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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8

클래식 음반세계의 끝 - 노먼 레브레히트 / 장호연 : 별점 4점

클래식 음반세계의 끝 - 8점
노먼 레브레히트 지음, 장호연 옮김/마티

클래식 음반("음악"이 아니라!)의 상세한 역사, 그리고 클래식 음반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명반 100선과 똥반 20선을 소개하는 클래식 음반 관련 미시사 - 가이드 북입니다. 책 소개를 보고 관심이 가던 차에 알라딘 중고 서점을 통해 구입하여 읽게 되었습니다. 전부 400여 페이지 정도의 분량인데 음반 역사와 명반, 똥반 소개가 정확하게 반, 반입니다.

이 중 클래식 음반의 역사 부분은 요약하자면, '녹음'이 실황 연주와 구별되는 독자적 음악 행위로 거듭난 1920년 빌헬름 켐프의 연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레코딩 산업이 기업 체제가 되어 EMI, RCA, CBS, 도이치그라모폰, 데카, 필립스라는 6대 메이저가 카라얀으로 대표되는 여러 천재들과 시장을 주도했던 1950~60년대 전성기, 팝 음악의 득세 및 후계자들의 부재로 서서히 몰락해가는 70~80 년대, 디지털 음원 발매와 '크로스오버'로 짧게 찾아온 80년대의 마지막 돈잔치, 마지막으로 90년대 몰락 이후 현재에 이르게 됩니다. 이 과정을 정말로 손에 잡힐 듯 상세하게 그리고 있는게 대단합니다. 역사서, 미시사 서적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새로운 시장이 시작되어 확대되고, 메이저 회사와 그에 속했던 천재들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승부를 벌이다가 몰락해 버린다는 내용은, 신대륙을 발견한 여러 나라들이 정복을 위해 나라를 대표하는 영웅들과 다양한 신무기로 정면 승부를 벌이고, 서로 연합하기도 하며 싸우다가 같이 멸망한다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군웅극' 못지 않은 재미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울러 그동안 생각해 보지 못했던, 클래식 음악 몰락 이유도 많은 교훈을 전해 줍니다. 생각해보니 현대에 클래식 음악이 몰락한 건 당연해요. 이미 대단한 해석이 존재하는 고전을 다시 반복하는 건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따르면 아마존에서 구입할 수 있는 베토벤 5번 음반은 276 종이나 된다니 까요. 여러 천재 예술가들이 새로운 시각을 찾으려 노력하고는 있겠지만, 이를 구태여 새롭게 비용을 들여 제작할 만한 시장은 이미 아닌 것이지요. 클래식 음반 산업을 궤도에 오르게 만든 토스카니니가 새로 작곡된 작품을 연주하고, 하이페츠나 메뉴인, 호로비츠, 루빈슈타인이 전성기 때 프로코피예프, 라흐마니노프, 시벨리우스, 버르토크 등 동시대 작곡가들의 음악을 연주했던 것처럼 현대에도 음악이 계속 작곡되어 흥행하지 않는 한, 시장은 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은 끝없는 '새로움' 의 추구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명심하게 만듭니다.
물론 '영화 음악' 이라는 비슷한 시장이 아직은 존재하기는 합니다만 영화 음악도 노래 없는 스코어 만으로는 시장이 굉장히 제한적일 뿐 아니라 '죤 윌리엄스', '엔니오 모리꼬네', '한스 짐머' 등 영화 음악 최전성기에 등장한 작곡가들 이후 등장한 유명 신진 작곡가가 딱히 없다는 점에서는 역시나 상당한 위기가 아닐까 싶군요.

이러한 음반 역사 뒤에 이어지는 명반 소개도 재미있습니다. '최고의' 음반이 아니라 음반 산업이 발전하는 데 영향을 끼친 음반 대상이라는 선정 기준이 명확하고 엄격한 덕에, 익히 알고 있는 고전 음악가가 아니라 "바버의 녹스빌", "수크의 아스라엘 교항곡", "바일의 베를린과 미국의 극장 음악",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 "알캉의 피아노 음악", "코릴리아노의 교향곡 1번" 같은 비교적 현대에 발표된 곡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게 특징입니다. 심지어 초기 영화 음악의 거장 "코른골트의 바다매" 까지 포함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정말 최고 중의 최고인 완벽한 음반의 소개가 좀 부족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하네요. 대표적인 예로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카라얀의 앨범이 한 개도 없습니다.
소개도 맛깔나서 모든 음반들이 관심이 가지만 그 중에서도 유시 비욜링과 로버트 메릴이 RCA 빅터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오페라 이중창", 레닌그라드 필하모니의 "차이콥스키 : 교항곡 4~6번", 뒤 프레가 런던 심포니와 함께 한 "엘가 : 첼로 협주곡", "루소 : 거리 음악 ; 블루스 밴드와 교향악단을 위한 세 개의 작품" 등은 꼭 한 번 찾아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똥반 소개도 재미있기는 마찬가지인데, 우리에게도 친숙한 안드레아 보첼리의 "베르디 : 레퀴엠" 처럼 연주나 노래가 잘못된 음반도 있지만 '기획' 자체가 실패한 음반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게 눈길을 끕니다. 스콜피언즈와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협연한 "Moment"가 대표적인 예인데, 저도 디자인 쪽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잘못된 기획이 모든걸 망친다' 는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재미있고 가치있는 내용이 가득하나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우선 클래식 음반의 역사 부분이 통사적으로 쓰여지기 보다는 주요 이벤트, 사건과 주요 인물별로 구성되어 조금 혼란스럽다는 점, 그리고 도판 및 국내 출시반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현지화 측면이 부족하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그래도 클래식 '음반' 에 대해서 A 부터 Z 까지 알려줄 뿐 아니라, 이 책에 나온 말대로 클래식 '음반' 은 이제 거의 죽은 시장이라면 이 책의 내용이 새롭게 업데이트 될 일도 많이 없을테니 그야말로 바이블이라고 해도 무방하기에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클래식 '음반' 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그렇지 않더라도 한 거대 산업이 몰락하는 과정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11/08/07

매혹의 클래식카 - 세르주 벨뤼 / 김교신 : 별점 2.5점

매혹의 클래식카 - 6점
세르주 벨뤼 지음, 김교신 옮김/시공사

19세기 후반 초기 자동차에서 시작해서 1992년의 BMW M3까지 100여년의 기간 동안, 시대를 풍미했던 자동차 50선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딱히 자동차에 대한 취미나 애정이 있는건 아닙니다. 하짐나 클래식카의 우아한 디자인을 좋아하며, 책 자체도 풀컬러 양장으로 그럴듯하게 출간되었기에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도판이 충실한 편은 아니며, 설명도 짤막한 요약에 그치는 탓에 18,000원이라는 정가를 전부 지불하고 산다면 아까웠을 것 같네요(저는 20% 할인가로 구입했습니다). 최소한 충실한 일러스트로 쿼터뷰 및 3면도 정도는 실어줬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클래식카를 좋아하기에 책의 후반부, 즉 70년대부터의 자동차는 딱히 끌리는 게 없었다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었고요. 

그래도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멋진 클래식카들을 책 한 권으로 만나볼 수 있다는 점 하나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이탈리아 왕자가 몰았다는 아틸라 29/50 CH라던가 최초의 물방울형 자동차인 룸플러 트로프펜-아우토, 그야말로 아름다운 클래식카의 정점인 부아쟁 '뤼미뇌즈', 귀요미 피아트 500 토폴리노, 르 코르뷔지에의 실현되지 않은 도시형 컴팩트카 '맥시멈' 등 다양한 자동차들의 향연이 펼쳐지거든요. 꽤 재미있게 봤었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영화 "터커"의 '터커 토페도'가 실려있는 것도 반가왔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자동차에 관심 있으시다면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책입니다. 덧붙이자면 읽다보니 미니어처를 소장하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드는군요. 빠지면 안되는데...

2011/10/03

타임머신 - 허버트 조지 웰즈 / 한동훈 : 별점 3점

 

타임머신 - 6점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한동훈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펭귄클래식 완역본입니다. 펭귄클래식 넘버도 외우기 쉬운 100이네요.

1960년에 제작된 걸작 클래식 영화를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작품이라 그동안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었는데, (참고로 2002년에 나온 리메이크작은 완전 쓰레기였죠) 급관심이 동해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상외로 영화와도 다르고, 제 생각과도 다른 부분이 많아 깜짝 놀랐습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사회주의적인 사상이 많이 들어가 있다는 것과, 절대로! 아동용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8만 년 뒤의 엘로이와 몰록이라는 지상-지하 세계로 분리된 설정이 계급 간 격차 때문이라는 것은 19세기의 시각을 감안하더라도 정말 놀라운 설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웰즈 본인의 말대로 조너선 스위프트스러운 부분도 보이고요.

여기에 더해 평이하게 전개되다가 전형적인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던 영화와는 달리, 위나의 죽음, 식인 행위, 몰록을 향한 주인공의 가공할 폭력과 파괴 행위 뒤에 이어지는 암울한 지구의 미래라는 결말은 지금 읽어도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끔찍했습니다.

딱 한 가지 아쉬웠던건 웰즈의 작가로서의 능력이 상상력에는 미치지 못해 여러 부분에서 묘사나 전개가 어색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웰즈의 초기작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할 뿐더러, 기본적인 상상력의 크기가 압도적이기에 충분히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한마디로 '올타임 클래식'이라 칭해도 될 정도로 시대를 앞서간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 저처럼 영화만 보셨거나 아동용인 줄 아셨던 분들은 길이도 길지 않으니 꼭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웬만하면 상세한 서문 역시 볼거리인 펭귄클래식 버전으로 말이죠.

2024/06/23

클래식 사용 설명서 - 송사비 : 별점 3점

송사비의 클래식 사용 설명서 - 6점
송사비 지음/1458music

딸아이 논술 교재.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여러가지 정보를 제공해주는 책입니다.
 
전부 '입문자' 기준으로 맞추어져 있다는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어린 시절 교과서를 통해 뭣도 모르고 '암기'했던 지식보다는, 실제 감상에 도움이 될 내용들 위주로 되도록 쉽게 설명해줍니다.

이 중 곡의 악장 구분이라던가 클래식 음악이 긴 이유같은건 꽤 유용했습니다. 입문자에게 추천하는 공연 관람 순서도 빼 놓을 수 없고요. 시립 교향악단의 연말, 연초 공연을 1순위로 추천하고 있는데, 올 연말에 딸아이와 함께 과천 시립 교향악단 연주회는 꼭 찾아가봐야겠더군요.
내 취향의 편성과 악기를 찾을 수 있도록 대표적인 곡들을 소개해주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클래식 취향 찾기'도 괜찮았던 주제였습니다. 이 책을 따라서 입문자분들이 취향의 추리 소설을 찾을 수 있는 '추리 소설 취향 찾기'를 한 번 구성해보아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케스트라의 악기 배치에 따른 특징, 지휘자가 하는 일, 그리고 악기별 특징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지휘자가 과연 무슨 역할을 할까?는 항상 궁금했던 주제였는데, 악보를 해석하고 많은 악기들이 조화롭게 소리를 터트릴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이라는걸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준 덕분입니다. 악기별로 흥미로운 설명들 - 예를 들어 호른이 음이탈이 많은 이유 - 도 많았고요.

그러나 종이로 된 책으로 읽다보니 함께 소개되는 곡들을 일일이 QR코드를 찍어 들어야 했다는 점은 불편했습니다. 한, 두 곡도 아니고 소개되는 개별 곡을 모두 QR 코드를 찍어야 했는데, 스캔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정말로 없었을까요?
아울러 악기별 설명에서는 대표적인 연주자나 대표곡 정도는 함께 소개해주는게 좋았을 것 같고요. 

그래도 입문서로는 차고 넘치는 좋은 책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다만 QR 코드를 찍는 문제도 있고 하니, 동영상 컨텐츠로 제작하는게 더 적합했을것 같기는 합니다.

2020/05/01

무라카미 하루키의 100곡 - 구리하라 유이치로 / 문승준 : 별점 2.5점

무라카미 하루키의 100곡 - 6점
구리하라 유이치로 엮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제목 그대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런 저런 곡들에 대해 해설해 주는 책입니다.
몇 년 전 "애프터 다크"를 읽었을 때, 이런저런 곡들이 무척 많이 소개되어 리뷰에 따로 적어놓았던 적이 있는데, 이런 책이 나올 정도로 다른 작품 역시 많은 곡들이 쓰였네요. 하긴, 대표작인 "노르웨이의 숲"은 제목부터가 비틀즈의 곡 제목일 정도이니 당연하겠지요? 책은 1960년대적 가치관 소멸을 상징한다는 1980년대 이후의 음악들 (주로 팝), 록, 팝, 클래식, 재즈의 5가지 장르로 하루키 작품 속 곡들을 분류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그렇게 많이 읽어본 편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는 곡 역시 그리 많지 않았고요. 하지만 짤막한 해설들이 꽤 재미있어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아는 작품, 아는 곡의 경우는 더욱 반갑더군요.

특히 좋았던건, 곡이 특별한 '상징'이나 '메타포'로 사용된 경우와 그 의미에 대해 설명해 주는 부분들이었습니다. 냇 킹 콜이 불렀다는 'South of border' 소개가 대표적입니다. 노래 속의 이상향으로 등장하는 '멕시코'가 실재하지 않듯이, 이 노래를 냇 킹 콜이 부른 버젼도 실재하지 않고, 그래서 이 곡이 등장하는 장면은 비현실적이지만 이상하게 현실적인,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판타지를 상징한다는데 이 정보를 알고 책을 읽으면 참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런 부분은 팝 보다는 클래식, 재즈 쪽 소개에 많은 편입니다. 클래식은 저자의 전공 분야인듯 싶고, 재즈는 하루키가 소싯적, 재즈 카페를 운영했을 정도의 재즈 매니아인 덕분이겠지요.

특히 클래식은 곡 마다의 소개도 다른 장르에 비하면 비교적 긴 편이며 내용도 굉장히 충실합니다. 일례로, "태엽갑는 새" 1부의 부제인 "도둑까치"를 통해, 까치의 장난에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마지막에 행복한 결말을 맞는 오페라 "도둑까치"와 작품의 내용이 연결되며, 각 부마다의 부제 모두 해당되는 오페라와 일맥상통한다는걸 알려주는 식입니다.
단지 곡 뿐만이 아니라, 누가 연주했는지에 따라 각 버젼별로 좋아하는 사람들의 캐릭터를 드러낸다는 디테일도 아주 좋았습니다. "해변의 카프카" 속 호시노가 듣고 반한 "베토벤 피아노 3중주 제 7번 대공"은 야샤 하이페츠 등 '백만불 트리오' 세 명이 조화따위는 무시하고 제멋대로 연주하는 버젼인데, 오시마 씨가 좋아하는건 앙상블에 주축을 둔 수크 트리오의 잘 정돈된 연주라는게 대표적이지요. 정말 아는만큼 보이는 것 같네요.

재즈의 경우는 곡 자체보다는 그 곡의 발표된 배경이나 연주자의 특징 등 좀 더 깊고 디테일한 정보를 작품과 엮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깊이가 느껴집니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A gal in calico'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유명하지 않은 1950년대 (1955년) 앨범의 유명하지 않은 곡으로,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배경인 1970년대에서는 이미 잊혀진 앨범입니다. 때문에 이 앨범을 찾는 '나'의 모습은 '나'의 허영심과, 1970년대 은퇴 선언 후 칩거에 들어간 마일스 데이비스의 모습으로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어떤 시대를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해석합니다. 정말 작가의 의도인건지, 꿈보다 해몽이 좋은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용은 참 좋네요. 저도 음식과 추리 소설에 대한 책을 썼는데, 이런 내용을 많이 담고 싶었습니다. 잘 된 것 같지는 않지만요...

그 외에도, 하루키 작품과는 무관하지만 이런저런 재미있는 정보도 많습니다. 하루키 작품에서 유독 많이 등장했다는 보비 다린이라는 가수는, 이 책에서 소개한 가정사가 아주 놀라왔어요. 키워준 어머니가 사실은 외할머니이고, 누나가 친어머니였다는데, 하드보일드 막장 드라마에서나 봄 직한 설정이지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등 그 자신의 인생도 파란만장해서, 이 책에서 소개된 대표곡 'Beyond the sea'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게 당연하다 싶네요.
 개인적으로는 듀란듀란과 보이 조지에 대한 신랄한 비평 - 특히 "댄스 댄스 댄스"에서 '끔찍하다'의 대명사처럼 인용되었다니 - 이 눈에 띄였습니다. 제 초등학생 때 좋아했던 밴드이고, 특히 컬쳐 클럽의 'Do You Really Want to Hurt Me'는 많이 들었던 곡이었기 때문이거든요. 진짜 팝 애호가라면 좋아하기 힘든 곡일 수는 있지만, 이렇게까지 신랄한 평을 들어야 할 밴드는 아닐텐데, 조금 슬펐습니다.

아는 가수와 곡으로는 밥 딜런, 비치 보이스 소개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밥 딜런이야 시대의 총아였으니 그렇다 쳐도, 비치 보이스는 좀 의외죠? 비치 보이스의 최고 명반인 'Pet sounds'의 일본 소개 당시 야마시타 타츠로가 라이너 노트를 썼다는 건 처음 알았는데, 정말 잘 어울린다 싶네요.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와 비치 보이스의 리더 브라이언 윌슨이 공통점이 느껴진다며 시작된 소개와 해설은 모두 동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비치 보이스의 음악은 죽음, 상실과 연관되는 내용이 많다는데, 이는 밴드의 운명과 브라이언 윌슨의 생애와는 별로 관계없는 작가의 기호일 뿐이라 생각되니까요. 덧붙이자면, 개인적으로 비치 보이스의 곡에 관련된 작품으로는 도리 미키의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단편이 최고라 생각합니다. 비치 보이스의 불운한 싱글인 'Child of winter'를 소재로 한 작품이에요. 비치 보이스의 크리스마스 앨범을 계기로 대학교 동창과 썸을 타는 관계가 되는데, 그녀는 다른 친구의 연인이 됩니다. 그 뒤 졸업을 앞 둔 겨울 방학의 어느날, 그녀가 자취방에 찾아오지만 나는 그녀를 내쫓습니다. 오해받기 싫다는 이유로요. 떠나면서 그녀는 "비치 보이스는 별로 좋아한게 아니었다..."는 말을 남기는, 83년도 단편입니다.

당연히 하루키 작품에 대한 소개, 평도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노르웨이의 숲"이 멋지게 마무리된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저는 사랑이 이루어졌는지, 아니 '나'의 미도리에 대한 마음이 사랑인지 아닌지도 모를 애매한 결말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하지만 하루키 작품 속 이런저런 곡들을 100곡 채우겠다! 는 의도가 지나친 나머지 무리한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보비 비의 'Rubber ball'에 대한 설명은 지나쳤어요. "1973"에서 이 노래가 1960년을 상징하는 것 처럼 - 1960년, 보비 비가 'Rubber ball'을 부른 해다' - 언급되지만, 1960년 최대의 히트곡은 다른 곡이라고 알려주죠. 이로써 객관적인 의미의 히트곡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사적인 선곡을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이는 독자가 각자의 경험에 근거한 곡을 대체할 수 있도록 하여 공감의 회로가 발생한다는데, 설명도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을 뿐더러, 이렇게 오타쿠, 매니아만 알 수 있는 기호가 어떻게 공감을 일으킨다는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배경 음악에 지나지 않는 곡에 대한 침소봉대식 소개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곡들은 그냥 제목, 아티스트만 소개하고 작품 소개 및 기타 주변적인 요소에 집중하는데 책의 취지에는 벗어나는 듯 하여 여러모로 별로였습니다. "춤추는 난쟁이" 속 프랭크 시나트라의 "Night and day'가 대표적이죠. 곡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보도 없이 4줄 정도의 소개로 그치고, 나머지는 전부 작품에 대한 줄거리와 인용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정보 측면에서 나쁘지 않고, 작품 자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설명도 적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내용도 절반 정도 됩니다. 설명도 곡의 장르에 따라 편차가 있는 편이고요.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의 팬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셔야 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조금 애매한 책입니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곡들이 궁금해서 유튜브에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곡들의 연주자, 발표 버젼이 일치하는건 아닙니다만 대체로 비슷은 하니 궁금하신 분들은 들어보셔도 좋겠습니다. 링크는 여기 입니다.

2011/09/18

안 타고는 못 배겨! - 데라다 카츠야 : 별점 2점

안 타고는 못 배겨!! - 4점
테라다 카츠야 지음/서울문화사(만화)

만화가 이시카와 슌의 평론서 "만화의 시간"에서도 언급되었던, 만화 형식을 빌린 클래식카 전문 칼럼. 저도 예쁜 클래식카를 무척 좋아하고, 데라다 카츠야라는 일러스트레이터의 팬이기도 해서 바로 구입해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책의 성격이나 내용 모두 좀 애매했습니다. 우선, 이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클래식카'를 다루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취미로 구입하여 타고 다닐 수 있는 차들이 대상이거든요. 그래서 기대했던 정통 클래식카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별 관심 없는 모델들이 대부분이었어요.

또한, '만화'가 아닌 '칼럼'이라는 점을 제가 간과했네요. 만화 형식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많은 정보가 담겨 있어, 재미는 둘째치고 애초에 읽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습니다. 데라다 카츠야가 어떻게든 만화 형식과 일러스트로 풀어내려 노력하고 있지만, 내용이 너무 복잡한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책 전부가 흑백이며, 원래 차량의 사진조차 실려 있지 않은 점은 너무 불친절하다고 느껴졌고요.

결과적으로, 재미와 정보 전달 측면 모두에서 실패한 느낌이라 별점은 2점입니다. 그나마도 점수의 대부분은 데라다 카츠야의 투박하지만 정교한 그림 덕분입니다. 한 대의 차에 좀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나름의 에피소드를 곁들여 진짜 만화 형식으로 풀어냈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2021/09/25

좀비 연대기 - 로버트 E. 하워드 외 / 정진영 : 별점 2.5점

좀비 연대기 - 6점
로버트 E. 하워드 외 지음, 정진영 엮고 옮김/책세상

근대 시기 유명 장르 소설가의 좀비 관련 중단편을 모아 놓은 앤솔러지입니다. 작가들의 명성과 장르 문학치고는 고전급에 속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과 성격은 유사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낡은 느낌이 강했던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과는 다르게, "지옥에서 온 비둘기"라던가 "좀비 감염 지대"같은 시대 초월 명작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최초로 '좀비'라는 말을 만들고, 아이티 부두교 좀비 설정을 확립했다는 "마법의 섬"과 같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작품도 눈여겨 볼 만 하고요. 크리쳐 호러물 외에도 저주받은 저택, 호러 모험 액션, 판타지에 SF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장르 스펙트럼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열 두편의 수록작 중 수준 이하 졸작도 제법 됩니다. 발표된지 100여년이 다 되어가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요. 그리고 제목에서 기대했던, 우리가 지금 '좀비'라고 하면 떠올릴 몬스터가 등장하는 작품도 없습니다. 아이티 등 열대 섬나라에서 부두교 주술 등으로 죽은 사람을 되살려 노예처럼 부렸다는 초기 좀비 전설에 기반한 이야기가 대부분이거든요. 물론 이게 단점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동일한 설정을 그대로 반복한 판박이같은 작품이 많다는거지요. "노예에게 소금은 금물",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시체들" 가 그러합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클래식이라는 명칭에 걸맞는 그런 앤솔러지였습니다. 좀비라는 크리쳐의 창작 초기 설정과 이야기들이 궁금하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다음과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옥에서 온 비둘기" 

그리스웰과 존 브래너는 비둘기 떼가 날아가버린 폐가에서 하룻 밤을 보내게 되었다. 밤중에 공포스러운 휘파람 소리에 잠을 깬 그리스웰은 2층으로 올라간 뒤, 도끼에 맞아죽은 브래너가 자기를 죽이려고 해서 도망쳤다. 도망치던 그리스웰을 구해준 보안관 버크너는 흉가 블래슨빌 저택에 얽힌 수수께끼와 브래너 살인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자 늙은 부두교 주술사를 찾아갔지만, 주술사도 뱀에 물려 죽었다. 사건을 매듭짓기 위해 버크너와 그리스웰은 흉가에서 하룻 밤을 보내지만, 그날 밤 그리스웰은 악령에게 홀려 2층으로 향하는데...

좀비물이라기 보다는, 저주받은 저택 장르물로 보는게 타당합니다. 죽은 브래너의 습격, 마찬가지로 사람을 습격해 죽이는 실비아 블래슨빌 모두 시체가 되살아난 것이기는 하지만, 이는 복수를 위해 부두교 주술로 저주한게 원인이고, 사람을 잡아먹지도 않으니, 저주물에 더 가깝고요.

저주받은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내다가 악령에게 습격받는 초반부 묘사는 지금 읽기에는 다소 진부하고 심심했지만, 버크너 보안관 등장 이후부터는 아주 재미있었어요. 특히 버크너가 브래너의 시체를 발견한 뒤의 전개는 추리 소설을 떠올리게 해서 독특했습니다. 상황은 그리스웰이 범인일 수 밖에 없어요. 둘만 있던 흉가에서 한 명이 도끼에 머리를 맞아 죽었으니까요. 그러나 버크너는 그리스웰의 옷에 피가 전혀 튀지 않았던 점, 그리고 그리스웰이 범인이라면 죽은 버크너가 자기를 죽이려 했다는 주장을 했을리 없다는 이유로 추가 조사를 벌입니다. 그리고 핏자욱을 따라 2층의 사건 발생 현장으로 이동한 뒤, 무언가 이상한 존재가 얽혀있다는걸 알게 되지요. 단서를 통한 추리,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수사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비밀 방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3명의 가족이 목을 메고 죽어 있었다는, 흉가 블래슨빌 저택에 얽힌 진상도 오싹했습니다. 사람들을 습격해 죽였던 괴물 '주벰비'가 실비아 블래슨빌을 원망했던 혼혈 하녀 조안이 아니라, 실비아 블래슨빌이었다는 반전도 충격적이었고요. 조안은 주벰비가 되는 검은 술을 자기가 먹지 않고 주인에게 몰래 먹였던 겁니다. 이거야말로 진짜 복수네요.

믿음직하고 용감한 보안관 버크너와 겁 많은 애송이 그리스웰의 조합도 반 헬싱 교수와 조나단 하커 관계와 좀 비슷한데, 전형적이지만 이런 류의 이야기에 딱 맞는 조합이더군요. 무서움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겁쟁이와 사건을 해결하고 악령을 응징하는 용감한 보안관이 조합되니, 두려움과 공포, 액션과 정의의 응징을 다 얻을 수 있잖아요!

그러나 딱 한 가지, 너무 옛스럽게 쓰여졌다는 건 좀 아쉽습니다. 공포를 효과적으로 묘사하기 여러모로 부족한 묘사가 특히 거슬렸어요. 오래된 폐가, 몰락한 가문, 뱀으로 상징되는 저주의 주술,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령, 도망쳤던 생존자가 남긴 일기 등 모든 면에서 미쓰다 신조의 "흉가"가 떠오르는데, 공포를 자아내는 묘사와 전개는 전혀 미치지 못했거든요. 미쓰다 신조가 같은 작품을 썼다면 훨씬 무섭게 쓸 수 있었을 겁니다. 아니면 차라리 지금 방식으로 영상화하면 훨씬 대단한 작품이 될 것이라 생각되네요. 

그래도 좋은 작품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검은 카난" 

커비 버크너는 고향 카난에서의 긴급 호출을 받고 귀향하다가 혼혈인 마녀의 유혹을 받았다. 최면에 걸렸던 버크너는 운 좋게 정신을 차리고 습격한 거구의 흑인 세 명을 물리쳤다. 마을에 도착한 버크너는 마을 흑인들이 모두 도망갔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고, 조사를 통해 늪지대에 사는 괴인 솔 스타크가 배후에 있다는걸 알아냈다. 그러나 조사 중 버크너는 마녀의 최면에 걸려 솔 스타크의 본거지로 본의 아니게 끌려가게 되었고, 친구 브랙스턴이 그를 돕기 위해 따라가는데....

부두교 주술사가 카난이라는 마을을 장악하려 하지만, 마을 지도자 버크너가 이를 물리친다는 호러 액션 활극입니다. 마녀의 최면, 주술로 만든 물고기 인간같은 공포스러운 요소가 등장하지만,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버크너 시점의 심리 묘사만 있는 탓이 큽니다. 버크너 캐릭터는 전형적인 서부 영화의 쾌남 영웅 스타일이라 공포를 크게 느끼지 않거든요. 공포에 사로잡힌 묘사도 잘 와 닿지 않더군요. 마녀와 괴물들이 총에 맞으면 죽는다는 것과, 최면술말고는 주인공을 크게 위협하지 못한다는 것도 작품이 무섭지 않은 이유이고요.

그래도 모험 활극으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주인공 버크너는 전작의 버크너 보안관의 선조, 혹은 동일인물이 아닐까 싶은데, 버크너 유니버스도 한 번 제대로 소개되면 좋겠네요.

"천 번의 죽음" 

물에 빠진 나를 구해준 건 아버지와 그 부하들이었다. 알고보니 아버지는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연구를 하고 있었고, 나도 물에 빠져 죽었었지만 아버지의 연구 덕분에 살아났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죽이고 되살리는 식으로 연구를 계속하는데....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등장하는 SF 호러 범죄물을 잭 런던이 썼다는건 특이했지만, 내용은 평이합나다. 죽은 사람을 되살린다는건 "프랑켄슈타인" 에서부터 내려온 고전적인 설정이니까요.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섬에 틀어박혀 생체 실험을 한다는건 "닥터 모로의 섬"과 똑같고요. 물론 생체 실험의 대상이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로, 그가 반복적인 죽음과 소생을 거듭한다는 설정으로 확실히 차별화되기는 합니다. '폭력에 의하지 않고, 신체 장기에 아무런 훼손이 없는 죽음은 단지 생명의 보류 상태'라며 죽음과 소생을 보다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점도 독특했어요.

하지만 차별화 요소를 잘 살렸다고 보기는 어렵네요. 독약, 질식 등으로 수차례 죽음을 맞는 고통이 잘 그려내지 못한 탓입입니다. 생체 실험의 고통을 극명하게 그려냈다면 호러물로 충분히 값했을텐데 말이지요. 과학적인 설명도 그럴듯해 보일 뿐, 실상 알맹이 없는 서술에 불과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갖은 노력 끝에 물질을 원소 상태로 되돌리는 장치를 개발했고, 이를 이용하여 아버지와 그 부하들을 없애고 탈출한다는 결말은 최악이네요. 아버지의 흑인 부하들이 자기 방으로 한 명씩 차례로 들어올 때 마다 없애고, 마지막에는 방에 들어선 아버지를 없앴다는데, 이럴 바에야 그냥 방에 한 명씩 들어올 때마다 칼로 찌르는게 빨랐을겁니다. 특별한 장치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롭고, 피해자들도 한 명씩 들어와 사라질 정도로 감시가 느슨했는데 왜 진작에 탈출하지 않은건지도 이유를 모르겠고요. SF스럽게 만들기 위한 억지 장치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엄청난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보였던 아버지의 최후라기에는 너무 허무했고요.

유사한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되는 요소가 있는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호러물로는 공포를 자극하는 요소가 부족했고, 결말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노예에게 소금은 금물"

나는 아이티 호텔에서 머물다가, 호텔에서 일하는 노파 마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지역 주민들과 호텔 직원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과거 아이티 독립 전쟁 당시 '소금을 먹지 마라'는 금기를 어겼다가 시체가 된 연인 트레생에 대해 말해 주는데...

뒤에 수록된 "좀비와 함께 걷다"를 읽어야 설정이 이해가 되는 작품입니다. "좀비와 함께 걷다"에 따르면, 좀비는 소금을 먹으면 자신이 죽었다는걸 깨닫고, 무덤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한다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트래생은 물론 마리도 진작에 죽었던 좀비였다는 뜻이고요. 트래생이 흑인 해방 등의 의식을 가질 정도로 똑똑했던 이유는 설명되지 않지만 노예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였다니, 다른 좀비들과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고 보면 되겠지요.

문제는 이 설정 외의 특별한 내용은 없다는 겁니다. 마리도 좀비였다는 결말은 너무 뻔했고요. 죽었다는걸 깨달은 좀비들이 무덤으로 폭주하는 장면 묘사 정도만 괜찮았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귀환자들의 마을" 

좀비 전설이 있는 열대 섬마을에 어느날 미모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에게 유혹당한 파파는 절벽에서 떨어져 죽게 된다...

괴담 소설로 유명한 라프카디오 헌의 단편인데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좀비와 다른, 열대 섬나라 좀비에 대한 설명과 파파가 관련된 이야기가 아예 별개로 진행되어 혼란스럽고, 별다른 내용도 없는 탓입니다. 섬마을의 여러 풍광에 대한 관능적이면서도 상세한 묘사를 걷어내고 '이야기'에만 집중하면 한, 두페이지로도 충분했을 이야기입니다. 수록작 중 최악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나트에서의 마법" 

조티크 대륙의 절반이 사막인 나라 지라의 왕자 아다르는 노예 상인 샤라그에게 납치된 약혼녀 달리리를 찾아 여러 왕국을 헤멨다. 그러다 그녀가 향했다는 요로스 왕국으로 가는 상선에 탑승했지만 항해 중 폭풍에 휘말렸고, 상선은 사악한 섬 나트로 표류하다가 침몰했다. 달릴리의 구조로 홀로 살아남은 아다르는 나트의 마법사 우두머리 바카른을 만나, 그녀는 바카른이 되살려낸 익사자라는 걸 알게 되는데....

"코난 더 바바리안"을 연상케 하는 작품. 존재하지 않는 고대 왕국을 무대로 마법사와 영웅이 등장해서 대결을 펼치는 고대 판타지라는 점에서요. 그런데 결말이 예상 외라 놀랐습니다. 영웅 포지션인 아다르가 권력과 재산을 차지하기 위한 바카른의 두 아들 음모에 가담하여 바카른을 죽이려다고 되려 찔려 죽고 말거든요. 그리고 바카른의 아들에 의해 되살아나 좀비가 된다는게 끝입니다. 달릴리와 뭔가 관계가 이루어진다던가, 정의가 이루어진다던가 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중간에 등장하던 족제비 괴물은 어떻게 되는지도 설명되지 않고요.

이런 이유로 방대한 설정으로 이루어진 긴 서사물의 일부만 수록된 느낌입니다. 최소한 아다르와 달릴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주었어야 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아이티 공화국 헌법에 좀비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는 말에서 시작해서, 아이티에 진짜 좀비가 있다는 다양한 증언들이 이어지는 작품. 페이크 다큐멘터리 방식의 파운드 푸티지 영화같은, 페이크 논픽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좀비는 소금을 먹지 않고, 좀비가 소금 맛을 보면 죽었다는걸 깨닫고 열일 제쳐놓고 죽을 자리를 찾기 위해 무덤으로 향한다는 설정에 기반한 경험담이 이어질 뿐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화이트 좀비" 

아프리카 엔스와지 지방의 행정관 제프리 에일럿은, 어느날부터 느껴지는 악취 탓에 겁에 질렸다. 안개 자욱한 어느날, 결국 에일럿은 쓰러지고 말았다. 그를 돌봐준 신부는 과거 에일럿과 함께 했던 전우 싱클레어의 미망인이 수상하다고 말했고, 에일럿은 탐문과 잠복 끝에 그녀가 부두교 주술로 시체들을 조종하는 현장을 목격하는데...

서인도 제도가 아니라 아프리카를 부대로 부두교 주술이 등장하는 이색작입니다. 서술은 장황하지만, 정작 내용은 에일럿이 잠복해서 부두교 좀비 축제? 현장을 목격하고, 거기서 싱클레어의 모습을 확인한 뒤 부두교 주술솨를 쏴 죽인다는게 전부입니다. 악취라던가 불길한 안개 등의 설정은 왜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신부의 존재도 불필요했어요.

게다가 좀비 사건의 원인, 결과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싱클레어 부인이 부두교 주술에 빠져 시체를 되살렸는지는 아프리카의 심장 운운하며 농장 관리 목적이었다고 소개되지만 명확하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싱클레어를 되살릴 이유도 없었고요. 에일럿이 악취를 느낀 이유 역시 밝혀지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아프리카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딱히 아프리카일 이유를 찾기도 힘들었습니다. 묘사만으로 작 중 무대가 아프리카처럼 느껴지지도 못했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할로 맨" 

한 남자가 아프리카로부터 15년만에 영국으로 찾아왔다. 그는 부두 거리를 헤메다 모모의 식당으로 들어섰다. 

모모는 자신이 15년 전에 죽여 매장했던 고팍이 자기 식당으로 들어오는걸 보고 경악했다. 고팍은 표범 인간이 자신을 깨웠다며, 자기를 책임지라고 요구했다. 모모가 자신을 죽였기 때문이라면서. 식당에 고팍이 머문 뒤, 식당은 서서히 망해갔고, 딸 버블스마저 고팍에게 홀려 생기를 빼앗기자 모모는 고팍을 또 다시 한 번 죽일 결심을 하게 되는데....

죽은 자가 돌아왔다가, 다시 죽음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찾는다는 내용의 작품. 그렇게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무서울 수 있는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무서운 포인트를 제대로 묘사하고 있지 못하는 탓입니다. 일단 모모 시점의 심리 묘사가 부족해요. 과거에 저지른 죄로, 손을 씻고 가족과 열심히, 단란하게 살아가던 소시민에게 지옥문이 열린 상황인데, 고팍의 존재를 너무나 쉽게 인정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묘사에서는 절박함이나 어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거든요. 내용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습니다. 왜 표범 인간이 고팍을 되살렸는지, 고팍이 영국에는 어떻게 왔는지 등이 모두 드러나지 않아요. 버블스의 생기를 빼았는다는 것도 대충대충 넘어가고요. 결말도 허무합니다. 결국 고팍은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걸로 마무리되는데, 이럴 거였다면 왜 진작에 없애지 않았는지 의문이에요.

여러모로 오래된 작품이라는 티만 물씬 났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시체들" 

나는 농부 폴리니스로부터 아이티 지역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다양한 존재들에 대해 들었다. 다른건 유럽과 흡사했지만, 이 지역에만 있는 존재가 있었다. 그건 바로 좀비였다. 나는 좀비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부탁했다

"좀비"라는 단어의 기원이 되었다는 작품으로 아이티에서 사람들이 단단한 대리석 무덤에 묻히고 싶어하고, 자기 집 마당에 묘를 만들고, 사람들 왕래가 많은 길가나 도로변에 무덤이 많은 이유로 좀비를 설명하는 등, 좀비를 실존하는 것 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여러 장치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아이티 형법을 증거로 내미는 장면도 그런 장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폴리니스가 해 준 늙은 추장 조제프가 데려온 좀비 이야기는 이 책에 앞서 수록되어 있는 다른 아이티 좀비 이야기들과 똑같습니다. 좀비가 소금기를 접한 뒤 다시 시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최후까지요. 좀비가 되었던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조제프에게 복수를 했다는 결말 정도만 차이점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원조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발표 당시에는 굉장히 새롭고, 무서운 이야기였을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잘 짜여져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오히려 이 작품을 다른 유사 작품들보다 앞서 수록하지 않은 이 책의 문제가 너무 커 보입니다. 지금 책의 구성은, 후대의 아류작으로 원조의 가치가 퇴색되는 셈이거든요.

하여튼, 원조라는 역사적 가치를 더해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투셀의 창백한 신부" 

흑인 부자 마티외 투셀은 스무살은 어린 혼혈 아가씨 카미유와 결혼했다. 그리고 첫 번째 결혼 기념일에 투셀은 카미유를 시체와 함께 하는 파티에 초대했고, 카미유는 미쳐버리는데....

화자가 직접 들었다는 이야기를 쓴 글 형태로, 화자의 말대로 '흐지부지되었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작품입니다. 결말이 없거든요. 투셀이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투셀이 파티가 연 의도가 무엇인지, 시체들은 누구였는지, 아내에게 1년간 비밀을 지키다가 갑자기 시체 파티에 초대한 이유는 무엇인지 전혀 밝혀지지 않아요. 그렇다고 딱히 무섭지도 않았고요.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는 문제가 많았던 소품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점비" 

그랜빌리 씨는 1차 대전에서 폐를 다친 뒤, 서인도 제도 세인트크로이 섬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다. 섬에서 친해진 제프리 다 실바와 럼주 칵테일을 함께 하던 어느날, 그랜빌리 씨는 '점비'에 대해 물었고 다 실바는 자기가 젊었을 때 목격했던 일을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신학교를 나온 집사 출신이라는 작가 이력이 특이했던 작품. 이런 이력이라면 좀비가 실제 있는 것 처럼 묘사되는 작품은 쓰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그러나 작품은 작가 이력만큼 특이하지는 않습니다. 다 실바가 친구 이베르센이 죽은 날, 이베르센의 유령을 만나고, 밤길에서 공중에 떠 있는 점비를 목격하고, 이베르센 집에서 개 인간을 만났다는 체험담이 이어질 뿐으로, "내가 했던 무서운 체험" 류의 기승전결없는 괴담의 나열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점비'나 개인간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도 없고요. 이래서야 좋은 점수를 줄 래야 줄 수가 없지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좀비 감염 지대" 

고든 파넘 박사는 아발론 섬에서 불사에 관련된 연구를 하다가, 죽은 시체를 되살리는 혈청을 개발했다. 마침 섬에 닥친 화산 폭발로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자, 박사는 혈청을 이용하여 그들을 되살릴 생각을 하는데...

부두교 주술로 되살아난 시체가 아닌, 과학의 힘으로 되살린 좀비가 등장하는SF 호러물입니다. 앞서 잭 런던의 단편과 비슷한 소재이지만, 되살리는 과정을 나름 과학적으로 잘 설명해 주는게 큰 차이점이자 볼거리입니다. 특히 인체는 기계와 같다는 등의 고든 파넘 박사의 생명에 대한 이론이 아주 재미있고 풍성했어요. 이 이론과 박사가 여러 동물로 진행하는 실험으로 이야기 여러 개는 충분히 뽑아낼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요. 예를 들어 '불멸성을 부여받은 실험체들이 번식을 통해 불멸성 유전을 증명했지만, 태어난 실험체들이 태어난 상태를 유지할 뿐이었다'는 이야기는 별도의 단편으로 꾸며도 재미있겠더라고요.

시체가 되살아나지만, 영혼과 두뇌가 없이 본능만 남은 상태라 야수로 돌변한다는 발상도 아주 좋았어요. 이들이 죽지 않는 상태로 군대, 경찰을 휩쓸어버리고, 잘려진 손발이 꿈틀대며 잘린 조각들이 엉망으로 붙어 괴물이 되어버리는 묘사도 일품이었고요. 절대 죽지 않는 존재를 없애기 위해 화산 폭발을 이용하여 우주 공간으로 날려버린다는 아이디어도 신선합니다. 스케일이 정말 남달라요.

물론 화산 폭발을 사람이 제어한다는건 지금도 상상하기 힘들기에, 설득력이 높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등장하는 작품에서 이 정도 허풍은 충분히 허용범위 안쪽이라 생각됩니다. 오히려 시대를 앞서간, 아니 시대를 초월한 끔찍한 아비규환을 그려낸 SF 좀비물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영화로 나와도 아주 근사했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2012/05/11

펭귄 북디자인 1935-2005 - 필 베인스 / 김형진 : 별점 5점

펭귄 북디자인 1935-2005 - 10점
필 베인스 지음, 김형진 옮김/북노마드

클래식 문고본 시리즈로 유명한 펭귄 출판사의 출판물들을 다섯 가지 시대로 구분하여 정리한, 일종의 디자인 역사서입니다. 크게 보면 미시사 책이라고 할 수 있겠죠. 자주 찾아가는 이요님 블로그에서 리뷰를 읽고 관심이 가서 구입했는데, 손에 잡고 완독하기까지 몇 시간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몰입하여 읽었습니다. 한때 출판사를 하나 차리는 게 꿈이었기 때문에, 펭귄북스라는 전설적 출판사의 시작과 다양한 출판물들의 아이디어와 결과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가 없을리가 없으니까요. 화려한 도판으로 시대별로 다양하게 선보이는 서적들의 디자인을 보는 재미도 엄청났고요.

전부 유익하고 재미있는 내용이지만, 펭귄의 역사로 보자면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탄생한 다양한 임프린트에 대한 내용이 특히 와닿았습니다. 디자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1961년 도입된 로멕 마버의 "마버 그리드"였고요. 전자는 "돈 버는 재주가 있었다"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발상이 돋보였고, 후자는 얀 치홀트의 전설적 세로 그리드를 벗어나 현대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다양한 장르의 출판물에 적용 가능한, 그야말로 만능 그리드라는 점에서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그리드와 더불어 폰트와 정렬 방식 모두가 완벽해서 지금 보아도 전혀 촌스럽지 않더라고요. 솔직히 너무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느낌을 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이러한 클래식한 디자인을 지금도 유지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마음에 들었어요. 물론 디자이너 입장에서 시각적으로 강한 펭귄 심볼의 사용은 탐탁지 않았겠지만, 그것을 이겨내는 진짜 디자인이 아쉽습니다.

비록 지금 하는 일은 다르지만 디자인과를 졸업했기에 더더욱 관심이 가고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만약 이 책을 제가 학부생 때 읽었더라면 제 인생이 혹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살짝 드는군요. 학부 때에는 전혀 관심 두지 않았던 편집 디자인의 매력을 새롭게 알게 되었으니까요. 제 학부 시절 이런 서적들이 별다르게 없었던 것이 유감스러울 따름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출판 분야 종사자나 최소한 관련 분야에 관심이 있는 분들, 특히 예비 편집 디자이너에게는 필독서라 생각됩니다. 저처럼 뒤늦게 후회하는 우를 범하지 마시고 꼭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2016/01/04

안데르센 동화집 -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 이나경 : 별점 1.5점

안데르센 동화집 - 4점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이나경 옮김/현대문학

에오스 클래식의 완역본. 2016년 첫 리뷰네요. 딸아이가 좋아하는 "엄지공주" 등의 이야기가 원래 어떠한지 궁금하여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읽기 힘들더군요. 재미도 없고 지루한 이야기 투성이였던 탓입니다. 이야기의 완성도도 낮으며 개연성도 부족하고요. 예를 들자면 "눈의 여왕"의 경우, 겔다가 갖은 고생을 다하며 카이를 찾아가는 과정이 내용의 핵심인데, 결말은 눈의 여왕이 그냥 떠나버리고 끝입니다. 겔다와는 만나지도 않지요. 이러한 모험(?) 비스무레한 과정이 대부분 우연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대부분 공주가 어디 갔더니 왕자가 있더라는 식이거든요.
지나친 종교색도 지금 읽기에는 거슬렸고, 왠지 모르게 낡은 느낌의 문체 역시 읽기 힘들게 만드는 요소였습니다.

뭐 이런 단점이야 쓰여진 시기를 감안하며 그러려니 할 수 있는데 동화와 거리가 있는 이야기들은 왜 이게 동화의 클래식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듭니다. 참혹한 이야기(예를 들자면 "분홍신"), 나쁜(?) 이야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대표적인 것은 "부시통"입니다. 눈이 큰 개 세 마리 설정은 재미있었습니다만, 약속을 어기고 마녀를 죽인 병사가 정말 나쁜 놈인데 공주를 얻는다는 게 말이나 되나요. 마녀는 무조건 나쁜 건가?
무슨 내용인지 당쵀 알 수 없는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에요. "꿋꿋한 양철 병정"이 좋은 예인데, 양철 병정이 갖은 고생을 하고 돌아온 후 그냥 불에 녹아버린다, 이게 어떻게 동화가 되는지 정말이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아주 건질 게 없지는 않습니다. 대략적으로 알고 있던 이야기의 오리지널 풀 버전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만으로도 큰 성과니까요.

또 새롭게 알게 된 것도 많은데 "인어공주"에서 거품이 된 인어공주가 천국까지 300년이 걸리는데, 착한 아이를 발견할 때마다 1년씩 줄여준다는 결말이 대표적입니다. 아이들이 아주 절망하지 않고 착하게 살게 만드는 적절한 동화스러운 결말이라 마음에 들었어요.
"눈의 여왕"은 읽고 나서 예전에 감상했던 러시아산 애니메이션이 비교적 원작을 충실하게 구현했다는 점에서 놀랐고요.

허나 이 정도로 점수를 주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오리지널, 원전으로서의 가치 외에 현대에 먹히지 않는 이야기들로 뭔가 교훈을 준다던가,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재미라도 줘야 하는데 지루함 말고는 별다른 가치를 찾기 어렵네요. 예쁜 디자인,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약간의 장점에 0.5점 더 얹어 별점은 1.5점입니다.

2019/12/22

영국 장식미술 기행 - 최지혜 : 별점 2.5점

영국 장식미술 기행 - 6점
최지혜 지음/호미

제목과 짤막한 소갯글만 보고"부르주아의 유쾌한 사생활" 비슷한, 제목 그대로 영국의 장식 미술에 대해 시기별로 대표적인 양식과 작품을 소개해주는 책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저자가 영국의 다양한 저택들을 구경다니며 그 저택과 소장품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일종의 기행문이기 때문입니다. 목차도 특정 시기나 문화, 유행에 집중해서 진행되는게 아니라 런던 시내와 런던 외곽을 구분하여 각각 7곳의 저택을 관광다닌 순서대로 나열된 것에 불과하고요. 게다가 방문한 저택들이 모두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소장품도 아주 돋보이는 그런 공간이라고 하기도 조금은 어렵습니다. 대체로 18~19세기 큰 영화를 누렸던 귀족이나 거부의 저택인데 소장된 가구라던가, 도자기 수집품 등의 면면이 아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국'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저택과 집들의 인테리어와 가구 등이 주로 소개되고 있거든요. 이럴 바에야 한 곳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보다 상세하게 풀어내는게 어땠을까 싶을 정도에요.

물론 개개의 저택과 집들과 방들, 소장품 하나하나 모두가 특색있으면서도 아름다운건 사실입니다. 저자가 클래식 악기와 같은 골동품 전문가인 덕분에, 깊이있는 전문가적인 식견도 곧 잘 눈에 뜨이고요. 예를 들어 자기 컬렉션에 대해 설명하면서 중국 자기 수입품이 마이센 자기로 대체되는 과정과 마이센 자기 최고의 대가인 캔들러라는 조각가에 대한 설명같은 부분이 그러합니다.
여행 동료가 직접 촬영한 사진과 함께 소개해 주고 있는데 이 역시 좋더군요. 눈도 즐거우며 이해를 도우니까요. 특히 가구들이 상세합니다. 디테일한 관찰이 과연 전문가다왔습니다. 클래식 악기 전문가다운 골동품 악기 설명도 재미있었던 부분입니다. 다른 대 저택들에 비하면 소박한 펜튼 하우스에 소장된 하프시코드, 버지널, 스피너 등에 대해 소개해주는데, 이 악기들 때문에 이 저택을 방문한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건축, 소장품 외에도 다양한 정보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특히 집 주인과 건축가, 디자이너에 대한 정보가 많은데 1939년에 완공된 비교적 최신 건물로 현대적인 디자인이 돋보이는 윌로우 로드 2번지의 경우, 건축가 에르노 골드핑거가 건축했는데 이 집이 너무 현대적이라 이를 못마땅했던 작가 이언 플레밍이 자신의 작품에서 골드핑거를 악당으로 지었다는 일화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녀였지만 몇 번의 결혼을 통해 손녀를 차기 왕위 계승자에 가까운 지위까지 끌어올렸던 출세의 천재인 '베스 오프 하드윅'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싶었어요. 속칭 '혼테크'의 1인자인 셈이죠. 또 도판도 전문가의 솜씨는 아니더라도 내용을 확인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는 수준이라 만족스러웠습니다. 풀 컬러라는 점도 좋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기대와는 다르지만 이 책만 놓고보면 볼만한 구석이 없지는 않은, 그런 책이었어요. 무엇보다도 전문가적인 관점에서 장식 미술만을 둘러본 여행기라는 측면에서는, 이런 류의 기행문의 교과서적인 글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그냥 유명 명승지를 둘러보는 기행문보다는 전문적이고 깊이가 느껴져서 괜찮았거든요. 저자의 장식 미술 소개서가 간행되면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2011/04/27

로빈슨 크루소 - 다니엘 디포 / 남명성 : 별점 4점

로빈슨 크루소 - 8점
다니엘 디포 지음, 남명성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펭귄 클래식 코리아에서 출간된 완역본입니다. 50% 세일행사 때 구입한 것입니다. 충동구매였는데 로빈슨 크루소의 파란만장 표류기 자체만으로도 재미가 넘칠 뿐 아니라 나름의 교훈을 잘 전해주고 있기에 구입을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삶이 얼마나 불행한지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동양적인 무송, 안빈낙도의 철학과 맥락이 같기도 하고요. 

또 두꺼운 분량에 걸맞게 옛날 아동용 책으로 보았을 때는 미처 몰랐던 사실들이 정말 많은데, 하나하나가 모두 드라마틱하다는 것도 마음에 듭니다. 로빈슨이 제법 괜찮은 중산층 자식으로 나름 훌륭한 교육을 받았지만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뱃사람이 되어 불운이 시작되었다는 것에서 시작하여, 터키의 포로가 되어 2년 간 노예 생활을 하다가 탈출에 성공한 뒤 브라질에서 농장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본인에게는 별 의미없는 항해에 나섰다가 30여년을 살게 되는 카리브해의 무인도로 표류하게 되었다는 등 로빈슨 크루소의 인생역정이 정말로 드라마틱하게 그려지거든요.

그 외에도 프라이데이가 사실은 식인종 출신이라던가, 섬을 탈출하게 된 것은 영국배에서 일어난 선상 반란 진압을 도와주었기 때문이라던가, 이후 브라질 농장을 처분하여 거부가 되어 표류했던 섬을 스스로의 영지로 삼았다는 후일담까지 새로운 내용이 무척 많았습니다.

아울러 아동용에서는 대충 넘어간 표류 생활 자체의 디테일도 발군이더군요. 그야말로 서바이벌 전문가 급의 내공이 보이는 것도 재미의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물론 로빈슨 크루소가 표류한 섬은 먹을 것과 식수를 구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고, 로빈슨 크루소도 난파한 배에서 이거저거 필요한 물건을 잔뜩 얻는다는 설정이 있는 탓에 베어 그릴스하고 비교하기는 어렵겠습니다만... 그래도 깨알같은 디테일은 놀라울 정도에요. 사냥, 농사, 집을 만드는 과정부터 여러가지 방법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과정이 그만큼 상세합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건 역시나 "담배파이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인데, 확실히 담배가 중독성이 강하긴 강한가봅니다.

그러나 쓰여진 시기가 18세기 초반인 만큼 제국주의적인 사고방식(만나는 유색인종은 모두 노예?)과 종교적 색체가 너무 짙은 것은 좀 아쉬웠습니다. 이중 종교적인 부분은 쓰여진 시기와 로빈슨 크루소에게 분명 신이 필요했던 순간이 있었던걸 감안하면 납득이 되지 않는건 아닙니다. 다만 지금 읽기에 정도가 과했던게 문제입니다. 그래도 식인종들을 하나의 인간으로 대해주며 학살하지 않으리라 결심하는 모습 등에서 약간이나마 진보적인 사고방식이 엿보인 것은 다행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4점. 저도 혼자서 표류하듯 떠나고 싶은 요즈음이라 좀 후하게 준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정말 읽기를 잘 한것 같아요. 왜 지금까지 이렇게나 많이 읽히는 지를 잘 알려주는 완역본입니다. 아동용 모험물로만 접하셨던 모든 성인분들께 추천합니다.

2013/01/17

청설모의 자동차카툰(cartoon) - 청설모 : 별점 3점

청설모의 자동차카툰(cartoon) - 6점
청설모 지음/이미지프레임(길찾기)

만화가 청설모 박상준 씨가 SK 엔크린 사이트에 연재하던 웹툰을 실물로 출판한 책. 세계적인 명차 및 국산 차들을 차종별, 브랜드별로 한 편씩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웹툰을 구태여 돈을 들여가며 인쇄 책으로 사지는 않지만, 연재물을 재미있게 보고 있을 뿐 아니라 클래식 카에도 관심이 있기에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시발, 대우 이름셔, 기아 프라이드와 캐피탈, 쌍용 코란도, 현대 포니, 대우 티코, 신진 코로나, 현대 코티나라는 국산 차들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시발 자동차 엔진 개발의 주역이었다는 "함경도 아바이", 골프 GTI와 견줄만했다는 혁신적 컨셉의 대우 이름셔, 신진 코로나 영욕의 역사 등 몰랐던 내용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더군요.

또 이런 류의 만화치고는 만화적으로도 제법 재미가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어요. 고집쟁이 영감 람보르기니가 페라리에게 무시당한 것 때문에 분노가 폭발하여 명차를 만드는 과정, 시트로엥을 미쉐린이 인수할 때의 모습 등에서 깨알 같은 유머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차들을 대부분 귀엽게 데포르메하여 그린 것은 단점이라 생각됩니다. 만화적인 구성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매 에피소드별로 한 페이지 정도는 할애해서 실차와 같은 상세한 이미지와 제원을 소개해 주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 같네요. 이 책을 읽고 "매혹의 클래식카"와 "안타고는 못배겨"를 다시 꺼내 읽게 되었는데, 확실히 비교되거든요. 재미 측면에서는 압도적이고 자료적인 측면에서도 부족함이 없지만, 일러스트와 도판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조금 남습니다.
아울러 최훈의 삼국전투기 캐릭터 등 유통기한이 명백한 패러디의 등장은 다음 권에서는 좀 빼 주면 좋겠고요.

허나 이 정도 단점은 이 책이 지닌 압도적인 장점에 비하면 큰 흠은 아니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만원이 넘는 가격은 부담스럽지만, 자동차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5/01/06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 - 워싱턴 어빙 외 / 한동훈 : 별점 3점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 - 6점 워싱턴 어빙 지음, 한동훈 옮김/태동출판사

이 블로그를 찾아주신 모든 분들께서는 아마도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고전 본격 황금기, 클래식 미스터리는 사족을 못 쓰는 애호가입니다. 이런저런 고전들은 많이 읽은 편인데 평균적으로 괜찮게 평가하고 있는 이유는 다 저의 취향 때문이죠.
 그러나 아주 오래전 읽었었던 예전에 읽었던 "골든에이지 미스터리 중편선"이 심하게 기대 이하라서 나름의 기준점을 최소한 19세기 말 이후로 설정해 놓았습니다. 그 이전 작품들은 지금 읽기에는 심하게 낡았다고 여겼거든요. 이 책 역시 대부분 작품이 19세기 후반 발표된, 기준점 통과가 간당간당해서 그동안 읽지 않았었던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 완전 대박입니다. 예상치 못한 즐거움과 놀라움이 가득했어요.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과 견줄만한, 국내에 많이 소개되지 않은 명탐정들 - 여성 탐정 러브데이 브룩, 오스트리아 최고의 형사이자 탐정인 요제프 뮬러, 의뢰인을 위해서는 그 어떤 일이라도 하는 변호사 랜돌프 메이슨, 과학 탐정 크레이그 케네디 교수 - 시리즈 단편들은 완성도를 떠나 존재만으로도 반가웠을 뿐더러 "무시무시하고 이상한 침대", "결산", "위험천만한 게임"이라는 "걸작"이라 칭해도 부족함없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4편이나 되는 작품이 수록된 볼륨도 마음에 들고요. 발표된 시기를 감안할 때 지금 읽기에는 낡아버리거나 시대착오적인 작품도 있고, 고전적 작법으로 쓰여져 지금 기준의 완성도를 충족시키기는 어려운 작품도 수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고전을 읽을 때 감수해야 할 필연적인 세금과도 같은 것이죠. 가이 포크스나 보르시치와 같은 고유명사를 잘못 번역한 옥의 티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번역도 무난한 편입니다.

그래서 수록 작품 평균해서 별점은 3점입니다. 고전 본격물 미스터리 애호가에게는 놓칠 수 없는 책인데 고전 애호가가 아니시라면 호불호가 갈릴 것 같기는 하네요. 그래도 최소한 걸작이라 말씀드린 저 세작품은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본서는 절판되었으나 e-book은 상당히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고 있기도 하니까요.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울버트 웨버, 혹은 황금의 꿈" 

"슬리피 할로우" 등으로 유명한, 19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중 한명이라는 워싱턴 어빙의 작품입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평범한 네덜란드 출신 배추농부 울버트 웨버가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한다는 내용인데, 떠벌이가 지껄이는 듯한 구전문학같은 묘사가 볼거리입니다. 울버트의 보물을 찾기 위한 헛된 노력이 해적들의 은밀한 행동과 결합되어 전개되는 독특한 전개, 블랙코미디 느낌도 많이 전해주는 유쾌함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울버트가 부동산 재벌이 된다는 난데없는 결말과 같은 두서없는 전개, 구전문학스러운 묘사 등은 너무 낡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약간 호러분위기이기는 하지만 장르 문학으로 보기에는 여러모로 애매하기도 하고요. 최소한 "미스터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던 작품입니다. 부동산이 최고라는 교훈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차라리 시사풍자물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길쭉한 궤짝"

에드거 엘런 포우의 단편. 친구가 애지중지 돌보는 궤짝 안에 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낡았다는 느낌을 주기는 하나 흥미로왔어요. 

다만 선장의 말을 빌어서 마무리하지 말고, 마지막 침몰 직전 상황에서 진상이 드러나는게 더 나았을 것 같네요. 예를 들자면 관 뚜껑이 열리고 아내의 시체가 등장하는 "어셔가의 몰락" 식으로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무시무시하고 이상한 침대"

윌리엄 윌키 콜린스의 걸작 단편입입니다. 무허가 3류 도박장에서 주인공이 도박으로 거금을 딴 뒤 술에 취하고 몽롱한 채로 도박장 방 하나를 빌려 잠을 자다가 침대 천장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는 내용이지요. 

주인공이 술에 취하는 과정의 생생한 묘사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도 침대 지붕이 내려오는 묘사가 정말 대단합니다. 읽다가 숨이 턱턱 막힐 정도에요. 잠이 오지 않아 세밀하게 관찰했던 벽에 걸린 그림 속 인물의 깃털 유무에서 모골송연한 범죄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과정도 매끄럽고요. 짧은 글이지만 정교하게 복선이 짜여져 있는 덕분이지요. 

한마디로, 이 작품을 읽은 것 하나 만으로도 이 작품집을 읽을 가치가 충분합니다. 근대 추리소설의 시조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거장의 작품다왔달까요. 별점은 5점입니다.

"꿈속의 여인"

조금 흔해빠진 괴담이랄까... 자신의 생일날 자신을 죽이기 위해 나타나는 여인에 대한 환상과 공포를 품고 살아가는 마부 아이작의 이야기입니다. 

별다른 극적 반전도 없고 여인의 정체도 알려주지 않는 등 불친절한 부분이 많아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앞선 작품은 걸작인데 이 작품은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거장이라고 항상 걸작만 쓰는건 아니겠지요. 

그래도 아이작의 과거 이야기는 분명 흥미로우며 꿈과 현실을 잇는 과정의 묘사만큼은 볼만했던 만큼 별점은 2.5점입니다.

"공주의 복수"

캐서린 루이자 퍼키스의 여성 탐정 러브데이 브룩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셜록 홈즈의 라이벌들"에 "문간의 검은 가방"이라는 단편이 소개되었던 시리즈이지요.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 셜록 홈즈 스타일입니다. 

루시에 쿠니에르라는 아가씨의 실종 사건을 그리는데 추리적으로는 별로였어요. 러브데이의 추리가 불완전한 "관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집사가 드루스 소령을 쳐다보는 눈빛에서 사건의 실마리를 잡았다고 하는데 지나친 억측입니다.
뭐 이 부분은 눈빛에서 살기를 느끼는 무림 고수와 같은 재주가 있었을지도 모르니 그렇다 쳐도, 사건 관계자들이 모인 상황에 난입하여 "모자 가게"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그냥 넘어가기 힘들 정도의 비약입니다. 그녀를 빼돌린 드루스 부인과 그윈 부인이 불안한 눈빛을 교환하며 모자를 쳐다보았다? 이게 모자 가게를 가리키는 것인지, 그냥 눈둘데가 없는 것인지도 불명확하고 그 모자 가게에서 산 모자인지도 확실치 않으니까요.

주로 관찰을 통해 추리하는 러브데이 브룩과 자신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주위 남자들을 매료시키는 루시에 캐릭터, 셜록 홈즈의 라이벌치고는 1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쓰여진 점 등은 특이하지만 추리적으로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천국의 물가에서"

아주아주 약간 고딕 호러 분위기가 나기는 하는데 실상은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러브스토리입니다. 주인공 케언공이 라마스 양에게 청혼할 때의 대사는 재미난데 그 외에는 별다른게 없는 고전 할리퀸 로맨스에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목사 서재의 피웅덩이" 

오스트리아 최고의 형사이자 탐정인 요제프 뮬러 시리즈 단편입니다. 목사관 서재에 피웅덩이를 남긴채 목사가 사라진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로, 충격적이면서도 기발한 인간 소실 트릭이 등장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실상은 트릭이고 뭐고 없이 서재에서 예배당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지나 지하실에 숨겼다는게 결론이라서 맥이 빠집니다. 이래서야 명탐정이 딱히 등장할 필요도 없죠. 자세한 현장 조사가 이루어졌더라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을 거에요. 아무리 피가 응고하였더라도 아무런 흔적없이 시체를 옮기는 작업을 성공했을리는 없으니까요.

그 외에도 사건 해결의 핵심 단서가 순전한 우연 - 범인이 시체를 옮길 때 우연히 팽이가 떨어져 그것을 돌리게 된 것 - 이라 추리적인 면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지닌 양치기 캐릭터는 전혀 등장할 필요가 없었고요. 

셜록 홈즈처럼 현장을 아주 철저하게 조사한 뒤 단서를 찾아내어 사건을 해결하는 뮬러의 활약은 그럴듯했습니다만, 이러한 이유로 별점은 2점입니다. 홈즈 시대 추리소설의 단점만이 극대화된 작품이었어요.

"범죄구성 사실" 

엉클 애브너 시리즈로도 유명한 멜빈 데이비스 포스트의 변호사 랜돌프 메이슨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사교계의 총아인 사무엘 월콧이 사실은 리차드 워렌이라는 인물로, 월콧의 아내와 공모하여 그를 죽인 뒤 신분을 가로챈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월콧 (워렌)이 아내를 죽여 입을 막으려는 계획을 돕는다'는 나름 충격적인 설정으로 고객을 위해서라면 불법적인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랜돌프 메이슨의 캐릭터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에요. 페리 메이슨의 선구자적인 캐릭터죠.

또 완벽하게 시체를 없앨 경우 범죄 사실 자체가 성립하지 않고, 사망 사실과 그 사망을 가능케 한 폭력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어서 무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 당시에 소설로 발표했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있었던 이른바 "시신 없는 살인사건"이 떠오르네요. 요새는 이 법의 헛점이 많이 알려진 덕인지 이런저런 정황 증거를 통해 범죄 사실이 입증된다면 유죄를 선고하는 것으로 보이기는 합니다만.... 

시체를 없애는 과정의 디테일도 좋아요. 황산을 이용하여 시체를 녹여 없애는 방법인데 소설처럼 깔끔하게 모든 흔적을 단시간내에 없애는 것은 어려웠겠지만, 묘사가 잔혹하면서도 생생해서 굉장히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 부족함이 없지는 않으나, 쓰여진 시기를 감안하면 좋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습니다.

"쌍벽의 탐정"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작가인 마크 트웨인의 작품으로 정통 추리물에 가까운 서사, 그리고 제법 그럴듯한 범죄 및 트릭이 등장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완성도는 좀 처집니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아치 스틸맨이 어머니를 버리고 모욕한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길을 떠나고, 그 와중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재능(냄새 맡기)을 어필하는 전반부와 호프 캐넌의 은광 부락에서 벌어진 폭사사고를 다룬 후반부로 나뉘는데, 두 이야기가 잘 결합되지도 않을 뿐더러 지루한 탓입니다. 

특히 전반부 이야기는 설득력도 낮고 이렇게 길게 설명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장황해요. 후반부도 문제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라서 플린트 버크너에게 살의를 품은 노예와 같은 영국 소년 페트락 존스가 범행을 결심하는 과정, 거기에 아치 스틸맨이 그 마을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의 특수한 능력을 발휘하여 실종된 아기를 찾아내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플린트 폭사사건 이후 페트락의 친척 아저씨 셜록 홈즈가 등장하여 여러가지 단서를 이용하여 범인을 지목하고 아치 스틸맨과 추리 대결을 펼치는 이야기 등 이런저런 이야기가 난잡하게 전개됩니다. 

마크 트웨인 작품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정교한 과학적 트릭 - 초가 타는 시간을 이용하여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알리바이를 만듬 - 이 등장하는 것은 인상적이지만 아치 스틸맨이 현장 조사를 통해 증거를 확보한 만큼 완전 범죄로 보기에는 문제가 많아요.

물론 셜록 홈즈의 패러디물을 쓰기도 했던 작가의 작품답게 셜록 홈즈가 등장하여 여지없이 망가지는 장면은 재미있었고 그 외에도 셜록 홈즈 스타일에 대한 통렬한 패러디, 예를 들어 "탐정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탐정 곁에서 일을 꾸미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등은 인상적이고 재미있긴 했습니다. 미국적인 정취와 무식함 (집단 린치를 포함하여)을 한껏 느낄 수 있다는 부가적인 장점도 존재하고요.

그러나 단점이 더 부각되는 작품이라 별점은 2.5점입니다. 조금 더 짧게 줄였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작가의 욕심이 과했던게 아닌가 싶네요.

"블랙 핸드"

제목을 한글로 풀이하면 "흑수단". 제목 그대로의 범죄단체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크레이그 케네디 교수 시리즈 중 한편입니다. "과학 탐정"의 선구자적인 인물이라고 하는데 이 작품에서도 자신이 직접 개발한 도청 장치를 이용하여 사건을 해결하죠.

셜록 홈즈 시리즈의 영향을 짙게 느껴지는데 1인칭 화자가 파트너로 등장하는 것에서부터 기묘한 사건의 의뢰, 독자가 그 사용법을 알 수 없는 장치의 등장, 대단원으로 이어지는 전개는 홈즈 시리즈를 보는 듯 합니다. 그러나 사건을 해결하는 방법은 별게 없습니다. 유괴 사건에서 아이를 은닉한 장소를 도청 장치를 통해 듣고 경찰에게 알려준다는 방법이 전부니 말이죠.

그런대로 잘 쓰여지기는 했지만 아주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탁상시계"

"독화살의 집"이라는 멋진 본격 추리소설을 쓴 작가의 작품이라 기대가 컸는데 환상특급을 보는 듯한 내용이라 기대와 영 달랐습니다. 장르 구분을 하자면 판타지에 가까왔달까요. 시간을 불특정하게 14분간 멈추는 능력이 있는 탁상시계로 벌인 완전범죄 이야기로 시간이여 멈춰라! 류의 내용이라 추리적으로는 건질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어요. 시계에 대한 최소한의 설명도 이루어지지 않고 반전도 없어서 여러모로 실망스러웠습니다. 

만년 2인자의 질투심이라는 동기는 충분히 설득력있기는 하고, 이런 류 아이디어의 원조인지도 궁금하긴 한데, 상술한 이유로 높은 점수를 주긴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결산"

퍼시벌 와일드의 단막극. 극작가로도 알려져 있지만 국내에 출간된 작품은 단편집 두 권밖에 없지요. 때문에 자료로서도 귀중한데 작품의 수준도 아주 높습니다. 딱 두명의 등장인물이 이발소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빚어지는 극도의 서스펜스가 놀라울 정도에요. 이발사 킬번이 과연 그의 딸을 농락하고 버린 손님 존의 멱을 딸 것인가?와 존이 시간제한이 있는, 전 재산이 걸린 경매에 참석할 수 있는가?라는 두가지 드라마를 긴장감넘치게 선보이면서도 킬번이 존을 12년 동안 뒤쫓고 지금의 찬스를 만들게 된 경위를 설명해주는 솜씨도 탁월한 덕분입니다.

아울러 마지막 반전 - 존이 이야기한 경매시간과 이발소 시계가 얼마나 빨리 가는지에 대한 대사 - 까지 확실하고요. 이런 작품이 10여 페이지에 불과하다니 고개가 숙여질 뿐이네요. 별점은 5점입니다!

"위험천만한 게임"

프로 사냥꾼 레인스포드는 우연히 조난당하여 러시아 출신 부호 자로프 장군의 섬에 표류하였다. 자로프 장군은 사냥에 미친 인물로 극도의 긴장감을 위해 인간을 사냥하고 있었고 레인스포드도 협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생명을 건 게임에 참여하는데..... 

어딘가의 앤솔러지에서 읽었었는데 다시 읽어도 재미있었던 걸작입니다. 인간 사냥이라는 아이디어, 그리고 실제 사냥 게임에 대한 설정 - 3일이라는 시간 제한 및 자로프 장군이 사거리 짧은 피스톨을 장비했다는 핸디캡 등 - 이 탁월할 뿐 아니라 두 명의 대결에 대한 묘사가 긴장감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반전도 기가 막혀요. 바다로 뛰어든 레인스포드의 목적은 탈출이 아니라 성까지의 거리를 단축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인데 예상을 깨는 맛이 있었거든요. 별점은 5점입니다. 

한 남자가 협박 때문에 생명을 건 모험에 뛰어들어 성공한 뒤 협박자를 응징한다는 내용은 스티븐 킹의 단편 "벼랑 끝에 선 사나이"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새 출발"

잘 모르는 작가의 종말 이후를 그린 SF로 문명이 모두 사라진 뒤, 이전 문명의 기억을 지닌 자가 미개집단의 종교인과 충돌한다는 설정의 작품입니다. 

설정부터 많이 접해보았던 것으로 딱히 특별한 내용은 없네요. 종교인이 믿는 신의 존재가 식기세척기였다는 반전은 있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하여 뛰어나다고 하기 어렵고요. 한마디로 전체적으로 진부했어요. 시대가 너무 흐른 탓이겠죠. 별점은 2.5점입니다.

2026/03/14

추리 소설 속 자동차 : 알파 로메오 스파이더

그동안 추리소설 속에 등장하는 요리에 대해 몇 차례 글을 써 왔습니다. 음식은 인물의 취향과 성격, 그리고 시대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모아서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지요.

이번에는 조금 방향을 바꿔,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자동차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자동차는 추리적으로 알리바이를 만들기도 하고, 완벽해 보이던 알리바이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도 하니까요. 때로는 밀실을 대신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하고요. 차종과 색상, 구입 시기 같은 정보만으로도 인물의 성향과 처지를 드러노기도 합니다. 굴러가기만 한다는 이유로 오래된 고물 블루버드를 타고 다니는 탐정 사와자키처럼요. 낡고 오래되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BMW’라는 별명답게 튼튼하고 신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물과 차가 절묘하게 겹쳐 보입니다. 최근의 예로는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의 미키 할러를 떠올릴 수 있겠네요.

이처럼 현대 추리소설에서 자동차는 사건과 등장인물과 밀접하게 연결된 존재입니다. 수많은 작품 속에 다양한 차가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이야기의 핵심 장치로 기능하는 자동차들을 중심으로 하나씩 소개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소개할 자동차는 알파로메오 스파이더 3세대입니다.

알파로메오는 1910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출발한 브랜드로, 레이싱을 통해 다져진 기술력과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명성을 쌓아 왔습니다. ‘운전의 즐거움’을 상징하는 브랜드로 자주 언급되며, 스포츠성을 중시하는 제조사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스파이더는 1966년 처음 등장한 2인승 오픈 스포츠카입니다. 디자인은 피닌파리나가 맡았고, 유려한 곡선의 차체로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영화 "졸업"에 등장하며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고, 1993년까지 약 27년간 생산되며 12만 대 이상 판매된 장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중 3세대는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생산된 후기형으로, 기존의 클래식한 이미지를 유지하면서도 범퍼와 외관을 현대적으로 다듬어 1980년대 감각에 맞춘 변화를 보여 주었습니다. 전통을 이어 가면서도 시대의 흐름에 발맞춘 세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모델이지요.

이 차가 등장하는 작품은 일본의 콤비 추리소설가 오카지마 후타리의 1987년 작품 "그리고 문이 닫혔다"입니다.
오카지마 후타리는 두 명(이노우에 유메히토, 도쿠야마 준이치)의 합동 필명으로, 이름의 유래는 ‘재미있는 두 사람’(오카시나 후타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독특한 아이디어와 소재를 도입한 본격 추리물로 유명하며, 대표작으로는 "클라인의 항아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는 피해자의 모친이 사건 용의자 네 명을 핵 셸터에 가둔 뒤 진상을 밝혀내려 한다는 독특한 설정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 속 피해자 사키코의 애차가 바로 알파로메오스파이더고요. 세대가 명확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발표 시점이 1987년이고 사키코가 부유한 집안의 딸로 최신 유행과 명품을 선호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판매 중이던 3세대 모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화려한 빨간색 오픈 스포츠카는 제멋대로이면서도 타인의 시선을 즐기는 사키코의 성격과 잘 어울립니다. 유이치와 드라이브를 하다가 일부러 차를 세우고, 루프를 연 채 키스를 나눈다는 묘사를 통해 관심받기를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그녀의 모습을 한층 선명하게 드러내지요. 이는 2인승 오픈카라서 가능했을 행위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 자동차는 단순히 이러한 사키코의 성격을 상징하는 소품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녀가 절벽 아래로 추락해 사망했을 당시 타고 있던 차가 바로 이 알파로메오였고, 사건의 실마리 역시 차량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신문에 실린 흑백 사진 속 인양된 알파로메오와, 사키코가 생전에 찍힌 컬러 사진 속 차량을 번갈아 보던 유이치 일행은 운전석 시트 위치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두 사진 모두 차량의 왼쪽에서 촬영되었고, 좌핸들 차량이므로 운전석은 카메라 쪽에 자리합니다. 그런데 바다에서 끌어올린 차량의 시트는 컬러 사진보다 훨씬 뒤로 밀려 있습니다. 사키코가 직접 운전했다면 시트 위치가 같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사건 당시 마지막으로 운전대를 잡은 인물이 사키코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자동차는 단순한 배경, 소품이 아니라 소설의 추리적 핵심 장치로 사용됩니다. 시트 위치라는 사소한 차이가 사고사라는 견해를 뒤집고, 등장인물들의 알리바이를 다시 검토하게 만드니까요.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 시각 현장에 있던 네 명 중 타다시는 사키코를 살해한 뒤 차량에 태워 절벽까지 이동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다시와 치즈루, 아유미는 이후 함께 절벽에서 차량을 발견했지만, 차 안에는 시체가 없었습니다. 그 뒤로 세 사람은 계속 함께 있었기 때문에 타다시가 차량을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는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반면 그 시간대에 유일하게 자리를 비운 인물은 유이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이치가 범인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는 사건 초반에 별장을 떠났기 때문에 살해를 실행하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으니까요.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요. 누가 언제 운전대를 잡았고, 사키코의 죽음은 어떻게 연출된 것일까요. 그 진상과 트릭은 "그리고 문이 닫혔다"를 통해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추리소설을 읽으실 때 인물들의 대사뿐 아니라 그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에도 한 번쯤 눈길을 주시면,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2010/07/06

삼성 스마트폰은 승리자의 꿈을 꾸는가 - 경쟁자로는 가능하다

 저희 형이 쓴 글입니다. 좋은 글이라 생각되어 퍼 옵니다. 원문은 여기

삼성에서 신형 안드로이드 폰 갤럭시 S가 나왔다. 옴니아 1과 옴니아 2라는 초대형 자책골이 터진 게 엇그제 같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신문, 잡지, 그리고 파워 블로거들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아이폰 대항마가 나왔다며 난리 브루스다.
그놈의 지긋지긋한 대항마 타령이야 어찌 됐건, 갤럭시 S가 괜찮은 제품이란 건 사실인 것 같다. 동시에 삼성 스마트폰에 대한 기대심리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 지금 이 정도 되는 제품을 만들었으니 다음엔 더 멋진 걸 만들겠지? 그래, 맞아, 조만간 아이폰 4를 떡실신시킬 수 있을 거야!

그러나 과연 그럴까?

지금 갤럭시 S는 SPC5111 CPU를 쓰고 있는데, 이건 애플의 A4 CPU와 사실상 같은 CPU다. ARM의 Coretex A8을 기반으로 인트린시티에서 설계한 것이다.
ARM의 coretex는 그 구조상 1Ghz를 넘기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인트린시티는 CPU 다이에 메모리 컨트롤러와 메모리를 내장시키 등의 개선을 통해 그 속도를 크게 향상시켰다. A4 CPU 개발 당시 5500만 달러를 애플과 삼성이 공동 투자했다고 한다. 삼성이 갤럭시 등 자사 스마트폰에 (A4와 동일한 설계의) SPC5111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7/5 일부 문구 수정)

문제는, 인트린시티를 애플이 인수했다는 사실이다.
그까짓 흔해빠진 ARM CPU 설계업체가 뭐 그리 중요하냐며 시큰둥하게 중얼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코 그렇게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인트린시티 A4 CPU는 그 설계상 멀티 코어 확장이 가능하며, 최대 8개 코어까지 얹을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애플이 멀티 코어 CPU를 탑재한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내놓으며 요란한 선전을 벌일 때, 삼성전자 마케팅 팀은 싱글 코어의 장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골머리를 썩혀야 하는 난관에 부닥칠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물론 그때까지 삼성전자가 손가락만 빨고 있진 않을 것이다. Coretex A9이 됐든 뭐가 됐든 그만한 성능의 최신형 CPU를 수급해 와서 우겨넣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경쟁사도 다 사서 쓸 수 있는 CPU나 GPU를 이용해 봐야 무슨 특장점이 있을까?
글쎄, 별로 없을 것이다.

[소니 침몰]의 저자가 지적했듯이, 범용 부품을 조립해 완성품을 만드는 수평 분업형 사업에선 가격 경쟁력 외에 다른 부가 가치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가격 경쟁력이라고 하면 중국 업체를 따라가기 어렵다. HTC 같은 데만 하더라도 엄청난 구매력과 저가 노동력을 무기로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저렴한 가격에 제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애플은 PC업계에서 마이너리티에 속했던 시절, 자신들만의 특장점을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쳤다. 그리고 파워피씨 CPU, MacOS(클래식), MacOS X 등을 내놓았다. 이러한 차별점을 특장점으로 받아들이고 부가 가치로 인정한 사람들은 애플의 빠가 됐고, 그걸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냥 윈도우 PC를 사거나 또는 애플의 까가 됐다.
몇몇 애플 까들은 애플이 폐쇄적이기 때문에 자사 OS를 고집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시시한 이유 때문에 몇 년이란 시간과 수억 달러의 개발비를 들여 OS를 만드는 멍청한 회사가 어디 있을까?
애플이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이유는 확실한 부가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다. 다른 수평분업형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들만이 쓸 수 있는 무기를 손에 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플은 모바일에 진출한 이후로도 이러한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독자적인 OS에, 독자적인 앱 스토어에, 독자적인 기타 등등...... 이젠 독자적인 CPU까지 만들어 넣으려 하고 있다. 아마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반면 삼성전자는 경쟁사도 쓰는 CPU와 공짜 OS, 통신사가 만든 앱 스토어에 의지하고 있다. 애플은 고사하고 HTC와의 차별점을 만들기도 쉽지 않다. 아, AMOLED 디스플레이? 확실히 눈에 띄긴 띈다. 하지만 그걸 넣으면 가격이 졸라 비싸지는데?
자칫 잘못하면 1, 2년 안에 삼성전자는 내세울만한 특장점이라곤 삼성 로고밖에 남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 부닥칠지도 모른다.

피쳐폰 분야에서는 사소한 기능 추가나 사소한 부품 개선이나 사소한 UI 변경만으로도 눈에 띄는 변화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스마트폰에선 그런 눈속임이 통하지 않는다. 다들 엇비슷한 부품을 쓰는 상황에서는 1) 가격 경쟁력 2) 부가 가치 중에서 하나라도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둘 다 있으면? 승리자가 된다.
그렇다면 삼성전자는 이 모든 난관을 이겨내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아 승리자가 될 수 있을까?

글쎄,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한데..... 삼성이 애플보다 먼저 인트린시티를 인수했다면, 그럴 가능성이 조금은 더 높아졌겠지!

이 글에 덧붙이자면, 삼성이 다른 제조사에 비하면 비교 우위에 있는 부분은 있습니다. 상기 글에 따르면 애플은 독자적 OS, 독자적 서비스 플랫폼 (스토어)와 메인 CPU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반면 삼성은 낸드플래시와 LCD를 확보하고 있지요. 제조사에 다년간 근무한 경험으로는 낸드플래시와 LCD 단가가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가장 원가 비중이 높은 품목이며, 이 두 가지 품목에서라도 가격 경쟁력을 유지한다면 애플 수준의 강력한 경쟁력을 삼성폰이 확보할 수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OS와 서비스 플랫폼은 구글과 MS라는 다른 경쟁사가 이미 잘 만들어 놓았잖아요? 메인 CPU까지 확보했더라면 금상첨화였겠지만, 삼성이 이 정도로 흔들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최소한 강력한 경쟁자로서의 지위는 계속 유지할 수 있겠죠.

물론.... 애플보다 "최적화" 측면에서 뒤지는 부분을 극복하기 위한 개발비 부담, 한발 늦게 대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변수가 되겠습니다만...

2004/10/01

최고의 영화 250개중 내가 본것은?

IMDB 선정 최고의 영화 250 아까짱님 글에서 트랙백 합니다. 저도 꽤나 궁금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하고난 결과라면... 역시 최신작, 흥행작 순위가 높다는 것과 제 예상과는 다른 의외의 순위가 많았다는 것이죠.

히치콕은 역시 꽤나 고순위였고 잉그마르 베르히만이 생각보다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이 이채롭네요.

상위권은 흥행작이 많아 본 작품이 많지만 갈수록 고전과 유럽 영화가 섞이며 확률이 떨어지는군요....

제가 본 영화는 붉은 색으로 표시했습니다. (2021.09.19) 생각보다는 본 영화가 많아서 즐거웠습니다. 뭐 볼 수도 있었지만 지루할 것 같아 포기한 영화도 있으니깐...

저만의 순위도 한번 작성해 보고 싶어집니다.

1. Godfather, The (1972) : 예상대로!
2. Shawshank Redemption, The (1994) : 좋은 영화긴 하지만 좀 의외이기도 합니다.
3. Lord of the Rings: The Return of the King, The (2003) : 이것도 좀 의외...^^

4. Godfather: Part II, The (1974)
5. Shichinin no samurai (1954) : 7인의 사무라이.. 이 정도일 줄이야...
7. Casablanca (1942) : 좋은 영화죠. 저도 무척 좋아합니다.
8. Lord of the Rings: The Two Towers, The (2002)
9. Lord of the Rings: The Fellowship of the Ring, The (2001)
10. Star Wars (1977) : 이것도 약간 의외군요.
13. Star Wars: Episode V - The Empire Strikes Back (1980) : 역시 의외...
14. Pulp Fiction (1994) : 타란티노가 14위! 대단하군요.
16. Dr. Strangelove or: How I Learned to Stop Worrying and Love the Bomb (1964) : 큐브릭 선생도 최근 흥행작에 많이 밀렸네요.
17. Raiders of the Lost Ark (1981) : 저는 사실 레이더스가 스타워즈보다 낫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18. Usual Suspects, The (1995) : 제가 본 추리계열 영화중에서는 순위가 탑이군요. (위에 있었던 "이창"은 보질 못했으니)
19. Memento (2000)
20. Buono, il brutto, il cattivo, Il (1966) : 웨스턴 1위! 할만한 작품입니다.
21. 12 Angry Men (1957) : ㅎㅎㅎ 엊그제 본 작품인데. 좋네요.
22. North by Northwest (1959) : 히치콕 선생은 꽤나 사랑받는군요. 역시~
25. Psycho (1960) : 역시 히치콕!
26. Fabuleux destin d'Amélie Poulain, Le (2001) : 아멜리에? 정말 의외에요!
28. Silence of the Lambs, The (1991) : 양들의 침묵, 좋은 영화죠.
30. C'era una volta il West (1968) : 옛날 옛적 서부에서, 각본에 다리오 아르젠토가 참여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32. American Beauty (1999) : 좋은 영화죠.
34. Matrix, The (1999) : 매트릭스는 생각보다 순위가 낮더군요.
43. Sen to Chihiro no kamikakushi (2001) : 10여계단 훌쩍 건너뛰어 센과 치히로라... 애니메이션 중 탑 순위군요.(솔직히 의욉니다)
44. Some Like It Hot (1959) : 마릴린 먼로의 걸작 코미디가 44위!
45. Boot, Das (1981) : 좋은 영화죠.
47. Singin' in the Rain (1952) : 역시 클래식, 좋은 영화입니다.
48. Chinatown (1974) : 제이크의 차이나타운..
50. L.A. Confidential (1997) : 역시 느와르
51. Se7en (1995)
59. Saving Private Ryan (1998) : 이 영화도 생각보다 순위가 낮은 편입니다.

60. Raging Bull (1980) : 마틴 스콜세즈 영화도 생각보다 찬밥이네요.
61. Alien (1979) : 리들리 스콧 선생도 겨우 입성했네요.
63. Léon (1994) : "의외!"
64. Wizard of Oz, The (1939)
67. Sting, The (1973)
68. Modern Times (1936) : 채플린 선생도 너무 순위가 낮다고 생각됩니다. 쩝...
70. Reservoir Dogs (1992)
72. Clockwork Orange, A (1971)

73. 2001: A Space Odyssey (1968) : 스트레인지 러브에게 한참 밀리는군요^^
77. Amadeus (1984)
78. Great Escape, The (1963)
79. Finding Nemo (2003)
81. Jaws (1975)
83. Wo hu cang long (2000) : 와호장룡? 미국에서 히트친 덕을 단단히 본다고 생각됩니다.
84. High Noon (1952) : 멋진 웨스턴이죠.
85. Aliens (1986) : 카메론도 겨우 입성하는군요...
86. Braveheart (1995)

87. Metropolis (1927) : 프리츠랑의 고전. 사실 지금 보면 좀 지루하긴 합니다만...
88. Shining, The (1980)
90. Fargo (1996) : 코헨형제가 이제서야 등장하는군요. 역시 컬트
91. Donnie Darko (2001) : 음.. 전 사실 굉장히 지루했던 영화입니다만 순위는 생각보다 무지하게 높네요.
92. Strangers on a Train (1951) : 낯선 승객, 멋진 고전 스릴러라 생각됩니다.
93. Blade Runner (1982)
96. Sixth Sense, The (1999)

97. Great Dictator, The (1940) : 위대한 독재자
98. Nuovo cinema Paradiso (1989)
100. Mononoke-hime (1997) : 미야자키도 대단하네요.
101. Princess Bride, The (1987) : 음악이 굉장히 좋았던 작품입니다.
107. Big Sleep, The (1946) : 솔직히 원작보다는 지루했습니다만...
109. Terminator 2: Judgment Day (1991) : 한 10년만 전이었어도 저 위쪽에 있었겠죠?
112. Forrest Gump (1994)
120. Glory (1989) :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남북전쟁 이야기입니다. 꽤 잘 만들고 좋은 영화인데 국내에서의 인지도는 낮더군요.
122. Once Upon a Time in America (1984) : 이것 역시 보다 순위가 높아야 할 걸작이죠.
124. Unforgiven (1992) : "용서받지 못한 자"
126. Ben-Hur (1959) : 126위? 흠...
129. Star Wars: Episode VI - Return of the Jedi (1983) : 1,2와 차이가 엄청나네요. 뭐 좀 딸리긴 했어요.
130. African Queen, The (1951) : 재밌었습니다^^

132. Green Mile, The (1999) : 좀 지루했죠. 너무 길었어요!
140. Shrek (2001)
141. Back to the Future (1985)
143. Indiana Jones and the Last Crusade (1989) : 흠...
145. Platoon (1986) : 올리버 스톤도 무지하게 낮군요.
149. Gone with the Wind (1939) : 아마 이거 안본 한국 사람 거의 없을것 같아요. 워낙 TV에서 많이 해줘서...
152. Wild Bunch, The (1969) : 상당히 충격적인 웨스턴이었습니다.
154. Young Frankenstein (1974) : 멜 브룩스도 이제야 등장하는군요.
155. Die Hard (1988)
163. Spartacus (1960) : 마지막 장면이 잊혀지지 않네요. "내가 스파르타쿠스다!"
164. Monsters, Inc. (2001)
167. Gladiator (2000)
168. Roman Holiday (1953)
171. Charade (1963) : 재미있었어요.
176. Ed Wood (1994)
177. Toy Story (1995)
178. Conversation, The (1974) : 솔직히 지루했다는....

179. All the President's Men (1976) : 연기파의 대결이라 흥미진진했던 정치드라마였습니다.
181. Brazil (1985) : 테리 길리엄도 그냥 저냥...
195. Stand by Me (1986) : 한참 건너뛰어 이 작품. 너무너무너무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입니다.
199. Being John Malkovich (1999)
202. Groundhog Day (1993) : 오잉? 너무나도 의외! 소품이라 생각했는데...
203. Terminator, The (1984)
207. Miller's Crossing (1990) : 잘 만든 느와르랄까.. 마음에 들었던 영화였습니다.
218. 39 Steps, The (1935) : 히치콕이죠^^ 전 원작보다 좋더라고요.
220. Bonnie and Clyde (1967) :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가 제목으로는 더 멋진 듯...
222. Midnight Cowboy (1969) : 걸작이죠!
229. Untouchables, The (1987)
232. X2 (2003) : X맨 2군요.
235. Planet of the Apes (1968) : 리메이크작은 솔직히 쓰레기였습니다.
238. Die xue shuang xiong (1989) : "첩혈쌍웅!"
239. Others, The (2001)
248. Beauty and the Beast (1991)
249. Spider-Man 2 (2004) : 겨우 겨우...

2005/03/10

숲을 지나가는 길 - 콜린 덱스터 / 이정인 : 별점 3.5점

숲을 지나가는 길 - 8점 콜린 덱스터 지음, 이정인 옮김/해문출판사

1년 전, 배낭만 발견되어 실종 처리된 스웨던 여대생 카린 에릭손을 찾기 위해 경찰에서 벌였던 장기간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건은 미결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타임즈 지에 보내진 여대생 실종 사건과 관련된 수수께끼같은 독자의 투고詩로 경찰은 다시 수사에 착수했고, 기존의 존스 경감대신 모스 경감이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휴가 도중 복귀하여 사건을 맡게 된 모스 경감은 시에서 유추해낸 해답으로 와이탐 숲 수색에 착수했고 곧바로 숲에서 유골을 발견했다. 그러나 유골이 사실 남성의 것이었다는 것이 밝혀진 후, 사건의 중요 참고인 중 한명이었던 데일리 마저 살해되면서 사건은 또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데....

모스경감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1작인 "옥스퍼드 운하 살인 사건"은 재미는 있었지만 조금 짧고 모스의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별로 없어 아쉬웠는데 2번째 작품은 상당한 길이의 장편이 출간되었네요.

일단 이 작품은 그동안 제가 다른 작품들에서 보아온 모스 경감의 모습 중에서 가장 적나라하면서도 화끈한 모습을 여러번 보여줍니다. 어떻게 보면 모스라는 캐릭터의 전부랄까요? 호색한이면서도 음주와 클래식을 즐기는 모스의 모습은 천재 탐정으로서의 잘난척과 부조화속의 조화를 이루어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유쾌한 캐릭터를 잘 드러냅니다. 또 그동안 개그 캐릭터와 천재 탐정을 오가던 모스라는 인물 묘사에서 천재 쪽 비중이 더욱 높아서 사건에 대한 명쾌한 추리가 곳곳에 등장하며 사건 해결을 위한 활약도 상당한 편입니다. 거기에 더해 친하게 지냈던 검시의 맥스의 죽음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좋아하는 여인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경찰 조직의 힘을 동원 하는 등의 모스의 모습은 확실히 이전 작품과는 많이 차별화 될 정도로 디테일하고 재미있게 꾸며져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루이스는 의외로 비중이 작아서 조금 아쉬웠지만요.

추리적으로는 포맷은 전혀 다르지만 이전에 읽었었던 "사라진 소녀"와 유사한 점이 느껴졌습니다. 어떤 여인이 사라진 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설정이 흡사하거든요. 그래서 중반 이후에는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모스가 사건 초반의 단서들을 종합하여 스스로만의 해답을 내놓은 뒤 그것을 밝혀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새로운 해답을 만나게 된다는 전개는 역시나 다른 작품들과 유사하지만 이 작품은 모스가 처음 내 놓은 해답이 정답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과정이 일관되게 흘러간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이고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천재형"에 더 공을 들였달까요?

복선이나 독자에 대한 정보도 비교적 공정한 편입니다. 뭐 본격물로 보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이기도 하지만 "수사"를 기본으로 하는 "현대 경찰 수사물"이라는 한계상 이 정도면 상당한 수준이라 생각되네요.

하지만 이 작품에서 작가가 공을 가장 많이 들였음직한 사건의 열쇠가 되는 수수께끼 시는 일종의 암호 트릭인데 상당히 괜찮은 편이긴 하지만 영어를 잘 모르면 해독이 불가능 하다는 점, 그리고 결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알리바이 트릭이 생각보다는 맥빠진다는건 조금 아쉽습니다. 아울러 이른바 "정체"를 밝히는 부분의 단서가 너무 깔끔한 탓에 조금 시시하게 보여진 것도 그러하고요. 이것 역시 "현대 경찰 수사물"의 한계겠죠. 

내용적으로도 각 등장인물들의 연결고리에 너무 신경쓴 듯 우연에 의한 설정이 많은 것은 단점이며 더 압축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페이지 수는 약간 부담되긴 했습니다. 영국 추리물 답지 않게 호색적인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하여(물론 그 중 한명은 모스입니다^^) 성적인 묘사가 좀 과한 부분도 한국 문화와는 좀 맞지 않는 점이라 생각되었고요. 물론 비슷하게 "포르노 영화"를 소재로 했던 에드 멕베인의 "장화신은 고양이"에 비하면 7만배는 낫지만요.

이렇듯 약간의 단점이 있기는 하나 결론적으로는 추천작입니다. 이 긴 호흡의 이야기를 잘 마무리 해서 깔끔하게 정리하는 작가의 필력에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네요. 마지막 반전도 상당히 인상적이었고요. 별점은 3.5점입니다. 다음권이 기대되네요.

PS : 일부 독자들 간의 마지막에 찾아오는 여인의 정체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데 저는 클레어 오스본이라 생각됩니다.

2009/07/24

김시광의 공포영화관 - 김시광 : 별점 3점

김시광의 공포 영화관 - 6점
김시광 지음/장서가

이글루스에서 arborday라는 아이디로 영화에 대한, 특히 공포영화에 대한 다양한 리뷰를 남겼던 김시광님의 공포영화 리뷰 모음집입니다. (지금은 이사가셨지만요) 리뷰만 있는 것은 아니고 간단한 공포영화의 역사 등 여러가지 정보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고요. 이번 렛츠리뷰를 통해 운좋게 당첨되어 읽을 수 있게 된 책입니다. 관계자 여러분들께 리뷰에 앞서 먼저 감사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 책은 김시광님과 그의 공포영화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일상적으로 풀어나간 Part 1, 그리고 주제별로 11개의 목차로 나눠 각 목차별 주요 공포영화를 소개하는 Part 2, 그리고 그 외의 간략한 정보를 다룬 Horror Tip 파트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중 이 책의 핵심은 흡혈귀, 좀비, 몬스터, 오컬트, 망령, 귀신들린 집, 로맨스, 가족, 정체성, 이성의 한계, 기타의 목차로 나누어 41편의 영화를 소개하고 있는 Part 2입니다. 이 41편의 소개된 영화 중에서 제가 본 영화는 "드라큘라", "울프", "엔젤하트", "스크림", "식스센스", "신체강탈자의 침입" 의 달랑 6편 뿐이네요. 나름 영화를 많이보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유명작품을 이렇게까지 놓치고 보지 않은 이유는 언젠가 제 블로그에 쓴 적도 있지만 "공포영화"라는 쟝르 자체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포"라는 감정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의사체험할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하기때문이 크고, "고어"라는 표현 방식을 극도로 혐오하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책을 보면서 정말로 감탄했습니다. 공포영화를 싫어하는 저같은 사람이 여기 등장하는 여러 영화들을 "보고싶다"고 느끼게 만드는 장르와 그 영화에 대한 애정이 페이지마다 묻어나는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거든요. 교묘하게 스포일러가 될만한 부분을 피해가며 줄거리와 영화의 핵심에 대해 설명하는 글솜씨 역시 보통이 아니고 말이죠. 하여간 어떤 분야에 그야말로 "일가를 이룬" 사람의 전문가적 식견이 돋보이는 책은 그 책이 어떤 주제를 다루건 (심지어는 꽃꽃이를 다루고 있더라도!) 항상 볼만한 법이죠. 이 책 역시 도착하자마자 하루만에 후딱 읽어버릴 정도로 재미있었습니다.

또한 단순히 특정 하위 장르의 인기작들만 훝어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영화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국가에서 제작된 영화들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취미가 아니라 "학술적인" 깊이까지 느껴지기에 정말 대단하다고 말 밖에는 할 수가 없네요. 개인적으로 저 역시도 "추리"라는 특정 장르에 많이 치우쳐진 애호가인 탓에 김시광님의 이러한 노력과 열정이 어떠한 것인지 어느정도 이해가 되었기에 읽으면서 눈물이 앞을 가리기도 했습니다 ㅠ.ㅠ 대한민국은 아직 이러한 쟝르에 대한 홀대가 여전하기에 저 역시도 추리문학을 좋아한다는 이유때문에 대다수 사람들에게서 오타쿠 취급을 받기 일쑤였으니까요. 난 오타쿠가 아니라 추리를 좋아하는 애호가일 뿐인데...

공포영화를 싫어하는 제가 재미있게 본 몇 안되는 공포영화들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 ("이벤트 호라이즌" 등등등) 과 얼마전 읽고 실망했던 김종일 씨의 소설에 대해 극찬을 하는 부분 등 저와는 취향이 맞지 않는 점도 눈에 뜨이긴 하지만, 이만큼의 전문가가 특별히 아는척이나 잘난척하지 않고 일반 독자들을 위하여 자신의 지식을 쉽게, 알기쉽게 전달해 주는 국내에 보기드문 "호러영화 입문서"를 만들어 내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앞으로 이러한 장르문화에 대한 다양한 도서들이 많이 출간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죽기전에 꼭 봐야할 영화"나 "클래식 명반 100선" 같은 책이나 이 책이나 전문가가 해설하는 해당 문화에 대한 입문서라는 점에서는 다를게 하나 없잖아요?

별점은 평이하고 무난하기에 3점입니다. 최근 대한민국의 현실이 더 호러이고 무섭기에 책으로 접하는 호러무비의 충격이 약한 점이 조금 아쉬운 점이었지만 재미있는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걸작이라고 단언하시면서 소개하신 "악마의 씨"와 "오디션", "큐어" 등은 아무리 취향이 아니더라도 꼭 챙겨봐야겠어요.

덧붙여, 추리소설에 대한 리뷰 - 입문서 출간을 원하시는 출판사가 있으시다면 저에게도 연락 한번 주시기 바랍니다^^ 워낙 인터넷 상에 거물들이 많으셔서 저한테까지 차례가 오지는 않겠지만요...

2008/11/05

명탐정 코난 극장판 Vol.12 - 전율의 악보 (Full Score of Fear) : 별점 3점

유명 피아니스트 도모토 카즈키의 도모토 홀 개관 공연인 파이프 오르간 연주회를 앞두고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소노코 덕분에 연주회를 참관하게 된 코난 일행은 연주회에 참여하는 소프라노 가수 아키바 레이코와 친분이 생기지만, 아키바 레이코를 노리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후 살인사건이 연쇄살인사건으로 발생하지만 범인은 오리무중. 그 상태에서 연주회의 막이 오르는데....

잊을만 하면 등장하는 명탐정 코난 극장판의 12번째 작품을 어제 감상하였습니다. 클래식 연주회가 주 소재인데 "노다메 칸타빌레"의 영향일까요? 어쨌건 이전 작품인 "감벽의 관"이 상상을 초월하는 쓰레기였던지라 별 기대를 하지는 않았는데 이 작품은 그런대로 평범한 수준의 완성도는 보여주더군요. 하긴 "감벽의 관"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모욕이겠지만...

이유는 안정된 작화, 그리고 근래 코난 극장판에서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작용하기도 했던 "올스타 캐스팅" 이 자제된 덕분이기도 하겠죠. 이 작품에서는 전형적인 코난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인 모리탐정 - 란 - 소노코 - 아가사박사 - 소년 탐정단 정도만 등장하고, 실질적 활약의 90%를 코난이 담당하고 있어서 이야기가 분산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란과 소노코, 아가사 박사와 소년 탐정단은 평상시의 역할대로 불쌍한 피해자와 개그 캐릭터 정도로만 활용되고 있는 덕분입니다. 막판 하이바라의 잠깐 활약은 제가 하이바라의 팬인지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고요. "아동 모험 활극"으로 전락한 다른 극장판들에 비한다면, "추리"라는 요소를 살리고 있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 만족스러운건 아닙니다. 너무 평범해서 극장판에는 걸맞지 않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범인도 조금만 생각하면 추리가 가능할 정도니까요. 제목과 내용에 걸맞게 약간의 음악적 장치가 양념처럼 쓰이지만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으며, 아무리 음악을 이용한 트릭을 위한 설정이라지만 전설의 음치 코난-신이치가 "절대음감"의 소유자라는 발상은 당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범행 동기도 설득력이 낮았고, 마지막 살짝의 반전은 괜찮았지만 오해 치고는 너무 스케일이 큰 것 아닌가 생각되네요.

또한 극적인 상황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몇가지의 설정들도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밖에서 폭탄이 수십발 터지고 있는데 아무리 완전 방음된 콘서트 홀이라도 내부의 관객들이 전혀 모른다는 상황, 목소리로 주파수를 맞춰 멀리 떨어져있는 전화를 건다는 등은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무리입니다. 괜히 이야기만 길어졌어요. 이야기가 길어진 것에는 "연주" 장면이 삽입된 탓도 있지만 더 압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극장판"이라는 수준은 겨우 충족시켜 주는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전작보다는 훨씬 나은 수준의 완성도라 다행이라는 느낌이 드네요. 아주 좋았던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기는 무리지만 별로였던 작품들보다는 나은, 최근작들 중에서는 손꼽을만한 나름의 이야기 완성도는 갖추고 있거든요. 다음 작품은 좀 더 좋아지길 바라겠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분발하세요~!

2016/12/10

스파이 vs 스파이 : 블랙(& 화이트) 작전 - 안토니오 프로히아스 / 최연석 : 별점 1.5점

스파이 vs 스파이 : 블랙(& 화이트) 작전 - 4점
안토니오 프로히아스 지음, 최연석 옮김/시공사(만화)

흰색과 검은색, 똑같이 생기고 색깔만 다른 멸치처럼 생긴 스파이 두 명이 복잡한 장치와 계획을 가지고(주로 부비 트랩이죠) 승부를 벌인다는 내용인 "스파이 대 스파이"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수십 년 전 모 잡지(아마도 "학생과 컴퓨터"?)에서 처음 접했었지요. 슈퍼 히어로나 유명 캐릭터물만 있는 줄 알았던 미국 만화에서 처음 접했던 파괴적인 슬랩스틱 개그물이라는 문화 충격과 함께 정교한 그림, 쉽고 재미난 이야기로 즐겁게 감상했었습니다.

허나 이후 게임까지 등장한 인기에 비하면 국내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아 그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이번에 정식 소개된다는 것을 알고 출간과 동시에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피천득의 "인연" 같은 느낌입니다. 예전의 좋았던 추억은 추억대로 남겨 놓는게 좋았습니다. 괜히 구입해 읽었네요.
일단 책 소개를 보면 24건을 가려 뽑았다는데, 대체 무슨 기준으로 뽑았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 느꼈던 정교함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야기들이 많은 탓입니다. 특히나 "스파이 대 스파이"의 핵심은 일종의 '골드버그 장치'스러운 장치들을 활용한 개그인데, 그런 이야기의 비중이 너무 낮습니다. "유도탄 장난"이나 "잠수함 대결", "출구에서 출구로" 등 전체에서 반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아요.
또 생각외로 잔인한 발상들도 눈에 거슬립니다. 원숭이와 뇌를 바꾸어 골탕먹인다는 이야기, 피라냐를 먹인다는 식의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재미있지도 않고 기분만 불쾌해질 뿐이었어요.

게다가 어렸을 때에 보았던 버전은 잡지 판형으로 한 페이지에 한 에피소드가 들어가는 식이라 화면이 축소된 덕에 작은 컷 안에 정교함이 잘 살아 있어서 좋았는데, 복간본은 한 페이지가 거의 1~2컷입니다! 원래 미국에서도 이렇게 발표된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페이지를 몇 컷으로 소화할 정도로 컷의 밀도가 높지는 않습니다. 컷 분할에 따른 흐름과 호흡도 잘 느껴지지 않았고요. 특히 작품의 페이지를 넘기는 방식으로 보다 보니 스파이들의 대결이 잘 살아나지 않습니다. 이 책만큼은 판형을 키워서 1~2페이지에 한 편 정도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출간되었어야 합니다. 페이지는 얇아지더라도 훨씬 가치가 높았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잊혀진 클래식의 재발굴 복간은 분명 환영할 일입니다. 지금 읽기에 낡아보인다는건 충분히 감안할 수 있고요. 그러나 이를 뛰어넘을 정도로 재미도 없고 책의 완성도도 낮아서 도저히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혹 저와 같이 옛 추억 때문에 구입을 고려하신다면, 부디 참아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