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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1

우리 미술 이야기 2 : 영원한 현재 - 고려 - 최경원 : 별점 2.5점


우리 문화 유산의 아름다움과 자랑거리, 그리고 알아두면 좋을 이런저런 내용을 소개해 주는 책. 저자의 "한류 미학 1"을 재미있게 읽어서 뒤이어 읽게 된 후속 권입니다. 절판 후 재출간되면서 제목이 바뀌었네요.

2권은 고려 청자 중심으로 고려 문화 예술만 소개하고 있는데, '고려의 청자를 비롯한 문화 예술품은 '대량 생산'되었기에 '디자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기저에 깔고 있습니다. 장인이 모든 것을 다하는게 '공예', 산업 혁명 이후 기계적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며 생산품 형태를 고안하는 일이 '디자인'인데, 국가 주도로 대량 생산된 청자는 '디자인'의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표준화' 경향으로 증명된다며 대체로 유사한 청자의 형태 등으로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꽤 그럴듯 했습니다. 디자인에 의한 대량 생산품의 우수함은 문화의 우수함을 증명한다는 주장도 아주 억지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고요.

다양한 청자를 가지고 청자의 우수성과 예술성을 설명해주는 부분도 좋았습니다. 도입부의 '청자의 색' 설명부터 눈길을 끕니다. 고려 청자의 다소 칙칙한 색이 찬양되고 있는 이유를 알려주는데, 고려청자는 '옥'의 색을 겨냥해 만들어진, '비취' 색이었기 때문입니. 옥은 중국에서도 구하기 힘든 보석 중의 보석으로, 송나라에서 처음으로 옥의 색과 질감을 유사하게 재현했었지만 고려 청자가 진짜 비취색을 구현해서 당대의 명물이 되었다고 하네요.

명품 고려 청자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느끼게 해 주는 여러가지 발견과 정보도 볼 만 했습니다. 사진이 아니라 스케치를 통해 그림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도판도 매력적이고요. 아래와같이 돋을새김 상감으로 이루어진 문양은 사진으로는 그 형태를 온전히 보기 어려운데, 스케치로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도자기는 3차원적 형태에 잘 어울리도록 그려지고, 이어진 형태로 감상해야 하는 그림이 많아서 전체를 돌려가며 보아야 된다는 착안도 좋았습니다. 이런건 박물관에서도 전시 시에 활용해주면 참 좋을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실제로 천천히 돌려서 전시하는 식으로 말이죠.

저자만의 주장도 눈길을 끄는게 많은데, 그 중 두 가지가 인상적입니다. 첫 번째는 황금 비례는 수학이 진리라고 생각했던 그리스 시대의 정신적 습관으로 만들어진 결과로 특정한 하나의 양식이자 독특한 미적 가설에 불과하다는 주장입니다. 황금 비례가 많이 사용되는건 사람의 눈의 구조가 똑같고, 보편적인 감정이 있어서 대체로 2:3이나 3:4 정도의 비례를 좋다고 느끼기에 그런 조형 결과물들이 많은 것 뿐이라서 특별히 대단한 이론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청자를 만들 수 없었던 조선은 문화가 낙후된게 아니라는 일련의 주장입니다. 조선 왕조 500년을 문화 퇴행기로 보는 건 일제 강점기 시기 총독부 소속의 일본 학자 세키노 타다시의 역사 왜곡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문신들은 삼강오륜을 앞세운 근엄한 도덕적 생활을 해서 정서가 발달하지 못했고, 경제력도 보잘것 없어서 미술이나 미적 감각을 발전시킬 힘과 여유가 없었다는 김원룡의 시각도 마찬가지로 악의적 편견인 것이지요. 저자는 조선의 경향은 조형 예술 역사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추상'이라는 개념의 경향일 뿐이라며, 이를 맨 마지막에 소개된 '은진미륵'을 통해 설명해줍니다. 은진미륵은 세계에 관한 관심이 달라진 데에 따라 만들어진 새로운 미적 감각의 표현으로, 인자한 보살의 이미지를 추상적으로 단순화시킨 조형으로 특유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는걸 여러가지 분석으로 알려주거든요. 이러한 경향이 조선으로 이어지게 된 것일테고요. 또한 청자가 만들어지지 않은건 옥의 모조품이라는 목표가 더 이상 사회적으로 공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게 타당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주장은 재미는 있는데 완벽하게 동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황금비례는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이론화 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거든요.
은진미륵에서도 추상성에 따른 아름다움은 솔직히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예가 좀 잘못된게 아닌가 싶더군요.

이외에도 많은 아름다운 유물을 보는건 좋았지만 청자가 대부분이고, 내용도 비슷한게 많아서 뒤로 가면 갈 수록 지루하다는 문제도 큽니다. 청자의 형태가 유기적으로 이는 최신 디자인 경향과 비슷하다는 주장이 반복되는 탓입니다.
그리고 이전에도 지적했지만 문헌, 사료적 근거가 다소 부족하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저자는 문헌을 분석하는 것 보다 유물 자체를 관찰하고 추론하는게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자신의 추론을 문헌을 통해 뒷받침하려는 노력 정도는 해 주는게 보기가 좋았을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유물 중심으로 분량을 줄였더라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2024/04/12

한류 미학 1 : 메이드 인 코리아의 기원 - 최경원 : 별점 3점


우리나라의 문화는 소박하지만은 않다는걸 여러가지 문화재, 유물을 통해 알려주는 책.
설명을 위해 유물들을 '디자인'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유물을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실제 사용자가 사용하는 '제품' 관점에서 분석하여, 해당 유물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갔던 '제품'인지를 알려준다는건데 꽤 그럴싸한 접근법이라 생각되었습니다. 현재의 갤럭시나 아이폰을 먼 미래 박물관 같은데서 본다고 상상한다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어요. 두 제품은 생긴 것만으로는 차이를 느끼기 어려우니까요. 차이를 느끼려면 아이폰이 가져온 혁신을 함께 알려주어야 하는데 이와 유사한 방식이 아닐까 싶거든요. 확실히 디자인 전문가다운 발상이었습니다.

또 디자이너답게 '형태'에 집중하고 있는 유물도 있는데 이 중에서는 삼한 시대의 오리모양 토기의 형태에 주목한 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른 문화권 토기들과 다르게 사실성, 장식을 배제하고 극도로 단순화한 수준높은 추상조형은 이를 소비하는 지배층의 인식 또한 뒷받침 되어야 하므로 높은 수준의 사회적 배경의 뒷받침되었을 거라는 저자의 의견은 설득력이 높아 보였습니다. 굉장히 모던하고 미니멀리즘적인 삼한 시대 토기 역시 마찬가지고요.
고구려의 다양한 화살촉은 실제 쓰임새(양력 등을 활용하여 보다 멀리 쏠 수 있도록) 때문에 발전된 형태라는 글도 흥미로왔습니다. 오히려 더 진지하게 파고들어 연구할 여지가 많은데 중간에 끝난 것 같아 아쉬웠어요. 왜 후대에 계승되어 더 발전되지 못했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일반 화살촉보다 분명한 장점 - 사거리 - 이 있어 보이는데, 그걸 상쇄할만큼 단점이 컸던 걸까요? 그렇다면 어떤 단점이 있었을까요? 아, 궁금합니다.

사진이 아니라 직접 그린 스케치로 이루어진 도판도 아주 좋습니다. 저자의 설명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정확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조형적인 완성도를 알려주는 대부분의 글들 도판들이 특히 빼어난데, 아래의 용봉문 투조 금동장식 속 봉황 등의 조형이라던가, 통일신라 말 발걸이에 그려진 말 캐릭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런 스케치가 아니라면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웠을터라 무척 고마운 도판이었어요.
몇몇 유물의 경우는 디자인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해 현대의 제품들과의 비교도 시도하는데 이 역시 괜찮았어요. 답을 정해 놓고 끼워맞춘 감이 없지는 않지만, 실제로 지향하는 바가 비슷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것들도 많습니다. 한국형 비파형 청동검은 굉장히 많은 노력을 기울인 걸작품으로 고조선이 상당한 수준의 문명 국가였다는걸 증명해 준다는 등이 그러합니다. 신라의 누금세공 귀걸이도 저 큰걸 귀에 어떻게 걸지? 싶었었는데, 명주실을 꿰어 귀나 모자에 걸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요(찾아보니 기사도 있네요).

하지만 다소 억지섞인 주장도 없지는 않습니다. 쌍용총 속 벽화의 무인의 패션이 샤넬, 아르마니의 컨셉과 일치하는 시대를 앞서간 패션이었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단지 무채색이라는 것 정도로는 논거가 부족합니다. 아래의 백제 허리띠처럼 실제로 꽤 감각적이고 멋드러진 형태라는걸 구체적으로 알려줬어야 했어요.
누구나 최고의 명품이라고 인정하는 금동대향로가 소개되는건 노력의 낭비가 아니었을까 싶고, 무엇보다도 저자의 의견이 과연 맞는지?에 대해서 증빙되지 못한다는 문제도 커 보였습니다. 주장은 일리가 있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료적인 근거는 거의 없다시피하거든요.

그래도 디자이너가 유뮬을 제품 관점에서 바라보았다는 책의 컨셉은 확실히 빼어납니다. 재미있게 읽었어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4/01/05

검은 황무지 - S.A. 코스비 / 윤미선 : 별점 3점

검은 황무지 - 6점
S. A. 코스비 지음, 윤미선 옮김/네버모어

<<아래 리뷰에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러가드는 어머니의 병원비와 딸의 대학 등록금 등 급전이 필요해서 로니의 보석상 다이아몬드 강탈에 참여했다. 로니와 콴의 실수로 엉망진창이 된 와중에도 보러가드의 빼어난 운전실력 덕분에 다이아몬드는 훔쳐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는 뒷세계 거물 레이지의 것이었고, 레이지는 강도단을 붙잡아서 경쟁자 셰이드의 플래티넘 코일을 훔쳐오라고 협박했다. 보러가드는 혼신의 힘을 다해 코일을 성공적으로 탈취해 왔지만, 로니가 배신해서 코일을 빼돌렸고 보러가드의 사촌 켈빈마저 살해했다.
배신을 알게 된 레이지는 보러가드의 가족을 납치하려고 했고, 이에 보러가드는 로니와 레지 형제를 죽이고 코일을 되찾은 뒤, 가족을 지키고 복수를 하기 위해서 레이지와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는데....


"타임지에서 선정한 역대 최고의 추리, 스릴러 소설 100선"을 통해 읽게 된 작품. 두뇌파 악당이 주인공이며, 그가 세운 계획에 따라 벌어지는 여러가지 범죄들이 이어집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는 피카레스크 하이스트 스릴러, 쉬운 말로는 악당 범죄 활극이지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흑인 버젼의 "악당 파커" 시리즈입니다.

하지만 전형적인 피카레스크 물과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주인공 보러가드는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살인도 서슴치 않는 악당이기는한데, 그가 범죄를 저지르는건 모두 가족 때문이며 마지막에는 가족을 위해 스스로 사라질 결심까지 한다는 점입니다. 가족을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서요. 물론 마블 세계관의 킹핀처럼 '내 가족에게는 따뜻하지만 반대하는 자들에게는 잔인한' 악당도 있지만 '보러가드'는 삶에 찌든 소시민으로 가족을 위해 싸우는 '아버지'의 모습을 강하게 보여줍니다. 탁월한 묘사는 이런 모습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 주고요. 반면 '버그'로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으로 범죄 계획을 세우고, 자신을 괴롭힌 악당들에게 하는 복수는 처절합니다. 이렇게 악당 '버그'와 좋은 아버지 '보러가드'라는 이중적인 면모를  이상하지 않게 잘 그려낸 솜씨가 탁월했니다.

범죄물로서도 평균 이상입니다. 일단 스릴러로서의 전개가 발군입니다. 보러가드에게 끊임없이 위기가 닥치는데 정말 읽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습니다. 이게 연재물이었다면 다음 호를 기다리기 힘들었을 것 같을 정도였어요.
'하이스트' 물로서도 충분한 재미를 가져다 줍니다. 다이아몬드 강도 사건, 코일 탈취 사건, 그리고 마지막 레이지와의 결전이라는 세 개의 큰 작전 모두 계획부터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이 세밀하게 설명되는 덕분입니다. 모두 보러가드의 운전 실력이 핵심이라는 독특함도 좋았습니다. 다이아몬드 강도 사건에서 고가도로로 도주한 뒤 뛰어내린다던가, 코일을 탈취할 때 코일이 실렸던 트럭을 더 큰 트럭 안으로 몰아 넣어 숨기는 식이거든요. 마지막에는 레이지를 끝장내기 위해 애차 더스터를 몰고 카 체이스를 벌이고요.
보러가드의 정비 기술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다이아몬드 강도 사건 때에는 이산화질소식 촉매 시스템을 엔진에 장착해서 빠른 속도를 냈으며, 강철판을 용접하여 추락 시 충격을 흡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코일 탈취 때에는 달리면서 밴이 트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트럭 꽁무니에서 경사로가 나오도록 개조했고요. 레이지에게 준 벤에는 원격 조종 폭탄을 설치하여 폭발시켰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범행 과정에서 반전처럼 등장해서 재미를 더해주며, 설명도 충분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자동차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등장하는 거의 모든 차는 차종에 대해 무조건 언급해줄 정도인데, 작가가 자동차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중에서도 아버지의 유물로 또 다른 주인공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더스터'는 무슨 차인지 궁금해서 좀 찾아보았는데, "Plymouth Duster"로 1970년대 생산된 자동차더군요. 전형적인 '아메리칸 머슬' 입니다. 보러가드, 아니 버그와 참 잘 어울리네요. 가족에 위기가 닥쳐도 포기하지 못할 정도로 애정을 보이지만, 복수를 끝낸 뒤 폐차시킨다는 결말까지도 뭔가 미국적이고 마초적이었고요.

하지만 걸작 하이스트 소설로 보기에는 작전은 평이한 편입니다. 신기에 가까운 운전 실력이 알파이자 오메가로 그렇게 치밀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대단한 세력을 지닌 듯한 악당 레이지의 조직이 보러가드 한 명에 의해 괴멸되는 결말도 별로였습니다. 여기에서야 말로 수와 화력의 열세를 뒤집을 치밀한 작전이 필요했는데, 단지 '폭탄'으로 모든걸 해결한다는건 지나치게 시시했거든요. 악당 조직이 이 때 한 곳에 모두 모인다는 설정도 억지스럽고요. 최소한 보스 레이지가 직접 나서서 트럭을 찾으러 갈 이유는 없잖아요? 전형적인 헐리우드 액션 스릴러 스타일의 결말이었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범죄 소설로서의 재미만으로도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덧붙이자면, 보러가드가 흑인이지만 인종 차별에 관련된 내용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도 좋았습니다. 어떤 가치관, 사상은 전혀 담겨있지 않은 순수한 오락물이거든요.

2023/08/02

블랙 아담 (2022) - 자움 콜렛 세라 : 별점 1.5점


기원전 가장 번성하고 위대한 고대 국가였지만 현재는 국제 군사 조직 인터갱의 독재 국가로 전락한 칸다크. 인터갱의 눈을 피해 고대 유물을 찾던 '아드리아나'는 우연히 50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블랙 아담'을 깨우게 된다.
엄청난 괴력과 스피드, 방탄 능력과 자유자재의 고공비행, 번개를 쏘는 능력까지. 온몸이 무기인 '블랙 아담'은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인터갱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칸다크 국민들은 이에 열광한다.
한편, 그의 폭주를 막기 위해 '호크맨', '닥터 페이트', '아톰 스매셔', '사이클론' 으로 구성된 히어로 군단 '저스티스 소사이어티'가 칸다크에 나타나는데... (영화 소개 인용)


유럽으로 향하던 비행기에서 감상한 작품. 
듣던대로 액션은 좋더군요. 블랙 아담이 처음 각성해서 인터갱을 쓸어버리는 장면, 그리고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와 처음으로 격돌하는 장면 두 개가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인터갱 살육 장면에서는 악당을 그야말로 박살내서 무조건 지옥으로 보내버리는 화끈함이 제대로 전해졌고,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와의 격돌에서는 실사화가 어려울 것으로 보였던 호크맨을 날개의 움직임과 역동적인 모습을 통해 잘 살려내고 있으며, 닥터 페이트가 아주 멋지게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닥터 스트레인지'를 떠오르게 만드는, 같은 마법 계열 능력을 마법진이 아니라 일종의 결정 같은걸 구체화시키는 능력으로 그려낸게 독특하고 잘 어울렸습니다. 사이클론과 아톰 스매셔도 비중은 많지 않지만 능력은 충분히 선보여주었고요.
캐스팅도 좋아요. 특히 그냥 인간 자체가 블랙 아담으로 보이는 (인자블?) 더 락 드웨인 존스와 닥터 페이트 역의 피어스 브로스넌은 그야말로 찰떡이더군요. 블랙 아담이 진짜 영웅이 아니라 영웅의 아빠였다는 설정도 나름 적절하게 잘 써먹고 있고요.

그러나 각본이 너무 형편없어서 작품을 다 말아먹었네요. 힘에 의존하여 방해물을 모두 없애버리는, 안티 히어로에 가까운 응징자 블랙 아담과 이를 막으려는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와의 대결을 그렸어야 했는데, 결과물은 그냥 자기 고집이 세고 악당을 잘 죽인다 뿐 그냥 전형적인 슈퍼 히어로물이었거든요. 잘 알지도 못하는 아이 하나 살린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사람들을 죽일뻔 했다고 자책하며 힘을 포기하는건 영 와 닿지 않았어요.
그나마 블랙 아담 이야기는 괜찮은 편인데. 칸타크 동네 소년 아몬이 관련된 이야기들은 끔찍했습니다. 아이 하나가 DDP 포즈 (아래)를 취한다고 민중들이 따라 일어선다? 이런 허황된 영웅담을 억지로 끼어넣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칸타크, 인터갱 등의 설정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고요.



액션도 뒤로 갈 수록 처집니다. 특히 아크-톤 왕의 후손이라는 이스마엘이 사박의 힘을 얻어 악마로 부활한 뒤의 대결을 그린 클라이막스는 이야기 전개부터가 엉망입니다. 닥터 페이트가 죽음을 선택하여 홀로 사박과 맞서는 중에 감금되어 있던 아담을 깨우는데, 홀로 싸우지 말고 아담을 깨워서 같이 싸우면 되잖아요? 왜 개죽음을 택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사박의 디자인과 존재감 모두 별로인데다가, 결말마저 힘으로 두 쪽을 내 버리는거라 너무 허무했고요. 이렇게 존재감없던 빌런이 또 있었나 싶네요. 또 블랙 아담의 힘으로 모든게 해결되는거였다면, 더더욱 닥터 페이트 죽음은 개죽음이라는 생각만 들더군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일부 액션씬은 볼만했지만, 이 정도라면 망한게 이해가 됩니다. 차라리 블랙 아담의 안티 히어로적인 속성에만 집중했더라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등급도 대폭 높여서요. 우리나라 '범죄도시' 시리즈의 흥행이 왜 성공했는지 - 악당들을 원펀치로 부숴버리는 희열! - 연구해보면 좋겠네요. 후속편 제작이 취소되었다니 이젠 다 필요없는 이야기가 되었지만요.

2023/05/26

청동 램프의 저주 - 존 딕슨 카 / hansang(?) : 2.5점


<<아래 리뷰에는 트릭, 진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고학자 길레이 교수가 전갈에 물려 죽은 뒤, '무덤의 저주'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고인이 세반 백작과 팀을 이루어 이집트에서 헬리홀 무덤 발굴을 진행했던 탓이었다. 그리고 백작의 딸 헬렌 로린은 이집트에서 귀국하던 중, 점술사 림베이로부터 램프를 돌려주지 않으면 먼지처럼 사라지고 말거라는 예언을 받았다. 청동 램프는 출토 유물 중 하나로 그녀가 이집트 정부로부터 선물로 받았던 물건이었다.

귀국 후 헬렌은 연인 키트, 친구 오드리와 함께 저택에 도착한 뒤, 램프를 장식하겠다며 혼자서 먼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헨리 메리벨 경은 마스터스 경감과 함께 수사에 착수했고, 그날 함께 사라졌던 전 백작부인 초상화 행방을 쫓다가 헬렌이 초상화를 가지고 골동품상 맨스필드 부인의 가게에 방문했다는걸 알아냈다.
H.M 등과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뒤, 저택으로 돌아온다던 세반 백작마저도 저택 안에서 사라졌다. 백작의 외투 등이 남아있던 자리에는 저주의 청동 램프가 놓여 있었다.

연이은 인간 소실로 당혹해하던 키트 앞에 헬렌이 나타나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고 말했지만, 뒤이어 들어딕친 경찰 앞에서 다시 사라졌다. 경찰은 건축가까지 불러와 은신처에 대해 치밀한 조사를 벌였지만 실패했다.

다음 날, 헨리 메리벨 경은 모든 관계자들을 저택에 소집했다. 그리고 진상을 밝히는 추리쇼를 펼쳤다. 헬렌은 은신처에 숨어있던게 아니라, 집사 벤슨의 도움으로 하녀로 위장하고 있었다!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은 존 딕슨 카의 장편. 1945년 발표작입니다. 일본 아오조라 추리문고본으로 읽어보았습니다. 정말 오래 걸렸네요. 한 달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오컬트와 본격 추리가 결합된 작품입니다. 작가의 특기이기도 하지요. 그동안의 오컬트 소재는 중세 전설에 관련된게 많았었는데, 이번에는 이른바 '미이라의 저주', 그리고 저주로 사람이 사라져버린다는 인간 소실 트릭이 함께 엮여 전개됩니다. 폐쇄된 대저택에서 사람이 사라지는 상황이니, '밀실의 대가'로서의 실력도 발휘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런데 기대보다는 많이 지루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헬렌의 소실이, 흥미를 자아내지 못하고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지 못한 탓이 가장 큽니다. 헬렌은 차에서 내린 후, 저택 자기 방 벽난로 윗 선반에 램프를 장식해 놓겠다고 먼저 들어갔습니다. 키트와 오드리는 밖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고요. 그런데 집사 벤슨을 포함한 저택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헬렌을 보지 못했고, 저택 밖에서 일하던 수 많은 사람들도 헬렌이 나가는걸 보지 못했다고 했죠. 
그런데 아무도 문을 감시하거나 헬렌의 모습을 쫓고 있었던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라졌다"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아요. 특히 저택 밖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쁜 와중이었다면, 누군가 나가는건 충분히 놓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의 눈은 그렇게 정확하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세반 관에 살고 있는 헬렌이라면 어디로 몰래 나갈 수 있는지, 아니면 어디서 몸을 숨기고 있을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을테고요. 그래서 여러모로 대단한 사건으로 생각되지 않았어요. 
뒤이어 벌어진 세반 백작 소실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작이 들어온걸 실제로 본 사람은 없고, 특별한 감시도 없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더 만들어진 상황일 가능성이 높지요. 실제로도 샌디 로버트슨이 백작의 차를 몰고 들어온 뒤, 옷가지를 서재에 던져두었을 뿐이었죠.

다행히 헬렌이 키트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던 두 번째 소실부터 재미있어지기 시작합니다. 마스터스 경감의 지시로 경찰이 모든 통로를 막은 상태에서, 철저하게 조사를 벌였지만 결국 헬렌을 찾아내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인간 소실이 일어난 것이지요.
여기서 사용된 트릭은 헬렌이 하녀로 변장하고 있었다는겁니다. 현실적이라는 점은 좋아요. 
이 작품보다 10년은 앞서 발표되었던 여사님 작품에서도 비슷한 트릭이 활용된게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처럼 "인간 소실"용으로 사용된건 아니었으니, 나름 신선한 느낌을 전해 주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를 위한 단서들도 모두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헬렌이 저택으로 들어올 때 차에서 떨어트린 담배를 짚기 위해 허리를 숙였던 이유는? 이미 고용인들에게 하인으로 소개되었던 헬렌을 관리인이 알아볼까봐였습니다. 헬렌이 다시 나타났을 때 비옷을 입고 단추도 모두 채웠던 이유는? 속에 하녀복을 입고 있어서였습니다. 헬렌이 도착하는 날, 모두가 바쁜 와중에 휴가를 낸 하녀도 한 명 있었고요. 그 외에 이런저런 단서와 복선들로 트릭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초상화가 없어진 사건도 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헬렌이 선대 백작 부인과 꼭 닮았기에, 그 초상화를 치워버릴 필요가 있었던겁니다.
공범(?) 벤슨이 이를 도왔다는걸 알려주는 단서들도 꼼꼼히 삽입되어 있습니다. 헬렌이 언제 도착하는줄 몰랐다는 벤슨이 마침 딱 맞춰서 꽃으로 화병을 장식했던 것 처럼 말이지요. 불가능 범죄 추리물의 대가다운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하지만 현실적이며 공정할 뿐, 높은 점수를 줄 트릭은 아닙니다.  H.M.의 말대로 모든 신문에서 저주에 대해 떠들며 헬렌의 사진을 실었는데, 하녀로 변장한 헬렌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단점이 치명적인 탓입니다. '헬렌은 사진과 실물이 굉장히 다르다!'는걸 이유로 내세우는데, 헬렌을 사진으로만 보았던 쥴리아 맨스필드가 헬렌을 알아보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너무 떨어집니다. 키트나 오드리 등 실제로 헬렌을 보아왔던 많은 사람들 앞에서까지 숨어있기도 쉽지 않았테고요.
게다가 세반 백작 소실 사건은 앞서 말했듯 딱히 트릭은 없습니다. 경찰이 출입구를 감시하지 않아서 가능했을 뿐입니다.

헬렌이 사라졌던건 '저주'라는 뜬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한 연극이었다는 동기도 납득하기 힘듭니다. 인간 소실 사건을 언론에서 크게 다루게 한 뒤, 나타나서 '이건 모두 연극이고 저주 따위는 헛소리다!' 라고 말할 셈이었다는데, 이럴거라면 주변 인물들이나 저택 사람들에게 트릭을 써 가면서까지 몸을 숨길 필요는 없었습니다. 진상이 공개되어 봤자, 일반 대중들은 저택 사람들이 한통속이었다고 생각할게 뻔하잖아요? 게다가 잘못된 소문과 정보를 진실로 바꾸는건 굉장힌 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애초에 잘못된 정보를 퍼트리는건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그냥 연극따위 벌이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게 훨씬 나은 방법이었습니다.
샌디 로버트슨이 백작을 죽이려 했다는 동기와 상황도 별로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샌디는 헬렌이 사라졌을 때 카이로에 있었으니, 백작이 사라져도 자기가 의심받지 않을 거라 여겼다는데 말도 안됩니다. 두 사건을 함께 엮어서 볼 이유는 없을 뿐더러, 당시 백작 옆에 있었던 사람은 샌디 뿐이라서 빠져나가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샌디가 빼돌린 유물 문제는 관련자들 수사만 해도 금방 알 수 있었을테고요. 분명 살인 미수범인 샌디를 백작이 그냥 놓아 보내준다는 것도 이상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국내 미발표 소개작을 완독했다는 기쁨은 크지만, 대표작들에 비하면 확실히 처집니다. 번역을 시도해 볼 까 했는데, 그럴 수고를 들일 가치는 없네요.

2023/05/21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1. 베이지 않는 말
에그가 하치오지(八王子)에서 사가미호(相模湖)를 왼쪽으로 보고 오쓰키(大月), 사사코(笹子) 터널을 지나 코후(甲府)에서 주오자동차도로 나올 때까지 마이코는 뒷좌석에서 잠을 잤다.
"나는 잠을 잘 자는 사람이야."
그 말대로, 그녀는 조금만 틈이나면 정말로 기분 좋게 잠들곤 했다.
스와코 호수에서 밤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짙은 구름 사이로 하얀 호숫가에 방사형 빛이 비쳤다. 시오지리에서 북쪽으로 마츠모토로 향했다. 마츠모토에서 국도 158호선을 타고 서쪽으로 나아가면 아즈미(安曇)의 댐군을 통하며, 왼쪽으로 노리쿠라(乗鞍)산, 오른쪽으로 야리가다(槍ヶ岳), 호다카(穂高)의 산맥이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사카마키, 히라유 온천을 지나면 히다이였다.
구름이 흐려지고 안개처럼 차가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에그는 깊은 산속을 지나 에치츄 도카이도에서 신토우 강변을 따라 히다 가도로 향했다. 도야마에 도착한 후 호쿠리쿠 자동차 도로를 달리니 어느새 비는 진눈깨비로 변해 있었다. 에그는 쇼와강을 건너 후카야 온천을 거쳐 가나자와에 들어섰다.
처음 보는 마을이었다. 아사노 강과 사이 강 사이에 펼쳐진 시가지에는 오래된 민가와 상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용수와 흙담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가가 백만석 성곽 마을의 풍격을 느끼게 해 주었다.
점심은 고린보(香林坊)의 우동집에서 먹었다. 식사를 마친 마이코는 지도를 꺼내들었다.
"오노에 갈 거야."
마이코가 말했다.
"오노 벤키치, 본명은 나카무라 벤키치. 오노에 살면서 오노 벤키치라고 불렸어. 오노초 덴센지(伝泉寺)에 벤키치의 무덤이 남아 있지."
토시오는 지도를 보았다. 가나자와 성터, 겐로쿠엔(兼六園), 혼간지(本願寺), 노마치(野町), 데라마치다이(寺町台) ......
오노는 가나자와 시가지에서 벗어나 동해에 면한 가나자와 항구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가와호쿠가타에서 흐르는 오노가와 사이카와 강 하구에 끼여 있는 오노의 바로 옆은 카네이시(金石)로, 제니야고헤에(銭屋五兵衛)의 유품관이 있었다.

일본해는 거칠게 파도가 일고 있었다. 묵직한 구름의 움직임, 하얀 거친 파도, 검은 항구도시의 지붕.
"호쿠리쿠의 바다는 이제부터가 진짜야."
마이코가 말했다.
덴센지에 있는 벤키치의 무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무덤은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하나는 작고 낡은 비석으로, 벤키치의 이름은 알 수 있었지만 뒷면의 비문은 거의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능했다. 다른 하나는 새로 지은 것으로 보였는데, 묘비명은 같았지만 비석에 일월오봉도 문장이 새겨져 있는 훌륭한 비석이었다.
덴센지 주지스님은 최근 가나자와에 사는 한 독지가가 벤키치 기념관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다만 기념관이라고 해도 건물 한 칸이 전부지만, 흩어져 있던 벤키치의 유품이 꽤 많이 모였으며, 열렬한 벤키치 팬이라서 멀리서 온 손님이라면 틀림없이 반가워할 것이라고 했다.

사설 오노 벤키치 기념관 관장 다카라다 고로(宝田五郎)는 일흔이 넘은,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이었다. 그는 의사였지만 지금 병원 일은 대부분 아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좋아하는 연구를 마음껏 하고 있다고 했다.
"벤키치의 역립 인형이 사람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당장 달려가서 보고 싶었어요."
다카라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응접실을 개조한 기념관 관장실의 방 전면에는 커다란 패널 세 장이 걸려 있었다. 모두 오래된 사진을 복제한 것으로, 표면에 얼룩과 벗겨짐이 눈에 띄었다. 그 양옆에는 유리 케이스가, 방 중앙에는 응접 세트가 놓여 있었다. 간혹 소문을 들은 애호가들이 관람하러 오면 다카라다 씨가 반갑게 맞이하며 차를 대접하기 위한 용도였다.
"그 주지스님께서 사설 기념관이라고 하셨나요?"
다카라다는 반쯤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기념관이라고 하는건 사실 부끄럽습니다. 유품도 적고, 벤키치에 대한 연구도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유리 케이스에 보관되어 있는 것은 다테에보시(立烏帽子)에 산바소(三番叟) 의상을 입은 산바소 인형이었다. 이 인형은 태엽 장치로 큰 원을 그리며 춤을 추면서 움직인다고 했다. 가라코가 고쇼차를 끌고 있는 가라코 인배대는 고쇼차 위에 잔을 올려놓으면 두 명의 가라코가 고쇼차를 끌고 간다고 했다. 그리고 유명한 차 나르는 인형 ...... 노시메(熨斗目)의 옷에 금란(金襴)의 하카마(袴)를 입고, 눈이 동그란 동자(童子)로, 양손에 큰 잔을 들고 있었다. 의상은 곳곳이 낡았지만, 얼굴에 칠한 호분(胡粉)에서 백 년이 넘는 세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얼마 전에도 대학 교수님이 오셨어요. 내부를 꼼꼼히 조사하고 돌아갔는데, 정교함에 혀를 내둘렀지요."
다카라다 씨는 자기 일인 양 좋아하며 말했다.
다카라다의 말에 따르면, 유물이 적다고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려면 한 번에 다 볼 수는 없을 정도라고 했다. 금속으로 만든 원경(遠鏡), 안경, 전기 텔레비전, 사진기, 자명종, 점화기, 라이터, 권총, 도자기 자동 분수대, 증기선 모형 ......
또한 벤키치는 유리 세공과 조각, 대나무 세공과 금속 가공 기술도 뛰어났다고 했다. 다양한 공예품들을 살펴보니, 카라쿠리는 엄청난 지식과 고도의 기술로 형성된 벤키치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순한 인형 제작자가 아니야. 소우지의 말이 떠올랐다.
"당시 이런 정교한 작품을 만들어낸 오노 벤키치라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마이코는 수많은 벤키치의 작품 앞에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그렇죠. 이토록 뛰어난 천재인데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첫째, 벤키치에 대해선 너무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어요. 비범한 학예를 가졌으면서도 평생 어느 번에서도 벼슬을 하지 않고 호쿠리쿠에 은거하다 죽은 기인(奇人)이니......."
"교토의 깃털 공예가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들은 적이 있어요"
"호오, 잘 아시는군요. 어렸을 때부터 시조류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더군요. 스무 살 무렵에는 나가사키에 건너가 서양화도 배웠다고 합니다. 벤키치에 대해서는 이시카와현 출신의 정치가 나가이 유타로(永井柳太郎)씨의 매우 흥미로운 연구가 있습니다. 연구를 통해 벤키치가 나가사키에 있었던 시기와 일본 서양학에 가장 큰 공헌을 남긴 시볼트 박사가 나가사키 데지마에 부임한 시기가 같다는 것을 알아냈지요. 여기서 벤키치와 시볼트가 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 증거는 찾을 수 없었지만요. 추측에 불과하지만 천문학에서 역법, 의학에서 항해술에 이르는 방대한 지식은 벤키치와 시볼트가 관계가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네요.
시볼트는 간첩혐의로 고발당했었고, 그 결과 네덜란드로 떠나 나가사키에서 모습을 감췄지요. 벤키치는 그 후 대마도, 조선으로 건너갔고요. 이 역시, 시볼트 사건의 여파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귀국 후에는 기이(紀伊)에서 기마술, 포술, 산술 등을 가르쳤습니다."
"벤키치가 오노에 살게 된 계기는요?"
마이코가 물었다.
"덴포 2년, 벤키치가 서른 살이었을 때입니다. 성곽 마을의 외곽에 있는 오노 마을은 교토에서 결혼한 아내 우타의 생가가 있는 곳이었어요. 그 후 메이지 3년, 69세의 나이로 병사할 때까지 벤키치는 이 땅을 떠나지 않았어요. 지금은 그 땅도, 바닷모래에 파묻혀서 집도 없어졌지만......"
그리고 다카라다 씨는 정면의 벽에 걸린 세 장의 패널을 가리켰다. 가운데 한 장이 오노 벤키치의 사진이었다.
큰 눈과 콧날, 뼈가 굵은 얼굴이었다. 개국론자로서의 강한 신념이 그 풍모에서 느껴졌다.
"오른쪽 사진은 벤키치의 아내 우타 씨입니다. 덴포 말기, 벤키치가 직접 만든 사진기로 촬영한 것이죠. 당시 사진은 기독교의 요술이라며 벤키치가 사진을 찍는 것을 다들 꺼려했죠. 부인도 많이 힘들었을거에요."
"벤키치는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취미도 있었군요."
"그래요. 깊은 지식과 정교한 기술, 그것만으로는 카라쿠리 인형을 만들 수 없죠.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꼭 필요하거든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번주가 벤키치에게 명령해 차를 나르는 인형을 만들게 했어요. 인형은 예의상 영주 앞에 차를 가져다 주었죠. 번주는 문득 부채로 인형의 머리를 두드려 보았어요. 그러자 인형은 두 눈을 번쩍 뜨고 갑자기 허리춤의 칼에 손을 얹어 자르려고 했습니다. 영주가 깜짝 놀라서 벤키치에게 물었더니, 벤키치는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인형에 미리 장치를 해 두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번주는 분명 요술이라고 생각했겠죠."
"이런 이야기라면 또 있습니다. 벤키치는 술장수 인형이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어느 술집 앞에서 톱니바퀴 소리가 들려서 보니 인형이 술병을 들고 걸어왔다고 합니다. 술장수는 인형이라며 술의 양을 줄였는데, 인형은 술장수의 마음을 알고 움직이지 않았어요. 술장수가 어쩔 수 없이 술의 양을 가득 채워 주자 인형은 돌아갔다고 하고요. 이 이야기는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어요. 인형은 술병이 일정한 무게가 되지 않으면 마개가 빠지지 않고, 기어가 움직이지 않도록 만들어졌을 거에요."
"원리는 차를 나르는 인형과 같다는 거군요"
"차를 나르는 인형에 대해서는 벤키치도 자필 설계도를 남겼는데, 원본은 제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사본을 보여드릴까요?"
다카라다 씨는 유리 케이스에서 한 권의 제본된 책을 꺼냈다. 제본된 표지에 '동시궁록(東視窮錄)'이라고 적혀 있었고, 내용 중 한 장에 정밀한 차 나르는 인형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내용은 자동 인형 뿐만이 아니었다. 시계, 사진기, 화학약품, 색유리 제조법부터 자동분수대 내부, 볼타식 파일 도해 등이 세세한 설명과 함께 빼곡히 적혀 있었다.
마이코는 그 한 장 한 장을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물론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키치의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정이 묘한 힘으로 다가왔다.
"이토록 학력과 창의력이 뛰어났있으니 벤키치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도 많았겠지요?"
마이코는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
"계속해서 벼슬길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벤키치입니다. 그래서 제자도 아주 적었어요. 불과 대여섯 명도 안 되는 제자 뿐이었지요, 카라쿠리는 요네하라 린하쿠에게, 의술은 다카라다 이스케에게 가르쳤어요. 다카라다 이스케가 제 증조부이십니다."
"그래서 벤키치의 유품을 많이 가지고 계신 거군요."
다카라다는 수염을 잡아당겼다.
"벤키치는 매독을 치료하는 비법을 알고 있었어요. 수은을 이용한 요법입니다. 벤키치는 은광 채굴에 종사한 적도 있거든요. 하지만 다카라다 이스케가 벤키치에게 가르침을 구한 기간은 극히 짧았어요. 가가번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지요. 즉, 기존의 집정관인 오쿠무라 히데미(奥村秀実)가 죽고 반대파가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젠고(銭五)씨가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죠."
"잠깐만요."
마이코는 학생처럼 손을 들어 다카라다의 말을 가로막았다.
"젠고 씨라고 하면 그 비극의 호상이라 불리는 제니야 고헤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요. 가가, 카네이시의 호상 제니야 고헤에. 카네이시는 이 오노의 바로 옆에 있습니다."
"그럼, 오노 벤키치와 제니야 고헤에는 친분이 있었나요?"
"그렇죠. 벤키치와 젠고 씨는 함께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을 정도였으니까요."
다카라다는 세 장의 사진 패널 중 왼쪽 사진을 가리켰다.
"저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 중 왼쪽에 있는 사람이 벤키치, 오른쪽에 있는 큰 사람이 젠고 씨예요."
토시오는 벤키치보다 더 큰 제니야 고헤에의 사진을 보았다. 다소 무뚝뚝해 보이기까지 하는, 정직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벤키치는 젠고 씨의 틀니를 만들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젠고 씨는 벤키치를 알면 알수록 깊은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고요. 특히 자신이 미국에서 구한 권총과 똑같은 것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합니다. 벤키치는 자신이 비밀리에 만든 지구본을 젠고에게 보여주기도 했어요. 벤키치는 젠고 씨이기 때문에 이런 물건을 보여준 것이겠지요. 실수로 지동설 따위를 입에 올리면 신변의 위협까지 받던 시대였으니까요. 지금도 벤키치가 만들어 젠고 씨에게 선물했다는 원안경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젠고 씨는 벤키치의 지식에 의존할 때가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니야 고헤에는 오노 벤키치의 후원자였다는 말씀이시군요?"
"그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 벤키치의 지식을 빌리면서 약간의 금품이 오갔겠지만, 벤키치는 젠고 씨의 비호하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벤키치의 가난을 본 젠고 씨는 쌀을 기부하겠다고 했지만, 벤키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젠고 씨는 거액의 재산을 모은 뒤에도 장작과 등잔 하나에도 신경을 쓰는 등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다고 합니다. 보통 거상이 되면 어처구니없는 유흥비, 쓸데없는 사치가 뒤따르기 마련인데, 그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인색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과단성 있는 결단을 상훈으로 삼고 있을 정도입니다. 한편 벤키치도 골방에 틀어박혀서 문제가 생기면 며칠 동안 물건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즐거움은 고양이와 원숭이를 키우는 것 정도였다고 하고요. 이런 두 사람의 성격에 뭔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죠?"
"제니야 고헤에는 밀무역으로 큰 부자가 되었다고 들었어요."
"네, 확실히 밀무역으로 재산을 모은 것도 사실입니다. 원래 젠고 씨의 집은 가나자와 항구도시 미야노코시(宮腰), 지금의 카네이시(金石)에서 환전상과 간장업을 하고 있었어요. 안에이 2년, 젠고 씨는 그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열일곱 살에 가독(家督)을 이었고요. 아버지 밑에서 평범하게 가업을 이어받아 평범하게 살아왔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크게 달라졌어요. 서른아홉 살 때였어요."
"서른 아홉이라고 하면 당시로서는 이미 한창 때는 진작에 지난 나이였을텐데..."
"그게 바로 젠고 씨의 비범한 점이죠. 그는 전당포에 있는 오래된 배를 개조해서 큰돈을 벌었어요. 당시에는 배를 새로 한 척 만들면 두 번의 항해로 원금을 회수할 수 있었다고 해요. 이를 계기로 젠고 씨는 해운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물론 해운업이 쉬운 일은 아니어서 해난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바다 위에는 해적선이 출몰했죠. 하지만 수익은 엄청났어요. 젠고 씨의 배는 홋카이도의 해산물과 비료를 도호쿠로 운반하고 도호쿠의 목재와 호쿠리쿠의 쌀을 간사이로 운반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간사이의 잡화를 싣는 등 운송 이익 외에도 많은 거래가 얽혀 있었죠. 상술에 능했던 젠고 씨는 순식간에 거액을 벌어들였습니다. 이 젠고 씨의 재산에 눈독을 들인 것이 가가번이었어요."
"제니야 고헤에는 번을 움직일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된 거군요"
"가가번에서는 젠고씨에게 자꾸만 돈을 바치라고 강요했어요. 평범한 상인이었다면 두말없이 거절했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젠고 씨는 그렇지 않았어요. 기꺼이 돈을 바쳤어요.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한다. 이것도 젠고씨의 상훈 중 하나였습니다. 공납금에 대한 보답으로 번의 물자 수송용 배를 한 척 맡을 수 있었고, 젠고 씨의 배는 곧바로 가가번의 공식 수송선이 되어 백만 석의 문장, 가가 매화 그릇을 염색한 깃발을 내걸고 항해하게 되었습니다. 가가번의 집정관은 오쿠무라 히데미(奥村秀実)였는데, 그와 손을 잡은 젠고 재벌은 흔들림 없이 성장해 나갔죠."
"제니야 고헤에의 재산은 어느 정도에 이르렀습니까?"
"네, 천석선이 열 척. 오백 석선이 열한 척. 오백석선이 십일척. 크고 작은 배를 합치면 이백 척의 선주였고, 전국에 서른네 개의 지점이 있었습니다. 추정 자산은 삼백만 양이라고 하는데요."
"삼백만 양--"
"그렇다고 해도 감이 잡히지 않겠지요.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수백억을 훨씬 넘을 겁니다."
"수백억!"
마이코가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불과 3억 엔의 강도 사건이 시효가 지나기 전까지 일본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기억도 새롭다.
"젠고 씨는 오쿠무라 히데미와 함께 밀무역도 하고 있었습니다. 가깝게는 다케시마를 중심으로 한 조선 근해 무역, 카라우타의 산탄(山丹) 무역, 사쓰난(薩南)열도에서는 대영국 무역, 북해에서는 대러시아 무역. 멀리 북아메리카에서 남쪽으로 태즈메이니아까지 그의 발길이 닿았다고 합니다. 그 이면에는 벤키치의 원양 항해술, 천문학, 어학에 대한 조력이 있었을테고요. 또한, 젠고 씨는 다양한 과학 기계를 밀수입해 벤키치에게 사용법을 배웠을 겁니다. 덕분에 벤키치도 몰랐던 희귀한 물건에 대한 지식이 더욱 풍부해졌을테고요."
"여러 가지 과학 기계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마이코는 두 사람이 나란히 있는 패널 사진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성장해나가던 젠고 재벌은 정말 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봉건제 하의 재력은 정치적으로는 정말 무력했음을 일깨워주는 사건이었죠 ......"
다카라다는 수염을 몇 번이고 빗어 넘기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덴포 14년, 젠고와 함께 번영했던 가가번의 중신 오쿠무라 히데미(奥村秀実)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젠고 씨는 71세였어요. 지금의 저와 같은 나이였죠."
다카라다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제니야 고헤에와 자신의 나이를 비교했다.
"당시 가가번에는 반대파가 세력을 키우고 있었어요. '검은 하오리당'이라고 해서 검은색 옷을 입고 다니고 있었죠. 이런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통일된 유니폼을 입고 싶어 하는 모양입니다. 하여튼, 오쿠무라 히데미 사망 후 검은 하오리당의 쿠데타가 성공했어요. 검은 하오리당이 정권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젠고씨의 번(藩) 공식 상인 지위를 박탈한 거였어요."
"제니야 고헤에는 번 재정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을텐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젠고 씨는 어디까지나 상인일 뿐이었으니, 시키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젠고씨가 좌절했던건 아니었습니다. 이 다음에 정말 원대한 계획을 세우거든요. 그 유명한 하북 매립공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둘레가 26km, 약 2천6백 헥타르나 되는 곳을 20년 계획으로 매립해서 논을 만들겠다는 거죠. 이 공사가 완료되면 가가 백만석에 수만 석이 더 추가될 것이었어요."
"일흔일곱 살에 20년 계획이라니…… 정말 이 사람의 깊이를 알 수 없군요."
"공사는 가에이 4년에 착공했는데, 이게 정말 어려운 공사였어요. 게다가 매립으로 인해 생계가 끊어질 것을 우려한 어민들의 격렬한 방해가 있었습니다. 젠고씨의 가훈 세 번째는 '세인의 믿음을 얻아야 한다’였는데, 이 때 세인의 믿음을 얻는데 실패했던 것이지요. 과거 천보 대기근 때에도 쌀 수탈과 타 지역 유출을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던 적이 있었는데, 매립 공사 시기에는 현지 노동력보다 임금이 싼 이주 노동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반감이 더욱 심해져 공사가 더디게 진행되었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북 투독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독극물 투척 사건이라니, 하북에 독극물을 투척한 건가요?"
"네, 하북의 물고기만 죽으면 어민들의 반대 운동도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에 셋째 아들 요가 독극물을 투척했다는 것입니다. 요가 석회에 냄새나는 물인 쿠사미즈, 기생충인 고나무시의 기름 등을 섞은 것을 몰래 하북에 투입했다고 했지요. 그 결과, 붕어, 고니 등이 죽어 떠올랐고, 이를 먹은 가마우지, 비둘기, 까마귀, 고양이와 개가 죽었고, 결국 인명 피해로 이어졌습니다. 물고기를 먹은 십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어요. 가에이 5년, 젠고씨 가문에 대한 체포가 시작되었습니다. 고헤에 일가와 공사 관계자를 합해 51명이 감옥에 갇혔죠."
"하북에 독극물을 던지는 그런 무모한 일이 정말 있었습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역사학자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하북은 원래 수질이 좋지 않은 곳입니다. 수초가 너무 많이 번식하면 물이 썩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고요."
"그런데 왜 고헤에가 체포된 거죠?"
"가가번은 위험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젠고 씨를 마음껏 이용해, 말하자면 번 전체가 밀무역을 하고 있었죠. 그 밀무역이 막부의 의심을 받을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만약 그것이 표면화되어 막부의 추궁을 받게 되면 번 존폐와도 관련된 사건이 될 테니까요. 번은 밀무역의 죄를 젠고 씨 한 명에게만 뒤집어씌워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것이지요. 마침 그 때 하북의 집단 중독 사망 사건이 발생했고, 젠고 씨는 번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 희생양이 된 겁니다."
"매립 공사는 중단되었고요."
"물론 그렇죠. 대체로 간척이라는 공사는 어려운 사업입니다. 같은 시기에 막부는 인바누마(印旛沼)의 간척에 착수했지만 이것도 실패했어요. 세 번째 실패였습니다.…….. 한편 막부에서는 젠고 씨의 밀무역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알고 있었지만 묵인하고 있었죠. 막부 내부에서도 대외무역을 시작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고 있는 시대였으니까요. 대정봉환이 눈앞에 다가왔고요. 일일이 밀무역을 감시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겁니다. 역사의 흐름은 이미 거기까지 왔던 거죠."
"번에게 시대를 판단할 힘이 없었던 거군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그래도 당시 상업 자본은 정치적으로 무력했습니다. 오사카의 요도야 다쓰고로(淀屋辰五郎), 하마다번의 아이즈야하치(会津屋八) 우에몬(右衛門)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사건의 결말은?"
"제니야 고헤에는 체포된 지 석 달째 되는 날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젠고는 80세였어요. 요와 그 형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지금도 십자가의 소나무라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제니야의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고요. 이것이 젠고 재벌의 마지막이 되었죠. 벤키치가 51세 때였습니다."
다카라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노 벤키치는 어떻게 되었나요?"
잠시 후 마이코가 물었다.
"좋은 지인을 잃은 외로움은 누구보다 컸을겁니다. 사람을 피하는 성격은 점점 더 강해져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대로 일개 촌부로서 일생을 마감했어요. 한편, 카라쿠리 기우에몬의 다나카 히사시는 젠고 씨가 투옥된 해에 교토에 기공당(技巧堂)이라는 가게를 열었죠. 이후 차근차근 키워나가 마침내 긴자에 다나카 제조소를 개업했고요. 그게 오늘날 도시바의 기틀이 된 겁니다. 같은 천재였지만, 인간의 일생은 정말 명암이 엇갈리는 법이에요. 이것은 그저 운의 좋고 나쁨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요. 츠루슈일록(鶴寿日録)에 따르면........"
다카라다의 장탄식을 멍하니 듣고 있던 마이코가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츠루슈..…"
"츠루슈 일록. 아까 말씀 안 드렸나요?...."
"처음 듣는 말이에요. 그 츠루슈일록이라는 건?
"벤키치의 일기의 일부가 남아 있어요. 그걸 츠루슈일록이라고 합니다."
"왜 츠루슈인가요?"
"벤기치 씨의 호가 츠루슈였거든요. 또 이치토(一東)라는 호도 사용한 적이 있어요 ......"
"츠루슈에, 이치토 ......"
오노 벤키치와 오나와에 이주한 마와리 사쿠조와의 인연은 이미 분명한 것 같다. 사쿠조는 자신의 가게 이름을 '鶴寿堂(쓰루슈도)'라고 짓고 자신의 아들을 '東吉(도키치)'라고 불렀다. 이것은 우연도, 암시도 아니다.
"오노 벤키치의 제자 중에 마와리 사쿠조라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마이코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벤키치의 제자는 극소수에 불과한데, 마와리 사쿠조 ...... 라는 사람은 기억이 나지 않네요."
"그 츠루슈일록은 벤키치의 일생을 기록한 일기인가요?"
"아뇨. 아까 말씀드렸던, 오쿠무라 히데미 씨가 병사했던 해인 덴포 14년의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원래는 벤키치의 유언대로 사후에 소각되었는데, 이 기록만 우연히 남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건 볼 수 있나요?"
"복사한 것이라면 거기에 있습니다."
츠루슈일록은 '동시궁록(東視窮錄)'이 들어있던 같은 유리 케이스 안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다카라다는 츠루슈일록의 사본을 꺼내 마이코 앞에 놓았다.
츠루슈일록은 '동시궁록'과 같은 정갈한 서체로 세밀하게 쓰여져 있었다. 일상 기록이라 길지 않았다.

3일, 맑음 저녁에 복어국을 먹다
4일, 흐림. 베지 못하는 말 도면 그리기. 우타가 통풍을 일으켰다.
5일, 비, 도면 그리기를 계속.
6일, 비, 카네이시로 감. 회의 후 심사숙고 끝에 승인을 미룸.
7일, 맑음, 하루 종일 고민하다.
8일, 맑음, 도면은 진전이 없다.
9일, 맑음, 久右衛門(구우에몬)이 모리타치노치토세(森八の千歳, 일본 전통 과자)를 가져옴. 久右衛門(구우에몬)에게 일을 맡기고 계속 도면을 그리다.
10일, 맑음, 우타가 역립인형의 의상을 만듬.
11일, 맑음, 도면 그리기를 계속하다…..

마이코는 열심히 츠루슈일록을 읽어 내려갔다. 다카라다 노인은 다른 방에서 다도 도구를 가져왔다.
"이 일록의 앞부분에 '무자마(無斬馬)'라고 되어 있는데, 무자마(無斬馬)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마이코는 다카라다 노인이 가져온 차를 마시며 물었다.
"베이지 않은 말이란, 오래된 장난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카라다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실물은 남아있지 않겠군요."
"네, 아쉽게도 실물은 남아있지 않아요. 하지만 어떤 장난감이었는지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벤키치가 읽은 것으로 추정되는 서양 서적에 그 장난감이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죠. 베이지 않는 말이란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이 만들었다는, 베어도 목이 다시 연결되는 목을 가진 말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되네요."
"베어도 떨어지지 않는 목?"
"이 말은 금속으로 만들어졌어요. 포도주 잔을 대면 안의 술을 다 마시죠. 장치는 놀라울 정도로 간단해요. 그냥 말의 중앙에 있는 관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말에게 술을 마시게 한 겁니다. 그 후 날카로운 칼로 말의 목을 베는데, 칼은 말의 목을 완전히 관통해 아래로 통과합니다. 그러나 베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목은 제대로 몸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잔을 대면, 말은 다시 포도주를 다 마시고요."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면 2천 년 전이겠군요."
마이코는 놀란 듯 말했다.
"헤론은 증기기관, 압착기, 압착 펌프, 사이펀의 원리를 발견한 사람으로 유명하죠. 동시에 많은 장치도 만들어 냈어요. 제단의 불로 춤추는 신상, 흐르는 물로 우는 새, 동전을 넣으면 일정한 성수가 흐르는 그릇, 이런 것들은 지금의 자판기의 원조겠지요."
"그럼, 베어도 떨어지지 않는 말의 목의 장치는 뭐죠?"
"원래 말의 목에는 잘리는 절삭점이 있어요, 말의 목은 세 개의 고리로 연결됩니다. 칼이 첫 번째 고리를 통과할 때, 첫 번째 고리는 칼이 지나갈 길을 만들지만 목은 두 번째, 세 번째 고리가 지탱합니다. 칼이 두 번째 고리를 통과할 때, 첫 번째 고리는 원래대로 제자리에 연결되고요. 이렇게 해서 칼이 완전히 목을 통과해도 목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밖에도 포도주가 지나가는 길의 개폐도 있어서 실제로 만들기는 아주 어려운 장치였습니다. 벤키치는 그 장치 제작에 도전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기록에 따르면 벤키치는 구우에몬이라는 사람과 자주 만났는데, 어떤 사람인가요?"
"그건 예전에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다카라다는 잠시 천장을 쳐다보았다.
".......스즈키 구스에몬, 마에다 도사마모루(前田土佐守)의 직행(直行) 가신으로 30석 봉록 무사였습니다. 당시 30살을 갓 넘겼을 것입니다. 벤키치의 몇 안 되는 제자 중 한 명입니다. 벤키치는 직행의 대우를 받았고, 그의 중재로 출입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즈키 구스에몬은 벤키치의 학문을 완전히 계승하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배우는 도중에, 봉록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죠."
"가가번의 개혁 때문이었나요?"
"아니요, 오쿠무라 히데미가 죽기 전입니다. 시녀에게 손을 댔다는 이유로 번에서 쫓겨났죠."
"그래서 구우에몬은 어디로 갔습니까?"
"거기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다른 몰락 무사와 비슷한 길을 갔겠지요."
마이코는 아쉬운 듯 츠루슈일록을 덮었다.
"그런데 최근에 벤키치에 대해 조사하러 이 사람들이 오지 않았습니까?"
마이코는 가방에서 사진을 꺼냈다. 토모히로와 마사오가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다.
"어?"
다카라다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진을 보더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군요. 요즘은 옛날로 갈수록 기억이 점점 더 선명해지는데, 가까운 일이라면 어제의 일도 잘 떠올릴 수 없어요. 만난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그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니요, 그 사람들로부터 최근에 오노 벤키치 이야기를 들어서, 혹시나 해서 여쭈어 보았을 뿐입니다."
"기억이 나지 않네요. 물론 당신 같은 미인을 만나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요."
다카라다 노인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노인의 틀니가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오노 벤키치 기념관을 나와서 젠고 유품관으로 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유품관은 리모델링을 위해 휴관 중이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 정도만 알아도 충분하겠지."
마이코는 그리 아쉽지 않은 듯 말했다.
에그는 젠고 유품관을 나오자마자 고베의 보금자리인 혼류사 앞을 지나 그대로 해안으로 향했다.
마이코는 차를 세우고 쏟아지는 진눈깨비 길에 섰다. 검게 드리워진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제니야 고헤에의 동상이 거칠어지기 시작한 일본해를 응시하고 있었다.
고헤에는 손에 원안경을 들고 있다. 오노 벤키치가 최신의 지식과 뛰어난 기술로 만든 원안경일 것이다.
다카라다 노인은 두 사람을 이웃집 아저씨처럼 젠고 씨, 벤키치라고 불렀다.
고헤에가 팔십, 죽음을 앞두었을 때 그의 가슴 속에 떠오른 것은 무엇이었을까.
토시오는 격렬한 파도소리를 들었다. 

2023/05/06

무관의 국보 - 배한철 : 별점 2.5점

무관의 국보 - 6점
배한철 지음/매일경제신문사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의미있고 빼어난 문화 유산을 소개해 주는 책.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 않아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유물들을 도판과 함께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총 8부 35편 구성 중 4부까지가 '국보급이지만 국보로 지정되지 않아 잘 알려지지 않은 유물' 정의에 가깝습니다. 소개하는 글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석굴암을 경성으로 옮겨오려다 실패한 데라우치가 대신 가져왔던 삼릉곡 석조약사여래좌상은 '석굴암 대신' 이라는 말이 잘 어울릴 정도로 그 완성도가 빼어납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개관했던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진열품으로 활용하려고 가져왔던 서산 보원사 철조여래좌상은 크기면에서 압도하는 측면이 강하고요. 겸재 화첩도 걸작이지만 임대 형식으로 들여온거라 국보 지정이 불가할 뿐입니다. 통일 신라 시대의 철조여래좌상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재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로 예술적 성취가 높은 유물이며, 반쯤 걸터앉은 자세인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지금 보아도 자연스럽다 싶은 자세가 아주 매력적입니다.
또 김명국의 달마도가 아직 국보나 보물이 아니라는건 신기했습니다. 김명국이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그려주었던 그림이라는건 처음 알았네요. 국립중앙박물관이 구입해 소장하고 있는게 다행입니다. 여튼 완성도, 지명도 뭐 하나 빠질데가 없고, 당대 제일가는 화가의 대표작이라는 점에서, 심지어 그의 작품은 현재 30점도 채 남지 않았다니 희소성마저도 있어서 국보로 선정되어도 손색이 없어 보이는데 왜 국보나 보물이 아닌지 모르겠네요.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과서에 흔히 실렸던 조선 전기 회화의 걸작이자 중국 명대 초가 화풍이 수용되는 과정을 알려주기도 하는 등 역사적 의미도 큰데 말이죠.
이런걸 보면, 국보 선정 기준이 뭘까? 궁금해집니다. 역사적 가치와 예술적 완성도 모두를 따지는 것인지, 다른 의미도 있어야하는건지 잘 모르겠네요. 아직 복원이 되지 않아 국보가 아닌 석불, 우리 소유가 아니라서 국보가 아닌 유물이야 그렇다 쳐도, 이 책에 소개된 많은 유뮬들은 충분히 국보로서 자격이 있어 보였습니다.

이런 멋진 유물 소개와 더불어, 유물과 관련된 이런저런 정보를 알려주는 부분도 재미있었습니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소개하며, '비로봉'이라는 지명은 비로자나불에서 유래했다는 정보에서 시작하여 부처의 종류에 대해 설명해주는 식으로요. 비로자나는 태양이라는 뜻의 범어 '바이로차나'의 음역으로 밀교의 부처이기도 합니다. 밀교에서 대일여래라고 부른다고 하네요. <<공작왕>>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비로자나불은 구분이 쉬운데, 그 자세 때문입니다. 다리는 가부좌, 수인은 두 손을 가슴까지 들어 왼손 검지를 오른 손이 감싸는 지권인 형태를 하고 있거든요. 오른손은 부처의 세계, 왼손은 중생계를 의미합니다. 


이 비로자나불은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의 영향으로 신라 하대 크게 유행했습니다. 사회적 불안이 커지며 지방 토착 호족 세력이 부상했는데, 그들이 '수행을 통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 교리에 반응하여 불교를 후원하며 불교의 탈중앙화가 급속도로 전개된 것이지요. 자기들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사상과 맞닿아 있었던 탓이겠죠?
<<지존의 삶. 절대 군주의 자취>>에서는 선조와 인조가 명필이었다며 어필을 중점적으로 소개해주고 있는데, 명필들은 정치적으로는 영 아니었다는게 재미있네요. 하긴, 이완용도 당대 명필이었다며, 글씨에 인품이 묻어난다는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철종 어필도 상당한 수준인데, 일자무식 강화도령은 아니었나 봅니다.

하지만 뒤로 갈 수록 딱히 인상적인 유물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화성능행도나 팔준도 등 여러 그림들이 특히 그랬습니다. 역사적 의미가 있을 수야 있겠지만 딱히 국보급 유물로 보이지는 않았거든요. 아래 팔준도 중 추풍오 그림을 한 번 보시죠. 재치있기는 한데, 솔직히 잘 그렸다는 말은 못 하겠습니다.... 


심사임당의 초충도 역시 유명세에 비하면 국보급이라 느껴지지 않았고요. <<음식디미방>>은 언급되는게 이상할 정도였습니다. 예술적인 것과는 거리가 머니까요.
그리고 도판 수록 순서가 뒤죽박죽이며 누락된 도판이 많다는 단점도 눈에 뜨입니다. 소개하고 있는 유물의 도판이 수록되어 있기는 한데, 현재 글 위치가 아니라 이전이나 다음 페이지에 수록된 경우가 잦습니다. 그리고 국보 지정 유물과 비교하는 내용이 많은데, 국보 유물의 도판 수록에는 인색해서 어떤 점이 비교되는지를 잘 이해할 수 없었어요. 세조 어진처럼 전체가 한 작품만을 설명하는 글이라면 문제없지만, 많은 유물들이 언급되고 또 비교되는 글에서는 문제가 큽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새롭게 알게 된 내용도 많고, 눈도 즐거운 독서였지만 제목과 주제에 걸맞는 유물들이 엄선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또 국보냐 아니냐가 그리 중요한 기준은 아니라는 생각도 드네요. 국보냐 아니냐보다는, 보다 명확하게 주제를 정하고 소개하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명작순례>>처럼 말이죠.

2023/03/25

삼성퇴의 청동문명 1, 2 - 웨난 / 심규호 : 별점 2점

삼성퇴의 청동문명 1 - 4점
웨난 지음, 심규호 외 옮김/일빛
삼성퇴의 청동문명 2 - 4점
웨난 지음, 심규호 외 옮김/일빛
중국 촉 지방에서 발견되어서 고대 문명 중 하나로 유명한 삼성퇴 문명의 발굴에 대한 이야기. 
고대 유물 발굴에 대한 괜찮은 논픽션을 많이 발표했던 웨난의 저작입니다. 제가 읽었었던 작가의 다른 논픽션들 모두 기본 이상은 했기에 이 책도 진작부터 읽고 싶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절판된 탓에 구하지 못하다가 얼마 전에서야 읽게 되었네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드리자면, 무척이나 실망스러웠습니다. 이유는 제 기대와 많이 달랐던 탓이에요. 제가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삼성퇴 문명이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나라에서 누가 이 유물들을 남기게 되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두 권 분량의 책에 가득 담겨있을 것으로 기대했지요. 화려한 도판은 물론이고요. 
그런데 정작 책에는 삼성퇴의 문명 발굴에 대한 에피소드만 넘쳐날 뿐입니다. 게다가 그 설명도 무척이나 장황합니다. 처음 삼성퇴에서 의미있는 유물을 발굴했다는 연도성의 일화만 보아도 그러해요. 연도성이 청나라 시기 지방 관직을 맡았지만 이후 민국이 되면서 자리를 잃었다는 설명이 3~4페이지 씩이나 길게 이어질 필요가 있을까요? 이런 설명보다는 실제 발굴이 진행되었던 삼성퇴 지역에 대한 상세한 지도와 도판이 추가되는게 훨씬 나았을겁니다. 연도성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뭐가 중요하단 말입니까. 
이후 연씨 일가가 보물을 하나씩 풀면서 그 정보가 학계에 알려지는 과정, 2차 대전과 문화혁명을 거친 뒤 삼성퇴에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벽돌 공장이 세워져 유적 일대가 훼손되지만, 학계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결국 1호갱, 2호갱이라는 두 차례의 큰 발굴 성과를 내는 이야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너무 길어요. 저는 삼성퇴 문명의 수수께끼가 궁금했을 뿐, 이런 발굴 이야기가 궁금했던건 아닙니다. 성과 현에서 출토된 유물 소유권을 둘러싸고 싸우는 이야기는 반복이 지나쳐서 짜증이 날 정도였고요. 
물론 이런 발굴에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재미가 없던건 아닙니다. 길지만 않았더라면 좋았을거에요. 그나마 한가지 웃겼던건 성 고고연구소에서 현과의 협상을 위해 진덕안을 보낼 때 두 청장이 삼국지 고사를 인용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제갈량의 출사표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진덕안을 파견하여 삼성퇴에 주둔하도록 했고, 현에서 변화가 있을 때 그가 나가서 단기필마로 응대한다, 그 뒤 우리와 같은 대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지원한다고 말하는데 이게 대체 뭔가 싶더라고요. 고고학 연구원들이라 이런 인용이 자연스러운건지, 아니면 중국인 특유의 허풍인지 감이 오지 않네요. 

이런 발굴 에피소드들 중심의 1권보다는 2권은 그래도 삼성퇴 문명에 대한 학술적인 설명이 많이 있어서 좀 낫기는 합니다. 
그런데 가장 현실적이고 이치에 맞는 이론을 엄선하여, 요약 설명해주는게 아니라, 여러가지 이론을 정제하지 않고 모두 수록하고 있어서 다소 복잡했습니다. 대충 제가 판단한 바로는, 고대 사천 지역에 여러 개의 부족 국가(마을)가 있었고, 이 마을의 왕들이 잠총, 백관, 어부, 두우, 개명 등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즉 파국이 고대 기록에서처럼 수도가 사방으로 천도했던게 아니라 애초에 나라가 여러개 있었던 겁니다. 시초라 할 수 있는 잠총 부족은 이유가 무엇이었건 중원에서 남하하여 나라를 만들게 된 것이고요. 이후 두우 시기에 초나라에서 도망쳐 온 별령이 치수 기술을 활용하여 민심을 장악한 뒤 스스로 왕이 되어 개명 왕조를 열었다고 합니다. 이 왕조는 춘추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진나라에 제압당하고 '촉군'이 되고 말았고요. 이후 청동기 문명이었던 촉도 철기 문명인 진나라에 융합된게 간략한 이 지역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삼성퇴의 1호갱, 2호갱에 보물들이 부장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단순 묘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근거는 갱내 기물이 모두 불에 탔다는 사실이죠. 하지만 화장한 왕의 유골이 없다는 점에서 화장묘라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재사갱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출토 유물이 모두 제사에 사용되는 기물이고, 불에 탔다는건 불을 이용한 제사에 사용되었다는 논리죠. 그런데 출토된 유물의 양이 너무 많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낮아요. 한 나라의 재력을 모두 모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유물들이라서, 제사에 한 번 쓰고 버리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삼성퇴 유적은 어부 왕조 당시 수도로 두우 왕의 공격으로 멸망할 때 마지막 제사를 벌이고 전멸한 흔적이다, 거대한 홍수 탓이었다는 등의 이론들이 발표되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전쟁으로 전멸하고 남은 유산이라는 설이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고대 국가에서 승리한 국가가 망한 국가의 신묘에 있는 제사용 보기들을 훼손하여 묻어버리는건 충분히 있음직했으리라 생각되거든요. 이 책에서도 이른바 '망국 보기 매장갱' 과 '상서롭지 못한 보기 매장갱' 이라는 해석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결론내리고 있고요. 
그리고 주요 출토 유물의 형태와 용도에 대한 설명, 다른 국가 유물들과의 관계 등에 대한 설명도 자세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래와 같은 특유의 안구 형태와 대담한 문양은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허나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나쁘지는 않은데 앞서 말씀드렸듯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는게 가장 큰 감점 요소입니다. 기이할 정도로 잡다한 주변 이야기가 많은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웨난의 다른 책들과 다르게 독자에게 그리 친절하지도 않고요. 2권 내용을 보다 결론 중심적으로 요약 정리하고, 1권 내용은 에피소드 중 중요한 것만 짧게 인용하는 식으로 분량을 조절했더라면 훨씬 나았을 겁니다.

2021/10/22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3 - 카토우 모토히로 / 학산문화사 : 별점 2.5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3 - 6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전통의 시리즈 43권입니다. 이번 권에는 네 편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으며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투명어"와 "치과"는 평균 이상은 되는 괜찮은 작품이지만 그닥이었던 두 편이 점수를 깎아먹은 탓입니다. 다음 권은 C.M.B 반지와 관련된 긴 호흡의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은데 기대 반, 우려 반입니다.

에피소드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앙숙"

신라는 다힐 교수의 부탁으로 이라크 쿠르드 자치구의 아시리아 유적 발굴 현장을 찾았다. 그 곳에서 만난건 예전부터 신라에게 경쟁의식을 불태우던 앙숙 무라트였다. 그런데 발굴 현장 텐트에 숨어든 사람이 있었다. 원치 않은 결혼을 피하고자 노력 중인 사루마였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체면이 손상될거라 생각했던 친척들이 그녀를 살해할 수도 있었다. 사루마는 프랑스 국적이 있었고, 신라 일행은 그녀의 프랑스로의 탈출을 도와주는데...

그닥이었던 첫 번째 이야기. 전개가 너무 뻔했습니다. 신라의 앙숙 무라트가 사루마 가족에게 그녀의 도주 계획을 털어 놓지만, 알고보니 거짓말로 사실은 사루마의 무사 탈출을 도왔다는건 누가 봐도 쉽게 눈치챌 수 있거든요. 눈에 잘 띄는 캐리어를 택시에 잘 보이게 싣고, 그 택시를 뒤쫓는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명예 살인이라고 해 봤자 동네 아저씨 한 명이 단도를 들고 설치는 정도라서 위기감이 느껴지지도 않았고요. 실제로 타츠키 혼자 간단히 제압하지요. 

앙숙이라는 무라트도 일방적으로 신라에 대한 질투심을 품는 동네 꼬마일 뿐입니다. 신라가 지닌 지식과는 상대도 될 수 없기에 대단한 대결을 펼치지도 못하지요. 앙숙이라는 설정은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았어요. 

CMB 특유의 현학적인 정보를 얻을 내용도 거의 없었습니다. 쿠르드 자치구, 아시리아 유적 발굴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명예 살인'이 핵심 소재였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추리적으로나, 재미면으로나, 얻을 수 있는 지식 측면으로나 뭐 하나 건질게 없는 졸작입니다.

"투명어" 

뉴욕 미술관에서 지구 온난화 경고 미술전이 열렸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를 거짓이라 생각한 사람의 협박이 이어지다가, 결국 미술관 학예원 토마스가 누군가에게 습격당해 중상을 입고 말았다. 범인이 어떻게 침입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이자 미술관 오너 에리는 친구 토마에게 소개받은 신라에게 사건 해결을 부탁하는데...

범인이 외부에서 정문까지 딱 하나 있는 길을 환한 조명과 감시 카메라에 들키지 않고 통과한 뒤, 2개의 전시실을 3명의 경비원들에게 들키지 않고 돌파하여 사무실까지 침입했던 방법은 '거울을 이용'했던 겁니다. 조명 아래 길에서는 거울 뒤에 숨어 이동했고, 전시실에 들어가서는 거울 뒷면의 검은 판을 이용하여 일종의 사각을 만들었던 거지요. 마술에 쓰임직한 트릭인데, 1회성으로는 쓸 수 있었을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미술관과도 잘 어울렸고요. 실제로 이런 거울을 옮기는 사람이 목격되더라도, 작품을 옮기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었을거라고 설명되고 있으니까요. 

전시되고 있는 '투명어'를 이용한 작품을 통해, 물고기의 특징으로 트릭을 설명하는 장면도 좋았습니다. 투명어보다는 일반 물고기가 더 잘 숨는 셈이다.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 적들에게서 숨기 위해 짙은 바다색과 비슷한 짙푸른 빛의 등을, 바다 밑에서 바라보는 적들에게서 숨기 위해 눈부신 태양과 같은 은빛 배를 가지고 있는 덕분이다는건데, 트릭에 정말 딱 맞아 떨어지는 설명이었습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도깊은 설명도 인상적입니다. 표현의 자유가 무엇이며, 왜 중요하고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를 쉽게 알려주고 있는 덕분입니다. 특히 표현의 자유에는 적절한 프로토콜이 필요하며, 이런 역할을 미술관, 박물관 등이 수행한다는 이야기가 와 닿더군요.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기도 했고요. 이 부분만 따로 떼어서 널리 소개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Q.E.D의 토마의 친구 '재난의 사나이' 알렌의 아내 에리가 등장하는건 오랜 팬으로서 반가웠던 부분이고요.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를 체포하여, 그의 족적을 확보하기까지 한 상황이었다면 신라의 도움이 필요했을지는 의문입니다. '거울을 현장에서 깼다'는 걸로 피해자 몸에 묻었을 거울 조각과 현장의 거울 조각, 그리고 용의자 신발에서 그 거울 조각을 채취하면 그가 범인이라는게 드러날 거라고 신라는 말하는데, 이건 트릭을 파헤치지 않아도 경찰 수사로 밝혀낼 수 있는 부분이잖아요? 수사를 통해 현장에 있었던 거울 조각을 알아낸 뒤, 여기서 트릭을 유추하는게 더 말이 되지요. 또 사람이 한 명 숨을 큰 거울을 현장에서 쉽게, 조용히 처리할 수 있었을까요? 작품 하나를 태운 정도로? 어림도 없어요. 이 부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억지스럽네요.

이렇게 문제가 없지는 않아 감점합니다. 그래도 얻을 수 있었던 지식의 가치가 높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치과" 

코즈에는 치과 진료를 받은 후, 병원을 나서다가 안개에 휩싸인 뒤, 진료받기 전 치과에 앉아있던 상태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타임 리프에 빠진걸 알아챈 그는 루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다른 대기 손님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다가 경찰에 체포되고, 안개에 휩싸이는걸 반복한 끝에 마지막 손님 신라에게 도움을 받게 되었다. 주변 환경에 단서가 있다는 신라의 말을 들은 뒤 코즈에는 차분히 주위를 관찰하여, 손님 중 한명인 여고생의 전화 착신음, 또 다른 손님인 꼬마 여자 아이 얼굴의 점, 치과 접수원의 이름, 치과에 놓인 곰 인형 등 모든게 전 여자친구와 관련이 있다는걸 깨닫는다.

전 여자 친구와 가슴 아프게 헤어졌던걸 뉘우치고, 다시 만나는게 루프에서 빠져나오는 열쇠였고, 방법은 예약 날짜를 바꾸는 것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원래 예약 날짜는 그녀의 생일이었기 때문이지요. 이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이런 저런 사소한 단서를 전 여자 친구와 관련이 있다며 드러내는 장면은 일상계 추리물 느낌이라 재미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낼 수도 있다는데 감탄했어요. '일상계 SF 로맨스'인 셈입니다. 점이 있던 꼬마 아이가 미래에서 온 코즈에와 여자 친구의 딸이었다는 에필로그도 사족 느낌이 들지 않게 잘 처리했고요.

그런데 이게 C.M.B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신라가 힌트를 주기는 하지만, 결국 코즈에가 혼자서 깊이 생각해도 알아낼 수 있는 단서들이었으니까요. 신라가 곰팡이 관련 책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정보를 주는 건 재미는 있었습니다만, 딱히 이야기와는 관계가 있어보이지는 않더군요. 오히려 C.M.B 시리즈에 억지로 집어 넣은 부분이 감점 요소가 아닐까 싶어요.

그래도 독특함과 재미, 신선함 모두 기대 이상이었던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이번 권의 베스트 에피소드로 꼽겠습니다.

"카메오 글라스" 

마우가 고대 로마 유물인 카메오 글라스를 사려다가 사기를 당했는데, 이를 도와주는 이야기로 카메오 글라스 케이스를 이용한 바꿔치기 트릭이 등장하는데, 현실성 높은 나쁘지 않은 트릭이에요. 뒤집힌 카메오 글라스 형태에서 착안했다는 이야기도 설득력 높고요.

하지만 마우 등장 이야기가 대부분 그렇듯, 그 외의 설정에서는 현실성을 찾기 어려서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C.M.B 반지를 회수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신라에게 전해 주기 위한 목적이 더 컸던 에피소드였다 생각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1/06/27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 배한철 : 별점 4점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 8점
배한철 지음/매일경제신문사

국보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풀어놓은 역사서입니다. 역사적인 가치와 담고 있는 의미는 물론 국보와 관련된 여러가지 일화들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것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우선 가야에 대한 설명입니다. 고 이병철 회장이 구입했던 고령 가야 금관이 도굴품이었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되는데, 12개국이나 되는 나라가 있었다. 우리가 흔히 부르듯 'OO가야'가 아니라 가락국, 가라국, 아라국과 같은 이름이었다. 임나는 실제로 존재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왔습니다.

문무왕릉비 설명도 재미있는 내용이 많습니다. 비에 따르면 신라 김씨 왕조는 흉노 왕손의 후예라는 것 처럼요. 비 외에도 거대 무덤, 북방 민족이 신성시하는 나무와 사슴뿔로 꾸며진 금관, 왕의 명칭이 '칸'과 비슷한 '마립간'이라는 등의 다른 근거들도 꽤나 그럴듯합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신라 무덤은 적석목곽분으로 평지에 목곽을 만들어 그 안에 관을 넣은 뒤봉분을 올리는데, 이게 바로 카자흐스탄 양식이랍니다. 동시기 고구려와 백제 무덤은 돌을 계단식으로 쌓아 올려 정상부에 시신을 안치하는 적석총인데 말이죠. 금관도 왕호가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뀔 때 등장하며, 아프카니스탄 북부 틸리야 테페 무덤 유물과도 흡사합니다. 또 이러한 거대 무덤과 금관은 왕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함으로, 후대 법률왕 무덤은 규모가 작은, 돌로 무덤방을 만든 횡혈식석실분이며 부장품들도 주로 투기류였다는 것을 통해 왕권이 강화되고 법치 체계가 확립되었다는걸 알 수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결말은 다소 뜬금없었습니다. 정말 북방에서 내려온 민족은 아니고, 단지 통치 이데올로기를 수용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데, 근거가 없어서 당황스러웠어요. 

화엄사 석탑 설명에서 소개되는 여러가지 국보 탑 소개도 재미있었고, 조선왕조실록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수차례 수정되었다는 내용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다양한 불상의 명칭과 뜻을 알려주는 부분도 좋습니다. 석가모니는 '샤카족 (인도 종족)의 성인' 이라는 의미, 비로자나불은 지혜와 진리의 부처를 부르는 칭호로 태양이라는 뜻의 범어 '바이로차나'의 음역이라는 것, 아미타불은 '무한한 수명의 것'이라는 범어 '아미타우스'에서 유래, 미륵은 석가모니 제자 중 한 명으로 사후 부처로 신격화 보살은 부처처럼 깨달았지만 중생 구제를 위해 부처가 되기를 거부한 존재라는 등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에밀레 종의 유명한 인신공양 설화는 일제 강점기 자료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되는데, 이는 조선 후기 유림 세력이 강했던 경주에서 불교를 폄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가공한 설화라는 주장도 그럴듯했어요.

그 외에 처음 알게 된 사실들도 많았습니다. 우선 관촉사 은진미륵이 이름처럼 미륵상이 아니라 관음상이라는데 놀랐습니다. 생긴 걸로는 영 믿어지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관촉사 관음전에는 관음보살상이 따로 없고, 법당 벽 창으로 야외 불상이 보이도록 만들었다는데, 다음에 관촉사에 가면 확인해봐야겠습니다. 

팔만대장경을 일본이 계속 노렸었고, 심지어 '구변국'이라는 가상의 국가를 사칭하면서까지 달라고 했다는 것도 몰랐던 사실입니다. 이 때 조선은 유교 국가라서 딱히 필요없다고 생각했던 태종과 세종 모두 주려고 했지만, 예조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는데 천만다행입니다. 

난중일기가 국보라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여기서 왜 난중일기가 국보인지에 대한 설명이 특히 와 닿았습니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쓴 귀중한 '기록 유산'으로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뿐 아니라 전략과 전술, 일반 백성 모습까지 고스란히 알 수 있기 때문이라네요. 누군가의 일기도 내용에 따라서는 국가 1급 문화재가 될 수 있다는 뜻인데, 저도 일기를 열심히 써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선조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이 단 한 줄도 없었다는 것도 눈에 뜨입니다. 과연 '충'무공이다 싶더군요. 

1968년과 70년, 중국에서 발굴되기 전까지 중국 한나라의 가장 중요했던 유물이 나온 곳이 우리나라였다는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1910년대, 일본 학자의 낙랑 고분군 발굴에서 수습된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인데, 손바닥만한 크기인데도 불구하고 디테일이 정말 엄청나더군요. 중요한 유물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러한 국보들의 입수, 보존 경위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진진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라면 간송 전형필 관련 일화를 빼 놓을 수 없는데, 그 중에서 특히 훈민정음 혜레본을 입수한 경위가 인상적이었어요.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지하 조직원이 활동 자금 마련을 위해 가보를 판 것이라고 하거든요. 이 항목에서 훈민정음은 오롯이 세종 혼자 만들었다는 사실을 여러가지 근거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도 나왔었던 승려 신미 창제설의 경우, 신미는 산스크리트어의 자음, 모음 설명에 그쳤다는 사료를 근거로 제시하는 식입니다. 훗날 문종이 된 세자와 정의 공주의 도움이 오히려 컸다는데, 특히 정의 공주 관련 사료들을 보면 공주는 정말 똑똑했었나 보더라고요. 신미보다는 정의 공주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나오는게 낫지 않았을까요?

이와는 반대인 문화재 훼손과 도난 등의 이야기도 눈여겨 볼 내용이 많았습니다. 훼손의 경우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억지로 복원해서 망가진 문화재들 이야기가 가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석굴암이야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고, 미륵사지 석탑을 콘크리트 떡칠을 해서 복원에 십 수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던가, 부석사 무량수전의 해체 복원 때 철물을 사용하여 건물을 망쳐놓았고 해체 시 자료도 남겨놓지 않았다는 내용은 화가 날 정도였어요. 물론 불국사 복원 같이 광복 후 복원도 엉망인건 사실입니다. 개발 독재 시대 성과 주의에 한국인들의 빨리빨리 습성이 결합된 아쉬운 결과물들이지요. 지금이라도 다시 잘 복원하기를 바랍니다. 제 생전에 제대로 복원된 유물을 볼 수 있도록요.

국보 도난 사건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은데 , 2019년 말 기준으로 도난 피해를 입은 국가지정문화재는 2,438점이었고 이 중 1,552점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니 놀랍습니다. 문화재 도둑들에게는 제발 천벌이 내리기를 바랍니다. 그나마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200명이나 되는 괴한을 동원하여 해체 후 도쿄로 빼내려던 다나카 미쓰아키의 계획이 실패했던 사건, 해방 후 미국에 국보급 백자를 팔아먹으려는 시도를 막아내었다는 국립박물관 미술과장 최순우의 활약 등은 다행이지만,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국내로 되찾아 올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 같은 일은 안타깝더군요. 이런 일은 다시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런 내용이 쉽고 재미있게 소개되고 있으며, 도판도 좋습니다. 단순한 국보 사진이야 인터넷으로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잘 정리되어 있긴 한데, 일제 강점기 등 오래전에 찍은 사진들이 많이 수록된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당시 문화재가 어떻게 방치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들이에요. 수학여행 때 첨성대를 둘러싸고, 올라거서 찍은 사진을 보면, 이래서야 도굴만 문제는 아니었겠구나 싶더군요.

책 초반부를 장식하는 무령왕릉 발굴과 유물에 대한 이야기, 반구대 암각화 관련 이야기, 백제 금동 대향로 이야기 등 다른 자료를 통해 많이 접했던 이야기가 제법 많다는건 조금 아쉬웠지만 재미와 가치, 두마리 토끼를 다 잡는 좋은 책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국보와 역사에 관심이 있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21/02/12

원숭이 신의 잃어버린 도시 - 더글러스 프레스턴 / 손성화 : 별점 3점

원숭이 신의 잃어버린 도시 - 6점
더글러스 프레스턴 지음, 손성화 옮김/나무의철학

오래전부터 온두라스 밀림 속에 숨겨져 있다고 알려진 '시우다드 블랑카', 즉 백색 도시라 불리는 유적발굴하는 과정을 그린 논픽션입니다. 정복자 코르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백색 도시가 실려있는 다양한 사료 소개에서 시작하여 20세기 초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탐험들부터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특히 미국의 대부호 헤이가 1930년대 미첼헤이스, 1935년 R.S 머레이, 1940년 모드를 고용하여 탐사를 벌였던 일련의 과정이 재미있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이 사기꾼이었고, 특히 모드는 유적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금광을 찾기 위해 탐험에 뛰어들었던 악질이라는 사실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대로 넘어와 본격적으로 잃어버린 도시 탐험이 시작됩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자율 주행 기술때문에 널리 알려진 '라이다' 기기를 활용했다는 점이었어요. 비행기에 실은 라이다 장치로 조사하려는 장소 스캔을 통해 GPS 정보까지 링크된 완벽한 3D 지도를 만들 수 있었고, 이 덕분에 실제 밀림을 뚫고 나가는 과정이 엄청나게 단축되었다는데 여러모로 놀라왔습니다. 과거 '인디아나 존스' 등으로 상징되는, 고고학자가 발로 뛰어들어 조금씩 유적의 실체를 벗기고 유물을 발굴한다는 것 자체가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거지요. 그래서 백색 도시 탐사 초반부의 어려움은 발로 뛰는 현지 조사가 아니라 온두라스 정부와 발굴 교섭을 하는 행정 절차였다고 하네요. 이 과정에서 온두라스 쿠테타로 인해 새로 정권을 잡은 대통령이, 백색 도시 발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후원했다는 언급도 신선했고요.

백색 도시 실체를 3D 지도로 확인한 뒤, T1 지구라고 부르는 현지 밀림 속으로 들어가 유적을 확인하는 과정은 어쩔 수 없는 인디아나 존스 스타일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전직 SAS 장교 출신으로 위험한 환경으로 들어가는 방송 관계자를 서포트하는 전문가들이 고용되고, 다양한 안전 장치를 거의 완벽하게 확보해서 그렇게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더군요. 세계에서 제일 위험한 독사를 만나고, 온갖 벌레들에게 습격당하는 묘사가 이어지기는 하지만, 실제로 현지 조사는 지팡이 없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프로젝트 리더 스티브 엘킨스가 직접 참여할 수 있었을 정도니까요. 제 생각에는 "정글의 법칙" 보다 조금 위험한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백색 도시에 대한 설명도 상세하며 이해하기 쉽게 잘 쓰여져 있습니다. 확실히 '내셔널 지오그래피' 소속 기자다운 느낌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중반부까지를 차지하는 백색 도시 탐험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저자가 책 서두에 던진 질문, 이 문화를 만든 이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문명을 일구었으며 어떻게 그렇게 깜쪽같이 깡그리 사라져 버렸는가? 에 대한 답이 설명되는 뒷 부분이 진짜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됩니다.

우선 이 문화를 만든 이들은 누구인가? 바로 모스키티아 주민들입니다. 원래 이 지역에 작은 부락을 만들며 서서히 세력을 키워가던 모스키티아 문명은, 수백 Km 떨어진 마야 도시 코판이 강성해지면서 영향을 받고 성장하게 됩니다. 426년 마야인 케트살마코가 코판을 장악했는데, 이 때 코판 지역 원주민들은 모스키티아 주민들과 동일 어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 당연히 영향을 받았겠지요.
그 뒤 코판과 모스키티아는 5세기 이후 각자 교류하며 발전해 나갔지만 코판에서 왕족들이 신성을 강조하며 거대 토목 사업을 벌이다가 기근이 닥치고, 신성이 무너져 주민들이 반기를 든 탓에 코판은 9세기경 붕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반대로 이때부터 모스키티아 문명은 더욱 발전하여 마야 스타일 도시를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도시 파괴 후 흩어졌던 코판 주민들 일부가 유입된 덕분이었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사람이 살기 힘들어 보이는 밀림에서도 복합 농경 사회를 일구며 발전한 모스키티아 문명도 1,500년 경 갑자기 몰락하고 맙니다. 그 이유를 저자는 서구 사회에서의 전염병 유입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백색 도시 제단에 남겨진 제물들 형태를 볼 때, 살아남은 주민들이 제물을 바치고 떠난게 분명합니다.

이들이 번성하는 도시를 그대로 놔 두고 도망쳐 버린 이유, 그리고 도시가 저주받았다는 전설이 널리 퍼진 이유는? 전염병이 그 이유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치에 맞습니다. 신세계에 콜럼버스와 선원들이 천연두, 홍역과 같은 전염병을 들불처럼 퍼트렸고, 이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던 신세계 주민들은 거의 90%가 죽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충분한 근거가 되고요. 코르테스가 단 500명의 군대로 아스텍 제국을 정복했던 것도 결국은 마찬가지로 전염병 덕분인 셈이니까요.
구세계 주민들은 전염병에 어느정도 내성이 있었는데 신세계 주민들은 속수무책이었는지도에 대한 저자 나름의 해석도 볼거리입니다. 구세계에서는 일찍이 온갖 가축을 키웠고, 밀집한 장소에 모여 살아서 병원균 침입 및 전파가 잦았고, 이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유전자를 물려주어서 유전 저항이 생길 수 있었지만, 신세계에서는 가축을 많이 키우지 않고 넓은 공간에 살아서 상대적으로 면역력을 키울 기회가 없었던 탓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꽤 그럴듯하지 않나요? "총, 균, 쇠"와 비슷한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무자비한 구세계 전염병의 습격을 저자가 온두라스에서 걸려온 풍토병 리슈아만편모충증과 연결하여, 우리는 분명 저주받았으며 이렇게 신세계에서 발생한 미지의 전염병이 우리를 습격하지 않을까라는 우려로 글을 끝맺는데, 최근의 코로나 사태와 어느정도 맥이 닿아 있는 부분이 있어서 꽤나 깊은 울림을 전해 줍니다. 앞으로 어떤 미지의 병원체가 인류를 습격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커지고 있는데, 남의 일이 아닌 셈이지요.

그러나 마지막 후일담은 씁쓸했습니다. 천연 밀림으로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았던 T1 지구가 온두라스 군대와 고고학자들이 머물며 파괴되어 가는 현재를 취재한 내용인데, 이렇게 사람 손 닿지 않은 비경이 훼손된 책임은 명백히 처음 도시를 찾아나선 전문가들에게 있으니까요. 때문에 그들은 저자처럼 훼손되는 숲을 보고 안타까와 하는게 아니라, 자연을 보호하고 원시림을 지키기 위해 행동에 나섰어야 했습니다. 그냥 발굴에 대한 명예만 얻고, 좋은 방송 콘텐츠 제작한걸로 끝내버리는 행동은 지극히 무책임해 보였어요. 하긴, 구세계 출신인 멤버들이 주도한 탐험과 발굴 자체가 문제이기도 합니다. 자기들이 퍼트린 질병으로 나라가 망했는데, 망한 나라를 숨겨진 도시라며 다시 찾아와 마지막으로 바친 제물을 끄집어 낸다? 부관참시와 같은 죽은 자를 죽어서까지 모욕하는 행위와 별로 다를게 없지요. 이래서야 발굴에 참여한 구세계 출신 멤버들이 안 좋은 운명을 맞게 되는건 당연해 보여요. 고고학이라는 학문 특성상 고인능욕(?)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그 나라 그 민족 후예들이 중심이 된 발굴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발굴과 조사도 무인 드론이나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무인 로봇개 등 무인 시스템을 활용하여 사람 손 닿지 않게 이루어지는게 바람직할테고요.

이렇게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는건 물론, 비교적 재미있고, 건질게 많았던 유익한 독서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온갖 벌레와 독뱀이 사방에 천지라 쉽게 갈 엄두를 내기는 힘든 곳이지만, 제 평생 한 번 정도는 중남미 고대 문명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네요. 언젠가 기회가 오면 좋겠습니다.

2020/12/25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 루스 렌들 / 홍성영 : 별점 3점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 6점
루스 렌들 지음, 홍성영 옮김/봄아필

루스 렌델이 쓴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중심의 단편집입니다. 수록된 대부분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무언가에 몰입, 집착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대상은 열쇠, 시계, 저택과 같은 사물도 있고, 여장이나 동물로 변장하는 등의 독특한 취미도 있지요. 주인공들은 결국 그 때문에 파국을 맞게 되는데, 파국을 맞는 장면이 마지막 몇 줄로 정리되는 반전 묘미가 빼어난 작품이 많습니다. 등골 서늘한 반전을 짤막한 문장으로 펼쳐보인다는 점에서 '기묘한 맛' 장르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정교하게 계획된 범죄가 등장하는 "휘파람 부는 남자"와 "늪지 저택, 펜 홀"은 등장 인물들 심리와 주변 배경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중심이기는 하지만, 잘 짜여진 추리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었고요.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시대에 조금 뒤처진 느낌도 들고, 반전도 뻔한 작품들이 많다는건 아쉽습니다. 대표적인게 표제작인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겠지요. "헤어가 살던 집", "아버지의 날" 등도 예상하기 쉬운 내용이었고요. 

하지만 뻔하더라도 독자를 몰입시키는 구성과 전개, 묘사가 빼어나서 한 번 읽어볼 가치는 충분합니다. 거장이 달리 거장이 아닌 거지요. 별점은 3점입니다.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남성 공포증이 있는 여자와 장난삼아 여장을 즐긴 남자가 겪는 파국을 그린 작품.

원제는 The New Girlfriend인데, 영화 때문에 제목이 바뀐걸가요? 여튼 여장한 데이빗을 진짜 여자로 생각하는 크리스틴의 심리 묘사가 볼거리였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데이빗이 크리스틴과 함께 하기(?) 위해 남자로 돌아오자, 그를 살해한다는 결말은 너무 뻔했습니다. 크리스틴이 남편 외 남성에 대해 갖는 혐오가 앞서서 상세하게 설명된 탓이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조금 찾아보니 영화는 기본 설정만 따왔을 뿐, 전혀 다른 이야기로 각색했더군요. 저는 영화 결말보다는 원작 결말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푸른 히아신스 향기" 

아내 캐서린이 불륜 뒤 임신하자 이혼하고 40년간 해외를 떠돌던 남자가 돌아왔다. 그는 다시 한 번 캐서린을 찾아 나섰고, 결국 그녀를 만났지만 그녀는 도망가버리고 말았다. 남자는 다시 그녀를 찾아가 총으로 쏴 죽였다. 그러나 그가 죽인건 알고보니 그녀의 딸이었다.

남자가 캐서린에게 집착하는 디테일한 심리 묘사가 일품입니다. 이를 통해 그녀에 대한 살의와 살인이라는 직접적 행위가 설명되고요. 죽인 여자가 캐서린이 아니라 그녀의 딸이었다는 반전 역시 대단했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과수원 울타리"

나는 공습을 피해 엘라 이모가 사는 인치필드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엘라 이모가 남편이 징집된 틈에 병가를 받고 돌아온 조종사 데니스 클리프턴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걸 알아챘다.
밤에 총 소리를 들은 어느 날 아침, 나는 나무에 매달린 허수아비를 데니스 클리프턴의 시체로 오인해 소동을 일으킨 뒤 런던으로 쫓겨났다. 엘라 이모도 아이를 낳다가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나는 그곳에서 머리에 산탄총을 맞은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이 작품도 '나'의 심리 묘사가 빼어난 작품입니다. 또 어린 시절 추억을 회고하면서 그려내는 영국 시골 풍경에 대한 묘사도 좋고요. 서정적인 분위기에서 불륜으로 긴장감을 싹 틔우고, 이를 목 매달린 시체 (허수아비)로 터트리는 전개도 거장답습니다.

그런데 에필로그처럼 그려진 마지막 반전은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발견된 유골은 데니스 클리프턴일겁니다. 그렇지만 데니스 클리프턴은 전시에 병가 중인 군인이었습니다. 그가 실종된게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었을까요? 마을 사람들 모두가 불륜을 알고 입을 맞췄다고 하더라도 전시라는 상황이면 문제가 되었을텐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헤어가 살던 집" 

살인 사건이 일어난 탓에 싸게 나온 집을 구입한 노먼은 아내 리타와 함께 이사왔다. 10여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계속 신경을 쓰던 노먼과 리타는 욕실 창문이 자꾸 열리는걸 가지고 다툼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리타를 거의 죽일 뻔 한 노먼은 다시 이사를 마음먹은 뒤, 헤어 사건이 알고보니 자기와 같이 욕실 창문이 열린 탓이라는걸 알게 되는데...

스트레스와 긴장이 쌓이면 사소한 일로 살의가 폭발하는 심리를 극단적으로 묘사한 작품입니다. 전형적인 일상 속 이야기처럼 그려내었다는게 특징입니다. 살의가 우리 삶에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를 잘 알려준다고 할 수 있네요. 일상 속 사소한 문제로 폭발한 살의라는 점에서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활자 잔혹극 (유니스의 비밀)"과도 비슷하고요.

하지만 전개와 결말은 다소 뻔했습니다. 별다른 반전도 없고요. 창문 문제가 살의를 촉발할 수 있다는걸 이웃은 알고 있던걸로 보이는데, 이웃에 대해서 반전 형식으로 풀어내었다면 어땠을까 싶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뇌물과 부패" 

니컬러스는 여자에게 홀려 자기 수준에 맞지 않는 레스토랑을 방문하여 엄청난 덤터기를 쓸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아버지를 해고했던 아버지 회사의 보스 소렌슨이 식사비를 대신 지불했다는걸 알게 되었다. 소렌슨이 아내가 아닌 젊은 여자와 함께 있는걸 목격했던 탓으로 여긴 니컬러스는 식사비를 돌려주기 위해 다음날 소렌슨을 찾아갔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니컬러스를 협박범, 그리고 바보 취급을 할 뿐이었다.

며칠 뒤, 소렌슨의 아내가 살해된 채 발견되고 소렌슨은 식당에서 그를 목격했던 니컬러스만이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수 있는 상황에 처하는데....

소심한 소시민이지만 자존심만큼은 갖춘 니컬러스가 펼치는, 자신을 무시했던 소렌슨에 대한 복수극입니다. 독자가 니컬러스에게 공감을 느낄 수 있도록, 니컬러스가 울분을 쌓아가는 과정을 차분히 그려낸 전개가 돋보입니다.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빌드업'이 완벽해요. 이러한 빌드업을 완성하는 마지막 니컬러스의 한 마디, "보지 못했습니다. 절대로요."가 작품의 백미고요. 소시민의 잔혹 복수극이자 일상계라는 독특한 작품의 정체성도 인상적입니다.

식당에서 소렌슨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조금은 작위적인 설정은 아쉽지만, 그 외에는 단점을 찾아보기 힘든 수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휘파람 부는 남자"

매뉴얼 밑에서 페인트 공으로 일하는 제레미는 영국인 불법 체류자이자 좀도둑으로, 일하던 중 모르는 집 열쇠를 줍게 되었다. 이 집을 털어서 인생 역전을 꿈꾼 제레미는 집 열쇠에 적힌 주소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집은 매뉴얼의 본가였고, 잽싸게 도망치던 제레미는 이 모든게 매뉴얼의 복수라는걸 깨닫게 되었다. 매뉴얼이 결혼할 여자인 루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게 들켰기 때문이었다...

허술해 보이는 쿠바 이민자가 영국인 좀도둑을 가지고 놀면서 제대로 복수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몇 줄로 드라마틱한 반전이 완성되는, 오 헨리 스타일의 반전물이기도 하고요. 반전을 통해 매뉴얼이 이상하게 돈이 많았다는 복선도 회수되지요. 

개인적으로는 호감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느낄 수 없는 영국인 제레미가 죗값을 치룬다는 권선징악적인 결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만큼 밉상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묘사력은 정말이지 부럽네요.

그런데 제레미가 집을 터는 동안, 제레미 짐 속에 마약을 숨긴 뒤 세관에서 걸리게 만든것 자체는 엄청난 복수이기는 합니다만 너무 복잡하고 거창한 복수가 아니었나 싶어요. 제레미가 집을 털 생각을 하지 않았거나, 집 주소를 알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고요. 물론 매뉴얼은 다른 복수를 준비했겠지만, 여러모로 손이 너무 많이 가는게 아닌가 싶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나팔꽃 시계" 

트릭시는 데본셔에 사는 친구 시빌에게 놀러갔다가 그곳 갤러리인 아티팩트에서 충동적으로 나팔꽃 시계를 훔쳤다. 시계는 그녀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안겨 주었고, 시계를 알아본 친구 미비마저 사고를 위장해 살해했다. 시계를 몰래 돌려 놓으려는 시도마저 실패하자 트릭시는 순간적 광기로 시계를 부숴버리는데....

특정 물건에 대한 충동적인 집착이 파국을 불러온다는 심리 드라마입니다. 주인공이 노인이며, 시계 때문에 그녀가 살인까지 저지르는 파국이 일상 속에서 전개되는 일상계 속성이라는 점을 주목할 만 합니다. 마지막에 쓰러진 트릭시가 "똑딱똑딱, 나팔꽃 시계 소리"라고 말하는 장면도 대단했어요. 그녀 정신이 붕괴했다는걸 이렇게 한 마디로 표현하는 솜씨는 그야말로 일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전개와 결말은 다소 뻔하다는 단점은 어쩔 수 없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늑대탈" 

'나'는 임박한 결혼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연극에 쓰는 늑대탈을 쓰면 자신을 잊을 수 있다는걸 알아챘다. 같은 취미를 숨기고 살던 어머니와 함께 하게 되자, 늑대탈을 쓰는 행위와 늑대가 될 때 야생으로 깊이 들어가던 행위는 점점 폭주하게 되었다. 마침내 약혼녀 모이라가 양가죽 외투를 입고 찾아온 날, 야생동물 두 마리가 양을 덮치고 만다....

두 마리의 야생 동물이 바닥에 쓰러진 양을 덮쳤다는 것이다. 는 마지막 문구는 섬뜩했습니다. 전형적인 '기묘한 맛' 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모이라를 먹은 건지도 살짝 궁금해지고요.

그러나 정신병자가 쓰는 글이라는걸 계속 알려주고, 늑대탈을 쓰면 늑대가 된다는 행동 묘사가 상세해서 반전의 묘미는 약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분명 어딘가에서 읽었던 작품이라 신선함도 부족했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늪지 저택, 펜 홀" 

프링글과 친구들은 아버지 친구 리던 씨가 사는 늪지 저택 펜 홀 근처로 캠핑 여행을 떠났다. 리던 씨는 저택 관리를 위해 모든걸 걸었지만 돈과 인력,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고, 리던 씨 아내 플로라는 저택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물건에만 집착했다. 때문에 저택 내부는 쓰레기장같아 보였다.
태풍이 불어 포퓰러 나무가 쓰러진 다음날, 나무 구덩이에서 오래된 유물이 발견되고 이를 좋아하는 플로라는 발굴에 나섰다. 그러나 리던 씨가 해체하던 쓰러진 나무가 구덩이로 떨어져 그녀는 깔려 죽고 마는데...

서로 다른걸 원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사고로 죽어버립니다. 당연히 남편이 사고처럼 위장해서 저지른 범행이고요. 이렇게 내용은 굉장히 뻔합니다. 하지만 이를 어린 아이인 프링글 시점에서 은근히 드러내는 묘사만큼은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해 줍니다. 직접적으로 죽이는걸 본건 아니지만, 여러가지 정황 증거들을 묘사하는 식이거든요. 

그리고 본 편 이야기보다도 오히려 늪지 저택 펜 홀과 숲에 대한 묘사가 훨씬 굉장하다고 느꼈습니다. 자작나무 줄기는 은색, 너도밤나무는 백랍색, 플라타너스는 회색과 노란색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도입부부터 독자를 사로잡는, 굉장히 상세하면서도 맛깔나는 묘사였어요. 작가의 필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아버지의 날" 

테디는 처제 가족과 그리스 섬으로 여행왔다. 처제의 남편 마이클은 아내 린다가 아이들과 함께 자신을 떠나는걸 두려워하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이클이 아내를 처치하고 아이들을 독차지한다는 이야기인데, 절벽에 떨어질뻔했던 테디와 아내 앤의 사고를 묘사하여 이어지는 사고와 연결시키는 전개는 너무 뻔했습니다. 수록작 중에서 가장 뻔한 이야기였달까요. 아이들과 헤어지기 싫지만 이혼이 만연한 세상에 두려워하는 마이클의 강박증 설정은 괜찮았지만, 테디 시점에서 묘사해서 그렇게 극적으로 묘사되지는 못한 것도 아쉽고요. 더 광적인 에너지가 느껴졌으면 했는데, 지금의 작품은 제 3자 입장에서 바라본 탓에 조금 무미건조한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케판다로 가는 초록길" 

나는 인기없는 판타지 소설을 쓰는 작가 아서 케스트렐과 친구였다. 그러나 그가 발표했던 15권에 달하는 '칼리나스 연대기'는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다. 아내 엘리자베스만 읽었을 뿐이었다. 아서는 어느날 '나'에게 런던 외곽선이 폐쇄되고 생긴 아름다운 산책로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엘리자베스와 함께 산책을 나섰지만, 그가 이야기한 풍경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서는 혹독한 비평이 신문에 실린 뒤 자살을 택했다. 바로 그 날, '나'는 알 수 없는 사명감에 아서를 찾아왔다가 귀가하던 중 아서가 이야기했던 산책로를 발견하는데...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가 다른 사람에게도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작가들이 꿈 꿔볼만한 일종의 판타지 작품. 장르 문학을 쓰는 작가에 대한 세간의 푸대접에 불만을 품고 쓴 글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아서가 만들어낸 산책로의 아름다운 묘사가 빼어납니다.

하지만 다른 수록작들과 비교할 때 극적 재미를 느끼기는 힘들었습니다. 특별한 반전도 없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20/05/10

깃털 도둑 - 커크 월리스 존슨 / 박선영 : 별점 3점

깃털 도둑 - 6점
커크 월리스 존슨 지음, 박선영 옮김/흐름출판

이라크 난민 재정착을 돕던 조정돤 커크 월리스 존슨은 휴가 차 뉴멕시코 북부에서 플라이 낚시를 즐기다가 놀라운 도난 사건 이야기를 듣게 된다. 2009년 6월, 미국인 에드윈 리스트가 플라이 제작용 희귀 깃털을 마련하기 위해 영국 트링 박물관의 희귀 조류 컬렉션 260점을 훔쳐낸 사건이었다.

트링 박물관의 희귀 조류 컬렉션 도난 사건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극락조로 대표되는 희귀 조류 탐사, 그리고 희귀 조류 깃털 시장에 대한 배경 설명으로 시작한 이후, 미국인 청년 에드윈 리스트 이야기와 저자 커크 월리스 존슨의 추적기를 나누어 소개해 줍니다.

에드윈 리스트 이야기에서는 한 미국 청년의 생애를 디테일하게 그려냅니다. 홈 스쿨링을 통해 이런저런 교육을 받은 영재로, 우연히 본 다큐멘터리 때문에 플라이 제작에 빠져들어 그 세계에서 유명해지는 과정이 첫 번째입니다. "플라이 타잉의 미래" 라고 불릴 정도였다니 말 다했지요. 그리고 희귀 깃털의 매력에 사로잡힌 나머지 박물관을 털어 조류 표본을 손에 넣은 후, 그것을 팔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까지의 과정이 두 번째입니다. 이 두 번째 부분이 핵심인데 한 편의 잘 짜여진 범죄 수사물을 읽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재미있었습니다. 트링 박물관의 허술한 방범 체제 덕분이기도 했지만, 박물관에서 가장 중요한 다윈이나 오듀본의 표본, 컬렉션이 아니라 평소에는 캐비닛에 보관되어 있는 "깃털이 화려한 조류 표본" 을 훔쳐낸 덕에 도난 사실이 늦게 발견되었으며, 때문에 동기도 파악이 어려워 체포까지 500여일이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그려지거든요. 소수의 매니아들에 의해서만 거액이 오가는 틈새 시장이라 일반인들은 쉽게 인지하지 못했다는(물론 에드윈이 의도한건 아니었습니다만) 기발함에 무릎을 쳤습니다. 도서관에 누군가 침입했지만, 가장 중요한 장서는 무사해서 마음을 놓았는데, 알고보니 도둑은 절판된 만화를 노린 것이었다는 상황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네요. 바로 얼마전 읽은 "머드맨"은 1, 2권 합쳐 10만원 정도에 중고 가격이 형성되어 있거든요. 물론 에드윈이 훔쳐낸 새 깃털은 훨씬 비싸긴 합니다만.

그러나 이후 에드윈이 아스퍼거 병 진단을 받아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조류 표본도 60여마리는 결국 회수하지 못했다는 후일담과, 바로 이어지는 커크 월리스 존슨의 추적기는 조금 실망스러웠습니다. 잃어버린 60여마리의 회수는 약간의 단서도 찾지 못한채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 과정에서 깃털을 추적하면서 만나는 플라이 타이어들의 뻔뻔함은 짜증만 불러 일으킵니다. 대체로 '박물관에서 캐비닛에 귀한 깃털을 처박아 놓느니, 그걸 유용하게 쓰는게 낫다' 라는 논리인데, 컬렉션을 만들고 보존하며, 다양한 연구를 수행한 과학자들의 노력을 폄하하는 몰상식한 발언인데다가, 최소한 이걸 훔쳐내어 영리 목적으로 활용하는 인간들이 할 말은 아닙니다. 이렇게 플라이 타이어들이 워낙 뻔뻔한 탓에 희귀 깃털 시장도 없애지 못한다는 현재는 더욱 씁쓸하고요. 에드윈에게 이용당한걸 알고 개과천선해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깃털만 사용하는 롱 응우옌같은 플라이 타이어가 많아지면 좋겠지만, 기대하기 힘들테니 이런 범죄도 아동 성범죄처럼 다루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깃털 뿐 아니라 희귀 동물에 대한 범죄 모두에 대해서 말이죠.

또 이런 명백한 절도 행각이 정신 감정 덕분에 집행유예를 받는건 황당했습니다. 에드윈은 범행을 오래전부터 계획했으며, 훔쳐낸 조류를 해체하여 값나가는 깃털을 이베이 등에서 팔아 거액을 손에 넣습니다. 계획된 범행에다가 충분한 영리 목적이 있었던거지요. 그러나 에드윈을 달랑 몇 시간 인터뷰한 전문가가 - 코미디언 사챠 배런 코언의 사촌이라는 - "돈이 목적이 아니었고, 사회적인 규범을 따르기 힘들어 법적인 면에서 취약한 상태였다"라며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도 판정했다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사회적 규범을 따르기 힘들면 더더욱 격리시켜야지 이게 뭐하자는 이야기랍니까?
게다가 사건을 수사했건 경찰과 박물관 모두 회수하지 못한 조류 컬렉션을 포기한 것도 까닭을 잘 모르겠습니다. "수사는 종결되었고, 그건 내 일이 아니다"라는 논리인데, 참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문제는 이게 깃털이 예쁜 새가 아니라, 정말 인류사에 중요한 유물이었어도 이 작자들은 이렇게 행동했을게 뻔해 보인다는 겁니다. 코로나 등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른바 선진국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는데, 이 역시 한 증거가 아닐까 싶네요.

이렇게 후반부는 에드윈의 범죄 행각을 다룬 전반부에 비하면 재미와 가치가 덜합니다. 그나마 후반부에서 흥미로왔던건 에드윈과의 인터뷰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놈도 정신 못 차리고 자기 변명과 비슷한 논리로 일관해서 화를 돋울 뿐이에요. 아스퍼거 증후군이 아님을 증명하는 행동들은 덤이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전반부는 압도적으로 재미있습니다. 잘 모르는 신기한 세계와 전대미문의 기묘한 범죄에 대해 알게 된 기쁨도 굉장히 컸고요. 전반부만 별점을 준다면 4점이상도 충분합니다. 후반부가 다 깍아 먹어서 문제지... 그래도 범죄 관련 논픽션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여, 책에서도 등장한 플라이타이 커뮤니티 소개해드립니다. http://www.classicflytying.com/ 입니다. 방문하시면 플라이타이가 무엇인지, 이해하실 수 있으실겁니다.

2020/04/24

초콜릿의 지구사 - 사라 모스, 알렉산더 바데녹 / 강수정 : 별점 2.5점

초콜릿의 지구사 - 6점
사라 모스.알렉산더 바데녹 지음, 강수정 옮김, 주영하 감수/휴머니스트

휴머니스트의 출판사에서 '식탁 위의 글로벌 히스토리'라는 주제로 간행하고 있는 'oo의 지구사' 시리즈 중 한 권. 모두 열 권의 시리즈가 출간되어 있습니다. 저도 소장용으로 모으고 있지요. 리뷰를 올리는 건 이 책으로 여섯 권 째네요.

전반적인 시리즈의 컨셉은 비슷합니다. 일단 해당되는 주제의 음식, 또는 재료를 어떻게 먹기 시작하였고, 그 뒤에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통사적으로 훝어봅니다. 그리고 그 음식이나 재료가 우리 식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미칠 것인지를 고찰하며 마무리 됩니다. 그 뒤에는 주영하가 저술한 해당 음식이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발전하였는지를 서술한 부록, 해당 음식과 재료로 만드는 요리 레시피가 수록되어 있고요. 음식, 재료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거의 비슷합니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분량을 할애하여 초콜릿의 재료인 카카오를 언제부터 어떻게 먹기 시작하였는지를 마야와 아즈텍에서 시작하여 스페인 정복 이후 유럽으로 전파되어 세계화 되는 과정을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거든요. 마야, 아즈텍 유물이라던가, 각종 문헌과 사료를 바탕으로 충실한 도판과 함께 설명해주기 때문에 설득력도 높고요. 이를 통해 처음에는 의학적 효과와 최음제 등의 용도로 쓰이다가,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얻게 된 이후 18세기 초에는 이미 현대의 핫 초콜릿과 비슷한 레시피가 등장하였으며, 18세기부터는 프랑스와 잉글랜드 아침 식사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으며 온갖 레시피가 쏟아져 나오는 등의 이야기가 재미있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 볼만 한 건 사드 후작과 초콜릿의 관계였습니다. 사드 후작이 감옥에서 초콜릿을 원한건 이게 계급을 상징하는 일종의 사치품이었기 때문이었다는 논리이지요.

이후 19세기 들어 기계화를 통한 대량 생산으로 비로서 초콜릿이 대중적인 기호품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 때 즈음부터는 과거의 사치품이 아니라 영양가 높고 저렴한 간식이자 음식이 된 거죠. 따뜻한 가정의 이미지와 일체화 되어서요. 현대에 접어들어서는 온갖 세계의 초콜릿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공정 무역, 서아프리카의 아동 노동과 강제 노동을 통한 카카오 산업의 어두운 부분과 같은 문제와 함께 여성성과 남성성, 쾌락 등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는 초콜릿의 상징성, 그 이미지에 대한 고찰을 끝으로 글은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다른 'OO의 지구사'와는 좀 다르게 각 시대별로 초콜릿이 무엇을 상징했는지?라는 '이미지'에 집중했다는게 눈에 뜨입니다. 아무래도 단순한 먹거리라기 보다는 기호품에 가깝기에 이렇게 접근했을텐데, 꽤 괜찮은 아이디어였습니다. 패션이나 시계, 쥬얼리나 와인과 유사한데, 초콜릿과 잘 어울린다 싶기도 하거든요. 시계도 쿼츠라는 기술이 탄생한 뒤, 일반화되었지만, 고급 명품 초콜릿 '그랑 크뤼' 처럼 기계식 시계 카테고리가 아직 건재한 것과 같은 이치지요. 다양한 마케팅으로 구축된 '이미지'가 산업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도 비슷하고요. 여러모로 생각할 점이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통사적인 측면에서는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너무 이미지 측면에 집착한 탓입니다. 그리고 제 컨디션 문제였을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잘 읽히지 않더라고요. 찬찬히 기회가 되면 다시 읽어봐야 되나 싶을 정도로 말이죠.
또 언제나 본 편 이상의 기쁨을 안겨다주었던 주영하의 부록도 이번에는 실망스러웠습니다. 한반도에서의 초콜릿 도입과 발전 및 '발렌타인 데이' 등 초콜릿으로 탄생한 문화 현상을 함께 다루기에는 10페이지를 갓 넘는 분량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좀 더 깊이있는 접근이 아쉽네요. 레시피도 이번에는 눈여겨 볼 만한게 없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초콜릿이라는 음식, 재료보다는 그 상징성과 이미지에 대한 고찰이라는 측면은 좋았지만 재미와 다른 부분의 가치는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2020/04/17

맥거크 탐정단 3 : 사형 선고를 받은 고양이 - 에드먼드 W.힐딕 / 신인수 : 별점 3점

맥거크 탐정단 3 : 사형 선고를 받은 고양이 - 6점
에드먼드 W. 힐딕 지음, 배중열 그림, 신인수 옮김/별별책방

맥거크 탐정단에게 이웃에 사는 윌리 형이 찾아왔다. 윌리가 키우는 고양이 위스커스가 이웃집 비둘기를 죽였다는 누명을 써서 동물 보호소로 보내질 위기에 빠졌기 때문이다.... 

오래전, 제가 초등학교 무렵 "매거크 탐정단"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리즈 중 하나였습니다. 아직도 본가에 몇 권의 유물이 남아있을 정도로 애지중지 아끼면서 읽었던 책들이었지요.
재 출간된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오래전 출간된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이자 엄청 좋아했던 일러스트가 모두 바뀐 탓에 별로 구입할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다시 읽기에는 제 나이도 너무 많으니까요.
그래도 점점 커 가는 딸 아이의 추리 소설 조기 교육을 위해 한 권 집어들게 되었네요. 시리즈 중에서 오래전에 읽지 못했던 책이기도 했고요.

책은 아동용 소설 답게 분량은 150 페이지도 안되고, 내용 전개도 쉽고 빠릅니다. 덕분에 완독하는데 한 시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네요. 그래도 추리적으로 동기, 단서, 복선 등 갖출 요소는 모두 다 갖추고 있습니다. 위스커스를 가둬 놓은 동안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나면 누명을 벗을 거라는 생각이라던가, 이 생각을 역 이용하는 계획과 같이 고도의 (?) 두뇌 싸움도 등장할 정도입니다. 

물론 어른들이라면 마틴 할아버지가 진범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긴 합니다. 비둘기와 고양이 모두를 싫어했고, 마침 위스커스를 숨겨놓은 창고에 대해서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어른이니까요. 하지만 이 정도라면 초등학교 3~4학년 까지의 아이들에게는 추리력을 시험해 볼 만한 좋은 도전거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되네요. 마지막에 마틴 할아버지의 자백을 이끌어내는 맥거크의 기지도 괜찮았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책입니다. 이전의 제가 사랑했던 일러스트는 아니지만, 컬러풀한 일러스트를 포함하여 책의 완성도도 아주 높은 편이거든요. 제 기준으로 별점을 주기는 애매한데, 어린아이의 시점으로 보면 내용도 재미있고, 그림도 예쁘니 별점 3점은 충분하지 않을까 싶네요. 딸아이가 조금만 더 크면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해줄 생각입니다. 재미있게 읽어준다면 좋겠는데....

2020/03/13

앙코르와트 - 후지하라 사다오 / 임경택 : 별점 2.5점

앙코르와트 - 6점
후지하라 사다오 지음, 임경택 옮김/동아시아

주석, 인용, 참고 문헌 포함하여 7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앙코르와트의 '발견', '발굴', 그리고 '연구와 관리' 에 대한 역사를 다루고 있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방대한 분량만큼 담고 있는 정보는 알찹니다. 책은 19세기 후반, 앙코르와트의 문물을 프랑스에 소개한 들라포르트의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그는 일종의 보물 탐사와 같은 느낌으로 유적의 문물을 반출한 인물입니다. 식민지의 주인인 프랑스가 유적을 보호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 약탈꾼에 불과하지만, 앙코르 유적의 미적 가치가 높다는걸 서구 사회에 알린 공적은 있습니다. 직접 쓴 저서와 삽화는 물론, 평면도 등을 바탕으로 유적의 조화로운 구조를 잘 알린 덕분이지요. 또 발굴되거나 발견된 조각을 가지고 상상하여 그가 그려낸 바이욘 사원의 복원도는 공상에 불과하지만, 당시 고고학 수준으로는 최고 수준의 연구였다는 점에서 노력만큼은 인정해 줄 만 해요. 만국 박람회에서 유적의 복제품을 전시하는 등 이 유적을 알리는데 온갖 수단과 방법을 전부 동원했다는 것도 그의 노력을 증명하는 사례이고요.

들라포르트 사후 소개되는 내용은 주로 '극동학원'의 활약상입니다. 앙코르 유적의 연구를 주도적으로 행한 단체로, 유적의 총 책임자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총독이 된 시기와도 일치합니다. 이는 프랑스가 고고학을 인도차이나 반도의 과거를 소생시키고, 중국과의 정치적 교섭에 활용하기 위해서 활용했기 대문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 지배할 때, 한반도와 중국 북부에 걸쳐 대규모의 고고학 조사를 진행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극동학원 초기 프랑스인의 태반은 고고학자도, 미술사가도, 학자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군인이나 관리와 건축가가 식민지 고고학에 매료되어 경력을 쌓아나갔다고 하는게 정확한 표현이라고 하네요. 이 뒤로부터 세데스, 골루베프 등 주요 인물들과 반테아이 스레이 유적 등에 대한 연구 결과 등 극동 학원에 관련된 대한 수백페이지 분량의 방대한 설명이 이어지며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 이후, 일본이 잠시 인도차이나 지역을 지배했을 때의 이야기가 짤막하게 이어지며 책은 마무리됩니다.

책에 따르면 극동학원의 연구는 묻혔던 유적을 새로이 발굴하고, 폐허를 보수하는 등 유적 보존 등에 나름 기여한 긍정적 결과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앙코르 유적에서 나온 유물을 관광객 등에게 공공연하게 판매하는 등의 도굴과 노략질을 일삼기도 했다는 점에서 도저히 좋은 평가를 할 수 없네요. 정치적 목적에 따른 상납이라던가, 일본과의 고미술품 교환을 통한 미술품 확보까지 행하였고, 심지어 유명 작가인 앙드레 말로조차도 1923년 23세의 나이로 인도차이나를 방문하여 유적에서 몰래 부조물을 잘라내어 밀반출하려다 실패했다는 일화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몰염치와 야만에 치가 떨릴 뿐입니다. 말로가 체포되어 재판에서 패소한 이유는 극동 학원의 독점적 지위를 훼손했기 때문일 뿐, 그 행위 자체가 비난받은건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죠. 이런 비판적인 시각을 조선 등을 식민지로 지배하여 비슷한 원죄가 있는 일본의 학자가 견지하여 책을 썼다는게 조금은 신기했습니다.

이렇게 발견과 발굴, 연구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쉽게 읽히는 편입니다. 들라포르트 이야기는 모험탐험 이야기와 별 다를게 없고, 연구를 거듭해가며 새로이 정체를 드러내는 앙코르 유적의 여러가지 정보들과 새롭게 발견된 멋진 유물들, 이들을 활용한 다양한 전시 등 볼거리가 많은 덕분이지요. 사료와 도판 역시 최고 수준이고요.

허나 제목만 보고 '앙코르와트'에 대한 역사서겠구나 싶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솔직히 기대와는 너무나 다른 책이었습니다. 저는 앙코르와트라는 유적 자체의 역사가 궁금해서 구입했지, 앙코르 유적의 연구사가 궁금해서 구입한건 아니란 말이죠. 35,000원에 육박하는 가격도 부담스럽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앙코르와트 연구사에 관심이 있으실 분들 외 저같이 앙코르와트 유적 자체에 관심 가지신 분들은 실망하실 가능성이 높다는 점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2020/01/05

명작 의자 유래 사전 - 니시카와 다카아키, 사카구치 와카코 / 박유미 : 별점 2.5점

명작 의자 유래 사전 - 6점
니시카와 다카아키 지음, 사카구치 와카코 그림, 박유미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역사 속 대표적인 의자 350가지를 선정한 뒤, 큰 판형을 잘 활용한 상세한 일러스트와 디자이너 정보와 함께 시대순, 지역별로 구분하여 소개하는 디자인 역사서입니다.

의자 디자인에 대한 책은 상당히 많은 편입니다. 의자가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제품 디자인'의 정수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이러한 의자 디자인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고 깊은지를 잘 알려주는데, 책에 따르면 의자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오늘날 의자의 형태가 이 때 거의 완성되었거든요.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자인 헤테프헤레스 1세의 황금 안락 의자, 그리고 좌석, 등판, 팔걸이, 4개의 다리, 하인방의 부재 (4개의 다리를 엮어 지탱하는 구조물)로 구성되어 오늘날의 의자 기본 구조와 거의 동일한 투탕카멘의 옥좌 등의 발굴로 증명되고요. 개인용 목제의자는 현대의 스툴 개념과 동일합니다.

그 다음은 현재 남아있는 유물은 없지만 그림으로 확인 가능한 고대 그리스의 의자 클리스모스, 고대 로마의 카데드라를 거쳐 중세 유럽으로 넘어가는데, 중세 유럽은 문화와 건축 양식에 따라 구분됩니다.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의 세가지 양식으로요.
이러한 문화와 양식 측면의 구분은 다음 시대인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등으로 이어지며 해당 시기마다 그 양식을 대표하는 의자들이 소개됩니다. 로코코부터는 나라별로 신고전주의 (루이 16세 양식), 퀸 앤 양식 (영국 앤 여왕 제위 시대 양식) 등으로 더 상세하게 구분한게 특징입니다. 이 때부터 특정 문화와 양식에 종속되어 유행을 따라가지 않은 디자이너 - 대표적으로는 영국의 가구 디자이너 토마스 치펀데일 - 가 등장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이 뒤는 특이하게 특정 '의자'의 소개로 넘어갑니다. 영국의 윈저 체어, 미국의 셰이커 체어, 토넷의 곡목 의자입니다. 한 시대를 거의 평정하다시피하며, 지금도 사랑받는, 일종의 '양식'과 '형태'를 만든 명작 의자들이기 때문입니다.

19세기부터는 다시 양식으로 구분되는데 영국의 미술 공예 운동, 아르누보와 20세기 전반 모던 양식 등으로 이어지고, 20세기부터는 현대 의자라고 해도 무방한 의자들과 유명 디자이너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친숙한 이름이 많아서 반가운데,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매킨토시와 힐 하우스 래더백 체어, 해릿 토마스 릿펠트의 레드&블루 체어,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바르셀로나 체어, 르 코르뷔지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야콥센의 스완 체어와 더 에그 체어, 베르너 팬톤의 팬톤 체어, 핀란드의 영웅 알바르 알토와 그의 의자들, 미국의 천재 찰스 임스와 그의 의자들, 그리고 현대의 아론 체어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20세기부터의 소개는 조금 아쉽습니다. 19세기까지의 소개는 크게 특정 시기를 묶어서 의자의 발전사를 시대순으로 확실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었었는데, 그냥 유명한 의자들을 닥치는대로 소개한 것에 지나지 않는 탓입니다. 책의 소개만으로 특정 양식이나 흐름 등을 알아차리기는 힘들어요. 이렇게 나열식으로 의자와 디자이너를 소개하면, 이전에 읽었던 "세상을 바꾼 50가지 의자"와 같은 책과 다를 바가 없잖아요? 아니, 흑백 일러스트로 소개해 준다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더 못합니다. 큰 판형을 살리지도 못하고 대부분 작은 사이즈로 소개되고 있기도 하니까요.
뒤에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형태, 계통도로 정리해 놓기는 했는데 실제 본문과 연결해 보기는 어려운 만큼, 차라리 이 형태와 계통도를 맨 앞에 목차처럼 수록하고, 의자들의 소개도 계통도대로 명확하게 소개해주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제목 그대로 '유래'에 대해 알 수 있도록 말이죠.

아울러, 일본이 제품 디자인 강국이기는 하나 '명작 의자 유래 사전'이라는 책에 한 꼭지를 할애하여 역사를 소개하고, 주요 디자이너와 의자를 소개할 정도로 비중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일본에서 나온 책이라 어쩔 수 없기는 하겠지만, 뭔가 공평한 시선으로 보이지는 않더군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19세기까지는 별점 5점을 주어도 괜찮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 감점합니다. 의자 디자인의 역사와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뒤의 부록과 같은 형태, 계통도만 참고하면 좋을 듯 합니다.

2019/12/16

2001+5 Space Fantasia Anthology - 호시노 유키노부 / 김완 : 별점 1.5점

2001+5 Space Fantasia Anthology - 4점
호시노 유키노부 글 그림, 김완 옮김/애니북스

좋아하는 작가 호시노 유키노부의 단편집입니다. "요녀전설 1"은 비록 큰 실망을 안겨 주었지만, 이 책은 항상 평균 이상의 작품을 선보였던 SF 단편집이라 기대가 컸습니다. 대걸작 "2001"의 후속작같은 느낌의 제목도 큰 기대에 한 몫 단단히 했고요.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실망입니다. 특히 책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Starship Adventure" 탓이 가장 큽니다. 제대로 완결을 맺지 못하고 중도에 연재가 중단된 미완성 작품이거든요. 연재 잡지가 폐간되었다는 이유가 있기는 합니다만, 작가 후기에서라도 결말에 대해 전해주지 못하는 완벽한 미완성 작품을 돈을 받고 판다는건 좀 비양심적인 행위였다 생각합니다. 죽은 작가도 아니고, 엄연히 살아있다면 결말은 정리해서 알려줬어야죠!
그렇다고 미완성인 이야기를 억지로 단행본화할 만큼 멋지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요. 호시노 유키노부의 장기인 Hard SF가 아닌 스페이스 오페라같은 가벼운 액션 활극인데, 특징은 명확하지만 호시노 유키노부라는 이름에서 기대할만한 이야기는 전혀 아닙니다. 내용도 평이하고요. 그나마 "아서월드"라는 소제목처럼, 아서왕 전설을 이야기에 깊숙이 연결시켜 전개하는 아이디어 정도만 눈에 뜨일 뿐입니다. '아발론'이라고 명명한 고대 외계인의 우주선 '엑스칼리버'를 손에 넣은 지구인들이 침략자들에 대항해 싸워나간다는 식이죠. 등장인물들도 팬드래건, 랜슬럿, 갤러해드, 퍼시벌, 거웨인 등 친숙한 이름들이 대거 등장하고요. 솔직히 너무 억지스럽게 가져다 붙인 티가 물씬 나서 딱히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요. 결론적으로 점수를 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제 별점은 1점입니다.

이 미완성 작품 외에는 총 7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역시나 대체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전체 평균 별점을 내자면 1.5점 정도입니다.

"밤의 망망대해에서"

이전 "2001"의 단편과 이어지는 내용으로, 오래전 우주를 탐사하기 위해 출발했지만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커크의 후일담을 그리고 있습니다. '월-E'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구형 로켓이 신형과 사랑에 빠져 신세대의 아담과 이브가 된다는 내용이니까요. 대단한 상상력이 발휘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고생만 한 커크에게 꽤 괜찮은 선물같은 결말이라는 점에서는 그런대로 괜찮았어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진노의 그릇"

2001 러시아에서 핵전쟁을 일으킨다는 내용의 짤막한 소품으로 별로 특별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냉전시대에 누구나 상상했었을 그런 이야기를 충실하게 그림으로 옮긴 정도에 불과하니까요. 별점은 1.5점입니다.

SPACE FANTASIA Part 1~3

제목처럼 3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2장 분량으로 짤막한 SF 꽁트입니다. 앞장은 기묘한 설정, 뒷장은 그 설정에 대한 반전과 같은 결말을 담고 있습니다. 반전이 핵심이라는 점에서 소설로 따지면 '쇼트쇼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소품이라 점수를 주기 애매합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포보스 & 데이모스"

화성의 포보스 기지에서 급작스러운 바이러스에 의한 사고가 발생되었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되는 작품입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포보스 기지의 바이러스는 포보스 지하에서 채굴한 얼음에서 발생했습니다. 이는 지구에서 튕겨나온 운석에서 비롯된 것이고요. 그리고 운석은 공룡 멸종을 가져온 대폭발 때문에 지구에서 튕겨나온 것으로, 멸종하던 공룡들의 공포를 그 사체와 함께 냉동건조하여 담았다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과감한 SF 적인 발상에 여러가지 과학적 설정이 뒷받침되어 꽤 독특한 반전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호시노 유키노부 스타일의 작품이었습니다. 아쉽게도 설득력이 높다고 하기는 어렵지만요. 그래도 그나마 읽을만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안개행성"

행성 화이트 포레스트 2호를 탐사하기 위해 착륙했던 우주선 풀룩스의 통신 두절 후, 구출을 위해 출동한 우주선 카스토르도 행성의 고농도 산소층 때문에 화재를 당해 겨우 착륙에 성공할 수 있었다. 풀룩스의 생존자인 조종사 레크랑을 찾아나선 대원들은 짙은 안개 속에서 문명의 흔적을 발견했지만, 이내 기묘한 생물의 습격을 받기 시작했다. 행성의 대기를 흡입한 대원 지나는 에어록을 열어 놓은 채 탈출하고, 모든 대원들이 행성의 대기를 흡입한 뒤 서서히 기억을 잃기 시작하는데...

지적인 동물이 나타나 불을 쓰기 시작하면 산소층이 반응해 신경 가스를 내뿜는 방위 시스템이 움직이고, 이 가스를 맡은 생명체는 기억을 잃고 사고력이 쇠퇴해 문명이 멸망한다는 설정이 아주 인상적인 SF입니다. 행성, 또는 숲이 사라지기 전에 자구책을 마련했다는 것이지요. 문명은 발전을 위해 숲을 벌채하기 때문입니다.

설정도 멋지지만, 이야기도 진상을 서서히 드러나게끔 풀어나가고 있어서 굉장한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지식과 경험이 없으면 노인은 필요가 없다는 말을 했던 선장의 자살 등 곳곳에 멋진 장면도 많고요. 한마디로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설명이 부족한 부분도 제법 눈에 뜨입니다. 우선 외계 문명이 돌로 건물을 만들 정도였다면 불도 진작에 썼을텐데 그 전에 쇠퇴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이유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홀로 우주선에 복귀하여 탈출하는데 성공한 조종사 이언이 필요없는 기억과 정보부터 잃는다는 설정도 마찬가지고요. 우주선 탈출 방법이라던가 조종법은 기억하지만 다른 동료들과 연인에 대한 기억을 잃는다? 너무 편의적인 발상입니다. 특히 동료의 아들 사진을 보며 소중한 무언가를 잊었다는 식으로 끝내는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다른 수록작들과는 비교하기도 어려운 걸작 급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이 작품 하나만큼은 찾아서 읽어볼 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