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ang.egloos.com 의 이사한 곳입니다. 2021년 1월, 추리소설 리뷰 1000편 돌파했습니다. 이제 2000편에 도전해 봅니다. 언제쯤 가능할지....
2006/05/20
황금의 랑데뷰 - 알리스테어 맥클린 / 이재중 : 별점 4점
"여왕폐하 율리시즈 호"의 작가 알리스테어 맥클린의 모험 활극입니다. 맥클린의 장기로 알고 있었던 밀리터리 계열이 아니라 신선했습니다. 거기에 "민간인" 이 주인공인 설정 또한 맥클린 답지 않은 새로운 모습이었고요. 그러나 전공이 아니라서 작품의 수준이 낮느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캄파리 호라는 호화 유람선과 수송선을 겸한 배라는 한정된 공간이 무대라서 긴장감이 배가됩니다. 손에 땀을 쥐게하는 사건과 모험도 연이어 펼쳐지고요. 한마디로 모험 활극의 기본이 될 만한 모든 요소를 갖춘 걸작입니다. 제한된 공간이라는 설정과 시간 제한이 있는 승부, 거기에 거의 맨몸으로 수십명의 악당과 맞서는 카터의 활약은 흡사 영화 "다이하드" 1편을 연상시집니다. 그 정도로 흥미롭고, 이를 박진감있는 전개와 묘사로 뒷받침하여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네요.
주인공이 몸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단순한 모험 활극도 아닙니다. 앞부분에 등장하는 국지전용 핵폭탄 "트위스터"라는 아이템이 극중에서 아주 적절하게, 합리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이러한 무기가 등장하는 소설은 테러리스트의 테러 기도에 쓰이는 이야기 전개가 많은데, 평범한 발상에서 벗어난 독특한 사용성(?)도 돋보였어요.
주인공 카터의 기민한 추리를 바탕으로 한, 앞뒤가 꼭 들어맞는 이야기 전개도 일품입니다. 카터의 추리대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때마다 일종의 반전같은 놀라움을 주는 요소가 효과적으로 삽입, 묘사되고 있는 점도 좋아요.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만들거든요. 이러한 특징들은 이 작품을 단순한 모험 활극을 넘어서게 만들어 줍니다. 맨 마지막 장면인 카터의 재치에 의한 반전은 정말 놀라왔어요.
제한된 공간탓에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이 많지 않아 캐릭터 성이 조금 약하고, 그나마 등장하는 인물들도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이라는건 조금 쉽게 간 느낌을 전해주지만(특히 여주인공격인 수잔 베레스포드라는 캐릭터가 너무 뻔합니다), 작품 자체가 워낙 재미있을 뿐더러 주인공 카터가 특출난 탓에 문제될 여지는 없습니악.
"여왕폐하 율리시즈 호"와 "하얀장미"는 솔직히 말해 작가나 작품의 명성에 비한다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었는데 이 작품을 읽어보니 그간의 편견이 싹 사라지는 느낌이네요. 진작에 읽은 작품이지만 다시 읽어도 여전한 흥분을 가져다 주는 1급 모험소설로 별점은 4점입니다. 번역이 약간 매끄럽지 못해 감점합니다.
2009/05/07
난파선 메리디어 호 - 하몬드 이네스 / 이태주 : 별점 3점
| 난파선 메리디어 호 - 하몬드 이네스 지음, 이태주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
태풍이 몰아치던 밤, 조난 사업을 막 시작한 존 샌스는 난파선 메리디어호의 구난을 위해 어렵게 탑승했지만 난파에 휩쓸렸다. 메리디어 호에 남아있던 유일한 승무원인 선장 기디언 패치와 함께 폭풍우를 뚫고 어렵게 생환한 그는, 메리디어호와 관련된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의로 배를 침몰시켰다 의심받는 기디언 패치 선장을 도와 다시 한 번 좌초된 메리디어호로의 목숨을 건 항해에 나서는데...
영국 작가 하몬드 이네스의 유명 고전 해양 모험 활극입니다. 이번 황금연휴 기간 동안 읽었습니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존 샌스가 난파선 메리디어 호 구조를 위해 탑승했다가 퇴선하지 못하고 조난당한 뒤, 배에 남아있던 선장 기디언 패치와 함께 메리디어호를 움직여 폭풍우를 빠져나와 생명을 건지게 되는게 1부입니다. 2부는 메리디어 호의 난파에 대한 법정 공방이고요. 그리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는 기디언 패치를 도와 존 샌스가 다시 메리디어호를 찾아가면서 벌어지는 3부로 마무리됩니다.
배만 해도 거대한 화물선 메리디어호를 비롯하여 요트, 보트 등 엔진, 돛, 인력(노?)을 이용한 다양한 종류가 등장하고, 조난의 종류 역시 난파선, 무인도 등 폭풍우 속 가혹한 바다를 무대로 생각나는 모든 곳을 건드리니 그야말로 해상 조난물로는 종합선물세트라 할 수 있는데, 이에 걸맞게 바다와 항해, 폭풍우와 해난 사고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상세하며 박진감도 넘쳐서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상세한 묘사는 특히 압권입니다. 저자가 정말 뱃사람 출신이 아닌가 싶을 정도니까요. 그 중에서도 지독할 정도의 폭풍우 묘사는 정말이지 읽다가 멀미가 날 정도였어요.
그리고 이른바 메리디어호에 관련된 음모 역시 설득력 있게 잘 짜여져 있습니다. 워낙 바다에 대한 묘사가 많은 탓에 좀 묻히기는 하지만, 한정된 지면 안에서 독자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정보를 잘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에 이해도 쉽고, 이 음모에 따른 주인공들의 절박한 행동도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두 주인공, 특히 우직하고 말없으면서도 신념에 목숨을 거는 기디언 패치 선장도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류의 작품에 등장하는 선장의 전형을 제시했다 해도 무방할 정도로 과묵하면서도 멋진 캐릭터입니다. 한마디로 바다 사나이 간지 가이~ 였습니다. 중간중간에 샌스에게 떼를 쓰는 장면만 없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죠.
그러나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드라마는 좀 약한 편입니다. 법정 장면이 주로 펼쳐지는 2부를 제외한 1부와 3부는 패치 선장과 샌스, 2명 중심의 이야기로 흘러갈 정도로 인물 관계에서 발생하는 드라마는 거의 없거든요. 나머지는 전부 바다에서 벌어지는 사투뿐이니까요. 드라마적으로, 추리적으로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법정 장면에서도 이른바 "음모"라는 것이 단순하게 주인공들에 의해 독자들에게 여과 없이 전달되기 때문에 조금 실망스러웠습니다. 보다 긴박감 넘치게 음모를 숨겨가며 법정 드라마 식으로 처리해 나갈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아울러 2부에서 3부로 넘어가면서, 끝내 메리디어 호의 조난 위치를 숨기고 샌스에게 난파된 메리디어 호로 데려가 줄 것을 요구했던 패치 선장의 행동이 드라마의 큰 키인데 여러 명이 목숨을 걸만한 비밀로 생각되지는 않았습니다. 살인은 무거운 범죄이지만, 12명이 넘는 사람이 죽은 대형 해난사고에 비하면 비약이 지나친 것이 아닌가 싶었거든요.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다만 제가 기대했던 만큼의 추리적 요소는 없어서 조금 감점합니다. 음모도 설득력 있고 주인공들의 행동도 타당하긴 한데 세련됨이 좀 떨어졌달까요? 그래도 해양 모험 활극이라는 주제와 권선징악적인 전개 등에서 알리스테어 맥클린 - 그 중에서도 꼽자면 "황금의 랑데뷰" - 의 작품이 연상될 정도로 경쾌하고 잘 쓰여진 작품으로 모험 활극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동서추리문고 치고는 번역도 괜찮은 편이고 가격도 착하니까요.
덧붙여, 영화에 참 잘 어울릴 것 같은 소재라 생각되어 잠깐 조사해보았더니 역시나더군요. "The Wreck of the Mary Deare (1959)"로 게리 쿠퍼와 찰턴 헤스톤을 투톱으로 내세운 작품인데, 이름값에 비해 평점은 별로네요. 대충 보니 원작보다 권선징악적 이야기를 더욱 강조하는 쪽으로 각색한 게 실수로 보입니다. 선장 캐릭터를 더 강화하는 것이 좋았을 텐데...
2021/12/26
대실 해밋 - 대실 해밋 / 변용란 : 별점 2.5점
![]() | 대실 해밋 - 대실 해밋 지음, 변용란 옮김/현대문학 |
하드보일드의 거장 대실 해밋이 쓴,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단편선. 작가 인생 초기작들로 유명한 컨티넨털 탐정사 탐정이 등장합니다. 대체로 액션 모험 활극에 가까우며, 추리의 여지가 별로 없다는 점에서 과도기적인 느낌을 전해줍니다. 몇몇 작품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배신의 거미줄>>
외과의사 에스텝 박사가 죽고 부인이 살인 혐의로 체포되었다. 박사가 숨겨왔던 첫 번째 부인이 찾아온 직후 사건이 일어났던 탓이었다. 변호사 리치먼드의 의뢰로 탐정은 의사가 죽기 전 부쳤다는 편지를 찾아 나섰다.
첫 번째 부인을 미행한 끝에 탐정은 사건 배후에 사기꾼 제이콥 레드위치가 있다는 것, 그리고 제이콥을 미행하는 또 다른 인물의 존재를 알아챘는데...
"의심이 든다면 미행해라"라는 말 처럼 미행을 통한 단서 찾기와 그 외 탐정 사무소를 통한 조사 및 다른 탐정들과의 분담과 협력 등 탐정의 진짜 업무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 실제로 탐정으로 일했던 대실 해밋의 생생한 경험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미행 과정을 통해 당대 샌프란시스코의 여러 거리와 풍경들을 보여주는 장면들도 좋았고요. 이 때 부터 중국인들이 샌프란시스코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추리적으로도 볼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일종의 "바꿔치기"트릭이 사용된 덕분입니다. 에스텝 박사는 가짜로, 진짜 에스텝 박사의 의사 면허를 제이콥에게서 구입하여 의사 행세를 해 왔던 겁니다. 첫 번째 부인이라며 다타났던건 진짜 에스텝 박사의 부인이었고요. 제이콥은 에스텝 박사를 수십년 동안 뜯어먹다가, 크게 한 탕 저지를 생각으로 사건을 꾸몄던겁니다.
제이콥의 계획도 괜찮았어요. 그는 거액을 요구하면, 박사가 자살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부인을 확보하고 있었기에, 그는 유산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의도는 아니었지만, 현 부인이 남편을 살해했다고 인정된다면 유산 전부를요!
그러나 계획을 밝혀내는데 있어서는 추리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탐정이 제이콥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단서를 잡은 뒤, 협박해서 그의 입으로부터 진상을 듣는게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행과 감시로 진상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현실적이기는 합니다. 허나 제이콥이 탐정에게 진상을 술술 이야기할 이유는 없었다는게 문제에요. 증거품인 에스텝 박사의 편지 (자살하겠다는)를 순순히 내 준 것도 납득하기 어렵고요. 탐정과 제이콥 모두 살인 혐의를 입증하기 힘들다는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제이콥이 이렇게까지 설설 길 이유는 없잖아요? 도주하던 제이콥이 오가르 경위에게 사살당한다는 마지막 장면도 허무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불탄 얼굴>>
탐정은 밴브룩의 두 딸 가출 사건 조사 중 잠깐 만났던 코렐 부인이 자살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둘째딸 루스 밴브룩마저 시체로 발견되었고 탐정은 사건들이 다른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을거라 확신했다. 탐정과 팻 형사의 조사 결과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유사했던 여성들이 자살했던 사건들이 여러 건 있었고, 모두 레이먼드 엘우드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내는데....
실종되고, 자살했던 여성들 사건을 독립적으로 보지 않고, 관계된 사건을 모두 조사해 보겠다는 수사 방침에 대한 아이디어는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그 외 부분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하드보일드라기 보다는, 액션 모험 활극에 가까운 탓입니다. 탐정과 팻 형사가 레이먼드 엘우드가 자주 방문했던 저택에 침입한 이후부터가 특히 그러했습니다. 저택에서 사이비 종교와 마약에 빠진 여자들이 난교 파티를 벌이던 사진을 찍어서 협박해 왔다는 진상도 허무했고요. 탐정이 팻을 설득해서 주요 증거물인 사진을 모두 소각한다는 결말도 낭만적인 모험 활극과 다를게 없지요. 팻의 백만장자 아내도 사진에 찍혀있었다는 약간의 반전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중국 여인들의 죽음>>
릴리언 샨은 하녀 한 명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가 취소하고 급작스럽게 귀가했던 날, 낯선 중국인 청년에게 습격당했다. 릴리언은 겨우 살아남았지만 하녀는 죽고 말았고, 신고를 받고 출동했던 경찰은 지하실에서 요리사 완란의 시체도 발견하였다.
탐정은 사건을 의뢰받은 뒤 정보를 캐내다가 사건 배후에 어빙턴 호텔 소유주 코니어스와 차아니타운의 실력자 창리칭이 관계되어 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차이나타운을 무대로 하는 작품. 단지 이국적인 배경에 그치는건 아니에요. 중국을 배신하고 한 몫 단단히 잡은 이민자의 딸이 주인공 중 한명이며,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중국인 독립운동가의 무기 밀수에 편승해서 악당들이 한 몫 잡으려고 했었다는 이야기의 핵심 설정과 전개 모두가 설득력있게 활용되고 있거든요.
릴리언의 저택은 해변과 맞닿아 있었는데, 밀수를 위해서는 해변과 맞닿아 있는 저택이 필요했다는 진상도 그럴듯했습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별 볼일 없었습니다. 탐정이 정말로 하는게 별로 없는 탓입니다. 전개는 우연과 억지에 의한게 많고요. 탐정이 조사원 중 한명이었던 마약중독자 얼이 수상하다는걸 깨닫는 장면이 대표적이었어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걸 알아챈건 순전히 넘겨 짚은 것에 불과하니까요. 동공? 눈빛? 모두 설득력이 약했어요. 주요 등장인물들을 필요할 때마다 만나서, 필요한 증언을 얻는다는 전개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휘슬러가 일본군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고 조작했던 사진을 결정적 순간에 주머니에서 꺼내는 장면처럼요. 탐정이 이 사진을 가지고 다닐 이유는 없었습니다.
아울러 당시 중국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판타지를 반영한 듯한 창리칭 저택의 복잡한 구조와 기묘한 보디가드들, 은밀하면서도 잔혹한 공격과 미모의 노예 소녀 슈슈에 대한 묘사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책을 계속 읽어야 할지 망설이게 만드는 지루했던 졸작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쿠피냘 섬의 약탈>>
탐정은 결혼 선물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쿠피냘 섬에서 열린 헨드릭슨 가문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날 밤, 폭풍우와 함께 강도단이 섬의 은행과 보석상을 습격했다. 결혼식 하객 중 한명이었던 러시아 공주로부터 이 사건 소식을 들은 탐정은, 선물을 지키는 임무를 헨드릭슨 저택 집사와 운전수에게 맡기고 현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강도단의 도주를 막는데는 실패했고, 헨드릭슨 저택으 복귀 후에 집사와 운전사가 살해당했으며, 결혼 선물은 도난당했다는게 밝혀지는데....
오래 전에 읽었었던 작품. 내용 자체를 잊어버려서 처음 읽는 기분으로 읽었습니다.
초, 중반부까지는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완전 무장한 강도단과 맞서 싸우는 탐정의 활약을 그린 영웅담으로 보였는데, 실제로는 정통파 추리물과 하드보일드가 잘 결합되어 있어서 놀랐습니다. 그것도 상당한 수준으로 말이지요.
특히 합리적인 추리가 볼만했습니다. 탐정은 강도들이 외부에서 왔다면 일당과 무기 운반을 위해 자동차나 배가 필요했을텐데, 섬 주민의 자동차와 배를 탈취했던 상황에 주목합니다. 그 외의 여러가지 단서를 조합하여 러시아 장군과 공주 일행이 강도라는걸 알아내고 맙니다. 러시아 혁명으로 망명한 후, 현실의 벽에 부딪혀 범행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공주 일당의 범행 동기도 시대를 감안해보면 충분히 그럴듯했고요. 이런 추리를 일종의 추리쇼를 통해 선보이는 장면은 정통파 고전 본격 추리물을 떠오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추리쇼에서 이어지는, 돈 보다 범죄를 해결하는게 더 재미있다며 뱀 같은 공주의 유혹은 무시하고, 심지어 여자를 쏘지 않을거라 믿으며 도망가려는 공주 다리를 쏘아 맞추는 탐정의 모습은 고전 본격 추리물을 넘어선, 하드보일드 장르의 도래를 알리는 명장면이었다 생각됩니다. "난 장애인한테서도 목발을 훔쳤던 사람 아닌가?"라는 말도 희대의 명대사였고요. 구 시대의 화려했던 부르주아들은 모두 현실에 몰락해 버렸고, 이들을 악전고투끝에 살아남은 플로레탈리아가 짓밟는 구성은 시대가 변했음을 잘 느끼게 해 주네요.
마지막에 우연히 사건에 휘말렸던 잔챙이 범죄자 플리포를 탐정과 공주가 서로 자기 편으로 만들려 설득하는 클라이막스도 재미있었습니다. 작위적이라는건 부인하기 어렵지만요.
물론 공주가 탐정을 살려둔 이유가 불분명하다는 큰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 가장 위협이 될 인물이라는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듯 한데 말이지요. 그래도 이 정도면 하드보일드 여명기, 장르의 초석을 다졌을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크게 한탕>>
탐정은 어느날 밤 술집에 패디 더 맥스, 블루포인트 밴스, 해피 짐 해커, 빅 버드 레드 오리어리 등 유명한 범죄자들이 모여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시맨스 은행이 습격당할거라는 정보를 전해 준 정보원 비노가 살해당한 다음날 아침, 시맨스 내셔널 은행과 골든게이트 신탁회사가 약탈당했다. 무려 150여명의 프로 범죄자들이 도로를 봉쇄하고 20분도 안 되는 시간동안 현금 수백만달러를 훔쳤고, 경찰 포함 30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던 대참사였다.
그런데 강도 일당 수십 명의 시신이 차례로 발견되기 시작했고, 현장에서 죽은 강도 중 한 명이 '빅 플로라'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생존자 레드 오리어리를 찾아내 뒤쫓던 탐정은 밴스를 비롯한 다른 강도들의 습격에서 그를 데리고 겨우 탈출했다. 부상당했던 레드 오리어리가 탐정을 이끈 곳은 빅 플로라가 몸을 숨기고 있는 은신처였다....
백명이 넘는 강도단, 수백만 달러의 강탈, 수십명의 죽음 등 어처구니없는 스케일을 보여주는 범죄물.
은신처에 있던 연약해 보였던 노인이 사건의 흑막 파파도풀로스였으며, 경찰에게 은신처가 포위되었기에 무사 탈출을 위해 탐정을 이용했다는 반전은 괜찮았습니다. 탐정사무소 소장인 '영감'이 사건 배후에는 굉장히 머리 좋은 인물이 있을거라고 말했었고, 빅 플로라가 탐정을 죽이지 않았던 이유 등 이런저런 복선이 잘 배치되어 있던 덕분입니다.
하지만 설정에 비하면 내용은 비교적 수수한 편입니다. 탐정도 레드 오리어리를 찾아내 뒤를 쫓는 것 말고는 하는게 없어요. 빅 플로라의 은신처에서 벌이는 목숨을 건 연극도 유치했고요. 빅 플로라가 노인을 하인 대하듯 하는 장면같은 억지도 눈에 거슬렸습니다. 빅 플로라가 우두머리이며 노인은 거의 노예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심어주어, 유능한 탐정마저도 속아넘어간 것에 대해 변명거리를 만들 속셈이었을텐데, 속이 너무 빤히 들여다보였어요.
이런 점에서 하드보일드 추리물로 건질만했던건 별로 없었던 작품입니다. 단순 화끈한 마쵸 모험 액션물에 가까운 이야기였어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거액을 강탈한 뒤, 공모자들을 죽이고 독차지하려고 했던 계획을 망쳐버린 사랑꾼 빅 레드 오리어리를 징벌하지 않은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파파도풀로스 입장에서는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았을텐데 말이지요.
<<피 묻은 포상금 106,000달러>>
탐정에게 패디 더 멕스의 동생 톰-톰 캐리가 찾아와 파파도풀로스에게 걸려있는 거액의 현상금에 대해 물어보았다. 몇 건의 살인과 습격이 이어진 끝에, 탐정들과 캐리는 백만장자 뉴홀 저택에 은신하고 있던 파파도풀로스를 잡는데 성공하는데...
시원치않았던 전편에서 이어지는 후편인데, 이 작품은 아주 좋았습니다. 탐정의 냉혈한스러운 면모가 빛나거든요. 탐정은 신참 탐정 잭이 파파도풀로스의 꼬임에 넘어가 한 패가 되었다는걸 진작에 눈치챘습니다. 아마도 그리스인 거주지 습격 사건 때 눈치챘겠지요. 그래서 마지막 습격 때 잭을 일부러 대동한 뒤, 모든 진상을 까발려서 잭은 캐리의 손에 의해, 캐리는 다른 탐정이 사살하게 만들었습니다. 자기 손에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배신자를 징벌하고 탐정 사무소의 평판을 지켜내는 놀라운 솜씨를 보여준 거지요. 이 와중에 탐정 사무소 다른 탐정들을 동원하고, 잭에게 뒤통수를 맞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안배를 하는 꼼꼼함도 볼만했고요.
잭이 배신하게 된 계기가 빅 레드 오리어리의 연인 낸시가 사실 백만장자 뉴홀의 딸이었다는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반전도 상당한 놀라움을 가져다 준 좋은 설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끝판왕격인 파파도풀로스의 허무했던 최후는 다소 아쉬웠습니다. 탐정이 잭의 배신을 언제 눈치챘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것도 설명이 더 있었더라면 좋았을거에요. 낸시의 이상했던 시선, 잭의 이상했던 눈빛은 증거가 될 수 없었는데 말이지요. 잭이 별다른 증거도 없는데 스스로 자포자기해서 자백을 한 것도 다소 편의적인 전개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했습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정교함과 냉혹함이 잘 살아있는 하드보일드 여명기를 대표할만한 수작이라 생각되네요.
<<메인의 죽음>>
메인이 출장을 다녀온 날 새벽, 2인조 강도가 습격하여 그를 죽이고 지갑 안의 2만 달러를 강탈해 사라졌다. 현장 근처에서는 흉기인 권총과, 여성 손수건이 들어있는 지갑이 발견되었다. 메인의 보스 군겐에게 고용된 탐정은 손수건이 군겐의 젊은 아내 것이며, 아내의 하녀가 범죄자와 어울린다는걸 알아낸 뒤, 아내로부터 사건 진상을 고백받는다. 그녀와 메인은 불륜 관계였으며, 2만 달러는 불륜을 저지르던 당일 오후에 강탈당했던 것이었다. 범인은 하녀의 애인이었다.
젊은 아내를 옭아맬 속셈으로 사건 수사를 의뢰한 군겐,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보스의 아내까지 건드리다 파멸한 메인,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당당한 젊은 아내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의 묘사는 재미있었습니다. 이들이 얽히고 섥혀 사건을 복잡하게 만든 건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스타일로 마음에 들었고요. 불륜 남녀가 돈을 빼앗긴걸 쉽게 털어놓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던 범인들의 잔꾀도 괜찮은 아이디어였어요.
하지만 범인 일당의 부주의한 행동이 미행으로 이어지고, 이를 통해 진상을 고백받은 형태로 제공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탐정 수사' 물인데, 미행으로 진범이 누구인지 바로 밝혀내는건 너무 쉬운 전개였습니다. 메인이 좌절한 나머지 자살했고, 보험금 때문에 메인의 아내가 이를 강도 사건으로 꾸몄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죽는 것 보다는 차라리 보스에게 사실대로 고백하는게 훨씬 낫다는 점에서,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메인을 죽이고 강도 살해 당한 것 처럼 꾸몄다는게 더 타당해 보이는데, 왜 이렇게 마무리하지 않았는지 의문입니다. 메인의 아내를 비롯, 군겐의 아내까지 사건에 관련 여성에게는 큰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일종의 기사도 정신을 발휘했던걸까요? 여튼, 작품에는 잘 어울리지 않았어요.
그래도 수사물로는 괜찮았던 깔끔한 소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국왕 놀음>>
탐정은 미국인 청년 라이오넬 그랜덤을 찾아 유럽의 소국 모리비아로 향했다. 성인이 되자마자 어머니의 과보호로부터 탈출한 그는, 유럽에서 무려 3백만달러나 되는 돈을 현금화했다. 탐정은 라이오넬이 군대를 장악한 실력자 에이나르손 대령과 함께, 모리비아에 혁명을 일으키고 스스로 왕이 될 생각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3백만 달러는 혁명을 위한 군자금이었다.
유럽 소국 모리비아를 무대로 한 일종의 군웅물이랄까, 여튼 왕이 되려는 사람들의 활약을 그리고 있는 작품. 설정은 기발했고, 왕위를 놓고 여러 세력이 벌이는 암투가 짤막한 분량안에서 잘 그려져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도 많았어요. 일단 에이나르손 대령이 왜 미국인을 끌어들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네요. 군대를 장악했고, 인기도 많았다면 스스로 혁명을 일으켜서 왕이 되면 그만이었을텐데 말이지요. 3백만 달러는 분명 거액이지만, 일국의 왕이 된다면 그 정도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거잖아요?
대통령 비서 마흐무드가 에이나르손 대령과 함께 혁명을 모의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현 대통령의 통치를 못마땅하는 국민들이 많았다 한들, 절대 권력을 가진 대통령 비서가 이를 쉽게 포기하고 혁명에 바로 몸을 맡긴다는건 설득력이 떨어지지요. 급작스럽게 에이나르손을 암살하려고 했던 것도 마찬가지고요.
에이나르손이 군대를 장악하여 기껏 혁명을 성공시켰지만, 탐정의 총에 굴복해서 순순히 라이오넬의 대관식을 치룬 것도 그의 야망과 노력을 생각하면 많이 허무했고요. 최후도 허무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낭만적인 중세 시대 모험 활극이라면 모를까, 20세기를 무대로 한 이야기에는 여러모로 설득력이 떨어지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파리잡는 끈끈이>>
뉴욕의 명문가 햄블턴 가문의 막내딸 수는 범죄자와 도망친 후 소식이 끊겼다. 그리고 1년 후, 돈 1,000달러를 요구하는 전보가 날라왔고 탐정은 돈을 가지고 지정된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이는 사기꾼 홀리 조의 계획으로 수는 가짜였었다. 홀리 조로부터 캐낸 수와 베이브의 거처를 찾은 탐정은 그곳에서 수의 시체를 발견했다. 부검 결과 수는 만성 비소 중독으로 죽었다는게 밝혀졌다. 비소는 파리잡는 끈끈이에서 추출한 것이었다.
다시 협잡꾼 홀리 조를 심문해서, 그가 수와 도주할 계획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갑자기 나타난 베이브가 홀리 조를 사살하고 달아나는데;....
부잣집 철부지 딸의 비참한 죽음, 얽히고 섥혀 서로를 죽이고 마는 애증 관계가 그려진 정통 하드보일드. 탐정이 베이브를 추격해서 사로잡는 부분은 액션 활극 느낌도 강하지만, "누가 수를 죽였나?"라는 후더닛 측면에서도 볼만한 추리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전개가 아주 매끄럽지는 않아요. 베이브가 마침 탐정이 심문하던 도중에 나타나 홀리 조를 사살했다는 것도 부자연스러웠고, 애초에 수와 조가 베이브를 죽일 생각이었으면 깔끔하게 사살하는게 나았을겁니다. 비소 내성을 키워 독살하려 한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범행을 저지른다고 살인죄가 덮이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추리적인 부분에서 볼만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이전 리뷰에서도 그 부분을 좋게 언급했었지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04/08/26
부부탐정 - 애거서 크리스티 : 별점 2.5점
| 부부탐정 - |
토미와 터펜스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집. 토미와 터펜스 부부 시리즈는 부부탐정이라는 설정과 부부가 함께 하는 모험이라는 이야기 구조로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걸작 시리즈죠.
장편 "비밀결사"에서 등장하여 결혼에 이른 부부 토미와 터펜스. 그들은 토미 숙부의 유산으로 넉넉하게 살아가지만 이전의 모험적인 삶을 그리워 하며 지루한 일상을 보냅니다. 그러던 중 정부의 카터라는 인물로부터 데어도어 블런트라는 탐정의 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수수께끼의 "16"이라는 숫자에 주목해 달라는 의뢰를 받게 된 이후 벌어지는 사건들이 펼쳐지는 내용입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아마 연재때문이 아닐까 하는 가정을 해 봅니다) 모두 23편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전-후편으로 나뉘어진 작품도 많고 부부가 탐정 사무소를 운영하게 된 경위가 나오는 첫번째 작품은 제외한다면 총 14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약간의 트릭이 가미된 유머스러운 추리 모험 활극으로 토미와 터펜스라는 부부의 유머와 재치때문에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집입니다. 무엇보다 여러 명탐정을 각 편마다 인용하며 나름의 경의를 표한 크리스티 여사에게 감탄했습니다. 현재는 잊혀진 탐정들도 있고 아직 접해보지 못한 탐정들도 있지만 이런 인용으로 보다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네요.
때문에 별점은 2.5점. 추리적으로 굉장한 논리나 사건은 없지만 읽는 재미 하나만큼은 확실한만큼, 부부탐정 팬 분들에게는 강추드립니다.
작품별로 상세하게 소개하자면
첫번째 작품 "차라도 한잔" 은 파리를 날리는 사무소의 손님을 유치하기 위한 터펜스의 사기극(?)으로 부부의 익살과 접수 소년의 재치 등 유쾌함이 넘치는 소품입니다. 하지만 추리적 가치는 빵점이네요... 뭐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겠죠.
두번째 작품 "분홍색 진주 사건"은 첫번째 사건에서 만족한 의뢰인이 소개한 의뢰인이 자신의 집에서 사라진 값비싼 진주를 찾아 줄 것을 요청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경찰에 알리지 못하고 은밀한 조사를 의뢰받는데 손다이크 박사를 흉내내는 토미가 단순한 사실에서 진상을 꿰뚫고 사건을 해결합니다. 그런데 등장하는 수수께끼가 모두 풀린 것 같지는 않아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는 것은 단점입니다.
세번째 작품 "이상한 불청객 사건"은 첫머리에 등장하는 블런트라는 원래 인물이 연루된 국제적인 범죄조직에 납치된 토미가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벗어나는 이야기로 첫부분에 등장하는 담배갑과 연관된 재치가 상당히 돋보이지만 추리적인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다만 토미가 인용하는 불독 드러먼드라는 캐릭터는 조금 궁금하더군요.
네번째 작품 "킹을 조심할것 & 신문지 옷을 입은 신사"는 초반에 토미와 터펜스가 이야기하는 신문지의 인쇄오류와 가장 무도회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을 연관시켜 진상을 추리하는 내용으로 변장 트릭이 등장합니다. 조금 흔한 트릭이긴 하지만 재치와 유머가 넘쳐 꽤 재미있습니다. 전형적인 크리스티 여사의 트릭과 전개방식이지만 캐릭터를 달리 함으로써 또 다른 재미를 만드는 이야기 구성력이 돋보였어요.
다섯번째 작품 "부인 실종 사건"은 유명한 탐험가에게서 실종된 약혼녀를 찾아달라고 의뢰받은 뒤 그녀가 사라진 마을에 찾아가 악덕 의사의 소굴에 잠입하여 진상을 밝혀내는 부부의 활약이 그려집니다. 서두에 토미의 셜록 홈즈 흉내가 굉장히 인상적이며 웃깁니다. 또한 상상하지 못했던 부분을 복선으로 인용하는 막판 반전이 꽤 재미나는 좋은 작품이었어요.
여섯번째 작품 "장님 놀이"는 제목 그대로 장님 탐정 (맥스 캐러도스가 아니라 콜튼이라는 모르는 탐정이더군요)을 흉내내기 시작한 토미가 안대를 착용하고 다니다가 세번째 작품의 조직에게 다시 위협받는데 요리 주문할때의 숨겨진 암호문으로 살아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체적으로 긴박감이 좀 떨어지고 토미의 안대에 대한 비밀이 말 한마디로 끝나는 구조는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더군요. 범작입니다.
일곱번째 작품 "안개속의 남자"에서는 토미가 브라운 신부를 흉내내네요. 하지만 이야기는 브라운 신부 시리즈와는 전혀 다른 크리스티 여사의 전형적 구조로 진행됩니다. 안개에 묻혀 통행이 뜸한, 입구에서는 경찰이 서 있었던 밀실과 같은 집에서 한 여배우가 살해당한 후 진범을 잡는 내용으로 트릭이나 범인은 후대 작품에서 비슷하게 써먹은 것이 많아 신선하진 않았지만 이 작품이 발표된 연대를 볼 때는 분명 여사님이 시대를 앞서 가신 것이죠. 여사님의 상상력에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네요.
여덟번째 작품 "위조지폐범을 찾아라"는 제목 그대로의 내용입니다. 범인역도 신선했고 모험소설적인 분위기도 잘 살아있어서 꽤 재미있었습니다.
아홉번째 작품 "서닝데일의 수수께끼"에서는 "구석의 노인"까지 등장합니다! 구석의 노인 흉내를 내던 토미와 터펜스 부부가 신문을 읽으며 미궁에 빠진 서닝데일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으로 안락의자형 탐정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구석의 노인의 이야기 진행방식까지 유사하게 차용한 재치가 돋보이며 추리적으로도 상당히 완성도 있는 작품입니다.
열번째 작품 "죽음이 숨어있는 집"에서는 꽤 재미있게 읽었던 "독화살의 집"의 아노 탐정이 인용되네요. "독화살의 집" 탐정의 인용작품 답게 저택에서 독살당한 가족의 범인을 찾는 이야기로 구성과 마무리까지 깔끔한 수작입니다만 모처럼 찾아온 미인 의뢰인이 독살당해 죽는다는 설정은 조금 마음에 안 들더군요....
열한번째 작품 "철벽의 알리바이"는 동시에 두곳에 존재한 한 여인의 알리바이를 파헤치는 트릭인데 알리바이 깨기의 명수 프렌치 경감이 인용됩니다. 하지만 트릭 자체는 실망스러운 범작이었어요.
열두번째 작품 "목사의 딸 & 레드하우스"는 암호해독 트릭입니다. 부유한 아버지의 백모로부터 돈은 없이 저택만 상속받은 목사의 딸이 집을 팔라는 끊임없는 권유와 집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현상으로 괴로워 하다가 토미와 터펜스에게 조사를 의뢰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이미 이 부분부터 눈치빠른 독자들은 "저택에 무언가 숨겨져 있다!"라고 느끼실 것 같은데 이야기는 예상대로 흘러갑니다.^^ 일종의 보물찾기로 꽤 괜찮은 암호문 (간단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잘 만든 암호문입니다)이 재미있습니다.
열세번째 작품 "대사의 구두"는 설정이 상당히 기발합니다. 자신의 구두 가방과 똑같은 가방을 가진 사람과 가방이 바뀌었던 미국 대사가 가방이 바뀌었다고 하며 되찾아간 사람이 사실은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고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 토미와 터펜스 부부를 찾아오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거든요.
가방안에 들어있던 것은 대사의 구두 뿐이었기 때문에 토미와 터펜스는 구두 안에 무언가 다른것이 숨겨져 밀수 되었으리라 짐작하고 범인을 밝혀내게 됩니다. 이 작품에서는 포튠이라는 탐정이 인용되는데 아직 작품을 읽지 못해서 아쉽더군요. 트릭은 대단치 않지만 워낙 설정이 독특하고 모험소설적인 부분이 많아서 빠져드는 맛이 있는 작품입니다.
마지막 작품 "16호 였던 남자"는 작품집 초반에 등장했던 수수께끼의 "16"이라는 숫자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러시아 스파이로 경찰이 체포를 노리는 수수께끼의 16호를 잡기 위한 마지막 모험이 벌어지는 내용으로 첩보물 적인 성향이 강하지만 트릭도 제법 괜찮았습니다.
2015/11/15
책으로 가는 문 - 미야자키 하야오 / 송태욱 : 별점 2점
| 책으로 가는 문 - |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와나미 소년문고 (岩波少年文庫) 중 50편의 작품을 선정하여 소개하는 책.
50편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하는 전반부와 책을 선정한 기준, 이유, 그리고 자신이 뽑은 책에 대해 보다 자세히 설명하는 일종의 인터뷰가 실려 있는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런 작품들이 제대로 된 번역으로 오래전부터 출간되었다는 것이 부럽기만 하더군요. 우리의 에이브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우리나라도 요새는 많이 좋아진 것 같아 다행이긴 하지만요.
하여튼, 우리 딸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 있을까 싶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라면 이쪽 바닥에서는 꽤나 믿을 만한 브랜드(?)이기도 하니 나름의 공신력이 있지 않을까 기대도 되었고요.
그러나 저의 목적과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일단 이 책만 읽고는 해당 작품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추천사, 의견이 대부분으로 줄거리 소개도 없고 극도로 짤막해서 고르는 데 참고가 될 것 같지 않은 탓입니다.
선정 기준도 애매해서 이와나미 문고가 아닌 다른 곳 (교과서)에서 읽은 작품을 선정한다던가, 이번에 처음으로 읽은 작품을 선정한다던가, 심지어 자신이 읽지도 않았지만 아내가 추천했다고 선정한 ("노르웨이의 농장") 작품도 있을 정도에요. 이래서 거장이 평생 관심을 가져왔던 그의 작품의 원형! 이라고 말하기에는 여러모로 무리입니다.
아울러 선정 기준이 명확한 작품의 경우도 그림에 대한 코멘트가 많은데, 단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미야자키 하야오가 좋아하는 그림 그대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이 있다는 점도 아쉬웠던 부분이고요.
그래도 어린이 문학에 대한 신념 — 어린이 문학은 기본적으로 응원이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살아도 된다는. 아이들에게 절망을 말하지 마라 — 만큼은 선명하게 드러나 있긴 합니다. 이런 신념을 가진 사람이 허술하게 작품을 고르지야 않았겠지요.
그래도 별점은 2점입니다. 흥미로운 책 몇 권을 건졌다는 점에서 소기의 성과는 달성했으나 여러모로 기대에 미치지는 못해서 감점합니다. 읽기 편하고, 분량도 짧아서 쉽게 읽을 수 있으니 간단한 읽을거리를 찾으시는 분들은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지만 분량에 비해서는 가격도 센 편이라 추천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덧붙여, 소개된 작품 중 딸을 위해 (혹은 저를 위해) 고른 작품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치폴리노 - 모험의 토마토 기사"
그림이 좋다고 극찬하고 있는 작품. 인터넷 서점을 통한 간략한 줄거리 소개만 봐도 꽤나 재미있겠더라고요. 그런데 한국어 판은 이와나미 문고와는 그림이 다른 듯 싶고 현재 절판이라는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 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겠죠.
2. "독수리 군기를 찾아."
에이브에 수록되었던 "횃불을 들고"로 친숙한 로즈마리 서트클리프 작품. 왠지 기대가 됩니다.
3.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는 작품인데 국내 출간된 버전도 이와나미 문고와 동일한 어니스트 하워드 셰퍼드의 그림이더군요. 꼭 구입해 봐야겠습니다.
4. "우리 이웃 이야기"
애니메이터로 일할 때 녹초가 되어 돌아와 이불 속에서 읽고 문학이란 정말 굉장하구나를 느꼈다는 작품. 짧은 작품 안에 세계가 그려져 있다는데 대체 어떤 작품일지....
5. "하늘을 나는 교실"
"에밀과 탐정들", 두 명의 로테로 유명한 에리히 케스트너의 작품. 어린 시절 읽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그래도 기본 이상의 재미를 선사해 주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5. "한국 민화 모음집"
한국인이라 관심이 간 작품. 삽화도 한국인 김의환 씨더군요. 미야자키 하야오가 "파를 심은 사람"이 아주 인상적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인터넷으로 찾아 읽어보니, 음... 정말 인상적이긴 했습니다. 애한테 권해주기는 좀 애매합니다만.
6. "클로디아의 비밀"
어딘가 소녀가 숨어 산다는 이야기? 그것도 미술관? 설정만으로도 흥미롭습니다.
7. "작은 백마"
거장이 예순아홉에 읽고 "반짝반짝 빛나는 단단한 알맹이를 품은 책"이라고 극찬을 하다니! 관심이 안 갈 수가 없잖아요. 영화 "문 프린세스"의 원작이라고도 하는데 저부터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그 외에도 기억에 남는 작품과 코멘트는 아래와 같습니다.
"삼총사" — 모험 활극 그 자체! 맞는 말이죠.
"셜록 홈즈의 모험" — "명작이다.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가 있어도 봐서는 안 되고 먼저 꼭 책으로 읽어야 한다." 라고 썼는데 동의할 수밖에 없네요.
그 외의 "바보 이반", "보물섬"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저에게 최고의 어린이책 일러스트는 "짐 크노프", "왕도둑 호첸플로츠", "꼬마 니꼴라", "돈 까밀로와 빼뽀네", "무밍"시리즈입니다. "돈 까밀로와 빼뽀네"는 아동용이라고 하기는 어려울려나요?
2009/06/24
그림자살인 (2009) - 박대민 : 별점 3점
홍진호는 경성 바닥에서 바람난 여인네들을 찾아다니며 푼돈을 버는 해결사. 그런 그에게 의학도 광수가 찾아와 자신이 주어온 시체를 살해한 범인을 잡아달라 부탁한다. 홍진호는 미국행 배에 승선하기 위한 요금 마련이 다급한 상황이었기에 그 청을 수락하고,피해자가 세도가 민대감의 아들 민수현임을 알게되어 민수현의 방을 뒤져 의문의 "백색가루"를 발견하게 된다. 과연 민수현을 죽인 범인은 누구인가? 백색가루의 정체는?
드디어 봤습니다! 이 영화는 "경성탐정록"과 유사한 경성 배경의 추리극이라고 해서 진작부터 관심이 있었는데 관람이 좀 늦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하고는 좀 많이 다르더군요. 이 영화는 추리극이라기 보다는 모험활극에 가까운 작품이었으니까요. 추리적으로는 거의 언급할 것이 없기에 "경성탐정록" 과는 쟝르 자체가 아예 구분되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추리적인 요소는 딱 두가지, 첫 만남에서 홍진호가 광수의 직업을 꿰뚫어보는 장면(알콜 냄새가 솔솔 난다는 이유), 그리고 살해된 경무국장 입 안의 천조각이 화려하다는 것에서 범인의 직업을 알아내는 것 정도인데 그나마 두번째 천조각 추리는 홍진호가 아니라 작중에 등장하는 여류 발명가 순덕이 밝혀내는 것이죠... 물론 몇가지 안되는 단서를 통해 홍진호가 결국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는 하지만 그야말로 "몸"으로 떼우는 것이 전부이기에 주인공 홍진호에게는 "사립탐정"이라는 수식어라면 몰라도 "명탐정"이라는 수식어는 붙이기는 어려워보입니다.
그리고 파트너역으로 소개된 의사 광수가 하는일이 전무한것 때문에 추리 애호가로서 좀 실망한 부분도 있습니다. 정통 추리물이라면 아무래도 파트너의 존재가 여러모로 반드시 필요한 법인데 이 작품에서는 기껏 등장시킨 것 치고는 너무나 하는 일이 없거든요. 영화 초반에 사건을 홍진호에게 가져다주는 매개체 역할 이상의 것을 전혀 소화하고 있지 못하니까요. 과학의 영역은 순덕이, 액션의 영역은 홍진호가 전부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이지 불필요한 캐릭터였습니다... . 차라리 1인칭 독백이라도 했더라면 화자로서의 역할이나마 수행했을텐데 말이죠.
그래서 말인데, 정통 추리물로 접근하려 했다면 차라리 광수 캐릭터는 빼고 탐정역은 순덕이 담당하게 하는게 좋지 않았을까요?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물로요. (게다가 미인!) 그리고 홍진호는 순덕의 눈과 발이 되는겁니다. 사건은 순사부장 오영달이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홍진호한테 의뢰하는 걸루 해서 홍진호가 돈에 눈이 멀어 사건에 뛰어든다... 이런 전개로 가면 탐정과 액션히어로도 확실히 구분되고 이야기도 더 깔끔해지지 않았을까 생각되는데 어떻습니까? 좀 뻔한 구도이긴 하지만 저는 이쪽 커플링이 더 마음에 드네요.^^
뭐 그래도 영화 자체로는 즐겁게 감상했습니다. 캐릭터도 유쾌한 사립탐정이라는 측면에서 잘 재현하고 있고 상당히 치밀하며 약간이긴 하지만 반전도 포함되어 있는 시나리오도 탄탄한 편이라 괜찮은 추리 - 활극물로서의 미덕은 충분합니다. 경성시대의 거리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고요. 경성탐정록 창작에도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해서 반가왔던, 별점 3점은 너끈한 유쾌하고 즐거운 오락물이었습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을 주제로 한 2탄이 에필로그 형태로 언급되고 있는데 속편도 나와주면 좋겠네요. 그래서 경성탐정록도 좀 더 팔려주면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덧붙이자면, 캐스팅은 좀 아쉬운데 홍진호 역에는 일단 좀더 액션이 되는 배우를 썼더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전성기때의 성룡이 맡았더라면 딱 어울렸텐데 말이죠. 악당역 캐릭터도 인상이 별로 강하지 못했고요. 무엇보다도 순덕 역의 엄지원씨는 너무나 연기가 별로였습니다. (결말에서 미국으로 가버리니 속편에는 등장하지 않을 것 같아 다행입니다)
2021/09/25
좀비 연대기 - 로버트 E. 하워드 외 / 정진영 : 별점 2.5점
![]() | 좀비 연대기 - 로버트 E. 하워드 외 지음, 정진영 엮고 옮김/책세상 |
근대 시기 유명 장르 소설가의 좀비 관련 중단편을 모아 놓은 앤솔러지. 작가들의 명성과 장르 문학치고는 고전급에 속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과 성격은 유사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낡은 느낌이 강했던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과는 다르게, <<지옥에서 온 비둘기>>라던가 <<좀비 감염 지대>>같은 시대 초월 명작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최초로 '좀비'라는 말을 만들고, 아이티 부두교 좀비 설정을 확립했다는 <<마법의 섬>>과 같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작품도 눈여겨 볼 만 하고요. 크리쳐 호러물 외에도 저주받은 저택, 호러 모험 액션, 판타지에 SF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장르 스펙트럼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12편의 수록작 중 수준 이하 졸작도 제법 되는 편입니다. 발표된지 100여년이 다 되어가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요.
그리고 제목에서 기대했던, 우리가 지금 '좀비'라고 하면 떠올릴 몬스터가 등장하는 작품도 없습니다. 아이티 등 열대 섬나라에서 부두교 주술 등으로 죽은 사람을 되살려 노예처럼 부렸다는 초기 좀비 전설에 기반한 이야기가 대부분이거든요. 물론 이게 단점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동일한 설정을 그대로 반복한 판박이같은 작품이 많다는거지요. <<노예에게 소금은 금물>>,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시체들>> 가 그러합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클래식이라는 명칭에 걸맞는 그런 앤솔러지였습니다. 좀비라는 크리쳐의 창작 초기 설정과 이야기들이 궁금하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다음과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옥에서 온 비둘기>>
그리스웰과 존 브래너는 비둘기 떼가 날아가버린 폐가에서 하룻 밤을 보내게 되었다. 밤중에 공포스러운 휘파람 소리에 잠을 깬 그리스웰은 2층으로 올라간 뒤, 도끼에 맞아죽은 브래너가 자기를 죽이려고 해서 도망쳤다. 도망치던 그리스웰을 구해준 보안관 버크너는 흉가 블래슨빌 저택에 얽힌 수수께끼와 브래너 살인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자 늙은 부두교 주술사를 찾아갔지만, 주술사도 뱀에 물려 죽었다.
사건을 매듭짓기 위해 버크너와 그리스웰은 흉가에서 하룻 밤을 보내지만, 그날 밤 그리스웰은 악령에게 홀려 2층으로 향하는데...
좀비물이라기 보다는, 저주받은 저택 장르물로 보는게 타당할 작품. 죽은 브래너의 습격, 마찬가지로 사람을 습격해 죽이는 실비아 블래슨빌 모두 시체가 되살아난 것이기는 해요. 허나 복수를 위해 부두교 주술로 저주한게 원인이고, 사람을 잡아먹지도 않으니, 저주물에 더 가깝고요.
저주받은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내다가 악령에게 습격받는 초반부 묘사는 지금 읽기에는 다소 진부하고 심심했지만, 버크너 보안관 등장 이후부터는 아주 재미있었어요. 특히 버크너가 브래너의 시체를 발견한 뒤의 전개는 추리 소설을 떠올리게 해서 독특했습니다. 상황은 그리스웰이 범인일 수 밖에 없어요. 둘만 있던 흉가에서 한 명이 도끼에 머리를 맞아 죽었으니까요. 그러나 버크너는 그리스웰의 옷에 피가 전혀 튀지 않았던 점, 그리고 그리스웰이 범인이라면 죽은 버크너가 자기를 죽이려 했다는 주장을 했을리 없다는 이유로 추가 조사를 벌입니다. 그리고 핏자욱을 따라 2층의 사건 발생 현장으로 이동한 뒤, 무언가 이상한 존재가 얽혀있다는걸 알게 되지요. 단서를 통한 추리,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수사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비밀 방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3명의 가족이 목을 메고 죽어 있었다는, 흉가 블래슨빌 저택에 얽힌 진상도 오싹했습니다. 사람들을 습격해 죽였던 괴물 '주벰비'가 실비아 블래슨빌을 원망했던 혼혈 하녀 조안이 아니라, 실비아 블래슨빌이었다는 반전도 충격적이었고요. 조안은 주벰비가 되는 검은 술을 자기가 먹지 않고 주인에게 몰래 먹였던 겁니다. 이거야말로 진짜 복수네요.
믿음직하고 용감한 보안관 버크너와 겁 많은 애송이 그리스웰의 조합도 반 헬싱 교수와 조나단 하커 관계와 좀 비슷한데, 전형적이지만 이런 류의 이야기에 딱 맞는 조합이더군요. 무서움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겁쟁이와 사건을 해결하고 악령을 응징하는 용감한 보안관이 조합되니, 두려움과 공포, 액션과 정의의 응징을 다 얻을 수 있잖아요!
그러나 딱 한 가지, 너무 옛스럽게 쓰여졌다는 건 좀 아쉬웠습니다. 공포를 효과적으로 묘사하기 여러모로 부족한 묘사가 특히 거슬렸습니다. 오래된 폐가, 몰락한 가문, 뱀으로 상징되는 저주의 주술,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령, 도망쳤던 생존자가 남긴 일기 등 모든 면에서 미쓰다 신조의 <<흉가>>가 떠오르는데, 공포를 자아내는 묘사와 전개는 전혀 미치지 못했거든요. 미쓰다 신조가 같은 작품을 썼다면 훨씬 무섭게 쓸 수 있었을 겁니다. 아니면 차라리 지금 방식으로 영상화하면 훨씬 대단한 작품이 될 것이라 생각되네요.
하여튼, 좋은 작품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검은 카난>>
커비 버크너는 고향 카난에서의 긴급 호출을 받고 귀향하다가 혼혈인 마녀의 유혹을 받았다. 최면에 걸렸던 버크너는 운 좋게 정신을 차리고 습격한 거구의 흑인 세 명을 물리쳤다.
마을에 도착한 버크너는 마을 흑인들이 모두 도망갔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고, 조사를 통해 늪지대에 사는 괴인 솔 스타크가 배후에 있다는걸 알아냈다. 그러나 조사 중 버크너는 마녀의 최면에 걸려 솔 스타크의 본거지로 본의 아니게 끌려가게 되었고, 친구 브랙스턴이 그를 돕기 위해 따라가는데....
부두교 주술사가 카난이라는 마을을 장악하려 하지만, 마을 지도자 버크너가 이를 물리친다는 호러 액션 활극.
마녀의 최면, 주술로 만든 물고기 인간같은 공포스러운 요소가 등장하지만,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버크너 시점의 심리 묘사만 있는 탓이 큽니다. 버크너 캐릭터는 전형적인 서부 영화의 쾌남 영웅 스타일이라 공포를 크게 느끼지 않거든요. 공포에 사로잡힌 묘사도 잘 와 닿지 않더군요.
마녀와 괴물들이 총에 맞으면 죽는다는 것과, 최면술말고는 주인공을 크게 위협하지 못한다는 것도 작품이 무섭지 않은 이유이고요.
그래도 모험 활극으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주인공 버크너는 전작의 버크너 보안관의 선조, 혹은 동일인물이 아닐까 싶은데, 버크너 유니버스도 한 번 제대로 소개되면 좋겠네요.
<<천 번의 죽음>>
물에 빠진 나를 구해준 건 아버지와 그 부하들이었다. 알고보니 아버지는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연구를 하고 있었고, 나도 물에 빠져 죽었었지만 아버지의 연구 덕분에 살아났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죽이고 되살리는 식으로 연구를 계속하는데....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등장하는 SF 호러 범죄물. 잭 런던이 썼다는게 특이했지만, 내용은 평이합나다. 죽은 사람을 되살린다는건 <<프랑켄슈타인>> 에서부터 내려온 고전적인 설정이니까요.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섬에 틀어박혀 생체 실험을 한다는건 <<닥터 모로의 섬>>과 똑같고요.
물론 생체 실험의 대상이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로, 그가 반복적인 죽음과 소생을 거듭한다는 설정으로 확실히 차별화되기는 합니다. '폭력에 의하지 않고, 신체 장기에 아무런 훼손이 없는 죽음은 단지 생명의 보류 상태'라며 죽음과 소생을 보다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점도 독특했어요.
하지만 차별화 요소를 잘 살렸다고 보기는 어렵네요. 독약, 질식 등으로 수차례 죽음을 맞는 고통이 잘 그려내지 못한 탓입입니다. 생체 실험의 고통을 극명하게 그려냈다면 호러물로 충분히 값했을텐데 말이지요. 과학적인 설명도 그럴듯해 보일 뿐, 실상 알맹이 없는 서술에 불과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갖은 노력 끝에 물질을 원소 상태로 되돌리는 장치를 개발했고, 이를 이용하여 아버지와 그 부하들을 없애고 탈출한다는 결말은 최악이네요. 아버지의 흑인 부하들이 자기 방으로 한 명씩 차례로 들어올 때 마다 없애고, 마지막에는 방에 들어선 아버지를 없앴다는데, 이럴 바에야 그냥 방에 한 명씩 들어올 때마다 칼로 찌르는게 빨랐을겁니다. 특별한 장치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롭고, 피해자들도 한 명씩 들어와 사라질 정도로 감시가 느슨했는데 왜 진작에 탈출하지 않은건지도 이유를 모르겠고요. SF스럽게 만들기 위한 억지 장치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엄청난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보였던 아버지의 최후라기에는 너무 허무했고요.
유사한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되는 요소가 있는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호러물로는 공포를 자극하는 요소가 부족했고, 결말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노예에게 소금은 금물>>
나는 아이티 호텔에서 머물다가, 호텔에서 일하는 노파 마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지역 주민들과 호텔 직원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과거 아이티 독립 전쟁 당시 '소금을 먹지 마라'는 금기를 어겼다가 시체가 된 연인 트레생에 대해 말해 주는데...
뒤에 수록된 <좀비와 함께 걷다>>를 읽어야 설정이 이해가 되는 작품. <<좀비와 함께 걷다>>에 따르면, 좀비는 소금을 먹으면 자신이 죽었다는걸 깨닫고, 무덤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한다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트래생은 물론 마리도 진작에 죽었던 좀비였다는 뜻이고요. 트래생이 흑인 해방 등의 의식을 가질 정도로 똑똑했던 이유는 설명되지 않지만 노예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였다니, 다른 좀비들과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고 보면 되겠지요.
문제는 이 설정 외의 특별한 내용은 없다는 겁니다. 마리도 좀비였다는 결말은 너무 뻔했고요. 죽었다는걸 깨달은 좀비들이 무덤으로 폭주하는 장면 묘사 정도만 괜찮았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귀환자들의 마을>>
좀비 전설이 있는 열대 섬마을에 어느날 미모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에게 유혹당한 파파는 절벽에서 떨어져 죽게 된다...
괴담 소설로 유명한 라프카디오 헌의 단편. 굉장히 실망했던 작품입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좀비와 다른 열대 섬나라 좀비에 대한 설명과 파파가 관련된 이야기가 아예 별개로 진행되어 혼란스럽고, 별다른 내용도 없습니다.
섬마을의 여러 풍광에 대한 관능적이면서도 상세한 묘사를 걷어내고 '이야기'에만 집중하면 한, 두페이지로도 충분했을 이야기입니다. 수록작 중 최악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나트에서의 마법>>
조티크 대륙의 절반이 사막인 나라 지라의 왕자 아다르는 노예 상인 샤라그에게 납치된 약혼녀 달리리를 찾아 여러 왕국을 헤멨다. 그러다 그녀가 향했다는 요로스 왕국으로 가는 상선에 탑승했지만 항해 중 폭풍에 휘말렸고, 상선은 사악한 섬 나트로 표류하다가 침몰했다. 달릴리의 구조로 홀로 살아남은 아다르는 나트의 마법사 우두머리 바카른을 만나, 그녀는 바카른이 되살려낸 익사자라는 걸 알게 되는데....
<<코난 더 바바리안>>을 연상케 하는 작품. 존재하지 않는 고대 왕국을 무대로 마법사와 영웅이 등장해서 대결을 펼치는 고대 판타지라는 점에서요.
그런데 결말이 예상 외라 놀랐습니다. 영웅 포지션인 아다르가 권력과 재산을 차지하기 위한 바카른의 두 아들 음모에 가담하여 바카른을 죽이려다고 되려 찔려 죽고 말거든요. 그리고 바카른의 아들에 의해 되살아나 좀비가 된다는게 끝입니다. 달릴리와 뭔가 관계가 이루어진다던가, 정의가 이루어진다던가 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중간에 등장하던 족제비 괴물은 어떻게 되는지도 설명되지 않고요.
이런 이유로 방대한 설정으로 이루어진 긴 서사물의 일부만 수록된 느낌입니다. 최소한 아다르와 달릴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주었어야 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아이티 공화국 헌법에 좀비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는 말에서 시작해서, 아이티에 진짜 좀비가 있다는 다양한 증언들이 이어지는 작품. 페이크 다큐멘터리 방식의 파운드 푸티지 영화같은, 페이크 논픽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좀비는 소금을 먹지 않고, 좀비가 소금 맛을 보면 죽었다는걸 깨닫고 열일 제쳐놓고 죽을 자리를 찾기 위해 무덤으로 향한다는 설정에 기반한 경험담이 이어질 뿐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화이트 좀비>>
아프리카 엔스와지 지방의 행정관 제프리 에일럿은, 어느날부터 느껴지는 악취 탓에 겁에 질렸다. 안개 자욱한 어느날, 결국 에일럿은 쓰러지고 말았다. 그를 돌봐준 신부는 과거 에일럿과 함께 했던 전우 싱클레어의 미망인이 수상하다고 말했고, 에일럿은 탐문과 잠복 끝에 그녀가 부두교 주술로 시체들을 조종하는 현장을 목격하는데...
서인도 제도가 아니라 아프리카를 부대로 부두교 주술이 등장하는 이색작. 서술은 장황하지만, 정작 내용은 에일럿이 잠복해서 부두교 좀비 축제? 현장을 목격하고, 거기서 싱클레어의 모습을 확인한 뒤 부두교 주술솨를 쏴 죽인다는게 전부입니다. 악취라던가 불길한 안개 등의 설정은 왜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신부의 존재도 불필요했어요.
게다가 좀비 사건의 원인, 결과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싱클레어 부인이 부두교 주술에 빠져 시체를 되살렸는지는 아프리카의 심장 운운하며 농장 관리 목적이었다고 소개되지만 명확하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싱클레어를 되살릴 이유도 없었고요. 에일럿이 악취를 느낀 이유 역시 밝혀지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아프리카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딱히 아프리카일 이유를 찾기도 힘들었습니다. 묘사만으로 작 중 무대가 아프리카처럼 느껴지지도 못했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할로 맨>>
한 남자가 아프리카로부터 15년만에 영국으로 찾아왔다. 그는 부두 거리를 헤메다 모모의 식당으로 들어섰다.
모모는 자신이 15년 전에 죽여 매장했던 고팍이 자기 식당으로 들어오는걸 보고 경악했다. 고팍은 표범 인간이 자신을 깨웠다며, 자기를 책임지라고 요구했다. 모모가 자신을 죽였기 때문이라면서.
식당에 고팍이 머문 뒤, 식당은 서서히 망해갔고, 딸 버블스마저 고팍에게 홀려 생기를 빼앗기자 모모는 고팍을 또 다시 한 번 죽일 결심을 하게 되는데....
죽은 자가 돌아왔다가, 다시 죽음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찾는다는 내용의 작품.
그렇게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무서울 수 있는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무서운 포인트를 제대로 묘사하고 있지 못하는 탓입니다. 일단 모모 시점의 심리 묘사가 부족해요. 과거에 저지른 죄로, 손을 씻고 가족과 열심히, 단란하게 살아가던 소시민에게 지옥문이 열린 상황인데, 고팍의 존재를 너무나 쉽게 인정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묘사에서는 절박함이나 어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거든요.
내용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습니다. 왜 표범 인간이 고팍을 되살렸는지, 고팍이 영국에는 어떻게 왔는지 등이 모두 드러나지 않아요. 버블스의 생기를 빼았는다는 것도 대충대충 넘어가고요.
결말도 허무합니다. 결국 고팍은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걸로 마무리되는데, 이럴 거였다면 왜 진작에 없애지 않았는지 의문이에요.
여러모로 오래된 작품이라는 티만 물씬 났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시체들>>
나는 농부 폴리니스로부터 아이티 지역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다양한 존재들에 대해 들었다. 다른건 유럽과 흡사했지만, 이 지역에만 있는 존재가 있었다. 그건 바로 좀비였다. 나는 좀비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부탁했다
"좀비"라는 단어의 기원이 되었다는 작품으로 아이티에서 사람들이 단단한 대리석 무덤에 묻히고 싶어하고, 자기 집 마당에 묘를 만들고, 사람들 왕래가 많은 길가나 도로변에 무덤이 많은 이유로 좀비를 설명하는 등, 좀비를 실존하는 것 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여러 장치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아이티 형법을 증거로 내미는 장면도 그런 장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폴리니스가 해 준 늙은 추장 조제프가 데려온 좀비 이야기는 이 책에 앞서 수록되어 있는 다른 아이티 좀비 이야기들과 똑같습니다. 좀비가 소금기를 접한 뒤 다시 시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최후까지요. 좀비가 되었던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조제프에게 복수를 했다는 결말 정도만 차이점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원조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발표 당시에는 굉장히 새롭고, 무서운 이야기였을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잘 짜여져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오히려 이 작품을 다른 유사 작품들보다 앞서 수록하지 않은 이 책의 문제가 너무 커 보입니다. 지금 책의 구성은, 후대의 아류작으로 원조의 가치가 퇴색되는 셈이거든요.
하여튼, 원조라는 역사적 가치를 더해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투셀의 창백한 신부>>
흑인 부자 마티외 투셀은 스무살은 어린 혼혈 아가씨 카미유와 결혼했다. 그리고 첫 번째 결혼 기념일에 투셀은 카미유를 시체와 함께 하는 파티에 초대했고, 카미유는 미쳐버리는데....
화자가 직접 들었다는 이야기를 쓴 글 형태로, 화자의 말대로 '흐지부지되었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작품입니다. 결말이 없거든요. 투셀이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투셀이 파티가 연 의도가 무엇인지, 시체들은 누구였는지, 아내에게 1년간 비밀을 지키다가 갑자기 시체 파티에 초대한 이유는 무엇인지 전혀 밝혀지지 않아요. 그렇다고 딱히 무섭지도 않았고요.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는 문제가 많았던 소품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점비>>
그랜빌리 씨는 1차 대전에서 폐를 다친 뒤, 서인도 제도 세인트크로이 섬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다. 섬에서 친해진 제프리 다 실바와 럼주 칵테일을 함께 하던 어느날, 그랜빌리 씨는 '점비'에 대해 물었고 다 실바는 자기가 젊었을 때 목격했던 일을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신학교를 나온 집사 출신이라는 작가 이력이 특이했던 작품. 이런 이력이라면 좀비가 실제 있는 것 처럼 묘사되는 작품은 쓰면 안되는게 아니었을까 싶은데 말이지요.
작품은 작가 이력만큼 특이하지는 않습니다. 다 실바가 친구 이베르센이 죽은 날, 이베르센의 유령을 만나고, 밤길에서 공중에 떠 있는 점비를 목격하고, 이베르센 집에서 개 인간을 만났다는 체험담이 이어질 뿐으로, "내가 했던 무서운 체험" 류의 기승전결없는 괴담의 나열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점비'나 개인간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도 없고요. 이래서야 좋은 점수를 줄 래야 줄 수가 없지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좀비 감염 지대>>
고든 파넘 박사는 아발론 섬에서 불사에 관련된 연구를 하다가, 죽은 시체를 되살리는 혈청을 개발했다. 마침 섬에 닥친 화산 폭발로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자, 박사는 혈청을 이용하여 그들을 되살릴 생각을 하는데...
부두교 주술로 되살아난 시체가 아닌, 과학의 힘으로 되살린 좀비가 등장하는SF 호러물입니다. 앞서 잭 런던의 단편과 비슷한 소재이지만, 되살리는 과정을 나름 과학적으로 잘 설명하는게 큰 볼거리였습니다. 특히 인체는 기계와 같다는 등의 고든 파넘 박사의 생명에 대한 이론이 아주 재미있고 풍성했습니다. 이 이론과 박사가 여러 동물로 진행하는 실험으로 이야기 여러 개는 충분히 뽑아낼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요. 예를 들어, 불멸성을 부여받은 실험체들이 번식을 통해 불멸성 유전을 증명했지만, 태어난 실험체들이 태어난 상태를 유지할 뿐이었다는 등의 이야기는 별도의 단편으로 꾸며도 재미있겠더라고요.
시체가 되살아나지만, 영혼과 두뇌가 없이 본능만 남은 상태라 야수로 돌변한다는 발상도 아주 좋았어요. 이들이 죽지 않는 상태로 군대, 경찰을 휩쓸어버리고, 잘려진 손발이 꿈틀대며 잘린 조각들이 엉망으로 붙어 괴물이 되어버리는 묘사도 일품이었고요. 절대 죽지 않는 존재를 없애기 위해 화산 폭발을 이용하여 우주 공간으로 날려버린다는 아이디어도 신선하더군요. 스케일이 정말 남다릅니다.
물론 화산 폭발을 사람이 제어한다는건 지금도 상상하기 힘들기에, 설득력이 높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등장하는 작품에서 이 정도 허풍은 충분히 허용범위 안쪽이라 생각됩니다. 오히려 시대를 앞서간, 아니 시대를 초월한 끔찍한 아비규환을 그려낸 SF 좀비물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영화로 나와도 아주 근사했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2007/10/19
명탐정 코난 극장판 11 - 감벽의 관 : 별점 1점
코난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그동안 솔직히 평균 타율 3할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워낙 팬이기에 이번에도 곧바로 구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동안의 작품들 수준의, 아니 훨씬 못한 작품이라 더더욱 실망이 컸습니다.
일단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추리"라는게 거의 없습니다. 기존에도 그다지 대단한 추리가 등장하는 작품은 거의 없었지만, 이 작품은 수준이 더 심각합니다. 영화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워낙에 없고, 모험에 치중한 이야기 구조인 탓이 크겠지만요. 그나마 등장하는 암호 트릭은 정말이지 초등학생 수준일 뿐더러, 작품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300여년 전 해적이 숨긴 보물을 찾는 단서"라기에는 한숨만 나올 정도로 설득력 없는 억지였습니다. 이런 암호 트릭을 가지고 300년 동안 보물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되죠. 초반의 상어 습격을 위한 장치 트릭은 트릭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허술한, 단순한 장치일 뿐이었고요.
그렇다면 해적의 보물에 관련된 모험 활극으로서의 가치는 있는가? 싶냐 하면 전혀 아니올시다입니다. 아무리 초등학생 수준이라도 최소한 "구니스" 정도의 재미는 줘야죠. 그냥저냥 흘러가다가 란과 코난의 액션(?)에 의해 사건이 한번씩 전개되는 식이라, 별다른 복선과 스릴은 찾아보기 힘들어 지루했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한다면 '초등학교 저학년 이하를 타겟으로 한 극장용 모험물'이라 생각되네요. 기존의 3D와 잘 안 맞던 튀는 작화는 훨씬 안정되어 영상은 꽤 괜찮았지만 작품 수준이 코난 팬인 저로서도 보기가 좀 힘들정도로 지루하고 짜증났습니다. 차라리 괜찮은 원작 에피소드를 영화화하는게 훨씬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별점은 1점입니다.
2020/03/15
눈보라 체이스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점
![]() | 눈보라 체이스 - ![]()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소미미디어 |
스노보드 마니아 다쓰미는 취업 전 마지막 겨울을 원없이 불태우려 니가타의 스키장으로 향했다. 출입 금지 구역에서의 짜릿한 스노보딩도 잠시, 도쿄로 돌아오니 갑자기 살인 용의자가 되어 경찰이 집을 에워싸고 있다. 다쓰미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지만, 법학도 친구 나미카와는 상황의 법리적 심각성을 알리며 당장 무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아야 한다고 재촉한다. 다쓰미는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유일한 사람은 살인사건 발생일 새벽, 스키장에서 우연히 만난 미인 스노보더 한 명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두 사람은 다른 동아리 부원의 차를 빌려, 그녀가 '홈그라운드'라고 언급한 전국 최대 사토자와 온천 스키장으로 무작정 떠난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히가시노 게이고의 '설산 시리즈' 3부작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시리즈물답게 네즈와 치아키 등 전편의 주요 인물들, 그리고 주요 무대였던 산게쓰 고원 스키장과 사토자와 온천 스키장이 다시 등장합니다. 다카노 세이야가 가이드로 등장하고, 세이야 부모님이 운영하는 전편의 주요 무대였던 카페 "뻐꾸기"와 세이야의 동생 유키의 재등장도 반가왔습니다. '뻐꾸기' 명물 프랑크푸르트 소세지도 빼 놓을 수 없겠지요.
그러나 전작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가장 큰 차이는 주인공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패트롤 네즈가 아니라 대학생 다쓰미와 친구 나미카와가 주인공으로, 둘이 함께 결백을 증명해 줄 증인인 '여신'을 찾아 경찰을 피해가며 스키장을 누비는게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덕분에 전작들과 같은 거대한 위협에 맞서는 모험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작과 다르기에 이 작품만이 가지는 장점도 분명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쓰미와 나미카와를 추격하는 고스기 형사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부하의 요청과 반론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무리한 명령만 남발하는 무능력한 관리자의 표상인 난바라 계장과 와와다 형사과장의 등쌀에 치이는 전형적인 소심남으로 보이지만, 뒤로 가면 갈 수록 멋지고 중후한 인물로 거듭나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계기는 오랫만에 스키를 타면서 열정이 되살아났기 때문으로 묘사되는데, 이 부분도 시리즈 핵심 소재와 일맥상통하는 맛이 있어서 좋았어요. 스키장의 실력자 유키코와의 장년의 로맨스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묵직하면서도 은근하고, 또 스키를 타면서 느껴지는 활기도 넘치고, 여러모로 마음에 드네요.
또 사토자와 온천 스키장이라는 무대를 전작인 "질풍론도"보다 더 잘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돋보입니다. 이는 드넓은 스키장에서 '여신'을 찾기 위한 다쓰미와 나미카와의 고민과 행동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냥은 도저히 찾을 수 없으니,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 스키장 패트롤 대장 네즈, 백컨트리 투어 가이드 다카노 등의 도움으로 그녀가 나타날만한 이런저런 포인트를 짚어 조사하고 기다리는 과정이 나름 합리적이며, 정말로 스키장에 대해 엄청나게 많이 조사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상세합니다.
대단한 추리가 등장하는건 아니고, 추격 모험 활극에 가깝기는 하지만,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이 있다는 점도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돋보이는 점입니다. 대표적인건 현장의 기묘한 상황을 눈치채고 진범이 누군지를 추리해 내는 과정입니다. 주인공 일행은 피해자 후쿠마루씨가 섹시 탤런트 DVD를 보는게 취미였는데, 그걸 볼 때마다 죽은 아내에게 미안해서 불단을 닫았지만 범행 현장 사진의 불단은 열려 있었다는 것을 알아냅니다. 이를 통해 현장에서 DVD를 재생시킨건 후쿠마루 씨가 아니며, 범인은 DVD를 바꾸어 재생해야 했고 이유는 원래 DVD가 범인에게 불리한 것이었다고 추리하게 되지요. 추리를 통해 결국 범인을 체포하는데 성공하고요.
원래 보던 DVD가 무엇이었는지 알아내기는 쉽지 않았을테고, 사전에 이런 정보를 독자에게 제대로 제공해 주지 않은건 공정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지만 추리 자체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나름 정통 추리물 느낌도 전해줄 정도거든요.
비교적 초반에 다쓰미에게 증인을 찾아 나설것을 조언하는 법대생 나미카와의 조언, 그리고 다쓰미의 알리바이가 나름 밝혀진 뒤 나미카와마저도 공범으로 몰리는 전개 역시 추리물 느낌을 가득 전해 줍니다. 다쓰미의 알리바이를 나미카와가 조작해 주었다는 논리인데 둘의 도주와 맞물러 설득력이 높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애써 찾은 증인인 '여신'이 임신 탓에 스노보드를 마음껏 탈 수 없다는 설정도 괜찮았어요. 둘이서 백방으로 노력해도 찾기 힘들었던 이유로 설득력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이 임신 설정을 마지막 결혼식 연출과 네즈와 치아키 커플이 연결되는 결말로 이어가는 전개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아주 좋은 작품이다라고 이야기하기는 아쉽게도 무리입니다. 일단 독자는 다쓰미가 범인이 아니라는걸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스키장을 배경으로 청춘들의 사랑과 고민이 함께 그려지는 탓에 서스펜스를 느끼기 어려운 탓이 큽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절박한 상황에서 증인을 찾아 나선다는 "환상의 여인" 만큼의 절박함이 보였어야 하는데, 두 대학생은 그런 마음이 별로 없어 보이거든요. 어떻게 보면 추리물, 스릴러라기 보다는 청춘 로맨스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전개 면에서 편의적인 부분이 많다는 점도 단점입니다. 네즈도 그렇고, 스키장의 유력자 유키코도 그렇고, 심지어 고스기 형사마저도 다쓰미가 결백하다고 생각한다는건 특히나 터무니 없어요. 아무리 관상이 좋고, 말주변이 좋아도 그렇지 경찰이 유력 참고인의 말을 믿고 시간을 준다는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죠. 증인을 찾기 어렵게 꼬아놓은 캐릭터 설정도 오버스러웠고요. 네즈에다가 경찰까지 도움을 준다면, 차라리 방송이라도 하는게 낫잖아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취미 생활처럼 힘을 빼고 가볍게 쓴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아주 뛰어나지는 않지만, 킬링 타임용 읽을거리로는 나쁘지 않은 수준입니다. 읽으실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22/09/04
대단한 밀실 트릭! 신비로운 고전 걸작 5편 소개 (from 'honto')
1. <<모르그 거리의 살인>> 에드거 앨런 포
밀실에서 일어난 범행이라는 수수께끼, 홈즈의 원형이라고 불리우는 명탐정 듀팽, 논리적인 해결, 의외의 범인 등의 요소로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의 막을 연 작품.
2. <<노란 방의 비밀>> 가스통 르루
<<오페라의 유령>> 원작자로도 유명한 저자가 그려낸 '완벽한 밀실'인 노란 방에서의 범행, 거기에 두 개의 인간 소실 수수께끼까지 더해져 있다. 고전 모험 활극의 향기도 느껴지고, 밀실 추리물 최고의 걸작이라고 칭송받기도 하는, 올 타임 베스트에 단골 선정되는 명작.
3. <<유다의 창>> 존 딕슨 카
엘러리 퀸, 크리스티 여사님과 함께 황금 시대 (골든 에이지) 삼대 거장이라고 불리우는 딕슨 카의 작품. 밀실의 거장이라고도 불리운 카의 작품답게 밀실 살인과 법정 미스터리가 결합되어 있다. 밀실에서 피해자와 함께 있었던 피고를 명탐정인 법정 변호사 헨리 메리베일경이 변호하는 내용으로, 아주 유명한 트릭이 사용되었지만 트릭을 알아채더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
4. <<혼진 살인사건>> 요코미조 세이시
명탐정의 대명사 긴다이치 코스케의 데뷰작. 열쇠도 없고, 장지문으로 만들어져 밀실에는 적합하지 않은 일본 가옥을 무대로 한 최초의 밀실 추리물로도 유명한 불후의 명작.
5. <<문신 살인 사건>> 다카기 아키미쓰
타카기 아키미츠의 데뷔작으로 명탐정 카미즈 교스케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유명 문신가의 문신을 한 3자매 중 한 명이 토막난 사체로 밀실에서 발견된다. 쌍둥이 자매, 토막난 시체, 욕실이라는 밀실에서의 살인이라는 본격 추리물의 재료가 가득한 작품. 트릭도 훌륭하다.
2008/11/05
명탐정 코난 극장판 Vol.12 - 전율의 악보 (Full Score of Fear) : 별점 3점
잊을만 하면 등장하는 명탐정 코난 극장판의 12번째 작품을 어제 감상하였습니다. 클래식 연주회가 주 소재인데 "노다메 칸타빌레"의 영향일까요? 어쨌건 이전 작품인 "감벽의 관"이 상상을 초월하는 쓰레기였던지라 별 기대를 하지는 않았는데 이 작품은 그런대로 평범한 수준의 완성도는 보여주더군요. 하긴 "감벽의 관"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모욕이겠지만...
이유는 안정된 작화, 그리고 근래 코난 극장판에서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작용하기도 했던 "올스타 캐스팅" 이 자제된 덕분이기도 하겠죠. 이 작품에서는 전형적인 코난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인 모리탐정 - 란 - 소노코 - 아가사박사 - 소년 탐정단 정도만 등장하고, 실질적 활약의 90%를 코난이 담당하고 있어서 이야기가 분산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란과 소노코, 아가사 박사와 소년 탐정단은 평상시의 역할대로 불쌍한 피해자와 개그 캐릭터 정도로만 활용되고 있는 덕분입니다. 막판 하이바라의 잠깐 활약은 제가 하이바라의 팬인지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고요. "아동 모험 활극"으로 전락한 다른 극장판들에 비한다면, "추리"라는 요소를 살리고 있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 만족스러운건 아닙니다. 너무 평범해서 극장판에는 걸맞지 않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범인도 조금만 생각하면 추리가 가능할 정도니까요. 제목과 내용에 걸맞게 약간의 음악적 장치가 양념처럼 쓰이지만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으며, 아무리 음악을 이용한 트릭을 위한 설정이라지만 전설의 음치 코난-신이치가 "절대음감"의 소유자라는 발상은 당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범행 동기도 설득력이 낮았고, 마지막 살짝의 반전은 괜찮았지만 오해 치고는 너무 스케일이 큰 것 아닌가 생각되네요.
또한 극적인 상황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몇가지의 설정들도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밖에서 폭탄이 수십발 터지고 있는데 아무리 완전 방음된 콘서트 홀이라도 내부의 관객들이 전혀 모른다는 상황, 목소리로 주파수를 맞춰 멀리 떨어져있는 전화를 건다는 등은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무리입니다. 괜히 이야기만 길어졌어요. 이야기가 길어진 것에는 "연주" 장면이 삽입된 탓도 있지만 더 압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극장판"이라는 수준은 겨우 충족시켜 주는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전작보다는 훨씬 나은 수준의 완성도라 다행이라는 느낌이 드네요. 아주 좋았던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기는 무리지만 별로였던 작품들보다는 나은, 최근작들 중에서는 손꼽을만한 나름의 이야기 완성도는 갖추고 있거든요. 다음 작품은 좀 더 좋아지길 바라겠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분발하세요~!
2022/02/05
마가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 별점 3.5점
![]() | 마가 -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북로드 |
유마는 새아빠의 동생인 삼촌과 여름 방학을 보내게 되었다. 재혼한 엄마가 임신 후, 미국 이주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탓이었다.
삼촌의 별장인 고무로 저택은 오래전에 부자 고무로 도쿠야로부터 받은 선물로, 실종되었던 도쿠야의 손자 히사시를 찾아 주었던 보답이었다. 그러나 별장은 왠지 모르게 섬뜩한 장소였다. 별장 뒤 숲에서는 아이들이 여러 명 실종되었었고, 근처 별장에서는 참극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유마는 별장에 머물면서 어린아이 형상의 누군가가 3층 다락방에 머물고 있다는걸 눈치챘다. 결국 '세이'라는 아이를 만난 뒤, 세이의 꼬드김으로 유마는 혼자 들어가면 안된다는 사사 숲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유마는 한 남자의 추격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게 되는데....
저주받은? 귀신들린? 저택을 무대로 한 호러의 명수 미쓰다 신조의 작품. 제가 읽은 작가의 유사 소재 작품만 해도 <<흉가>>, <<백사당>>, <<사관장>>, <<기관>> 등이 있습니다. 대부분 평균 이상의 수작이었던걸 보면 '명수'라는 호칭이 과한건 아니겠지요.
작품의 특징이라면 다른 작품들과는 목표하는 독자 연령대가 낮아 보인다는 점입니다. 영 어덜트 판타지를 연상케하는 표지에서부터, 초등학교 6학년이 '잘 모르는 넓은 저택'과 '넓은 숲, 동굴' 에서 펼치는 모험 활극에 가까운 내용, 그리고 피가 튀기는 고어물도 아니고, 아주 무섭지도 않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호러 작가로서의 솜씨가 사라진건 아닙니다. 유마가 저택 안을 배회하는 정체 불명의 무언가와 말없이 암투를 벌이는 광경, 이계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사 숲과 나무 동굴 속에서 벌어지는 목숨을 건 추격전 등의 묘사는 공포심을 충분히 자극시켜주는 멋진 묘사들이었습니다.
작가 특유의 호러와 범죄, 추리 소설과의 결합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초, 중반까지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반전을 통해 '범죄 소설'로 전환되는 구성이 인상적이었어요. 반전을 통해 삼촌이 유마를 돌보려고 했던게 아니라, 유괴를 했던 거라는게 드러나거든요. '삼촌이 삼촌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변한 것 같았다'는 유마의 느낌, 밤중에 삼촌이 기묘한 목소리로 유마와 사람들의 이름을 표준어로 말하는 연습을 했던 것등은 모두 공포스러운 연출이라고 여겼었지만, 사실 전부 유괴라는 범죄에 대한 단서였던 겁니다!
별장으로 향할 때 삼촌이 해 주었던 말, 삼촌이 별장에 유마가 머물 줄 알고 미리 책을 사 두었던 이유, 어머니와의 통화 등도 알고보니 모두 단서와 복선이었고요.
고무로 히사시를 비롯한 과거 유괴 사건들도 사실은 삼촌이 일으켰었고, 이 때 사사 숲에 아이를 숨겨두면 아이들이 유괴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다는걸 눈치채서 범행을 계획했다는 진상도 이야기와 잘 맞아 떨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10년 전, 고이즈미 마사토는 실수로 죽이고 말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도 깔끔했습니다. 유마가 저택에서 만났던건 고이즈미 마사토의 유령이었던 거지요. 유령도 이야기에서 큰 역할을 수행합니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과거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유마에게 알려주는 식으로요.
이렇게 등장하는 설정, 소재를 허투루 소비하지 않고 모두 이야기에 녹여내는 것도 돋보였던 장점으로, 유마가 이계 공간을 오갈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능력 덕분에 삼촌의 공범이었던 유괴범에게 쫓기다가 혼자서 사사 숲 이계 공간에서 무사 귀환할 수 있었으며, 삼촌도 유마를 아예 죽일 생각이었다는걸 명확하게 독자에게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다소 뜬금없었던 설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적절히 활용한 셈이라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확실히 대가는 다른 법이네요.
무엇보다도 맨 마지막 한 줄의 반전, 유마가 옥상에 RC카를 두고 온건 실수가 아니었다는건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유마에 의해 삼촌이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다는 최후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여러가지 치밀함을 발휘하여 유마를 옭아매던 삼촌의 최후치고는 너무 허무했으니까요. 세이의 유령이 뭔가 도움을 줄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고요.
추리적으로도 호러와의 결합은 잘 하고 있지만, 정교함은 부족한 편입니다. 유괴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몸값을 받는 부분입니다. 이전 고이즈미 마사토 사건에서는 마사토의 새아버지로부터, 마사토가 돌아오지 않는 조건으로 돈을 받았으니 그건 별로 어렵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유마의 어머니는 그럴리가 없으니, 깜쪽같이 돈을 받아기는 힘들었을거에요. 그러나 관련된 계획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건 유괴물로는 큰 단점이라 생각됩니다.
범행 후 삼촌이 유마를 죽이고 사체를 유기했더라도, 관리인이 유마를 목격한 이상 수사가 이루어지면 삼촌이 빠져나가기는 힘들었을거라는 점도 문제입니다. 관리인도 살해할 생각이었을까요? 그렇다 해도 조카가 유괴당한 후 실종되었는데 그 삼촌은 갑자기 생긴 거액의 돈으로 사업상 위기를 해결했고, 삼촌 소유의 별장이 있는 별장지 관리인이 살해당했다면, 경찰 수사가 시작될 경우 용의선상에 올라 철저한 조사를 받는건 당연했을겁니다. 여러모로 허술한 범죄라는 생각을 지우기 힘드네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한 편이며, 읽다보면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공포는 덜하지만, 범죄 소설로 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분량도 적당하고요. 호러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미쓰다 신조 월드 입문자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10/08/04
우주괴인 자이로박사 - 에드먼드 해밀턴 / 박홍근 : 별점 3점
작품은 그야말로 우주 활극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에테르 우주관을 바탕으로 한 복고적인 태양계를 종횡무진하며 정의를 위해 싸우는 캡틴 퓨처와 그의 동료 퓨처맨 - 사이먼, 클라크, 오토 - 의 모험이 그야말로 숨쉴틈없이 벌어지는 덕분입니다. 화성에서는 로프뱀에 사로잡히고, 에테르 사르갓소 바다에 표류하였다가 탈출하기도 하고, 명왕성에서 맹수와 사투를 벌이는 등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에요.
단순하게 모험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이로 박사'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과정이 추리물적인 성격을 띄고 있어서 재미를 더해줍니다. 자이로 박사와 함께 있는 외계인이 코발트가 함유되어 있는 행성에서 왔다던가, 자이로 박사가 나타났던 현장에 남아있던 발자국과 진흙을 가지고 펼치는 추리 등이 감칠맛나게 잘 쓰이고 있거든요. 이러한 추리를 바탕으로 한 반전도 깔끔한 편입니다. 아울러 에테르 우주관이기는 하지만 암흑성의 정체를 빛의 굴절 등을 통해 증명한다는 것도 괜찮았어요.
그 외에도 캡틴 퓨처와 퓨처맨 파티가 두뇌 - 힘 - 변장 으로 확실히 영역구분이 되어 있다는 점, 캡틴 퓨처의 벨트에 다양한 도구가 들어있고 캡틴 퓨처를 부를 때에는 북극에 마그네슘 등을 켠다는 등의 슈퍼 히어로 만화같은 느낌이 담뿍 들어있는 것도 독특한 재미를 가져다 줍니다.
제 어린시절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책인데 다시 읽어도 역시 재미있네요. 너무 아동용으로 번역된 느낌이 드는 것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04/09/14
명탐정 코난 - 은빛 날개의 마술사 : 별점 1.5점
모리탐정사무소에 연극배우 마키 쥬리(牧樹里)으로부터 의뢰가 들어온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스타사파이어 반지 '운명의 보석'을 훔쳐가겠다는 괴도 키드(キッド)의 범행 예고장이 도착했다는 것이다.
공연에 초대된 코고로와 란(蘭), 코난(コナン), 그리고 소년탐정단 일행앞에 괴도 키드는 대담하게도 신이치(新一)로 변장하고 나타났다. 여러모로 복잡한 상황 하에 막이 오른 연극 <왕비 조세피나>. 코난은 신이치로 변장한 키드의 범행 증거를 잡기 위해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다. 마침내 정열적인 연극이 클라이맥스에 도달할 때 신이치가 사라지고, 급히 뒤를 쫓던 코난은 2명의 경비원 중 한 명이 키드라는 걸 알아채고 추격을 시작하지만 결국 놓친다.
하지만 무사히 스타사파이어를 지킨 코고로와 코난 일행은 쥬리로부터 감사 표시로 홋카이도(北海道) 하코다테(函館) 별장에 초대를 받는다. 코난 일행이 탄 대형 여객기가 예정대로 하코다테를 향해 이륙하자 곧 마키 쥬리가 살해당하는데....
이제 7번째 극장판인가요? 이 작품은 인기가 많은 서브 캐릭터 중 하나인 괴도 키드를 전면에 부각시킨 작품입니다.
하지만 내용은 허술하기 그지 없습니다. 극장판 시리즈는 점점 퀄리티와 내용의 수준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각본이 엉망이네요. 차라리 원작 만화에 있는 에피소드를 각색하는 편이 훨씬 나을 정도입니다.
일단 키드의 초반 범행 예고에서 시작해 키드와 코난의 추격전이 벌어지는 초반부, 비행기에서의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중반부, 비행기가 기장의 중독으로 조종 불능상태에 빠지는 후반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세 부분이 각자 따로 노는듯한 느낌을 줍니다. 키드와 코난의 라이벌전을 그리려는 초반부 의도와는 달리 그나마 추리극이라 할 수 있는 중반부의 살인사건에서 괴도 키드는 방관자로만 등장할 뿐입니다.
추리도 문제가 많습니다. 먼저 초반부에서 키드의 교묘한 도둑질을 기대한다면 실망만 할 뿐이에요. 암호 트릭 자체는 괜찮았지만 그다지 효과적으로 쓰이지도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중반부의 살인사건은 트릭을 위해 다른 요소들이 전부 어거지로 짜맞춰졌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일단 용의자들의 동기가 굉장히 약하고, 다른 방법도 많이 있었을텐데 용의자가 한정되는 비행기안에서 범행한 범인의 의도도 이해되지 않아요. 그나마의 트릭도 우연으로 이루어진 측면이 있어서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고요. 설득력이 떨어진달까요?
게다가 6번째 극장판 "미궁에 십자로"에서 지나치게 남용한 3D를 역시 많이 사용해서 작화나 전체적인 연출의 느낌이 좋지 못합니다. 셀과 3D를 조화롭게 사용하기에는 아직 멀은 것 같고 작화도 기존 TV 시리즈 수준 정도로 극장판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네요.
물론 건질게 아주 없는건 아니라서 모리탐정의 개그, 키드가 신이치로 변장하고 나온다는 설정, 그리고 초반부의 추격전은 제법 재미있습니다. 마지막의 비행기 비상 착륙 장면은 흥미진진하고요.
2015/06/22
13.67 - 찬호께이 / 강초아 : 별점 3점
| 13.67 -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100여페이지 정도 분량의 중단편 6편이 수록된 연작 중단편집. 제목의 13.67은 2013년에서 시작하여 1967년까지를 거슬러 올라가는 시대적 배경을 의미하고 있죠. 탐정역의 관전둬가 전편에 등장할 뿐더러, 뤄 샤오밍이나 탕 아저씨, 범죄자 스씨 형제 등 등장인물들이 여러개의 작품에 등장하는 등 연작, 시리즈 느낌이 강합니다.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국내에서 보기 힘든 중국 추리소설이라는 점인데, 단지 이색적이기만 한게 아니라 추리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이라는 것에 놀랐습니다. 중국 추리소설 수준도 정말 높구나 싶어 감탄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탐정역인 '천리안' 관전둬의 뛰어난 추리력과 사소해보이던 단서들의 조합으로 진상이 밝혀지는 정교하게 짜여진 이야기 구성도 좋지만, 진상이 놀랍기 때문에 흡사 반전 스릴러를 읽는 듯한 짜릿함을 선사해준다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중국 작가가 쓴 중국 추리소설이기에 선보이는 중국 - 홍콩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도 볼거리에요. 특이한 계급명과 CIB를 비롯한 중안조, 반흑조, 특별 직무대, 비호대와 같은 다양한 부서명에 1호 (경찰 최고위인 경무청장의 속칭), 장작 (제복 문양)같은 중국 - 홍콩 경찰 관련 용어 및 은어들, 탁가, 고혹자, 파파라치, 다취안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범죄자), 도사 (마약중독자), 일루일봉 (홍콩 특유의 매춘업소) 과 같은 범죄 관련 은어, 호루라기를 분다 (동원 가능한 인력과 물자를 총동원한다)나 책에 들어간다 (감옥에 간다), 저수지를 경비한다 (한직으로 밀려난다)와 같은 홍콩 속어, 은어로 탄산수를 "네덜란드 음료수"라고 부른다거나 광둥어로 농땡이부리는 사람을 사왕이라고 한다는 등의 묘사가 그러합니다.
실존하는 맥퍼슨 스타디움, 퀸 메리 병원, 프린스 에드워드 서로, 퉁초이가 (여인가) 등 몽콕의 거리, 그레이엄가 시장, 카오룽 거리와 같은 이국적 풍광 역시 가득하고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분명 있습니다. 일단 탐정인 관전둬의 캐릭터가 큰 매력이 없다는 점이 그러해요. "천리안" 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능한 경찰로 한번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고, 발자국만 봐도 범인이 누군지 알아낸다는 천재이지만 사생활에서는 구두쇠 수준으로 알뜰하고 정리정돈을 잘 못한다 라는 식으로 캐릭터를 부여하기 위한 묘사는 제법 되기는 하나 특별히 와 닿지도 않고, 내용과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았거든요. 또 몇몇 이야기는 너무 작위적으로 짜여져 있기도 합니다. "죄수의 도의" 편이 대표적이죠.
허나 단점은 사소할 뿐, 부담되는 분량임에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여러모로 자극도 많이 되었고요.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새로운 추리 소설을 읽기 원하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저와같이 80~90년대 홍콩영화 최 전성기 팬이시라면 더 즐겁게 감상하실 수 있을 것 같네요.
책 소갯글을 보니 영화가 나온다고 하는데 꼭 보고 싶어집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하니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길...
"흑과 백 사이의 진실"
펑하이 그룹의 총수 위안원빈 살인사건 해결을 위해 담당인 뤄 독찰이 선택한 방법은 자신의 사부 관전뒤의 병실로 사건 관계자들을 소집하는 것. 이유는 관전둬가 사건해결 100%를 자랑하는 명탐정이지만 간암말기로 혼수상태에 빠졌기 때문으로 병원에서 뇌파를 읽는 특수한 장비를 이용하여 관계자들에게 사건에 대해 듣고 그 자리에서 추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관전둬의 추리를 통해 단순 강도사건인줄 알았던 사건이 위씨 가문 내부인의 소행이라는 것, 그리고 사건 현장에 남겨진 증거들 - 테이프, 다이잉 메시지가 없는 이유, 흉기인 작살에 대한 이상한 사실 등 - 을 통해 아들 위용렌이 범인임이 밝혀진다.
그러나 뤄 독찰은 위용렌 뒤에 고용인 탕 아저씨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체포한다. 탕은 경찰서로 이동하는 자동차 안에서 가설임을 전제로 사건의 진짜 동기와 위용렌을 조종한 방법 등을 낱낱이 밝힌다. 그를 옭아맬 증거는 전혀 없는 상태. 그러나 뤄 독찰은 탕이 관전둬를 살해하는 현장을 촬영하여 그를 관전둬 살해범으로 체포하게 된다.
2013년을 무대로 한 첫 이야기. 그동안은 링컨 라임이 안락의자 탐정의 최고봉이라 생각했는데 그를 뛰어넘는 존재가 나왔습니다! 이제는 아예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가 탐정이거든요.
이런 설정은 좀 작위적이고 웃기지만 추리의 흐름은 괜찮습니다. 바닥이 어질러져있지만 침입한 흔적은 없다는 단순한 사실로 용의자를 특정하는 초반부, 위씨 가문의 무남독녀 위첸러우에 관련된 어두운 과거가 드러나는 중반부, 테이프와 작살총, 다이잉메시지가 없는 상황 등을 통해 범인을 확정하는 후반부까지 모두 합리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안락의자 탐정물이기에 독자에게 제공되는 정보도 공정한 편이고요.
무엇보다도 탕 아저씨가 진정한 흑막이며 사건의 핵심 동기가 밝혀지는 마지막 반전이 인상적이었어요. 위용롄의 설득력없는 동기에 비해, 설득력은 물론 드라마까지 갖춘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위용롄을 조종할 수 있었던 이유도 충분히 설명되고요. 아울러 뤄독찰이 모든 것을 꾸민 것이었다는 것도 앞서 말한 작위적인 설정을 잘 포장하고 있어서 꽤 괜찮았어요.
그러나 탕이 관전둬를 살해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결말이 영 별로네요. 그가 직접 나서서 관전둬를 살해할 이유가 없거든요. 본인 스스로 말했듯 아무런 증거도 없는 상황인데 뭐하러 추가 범행, 그것도 경찰을 살해하는 범행을 저질러 가며 뒷처리를 해야 했을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직접 죽이지 않아도 오늘, 내일 하는 상황이고 그의 추리도 결국 증거를 확보하지 않은 가설이자 추론에 불과할텐데 말이죠.
때문에 감점해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마지막 사족만 없었어도 별점 3점이상은 충분했을텐데 아쉽습니다.
"죄수의 도의"
잘 나가는 엔터회사 사장이지만 실상은 흑사회 보스인 줘한창을 검거하려는 뤄샤오밍은 실패만 거듭한다. 그러던 중 줘한창 회사에 소속된 신인가수 탕린이 괴한에게 습격당하고 살해당하는 동영상이 배포되는데....
줘한창을 잡아넣기 위해 암흑가 도의를 굳게 지키는 경쟁 조직 보스 런더러의 입을 열게 만든다는 작전이 그려지는 작품.
솔직히 여러모로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특히 죄수의 딜레마가 내용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영 모르겠어요. 죄수의 딜레마가 소용이 없는 암흑가 도의가 관련된 특수 상황에 대한 것은 알겠지만 런더러가 입을 여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데 말이죠. 또 탕린이 사실 줘한창에게 복수를 다짐한 전 정보원의 딸이라는 설정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과거 가쉽으로 접해보았던, 암흑가가 깊숙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홍콩 연예계의 이면을 그린 점은 괜찮았지만 평작 이상의 작품은 아닙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가장 긴 하루"
최고의 지능범인 스번톈의 탈옥 사건과 시장 대상의 무차별 산성액 투척사건이 한꺼번에 벌어진 날, 모든 사건을 꿰뚫어 본 관전둬는 한번에 사건을 해결한다.
스번톈이 저우샹관과 바꿔치기 되어 있다는 진상도 기발하지만, 이를 밝혀내는 추리도 합리적입니다. 스번톈 탈옥에 징교원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리는 쉽지만, 작중 등장하는 번호표가 뜯겨진 죄수복, 도로에서 발생한 사고, 산성액 투척 사건이 벌어진 시간과 저우샹관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상황, 응급처치에 대한 증언 등 사소한 것 하나하나 모두가 중요한 추리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스번톈과 대면한 관전둬가 그를 옭아매는 장면도 아주 통쾌했고요.
무엇보다도 '인구밀집형 도시가 무대인 탓에 설득력이 생기는' 작품의 대표적인 예라 더 주목할만 합니다. 탈옥 해 봤자 더 큰 감옥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누군가 죽었을 때 누구라도 조그만 의심을 품으면 법망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는 홍콩만의 상황을 기본에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홍콩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잘 표현한 작품이지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4점. 홍콩 추리문학계의 높은 수준을 짐작케 하는 좋은 작품입니다. 수록작 중 최고작으로 꼽겠습니다. 다양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스케일이 큰 만큼 영화화에도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영화로도 보고 싶네요.
"테미스의 천칭"
흉악범 스씨 헝제를 체포하기 위해 경찰은 스번성이 머무는 은신처 주위에 잠복한다. 그러나 일당이 도주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잠복 중이던 TT가 이끄는 경찰들이 그들을 체포하려 나서고, 총격전 끝에 범인은 모두 사살하지만 인질이 된 시민이 모두 죽는 참사가 발생한다.
이후 경찰내 내통자가 있을 것이라는 단서가 발견되고 사건을 지휘하던 가오랑산이 TT를 제거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는 소문이 퍼지는데...
홍콩 영화에서 봤던 악당과의 총격전이 유감없이 펼쳐지는 작품. 봉쇄된 주상복합(?) 건물에서의 활극 묘사는 일품이었어요
추리적으로도 인상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TT가 모든 것을 계획한 것이라는 진상도 놀랍지만 동기가 합리적으로 그것을 끌어내는 추론 역시 타당하거든요. 몇몇 사소해보이는 대사에서 단서를 끌어내는 관전둬의 활약이 빛을 발하거든요. 아울러 전작의 스번톈과 필적하는 강적 TT와의 두뇌 싸움도 돋보였습니다. 무선 발신 시간과 총격전 시간을 조종하는 트릭도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고요.
그러나 문제도 명확합니다. 관전둬의 추리에 증거가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죠. 때문에 증거를 조작하면서까지 벌이는 관전둬의 협박(?)이 그리 와닿지 않기도 합니다. TT가 총탄이 바꿔치기 당했다고 우겼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잘 모르겠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장점이 훨씬 많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빌려온 공간"
염정공서에 근무하는 영국인 그레이엄 아들 유괴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염정공서가 홍콩 경찰의 부정부패를 캐고 있었기에 경찰 조직과의 마찰이 있다는 당시 홍콩의 시대적 배경을 작품 전편에 깔고 있습니다.
유괴물로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데, 특히 지금 보아도 흥미진진한 몸값 전달 방법이 그 백미입니다. 지폐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금괴로 바꾸라는 지시를 하는 것, 혹시 모를 탐지기를 무효화하기 위해 수영장 잠수를 지시하는 것 등이 대표적입니다. 작중 시대에 적합했던 수사 현실을 반영한 완전 범죄 계획이라 할 수 있겠지요. 게다가 범인이 몸값 회수에 실패하는 결정적 이유인 주머니의 지퍼 고장 역시 현실적이라 마음에 들었고요. 홍콩에 실존하는 여러가지 공간을 활용하여 현장감이 높다는 것도 큰 장점이라 생각됩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아서, 관전둬가 사간의 진상을 깨우치는 모든 단서가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될 뿐더러 반전도 괜찮습니다. 유괴는 조작된 것이었고 실제로는 집 금고를 열고 서류를 훔쳐내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다는 것인데, 당시 시대 상황과 맞물린 좋은 동기였습니다.
허나 경찰이 연류되어 있었다면 더 현실적이고 쉬운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운과 우연에 많이 기댄 계획이니까요. 특히 리즈는 상근 유모이기에 열쇠를 복제할 기회는 찾다보면 분명 있었을텐데, 이렇게까지 사건을 키운건 쉽사리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시 시대 상황이 그만큼 절박했을 수도 있지만 우리와 같은 이국(異國) 독자들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드니까요.
아울러 관전둬가 직접 서류를 훔쳐낸 뒤 벌이는 공작 역시도 이해는 잘 되지 않더군요. 차라리 유괴 사건이 조작된 것임을 밝히고 주모자를 체포해 나가는게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유괴 자체는 굉장히 잘 그린 작품이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빌려온 시간"
1967년, 영국 정부와 홍콩인의 충돌 및 좌익 인사들의 테러 등이 벌어지던 시대. 하루하루 근근히 먹고사는 화자인 "나"는 "아칠"이라는 순경과 함께 좌익 테러리스트들의 폭탄 테러를 막기 위한 모험에 뛰어드는데...
1편의 악당 탕 아저씨가 화자로, 관전둬가 아칠이라는 순경으로 등장하는 작품. 화자인 "나"의 추리력과 활약이 비상해서 이 친구가 관전둬인지 알았는데 좀 의외였습니다.
여튼, "1번"이라는 말 자체에 주목하여 '페리선에서 영국인이 타지 않았다'는 답변을 통해 1번 차만 페리로 옮기며 운전사는 중국인이었다는 상황 설정이 돋보입니다. 당시 홍콩 거리를 차와 오토바이를 활용하여 질주하는 묘사 등에서 스케일 큰 모험 활극 느낌이 들었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크게 눈여겨 볼 부분이 없고, 시대 상황에 따른 정치적인 이야기가 많아서 딱히 감흥은 없었던 평작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