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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4

슬로모션을 다시 한번 - 카노우 리에 / 허윤 : 별점 2점

슬로모션을 다시 한번 1 - 4점
카노우 리에 지음, 허윤 옮김/대원씨아이(만화)

80년대를 좋아하는 고교 1년생 오오타키와 야쿠시마루가 서로의 공통점을 알고난 뒤, 알콩달콩한 첫사랑을 키워나간다는 청춘 멜로물입니다.

달달하면서도 순수한, 그야말로 플라토닉한 고등학생들의 첫사랑을 80년대 풍으로 그려낸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주인공들이 너무나 착하고 순진하다는 점부터 그러해요. 전 7권 분량 동안 둘이 교제를 결심하는 것도 막바지인 6권부터이며, 교제를 시작해도 키스 한 번 하지 않는 순진한 아이들이거든요. 지나치게 소심하고 착한 야쿠시마루야 그렇다쳐도, 남자 주인공인 오오타키마저도 큰 가슴에 혹하기는 하지만 별다른 성욕이나 망상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캐릭터 묘사도 80년대스러워요. 작화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여주인공 야쿠시마루는 80년대 대표 아이돌 마츠다 세이코의 판박이입니다. 흔치않은 이름부터가 80년대 최고의 아이돌 중 한 명이었던 야쿠시마루 히로코에서 따왔으니 말 다했지요. 중간 중간 등장하는 컷 일러스트들도 추억을 돋게 만들고요.

또 이야기의 주요 흐름이 80년대의 아이돌과 그들의 노래 중심으로 흘러간다는 점도 재미를 더해줍니다. 제목의 "슬로 모션"은 물론, 소제목 모두가 당대 인기곡들 제목이며, 그 외 수많은 80년대 아이돌과 노래가 직, 간접적으로 전개에 영향을 주거든요. 처음으로 자신과 같은 취미를 가진 소녀 야쿠시마루를 만난 오오타키의 모습 뒤에 두근거리는 감정 표현과 함께 "슬로 모션"의 클라이막스인 '만남은 슬로우 모션' 이 흐르는게 좋은 예입니다. 이 노래를 아는 사람들은 이 전 가사가 '갑자기 등줄기를 따라, 사랑의 예감이 달콤하게 달렸어'라는걸 알고 있으니까요.

이외에도 어떤 순간, 80년대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던가, 다케우치 마리야의 시티팝은 어른 노래라고 하는 등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는 장치가 많아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길게 끌고나가지 못한 이유도 명백합니다. 뻔한 이야기를 무리하게 길게 끌고 나가서 생긴 온갖 문제가 전부 들어 있는 탓입니다. 우선, 둘의 교제가 시작되기까지의 이야기가 너무 깁니다. 아무리 80년대 복고풍 청춘 멜로물이라 하더라도, 21세기에 발표된 작품이 별다른 애정표현도 없이 6권에서야 사랑 고백을 하다니 이건 좀 지나치죠. 나카이도나 고이즈미와 같은 쓸데없는 라이벌의 등장과 이를 통해 삼각 관계나 사각 관계를 끌고가려는 전개도 억지스러웠고요. 별다른 고민없이 그냥 인기있던 작품들의 설정들을 억지로 가져다 붙인 느낌이에요. 하긴, 좀 더 매끄럽게 삼각 관계, 사각 관계를 그려냈더라면 지금보다야 연재가 길게 이어지긴 했을겁니다. 의도는 나쁘지 않았으나 작가의 실력이 부족했던거지요.
여러가지 전개 상의 시행착오 끝에 둘이 사귀기 시작한 뒤도 급하게 마무리되는 것도 아쉽습니다. 정작 사랑 이야기보다는 야쿠시마루의 성장기 중심으로 이야기도 완벽하게 궤도가 바뀌거든요. 그나마도 좀 극적이었다면 모를까, 클라이막스인 패션쇼가 전혀 와 닿지 않아서 설득력이 떨어졌습니다. 야쿠시마루 아버지 실종의 진상도 뭐 그런가보다, 싶은 정도로 넘어가버리고요. 이럴거라면 중간부분을 모두 들어내고 분량을 대폭 줄여서 둘이 교제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끝나도록 3˜4권 정도로 발표하는게 훨씬 완성도가 높았을 듯 싶네요. 그랬다면 걸작이 되고, 영상화도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외에도, '80년대를 사랑하는 아이들' 이라는 컨셉을 너무 과하게 우려먹는 것도 문제에요. 초반부는 옛날 노래가 등장하는 상황이라던가, 다른 등장 소품들이 이야기와 잘 어울리고 추억을 떠올리게 해서 좋았는데 가면 갈 수록 소재 고갈 탓인지 억지가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오오타키가 결의를 다지기 위해 밤에 부르는 노래가 "쥴리아의 상심"이라는건 누가 봐도 좀 오버스럽지요.

마지막으로 단점은 아니지만, 80년대 아이돌과 노래들 중 밴드는 고작해야 첵커스, RC석세션 정도만 등장하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불만이었습니다. 저에게 80년대는 안전지대, 튜브, 사잔, 오메가 트라이브의 시대였는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아이디어도 나쁘지않고, 추억을 불러 일으킨다는 점에서는 성공했지만, 전개와 마무리는 영 좋지 못했습니다. 작가와 편집자 모두 실력이 부족한 탓이지요. 권해드리기는 조금 애매한데 80년대를 사랑하시는 분들이라면 1,2권 정도은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겁니다. 그러나 뒤로 가면 갈 수록 별로라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17/05/28

허즈번드 시크릿 - 리안 모리아티 / 김소정 : 별점 2점

허즈번드 시크릿 - 4점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마시멜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드니에서 딸 셋, 남편 존 폴과 행복하고 무난하게 살고 있는 성공한 주부 세실리아는 어느 날 존 폴의 비밀 편지를 다락에서 발견했다.
레이첼은 30여년전 살해당한 딸 쟈니에 대한 회한으로 평생을 보내온 할머니로 쟈니의 죽음 이후 남편, 아들과 멀어진채 살아왔는데 아들 부부가 유일한 위안인 손자 제이컵과 함께 뉴욕으로 간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테스는 남편 윌, 사촌 펠리시티와 함께 광고회사를 하는, 아들 한명이 있는 커리어 우먼으로 어린 시절부터 펠리시티와 떨어진 적이 없는 단짝이었는데, 급작스럽게 남편과 펠리시티가 사랑에 빠졌다는 고백을 들었다.

실수는 사람의 영역이고, 용서는 신의 영역이다. - 알렉산더 포프.

최근 가장 핫한 베스트셀러인 책입니다. 딱히 관심이 가지는 않았지만 읽을거리를 찾다가 우연찮게 읽게 되었습니다. 세실리아가 존 폴이 남긴 비밀 편지를 발견하고 그 내용을 궁금해 하는 과정까지는 흥미롭습니다. 여기까지가 이야기의 절반 정도 부분인데,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끄는데 성공하고 있어요. 도입부의 판도라 상자 이야기와 엮이는 아이디어도 절묘하고요.
뒷 부분도 읽는 재미는 충분합니다. 남편 존 폴이 과거 살인 사건의 범인임을 고백하는 편지에 대해 고민하는 아내 세실리아의 심리 묘사가 아주 준수한 덕분입니다. 특히 지역 공동체에서의 삶 때문에 피해자의 어머니인 레이첼과 얽히는 과정에서 세실리아의 긴장이 극으로 치닫는 장면이 아주 대박이었어요. 딸을 허무하게 잃은 레이첼의 심리 묘사도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편집증과 같은 심리 상태를 아주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딸의 죽음 때문에 남편, 아들과의 관계가 파탄나버렸다는 묘사도 발군이고요. 시드니라는 낯선 공간을 무대로 했다는 점, 부활절 풍광과 핫 크로스번같은 디테일도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우선 이야기의 핵심인, '아내가 어느날 남편이 살인 사건의 범인임을 알게 된다.'는 설정이 지나칠 정도로 흔해 빠진 탓이 큽니다. 때문에 작품이 살아남으려면 차별화 요소가 필요했습니다. 사실은 남편이 범인이 아니고 범인을 숨겨주고 있었다던가("레베카"), 아니면 남편이 아직도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연쇄살인마라던가 (스티븐 킹의 중편 "행복한 결혼 생활") 라는 식으로요. 그러나 이 작품이 선택한 방법은 "섹스앤시티"나 "위기의 주부들"같은 미국 막장 드라마 설정을 가져온게 전부입니다! 등장하는 아줌마들 모두 머릿 속에 섹스 생각밖에 없어요! 기승전섹스, 생각의 단계가 이거밖에 없는 것 같더라고요. 그 외 고부간 갈등과 불륜이라는 한국 일일 드라마 소재도 좀 섞여있는 정도고요. 제 취향과는 완전히 달라서 실망스러웠습니다.

또 레이첼이 쟈니의 죽음 이후 삶이 망가졌다는걸 세실리아가 알아채지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때문에 세실리아의 죄책감이 별로 부각되지 못합니다. 이래서야 세실리아 혼자만의 고민일 뿐이죠. 최소한 이전부터 친했다, 또는 잘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레이첼의 붕괴된 심리를 세실리아가 공유하는 전개였어야 합니다. 그런 관계없이 남편이 거의 30여년전 벌어진 살인사건의 범인이라는 것을 엄청난 문제처럼 부각시키니까 솔직히 설득력도 좀 많이 떨어집니다. 공소시효도 한참 지났을 뿐더러 범행을 저질렀을 때 까지의 삶보다 그 이후, 특히 결혼하고 함께 지낸 삶이 더 길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최소한 진심을 믿어주고 잊어버리는게 현실적일 테니까요. 존 폴은 그만큼 참회하는 인생을 살아오기도 했고요.

세실리아의 고민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레이첼이 피해자 포지션으로 확실히 와 닿아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도 아쉽습니다. 특히 아들 롭은 내버려뒀으면서 손자 제이컵에게 한없는 애정을 보이며 며느리를 미워하는 모습은 완전 비호감이기 때문입니다. 카드로 만든 집 운운하며 가장 중요한 카드가 제이컵이라 그 카드가 빠지면 무너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손자이기는 하지만 부모가 직접 뉴욕으로 데려간다는데 뭘 어쩌자는건지 모르겠더라고요. 게다가 아이를 더 많이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니, 완전 우리나라 꼰대 시어머니 저리가라에요. 물론 직접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지만 심리묘사가 지나칠 정도죠. 이래서야 피해자이기는 하지만 악역에 더 가까와 보입니다. 쟈니의 죽음으로 인한 안쓰러움보다는 악당이 벌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말 다했지요.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마지막 결말입니다. 남편의 죗값으로 내 딸이 불구가 되었다고 순순히 받아들이는 장면은 솔직히 어이가 없어요. 저라면 레이첼에게 남편의 죄를 고백하고, 남편에게 보복하라고 했을 겁니다. 그 대신 레이첼도 목숨을 내 놓아야겠지요. 레이첼의 행동으로 고통을 받아야 하는건 존 폴이지 어리고 귀여운 폴리가 아니니까요. 이런 식으로 풀어낸 결말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쟈니는 마르판 증후군이었고, 존 폴은 살인자가 아니었다는 에필로그는 더 최악입니다. 쟈니가 마르판 증후군이라는 설정을 밀고 싶었으면 단서를 최대한 제공해 줬어야 했습니다.

그 외에도 테스와 윌 부부, 펠리시티 세 명의 삼각관계와 뒤이어 벌어지는 테스와 코너간의 일탈은 완전히 사족입니다. 테스가 불안증이 있고 펠리시티는 뚱뚱해서 둘만의 세계에 갖혀 살았다는 설정도 마찬가지고요. 코너를 극에 끌어들이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데 그런 것 치고는 분량이 너무 많았어요. 그렇잖아도 무지하게 긴데, 쓸데없는 이야기는 좀 잘라냈어야 합니다. 하긴 쓸데없는 이야기는 이거 한개 뿐만이 아니죠. 지겹고도 지겨운 베를린 장벽 관련 잡담을 비롯해서 수도 없이 넘쳐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중반까지 독자를 몰입 시키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없습니다. 이거보다는 우리나라의 범죄가 조금 들어간 막장 드라마들이("아내의 유혹"(?)) 더 재미있을 겁니다.

2016/04/18

클로저 이상용 - 최훈 : 별점 3점

클로저 이상용 9 - 6점 최훈 지음/알에이치코리아(RHK)

최훈 작가를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하대리"부터 팬이 되었었지요. 독특한 개그 센스에 더해 하루하루 완결되는 이야기를 이어서 하나의 거대한 장편을 만들어 낸 아이디어가 정말 참신했기 때문입니다. 4컷 만화들이 이어져 하나의 긴 이야기가 되는 작품은 일본에서는 이전부터 있었지만("아즈망가 대왕"), 국내에서는 처음 보는 형식이었고 완성도도 높았습니다. 이어진 "MLB 카툰"에서부터는 주특기라 할 수 있는 덕력과 패러디 센스가 제대로 폭발했고요.

하지만 이후 연재작들로 팬심은 많이 떠났습니다. 완결짓지 못한 이야기가 많은 탓이 큽니다. 한 편, 한 편으로 완결되는 프로야구 카툰 같은 작품은 언제 연재가 중단되어도 괜찮지만, 장편 연재물이었던 "하대리" 3부(였나요?), 팝과 록의 역사를 다룬 "록커두들",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전직 여자 농구 선수들이 나오는 농구 만화 등은 아무런 언급 없이 연재가 중단되었지요.

그나마 완결된 작품도 흐지부지 끝나서 더 욕을 먹었는데, 대표적인게 바로 "GM"입니다. 국내 최초로 스카우터, 단장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팀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그려내어 큰 인기를 끌었지만, 작중에 흩뿌린 떡밥을 회수하지 못한 채 갑자기 끝나 버렸습니다. 스토브리그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시즌 개막도 맞지 못하고 끝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삼국전투기"의 경우 마감일을 지키지 못해 큰 비난을 사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런저런 작품들을 모두 끝내 버린 덕분인지, 최근의 행보는 다행스럽습니다. "삼국전투기"는 공명 사후 이야기를 유사 콘텐츠를 압도할 정도의 디테일로 다루며 박수를 받으며 마무리되었고, 이 작품 "클로저 이상용" 역시 정상적으로 완결에 이르렀으니까요.

"클로저 이상용"은 야구 만화인데, 2군에서 올라온 이상용과 진승남 배터리가 패배주의, 개인주의, 세력 다툼으로 엉망이 된 게이터스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며 여러 상대팀을 제압해 결국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내용입니다. 전작 "GM"과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하는게 특징이기도 합니다. 전작의 캐릭터(하민우 등)가 감초 역할로 등장해 팬으로서 무척 반가웠어요.

단지 스핀오프에 그치지 않고, 독립적인 작품으로의 재미 요소도 확실합니다. 가장 큰 재미 요소는 이상용이 라이벌들과 펼치는 두뇌 게임과 심리전이고요. 두 가지 요소 모두 이 분야의 본좌 "원 아웃"과 비교할 만한 수준으로 펼쳐집니다. 토쿠치 토야와 이상용 모두 구위가 아닌 심리전을 통해 타자를 제압하는 기교파 투수이기 때문이지요.

주인공이 적당한 구위를 가지고 현실적인 야구를 한다는 점에서는 "그라제니"의 본타와도 살짝 겹치는데, 단순한 설정 차용은 아닙니다. 이상용은 철저한 분석과 데이터 기반의 야구를 하고, 확실한 주무기 (체인지업)을 갖춘 데다 안 되는 타자는 철저히 거르는 식으로 비겁하게 이겨 나간다는 차이가 있거든요. 마지막 장면에서 어깨가 망가진 상태로 승부하면서도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는 모습은 클라이맥스로서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최훈 작가 본인이 상당한 수준의 야구 팬이기에 가능한 디테일들도 큰 장점입니다. "GM"에서도 선보였던 데이터 위주의 선수 설정들, 옷주름으로 구질을 파악한다는(쿠세) 이야기, 이상용의 독특한 작전으로 만든 병살 플레이, 외국인 투수와 통역의 대화 같은 깨알 개그, 작가 특유의 패러디들까지 풍성했습니다. KBO 팀을 연상케 하는 구단들의 설정은 물론, 실존 선수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들 역시 야구팬이라면 놓치기 어려운 재미 요소고요. 게이터스가 LG 트윈스를 떠올리게 하는 설정이라 LG 팬에게는 더더욱 의미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다만 성적 때문에 불편했을지도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작품 역시 던진 떡밥을 모두 회수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상용을 둘러싼 삼각관계, 라이벌 선수들과의 관계가 대표적입니다. 선데빌스의 김성욱에게 함정을 심어두었다는 설정, 이헌과 여자를 두고 얽힐 것 같던 전개 모두 마무리되지 않고 끝나 버렸습니다. 일본 연재물처럼 한 편 한 편이 완결성을 갖추고 이어졌다면 해결할 수 있었겠지만, 신문 연재 특성상 그게 어려웠던 것 같네요.

또한 이상용이 만년 2군을 전전하다가 체인지업을 완성해 최고의 마무리가 된다는 설정에서 출발했는데, 마지막에 커브까지 갖춘 완전체 투수로 업그레이드되는 전개는 원래의 취지와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결말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속 시원한 느낌은 받지 못했습니다. 고교 야구 만화로 치면 지구 예선을 통과해 갑자원에 진출하면서 ‘1부 완결’로 끝나는 느낌이랄까요.
아울러 정인권과의 최후의 승부는 명장면이었지만 설득력 면에서는 조금 부족했습니다. 이미 직구와 체인지업의 구위가 떨어진 상태에서 그립 변화만으로 삼진을 잡는 것은 다소 억지스러웠으니까요. 오히려 직구 승부인데 어깨가 망가져 체인지업의 속도로 들어온다는 설정이 더 그럴듯했을 것 같습니다.

후일담 역시 너무 간략합니다. 게이터스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우승은 실패했고, 부상당한 이상용은 수술과 재활 끝에 1년 만에 방출되었다가 램스에 입단해 선발 투수로 커리어를 이어간다는 서사를 단 한 편으로 마무리한건 여러모로 부족했어요.

이렇듯 단점이 없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야구팬이라면 충분히 즐길 만한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후속작이 시작된다면 부족했던 부분을 잘 보완해 주었으면 합니다.

2017/04/15

몽키 턴 1~25 - 카와이 카츠토시 : 별점 3점

몽키 턴 25 - 6점
카츠토시 카와이 지음/세주문화

카와이 카츠토시의 히트작으로, 경정을 소재로 하여 청춘들을 그린 스포츠물입니다. 단행본으로 25권이나 되는 장편이지요. 

내용은 크게 3개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주인공 겐지가 경정 선수가 되기 위해 입문하는 경정 학교 시절, 선수로 첫 더비 킹이 되는 이야기, 큰 부상을 입은 후 복귀하여 연말 상금왕 레이스를 우승하는 이야기로요.
스포츠 세계를 무대로 각자 주특기가 있는 주인공과 친구, 라이벌들이라는 캐릭터 설정과 주요 시합을 핵심 이벤트로 진행하는 전개, 그리고 주인공이 나름 천재이며 첫 등장부터 소꼽친구가 있는 커플이라는 점은 작가의 전작인 "캠퍼스 라이벌"과 동일합니다.

하지만 이전 히트작의 단순 반복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높이 평가하고 싶은 점은 '경정'이라는 잘 모르는 세계를 정말로 자세하게 그려냈다는 점입니다. 경정을 소재로 한 작품은 이 작품 이전, 이후 모두 전무후무하다 할 정도로 독특한데, 단지 새롭기만 한게 아니라 나름의 재미도 확실하게 선사해 줍니다.
물론 '보트'를 타고 물에서 진행한다는 점 외에는 흔하게 보아온 레이싱 물과 큰 차이는 없습니다. 머신의 성능과 드라이버의 기술이 조화를 이루어야 승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장르니까요. 그러나 보트와 물이라는, 이 차이점을 극대화한 전개에 작가의 뛰어난 구성력이 더해져 남다른 재미를 선사합니다. 나름의 두뇌 게임이 펼쳐지는 것 역시 읽는 재미를 더해주고요. 주인공 겐지가 5km 더 빠른 라이벌 도구치의 신형 페라를 더비 경주에서 이기고 더비킹이 되는 에피소드가 대표적입니다.

'유도'에 미쳤던 전작 등장인물들에 비하면 삼각관계가 등장하는 등 주인공들의 사랑과 청춘이 보다 자세하게 그려지는 식으로 인간관계, 드라마가 훨씬 복잡해진 것도 마음에 들어요. 조금 가볍고 유쾌한 주인공과 그에 대항하는 쿨하고 과묵한 느낌의 천재 라이벌(심지어 좋은 가문!)이라는 인물 설정은 스포츠물, 청춘물에 흔히 나오는 뻔한 설정과 구도이지만, 앞서 말씀드린대로 첫 등장시점부터 주인공의 커플이 완성되어 있다거나 정말로 나쁜 악당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 등 작가만의 독특한 요소가 덧붙여져 차별화되고 있으니가요. 개그 요소도 적절한 편이고요. 질질 끌지 않고 깔끔하게 마무리한 점도 높이 평가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뻔하고 진부한 설정, 전개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소재에 작가의 능력이 더해져 평균 이상의 재미를 전해줍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4/10/26

렌지맨 1~6 - 모리 타이시 : 별점 2.5점

렌지맨 6 - 6점
모리 타이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오츠카 렌지는 끊임없이 연애에 실패하는 고등학생으로, 우연히 수수께끼의 노인 Dr. 오기쿠보를 만나 사랑의 힘으로 변신할 수 있는 히어로 ‘렌지맨’이 된다. 하지만 그 대가로 변신 시마다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을 잃는 슬픈 운명을 맞는데....

마사토끼가 추천했던 작품. 이전에 읽었었는데 리뷰를 올리지 않았더군요. 다시 정리해서 올려봅니다.

이 작품의 장점은 전대물과 개그 러브 코미디의 조합이라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잘 살려냈다는 점입니다. 사랑을 하면 파워가 생기지만 그 대가로 사랑을 잊는다는 설정도 좋아요. 이를 통해 개별 에피소드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이야기의 몰입감을 높여주거든요. 좋아하는 사람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열혈 캐릭터인 렌지도 '코이즈미 마이 러브~'를 외치던 "이케테루 후타리"의 사지가 떠오르는 올드 타입이지만 작품의 분위기와 잘 어울려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작품이 지나치게 개그 위주로 전개되는건 아쉬웠습니다. 좌충우돌 렌지와 그에게 빠져드는 후카의 이야기를 좀 더 집중해서 풀어주었더라면 좋았을 겁니다. 마지막 편에서 전대 액션을 전혀 넣지 않고 후카 시점에서만 이야기를 풀어나간건 굉장히 인상적이었거든요.
렌지가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한 리키와 후카와의 삼각관계 에피소드도 지나치게 길었습니다. 나름 전대물인데 한 권 이상 분량을 밀땅으로 때우는건 말이 안되지요. 리키에게 정말로 푹 빠진 묘사를 강조해서 마지막 실연, 그리고 후카와의 사랑과 기억 상실을 더 극적으로 만드는게 좋았을겁니다.
마찬가지로 오쿠다가 후카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전개도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억지스러웠고, 등장 인물들 비중 분배도 실패한 느낌만 줍니다. 인기 때문에 새로운 인물을 계속 등장시키기는 하는데,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상황도 반복되고요 .후카의 라이벌이라고 자칭하는 레미가 대표적입니다.
레미가 유혹하려고 했을 때 렌지가 넘어가지 않은것도 이상합니다. 원래 그런 캐릭터도 아니고, 이 때는 후카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편도 인상적이었지만, 결말만큼은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후카를 잊은 렌지를 한 대 때리자마자 기억이 돌아온다는건 지나치게 편의적인 발상이었으니까요. 기껏 쌓아올린 애틋함을 한 방에 무너뜨리는 마무리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독특한 설정과 참신한 개그 요소는 좋지만, 개그와 스토리의 균형 면에서는 다소 아쉬워 감점합니다.

2024/03/30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하빌리스

<<아래 리뷰에는 트릭,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밤비 뱅큇에서 컴패니언으로 일하는 교코의 친구 에리가 호텔에서 죽은채 발견되었다. 경찰은 자살로 추정했다. 에리가 죽은 호텔 방문에 도어 체인이 걸려있었고, 독약을 고향에서 챙겨 왔다는게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밤비 뱅큇 사장 마루모토와 팀장 에자키 요코와의 삼각관계가 원인으로 보였다.
그러나 몇 가지 미심쩍은 이유로 형사 시바타는 자살설에 의문을 품었고, 마침 이웃이 된 교코와 함께 조사에 나섰다. 여기에 에리의 전 직장 동료 유카리도 합세했다. 그녀 역시 에리의 자살을 믿지 않았었다. 그들은 조사를 통해 에리는 전 애인 이세의 자살과 얽힌 사건 진상을 밝혀내려 노력해왔고, 그 목적으로 밤비 뱅큇으로 이적했다는걸 알아냈지만, 유카리마저 살해당하고 말았다.....


일본 추리 소설의 제왕이라 할 수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장편. 1992년 발표작입니다. 원제는 "ウインクで乾杯 (윙크와 건배)"입니다.
'복고풍 미스터리'라는 홍보 문구 그대로인 작품이에요. 특히 부자와 결혼하는게 꿈이라는걸 서슴없이 밝히는 여주인공 교코, 그리고 '프린세스 프린세스'와 '티파니'를 즐겨들으며 교코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귀엽게 선보이는 형사 시바타는 80~90년대 유행했던 일본 트렌디 드라마 그 자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교코의 철없음과 연인 미만 우정 이상의 관계를 가지는 시바타의 모습은 "롱 바케이션"의 미나미와 세나와 아주 흡사해 보였거든요.
컴패니언이라는 직업과 화려한 보석상의 파티, 부동산 재벌과 함께 하는 데이트도 80~90년대 버블 경제의 편린을 느끼게 해 줍니다. 80~90년대를 떠오르게 만드는 장치는 이외에도 많습니다. LP와 CD가 공존하던 시기, 테이프로 앨범을 녹음하고 워크맨으로 듣는 모습 등처럼요.
조금 찾아보니 오래전에 영상화(1988년, "화요 서스펜스 극장")가 되었던데, 아니나다를까 시바타 형사가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 포스터만 붙여진 원룸에서 웃통을 벗고 맥주를 마시는 장면 등 화면이 완전 트렌디 드라마더군요.
 

'복고풍'이라는 단어에서 떠올릴 수 있는 고전 본격물적인 성격도 일부지만 갖추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본격적인 트릭이 등장하는 덕분입니다. 특히 에리 살해 사건은 여러가지 트릭과 상황이 잘 어우러져 추리 애호가들을 만족시킵니다. '방 문에 걸려 있던 체인'이라는 밀실 트릭을 비롯해서, 어떻게 에리가 독을 먹었는지, 마루모토가 어떻게 알리바이를 만들었는지 등이 복합적으로 사용되고 있거든요. 체인은 걸려있던게 아니라 양면 테이프같은걸로 방 문에 '붙어 있었을' 뿐이었다는 간단한 트릭이지만, 범인 마루모토가 처음 방문을 확인했고 나중에 회수할 기회가 확실했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 높다는 점이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에리가 살해당한건 9시 30분 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이라서 마루모토의 알리바이가 성립했으며, 이는 연인 에자키가 공범으로 에리인 척 프런트에서 열쇠를 빌렸기에 가능했다는 추리도 그럴듯했고요. 이 추리가 에리가 마루모토를 죽일 생각이었는데 프런트에서 구태여 이름을 밝힐 이유가 없다는 착안에서 성립되었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설득력 높은 이유였어요.
트릭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시바타가 여러가지를 생각한 뒤 직접 확인해보는 모습도 좋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체인을 끊고 사람들이 들어왔을 때 범인이 욕실에 숨어 있다가 몰래 나가지 않았는지를 직접 실험해보는 장면처럼요. 이런 모습은 현실적이며 경찰이라는 직업 성격에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체인 하나를 벌려 밖에서 이어 놓은 뒤, 그 체인을 펜치로 끊어 증거를 인멸한다는 착안도 괜찮았고요. 체인에 가죽 커버가 씌워져 있어서 실현은 불가능했지만 이렇게 추리가 계속 등장하는건 추리 애호가로서는 반가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중요한 단서인 이세가 남긴 유서가 어디 있는지를 알아내는건 억지였습니다. 비틀즈를 녹음한 테이프 뒷 면에 진짜 유서를 적어 놓았다는건데, 이렇게 꼬아서 암호처럼 전달해야 했을 이유가 없었던 탓입니다. 이세가 자살한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유서는 경찰, 그리고 유족에게 전달될 터이니 테이프에 적어 두었던 글을 유서에 적었어도 아무 문제 없었을겁니다. 이세가 죽는 시점에 자기 유서를 겐조가 먼저 발견하리라는걸 예상할 수 있었을까요? 이게 말이 되려면 공범인 겐조 등이 이세가 자살하게끔 유서를 적고 목을 메는걸 협박으로 강요했어야 했습니다. '페이퍼백 라이터'라는 곡 명을 '페이버 백'이라고 표기해서 '종이 뒷면', 즉 녹음된 테이프 뒷 면을 보라고 했다는 것도 영 와 닿지 않았고요. 
전개도 초기작답게 어설픈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다카미에게 걸려오는 이상한 전화로 그를 수상쩍게 만드는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이 사람이 진범이다!'라는걸 독자에게 강요하는 듯 했어요. 에리가 겐조를 살해하려다가 잔을 바꿔치기한 겐조에 의해 죽게 되었다는 진상도 마찬가지고요. 맥주야 안 마시면 그만인데 말이지요. 진범이 겐조라는 것도 급작스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냥 마루모토 선에서 끝내는게 좋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재미는 있었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저처럼 80~90년대 일본 트렌디 드라마에 향수를 가지신 분들이라면 충분히 즐기실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트렌디 드라마 풍의 '복고풍 미스터리'로 홍보하려면 원제를 살리는게 좋았을겁니다.

2022/09/09

BOX ~상자 속에 무언가 있다 1~3 - 모로호시 다이지로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이야기의 진상 및 반전, 여러가지 트릭과 장치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형의 죽음으로 가정이 엉망이 된 고등학교 1학년 가쿠다 코우지에게 어느날 발신인 불명으로 세공상자가 배달되었다. 상자 퍼즐을 풀자 큰 소리와 함께 알수없는 무언가가 어디론가 향했고, 집과 어머니 머리 일부는 사라져 버렸다. 기묘한 사건을 풀기 위해 무언가가 향한 곳을 찾아간 코우지는 루빅스 큐브를 풀고 있던 마스다 메구미를 만났다. 그 뒤 둘은 공원의 기묘한 정방형 건물 앞에서 똑같이 발신자를 알 수 없는 퍼즐을 받았다는 다른 다섯 명을 만났고(두 명은 부부라서 네 팀), 호기심 넘치는 기묘한 여자 쿄우코와 함께 정방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출구는 곧바로 사라져버렸고, 건물 속 네비게이터라는 괴소녀가 건물을 빠져나가려면 '상자'가 제공한 퍼즐을 모두 풀어야 한다고 일행에게 말했지만, 일행 중 야마우치는 퍼즐을 풀지 않으려 했다. 건물과 관련된 민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들어간 사람 중 돌아오지 않거나 존재조차 사라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퍼즐을 풀면 그렇게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야마우치는 괴물로 변했고, 퍼즐을 풀지않고 편법으로 빠져나갈 생각이었던 고우다도 자기 퍼즐을 쿄우코에게 넘기다가 괴물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쿄우코, 코우지와 메구미, 치에코 네 명은 괴물 고우다의 공격, 상자 퍼즐 네비게이터 괴소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퍼즐까지 풀어내는데 성공했다. 괴소녀는 최후의 순간에 네 명을 모두 없앨 계획이었지만 이 역시 쿄우코가 기지를 발휘하여 무사히 빠져나오게 되는데...

좋아하는 작가인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장편(?)입니다. 국내에 소개된 작품은 아닙니다. 일본어 독해 실력은 형편없지만 읽고 싶은 마음에 도전해 보았는데, 전 3권으로 각 권당 200페이지 정도 분량 정도라 다행히 어떻게든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체 불명의 누군가가 보낸 초대장으로 모인 사람들이 폐쇄된 장소에서 생존 게임을 벌인다는 설정은 흔합니다. 하지만 초대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없애야 하는 서바이벌 게임이 아니라는건 독특했습니다. 초대장이기도 한 '퍼즐'을 모두가 푸는게 살아남는 조건이라서, 모두 살아남는 것도 가능하거든요. 

또 이런 류의 생존 게임은 게임이 진행되는 상황의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많았었는데, '상자'에 갖혀있는 '인과'를 잡아먹는 괴물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서 게임을 벌인다는 나름의 이유도 괜찮았습니다. 황당무계하게 스케일을 키워버리니까 오히려 번잡하고 비현실적인 게임이 더 말이 되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냥 사람들을 불러들였지만, 사람들이 패닉을 일으키며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자 - 당연합니다. 정체 불명의 공간에 갇혔을테니... -, 사람들이 단계를 밟아 나가며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퍼즐'을 풀게 했다는 설정, 그리고 '먹이'가 사람들이 버리고 싶은 것이라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괴물의 먹이가 '인과'인 탓에, 사람들이 상자에 두고 가서 '무언가'가 원래부터 없던게 되어버리면 - 예를 들어 아내를 상자에 준다면, 상자에서 나온 세상에는 아내가 처음부터 없다. -, 인과관계 변화가 크게 생겨서 그에 따른 에너지를 상자 속 괴물이 먹어치운다고 설명되는데, 상황에 대한 설득력은 충분했어요. 괴물의 실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작가가 자주 써먹는 특유의 크툴루 신화스러운 분위기를 적당히 살린 은근하게 묘사도 한 몫 하고요. 

다른 소소한 설정들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초대된 사람들이 6명인 이유는 '상자', 즉 육면체가 플레이어들을 선택하여 퍼즐을 풀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퍼즐을 풀었다는 증거인 카드가 죽은 사람 것이라도 반드시 필요했던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육면체에 카드를 붙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퍼즐'을 풀지 않는게 가장 중요한 규칙 위반이라서 그런 짓을 한 플레이어는 상자가 처단한다는 설정, 그리고 입장권과 퍼즐을 넘기면 플레이어로서의 권리를 넘길 수 있다는 설정도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뿐더러 이야기 절정부에서 아주 잘 사용되고요.

작중에 등장하는, 작가가 직접 고안했다는 퍼즐들도 좋습니다. 종이를 접어야 풀 수 있는 미로, 일행의 이름을 사용하는 힌트없는 크로스워드 퍼즐에서 시작해서, 각 에피소드 표지 그림 등 곳곳에 삽입된 그림 퍼즐들 모두 볼거리에요.

퍼즐 풀이에 긴장감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들도 적절합니다. 코우지는 세공 상자를, 메구미는 루빅스 큐브를 이미 풀었는데 상자에 들어갈 때 퍼즐을 풀었다는 증거인 카드를 받지 못했었지요. 오히려 '안'에서 다시 풀어야 한다는 이야기만 들었고요. 이는 세공 상자와 루빅스 큐브를 풀었던 방법을 상자 안에서 그대로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전개로 이어지는데, 아주 흥미진진했습니다. 세공 상자의 해법 순서대로 '문'을 열고 닫을 때 열린 문으로 괴물이 들어올 수 있는 상황에 처해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메구미가 풀어야 하는 퍼즐이 전체 면이 백색인 루빅스 큐브라는 것도 기발했습니다. 원래 밖에서 풀었던 큐브 순서 그대로 다시 풀어야 했던 거지요. 네비게이터가 이를 방해하기 위해 큐브를 건드리려 했었던 상황은 정말로 큰 위기였고요. 한 칸이라도 돌렸으면 푸는게 불가능했으니까요.

캐릭터 구성도 나쁘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소년 만화 주인공 쾌남 코우지를 비롯한 대부분 등장인물들의 활약이 잘 배분되어 있는 덕분입니다. 메구미가 상자에 갇힌 타니 부부를 데려오려 했던게 알고보니 중요했다는 - 타니 부부의 카드를 손에 넣을 수 있어서 - 게 대표적입니다. 딜러, 힐러 등으로 역할 구분이 되는게 아니라 모두 퍼즐을 푸는데 성공하는 두뇌파 모습을 공평하게 보여준다는 점과 코우지와 메구미, 치에코의 기묘한 삼각관계도 독특합니다. 패닉을 일으키는 어른 두 명과 네비게이터 괴소녀와의 대결을 통해 서바이벌 게임이 아닌 탓에 다소 부족했던 갈등과 대결 구도를 보완하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였고요.

그러나 '네비게이터'같은 설정 구멍이 없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목숨을 걸고 게임을 시키고, 그 결과 자기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걸 먹이로 준다는게 상자 퍼즐 게임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왜 이를 플레이어들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걸까요? 애초에 제대로 먹이를 주지 않으면 상자 속 괴물이 상자를 찢고 나올 수 있어서 이 게임을 벌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게임은 퍼즐을 잘 풀도록 도와줘서 필요없는걸 - 그리고 그에 따른 인과 에너지를 - 쉽게 받아내는게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구태여 플레이어들을 곤경에 빠트리고, 심지어 죽이려고 할 이유가 없어요. 그런다고 인과 에너지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네비게이터는 마지막에 카드에 표시되는, 자기가 바쳐야 할 무언가를 상자에게 주는걸 거부하면 그 플레이어 혼자서만 빠져나올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나 각자에게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는건데 그걸 거부하고 상자를 빠져나오는 선택을 하는 플레이어가 있을까요? 실제로 작중에서 코우지는 집안의 우환이 되어버린 죽은 형의 존재, 메구미는 성정체성장애를 겪는 자신의 '남성', 치에코는 자기를 고립되게 만든 '영감'을 주는데, 이것들은 그들이 너무나 쉽게 버릴 수 있고 버려야 하는 것으로 작 중에서 설명됩니다. 코우지 일행 중 이것들 때문에 배신을 할 사람이 있을리 없습니다. 이미 친구 이상이 되기도 했고요. 게다가 네비게이터는 쿄우코의 작전으로 진짜 '플레이어'가 되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직접 무언가를 주는걸 거부하면 됐습니다. 일행을 유혹해서 배신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어요. 모두가 필요없는걸 바친 정도가 목숨을 건 게임 보상이라는건 좀 시시했고요.

그래도 이런 설정 구멍은 빠른 전개와 여러가지 퍼즐의 배치로 읽으면서 눈치채기는 어렵지만, 더 큰 문제는 발암 캐릭터 쿄우코입니다. 이야기 맥락을 많이 끊을 뿐더러, 그녀가 네비게이터 소녀에게 싸움을 걸어서 코우지 일행이 위기에 처하게 되기 때문에 만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단순히 '흥미가 넘쳐서' 상자에 일부러 뛰어든다는 등의 캐릭터 설정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녀가 대활약하는 '착시 퍼즐' 부분은 퍼즐이라고 하기는 억지스러운, 다소 개그스러운 내용이라서 역시나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저자가 그녀는 '트릭스터'이며 "요괴헌터"의 히에다 교수의 제멋대로 무책임 버젼이라고 하는데, 차라리 히에다 교수 본인이 등장하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정신나간 여자가 어설픈 개그, 색기 따위를 보여주는것 보다는 말이죠.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모로호시 다이지로 테이스트가 잘 살아있으면서도 거북하지 않은 괜찮은 모험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모로호시 다이지로 월드 입문작으로 제격인 작품으로 생각되는 만큼, 국내에도 꼭 소개되기를 바랍니다.

2024/08/10

열린 어둠 - 렌조 미키히코 / 양윤옥 : 별점 2.5점

열린 어둠 - 6점
렌조 미키히코 저자, 양윤옥 역자/모모

"회귀천 정사"로 유명한 렌조 미키히코의 단편집. 원제는 "夜よ鼠たちのために (밤이여, 쥐들을 위해)". 모두 아홉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1983년에 출간된 나름 고전(?)으로 일본에서도 꽤 오래 절판 상태였었는데,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2014년 판에서 '복각(재출간) 희망! 환상의 명작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한 덕분에 2014년에 복간된 이력이 있습니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아래와 같이 극찬하는 인터뷰와 글을 남겼을 정도로 좋아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 미스터리의 재미 중 가장 큰 것은 무엇인가 하면, 역시 마지막의 반전, 결말의 의외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편에서 그걸 내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단편집은 모든 작품이 놀라운 반전 구조를 그립니다. 생각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전개를 실현한 작품들입니다. 마치 네거티브 필름이 포지티브로 바뀌는 것처럼, 결말에서 흑백이 뒤바뀝니다. 모든 작품에서 완전히 속아버릴 수 밖에 없어요. 전후 미스터리 단편집 중에서, 저는 이 책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표제작입니다. 미스터리라는 성격상, 스토리를 말하는 것은 스포일러가 되므로 삼가겠습니다만, 제가 만약 단편을 쓴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an・an」 1990년 11월 23일호, 아야츠지 유키토 「나의, 한 권. 멋진 반전의 구조. 전후 최고의 미스터리 단편집」에서)
  • 아야츠지: 렌조 작품은, 일반적으로는 나오키상 수상작인 연애소설 『연문』이 유명합니다만, 충격적이었던 것은 역시 먼저, 『회귀천 정사』, 『은밀한 상복』 등의 초기 단편집입니다. 지금은 고분사 문고로 읽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밤이여, 쥐들을 위해』입니다.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실업지일본사에서 신서판으로 나왔고, 신초문고와 하루키 문고로 차례로 옮겨졌는데, 현재는 절판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 서술 트릭 계열 단편집의 최고봉인데......아깝네요. (「작가의 독서도 제150회: 아야츠지 유키토」에서)

읽어보니 이 정도 극찬을 받을만한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호평은 이해가 됩니다. 서정성과 트릭이 잘 결합되어 있던 작가 최전성기 시절("회귀천 정사" 시절)답게, 추리적으로 굉장히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트릭이 사용된 정통 본격 추리물에서 유괴극, 복수극, 서술 트릭 반전극, 느와르 등 수록작의 장르도 다양합니다. 과하게 느껴졌던 작가의 묘사도 다른 후기작에 비하면 절제되어 있어서 부담이 덜하고요.
모든 수록작이 다 괜찮은건 아니지만, 더운 여름, 한 번 읽어볼만하다 생각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가득하다는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두 개의 얼굴"
화가 마사키 유스케는 아내 게이코가 신주쿠 호텔에서 살해당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택 침실에서 유스케가 살해해 뒷마당에 파묻었다. 호텔 사건의 여자가 게이코라면, 유스케가 집에서 죽인 여자는 누구인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유스케는 죽인 여자의 얼굴을 그날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유스케는 호텔 사건에는 알리바이가 있었기 때문에, 호텔에서 발견된 여자를 게이코로 만들어 버리자고 마음먹었다...

진상은 유스케의 범행을 목격한 동생 신지가 자신을 협박하던 꽃뱀 여자를 함께 처치해 버렸던 겁니다. 마침 몸매가 비슷해서 속일 수 있었지요. 이 때 집 안에 전화가 두 대 있는 것을 이용해서 '순간 이동' 트릭을 선보입니다. 전화가 걸려와 안부를 물으면 당연히 외부에서 전화를 했을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같은 집 안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간단하면서도 현실적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유스케가 살해한 아내의 사체가 이동한 이유도 잘 설명되고 있으며, 사건에 대한 유스케의 심리묘사도 독자의 흥미를 더해주는 요소입니다. 서스펜스가 제법이었어요.
하지만 단편이라서 설명이 부족하며, 작위적으로 전개한 부분은 눈에 거슬립니다. 우선 신지가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건 너무 뻔했습니다. 신지를 협박하던 꽃뱀 여자가 유스케 집까지 찾아와 지문을 남긴건 억지스러웠고요, 마지막 신지의 장난도 이유를 알기 어럽습니다.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7인 1역"과 유사하다는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과거에서 온 목소리"
'나'는 금수저 출신으로 형사일을 견디다 못해 2년만에 그만두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뒤, 그만 둔 이유에 대해 강 선배에게 편지를 썼다.
1년 전, 전일항공 부사장 야마후지 다케히코의 외아들 가즈히코 유괴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 부인을 전화기에 붙잡아 놓은 상태에서, 담을 뛰어넘어 아이를 유괴했다. 경찰은 몸값을 확보하고 도주하던 범인을 미행하다 놓치고 말았다. 다행히 몸값을 받은 범인은 아이를 무사히 풀어주었고, 이후 공개 수사로 전환한 경찰에게 정체가 드러난 범인 오카다는 자동차 사고로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유괴범에게 동정심을 느낀 '나'는 당시 일부러 범인이 도주하도록 수사를 방해했다. 유괴범 중 한 명이 강 선배라는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건 범인이 '내일'이 금요일인지 토요일인지 정하지 못했던 상황을 통해, 범인이 두 명이며 둘 사이 커뮤니케이션이 원할하지 않다는걸 추리해 내는건 아주 좋았습니다. 두 명 중 한 명이 아이를 유괴당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부잣집 아들을 유괴해 몸값을 받아내려 했다는 발상도 재미있었어요. 실행범은 자기 아이를 유괴한 범인의 요구사항을 자기가 유괴한 사건 피해자에게 그대로 전달만하면 된다는 아이디어인데, 정말 획기적인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강 선배가 오카다를 살해했을거라는 결말도 합리적입니다. 오카다가 체포되면 진상이 드러날 수 있으니, 경찰이 체포하기 전 정보를 흘려 유인한 뒤 살해했다는건 말이 되니까요.

그러나 유괴가 이렇게 겹쳐서 강 선배가 피해자이자 범인이 된다는건 다소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나'가 강 선배의 눈에서 이십 년 전 범인 눈빛을 떠올린 덕에 진상을 깨달았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나'가 집 안에 있는 신이치가 사실은 유괴당한 가즈히코라는걸 눈치챈건 앞선 복선으로 설명되지만, 독자는 눈치채기 힘들다는 점에서 공정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유괴 피해자가 몸값 마련을 위해 유괴범이 된다는 아이디어는 아주 좋았던만큼, 이를 확장한 장편으로 묵직하게 썼다면 "킹의 몸값"과는 또 다른 딜레마를 안겨다주는 좋은 작품이 될 수도 있었을것 같은데 아쉽네요. 그래도 아이디어만으로 별점 3.5점은 충분합니다.

"화석의 열쇠"
하반신 마비 소녀 지즈가 목이 졸려 죽을 뻔 했다. 피해자 집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창문은 모두 안에서 잠겨 있었고, 출입구는 현관문밖에 없는데 열쇠는 관리인 사와가 보관하고 있었다.

지즈가 엄마를 집에 들이기 위해 자물쇠 바꾸는 청년을 속여 헌 자물쇠를 달게 했고, 엄마와 아빠 모두 지즈가 부담되어 살해하려 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이를 드러내기 위한 정보 제공은 공정합니다. 지즈가 자물쇠 바꾸는 청년에게 상황에 맞지 않는 초콜릿 부탁을 한 것, 관리인 사와가 엄청나게 청소를 열심히 한다는 등 상황에 대한 공유는 확실하니까요. '열쇠 화석'이라는 말도 단서로서는 좋았습니다. 사와가 이 모든걸 깨닫는 전개는 일상계스러워서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 둘이 동시에 딸을 살해할 생각을 한다는건 와 닿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다면 자기가 빠져나갈 생각을 할까요? 신파적인 결말도 별로였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기묘한 의뢰"
흥신소에서 일하는 나에게 쓰치야 마사하루라는 의뢰인이 찾아왔다. 아내 동향 조사 의뢰를 위해서였다. 아내 사야코는 하릴없이 이곳 저곳에서 시간만 보냈다. 알고보니 그녀는 나의 미행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고, 나에게 오히려 남편 쓰치야의 행적 조사를 부탁했다. 알고보니 나를 이용해서 몰래 불륜 행각을 저지르기 위함이었다. 이 역시 쓰치야에게 들켜버렸고, 쓰치야는 자기 행적 조사를 거짓으로 전달하라고 했다. 전달하기 위한 쓰치야의 행적은 애인 유리의 맨션 주소와 연락처로 받으려 했는데, 그 뒤 유리가 살해되었다...

쓰치야는 유리의 다른 애인으로, '나'와 유리의 관계를 알고 유리를 살해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조사를 맡긴건 유리와 나의 관계를 확실히 알아내기 위해서였고요.

나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그리고 냉소적인 심리묘사가 대부분으로 추리적으로 딱히 눈에 뜨이는 부분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묘사로 '나'의 별로인 모습만 드러나 작품에 몰입하기 힘들다는게 문제입니다. 쓰치야 부부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모습은 무능력했고, 유리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는 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마지막에 자신이 쓰치야에게 농락당한 것에 불과하다는걸 알아 버렸지만, 그냥 그대로 끝나버리는 결말은 이게 뭔가 싶더군요. 이야기가 완결되었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어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밤이여, 쥐들을 위해"
어린 시절 불우했던 나는 교정을 받아 사회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를 잃은 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복수를 결심했다. 
병원 원장 요코즈미 다다오는 '나'의 협박 전화를 받고 서둘러 집을 나선 뒤 살해당했다. 경찰은 백만엔이라는 돈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나'의 원한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추정했다. 이후 원장 사위이자 내과 부장 이시즈의 사체도 발견되었다.

'나'인 쓰무라의 아내는 불치병 뇌종양이었고, 병원의 과실로 죽은게 아닙니다. 그런데 왜 백만엔이라는 돈을 건네려고 했을까요? 이 수수께끼는 흥미롭습니다. 알고보니 이하라의 아내 후미요에 대한 오진을 숨기려고 원장과 내과 부장이 그녀가 백혈병에 걸리게 만들었다는게 진상입니다. 생각도 하지 못했네요. 쓰무라와 이하라의 정체가 독자가 알고 있던 것과 정 반대라는게 드러나는 반전도 좋았습니다. 잘 짜여진 서술 트릭물로, 독자를 완벽하게 속이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단 둘의 흉터는 너무 노골적으로 속이겠다!는 의도가 보여 좀 별로였고, 어린 시절 쥐를 죽였던 원한으로 살인까지 저지른다는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하라는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수 밖에 없었으니 억지스럽더라도 죽일 수 밖에 없는 동기를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작가의 고충은 이해가 되지만, 억지는 억지에요. 그래도 심리 묘사가 탁월한 덕분에 생각보다는 잘 설명되는 편이라 다행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이중생활"
마키코는 열 여섯살 많은 슈헤이에게 젊음을 바쳤지만, 자신을 버리려하는 슈헤이에게 증오를 느꼈다.

정부인줄 알았던 마키코가 진짜 아내이고, 반대로 나이많은 시즈코가 정부이자 불륜녀라는 반전이 인상적입니다. 이 반전을 결말 부분까지 잘 숨기면서 전개한다는 점에서는 서술 트릭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마키코가 남편 슈헤이와 불륜녀 시즈코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살해당한 것처럼 자살한다는 반전, 그리고 이를 위해 데쓰오와 시즈코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방법도 잘 짜여져 있어서 범죄물로도 우수한 수준이고요.

그런데 마키코가 정부 데쓰오를 범행에 끌어들인건 억지스럽습니다. 불륜을 저지르다가 살해당한 모양새이니, 마지막 순간치고는 영 폼이 나지 않으니까요. 데쓰오 없이도 현장 상황 - 슈헤이가 받아온 수면제가 들어있는, 슈헤이가 즐겨 마시던 와인 - 과 스토브 지문으로 슈헤이에게 누명을 씌우는건 가능했을것 같거든요. 시즈코마저 옭아매기 위해 데쓰오를 이용했다고보면 말은 돼지만, 이 역시 나이든 시즈코와 데쓰오가 불륜 관계라는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작위적입니다. 조건이 갖춰진 뒤에야 실행 가능한 계획이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도 힘들고요. 

단편이 아니라 장편이었다면 좀 더 설득력있는 인간 관계를 쌓아올리는게 가능했다는 측면에서, 조금 긴 호흡으로 풀어나가는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대역"
인기 배우 하세쿠라 슌은 아내 료코와의 이혼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 자신과 꼭 닮은 남자 다카쓰 신야를 찾아냈다. 그러나 료코가 슌의 불륜을 알고 있었으며, 이혼할 생각도 없다는걸 알게된 뒤 료코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다카쓰 신야를 이용한 알리바이를 만들어서였다. 오사카에서 다카쓰를 자신인 척 연기시킨 뒤, 자신은 변장하고 도쿄로 가서 살해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료코는 없었고, 오사카로 돌아간 뒤 자신의 방에 죽어있는 기누에를 발견했다. 이 모든건 료코와 다카쓰의 음모였었다.


하세쿠라 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완전 범죄물로는 볼만합니다. 도무지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완벽한 계획이었습니다. 하세큐라 슌의 대타가 다카쓰 신야가 아니라, 료코와 기누에 입장에서는 그 반대였다는 반전도 인상적이었어요.
 
하지만 이야기의 현실성이 많이 떨어집니다. 애초에 이렇게 닮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 주위에 같은 여자들이 엮이게 된다는 것 부터가 말이 안되지요.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기는 했는데, 말이 되는 이야기로 만드는 데에는 실패한 셈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베이 시티에서 죽다"
동거녀와 믿었던 아우에게 배신당한 조직원이 출소 후, 둘이 함께 도망친 항구 도시로 찾아가 모두 죽여버린다는 느와르.. 묘사도 멋있고 배신의 진상 - 없던 죄를 뒤집어 쓴게 아니라 원래 내가 지은 죄였다는 - 도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딱히 흥미롭지는 않았습니다. 추리적인 맛은 거의 없고, 내용도 신선함이 떨어지는 탓입니다. 그냥 서정적인 '사나이' 이야기를 한 편 쓰고 싶어 쓴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열린 어둠"
불량 학생들만 다니는 사립 세이에이 고등학교 음악교사인 미즈키 마사는 '마더'라는 별명으로 학생들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어느날 퇴학당한 폭주족 블랙호크스 멤버 중 한 명인 노리코가 긴급한 도움 요청을 해 왔다. 리더 다카기가 살해당했다고 했다. 노리코와 함께 현장에 온 마사는 경찰에 신고하려 했지만, 노리코가 유력한 용의자라는걸 알고 한 시간만 더 고민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카기의 죽음이 학교 체육 교사 아카자와 다케시 살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아카자와는 동성애자였다.

불량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을, 학생과 얼마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열혈 신입 교사가 해결한다는 내용으로 7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청춘 미스터리'의 영향이 가득 느껴집니다. 동성애로 인한 삼각관계가 원인이라는 점은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신선한 편이고요. 요새 이런 설정이 유행이라는데, 나도 한 번 써볼까!라는 생각으로 쓴 듯한데 의외로 괜찮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습니다. 다카기가 폐소 공포증이라는게 핵심 단서인데 - 아카자와 선생의 차는 비가 오는데도 창문이 열려있었다 -, 이는 여러가지 단서로 독자에게도 공유됩니다. 노리코가 아침에 다카기의 방에서 쫓겨난 건 창문을 닫으려고 해서, 다카기가 초고층 맨션에서 뛰쳐나온건 엘리베이터를 탈 수가 없어서, 다카기가 폭주족이 된 건 차를 타기 싫어서였다는 식으로요. 
미즈키 마사가 학생들 앞에서 추리쇼를 펼쳐 진상을 밝히는 전개도 정통 본격 추리물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다카기가 스즈타에게 아카자와 살인 혐의를 뒤집어 씌우려고 현장을 조작했기에, 스즈타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걸 증명하려고 다카기를 살해하고 노리코에게 혐의를 씌웠다는 동기는 설득력이 약합니다. 후더닛 물로는 괜찮았지만, 와이더닛 측면에서는 좋다고 하기 어렵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2004/06/22

Kimagure Orange Road! (변덕쟁이 오렌지 로드)

간만에 옛 추억이 생각나서 적어 봅니다. 

이 만화-애니메이션은 그야말로 저의 청춘기를 지배한 작품입니다. 중3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정말 미친 듯이 좋아했던 작품이거든요. 당시 얼마 안 되는 용돈으로 관련 상품을 사 모았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원작 만화는 초능력 가족의 장남인 주인공 카스카 쿄우스케(春日恭介), 이사 온 첫날의 산책 길에서 우연히 날아온 빨간 밀짚모자를 잡아준 인연으로 묘한 인연이 생기게 되는 아유카와 마도카 (鮎川まどか), 카스카가 우연히 초능력을 쓰는 것을 보고 그를 좋아하게 되는 후배 소녀 히야마 히카루 (檜山ひかる), 이 3명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한 청춘 러브 코미디입니다.
지금 보면 뻔한 설정에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포맷으로 들쭉날쭉하는 작화는 짜증마저 불러 일으키지만, 초능력이라는 설정을 도입하여 작품에 감칠 맛을 주고 주인공 3명 이외에도 여러 다양한 캐릭터들의 유머스럽고도 디테일한 묘사로 상당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잔잔하고 진지한 사랑이야기를 다루며 또 다른 느낌을 전해 주고요.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은 80년대 후반을 강타한 TV 애니메이션입니다. 당시 작품들과 비교해서도(같은 시기에 “시티헌터” 1기가 시작했었지요) 뛰어난 작화와 다케다 아케미씨가 디자인한 캐릭터들, 그리고 국내 영화 “무사”의 음악 감독까지 맡았던 음악감독 사기스 시로(鷺巢詩郎)의 음악이 잘 조화된 수작입니다.
거기에 당대를 주름잡았던 최고의 여성 캐릭터 아유카와 마도카의 존재로 이 작품은 더욱 빛났습니다. 싸움과 운동, 공부, 거기에 음악성까지 뛰어나다는 초월적 캐릭터로, 다케다 아케미씨의 묘한 느낌의 성숙함까지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당대의 아이돌이었지요.

만화 엔딩의 멋진 대사(Like or Love? Like! 한없이 Love에 가까운….)가 나오지 않던 TV 애니메이션은 조금 불만이었지만, 극장판에서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조금씩 흔드는 슬픈 사랑의 결말을 보여주면서 오히려 더 리얼하고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듯한 캐릭터들로 저의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메종 일각"과 더불어 80년대 청춘 러브 코미디의 양대 산맥이자, 미소녀는 긴머리와 단발머리 두명!이라는 공식을 정의하고 훗날 수많은 작품에서 패러디 되고 인용되는 작품 오렌지 로드….
이사가려고 짐을 정리하는데 우연히 몇 년전에 모 동호회에서 사 둔 미국판 오렌지로드 TV판 DVD 박스 셋트(라지만 LD버전을 그대로 옮긴 듯한)가 눈에 띄어 몇자 적어봅니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저도 예전같지는 않지만 아직도 이 작품을 보면 무언가 느껴질만큼 인상적이었던 제 청춘의 초상입니다.

2014/06/09

Q.E.D 큐이디 45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5점

큐이디 Q.E.D 45 - 6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Q.E.D 큐이디 46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3점

46권부터 읽어서 45권을 찾아 읽었는데 어느새 47권이 나와버렸네요... 

45권은 Q.E.D의 전통이라고 해도 무방한 스타일 -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며 한편은 강력 사건 범죄물, 다른 한편은 잔잔한 일상계 - 에서 벗어났다는게 특징입니다. 수록작 두 편 모두 살인 사건이 등장하거든요. 특히 두 번째 에피소드는 학교와 학생이 무대인 전형적 Q.E.D 일상계 설정인데도 불구하고요.

그러나 솔직히 아쉬움이 더 큽니다. Q.E.D만의 장점이자 김전일, 코난 등과 가장 크게 차별화되는 장점은 풋풋한 일상계 이야기들인데 그런 맛을 느끼기 힘들었으니까요. 고등학교가 무대일 필요가 없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합니다. 앞으로는 일상계 쪽으로도 신경을 더 써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별점은 대충 반올림해서 2.5점 정도. 그냥저냥한 평작 수준이었습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금성"

일종의 밀실 트릭이 등장하는데, 솔직히 추리적으로는 옷장 거울을 이용한 핵심 트릭 외에는 논할게 없습니다. 트릭도 본편에서는 제대로 언급되지 않아서 공정하다고 보기 어려우며, 동기도 살의를 품을 만큼 설득력있는지는 잘 모르겠고요.

또 태양계의 여러 행성에 대해 설명해주는 과학만화가 본편과 함께 전개되는데,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작품과 잘 결합되어 있다고 보기 힘듭니다. 범인이 이 책 때문에 비뚤어진 사고방식을 가진 어른이 되었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본편 살인 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지도 않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잘 알 수 없거든요. 제목도 잘 이해가 되지 않고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알고 있던 것 뒤에 숨겨진 진실'이라는 주제에 좀 더 초점을 맞추어 진행하는게 좋았을겁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첫사랑"

모두의 여신이라 할 수 있는 여학생과 사귀게 된 뒤 살인사건에까지 휘말리게 된 동급생을 도와주는 토마의 이야기. 풋풋한 첫사랑의 감정과 살인사건을 결합시킨 전개는 그럴듯하지만, 살인 사건이 등장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기본 설정이 이전 Q.E.D 초창기의 농구부 주장 - 검도부 부장 - 신문부 기자 친구의 삼각관계 설정과 굉장히 흡사한걸 보면, 작가 스스로 이전 이야기의 간단한 "장난"을 "살인"으로 업그레이드해서 변주한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이 정도면 좀 달라보이겠지?하는 심정으로요. 하지만 고교생이 장난을 치는 것은 그럴듯해도 살인을 저지르는건 지나쳤습니다.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풍성한 편이라는건 장점입니다. 트릭도 두 가지나 등장합니다. 하나는 건너편 옥상에서 시체를 던지는 장치 트릭이고, 또 하나는 시체 바꿔치기 트릭입니다. 다만 이 중에서 시체 바꿔치기 트릭은 현실성이 부족합니다. 시체를 잠깐 들춰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상황일 뿐더러, 변수가 너무 많은 탓입니다. 예를 들어 핸드폰으로 사진 정도는 찍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시체 주변에서 자리를 비울 것이라는 것도 확신하기 어려우며, 짧은 시간 동안 눈치채지 못하게 바꿔치기 하는 것도 과연 가능했을지 의문입니다. 베란다의 통로가 이미 제시된 만큼, 경찰 수사를 통해 진상이 밝혀졌으리라 생각되기도 하고요. 현장 감식을 통해 시체 이동 경로만 알아내면 게임은 끝이니까요.

때문에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여러모로 조금 부족했던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내용에서 46권의 만담가 사건 이야기가 언급되는데 다음 권 이야기를 앞서 설명해주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단행본에서 추가된 부분일까요? 아니면 앞부분의 내용을 작가가 미리 구상해 놓고 반영한 것일까요? 궁금하네요.

: DSmk2님께서 댓글로 알려주신 내용 덧붙입니다. 현재 Q.E.D.는 일본 잡지에서 월간소년매거진과 월간소년매거진 플러스라는 두 잡지에서 연재 중인데, 45권에 들어간 "첫사랑"과 46권에 들어간 "실연"은 각각 월간소년매거진 2013년 7월호(6월 6일 발매), 월간소년매거진 플러스 06호(6월 20일 발매)라서 동시기 작업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또 이 두 에피소드는 제목에서부터 일본어로 初恋, 失恋이라 딱 보면 느낌이 오는데, 한국말로 해놓으니까 느낌이 안 사는 게 아쉽다고도 하셨고요.

"실연"에서 아야메라는 캐릭터가 나와서 '실연'이라는 결말을 맞게 만든 것은 불필요한 장치로 보인다고 리뷰를 남겼는데, 제목에서부터 이어지도록 한 작가의 의도가 개입된 것이라는 점을 새롭게 알게 되었네요. DSmk2님,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2011/04/01

러브로마 1 - 토요다 미노루 / 김동욱 : 별점 3점

러브로마 1 - 6점
토요다 미노루 지음, 김동욱 옮김/세미콜론

항상 직구승부, 하고싶은 말은 무조건 하는 정직맨 호시노와 화끈하다는 점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네기시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블로그 이웃이신 벨제뷔트님이 번역하신 작품으로 벨제뷔트님의 배려로 읽게 되었죠. 이 자리를 빌어 먼저 감사드립니다. 

설정만 놓고 본다면 진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즐겁고 유쾌한 학교생활, 주변에 있는 만만치않게 개성적이면서도 유쾌한 친구들 등 그야말로 우울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차이점이 큽니다. 거대한 사건이나 음모 없이, 별다른 삼각관계나 위기 없이도 여자친구와의 첫 키스, 그녀가 싸준 도시락, 처음 가본 그녀의 집에 대한 추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 깨닫게 만들어 주는 일상성도 아주 마음에 들었고요. 순수한 감수성과 즐거움이 가득하여 독자를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에요.

아쉽게도 그림이 썩 좋다고는 할 수 없는데, 찬찬히 보면 목판화가 연상될 정도로 선의 느낌이 개성적이고 순진해서 작품이랑 딱 어울린다 생각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 고교생 연애물은 역사도 깊고 그 종류도 많겠지만 그 중에서도 독특하고 인상적인, 자기만의 세계를 꾸려가고 있다는 점에서 추천합니다.

2026/05/17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3) 무덤 위 에로그로 식탁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이단자의 사랑"입니다. 이 작품은 일본 유학 시절이던 1934년에 단편 "타원형의 거울"로 데뷔한, 국내 최초의 본격 추리소설 작가 김내성의 단편입니다. 저는 절판된 지 오래된 단편집 "비밀의 문"을 통해 이 작품을 접했는데, 다행히 최근 복간되어 이제는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전자책으로도 출간되었으니 참고하세요.

의사 김철하는 애련과 약혼했지만, 1년에 한 번만 그녀를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조건을 걸고 그녀를 시인 추강에게 양보합니다. 추강이 그녀의 첫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애련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추강은 그녀의 묘 위에 복숭아나무를 심습니다. 애련의 살과 피로 자라난 복숭아 열매를 김철하가 보는 앞에서 홀로 독점해 맛보기 위해서였지요. 추강은 김철하가 찾아오는 날마다 복숭아를 따 먹으며 그의 앞에서 자신의 승리를 과시합니다.

이 장면은 추강의 광기 어린 독점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묘사가 정말 일품입니다. 탐미적이면서도 에로틱하고, 변태스러우면서도 그 과즙이 입안에 흥건하게 고이는 느낌을 줄 정도로 사실적이기 때문입니다. 미녀의 무덤에서 자란 과일로는 복숭아만 한 게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복숭아는 원래 미녀를 상징하는 과일이기도 하니까요.

복숭아는 본래 "손오공"에 등장하는 천도복숭아처럼 장수의 상징이자 귀신을 쫓는 신령스러운 과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언제가부터 농밀한 여인의 이미지가 덧붙여졌는데, 복숭아의 특성과 맛 때문일 겁니다. 맛있는 복숭아를 뜻하는 '수밀도'라는 단어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껍질이 얇고 살과 물이 많으며 달콤한 맛'이라는 뜻이 미녀와 연결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니까요. 뜻 뿐만이 아니라, 높은 당도에도 불구하고 저칼로리에 수분과 식이섬유가 풍부해 다이어트에 좋고, 비타민도 많아서 피부 미용에도 좋으며, 피부의 멜라닌 생성을 촉진하는 타이로시나아제라는 성분을 억제해서 피부 미백 효과도 볼 수 있다니, 미인이라면 놓쳐서는 안 될 과일입니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추강은 한여름 날 복숭아를 따서 껍질째 먹는데, 이 방식이야말로 복숭아를 제대로 먹는 방법입니다. 껍질에 비타민 E 등 유익한 성분이 많고, 높은 온도에서 단맛이 더욱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추강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김철하는 복숭아를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이 가져온 고래고기 통조림만 먹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고래고기의 정체를 알아챈 추강에게 김철하가 "고래고기다!"라고 외치며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이 작품이 발표된 1943년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입니다. 당시 고래고기는 가장 싸고 대중적인 고기였습니다. "맛의 달인" 등에서도 전쟁 전후에 고래고기가 저렴한 서민 음식으로 자주 언급되지요.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 이전에는 포획량이 많아 흔한 음식이었습니다. 지금은 포경 금지로 인해 귀하고 비싼 음식이 되었지만요.

고래고기는 육고기와 생선의 중간 맛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회나 수육으로 먹었고 일본에서는 스테이크나 꼬치 요리로도 소비되었습니다. 외국 사례를 보면 "모비 딕"에서는 스테이크로 먹는 묘사가 등장하고, 아이슬란드에는 고래고기 꼬치가 전통 요리 가운데 하나라고도 하네요.

콜레스테롤 없는 불포화지방산을 다량 함유하고 있고, 온갖 비타민도 골고루 들어 있어 영양가도 뛰어나지만, 특유의 냄새 때문에 호불호가 갈립니다. 철 성분이 많은 고래의 피가 썩으면서 나는 냄새인데, 고래는 죽자마자 바로 피가 부패되기 시작합니다. 육지 동물보다 산소를 운반하는 헤모글로빈 수치가 높은 탓이지요. 헤모글로빈은 단백질이라 곧바로 썩거든요. 그런데 고래는 정식으로 잡을 수 없어서 그물에 걸려 죽은 경우 등에 한해서만 유통되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피를 곧바로 뺄 수 없어서 냄새가 나게 됩니다.

작품에서처럼 통조림으로 만들 때는 냄새가 심한 싸구려 고기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보통은 진한 양념을 사용해 냄새를 잡고 맛을 균일화하는 조림 방식으로 만듭니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야마토 조림' 고래고기 통조림이 있습니다. 설탕, 생강, 간장 등으로 조린 이 요리는 냄새를 잡고 고기를 부드럽게 만듭니다. 다만 고기 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짐작하시듯, 작품 속 고래고기 통조림 속의 고기는 고래고기가 아닙니다. 조리 방식도 장기 보존을 위해 소금에 절인 뒤 말렸을 뿐이지요. 같은 재료,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육포는 야마시로 아사코의 "엠브리오 기담" 수록작 "지옥"에도 등장합니다. 산적들에게 잡힌 주인공이 구덩이에 갇혀, 산적들이 던져 준 육포로 연명하다가 함께 갇혔던 신혼부부 중 신부가 도망친 날, 신선한 고기가 던져졌다는 내용이 압권이지요. 지옥 구덩이에서 주인공이 탈출에 성공해 산적 일가를 구덩이에 가둔 뒤 벌어진 참상도 상상을 초월하고요. 참고로 야마시로 아사코는 "ZOO"와 "GOTH"의 작가 오츠 이치의 또 다른 필명입니다. 작품도 과연 오츠 이치구나 싶어요.

"이단자의 사랑"은 지금 기준으로 뛰어난 작품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당시 유행했던 '에로그로' 코드가 과도하고, 에도가와 란포의 영향이 짙으며, 흔한 삼각관계 치정극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시인과 과학자의 대결 구도도 다소 부자연스럽고요. 그러나 반전만큼은 강렬합니다. 제 아버지께서는 약 50년 전에 이 작품을 읽으셨는데도 이 반전을 아직도 기억하실 정도입니다. 반전을 위해 사용된 복숭아와 고래고기의 대조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복숭아는 농밀하고 탐미적인 에로스를, 고래고기는 거칠고 냉혹한 그로테스크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에로그로'라는 키워드를 음식으로 명확하게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리메이크한다면 어떤 통조림이 적합할까요? 저는 골뱅이 통조림을 떠올렸지만, 고기 형태가 너무 달라 쉽게 들통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통조림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나요?

# 시리즈 전체 보기

2022/01/16

작가 형사 부스지마 - 나카야마 시치리 / 김윤수 : 별점 2점

작가 형사 부스지마 - 4점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김윤수 옮김/북로드

제목처럼 전직 형사이지만 은퇴 후 작가로 데뷰해 인기를 얻으면서, 형사 지도원으로 복귀한 부스지마가 신참 형사 아스카와 함께 작가들이 관련된 여러 사건들을 해결한다는 내용의 단편 모음집입니다. 이런 저런 작품들로 많이 접해 보았었던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이지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지극히 만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 나가는 작가로 문학계에 정통하며 온갖 냉소와 비난을 사정없이 날리는 작가 형사 부스지마의 설정부터가 만화적이니까요. "부호 형사"와 별다를게 없는 과장된 설정입니다. 등장하는 편집자와 작가들에 대한 설정들도 억지가 느껴질만큼 과장되어 있다는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사회파에 가까운, 묵직한 작품들을 선보였던 작가답게 마냥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출판계, 특히 작가들에 대해서 부스지마의 입을 빌어 통렬한 비판을 가하는건 나름 메시지를 전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좀 부족했고, 이야기 구성이 대체로 한가지 패턴이라는 단점은 큽니다. 전체 평균한 별점은 (간당간당한)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트릭과 진상, 범인을 모두 까발리는 스포일러 가득한 리뷰'라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워너비의 심리 테스트" 소설 스메라기 신인상 1차 심사위원이었던 도메키가 자루없는 날카로운 알루미늄 송곳에 꿰뚫려 살해당했다. 용의자는 도메키가 심사평을 험하게 썼던 신인상 출품 작가들 3명 - 다다노 구스오, 오우미 히데오, 아이카와 시오리 - 이었다. 그러나 작가들의 심문에 넌더리가 났던 아소 반장과 이누카이 형사는 신참 아스카에게 형사 지도원 부스지마의 도움을 받아 수사를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사건 설명을 들은 부스지마는 3명을 각각 만나, 그들 면전에서 더욱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데....

주요 설정과 등장인물들이 소개되는 시리즈 제 1작. 이 시리즈가 어떤 작품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부스지마가 얼척도 없이 자기 작품에 대해 자신감만 가득차 있는 신인 작가들을 통렬하게 깨부시는 장면이 가장 핵심이라는 점에서 말이죠.

추리적으로 빈약하다는 특징도 두드러집니다. "자루가 없는 알루미늄 송곳"이 화살인건 너무 명백하니까요. 이를 초반에 알아채서 이야기하지 않는게 더 이상했습니다. 부스지마가 용의자들을 도발해서 재차 범행을 시도하도록 만드는데, 범인이 이에 넘어가 부스지마를 죽이려 한다는 전개도 다소 유치했고요. 오우미 히데오가 기계 공작 회사를 다니다가 정년 퇴직했다는 정보를 이용하여 흉기를 추리해 낸 뒤, 가택 수사로 증거를 잡는게 더 추리물다왔을겁니다. 부스지마가 직접 표적이 되어 현장에서 범인을 체포한다는 과장된 추리쇼는 불필요했을 뿐더러, 억지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아무리 방탄복을 입었다고 한 들, 화살을 머리에 맞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신인 작가들에 대한 비난도 나름 새겨들을 부분은 있지만, 대상자인 3인이 안 좋은 신인 작가의 단점만 극대화하여 합쳐놓은 인물들이라는 것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일관한다는 점에서, 만화적인 느낌을 부각시킬 뿐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편집자(編集者)는 편집자(偏執者)" 

편집자 마다라메 아키라에게 신인 작가들이 연이어 찾아왔다. 하고로모 사야는 데뷰 전 동인 작품의 출간을 막고자, 그리고 그녀 원고 속 트릭 아이디어를 반강제로 중견 작가에게 넘긴걸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덴도 구이치로 역시 항의가 목적이었다. 데뷰작에서 사용하라고 마다라메가 전해 준 트릭과 반전이 인기작가 아야메 작품을 베낀 것이어서, 덴도는 표절 작가로 낙인찍혀 작가 인생을 망쳤기 때문이었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출판, 문학계를 통렬히 비판합니다. 신인 작가들 약점을 쥐고, 자기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폭언을 내뱉는 악덕 편집자 마다라메, 그리고 제대로 된 작가도 아니면서 자기 작품과 소설가라는 직업에 헛된 신념을 품은 신인 작가를 통해서요. 문단에서 라이트노벨 작가는 일회용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는 등의 업계인스러운 이야기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나카야마 시치리 시선을 보자면, 편집자보다는 작가 문제가 훨씬 큰 것으로 그려져 이채롭더군요. 편집자가 작가와 이인삼각으로 작품을 완성해 나가면 좋지만, 수익을 중시하는 편집자도 당연히 필요하다는게 나카야마 시치리의 논리거든요. 출판도 시장이니까요. 마다라메도 문제는 있지만,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는 측면으로는 우수한 직원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작가들은 일반인의 상식도 갖추지 못한, 자의식에만 쩌든 괴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덴도 구이치로는 아예 동정도 가지 않을 정도에요. 소설가라는 놈이 편집자가 제공한 트릭과 반전으로 글을 썼다면, 이건 작가가 아니라 그냥 대필 기계일 뿐이니까요. 이런 주제에 자기가 창작자다 뭐다 운운하며 뭔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인 것 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욕을 먹어도 쌉니다. 조금 낫기는 하지만 하고로모 사야도 마찬가지에요. 또 이런 작가들이 단순한 비지니스 파트너에 불과한 편집자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모습도 통렬하게 꼬집습니다.

다행히 이 작품은 비판 외에도 추리물로도 볼 만했습니다. 사용된 알리바이 트릭이 꽤 괜찮았거든요. 우선 하고로모가 흉기를 준비하고, 범행 현장인 호텔 지하 주차장까지 마다라메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범행 시각에는 너무나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듭니다. 그리고 호텔 바에서 술을 마시던 덴도가 화장실을 가는 척 잠깐 자리를 비운 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 트렁크 안에 가두었던 마다라메를 찔러 죽이고 바로 돌아온 겁니다. 나중에 하고로모가 차를 회수하면서, 시체도 유기했고요. 꽤 그럴듯했어요. 

그러나 문제는 호텔은 CCTV가 완벽하게 존재하는 곳이라는 거지요. 지하로 향하는 모든 입구, 엘리베이터와 주차장 CCTV만 조사해도 트릭이 드러나는건 순식간이었을 겁니다. 덴도가 호텔 바에 있었다는걸 검증하기 위해 경찰이 철저하게 수사했을테니 빠져나가기는 힘들었을테고요. 그런 점에서 정교한 계획이라고 보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이는 수사의 문제일 뿐, 트릭을 폄하하기는 힘들고 독자가 추리하기 위한 정보도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는 만큼 별점은 2.5점 주겠습니다.

"상을 받긴 했지만" 

신인상 수상작가들에게 쓴 소리를 하던 노 작가가 살해된 사건이 등장합니다. 당연히 쓴 소리를 들은 작가들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자의식 과잉으로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한 애송이들에 불과하고요. 부스지마가 풋내기들 정신 교육을 시킨다는 전개도 앞서 이야기들과 똑같습니다. 한마디로 원 패턴으로 일관하는 자기 복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최악이에요. 트릭이나 단서, 증거같은건 등장하지도 않거든요. 부스지마의 정신 공격(?)에 무너진 범인이 스스로 범행을 자백하는게 전부니까요. 작가들을 쓴 소리로 비판하면서, 본인은 이런 작품을 버젓이 발표하는건 무슨 정신머리인지 모르겠네요. 최악 중 최악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애독자" 

작가 다카모리 교헤이 토크쇼 간담회에 3명의 독자가 참석했다. 한 명은 인터넷에 혹독한 비판만 올리며 즐거워하는 일종의 악플러인 구와에 도모미. 한 명은 다카모리 교헤이에게 강하게 연심을 품은 정신병자 스토커 마키시마 히나코. 마지막 한 명은 다카모리 교헤이에게 어떻게든 자기 작품을 보여주려고 발악하는 작가 지망생 가노 이쿠였다. 그리고 간담회 직후 다카모리 교헤이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여러모로 앞서의 시리즈 다른 작품들과는 차이점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는 작가가 아니라 작가에게 비틀린 애정을 품은 독자들이 주요 용의자라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부스지마가 이 독자들에게는 독설을 날리지 않는다는 점이고요. 마지막 세 번째는, 범인이 따로 있었다는 점입니다! 다카모리 교헤이는 여자 관계가 복잡해서, 아내가 그를 살해했던게 진상이었습니다. 최신간 속지 부분을 뜯어내어 현장에 두었던건, 사인을 받았을 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했던 것이고요. 이 페이지만 뜯어진 채 시체 밑에 책이 놓여져 있던 것, 사인이 번지는걸 막기 위함인 간지가 현장에 없었던 것, 그리고 현장에 있던 책은 2쇄본이었는데, 2쇄본이 작가 서재에 없었던 걸로 보아 서재에서 꺼내온 책이라는 결정적 증거 등으로 진상을 추리해내는 과정도 합리적이었습니다. 이 중 간지가 현장에 없었던게 증거가 되기는 힘들어 보이기는 했지만, 그 외 내용은 아주 괜찮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원 패턴이었던 전개를 탈피했다는데 점수를 주고 싶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스포일러 가득한 악담을 리뷰랍시고 올리는 구와에 도모미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등장하는데, 살짝 찔리더군요. 저도 거의 모든 리뷰에 스포일러를 가득 담고 있으니까요. 앞으로는 리뷰 내용에 스포일러가 있다는걸 더 잘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원작과 드라마 사이에는 깊고 어두운 강이 있다" 

부스지마의 트리콜로 시리즈의 드라마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듀서 소네는 원작의 인지도만 원했기에, 주인공도 여자로 바꾸고 없던 러브라인, 해피엔딩을 추가했으며 핵심인 보험금 살인도 스폰서 눈치를 보느라 치정 살인으로 바꾸고 말았다. 결국 부스지마와 편집자 신보는 방송사 관계자와 담판을 짓는 자리를 갖고, 부스지마는 언제나의 말투로 이 모든걸 소설이나 기사 형태로 폭로하겠다며 관계자들을 비웃었다. 그리고 그날 밤, 소네는 살해당했고 부스지마도 용의자로 떠올랐다.

작가 지망생들보다는 TV 드라마 관계자들을 비웃고 비난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비판할 악당의 악행을 먼저 묘사해서 독자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킨 뒤, 부스지마가 면전에서 한 방 먹이는 방식은 전작들과 거의 같습니다. 한마디로 원 패턴이라 식상했어요. 

추리적으로도 건질게 별로 없습니다. 부스지마가 시나리오 작가 후세가 소네를 공격한 방법을 과거 드라마에서 찾아내는 등의 활약은 하지만, 후세와 신보의 발자욱을 현장에서 입수했기 때문에 추리로 범인을 밝혀낼 여지는 전무하니까요. 후세는 단순 폭행이었고, 실제로 질식사하게 만든건 편집자 신보였다는 추리도 설득력이 낮습니다. 무엇보다도 신보가 자백하지 않았다면, 범행을 증명하기 쉽지 않았을겁니다. 기절한 사람을 돌려 놓으면 질식사 할 수 있다는 책을 함께 작업했다는 것 정도가 증거가 될 수는 없을테니까요.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 2인 3각으로 작품을 만든 신보를 직접 고발하는 부스지마가 자기는 작가 이전에 형사였다는 멋진 말을 한 직후, 이를 소재로 작품 하나를 쓸 수 있겠다고 하는 장면은 부스지마 캐릭터가 어떤 인물인지를 잘 드러내기는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느껴져서 별로 자연스럽게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2023/11/17

#진상을 말씀드립니다 - 유키 신이치로 / 권일영 : 별점 2점

#진상을 말씀드립니다 - 4점
유키 신이치로 지음, 권일영 옮김/시옷북스

일본 추리계의 신성이라는 작가의 단편집. 모두 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장점이라면 공정한 정보 제공과 추리의 연계입니다. 고전 본격 추리물을 연상케 할 정도였습니다. 반전들도 강렬합니다. 뒷맛을 전해 준다는 점에서는 '기묘한 맛' 류라고 보아도 괜찮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일단 사건들이 일어나는 상황, 동기들이 비현실적입니다. 사건을 저지른 다음의 뒷 수습을 고려하고 있지도 않고요. 여기에 더해 전개가 너무 뻔합니다. 현재 상황이 어떠하며 앞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어요. 추리는 이런 예상을 굳히기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추리를 통해 의외의 진상이 드러난다던가 하는건 거의 없습니다. 때문에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듭니다. 그나마 2021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 부문)을 수상했다는 마지막 작품인 "#퍼트려 주세요"만이 뻔하지 않은 진상과 결말로 이어지기는 합니다만, 비현실적이라는 단점은 마찬가지고 오히려 '추리' 적인 요소가 별로라는 문제는 도드라지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 딱히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자면담
가정교사 소개 영업사원 가타기리는 야노 모자와 방문 상담을 진행하던 중, 무언가 수상하다는걸 느꼈다. 야노 부인의 신경질적이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여러가지 행동들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아들 유의 행동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명문 중학교를 노린다는 아이가 간단한 수학 문제의 답으로 110만 쓰고 있었다....

요약에서 설명한 장점과 단점이 모두 극명하게 드러난 작품. 장점부터 이야기하자면, 소년의 이름이 한자를 일반적으로 읽는 발음과 달랐다던가 ('유'가 아니라 '하루카'였음), 소년이 피아노를 배웠다는데 치지 않는다던가, 분명 먼 사립 학교를 다니는데 동네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논다고 하고, 무슨 문제를 내어도 110이라는 답을 내 놓는 등 정보 제공은 확실합니다. 심지어 이웃집 부인이 진짜 야노 부인을 살해했던 동기인 쓰레기 봉투 문제까지도 앞 부분에서 설명될 정도입니다. 하루카는 이미 사고로 죽었었으며, 야노 마리가 아직 아들이 살아있다고 믿은 망상 탓에 불거진 일이었다는 반전도 섬찟했고요.
상황도 무척 흥미진진합니다. 살인범과 피해자의 아들, 그리고 평범한 일반인이 함께 삼자 면담을 진행하는 과정은 서스펜스 넘칩니다.

하지만 단점 역시 말씀드렸던 그대로입니다. 우선 상황 자체가 비현실적입니다. 가짜가 가타기리를 만나서 방문 상담을 진행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아들이 갑자기 아파서 날짜를 조정하겠다 정도로 이야기하는게 당연하지 않았을까요? 무려 20분이나 걸려 현장을 대충 치워야 했다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게다가 아이가 아무리 공포에 질려 있었어도 순순히 범인의 협박에 따라 행동한 것도 이상해요. 작중에서도 초등학교 6학년이면 성인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언급할 그런 나이인데 말이지요. 전개도 너무 뻔합니다. 초반부터 야노 부인이 가짜라는 건 쉽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대 놓고 수상하다는걸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매칭어플
나는 kento라는 가명으로 매칭어플을 통해 마나를 만나 데이트한 뒤 그녀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방을 관찰하고 샤워를 하던 중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위화감을 느꼈다.

마나가 원조 교제 남성들을 낚아 협박하는 조직의 멤버였으며, 마나의 자취방은 일당의 아지트였다는 내용은 신선했습니다. 그래서 마나가 데이트 중 했던 말과 방 안 사물들이 일치하지 않았고, 샤워기 높이 등도 잘못 놓여져 있었던 것이지요. 이를 위한 정보 제공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공정합니다. 추리적으로는 나무랄데 없어요.

그러나 딸의 원조 교제를 중단시키기 위해 이런 사건을 저질렀다는 동기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딸이 매칭 어플로 원조 교제를 한다고 딸을 닮은 원조 교제녀들을 여러명 죽이고 다닌다? 이건 비현실적을 넘어서는 미친 설정입니다.
또 주인공이 매칭 어플을 사용하는 딸과 닮은 여성들을 살해하는 연쇄살인마라는 것도 쉽게 알 수 있는데다가, 마지막에 밝혀지는, kento의 딸 미유키 역시 조직의 멤버였다는 반전도 신선하기는 했지만 작위적이었습니다. 마침 그 때 문자 메시지가 배달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판도라
명문대 출신인 나는 아이가 생기지 않아 괴로워하다가 힘들게 딸 마나쓰를 얻은 뒤,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정자 제공을 하려고 결심했다. 하지만 정자 제공은 딱 한 번에 그쳤다. 그리고 15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자 어린이 연속 유괴 살인사건의 범인 호조지 재판이 잘못되었었다는 뉴스가 나오던 어느날, 나의 딸이라는 아이 쇼코의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잔잔한 드라마로 쇼코와의 대화를 통해 마나쓰가 친딸이 아니며, 아내도 다급한 나머지 정자를 기증받았던게 아닐까라는 깨닫지만,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고 두 아이 모두 자기 딸로 인정하겠다는 결말이 괜찮았던 작품.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정자 제공을 한 상대가 호조지의 아내였다는건 쉽게 눈치챌 수 있었지만, 이야기의 핵심 요소는 아니라서 큰 단점은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정체는 금방 밝혀지기도 하고요.

그러나 문제는 추리물도 아닐 뿐더러, 그녀가 정자 제공을 받으려 했던 동기가 영 설득력이 없다는 겁니다. 호조지와 마지막 관계를 가진 뒤 그가 체포된 탓에, 혹시 임신되었을 때를 대비해 누구의 딸인지 모르게 하기 위해 기증받은 정자를 주입했다고 합니다. 혹시 딸 쇼코가 아버지의 정체를 눈치채면 딸에게 "너는 살인범의 딸이 아니라 기증받은 정자로 태어난 아이다"라고 말해주려고요. 그런데 유전자 검사라는 방법이 있으니 이는 결국 자기 만족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임신 중절을 하기 싫었다면, 모르는 남자의 아이를 키우느니 이민을 가는게 더 나은 선택이었을 거에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삼각간계
나 (기리야마), 모기, 우지하라는 대학 시절 친했던 "이쓰멘" 모임 멤버로 5년 만에 모임을 가졌다. 오사카에 사는 모기의 집 앞으로 우지하라가 전근온 것이 계기였다. 도쿄에 있는 기리야마를 고려해 온라인으로 가진 모임 중, 우지하라는 기리야마에게 모기를 죽이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자기 약혼녀가 모기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우지하라가 보낸 사진 속 약혼녀는 기리야마가 사귀고 있는 여자 미나미였다...

전개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뻔합니다. 우지하라 약혼녀의 불륜 상대가 기리야마라는건 전개 상 당연했거든요. 당연히 우지하라가 죽이려 하는 것도 모기가 아니라 기리야마였고요. 오사카에 있는 척 했던 트릭은 머리를 많이 쓴 것 처럼 설명되지만, 원격 미팅이 잦은 최근 시점에서는 새롭지도 않으며 기리야마가 눈치챈게 아니라면, 우지하라가 장황하게 설명해 줄 이유도 없습니다.
기리야마가 거짓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이렇게 원격 모임처럼 가장해서 속였다는 동기도 수긍하기 어려웠습니다. 약혼녀가 불륜을 저질렀다고 살인을 저지르는 우지하라는 몰상식한 인간이라고 쳐도, 친구 모기가 공범으로 살인에 가담하는건 말이 안되잖아요? 결혼해서 애도 있는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1점. 수록작 중 워스트입니다.

#퍼트려주세요
어렸을 때 부모님을 따라 외딴 섬 몬메지마로 이사온 와타나베 초모란마는 자기처럼 도쿄에서 오고 독특한 이름을 가진 동갑내기 구와지마 사데쓰, 안자이 루주, 그리고 유일하게 토박이었던 소녀 린코와 친해졌다. 그러던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느날, 섬에 방문했던 외지인이 나가사키에서 살해당했고 그날 이후 도쿄 출신 아이들에 대해 링크를 포함한 섬 사람들이 모두 서먹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마침 그 날은 린코가 아이폰을 보여주며 유튜버가 되자고 말했던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6학년이 되어 졸업을 앞두고, 린코는 초노를 불러내었다. 린코는 중요한걸 고백하려고 했었지만 실패했고, 절벽에서 추락해 죽고 말았다....

어렸을 때부터 섬에 살며 TV 정도를 제외하면 문명의 이기, 인터넷 등을 전혀 접하지 않던 섬 소년, 소녀들의 부모가 알고보니 인기 최고라는 6인조 유튜버였으며, 그 유튜브 컨텐츠는 섬에 사는 자기 아이들을 몰래 찍은 동영상이었다는 반전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트루먼 쇼의 소규모 개인 버젼이라 할 수 있는데, 최근 기술력과 장비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생각되네요.
섬의 비밀을 밝히려는 외지인이 살해당한건 충성스러운 구독자들 때문이었고, 그래서 마을 주민들이 유튜버 가족들을 피하게 되었다는 것도 그럴싸 했습니다. 자기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 차라리 관여하지 말자고 생각한건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입니다. 일단 유튜브를 아이들에게 비밀로 한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알려주었어도 상관없었을겁니다. 구독자들만 아이들이 '모르고 있다'고 속으면 되잖아요? 어차피 영원히 속일 수도 없어요. 작 중 묘사처럼 중학교 진학을 위해 섬 밖으로 나가게 되면 바로 알게 될 테니까요.
게다가 마을 주민들이 비밀에 동참한 것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심지어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부모가 아이들 몰래 유튜브를 찍어 올렸다는 것도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학교에서 보호되고 통제가 되었을 겁니다. "귀등의 섬" 세계관처럼 고아들을 모아놓은 고립된 섬에서 선생들이 작당하고 학생들을 몰래 카메라로 찍었다면 모를까, 21세기에는 있을 수 없는 설정입니다.
아이 세 명의 부모 중 누군가가 아니라 루주가 린코를 직접 살해하고 알리바이를 조작한 것도 말이 안됩니다. 자동차도 있고 힘도 좋은 어른들이 6명이나 있는데, 초등학교 6학년 생에게 살인을 저지르라고 시킬 까닭은 없지요. 알리바이 트릭도 상당히 유치했고요. 이 모든걸 알아낸 초모란마와 사데쓰가 루주에 대한 응징을 라이브 방송 투표로 결정하겠다는 마지막 장면도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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