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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8

리셋 - 기타무라 가오루 / 고주영 : 별점 2점

리셋 - 4점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고주영 옮김/황매(푸른바람)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45년, 전쟁 막바지에 아버지 요양차 지방 친척집으로 향하게 된 중학생 마스미는, 호감이 있던 슈이치에게 직접 만든 선물을 전해주고 작별을 고했다. 슈이치와 마음이 통한걸 느꼈지만, 슈이치는 폭격으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어린이 책을 만드는 직장인이 된 마스미는 초등학교 졸업반 무라카미와 친해졌다. 그리고 그가 슈이치의 환생이라는걸 알게 되는데...

일상계 미스터리인 '엔시 씨와 나'로 유명한 기타무라 가오루의 '시간과 사람' 3부작 중 한 편입니다. 예전 미스테리아 8호에 수록되었던 요네자와 호노부 특집에서 요네자와 호노부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책으로 꼽았던 책입니다. 기타무라 가오루를 좋아하기도 하고, 요네자와 호노부 역시 좋아하는 작가라 기억에 담아 두었다가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작품 장르는 생각과는 다르게 윤회전생 멜로물이더군요. 특이한건 핵심인 윤회전생이 초능력이나 특정 장치, 장소와 같은 방법이라던가, 우연한 자연 현상이나 사고와 같은 계기가 없는, 그야말로 단순한 윤회전생이라는 점이고요. 다시 태어난 연인이 원래의 사랑을 발견하는 과정도 우연에 불과합니다. 이런 부분들에서 약간이나마 추리적 요소를 기대했지만 찾아보기 힘들어요. 

내용도 윤회전생 멜로물이라면 누구나 떠올릴법한, 수천 수만가지 비슷한 콘텐츠와 비슷합니다. 어린 중학생 청춘 남녀가 사랑에 빠지지만, 남자가 전쟁통에 폭격으로 죽고 여자는 결혼하지 않은 채 직장인으로 지낸다, 그러다가 환생하여 중학생이 된 남자를 다시 만난다, 그러나 여자는 사고로 죽고 다시 환생한다, 그리고 다시 만나 결혼한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래도 차별화 요소를 찾아 본다면, 우선 슈이치가 마스미가 만나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교감한게 '2차 대전'이라는건 독특했습니다. 마스미와 주변 지인들 모두 유복한 가정이고, 사는 동네도 부촌이라는 설정이라 2차 대전에서 일본이 극에 몰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여유있고, 공포와 두려움은 찾아보기 힘든 묘사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를 무대로 한 작품들 중에서는 돋보일 정도로 색다른 분위기였어요. 이런 분위기는 작 중, 공습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커피에 설탕을 곁들여 먹는다는 묘사라던가, 마스미 지인 중에서 전쟁 때문에 죽는건 슈이치 말고는 징집된 친구 유코 오빠 밖에는 없다는 걸로 잘 드러닙니다. 

그리고 1, 2부 구성으로 1부는 마스미, 2부는 환생한 슈이치인 무라카미 가즈히코 시점으로 전개된다는건 다른 윤회전생이라 시공간 초월 멜로물과 유사하지만, 성인, 아니 중년 이상 나이가 된 무라카미가 자신이 어린 시절 썼던 일기를 토대로 자식들에게 녹음한 테이프를 전달한다는 2부 구성은 색다른 맛이 있더군요. 당대 분위기에 대한 상세한 묘사도 압권이었고요. 아마 저자 본인이 1949년 생이라 직접 경험해 보았던 덕분이라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어린 시절 마스미와 슈이치가 공유했던 기억이, 슈이치가 환생한 무라카미와 마스미, 그리고 무라카미와 마스미가 환생한 마이코가 서로 인연임을 공유하는 방아쇠 중 하나가 ''책" 이라는게 가장 독특하면서도, 마음에 들었던 부분입니다. 이야기 서두에서 갓 알게된 마스미에게 슈이치는 사펠 여사가 쓴 "사랑의 가족"이라는 책을 빌려 줍니다. '사자 자리 유성균'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한 게 이유였지요. 그리고 성장하여 중학생이 된 뒤, 전쟁 탓에 비행기 공장에서 일하는 마스미에게 슈이치는 기노시타 유지가 쓴 시집 "전원의 식탁"을 빌려 줍니다. 두랄루민이 비행기 제조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두랄루민이 언급된 시가 있는 시집을 빌려준 겁니다. 그리고 그 시집에는 '텐 예다 프뤼링 핫 누아 아이넨 마이'라는 슈이치가 쓴 메모가 꽂혀 있었습니다. "춤추는 회의"라는 독일 영화 속 주제가로 '그래도 5월은 한 번 밖에 오지 않겠지'라는 뜻이었습니다. 5월이 생일인 마스미에게 자신의 마음을 함께 담아 전하는, 애틋한 장면이었어요.
그리고 슈이치가 환생한 무라카미에게 마스미는 기노시타 유지가 쓴 "아동 시집"을, 그 뒤 무라카미가 입원했을 때 "사랑의 가족"을 빌려줍니다. 마지막에 무라카미 가즈히코와 마스미가 환생한 마치코가 만나게 된 건, '텐 예다 프뤼링...'을 무라카미가 부르다가, 그 노래에 마치코가 가능하여 달려나온게 인연이 되고요. 그 외에 여러가지 책들에 대한 소개도 재미있으며, 사소한 단서들을 쌓아 올려 환생과 재회에 이용한건 추리 작가다운 솜씨라 생각되어 좋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너무 뻔한 이야기라는건 어쩔 수 없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작품이 발표된 2001년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시점에서 권해드릴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추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2026/01/16

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대하여 - 세스지 / 전선영 : 별점 2점

영화까지 발표되었던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의 작가 세스지의 신작입니다.

전작은 여러 형식의 기록들을 이어붙인 모큐멘터리 형식으로 괴이 현상의 실감을 높였는데, 이번에는 전형적인 소설의 형식을 따릅니다. 때문에 형식은 유사하지만 별로 실감나지는 않았어요. 여러 기록들도 작중에서는 모두 심령 현상이 일어난 해당 장소와 관련된 괴담을 '날조'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기도 하고요.

괴이한 심령 현상들도 복수라고 볼 수 있는, 일종의 '윤회'라는 식으로 풀어가는데 깔끔한 느낌을 주지는 못합니다. 등장인물들의 개별 서사도 이야기에 충분히 녹아들지 않고, 주어진 떡밥들 역시 모두 깔끔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여러모로 작가의 욕심이 지나쳐 보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섬찟한 부분도 있지만, 여러모로 전작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상세한 괴담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태 오두막

유튜버 이케다와 팬북을 출간을 진행 중이던 고바야시는 재생 횟수가 많았던 동영상에 그럴싸한 괴담을 날조해서 꾸며 넣기로 했다. 출판사가 혹하게 만들이 위해서였다. 첫 번째 대상은 '변태 오두막' 촬영 영상으로, 산 속의 이른바 '변태 오두막'은 누군가 도촬한 듯한 사진이 널려있는 기묘한 곳이었다.
날조에도 리얼리티가 필요하다는 고바야시의 주장으로, 이케다는 '변태 오두막'처럼 '인형'을 버린 폐가를 취재했던 유튜버와의 인터뷰를, 고바야시는 '변태 오두막' 속에서 발견된 사진에 대한 추가 취재를 진행하는데..

괴담 내용은 상당히 흥미진진합니다. 변태 오두막은 누군가를 저주하려는 사람들이 저주의 대상 사진을 집어 넣는 곳이었습니다. 유키에는 불륜 상대의 아내 료코가 이혼해 주지 않아서 그녀를 저주하려고 오두막에 사진을 집어 넣었고, 이후 료코는 자살했습니다. 자살 후 유키에의 딸 유카에게 료코가 윤회하여 빙의해 버렸기 때문이지요. 료코 사진이 '정화' 의식 때에는 부풀어 올라 있었다는 묘사는 확실히 섬찟했고요.

그러나 등장인물들이 찾아낸 정보라고 설명되기 때문에, 현실감이 부족해서 아쉽습니다. 인터뷰, 신문 기사 등을 통해 드러내는건 전작과 비슷했지만 전작보다는 더 소설 느낌이 강했던 탓입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진상을 유키에의 독백으로 마무리한건 문제입니다. 유카가 마지막에 말한건 맥락 상 "용서 못해"일텐데, 이를 표현하지 않은 이유도 모르겠네요. 이 진상은 맥락적으로도 이상해요. 변태 오두막의 저주가 통해 료코가 죽었다면, 료코의 영혼 역시 저주로 죽는게 맞지 않을까요?

유키에의 독백말고 그냥 그녀가 딸을 방치하여 죽였고, 이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후일담 기사 정도로 마무리하는게 좋았을 겁니다.

천국 병원

유령을 볼 수 있다는 괴담 작가 호조가 '천국 병원'에 대한 괴담을 찾아냈다. 폐암으로 연명 치료 중이던 할머니가 그만 편해지기를 바랬다는 한 소설가의 고교 시절 추억담으로, 이후 소설가는 자살했다...

앞부분 소설가의 회고는 괴담이라고 보기 어려운 담담한 이야기로 실망스럽지만, 뒤이은 청년들이 병원에서 벌인 담력 시험 체험기는 오싹합니다. 천국 병원의 막혀있던 병동에서 '괴이'를 마주쳤다가 쫓기는 과정의 서스펜스, 그리고 일행을 쫓던 머리가 커지던 괴이가 들고 있던 친구 휴대전화 번호로 아직도 전화가 걸려 온다는 후일담까지 완벽했던 덕분입니다.
마지막에 소설가의 회고를 틀어서 진상, 즉 소설가는 할머니가 미워했던 양녀였고, 소설가는 사신과 거래하여 할머니를 죽게 만들었다는 진상도 재미있었습니다.

아울러 병원이 '제로 자기장'에 위치해서 괴현상이 많이 발생한다는 설명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합리적이거나 설득력이 높지는 않지만, 단순 괴담에 그치지 않으려는 노력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니까요.

그러나 소설가가 할머니를 저주로 죽게 만든게 그리 나쁜 짓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건 문제입니다. 할머니는 나쁜 사람으로 그려진 탓에, 그냥 보면 정의구현으로 보이거든요. 그래서 소설가가 저주의 역풍을 맞은 듯한 현실은 별로 와 닿지 않네요.

어리석은 세 사람

등장인물들의 과거 - 이케다는 과거에 호감을 품었던 유코를 저주로 죽게 만들어서 유령을 쫓는 유튜버를 하게 되었다, 호조가 유령을 볼 수 있어서 중학교 때 왕따를 당하다가 교생을 자살하게 만들었다 등 -가 펼쳐집니다. 책 전체로 보면 징검다리 역할이라고 할 수 있어요. 뒤에 이 과거가 중요하게 작용하게 되거든요.

하지만 그냥 이 부분만 놓고 보면 딱히 점수를 줄 부분이 없는, 지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윤회 러브 호텔

러브 호텔에 그려진 괴상한 벽화와 여러 소문에 대해 논의하는게 대부분인데, 대체로 굉장히 합리적으로 설명하며 마무리하는게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뒤에 이어지는, 스토커 피해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죽은 여성 이야기는 어떻게 이어지는건지 잘 모르겠네요. 이 여성은 순수한 피해자에 불과한데, 스스로 스토커 게이이치에게 뭔가 잘못했다고 여기는 묘사는 불쾌하기까지 했습니다. 뒤로 가면 갈 수록 이야기가 이상해지는 느낌이에요.

불확실한 괴이

앞서 날조를 위해 만들었던 이야기들 모두 고바야시의 음모였다는게 드러납니다. 유령을 믿지 않는 이케다가 유령에 홀리게 만드는게 목적이었지요. 이케다에게 뭔가 괴이 현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책을 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세사람"처럼 각자의 사정과 과거가 펼쳐지는 징검다리 이야기입니다.

한낱 패밀리 레스토랑

이케다에게 달력 일정에 유코의 기일이 기입되었고, 기분 나쁜 장난 전화가 걸려왔고, 움직일리 없는 유튜브 동영상 속에 괴이한 여성의 움직임이 나타났고, 자주 보던 버튜버의 화면이 기이하게 바뀌는 등의 괴이 현상이 일어났다...

이케다의 괴이 체험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앞서 선택되었던 괴담들 모두가 일종의 '윤회'를 다룬, 괴이가 다시 태어난다는 괴담이었다는게 설명되기 때문에, 책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부분이지요.

한낱 옛날 이야기

세 명 모두 누군가를 죽였었다, 그리고 죽였던 여자들이 유령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얻었는가?

유령에 홀렸던 이케다가 신관인 호조 아버지의 도움으로 벗어나고, 책은 출간이 결정된다는 결말입니다. 앞서 그들이 각자 보았던 괴이들은 각자가 죽였던 피해자들이었다는게 밝혀지고요.

윤회에 관련된 로쿠부 살해 괴담을 이방인의 피가 필요했다로 연결하는 아이디어만큼은 참신했는데 회수가 안 된 떡밥이 너무 많고 - 이케다는 유코를 죽이지 않았는데 무엇에 홀린건가? 호조의 교생 선생은 어떻게 죽었는가? 윤회는 모든 저주의 대상에 해당하는가? 등 -, 등장인물들의 일이 모두 잘 풀린다는 결말은 허무합니다. 최소한 고바야시는 이케다를 괴이에 홀리게 만들려는 악의가 있었던게 분명하니, 이 작자만큼은 벌을 받으면 했는데 말이지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2016/01/18

엠브리오 기담 - 야마시로 아사코 / 김선영 : 별점 3점

엠브리오 기담 - 6점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엘릭시르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딘가에서 읽었던 서평이 기억에 남아 주말 동안 읽기 위해 집어든 책으로 에도, 아니 메이지로 보이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환상 문학 단편집입니다. 온천에 대한 여행기를 쓰는 길치 이즈미 로안과 그의 짐꾼이자 동료인 미미히코가 등장하는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시대물 설정, 거기에 전부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괴담이라는 점에서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물이나 교코쿠 나쓰히코의 작품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 작품들보다는 환상 문학에 훨씬 가깝고, 교코쿠 나쓰히코의 작품들보다는 읽기 쉽고 명확한 내용이라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수록 작품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점에서는 레이 브래드버리나 리처드 매드슨 등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구태여 구분하자면 "엠브리오 기담"은 일상계 크리처물, "라피스 라줄리 환상"은 윤회 판타지, "수증기 사변"과 "끝맺음"은 일상계 괴담, "얼굴 없는 산마루"는 일상계 드라마, "있을 수 없는 다리"는 전형적 괴담, "지옥"은 끔찍한 고어 호러, "빗을 주워서는 아니 된다"는 괴담 분위기의 자살극으로 넓은 장르를 포용하기 때문입니다("자. 가요." 소년이 말했다는 그냥 사족입니다)

이렇게 많은 장르물을 포괄하면서도 대체로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보인다는 점도 대단합니다. 코미디에서 호러까지 오가는 선배 작가들만큼의 넓은 변화 폭은 아니긴 하지만요. 이 정도면 이름 모를 작가 치고는 제법이라 생각했는데, 후기를 보니 야마시로 아사코는 오츠 이치의 또 다른 필명이더군요. 솔직히 취향이 아니라 많은 작품을 찾아 읽지는 않았지만, 특유의 팔색조 매력은 여전한 듯 하여 아주 반가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최초 서평이 기억에 남았던 이유도 오츠 이치의 이색작이라는 소개 때문이었던 듯 싶습니다. 이놈의 기억력...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말도 안 되는 설정이 제법 있는 등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허나 이 정도면 null괴담물로 기본은 해 주었으며, 오츠 이치의 단점이라 여겼던 만화적인 상상력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좋은 작품입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만, 사족인 마지막 이야기를 제외한 별점은 3점입니다. 괴담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덧 1 : 앞서 말씀드린 대로 수록 작품들의 장르가 천차만별이지만 절반 이상이 '괴담'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추리 / 호러' 장르로 분류합니다.

덧 2 : 저도 온천을 좋아하는데 딸아이가 좀 더 크면 온천이나 다녀봐야겠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끔찍한 경험은 사절입니다만 끔찍한 경험을 한 이즈미 로안과 미미히코가 그래도 온천을 다니는 것을 봐서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게 분명하겠죠.

단편별 상세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엠브리오 기담"

미미히코는 갓난아기 전 인간의 모습인 '엠브리오'를 우연히 구했다. 금세 죽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엠브리오는 살아남았고, 도박빚에 시달리던 미미히코는 엠브리오를 이용하여 돈 벌 계획을 세우는데...

인간의 태아(이전 단계)인 '엠브리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엠브리오에 대한 설정 - 하얀 애벌레 같아 허여멀건 몸뚱이에 볼록 튀어나온 배, 발달이 덜 되어 단순한 돌기에 지나지 않는 손발, 몸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머리에 점을 콕 찍은 듯한 눈, 도마뱀처럼 꼬리 같은 것까지 있고 갓난아기 피부와 내장 표면의 딱 중간 정도 피부로 쌀뜨물을 먹고 미지근한 물을 좋아한다 등등 - 이 실제 존재하는 생물처럼 상세하다는 것이 재미 요소입니다. 이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는 '기묘한 상상력'이 크리처에 발휘된 환상 문학이지요.

다만 결말은 아쉽습니다. 아이를 원하는 부부에게 엠브리오를 넘겨 무사히 출산하게 하고, 수년이 지나 미미히코와 그 아이가 재회한다는건데, 공식대로라서 식상했던 탓입니다. 그래도 더 이상의 좋은 결말을 찾기는 어려웠으리라 짐작되며, 전체적으로는 무난한 수준이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라피스 라줄리 환상"

도매 서점에서 일하는 린은 행수 어르신의 지시로 이즈미 로안과 미미히코의 여행에 동행했다.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일행은 마침 발견한 마을에서 잠깐 머무는데, 다음날 촌장의 증손자가 고열로 쓰러졌다. 마침 린이 가지고 있던 약으로 아이는 생명을 구했고, 답례로 촌장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라피스 라줄리(유리)'를 선물하는데...

린이 '라피스 라줄리'를 받은 이후, 인생을 되풀이한다는 윤회 판타지입니다. 윤회를 하면서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내용도 잔잔하니 읽을 만한데, 작품의 핵심은 반전입니다.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간다는 촌장 노파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이 태어날 때 죽는 어머니를 위해 뱃속에서 탯줄을 스스로 목에 감는 방법으로 자살을 한다는 결말이거든요. 행복한 결혼 생활도 해 보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공부도 해 보았지만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는 것인데 참 절절했습니다.
다른 수록 작품과는 다르게 미미히코 시점이 아니라 린 시점 묘사라는 점도 특이했고요.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라피스 라줄리의 힘이 어디서 온 것인지 등 세세한 설정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린은 이전 기억을 계속 쌓아나가기 때문에 환생할 때마다 강해질 수밖에 없는데 지나칠 정도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건 설득력이 약해 보였거든요. 미래도 읽을 수 있고, 그에 어울리는 공부도 한다면 세계를 바꿀 만한 재산이나 세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래도 평균 이상은 되는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수증기 사변"

로안과 미미히코는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뒤 산기슭 온천 마을을 찾아냈다. 둘은 마을의 허술하기 짝이 없는 여관에 묵으며, 마을 온천을 밤에 찾아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밤에 온천에 몸을 담근 미미히코는 어린 시절 소꿉친구로 죽어버린 유노카를 온천에서 만는데...

저승과 연결되어 있는 온천을 그리고 있습니다. 유령이 등장하는 괴담으로 죽은 사람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이유, 어린 시절의 추억과 유노카의 죽음에 대한 진상 등 이런저런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기본적으로는 잔잔한 일상계입니다. 마지막에 미미히코가 유노카의 모습을 떠올리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문제는 너무 잔잔해서 극적인 재미가 없다는 겁니다. 유노카의 죽음이 단순 사고보다는 드라마틱했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사실은 미미히코의 잘못으로 죽었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끝맺음"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로안과 미미히코가 묵어 가게 된 바닷가 마을. 그곳은 모든 사물이 사람의 얼굴로 보이는 기묘한 곳으로 식재료마저 그랬던 탓에 미미히코는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해 아사 직전에 놓이는데...

모든 사물이 사람의 얼굴로 보인다는 이토 준지스러운 상상력이 돋보이는 기묘한 작품입니다. 만화나 영화 같은 시각 매체로 발표되었더라면 굉장히 그로테스크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상상의 여지가 더욱 많은 소설이 섬찟함을 느끼게 하는 데 더 좋긴 하겠지만요.

게다가 굶어 죽기 직전의 미미히코가 자신을 끔찍하게 따르던 닭 아즈키를 잡아먹고 살아난다는 결말도 마음에 듭니다.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를 잘 드러낸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자기 혼자 살아남기 위해 친구를 팔아넘기고 살아남는 왕따물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마을의 정체가 무엇인지 등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 조금 감점합니다만,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있을 수 없는 다리"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로안과 미미히코는 근사한 구름다리를 발견했다. 허나 마을에서는 구름다리는 이미 사십 년 전에 무너졌다고 했다. 둘의 말을 들은 숙소의 노파는 밤중에 넌지시 구름다리로 데려다 줄 것을 부탁했다. 그녀는 구름다리가 무너졌을 때 아들을 잃었는데, 지나는 여행객들로부터 다리에서 아들의 모습을 보았다는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미히코는 다리에서 노파의 아들을 발견하고 둘의 상봉을 주선하는데...

감동적인 상봉을 기대했지만 실상 소년은 그야말로 '귀신'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는 존재였다는 반전이 돋보입니다. 이전 수록작인 "수증기 사변"과 비슷한 작품이라 생각하고 읽다가 깜짝 놀랐네요. 하긴 이게 귀신의 본모습이겠죠.

반전에 더해 묘사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소설보다는 영상화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귀신이 본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의 묘사도 좋지만, 특히 귀신이 노파를 데려가려고 하자 그녀가 미미히코를 붙잡고, 미미히코는 욕설을 하면서 노파를 어떻게든 떼어 내려 하는 처절한 묘사가 기억에 남습니다.

재미도 있고 반전도 있는, 괴담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작품으로 별점은 4점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얼굴 없는 산마루"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로안과 미미히코가 우연히 방문한 마을 사람들은 미미히코를 보고 놀랐다. 이유는 그가 사고로 죽은 마을 사람 모키치와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미미히코가 자신과 똑같이 생기고 비슷한 인생을 살아간 모키치의 가족을 만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는 일상계 소품. 잔잔하고 여운을 주는 내용은 좋았습니다.

허나 모키치의 아내 야에의 말을 듣고 다시 여행을 떠난다는 뻔한 결말, 그리고 미미히코가 모키치와 모든 면에서 똑같은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는건 단점입니다. 그냥 닮았다고만 해도 충분했을 텐데 흉터까지 같다는 것은 무리수였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조금 쉬어가는 느낌의 작품입니다.

"지옥"

이즈미 로안과 미미히코는 여행 중 강도를 만났다. 사로잡힌 미미히코는 신혼부부 후지와 요이치와 함께 축축한 구덩이 속에 갇혔다. 셋은 강도 가족이 던져주는 육포 조각을 먹으며 삶을 이어갔는데, 강도들이 한 명을 꺼내 준다고 제안해서 여성 후지를 올려 보냈다...

구더기 그득한 축축한 구덩이 감옥 묘사도 사람 잡는데, '후지가 빠져나간 뒤 육포가 아니라 신선한 고기가 던져진다'에서 시작되는 공포스러운 묘사가 압권인 작품입니다.

핵심은 강도 가족이 사람을 죽여 먹고, 가죽으로 생활용품 등을 만든다는 설정으로 스코틀랜드의 소니 빈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게 분명해 보입니다. 허나 단순히 영감을 얻은 수준은 아닙니다. 아이가 사람 얼굴 가죽으로 만든 가면을 쓰고 노는 등의 디테일이 잘 살아 있거든요.

이러한 묘사에 더해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전개도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미미히코가 머리카락을 엮은 줄을 이용하여 요이치를 끌어 올렸던 밧줄을 회수하고, 구덩이에서 탈출하여 역으로 강도 가족을 구덩이에 쳐 넣는 데 성공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찾아가 보니 강도 가족이 구덩이 속에서 서로를 잡아먹고 있었기에 뚜껑만 덮고 도망쳐 온다는 결말까지 정말 손에서 떼기 힘들 정도로 몰입감을 선사해 줍니다. 이런 류의 돌직구 고어 호러는 오츠 이치의 특기이기도 하죠. "ZOO - seven rooms"처럼요.

물론 해당 단편과 단점은 동일합니다. 왜 강도 가족이 포로를 잡자마자 죽이지 않고 귀한 육포를 먹여 가며 살려두는지가 설명되지 않는 점 등 세부 설정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제법 있는 탓입니다.

그래도 섬찟함과 독자를 몰입시키는 맛은 수록작 중 최고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이전 작품이 쉬어가는 느낌이라 공포심이 더욱 배가된 듯한데, 목차도 작가의 의도인지 살짝 궁금해지는군요.

"빗을 주워서는 아니 된다"

전편의 경험으로 미미히코가 여행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즈미 로안은 다른 고용인과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온 로안은 미미히코에게 동행인이 죽었다며, 그의 죽음에 대해 알려주는데...

떨어진 빗을 줍는 것은 고통과 죽음을 줍는 것이기에 꼭 빗을 주워야 할 때는 발로 한 번 밟은 뒤 주워야 한다는 설정이 바탕입니다. 빗을 그냥 주웠다는 고용인이 머리카락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죽은 시체로 발견되는데, 입에 들어 있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니 엄청난 양이 나왔다는 부분까지는 평범한 괴담입니다.

그러나 노파가 빗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거짓말로 그가 지어낸 이야기이며, 머리카락은 죽은 어머니의 것이라고 밝혀지는 결말이 아주 독특했습니다. 괴담을 너무 좋아한 청년이 자작극을 벌이면서까지 괴담이 되려 했다는 내용이니까요. 누군가의 이야기가 괴담이 된다는 점에서 "백귀야행"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단순 괴담이 아니라는 점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자. 가요." 소년이 말했다

결혼한 뒤 온갖 괴롭힘을 당하던 여자가 우연히 한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그녀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데...

이즈미 로안이 길치가 아니라 사실은 차원을 이동하는 능력을 가진 텐구의 자식이라는 설정을 알려주기 위한 이야기.

단순한 설정 보강용이라 하나의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자를 괴롭히던 시댁에 뭔가 천벌이 내렸다는 이야기라도 있었더라면 완결성이 있었을 텐데요. 별점은 빵점입니다.

2022/01/21

싫은 소설 - 교고쿠 나쓰히코 / 김소연 : 별점 2.5점

싫은 소설 - 6점
교고쿠 나쓰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손안의책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대거 포함되어 있습니다

괴담추리의 결합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교고쿠 나츠히코의 괴담 호러 단편집입니다. "싫은 아이", "싫은 노인", "싫은 문", "싫은 조상", "싫은 여자친구", "싫은 집", "싫은 소설"의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이라면 그야말로 '싫은 느낌'을 극대화하고 있는 작품들이라는 점입니다. 읽고 나면 기분이 나빠진다는 점에서는 '이야미스' 쟝르에 딱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후카타니'라는 인물이 모든 작품에 관여하고 있는 연작 속성이 있다는 것도 특징이고요. 윤회, 루프물이 많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수록작들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첫 번째는 괴담물입니다. 기승전결로 완결되는 구조가 아니고, 괴현상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이야기들을 의미하지요. "싫은 아이"에서 갑자기 나타난 머리가 크고 시체같은 아이의 정체, "싫은 노인"에서 구보타 가에서 돌보는 노인의 정체와 폭주의 이유, 살인 사건이 일어난 이유, "싫은 조상"에서 불단 속에 모셔진 시체도 아니고, 유령도 아닌 괴물체의 정체는 모두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단점은 아닙니다. 설명이 없는 부분은 일종의 여백처럼 독자의 머릿 속에 여러가지 상상을 떠오르게 만들거든요. 그 덕분에 더 무서우면서도, 이래서야 사람이 미치는게 당연하겠구나 싶은 생각을 자연스럽게 들게 해 줍니다. 괴상한 아이에게 화자인 다카베의 아내는 강간당하고 다카베는 발광해 버리는다는 "싫은 아이"의 급작스럽고 뻔한 결말은 별로이긴 했지만요.

두 번째 단편물은 괴담물과는 다르게 나름 기승전결로 각자 완결되는 이야기 구조를 갖추고 있는 "싫은 문"과 "싫은 여자친구", "싫은 집"입니다. "싫은 집"은 일종의 윤회물로 '싫어하는 느낌'이 반복되는 집이라는 소재는 괴담물스럽기는 하지만, '저주받았다'고 해석한다면 나름 합리적(?)인, 완성된 이야기로 보입니다.

"싫은 여자친구"는 '싫어하는 느낌'을 극대화한, 수록작 중 최고의 '이야미스' 물입니다. 고리야마가 싫어하는 행동만 극대화하여 반복하는 여자친구 행동에 대한 묘사가 정말 압권으로, 사람을 정말 말려죽이는 공포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단순한 스플래터 고어 호러보다, 이런 일상적이면서도 단순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저주같은 공포가 더 무섭네요. 이건 정말 영상화해야만하는 작품이 아닌가 싶어요. 수록작 중 최고였습니다. 싫은 느낌, 완성도, 공포라는 모든 측면에서요. 

싫은 문"은 불행한 남자 기자키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호텔방에 초대받으면서 시작됩니다. 그 방에서 기다리다가 들어오는 사람을 산탄총으로 쏴 죽이고, 그가 가지고 있던 돈을 챙겨 도망가면 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지요. 기자키는 들어온 사람을 죽이고, 천만엔을 챙겨 달아난 뒤 이어지는 행운으로 성공합니다. 여기까지는 흥미로왔는데, 기자키가 1년 후 그 호텔방을 찾아가 스스로를 스스로에게 죽게 만든다는 결말은 좀 뻔했습니다. 영미권의 판타지 호러스러운 느낌이었어요. "바벨의 도서관" 수록작 "병 속의 악마"와 설정과 전개, 결말 모두 비슷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수록작들 중에서 싫은 느낌이 가장 덜하기도 합니다. 기자키는 스스로 선택해서 사람을 죽였고, 그 덕에 행운을 손에 넣게 됩니다. 싫은 느낌을 받을 이유가 없지요. 루프는 일종의 문이 1년 전으로 시간 이동하는 느낌이라 죽는다는 기분을 가져가지도 않고요. 알고보면 영원히 죽는 잔혹한 상황이지만 기자키가 그걸 알 방도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부분은 설정 구멍같았어요. 기자키에게 방의 루프를 넘겨준 노인은 누군가 기자키가 다음에 오면 나가야 하는게 원칙이라고 했습니다. 그 역시 그 말을 하고 루프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복귀하고요. 하지만 설정 상 현재의 기자키가 루프되는 걸 알 수가 없으니, 이 루프를 기자키가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행운을 얻기는 후, 루프가 된다는걸 알아내야 다른 사람을 찾을텐데 그건 설정상 불가능하니까요.

이렇게 괴담물과 단편물은 각각 세 작품 씩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대미를 장식하는건 단편집 전체를 완결하는 표제작 "싫은 소설"입니다. 앞서 모든 작품에서 상담역 등으로 등장했던 후카타니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상사 가메이와 출장가다가, 그로부터 모욕적인 말을 듣고 소설을 읽기 시작하는 장면에서 시작해서, 후카타니가 읽는 소설이 앞서 여섯 편의 이야기이며, 마지막 소설은 계속 반복된다는 일종의 루프물이지요. 후카타니가 폭주하여 루프는 끝나지만, 결국 후카타니도 '싫은' 상황에 처한다는 결말이고요.

그런데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 치고는 다소 아쉬웠습니다. 후카타니는 좋은 사람이 분명합니다. 빚 잔치 끝에 자살한 동창 기자키의 처자식 장례식을 도맡아 진행해주고, 회사 선후배 상담역을 맡을 정도니까요. 고리야마가 입원했을 때는 병문안도 가 주고, 도노무라 본부장의 '싫은 집'은 휴가를 내어 함께 찾아가는 등 노력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주위 친구들을 모두 '싫은 상황'으로 잃고 본인도 싫은 상황에 빠진다는 결말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무능한 꼰대인데다가, 게다가 성희롱도 남발하는 가메이같은 상사가 멀쩡히 살아남는다는건 더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차라리 후카타니가 결국 폭발하고 루프가 끝난다면 시원하게 가메이의 목을 졸라 죽인다는 결말로 풀어내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물론 이런 이야기였다면 '싫은 소설'은 될 수 없었겠지만요.

별점 4점은 충분한 걸작 "싫은 여자친구"와 평작 수준 이상인 "싫은 노인", "싫은 조상", "싫은 집", 그리고 기타 평균 이하 작품들의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한 번 손에 잡으면 내려놓기 힘든 흡입력은 있는데, 취향을 많이 탈 것으로 생각됩니다. 선뜻 추천드리기는 어렵네요.

2016/01/12

모방살의 - 나카마치 신 / 최고은 : 별점 2.5점

모방살의 - 6점
나카마치 신 지음, 최고은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7월 7일 7시, 추리작가 사카이 마사오가 청산가리를 음독하고 사망했다. 정황상 자살로 추정되었으나, 사카이의 약혼자 나카다 아키코와 친구 쓰쿠미 신스케는 의문을 품고 각자 사건의 진상을 추적해 나가는데.....

이런저런 추리 커뮤니티와 애호가들 사이에서 좋은 평을 받아서 관심 가던 차에 읽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확실히 추리적인 요소, 특히 트릭은 상당히 빼어나더군요. 추리 애호가들의 입소문을 타기에는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요.

추리소설가 사카이의 자살을 사카이의 약혼자 아키코와 친구이자 동료인 신스케가 각자 진상을 추적하는 과정을 교차하며 보여주는 전개가 가장 큰 특징입니다. 두 명의 시점을 오가는 교차 전개를 지닌 작품은 많지요. 그런데 이 작품은 여기에 트릭을 결합시켜 놓았습니다. 두 시점이 서로 다르다는 서술 트릭이지요.
핵심 트릭 중 하나인 '두 명이 알고 있는 사카이는 다른 사람이다!'는 중반 정도에 비교적 쉽게 눈치챌 수 있기는 합니다. 나카다 아키코의 약혼자 사카이는 출판사에서 정서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로 깔끔한 원고를 쓰는 사람인데 신스케의 친구 사카이의 원고는 지저분하다는 설명이 가장 큰 단서였어요. 트릭을 알고 나니 그 외의 몇 가지 자잘한 단서들도 눈에 뜨이더군요. 아키코가 약혼자 사카이의 신인상 수상을 몰랐다던가... (다른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는 단점은 아니에요. 외려 공정하다는 측면에서는 높이 평가합니다. 또 작품이 발표된 시기를 고려해 본다면 (첫 발표는 1970년대) 상당히 앞서나간, 놀라운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저도 다른 서술 트릭물을 많이 접해보았으니 눈치챘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무척 놀랐을 것 같네요.

게다가 이 트릭 하나에 그치지 않는 점도 대단합니다. 즉 두 사건이 1년의 시차를 두고 벌어졌다는 다른 서술 트릭도 등장하며, 곁가지로 사용된 트릭들도 나무랄 데 없습니다. 아키코 - 사카이 사건에서의 사진을 활용한 알리바이 트릭, 신스케 - 사카이 사건에서 열차와 충돌한 트럭에 쓰여진 회사 이름("오코노기" / "고시바")를 활용한 트릭 등이 그러합니다. 물론 이건 트릭이다! 라는게 노골적이라서 약간은 추리 퀴즈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수준도 높고 작품과 잘 연결되어 재미있게 묘사됩니다.
서술 트릭과 함께 이러한 트릭들이 연이어 펼쳐진다는 점에서 작가의 노력이 여실히 느껴지네요. 이렇게까지 아이디어를 아낌없이 투입한 역작은 최근에 본 적이 없으니까요.

범행에 관련된 동기도 비교적 설득력이 높아서 와이더닛 물로도 괜찮습니다. 아키코 - 사카이 사건에서 뇌성마비 아이와 관련된 유괴, 거액의 현금이라는 동기와 신스케 - 사카이 사건에서의 유명 작가 표절에 얽힌 동기 모두 그럴듯했어요. 특히나 신스케 - 사카이 사건에서 거장 세가와의 작품을 표절한 것으로 알려진 사카이의 작품에 얽힌 진상 - 사실 세가와가 1년 전에 죽은 사카이의 작품을 표절한 것이었고, 이 노트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우연히 입수한 1년 후의 사카이가 표절한 것이라는 표절의 윤회 - 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첫 번째 사건을 "모방"한 이유도 비교적 타당하고요.

하지만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이냐고 하면 선뜻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이름이 같은 다른 두 사람이 1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방법 (청산가리 음독)으로 자살한다는 것부터 트릭을 위해 사건을 만든 느낌이 드는 탓입니다.

물론 이런 작위적이라는 굴레는 본격물이 숙명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고, 트릭이 빼어나서 단점이라고만 하기 어렵습니다만, 소설로서의 완성도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키코와 신스케가 각자 범인으로 지목한 인물들, 즉 도가노 리쓰코(아키코)와 야나기사와 구니오(신스케)를 대면하자마자 즉흥적으로 범인임을 확신하고 공격하는 등 이야기의 밀도와 설득력이 낮기 때문입니다. 택시에서 몇 마디 들은 것을 가지고 처음 만난 사람을 살인범으로 몬다는 건 말도 안 되잖아요.

또 비교적 공들인 트릭인 사진을 이용한 알리바이 트릭을 사용했음에도 첫 번째 사카이의 죽음은 자살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던가, 마찬가지로 알리바이를 공작한 편집장 야나기사와 구니오가 실제로 범인이 아니었다는 결말도 허탈했고요.

작가 스스로도 정말 여러 번 고쳐서 발표한 작품이라는데, 고쳐 쓴 작품이 이 정도라면 역량 부족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괜한 욕심에 여러 가지 트릭을 넣어 이야기를 키우지 말고, 차라리 서술 트릭에 1년간의 시차를 이용한 표절의 윤회 중심으로 보다 짧게 썼더라면 완성도는 높았을텐데 아쉽습니다. 사카이 유괴 사건과 그로 인한 자살, 슌스케의 사카이는 표절의 진상 폭로를 걱정한 나카이에게 살해당한다 정도면 아주 깔끔했을 텐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좋은 트릭들이 결합된 좋은 추리물입니다.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캐릭터와 묘사 역시 트릭에 비하면 좋다고 하기 어렵기에 감점하지만, 추리 애호가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8/05/18

악몽을 파는 가게 1 - 스티븐 킹 / 이은선 : 별점 2점

악몽을 파는 가게 1 - 4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황금가지

스티븐 킹의 최신작 단편집입니다. 원초적인 공포보다는 순문학 쪽으로 이동하는 느낌을 물씬 풍겼던 최근 작풍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래전 분실한 초고를 다시 썼다는 "130"만 옛 작품을 연상케하는 자극과 속도감을 보여주며, 이외에는 대체로 자극이 부족합니다. 옛날 작품들이 불량 식품 같았다면, 이 책의 수록작들은 녹즙같은 느낌이랄까요.

물론 "모래 언덕", "못된 꼬맹이"와 같이 기발한 발상과 섬찟함을 겸비한 작품이 없는건 아닙니다. 순문학스러운 느낌이더라도 "죽음" 은 이런 류의 단편에서는 손에 꼽을만한 걸작임에는 분명하고요. 거장다운 깊은 연륜도 작품마다 가득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좀 얌전하고 재미도 별로 없어서 아쉽네요. 최소한의 의외성은 가져갔어야 하지만 좀 쉽게 쓴 느낌으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작품 별로 조금 더 상세하게 소개해 드리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언제나 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30"

버려진 휴게소에 사람을 잡아먹는 자동차가 나타나 여러 사람들을 해치웠다. 그렇지만 몰래 숨어든 용감한 소년이 돋보기로 불을 붙여 괴물을 퇴치한다!

오래전 분실한 초고를 다시 썼다고 하는데, 그 덕분인지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차의 등장과 묘사는 킹의 초기 크리쳐 단편 느낌 그대로입니다. 사람을 빠져들게 만드는 생생한 묘사 만큼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에요. 처음 버려진 휴게소로 탐험을 떠난 소년의 묘사, 그리고 뒤이어 등장하는 사람 잡아먹는 자동차와 희생자들에 대한 묘사로 이어지는 속도감도 대단하고요. 끝까지 눈을 떼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운운하며 희생된 첫 번째 희생자를 비롯한 죽은 사람들 모두가 "선의" 때문에 죽었다는 약간의 풍자도 젊은 시절 킹 작품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안이한 결말로 이런 장점 모두가 희석됩니다. 10살밖에 되지 않은 꼬마 소년이 불 좀 붙였다고 사라져 버리다니! 죽어나간 여러 명의 어른들은 대체 뭔가 싶더군요.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원래 결말도 이러했다면 아무리 마약 중독 등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킹이 이 작품을 분실한 건 별로 아까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최소한 다시 썼다면 결말 정도는 고쳤어야 해요. 이렇게 대충 마무리 지을 내용은 절대로 아니었으니까요. 예를 들자면 흑인은 잡아먹지 않는다던가, 여자는 잡아먹지 않는다던가 하는 식으로 뭔가 차별이나 혐오에 대한 이야기처럼 포장하는 등의 설정과 반전처럼 말이죠. 흑인은 잡아먹지 않아서 흑인 한 명이 살아남지만, 도착한 경찰들에 의해 사살된다! 는 "새벽의 저주" 스러운 이야기였다면 걸작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프리미엄 하모니" 

부부는 조카 선물을 사러 마트에 들렸는데, 남편은 아내가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 조금 덤덤하고 건조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소개에서 킹이 "레이먼드 카버"의 책을 읽고, 그의 스타일로 썼다고 말하는데, 레이먼드 카버 작품은 읽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엄청나게 더운 날, 아내가 죽은 후 주차장으로 돌아오자 애견마저 차 안에서 쪄 죽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결말까지 소소하게 읽을만 했습니다.

문제는 너무 순문학스럽고 의외성이 없다는 점입니다. 죽은 게 애견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면 조금 나았을지 모르겠네요. 상상하기는 싫지만, 그게 뭐든요.

하여튼 저는 킹의 작품을 읽고 싶지 킹이 쓴 카버 스타일 카피를 읽고 싶지는 않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배트맨과 로빈, 격론을 벌이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함께 주말마다 식사를 하는 60세 노인이 우연히 일으킨 차 사고로 트럭 운전사에게 구타당하다가, 아버지가 운전사를 칼로 찔러 살아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치매에 걸렸건, 나이가 들었건 아버지는 영원히 아들 앞에서는 슈퍼 히어로라는 주제 만큼은 정말 마음에 드네요. 저도 끝까지 딸 아이를 지켜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으니까요.

그러나 아쉽게도 좋은 작품은 아니에요. 무언가 복잡한 과거가 있는 듯 변죽을 울리다가, 갑작스러운 사고와 함께 이야기가 바로 절정으로 치닫고 끝나버려 내용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껏 고급차를 쓸고 닦아 광 내어 어렵게 시동을 걸지만 도착한 장소는 집 앞 편의점이랄까요? 그냥저냥한 평범 이하 소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모래 언덕"

아흔살이 넘은 하비 비처 판사는 유언장을 작성하기 위해 변호사 앤서니 웨이런드를 불렀다. 그리고 유언장에 적혀 있는, 한 섬을 영구 야생지로 공표하는 사항을 두고 그 섬에 얽힌 오랜 비밀을 이야기 해 주는데...

짧은 분량, 섬뜩한 느낌, 여기에 반전까지 삼위일체를 이룬 '기묘한 맛', '쇼트쇼트' 계열의 작품입니다.

우선 아주 짧다는 점에서 '짧은 분량' 조건은 충족합니다. 그리고 섬의 모래 사장에 곧 죽을 사람 이름이 쓰여진다는 아이디어에서, 특히 비행기 추락 사고 때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는 묘사의 섬뜩함이 대단해서 두 번째 조건 역시 충족하고요. 마지막 조건도 유언장 작성을 서두른 이유에 대한 반전 때문에 완벽하게 충족합니다. 특히 결말은 아주 좋은 수준으로 킹 역시나 결말이 마음에 든다고 자찬할 정도에요.

별점은 4점입니다. '기묘한 맛', '쇼트쇼트' 류 장르의 걸작만 모아 놓은 앤솔러지가 있다면 충분히 목록을 장식할만 한 교과서같은 작품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어느 못된 꼬맹이"

사형수 헬러스가 국선 변호인이었던 브래들리와의 마지막 면회에서 그가 아이에게 총알 여섯발을 쏜 이유를 설명해 주는데...

장난꾸러기 어린 아이가 상황에 따라서는 공포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이색적인 설정에 더해, 이러한 공포가 직접 닥쳤을 때 벌어지는 무간지옥의 묘사가 압권인 작품입니다. 읽는 내내 끔찍했고, 손에서 떼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또 인생을 파멸시키기 위해 악마가 누군가에게 나타난다는 뻔한 설정을 악마가 아이의 모습으로 위장했다는 약간의 변주만으로 차원이 다른 몰입감을 선사해주는건 역시나 거장다웠습니다. 저 역시 악마같은 아이들을 몇 번 본 적이 있어서 굉징히 와 닿은 아이디어이기도 해요.

그런데 헬러스에게 이 악마가 나타난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는 점은 좀 문제입니다. 그냥 아픈 것, 자연 현상과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대충 넘어가는데, 그건 그렇다 쳐도 브래들리에게 이 꼬마가 나타날 이유는 또 없잖아요? 최소한의 설득력을 보장할 약간의 양념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재미는 있지만 잘 나가다가 결말을 만들기 위해 지나치게 무리수를 둔 느낌이라 감점합니다.

"죽음"

동네 바보 트러스데일은 한 소녀를 죽이고 은화를 빼앗은 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보안관 바클레이는 그의 무죄를 확신하나 형은 집행되고, 이후 유일한 증거인 은화가 교수형당한 트러스데일의 분비물에서 발견되었다...

일종의 '딜레마' 를 다룬 심리 드라마인데 한마디로 걸작입니다. 동네 바보 트러스데일이 무죄일 수도 있다는 분위기로 끌고 가다가 마지막에 반짝이는 은화가 분비물 속에서 발견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네요. 수감되어 있는 한 달 동안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똥으로 나올 때마다 다시 삼킨 거라는 진상도 기발하고 말이죠. 무엇보다도 바클레이의 딜레마를 그리는 심리 묘사와 무엇보다도 어차피 교수형 당할거, 왜 자백을 하지 않았냐는 묵직함이 독자를 사로잡는 좋은 단편이에요.

그래서 제 별점은 5점. 수록작 중 최고로 치고 싶네요. 덧붙이자면, 트러스데일 시점의 번외편이 나와주어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납골당"

정글 속 납골당으로 떠난 일행이 하나씩 죽어가는 과정을 술 먹은 사람의 독백으로 들려주는 특이한 작품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과정의 묘사는 킹 답습니다.

그런데 그 외에는 솔직히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되살아나 행진하는 죽음의 윤회 이야기인지? 아니면 술 주정뱅이의 주정에 불과한지? 킹 본인은 산문적 해설을 제거한 형식만 보았을 때 훌륭하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지금 보다는 훨씬 더 해설이 필요한 이야기였어요. 말하고 있는 술주정뱅이도 무슨 벌어졌는지는 모르는 듯 하고, 이게 더 현실적이기야 하겠지만 여러모로 일반 독자에게 잘 와 닿을 것 같지는 않네요.

한마디로 소갯글처럼 학교 작문 시간에 발표했음직한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습작에 불과합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도덕성"

가난한 부부에게 아내 노라가 간병하는 부유한 신부 위니로부터 이십만 달러의 유혹이 다가왔다. 죄를 짓는 장면을 촬영해서 보여달라는 유혹에 굴복한 채드와 노라 부부는, 노라가 변장하여 어린아이를 때리는걸 채드가 촬영하여 돈을 받고 말았다. 이후 채드의 작가로서의 미래, 그리고 부부의 결혼생활은 끝장나 버리는데...

일단 재미도 없고 여러가지 문제가 많아 점수를 줄 부분이 많지 않네요. 일단 설득력 없는 등장인물들의 고민이 아쉽습니다. 얼척없는 도덕심보다는 돈이 더 이유를 가진다는 건 당연한 현실인데 이를 뭐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아이를 때린 정도로 평생 죄책감을 느낄 것 같지도 않고 말이죠. 덕분에 위니를 통해 종교적인 시점에서 나쁜 짓, 회개에 대해 한번 쯤 생각해 보게 만든다는 발상은 좋지만 이를 풀어나가는 데에는 그다지 성공하고 있지 못합니다.

소싯적 피를 팔고 리포트를 대신 써 주는 밥벌이를 했었는데 그 당시 자신을 매춘부라고 생각했다는 창작 비화가 더 인상적이었던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아이를 유괴하는 등 더 강력하고 심각한 딜레마를 초래하는 범행으로 묘사하는게 훨씬 나았을 것 같네요.

"사후세계"

대장암으로 죽은 빌은 기묘한 공간에서 해리스라는 남자를 만났다. 그는 과거 공장 문을 잠갔다가 화재로 146명의 여직원을 죽게 한 죄로 끝나지 않는 상담이라는 연옥에 갇힌 인물로, 빌에게 환생과 사라짐을 선택할 수 있지만, 다시 태어나도 변하는 것은 없을 거라 말해 주었다. 그가 이곳에 온 게 다섯번 째이며 언제나 똑같은 말을 했다면서. 그러나 빌은 동생의 손가락을 잘랐던 실수 , 어렸을 때의 시계 절도, 성폭행 등의 실수 중 하나라도 막기를 바라며 환생을 선택한다.

사후 세계에 대한 독특한 묘사와 설정, 그리고 동양적인 일종의 "윤회"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인상적인 소품입니다. 단, 묘사와 설정에 비하면 결말은 좀 평이한 편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우르"

구식 영문학과 교수 웨슬리는 농구팀 감독인 애인 엘런과 헤어진 후 반쯤은 복수심에 킨들을 구입했다. 그런데 그가 구입한 킨들은 시판되지 않는 핑크빛 제품으로, '우르' 라는 일종의 평행우주로 접속하여 작품을 찾아 제공하는 능력이 있는 기기였다. 웨슬리 스미스는 헤밍웨이의 미발표작 등을 검색하는데...

아마존 킨들을 위해 집필했다는 소설인데, 한마디로 말해 광고를 위해 쓰여진 수준 이하의 졸작입니다.

이유는 명확해요. 소설을 쓰지 못하는 영문학과 교수가 핑크빛 킨들을 통해 다른 평행 세계에서 유명 작가들이 발표한, 이쪽 세계에서는 발표되지 않은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절반 이상까지 장황하게 펼쳐나가기 때문에 독자는 유명세를 위한 표절같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되는데, 정작 이야기는 급작스럽게 "내일 뉴스" 와 같은 이야기로 빠지기 때문입니다. 전혀 다른 설정을 하나로 묶어놓은 느낌이라 영 별로입니다.
"내일 뉴스" 이야기라도 재미있었더라면 모르겠지만 뉴스를 어떤 식으로든 미리 알고, 그렇게 알게 된 사고를 막기 위해 노력한다는 쎄고 쎈 유사 작품 대비 특별한 부분도 없는 탓에 별다른 흥분과 재미를 불러 일으키지도 못합니다.

킹 작품에서는 보기 드문 지극히 극단적인 해피 엔딩이라는 결말은 특이하지만 그 외에는 건질게 거의 없는, 킨들 광고에 불과한 평균 이하의 범작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26/01/18

파이어 펀치 1~8 - 후지모토 타츠키 : 별점 2점

"체인소맨"으로 인기 절정을 달리는 작가 후지모토 타츠키의 첫 장편 연재작입니다. 연재 당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작품이지요.
복수를 위해 살아가는 아그니, 그를 이용해 자신만의 영화를 만드려는. 아그니를 신으로 숭배하는 산, 아그니와 대척점에 서 있다가 그를 포용하게 되는 유다 등의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작품으로 일종의 초인물입니다. 

그러나 인터넷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현 시점에서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여러모로 어렵습니다.

물론 재생 능력으로 사람들을 먹여 살리지만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길에 휩싸이는 벌을 받은 아그니가 복수를 다짐하는 초반부만큼은 대단합니다. 구세주가 고통을 잊고 현재의 안식을 찾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추종자들 때문에 다시금 고통으로 뛰어든다는 일종의 윤회, 종교적 세계관을 독특하게 풀어낸 것도 작가가 될성부를 떡잎이라는걸 느끼게 해 주고요.

그러나 이런 매력적인 설정을 잘 살리지는 못했습니다. 토키타와 함께 연극, 연기 이야기가 나오면서 이야기가 점점 이상해지는 탓이 큽니다. 아그니를 이용하여 자신의 영화를 제작하려는게 목적인 토키타 자체는 독특해서 나쁘지는 않아요. 그러나 이야기에서 겉돕니다. 완벽한 영화를 위해서 모든걸 통제하려는 흑막도 아니고, 단지 자신의 재미와 흥미만을 위해 순간순간을 살아가려는 즉흥적인 모습만 보이니까요. 모든게 연기이고 연기가 중요하다는 그녀의 말과는 정 반대로, 본능에 충실한 삶을 이어갈 뿐입니다.
또 이 연기라는 설정도 문제입니다. 그냥 원래의 신, 구세주가 싸구려 B급 영화 이야기였다는 정도, 그리고 얼음의 마녀 따위는 없고 지구는 멸망해가는 중이다는 진상 정도로도 충분했습니다. 아니면 차라리 복수를 위해 유다와 맞서 싸우는 평범한 이능력 배틀물로 끌고가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작가가 이야기 전개를 위해 둔 무리수는 그 외에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얼음의 마녀 스랴죠. 굳이 그녀가 튀어나올 이유는 없었습니다  실제로 비중도 변변찮고요.  막판에 작화가 볼썽사나울 정도로 무너지는 것도 눈에 거슬립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압도적인 초반부는 볼 가치가 있지만, 끝까지 볼 필요는 없습니다.

2024/09/01

정말로 추천하고 싶은 미스터리 소설 (オモコロ(Omocoro)bros)

유머러스한 기사들로 인기가 많은 일본 웹 사이트인 オモコロ(Omocoro)bros 편집부 멤버들이 추천하는 미스터리 소설들입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작품은 세 편 뿐이라는게 아쉽네요.

브로스 편집부입니다.
8월의 일요일마다 다양한 장르의 "추천 소설"을 소개하는 기사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이번 주는... "추천 미스터리 소설"! 다양한 미스터리를 즐겨보세요.

**다빈치 오시야마의 추천 호러 소설**
《우주 탐정 노그레이》 (타나카 히로부미)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전제로 한 미스터리 작품을 "특수 설정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마법이 있는 세계"나 "타임루프가 있는 세계"와 같이, 이제는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특수 설정이라도 "아무거나 가능"한 것은 아니란 점이 중요합니다. 마법이 있다고 해서 "아무도 모르는 워프 마법을 범인만 사용할 수 있었다"라고 하면 흥이 깨지겠죠. 비현실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결말에도 논리적인 납득이 필요합니다.
《우주 탐정 노그레이》는 다섯 편의 연작 단편집입니다. 우주를 무대로 하는 능력 있는 탐정 "노그레이"가 기묘한 행성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단, 이 행성들이 모두 매우 특이합니다.
  • 고지라 같은 거대 괴수만 사는 "괴수 행성 킹고지"
  • 주민들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천국 행성 파라이스"
  • 주민 수가 항상 일정하며, 죽은 자가 다시 태어나는 "윤회 행성 텐쇼우"
  • 모두가 대본대로 연극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 "연극 행성 엔게키"
……등, 독특한 행성들만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미스터리에서 "목 없는 시체"는 흔한 미스터리지만, 그 시체가 무적의 거대 괴수라면? 유쾌한 행성에서 벌어지는 더욱 불가사의한 사건들. 그 해결도 역시 행성의 특수한 성질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결말을 예측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마치 모든 것이 가능한 듯 보이면서도 마지막에 피스가 맞아 떨어지며 규칙의 전체 그림이 보이는 그 기분은 미스터리의 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장난감 상자를 들여다보는 듯한 재미가 있는 한 권입니다.

**카마도의 추천 미스터리 소설**
명탐정의 제물: 인민교회 살인사건》 (시라이 토모유키)

플롯부터 너무 멋진 미스터리 작품입니다. 최고입니다!!!!!!!
미스터리 작품 중에 "다중 해결 미스터리"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진실은 언제나 하나"라는 개념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으로, "추리 결과, 여러 진실이 존재한다"라는 것이 이 장르의 특징입니다. 이 시라이 토모유키 선생님의 다중 해결물은 탁월합니다. 미스터리 팬이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작품입니다.
다중 해결물은 매우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추리가 계속 바뀌기 때문에, 도중에 "이게 뭐야... 방금 추리는 뭐였지?" 또는 "피곤해... 결론만 말해줘..."라는 상황이 될 수 있지만, 이 《명탐정의 제물》에서는 제시된 여러 추리가 모두 강력한 임팩트를 줍니다. 압도적인 해설 파트를 읽으면서 "이 사람, 정말 대단하다!"라고 감탄하게 될 정도입니다. 장인의 기술에 감탄할 정도로 멋진 작품입니다. "다중 해결"의 구조적 약점을 없애면서, 동시에 "다중 해결"이라는 장르 자체에 새로운 빛을 불어넣는 듯한 훌륭한 플롯을 꼭 경험해 보세요.
다른 작품도 읽을 가치가 충분하며, 이 《명탐정의 제물》을 시작으로 깊이 빠져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 작품인 《엘리펀트 헤드》는 정말 최악입니다. 물론 나쁜 의미가 아니라, 정말 재미있지만, 진짜 최악입니다. 사람이 이런 걸 써도 되나? 여러 의미에서 머릿속이 어떻게 된 걸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섭습니다.

**나시의 추천 미스터리 소설**
《세계에서 가장 투명한 이야기》 (스기이 미츠루)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손이 떨리다니" 라는 경험을 한 건, 이 책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일종의 상쾌함까지 느낄 정도로, 기분 좋게 압도당했습니다.
훌륭한 독서 체험을 보장하므로,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은 꼭 서점에서 구입하시길 권합니다.
아니면 Amazon 카트에 담아주세요.
"전자책은 없나요?"라고 낙담할 시간도 없습니다.
지금.
당장.

**마키노의 추천 미스터리 소설**
여섯 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 (아사쿠라 아키나리)

취업을 위해 양산된 듯한 여섯 명의 우수한 대학생들이, 모두 내심 내정받고 싶은 대기업의 최종 면접에 남았으나, 전원이 내정받는다고 생각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한 명만 내정된다고 변경되었고, 그뿐만 아니라 최종 토론 중에 우등생들의 "뒷모습"을 폭로하는 고발장이 나오면서, 한 사람씩 가면이 벗겨지는 미스터리입니다.
책의 재미 순위를 석권하고, 만화화, 영화화, 라디오 드라마화까지 이루어졌을 정도로, 정말 재미있습니다! 취업을 위해 드러난 좋은 면과 고발을 위해 드러난 나쁜 면이 교차하며, 사람의 인상이 전혀 믿을 수 없다는 스릴 넘치는 구성에 책을 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게다가 엄청 읽기 쉽습니다!).
여러 번 뒤집히는 대학생들의 의혹에 끝까지 예측할 수 없는 교묘한 미스리드, 마지막에 남겨진 고발문의 놀라운 결말, 그리고 모두가 좋아하는 선명한 복선 회수... 말할 것이 없는 소설의 완전체였습니다. 11월에 영화도 개봉된다고 합니다. 꼭 보세요!

**가미죠의 추천 미스터리 소설**
흑뢰성》 (요네자와 호노부)

나오키상을 받은 화제작을 지금 와서 추천하는 것도 뭐하긴 하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소개하고 싶습니다.
배경은 전국시대로, 주인공은 실존 인물인 전국 무장 아라키 무라시게입니다.
…잠깐만요, 이 시점에서 "역사물인가, 흥미 없네"라고 생각한 분들, 조금만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이 소설은 등장인물과 배경만 역사물일 뿐, 내용은 완벽한 미스터리입니다.
주인공 무라시게는 어느 계기로 상사 오다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성에 틀어박힙니다. 그곳에 쿠로다 칸베이라는 엄청나게 뛰어난 지장이 찾아와 무라시게를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성 안에서 둘이 나눈 이야기가 지금으로 치면 실제로 있었던 "밀실 토크"처럼 느껴져, 이 두 사람의 생각을 예상해가며 즐기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 이 이야기에는, 예측할 수 없는 충격적인 반전이 숨겨져 있습니다. 다 읽고 나서 "설마, 이런 전개가 가능하다니!"라고 생각하며 충격을 받을 겁니다. 요네자와 호노부 선생님의 《흑뢰성》을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다시 한번, 독서의 즐거움을 느껴보세요!

2005/11/01

신화 진시황릉의 비밀 - 당계례 : 별점 1.5점


고고학자 잭은 친구인 물리학자 윌리엄의 요청으로 고대의 "무중력"세계를 구현했던 유적지를 찾아 그 수수께끼를 풀려 한다. 하지만 이 수수께끼에 다가갈 수록 자신이 계속 꾸는 진시황 시절 몽 장군과 옥수 공주의 사랑에 대한 꿈과 겹쳐지는 것을 느끼게 되고, 결국 꿈에서 본 장소인 한 폭포 속에서 완벽한 무중력으로 구현된 진시황의 지하 궁전을 발견하게 되는데...

공사가 다망한 관계로 (?) 포스팅이 뜸했네요. 짬내서 주말에 본 성룡의 최신작입니다.

사실 성룡 영화를 저도 예전에는 매년 놓치지 않고 봤었지만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슬슬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중안조" 이후의 영화는 안 본 영화가 더욱 많은 것 같네요. 이유야 여러가지이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성룡의 유머가 슬슬 사라지면서 영화의 재미가 많이 떨어졌다는 느낌이 강했거든요. 왠지 유머와 재치를 돈으로 커버하려 한 듯한 느낌이 많이 나서 싫어지더군요.

그런데 이 영화 역시 제가 싫어한 부분을 극대화해서 답습하고 있습니다. 성룡의 유머와 재치는 거의 드러나지 않고 액션도 성룡 특유의 아크로바틱 코믹 액션은 묘지에서의 액션과 끈끈이 공장에서의 액션, 딱 2장면에서만 드러나고 나머지는 흔해빠진 중국 무협 영화의 도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서 불만스럽고요. 제일 용서가 안되는건 클라이막스의 액션을 와이어로 땜빵한거에요. 이건 성룡이 아니야!
이야기도 당위성과 설득력 모두 굉장히 부족할뿐더러 "불사의 약"에 관련된 시공을 초월한 사랑과 윤회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진용"에서 써먹은 것이라는 점, 그리고 식상해진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10여년 전에 발표된 "진용" 쪽이 이야기의 밀도나 설득력은 훨씬 높다는 것 역시 당황스러운 점이었어요. 이야기가 해피엔딩이었으면 좀 더 마음에 들었을지 모르는데 언해피 엔딩이라는 것도 별로였고 말이죠. 게다가 악당역의 "구선생"이 왜 무공 고수인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해 불가능의 영역입니다. 떡하니 등장해서 최고수의 무예를 급작스럽게 선보이니 기가 막힐 뿐이죠. 중국은 쿵후 고수만 교수를 할 수 있나?
이러한, 10여년 전에서 전혀 발전하지 못한 전개와 설정은 빼 놓더라도 장예모 쪽이 성룡보다는 더욱 진나라 무사에 어울리는 비쥬얼이라는 문제도 큽니다. 성룡은 아무리 생각해도 외모상으로만 본다면 미스 캐스팅이에요.

그래도 무중력에 관한 접근이 진시황릉의 비밀로 이어지는 과정과 그것을 구현한 상상력 하나는 꽤 괜찮았다고 보여지고, 김희선의 연기는 잘 모르겠지만 비쥬얼 하나만큼은 정말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성룡도 몇몇 장면에서 나이를 잊은 듯한 모습과 액션을 가끔 보여주는만큼, 성룡과 김희선의 팬이라면 볼 만한 수준의 영화라 생각되긴 합니다. 그래도 대단한 팬이 아니시라면 TV에서 방송할 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 훨씬 낫을거에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1/04/02

복수의 심리학 - 스티븐 파인먼 / 이재경 : 별점 2.5점

복수의 심리학 - 6점
스티븐 파인먼 지음, 이재경 옮김, 신동근 추천/반니

복수에 대해서 생물학적, 역사적, 사회적 사례들과 함께 설명해 주는 인문학 서적입니다.

생물학적 사례는 책 서두에 설명된 2000년 사우디아라비이아에서 있었던, 비비 원숭이가 인간에게 덤벼들었던게 대표적입니다. 비비 원숭이와 침팬지를 통해 복수가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명하고요. 삶의 목적이 패권과 짝짓기라면, 이를 위협하는 존재에 대한 보복믄 반드시 필요하며 이는 인간 영장류와 다르지 않다네요.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집단이 훨씬 크고, 삶의 목적과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도 훨씬 복잡하기 때문에 단순한 개인적 응징은 사라지고, 국가가 공정과 냉철을 원칙으로 대신 복수를 하게 된게 현재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법 체계인 것이지요.

뒤이어 종교, 문학, 사법 체계, 여성 대상 범죄 등 여러가지 복수의 역사와 실제 사례가 소개됩니다. 예를 들어 종교에서 복수는 대체로 신의 것이며, 대부분 종교 교리는 복수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힌두교는 카르마, 즉 업과 윤회가 공통 사상이라서 남을 해치면 내게도 화가 미치게 됩니다. 기조 사상인 아힘사는 비폭력과 불살생을 표방하고요. 그래서 폭력적 말과 행동은 삼가야 합니다. 불교에서 보복 행위는 적은 남이 아니라 내 속에 있다는 부처의 가르침을 어기는 일이에요. 그러나 이 모든 영적 이상은 세속 정치에 의해 엇나갑니다. 사람들은 교리와 경전을 각색해서 복수를 정당화하지요. 종교간, 종파간 분쟁과 전쟁은 지금도 끊이지 않으며, 일부 종교 지도자들의 증오와 분노만 가득한 선동은 지금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이 쯤 되면 교리와 경전은 없고, 지도자들 개인의 복수심만 남아 있는 상황이지요. 이 책을 읽으니 종교를 믿을 이유가 없다는 신념이 더욱 강해집니다.

그 외에도, 소프클레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유서가 깊다는 서두에서 시작된 문학에서의 복수에 대한 소개는 흥미로왔습니다. 중세 결투와 종교 재판 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 16세기 이후 지역 공동체가 국가 대리인 역할로 법을 집행했던 상황에 대한 설명 등에서, 법 집행이 복수나 보복일 수 있다는 견해도 굉장히 그럴듯했고요. 이와 반대로, 특정 지역 부족간, 가족간 보복이나 명예 살인, 갱단의 보복은 영역과 위상을 지키기는게 전부인 후진적 발상이라는 설명도 와 닿더군요. 여성 대상 범죄와 여성들의 복수는 사회 체제가 미개하고 잘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라는 소개에서는, 우리나라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 바로 떠올랐습니다. 참고로 리벤지 포르노와 학교 내 총기 사고. 학교 총기 사건 방지는 교사와 학교 상담사, 학부모 역할이 중요하다. 심리적 위축과 같은 위험 징후들을 경계하고 방심하지 말아야 한답니다. 직장 내 복수 사례에서는 큰 사건은 물론 상대방 커피에 침을 뱉는 류의 자잘한 복수까지 망라하고 있는데. 콜 센터나 식당, 항공사 등 감정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복수 사례가 특히 재미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독재 정치가 끝나고 복수에 대한 열망이 끓어오르지만 새 정권이 통치 기반을 다지는 과정에서 지난 정권 지지층 반발을 피하는데 급급해서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설명은 뼈 아팠습니다. 우리나라가 바로 그런 경우니까요. 일제 강점기 때 친일 부역자들과 독재자 전두환과 그 일당은 제대로 처벌해서 정의를 바로 세웠어야 했습니다. 책에 나온 스페인 프랑코 정권 피해자가 "화해의 미덕은 믿지만, 반성과 사죄 없이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고 했는데, 말 그대로죠. 사면 따위는 사치였습니다. 정치 보복 역시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아왔기에 남 이야기 같지 않더군요. 그 중에서도 "인신 공격은 대중매체가 정치를 사유화하는 경향이 강한 풍토에서 더욱 극성을 떤다. 이 점에서도 미국이 선두다. 토머스 제퍼슨이 애덤스 뒷통수를 친 사건이나 최근의 도널드 트럼프가 좋은 예이다." 라는데, 언론의 불공정하고 비합리적인 기사가 많은 우리나라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언론의 보복이 민주주의 투사들과 맞장을 떠 온 역사도 마찬가지에요. 책에서는 토머스 제퍼슨과 랜돌프 허스트의 언론을 이용한 여론 조작, 그리고 루퍼트 머독이 호주 정치에 개입한 악질적인 사례가 언급되는데, 우리나라 사례를 추가시켜 달라고 요청하고 싶을 정도에요.

하지만 재미있고 인상적인 내용이 많음에도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복수가 필요하다는건 잘 전달하고 있기는 한데, 제목처럼 '복수'에 대한 심리학적인 분석을 잘 담고 있느냐 하면 솔직히 잘 모르겠거든요. 법 집행을 광의의 복수로 보는 시각도 그럴듯하지만, 이건 심리학과는 좀 거리가 있는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심리학적으로 풀려면 피해자와 법 집행에 의해 처벌받는 가해자와의 관계와 그 심리를 보다 자세하게 다루었어야 했어요. 그 외의 이야기들도 사례는 재미있지만 심리학적인 부분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요. 책의 부제인 "사람들이 왜 용서보다 복수에 열광하는지"에 대한 정의도 없습니다. 관련된 사례, 그리고 일종의 교훈?만 존재할 뿐이죠.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05/03/06

제 5 도살장, 혹은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 죽음과 추는 의무적인 춤 - 커트 보네거트 / 박웅희 : 별점 4점

제5도살장 - 8점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아이필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던 주인공 빌리는 검안사로 성공하여 안정된 생활을 꾸려가던 중 비행기 사고로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퇴원한 날 부터 자신이 예전 딸의 결혼식 날 머나먼 "트라팔마도어"행성인들에게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전파하고 다니게 된다. 빌리는 "트라팔마도어"로 납치된 이후 유럽의 전장에서부터 '현재'와 미래로 시공간을 초월하는 시간여행을 하며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아우르는 초월적인 경험을 한다.

제목의 "제 5 도살장"은 드레스덴 폭격 당시의 미군 포로 수용소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소설의 내용은 부제인 "죽음과 추는 의무적인 춤"이 더 어울리는 것 같지만요.
그런데 이 책은 도대체 어떤 장르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SF나 반전소설로 정의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작품이에요. 작가가 직접 경험했다는 2차 대전에서의 드레스덴 폭격에 대한 일화를 단순히 담아낸게 아니라 빌리라는 존재를 통해 시공을 초월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윤회사상과도 닮아 있지만 결정적 파국, 즉 종말은 피할 수 없다는 종말론적 사고방식은 또한 기독교의 그것인데도 묘하게 어울리면서도 깊은 울림을 전해줍니다.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극중 주인공 빌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공 초월에 대한 소설적 접근은 엄청나게 새로우면서도 충분히 충격적이고 또한 재미도 있습니다. 짤막한 단상들이 이어져서 하나의 소설을 이루는데 그 단상들의 등장인물들이 엄청나게 방대하고 사건들도 다양함에도, 또한 시간과 공간이 제각각임에도 불구하고 소설로 성립되는데 재미까지 있다는 점은 정말 놀라워요.
그리고 "트랄파마도어" 행성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기독교에 대한 통렬한 정의! 왜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쉽게 잔인해지는지에 대한 해답. 즉 복음서의 의도는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자비로워질 것을, 나아가 낮은 자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자가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지만 실은 "누구를 죽이기 전에, 그자에게 든든한 연줄이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확인하라"라고 가르친다라는 부분은 너무나 멋집니다.
소설에서 말하는 "종말은 피할 수 없으니 가장 즐거운 시간을 즐겨라"라는 사고방식도 왠지 공감이 가네요. 채근담이었나요? 흡사 군대 훈련소 시절 화장실 벽에 붙어 있었던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과 왠지 잘 어울리기도 합니다. 하긴, 이 책은 군대소설이기도 하죠.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4점! 처음 접하는 작가의 작품이었지만 명성에 충분히 어울리는 좋은 작품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한 작가 어쩌구 하는 선전문구가 꼭 필요했을지는 의문이나 하루키가 "노르웨이의 숲"에서 표현했던 "중간의 어떤 페이지를 열어도 멋진 책"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작품들 중 하나임에는 분명합니다. 정말로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작품으로 추천합니다.

그나저나 영화화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뒷 해설에 나오는데, 도대체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을지 궁금하네요.

2004/01/29

Happy SF 03 : 신들의 사회 - 로저 젤라즈니

신들의 사회 - 8점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행복한책읽기

먼 미래의 어느 행성인 이곳에 우주선 “인도의 별”을 타고온 1세대 이주민 중 한명으로 과학 기술로 다들 신으로 군림하던 1세대인들에게 “촉진주의”의 기치를 들고 반란을 일으키나 패배한 뒤 추방당했던 "샘"을 죽음의 신 “야마-다르마”가 기계장치의 도움으로 부활시킨다. 샘은 몇번에 걸친 전투와 환생 끝에 마지막으로 제 1세대 중 한명이었지만 전 세계를 기독교화 하려는 야심가 “니리티”와 신들의 전쟁에 참전하는데…

뉴 웨이브 SF의 걸작으로 인도신화를 배경으로 한 장대한 서사 SF입니다. 힌두 신화의 신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방대한 세계관과 역사관 속에서 서양인이 잘 이해할 수 없을 불교 사상과 윤회, 전생, “업” 등등의 종교적 요소와 신들의 무기인 “열추적 미사일 = 루드라의 화살”, “우레의 전차 = 공격형 비행선”, 등 같은 SF적인 요소를 잘 결합시킨 작품이죠.

사실 힌두의 신들이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싸운다.. 라는 설정은 이제 21세기가 된 지금에는 그다지 특이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더군요. "공작왕", “3X3 eyes”도 있고, “수라왕 슈라토”도 있고 clamp의 “리그-베다 (성전)” 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책의 세계관과 역사관, 설정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냥 단순한 신들의 설정만 빌려와 전투 능력만을 강조한 후대 일본의 여타 작품들과는 달리, 온갖 동양철학과 사상을 집어넣어 방대하면서도 심오하게 묘사하고 있거든요. 그렇지만 딱딱하지만은 않고 소설적으로도 굉장히 재미있는 것이, 흡사 무협지를 읽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예를 들자면 다양한 능력과 기술로 전투를 묘사할 뿐더러 전투 와중에 설법을 교환하는 특이한 장면들이 그러합니다. 목을 조르면서 “아무도 공기를 찬미하는 자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없을 경우를 생각해 보라!” 라는 장면이 대표적이죠
샘이 “불타”의 모습으로 설법을 하는 중간부분까지는 조금 지루하지만 뒷 부분의 전투장면등은 확실히! 재미있습니다.

사람 취향을 좀 타는 책일 수도 있지만 책을 전체적으로 봤을 때, 너무나도 가볍고 얄팍한 설정의 기존 환타지에 비하면 확실히 무게감이 느껴지는 수작입니다. 물론 저도 재미있게 읽었고요. SF와 환타지를 좋아하시는 장르문학 팬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작품이 아닐까 싶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PS : 번역이 조금 딱딱해서 읽기가 좀 어렵더라고요. 더 부드럽게… 표현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2005/01/23

동굴의 여왕 (She) - L.라이더 헤거드 : 별점 2점

동굴의 여왕 H.라이더 해거드 지음, 김지혜 옮김/영언문화사

루드윅 홀리는 친구 빈시의 유언으로 그의 아들 레오를 25년간 양육하게 되며, 레오가 25살이 된 해, 유언대로 빈시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철궤를 열어 홀리와 레오는 빈시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과도 같은 숙명 -가문의 시조인 칼리크라테스를 죽인 아프리카의 늪지대의 왕국에 사는 불멸의 여왕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것-에 대해 알게되고 그 비밀을 풀기 위한 모험을 떠나게 된다.
홀리와 레오, 하인 조브로 이루어진 일행은 목숨을 건 여행 끝에 고대 코르 왕국에 은둔하고 있는 여왕 아샤를 만나게 되며 가문의 복수와 사랑하는 여인까지 죽였음에도 아샤의 매력에 빠져버린 레오와 일행은 그녀를 거부하지 못한채 오히려 같이 불멸의 존재가 되기 위해 생명의 원천까지 찾아가게 되는데....

작년에 읽었던 "솔로몬 왕의 보물"과 더불어 완역되어 나온 해거드의 장편소설입니다.
흑인들의 왕국에 살고 있는 불멸의 존재인 백인 여왕이라는 아이디어는 다른 곳에서도 숱하게 베껴먹어서 새로운 맛은 별로 없지만 확실히 기발한 설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품 속에서도 디테일한 묘사로 계속해서 뒷받침 하여 보여주는 주인공 여왕에 대한 독특한 매력과 존재감은 이 작품의 원조로서의 가치와 품격을 느끼게 해 줍니다. (저는 "엘하자드"의 바그롬 제국의 여왕이 연상되더군요)
그리고 한 가문에 2000년 동안 전해진 숙명과 불멸의 여왕과의 관계도 꽤 인상적인 부분입니다. 그 세월 자체가 워낙 방대하여 스케일이 크기도 하지만 윤회와 영생에 대한 독특한 시각과 철학이 보여지거든요.
작가 특유의 흑인과 아프리카에 대한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시각은 불편하긴 했지만 대충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라 소설의 몰입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고요.
하지만 소설 자체로는 "솔로몬 왕의 보물"에 비하면 한참 재미없습니다. 일단 고대 유적이나 여왕에 대한 묘사가 너무 장황하고 뻔해서 지루합니다. 특히 여왕을 만나고 나서부터 여왕과 홀리의 대화 중심으로 철학적이고 시적인 묘사가 늘어나면서 더욱 지루해지더군요. 실질적으로 일행의 모험도 초반의 늪지대 돌파와 아마하가 부족 마을에서의 사투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인상적인 것도, 재미있는 것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여왕의 "아름다움"이라는 설정때문이긴 하지만 레오가 가문의 복수와 사랑하는 여인의 복수조차 너무 손쉽게 잊어버리는 등 이야기의 비약이 너무 심한 것이 문제라 할 수 있겠네요. 해거드 자신도 6주만에 다 써내려 갔다고 하니 좀 대충 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잃어버린 지평선"이 생각나는 엔딩으로 끝나는 끝맺음도 어느정도 예상한 부분이지만 조금 맥이 빠집니다. 엔딩이 너무 확실한 편이라 어떻게 속편이 나왔는지는 조금 궁금해지더군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나름의 원조로서의 품격과 가치는 분명하지만 또 읽게될 것 같지는 않네요.

2014/02/27

반전 - 아이작 아시모프 외 / 박준형 : 별점 2.5점

지금은 절판된 앤솔러지입니다. 하우미스터리의 벼룩시장을 통해 구입하였습니다.

약 20여년 전 출간되었는데, 편저자가 여러 단편집을 읽은 뒤 멋진 반전이 있는 작품만 엄선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마 저작권 개념은 없이 출간되었으리라 생각되는데, 모두 13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

  • 노래하는 종
  • 황금알을 낳는 거위
  • 반중력 당구공
프레데릭 포사이스

  • 제왕
  • 면책특권
  • 완전한 죽음

제프리 아처

  • 뉴욕에서의 하룻밤
  • 구식 사랑
  • 깨어진 습관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크리스티나 브랜드)

  • 이 집에 축복 있으라
  • 메리 고 라운드
  • 너무나 선량한 남자
  • 살인 게임

소개 작가의 면면만 보아도 화려하죠? 작품들도 반전을 테마로 한 앤솔러지답게 "기묘한 맛" 류의 작품들이 많은데 모두 기본 이상은 해 줍니다.
아시모프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영국작가의 작품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지극히 영국적인 사고방식(지나칠 정도의 계급의식과 체면치레)이 작품에 강하게 드러난다는 점도 독특했어요.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미 다른 앤솔러지로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 8편입니다... 결국 딱 5편만을 위해 구입한 셈이죠. 그런데 그 5편 중 가장 기대가 컸던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크리스티나 브랜드)의 작품 4편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수록작들의 가치만 놓고 보면 별점 3점 이상은 충분하겠지만, 읽지 않은 5편만의 평균 별점은 2.3점.. 조금 올려도 2.5점밖에는 못 주겠네요. 어렵게 구한 고서당 류 책인데,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덧붙이자면,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는데 선정된 단편이 모두 가장 우수하고 뛰어난 반전을 가진 작품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프레데릭 포사이스, 제프리 아처의 작품은 작품의 수준을 떠나 반전만 놓고보면 여기 수록작보다 뛰어난 작품이 많거든요.

때문에 혹 관심있으신 분들께는 여기 수록된 작품들이 전부 수록된 작가별 단편집 쪽을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물론 이 책이나 원래 단편집이나 절판된 것은 마찬가지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니까요.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약간의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

"노래하는 종"

이미 다른 앤솔러지에서 접했던 유명 단편.

"달과 지구의 중력 차이는 몸이 기억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다"는 과학 상식에 바탕을 둔 추리가 돋보이는 SF 추리물입니다. 1954년에 발표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에요.
또 외계환경공학자이지만 우주선도 타지 못하는 천재인 웬델 어스 박사 캐릭터가 인상적이라 찾아보니 역시나 시리즈가 있더군요! 다른 웬델 어스 시리즈도 읽고 싶은데 과연 언제나 가능할지...

"황금알을 낳는 거위"

역시나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어딘가에서 읽었었던 작품.

그런데 반전은 없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 대한 과학적인 고찰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단편집 성격과는 거리가 멉니다. 별로 재미있게 느껴지지도 않았고요. 어려운 과학 이론을 소설처럼 쉽게 쓰는 작가의 능력은 잘 보여주지만, 보편적으로 인기를 끌 작품은 아닙니다.

"반중력 당구공"

프리스와 브룸이라는 앙숙이 등장하여 "반중력"을 구현하는 쇼장에서 벌어진 사건을 다룬 작품. 반중력이 무엇인지에 대한 과학적 고찰이 뛰어나고 그곳에 들어간 당구공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 역시 설득력이 넘칩니다.

무엇보다도 반전이 앤솔러지 취지에 부합할만큼 괜찮아서 마음에 드네요. 결국 브룸의 거의 모든것을 차지하게 된 프리스 박사의 순간적 기지가 그것인데 과학적일 뿐더러 복선에도 충실하고 나름 여운도 남기니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프레데릭 포사이스 작품들"

단편집 "마지막 에이스"를 통해 접했던 작품들. "황홀한 죽음"이 "완전한 죽음"으로 제목이 바뀐 것 말고는 동일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에이스"에 수록된 작품들 중 최고작은 아니라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제왕"만큼은 다시 읽어보니 11년전에 읽었을 때와 다르게 상당히 흥미롭더군요. 당시는 제가 결혼 전이고 지금은 결혼 후이기 때문이겠죠. 왠지 저도 모리셔스로 떠나고 싶어집니다.

"제프리 아처 작품들"

역시나 단편집 "포기하기 힘든 유혹"을 통해 접했던 작품들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장 좋은 작품이 실려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구식 사랑"에는 반전은 등장하지도 않고요. 여기 수록된 작품들보다는 "포기하기 힘든 유혹"을 권해드립니다.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크리스티나 브랜드)"

"이 집에 축복 있으라"

자기 집에 어느날 찾아온 부부, 그리고 그날 밤 낳은 부부의 아들이 "예수"라고 확신하는 노부인에 대한 이야기. 평범한 일상 속 광기와 광기가 충돌한다는 설정의 "기묘한 맛" 류 단편으로 서늘한 느낌은 확실히 전해줍니다.

그러나 죠셉, 마를린 부부의 사고방식은 좀 이해가 안되네요. 메이스 부인과 본 부인을 처치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요? 단지 시점의 문제지... 아기가 있다고 집을 얻기 힘들다는 것도 너무 오버가 심한 것 같고 말이죠. 때문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메리 고 라운드"

포르노 사진을 둘러싼 스캔들과 살인을 다룬 작품. 협박자가 협박하던 재료 (포르노 사진)가 협박자를 살해한 범인을 통해 다시 협박에 사용된다는, 약간 윤회와 같은 구성이 독특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부모들의 범죄를 알고 있었다라는 결말은 좀 약했어요. "그때문에 언젠가 이득을 볼지도 모른다"라는 구절을 조금 더 강조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죠. 그냥저냥한 평작이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너무나 선량한 남자"

기묘한 정신병을 가진 남자를 그린 짤막한 소품.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병적, 범죄적으로 비튼 작품이랄까요? 솔직히 이해도 잘 안되고 공감도 안되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

"살인 게임"

범죄자와 범죄 피해자의 아이들을 돌봐온 인격자 재미니 변호사가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수수께끼와 같은 절규 -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사라졌어! 긴 팔!" - 를 남겼다. 곧바로 출동한 경찰은 방문이 잠긴 재미니의 5층 사무실에서 그의 시체를 발견했다. 창문은 막 깨진 듯 흔들리고, 칼에 찔린 상처에서는 아직 피가 나고 있었지만 범인은 찾아볼 수 없었다. 뒤이어 비슷한 전화를 남긴 경찰 한 명이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어 사건은 더욱 미궁에 빠지게 되는데...

기묘한 밀실트릭이 등장하는 본격물. 초, 중반부에 유력한 용의자를 한명씩 등장시킨 뒤, 용의자가 가능했을 범죄의 방식을 논하는 문답식 전개 방식이 독특했습니다. 한니발 렉터를 연상케하는 탐정역의 노인도 인상적이었고요. 마무리에서 노인이 쟈일스의 할아버지일 것이라는 여운을 짙게 남기는 것도 작위적이기는 하나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기대에 미쳤다 보기 어렵습니다. 트릭이 너무 별로이기 때문이죠. 우선, 전화 목소리가 피해자를 가장한 범인의 목소리였다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반칙이라 생각됩니다. 아무리 경황이 없어도 경찰들이 같이 출동한 동료가 누구인지 몰랐을거라 단정하는건 경찰을 너무 물로 보는 느낌이고요. 작위적이고 우연에 의지한 전개(갑작스러운 비에 레인코트를 입지 않은 것을 목격하고 알리바이에 이용한다던가)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작가의 이름값이나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많이 처지는데,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라는 명성은 장편에서만 유효한가 싶은 생각도 드네요.

2005/07/13

엘러리 퀸 미스터리 매거진 (EQMM) 1,2 : 각권 별점 3점


유명한 단편 추리 전문 잡지 엘러리 퀸 미스터리 매거진(EQMM) 한국판 1, 2호. 우연찮게 헌책방에서 발견해서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워낙 유명해서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겠죠? 짧게만 소개해 드리자면, 추리작가 엘러리 퀸이 간행하기 시작한 잡지로 유명한 단편 앤솔로지나 단편집, 단편 작가들은 거의 다 여기를 통해서 알려지고 배출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에드가상 단편 부분 수상작으로도 선정된 작품도 많은, 그야말로 단편의 보물창고 같은 잡지죠.

각 권별 전체 평균 별점은 3점. 제가 뽑은 베스트는 1호에서는 "여행중에 생긴 일". 2호에서는 "평생동안의 기다림"과 "클레머티스의 향기" 입니다. 2호보다는 1호가 좀 더 고전파에 가깝다 보이는데 취향에 맞춰 골라보는 재미도 쏠솔하네요. 그러나 한국판은 제가 알기로는 2호가 마지막인듯 싶군요. 좋은 기획인데 역시나 판매부수가 문제였을테죠. 단편 추리물 팬으로서 무척 아쉬운 일입니다. 이 정도 두께와 가격에 이 정도의 수준을 보여주는 잡지라면 계속 구입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이후에도 계속 출간되었으면 합니다만... 힘들겠죠?

수록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1호 수록작
"욕실살인"
나름대로 개인적 인연이 약간 (아주 약간!) 있는 에드워드 D 호크의 작품으로 아무도 없는 욕실 안에서 단검에 찔려 살해된 시체때문에 범인으로 몰리는 백화점 직원 수잔 홀트의 이야기입니다. 수잔 홀트는 수많은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 중 한명인 모양이네요. 에드워드 D 호크 특유의 "불가능 범죄" 이야기를 잘 풀어나가고 있기는 하나 트릭은 좀 시시한 편입니다. 별점은 2.5점.

"여행중에 생긴 일"
보험 조사원 숀 콜란 (마스터 키튼? ^^)이 우연히 여행 중 사고를 당해 한 농장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농장 여주인 남편의 교통 사고를 알고나서 나름의 호감과 정의감으로 보험금을 받게 해 주려고 애쓰던 중, 이유를 알 수 없는 습격을 받게 된다는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이런저런 앤솔로지에서 몇번 접해보았던 도그 앨린의 작품으로 단편보다는 중편에 가까운 길이지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한편의 영화처럼 서스펜스 가득한, 긴박감이 넘치는 묘사가 일품이었기 때문이에요. 마지막 부분에 공격받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설명해 주는 부분도 아주 좋았고요. 그야말로 무릎을 칠 만 했달까요. 별점은 4점!  1호의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여자의 행복조건"
생소한 작가 도날드 올슨의 작품. 유산을 둘러싸고 조카딸의 도박꾼 남편 윌리와 베스타 이모가 대결한다는 일종의 완전범죄물로 도박꾼이자 인간 쓰레기인 윌리라는 인물과의 두뇌싸움이 흥미진진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놀라운 돼지들"
역시나 생소한 작가 조지 체스브로의 작품. 시리즈 캐릭터라고 하는 갈쓰 프레더릭슨이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돼지를 둘러싼 소송때문에 갈쓰가 머리를 써서 소송을 낸 사기꾼 어크맨을 속여먹는 부분은 좋았는데 후반부가 황당해서 점수를 다 깎아먹네요. 상상력은 기발한데...글쎄요, 저는 적응이 잘 안되더라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계산 착오"
완전 범죄를 노리는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
여성작가 캔디스 앨리엇의 작품으로 '현대 범죄에서 동기는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어지거나 분석되지 않는다'는 뒷부분 작품 해설처럼 동기보다는 완전 범죄를 위한 주인공의 계획에 촛점이 맞춰지고 있습니다. 나름 설득력있는 발상이라고 생각되네요. 제목에서 암시하는 것 처럼 결국 완전 범죄는 실패로 돌아가는게 문제지만...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다쟁이의 질투"
존 몰티머의 작품으로 원래는 TV용 시나리오였다고 합니다. 짧지만 변호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긴박감있는 법정 장면까지 보여주는 알차고 임팩트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정통 추리물로 보기에는 어렵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호 수록작
"비상을 꿈꾸며"
클라크 하워드의 작품으로 악당 조직의 두목이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인물을 없애기 위해 항공기 관제사 제드의 가족을 인질로 삼는다는 인질극입니다.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서스펜스와 스릴이 확실해서 시종일관 긴장을 늦추지 않게 만드는 전개는 대단하더군요. 허나 마지막이 너무 허무한 편이라 아쉽습니다. 단편의 한계였던 것일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이번엔 진짜 실탄?"
윌리엄 뱅키어의 작품입니다. 30여년만에 고향에 돌아온 조 헉은 보험 사기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현재 도피중인 인물이라는 이야기로 두번의 반전이 돋보입니다. 충격적이거나 놀랍다기 보다는 아기자기한 소품같은 느낌이 좋고, 해피엔딩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악녀의 죽음"
피터 턴블의 드라마에 가까운 소품. 우연하게 순찰경관이 발견한 방치된 차에서 범죄가 드러나는 과정, 그리고 범인의 심리를 밝히는 결말부가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정통 추리물은 아니지만 작가가 글을 참 잘 쓴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평생동안의 기다림"
1호에도 실려있는 도날드 올슨의 작품입니다. 이 작가 EQMM과 인연이 깊나 보네요. 두명의 노파가 등장하여 갈등관계를 보여주다가 한 노파가 고향 마을로 여행을 떠난다는 단순한 내용인데 범죄와 드라마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 깊이있는 전개가 인상적인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트릭보다는 드라마가 중시되는 현대 추리 단편의 좋은 예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3.5점입니다.

"페트라코브와 고릴라"
러시아에서 망명한 병리학자 일리아 페트라코브 시리즈로 벤 클라인의 작품입니다. 동물농장의 주인이 고릴라 우리에서 굉장한 힘으로 짓이겨져 타이어에 쑤셔넣어져 있는 시체로 발견되고 범인으로 의심받는 고릴라가 사형(?) 당할 위기에 처한다는 이야기로 캐릭터 측면에서는 손다이크 박사가, 수사 측면에서는 CSI 느낌이 많이 나는 단편이었습니다. 괜찮긴한데 시리즈 캐릭터라는 병리학자 일리아의 매력이 별로 드러나지 않는 것은 단점으로 보입니다.별점은 2.5점입니다.

"콜럼버스의 얼굴을 훔친 사나이"
에드워드 D 호크의 괴도 닉 벨벳 시리즈로 거대한 콜럼버스 동상의 11톤이나 되는 머리 부분만 훔쳐내는 이야기입니다. 유명한 시리즈이긴하나 전개와 설정 모두 납득이 잘 가지 않는 평균 이하의 작품이었습니다. 작가와 시리즈 명성에 비하면 무척 실망스럽더군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비밀을 털어 놓은 남자"
H.R.F 키팅의 인도 봄베이 경찰국의 가니쉬 고케 경감이 등장하는 단편으로 시리즈라고 하는군요. 일종의 "윤회"를 테마로 하고 있는 지적이면서도 몽환적인 단편이었습니다. 추리적으로 별로 눈여겨 볼 것은 없지만 문체와 전개방식이 독특해서 읽는 맛은 좋았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클레머티스의 향기"
미뇽 F 발라드의 작품으로 한 노처녀의 의문의 죽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정통 추리에 가까운 작품으로 애거서 여사의 단편같은 느낌의, 영국 정통 추리물의 명맥을 잇는 듯한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럼 비지니스"
마가렛 요크의 그랜트 교수가 등장하는 시리즈 단편. 내용과 전개방식은 고전적이고 정통 추리물에 가까우나 사건의 해결 방식이 쉽게 납득 되지 않고 그다지 공정한 편은 아니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었습니다. 갑자기 마약 밀매로 이야기가 급진전 되는 것도 문제있는 설정으로 보이네요. 그냥저냥한 작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2016/11/20

별도 없는 한밤에 - 스티븐 킹 / 장성주 : 별점 3점

별도 없는 한밤에 - 6점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황금가지

호러의 제왕 스티븐 킹의 중단편집입니다. "사계"처럼 4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품들 모두 어디선가 봤던 설정들이 대부분인 탓에 아이디어는 대단치 않습니다. 대단한 복선이나 극적인 반전이 있지도 않고요. 그러나 독자를 몰입시키는 능력은 정말이지 극에 달해 있습니다. 읽으면서 정말이지 손에서 떼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600쪽 가까운 분량을 하루에 읽을 정도로 말이죠.

한마디로 왜 제왕이 제왕인지를 다시금 느낄 수 있게 하는 단편집입니다. 스티븐 킹과 장르 소설 애호가분들 모두에게 추천드립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1922

1922년, 네브래스카 주 헤밍퍼드홈에 사는 윌프리드 릴런드 제임스는 아들 행크와 함께 아내 알렛을 살해했다. 이유는 그녀가 땅을 팔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뒤, 그의 삶은 지옥으로 변해갔다. 시체를 은닉하던 중, 쥐떼에 뜯어먹히던 처참한 아내의 시체를 목격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서서히 정신적으로 붕괴되어 가던 아들 행크는 이웃집 딸 섀넌을 임신시켰지만, 섀넌의 아버지가 둘을 갈라놓자 가출했다. 그리고 섀넌을 되찾기 위해 강도가 되고 말았다. 결국 섀넌을 만나 도주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연인 강도단'으로 연이어 강도 행각을 벌이다가 둘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쥐에 물린 상처로 사경을 헤매이던 중, 아내의 유령과 함께 행크의 최후를 실시간으로 바라본 제임스는 이후 팔 하나와 그렇게까지 지키려 했던 땅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끝까지 가기 싫어했던 오마하로 가 홀로 8년을 버티다가 자살했다....

"자살한 사람과 살인자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길을 못 찾아서 헤멜 일은 없을 것이다. 지난 8년간 나는 그곳에서 살았으니까."

아들과 함께 아내를 죽인 뒤, 파멸해 가는 남자를 1인칭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내용은 별게 없습니다. 아내를 죽인 뒤 죄책감과 공포로 인해 서서히 붕괴해가는 주인공, 마찬가지로 비정상이 되어가는 아들 행크, 그리고 그 둘의 삶에 휩쓸려 무너져가는 이웃들을 그려내는 적나라한 묘사가 전부입니다. 이렇게 범죄, 살인 이후 무너져가는 인물을 그린 작품이야 "죄와 벌"을 비롯해서 차고 넘칠 정도로 많지요.

그러나 이런 뻔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제왕의 필력이 너무나 압도적인 덕분에 읽는 내내 손에서 떼기 힘듭니다. 그야말로 생지옥이 펼쳐지거든요. 220여 페이지에 달하는 중편인데 거의 모든 페이지에 공포와 혐오, 증오가 가득차 있습니다.

단순히 죄책감에서 비롯된 심리 묘사뿐 아니라 제왕다운 고어한 묘사도 대단합니다. 그 중에서도 누구나 혐오스러워하는 '쥐'를 매개체로 한 일련의 묘사는 정말 최고에요. 아내의 시체는 물론 자살한 아들 시체까지 쥐에게 파먹히고, 본인 스스로는 환각을 보고 자기 자신을 씹어먹어 죽는다는 결말에 이르는 과정까지의 묘사는 흡사 크리쳐물을 읽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어요.

그리고 생지옥에 대한 고어스러운 묘사만 반복적으로 펼쳐졌다면 조금은 둔감해질 수도 있었을텐데, 순수했던 아들 행크가 변해가는 과정과 천사와 다름없었던 희생자 섀넌과 같은 피해자들에 대한 묘사로 극적인 효과를 배가시킵니다.

무엇보다도 아이러니라면 알렛이 한 말대로 했더라면, 이 가족은 최소한 지옥을 겪지 않았으리라는 점입니다. 특히나 만취한 알렛의 주정을 통해 행크가 어머니 살해를 결심하게 만든 "임신은 시키지 마. 원 없이 훑어도 좋아, 네 물건이 만족해서 토할 때까지. 하지만 안에다 토하면 절대 안 돼. 그랬다간 엄마랑 아빠처럼 평생 한 집에 갇혀 살게 될 테니까"라는 말은 정말로 진실이었어요. 최소한 행크가 임신만이라도 시키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역시 어른들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네요.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상황부터가 문제이긴 해요. 아무리 아내를 'bitch'로 묘사했더라도 아내를 살해하는데 아들을 끌어들인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인지라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누가 보아도 인간 이하의 범죄니까요.

또 흔한 설정만큼 캐릭터들도 진부합니다. 책을 좋아하며 소들에게 여신들 이름을 붙여주는 주인공 제임스도 기시감이 많이 들지만, 행크와 섀넌이 강도가 되어 극으로 달리는 부분은 '보니 앤 클라이드' 그 자체입니다. 여기서 보니와 클라이드는 범죄에 중독된 것이라 하더라도, 행크가 섀넌을 만난 이후 강도행각을 계속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건 문제에요. 아울러 장점이라고는 했지만 행크와 섀넌을 다룬 부분은 약간 신파 멜로물같을 정도로 지나치게 감성적이라 호불호가 조금은 갈리지 않을까 생각되고요. 주인공이 결국 땅을 잃는 과정도 뻔하고 작위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류의 작품 초심자는 견디기 힘들 정도의 섬찟한 작품이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뭐 이 책을 읽으시려는 분들께는 당연히 칭찬이겠죠?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5점. 장점, 단점이 명확한데 읽는 내내 눈길을 떼기 힘든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빅 드라이버

'뜨개질 클럽 시리즈'라는 코지 미스터리 시리즈를 쓰는 추리작가 테스는 강연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 남자를 만나 강간당해 버려졌다. 시체가 쌓여있던 현장에서 겨우 도망쳐 나온 후, 그녀는 스스로 복수할 것을 결심하고 단서를 찾아 나서는데...

전작과 마찬가지로 설정은 뻔합니다. 성폭행 피해자가 스스로 범인을 단죄한다는 복수극은 널리고 널렸죠. 영화 쪽으로는 "네 무덤에 피를 뱉어라"라던가, 본 작에서도 언급된 "왼편 마지막 집" 등등이 떠오르네요.

하지만 독자를 사로잡는 매력은 전편 못지 않습니다. 특히 한편의 범죄 스릴러로 손색 없는 디테일이 아주 좋아요. 테스가 강간범의 모습을 떠올리고, 범행의 강연회를 주선한 라모나 노빌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 그녀의 주변을 캐고 범인이 어디 사는 누구인지 확인하여 복수를 위해 벌이는 과정이 생생하며 설득력이 높은 덕분입니다.

복수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돌발상황, 예를 들어 라모나 노빌이 진짜 사건에 연루된 것이 맞는지?에 대한 고민, 라모나에게 총을 빼앗기는 상황, 그리고 처음 죽인 남자가 범인인 동생이 아니라 큰 형 빅 드라이버였다 등의 상황이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것도 읽는 내내 흥미를 더해 주고요.

아울러 코지 미스터리 작가인 주인공 테스도 마음에 듭니다. 성격적으로 아주 개성이 넘친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코지 미스터리 작가가 하드보일드스러운 응징을 계획하고 수행한다는 이질적인 매력에 더해 애완동물이나 네비게이션 등과 대화하면서 디테일을 잡아나간다는 묘사, 작품을 위해 권총을 사고 사격 연습을 받았다는 식으로 그녀의 작가적 능력 몇 가지가 이야기에 도움을 준다는 아이디어가 괜찮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경찰에 신고하기 전, 자신에게 닥칠 상황을 상상하고 신고 대신 복수를 선택하는 장면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피해자가 또다른 피해를 우려하여 신고를 포기한다는 이야기는 참 여러모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네요.

하지만 "1922"에 비해서 완성도가 높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앞서 범죄물로서 괜찮은 연결고리를 갖추었다고는 했지만, 라모나 노빌 - 레스터 스트렐키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너무 뚜렷해서 딱히 추리의 여지가 없는 탓이 큽니다. 대놓고 '내가 범인입니다' 라는 식인데 그런 것 치고는 연쇄 강간-살인이 너무 오래 지속된 거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테스가 실종되었다면 마지막 강연 의뢰인인 라모나에게 경찰 수사가 미쳤으리라는 것은 불보듯 뻔한데, 테스의 귀걸이를 라모나가 가지고 있다는 것도 석연치 않았습니다. 팔기도 뭐하고, 잘못 들통나기라도 하면 명백한 증거가 될 텐데 너무 부자연스러워요.

마지막으로 빅 드라이버를 죽인 후 자살을 기도하던 테스의 죄책감이 사라질 만큼 빅 드라이버 역시 사건에 깊숙이 개입한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과정, 유일한 증인이 될 수 있는 벳시 닐이 마찬가지로 성폭행 피해자로 범행을 눈감아 준다는 결말은 지나칠 정도로 작위적입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딸자식 가진 부모로서 분노를 가지고 몰입해서 읽기는 했지만 명확한 단점으로 감점합니다.

덧붙이자면, 2014년 TV용 영화로 영상화가 되었더군요. 그런데 예고편을 보니 작중 애완동물, 네비게이션과 1:1로 나누는 대화 부분을 테스의 인기 시리즈 '뜨개질 클럽' 주인공 할머니가 가상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살짝 각색이 된 듯 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 중 하난데 이렇게 각색을 하다니... 여러모로 딱히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네요.

공정한 거래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던 스트리터는 우연히 만난 노점상 엘비드와 거래했다. 그의 수명을 늘리려면 누군가에게 그것을 옮겨야 했고, 스트리터는 불알친구 톰을 미워한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 씨발놈이 내 여자를 뺏어 갔다고요!"

악마와 거래한다는 내용의 작품 역시 쎄고 쎘죠. 굳이 예를 들자면 졸문 "계약은 충실하게"가 있고요.

그래도 노점상이 악마라는 것에서 시작하여, 시한부 인생 대신 15년 이상의 수명을 약속하고 이후 받게 될 수익의 15%를 요구한다는 등의 디테일은 독특했습니다.
또 거래 후 톰에게 닥치는 불행의 연쇄반응 역시 스티븐 킹답더군요. 과정이 정말 끔찍하기 그지 없거든요. 1인칭으로 그리면 1922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죠. 아울러 스트리터와 톰의 행복 - 불행의 지수가 한쪽에 쏠리는 일종의 '행복 질량 보존 법칙' 같은, 흡사 동양의 윤회 사상 비스무레한 전개도 볼 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처지긴 합니다. 악마와의 거래 후에는 일방적인 행복 - 불행의 과정만 나열될 뿐 딱히 반전도 없고 결말도 애매한 탓입니다. 스트리터가 톰이 가졌던 행운까지 차지하고 만다는 결말은 영 와 닿지 않았어요. 악마와의 거래가 이렇게 해피 엔딩으로 끝날 리가 없는데 말이지요.

하긴, 애초에 스트리터가 톰을 팔아넘긴 것도 딱히 설득력이 없습니다. 여자를 빼앗긴 남자는 그게 수십 년이 지나더라도 복수한다는 교훈을 주려고 했던 걸까요? 저는 솔직히 스트리터가 가공할 정도로 찌질하고 속이 좁다는 느낌밖에는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다른 악마와의 거래 소재 작품에 비하면 딱히 쳐줄 부분이 없는 소품입니다. 딱히 찾아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

다아시는 1982년에 만난 회계사 밥 앤더슨과 결혼하여 27년간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오던 중, 우연히 밥이 유명한 연쇄살인마 '비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밥이 출장간 어느 날 리모컨 건전지를 찾기 위해 차고를 뒤지다가 밥의 비밀 창고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뭐 이 역시 소재는 뻔합니다. 아내, 혹은 남편에게 자신의 정체를 비밀로 한 배우자, 혹은 다른 가족을 다룬 작품은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수많은 슈퍼 히어로물이 대체로 그러하고, "트루 라이즈" 같은 작품 역시 마찬가지겠죠. 이 작품처럼 배우자가 범죄자라는 설정 역시 많고요.

이런 류의 작품은 보통 배우자의 정체를 눈치챈 순간부터 극적 긴장감이 생기는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결말 두 가지, 즉 '배우자의 은밀한 생활에 동참하거나', '그만두게 하거나' 중 '그만두게 하는' 쪽으로 흘러가는 것 역시 예상대로에요. 보통의 드라마가 부부 동반으로 비밀 정보원이 되거나 슈퍼 히어로가 된다면, 살인마 이야기는 함께 하는 쪽보다는 그만두게 하는게 정상이니 당연하지요. 결국 다아시가 밥을 죽인다는 결말도 솔직히 너무 뻔했어요.

하지만 거장의 솜씨가 작품을 살립니다. 우선은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묘사가 대박입니다. 다아시가 밥의 비밀 창고를 발견하는 과정과 정체를 알아가는 과정의 묘사, 이후 자신의 정체를 아내가 알았다는 것을 눈치챈 밥이 다아시에게 찾아가 이야기하는 장면 묘사 등에서 서늘함과 긴장감이 잘 살아 있는 덕분입니다. 아들과 딸을 생각하여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는 다아시의 딜레마 역시 설득력 있어서 뻔한 전개에 충분한 긴장감을 불어넣어 줍니다.

결말도 뻔하지만 노형사 홀트가 등장하여 깔끔하게 마무리하는건 마음에 들었습니다. 밥의 잔인한 범행을 경찰 입으로 밝혀주면서 응징의 정당성을 높여주면서, 결국 다아시가 밥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체포되었을 것이라는 말로 다아시의 죄책감을 줄이는 좋은 선택이었다 생각되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뻔한 소재로도 볼만한 이야기를 뽑아내는 거장의 솜씨를 볼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이래저래 많은 공부가 되었어요. 과연 비슷한 소재로 쓸 때 저라면 어떻게 쓸지, 한번 고민해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