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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4

사형에 이르는 병 - 구시키 리우 / 현정수 : 별점 2.5점

사형에 이르는 병 - 6점
구시키 리우 지음, 현정수 옮김/에이치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케이 마사야는 명문 사립 고등학교 입학 때까지는 승승장구했지만 고등학교 입학 후 전락했다. 그래서 지금은 3류 대학교에 겨우 입학하여 아웃사이더로 다니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어린 시절 단골 빵집 주인 하이무라 야마토가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9명을 연쇄 살인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사형수였다. 마사야와의 면회에서 그는 9번째 범행만은 저지르지 않았다며, 진실을 밝혀달라고 부탁했다. 

하이무라 야마토의 과거, 그리고 범행에 대해 조사에 나선 마사야는 어머니 에리의 과거를 알아냈다. 그녀는 야마토와 같은 학대 아동으로 어린 시절 한 때. 같은 양모 밑에 있었었다. 그리고 결국 변해가는 자신과 함께 충격적 사실에 마주하게 되는데...

천재 연쇄 살인범이 저지르지 않았다는 살인 사건진상을 더듬어가다가,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는 내용의 범죄 스릴러입니다. 

천재 범죄자가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는 하늘의 별처럼 많습니다. 감옥 안에 갖혀 있는 천재 범죄자는 하니발 렉터라는 거물이 수십년 전에 이미 보여줬던 설정이고요. 그러나 이 작품에는 주인공과의 두뇌 대결이나, 주인공을 도와 또 다른 범죄를 막는 다른 천재 범죄자 작품들과는 분명히 차별화 되는 점이 있습니다. 천재 범죄자 하이무라 야마토의 진짜 목적이 가케이 마사야를 조종하는데 있었다는 반전입니다. 이 반전이 몇 가지 의문들, 왜 마사야에게 편지를 보냈는지? 9번째 범행인 네즈 가오루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 등이 풀리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전개도 일품이고요.
첫 번째 의문에 대한 답으로, 작가는 마사야가 야마토의 아이인 것 처럼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흥미로운 전개이지만, 이는 마사야의 모친 에리에 의해 부정됩니다. 그리고 야마토가 사이코패스이며 자신의 통제력을 발휘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마사야를 골랐다는게 밝혀집니다. 네즈 가오루를 살해한 진범으로 의심되었던 가나야마 이츠키를 통해서요. 즉, 마사야는 수많은 야마토의 조종 희생자 중 한 명일 뿐이었다는게 진상입니다. 이 과정에서 가나야마 이츠키를 우연히 만나게 된 이유도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그 역시 희생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이무라 야마토의 목적을 사이코패스에 대해 비교적 충실한 사례와 근거들로 뒷받침하면서 설득력있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입니다. 작가가 저도 얼마전에 읽었었던 "사이코패스"라는 책을 많이 참조한 듯 싶더군요. 그 책에 나왔던 사이코패스의 특징 - '강력한 통제력'과 '빼어난 거짓말 솜씨',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능력' - 이 이야기 안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나거든요. 아울러 사이코패스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면서, 야마토가 이츠키를 조종하기 위해 '3초 안에 대답할 것' 등의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를 9번째 네즈 가오루 사건과 연결시키는 과정도 감탄스러웠습니다. 어쨌건 9번째 범행도 야마토가 저질렀다는것 뿐만 아니라, 왜 그 사건이 다른 사건과 범행 수법이 사뭇 달랐는지, 왜 네즈 가오루가 희생양으로 선택되었는지, 왜 이츠키가 계속 그 사건과 엮였는지가 명확하게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독특한 점을 제외한 다른 모든건 반전이 있는 일본 범죄 스릴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단점은 큽니다. 전능한 천재 사이코패스 야마토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일본 소설이나 만화에서 수도 없이 등장해 왔던 쿨한 천재 악당 그대로인 탓입니다. 그 외 캐릭터도 극단적으로 과장되어 있습니다. 사람 대하는게 서투른 마사야가 여러 증인들과 만나 인터뷰를 서슴없이 능숙하게 진행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졌고요. 그 외에 시점을 간혹 바꿔가며 독자에게 혼돈을 준다던가, 불필요하게 과장된 잔혹한 범죄 묘사 등은 그야말로 일본 범죄 스릴러물의 단점만 모아서 집대성한 느낌이었습니다.

야마토의 목적을 드러내는 전개는 괜찮다고 말씀드렸지만, 세세하게 들어가면 억지스러운 부분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마사야가 진행하는 야마토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조사의 경우, 솔직히 불필요했습니다. 9번째 살인을 야마토가 저지르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조사라면, 야마토의 과거는 조사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소설로 만들기 위한 억지 장치였던 셈이지요. 

야마토의 피해자이자 사건 증인 중 한명이었던 가나야마 이츠키를 9번째 범행 용의자라고 단정짓는 과정도 마찬가지에요. 우연치고는 지나치게 마사야와 엮이기는 했지만, 다른 근거는 하나도 없어서 억지스러웠습니다. 그 외에도 마사야의 친부가 누구인지, 가나야마 이츠키는 어떤 인물인지를 조사하는 과정도 작위적입니다. 마사야가 야마토의 아들인지는 어머니에게 전화로 물어보면 됐고, 가나야마 이츠키도 그냥 만나면 됐으니까요. 쉽고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억지로 돌아갈 필요는 없잖아요?

아무리 일본 검찰이 기소한 범죄를 유죄로 만드는 경향이 강하다 하더라도, 3류 대학 법대생도 금방 눈치챌 정도로 이상한 사건을 엮어서 야마토의 범죄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긴, 애초에 자격지심에 시달리는 찐따 가케이 마사야가 중학교 시절 약간의 접점밖에 없었던 야마토의 부탁으로 조사에 나선다는 것 부터가 억지스러웠으니 더 말해 무얼 하겠습니까.

마지막에 마사야와 사귀게 된 아카리도 야마토에게 조종받고 있었다는 에필로그도 과했습니다. 사족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녀는 야마토가 납치했지만 운 좋게 살아서 도망치는데 성공했다는 소녀일텐데, 그렇다면 그녀가 야마토에게 조언을 얻으며 조종당하게 된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걸작 잔혹 서술 트릭 작품인 "살육에 이르는 병"이 떠오르는 제목이라 선뜻 손이 가지 않았는데, 나름의 독특한 맛은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전형적인 일본식 범죄 스릴러가 취향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괜찮지만, 그렇지 않으시다면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8/08/15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 데이비드 발다치 / 황소연 : 별점 2.5점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 6점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황소연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직 미식축구 선수였던 에이머스 데커는 시합 중 큰 충격을 받고 죽다 살아난 후, 모든 것을 기억하는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 그 뒤 경찰로 변신한 데커는 능력을 이용해 많은 범죄를 해결해 나갔다.
그러나 아내와 딸, 처남이 처참하게 살해당한 후 거의 폐인이 된 데커는 가족이 살해당하고 15개월 후, 범인이 자수했다는 이야기를 옛 파트너로부터 전해 듣는데...

최근 잘 나간다는 작가 데이비드 발다치의 작품입니다. 소문만 들었지 읽어본 건 처음이네요.

천재 탐정과 천재 범죄자의 대결을 그린 작품은 쎄고 쎘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탐정과 범죄자가 천재인 이유에 대한 설정으로 차별화하고 있습니다. 모두 후천적인 서번트 증후군 능력으로, 이는 20년 전 둘에게 닥쳤던 커다란 충격과 관련이 있다는 설정이지요.

이 능력을 이용하여 범죄자 와이트를 추적해 나가는 에이머스 데커의 추리 과정이 재미의 핵심 요소인데, '모든 것을 기억하는' 데커의 두뇌가 여러가지 상황과 단서를 토대로 범인이 내 건 수수께끼를 하나씩 해결해 가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이 적절한 복선과 함께 설득력있게 묘사됩니다. 학교에서 범인의 이상한 행동을 분석하고, 여러가지 수사를 통해 범인의 탈출구와 이동경로를 발견하는 식으로요.
또 이를 뒷받침하는 CCTV 및 각종 감식, 과학 수사와 같은 설정들과 현실을 색깔, 숫자와 함께 기억하고 인지하는 데커의 능력에 대한 묘사도 훌륭합니다.

그러나 복선이 잘 짜여져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작위적입니다. 예를 들어 데비의 할아버지가 방공호에 대해 데비에게 알려주었다는건 완전히 우연에 불과합니다. 차라리 오래된 설계 도면을 뒤져서 알아냈다는게 나았을 거에요. 그리고 냉장고 안에 숨어 있을 수 있다가 철조망 구멍으로 빠져나갔다는 처음의 추리도 가능한데, 구태여 비밀 통로를 통해 빠져나갔다는 수수께끼를 배치한 이유도 잘 모르겠어요. 데비에게 수사가 쏠리게끔 하려는 의도였다면 사물함 속 노트의 그림으로 충분했으니까요.
처음에 세븐 일레븐이 편의점이 아니라 과거 인지연구소 주소를 의미한다는 걸 미리 깨닫지 못한 것도 어설픕니다. 레오폴드의 존재는 마지막 대결에서 내분을 일으켜 자멸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는데, 이 마지막 장면은 굉장히 작위적이고 뻔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설명도 부족합니다. 데커의 처남과 아내, 딸을 잔혹하게 살해한 뒤 1년 이상 지난, 15개월 후 시점에 맨스필드 고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을 일으킨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데커와 게임을 하려고 했다면 첫 살인 시점에서부터 게임이 시작되었어야 합니다. 이 사이에 데커가 도시를 뜨거나, 자살을 할 수도 있잖아요?
레오폴드가 구태여 자수를 하여 존재를 드러낸 이유도 이해불가에요. 범행의 동기를 직접 드러냈고 세븐 일레븐이라는 단서를 남긴 것 외에는 레오폴드의 자수, 석방과 실종과 이 게임은 무관한 탓입니다. 동기와 단서는 게임을 위해 필요했지만 직접 모습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죠. 다른 단서들처럼 메시지로 남겨도 충분하니까요. 

아울러 범인 와이트를 너무 전능한 것으로 묘사한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기억을 잘 한다고 해서 천재 범죄자가 되는건 아닌데 말이지요. 변장의 천재라는 설정도 억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동기에요. 범인이 에이머스 데커의 일가족을 죽이고, 고등학교에서도 여러 명을 죽이고 데커와 게임을 벌이는 과정만 보면 데커를 뼈저리게 증오하고 있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증오의 원인이 둘이 함께 지냈던 연구소에서의 사소한 행동 - 와이트는 경찰관과 미식축구 선수들이 포함된 그룹에게 폭행과 강간을 당했는데, 미식 축구 선수 출신인 에이머스 데커가 장래 경찰관이 되겠다고 해서 그를 증오하게 되었다 - 때문이었다? 아내 성폭행 사건에서 범인들이 아니라 신고하지 않았던 목격자들을 죽여나간다는 희대의 쓰레기 "살인 곱하기 다섯" 급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동기였어요. 증오심을 품어야 하는 대상의 번지수가 틀려도 너무 많이 틀렸잖아요. 이렇게 잔인하고 방대한 범행을 저지를 만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은 많지만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재미만큼은 확실한, 더운 여름날 한가롭게 읽기 적당한 킬링타임용 소설입니다. 

2015/09/01

팡토마스 1 - 피에르 수베스트르, 마르셀 알랭 / 성귀수 : 별점 2점

팡토마스 1 - 4점 피에르 수베스트르.마르셀 알랭 지음, 성귀수 옮김/문학동네

아주 어렸을 적, 아마 초등학교 시절 "팡토마"라는 영화를 TV를 통해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로는 보기 드문 프랑스 액션 영화로 시끌벅적한게 재미있었지요. 무엇보다도 “팡토마”가 주인공이 아니라 악당 조직의 우두머리 범죄자 이름이라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범죄자가 주인공인 작품이야 뤼뺑을 필두로 많긴 하지만 그래도 악당이라기보다는 안티히어로 같은 캐릭터인데 반해, 팡토마는 잔인무도한 악당이라는 점 때문이었지요. 만화 버전 루팡 3세 스타일이었달까요? 시퍼런 얼굴빛의 범죄 신사로 두 편의 시리즈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끝까지 잡히지 않고 도망친다는 결말도 기억에 남네요.

이 작품이 사실은 100년도 더 된 옛날 프랑스에서 발표된 범죄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영화를 감상한 한참 이후, 장르문학 애호가가 되면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보만 있을 뿐 국내에서 출간된 이력이 없기에 입맛만 다셔왔습니다. 어린이용으로 발표된 절판본을 어렵사리 구하기는 했지만 번역도 문제였고, 축약이 심해서 제대로 감상했다고 보기는 어려웠고요.
그런데 이러한 기다림의 시간에 보답하듯 "뤼뺑" 시리즈 완역으로 유명한 전문 번역자 성귀수 씨께서 직접 손댄, 정말로 제대로 된 원작이 출간되었습니다. 사실 출간은 어언 3년 전이긴 하지만요.

하여튼, 뒤늦게 읽은 이 작품은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위에서 절절히 소개한 대로 오랫동안 관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읽지 않은 이유는 기대가 별로 되지 않았던 탓입니다. 걸작으로 유명한 고전에서 뒷통수를 맞은 경험이 많아서인데, 역시나 이 작품 역시 오랜 기다림과 기대에 값하는 작품은 아니더군요.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시간이 오래 흘렀기 때문입니다. 발표 당시 충격을 안겨다 주었을 여러 설정과 아이디어는 이미 다른 작품들에서 숱하게 써먹은 탓에 신선함이 휘발된 지 오래거든요. 예를 들어 변장에 능숙한 천재 범죄자와 뛰어난 추리력을 갖춘 탐정의 대결, "괴인 20면상" 시리즈와 다를 게 없잖아요?

소설로서의 완성도 역시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합니다. 창작 배경부터가 철저한 상업성이었고, 신속한 저술이 더욱 중요했다고 하니 애시당초 완성도가 높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지만 정말 기대 이하였어요.
일단 사건이 반복되는 전개부터가 문제입니다. 랑그륀 후작부인 살인사건, 벨담경 살인사건, 에티엔 랑베르 재판 (랑그륀 후작부인 사건과 이어지는), 소냐 대공비 강도사건, 거언 체포, 돌롱 살인사건이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는데, 사건 하나하나는 흥미진진하지만 이어지는 방식이 영 뜬금없기 때문이에요. 랑그륀 후작부인 살인사건 - 벨담경 살인사건 - 소냐 대공비 강도사건의 전혀 다른 세 가지 이야기가 연결된 느낌으로, 이야기의 얼개를 제대로 갖추어 놓고 썼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추리·범죄물로 보기에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애호가로서 아쉬운 점입니다. 오직 등장하는 것은 변장밖에는 없어요. 밀실 트릭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 랑그륀 후작부인 살인사건의 진상은 에티엔 랑베르로 변장한 팡토마스가 방문한 것이고, 대공비 사건에서 팡토마스가 깜쪽같이 호텔을 빠져나간 방법 역시 변장이며, 심지어 주변 인물인 샤를 랑베르조차 변장하여 은신해 있었고 쥐브 반장의 주요 수사 방법도 변장해서 탐문 수사하는 겁니다. 작가가 변장 외에는 다른 아이디어가 전무했구나! 라는 생각마저 들어요.

물론 범죄자가 주인공인 범죄물에 꼭 대단한 트릭이 등장할 필요는 없긴 합니다. 허나 팡토마스가 익히 알려진 만큼 천재적인 범죄자로 잘 그려졌느냐, 그리고 범죄가 정말 잘 짜여진 치밀한 범죄냐 하면 그 역시 아닙니다. 에티엔 랑베르가 아들 샤를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는 초중반 장면이 대표적이죠. 에티엔 랑베르가 무죄 방면된 것은 순전히 운일 뿐으로, 배심원 설득에 실패했더라면 과연 어떻게 빠져나갔을까? 라는 문제에는 답이 없어요.

무엇보다도 거언(팡토마스)이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탈옥하기까지는 어이없음의 정점을 찍습니다. 돌롱 집사를 살해하기 위해 잠깐 빠져나갔다가 돌아오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형 집행 전날 자신을 닮은 연극배우를 끌어들여 대신 죽게 만드는 결말까지 전부가 설득력이 전무하더군요. 팡토마스가 그 시점에 정부인 벨담 부인을 찾아갈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점도 설득력이 떨어지는데, 돌롱 집사를 살해하기 위해 쉽게 빠져나갔음에도 다시 돌아와 사형 전날까지 목숨을 걸고 운에 의지한 채 버틴다? 이게 말이 될 리가 있습니까. 그냥 돌롱 집사를 죽이고 도망가면 그만이지... 연극배우 발그랑 포섭에 실패했다면 어찌 되었을지에 대한 답도 없고 말이죠. 돈으로 몇 시간 빠져나오는 게 가능하다면 도주는 더 쉬웠을 텐데 일만 크게 벌인 꼴 아닌가 싶어요. 한마디로 변장과 행동력은 있지만 명성만큼의 전설적인 범죄자인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추리력만 따지자면 오히려 라이벌 쥐브 반장의 캐릭터가 더 낫더군요. 초반 살인사건에서 외부에서 범인이 침입했음을 설명하는 장면 등에서 제대로 추리력을 선보이거든요. 직접 발로 뛰면서 증거를 모아 범인이 어떻게 기차를 타고 내렸으며 어디서 뛰어내렸는지 등을 확인한 증거로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장면은 동시기의 셜록 홈즈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싶긴 하지만 추리애호가로서 충분히 만족할 만했습니다.

그런데 쥐브 반장의 추리가 샤를 랑베르를 범인으로 만드는 저주받은 유전자 논리와 엮이는 부분은 좀 특이했습니다. 근대와 중세적 사고관의 충돌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거든요. 작중 시대가 증기기관차와 자전거, 마차가 공존하는 근대화 초입기라 그러한 것 같은데 상당히 이색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베르티용 측정법이 효과적으로 쓰이는 것도 인상적이었고요.

그래도 좋은 점은 너무 적네요. 전설임에는 분명하기에 역사적 가치까지 평가한 별점은 2점입니다만, 지금 읽기에는 너무 퇴색해버린, 낡아버린 이야기일 뿐입니다. . 소개가 너무 늦은 것이 아쉽기만 할 따름입니다. 2권은 아무래도 읽게 될 것 같지 않군요.

2015/05/05

대낮의 사각 1/2 - 다카기 아키미쓰 / 김선영 : 별점 3점

대낮의 사각 1 - 6점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검은숲
대낮의 사각 2 - 6점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검은숲

도쿄대 역사에 남을 정도의 천재 스미다 고이치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아 "태양 클럽"이라는 조직을 만든 뒤, 전후 혼란기에 거대한 재력을 손에 넣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잠깐의 성공 이후 스미다는 폭주한 끝에 자살이라는 최후를 맞았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의 추종자 중 한명이었던 쓰루오카는 스스로 "사기"라는 범죄로 성공할 생각을 굳히는데...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으로 무려 800여페이지가 넘는 초거대작. 문예춘추 선정 일본 미스터리 100선에도 선정된 (28위)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도착의 사각"이 떠오르는 제목이라 당연히 본격물이라 생각했는데,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 가미즈 교스케, 기리시마 사부로, 햐쿠타니 센이치로가 등장하는 정통파 본격 추리소설이 아니라 쓰루오카 시치로라는 천재적인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한 범죄 소설이라서 조금 의외였습니다.

그래도 재미만큼은 확실합니다. 얼마나 범죄가 치밀하게 그려지는가?가 범죄 소설의 핵심 재미 요소인데, 등장하는 어음 편취 사기의 설득력이 아주 높은 덕분입니다. 어떻게 어음을 손에 넣는지와 그것을 어떻게 현금화 하는지에 대해 재미있으면서도 기발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등장하는 여러 사기 사건 중에서도, 어음을 발행하는 피해자가 홀딱 속아 넘어가도록 일본 조선 주식회사로 위장한 회사 건물 안에서 연극을 연출하듯 모든 상황과 장소를 조작했던 '신요 기선 어음 편취 사건', 그리고 실존하는 공사관을 무대로 대사의 비서와 직접 짜고 벌인 '파세도나 공사관 사기 사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외의 사건들도 치밀함은 뒤지지 않습니다. 실제 범죄자와 직접 인터뷰를 한 뒤 쓰여졌다고 하는데, 생생함과 설득력이 정말 대단한 수준이에요. 항상 사기는 당하는 쪽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는데, 이렇게까지 치밀하면 도저히 벗어날 수 없겠다 싶은 생각도 듭니다.

아울러 주인공이 도쿄대 법대 출신이라는 설정을 대기업 임원과의 술자리 대화를 통해 자금을 편취하는 사기라던가, 경찰 취조를 빠져나가는 부분 등에서 효과적으로 써먹는 것도 괜찮았어요.

또 범죄 소설은 주인공 범죄자의 캐릭터도 무척이나 중요한 요소입니다. "뤼팽"은 고전 본격물에 가까워 뺀다 쳐도 "팡토마스", 리처드 스타크의 "악당 파커", 퍼트리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리플리" 등의 유명 악당 캐릭터는 지금까지도 그 생명력이 이어지고 있죠. 이 작품 역시 등장인물들 묘사가 아주 그럴듯한데, 그 중에서도 자신의 모든 행동을 분단위로 기록한다는 천재 스미다 고이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비록 초반부에 퇴장하지만 천재이자 광인으로 그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지배한 남자 류비세프의 흑화버젼이랄까요. 참고로, 실존했던 전후 도쿄대 출신 수재들이 벌인 "히카리 클럽" 사건 주역에게서 모티브를 얻어 묘사했다니, 이 역시 생생함이 남다를 수 밖에 없겠지요.

그리고 주인공들의 입을 빈 전쟁 직후, 이른바 전중 혹은 전후파라 불리우는 세대의 시각도 돋보였습니다. 메이지 세대라 불리우는 전쟁을 일으킨 세대에 대해 맹목적인 분노와 적개심 가득한데 1920년대 생인 작가 본인의 시각일겁니다. 허나 이들 역시도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도 성공은 하고 싶고, 위기에 몰리면 피해자 코스프레에 몰두하는 비겁한 인물들일 뿐입니다. 시대의 대악당을 꿈꾸지만 결국 소인배라는 것이 이채롭네요.

이렇게 소재 및 전개, 캐릭터까지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재미를 갖추고는 있는데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일단 이야기의 흐름이 하나의 거대 장편이라기 보다는 옴니버스 범죄물처럼 토막나 있어서 하나의 호흡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럴거라면 여러편으로 시리즈를 쪼개던가, 아니면 큰 줄기의 이야기는 넣지 않는게 좋았을겁니다.

주인공 쓰루오카의 캐릭터가 스미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약한 점도 아쉽습니다. 본인 스스로 악인을 자처하는데 인간적인 모습이 계속 엿보이게 만드니 죽도 밥도 안된 느낌이거든요. 차라리 "야수는 죽어야 한다"의 다테 구니히코처럼 막 나갔어야 했어요.
그나마 마무리 직전까지는 그런대로 능력있는 악당 느낌을 전해주는데, 마지막의 급작스러운 몰락 탓에 캐릭터 훼손도 심해져 버리고 말았네요. 쓰루오카를 집요하게 추적하던 후쿠나가 검사에 의해 체포된 뒤, 파세도나 공사관 사건에서 고용했던 하수인 곤잘로의 증언으로 한순간에 끝장난다는 결말인데 고작 이정도밖에 안되나? 싶었던 탓입니다. 좀 더 치밀한 안배, 효과적인 도주가 덧붙여져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 여성들에 대한 묘사가 별로라는 것도 단점입니다. "여자는 단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도구는 많을 수록 좋다"라는 스미다의 신조가 작품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지만, 다카코의 자살은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그야말로 개죽음이며 극적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니까요. 일종의 성녀 이미지를 작품에 집어넣어 쓰루오카의 악을 비교하여 더욱 추악하게 묘사하려는 의도였을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 진부한 캐릭터에 진부한 묘사로 인해 분량만 아까웠습니다.

그리고 이건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사기극들은 만화 "쿠로사기" 등에서 이미 접해본 것들과 비슷해서 신선함이 떨어지기는 하더군요. 작품이 발표된 시기에 읽어보았다면 굉장히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을텐데 지금 읽기에는 낡기도 했고요.

결론적으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쓸데없는 묘사는 덜어내고 패배를 모르는 냉혹한 악당 쓰루오카의 범죄 행각에 촛점을 맞추었더라면 별점 4점 이상은 너끈했을텐데, 약간의 단점들로 인해 감점합니다. 그래도 천재적인 범죄에 전율하게 만드는 거장의 솜씨는 놀라운 고전 명작임에는 분명한 만큼, 추리소설 애호가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덧 : 현재까지 국내 출간된 다카기 아키미쓰 작품 8편은 전부 다 읽어보았는데 개인적인 순위는 아래와 같습니다.
"야망의 덫" - "실험부부" - "파계재판" - "문신 살인사건" - "대낮의 사각 (본편)" - "유괴" -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 "제로의 밀월"

작품별 별점 평점이 2.037.., 3점이네요. "타율왕"에 올려도 부족함이 없겠습니다.

참고로, 야망의 덫과 실험부부는 제 추리소설 리뷰 초창기에 읽고 감상을 남긴 것이라 지금 읽으면 점수가 좀 처질 수도 있는 점 양지해 주세요.

2023/08/25

폭탄 - 오승호 / 이연승 : 별점 2.5점

폭탄 - 6점
오승호 지음, 이연승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진상,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0시 정각. 아키하바라 쪽에서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날 겁니다." 술에 취해 자판기를 훼손해 인근 경찰서로 붙잡혀온 남자가 왠지 촉이 온다며 내뱉은 이 말에 귀 기울인 경찰은 한 명도 없었다. "술이 덜 깼나?" 하는 비아냥은 10시 정각에 폭발 사고 신고가 들어오며 서늘한 공포로 변한다. 남자가 히죽거리며 말을 잇는다. "제 촉대로라면 지금부터 총 3회, 이다음에는 한 시간 후에 폭발이 일어날 겁니다."

가벼운 상해 사건이었던 이 건은 금세 최우선 순위로 격상되고, 본청 형사들이 취조실로 들이닥친다. 베테랑 형사들을 앞에 두고 남자는 선문답을 연상케하는 말을 늘어놓으며 '아홉 개의 꼬리'라는 퀴즈 게임을 제안한다. 어쩔 수 없이 제한 시간을 두고 그와 마주 앉아 절박한 게임에 참여하게 된 경찰. 허술한 주취자로 생각했던 남자가 "하지만 폭발한다고 해서 딱히 문제 될 것 없지 않나요?" 하며 싱글벙글거리고, 사건의 전모가 예상을 가히 뛰어넘는다는 것이 밝혀지며 취조실에는 오싹함이 감돈다. 이들은 폭발을 막을 수 있을까. (출판사 제공 줄거리 인용)

<<도덕의 시간>>, <<스완>>의 작가 오승호의 따끈따끈한 신작. 작년 거의 모든 일본내 추리, 미스터리 랭킹을 휩쓸었던 화제작이었지요. 천재 범인과 경찰의 대결을 독특하게 변주한 점에 더해 추리적으로도 (제가 읽었던 작가의 다른 작품들보다는) 빼어난 덕분일 겁니다. 
별볼일 없는 사고뭉치 노숙자로 보였던 스즈키가 폭탄 테러의 핵심 인물로 드러나는 도입부부터 굉장히 흥미로우며, 스즈키가 경찰에게 심문을 받으며 내 놓는 퀴즈(?)는 대부분 말장난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재미있고, 설명도 그럴듯합니다. 전설의 동물 구단 이야기로 지역은 '구단시타', '신의 말씀과 회문, 그리고 탁점'이라는 힌트로 '신문지'를 떠올리게 해서 구단시타의 조간신문을 배달하는 곳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는 정답을 이끌어내는 식으로요.
스즈키와 진범 다쓰미 일당과의 연결 고리를 더듬어가는 과정도 마찬가지에요. 스즈키가 일부러 남긴 핸드폰이라는 단서와 도도로키 형사의 심문 중 나온 하세베 유코의 이름을 통해 가족들을 찾게되는 수사 모두 다쓰미의 마지막 거주지로 연결되기 때문에 설득력이 높습니다. 다쓰미 시체에 설치된 폭탄이 폭발한 것도 단순히 경찰을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쓰미의 사인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목적이었다는 것도 합리적으로 설명되고요.
스즈키의 퀴즈로 역을 알아낼 수 없었던건, 그도 어떤 역에 폭탄이 설치되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추리도 좋았습니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스즈키는 다쓰미 일당이 아니었고 진범임을 자처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는 반전도요. 다쓰미의 모친 아스카가 아들의 테러를 알고 살해한 뒤 스즈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도 셰어 하우스에 다쓰미가 데려왔던 네 번째 인물, 그리고 스즈키가 노숙자 시절 알고 지냈던 신참 노숙자, 스즈키의 드래곤즈 모자 등으로 차분히 단서와 복선을 설계하여 잘 풀어내고 있습니다.
  
진범 다쓰미 일당이 계획했던 폭탄 테러 방법도 기발했습니다. 일당 중 한 명인 야마와키의 주류 배달업이라는 직업을 활용하여 음료수 형태로 가공한 폭탄을 자판기 안에 넣었다는데, 이래서야 경찰의 수색으로 찾아내지 못한건 당연하겠지요. 결국 정해진 시간이 되어 순환선 야마노테선의 주요 역들이 차례대로 폭발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었고요. 이건 영상화되면 꼭 한 번 보고 싶을 정도에요.

아울러 오승호 작품답게 사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구성도 좋았습니다. 단순한 사회파 범죄물처럼 특정 이슈에 대한 범죄를 등장시키는건 아니고, 주로 스즈키의 입을 통해 누군가 폭발로 죽을 때 내가 슬퍼해야 하는가? 인간의 생명은 과연 평등한가? 동료가 아닌 적의 목숨은 없애도 괜찮지 않나? 이 세상은 정말 살 가치가 있는가? 이런 세상은 모두 망해버려야 하지 않는가? 등 작가가 생각하는 사회적인 여러가지 문제를 직접적으로 전달합니다. 덕분에 스즈키의 캐릭터성도 독특하게 다가옵니다. 천재 범죄자이자, 사회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있을 '조커'가 배 나오고 머리에 땜통까지 있는, 자기비하에 능숙한 노숙자 출신 아저씨라니! 다시 보기 힘든 빌런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작가의 의지(?)가 투영되어 있는 듯한 메시지가 과잉인 탓입니다. 다쓰미가 가족이 무너진 것에 대한 복수의 의미로 테러를 저지른다는 동기는 명확하고 설정도 참신했지만, 그 뒤 스즈키가 테러를 떠안는 동기도 잘 설명되지 못해서, 메시지 전달도 공허합니다. 다쓰미가 직접 별거 아닌 일로 가족을 붕괴시킨 일본 사회에 복수하겠다는 메시지를 외쳤다면 설득력이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애초에 남편과 아버지가 변태였다는게 사회적으로 가족이 모두 매장당할 일인지 잘 모르겠거든요. 범행 현장에서 자위 행위를 한 건 피해자들 입장에서 분통이 터질 행위인건 맞지만, 법률적으로는 죄라고 보기는 어렵잖아요? 우리나라에서는 거주지만 옮겨도 가족들의 생활이 무너질 일은 없었을 겁니다. 이렇게 억울했을 다쓰미에 비하면, 스즈키의 메시지는 사회 부적응자의 개인 주장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또 노숙자에 불과한 스즈키가 어떻게 고도의 심리 - 정보전을 엘리트 경찰들과 대등하게 벌이는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유너바머' 정도의 배경은 있어야 할 인물 같은데, 노숙자라는 '현재'만 보여주다보니 그런 부분에서 설득력이 많이 부족해져 버렸네요.

그래도 스즈키는 독특한 매력을 뿜뿜해서 이야기를 끌고가는 주역으로서의 자리매김은 확실히 하고 있는 반면, 상대역인 경찰쪽 인물들의 매력은 부족하다 못해 없다시피 합니다. 도도로키 형사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상대방에게 공감하는 스타일이라서, 루이케는 정의와 사명감보다는 스즈키와의 게임에 심취해서, 기요미야는 심약하고 정서가 불안해서 스즈키에게 농락만 당하는 탓에 모두 맞상대로서의 격을 느끼기 어려웠던 탓입니다. 때문에 스즈키와 1:1로 대결을 펼치는 재미를 전혀 주지 못합니다. 이런 류의 작품에서 중요한 팽팽한 대결의 긴장감도 없다시피하고요. 마지막에 야마노테 선 폭탄 테러를 막지 못하는게 당연하다 싶을 정도였어요. 
그 외에도 친구의 부상으로 폭주하는 순경 사라, 자리를 지키는데에만 급급한 쓰루쿠 등도 그야말로 뻔하디 뻔한 스테레오 타입이라 지루했습니다.

가족 구성원 누군가의 범죄로 다쓰미 가족 모두가 무너져 버린다는 것 같이 다른 작품에서 보아왔던 설정도 많습니다. 천재 범죄자와 경찰과의 두뇌 게임은 물론이고, 스스로의 가치관에 맞는 행동을 고집하여 조직 내에서 고립된다던가 (도도로키 형사) 하는 이야기는 질릴 정도로 많이 봤습니다. 잇달아 일어나는 범죄 탓에 일반 시민들이 경찰서로 몰려드는 묘사도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등에서 이미 써먹었던 것이고요.
 
변태 남편 탓에 이미 지옥을 맛 보았던 아스카가 또 고통을 겪고야 마는 결말, 에필로그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다쓰미가 폭탄 탓에 산산조각이 나기 전 살해당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마지막에 스즈키를 죽일 의도로 경찰서로 찾아오기는 했지만 폭탄도 없었고, 살의를 증명할 방법도 사라의 증언 말고는 딱히 없어 보이고요. 그녀를 어떻게 재판에 회부할 수 있을까요? 그런 부분에 대한 설명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좋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알겠지만 제게는 좀 애매했습니다.

2017/06/18

미스테리아 5호 - 미스테리아 편집부 : 별점 2점

미스테리아 5호 - 6점
미스테리아 편집부 엮음/엘릭시르

구하게 되면 읽곤 하는 장르문학 전문 잡지 미스테리아 5호입니다. 작년 초에 출간된 한참 전 과월호지요. 언제나처럼 특집 기사와 신간 소개, 이런 저런 연재 기사, 인터뷰, 수록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장 관심 있던건 특집입니다. "음식 미스터리"가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장르 문학 속 요리'에 대해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있어서 좋은 비교, 혹은 참고가 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아주 별로였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소재가 진부하다는 겁니다. 추리 애호가라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흔해 빠진 내용이에요. 도입부의 식인 천재 범죄자 한니발 렉터, 미식가 탐정 네로 울프가 대표적입니다. 그나마도 인터넷을 뒤지면 알 수 있는 내용일 뿐이고요. 정작 기대했던 내용은 실려있지도 않습니다. 저라면 한니발 렉터의 '전두엽 소테'나 네로 울프의 '소시스 미뉴이'를 소개할 때 최소한 해당 음식의 레시피와 조리 사진을 수록했을 겁니다.
이어지는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속 독약에 대한 소개는 '음식 미스터리'의 범주에 넣기는 무리입니다. 차라리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같은 작품 소개가 더 적절했을 것입니다.

작품 속 요리를 재현하는 코너 역시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주제와 연결되는 요리들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미스테리아 측에서 별다르게 창작한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 참고 도서 속 - 주로 "미국 미스터리 작가들의 요리책" -  요리를 재현한 것에 불과해요. 그나마 셜록 홈즈가 '해군 조약문'을 극적으로 등장시키기 위한 장치로 사용했던 "해군 조약문" 속 치킨 커리 정도만 어느정도 주제에 값할 뿐, 재현한 요리가 작품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도 않았고요. 

마지막의 '10권의 맛있는 미스터리' 소개는 실망의 정점을 찍습니다. 기준, 근거를 알기 어려운 탓입니다. 일단 소개작 중 "스위트 홈 살인사건",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 "기나긴 이별"은 절대로 음식 미스터리로 포장할 수 없습니다. 억지에요. "어느 백만장자의 죽음"은 아슬아슬하게 음식 미스터리 범주 안에는 들기는 한데, 지금은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책을 추천 도서로 떡 하니 내미는 행위는 받아들이기 힘드네요. 조앤 플루크의 한나 스웬슨 시리즈는 빈말로도 좋은 작품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그 외 작품들도 음식 미스터리로는 볼 만 하지만, 추천할만한 수준의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개인적으로는 "특별 요리""맛" 외에는 모두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점수를 주자면 1.5점 정도? 제 개인 프로젝트에 필적할만한 내용이 없다는 점에서는 조금 안심했지만, 여러모로 점수를 주기 힘든 기획입니다. 

다행히 특집 외에는 나쁘지 않습니다. 특히 빼어난 리뷰가 많아서 "미스테리아"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신간 소개 코너는 역시나, 사람을 혹하게 만드는 좋은 리뷰들이 많더군요. 솔직히 읽어본 결과에 따르면 좀 과한 홍보의 결과물이라 생각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이번에 소개된 작품 중 마쓰모토 세이초의 "범죄자의 탄생"은 꼭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원작, 영화를 함께 소개하는 코너에서 "검은 옷을 입은 신부""상복의 랑데뷰"보다 낭만적인 애상으로 넘쳐흐른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네요. 완성도 면에서 천지차이니까요. 영상화된 작품이라는 이유로 소개되기는 했지만, 정보는 공정하게 제공해 주면 좋겠습니다.

연재물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와 건축가 야스이 도시오의 밀실에 대한 대담은 재미있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라 써먹기는 힘들다는 단점은 있지만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았어요. 특히 다다미를 걷어내면 아마추어는 다시 깔 수 없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울러 이 코너를 통해 소개되는 정보를 토대로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내 놓는 아이디어 - 다양한 기술자들이 등장하는 탐정물 - 도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미로관을 예로 들며 전기비가 많이 들었을 것이라는 언급을 하는 등 건축 전문가의 식견이 느껴지는 여러 코멘트들도 기억에 남고요.

한국의 50~60년대 추리 소설을 발굴한 추리소설 평론가 박광규 씨와의 인터뷰 역시 좋습니다.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화재 사고와 관련된 논픽션, 폴란드에서 실제로 있었던 젊은 지식인 발라가 자신이 저지른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쓴 소설 이야기도 아주 흥미로웠는데, 특히 범인 크리스티안 발라와 그의 작품 "아목", 형사 브로블레브스키라는 키워드는 꼭 기억해두었다가 나중에 찾아봐야겠습니다.
 한국 미스터리 소설의 계보를 추적하며 잃어버린 고리를 찾는다는 기획물인 '동아시아 미스터리, 정치적 죄와 서스펜스'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대중 서사의 최고봉이라는 이병주의 "관부 연락선", "별이 차가운 밤이면"과 김내성의 "청춘 열차"는 틈 나는 대로 한번 읽어봐야 겠습니다.
마지막에 수록된 두 편의 단편도 나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전체 별점은 2점입니다. 척박한 한국 장르 문학의 구심점 역할을 해 주는 좋은 잡지이지만, 이번호는 특집이 너무 별로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마지막으로 수록된 2편의 단편의 짤막한 리뷰로 글을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나비 부인의 커튼콜" 

전직 사회부 기자 박희윤과 퇴출 형사 갈호태, 두 남자가 운영하는 카페 '이기적인 갈 사장' 건너편에 '나비 부인'이라는 카페가 개업했다. '나비 부인'은 가면을 쓰고 서빙하는 독특한 컨셉과 인테리어, 커피 맛이 입소문을 타 맛집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던 중, 기묘한 노인이 '나비 부인'에서 진상을 부린 다음 날 '나비 부인' 사장이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최혁곤의 단편입니다. 시리즈 캐릭터로 전직 사회부 기자 박희윤과 퇴출 형사 갈호태 콤비가 등장하는 단편집 "탐정이 아닌 두 남자의 밤"에서 이어지는 시리즈입니다.

전작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유쾌한 분위기의 버디물인데, 아쉽게도 추리적으로는 그닥입니다. 별로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 않는 탓입니다. 초반에 나왔던 수상쩍은 노인이 범인으로 체포되는 등 수수께끼의 여지도 없고요. 

특히 후더닛 물로는 영 아니올시다에요. 오히려 인터넷 상에서 사람을 공격하여 죽게 만드는 일종의 '사이버 테러'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사회파적 측면이 강하며, 이것이 동기로 밝혀지는 과정이 이야기의 핵심인 와이더닛물에 더욱 가깝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좀 가볍고 유머러스한 분위기와 사회파적 설정이 잘 어울리지는 않네요. 인터넷의 비방글로 자살을 한다는 것도 와 닿지 않고요. 또 고3 수험생 투신 사건도 불필요할 정도로 질질 끄는 느낌입니다. 동기 부분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도 와이더닛물로는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진범 검은 뿔테가 살인을 저지른 이유도 불분명하니까요. 남자 친구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낮아요.
진소담의 가족 관계 증명서 정도만 나름 증거일 뿐, 추리가 모두 정황 증거에 기반한다는 약점도 크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읽는 재미는 있지만 추리적으로는 기대 이하였던 범작이었습니다. 그래도 버디물로서는 충분히 즐길만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만큼, 단편집은 한번 읽어 볼 생각입니다. 

"죽음이 갈라 놓을 때" 

기흥 보리산 자락에 있는 무당의 당집에서 처참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완벽한 밀실 안에서 홀로 생존한 채 발견된 유홍석이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되어 사형이 구형되었다. 그러나 판사에게 유홍석의 편지가 도착하는데...

한국에서 보기 드문 본격 추리물들을 발표하고 계신 도진기 판사님 - 현 시점에서 변호사가 되셨지만 - 의 스탠드얼론 단편입니다.

다른건 몰라도 작가가 뼛속까지 고전 본격물 애호가라는 것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입니다. 1인칭의 수기 형태로 전개되며, 끔찍한 사건이 초자연적인 현상과 얽혀 일어난다는 점이 완전 고전 스타일이었거든요. 비교하자면 코난 도일경의 "J. 하버쿡 젭슨의 진술"이라던가, 앰브로스 비어스의 "아울크리크 다리에서 생긴 일"에 수록된 작품들이 떠오릅니다. 제가 워낙 고전물을 좋아하기에, 완전 제 취향이라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게다가 단지 스타일을 따온 것에 그치지 않고, 무당 '인문희'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덕분에 독특한 한국적 오컬트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다는 점도 큰 장점이에요. 특히 그녀가 서상표의 집에 몰래 부적을 붙인게 드러나는 장면은 굉장히 섬찟합니다. 만약 영상화한다면 클라이막스로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문희에 비하면 서상표는 전형적인 한국 쓰레기 남자와 다를 바 없어 지루합니다. 무엇보다도 진상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어요. 괜찮은 고전 오컬트물이 갑자기 크리쳐 호러로 변질되는데 영 어울리지 않았던 탓입니다.
게다가 잘린 목이 경동맥을 물어 뜯었다면 부검으로 밝혀지는게 당연한데 간과되고 있고, 유홍석이 현장 문을 잠가 밀실로 만든 이유도 끝까지 설명되지 않는 등 디테일에서도 문제가 많아요.

하지만 한국에서 보기 드문, 고전 스타일 오컬트 호러 스릴러임에는 분명합니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를 굉장히 탈 텐데 저한테는 호 쪽에 가깝습니다. 무엇보다도 앞서 말씀드린 부적이 드러나는 장면 하나만으로도 별점 2.5점은 충분합니다.

2021/12/03

유리 감옥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 김미정 : 별점 2점

유리 감옥 - 4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횡령을 저질렀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갖힌 카터는 징계를 받다가 엄지 손가락에 큰 부상을 입고 모르핀에 중독되고 말았다. 횡령 사건 주범으로 의심되는 가윌의 부정을 밝혀내는게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변호사 설리번은 가윌의 뒤를 캐는건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설리번의 노력은 실패했고, 카터는 교도소에서 사귄 친구 맥스가 폭동 와중에 살해되는 사건 등을 겪으며 7년 만에 가석방되어 세상에 복귀했다. 그러나 석방 후, 아내 헤이즐이 설리번과 부정을 저질렀다는걸 알아챈 카터는 충동적으로 그를 살해하고 마는데....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장편 범죄 스릴러입니다. 

이야기는 끔찍했던 감옥에서의 생활과 출소 이후의 현실로 완벽하게 나뉩니다. 핵심은 이 두 공간이 카터 기준으로는 개념적으로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고요. 카터의 현실 속 주변 인물들은 모두 범죄자이며, 카터가 마음 편하게 머무를 곳이 없다는 점에서요. 카터의 말 그대로 이 세상은 거대한 감옥과 다를바 없는 셈이지요. 이런 상황을 빼어난 심리 묘사로 그려내고 있는데, 감옥 안에서 헤이즐과 설리번의 관계를 의심하는 부분, 그리고 출소 후 범행을 저지르고, 경찰에 쫓기는 과정에서의 카터의 심리를 그린 부분, 그리고 카터가 범행을 저지르고 가윌과 협상한 뒤, 경찰의 취조에 맞서는 장면이 특히 좋았습니다. 심리 서스펜스의 달인인 작가의 솜씨를 여실히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 외의 부분은 대체로 실망스럽습니다. 범행이 작위적이며 설득력이 낮은 탓입니다. 제대로 된 범죄물로 보기 어렵습니다. 카터가 설리번을 우발적으로 살해한 것까지는 그럴싸합니다. 그러나 그 시점이 가윌이 설리번을 살해하기 위해 고용했던 청부업자 오브라이언이 습격한 직후였다는게 문제입니다. 상식적으로 누군가 자기를 목격했는데, 바로 살인을 저지른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게다가 오브라이언이 카터가 진범임을 밝히겠다고 협박하는 것도 설득력이 낮습니다. 카터와 오브라이언 모두 현장에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브라이언 혼자 증언을 뒤집는다고 그게 사실이 되는건 아니니까요. 또 오브라이언도 범행 당시 설리번을 방문했었다는 이야기니, 오브라이언이 범인으로 몰릴 여지도 높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도 이건 협박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이 정도면 괜찮았을텐데, 카터가 오브라이언마저 즉흥적으로 죽인 뒤 가윌을 협박하여 알리바이를 만든다는건 최악의 정점입니다. 카터는 가윌이 설리번을 죽이기 위해 오브라이언을 고용했고 실제로 사건 당일 오브라이언을 현장에서 목격했다고 협박하는데, 가윌은 잃을게 없습니다. 오브라이언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가윌이 고용했다는걸 증명할 방법도 없고요. 오브라이언을 가윌이 고용했다는 다른 증거가 있었다면, 진작에 경찰에 체포되었을 테지요. 

카터가 '오브라이언 때문에 골머리 썩일 사람은 가윌이지 제가 아닙니다.'라고 경찰에게 말한 것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경찰도 오브라이언이 카터가 진범이라는걸 알고 협박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가윌이 골머리 썩을 일은 애초부터 없었어요. 카터가 오브라이언을 죽인 뒤, 진짜 완벽한 천재 범죄자로 거듭난다는 "리플리"스러운 결말이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지금의 결과물은 억지만 남아 있는 느낌입니다.

또 읽기 힘들다는 문제도 큽니다. 감옥에 대한 여러가지 묘사는 지루하고 진부했으며, 캐릭터 설정과 묘사도 마찬가지인 탓입니다. 헤이즐이 자기도 힘들었다며 불륜을 정당화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그녀는 감옥 안에서 친구가 된 맥스와의 관계를 들먹이면서 정당화하는데, 맥스와 카터의 관계는 친한 직장 동료 사이와 비슷했습니다. 불륜과 비교할 이유는 없습니다. 카터의 마약 중독을 언급하며, 그 역시 잘못이 있다는 주장도 똑같습니다. 카터가 마약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정말 카터가 싫어졌다면, 이혼하면 됐습니다. 이혼하지 않는건, 감옥에 간 카터를 버리지 않았다는 세간의 평가와 함께 카터가 상속받은 10만달러가 넘는 돈을 놓치기 싫었을 뿐입니다. 결국 카터가 격분해서 설리번을 죽인건 다 헤이즐 때문입니다. 두 남자를 모두 움켜쥐려다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지옥에 빠져들게 만든거지요. 아들 때문에 이혼 생각을 못했다? 그 결과가 살인범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생긴 것이고요. 어떻게 이렇게 이기적일 수 있을까요? 반대로 카터가 이런 상황에 빠졌음에도 헤이즐을 어떻게든 품으려고 하는 노력도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렇게 짜증을 불러 일으키는 요소가 너무 많아서 쉽게 읽히지 않았습니다. 리뷰를 쓰기도 힘든, 그런 작품이었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짜증나는 인간 군상의 묘사가 목적이었다면, 그건 분명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재미나 가치는 딱히 찾기 어려웠던 작품이에요. 딱히 권해드리지 않습니다.

2020/05/30

콜드 문 - 제프리 디버 / 유소영 : 별점 2.5점

콜드 문 - 6점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뉴욕에서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현장에 시계, 기묘한 시와 함께 자신을 '시계공'이라고 서명한 범인을 찾기 위해 링컨 라임과 아멜리아 색스가 나섰다. 한편 색스는 이 사건 외에도 자살로 위장한 사업가 살인 사건을 맡게 되었다. 경찰 118번 지구대가 범행에 연루되어 있다는게 드러났으나, 당장은 내사과 투입이 어려워 부시장 월러스와 경정 매릴린 플레허티의 합의로 색스 혼자 사건을 수사하게 된 것이었다.

전신마비 법의학자 링컨 라임과 그의 수족인 여성 경찰 아멜리아 색스 컴비의 활약이 그려지는 제프리 디버의 베스트셀러 시리즈 일곱 번째 작품입니다.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30주년 기념 킹 오브 킹 순위'에서 해외편 6위에 당당하게 위치해 있는 탓에, 평소 궁금하게 여기다가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장점이라면 흡입력, 재미입니다. 거의 550여페이지에 달하는 대장편인데 쉽게 읽힙니다. 시계공 던컨의 범죄 행각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까지 유행했던 "싸이코 연쇄 살인마와 천재 경찰의 대결"을 비튼 아이디어도 좋아요. 반전도 괜찮으며, 철저한 증거 위주의 수사로 수집한 증거를 통해 이런저런 수수께끼를 던져주고 그것들이 추리로 이어지는 과정도 마음에 듭니다.
새 캐릭터인 동작학 전문가 캐스린 댄스의 심문 과정에 대한 묘사도 그럴듯합니다. 거의 인간 거짓말 탐지기 수준으로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럴듯하게 묘사되어서 상당한 설득력을 보여주는 덕분입니다. 다른 링컨 라임 주변인물 묘사도 시트콤스러운게 유쾌했고요. 아멜리아 색스가 아버지의 추문, 경찰에 대한 신뢰 추락이라는 심리적 상처를 극복하고 성장한다는 결말도 전형적이지만 나쁘지 않았어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좋은 사람은 잘 되고 나쁜 사람은 파멸하는 이야기가 감정이입이 잘 되더라고요.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걸 알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에서 지난 30년간 작품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으로 꼽을만하냐면, 그렇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추리의 여지가 많지 않은 탓입니다. 다음 단계로의 진행은 모두 주요 관계자의 증언에 따를 뿐입니다. 빈센트 체포 후 빈센트의 증언으로 다음 피해자 대상이 좁혀지고, 이는 베이커의 작전이었지만 베이커 체포 후 던컨 본인도 체포되어 연쇄 살인극이 아니라는게 그의 입으로 밝혀지고, 던컨이 풀려난 뒤 그의 다음 목표가 델파이 메커니즘이라는 것도 빈센트와 이전 시계점 증언으로 밝혀지는 식이거든요. 이래서야 링컨 라임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솔직히 링컨 라임이 없어도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또 지나친 반전과 어처구니없는 진상도 문제입니다. 초, 중반까지는 연쇄 살인극을 꾸미는 시계공 던컨과 조수격인 성범죄자 빈센트가 몇 명의 여성 희생자를 집요하게 노리는 묘사가 이어지죠. 그러나 빈센트는 그냥 미끼였고, 던컨의 진짜 목표는 118번 수사대 비리와 연류된 비리 경찰 베이커의 의뢰로 색스를 연쇄 살인범의 범행으로 위장해서 죽인다는 반전, 베이커 뒤에 흑막으로 부시장 월러스가 있었다는 반전, 시계공 던컨의 진짜 목적은 세슘 시계를 조작해서 이전부터 탐낸걸로 묘사된 '델파이 메커니즘'을 훔치려는 것, 인줄 알았지만 진짜 중의 진짜는 뉴욕 도시 개발 공사에서 뉴욕시와 국방부 등이 주최하는 행사에서 사람을 다량으로 살상하는 테러였다는 반전이 계속 이어집니다. 이렇게 반전이 너무 많다보니 가면 갈 수록 흥미가 떨어지더군요. 90년대 후반부터 유행했던 '반전물' 들을 보고, "내가 진짜 반전이 뭔지 보여주겠다!"라는 결심을 하고 쓴 느낌인데, 지나쳤어요. 과유불급이랄까요....

게다가 '시계공의 목적은 무차별 대량 살상 테러였다!' 라는 진상도 너무 별로입니다. 작 중에서는 사람은 죽이지 않고, 이전에 사람을 죽였다고 언급헸던 범행의 대상은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라 안티 히어로 모습을 보여주던 천재 범죄자 시계공이 왜 무작위로 사람을 살상하는 테러를 선뜻 받아들이는지가 잘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계공의 캐릭터도 이상해져 버렸고요.
마지막 범행, 즉 테러를 위해 연쇄 살인 시도를 가장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 역시 억지로 끼워 맞춘 느낌입니다. 자물쇠를 따고 숨어드는게 쉽다면, 루시 릭터가 친구를 만나러 나갔을 때 집에 침입해서 필요한 서류를 찍어가지고 오면 되는거잖아요? 꽃가게 조앤의 화분 역시 마찬가지고요. 구태여 엄청난 숫자의 뉴욕 경찰이 동원될만한 살인극을 가장할 이유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비리 경찰 베이커의 의뢰를 받아들인 목적도 불분명합니다. 시계공의 범행이 가짜이고 해프닝에 불과했다는걸 구태여 드러낼 이유는 없어요. 테러를 위해서라면 그냥 연쇄살인극을 위장하는게 나은 선택 아니었을까요? 구태여 아는 사람을 늘릴 이유도 없고, 베이커에게 복수하겠다는 가짜 동기 등 시계공의 모든게 가짜라는게 드러나는 것도 시간 문제인데 말이지요. 베이커의 의뢰를 받아들여 아멜리아 색스를 연쇄 살인범에 의한 것으로 가장하여 살해하려는 의도였다고 중간에 설명되지만, 이는 시계공이 베이커의 범행은 실패하게끔 총을 조작했다는 이야기 전개를 보면 역시나 합리적이지 않아요. 차라리 링컨 라임과의 대결을 위해 도전한다는걸 보다 명확하게 표현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 측면에서는 나무랄데 없습니다만, 비리 경찰 베이커와 아멜리아 색스의 아버지 이야기를 빼고 350~400 페이지 정도로 이야기를 정리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2021/05/23

사이코패스 : 정상의 가면을 쓴 사람들 - 나카노 노부코 / 박진희 : 별점 3.5점

사이코패스: 정상의 가면을 쓴 사람들 - 8점
나카노 노부코 지음, 박진희 옮김/호메로스

제목 그대로, 사이코패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는 심리학, 과학, 인문학 교양서입니다. 사이코패스에 대해 그 존재 이유 및 특징, 문제점과 대처 방안, 치료 방법 등 거의 모든 관련 항목을 알게 도와주는데 분량도 부담이 없고, 설명도 쉬운 편이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새롭게 접했던 정보들이 아주 많습니다. 대표적인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사이코패스의 신체적 특징으로 얼굴이 긴 남성보다는 얼굴 폭이 있고 완고한 인상의 남성이 사이코패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 의 농도가 높을수록 얼굴이 옆으로 넓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테스토스테론의 분비가 많으면 경쟁심과 공격성이 높아지니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설입니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좋은 정보 같습니다. 단, 여성의 경우 얼굴 폭은 그다지 상관관계가 없답니다.
그리고 심박수가 낮고 잘 높아지지 않는 사람일 수록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기 쉽다는건 당연합니다. 무언가 사건을 저지른 뒤 심박수가 높아지지 않으면 행동에 브레이크가 잘 걸리지 않을테니까요. 그런데 이게 남성이 여성보다 폭력성, 반사회성이 높은 근거가 될 수 있다는건 재미있었어요. 남성이 여성보다 심박이 1분간 약 6회 정도 늦은 탓일 수도 있다고 하거든요. 청중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이나 법정에서의 변론 등에서 긴장하지 않고, 냉정하게 행동하는 경영자나 변호사에게 사이코패스가 많은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심박수가 낮아야 냉정하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이코패스는 보통 'IQ 높은 천재 범죄자'로 알려져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설명도 인상적입니다. 이런 착각이 생긴건 사이코패스가 사회 통념상 할 수 없는 일을 거리낌없이 해 버려서, 특별해 보인 것 뿐입니다. 한마디로 '돌아이'와 '천재'를 착각한 것에 불과한 거지요. 이는 사이코패스가 불안에 강한 특징 덕분이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이면 불안을 느끼는 강도가 높아 위축되고,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되면 불안의 강도가 낮아 대범해지는 반면, 사이코패스는 불안의 강도가 높은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행동으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성향이 강하거든요. 덕분에 검거하기 쉬운 사이코패스가 생겨난건 다행입니다. 위험한 상황에서 불안을 느끼지 않아 위험을 알아차리기 어렵고, 그래서 회피가 힘들어지게 된다고 하네요. 

그리고 사이코패스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스스로의 감정은 드러내지 않고, 타인의 심리를 읽어내는 재능이 뛰어나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정성은 낮지만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과 권위의 존중은 중요하게 생각한다 등이 소개됩니다. 허언증이 있을 경우도 사이코패스일 가능성이 높고요. 거짓말에 죄의식이 없다, 타인의 아픔을 무시한 채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한다는 점은 사이코패스의 특징 그 자체지요. 사이코패스가 상대방의 신뢰를 잘 얻는건 이런 거짓말 능력도 한 몫 단단히 할 테고요. 실제로 허언증이 있던 사이코패스 사례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가지 특징을 본다면, 사이코패스는 프로 도박사가 가장 적합한 직업이 아닐까 싶어요. 불안을 느끼지 않고, 위험한 순간에도 주도권을 쥐려고 노력하며, 거짓말을 잘하고, 타인의 감정을 잘 읽으면서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니 말이지요. 이런 특징들에 더해 조직에 충성한다는 점에서는 킬러도 잘 어울릴 것 같네요.

그동안 궁금했었던,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의 차이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이는 과학자들의 시각이냐, 사회학과 교육학자의 시각이냐의 차이더라고요. 이런 존재를 심리학, 생물학, 유전학적 요인으로 설명하려는 사람들은 '사이코패스'라는 명칭을 선호하고, 이 존재가 사회의 영향력이나 유년기 경험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시오패스'라고 부르는 일이 많다니, 결국은 명칭의 차이일 뿐 큰 차이는 없는 셈입니다. 이 책을 통해 이 양쪽 모두 중요한 원인이 된다는걸 알 수 있고요. 유전적인 이유에 어린 시절의 환경, 교육 등이 결합해야 사이코패스가 탄생한다는걸 여러가지 실험 결과를 통해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직전에 읽었던 "n분의 1의 함정"에 등장했던 '최후 통첩 게임'을 사이코패스를 찾아내는데 사용하는 실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정해진 돈을 나눌 때, 분배자가 정한 비율을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여 거부하는 사람 보다는,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거부하지 않는 사람이 사이코패시 성향이 높다는군요. 복수하듯 거절하기 보다, 단 돈 1엔이라도 받는게 이득이라고 냉철하게 판단하기 때문이라는데 그럴듯했습니다. 입사 면접에서 한 번 해볼만한 테스트가 아닐까 싶네요. 

사이코패스는 보통 사람과 뇌의 특정 부분의 문제와 차이점이 있다는 연구 결과들도 기억에 남습니다. "뇌의 전두전피질 가운데 안와전두피질과 내측전두전피질의 양쪽 기능이 저하되어 있으면 반사회적 행동의 위험성이 높아진다. 사이코패스는, 편도체와 안와전두피질 혹은 내측전두전피질과의 연결성이 약하다고 알려져 있다." 등인데, 앞으로는 이를 통해 사이코패스의 구분이 의학적으로 가능해 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을 판별하는데 중요한 척도로 쓰이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이 책에 따르면 사이코패스는 유전의 영향이 어느정도 있다고 하니, 의학적인 결과와 혈통적인 계보가 결합하면 그 완성도는 더욱 높아질테니까요. 그런 세상이 좋은 세상일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만...

또 각종 문헌을 통해, 사이코패스는 오래전부터 세계 각지에 있어왔다는 내용도 신기했습니다. 예를 들면 알래스카 북서부의 소수민족 유픽 (이른바 이누이트) 의 'kunlangeta'가 그러합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것을 하지 않는다’= ‘반복해서 거짓말을 하며 속이거나 훔치는 남자’를 의미하는데, 500명에 한 명꼴로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무리들과 사냥에 나가지 않고 다른 남자들이 마을을 나서면 많은 여자들에게 섹스를 강요하며. 비난을 받아도 개의치 않으며, 장로의 앞에 끌려가 벌을 받아도 몸가짐을 고치지 못해서 결국 누군가 죽여버리고 만다는군요. '선천적이므로 고칠 수 없다'는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이지요. 아울러 승리자 그룹에 속하는 사이코패스도 많다며 오다 노부나가, 모택동, 표토르 대제 및 여러 미국 대통령들을 예로 들어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해주는데, 그럴 듯 했습니다. 이 중 가장 놀라왔던건 성녀 마더 테레사도 사이코패스일거라는 주장이었어요. 그녀가 보살폈던 아이들과 측근들에게 냉담했다는 여러 기록이 근거라네요. '박애주의자'는 특정 소수의 인간에게 깊은 애착을 가지지 못하므로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른다는 가설도 성립되는데, 좀 무서워지는군요.

그렇다면 전 세계적으로, 인류 역사에서 사이코패스가 계속 나타나고 일정 비율로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이코패스가 생존에 유리했다면 그 수가 늘어났을 테고, 생존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면 자손을 남기지 못하여 도태되고 말았을텐데 말이지요. 이 책에서는 사이코패스와 같은 개체가 일정 수 존재하는게 거시적인 시점에서 집단 생존에 유리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탐험가와 개척자도 사이코패스였을테고, 전쟁에서 아군의 피해에 눈 하나 깜짝않고 적을 죽이는 전쟁 영웅도 사이코패스였을테니까요. 이렇게 사이코패스가 필요한 상황이 많아서, 사이코패스 유전자가 소실되지 않았다는 해석이지요. 필요에 더해, 사이코패스는 집단에서 배척당하고, 제거될 가능성이 높기도 하지만 반대로 집단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시하여 도리어 살아남기 용이했고, 복수의 이성을 홀려 유전자를 남겼을 가능성이 높았을 거라는 추론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이코패스 존재 이유를 설명하면서 소개된, "여성들이 나쁜 남자에게 빠지는 이유는?"에 대한 고찰도 재미있었습니다. 남성의 경우 인기있는 타입은 육아에 노력을 분배, 할애할 것 같은 남성과 사이코패스의 두 가지 타입이라고 합니다. 사이코패스는 거짓말을 잘 하고, 강함을 어필하여 번식에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문명화된 현대에서는 육아를 도와줄 남성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생리 주기에 의해 호르몬 밸런스가 원시적으로 변화할 경우 - 여성 호르몬과 세로토닌의 농도가 내려가는 배란기 전후 3일과 생리 전 일주일 - 사이코패스 성향이 높은 남성이 선택될 수 있다고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의 사이코패스의 삶도 소개됩니다. 스티브 잡스가 사이코패스인 이유부터 상세히 설명된 이 장에서 가장 주목할만했던건, 면접을 중시한 채용 시험, 그리고 배심원 참여 재판의 문제입니다. 사이코패스는 거짓말을 잘하고, 항상 당당하며 불안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면접을 통과하거나, 배심원들을 설득해서 무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악덕 고용인, 악플러, 서클 크러셔 등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사이코패스 및 이들의 먹잇감이 되는 추종자들에 대한 설명도 흥미로왔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문제가 되었던, "아나키"같은 여러 비합리적인 커뮤니티 멤버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이 책에 따르면 추종자들은 속았다는걸 알게 되더라도 '믿는 편이 기분이 좋기 때문에' 계속 추종자로 남게 된다는군요. 인지부하, 즉 스스로 판단하는건 부담스럽기에, 뇌의 부담을 덜기 위해 무언가를 믿는 쪽을 택하는 거지요. 종교와 별 다를게 없는 셈입니다. 

 마지막 장은 사이코패스 진단법과 분류, 그리고 치료 방법입니다. 치료를 위해서 사이코패스에게는 벌이 아닌 보상을 규칙으로 학습시킬 수 밖에 없다는 실험 결과가 기억에 남네요.

이렇게 사이코패스에 대해 잘 알 수 있었던 좋은 독서였습니다. 목차가 다소 두서가 없다는 점, 그리고 반복되는 내용이 많다는 점 등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재미와 자료적 가치 모두 빼어난 책이었어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사이코패스에 대해 궁금하셨던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09/12/05

다이도지 케이의 사건 수첩 - 와카타케 나나미 / 권영주 : 별점 3점

다이도지 케이의 사건 수첩 - 6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권영주 옮김/시작

마츠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하권이 새로 나왔기에 구매차 방문한 인터네 서점을 둘러보다가 구입한 책입니다. 어떻게 보면 충동구매에 가까웠는데, 다행히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책 자체의 구성이 신선한 덕분입니다. "다이도지 케이 최후의 사건" 이라는 중편 이야기가 총 6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펼쳐지며, 이 중편의 각 장이 끝나면 곧바로 다이도지 케이가 경찰관을 은퇴한 뒤 벌어지는 단편 에피소드들이 이어져서 전개됩니다. 그런데 이 단편 에피소드들이 중편 "최후의 사건"에 등장했던 다이도지 케이의 과거사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중단편집이지만 일종의 유기적인 연결고리를 자연스럽게 가지게 끔 한 것으로 좋은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물론 와카타케 나나미가 단편들을 엮어 전체적으로 하나의 맥락을 갖추게끔 하는데 탁월한 실력을 지녔기에 가능한 아이디어이기도 하고요.

또 전직 경찰관이지만 지금은 작가(?)로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는 다이도지 케이라는 주인공은 물론, 각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기상천외한 범죄자들 모두 매력적입니다. 이상하게 사건에 엮이게 되는 다이도지 케이의 상황들도 재미있고요. 관련된 사건들 전부가 상상을 뛰어넘을만큼 황당하지만 묘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특징입니다. 이러한 독특한 설정과 분위기, 그리고 일상물로 여겨질만큼 평범하지만 희한하게 느껴지는 재미난 캐릭터들 모두 작가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선보입니다.

또 그동안은 작가의 단점이라 할 수 있었던 요소들, 즉 본격으로 치기에는 좀 구성의 짜임새가 없고(이건 제가 단편집만 읽은 탓이 크겠죠), 즉흥적으로 보이는 장난스러운 설정과 묘사들이 단편집이라는 형태에서는 외려 장점으로 작용합니다. 약간은 억지스러운 트릭들이지만, 작품 분위기가 일상계면서도 황당한 상황들이라서 이야기에는 더 잘 어울린 느낌이에요. 작가의 팬으로서는 전작들과 어느정도 연결되는 세계관도 즐길거리였고요.

결론적으로 근간 읽은 추리소설들 중에서는 가장 유쾌하고 재미있는 작품이었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와카타케 나나미 작품 중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재미있는 작품이에요. "코지 하드보일드" 라는 조금은 기괴한 장르명으로 소개되고 있던데, 일상계의 탈을 어느정도는 뒤집어 쓰고 있다는 점에서는 코지, 다이도지 케이라는 캐릭터가 하드보일드 탐정의 성격을 갖추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뭐 그다지 과장된 소개는 아닙니다. 코지 계열의 팬이거나 가벼운 유머 미스터리를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추천합니다. 와카타케 나나미의 팬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죠.

1. 다이도지 케이 최후의 사건

경찰관 다이도지 케이는 상사 고이즈미 무사시와 함께 30대 초반 여성 살해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피해자인 자유기고가 후지노 유키의 신변을 조사하던 다이도지는 그녀에게 일을 의뢰했던 적이 있는 출판사 직원인 소꿉친구 히코사카 나쓰미를 찾아가는데.... 

총 6개 장으로 나뉘어져 있는 중편입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다이도지 케이의 과거사, 즉 아내의 비참한 뺑소니 사고와 범인을 일부러 놓아준 경찰서 내부 G반 인간들, 그리고 다이도지를 작가의 길로 끌어들이는 히코사카 나쓰미나 원숭이 조지와 같은 곁다리 등장인물이 다른 단편 에피소드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집의 밑그림과도 같은 작품이죠.

그러나 아무래도 단편 에피소드들을 위해서인것 같은 무리한 이야기 전개도 약간 거슬리고 내용도 설명적으로 전개되는 편이라 크게 두드러지는 작품은 아닙니다. 트릭 역시 중요한 단서가 말장난에 가까운 등 공감하기 어려웠고요. 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충분히 합리적이고 이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 책의 뼈대라는 점에서 평작은 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 죽어도 안 고쳐져

작가가 된 다이도지 케이는 경찰시절 겪었던 얼간이 범죄자들을 다룬 "죽어도 안 고쳐져"라는 책을 발표하고 강연회를 가졌다. 그리고 차를 타고 이동하려는데 자칭 트레이시라는 범죄자가 다이도지를 협박하며 자신이 뒤집어쓴 누명을 벗겨줄 것을 강요하는데... 

아주 유쾌하면서도 기발한 소동극입니다. 범죄의 천재로 자부하는 스킨헤드 범죄자 트레이시 로즈라는 캐릭터의 등장부터 유쾌하고, 트레이시가 누명을 뒤집어쓰게 된 밀실 살인 사건은 추리적으로 완벽해서 흠잡을데가 없습니다. 게다가 다이도지가 전세를 역전시키는 마지막 장면은 하드보일드 분위기가 물씬 풍기기도 해서 정말 재미있게 읽은 단편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베스트 에피소드를 꼽으라면 이 이야기를 꼽겠습니다.

* 덧붙이자면, 책 뒤의 해설에서 트레이시 로즈는 포르노 출신 배우라고 하는데, 저는 80년대 헤비메탈 밴드에서 따온 이름인줄 알았습니다. 메탈 쪽이 더 이미지가 비슷한 것 같은데 말이죠...

3. 원숭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

"죽어도 안 고쳐져"에서 자신을 우습게 다루었기 때문에 딸이 가출했다고 소매치기 원숭이 조지가 우긴 탓에, 다이도지 케이는 딸을 찾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후 찾아온 경찰에 의해 원숭이 조지가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조금은 미묘한 작품입니다. 다른 이야기들처럼 유머러스한 전개로 재미있게 읽히기는 하지만 범죄가 우발적이고 트릭도 별것 없으며 무엇보다도 증거가 빈약하다는 단점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다이도지 케이라는 캐릭터가 이 작품에서의 활약이 발군이라서 평작 수준은 됩니다.

4. 죽여도 안 죽어

다이도지 케이에게 한 추리소설가가 자신의 작품을 검토해 줄 것을 부탁해 왔다. 경찰관 시절 경험을 살려 조언을 해주기 시작했지만, 어느새 작품의 살인계획이 현실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는데.... 

편지로 긴장감을 높여주는 전개가 독특한 작품으로 깔끔한 이야기 구성에 반전도 확실한 편이라 즐길거리가 많은 에피소드입니다. 추리적으로 "증거"라는 것이 빈약하고 동기가 불분명하다는 단점이 크긴 한데 워낙에 아이디어가 돋보여서 단점도 묻혀가는 느낌이랄까요. 확실히 단편은 아이디어가 더 중요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네요.

5. 추락과 붕괴

논픽션 작가 이소베 다카히토의 유고를 이어쓸 것을 본의아니게 떠맡은 다이도지 케이는 고카 악이라는 화산지대에 위치한 이소베의 별장을 찾아가는데... 

사건은 별게 없고 트릭도 무지하게 간단하지만 이소베라는 작가와 연관된 인물들의 악의가 거침없이 드러나는 것이 재미있었던 에피소드입니다. 이러한 평범한 악의의 극대화는 작가의 특기이기도 하죠. 전개도 합리적이라 무난한 수준의 평작이라 생각됩니다.

6. 도둑의 엉뚱한 원한

하자키 문화센터에 강연차 방문한 다이도지 케이는 2인조 강도에게 납치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곤경을 해결하고 사건의 복수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물어보는데... 

앞선 이야기들과 동일한 구성, 즉 다이도지 케이가 희한하게 사건에 엮이게 된다는 전개이지만 2인조 강도단이 이야기한 사건의 내용만 듣고 진상을 밝혀내는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물" 이라는 점에서 다른 이야기들과 약간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사건도 앞선 에피소드들에 비한다면 일상계에 가까운 내용이라 가볍게 읽기에 편했고요. 단서와 복선들도 공평해서 합리적으로 전개되기에 추리적으로 만족스러운, 여러모로 평균 이상의 괜찮은 이야기입니다.

2014/05/27

타인의 목 - 조르주 심농 / 최애리 : 별점 2점

타인의 목 - 4점
조르주 심농 지음, 최애리 옮김/열린책들

사형수 외르탱은 사형 직전에 누군가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했다. 사실 탈옥은 메그레 경감이 외르탱이 진범이 아님을 직감하고 진범을 알아내고자 벌인 의도적인 작전이었다. 이후 외르탱이 체코인 라데크를 만나려고 시도한다는걸 알아챈 메그레는 라데크를 집중 추궁했다. 하지만 라데크의 혐의를 입증하지는 못하고, 외려 외르탱의 자살 시도 등으로 궁지에 몰린다…

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시리즈아홉 번째 작품입니다. 5, 6, 7, 8번째 작품을 건너뛰고 선택하여 읽게 되었는데, 오래전 "황색견"과 함께 국내 소개되었던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라 대표작이겠거니 싶어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독특한 점은 인간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증오심으로 똘똘 뭉친 사나이 라데크라는 일종의 소시오패스 악당이 중심인물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유별난 재능은 사람의 약점을 파악하여 뜻대로 조종하는 능력이라고 묘사되는데, 당대 유행하던 "팡토마스"의 영향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목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악당이라는 점에서도요. 노파 하나의 생명을 빼앗아 개인적 욕망을 충족시키려 한다는건 "죄와 벌"과도 비슷한데, 라데크는 구원 따위는 믿지 않는 내추럴 본 악당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캐릭터 크로스비도 꽤 인상적이었어요.
그래도 범죄를 단순한 욕망의 충족이 아닌, 세상에 대한 증오심을 표출하기 위해 저지른다는 점과 결국 권선징악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는 최소한의 윤리적 가이드라인이 존재한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유감스럽게도 볼 만한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정교한 맛도 없고 전개도 뜬금없는 탓입니다. 메그레가 자신의 목을 걸고 외르탱 탈옥 작전을 벌인 이유부터가 석연치 않습니다. 외르탱이 라데크와의 접촉을 시도해서 라데크를 주목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후의 수사는 지지부진하기 그지없거든요. 라데크가 무전 취식 후 경찰과 함께 나가는 전략으로 외르탱과의 접촉을 무효화시키는걸 메그레가 막지 않는게 대표적입니다. 수고를 덜 수 있었는데 가만히 지켜본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요. 이건 "생폴레옹에 지다"에서 메그레가 다른빈유를 방관하여 자살하게 만들었던 것과 유사한데, 과거의 실수에서 뭔가 배운게 없는걸까요?
또한, 메그레가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것을 의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인 ‘외르탱이 짧은 시간 안에 귀가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해답이 단순히 택시를 탔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허술합니다. 수사가 부실했다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으니까요.

마지막으로 라데크가 계속 자신이 범인임을 드러내는 듯한 허세를 부리지 않았더라면 사건이 과연 쉽게 해결되었을지도 의문입니다. 라데크가 최후의 순간에 메그레에게 총을 쏘는 우발적 행동 역시 큰 약점이고요. 이 장면 때문에 그나마 있던 천재 범죄자와의 두뇌 대결 분위기가 무너져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라데크가 무계획에 즉흥적인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리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이 장면은 L의 죽음 이후 급속도로 힘이 빠진 "데스노트"를 떠오르게 했습니다. 최후의 순간에 찌질한 모습을 보여줘 실망을 안겨준 야가미 라이토와 다를게 없다는 점에서요.

이렇게 좋은 추리소설로 보기는 여러모로 어렵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물론 멋드러진 제목만큼이나 문학적인 향취는 짙고, 외르탱의 탈옥을 지켜보는 메그레에 대한 묘사는 정말 대단한 등 심농이라는 작가의 필력은 유감없이 느껴지기는 합니다. 차라리 "죄와 벌"처럼 라데크의 심리를 더욱 디테일하게 파고들었더라면 더 나았을텐데 조금 아쉽네요.

2024/11/29

십계 - 유키 하루오 / 김은모 : 별점 2점

십계 - 4점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대 입시생 리에와 그녀의 아버지 오무로는 오랫만에 큰아버지 슈조의 소유였던 에다우치지마섬을 찾았다. 슈조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리조트 개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일행은 개발회사, 부동산 업자, 건축가 등을 포함해 모두 9명이었다.
그런데 섬에서 대량의 폭탄 재료들이 발견되었고, 그날 밤 부동산 업자 오사나이가 살해당했다. 범인은 열가지 규칙('십계')를 남긴 뒤, 앞으로 사흘 동안 생존자들에게 섬을 떠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일행은 십계를 지키며 사흘을 버티려고 했지만, 슈조의 친구였던 야노구치, 부동산 업자 후지와라가 차례로 살해당하고 마는데...

유키 하루오의 장편 소설 "십계"는 그의 전작 "방주"와 같은 클로즈드 서클물로, 특유의 반전 매력을 내세운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장점 중 하나는 짧은 분량입니다.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길이로, 빠르게 읽고 즐기기 좋은 점이 매력적입니다. 또한, 전작 "방주"보다는 설득력 있는 무대 설정이 돋보입니다. 부유한 개인의 취미 생활이었던 무인도라는 설정은 현실성은 물론이고, 클로즈드 서클이라는 제한된 공간과 상황에 대한 설득력을 충실히 전해줍니다.

추리 소설로서의 가치도 높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는 단서가(그런대로) 독자에게 공정히 제공되는 덕분입니다. 특히 '범인은 왜 자신의 발자국이 아니라 야노구치의 발자국만 지웠을까?'라는 핵심 단서를 통해 결말로 이어지는 추리가 좋았습니다. 야노구치가 범인의 신발을 착각해서 신었기 때문이며, 이렇게 착각할만한 신발은 후지와라의 신발밖에 없어서 범인은 후지와라이다!라는 건데, 아주 합리적이었어요.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방주"와 달리 사건의 템포가 느리며, 긴장감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방주"에서는 제한 시간 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모두가 죽을 수 밖에 없는 반면, "십계"는 제한 시간 내에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는 조건만 지키면 모두가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긴장감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범인이 약속을 어기고 모두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는 하는데, 이는 독자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작가가 애써 제시한 '십계'라는 공정한 룰이 깨지면, 본격물이라는 작품의 정체성을 해칠테니까요.

또 아야카와가 진범임을 반전처럼 밝히는 마지막 장면은 추리물로서는 불공정합니다. 애초에 아야카와는 리에와 오사나이가 살해당한 밤에 같은 방을 썼기에 알리바이가 성립되었었고, 심지어 리에는 주요 화자로 등장하여 아야카와의 알리바이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리에도 그녀가 범인이라는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설명하는건 반칙입니다. 차라리 아예 몰랐다고 했더라면 모를까요. 아울러 리에가 아야카와의 범행을 숨긴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점도 독자에게 혼란을 줍니다. 최소한 아야카와가 범행 이유- 폭탄을 만든 일당이 그들을 죽이려 해서 먼저 죽였다! -를 설명하고 같은 편이 되기를 설득했다는 설정은 필요했습니다.

작위적인 전개도 눈에 띕니다. 오사나이의 살해 이후 야노구치와 후지와라가 차례로 아야카와의 꾀임에 빠져 홀로 행동하다 살해당했다는 설정은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본인이 유력한 다음 희생자라는 점이 명확한 상황에서, 알리바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야카와를 쉽게 믿고 행동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섬에 폭탄 재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점 역시 작 중에서는 실수로 설명되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전작보다는 낫다고 해도 비현실적인 요소 역시 여전합니다. 예를 들어, 무인도에 엄청난 양의 폭탄이 있다는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왜 폭탄을 만들었는지 설명도 없고요. 중요한 연결고리가 끊겨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캐릭터 역시 평면적으로, 등장인물 대부분이 다른 작품에서 자주 보아왔던 스테레오 타입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매력이 부족합니다. 특히 탐정이자 천재 범죄자인 아야카와는 흥미롭기보다는 진부하게 느껴집니다. 결말에서 리에에게 반 협박식으로 건네는 마지막 인사도 영 별로였고요. 다른 인물들도 건축사 노무라 씨 정도를 제외하면 특별한 묘사가 없어서 그들이 처한 위급한 상황이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전작만큼의 화제를 불러오지 못했는데, 읽어보니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전작을 정 반대로 비틀기는 했는데, 단점은 거의 그대로이고 좋았던 장점마저 희석되고 말았네요. 딱히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0/09/27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4 (완전판) 주머니 속의 호밀 - 애거서 크리스티 / 이은선 : 별점 3점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4 (완전판)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은선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금융 회사 사장 포티스큐가 회사에서 차를 마시다가 죽었다. 독을 먹은게 확실하여 경찰은 수사에 나서는데, 유력한 용의자였던 미모의 젊은 부인마저도 자택에서 과자와 꿀을 먹던 중에 사망했고, 비밀을 숨기고 있던 하녀 글래디스마저도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포티스큐의 옷 속에 '호밀'이 들어 있었던 것, 글래디스가 빨래 집게로 코가 집힌 채였던 상황을 통해 미스 마플은 “6펜스 노래를 부르자, 주머니는 호밀로 한 가득, 파이로 구워진 넷하고 스무 마리의 지빠귀. 파이가 열리면 새들이 노래를 시작하지. 이건 왕 앞에 차릴 만한 진수성찬. 왕은 보물 창고에서 돈을 세고, 왕비는 거실에서 빵과 꿀을 먹고, 하녀는 정원에서 빨래를 너는데,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하녀의 코를 물었지.” 라는 마더구스 동요를 떠올렸고, 미스 마플의 조언에 따라 닐 경위는 '지빠귀'를 찾다가 의외의 진실을 알게 되는데...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님의 미스 마플 장편입니다.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공략"에서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 별점 5점짜리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유는 미스 마플이 하녀 글래디스의 불쌍한 죽음을 파헤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복수의 여신'이자 '정의의 수호자'로 등장해서 시리즈 중 최고로 멋지기 때문이랍니다. 추리적인 구성이나 트릭에 점수를 주고 있는건 아닌데, 여사님 작품이라면 추리적인 요소는 당연히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이라는 전제가 깔려있지 않나 싶네요.
그런데 저는 뭐가 그렇게 멋진지는 잘 모르겠더라구요. 글래디스가 살해당한걸 뉴스에서 읽고 직접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출동한거라 다른 작품들 보다 적극적이기는 한데, 딱히 정의의 수호자 느낌을 받지는 못했거든요.

그래도 작품은 좋았어요. 저는 외려 "공략"에서 언급하지 않은, 추리적인 부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진범을 제외한 (!) 모든 등장 인물들이 수상하다는 전개가 돋보입니다. 덕분에 진범이 랜스라는게 밝혀지는 장면이 더욱 충격적이었거든요.
조금 자세히 설명하자면, 포티스큐 씨를 독살한 방법은 차가 아니라 아침 식사 마멀레이드에 독을 넣었던 겁니다. 가족 중 포티스큐 씨만 마멀레이드를 먹기 때문에 그 속에 독을 넣어 살해한 거지요. 이 수법은 비교적 초반에 드러나며, 일종의 시한 장치 트릭이라 몇 개월 전 영국의 포티스큐 저택을 방문했던 랜스에게 아예 불가능한 범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잠시 머문 손님이, 그것도 안성마춤으로 몇 개월 후에 먹을 마멀레이드에 독을 넣는건 상식적으로 어려운 탓에, 랜스는 경찰은 물론 독자의 시야에서도 완벽하게 빠져나갑니다.
게다가 마멀레이드에 독을 넣기 위해 누구나 범인이 아니라 여길 덜 떨어진 하녀 글래디스를 실행범으로 조종했다는 수법이 정말이지 기가 막힙니다. 랜스가 가명으로 글래디스를 유혹한 뒤, 독을 자백약이라고 속이고 포티스큐 씨에게 먹게 만든건데 현실적이면서도 설득력도 높거든요. '맹했다'는 글래디스의 캐릭터 묘사도 설득력을 뒷받침 해 주는 요소였고요.
이후 랜스는 아버지, 유산을 손에 넣을 새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정체를 아는 유일한 증인 글래디스까지 살해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 범행을 포장하기 위해 마더 구스 동요를 가져온 것도 기발했어요. 확실히 나쁜 놈들이 머리가 좋은 법입니다.

이런 랜스의 범행을 적절히 배치된 여러가지 단서와 복선 - 특히 글래디스의 유품인 사진과 편지 등 - 을 통해 독자가 미스 마플과 같은 수준에서 추리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정통 본격 추리물다운 전개, 동기인 '돈'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는 점, 이론적이고 상식적인 닐 경위와 인간 관계를 통해 진상을 파악해내는 미스 마플의 협업, 랜스의 부인이 '나쁜 남자'에게 빠지는 습성을 통해 랜스의 본질을 파악하는 미스 마플의 통찰력 등 그 외에도 돋보이는 부분은 많습니다.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랜스가 글래디스를 죽일 때까지 그녀가 입을 다물고 있을거라는 보장이 없었다는 문제가 가장 큽니다. 실제로 그녀는 죽기 전 미스 마플에게 편지와 함께 결정적인 단서를 보냈으니까요. 닐 경위에게도 거의 실토하기 직전이었고요. 이래서야 천재 범죄자의 완벽한 범죄로 보기는 힘듭니다. 기껏해야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이 알기 전에 몰래 글래디스를 죽이고, 막 도착한 듯 티 타임에 참석해서 새어머니의 차에 독을 타는 일련의 과정이 너무 쉽게 흘러간건 좀 아쉬웠어요. 교살할 때 글래디스가 반항했더라면? 피터 러브시"밀랍 인형"에서처럼 새어머니가 즉사하지 않고 난리를 쳤다면? 바로 체포되어 교수대로 향했을 테지요. 이는 조금은 편의적인 전개였다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마더 구스의 '6펜스 노래를 부르자'와 비슷하게 사건을 꾸민 작전도 기발할 뿐, 현실적이지는 않아요. 아버지에게 원한을 품은 맥켄지 가문의 후예나 형 퍼시벌이 유력한 용의자인데 구태여 정신병자인 제 3의 인물을 끌어들일 이유도 없고요. 오히려 '지빠귀 광산' 이 유력한 동기임이 드러나는 멍청한 행동이었습니다. 하녀 글래디스 살해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걸 강조했더라면 차라리 말이 되었을텐데, 이대로는 좀 애매합니다. 그나마도 이렇게 복잡하게 사건을 꾸밀 필요 없이 글래디스가 뭔가 목격해서 죽였다는 식으로 풀어나가는게 더 현실적이라는건 분명하고요.

그래도 좋은 작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 없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09/07/11

홈즈 시리즈의 parody와 pastiche의 역사

일본 추리관련 사이트에서 읽고 느껴지는 것이 있어 번역해 올립니다. 수많은 의역이 있지만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참고로, 글을 올리는 요지는 "경성탐정록"은 결코 parody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섭니다.^^ 차라리 pastiche나 오마주에 가깝죠. 과연 설홍주와 왕도손 이름이 달랐다면, 홍진호와 광수였더라도 패러디라는 말을 들었을까요? 홈즈 형태의 추리물 (명탐정과 화자이자 조수가 등장하는 형태의 본격추리 장 / 단편) 자체가 하나의 장르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유사품이나 팬픽으로 평가절하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일본 미스터리 / 추리소설 데이터베이스 aga-search로 부터>

아서 코난 도일이 탄생시킨 셜록 홈즈 작품은 성전이라고도 하는 4편의 장편과 56편의 단편이 있지만, 이외에 여러 작가들이 홈즈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발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크게 나누어 parody와 pastiche로 구분됩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parody는 특정 작품과 명탐정을 희화화하고 풍자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린 것을 가르키며, pastiche는 원작 자체를 충실하게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홈즈의 첫번째 parody가 등장한 것은 단편 "보헤미아의 스캔들"이 발표된 이듬해인 1892 년, <아이들러 매거진> 5 월호에서였습니다. 발표한 사람은 영국 최초의 외국인 탐정 유진 발몽의 창조자이자 도일의 친구이기도 했던 "로버트 바" 로, ""Detective Stories Gone Wrong : The Adventures of Sheroaw Kombs (세로우 콤즈의 모험, 훗날 베그럼의 괴사건으로 제목 변경) "라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도일의 사후 50년이 지나 저작권이 소멸된 지금에도 이러한 parody와 pastiche가 계속 출판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의 수가 점차 늘어나는 것은 홈즈의 인기를 말해 준다고도 할 수있습니다.

이러한 수많은 작품 중에서 특히 중요한 3편의 작품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소개할 작품은, 도일이 1927년 5월에 "쇼스콤 올드 플레이스"를 발표한 뒤 홈즈 시리즈의 집필을 중단했던 이듬해, 1928년에 발표된 미국 작가 오거스트 덜레이의 작품으로, 홈즈를 꼭 닮게 묘사한 캐릭터 "솔라 폰즈" 가 활약하는 시리즈입니다. 현재 장단편 합쳐 전부 70편의 작품이 남아 있습니다.

그 다음 작품은 1952년부터 "코리어즈" 지에 연재되었던 12편으로, 도일의 아들인 에이드리언 코난 도일과 본격황금기 시대의 거장 존 딕슨 카가 합작한 단편집 "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 (1954년)입니다. 이 작품들은 홈즈의 작품 중에서 이름만 등장했던, 소위 "언급되지 않은 사건" 12편을 그리고 있습니다.
딕슨 카는 이전에 유족들이 공인한 코난 도일의 전기인 "코난 도일"을 발표했었는데 이 때의 인연으로 도일의 아들 에이드리언과 알게되어 함께 이 작품을 발표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마지막 작품은 현대 추리소설계에서 단편의 명수로 알려져 있는 미국 작가 로버트 L 피쉬 Robert L. Fish)가 창조한 "슈록 홈즈" 시리즈를 들 수 있습니다. 그의 사후 미국 탐정작가 클럽 (MWA)에서 그 해에 발표된 최우수 처녀 단편을 선정하여 수여하는 "피쉬 상"이 창설될 정도로 뛰어난 단편작가였던 피쉬가 쓴 이 parody 시리즈는 1960년에 "EQMM (엘러리 퀸즈 미스테리 매거진)"에 "애스콧 타이 사건 (The Adventure of the Ascot Tie)"이 발표된 이래, 사망하는 1981년까지 전부 32편이 발표되었습니다.

그 외에 장편으로는 홈즈가 은퇴한 뒤의 사건을 그린 H.F 하드 (H F Heard)의 "꿀맛 (A Taste for Honey)"과 홈즈 parody 작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니콜라스 메이어의 "7퍼센트 용액 (The Seven-Per-Cent Solution)"이 유명합니다.

단편으로는 열렬한 셜록키언으로 알려진 추리 작가이자 평론가인 빈센트 스타렛트의 "진본 <햄릿> 사건"과 발표 당시에는 코난 도일 명의로 발표되었던 "지명수배남" , 그리고 미국 본격 황금 시대의 거장 엘러리 퀸이 편찬한 선집 "셜록 홈즈의 재난 "에 수록된 단편들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단편집에는 모리스 르블랑, 애거서 크리스티, 엘러리 퀸, 안토니 버클리, 스튜어트 파머, 안토니 바우처 등 쟁쟁한 멤버가 이름을 올렸습니다.

최근에는 본격 작가로 유명한 여류 작가 쥰 톰슨 (June Thomson)이 발표한 일련의 pastiche들이 셜록키언들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현재 4편의 단편집이 간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많은 홈즈 parody와 pastiche 외에도 홈즈의 형인 마이크로포트가 활약하는 작품들, 홈즈의 숙적 천재범죄자 모리어티교수가 활역하는 존 가드너의 "범죄왕 모리어티의 생환", "범죄왕 모리어티의 복수", 심지어 홈즈의 자손이 활약하는 작품들까지 있기에 이 모든 작품들을 통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홈즈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진심어린 열의가 전해져 오기 때문에 손에 잡히는대로 읽고 싶어지는 것이 바로 셜록키언이라는 것이겠죠.^^

2018/05/26

속삭이는 자 1,2 - 도나토 카리시 / 이승재 : 별점 2.5점

속삭이는 자 1 - 6점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시공사
속삭이는 자 2 - 6점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시공사

아래 리뷰에는 본 작품의 핵심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섯 명의 소녀들이 차례로 유괴된 후, 여섯 명 소녀의 절단된 팔이 발견되었다. "아돌프" 라고 명명한 범인의 도전에 게블러 박사가 이끄는 연방 경찰의 행동 과학 수사팀은 총력을 다해 응했지만, 소녀들의 시체가 한 구 씩 차례로 발견되었고, 발견된 장소와 얽힌 추악한 범죄가 함께 드러나며 수사팀은 서서히 와해되는데...

이탈리아 출신 범죄학자의 장편 소설 데뷔작입니다. 회사 동료인 Y리님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습니다(Y리님 감사해요!).

천재적인 범죄자와 경찰과의 대결은 굉장히 많이 보아온 물릴대로 물린 설정입니다. 제 블로그에서도 여러 편의 작품을 찾아볼 수 있지요.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한 모방작은 아닙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범죄자 "아돌프"가 여섯 명의 조력자와 함께 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두 번째 시체 발견 장소인 옛 고아원과 관련된 이야기는 아주 기가 막힙니다. 왜 고아원에 시체를 유기했는지? 에 대해 오래전 고아원에서 빌리라는 소년이 살해된 사건을 밝혀내고, 진범 로널드 더미스가 누구인지 정체를 밝혀내는 과정이 정말 손에 땀을 쥐게 만들거든요. 로널드 더미스가 "그"라는 인물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진짜 흑막을 드러내는 연출도 괜찮고요.

작가로서의 첫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전 편에 걸쳐 치밀한 복선과 단서를 배치하는 전개도 인상적입니다. 실종 아동을 찾는 전문가로 팀에 투입된 밀라를 적대시하는 로사에 대한 묘사가 대표적이죠. 이는 로사가 발견되지 않은 여섯 번째 실종 아동의 어머니로 유괴 사건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는 반전으로 이어지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됩니다. 아울러 여섯 번째로 실종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샌드라가 최초의 목표였으며, 첫 번째부터 다섯 번째 실종 아동은 모두 샌드라의 조건에 맞춰 고른 것 - 때문에 모두 비슷한 또래의 외동 딸들임 - 이라는 이론도 아주 괜찮았어요. "ABC 살인사건"같은 아이디어인데 이 작품에서는 그다지 효과적으로 사용되는 못한 만큼, 다른 작품 속 트릭으로 사용해도 좋겠다 싶더라고요.

그러나 이렇게 사체가 발견된 장소와 얽힌 다른 사건이라는 설정에 대한 작가의 욕심은 지나쳤어요. 두 번째 실종 아동이 발견된 사건까지는 앞서 말씀드렸듯 아주 괜찮지만, 세 번째 실종 아동과 관련된 조지프 록포드, 네 번째 실종 아동과 관련된 펠더 사건은 그 규모와 잔혹성 모두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은 탓입니다. 어린 시절 동료 고아를 죽인 고아 소년은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허나 엄청난 거부가 30여 명의 동성애 상대들을 모두 죽여 저택 인근에 매장하거나, 별볼일 없는 고아 출신 일용직 노동자가 고급 주택가에 거주하는 일가족을 6개월 동안 지배하며 학대하다가 잔혹하게 살해한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입니다.
이 두 사건 모두 다섯 명의 소녀를 살해한 본 이야기와 비교해도 더 자극적이고 규모가 절대로 작지 않은 사건이라 본말전도가 된 느낌도 들고요. 

게다가 수사팀 본부에서 다섯 번째 소녀가 발견된 이유가 팀 내부에 있는 배신자이자 유괴의 조력자인 로사를 고발하는게 아니라, 수사팀의 실질적인 리더인 고란 게블러 박사가 저지른 살인을 폭로하는 것이라는 반전도 과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작품 전개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불필요한 반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앞서 여러 번 반복적으로 묘사된 게블러 박사의 일상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도 조금 입맛이 썼어요. 좋은 아이디이고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는 한데 이렇게 까지 해서 독자를 속일 필요는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이렇게 과한 이야기들도 나름 재미는 있어서 그렇다 쳐도, 사건의 진짜 흑막이자 진범인 "속삭이는 자"에 대한 설정은 정말 큰 문제입니다. 누군가를 조종해서 살인을 저지른다는 건 실제로도 여러 사건들이 있다고 하고, 저자도 범죄학자 출신이라 이런 사건들을 토대로 창작한 것으로 보이지만 작품 속에서 선보이는 그의 모습, 행적은 모두 모호하고 어떤 건 초능력에 가까운 탓에 설득력이 낮습니다. 물론 몇몇 디테일이 없지는 않습니다. 로널드 더미스(와 펠더)는 어린 시절부터 세뇌했다고 설명하며, 방법도 조지프의 회상에서 살짝 선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몇마디 말, 연극적인 무대 묘사에 그칠 뿐이라 별로 그럴듯 해 보이지는 않더군요. 알렉산더 버먼처럼 특별하게 세뇌하지 않고 약점을 잡고 흔드는 게 더욱 현실적으로 보였어요. 

그리고 그나마 방법이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이 네 명은 그렇다 쳐도 어떻게 유괴할 타겟을 골라내었으며, 어떻게 실행범 빈센트 클라리소를 한 달만에 감방에서 교육시켜 원하는 대로 범행을 저지르게 만들었는지는 아예 설명되지 않아서 답답합니다. 이게 사건의 핵심인데, 결국 범행은 증명하지도 못하고 끝나버리니까요. 여기에 더해 아돌프가 고란 게블러 박사가 살인을 저지르게 만들었다는 주장은 완전 억지입니다.
심지어 마지막 교도소에서의 모습은 자신의 DNA 정보를 절대로 흘리지 않는다는 식이라 그냥 전능한 존재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렇게 전능한 범죄자의 비법(?)이 소개되지 않는 점에서는 마에카와 유타카의 작품들이 떠오르는데 좋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겠죠. 이럴 바에야 로널드 더미스가 진범인 서스펜스 스릴러로 끌고가는게 모든 면에서 훨씬 나았을 겁니다.

또 반전에는 욕심을 냈지만 캐릭터 설정은 그렇지 못한 것도 옥의 티입니다. 고란 게블러 박사와 밀리 형사 모두 이런 류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테레오 타입이라 굉장히 식상해요. 토마스 해리스, 제프리 디버 등 유명 작가들의 두뇌파 남성과 행동파 여성이 등장하는 작품 속 캐릭터들과 하등 다를 게 없습니다. 차별화를 두기 위한 여러가지 설정, 예를 들어 밀라가 과거 유괴된 경험이 있고 고통에 무감각한 캐릭터라는 식의 설정도 무리수에 불과합니다. 고통에 무감각한 캐릭터치고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왜 이런 설정을 넣었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여러모로 욕심이 너무 과해서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그래도 킬링 타임용으로는 적절한 수준의 재미를 선사해 주는 만큼 소일거리를 찾으신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0/04/05

무증거 범죄 - 쯔진천 / 최정숙 : 별점 2점

무증거 범죄 - 4점
쯔진천 지음, 최정숙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년 전부터 일어나고 있는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은 현장에 지문과 ‘날 잡아주세요’란 메시지가 인쇄된 종이 한 장만을 남기고 다른 어떤 허점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한 네 번째 특별조사팀마저 성과 없이 해산되자, 경찰은 수학 교수로 일하고 있는 범죄논리학 전문가 옌량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편 한순간의 실수로 불량배를 죽이게 된 청년 앞에 한 남자가 다가와 증거를 없애줄 테니 범죄를 부인하라며 경찰 대처법을 가르쳐주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수정 인용)

중국 추리 소설찬호께이의 작품 3편 - "13 .67", "망내인", "기억나지 않음, 형사" - 과 원샨의 "역향유괴" 만 읽어보았습니다. 찬호께이의 작품은 대체로 평작 이상이었지만 원샨의 작품은 기대 이하였었는데, 이 작품은 어떨까 싶어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트릭이 존재하는 본격 추리물은 아니며, 범죄자와 탐정두뇌 싸움이 핵심인 범죄 스릴러입니다. 그러나 제목의 '무증거 범죄'가 의미하는 완전범죄에 대해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꽤 재미있었습니다. 전前 수사전문 요원이었던 뤄원이 깡패 소태보가 살해된 현장을 조작하는 과정의 디테일, 그리고 이 사건이 범죄논리학자 옌량에 의해 하나씩 단서가 드러나며 진상이 밝혀지는 과정이 볼 만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2만 위안이 넘는 큰 돈을 하트 모양으로 작게 접어서 사건 현장에 숨겨 놓는다는 아이디어가 기발했어요. 이 돈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현장에 몰려들어 현장이 훼손되게 만드려는 의도였는데, 아주 설득력 넘쳤습니다.
이 사건과 항저우 시에서 "나를 잡아주십시오"라는 메모를 남기고 벌어진 연쇄 살인극이 맞물리는 전개도 좋습니다. 뤄원이 자신의 아내와 딸이 실종된 현장에 남겨진 지문의 소유자를 찾기 위해, 그 지문의 소유자가 범인인 살인극을 조작하여 일으켰다는 동기였는데 대담한 아이디어일 뿐 아니라, 설득력도 충분합니다. 이러한 설득력 덕분에, 이야기를 끝까지 읽게 됩니다. 

옌량이 추리한, 뤄원이 주후이루와 궈위가 저지른 살인 은폐를 도와준 이유도 그럴듯합니다. 뤄윈이 소태보를 애초부터 살해할 목적이었지만, 선수를 빼앗긴 뒤 은폐를 도와주었다는 이유인데, 여러가지 정황 증거들이 그게 사실이라는걸 암시하니까요. 좀 작위적이기는 해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이외에 익숙치 않은 중국식 묘사들도 흥미로왔습니다. 제목의 '무증거 범죄(완전범죄)'를 비롯하여 상식적이다, 이론적이다라는 말을 '유물론자'라고 표현한다던가, 범인이 경찰 수사에 대해 잘 알고있다는 걸 '역수사 능력' 이라고 표현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으며, 두뇌 싸움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옌랑과 경찰이 뤄원을 잡아 넣을 증거를 찾아내는데 결국 실패하는 탓이 가장 큽니다. 옌량의 활약이 없는건 아니지만, 두뇌 싸움의 결과는 일방적입니다. 게다가 고차방정식 운운하며, 증거가 없으니 범인부터 대입해서 시나리오를 짠다는 옌랑의 방법론은 일견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특정 인물을 범인으로 만드는 조작극과 별로 차이가 없어서 아주 실망스럽습니다. 이는 뤄원이 "모든 이야기가 들어맞는다고 해서 내가 범인이라곤 할 순 없어. 자네의 시나리오는 아무한테나 죄를 뒤집어씌운 다음 범행 동기를 설명할 수 있지."라고 통렬하게 부정하지요. 옌랑은 마지막에는 감정에 호소해서 어떻게든 자백을 이끌어내는게 전부로, 한 마디로 뤄원한테 완패한 셈입니다. 이래서야 공정한 두뇌 싸움으로 보기는 어렵죠.
또 뤄원이 연쇄 살인극을 벌이는 와중에, 과연 단 한 번도 경찰 수사 물망에 오르지 않을 정도의 완전범죄가 가능했을지?에 대한 설명도 많이 부족합니다. 뤄원이 대단한 전문가라는걸로 퉁치기는 힘들어요. 실제로 공원에서의 범행은 목격자도 있었는데 말이죠. 하긴, 이는 뤄원의 아내와 딸을 살해한 범죄가 완전범죄가 된 것에 비하면 약과이기는 합니다. 우발적으로 급작스럽게 벌인 범행인데도 불구하고, 경찰 최고의 전문가가 사력을 다해 찾았지만 범인이 누군지 밝혀내지 못할 완전 범죄가 성립된걸 단지 운이라고 치부하는게 가능할까요? 작 중에서 뤄원의 능력이 시종일관 대단한걸로 묘사되는 것과는 배치되는 내용이기도 해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아울러, 옌랑이 뤄원을 수상하다고 여긴 계기가 된 뤄원의 차에 대한 감상은 억지스럽습니다. 뤄원답지 않은 좋은 차는, 범행을 저지르고 용의선상에서 쉽게 빠져나가기 위함이라고 추리하지만, 뤄원이 과거 출원했던 특허로 성공한 부자라고 설명되는 만큼, 좋은 집과 좋은 차는 그 재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의심을 할 이유는 없어요. 또 그게 수상했다면 좋은 집에 사는 건 왜 트집을 잡지 않았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단점들은 사소할 뿐, 가장 큰 문제는 책 뒤 해설에서도 실려 있듯이, "용의자 X의 헌신"과 너무나 비슷한 구조라는 점입니다. 수학, 과학과 관련된 천재들의 두뇌 대결, 순전히 선의에 의해 사건 은폐에 가담한다는건 완전 판박이입니다. 애틋한 사랑을 키워나가던 두 청춘 남녀가 결국 파멸한다는 결말까지도 똑같고요. 작가 스스로도 영향을 받았다는걸 인정했다는데, 그렇다면 오리지널을 뛰어넘는 무언가 새로운게 있었어야 했습니다. 공정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요. 그러나 그러한 새로운 요소는 중국이라는 무대의 특성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한 마디로, 오리지널 만큼의 수작은 아닙니다. 그나마 캐릭터를 가져오려면 제대로 가져왔어야 했는데, 옌량과 뤄원 모두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갈릴레오 유가와 역인 옌량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범죄자와의 승부에서 이기지 못한다는 결정적 단점이 있으며, 뤄원은 아무리 아내와 딸 실종 사건의 진범을 찾기 위해서라지만, 잔챙이 범죄자들을 다섯 명이나 살해했기 때문에 동정심을 가질 여지가 없으니까요. "용의자 X의 헌신" 속 이시가미처럼 뤄원이 아내와 딸의 실종 이후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를 독자에게 잘 공감시키지 못하기도 했고요. 이건 작가가 놓쳤다고 밖에는 볼 수 없겠죠. 어설프게 캐릭터를 베끼지 말고, 초반부에 옌량이 똥이 있는 엘리베이터에 갇힌 뒤 벌어지는 사고는 재미있었던 만큼, 이런 식으로 좀 어설픈 인물로 그려가는게 차별화되고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읽는 재미는 나쁘지 않지만, "용의자 X의 헌신"에 비교하자면 한없이 부족하네요. 중국 추리 소설이 궁금하신게 아니라면,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 중국 추리 소설은 찬호께이만 믿고 가야겠습니다.

2024/09/07

오렌지와 빵칼 - 청예 : 별점 2점

오렌지와 빵칼 - 4점
청예 지음/허블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벗어나지 않게 순종하며, 도덕적으로 완벽한 삶을 따라하며 모든걸 속으로 삭이며 살아가는 유치원 교사 오영아는 심리 상담을 통해 전두엽 기능을 일부 조절하는 시술을 받았다. 그 뒤 영아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않고, 억압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모든 금기를 범하며 엄청난 쾌락을 얻는다. 그러나 시술 효과는 4주만 지속될 뿐이었다.

통제에서 벗어나 사회적인 금기를 범하는, 도덕에 반하는 행동(배덕의 맛)은 쾌락을 주지만 이는 마약과 같다는 설정의 일상 심리물. 

뇌를 건드려 사람이 변모한다는 설정의 작품은 많습니다. 전두엽 절제로 멀쩡한 사람을 로봇처럼 만든다던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혹성탈출 1" -, 아니면 바보를 천재로 만드는 - "앨저넌에게 꽃을", "론머맨" - 식으로요. 이 작품처럼 자기 통제를 없애는 설정은 뇌 조작으로 사악한 범죄자를 사회 규범에 충실하게 만드는 "시계 태엽 오렌지"의 반대 버젼이고요. 사회 비판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도 비슷합니다. 다들 자기가 옳다고 믿지만, 그걸 타인에게 강요하는건 잘못되었고 이런걸 추종하지말고 자기 자신의 뜻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내용이거든요.

하지만 이렇게 자기 통제, 죄의식을 없애는 설정이라면 SF나 디스토피아적인 배경에서 완벽한 군인이나 범죄자, 혹은 킬러를 만들 때 써먹음직 한데, 이를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평범한 일상으로 풀어나간건 분명한 차별화 요소입니다. 사회 비판적 요소도 공정무역, 환경보호와 친환경, 기부 등과 같은 일상과 맞닿아 있는 소소한 것들이라 신선했어요. 이런 작품이 체제와 제도의 비판을 하지 않는건 거의 처음 본 것 같네요.
덕분에 신선한 느낌은 충분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온갖 통제에 얽매여 살아가는 오영아의 답답한 모습에서,시술 후 통제를 다 부숴버리고 자신을 힘들게 했던 주변인들을 날려버리는 모습으로 변모하는 묘사는 통쾌했고요.

그러나 통제를 벗어난 상황에서 극도의 쾌락을 느낀다는 핵심 설정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왜 쾌락을 느끼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무한 탓입니다. 자기 통제가 강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인지, 오영아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상황인지도 모르겠고요. 영아의 연인 수원도 피실험자로 영아를 희생양삼아 공짜 시술을 받은 듯 한데, 평상시에 철저한 자기 관리와 영아에 대한 지극정성을 보여준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수원이 은우의 친부였다는 일종의 반전도 그다지 새롭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식의 결말도 아쉬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어딘가의 추천에서 접해서 읽어보았는데, 저는 그닥이었습니다. 기대했던 '장르 문학'은 아니었던 탓이 가장 큽니다.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15/06/22

13.67 - 찬호께이 / 강초아 : 별점 3점

13.67 - 6점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100여페이지 정도 분량의 중단편 6편이 수록된 연작 중단편집. 제목의 13.67은 2013년에서 시작하여 1967년까지를 거슬러 올라가는 시대적 배경을 의미하고 있죠. 탐정역의 관전둬가 전편에 등장할 뿐더러, 뤄 샤오밍이나 탕 아저씨, 범죄자 스씨 형제 등 등장인물들이 여러개의 작품에 등장하는 등 연작, 시리즈 느낌이 강합니다.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국내에서 보기 힘든 중국 추리소설이라는 점인데, 단지 이색적이기만 한게 아니라 추리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이라는 것에 놀랐습니다. 중국 추리소설 수준도 정말 높구나 싶어 감탄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탐정역인 '천리안' 관전둬의 뛰어난 추리력과 사소해보이던 단서들의 조합으로 진상이 밝혀지는 정교하게 짜여진 이야기 구성도 좋지만, 진상이 놀랍기 때문에 흡사 반전 스릴러를 읽는 듯한 짜릿함을 선사해준다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중국 작가가 쓴 중국 추리소설이기에 선보이는 중국 - 홍콩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도 볼거리에요. 특이한 계급명과 CIB를 비롯한 중안조, 반흑조, 특별 직무대, 비호대와 같은 다양한 부서명에 1호 (경찰 최고위인 경무청장의 속칭), 장작 (제복 문양)같은 중국 - 홍콩 경찰 관련 용어 및 은어들, 탁가, 고혹자, 파파라치, 다취안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범죄자), 도사 (마약중독자), 일루일봉 (홍콩 특유의 매춘업소) 과 같은 범죄 관련 은어, 호루라기를 분다 (동원 가능한 인력과 물자를 총동원한다)나 책에 들어간다 (감옥에 간다), 저수지를 경비한다 (한직으로 밀려난다)와 같은 홍콩 속어, 은어로 탄산수를 "네덜란드 음료수"라고 부른다거나 광둥어로 농땡이부리는 사람을 사왕이라고 한다는 등의 묘사가 그러합니다.

실존하는 맥퍼슨 스타디움, 퀸 메리 병원, 프린스 에드워드 서로, 퉁초이가 (여인가) 등 몽콕의 거리, 그레이엄가 시장, 카오룽 거리와 같은 이국적 풍광 역시 가득하고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분명 있습니다. 일단 탐정인 관전둬의 캐릭터가 큰 매력이 없다는 점이 그러해요. "천리안" 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능한 경찰로 한번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고, 발자국만 봐도 범인이 누군지 알아낸다는 천재이지만 사생활에서는 구두쇠 수준으로 알뜰하고 정리정돈을 잘 못한다 라는 식으로 캐릭터를 부여하기 위한 묘사는 제법 되기는 하나 특별히 와 닿지도 않고, 내용과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았거든요. 또 몇몇 이야기는 너무 작위적으로 짜여져 있기도 합니다. "죄수의 도의" 편이 대표적이죠.

허나 단점은 사소할 뿐, 부담되는 분량임에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여러모로 자극도 많이 되었고요.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새로운 추리 소설을 읽기 원하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저와같이 80~90년대 홍콩영화 최 전성기 팬이시라면 더 즐겁게 감상하실 수 있을 것 같네요.

책 소갯글을 보니 영화가 나온다고 하는데 꼭 보고 싶어집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하니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길...

"흑과 백 사이의 진실"

펑하이 그룹의 총수 위안원빈 살인사건 해결을 위해 담당인 뤄 독찰이 선택한 방법은 자신의 사부 관전뒤의 병실로 사건 관계자들을 소집하는 것. 이유는 관전둬가 사건해결 100%를 자랑하는 명탐정이지만 간암말기로 혼수상태에 빠졌기 때문으로 병원에서 뇌파를 읽는 특수한 장비를 이용하여 관계자들에게 사건에 대해 듣고 그 자리에서 추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관전둬의 추리를 통해 단순 강도사건인줄 알았던 사건이 위씨 가문 내부인의 소행이라는 것, 그리고 사건 현장에 남겨진 증거들 - 테이프, 다이잉 메시지가 없는 이유, 흉기인 작살에 대한 이상한 사실 등 - 을 통해 아들 위용렌이 범인임이 밝혀진다.

그러나 뤄 독찰은 위용렌 뒤에 고용인 탕 아저씨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체포한다. 탕은 경찰서로 이동하는 자동차 안에서 가설임을 전제로 사건의 진짜 동기와 위용렌을 조종한 방법 등을 낱낱이 밝힌다. 그를 옭아맬 증거는 전혀 없는 상태. 그러나 뤄 독찰은 탕이 관전둬를 살해하는 현장을 촬영하여 그를 관전둬 살해범으로 체포하게 된다.

2013년을 무대로 한 첫 이야기. 그동안은 링컨 라임이 안락의자 탐정의 최고봉이라 생각했는데 그를 뛰어넘는 존재가 나왔습니다! 이제는 아예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가 탐정이거든요.

이런 설정은 좀 작위적이고 웃기지만 추리의 흐름은 괜찮습니다. 바닥이 어질러져있지만 침입한 흔적은 없다는 단순한 사실로 용의자를 특정하는 초반부, 위씨 가문의 무남독녀 위첸러우에 관련된 어두운 과거가 드러나는 중반부, 테이프와 작살총, 다이잉메시지가 없는 상황 등을 통해 범인을 확정하는 후반부까지 모두 합리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안락의자 탐정물이기에 독자에게 제공되는 정보도 공정한 편이고요.

무엇보다도 탕 아저씨가 진정한 흑막이며 사건의 핵심 동기가 밝혀지는 마지막 반전이 인상적이었어요. 위용롄의 설득력없는 동기에 비해, 설득력은 물론 드라마까지 갖춘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위용롄을 조종할 수 있었던 이유도 충분히 설명되고요. 아울러 뤄독찰이 모든 것을 꾸민 것이었다는 것도 앞서 말한 작위적인 설정을 잘 포장하고 있어서 꽤 괜찮았어요.

그러나 탕이 관전둬를 살해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결말이 영 별로네요. 그가 직접 나서서 관전둬를 살해할 이유가 없거든요. 본인 스스로 말했듯 아무런 증거도 없는 상황인데 뭐하러 추가 범행, 그것도 경찰을 살해하는 범행을 저질러 가며 뒷처리를 해야 했을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직접 죽이지 않아도 오늘, 내일 하는 상황이고 그의 추리도 결국 증거를 확보하지 않은 가설이자 추론에 불과할텐데 말이죠.

때문에 감점해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마지막 사족만 없었어도 별점 3점이상은 충분했을텐데 아쉽습니다.

"죄수의 도의"

잘 나가는 엔터회사 사장이지만 실상은 흑사회 보스인 줘한창을 검거하려는 뤄샤오밍은 실패만 거듭한다. 그러던 중 줘한창 회사에 소속된 신인가수 탕린이 괴한에게 습격당하고 살해당하는 동영상이 배포되는데....

줘한창을 잡아넣기 위해 암흑가 도의를 굳게 지키는 경쟁 조직 보스 런더러의 입을 열게 만든다는 작전이 그려지는 작품.

솔직히 여러모로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특히 죄수의 딜레마가 내용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영 모르겠어요. 죄수의 딜레마가 소용이 없는 암흑가 도의가 관련된 특수 상황에 대한 것은 알겠지만 런더러가 입을 여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데 말이죠. 또 탕린이 사실 줘한창에게 복수를 다짐한 전 정보원의 딸이라는 설정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과거 가쉽으로 접해보았던, 암흑가가 깊숙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홍콩 연예계의 이면을 그린 점은 괜찮았지만 평작 이상의 작품은 아닙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가장 긴 하루"

최고의 지능범인 스번톈의 탈옥 사건과 시장 대상의 무차별 산성액 투척사건이 한꺼번에 벌어진 날, 모든 사건을 꿰뚫어 본 관전둬는 한번에 사건을 해결한다.

스번톈이 저우샹관과 바꿔치기 되어 있다는 진상도 기발하지만, 이를 밝혀내는 추리도 합리적입니다. 스번톈 탈옥에 징교원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리는 쉽지만, 작중 등장하는 번호표가 뜯겨진 죄수복, 도로에서 발생한 사고, 산성액 투척 사건이 벌어진 시간과 저우샹관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상황, 응급처치에 대한 증언 등 사소한 것 하나하나 모두가 중요한 추리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스번톈과 대면한 관전둬가 그를 옭아매는 장면도 아주 통쾌했고요.

무엇보다도 '인구밀집형 도시가 무대인 탓에 설득력이 생기는' 작품의 대표적인 예라 더 주목할만 합니다. 탈옥 해 봤자 더 큰 감옥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누군가 죽었을 때 누구라도 조그만 의심을 품으면 법망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는 홍콩만의 상황을 기본에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홍콩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잘 표현한 작품이지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4점. 홍콩 추리문학계의 높은 수준을 짐작케 하는 좋은 작품입니다. 수록작 중 최고작으로 꼽겠습니다. 다양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스케일이 큰 만큼 영화화에도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영화로도 보고 싶네요.

"테미스의 천칭"

흉악범 스씨 헝제를 체포하기 위해 경찰은 스번성이 머무는 은신처 주위에 잠복한다. 그러나 일당이 도주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잠복 중이던 TT가 이끄는 경찰들이 그들을 체포하려 나서고, 총격전 끝에 범인은 모두 사살하지만 인질이 된 시민이 모두 죽는 참사가 발생한다.

이후 경찰내 내통자가 있을 것이라는 단서가 발견되고 사건을 지휘하던 가오랑산이 TT를 제거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는 소문이 퍼지는데...

홍콩 영화에서 봤던 악당과의 총격전이 유감없이 펼쳐지는 작품. 봉쇄된 주상복합(?) 건물에서의 활극 묘사는 일품이었어요

추리적으로도 인상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TT가 모든 것을 계획한 것이라는 진상도 놀랍지만 동기가 합리적으로 그것을 끌어내는 추론 역시 타당하거든요. 몇몇 사소해보이는 대사에서 단서를 끌어내는 관전둬의 활약이 빛을 발하거든요. 아울러 전작의 스번톈과 필적하는 강적 TT와의 두뇌 싸움도 돋보였습니다. 무선 발신 시간과 총격전 시간을 조종하는 트릭도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고요.

그러나 문제도 명확합니다. 관전둬의 추리에 증거가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죠. 때문에 증거를 조작하면서까지 벌이는 관전둬의 협박(?)이 그리 와닿지 않기도 합니다. TT가 총탄이 바꿔치기 당했다고 우겼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잘 모르겠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장점이 훨씬 많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빌려온 공간"

염정공서에 근무하는 영국인 그레이엄 아들 유괴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염정공서가 홍콩 경찰의 부정부패를 캐고 있었기에 경찰 조직과의 마찰이 있다는 당시 홍콩의 시대적 배경을 작품 전편에 깔고 있습니다.

유괴물로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데, 특히 지금 보아도 흥미진진한 몸값 전달 방법이 그 백미입니다. 지폐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금괴로 바꾸라는 지시를 하는 것, 혹시 모를 탐지기를 무효화하기 위해 수영장 잠수를 지시하는 것 등이 대표적입니다. 작중 시대에 적합했던 수사 현실을 반영한 완전 범죄 계획이라 할 수 있겠지요. 게다가 범인이 몸값 회수에 실패하는 결정적 이유인 주머니의 지퍼 고장 역시 현실적이라 마음에 들었고요. 홍콩에 실존하는 여러가지 공간을 활용하여 현장감이 높다는 것도 큰 장점이라 생각됩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아서, 관전둬가 사간의 진상을 깨우치는 모든 단서가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될 뿐더러 반전도 괜찮습니다. 유괴는 조작된 것이었고 실제로는 집 금고를 열고 서류를 훔쳐내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다는 것인데, 당시 시대 상황과 맞물린 좋은 동기였습니다.

허나 경찰이 연류되어 있었다면 더 현실적이고 쉬운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운과 우연에 많이 기댄 계획이니까요. 특히 리즈는 상근 유모이기에 열쇠를 복제할 기회는 찾다보면 분명 있었을텐데, 이렇게까지 사건을 키운건 쉽사리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시 시대 상황이 그만큼 절박했을 수도 있지만 우리와 같은 이국(異國) 독자들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드니까요.

아울러 관전둬가 직접 서류를 훔쳐낸 뒤 벌이는 공작 역시도 이해는 잘 되지 않더군요. 차라리 유괴 사건이 조작된 것임을 밝히고 주모자를 체포해 나가는게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유괴 자체는 굉장히 잘 그린 작품이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빌려온 시간"

1967년, 영국 정부와 홍콩인의 충돌 및 좌익 인사들의 테러 등이 벌어지던 시대. 하루하루 근근히 먹고사는 화자인 "나"는 "아칠"이라는 순경과 함께 좌익 테러리스트들의 폭탄 테러를 막기 위한 모험에 뛰어드는데...

1편의 악당 탕 아저씨가 화자로, 관전둬가 아칠이라는 순경으로 등장하는 작품. 화자인 "나"의 추리력과 활약이 비상해서 이 친구가 관전둬인지 알았는데 좀 의외였습니다.

여튼, "1번"이라는 말 자체에 주목하여 '페리선에서 영국인이 타지 않았다'는 답변을 통해 1번 차만 페리로 옮기며 운전사는 중국인이었다는 상황 설정이 돋보입니다. 당시 홍콩 거리를 차와 오토바이를 활용하여 질주하는 묘사 등에서 스케일 큰 모험 활극 느낌이 들었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크게 눈여겨 볼 부분이 없고, 시대 상황에 따른 정치적인 이야기가 많아서 딱히 감흥은 없었던 평작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19/08/02

죽여 마땅한 사람들 - 피터 스완슨 / 노진선 : 별점 2점

죽여 마땅한 사람들 - 6점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푸른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투자회사를 운영하는 테드 스버슨은 아내 미란다가 건축업자 브래드와 불륜을 저지른다는 걸 알고 실의에 빠졌다. 그 때 우연히 만난 여성 릴리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 둘은 죽어 마땅하다며 테드가 직접 행동에 나설걸 촉구했다. 릴리에게 빠져든 테드는 살인 계획을 세웠지만, 브래드가 선수를 쳐서 테드를 살해해 버리고 말았다. 이 사실을 뉴스로 접한 릴리는 그 둘을 직접 응징하려 하는데... 

이런 저런 곳에서 평이 상당히 좋았던 미국 스릴러입니다. 오쟁이를 진 남편이 살의를 품게 된 계기가 우연히 만난 여성 릴리의 설득 때문이라는 시작은 독특합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낯선 승객"이 살짝 떠오르더군요. 책 뒤 해설을 보니 영향을 받은 듯, 안 받은 듯 모호하게 쓰여져 있기는 한데 최소한 작가도 존재를 알고 있었던건 분명하네요. 첫 만남 당시 릴리가 읽고 있던 작품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1" 이니까요.

평이 좋은 이유는 일단 잘 알 수 있습니다. 재미만큼은 확실하거든요. 흡입력있는 신선한 전개도 아주 좋고요. 중반부까지 테드와 릴리의 시점을 각각 오가는데 테드의 시점은 릴리를 만난 다음부터의 현재이며, 릴리의 시점은 그녀가 첫 살인을 저지른 어린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옵니다. 그리고 두 시점이 합쳐지는 순간, 테드는 살해당하고 이는 독자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줍니다. 그 뒤에도 릴리와 미란다 시점, 미란다가 살해된 뒤에는 경찰 킴볼 시점과의 교차 전개가 계속되는 것도 괜찮았어요. 독자에게 다양한 시각, 알지 못했던 정보를 제공하는 덕분입니다.
이 과정에서 테드에게 살의를 불러 일으키는 릴리에 대한 설정과 묘사도 인상적입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죽이는데 주저함이 없는 싸이코패스"나를 찾아줘"의 에이미 스타일인데, 개인의 욕심이나 이기심보다는 제목 그대로 '죽여 마땅한' 사람들만 죽인다는 차이점이 명확합니다. 범행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의 추진력, 결단력 역시 매력적이고요. 그녀를 실존하듯 그려낸 묘사도 일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린 시절부터 추리 소설을 - '낸시 드류' 시리즈를 포함해서 - 좋아했던 소녀로 그려져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녀와 대척점에 있는 '죽여 마땅한' 사람들인 미란다와 브래드 설정도 괜찮습니다. 단순히 불륜 관계가 아니라 테드를 살해한다는 전개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 킴볼 역시 잘 그려져 있습니다. 시를 쓰는게 취미일 정도로 문학에 조예가 깊고, 상당한 관찰력과 추리력을 갖추고 있으며 우연히 쓴 음란한 시가 발목을 잡게 된다는 복선도 치밀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릴리가 대학 시절 사귀었던 에릭을 살해한 범행만큼은 돋보입니다. 에릭이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고 견과류가 들어간 인도 요리를 먹인 뒤, 치료제를 숨겨 질식해 사망하게 만드는데 사고사로 보이게끔 다양한 조작을 하기 때문입니다. 견과류는 미리 갈아서 요리에 섞어두었고, 범행 전 에릭의 승부욕을 자극하여 펍에서 열리는 술 먹기 대회에 참여하게 만드는 등의 작전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술에 취한 에릭이 실수로 요리를 먹고, 치료제도 찾지 못해 죽었다고 경찰은 생각하게 되지요.
경찰 킴볼이 의외로 유능해서 릴리와 테드의 관계, 릴리의 거짓말과 여러가지 이상한 행동을 파헤치는 과정도 볼거리입니다. 정말 몇 안되는 단서를 통해 릴리를 추적해나가는 과정은 경찰력에 상당한 신뢰를 갖게 만들 정도에요.

그러나 다른 범행은 그닥입니다. 릴리가 미란다와 브래드를 살해하는 핵심 범행부터가 그러합니다. 특히 브래드를 설득해서 미란다를 죽이게 만든다는 계획이 최악이죠. 브래드가 미란다에게 역으로 설득당해 릴리를 죽일 수도 있었으니까요.
미란다, 브래드를 살해한 뒤 먼 거리를 이동하여 사체를 유기하는 장면의 묘사도 나쁘지는 않지만 도로의 CCTV에 촬영되거나 도로 요금소에서 목격당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완벽하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미국 도로 CCTV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과연 추적이 불가능했을지?에는 의구심이 남습니다.

릴리가 저질렀던 다른 사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 만났던 유아 성애자 챗을 숨겨진 우물에 떨어트려 죽인 뒤 챗의 모든 짐도 같은 장소에 버린 첫 범행부터 문제가 많습니다. 범행 자체의 설득력부터 부족한 탓입니다.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기는 했지만 챗이 우물에서 떨어져 즉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을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으니까요. 지나치게 잘 풀린 느낌이에요. 차라리 뚜껑을 덮고 굶어죽도록 놔 두는게 낫지 않았을까요? 또 당장은 살해하는데 성공했더라도 누군가 찾아 나섰다면 충분히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도 문제에요. 정처없이 떠도는 나그네라 아무도 찾지 않았다는 설정으로 대충 넘어갈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릴리가 충동적으로 킴볼을 칼로 찔러 체포되는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백주대낮에 현역 경찰에게 직접 흉기를 휘두르는건 빠져나가기 힘든 범죄니까요. 킴볼을 없애려면 더 철저하게 준비해서 범행을 저질러야 했습니다. 치밀해 보였던 릴리 캐릭터가 막판에 급작스럽게 붕괴되어 버리는데 그래서 얻은 건 아무 것도 없어요. 범죄 천재로 보였지만 그냥 어설픈 정신병자에 불과했다는 결말에 불과합니다.

그 외의 범행들도 어설픕니다. 남편을 죽이고 재산을 가로채려던 미란다의 계획? 당연히 실패했을겁니다. 범행 당시 브래드의 인상착의가 목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릴리에 의해 살해되지 않았다면 킴볼 등 경찰의 수사에 의해 진상이 드러나는건 순식간이었을 거에요. 작 중에 등장하는 것 처럼 가짜 증언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과연 그렇게 쉽게 넘어갔을지는 의문입니다.
테드가 충동적으로 릴리가 근무하는 대학 도시 윈슬로를 방문한 것, 릴리가 테드 사망 후 케네윅을 방문해서 숙박한 것 등의 자잘한 실수도 눈에 뜨입니다. 테드의 실수는 릴리를 곧바로 수사 선상에 올리게 만드니까요. 테드가 미란다보다 선수쳐서 범행을 저질렀다 해도 이래서야 완전 범죄가 성공했을 것 같지는 않네요. 테드와 릴리가 서로 끌렸다는 설정은 바람난 아내와 정부를 응징하겠다는 테드의 계획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아니 등장하니만 못했고요.

작위적인 설정도 많습니다. 테드의 아내 미란다가 에릭과 바람이 났던 대학 시절 친구 페이스이며, 우연히 만난 줄 알았던 릴리와 테드의 만남도 어느정도 계획된 것이라는게 밝혀지는 것 등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냥 우연히 만나서 정말로 범행에 대해 조언을 해 주게 되었다는 식으로 풀어나가도 충분했을텐데 말이지요. 마지막에, 릴리가 시체를 유기했던 초원 지대가 재개발된다는 마무리도 작위적입니다. 이런 류의 개발 계획을 근처에 사는 사람이 몰랐다는게 말이 될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인물 설정 및 묘사, 그리고 전개는 뛰어나지만 범죄물로는 함량 미달이라 감점합니다. 공들여 쌓아올린 천재 여성 범죄자가 별볼일 없는 정신병자라는 결말도 실망스럽고요.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7/04/21

아마겟돈 - 프레드릭 브라운 / 조호근 : 별점 3점

아마겟돈 - 6점
프레드릭 브라운 지음, 조호근 옮김/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그동안 유명세만큼 국내에 소개되지는 않았던 거장 프레드릭 브라운의 단편선입니다. 정식 소개된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네요. 반가운 마음에 바로 구입하였습니다. 

작가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 유머, 반전이 살아있는 단편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는데, 유일한 단점이라면 국내 소개가 너무 늦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2.66.... 인데 반올림해서 3점주겠습니다. 늦었지만 번역 출간된 것만 해도 충분히 점수를 줄 만하니까요. 같이 소개된 "아레나"도 빨리 구해봐야겠습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마게돈" 

마술사를 꿈꾸는 꼬마가 성수를 담은 물총으로 악마를 퇴치한다는 내용으로, 이전에 국내에 소개되었던 단편집 ("마술 반지" 였던가요?) 에서 접했던 작품입니다.

악마가 소환되는 과정의 의외성은 돋보이지만, 딱히 대단한 반전은 없습니다. 그냥 저냥한 소품이에요. 솔직히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기는 어려운데 왜 표제작인지 잘 모르겠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스타 마우스"

과학자 헤르 오베르부르커는 직접 만든 로켓에 생쥐 밋키(미키인데 오베르부르커 발음이 이렇습니다)를 태워 달로 보냈다. 소행성 프록슬에 착륙한 밋키는 프록슬인에 의해 지성을 갖게 되었다.
밋키는 쥐들의 지능을 인간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기계를 가지고 지구로 복귀해 쥐들의 나라를 만들 꿈을 꾸었지만, 아내 미니 우리에 설치된 전기 장치 탓에 원래의 생쥐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쥐가 놀라운 지능을 가지게 되지만 허무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내용은 "앨저넌에게 꽃을"이 떠오릅니다. 앨저넌도 쥐였지요. 

작품은 오베르부르커 시점에서 로켓 계획이 펼쳐지는 전반부와 밋키 시점의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 마지막에 말하는 쥐를 등장시킨 후, 그 이유를 후반부에서 설명하는 연재물같은 구성인데 덕분에 독자의 흥미가 끝까지 유지됩니다. 황당하지만 다소 허풍섞인 글도 매력적이고요. 복선인 미니 우리에 설치된 전기장치도 잘 안배되어 있습니다.

허나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소재임에는 분명합니다. 비슷한 류의 이야기는 이미 너무 많은 탓입니다. 물론 이 작품은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선구자적인 작품일거에요. 시대가 너무 지난 뒤 읽은게 안타깝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모자마술" 

두 커플이 더블 데이트를 즐기던 중, 밥이 카드 마술을 선보였는데 월터가 트릭을 말해버렸다. 자존심이 상한 밥은 월터에게 마술을 보여달라고 종용했고, 등쌀에 못 이긴 월터는 모자에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기묘한 생물을 꺼내어 보여주는데...

10페이지에 불과한 초단편인데 밥과 월터의 신경전으로 긴장을 자아내다가, 월터가 기묘한 생물을 꺼내는 클라이막스로 끌고 가는 과정이 탁월합니다. 

그러나 월터가 외계인일지도 모른다는 여운을 남기는 결말은 안이했어요. 좀 쉽게 간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불합리 행성" 

행성을 다니며 공연을 하는 '나'는 새로운 행성을 발견하고 고용 선장인 조니, 아내 , 딸 엘렌과 착륙했다. 행성에 '불합리 행성'(시리우스 1번, 2번 행성이 이미 있는 상태에서 '0'번이 되는 궤도의 행성을 발견한 것이므로)이라고 이름 붙인 후, 행성을 탐사하면서 상상하기 어려운 기묘한 생물과 현상을 목격하는데...

행성에 나타났던 기묘한 동물과 거리는 모두 바퀴벌레를 닮은 행성 거주민이 투사했다는 내용의 SF 단편입니다. 이전 다른 앤솔로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물질 대신 정신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설정은 꽤 자주 변주되었던 것인데, 이 작품처럼 1940년대부터 인용된 고전적인 소재라는건 몰랐네요. 그만큼 작가가 시대를 앞서갔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작품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조금 뻔하지만 코믹한 내용에 의외의 반전이라는 작가의 특징이 잘 나타나 즐겁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예후디 장치"

'나는 미쳐가고 있다.'라는 충격적인 글로 시작되는 단편으로  예후디 장치라는 이름의 - 정식 명칭은 자율 자동암시 교열진동 초가속기' - 기계가 핵심입니다. 사람을 가속시켜 원하는 일을 해 주도록 만들지만, 본인은 자기가 직접 빠르게 움직여 무언가를 했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계이지요. 그런데 예후디라는 "이름"을 부르는 탓에 무형의 존재가 실체를 갖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약간 동양적인 설정이죠? 이름을 불러야 의미를 갖는 꽃처럼 말이죠.
덕분에 '예후디'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명령인 "자살이나 하라고"에 따라 자살을 해 버려 동작이 멈춘다는 결말로 이어지는 전개가 아주 깔끔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예후디 장치를 이용해 '나'가 썼다는 마지막 반전도 놀라웠고요.

진으로 만든 칵테일인 '진 벅'이 주요한 소재 중 하나로 등장하는 것도 이채롭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칵테일로 먹지만 다음 잔은 진을 7/8 넣어서, 마지막은 진만 따르고 소다수는 건드리지도 않고 먹지요. 하긴 이런 기계를 보고 겪으면 제정신이기는 힘들테니까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디테일한 설정에 녹아든 동양 철학적인 사고 방식과 반전까지 잘 갖추어진 좋은 작품입니다.

"웨이버리" 

사자자리 어딘가에서 전파를 쫓아 지구로 온 베이더 (inavader)가 모든 전기를 빼앗은 후를 그린 단편입니다. 

분명 지구가 정복당한 상황인데, 주인공 조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더 행복해진다는 결말이 독특합니다. 전기는 없지만 증기기관, 말로 동력을 대체한 뒤 자전거 등으로 더욱 건강해지고, 텔레비젼과 라디오에 시간을 뺏기지 않아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취미 활동을 즐기게 된다는 내용이거든요.
이러한 점에서는 SF라기 보다 풍자극으로 보는게 타당할 수도 있습니다. 시사하는 바도 크고요. 현재를 무대로 인터넷을 잡아먹는 침략자가 등장하는 내용으로 변주해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하늘의 혼란" 

1945년 작품으로, 무대는 1987년입니다. 작중 등장하는, 하늘의 별을 조작하는 기계에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함이겠지요. 

그러나 천문학은 건판 사진기에 의지하고 있고, 라디오가 주요 미디어로 등장하는 등 미래에 대한 상상력만 놓고 보면 보잘 것 없습니다. 또 천문대 연구원 로저 플러터에서 물리학자 밀턴 헤일 박사로 주인공이 이동하는 과정도 매끄럽지 않습니다. 로저 플러터 없이 헤일 박사로만 이야기를 끌고나갈 수도 있었을텐데 괜히 이야기를 벌인 느낌이에요. 헤일 박사가 택시와 함께 장거리 여행을 하는 묘사도 불필요했고요.

그러나 이 작품은 분명 걸작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미래에 대한 상상력 자체는 별로지만 미래에 대해 진짜로 통찰력을 발휘한 부분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광고에 대한 것입니다. 하늘의 별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운동이 광고를 위한 것이었다는 반전, 결말은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아이이디입니다. 천재 스니블리가 자신의 발명품으로 비누 광고를 하는데 성공하지만, 철자가 틀려 쓰러진다는 결말도 유쾌하고요.

조금만 더 압축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리고 서두에 언급한 단점이 없었더라면 완벽했겠지만 아이디어와 반전만으로도 최고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노크" 

"지구 최후의 남자가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장 두 개로 이루어진 짧고 훌륭한 공포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단편입니다. 그러나 공포물은 아니고 기발한 SF에요. 주인공 월터는 잔이라 불리우는 외게인들에게 채집된 인간으로, 그 외 다른 인류는 모두 잔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월터는 백 종류에 달하는 무작위 채취된 동물 암수 한 쌍 중 하나로, 잔들의 동물원에 수용된 신세이고요.
거의 불멸에 가까운 수명을 가진 잔은 인간과 동물들의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월터는 방울뱀을 이용하여 잔 두명을 죽게 만드는데 성공하여 그들이 떠나게끔 유도합니다. 첫 두 문장은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여자, 이브가 될 그레이스가 월터의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고요.

그런대로 재미있지만 허술한 것도 사실입니다. 서두만큼은 괜찮았는데 말이죠.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저 같으면 어떻게 썼을까요? 지구 최후의 남자가 방 안에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린다... 과연 문을 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딜레마를 다뤘을 것 같아요. 누가 문을 두드렸는지 너무나 알고 싶어서 혹시 죽을지라도 그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다는 내용으로 말이지요. 혹시 내가 지구에 혼자 남은 생명체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과연 문을 두드린 것은 누굴까요? 아, 저도 궁금해지는군요.

"모든 선량한 벌레눈 괴물들이" 

SF 작가 엘모와 아내 도로시 앞에 안드로메다 2에서 온 외계인 5명이 동물들의 몸을 빌어 나타났다.

어딘가에서 봤음직한 내용입니다. 외계인들이 동물들의 모습으로 지구인 앞에 나타난다는 설정은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그러나 이 작품 속 외계인들이 엘모와 도로시 앞에 나타난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딱히 우주선을 고치는데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감시 때문에 사람만 부족해졌을 뿐이에요. 엘모에게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준다는 것도 창작력을 준 게 아니라 머릿 속에 있는 일종의 장애물을 제거해 주었다는 설정이라 여러모로 애매해보였고요.

그다지 기발하지도 않고 내용도 설득력이 낮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광기에 빠져라" 

조지 바인은 3년전 교통사고로 이전 기억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는데, 어느 날 편집국장 캔들러가 그에게 병을 핑계로 정신병원 잠입 취재를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기억 상실은 핑계일 뿐, 조지 바인은 27세의 나폴레옹이 시공을 초월하여 이식된 상태였다. 조지는 취재 지시의 목적이 자신의 정신병을 몰래 치료하려는 음모일 수도 있다고 여겼지만 취재에 응해 정신병원에 잠입하는데... 

인간은 실수이고, 기생충이고, 게임의 말일 뿐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백만 개의 행성에는 그 행성의 유일한 지성인 곤충 종족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지성이 한데 모여서 단 하나의 우주적 지성을 만든다. 바로 신을!

개미가 신과 같은 절대자라는 반전이 독특한 작품으로 수록작들 중에서는 가장 긴 작품 중 하나입니다. 70여 페이지에 이르니까요.

초반은 꽤 흥미롭습니다. 정신병원의 비밀도 궁금할 뿐 아니라 조지 바인은 사실 나폴레옹이라는 설정도 꽤 매력적이니까요.

그러나 나폴레옹은 개미들의 게임을 위해 시공을 초월한 것이라는 짤막한 해석 외의 초반 떡밥은 하나도 회수하지 못합니다. 정신병원의 비밀은 무엇인지, 조지 바인을 본인 몰래 정신병원에서 치료하기 위한 음모였는지 아닌지, 나폴레옹을 구태여 조지 바인에게 소환시키면서까지 하려고 한건 무엇인지 등등은 결국 등장하지 않으니까요.
아울러 인간은 별거 아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것이 진짜 절대자다라는 설정도 지금 읽기에는 식상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진실탐지기" 

2년 전 실종된 범죄 심리학자 채플 박사와 범죄자들이 거짓말 탐지기를 빠져나간 상황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유능한 탐정 벨라 조드가 사건 해결에 도전한다.

1999년을 무대로 한 SF 범죄물인데, 탐정과 범죄자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범죄는 그다지 비중이 없습니다. 유능하다는 탐정 벨라 조드의 수사도 변장과 함정 수사가 전부고요.

하지만 최면을 통해 기억을 지워 거짓말 탐지기를 통과하게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정말 획기적입니다. 사건 자체에 대해 기억을 하지 못하므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는건데, 참신하고 대단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처음 등장한 것인지 궁금하네요.
이어지는 반전도 그럴듯합니다. 거짓말 탐지기 통과를 요청한 범죄자는 모두 중범죄자들인데, 그들의 기억을 지워주면서 선량하게 살게끔 최면을 걸어 결국 범죄 자체가 없어지게 만든다는 것으로 역시나 탁월한 아이디어였어요.

한마디로 여러모로 시대를 앞서간 프레드릭 브라운의 아이디어가 빛나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불사조에게 보내는 편지" 

18만년 동안 살아온, 15만배 느리게 사는 남자의 독백으로 핵 전쟁이 일어나 문명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냉전시대의 공포를 희망적으로 설명하는 소품입니다. 불사에 가까운, 15만배 느리게 사는 남자에 대한 설정은 재미있으며, 인류는 역동적이기에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는 희망찬 메시지도 인상적입니다.

허나 배경이 되는 사상과 메시지 모두 지나치게 오래된 것이에요. 때문에 지금 시점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군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밋키 다시 우주로"

8년만에 다시 쓰여진, 똑똑해진 생쥐 밋키 이야기입니다. 어지간히 캐릭터들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이번에는 새로 투입된 흰색 생쥐 화잇티와의 사투를 그립니다. 일종의 모험물이랄까요? 화잇티가 X-19 장치를 조작하여 흰 쥐를 생태계 정점에 놓으려 한다는 악마적인 발상이 눈길을 끌며, 지성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결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앨저넌에게 꽃을"과 역시나 비슷하네요. 앨저넌 이름이 밋키였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녹색의 땅"

붉은 행성 크루거 4에 추락한 우주비행사 맥개리는 이 행성에 추락한 것으로 알려진 우주선 잔해를 찾아 정글을 헤멘다. 트랜지스터 부품을 구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그의 유일한 파트너는 5족 생물 '도로시'. 어깨 위에 올려놓은 도로시는 흡사 여성의 손길 같고, 그런 도로시에게 위안을 느끼며 말을 건넨다. 그러던 중 우주선 하나가 그를 발견한다!

붉은 행성에서 '초록색'에 대한 환상을 품고 살아가는 광인의 이야기입니다.
구하러 온 아처 중위에 의해 도로시는 존재하지도 않고, 4~5년이라고 믿었던 표류 기간이 무려 30년이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 까지는 버틸 수 있었지만 지구가 우주 전쟁으로 파괴되어 초록색이 남아있지 않다는 말에 결국 정신이 붕괴해버리고 만다는 결말은 섬찟합니다. 붉은 행성 크루거와 그곳의 생태계에 대한 짤막한 묘사도 상상력을 많이 자극하는데, 이 부분은 영상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이 역시 지금 읽기에는 조금 낡은 반전이었어요. 예전에 다른 앤솔로지에서 읽었기에 더 그러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인격 교환기" 

편집장 맥기에게 괴롭힘당하는 기자 '나'는 발명가 타킹튼 퍼킨스의 신발명 취재를 나선 후, 그가 '연격 교환가'라는 것을 발명한 것을 알게 되는데...

도라에몽스러운 발명품이 등장합니다. 내용도 성인용으로 변주한 도라에몽같고요. 발명품으로 소동이 일어나고, 결국 주인공들이 모두 행복해지는 결말은 도라에몽 그 자체이지요. 

하지만 소동 이후 모든게 제자리를 찾는 도라에몽 장치와는 다르게 타킹튼 퍼킨스와 맥기의 몸을 바꾸어서 최악의 파트너들끼리 함께 살게 만든다는 결말은 아주 통쾌했습니다.

평범한 아이디어를 전개와 결말로 보완한 작품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무기" 

그레이엄 박사는 궁극의 무기를 연구하고 있는 과학자로, 그의 유일한 고민은 정신지체아인 아들 해리였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니만트라는 인물이 찾아와 무기 개발을 그만둘 것을 부탁하는데... 

인류가 궁극의 무기를 가질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한 프레드릭 브라운의 답변. 

4페이지밖에 안되는 짤막한 분량이지만 흥미로운 도입부와 캐릭터, 진지한 주제에 놀라운 반전까지 모든 걸 갖춘 걸작입니다. 인류가 궁극의 무기를 갖는건, 백치가 장전된 리볼버를 갖는 것과 다를바 없다는 시각은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시대를 뛰어넘은 측면도 있습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카투니스트" 

끔찍하고 흉물스러운 외계인 만화를 그린 후, 빌 개리건은 그가 그린 외계인과 똑같이 생긴 외계인의 초대를 받았다. 그들은 만화에 감명해서 개리건을 황실 만화가로 임명하려 했다... 

"외눈박이 나라에 간 두눈박이" 이야기를 변주한 SF입니다. 서로를 끔찍하고 흉물스럽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점이 그러하지요. 그러나 결말은 정 반대입니다. 개리건이 외계인 모습이 된 다음에 익숙해진 후 모든 행복을 거머쥐거든요.

그러나 좋은 결말, 반전이었다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반전의 매력은 부족하며, 여러모로 쉽게 간 느낌이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돔" 

'죽음보다는 고독이 나은 법이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죽음보다는 나은 법이다.'

카일 브레이든은 핵전쟁이 발발했다는 뉴스를 듣고 구 형태로 완벽한 방어막을 이루는 "역장"을 작동시켰다. 카일은 죽음보다 고독이 낫다는 생각으로 30년을 버텼지만, 결국 홀로 죽기가 두려워 역장을 끌 결심을 하는데... 

착각으로 스스로 고립되어 이방인이 된 남자를 그린 작품으로 주제는 좋습니다. 냉전 시대를 극한까지 그려낸 설정도 볼만하고요. 하지만 홀로 돔 안에 갇히는 것을 선택한 카일 브레이든의 심정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고독보다는 죽음이 나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리고 밖의 세상은 유토피아가 되었다라는 반전도 평이합니다. 차라리 사랑을 고백한 '미라'가 그를 떠나지 않고 둘이서 같이 30년간 늙어가다가 유토피아를 만난다는 설정이 소설적으로는 더 나았을 것 같네요. 만약 그랬다면 미라에 의해서 지옥이 열렸을테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스폰서의 한마디" 

1954년 7월 9일 수요일 오후 8시 30분, 전 세계 라디오에서 기묘한 방송이 들려왔다.
아주 잠시 먹통이 된 후 차분하고 평범한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스폰서의 한 마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1초 후 다른 사람이 말했다. "싸워라."
미국 대통령은 이 방송이 현재 기술로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현상이라는 분석 결과를 전달받는데... 

'인간은 명령을 받으면 반대로 행동한다'는, 신뢰할 수 없는 심리학 설정에 기반을 둔 작품입니다. '밀그램 실험'이 있기 전에 쓰여진 이야기겠지요. 

그래도 과학적, 정치적인 분야에서 시작하여 종교적인 분야까지 전문가들에 의한 분석이 이어지면서, 이 명령은 들으면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만큼은 꽤 설득력있게 그려집니다. 사탄이 내린 명령이면 당연히 들으면 안되고, 신이 내린 명령이라면 지성과 선의가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신성한 반어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논리인데 그럴듯했어요. 분석 덕분에 여론도 싸우지 않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는 전개도 괜찮았고요.
또 이러한 평범한 냉전 시대를 무대로 한 우화임에도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끄는 요소가 존재하는 것도 장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스폰서"라는 단어죠. 대체 우리, 지구, 인류의 스폰서는 누구란 말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지 않고, 스폰서가 누군지 모르므로 명령을 들을 수 없다는 결론과 함께 작품은 끝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약간 흥미로왔을 뿐 기대에 부합하지는 못했습니다. 결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 큽니다. 별반 대단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무래도 냉전 시대 관련 설정의 작품은 여러모로 뻔하고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소재임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나와 플랩잭과 화성인" 

광산을 찾아다니는 나와 당나귀 플랩잭은 어느날 화성인을 만났다. 화성인은 내가 아니라 플랩잭이 지성체라 여겨 대화를 시도하고, 그들의 지구 침공 계획을 털어놓는데... 

이른바 '오해와 착각' 개그물입니다. 나와 플랩잭의 티격태격 묘사가 유쾌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오해로 인한 난처한 상황도 볼거리고요. 무엇보다도 플랩잭이 화성인에게 무언가 멋진 아이디어를 제공해서 그들이 지구 침공을 포기하고 돌아가는데, 나도 그렇고 독자도 그렇고 플랩잭이 준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결말까지 유쾌합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마크 트웨인이 쓴 SF를 읽는 느낌이었달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어린 양" 

수록작 중 가장 이질적이라 할 수 있는 싸이코 스릴러로 "진, 베르무트에 젖은 올리브 색깔"이라는 묘사나 여러 시, 음악, 밤이라는 배경에 대한 묘사는 '코넬 울리치'가 썼다 해도 믿을 정도로 디테일합니다. 아내 램이 살아 있는 것 처럼 묘사하다가 마지막에 그녀는 이미 죽은지 오래라는 것이 밝혀지는 장면도 섬찟했고요. 유머러스한 블랙 코미디나 반전이 있는 장르 문학에 강한 작가인줄 알았는데 이런 순문학적인 스릴러에도 능하다니 과연 거장은 거장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날개짓 소리"

15달러에 영혼을 팔려던 무신론자가 급하게 멈추고 15달러를 날린 이유는? 에 대한 짤막한 소품입니다. 주인공이나 독자나 답을 찾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뭐가 껄끄러웠던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특별히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이럴 바에야 영혼을 팔고 할아버지가 죽은 뒤 무언가 기묘한 일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가는게 더 재미있었을 것 같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거울의 방" 

시간을 되돌리는 일종의 타임머신이 등장하는 SF로 타임머신에 대한 아이디어와 함께 '50년'을 계속 되돌아가는 주인공에 대한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돔"의 주인공은 역장을 끄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 작품의 주인공은 타임머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면 인류가 '불사'의 존재가 될 수 있는 위험 때문에 갖혀 지낸다는 점에서 좀 비슷한데, 냉전 시대의 뻔한 SF인 "돔"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설정도 보다 디테일하고요. 50년 동안 무얼 어떻게 먹고 사는지 등 깊이 들어가면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평균 이상의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다음은 모두 1~2페이지짜리 쇼트쇼트입니다. 줄거리 요약은 생략하고 단평만 적겠습니다.

"해답" 두말할 필요 없는 걸작. 별점은 5점.

"데이지" 짤막하지만 담겨야 할 모든 것이 담겨있는 교과서적인 쇼트쇼트. 별점은 4점.

"대동소이" 뻔했음. 별점 2점. 

"예절" 이문화간 커뮤니케이션을 다룬 유쾌한 소품. 별점은 3점.

"허튼소리" SF 작가의 자조적인 농담으로 보이는 소품. 별점은 2.5점.

"화해" 뻔하고 뻔하도다. 별점 1점.

"탐색"신이 두려워한 사람이 누구인거죠? 주인공 피터의 정체는 신선했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별점은 2점.

"형기" 과학적인 농담인데 꽤 써먹음직한 반전이 돋보임. 별점은 2.5점.

"유아론자" 이 정도면 신성모독이 아닐까... 여튼 신선한 창조 이야기. 별점은 2.5점.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진정한 소리를 찾는 음악가 둘리 행크스가 우연히 만난 노음악가를 살해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호우보이'라는 악기를 손에 넣은 뒤 맞는 최후에 대한 이야기.
음악에 대한 장황한 묘사가 펼쳐지는 순문학스러운 범죄 판타지로 '하메룬의 피리부는 사나이'로 끝나는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