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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9

홍차의 세계사, 그림으로 읽다 - 이소부치 다케시 / 강승희 : 별점 3점 -> 미정

홍차의 세계사, 그림으로 읽다 - 6점
이소부치 다케시 지음, 강승희 옮김/글항아리

"차"보다는 "홍차" 중심으로 기원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소개해 주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입니다. 도판과 자료가 화려해서 즐겁습니다. 차를 마실 때 사용했던 눈이 휘둥그레지는 각종 도구, 다기들, 차와 관련된 그림과 사진, 지도 등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거든요.

책은 유럽에 최초로 소개된 차는 녹차였는데 이것이 왜 홍차로 바뀌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영국물은 미네랄이 많이 함유되어 경도가 높은 탓에 녹차를 우리면 차의 떫은맛 성분인 탄닌이 제대로 우러나지 않는데, 녹차 대비 탄닌 함유량이 높은 발효차는 중국에서는 떫지만 런던의 경수에서는 순하게 우려져 좋은 맛이 되었기 때문이라네요.

원래 홍차가 실패한 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도 흥미롭습니다. 어쩔 수 없는 환경적 요인으로 반발효차를 만들지 못해 완전 발효차가 되었고, 차를 만드는 공장에서 찻잎을 건조시키는 땔감으로 쓴 소나무의 연기가 찻잎에 착향된 것이 미묘한 향이 난다는 보히차, 정산소종이 되었다고 하니까요. 그러나 원산지인 우이산의 보히차가 영국의 소비량을 따라가지 못하고, 격동기의 중국에서 차를 확보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가짜 보히차가 범람하고, 더욱 강한 맛과 향을 착향시키기 위해 강제로 훈연한 랍상소종이 지금은 영국의 전통적인 차로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니 세상 일은 정말 모를 일입니다.

또 차의 기원을 찾아 이런저런 곳을 돌아다니며 찾은 여러 가지 차에 대해 소개해 주는데, 홍차 관련된 장소에 대한 기행문이라는 점에서는 "커피견문록"이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는 지노족이라는 소수민족의 량반차가 인상적이었어요. 왜냐하면 반찬처럼 먹는 차이기 때문이에요. 차의 생엽을 유념하여 생강, 마늘, 고추, 소금과 함께 섞어 뜨거운 물을 부은 뒤 먹는다고 합니다. 꽤 맛있을 것 같죠? 비슷하게 반찬처럼 먹는 차가 미얀마에도 있는데, 이곳에서는 약간 발효한 절인 음식처럼 먹는다고 하네요.

이외에 여러 가지 차에 관련된 중요한 역사의 흐름도 짤막하게 알려줍니다. 물론 "보스턴 티 파티"가 빠질 수 없죠. 아편전쟁도 어떻게 보면 차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해석하는 관점도 새로웠고요.
홍차 관련 주요 인물들 어떤 활약(?)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얼 그레이 홍차를 만든 그레이 백작을 비롯해 중국에서 차 수입이 어려워지자 인도의 아삼이나 스리랑카의 실론 등의 식민지를 차 생산지로 활용하기 위해 노력했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지금도 그 이름을 강하게 남기고 있는 홍차의 왕 "립턴"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네요. 다른 사람들은 정말 홍차를 재배하고 널리 퍼트리는 데 노력한 사람들이라면, 립턴은 순수한 사업가로 생산과 판매에 남다른 재주를 발휘하여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거대 기업을 세운 것이니까요. 참고로 얼 그레이는 유명한 홍차 상회 트와이닝에서 정산소종의 훈연향이 랍상소종만큼 강하지 않자, 다른 향기에 주목하여 베르가못의 향을 첨가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차가 전래되면서 미국인의 실용적인 관점으로 새롭게 등장한 티백, 아이스티, 레몬티 등이 소개되고, 마지막은 맛있는 홍차를 만드는 방법으로 끝맺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통해 읽었던 조지 오웰의 수필을 중심으로 설명되고 있어서 더 반갑더군요. 내용의 핵심은 "우유를 먼저 붓느냐, 차를 먼저 붓느냐"였는데 조지 오웰의 주장은 우유의 양을 조절할 수 있으므로 우유를 나중에 부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MIF, MIA 논란은 계속 이어졌는데, 왕립화학학회까지 나서서 내린 결론은 "우유가 먼저(MIF)"입니다. 우유를 나중에 넣으면 우유 속의 단백질이 고온의 차에 의해 변성되어 차의 맛과 향이 나빠지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과학이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아주 좋은 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재미는 물론 자료적 가치도 충분한 만큼, 차를 좋아하신다면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책의 장정, 디자인도 아주 예쁘고 실려 있는 도판들도 컬러로 제대로 수록되어 있는 등 책의 완성도도 높은 편입니다.

2014.10.30 수정) 댓글을 읽어보니 책 내용에 오류가 제법 있는 것 같습니다. 참고하세요.

2014.11.06 수정) 댓글을 읽어보니 오류 정도가 아닌 것 같기에 별점은 미정으로 최종 수정합니다. 잘 아는 분야에 대해서만 리뷰를 남길 수는 당연히 없습니다. "독서"가 자신의 교양을 쌓고 부족한 것을 채우는 데 목적이 있기도 하니까요. 잘못된 정보를 주는 책을 잘 모르는 독자가 읽었을 때의 폐해의 대표적인 경우라 생각하겠습니다.

2019/09/14

차 상식사전 - 리사 리처드슨 / 공민희 : 별점 3점

차 상식사전 - 6점
리사 리처드슨 지음, 공민희 옮김, 이유진 감수/길벗

차에 대해서 이런 저런 지식을 알려주는, 제목 그대로 차에 대한 상식 사전입니다. '차'라는 이름의 어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지금의 '차'는 씀바귀 '도'에서 비롯되었으며, 일부 해안 지역에서 도의 방언 '테이'를 사용한게 티 (tea)의 유래라네요. 이전에는 '차'의 방언이라고 생각했는데 '도'의 방언이었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그 뒤에는 차의 6가지 분류를 - 백차, 녹차, 황차, 홍차, 청차, 흑차 - 각 차 별로 상세하게 소개해 줍니다. 이 책만 읽어도 각 차 별로 원산지, 제다 방법, 주요 종류, 향과 맛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합니다. 차를 끓이는 방법 역시 물의 종류 및 온도별 차 우리는 시간, 국가별로 다른 차 제조법 및 다도 방식까지 세세하게 설명해 주고요.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차를 이용한 다양한 레시피까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책만 읽어도 웬만한 차는 쉽게 끓일 수 있고, 다도에서 결례가 되지 않게 마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중국식 다도, 일본식 다도야 친숙하지만 대만과 영국, 심지어 모로코와 러시아식 다도까지 소개해주니 말 다했지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레시피 몇 개 소개해드리자면, 첫 번째는 전자레인지를 이용해 간단하게 만드는 밀크티 제조법입니다. 찻 주전자에 끓는 물과 찻잎을 넣고 5분 정도 우린 뒤, 찻 주전자에 우유를 넣고 이를 전자레인지에 넣어 우유가 끓어 넘치기 직전까지 돌리면 됩니다. 찻잔에 찻잎을 걸러서 따른 뒤 취향에 따라 설탕을 넣으면 된다는데 홍차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시도해 보고 싶네요.
아이스 밀크티 만드는 레시피도 볼 만 합니다. 얼음 얼리는 통에 우유를 얼려 놓은 뒤 홍차를 진하게 우려냅니다. 찻잔에 우유 얼음을 꽉 채운 뒤 우려낸 홍차를 살살 부으면 된다는데 정말 그럴듯해요! 그 외에 차를 이용한 레시피, 음식과 잘 어울리는 차에 대한 소개도 볼 만 합니다.

마지막은 차와 건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차가 왜 건강에 좋은지에 대한 설명과 커피와 차 중에 무엇을 마셔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저는 카페인 효과 때문에 진한 커피를 마시는 편인데, 저 같은 사람은 카페인 함량이 높은 진하고 강한 맛의 홍차나 백호은침을 마시라고 알려줍니다. 이래저래 홍차는 좀 구입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이 책 한 권만 읽어도 왠만한 차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도판이 조금 부실하지만 그 외에는 나무랄데 없는 책이에요. 전문가보다는 저와 같은 차 입문자에게 추천드립니다.

2018/06/16

집에서 차 한잔 할까? - 미야케 타카오 / 최우영 : 별점 2.5점

집에서 차 한잔 할까? - 6점
미야케 타카오, 최우영/스트로베리

일본의 중국 정부 공인 전문가인 저자가 일본차, 중국차, 홍차, 허브차, 커피의 5가지 종류 차에 대해 한 페이지에 한 가지씩, 모두 100가지 이야기를 전해주는 책입니다.

100 가지나 되는 이야기가 수록된 만큼 볼거리가 많습니다. 특히 일본차와 중국차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한 책은 처음 접해봅니다. 물론 제 공부가 부족한 탓이겠지만 이 책으로 많은 걸 알게 되었네요. 그 중 제 기억에 남은 이야기 몇 가지를 소개해드리자면, 먼저 중국의 차 중 "황차" 는 다른 차와 마찬가지로 채취하고, 볶고, 비비고, 건조시키는 과정은 동일하지만 종이로 싸서 가볍게 찌는 '민황' 이라는 작업이 추가되어 깊이가 있는 독특한 향이 생긴다고 합니다. 종이 위에 찻 잎을 얹어놓고 불 위에서 가볍게 굽는 작업이 등장했던 "맛의 달인"의 한 에피소드가 떠오르는데, 우미하라 (가이바라) 는 중국차 애호가였던 걸까요? 왠지 안 어울립니다. 

여러 명차도 잔뜩 소개하는데 그 중에서도 우롱차 중 최고라는 '봉황단총' 은 꼭 한 번 먹어보고 싶습니다. 꿀 향기가 나는 우롱차인 '동방미인' 도 마찬가지로 땡기고요. 이 차는 꿀을 첨가한 게 아니라 어린 잎을 해충에게 먹힌 차나무가 해충의 천적을 부르기 위해 천적이 좋아하는 물질을 분비해서 꿀 향기가 난다는데, 자연의 신비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 외에도 맛있는 차가 어떤 것이며 어디서 구입하면 되는지, 차를 맛있게 우려내려면 어떻게 하는지, 여러 도구들은 어떻게 쓰며 간단한 다도에서의 매너는 무엇인지 등 실제 차를 마시는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가득합니다. 그냥 뜨거운 우유를 넣는 밀크티가 아니라 우유로 끓여 만드는 "차이"에 대한 소개가 개중 백미였어요. 나중에 한 번 꼭 만들어 마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러한 정보들과 함께 매 이야기마다 수록되어 있는 일러스트도 마음에 들었고요. 그림도 잘 그렸지만 내용을 재미있게 압축해서 잘 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없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제목 그대로 "집에서 차를 먹는" 방법에 더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 가장 크게 실망했어요. 차에 대한 역사와 그 유래 등에 대한 정보도 많이 전해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최소한 항목을 일본차, 중국차, 홍차와 같은 식으로 나누려면 "왜 일본은 차를 쪄서 만들고, 왜 중국은 덖어서 만들고, 왜 영국과 유럽은 홍차를 더 좋아하는지?" 는 알려줬어야 하지 않을까요? 

또 100개의 이야기를 한 페이지 정도로 요약, 소개하기 때문에 재미보다는 참고서를 읽는 느낌이 강하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일러스트로 보강하기에는 한계가 명확한 내용이 많았어요. 홍차나 커피의 경우, 다른 전문 서적이나 자료가 굉장히 많아서 이렇게 소개할 필요가 있을지도 의문이고요. 차라리 중국차와 일본차에 집중해서 이야기마다 보다 상세하게 소개하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마지막으로 Ceylon을 실론이 아니라 세이롱이라고 표기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고, "본 차이나"를 백색 점토 대신 소의 뼈를 사용하여 만들었다는 소개는 오해의 여지가 커 보이는 등 번역 문제도 조금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차를 즐겨 마신다면 도움이 될 내용이 수록되었다는 건 분명합니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도구를 하나씩 장만해서 집에서 제대로 차를 우려내는게 개인적인 꿈 중 하나인데, 그날이 올 때까지는 두고두고 소장할 생각입니다.

2020/05/03

푸드 오디세이 - 빌 프라이스 / 이재황 : 별점 3.5점

푸드 오디세이 - 8점
빌 프라이스 지음, 이재황 옮김/페이퍼스토리

'음식은 어떻게 인류 역사를 바꾸었나'라는 부제처럼 음식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가 매우 가까우며, 음식이 사회와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걸 50개의 대표 음식, 요리, 재료를 통해 알려주는 책입니다.

약 350여 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각 항목별로 많아도 10페이지를 넘기 어렵지만, 해당 항목이 어떻게 역사, 사회에 영향을 끼쳤는지는 잘 알 수 있도록 충실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구"라는 책에서, 대구 어장의 발견과 어업이 당시 해상 무역과 교역 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 수 있었는데 이 책에서 소개되는 '청어' 역시 그에 못지 않습니다. 청어가 많이 잡혔던 발트해 근처의 독일 도시 뤼베크가 절인 청어 교역으로 급성장한 뒤 서유럽, 동유럽을 잇는 교역망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 교역망 보호를 위해 다른 도시들과 상인 조합을 결성한게 그 유명한 '한자 동맹'의 기원이라고 하니까요. 16세기 중반, 발트해 청어가 크게 감소하여 결국 한자 교역은 쇠락하지만 도시는 아직 건재하고, 청어도 종수를 회복하여 아직 발트해 지역에서는 많이 먹는다고 하니 다행이에요.
 홍차의 경우, 아편 전쟁을 일으키는 등 세계사에 큰 격변을 일으켰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영국의 인도 지배가 끝난 뒤에도 인도 정부가 홍차 내수 시장을 키우려 안간힘을 썼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하기사, 이렇게 큰 기간 산업이자 농업의 핵심 소비층이 떠나갔다고 손 놓고 황폐화 시킬 수는 없었을테지요. 이 활동은 성공해서 인도산 홍차의 70퍼센트가 인도 내에서 소비된다니 다행입니다. 이를 통해 '마살라 차이'가 새롭게 등장했다는 것도 다행이고요.
바나나의 유통을 위해 미국의 유통회사들이 이른바 과테말라 등에 '바나나 공화국'을 세운 뒤, 그 나라 내정을 간섭하고 반정부 투쟁까지 주사했다는 이야기는 가슴아프게 다가왔습니다. "백년 동안의 고독"의 한 토막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참 나쁜 역사지요. 유나이티드 푸르트 사의 바나나는 먹지 말아야 할텐데, 구분이 가능할지 걱정입니다. 현재의 바나나는 모두 캐번디시 동일종으로 질병에 취약해서 곧 '흑색 싱카토카' 곰팡이에 의해 절멸할지도 모른다는데, 그 때가 되면 제발 유나이티드 푸르트도 함께 망해버리면 좋을 듯 합니다. 이와 비슷한 역사로는 북미 자유 무역 협정이 있습니다. 이 덕분에 '가루 우유'로 대표되는, 정부 보조를 받는 미국산 농축산물이 멕시코로 무관세 수입된 뒤, 멕시코 낙농업이 괴멸하여 이게 결국 가난과 불법 이민 등으로 이어지고, 현재의 마약 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하니까요. 남아메리카 국가들에게는 미국이 악의 축인 셈입니다.
전쟁과 관련된 음식 소개도 많습니다. 육포 빌통은 남아프리카 부르 전쟁에서 부르인들의 유격전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그 외에도 콘 비프와 같은 '불리 비프', 앤잭 비스킷 등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앤잭 비스킷 소개에서 언급된 건파이어 조식은 인상적이에요. 럼주를 탄 커피 한 잔인데, 1차 세계대전 때 앤잭 병사들 (오스트레일리아 - 뉴질랜드 병사들) 이 전투 시작 직전에 했던 방식 그대로라고 하네요.

그리고 그냥 흥미, 재미거리로 읽을만한 글들도 많아요. '카술레'는 그다지 익숙치 않은, 프랑스 스튜인데 굉장히 평범한 일상 요리입니다. 그러나 영국이 2차대전 후 경기를 회복하여 사람들이 프랑스로 휴가를 가게 된 뒤 유명해졌다는게 재미있습니다. 그들은 휴가 때 툴르즈에서 출발해 남프랑스로 내려가는 운하 여행을 즐기는데, 그 중간에 위치한 카스텔노다리에서 카술레를 먹던게 계기라는군요. 우리나라로 따지면 다른 지방에서는 잘 몰랐지만 방송 등으로 유명해져 전국구 지역 명물이 된 '만석 닭강정'과 비슷하겠지요?
항상 궁금했던, 애플 파이가 왜 미국을 대표하는지에 대해서도 한 꼭지를 할애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오리지널 음식은 아니고, 애플 파이와 미국의 건국을 연결시키는건 무리이지만 이른바 '향수', 남겨진 '유산'을 상징하기 때문이라는군요. 버팔로가 멸종하지 않았고, 지금은 개체수를 많이 회복했다는 이야기도 아주 반가왔고요.

그러나 워낙 많은 음식과 재료가 소개되는 탓에, 단순한 에피소드 정도에 그치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크푸르트 소시지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건, 미국에 독일 이민자가 많았다는 정도입니다. 또 앞서의 애플 파이처럼 특별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왜 시애틀이 커피 중심지가 되었는지? 인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는게 전부라서 약간 실망스러웠어요. '로이 리히텐슈타인'을 '리크텐슈타인'이라고 표기하는 등의 오타인지, 제대로인지 알 수 없지만 친숙하지 않은 발음도 몇 가지가 거슬렸고요.

그러나 단점은 사소할 뿐입니다. 오히려 프랑크푸르트 소시지 이야기에서는 생뚱맞지만 재미있는 정보가 실려있어요, 값싼 핫도그로 유명했던 '네이선스 페이머스'의 싼 가격에 사람들이 의심을 품자, 창업자 네이선 핸드워커는 인근 병원 의사들이 흰 가운을 입고 오면 핫도그를 공짜로 주었다는 이야기죠. 의사들이 줄을 선 것을 본 사람들이 음식의 안전성에 대한 의심을 풀었다는 것으로, 이렇게 그 나름의 가치는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가게도 코니 아일랜드 등에 여전히 건재하니 언젠가 꼭 한 번 가서 먹어 봐야 겠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글들이 함께 한 도판도 수준높고 적절해서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 별점은 3.5점입니다. "대구" 처럼 한 주제를 깊숙히 파고들어간 깊이는 부족하지만, 재미와 함께 지식을 얻기에는 부족함 없는 책이었어요. 음식과 문명에 대해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2008/10/09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 - 아리스가와 아리스 / 김선영 : 별점 3점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 - 6점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시작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가 아리스 시리즈 중,단편집입니다. 이 시리즈의 탐정은 범죄 심리학 조교수 히무라 히데오로 작가 아리스 시리즈라 불리우는 이유는 작품의 왓슨 역이 저자 이름과 같은 추리소설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원서로 읽고 리뷰를 남긴 “러시아 홍차의 비밀” 도 같은 시리즈의 한권이죠. 뭐 제가 좋아라 하는 일본 본격 추리 단편집이니 당연한 마음으로 사서 읽었습니다. 작가 아리스 시리즈 대표작은 “국명 시리즈”로 알고 있는데 좀 엉뚱한 시리즈가 먼저 번역되어 소개된 것이 좀 의아하긴 했습니다만.

감상평은 뭐랄까, 좀 애매하네요. “국명 시리즈” 이기도 한 “러시아 홍차의 비밀” 보다 재미와 수준이 떨어지기도 하고요. 전체적인 책 자체의 평균은 비슷하지만 “러시아 홍차의 비밀” 은 수록작품의 편차가 커서 좋은 작품은 굉장히 좋은 반면, 이 책에 실린 작품의 수준은 엇비슷하지만 고만고만한 수준의 작품들이 모여 있어서 딱히 끌리는 작품은 없거든요. 또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특징이기도 한 정교한 트릭에 매몰되어 이야기 전개가 매끄럽지 않은 부분도 눈에 많이 거슬렸고요. 이런 단점까지 존경한다는 엘러리 퀸을 닮을 필요는 없었을텐데... 어쨌건 별점은 3점입니다. 신본격 대표작가의 정통 추리 단편집을 국내에서 접하기는 쉽지 않기에 가산점을 더했습니다.^^

총 4편의 중단편이 실려있는데 작품별로 자세하게 이야기하자면,

부재의 증명
일종의 알리바이 트릭 + 순간이동 트릭 등이 결합된 정통 퍼즐 미스터리물입니다. 아주 약간의 시간차를 이용한 결정적 단서 포착 부분은 좋았으며 동기와 범행 방식, 범인의 행동도 설득력이 넘쳐서 완성도가 높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에서의 베스트 작품이었습니다.

지하실의 처형
형사가 수배중인 테러리스트 들에게 사로잡힌채 그들의 처형 의식의 목격자가 된다는 기본 설정은 독특했지만 애당초 범인이 둘중 하나라는 근본적 한계 때문에 꽉 짜여진 긴장감을 느끼기 어려운 작품이었습니다. 히무라의 추리 역시 경찰의 수사 결과를 토대로 이루어지기에 그다지 대단하거나 놀라운 진상이 밝혀지는 것도 아니고요. 차라리 논리 퍼즐 형태의 미스터리로 가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어쨌건 정통 추리의 맛을 느끼기 어려웠고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기도 어렵기에 이 단편집에서의 워스트 작품으로 꼽겠습니다.

비할 바 없이 성스러운 순간
2건의 다이잉 메시지가 중요하게 사용되는 퍼즐 미스터리입니다. 그런데 2건 중 첫번째 메시지는 너무나 특정한 정보를 나타내는 것이며, 중간의 히무로의 착안이 명확하기에 해당 정보를 알고 있다면 크게 수수께끼로 남을 것 같지 않아 그다지 정교한 트릭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죽어가는 사람이 그런 정교한 도안을 그릴 수 있었을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생기기도 하고요. 두번째 메시지는 피해자의 행동이 그럴싸 하다는 점에서는 합격점을 줄 만 하고 피해자의 의도와 다른, 하지만 정확한 결론이 도출된다는 점은 신선한 발상이 엿보였습니다. 첫번째 메시지의 작위성만 없었다면 괜찮았을텐데 아쉽네요.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
이 책에서 가장 긴, 중편분량의 정통 추리물로 고전적인 시간표를 이용한 알리바이 트릭을 다루고 있습니다. 긴 분량에 걸맞게 트릭 자체는 공들여 잘 만들어진 트릭으로 추리적으로는 만족할 만 한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야기 전개에 있습니다. 범인이 범행을 하는 동기를 만들어 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동기가 되는 첫 사건의 동기는 전혀 설명되지 않으며, 애당초 첫번째 범행에서의 증거가 너무나 결정적이기에 두번째 사건이자 주 사건의 알리바이 트릭을 파헤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 보여지거든요. 한 사건의 범인임이 명백하고 증거도 확실한데 왜 다른 사건에 시간과 공을 들이는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또한 작품 전반에 걸쳐 “토끼”라는 상징이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작품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어서 나중에는 짜증마저 일었고요. 추리적 완성도가 높은, 잘 짜여진 작품이지만 이야기 전개에 실패한 작품으로 보이기에 아쉬움이 큽니다.

2021/12/31

2021 내 블로그 리뷰 총 결산

열 여덟번째 블로그 리뷰 총 결산입니다. 블로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나이라니 감개무량합니다. 다 컸으니 이제 돈을 좀 벌어 와야 할 텐데 말이지요.

하여튼, 올해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코로나 사태 장기화 탓에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작년보다는 줄었어요. 작년에는 133권을 읽었는데, 올해는 추리 / 호러 장르문학 57 (77)권, 기타 장르문학 3 (4)권, 역사서 17 (9)권, 디자인 or 스터디 1 (4), Food 및 구루메 관련 도서 15 (25)권, 기타 도서 24 (14)권으로 다 합쳐서 117권을 읽었으니까요. 이유는 백신 접종과 위드코로나 정책 덕분에 다른 활동으로 보낸 여가 시간이 늘었던 탓입니다. 올림픽도 열심히 관전했고요. 거기에 더해 작년에는 '추리 소설 1,000권 읽기'라는 개인적인 큰 목표 달성을 위해 더 열심히 달리기도 했었지요. 여러모로 작년이 역대급이었던 셈으로, 당분간은 작년처럼 책을 많이 읽는 해는 오지 않을거라 생각되네요. 그래도 최소한의 목표인 100권은 훌쩍 넘겼으니 만족합니다.

그럼 언제나처럼 각 항목별 베스트 - 워스트를 소개해드립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올해 발표된 작품 기준이 아니라 제가 올 한해 보고 읽은 것들 기준입니다.

2021년 베스트 추리소설 :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
별점 4.5점! 20세기 미국 범죄 소설, 그 중에서도 하드보일드 장르의 흐름을 미국 역사 흐름과 비교하여 분석하는 문학사 서적. 상세 리뷰는 링크 참고하시길.

"나는 언제나 옳다
별점 4점! 복잡한 복합 장르 구성을 재미있게 풀어낸 작품. 단편 분량인 만큼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께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2021년 워스트 추리소설 :

"ON 온"
올해의 워스트 후보작은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술트릭의 모든 것",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밀실 대도감", "가면병동", "최후의 일격, "범죄 캘린더"와"On 온"의 7편이나 됩니다. 모두 별점 1.5점짜리였지요. 거장 엘러리 퀸의 작품이 두 편이나 포함되어 있는게 놀라운데, 한 편은 나이 탓에, 또 한 편은 양산 모드로 쓰여졌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결과물이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최후의 일격"은 괜찮은 발상의 트릭이 사용되기는 했고, 단편집 "범죄 캘린더"는 별점 2~2.5점짜리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서 워스트 급은 아닙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밀실 대도감"은 책 자체 내용 문제보다는 다른 문제로 인한 감점 요인이 더 컸고요. 단편집 "서술트릭의 모든 것"은 "범죄 캘린더"와 같은 이유로 제외하면, 진짜 워스트 후보작은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와 "가면병동", "On 온"의 세 편이 남습니다. 

이 중 올해의 워스트로는 "On 온"을 꼽습니다. 유치한 설정, 합리적이지 못한 전개, 스테레오 타입의 뻔한 주인공들이 어우러진 싸구려 스릴러니까요. 다른 두 편은 약간이나마 추리적인 요소가 들어갔다는 점에서 그나마 "On 온"보다는 조금 나았습니다. 물론 도긴개긴입니다만....

2021년 베스트 / 워스트 기타 장르문학 : 

올해 기타 장르문학도 3권 밖에 읽지 않아서 뽑기가 어렵네요. 재미만큼은 확실했던 별점 3점의 "사라진 세계"가 베스트였어요. 워스트는 따로 뽑지 않겠습니다.

2021년 베스트 역사 도서 :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별점 5점! 역사 바로 세우기 측면에서 모든 분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책입니다.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와 "영어 조선을 깨우다 1"도 별점 4점을 받은 좋은 책이었는데, 아쉽게도 탈락했네요.

2021년 워스트 역사 도서 : 

"지도로 읽는다 리스타트 한국사 도감"
별점 1점. 편협한 개인 의견을 잔뜩 투입해서 불쾌하기 짝이 없었던, 그냥 '나쁜' 책입니다.

2021년 베스트 / 워스트 디자인 or Study :

딱 한 권 밖에 읽지 않아서, 올해는 평가할게 없네요. 공부가 부족했던 한해네요....

2021년 베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
올해 이 쪽 분야 책들은 다 고만고만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카레로 보는 인도 문화", "경양식집에서",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 "음식으로 읽는 중국사", "가스트로노미"의 5권이 별점 3점을 받았습니다. 이 중 재미와 자료적인 가치, 책의 완성도 등 모든 면을 고려하여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를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1부만 한정하면 별점 4점 이상도 충분했던 책이니까요.

2021년 워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올해는 2점 이하의 별점이 없어서, 워스트는 따로 뽑지 않습니다.

2021년 베스트 기타 도서 :

"이상한 나라의 언어 씨 이야기"
별점 4점을 받은 책은 "1달러의 세계 경제 여행", "이상한 나라의 언어 씨 이야기", "n분의 1의 함정"의 세 권이었습니다. 다 좋은 책이었지만, 이 중 재미에 더해 제 전공 분야인 커뮤니케이션과 상호 작용에 대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어 준 "이상한 나라의 언어 씨 이야기"를 올해의 베스트로 꼽습니다.

2021년 워스트 기타 도서 : 

"과학자는 전쟁에서 무엇을 했나"
별점 1.5점을 받은 올해의 워스트 후보작은 "재미있는 식물 산책 도감", "과학자는 전쟁에서 무엇을 했나", "만화로 보는 99가지 발명품 이야기"의 3권입니다. 이 중 사람 열받게 만드는 가소로운 자기 주장을 담고 있는 "과학자는 전쟁에서 무엇을 했나"가 올해의 워스트입니다.

2021년 베스트 Movie : 

"나이브스 아웃"
훌륭하게 현대에 되살린 본격 추리물! 별점 3점.

2021년 워스트 Movie : 

"철권을 가진 사나이"
황당무계하고 유치했던, 심지어 액션마저 별 볼일 없었던 '가짜' 무협 영화.

2021년 베스트 Comic - 추리 or 호러 : 

전체적인 별점은 고만고만해서 베스트랄건 없네요. 에피소드 기준으로는 "Q.E.D iff 증명종료 14" 수록작 "1억엔과 여행하는 남자"가 오랫만에 별점 4점짜리 에피소드였습니다.

2021년 워스트 Comic - 추리 or 호러 : 

"Q.E.D iff 증명종료 16"
수록작 3편 중 2편이 별점 1.5점, 1편이 별점 1점을 받은 워스트 오브 워스트. 그 외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3"의 "앙숙"도 별점 1점짜리 망작이었습니다. 별점 1.5점 짜리 에피소드들은 언급하기도 힘들만큼 숱하게 있었고요. 추리 만화 분야는 영 실망스러웠던 한해였네요.

2021년 베스트 Comic - 기타 : 

"그리고, 또 그리고 1~5"
별점 4점짜리 책은 이 책 외에도 "피너츠 완전판 19 : 1987~1988"이 있었습니다. 이 책을 베스트로 꼽은 이유는 재미와 감동에 더해 미대 졸업생인 저에게 많은걸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고요. 하여간, 극히 일부의 예외는 있지만 만화가가 그린 자기 이야기는 무조건 최고에요.

2020년 워스트 Comic - 기타 : 

최저 별점이 2점이라서, 워스트는 따로 꼽지 않겠습니다.

결산평 : 

이상으로 2021년 블로그 결산을 마칩니다. 올 한해는 저 개인적으로는 큰 의미가 있는 한해였어요. 인생의 큰 목표 중 하나였던 '추리 소설 1,000권 읽고 리뷰 쓰기'를 완료했기 때문이거든요. 저도 하루하루, 한달한달, 한해한해가 더욱 소중한 나이가 되었는데, 2022년에도 저 개인적으로 내세울 수 있고 자부심을 가질만한 한 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제 블로그를 찾아주신 모든 분들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의미있고 가치있는 2022년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했고, 또 감사드립니다!

2020 내 블로그 리뷰 총 결산

2021/03/06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 - 제임스 노우드 프랫 / 문기영 : 별점 3점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 - 6점
제임스 노우드 프랫 지음, 문기영 옮김/글항아리

서양의 많은 애호가에게 바이블처럼 읽힌다는 차에 대한 전문서이자 문화사 서적입니다.

1부에서는 차의 기원에서 시작하여 차가 세계로 퍼져나가게 된 역사, 그리고 홍차 인기가 주춤했던 뒤 다시 인기를 끌게 된 현재 시점까지를 상세하게 서술하여 알려줍니다. 특징이라면 '기원' 부터 상세하게 통사적으로 서술해서 알려준다는 점이고요. 특히 미국인 저자에게는 불리했을 중국차 역사가 비교적 정확하다는 데에서 공부의 깊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중국 신농 황제가 차에 관심을 보였고, 기원전 1066년 윈난 성에서 생산된 차가 황제에게 공물로 바쳐졌다는 등 중국 고대사에서 시작하여 당나라 육우의 "다경"이후 송나라 채양의 "다록", 명나라에서 이전과 다른 녹차 가공법이 등장했다는 역사 소개가 상세하며, 심지어 "고문진보" 속 차에 대한 명시 '칠완다가'까지 번역하여 소개할 정도입니다. 

또 이 과정에서 차 전래가 불교 전파와 관련이 있다는 여러가지 설들과 그에 대한 해석도 재미있었습니다. 첫번째 설은 승려 감로가 1세기 경 인도 순례를 마치고 돌아올 때 차를 들여왔다는 설로, 그가 심었다는 전설의 차나무 일곱 그루는 아직도 쓰촨성 멍딘 산에 남아 있다네요. 두번째 설은 달마 선사 눈꺼풀에서 차나무가 자라났다는 설인데, 달마 선사가 인도 출신이니 이 역시 차나무 인도 기원설을 의미하지요. 야생 차나무의 고향은 윈난성과, 인간이 차나무를 처음 재배한 곳으로 알려진 쓰촨 성 모두 인도에서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점, 불교에서 명상과 술을 대신하기 위한 이유로 차를 이용했고, 그래서 승려들이 차나무 재배와 차 가공법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꽤나 타당한 해석으로 보입니다. 불교가 융성했던 당나라에서 육우 선사가 "다경"을 쓴 배경 역시 마찬가지 이유일테고요. 

'차 茶'라는 문자가 등장한 시기와 그 발음 및 일본 다도 문화의 역사, 그리고 일본 다도를 대표하는 센노 리큐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주로 오카쿠라 가쿠조의 "차에 관한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 많은데, 놀랍게도 국내에 e-book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어 있네요. 이 책에 일본이 가루차를 거품내는 송나라 방식을 쓰는건, 자기들이 몽골 침략을 물리쳐서 차 전통을 계승할 수 있었던 거라는 해석이 나오는 모양인데,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센노 리큐 이후 센차 방식을 발전시킨 바이사오에 대한 설명도 빼 놓지 않고 있고요.

다음은 중국차가 유럽에 전해지는 과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1610년 네덜란드가 최초로 차를 들여오면서 유럽에서 차가 확산되게 됩니다. 이후 17세기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이 전쟁을 벌일 때 프랑스와 네덜란드 교역 단절로 프랑스는 차 공급이 끊어졌고, 반대로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커피 수입이 단절된게 국가적 선호가 갈리게 된 이유라고 하네요. 그리고 영국에서 찰스 2세와 왕비에서부터 시작된 엄청난 차 유행과 이 때문에 벌어진 영국 동인도 회사, 존 컴퍼니와 중국 무역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원래 중국차를 성공적으로 수입해서 유럽에 유통시킨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였는데, 네덜란드는 중국 차의 미래를 과소평가해서 인도네시아 자와섬을 통한 중계 무역만 하다가 수요 폭증 때 중국과 직거래하던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고요. 그리고 보스턴 티 파티, 제국주의의 선봉장이었던 동인도 회사의 추악한 행위들과 아편 전쟁, 영국이 패권을 쥔 뒤 민싱 레인에서의 차 거래와 차 운반선들이 레이스를 펼치던 영광의 시대, 인도 아삼 지방에서의 차 재배 성공, 토머스 립턴과 실론 티의 성공 등이 이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기존 제국주의 사고방식과 다른 전통들이 모두 파괴된 뒤 그 자리를 값싼 '티백'이 차지하였고, 회사마다 가격 경쟁이 시작되어 고급 차들이 모두 시장에서 사라져버린 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이 시대는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고요. 다행히 지금 고급 차 시장이 기지개를 펴고 있다고 언급하며 차 역사 설명은 마무리됩니다. 그 외에는 차와 관련된 여러 유명인들, 그리고 '본차이나'로 대표되는 다기 제조에 대한 역사 등을 함께 소개해주고 있는데, 모두 재미있었어요.

반면 2부의 나라별 주요 차 소개는 특별히 와 닿는 내용은 없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많았고, 인터넷 등에서 확인 가능한 정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강희제가 '벽라춘'이라고 이름붙인 차 이름의 유래는 찻잎이 우러나는 동안 나선 모양으로 회전하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저자 개인적인 견해는 괜찮았지만요. 그 밖에는 프랑스가 1825년 베트남에 최초의 차나무를 심었다고 자랑하지만, 옛날부터 차나무는 베트남에 야생으로 자라고 있었으며, 차는 이미 1,000년 전 부터 인도차이나 문화 일부였다며 일침을 가하는 것처럼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시각 정도만이 눈에 뜨였습니다. 프랑스가 뭘 새롭게 한 건 없고, 오히려 창피해 해야 마땅하다는 이야기로, 비교적 공정한 견해라 할 수 있겠죠. 

그래도 2부 마지막에 실린 블렌딩과 차 브랜드 설명은 그런대로 유용했습니다 . 브랜드별 대표 차 명칭, 어떻게 블렌드되어 있고 어떤 맛인지를 대략적이나마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 그레이의 기원과 레시피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인상적이었고요. 

하지만 3부는 50페이지도 안되는 짤막한 분량인데다가 차를 어떻게 마시는게 좋은지 차 마시는 방법이 전부입니다. 도판과 함께 상세하게 소개해주는 다른 책들에 비해 더 나은 점을 찾기는 어렵더군요. 도판이 없다면 최소한 유튜브 동영상 링크라도 포함해 주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2부와 3부는 그닥이었지만, 1부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차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최소한 1부만이라도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06/01/14

러시아 홍차의 비밀 - 아리스가와 아리스 : 별점 2점

ロシア紅茶の謎 (講談社文庫) (文庫) - 4점
아리스가와 아리스/講談社

범죄 심리학 조교수이자, 실제 사건에서의 활약으로 "임상 범죄 학자"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천재 히무라 히데오와 추리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 컴비 시리즈 단편집. 아리스가와 아리스(저자)의 첫번째 단편집이기도 합니다. 그의 "국명 시리즈"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책에는 전부 6개의 단편과 작가 해설 등이 담겨있습니다.
일본 여행 가서 구입한 책으로 장편이 아니라 단편집이라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중간에 번역 한번 해 볼까 하고 삽질하느라 걸린 시간도 있어서 이래저래 거진 한달이 걸렸네요.... 2006년 들어서는 처음으로 완독한 책인 것 같습니다. (만화책은 수도없이 읽었지만서도)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 이하였습니다. '일본의 엘러리 퀸'이라고도 불리우는 신본격 작가라서 굉장히 기대했는데 말이지요. 이유는 작품 대부분이 "트릭을 위한" 이야기들이라 트릭에 매몰된 듯한 느낌인 탓입니다. 트릭도 만들기 쉬운 암호 미스테리가 많아서 별로였고요. 표제작이며 작가 스스로 마음에 든다는, 이른바 국명 시리즈인 "러시아 홍차의 비밀"이 제일 어처구니 없고 수준이하였다는 점도 당황스러웠습니다.
또한 탐정역의 히무라 히데오의 캐릭터가 너무 전형적이라는 것도 감점 요인입니다. 캐릭터를 돋보이게 하기에는 단편이라는 특성상 쉽지 않은 부분이 많았겠지만, 잘난척 하는 천재라는 고전적 스테레오 타입 그대로의 인물이라 새로운 면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도 신본격답게 문제-해결이 명확하고 이야기 하나하나가 깔끔하게 매듭지어지는 것은 좋았습니다. 용의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고 단서에 대한 범위를 좁혀줌으로써 이해를 돕는 추리만화 타입의 전개도 쉽게 읽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요.

결론내리자면 그냥저냥한 평작이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트릭 자체는 제법 괜찮은게 있고, 뛰어난 작품도 분명있기는 합니다. 위에 말한 단점은 장편을 보면 많이 상쇄될 것도 같고요. 다음번에는 장편에 한번 도전해 봐야 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한 3개월은 걸리겠지만....

개인적인 베스트는 "동물원의 암호"와 "팔각형의 함정" 입니다.

작품별 상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동물원의 암호 :
동물원 원숭이 우리에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 사육사. 그는 죽기 직전 암호로 된 쪽지를 남긴다. 그 암호는 퍼즐광이었던 피해자가 공들여 만든 것으로 암호를 해독하면 범인을 알 수 있으리라는 판단 하에 주인공 컴비는 동물 이름으로 구성된 암호 해독에 도전하는데...
"동물 이름으로 구성된 암호" 자체가 무척 괜찮습니다. 기발하면서도 수긍이 가는 그런 암호거든요. 일본 거주자가 아니면 풀기 힘들다는 약점은 있지만 말이죠. 내용 전개도 명쾌하고 논리적이라 가장 마음에 드는 단편 중 하나였습니다.

2. 지붕 밑의 산보자 :
하숙집 주인이 살해되는데 경찰 조사로 발견한 그의 일기에서 그가 하숙집 지붕을 밤에 돌아다니는 변태적인 취미가 있었다는 사실과 하숙인들 중 인근 연쇄 강간마로 짐작되는 인물이 있다는 것도 밝혀진다. 그런데 하숙인들을 암호화된 이니셜로 표기하고 있어서 정체를 모르는 상태. 연쇄 강간마이자 하숙집 주인 살인 사건의 범인인 그 하숙인을 찾기 위해 두 컴비가 나선다.
역시 암호 트릭입니다. 이 작품은 암호 자체는 무척 간단한 편이라 정교한 맛은 좀 없더군요. 그래도 에도가와 란포의 동명 단편을 응용한 센스와 마지막의 살짝 등장하는 반전은 무척 좋았다 생각됩니다.

3. 붉은 도처 (稻妻) :
한 여인이 투신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히무라 히데오의 제자인 학생이 목격자로 나서 그 여자가 방에서 밀려 떨어졌다는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그 여자의 방은 완벽한 밀실 상태.
밀실 트릭물입니다. 그러나 트릭의 정교함은 떨어지는 편이고 작품에 흥미를 느낄만한 요소가 너무 적어서 이상할 정도였어요.

4, 룬의 가르침 :
외국인 기자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요청받아 찾아간 히무라 히데오. 그는 피해자가 손에 쥐고 죽은 "룬 문자판" 4개의 수수께끼를 푸는데 주력한다.
이 책의 단편들 중에서 전개가 가장 이색적인 작품이었습니다. 히무라 히데오의 방에 놀러간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책상위에 놓여진 룬 문자판을 보게 되자 히무라 히데오가 그것에 관련된 사건을 들려주는 셜록 홈즈물 스타일의 전개로 이루어지거든요. 트릭은 역시나 일본 독자들만이 풀 수 있는 암호인데 평이하기도 하지만 좀 억지성이 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룬 문자"라는 요소가 왜 들어갔나 싶게 쌩뚱맞아서 의아했는데 책 뒤의 작가 후기를 보니 "고대문자"에 관련된 트릭 추리물을 써 달라는 의뢰의 결과물이더군요. 뭐 그냥저냥한 수준의 작품입니다. 

5. 러시아 홍차의 비밀 :
인기 작사가 독살 살인 사건에 참여한 컴비. 아무도 그의 찻잔에 독을 주입할 기회가 없었던 상황에서 사건의 해결에 도전한다.
표제작이자 국명 시리즈라는 작품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 책에서 이 작품이 제일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트릭도 억지에다가 범인이 왜 그런 트릭을 썼는지에 대한 타당성 자체가 불분명 합니다. "아무도 죽일 수 없는 상황" 이라고 해서 자기 자신이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거든요. 어차피 제일 의심 받을 수 밖에 없는 인물이었는데.... 본격물의 정도를 벗어나 너무 트릭에만 집착한 씁쓸한 결과물로 보입니다.

6. 팔각형의 함정 :
아리스가와 아리스 원안의 추리극을 상연하는 연극 예행 연습에 초대된 두 컴비는 실제로 살인 사건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런게 실제로 있군요! 만화에서만 보던 "추리극" 공연과 관객이 함께 하는 범인 맞추기 이벤트라는 연극을 위해 아리스가와 아리스(작가)가 실제로 원안을 제공했던 연극 각본의 소설화 작품이라고 합니다. 작품도 본격물에 걸맞는 깔끔하고 완벽한 구성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작품이었습니다. 트릭도 아주 약간을 제외한다면 수긍할 만 했고 범인이 왜 그렇게 트릭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설명 역시 합당하며 범인을 알게 되는 단서 역시 이치에 맞거든요. 일종의 문제편 격인 서술 뒤에 "독자에게의 도전장" 이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고요.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연극으로 본다면 더욱 재미있을 것 같아요.

2020/09/12

괴담의 테이프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 별점 3점

괴담의 테이프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미쓰다 신조)는 편집자 도키토 미나미로부터 녹음된 괴이담을 기초로 한 단편을 써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녹음한 카세트나 MD는 많아도 대부분 써먹기 힘든 탓에 거절했지만, 도키토 미나미는 자기가 듣고 소재를 찾아보겠다며 카세트와 MD를 빌려갔다. 이렇게 해서 완성한 작품이 "빈 집을 지키던 밤"이었다. 

도키토는 후속 작품도 정기적으로 써 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연작 단편 구성을 취하기 위해 실제 괴담을 겪은 사람들의 체험담을 듣고 쓴 글이라는 머릿말을 추가했다. 그런데 도키토는 녹취를 시작한 이후, 기묘한 걸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침마다 마시던 홍차 속 기묘한 반원형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나날이 바뀌어 결국 작은 사람의 모습이 되었고, 도키토는 이후 홍차 마시기를 그만두었다. 이외에도 샤워할 때 빗소리가 들리는 등의 괴이 현상이 그녀 옆에서 계속 일어나자 나는 그녀에게 녹취를 그만두라고 이야기했다.

작품 연재를 마무리한 나는, 도토키 미나미로 부터 회수한 MD와 카세트 중에서 예전에 듣다가 무서워진 나머지 꽁꽁 봉해놓고 처분했던 기류 마사히코의 카세트를 다시 발견했다. 충동적으로 카세트를 듣다가 그 목소리가 물 속에서 들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모든 괴기 현상이 '물'과 관련되어 있다는걸 깨닫는데...

실제 사연들을 소설화 했다는 설정의 생활 괴담 단편들이 미쓰다 신조가 괴담 단편을 창작하는 과정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는 연작 단편집입니다. 수록작 모두가 '물'과 관련되어 있다는게 특징입니다. 또 저자의 '작가 시리즈'와 유사하게, 실제 있었던 이야기처럼 쓰여진 덕분에 실제감, 현실감이 아주 높습니다. 어떤 작품은 논픽션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니 말 다했지요. 이야기 한 편, 한 편의 완성도도 빼어나고요.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미쓰다 신조 장편이 두께 때문에 손대기 어려우셨던 분들이라면, 이 책으로 발을 들여놓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다음과 같습니다.

"죽은 자의 테이프 녹취록" 

나 (미쓰다 신조)는 자살 명소에 대한 글을 의뢰하기 위해 프리랜서 작가 기류 요시히코를 만났다. "호러 재피니스크 총서" 기획 때문이었다. 기류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자살자가 죽기 직전 남긴 테이프를 여러개 가지고 있다며, 그 테이프 녹취를 출간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3개월 뒤, 기류는 3개의 테이프를 듣고 기록한 샘플 원고를 보내 오는데...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생생함입니다. 특히 진짜 자살자가 죽기 직전 남긴 듯한, 생생한 테이프 녹취가 아주 일품이에요. 그 처절한 죽음의 순간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섬찟합니다. 생생함은 미쓰다 신조 1인칭으로 쓰여지고, 미쓰다 신조의 과거 펀집자 경험을 작품 속에 녹여낸 덕분이기도 합니다. "붉은 눈"에 수록되었던 1인칭 괴담과 같은 계열이지요.

또 3개의 괴담 테이프 녹취 중 앞의 2개는 호텔에서 목을 매거나, 자동차로 절벽을 향하는 등 일반적인 자살에 대한 단순한 녹취이지만, 마지막 녹취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드러냅니다. 그리고 기류가 마지막으로 자신이 직접 녹음한 테이프를 미쓰다 신조에게 보내고, 미쓰다 신조가 기류의 테이프를 잠시 틀어보고는 바로 봉인해 버리는 결말이지요.
무엇 하나 드러나지 않은 듯 하지만 기류는 죽었고, 기류가 녹음한 테이프는 누군가 회수해서 미쓰다 신조에게 보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테이프를 받은 사람이 듣기를 원했을테고요. 즉, "링"과 같은 일종의 저주, 죽음의 연쇄가 시작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소설로서의 얼개는 갖춰진 셈이지요. (*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지막 이야기에서 어느정도는 비슷하게 마무리 됩니다)

이렇게 여러가지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던 작품입니다. 르포르타쥬 형식의 작가 1인칭으로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는 생생함도 대단했고요. 무서워야 한다는 괴담의 조건도 아주 잘 충족하고 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빈집을 지키던 밤"

마이코는 대학 문예부 선배 오다기리로부터 기묘한 아르바이트를 제안받았다. 젊은 부부가 백모와 함께 살고 있는 시골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일이었다. 부부가 집을 비운 동안 백모를 혼자 둘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아르바이트 내용이 소개되는 시작부터 흥미를 잡아 끕니다. 여대생이 선뜻 수락하기에는 너무 수상한 아르바이트잖아요? 역에서 저택까지 거리도 멀고, 인기척도 없는 곳에 홀로 찾아가 하룻밤을 보낸다니, 이래서야 바로 납치되어 이상한 비디오 주인공이 되는 전개도 어색하지 않죠. 당연히 이야기도 그런 식으로 흘러갑니다. 마이코가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지만, 겨우 탈출한다는 내용이거든요.

그러나 뻔한 설정과 전개임에도 여러가지 복선과 디테일로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택에 대한 묘사부터 그러합니다. 기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아치 장식 등을 통해 위화감과 뒤틀림을 설득력있게 그려내고 있거든요. 하여튼, 미쓰다 신조의 무서운 집 묘사는 정말이지 최고에요.
또 저택에서 느낀 위화감과 뒤틀림을 젊은 부부에게서도 느끼게 된다는 연계도 좋습니다. 그 중에서도 부부가 서로 다른 말을 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백모님을 숭배하고 있으며, 백모님은 낯선 사람을 부담스러워할 수 있으니 집을 지킬 때 백모님이 계신 3층에는 올라가지 말아달라고 당부합니다. 하지만 부인은 백모님은 이미 죽었으며 남편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하고요. 아, 정말 섬찟합니다.

단순한 체험 괴담이 아니라 한 편의 완성된 소설이라는 점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3층에 있던건 백모님이 아니라 젊은 남편 미쓰노부였으며, 그가 이전 아르바이트 생들을 살해했다는 명확한 결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결말에 앞서 마이코는 팔 다리가 길었고, 저택 근처에서 양팔만 잘라 가슴께에 평행하게 올려놓은 기묘한 토막 살인 사체가 발견되었었고, 부부가 저택 안을 오갈 때에 복도 한 가운데로는 지나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등의 복선과 단서를 통해 이유를 설명해 주기도 합니다. 앞서 위화감을 느꼈던 아치는 '도리이'이며, 도리이 아래 길은 신이 지나가는 길이다, 이 길은 백모의 방과 통해 있다, 사체의 토막은 도리이를 나타내고, 그래서 긴 다리를 지닌 피해자가 필요했다... 는 내용으로 마무리 되니까요.

젊은 부부의 광기, 백모님은 어떻게 되었는지 등 설명이 부족하고 마지막 미쓰노부가 살인마라는 반전은 뻔하지만 정교하면서도 하나의 완성된 호러, 공포 소설로 나무랄데 없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영상화해도 좋을 것 같은데,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우연히 모인 네 사람"

오쿠아먀 가쓰야는 가쿠 마사노부의 하이킹 계획에 동참했는데 정작 가쿠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쿠야마가 리더가 되어 하이킹을 이끌어 달라는 휴대전화의 부재 중 메시지 탓에 가쓰야는 모르는 세 사람과 하이킹을 떠나는데...

네가히산이 실존하는 산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정 미스터리를 보는 듯한 상세한 묘사도 좋고, 가쿠씨가 오지 못한 이유로 불안이 쌓여가는 전개도 멋집니다. 가쿠씨가 보낸 메시지 등 불안을 가중시키는 요소들이 서서히 하나씩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하이킹을 일렬로 가야 하는 상황도 불안하고요. 그러다가 숨겨진 길로 발을 들이는건 그야말로 화룡정점입니다. 알 수 없이 무서운 공간에 대한 묘사도 좋지만, 길에 남아있는 발자국 오른쪽보다 왼 쪽이 더 먼저 찍힌것으로 보인다는 묘사가 아주 기가 막혔어요. 방 구석에 있는 사람을 차례로 터치하는 게임처럼, 가쿠가 오지 못한다고 했지만 특급 열차에 네 명이 탈 수 있었던 상황에 대한 의심을 품는 장면도 오싹합니다. 가쿠가 오지 못한다는건 미리 알지 못했다면, 표가 모자랐을테니까요!

하지만 괴이한 존재였던 이마이 쇼조의 정체가 무엇인지, 가쿠는 어떻게 되었는지, 산에서 주은 계란돌은 무엇인지 등 수수께끼만 남긴채 이야기는 마무리되기에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는 힘들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완결된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생생한 묘사만큼은 발군이었습니다.

"시체와 잠들지 마라"

'나'에게 중학교 동창 K가 자기 어머니와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었다는 기묘한 노인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입원해있던 요양병동에서는 밤마다 희미한 비명 소리나 남자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리고 뒤 이어 입원한 노인 로쿠바 히로는 K의 뒤에서 중얼중얼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거의 정신을 잃은 노인이 혼자서 중얼중얼하는 이야기를 모아 놓았더니 무서운 이야기였더라....는 아이디어가 정말 좋습니다. 로쿠바 히로가 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독자를 궁금하게 만드는 전개는 그야말로 엄청나고요.

로쿠바 히로 노인의 이야기를 설명드리자면, 누군지도 모르는 친척이 상을 당했는데, 다른 가족들이 다치거나 상황이 어려워 부의금을 가지고 상가에 혼자 방문하게 된 소년이 주인공입니다.
소년은 출발 전 할머니와 함께 한 곳쿠리님에서 '시체와 함께 자지 마라'는 계시를 받죠. 그러나 기차에서 소년은 이상한 노인을 만나서 노인의 이야기를 듣다가 잠이 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집에서 잠을 깨고, 누군지도 모르는 친척의 부고를 받는다... 는 루프물입니다. 

이야기만 놓고 보면 그다지 새로운 요소는 없어요. '나'를 통해서 노인의 괴이한 행동은 노인이 젊은 아이의 몸을 빼앗는 과정이라 설명되는데 이 역시도 뻔한 설정입니다. 또 이야기만 놓고 보면 K에게 시카바네 히로(로쿠바 히로)가 뒤집어 씌여야 하는데 왜 그러지 않았는지도 설명되지 않아 답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로쿠바 히로가 한 말 중 '휴대'와 '뉴루우스'라는 말 뜻을 몰라 궁금해 하는 장면이 있어서 충격적인 진상과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용도 전혀 없어서 실망스러웠고요.

흥미로운 설정이었고, 전개도 대단했지만 결과물은 그냥저냥한 평작이라 아쉽습니다. 이 설정으로 이야기를 다르게 풀어내었더라면 분명 걸작이 될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별점은 2점입니다.

"기우메 노란 우비의 여자"

잡지의 편집자인 '나'는 점성술사 취재를 하다가, 그들은 '자신의 죽을 날'이 언제냐는 질문에 절대로 답하지 않는다는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답을 알려준 적이 있다는 점성술사에게 '나'가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대학 시절 연인이었단 사토루와 '기우메' 이야기로 답해 주었다.

기우메는 사토루 자취방에서 학교 통학로에서 목격된, 비가 오지 않는데 우산과 레인코트, 장화, 우천용 모자를 노란색으로 전부 갖춰입은 여자였다. 사토루는 어느 날 그녀와 눈을 마주친 뒤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히지만 선배의 조언으로 기우메를 무시했다. 그리고 여름 방학, 점성술사는 사토루와 헤어져 아르바이트로 나날을 보내며 편지로 근황을 주고 받았다. 그런데 사토루의 마지막 편지는 폭우가 쏟아지는 날, 기우메가 수로에 휩쓸려며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뒤, 사토루의 자취방을 찾아간 점성술사는 빈 방에서 쓰다만 편지를 읽었다. 사토루가 기우메의 시체를 발견하기까지 했지만, 계속 기우메를 통학로에서 목격했는데 그녀가 볼 때마다 점점 자취방으로 다가왔으며 마지막에는 폭우와 함께 문을 두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사토루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초반에 비중있게 설명되는 '나'가 과거 고교 시절 겪었던 기묘한 유령 체험은 본 편인 기우메 이야기와 별 상관이 없습니다. 점성술사의 기우메 이야기도 그녀가 왜 죽을 날을 손님에게 이야기해 주었는지와 크게 관련이 없고요. 괜히 이야기만 두서없이 전개되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도 기우메 이야기는 충분히 무섭기는 했습니다. 괴이한 무언가를 눈치챈 후 '그것'이 서서히 자신에게 다가온다는걸 알게되는 이야기는 몇 편 읽어보았는데, 그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말이지요.

실화 괴담이라는 주제에 충실한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스쳐 지나가는 것"

도쿄에서 직장에 다니며 혼자 사는 유나는 어느날 집을 나서다가 문 앞에 꽃이 꽂혀 있는 작은 유리병이 놓여져 있는걸 발견했다. 그 뒤 유나는 출근길에서 검은 이상한 형체를 보기 시작했다. 검은 형체는 출근길을 거슬러 점점 유나의 집으로 다가왔고, 유나는 집 앞에 놓였던 꽃이 검은 형체를 불러오는 매개체가 되었던게 아닌가 싶어 공포에 떨었다.

드디어 어느 월요일 아침, 유나의 집 앞에 검은 형체가 도착해 인터폰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유나가 도움을 요청한 친구 히나타가 도착하자 이상한 형체는 사라졌지만, 이후 히나타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전 기우메와 비슷하게 점점 나에게 다가오는 정체불명의 무언가에 대한 괴담입니다. 마지막 유나의 집 문을 두드리는 장면, 히나타에게 무언가 씌워진다는 결말은 상당히 오싹합니다. 이전 작품과 유사하기는 한데, 정확히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 애매한 공포라서 실화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는 차별화 요소도 괜찮았고요.

그러나 왜 유나의 집 앞에 그것이 다가오는지, 대체 그건 무엇인지 등이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조금 답답하기는 합니다. 유나의 집 앞에 놓였던 꽃이 건널목 근처 사고 현장에 놓여진 공양물이었고, 어린 아이가 장난으로 이를 가져다 유나의 집 앞에 놓았기 때문에 원령이 다가오기 시작했다는 식의 추리가 살짝 등장하는데, 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작은 유리병과 꽃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으며, 왜 유나의 집 앞에 놓여 있는지도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기승전결은 있고, 오싹한 맛도 괜찮았습니다.

2017/10/06

하늘을 나는 말 - 기타무라 가오루 / 정경진 : 별점 3점

하늘을 나는 말 - 6점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정경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기타무라 가오루의 전설적인 일상계 연작 단편집입니다. "동서 미스터리 100"의 일본편 17위를 차지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걸작이지요. 오래 전 부터 국내 출간을 기다리던 작품입니다.
사실 국내 소개가 이렇게나 늦어진 것 자체가 굉장히 의외에요. 앞서 말씀드린 "동서 미스터리 100"선 상위 20개 작품 중 국내 미출간 작품은 이 작품과 아유카와 데쓰야의 "검은 트렁크" 두 작품이 유이할 정도거든요. 이 중 "검은 트렁크"는 1950년대 출간된 묵직한 고전이지만, 이 작품은 80년대 발표된 나름 신세대 미스터리 작품인데 말이지요. 게다가 일상계 미스터리는 국내에서도 요네자와 호노부의 작품들이나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 등으로 제법 인기를 확보하고 있기도 하고요. 온갖 수준 이하의 작품들까지 번역되는 일상계 추리물의 홍수 속에 이 유명 작품이 이제서야 소개된 것 자체가 미스터리같습니다. 무슨 어른의 사정이 있는지 조금은 궁금하네요.

여튼, 그만큼 기대가 컸는데 다행히 재미있었습니다. 작가가 여성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의 섬세한 묘사들이 가득하여 푸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전해주며, 추리적으로도 정통에 가까운 이야기들인 덕분입니다. 기묘한 이야기가 선보이고, 그것을 엔시씨가 주어진 단서만으로 풀어낸다는 고전적인 안락의자 탐정 스타일인데, 대체로 설득력있고 합리적입니다.
국문학을 전공하는 화자 "나"와 라쿠고가 탐정 엔시 씨 캐릭터도 좋아요. 작가의 섬세한 필치로 매력적으로 묘사되고 있음은 물론, 주인공의 "국문학도" 로서의 전문가적인 지식과 엔시 씨의 "예인"으로서의 특수 능력 - 놀라운 기억력과 라쿠고 연기를 통해 단련한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보는 능력 - 이 이야기와 잘 결합되고 있는 덕분입니다.

단점이라면 분량에 비해 추리적인 부분이 좀 부족하다는 것 정도? 이것은 엔시씨와 나, 그리고 그 외 등장 인물들과 본 편 추리와는 무관한 배경 묘사 비중이 높은 탓입니다. 덕분에 캐릭터가 생동감있게 다가오고, 전개에 있어서도 설득력이 더해진다는 장점은 있습니다만, 추리 부분의 비중이 작아진건 개인적으로 아쉬웠어요. 국내 소개되었던 작가의 다른 단편집 - "시미가의 붕괴" - 등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굉장히 빠른 호흡으로 전개되었기에 의외이기도 했고요. 아무래도 이 작품이 발표된 해가 버블의 정점이었던 1989년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여유있고 풍요로왔던 시대에 어울리는 느긋한 분위기가 가득 느껴지니까요.

그래도 숨 넘어갈 것 처럼 달리는 와중에도, 쉬어갈 필요는 있는 법이지요. 단점은 사소할 뿐, 시대를 뛰어넘는 재미를 전해주는 좋은 일상계 소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일상계 미스터리를 좋아하신다면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다음과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세요.

"오리베의 망령" 

"나"는 우연히 대학교 은사 가모 교수의 부탁으로 라쿠고가 엔시씨 인터뷰에 동행했다. 인터뷰 후 회식 자리에서 가모 교수는 어린 시절 꾸었던 기묘한 꿈 이야기를 했는데, 엔시 씨는 이야기만 듣고 진상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는 증거 보완을 위해 한 달의 시간을 요청하는데...

화자인 "나"와 탐정역인 라쿠고가 엔시씨가 등장하는 기념할만한 시리즈 첫 편입니다. 섬세하면서도 느긋하고, 조금은 할머니 취향인 "나"와, 뛰어난 기억력을 갖추고 사람들을 꿰뚫어보는 엔시 씨가 제대로 소개됩니다. 전통 일본적 소재인 라쿠고와 오리베 자기, 그리고 교수님 꿈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지는 전개도 괜찮고요.

추리적으로도 단서가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교수님 꿈의 이유가 된 숙부님이 평소 책을 함부로 대했다는게 핵심이거든요. 물론 교수님이 어렸을 때의 일본 사회 분위기, 당시 경매 제도 디테일 등은 국내 독자로서 알아내기는 불가능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만, 일본 한정으로는 충분히 설득력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되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리즈 시작으로는 적절한 수준의 이야기였습니다.

"설탕 합전" 

"나"는 어느 날 엔시 씨를 우연히 만나 함께 홍차를 마시게 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는 앞 테이블에 앉은 3인조의 기묘한 행동에 신경을 쓰게 되는데...

사소한 것에서 진상을 꿰뚫어보는 엔시 씨의 능력이 잘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핵심 추리는 "왜 세 명의 마녀(?)가 설탕 합전을 벌이는가?" 이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나"가 신경쓰는 사람들이 세 명의 여자 아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그녀들이 반드시 다시 돌아올 거라는걸 예언하는 등의 소소한 추리도 아주 볼만했습니다. "설탕을 홍차에 타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설탕을 꺼내려는 목적이었다"에서 시작되는 핵심 추리의 흐름 및 진상도 충분히 합리적이고요. 변장과 연기(?)로 사건을 완벽하게 해결하는 엔시 씨의 활약까지 더해지기 때문에, 그야말로 완벽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가 무언가 이상한 것(소금)을 넣는 것을, 원래 퍼낸 설탕을 다시 넣는 것으로 착각한 이유가 불분명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다른 용기에 담아온걸 넣었을 텐데, 이걸 착각한다는건 무리니까요. 앙심을 품은 알바생이 너무 자신을 드러내놓고 가게에 출입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그래도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은, 시대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아주 좋은 일상계 소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호두 껍데기 안의 새" 

"나"는 친구 다카오카 쇼코와 함께 도호쿠 여행을 떠났다. 엔시 씨의 공연도 보고, 온갖 절경을 감상하며 여행을 즐기던 중, 현지에서 만난 친구 에미의 차 시트가 모두 벗겨진 채로 발견되는데...

분량은 약 90페이지에 가까운데, 80여 페이지에 걸쳐 도호쿠 여행담이 소개됩니다. 아무리 일상계 작품이라지만 이래서 되나 싶을 정도로 무관한 배경 묘사 비중이 높아서 마음에 들지 않네요. "나"와 친구들 사이의 대화 역시 지나치고요. 

작품 속 추리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동일 차종의 차 커버를 벗겨 위장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단지 시트 커버만 벗긴다고 차가 비슷해질까요? 그 안의 모든 디테일, 소품이 다를텐데 말이지요. 아울러 이렇게 위장하려고 했던 대상이 어린 여자아이라는걸 쉽게 떠올리는건 너무 심한 비약입니다.

물론 배경 묘사는 아주 근사합니다. 일본 인형 코케시의 고장이라고도 하는 "자오산"의 풍광이 정말 매력적으로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나"가 문학에 대해 정말 조예가 깊다는게 잘 드러나는 점도 좋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아쉬움이 있기에 감점합니다.

"빨간 모자"

"나"는 동네 치과에서 우연히 함께 대기실에 있던 "점 여사"로부터 기묘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알고 있는 점 여사의 동창 모리나가 유미코 씨의 집 앞에, 매주 일요일 밤마다 빨간 옷을 입은 소녀가 나타난다는 이야기였다.

전편에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전편의 결과(아이를 버린 어머니)를 궁금해 한 엔시 씨가 "나"를 공연에 초대한 후 이야기를 듣는다는 설정과 본편 이야기가 이혼에서 비롯되어 있다는 점에서요.

추리적으로는 무난합니다. "빨간 모자" 이야기는 사실 모리나가 유미코의 창작으로, 점 여사가 찾아온 날 화장실 옆에서 신발장을 정리한게 핵심 단서라는 것은 괜찮았어요. 충분히 일상계스러우면서도,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해 준 셈이니까요. 그날 목격한 "빨간 모자"는 유미코의 딸일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점 여사의 남편과 모리나가 유미코가 불륜 관계였기 때문이라는 추리도 충분히 설득력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인간 관계, 인간 심리를 그려낸 묘사는 부담스러웠습니다. 점 여사의 방자한 태도, 마지막에서 "나"가 사고가 날 뻔한 상황 등에 대한 묘사는 솔직히 불필요했고요. 본 편 추리하고는 동떨어져 있는 모리나가 유미코의 "빨간 모자" 동화 묘사도 지나치게 깁니다. 이러한 점은 한 편당 80여 페이지라는 분량을 맞추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나 의심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냥저냥한 수준의 이야기였습니다.

"하늘을 나는 말"

"나"는 집 근처 상점 "모퉁이 집"의 젊은 사장 구니오 씨가 연인과 함께 있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 이후 "나"는 부탁을 받아 유치원 크리스마스 공연 비디오 촬영을 나섰는데, 그 곳에서 산타클로스로 분장한 구니오 씨를 다시 만났다. 그날 그는 유치원에 가게에 있던 목마를 선물로 기증했다. 그런데 이웃집 며느리로부터, 유치원 마당에 놓여져 있던 목마가 순간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표제작으로 일상계 단편집 마무리에 어울리는 가슴 따뜻하고 훈훈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추리적으로 수수께끼 자체는 평이하지만, 다무라씨(구니오씨의 연인)가 날짜를 착각했다는게 잘 설명되고 있는 만큼 즐길거리는 충분합니다. 일상계에 딱 어울리는 정도의 수수께끼였어요.

무엇보다도 제가 읽었던 크리스마스용 소품들 중에서는 최고입니다. "나"의 생일이 크리스마스이고, 소재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며, 이야기의 핵심이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니 이만큼 좋은 작품이 또 있을까요? 크리스마스의 즐거움을 더해 별점은 3.5점입니다.

2021/02/19

빵의 역사 - 하인리히 야콥 / 곽명단, 임지원 : 별점 3.5점

빵의 역사 - 8점 하인리히 야콥 지음, 곽명단.임지원 옮김/우물이있는집

이전 올렸던 "빵의 지구사" 리뷰에 댓글로 홍차도둑님이 추천해 주셔서 읽게 된 세계사, 식문화 서적입니다. 새로 복간된 버젼은 아니고 예전에 절판되었던 버젼입니다. 

그런데 '빵의 역사'라는 제목과는 담고 있는 내용이 달라서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농사'와 '농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희생되고 숨겨진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집트부터 책이 쓰여진 2차대전 이후까지 주요 문명별로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담고 있는 내용이 무척 깊고 넓어서 간략한 리뷰로 정리하기는 불가능한 역작입니다만 저자 주장의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보자면, 일단 처음 '빵'(효모로 부풀리는)과 '오븐'이 태어난 이집트는 모든게 신성화된 왕의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관료가 엄청 많을 수 밖에 없어서 농업에 기반을 둔 농업 국가였음에도, 모든 영광은 관료들이 차지했습니다. 농민들은 농노에 가까왔지만 신성화된 왕에게 소유됨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서 문명은 잘 유지되었지요.

반면 그리스 문명은 토지 특징 상 농업이 주가 될 수 없었습니다. 곡물은 주로 수입에 의존했어요. 저자는 '황금 양털 가죽'을 찾아 모험을 떠난 이아손과 영웅들은 곡물상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대신 목축이 주였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나 서사시에서 소유한 가축의 양과 질로 부유한지 아닌지가 결정되었다는걸로 알 수 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하룻만에 아우게이아스의 마굿간을 청소한 신화도 그들이 농사를 짓지 않았다는걸 의미한다네요. 농부였다면 소중한 퇴비의 재료가 되는 마굿간 퇴적물을 물로 씻어 버렸을리가 없다는 이유인데,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솔론의 개혁으로 토지가 분배되었고, 그 덕분에 농민들이 아테네를 다스리게 됩니다. 사유지 확장을 금하고, 정해진 이상의 개인 토지를 몰수한 이 법은 소농들 권한을 강화시켜 아테네를 농업 민주 국가로 변모시켰고, 농민 신분도 상승했습니다. 대지와 곡식, 그리고 '빵'의 여신 데메테르를 숭배하는 엘레우시스교가 아테네의 국교가 될 정도로요. 엘레우시스교는 뒤이은 로마에서도 나름 건재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이 토지를 점차 장악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농지 분배를 받지 못한 뒤 로마 토지는 이윤이 많이 남는 축산업에 활용되고, 곡물은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주로 아프리카 정복지를 통해 수입되었죠. 그러나 반달족 습격으로 아프리카를 잃고, 유대 지방 곡물의 수탈이 시작되자, '농업인' 예수가 세력을 넓히지만 로마에 의해 살해당하게 됩니다.

로마가 식량 부족으로 동과 서로 나뉜 뒤, 북방 민족이 로마 제국 영지를 차지합니다. 목축 중심이었던 그들의 경제 활동이 농사로 바뀐 건 필연이었어요. 6인 가족의 중앙 아시아 유목민이 보통 환경에서 생활하기 위해서 가축 300마리가 필요하다니, 굶어죽지 않으려면 당연했겠지요. 그러나 농사를 싫어하는 민족 특성으로 로마식 노예 제도가 이 때부터 뿌리내리게 됩니다. 그래도 중세 초기에는 지주는 농노를 잘 보살폈습니다. 일을 잘 하게 만들기 위함으로, 자유민들도 군복무를 하지 않고 안전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농노가 되었고요. 

농민들이 그나마 살 만 했던건 이 시기까지였습니다. 곧바로 가진자들의 수탈이 시작됐거든요. 도시 문명이 발달하며 도시민, 상인, 그리고 길드 소속 장인들 권리는 신장되었지만 농민들의 노동은 홀대받았습니다. 이는 '농사는 아담과 이브가 죄를 저질러 낙원에서 쫓겨난 탓에 어쩔 수 없이 종사해야 했던 원죄'라는 기독교적 사고 방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탓으로 설명됩니다. 결국 13세기, 농민들에 의한 봉기가 일어났지요. 그런데 조금 재미있는건 당시 종교 개혁이 이 농민 봉기와 관련이 있다고 해석한 부분입니다. 교회의 토지 수탈을 비판하던 종교 개혁가들이 농민 편에 섰기 때문이라는군요. 그러나 놀랍게도 종교 개혁의 핵심 인물 루터가 배신(?)한 탓에 봉기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루터의 교회도 수탈로 토지를 확보했을 뿐더러, 루터가 책임 전가를 겁내어 자기를 추종했던 농민 전쟁 참가자들을 배신했던 걸로 보입니다. 봉기 실패 이후 농민들은 더 가혹한 삶을 강요받게 되었고요.

저자는 농민들의 미대륙 이주를 이러한 처절한 삶을 탈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던, 즉 독립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지주와 농민 세력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요. 다른 국가들의 군대는 농민이 아니었지만 미국 독립군은 사실상 농민군으로, 전쟁에서 질 경우 모든걸 잃고 다시 도망쳐 나왔던 대토지 소유 제도 하에서 고통받아야 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박에 없었다는 해석이지요. 이 해석이라면 13세기 농민 봉기가 실패한 이유가 잘 설명되지는 않지만, 꽤 그럴싸했습니다. 농민들이 주도권을 쥐게 된 미국은 광대한 땅에서 농사를 효율적으로 짓기 위해 여러가지 참신한 시도로 세계 최대의 농업 생산국이 되었고, 결국 빵이 풍부해서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다는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유럽 정국이 요동치고, 그들이 패권을 잃은 과정 역시 저자에 따르면 농민 세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이후 농민을 포함한 민중이 이런저런 인쇄물과 매체를 통해 여러가지 '생각'을 접하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근대화에 접어듭니다. 그러나 일부 중농주의자들을 제외한 왕의 측근들이 농업보다는 상공업이 국가의 미래라고 생각했던 탓에, 기근과 가뭄이 닥쳐 방앗간에서 밀가루 생산이 멈추자 시민들이 빵을 달라며 혁명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마찬가지로 공업을 신봉한 탓에 무너졌습니다. 그는 백성과 군대가 잘 먹어야 한다는 현실 자체는 인지했지만,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곡물 수입이 막히자 패망한 거지요.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들이 일으켰다는 차이가 있지만, 노동자들은 농민들과 타협했습니다. 1921년 농민들은 농작물 세금만 납부하면 남은건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지요. 스탈린이 러시아를 공업 국가로 만들기 위해 모든 토지를 국영화하고 농민들을 집단 농장 소속 농부로 만들었지만, 이는 스탈린이 그만큼 막강한 권력을 지닌 독재자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농민들보다 강했던 파시즘이 유럽을 휩쓸었던 시기이기도 했고요.

이렇게 세계 역사의 주요한 흐름을 농민들의 존재와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통해 풀어내는게 아주 신선했습니다. 그동안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시각이었으니까요. 각 시기별로 주요한 에피소드, 인물, 콘텐츠를 인용하여 설득력도 높이고요. 

그러나 유럽 중심의 역사만 다룬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한계와 약점이 느껴집니다. "빵"이 아니라 농민 중심으로 흘러간 문명사를 쓰려는게 의도였다면 당연히 중국 역사도 포함시켰어야 했습니다. "고문진보"만 보아도 농부의 노고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노래한 고시 - “봄에 곡식 한 알 뿌리면, 가을엔 만 알의 곡식 거두네. 천하에 놀리는 밭이 없는데, 농부들은 굶어 죽는다네 (春種一拉東, 秋收萬顆子, 四海無閑田, 農夫餓死)." - 가 등장하는데 말이지요.

또 농민들의 존재, 그들의 위치로 큰 세계사 흐름을 설명하려다 보니 억지스러운 점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인게 미국 남북 전쟁은 북부가 곡물 생산량이 높아서 승리했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해석이에요. 유럽 역사에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유대 민족에 대한 비중이 높다는 점도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저자가 유대인인 탓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엘레우시스교 축제에 대한 장황한 설명같이 지루한 이야기나 주제이기는 동떨어진 이야기 비중도 만만치 않다는 단점도 큽니다. 성찬 의식에 대한 견해 차이의 역사를 서술한 부분이 좋은 예입니다. 몰랐던 내용이라 신기하긴 했으나, 이 책 주제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생각되네요.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발표 시기가 오래된 탓에 최신 정보를 담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약점이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사를 바라보게 해 주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추천해주신 홍차도둑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빵의 지구사 - 윌리엄 루벨 / 이인선 : 별점 2.5점

2004/01/01

절대미각 식탐정 - 테라사와 다이스케

절대미각 식탐정 1 - 6점
다이스케 테라사와 지음/학산문화사(만화)

"미스터 초밥왕"의 작가 테라사와 다이스케의 신작.
미스터 초밥왕은 제가 요리만화를 무척 좋아하는데도 불구하고 별로 정이 가진 않았었습니다. 설정에서부터 캐릭터들, 스토리라인 전체가 초밥이라는 소재를 놓고 벌어지는 오버의 극치들이었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았었죠. 특히나 매번 감정에 북받치는 주인공들이나 "입안에서 터지는 어쩌구..."하는 맛에대한 묘사는 짜증날 정도였고요.

그래도 이 "절대미각 식탐정" 은 일단 그러한 감정 과잉이나 오버가 조금은 희석되어 있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그림은 뭐 여전히 독특하지만 꽤 탄탄한 편이고요.

주인공 다카노는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아 유유자적 하면서 역사 소설가와 탐정이라는 두가지 직업을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으로 이 두가지 직업을 모두 알고 있는 인물은 비서인 교코 뿐이죠. 더군다나 그는 앉은 자리에서 도시락 10인분은 바로 먹어치울 정도의 굉장히 식탐이 심한 미식가입니다. 만화는 이 다카노가 경찰청 엘리트인 오카다의 요청으로, 또는 의뢰로, 또는 우연히 사건을 받아 해결해 나가는 추리만화의 구성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이야기 전부가 "음식"과 연관되어 있는, 약간은 요리만화의 설정도 띄고 있습니다.

사건의 예를 들면 어떤 식당에서 벌어진 살인 현장에서 범인으로 심증은 가는 요리사가 있습니다. 살해당한 요리장은 머리를 강타당했는데 흉기를 찾지 못한 상태죠. 여기서 다카노는 주 메뉴였던 커틀릿을 먹어보고 커틀릿 빵가루가 일반적인 빵이 아닌 일종의 "단단한 빵"으로 만들어 졌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그 요리사의 자백을 받아냅니다.... (1권 003 "남의 커틀릿을 먹다")

그러나 다카노라는 주인공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네요. 개인적으로는 "맛의 달인"의 지로같은 녀석이 이 만화 주인공으로 적당했을것 같습니다. 다카노의 너무 잘난척 하는 모습은 짜증날 정도였고, 비정상일 정도의 식탐이 현실성이 부족했거든요. 아울러 살인 현장에 음식이 중요한 증거로 남아있어 그 음식을 먹어보고 사건을 추리해 낸다던가(1-004 : 살인현장의 초밥을 먹다 편 등), 식당이 범행 장소라던가(2-012 : 라면집에 줄을 서서 라면을 시켜 먹는다 등), 음식의 특성으로 트릭이 이루어진다던가(1-005 : 독이 든 홍차까지 마신다 등) 하는 식으로 모든 사건이 음식과 관련되어 있는 만큼, 상당한 수준의 내용도 있지만 이야기의 소재와 설정이 아무래도 끼워맞추는데 문제가 좀 있는 편이라 전체적으로 그 추리의 깊이나 내용이 합리적이거나 치밀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즐겨 찾는 추리 동호회의 한 회원분은 거의 쓰레기급으로 분류하시더군요^^

하지만 요리만화를 좋아한다면 꽤 즐길 수 있는 만화입니다. 저도 추리만화와 요리만화를 무척 좋아하는데 이런 형태의 만화를 만나니 꽤 신선합니다.

"추리" 보다는 "요리"만화를 좋아한다면 추천입니다.

2019/10/12

사치와 문명 - 장 카스타레드 / 이소영 : 별점 2.5점

사치와 문명 - 6점
장 카스타레드 지음, 이소영 옮김/뜨인돌

문명, 문화 발전에 사치가 큰 동력이 되었음을 설명하는 미시사, 문화사 서적입니다. 이전 설혜심 교수의 "소비의 역사"를 읽고 쓴 리뷰에 댓글로 존경하는 이웃 블로거이신 홍차도둑님께서 함께 읽으면 좋을거라고 추천해 주셨던 책이지요. 절판되었지만 근성으로 찾아내어 구입했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지요.

"소비의 역사"가 당대 특정 상품과 문화, 유행별로 항목을 구분하여 소개하고 있다면 이 책은 역사적으로 특정 '시기'의 거대 국가, 집단에서 어떠한 사치 행위가 있었으며, 해당 행위가 어떻게 문명 발전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소개합니다. 수메르부터 시작하여 아시리아, 고대 이집트, 히브리, 그리스, 크레타와 로마 등의 기원 전 고대 문명에서부터 시작하여 기원 후의 인도와 이슬람 문명, 마야, 아스텍, 잉카 문명, 아프리카, 중국, 일본 및 현대 BRICs 국가까지 망라하는 방대한 분량이죠. 사치 행위도 단순 기호품은 물론이고 문자, 건축, 종교 및 식사에 이를 정도로 폭 넓게 다루고 있습니다.

읽다보면 책 소개글에 나온 것 처럼 사치가 단지 '소모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 활동의 표식 그 자체이면서도 문명 형성과 발전의 주요 원동력임을 알게 됩니다. 특정 품목, 혹은 행위에 대한 기호 자체가 어느 정도 발전된 사회에서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사치는 타인에게 선망과 질투, 욕구를 불러 일으켜 사회의 기본 원칙 중 하나인 '목적 의식'을 일으킨 이유가 되기도 했고요. 지금 우리가 성공하려고 발버둥치는 것 역시 이러한 고대로부터의 행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좋은 집, 좋은 차, 아이를 위한 좋은 학교 등 모두가 사치 행위니까요. 명품에 대한 열망 역시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당연한 이야기를 너무 장황하게 쓴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은 듭니다. 욕망이 목적 의식을 불러 일으키고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는 주제가 반복될 뿐이거든요. 물론 시기별, 문명별, 지역별 각종 사치에 대한 소개는 재미있지만, 이를 모두 담기에는 분량이 부족했습니다. 도판도 부실하고요.
또 서양 문명에만 집중하지 않은 점은 높이 평가하나, 타 지역 사치가 심도깊게 소개되었다고 보기도 힘듭니다. 예를 들자면 중국의 경우 등장하는 비단과 옥, 건축물 등은 이국적인 소재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으니까요. 일본 역시 4~5페이지 분량의 짤막한 역사 소개가 끝나면 바로 메이지 유신 이후 해외 사치 문화가 유입되어 현재에 이르렀다는 결론이 전부고요. 이럴 바에야 이야기를 서양 중심으로 맞추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또 마지막 BRICs 역시 책이 출간되고 1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 된 것 처럼, '현대' 기준의 시각과 소개는 되도록 줄이는게 바람직했을 겁니다. 어치피 현대의 사치가 무엇인지는 누구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책의 주제를 설명하는데 구태여 현재 시점의 사치 소개가 필요한건 아니니까요.
아울러 설혜심 교수의 책에 비하면 읽는 재미는 많이 부족하다는 단점도 큽니다. 특별한 이야기나 드라마없이 소개에 그치는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좋은 내용이기는 한데 단점도 명확합니다. 그래도 문명 발전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2021/09/19

커피인문학 - 박영순 : 별점 2점

커피인문학 - 4점
박영순 지음, 유사랑 그림/인물과사상사

커피의, 그리고 커피가 관련된 역사에 대해 상세히 알려주는 식문화 관련 인문학 서적입니다.

커피의 간략한 역사부터 시작하는데, 이 책에 따르면 커피는 에디오피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예멘을 거쳐 이슬람 세계에 널리 퍼졌고, 오스만 제국 시기에 베네치아를 통해 유럽에 상륙하여 대중화 되었습니다. 164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었고, 이후 각국에 사람들이 모여 커피를 마시는 곳에 관련된 시설들이 생겨나게 되었지요. 당시에는 간판도 없어서 사람들이 '커피'라는 말로 그 장소를 특정한게 '커피'를 뜻하는 '카페'가 마시는 공간까지 아우르게 된 이유입니다.

커피 추출법은 16세기 초 오스만 제국 이스탄불 시대부터 기록이 전해진다는군요. 지금까지 전해지는 '터키시 커피' 방식으로 '체즈베'라는 도구에 볶아 빻은 커피콩을 끓여내는 방식이지요. 이후 유럽에서 가루를 걸러내기 위한 필터를 도입했고, 더 맛있게 마시기 위해 생크림을 얹거나 우유를 가미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1711년에 천주머니에 원두가루를 채워 '우려내기' 방식으로 마시기 시작했고요. 1908년에는 독일의 멜리타 벤츠가 드립법을 창시했고, 1906년 이탈리아에서는 최초의 에스프레소 머신을 발표했습니다. 1933년에는 비알레티의 모카포트가 발명되었고요. 1938년, 아킬레 가치아가 드디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현대적인 에스프레소 머신을 만들어 내었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와 함께 커피에 관련된 일화도 소개해줍니다. 바흐의 커피 칸타타라던가, 볼테르는 하루에 40~50잔의 커피를 마셨고, "커피가 독이라면, 그것은 느리게 퍼지는 독일 것이다"는 말을 남겼는데, 실제로 84세까지 장수했다고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루소, 탈레랑, 나폴레옹, 베토벤, 슈베르트, 모차르트 등 여러 유명인들이 등장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커피가 대중화 된 이유는, 일본인들이 우유 먹기를 힘들어하자 메이지 정부에서 커피에 섞어 마시도록 했기 때문이라는 소소한 역사도 재미있었고요.

그리고 미국의 독립, 조선의 커피 음용이나 우리나라 해방 이후 현재까지의 커피 역사도 알려준 뒤, 각 주요 커피 산지에서 커피가 재배된 역사와 현재를 다루는 이야기가 책 마지막까지 이어지는데, 크게는 브라질과 자메이카, 파나마, 르완다와 우간다, 하와이, 콜롬비아 순입니다. 이를 통해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명성을 얻게 된 건, 대공황 등 여러가지 이유로 추락한 자메이카 커피 산업에 1960년대 일본 자본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부터였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일본은 명확한 품질 관리와 최고 등급 커피의 세계 시장 유통을 인위적으로 조절했고, 커피 생두를 오크통에 담아 파는 고급화 전략으로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을 세계 최고급 커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맛도 맛이지만, 마케팅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 외 파나마 게이샤 커피의 역사와 르완다 커피의 감자맛 결함, 하와이와 콜롬비아 커피의 역사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읽다보니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가 바로 떠올랐습니다. 특정 음료의 역사와 관련된 문화적 의미에 대해 고찰하고, 유명 산지와 주요 결과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똑같으니까요. 그러나 책의 완성도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커피에 대한 과대평가가 너무 심하다는 겁니다. 이런 시각은 "커피견문록"에서 이미 접했었지만 그 정도가 더욱 심해요. 커피가 프랑스에서 계몽 사상을 일깨운 각성제로 프랑스 혁명을 이끌어냈고, 미국에서 커피가 독립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한건 커피 때문이다라는 식이거든요. 뒤로 가면 갈 수록 더 가관입니다. 조선에서 모던 보이들 중심으로 커피하우스 개업이 이어졌지만, 주권 회복을 위한 시대적 각성과 독립을 위한 저항심을 기르는 커피와 카페의 역할이 작동한 사례가 발굴되지 않았다면서 아쉬워하는데, 대관절 커피가 독립 운동과 무슨 상관이랍니까?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는. 뭐라 언급하기도 어려운 억지스러운 발상이었습니다. 커피에 계몽의 힘 따위는 없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커피가 아니라 카페인의 힘이에요. 이런 각성이 중요하다면, 다른 각성제도 다 마찬가지겠지요.

목차가 명확히 정의되지 못하고 두서없이 섞여있는 구성도 아쉽습니다. 각 주요 산지의 커피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커피가 선악과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식이에요. 재미있는 주제이고, 한 번 볼 만 했지만 이는 커피 역사 부분에 포함시켰어야 하는 이야기였다 생각됩니다. 심지어 같은 주제 안에서도 두서가 없을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우간다 커피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우간다 로부스타는 로부스타 중에서도 품질이 좋기로 소문나 인스턴트 커피용보다 에스프레서 블렌딩용으로 인기가 높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하지만 우간다 로부스타종은 인스턴트 커피의 주 원료로 이용되고 있다는 글로 마무리되지요. 뭐가 맞는걸까요?

도판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커피로 그렸다는 일러스트도 구태여 필요했을지 의문입니다. 잘 알려진 사진이나 그림을 그대로 모사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들이 많고, 내용에 꼭 필요했는지도 의문이며, 그리 잘 그린 것 같지도 않거든요. 실제 그림에서는 커피 향이 느껴질 수도 있었겠지만, 인쇄된 책으로 보는데 커피로 그렸어야 할 이유도 잘 모르겠고요.

커피에 대한 역사를 알 수 있고, 여러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인 건 맞지만, 단점도 명확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많은 커피 관련 책을 읽어봤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두드러진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18/12/15

18세기의 맛 - 안대회 외 : 별점 2.5점

18세기의 맛 - 6점
안대회.이용철.정병설 외 지음/문학동네

18세기의 문화를 음식과 함께 잘 소개해주는 인문학, 미시사 서적으로 모두 23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네이버 캐스트에 연재된 글을 묶어 출간한 책인데, 연재 당시 몇몇 글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 구입해 보았습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자의 전문 분야에 대해 연관된 음식과 함께 소개해준다는 아이디어도 좋고, 결과물들도 상당한 수준이기는 합니다. 전문가다운 독특하면서도 새로운 시각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버터의 확산은 카톨릭에서 이탈한 나라와 일치한다던가, 감자가 확산이 늦어진 이유는 당대의 오해와 의혹인데 이를 감자를 소재로 해서 작품을 남긴 유명 화가는 민중 화가인 밀레와 고호밖에 없다는 사실과 연결시키고, 파스타는 18세기에 부유층만 소비하는 고급 음식으로 이를 "그건 마카로니야"라는 당시 속어로 드러내는 등의 방법이 그러합니다. 커피는 남성적 담론을, 홍차는 여성적 담론을 상징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에요.

진은 사회적 폐혜를 불러일으켰지만 맥주는 활력과 번영의 상징이었다는 것을 호가스의 그림으로 드러내는 이야기와 같이 도판이 중요한 이야기가 많은데, 이를 위한 도판 및 그 외의 각종 참고 자료 역시 최고 수준입니다.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모두를 아우르는 등 다루는 범위도 넓습니다. 복어와 식용 국화, 삼해주와 조선의 술 문화 등을 통해 음식 그 자체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내용도 많아요. 이 중에서는 항상 궁금했던 "솔잎"을 먹는 방법에 대한 상세한 소개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신선들이나 무림 고수들이 먹는 나름 괜찮은 음식으로 알았는데 심한 변비를 일으킨다는 건 처음 알았거든요. 하긴, 몸에도 좋고 맛있었다면 지금도 많이 먹고 있을테지요. 변비를 극복하고 맛을 좋게 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도 상세하게 소개되어 무척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지엽적인 이야기 소개에 그치는 내용도 적지 않고, 어떤 이야기는 너무 좁은 분야에 매몰되어 소개되는 등 전체적인 수준이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나는 전문가다" 라는 인식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너무 어렵게 쓴 글들이 적지 않은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네이버 캐스트 연재물이라면 독자를 고려해서 조금 더 쉽고 일상적으로 써 주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책의 주제라 할 수 있는, "18세기에 대한 인문학"을 "음식"으로 잘 드러내는 글들이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것도 감점 요소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전문가들의 식견이 느껴지는 좋은 글들도 많지만 전체적인 글들의 편차가 일정하지 않은 등의 단점도 많아 감점합니다. 그래도 몇몇 특정 주제만큼은 다른 책에서 찾아보기 힘든 전문성이 느껴지는 만큼, 이런 류의 글을 좋아하시는 분들께서는 한번 쯤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6/06/05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 - 최지혜 : 별점 2.5점

서울 종로구 행촌동에 있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에 지어진 서양식 주택 "딜쿠샤"의 역사와 복원 과정을 다룬 인문학, 미시사, 근대미술사 서적입니다.

책은 우선 "딜쿠샤"의 역사부터 짚습니다. 테일러 부부가 이 집을 지은 과정, 화재 이후 다시 보수한 과정, 그 뒤 누가 이 집에 살았고 누가 이곳에서 일했는지를 차례로 알려주거든요. "딜쿠샤"는 이른바 문화 주택 열풍의 출발점처럼 볼 수 있는 집으로, 이 집의 건축 과정 소개를 통해 당시 조선에 방갈로를 비롯한 서양식 주택이 어떻게 들어오고 퍼졌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책의 핵심인 복원 과정에 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당시 촬영된 사진을 기준으로 실내의 세부 요소를 하나씩 찾아내고, 그것을 다시 재현하는 과정이 자세하게 소개됩니다. 전등이 몇 개였는지 같은 고증은 물론, 복원에 필요한 물품을 어떻게 구입했는지, 구할 수 없는 물건은 어떻게 제작했는지도 설명됩니다. 이를 통해 복원이라는 일이 단순히 낡은 건물을 고치는 수준에 그치는게 아니라는걸 알 수 있습니다. 사진과 온갖 자료들을 조사하여 물건의 쓰임을 확인하고, 없어진 것은 다시 만드는 굉장히 치밀한 작업이더군요. 그 정성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어요.

그리고 복원 과정에서 구하거나 만든 여러 소품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좋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아래와 같습니다.

비연호는 코담뱃가루를 담는 작은 병입니다. 청나라 때부터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청에서는 담배는 금지했지만, 코로 흡입하는 코담배는 감기, 두통, 위장병 같은 증상을 완화하는 치료약으로 허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코담뱃가루는 습기에 약했기 때문에, 공기에 덜 닿도록 입구가 작은 병을 만들었고요. 그 병이 비연호입니다.

딜쿠샤 벽난로 옆에 놓인 둥근 그릇은 히바치로 일본 전통 화로입니다. 나무, 도자기, 동으로 만들었는데, 특징이라면 난방용으로만 쓰인건 아니라는 점 입니다. 방 안에서 차나 국을 데우거나, 김을 굽고, 찰떡을 구워 먹고, 깨를 볶는 데에도 썼다고 하네요.

2층 거실 탁자는 상판과 다리까지 조각 장식으로 뒤덮여 있는데, 이건 일본의 닛코보리 탁자입니다. 닛코보리는 일본 닛코 지역의 공예품입니다. 1643년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닛코의 도쇼구를 크게 고치면서 많은 조각 장인들이 모였고, 공사가 끝난 뒤 이들이 그 지역에 정착해 방문객을 대상으로 쟁반과 가구 같은 기념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유래라고 합니다.

서양인의 서양식 주택이지만, 당시 조선의 가구와 소품들도 갖추어져 있었는데 이에 대한 설명도 확실합니다. 조선의 돈궤를 서양인들이 캐시박스라고 불렀고, 우리나라 전통 가구 중 장은 분리되지 않지만 농은 층층이 분리되는걸 의미하며, 당시 서양인들에게 삼층장은 조선 가구의 대표였는데 1920~30년대 조선을 찾은 미국인들은 화려한 것을 좋아해서, 번쩍거리는 장식이 많이 붙은 삼층장을 선호했다는 등의 정보가 가득한 덕분입니다. 

이런 정보들과 함께하는 도판도 좋습니다. "딜쿠샤" 복원에 관련된 소품과 세부 디테일 사진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소품과 관련된 도판, 당시 분위기를 알려주는 사진도 충실합니다. 이런 책은 글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데, 사진 자료가 많아서 읽기 편했습니다.

다만 단점도 분명합니다. 특히 문장이 아쉽습니다. 이런 저런 명언과 미학 이론을 들먹이며 이야기를 멋스럽게 쓰려는 표현이 많은 탓입니다. 책의 소재 자체가 이미 충분히 재미있는 만큼 오래된 사진을 보고, 사라진 물건을 찾고, 공간을 다시 만드는 과정만 담백하게 쓰는게 좋았을 것입니다. 괜히 문장을 꾸미려는 부분이 오히려 정보 전달을 방해한다고 느껴집니다.

또 다른 단점은 일부 정보의 근거가 약하다는 점입니다. 저자의 전문분야인 건축, 미술, 복원 외의 생활문화 부분은 다소 부실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영국인들이 홍차를 좋아한 이유를 영국 물의 미네랄 함유량이 높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부분이 그렇습니다. 차 문화는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닙니다. 역사, 무역, 계급, 식민지, 기호품 소비 등 여러 요소가 얽혀 있으니까요. 이 책에서처럼 한, 두 페이지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6/03/11

마루타마치 르부아 - 마도이 반 / 김예진 : 별점 2점

마루타마치 르부아 - 4점 마도이 반 지음, 김예진 옮김, 쿠마오리 준 그림/파우스트박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관서에서 저명한 의사 가문 시로사키가의 손자 론고는 3년 전, 자택에 침입한 정체불명의 여인 루주와 의도치 않게 시간을 보낸 뒤 그녀에게 푹 빠졌다. 그러나 론고가 수면제에 취한 틈에 그녀는 사라졌고, 할아버지 지온의 심장 페이스메이커가 정지하여 사망했다.

루주와의 약속으로 사실을 함구한 탓에 할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처벌받은 론고는 3년 후, 가문의 지시를 거부하고 의대에 진학하여 명문가의 사설 법정인 "쌍룡회"에 피고인 "어속"으로 호출되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론고를 위해 저명한 용사인 타츠키 가문의 황룡사 야마토와 대결할 청룡사로 선택된 것은 교토대생 미카가 미츠루와 조수 타츠야였다. 그리고 이윽고 벌어진 쌍룡회에서 3년 전 사건의 진실과 루주의 정체가 차례로 밝혀지는데...

마도이 반의 데뷔작으로 추리 애호가들의 커뮤니티인 하우미에서의 반응이 좋아 구입하였습니다. 사실 구입한 건 꽤 오래전인데 읽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네요.

작품의 핵심은 '론고는 무죄이며 진범은 루주라는 정체불명의 여자다'라는걸 밝혀내는 과정입니다. 이게 "쌍룡회"라는 일종의 법정에서 검사인 황룡사와 변호사인 청룡사의 논리 배틀을 통해 진행된다는게 특징이고요. 이러한 전개는 법정물이라고 해도 무방한데, 압도적으로 불리한 론고와 청룡사 측이 처음 생각했던 작전 — 재판관의 손녀인 카나리가 루주일지도 모른다는 단서를 흘려 주도권을 잡으려는 — 이나, 청룡사와 황룡사의 주거니 받거니 하는 공격과 그 와중에 놀라운 진상이 연이어 드러나는 전개는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추리 애호가분들이 입을 모아 칭찬할 만한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선 "쌍룡회"부터가 만화적인 설정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교토의 오래된 명문가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귀족들의 여흥이라는 쌍룡회와 젊은 미남미녀들로 구성된 등장인물들은 "오란고교 호스트부" 와 다를게 없으니까요. 하는 행동들도 비슷하고요. 법정에서 암검살이니 낙화 되돌리기니 하는 필살기를 펼쳐 보이는 묘사와 과장된 연출도 마찬가지입니다.그런데 문제는 이 작품이 코미디가 아니라 완전히 진지한 법정물이라는 겁니다. 

물론 작품이 라이트 노벨이니 그냥 만화와 다를게 없다고 생각하면 그러려니 할 수 있는데, 쌍룡회가 억지의 연속으로 이루어진건 확실히 문제입니다. 3년 전 벌어진 사건의 범인으로 강력하게 의심되는 용의자가 "사실은 그때 다른 여자랑 같이 있었는데 그녀가 범인이다"라고 주장하며, 그녀가 있었다는 증거로 선물받았다는 키스 마크가 찍힌 손수건을 조작해 들이민다는 것부터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제가 검사, 즉 황룡사라면 다른 건 둘째치고라도 그 손수건이 그때 받은 것임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를 물었을 겁니다. 쌍룡회가 어느 순간부터 '루주는 확실히 존재했다, 그런데 그녀의 정체는 OO다'는 식으로 흘러갈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게다가 첫 번째 증거로 내민 찻잔은 검사인 황룡사가 바꿔치기를 하는 등 정상적인 법정으로 보기 불가능한, 비합법적이고 비합리적인 요소와 설정이 난무한다는 점도 감점 요인입니다. 논하는 사건 자체가 피고의 증언에만 기반하는데다가, 변호사와 검사는 서로 사기만 치는걸 좋은 법정물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추리적으로도 별로입니다. 커피가 홍차로 바뀐 것으로 루주의 정체를 밝히는건 논리적으로는 그럴듯하지만, 결정적 증거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애초에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피고이기 때문입니다. 증언의 신빙성을 보장할 수 없어요. 찻잔을 바꿔치기한 것으로 도청 사실을 눈치채는 장면 역시 그럴듯해 보이지만, 똑같은 디자인과 색깔의 찻잔을 준비했다는건 억지입니다. 찻잔의 모양이 목소리로 전달될 수는 없으니까요.

마지막에 놀라운 사실이 속속 밝혀지는 부분도 과했습니다. 루주의 정체야 그렇다 쳐도, 미츠루는 여자였고 야마토는 나데시코였다는 서술 트릭은 불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논리 배틀의 탈을 쓰고 있지만 불합리한 요소와 억지가 많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와 닿지 않는 만화적인 설정과 읽기 힘들게 만드는 장황한 대화 역시 감점 요인입니다. 후속작이 있나 본데 도저히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군요. 차라리 만화였다면 조금 더 재미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26/09/12

내가 읽었던 아리스가와 아리스 작품 순위

어제 아리스가와 아리스 데뷰 35주년 헌정 단편 앤솔로지를 읽은 뒤 탄력받아 정리해 보았습니다. 원서 포함해서 모두 12권 입니다. 국내 소개된 작품 중에서는 여섯 권을 빼고는 전부 읽었습니다.

평균 별점을 확인해보니 2.3점입니다. 생각보다는 평균 별점이 높아서 의외인데, 제가 좋아하는 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에 충실한 덕분이라 생각되네요.

제 순위와 별점은 아래와 같습니다. 

공동 1위: 별점 3점

공동 4위: 별점 2.5점

공동 8위: 별점 2점

공동 11위 : 별점 1.5점

2019/05/28

2018년 내 이글루 결산

이글루스와 함께 한 2018년, 무슨 일이 있었나요?

  • 2018년 hansang님은 이글루스에서 480번째로 글을 많이 쓰셨네요!
  • 포스팅을 가장 많이 한 달은 2, 4, 7, 8, 12월 이예요!
  • 내 이글루 댓글 상위 랭커는 홍차도둑 님이였어요!
더 자세한 이글루결산이 궁금하다면? GO

2025/06/27

네가 손에 쥐어야 했던 황금에 대하여 - 오가와 사토시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소설가의 평범한 일상을 풀어낸 작품집입니다. 소설가 생활을 시작한 뒤, '야마모토 슈고로 상' 후보가 되기까지를 아우르는 여섯 편의 연작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가와 사토시 특유의 독특한 발상들이 가장 인상적입니다. 특별한 사건 없이 별다를 것 없는 일상들이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드라마가 될 수 있다는걸 잘 보여줍니다. 이와 동시에 소설이란 무엇인지, 창작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작가적 성찰도 좋았고요. 

이야기마다 밀도나 완성도의 편차가 존재하며, 일부 수록작에서는 특유의 발상이 부족해 다소 평이하게 흘러간다는 단점은 있지만 사소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작가의 팬이시라면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프롤로그

독서광 대학원생인 '나'는 '당신의 인생을 원 그래프로 표현하시오'라는 입사지원서 항목을 높고 고민하다가, 여자친구 미리의 조언으로 입사 지원서에 자신의 인생을 주제로 한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구직을 위한 동기와 목적이 이야기로서 부족하다고 느낀 탓에 자신의 인생을 소설처럼 바꾸려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진짜 소설 쓰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결국 소설가가 되기 위해 미리와 이별한 나는 6년 후 소설가가 되었고 미리는 결혼했다.

연작 단편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입니다. 입사 지원서의 항목 하나를 두고 주인공과 여자친구가 나누는 진지한 토론도 인상 깊었지만,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여자친구 미리의 조언입니다. '입사 지원서에는 진실을 쓸 필요가 없고, 구직 활동 자체가 하나의 소설과 같으니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라'는 말로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현실적이고 참신하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아마 지금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 생각도 되고요. 결국 주인공이 가짜 인생을 그럴듯하게 써 내려가려고 노력하다가 진짜 소설가가 되고 만다는 결말도 횡당하지만 좋았습니다.

작가 오가와 사토시 특유의 기발한 발상과, 일상을 다루면서도 어딘가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특성이 잘 살아 있는 단편입니다. 미리와의 건조하면서 담백한 관계와 헤어짐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연상케도 하고요.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3월 10일

대지진 3년 후인 3월 11일, 고등학교 동창 네 명이 모여 술을 마셨다. 다들 지진이 일어난 날에는 무엇을 했는지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바로 전날인 3월 10일에 뭘 했는지 모두 잊어버렸다. 이걸 계기로, 나는 인생의 대부분은 기억에도 남지 않는 평범한 날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3월 10일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나는 예전에 썼던 핸드폰까지 찾아내어 조사했다. 바로 기억을 떠올리지는 못했지만, 당시 문자를 통해 홍차와 마들렌을 먹으면서 어릴 적 기억을 세세한 것까지 떠올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결국 그날 나는 아카네와 사귀기 위해 영화 초대권을 이용한 수작을 부렸었다는걸 알아냈고, 지금 아카네는 이별을 고했다.

4년 전의 평범한 하루를 추적해 나가는 과정을 다룬 이 작품은 일상 속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마치 추리 소설처럼 긴장감 있게 전개됩니다. 사소한 단서들을 따라가며 퍼즐을 맞추듯 과거를 되짚는 흐름이 꽤 흥미롭고, 일상계 추리물로도 완성도가 높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주인공이 약속에 늦잠을 자고는 부끄러워 그 이유를 '숙취'라고 꾸며낸 뒤, 그 이야기를 반복하는 사이 자신도 그게 사실이라고 믿게 되는 장면이었습니다. 거짓이 반복되며 진실처럼 굳어지는 과정은 현실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잊힌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을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연결한 구성도 눈에 띄었습니다. 주인공이 아카네와 가까워지기 위해 인용한 질베르트의 이야기가 단순한 장치가 아니라, 전체 구조 속에서 유기적으로 활용되는 점이 돋보였거든요. 처음엔 지나쳤던 대사나 행동들이 나중에 의미를 드러내며, 이야기 전체에 짜임새를 더해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인공의 친구들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기억을 왜곡했던 경험을 고백하면서,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주관적인지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전개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대단한 사건 없어도 일상을 이렇게 깊이 있게 풀어낼 수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소설가의 본보기

'나'의 친구 니시가키는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 독특한 인물로, 마음에 들었던 여성 에리카와 가까워지기 위해 작가인 나를 이용하여 결국 결혼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결혼 후 니시가키는 나에게 에리카가 소설가가 되겠다며 회사를 그만두려 한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알고 보니 에리카는 오라 리딩이라는 점술에 빠져 소설가가 되려고 했고, 니시가키는 그것이 사기라는걸 나와 함께 밝히기로 했다. 처음에는 니시가키가 점술가를 직접 찾아가 사기 행각을 증명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내가 직접 소설 속 인물을 빌려 점술가에게 접근해서 어느 정도 거짓을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나 역시 점술가의 말에서 분명 무언가를 느꼈다.

'소설을 써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자주 물어보는 질문이다. 아이디어는 어떻게 생겨나는 겁니까? 내 경험을 말하면 지금까지 소설의 아이디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이디어는 퍼즐 조각 같은 것이어서 늘 내 마음속에 몇가지씩 존재한다. 그 조각들을 끼워 맞추면 비로서 소설의 아이디어가 된다. 작품을 구상하는 기간의 태반은 딱딱 들어맞지 않는 퍼즐 조각들을 억지로 겹쳐놓고 겹친 부분을 잘라내거나 공백 부분을 채워넣으면서 모양새를 다듬어 가는데 시간을 쏟는다. 이기고 치대는 사이에 점점 아이디어의 형태를 갖춰 간다.'

점술이라는 주제를 통해 현실적인 의심과 믿음, 그리고 창작의 과정을 교차시키는 구성이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오라 리딩이라는 점술이 어떻게 사람을 현혹하는지, 콜드 리딩이라는 간단한 사기 수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이 재미의 핵심이었습니다. 상대의 반응을 보며 교묘하게 말을 끌어가는 방식은 실제 사례로도 있을 법해서 몰입감 있게 읽혔습니다.

그 흐름 속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소설은 어떻게 쓰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장면도 눈에 띄었습니다. 아이디어는 갑자기 떠오르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 흩어진 퍼즐 조각들을 끼워 맞춰 가는 과정이라는 설명은 매우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작가로서 겪는 고유의 고민과 구상의 실제적인 측면이 잘 전해졌습니다.

다만 이야기 자체는 결국 에리카가 회사를 당장 그만두지 않기로 하면서 비교적 평이하게 마무리됩니다. 앞선 단편들에 비해 기묘한 전개나 파격적인 발상은 덜해서, 그런 부분을 기대했던 독자라면 다소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네가 손에 쥐어야 했던 황금에 대하여

나는 남이 내 일에 간섭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 타인에게도 참견하지 않는 반면 고등학교 동창 가타기리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대로 거리낌 없이 타인의 일에 개입해왔다. 나는 그를 경멸했지만, 완전히 미워하지는 않았고 종종 괜찮은 행동도 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졸업 후 가타기리는 사기성 있는 투자로 동창들에게 피해를 입혔지만 나에게는 연락하지 않았고 2년 뒤 잠깐 만나 목욕탕을 함께 간게 전부였다. 그리고 또 몇 년 후, 잘 나가는 줄 알았던 가타기리는 다시 나를 찾아와 악성 댓글 대응법을 물어보았다. 알고보니 그는 폰지 사기를 벌이던 중이었고, 결국 모든게 밝혀져 파산하고 말았다.

가타기리는 실제로 돈을 벌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빌린 돈으로 배당금을 주며 허상만 유지해왔다. 나는 그가 단순히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투자자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통해 삶의 보람을 느껴왔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이 그만의 ‘황금률’ 실천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가짜 황금을 좇는 점에서는 가타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설가에게 필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재능 없음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가는 길에서 발길을 멈추고 마는 굼뜬 성격,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않은 것에 집착하는완고함, 강박적으로 타인과 똑같은 걸 하기 싫어하는 비뚤어진 심사.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이처럼 인간으로서의 결손, 일종의 우매함이 필요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술술 풀리고 갈등이라곤 없는 인생에 창작은 필요 없다.

표제작. 이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소설가에 대한 묘사였습니다. 작가는 소설가에게 필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오히려 ‘재능 없음’이라고 말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지나칠 일에 괜히 발을 멈추는 둔한 성격,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에 집착하는 완고함, 타인과 똑같은 것을 하길 극도로 꺼리는 비뚤어진 심사—이런 결손이야말로 소설을 쓰기 위한 조건이라는 설명이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갈등 없이 순탄하게 흘러가는 인생에는 애초에 창작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말에도 공감이 갔고요.

또 하나 마음에 남았던 건 학창 시절, 영원히 함께할 줄 알았던 친구와도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완전히 연락이 끊기는 현실이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친구들이 제법 있어 더욱 실감 있게 다가왔습니다.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만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도 더는 서로의 삶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 묘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반면, 가타기리의 사기가 그저 흔한 폰지 사기였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그동안 작가가 보여준 기발한 반전이나 의외성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터라, 전개가 다소 평이하게 흘러간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또한 마지막 결말 부분—즉, 소설가인 ‘나’가 가타기리와 마찬가지로 ‘가짜 황금’을 좇는 사람이라는 식의 연결도 개인적으로는 납득이 쉽지 않았습니다. 가타기리의 행동은 엄연한 범죄입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요. 이런 범죄 행위와, 자기 안의 무언가를 꺼내어 소설로 표현하는 창작 행위를 단순히 동일선상에 놓는게 과연 타당할까요? 이를 비교하려면 이보다는 조금 더 설득력 있는 연결 고리 - 예를 들어 '나' 역시 다른 사람의 글이나 아이디어를 도용한 적이 있었다는 식으로 - 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즉, 이 작품 설정보다는 바로 이어지는 "가짜"의 바바 이야기가 비교 대상이 되었어야 합니다.

황금률 등 이런저런 설정을 도입하고, 비교적 긴 호흡으로 끌고 가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작가 특유의 기발하고 기묘한 발상보다는 현실에 많이 매몰되어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가짜

나는 교토에서 귀가하던 신칸센에서 만화가 바바 류지를 만났다. 그를 처음 만났던건 1년 전 설 연휴 즈음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술자리였다. 동창 가토가 그를 데려왔다. 바바는 "일본 고등학교 옛날 이야기"라는 만화를 준비 중이었고, 이는 동창회에서 자주 등장하는 추억담을 수집하는 형식이라 취재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동창 도도로키는 바바가 짝퉁 시계를 차고 다닌다며 그를 신뢰하지 않았고,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바바의 만화는 물론 인생 자체가 전부 남의 이야기와 재능을 빌린 표절이었다. 만화조차도 실제로는 그의 아내가 그린 것이었다.

끝없이 표절을 반복하는 바바라는 인물도 인상적이지만, 바바가 표절하게 만든 '나'의 기발한 발상들이 더욱 재미있었습니다. '나'가 이야기하는 미스터리 소설의 범인 맞추기 방법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미스터리 소설은 독자에게 놀라움을 안겨야 하므로, 언뜻 보아서는 동기가 없고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진 사람이 유력한 범인 후보이다. 마찬가지로 독자를 놀라게 하는 요소는 모두 고려한다. 미스터리 소설에 시력을 잃은 사람이 나온다면, 그 사람이 실은 눈이 보일 가능성을 고려한다던가, 범행 현장 창문 유리가 깨져 있다면 범인은 외부에서 침입하지도 않았고, 외부로 도망가지도 않았다. 유리가 깨진 건 침입, 도망과는 관계없는 이유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범행 시에 깨져버린 안경 파편을 감추기 위해서라던가' 등 재미있는 발상이 가득하거든요. 이 정도 이야기를 들으면 표절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게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이와 함께 창작이라는게 무엇인지에 대해 되묻는 듯한 내용 전개는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바바가 워낙에 독특한 인물이니만큼, 이 인물에 대해 보다 깊숙하게 파고든 기묘한 이야기를 풀어내는게 재미면에서는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여러가지 독특한 아이디어가 가득한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수상 에세이

나는 신용카드 도용과 야마모토 슈고로상 후보가 된 상황에서 자기를 되돌아 보게 되었다. 

소설가로서의 자기를 되돌아보며 일종의 마침표를 찍는 글입니다. 왜 소설을 쓰는지에 대한 해답같은 내용이 등장하거든요. '소설을 쓴다는 것은 내가 모르는, 내가 감히 닿을 수 없는 소설이 무수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된 감동. 우리는 매일 지금까지 물렸던 것을 접한다. 크든 작든 그것들은 우리의 인생을 바꾼다. 여전히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것이 무수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지요. 이를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 첫 문장에 대한 감상을 통해 펼쳐보이는데 여기서는 확실히 작가만의 색다른 발상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얼음을 처음 봤을 때 기분을 떠올릴 수 없었다. 얼음이 항상 주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인터넷이 처음 연결된 날의 기억에 의존하여 얼음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는데, 이런 발상은 정말이지 부럽습니다.

그러나 한 편의 소설로 완성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이 단편집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에 대한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만 별점을 주기는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