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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3

스쿨 인어 (スクール人魚) 1~2 - 요시토미 아키히토 : 별점 2.5점

스쿨 인어 (スクール人魚) 1~2권 (완) : 인어 먹는 소녀들

"이트맨"의 작가 요시토미 아키히토의 단편 옴니버스 판타지 호러 연작. "이트맨" 이후 발표했던 작품들은 대체로 시원치 않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블랙잭 스핀오프였던 "레이"는 역대급 쓰레기였지요. 그래서 한동안 관심을 끊었었는데, 이 작품은 인터넷에서의 평이 좋아서 구해보게 되었습니다.

읽다 보니 다카하시 루미코의 "인어" 시리즈가 떠올랐습니다. "인어 고기를 먹으면 뭔가 얻을 수 있지만 그에 따른 댓가가 있다"라는 핵심 설정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카하시 루미코 작품은 일본 괴담 분위기가 물씬나는 전형적인 호러물로, 인어는 일종의 크리쳐로 등장했었지요. 반면 이 작품은, 호러보다는 판타지 성향이 강하며 순애, 백합물 성향을 담뿍 담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기본 설정부터가 "영원한 생명"에 비교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작은 "사랑"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야기들도 조금은 가볍게 느껴집니다. 물론 실제 사춘기 소녀들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할 수 있는 게 "사랑"이기에 묵직하고 진지한 이야기도 있는데, 그것도 나름 매력적이었어요(waterlotus님 블로그를 참조하시길...).

또 인어를 불러내는 방법에 대한 노트의 중요한 페이지가 찢어져 있는데, 이 페이지에 '시간 내에 인어고기를 먹지 못하면 주문을 말한 사람이 인어가 된다'는 중요한 사실이 적혀있었다는 등의 부가적인 설정들이 여러 가지 반전을 이끌어내는 전개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초반부의 한두 개 에피소드는 "이트맨"의 좋았던 분위기가 아주 약간 떠오를 정도였어요.

인어들은 인어를 불러내었지만 고기를 먹는 데 실패한 당사자들로, 학교 수영복을 입고 있다는 디자인적인 참신함도 괜찮았습니다. 좀 대놓고 밀어붙인 감도 없잖아 있긴 하지만, 여튼 확실히 현대적이고 경쾌한 맛은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이트맨"과 비교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첫 이야기에서 밝혀지는 설정 이외의 것이 별로 없어서 반전이 놀라운 이야기는 드물고, 떡밥도 제대로 회수가 안 되는 이야기가 있는 탓입니다. 또 "사랑"은 작중 한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노처녀 노리코 선생 말대로 직접 부딪쳐서 얻어내도 충분한 것이니 긴장감이 떨어지고, 감정이입이 어렵다는 문제도 큽니다. 과연 목숨을 걸 정도로 절박하냐 하면 별로 그렇게 보이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아쉬운 점은 분명 있습니다만, 평균 수준의 재미는 전해 줍니다. 장르물 애호가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17/06/09

인어공주 - 기타야마 다케쿠니 / 김은모 : 별점 2.5점

인어공주 - 6점 기타야마 다케쿠니 지음, 김은모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폴레옹 황제의 실각 이후, 동맹국이었던 덴마크는 노르웨이에 해당하는 영토를 빼앗기는 등 빈국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덴마크 왕 프레데리크 6세의 둘째 아들 크리스티안 왕자는 스웨덴의 실력자 가문의 딸 루이세와 결혼했다. 그러나 왕자는 결혼식 직후 피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한편 덴마크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실의에 빠져 병사한 후, 의지할 데 없는 나날을 보내던 학생 한스 안데르센은 우연히 만난 화가 루트비히 그림과 함께 해변에서 자신이 인어라고 주장하는 셀레나라는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왕자 살인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를 밝히기 위해 심장을 내걸고 인간이 되었다고 했다. 그녀를 도와 그림과 안데르센은 사건 수사에 뛰어드는데... 

기타야마 다케쿠니의 판타지 본격 추리물입니다. 장르 측면에서는 여러모로 요네자와 호노부"부러진 용골"과 비슷한 느낌이지만, 실제 역사를 이야기에 강하게 접목시키고 있다는 차이점은 큽니다. 나폴레옹에게 반해버린 마녀가 나폴레옹을 돕기 위해, 크리스티앙 왕자와 루이세 왕자비간 결혼을 파탄내어 스웨덴과 덴마크 간 동맹을 무너트리려 했다는 왕자 살해 동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외에도 실제 덴마크 역사를 이야기에 많이 삽입하고 있습니다.
화자 역할로 한스 안데르센을, 탐정 역할로 그림 형제의 막내 루트비히를 내세우고 있는 것 역시 팩션 분위기를 더해주는 요소입니다. 

이러한 실제 역사, 인물과 대척점에 있는 '인어 공주' 이야기도 괜찮습니다. 안데르센동화를 가져와 추리 소설로 변주하는데, 후더닛, 하우더닛 물로는 충분한 수준의 본격물인 덕분입니다. 도개교를 이용하여 시체를 발코니로 옮겼다는 핵심 트릭이 특히 그럴 듯 했습니다. 작품 분위기하고도 잘 어울리는 트릭이라는 점도 좋습니다. 또한 세세한 별궁 묘사는 물론, 한스와 셀레나가 별궁에서 도망 다닐 때 도개교는 아이의 힘으로도 끌어올릴 수 있다는걸 보여주는 등 단서도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물론 시체가 도개교 끄트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았을지?라는 의문은 존재하며, 이 정도는 추가로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확실히 나쁘지 않았어요. 작가가 워낙에 물리 트릭을 많이 내세워 '물리의 기타야마'라고 불리울 정도라는데 그 명성에는 충분히 값합니다.

마녀의 단도는 마녀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는데, 마녀의 시체 갈비뼈와 입수한 단도의 손잡이 모양이 다르다는 점에서 마녀가 사실은 2명이라는걸 끌어내는 추리도 좋습니다. 마녀가 일종의 '대를 잇는' 존재라는 아이디어도 나쁘지 않았고요. 여러가지 가설을 늘어놓고 가장 합리적인 가설을 선택하는 루트비히의 추리법도 괜찮습니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설이 전부 등장하며, 가설 모두 논리적으로 분석되어 설득력이 높은 편이거든요.
개인적으로는 마녀가 마법으로 왕자를 죽이지 않은 이유가 가장 궁금했는데, 구태여 '살인 사건'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 마녀의 마법이라면 자연사나 사고사를 노렸을테니 - 말이 안된다는 이론이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셀레나가 사건 수사에 왜 뛰어드는지 잘 모르겠어요. 바닷속 나라에서 인어공주 사건 때문에 내분이 생겼다는데 설득력이 약합니다. 바다 속 왕국은 어차피 덴마크와 아무 상관도 없는데 공주가 왕자를 죽이건 말건 그게 왜 큰 문제가 될까요? 설령 문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공주가 이미 죽은 이상 처벌도 끝난건데 말이지요.

핵심 동기도 본격물다운 설득력은 갖추고 있긴 하나 설정에 오류가 있습니다. 인어 공주는 원래 크리스티앙 왕자를 사랑해서 인간이 되었는데, 마녀가 됨으로서 그 사랑을 잊어버리고 나폴레옹에 대한 사랑만 간직하게 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나폴레옹을 사랑한 인어도 마녀를 죽이고 마녀가 되었다고 묘사되는 탓입니다. 크리스티앙 왕자를 사랑한 인어가 이전 마녀를 죽였다면, 사랑의 대상도 바뀌는게 더 합리적이잖아요?
아울러 루이제가 왕자를 살해한 것도 마녀에게 조종당했다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습니다. 그냥 단순히 질투 때문이었다고 하는게 훨씬 깔끔했을 겁니다. 이 부분은 동화 속 주인공 중 하나인 루이제를 배려하기 위한 티가 역력합니다. 이런 내용들은 싹 정리하는 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물거품이 된 인어 공주가 왕자 살인범의 누명을 쓴 탓에, 진상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언니 셀레나가 나섰고, 범행은 루이제 왕자비가 질투 때문에 저질렀다는 정도로요. 물론 이런 식이었다면 장점이라고 했던 실제 역사 이야기가 작품에 거의 녹아들 여지가 없어지기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훨씬 설득력 높고 깔끔해 졌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아이디어도 나쁘지 않고 추리적으로도 괜찮기는 한데, 지나치게 살을 붙인게 아쉽습니다. 조금만 힘을 뺐더라면 "부러진 용골"급의 작품은 되었을 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워낙에 독특한 점이 있는 만큼, 궁금하신 분들은 한 번 쯤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16/12/16

용의 귀여운 일곱 아이 - 구이 료코 (쿠이 료코) / 김완 : 별점 3점

용의 귀여운 일곱 아이 : 쿠이 료코 작품집 - 8점
구이 료코 지음, 김완 옮김/㈜소미미디어

"용의 학교는 산 위에"만큼의 긴 제목을 지닌 쿠이 료코의 단편집으로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용의 학교는 산 위에"는 영 아니었지만, 그래도 팬심으로 구입했는데 다행히도 아주 괜찮았습니다. 발상도 기발하며, 모두 길이에 걸맞는 완결성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입니다. "서랍 속 테라리움"과 비교하자면, 의외성은 덜하지만 완성도가 더 높은 편이에요. 쇼트쇼트와 일반 단편의 차이점처럼요.

작품별 편차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가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쿠이 료코 팬들께는 적극 추천드립니다.

"용의 소탑"

바다 나라와 산 나라의 전쟁을 가로막는 국경 지대 용의 새끼가 부화하여 둥지를 떠날 때까지,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에 머물렀다. 교류가 끊긴 양국은 기본적인 물자 보급에도 문제가 생겼고, 마침 산 나라에 포로로 잡혔던 청년 '사난'은 소금을 가져다 준다는 약조 후 풀려나는데...

전형적인 중세풍 세계관에 ''이 등장하는 식으로 약간의 판타지가 결합된 시대물로, 막강하면서도 기묘한 존재 탓으로 적대하던 사람들이 하나가 된다는(외계인이 쳐들어오면 힘을 합치듯이), 왕도스러운 내용입니다.
그러나 쿠이 료코스러운 변주가 딱 하나 들어간 덕분에 독특한 매력을 전해 줍니다. 바로 '교역'입니다. 전형적인 이야기에 딱 한 가지의 설정 추가로 독특함을 만들어 낸다는 점은 "던전밥"과 똑같네요. 결국 사난과 유르카가 하나가 된다는 해피엔딩도 마음에 들었고요.

등장하는 크리쳐는 '용'이라기보다는 그리폰 같았다는건 조금 이해가 안되지만,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인어금렵구"

누가 봐도 인어인 기묘한 생명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무대로 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특별한 일은 벌어지지는 않아요. 인어가 멀리 떨어진 학교로 가고 싶어하고, 주인공은 그것을 도와준다. 그리고 그것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라는, 한여름날 짧은 만남 이후 추억과 여운을 남기고 각자의 길을 간다는 전개는 전형적인 "보이 미트 어 걸" 그대로고요. 이 와중에 약간의 성장기 느낌을 전해주는 것 역시 동일합니다.

그러나 "용의 소탑"이나 "던전밥"처럼 '인어'라는 설정이 추가되어 독특한 매력을 풍깁니다. 이 설정에 더해 비교적 짧은 분량 안에서 '서로 다르기에 마음을 전하기 힘들다'는 주제를 설득력 넘치게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실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깔끔하면서도 흑백톤 위주의 작화 역시 이야기에 꼭 맞아 떨어져서 마음에 들었고요.

한마디로 익숙한 주제에 약간의 변주를 더해 새로운 것을 만드는 작가의 능력이 최고치로 발휘된 작품. 별점은 4점입니다.

"나의 신"

중학교 입시를 앞둔 소녀가 갈 곳을 잃은 물고기 신을 어항에서 키운다는 이야기로 신은 별다른 능력이 없고, 소녀는 입시에서 떨어진다는 현실적이면서 일상적인 결말이 눈길을 끕니다.

하지만 이야기만 놓고 보면 딱히 대단할 것은 없는 소품이에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늑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늑대인간이 주인공인 드라마로 남녀 관계가 아니라 모자 관계 설정이 신선했습니다. 늑대인간이 실제 인간 세계에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상세한 설정들도 인상적이고요.

단, 지나치게 일상계스러운 내용으로 주인공 케이타의 약간은 철없는 행동이 사건, 드라마의 전부라는 것은 조금 시시했습니다. 그만큼 설득력은 높았지만, 이만큼의 상세한 설정을 만들었다면 더 극적인 이야기를 전개해도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무일푼 뱌쿠로쿠"

천재 화가 타카가와 뱌쿠로쿠가 무일푼이 된 후, 자신이 그렸던 사자, 호랑이, 용 등을 실체화시켜 큰돈을 벌고자 한다는 시대극 판타지입니다.

가장 큰 장점은 일본화를 모티브로 한 작화입니다. 붓을 주로 사용한 듯한데 정말로 빼어나고 시원시원한 구도도 돋보인 덕분입니다. 뱌쿠로쿠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위작의 이야기는 진부하지만, 나중에 아들이 그린 그림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며 진한 여운을 남기는 것도 인상적이고요.

한마디로 쿠이 료코라는 작가의 넓은 스펙트럼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제 자식이 어여쁘다고 용은 운다"

왕자 준이 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용의 비늘을 얻으려 나섰다. 길 안내를 맡은건 마을 이방인 준이었다.
용을 잡으러 가는 험한 길에서 병사들은 계속 낙오되었고, 결국 부상당한 왕자만 남았을 때 준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왕이 자신의 아들을 죽였기에 그것을 복수하려 한다는 것...

뻔한 복수극으로 의외성도 없고, 이야기도 좀 막 나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용의 알과 자식을 동일시하는 전개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수록작 중에서는 제일 처집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누타니 일족"

초능력 가문 이누타니 일족의 집에 소년 탐정 도다이치 코우스케가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실수로 일족의 초능력이 들통날 위기에 처해 그것을 숨기려 하나, 오히려 도다이치 코우스케는 연쇄 살인극으로 의심하며 겉잡을 수 없이 폭주하는데...

제목(원전은 "이누가미 일족"이지요)과 설정부터 여러 작품을 패러디하고 있는 작품으로 다양한 초능력을 지닌 가족들의 행동을 ‘살해당했다’고 오해해 진상을 추리하려는 탐정의 행동이 이야기의 핵심인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나 싶을 정도로 기발하면서도 재미있었습니다. "오렌지로드"에서 초능력을 감추려는 카스가 패밀리의 노력이 겹쳐져 왠지 모를 향수가 느껴진 건 덤이고요.
강대한 힘을 과신하다가 화를 부른 상황에서, 가장 쓸모없을 줄 알았던 아리사의 ‘입고 있는 옷을 파자마로 바꾸는 능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반전도 돋보였습니다.

또 보통 소년 탐정이 사건에 뛰어드는 이유 — 자기와 관계도 없고 부탁한 사람도 없는데 왜 이렇게 애를 쓰지? — 에 대해 ‘자기 능력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힘을 써야 할 때 쓴다’라는 슈퍼 히어로스러운 마인드로 알려주는 점도 괜찮았어요. 하기사 명탐정이 슈퍼 히어로와 다를 건 별로 없지요.
‘힘을 써야 할 때는 최선을 다해서 쓴다, 그러나 힘을 과신하지 말라’는 주제 역시 여러모로 생각해볼 거리가 많아서 좋았습니다.

다양한 장르물에 대한 깊은 이해에 더해 유쾌한 분위기, 적절한 반전, 심오한 주제까지 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명작입니다. 단점이라면 너무 짧다는 것과 결말이 약간 시시했다는 것 정도? 그래도 별점 4점은 충분합니다. 장르소설 애호가라면 이 작품만큼은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2006/02/15

골프코스의 인어들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 민승남 : 별점 2점

골프 코스의 인어들 - 4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민승남 옮김/민음사

연달아 읽어버린 하이스미스 여사의 단편집 두 번째 권입니다. 원래는 이게 세 번째 단편집이고 먼저 읽었던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가 두 번째 단편집이라고합니다. 첫 번째 단편집을 착오로 구입 못해 순서가 좀 바뀌어 버렸네요. 뭐 단편집이니까 그건 별로 중요하진 않겠지만요. 

여튼, 전에 읽었던 단편집이 워낙 마음에 들었기에 나름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솔직히 실망스러웠어요. 이전 단편집에서 언급한 로얄드 달의 "당신을 닮은 사람" 같달까요? 한마디로 심심합니다. 의표를 찌르는 맛이나 독자의 감정을 살살 건드리는 맛은 거의 없고, 세밀한 심리묘사에 더욱 치중한 경향이 강한 탓이에요. 작품들 개개의 결말도 그다지 와 닿지 않았고요. 저는 단편소설에서는 여운을 남기던, 반전이 있던 어쨌거나 결말의 끝맺음이 작품에서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단편집에서는 대체로 애매모호하고 시시하게 처리하는 작품이 많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결말에서 이상할 정도로 해피엔딩이 많은게 특히나 불만스러워요.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편인데도 하이스미스 여사 작품에서의 해피엔딩이라니 이건 정말 아니올시다죠. 배신감을 느꼈달까요? 

물론 특유의 불편한 인간 관계 설정과 심리묘사, 시대를 앞서가는 상상력과 기발한 발상을 토대로 한 전개는 여전합니다. 역자가 해설에서 카뮤의 "이방인"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충분히 그정도의 임팩트는 있는 작품들로 채워져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문장과 설정에서의 몽환적인 느낌은 확실히 거장의 풍모를 전해줍니다. 

그래도 확실히... 전작보다는 좀 읽는 맛은 확실히 덜 했습니다. 전에도 이야기했던 독특한, 기묘한 맛은 거의 없고 그냥저냥한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는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제가 기대가 너무 큰 탓도 있긴 하겠만요.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다른 시리즈의 구입을 망설이게 되네요. 지금까지 5할의 확률이니 기대를 한번 더 걸어봐야 하겠지만요... 

역시나! 싶은 이 단편집의 베스트는 "난데없이 날아온 총알"과 "애완동물 공동묘지"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골프 코스의 인어들 

대통령의 생명을 구한 교수의 환상과 애증 이야기랄까요? 골프 코스의 인어들이라는 제목과 발상 자체는 기발하기 그지 없지만 그다지 끌리는 요소는 없었습니다. 

2. 단추

다운 증후군에 걸린 아들과 아들 때문에 변해가는 아내 탓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던 회계사 롤랜드는 어느날 밤 갑작스럽게 충동적인 살인을 저지르는데... 

일상 생활속에서의 평범한 사람의 심리가 급작스럽게 변해가는 과정과 그 결말을 디테일하게 그린 수작입니다. 역자가 "이방인"을 언급한 작품으로 그만큼 순문학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작품으로 보이네요.

하지만 나름 해피엔딩이라는 것이 결정적인 감점 요소로 보입니다. 막판에 힘이 팍 풀려버리는 바람에 뫼르소 만큼의 고뇌를 롤랜드가 끝까지 보여주지는 못하거든요. 

3. 우연한 특종

별볼일 없는 지방신문 사진 기자 크레이그는 어느날 우연히 찍은 성폭행 피해자의 사진 한장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날리게 된다.

평범한 일반인이 우연으로 성공하게 되지만 그 뒤에 도사린 죄책감과 결국 성공이라는 열매때문에 모든 것을 무시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린 작품입니다. 매스미디어의 속성을 비판한 작품으로 보이는데 독특한 전개와 발상에 비해서 왠지 묘사의 섬세함이 좀 떨어지는 작품이더군요. 결말도 시시하고요. 

4. 크리스의 마지막 파티

자신을 배우의 길로 이끈 크리스 웰스의 죽음을 앞두고 배우 사이먼은 취리히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는 과거의 일과 현재를 돌아보게 되는데... 

솔직히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더군요. 사이먼에게 있어서 크리스의 존재가 무엇이었는지, 그의 죽음으로 무엇이 변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추억과의 결별이 닥쳤을때의 심리묘사랄까요? 깊이 생각하자면 메시지를 많이 전해주기도 하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알맹이 없는 공허한 작품이었습니다.

5. 크리스마스에 사라진 시계

자수성가한 샤를과 부호의 딸인 미셸은 서로 사랑하는 부부지만 미셸이 도와준 거리의 소년이 샤를의 물건을 훔쳐가면서 둘 사이에 서서히 금이 가게 되는데... 

부유한 부부와 거리의 소년에 대한 자세한 설정과 심리묘사는 모파상을 연상케 합니다. 출신성분이 다른 두사람의 디테일하게 묘사된 갭은 디킨즈 작품같은 느낌도 주고요. 

하지만... 기둥 스토리 자체와 결말이 시시한 편이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6. 난데없이 날아온 총알

미국 청년 앤드류는 멕시코의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한 소년이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신고하게 된다. 그러나 오히려 그가 범인으로 몰려 악몽과 같은 하루를 보내게 된다. 

평범한 청년에게 닥친 악몽과도 같은 하루를 다루고 있는 드라마틱한 작품입니다. 작품 자체에 생기가 가득 넘치는 것이 이 단편집에서 단연 돋보이더군요. 뭐 이야기 자체는 뻔하긴 했습니다만.... 

7. 애완동물 공동묘지 

변호사 크리스토퍼는 키워왔던 애완동물을 박제로 만드는 아내 페니의 취미를 싫어했지만 그 취미가 기사화되자 과거에 억눌러 왔던 감정들이 북받쳐 복수심으로 발전한다.

제목 그대로 애완동물의 공동묘지와 같은 기묘한 취미와 더욱 기묘한 방법으로 복수(?)하는 남편의 이야기를 기묘하게 다룬 여사다운 단편입니다. 제목만 보고는 스티븐 킹 작품을 연상하긴 했지만 역시나 전혀 분위기가 다르더군요. 덜 자극적이고 원색적이지만 왠지 더 우울하고 기묘한, 아주 독특한 작품이었습니다.

8. 어쩌면 다음 생에

고독하고 외롭게 살아가는 엘리너는 어느 날 부터 유령과 같은 "그"를 보게 된다. 그와 엘리너는 서로 생활을 공유하며 가까와지지만 "그"는 결코 착하지 않은 존재였다.

여사님이 이런 작품까지 쓰셨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전형적인 유령 공포 환상 괴담이자 심리학적으로도 눈여겨 볼 만한 곳이 많은 디테일한 작품이네요. 주인공 여성 엘리너의 애절한(?) 삶과 사고방식이 전혀 공감되지 않아 높은 점수를 줄 순 없었지만, 여러모로 수준 높은 작품이었다 생각됩니다.

9. 나는 남들만큼 유능하지 못해

세일즈맨 랠프는 주말 별장 이웃인 에드와 그레이스 부부의 척척박사와 같은 작업들에 컴플렉스를 느끼며 불안해 하던 중 별장에 초대한 프랜시스라는 아가씨와의 하루를 보내게 되는데... 

일종의 현대인의 스트레스와 불안을 한 남자에게 빗대어서 조금은 유머스럽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결국 주인공이 폭주하게 되지만 그나마 해피엔딩이라는 데 현대인으로서 안도감을 느낍니다.

10. 가장 잔인한 달

영어교사 오딜의 취미는 소설가들에게 개인적인 팬레터를 보내는 일로, 그녀는 친구와 영국 여행을 떠나며 작가 데니스 홀리우드를 만나기 위한 계획을 실천에 옮긴다.. 

여사 특유의 몽환적이고도 섬세한 심리묘사가 발군인 작품으로 환상이 현실 앞에서 잔혹한 얼굴을 드러낼때의 심리를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 역시 이상하게 마무리가 좀 대충대충이라서...

11. 몽상가

비서로 일하는 이저벨은 항상 낭만적인 데이트를 꿈꾸지만 첫 데이트에서 바람을 맞고 만다. 그 후 다시 한 남자에게서 데이트 신청을 받는데...

바로 위의 "가장 잔인한 달"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역시 환상과 현실의 갭을 다루고 있으며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심리묘사를 기반으로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거든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결말 부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잔인한 달"의 주인공은 나름 현실을 수긍하며 환상을 전개하는 데 반해 이 작품의 이저벨은 아예 환상속에서 살기로 결심해 버리니까 말이죠. 여사의 글 솜씨를 느끼게 해 주는 작품으로 두 작품 모두 남성인 저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긴 하지만, 비교해서 읽으면 읽는 재미가 더욱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2016/01/04

안데르센 동화집 -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 이나경 : 별점 1.5점

안데르센 동화집 - 4점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이나경 옮김/현대문학

에오스 클래식의 완역본. 2016년 첫 리뷰네요. 딸아이가 좋아하는 "엄지공주" 등의 이야기가 원래 어떠한지 궁금하여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읽기 힘들더군요. 재미도 없고 지루한 이야기 투성이였던 탓입니다. 이야기의 완성도도 낮으며 개연성도 부족하고요. 예를 들자면 "눈의 여왕"의 경우, 겔다가 갖은 고생을 다하며 카이를 찾아가는 과정이 내용의 핵심인데, 결말은 눈의 여왕이 그냥 떠나버리고 끝입니다. 겔다와는 만나지도 않지요. 이러한 모험(?) 비스무레한 과정이 대부분 우연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대부분 공주가 어디 갔더니 왕자가 있더라는 식이거든요.
지나친 종교색도 지금 읽기에는 거슬렸고, 왠지 모르게 낡은 느낌의 문체 역시 읽기 힘들게 만드는 요소였습니다.

뭐 이런 단점이야 쓰여진 시기를 감안하며 그러려니 할 수 있는데 동화와 거리가 있는 이야기들은 왜 이게 동화의 클래식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듭니다. 참혹한 이야기(예를 들자면 "분홍신"), 나쁜(?) 이야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대표적인 것은 "부시통"입니다. 눈이 큰 개 세 마리 설정은 재미있었습니다만, 약속을 어기고 마녀를 죽인 병사가 정말 나쁜 놈인데 공주를 얻는다는 게 말이나 되나요. 마녀는 무조건 나쁜 건가?
무슨 내용인지 당쵀 알 수 없는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에요. "꿋꿋한 양철 병정"이 좋은 예인데, 양철 병정이 갖은 고생을 하고 돌아온 후 그냥 불에 녹아버린다, 이게 어떻게 동화가 되는지 정말이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아주 건질 게 없지는 않습니다. 대략적으로 알고 있던 이야기의 오리지널 풀 버전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만으로도 큰 성과니까요.

또 새롭게 알게 된 것도 많은데 "인어공주"에서 거품이 된 인어공주가 천국까지 300년이 걸리는데, 착한 아이를 발견할 때마다 1년씩 줄여준다는 결말이 대표적입니다. 아이들이 아주 절망하지 않고 착하게 살게 만드는 적절한 동화스러운 결말이라 마음에 들었어요.
"눈의 여왕"은 읽고 나서 예전에 감상했던 러시아산 애니메이션이 비교적 원작을 충실하게 구현했다는 점에서 놀랐고요.

허나 이 정도로 점수를 주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오리지널, 원전으로서의 가치 외에 현대에 먹히지 않는 이야기들로 뭔가 교훈을 준다던가,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재미라도 줘야 하는데 지루함 말고는 별다른 가치를 찾기 어렵네요. 예쁜 디자인,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약간의 장점에 0.5점 더 얹어 별점은 1.5점입니다.

2019/04/13

인어가 잠든 집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1.5점

인어가 잠든 집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하리마 테크의 후계자 가즈마사는 바람을 피운 탓에 아내 가오루코와 별거 중으로 이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딸 미즈호가 뇌사에 빠진 후, 미즈호의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 이혼을 보류하고 금전적, 기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도움의 핵심은 하리마 테크의 기술자 호시노가 개발한, 척수를 자극해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기술이었다. 그러나 가오루코의 노력과는 별개로 주위 가족들은 미즈호를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결국 미즈호의 동생 이쿠토의 초등학교 입학을 계기로 갈등은 폭발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작으로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대장편입니다. 뇌사 상태의 아이가 살아있느냐? 죽어있느냐? 에 대한 딜레마를 심도깊게 그리고 있는 드라마 작품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딜레마를 그린 드라마에도 강점을 보이는 작가지요. 대표작 중 하나인 "비밀"도 딸로 환생한 아내는 딸인가? 아내인가? 라는 딜레마가 이야기의 핵심이었으니까요.

굉장히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흡입시키는 솜씨는 여전히 일품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뇌사자의 상태에 대한 딜레마도 흥미롭지만, 이외에도 뇌사자를 기계로 움직이게 하는 행위에 대한 윤리적인 고민, 심장 이식이 필요한 아이 묘사를 통한 장기 이식에 대한 고민 등 다양하고 심각한 주제가 등장하는데도 이를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능력은 작가 명성에 충분히 값합니다.

하지만 "비밀"이 딜레마를 중심으로 깔끔한 전개와 결말을 보였다면 이 작품은 그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불필요한 내용이 너무 많아요. 대표적인건 가오루코를 둘러싼 여러가지 설정들입니다. 가즈마사와 가오루코가 이혼을 앞두고 있으며, 가오루코가 의사 에노키다와 불륜 직전까지 가는 연심을 품고 있고, 하리마 테크의 기술자 호시노가 그녀에게 반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미즈호가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다는 설정 모두가 불필요합니다. 가오루코가 마성의 매력을 가진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복잡한 남자 관계를 끌고 들어오는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재미도 없고요. 

또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툭툭 끊어져 들어오는 것도 문제입니다. 미즈호의 뇌사, 하리마 테크의 기술 도입, 그 와중에 심장 이식이 필요한 유키노라는 아이에 대한 묘사가 등장하다가 몇 년 후 갈등이 폭발하고, 또 몇 년 후 유키노를 놓아 준다는 이야기 모두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여기에 더해 특별한 악역이 없는 점도 지루함을 가중시키고요.

차라리 전남편 가즈마사가 회사를 위해 딸 아이를 회사 기술을 이용하여 인형처럼 움직이며 미소짓게 만들며 이익을 챙기지만 이를 보다못한 가오루코와 호시노가 힘을 합쳐 막다가 심장 이식이 필요한 유키노를 만난 후 미즈호를 놓아준다, 가오루코는 호시노와 결합한다는 식으로 풀어가는게 훨씬 나았을겁니다. 여러가지 설정에 대한 이유로도 그럴듯하고요.

덧붙이자면 결말도 너무 뻔해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어쨌건 미즈호를 붙잡고 살다가, 미즈호가 유령? 처럼 나타나 떠나 보낸다는 결말, 미즈호의 장기를 이식받아 건강해진 아이가 등장하는 에필로그가 그러해요. 이는 뇌사에 대한 깊이있는 고민은 다 부질없고, 결국 마음의 준비 문제였다는 이야기에 불과해서 실망스럽습니다. 미즈호가 회사에 빠지게 된 사고의 진실 역시 딱히 중요한 내용은 아니라 실망스럽긴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작가 명성에 값하는 볼만한 장면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가오루코가 미즈호의 선생인 신쇼 후사코로 위장하여 심장 이식이 필요한 유키노를 돕기 위해 나서는 내용은 미스터리 스타일로 펼쳐져 독자에게 흥미를 불러 일으킵니다. 앞서 신쇼 후사코에 대해 수상쩍게 묘사하고, 뇌사자 장기 기증에 대해 심도깊게 이야기를 펼쳐 나가면서 신쇼 후사코에 대해서 의심을 품게 만드는 솜씨가 일품인 덕분이지요.
아울러 미즈호가 살아 있다!는 희망을 부여잡기 위해 뇌사 상태의 아이를 움직이고, 심지어 미소까지 짓게 만드는 과정이 이어지다가 이쿠토의 생일날 이미 미즈호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주위 사람들 반응에 격분한 가오루코가 미즈호에게 칼을 겨눈 뒤 경찰을 직접 불러 지금 미즈호의 심장을 칼로 찌르면 살인죄냐 아니냐를 묻는 장면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영화 버젼의 예고편에서도 이 과정과 장면을 핵심으로 소개할 정도로 뇌사자가 살아있느냐 아니냐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좋은 장면이었어요.

그러나 이 정도로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여러모로 부족합니다. 전성기 작품에 비하면 군더더기가 너무 많은 탓으로 이렇게 길게 끌고 갈 이유는 없었습니다. 추리, 미스터리 장르와 거리가 멀다는 점도 감점 요소고요. 최소한 휴먼 미스터리라고 홍보는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 '미스터리'를 원하는 분이시라면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7/10/09

허구추리 - 시로다이라 쿄 / 박춘상 : 별점 2점

허구추리 - 4점
시로다이라 쿄 지음, 박춘상 옮김/디앤씨북스(D&CBooks)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루머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고 알려진 아이돌 나나세 카린의 유령이 마쿠라자카 시에 나타났다. 큰 가슴에 미니 드레스, 리본을 달고 손에는 큰 철골을 든 모습이라서 사람들은 그녀를 "강철 인간 나나세"라고 불렀다. 유령은 사람들을 습격하다가 결국 경찰마저 살해해 버렸고, 사건에 관련된 교통과 순경 사키는 우연히 만난 소녀 이와나가 코토코, 그리고 전 애인 쿠로와 함께 강철 인간을 없애기 위한 승부에 나섰다... 

일본작가 시로다이라 쿄의 장편 소설입니다. 추리 만화 "스파이럴" 등의 원작으로 알려진 작가이지요. 본 작도 만화적인 설정이 가득찬 라이트 노벨이기는 한데,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진짜 진상이 아니라 정말로 있어보이는 가설을 연달아 내 놓는다는, 발상의 전환이라 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이런저런 가설, 추리가 선보이는 작품은 그 중에서 "진상"을 찾아내는게 보통 이야기의 핵심인데, 이 작품은 "허구(사실에 없는 일을 사실처럼 꾸며 만든) 추리"를 진짜라고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게 목적이거든요. 이 아이디어 덕분에 '12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같은 이유로 국내 최고의 미스터리 애호가 모임인 "하우미스터리"에서도 추천하는 분들이 제법 계셨을 테고요. 저도 "하우미스터리"에서 관련 정보를 접하고 관심을 가지던 차에, 기나긴 추석 연휴의 대미를 장식하고자 집어들었습니다.

일단 라이트 노벨답게 쑥쑥 읽힙니다. 만화 원작을 많이 쓴 작가답게 캐릭터와 장면을 시각적으로 떠오르게 만드는 묘사, 재치넘치는 대사도 괜찮아요. 주인공인 일안일족 아가씨 이와나가 코토코도 마음에 듭니다. 귀한 집 아가씨이지만 상스러운 말도 서슴없이 내뱉고, 남자친구 사쿠라가와 쿠로에게 집착하는 모습이 개성적이면서도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새 말로 '갭모에'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앞서 언급했던 독특한 아이디어를 제외하면 추리적으로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은 많지 않습니다. 우선 "허구 추리", 즉 이와나가가 '강철 인간 나나세 종합 사이트'에 올리는 네 가지의 추리 모두 조금만 뒤집어보면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바로 반박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될 정도로요.
그리고 네 번째 추리를 설득력있게 포장하기 위해 앞의 세 가지 추리를 내 놓는다는 것도 억지스럽습니다. "테라다 형사가 혼자서 수사에 나섰다", "나나세 카린의 아버지가 악의를 가지고 수기를 남겼다.", "나나세 하츠미가 매스컴에 수기를 흘렸다."라는건 구태여 이렇게 가설까지 만들어가며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니까요. 네 번째 추리의 핵심이 이 세가지 요소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게다가 첫 번째 테라다 형사 이야기를 제외하면 결국 나나세 카린은 "궁지에 몰리고", "죽고 싶었다."라고 밖에는 설명되지 않기에 외려 드러내면 안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냥 네 번째 가설로 정면 승부를 하면 될텐데, 구태여 앞에 장황한 설명을 덧붙인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또 네 번째 "허구 추리"의 핵심인, 나나세 카린이 실제로 살아있다는 시체 바뀌치기 트릭은 조금 그럴듯하게 포장해 놓았지만 솔직히 현대 경찰을 우습게 본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건 정말이지 뭐라 할 말이 없네요.

만화적인 설정도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특히 인어 고기와 쿠단의 고기를 함께 먹은 사쿠라가와 쿠로에 대한 설정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쿠단의 "미래 결정 능력"에 불사의 능력이 결합되어 죽지 않고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좋지만, 사건 해결에 별 도움이 되지는 않는 탓입니다. 단지 강철 인간과 호각으로 맞붙기 위한, 액션용 소품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입니다. 능력이 있다고만 묘사되지 딱히 어떻게 발휘되는지 묘사가 없으니 독자는 알 도리가 없지요. 그냥 이와나가가 올린 글로 사건이 해결되는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이 점은 쿠로의 사촌 누나이자 동일한 힘을 가졌으며, 강철 인간 나나세를 만들어낸 최대의 적 릿카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럴 바에야 이와나가는 귀신과 소통할 수 있으며 쿠로는 일종의 호위 무사라는 정도로 끝내는게 깔끔했을 겁니다. 아니면 "미래 결정 능력"을 좀 더 시각화하던가요("그래 결심했어!"와 함께 두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른다던가...).

이렇게 독특함 외에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조금 연령대가 낮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작품으로 생각됩니다.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구태여 구해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만화로도 발표되었는데 만화가 훨씬 괜찮을 것 같네요.

2004/12/11

부활하는 군단 1,2 - 웨난 / 유소영 외 : 별점 4점

부활하는 군단 1 - 8점
웨난 지음, 유소영 외 옮김/일빛
부활하는 군단 2 - 8점
웨난 지음, 유소영 외 옮김/일빛

"진시황이 즉위하여 여산에 치산 공사를 벌였다... 지하수를 세번 지날 만큼 땅을 깊이 파고, 녹인 구리를 부어 "곽"에 이르게 했다... 장인들로 하여금 자동으로 발사되는 기계 장치가 된 쇠뇌를 만들게 하여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발사되도록 했다. 수은으로 온갖 하천과 강, 바다를 만들고, 기계를 이용해 수은이 흐르게 했다. 인어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영원히 꺼지지 않게 했다... (사마천, 사기)"

중국의 최초의 진정한 황제라 할 수 있는건 시황제죠. 이 책은 진시황의 병마용갱을 발굴하며 얻어진 고고학적 성과를 자세히 고찰하면서도 당시 시대상황과 중국 고고학계에 던지는 메시지까지 담겨있는 저서입니다.
2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권은 병마용갱의 발견과 발굴에 이르는 숨가쁜 상황과 발견된 유물들을 자세히 분석하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각종 사료들, 발굴된 유물에서 유추한 당시 무기들과 군대 편제, 진법, 그리고 춘추 전국 시대와 진 왕조의 사회 구조와 법령 등 역사적 사실까지 고찰하고 유사 유물들과의 비교를 통한 해석을 덧붙여 책의 충실도를 높이고 있죠.

2권은 병마용갱의 또 다른 대 발견이었던 "동거마" 발굴에 관련된 일화와 동마에 관한 자세한 고고학적 연구 및 고찰이 전반부의 주요 내용입니다. 1권에 못지 않을 정도로 자료적 가치가 상당합니다.
중반부에는 병마용을 찾아왔던 각국 유명인사들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으며 (레이건과 닉슨 등), 후반부에는 2번에 걸쳐 발생했던 "장군용두"도난 사건과 도난 사건에 연루되었던 관계자들의 증언, 그리고 도굴과 문화재 밀반출이 심할 뿐 아니라 기껏 발굴한 유물도 도난과 관리 소홀로 인한 문제점 등의 중국 고고학의 현실과 병마용의 현실도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도굴및 유물 보존에 대한 문제점은 유흥준 교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지적한대로 국내에도 거의 비슷하게 적용될 것 같지만 하나 부러운 것은 용두 도난사건의 범인들에게 이례없는 중형 (사형, 무기징역 등) 을 선고한 중국 정부의 태도입니다. 너무 가혹하지 않나 싶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중형은 꼭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진시황릉 지하궁에 대한 각종 사료 조사 및 향후 발굴 계획 등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며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항우가 진시황릉을 불태우고 유물을 약탈한 등 여태까지의 사료에서 밝힌 도굴에 관한 것이 역사적, 과학적으로 볼때 거의 신빙성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아직 발굴 계획은 없다고는 하나 사료적으로 밝혀진 여러 내용만으로도 지하궁에 대한 기대를 높여줍니다.

비록 2권 중반부의 방문한 사람들에 대한 묘사나 도굴에 대해 지나치게 길게 서술한 점, 너무 공산당 정부측 입장을 대변하는 것 처럼 보이는 후반 묘사는 분명 거슬리고 불필요한 부분이며 권당 12,800원이라는 가격도 부담되는건 사실이에요.

허나 역사와 고고학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충분히 그만한 가치를 가진 책입니다. 무엇보다도 고고학-역사 관련 서적이 그다지 많지 않은 국내 현실에서 거의 독보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세한 도판과 해설이 곁들여져 지적 만족감을 충실하게 해 준다는 것 만큼으로도 높은 점수를 줄 만 하죠. 저자의 문장력도 상당한 편이라 읽는 내내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재미까지 주기도하고요. 때문에 별점은 4점입니다.

이런 책만 출판해도 출판사가 버틸 수 있는 문화적 풍토가 국내에 조성되기 위해서라도 저자의 다른 책 "마왕퇴의 귀부인"도 구입해 봐야 겠습니다.

2012/08/23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상) - 스티븐 킹 / 조영학 : 별점 2.5점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 상 - 6점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하) - 스티븐 킹 / 조영학 : 별점 2.5점

먼저 읽었던 하권에 이은 상권.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4호 부검실
검은 정장의 악마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잭 해밀턴의 죽음
죽음의 방
엘루리아의 어린 수녀들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그다지 무섭지 않으며 강한 심리 묘사가 중심이라는 특징은 하권과 동일합니다. 그래도 교훈적인 주제는 하권만큼 많지는 않더군요. 조금 더 재미에 치중한 작품들이었습니다. 별점은 2.5점. 개인적인 베스트는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입니다.

<제 4호 부검실>
의식이 있지만 몸 전체가 마비된 주인공이 부검실에서 부검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을 깨닫는다는 스릴러. 그에게 닥칠 부검이 언제 시작될 것인지에 대한 긴장감이 부검실 의사들의 유머러스한 대화와 맞물린다는 점에서 블랙코미디같은 느낌도 큽니다. 결말이 예상대로이긴 하나 코미디로 보면 괜찮은 듯. 별점은 2.5점입니다.

<검은 정장의 악마>
한 노인이 20세기 초엽, 자신이 아홉살 때 만났던 악마에 대해 털어놓는다는 내용. 너새니얼 호손의 <영 굿맨 브라운>에 대한 개인적 헌사이며 킹 본인은 별볼일 없는 결과물로 생각했지만 반응도 좋았고 상도 탔다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킹 의견에 동의합니다. 별볼일 없었어요. 호손 시대에 쓰여진듯한 오래된 감수성이 확실히 느껴지기도 했을 뿐더러 별로 무섭지도 않았거든요.
게다가 전개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악마가 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거짓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고 제대로 추격하지 않은 이유도 명쾌하지 못한 등 떡밥만 가득할 뿐이라서 말이죠. 중후반부 악마와의 추격전 하나만큼은 긴장감이 넘치지지만 단점이 워낙 명확하기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한 세일즈맨이 자살을 하려다 평생 모은 화장실 낙서에 대한 노트의 처리를 놓고 고민한다는 드라마. 탁월한 심리묘사에 화장실 낙서라는 이질적인 소재를 잘 어우른 걸작 소품. 길이도 적당할 뿐더러 삽입된 낙서들이 참 적절하더군요. 그리고 열린 결말이 정말 잘 어울렸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잭 해밀턴의 죽음>
딜린저 갱단의 일원이었던 잭 해밀턴의 죽음을 딜린저의 오른팔 호머 반미터가 회고하는 안티 히어로 물이자 신화이자 팩션. 실제로 있었음직한 생생함이 압도적입니다. 딜린저에 대해 모르면 즐기기 어렵다는 단점은 있지만... 저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창작 동기가 킹이 호머 반미터가 파리에 올가미를 던지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라고 하는데 단지 그 정도의 소스로 이렇게나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꾸며내다니, 역시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 하나만큼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구나 싶더군요. 별점은 3점입니다.

<죽음의 방>
남미 한 국가 고문실에 잡혀온 미국기자 플레쳐의 탈출을 그린 모험물.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전개가 일품인, 서스펜스 하나만큼은 최고로 치고 싶은 작품입니다. 금연한 사람에게 담배를 피고 싶게끔 만드는 효과도 있는데 흡연 장려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지나치게 낙관적인 결말은 그닥이나 흥미진진한 것은 확실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엘루리아의 어린 수녀들>
<다크 타워> 시리즈의 번외편 단편이라고 합니다. 원전을 읽지 않아 세계관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느낌은 <북두의 권> + <트라이건> 정도 되려나요? 이 작품집에서 가장 긴, 중편에 가까운 길이를 자랑합니다.
일단 수녀들의 정체, 녹색 괴물들과 끔찍한 벌레들이 등장하는 등 호러 판타지로서의 묘사와 설정은 좋습니다. 그러나 포로가 된 히어로와 그를 돕는 비련의 히로인 그리고 둘에게 닥친 비극적 결말이라는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에서 조금도 더 나아간 것이 없어서 아쉽습니다. 이래서야 인어공주의 다크버젼일 뿐이죠. 물거품이 아니라 벌레가 되었을 뿐.
때문에 제게는 알맹이가 별로 없는 흔해빠진 호러 판타지였을 뿐입니다. 젤라즈니가 왜 대단한지 다시금 느끼게 해 주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사람을 자살로 유도하는 초능력을 가진 딩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관에 고용되어 안락한 삶을 누리지만 자신이 살인에 이용되었음을 깨닫고 탈출을 결심한다는 이야기.
설정도 흥미진진하고 이야기도 재미있기는 한데 영화로 따지면 기본 설정과 주인공 소개 후 막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려 할 때 끝나는 느낌이에요. 기-승 까지만 있다는 느낌? 그래서 완성도는 높이 쳐주기 어렵네요. 뒷부분을 따로 본다면 모를까.
덧붙이자면 작가 스스로 밝힌, 창작 동기인 잔돈을 버리는 청년에 대한 설명도 그닥 잘 되어 있지 않더군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17/10/22

걸 온 더 트레인 - 폴라 호킨스 / 이영아 : 별점 2점

걸 온 더 트레인 - 4점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북폴리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임으로 인한 알콜 중독 탓에 이혼과 퇴사로 인생이 엉망이 된 레이첼에게는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듯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게 유일한 낙이었다, 그리고 기차가 정차하는 중간 지점에서 보이는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보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레이첼은 부부 중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뒤이어 그녀가 실종되었다는걸 알게 되는데... 

"인어 다크, 다크 우드"와 동일한, 요새 유행하는 1인칭 시점의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입니다. 영화화되었다는데, 영화화될 만큼의 재미는 충분히 전해줍니다. 사라진 메건이 어떻게 되었는지? 누가 죽였는지?에 대해 계속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전개 덕분입니다. 이 중 메건이 실종된 날 필름이 끊긴 레이첼의 기억이 사건 해결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은 특히나 일품이에요. 레이첼이 메건을 죽인걸까? 아니면 뭔가 중요한 것을 본 걸까? 등 오만가지 생각을 불러일으키니까요.

이러한 전개가 모두 3명의 여성 - 레이첼, 메건, 애나 - 시점으로 진행되는 것도 독특합니다. 사실 다양한 인물들의 1인칭 시점이 교차되는 전개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근 읽은 이런 류의 전개 방식은 보통 서술 트릭을 위한 장치인 경우가 많았던 반면, 이 작품은 애나가 톰이 거짓말을 정말 잘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장면, 애나가 톰이 숨겨둔 전화기를 찾아내는 장면 등 레이첼 시점에서는 알 수 없는 디테일을 보강해주는 장치로서, 또 톰이 원래 살던 집에서 계속 사는 이유에 대해 레이첼에게 한 말과 애나 시점의 심리 묘사가 반대된다는 것을 드러내는 식으로 레이첼은 모르지만 독자에게만 해당 정보를 살짝 알려주는 식으로 사용되는 등 정직하게 전개를 위해서만 사용해서 오히려 더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레이첼이 메건을 엿보며 "제스"라고 혼자 부르다가 갑자기 "메건" 시점으로 넘어올 때의 기묘한 느낌도 나쁘지 않았고요.

아울러 "일상계" 느낌이 가득하다는 독특함 역시 큰 장점입니다. 정말 보통 사람(알콜 중독에 빠져 있고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앓고 있는 현 상태만 보면 오히려 그 이하)인 레이첼이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좌석의 기차를 타면서 똑같이 정차 하는 곳의 집을 쳐다보다가 사건과 관련된 무언가를 보게 된다는 설정부터 아주 매력적이지요. 게다가 그녀가 목격한 것은 정말 사소한 사항에 불과했고, 사건의 진실과도 동떨어져 있었다는 진상도 마음에 들고요. 우연히 찍은 사진에 거대 조직의 음모가 담겼다! 이런 것보다 여러모로 현실적이라 좋았습니다.

그러나 괜찮은 범죄 스릴러냐하면, 솔직히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추리"의 여지가 거의 없으며, "서스펜스"나 "스릴"을 불러일으키는데도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추리적인 부분부터 보자면, 작 중 레이첼이 벌이는 일종의 탐정 활동은 모두 무의미한 것에 불과합니다. 진상은 등장인물들의 입으로 밝혀질 뿐이에요. 단지 메건 사건 뿐만이 아니라, 등장인물들 마음 속에 있는 한가지 씩의 비밀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비밀들은 모두 사건과 관계가 없습니다. 메건의 비밀은 비교적 초반, 즉 심리치료사 카말과 면담 때 부터 중요하게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철없을 때 낳았던 딸을 부주의로 잃었다는건데, 이걸 아는 사람은 헤어진 아이 아빠 맥 밖에 없으므로 본 사건과 관계가 있을리 없으며, 심리치료사 카말이 이 것을 안다고 해도 딱히 뭘 할 리가 없지요.
레이첼이 술을 마시는 이유? 불임 때문에 알콜 중독이 시작되었고, 그 때문에 톰이 바람을 피워 이혼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 역시 본 사건과는 무관합니다. 그냥 분량 늘리기에 불과해요. 

톰이 진범임이 드러나는 장면도 황당합니다. 메건 시점으로도 작품이 교차 진행되기 때문에, 결국 메건 시점의 마지막 날 범인은 밝혀지게 됩니다. 때문에 최대한 레이첼, 애나 시점에서 범인을 제대로 드러냈어야 했는데 이 부분에서 정교한 맛이 없어서 설득력이 거의 없습니다. 결정적 단서는 애나가 우연찮게 발견한 톰의 또다른 휴대전화가 전부인데, 사건이 일어난지 오래 되었는데 왜 휴대전화를 버리지 않았을까요? 이래서야 톰이 뜬금없이 둘 앞에서 "내가 범인이야. 놀랐지?" 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도 않지요. 이는 "톰은 거짓말을 잘한다"를 드러내는 것 까지는 괜찮았는데 이를 범인으로 연결하는데 실패한 탓이 큽니다. 레이첼이 필름이 끊겼을 때 톰이 이야기 한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독자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못했고요.
이럴 바에야 레이첼 1인칭 시점으로만 작품을 전개하는게 더 깔끔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메건과 애나 시점의 전개는 실상 본 사건 해결에는 별 도움도 안되는데 장황한 묘사로 페이지를 낭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울러 서스펜스나 스릴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데, 레이첼 시점의 묘사가 너무 많은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정신적으로 불완전하고, 이혼에 대해 자책하고 항상 알콜 중독을 의식하면서 술을 마시거나, 혹은 도피처를 찾는 묘사들로 솔직히 짜증 났어요. 무능력한데다가 입만 열면 거짓말에, 오지랖은 넓어서 쓰잘데 없는 사건에 뛰어들어 일만 복잡하게 만드는 민폐 캐릭터 그 자체니까요. 경찰 라일리가 그녀를 못견뎌하는게 충분히 이해될 정도였습니다. 제대로 된 증인 역할도 불가능한 인물이 탐정역을 한다? 어불성설도 유분수여야지요.
레이첼 뿐만이 아니라 다른 캐릭터들 모두 짜증나기는 마찬가지에요. 메건? 남편 덕에 유유자적하게 살면서 당당하게 바람을 피면서 사람 가지고 노는게 취미인 유부녀로, 솔직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더해요. 카말은 자신의 환자와 바람을 피는 부도덕한 심리치료사, 스콧은 의처증 가득한 정신병자, 톰은 거짓말을 일삼는 살인자라는 점에서요. 등장인물 중에서 그나마 정상이 애나, 그리고 "좋은 사람"은 레이첼의 친구 캐리가 유일할 정도로 작품에 제대로 된 사람이 없습니다(아, 캐리는 거의 마더 테레사 수준입니다).

또 최근 접했던 이런 류의 여성 1인칭 시점의 스릴러물의 대부분이 "아이"와 "임신"이 핵심 소재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 작품은 도가 지나칩니다. 레이첼이 알콜 중독이 된 이유는 그녀의 불임이고, 톰과 애나의 불륜과 재혼은 애나의 임신 때문이고, 메건의 불면증의 원인은 그녀가 출산한 아이가 죽은 탓이고, 메건이 살해당한 이유는 톰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이고.... 모든 사건이 임신과 출산에 관련되어 있는데 지나치게 편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드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는 그럭저럭인데, 최근 유행(?)에 편승한 작품으로 딱히 완성도가 높지는 않습니다. 특히 추리나 서스펜스 측면에서 말이죠.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나저나, "걸"은 등장하지도 않는데 왜 제목이 "걸 온 더 트레인" 일까요? 이 역시 미스테리입니다...

2018/07/31

지구의 방과 후 (地球の放課後) 1~6 - 요시토미 아키히토 : 별점 1.5점

"이트맨"의 작가 요시토미 아키히토의 서바이벌 하렘 SF 만화입니다.

작가의 작품은 편차가 커서 이전에 읽었던 "이트맨"은 대박, "스쿨인어"는 중박, "레이"가 쪽박이었습니다. 중박 이상일 확률이 60%가 넘기는 하지만... 아쉽게도 이 작품은 쪽박입니다. 서바이벌 하렘 SF라는, 인기있을만한 요소는 다 때려넣었지만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 탓입니다.

우선, 서바이벌 만화로는 빵점입니다. 소녀 3명, 소년 1명만이 살아남은 도쿄 중심가에서의 삶을 그리고 있는데 위기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단지 사람들이 사라졌을 뿐, 모든 필요한 용품들은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삶은 어렵지 않고, 약간의 불편함도 오히려 캠핑같은 묘사로 즐거움만 가득합니다. 드럼통 목욕이라던가, 비료로 쓰기위해 밭 가까이에 설치한 화장실이 좋은 예이지요. 너무나 행복해서 '방과 후'라고 부르며 이러한 삶을 만끽하는 아이들의 묘사를 본다면, 그 누구도 이 작품을 서바이벌 만화라고 부를 수 없을거에요.

하렘물로는 어떨까요? 역시나 함량 미달입니다. 거유 안경녀, 장발 츤데레, 단발 로리라는 인기를 끌 만한 캐릭터는 모두 긁어모으긴 했습니다. 그러나 성격과 행동 모두 전부 어디서 본 듯 합니다. 무엇보다도 작화가 부족하여 별다른 매력을 느끼기 어려워요. 그야말로 색기 제로이지요. 기묘한 설정은 나름 잘 하지만 매력적인 여성을 그려내지는 못했던 작가의 실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나마 SF쪽 설정은 조금 괜찮은 편입니다. 지구를 구하기 위해 이러한 현상(팬텀의 습격)을 일부러 일으켜 미래로 사람들을 납치했다는 진상은 억지 투성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지만... 그래도 진상에 이르기까지 아주 조금씩 드러나는 복선들 - 주인공이 갑자기 타임슬립을 하고, 주인공과 다른 세 명의 소녀가 모두 수학 천재이고, 전혀 다른 장소에 있던 생존자들 그룹 리더가 동일 인물이었다는 등 - 은 제법 흥미를 갖게 만들거든요. 

하지만 장점은 미미할 뿐 전반적으로는 망작입니다. 긴장감과 색기 제로의 방과 후 이야기는 다 집어 치우고 팬텀의 습격 와중에 생존자들이 수수께끼를 찾아나가는 이트맨 스타일 전개의 한 권짜리 단편으로 발표하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구해보시지는 마세요. 시간 낭비입니다.

2023/09/24

붉은 집 살인사건 - 도진기 : 별점 2점

붉은 집 살인사건 - 4점
도진기 지음/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진범,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진은 암으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오빠 남성룡의 유산 상속에 대해 의뢰한 남광자를 만나러 우면동 붉은 집에 방문했다. 붉은 집 1층에는 서씨 가문, 2층에는 남씨 가문이 거주하고 있었다. 고진은 1순위 상속자인 남성룡의 딸 남진희가 모든걸 상속받기에 상속은 오빠와의 협의가 전부라며 자리를 뜨려 했지만, 과거 있었던 2건의 사건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바꾸었다. 과거 서씨 가문의 가장 서판곤이 남씨 가문의 모친 이분희와 재혼 후 아내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백솔 사체로 발견되었던 사건과 서판곤의 아들이자 현재 서씨 가문의 가장 서태황의 아내 박은순이 강도에게 살해당했던 사건이었다.
이는 우연이 아니며, 뒤이어 다른 사건이 일어날거라 여겼던 고진의 직감대로 6개월 뒤 남진희가 실족사라는 형태로 사망했다. 고진은 짧은 만남이었지만 미모의 맹인 남진희에게 매료되었던 탓에 사건의 진상을 밝혀낼 것을 결심하고 친구이자 우면동관할서의 반장 이유현과 함께 사건 수사에 뛰어드는데....

과거 판사였던 도진기 씨의 데뷰작이자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 첫 작품. 제목이 달라져서 몰랐는데, 10여년 전에 읽었던 <<어둠의 변호사>>와 같은 작품이더군요.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바뀐 제목에 낚여서 다시 완독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주요 트릭과 진상은 대충 잊어버렸던 터라 새롭게 읽는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네요.

한국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채로운 트릭과 두뇌 싸움, 복선이 가득하다는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크게는 아래와 같이 서형일이 만든 트릭 세 가지, 그리고 남성룡의 계획 두 가지가 눈에 뜨입니다.

서형일의 트릭
  1. 박은순 살해 당시 알리바이 트릭
  2. 남진희 사건을 일으킨 원격 조종 트릭
  3. 남진희 사건 당시 알리바이 트릭
남성룡의 계획
  1. 서형일의 다아잉 메시지를 이용하여 서태황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던 계획
  2. 서형일을 움직여 남진희를 살해하도록 만든 계획

서형일의 첫 번째 알리바이 트릭은 유럽 여행 중 살인을 위해 이미 한국에 들어왔지만, 유럽에 남아있던 지인애게 당일 한국 날씨를 확인하여 엽서를 보내도록 만든 것입니다. 단순히 '서형일의 필적'이 근거라는건 증거로 삼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이지만, 한국 날씨 예보 종류는 몇 개 없기에 날씨에 대해서만 여러가지로 다르게 기입한 엽서를 준비해서 - 같은 내용으로 "맑음", "흐림", "비" 등으로 만들어 놓는 식으로 - 해당 날짜 예보에 맞는 엽서를 골라 보냈다는 아이디어는 좋았습니다. 문제는 인어공주 동상에 돼지 피를 뿌린 것도 서형일의 공범이었다는 겁니다. 만약 현장에서 체포되었더라면 어쩔 셈이었을까요? 최대한 몸조심하면서 숨어다녀도 모자랄 판인데 이런 조작까지 해 가면서 엽서를 만들어 보낼 필요는 없었습니다.
두 번째의 원격 조종 트릭은 남진희 침실 구조를 이용하였습니다. 남진희가 수면제에 취한 틈에 침대 위치를 정 반대, 대각선 위치로 옮겨놓았던 겁니다. 원래 위치에서 문을 열면 거실로 나갈 수 있지만, 바뀐 위치에서 문을 열면 계단으로 추락하도록요. 수면제, 방의 구조 등 여러가지 단서와 상황을 잘 조합한 멋진 트릭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침대 위치를 옮기는 조작을 위해 사고 전날 부산으로 이동할 때 알리바이를 만든 트릭입니다. 상, 하행선 고속도로 휴게소를 오갔다는 다소 간단한 내용이지만 실행이 용이하다는 점에서는 현실적이었어요.
 
남성룡의 첫 번째 계획은 서형일이 남긴 '아버지'라는 말이 녹음되었다는걸 알고 녹음기를 그대로 두었던 겁니다. 자신이 서형일의 친부라는건 아무도 모르니, 서형일의 양부 서태황이 죄를 뒤집어 쓸 거라 여겼기 때문이지요. 사건의 진상과 동기 를 밝히는 핵심 소재가 된다는 정메서 눈여겨 볼 만 합니다.
남성룡이 서형일을 조종하기 위해 유언장 정보를 흘려 살의를 부추켰다는건 뻔했지만, 언제나 설득력을 보장하는 동기인건 분명하고요.

하지만 확실히 처음 읽었을 때 보다는 별로였습니다. 일단 '잘 쓴' 작품은 아닙니다. 묘사가 튀는 부분이 많고, 고진과 이유현의 추리가 중구난방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고진이 중심을 잡고 사건을 끌고가는 맛이 부족해요.
인물 설정과 묘사도 별로입니다. 일본 변격물을 연상케하는 엽기 범죄가 명문가 - 서울대학교 교수와 2성 장군 집안이니... - 에서 이어진다던가, 맹인과 트랜스젠더가 혼재하는 복잡한 가족 설정들 모두가 비현실적이었거든요. 거의 마지막까지 서태황과 서두리를 악역으로 묘사하는건 '얘네들이 범인일거야! 그렇겠지?'라는 작가의 의도가 심하게 드러났고요. 무엇보다도 범죄자의 피는 유전된다는 이론을 작품 전체의 밑바탕에 깔고 있는건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고루할 뿐더러 굉장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전혀 찬동할 수 없어요.
그리고 본격 추리물을 추구한 작풍 탓이겠지만, 작 중에서 주요 정보를 노골적으로 알려주어서 추리하기 쉬웠다는건 다소 아쉬웠습니다. 뭔가 상세한 묘사가 있거나 하면 금새 이게 단서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남진희가 추락사한 침실 현장에 대한 극도로 상세한 묘사, 그리고 박은순 사건 당시 서형일의 알리바이에 관련된 묘사들이 대표적입니다. 남진희 사건은 묘사만 보아도 트릭은 잘 몰라도 수면제로 깊이 잠든 남진희와 방의 구조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서형일의 알리바이도 신문 기사를 통해 곧바로 가짜라는게 드러나고요. 날씨에 대해서 어떻게 조작했는지는 몰라도, 범인이 서형일이라는건 금방 알 수 있어요.
남진희 사건 때 서형일이 톨게이트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것도 알리바이 조작일거라는게 너무 뻔했습니다. 작품 발표 시기는 2000년대 이후인데, 이 때 고속도로 CCTV가 없었을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고요. 무슨 차를 탔는지를 알면 고속도로를 이용한 서형일의 알리바이는 금방 깨트릴 수 있었을 겁니다. 이외에도 경찰 수사를 거의 없다시피 묘사한 것도 옥의 티입니다. 서형일은 유럽 여행에서의 알리바이, 고속도로 휴게소 알리바이 모두 협력자가 필요했습니다. 주변 인물과 연락 내용만 살폈어도 협력자를 알아내어 범행을 밝힐 수 있지 않았을까요? 최소한 그런 수사는 벌였어야 했는데 수사에 대한 묘사는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남성룡이 서형일을 살해하고 그 죄를 서태황에게 뒤집어 씌우려 한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아버지'라는 말이 녹음된건 우연에 불과합니다. 그 다이잉 메시지(?)만 없었어도, 남성룡 역시 용의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살의가 넘쳤다 한들, 이렇게 무모하게 범행을 저지를 이유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10여년 전 보다 감점하여 2점입니다. 데뷰작인 탓에 여러모로 욕심을 부린 티가 많이 납니다. 서형일의 억지스러운 알리바이 트릭에 관련된 이야기는 다 빼고, 남성룡이 남진희에게 살의를 품은 이유 - 아내가 떠나면서 자기 딸이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 - 와 괜찮았던 남진희 원격 살해 트릭만 가지고 짧고 깔끔하게 다듬는게 더 나았을 것 같네요.

2025/05/11

화산전생 - 정준, 토마씨 : 별점 1.5점

화산의 장로였던 주서천은 죽은 뒤, 과거로 회귀했다. 주서천의 시대에서 암천회와 무림의 전쟁이 벌어져 수많은 영웅들이 죽었던 탓에, 주서천은 영웅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암천회의 음모 좌절에 새로운 생을 걸었다.

인기 웹소설의 웹툰화 작품입니다. 인기가 많다기에 이번 연휴에 몰아서 완결까지 보았습니다. 

뻔한 회귀물이지만 인기작답게 나름대로 독특한 점은 있네요. 단순한 무공 대결보다는 전략과 정보전이 강조된다는 점이 대표적입니다. 암천회는 소문과 거짓 정보를 활용해 무림 인물들을 현혹시키고, 9파 1방에 속하지 않은 이들의 질투심과 자격지심을 교묘히 자극해 세력으로 끌어들이는데 꽤 설득력 있습니다. 마지막 무림맹과 암천회의 결전은 수천의 병력이 각자 군사의 지휘 하에 지형과 다양한 작전을 활용해 전투를 벌이기 때문에 무협지보다는 말 그대로 '전쟁'을 그려내고 있고요.

전통적인 무협의 틀을 벗어나, 기관 전문가와 상인이라는 인물을 주력 조력자로 배치한 점도 특이합니다. 기룡 제갈승계는 초반에는 단순한 기관 돌파 전문가 정도의 역할이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다양한 병기와 기관으로 암천회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킵니다. 참호전 당시 첫 등장했던 기관총을 연상케 하는 그의 활약은 열세인 무림맹의 승리에 상당한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작 중 대립 상대인 '암천회'의 설정도 괜찮습니다. 비록 숙청당할까봐 두려워 숨어지냈지만, 황실과 관련이 있다는 설정은 암천의 다양한 재보, 자금과 군대까지 엮을 수 있던 이유를 잘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보통 무협물은 황실과 거리를 두는게 보통인데, 이를 적극적으로 설정에 녹여낸 작품은 개인적으로는 처음 보았습니다. 

또한 이야기 전개가 빠르고 명쾌해서 고구마스럽거나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 점도 장점 중 하나입니다. 주서천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인간 관계를 - 심지어 여자 관계까지! - 칼같이 정리하는 덕입니다. 주변 인물들도 불필요한 감정선 없이 빠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건 마찬가지에요. 선악의 구도도 명확하고, 악인은 반드시 최후를 맞이하는 단순하지만 시원한 구성도 이야기를 더욱 속도감 있게 만듭니다.

하지만 솔직히 그렇게 대단한 작품으로 보이지는 않네요. 회귀물을 기반으로 한 전형적인 전개는 이미 많은 작품에서 반복되어온 구조이며, 과거의 기억으로 모든 정보를 꿰뚫고 최강자가 되는 설정은 지극히 뻔했던 탓이 큽니다. '기연이 있는 장소를 미리 알고 찾아서 확보한다'가 거의 전부거든요. 별 탈 없이 레벨(?)을 올린 주인공이 상대방을 모두 해치우며 결말까지 이어지는 전개는 새로움을 느끼기 어려웠어요.

중후반부로 넘어가면서 무협이라는 장르의 틀을 벗어나 전형적인 판타지물처럼 변모하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혈마가 강시를 만들고 시신을 활용해 몸을 바꿔치기하며, 인어와 이무기, 현무, 말하는 독거미 등 이종족(북해빙궁은 엘프더군요)과 몬스터에 이상한 주술까지 등장하는데 무협물이 아니라 혼합 장르물 혹은 마법 판타지로 느껴집니다. 등장인물들의 강함을 일종의 레벨처럼 표현하고, 최강자들의 필살기(심상구현이라 부르는)는 각자 독특한 무공이 한 개씩 있다는 것 역시 전형적인 만화 판타지 세계관으로 보이고요. 뒤로 가면 이게 무협물일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그나마도 무공이라면 모를까 주서천이 마지막 암천회주와의 결전에서 시간을 되돌리는건 어이가 없었습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도 아니고... 주서천의 심상구현인 모든 상처를 치료해주는 '회귀'로 주서천이 치명상을 입은 줄 알고 방심하고 있던 암천회주에게 한 방을 먹이는 정도가 적당했습니다. 

그 외 전개에서 이상하게 늘어지며 억지스러운 부분도 적지 않아요. 대표적인게 무림맹주 남궁위무의 퇴장입니다. 암천회와의 결전 직전에 무림맹 내부의 다툼으로 처형된다는 전개보다는, 백의종군하여 마지막 대결에 참여하게 했더라면 훨씬 개연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작품 전반에 걸쳐 비급과 보물이 과도하게 등장하는 점도 몰입을 방해했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흥미로운 점이 없지는 않으나, 전형적인 판타지 회귀물과 별다를게 없고 작화가 심하게 좋지 않아서 추천드리기는 어렵네요.

덧붙이자면, '별호'가 이렇게 별로인 무협지는 정말이지 처음 봅니다. 검 좀 쓰면 검성, 검신, 검선, 검마로 돌려막는 식이거든요. 제가 만든 챗봇으로 화산파 장문인 검선 우일문의 별호를 만들어보니 '매영검옹(梅影劍翁)'을 추천하는데, 검선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나 싶습니다.

2014/01/08

성냥팔이 소녀는 누가 죽였을까 - 도진기 : 별점 2.5점

성냥팔이 소녀는 누가 죽였을까 - 6점
도진기 지음/추수밭(청림출판)

추리소설을 쓰는 현직 검사이신 한국의 존 그리샴 "도진기 작가"가 쓴 법률 안내서입니다. 염라대왕이 천국과 지옥행을 결정하는 판사 역할을, 소크라테스가 염라를 도와주는 변호사로 등장하여 여러 역사 속, 픽션 속 사건의 피고인에 대한 재판을 진행한다는 설정입니다. 본인의 능력을 살려 일종의 소설같은 구성과 전개를 보여주는게 특징이고요.

장점이라면 등장하는 사건들이 흥미롭다는 점입니다. 덕분에 쉽게 읽힙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윌리엄 텔이 아들에게 화살을 쏜 것에 대한 재판

결과가 생길 수 있지만 그래도 좋아! 라는 것이 미필적 고의, 결과가 생길 수 있지만 설마 그러겠어? 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식 있는 과실로, 윌리엄 텔은 고의도 없었고 미필적 고의(아들이 죽어도 좋아)도 없었기에, 인식 있는 과실에 해당되어 처벌받지 않습니다.

하멜의 피리 부는 사나이 재판

피리 소리가 아이들을 꾀어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으면 무죄입니다. 상당 인과관계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검투사 막시무스가 다른 검투사들을 죽인 것에 대한 재판

기대 가능성이 없어서(올바른 행동을 기대할 수 없음) 죄가 되지 않습니다. 강요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당연한가요?

샤일록의 계약에 대한 재판

계약 자체가 사회질서에 어긋나는 것이라 무효! 인어공주의 목소리를 빼앗은 마녀와의 계약 역시 마찬가지이며, 이른바 신체포기각서라든가 도박빚 역시 무효입니다. 단, 무효인 도박 빚도 일단 돈을 주었다면 돌려받지 못합니다.

짤막한 내용만 보아도 상당히 재미나죠? 그러나 소설도 아니고, 법률 안내서도 아닌 애매한 결과물이라는 단점도 명확합니다. 소설적인 부분은 설정이 유치하며, 중간중간의 대사들 역시 그러합니다. 약간 아동 취향으로 보여서 많이 어색했어요. 법률 안내적인 측면으로는 깊이가 부족하고요. 소설적인 설정과 구성에 너무 많은 부분이 할애되어 있는 탓입니다. 현직 검사의 관점으로 이 책에 등장한 사건들에 대해 쉽고 재미나게 설명해 주는 정도로 충분했을 텐데 아쉽네요. 너무 오버한 느낌이에요. 소설가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신 것 같기도 합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재미있는 내용이 많고 장점도 확실해서 아예 폄하하기는 힘드나, 억지스러운 설정은 빼는 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유사하지만 금태섭 변호사의 책이 저는 더 마음에 드네요.

2020/08/13

우먼 인 윈도 - A.J 핀 / 부선희 : 별점 3점

우먼 인 윈도 - 6점
A. J. 핀 지음, 부선희 옮김/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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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 장애로 집 밖에 나가지 못한지 10개월이 넘은 정신과 의사 애나 폭스는 이웃에 새로 이사온 제인 러셀과 친해졌다. 며칠 뒤 밤, 애나는 이웃집 창을 바라보다 칼에 찔려 죽어가는 제인 러셀을 목격했다. 911에 신고한 뒤 애나는 공황 장애를 무릅쓰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집 밖을 뛰쳐나가다가 기절해버렸다.

다음날 정신이 든 애나 앞에 자신이 아는 제인 러셀과 다른 여자가 '제인 러셀' 이라며 나타나서 살인 사건은 없던걸로 처리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모든건 애나의 알콜 중독과 치료를 위해 먹는 약이 결합되어 생긴 망상이라는 결론이 내려지는데...

600여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이라 좋은 평에도 불구하고 평소에는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여름 휴가를 맞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딱히 갈 곳도 없는 탓이지요.

작품은 최근 몇 년간 유행한 - "나를 찾아줘 (gone girl)", "인어 다크, 다크 우드", "걸 온 더 트레인" - 과 유사한, 여성 주인공 1인칭 시점의 범죄 스릴러입니다. 몇 편은 영화화되었다는 것도 공통점이네요. 이 중에서도 특히 "걸 온 더 트레인"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몰래 엿보던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된 후, 진상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설정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인 '나'가 알콜 중독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설정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걸 온 더 트레인"보다는, 이런 류 내용의 원조인 1954년 작품 "이창"의 설정에 더욱 가까운 편입니다. "이창"에서 주인공 제임스 스튜어트는 다리를 다쳐 움직이지 못해서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해서 심심하던 차에 이웃집을 카메라로 도촬한다는 설정인데, 이 작품의 주인공 애나는 공황 장애로 집 밖을 나가지 못해 창문으로 이웃집을 바라보고 가끔 사진도 찍는다는 설정이니까요. 그러다가 이웃집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목격한다는 것도 같고요.

하지만 단순히 설정만 따온 표절작은 아닙니다. 다리 부상이라는 물리적인 제약이 보다 정교한 공황 장애로 발전한 것은 물론, 6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여러가지 복선, 단서를 선보이면서 독자를 몰입시키기 때문입니다. '제인 러셀'과 친분을 쌓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단 한 번도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애나가 넘겨짚은 것 뿐이지요.
또 이 과정에서 제인 러셀이 그려준 애나의 초상, 애나가 찍은 석양 사진 속 창문에 반사된 그녀가 찍힌 것 등이 나중에 차례로 밝혀지면서 그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게 드러나게 되고요. 애나의 아랫층 하숙인인 데이비드의 방 안에서 제인 러셀의 진주 귀걸이가 발견되지만, 그게 '캐서린' 것이라고 한 데이비드의 말도 '제인 러셀'이 사실은 캐서린, 케이티라는게 밝혀지면서 사실로 밝혀지는 등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 단서는 한 개도 없습니다!

실제로 존재하지만 존재가 증명되지 않은 '제인 러셀'의 정체도 인상적이에요. 이 부분을 요약해서 설명드리자면, 처음에 애나가 '제인 러셀'로 알았던건 사실은 이웃집 아들 이선의 친모 케이티였습니다. 케이티는 방탕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이선을 낳았는데, 약물 중독 등으로 보살필 수 없어 입양을 보냈었습니다. 그 후 갱생한 뒤 이선의 양부 알리스타가 이사간다는걸 뉴스에서 보고 찾아온겁니다. 도중에 만난 애나가 그녀를 이웃집 엄마로 오해하자, 구태여 그걸 수정하지는 않은거지요. 때문에 케이티가 알리스타의 집에서 살해된걸 목격한 애나는 '제인 러셀'이 살해되었다고 생각하고 신고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진짜 제인 러셀이 살해된건 아닙니다. 곧바로 진짜 제인 러셀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출동한 경찰에게 증명하고요. 결국 제인 러셀이 살해되었다고 주장하는 애나가 정신병자 취급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총 출동하여 애나를 압박하자, 애나 본인 스스로 모든게 환각이었다고 자기 합리화하는 장면도 그럴듯합니다. 과음에 독한 약을 수시로 다량 복용하며, 이 과정에서 본인의 무의식적인 행동들 - 제인 러셀의 사인을 써 보는 등 - 이 착각의 근거로 뒷받침 되는 덕분입니다.

애나의 광장 공포증, 공황 장애에 대한 묘사도 좋고 그 원인도 합리적입니다. 불륜을 저지른 자기 때문에 남편과 어린 아이가 죽었다면 미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을테니까요. 이런 부분은 확실히 불임, 이혼 정도로 자책하고 망가진다는 "걸 온 더 트레인"보다는 한 수 위였습니다.

아울러 이야기 전개가 애나가 좋아하는 고전 흑백 영화들, 특히 스릴러와 느와르 영화의 소개와 함께 전개되는 방식도 아주 독특해서 마음에 드네요. 책 뒤에 부록 "애나 폭스의 영화들"이 소개되는데 총 49편에 이를 정도로 양도 방대할 뿐더러, 그 수준들도 높은 명작들이 많아서 따로 이 작품들만 챙겨보고 싶어질 정도에요. 이 작품 자체가 이런 고전 스릴러의 충실한 후계자이기도 하니, 영화화가 된다는데 영화 버젼도 기대가 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이웃집 아들 이선이 범인이었다는 반전은 너무 뜬금없었어요. 하숙인 데이비드도 범인이 아니고, 이웃집 남편 알리스타도 범인이 아니면 남는 사람이 별로 없기는 한데, 그래도 반칙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주어진 단서가 너무 없어요. 이선이 고양이 펀치의 발이 다친걸 알고있다는걸 말함으로서 범인이라는게 드러나는건 나름 단서지만, 등장하자마자 곧바로 이선이 애나를 죽이려 하니 결정적 단서라고 하기는 힘들어요. 또 입양한 아이의 부모가 친모를 살해하는 건 그렇다쳐도, 아이가 친모를 살해하는건 억지스럽습니다. 특별한 동기도 없이 단지 짜증난다는 이유인데 이를 싸이코패스라는 말 하나로 정리해버리는건 너무 쉽게 간 느낌입니다. 싸이코패스라는 말이 막장 드라마의 기억상실증같은 만병통치약도 아닐텐데 말이지요. 이선이 애나를 죽이려고 찾아와 진상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전개 역시 편의적이면서 헐리우드스러운 발상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반전에 욕심을 부렸는데, 여러모로 아쉬웠어요.

그 외에도, 알리스타가 밤에 술을 먹고 애나의 집에 침입해서 그녀를 폭행한건 옥의 티입니다. 알리스타가 진범임을 끌고 나가기 위한 장치로 생각되는데 무리수였습니다. 이런 명백한 범죄를 저질러 꼬투리를 잡히게 할 까닭은 없으니까요. 범행 전 케이티가 지른 비명을 동네 사람들 아무도 듣지 못했다는 것도 이상하고요. 이런 류의 작품에서 흔히 있는 불필요한 묘사들도 제법 됩니다. 데이비드와 애나가 관계를 가지는 묘사가 대표적이지요. 데이비드의 캐릭터만 애매해질 뿐이에요.

지루한 심리 묘사도 많습니다. 애나의 남편 에드와 딸 올리비아와 별거하면서 스카이프로 통신한다는 1인칭 시점의 묘사도 마찬가지에요. 필요도 없을 뿐더러, 그 둘이 이미 죽었다는건 초반에 짐작할 수 있어서 별로 새롭지도 않은 탓입니다. 이런 류의 서술 트릭은 이미 숱하게 존재하니까요.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이 사실을 폭로하며 모든걸 애나의 착각으로 몰아가는 경찰 노렐리가 얼마나 배려심없는 쓰레기인지를 드러내는 장치 역할 외에는 쓰임새가 없는, 분량 낭비에 가까운 묘사였습니다.

덧붙이자면, 애나가 혼자 사건을 밝히지 못해 전전긍긍하는건 이해가 되지는 않았어요. 400만불 가까이 되는, 옥상에 정원까지 있는 큰 집에 혼자 사는 전직 정신과 의사라면 직접 돈을 써서 사람을 고용하여 진상을 알아보는게 현실적이지 않았을까요? '제인 러셀' 이라고 주장한 케이티의 그림과 함께 둔 체스 말에서 지문을 채취하면 정체를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말이지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술과 약에 취해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납득이 되지 않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한 번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은 명불허전이며, 결말까지 이르는 과정도 정교함이 돋보이는 웰-메이드 스릴러라는건 분명합니다. 여성 주인공 1인칭 시점 스릴러 중에서도 빼어난 편이고요. 무리한 반전, 그리고 마지막 대결이 작위적이라는 아쉬움은 있지만 충분히 추천드릴만합니다.

알고보니 모중석 스릴러 클럽 레이블의 47번째 소개작인데, 이 레이블이 아직도 나오는지는 몰랐네요. 장르 문학 애호가로서 앞으로도 모중석 씨의 건투를 빕니다.

2005/02/23

아가페이즈 - 야마다 레이지 : 별점 3점

아가페이즈 6 - 6점
레이지 야마다 지음/세주문화

비쥬얼 록밴드 "에로스"의 리더인 미즈키 유리는 천재 기타리스트 및 작곡가로 언더그라운드의 카리스마로 까지 불리우는 인기인이지만 16년동안 자신이 호모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다.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된 불량조직 카르마 레인의 리더 우즈메는 유리에게 연민을 느끼고 유리가 짝사랑하는 야구부 스타 카네다 토라키에게 사랑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유리를 도와주고자 한다. 

하지만 얇은 선수층과 콩가루같은 팀 분위기라는 악조건에서 큐세이 고교를 갑자원에 진출시키기 위해 홀로 팀에서 고군 분투하는 토라키를 위해 유리가 야구로 도와줄 생각을 하고 전설의 풍수사 "세이메이"를 찾아가게 되면서 부터 모두의 운명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풍수마구 5행 5종을 익히게 된 유리는 마구를 하나 던질때 마다 자신의 소중한 것을 하나씩 잃게 된다는 계약을 하게되고 마구를 계속 던져간다. 기타 연주력, 작곡능력 등을 차례로 잃어가다가 최후의 마구 1개를 남기고 마지막 남은 계약대상인 유리의 목소리만이라도 지키기위해 우즈메와 토라키를 비롯한 팀원들이 힘을 합치지만 결국 지구대회 준결승에서 최후의 핀치에 몰린 유리는 토라키와의 대화끝에 마음을 정리하고 최후의 마구를 던지게 된다...

도대체 이 만화의 쟝르를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인어공주에서 모티브를 얻은 비쥬얼 호모 열혈 고교야구 청춘 게이 애정 멜로 만화랄까요?

그동안 주류 만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모든 코드들을 조합해서 16세의 주인공들을 통해 보여주면서도 실제적으로 드라마의 무대는 고교야구 지구 예선으로 설정하여 진행하는 엄청난(!) 만화입니다.

읽으면서 저는 아다치 테츠의 만화 "세븐틴 러브"가 일단 연상되더군요.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향해 달려가는 주인공들과 그들의 앞뒤 가리지 않는 문란한 사생활, 거기에 현란한 대사와 독백이 난무하는 것이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제대로 된 어른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각각 어두운 가정환경과 주위 환경에 시달리며 여러 비정상적인 생활이 배경에 깔려 있다는 것도 비슷하네요. 그리고 대충 그린듯한 그림도요.

하지만 이러한 요소는 일부 막나가는 청춘물이나 성장물에서 끝없이 반복되어 왔던 점이라 이 작품만의 독특하거나 특별한 점으로 보기에는 힘듭니다. 결정적 차이점이자 이 작품만의 특징이 있다면 이른바 "청춘애정물"적인 성격이 강한 이 작품에서의 사랑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필연적인 흐름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풍수"와 "야구"라는 황당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매개체를 통해서 말이죠.

이 작품에서 이질적인, 제대로 된 어른이 유일하게 붙어있고 재능과 어느 정도 행복한 가정이 있는 존재인 토라키(와 토라키와 연결되는 야무) 만을 제외한다면 작품안에서 크게 진행되는 두개의 사랑의 흐름, 우즈메->유리->토라키->야무->유리마츠오->다키니->류추다 라는 두개의 사랑 모두 당사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비극으로 귀결됩니다. 첫번째는 주 당사자인 유리는 호모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특히 토라키) 노멀이라는 것 때문에, 두번째는 다키니의 죽음 때문에 당사자들 모두에게 상처만 남기게 되지요.

또한 진정 자신에게 소중했던 모든것을 토라키를 위해 버린 유리의 경우를 비롯하여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지불해야만 한다는 풍수의 이론 (등가교환의 법칙?) 때문에 모두들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잃어가는 전개는 이들의 상처를 더욱 깊고 암울하게 합니다. 이렇게 흡사 인과율의 법칙처럼 정해진 파국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전개는 파국의 정도 차이가 있을 뿐 결과적으로는 "베르제르크"와도 유사한 전개로 비슷한 전율을 안겨다 줍니다.

혹시 어디서 본듯한 설정이라고요? 최관->현지->오혜성->엄지->마동탁 이 생각나지 않나요? 무엇보다 최근에 거의 찾아보기 힘든 주인공인 유리, 즉 오로지 사랑때문에 자신을 파괴해가는 모습은 흡사 엄지를 위해 장님이 되면서까지 시합에 져주기 위해 발광하는 오혜성의 모습이 그대로 겹쳐집니다. 그러나 오혜성과 미즈키 유리의 차이점은 오혜성은 사실상 더 잃을것이 없었지만 유리는 사랑을 위해서 가진 모든것을 잃게 된다는 것, 그리고 동료들도 결국 진출한 갑자원 1회전에서 엄청난 점수차로 패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모든것을 희생하여 진출한 갑자원 1회전에서 무참하게 패하는 큐세이의 이야기는 현실적이고 당연했지만 너무나 어둡고 비극적인 끝맺음이었죠. 때문에 대충 그린듯한 그림체에 비현실적인 캐릭터와 설정에도 불구하고 더 비장하고 더 암울한 이야기를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권에서 모든것을 잃게된 후 각자 스스로의 처지를 알게 되어 행복을 위해 다시 모인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자기 파괴적인 유리의 마지막 피칭로 끝나는 8권정도에서 끝맺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후의 전개는 에필로그-후일담 형식의 후반 이야기가 너무 길어 상당히 처지는 편이라서요. 차라리 음악을 포기하고 말없는 풍수 마구 투수로 프로를 재패하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은데 음악에 대한 집념과 천재적인 음악성에 대한 묘사가 설득력이 부족해서 마지막 부분에서의 비장함이 약해 8권까지 꾸준히 달려주던 감성이 좀 무뎌지게 되거든요.

그래도 단점을 지적하기에는 너무나 독특한 고교 청춘 애정물이면서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전편에 걸쳐 명장면과 명대사가 계속 등장하고 있으며 심각한 대사와 전개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특유의 개그와 과장을 계속 선보여서 이질적이고도 해괴한, 하지만 작품에는 너무나 어울리게 구성하는 센스는 놀랍습니다. 아쉽게도 야구만화로서의 가치는 상당히 낮은 편이지만 설정과 잘 조합된 마구의 특성과 던지는 법, 그리고 계속해서 등장하는 라이벌에 대한 설명과 묘사는 흡사 20여년전의 야구만화를 보는 것 같아 재미있더군요.

작품 자체도 스토리는 황당무계하지만 사람을 잡아 끄는 매력이 특출나서 몇번이고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굉장히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 작품이긴 하지만 저에게는 굉장히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PS : 그림만 조금 더 좋았더라면 누구에게나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이었을텐데 아쉽군요. 뭐 그나마 요새는 구하기도 힘든 절판도서가 되어버렸지만요... 

개인적인 명장면 베스트...최후의 투구를 앞두고 토라키와 유리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
"너 이 시합전에 자신이 게이라고 얘기했어.. 대답해 유리... 너...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싸워온거냐..?"
"핫 핫 하" 
[물론이야...] "바보-" 
[아주 좋아하고 있어] "시시껄렁한 소리 다 듣겠다" 
[너는...] "미안하지만..." 
[나의 전부야..]"내 타입이 아니야"

2025/10/25

역대급 영지 설계사 - 문백경 원작/ 이현민 각색 / 김현수 작화 : 별점 3.5점

문백경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웹툰입니다. 각색은 "질풍기획"의 이현민, 작화는 김현수가 맡았습니다. 

소설 전생물과 영지물의 전형을 따르지만, 몇몇 차별화된 설정이 재미요소입니다. 우선 전생을 한 게 원작 소설 속 주인공인 하비엘이 아니라, 초반에 죽는 악역인 망나니 귀족 로이드 프론테라라는 점입니다. 지금은 비교적 흔해진 설정이지만, 이 설정을 잘 살려서 이야기 몰입감을 높입니다. 이를 위해서 등장하는게 바로 주인공이 토목공학도라는 설정이고요. 로이드는 토목 지식을 바탕으로 닥친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위기를 극복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토목 공학에 최적화된 소환수와 능력들도 잘 어울립니다. 

주인공의 성장 방식도 차별화 요소입니다. 몬스터를 잡는 대신, 다양한 미션을 해결하며 레벨업이 진행되는데 과제들이 신선하고 재미있으며, 전략적인 요소도 함께 녹아 있거든요. 단순한 전투보다는 꽤 치밀한 계획과 인프라 구축 중심의 접근이 많다는게 특징이지요. 켄타우로스 폭주족과의 대결 결과로 경기장을 지어주고, 인어들에게 찜질방을 만들어 주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각색을 맡은 이현민의 빠른 전개와 과감한 개그도 잘 어울렸고, 김현수 작가의 작화 역시 인물 디자인과 액션, 컷 구성 모두 빼어납니다. 이 둘이 합쳐서 시너지를 불러 일으킨 명장면이 바로 아래의 '고기 사주는 짱친'이라 할 수 있지요. 이런 개그가 넘쳐납니다.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전체적인 전개 구조는 익숙하며, 결말 역시 깔끔하긴 하지만 특별한 여운은 남기지 않습니다. 지옥왕 헬카로스의 최후도 심심한 편이고요. 

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이 마무리된 작품으로, 완성도는 높습니다. 제가 본 전생물 중에서는 손가락에 꼽을 만 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전생물이나 영지물을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립니다.

2022/11/20

클락성 살인사건 - 키타야마 타케쿠니 / 김해용 : 별점 1.5점

클락성 살인사건 - 4점
키타야마 타케쿠니 지음, 김해용 옮김/북홀릭(bookholic)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자기장 이상으로 멸망을 앞둔 세계, 유령을 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탐정 미나미 미키는 파트노 시노미 나미와 함께 '클락성'으로 향했다. 수수께끼의 미녀 쿠로쿠 미카가 '스킵맨'이라는 유령을 퇴치해 줄 것을 의뢰했기 때문이었다. '클락성'은 그 이름처럼 거대한 세 개의 시계가 외벽에 설치된 저택으로,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를 나타내는 시계라고 했다. 그리고 그날 밤, 클락성의 주인 쿠로쿠 박사와 박사의 동생 슈지가 목없는 시체로 발견되었고, 두 명의 목은 박사의 딸로 오랫동안 혼수상태였던 미온의 방에 놓여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서로 떨어진 관에 있던 두 사람을 살해하는 것, 그리고 입구를 마모루가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던 미온의 방에 잘린 머리를 가져다 놓는건 불가능해서 사건은 미궁에 빠졌고, 슈지의 아들 레이마와 박사의 아들 린, 그리고 결국 루카마저 죽고 마는데...


전자기장 이상으로 멸망을 앞둔 지구를 무대로, '유령'을 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탐정 미키가 '클락성'에서 일어난 괴 사건을 해결하는 SF 판타지 추리물. '물리의 다케야마'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잘 짜여진 물리 장치 트릭의 대가 기타야마 다케쿠니의 데뷰작으로 메피스토 상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국내 출간된지는 꽤 되었지만, 다소 유치해보이는 제목과 낯선 작가 이름 탓에 손이 가지는 않았는데 어딘가의 랭킹에서 추천하기에 구해보게 되었네요. 작가의 다른 작품인 <<인어공주>>을 재미있게 읽기도 했고요.

그런데 작품은 대체 제가 뭘 읽었나 싶을 정도로 엉망이었습니다. 제대로 리뷰를 쓰기 힘들 정도로요.
일단 유령이 등장하는 세계관과 물리 법칙을 따르는 본격 추리물은 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냥 지구 멸망을 앞두고 있었다 정도의 설정으로 충분했을겁니다. 뭔가 있어보였지만, 사실상 알맹이 없었던 다른 유치한 설정들 모두 없는게 차라리 나았고요. 멸망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조직인 12사도와 SEEM, 그리고 그들이 멸망을 막기 위해 찾는 '한 밤의 열쇠'라는 존재 등등은 모두 본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거든요. 미키가 유령을 잡을 수 있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에요.
사건과 연관이 있던건 '클락성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모두 시간에 대한 유전병이 있는 도르 가문의 후손이며, 클락성은 일부러 시간에 대한 감각을 지우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정도였습니다만, 이 역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작위적인 설정이라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기대했던 트릭도 별볼일없었습니다. 거대한 세 계의 시개가 벽 면에 붙어 있는 클락성의 특징을 활용한 트릭이라는게 빤히 들여다 보였던 탓입니다. 즉, 서로 떨어진 두 관을 시침과 분침이 다리 역할을 하는 특정 시간에 이동했던 것이지요. 시간만 알면 단순 소거법으로 범인은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알리바이가 없는건 린 밖에 없었으니까요.
이 트릭은 아래와 같은 클락성에 대한 도판만 사전에 공개되었다면, 누구나 풀어낼 수 있었을겁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도 권말 해설을 통해 똑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추리의 묘미를 즐기기 위해서는 도판을 보지 말라고요. 반대로 말하자면, 등장인물들의 추리력이 형편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클락성을 실제로 보고, 잠시 머물기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거대한 시계 바늘이 과거와 미래의 관을 오가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걸 떠올리지 못하니까요.


시계 트릭보다는 차라리 범인은 린이 아니라 미키라 주장하는 미온과 나미의 추리 대결이 더 볼만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야기되는, 박사와 슈지의 머리를 잘랐던 이유에 대한 추리가 괜찮았거든요. 범인이 두 개의 관을 시계 바늘을 이용하여 오가기 위해서는 특정 시간에만 시계 바늘로 만들어지는 길이 열리고, 그건 처음 길이 열리고 나서 2시간 뒤라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범인 린은 아날로그 시계를 볼 줄 몰랐고, 클락성 안에는 시계도 없어서 첫 범행에서 시계의 목을 베어 가지고 왔다고 추리합니다. 시체의 안구가 2시간 지나면 변하는 법의학적 상식을 이용했기 때문이라나요. 제가 여태까지 보아왔던 시체 훼손 추리물에서 손에 꼽을만한 독창적인 동기였습니다. 얼마전 소개해드렸던 엽기 토막 살인이 등장하는 추리 소설들 랭킹에서 언급해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에요.
문제는 이 추리에도 헛점이 많다는 겁니다. 구태여 시체의 목을 벨 필요는 없었습니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바늘의 위치만 확인해도 되었을 일이니까요. 린이 아날로그 시계를 볼 줄 몰라서 범인이 될 수 없다고 하는 미온의 주장도 마찬가지로 현실적이지 않아요. 거대한 시계가 붙어있는 집에서 태어나 자라온지 십년이 넘었다면, 시계를 볼 줄은 몰라도 그걸 이용하는 방법은 충분히 알 수 있는게 당연하잖아요?

미온이 루카와 린의 모친이었다는 일종의 반전도 불필요했을 뿐더러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린의 동기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는건 알겠어요. 하지만 누나였어도 돼잖아요. 어린 소녀를 근친상간으로 임신시켜 출산하게 했다는건 지나치게 극단적인 설정이었어요. 불쌍한 루카를 죽인 이유도 모르겠고, 결국 세계가 멸망하는 건지도 알 수 없는 결말도 별로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절판된게 당연하다 싶은 망작이었습니다. 중고 가격이 상당한 편인데, 절대 그만한 값어치는 없습니다.

2023/01/29

여고생 드래곤 - 땅콩 : 별점 3점


오랫만에 완결까지 정독한 웹툰. 여고생 김민지가 이세계 골드 드래곤과 몸이 뒤바뀐 뒤,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분투한다는 내용의 개그 판타지입니다.
인간이 이세계 용의 몸으로 전생한다는건 <<드래곤과 조지>>에서 접했었던, 다소 흔해빠진 이야기입니다. 김민지로 전생한 드래곤이 남자친구와 사람에 빠진 뒤 모든 능력을 포기하고 인간이 되는걸 택한다는 이야기 역시 흔하다면 너무나 흔한 이야기이고요. <<인어공주>>와도 별로 다를게 없잖아요?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런 흔해빠진 이야기를 특유의 개그 센스로 보완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천할 만 합니다. 게다가 개그가 아주 잘 짜여져 있기까지 합니다! 판타지 세계의 경우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놓인 상황과 등장인물들간의 티키타카를 통해서 개그가 발생하는데, 민지의 일행인 스미스가 '전설의 초거대 짐승'을 죽이고 나서의 경우가 있습니다. 초거대 짐승은 알고보니 현자가 남긴 보물 '사냥의 신'의 남편이라서 난처한 상황에 빠지고 말지요. 또 판타지 세계에서는 전형적인 클리셰를 비트는 개그 요소도 많은데, 도미니크가 만년설원에서 얼음 검을 넣고 용사의 힘을 얻지만 더운 지방으로 이동하자 검이 녹아버리고 만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여고생 몸에 들어온 골드 드래곤 시점의 개그는 전형적인 캐릭터 개그물인데 이게 또 대박입니다. 주위 사람들을 '필멸자'라 칭하는 등 독특한 화법과 정신세계로 현실을 바라보는게 매 화마다 한두컷 정도 선보이는게 전부인데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게다가 이 한두컷 정도 분량으로 100여화를 넘게 이어가면서 결론적으로 또 다른 하나의 긴 이야기 - 그것도 결국은 청춘 로맨스를!!!!! - 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는 점에도 박수를 칩니다. 약간 <<엘하자드>> (OVA 버젼) 느낌도 나는데 개인적으로는 뒤지지 않는다 싶을 정도로 아주 괜찮았어요. 100여화로 깔끔하게 마무리한, 적절한 분량도 마음에 들고요.

민지의 일행 중 더러움을 담당하는 도미니크에 의한 화장실 개그가 없는 편은 아니고, 지나치게 개그에 몰두해서 무리수를 두거나 중간중간 전체적인 흐름에서 다소 이질적인 전개를 보이는 에피소드도 살짝 거슬리기는 합니다. 작화도 아주 좋다고 하기는 어렵겠지요. 하지만 단점은 사소합니다. 이 정도면 누가 읽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개그물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3/10/20

히가시고 게이고 추천 작품 30선

"'정말 아까운 (못타이나이)' 책방" 이라는 이름의 일본 중고 서점에서 직원이 선정했다는 히가시고 게이고 추천 작품 30선입니다. 2022년 5월에 발표된 기사라서 아주 최신작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래의 작품들입니다. "유성의 인연"은 다른 리스트에서도 높은 순위로 선정되었던데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선정된 작품들이 추리물보다는 드라마 쪽 비중이 높은게 영 불안하기는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