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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4

웃어라, 샤일록 - 나카야마 시치리 / 민현주 : 별점 2점

웃어라, 샤일록 - 4점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민현주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데이토 제일 은행의 젊은 엘리트 은행원 유키 신고는 은행 섭외부로 발령받았다. 섭외부는 부실 채권을 회수하는 곳이었다. 은행의 주요 업무가 아니라는 점에서 낙담했지만, 곧바로 그곳의 에이스 야마가의 활약을 보고 채권 회수의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야마가는 살해된채 발견되었고, 유키는 도자이 은행과 합병 시 부실 채권이 많으면 데이토 제일 은행이 불리해 질 것이라는 말을 듣고 야마가가 맡았던 거액의 부실 채권 회수에 나서는데...

여러 편의 본격 추리물로 잘 알려져 있는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입니다. 

채권자가 채무자로부터 빚을 받아내는 이야기가 중심이라는 점에서는 "우시지마" 시리즈를 연상케 하기는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여기서 채권자 데이토 제일 은행은 불법은 저지르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빚을 받아내는 행위가 일종의 선행이자 일본의 경제를 살리는 초석처럼 그려진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채무자 쪽이 더 악질로 그려진다는 점에서 "우시지마"와는 정 반대, 대척점에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은행에서 발생하는 대출에 대한 묘사는 상세했고, 특히 야마가의 입을 빈 자본 선순환, 그리고 은행의 잘못된 관행으로 부실 채권이 쌓여가는 이유 등 반쯤 전문적인 이론들을 이야기와 잘 결합하여 설명하고 있는 덕분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야마가는 채무자에게 원한을 사서 죽었다고 생각되었지만, 밝혀지는 실제 동기가 괜찮았어요. 등장하는 대부분의 부실 채권이 섭외부 부장 가시야마가 결재를 올렸다는 설정이어서 의아했는데 이를 복선처럼 잘 활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실 채권은 결재자였던 가시야마의 상사 진나이의 음모였던 것이지요. 진나이는 데이토 제일 은행에 부실 채권을 잔뜩 만들어 몇 년 뒤로 예정된 합병 시 도자이 은행이 주도권을 쥐게 만드려는 작전을 실행했고, 그 댓가로 도자이 은행 섭외부 부장으로 이직할 수 있었습니다. 야마가는 이를 추궁하기 위해 진나이를 만났다가 살해당한 것이고요.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인 빚을 받아내는 내용은 기대만큼 정교하게 그려지지는 못합니다. 조금 자세히 살펴보자면, 첫 번째 채무자 가시와다의 경우, 그의 빚은 5백만엔밖에 안되고, 가시와다 명의의 땅이 있어서 미리 가압류만 걸어두면 즉시 회수가 가능했습니다. 이건 야마가가 딱히 뭘 했다고 보기 어려워요. 

두 번째 채무자 인더스트리아 공업과 사장 쓰치야 고타로의 채무 1억 4천만엔도 회사 특허로 갚을 수 있었습니다. 파산 시키겠다고 협박하면서 쓰치야 사장을 정신적으로 넉다운시키는 장면은 인상적이었지만, 애초에 불필요한 협상이자 논쟁입니다. 모욕을 주지 않아도, 쓰치야 사장에게 다른 선택권은 없었으니까요. 

야마가가 죽은 뒤 유키가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더 가관입니다. 우선 세 번째 채무자 가이에다 물산의 채무 20억엔은 '차환' 거래로 가이에다 물산을 분할한다는 해결책이 등장하는데, 섭외부의 일개 은행원이 아니라 최소 부장급은 나서야 하는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애초에 설득의 문제가 아닙니다. 20억엔이라는 엄청난 돈에 대한 비지니스 문제잖아요? 게다가 가이에다 사장을 '설득'시키기 위해 록가수 스미라기 신이치와의 마약 커넥션을 들먹인 것도 억지스러웠고요. 

네 번째 채무자인 종교단체 쇼도관의 채무 20억엔, 다섯 번째 채무자인 전 유력 정치인 시이나의 채무 20억엔, 여섯 번째 채무자인 야쿠자의 프런트 기업'아칼 에스테이트'의 채무 70억엔 해결은 그냥 만화같습니다. 쇼도관에는 신도 8만명에게 교주의 경이 담긴 CD를 팔아서 돈을 회수하라고 하고, 시이나의 경우는 담보물이었던 싸구려 그림의 가치를 억지로 높여 경매에서 빚을 벌어 들이고, 야쿠자에게는 빚 담보인 땅을 팔아서 돈을 갚은 뒤 그 곳에 새로운 개념의 맨션을 만들어 수익을 창출하라는 일종의 경영 컨설팅을 해주는 식이거든요. 애초에 이런걸 왜 일개 은행원이 하고 있는걸까요? 변제 계획을 세워 주는 것도 은행원의 할 일이라고 말하지만, 은행원의 변제 계획은 가진 자산에서 최대한을 뽑아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런저런 작전과 컨설팅으로 이익을 창출하는건 아니지요. 작전들도 너무 무난하고 쉽게 전개되어서 극적 긴장감을 느끼기도 힘듭니다.

열혈 청년인 유키가 주인공으로 전면에 나서면서부터 뻔한 전개로 흘러가는 것도 아쉽습니다. 냉혈한 야마가를 주인공으로 한 독특한 일상계 추리물 이야기로 풀어가는게 훨씬 매력적이었을 거에요. 야마가가 가시와다 집을 방문했을 때처럼 말이지요. 처음에는 단순히 독촉차 방문한 것으로 여겨졌었지만, 야마가는 더러워진 집안 상태와 그의 아내는 열심히 일한다는 이야기를 통해 가시와다가 곧 이혼당해서 집을 팔게 될 거라는 걸 곧바로 추리해 내거든요. 하지만 유키에게는 이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요.

아울러 앞서 동기 부분은 괜찮았다고 말했지만, '동기'만 괜찮았을 뿐 실제로 진나이가 야마가를 죽였을리는 없다는 문제도 큽니다. 진나이가 결재를 했던 채권들이 모두 부실화되었다 한 들 이미 퇴직한 사람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일부러 부실화되었다는걸 증명하기도 쉽지는 않을테고요. 예를 들어 야쿠자 '아칼 에스테이트' 채권의 경우, 이야기 중에도 리먼 사태 등으로 운이 없었을 뿐, 대출 당시에는 충분히 말이 되는 사업이었다고 소개되고 있을 정도지요. 즉, 진나이의 고의성을 입증할 증거가 제시되고 있지 못해서, 범행에 설득력을 느끼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눈여겨 볼 부분이 거의 없는, 흔해빠진 일본식 전문가 슈퍼맨의 만사해결 이야기입니다. 별로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10/07/31

위대한 캣츠비 (2005) - 강도하 : 별점 3점

위대한 캣츠비 - 전6권 - 6점
강도하 지음/애니북스

웹툰작가 강도하의 출세작이자 대표작. 우연찮은 기회에 1회부터 정주행하기 시작해서 무려 5년만에 완독하게 되었습니다.

젊은 청춘들의 가슴아픈 사랑이 여운을 남기는 연출,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대사들, 그리고 이러한 연출과 대사를 뒷받침해주는 심리묘사가 탁월합니다. 하라 히데노리의 청춘 사랑 이야기 - 예를 들자면 "겨울 이야기"나 "내 집으로 와요" - 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물론 하라 히데노리의 20년전 만화들보다는, 웹툰의 강점을 이용한 컬러와 세로로 긴 그림들, 다양한 구도 및 완성도 높은 뎃셍력으로 진일보한 묘사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한계도 분명합니다. 사랑 이야기 말고는 현실을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하라 히데노리 작품과 비교해 본다면, 하라 히데노리의 주인공들은 항상 사랑과 자신의 현실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어쨌건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삶의 지상 과제인 재수생 히까루, 사진작가로 성장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시오무라 미키오 둘 모두에게서는 현실의 무게가 짙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현실이 결국 사랑을 잃게 되는 계기가 되고요.
이들에 비교한다면 백수로 친구에게 얹혀살며 구직 활동도 열심히 하지 않는 캣츠비에게서 느낄 수 있는 현실감?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아무리 가슴 아픈 사연이라도 현재의 모습을 보면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지요. 그래서 사랑 타령만 늘어 놓는건 솔직히 한심하기 그지 없었어요. 
개와 고양이 등으로 그려진 캐릭터들로 짐작해 본다면, 작가도 이 작품이 현실과는 다른, 현실을 벗어난 판타지라고 생각하고 그린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어쨌건 제가 읽기에는 너무 '젊은' 작품이었어요. 5년 전에도 그림 하나만큼은 마음에 들어 꾸준히 봤었지만 감성을 이해하지 못해 중간에 포기했었는데 지금 역시 마찬가지에요. 사랑 이야기를 하기에는 현실이 더 고달프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렸으니까요. 사랑을 다룬 판타지보다는 사채꾼의 무서움을 다룬 "사채꾼 우시지마"가 지금의 저에겐 더 어울립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다 제가 나이를 너무 많이 먹은 탓입니다...

2026/05/15

친구가 사라졌다 - 가네시로 가즈키 / 양억관 : 별점 1점

화려한(?) 고교 생활을 보냈지만 지금은 평범한 생활을 보내던 대학생 미나가타에게 동급생 유토가 찾아왔다. 사라진 친구 기타자와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기타자와가 푹 빠졌었다는 연합서클 ESSC와 관련된 문제로 생각한 미나가타는 ESSC의 리더 시다와 대면했지만, 오히려 기타자와가 강간과 대마 밀매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가 사라졌다는걸 알게되는데...

"GO"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네시로 가즈키의 장편입니다. 몰랐는데 미나가타가 고등학교 때 활약했던 전작이 있습니다. 작 중에서도 전작의 활약이 자주 언급되고요. 하지만 이 작품만 읽어도 별 문제는 없습니다.

내용은 그대로 사라진 친구 기타자와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미나가타가 해결사처럼 움직이며 사건의 배후를 파고드는 전개로, 정통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청춘 범죄 활극에 가깝습니다.

장점은 분명합니다. 쉽게 읽힙니다. 한마디로 가독성이 좋은 책입니다. 문장은 빠르고, 장면 전환도 가벼우며, 크게 막히는 부분 없이 술술 넘어갑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읽는다면 금방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독성 외에는 전부 단점에 가깝습니다. 우선 설정부터 빈약합니다. 주인공 미나가타부터 그러합니다. 무언가 그럴듯한 과거가 있고 지금은 혼자 살면서 휴대폰과 TV도 없이 LP로 음악을 듣는 취미가 있으며, 유명 탤런트와 친구라는 등의 설정은 지나치게 멋을 부린 느낌입니다. 현 시점에 맞지도 않고요. 80~90년대 하루키 작품 주인공이 액션 영화 주인공이 된 느낌인데 영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단맛 쓴맛 다 본 인물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나이를 생각하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기껏해야 대학생인 주제에 무슨 대단한 경험을 했나 싶거든요. 이보다는 군대 갔다 와서 취업전선에 뛰어든 우리나라 20대 청년 경험이 더 화려할 겁니다.

미나가타 주변 인물들의 설정은 더 황당합니다. 미나가타에게 취미삼아 살인 격투술을 가르치는 노숙자 람보와 윌, 대학생으로 연합 서클 ESSC를 이끌며 군림하지만 이면에서는 개인정보를 이용해 협박과 조종을 일삼는 시다, 친구들을 돕다가 사적 복수 활동까지 시작한 여고생 리츠 등 만화로 보기에도 황당한 설정이 넘쳐납니다. 이들 모두 미나가타와 함께 이야기의 현실감을 떨어뜨리기만 합니다.

이야기도 허술합니다. 핵심인 '사라진 친구' 기타자와 실종 사건의 원인이 된, 유명 대학 서클 멤버의 음주 강간 사건은 와세다 대학 슈퍼 프리 사건을 그대로 따왔으며, 실종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도 치밀한 추리나 강한 긴장감이 만들어지지는 않는 탓입니다. 기타자와를 되찾는 작전도 별볼일없습니다. 결국은 미나가타의 개인기와 인맥에 의존하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리츠의 도움으로 야쿠자를 제압하는 게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이래서야 재미가 있을 수 없지요. 별로 통쾌하지도 않고요.

그리고 가장 불쾌했던 건 납치된 기타자와를 불쌍한 피해자처럼 그려내는 묘사입니다. 고바야시에게 성폭행당했던 과거가 현재의 그가 저지른 여대생 강간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작품은 성폭행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긴 탓에 그랬다면서 기타자와를 불쌍하게 보이도록 묘사합니다. 본인이 피해자였다고 해서 가해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이런 놈은 "사채꾼 우시지마"의 이벤트 서클 에피소드에서처럼 철저하게 부숴버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완성도도 별로이지만,  "콜드 게임"처럼 기본적인 윤리 의식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더 이상의 점수는 못 주겠네요. 가네시로 가즈키의 광팬이라면, 그리고 전작을 읽었다면 참고 삼아 읽어볼 만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추천하지 않습니다.

2015/06/15

우리집 - 사이바라 리에코 / 김문광 : 별점 3점

우리집 - 6점 사이바라 리에코 지음, 김문광 옮김/에이케이(AK)

힘들어도 사람은... 하나님이 허락해줄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가지 않으면 안돼. - 고이치

"만화가 상경기"를 읽고 리뷰를 남겼던, 괴짜로 유명한 작가의 대표작입니다.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이 적합한 세 남매를 중심으로, 남매와 여러 주변인물들 - 조폭, 약물중독자, 정신병자, 변태, 창녀들.... - 의 이야기가 짤막하게 이어지며 전개됩니다.

이야기 한편 한편은 "사채꾼 우시지마" 에피소드로 옮겨도 될 만큼 끔찍한데, 이러한 잔인하고 괴로운 밑바닥 인생들의 현실을 동화같은, 흡사 "보노보노"가 연상되는 그림체와 기이한 개그 감각으로 그려내었다는 갭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놀랍게도 이 만화는 개그만화거든요!

잔혹한 현실과 귀여운 그림체의 조합은 아사리 요시토오의 잔혹 동화도 떠오르지만, 아사리 요시토오 작품들은 모두 판타지나 SF처럼 현실이 아닌 세계를 무대로 하고 있는 것에 반해 이 작품은 황당할 정도로 비참한 현실을 그리고 있어서 더욱 큰 갭이 느껴집니다. 가난과 폭행, 방치와 무관심이 일상화된 세계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이야기니까요. 마냥 웃고 즐길 수도 없어요.

그래도 주인공들이 어떤 식으로든 조금씩 성장한다는건 약간 다행입니다. 누나의 짐이 되지 않으려는 잇타, 폭력의 세계에서 벗어나 어부가 되는 고이치, 빚을 다 갚는데 성공한 누나 등 어떤 식으로든 밑바닥 인생에서 올라설 발판은 마련하는걸로 보이니까요. 결국 가족이 해체되는 결말이기에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모두 성장한 만큼 미래에는 조금이나마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볼 수 있겠죠.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호불호가 갈릴게 뻔하지만 저에게는 진한 여운을 남기는 만화였습니다. 정말 행복이란게 별게 아니구나 싶게 만들기도 하고요. "자학의 시"를 재미있게 보셨다면 추천드립니다. 물론 이 작품은 "자학의 시"의 긍정적 결말과는 다르게 현실은 여전히 시궁창이라는 차이는 존재합니다만....

2017/11/17

인간증발 - 레나 모제, 스테판 르멜 / 이주영 : 별점 2점

인간증발 - 4점
레나 모제 지음, 스테판 르멜 사진, 이주영 옮김/책세상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에서는 매년 10만명이 실종되는데, 이 중 85,000명이 스스로 사라졌다는 충격적 사실로부터 시작되는 프랑스 작가의 논픽션입니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인터뷰 및 현장 취재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책 소개가 아주 흥미로왔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좀 많이 달라요. 우선 "인간 증발"에 대해 다루고는 있지만, 직접 인터뷰나 취재가 가능했던 특정 사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소문이나 저자의 추측에 의지하지 않는건 좋지만 큰 빚, 야쿠자의 협박 같은게 아니라 그냥 회사나 학교에서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혹은 오래전부터 짝사랑했다는 남편 직장 사장의 고백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증발 이유가 뜬금없고 황당한 것이 많아서 당황스러웠어요. 그나마 이 정도면 드라마라도 있는 편인데, 정말 뜬금없이 갑작스럽게 사라진 사례의 경우는 정말이지 와 닿지 않았어요.
또 스스로 증발을 택한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낙오자가 된 경우는 같은 레벨로 설명하면 안될텐데 좀 의아했습니다. "마키오의 고백, 증발 65년"은 가난과 학대로 집을 나와 떠돌던 마키오의 이야기인데 이건 스스로 택한 증발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마찬가지로 "부락민"이 차별받는다는 언급은 그 차별 때문에 증발한게 아니므로 사족에 불과했고요.
그 외 자살자에 대한 이야기나, 실종자를 찾는 탐정들 인터뷰, 사라진 가족이 북한에 갔을 것이라 믿는 어떤 가족의 이야기들도 주제에 적합한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핵심은 인간 증발이 아닙니다. 모든 취재와 인터뷰는 결국 "일본인은 체면이 중요하며 조직 내에서의 관계가 중요하다. 체면을 잃고 수치심을 느끼게 되면 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일본만의 특이성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큽니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도 틀린 말은 아닌데, 문제는 책 안에서 딱히 설득력 있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름 근거로 삼기 위하여 독특한 일본만의 사회, 문화를 보여주기 위한 이야기에 적지 않은 분량이 할애되는데 - "지옥의 캠프", "오타쿠의 성지", "토요타 시, 떠나거나 병들거나 미치거나" 등 - 억지스럽기만 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이상하다! 그런데? 그 다음이 없는거죠.
정말 저자가 자기 주장이 맞다고 이야기하려면, 이러한 일본만의 특수한 문화 소개 후 이것 때문에 증발한 사람의 사례를 연결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도 못했고, 증발의 원인이 저자의 주장 때문이 맞는지도 이 책에 실린 내용으로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여러모로 프랑스인이 통역을 써 가며 취재한 한계가 느껴졌습니다.

물론 기대에 값하는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증발이라는 말이 몸과 함께 과거를 씻어내고자 했던 도망자들이 온천을 찾은 것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처음 알았네요. 흔하게 이런저런 작품에서 많이 보아왔던, 회사에서 잘렸지만 출근하는 척을 하다가 결국 증발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는 점도 놀라왔고요. 탐정에게 의뢰하여 증발자를 찾았지만 가족이 재회를 거부한다던가, 인생 낙오자들이 후쿠시마에서 쓰레기 치우는 일을 하게 된다던가 하는 등의 이야기는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인간의 밑바닥을 볼 수 있는 기회라 물론 생각했는데 여러모로 실망스럽네요. 개인적인 문제로 야반 도주나 증발을 기도하는 사람들의 처절한 모습을 보려면 차라리 "사채꾼 우시지마" 를 보는게 나을 것 같습니다.

2016/10/17

살아있는 육체 - 루스 렌들 / 홍성영 : 별점 2.5점

살아있는 육체 - 6점
루스 렌들 지음, 홍성영 옮김/봄아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물여덟 살의 빅터 제너는 어느 날 공원 숲에서 한 여자를 겁탈하려다 실패했다. 뒤쫓아 오는 사람들을 피해 숲을 빠져나와 마을로 도망친 빅터는 빈집을 찾아 잠시 몸을 숨기려 했는데, 집안에 홀로 있던 젊은 여인이 소리를 지르며 창문을 깼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집을 포위했다. 빅터는 여자를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빅터는 이모부의 것이었던 루거 권총을 가지고 있었다. 빅터는 그 총이 진짜 총이니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하며, 여자를 놓아줄 것이니 도망칠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경찰이 그 총은 가짜 총이라며 말하면서 그의 말을 믿지 않자, 빅터는 경찰관인 데이비드 플리트우드의 척추 아랫부분을 향해 총탄을 발사했다. 총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진 플리트우드는 반신불수가 되고 마는데… 

평범함 속의 악의를 다루며 읽는 사람의 마음을 서늘하게 만드는 능력자인 — 개인적으로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여사와 동급으로 봅니다 — 여성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작가 루스 렌델 여사의 대표작입니다. 1986년 골든 대거상 수상작이지요.

경찰 데이비드 플리트우드 시점으로 인질극과 총격이 일어나는 27페이지 분량의 1장 이후, 392페이지까지는 범인 빅터 시점으로 전개되는 400여 페이지의 장편인데, 한 번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이 대단합니다. 

루스 렌델 여사 작품의 최고 강점인 심리 묘사 역시 탁월해요. 한 명이 반신불구가 되고, 한 명은 살해당하고, 몇 명의 여성들이 성폭행당하는 범죄 소설인데도, 범죄보다는 빅터가 처한 상황과 심리 묘사가 더욱 상세한 덕분입니다. 이런 점은 "활자 잔혹극 (유니스의 비밀)"과도 일맥상통하네요.

추리적으로는 특출난 점은 없지만 빅터의 범죄에 대한 상세한 묘사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플리트우드처럼 장애인으로 가장하여 도주하는 과정은 기가 막힙니다. 또, 이모부의 코트라고 생각했던 코트가 사실은 주프 씨의 것이고, 호주머니 속 박하사탕 껍질로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은 복선과 디테일이 잘 결합된 명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장점에도 불구하고,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이유는 주인공 빅터의 모든 것이 불쾌해서 읽는 내내 불쾌함이 가시지 않는 탓입니다. 그는 나이만 들었을 뿐 아이와 다를 바 없는 존재로, 모든 일을 남 탓하며 자기 합리화를 반복합니다.

- 플리트우드는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고 빅터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빅터는 극심한 스트레스나 압박감을 받을 때면 그런 일을 저질렀는데, 늘 그래 왔었다. 정신을 잃고 갑작스레 겁에 질려서 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죄를 묻고 살인미수죄를 씌우는 건 부당했다. (40p)

- 빅터는 플리트우드를 불구로 만든 것에 이모부의 책임이 얼마나 있는지 이따금 생각해보곤 했다. 시드니 이모부와 플리트우드, 그리고 로즈마리 스탠리도 각각 책임이 있었다. (81p)

- 빅터는 플리트우드가 고의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불구가 된 영웅을 우러러 본다는 걸 알고서 일부러 스스로에게 총을 쐈는지도 모른다. (127p)

무언가를 얻는 데 '노력'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없고, 한번 얻은 것은 영원히 자기 것이라 착각하는 자기 중심적인 태도 역시 문제에요.

- 빅터는 그녀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그에게 자리를 양보해 준 여자는 지금껏 아무도 없었다... (140p)

뮤리엘 이모에게서 돈을 훔친 뒤에도 "어차피 유산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등, 성범죄자이자 전과자인 주제에 모든 상황을 남 탓으로 돌리는 모습은 정말 최악입니다. 이러한 이기주의는 클레어와의 하룻밤 후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데이비드가 성기능이 없다는 이유로 그녀와의 관계를 정당화하고, 결국 폭주해 버리고 말이죠. 이처럼 타고난 악당이 막 나간다면, 차라리 확실히 끝장나 버리는 "내 안의 살인마" 같은 결말이 후련했을 텐데, 빅터가 감염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허무하게 죽어버려서 뒷 끝이 개운치 않습니다.

또, 빅터의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의 원인을 유년 시절 부모의 성관계 목격 경험에서 찾는 설정은 충격적이긴 했지만 불필요했습니다. 평범하고 사랑 넘치는 가정에서 단지 그 장면을 목격한 것만으로 괴물이 된다? 설득력이 약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인간쓰레기를 주인공으로 몰입감 있게 전개된다는 점은 "사채꾼 우시지마"와 비슷합니다. 두 번 읽고 싶지는 않다는 점까지요.

덧1: 전과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이 모든 건 빅터를 생생하게 그려낸 여사의 필력 덕분입니다. 특히 성범죄자에 대한 처우, 치료, 사회 복귀 문제에 있어 많은 고민을 하게 합니다.

덧2: 제목 "살아있는 육체"는 빅터를 상징하는 말일 겁니다. 살아있는 육체를 가졌지만 정신은 썩어있는, 그런 인간을 그렸다는 의미로 읽혔습니다.

2022/05/29

나쁜 토끼 - 와카타케 나나미 / 문승준 : 별점 2점

나쁜 토끼 - 4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무라 아키라는 가출 소녀 미치루를 찾는 의뢰를 수행하던 중 칼에 찔렸지만, 이 사건을 해결한 덕분에 로열 할리우드 호텔 체인 회장 다키자와의 의뢰를 받게 되었다. 미치루의 친구이기도 한 딸 미와를 찾아달라는 의뢰였다. 고압적인 다키자와 때문에 조사는 난항을 겪었지만, 미치루의 도움으로 공통의 친구였던 아야코가 미와 실종과 관련이 있다는걸 알아냈다. 그러나 아야코는 마약 중개인에게 살해당했고, 소녀들의 공통 친구인 가나도 실종되는 등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고, 결국 하무라 아키라도 납치 후 감금당하고 마는데....

와카타케 나나미의 이른바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첫 장편입니다. 국내 소개된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초기작이 지금 소개되는게 조금 뜻밖이네요. 

하무라 아키라의 불행은 이 작품에서도 화려하게 펼쳐집니다. 가출 소녀를 집으로 데려오는 간단한 의뢰에 미친 강간마 탐정이 끼어드는 바람에 격투 끝에 발이 부러지고, 친구가 교제하는 남자가 사악한 혼인 빙자 사기범이라는걸 알게 되고, 또 다른 실종 소녀를 찾는 의뢰는 자기 밖에 모르는 아버지 때문에 처음부터 고생하다가 납치 당해서 이틀 동안이나 갖히고, 마지막에는 사냥 게임의 사냥감으로 죽을 뻔 하니까요. 이 정도면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서도 불행과 고생으로는 1, 2위를 다툴만 합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딱히 건질건 없습니다. 오히려 억지스러운 설정 문제가 도드라집니다. 비교적 현실적이며, 일본의 현실에 잘 어울리는 하드보일드물이라고 여겨지는 후기작 - 특히 살인곰 서점 시리즈 - 과 비교하면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에요. 부유하지만 고압적인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다키자와 가족과 다이라 가족 묘사부터가 그러합니다.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흉내내지만 캐릭터들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만화적입니다. 딸의 소유물은 마음대로 내다 버리면서 거액의 용돈을 주고 남자와 만나는건 아무렇게 생각하지도 않는 다키자와, 어린 시절 유괴당한 뒤 죽은 아들을 못 잊어 딸을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다이라 미치루의 엄마 등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인물들이 한 가득입니다. 하무라 아키라의 불행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자기만 아는 괴물로 묘사되는 것 역시 읽기 불편했고 현실적이지도 못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범인들이 버젓이 사람을 죽이고, 납치하고, 경찰서에서 유력한 용의자가 눈에 젖가락을 꽂는 방법으로 자살한다는 식의 전개도 억지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현대물"이기 때문입니다. 개중 백미는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 명사들의 모임 '28회'에서 사람을 사냥감으로 하는 게임을 했다는 진상입니다. 

사실 사냥꾼이 사람을 사냥한다는 소재를 가진 장르 문학은 많이 있습니다. 자기 소유의 섬으로 난파해 온 생존자들을 사냥하는 게임을 즐긴다는 내용의 "가장 위험한 게임"이 우선 떠오르지요. SF "불사 판매 주식회사"도 고용한 인간 사냥꾼들과 승부를 펼치는 이야기가 등장하며, 단편 "요트클럽"은 이 작품처럼 나름 상류층 사람들 모임에서 친목 행사로 사람 사냥이 벌어진다는 설정이고요. 하지만 이 작품처럼 막 나가지는 않아요. "불사 판매 주식회사"은 이야기가 허구라는게 이미 시대 배경 등으로 등장하고, "아주 위험한 게임"은 개인 소유의 섬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인물이 벌이는 게임입니다. "요트클럽" 역시 망망대해에서 우연히 마주친 선박 승객들을 사냥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나마 말은 됩니다. 그러나 현대 일본에서 노숙자도 아니고, 평범한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사냥 게임을 한다? 그것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아무리 봐도 억지스러우며 설득력도 낮습니다. 

노나카가 사냥 게임 사냥감으로 쓰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유혹에 빠지기 쉽고 시끄러운 주변 인물이 없는 젊은 여자를 찾고 있었다 하더라도, 친구 딸의 친구를 끌어들인다는 것도 설득력이 부족했습니다. 최소한 다른 연줄을 활용하는게 맞았어요. 이 건을 계기로 사기가 파토날 수도 있으니까요. 실제로도 그러했고요.

작위적이며 불필요했던 요소들도 너무 많아요. 가면을 쓰고있던 딸 미와를 사살한게 아버지 다키자와였다는게 대표적입니다. 하무라 아키라를 납치해서 이틀 동안 가두어 놓는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정황을 보면, 감금 장소에 시체를 묻었다면 영원히 발견되지 않았을 거에요. 범인들의 범죄 행각을 보면 하무라 아키라 한 명 더 죽인다고 해도 죄상이 달라질 것도 없고요. 사건이 커질걸 우려했다? 미와와 가나의 실종은 경찰도 알고 있었습니다. 고아나 다름없는 가나야 그렇다쳐도, 대기업 회장 다키자와의 딸 실종은 이야기가 다르지요. 이래저래 하무라 아키라를 죽여서 입을 막는게 당연했습니다.

이외에도 하무라의 친구 미노리가 혼인 빙자 사기범 우시지마 준타와 교제하면서 일어나는 트러블, 도토종합리서치 사원 세라가 일으킨 트러블들도 불필요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보통 정통 하드보일드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보이는 트러블 들이 결국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는데 반해, 이 작품에서는 요란스럽기만 할 뿐, 전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냥 분량만 차지할 뿐이지요.

추리적으로도 별볼일 없었습니다. 노나카가 범인이라는걸 추리해 낸 것처럼 그려지지만, 당연히 노나카밖에 용의자가 없게끔 이야기가 흘러가기 때문에 대단한 추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독자가 함께 고민해볼 만한 단서도 딱히 제공되지 않으며, 제목이자 게임의 유래가 되는 동요의 존재는 억지스럽기만 합니다. 대부분의 수사는 탐문, 그리고 관계자들 증언을 통해서 나아가고 있어서 탐정이 딱히 필요한 이야기로 보이지도 않았고요.

물론 볼만한 부분이 없는건 아닙니다. 하무라 아키라라는 독특한 탐정에 대한 묘사만큼은 발군이에요. 그녀에 대한 세세한 일상 묘사로 소심하면서도 정의로운 그녀의 매력이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미와의 엄마 아스미가 자살한 탓에 노나카가 궁지에 몰리는 과정이라던가, 미치루가 발가락을 잘 쓰는게 특기라는 극 초반의 복선도 잘 활용되고 있고요. 악당들이 모두 몰락하고 만다는 결말은 특히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다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후반부 작품들 수준에는 확연히 미치지 못합니다.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8/10/26

망내인 - 찬호께이 / 강초아 : 별점 2.5점

망내인 - 6점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다섯 살 여중생이 인터넷 익명 게시판의 악의적인 소문과 신상 공개를 견디다 못해 아파트에서 투신했다. 경찰은 자살로 결론짓지만 언니 '아이'는 이 사건은 타살이며, 반드시 범인을 찾아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수소문하여 찾아간 유명 탐정은 온라인 사건은 맡을 능력이 없다며 고사했고, 대신에 신비에 싸인 해커이자 '탐정들의 탐정'이라 불리는 '아녜'를 소개해 주었다. 처음에 '너무 쉽고 재미없는 사건'이라는 이유로 아이를 문전박대하던 아녜는 며칠 뒤 '예상 외로 재밌는 사건'이라며 의뢰를 받아들였다. 조사가 진행되고 용의자의 범위가 좁혀질수록 몰랐던 동생의 과거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데...

중국의 추리작가 찬호께이의 7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입니다. 

아이의 동생 샤오원이 자살을 택하게 만든 인터넷 글을 올린 kidkit727을 찾는 전반부만큼은 철야책이라는 별명을 붙여도 좋을만큼 엄청난 흡입력을 자랑합니다. 설정부터가 굉장히 공감이 갑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상 공개 때문에 무차별한 비난에 시달린 유치원 여교사가 자살한 사건처럼 현실적인 소재인 덕분입니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긴 kidkit727과 탐정 아녜의 현란한 두뇌 싸움도 굉장한 볼거리이며, 이를 친숙한 인터넷 및 각종 기술 용어 설명을 통해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것도 장점입니다. 그동안 용어, 명칭만 알아왔지 실제 기술적인 원리나 내용에 대해서 잘 몰랐던 여러가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최신 기술이 개인 정보 유출, 해킹에 사용되며, 저 역시 언제든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이라서 더욱 관심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해킹이나 첨단 기술에 관련되지 않는 순수한 추리들도 볼만합니다. 아녜의 사회 공학 이론을 바탕으로 한 다채로운 화술과 용의자 분석들도 그럴듯하지만 아이가 아녜의 집을 청소하면서 주요 증거물을 따로 모아 놓는다던가, 모탐정을 보고 아녜에게 어떤 정보가 전달되었을지를 알아내는 장면들 모두 왠만한 정통 추리물 못지 않은 추리적인 즐거움을 가득 전해 줍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용의자가 좁혀진 다음부터는 재미가 한 풀 꺾입니다. 특히 샤오원의 주변 인물 중 iOS 핸드폰을 사용하는 인물이 범인이다! 이후부터요. 용의자도 적고, 그 다음부터는 전형적인 탐정의 탐문 수사에 불과한 활동이 거의 전부인 탓입니다. 이후 아녜가 이미 처음부터 범인을 알고 있었다는게 밝혀지는 장면에 이르면 이런 행동들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고요. 다른건 몰라도 샤오원의 유서를 위조하여 도서관 책에 숨기는 연극은 불필요했습니다. 해킹용 어플리케이션을 심을 수 있었기에 진작에 심어서 정보를 수집했더라면 그만이니까요. 변호사 사무실에서 수리리로 자칭한 여학생이 정보를 빼냈다는 증언을 입수했을 때 모탐정을 통해 사진 등으로 그게 누군지 알아냈더라도 게임은 끝나고요. 두쯔위가 증거를 인멸하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어 복수심을 끌어 올리기 위해? 그런것 치고는 너무 거창한 연극이었습니다.

또 이어지는 두쯔위에 대한 복수는 전개에 심각한 문제가 존재합니다. 아녜가 두쯔위의 와이파이, 스마트폰을 해킹하여 게시판을 위조하고 정보를 차단하는 작전은 상당히 설득력있게 묘사되어 읽는 재미는 충분하고, 인터넷 세계에서 무기명으로 무차별한 음해와 신상털기가 자행되며 누구나 피해자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주제 의식만큼은 빛나지만 두쯔위의 동기가 자신을 모함했던 샤오원에 대한 복수 때문이었다는게 밝혀지는 결말이 문제에요. 너무 작위적이었거든요. 이 진상을 아녜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설정도 당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헛수고 하지 말고 최소한 아이가 복수를 의뢰할 때 알려줬어야 합니다. 그나마 샤오원도 가해자였다는 진상 정도면 충분했을텐데, 언니 아이가 샤오원에게 무관심했었다는 부분은 명백한 사족입니다. 어머니와 언니 때문에 샤오원이 자살 결심을 굳혔다는건데 이런 쓸데없는 죄책감을 불러 일으킬 이유는 없어 보이네요. 이렇게 따지면 세상에 죄인 아닌 사람이 있을까요? 또 샤오원이 자살을 결심한 건 잔혹한 메일 탓이 크고, 메일을 보낸 두쯔위가 아예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기에 포인트를 좀 잘못 잡은 느낌도 듭니다.

무엇보다도 분량으로는 1/3 수준인 진범 스중난 파트는 완벽한 사족이자 작위적인 전개의 결정판이라 도저히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스중난이 사건의 원인이 된 샤오원 성추행 사건의 진범이라는 것부터, 원조 교제를 통해 희생양을 물색하는 쓰레기라는 설정은 도무지 공감이 되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누구나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수 있는 인터넷 세계의 무서움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면, 스중난이 동생 두쯔위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자신의 전문 기술을 활용하여 샤오원을 공격했다 정도가 현실적이고 괜찮았을겁니다. 괜히 절대악으로 포장해서 응징할 필요는 없었어요. 스중난의 파멸을 위한 과정에서 불거지는, 가쉽을 사고파는 사이트에 대한 아이디어는 처음에만 혹할 뿐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현실성없는 내용이었고, 이 사이트 투자를 미끼로 한 아녜의 작전도 별로 와 닿지 않았어요. 그냥 스중난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동영상만 유포해도 끝날 일인데 쇼맨쉽이 지나칩니다.

그리고 700페이지가 넘는 장편임에도 캐릭터들이 입체적이지 못한 것도 단점입니다. 가난하지만 책을 좋아하고 빼어난 지성을 지닌 의뢰인이자 주인공 아이, 천재 해커 탐정으로 처음에는 비호감덩어리였지만 알고보니 정의의 화신이라는 아녜의 캐릭터 설정부터가 흔해 빠진 일본 추리 만화를 답습하여 식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천재 탐정, 해결사가 첫 의뢰인과 컴비가 된 후 자기 집에 거주하게 하면서 자기 일을 돕게 하는 에필로그는 "시티 헌터" 를 떠오르게 만들고요. 무엇보다도 세계적인 투자자 그룹 SIQ의 2인자로 잘생기기까지 해서 아시아판 리처드 기어로 보인다는 스투웨이가 산발에 평균 이하로 보이는 아녜였다는 반전은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설정의 극치었습니다. 사채꾼 우시지마가 알고보니 정의의 억만장자 토니 스파크였다는 이야기인데 이게 말이나 됩니까. 차라리 은둔하고 있는 천재 이노우에가 아녜였다면 모를까... 이 반전만큼은 도저히 용서가 안되네요.

전체 700여 페이지 중 kidkit727의 정체가 두쯔위였음을 밝혀내는 약 절반 가량의 분량은 별점 3점을 줘도 좋을 만큼 재미있고 볼거리가 많습니다. 두쯔위에 대한 복수가 진행되는 150여 페이지는 앞서 말씀드렸던 작위적인 결말 때문에 진행 과정은 흥미진진함에도 별점은 2.5점 정도고요. 그러나 나머지 약 200여 페이지에 해당되는 스중난 파트는 총체적인 난국이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이야기를 절반 정도로 줄이고, 스중난은 아녜와 같이 조력자의 위치로 하여 마지막 두쯔위 자살 직전에 그녀를 구해주고 개과천선 (?) 한다는 내용이었다면 별점 3점도 충분했을텐데 아쉽네요.

노골적으로 에필로그에서 시리즈임을 어필하는데 앞으로 계속 읽어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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