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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5

내 안의 살인마 - 짐 톰슨 / 박산호 : 별점 3점

내 안의 살인마 - 6점
짐 톰슨 지음, 박산호 옮김/황금가지
이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텍사스 작은 마을의 신뢰받는 부 보안관 루 포드는 창녀 조이스와 얽힌 뒤, 과거 자신을 괴롭혔던 정신적인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느꼈다. 결국 조이스를 그녀를 짝사랑하는 엘머 콘웨이와 엮어 살해했지만 조이스가 큰 상처를 입고도 살아있는 채 발견되자 루는 걷잡을 수 없게 폭주하게 되는데....

심각한 정신적인 문제를 앓고 있지만, 운 좋게 그것을 숨겨온 주인공 루 포드가 특정 사건을 계기로 폭주를 벌이는 이야기를 1인칭으로 그린 범죄 - 심리 서스펜스물입니다. "MWA 추천 베스트 미스터리 100"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린 1952년도에 발표된 고전이기도 합니다. 이 리스트가 없었더라면 아마 읽게 되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여튼 찾아 읽어보게 되었네요.

작품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돌직구'입니다. 죽이고 싶고, 죽여야 하면 바로 죽입니다. 이렇게 시종일관 돌직구 스트라이크가 팍팍 꽂힙니다. 때문에 루 포드 캐릭터 묘사가 가장 중요한데 캐릭터 묘사, 즉 직구의 구위 역시 일품입니다. 지역 주민들에게 굿 가이로 통하지만 실상은 잔인무도한 살인마 주인공이 이렇게 설득력 있게 표현된 작품도 드물지요. 1인칭 시점으로 여러 가지 살인 계획을 세우고 수행하는게 냉정하면서도 하나의 게임처럼 그려지고 있는데, 정말로 오싹할 정도였어요. 그야말로 소시오패스 그 자체인 인물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귀공자 연쇄살인마 "테드 번디"가 살짝 연상되는데, 작품 발표 시기가 테드 번디 사건 20여 년 전이라는걸 보면 그야말로 이 분야의 선구자라 불러도 무방할 겁니다.

이러한 캐릭터를 날것 그대로 생생하게 그리는 묘사도 대단합니다. 하드보일드 작가가 맘먹고 그려낸 "나쁜 놈"이라는 이미지인데, 1인칭 하드보일드 스타일 범죄물은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번 울린다" 등의 작품이 있기는 하나 이 작품의 범인은 차원이 달라도 너무 달라요. 타당한 동기는 뒷전인 살인마니까요.

아울러 최초 범행에서 받은 뒤 우연찮게 사용한 20불의 존재가 동네의 껄렁한 불량아인 조니에게 이어지고, 교도소 안에서 살해한 조니가 사실 알리바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 다른 희생양을 찾아 약혼녀를 살해하고, 협박범을 강도로 위장하여 살해하는 등의 모든 범행이 1인칭으로 그려져서 도서 추리물 같은 느낌을 전해주는 것도 독특했어요. 마지막의 조이스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고요. 사실상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는 점에서 더더욱 말이죠.

그러나 불필요한 잔설정이 많은 것은 좀 아쉽더군요. 초반에 루 포드가 다국어를 하고 심심풀이로 미적분을 푸는 지적인 인물로 묘사되지만, 이후 그러한 설정은 별로 드러나지 않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루 포드가 정신적 문제를 가지게 된 계기인 가정부와의 에피소드, 그의 죄를 뒤집어썼던 의붓형 마이크에 대한 이야기도 솔직히 사족이었습니다. 이왕지사 돌직구를 날리려면 그냥 나쁜 놈이다는 식으로 가는 게 더 좋았을 겁니다.

전개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콘웨이는 처음부터 진범을 알고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초반에 보안관 밥에게 무언가 이야기했다는 것이나, 조니 파파스의 아버지 가게를 리모델링하는걸 돕는 식으로요. 그런데 왜 루 포드를 그냥 방치해서 사건을 키우는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또 변호사 빌리 보이 워커가 루 포드를 정신병원에서 꺼낸 것 때문에 불필요한 마지막 사건이 또 일어난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이렇게 설정면의 오류나 이해하기 어려운 전개는 어딘가의 연재물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게 만듭니다(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문제는 있지만 강력한 소설로, 컨트롤은 별로지만 돌직구 하나로 타자를 제압하는 투수가 연상되는 작품입니다. 지나치게 잔인하고 묵직한, 불쾌감 남는 묘사 탓에 모든 분들께 권해드리기는 어려우나 명성에 어울리는 가치는 충분하죠. 시대를 뛰어넘어 여러 차례 영화화 된 이유는 분명해 보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크리스마스에 읽고 리뷰를 올리기에는 좀 너무하네요....

2018/12/16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30주년 기념 킹 오브 킹 순위

1년에 한 번씩 그해 출간된 작품 기준으로 국내 (일본) / 해외 작품 순위를 발표하는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고노미스) 가 30주년을 맞아 그동안의 리스트를 총 망라하여 베스트 10을 선정하여 발표했네요. 국내 최고의 추리애호가 커뮤니티 하우미스터리에서 보고 퍼 옵니다. (원문)

그런데 순위가 납득이 되지는 않습니다. 제 개인 기준으로는 도저히 순위에 오를 수 없는 작품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는 탓입니다. 단지 작품의 완성도 뿐 아니라 인기와 영향력을 감안해서 순위를 정한 듯 합니다. 예를 들어 "신주쿠 상어"는 추리적으로 완성도는 그닥이지만 일본식 하드보일드의 전형으로 수많은 아류작과 이종 컨텐츠를 낳은 공을 높이 산 것이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생각해보아도 "유니버셜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고백"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하여튼, 순위는 아래와 같습니다. 해외 작품은 저도 많이 읽지 못했는데 부지런히 찾아 읽어봐야겠네요. 

* 2020.11.29 "골든 슬럼버", "개의 힘" 리뷰 링크 추가

(국내편) 

#1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 야마구치 마사야 

#2 64, 요코야마 히데오 

#3 용의자 X의 헌신, 히가시노 게이고 

#4 화차, 미야베 미유키 

#5 신주쿠 상어, 오사와 아리마사 

#6 내가 죽인 소녀, 하라 료 

#7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8 골든 슬럼버, 이사카 고타로 

#9 奇術探偵曾我佳城全集 기술탐정 소가 가조 전집, 아와사카 쓰마오 

#10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로 지도의 독백, 히라야마 유메아키

(해외편) 

#1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2 개의 힘, 돈 윈슬로 

#3 양들의 침묵, 토머스 해리스 

#4 A Touch of Frost, R. D. Wingfield

#5 Pop. 1280, 짐 톰슨 

#6 심플 플랜, 스콧 스미스 

#6 The Crime Machine, 잭 리치 

#6 콜드 문, 제프리 디버 

#6 Flicker, Theodore Roszak 

#10 탄착점, 스티븐 헌터

2017/07/08

좀비 - 조이스 캐롤 오츠 / 공경희 : 별점 2.5점

좀비 - 6점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포레

Q_는 얼마전 저지른 흑인 소년 성추행 건으로 정기적인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유명 교수의 아들로, 변태적인 싸이코로 진화한 뒤 '전두엽 절제 수술'로 자신에게만 복종하는 일종의 성노예 좀비를 만들 꿈을 꾸는데...

명성이 자자했던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품입니다. 스티븐 킹이었나요?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누군가가 현대를 대표하는 공포, 호러 소설 중 한편으로 극찬했었기에 평소 관심을 두던 차에, 드디어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읽어본 결과는 제 생각과는 굉장히 달라서 의외네요. 실제로 좀비가 등장하는 크리처 호러를 생각했는데 작품은 짐 톰슨의 "내 안의 살인마"같은, 변태 싸이코 살인마범죄극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재미가 없던건 아닙니다. 이런 류의 작품들에서 봄직한, 무의미한 범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차이점도 있고요. 예를 들어, "내 안의 살인마"의 주인공 루 포드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즉 그냥 '죽이고 싶으면' 죽입니다. 즉, 무계획적이고 돌직구같은 범행이지요. 그러나 Q_의 범죄는 명확한 목적이 있습니다. 이를 치밀하게 계획하고 수행한다는 점이 독특했어요. 

들은 바 대로 묘사력도 대단합니다. 특히 범죄 행위에 대한 묘사들은 그야말로 발군입니다. 가장 상세하게 묘사되는, '다람쥐'를 잡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 대표적입니다. 디테일이 지나쳐서 쉽게 모방 범죄가 발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세세한 디테일 - Q_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이 먹는 음식이나 입고 있는 옷, 기타 여러가지 설정들 - 을 적재적소에 그려내어 자연스럽게 캐릭터가 드러나고 부각되게 만드는 솜씨도 훌륭해요. 

아울러 전두엽 절제 수술로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행동하는 '좀비'로 만든다는 아이디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쉽사리 사람을 사귀지 못하고, 본인에게 별다른 매력도 없는 싸이코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설득력이 높습니다. 물론 대학을 수차례 다닐 정도로 기본적인 지성은 갖춘(것으로 보이는) Q_가 전두엽 절제 수술에 대해 지나친 환상을 갖는다는건 다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만, 미친 놈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넘어가야겠지요. 최소한 '최면술' 따위나 실제 좀비 전설의 원전인 '부두교 주술'보다는 과학적이긴 하고요.
260여 페이지에 여백도 많아서 읽기 쉬웠다는 것 역시 장점입니다. 별다를 것이 없는 범죄극에 딱 맞는 적절한 분량이었어요.

그러나 솔직히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내 안의 살인마"도 별로 제 취향이 아니었는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에요. 주인공 Q_ (쿠엔틴인데 1인칭 시점에서는 항상 Q_로 묘사됩니다)가 상상 이상의 변태이며, 범죄도 혐오스럽기 그지 없는 탓입니다. 하드고어적인 내용만 보면 "살육에 이르는 병"과 별로 다를게 없을 정도이니 말 다했지요. Q_의 동성애 취향, 그리고 기껏 전두엽 절제술로 만든 좀비를 만들어 성노예로 부릴 것이라는 목표도 너무 싸구려 성인물같아서 역겨웠고요. 

엽기적인 변태 싸이코가 등장하더라도 "내 눈에 비친 악마"에서처럼 별다르게 범행에 성공하지 못하고 파멸하는 전개라면 모를까, 이렇게 살아있을 가치가 전무한 주인공이 벌이는 엽기 행각이 지속적으로 성공하고, 또 앞으로도 성공할 것 같다는 마무리는 정말 별로였습니다. Q_가 자신이 관리하는 하숙집 외국인 유학생을 상대로 범행을 저지른다면 충분히 오랫동안 들통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소름이 끼치더군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사람들이 앞다투어 이야기하는 거장의 매력은 충분히 살아있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네요. 또 읽어 볼 일은 없겠습니다.

2012/08/16

세계 10대 추리소설 리스트 정리 (Brutus 397호 참고)

이런 리스트는 별로 신뢰하지 않지만 요청도 있었고 마침 자료가 있기에 몇 자 정리해서 올려봅니다. 일본 잡지 Brutus에서 전문가 대상으로 선정한 리스트 중심입니다. 90년대 후반 자료이니 과거의 리스트에 비하면 그래도 최신 작품이 몇 개 있긴 하지만, 대표작들은 역시 대동소이하네요.

*2007.3.19 첫 작성
*2012.08.16 링크 추가
*2014.08.01 링크 추가
*2020.02.01 링크 추가

오토 펜즐러 (유명 추리 평론가 및 전문서점 "미스테리어스 북 숍" 점주) 선정 All Time Best 10

  1. 윌키 콜린즈 "백의의 여자"
  2. "바스커빌가의 개" – 코넌 도일
  3. "상복의 랑데뷰" – 코넬 울리치
  4. 아이라 레빈 "죽음의 키스"
  5. "말타의 매" – 더쉴 해미트
  6. 로스 토마스 "대역전"
  7. "레베카" – 다프네 뒤 모리에
  8. 프레드릭 브라운 "이상한 나라의 살인"
  9. 토머스 해리스 "레드 드래곤"
  10. 애거서 크리스티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제이 퍼설 (미스테리 전문 서점 "세익스피어 & 컴퍼니" 원 바이어) 선정 All Time Best 10

  1. "기나긴 이별" – 레이몬드 챈들러
  2. "유리 열쇠" – 더쉴 해미트
  3.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 번 울린다" – 제임스 M 케인
  4. "셜록 홈즈의 모험" – 코넌 도일
  5. 제임스 크럼리 "안녕 달콤한 입술이여"
  6. 짐 톰슨 "Pop.1280"
  7. 죠너던 래티머 "Solomon's Vineyard"
  8. 로스 토머스 "대역전"
  9. 엘모어 레오나드 "Unknown Man #89"
  10. 토머스 페리 "도망친 킬러"

세계 10대 추리 소설 (히치콕 매거진 선정 / 동률 포함 총 12작품)

  1. "Y의 비극" – 엘러리 퀸
  2. "통" – F.W 크로프츠
  3. "비숍 살인사건" – 반 다인
  4. "그린 살인사건" – 반 다인
  5. 윌리엄 아이리쉬 "환상의 여인"
  6. 애거서 크리스티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7. "빨간머리 레드메인즈" – 이든 필포츠
  8. 가스통 르루 "노란방의 비밀"
  9. "기나긴 이별" – 레이몬드 챈들러
  10. "어둠 속의 목소리" – 이든 필포츠
  11. 애거서 크리스티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12. "바스커빌가의 개" – 코넌 도일

동서미스터리 베스트 100

2021/02/13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 - 레너드 카수토 / 김재성 : 별점 4.5점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 - 10점
레너드 카수토 지음, 김재성 옮김/뮤진트리

부제는 "20세기 미국 범죄 소설사"입니다. 말 그대로 20세기 미국 범죄 소설, 그 중에서도 하드보일드 장르의 흐름을 미국의 역사적 변곡점, 흐름과 비교하여 분석하고 있는 문학사 서적이지요.

간단하게 정리해본다면, 하드보일드의 통로 역할을 한 작품으로 소개된건 드라이저의 "미국의 비극"입니다. 가족과 신앙이 도덕적 삶의 기초이고 중심이었던 19세기 모델에서 산업화, 도시화로 급변한 20세기 초 지극히 미국적인 범죄 행위를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 뒤, 전통적 가족 모델이 서서히 해체되는 시기에 등장한 작품이 대쉴 해밋"몰타의 매"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신뢰의 결핍이 두드러집니다. 이는 기업화와 함께 찾아온 사회 경제적 변화 때문이지요. 당시 석유 회사에서 시작된 '트러스트' 체제 등장으로 가족 메타포가 기업 세계로 편입되었고, 기업 관행이 모든걸 지배했던 세계입니다. 그 결과, 전통적 가족 관계는 붕괴하고 이기적 개인들이 가족 유대 관계와 의무에서 벗어나 공감따위는 저버리고 돈만 쫓아 날뛰는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하지만 돈과 신뢰가 위험한 세상에서 의지가 되지 않는다는걸 보여주고, 샘 스페이드가 매로 상징되는 '투기'를 거부하는 모습은 1929년 주식 시장 폭락을 반영하며, 매 조각상이 가짜라는건 투기 역시 환상이라는걸 의미합니다. 광란의 투기 경제에 대한 해밋의 비판적 시각을 잘 알 수 있지요. 또 주목할만한건 '진짜 남자'에 대한 해석입니다. 대쉴 해밋은 남자를 남자로 만드는건 정당한 보수를 받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스페이드는 직업을 잃을 어떤 모험도 하지 않고요. 반대로 부자들은 무르고 기괴하게 여성적입니다. 돈 많은 악당들을 여성화하여 폄하한 겁니다.

그리고 대공황 시대를 잘 드러내는 작품은 제임스 M 케인의 "밀드레드 피어스"입니다. 하드보일드와 감상주의가 결합된 작품이지요. 밀드레드는 감상주의에 빠져 완벽한 가족을 꿈꾸지만 현실은 시궁창, 딸과의 관계가 파괴된 후 술에서 위안을 찾는 현실주의자가 된다는 결말로 가정사는 더 이상 여성 공동체에 의해 주도되지 않는다는걸 알려줍니다. 대공황 이후 뉴딜 정책으로 급작스럽게 모든게 변한 탓입니다. 뉴딜은 현대 복지 국가라는 개념으로 가족이 수행했던 보호 관리 역할을 정부가 맡아 수행했기 때문에 공감과 감성은 공적 영역으로 확대되었고, 여성은 뒤로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남성 중심 하드보일드 소설은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여성은 배제되고, 남성 관료주의가 가정과 사회의 도덕적 중심이라는 자리를 차지했고요.

대공황 이후 가족은 위협받고, 남성은 남성상의 기본 토대인 가족 부양자로서의 정체성이 몰락하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때 탄생한게 완벽한 남자 필립 말로입니다. 위협받던 남성상과 파편화된 가족을 구하는 영웅으로, 배트맨과 슈퍼맨 탄생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요. 말로는 무너진 의뢰인이나 관계자들 가족 복원에 최선을 다하는, 감상적이고 선한 영웅이거든요. 이는 구시대 하드보일드 태동기의 냉혹한 회의주의와는 정 반대 모습이에요. 가정이 중심이 되며, 사회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그리고 1950년대에 접어들면, 말로는 더 깊숙이 사건에 개입하고, 더 정서적으로 엮이게 됩니다. 대표적인게 "기나긴 이별"로 말로는 일이 아니라 일의 수혜자에게도 충성합니다. 이거야말로 감성적인 부분이지요. 이렇게 1950년대에 과도한 남성상을 지닌 폭력적인 마초가 부드럽고 감상적인 영웅으로 변한건 냉전 시기, 강한 미국과 안정된 가정이라는걸 유지하려는 분위기 탓으로 설명됩니다. 가장 끔찍했던건 사회 질서의 붕괴를 뜻하는 여성의 일탈이었고요. 그 덕분에 이 때 진정한 의미의 '요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순위를 매기자면, 일하고 능력있는 여성도 나쁘지만, 동성애자는 전통적 가족의 대립항이라 훨씬 더 나빴고, 무엇보다도 잠재적 어머니 역할을 고의로 방기하는 여성 동성애자는 최악 중 최악으로 인식되었다고 하네요. 이후 짐 톰슨은 풍요 속 공포와 우려를 표현했고,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고향에서 뿌리를 잃은 도덕적 불안을 작품에 드러내었습니다. 그런데 두 작가 작품 속 주인공들 모두 피해자들에 대한 감상주의적 공감이 최대의 능력으로 묘사되며, 감상주의를 중산층에서 분리해서 상류층에 국한된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감상주의가 위험하다는 시각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특기할 만 합니다.

1960년대 들어서 하드보일드 탐정들은 더욱 친절해지고, 범인들은 더욱 사악하고 반사회적으로 진화하게 됩니다. 탐정들은 가정을 중시하는 감상주의자에 심지어 페미니즘 운동의 영향으로 페미니스트이기도 할 정도로요. 이 시기, 로스 맥도널드는 무너지는 가족 관계를 그렸는데, 모자간 결합의 단절을 통해 부모들의 책임 회피와 피해자는 아이들이라는걸 나타내었습니다. 이는 반항하는 자녀와 무력한 부모라는 1960년대 세대간 갈등을 극명하게 투영한다고 할 수 있지요. 젊은이들의 신뢰를 받고 파괴된 가족을 복원해주는건, 연민, 공동체적 결속과 공감을 중요시하게 여기고 폭력을 가능한 사용하지 않는 사립 탐정이고요. 이렇게 친절하고 가정적인 사립 탐정 속성의 변화는 여성 탐정들을 등장시킵니다. 반면 더욱 사악하고 반사회적이 된 범인들은 결국 연쇄 살인범으로 진화하였습니다. "레드 드래곤"이 연쇄 살인범 소설의 교과서적 캐릭터와 기본 플롯을 제공한 뒤, 포화상태를 넘어서 공급 과잉상태에 이를 정도로 인기를 끌었는데 이 책에서는 그 이유 중 하나로 20세기 후반 미국 정부의 정신질환 정책과의 관계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정신질환자가 공감을 일으키는 대상에서 괴물로 변한 뒤 혐오와 배척의 대상이 되었으며, 연쇄 살인범은 이 대상화 작업에 적합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요.

이렇게 현대 연쇄 살인범 소설까지 큰 흐름을 일람하고 있으며, 흑인 범죄 소설과 같은 특이점에 대한 소개도 충실합니다. 미국 근대사와 범죄 소설의 흐름이 절묘하게 일치하는게 신기하기도 했고, 여러가지 대표작에 대한 소개도 상세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어요. 문제라면 저는 도저히 좋은 평가를 할 수 없었던 존 D 맥도널드의 작품이나 탐정 스펜서 시리즈에 대한 호평이었습니다. 이래서야 책에서 소개하는, 제가 읽지 못한 다른 작품들에 대한 신뢰도 하락할 수 밖에 없지요. 60년대 이후 범죄 소설의 흐름에 대한 소개는 별로 자세하지 않다는 점도 조금은 아쉬웠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5점입니다 이쪽 장르에 대한 문학사이자 비평서로서 재미와 가치 모두를 충족시키는 좋은 책인건 분명합니다. 추리와 범죄 소설을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리뷰를 쓰기 어려웠어요. 처음에 가벼운 마음으로 재미삼아 읽기 시작했던게 문제였습니다. 약간은 공부하듯 분석하고 정리해야 내용 요약이 가능한 내용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리뷰로 이 책을 잘 소개하지 못한건 다 제 공부가 부족한 탓입니다....

2016/11/09

말레이 철도의 비밀 - 아리스가와 아리스 / 최고은 : 별점 2.5점

말레이 철도의 비밀 - 6점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북홀릭(bookholic)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희망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름다운 말이군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죠."
출국 시간이 정해져있는 히무라에게 아즈란이 시간 내 사건 해결이 가능할지를 물은 상황에서 오가는 대사.

히무라와 아리스가와는 말레이시아의 낭만적인 휴양지 카메론 하일랜드로 여행을 떠났다. 대학시절 친구 타이론 덕분에 여유로운 여행을 즐기던 그들은, 우연히 알게 된 일본인 모모세 준코의 초대로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그러나 둘은 그곳에서 의문의 변사체를 발견했고, 뒤이어 일어나는 사악한 범죄에 빠져드는데…

일본의 신본격 작가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시리즈 탐정인 범죄학자 히무라 히데오, 추리소설가 아리스가와 아리스 컴비가 등장하는 국명 시리즈 장편입니다. 이 시리즈는 단편집으로 두어권 읽어 본 정도이며 장편은 처음입니다.

읽기 전에는 별로 기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작가의 타율 자체가 낮은 편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읽어보니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가장 큰 장점이라면 신본격 기수 중 한명이라는 작가의 명성, 그리고 엘러리 퀸 국명 시리즈를 오마쥬하고 있는 시리즈 특성에 걸맞는 수준의 고전적인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입니다. 첫 사건부터 본격물다운 굉장히 기묘한 밀실 - 피해자 웡후가 살해된 채 발견된 트레일러 하우스의 모든 출입문, 창문은 안쪽에서 테이프로 봉해져 있는 상태였다는 - 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라는  불가능 범죄를 선보이고 있거든요. 
트릭도 상당히 괜찮습니다. 사건 현장을 외부에서 조작하여 범인이 원하는 밀실로 만들었다는건 오래 전에 읽었던 삼색털 고양이 홈즈 시리즈 첫 작품 "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추리"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추리"에서는 거대한 크레인이 필요하다는 점 탓에 현실성이 떨어졌다면, 이 작품은 간단하게 차량수리용 잭을 활용하여 실현할 수 있어서 보다 설득력이 높습니다.
이를 설득력있게 만들기 위해 묘사된 습도 조절용 물컵과 같은 디테일도 빛납니다. 컵을 접착제로 붙이고 물을 얼려놓는다는 설정은 그 자체만으로 트릭으로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어요.

정보와 단서 모두가 독자에게 모두 공정하게 제공된다는 점 역시 본격물답습니다. 특히 기발했던 부분은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영어실력이 부족하다는 설정, 현지 카페 주인 존을 영국인 작가 앨런 글래드스턴이 영국식으로 '잭'이라고 부른다는 설정을 교묘하게 결합하여 글래드스턴 살인 사건으로 이르는 동기와 범인을 밝혀내게끔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최근 읽었던 작품 중에서도 손에 꼽을만큼 잘 짜여진 장면이었습니다.

두 컴비가 오래전 지인 위 타이론을 만나기 위해 말레이시아의 휴양지 카메론 하일랜드(하이랜드) 여행을 떠나는 설정 덕분에 여정 미스터리물 느낌도 많이 난다는 점도 독특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현지 명소에 대한 묘사가 많아서 읽는게 즐거웠어요.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일단 아리스가와 아리스 작품에서 항상 느낄 수 있는 점인데, 그다지 글을 잘 쓴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불필요한 설정과 묘사가 너무 많아요. 딱히 필요해 보이지 않는 페미니즘 관련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반딧불 어쩌구 하면서 사랑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어내는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고요.

그리고 대부분의 본격물이 가지고 있는 문제인 작위적인 상황 설정도 눈에 거슬렸습니다. 첫 번째 범행인 웡후 살인부터 그러합니다. 복수를 위해 모모세를 덮치지만 되려 살해당한다는 것부터 작위적이며, 말레이시아 법률은 잘 모르겠지만 모모세가 웡후 살인 사건을 자살, 혹은 다른 범죄로 위장할 이유가 있어 보이지 않은 탓입니다. 림 의사를 살해한건 히키이며 모모세는 실행범이 아닙니다. 아무런 증거없이 죽어가는 히키의 전화만으로 모모세가 범인이라 우길 근거는 너무 빈약하지요. 제가 모모세라면 모든건 오해라고 당당하게 맞섰을 겁니다. 웡후를 죽인 후에라도 같은 이유로 경찰에게 역시 당당했을 수 있었을테고요.
게다가 두번째 츠쿠이 살인은 순전히 우연에 기인한 것입니다. 아울러 앞부분 묘사에서 모모세 준코의 차에 잭이 있다는 것이 설명되니 모모세가 잭을 구하러 멀리 갈 필요도 없고요. 

또 앞서 트릭을 칭찬하기는 했지만 현장을 조작하는 방법 외에는 약점도 존재합니다. 실제로 트레일러하우스를 좀 기울이는 정도로 과연 창문의 테이프를 잘 붙일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거든요. 

마지막으로 모모세가 과거 보험금으로 사업을 일으킨 점 등 트릭을 모르더라도 정황 증거만 조합하면 대충 범인이 누군지 답이 나온다는 것도 조금은 아쉬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만 놓고보면 나쁘지는 않지만 이런저런 단점과 구멍도 존재합니다. 그래도 본격물 팬이라면 추리적으로 즐길거리가 많으니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 : 초반 언급되는 마츠모토 세이초가 썼다는, 카메론 하일랜드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과 타이의 실크왕 짐 톰슨 실종사건을 엮어서 만든 "뜨거운 비단"이라는 작품이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