된 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창 밖 바다에 총과 겉옷을 버렸고, 그 때 그걸 목격한 거리의 떠돌이 소년을 쏴 죽였으며, 문만 열어두면 침입한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고 여겨졌겠지만 힘이 다해 문을 열기 전에 죽고 말았다는 추리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리리코는 요코야부의 겉옷을 벗겨간 건 자기보다 큰 재킷을 입고 있었던 거리의 떠돌이 소년이며, 그가 바로 108호였다는 추리를 내 놓습니다. 요코야부에게 원한을 품은 108호는 요코야부에게 총을 쏜 뒤 오토야의 추리처럼 그를 108호로 몰기 위해 총을 객실에 두고 나왔는데, 기력이 남아있던 요코야부가 창 밖의 108호를 쏴 죽인 뒤 108호로 오인받지 않으려고 권총을 던져버렸다면서요. 108호는 10년 전에도 10대 중반의 소년이었는데 지금도 어린 소년으로 보이는 이유는, 성인이 되지 못하는 선천성 질환인 하이랜더 증후군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리하는데, 이는 경찰 조사 결과 사실로 밝혀지게 됩니다.
오토야와 리리코의 추리는 괜찮습니다. 추운 날씨인데도 켜지 않는 나방과 입지 않은 외투, 안에서 보기에 열릴 것 처럼 보이지 않는 바다로 향한 창, 다른 객실 투숙객이 들은 물 튀기는 소리 등 단서도 잘 제공되고 있거든요. 
하지만 총을 훔쳐 11명이나 죽였던 범인이 알고보니 성장하지 못하는 병을 앓고 있었다는게 너무 억지스러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며, 무엇보다도 이 사건이 오토야가 조든 타운 신도들을 모두 독살한 진범이었다는 마지막 진상으로 이어진다는건 해도 너무했습니다. 명탐정 리리코가 고작 세 명을 살해한 잡범에게 살해당했다는걸 인정할 수 없어서 - 요코야부는 11명을 죽인 108호에게 죽었는데! - 수백명을 참살하도록 만들었다는데, 정말 가관이었어요. 일본식 명탐정 허세의 극을 달리는, 정신줄 놓게 만드는 황당한 동기였습니다. "탐정은 때로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며 탐정의 역할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도 옥의 티이고요. <<유리탑의 살인>>도 그렇고, 왜 이렇게 명탐정이라는 존재에 목숨을 거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동기야 어쨌건 오토야가 독을 탔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루이스의 유서는 이 사실을 증명하기에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어요. 신도 중 생존자였던 Q가 루이스가 이상했지만, 당시 조든 타운 신도였기에 이를 몰랐다는 주장을 펴는 것 역시 입증할 증거는 전무하고요. 오토야가 범행을 순순히 인정하고 체포되어 수감될 이유가 도저히 보이지 않네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 실제 있었던 끔찍한 사건을 추리와 결합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낸 솜씨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만화같은 불필요한 설정, 그리고 추리에 사족이 많았기에 감점합니다. 그래도 본격 추리물로는 충분한 재미를 선사하는건 분명하니, 추리 애호가분들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3/03/11

흑뢰성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3점

흑뢰성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리드비

<<아래 리뷰에는 내용 및 트릭 등 주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리오카 성의 성주이자 셋슈 지방의 영주 아라키 무라시게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다. 구로다 간베에는 이를 막기 위해 찾아왔다가 아리오카 성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고, 아라키 군과 오다 군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라시게 믿었던 모리 군의 참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초반에는 잘 버텼던 무라시게 군의 기강도 나날이 해이해져 갔다. 그 와중에 아리오카 성 내에서는 여러가지 기묘한 사건들이 일어났고, 아라키는 사건 해결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구로다 간베에의 도움을 청하는데....


요네자와 호노부에게 나오키 상을 안긴 대작 연작 장편 소설. 발간된지는 꽤 되었지만 이제서야 읽게 되었습니다.
전국시대 아리오카 성 전투를 배경으로 전투의 시작에서 끝까지를 그리고 있는 역사 추리물입니다. 그런데 <<대망>>같은 전국시대 군웅물로 보아도 무색하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대하 역사극 서사를 잘 그려내고 있거든요. 아리오카 성을 기반으로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은 아라키 무라시게와 그의 군대가 오다 군에게 포위당하고 1년여간 서서히 무너져가는 과정이 치밀하게 그려져있는데 기가 막힙니다. 원래 글을 잘 쓰는 작가라는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고등학생들이 등장하는 청춘물을 주로 쓰던 작가가 대하 서사물을 이런 수준으로 발표했다는데는 탄복할 수 밖에 없네요.
군웅물 대하 역사극답게 등장인물들 모두 관련된 배경 설명도 충실하며 캐릭터들이 확실하게 잡혀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문무를 겸비한 인재인 주인공 아라키 무라시게를 비롯하여 직속 수하들인 호위대 오본창, 철없는 애송이 나카니시 신파치로, 호전적인 노무라 단고, 냉정한 규자에몬, 이케다 이즈미 등 모두가 그러합니다. 특히 애송이 나카니시 신파치로가 처음에는 아라키 무라시게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다가, 1년여가 흐르면 적장과 주군 몰래 교류를 하는 묘사 등으로 인물 설정과 배경 묘사를 통해 아라키 군의 해이와 패망의 전조를 알리는 잘 짜여진 구성은 매력적이었어요.
구로다 간베에가 아리오카 성 전투 당시 지하 감옥에 갇혔었다, 아라키 무라시게는 리큐의 진전을 받은 다도인으로 천하가 흠모하는 명품 다기 "도라사루'를 가지고 있었다, 무라시게의 아내 지요호는 과거 나가시마에서 겪었던, 일향종 신도들의 떼죽음이라는 절망적인 체험을 겪었다는 실제 사실을 이야기에 녹여내는건 팩션 느낌을 전해주며, 호위대 오본창과 사이카 병사 등이 각자 지니고 있는 힘, 창, 검, 총포 등의 특기, 그리고 남만종을 믿는 다카야마 다료의 입장 등이 이야기와 맞물린다는건 설정 하나하나를 깊게 고민한 티도 물씬 났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합니다. 수록된 네 편의 이야기 중에서 두 편은 본격적인 트릭이 사용되고 있는 본격물이기도 하거든요. 첫 번째는 <<설야등롱>>에서 인질 아베 지넨이 죽은 사건입니다. 아베 지넨은 복도 양쪽을 충실한 호위대가 지키고, 장지문 앞 마당으로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은 상태에서 화살을 맞고 죽은 시체로 발견됩니다. 화살마저 사라져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요. 핵심 단서는 마당 가운데에 서 있던 석등이었습니다. 석등 안쪽에서 핏자욱이 발견되었거든요. 즉, 벽을 따라 순찰하던 호위대원 모리 가헤에가 창 두개를 이어붙인 긴 봉 끝에 화살촉을 매단 뒤, 석등을 통과시켜 아베 지넨을 죽인 일종의 원격 살인 트릭이었던거지요. 봉이 너무 길어서 가운데 받침대가 필요했던겁니다. 모리 가헤에가 호위대 오본창에서도 특히나 창의 명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범행이지요.
세 번째 작품 <<원뢰염불>>에서는 무라시게가 밀정으로 쓰던 행각승 무헨과 그를 호위하던 오본창 아키오카 시로노스케가 살해됩니다. 무헨이 머물던 암자는 호위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범인은 어떻게 둘을 살해하고 깜쪽같이 사라질 수 있었을까요? 범인은 승려 행색을 하고 다니던 장수 노토 뉴도였습니다. 그는 호위대가 도착하기 전 무헨을 찾아갔다가 살해한 뒤, 무헨의 삿갓과 지팡이, 고리짝을 훔쳐 무헨으로 위장한 뒤 호위대 아키오카를 살해하고 도주했습니다. 변장을 통해 일종의 알리바이 조작 및 순간 이동 트릭을 선보인 셈입니다. 이를 무헨 (으로 위장했던 노토 뉴도) 스님이 기묘한 진언을 읆었고 평소와 다르게 일꾼을 험하게 대했다던가, 고리짝을 훔쳐간 이유 등으로 독자에게도 단서를 공정하게 제공하고 있어서 본격 후더닛물로 손색없는 수준이었고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대단한 작품이냐? 라고 물으면 그 정도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일본에서야 전국 시대를 배경으로 본격 추리물을 결합한 독특함과 그 완성도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았을거라 생각되는데, 국내독자가 이 부분에 대해 평가할 여지는 많지 않으니까요.
아울러 호적수이자 일종의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구로다 간베에가 너무 별로였습니다. 적이지만 그 두뇌를 인정하여 죽이지는 않고, 필요할 때 가서 조언을 구한다는 핵심 설정은 유사한 캐릭터, 설정을 많이 모방한 탓입니다. 대표적인게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지요. 구로다 간베에도 한니발 렉터 못지 않게 아라키 무라시게의 마음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요. 이 설정 때문에 괜찮은 팩션이 그냥 가공의 픽션으로 바뀌어버린 느낌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아라키 무라시게에 비하면 구로다 간베에는 그야말로 전국구 인기 무장이라 이렇게라도 끼워 넣은 작가 의도는 대충 알겠습니다만, 구로다 간베에의 등장 없이 아라키 무라시게 혼자서 북치고 장구쳤어도 이야기 전개에는 무리가 없었을겁니다.
무라시게가 일세의 영웅처럼 묘사되지만 갈수록 설득력이 떨어지는 문제도 두드러집니다. 모리가 원군을 보내지 않는다는걸 진작에 알아챘는데도 불구하고,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오다 노부나가와의 화의를 신청하는 밀사를 보내는 것 외에는 딱히 하는게 없거든요. 이것도 밀사 무헨의 죽음 뒤로는 흐지부지되어버리고, 도라사루에 대한 애착만 드러내며 끝난다는 점에서는 도대체 뭘하는지 알 수가 없어집니다. 별다른 계획도 없이 패배와 죽음으로 이어질 시간만 질질 끌 뿐입니다. 심지어 유력 가문 무장 노토 뉴도가 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드러난 상황에서도요. 그러니 무라시게에게 전국에 대해 동등하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건 자신밖에 없다고 일갈하는 간베에의 모습도 아첨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당장 닥친 위기에 대해서도 생각이 없는데 무슨 전국에 대해 논한단 말입니까? 대학 입시도 치루지 않은 학생에게 대기업 입사 시험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것과 다를게 없어요. 오히려 자기 혼자 살겠다가 홀로 도망치는걸 원군을 이끌고 돌아와 승리하리라! 는 결심으로 포장하는건 헛웃음마저 났습니다. 그럴거면 원군을 진작 보냈겠죠. 다 진 싸움에 누가 원군을 보낸답니까.

추리적으로도 다른 두 편은 그리 대단한 트릭이나 내용이 있는게 아니라서 전체적으로는 부족합니다. 아베 지넨을 죽게 만들고, 적장의 수급을 흉상으로 만들고, 노토 뉴도를 쏘아 죽이려고 했던게 누구인지?는 너무나 단순한 소거법이라서 추리라고 하기도 어렵고요.
트릭도 디테일은 다소 부족합니다. <<설야등롱>>에서 범인 모리 가헤에가 아베 지넨을 살해한 동기, 그리고 트릭을 떠올린 방법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지 않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모리 가헤에는 지적인 면은 다소 부족한 인물로 묘사되기에 이런 복잡한 트릭을 떠올린다는건 현실적이지 않거든요. 게다가 호위대 오본창으로 아라키 무라시게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갖추고 있기에, 주군 명에 반하는 범행을 저지른 동기도 석연치 않고요. 무라시게의 아내 지요호가 부처의 벌을 가장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기 때문에, 지요호가 트릭을 가헤에에게 알려주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이런 트릭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도 썩 납득이 가지는 않을 뿐더러, 전국시대 호위대 무사가 주군의 명을 어기면서까지 종교, 그리고 주군 아내의 뜻을 따른다는게 말이 되는건지 잘 모르겠네요. 다카야마 다료의 말처럼 종교는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이용할? 도구 정도에 그치는게 당시 현실이었을텐데 말이죠. <<원뢰염불>>에서 노토 뉴도가 벼락에 맞아 죽는다는건 솔직히 어이가 없었습니다.

뭐, 그래도 명성에 걸맞는 재미만큼은 충분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다소 단점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본다면 사소합니다. 전국시대 군웅물 팬이시라면, 혹은 <<노부나가의 야망>>과 같은 게임을 즐겨 하신다면 엄청나게 몰입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겁니다.

2023/03/05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아와사카 쓰마오 : 별점 3.5점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아래 리뷰에는 진범,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완구회사 해바라기 공예의 후계자인 마바리 토모히로는 아내 마사오와 함께 해외 출장을 위해 공항으로 향하던 중, 떨어지는 운석에 맞아 사망하고 만다. 토모히로의 의뢰로 그 뒤를 쫓던 흥신소 사장 우나이 마이코와 조수 카츠 토시오의 바로 앞에서였다. 마이코와 토시오는 사고 당시 마사오를 구해준 인연으로 은근슬쩍 마바리 가문에 접근하는데, 장례식날 토모히로의 어린 아들 토우이치를 시작으로 뒤이어 토모히로의 동생 카오리, 소우지, 가문의 당주 테츠마까지 차례대로 살해되는걸 목격하게 되었다. 마사오에게 마음을 빼앗긴 토시오는 유력한 용의자 마사오와 함께 도주하게 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 아이이치로' 시리즈만 소개되어 있는 아와사카 쓰마오의 미소개 장편. 1977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기도 하지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예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에 도전해 보았습니다. 원서를 읽는건 언제나 힘든데, 이 작품은 기계장치 자동 인형에 대해 장황한 소개가 포함되어 있어서 더 힘들더군요. 그래도 완독을 하기는 했네요. 무려 4명이나 되는 사람이 살해당할 뿐더러, 마바리 가문의 호도가 만들었다는 기묘한 나사 저택과 정원에 있는 미로, 그리고 여러 장난감과 기계 장치 인형 들이 중요하게 등장하여 흥미를 계속 자극하는 매력이 넘치는 덕분입니다. 여러가지 번역기의 도움도 컸고요.

정통 본격물 작품을 발표했던 작가 답게 굉장히 트릭넘치는 살인 사건들이 인상적인데, 우선 어린 토우이치의 수면제 과다 복용에는 뚜렷한 단서가 있지는 않습니다. 토모히로가 단 것을 주지 않는 교육을 했다는 등은 모두 정황 증거일 뿐이지요. 하지만 아무도 접근하지 않은 정자에서 눈에 총을 맞고 죽은 카오리, 기계에 장치된 독극물 주사로 살해당한 소우지,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던 약병 속 약을 독약으로 바꿔치기 당해 죽은 테츠마 사건은 모두 불가능 범죄로 추리 애호가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사용된 트릭도 기발했습니다. 카오리는 알고보니 총에 맞은게 아니라, 총알이 발사되도록 장치된 만화경을 들여다보다 죽었던 겁니다. 앞서 카오리가 만화경에 관심이 많다는 설명도 있고, 그녀가 죽기 전 '마른 우물 (카레이도)' 이라는 말을 남겼다는건 확실한 단서이기 때문에 - 카레이도스코프 (만화경) 이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임 - 공정함 측면에서도 만점을 주고 싶네요.
소우지 사건은 거꾸로 서는 기계 인형 태엽 장치에 설치된 주사기가 금방 드러나는데, 이는 굉장히 기묘한 수수께끼로 이어집니다. 소우지가 마사오, 마이코와 토시오 앞에서 기계 인형을 조작하다가 죽지 않았다면, 인형 속에 설치된 주사기는 쉽게 발견되기 어려웠을 겁니다. 최소한 카오리 살해 직후에는 장치를 설치해서 범행을 저지른다는건 말이 안되는 상황이었어요. 저택 안에 경찰이 가득했으니까요. 이는 토모히로 장례식으로 관계자가 많았던 시점에 토우이치를 살해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추리로 이어져 범인이 누구인지 드러내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테츠마의 약을 바꿔치기한 범행도 기발하다는 점에서는 뒤지지 않습니다. 토시오는 알약 하나만 바꿔치기한 일종의 시한폭탄 장치라 생각했지만, 경찰 조사결과 약병 안의 캡슐 내용물은 모두 독약이었다는게 밝혀집니다. 즉, 약병 내용물을 통째로 바꿔치기했어야 했다는거지요. 하지만 테츠마는 연이은 살인 사건으로 극도로 조심하고 있었기에 이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미로에서 이어지는 비밀 통로를 알고 있던 마사오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게 되고요. 그녀가 비밀 통로로 밤중에 테츠마의 방에 몰래 침입해서 약을 바꿔치기했다는 거지요. 하지만 진상은 애초 - 모든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 에 약은 바꿔치기되어 있었고, 다만 딱 한개만 몸 속에서 녹는 재질의 캡슐이었다는 겁니다. 다른 캡슐은 모두 녹지않는 플라스틱이었던거지요. 일종의 시한폭탄 장치는 맞는데, 그 발상을 한 번 더 꼬아 놓은 발상은 신선했습니다.

그리고 저택 내 오각형 미로에 얽힌 수수께끼도 볼만했습니다. 단순한 여흥거리가 아니라, 비밀 통로로 이어지는 장치가 되어있었으며 이 비밀 통로는 실존인물 제니야 고헤에의 숨겨진 재산과 관련이 있었다는건데, 에도 시대 상인 제니야 고헤에, 그리고 에도 시대 일본 발명가인 오노 벤키치와 같은 인물을 중심으로 그럴듯하게 짜 낸 서사는 상당히 설득력있었습니다. 제니야 고헤에가 변화하는 시대에서 혹시 모를 위협을 대비해 재산 일부를 은닉하려 했다는건 충분히 그럴싸했으니까요. 덕분에 <<다빈치 코드>>같은 팩션 보물찾기 모험물스러운 재미를 전해주기도 합니다.
토시오가 처음 미로에 들어갔었을 때 담벼락을 따라 갔지만 중심부에 갈 수 없었던건, 미로 내부의 구조가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추론으로 이어지는 전개도 좋았습니다. 미로에 대해서도 기계 장치 인형만큼이나 상세하게 설명되는데, 이 역시 현학적인 재미는 충분히 충족시켜 주고요.

범인도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범인은 토우이치 군이 죽은 날 많은 사람들이 토모히로 씨 장례로 모일 줄 몰랐던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토모히로 씨가 죽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사람이죠. 또 카오리 씨가 죽은 날, 카츠 일행이 나사 저택에 가는 것을 몰랐던 사람이며 같은 날, 마사오 씨가 소우지의 방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고, 마지막으로 데츠바 씨가 살해당했을 때, 마사오 씨가 나사 저택에서 잠을 자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즉, 범인은 토모히로였고, 토모히로는 알리바이를 위해 자기가 출장간 동안 사건이 일어나도록 정교한 장치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과연 장난감 전문가다운 발상의 범행이었달까요. 범행 동기인 제니야 고헤에의 재산과 친부 류키치 때문에 생긴 원한도 모두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작위적인 설정이 많다는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무엇보다도 이해가 안되는건 마바리 호도가 나사 저택과 미로를 만든 이유입니다. 호도는 제니야 고헤에의 숨겨진 재산을 이미 찾아내었던걸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재산을 모두 현금화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 재산만 따로 숨기면 될 일이었어요.
게다가 미로는 비밀 통로 어디에 보물이 놓여져 있는지를 알려주는 역할도 하는데, 도대체 뭘 위해서 이런걸 만들었을까요? 자식들에게 알려주려면 그냥 말로 설명해줘도 충분했을텐데 말이죠. 지상에 거창한 미로이자 보물 지도를 만들 까닭은 없었습니다. 마이코는 나사 저택을 이상하게 만든건, 미로가 이상하다는걸 숨기려는 목적이었다는데 그럴거면 아예 안 만드는게 훨씬 낫잖아요?
그리고 토모히로가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자동 살인 장치를 만들었다는건 합리적이지만, 카오리가 살해된 뒤에는 경찰이 저택에 깔리는건 마찬가지였을겁니다. 즉, 소우지와 테츠마마저 연이어 살해된다면 현장에 없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 드네요. 이런 거창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 보다는 이미 위치를 파악한 보물을 그냥 빼돌리는게 더 현실적이기도 하고요.
마이코의 과거 경찰 시절 누명을 증명해줄 사람이 마바리 테츠마였다던가, 카츠 토시오가 마사오에게 첫눈에 반한다는 설정도 다소 억지스러웠습니다. 솔직히 불필요한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네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이런저런 리스트 (이런 거라던가 이런거, 이런거....)에서 빠짐없이 언급될 정도의 재미를 안겨다주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언젠가 국내 출간이 되어서 많은 분들이 쉽게 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오노 벤키치의 가라쿠리 인형 (기계 장치 자동 인형) 소개 동영상이 있더군요. 생각만큼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아니긴 한데, 에도 시절에는 충분히 먹혔음직 해 보입니다. 아울러 덧붙이는데, 발표 직후인 1979년에 영화화되었었는데 주연이 무려 마츠다 유사쿠! 낡은 느낌 가득하지만 영화도 한 번 찾아보고 싶어집니다.

2022/07/01

삼개주막 기담회 - 오윤희 : 별점 2점

삼개주막 기담회 - 4점
오윤희 지음/고즈넉이엔티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포나루에 있는 , 과부 주모가 세 아이와 함께 운영하는 삼개주막을 찾은 손님들이 하는 기담 내지 괴담을 엮은 단편집입니다. 모두 여섯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조선 후기를 무대로 하고 있으며, 한국적인 소재들이 등장하는게 눈길을 끕니다. 묘사도 마음에 들고요. 특히 여러 한국 요리 묘사가 좋습니다. 실제로 주막에서 먹었음직한 요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숙소와 주막을 겸하는 객주집에 대한 상세한 묘사도 마음에 들고요. "열녀" 속 등장인물인 허씨 가문의 아이 율이가 후일 장사의 귀재인 허생전의 허생이 되었다던가, 주막집 장남 선노미가 연암 박지원의 기담회의 이야기 꿈이 된다는 등 실제 역사와 고전을 버무리는 팩션 스타일 전개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괴담치고는 섬찟함이 부족하다는건 문제입니다. 단순한 치정극이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탓입니다.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존재라던가, 인간이 더 무섭다는 식으로 공포를 자극하는 이야기는 전무합니다. "열녀"에서 허씨 가문 도련님이 본 건 그네를 타는 미모의 아낙이 아니라 목을 맨 형수 정씨의 사체가 흔들리는 모습의 환영이었다는 정도만 눈여겨 볼 만한데, 이는 오노 후유미의 "귀담백경" 속 "마음에 들다"와 똑같은 설정이라서 "귀담백경"을 읽은 저의 공포심을 자극하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미 아는 내용에서 무서움을 느낄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네를 타는 아낙 정체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마음에 들다"보다 오히려 못하기도 하고요.

이야기들도 앞서 설명드린 몇몇 요소를 제외하고는 딱히 한국적인 부분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도 아쉽습니다. 특별히 시대 배경을 따른다기보다는 일본 괴담물에서 보았음직한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사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를 배경으로, 특정 가게를 찾은 손님으로부터 듣는 괴담물이라는 설정부터가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물의, 그 중에서도 '미시마야' 시리즈와 너무 비슷하지요. 선노미가 괴담을 그림으로 그린다던가, 기담을 이야기하는 이야기꾼 역할을 맡게된다는 것도 미시마야 시리즈와 유사하고요. 이야기를 도맡아 '듣는' 역할이 아니라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는' 역할을 한다는걸로 역할만 반대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설정도 공양을 겸해 그림을 그리는 미시마야보다는 빈약해 보였고요. 

또 첩의 저주로 자기가 사산했다고 생각한 정실 부인이 첩과 첩의 아이를 죽였는데, 그 이후 정실 부인이 낳은 딸이 첩의 환생이었다는 "첩의 환생", 과거 보러 가는 길에 우연히 찾은 폐가가 알고보니 과거 보러가던 원래 친아버지인줄 알았던 양부의 모함으로 멸문지화를 당했던 친부 집이었다는 "과거 보러 가는 길", 유괴된 아이가 '고독'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쓰이다가 죽은 뒤 복수를 하기 위해 돌아온다는 "유괴된 아이"는 다 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들입니다. 저는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이계록" 등의 중국 괴담이 바로 떠올랐어요. 

수록작 중 독한 시어머니가 남편을 잃은 며느리를 살해한 뒤, 자살한 것으로 꾸며 '열녀' 칭호를 받으려 했다는 "열녀"정도만 조선을 무대로 했다는 인상을 주지만, 앞서 말했듯 그네를 타는 여인의 환각 등 다른 일본 괴담물에서 이미 접했던 설정이 등장해서 그리 신선한 느낌을 주지 못합니다.

이리저리 꼬인 가족 관계를 남발하는 전개도 좋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과거 보러 가는 길"의 선비 세진의 아버지가 알고보니 친아버지가 아니라 원수였다던가, "열녀"의 정씨 남편은 전처의 아들이라 시어머니가 도련님을 더 챙겼다던가, "옹기장의 꿈" 속 옹기장이 박씨의 아들 희동이는 알고보니 옹기장이의 친동생같은 제자 덕배의 씨였다던가, 심지어 주막집 맏아들 선노미까지 도망친 노비의 아이였다는 식인데, 너무 지나치죠.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지금의 결과물은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물의 아류작으로만 보입니다. 조선 후기를 무대로 했다면 더 한국적인 소재가 등장했어야 했습니다. 별로 무섭지도 않아서, 딱히 권해드릴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저도 다음 권은 읽어볼 생각이 별로 들지 않네요.

2022/04/14

큐브릭 게임 - 데릭 테일러 켄트 / 최필원 : 별점 1.5점

큐브릭 게임 - 4점 데릭 테일러 켄트 지음, 최필원 옮김/책세상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UCLA의 괴짜 영화학도 숀은 큐브릭 매니아라는 이유로 지도교수 마스카로에게 '큐브릭 게임'을 풀어낼 적임자로 지목되었다. 숀은 스탠리 큐브릭이 직접 남긴 수수께끼를 차례대로 풀어나가야 하는 게임에 친구 윌슨, 새미와 함께 뛰어들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게임에 위험한 세력이 연루되어 있다는걸 깨닫는데....

스탠리 큐브릭이 생전에 남긴 메시지로 큐브릭의 영화를 분석해 퀴즈를 풀어낸다는 내용의 모험 미스터리입니다. 

누군가 남긴 퍼즐을 풀어내는 이야기가 가슴 따뜻하게 만드는 진상과 우승 상품, 그리고 여러모로 크게 성장하는 주인공의 성장기와 결합되었다는 점에서는 "웨스팅 게임"이 떠오릅니다. 여러 팀이 서로 경쟁을 벌인다는 점도 유사하니까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거장의 유명 작품들 속 단서들을 풀어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단서를 풀어가는 주인공들을 위협하는 세력이 있다는건 "다빈치 코드"와 똑같고요.

이렇게 인기 있을만한 설정과 큐브릭이라는 흥미로운 소재가 결합된 탓에 호기심에 읽기 시작했습니다. 큐브릭에 푹 빠진 영화 매니아 청년이 친구들과 함께 거장이 남긴 메시지를 더듬어간다! 그럴듯하잖아요. 실제로 초, 중반부까지는 꽤나 흥미진진합니다. 큐브릭의 영화들이 담고 있는 다양한 상징들, 특히 "샤이닝"과 아폴로 11호가 어떻게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설명도 재미있고요.

하지만 이야기는 뒤로 가면 갈 수록 이상해져 버립니다. 정확하게는 게임의 목적과는 상관도 없는, 스탠리 큐브릭이 달 착륙 영상을 찍어서 조작했다는게 폭로되는걸 막기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조직이 등장하면서부터입니다. 이 조직 구성원들인 마스카로와 일당들이 프리메이슨 내 '기사단' 소속으로 비밀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는건 대체 뭔가 싶더군요. 시대와 장소를 100년이상 착각한 듯한 설정도 비현실적이며 우습기 짝이 없고, 숀을 이용하여 게임의 정답을 알아낼 속셈이었다가 중간부터는 노골적으로 숀을 위협하는 행동도 설명이 안되는 탓입니다. 직접 나서지 않고 끝까지 같은 편인척 하다가 뒤통수를 치는게 훨씬 사실적이며 당연한 행동 아닐까요? 핵심 빌런이 하는 짓 치고는 너무 조잡했어요. 

릭의 부하로 게임을 만들었으며, 게임 운영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루크와 리치가 마스카로를 살해한다는 것도 당황스러운 전개였습니다. 숀과 같이 마실 수도 있었던 와인에 독을 탔다는 발상도 어처구니 없었지만서도, 사람을 이렇게 쉽게 죽일 수 있었다면 왜 이중 스파이인 척 마스카로와 협조했는지도 알 수가 없으니까요. 빌런을 없애기 위한 지극히 편의적인 해결책에 지나지 않아보였습니다.

아울러 스탠리 큐브릭의 메시지를 모두 해독하면 '꿈에서 그 답을 얻게 된다'는 결말은 비현실적인걸 넘어서는 황당한 결말이었습니다. 작가의 큐브릭 신격화가 도를 넘은 느낌이에요. 정도껏 했어야죠.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판타지를 만들어버리면, 모처럼 큐브릭, UCLA 등 현실적 소재와 배경으로 이야기를 채워넣은 보람도 없고요. 이보다는 그냥 큐브릭 본인이 스스로 자신의 영화에 푹 빠진 영화 애호가 후배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꾸며낸 게임이었다 정도로 마무리하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등장하는 퍼즐과 퀴즈들도 문제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단서들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꽤나 공들여 만들어졌다는건 분명합니다. 게임 도중에 말콤 맥도웰이나 스티븐 스필버그와 같은 실제 헐리우드 거물이 직접 등장하기도 하는 등 약간 팩션스러운, 논픽션스러운 느낌을 전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대부분 말장난, 그리고 영화 화면 내 이미지와 상징에 주목하고 있어서 동참하기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스탠리 큐브릭의 광팬 정도만 재미있다고 여길 정도로 말이지요. 수수께끼도 지나치게 꼬아놓아서 억지스러웠고요. 도판을 활용하기는 하지만 별로 도움은 안 되는 수준이었어요. 차라리 음악을 활용하는게 훨씬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생각됩니다. "2001"의 가짜 OST 의 곡목 순서대로 그 곡이 사용된 영화 장면을 이어붙여 편집하면 무언가 답이 나온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실제로 숀이 이렇게 영화를 편집하기도 했었는데, 별다른 해답을 얻지 못했다는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스탠리 큐브릭 회고전 티켓 판매 목적으로 쓰여진 작품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별 볼일 없는 흔해빠진 하이틴 모험 미스터리물입니다. 별로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1/10/09

늑대의 왕 - 니클라스 나트 오크 다그 / 송섬별 : 별점 2.5점

늑대의 왕 - 6점
니클라스 나트 오크 다그 지음, 송섬별 옮김/세종(세종서적)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79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방범관 카르델은 호수에서 시체 하나를 건져내었다. 시체는 살아있을 때 몇 개월에 걸쳐 혀, 이빨, 눈, 귀 및 사지가 하나씩 훼손된 후, 치료되었다는게 밝혀졌다. 인데베토우 치안본부 소속의 세실 빙에는 치안총감 놀린의 부탁으로 사건을 맡고, 카르델과 힘을 합쳐 수사에 착수했다. 놀린은 세력가 레우테르홀름의 간섭으로 치안총감 자리를 오래 유지하기 힘든 상태였고, 빙에도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중이라 남은 시간은 별로 없었다. 카르델의 탐문 수사, 그리고 빙에가 시체를 감쌌던 천을 추적해서 둘은 시고위층 비밀 조직 에우메니데스가 소유한 고급 창관이 시체를 버렸다는걸 알아냈는데....

18세기 후반 스웨덴을 무대로 펼쳐지는 역사 추리 소설입니다. 무식과 야만, 과학이 공존하던 비슷한 시기 유럽을 무대로 하는 "사형 집행인의 딸" 시리즈와 분위기가 비슷하지만, 구스타프 3세가 일으켰던 대 러시아 전쟁, 그 중에서도 스벤스크순드 해전이 꽤 비중있게 등장하고, 프랑스 혁명도 사건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등, 역사적인 배경을 더 짙게 깔고 전개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팩션' 인 셈이지요.

이런 역사적인 부분의 디테일은 아주 빼어납니다. 당시 문화와 시대상, 생활상을 잘 알 수 있을 정도니까요. 예를 들면, 머리가 맑아진다는 이유로 독한 아라비카 커피를 자주 마신다는 세실 빙에의 묘사처럼요. 전형적인 지知-용勇 컴비 - 허약한 두뇌파 탐정 세실 빙에와 엄청난 완력과 터프함을 자랑하는 카르델 - 설정도 이 작품에서는 효과적으로 작동합니다. 웁살라 대학교 법학과 출신으로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빙에, 왼 팔을 대 러시아 전쟁 중에 잃었던 역전의 용사 카르텔은 그들에 대한 설명과 그들 각자의 회상 만으로도 작품의 역사적인 배경과 디테일을 보다 강화시켜 줍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빙에와 카르델이 수사를 통해 창관까지 찾아가기는 하지만, 피해자와 범인이 드러나게 되는건 피해자 다니엘 데발을 그 꼴로 만든 집행자 크리스토페르 블릭스가 남긴 편지가 빙에에게 보내졌기 때문입니다. 범인인 발크가 크리스토페르를 자유롭게 풀어준 이상, 체포되는건 시간 문제이기도 했고요. 크리스토페르가 죄책감에 밍기적거리며 시간을 낭비하지만 않았어도 사건은 더 빨리 해결되었을 겁니다. 

그나마 컴비가 창관으로 찾아가기까지의 수사를 그린 1부, 크리스토페르가 범행을 저지르게 되는 과정을 그린 2부는 수사와 범죄 과정이 상세히 등장하기라도 하는데, 안나 스티나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그린 3부는 존재 자체가 불필요했습니다. 재미도 있고, 당시 스웨덴이 얼마나 무식한 국가였는지, 노역장이 얼마나 생지옥이었는지, 방범관들이 얼마나 쓰레기인지 등의 시대상을 드러내는데에는 효과적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3부를 읽지 않아도, 그리고 안나 스티나는 등장하지 않아도 이야기 전개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최악의 방범관이자 새디스트인 페테르손이 카르델에 의해 비참한 결말을 맞는다는 에필로그라도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그것도 아니었고요. 또 안나 스티나는 마지막에 살인까지 저질렀으니, 아무리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한들 그냥 봐 주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아울러 요한네스 발크가 이런 무서운 범행을 저지른 동기가 '프랑스에서처럼 혁명을 일으키기 위함이었다'는건 팩션이라는 측면에서는 잘 어울렸으나 쉽게 와 닿지는 않았어요. 데발을 사랑했지만, 데발이 자신을 배신하고 팔아먹으려고 했던, 전 치안총감 릴옌스파레의 끄나풀이었기 때문이라는걸 알게 되어 살의를 품었다는 발크의 동기는 누가 보아도 명백합니다. 때문에 그가 재판정에 서 봤자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는 부족했을 겁니다. 사랑했던 연인의 배신으로 살인을 저지른 귀족의 후예 때문에 폭동이 일어난다? 그럴리가 없잖아요.

그래도 4부에서 피해자 뱃 속에서 발견한 반지의 문장을 통해 피해자 신원, 그리고 범인이 누구인지를 더듬어가는 부분만큼은 좋았어요. 반지의 문장은 전 치안총감 릴옌스파레의 문장을 흉내낸 것이었고, 이를 통해 반지 주인이 릴옌스파레가 풀어놓은 정보원이었다는게 밝혀지는 과정이 앞서의 복선 등으로 꽤 설득력있게 그려지고 있는 덕분입니다. 피해자가 자기 배설물을 먹었던 것도 리스토페르가 사지를 잘라내는 시술을 피해자에게 가하던 중에 문장이 새겨진 반지를 먹여서 나중에 부검을 통해 그의 신원이 드러나게끔 조치했기 때문이라는 합리적인 이유로 설명되며, 피해자가 처한 끔찍한 상황과 잘 맞아 떨어져 극적인 효과를 더해줍니다. 빙에가 "사실 다니엘 데발은 발크를 배신한게 아니라 그를 사랑했다"고 데발의 편지를 위조해서 발크를 속인 끝에 그가 순순히 죽음을 맞게 만든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감동을 주는 듯 하다가, 사실은 빙에의 조작이었다는게 드러난건 확실히 새로왔어요. 세실 빙에와 그의 아내에 관련된 가슴 아픈 사연과 맞물려 여운을 남기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독특한 역사물로의 재미는 확실하고, 추리적으로도 볼 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잔혹한 범죄, 범죄 만큼이나 끔찍한 당시 스웨덴 상황 등은 부담스러워서 감점합니다. 해피 엔딩에 악당들은 확실히 응징하는 "사형 집행인의 딸" 시리즈가 훨씬 더 제 취향이었습니다.

2020/10/08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 에릭 앰블러 / 최용준 : 별점 2.5점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 6점
에릭 앰블러 지음, 최용준 옮김/열린책들

영국인 추리 소설 작가 레티머는 터키 이스탄불을 여행하다가 우연히 디미트리오스라는 범죄자의 시체를 보게 되었다. 래티머는 디미트리오스에게 강한 흥미가 생긴 나머지 디미트리오스의 행적을 좇아 유럽을 횡단해 가며 이런저런 조사를 벌이는데...

에릭 앰블러가 발표했던 스파이 소설의 고전입니다. 이쪽 바닥에서는 일찌기 걸작으로 인정받은 작품이지요. MWA 선정 베스트 미스터리 100 순위도 17위라는 고순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파이 소설로 알려진 바와 다르게, 범죄자를 쫓는 탐정 수사물로 보는게 맞습니다. 물론 래티머는 제대로 된 탐정은 아니고, 수사도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소개받아 추억담같은 이야기를 듣고 수집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옛 동화나 민요를 수집하는 민속학자 활동에 가깝지요. 차이점이라면 디미트리오스는 정말로 사악한 범죄자이며, 이야기되는 추억담은 모두 범죄라는 정도고요.

읽으면서 아직도 걸작으로 회자되는 이유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흔해빠진 스파이 소설이나 느와르, 하드보일드 물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고급스러움이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는 빼어난 묘사들과 생생한 캐릭터들 덕분입니다. 유유부단하며 체면을 중시하는 속물이자 샌님인 주인공 래티머부터 눈부실정도로 생생해요. 뭔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알맹이는 없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모습은 실존하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전해 줄 정도입니다. 탐정 수사, 모험물 주인공이 이렇게 평범하고 소심하기도 힘든데, 거의 백여년전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해 내고 있는게 놀랍네요.

조역들도 현실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범죄물, 특히 느와르나 하드보일드에서 자주 등장했던 쌍욕을 하는 범죄자, 보자마자 사람을 죽이는 킬러, 여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마초와 폭력배들은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사악한 범죄자 디미트리오스조차도 나름 신사적이며, 그를 등쳐 먹으려는 시시한 사기꾼 악당 피터슨조차 철학사를 옆에 끼고 사는 인물로 그려지는 등, 후대의 느와르나 하드보일드와는 캐릭터가 사뭇 달라요. 요즘 작품이라면 당연시되는 불필요한 정사 장면 묘사나 고어, 포르노에 가까운 혐오스러운 폭력 묘사 역시 찾아보기 힘들고요.

실제 등장은 마지막 몇 페이지에 그치는 디미트리오스의 존재감도 발군입니다. 그야말로 '씬 스틸러' 로 돈과 권력을 탐하는 순수한 악당이지만, 기묘한 조직력과 행동력, 관찰력이 잘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가난뱅이 악당 시절, 이웃이었던 프레베자를 범죄에 끌어들이며 한 말이 기억에 남네요. "내가 당신을 고른 건, 비록 당신이 무르고 감상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약삭빠르고 쉽게 흥분하지 않기 때문이야. 내가 그날 당신 방에 갔을 때, 나는 당신이 커튼에 돈을 숨겨 놓았을 거라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당신 같은 사람들은 늘 커튼에 돈을 숨겨 놓거든. 낡은 수법이지. 하지만 당신은 초조한 눈으로 핸드백을 계속 주시했고, 그래서 나는 당신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았어." 라는데,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프레베자는 자기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이 말에 넘어가 버리고 말지요.

디미트리오스의 여러 악행을 1920~30년대 유럽에서 일어났던 실제 역사에 잘 녹여낸 전개도 그럴듯합니다. 예를 들자면, 디미트리오스는 1922년 터키와 그리스 전쟁으로 벌어진 스미르나 대학살 당시, 피난민들 움직임을 이용하여 그리스로 도주했고, 1924년에 터키 지도자 케말 퍄사 암살 음모에 가담했었으며, 1926년에 유고슬라비아가 오트란토 해협에 설치한 기뢰 위치가 기록된 지도를 빼돌려 프랑스에 팔아먹으려고 했다는 식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약간 팩션 느낌도 전해 주고요.
래티머가 당시 교통 수단을 이용하여 이스탄불에서 스미르나, 아테네, 소피아, 제네바를 거쳐 파리로 향하는 여정도 마찬가지로 볼 만 합니다. 그런데 구글 지도로 확인해보니 4,162Km에 달하는 거리더라고요. 단순한 호기심으로 이렇게 긴 수사 여행을 떠나는 래티머도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긴 하네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그닥 도드라지는 부분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수사는 별 볼일 없고 - 영국인 작가가 밝혀낼 수 있는 상식적인 수준에 그칩니다. - 디미트리오스의 악행과 범죄는 모두 관계자 증언만 있는 탓입니다. 증거라고는 전무합니다.

그나마 딱 한 가지, 이전 디미트리오스를 협박했던 피서르가 살해된 후 디미트리오스로 위장된 경위를 설명하는 피터슨의 추리 정도만 볼만 했습니다. 여러명이 함께 요트 여행을 간 뒤, 다른 승객이 내릴 때 피서르에게만 따로 이스탄불로 함께 가자고 유혹했다는 추리지요. 그리고 이스탄불에서 피서르를 살해하고 자기 옷을 입혀 바다에 버린 후, 자신은 피서르의 이름으로 투숙한 뒤 떠난 겁니다.
다만 피서르가 자신이 협박하던 디미트리오스와 선뜻 단 둘이 항해를 떠났다는건 설명하기 어렵고, 역시나 증거라곤 하나도 없다는 문제는 큽니다.

또 래티머가 확인했던 사체가 사실은 디미트리오스가 아니라 피서르였다 한 들, 이를 밝힐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프랑스 경찰이 뭘 할 수 있지도 못해서 딱히 디미트리오스에게 위협이 될 사건도 아닙니다. 피터슨이 협박하자 디미트리오스는 살인으로 입을 막으려 하는데,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어보였거든요. 

그리고 피터슨이 디미트리오스에게서 백만 프랑을 울궈낸 뒤, 당연한 보복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건 마찬가지에요. 온갖 범죄를 저질러 왔던 악당인데, 협박범을 그냥 놔 둘리 없잖아요? 래티머도 위험한건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협박은 엄연한 범죄인데 래티머가 공범으로 함께 자리하는 전개도 쉽게 납득하기는 어려웠어요.

피터슨과 래티머를 궁지에 모는 데 성공한 디미트리오스가 래티머를 제압하지 못해 최후를 맞는 결말도 많이 시시했습니다. 래티머는 바닥 양탄자에 미끄러진 탓에 디미트리오스가 쏜 총알을 피할 수 있었고, 이어진 격투로 총을 빼앗는데 성공하는데, 이렇게 운과 우연에 의해 살아남는게 소시민 래티머에게 어울리기는 하지만 조금 더 정교한 무언가를 기대했는데 아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고급스러움을 얻기 위해 도입한 장황하면서 옛스러운 묘사, 그리고 느릿느릿한 전개와 말투는 독서를 방해하는 요소였습니다. 고급스러움의 반대급부로 지루함이 생겨난 셈이지요. 예를 들어 제목은 래티머가 디미트리오스를 처음 만났을 때 떠오른, '인간은 악마의 가면처럼 얼굴을 사용한다. 얼굴은 자기감정을 보충해 주는 감정을 타인의 가슴속에 불러일으키기 위한 도구다.' 라는 상념에서 비롯된겁니다. 얼굴이 가면같다니! 멋지긴해도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발표 당시에는 걸작이었을테고, 지금 읽어도 멋진 작품이기는 하지만 기대만큼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추리적인 요소와 재미 측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에 감점합니다. '추리' 보다는 '순문학'에 가까운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열린책들'에서 '세계문학' 으로 출간한게 이해가 됩니다.

덧 1 : 해설이 아주 좋습니다. 서점에서 뒷부분 해설만이라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덧 2 : 원래 "디미트리오스의 관"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해설에 따르면 원래는 "가면"이 맞다고 하는군요. 미국 출간 당시 제목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도 관 보다는 가면 쪽이 작품에 더 적절합니다.

2019/11/11

요녀전설 1 - 호시노 유키노부 / 강동욱 : 별점 1.5점

요녀전설 1 - 4점
호시노 유키노부 지음, 강동욱 옮김/미우(대원씨아이)

좋아하는 작가 호시노 유키노부의 단편집입니다.

요녀 (妖女)의 사전적 의미는 '요사스러운 여자'입니다. 요망하고 간사한 데가 있는, 한마디로 사람 마음을 가지고 놀 줄 아는 악녀를 뜻하지요. 제목만 보고 이렇게 사람 마음을 흔들어 조종하고, 그래서 파멸을 불러오는 여자들이 나오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더군요. '요녀'와는 관계없는 작품이 더 많습니다. 수록된 8편의 단편 중 제목에 값하는 작품은, 질투심 때문에 젊은 여인을 죽이려다가 파멸하는 귀족 여성이 등장하는 "메두사의 머리" 와 젊은 여성을 이용하는 늙은 흡혈귀 여성의 이야기인 "카르밀라의 영원한 잠" 두 편 뿐입니다.
조금 폭을 넓혀 본다면 일본 인형극 용 인형이 감정을 가져 연주가와 동반 자살한다는 "히다카가와", 설녀가 다가오는 빙하기에서 인간을 구하기위해 후손을 남기려 한다는 "만가"는 여성형 크리쳐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애보나 드라마에 가까와서 요녀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아슬아슬하게 요녀 커트라인선인데, 나머지 작품들은 아예 '요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재미라도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고요. "월몽"은 카구야 히메의 SF 변주인데, 일본 전래 동화를 소재로 한 탓에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게까지 높이 평가할 이야기는 아니라 생각됩니다.
마을에 찾아온 여인과 화가를 마녀로 몰아 죽인다는 "로렐라이의 노래"는 히틀러와 엮은 결말이 영 억지스러웠고요.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마타 하리가 타이타닉호에서 라스푸틴과 추격전을 벌인다는 이야기인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체사레 보르자의 몰락이 루크레치아가 칸타렐라를 로마 시내에 뿌린 탓이라는 "보르자 가의 독약"은 간단한 줄거리 요약만 보셔도 아시겠지만 내용이 어처구니를 쌈싸먹은 수준이라 아쉽습니다.
그래도 두 작품 중 "보르자 가의 독약"이 이야기의 완성도로는 조금 더 낫기는 합니다. 특유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실제 역사를 가지고 노는 팩션 전개가 돋보이는 덕입니다. 문제는 루크레치아를 무슨 성처녀처럼 그린 것과 칸타렐라가 전염병의 숙주같은 존재였다는 설정입니다. 루크레치아가 오빠와 놀아나는 등 문란한 행각을 벌였다는건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고, 칸타렐라는 '삼산화비소' 였을거라는게 대부분 역사가들의 추측이니까요. 다 빈치의 등장과 결말 역시 무리수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제목에 부합하고 내용도 괜찮았던 작품은 "카르밀라의 영원한 잠" 딱 한 편입니다. 다른 작품들은 여러모로 완성도도 부족하고 기대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2권이 있다는데 찾아보게 될 것 같지는 않네요.

2019/10/26

위작 X 미술시장 - 켄 페레니 / 이동천 : 별점 3점

위작 X 미술시장 - 6점 켄 페레니 지음, 이동천 옮김/라의눈

위작 전문가 켄 페레니의 자서전입니다. 1949년에 태어난 켄 페레니가 1960년대, 히피 문화의 전성기 때 범죄자 토니 마사치오와 어울리며 예술가 톰 달리를 만나 예술에 눈을 뜨고, 판 메이헤른의 책을 읽고 위조를 시작한 뒤 여러 지인들의 도움으로 수많은 위조 작품을 만들고 판매하는 과정을 본인 스스로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책은 기막히게 재미있습니다. 본인의 생생한 경험담들이 압권이기 때문입니다. '허구는 실화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은 정말이지 맞는 말이에요. 톰 달리와 앤디 워홀, 유명 변호사 로이 콘, 유명 컬렉터 지미 리코, 피카소의 딸 팔로마 피카소 등 실존 인물들이 등장해서 팩션같은 재미도 전해주고요.게다가 켄 페레니가 저지른 수많은 범죄들은 하나, 하나가 한 편의 이야기로 충분할 정도로 기승전결이 완벽한데, 이런 범죄들이 400여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 빼곡하게 실려있다는 볼륨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실존하는 위조범이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30여년간 위조를 하면서 발전시키는 기술과 위조 분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볼 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어떤 젯소와 어떤 캔버스를 써서 어떻게 오래된 듯한 흔적을 남기는지에 대한 노하우도 아낌없이 공개해주고 있으니까요. 공개해 봤자 어차피 따라하기는 힘든 영역이긴 하지만요.
대표적인 노하우는 작가들이 작품을 만들 때 이런저런 공통 요소들을 조합한 패턴을 많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당연히 처음 알게 된 사실도 많아요. 그림에 흔히 보이는 작은 까만색 덩어리는 바니시의 당분에 끌린 집파리 싼 파리똥 축적물이라는게 좋은 예입니다.

초창기 켄이 영향을 받은 예술가인 톰 달리를 비롯하여 오드리 비어즐리, 제임스 엔서, 히로니뮈스 보스, 피터르 브뤼헐, 브라이스 마든, 벤자민 웨스트를 비롯하여 지미의 영향으로 현대 미국 회화를 방대하게 위조할 때 연구했던 현대 미국 화가인 캐틀린, 찰스 버드 킹, 인먼, 존 F 피토, 라파엘 필, 존 F 프랜시스, 레비 웰스 프랜시스, 제임스 E 버터스워스, 안토니오 제이콥슨, 제임스 바드, 마틴 존슨 히드, 윌리엄 아이콘 워커, 안토니오 제이콥슨, 세베린 로센, 레비 웰스 프렌티스, 그리고 FBI의 추적으로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영국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위조를 시작했을 때 손 대었던 영국 수렵파 화파 화가들인 조지 스터브스, 존 우턴, 존 프레드릭 헤링 주니어. 제임스 세이무어, 존 노스트 사토리우스, 토머스 스펜서, 존 프레드릭 헤링 시니어, 존 E 퍼넬리와 영국 해양화가인 토마스 휘트콤, 찰스 브루킹, 토마스 버터스워스, 니콜라스 캔디 등 실존 유명 화가들에 대한 언급도 상세합니다.

이런 오랜 연구와 위조 과정을 거치며 가면 갈 수록 실력이 늘어서 1993년 마틴 존슨 히드의 "브라질의 보배" 위작은 경매에서 판매되었다는 기사가 '런던 타임즈'에도 실리고, 1994년 그린 최고의 위작인 히드의 "팻 보이"는 모든 전문가의 감정까지 통과하여 무려 71만 달러에 경매에서 판매되기까지 합니다. 마침내는 그가 가공의 화가를 내세워 그린 작품들, 심지어 위작가 켄 페레니의 작품을 수집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고 하니 이 정도면 위작계의 미켈란젤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네요.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켄 페레니가 저지른 범죄 들은 위조 관련 범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절도, 사기 행각이며 별로 치밀하지도 않은 즉흥적인 범죄가 많습니다. 사회 통념과 정의를 깨트리는 파격이라는 재미로 보기에는 단순히 '돈'을 노리고 저지른 단순 범죄에 불과하고요.
켄 페레니가 '천재 예술가'와는 거리가 먼 거리의 잡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 역시 당연하지만 썩 개운하지 않았어요. 이런 인간이 잘난척 떠벌이는 무용담을 수백 페이지나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거든요.
그리고 인생이 너무 잘 풀립니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에 의해 인생이 바뀌고 위기를 벗어나는 과정이 계속 반복되는 탓입니다. 실화라고 하니 할 말은 없지만 소설이라면 이렇게 쓰면 욕을 먹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에요.
마지막으로 이렇게 위조, 위작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면 도판이 보다 충실한게 좋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번역도 오타가 많아서 불만스러워요. 

그래도 재미 측면에서는 나무랄데 없는 자서전이자 논픽션임에는 분명합니다. 켄 페레니가 동네 잡범이라도 최소한 위작 계에서의 위치는 인정해 줄 수 밖에 없기도 하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위조와 위작 사기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9/08/25

테러호의 악몽 1, 2 - 댄 시먼스 / 김미정 : 별점 3점

테러호의 악몽 1 - 6점
댄 시먼스 지음, 김미정 옮김/오픈하우스
테러호의 악몽 2 - 6점
댄 시먼스 지음, 김미정 옮김/오픈하우스

1845년, 최신식 함정 이리버스호와 테러호를 타고 북서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출발한 존 프랭클린 경 탐사대는 무리한 항해 끝에 얼음 속에 고립되고 말았다.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탐사대를 키가 4m가 넘는 하얀색 괴물이 습격하기 시작했고, 괴물과 추위, 식량 부족 등의 문제가 겹치며 프랭클린 경을 비롯한 탐사대원들이 하나씩 죽어가자 테러호의 함장 크로지어는 배를 버린 후 생존한 탐험대 전부와 함께 육로로 탈출을 결행했다.
그러나 계속된 괴물의 습격과 식량 부족은 생존자들을 계속 괴롭혔고, 누수방지공 히키를 중심으로 한 대원들의 반란까지 일어나는데...

"칼리의 노래"로 접했었던 댄 시몬즈의 장편 호러 팩션입니다. 실존했던 싱클레어 탐험대에게 닥친 비극과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작가적 상상력으로 그려낸 작품이지요. 실존하는 미해결 미스터리를 풀어낸다는 점에서는 코난 도일의 "J.하버쿡 젭슨의 진술"이 떠오릅니다.

이전부터 굉장히 기대했었는데 역시나,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1, 2권 합쳐서 9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순식간에 읽어버렸을 정도로요. 재미의 가장 큰 요소는 끔찍한 초극한 상황의 생생한 묘사입니다. 이들에게 닥친 비극은 작 중에서도 언급되다시피 포경선 에식스 호의 비극과도 유사합니다. 그러나 에식스 호는 십 수명의 선원들이 주로 '굶주림' 과 싸우며 그래도 다섯 명이나 생존했지만, 싱클레어 탐험대는 백명을 훌쩍 넘는 대원들이 아무 것도 잡지 못해 줄어드는 자원만으로 버텨야 해서 직면한 굶주림은 물론, 상상을 초월하는 추위와도 싸워야 한다는 점에서 몇 수 위입니다. 최고 영하 60도 이하로 떨어져 맨 손으로 총을 잡으면 살갗이 벗겨질 정도니까요.

탐험대를 곤경에 빠트리는 요소로는 괴혈병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묘사도 굉장합니다. 모공 등 모든 몸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이빨이 빠지고, 붓기가 심해지며 피부의 탄력도 사라지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몇몇 선원들이 걸린 납중독 묘사도 처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죽어가는 핏제럴드 함장의 최후가 특히나 끔찍합니다. 

탐험대를 습격하는 거대 괴물 툰바크의 위협도 어마어마한 수준입니다. 4m도 넘는다는 거대한 체구에 속도도 엄청나며 총을 맞아도 죽지 않는 괴물로 인간은 도저히 제압할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나마 탐험대의 발버둥은 테러 호의 항해장 블랭키가 괴물에 맞서 오랫동안 버티며 살아남는 정도에 불과해요. 참고로 블랭키의 사투는 박력이 넘쳐서 전체 내용 중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수많은 어려움에서 드러나는, 인간 관계를 통한 드라마도 탄탄해서 재미를 더합니다. 작중 최고 악역인 누수방지공 코닐리우스 히키의 존재는 비교적 평범한 편이나, 다른 인물들의 묘사와 설정이 아주 빼어납니다. 실력은 없지만 운과 허세에 의존하는 존 프랭클린을 비롯, 실력은 뛰어나나 아일랜드인이라는 출신 성분 탓에 뼛 속 깊이 분노를 품고 사는 크로지어 함장, 순수한 군인이자 '인간' 인 어빙 소위, 체력이나 능력은 딱히 없지만 열정과 신념으로 무장한 해리 굿서 등 모든 인물들이 눈에 보이듯 그려져 정말 살아 숨쉬는 듯 합니다.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다가 죽어가는 인물들과 인간임을 포기하고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 인간 군상들의 대비도 확실하고요. 사실 극한 상황에서 군율과 군기가 유지된다는게 처음에는 영 와 닿지 않았는데, 묘사를 통해 국가와 인간에 헌신적인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 덕분에 나름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탐험대가 전멸할 때 이누이트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게 영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히키가 어빙을 죽이고 이누이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탓이라는 설명이 더해진 것도 좋았습니다. 탐험대가 이누이트를 복수 명목으로 학살해서 도움을 받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아쉬운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탐험대의 생존 경쟁만 그렸으면 좋았을텐데, 초자연적이고 신화적인 영역의 이야기가 너무, 지나칠 정도로 많은 탓입니다. 가장 실망스러웠던 건 툰바크, 그리고 툰바크와 관련된 벙어리 여인 실나의 정체입니다. 실존한다기 보다는 결국 이누이트 신화 속의 존재라는 진상은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크로지어 함장이 '천리안'을 갖춘 인물로 그 역시 실나와 결혼하고 이누이트 주술사로 거듭난다는 결말 역시 전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프레데터'와 총으로 싸우다가 나중에 부적을 붙여 퇴치한다는, 크리쳐 호러물이 갑작스러운 퇴마물로 전환되는 셈인데 영 개운치 못했거든요.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TV 시리즈에서는 툰바크가 실체가 있는 괴물로 그리고 있던데 그게 더 나은 선택인건 분명합니다.

그래도 워낙에 압도적인 내용이 많고 재미 또한 빠지지 않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결말만 더욱 현실적으로 그려내었더라면 4점도 아깝지 않았겠지만 지금 수준으로도 충분히 좋은 작품인건 분명합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밀리의 서재' 처음 한 달 무료 프로모션을 통해 읽게 되었는데, 아직 '밀리의 서재' 가입을 하지 않으셨다면 무료로 읽어보실 수 있을 겁니다. 

덧붙이자면 TV 시리즈도 무척 땡기지만, 심하게 무서울 것 같아 망설여지는군요. 호러 무비는 취향이 아니다보니...

2018/04/22

배트맨 : 가스등 아래의 고담 - 브라이언 어거스틴 외 / 이한 : 별점 3점

배트맨 : 가스등 아래의 고담 - 6점
브라이언 어거스틴 외 지음, 이한 옮김/세미콜론

스팀 펑크 세계관에 배트맨을 등장시켰다는 전설적인 작품으로 다양하게 미디어 믹스된 바 있고, 얼마전에는 애니메이션도 출시된 표제작 "가스등 아래의 고담", 그리고 동일 세계관 시리즈인 "미래의 주인" 두 편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읽으면서 스팀 펑크 세계관이 아니었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왜 스팀 펑크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특히나 "가스등 아래의 고담" 은 그냥 빅토리아 시대를 무대로 하여 배트맨을 등장시킨, '팩션'이라고 해도 무방할 설정의 작품이었습니다. 실존 인물인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브루스 웨인의 스승으로 등장하고, 잭 더 리퍼 사건이 이야기의 핵심으로 전개되는 등 현실과 허구의 혼합이 절묘한 덕분입니다. 고담도 미국이기는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 런던의 분위기를 자아내며, 배트맨 역시 과학 기술과는 무관한, 순전히 단련된 육체에 의지하는 인물로 그려져서 현실감을 더해 줍니다. 슈퍼 히어로가 아니라 "자경단원" 이자 "탐정"으로서의 배트맨이 그려지는 것 역시 현실적이면서 마음에 든 점이고요.

아이디어는 굉장히 탁월하고 작화도 독특하고 좋은데, 아쉽게도 작품의 완성도는 기대 이하입니다. 브루스 웨인이 잭 더 리퍼로 오인받아 체포되고, 감옥에서 정보를 끌어모아 진범을 알아내는 과정의 긴장감과 이야기의 설득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브루스 웨인에게는 삼촌같았던 변호사 제이콥 패커가 진범임이 드러나는 과정이 특히 그러해요. 단순히 같은 연대 소속이었다는게 범인이라는 증거가 될까요? 또 제이콥 패커는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와 같은 연배인 노인으로 애초에 배트맨과 일기토를 벌인다는 건 불가능해서 최후의 대결에서의 긴장감도 제로에 가깝습니다.

결론적으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걸작이라는 명성에 비하면 실망이 더 큽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차라리 이 작품보다는 함께 실려있는 "미래의 주인" 이 재미면에서는 한결 낫습니다. 우선 빌런 알렉상드르 르루아의 존재감이 출중합니다. 배트맨의 맞수로 부족함이 없어요. 적당히 미치기도 했고, 적당한 능력도 갖추고 있으니까요. 또 르루아가 비행선에 달린 장치를 이용하여 '태양의 불길'을 내리쳐 고담시에서 열리는 박람회를 비롯하여 고담시 일부를 불에 태워 백 명 이상의 사망자를 발생시키는 음모의 스케일도 크고, 이를 막기 위한 배트맨과의 일기토도 적절하여 재미를 더합니다. 르루아의 파괴는 그와 손잡은 악덕 기업인이 있었다는 진상을 밝혀내는 '탐정' 배트맨의 활약과 그의 정체를 간파한 약혼녀 줄리 캐릭터도 볼거리였고요. 그리고 르루아의 비밀 무기도 "스팀 펑크 세계관의 배트맨" 이라는 말에 더 어울리는 소재였어요. 아주 초월적인 무언가는 아니고, 상식선의 무기로 보이긴 하나 적당히 SF적이고 적당히 레트로한게 꽤나 잘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딱 한 가지, 전형적인 미국 극화체 작화만큼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작화만 "가스등 아래의 고담" 스타일이었다면 별점 5점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그래서 두 작품 평균 별점은 3점입니다. 유명세에 비하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으나 예상치 못한 다른 작품 덕분에 평균 이상의 재미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세계관의 다른 시리즈도 보고 싶어집니다.

덧 1 : 배트맨이 등장하는 슈퍼 히어로물이지만 분위기는 잭 더 리퍼 사건을 해결하는 범죄 액션 스릴러에 가까우므로 분류는 "추리 - 호러" 로 하겠습니다. 덧 2 : 아무리 풀 컬러지만 120페이지도 안되지만 14,000원은 좀 비싸네요. 한 페이지에 100원이 넘는 셈이잖아요? 이렇게 비싼 이유가 있는걸까요?

2017/06/09

인어공주 - 기타야마 다케쿠니 / 김은모 : 별점 2.5점

인어공주 - 6점 기타야마 다케쿠니 지음, 김은모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폴레옹 황제의 실각 이후, 동맹국이었던 덴마크는 노르웨이에 해당하는 영토를 빼앗기는 등 빈국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덴마크 왕 프레데리크 6세의 둘째 아들 크리스티안 왕자는 스웨덴의 실력자 가문의 딸 루이세와 결혼했다. 그러나 왕자는 결혼식 직후 피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한편 덴마크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실의에 빠져 병사한 후, 의지할 데 없는 나날을 보내던 학생 한스 안데르센은 우연히 만난 화가 루트비히 그림과 함께 해변에서 자신이 인어라고 주장하는 셀레나라는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왕자 살인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를 밝히기 위해 심장을 내걸고 인간이 되었다고 했다. 그녀를 도와 그림과 안데르센은 사건 수사에 뛰어드는데... 

기타야마 다케쿠니의 판타지 본격 추리물입니다. 장르 측면에서는 여러모로 요네자와 호노부의 "부러진 용골"과 비슷한 느낌이지만, 실제 역사를 이야기에 강하게 접목시키고 있다는 차이점은 큽니다. 나폴레옹에게 반해버린 마녀가 나폴레옹을 돕기 위해, 크리스티앙 왕자와 루이세 왕자비간 결혼을 파탄내어 스웨덴과 덴마크 간 동맹을 무너트리려 했다는 왕자 살해 동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외에도 실제 덴마크 역사를 이야기에 많이 삽입하고 있습니다.
화자 역할로 한스 안데르센을, 탐정 역할로 그림 형제의 막내 루트비히를 내세우고 있는 것 역시 팩션 분위기를 더해주는 요소입니다. 

이러한 실제 역사, 인물과 대척점에 있는 '인어 공주' 이야기도 괜찮습니다. 안데르센의 동화를 가져와 추리 소설로 변주하는데, 후더닛, 하우더닛 물로는 충분한 수준의 본격물인 덕분입니다. 도개교를 이용하여 시체를 발코니로 옮겼다는 핵심 트릭이 특히 그럴 듯 했습니다. 작품 분위기하고도 잘 어울리는 트릭이라는 점도 좋습니다. 또한 세세한 별궁 묘사는 물론, 한스와 셀레나가 별궁에서 도망 다닐 때 도개교는 아이의 힘으로도 끌어올릴 수 있다는걸 보여주는 등 단서도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물론 시체가 도개교 끄트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았을지?라는 의문은 존재하며, 이 정도는 추가로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확실히 나쁘지 않았어요. 작가가 워낙에 물리 트릭을 많이 내세워 '물리의 기타야마'라고 불리울 정도라는데 그 명성에는 충분히 값합니다.

마녀의 단도는 마녀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는데, 마녀의 시체 갈비뼈와 입수한 단도의 손잡이 모양이 다르다는 점에서 마녀가 사실은 2명이라는걸 끌어내는 추리도 좋습니다. 마녀가 일종의 '대를 잇는' 존재라는 아이디어도 나쁘지 않았고요. 여러가지 가설을 늘어놓고 가장 합리적인 가설을 선택하는 루트비히의 추리법도 괜찮습니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설이 전부 등장하며, 가설 모두 논리적으로 분석되어 설득력이 높은 편이거든요.
개인적으로는 마녀가 마법으로 왕자를 죽이지 않은 이유가 가장 궁금했는데, 구태여 '살인 사건'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 마녀의 마법이라면 자연사나 사고사를 노렸을테니 - 말이 안된다는 이론이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셀레나가 사건 수사에 왜 뛰어드는지 잘 모르겠어요. 바닷속 나라에서 인어공주 사건 때문에 내분이 생겼다는데 설득력이 약합니다. 바다 속 왕국은 어차피 덴마크와 아무 상관도 없는데 공주가 왕자를 죽이건 말건 그게 왜 큰 문제가 될까요? 설령 문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공주가 이미 죽은 이상 처벌도 끝난건데 말이지요.

핵심 동기도 본격물다운 설득력은 갖추고 있긴 하나 설정에 오류가 있습니다. 인어 공주는 원래 크리스티앙 왕자를 사랑해서 인간이 되었는데, 마녀가 됨으로서 그 사랑을 잊어버리고 나폴레옹에 대한 사랑만 간직하게 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나폴레옹을 사랑한 인어도 마녀를 죽이고 마녀가 되었다고 묘사되는 탓입니다. 크리스티앙 왕자를 사랑한 인어가 이전 마녀를 죽였다면, 사랑의 대상도 바뀌는게 더 합리적이잖아요?
아울러 루이제가 왕자를 살해한 것도 마녀에게 조종당했다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습니다. 그냥 단순히 질투 때문이었다고 하는게 훨씬 깔끔했을 겁니다. 이 부분은 동화 속 주인공 중 하나인 루이제를 배려하기 위한 티가 역력합니다. 이런 내용들은 싹 정리하는 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물거품이 된 인어 공주가 왕자 살인범의 누명을 쓴 탓에, 진상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언니 셀레나가 나섰고, 범행은 루이제 왕자비가 질투 때문에 저질렀다는 정도로요. 물론 이런 식이었다면 장점이라고 했던 실제 역사 이야기가 작품에 거의 녹아들 여지가 없어지기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훨씬 설득력 높고 깔끔해 졌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아이디어도 나쁘지 않고 추리적으로도 괜찮기는 한데, 지나치게 살을 붙인게 아쉽습니다. 조금만 힘을 뺐더라면 "부러진 용골"급의 작품은 되었을 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워낙에 독특한 점이 있는 만큼, 궁금하신 분들은 한 번 쯤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16/08/05

제라르 준장의 회상 - 아서 코난 도일 / 김상훈 : 별점 3.5점

제라르 준장의 회상 - 6점
아서 코난 도일 지음, 김상훈 옮김/북스피어

나폴레옹 휘하에서 싸웠던 제라르 준장의 소싯적 모험담이 수록된 연작 단편집입니다. 모두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셜록 홈즈의 아버지 코난 도일 경의 작품으로 "코난 도일을 읽는 밤"에서 마이클 더다가 극찬했던 탓에 관심을 갖던 작품인데, 얼마 전 국내에 정식으로 번역 출간되어서 여름 휴가 기간을 이용하여 읽어보았습니다.

읽어보니 확실히 극찬받을 만하더군요! 발표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읽는 재미만큼은 정말 발군이었던 덕분입니다. 준장의 생명을 건 모험들의 긴박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 손에 땀을 쥐고 읽었습니다.
여섯 명의 펜싱 사범과 결투를 벌였다는 식의 허세 끼 있으면서도, 황제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과 여성들에게 한없이 관대한 매너를 보여주는 제라르 준장도 아주 매력적이고요. 시기적으로 본다면 얼마 전 읽은 "내 방 여행하는 법"의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가 떠오르는데, 허세는 동급이더라도 유머 감각은 월등합니다. 그래서 모험담도 전반적으로 유쾌해요. 잘난 척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유쾌한 친구인 셈이지요.

아울러 역사 모험물답게 나폴레옹, 네 원수, 탈레랑, 워털루 장군, 뮈라 원수 등 다양한 실존 인물들과 실제 전쟁이 벌어졌던 곳들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도 좋습니다. 군복을 비롯한 여러 세세한 디테일들과 전투 장면의 묘사 역시 큰 볼거리에요.

결론적으로 추천작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약간 시대는 다르지만 "스카라무슈"나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비교할 만한 좋은 작품입니다. 후속작도 빨리 읽어보고 싶네요. "잃어버린 세계"로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도일 경은 추리물뿐 아니라 모험물에도 확실히 대단한 역량을 보여주는 작가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프랑스 군인의 이야기를 영국 작가가 이렇게나 실감나게 쓴 것도 정말이지 놀라와요. 영국 군인을 지나치게 영웅시하지 않은 것도 신기했습니다.

각 단편별 간략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라르 준장, 음울한 성으로 가다"

1807년 2월, 제라르 중위는 연대 본부에 출두하던 중 우연히 경기병 연대 순찰대를 만났다. 순찰대의 지휘관 뒤로크 소위는 아버지의 원수 슈트라우벤탈 남작에 대한 복수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둘은 남작의 계략으로 성에 갇혀버리는데...

제라르 준장의 회고에서 시작되는 모험담의 첫 이야기입니다. 나이 지긋한 인물의 1인칭 방백에서, 본 이야기는 3인칭의 소설로 전환되는 구조인데 예전 "샘 호손의 사건부"와 같은 방식입니다. 이야기의 현실성을 높이는데에는 아주 좋은 방법이라 생각되네요.

시리즈의 시작으로 나무랄 데 없습니다. 지하에 갇힌 후 탈출하는 과정, 그 와중에 남작을 중오하는 의붓딸의 도움, 그리고 남작과의 최후의 결투와 완벽한 해피엔딩 등 모험물로서의 재미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라르 준장의 캐릭터가 뚜렷하게 각인될 뿐 아니라, 사악한 남작의 캐릭터도 잘 살아 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제라르 준장, 아작시오의 자객들을 처단하다"

1807년, 제라르 중위는 퐁텐블로 궁에서 나폴레옹 황제의 밀명을 받았다. 밤 10시에 황제와 함께 어떤 사내들을 상대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코르시카에서 '아작시오 형제단'이라는 단체에 가입했었는데, 그 단체로부터 협박을 받는다는 설정입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팩션적 요소 외에는 딱히 눈에 띄는 부분은 없습니다. 황제가 암살될 수 있다는 긴장감이 핵심인데, 이미 결과(암살 실패)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별다른 재미를 주기 어려운 탓입니다. 검술로는 상대도 안 되는 두 명의 자객과 대결하는게 모험의 전부이기도 하고요.

물론 나폴레옹을 위장한 일종의 가게무샤가 대신 죽었다는 약간의 반전, 그리고 제라르가 궁을 나갈 때 처음 들어올 때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서, 즉 모든 걸 잊고  나가겠다고 하자 나폴레옹이 한 답변 — "그럴 수는 없을걸, 그때 자넨 중위였으니까 말이야. 이제 가서 푹 쉬게, 제라르 대위" — 등 재치 있는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단점이 더 크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제라르 준장, 왕을 잡다"

1810년, 부상으로 후방에 머무르던 제라르 대령은 연대 복귀를 위해 산을 넘다가 게릴라들에게 사로잡혔다. 잔혹한 게릴라 엘 쿠치요에게 사지가 찢길 뻔했던 제라르를 구해준 건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영국군 용기병대였다.
용기병대의 지휘관 바트와 친해진 제라르는 그와 카드 게임 '에카르테'를 벌여 당당하게 탈출할걸 계획하는데...

산적에게 습격받았다가 영국군에 사로잡히고, 마지막에는 웰링턴 장군까지 나오는 드라마틱한 구성이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제라르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기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스페인 산적들의 묘사도 생동감 넘치며, 프랑스인이 영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들, 카드 게임의 박진감 등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고요. 에카르테를 프랑스 전체를 뒤져 자기보다 잘하는 사람이 세 사람이나 될까라는 식의 귀여운 허세도 여전합니다.

마지막 웰링턴의 한마디도 인상적입니다. 급작스럽게 나타난 웰링턴에게 제라르가 하는 말 — "내가 카드 게임에서 이겼다, 약속대로 자유를 달라, 자신은 킹을 잡고 있다" — 에 대한 답변으로 웰링턴이 "자넨 우리 킹에게 잡혔거든" 이라고 하는 장면은 영국적이면서도 재치 있더라고요.

모험물로도 재미있고, 팩션으로도 괜찮은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왕, 제라르 준장을 잡다"

1810년, 다트무어 감옥에 수감된 제라르는 탈출을 감행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치밀한 탈출 — 창의 철봉을 뽑고, 벽돌을 빼낸 후 이중 벽을 철봉에 침대보로 만든 밧줄을 묶어 넘음 — 도 재미있지만, 탈출 후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습니다.
우선 찰스 메러디스의 마차를 우연히 만난 후 그의 외투를 훔칩니다. 그러나 그 사이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을 몰라서 왔던 길을 되돌아와 다시 형무소 근처에 오고 말지요. 기지를 발휘하여 자신이 말한 방향과 반대로 향했지만, 영국 복싱 챔피언 브리스톨 버슬러를 만나 격투를 벌인 끝에 사로잡힌다는 좌충우돌 행각이 정말 흥미진진한 덕분이에요.
메레디스의 편지로 풀려난다는 반전도 아주 기막히며, 이 와중에 편지를 끝까지 읽지 않는 기사도 정신도 반짝반짝 빛납니다. 메레디스 부인과 나누는 농짓거리도 인상적이었고요.

한마디로 탈출기로서도, 모험담으로서도 빼어난 수작입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제라르 준장, 밀플뢰르 원수와 맞서다"

1810년, 마세나 원수는 제라르 대령에게 탈주병 출신으로 엄청난 세력의 산적 집단을 만든 밀플뢰르 원수 타도 및 그가 사로잡은 부유한 백작 부인을 구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부하들과 산적의 근거지로 향하던 제라르는 도중에 영국군을 만났다. 다행히 지휘관이 친분이 있던 바트이며, 그도 같은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공동 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그러나 산적의 근거지인 수도원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마침 그 수도원에서 쫓겨났다는 수도원장의 말을 듣고, 패잔병을 가장하여 잠입할 것을 모의하는데...

일단 바트의 재등장은 반가웠고 수도원장의 정체가 밀플뢰르 원수였다, 그리고 백작 부인은 원수에게 푹 빠져버렸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허나 중간에 제라르의 목숨을 노릴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는 등 전개 면에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영국군을 사로잡은 방법과 똑같이 아침에 제라르를 유인하여 프랑스 군도 일망타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방심을 노렸다 치더라도 밀플뢰르 원수가 직접 나설 이유는 당연히 없습니다. 또 반가운 캐릭터였던 바트가 전사한다는 내용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제라르보다는 밀플뢰르가 더욱 주인공에 가까운 일종의 안티 히어로물로 보는 게 타당할 듯싶네요. 결국 밀플뢰르가 승리하는 결말 역시 그러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제라르 준장, 왕국을 걸고 도박을 하다"

1812년, 프랑스는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한 후 괴멸적 상황에 빠졌다. 때문에 제라르 대령은 프랑스로 복귀하여 부대를 재건할 것을 명받았다.

독일을 가로질러 귀국하는 와중에 제라르는 항상 프랑스와 친밀했던 분위기가 바뀐 것을 눈치챘고, 협력자를 통해 곳곳에 표시된 기묘한 "T"자 마크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것은 프로이센 상류층의 비밀 결사 투겐트분트의 표식이었다. 

그리고 제라르는 죽어가는 군위대 장교 아르노 후작을 만나 황제의 밀서를 건네받았다. 그의 마지막 부탁은 호프성의 작스-펠슈타인 대공에게 밀서를 전해 독일이 황제에게 거역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 그리고 전 유럽이 나폴레옹에게 거역하는 상황의 한가운데 놓인 제라르의 모험이 펼쳐진다는 점에서 팩션 느낌이 강합니다. 하지만 실상 모험이랄 것은 대단치 않습니다. 대공을 찾아가 이야기하는 게 거의 전부인 탓입니다.

제라르가 팔로타 백작부인을 자칭한 대공비에게 서류를 뺏기는 과정, 궁지에 몰려도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역사를 거스르지 못하는 제라르의 실패만큼은 인상적이지만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제라르 준장, 훈장을 타다"

준장이 된 제라르는 전우 샤르팡티에 소령과 함께 나폴레옹의 부름을 받았다. 황제는 당면한 작전 내용과 밀서를 스페인 국왕인 자기 형에게 전하라고 명령한 후, 친히 경로까지 정해 주었다. 하지만 그 경로는 프로이센 군 등에 이미 점령당한 상태였다. 제라르는 사로잡힐 위기에 처하지만 기지를 발휘해 탈출하여 명령을 완수하는데...

태사자가 홀로 북해성 밖의 원군을 청하는 것과 같은, 혈혈단신으로 적진 한복판을 가로지른다는 화끈한 모험이 펼쳐집니다. 태사자처럼 제라르의 기지도 돋보입니다. 시장 저택에서 벌어지는 프랑스군 - 프로이센군 전투, 그리고 이후 프로이센 군에게 다시 점령된 상황에서 코사크 장교 부트킨 백작을 속여 탈출하는 과정은 정말 기가 막히거든요.

게다가 황제의 의도는 그들이 사로잡히게 만들어 거짓 정보를 적에게 노출시키려 했다는 것, 그래서 황제는 사로잡힌 샤르팡티에게 레지옹도뇌르를 수여하고 제라르에게는 특별 명예 훈장을 수여한다는 결말까지도 완벽합니다. "저 친구는 우리 군에서 최악의 돌대가리일지도 모르지만 가장 용감한 군인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까 말이야."라는 말과 함께요. 그 말 정말이지 정확합니다! 아무래도 제라르는 주어진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머리는 타고났지만 좀 더 큰 그림은 볼 줄 모르는 인물인 것 같아요.

여튼 별점은 4점. 모험도 화끈하고 결말까지 완벽하니 더할 나위 없습니다.

"제라르 준장, 악마의 유혹을 받다"

나폴레옹 군대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제라르 준장은 프랑스 군 내에서 최고의 용사로 알려진 다른 전우 2명과 함께 베르티에 원수의 호출을 받았다. 그는 나폴레옹을 적군에 넘기자고 제안했다. 3명 모두 분노와 함께 제안을 거절했지만, 직후 황제가 나타나 그들을 시험했다며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그의 후계자를 증명하는 서류와 4천만 프랑에 해당하는 증권을 숨겨 놓는 것이었다.

그러나 탈레랑의 지시를 받은 악당들에게 서류를 빼앗겼고,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건 추격과 격투를 벌이게 되는데...

이 단편집의 아쉽지만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마지막답게 황제 나폴레옹의 최후를 다루고 있습니다.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이 단 한통의 편지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는 도입부로부터 그 편지의 내용이 무엇이었을지 밝히는 전개는 괜찮습니다. 허나 무려 전우 2명이 죽었음에도 대단한 모험으로 보기는 힘듭니다. 그리고 이 임무를 성공하더라도 나폴레옹에게 내일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에 좀 맥이 빠고요. 나폴레옹 2세는 결국 한 게 아무것도 없을 뿐더러 이 서류들이 그의 존재를 어떻게 한 건 아니니까요.

결론적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이야기였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