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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2

스파이더 맨 브랜드 뉴 데이(2026) - 데스틴 대니얼 크레턴: 별점 4점

지금 최고 흥행작이죠. 마블 영화에 대한 관심은 최근 많이 식었지만, 그래도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OTT를 통해 빼놓지 않고 챙겨봤는데(왜 리뷰가 없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번 작품은 오랫만에 극장에서 관람했습니다.

가장 돋보인 건 액션입니다. 화끈하고 속도감 넘칩니다. 특히 초반의 1인칭 시점 질주, 활강 장면은 이전 "스파이더맨"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연출이라 신선했습니다. 드라마와 액션의 조화도 적절해서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아이디어도 좋습니다. 진 그레이가 점프하듯 다른 사람의 육체를 강탈하는 시퀀스가 대표적입니다. CG가 필요없는 아날로그적인 촬영으로 슈퍼 히어로의 능력을 구현했다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탄탄한 이야기도 마음에 듭니다. 진 그레이가 벌이는 일종의 테러에는 V-Max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하지요. 이는 나중에 진이 갇혀 있던 연구소 천장에 설치된 에어컨 브랜드에서 유래되었다는게 밝혀지면서, 진의 언니 세라가 연구소에 감금되어 생체 실험을 당했다는 과거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별 의미 없어 보였던 단서가 진상을 밝히는 열쇠가 되고, 동시에 진 그레이의 행동에 설득력을 더해 주는 구성인데 아주 훌륭해요. 복선을 제시하고 회수하는 과정도 깔끔하고요.

중반에 진이 MJ의 육체를 강탈했지만, MJ인 척 피터 파커를 속이는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지극히 뻔하고 유치한 설정인줄 알았는데, 이 역시 진의 농간이었다는게 드러나면서 그녀의 가공할 능력을 관객에게 제대로 각인시켜 주거든요. 

블랙 위도우와 헐크 등 다른 마블 히어로들의 등장도 반갑습니다. 여러 캐릭터를 등장시키면서도 이야기가 산만해지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퍼니셔와 스파이더맨의 조합이 의외로 재미있더군요. 액션 스타일만 놓고 보면 잘 어울리는 콤비는 아니지만, 상극인 두 사람의 티키타카가 의외로 잘 맞습니다. 피터 파커가 필요한 장비를 이야기할 때마다 퍼니셔가 모두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 등 개그 장면들이 아주 발군이에요.

하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피터 파커가 MJ를 잊지 못한 채 4년이나 홀로 지내며 괴로워한다는 설정은 별로 와닿지 않았습니다. 21세기 MZ 세대의 젊은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MJ 역의 젠데이야가 그 정도로 설득력 있는 외모를 갖췄는지도 개인적으로는 의문이고요.

마지막 절정부도 조금 아쉽습니다. 영화의 중심이 강력한 슈퍼 빌런과의 대결보다는 피터 파커 내면의 사투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마지막을 장식할 만한 화려한 액션 대결이 없습니다. 핸즈와의 대결이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스파이더맨이 질 것 같지 않은 상대라 긴장감은 떨어집니다.

그리고 단점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마블 영화와 세계관을 잘 알고 있지 않으면 100% 즐기는데는 무리가 있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화끈한 액션과 신선한 아이디어, 적절한 유머에 잘 짜인 이야기를 갖춘 좋은 작품입니다. 

2026/06/26

1888 잭 더 리퍼 (一八八八 切り裂きジャック) - 핫토리 마유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888년, 국비 유학생 가시와기 가오루는 '엘리펀트 맨' 연구를 위해 찾은 런던에서, 먼저 와 있던 도쿄대 동창 다카하라 고레미쓰와 함께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다카하라가 스코틀랜드 야드 근무를 하던 탓에, 가오루는 그해 막 시작된 '잭 더 리퍼' 사건에 휩쓸렸다. 그러면서 앨버트 에드워드 전하를 비롯한 다양한 명사들 - 황태자비, 황태손, 작가 에드거 라이더 해거드와 리처드 버튼, 버너드 쇼, 신지학 영매 마담 블라바츠키 등 - 과 어울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함께 찾아 나가게 된다.

일본 작가 핫토리 마유미의 장편 추리 소설입니다. 원서로 읽었습니다.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1888년 런던 묘사입니다. 화이트채플을 비롯한 여러 장소가 실제로 발로 뛰어 쓴 것처럼 생생하고 안개와 거리의 분위기가 좋습니다. 다카하라와 가오루가 머무는 하숙집도 방의 구조와 가구, 집주인 보몬트 부인의 관리와 접대까지 생활감 있게 그려져 있고요. 일본 작가가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수준입니다.

이방인인 일본인이 영국에 압도당하는 묘사도 좋습니다. 가오루는 당대 최대 선진국인 영국을 바라보며 감탄하면서도 위축되는데, 그 심정이 굉장히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동시에 일본의 현실도 냉정하게 바라봅니다. 원래 백성이었던 자들이 영국을 흉내 내어 공작이니 백작이니 하며 으스댄다는 식인데 꽤 통렬합니다. 소설가가 되기를 결심하기까지의 가시와기 가오루의 심리 묘사도 설득력 넘치고요.

팩션답게 많은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데 - 앨버트 에드워드 황태자, 앨버트 빅터 황태손, "동굴의 여왕"의 작가 에드거 라이더 해거드, 신지학 마담 블라바츠키, "아라비안 나이트"의 소개자 리처드 버튼, 잭 더 리퍼 후보이기도 했던 변호사 몬터규 존 드루잇에 심지어 어린 시절의 버지니아 울프까지! - 이 묘사 역시 뛰어납니다. 이 중 옆 집 6살 소녀인 버지니아와 성공하고 싶어 하는, 자기 과시욕이 강한 가난한 아일랜드인으로 그려지는 버너드 쇼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실제로 잭 더 리퍼로 오해받았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잘 어울렸어요.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엘리펀트 맨" 조지프 케리 메릭에 대한 묘사도 좋습니다. 과거의 ‘공연’은 그 자신도 감수했던 행동이었고, 현재의 안락을 유지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가오루 등과의 교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그의 심성이 아주 인상적이거든요.

잭 더 리퍼가 저질렀던 범죄에 대한 묘사도 강렬합니다. 다른 잭 더 리퍼 관련 작품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낙서를 지운 이유와 그 낙서의 의미를 풀어내는 부분처럼 익히 알려져 있는 설도 이야기 속에 잘 녹여내고 있고요. 수사를 맡았던 경찰 조직과 지휘 체계, 수사 방식에 대한 묘사도 상세해서 재미를 더합니다. 마지막 피해자 메리 켈리와 가오루가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다는 설정도 좋습니다. 가오루가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고 메리 켈리를 사랑한 존 드루잇과 가오루 사이의 접점도 더해지기 때문에, 그녀의 최후가 더 끔찍하게 다가오니까요. 잭 더 리퍼 사건을 바라보는 런던 시민들의 태도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내세운 범인은 트리브스 의사인데, 트리브스는 화이트채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므로 매춘부들이 경계하지 않았고, 피투성이가 되어도 의심받지 않았으며, 병원에서 물을 마음대로 써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근거인데 꽤 그럴듯 합니다. 트리브스가 보호하는 '엘리펀트 맨' 조지프 메릭이 얽혀있다는 추리도 괜찮습니다. 트리브스는 메릭의 보호자였기 때문에, 밤중에 병원으로 들어올 때 메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는 추리이지요. 단서는 메릭이 몸을 씻을 때 보였던 핏자국입니다. 메릭은 피를 흘리지 않았으므로, 그 피는 다른 곳에서 비롯된 것일 테니까요. 메릭이 입을 다문 이유도 앞서 가오루가 눈치챈, 지금의 안락을 놓치고 싶지 않은 심정 때문이고요. 

가오루가 첫 눈에 반했던 비토리아는 드루잇의 여장 모습이었고, 드루잇은 스티븐과 여장을 하는 동반자였는데 드루잇이 메리 켈리와 사랑에 빠져서 일어난 사건도 재미있습니다. 드루잇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스티븐이 잭이라고 확신하고, 그를 비밀방에 감금해 버리고 말았거든요. 버지니아가 스티븐의 사무실에서 들었던 '유령 소리'도 여기서 복선처럼 사용됩니다. 스티븐이 여장할 때 사용하던 옷장 속 비밀 방에서 난 소리였던 겁니다.

범행 도구로 보이는 메스가 가오루에게 전해진 메릭이 만든 이별 선물 안에 있었다는 일종의 반전도 나쁘지 않고, 그 외 시기와 잘 맞춰 사용된 사건과 소품들도 볼거리에요. 수시니의 비너스, 자전거, 베르티용 측정법과 지문, 맹장염 수술법, 빌헬름 1세의 죽음과 마지막의 관동 대지진까지 모두 적재적소에 잘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 짜여진 추리 소설로 보기는 무리입니다. 트리브스 의사가 진범이라는 추리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없는 탓입니다. 황태손이 범인이고 왕실 주치의가 은닉을 도왔다는 식의 다른 잭 더 리퍼 관련 추론보다 더 설득력 있다고 보기 어려워요. 동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리브스 의사가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증거도 없고 동기도 부족해서, 후더닛과 와이더닛 양쪽 모두에서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 황태자 연회에서 펼쳐지는 다카하라의 추리쇼도 어처구니 없습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지문을 확보했다며 연회에 참석한 상류 계급 의사들을 대상으로 협막을 하는게 말이나 됩니까. 지문이 일반적이지도 않은 시대인데도 말이지요. 트리브스가 범인이라는걸 황태자에게 설득하는데 성공했다면, 이런 추리쇼보다는 몰래 트리브스 의사를 사고로 위장해 죽이는 쪽이 더 현실적이었을 겁니다.

분량도 문제입니다. 780여 페이지에 달하는데, 가시와기 가오루의 갈팡질팡하는 혼란스러운 심리 묘사, 연회와 만찬 장면, 주변 인물 묘사가 너무 많습니다. 상상을 초월한 미남으로 황태자를 비롯한 온갖 상류층과 깊은 교분을 쌓은 다카하라 캐릭터 설정도 영 별로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잭 더 리퍼 사건과 실존 인물들을 활용한 팩션으로는 볼 만 하지만 추리 소설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국내 소개가 될지 잘 모르겠지만,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6/03/01

그리고 문이 닫혔다(そして扉が閉ざされた) - 오카지마 후타리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키코의 죽음 이후, 사키코의 어머니 미타 마사요가 사건 당시 함께 있었던 일행 4명(유이치·아유미·타다시·치즈루)을 집으로 불러 수면제가 든 주스를 먹인 뒤 지하 셸터에 감금했다. 셸터 안 화장실에는 “너희가 죽였다”라는 문구와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이들은 사키코의 죽음이 “정말 사고였는지”를 두고 서로를 의심하며 탈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사고’로 보였던 사건의 퍼즐이 맞춰지면서, 사키코가 셸터 안에서 아이스픽에 찔려 죽었고, 그 뒤 누군가가 사고로 위장했다는 진상이 드러난다...

"클라인의 항아리"로 유명한 일본의 본격 추리 작가 오카지마 후타리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약 20년 동안의 일본 미스터리 베스트 100에 포함될 정도로요. 원서로 읽었습니다. 

특정 사건의 유력 용의자 네 명을 폐쇄 공간인 핵 셸터에 가둔 뒤, 그들끼리 생존 게임을 이어 가며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게 만든다는 내용으로, 1987년이라는 발표 시점을 감안한다면 이런 류의(예를 들어 이런 작품) 원조인 듯 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본격 추리 작가의 작품답게 논리적으로, 발견되는 단서와 증언들에 의해 단계적으로 치밀하게 전개됩니다. 이 과정을 밟아 나가기 위한 단서의 제시도 공정하고요. 작품 속 추리 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처음에는 사키코의 죽음을 모두 사고사라고 믿습니다.
  2. 사진 속 자동차 운전석 시트 위치를 근거로, 사키코가 혼자 운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운전석 시트가 ‘추락 충격으로 움직였다고 보기 어려운 방향’이라서, 사키코보다 체격이 큰 누군가가 운전했을 가능성이 떠오르지요.
  3. 셸터 화장실 바닥에서 수건에 싸인 아이스픽이 발견됩니다. “왜 셸터 화장실 바닥에 있었는가?”라는 의문과 함께 사키코가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논의됩니다. 이후 네 사람은 서로의 알리바이를 교차하며 검증합니다.
  4. 곧이어 셸터에서 사키코의 귀걸이가 발견되면서, 셸터 자체가 살인 현장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5. 사키코의 알파로메오가 나갈 당시 치즈루와 아유미는 별장 2층에 있었고, 차가 나가기 30분 전 유이치는 디지에서 별장으로 전화를 걸었기 때문에 알리바이가 성립합니다. 따라서 알파로메오를 운전할 수 있는 인물은 타다시뿐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타다시는 절벽에서 돌아올 때 탈 오토바이도 알파로메오에 싣고 갔던 겁니다.
  6. 그러나 이후 치즈루와 아유미가 절벽에서 알파로메오를 발견했을 때, 차 안에 사키코의 사체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차가 절벽에서 떨어진 시점은 그들이 차를 본 이후의 새벽이며, 당시 세 사람은 함께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차를 떨어뜨릴 수 있는 인물은 유이치뿐이라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7. 그러나 타다시가 사키코의 사체만 먼저 절벽 아래로 던진 뒤, 얼음을 쐐기처럼 가공해 장치하여 차가 새벽에 자동으로 떨어지도록 만든 것으로 밝혀집니다. 아이스박스 뚜껑이 열려 얼음이 물로 변해 있던 점 등이 그 증거로 제시됩니다.

타다시의 사체 은닉 이후 밝혀지는 진상 또한 나름 설득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최초의 언쟁에서 유이치가 밀친 탓에 실수로 사키코가 죽었고, 유이치를 사랑하는 아유미가 이를 숨기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묘사된 유이치와 아유미의 통화를 통해 미리 암시되기에, 치밀하며 공정하다는 느낌도 전해줍니다.

아울러 네 명만 등장하는 폐쇄 공간 미스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셸터의 묘사(아래의 ChatGPT 이미지 참고하세요)와 그곳을 탈출하려는 여러 시도들도 긴박감 넘칩니다. 소규모 무대극으로 각색해도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아직 영상화가 되지 않은게 의아할 정도입니다.

다만 단점도 분명합니다.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굳게 믿던 화자 유이치의 실수로 사키코가 죽었다는 진상은 다소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또한 타다시의 사체 은닉 방식 역시 허술합니다. 사체를 단순히 바다에 던졌다면 언제든 발견될 수 있고, 그 경우 사고사가 아니라는 점이 곧바로 드러났을 것입니다. 사체가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아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운이었습니다. 왜 사체에 돌을 묶는 등의 추가 조치를 하지 않았는지도 의문입니다.

그리고 사키코의 모친이 사고사를 의심해 당시 별장에 있던 네 명을 셸터에 가둔 이유, 그리고 유이치와 그리 오래 함께 하지 않았던(별장에서의 3일 정도 뿐) 아유미가 유이치를 위해서 사키코의 죽음을 은폐할 정도로 깊이 빠져 있었다는건 설명이 부족합니다.

추리적으로도 구멍이 있습니다. 유이치가 화자인 상황에서는, 유이치가 별장을 떠난 뒤 남아 있던 세 명이 사키코를 살해하고 차와 함께 절벽으로 떨어뜨렸다는게 가장 논리적인 추리이기 때문입니다. 사키코가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 아이스픽을 챙겼다면, 그 대상은 연인을 빼앗아 간 아유미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유미가 반격해 사키코가 사망했고, 아유미의 약혼자 타다시가 사체 은닉을 도왔다고 보는 편이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애초에 타다시는 동기도 가장 부족하고,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인물로 그려지지 않으니까요. 그런데도 이런 가능성이 아예 제시되지 않는건 이상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런 폐쇄 공간 미스터리의 원조격이라는 의미 외 가치는 높지 않습니다. 구태여 번역까지 해 가며 읽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추천드릴 만한 작품은 아니네요.

2026/02/01

그렇게 사건 현장이 되어 버렸다(2025)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악관에서 호주 국빈 만찬이 열리던 밤, 백악관 관리 총책임자 A.B. 윈터가 시체로 발견됐다. 대통령 측근 해리 홀린저 등은 자살로 무마하려 했지만, 워싱턴 경찰 국장이 수사를 위해 부른 명탐정 코델리아 컵은 살인 사건이라며 백악관을 폐쇄하고 모든 관계자와 초대 손님들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와 여러 수사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제로 인하여 사건은 자살로 마무리되었으나, 국회 청문회에서 새로운 사실(세 번째 남자)이 밝혀져 다시 코델리아 컵이 소환되는데...

넷플릭스에서 감상한 추리 드라마입니다. 총 8회 에피소드, 시간으로는 약 8시간에 이르는 대장편입니다. 이렇게 긴 호흡의 장편 영상 추리물을 본 건 처음인 듯합니다.

그럼에도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안락의자형 추리물을 영상화한다면 이렇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잘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국회 청문회에서의 증언과 컵 탐정이 관계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장면이 전개의 대부분인데, 이를 단순히 나열했더라면 매우 지루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증언 장면과 컵 탐정이 추리한 실제 상황을 교차 편집하여, 왜곡된 증언과 진상을 동시에 보여주는 연출이 매우 훌륭합니다.

단서 제공도 공정한 편입니다. 범인 릴리 슈마커가 대통령의 배우자 엘리엇의 목소리를 흉내 내 사건 발생 당시 2층을 비우고, 이후 사건 현장은 옐로우 룸을 드나드는 문을 폐쇄하는 공사를 진행한 것이 핵심 단서인데, 릴리가 인터뷰 중 실제로 엘리엇의 성대모사를 선보이는 장면이 등장할 정도니까요. 이런 장면은 소설로는 구현하기 힘든, 영상물이기에 가능했던 연출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외의 단서들, 예를 들어 백악관 내부 그림의 이동으로 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장면 등도 모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탐정 코델리아 컵도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뛰어난 추리력을 지닌 명탐정이기도 하지만, 세인트 메리 미드라는 마을과 인간 관계의 전문가인 미스 마플처럼, 자신이 지닌 "탐조"라는 전문 지식을 활용해 사건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흥미로웠던 덕입니다. 
스스로를 천재로 인식하고 있으며, 주변 인물들의 무능을 드러내며 면박을 주는 데도 거리낌이 없는 태도 또한 인상 깊습니다. 고전 본격물의 "잘난 척하는 명탐정"에 가까운 캐릭터이지만, 백악관 관계자들의 무능과 거짓이 워낙에 강하게 드러나는 덕분에 오히려 통쾌함을 안겨줍니다.
추리의 절정에서 선보이는 추리쇼도 명탐정답게 화려합니다. 릴리가 범인임을 밝혀내고, 핵심 증거인 시계를 찾아내는 장면은 압권이었습니다.

배우들의 캐스팅도 적절합니다. 모두 자신에게 딱 맞는 배역을 맡아 열연을 펼칩니다. 카일리 미노그의 깜짝 카메오 등장도 재미요소였어요.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백악관 내부 묘사입니다. 지나치게 희화화되어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습니다.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조직이 이렇게 무능하게 묘사된다는 건 과장이 지나치지요. 백악관의 전통과 규범은 무시한 채, 개인의 아집으로 만찬을 망친 요리사 실라와 파티셰 디디에, 알코올중독 집사, 그리고 불청객과 정체 불명의 게스트까지 들여보낸 경호원들 모두 다음 날 해고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인물들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게이라는 설정 역시 과하다고 느꼈습니다. 이야기 전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차라리 더 자연스럽게 풀어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여성인 릴리가 퍼스트 레이디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면 훨씬 더 설득력 있었을 테고요. 여러모로 불필요한 설정처럼 보였습니다.

추리적인 면에서도 억지가 있습니다. 릴리는 별다른 고민 없이 살인을 저질렀고, 이후 사건이 미궁에 빠진 건 대통령 동생 트립, 엔지니어 브루스, 파티셰 디디에 등이 우연히 개입한 탓입니다. 거의 동시에 사건 현장에 모였던 여러 인물이 벌인 우발적 행동으로 인해 사건이 꼬였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사건이 호주 국빈 만찬 중에 벌어졌고, 국빈들을 감금했다는 설정도 무리입니다. 백악관 직원을, 백악관 내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살해했다는 점은 이미 코델리아 컵에 의해 밝혀졌던 상황이었고, 그렇다면 국빈들은 바로 풀어주었어야 했습니다. 다른 관계자들의 감금을 유지하더라도요.

후더닛물답게 의심스러운 용의자들을 다양하게 배치하고는 있지만, 정작 범인 릴리의 동기가 제대로 부각되지 않은 점도 아쉽습니다. 릴리는 재벌가 출신으로 애초에 살인을 저지를 만한 동기가 희박합니다. 실라나 엘시처럼 직접적인 "해고"라는 동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횡령이라는 설정을 덧붙이고는 있지만, 명확히 설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통령의 가장 큰 후원자의 딸인 릴리가 이 정도 이유로 해고되거나 커리어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는 설정은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물로서 잘 만들어진 작품이긴 합니다. 설정의 과도함과 동기의 빈약함 같은 단점은 분명하지만, 추리물 애호가라면 한 번쯤은 감상해 볼 만합니다.

2025/12/13

피안장의 유령 - 아야사카 미쓰키 / 김은모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대 초반의 야마모토 히나타는 강력한 염동력으로 사고를 일으킨 뒤 가족과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한 소꿉친구 사라와 함께 기지마 그룹 후계자 렌의 의뢰를 받고 외딴 저택 '피안장'으로 향했다. 피안장에 일어나는 괴현상 조사에 협조해 달라는 의뢰였다. 조사에는 예지 능력자 시게키, 사이코메트러 미즈키, 정신감응 능력자 도시코, 자동서기 능력자 아키라, 일렉트로키네시스 나기도 함께 참여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조사에 나섰지만, 저택의 괴현상은 실재했고 첫날 밤 시게키가 소파 속 비밀 공간에서 혈액이 모두 사라진 채 전신이 찢긴 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일행은 저택의 의지에 의해 감금되어 버리고 마는데...

제미나이로 그려본 피안장

초능력자들이 대거 등장하는 '특수 설정' 미스터리물임과 동시에 하우스 호러물과 정통 본격 미스터리도 결합되어 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초능력과 저주받은 피안장 내 특수한 조건에 의해 일어난 괴사건을 정통 본격물처럼 논리적으로 추리하여 진상을 드러내거든요.

특히 나름대로 정통 본격물이라는 게 밝혀지는 마지막 히나타의 추리쇼가 빼어납니다. 논리적으로도 확실하며, 단서들과 추리에 대한 근거 모두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제공되는 덕분입니다. 

히나타의 추리에 따르면, 첫 번째 사건인 '혈액이 모두 사라진 채 전신이 찢긴' 시게키 사건은 사고였습니다. 시게키가 사라에게 장난치기 위해 소파 빈 공간에 들어갔는데, 근처에 있던 나기가 천둥번개와 정전으로 놀라서 일렉트로키네시스 능력을 발동했던 겁니다. 이 충격에 시게키가 휩쓸려 체내 혈액이 전기분해되어 피는 수소와 산소로 분해되어 사라지고, 발생한 수증기 탓에 신체 표면이 파열되어 죽었습니다. 나기의 고의가 아닌 일종의 사고였기 때문에 도시코의 정신감응 능력으로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고요.

두 번째 사건인 도시코 추락 사건은 밤이 되면 옥상 테라스에는 한 명만 올라갈 수 있어서, 사람을 심리적으로 쫓기게 만드는 저택의 능력에 의한 자살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히나타는 과거 모녀가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죽었던 기사를 통해 '의식을 잃은 사람'은 머릿수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추리합니다. 즉, 누군가가 도시코를 때려 기절시킨 후 테라스로 끌어올려 떨어뜨려 죽였던 겁니다.
이는 미즈키의 사이코메트리로 도시코가 뒷통수를 가격당했다는 게 밝혀져 증명되고, 범인은 렌의 독살 미수 사건으로 드러납니다. 독이 든 와인잔은 아키라 앞에 놓여 있었는데, 아키라는 포도 알레르기라고 전날 아침에 밝혔습니다. 포도 알레르기인 사람을 와인으로 독살하는건 말이 안되니 범인은 그걸 모르는 사람이지요. 그때 자리에 없던건 렌, 가즈히사, 유토였고요. 이 중, 독을 마시고 죽을 뻔한 렌은 제외됩니다. 유토는 앞서 테라스 살인에 사용된 머릿수에 대해 알 수 있는 기사를 볼 기회가 없었고요. 즉, 소거법으로 범인은 가즈히사입니다. 렌이 독으로 쓰러졌을 때 신속하게 위세척 등을 진행한 행동이 그가 독을 넣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주요 사건에 대한 본격물스러운 추리에 더해서 소소한 추리들이 곳곳에 삽입되어 재미를 더합니다. 렌의 이모부 부부가 자살했던 사건에 대한 추리 — 이모부가 렌에게 성적인 학대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서, 이모가 이모부를 죽이고 자살했다 — 라든가, 사라의 염동력 힘의 원천이 히나타였다는 추리 등이 그러합니다.

정통 오컬트 호러 판타지 스타일의 마지막 박진감 넘치는 피안장 탈출 묘사는 꽤 볼만 했고, 히나타가 조사에 아르바이트로 참여한 연구 조수 유토와 사귀게 되어 결혼까지 이른다는 완벽한 결말과 에필로그도 마음에 듭니다. 최근 작품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깔끔한 마무리였어요. 수미쌍관식 구성이라고도 볼 수 있는 꽃잎 묘사도 여운을 남깁니다.

그러나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우선 렌이 초능력자들을 저택에 모은 이유부터 설명이 부족합니다. 저택을 깨우기 위해 초능력자들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주장에 대한 근거는 전무한 탓입니다.
또 조사 참가자들이 머문 사흘 동안의 사건은 확실히 진상이 밝혀지지만, 과거 피안장에서 일어났던 괴사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택 안에서 행방불명된 남자가 일주일 후 온몸의 피를 잃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이를 단지 저택의 저주라고 하기에는 애매합니다. 저택이 이런 능력이 있다면, 렌 일행을 모두 직접적으로 처리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고요..
첫날 밤 위기에 처했던 도시코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도 설명이 없으며, 가즈히사의 동기가 결국 ‘저택에 사로잡혔다’는 게 전부라는 것 등도 여러모로 납득하기가 힘듭니다. 뭔가 있어보였던, 아키라가 자동서기 능력으로 그렸던 '스페이드 모양 문고리가 달린 문' 설명도 흐지부지 넘어가고요.

전개 부분의 완성도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미즈키, 도시코, 아키라 등으로 시점을 전환하는 부분이 특히 별로입니다. 저택 괴현상 때문에 놀라는 심리 묘사 외에는 시점을 전환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키라만 별도 설정을 풀어낼 필요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키라 시점 부분의 전개는 워낙 비호감으로 그려지는 탓에 짜증만 났습니다. 
그리고 예지 능력자 시게키의 죽음 이후에도 참가자들이 무방비하게 행동하는 모습은 비현실적입니다. 도시코의 능력으로 시게키 사건의 범인이 조사 참가자들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면, 협력해서 움직이는 게 당연했을 겁니다. 왜 저주받은 저택에서 밤을 홀로 보내다가 위기에 처하는 걸까요? 이 부분의 설득력이 낮아서 감정 이입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항상 그래왔지만, 거의 모든 묘사가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점도 아쉽습니다. 지나치게 쿨한 염동력 미소녀 사라, 입이 험하지만 알고 보면 따뜻한(?) 색기 넘치는 누님 미즈키 인물 묘사 및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피안장에 대한 묘사는 물론 저택 내에서 반복되는 괴현상 역시 식상한 헌티드 하우스 호러물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서 실망스럽습니다.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하우스 호러와 본격 미스터리의 혼합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개성을 가진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킬링 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았어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25/08/29

네버 라이 - 프리다 맥파든 / 이민희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트리샤와 남편 이선은 둘러보기 위해 방문했던 교외의 외딴 저택에 고립되었다. 눈보라 탓이었다. 저택은 원래 2년 전 실종된 유명 정신과 의사 에이드리언 헤일의 소유였다. 머무는 동안 트리샤는 누군가 숨어 있다고 의심했지만 정체를 확인하지 못했고, 대신 에이드리언이 환자 상담을 몰래 녹음해 보관한 비밀방을 발견했다. 테이프를 들으며 시간을 보내던 트리샤는 또 다른 숨겨진 지하실을 찾아냈는데, 그 안에 부패한 사체가 놓여 있었다... 

2년 전, 유명 정신과의사 에이드리언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차량 타이어를 훼손했었다. 그런데 그 장면을 찍은 환자 EJ의 협박이 시작됐고, 그녀는 연인인 컴퓨터 전문가 루크의 도움으로 영상을 삭제하려 했지만 EJ는 이 장면마저 촬영해 협박 수위를 높였다. 결국 에이드리언은 EJ 살해를 결심하는데...

프리다 맥파든이 쓴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장편 소설입니다. 최근 너무 일본 작품만 읽은 듯 하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편식은 좋지 않으니까요.

이 작품은 2년 전 정신과 의사 에이드리언 헤일의 시점과 2년 후 현재 트리샤의 시점이 번갈아 전개되다가 결국 두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전개 방식 자체는 특별히 독창적이지 않지만, 이 과정을 통해 트리샤가 에이드리언의 환자 PL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반전은 인상적입니다. PL이라는 이름은 패트리샤에서 비롯된 것이고, 트리샤는 (패)트리샤였던 겁니다.

PL은 원래 약혼자와 친구들과 캠핑을 갔다가 의문의 연쇄살인마에게 습격당해 혼자 살아남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약혼자와 친구의 불륜을 알게 된 뒤 두 사람을 살해하고, 이후 살인마에게 습격당한 것처럼 꾸며온 것이 진상이었습니다. 에이드리언은 외상 후 스트레스 치료를 위해 찾아온 PL과의 상담 과정에서 이 사실을 간파했고, 자신을 협박하던 EJ를 제거하기 위해 트리샤를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진실이 드러날까 두려워진 트리샤는 오히려 에이드리언을 살해하고 시체를 감췄지요. 

한편, 에이드리언의 집 지하실에서 발견된 시체는 에이드리언이 아니라 EJ였는데, 이는 에이드리언이 EJ를 감금해서 살해했기 때문입니다. 루크가 지하실에서 발견한 사체를 보고도 에이드리언이 아니라고 확신한 이유 역시 흥미로웠습니다. 시체가 청바지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의 것이라고 판단했는데, 이런 디테일은 확실히 여성 작가스러워서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 진상, 반전에 이르는 과정은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트리샤는 에이드리언을 살해한 범인인데, 마지막 반전이 드러날 때 까지 트리샤 시점 전개에서 그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심약한 임산부로만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3인칭도 아니고 1인칭 시점이며, 다중인격도 아닌데요. 이건 반칙입니다.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설정과 묘사도 많습니다. 트리샤가 굳이 비밀리에 테이프를 듣는게 대표적입니다. 트리샤는 EJ를 죽인건 에이드리언이고 루크가 범인이 아니라는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 둘의 상담 테이프를 들을 이유는 없어요.
트리샤가 이선이 어머니를 살해했다는걸 알고, 그런 그에게 자기 범행을 고백한 뒤 부부가 함께 입을 막기 위해 루크를 살해하고 사체를 파묻는다는 결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선의 범행은 지금 와서는 제대로 증명할 수도 없고, 그나마 증거라는 테이프도 태워버렸습니다. 그러나 트리샤의 범행은 잔혹함과 규모에서 이선의 범행과는 수준이 달라요. 아무리 부창부수라지만 이선이 선뜻 트리샤의 손을 잡는다는건 와 닿지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설명도 부족합니다. 트리샤가 에이드리언을 왜 살해했을까요? 트리샤는 EJ를 납치하는 자기가 CCTV같은데 찍혔을지도 모른다며 에이드리언을 살해했는데, 전혀 와 닿지 않습니다. 에이드리언을 죽인다고 CCTV 데이터가 사라지는게 아니니까요. 스스로 EJ의 사체를 없애기 위해서라는 목적도 억지입니다. 사체가 발견되면 가장 문제가 될 건 에이드리언이니, 그녀가 알아서 잘 숨겼다고 믿는게 당연합니다. 되려 시체만 하나 더 늘렸고, 유명인사 에이드리언의 실종을 초래하여 경찰이 수사에 나서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수사 당시 경찰이 저택 비밀 공간들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한건 순전히 운이었고요. 
저택에 누군가 침입한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이선이 지나치게 태평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 루크가 저택에 침입한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결말도 별로입니다. 환자를 돈으로만 대했고, 특별히 좋은 치료를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환자를 살해하기 까지 한 에이드리언 헤일은 죽어도 쌉니다. 트리샤, 이선 급으로 나쁜 악당이니까요. 그러나 엄청나게 순수했고, 진심으로 에이드리언을 사랑했을 뿐인 루크를 마지막에 부부에게 개죽음당하게 만든 결말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부부의 행복한 생활과 트리샤가 이선마저 죽일 수 있다는 에필로그보다는 루크의 죽음이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드러날거라는 식으로 그리는게 훨씬 좋았을겁니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처럼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반전은 흥미롭지만 반전을 반들기 위한 의도적인 가짜 서술 트릭물이라서 감점합니다. 억지와 작위적인 전개도 거슬렸고요. 그다지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5/06/07

백수아파트 (2025) - 이루다 : 별점 2점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수인 안거울은 큰동생 두온의 집에서 조카들을 돌보며 지냈지만, 오지랖 넓은 성격 탓에 쫓겨나듯 독립하게 되었다. 그녀가 새로 이사한 곳은 재개발 예정지에 위치한 백세 아파트로, 이곳에선 새벽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층간소음이 발생해 주민들이 괴로워하고 있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선 안거울은 이내 주민 대표 지원, 무당 무학보살, 전직 회계사 경석, 공시생 샛별, 유튜버 동오와 협력하게 되었고, 203호에 사는 광신도 여성을 체포하게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그녀는 범인이 아니었다. 
안거울은 크게 좌절했지만, 결국 소음을 일으킨건 경석이며, 그 배후에 아파트 경비원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주민들과 함께 마지막 대결에 나서는데...

이 영화는 백수 소시민이 층간 소음 추적에 나선다는 일상계 코믹 추리 스릴러입니다. 연휴를 맞아 티빙으로 감상했습니다. 

장점이라면 우선, 남는 것이 시간뿐인 백수가 탐정극을 끌고 나가는 설정 자체가 독특하고 흥미롭습니다. 실제로 층간 소음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작전—탐문 수사, 주민 파티 구성, 소음 측정기 활용 등—은 현실적인 공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고요. 무엇보다 수상해 보인다고 막무가내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서와 증거를 수집하고, 그에 대한 반론 상황까지 함께 제시하며 범인을 좁혀가는 과정은 장르적 재미를 잘 살리고 있습니다. 대표적인건 203호가 범인이 아니라는게 노숙자 증언으로 밝혀진 뒤, 경비가 그 때 소음을 일으켰고 이유는 자기 멤버 중 한 명이 범인이었기 때문이라는 거울의 추리입니다. 뒤이어 거울은 쉼터 사용자 목록을 조사하여 범인이 경석이라는걸 밝혀내게 되지요.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주인공 안거울 캐릭터도 생생합니다. 배우 경수진 씨의 연기가 좋더라고요. 그가 함께 지내는 조카가 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존재였고, 현재 곁에 있는 조카는 귀신이라는 설정도 비교적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습니다. 다른 아파트 주민들도 잘 표현하며, 곳곳에 피식하게 만드는 재미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저예산 영화라 해도 영상미나 연출의 완성도, 스케일 모두가 영화보다는 TV 드라마에 가깝다는건 아쉽습니다. 차라리 기, 승, 전, 결의 네 파트로 나누어 - 안거울 설정 설명과 이사 후 층간 소음을 만나는 기, 안거울이 오지랖 넓게 나서서 범인을 찾기 시작하는 승, 203호를 범인으로 특정하지만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는게 밝혀지는 전, 진범인 경비와 마지막 승부를 펼치는 결 - 연속극 형식으로 구성했다면 더 효과적이었을겁니다. 

또한 후반부로 갈수록 추리 스릴러로서의 서사의 긴장이 급격히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범인이 경비원으로 밝혀지는건 너무 노골적이었고, 경비원이 감추고 있던 서류를 놓고 다투는 장면이 너무 길며 긴장감도 느낄 수 없었던 탓입니다. 경비원은 안거울을 살해하려고 했다가 실패한 상황인데, 서류를 숨기고 있었는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안거울이 경찰에 신고만 해도 살인미수, 납치 감금 등으로 중형을 선고받았을텐데 말이지요. 경비원과 부하들이 주민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것 역시 마찬가지, 백주대낮에 그렇게 심한 폭행을 저지르고 빠져나간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아울러 재건축을 유도하기 위해 집값을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몇 개월씩 소음을 유발했다는 설정은 설득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렇게 장기간 문제가 지속되었다면, 영화보다 훨씬 빠른 시간 안에 범인이 밝혀졌을 법하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이보다는 차라리 다른 방법, 예를 들어 방화를 시도하는 등의 적극적인 방법이 더 현실적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시도 자체는 흥미로웠지만, 완성도 면에서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영화보다는 백수 안거울을 중심으로 한 연속 TV 시리즈가 훨씬 어울렸을테고요. 같은 설정의 TV 시리즈를 기대해 봅니다.

2025/05/23

여왕국의 성 1,2 - 아리스가와 아리스 / 김선영 : 별점 2.5점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이토 대학 추리소설 연구회 EMC 회원인 모치즈키, 오다, 아리스가와, 마리아 네 명은 렌트카로 가미쿠라로 향했다. 가미쿠라에 위치한, 외계인을 믿는다는 신흥종교집단 '인류협회' 본거지로 떠났던 에가미 선배의 연락이 끊긴 탓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에가미 선배를 만나는데 성공했지만, 그들은 인류협회의 '성'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에 휘말리고 말았다. 하지만 인류협회는 경찰을 부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감금하였고, 에가미 선배와 일행은 성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사건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데...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시마다 소지의 계보를 잇는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 작가이지요. 국내에도 많은 작품들이 소개되었는데, 이 작품은 작가의 유명 시리즈 중 하나인 '학생 아리스' 시리즈(또 다른 시리즈는 명탐정 히무라 히데오가 등장하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 장편입니다. 신흥 종교집단의 본거지인 ‘성’을 배경으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루는데, 1권과 2권을 합쳐 9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자랑합니다. 완독에 1주일 정도 걸렸네요.

명성답게 추리적으로는 상당히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2008년 '주간분슌 선정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위", '제 8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했다는게 이해가 될 정도로요.
우선, 공정한 단서 제공이 단연 돋보입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사건 해결에 필요한 정보들을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제공해 줍니다. 마지막 추리쇼 직전에는 ‘독자에의 도전장’이 삽입되어 있기도 하고요. 전통적인 본격 추리물 애호가라면 누구나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구성이지요.

사건과 트릭, 추리도 나쁘지 않습니다. 11년 전 총기 실종 사건 트릭은 단순하면서도 현실적인 조건을 이용하고 있다는게 마음에 들었어요. 밀실인 현장에서 자살한 피해자의 총기를 가져간 범인은 어린아이로, 아이는 작은 체구를 이용해 쓰러져있던 사체 뒤에 숨어 창 밖에서 바라보던 쓰바키 등 목격자 시야에서 벗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방 안에 들어왔을 때는 문 뒤에 숨었고요. 그리고 쓰바키가 경찰이 올 때 까지 정문 앞을 지킬 때 총을 가지고 뒷문으로 탈출했던 겁니다. 복잡한 장치를 활용한 트릭이 아니라, 상황과 조건을 정교하게 활용한 현실적인 트릭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높고, 어린 아이라는 범인 특징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현재 시점의 연쇄 살인 사건은 전형적인 후더닛 추리인데, 아래 의문이 핵심입니다. 

  • 첫째, 총기는 어떻게 삼엄한 보안이 이뤄진 인류협회 본부로 반입되었는가? 
  • 둘째, 어떻게 총기가 11년전 사라졌던 그 총일 수가 있었는가? 

이에 대한 추리는 아래와 같고요.

  • 첫째, 총기는 성스러운 동굴 안에 숨겨져 있었는데, 인류협회 쪽이 아닌 마을에서 들어오는 입구는 좁아서 어린 아이만 들어올 수 있었다. 즉, 총기를 숨긴건 어린 아이였다. 
  • 둘째, 총기가 11년 전 사건의 흉기였던 권총이기 때문에, 범인은 11년 전 사건에서 총기를 훔쳤던 사람이다. 

이렇게 범인은 11년 전 마을에 살고 있던 어린 아이라는게 밝혀집니다. 현재 인류 협회 소속 인원 중에서 이에 해당되면서, 사건 당시에 알라바이가 없는건 아오타밖에 없고요. 즉 아오타가 범인입니다!

이런 추리적 요소와 더불어 사건들이 벌어지는 배경인 인류협회의 설정도 흥미롭습니다. 외계인을 신으로 믿는다는 다소 황당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의 교리, 협회의 구성, 생활 방식과 본거지 '성'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현실감을 부여합니다. 교주 노사키 기미코가 유괴당해서 에가미 일행이 감금될 수 밖에 없었다는 진상 역시 그럴듯했어요.

등장인물들의 성격 묘사와 팀워크도 돋보입니다. EMC 멤버인 모치츠키, 오다, 아리스, 마리아 모두 톡톡 튀는 매력을 갖추고 있으며 중반부에 '성'에서 탈출하려는 모험도 풋풋하고 귀엽게 그려지고 있는 덕분입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보다는 이 작품 쪽이 더 "청춘 미스터리"의 범주에 들어맞는게 아닌가 싶네요. 버블 경제 몰락 직전의 분위기에 대한 언급, 그리고 멤버들을 통해 중간중간 등장하는 문학, 드라마, 영화에 대한 인용도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카프카의 "성"을 이렇게 읽어보고 싶게 만들게끔 소개한 글은 정말이지 처음 봅니다.

다만 몇 가지 아쉬움도 있습니다. 우선, 전체 분량이 과합니다. 거의 900페이지 분량 중 인류협회와 '성'에 대한 설명에 많은 분량이 할애되는데 이렇게까지 길 필요는 없었습니다. 특히 '성'의 경우, 내부 구조도까지 곁들인 상세한 묘사로 과다한 정보를 주지만 이는 실제 사건과 거의 관계가 없어서 허무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이야기 중간에 마리아의 시점으로 전환되는 장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점 변경이 새로운 정보나 심리적 깊이를 제공하기보다는 서사 전개의 리듬을 끊는 것에 불과하거든요. 지루함도 가중시키고요.

그리고 사건 해결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장면에서 지나치게 절묘한 우연이 개입되었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번역자도 후기를 통해 언급한 문제인데, 범인이 5시 경에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던 도이를 살해한 뒤 곧바로 동굴에 들어가 총기를 꺼냈다면, 지즈루와 일정 시간 동굴 내부에 함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한쪽이 인기척이나 이상한 낌새를 느꼈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이보다는 차라리 범인이 마주친 지즈루마저 살해하여 사체를 숨겼다가 발각된 후, 지즈루가 동굴 안에 있던 시간을 여러가지 증거(깨진 시계라던가, 할아버지 증언이라던가...)로 알아내어 범인을 특정한다는 이야기가 추리적으로는 더 나았을 겁니다. 잔혹하긴 하지만요.

아울러 에가미의 추리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문제가 많습니다. '어린아이만 동굴을 통과할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이 특히 그러합니다. 입구 측에서 총을 종이와 비닐 등으로 공 모양으로 감싸 던진 뒤 출구 쪽('성'의 동굴)에서 회수하거나, 개에 묶어서 들여보내는 등 여러가지 대안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저 권총을 흉기로 써서 꼬리를 밟힐 이유부터 설명이 부족합니다. 인류협회에 대한 원한으로 예언을 망치기 위해 살인을 저지렀다는 동기부터 비현실적이지만, 정말로 이게 목적이었다면 둔기나 칼을 사용해도 문제가 없었으니까요. 

아오타가 사체 강직을 이용해 총을 쏘게 만든 이상한 알리바이 트릭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앞서의 동기가 진짜라면, 에가미의 말대로 자기가 범행을 저질렀다며 세상에 진상을 드러내는게 더 좋은 방법입니다. 알리바이 트릭을 써 가며 은폐를 기도할 이유는 없어요. 심지어 제대로 동작할지도 모르는 애매한 방식의 트릭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정통 본격 추리의 규칙을 철저히 따르면서도, 현대적인 감성과 설정을 조화롭게 결합한 신본격 추리 소설이 뭔지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일단 재미는 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본격 추리물 애호가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겁니다.

2024/12/20

탈주자 - 리 차일드 / 안재권 : 별점 1.5점

탈주자 - 4점
리 차일드 지음, 안재권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잭 리처는 시카고에서 우연히 마주친, 다리가 불편한 여성을 도우려다가 그녀와 함께 무장한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 납치된 리처와 홀리가 도착한 곳은 몬태나의 깊은 숲 속 민병대 은신처였다. 민병대 사령관 보우 보켄은 합참의장의 딸이자 대통령의 대녀인 홀리를 이용하여 미국 정부를 압박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잭 리처는 감금 장소에서 탈출한 뒤, 보우 보켄의 진짜 목적을 알아차렸다...

"탈주자"는 리 차일드의 대표작인 잭 리처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입니다. 제 기준으로는 시리즈 16번째로 읽은 작품이고요.

기존 잭 리처 시리즈와는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장면들이 눈에 뜨입니다. 가버 장군이 직접 총을 들고 나서는 모습이 대표적입니다. 팔팔한 모습으로 M16을 능란하게 다루는 모습이 신선했습니다.
시리즈 최고의 매력 포인트라 할 수 있는, 리처의 파괴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도 역시나 존재합니다. 납치범 중 한 명인 운전사 피터 웨인 벨과 민병대 사령관 보우 보켄의 오른팔인 파울러를 제압하는 장면이 그러합니다.

홀리의 행방을 쫓는 수사 과정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1998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발표된 초창기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각도의 흑백 CCTV 화면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복원하여 다른 각도로 찍혀있던 용의자의 정면 사진을 얻어내는 과학 수사가 등장한건 아주 놀라왔어요. 지금은 아마 가능한 기술 같기는 한데, 이걸 1998년 발표 작품에 써먹었다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연방수사국이 불탄 차량을 단서로 납치범들의 은신처를 좁혀나가는 과정도 설득력이 높았고요. 

연방수사국 요원 두 명이 모두 배신자였다는 나름의 반전도 존재합니다. 이 과정에서 밀로셰비치가 배신자임을 드러낸 후, 브로건이 배신자일 것이라는 리처의 추리가 이어지는데, 그 직후 브로건이 민병대에게 잡혀가는 장면으로 전개되고, 마지막에 리처의 기지로 브로건의 정체가 밝혀지는 흐름도 깔끔합니다. 일종의 서술 트릭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헬렌이 납치되었지만 선거 때문에 드러내놓고 헬렌을 구출하지 못하는 상황 역시 현실적이고 설득력 높았습니다.

합참의장의 딸이자 FBI 요원인 헬렌도 매력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심각한 다리 부상을 입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도구를 활용하여 활약하는 모습 덕분입니다. 주체적이면서도 강한, 리처에게 보호받는다기보다는 동등한 관계의 여성을 잘 그려냈다고 생각되네요. 실제로 리처의 생명을 한 번 구해주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런 장점들보다 단점이 훨씬 큽니다.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잭 리처 시리즈의 기존 매력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중반부까지는 리처가 시카고에서 홀리의 납치 사건에 휘말려 몬태나 숲 속 민병대 은신처까지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과정만 반복될 뿐,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 지루합니다. 최초 납치 시, 그리고 이동 중에 탈출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리처의 모습도 납득하기 어려웠고요.
몬태나에 도착한 이후의 전개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아무리 오합지졸이라도, 백 명 이상의 군사 조직이라는 점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잡혀있는 동안, 리처가 감시를 빠져나간건 한 두번이 아닙니다. 너무 쉽게 풀려나고 빠져나가서 긴장감을 느낄 여지가 없을 정도에요. 감시병을 힘으로 제압하지 않고 엄청난 화술로 속여서 탈출하는 장면은 신선했지만, 이런 수작은 영 잭 리처답지 않아서 별로였습니다.

사건의 전개도 허술한 점이 많습니다. 우선 보우 보켄이 헬렌을 납치한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그의 계획은 몬태나로 모든 이목을 돌린 후 샌프란시스코 연방 준비 은행을 1톤의 다이너마이트로 날려버리는 것이었는데, 이 계획에 헬렌은 필수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독립 국가 선언문을 발표해도 충분히 시선을 끌 수 있었을 텐데, 굳이 헬렌을 납치해 위험을 자초할 이유는 없습니다. 헬렌이 합참의장의 딸이자 대통령의 대녀라 한 들, 그게 미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굳이 몬태나로 시선을 돌리게 만들 이유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진주만과 같은 사건을 언급하며 전략적으로 필요했다는 설명이 붙지만, 아무도 그들의 범행을 예상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왜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지 의문이 듭니다. 샌프란시스코를 폭파한 후 성명문을 발표하는게 더 논리적인 전개였습니다. 단적인 예로, '911' 테러 전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노력했을까요? 그럴리 없지요.

연방수사국 요원 두 명이 배신자라는 설정도 억지스럽습니다. 게다가 이 두 명만을 선발하여 수사팀을 꾸렸는데 두 명 모두가 배신자였다는건 어처구니가 없어요. 맥그래스 지부장이 정말 유능한 인물인지 의심하게 만듭니다.
스팅어 미사일을 훔친 이유 역시 애매합니다. 등장 자체가 불필요하게 느껴지고, 스케일만 억지로 키운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아군 공격이 가능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등장하지도 않고요. 설령 아군 공격이 가능했다 한 들, 몬태나에서 농성하며 연방군을 상대할 때 스팅어가 그렇게 강한 억지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도 않습니다. 이보다는 핵폭탄과 같은 강력한 장치가 더 설득력이 높았을 겁니다.

잭 리처 특유의 시원한 복수와 응징이 부족했던 점도 실망스럽습니다. 잭 리처의 파괴력보다는 저격 실력에 대한 묘사가 더 많고, 보우 보켄은 단 한 발의 저격으로 처리되며 이야기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보켄의 잔혹함과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근거없는)카리스마, 이야기에서의 무게감을 고려할 때 이런 결말은 개운하지 못했습니다. 

불필요한 고어스러운 묘사나 총알 발사 과정에 대한 과도한 설명 등도 분량을 늘리기 위한 불필요한 요소로 보입니다. 550페이지라는 방대한 분량은 이러한 묘사를 줄였다면 100페이지 정도는 줄어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국어판 제목인 "탈주자"도 무슨 의미인지 영 알 수가 없네요. 여기서 탈주한 사람은 없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반전과 흥미로운 수사 과정은 돋보였지만, 지루한 전개와 비현실적인 설정이 작품의 완성도를 크게 떨어뜨린 졸작입니다. 제가 읽었던 시리즈 중에서는 최악이었어요.

2024/10/06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 미쓰다 신조 / 권영주 : 별점 3점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핵심 트릭과 진상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조 겐야는 대학교 선배 아부쿠마가와 가라스로부터 하미 지역의 특별한 제의와 기묘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하미에는 네 개의 마을에 각각 신사가 있고, 홍수나 가뭄 때마다 신사마다 돌아가며 지역 농사의 젖줄인 미쓰 천의 원류 진신 호에서 미즈치 신을 모시는 제의를 행해왔는데, 13년 전 제의에서 사요촌 미즈시 신사 신관 류지의 큰아들 류이치가 죽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으나, 터무니없이 무서운 어떤 것을 본듯한 형상이었다. 그 뒤 제의에서도 신관들은 기묘한걸 목격했다고 했다. 
이 소재를 탐방하기 위해 도조 겐야는 편집자 소후에와 함께 가뭄 탓에 행해지는 하미의 기우제에 참석했다. 그리고 제의 중 신남 역할을 맡은 류지의 둘째 아들 류조가 가슴에 미즈치 님의 신기 중 하나인 뿔에 찔려 죽은걸 목격했다. 그러나 현장인 집배는 완전한 밀실이었다. 겐야는 현장을 확인한 뒤, 자살이라고 추리했고 류지가 동의하여 사건은 마무리 되는 듯 했다. 그러나 미즈시 신사 외눈 광에 제물로 류지의 의붓손녀 사요코가 감금돠었다는걸 다른 신관들과 관계자들이 알게 되었다. 사요코를 풀어달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류지는 주술을 푸는데 시간이 걸린다며, 다음 날 풀어 줄 것을 약속했다. 

그날 밤부터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 미즈치 신사의 다쓰키치로, 미쿠마리 신사의 다쓰조 신관이 차례로 살해당했고, 스이바 신사 류코 신관은 중상을 입었다. 류지는 소후에를 감금한 뒤 겐야를 협박하여 범인을 밝혀낼 것을 종용했고, 겐야는 관계자들 앞에서 범인은 류지의 의붓 손자 쇼이치라고 추리했다. 겐야가 내 놓은 범인의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건 쇼이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추리쇼 직후 류지마저 총격으로 살해당했고, 도조 겐야는 소후에를 구해내 스이바 신사 후계자 류마와 함께 마을 밖 경찰서로 향하는 차 안에서 류마에게 진짜 진범이 누구인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 때 네 개의 마을은 폭우로 범람한 미쓰 천에 모두 휩쓸리고 말았고, 도조 겐야는 경찰에 살해된 사람들과 범인들 모두 실종된 것으로 신고했다.

"나 개인적으로는 자신감 있는 오만한 명탐정보다 도조 겐야 쪽이 마음에 드는 걸. 연쇄살인이 발생해 몇 명 죽고 난 다음에 겨우 사건을 해결해 놓고 실은 처음부터 범인을 알고 있었다고 지껄이는 명탐정보다,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는 댁이 훨씬 더 믿음이 가." - 류마.

도조 겐야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 제 10회 일본 본격미스터리 대상 수상작입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인데, 굉장히 흡입력있고 재미있는 내용이라서 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미즈치 신을 모시는 제의와 사건, 트릭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게 아주 돋보였습니다. 제의는 공물을 담은 큰 통을 호수에 빠트리면서 진행되는데, 이 통 안에 '산제물'인 사람을 넣어 두었던게 밀실 트릭의 진상입니다. 13년 전 제의에서 처음 산제물을 바쳤는데, 이 때 통에 갇혔던 산제물 이치로가 물 속에서 튀어나와서 류이치는 깜짝 놀라 심장마비를 일으켰던겁니다. 이치로는 지하 수로로 빨려들어갔고요. 그리고 이번 사건에서는 산제물은 사요코였는데, 그녀 역시 통을 호수에 빠트릴 때 빠져나와 류조를 찔러 죽였습니다. 통 안에 공기가 남아있어서 관계자들이 현장을 보고 떠날 때 까지 숨어있을 수 있었고요. 이 과정에서 집배가 한 번 더 흔들린 이유 - 떠오른 통에 부딪혀서 - 까지 설명되는게 아주 좋았습니다.
사건에 대해 겐야가 내 놓는 여러가지 추리도 볼 만 합니다. 우선 겐야는 범인에게 해당되는 일곱 개의 조건을 꺼내어 놓습니다.
  1. 미즈치님 제의에 산재물이 부활했다는 걸 알 수 있는 인물
  2. 쓰루코 대신 사요코가 제물이 되었다는 걸 알 수 있는 인물
  3. 산재물이 통 안에 들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인물
  4. 사요코가 제물로 바쳐졌음을 알고 범행을 결심한 인물
  5. 류마의 잠수 장비가 어느 광 어느 궤짝에 들어 있는지 알 수 있는 인물
  6. 잠수 장비를 착용하고 활동할 수 있는 인물
  7. 호수에 드나드는 방법을 알 수 있는 인물.
이 조건에 맞는 사람들을 추려낸 후, 하나씩 소거해가는 과정이 아주 그럴듯했어요. 이를 통해 범인이 쇼이치라는걸 드러내는 추리도 합리적이고요. 물론 이는 나중에 아닌걸로 밝혀지지만요.
미즈시 신사가 '산제물'을 바쳤다는걸 밝혀내는 추리도 돋보입니다. 신에게 바치는 '신찬'은 누가 보아도 산제물인 여성을 형상화한 것인데, 류지가 이를 대충 고르는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꼈다는 등의 단서는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알려줍니다. 여러모로 '본격추리대상'을 탈만큼 추리적으로는 풍성합니다.
다만 도조 겐야의 추리는 일본어를 이용한게 많아서 한국 독자는 풀어내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 약간 아쉬웠습니다. '산제물'을 추리해내는 추리가 특히 그러했습니다. 이런걸 원어로 보고 이해하며 추리에 동참할 수 있는 일본 독자들이 부럽기만 할 따름입니다.

전쟁 당시 일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눈에 뜨였습니다. 류마가 해군 자살 특공대 후쿠류 출신이라는 설정인데, 류마의 입을 빌어 전쟁 당시 자살 특공대에 대해 개죽음이라고 비판하는 부분이라던가, 자식이 죽어도 체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낙후된 촌락의 사고방식을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사고방식과 빗대는 부분이 그러합니다. 아버지나 자식이 죽어도, 형이나 동생이 목숨을 잃어도 슬퍼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기뻐했던건 비정상적이라는 것이지요.
쇼이치가 어떻게 되는지 밝혀지지 않은 후일담은 다소 마음에 걸리지만, 자매가 행복을 찾았다는 결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것도 몇 가지 있습니다. 사요코가 산제물로 통 안에 갖혔을 때 미즈치의 뿔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처럼요. '불안함을 느껴 호신의 의미로 가지고 있었다'는 정도로 대충 넘어가는데, 제대로 된 설명은 아닙니다. 그렇게 아무나 가져갈 수 있게 두었다는 것부터가 설득력이 떨어지니까요. 그것도 제의 전에 말이지요. 또 호수에서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강하게 이야기했는데, 사요코가 범행을 저지른 뒤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설명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물론 공기가 들어있는 통을 사용했다는 트릭이 활용되기는 했는데, 과연 얼마나 숨을 쉴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물 밖으로 나온 뒤 사건에 대해 증언하지 않고, 숨어서 신관 연쇄 살인 사건을 일으킨 동기도 불분명합니다. 자신을 산 제물로 삼으려고 했다는게 신관들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라고 믿었다 한 들, 최우선 복수의 대상은 류지여야 합니다. 다른 신사의 신관들이 아니라요. 그리고 복수심에 불탔다 한들 신관들을 미즈치 님의 신기로 살해할 이유도 없습니다. 상식적이었다면 자신들의 편일 세이지, 류마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마을 밖 경찰서에 신고했어야 했어요.
류지가 산제물을 바치기로 결심한 뒤에도 외눈광을 유지한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의 때마다 산제물을 바친다면, 필요 없는 곳입니다. 미즈치 신을 모시는 곳이라서 쉽게 허물 수가 없었던 것일까요? 그렇다쳐도 첫 산제물을 바친게 13년 전이니,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습니다.
이미 13년 전에 통 뚜껑을 잘 닫지 않아 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또 통 뚜껑이 열렸다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았던 점이고요.

아울러, 미쓰다 신조의 작품을 어느 정도 읽은 지금 시점에서 보면, 작품의 거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쇼이치 시점의 이야기는 너무 길고 지루했습니다. 쇼이치를 통해 하미 지방에 미즈치 신 외에도 기묘한 어떤 것 - '팽것', 귀녀 등 - 이 있다는 설정을 장황하게 풀어내고 있는데, 이러한 이형 존재에 대한 서술은 다른 미쓰다 신조 작품과 거의 똑같았던 탓입니다. 추리적으로 도움이 되는 부분도 거의 없고요. 그나마 진신 호에서 미쓰 천으로 이어지는 지하 수로는 여러 통로로 접근할 수 있다 정도만 추리에 도움을 주지만, 이 역시 류마가 조성한 무덤 - 이치로의 시체가 떠내려 온 - 과 이치로의 사체가 발견된 곳 등으로 알려주기 때문에 그렇게 필요한 정보는 아니었습니다. 다 읽고나서 쇼이치 부분을 빼고 도조 겐야 부분만 추려서 읽어도 충분히 말이 될 정도였으니까요.
쇼이치 가족의 어머니가 '가가구시촌의 사기리'였다는건 시리즈 제 1작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과 연결되는데, 이 역시 천편일률적인 묘사로만 이어질 뿐 특별한 소재로 사용되지는 못합니다.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별점은 3점입니다. 재미있는건 분명하니까요. 도조 겐야 시리즈, 혹은 호러 미스터리를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24/06/07

리뎀션 - 안데슈 루슬룬드, 버리에 헬스트럼 / 이승재 : 별점 1.5점

리뎀션 - 4점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중요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베트 그랜스 경정은 손님을 걷어차 뇌출혈을 일으키게 만든 밴드 가수를 체포했다. 그런데 존 슈워츠라는 가수의 여권은 위조였다. 가수의 정체는 이미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던 존 메이어 프레이였다. 존 메이어 프레이는 오하이오의 사형수였는데, 6년 전 탈옥했었다. 그가 무죄라고 믿었던 교도관 버논 및 사형 폐지 연합의 도움 덕분이었다. 버논은 식사에 독을 섞어 건강 이상을 유발시킨 뒤, 사형 폐지 연합 소속 의사가 마취제 등을 투여하여 존의 사망을 위장했었다. 시체 운반 부대를 통해 교도소에서 빠져나온 존은 러시아 등을 거쳐 위조 여권으로 스웨덴에 입국할 수 있었다.
존의 생존을 알아낸 미국 정부는 송환 후 사형 집행을 원했다. 스웨덴은 사형과 같은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받는 개인의 송환요구는 거부하고 있었지만, 미국과의 관계에 금이 갈까 우려하여 존을 러시아로 추방하는데 합의했다. 존은 러시아에서 곧바로 미국으로 끌려가 사형 집행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사형제를 반대하던 교도관 버논의 계획이었다...


모르는 스웨덴 컴비 작가의 범죄 스릴러. 에베트 그랜스 경정 시리즈 중 하나로 내용의 핵심은 교도관 버논이 엘리자베스 피니건을 살해하고 존이 사형 선고를 받도록 만든 음모입니다. 존이 사형 집행을 당한 다음에, 자신이 진범임을 밝혀 체제를 뒤흔들 생각으로요. 사형 제도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사형과 같은 '동해보복'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지를 드러내기 위해 자살할 때 에드워드 피니건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조작하여 에드워드를 살인 사건의 피고로 만들어 버리기까지 합니다.
버논이 계획을 밀고 나가던 중간에 존을 불쌍히 여겨 교도소에서 탈옥하게 만든 과정도 재미있었습니다. 약물로 심장에 일시적으로 이상을 일으킨 후, 교도소에 고용된 같은 편 의사들이 존을 언뜻 보기에 죽은 것처럼 마취시키도록 만들어서 사망 선고를 내렸고, 그 뒤에는 시체 안치실에 집어 넣었다가 부검 절차를 핑계로 시체 운반 부대에 넣고 빼돌리는 과정 모두가 설득력있게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송환되면 죽을게 뻔한 존의 처리(?)를 놓고 고민하는 스웨덴 정부 관계자들의 모습도 흥미로왔습니다. 사람의 생명에 대한 딜레마는 항상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소재이니까요.

하지만 작품에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사형 제도 폐지를 위해 살인 사건을 조작하여 무고한 사람이 사형당하게 만든 뒤, 이를 폭로한다는 핵심 계획부터 영화 "데이비드 게일"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데이비드 게일은 강간 살인죄로 사형을 당했는데, 알고보니 그가 살해했다는 피해자는 자살했었습니다. 피해자는 데이비드 게일의 공범이었고요. 이 사실은 게일의 사형 집행 직후에 드러납니다. 사형 제도를 폐지하기 위해서였지요. 완전히 똑같은 이야기죠. 게다가 이 작품은 이보다도 훨씬 못합니다. 데이비드 게일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피해자로 알려진 콘스탄스도 불치병에 걸려 자살했던 공범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버논은 무려 세 명 - 사형 선고를 받은 에드워드까지 - 이나 죽게 만든 살인범입니다. 버논의 존재가 사형 제도가 유지되어야 하는 근거인 셈이지요. 살인마가 사형 제도 폐지를 논한다는건 가소롭기 짝이 없습니다.
작품 속 등장인물을 바라보는 시선도 큰 문제입니다. 누가 보아도 살해당했던 엘리자베스 피니건의 아버지 에드워드 피니건은 작 중 가장 큰 피해자 중 한 명입니다. 그가 존에게 엄청난 복수심을 불태우는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작가들은 에드워드 피니건을 복수심 때문에 제 정신을 잃은 변태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버논은 꽃다운 청소년 두 명을 희생시킨 살인범입니다. 에드워드 피니건마저 자신을 죽인 살인자로 조작한건, 에드워드가 그가 사랑했던  앨리스와 결혼한 것에 대한 복수로 보이고요. 그런데 작 중 버논은 시종일관 나름의 정의와 신념을 굳게 지키는 정의로운 인물처럼 등장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에드워드가 사형 선고를 받고 존이 갇혔던 사형수 동에 감금되었다는 에필로그도 억지스럽습니다. 끈을 이용하여 자살 후 총이 튕겨 나가도록 만들고, 끈은 까마귀가 먹어치우도록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미국 경찰이 '초연 반응' 정도를 검사하지 않을리 없어요. 존이 자살한게 아니라 살해당했다는걸 입증하기는 쉽지 않았을겁니다. 설령 수사가 미비하여 에드워드가 버논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썼다고 치죠. 그래도 딸을 살해한 범인을 직접 처단한 아버지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 버논이 그의 딸을 살해했다는건 이미 밝혀진 다음입니다. 납득하기 어려워요.
다른 인물들도 엉망이거나 별볼일 없습니다. 기껏 목숨을 건진 존이 분노를 참지 못해 사건을 저질러 정체가 드러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솔직히 이렇게 멍청하다면 죽어도 싸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그와 가족과의 이야기는 너무나 뻔해서 지루했고요.
에베트 그랜스도 영 마음에 드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하는게 거의 없습니다.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지 주변 인물들에게 화를 내는 것, 그리고 자신의 실수로 뇌손상이 온 아내(?) - 전작을 읽지 않아 이 설정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은 안 됩니다만 - 안니에 대해 신경쓰는 것 밖에는요. 나이 많고 화도 많은, 붙임성 없는 거구의 경찰이라는 인물 설정도 "메그레" 경감과 똑같습니다. 그나마 독특한건 스웨덴 가수 시브 말름크비스트의 광팬이라는 것 뿐입니다. 마리안나 헬만손 경위도 이런 상사 밑에서 일하는 미모의 여성 형사의 스테레오 타입에 그칩니다.

그리고 버논의 계획은 스웨덴 형사 에벤트 그랜스와 별 관계도 없습니다. 오히려 에베트 그랜스가 존의 무죄를 믿고 송환에 반대할 까닭도 없지요. 한 국가의 고위 경찰이 남의 나라 사법 제도를 존중하지 않는게 더 이상하니까요. 한마디로. 스웨덴 형사 에베트 그랜스 시리즈일 필요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에베트 그랜스의 등장 부분을 거의다 잘라내고, 존과 버논 중심으로 이야기를 꾸며도 충분했어요.

때문에 별점은 1.5점입니다. 탈옥에 대한 디테일 외에는 전부 꽝이었습니다. 앞으로 이 시리즈를 더 읽어볼 일은 없겠습니다.

2024/03/10

10호실 - 리 차일드 / 윤철희 : 별점 2.5점

10호실 - 6점
리 차일드 지음, 윤철희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잭 리처는 아버지의 고향인 뉴햄프셔 래코니아를 충동적으로 방문하여 아버지가 살던 집을 찾아 나섰다.
한편, 캐나다 출신 연인 쇼티와 패티는 새출발을 위해 고향을 떠났지만 중간에 차가 고장날 지경이라 어쩔 수 없이 래코니아 근처 모텔에 머물렀다. 그런데 손님은 그들 둘 뿐이었고, 자동차는 완전히 퍼졌다. 휴대폰 전파도 차단되어 외부와의 연락을 할 수도 없고, 마크 외의 모텔 관리자들과 충돌도 빚던 둘은 어느새 10호실 방에 감금되어 버렸다. 알고보니 마크들은 사람을 활로 사냥하고 싶어하는 멤버들을 모아 거액을 받고 사냥감을 제공하는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고, 결국 쇼티와 패티를 사냥감으로 하는 활 사냥꾼들의 밤이 시작되고 말았다.


"웨스트포인트 2005"을 잇는 잭 리처 시리즈 23번째 작품. 원제는 "Past Tense"입니다.
최소한 이 작품만큼은 원제보다 우리나라 출간 제목이 훨씬 좋네요. 원제(과거시제(?))는 잭 리처가 아버지의 과거를 찾는 이야기를 핵심으로 그린 듯 하지만, 이 작품의 핵심은 10호실에 갖힌 쇼티와 패티의 생명을 건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광할한 미국 대륙 외딴 곳에서 자동차가 고장나고, 핸드폰마저 터지지 않는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려주는 도입부부터 마크를 비롯한 모텔 관리인 일당이 10호실을 CCTV와 마이크로 감시, 도청하여 둘을 농락하며 위험에 빠트리는 과정이 정말로 흥미진진했습니다. 정비공인줄 알았던 카렐이 둘의 뒷통수를 치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화룡정점이었고요. 둘을 위기에서 구해줄 은인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사냥꾼 중 한명이었을 줄이야!

마크 일당이 둘의 생명을 걸고 벌인게 인간 사냥 게임이었다는 진상도 꽤 신선했습니다. 장기 매매라던가 스너프 필름 등을 위한게 아닐까 싶었는데 인간 사냥은 생각도 못했네요. 진상을 드러내는 '이틀치 비상식량'에 끼워넣어진 '손전등'라는 중요한 단서를 수수께끼처럼 배치해서 흥미를 더하는 전개도 일품이었고요. 억지로 비상식량에 손전등을 끼워넣어 전해 준 건 밤에 벌어질 사냥 시간에서 도망갈 때 효과적으로 쓰라는 이유였거든요. 손전등에 GPS가 장치되어 본부(?)에서 추적할 수 있다는 이유도 크고요. 하지만 쇼티와 패티는 이를 무기로 활용하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악당들의 판단 착오였던 셈이지요.

완력이 쎄고 즉흥적인 계획에 강점이 있는 쇼티, 어느정도 추리력을 갖춘데다가 행동력도 탁월한 두뇌파 패티 캐릭터의 설정도 좋으며, 사냥이 시작된 후 둘이 머리를 짜내 위기를 탈출해나는 과정도 흥미진진하게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특히 쇼티가 자동차들 휘발유를 이용하여 모텔에 불을 지르고, 앞서 설명드렸던대로 손전등을 활용하여 야간투시경을 무력화한 뒤 사냥꾼들을 처단하는 장면들은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리처가 아버지 과거를 조사하다가 마크의 모텔을 찾은 뒤, 모텔과 10호실의 이상함을 눈치채고 둘을 돕게되는 과정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마크가 완벽하게 짜낸 거짓말을 하나씩 분석하여 거짓말임을 드러내는 장면에서는 특유의 추리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요. '제 3의 인물'로 마크 일당과 사냥꾼들이 방심한 사이에 그들을 급습해서 처치하는 장면도 잭 리처스러워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친해진 변호사 캐링턴이 위험에 빠졌을거라는 추리도 잘못 짚기는 했지만 나쁘지 않았어요.

반면 리처가 아버지의 발자취를 쫓는 과정은 별 재미는 없었습니다. 와중에 아버지가 과거 저질렀던 살인 사건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별다른 이슈가 되는건 아닙니다. 리처가 우연찮게 동네 건달을 혼내주고, 사과 과수원 주인 아들을 혼내주다가 킬러와 덩치들에게 쫓기게 된다는 설정은 지루하고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무장한 사냥꾼 중 둘이나 쇼티와 패티에게 당해버리고, 마크가 혼자 돈을 차지하기 위해 패거리들을 총으로 쏴죽인 뒤 달아날 생각을 하는 등 마지막 사냥 장면은 다소 급하게 마무리된 느낌을 줍니다. 특히 마크는 리처가 있다는걸 분명 알고 있었는데도 너무 안일하게 상황을 정리하려 하는데 영 와 닿지 않더라고요. 이 상황에서는 카렐을 죽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리처 시리즈가 아니라 쇼티와 패티를 주인공으로 한 별개의 작품이었다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2023/12/16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 - 시라이 도모유키 / 구수영 : 별점 1.5점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 - 4점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리뷰에는 트릭 및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물 모두가 감염될 수 있는, 치사율이 50%가 넘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여 인류의 상당수가 사망했다. 치료제를 만들었지만 인간에게만 유효해서 사람들은 채식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영양 섭취 문제가 불거졌다. 일본 유전자 공학의 1인자 후지야마 히로미는 식용 클론 인간을 대량 생산하여 고기를 보급한다는 계획을 내 놓고 '플라나리아 센터'라는 식육 가공 시설을 만들었다. 클론의 개인 제작은 엄격하게 금지하며, 클론 고기는 먹는 본인의 클론이어야 하고, 클론은 성장 촉진제로 빠르게 성장시키기에 개와 비슷한 지성밖에 갖추지 못한다는 등의 조건을 내세워 비난을 최소화했다. 사업은 성공했고, 일본 경제도 성장했지만 후생 노동부 장관에 취임했던 후지야마는 매춘 스캔들이 터져 사임했다. 이는 클론 인간 제작을 반대했던 정적 노다 조타로 살인 사건 조사 때 드러났다.
그리고 몇 년 후, 후지야마에게 배달하기 위해 가공했던 클론 배달물에 '머리'가 함께 배달되는 사고가 터졌다. 유력한 용의자는 배달물을 포장했던 시바타 가즈시였다. 동료 유시마 미키오가 범인은 후지야마 본인이라는 그럴듯한 추리를 내 놓았지만 증거를 잡지는 못해서 둘 다 근신 처분을 받았다. 그날 밤, 잃어버린 시계를 찾으려고 다시 플라나리아 센터로 항했던 시바타는 괴한에게 습격당했고, 다음날 센터가 테러 때문에 전소되는 대형 사고가 벌어지는데....

"명탐정의 제물"로 화제를 불러 일으킨 시바타 도모유키의 데뷰작. 제 34회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 최종 후보작이었습니다.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미치오 슈스케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추천으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고 하네요.

식인이라는 금기에 도전했던 작품은 수도 없이 많지만, 이 작품에서는 식인은 단순히 미식이나 생존 목적은 아닙니다. 일종의 수단으로 식용 '클론'을 만들 수 밖에 없게 되었던 이유, 식용 클론을 만드는 플라나리아 센터에 대한 상세한 설정 등은 상세하게 설명됩니다.

추리적으로도 풍성합니다. 후지야마가 잘린 머리를 배달받은 사건에서 시작해서 시바타가 밤에 센터에서 만났던 괴한 사건, 플라나리아 센터 폭파 테러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이 연달아 벌어지며, "명탐정의 제물"처럼 여러 등장인물들이 서로 자신의 추리를 선보이다가 의외의 진상으로 이어지는 덕분입니다. 이 과정에서 식인, 그리고 클론이 트릭의 핵심 요소로 등장하기 때문에, 다른 식인물과 충분히 차별화됩니다.
전개도 괜찮아요. 단서와 정보도 공정하게 제공해줄 뿐 아니라 시바타 가즈시와 가와우치 미노리로 화자를 바꾸어가며 전개하는데, 결국 시바타 가즈시와 가와우치 이노리가 사실은 두 명이었다는 일종의 서술 트릭을 활용한 반전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좋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추리와 트릭을 위해 만들어진 설정이 허황되고 비현실적인데다가, 사건들 대부분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우연과 운이 많이 작용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완성도가 낮습니다.
핵심 트릭인 '클론으로 사람 바꿔치기'부터가 비현실적입니다. 후지야마는 노다 조타로를 살해할 때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자기 클론을 활용했습니다. 클론은 성장 촉진제를 사용하여 두뇌 개발이 더디다고 했는데, 어떻게 후지야마인 척 할 수 있었을까요? 이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게다가 알리바이를 만들거라면 대중들 앞의 노출된 장소에서 뭔가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게 나았을겁니다. 매춘부를 만나는 것 보다는 말이죠.
같은 이유로 시바타에 의해 가축으로 키워진, 실제 나이로는 몇 살 되지 않을 차보의 남다른 지성, 그리고 차보가 감금 장소를 마음대로 빠져나가며 이런저런 행동을 했다는 것, 그리고 클론이 후지야마를 살해한 뒤 그 자리를 꿰찼고, 차보가 후지야마의 클론과 손을 잡고 클론 해방과 시바타에 대한 복수로 일련의 사건을 일으켰다는 진상도 허황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보다는 성형 수술이나 쌍둥이 쪽이 더 말이 되는 트릭이었을거에요.
또 공들여 만든 클론 관련 설정이 이렇게 작가 편의에 따라 변경되는 탓에, 이는 트릭을 위해 만들어진 억지라는 느낌을 강하게 전해줍니다. 상식적으로도 사람을 위한 치료제를 만들었다면, 동물 대상으로 못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고액을 들여 인간 클론을 고기로 만드는 공장을 만드는 것 보다도 동물용 치료제를 만드는게 싸게 먹힐테고요. 설령 동물용 치료제가 만들어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동물성 단백질을 대체할 식물성 단백질은 많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무슨 큰 일이 나는건 아닙니다. 콩 등에서 뽑아낸 성분으로 고기를 만드는 공장도 최근 많이 늘어나고 있고요.

추리적으로도 뭔가 수수께끼가 많고 복잡해보이지만 결론적으로 별건 없습니다. 노다 조타로 사건은 클론을 이용한 알리바이 트릭, 후지야마 클론 머리 오배송 사고와 플라나리아 센터에 잡입한 괴한 사건, 테러 사건은 모두 시바타를 함정에 빠트리고 센터를 폭파시키려고 후지야마 클론이 실행범으로 일으켰다는게 전부거든요. 즉, 어떻게보면 시바타의 주장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증거만 없을 뿐이었지요. 
이 와중에 시바타가 '후지야마는 약시다! '라는게 증거라고 믿었던건 어이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약시인 것과, 범행과 무슨 관계가 있지요? 무엇보다도 약시가 범인이라는걸 드러내는 괴한의 센터 침입 사건의 목격자는 시바타 본인입니다. 이걸 경찰이 어떻게 믿고 수사를 하겠습니까..... 설령 그 범행을 약시인 사람만 저지를 수 있었다 한 들, 그건 단순히 정황 증거에 불과하고요.
또 마지막 테러 사건까지의 모든 사건이 차보가 계획한 음모의 한 셋트인데, 여러모로 헛점이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플라나리아 센터에 잠입한 괴한을 시바타가 제압했다면? 시바타가 센터 테러 사건 와중에 공장 내부에 남지 않았다면? 유시마 미키오가 죽지 않았다면? 뭐 하나라도 변수가 생겼다면 성립할 수 없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권해드릴 수준의 작품은 전혀 아닙니다.

2023/08/18

샘 호손 박사의 세 번째 불가능 사건집 - 에드워드 D. 호크 / 김예진 : 별점 1.5점

샘 호손 박사의 세 번째 불가능 사건집 - 4점
에드워드 D. 호크 지음, 김예진 옮김/리드비

단편의 제왕 에드워드 D. 호크의 20세기 초반을 배경으로 한 정통 본격 미스터리 단편 시리즈. 1, 2편 반응이 괜찮았었는지 3편까지 출간되었네요.
추리 소설 애호가로서 출간 자체야 반길 일이지만 솔직히 수준은 영 아니었습니다. 상당한 수준의, 아니 걸작들도 포함되어 있었던 첫 번째 사건집에 비해 두 번째 사건집은 다소 처졌었는데, 3권은 아쉽게도 2권보다도 못했어요. 기대했던 불가능 범죄를 해결하는 본격 추리물로서의 가치가 낮은 탓이 가장 큽니다. 트릭부터가 대체로 별볼일 없습니다. 변장, 자작극 트릭이 너무 많더라고요.수십편의 이야기를 쓰다보니 아이디어가 고갈된게 아닌가 싶어요.
이야기 전개도 부실해서 대부분의 작품에서 동기가 헐겁습니다. 불륜과 질투가 너무 많아요. 고작 이 정도로 이렇게까지 범죄를 저지르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동기가 설득력이 떨어지니 불가능 범죄'를 일으킬 타당성도 결여되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대부분 수록작들이 평균 이하 수준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이 시리즈도 이젠 더 읽을 일이 없겠습니다.

수록작별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묘지 소풍의 수수께끼>>
혼자 걸어가던 여자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리에서 떨어진 뒤 사망한 사건이 등장하는데, 결론은 변장 트릭이었습니다. 피해자로 변장한 여자가 피해자인 척 물에 뛰어들은게 전부에요.
트릭도 변변찮지만, 이후 전개 과정도 문제입니다. 우선 증거가 너무 빈약합니다. 옷을 갈아입는 여자를 보았다는 (변장 때문에) 술주정뱅이 묘지 관리인의 증언으로 유죄를 만들기는 쉽지 않았을거에요. 샘 호손이 직접 피해자 - 로 변장한 일당 - 가 샌드위치를 먹는걸 보았지만 피해자는 위장이 비어 있었다는 것도 증거로는 약합니다. 물에 빠진 뒤 토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 단편집의 단점을 모조리 갖추고 있는 졸작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유아 보호실의 수수께끼>>
밀실이었던 극장 내 유아 보호실에서 시장이 총에 맞은 사건인데, 트릭은 흔해빠진 자작극이라 특별한게 없을 뿐더러 동기가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시장이 밀주 유통을 한다는걸 들켜서 협박범을 살해했다는건 말이 됩니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이 총에 맞는 불가능 범죄로 자작극을 벌이는 이유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런 자작극을 벌인다고 협박범을 죽인 사건이 미해결이 될 리가 없습니다. 애초에 죽은 사람이 시장을 쐈을리 없으니까요. 보안관의 수사만 시작될 뿐이지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치명적인 불꽃놀이의 수수께끼>>
독립기념일, 폭죽놀이를 즐기려던 정비소 형제가 불을 붙인건 다이너마이트였다. 형은 즉사하고 동생은 화상을 입었다. 밀봉된 포장에서 꺼낸 폭죽을 어떻게 다이너마이트로 바꿔칠 수 있었을까?

범인은 동생이었습니다. 포장에서 폭죽을 꺼낸건 동생밖에 없으니, 형이 자살할 생각이 아니었다면 범인은 너무 뻔하지요. 마침 동생이 불을 붙이는데 계속 실패했다는 설명까지 있으니까요. 그래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중간에 등장하는 렌즈 보안관의 추리는 더 어이가 없었습니다. 정부 요원으로 가방한 밀주업자가 폭죽을 검사하는 척 하면서 바꿔치기 했다는데, 동일한 포장의 폭죽 상자를 미리 준비한다는건 말이 안되잖아요? 보안관으로는 너무 수준 미달의 인물이 아닌가 싶네요. 
여러모로 평균 이하 수준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미완성 그림의 수수께끼>>
밀실인 아틀리에에서 테스 웨인라이트가 살해되었다. 가정부 밥콕 부인은 그녀가 라디오를 켜고, 전화를 받았다는고 말했는데.....

문을 닫고 마지막에 나온건 남편이고, 가정부가 들은건 오로지 '소리' 뿐이니 범인이 누구인지는 자명합니다. 라디오를 밖에서 켜고, 전화벨이 한 번 울리고 끊기게 만든 것도 별로 어려운 트릭으로 보이지 않았고요. 전화는 건 사람이 바로 끊으면 되잖아요? 읽으면서 라디오를 켠 건 발명왕이라는 마을 주민 대령의 발명품 덕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보다도 간단한 트릭 - 창고에서 퓨즈를 연결 - 을 사용했더군요.

그래도 테스가 전화를 받았다면 라디오를 끄지 않았을리 없다 - 나중에 밥콕 부인이 경찰에 신고하면서 시끄러워서 라디오를 끈것처럼 - 는 디테일 만큼은 좋았고, 샘 호손이 환자들에게 집중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는 등 전작들보다 눈여겨 볼 부분은 조금 있기는 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밀봉된 병의 수수께끼>>
금주법이 폐지되는 달 축배를 들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크레슨 시장이 독을 마시고 죽었다. 배달된 한 상자의 셰리주 중 시장이 딴 한 병에만 청산가리가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술을 배달했던 주류업자 얀시도 총에 맞아 살해되는데......

금주법 폐지되는 시점을 배경으로 하여, 마을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술을 마시기 위해 모인다는 묘사는 재미있었습니다. 충분히 그럴 만 하지요.
술 상자를 진작에 배달받았지만, 사건 당일 배달된 것 처럼 연극을 벌였다는 트릭도 수긍할만 했습니다. '파티'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라는건 시대 배경을 감안하면 충분히 설득력있었어요. 샘 호손도 죽이려 했던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었고요.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황당한 수준입니다. 시장 등 별장에서 시간을 보낸 멤버들이 마약중독자들이었다는 설정, 마약에 중독돠어 자살한 남편의 복수였다는 동기 모두가 어이를 상실케했거든요.
사람이 하품을 한 정도로 마약에 중독되었다고 추리한 샘 호손의 추리도 어거지였고, 밀봉된 병에 주사기로 독을 넣었다는 트릭도 별로였어요. 시장이 무슨 병을 잡을지 알고 있어서 독을 한 병에만 넣을 수 있었다는 것 역시 억지스러웠습니다.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았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사라진 곡예사의 수수께끼>>
서커스단에서 공중 곡예 중이던 곡예사 한 명이 그물로 떨어지는 곡예를 한 뒤, 다시 기어올라갔지만 사라져버렸다. 그 뒤 서커스단 천막이 설치된 목장 주의 집에서 살해된채로 발견되는데....

곡예사가 사라진건 마캐팅으로, 분홍색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서 올라가는 사람을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트릭은 그럴싸했지만, 곡예사가 올라가기 전에 광대 무리가 몰려들었던걸 - 그래서 사라진 곡예사가 광대로 변장하고 빠져나갔다는걸 - 설명하지 않아서 공정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질투로 보이는 살해동기도 대충 얼버무리고 있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담뱃잎 건조실의 수수께끼>>
제닝스 담배 회사 사장 재스퍼 제닝스의 아내 세라가 일꾼 로이 핸슨과 불륜관계라는 괴편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재스퍼는 담배 건조실에서 날카로운 칼에 목이 베어 살해당했다. 주변에 있었던 두 명 - 프레스콧과 핸슨 - 은 모두 범행을 부인했고, 둘에게서 흉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누가, 어떻게 제스퍼를 살해했을까?

읽으면서 <<마스터 키튼>>에 나왔던, 주변 사물을 흉기로 쓰는 킬러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담뱃잎을 흉기로 쓴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그런데 읽어보니, 흉기인 면도칼을 풍선에 실어서 건조실의 천장에 숨겼다는 장치 트릭이 사용되었던데, <<마스터 키튼>>이 더 괜찮지 않았나 싶습니다. 트릭이 애들 장난같았기 때문입니다. 경찰이 조사에 나서면 금방 드러날 트릭이기도 하고요.
어차피 범인은 함께 있었던 두 명 중 한 명인데, 가장 유력한 용의자 핸슨이 왜 이 때 범행을 저질렀는지도 잘 설명하지 못합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눈에 갇힌 오두막의 수수께끼>>
새 차를 타고 에이프릴과 메인주로 드라이브 여행을 떠난 샘 호손은 하이킹 도중 오두막에 혼자 살고 있던 쇼터의 시체를 발견했다. 쇼터는 어떤 발자국도 없는 눈밭으로 둘러싸인 집 안에서 칼에 찔려 죽은 상태였다.

밀실 살인 사건인데 전화 설치 기사로 변장한 범인이 철제 케이블을 설치한 뒤, 케이블을 타고 집 안으로 이동했다는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솔직히 어이가 없었어요. 행글라이더를 타고 날아들어왔다 수준입니다. 흉기를 두고가는걸 잊어서 자살로 위장하는데 실패했다는 상황도 황당했고요. 무슨 장난같은 느낌이에요. <<존 딕슨 카를 읽은 사나이>>도 아니고.... 중간에 앙드레가 범인일거라며 샘 호손이 펼치는 추리도 말이 안되는건 마찬가지고요.

에이프릴이 휴양소 주인 앙드레와 결혼한다는 결말은 뜻밖이었고, 채광창에 햇빛이 들어온걸 단서로 - 눈이 쌓여있지 않았을 리 없다 - 그곳으로 범인이 들어왔을 것이라 여겨 추리를 시작하는건 좋았지만 그 외에는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천둥 방의 수수께끼>>
결혼한 에이프릴의 후임으로 고용된 간호사 메이는 이상할 정도로 천둥을 무서워했다. 어린 시절 천둥방(뉴잉글랜드의 오래된 가옥에 있는, 폭풍이 칠 때 가족이 대피하는 방)에 숨었던 기억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폭풍이 찾아온 날, 행크 포스터가 살해당했는데, 그 아내는 범인이 메이라고 주장했다. 마침 메이는 폭풍이 칠 때진료실 안에서 혼자 쉬고 있었다. 샘 호손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건 단지 15분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행크스라는 아내 브루나의 주장은 너무나 확고했고, 알고보니 메이의 부모님도 천둥방에서 행크처럼 망치에 맞아 죽었다고 했다...


범인은 메이의 쌍둥이 남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풀어가는 전개가 말장난에 가깝습니다. 샘 호손은 메이에게 여동생이 있는지 물어보는데, 다들 없다고 하거든요. '남동생'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동생이 정신이상이라 살인을 저질렀다는 동기도 영 별로였고요. 별점은 1점입니다.

<<검은 로드스터의 수수께끼>>
노스몬트 은행에 강도들이 나타났다. 재빠른 대처로 강도들은 노스몬트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들은 어디로 사라진걸까?

샘 호손은 처음에 중고차 판매원 행크가 범인이라고 추리했습니다. 하지만 은행원들이 작당했던 자작극이었다는게 진상이에요. 은행원들이 감금되었던 방이 뒷 골목과 통해있었던게 핵심이고요.

다른 수록작들보다는 비교적 추리적으로 괜찮고, 동기도 합리이었습니다 (상대적입니다). 샘 호손이 한 번 실패한다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은행강도 사건을 꾸며낸다는게 비현실적이라는 단점은 있지만 이 정도면 그럭저럭 평작은 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메리가 사건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노스몬트에 남아 샘 호손의 간호사가 된다는건, 그녀가 앞으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걸로 보이는데 두고 봐야겠네요.

<<두 출생 모반의 수수께끼>>
병원에 식붕독을 일으킨 스트리터가 입원했다. 샘은 메리와 함께 식중독의 원인을 찾고자 매그놀리아 식당을 방문했다가 누군가 망치로 복화술사 인형을 망가트린 현장을 보았다. 마침 그날, 병원에서는 누군가 스트리터를 살해하려 했고, 다음날에는 상근 간호사 중 한 명인 애나가 잠긴 수술실에서 살해당한채로 발견되었다. 수술실 열쇠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는 의사 엔들와이즈만 갖고 있었다.

스트리터가 벌인 자작극이라는건데, 자작극 트릭은 수록작에서 너무 많이 나와서 식상했어요. 시체 은닉은 보안관도 어려운 일이라 말할 정도로 비현실적 - 이동거리가 너무 멀다 - 인데다가 양 쪽으로 열리는 미닫이 문 잠금 장치에 대란 트릭은 글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공정하게 정보가 제공되지 못합니다. 알고보니 애나와 스트리터는 이부형제였고 큰 땅을 상속받을 예정이었다는 동기도 억지로 가져다 붙인 느낌이고요. 무엇보다도 불가능한 상황을 억지로 만든 이유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빈사의 환자 수수께끼>>
샘 호손이 처방한 디기탈리스를 먹은 노부인이 사망했다. 샘이 실수를 했거나, 노부인을 안락사시켰을거라 생각한 의료협회는 의료 면허 박탈까지 1주일의 기한을 주었다.
샘 호손이 보는 앞에서 노부인은 어떻게 시안화합물을 먹였을까? 그리고 곧 죽을 사람이었는데 누가, 왜?


사탕이라는 증거가 비교적 초반에 제시된다는 점에서는 공정했지만, 그 외에는 딱히 언급할 부분이 없네요. 노부인이 유언장을 바꾸려고 해서 두려워했던 조카딸의 범행이라는 것도 진부했고요. 마을에서는 추리하는 의사로 유명한 샘 호손을 불러서 독살 과정을 지켜보게 만든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농가 요새의 수수께끼>>
농장을 요새처럼 꾸민 루디 프랑크푸르트가 살해된채 발견되었다. 잠긴 정문, 2미터 높이의 전류 울타리, 파수견, 게다가 집은 모든 문과 창문이 다 잠겨 있었다.

베를린 올림픽에 높이뛰기 선수로 출전을 준비하는 빌 크롤리가 범인이 아닐까? 는 추리로 전개되다가, 배달부 폴이 진범이라는게 밝혀지는 구성입니다. 추리적으로 잘 짜여져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일종의 순간이동 트릭이 꽤 합리적으로 사용된 덕분입니다. 폴은 루디를 죽이고 트럭에 실어 놓았었습니다. 그리고 샘 호손과 방문했을 때 집 안애 시체를 유기했던 것이지요. 루디가 배달을 지시한 물건들이 이미 집 안에 있었고, 개들이 폴의 트럭에서 짖어대었다는 등 단서 제공도 공정한 편입니다.

그러나 동기는 영 와닿지 못합니다. 질투 때문에 빌을 함정에 빠트리려고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다? 지나치게 억지스럽습니다. 가문의 원수 정도는 되어야 저지를만한 범행이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목적에 맞는 범행으로 보이지도 않아요. 그냥 묘한 불가능 범죄로 보일 뿐이니까요. 빌이 함정에 빠질 이유도 없습니다. 이 정도 트릭을 고안해 낼 정도로 머리가 비상했다면, 더 직접적으로 빌에게 죄를 물을만한 상황 - 최소한 빌의 운동화같은 증거라도 현장에 두는 등 - 을 꾸며냈어야 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저주받은 티피의 수수께끼>>
188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 카우보이 일을 했다는 벤 스노가 샘 호손을 찾아와 오래전 수 종족과 만났을 때 있었던 불가능 범죄를 이야기해 주었다.
일족의 추장이 머무는 티피에 저주가 걸려서 추장의 아내, 아들, 손자, 그리고 벤 스노가 보는 앞에서 또 다른 아들 흐르는 구름마저 죽고 말았다는 사건이었다.


진상은 티피에 사용되었던 협죽도 기둥 탓에 사람들이 죽었다는 겁니다. 흐르는 구름은 아내의 복수로 독살당했고요.
스쳐 지나가는 말로 '협죽도'라는 단어를 꺼낸다던가, 흐르는 구름의 아들에 대한 설명 등 주로 '말'로 단서가 제공되는데, 그렇게 정교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늙은 추장 달리는 말이 죽지 않은건 단지 튼튼했다는 설명도 별로였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파란 자전거의 수수께끼>>
차도 트럭도 아무것도 안 지나간 길에서, 앞질러 가서 모퉁이를 돌은 앤젤라가 사라져버렸다. 현장에는 그녀가 타던 자전거만 남아있었다.

앤젤라가 숨을 수 있었던 옥수수밭의 존재를 초반에 잘 설명하지 않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남자친구 필 브륵스와 도피하려고 했다는 동기도 영 아니었고요. 그냥 도망가는 것과, 이런 실종 사건을 떠들썩하게 일으키는건 별 차이가 없습니다. 어차피 경찰이 나서서 찾게 될 테니까요. 공들여 연극을 벌일 이유는 없어요. 차라리 조금이라도 멀리 도망가는게 나았을 겁니다.
필 브룩스의 말 실수가 단서가 되는 전개도 식상했으며, 브룩스가 앤젤라의 친구 주디마저 살해한 이유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친구라면 잘 설득해서 숨어있게 해 달라고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작 중 렌즈 보안관도 브룩스가 주디를 살해했다는걸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설득력없는 범행이었어요.
마지막 이야기라는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의 졸작이었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2023/08/02

블랙 아담 (2022) - 자움 콜렛 세라 : 별점 1.5점


기원전 가장 번성하고 위대한 고대 국가였지만 현재는 국제 군사 조직 인터갱의 독재 국가로 전락한 칸다크. 인터갱의 눈을 피해 고대 유물을 찾던 '아드리아나'는 우연히 50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블랙 아담'을 깨우게 된다.
엄청난 괴력과 스피드, 방탄 능력과 자유자재의 고공비행, 번개를 쏘는 능력까지. 온몸이 무기인 '블랙 아담'은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인터갱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칸다크 국민들은 이에 열광한다.
한편, 그의 폭주를 막기 위해 '호크맨', '닥터 페이트', '아톰 스매셔', '사이클론' 으로 구성된 히어로 군단 '저스티스 소사이어티'가 칸다크에 나타나는데... (영화 소개 인용)


유럽으로 향하던 비행기에서 감상한 작품. 
듣던대로 액션은 좋더군요. 블랙 아담이 처음 각성해서 인터갱을 쓸어버리는 장면, 그리고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와 처음으로 격돌하는 장면 두 개가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인터갱 살육 장면에서는 악당을 그야말로 박살내서 무조건 지옥으로 보내버리는 화끈함이 제대로 전해졌고,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와의 격돌에서는 실사화가 어려울 것으로 보였던 호크맨을 날개의 움직임과 역동적인 모습을 통해 잘 살려내고 있으며, 닥터 페이트가 아주 멋지게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닥터 스트레인지'를 떠오르게 만드는, 같은 마법 계열 능력을 마법진이 아니라 일종의 결정 같은걸 구체화시키는 능력으로 그려낸게 독특하고 잘 어울렸습니다. 사이클론과 아톰 스매셔도 비중은 많지 않지만 능력은 충분히 선보여주었고요.
캐스팅도 좋아요. 특히 그냥 인간 자체가 블랙 아담으로 보이는 (인자블?) 더 락 드웨인 존스와 닥터 페이트 역의 피어스 브로스넌은 그야말로 찰떡이더군요. 블랙 아담이 진짜 영웅이 아니라 영웅의 아빠였다는 설정도 나름 적절하게 잘 써먹고 있고요.

그러나 각본이 너무 형편없어서 작품을 다 말아먹었네요. 힘에 의존하여 방해물을 모두 없애버리는, 안티 히어로에 가까운 응징자 블랙 아담과 이를 막으려는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와의 대결을 그렸어야 했는데, 결과물은 그냥 자기 고집이 세고 악당을 잘 죽인다 뿐 그냥 전형적인 슈퍼 히어로물이었거든요. 잘 알지도 못하는 아이 하나 살린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사람들을 죽일뻔 했다고 자책하며 힘을 포기하는건 영 와 닿지 않았어요.
그나마 블랙 아담 이야기는 괜찮은 편인데. 칸타크 동네 소년 아몬이 관련된 이야기들은 끔찍했습니다. 아이 하나가 DDP 포즈 (아래)를 취한다고 민중들이 따라 일어선다? 이런 허황된 영웅담을 억지로 끼어넣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칸타크, 인터갱 등의 설정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고요.



액션도 뒤로 갈 수록 처집니다. 특히 아크-톤 왕의 후손이라는 이스마엘이 사박의 힘을 얻어 악마로 부활한 뒤의 대결을 그린 클라이막스는 이야기 전개부터가 엉망입니다. 닥터 페이트가 죽음을 선택하여 홀로 사박과 맞서는 중에 감금되어 있던 아담을 깨우는데, 홀로 싸우지 말고 아담을 깨워서 같이 싸우면 되잖아요? 왜 개죽음을 택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사박의 디자인과 존재감 모두 별로인데다가, 결말마저 힘으로 두 쪽을 내 버리는거라 너무 허무했고요. 이렇게 존재감없던 빌런이 또 있었나 싶네요. 또 블랙 아담의 힘으로 모든게 해결되는거였다면, 더더욱 닥터 페이트 죽음은 개죽음이라는 생각만 들더군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일부 액션씬은 볼만했지만, 이 정도라면 망한게 이해가 됩니다. 차라리 블랙 아담의 안티 히어로적인 속성에만 집중했더라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등급도 대폭 높여서요. 우리나라 '범죄도시' 시리즈의 흥행이 왜 성공했는지 - 악당들을 원펀치로 부숴버리는 희열! - 연구해보면 좋겠네요. 후속편 제작이 취소되었다니 이젠 다 필요없는 이야기가 되었지만요.

2023/05/27

당신의 과녁 - 고태호 : 별점 2점

당신의 과녁 5 - 4점
고태호 지음/3rdpost(써드포스트)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스무살 청년 최엽은 연쇄 살인범 석규남의 함정에 빠져 누명을 쓴 뒤,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다행히 석규남이 노환으로 죽고, 남은 가족들이 발견한 증거를 제출한 덕분에 17년 후 풀려났다. 
그러나 17년 만에 돌아온 세상은 지옥과 같았다. 연인은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가족은 생업을 잃고 갖은 욕을 먹었으며, 어머니는 무죄를 탄원하는 거리 시위를 하다가 쓰러져 식물인간 상태였다. 이에 최엽은 연쇄 살인마의 손녀를 납치해 자기와 똑같이 17년간 감금하기로 결심했다.
죄책감으로 최엽의 협력자가 된 경찰과 당시 기자, 그리고 여동생과 절친 3인방은 최엽의 계획을 알고나서, 17년 감금할 시설 공사를 한다는 핑계로 최엽과 주말마다 어울렸다. 사회의 따뜻함, 가족의 온정 등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최엽은 석규남의 손자 - 납치 대상의 남동생 - 으로부터 자기가 무죄라는걸 알고도 그 가족들이 증거 제출을 10년이나 미루었다는걸 알고난 뒤, 납치를 결행했다. 그러나 납치 대상이 여성 연쇄 납치범 일당에 납치당하는걸 목격한 최엽과 일행들은 납치범들을 뒤쫓아 결국 그들을 체포하고 납치 대상을 구해냈다....


간략한 줄거리 소개만 보고 혹해서 보게 된 웹툰입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는 최엽의 심리 묘사입니다. 뎃셍력이 별로라 인물 형태가 계속 깨지며, 모든 묘사에서의 디테일이 부족해서 작화는 등 좋은 편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지만, 미묘한 심리 묘사는 놀라울정도로 탁월했습니다. 최엽이 분노하는 장면은 묘사의 달인 윤태호의 <<야후>>를 보는 듯한 섬찟함마저 느껴졌으니까요.
만화의 컷 구성을 잘 활용하고 있는 것도 돋보입니다. 엣 연인을 다시 만나 각자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에게 아이가 있다는게 마지막 컷에서 드러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좋은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기대했던 복수극으로는 뜨뜻미지근한 탓입니다. 최엽의 복수 외길 전개가 아니라, 최엽이 친구들을 만나 다시 흉금을 터 놓게 되는 과정처럼 주변 인물들과 관계 복원을 이루는 출소자의 사회 적응기, 주변 인물들과 여러가지 즐거운 추억을 쌓는 일종의 일상 시트콤, 거기에 연쇄 부녀자 납치범들과 대결하는 액션 추적극이 뒤섞여 있습니다. 이런 곁가지 이야기들이 비중만 놓고 보면 복수 자체보다 더 커요.
게다가 복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납치하려던 여자를 도리어 구해주게 된 뒤, 최엽이 복수를 포기한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더 큰 악을 만나서 그들을 물리치고나니 모든게 허탈해졌다는 건지, 아니면 주변 사람들을 더 이상 위험에 빠트릴 수 없었던 건지 알 수가 없어요. 이 과정에서 석규남 가족의 진심어린 사죄도 없고요.
여기까지는 그렇다쳐도, 자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한 뒤 식물인간이 되었던 어머니가 깨어난다는 말도 안되는 해피엔딩은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너무 뜬금없었어요. 최엽이 겪은 고생에 대한 보상으로 이 정도는 줘야지!라는 작가의 의도일까요? 이런 애매한 해피엔딩보다는 차라리 화끈한 복수가 더 맞는 방향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최엽 캐릭터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190cn가 넘는 거구의 근육질로 묘사되는데, 딱히 대단한 전투력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두뇌가 비상한 것도 아니고, 돈을 많이 모은 것도 아니라서 강력 범죄를 계획하는 인물로의 설득력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맨몸 운동을 조금 한 정도로 세상과 맞서 싸우기는 어렵지요. 경찰과 기자라는 조력자, 그리고 죄책감을 느낀 검사의 유산 - 납치범을 가둘 일종의 별장 - 이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했어요. 흥미진진한 전개를 위해서는 최엽이라는 인물에게도 보다 설득력을 부여했어야 했습니다.
납치 계획도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만약 납치에 성공했었더라도 체포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을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납치가 핵심인 범죄물이 아무리 아니더라도, 이래서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지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흥미로운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기대했던 복수극이나 범죄 스릴러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더 글로리>> 류의 화끈한 복수극을 기대하고 보신다면 실망하실겁니다.

2022/11/27

로그 메일 - 제프리 하우스홀드 / 이나경 : 별점 2.5점

로그 메일 - 6점 제프리 하우스홀드 지음, 이나경 옮김/arte(아르테)

<<아래 리뷰에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의 고위층 명사가 유럽 어딘가의 독재자를 암살하려다가 체포되었다. 진짜로 죽이려고 했던건 아니고, 심심풀이로 벌인 게임에 지나지 않았지만, 독재자의 부하들은 모진 고문 뒤 사고로 위장해 죽이려 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그는 천신만고 끝에 영국으로 돌아오지만, 독재자의 부하들이 여전히 자기를 노리고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불명예를 걱정한 그는 국가의 도움을 받지않고 홀로 도주하여, 과거 추억이 어려있던 도싯 지방에 은신처를 마련하는데...
.

2차 대전 직전인 1939년 출간된 전설적인 서스펜스 스릴러.
사실 저는 제목만 보고 최첨단 IT 소재물이라고 착각해 왔었습니다. Log mail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알고보니 Rogue Male 이더라고요! 외톨이 수컷, 일본식 표현으로는 한마리 외로운 늑대와 비슷하겠지요? 일종의 사냥감이지만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가끔은 흉폭함과 야성을 드러내는 주인공에게 딱 들어 맞는 제목입니다.

하여튼, 여러 미스터리 랭킹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던 작품으로, 국내에는 상당히 늦은 2019년에 출간되었는데 명성답게 서스펜스, 긴장감은 발군입니다.
외국에서 망신창이 상태로 이름모를 낚시꾼, 그리고 영국 배의 일등 항해사 베이너의 도움을 얻어 귀국한 뒤, 도싯 지방의 아무도 모르는 오솔길에 위치한 은신처로 이동하기 위해 여행하는 부부로부터 사이드카가 달린 자전거를 구입하는 등 갖은 노력을 다하고, 은신처 위치가 좁혀질 위기에 처하자 경찰 시선을 돌리기 위해 다른 곳을 은신처처럼 만들어 위장하고, 결국 외국 비밀 요원 퀴브-스미스에게 위치가 발각되어 좁은 공간에 갇혔다가 탈출하는 과정 모두 읽는내내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여러가지 잘 안배된 설정들도 긴장감을 더해줍니다. 대표적인게 주인공이 고문을 받아 '눈에 상처'를 입었다는 설정입니다. 사람들 눈에 너무 띄는 탓에 원래 계획이었던 시골 마을에 몰래 숨어드는게 불가능해져버리니까요. 선글라스로 가려도 누구나 눈에 이상이 있다는걸 눈치채버리고 말거든요.
비교적 초반에 비밀요원 중 한 명을 죽이는 바람에 영국 경찰들에게도 쫓기게 된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덕분에 주인공의 눈 이상이 전국에 알려졌을 뿐더러, 외국 정보요원들 뿐만 아니라 영국 경찰들도 주인공을 체포하려 해서 이중고를 겪게 됩니다.

주인공의 실력과 의지, 인내력만으로 이야기를 끌고가는 것도 마음에 듭니다. 조력자 - 특히 미녀 - 를 만나 도움을 얻는 헐리우드 스릴러스러운 전개는 전무합니다. 처음 탈출할 때 외국인 낚시꾼과 일등 항해사 베이너가 선선히 도와주는 장면같이 운에 의지하는 부분이 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허용 범위 안쪽입니다. 낚시꾼은 독재 반대파일 수 있으며, 베이너의 경우는 주인공이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유명인사라는 설정 덕에 도와주었을 거라는 암시를 주는 식으로 합리적인 설명도 덧붙여져 있고요.

쫓고 쫓기는 대결 구도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치밀하고 끈기있는 추적으로 주인공의 은신처를 알아낸 퀴브-스미스 대령은 라이벌로 손색이 없습니다.
더 놀라왔던건 만만치 않았던 영국 경찰의 수사력 묘사였습니다. 도싯 시골 숲 속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숨어 있던 주인공에게 거의 한끝발 차이로 육박해 올 정도의 솜씨를 보여줍니다. 심지어 맞부닥치는 바람에 정면에서 도주극을 벌이는 상황에 놓이기도 하지요.
이런 상대방들의 추적을 통해 원래 사냥꾼이었던 주인공이 사냥감이 되었다는 상황을 잘 알려주는 묘사들도 몰입을 도와줍니다.

그러나 몇가지 앞, 뒤가 맞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주인공의 독재자 암살 시도가 그러한데요, 주인공은 일관되게 단지 자기의 실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퀴브 -스미스에 의해 은신처에 산채로 감금당한 뒤에 갑자기 약혼했던 연인의 복수를 위해서라는 동기가 튀어나옵니다. 이럴거라면 처음부터 당당히 죽일 의도가 있었다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인이 남의 나라 지도자를 쏘려고 했다가 잡혔는데, 이게 왜 외교 문제가 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게임에 불과했다는 말을 외국 정보부에서 선선히 받아들여서 사고사로 죽이려 했다는 것도 말이 안되고요. 주인공은 상당한 고위층으로 보이기에, 당연히 좋은 협박거리(?)로 사용될 수 있었으니까요.

전체적으로 흥미로운건 사실이지만, 경찰 추적이 근처에 이른 탓에 가짜 은신처를 만든 뒤 그 곳에 숨어있다가 도주한 것처럼 꾸미는 장면은 과했습니다. 도주 경로와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일부러 눈에 띄는 행동을 하고, 경찰 바로 옆에 숨는 묘기를 부릴 것 까지는 없었어요. 은신처를 감추려다가 본인이 위기에 처하는건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잖아요. 또 그렇게 잘 숨을 수 있으면,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은신처에서 숨어 있는게 더 나았을테고요.
게다가 이 시도는 퀴브 -스미스에 의해 숨겨두었던 사이드카가 드러나, 은신처 바로 근처까지 퀴브 -스미스가 찾아왔을 때의 행동과는 반대라 앞, 뒤가 맞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퀴브 -스미스가 근처 농장을 다 뒤져서 오솔길이 은신처라는걸 알아냈다고 추리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앞서 경찰이 나타났을 때 처럼 다른 곳으로 도주했다고 위장하거나, 아니면 실제로 도주했어야 했습니다. 시간도 충분했었고요. 하지만 은신처에 틀어박혀 숨어있는 방법을 택했다가 산채로 감금당하고 말지요.

주인공을 은신처에 가둔 퀴브 - 스미스가 바로 그를 죽이지 않고 회유하는 척 연기를 하는 장면도 이상했습니다. 바로 죽이지 않는 이유를 영 모르겠더라고요. 영국을 떠나지 않겠다는 서류에 서명을 받기 위한 목적은 전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별로 대단한 서류가 아니라는건 주인공과 퀴브 -스미스의 대화로 이미 드러날 정도이고, 주인공 서명 정도를 위조하는게 그리 어려울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영국 정부와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것도 21세기의 한국 독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불명예가 예상된다는데, 도대체 무슨 불명예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주인공이 "사실 내가 아는 영국인 중에 그가 가져온 망할 문서에 서명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도 거부하겠지만, 대부분은 그저 고집 때문에 거부할 것이다."며 서명을 거부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무엇보다도 퀴브-스미스와의 마지막 대결이 아쉬웠습니다. 총이 없어서 고대 로마의 노포와 비슷한 무기를 직접 만들었다는 설정은 나쁘지 않아요. 그러나 퀴브 스미스가 환기구를 막았던 자루를 빼다가 주인공이 쏜 화살에 맞고 죽는건 어처구니 없었습니다. 주인공에게 총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환기구로 고개를 내민다는건 영 석연치 않았습니다. 물론 직전에 주인공이 서명을 하겠다며 퀴브-스미스를 구워 삶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총이 없다는걸 퀴브-스미스가 확실히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내용을 보강하던가, 아니면 퀴브-스미스가 예상하지 못한 무기를 사용하는 식으로 끌고가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최소한 주인공과 자웅을 겨룬 라이벌에게 어울리는 결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명성의 이유는 잘 알 수 있지만, 지금 시점의 한국 독자가 읽기에는 다소 낡은 느낌도 없지 않아서 감점합니다.
이런 작품은 아무래도 영화로 보는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과거 2번이나 - 그 중 한 편은 흑백 고전 영화 시대의 거장 프리츠 랑 감독이고, 또 다른 한편은 명배우 피터 오툴 주연 - 영화화 되었더군요. 곧 베네딕트 컴버비치 주연으로 다시 영상화된다는 소문이 있는데, 어떻게 만들어질지 기대되네요.

2022/10/30

외침과 기도 - 시자키 유 / 김은모 : 별점 2.5점

외침과 기도 - 6점
시자키 유 지음, 김은모 옮김/북홀릭(bookholic)

7개 국어에 능통한 사이키가 해외 동향을 분석하는 잡지사에서 일하며 겪는 여러가지 사건들로 구성된 연작 단편집. 시자키 유의 데뷰작으로 근래 찾아보았던 추리소설 랭킹에서 추천하길래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몰랐었는데, 작품이 발표되었던 2010년에 이런저런 상 - '주간 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0' 2위, 2010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 2위 등 - 을 휩쓸었군요.

읽어보니 과연!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독특함도 잘 살아있고 완성도도 높습니다. 특히 이국에 대한 서정적인 묘사들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굉장히 고급진 느낌을 전해주거든요.
추리적으로는 편차가 있는 편이라 전체 평균한 별점은 2.5점입니다만, 몇몇 작품 (개인적으로는 <<얼어붙은 루시>>)의 수준은 높으니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각 단편별 상세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리뷰라는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막을 달리는 뱃길>>
사이키는 사하라 사막 한 복판에서 소금을 채굴하는 대상 일행에 합류했다가 일행이 하나씩 살해당하는 사건에 휘말렸다. 사막에서 소금길을 나아갈 뿐인, 몇 안되는 일행을 살해할 이유는 무엇일까?

사이키의 모험과 여행, 그리고 삶에 대해서모험 소설과 추리 소설을 결합한 형태로 풀어주는 작품. 추리적으로도 괜찮았습니다. 특히 동기 측면에서 눈여겨 볼 만 합니다. 대장이 급작스럽게 사고로 죽은 뒤, 달랑 세 명 - 사이키까지는 네 명 - 밖에 없는 일행을 죽일 이유가 무엇일까요? 소금을 독차지하기 위해서였다면 차례로 죽인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첫 범행인 켄부를 죽일 때 다 죽이면 됐으니까요. 만약 대장의 죽음이 사고사가 아니라서 복수를 위해서였다면? 범인을 지목하고 일행의 동의를 얻어 처단하는게 깔끔했습니다. 모두가 공범이었을 수는 있지만, 그랬다면 마찬가지로 한 번에 다 죽이는게 합당했고요. 그렇다고 완전 범죄를 노리기에는 마지막 남은 사람이 범인인게 뻔하니 그것도 아니고.....
그런데 여기서 '사막의 대상' 이라는 환경에 꼭 들어맞는 타당한 이유가 등장합니다. 죽은 대장만이 사막에 난 길의 경로를 알고 있었던 겁니다! 범인 바르보예는 자기가 모르는 소금 채굴 마을로 향하는 길의 이정표를 만들기 위해서 일행들을 죽였고요. 시차를 두고 차례대로 죽였던건, 시체를 죽은 자리에 두어야 했기 때문이에요. 바르보예는 전체 길의 일부만 모른다는게 앞서 소개되는 등, 추리를 위한 단서 제공도 공정합니다.
대장이 아꼈던 어린 낙타 메챠보가 모든 길을 알고 있었다는 반전도 깔끔했어요. 이야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사막과 대상 일행에 대한 묘사도 빼어나고요.

사이키가 왜 대상 일행에 합류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애매했고, 사이키가 메챠보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는 장면은 조금 작위적이었지만 이 정도면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2008년,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제5회 미스터리즈! 신인상'을 수상했던 이력이 이해가 되는 좋은 작품이었어요.

덧붙이자면, GPS를 누구나 쉽게 이용하는 지금 시점에서는 조금 낡은 소재일 수는 있겠습니다.

<<하얀 거인>>
사쿠라는 대학 친구 사이키, 요스케와 함께 1년 전 연인과 이별했던 마드리드 근처 레엔쿠엔트로 마을에서 휴가를 보내게되었다. 1년 전, 연인 아야코는 마을의 하얀 풍차 안에 들어간 뒤 사라져 버렸었다....

사쿠라는 풍차 주인이 아야코를 살해하고, 풍차의 돌절구를 이용하여 그녀를 분해(!)했다고 추리하지만 진상은 그냥 아야코가 사쿠라 눈 앞에서 떠났던게 전부입니다. 온통 하얀 옷, 그리고 모자까지 하얀 색이었던 탓에 사쿠라는 눈치채지 못했던 거지요. 풍차가 하얀색이었기 때문이랍니다.... 솔직히 트릭은 어처구니가 없었습다.
'사쿠라'는 별명으로, 화자의 정체는 스페인인 세레소였다는 서술 트릭 역시 그렇게 잘 짜여져 있다는 느낌을 받기 어렵습니다. 일단 정보가 부족하며, 사쿠라의 정체가 이야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 탓입니다. 딱히 반전이라고 볼 수도 없었고요.

이야기도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아야코의 귀국은 레엔쿠엔트로 마을에서 급작스럽게 결정된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그녀가 세레소에게 호감이 있었다면, 당연히 사유와 연락처를 진작에 알려줬을거에요. 눈 앞에서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면,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의도였다는게 타당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이 작품에서처럼 세월이 지난 뒤 다른 유학생들을 통해 찾는다는건, 다른 목적이 있다고 밖에는 생각이 안 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추리적으로도 그닥일 뿐더러 이야기의 설득력이 낮고 공감하기 어려워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얼어붙은 루시>>
사이키는 러시아 정교회의 우라디미르 사제와 함께 우크라이나에 인접한 수도원에 방문했다. 죽은지 250년이 지났지만, 썩지 않고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리자베타 수녀의 성인 인정 절차를 함께 하기 위해서였다. 확인한 유해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우라디미르 사제가 사흘 동안 유해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한 부탁을 수도원장에게 허락받은 뒤, 사이키는 '성인'이라는게 무엇인지 수도원장과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일반적인 3인칭 시점과 리자베타 수녀를 신성시하는 스코냐 수녀 시점을 오가는 전개는 복잡하기만 할 뿐이라 생각했는데, 이는 스코냐가 수도원장을 살해했다는걸 추리할 수 있도록 잘 짜여진 구성이더군요. 읽으면서 실로 감탄했습니다. 스코냐가 수도원장, 우라디미르 사제와 사이키간 대화를 어딘가에 숨어서 듣는 묘사는, 이후 스코냐가 사이키에게 실수로 그 사실을 드러낸 뒤 스코냐가 리자베타 수녀의 유해인 척 했다는 사이키의 추리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에는 숨을데가 없었거든요.
수도원장이 기도실에서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살해당했고, 스코냐가 리자베타 수녀의 유해인 척 수도원장의 유해를 관에 넣어 두었다는 추리도 기가 막혔습니다.

이 사건이 스코냐 수녀의 그릇된 신앙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주목해 볼 만 합니다. 스코냐 수녀가 수도원장을 살해한건, 시성 (성인인증)을 받기 위함이었다는 겁니다. 수도원장은 앞서 시성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단지 성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로 삼고 싶다는 취지에서 시성을 요청했을 뿐인데 말이지요. 수도원장은 '살아있는 성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신앙심이 깊어서, 리자베타 수녀의 유해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거라 여겼다는 추리는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마지막에 사이키가 스코냐에게 물었던, '그렇다면 리자베타 수녀의 유해는 그럼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답도 인상적이었어요. 리자베타 수녀는 부활했기 때문에 유해가 사라졌다는데.... 와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가지 이해가 안되었던건, 수도원장은 시성을 위해 스코냐가 리자베타의 유해 대역을 소화하는걸 묵인했던게 분명합니다. 이는 시성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수도원장의 말과는 배치됩니다. 스코냐가 우리디미르 사제와 사이키가 조사를 나왔을 때 급작스럽게 대역을 소화했다는 묘사도 없고요. 다른 수녀들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입을 다문건지 설명되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그래도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이야기였다는건 분명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했고요. 이 단편집 최고의 작품으로 꼽고 싶네요.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외침>>
사이키는 의료 봉사를 하는 영국인 의사 애슐리 카슨과 함께 아마존 오지의 데뮤니 촌락으로 향했다. 잡지 취재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마을은 에볼라 바이러스와 비슷한 전염병으로 거의 절멸의 위기에 처한 상태였다. 살아있는 사람 중 감염되지 않은건 장로, 전사 아리밀리, 통역 역할을 하는 다니 정도였다. 그러나 외부로 도움을 청하려다 실패하고 돌아온 사이키는 그나마의 생존자들도 누군가 살해했다는걸 알게 되었다. 누가 곧 죽을 사람들을 일부러 살해했을까?

아마존 오지에서의 에볼라 바이러스 유행에 대한 묘사는 빼어나며, 사이키와 애슐리가 서로가 범인이라며 펼치는 추리 대결이 특히 볼만했던 작품입니다. 에볼라는 엄청난 고통을 동반하니 편하게 죽게 도와주었을거다, 그들은 보균자가 될 수 있으니 화를 없애기 위해 먼저 제거했을거라는 동기에 대한 각자의 주장이 설득력이 높은 덕분입니다. 사이키가 챙겼던 비옷 등 앞서 소개되었던 정보를 토대로 펼치는 추리도 괜찮았고요.

그러나 정작 진상은 황당했습니다. 범인은 전사 아리밀리였어요. 동기는 데무니 마을 사람들에게는 살아 있다는건 굉장히 중요했고, 데무니 마을만이 유일한 세계였기에 마지막 생존자는 세계의 마지막 역사에 남는, 최고의 영예라는 원주민의 세계관 때문이었고요. 이는 다니 등 다른 원주민들의 언행을 통해 살짝 드러나기는 하나, 추리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이렇게 일반 상식으로는 떠올릴 수 없는, 다른 세계관으로 동기를 해석해야 한다면, 반칙인 셈이라 추리 소설로는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기도>>
찾아가기도 힘든 밀림 속, 높이 10m되는 바위산에 천연 동굴을 파 낸 '고아.도아', 우리말로 '기도의 동굴' 이라는 곳이 있다. 동굴 안 쪽 벽에는 모두 이런저런 그림이 새겨져 있었고, 뒷 쪽 출구는 바다로 인접한 낭떠러지에 위치했다. 이런 동굴이 '기도의 동굴'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 '나'는 친구 모리노가 낸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이런 저런 조사에 나서는데...

동굴은 감옥이었다는게 '나'의 답이었습니다. 고위층을 유배했고, 그들을 출구를 통해 자살하게끔 유도했다, 동굴 안 조각들은 그들이 새긴 절망과 저주였다는겁니다.
그러나 '나'가 동티모르에서 폭동에 휩싸인 뒤, 측두엽성 기억상실에 빠진 사이키라는게 밝혀지고, 이 답은 사이키 자신의 처지를 빗댄거라는게 드러납니다. 사이키가 멀쩡했을 때, 그는 동굴은 말 그대로 기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했었거든요. 물고기를 잡으러 나간 배의 무사 귀환을 바라기 위한 장소로 바다가 보이는 출구를 만들었고, 동굴 안에 이런저런 기도 목적의 그림을 새겼다고 추리했었으니까요.
정답은 없지만 이러한 '기도의 동굴' 명칭에 대한 추리는 괜찮았습니다. 현재 사이키 상태와 연결되어 다른 답이 나온다는 구성도 좋았고요.

그런데 기억상실 설정은 다소 뜬금없는 편입니다. 전체 단편집 맥락과 잘 맞지도 않았고요. 다른 단편들은 여행, 그리고 그곳에서의 사건으로 삶과 생존, 인생과 사랑 등에 대해 생각할거리를 던져주지만, 이 이야기는 여행과는 무관하며, 내용도 자아성찰에 가까운 탓입니다. 차라리 여행지에서 물리적인 감금 상태에 놓였다고 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이 설정에서 빚어지는 다소 모호한 1인칭 시점 묘사도 그닥이었고요.
책 소개를 보니 '세계 속에 넘치는 이야기들, 그 신비하면서도 미스터리한 경험들을 전달하고자 하는 '여행자'의 바람은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전체 에피소드를 하나로 아우르는 강력한 구심점 역할을 한다.'는데 무슨 말인지 당쵀 모르겠네요.

하여튼, 별점은 2.5점입니다.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작품치고는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2022/07/30

알렉스 - 피에르 르메트르 / 서준환 : 별점 2.5점

알렉스 - 6점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다산책방

아래 리뷰에는 범행 동기, 범인 및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알렉스는 트라리외에게 납치되어 '새장'이라 불리우는 작은 상자에 갇혀 죽을 운명에 빠졌다. 트라리외의 목적은 알렉스에게 살해당한 아들의 복수를 위해서였다. 트라리외는 경찰에게 체포되기 직전 자살했지만, 알렉스는 경찰이 구조하기 전에 자력으로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카미유 반장의 수사 결과 알렉스는 산성 용액으로 남자들을 죽이고 다녔던 연쇄 살인범으로 밝혀졌고, 그녀는 경찰의 추적 아래에서도 살인을 거듭해 나가는데....

프랑스 작가 피에르 르메테르의 500페이지가 훌쩍 넘어가는 대장편 범죄 스릴러. 형사반장 카미유 베르호벤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입니다. 얼마전 접했던 모 리스트에서 '신감각 납치 미스터리' 라던가 '서점 대상, 고노미스 대상 등 모든 상을 휩쓴 사상 최초 7관왕 작품!'이라는 등 엄청난 수식어로 소개하고 있길래 궁금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3부 구성입니다. 1부에서는 알렉스가 괴한에게 납치된 뒤, 외딴 건물 속 '새장'이라 불리는 상자에 갇힌 채 죽어가는 과정과 납치 사건을 쫓는 카미유 반장 팀의 수사가 교차됩니다. 2부에서는 알렉스가 진한 산성 용액으로 여러 명을 살해하는 범죄 행각이 그려지고요. 알렉스가 자살한 뒤의 이야기인 3부에서 알렉스가 저지른 범행이 알고보니 그녀의 오빠 바쇠르가 알렉스에게 오래 전부터 저질러왔던 성범죄 탓이었고, 알렉스는 자살한게 아니라 오빠에게 살해당했다는게 밝혀지며 끝납니다.

1부에서 볼거리는 상자에 갇힌 알렉스가 좁아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몰려든 쥐떼와 극한의 승부를 펼쳐가며 탈출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입니다. '신감각 납치 미스터리'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로 실감나는 덕분에 읽는 독자마저도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듭니다. 

 2부에서의 알렉스가 저지르는 연쇄 살인 사건 묘사도 그럴싸합니다. 특히 알렉스가 자신의 정체를 숨겨가며 대담한 범행을 저지르는 과정의 설득력이 높습니다. 남자들(그리고 여자 한 명)을 유혹해서 함정에 빠트리는건 그녀의 미모 묘사로 보면 손쉬웠을테니까요. 당당히 얼굴을 드러내면서 범행을 반복했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이 그녀를 쉽게 체포하지 못하는 이유도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지문이 등록되어 있지 않으니 '범인이 알렉스다!'라는 것만 드러나지 않으면 되는데, 이건 현장에서 체포되거나 명확한 단서가 있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니까요. 여기에 더해 작품에서처럼 현금 결재를 기본으로 소지품을 최소화하여 잦은 이동과 은신을 반복한다면 더더욱 어려웠을테고요. 

3부는 일종의 대단원으로, 알렉스 과거 일기를 토대로 그녀가 11살 때 부터 오빠 바쇠르에게 성폭행을 당해왔으며, 심지어 오빠 때문에 성매매까지 하다가 산성 용액으로 하복부에 엄청난 상해를 입었다는 과거와 그 탓에 살인을 저질러 왔다는게 밝혀지고, 마지막에는 그녀를 오빠가 죽였다는게 드러납니다. 서로 별 관계가 없어 보였던 2부에서의 피해자들이 사실은 오빠 피에르의 지인들이었고, 그녀를 아프게했던 가해자라는게 함께 밝혀지고요. 1, 2부를 종합적으로 정리해서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는 점에서는 좋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베르호벤 반장의 수사추리도 눈길을 끕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납치당했던 알렉스가 어디로 어떻게 귀가했는지?에 대한 추리였어요. 몰골과 상태가 말이 아니었을테니 걷거나 택시나 버스는 눈에 뜨였을텐데 어디로 어떻게 이동했나? 라는 수수께끼인데 베르호벤 반장은 불법 체류자들이 모는 불법 택시를 이용했을 거라고 추리한 뒤, 이를 토대로 알렉스의 거처를 알아냅니다. 극도로 단서가 제한된 상태에서 납치된 여성을 찾기 위해 현장 근처에 차량이 대기할 만한 장소를 우선 파악한 뒤, CCTV로 수상한 트럭에 대한 정보를 얻는 등 다른 수사들 모두 합리적이고요.

그러나 잘 짜여진 구성에도 불구하고 지루한 편입니다. 베르호벤 반장에 대한 불필요한 심리 묘사와 서술이 많은 탓이 가장 큽니다. 전작에서 사망했던 아내 이렌을 잊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묘사 등이 그러합니다. 이런 부분들은 역시나 프랑스 소설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추리적으로도 베르호벤 반장이 펼치는 약간의 활약을 제외하고는 건질게 전무합니다. 진상이 드러나는 3부는 발견된 알렉스의 일기를 토대로 진행되고, 독자는 전혀 모르는 오빠 바쇠르와의 과거가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상당한 지능범으로 카미유 반장 팀과 심문 중 배틀을 벌일 정도로 뻔뻔했던 바쇠르가 현장에 자기 지문과 모발을 남겼다는 어처구니 없는 결말도 추리물로서의 완성도를 저해합니다. 굉장히 기발하게 범행이 드러날 것으로 생각했는데, 단순한 현장 감식만으로 드러난다는건 실망스럽더군요. 지능범답지도 않았고요. 바쇠르 캐릭터를 3부 내내 잘 쌓아올려 갔는데, 마지막 한, 두 페이지로 그 모든게 무너져버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애초에 현장 감식에서 그의 지문과 모발이 발견되었다면, 3부에서 장황하게 펼쳐졌던 바쇠르와의 대결(?)은 존재 의미를 상실한다는 문제도 큽니다. 

더 큰 문제는 2부에서 알렉스가 죽음에 이르는 장면 묘사입니다. 3부에서 알렉스는 자살한게 아니라 오빠 바쇠르에게 살해당했다고 설명됩니다. 그러나 알렉스가 머리를 세면대에 짓찧고, 술과 함께 약을 섭취하는 마지막 장면은 분명 그녀의 의지였던걸로 묘사됩니다. 지문이 지워진 뒤에 덧 씌워진 술병 지문 등을 보면, 오빠의 범행이 맞는 듯 한데, 그렇다면 이렇게 알렉스가 자살하는 듯한 심리 묘사는 거짓이에요. 이런 불공정한 정보를 중요 순간에 드러내고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는건 좋은 추리물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아니면 바쇠르의 주장대로 그녀가 자살하면서 오빠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다는게 맞다면, 오빠의 모발같은걸 어디서 어떻게 가져와서 흘려두었는지 등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나 많아요.

범행 동기도 석연치 않았습니다. 알렉스를 힘들게 했던 원흉은 오빠 바쇠르,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도 외면했던 어머니입니다. 성매매를 했던 다른 남자들은 모두 가해자이기는 해도 오빠보다 죄가 많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정작 오빠는 죽이지 않고, 오히려 오빠에게 살해당한다는건 이상합니다. 제대로 된 이야기였다면 오빠에게서 과거의 가해자들 주소를 입수한 뒤에는, 오빠를 죽였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또 알렉스의 범행은 앞서 설명했듯 설득력이 높지만, 그녀가 항상 얼굴을 드러내놓고 다녔다는건 분명 문제입니다. 경찰은 그녀의 사진도 이미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작에 공개 수사로 전환했더라면 체포는 몰라도 마지막 한, 두 건의 범행은 막을 수 있었으니까요. 이렇듯 경찰의 수사도 여러모로 딱히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키가 145cm밖에 안되는, 유명 화가의 아들인 카미유 베르호벤 반장과 거구에 고도 비만인 상관 르 구엔 상관, 카미유의 부하로 명품을 휘감고 다니는 부자 루이와 구두쇠 아르망처럼 서로 대비되는 여러 캐릭터들도 비현실적이고 작위적이라서 별로였어요. 특히 베르호벤 반장에게 이런 핸디캡과 기묘한 특성을 부여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키가 작은게 수사에 불리한건 하나도 없으니, 이는 단지 '독특함'만을 위해 부여한 특징 같은데 오히려 능력보다는 카미유 베르호벤 반장의 불안한 심리만 부각시켰을 뿐입니다. 

피해자를 둔기로 타격한 뒤, 아황산을 입에 주입해 끝장내는 알렉스의 잔혹한 범죄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3부를 통해 이 범죄가 그녀가 당했던 고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게 드러나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지나치게 자극적인 묘사로 분량을 채울 필요는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알렉스가 어린 시절 아황산으로 입은 상처 역시 과했던 설정이라 생각됩니다. 성폭행만으로도 범행 동기로는 차고 넘쳤다고 보이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작가의 전작도 그닥이었기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는데, 몇 개의 반전이 이어지고, 감금과 범행 과정에 대한 설득력이 높은 등 좋은 평가를 받을만한 부분은 제법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만만치 않은건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알렉스만 주인공으로 해서, 그리고 그녀가 정확하게 오빠를 덫에 걸리게 만들었다는 결말로 마무리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억지로 카미유 베르호벤 시리즈로 만든게 여러가지 단점들의 가장 큰 원인이니까요. 한 번 읽어볼 만은 하지만 해외 미스터리 랭킹 베스트 10에 당당히 꼽힐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2/06/16

룸 - 엠마 도노휴 / 유소영 : 별점 1.5점

 - 4점
엠마 도노휴 지음, 유소영 옮김/arte(아르테)

다섯 살 잭은 엄마와 함께 방 한 칸 짜리 별채 집에 감금된채 살아왔다. 엄마를 납치한 올드 닉은 매주 생필품을 가지고 모자를 찾아와 엄마를 농락한 뒤 돌아갔다. 그러던 중 올드 닉의 실직으로 위기 의식을 강하게 느낀 엄마는 잭이 죽은 것 처럼 올드 닉을 속여서 탈출시키고, 도움을 요청하게 만드는 '몽테크리스토 작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잭은 탈출에 성공하는데....

실화를 각색한 범죄 휴먼 드라마로 2015년 발표되어 주목받았었던 동명의 영화 원작 소설입니다. 영화 쪽이 훨씬 유명한 것 같네요. 직접적 피해자인 여성이 아니라 그 아들 잭이 화자이자 주인공인게 특징입니다.

전반부는 방 한 칸 집에 감금당한 상태로 나날을 보내는 엄마와 그 결과로 태어난 아이 잭의 생활을 그립니다. 모자가 가로세로 3.5미터에 불과한 공간에서 갇혀 지내는 동안 범인 올드 닉이 1주일마다 한 번씩 찾아와 엄마를 덮치고, 그 때마다 그가 가지고 오는 생필품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비참한 생활 묘사는 정말로 굉장합니다. 엄마가 극심한 치통에도 병원에 가지 못해 결국 이빨이 빠지고, 잭은 바깥 세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TV와 현실의 차이도 모른다는 등의 이야기가 설득력있게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이런 와중에도 어떻게든 잭에게 운동과 교육을 시키며 최소한의 상식과 교양을 갖추게 하려는 엄마의 노력도 잘 보여주고요. 또 이 와중에 모자 간의 애정, 어린 잭의 순진한 시선이 곳곳에 드러나는데, 비참한 현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동화같은 느낌을 전해주는게 독특했습니다. 자기가 피해자인줄 모르고, 자기가 감금되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요정의 시선이랄까요?

이어지는 짤막한 중반부는 일종의 모험물로 볼 수 있습니다. 실직했다는 올드 닉의 말을 듣고, 집이 은행에 넘어가면 자기들이 죽을거라 확신했던 엄마의 탈출 계획이 중심이거든요. 이른바 '몽테크리스토 작전' 으로 올드 닉이 아이가 죽었다고 믿게 만든 후, 트럭에 싣고 매장하러갈 때 탈출하는 계획이었지요.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국 잭이 탈출하는데 성공함으로서 결국 모자는 구조되게 됩니다. 

여기서 핵심은 잭의 시점에서 묘사한다는 점입니다. 어른이라면 쉽게 성공했겠지만, 잭은 세상물정이라고는 아무 것도 모르고 바깥 세상을 처음 접해 보았기에 실패할 뻔 하거든요. 치밀한 계획 끝에 성공하는 탈주극은 아니지만, 덕분에 훨씬 긴장감 넘치면서도 설득력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실존했던 범죄를 다룬 픽션이라기에 범죄 스릴러물을 기대했었는데, 그런 요소를 찾아보기는 힘듭니다. 범죄 자체보다는 범죄의 결과를 그린 이야기니 당연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책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후반부는 영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제대로 된 교육과 돌봄을 받지 못하고, 태어나서부터 집 안에 갇혀 자란 잭의 사회 적응기로 일종의 성장기인데, 이런 특수한 환경에 놓였을 아이의 심리를 유추하여 글을 쓴 상상력은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너무 깁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내용도 뻔해서 지루하기만 했고요. 

이 기나긴 잭의 성장기는 범죄와 천진한 아이를 대비시키고, 극적인 요소를 강화하기 위함이었겠지만, 차라리 아이러니 그 자체인 잭의 존재를 강조하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잭은 엄마가 감금 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선물이지만, 아빠는 엄마를 감금한 잔인무도한 범죄자 올드 닉이니까요. 굉장히 고민해 볼 만한 주제인데 이 작품에서는 너무 짧게 언급되어서 아쉬웠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큰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대했던 쟝르물도 아니라서 딱히 점수를 줄 부분이 없군요. 별로 권해드릴 책은 아니었습니다.

덧붙이자면 에버노트의 문제로 두 번 날려먹었던 리뷰입니다. 세 번째도 날려먹을 뻔 했네요. 더 길게 적기도 힘들기에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