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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8

2017 내 블로그 리뷰 총 결산

2016 내 블로그 리뷰 총결산

14차, 열 네번째!를 맞는 블로그 결산입니다. 열네살이라... 블로그 생활도 이제 중학생 레벨에 진입한다니 감개무량합니다.

숫자부터 정리해보면, 2017년 읽은 책 중 리뷰를 남긴 책은 추리 / 호러 장르문학 52 (53)권, 기타 장르문학 3 (8)권, 역사서 15 (18)권, 디자인 및 스터디 도서 2 (4)권, Food 및 구루메 관련 도서 9 (9)권, 기타 도서 20 (15)권으로 모두 101 (107)권입니다(괄호는 작년). 작년보다 소폭 줄었지만 100권은 넘겼으니 만족합니다. 

각 항목별 베스트 - 워스트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올해 발표된 작품 기준이 아니라 제가 올 한해 보고 읽은 것들 기준입니다.


2017년 베스트 추리소설 : 

"올빼미의 울음" 

단평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장편 중에서 재미와 함께 서스펜스를 가져다 주는 보기드문 수작.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 추리, 호러 장르물 중 별점 4점 이상 작품은 단 한편도 없습니다. 이 작품 홀로 별점 3.5점을 받았을 뿐이죠. 전반적으로 흉작인데, 내년에는 좀 더 재미있는 작품을 많이 읽었으면 합니다.

2017년 워스트 추리소설 : 

"나를 사랑한 스파이" "후쿠오카 살인" 

단평 : 과연 바닥은 어디인가? 

올해 별점 1점을 받은 쓰레기는 이 두 편입니다. 뭐라 이야기하기도 어려운 수준의 망작들입니다. 꼭 피해가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7년 베스트 / 워스트 기타 장르문학 : 

"수상작 없음" 

올해 기타 장르문학은 딱 3권밖에 읽지 않아 선정할 작품이 없네요.

2017년 베스트 역사 도서 : 

"보석 천 개의 유혹" 

단평 : 첫번째 장은 별점 5점도 아깝지 않음. 

올해는 역사 도서 중에서 "대지를 보라" "북로우의 도둑들" "보석 천 개의 유혹" 이 별점 4점이었습니다. 무려 세 권이나 별점 4점이라니 대단하지요.
전부 재미와 가치를 동시에 지닌 좋은 책들이지만 이중 한 권을 꼽는다면, 일제 강점기 시대에 대한 개인적 관심사가 크게 작용한 "대지를 보라", 특정 특정 소재에 집중한 "북로우의 도둑들" 보다는 재미와 대중적인 측면에서 앞서는"보석 천 개의 유혹"을 올해의 베스트로 꼽습니다.

2017년 워스트 역사 도서 :

"수상작 없음" 

역사 도서는 좀 가려읽는 편이라 워스트가 대체로 없습니다. 올해 별점 2점 짜리 책은 두 권인데 "워스트"라고 할만한 책들은 아닙니다.

2017년 베스트 디자인 / 스터디 도서 : 

"수상작 없음" 

읽은 책이 2권 밖에 안되기에 평가가 불가하네요.

2017년 베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수상작 없음" 

올해 읽은 10권 모두 고만고만해서 딱히 베스트는 없습니다. 별점 3점짜리 책은 4권인데 이 정도 별점은 베스트로는 좀 애매하죠.

2017년 워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진짜? 가짜?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본 음식 이야기" 

단평 : 전반적으로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크다. 

온갖 잡다한 정보를 담아내어서 주제에 걸맞지도 않았고, 깊이있는 내용도 부족한 등 총체적 난국입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e-book 으로 읽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2017년 베스트 기타 도서 : 

"작가의 수지" 

단평 : 이쪽 바닥에 속한, 관심있는 사람들 모두의 필독서.

작가로서의 벌이에 대한 상세한 정보 전달은 물론 여러모로 허투루 듣기 어려운 프로 작가의 의식이 선명히 빛나는 멋진 에세이입니다. 재미까지 있으니 별점 4점을 받는건 당연하지요. 이 쪽 바닥 (출판)에 어떤 식으로든 속해 있거나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한 번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2017년 워스트 기타 도서 : 

"윤광준의 신 생활명품" 

단평 : "생활 명품"과는 몇 광년 멀어지다. 

올해 기타 도서 중 별점 1.5점을 받은 책은 이 책과 "학교 출입 금지" 의 두 권입니다. 그래도 "학교 출입 금지" 는 애초부터 제 취향은 아닌, 아동용 성장기 비스무레한 책이라 그렇다 치더라도(딸이 골라줘서 억지로 읽었을 뿐입니다...) 이 책은 너무나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당당한 올해의 워스트에요. "생활 명품" 이라는 말이 아까운, 그냥 비싼 명품 소갯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널리고 널린 광고가 태반인 명품 소개 잡지와 구분하기도 어려울 정도입니다. 오히려 최신 트렌드나 신상을 소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잡지보다도 못합니다.

그 외 만화는 "피너츠 완전판 5"가 별점 4점으로 올해의 베스트이며, 다른 작품들은 대체로 무난했습니다. 딱히 소개해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결산평 : 

순수한 책만 따져서 올해도 완독한 책이 100 권이 넘네요. 이 정도면 취미인으로 할만큼 했기에 만족스럽습니다. 추리, 호러 등 장르 문학은 최근 점수가 별로 좋지 않지만, 그래도 작년 보다는 조금 나은 듯 해서 다행이고요. 내년에는 보다 재미있고 가치있는 작품을 많이 읽게 되면 좋겠습니다.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모든 분들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 원하시는 일 다들 이루시는 그런 한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작년, 그리고 재작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분들이라면 남들이 관심갖지 않는 사소하고 디테일한 것들에도 관심을 가지시는, 정말로 세심한 분임이 분명할테니 내년에는 더욱 잘 되실거에요. 사랑합니다~!

2017/12/25

죽이는 요리책 - 케이트 화이트 엮음 / 김연우 : 별점 2점

죽이는 요리책 - 4점
케이트 화이트 엮음, 김연우 옮김/라의눈

MWA (미국 추리 작가 협회) 에서 소속 작가들을 대상으로 레시피를 추천받아 모아 놓은 요리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추리 소설 속 요리"라는 주제로 글을 조금 쓰고 있기 때문에 흥미가 생겨 구입했습니다.
구입 전부터 "요리"와 "추리 소설" 에 관련된 글들은 아니고 단순한 레시피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별로 큰 기대도 없었고요. 

역시나, 책은 유명 작가들이 짤막한 레시피 소갯글과 함께 레시피를 실어 놓은게 전부라 딱히 언급할 내용이 많지는 않네요.
오히려 책의 성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이런 의뢰를 받았다면 최소한 제 작품, 자기 작품에 등장했던 인상적인 레시피를 소개했을 겁니다. 루이즈 페니의 "마담 브누아의 투르티에" 처럼 말이지요. 루이즈 페니는 자신의 작품 속 묘사와 함께 투르티에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작품에서는 스쳐 지나가는 소재에 불과하긴 하지만, 최소한 자신의 작품 속에는 등장하는 소재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의 특기 요리" 라던가, "내 시리즈 탐정이 즐겨 먹음직한 요리"라면서 작품과 별 상관도 없는 레시피들이 실려 있는 건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아울러 "MWA" 소속이지만 지명도가 떨어지는 작가들이 많다는 점도 책의 매력을 반감시킵니다. 전부 110명의 작가가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는데, 제가 이름을 들어보았거나 한 권이라도 책을 읽어본 작가는 15명이 채 안 됩니다. 제가 그래도 추리 소설을 꽤 읽은 편인데 이 정도라면, 아마 일반 독자분들은 한두 명(리 차일드나 제임스 패터슨, 길리언 플린 정도?) 알 정도겠지요. 유명 작가의 레시피라면 팬심으로라도 구해 볼지 모르겠는데 이름을 알 만한 작가조차 적으니, 우리나라에서는 여러모로 흥행하기 힘든 책이겠구나 싶습니다. 

또 레시피들의 거의 대부분이 "오븐"을 필요로 해서 집에서 해 먹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도 아쉬운 점이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재료도 많고요. 토머스 H. 쿡의 "채식주의자 칠리 프롤로그" 는 아주 그럴듯해 보이는데 "초리조" 를 어떻게 구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아예 절망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존 매커보이의 "파산자의 굴라시" 처럼 국내에서도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 이루어진 레시피도 제법 되니까요. 파산자의 굴라시는 제일 먼저 간 쇠고기를 양파, 피망과 함께 냄비에 볶은 후 마늘 소금으로 간합니다. 국수를 알 덴테 직전까지 삶아 쇠고기, 채소를 볶은 냄비에 넣고 토마토 소스도 넣은 후 뚜껑을 연 채 약한 불에 15분 정도 끓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케첩을 넣어 잘 섞으면 완성입니다. 맛있어 보이죠?
또 "베이커 가의 음식 사냥개"라는 제목으로 홈즈의 작품에 등장하는 음식들을 소개한다던가, "당신의 정원에 있는 예쁜 독"이라는 제목으로 일상 속 독초를 소개하는 식으로 짤막하게 실린 몇 가지 팁들은 무척 반가웠습니다. 책도 만듦새는 아주 좋고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딱히 마음에 드는 책은 아니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유명 작가가 되면 몇 줄의 레시피 소개만으로도 돈을 벌 수 있어서 참 좋겠다는 생각만 들 뿐입니다. 수록 작가 중 누군가의 굉장한 팬이 아니시라면 딱히 권해드리지 않습니다. 25,000원이라는 가격을 생각하면 더더욱 말이죠.

2017/12/24

막대가 하나 - 타카노 후미코 / 정은서 : 별점 2점

막대가 하나 - 4점
타카노 후미코 지음, 정은서 옮김/북스토리

북 스토리 아트코믹스 시리즈 다섯 번째 단행본입니다. 관심이 가던 차에 연휴를 맞이하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재 작품인, 과묵하면서도 성실한 남편과 그를 믿고 따르며 묵묵히 내조하는 아내의 잔잔한 일상을 그린 "아름다운 마을" 은 괜찮습니다. 잔잔한 이야기에서 일상 속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다른 작품들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게 하는 좋은 작품이에요. 이와 비슷한 잔잔한 이야기인, 익숙치 않은 초행 심부름길을 다룬 "버스로 네 시에" 도 마음에 들었고요. 특히 이 작품은 앵글을 과감하게 사용한다는 특징이 있는데, 영화적이기도 하면서 시대를 뛰어넘어 신선함을 가져다 준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들은 그냥 저냥입니다. 우선 "병에 걸린 토모코"는 굉장히 짧은 소품이라 언급하기 애매하고, "내가 아는 그 아이" 는 자신의 감정 표현에 대한 이야기인데 대단한 내용은 아니에요. "도쿄 코로보클"은 이야기는 명확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이야기였고요.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야기로 성립은 하는데, 마지막 수록작으로 가장 긴 중편 분량의 "오쿠무라 씨의 가지" 는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더군요. 전기점을 운영하는 오쿠무라 씨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아마도 외계 지성체로 보이는 아가씨가 찾아옵니다. 그녀는 25년전 6월 6일 목요일 오쿠무라 씨가 먹었던 식사에 대해 물어봅니다. 그가 먹은 식사가 자기 선배의 결백을 증명해 줄 수 있다는 이유로요. 그리고 온갖 기묘한 도구로 당시 상황을 추측해 나가는 내용으로 "막대가 하나"라는 대사가 여기 등장하는데... 내용을 이해할 수 없어서 줄거리를 요약해드리기도 힘드네요. 기묘한 설정과 과감한 묘사들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작품에 제대로 녹아났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시대를 초월하는, 아직도 세련되어 보이는 깔끔한 작화와 선 굵은 전개는 충분히 인상적이고, 잔잔한 이야기 속에서 깊이있는 심리 묘사와 기묘한 설정이 가끔 눈에 띈다는 점에서는 "카페 알파"의 직계 조상 쯤 되는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카페 알파" 만큼의 재미나 고즈넉함, 여유를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아트 코믹" 취향은 아닌 듯 싶네요.

2017/12/17

배빵빵 일본식탐여행 한 그릇 더! - 타카기 나오코 / 채다인 : 별점 2.5점

배빵빵 일본식탐여행 한 그릇 더! - 6점
다카기 나오코 지음, 채다인 옮김/애니북스

2권이 나왔는지 전혀 몰랐는데 얼마전 알고 구입하게 된 다카기 나오코의 에세이 만화입다. 1권과 마찬가지로 타카기 나오코 에세이 만화의 진수인 음식, 여행, 일상과 유머가 모두 포함된 즐거운 작품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작화, 만화적 구성도 조금 실망스러웠던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훨씬 '만화'에 가깝고요. 1권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술과 음식을 더 많이 먹고, 더 먼 곳으로 떠난 여행이 많다는 정도? 제목에 '배 빵빵'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정말 많이 먹더라고요.

하지만 대지진 이후 갈 생각이 없어진 후쿠시마를 비롯한 동북부 지방 여행기가 절반 정도 되는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후쿠시마와 카나가와 편에서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많이 등장해서 더 그러했어요. 후쿠시마의 꿀경단과 도부지루를 비롯한 해산물들, 카나가와의 네이비 버거와 시로코로 곱창 등은 당장이라도 먹고 싶은데 말이지요. 그래도 이러한 부분은 여행의 용이성 문제일 뿐, 이야기 자체는 충분히 재미있고 즐겁습니다.
고치, 미야자키와 카고시마는 충분히 허용 범위라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었어요. 특히나 고치의 가다랑어 타타키는 이런저런 만화 등에서 많이 접해서 먹어본 적은 없지만 굉장히 친숙한데 정말이지 먹어보고 싶네요. 타카기 나오코도 완전 극찬하고 있으니까요. 특히 맛있다고 한 소금 타타키는 "술 한잔 인생 한입"에서 주인공 소다츠의 친구 다카노마타가 집에서 만들어 주는 에피소드도 있었는데, 이렇게라도 먹어봐야하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 외에도 고치 시골 초밥과 각종 디저트, 미야자키의 토종닭 숯불 구이도 언젠가는 한 번 먹어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요.

이렇듯 1권, 그리고 타카기 나오코 팬이라면 누구나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마지막 에피소드는 번역본이 출간된 대만 출판사 요청에 의한 대만 여행기인데 우리나라에도 거의 전 작품이 번역 출간된 만큼, 3편에서라도 다루어주면 어떨까 싶습니다. 번역하신 채다인님도 찬조 출연하시면 더 좋고요.

캐리 - 스티븐 킹 / 한기찬 : 별점 2점

캐리 - 4점
스티븐 킹 지음, 한기찬 옮김/황금가지

호러 문학의 제왕 스티븐 킹의 기념비적인 데뷔작입니다. 영화 버젼으로도 굉장히 유명하지요. 주말 내 읽을 거리를 찾다가 호기심에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영화로 내용을 이미 알고 있던 탓입니다. 광신도 어머니 때문에 겪는 성적인 무지와 왕따로 촉발되는 거대한 재앙이라는 핵심 내용은 영화와 똑같거든요. 게다가 돼지피를 뒤집어 쓴다던가 하는 묘사는 아무리 잘 써도 영상을 따라가기도 힘들 판인데, 정작 잘 쓰여져 있지도 못합니다. 돼지피에서 이어지는 클라이막스인 캐리의 폭주와 마을에 닥치는 거대 재앙은 데뷔작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박력과 화끈함, 통쾌함 모두 부족하고요.
복수 과정이 너무 짧다는 문제도 큽니다. 대표적으로 크리스와 빌리의 최후는 최근 영화 쪽이 몇 배는 더 낫습니다.

그래도 소설에서는 혹시 뭔가 다른 전개가 있을까 싶었는데 별다른 건 없습니다. 신문 기사, 다양한 인터뷰, 고백서 등 이런저런 인용 문서들로 캐리 사건이 실존했음을 강하게 드러내고, 전개에 설득력을 더하고는 있지만 있으나 마나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입니다. 작가 후기에서 고백하듯 단편 분량을 중, 장편 이상으로 늘리기 위한 꼼수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았어요.

그래도 몇가지, 담임과 교장 선생님은 제대로 된 교육자였고 수지와 토니, 특히 그 중에서도 토니는 순수한 의도만 가지고 있었다는건 눈에 띄었습니다. 이들의 노력만으로도 캐리는 어머니로부터 벗어나 충분히 행복해 질 수 있었을텐데 아쉽습니다. 악역을 담당하는 크리스와 빌리가 단순한 일진은 아니고 비교적 복잡한 배경을 갖추고 있다는 점도 조금은 특이했고요. 그래봤자 동네 건달이긴 하지만요.

한마디로, 스티븐 킹의 데뷔작이라는 점 외의 장점은 찾기 힘듭니다. 발표 당시라면 모를까,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았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만, 역사적인 가치를 감안했을 뿐입니다. 영화를 이미 보셨다면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7/12/10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김정선 : 별점 2.5점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6점
김정선 지음/유유

20년 이상 단행본 교정 교열 작업을 해 온 저자가 어색한 문장을 다듬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예제가 많고 현실적이라 마음에 듭니다. 굉장히 실용적이에요.

특히 빼야 하는 것들이 아주 대박이네요. 굉장히 충실하고 이치에 맞습니다. 저 자신부터 생각없이 반복했던 습관이 빼야 하는 것들로 굉장히 많이 등장해서 부끄럽기도 했고요. 그래도 이런 방법들을 잘 익힌다면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겠죠. 대표적인 예는 아래와 같습니다.

  • '-적', '-의' 를 뺄 것
  • 의존명사 '것'을 뺄 것
  • '있다' 라는 표현은 주의하고 뺄 수 있으면 빼자. 쓸데없는 장식이다.
  • '- 들 중 하나', '- 중 대부분' 역시 습관적으로 쓸 때가 많다. 되도록 빼자.
  • '될 수 있는', '할 수 있는' 도 뺄 수 있으면 빼자.
  • 지시대명사 '그', '이', '저' 와 '이렇게' 도 마찬가지로 빼자.
  • '여기', '저기', '거기'도 가려 써야 한다.
  • '놀라기 시작했다' 대신 '놀랐다' 처럼 '시작하다'는 명확한 항목 외에는 붙이지 말자.
  • 말을 이어 붙이는 접속사는 자제하자. '가령', '그리고', '그래서' 나 '은', '는' 과 같은.
  • '이', '가' 와 같은 주어 하나에는 서술어 하나를 쓴다. 그 뒤에 관형사를 붙이는 말도 많지만 뺄 수 있다.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 대신 '아무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 처럼.
  • '- 같은 경우', '- 에 의한', '-으로 인한' 은 쓸 수는 있지만 습관처럼 반복하지 말자.
이렇게 빼야 하는 요소들을 실제 문장 예와 함께 차분히 설명해 주고 있어서 이해가 쉽습니다. 당연하지만 사전적인 의미와 함께 설명되어서 합리적이기도 하고요. '-에 대한' 에 대한 설명이 대표적입니다. 사전적 의미와 함께 용례를 설명해 주는데, 뭉뚱그리지 말고 구체적으로 써야 한다는 결론이에요. '사랑에 대한 배신' 이라는 문장에서는 빼기 어려우며, 빼려면 '사랑을 저버리는 일'과 같이 풀어써야 한다는 식입니다. 뭉뚱그려 표현한 문장은 구체적으로 쓰는게 좋다고도 하고요. 아울러 '-에 대해'는 빼도 된다고 하네요.

사전적 의미를 통해 새롭게 알게된 용법들도 많습니다.

  • 주격 조사는 '이','가' 고 '은', '는' 은 보조사이기 때문에 '이', '가' 는 말하는 주체이고 '은', '는' 은 화제의 중심이라는 설명.
  • '에' 는 처소나 방향, '을' 은 목적이나 장소라는 것.
  • '-에' 는 무생물, '- 에게'는 생물에 붙이므로 선전포고는 '적국에게' 가 아니라 '적국에' 하는게 맞다는 것.
  • '- 을 하다'와 '하다'는 다른 말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 '멋진 그림으로 장식을 했다.' 에서는 장식이 목적어입니다. 멋진 그림으로 다른걸 할 수도 있었지만 장식을 했다는 의미죠. '멋진 그림으로 장식했다' 는 말 그대로 멋진 그림으로 장식한 것이고요. 즉 내가 쓰려는 문장이 하다가 동사인지, 다른 동사가 주가 되는지 가려 써야만 합니다.
피해야 하는 용법 설명도 많아요.
  • '-로의', '-에게로' 처럼 조사가 겹친 표현은 피하자.
  • '-로부터' 는 '-에게', '-와', '-에서' 로 나누어 써야 할 표현을 뭉뚱그려 대신한 것으로 피해야 한다.
  • 두번 당하는 말을 만들지 말자. '나뉘어지다' 는 '나누다'의 당하는 말인 '나뉘다'와 '나누어지다'가 합쳐진 말이다.
  • '시키다'는 자제하자.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 대신 '소개해 줘' 로 충분하다.
  • '-가 되다'와 같이 구태여 '되다'를 동사로 쓸 필요는 없음.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저자가 쓴 "문장의 주인은 문장을 쓰는 내가 아니라 문장 안의 주어와 술어임." 이라는 글은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여태까지 놓치고 있던 것을 비로서 깨달은 느낌이랄까요?

이렇게 실용적이고, 도움이 되는 부분도 많은데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용례 중간 중간에 삽입된 저자와 소설가 함진주 씨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소설은 재미도 없고, 내용에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200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인데 가격이 12,000원이나 한다는 것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요. 도서출판 유유의 책들이 대체로 분량에 비해 가격이 높은데 솔직히 무슨 근거로 책정된 가격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책만 해도 쓸데없는 함진주 씨 이야기를 빼고 120여 페이지 정도로 정리해서 '살림 지식 총서' 처럼 5,000원 이하 가격으로 내 놓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글을 쓰시는 분들이라면 한번 쯤 읽어보셔도 괜찮겠지만 가성비에 문제가 있다는 점은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도판이 하나도 없는 만큼 ebook으로 읽어도 되긴 하지만 ebook의 현재 가격도 8,400원이나 하는군요. 혹시 모를 세일이 있다면 한 번 노려보시기 바랍니다.

2017/12/09

마스터 키튼 리마스터 - 우라사와 나오키, 나가사키 타카시 / 강동욱 : 별점 2점

마스터키튼 리마스터 - 4점
우라사와 나오키, 나가사키 타카시 지음, 강동욱 옮김/대원씨아이(만화)

전설의 작품 "마스터 키튼"의 20 년 뒤 이야기를 그린 후속작입니다. 출간된지 1년이 넘었는데 리뷰가 늦었네요. 

키튼이 오리지널 시리즈 마지막에 도전한 도나우 강 유적 발굴에 성공하지만, 박사 학위도 없고 후원자도 없어서 연구를 계속하지 못하고 여전히 탐정업무를 - 짬을 내어 - 진행한다는 설정으로 단편들이 진행됩니다.
각 단편 에피소드들은 일견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구 시리즈의 좋았던 이야기들과 비슷한 느낌은 전해주거든요.그 중에서도 키튼의 학자적 지식이 돋보인 "매리언의 덫" 과 "하바쿡의 성야"가 특히 괜찮았습니다. "매리언의 덫"에서는 트로이 목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하바쿡의 성야"에서는 물에 적신 신문지로 총알을 막는다는 설정이 좋았던 덕분입니다. 

그러나 보스니아-헤르체고비아 사태가 이야기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점, 구 시리즈에서 질릴 정도로 보았던 특정 인물의 도망과 암살 시도 등이 반복되는 점 등은 지루했습니다. 냉전 시대 스파이들과 군인의 사회 부적응을 다룬 에피소드들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런건 한마디로 좋았던 과거 영광의 자가 복제에 불과하지요.

게다가 키튼은 전직 군인으로서의 실력을 거의 보여주지 않고, 그냥 학자나 보험 조사원 이미지로만 등장해서 나름의 매력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키튼의 아버지도 건재하고 성인이 된 딸 유리코도 반갑긴 한데, 가족 외 다른 구 시리즈 캐릭터들이 등장하지 않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특히 후반부 주요 인물이었던 찰리 채프먼의 근황은 아주 궁금했는데 말이지요. 그나저나 딸 유리코도 이혼하는데 3대가 다 이혼하다니, 참 유니크한 가족이에요. 물론 유리코가 이혼한 건 키튼의 편이 되어주지 않은 남편 탓이기는 합니다만.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정도라면 돌아오지 않는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작화, 내용 모두 구 시리즈에서 한 발자욱도 나아가지 못한 과거의 유물에 불과합니다.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페퍼로드 - 야마모토 노리오 / 최용우 : 별점 3점

고추의 발상지에서 시작하여, 고추가 전 세계로 전파되는 과정을 그린 음식사, 문화사, 미시사 서적입니다.

농학 박사이자 민족, 민속학자로 화려한 이력을 지닌 저자가 직접 발로 뛰고 조사한 정보들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내용이 굉장히 충실하고 신뢰가 갑니다. 고추가 자생종에서 처음 재배종으로 바뀌게 된 남미에서의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저자의 젊은 시절 박사 논문을 읽기 쉽도록 재구성했다고 하는데, 수록된 사진과 분포도 등의 도판만으로도 박사 학위는 충분히 딸만 하다 생각될 정도에요.
새롭게 알게 된 내용도 많습니다. 고추가 매운맛을 지니게 된 이유는 동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인데, 새는 고추를 좋아한다고 하네요. 씨앗을 널리 퍼트리기 위해 선택적으로 진화되었기 때문이랍니다. 굉장히 신기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고추는 중남미에서 가장 오래된 재배 식물로 기원전 8,000~9,000년 경부터 이용되기 시작하여 수천 년에 걸쳐 재배화되었습니다. 이후 콜럼버스가 처음 발견하여 후추를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16세기 중반 무렵에는 스페인 곳곳에서도 재배가 시작되죠. 매운맛은 이런저런 편견을 불러일으켜 유럽 전역으로 퍼지지는 못했지만, 이탈리아 등에서는 널리 퍼지게 됩니다. 흔히 들어본 "페페론치노"가 바로 고추라는 뜻이죠.
또 고추의 하나인 파프리카는 헝가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헝가리에는 맛이 아니라 관상용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는데, 이후 오스만 제국을 거쳐 식용 고추가 유입됩니다. 헝가리에서 고추를 "터키 후추"라고 부르는 게 가장 큰 증거죠. 그 후 덜 매운 고추를 선별해가는 과정을 거쳐 파프리카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파프리카는 1937년 얼베르트 센트죄르지의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센트죄르지는 비타민 C를 연구하기 위해 이를 분리해내야 했지만, 감귤류에서 분리하는 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 답보상태였는데, 우연히 저녁 식사로 올라온 파프리카를 실험한 결과로 다량의 비타민 C를 분리하는데 분리하여 성공하게 되었다고 하거든요. 수많은 국경과 시대를 넘어 대단한 결과를 가져온 멋진 이야기입니다.

이후 노예제 때문에 아프리카로 전해지는 과정, 대항해 시대를 거쳐 인도로 전해지는 등 세계화되는 과정 모두가 상세하게 소개됩니다. 당연히 한, 중, 일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로의 전래도 상세하고요. 여기서 몇 가지 특기할만한 점은 매운 요리로 유명한 사천 지방에서도 고추를 이용한 건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니라는 점, 한국에서도 18세기나 되어서야 김치에 고추를 사용한다는 기술이 등장한다는 점 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고추는 중국에서 전래하였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전래하였을지 모른다는 것도 흥미로웠으며, 또 일본에서 왜 중국이나 우리나라처럼 고추를 많이 먹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고기 요리를 중국이나 우리나라처럼 많이 먹지 않았기 때문이라는데 아주 그럴듯했거든요. 빨간색과 매운맛을 통한 일종의 '벽사 신앙'도 큰 역할을 했다고 하니 놀랍습니다.

이렇게 고추의 역사와 그 전파 과정, 그리고 나라별 특징 등을 모두 아우르는 고추의 집대성 같은 책입니다. 재배화 과정에 대한 내용은 조금 지루하고, 나라별 전파 과정과 레시피를 보다 상세하게 실어주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지만, 단점은 사소할 뿐입니다. 재미와 가치 모두 높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고추에 대해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당장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17/12/03

대포와 스탬프 03, 04권 - 하야미 라센진 : 별점 2.5점

[고화질] 대포와 스탬프 03권 - 6점
하야미 라센진 지음/미우(대원씨아이)
[고화질] 대포와 스탬프 04권 - 6점
하야미 라센진 지음/미우(대원씨아이)

출간된 지 제법 되었지만 리뷰가 늦었네요. "대포와 스탬프" 제3, 4권입니다. 전자책으로 구입하여 읽었습니다.

이번 권들에는 단편 에피소드도 있지만, 전작에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 비중이 더 큽니다. 특히 헌병대 이중 스파이 시난 중위를 핵심으로 이야기를 길게 끌고 가려는 작가의 의도가 강하게 보입니다. 물론 짤막하게 소모될 캐릭터는 아니라 생각했지만, 가면 갈수록 그 스케일이 정말로 커져서(마약밀매 조직의 운영이라던가, 비행선 테러 등) 당황스럽네요. 덕분에 밀리터리 물로서의 가치가 훼손된다는 문제도 생기고요. 특히 공화국, 공국에 걸쳐 있는 범죄 조직을 다룬 에피소드는 군대 이야기하고는 상관이 없었으니까요. 이는 사라진 보고서를 둘러싼 암투가 벌어지는 4권 마지막 에피소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그림체와 어울리지 않는 잔혹함, 성적인 묘사도 별로였습니다. 형무소 내 세력 다툼과 그에 따른 희생, 잔혹한 현실을 그린 아네티카 주인공의 번외편 "북극 번외지" 가 대표적입니다. 이런 작화로 다루기에는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았던 탓입니다.

물론 단점만 있는건 아닙니다. 전편부터 이어지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 - 장갑 열차 부대의 재등장, 대령이 나름 SF 작가로서 확고부동한 위치가 있다는 등 - 은 즐거웠으며 캐릭터들을 꼼꼼하게 만드는 관련 에피소드도 나쁘지 않았어요. 보이코 상사의 부인 등장, 마르티나 중위의 고향과 가족 이야기 등 처럼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림체하고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아네티카 병장이 과거 형무소에 있었던 죄수였다는 과거도 이야기만큼은 마음에 들었고요. 작화와 어울리는 귀엽고 유쾌한 이야기도 없지는 않습니다.

또 비중은 작아졌지만 특유의 집요한 밀리터리 관련 설정도 여전히 즐길 거리임에는 분명합니다. 구소련군이 모티브인 독특함에 더해진 묘사는 그야말로 최고 수준이니까요.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는 '있었음 직한' 메카닉들도 마찬가지로 반가웠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저는 꽤 재미있게 읽었지만, 팬이 아니라면 조금 애매할 수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덧붙이자면, 전자책으로는 2페이지 양 쪽을 사용하여 에피소드별 주력 등장 메카닉을 소개하는 부분 편집이 영 괴상하더군요. 전자책으로 출간한다면 이런 부분에 대한 세세한 수정을 해 주면 좋겠습니다.

독서광의 모험은 끝나지 않아! - 미카미 엔, 구라타 히데유키 / 남궁가윤 : 별점 2.5점

독서광의 모험은 끝나지 않아! - 6점
미카미 엔.구라타 히데유키 지음, 남궁가윤 옮김/북스피어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의 작가 미카미 엔과 "R.O.D"의 작가 쿠라타 히데유키가 여러가지 책에 대해서 이야기한 대담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얼마 전에도 읽었던 북스피어의 '박람강기' 프로젝트의 한 권이지요.
자연스러운 일상생활 속 대화같은 대담이 인상적입니다. '술집 옆자리에서 두 남자가 주고받는 대화를 귀 기울여 들었더니 꽤 재미있더라'는 책 뒤 소갯글 그대로의 내용이에요. 구라타 스스로도 북 가이드라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런 시시콜콜한 대담까지 책으로 출간되는 일본 출판 시장이 부럽기도 하네요. 우리나라 같으면 팟캐스트나 유튜브 방송 정도로 소모되고 끝날 내용이거든요. 좋게 말하자면 읽기 쉽고 나름 재미도 있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그다지 깊이가 있거나 진지한 내용은 아닙니다.
그래도 독서광 작가들이 모여 수다를 떤 내용이라서, 독서광까지는 아니더라도 독서에 있어 명함을 내밀 정도는 되는 저로서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순서대로 한 번 살펴볼까요?

우선 모던 호러가 주제인 수다에는 스티븐 킹, 딘 쿤츠, 클라이브 바커 등 익숙한 작가들의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다만 내용은 딱히 새롭지 않아요. 모던 호러라는 주제를 이야기하면 누구나 이야기할만한 내용이었거든요.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롱 워크"를 극찬하는 등 저와 취향이 다른 탓도 크고요. 하지만 잭 케첨 소개는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구라타 히데유키 말에 따르면 "이웃집 소녀"는 구입한 그 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책을 다 읽지 않으면 오늘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거야 라고 생각했을 정도라니 꼭 읽어 봐야 겠습니다. 마침 국내에 유일하게 소개되어 있기도 하고요. 그 외에도 소니빈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는 데뷔작 "비수기" 와 후일담 "더 우먼"도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은데, 이 두 작품은 아쉽게도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았네요.

요코미조 세이시에도가와 란포, 야마다 후타로를 소개하는 챕터는 너무 뻔하더군요. 다 알고 있는 내용이거든요. 그래도 딱 한 가지, 일본 초등학생이 읽기 힘들어했다는 토로는 색달랐지만요. 구라타 왈, 모르는 단어가 많이 나와서라고 하는데 저는 그런 인상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번역을 잘 한건지 아니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만큼 역사와 과거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네요. 그냥 일본 초등학생보다는 제가 이해력이 좋기 때문인걸까요?
그래도 좋아한다고 언급하는 작품들이 대체로 저 역시 좋아하는 작품들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백일홍 나무 아래" 만 빼고 말이죠. 그 외 작품으로는 읽어본 적 없는 식인 테마 작품인 "어둠에 꿈틀거리다"가 궁금했습니다. 국내 출간되었는지 찾아봐야겠군요.
그런데 갑자기 야마다 후타로와 "마계전생" 이야기로 넘어가는건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야마다 후타로의 대표작이라는 "인법첩" 시리즈도 영화, 만화로 접한게 전부라 딱히 수다에 공감하거나 이해할 내용도 별로 없었고요.

영화화된 작품 원작에 대한 수다는 가도카와 하루키가 이끌던 가도카와 문고와 영화 전성 시대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작가 시점에서 아카가와 지로를 나름 극찬하는 - 쉽게 대사를 쓴, 일종의 라이트 노벨 선구자라는 등 - 정도만 눈에 뜨일 뿐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듯한 아카가와 지로가 쓴 크리쳐 호러 소설 "밤"이 그나마 궁금하지만, 최고 걸작이라는 "마리오네트의 덫" 수준을 미루어 본다면 구태여 읽어볼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좌절본은 읽다가 포기하거나 여러가지 이유로 아예 그 생각이 없었던 작품들에 대해 수다를 떠는 챕터로 보통은 어려운 책 - 커트 보니컷의 "제 5 도살장"이나 케플러의 "우주의 신비" 등 - 이거나 너무 길어 포기한 작품들이 대부분입니다. 100권이 넘는 "구인사가", 미완으로 끝났다는 일본의 시대소설 "대보살고개" 등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제 5 도살장" 이 어렵다는 주장은 동의하기 어렵고 "삼국지" 나 "삼총사" 같이 재미도 있고, 읽기도 쉬운 작품이 좌절본에 포함되어 있는 등 제 생각과는 조금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미카미보다는 구라타 취향이 특히 그런데, 뭐 이런 것이야 말로 개인 취향이겠지요. 허나 오래전 작품이라 요새 취향과 맞지 않기 때문에 읽기 힘들다는 이유로 "반지의 제왕" 은 좌절본이다!라는 의견만큼은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이런 류의 독서광들 수다라면 빼 놓을 수 없는 진귀한 책, 기이한 책이 이야기도 물론 들어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희귀 도서들보다는 재미있는 아이디어의 책들 소개가 더 인상적이었어요. 아와사카 쓰마오의 "산 자와 죽은 자 - 명탐정 요기 간지의 투시술" 이 대표적입니다. 모든 페이지가 16 페이지 단위로 봉해져 있어서 그대로 읽으면 25페이지 짜리 단편이지만, 다 읽고 봉한걸 풀면 새로운 장편 소설이 된다는 책으로 여러모로 신기했거든요.
우리나라에도 소개되다 만 게모노기 야세이의 만화 "Palm" 소개도 기억에 남습니다. 무려 30년간 이어진 연재의 설정을 초기에 확립하여 그대로 끌고갔다니 대단해요. 미카미 엔이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는게 이해가 되더라고요. 국내에는 절판되어 말 그대로 진귀한 책이 되어버렸는데, 어떻게 다시 구해보고 싶어 지네요.

추억 속에 깊게 남은 인상적이었던 책도 언급하는데, 구라타를 독서가로 이끈 책은 "투명인간", "우주전쟁" 이라고 합니다. 덕분에 SF에 빠졌다가 미스터리로 관심이 이동한 전형적인 장르 애호가 루트를 밟았더군요. 또 다른 추억의 책은 폴란드 아동문학인 "크레크스 선생님의 학교"를 꼽았고요.
미카미 엔은 "마더 구스", 히노 히데시의 만화 "죠로쿠의 기묘한 병"를 이야기하는데 이 책들은 국내 소개되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미카미 엔이 소설을 쓰자고 마음먹은 계기가 되었다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단편집 "에렌디라" 속 수록작인 "단순한 에렌디라 와 무정한 할머니의 믿을 수 없이 슬픈 이야기" 정도만 국내 출간되었을 뿐입니다. 마르케스 작품은 많이 읽어보지 못했는데 '일정한 틀의 캐릭터에서 빠져나온 뭔가를 소설에서 배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라는 미카미의 말이 마음에 들기에 한 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저런 만화 이야기도 하는데, "블랙잭" 이야기에서는 확실히 두 사람의 깊은 내공이 느껴지더군요. 미카미 엔이야 블랙잭이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 한 편에서도 소개되었으니 그렇다 쳐도, 그에 뒤지지 않는 구라타가 참 대단했습니다.
후지코 후지오 이야기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라 더 반가왔어요. "Utopia"도 아마 "비블리아 고서당" 에서 소개되었었죠? 개인적으로는 "만화의 길" 에서 접했기에 더욱 반가왔고요. 어차피 지금은 복간되어 구하기 그리 어렵지 않기는 하지만요. "모쟈코"와 "에스퍼 마미"는 개인적으로 좋아해서 언급되는게 기뻤습니다. 또 "유혈귀" 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의 내용을 상당히 길게 언급하는데 결말이 뭔지 궁금해 미칠 지경으로 만들어서 구해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흡혈귀는 신인류고, 구인류는 선량한 신인류의 피를 흘리게 만드는 유혈귀였으며 결국 주인공도 신인류?가 되어 즐겁게 살아간다는,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굉장히 시대를 앞서간 호러물이더군요. "만화의 길" 에서는 데즈카 오사무, 이시노모리 쇼타로, 아카츠카 후지오 등 다른 거장들보다 못한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누가뭐래도 후지코 후지오 역시 뒤지지 않는 천재임에는 분명해요. 

그리고 소설가로 계속 활동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기억에 남습니다. 소설가가 되고 처음 안 사실은 계속 하는게 정말 어렵다는 점이라는군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쌓아두었던 것을 토해내면 첫 번째 책은 어떻게든 모양은 갖출 수 있지만, 문제는 그 뒤로 세 번째, 네 번째 때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만이 프로로서 해 나갈 수 있다는 말인데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전해줍니다. 데뷰작이 가장 좋은 작가들이 많은 이유도 마찬가지겠지요.

책을 사랑해서 벌어진 에피소드들도 이야기하는데, 주로 재미있는 책을 읽었을 때의 경험들에 대한 수다입니다. 미카미 엔이 코니 윌리스의 "항로" 라는 소설을 읽을 때, 절묘한 부분에서 상권이 끝났지만 한밤중이라 문을 연 서점이 없었다는 이야기처럼요. 저도 이런 경험이 몇 번 있습니다. "용오"의 복제 예수 에피소드 다음 권을 사기 위해 업무 중 홍대 앞 한양 문고로 뛰어갔던 적도 있고, "불멸의 용병" 이라는 해적판으로 접한 "베르세르크" 의 그리피스 편 다음을 읽기 위해 한 밤중에 도서대여점을 돌아다닌 적도 있으니까요.
페이지를 접거나 메모하는 행동에 대한 대화도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이야기같아 좋았습니다. 저는 둘 다 안합니다만. 책 때문에 담배를 끊고 심지어 하루에 라면 한 개로 버틴다는 이야기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의 베스트셀러는 왠지 꺼린다는 미카미와 구라타의 말도 공감이 갔습니다. 저도 좀 청개구리과라서, 인기가 있다고 하면 그냥 좀 싫거든요.

이렇게 다양한 책에 대한 수다가 장황하게 펼쳐지는데, 공감가는 이야기도 있고 동의하지 못하는 이야기도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고 뭐 그렇습니다. 그래도 재미만 놓고보면 나쁘지는 않았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러나 "탐정, 범죄, 미스터리의 간략한 역사" 리뷰에서 적었듯이, 수다 중 언급되는 작품들 중 국내 출간된 작품 정도는 조사하여 알려주었어야 했습니다. 하루도 안 걸렸을 것 같은데, 이 정도 수고도 하지 않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네요.

2017/12/01

관계의 조각들 - 마리옹 파욜 / 이세진 : 별점 2점

관계의 조각들 - 4점
마리옹 파욜 지음, 이세진 옮김/북스토리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입니다. 그림이 좋아서 읽게 되었는데 묘사나 풍자, 담고있는 사상들 모두 은근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요즘 작품같지가 않더군요.
예를 들면 "고독"이라는 작품에서는,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앞에 두고 한참 식사를 하다가 그 남자를 말아버립니다. 그 남자는 그림이었던거지요. 그리고 여자는 홀로 고독에 잠긴다는 내용입니다. 반전이 아주 놀랍지도 않고, 드라마도 별건 없습니다. 풍자로서도 평범하고요. 그래도 그림으로 이러한 이야기를 아주 잘 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참 뒤에 이 여자가 다시 등장해서 그림 고양이를 꺼내어 잠깐의 평화를 얻는다는 후일담도 과하지 않고 적당한 수준이지요. 

그 외에도 남자는 초, 여자는 남자에게 불을 당긴다. 남자는 여자 때문에 녹아버리고, 여자는 그 속으로 풍덩 뛰어든다는 이야기인 "불을 당기는 여자" 라던가, 여자들에게 사랑받지만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남자를 여자들이 부숴버리고 조각들을 나눠 갖는다는 "미남자" 등이 기억에 남네요.

그러나 굉장히 평범하거나 지나치게 소박한 이야기의 비중이 더 많아서 아쉬웠습니다. "식육 식물"이 대표적이에요. 아이를 키우다가 너무나 커져버린 아이에게 부모가 죽거나 잡아 먹힌다는 이야기인데 풍자로서는 지극히 평범하고 내용도 별로 인상적이지 못했어요. 프랑스 감수성 탓인지 이해 못할 작품도 많았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이야기 보다는 빼어난 그림을 보는 맛이 더 좋았습니다. 그림책으로서는 괜찮은 미덕이기는 한데, 두 번 보게 될 것 같지는 않네요

2017/11/26

의자의 재발견 - 김상규 : 별점 2점

2011년에 초판이 발간된 책으로 좋은 의자란 무엇인지, 좋은 의자 디자인은 무엇인지, 어떤 의자들이 있는지, 누가 유명 의자 디자이너인지 등 의자 디자인에 대해 여러가지를 알려주는 디자인 에세이집입니다.

소개된 유명 디자이너들의 유명한 의자 디자인 작품, 여러 디자인 회사들에 대한 소개와 설명은 재미있으며, 도판도 충실하지만 제가 읽어왔던 다른 의자 디자인 관련 책들과 비교할 때 차별화되는 요소는 특별히 없습니다. 출간된지 제법 된 탓에 지금 시점에서는 이미 생명력을 다한 작품과 소재가 많다는 것도 문제에요. 3D 프린터가 보편화된 지금 보기에는 아이들 장난감과 다를 바 없는 스웨덴 디자인그룹 프론트의 '스케치 가구' 퍼포먼스가 대표적입니다.

또 내용이 정리가 되어 있지 못한 느낌이 강한데, 이유는 저자의 욕심이 과한 탓입니다. 의자의 역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고, 좋은 의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고, 좋은 의자 디자인은 또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등 펼쳐 놓은 이야기는 많지만 정작 눈에 잘 들어오지는 않아요. 저자의 글 솜씨도 그닥이며, 책의 목차와 내용도 잘 정리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괜찮았던건 다른 문화와 연결되는 의자 이야기로 이를 좀 더 소개해 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 속, 명화 속 의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등 다른 책에서 보기 힘든 아이디어가 빛나는 이야기들이었는데 말이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7/11/25

오래된 디자인 - 박현택 : 별점 4점

오래된 디자인 - 8점
박현택 지음/안그라픽스

부제는 박현택의 디자인 예술문화 산책입니다. 저자는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근무하시는 디자이너로 동문 선배님이시더군요. 알라딘 등을 통한 책 소개를 보고 관심이 가던 차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디자이너의 관점으로 바라본 여러가지 것들에 대한 에세이인데, 저자의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과 미적 관점이 잘 결합되어 있습니다. 글재주도 빼어나서 읽기도 편하고요. 읽기 편하다는게 얼마나 큰 장점인지는 이 책 맨 앞에 수록된 도올 김용옥의 서두만 읽어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도올의 글도 물론 좋아요. 깊이도 있고요. 그러나 읽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솔직히 서두만 읽었을 때에는 본문도 이렇지 않을까 긴장을 많이 했을 정도인데 무척 다행이었어요.
또 단순한 생활 속 신변잡기 같은 글들 뿐 아니라 복잡하거나 사연있는 디자인이나 미학 이론을 설명하는 글들마저도 쉽게 읽히는건 정말이지 대단하다 생각됩니다. "호랑이 요강과 마르셀 뒤샹의 샘" 이라는 글이 좋은 예에요. 요강에서 시작하여 변기로 이르는 과정과 변기가 미술관에 놓인 사연을 통해 "다다이즘"을 설명하는 내용인데, 다다이즘은 "예술품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언제 예술인가?"라는 질문이 더 적절한 제도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결론은 이렇게 억지스러운 것 보다는 호랑이 요강이 더 정이 가고 좋다!라고 마무리되고요. 삶을 위한 예술은 있어도 예술은 위한 삶은 없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요약하니 좀 두서가 없어 보이는데, 실제로 글을 한 번 읽어보시면 호랑이 요강과 샘의 차이가 무엇인지, 예술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세한도를 디자인 전문가적인 관점에서 분석한 에세이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세한도가 왜 뛰어난 그림인지는 관련된 서적을 이전에도 한 번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각 디자이너로서 "편집 디자인" 관점으로 분석해서, 세한도는 "그리드"시스템, 모듈 관점에서 보아도 완벽하다는 것을 그림과 함께 설명해주니 더 머리에 쏙쏙 들어오네요.

또 명품, 유명 디자이너가 손댄 것들보다도 우리 주변에서 보아왔던 재활용 디자인 등도 중요하다고 서술한 관점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싸고 좋은, 유명 디자이너가 손 댄 것이 당연히 좋고 예쁘겠지만 단지 미학적, 디자인적으로 뛰어나다는 관점보다 중요한건 삶과 생명 그 자체라는 논리로 디자이너가 만든 가죽으로 된 이케아 쇼핑백이 수백만원에 팔리는 세상에 경종을 울려줍니다. 저자는 다른 글들에서도 허울뿐인 허례 허식을 비판하면서 "사실 디자인이란 그리 대단한 것도 전문적인 것도 아니다. 그걸로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지상 최대의 화두이며 고도의 전문적인 분야로 취급되고 싶어 할 지 모르지만, 우리 삶 속에서의 디자인이란 조금 다듬어진 상식의 범주일 수도 있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저 역시 디자인 전공자이지만 정말이지 와 닿는 말이에요. 이런 글들이 더욱 널리 알려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선민의식은 제발이지 사라졌으면 하거든요.

그 외의 다른 글들 모두 대부분 하나하나 곱씹을 만한 좋은 글들입니다. 도판도 적절하고요. 몇몇 글들은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기 힘든 부분도 있고, 소재와 글이 잘 어울린다고 여겨지지 않은 글도 있습니다만 소수일 뿐으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4점입니다. 사소한 단점을 제외하면 최고 수준의 디자인 에세이입니다.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시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7/11/19

탐정, 범죄, 미스터리의 간략한 역사 - 엘러리 퀸 / 박진세 : 별점 1.5점

탐정, 범죄, 미스터리의 간략한 역사 - 4점
엘러리 퀸 지음, 박진세 옮김/북스피어

북스피어의 박람강기 프로젝트 일곱 번째 책입니다. 박람강기(博覽强記)는 국어사전 풀이로는 "여러 가지의 책을 널리 많이 읽고 기억을 잘함." 이라는 뜻으로, 북스피어에서는 장르 소설이 아니라 소설 외의 다른 책들을 이러한 이름으로 펴내고 있지요. 저도 이 중에서 작가의 수입, 지출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인 "작가의 수지", 서간문집인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기행문인 "미야베 미유키 에도 산책"을 읽고 리뷰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이 책 역시 박람강기 레이블로 출간된 책답게 추리 소설은 아닙니다. 엘러리 퀸이 추리 소설을 연대별로 구분하여 각 연대별로 걸작을 꼽은, 추리 소설의 큰 역사와 대표작을 소개하는 일종의 가이드 북이자 서지 정보 책입니다.

그러나 제목만 다를 뿐, 추리 소설 애호가들에게는 익히 잘 알려져 있는 "퀸의 정원"의 단순 번역본에 불과해서 아주 실망스러웠습니다. 제가 이전에 관련해서 글을 남긴 적이 있을 정도로 이미 이런 저런 곳에서 공개되어 있는 내용이거든요.

물론 저는 일본어 사이트로 접했고, 영어나 일본어를 못하는 독자분들께는 유용한 정보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의미가 있으려면 제가 링크한 일본 사이트처럼 국내에 번역되었는지, 어떤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지, 간략한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었어야 했습니다. 대충 훝어보니 약 30권 정도만 국내 소개된 듯 한데 간단한 수고 만으로도 이 정도 정보는 제공해 줄 수 있었을 거에요.
한 마디로 돈 받고 파는 책이 공짜 일본 사이트보다 담고 있는 정보가 부실합니다. 이 정도 수고도 하지 않고 그냥 책을 출간한건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아요. 지금 이 책을 읽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희귀한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엘러리 퀸의 책 자랑 정도 밖에는 없습니다.

그나마 내용이라도 재미있다면 괜찮겠지만 선정된 125 편의 책 소개 대부분은 작가와 탐정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제일 궁금한 내용은 정작 알려주지 않으니 뭘 어쩌라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완벽하게 성공하기는 했습니다만, 이래서야 이게 책 가이드로 의미가 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또 이 책이 발표된 해는 1969년 증보판 기준으로 보아도 이미 50년 전이며, 선정 기준에 "역사적인 중요성"이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게다가 "단편" 이어야 한다는 기묘한 기준도 있기 때문에(아마도 잡지 EQMM의 홍보를 겸한 듯 싶어요) 국내에 소개되었다 하더라도 재미나 완성도 측면에서는 부족한게 많습니다. 제가 읽었던 잘레스키(자레스키) 왕자 시리즈 중 한편인 "오번 가문의 비극"이 대표적이지요. 도저히 눈 뜨고 보기 힘든 수준이었거든요. "아마추어 괴도"(래플스 시리즈)도 마찬가지고요. "뜀뛰는 개구리" 처럼 그 어떤 기준을 들이 대어도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 어려운 작품도 선정되어 있는 것도 문제고요. 그래도 이 작품은 재미라도 있으니 좀 낫긴 하네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추리 애호가로서 한 번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 번역되었다는 점 외에는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이유들에 더해 번역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고요. 추리 소설 명작 리스트가 궁금하시다면 이런 것 같은, 인터넷에 여러가지 공개된 자료를 참고하시는 것이 훨씬 나을 겁니다.

2017/11/18

다이아몬드 미스터리 - 마틴 위드마크 / 김영선 : 별점 2.5점

"팀과 티나의 탐정 사무소" 시리즈 제 1작입니다. 아동용 작품으로 제목 그대로 팀과 티나의 탐정 사무소에 의뢰된 카라트 씨의 다이아몬드 도난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입니다. 소개에 따르면 북유럽에서 가장 사랑받는 탐정 소설 시리즈라고 합니다.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런데 예상 외로 정통 추리물이라 놀랐습니다. 사건이 있고, 용의자들도 세 명이나 등장하며 용의자들 모두 어딘가 수상쩍다고 소개됩니다. 여기에 더해 다이아몬드를 어떻게 빼돌렸는지에 대한 나름 정교한 장치 트릭까지 등장합니다. 특히나 래리 스미스 씨가 매일 아침 먹는다는 사과를 이용하여 사과 속에 보석을 쑤셔넣고 창 밖으로 던진 후 밖에서 회수해 왔다는 트릭을 밝혀내는 과정은 정통 본격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에요. 래리 스미스의 사무실 및 그 어떤 장소에서도 사과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과 래리 스미스의 행동 관찰을 통해 진상을 추리해낸다는 점에서요.
이외에도 주어진 떡밥도 깔끔하게 설명하며 - 예를 들면 마가레트 로스 부인의 화려한 치장이 어떻게 된 것인지 -, 이 모든걸 80여 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으로 소화한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물론 성인 시각으로 보면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왜 카라트 씨가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고 누가 봐도 어린아이임이 분명한 팀과 티나에게 사건을 의뢰하는지 부터가 석연치 않으니까요. 경찰 수사만 했다면 범인이 누군지 밝혀내는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을텐데 말이지요. 또 아쉽지만 삽화가 좋은 편은 아닙니다. 기대했던 북유럽 스타일(?)의 깔끔하고 차분한 그림이 아니더라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아이들을 위한 정통 추리 입문서로서는 충분한 가치를 지닙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 강국 북유럽의 저력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네요. 나중에 제 딸 아이가 조금 더 크면 한번 권해볼 생각입니다.

2017/11/17

인간증발 - 레나 모제, 스테판 르멜 / 이주영 : 별점 2점

인간증발 - 4점
레나 모제 지음, 스테판 르멜 사진, 이주영 옮김/책세상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에서는 매년 10만명이 실종되는데, 이 중 85,000명이 스스로 사라졌다는 충격적 사실로부터 시작되는 프랑스 작가의 논픽션입니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인터뷰 및 현장 취재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책 소개가 아주 흥미로왔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좀 많이 달라요. 우선 "인간 증발"에 대해 다루고는 있지만, 직접 인터뷰나 취재가 가능했던 특정 사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소문이나 저자의 추측에 의지하지 않는건 좋지만 큰 빚, 야쿠자의 협박 같은게 아니라 그냥 회사나 학교에서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혹은 오래전부터 짝사랑했다는 남편 직장 사장의 고백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증발 이유가 뜬금없고 황당한 것이 많아서 당황스러웠어요. 그나마 이 정도면 드라마라도 있는 편인데, 정말 뜬금없이 갑작스럽게 사라진 사례의 경우는 정말이지 와 닿지 않았어요.
또 스스로 증발을 택한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낙오자가 된 경우는 같은 레벨로 설명하면 안될텐데 좀 의아했습니다. "마키오의 고백, 증발 65년"은 가난과 학대로 집을 나와 떠돌던 마키오의 이야기인데 이건 스스로 택한 증발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마찬가지로 "부락민"이 차별받는다는 언급은 그 차별 때문에 증발한게 아니므로 사족에 불과했고요.
그 외 자살자에 대한 이야기나, 실종자를 찾는 탐정들 인터뷰, 사라진 가족이 북한에 갔을 것이라 믿는 어떤 가족의 이야기들도 주제에 적합한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핵심은 인간 증발이 아닙니다. 모든 취재와 인터뷰는 결국 "일본인은 체면이 중요하며 조직 내에서의 관계가 중요하다. 체면을 잃고 수치심을 느끼게 되면 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일본만의 특이성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큽니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도 틀린 말은 아닌데, 문제는 책 안에서 딱히 설득력 있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름 근거로 삼기 위하여 독특한 일본만의 사회, 문화를 보여주기 위한 이야기에 적지 않은 분량이 할애되는데 - "지옥의 캠프", "오타쿠의 성지", "토요타 시, 떠나거나 병들거나 미치거나" 등 - 억지스럽기만 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이상하다! 그런데? 그 다음이 없는거죠.
정말 저자가 자기 주장이 맞다고 이야기하려면, 이러한 일본만의 특수한 문화 소개 후 이것 때문에 증발한 사람의 사례를 연결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도 못했고, 증발의 원인이 저자의 주장 때문이 맞는지도 이 책에 실린 내용으로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여러모로 프랑스인이 통역을 써 가며 취재한 한계가 느껴졌습니다.

물론 기대에 값하는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증발이라는 말이 몸과 함께 과거를 씻어내고자 했던 도망자들이 온천을 찾은 것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처음 알았네요. 흔하게 이런저런 작품에서 많이 보아왔던, 회사에서 잘렸지만 출근하는 척을 하다가 결국 증발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는 점도 놀라왔고요. 탐정에게 의뢰하여 증발자를 찾았지만 가족이 재회를 거부한다던가, 인생 낙오자들이 후쿠시마에서 쓰레기 치우는 일을 하게 된다던가 하는 등의 이야기는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인간의 밑바닥을 볼 수 있는 기회라 물론 생각했는데 여러모로 실망스럽네요. 개인적인 문제로 야반 도주나 증발을 기도하는 사람들의 처절한 모습을 보려면 차라리 "사채꾼 우시지마" 를 보는게 나을 것 같습니다.

2017/11/12

윤광준의 新생활명품 - 윤광준 : 별점 1.5점

윤광준의 新생활명품 - 4점
윤광준 지음/오픈하우스

윤광준의 생활명품 에세이 신작입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직접 써 보고 경험했던 제품들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45개의 제품이 소개되고요.

일단 저는 '생활 명품'은 지극히 평범할 수 있지만 오래 사용하면서 장점과 특징을 알게되어 진가를 깨닫게 되는 제품들이라 생각합니다. '명품' 보다는 '생활'에 방점이 더 강하게 찍힌다는 뜻이지요. 그만큼 일반인들의 진입도 아주 어렵지 않아야 하고요.
그러나 이 책에서 소개되는 제품 대부분은 그다지 오래 쓰지도 않았으며, 좋아하는 이유도 단지 개인 취향, 개인 기호에 불과한 제품이 다수라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디지털 가젯들입니다. "Stuff" 같은 얼리어답터 잡지라면 모를까, "생활 명품"에는 영 어울리지 않더군요. 이런 류의 디지털 제품들은 아무래도 수명이 정해져 있고, 시간이 지나면 더 좋은 제품이 더 싸게 나오는게 당연하니까요. 게다가 이 가젯들에 관련된 저자의 사고방식도 '독일에는 가전 메이커의 A/S 센터가 눈에 잘 뜨이지 않는다. 고장이 잘 안나니 당연하다. 이를 보면 국내 가전사의 A/S망이 풍부하다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라는 식으로 동의하기 어려운게 많고요.
무엇보다도 '아스텔앤컨'의 좋은 음질이 전문가가 내부 회로를 변경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어이없음의 극치였어요. 디지털 음원을 재생하는데 회로의 변경이 큰 의미가 있나요? 자체 스피커로 음악 감상하는 도구도 아닌데 말이지요.
여러 식품 소개들도 마찬가지 이유로 별로입니다. 수많은 싱글 몰트 위스키 중에 구태여 '글렌리벳'을 점찍는 것은 순전히 개인 취향에 불과하기죠. 자기 취향의 '디자인'을 갖추었다고 생활 명품이라고 추켜세우는 몇몇 제품들 역시 마찬가지로 '아물레또 스탠드', '이노 디자인 T라인' 등이 대표적인데, 저는 저자 취향 외에 생활 명품이라고 이야기할 포인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 모든건 저자의 사고 방식이 이전과 조금 달라진 탓입니다. 이번 저서에서는 유달리 '명품은 비싼게 당연하다.'는 주장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거든요. 예전 저서에서는 그렇지 않았었는데 말이지요. 좋은 재료, 원료를 사용하여 장인 정신으로 꼼꼼히 만든 명품이 비싸다는 것에는 동의하나, 앞서 말씀드렸듯 '생활 명품'이라는 제목에 부합하는 사고 방식으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예컨데 '아물레또 스탠드'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 마트에서 파는 스탠드 중 가장 가성비가 적절하고 괜찮은 제품을 소개하는게 더 적절했을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생활 명품'이 아니라 그냥 '명품' 소개에 불과하여 이래서야 비싸고 좋은 제품을 소개하는 널리고 널린 잡지들과 다른 이 책만의 차별화 포인트가 뭔지 잘 모르겠네요.

물론 몇몇 제품은 여전히 와 닿고, 갖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긴 합니다. '토앤토' 신발', '요괴손 등긁개'가 그러합니다. 저 역시 잘 쓰고 있는 '세타필', '에버노트' 소개도 반가왔던 부분이고요. 그 외에도 "생활 명품"이라는 단어 취지에 부합하는 제품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소개된 45개 제품 중 그러한 제품은 절반, 아니 1/3도 되지 않으며, 근저에 깔린 저자의 사고 방식 역시 "생활 명품"에 적합해 보이지는 않기에 도저히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아무래도 저자가 오랜 시절 사용한 생활 명품 소재가 고갈된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후속권이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라면 더 찾아볼 이유는 없겠네요. 혹 나오더라도 후속권 제목은 독자의 혼란을 최소화 할 수 있도록 "생활"이라는 단어를 빼 주었으면 합니다.

2017/11/11

최후의 도박 - 로버트 B. 파커 / 강호걸 : 별점 2점

스펜서는 보스턴 레드삭스 관계자 해럴드 애스킨으로부터 유망한 투수 마티 러브가 승부 조작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조사를 의뢰받았다. 조사를 위해 작가로 위장한 스펜서는 락커룸 등에서 관계자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그날 고리대금업자 프랭크 두어와 히트맨 월리 호그로 부터 협박을 받게 되는데... 

탐정 스펜서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이전에 전작을 읽고 더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모처에서 "프로야구"를 소재로 한 작품이라는 글을 읽고 호기심이 동해 찾아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킬링 타임펄프 픽션입니다. 쑥쑥 읽히는 재미는 있지만, 한번 읽으면 그 뿐입니다. 소재가 된 프로야구도 승부 조작과 도박이라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전형에서 한 발자욱도 더 나아가지 못했고요. 

추리물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이 작품에서 스펜서가 탐정으로서 뭔가 추리(?)하는 부분은 딱 한 장면밖에는 없는 탓입니다. 마티 러브가 아내 린다를 처음 만났다는 상황 - 싸인을 해 달라고 하는 아내에게 한 눈에 반했다 - 을 너무나 작위적이라 느끼는 부분이지요. 이후 스펜서가 벌이는 조사는 모든 것이 그의 생각대로, 순서대로 진행됩니다.
우선 '마티 러브와 아내 린다가 처음 만났다는 이야기는 너무 작위적이다'에서 시작해서 린다에 대한 조사에 나섭니다. 그리고 약간의 트릭(사진을 골라달라고 해서)으로 확보한 린다의 지문을 경찰 친구에게 조사 의뢰하여 그녀의 본명을 알아내고요. 그 뒤 그녀가 어린 시절 가출해서 뉴욕에서 매춘부로 일했었고, 매춘부 시절 포주(?)를 만나 그녀가 매춘부 시절 촬영한 포르노가 협박 거리라는 걸 알게 되는 식입니다.
아울러 포르노 마스터 프린트를 찾으러 온 놈팽이가 레스터 프로이드였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물 흐르듯 하여 감탄이 나올 정도입니다. 어떻게 단 한 번의 헛발질도 없을까요? 사실 린다가 마약 복용으로 검거된 과거만 없었더라도 첫 단계에서 꽉 틀어 막혔을텐데요. 하기사, 이런 저런 좌충우돌로 분량만 낭비하는 작품들 보다야 이런 깔끔한 전개가 읽기에는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게 펄프 픽션의 미덕이겠지요.

그래도 여기까지는 조사, 수사가 핵심이라 보통의 미국식 하드보일드 탐정물과 비슷하기는 한데, 다음부터는 전형적인 헐리우드 히어로물, 고전 서부극의 현대적 변주로 흘러갑니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오로지 정의감 때문에 스펜서는 프랭크 두어와 부하 월리 호그를 목숨걸고 처단하고, 버키 메이터드와 레스터 프로이드 컴비까지 응징해 버리거든요. 한 가족을 위해 악을 응징한다! 또 이렇게 세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거는 떠돌이 설정은 "셰인"의 판박이입니다.
물론 과거를 매스컴에 고백하는 린다의 큰 결심도 있기는 하나, 스펜서는 목숨을 걸고 살인까지 저지르는 마당에 이 정도 희생은 미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러한 헐리우드스러움은 이외에도 작품 곳곳에 묻어납니다. 도나 발링턴이 가난에 쪄든 고향을 떠나 매춘부가 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전형적인 시골처녀 상경기와 다름 없죠. 포주 패트리셔 애틀리가 도덕심을 발휘하여 마스터 프린트 폐기를 도와주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뭐 그래도 쑥쑥 시원하게 읽히는 맛은 있으니 나쁘다고 폄하하기만은 어렵습니다. 마지막에 레스터를 작살내는 장면은 아주 속이 시원하기도 하고요. 스펜서가 사람을 죽였다는 죄의식에 아주 약간 사로잡혀 있는 묘사도 괜찮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물이라고 보기에는 몇 광년 떨어져 있지만 성공한 펄프 픽션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메이저리그, 범죄, 도박, 포르노까지 모든 흥행 요소가 갖추어 졌을 뿐더러 읽기도 쉽고 결말까지 완벽한 권선징악 해피엔딩이니 이래서야 실패하는게 더 어려울 듯요. 아, 저도 앞으로는 이런 작품을 써야겠습니다.

덧붙이자면, 작품이 발표된 1975년에는 미국에서도 매춘부라는 직업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문제가 된다는 것이 조금 특이했습니다. 지금은 스포츠 스타가 포르노 배우하고 결혼하는 세상인데, 세상이 변해도 참 많이 변했네요.
그리고 스펜서가 굉장히 요리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이전에 읽었던 "약속의 땅"에서도 요리를 통해 사람의 인간성을 파악하는 괜찮은 묘사가 등장했었는데, 여기서는 요리 묘사가 과하다 못해 흘러 넘칠 정도입니다. 매일 매일, 매 끼 무엇을 먹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을 정도거든요. 딱히 전개에 필요한 부분도 아닌데 말이죠. 여튼, "스펜서의 요리책" 이라는 책이 출간된 이유가 충분히 느껴졌습니다. 스펜서의 요리책도 출간되면 좋겠네요.

2017/11/05

화석의 기억 1~3 - 타가미 요시히사 : 별점 2.5점 (국내 미출간)

도쿄에 사는 미나기 류이치는 어린 시절 살던 시골 마을(정확하게는 '붉은 숲'이라는)에서 "누시"라는 큰 곰(?)에 의해 어머니 후유코를 잃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본 TV 뉴스를 통해 누시가 다시 나타났다는걸 짐작하고 복수를 결심했다.
교제하던 유키에와의 성관계 동영상으로 그녀의 아버지를 협박하여 300만엔이라는 자금을 마련하여 시골 마을로 향한 류이치는 대학 조교 혼조 테츠야를 만났다. 그는 백악기(7,000만년전) 지층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두개골 화석을 발굴하고 있었다.
이후 이 '오파츠'가 교수에 의해 부정당한 테츠야는 홀로 조사를 떠나는데....

국내에는 "nervous breakdown" , 그리고 "초공속 가루비온"의 캐릭터 디자이너로만 알려진 타가미 요시히사의 1980년대 작품입니다. 정확하게는 1985~87년까지 연재되었는데, 대표작이라고 하는 "카루이자와 신드롬" 연재 종료 직후(1982~85) 시기이니 작가 인생 최전성기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다른 대표작 "grey"와도 년도가 겹치네요. 굉장히 진지한 SF물이면서도 크리쳐 물이기도 하고, 미스터리 스릴러물 성격도 포함된 복잡한 장르물입니다.

위의 줄거리만 보셔도 아시겠지만, 오파츠가 등장하는 부분까지는 아주 흥미롭습니다. 누시가 무엇인지도 궁금하지만 무엇보다도 7,000만년 전의 호모 사피엔스 화석 정체는 특히나 궁금증을 자아내니까요. "별의 계승자"가 살짝 떠오르기도 하고요.

뒤이어 모든 것은 타임머신 때문이었다는게 밝혀지는 전개와 여기서 불거지는 '타임 패러독스'도 볼만합니다. 등장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뭔지도 모르면서 찾아 헤메는, 그리고 타임 머신으로 밝혀지는 "용고"의 정체는 원래 지구에서의 생존이 어려워져 만들어낸 외계로의 도망 우주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엔진 (용고)의 폭주로 시공을 뛰어넘어 1987년 붉은 숲에 떨어졌고, 이 "용고"가 계속 시공간을 뒤튼 탓에 7,000만년전과 연결되어 있게 된 겁니다. 누시는 7,000만년 전 숲에 살던 공룡이었고, 7,000만년전 지층에서 발견된 호모 사피엔스 화석은 마찬가지 이유로 과거로 점프한 현대 인류의 것인거지요.
이렇게 원인과 결과가 동일한 타임 패러독스는 도라에몽에서도 익히 보아 온 것입니다. 작 중에서도 용고는 노비타의 책상 서랍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니까요. 그러나 진지한 SF 스토리에 약간의 추리적 요소를 가미한 덕에 꽤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용고"의 위치를 찾아내기 위한 단서가 오래전 한 할머니가 남긴 일기라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누시가 12간지의 움직임을 보이는, 일종의 시계 같은 장소에 나타나며 이를 통해 한 가운데임을 추리하는 식이지요.

그러나 아쉽게도 결말이 완성도를 떨어트립니다. 류이치가 깨닫는 것, '조금씩의 차이가 결과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그려내기에는 너무 서둘러 마무리된 탓입니다. 관련자들을 타임 머신이 부른 이유 - 동일한 역사 반복을 위해 - 에 대한 설명도 부족했고요. 설득력을 갖추려면 또다시 시공을 점프한 후, 류이치가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여 현 시점(1987년)에 "용고"가 없는 평안한 인생을 손에 넣는다는 결말 정도는 보여줬어야 합니다. 마지막 장면이 현세의 기차에서 내리는 류이치가 어머니 후유코와 포옹하는 것이었다면 좀 낫지 않았을까요? "죠죠의 기묘한 모험" 6부 스톤 오션의 결말이나 영화 "프리퀀시"의 클라이막스처럼 말이죠. 뭐 그만큼의 설득력은 조금이나마 쌓아 올렸어야 하겠지만... 여튼 지금의 결말은 역사가 단순 반복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 작가 의도가 제대로 반영된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또 흥미로운 본편 전개에 비하면, 곁들여지는 사이드 에피소드들이 이야기에 잘 녹아들지 못한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누시의 정체가 공룡이라는 것도 너무 빨리 밝혀져서 몰입을 저해하고, 누시보다 주인공들 혈족에 전해지는 "용고"를 찾아내려는 음모 이야기는 솔직히 지루했습니다. 이 부분의 핵심인 기업, 친족 간의 파벌 싸움이 이야기에 잘 녹아나지도 않았고 말이죠.
아울러 주인공 캐릭터가 너무나 별로에요. 여중생 섹스 파트너와의 성관계 비디오를 그 아버지에게 팔아 넘겨 자금을 마련하는 쓰레기인데다가, 어머니인 후유코를 제외한 거의 모든 여성 등장 인물들과 정사를 갖는 등 전반적으로 쿨함을 강조하기에는 도가 지나칠 뿐더러 너무 자극적으로 접근하려 한 것 같아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꽤나 흥미로운 소재이지만 지루한 전개에 더해 작가 특유의 허무한 결말이 더해진 결과물입니다. 본 편 이야기에 집중하여 조금만 더 긴 호흡으로 가져갔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2017/11/04

고양이는 알고 있다 - 이상우 : 별점 1.5점

국내 대표적 추리 작가 중 한 분이신 이상우 작가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하여 일곱 편의 꽁트 및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우연찮게 읽어보았는데, 수준은 낮은 편입니다. 평균 별점은 1.5점 정도? 때문에 권해드리기는 무리지만 그래도 딱 한편, "황매실의 하룻밤"은 괜찮았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이 작품 하나만큼은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낭랑 18세" 

수위와 짜고 빈 사무실을 터는 보일러실 직원의 실패담입니다. 굉장히 짤막한 꽁트인데, 나름 재미있는 트릭이 등장합니다. 지하에서 일하는 직원이 어떻게 빈 사무실을 알아냈나?는 것으로 답은 공범자인 수위가 휴게실에 틀어놓은 음악 테이프였습니다. 음악을 듣고, 보일러실 직원이 레코드 가게에서 그 노래의 길이로 몇 호인지를 알아낸 겁니다. 4분 12초 짜리면 412호라는 식으로요. 그러나 결국 덜미가 잡히는데, 그 이유는 가게 점원에게 부탁하여 낭랑 18세를 찾은 탓이었습니다. 점원이 찾아준게 오리지널이 아니라 최근에 유행한 리메이크 버젼이었기 때문이지요.

발상은 재미있지만, 문을 따기 전에 최소한 안이 비었는지 아닌지 정도는 최소한 확인하고 문을 땄어야 하지 않나 싶어서 그리 현실적인 아이디어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백사도"

김내성스러운 제목에, 주인공인 그로테스크한 화풍으로 유명하다는 화가 김몽산도 김내성스러운 설정이라서 혹시나 했는데, 내용을 보니 정말로 김내성의 백사도에서 모티브를 따온 작품이더군요. 김몽산의 최신 대표작 제목이 "백사도" 거든요.

그러나 내용 자체는 김내성 작품과는 무관합니다. 자신의 작품을 혹평하는 평론가 곽충빈에게 살의를 품고 독이 든 얼음을 만든 김몽산의 계획이 실패하고 허무한 결말에 이르는 내용으로, 독이 든 얼음을 직접 챙기지 않고 딸에게 운반시킨 잔꾀 때문에 망한다는 것입니다. 설령 김몽산의 계획이 성공하여 곽충빈이 죽었어도 김몽산이 빠져나갈 수 있었을까?도 지극히 회의적이고요.

거장의 명성에 기대기만 한 수준 이하의 내용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예고 살인"

유전공학을 이용한 제품으로 유명한 주식회사 무진에서 일하는 천재 학자 김묘숙 박사와 그녀와 함께 기술팀을 이끌던 장주석 기술 이사가 차례로 살해당하는데...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 추경감과 강형사가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이 단편집 속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추리적으로는 완성된 편입니다. 김묘숙 박사에게 1시간 이상 지나야 녹는 독약 캡슐을 전해주고, 100kg이 넘는 장이사의 체중을 이용하여 일정 무게 이상의 사람이 밟아야 독이 주입되는 독 주사기를 장치하는 식으로 트릭이 등장한다는 점, 그리고 범인인 변사장이 범인으로 삼을 희생양(이이사)을 준비하여 사건을 꾸미고 이이사가 범인이라고 몰고 간다는 점, 마지막으로 변사장의 동기가 비교적 상세하게 등장한다는 점에서요.

하지만 이 모든 점들이 잘 연결되어 완성되어 있지는 않아서 아쉽습니다. 일단 김묘숙 박사에게 준 캡슐이 1시간이 지나야 녹는다는 것은 마지막 추경감의 추리 외에는 그 어떤 단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래서야 트릭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요. 장이사 체중을 이용한 트릭은 조금 낫기는 하지만 너무 뻔할 뿐더러, 경찰이나 다른 사람이 과체중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은건 문제입니다. 또 이이사라던가, 비서 미스 구 등을 엮어서 범인으로 꾸미려는 변사장의 계획도 그닥 치밀하게 전개되지 않고요.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증거인 "괴문서"를 만든 신문이 변사장 집에서 발견된다는 점에서 좋은 추리물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증거 앞에서 또 다른 추리들은 전부 불필요해져 버리니까요. 그 외에도 변사장의 계획은 헛점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추경감과 강형사의 툭탁거리는 캐미는 좋고, 앞서 말씀드렸듯 추리물로서의 기본 조건은 갖추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조금만 더 신경썼더라면 훨씬 좋은 작품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아내의 남자들"

우연찮게 추경감은 한 주부의 불륜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 주부가 살해되었다는 것을 전해듣고 사건 수사를 돕기 위해 나섰다.

지극히 평범한 불륜 치정극입니다. 약간의 수사가 진행된 후 현장에 남겨진 증거 - 현장 도어 손잡이 지문과 체모 - 로 범인이 체포되기에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무리입니다. 정숙해 보였지만 사실은 문란했던 한 주부에 대한 묘사를 선보이는게 목적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그 쪽으로도 많이 부족했고요. 딱히 점수를 줄 부분이 없기에 별점은 1점입니다.

"황매실의 하룻밤"

두 쌍의 젊은 부부가 시골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려고 이동 중에 별장 옆 황매실이라는 작은 촌락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곳에 거주하던 사람들 모두 부부를 보고 말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급한 일로 밤에 전화를 쓰려 별장에서 황매실로 이동한 부부는 황매실 마을이 텅 빈 것을 보고, 황매실 마을이 전설처럼 구미호들이 사람 행세를 하고 있는 곳이 아닐까 생각하며 두려움에 떠는데...

몇 페이지 되지 않는 꽁트인데 이 단편집 최고의 작품입니다. 공포스러운 상황도 설득력이 넘칠 뿐더러, 결말 역시 와 닿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한국적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고요. 진상은 바로 '황매실 주민들은 할아버지 제사로 밤에는 모두 아랫 마을에 다녀온 것이며, 제사드리는 날은 목욕 제계하고 외간 사람들과 말도 나누지 않는 법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정말 그럴듯 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공포스러운 하룻밤에 대한 묘사가 조금만 더 생생했더라면 5점도 충분했겠지만, 이대로도 아주 좋은 작품입니다.

"고양이는 알고 있다" 

최건일이 청산 중독으로 사망했다. 원인은 팔에 난 상처로, 경찰 수사를 통해 상처의 원인이 된 고양이 발톱에 청산이 발라져 있었다는게 밝혀졌다. 추경감과 강형사는 수사를 통해 최건일의 복잡한 가정사에 주목하는데...

니키 에쓰코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표제작으로, 전형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콩가루 집안이 등장합니다. 빚에 쪼들리는 동생(최건식), 방탕한 아들(최호정), 아버지가 반대하는 남자와 교제하는 딸(최현아), 최건일의 오랜 불륜 대상인 가정부(석이네) 등 등장인물 모두 전형적이니까요.

그러나 콩가루 집안에 대한 묘사 외에는 추리물로 볼 만한 여지가 전무합니다. 강형사의 현란한 헛다리짚는 추리가 펼쳐지는 것 정도는 볼거리이지만, 실상 진상은 별 볼일 없기 때문이에요. 차라리 고양이 발톱에 바른 청산이 흉기였다는게 더 재미는 있었을텐데, 실상은 건식이 소독약을 바꿔치기한게 진상이라니 허무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것이 밝혀지는 것도 최호정의 자백에 불과하고요. 도대체 고양이가 뭘 알고 있었던건지 당쵀 알 수가 없네요. 

무엇보다도 방탕하고 철없던 최호정이 마지막 순간에 휴머니스트로 돌변하여 눈물까지 쏟는다는 결말은 최악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고로 별점은 1점입니다.

"아내는 탐정"

술을 끊은 김말구는 아내 박순임, 딸 김민희와 무인도로 캠핑을 떠났다. 그런데 텐트에서 소주병이 발견되고, 김말구는 새벽에 몰래 술을 마시러 나오는데...

남편이 술을 사다가 텐트에 숨겨놓은 후, 오래전 술을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위장하여 다시 술을 입에 대려고 한 것을 알아챈 아내가 술을 물로 바꿔치기했다는 내용의 꽁트입니다. 아내가 이를 알아챈 이유는 술병을 쌌던 신문지가 올해 것이었다는 겁니다. 여러모로 딱히 점수를 주기 애매한 수준의 작품이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출동! 검은손 탐정단 - 한스 유르겐 프레스 / 박수현 : 별점 2.5점

출동! 검은손 탐정단 - 6점
한스 유르겐 프레스 지음, 박수현 옮김/미래엔아이세움

어딘가 블로그에서 접하고 갑자기 너무나 읽고 싶어서 구입하게 된 아동용 추리 소설입니다. 우리나라에는 2004년도에 발표된 판본입니다. 벌써 13년 전이네요.

제가 어렸을 적에 어린이가 읽을만한 소년탐정단 관련 소설은 전설의 명작 "매거크 탐정단" 시리즈와 에리히 케스트너의 "에밀과 탐정들" 정도 밖에 없었는데,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다양한 어린이용 탐정, 추리소설 소개가 시작되었지요. 정말로 많은 어린이용 추리소설이 쏟아져 나왔는데, 지금 보면 정말이지 격세지감입니다. 제가 읽어 보지 못한 작품도 많아서 살짝 질투도 나고 말이죠. 이 시리즈는 이러한 어린이용 추리 소설의 러쉬 와중에도 탄탄한 위치를 아직 유지하고 있는(듯한) 인기작이고요. 

그런데 이 작품이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제목만 놓고 보면 첫 번째 작품 같은데, 내용에서는 시리즈 후속작 느낌이 강하게 나거든요. 탐정단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탐정단이 처음 만들어진 계기라던가, 탐정 단원들 소개가 거의 전무하며 탐정단이 나름 자리를 잡아 경찰과 함께 사건 수사를 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야기부터 읽어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기는 합니다.

그런데, 읽기 시작한 후 곧바로 큰 위화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위화감의 정체는 바로 이 책은 추리소설이 아니라 '숨은 그림 찾기'라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주요 항목별로 수수께끼가 등장하는데, 그 해답은 바로 이어진 삽화 속에 있거든요. 답은 추리력보다는 정해진 클리셰 (대표적인 예는 범행 시 깨진 시계라던가 담배 연기로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아내는 것)를 활용한 숨은 그림 찾기고요. 이래서야 "윌리를 찾아서"와 별로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물론 단점이라고 마냥 폄하할 수는 없습니다. 주요 독자라는 11세 가량의 아이들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일 수도 있으니까요. 게다가 소개되는 2편의 이야기 모두 나름의 재미도 있고 숨은 그림 찾기건 뭐건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만큼은 충실하게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기를 끌 만한 여지도 크고요. 그림도 아주 좋은 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물이라는 것에 입문하는 어린 친구들에게는 충분히 좋은, 추천할 만한 책인만큼 나중에 제 딸아이에게 한번 보여줄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책이 출간 될 정도인데 왜 전설의 명작 "매거크 탐정단"은 아직도 복간이 되지 않는걸까요?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2017/10/28

엔드 오브 왓치 - 스티븐 킹 / 이은선 : 별점 2.5점

엔드 오브 왓치 - 6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랜 컴비 홀리와 함께 사설업체 "파인더스 키퍼스"를 운영하던 빌 호지스는 의사로부터 췌장암에 걸려 오래 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편, "메르세데스 킬러" 브래드 하츠필드는 재핏이라는 게임기를 활용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 속으로 이동하여 조종하는 능력을 손에 넣었고, 이 능력을 이용하여 세상과 빌 호지스에게 복수하려 했다. 
재핏 게임기와 관련된 기묘한 자살 사건, 특히 제롬의 여동생 바브라에게 닥친 자실 미수 등을 접하며 빌 호지스는 사건의 이면에 브래디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지만 브래디는 담당 의사 배비노의 몸을 빼앗아 도주해 버렸다.
빌 호지스는 브래디의 음모를 막기 위해 생명을 걸고 마지막 승부에 나서는데...

스티븐 킹빌 호지스 3부작(요새 말로 트릴로지) 마지막 편입니다. 이번에는 병원에서 신비한 능력을 얹은 1편의 살인마 "미스터 메르세데스" 브래디 하츠필드가 재등장하여 빌 호지스와 숙명의 대결을 펼칩니다. 결말은 "끝"을 의미하는 제목 그대로고요. 시리즈는 정말 확실하게 끝납니다.

재미만큼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납니다. 그런데 다른 시리즈와 확실한 다른건, 이 작품은 추리물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겁니다. 1편은 2015년 에드거상 수상작답게 분명 추리라고 할 수 있는 요소가 있었습니다. 정교하지는 못했지만요. 2편은 빌 호지스 시리즈라고 부르기 민망할 뿐 범죄물로는 괜찮았고요. 허나 이번 편은 추리적인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장르도 "싸이킥 호러 스릴러"라고 해야 합니다. 브래드가 손에 넣은 특별한 능력 - 염력과 재핏 게임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침투하여 그들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 - 이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니까요.
물론 빌 호지스가 브래디의 능력을 알아내는 과정은 수사 비스무레한 절차를 거치기는 하지만, 브래디의 능력이 상식을 초월했다는 것만 문제지 그의 행방과 음모를 추적하는 과정은 너무 뻔하고 단순해서 흥미를 불러 일으키지 못합니다. 몇가지 단서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 브레디의 담당 의사가 수상하다! 녀석을 쫓아가자! 그냥 이게 전부거든요.

그래도 브래디의 능력은 설득력 있게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지 않은 것을 있음직하게 그려내는 스티븐 킹의 특기가 잘 발휘되어 있지요. 단지 능력에 대한 묘사 뿐 아니라, 재핏 게임기를 활용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침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후의 계획도 볼거리입니다. 기술을 더욱 발전시킨 후 게임기를 확산시켜 자살을 사람들 마음속에 심어준다는 음모인데, 희대의 IT 전문가이자 정신병자 살인마인 브래디 캐릭터에도 잘 어울리는 설득력 높은 설정이었어요.

또 여러모로 열세였던 빌 호지스가 브레디의 최면 침투를 이겨내고 반격을 가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앞부분에 사용되었던 커다란 벨소리라는 복선이 적절하게 사용된 것은 정말이지 기가 막힌 명장면입니다! 너무나 전형적인 헐리우드 스타일 엔딩이지만 저는 마음에 들었어요. 아,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냥 통증 때문에 침투에 걸리지 않는 정도로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이를 위한 기지국 복선 역시 적절했고요.

다만 브래드의 음모는 세세하게 들여다보면 문제 투성이이기는 합니다. 왜 최면에 게임기를 반드시 써야 하는지가 가장 의문이에요. 그냥 화면을 들여다보고 탭하는 것으로 최면에 걸릴 수 있다면, 웹사이트를 만들어서 유도하는게 훨씬 빠르고 저렴한 방법이잖아요? 사이트 뿐 아니라 앱 형태로 뿌리면 갯수 제한이 있는 게임기보다 훨씬 넓게, 멀리 확산시킬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게임기라는 특정 조건이 꼭 필요한 것으로 설명되지도 못한 탓도 큰데,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아울러 브레디의 자살 전염, 전파 계획은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좀 허무합니다. 대량 학살을 저지르려 했던 살인마가 개개의 사람들 마음 속 빈틈을 파고들어 자살을 유도 한다는게 너무 소박해 보였던 탓입니다. 피해자들이 주변인들을 죽이게끔 하는 장치가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피해자가 고작 서너명이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지요.

아울러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제롬의 비중이 등장이 적다는 것도 별로였어요. 이럴바에야 등장하지 않고 그냥 홀리와 빌 컴비의 활약만으로도 충분했을 겁니다. 특히 이번 편에서 빌 캐릭터가 너무나 멋있게 그려져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고통도 참아가며, 심지어 마지막에 오줌까지 싸 가면서 최후의 순간까지 정의를 위해 싸우는, 특별한 능력은 없지만 친구와 선한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거는, 지금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이기까지하는 정말 멋진 올드 히어로거든요. 지금은 멸종해버린 서부영화 주인공인 셈으로, 죤 웨인이 늙어서 형사 역할을 맡는다면 이련 역할이 정말 잘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여튼, 늙은 죤 웨인의 최후의 활약을 뒤로하고 젊고 잘생긴 신예가 마무리를 짓는 결말은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정교하지도 않고, 추리물로써의 가치는 낮지만 스티븐 킹은 정말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걸 새삼 느끼게 해 준 작품입니다. 킬링타임용 책을 찾으신다면 한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타임슬립이 무엇인지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덧붙이자면, 빌 호지스 캐릭터가 정말로 멋지게 그려진 만큼 그의 젊은 시절 활약을 그린 프리퀄이 나와 주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2017/10/22

걸 온 더 트레인 - 폴라 호킨스 / 이영아 : 별점 2점

걸 온 더 트레인 - 4점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북폴리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임으로 인한 알콜 중독 탓에 이혼과 퇴사로 인생이 엉망이 된 레이첼에게는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듯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게 유일한 낙이었다, 그리고 기차가 정차하는 중간 지점에서 보이는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보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레이첼은 부부 중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뒤이어 그녀가 실종되었다는걸 알게 되는데... 

"인어 다크, 다크 우드"와 동일한, 요새 유행하는 1인칭 시점의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입니다. 영화화되었다는데, 영화화될 만큼의 재미는 충분히 전해줍니다. 사라진 메건이 어떻게 되었는지? 누가 죽였는지?에 대해 계속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전개 덕분입니다. 이 중 메건이 실종된 날 필름이 끊긴 레이첼의 기억이 사건 해결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은 특히나 일품이에요. 레이첼이 메건을 죽인걸까? 아니면 뭔가 중요한 것을 본 걸까? 등 오만가지 생각을 불러일으키니까요.

이러한 전개가 모두 3명의 여성 - 레이첼, 메건, 애나 - 시점으로 진행되는 것도 독특합니다. 사실 다양한 인물들의 1인칭 시점이 교차되는 전개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근 읽은 이런 류의 전개 방식은 보통 서술 트릭을 위한 장치인 경우가 많았던 반면, 이 작품은 애나가 톰이 거짓말을 정말 잘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장면, 애나가 톰이 숨겨둔 전화기를 찾아내는 장면 등 레이첼 시점에서는 알 수 없는 디테일을 보강해주는 장치로서, 또 톰이 원래 살던 집에서 계속 사는 이유에 대해 레이첼에게 한 말과 애나 시점의 심리 묘사가 반대된다는 것을 드러내는 식으로 레이첼은 모르지만 독자에게만 해당 정보를 살짝 알려주는 식으로 사용되는 등 정직하게 전개를 위해서만 사용해서 오히려 더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레이첼이 메건을 엿보며 "제스"라고 혼자 부르다가 갑자기 "메건" 시점으로 넘어올 때의 기묘한 느낌도 나쁘지 않았고요.

아울러 "일상계" 느낌이 가득하다는 독특함 역시 큰 장점입니다. 정말 보통 사람(알콜 중독에 빠져 있고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앓고 있는 현 상태만 보면 오히려 그 이하)인 레이첼이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좌석의 기차를 타면서 똑같이 정차 하는 곳의 집을 쳐다보다가 사건과 관련된 무언가를 보게 된다는 설정부터 아주 매력적이지요. 게다가 그녀가 목격한 것은 정말 사소한 사항에 불과했고, 사건의 진실과도 동떨어져 있었다는 진상도 마음에 들고요. 우연히 찍은 사진에 거대 조직의 음모가 담겼다! 이런 것보다 여러모로 현실적이라 좋았습니다.

그러나 괜찮은 범죄 스릴러냐하면, 솔직히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추리"의 여지가 거의 없으며, "서스펜스"나 "스릴"을 불러일으키는데도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추리적인 부분부터 보자면, 작 중 레이첼이 벌이는 일종의 탐정 활동은 모두 무의미한 것에 불과합니다. 진상은 등장인물들의 입으로 밝혀질 뿐이에요. 단지 메건 사건 뿐만이 아니라, 등장인물들 마음 속에 있는 한가지 씩의 비밀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비밀들은 모두 사건과 관계가 없습니다. 메건의 비밀은 비교적 초반, 즉 심리치료사 카말과 면담 때 부터 중요하게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철없을 때 낳았던 딸을 부주의로 잃었다는건데, 이걸 아는 사람은 헤어진 아이 아빠 맥 밖에 없으므로 본 사건과 관계가 있을리 없으며, 심리치료사 카말이 이 것을 안다고 해도 딱히 뭘 할 리가 없지요.
레이첼이 술을 마시는 이유? 불임 때문에 알콜 중독이 시작되었고, 그 때문에 톰이 바람을 피워 이혼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 역시 본 사건과는 무관합니다. 그냥 분량 늘리기에 불과해요. 

톰이 진범임이 드러나는 장면도 황당합니다. 메건 시점으로도 작품이 교차 진행되기 때문에, 결국 메건 시점의 마지막 날 범인은 밝혀지게 됩니다. 때문에 최대한 레이첼, 애나 시점에서 범인을 제대로 드러냈어야 했는데 이 부분에서 정교한 맛이 없어서 설득력이 거의 없습니다. 결정적 단서는 애나가 우연찮게 발견한 톰의 또다른 휴대전화가 전부인데, 사건이 일어난지 오래 되었는데 왜 휴대전화를 버리지 않았을까요? 이래서야 톰이 뜬금없이 둘 앞에서 "내가 범인이야. 놀랐지?" 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도 않지요. 이는 "톰은 거짓말을 잘한다"를 드러내는 것 까지는 괜찮았는데 이를 범인으로 연결하는데 실패한 탓이 큽니다. 레이첼이 필름이 끊겼을 때 톰이 이야기 한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독자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못했고요.
이럴 바에야 레이첼 1인칭 시점으로만 작품을 전개하는게 더 깔끔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메건과 애나 시점의 전개는 실상 본 사건 해결에는 별 도움도 안되는데 장황한 묘사로 페이지를 낭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울러 서스펜스나 스릴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데, 레이첼 시점의 묘사가 너무 많은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정신적으로 불완전하고, 이혼에 대해 자책하고 항상 알콜 중독을 의식하면서 술을 마시거나, 혹은 도피처를 찾는 묘사들로 솔직히 짜증 났어요. 무능력한데다가 입만 열면 거짓말에, 오지랖은 넓어서 쓰잘데 없는 사건에 뛰어들어 일만 복잡하게 만드는 민폐 캐릭터 그 자체니까요. 경찰 라일리가 그녀를 못견뎌하는게 충분히 이해될 정도였습니다. 제대로 된 증인 역할도 불가능한 인물이 탐정역을 한다? 어불성설도 유분수여야지요.
레이첼 뿐만이 아니라 다른 캐릭터들 모두 짜증나기는 마찬가지에요. 메건? 남편 덕에 유유자적하게 살면서 당당하게 바람을 피면서 사람 가지고 노는게 취미인 유부녀로, 솔직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더해요. 카말은 자신의 환자와 바람을 피는 부도덕한 심리치료사, 스콧은 의처증 가득한 정신병자, 톰은 거짓말을 일삼는 살인자라는 점에서요. 등장인물 중에서 그나마 정상이 애나, 그리고 "좋은 사람"은 레이첼의 친구 캐리가 유일할 정도로 작품에 제대로 된 사람이 없습니다(아, 캐리는 거의 마더 테레사 수준입니다).

또 최근 접했던 이런 류의 여성 1인칭 시점의 스릴러물의 대부분이 "아이"와 "임신"이 핵심 소재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 작품은 도가 지나칩니다. 레이첼이 알콜 중독이 된 이유는 그녀의 불임이고, 톰과 애나의 불륜과 재혼은 애나의 임신 때문이고, 메건의 불면증의 원인은 그녀가 출산한 아이가 죽은 탓이고, 메건이 살해당한 이유는 톰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이고.... 모든 사건이 임신과 출산에 관련되어 있는데 지나치게 편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드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는 그럭저럭인데, 최근 유행(?)에 편승한 작품으로 딱히 완성도가 높지는 않습니다. 특히 추리나 서스펜스 측면에서 말이죠.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나저나, "걸"은 등장하지도 않는데 왜 제목이 "걸 온 더 트레인" 일까요? 이 역시 미스테리입니다...

2017/10/18

150cm 라이프 1 - 다카기 나오코 / 한나리 : 별점 1.5점

150cm 라이프 1 - 4점
다카기 나오코 지음, 한나리 옮김/시공사(만화)

작품이 있으면 읽어보곤 하는 일상 에세이툰 작가 다카기 나오코의 작품입니다. 제목 그대로, 키가 작기 때문에 겪었던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털어놓고 있습니다.

언제나처럼 귀엽고, 생활 밀착형 에피소드들은 역시나 잔잔하니 좋긴 한데...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일단 제 자신이 키가 작은 편은 아니라서 이야기에 공감하기 쉽지 않았던 탓이 큽니다. 게다가 별 관심이 없는 "패션" 관련 이야기 비중이 높다는 문제도 있고요(약 2/5 정도?). 재미가 없는건 아닌데, 여자 옷에 대해 아는게 없는 저로서는 즐길거리가 별로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키가 작아서 공감대를 느낄 수 있는 분들이라면 모를까, 구태여 구해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3권까지 출간되었는데, 저 역시 더 찾아볼 것 같지는 않네요.

덧붙이자면, 100여 페이지를 갓 넘을 뿐인데 정가가 9,000원이나 한다는 것도 잘 이해가 안됩니다. 왜 이렇게 비싼 걸까요?

악마의 증명 - 도진기 : 별점 2점

악마의 증명 - 6점
도진기 지음/비채

소설쓰는 판사에서 소설쓰는 변호사가 되신 도진기 작가의 신작 단편집입니다. 여덟 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책 뒤 소갯글에 따르면 주로 초기작들입니다.

익히 알려진 작가의 이력만 보면 한국의 존 그리샴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작품들도 재판 과정이 핵심이거나, 아니면 일반인이 놓치기 쉬운 법의 맹점을 파고 드는 이야기가 많고요. 그런데 이 단편집 수록작들에서는 "정신자살"에서는 보여주었던 변격물적 취향이 많이 엿보입니다. 몇몇 작품은 김내성의 직계 후예라 해도 좋을 정도에요. 김내성의 본격물이 아니라 "비밀의 문"에 수록되었던 범죄 추리 소설, 또는 환상 소설에 가까운 작품들 말이지요.

물론 작가의 특기라 할 수 있는, 한국 추리 문학계에서 보기 드문 퍼즐러로서의 장점을 잘 드러내는 본격 추리물이 없지는 않습니다. 검사이자 변호사인 호연정 시리즈 2편, 그리고 "구석의 노인"이 그러합니다. 작품들 모두 법정 미스터리 분위기가 물씬 나는 것도 괜찮고요. "킬러퀸의 킬러"도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맛이 잘 살아있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외 4 작품은 김내성의 범죄 추리, 환상 소설과 유사하거나, 장르를 특정짓기 어려운 작품인데 개인적으로는 변격물적인 취향은 영 아니다 싶었어요. 몇몇 작품은 습작 수준이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도 힘들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정통 본격 추리물을 전문가적인 지식을 더하여 써 낸다는 측면에서 항상 응원하고 있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시작과 취향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 책입니다만, 전체 수록작의 평균 완성도는 이 정도에 그칩니다. 그래도 일부 작품은 괜찮은 만큼,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수록 작품별 상세 리뷰로 글을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악마의 증명"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박철은 부대찌게 집을 털려다 우발적으로 살인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경찰에 순순히 체포된 그는 검사 호연정에게 범행을 자백했다. 그러나 법정에서 이 모든 것을 뒤집는데... 

모 드라마에서 표절했다는 시비가 붙었던 작품입니다.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지만 "범인이 쌍동이이고, 누가 범행을 저질렀는지 명확하지 않으면 기소가 불가능하다."는 설정을 따라갔다면 표절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진기 작가 정도의 전문가가 아니면 이만큼 설득력있게 그려내기가 힘든 소재니까요. 물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법리적인 이론을 바탕에 둔 아이디어라 표절을 증명하기는 어렵다는게 문제겠지만요. 여튼, 표절 시비가 있을 만큼 괜찮은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러나 호연정 검사가 박철 기소에 성공하는 후반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일사부재리 원칙을 피해가기 위해서 첫번째 사건 기소를 허위로 작성했다는게 핵심인데, 일반 독자가 볼 때 무리수였던 탓입니다. 박철이 법정에서 자백을 뒤집을 것이라는건 호연정 검사의 막연한 추측일 뿐, 명확한 것이 아니니까요.
꼭 이렇게 권선징악적인 결말을 가져가야 했을지도 의문입니다. 법대생 박철을 악의 화신으로 만드는 결말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작가의 데뷰작으로 이후 활약을 짐작케하는 좋은 소품이지만, 억지스러운 마무리는 아쉽습니다.

"정글의 꿈" 

노인 전문 요양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광수 노인은 오래전 경험을 토대로 밀림, 타잔 조각상을 만든 후 자신이 타잔이 된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데...

광수 노인의 환상 묘사가 이야기의 중심으로, 이는 의학적 실험의 결과물이라는 씁쓸한 결말인데 의학적 실험에 대해 깊이 파고든 것도 아니고, 딱히 특별한 반전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미묘한 소품입니다. 습작 수준의 작품이었다 생각되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선택"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를 개업한 호연정에게, 한 할머니가 딸의 죽음에 대한 보험금 수취를 의뢰했다. 딸 백해령은 손녀 현지와 함께 자동차 사고로 죽었는데, 손목을 메스로 그어 피가 전부 빠져나갔기에 보험사는 자살임을 주장하는 중이었다...

보험사에서 자살로 판단하여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는 기묘한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이야기로, 호연정 변호사의 끈질긴 수사와 추리가 돋보입니다. 특히 작 중 중요하게 언급되는 '동기' - 살인이든 자살이든 물리 법칙에 맞는 설명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은 바로 '동기'다. 동기라는 인과를 벗어나 있는 사람은 없다. - 를 드러내는 과정만큼은 정말 괜찮았어요.

하지만 진상의 설득력이 높지는 않습니다. 차가 절벽에 걸린 상태에서 뒷좌석에 앉은 딸아이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손목을 그어 피를 짜낸다는 극한의 모성애가 진상으로, 일종의 시소와 같이 무게 중심이 뒤로 이동하도록 한 고육지책이라고 설명되는데 솔직히 납득이 되지 않았거든요. 전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손목을 메스로 그을 정도라면 최후의 순간까지 뭔가 다른 수를 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지요. "김전일"의 한 대사처럼(아마도 "비련호?"), 어떻게든 둘이서 함께 살아날 방법을 찾는게 최선이니까요. 결국 둘 다 죽어버렸다는 결말이니 더더욱 그러합니다. 뭔가 이도저도 아닌 결말이라 씁쓸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일종의 불가능한 상황을 추리로 밝혀내는 작가의 특기는 잘 나타나있지만, 진상의 설득력이 약해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호연정 변호사 캐릭터는 마음에 든 만큼,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활약해 주기를 바랍니다.

"외딴집에서" 

백수로 미제 사건을 추적하는 취미가 있는 "나"는 우연히 가평군 일대를 공포에 떨게 한 연쇄 토막 살인 사건의 범인을 목격하고 추격했지만, 그에게 되려 습격당해 정신을 잃고 마는데...

10페이지 정도에 불과한 짤막한 꽁트로 1인칭 시점으로 연쇄 토막 살인 현장에 대해 자세하게, 잔혹하게 설명하는 것이 내용의 거의 대부분입니다. 흔해빠진 공포 영화와 다를바 없는 상상력에 기반한 묘사도 진부하지만, 마지막에 화자는 이미 죽어 목이 잘린 상태라는 것이 드러나는 반전은 뜬금없기 그지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점수를 줄 여지가 거의 없는 습작으로, 이 단편집 수록작 중 단연코 워스트입니다.

구석의 노인 

개업한지 2년차 변호사 성호는 한 살인 사건을 수임하였다. 국밥집을 남편과 운영하던 강은심 여인이 남편을 죽인 스토커 장만녕을 살해한 살인 사건으로, 성호는 정당 방위임을 확신하고 변호를 진행했다. 강은심 여인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의욕이 없었지만, 성호의 노력으로 그녀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성호는 사건을 방청한 '구석의 노인' 김옥선으로부터 의외의 진상을 전해 듣는데...

국내에서 보기 드문 법정 미스터리와 안락의자 탐정물이 결합된 이색작입니다. 강은심 여인이 정당 방위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성호의 활약으로 증명되는 부분이 법정 미스터리이고, 김옥선 노인을 통해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는 부분이 안락의자 탐정물입니다. 

김옥선 노인 추리의 근거가 되는 단서들은 대체로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어서 본격물로의 가치도 높습니다. 특히 장만녕이 스토커로 오해받게 된 이유 - 공중 전화로 자기를 숨기고 연락을 했다는 등 - 가 사실은 둘이 몰래 사랑하는 사이었다는 추리로 이어지는 부분은 아주 괜찮았어요. 재판 과정의 디테일이라던가, 정당 방위와 오상 방위의 차이점이 중요하게 언급되는 등 작가의 법률 지식이 돋보인다는 것도 큰 장점이고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강은심 여인이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며 살아왔다는 것이 법정이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전혀 언급되지 않는게 대표적입니다. 오로지 김옥선 여사의 관찰로 얻은 정보이며, 최후의 추리에서 소개되기에 독자는 이 정보를 얻기가 불가능하거든요. "형부에게 그렇게나 구박받고 살아왔지만.." 하는 식으로 사건을 의뢰한 강은심 여인 동생으로부터 정보를 제공받는게 보다 공정했을 겁니다.
추리도 비약이 심해서 좋은 점수를 주긴 힘들어요. 마침 사건 당일 반지를 선물받았다는 것은 작위적이며, 이 반지로 강은심 여인의 마음이 갑자기 바뀌었다는건 아무리 보아도 무리입니다.

아울러 장만녕, 강은심 커플의 계획 살인도 어설프기 그지 없습니다. CCTV 필름을 사건 후 회수할 생각이었다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사건의 핵심 증거물이 될 CCTV 필름이 사라진걸 경찰이 과연 허투루 넘겼을까요? 이렇게 대충 설명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지요. 차라리 가게 안이 아니라 입구 쪽에서 살해하고 도주했다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형식으로 재미있는 작품이긴 합니다. 단, 추리적으로는 보완이 필요해 보여 감점합니다.

참고로 "미스테리아 1호"에 수록되었던 작품으로, 당시에는 별점을 1.5점 주었었네요. 다시 읽어보니 그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습니다.

"시간의 뫼비우스"

기차 여행 중인 민경에게 옆자리에 앉았던 중년 사내가 말을 걸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마약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시작하여, 과거 108번에 걸친 기나긴 시간 여행에 대해 털어놓는데...

이색적인 환상 소설로 타임 슬립을 다룹니다. 의식만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의 삶을 지켜보기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타임 슬립 SF와는 차별화되고요. 주인공 정영한이 108번에 걸친 인생 반복을 통해 나름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구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아요. 정영한이 타임 슬립을 하며 두 가지의 미련, 자신을 파멸시킨 악한 김광련과 이철환에 대한 원한과 자신의 실수로 헤어진 첫사랑 채희에 대한 회한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게 결말이니까요.
"풍뎅이"로 상징되는 타임 슬립 이론도 꽤 괜찮습니다. 머리 속에 영상으로 그려질 정도로 디테일한 묘사가 뒷받침되어 있기도 하고요.

아울러 108번을 살아온 사람다운 독특한 의견이 눈길을 끕니다. 그건 바로 청춘의 방황이라면 차라리 발산하는게 낫다는 것입니다. 안으로, 안으로만 들어가서는 지나고 보면 후회밖에 남지 않는다, 책 천 권을 읽으면서 젊음을 보낸 사람이나 여자 백 명을 만나며 젊음을 보낸 사람이나 지나고 보면 같고, 그 깨달음의 깊이도 다르지 않다는 의견입니다. 카사노바와 칸트가 같은 레벨이라는 뜻인데, 동의는 못하겠지만 특이하긴 합니다.

하지만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딱히 과학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타임 슬립 자체가 아니라 정영한에 집중한 이야기 구조는 좀 단순합니다. 108번이나 인생을 되돌아 살아왔던 사람에게 남은게 첫 사랑에 대한 회환과 원수에 대한 복수 뿐이라면 좀 시시하잖아요. 복수를 포기하는 것도 딱히 설명되지 않고요. 저 같으면 복수를 하고, 마지막 기차를 타서 인생을 바꾸려고 했을 겁니다.
이야기를 듣는 민경의 역할도 애매합니다. 정영한 1인칭 시점의 이야기로 풀어내려갔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왜 민경이라는 역할을 등장시켰을까요? 화자도 아니고, 딱히 이야기에 도움을 주는 역할도 아닌데 말이지요. 이런 이야기 끝에 영한이 정말로 사라져버렸다면, 이렇게 담담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을 사람이 있을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굉장히 독특한 작품임에는 분명한데, 이야기 완성도면에서 조금 아쉽네요.

"킬러퀸의 킬러" 

헤어디자이너 성희는 킬러퀸이라는 바에서 펀드매니저라는 피터 최를 만나 사귀기 시작했다. 이후 장안일보 윤주현 기자가 살해당했고, 유력한 용의자로 피터 최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윤주현 기자에게 발송된 메시지를 보낸 휴대폰 추적 결과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사건은 답보 상태에 놓이고, 윤주현의 로커룸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현금 다발이 발견되는 등 꼬여만 갔고, 결국 추리 소설을 쓰는 그의 아내 송지원이 직접 사건 해결에 뛰어드는데... 

호구의 영원한 유행어,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를 뱉고 마는 성희였다.

이 단편집에서 재판이나 법조계 인물이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정통 추리물인 이색작입니다. 수준도 높습니다. 송지원이 입수한 정보는 모두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며, 추리 역시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는 덕분입니다. 남편과 동명이인인 리틀 윤주현에 얽힌 해프닝도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어서 마음에 드네요.

단점이라면 윤주현이 사실은 아내도 모를 정도의 이중 생활을 수년간 벌였다는게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정도면 꼬리가 밟혀도 진작에 밟혔어야 할 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경찰이 "피터 최"의 행적을 제대로 쫓았다면, 결국 그가 윤주현 기자와 동일인물이라는 것도 밝혀졌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가끔 추리 소설을 읽다가 드는 생각인데, 작가들이 경찰력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어요.

그래도 본 단편집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로 치고 싶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죽음이 갈라 놓을 때"

"미스테리아" 5에 수록되었던 단편입니다. 그 당시에도 리뷰를 작성했으며, 제 감상평은 그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에 링크만 겁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링크를 확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017/10/14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 박연선 : 별점 2.5점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 6점
박연선 지음/놀(다산북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삼수생 강무순은 얼마 전 할아버지를 잃은 할머니 감시(?)차 시골 마을 두당리에 유배(?)되었다. 아흔이 넘어도 건강한 할머니와 함께 익숙하지 않은 시골 생활을 보내던 중, 우연히 15년 전 마을 소녀 4명이 한꺼번에 사라진 실종 사건과 당시 할머니 집에 와 있던 그녀가 어떤 식으로든 실종 사건에 관련되었다는걸 알게 되었다. 강무순은 마을의 유력자인 경산 유씨 종가댁 후계자 "꽃미남"과 함께 당시 있었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게 되는데....

유명 드라마 작가라는 박연선의 작품입니다. 이쪽 바닥(?)에서의 입소문이 제법이라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확실히 입소문이 날 만 하더군요. 재미 면에서는 나무랄 데가 없는 덕분입니다. 특히 드라마 작가답게 대사가 아주 찰지고 현란합니다. 주인공 강무순이 억지스러운 시골 유폐 생활을 한탄하는 독백은 개중에서도 백미입니다. 좀 지루해질만 하면 중요한 변곡점이 등장하는 식의 전개, 사연이 있으면서도 개성적인 캐릭터들도 드라마 작가로 다져온 솜씨를 발휘해서 독자를 사로잡고요.
한국적인 묘사들도 좋습니다. 두당리라는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세세한 소품, 그리고 설정들을 허투루 지나가지 않는 디테일이 아주 빼어나거든요. 마을의 중심에 있는 경산 유씨 종가집과 마을 사람들, 농사와 식사 등 모두가 충실하게 묘사되고 있으니까요. 또 묘사를 묘사로 끝내지 않고 전개에 슬쩍 끼워 넣는 솜씨도 탁월해요. 명아주라던가 바랭이 풀에 대한 묘사가 이야기에 녹아들어가는게 대표적입니다.

이러한 전개, 묘사에 더해 이야기의 핵심 미스터리도 흥미롭습니다. 15년 전 마을 소녀 4명의 실종 사건이 중심인데, 이것을 강무순이 당시 묻었던 보물 상자와 결합시켜 전개함으로써 독자를 몰입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수수께끼가 하나씩 드러나는 것도 앞서 말씀드린 주요 변곡점과 합쳐져 독자의 관심을 계속 잡아 끌고요. 이는 보물 지도 속 "다임개술"이라는 기묘한 말과 보물 상자 속 소품들이 무엇인지가 이 소녀들 실종 사건과 연결되는 덕분으로,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4명의 소녀가 실종된 것은 모두 개별적 사건이라는 진상도 엄지 척입니다. 아,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그 중에서도 황부영 실종에 대한 진상은 정말이지 최고에요. 지극히 한국적인 비극적 가족 관계를 이야기에 잘 녹여낸 아주 괜찮은 이야기였거든요. 이것만 따로 떼어서 이야기를 한 편 꾸며도 충분히 좋겠다 싶을 정도였어요.

그러나 좋은 추리 소설, 장르문학이냐고 하면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강무순이 종가댁 꽃미남과 벌이는 조사는 모두 진상과는 무관한 헛된 노력일 뿐이며,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과정에 별다른 추리는 등장하지 않는 탓입니다. 소녀들 실종 사건은 모두 우연하게 해결되니까요.
우선 유미숙을 발견하는 것은 단순한 미행의 결과에 불과합니다. 목사댁 조예은의 사체가 발견된 것도 우연이고요. 황부영 사건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도 억지스러운 작위적인 설정 - 강무순이 우연히 만난 황부영을 기억하고, 또 우연히 당시 사진을 찍어 조사가 가능했다는 두 번의 우연이 겹친 것 - 에 의해 해결되기에 더욱이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솔직히 우연히 만난 여성의 엄지손가락을 기억하여 그 여자가 황부영이 아닐까?를 떠올린다는 것 부터가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이지요.
유선희 실종 사건의 진상도 별로이며, 황부영을 통해 알아낸 정보가 도화선이 된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게다가 진상은 모두 당사자(황부영, 종가댁) 입을 통해 직접 듣는다는건 부실한 추리 구조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유선희를 임신시킨 진짜 악당이 안체부였다는 진상입니다. 아무런 복선도, 단서도 없이 드러나기 때문에 뜬금없기가 이루 말할 수 없네요. 최소한 안체부와 꽃돌이가 닮았다는 정도의 단서라도 제공해 줬어야지요.

그 외, 강무순이 타임 캡슐로 묻은 뱃지와 목각인형을 얻은 경로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등 설명이 부실한 것도 감점 요인입니다.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어렵지만, 21세기를 무대로 한 작품이 30년 전 "전원일기" 당시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시골 마을과 캐릭터 설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솔직히 이해는 잘 되지 않았어요.

그래도 이러한 단점을 덮을만큼 압도적인 재미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본격물 애호가가 아니라면 미스터리 쪽으로도 나름 즐길 만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저는 본격물 애호가라 감점 했습니다만 한국 추리 소설, 장르 문학에 관심있으신 분들께 꼭 권해드리고 싶네요.

2017/10/09

허구추리 - 시로다이라 쿄 / 박춘상 : 별점 2점

허구추리 - 4점
시로다이라 쿄 지음, 박춘상 옮김/디앤씨북스(D&CBooks)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루머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고 알려진 아이돌 나나세 카린의 유령이 마쿠라자카 시에 나타났다. 큰 가슴에 미니 드레스, 리본을 달고 손에는 큰 철골을 든 모습이라서 사람들은 그녀를 "강철 인간 나나세"라고 불렀다. 유령은 사람들을 습격하다가 결국 경찰마저 살해해 버렸고, 사건에 관련된 교통과 순경 사키는 우연히 만난 소녀 이와나가 코토코, 그리고 전 애인 쿠로와 함께 강철 인간을 없애기 위한 승부에 나섰다... 

일본작가 시로다이라 쿄의 장편 소설입니다. 추리 만화 "스파이럴" 등의 원작으로 알려진 작가이지요. 본 작도 만화적인 설정이 가득찬 라이트 노벨이기는 한데,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진짜 진상이 아니라 정말로 있어보이는 가설을 연달아 내 놓는다는, 발상의 전환이라 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이런저런 가설, 추리가 선보이는 작품은 그 중에서 "진상"을 찾아내는게 보통 이야기의 핵심인데, 이 작품은 "허구(사실에 없는 일을 사실처럼 꾸며 만든) 추리"를 진짜라고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게 목적이거든요. 이 아이디어 덕분에 '12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같은 이유로 국내 최고의 미스터리 애호가 모임인 "하우미스터리"에서도 추천하는 분들이 제법 계셨을 테고요. 저도 "하우미스터리"에서 관련 정보를 접하고 관심을 가지던 차에, 기나긴 추석 연휴의 대미를 장식하고자 집어들었습니다.

일단 라이트 노벨답게 쑥쑥 읽힙니다. 만화 원작을 많이 쓴 작가답게 캐릭터와 장면을 시각적으로 떠오르게 만드는 묘사, 재치넘치는 대사도 괜찮아요. 주인공인 일안일족 아가씨 이와나가 코토코도 마음에 듭니다. 귀한 집 아가씨이지만 상스러운 말도 서슴없이 내뱉고, 남자친구 사쿠라가와 쿠로에게 집착하는 모습이 개성적이면서도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새 말로 '갭모에'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앞서 언급했던 독특한 아이디어를 제외하면 추리적으로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은 많지 않습니다. 우선 "허구 추리", 즉 이와나가가 '강철 인간 나나세 종합 사이트'에 올리는 네 가지의 추리 모두 조금만 뒤집어보면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바로 반박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될 정도로요.
그리고 네 번째 추리를 설득력있게 포장하기 위해 앞의 세 가지 추리를 내 놓는다는 것도 억지스럽습니다. "테라다 형사가 혼자서 수사에 나섰다", "나나세 카린의 아버지가 악의를 가지고 수기를 남겼다.", "나나세 하츠미가 매스컴에 수기를 흘렸다."라는건 구태여 이렇게 가설까지 만들어가며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니까요. 네 번째 추리의 핵심이 이 세가지 요소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게다가 첫 번째 테라다 형사 이야기를 제외하면 결국 나나세 카린은 "궁지에 몰리고", "죽고 싶었다."라고 밖에는 설명되지 않기에 외려 드러내면 안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냥 네 번째 가설로 정면 승부를 하면 될텐데, 구태여 앞에 장황한 설명을 덧붙인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또 네 번째 "허구 추리"의 핵심인, 나나세 카린이 실제로 살아있다는 시체 바뀌치기 트릭은 조금 그럴듯하게 포장해 놓았지만 솔직히 현대 경찰을 우습게 본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건 정말이지 뭐라 할 말이 없네요.

만화적인 설정도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특히 인어 고기와 쿠단의 고기를 함께 먹은 사쿠라가와 쿠로에 대한 설정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쿠단의 "미래 결정 능력"에 불사의 능력이 결합되어 죽지 않고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좋지만, 사건 해결에 별 도움이 되지는 않는 탓입니다. 단지 강철 인간과 호각으로 맞붙기 위한, 액션용 소품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입니다. 능력이 있다고만 묘사되지 딱히 어떻게 발휘되는지 묘사가 없으니 독자는 알 도리가 없지요. 그냥 이와나가가 올린 글로 사건이 해결되는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이 점은 쿠로의 사촌 누나이자 동일한 힘을 가졌으며, 강철 인간 나나세를 만들어낸 최대의 적 릿카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럴 바에야 이와나가는 귀신과 소통할 수 있으며 쿠로는 일종의 호위 무사라는 정도로 끝내는게 깔끔했을 겁니다. 아니면 "미래 결정 능력"을 좀 더 시각화하던가요("그래 결심했어!"와 함께 두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른다던가...).

이렇게 독특함 외에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조금 연령대가 낮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작품으로 생각됩니다.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구태여 구해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만화로도 발표되었는데 만화가 훨씬 괜찮을 것 같네요.

2017/10/06

하늘을 나는 말 - 기타무라 가오루 / 정경진 : 별점 3점

하늘을 나는 말 - 6점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정경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기타무라 가오루의 전설적인 일상계 연작 단편집입니다. "동서 미스터리 100"의 일본편 17위를 차지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걸작이지요. 오래 전 부터 국내 출간을 기다리던 작품입니다.
사실 국내 소개가 이렇게나 늦어진 것 자체가 굉장히 의외에요. 앞서 말씀드린 "동서 미스터리 100"선 상위 20개 작품 중 국내 미출간 작품은 이 작품과 아유카와 데쓰야의 "검은 트렁크" 두 작품이 유이할 정도거든요. 이 중 "검은 트렁크"는 1950년대 출간된 묵직한 고전이지만, 이 작품은 80년대 발표된 나름 신세대 미스터리 작품인데 말이지요. 게다가 일상계 미스터리는 국내에서도 요네자와 호노부의 작품들이나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 등으로 제법 인기를 확보하고 있기도 하고요. 온갖 수준 이하의 작품들까지 번역되는 일상계 추리물의 홍수 속에 이 유명 작품이 이제서야 소개된 것 자체가 미스터리같습니다. 무슨 어른의 사정이 있는지 조금은 궁금하네요.

여튼, 그만큼 기대가 컸는데 다행히 재미있었습니다. 작가가 여성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의 섬세한 묘사들이 가득하여 푸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전해주며, 추리적으로도 정통에 가까운 이야기들인 덕분입니다. 기묘한 이야기가 선보이고, 그것을 엔시씨가 주어진 단서만으로 풀어낸다는 고전적인 안락의자 탐정 스타일인데, 대체로 설득력있고 합리적입니다.
국문학을 전공하는 화자 "나"와 라쿠고가 탐정 엔시 씨 캐릭터도 좋아요. 작가의 섬세한 필치로 매력적으로 묘사되고 있음은 물론, 주인공의 "국문학도" 로서의 전문가적인 지식과 엔시 씨의 "예인"으로서의 특수 능력 - 놀라운 기억력과 라쿠고 연기를 통해 단련한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보는 능력 - 이 이야기와 잘 결합되고 있는 덕분입니다.

단점이라면 분량에 비해 추리적인 부분이 좀 부족하다는 것 정도? 이것은 엔시씨와 나, 그리고 그 외 등장 인물들과 본 편 추리와는 무관한 배경 묘사 비중이 높은 탓입니다. 덕분에 캐릭터가 생동감있게 다가오고, 전개에 있어서도 설득력이 더해진다는 장점은 있습니다만, 추리 부분의 비중이 작아진건 개인적으로 아쉬웠어요. 국내 소개되었던 작가의 다른 단편집 - "시미가의 붕괴" - 등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굉장히 빠른 호흡으로 전개되었기에 의외이기도 했고요. 아무래도 이 작품이 발표된 해가 버블의 정점이었던 1989년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여유있고 풍요로왔던 시대에 어울리는 느긋한 분위기가 가득 느껴지니까요.

그래도 숨 넘어갈 것 처럼 달리는 와중에도, 쉬어갈 필요는 있는 법이지요. 단점은 사소할 뿐, 시대를 뛰어넘는 재미를 전해주는 좋은 일상계 소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일상계 미스터리를 좋아하신다면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다음과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세요.


"오리베의 망령" 

"나"는 우연히 대학교 은사 가모 교수의 부탁으로 라쿠고가 엔시씨 인터뷰에 동행했다. 인터뷰 후 회식 자리에서 가모 교수는 어린 시절 꾸었던 기묘한 꿈 이야기를 했는데, 엔시 씨는 이야기만 듣고 진상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는 증거 보완을 위해 한 달의 시간을 요청하는데...

화자인 "나"와 탐정역인 라쿠고가 엔시씨가 등장하는 기념할만한 시리즈 첫 편입니다. 섬세하면서도 느긋하고, 조금은 할머니 취향인 "나"와, 뛰어난 기억력을 갖추고 사람들을 꿰뚫어보는 엔시 씨가 제대로 소개됩니다. 전통 일본적 소재인 라쿠고와 오리베 자기, 그리고 교수님 꿈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지는 전개도 괜찮고요.

추리적으로도 단서가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교수님 꿈의 이유가 된 숙부님이 평소 책을 함부로 대했다는게 핵심이거든요. 물론 교수님이 어렸을 때의 일본 사회 분위기, 당시 경매 제도 디테일 등은 국내 독자로서 알아내기는 불가능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만, 일본 한정으로는 충분히 설득력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되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리즈 시작으로는 적절한 수준의 이야기였습니다.

"설탕 합전" 

"나"는 어느 날 엔시 씨를 우연히 만나 함께 홍차를 마시게 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는 앞 테이블에 앉은 3인조의 기묘한 행동에 신경을 쓰게 되는데...

사소한 것에서 진상을 꿰뚫어보는 엔시 씨의 능력이 잘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핵심 추리는 "왜 세 명의 마녀(?)가 설탕 합전을 벌이는가?" 이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나"가 신경쓰는 사람들이 세 명의 여자 아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그녀들이 반드시 다시 돌아올 거라는걸 예언하는 등의 소소한 추리도 아주 볼만했습니다. "설탕을 홍차에 타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설탕을 꺼내려는 목적이었다"에서 시작되는 핵심 추리의 흐름 및 진상도 충분히 합리적이고요. 변장과 연기(?)로 사건을 완벽하게 해결하는 엔시 씨의 활약까지 더해지기 때문에, 그야말로 완벽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가 무언가 이상한 것(소금)을 넣는 것을, 원래 퍼낸 설탕을 다시 넣는 것으로 착각한 이유가 불분명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다른 용기에 담아온걸 넣었을 텐데, 이걸 착각한다는건 무리니까요. 앙심을 품은 알바생이 너무 자신을 드러내놓고 가게에 출입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그래도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은, 시대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아주 좋은 일상계 소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호두 껍데기 안의 새" 

"나"는 친구 다카오카 쇼코와 함께 도호쿠 여행을 떠났다. 엔시 씨의 공연도 보고, 온갖 절경을 감상하며 여행을 즐기던 중, 현지에서 만난 친구 에미의 차 시트가 모두 벗겨진 채로 발견되는데...

분량은 약 90페이지에 가까운데, 80여 페이지에 걸쳐 도호쿠 여행담이 소개됩니다. 아무리 일상계 작품이라지만 이래서 되나 싶을 정도로 무관한 배경 묘사 비중이 높아서 마음에 들지 않네요. "나"와 친구들 사이의 대화 역시 지나치고요. 

작품 속 추리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동일 차종의 차 커버를 벗겨 위장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단지 시트 커버만 벗긴다고 차가 비슷해질까요? 그 안의 모든 디테일, 소품이 다를텐데 말이지요. 아울러 이렇게 위장하려고 했던 대상이 어린 여자아이라는걸 쉽게 떠올리는건 너무 심한 비약입니다.

물론 배경 묘사는 아주 근사합니다. 일본 인형 코케시의 고장이라고도 하는 "자오산"의 풍광이 정말 매력적으로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나"가 문학에 대해 정말 조예가 깊다는게 잘 드러나는 점도 좋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아쉬움이 있기에 감점합니다.

"빨간 모자"

"나"는 동네 치과에서 우연히 함께 대기실에 있던 "점 여사"로부터 기묘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알고 있는 점 여사의 동창 모리나가 유미코 씨의 집 앞에, 매주 일요일 밤마다 빨간 옷을 입은 소녀가 나타난다는 이야기였다.

전편에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전편의 결과(아이를 버린 어머니)를 궁금해 한 엔시 씨가 "나"를 공연에 초대한 후 이야기를 듣는다는 설정과 본편 이야기가 이혼에서 비롯되어 있다는 점에서요.

추리적으로는 무난합니다. "빨간 모자" 이야기는 사실 모리나가 유미코의 창작으로, 점 여사가 찾아온 날 화장실 옆에서 신발장을 정리한게 핵심 단서라는 것은 괜찮았어요. 충분히 일상계스러우면서도,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해 준 셈이니까요. 그날 목격한 "빨간 모자"는 유미코의 딸일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점 여사의 남편과 모리나가 유미코가 불륜 관계였기 때문이라는 추리도 충분히 설득력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인간 관계, 인간 심리를 그려낸 묘사는 부담스러웠습니다. 점 여사의 방자한 태도, 마지막에서 "나"가 사고가 날 뻔한 상황 등에 대한 묘사는 솔직히 불필요했고요. 본 편 추리하고는 동떨어져 있는 모리나가 유미코의 "빨간 모자" 동화 묘사도 지나치게 깁니다. 이러한 점은 한 편당 80여 페이지라는 분량을 맞추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나 의심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냥저냥한 수준의 이야기였습니다.

"하늘을 나는 말"

"나"는 집 근처 상점 "모퉁이 집"의 젊은 사장 구니오 씨가 연인과 함께 있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 이후 "나"는 부탁을 받아 유치원 크리스마스 공연 비디오 촬영을 나섰는데, 그 곳에서 산타클로스로 분장한 구니오 씨를 다시 만났다. 그날 그는 유치원에 가게에 있던 목마를 선물로 기증했다. 그런데 이웃집 며느리로부터, 유치원 마당에 놓여져 있던 목마가 순간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표제작으로 일상계 단편집 마무리에 어울리는 가슴 따뜻하고 훈훈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추리적으로 수수께끼 자체는 평이하지만, 다무라씨(구니오씨의 연인)가 날짜를 착각했다는게 잘 설명되고 있는 만큼 즐길거리는 충분합니다. 일상계에 딱 어울리는 정도의 수수께끼였어요.

무엇보다도 제가 읽었던 크리스마스용 소품들 중에서는 최고입니다. "나"의 생일이 크리스마스이고, 소재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며, 이야기의 핵심이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니 이만큼 좋은 작품이 또 있을까요? 크리스마스의 즐거움을 더해 별점은 3.5점입니다.

2017/10/03

살인자의 선택 - 에드 맥베인 / 박진세 : 별점 2점

살인자의 선택 - 4점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애니 분은 일하던 주류 판매점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그녀가 어떤 여성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당구를 즐기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쾌활한 여자인지,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 금욕주의자인지, 누군가의 정부이고 만나는 남자하고 모두 자는 방탕한 여자인지, 플라토닉한 연애를 즐기는 순수한 여자인지, 장애인 청년의 말벗이 되어주는 박애주의자인지..
경찰은 그녀의 전남편, 정부, 애인들을 샅샅이 조사하지만 그들 모두에게 확고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한편, 악덕 경찰 하빌랜드가 강도에게 살해되고, 이 사건을 수사하던 스티브 카렐라는 30분서에서 이동한 형사 코튼 호스의 실수로 용의자에게 죽을 뻔한 위기를 겨우 넘기는데...

87분서 시리즈 신작 장편(신작이라 함은 국내 소개 기준입니다)입니다. 

87분서 시리즈답게 수사 과정의 디테일은 마음에 듭니다. 그야말로 발로 뛰는 수사의 모범이랄까요. 또 팔색조 매력의 피해자 여성 애니 분 설정도 좋아요. 그녀의 전 남편, 애인, 친구들 모두에게 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기묘한 캐릭터로, 제목인 "살인자의 선택"은 그 중 하나였다는 설정인데 참 마음에 들었어요. 일본 만화에서는 히로인일 팔색조 슈퍼 우먼이 단순한 피해자라니! 시대를 앞서간 발상의 전환입니다! 이대로 마무리되기에는 아이디어가 아깝다 싶을 정도에요.
애니 분 외의 캐릭터들 묘사도 좋습니다. 그녀의 딸 모니카 분에 관련된 묘사들 - 특히 버트 클링과의 밀땅과 재치 -도 아주 귀엽고, 이번 이야기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코튼 호스의 데뷰도 아주 강렬하거든요. 코튼 호스의 첫 실수는 정말이지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후 시리즈에서도 가끔 언급될만한, 그런 이야기니까요.

작가 특유의 묘사력, 상상력도 여전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승강기 운전원이 수사 중인 버트 클리에게 하는 대사가 굉장히 기억에 남습니다. 그는 밖에 비가 오는 줄도 모릅니다. 빌딩 안 승강기에 8시 부터 저녁 5시까지 묶여있기 때문이지요. 점심도 빌딩 안 지하층 골방에서 먹고요. 때문에 그는 자기와 도시 사람들을 "두더지"라고 묘사합니다. 아이솔라는 현대판(작중 시점으로) 마굴이고, 모두 그 속을 기어다니는 벌레에 불과하다는건데, 지하와 실내만 오가는 상황만 놓고보면 지금도 그렇게 다르지는 않기 때문인지 굉장히 와 닿네요. 더위나 추위를 끔찍하게 그려내어 아이솔라라는 도시를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로 느껴지게 만든 전작들에 비하면 좀 부드러운 편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현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낸 명장면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장점은 이 정도일 뿐, 단점이 더 많습니다. 우선 추리적으로는 완전히 꽝이에요. 애니 분 사건은 전개 중 중요한 단서로 등장한 '괴편지'를 찾아낸 것이 해결 방법의 전부입니다. 전체 250여페이지 분량 중 마지막 10페이지 분량에서 해결되어 버려서 허무하기가 이루 말할데 없어요. 이 편지의 필적 감정을 통해 범인이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또한 운전면허 등록증 서명이 필적 감정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상황도 어설픈데, 정교한 알리바이 트릭을 준비한 범인이 충동적으로 자필 편지를 써서 스스로 범행을 드러낸다는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곁가지로 삽입되어 전개되는 하빌랜드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상 강도와의 다툼으로 허무하게 죽음을 맞는 상황도 어처구니 없을 뿐 아니라, 범인 찰스 페터릭의 행보가 여러모로 황당하기 그지 없으니까요. 그는 도난 차량을 도색하는 상황에서 정직하게 본명과 주소를 기입하는 등 모든 과정에서 정직 그 자체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때문에 찰스 페터릭을 찾아나가는 과정은 꼼꼼한 수사가 바탕이 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추리적인 여지는 전무합니다. 백번 양보해도 경찰까지 살해한, 도주 중인 강력범으로 보이지는 않았어요.

마지막으로 코튼 호스도 영 별로입니다. 작가 후기에 따르면 의도적으로 인기를 노리고 투입한 캐릭터인데도 불구하고요. 감식반에서 감식반원 피트와 말다툼하는 장면이 좋은 예입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에 대한 최소한의 매너가 느껴지지 않아서 화가 날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용의자를 체포하러 갔을 때는 노크를 한다? 이중인격자도 아니고 이게 뭔가 싶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인기없는 악덕 경찰을 퇴출시키고, 인기가 있을만한 새 캐릭터(코튼 호스)를 등장시키라는 편집부의 요구 사항이 뭔가 부족한 이야기에 결합된 결과물로 보입니다. 이야기 완성도가 낮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차라리 애니 분의 독특한 매력을 극대화시켜 다른 작품으로 썼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